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36)
금수저 투자백서 36화(36/231)
36. 이걸로 홈런을 쳤다고 하면 안 되지.
지겨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온 하버드 대학교 캠퍼스는 학기 시작과 함께 돌아온 학생들로 다시 북적이며 활기가 넘쳤다.
많이 올라간 기온에 두꺼운 외투 대신 얇은 바람막이를 걸친 석원은 자전거에서 내려 기숙사 한쪽에 세웠다.
누가 훔쳐 가지 못하게 앞바퀴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우고는 백팩을 둘러매고 기숙사 건물로 들어갔다.
“Hey, 박!”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기숙사 관리인이 막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석원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불렀어요?”
가까이 다가온 관리인이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쪽지를 내밀었다.
“아까 널 찾는 전화가 왔었어.”
“아, 고마워요.”
“이런 걸 가지고 뭘.”
관리인은 짧은 미소를 짓고는 하던 일을 마저 하러 갔다.
석원은 그 자리에서 바로 건네받은 쪽지를 펼쳐봤다.
[XXX-XXX-XXXX 아마르 커프]전화번호와 함께 적힌 이름에 그는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기부금 낸 걸 확인했나 보네.”
이렇게 메시지까지 남겨 그를 찾을 이유라면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석원은 쪽지를 다시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아직 로이가 돌아오지 않았는지 잠겨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을 하면서 백팩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둔 석원은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백팩에서 핸드폰을 꺼내 쪽지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거리는 연결음을 들으며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이내 젊은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네. 반힐&게필드 변호사 사무실입니다.]“아마르 커프 변호사님 좀 바꿔주시겠어요.”
[실례지만 누구시라고 말씀드릴까요?]“박석원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그렇게 얼마쯤 기다렸을까 귀에 댄 핸드폰에서 커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아니에요.”
전화기 너머로 듣는 커프의 목소리는 활기에 넘치고 유쾌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석원은 미소 띤 얼굴로 부드럽게 말을 받으며 물었다.
“기숙사에 메시지를 남기셔서 연락을 드렸어요.”
[지난번에 받은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까 했는데 수업 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기숙사에 연락해 메시지를 남겼지.]“그러셨군요. 얼마 전에 호출기를 하나 장만했는데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거기에 번호를 남겨주세요.”
[아, 잘 됐군! 꼭 번호를 알려주게.]커프가 반색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학생 신분이었던 석원은 수업 중일 때는 핸드폰을 꺼놔야 했기에 연락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삐삐”라고도 불렸던 무선호출기를 따로 구입해서 사용 중이었다.
‘이걸 다시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야.’
무선호출기는 명함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 한 줄 사이즈의 LCD 화면으로 20자 정도의 텍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그걸 보고 핸드폰이나 근처 공중전화기로 메시지를 보낸 사람한테 연락하는 거였다.
지금 같으면 스마트폰이나 메신저를 쓰면 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핸드폰도 대중화되기 전이었기에 아주 유용한 통신 수단이었다.
‘핸드폰에 무선 호출기까지. 백팩에 가지고 다니는 장비가 점점 느는 것 같네.’
여러 기기를 같이 가지고 다니려니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어서 빨리 스마트폰이 나와야지 너무 불편해서 못 살겠다니까.’
한번 편리함을 접해본 사람은 다시 뒤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석원이 딱 그 짝이었다.
그런 걸 보면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에 화상통화까지 할 수 있고 밖에서 걸어 다니는 중에도 인터넷까지 이용 가능한 스마트폰이 정말 대단한 물건이라고 새삼 깨달았다.
인류의 역사는 스마트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다.
석원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연락만 하는데 온갖 기기를 바리바리 다 싸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지웠다.
뭣 때문에 커프가 연락했는지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렇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면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하신 건가요.”
[혹시 시카고 숲 기금 재단에 기부금을 보낸 적이 있나?]커프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역시나 예상한 용건이 맞았다.
석원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데요.”
[정말로 자네가 10만 달러를 낸 건가?]“네, 맞아요.”
