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83)
금수저 투자백서 83화(83/231)
83. 이번에도 레 버리지를 거시는 거겠죠?
석원의 폭탄 발언에 두 사람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투기 세력의 공격으로 페소화가 10% 넘게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반토막이 날 거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랜든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페소가 반토막이 날 거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석원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고는 차분히 이야기했다.
“페소화가 폭락하게 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요?”
“그야 미국 달러화에 연동되는 연계환율제도를 쓰다가 올 초부터 전격 실시된 미국 금리 인상에 직격탄을 맞은 것이지 않습니까.”
“맞아요.”
석원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미국 내에서 보이는 인플레이션 조짐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기축 통화로서 달러가 가지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 여파는 미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에 미칠 수밖에 없죠.”
기축통화국인 미국과 달러의 힘이 얼마나 큰지는 금리 인상에 말 그대로 대학살이 일어난 전 세계 채권 시장 상황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다고 말까지 있겠어.’
실제로 앞으로 수년에 걸쳐서 벌어지는 연쇄적인 신흥국 경제 위기의 뒷배경에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큰 영향을 끼쳤다.
“금리를 올린다는 건 곧 긴축을 뜻하는 거니까. 저금리에 전 세계에 풀려 있던 수많은 유동 자금들이 다시 미국으로 빨려들어 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미국 국채는 가지고 있어봤자 5~6%밖에 이자를 안 주는 데 반해 멕시코 국채는 12~14%의 수익을 보장해주니. 보스가 말씀하신 대로 그동안 월가의 핫머니들이 대거 멕시코로 유입됐었죠.”
단순히 미국에서 돈을 빌려 멕시코 국채에 투자만 해도 두 배 차익을 올릴 수 있는데 이걸 안 한다면 바보였다.
상석에 앉은 석원을 힐끗 쳐다보며 앤드루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면서 이렇게 편하게 돈을 버는 방법이 더 이상은 통하지 않게 되어 버렸고. 오히려 들어와 있던 핫머니들이 다시 빠져나가면서 페소화 하락을 촉발시킨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석원이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거기에 유력 대선 후보가 피살돼 정치적 불안까지 드러내며 흔들리니까. 그 틈을 노린 투기 세력이 들러붙으면서 페소화를 더욱 아래로 끌어 내려 버린 것이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이에요.”
그러자 랜든이 머리를 절레 흔들었다.
“옛말에 불행은 한 번에 몰려온다더니 딱 그 꼴이군요.”
“멕시코 입장에서 최악인 것은 연준이 아직 금리 인상을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끄으응.”
랜든은 앓는 소리를 내며 석원의 말에 수긍했다.
“하긴 이번 FOMC에서도 또 금리를 올려 이제 4%를 넘겨 버렸죠.”
“미국 금리가 높아질수록 투자금 유출이 더욱 크고 빨라지게 될 거예요.”
두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돈을 빼서 미국으로 가져가지 멕시코에 그대로 남겨놓지는 않았을 터였다.
“멕시코 중앙은행이 가지고 있는 외환보유고가 286억 달러나 된다고 해도 들어와 있는 핫머니의 규모가 몇 배 더 많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겠죠.”
그러자 앤드루가 반박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페소화가 반토막이 날 거라고 하시는 건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멕시코 정부도 바보가 아닐 텐데 그런 상황이 될 때까지 그냥 가만히 지켜만 보겠습니까.”
랜든 역시 같은 생각인지 소파에 앉은 채 머리를 끄덕였다.
“월가에서 예상하는 것처럼 더 견디지 못한 멕시코 정부가 조만간 연계환율제도를 폐지하고 페소화를 절하할 거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게 정상이지 않습니까?”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 자세로 몸을 기댄 석원이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러겠지만 문제는 지금 멕시코가 한참 대선을 치르는 중이라는 거예요.”
“……!”
“위기를 진정시키려면 단순히 환율제도만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증세와 동시에 공공지출을 줄여야 되는데, 대선을 앞둔 상태에서 그럴 수 있겠어요?”
이야기를 들은 랜든이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으음.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말을 꺼내는 순간 표가 우수수 떨어져 나갈 테니 절대 먼저 총대를 메려고 하지 않겠죠.”
처음 예상과 달리 멕시코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앤드루는 눈을 반짝이며 석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에 더해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가 암살당해 유력한 대권 후보가 사라져 버린 집권당은 내부 분란과 권력다툼에 빠져 상황을 정리할 여력이 없으니 더욱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면서 석원은 지난 삶에서 오 부장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여어. 새신랑 오늘은 구두를 좀 많이 닦았냐?”
