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50)
금수저 투자백서 50화(50/231)
50. 팀장님이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이튿날 오후.
하루가 지났지만 금융실명제 실행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증시는 끝없는 추락을 계속 이어갔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대는 사무실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떨어지려는 거야.”
“제기랄! 주문을 아무리 넣어도 체결이 안 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아. 망했어.”
계속 들어오는 매도 주문에 어떻게든 물량을 팔려고 발버둥쳤지만 사자가 완전히 사라진 시장은 오직 주식을 던지려는 사람들뿐이었다.
매수가 없자 마음이 급해진 투자자들은 조금이라도 물량을 털어내려고 앞다퉈서 가격을 내렸고 그게 다시 주가를 끌어 내리며 시장의 공포심을 키우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사색이 된 직원들의 얼굴처럼 증시는 온통 새파랗게 질린 채 끝없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온통 절망과 패닉에 빠져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분위기를 보이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석원이 이끄는 투자 4팀이었다.
“지수가 전날보다 20포인트 더 내려서 673.57을 기록 중입니다.”
컴퓨터 모니터 두 개를 책상에 올려둔 유석현이 재빨리 보고했다.
곰 같이 커다란 덩치와 다르게 두 눈이 양쪽 모니터를 빠르게 오가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숫자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노타이에 와이셔츠 소매를 반으로 접어서 올린 석원이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다가 왼편 책상에 앉아 있는 정환엽 대리에게 물었다.
“한국전력 주가는요?”
그러자 주가 차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정환엽 대리가 평소의 장난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로 몸을 돌려 대답했다.
“주당 만 6천 5백 원입니다.”
“사성전자도 만 9천 3백 원까지 떨어졌습니다.”
최호근 과장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는 팀원들과 달리 석원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아직 더 떨어질 테니까 기다려요.”
“예.”
그가 봐도 지금은 매수 타이밍이 아니었기에 최호근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지는 칼날을 잡는 건 미친 짓이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지수 그래프는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성전자가 만 9천 원을 찍으면 바로 알려줘요.”
“예.”
각자 책상에 앉아 다시 집중해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팀원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석원은 예전에 오 부장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오늘은 구두를 많이 닦았냐.”
의자에 앉아 라이터로 살짝 스치듯 지져주며 불광을 내고 있던 석원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점심을 먹고 왔는지 입에 이쑤시개를 끼운 오 부장이 바지에 손을 넣은 채 건들거리는 자세로 다가와 플라스틱 의자에 턱 걸터앉았다.
제 집인양 자연스러운 행동에 석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는 맨들맨들 잘 닦인 구두를 옆에 내려놓으며 오 부장을 슬쩍 쳐다봤다.
“구두 닦으시게요?”
“이틀 전에 닦았는데 뭘 또 닦아. 그냥 커피나 한잔 줘라.”
“여기가 구둣방이지 다방이냐고요.”
투덜대면서도 석원은 몸을 돌려 한쪽에 있는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끓였다.
“야 그동안 내가 여기서 구두를 얼마나 닦았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단골한테는 좀 대접을 해줘야 할 거 아냐.”
“그래서 지금 해드리잖아요.”
믹스 커피를 꺼내 뜯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오 부장이 크게 탄식했다.
“우리 귀여운 구둣방 꼬맹이는 어디로 가버리고 요런 까칠한 녀석만 남았냐. 애가 사연이 좀 있는 가여운 녀석이긴 해도 똘똘해서 데리고 놀기 좋았는데!”
“가엽다니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럭저럭 알아서 잘 살고 있거든요? 게다가 남자한테 귀엽다는 게 뭐예요.”
“예전에는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해서 놀리는 맛이 있었는데 이제 머리가 좀 컸다고 재미가 없어.”
“그러니까 여긴 놀려고 오는 장소가 아니라 구둣방이라고요.”
석원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오부장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절레 흔들었다.
마침 물이 다 끓자 대충 종이컵에다 믹스 커피를 넣고 휘휘 저어서 오 부장한테 내밀었다.
“여기 커피요.”
“오 땡큐.”
오 부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기분 좋게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달달한 게 딱 좋네. 역시 이 맛이지.”
넉살 좋은 오 부장의 모습에 피식 웃던 석원은 이내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뭐가.”
“오늘 ST 텔레콤 주가가 많이 떨어졌잖아요.”
“난 또 뭐라고.”
