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88)
금수저 투자백서 88화(88/231)
88. 이제 진짜 위기가 시작됐군.
하루 종일 뜨겁게 내리쬐던 햇살이 기세를 죽이고 서쪽으로 저물고 있는 늦은 오후.
사람들로 북적이는 노천카페 한쪽 테이블에 여전히 부스스한 갈색 머리칼을 한 로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헐렁한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로이는 대학교에 다닐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차림새였다.
파라솔 그늘 아래에서 맥주로 갈증을 달래며 손으로 피자 한 조각을 우물우물 집어먹고 있을 때 누군가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는데 왜 피자를 먹고 있어. 그렇게 배가 고팠냐?”
로이가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반가운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왔냐.”
기름이 잔뜩 묻은 손가락을 흔들며 말하자 석원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서양인들 사이에 있어도 눈에 띌 정도로 훤칠한 키에 웬만한 배우 뺨치게 잘생긴 석원이 흰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자 화보가 따로 없는 모양새였다.
거기다 단추를 느슨하게 풀어 내린 리넨 셔츠와 레이밴 선글라스는 또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옷차림에 별로 신경 안 쓰는 로이도 너무 편하게 입고 왔나, 민망한 마음에 슬쩍 자기가 입은 남방을 내려다볼 정도였다.
주변을 살짝 둘러본 로이는 서빙을 하는 여종업원은 물론이고 손님들까지 노천 카페에 있는 여자들의 시선이 전부 석원한테 꽂혀 있는 걸 알아채고 혀를 찼다.
“쳇.”
“왜 그래?”
“넌 다른 남자들을 위해서라도 밖에 돌아다닐 때 모자는 꼭 쓰고 다녀라. 아니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던가.”
“뭔 소린지 모르겠네.”
석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로이가 밥맛이 뚝 떨어진 표정으로 손에 든 피자를 그릇에 내려놓고는 뜬금없이 물었다.
“요즘 관리라도 받냐?”
“관리라니. 아까부터 왜 계속 헛소리를 하고 있어.”
“피부가 백인인 나보다 더 하얀 것 같아서.”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로이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놈이라는 걸 알고 있는 석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몰라. 선크림을 발라서 그렇게 보이나 보지.”
“남자가 무슨 선크림이야. 그런 건 여자들이나 바르는 건데.”
괜히 심통을 부리는 모습에 석원도 코웃음으로 맞받아쳤다.
“안 그래도 햇볕이 강한 동네인데 선크림도 안 바르고 다니면 한순간에 훅 간다. 너야말로 조심해.”
“난 그런 거 필요 없거든.”
로이는 일부러 고집을 부리듯 대꾸하곤 남은 피자를 집어서 입에 넣고 씹었다.
“그나저나 말이 나와서 하는 건데 그새 얼굴이 왜 이렇게 삭았냐?”
“내가 뭐 어때서.”
“다크서클은 턱까지 내려와 있고 피부도 푸석푸석해 보이는 게 상태가 영 아닌데? 꼭 일주일은 철야 한 사람 같은 몰골이잖아.”
“그 정도는 아니야.”
“뭐가 아냐. 거울 보여줘?”
“에이 씨.”
로이가 쩝쩝 입맛을 다시더니 버럭 성질을 냈다.
“야 너도 매일 밥 먹듯이 밤낮으로 컴퓨터 앞에서 일해봐라, 이렇게 되지.”
넷스케이프 사무실에 봤던 톰 하퍼와 반 좀비화 되어가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을 떠올린 석원이 애처로운 시선으로 로이를 쳐다봤다.
“이런 불쌍한 놈.”
“눈을 왜 그렇게 뜨냐. 저리 안 치워?”
“그렇게 힘들면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으로 옮기면 되잖아. 내가 알아봐 줄까.”
“안 그래도 돼. 누가 등 떠미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뭐.”
로이가 냅킨으로 손에 묻은 기름을 슥슥 닦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래?”
괜히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느낀 석원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로이뿐만 아니라 톰과 넷스케이프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위에서 시킨다고 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없다면 그렇게 밤낮없이 매달려 모든 걸 쏟아붓지는 못할 터였다.
“대신 혹시라도 나중에 회사를 나오게 되면 그때 투자나 해주라.”
로이가 뒤로 몸을 기대며 말했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석원이 의아하게 쳐다보고 물었다.
“너도 창업을 하려는 거야?”
“지금 당장은 아니고…….”
로이가 한쪽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사실은 너희가 보내준 새 웹 브라우저 베타 버전을 해보고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거든.”
“어떤 건데?”
