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78)
금수저 투자백서 78화(78/231)
78. 여기서 더 오른다고?
어슴푸레 해가 지고 있는 저녁.
검은색 벤츠 대형 세단 한 대가 한남동 주택가로 들어섰다.
높다란 담장과 나무들로 둘러싸인 저택 앞에 대형 세단이 멈춰 서자 추세영 과장이 조수석에서 내려 얼른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린 박태홍 회장은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걸 느끼고 작게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날씨가 이런 걸 보니 이번 여름은 많이 덥겠군.”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추세영 과장한테 시선을 줬다.
“자넨 그만 여기서 들어가 보게.”
“네. 그럼 편안히 쉬십시오. 회장님.”
박태홍 회장은 꾸벅 머리를 숙이는 추세영 과장의 인사를 뒤로하고 저택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봄이 온 걸 알리듯 넓은 정원은 막 올라온 연두색 새싹들과 싱그러운 풀냄새로 가득했다.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박태홍 회장은 아무도 없는 파라솔 테이블 위에 어미 삼색이와 함께 고양이 세 마리가 한가롭게 누워 그루밍을 하는 걸 발견하곤 발을 멈췄다.
“냐옹.”
귀를 쫑긋거린 고등어 태비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박태홍 회장을 보곤 어서 오라는 듯 울음소리를 냈다.
그런 모습에 박태홍 회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아는 척을 하는 걸 보니까 아주 양심 없는 녀석들은 아니로군.”
잠깐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양이들을 쳐다본 박태홍 회장은 이내 다시 표정을 굳히고 발걸음을 옮겨 본채로 향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조덕례 여사와 둘째 아들인 석원이 군산댁과 함께 서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
석원이 웃으면서 인사하자 박태홍 회장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둘째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퉁명스레 툭 내뱉었다.
“그래도 집에 돌아는 왔구나.”
누가 봐도 화가 났다는 표시에 석원이 한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출장이 좀 길어지긴 했죠.”
“팀장이라는 녀석이 마음대로 그렇게 자리를 오래 비우면 밑에 있는 직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박태홍 회장은 얼굴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잔소리를 쏟아냈다.
예전 같았으면 눈도 못 마주치고 머리를 숙였겠지만 속에 세상 풍파를 다 맞으며 닳고 닳은 능구렁이가 들어앉은 석원은 넉살 좋게 말을 받았다.
“직원들은 다 좋아하던데요. 그리고 그냥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미국에 다녀온 거예요.”
“뭐야?”
기가 막힌 박태홍 회장이 미간을 좁히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 지켜보던 조덕례 여사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어휴 현관 앞에서 뭐하는 거예요. 그쯤하고 얼른 씻고 저녁부터 드세요.”
“주 의원하고 밥 먹고 왔어.”
짧게 대답한 박태홍 회장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석원을 쳐다봤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조금 있다가 서재로 오거라.”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성큼 걸음을 옮겨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 흔든 조덕례 여사는 석원에게 걱정스런 시선을 던졌다.
“너도 괜히 아버지 신경 건드리지 말고 뭐라고 하면 죄송합니다라고 해.”
“네 그럴게요.”
이층에서 기다리다가 적당히 시간을 맞춰 얇은 서류철을 하나 들고 내려온 석원은 서재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있던 박태홍 회장이 굳은 얼굴을 한 채 빈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거기 앉거라.”
석원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박태홍 회장이 언짢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질책하듯 물었다.
“뭘 하느라 그렇게 오랫동안 미국에 있었던 거냐?”
“미국에 있는 제 개인 운용사 일을 처리하러 갔었어요. 회사 일과 병행해서 해도 된다고 아버지가 허락하셨잖아요.”
야단을 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서 예전에 했던 약속을 거론하자 할 말이 궁해진 박태홍 회장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하지만 대기업 오너답게 박태홍 회장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몇 달씩이나 자리를 비워도 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해요. 하지만 알고 계시다시피 미국 채권 시장이 한바탕 뒤집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금리는 사업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기에 당연히 미국에서 벌어진 채권 대학살에 대해 알고 있던 박태홍 회장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설마 채권에 투자했던 거냐?”
“네. 그렇지만 손해를 보진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전에 규모가 큰 미국 보험사가 채권에 투자했다가 수억 달러의 손실을 냈다는 신문 기사를 봤던 걸 떠올린 박태홍 회장은 염려 가득한 시선으로 둘째 아들을 봤다.
“정말 괜찮은 거냐?”
“다른 건 몰라도 제가 촉 하나는 좋잖아요. 찝찝한 느낌이 들어서 금리 인상 발표가 나오기 전에 얼른 빠져나왔어요.”
단순히 먼저 빠져나온 것에 그치지 않고 숏베팅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지만 그건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기에 어물쩍 넘어갔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짓던 박태홍 회장은 이내 정색하며 충고를 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위기를 피해갔지만 언제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악재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이 투자라는 걸 확실히 느꼈을 거다.”
“네.”
“그러니 파운드화 때처럼 무모하게 덤벼들지 말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자세로 항상 신중을 기하도록 해라.”
“그럴게요.”
순순히 대답하는 석원의 모습에 박태홍 회장이 오히려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냉큼 대답만 하지 말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라는 걸 잊지 말란 말이야.”
“감만 가지고 무턱대고 투자하는 멍청이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흥. 그러는 녀석이 거액의 복권 당첨금을 몽땅 파운드 폭락에 몰빵 해?”
“그야 파운드화가 가치보다 높게 올라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석원은 은근한 핀잔에도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조만간 하락할 것이 눈에 보이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는다면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짓 아니겠어요.”
꼬박꼬박 대꾸하는 것이 기가 막혔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기에 박태홍 회장은 야단을 치지 못하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미국에 유학을 보내놨더니 공부는 안 하고 말재주만 늘어서 왔구나.”