갑자기 씩 미소를 지은 오 부장이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대꾸했다.
“내가 이 바닥에 있으면서 배운 것들이 있어.”
“그게 뭔데요?”
“아무리 소나기가 오더라도 갈 놈은 간다는 거야.”
“……?”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린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남들이 겁을 먹고 집어 던질 때가 진짜 대박을 터트릴 기회라는 거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석원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뉴스에서 ST그룹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던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어깨를 으쓱이며 태평하게 반응하는 오 부장의 말에 그는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큰일이잖아요.”
악재에 주가가 더 떨어질 일만 남은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 부장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며 대꾸했다.
“한동안 오너 리스크로 시끄럽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ST 텔레콤의 펀더멘탈에 심각한 손상인 간 건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막말로 회장이 구속된다고 해도 LTE 열풍으로 빠르게 늘고 있는 ST 텔레콤 가입자가 줄어드는 건 아니잖아.”
오 부장의 말대로 욕은 들어먹겠지만 통신사들 가운데 가장 잘 터지고 서비스가 편리한 ST 텔레콤을 사람들이 안 쓸 가능성은 희박했다.
오히려 LTE 서비스 조기 활성화로 인해 가입자와 더 비싼 요금제로 전환하는 비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최근 ST 텔레콤 주가가 주당 10만원을 거침없이 돌파하며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간 것도 이런 기대감 때문이었다.
“노이즈는 말 그대로 잠시 지나가는 잡음일 뿐이야.”
“…….”
“그렇게 시끄러운 일이 지나가고 나면 어떻게 될 것 같냐.”
시선을 받은 석원은 마치 선생님 앞에서 대답하는 제자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말했다.
“그동안 못 올라간 것까지 더해져서 크게 튀어오르겠죠.”
그러자 오 부장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맺혔다.
“큭큭큭. 가르친 보람이 있다니까.”
“정답이에요?”
“맞아. 한 번 눌러줬으니 반발력이 더 커지는 법이지.”
오 부장은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홀짝이면서 말했다.
“지난번에 금융실명제가 갑자기 실행되면서 주가가 폭락한 적이 있었다고 했지?”
“네.”
“지금 90만원인 사성전자 주가가 그때 만 9천원까지 떨어졌었거든.”
“진짜요?”
석원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완전 헐값이네요.”
“지금처럼 사성전자가 반도체하고 스마트폰으로 잘 나가기 전이었으니까 그 가격이었지. 뭐 그렇다고 해도 3만 천원에서 거의 반토막이 나 버린 거였으니 엄청 싸진 건 분명하지.”
오 부장은 다 마신 종이컵을 옆으로 치우고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 붙여드릴게요.”
“오냐.”
라이터를 켜서 앞으로 내밀자 오 부장이 커다란 손으로 머리통을 마구 쓰다듬었다.
“웬일로 귀여운 짓을 다 하고 그러냐.”
“이야기 듣는 값이에요.”
“역시 다 이유가 있었구만.”
오 부장은 나직하게 웃더니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데 직전까지 사성전자를 못 사서 안달이던 사람들이 주가가 폭락하니까 아무도 손을 안 댔어. 오히려 가지고 있던 주식도 손해를 보고 던지기에 바빴지.”
“지금처럼요?”
“맞아.”
“하지만 그때는 금융실명제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공포감에 주식을 투매한 거잖아요.”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 않냐는 석원의 지적에 오 부장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런데 금융실명제가 된다고 사성전자나 한국전력의 펀더멘탈이 달라지는 게 있어?”
“어…….”
석원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다들 주식을 집어던지기 바빴지만 며칠 뒤에 그걸 깨닫고 폭락했던 지수가 금방 다시 반등해서 IMF가 올 때까지 미칠 듯이 올라갔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오 부장이 말했다.
“과감하게 한발 먼저 떨어진 주식을 바닥에서 주워 담은 투자자들은 큰 차익을 거뒀지만 뒤늦게 눈치챈 사람들은 주가가 치솟는 걸 손가락을 빨며 구경만 해야됐고.”
허공에서 흩어지는 연기를 따라 움직이던 오 부장의 시선이 이내 그를 향했다.
“눈앞에 기회가 왔을 때 용기를 내서 움켜잡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는 걸 잊지마.”
그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석원은 긴 회상에서 깨어났다.
“……장님. 팀장님!”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최인호 과장이 황급히 말했다.
