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703
703. 아직 남은 일이 있는데 한번 시작한 건 끝을 봐야지.
유니콘 타워 168층 회장실.
널찍한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재성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권혁재 실장이 약간 굳은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재성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놨다.
“저기 앉아서 이야기하죠.”
재성이 먼저 몸을 일으켜 소파로 향하자 권혁재 실장이 왼편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 그리 심각해요?”
“조금 전 러시아군이 드니프로에 있는 공장에 탄도탄 3발을 쐈다고 합니다.”
재성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다행히 얼마 전 배치된 천궁Ⅱ 포대가 모두 요격에 성공해 피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드니프로 공장이 중요한 군수공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탄도탄을 3발이나 쏜 걸 보면 최근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보복성 공격이지 않겠습니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재성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겠죠.”
재성은 골치 아프다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동결 자금을 빼앗기고 암살까지 사실상 힘들어졌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화풀이를 하려는 걸 거예요.”
“그럼 계속 공격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잘 막아냈지만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을 하고는 재성이 말했다.
“공장은 계속 가동하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직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지시해 둬요.”
“예.”
권혁재 실장이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회장님.”
“왜요. 더 할 이야기가 있어요?”
권혁재 실장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벌써 전쟁이 시작된 지 석 달이 넘었는데 이게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재성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권혁재 실장을 쳐다봤다.
“빠르면 올해 겨울, 어쩌면 몇 년을 더 갈 수도 있을 거예요.”
권혁재 실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크라이나군이 반격에 나서고 있고 무엇보다 EU와 미국이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랜드리스 법까지 통과시켜 지원을 해주고 있는데 전쟁이 그렇게 길게 이어질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렇게 길게 예상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재성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니까요.”
하지만 권혁재 실장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중간 선거를 앞두고 인플레이션으로 가장 골치를 썩고 있는 곳이 미국인데 전쟁을 오래 끄는 걸 원한다는 겁니까?”
재성은 음울하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인플레이션은 금리 인상과 공급망 재편 등으로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지만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러시아를 주저앉힐 기회는 흔하지 않아요. 그게 바로 가장 큰 이유예요.”
“……!”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인 권혁재 실장에게 재성이 설명을 덧붙였다.
“남부 헤르손주와 돈바스 일대를 러시아가 장악했지만 키이우 공략에 실패하는 바람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건 알고 있을 거예요.”
실제로 전쟁 초반 수도인 키이우를 향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던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가로막혀 큰 고전을 치렀다.
특히나 때마침 들이닥친 라스푸티차에 겨울 동안 꽁꽁 얼어 있던 땅들이 녹으며 온통 진창으로 변하자 무리하게 진격했던 러시아군은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우크라이나군이 보급선을 끊어버리며 반격에 나서자 대대전투단(BTG) 단위로 흩어져 고립되어 버린 러시아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국경 밖으로 후퇴하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지난 석 달간 우크라이나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러시아가 잃은 병력과 무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요. 거기다 지금까지 강한 군사력으로 주변국을 위협해 왔는데 막상 전쟁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준 게 치명타예요. 위상이 그야말로 바닥까지 처박혔으니 러시아로선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겠죠.”
우크라이나가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러시아는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셈이었다.
한번 떨어진 이미지는 다시 쌓아 올리기가 매우 힘든 법이었다.
“직접 러시아를 꺾으려면 미국 역시 큰 피해를 감수해야 되는데 우크라이나가 대신 피를 흘리며 러시아를 밑바닥부터 흔들어주고 있으니 미국으로선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지 않겠어요.”
“랜드리스 법을 실행한 것도 우크라이나가 쓰러지지 않고 계속 싸워 러시아의 힘을 빼놓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이시군요.”
“누가 봐도 뻔한 노림수죠. 러시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고.”
재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에 더해서 자꾸 독자 노선을 타려는 EU 국가들에게 미국의 힘을 보여줘서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을 거예요. 물론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도우려는 것도 있을 테고.”
미국이 러시아와 부딪칠 위험을 감수하고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이런 복합적인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EU 역시 이번 전쟁을 통해 위협이 되는 러시아의 힘이 크게 소진되길 바랄 거예요. 반면 러시아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데다 크게 망신까지 당한 만큼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전쟁을 끝낼 수 없을 테고.”
