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47)
금수저 투자백서 47화(47/231)
47. 결국 올 것이 왔군.
일주일 뒤, 여의도 대흥 증권 본사.
창밖으로 오후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 가운데 넓은 사무실에는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수십 명의 남녀 직원들이 책상 앞에 앉아 각자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네, 어떤 종목을 매수하고 싶으시다고요?”
“한보 채권 3억 원 매수 주문 들어 왔습니다!”
“젠장 또 떨어졌네.”
“어떡하지 팔아야 되나?”
“시장이 좋으니까 조금 더 지켜봐.”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과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직원들의 대화가 끊임없이 오가며 다들 활기차게 움직였다.
이런 가운데 유독 따로 동떨어진 섬처럼 다른 분위기를 보이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투자 4팀이었다.
칸막이 너머 다른 팀 직원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것과 달리 투자 4팀 직원들은 딱히 하는 것 없이 낱말 퍼즐의 빈칸을 채우거나 컴퓨터로 테트리스 게임을 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어휴 덥다.”
반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한 최호근 과장이 손 부채질을 하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다가 그런 모습을 보곤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야!”
손에 들고 있던 얇은 서류철로 정환엽 대리의 등짝을 가볍게 후려친 최호근 과장이 혀를 쯧쯧 차면서 말했다.
“잘들 한다. 회사에서 게임이나 하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
그러자 정환엽 대리가 하던 테트리스 게임을 황급히 끄고는 넉살 좋게 웃는 얼굴로 머리를 꾸벅 숙였다.
“과장님 오셨어요.”
“웃지 마 이 자식아. 정들어.”
그 와중에 홍재희는 낱말 퍼즐 책을 책상 아래로 후다닥 숨기곤 아무것도 안 한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었다.
“아이고 머리야.”
최호근 과장은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내가 없으면 정 대리 네가 알아서 팀원들을 챙겨야지. 남들 보는 데서 게임이나 하고 앉아 있으면 어쩌냐. 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할 말은 있는지 정환엽 대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하지만 하루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넘게 멍하니 앉아만 있잖습니까. 너무 지루해서 그랬죠.”
정환엽 대리의 이야기대로 첫날 반짝 뭔가를 하려는 것 같더니 그 뒤로 한참이 지났는데도 석원이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아 투자 4팀은 말 그대로 개점휴업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팀원들도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상황이었기에 마냥 뭐라 하기도 힘들었다.
“씁…… 야 그래도 일이 없으면 찾아서라도 해야 될 것 아니야!”
입맛을 다신 최호근 과장은 일부러 엄한 표정을 짓고선 팔짱을 낀 자세로 눈을 부라렸다.
“요즘 수출 기업들 분위기가 좋으니까 상승 가능성이 높은 종목 열 곳을 추려서 분석 보고서를 작성해 가져와.”
“알겠습니다.”
최호근 과장은 시선을 옮겨 홍재희와 유석현에게도 일거리를 줬다.
“두 사람은 이번 주 외국인 매매 동향을 조사해서 모레 오후까지 보고서로 제출해.”
“네.”
“예, 과장님.”
얼른 서류를 뒤적거리며 부산을 떠는 두 사람의 모습에 최호근 과장은 남몰래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하 팀원들이 쉬는 꼴을 못 봐 일을 만들어서 시키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팀 직원들의 시선이 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최호근 과장도 지금 이 상황이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첫인상과 달리 마치 회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그냥 자신과 팀원들을 방치하고 있으니 하루하루 허탈하고 맥빠진 기분이 들었다.
이럴 거면 회사에 꼬박꼬박 출근은 왜 하나 싶을 정도였다.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돌려 문이 닫힌 석원의 개인 사무실을 잠시 쳐다보던 최호근 과장은 이내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지난번에 지은 죄가 있어 계속 꾹꾹 눌러 참았지만 오늘은 완전히 찍히게 되더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성큼 걸음을 옮긴 최호근 과장은 문 앞에 서서 후, 하고 폐에 남아 있던 공기를 뱉어내고는 마음을 다잡고 문을 두드렸다.
뒤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최환엽 대리는 최호근 과장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장 다른 두 팀원과 머리를 맞대고 속삭였다.
“드디어 과장님이 담판을 지으시려는 건가?”
“이만하면 오래 참았죠. 솔직히 우리도 더 버티기 힘들잖습니까.”
“석현 씨 말이 맞아요. 저 더 이상 낱말 풀기로 시간 때우는 것도 한계라고요.”
