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68)
금수저 투자백서 68화(68/231)
68. 금리 인상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1994년 1월 25일 미국 워싱턴 DC.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가운데 백악관 웨스트윙 서쪽 끝에 위치한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 소파에 필립 데이비슨 대통령이 참모들과 둘러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데이비슨 대통령은 굳은 얼굴로 측근인 헉슬리 비서실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NAFTA 서명의 여파로 인해 러스트 벨트를 중심으로 한 핵심 지지계층의 이탈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건가.”
갈색 정장을 입은 헉슬리 비서실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대로 간다면 현직 의원들이 버티고 있는 펜실베이니아와 테네시도 위험한 상태라 자칫하다간 상원을 공화당에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지난 대선 때 선대본부장을 지내고 현재 백악관 선임 고문으로 있는 중년의 벤 우드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받았다.
“하원은 상원보다 더 심각합니다. 하원의장인 지미마저 위태위태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데이비슨 대통령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미는 지역구인 워싱턴 5구에서 내리 15번을 당선됐을 정도로 지역 기반이 탄탄한 걸로 아는데. 그런데도 고전을 한다는 건가.”
“그만큼 상황이 안 좋다는 반증일 겁니다.”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뱉은 데이비슨 대통령을 보며 우드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52년 선거 이후 계속 이어져 오던 하원에서의 우세가 42년 만에 뒤집어질 수도 있습니다.”
“환장하겠군.”
데이비슨 대통령이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며 우드는 내심 쯧 하고 혀를 찼다.
‘선거에 치명적이라고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고집을 부리더니.’
재선에 도전하던 전임 대통령을 압도적인 표차로 꺾으며 당선됐을 뿐만 아니라 여당이 상원과 하원 양쪽을 다 장악한 가운데 의기양양하게 임기를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동안 연이은 헛발질로 인해 불과 2년 만에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몰래 한숨을 내쉬던 우드는 자신을 부르는 말에 잡념을 지우고 대통령을 봤다.
“우드. 판세를 뒤집을 해결책이 없겠나?”
일은 자기가 저지르고 뒷수습을 떠맡기는 모습에 짜증이 났지만 일단 선거는 이기고 봐야 했기에 준비해 온 카드를 꺼내놨다.
“급선무는 악화된 핵심 지지층인 중서부 노동자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겁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뾰족한 수단이 없으니까 이러는 거지.”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던 데이비슨 대통령은 우드의 말에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관심을 보였다.
“그게 뭔가?”
함께 있던 헉슬리 비서실장도 몸을 당겨 앉으며 우드를 쳐다봤다.
“일본과 진행 중인 무역 협상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잔뜩 기대했던 것과 달리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에 데이비슨 대통령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지금도 진행 중인 일이지 않나.”
“그걸 좀 더 이슈화시키자는 겁니다.”
“그런다고 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군.”
회의적인 반응에 우드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전통적인 지지층이던 중서부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돌아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잘못을 꼬집는 것 같아 데이비슨 대통령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내가 NAFTA 비준을 해줘서 선거 판세가 불리해졌다는 건가.”
그럼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오랫동안 정치판에서 구른 능구렁이답게 우드는 전혀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선거 이후로 서명을 미루셨다면 더 좋았겠지만, 미국을 위해 필요한 결단이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눈치 빠르게 비위를 맞춰주자 정색한 데이비슨 대통령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의도가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기업들이 공장을 대거 해외로 이전하면서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크게 줄어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으음.”
뼈아픈 지적에 데이비슨 대통령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공화당도 그걸 알기에 백악관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자극적인 말로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흔드는 것이고요.”
“빌어먹을 GQP 녀석들 같으니라고!”
GQP는 “Grand QAnon Party”의 약어로 공화당을 비하하는 용어였다.
“상대가 일자리 문제를 부각시켜 NAFTA 비준 문제가 선거에서 쟁점으로 떠오를수록 상황이 불리해지게 될 겁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짜증 섞인 물음에 우드가 데이비슨 대통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슈는 이슈로 덮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헉슬리 비서실장이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일자리 이슈를 일본과의 무역 분쟁으로 덮자는 겁니까?”
“바로 맞췄네.”
우드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데이비슨 대통령이 솔깃한 얼굴로 슬쩍 물음을 던졌다.
“그게 가능하겠나?”
“다른 분야들도 어렵지만 NAFTA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이 바로 자동차 노동자들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데이비슨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여 수긍했다.
곁에서 헉슬리 비서실장도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걸 보면서 우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 시장에서 빠르게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일본 자동차를 러스트 벨트 몰락의 주범으로 몰아붙여 이슈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유권자들의 관심에서 NAFTA 비준 문제를 희석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데이비슨 대통령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비난의 대상을 내가 아닌 일본 자동차 회사로 돌리자는 거군. 정말 절묘한 방법이야.”
그러자 헉슬리 비서실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려를 나타냈다.
