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99)
금수저 투자백서 99화(99/231)
99. 이제 고점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군.
“비서실장님이 오셨습니다. 회장님.”
마호가니로 만든 널찍한 책상 앞에 앉아 결재 서류를 살피고 있던 박태홍 회장은 비서인 정윤경의 말에 상체를 바로 세웠다.
“들어 오라고 해.”
“네.”
정윤경이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회색 정장을 입은 길성호 비서실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쓰고 있던 돋보기 안경을 벗어 서류 위에 내려놓은 박태홍 회장은 한 손으로 앞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앉게.”
“예.”
길성호 비서실장이 오른편 소파에 앉자 박태홍 회장은 몸을 일으키면서 문 앞에 서 있는 정윤경에게 말했다.
“커피 두 잔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정윤경이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 책상을 돌아 나온 박태홍 회장은 가운데 상석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길성호 비서실장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줬다.
“지난번 건강검진 때 김 박사가 이제 건강을 챙기실 때가 되셨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참에 담배를 좀 줄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서 얼마나 더 오래 산다고. 하고 싶은 걸 참으면서 갑갑하게 사느니 그냥 내 맘대로 하는 게 낫지.”
박태홍 회장이 코웃음을 치면서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길성호 비서실장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박태홍 회장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떠올리고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때 정윤경이 노크와 함께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박태홍 회장과 길성호 비서실장 앞에 하나씩 찻잔을 내려놓은 정윤경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다시 방을 나갔다.
향긋한 원두향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박태홍 회장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길성호 비서실장을 향해 물었다.
“어제 한번 살펴보라고 준 건 다 읽어봤나?”
“공익재단 건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세를 고쳐 앉은 길성호 비서실장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왜 이걸 진작 생각 못 했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랬을 거야. 나 역시 둘째 녀석이 가져온 계획서를 읽고 무릎을 탁 쳤으니까 말이야.”
상속에 관한 얘기는 예민한 것이었기에 길성호 비서실장은 슬쩍 박태홍 회장의 표정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공익재단을 활용한다면 그룹 경영권을 큰 아드님한테 넘길 때 확실히 상속과 증여세 부담을 덜 수 있을 겁니다.”
“세금을 다 내게 되면 가뜩이나 적은 지분이 더 쪼그라들어 버릴 텐데. 그걸 줄이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지.”
“맞습니다. 거기다가 사회 공헌을 한다는 명분까지 챙길 수 있지요.”
“그렇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박태홍 회장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세금을 아끼면서 손가락질이 아니라 칭찬을 들을 수 있으니 이게 바로 일거양득이지.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아주 흡족해하는 박태홍 회장을 보며 길성호 비서실장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많은 지분을 공익재단에 넣는다면 자칫 편법 승계라는 비난을 받게 될 수 있을 겁니다.”
“뭐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니까. 그렇겠지.”
박태홍 회장이 담배를 한 입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길성호 비서실장을 봤다.
“어느 정도면 괜찮을 것 같나?”
그러자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는지 길성호 비서실장이 곧장 대답했다.
“가지고 계신 미도파 백화점 지분 19.6% 가운데 절반인 9.6%를 공익재단에 넣는다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백화점이 방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걸 염두에 둔 건가?”
바로 핵심을 짚자 길성호 비서실장이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미도파 백화점이 지분 32.8%을 가진 최대주주로 사실상 방직을 소유하고 있으니, 백화점만 확실히 손에 쥐고 계신다면 안정적으로 그룹 경영권을 유지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박태홍 회장은 그룹 지배 구조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공익재단은 새로 만드는 것보단 기존에 있는 우보재단을 활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보재단은 박태홍 회장의 아버지이자 그룹 창업주인 박용주 전 회장의 호(號) 우보(牛步)를 따서 세운 장학재단이었다.
“기존 정관을 변경해서 공익사업을 추가하면 될 테니 그게 훨씬 수월하겠군.”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박재홍 회장은 이내 결심을 굳혔다.
그러고는 어느새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탁자 위에 있는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서 끄며 지시를 내렸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마련해서 가져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 * *
[삼풍 백화점 붕괴 위험 영업 정지 명령 건물 폐쇄불법 증축과 부실 공사 의혹을 받고 있던 삼풍 백화점이 서울시의 긴급 안전 진단 결과 붕괴 위험이 있다는 판단에 긴급 영업 정지와 함께 건물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안전 진단에 참여한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건물 기둥과 5층 천장에 미세한 콘크리트 알갱이와 골재가 떨어져 나올 만큼 균열이 심각한 상태인 걸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오늘 자정부터 영업 정지 명령을 내리고 폐쇄조치 후 건물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얼마 전 성수대교 붕괴 참사 이후 부실 건축물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상황에서 일어난 이번 사건에 정부는 후속 조치를 엄격하게 취해 국민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도 백화점 건설 당시 용도 변경과 증축 허가 과정에 불법 행위가 없었는지 수사에…….]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서 구두를 닦으러 온 석원은 의자에 앉아 신문에 실린 삼풍 백화점 기사를 보면서 눈빛을 일렁였다.
고려일보에서 첫 특종 기사를 내보내자 예상대로 삼풍 백화점 문제가 큰 이슈를 끌었다.
‘성수대교 붕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울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백화점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라고 하니까. 다들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지.’
문제가 커지자 백화점 측에서 건물 상태는 안전하다고 즉시 부인했다.
하지만 부실 공사에 대한 불안감이 사회 전반에 확산된 상황에서 분위기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고객들의 불신과 의혹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러자 급기야 서울시에서 긴급 안전 진단에 나섰고 결과는 기사에 실린 대로였다.