로이가 컴퓨터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석원은 흥미를 보이며 쳐다봤다.
“아직 말할 정도는 아니고 조금 더 명확해지면 얘기해 줄게.”
“그래. 그럼 준비가 되면 말해.”
그러자 석원도 더 캐묻지 않고 선뜻 뒤로 물러섰다.
“대신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아이템이 별로라면 투자는 못 해줘.”
“당연하지. 나도 그런 건 싫으니까 염려하지 마.”
별로 서운한 기색 없이 바로 대답하는 로이의 모습에 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앞치마를 한 여종업원이 다가와 석원에게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석원은 로이가 시킨 맥주를 힐끔 쳐다보곤 말했다.
“쟤랑 같은 걸로 한 잔 부탁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종업원이 웃는 얼굴로 사라지자 석원이 테이블에 놓인 빈 접시를 턱으로 가리켰다.
“근데 방금 피자 먹어놓고서 또 저녁 식사를 하러 갈 수 있겠어?”
“이건 그냥 입가심이지. 저녁 먹을 배는 따로 남겨뒀으니까 걱정하지 마.”
못 말린다는 듯 석원이 머리를 절레 흔들 때 여종업원이 맥주를 들고 돌아왔다.
“맥주 나왔습니다.”
투명한 유리컵에 새하얀 거품이 넘칠 듯 채워진 맥주는 보기만 해도 엄청 시원해 보였다.
석원이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기포가 터지는 느낌과 함께 상쾌함이 목안을 타고 넘어가며 더위를 단번에 식혀줬다.
꿀꺽거리며 맥주를 삼킨 석원이 시원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놨다.
“후, 더워서 그런지 더 맛있는 것 같네.”
석원은 거품이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고는 로이를 쳐다봤다.
“그건 그렇고 베타 버전을 써 보니까 어땠어?”
완성된 새 웹 브라우저를 석원이 확인한 다음 날부터 곧장 미리 선정해둔 천 명을 대상으로 베타 테스트에 들어갔다.
당연히 석원과 톰 하퍼 두 사람하고 모두 인연이 있던 로이도 베타 테스터로 참여했다.
오늘 이렇게 만난 건 오랜만에 얼굴을 보려는 것도 있었지만 사용자 입장에서 새 웹 브라우저를 실제로 써보니 어땠는지 직접 물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솔직히 좀 놀랐어.”
“어떤 부분에서?”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묻는 말에 로이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베타 버전이라고 해서 엉성한 곳이 꽤 있을 줄 알았거든.”
베타 테스트 자체가 정식 출시 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류가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써 보니까 당장 정식으로 출시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더라고.”
“그래도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 것 아냐?”
“아니. 전혀 없었어.”
머리를 가로젓고는 로이가 말을 이었다.
“사흘밖에 안 써봤지만, 지금까지 사용해 본 걸로는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어. 현재까지 출시된 웹 브라우저 가운데 가장 좋다는 모자이크보다 성능이 훨씬 낫다고 느낄 정도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어.”
“그렇다니 다행이네.”
석원이 보기에는 괜찮았지만 컴퓨터에 빠삭한 전문가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지 몰랐기에 내심 베타 테스트 결과를 긴장하며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로이의 극찬을 듣자 한시름 놓이는 기분이었다.
“다양한 이미지나 영상 그리고 음성까지 멀티미디어콘텐츠를 재생할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각종 플러그인(plug-in)을 통해 기능을 확장할 수 있게 해둔 것이 좋았어.”
로이가 눈을 반짝이며 열정적으로 자신이 느낀 감상을 쏟아냈다.
“여러 장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든 것이 뭔지 알아.”
“뭔데?”
“바로 이렇게 많은 기능을 지원하면서도 프로그램이 가볍다는 거야.”
그 말에 석원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래봤자 용량 차이는 얼마 안 나잖아.”
로이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을 토했다.
“보통 사용하는 하드 디스크 용량이 많아봤자 850MB에 RAM은 4MB~8MB인데 프로그램이 무거우면 제대로 돌아가겠어? 그게 제일 중요한 거라고!”
이야기를 들은 석원은 내심 아차 싶었다.
‘맞아. 이땐 하드 디스크 용량이 작아서 플로피 디스켓에 대신 저장을 해둘 때였지.’
회귀 전 웬만한 영화 한 편 용량이 3~5G씩 차지하는 걸 생각하면 그동안 컴퓨터 성능이 얼마나 놀랍도록 빠르게 발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모자이크도 처음에는 속도가 괜찮았는데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뭐가 자꾸 덕지덕지 늘어나는 바람에 지금은 엄청 무거워져서 사용하기 불편해졌단 말이야. 그런데 이건 기능도 훨씬 나으면서 가볍기까지 하니까 게임이 끝난 거지.”
