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89)
금수저 투자백서 89화(89/231)
89. 마음에 들면 그냥 질러 버리는 거죠.
뉴욕 맨해튼.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탁 트인 이스트 강이 보이는 엘도라도 펀드 대표실 안.
석원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랜든과 앤드루가 소파에 앉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엎치락뒤치락했지만 결국 집권당이 승리했네요.”
파란색 명품 넥타이를 한 랜든이 그를 보며 말을 받았다.
“세디요 후보가 당선되긴 했지만 득표율이 고작 2%밖에 차이가 안 날 정도로 진땀승이었습니다.”
“암살당한 콜로시오 후보에 대한 동정론이 일지 않았다면 아마도 집권당이 선거에서 패배했을 겁니다.”
석원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월가 분위기는 어때요?”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면서 묻자 랜든이 바로 대답했다.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예일대 경제학 박사에 멕시코 중앙은행과 기획예산부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랜든과 마주 보며 앉아 있던 앤드루가 말을 덧붙였다.
“객관적으로 외환 위기에 직면한 멕시코를 정상화시키는데 가장 적임자일 테니까요. 그것 때문인지 당선이 확정되자 달러당 4페소까지 내려왔던 환율이 반등해 3.5페소를 회복했습니다.”
“채권 시장에서도 바닥을 기던 멕시코 채권이 살짝 살아나는 모습입니다.”
페소화와 멕시코 국채에 숏을 친 엘도라도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석원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처음 위기가 불거졌던 3, 4월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어요.”
“…….”
“세디요 당선인에 대한 기대감에 반짝 상황이 나아질 수는 있어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자 석원의 눈치를 살피며 랜든이 조심스럽게 반론을 내놨다.
“선거가 다 끝났으니 이제 눈치를 보지 않고 멕시코 정부가 환율 안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겠습니까?”
앤드루 역시 같은 생각인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석원은 뒤로 몸을 기댄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그럴까요.”
“……?”
두 사람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석원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지금 페소화 절하를 선언한다면 외환 위기의 책임을 모두 떠안게 될 텐데 살리나스 대통령이 그러려고 할 것 같아요?”
“……!”
“아마도 취임식 전까지 어떻게든 틀어막다가 시한폭탄을 세디요 당선인한테 떠넘기려고 할 거예요.”
중지로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 올리면서 앤드루가 반박했다.
“분명 불명예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정권이 바뀐 것도 아니고 같은 집권당 소속인데. 설마 그렇게 하겠습니까?”
랜든도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맞습니다. 그랬다가는 문제가 더 커질 뿐만 아니라 그런다고 책임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름 타당한 의견이었지만 석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게 합리적이지만 때로는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기도 하는 법이죠.”
“…….”
“임기 동안 4~5%의 높은 실질 GDP 성장률을 기록하는 것과 동시에 물가를 안정시켜 멕시코 경제를 부흥시킨 것이 살리나스 대통령이 내세우는 최대 치적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석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게 멕시코 정부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가입과 저금리로 인해 쏟아져 들어온 달러 덕분이지만 살리나스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죠.”
실제로 엄청나게 유입된 달러로 인해 멕시코 증시는 지난 3년간 무려 세배가 상승하는 호황을 누렸다.
그렇게 밀려든 유동성을 잘 활용해 산업 생산성 확대와 고용 증대에 사용했다면 상황이 지금과 많이 달라졌겠지만 안타깝게도 멕시코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미국 연준이 금리를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계속해서 올릴 줄은 전혀 예상을 못 했겠지.’
아무튼 너무 방심하며 안이하게 생각한 대가를 멕시코는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었다.
“멕시코 경제를 부흥시킨 인물로 찬사를 받아 온 만큼 마지막까지 명예를 지키고 싶어할 거라는 말씀이군요.”
랜든의 말에 석원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감정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살리나스 대통령 같은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런 똥물을 뒤집어쓰기 싫겠죠.”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을 곱씹어 본 두 사람은 이내 눈에서 이채를 띠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긴 저 같아도 가능하다면 책임을 미루고 싶을 겁니다.”
한쪽 다리를 꼰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던 석원이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퇴임 전까지 살리나스 대통령이 시간을 끄는 동안 그나마 남아 있던 외환보유고마저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게 될 거예요.”
“기껏 대통령이 됐는데 파산 직전의 회사를 물려받은 꼴이 되겠군요.”
랜든의 말에 석원은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맞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세디요 당선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겠죠.”
그러자 앤드루가 눈을 반짝이며 곧장 머릿속에 떠올린 단어를 입에 담았다.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선언하겠군요.”
모라토리엄은 여러 이유로 채무 상환이 어려워졌을 때 국가가 일정 기간 모든 채무에 대한 원금과 이자 지불을 유예시키는 걸 뜻했다.
석원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되면 국가 신용도가 추락하고 금융 거래가 마비되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멕시코가 파산하게 생겼으니 다른 선택지가 없을 거예요.”
사실 지금도 멕시코 혼자 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데 정말로 석원의 예상대로 살리나스 대통령이 그저 시간만 벌어 책임을 떠넘기려고 든다면 더욱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미 한번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적이 있으니 두 번째는 처음보다 결정을 내리기가 더 쉬울 거예요.”
그러자 앤드루가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82년도 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요.”
1982년 당시 방만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외채를 대거 빌려 쓰고 있던 멕시코 정부는 주요 외화획득 수단인 원유 가격이 급락하자 지금처럼 외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벼랑 끝에 몰린 멕시코 정부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아야 했다.
“하긴 원래 뭐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죠.”
랜든의 중얼거리자 앤드루가 곧장 말을 이어받았다.