‘이걸로 삼풍 백화점 사고는 이제 일어나지 않겠네.’
최선을 다해 희생자 숫자를 줄이긴 했지만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아까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석원은 안타까운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더 큰 인명 피해가 났던 삼풍 백화점 붕괴를 사전에 막아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확신하는 순간 석원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가슴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 하나를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때 몇 번 구둣방에 들른 덕에 이제 제법 친해진 남자아이가 손질을 끝낸 구두를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 끝났어요.”
석원은 손에 든 신문을 내리고 발치를 내려다봤다.
먼지를 깨끗하게 다 털어내고 구두약을 꼼꼼하게 바른 구두는 반질반질 광이 났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앞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에게 칭찬을 해줬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
그러자 얼굴에 검은 구두약을 묻힌 남자아이가 목장갑을 낀 손으로 코끝을 슥 훔치면서 씨익 웃었다.
“헤헤. 맘에 드세요?”
“그래. 이제 경웅이 너 혼자 따로 가게를 차려도 되겠다.”
“그럴까요?”
김경웅이 능청스럽게 농담을 받아넘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근처에서 구둣방 남자아이 혹은 구둣방 걔라고 불리는 김경웅은 주로 회사를 돌아다니며 구두를 가져오고 돌려주는 일을 했는데 어른들을 많이 상대해서 그런지 넉살이 좋은 구석이 있었다.
석원은 예전 자신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김경웅을 나름대로 귀여워하며 잘 대해줬다.
피식 웃은 석원이 의자에 앉은 채 한쪽에 걸린 주걱을 써서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빼서 내밀었다.
“잠시만요.”
지폐를 받은 김경웅이 잔돈을 거슬러주려고 하자 석원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처음으로 경웅이 너한테 구두를 닦은 기념이니까 잔돈은 너 가져라.”
“앗. 정말요? 감사합니다!”
김경웅이 반색하며 활짝 웃었다.
구김살 없이 항상 밝고 착실한 모습에 석원도 저절로 대견한 미소를 지을 정도였다.
‘오 부장님도 나한테 구두를 닦으러 오실 때마다 이런 마음이셨으려나.’
석원은 문득 든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김경웅이 잠시 주저하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본부장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래.”
“주식 말이에요. 그걸 하면 정말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거예요?”
석원은 미간을 찡그리고 물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구두를 닦으러 가끔 오는 객장 손님들한테요.”
김경웅은 석원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아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열심히 쫑알거렸다.
“뭐든 오르는 불장이라 새로 상장하는 회사 주식을 아무거나 사두기만 하면 한 달에 서너 배는 그냥 벌 수 있다던데요.”
시장 개방과 함께 외국인 투자금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주식 시장은 5년 만에 코스피 1,000포인트를 회복한 것에 이어 연달아 최고점을 갱신하며 말 그대로 대 호황을 이어가고 있었다.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평소 투자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난생처음 증권사 계좌를 만드는 등 주식 광풍이 불고 있었다.
“그래서 주식을 하겠다고?”
“금방 큰돈을 벌 수 있다니까 솔직히 솔깃하더라고요.”
석원은 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는 김경웅을 잠시 쳐다보다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에 쉽게 벌 수 있는 돈은 없어. 그리고 누군가 돈을 땄으면 다른 사람은 잃은 건데 그게 바로 네가 될 수도 있는 거야.”
평소 항상 웃고 다니던 석원이 정색하자 김경웅은 자기가 괜히 잘못한 것 같아 주눅이 든 채 눈치를 살폈다.
그걸 본 석원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나 싶어 표정을 풀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충고했다.
“정말로 주식을 하고 싶으면 제대로 공부를 한 뒤에 잃어도 되는 돈을 가지고 해.”
“예. 본부장님 말씀을 들으니까 제가 또 남의 말을 듣고 귀가 팔랑거렸나 봐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석원은 달래 줄까 하다가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아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난 그만 가볼 테니까 장사 잘해라.”
“안녕히 가세요.”
얼른 따라 일어난 김경웅이 꾸벅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걸음을 옮겨 회사 건물로 들어온 석원은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돌려 1층에 있는 객장으로 향했다.
자동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겨울인데도 후끈한 공기가 느껴졌다.
난방이 잘 되어 있기도 했지만 객장에 모인 사람들의 열기가 주변 공기를 따끈하게 데우고 있었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것 같은 젊은 사내부터 넥타이를 맨 중년 남성.
쇼핑백과 장바구니를 든 아줌마들에다 유모차를 끌고 온 여자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넓은 객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종목을 사시면 무조건 두 배는 갑니다.”
“정말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아줌마를 보며 증권사 직원이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지금 안 사시면 이 가격에 다시는 매수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증권사 직원의 말에 마음이 급해진 아줌마가 얼른 현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그럼 빨리 사 주세요! 이거면 되죠?”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증권사 직원은 봉투 안에 든 현금을 계수기에 넣어 세고는 곧바로 매수 주문을 처리했다.
시선을 돌려보면 창구 곳곳에서 똑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애들 학원비를 낼 돈으로 주식을 매수하는 아줌마, 친구의 친구한테서 들은 정보가 확실하다며 떡상을 노리고 얼마 전 상장한 회사 주식을 끌어모으는 대학생, 요즘 너도나도 돈을 벌었다고 하니 호기심에 기웃거리는 사람들.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그런 모습들을 지켜본 석원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장바구니를 든 아줌마까지 객장에 나와 주식을 사는 걸 보니 이제 고점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군.”
항상 거품은 이럴 때 터지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