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97)
금수저 투자백서 97화(97/231)
97. 그럭저럭 부족하진 않겠네요.
사고를 낸 차량 대신 새로 뽑은 검은색 BMW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호텔 정문 앞으로 들어와 멈춰 섰다.
깔끔한 제복 차림의 도어맨이 얼른 다가와 운전석 문을 열어주자 세련된 슈트를 입은 석원이 길쭉한 다리를 내디디며 BMW에서 내렸다.
“잘 부탁해요.”
차 키를 꽂아두고 나온 석원이 지폐를 내밀자 도어맨이 미소를 띤 얼굴로 머리를 숙이며 팁을 받고는 대신 운전석에 올라탔다.
주차를 맡긴 석원은 손목에 찬 롤렉스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옮겨 특급 호텔 로비로 향했다.
호텔 로비는 대리석 타일과 화려한 샹들리에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선 하나같이 부티가 흘렀고 이따금 외국인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석원이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최 팀장입니다. 본부장님.]지난달 최진우 사장의 예정된 사임 이후 이루어진 소규모 인사 조정에서 석원은 미리 귀띔받았던 대로 본부장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측근인 최호근 역시 팀장으로 승진해서 그를 대신해 투자 4팀을 맡게 됐다.
[지난번에 지시하셨던 기사가 내일 나올 거라고 합니다.]최호근 팀장의 말에 석원은 눈에서 이채를 띠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걷던 방향을 틀어 햇볕이 잘 들어오는 유리벽 앞에서 계속 통화를 했다.
[그것도 신문 1면에 메인 기사로 실을 예정이라고 합니다.]뜻밖의 이야기에 석원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도 있었으니까. 지난번처럼 기사를 뭉개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1면 메인이라니 이건 좀 예상 밖이네요.”
신문 1면이라면 그날 가장 중요하고 시사성이 높은 기사를 싣는 거였기에 그럴 만도 했다.
[참사 이후 부실 공사와 관리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데다가, 무엇보다 문제가 있는 백화점이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장소인 것이 크게 작용한 걸로 보입니다.]“그럴 수 있겠네요.”
어느새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보름이 지났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충격과 깊은 슬픔 속에 잠겨 있었다.
석원이 개입하면서 원래보다 사상자 숫자가 줄긴 했어도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친,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매출액 1위의 최고급 백화점에 붕괴 위험이 있다고 하면 큰 이슈 몰이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일부러 더 기사를 1면에 넣어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겁니다.]“결국 신문을 더 팔려는 꼼수라는 거네요.”
[그렇지요.]석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사회의 정의와 공익을 위해 진실과 사실을 추적하고 규명해 시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준다는 언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나서는 건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수대교 붕괴라는 참사를 겪고도 사명감보단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에 입안이 썼다.
‘의도가 불순하긴 해도 어찌됐건 이걸로 크게 이슈가 되면 그만큼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확률도 높아지는 거니까. 그러면 된 거지.’
석원은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을 돌리며 통화를 끝냈다.
“수고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회사에서 듣도록 하죠.”
휴대폰을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석원은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가자 입구 데스크에 있던 키가 큰 여종업원이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혹시 예약을 하셨나요?”
“박석원으로 되어 있을 거예요.”
예약 리스트에서 석원의 이름을 확인한 여종업원이 곧바로 대답했다.
“크리스탈 룸을 예약하셨네요. 일행분들은 먼저 도착해 계십니다. 안내해드릴 테니 절 따라오시겠어요?”
여종업원은 정중한 태도로 말하며 안쪽에 있는 별실로 석원을 안내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기에 테이블은 대부분 비어 있었고 띄엄띄엄 몇 명의 손님들만이 앉아 있었다.
중앙에 있는 무대에는 등이 훤히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여성 연주자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감미로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예약된 룸은 다른 손님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식사할 수 있도록 안쪽에 따로 마련된 별실이었다.
여종업원이 열어주는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랜든과 앤드루가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보스.”
“서울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보스께서 부르시는데 얼른 달려와야죠.”
평소처럼 밝은 랜든의 표정에 석원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시선을 옮겨 옆에 서 있는 앤드루에게도 말을 걸었다.
“잘 지냈죠?”
“저야 언제나 똑같지요.”
앤드루 역시 웃으며 석원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석원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앉죠.”
석원이 먼저 의자에 앉자 두 사람도 맞은편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주문을 하시겠습니까?”
능숙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세팅해준 여종업원이 메뉴판을 펼쳐 보이며 물었다.
“여긴 시그니처 코스가 괜찮아요.”
“그럼 그걸로 하시죠.”
“저도 좋습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처음 오는 곳이라 별말없이 석원의 추천을 따랐다.
“시그니처 코스로 3인분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와인은 미리 말씀해주신 그걸로 가져올까요?”
“그래요.”
주문을 받은 여종업원이 별실 밖으로 나가자 석원은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구입한 전용기를 처음 타고 왔다면서요.”
“네.”
걸프스트림 사에서 구입한 비즈니스 제트기 3대 가운데 업무용으로 사용할 기체가 먼저 출고돼서 두 사람은 이번 한국행에 그걸 타고 왔다.
“괜찮았어요?”
“임대한 기체가 아니라 저희 회사 전용기라고 생각하니 확실히 기분은 더 편했습니다.”