“재희 씨도 테트리스 한 번 해보라니까. 아니면 지뢰찾기도 재밌어.”
“대리님은 게임하러 회사 와요?”
아웅다웅하는 최환엽 대리와 홍재희를 놔두고 유석현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닫힌 문을 쳐다봤다.
“어쨌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그러는 사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최호근 과장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든 석원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팀장님한테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색한 얼굴을 본 석원은 한쪽 팔을 들어 앞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요.”
“네.”
자리에서 일어난 석원은 창가에 놓인 커피포트로 가며 물었다.
“커피 한잔 마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석원은 믹스 커피를 찢어서 넣은 머그컵에 따뜻한 물을 붓고 티스푼으로 몇 번 저어서 섞었다.
양손에 머그컵을 든 석원이 한 잔을 앞에 내려놓자 최호근 과장이 살짝 머리를 숙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한쪽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은 그는 최호근 과장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할 이야기가 뭔지 해봐요.”
최호근 과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석원을 똑바로 쳐다 보면서 가져온 서류철을 앞으로 내밀었다.
“회사에서 보유 중인 시총 상위 5개 종목 물량을 정리한 겁니다.”
서류철을 받아서 펼친 석원은 내용을 대충 훑어보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물량이 꽤 되네요.”
“아무래도 증시를 대표하는 종목이다 보니 지수 수익률을 추종하려면 일정량을 가지고 있어야 되니까요.”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석원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손에 든 서류철을 덮어서 내려놨다.
그걸 보며 최호근 과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난번에 이 종목들을 매도하실 거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죠.”
“신용융자를 받아 물량을 확보하려면 그 전에 밟아야 될 절차가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석원이 머그컵을 들어 향이 진하게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아 신용융자는 받지 않기로 했으니까 잊도록 해요.”
“정말이십니까?”
“그래요.”
솔직히 가능성을 낮게 보던 공매도를 안 한다니 안심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는 게, 그나마 석원이 하려던 일 아닌가.
그런데 그것마저 그만둔다는 말을 들으니 최호근 과장은 석원이 정말 일을 할 생각은 있는 건지 의문스러워졌다.
울컥하는 마음에 괜히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로써 출근하신 지 일주일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런데요.”
최호근 과장은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속에 있던 불만을 단번에 쏟아냈다.
“첫날 회의 뒤로 아무런 지시가 없으셔서 다들 손 놓고 빈둥거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실 거면 차라리 알아서 고유계정거래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고유계정거래는 흔히 프랍 트레이딩이라고도 불렀는데 증권사가 수익을 내기 위해 고객 돈이 아닌 자기 자본금으로 주식이나 파생상품들을 거래하는 거였다.
“지금 일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석원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최호근 과장을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번 달 수익률이 0으로 나올 겁니다.”
투자 4팀에 무능한 밥버러지라는 낙인이 찍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하소연하는 최호근 과장과 달리 그는 오히려 살며시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근거 없는 장담에 최호근 과장은 못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오시고 난 뒤로 거래를 단 한 건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실적을 낸다는 말씀입니까?”
말할수록 더 억울한 마음이 들어 점점 얼굴이 상기되는 최호근 과장과 달리 석원은 얄미울 정도로 느긋하게 굴었다.
“좁쌀이 열 번 굴러봐야 호박이 한번 구르는 걸 못 당하지 않겠어요.”
“조금 전에 공매도를 안 할 거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자 석원이 손에 든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잘못을 바로잡아 줬다.
“필요가 없어 신용융자를 안 받는다고 했지 주식을 매도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는 한 적이 없어요.”
“……?”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두 눈을 껌뻑이는 최호근 과장을 보며 석원이 말했다.
“오늘 중으로 운용 계좌로 백오십억이 입금될 거예요.”
“……!”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최호근 과장은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배, 백오십억이라고 하셨습니까?”
“맞아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석원이 말을 이었다.
“신용융자를 최대로 받아도 백억 남짓밖에 안 될 테니 이러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그렇지요.”
최호근 과장이 홀린 듯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런 큰돈을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그것까진 알 필요 없어요.”
트레이딩을 할 때 종종 거액을 가진 큰손들의 돈을 위탁받아 함께 투자하는 경우가 있었다.
보통 이런 큰손들은 자신이 드러나는 걸 꺼려했기에 최호근 과장도 더 이상 깊이 묻지 않았다.