재차 확인하던 커프는 석원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오히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거금을 기부한 거지? 시카고 숲 재단과 혹시 내가 모르는 인연이라도 있었나. 그렇다고 해도 한꺼번에 그만한 돈을 쓰는 건 웬만한 거부가 아니면 엄두를 못 낼 일인데.]기부금을 보내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런 질문이 있을 걸 예상한 석원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에 투자했던 것이 성과가 좋아서 일부를 기부하기로 했는데. 마침 커프 씨가 돕고 있는 공익 재단이 생각나서 그쪽에 연락한 거예요.”
[투자라고?]아직 졸업도 안 한 학생이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어조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말씀을 안 드렸네요. 엘도라도 펀드라는 개인 운용사를 하나 설립해서 운용하고 있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당황한 커프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개인 운용사라고 했나?]“맞아요.”
석원은 손에 든 핸드폰을 고쳐 쥐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월가 거물들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수억 달러 정도를 굴리고 있어요.”
개인 운용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자본금이 무려 수억 달러나 된다는 이야기에 커프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것 참…… 정말 당황스럽군. 자네 설마 록펠러나 모건 같은 대부호의 자식이었나?]얼마나 놀랐는지 아예 인종조차 다른 걸 알면서도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물음을 던질 정도였다.
“뭐 비슷하긴 한데 부모님한테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 제힘으로 운용사를 세웠어요.”
그 부분만은 확실하게 하고 싶은 듯 석원이 목소리에 힘을 줬다.
“얼마 전에 아주 큰 행운이 있었거든요.”
[행운이라니?]“작년에 파워볼에서 2억 달러짜리 잭팟이 터졌던 거 기억하시죠.”
전국구로 뉴스를 탔던 일이었기에 커프가 모를 리 없었다.
[설마! 자네가 그 주인공이란 말인가?]“맞아요.”
석원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개인 펀드와 파워볼 당첨 사실까지 굳이 세세하게 이야기해주는 건 커프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자금의 출처를 확실히 밝혀서 혹시라도 꺼려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미리 안심시켜두려는 의도도 있었다.
‘나중에 덕을 보려면 지금부터 착실하게 관리를 해둬야지.’
앞으로 불과 십 년이 조금 넘는 짧은 기간, 주 의원부터 시작해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는 인물이 바로 아마르 커프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당장 내후년 커프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뒤부터는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릴 테니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터다.
그러니 아직 유망한 변호사에 불과한 지금이 커프와 친분을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원래 힘들 때 도와준 친구가 제일 마음에 깊이 남는 법이지.’
석원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커프의 반응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파워볼 당첨자가 아시아 유학생이라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그게 자네였나? 맙소사, 바로 코앞에 기적 같은 행운을 거머쥔 사람이 있었군.]“예. 그때 받은 당첨금으로 운용사를 세웠죠.”
그제야 전후 사정을 모두 납득한 커프가 말했다.
[이것 참. 거액의 잭팟을 터트린 주인공이란 것도 놀랍지만 그걸 투자해 큰 수익을 올렸다니 정말 대단한걸.]보통은 고급 차나 요트, 저택 같은 걸로 돈을 쓸 생각만 하는데 오히려 투자해서 몇 배로 불리는 선택을 한 석원을 보고 커프가 거듭 감탄했다.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머리는 더 똑똑한 후배가 아닌가.
커프의 마음속에서 석원의 호감도가 대폭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운이 좋았죠.”
석원이 겸손하게 말하자 커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거라면 행운의 여신이 자네만 너무 편애하는 것 같군. 하긴 여신도 미남은 좋아하겠지.]크게 웃은 커프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일이 생겨 재단에 돈이 필요하던 시점이었는데 자네가 준 기부금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조만간 케임브리지에 갈 일이 있는데 그때 식사라도 함께하는 게 어떤가? 물론 내가 사는 거야.]“선배님께서 사신다면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석원이 웃으면서 말하자 커프도 기뻐했다.
통화를 끝낸 석원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이 정도면 첫 단추는 잘 끼운 것 같네.”
10만 달러가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미국 대통령이 될 인물과 친분을 다지는 비용이라면 아주 싸게 먹힌 거였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개빈 필립스하고 점심 한 끼 먹는데 수백만 달러인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껌이지.”