“저희가 추정하는 것이 맞다면 지금쯤 멕시코가 가진 총알이 절반 아래로 떨어져 있을 겁니다. 그걸 다시 연말까지 환율을 방어하는 데 허무하게 써 버린다면 세디요 당선인도 다른 뾰족한 수가 없긴 할 겁니다.”
찻잔을 집어든 석원은 어느새 커피가 차갑게 식어 있자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디요 당선인 본인이 박사 학위를 가진 경제전문가인 만큼 미적거리지 않고 더 빨리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거예요.”
“시간을 끌어봤자 상황이 더욱 악화만 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테니 아마 그럴 겁니다.”
앤드루의 이야기에 랜든도 역시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석원이 두 사람을 봤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되면 페소화와 멕시코 채권이 결정타를 입고 바닥까지 추락하게 될 거예요.”
“이번에는 얼마나 버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랜든이 가볍게 웃으며 슬쩍 눈가를 휘었다.
앤드루 또한 그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감탄하는 시선을 보냈다.
“페소화와 채권 양쪽 다 여전히 수익권 안에 있죠?”
“그렇습니다.”
앤드루의 대답에 그가 느긋하게 말했다.
“진짜 폭락은 대통령이 바뀌는 12월부터일 거니까. 그때까지 이대로 포지션을 유지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랜든이 가벼운 화제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꿨다.
“참. 보스 어쩌면 지금 입주해 있는 빌딩 주인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체이스 맨해튼 은행이 여기 소유주 아니었어요?”
예전에 들은 기억을 떠올리며 묻자 랜든이 바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건물을 팔려고 내놨다는 거예요?”
“원래 여길 은행 본점으로 사용해왔었지만 알고 계시다시피 몇 년 전 브루클린에 새로 마련한 사옥으로 전부 옮겨 갔지 않습니까.”
머리를 끄덕이는 석원을 보며 랜든이 설명을 계속했다.
“지금은 체이스 은행이 사용하는 공간은 없고 임대 수익을 얻는 용도로만 활용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내부적으로 유휴 부동산을 대거 정리하기로 결정 내리면서 원 뉴욕 플라자 빌딩도 팔기로 한 모양입니다.”
“이스트 강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라 위치도 좋고 역사적인 상징성도 있는 랜드마크 격인 건물이라 팔기 아까울 텐데. 조금 의외네요.”
“말씀대로 맨해튼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건물이긴 하지만 1959년에 지어져 벌써 35년이나 된 빌딩이라 너무 낡아서 불편한 부분이 많으니까요. 거기다 유지보수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가다 보니 그냥 처분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앤드루 역시 들은 이야기를 꺼내며 설명을 덧붙였다.
“몇 년 전에 로비와 오래된 엘리베이터를 교체하고 건물 내부 석면을 제거하는 데만 5천만 달러나 되는 비용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석원은 여전히 의아함이 남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 그렇게 돈을 들여서 보수해놨는데 파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요?”
“그렇게 한 번 리모델링을 했으니 또 보수해야될 일이 생기기 전에 가격을 더 올려서 팔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낡은 채로 그냥 내놓는 것보다 새로 깔끔하게 단장해서 파는 게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을 테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석원이 랜든을 봤다.
“여기 공실이 거의 없는 걸로 아는데 맞아요?”
“네. 위치가 좋은데다가 무엇보다 거래소하고 전용회선이 깔려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까요.”
주식이나 채권을 사고팔 때 찰나의 순간에 시세가 바뀌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때문에 남들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주문을 넣을 수 있는 전용회선의 존재가 중요했다.
소유주인 체이스 은행뿐만 아니라 여러 금융 회사와 헤지펀드들이 주로 입주해 있었기에 원 뉴욕 플라자 빌딩은 거래소하고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용 통신선이 깔려 있었다.
‘임대료가 비싼데도 불구하고 여기로 사무실을 정한 이유도 바로 전용선 때문이었지.’
이런 이점 때문에 대형 투자 은행인 골드만 삭스와 푸르덴셜증권도 이 빌딩에 입주해 여러 층을 임대해서 사용 중이었다.
한쪽 손으로 깔끔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한 석원은 이내 다시 입을 뗐다.
“체이스에서 빌딩을 얼마에 내놨어요?”
“3억 달러라고 들었습니다.”
“적지 않은 액수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싼 건 아니네요. 이 건물 우리가 사죠.”
“예?”
너무 태연하게 뱉어진 말에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여길 사시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펀드 자산이 처음보다 크게 늘어났으니 맨해튼에 건물 하나쯤은 매입해도 괜찮지 않겠어요.”
랜든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다른 것도 아니고 50층이나 되는 초고층 빌딩을 사는 건데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오늘 먹을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툭 내던질 말은 아니었다.
앤드루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것처럼 머리를 주억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석원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고민은 시간만 지체할 뿐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입지는 이만하면 최상급이니 앞으로 가치가 더 올라갈 것이 뻔할 테고. 거기다 공실도 없어 안정적으로 임대 수입까지 올릴 수 있는데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석원은 어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갖고 싶은 마음에 들면 그냥 질러 버리는 거죠.”
이걸 통이 크다고 해야될지 아님 화끈하다고 해야될지 모를 정도로 거침없는 결정이었다.
3억 원도 아니고 무려 3억 달러짜리 초고층 빌딩을 즉흥적으로 질러 버리는 모습에 랜든과 앤드루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성급하게 결정한 것 같아도 석원의 이야기처럼 돈이 없는 것도 아닌 데다가 부동산으로서 가치 역시 뛰어났기에 빌딩을 매입해서 손해날 일은 없었다.
두 사람 다 그런 사실을 알았기에 만류하지도 못하고 그저 이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누가 먼저 채가기 전에 바로 전화해서 계약을 걸죠.”
“아, 예.”
랜든은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을 떨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