여느 때와 똑같이 좁은 구둣방에 혼자 앉아 찍어온 구두를 닦고 있던 석원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는 종이 가방을 한 손에 든 오 부장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결혼한 지 1년도 넘었는데 무슨 새 신랑이에요.”
오 부장은 익숙한 손짓으로 색이 살짝 바랜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그럼 헌 신랑이라고 불러줄까?”
“됐네요. 구두 닦으러 오셨어요?”
졌다는 듯 머리를 절레 흔든 석원이 물었다.
“그래. 하던 거 마저 끝내고 천천히 해줘.”
오 부장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두곤 삼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마치 자기 집 안방인 것 마냥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행동이었다.
석원이 눈을 힐끔 돌려 오 부장이 벗어둔 구두를 보자 먼지가 조금 낀 걸 빼곤 아직 깨끗했다.
하긴 겨우 사흘 전에 구두를 닦고 갔으니 벌써 더러워지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살짝 먼지만 털어내면 될 정도였지만 구두를 닦는 것보단 오 부장이 그냥 잡담이나 하면서 주식 거래로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오는 걸 알았기에 석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커피 한 잔 드려요?”
“좋지.”
오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들고 있던 구두를 내려놓고 장갑까지 벗은 석원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돌려 생수병에 든 물을 커피포트에 따랐다.
그러곤 종이 박스에서 믹스 커피를 두 봉 꺼내 뜯은 뒤 종이컵 하나에 다 털어 넣었다.
믹스 커피 하나는 밍밍하다며 항상 두 개씩 타서 먹는 오 부장의 습관을 알기 때문이었다.
금방 물이 끓어오르자 석원은 적당히 종이컵에 따르고는 오 부장한테 내밀었다.
“잘 풀리게 몇 번 저어서 드세요.”
“오냐.”
종이컵을 받아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 홀짝인 오 부장이 캬 하는 소리를 냈다.
“크으. 역시 네가 타주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니까. 우리 인턴 녀석은 왜 이 맛을 못 내는지 몰라.”
다시 장갑을 낀 석원은 바닥에 놔둔 구두를 집어 들면서 툭 던지듯 말했다.
“커피 심부름 같은 거 시키면 요즘 큰일 나는 거 아시죠?”
“내가 갑질이나 하는 놈인 줄 아냐. 시킨 게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타주는 거야.”
“아무튼요.”
석원은 헝겊을 둘둘 만 손에 검은색 약을 묻혀서 구두를 다시 닦기 시작했다.
몇 년이나 똑같은 움직임을 반복한 탓에 구두를 닦는 손짓엔 쓸데없는 군더더기 같은 게 전혀 없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묘하게 집중하게 되는 광경에 오 부장은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다가 한쪽에 반으로 접힌 채 놓여 있는 신문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경제면을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기사에 눈을 찌푸렸다.
[멕시코 1Q 경제 성장률 ‘테킬라 위기’ 이후 최악]“여기는 또 이러네.”
고개를 들어 오 부장이 보고 있는 신문 기사를 힐끔 쳐다본 석원은 계속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경제 상황이 안 좋은데 신종플루까지 유행해서 난리도 아닌가 보더라고요.”
“원래 어려움이 닥치면 약한 고리부터 먼저 나가떨어지는 법이지.”
그러면서 오 부장은 신문을 다시 접어서 내려놨다.
“여기 나온 테킬라 위기가 뭔진 알지?”
“당연하죠. 90년대쯤에 멕시코가 겪은 외환위기잖아요. 그걸 멕시코 특산 술 이름을 붙여서 테킬라 위기라고 부르고요.”
“역시 내 수제자답다.”
“그 정도는 기본이죠.”
석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좀 띄워주니까 금방 우쭐하는 거 봐라.”
오 부장은 그런 석원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놀리는 거냐면서 눈을 흘기자 오 부장이 입으로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테킬라 위기가 지나가고 2년쯤 뒤에 멕시코로 출장을 갔던 적이 있어.”
“아, 기억나네요. 선물이라고 하면서 이상하게 생긴 목각 인형을 주셨죠.”
“그래그래. 그때 준 건 잘 가지고 있냐?”
석원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왼편 선반에 올려진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텔레비전 위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진 인디언 목각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짜식. 그래도 안 버리고 가지고 있네.”
“놔둘 자리가 없어서 저기 올려놨다가 그냥 잊어버린 건데요.”
“뭐 됐다. 아무렴 어때.”
오 부장은 피식 웃고는 어느새 거의 다 마신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넣은 뒤 썰을 풀기 시작했다.
“테킬라 위기가 뒤이어 벌어진 IMF 금융위기의 전조였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네.”
담뱃재를 빈 종이컵에 털면서 오 부장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위기를 겪은 지 2년이나 지났을 때지만 출장을 가서 본 멕시코 상황은 정말 말도 아니었어.”