랜든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자 앤드루도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
“원래 소유주가 최고급 사양으로 주문했던 거라 그런지 내부 설비가 훌륭해서 좋더군요. 솔직히 웬만한 호텔룸보다 더 고급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앤드루가 이야기한 대로 최고급 옵션이 들어간 기체였기에 인테리어를 크게 바꾸지 않고 외부 도색을 포함해 몇 가지 소소한 부분만 교체한 덕분에 빨리 출고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써본 전용기에 대해 이런저런 감상을 늘어놓고 있을 때, 여종업원이 미리 주문해둔 와인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로마네 콩티 아닙니까.”
와인병을 본 랜든이 눈을 반짝이며 석원을 돌아봤다.
“원산지인 부르고뉴 지방 전역이 대풍작이 들었던 그레이트 빈티지인 1990년 산이에요.”
“1990년 산이면 로마네 콩티 가운데서도 품질이 뛰어난 걸로 유명한 빈티지이지요.”
평소 와인을 좋아해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저택에 와인 룸까지 따로 만들 정도였던 랜든은 무척 기대하는 표정으로 여종업원이 따라준 로마네 콩티를 한 모금 입안에 넣고 맛을 봤다.
“으음.”
랜든은 와인잔을 손에 든 채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우아하면서도 힘이 넘치고 신선한 과일의 깊고 단단한 균형감이 느껴지는 것이 역시 마법 같은 와인이라고 불릴 만하군요.”
그러고는 한 번으론 아쉬운지 다시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저는 랜든만큼 와인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닙니다만, 왜 유명한지 알겠군요. 향부터 무척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앤드루 역시 마음에 든 표정으로 와인을 홀짝였다.
“선물로 한 병씩 따로 챙겨뒀으니까 나중에 가져가도록 해요.”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보스.”
랜든이 환한 얼굴로 반색하며 대답했다.
작년에만 수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은 랜든이었기에 방금 마신 와인 정도는 얼마든지 사서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서 선물로 받는 건 또 달랐기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하물며 석원이 그의 취향을 고려해 일부러 골라준 선물이었으니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잘 마시겠습니다.”
앤드루도 옆에서 함께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사이 테이블 위에는 일행이 주문한 코스 요리가 올려졌다.
버터 향이 가득한 식전 빵과 수프, 누에콩으로 만든 카나페와 캐비어를 이용한 요리는 제대로 입맛을 돋워줬으며 메인은 촉촉하게 구운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였다.
세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코스 요리를 즐겼는데 마지막으로 디저트와 에스프레소가 나올 때 쯤에는 조금씩만 먹었는데도 배가 상당히 찼다.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은 석원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랜든과 앤드루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오늘 두 사람을 한국으로 부른 용건을 꺼냈다.
“페소화 움직임은 어때요?”
그러자 앤드루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내고는 대답했다.
“대선 이후 잠깐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보스가 예상하셨던 대로 다시 서서히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차 대신 와인을 마시면서 사뭇 진지한 얼굴로 랜든이 말을 받았다.
“어느새 다시 1달러당 3.5페소를 넘겼고 이대로 간다면 4페소도 뚫리는 것이 시간문제일 겁니다.”
앤드루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뒤로 몸을 기댄 채 석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본격적인 페소화 폭락은 12월 신임 대통령 취임식 이후부터 시작될 거예요.”
예상한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고 있었기에 랜든과 앤드루는 철석같이 믿으며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지금 이대로 포지션을 계속 유지하도록 해요.”
“그러겠습니다.”
앤드루의 대답에 나란히 있던 랜든이 새삼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정말로 살리나스 대통령이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책임을 모면하기에만 급급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사람의 본성이죠. 정말로 혜안이 있고 국민들을 아꼈다면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냥 있지 않았을 거예요.”
랜든과 앤드루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멕시코에 넣어둔 포지션을 제외하고 여유 자금이 얼마나 남아 있죠?”
“당장 사용할 수 있는 현금성 자산은 9억 달러 정도가 있습니다.”
랜든의 대답에 석원이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레버리지까지 쓴다면 그럭저럭 부족하진 않겠네요.”
뭔가 또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두 사람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랜든이 참지 못하고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물었다.
“새로 투자할 곳이 생기신 겁니까?”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석원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일본 증시와 엔에 숏베팅을 하려고 해요.”
“일본이라고요?”
“그래요.”
난데없이 일본에 숏베팅을 한다고 하자 랜든과 앤드루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이 슈퍼 301조를 발동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여전히 미국과 일본 사이엔 무역 분쟁의 불씨가 남아 있어요. 그 탓에 언제든지 다시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걸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석원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미국의 견제와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일본 경제가 예전의 호황을 다시 누리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이 내 판단이에요.”
물론 일본 증시와 엔에 숏을 치려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이야기해줄 수는 없었기에 적당한 핑계를 댔다.
두 사람은 잠시 석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고심하더니 앤드루가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멕시코하고 달리 드라마틱한 성과를 내긴 힘들겠지만 일본 경제가 한풀 꺾인 건 사실이니까. 나쁘지 않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저 역시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어서 랜든까지 찬성하고 나서자 석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그리고 베팅할 데가 한군데 더 있어요.”
“거기가 어딥니까?”
랜든의 물음에 석원이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베어링스 은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