로이는 확신에 찬 얼굴로 장담하듯 말했다.
“아마 정식으로 출시하면 모자이크를 그대로 발라 버릴걸? 내기해도 좋아.”
“그 정도로 괜찮단 말이지.”
석원이 재차 확인하듯 묻자 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부러움 섞인 표정을 했다.
“그래. 이런 걸 만들어내다니 톰 그 녀석은 진짜 천재가 확실하다니까.”
그러면서 로이가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톰 녀석한테 내가 투자를 하는 건데.”
“그러지 그랬어?”
석원이 웃으며 묻자 로이가 눈을 흘기고 투덜거렸다.
“너처럼 부자도 아니고 내가 돈이 어디 있어? 하여튼 되는 놈들은 엎어져도 금반지를 줍는다더니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니까.”
가만히 놔두면 계속 쫑알거릴 기세라 석원이 대충 녀석을 달랬다.
“알았어. 대신 저녁은 내가 살게.”
“겨우 그걸로 입을 닦으려고. 오늘 술값은 네가 다 책임지는 걸로 하자. 내가 오늘 주머니를 탈탈 털어주지.”
어림도 없다는 듯 대꾸하는 로이의 말에 석원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그러지 뭐.”
나중에 넷스케이프를 증시에 상장시켜 벌어들일 돈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 * *
베타 테스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걸 며칠 더 지켜본 석원은 다시 비즈니스 제트기를 타고 뉴욕으로 넘어갔다.
항상 머무는 플라자 호텔 펜트하우스에 짐을 푼 석원은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하품을 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 커튼을 열자 환한 햇살이 거침없이 안으로 쏟아졌다.
“으. 눈부셔.”
석원은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린 채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센트럴 파크의 짙푸른 녹음과 그 너머로 빌딩들이 높게 솟아 있는 광경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경치를 감상하며 잠기운을 쫓아낸 석원은 실내 가운을 어깨에 걸치고는 침실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밖에서 나는 초인종 소리에 객실 문을 열어주자 깔끔하게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이 트롤리를 앞에 두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룸서비스입니다.”
그제야 자기 전에 조식 서비스를 요청해뒀던 걸 떠올린 석원이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들어와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트롤리를 밀고 객실 안으로 들어온 호텔 직원이 석원에게 물었다.
“조식은 어디에 준비해 드릴까요?”
“테라스에 차려줘요.”
“알겠습니다.”
호텔 직원은 곧바로 트롤리를 밀어 테라스로 향했다.
펜트하우스답게 테라스 역시 널찍했는데 새하얀 난간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 호텔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호텔 직원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테이블 위에 하얀 식탁보를 깐 뒤 가져온 음식들을 하나씩 세팅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이내 조식을 다 차린 호텔 직원이 인사를 하자 석원이 챙겨둔 팁을 내밀었다.
보통 팁으로 받는 것보다 두 배는 더 후한 인심에 호텔 직원의 태도도 절로 공손해졌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호텔 직원이 객실을 나가자 석원은 어슬렁거리며 테라스로 나가 은색 덮개를 하나씩 열어봤다.
갓 구운 크루아상과 스크럼블 에그, 베이컨 그리고 아삭한 샐러드와 신선한 과일이 같이 차려져 있는 풍성한 메뉴였다.
석원은 커피포트를 집어서 찻잔에 커피를 따른 후 의자에 앉아 진한 원두 향을 음미했다.
“음. 향이 좋네.”
홀짝거리며 커피를 마시자 그제야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입맛이 돈 석원은 따끈한 크루아상을 들어 살짝 베어 물었다.
풍성한 버터향과 함께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맴돌았다.
석원은 우물우물 크루아상을 씹으면서 조식과 함께 가져다 놓은 신문을 집어 들어 펼쳤다.
그러자 1면에 실린 기사가 석원의 시선을 끌었다.
[멕시코 대선 에르네스토 세디요 당선!어제 실시된 멕시코 대선에 집권당 후보인 에르네스토 세디요가 득표율 48.7%로 당선이 확정됐다.
전기공의 아들로 태어난 세디요 당선인은 구두닦이를 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좌절하지 않고 명석한 두뇌와 노력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냈다.
그후 멕시코 중앙은행과 기획예산부를 거친 전문 관료 출신으로 최근 외환 위기에 빠진 멕시코를 정상화시킬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당선이 확정되자 지지자들 앞에 서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세디요 당선인의 사진을 내려다보면서 석원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위기가 시작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