“사성전자 주가가 만 9천원까지 내려왔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다는 생각에 석원이 눈에서 이채를 띠며 물었다.
“지수는 얼마에요?”
모니터에 뜬 지수 그래프를 보던 유석현이 의자에 앉은 채 뒤돌아 대답했다.
“7.90 포인트가 더 떨어져서 665.67입니다.”
바닥까지 내려온 걸 확인한 석원은 지체 없이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말했던 종목들을 다 쓸어 담아요!”
그러자 최호근 과장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직 하락이 멈추지 않았는데 매수를 시작하란 말씀입니까?”
“지금이 바닥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주문을 넣어요!”
석원이 강한 어조로 서두르라며 재촉했다.
지금까지 느긋하게 있던 것과 달리 급하게 다그치는 모습에 최호근 과장은 미심쩍은 마음을 일단 접어두고 지시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다들 말씀 못 들었어. 어서 움직여!”
그러자 팀원들은 미리 계획을 짜둔대로 주식 매수에 나섰다.
“어. 나야. 사성전자 주식 만오천주 현재가로 매수!”
“한국전력 만주 시가로 매수해줘.”
“오광산업 오천주 주문요!”
수화기를 귀에 대고 정신없이 매수 주문을 외치는 최호근 과장과 팀원들을 보며 석원은 낮게 중얼거렸다.
“조정 뒤에 반등이 얼마나 세게 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
떨어지는 기세가 매서울수록 반등하는 힘도 강할 것이다.
석원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일렁였다.
“오케이. 확인했어.”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은 정환엽 대리가 의자에 앉아 몸을 돌렸다.
“마지막 물량까지 다 매수했습니다.”
그러자 뒤에 서서 작업을 지켜본 석원이 팔짱을 풀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정환엽 대리를 비롯한 팀원들은 모두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내일은 광복절 휴일이니까 푹 쉬고 목요일에 다시 봐요. 자, 그리고 이거.”
석원은 그렇게 말하며 양복바지 뒷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봉투를 꺼내 최호근 과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최호근 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석원이 웃으며 말했다.
“회식비예요. 고생했으니까 술 한잔씩들 하라고요.”
“팀장님은 같이 안 가십니까?”
“원래 이런 자리는 빠져 주는 게 좋은 상사라고 하던데요.”
“그래도 저희끼리 가는 건 좀…….”
“매도까지 끝내고 나서 다 같이 제대로 회식을 하도록 하죠. 오늘은 그냥 가볍게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요.”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고 개인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유석현이 슬쩍 눈치를 보다가 걱정스레 입을 뗐다.
“방금 200억이 넘는 주식을 사들였는데 괜찮을까요.”
한창 매수 주문을 넣을 때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지만 다 끝내고 나자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더 빠지면 어떻게 해요.”
홍재희도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표정이었다.
최호근 과장 역시 너무 일찍 주식을 매수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됐으나 팀원들 앞이었기에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팀장님이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러자 정환엽 대리가 계속 앉아 있어서 뻐근해진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허기가 지네. 과장님! 봉투에 얼마나 들어있어요?”
유석현과 홍재희도 궁금하다는 듯 쳐다봤다.
“밥값이라고 했으니까 만원짜리 몇 개 넣었겠지.”
최호근 과장은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투로 대꾸하며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지폐를 꺼냈다.
하지만 막상 튀어나온 건 새파란 배추잎이 아니라 10만원짜리 자기앞 수표 열 장이었다.
최호근 과장이 헉하고 헛바람을 삼키는 가운데 다른 팀원들도 수표를 보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기업 사원 평균 월급이 백만 원 안팎인 시절이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머! 수표잖아요.”
“이거 저녁을 먹고 새벽까지 술을 진탕 마셔도 남겠는데요.”
홍재희에 이어 유석현까지 크게 웃으며 반색했다.
“크으. 역시 재벌 3세라 그런지 손이 크네.”
아까부터 배고프다고 밥 타령을 해대던 정환엽 대리도 엄지를 척 치켜올렸다.
최호근 과장은 석원이 들어간 개인 사무실을 놀란 눈으로 둘러본 후 팀원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돼지 대신 소고기로 가자!”
“좋아요!”
“이거 오랜만에 배에 제대로 기름칠을 하겠는걸.”
“저도 찬성입니다.”
팀원들은 잠시 걱정을 잊고 서둘러 업무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