우크라이나가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는 힘들이 동시에 전쟁을 오래 끌게 하는 요소도 된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하긴 아무것도 못 얻고 물러난다면 국민들의 반발이 엄청나겠지요. 제아무리 크라스니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걸 감당하기는 힘들 겁니다.”
재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렇게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전쟁은 길게 갈 수밖에 없어요.”
할 수 있는 건 암울한 예측뿐이었다.
많은 국가들이 뒤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이에 피를 흘리며 희생되는 건 죄 없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었다.
“어쩌면 수년간 이어졌던 돈바스 내전처럼 긴 전선을 형성한 채 소모전이 계속되거나, 시간을 더 끈 뒤에 한국처럼 승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휴전이 될 수도 있겠죠.”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말씀대로 될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권혁재 실장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우크라이나 서부와 중부 지역은 점차 정상화가 되어갈 거예요.”
우크라이나 정부 입장에서도 장기전에 대비하려면 일부라도 국가를 정상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느라 아직 끼어들지 못할 때 해당 지역에서 나오는 곡물과 광물을 우리가 먼저 선점할 수 있게 미리 손을 써두도록 해요.”
“예. 알겠습니다.”
권혁재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바이 팜 주메이라(Palm Jumeirah).
바다에 만들어진 인공섬인 팜 주메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야자수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방파제처럼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거대한 섬에는 오성급 호텔과 아름다운 모래 해변 그리고 최고급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그리고 야자수 줄기처럼 양옆으로 쭉 뻗어 있는 공간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최고급 별장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대부호와 할리우드 배우, 팝가수는 물론이고 애런 아서 전 대통령의 별장도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러시아 석유 재벌이자 전 첼시 구단주였던 포민의 별장도 이곳에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제재를 피해 두바이에 머물고 있던 포민은 전쟁과 상관없이 빼돌려 둔 재산으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별장에 있는 개인 풀장에선 두바이를 상징하는 초고층 빌딩들이 건너다보였고, 날마다 포민의 부름을 받은 늘씬한 미녀들이 별장을 들락거렸다.
“조금 더 아래로. 그래, 꼼꼼하게 잘 펴 바르라고.”
그러자 태닝 오일을 발라주던 러시아 모델이 살짝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차라리 샵을 가지 그래요? 그게 더 빠를 텐데.”
“모처럼 두바이까지 왔는데 햇빛이 아깝잖아.”
포민은 잔말 말고 오일이나 열심히 바르라며 타박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경제 제재로 크라스니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신흥재벌(올리가르히)들의 해외 자산이 대거 동결되면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포민 역시 상당한 자산이 묶여 버렸지만 적지 않은 재산을 미리 추적이 어려운 코인으로 바꿔놓은 데다가 첼시를 매각하며 재성한테 받은 거액의 Moon코인이 있어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미녀의 손길을 느끼며 휴식을 즐기고 있을 때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건장한 경호원이 가까이 다가와 위성 전화기를 내밀었다.
“안드레이 씨 전화입니다.”
안드레이는 포민의 재산을 관리하는 최측근이었다.
귀찮은 듯 몸을 일으킨 포민이 선베드에 걸터앉아 위성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나야.”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다급한 안드리에의 목소리에 포민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지금 코인 거래소에서 Moon코인 가격이 폭락하고 있습니다!]“뭐야!”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포민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90달러대를 오르내리던 가격이 순식간에 63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포민은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당장 내 애플패드 가져와!”
경호원이 애플패드를 찾아 갖다 주자 포민은 빼앗듯이 받아 들곤 거래소 앱을 실행시켰다.
“젠장. 거짓말이지.”
앱이 실행되는 동안 다리를 달달 떨면서 초조하게 기다린 포민은 바로 Moon코인 시세부터 확인했다.
잘 올라가다가 갑자기 훅 꺾여 아래로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있는 시세 그래프를 본 순간 포민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재성한테 첼시 매각 대가로 받은 4억 500만 파운드 상당의 코인 외에도 추가로 제재를 피해 4억 달러 어치의 Moon코인을 사 뒀는데 그게 몽땅 증발하는 중이었다.
“이런 젠장.”
포민은 다시 위성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고 소리쳤다.
“대체 무슨 일이야? 왜 이러는 건데!”