“언변도 경영자가 갖춰야 될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라고 배웠어요.”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녀석 같으니라고.”
박태홍 회장이 졌다는 듯 머리를 절레 흔들었다.
그걸 보면서 능글맞게 웃고 있던 석원은 곧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말씀대로 앞으론 더욱 신중하게 생각해서 투자하도록 할게요.”
“열 번 성공해도 판단 실수로 한 번 크게 실패하면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경영자라는 자리다. 그로 인한 고통은 밑에 있는 직원들한테 더 크게 미친다는 걸 절대 잊지 말도록 해.”
실제로 오너는 잘못된 판단으로 회사가 큰 손해를 입더라도 별다른 걱정이 없었지만 직원들은 생계를 위협받을 수 있었다.
‘몇 년 뒤에 닥칠 IMF에서도 재벌 회장들이 아닌 그동안 묵묵히 일만 해온 서민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었지.’
건국 이래 최대 국난 중 하나라는 IMF 사태 이후로 한국은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뼈아픈 것이 바로 중산층의 몰락이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석원은 박태홍 회장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흐흠. 이번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치고 다음부터는 또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도록 해라.”
“하지만…….”
손바닥을 내밀어 석원의 말을 막은 박태홍 회장이 엄한 목소리로 훈계했다.
“네 개인 운용사 일을 병행해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그렇다고 증권사 업무를 소홀히 해도 된다고 한 적은 없다. 팀장이라는 놈이 툭하면 자리를 비우는데 안심하고 돈을 맡길 수 있겠냐.”
“미국에 가 있는 동안 한국 쪽 일을 등한시한 적은 없어요.”
박태홍 회장은 콧방귀를 뀌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국이 옆 동네도 아니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러자 석원이 이럴 줄 알고 가져온 얇은 서류철을 박태홍 회장 앞에 내려놨다.
“이게 뭐냐?”
“위탁하신 자금 운용 성과 내역서예요.”
“……?”
허리를 꼿꼿이 세운 석원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걸 보시면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아실 거예요.”
“…….”
미간을 좁힌 박태홍 회장은 둘째 아들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한쪽 팔을 뻗어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성과를 얼마나 냈기에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어디 한번 보자.”
결과가 마음에 안 차면 혼쭐을 내주려고 했던 박태홍 회장은 내역서에 적힌 숫자를 확인하곤 눈을 크게 부릅떴다.
[투자 원금 : 163억 3천만 원총 수익금 : 589억 9천만 원 (1994년 4월 6일 기준)]
번쩍 고개를 든 박태홍 회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오…… 오백팔십구억이라니…… 이거 제대로 계산한 것이 맞는 거냐?”
맡긴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투자금이 몇 배로 뻥튀기됐으니 이런 격한 반응을 보일만도 했다.
평소 항상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던 박태홍 회장이었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이때만큼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박태홍 회장의 모습에 석원은 내심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겉으론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 오차가 있긴 해요.”
“그, 그렇지. 말이 안 되는 숫자니까 말이다. 당연히 오차가 있겠지.”
하지만 박태홍 회장은 바로 이어진 석원의 이야기에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투자한 오광산업과 천호제강 주가가 오늘도 5% 가까이 올랐거든요.”
“…….”
“그러니까 대충 잡아도 590억은 넘겼을 거예요.”
“……!”
석원이 툭 내뱉는 말에 박태홍 회장은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도저히 안 믿겨 지는지 되물었다.
“지금 590억이라고 했냐?”
박태홍 회장의 시선을 마주 보면서 석원이 태연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네.”
손에 들고 있는 내역서를 다시 한번 확인한 박태홍 회장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둘째 아들을 쳐다봤다.
“이게 가능한 거냐?”
“제가 이쪽 일도 소홀히 안 하고 제대로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석원이 어깨를 으쓱이자 박태홍 회장은 허어 하고 헛바람을 내쉬었다.
“3배 넘게 수익이 났지만 아직 더 오를 주식이니까. 그냥 이대로 놔두는 걸 추천드려요.”
박태홍 회장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물었다.
“여기서 더 오른다고?”
“네. 못해도 열 배는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여. 열 배면…… 천 육백억이 넘는데 너무 욕심부리는 거 아니냐.”
기껏 수익을 낸 것까지 까먹을까 봐 걱정하자 석원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열 배 수익을 목표로 하고 투자한 걸요.”
“허어. 이것 참.”
박태홍 회장이 고민에 찬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타석에 서서 방망이를 휘두를 때 자잘하게 안타를 치는 것보단 크게 홈런 한 방을 날리는 것이 더 낫잖아요.”
“이 녀석아. 이게 야구하고 같아!”
“모든 건 하나로 통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하여간 말은 절대 안 지는구나.”
박태홍 회장은 한참을 고심하다가 그를 보며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정말 자신이 있는 거냐?”
“지금 빼시면 나중에 후회하실 거예요. 참고로 제 투자금은 그대로 놔둘 겁니다.”
“끄으응.”
박태홍 회장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널 한 번 믿어보마.”
“탁월한 선택이세요.”
석원이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녀석, 넉살은.”
박태홍 회장은 그사이 진이 다 빠진 얼굴을 하고선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봐라.”
“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석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갔다.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박태홍 회장은 혼을 내주려고 불렀다가 오히려 이리저리 휘둘린 걸 깨닫고 실소를 흘렸다.
“이 녀석.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온 거군.”
그게 아니라면 딱 맞춘 것처럼 이렇게 투자 내역서를 떡하니 내놓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으니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박태홍 회장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서류철에 든 내역서를 다시 한번 천천히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녀석. 역시 날 닮아서 돈 버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