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84)
금수저 투자백서 84화(84/231)
84. 그냥 딱 촉이 오는 걸로 골라봐요.
같은 시각 종로구 고급 한식당.
넓은 대지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한식당 별채에 박태홍 회장이 김성규 대통령의 최측근인 구형기 비서실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널찍한 교자상 위에 마흔 가지가 넘는 요리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는 가운데 구형기 비서실장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독대 때 박 회장님이 주신 선물에 VIP께서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셨다니 다행이군요.”
정권 최고 실세 가운데 한 명인 만큼 박태홍 회장은 예의를 지켜 정중하게 상대를 대했다.
“그날 저도 함께 있었지만 가져오신 선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구형기 비서실장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앉은 채 상체를 살짝 앞으로 굽히며 물었다.
“잊고 있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찾아내서 다시 가져오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겁니까?”
그러자 박태홍 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우연히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폐선 직전에 있다는 걸 알고 그걸 막으려 사들였는데. 때마침 독대가 예정되어 있어 그날 국가에 기증하게 된 겁니다.”
“그렇군요.”
둘째 아들의 공을 가로채는 것 같아 박태홍 회장은 내심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석원이 이렇게 하길 원했고 무엇보다 구구절절 내막을 설명하는 것보다 이러는 게 여러모로 나았기에 그냥 미리 생각해둔 대로 이야기를 했다.
“흥남 철수 작전에서 많은 피난민들의 생명을 살린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중국에 고철로 팔려 폐선됐다면 무척이나 가슴 아팠을 텐데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저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뒤늦게 사실이 알려졌다면 국민들의 비판이 쏟아져 김성규 대통령과 정부 입장이 꽤 난처했을 터였다.
“보름 뒤에 배가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하셨지요?”
“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보니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손을 좀 본 뒤에 가져오느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구형기 비서실장이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긴 2차 대전 때 건조됐으면 벌써 50살 가까이 나이를 먹은 걸 텐데 온전한 상태일 리가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도착할 때 VIP께서 직접 환영식에 참석하셔서 맞이할 텐데. 여기저기 녹이 슬어 너덜너덜해져 있는 것보단 깨끗한 모습인 게 더 보기에도 좋겠죠.”
처음 듣는 이야기에 박태홍 회장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님께서 직접 오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미 의회에서 갤런트십 칭호까지 받은 6.25 전쟁에서 기적을 일으킨 선박이 돌아오는 날인데 VIP께서 맞이를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미소를 지으며 구형기 비서실장이 하는 이야기에 박태홍 회장은 청와대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귀환을 아주 제대로 우려먹을 작정이라는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날 거제도에 별도의 기념 공원을 만들어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전시하는 계획을 발표하고 박 회장님께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실 겁니다.”
“훈장을 주신다고요?”
“자칫 영영 잃어버릴 뻔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되찾아오는 큰 공을 세웠으니 훈장을 수여 받기에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 감사하면서도 당황스럽군요.”
“VIP께서 지시하신 일이니 나중에 인사를 드리십시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 그리고 환영식에 VIP께서 참석하신다는 건 기밀이니까. 공식 발표가 나오기 전까진 함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어느 나라든 국가 원수인 대통령의 동선은 기밀 사항이었다.
구형기 비서실장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놨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태홍 회장을 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참 지난 독대 자리에서 면세점 사업에 관심이 크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직감적으로 오늘 만나자고 한 용건을 꺼내려고 한다는 걸 느낀 박태홍 회장은 상체를 바로 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를 한국 방문의 해로 지정하고 일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 관광산업 육성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는 걸 알고 있으실 겁니다.”
“물론입니다.”
“다행히도 정책이 효과를 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났지만 국내에서 즐길 수 있는 관광 시설이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입니다.”
“…….”
“면세점 역시 그중 하나이고요.”
무슨 말을 할지 조바심이 들었지만 박태홍 회장은 노련하게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해서 연말에 시내 면세점 두 곳을 새로 허가하기로 했습니다.”
구형기 비서실장이 일부러 잠깐 뜸을 들이고는 박태홍 회장을 봤다.
“이번 일도 있고 해서 그중 한 곳을 대흥 그룹에 맡기라는 VIP의 말씀이 있으셨는데, 해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그러자 박태홍 회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 어딜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는 멋들어진 면세점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로테와 유토피아 그룹의 공격적인 백화점 사업 진출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타개책으로 대흥 그룹이 생각한 것이 바로 면세점 사업이었다.
하지만 면세점은 정부에서 허가권을 받아야 되는 사업이었기에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난번 독대 자리에서 선물을 받고 기분이 좋아진 김성규 대통령이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하거나 어려운 이 없냐고 묻자 얼른 면세점 이야기를 꺼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말한 거였는데 혹시나 하던 기회가 정말로 주어진 거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박태홍 회장이 강한 의욕을 드러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구형기 비서실장이 말했다.
“다음 달에 신규 면세점 사업자 공고가 나갈 테니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해놓도록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구형기 비서실장이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다 박 회장님이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시니 그 보답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콕 집어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가져온 것에 대한 대가라는 걸 그대로 말해주는 구형기 비서실장이었다.
새 성장 동력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많은 걸림돌 탓에 쉽사리 추진하지 못하던 면세점 사업이 배 한 척으로 간단히 해결되다니.
박태홍 회장은 내심 둘째 아들의 뛰어난 혜안에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상념을 지운 박태홍 회장은 술이 든 주전자를 들어서 비어 있는 구형기 비서실장의 잔을 채워줬다.