[Moon과 한 짝을 이루는 스테이블 코인인 쥬피터의 페깅이 갑자기 깨져 1달러 아래로 내려가면서 폭락이 시작됐습니다.]안드레이가 하는 말의 반도 못 알아들은 포민이 인상을 썼다.
“아 복잡한 건 모르겠고. 가격이 다시 복구될 수 있는 거야, 아니면 계속 떨어지는 거야. 그것만 말해!”
[변동성이 워낙 커서 단언할 순 없지만 상황이 무척 안 좋습니다.]다른 자산들이 대부분 동결되었기 때문에 코인으로 숨겨둔 돈만이 현재 마음껏 쓸 수 있는 재산의 전부였다.
한마디로 코인 가격이 폭락하면 포민은 한순간에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럼 당장 다 팔아버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들 매도하는 상황이라 손실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손해는 감안하셔야…….]“알겠으니까 어서 팔기나 해! 돈이 실시간으로 녹고 있는데 손해 따위가 대수야? 어떻게든 최대한 건져내 보라고!”
포민은 안드레이의 말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코인 가격은 그새 더 떨어져서 60달러도 위태로웠다.
“제기랄!”
* * *
영국 런던 스탬퍼드 브리지.
새롭게 첼시를 인수한 재성은 처음으로 홈구장을 방문해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Blue is the colour, football is the game. We’re all together and winning…….”
푸른색 셔츠를 입고 VIP석에 자리한 재성은 고상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난간 앞에 서서 홈팬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첼시 선수들을 응원했다.
“아! 위험해. 막아야지! 아후.”
후반 추가 시간을 얼마 안 남겨두고 상대팀 선수에게 동점골을 허용하자 재성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재성이 좌절하는 모습을 절묘하게 포착한 카메라가 경기장 대형 전광판에 그 장면을 띄워 올렸다.
화면을 반으로 나눠 한쪽은 골을 넣고서 환호하는 모습, 다른 한쪽은 재성이 얼굴을 감싸 쥐는 모습이 몇 번이나 리플레이 됐다.
삐이익–!
심판이 종료 휘슬을 불자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던 선수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을 멈췄다.
“와아아!”
승자는 환호하고, 패자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재성은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아직도 전광판에 제 얼굴이 나오는 걸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구단 인수 이후 첫 방문이라 방송 카메라가 수시로 재성을 잡고 있었다.
재성은 허리를 똑바로 쭉 펴고서 열심히 경기를 뛴 선수들에게 박수를 쳤다.
“돈 많은 갑부인 줄 알았더니 꽤 괜찮은 것 같네.”
“그러게. 열정도 있어 보이는 게 딱 우리 첼시에 어울리는 것 같군.”
경기 내내 함께 웃고 울던 모습을 스크린으로 지켜본 홈팬들은 재성의 첫 나들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남은 열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 재성은 홈팀 라커룸으로 내려가 선수들과 감독, 코치진을 격려했다.
방금 전까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격한 운동을 하고 온 선수들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기에 재성은 가볍게 눈도장을 찍는 정도로 인사를 끝냈다.
그리고 재성이 라커룸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복도에서 잠복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기자들 무리가 덤벼들었다.
20명도 훌쩍 넘어 보이는 기자들은 줄 너머로 마이크를 들이대고서 질문을 쏟아냈다.
“첫 관람 경기가 아깝게 무승부로 끝났는데 소감이 어떻습니까?”
“승리를 거뒀다면 더 좋았겠지만 열정적인 홈팬들의 응원과 선수들의 기량에 만족합니다. 첼시의 일원이 되길 다시 한번 잘했다고 확신합니다.”
재성은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구단을 인수하시며 큰 투자를 하겠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요. 구체적인 계획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선수 영입을 비롯해 경기장 시설 보충, 그리고 구단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유소년 아카데미에 20억 파운드 이상을 투자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20억 파운드면 한화로 3조 원이 훌쩍 넘어가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오오!”
약속대로 통 큰 투자 계획에 기자들은 저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입 선수 명단에 현재 큰 활약을 펼치고 있는 쏘니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다분히 재성이 한국인임을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인터넷에서도 꽤 많은 말들이 오갔던 주제라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재성을 향했다.
“선수 영입은 전적으로 감독과 코치진의 의견에 따라 이루어질 겁니다. 하지만 우승을 목표로 하는 팀이라면 득점왕 경쟁을 벌이고 있는 선수를 욕심내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그럼 일단 생각은 하고 계신단 말씀이군요?”