“한국과 함께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 핵심 우방국인데 관계가 악화된다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뒤늦게 문제점을 깨달은 데이비슨 대통령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우드가 바로 염려할 것 없다는 듯 단언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것이 일본입니다. 분명 강하게 억누르면 반발이 있겠지만 결국은 저희한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85년에 있었던 플라자 합의 때도 그랬지 않습니까.”
1980년대 중반 대규모 무역 적자가 지속되자 미국 정부가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 재무장관들을 뉴욕 플라자 호텔로 불러 모아 강제적으로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엔화와 독일 마르크 가격을 올리는 데 합의한 것을 플라자 합의라고 불렀다.
급격한 엔화 강세로 인해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 불황에 빠지는 원인이 됐다.
“선거 때까지만 강하게 압박하고 이후에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 짓는다면 동맹이 훼손될 일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데이비슨 대통령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 모습을 본 우드가 재차 밀어붙이며 설득했다.
“이번 대선뿐만 아니라 뒤에 있을 재선도 생각하셔야지요. 강한 모습을 보여 중서부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지지를 회복한다면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중간 선거도 중요했지만 데이비슨 대통령 입장에서 가장 우선인 건 다름 아닌 재선이었다.
무역 마찰로 우방인 일본과 관계가 악화되겠지만 재선에 도움이 된다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팔짱을 낀 채 고심하던 데이비슨 대통령은 바로 마음을 굳히며 말했다.
“좋아. 어떻게 해야될지 빈센트 상무장관하고 논의해서 최대한 빨리 다시 보고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때 노크와 함께 투피스 정장을 입은 비서실 여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먼로 연준 의장님이 와 계신데 어떻게 할까요?”
오늘 먼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과 약속이 되어 있던 걸 떠올린 데이비슨 대통령이 우드 선임고문에게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오늘은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지.”
“예.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우드 선임고문은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잠시 한숨을 돌린 데이비슨 대통령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여직원에게 시선을 줬다.
“먼로 의장을 들여보내게.”
“예.”
잠시 뒤 중키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60대 중반의 사내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바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수장인 먼로 의장이었다.
“어서 오시오. 먼로 의장.”
“바쁘신데 제가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먼로 의장이 보자는데 시간을 빼야되지 않겠소.”
웃는 얼굴로 일어서서 먼로 의장을 맞이한 데이비슨 대통령이 소파를 권했다.
“자 이러지 말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예.”
먼로 의장은 역시나 일어나 있는 헉슬리 비서실장과도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뒤 비어 있는 왼편 소파에 앉았다.
얼른 우드의 찻잔을 치우는 여직원을 보면서 데이비슨 대통령이 먼저 물었다.
“차는 뭘로 마시겠소?”
“커피로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직원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테이블이 깔끔하게 치워지자 데이비슨 대통령은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먼로 의장을 봤다.
“다음 주 화요일이 FOMC 회의라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을 텐데. 급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뭐요?”
그러자 먼로 의장이 데이비슨 대통령을 마주 보며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이번 FOMC 회의에서 금리 인상을 결정할 계획이라 미리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
* * *
같은 시각, 미국 뉴어크 리버티 국제공항(Newark Liberty International Airport).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한 가운데 늘씬하게 빠진 새하얀 동체를 가진 걸프스트림 IV 비즈니스 제트기 한 대가 막 착륙해 넓은 주기장으로 들어와 멈춰 섰다.
이내 출입구가 천천히 열리자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캐주얼한 차림의 석원이 선글라스를 낀 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델같이 날씬한 금발 스튜어디스의 배웅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오자 마중을 나온 랜든이 기다리고 있다가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보스.”
반갑게 악수를 나눈 석원은 눈부신 듯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 많이 온다더니 지금은 그쳤네요.”
“보스가 오는 걸 알고 하늘도 환영을 하는 모양입니다.”
능청스런 농담에 석원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태평양을 건너오시느라 힘들진 않으셨습니까?”
“전용기를 타고 와서 그런지 크게 피곤하진 않아요.”
석원이 한쪽 손을 들어 뒤에 있는 비즈니스 제트기를 가리켰다.
“진짜 전용기를 하나 장만하셔야 되겠는데요? 매번 이렇게 빌리는 것도 번거롭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이번에 크게 벌면 한 대 구입할 생각이에요.”
그러자 랜든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스포츠카가 아니라 전용기 쇼핑이라. 그거 정말 멋지군요.”
“그러려면 우선 잭팟부터 터트려야죠.”
“예, 물론입니다.”
함께 온 운전사가 비즈니스 제트기에서 내린 짐을 받아 리무진 트렁크에 싣는 걸 보면서 랜든이 말했다.
“항상 머무시는 플라자 호텔 펜트하우스를 예약해뒀습니다. 가시죠.”
석원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곤 리무진 뒷좌석에 랜든과 함께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