그러고는 옆에 놔둔 하드 케이스 가방을 슬그머니 구형기 비서실장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약소하지만 정성을 담았으니 받아 주십시오.”
“뭘 이런 걸.”
“대통령님을 모시다 보면 필요하실 일이 있으실 테니. 부담 갖지 마시고 쓰십시오.”
구형기 비서실장이 가방을 바닥에 눕혀서 슬쩍 열어보자 달러와 엔화 현금 뭉치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하고 입가에 미소를 띄운 구형기 비서실장은 한결 더 부드럽게 말했다.
“이러면 안 되지만 각하를 위해 준비한 거라고 하니 받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방을 다시 닫는 걸 보며 박태홍 회장이 술잔을 집어 들었다.
“한잔 하시죠.”
“그럴까요.”
구형기 비서실장과 가볍게 잔을 부딪친 박태홍 회장은 기분 좋은 얼굴로 단번에 술을 삼켰다.
* * *
다음날 여의도 대흥 증권 본사.
오늘도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5층 트레이딩 센터 직원들은 장이 마감되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다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흰색 와이셔츠를 접어 팔꿈치까지 올린 최호근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커피 한 잔씩 타 드릴까요?”
“좋지.”
홍재희의 말에 최호근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 내린 정환엽 대리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살짝 돌려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렸다.
“난 믹스 두 봉. 알지?”
“매번 그렇게 드시는데 모를 리가 있겠어요.”
새침하게 대답한 홍재희가 탕비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피곤하겠지만 오늘 거래 내역을 정리해서 미스 홍한테 넘겨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장이 마감했다고 해서 곧바로 퇴근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 할 일이 꽤 남아 있었다.
유석현의 대답을 들은 최호근 과장은 돌돌 말아 올린 와이셔츠 소매를 바로 하고는 옷걸이에 걸어둔 윗도리를 빼서 걸쳤다.
“그럼 난 팀장님한테 갔다 올게.”
서류철을 챙겨 팀장실로 가려던 최호근 과장은 뭔가를 발견하곤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정환엽 대리 등 뒤로 다가가 손에 들려 있는 걸 어깨너머로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뭐하냐?”
그러자 고개를 든 정환엽 대리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 이거요. 자동차 팸플릿이에요.”
“차를 사려고?”
“네. 대광 자동차에서 나오는 에스페로인데 멋지지 않아요.”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유석현이 중간에 끼어들어 물었다.
“에스페로면 준중형이라 가격이 꽤 나가지 않습니까?”
“아는 후배가 여기 영업 사원이라서 싸게 해준다더라고.”
어쩐지 오늘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인다 했더니 차를 살 생각에 들떠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얼만데.”
“9백이요.”
“비싸네. 돈은 있냐?”
“연말에 보너스 나올 거잖습니까.”
정환엽 대리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그런 모습에 눈썹을 찡그린 최호근 과장이 혀를 차며 타박했다.
“임마. 아직 여름도 다 안 지났어.”
“원래 차는 돈이 아니라 용기로 사는 거 모르셨어요. 그리고 할부라는 아름다운 제도가 있잖아요.”
“으이구. 저러다 한 번 제대로 데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원래 대책 없는 놈인 건 알았지만 갈수록 증상이 심화되는 듯했다.
최호근 과장은 머리를 절레 흔들고는 몸을 돌려 팀장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석원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동해그룹 차입금 상황을 정리해서 가져왔습니다.”
“아. 수고했어요.”
석원이 손을 내밀자 최호근 과장이 공손하게 서류철을 건넸다.
서류철을 펼쳐 대충 훑어본 석원이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나중에 천천히 살펴볼 테니까 나가봐요.”
“네.”
머리를 숙여 인사한 최호근 과장은 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요.”
그때 뒤에서 들리는 석원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다시 돌아봤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이것 좀 잠깐 볼래요.”
석원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팸플릿을 집어서 내밀었다.
얼떨결에 팸플릿을 받아든 최호근 과장은 걸프스트림과 봄바디어 등에서 만든 여러 비즈니스 제트기 모델들의 사진을 보곤 멀뚱히 눈을 껌뻑였다.
“최 과장이 보기에 거기에 있는 전용기 중에 뭐가 제일 나은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최호근 과장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비행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그냥 딱 촉이 오는 걸로 골라봐요.”
석원이 가벼운 말투로 재촉하자 최호근 과장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다시 팸플릿을 내려다보다가 그중 하나를 손가락을 짚었다.
“전 이게 좋아 보입니다.”
최호근 과장이 선택한 기종을 본 석원은 싱긋 미소지었다.
“역시 보는 눈은 다 똑같네요. 나도 그게 괜찮았는데.”
“어…… 그렇습니까?”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봐요.”
“아, 네.”
엉거주춤 대답한 최호근 과장은 밖으로 나와 문이 닫힌 팀장실을 힐끗 쳐다봤다.
“설마 팸플릿에 있는 비행기를 사시려는 건 아니겠지.”
전용기 팸플릿을 무슨 슈퍼마켓 전단지처럼 쫙 펼쳐놓고 고르고 있던 모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정환엽 대리도 자동차 산다고 들떠있는데 재벌 3세인 석원은 비행기를 사야 급이 맞는 거 아닐까.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하던 최호근 과장은 이내 헛웃음을 내뱉었다.
“에이 비행기가 무슨 자동차도 아니고.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