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6
6. 내가 직접 보여주죠.
재성이 먼저 회의실을 나간 뒤. 남은 팀원들은 각자 자리를 정리하며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대박. 우리 본부장님 좀 멋지지 않아요?”
“아, 그만 웃어. 지금 바로 준다는 것도 아닌데 뭘 실실거리는 거야.”
권혁재 대리의 말에 장하나는 흥, 하며 눈을 흘겼다.
“사람이 잘하는 건 좀 칭찬도 하고 그래요. 언제까지 계속 삐딱하게 굴 거예요?”
“내가 뭘.”
“처음에 본부장님한테 좀 깨졌다고 계속 꽁해 있잖아요, 지금.”
“아니거든!”
“어휴 속이 어떻게 간장 종지만도 못하담.”
장하나가 계속 면박을 주자 유독 그녀에겐 약한 권혁재 대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니, 뭐. 나도 인정할 건 인정한다고. 요즘 보니까 일은 제대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네 뭐라고요? 안 들려요.”
“아, 됐어! 일이나 하련다.”
홱 일어서서 쿵쾅거리며 나가는 권혁재 대리를 장하나가 웃으면서 뒤따랐다.
* * *
그날 오후.
재성은 새로 바뀐 광고 기획안을 잘 정리해서 회장실로 올라갔다.
넓은 비서실로 들어서자 미리 연락을 받은 정태규 실장이 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회사에서는 직급으로 불러주십시오.”
딱 부러지는 대답을 들은 정태규 실장이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기라도 했는지 지금까지하고는 영 태도가 딴판이었던 탓이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는 본부장님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정태규 실장이 손으로 안내하는 것을 따라 재성은 회장실 앞에 섰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업무를 보고 있던 박경수 회장이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이게 누구야. 마케팅본부장 아니신가.”
“…….”
“내 방에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군. 그쪽에 앉아.”
“예.”
원목으로 된 소파에 앉자 박경수 회장이 책상을 돌아 나와 상석에 자리했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왔어?”
“새로 출시 예정인 핸드폰 광고 기획안이 완성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가져온 서류철을 박경수 회장 앞에 올려놨다.
박경수 회장은 말없이 서류철을 집어 기획안을 살펴봤다.
재성은 겉으론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에 내심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손에 든 서류철을 내려놓으며 박경수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DMB와 와일드 액정 기능을 요즘 세대에 맞춰 감각적으로 부각시킨다라…… 이걸로 타사 제품을 누를 수 있을까?”
덤덤하지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재성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예. 장황하게 여러 가지 기능을 늘어놓는 것보다 핵심이 되는 하나를 강조하는 것이 소비자들에게 더 어필될 겁니다.”
“그건 그렇지.”
“언제 어디서든 다른 핸드폰에 없는 와일드 액정 화면으로 DMB 방송이 시청 가능하다. 이것만으로도 소비자들의 욕구를 자극해 수요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사 마케팅본부장에 앉히긴 했지만 재성에게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경수 회장이었다.
어차피 오너 일가로 자리 하나를 차지하는 건 확정적이었다.
그 전에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자리였기에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케팅을 따로 배우기라도 한 걸까?
알아듣기 쉽게 핵심만 간추려서 설명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팀원들을 리드하기 위해 퇴근하고 나서도 밤늦게까지 머리를 싸매며 공부하기는 했다.
물론 박경수 회장이 그걸 알 길은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광고 모델은 왜 교체한 거지? 내가 듣기로 인기가 많은 배우라서 꽤 어렵게 섭외한 걸로 아는데 말이다.”
“광고 컨셉에 맞지 않는 데다가, 무엇보다 새로 출시하는 제품보다 모델이 더 부각돼 광고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래도 너무 인지도가 낮으면 시선을 끌기 어려울 텐데?”
“맞습니다. 그래서 광고만으로도 소비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컨셉을 부각시킬 생각입니다. 물론!”
“…….”
“회장님의 말씀처럼 인지도 있는 배우를 쓰는 광고도 주목을 얻긴 쉽겠죠. ‘아, 그 배우 나왔던 광고?’ 하면서 기억에 남을 테고요.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그렇게 시선을 끌어봤자 오롯이 전부 매출로 연결되진 않는다는 말입니다. 배우에게 편승해 기억되는 쪽보다 ‘아! 그 핸드폰 광고?’가 신제품의 홍보에 더 매력적이지 않겠습니까?”
박경수 회장은 일순 말을 잊었다.
주눅 들고 자신을 피하기 바빴던 아들이 맞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설군.’
그러나 이런 막내아들의 변화가 싫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내심 스스로를 깐깐하다 생각하는 박경수 회장조차 재성의 말에 혹하는 감정이 들었다는 것이다.
