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37)
금수저 투자백서 37화(37/231)
37. 이번에 놈들을 솎아내지 못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야.
서울 청와대.
이른 아침, 청와대 본관 앞에 검은색 그랜저 한 대가 멈춰 섰다.
차문을 열고 전덕재 국방부 장관이 내리자 낯익은 비서실 직원이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장관님. 각하께서는 관저에 계십니다. 그리로 모셔 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가세.”
“절 따라오십시오.”
앞서 가는 비서실 직원을 따라 전덕재 국방부 장관은 성큼 걸음을 옮겼다.
잘 가꿔진 아름드리 정원수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산책로를 따라 얼마쯤 걸어가자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관저가 나왔다.
아침 일찍 전덕재 장관이 청와대에 온 건 얼마 전 취임식을 한 김성규 대통령과 아침 식사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른색 기와를 얹은 한옥 형태로 지어진 관저 안으로 들어간 전덕재 장관은 한편에 마련된 대식당으로 안내됐다.
대식당은 십여 명이 넘는 인원이 같이 식사를 해도 넉넉할 정도로 공간이 넓었고 전통적인 격자형으로 만들어진 창문은 한옥의 우아함을 살린 디자인이었다.
더불어 바닥엔 두터운 카펫이 깔렸고 천장 위에는 반짝거리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어 고급스러움까지 더해졌다.
“잠시 기다리시면 각하께서 나오실 겁니다.”
“알겠네.”
전덕재 장관은 비서실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비어 있는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 때.
한쪽 문이 열리더니 와이셔츠 차림의 김성규 대통령이 측근인 구형기 비서실장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그걸 본 전덕재 장관은 얼른 몸을 일으켜 대통령을 맞이했다.
“이른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아침 메뉴가 수제비라고 하던데 괜찮나?”
“봄이지만 아직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한데 이럴 때 뜨끈한 수제비를 먹으면 든든하지요.”
전덕재 장관은 능숙하게 말을 받으며 김성규 대통령의 비위를 맞췄다.
“하긴 그렇지. 일단 앉게나.”
가운데에 자리한 김성규 대통령의 양옆으로 구형기 비서실장과 전덕재 장관이 마주 보는 형태로 앉았다.
그러자 곧 앞치마를 두른 청와대 직원들이 들어와 멸치 육수로 맛을 낸 쫄깃한 수제비와 여러 가지 반찬을 쭉 가져와 원형 테이블에 올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자, 다들 들지.”
김성규 대통령이 먼저 숟가락을 들고선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제비 국물을 한 입 떠서 먹었다.
“국물이 진해서 좋구만.”
김성규 대통령이 만족한 듯한 얼굴을 하자 곧바로 구형기 비서실장이 말했다.
“거제도에 계시는 부친께서 보내주신 멸치로 육수를 낸 거라고 합니다.”
“어허, 그래? 어쩐지 그래서 국물이 더 진했구만.”
김성규 대통령의 부친은 멸치 선단을 소유한 거제도에서도 알아주는 갑부로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정치 활동을 하면서 명절 때마다 계파 의원과 지인들에게 부친이 보내준 멸치를 선물로 주곤 했다.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한 김성규 대통령은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왼편에 앉아 있는 전덕재 장관에게 시선을 줬다.
“아침부터 이렇게 보자고 한 건 중요한 지시를 내릴 것이 하나 있어서네.”
김성규 대통령이 본론을 꺼내자 전덕재 장관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뭔지 말씀하십시오.”
잠시 뜸을 들인 김성규 대통령이 이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하려고 하네. 후임으로 누가 적임자인지 한번 말해 보게.”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지시에 전덕재 장관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방금 전 대통령이 거론한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은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의 핵심 멤버들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덕재 장관이 얼른 맞은편에 있는 구형기 비서실장을 보자 이미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갑자기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일이 있음을 직감했었다.
하지만 설마 이런 걸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던 전덕재 장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 두 사람은 하나회 핵심 멤버들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려는 거네.”
“전임 대통령 두 분은 물론이고 하나회의 반발이 클 겁니다.”
에둘러 우려를 나타내자 김성규 대통령이 눈썹을 찡그렸다.
“제 2의 12.12 사태라도 일어날 거라는 건가.”
시선을 받은 전덕재 장관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군을 책임진 장관으로서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였으나 그게 현실이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로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하나회를 상대로 칼을 빼 들려고 하니 군부 쿠데타를 우려하는 것이 당연했다.
식당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가운데 김성규 대통령이 전덕재 장관을 보며 말했다.
“이봐. 전 장관.”
“네. 각하.”
“내가 누군가.”
뜬금없는 물음에 전덕재 장관은 대통령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대통령 각하이십니다.”