“그렇게나 안 좋았어요?”
석원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손은 바쁘게 움직이며 구두에 광을 냈다.
“그래. 파탄 난 경제가 회복되지 않아서 도시 곳곳이 우범지대로 변하고 가는 곳마다 구걸하는 노숙자들 천지였어.”
“꼭 IMF 때 한국 같네요.”
“우리도 그때 많이 힘들었지.”
오 부장이 텔레비전 위에 있는 인형을 가리켰다.
“저 목각 인형도 10살도 안 되는 원주민 아이가 호텔 앞에서 관광객들한테 팔러 다니는 걸 보고 10달러를 주고 산 거야.”
그것까지는 몰랐던 석원이 고개를 돌려 별생각 없이 내버려 뒀던 목각 인형을 새삼스럽게 쳐다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래도 설마 멕시코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웬걸 반년도 안 돼서 IMF가 터져 버리더라고.”
오 부장이 타이어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물었다.
“그런데 진짜 웃긴 건 뭔지 아냐.”
“뭔데요.”
오 부장은 거의 다 피운 담배를 손에 든 종이컵에 비벼 껐다.
“외환위기까지 가는 상황을 보면 한국과 멕시코가 너무나도 닮은 구석이 하나 있다는 거야.”
“정말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석원이 구두를 닦던 손을 멈췄다.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냐.”
“지난주에 사모님한테 상갓집에 간다고 해놓고선 친구분들이랑 갯바위 낚시하러 가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오 부장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짜식이 별걸 다 기억한다니까.”
입속으로 한참 투덜거린 오 부장은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외환위기가 찾아왔을 때 멕시코가 한창 대통령 선거 기간 중이었거든. 우리도 그랬고 말이야.”
“어 정말 그렇네요.”
실제로 한국도 한창 15대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진행되는 와중에 IMF 사태가 터졌고 그로 인해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유력한 집권당 대선 후보가 피살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한꺼번에 겹치기도 했지만 멕시코가 국가 파산 직전까지 몰리게 된 건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 정부와 중앙은행이 제대로 대처를 못한 것이 제일 커.”
오 부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리고 더 뼈 아픈 건 멕시코가 그렇게 된 걸 똑똑히 지켜봤으면서도 불과 2년 뒤에 비슷한 상황에서 미리 대비 못하고 한국도 똑같이 당했다는 거야.”
“아…….”
석원도 따라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 부장의 이야기대로 한국 관료들이 멕시코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남 일이라고 그냥 넘기지 않고 교훈을 삼았다면 IMF 사태를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때 갑자기 울린 벨 소리에 오 부장이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그래. 뭐? 알았어.”
짧게 통화를 끝낸 오 부장이 급히 벗어둔 구두를 다시 신으며 말했다.
“전무님이 급하게 찾는다고 해서 바로 가봐야겠다.”
“그러세요.”
어차피 구두가 깨끗해 딱히 닦을 필요도 없었다.
몸을 일으킨 오 부장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옆에 놔둔 종이 가방을 석원한테 내밀었다.
“이거 받아라.”
얼떨결에 종이 가방을 받아든 석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요?”
“제수씨가 아이를 가졌다며. 그래서 아기용품을 이것저것 샀지.”
“안 그러셔도 되는데.”
“임마. 너한테 주는 게 아니고 애기 선물이야. 그럼 난 간다.”
오 부장은 살짝 손을 들어 올리고는 서둘러 회사로 들어갔다.
뒤늦게 종이 가방을 열어본 석원은 안에 들어있는 작고 귀여운 아기 신발을 보곤 미소를 지었다.
손바닥 위에 놓인 앙증맞은 신발 한 쌍의 무게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였다.
그렇게 예전 기억을 회상하던 석원은 앤드루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확실히 혼란스러운 멕시코의 정치 상황을 생각해볼 때 어쩌면 월가에서 예상하는 것과 다르게 사태가 흘러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자 랜든이 두 손을 비비면서 살짝 들뜬 표정을 지었다.
“말씀대로 된다면 영국 때보다 더 판이 커질지도 모르겠군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은 석원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사 예상과 달리 멕시코 정부가 최악까지 가지 않고 막아낸다고 해도 페소화가 지금보다 더 떨어져 있을 테니까. 기대보다 수익이 줄어들 뿐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잃을 리스크 없이 무조건 따는 게임이라면 베팅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페소화만 투매하실 겁니까.”
앤드루가 살짝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경제 위기에 몰리게 되면 국채도 동반 추락할 테니 같이 베팅을 하도록 해요.”
“이번에도 레 버리지를 거시는 거겠죠?”
랜든의 물음에 석원이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