놀란 기색을 숨기느라 잠시 지그시 재성을 쳐다본 박경수 회장은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신제품 개발에 얼마나 많은 자금과 노력이 들어갔는지 알고 있겠지.”
“예.”
“그걸 전부 허사로 만들지 않으려면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거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번 광고가 신제품 판매에 날개를 달아줄 테니까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성공을 자신하는 모습에 박경수 회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사내가 일을 추진하는 데 그만한 자신감은 있어야지. 하지만 말이야. 만에 하나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자신도 있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박경수 회장은 기획안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좋아. 어디 한번 해봐.”
* * *
성과금의 위력인지.
직원들이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며칠 뒤, 강남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광고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차시킨 차에서 내리자 미리 연락을 받은 권혁재 대리가 마중을 나왔다.
“촬영은 시작했어요?”
“이제 준비를 다 끝내고 조금 있으면 시작할 것 같습니다.”
대답을 들으며 발걸음을 옮긴 재성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로 촬영이 이루어질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무대가 중앙에 꾸며져 있고 천장에는 번쩍이는 미러볼까지 달아둔 모습이 실제 클럽을 옮겨온 듯했다.
마침 촬영을 시작하려는지 보스턴 레드삭스 모자를 쓰고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감독이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누가 저기에다가 장비를 갖다놨어. 화면에 걸리잖아. 어서 치워! 그리고 중앙에 조명을 조금 더 주고.”
뒤에 이어질 편집 작업까지 생각하면 오늘 촬영을 모두 끝내야 했기에 감독의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재성은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한쪽 구석에 서서 현장을 지켜봤다.
“올 스탠바이! 하이. 큐!”
음악이 나오자 남녀 엑스트라 배우들이 거기에 맞춰 몸을 들썩였다.
그러자 이번 신제품 광고 모델인 박찬수가 바깥에 있는 의자에 늘씬한 미녀들과 앉아 있다가 조명을 받으며 일어났다.
중앙 무대에 선 박찬수는 리듬을 타며 요즘 클럽에서 유행하는 춤을 멋들어지게 췄다.
“컷! 좋은데 좀 더 흥겨운 느낌으로 그리고 주위에 있는 여자들을 슬쩍슬쩍 곁눈질하면서 춤을 춰줘요.”
“알겠습니다.”
“카메라는 아까보다 타이트하게 잡아서 훑고 내려오고!”
“예.”
“다시 갑시다. 하이 큐!”
다시 재개된 촬영을 바라보며 재성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어떻게 된 거지.”
“예?”
옆에 나란히 서 있던 권혁재 대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분명 콘티에는 박찬수가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춤을 춘다고 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재성이 생각한 춤이 아니었다.
‘춤이 완전히 다르잖아.’
요즘 유행하는 것이긴 해도 과거 광고에 나와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 동작은 아니었다.
광고가 히트를 친 건 바로 코믹하면서도 특이한 춤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없다면 앙꼬 없는 호빵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멈추라고 해봐.”
“아, 예.”
갑자기 심각해진 재성의 태도에 권혁재 대리는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직속 상사의 명령이니 권혁재 대리는 서둘러 감독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컷! 잠시 휴식합니다!”
일단 손을 휘둘러 촬영을 정지시킨 감독이 재성이 있는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춤이 광고 컨셉하고 안 맞는 것 같군요.”
“어, 하지만 콘티대로 진행하고 있는데요.”
감독은 손에 쥐고 있던 콘티를 뒤적거리며 다시 확인했다.
그러다 별 문제점을 찾지 못했는지 다시금 고개를 든 얼굴엔 약간 불만스러운 기색이 나타났다.
아무리 광고주라고 해도 한참 어린 사람이 나와서 트집을 잡으니 괜히 시비를 건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가 콘티대로라는 말이죠.”
얼굴을 굳힌 재성은 감독이 들고 있던 콘티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리고는 댄스신이 그려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길 보면 분명 코믹하면서도 개성 있는 춤을 춰달라고 적혀 있는데 방금 그건 그냥 최신 유행 댄스잖아요. 그런데도 똑같다는 겁니까!”
날카로운 지적에 찔끔한 감독은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변명하듯 말을 늘어뜨렸다.
“그게…… 시간도 촉박하고…… 이렇게 가는 것도 나름 괜찮지 않습니까.”
재성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죠. 이러면 광고 컨셉이 완전히 바뀌는 거지요!”
“아니, 입맛에 딱 맞는 춤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럼 어쩌라는 겁니까.
감독은 모자를 벗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난감한 듯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괜히 중간에 끼인 권혁재 대리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하아. 그 광고를 만들었던 감독이 누군지 몰라서 그나마 감각이 있다는 사람으로 구한 건데. 내가 너무 날로 먹으려고 그랬나.’