“그래. 맞아. 국민들이 뽑아준 대통령인 내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까 봐 하나회 놈들의 눈치나 보며 전전긍긍해서야 되겠나!”
“…….”
“취임식을 하기 전에 전 국방부 장관이라는 작자가 기자회견을 열어서 뭐라고 떠들어 댔는지 자네도 모르진 않을 거야.”
대통령의 이야기에 전덕재 장관은 군 출신으로서 부끄러운 얼굴로 머리를 떨어뜨렸다.
취임식 이틀 전.
최구창 전 국방부 장관이 기자들을 불러 회견을 자처하고는 향후 군의 진로와 편제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은 일이 있었다.
당연히 김성규 대통령은 물론이고 인수위와 사전에 전혀 논의가 안 된 돌발 행동이었다.
최구창 전 국방부 장관의 발언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앞으로도 군대는 하나회가 관리, 통솔하겠다는 거였다.
출범을 앞둔 문민정부를 상대로 최구창 전 국방부 장관, 아니, 하나회가 대놓고 도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초반에 대통령과 문민정부를 길들이려는 수작질이지.’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하나회의 위세가 크고 대단하다는 거였다.
“군 하나 마음대로 통수하지 못하는 꼭두각시 대통령이라면 차라리 직을 그만두고 오늘이라도 청와대를 나가겠네.”
이미 하나회를 청산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굳힌 듯한 모습에 전덕재 장관은 한숨과 함께 차선책을 말했다.
“각하. 그러시면 성급하게 움직이는 것보단 철저히 사전 준비를 끝낸 뒤에 칼을 빼 드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러자 김성규 대통령이 바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10.26 사건 이후 정일우 육군 참모총장이 하나회 세력을 조용히 물갈이하려다가 오히려 거꾸로 당해 쿠데타 세력에 숙청당한 걸 잊었나.”
당시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을 이끈 것이 바로 전두수 전 대통령이었다.
“먼저 으름장을 놓고 방심하고 있을 지금이 적은 피로 하나회를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거야.”
“……같은 아군끼리 유혈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려 가득한 전덕재 장관의 말에 김성규 대통령이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각오하고 있네. 안타까운 희생이 나오더라도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고 민주화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야.”
그러고는 전덕재 장관을 보며 말했다.
“충돌을 최소화시키고 희생을 줄이는 것이 자네가 해야될 일이네.”
“…….”
“할 수 있겠나.”
묵직한 물음에 온몸이 짓눌리는 듯한 중압감을 느꼈다.
잠시 침묵하던 전덕재 장관은 이내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해내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네.”
김성규 대통령은 흡족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를 맡길 적임자가 있나?”
군사정권 기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하나회에 속한 인물들이 돌아가며 맡았을 정도로 두 자리는 군부 내에서도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몇 년 전에 군령권이 합참의장한테 이양됐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육군 참모총장이 군내 최고 실권자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무사령부는 전신인 보안사령부 시절부터 군 안팎의 정보를 다루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다.
하나회를 이끈 전두수 전 대통령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보안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김성규 대통령도 1차 숙청 대상으로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콕 집어서 지목한 거였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였기에 전덕재 장관은 신중하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육군 참모총장에는 연합사 부사령관으로 있는 김동해 장군이, 그리고 기무사령관에는 우하용 기무사 참모장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인가?”
정권의 안위는 물론이고 자칫 피땀을 흘려 이루어낸 민주화가 채 만개하기도 전에 떨어지고 다시 군사 독재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도 있고 무엇보다 하나회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하나회와 접점이 없다는 말에 김성규 대통령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그 두 사람으로 하지. 바로 임명할 수 있게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전하게.”
“지금 말씀이십니까.”
너무 갑작스럽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으나 김성규 대통령은 대통령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이번 일의 승패는 하나회 놈들이 대응할 틈을 주지 않고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에 달렸어.”
단호하게 꽉 다물린 입매를 본 전덕재 장관은 결연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보안을 유지하는 걸 잊지 말게.”
“예.”
그러자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구형기 비서실장이 몸을 일으키더니 식당 한쪽 선반에 놓인 유선 전화기를 통째로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이 전화를 쓰시면 됩니다.”
전덕재 장관은 슬쩍 눈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수화기를 집어 들고 먼저 용산 미군 기지에 위치한 한미연합사령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 전덕재 장관을 보며 김성규 대통령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구형기 비서실장이 얼른 담배를 한 개비 꺼내 건네고는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김성규 대통령은 하얀 담배 연기를 폐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속내는 긴장감에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군대와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해온 하나회를 청산하는 일이 아닌가.
불안하고 초조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완성하고 정권이 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기에 외면하거나 미루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김성규 대통령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이번에 하나회 놈들을 솎아내지 못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