‘설마 회장님 돈은 아니겠지.’
자신도 모르게 정답을 떠올린 최호근 과장이었지만 석원의 이야기에 상념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고 이사님한테 승인을 받아뒀으니까. 지난번에 지시한 대로 물량을 넘겨받아서 바로 매도하도록 해요.”
“전부 다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최호근 과장이 머뭇머뭇하며 말했다.
“다섯 종목 모두 오늘도 오르는 중인데…… 조금 분위기를 지켜보면서 파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뒤로 몸을 기댄 석원은 최호근 과장을 보며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아까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불만이라더니. 일거리를 주니까 지금은 또 싫다고 하는 거예요?”
“아니, 아닙니다.”
제 입으로 뱉은 말이 있었기에 최호근 과장은 반박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뭐해요. 어서 나가서 일을 진행시키지 않고.”
“아, 예.”
엉거주춤 소파에서 일어난 최호근 과장이 머리를 꾸벅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석원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제법 강단이 있네. 어디 실력도 그만큼 되는지 한 번 지켜볼까.”
말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눈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찾아와 입바른 소리를 하는 최호근 과장의 행동이 마음에 든 그는 남은 커피를 마시며 얼굴에 옅은 기대감을 드러냈다.
* * *
나흘 뒤.
저녁 약속이 없어 일찍 퇴근한 박태홍 회장은 오랜만에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박태홍 회장이 젓가락으로 잘 구워진 장어구이를 하나 집어서 소스에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음. 느끼하지 않게 잘 구웠구만.”
“입맛에 맞아요?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에는 보양식을 먹어줘야 몸이 안 축나죠. 깻잎에 생강채도 싸서 먹어봐요.”
“장어가 몸에 좋긴 하지.”
박태홍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내가 말한 대로 장어를 싸서 먹었다.
다른 반찬들도 전부 집에서 직접 양념까지 만들어 무친 거라 밖에서 먹는 음식과는 비교가 안 됐다.
조덕례 여사는 구운 장어를 하나 집어서 맞은편에 있는 둘째 아들의 밥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
“너도 많이 먹으렴.”
“네.”
그렇게 단란하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삐리리릭! 삐리리릭!
앞치마를 입은 군산댁이 얼른 거실로 나가더니 무선 전화기를 들고 와 박태홍 회장에게 내밀었다.
“회장님. 길 실장님한테서 온 전화예요.”
“그래.”
박태홍 회장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군산댁의 손에서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날세.”
[댁에 계신데 죄송합니다.]“아니야. 그것보다 무슨 일인가?”
박태홍 회장의 물음에 길성호 실장이 굳은 목소리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10분 뒤에 청와대에서 생중계로 특별담화를 발표한다고 합니다.]“특별담화라고?”
[예.]박태홍 회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언성을 높이자 식탁에 있던 조덕례 여사와 석원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러자 박태홍 회장이 무선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갑자기 왜 저런담. 회사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조덕례 여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그러는지 대충 짐작이 된 석원은 애써 웃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밥이나 다 먹고 얘기하지…… 어휴, 길 실장도 참.”
조덕례 여사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서재로 들어간 박태홍 회장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무선 전화기를 붙잡고 물었다.
“담화 내용이 뭔지 알아냈나?”
[청와대에서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어서 그거까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흐음.”
[하지만 집히는 건 하나 있습니다.]“금융실명제 말인가.”
[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사람들이 퇴근을 미루고 비상근무에 들어갔다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짧게 침음성을 내뱉은 박태홍 회장은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고 다시 전화하도록 하지.”
[예.]통화를 끝낸 박태홍 회장은 서재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켰다.
KBC로 채널을 맞추고 소파에 앉아 얼마쯤 기다리자 이내 방송되던 프로그램이 중간에 끊어지며 대통령 특별담화라는 글자가 브라운관에 크게 떠올랐다.
그러더니 화면이 바뀌며 텔레비전에 청와대 본관 1층에 있는 영빈관이 비춰졌다.
뒤로 짙은 녹색 커튼이 내려져 있는 가운데 옆에 태극기를 두고 정중앙에 설치된 연단에 김성규 대통령이 서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가득 잡혔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오늘 저는 국민 여러분께 금융실명제 시행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억센 말투로 강하게 내뱉는 대통령의 첫마디에 박태홍 회장은 뚫어질 듯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결국 올 것이 왔군.”
나직이 중얼거린 박태홍 회장은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