커프와 친분을 쌓아 나중에 얻게 될 이득을 생각하자 석원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요란하게 벨이 울렸다.
석원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귀에 핸드폰을 갖다 댔다.
“여보세요.”
[보스. 저 랜든입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석원은 편하게 늘어져 있던 몸을 다시 바로 세웠다.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사실은 좋은 소식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석원은 이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기대 섞인 표정을 했다.
“FTC에서 합병 심사 결과가 나왔어요?”
[하하하. 놀라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역시 바로 눈치채시는군요. 조금 전 블룸버그 속보로 합병 승인 뉴스가 떴습니다.]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지만, 원하던 결과가 나오자 기쁜 건 마찬가지였다.
“잘됐네요!”
[속보가 나오자마자 NCR 주가가 인수 가격인 105달러까지 바로 치솟았습니다.]“인수 가격 밑에서는 무조건 차익을 낼 수 있으니 그렇겠죠.”
지금쯤 월가에서는 트레이더들이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 합병은 언제쯤 마무리될 것 같아요?”
석원의 물음에 랜든이 바로 대답했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FTC 승인이 떨어졌으니 AT&T가 곧바로 합병 작업에 들어갈 겁니다. 그러면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모든 절차가 마무리될 걸로 예상됩니다.]“하긴 길게 끌어서 좋을 것이 없을 테니까. AT&T에서도 빨리 끝내려고 하겠죠.”
[분명 그럴 겁니다.]합병 승인이 났지만 여전히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기에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서둘러 합병을 끝내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AT&T 입장에서는 유리했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되겠지만 합병 승인으로 이번 거래에서 54.41%의 수익률을 확정 짓게 됐습니다.]“그럼 한 5억 달러 정도 되겠네요.”
[살로몬 브라더스에 지급할 수수료를 비롯해 이런저런 비용을 제하면 대략 5억 3,500만 달러쯤 될 겁니다.]“나쁘지 않은 성적이네요.”
그러자 랜든이 무슨 이야기냐는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수익률이지요. 파운드 숏에 이어서 또다시 연타석 홈런을 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앤드루도 월가에서 오래 있었지만 한 번도 내보지 못한 수익률이라며 감탄을 감추지 못하더군요.]석원은 호들갑을 떨어대는 랜든의 목소리에 입꼬리를 끌어올려 씨익 웃었다.
“수익금 가운데 1억 달러는 내가 따로 쓸 곳이 있으니까 빼두고, 나머지는 유럽 국채 투자에 집어넣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그리고 천만 달러는 직원들한테 보너스로 지급하도록 해요.”
그러자 랜든이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천만 달러를요? 그렇게나 많이 주시는 겁니까!]“성과를 낸 만큼 보상을 해주는 건 당연하잖아요.”
[솔직히 보스께서 다 하신 거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많은 보너스를 받으려니 염치가 없습니다.]“아, 그래요? 부담되면 굳이 안 받아도 되는데.”
석원이 짓궂게 장난을 걸자 랜든이 바로 대꾸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번개 같은 태세 전환에 석원이 큭큭 웃으며 말했다.
“같은 식구니까 백 오피스 직원들까지 한 명도 빠트리지 말고 전부 보너스를 잘 챙겨주도록 해요.”
[예, 걱정 마십시오.]백 오피스(Back office)는 일선 트레이딩 직원 외에 뒤에서 업무를 지원하고 도와주는 일이나 부서를 뜻했다.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뒤 랜든과 통화를 끝낸 석원은 스트레칭을 하듯 팔을 쭉 폈다.
그러고는 한쪽 구석에 있는 미니 냉장고 문을 열고 안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냈다.
뚜껑을 따자 칙 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올라왔다.
“크으.”
혼자 축배를 들 듯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석원이 창가 벽에 기대서서 바깥을 내려다봤다.
봄이랍시고 앙상했던 가지에 슬슬 꽃망울이 움트고 있었다.
“진짜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 이걸로 홈런을 쳤다고 하면 안 되지.”
홈런은 아니라 한 2루타쯤 되려나.
석원은 짙게 웃으며 맥주를 꿀꺽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