서서 잠시 생각하던 재성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가 시범을 보이도록 하죠.”
“본부장님!”
“예에?”
권혁재 대리는 물론이고 감독의 입에서도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재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윗도리를 벗어 권혁재 대리에게 휙 내던진 뒤, 조명이 켜져 있는 세트 중앙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안 그래도 이쪽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작게 술렁거렸다.
뒤로 빠져서 사태를 관망하던 박찬수 역시 재밌다는 얼굴로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조감독이 도움을 요청하듯 감독에게 물었다.
“저……. 어떻게 하죠.”
그러자 감독은 나도 모르겠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시범을 보여주시겠다잖아. 일단 음악이나 틀어드려.”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듯 팔짱을 끼고 물러나니 조감독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큐 사인이 떨어지자 쿵쿵거리는 리듬과 함께 여성 보컬의 목소리가 담긴 음악이 시작되었다.
한창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푸시캣 돌스의 Don’t cha였다.
흥겨운 리듬에 맞춰 재성은 조금 어색한 동작으로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무릎은 반동만 주면서 손을 움직여 가슴과 배를 왔다 갔다 거렸다.
그러다가 목을 자라처럼 쭈욱 빼서 좌에서 우로 움직여줬다.
“큭큭. 저게 뭐야.”
“그러게 너무 웃긴다.”
코믹하면서도 특징 있는 몸짓이었다.
자연히 스탭들 사이에서 킥킥 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계속 보니까 괜찮은데?”
“그러니까 말이야. 뭔가 쌈빡해.”
“다음에 클럽을 가면 나도 한번 춰봐야지.”
[행운 발동!매력 스탯의 영향으로 ??이 1 올라갑니다.] [?? 1 상승!] [?? 1 상승!] [?? 1 상승!] [?? 1 상승!]
어색하지만 최선을 다해 머릿속 기억을 떠올리며 춤을 추던 재성은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창들을 보고 내심 두 눈을 껌뻑였다.
‘이건 또 뭐야?’
메시지창에 표시된 물음표가 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춤을 보여준 재성은 감독에게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따라 하기 쉬우면서도 눈에 띄는 춤이군요.”
“그럼 이걸로 바꿔서 가도록 하시죠.”
단번에 이건 된다는 촉이 온 감독이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 있었으면 진즉에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감독은 곧장 스태프들한테 메이크업 수정을 받고 있는 박찬수한테 가서 말했다.
“찬수 씨. 방금 춤 봤지.”
그러자 박찬수는 재성을 힐끔 쳐다보곤 대답했다.
“예.”
“그걸로 춤을 바꿀까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동작이 크게 어렵지 않으니까 해보죠.”
“좋아요.”
신인이라 까탈스럽게 굴 입장이 아니기도 했지만 시범을 보여준 춤이 흥미롭기도 했던 박찬수는 순순히 승낙했다.
잠시 뒤.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 콘티대로 박찬수가 몸을 흔들면서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음악에 맞춰 방금 전 재성이 췄던 춤을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괜찮은데?”
“그렇지. 아까는 우스꽝스럽기만 했는데 자꾸 눈길이 가네.”
“나도 그래.”
스태프와 지원 나온 팀원들이 뒤에서 속닥거리는 사이. 그제야 재성도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그림을 원했다.
“본부장님. 그런 춤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권혁재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 오랫동안 클럽을 다닌 덕분이라고 해두죠.”
“아. 그렇군요.”
대충 둘러댄 말이었으나 권혁재 대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너무 쉽게 긍정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동한 재성이 슬쩍 농담을 던졌다.
“바로 납득해 버리면 어쩝니까. 그렇게 내 이미지가 안 좋아요?”
“어, 그게 아니라.”
“내가 아무리 망나니처럼 놀고먹었어도 클럽 죽돌이까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
재성의 페이스의 말린 권혁재 대리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농담입니다.”
재성은 씩 하고 웃으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클럽을 가본 경험에서 나온 거죠. 안 그러면 어떻게 췄겠어요. 난 그만 사무실로 들어가 볼 테니까. 혹시 또 문제가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보도록 해요.”
“예, 옛!”
권혁재 대리는 먼저 성큼 걸어 나가는 재성을 보고 얼른 대답했다.
회의실에서 조금 대들었다고 이렇게 골려먹는 건가?
한 번도 직원들하고 친근하게 농담 따위는 하지 않던 사람이 저한테 이러는 게 영 어색했다.
‘이놈의 입이 웬수지 웬수야.’
권혁재 대리는 성급하게 입을 놀린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