끈질긴 기자의 말에 재성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영입을 제안한다면 어떤 조건을 제시하겠습니까.”
“글쎄요. 최고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하는 것이 제 철학이라.”
재성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우리 팀과 함께할 기회가 생긴다면 수억 파운드 이상의 센세이션한 계약이 될 겁니다.”
그 뒤로도 적당히 인터뷰에 응해줬지만 기자들의 질문은 끊이지를 않았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취재진을 겨우 물리친 재성은 경기장을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출발한 승용차는 새롭게 런던에 장만한 저택으로 향했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 진동벨이 울렸다.
스마트폰을 꺼낸 재성은 액정에 김명우 비트스타 대표의 이름이 뜬 걸 확인하고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회장님. 통화 가능하십니까?]“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예상하신 대로 Moon 코인이 사흘 연속 폭락해 결국 5달러 아래로 떨어졌습니다.]재성이 살짝 굳은 얼굴로 물었다.
“직전 최고가가 119.5달러였죠?”
[그렇습니다.]“95% 넘게 마이너스가 난 거네요.”
[더욱 심각한 건 1달러로 고정시키겠다고 약속했던 쥬피터가 40센트까지 떨어지면서 투자자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겁니다. 그로 인해 투매가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발행사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어요?”
[쥬피터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Moon코인을 무한 발행해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저희가 확인한 결과 이미 발행한 Moon 코인 숫자가 최대 발행량인 10억 개를 훌쩍 넘어 16억 개에 육박하고 있는 걸로 파악됐습니다.]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재성이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그런 상태라면 사실상 생태계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이 된 거네요.”
[극적으로 재기할 여지가 아예 없지는 않겠으나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회생이 불가능하다면 거래소 이용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겠네요.”
[거래 중단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마지노선인 1달러까지 깨진다면 바로 입출금을 막고 상장폐지 수순을 밟도록 해요.”
그러자 김명우 대표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상장폐지는 너무 과한 조치가 아닐까요?]하지만 재성의 태도는 단호했다.
“Moon 코인이 더 이상 가망이 없다면 신속하게 정리하는 것이 투자자들의 피해를 줄이는 유일한 길일 거예요.”
[회장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발행사 계좌부터 먼저 동결하고 상장폐지가 확정되면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지난번에 만들어둔 보상 절차를 진행하도록 해요.”
[예.]Moon 코인 사태가 벌어질 걸 알고 있던 재성은 몇 달 전부터 이런 사고가 터졌을 때 거래소 이용자 보호를 위한 매뉴얼을 미리 준비해 뒀다.
통화를 끝낸 재성은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린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코인 시장에 곧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치겠군.”
이번 사태로 큰 소실을 입게 될 투자자들을 생각하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김치 코인 Moon코인 충격파 “죽음의 소용돌이 패닉!”] [Moon, 쥬피터 폭락 사태 수십만 투자자들 비명!] [IMF 총재 Moon 사태에 “피라미드 사기!” 비판.] [금감원 Moon 폭락 사태 예의 주시 중.] [비트스타에 이어 국내외 주요 거래소 다섯 곳 Moon 코인 거래 중지.]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었다” 피해자들 망연자실] [Moon코인 후폭풍 코인 연쇄 폭락!] [비트스타 Moon코인 상장폐지 결정. 박재성 회장 “코인 거래 수수료로 투자자들 피해 일부 보상!”전 세계 1위 코인 거래소인 비트스타는 오늘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Moon코인을 상장폐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앞서 비트스타는 Moon코인 문제가 불거지자 제일 먼저 거래중지 결정을 내렸는데 사태가 더욱 심각해져 결국 어젯밤 최저 0.69달러까지 떨어지자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상장폐지를 결정했다.
비트스타를 소유한 박재성 회장은 “투자 손실에 대한 법적 책임을 떠나서 문제가 있는 코인을 거래소에 상장시킨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며 “1년간 Moon코인 거래로 벌어들인 수수료 전액을 이번 사태로 손해를 입은 거래소 이용자들에 대한 보상과 지원에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비트스타 측에 의하면 1년간 발생한 거래 수수료는 약 893억 원에 달하는 걸로 알려졌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박재성 회장이 개인 사비 천억을 더 내놓기로 해서 모두 천 893억 원이 피해자 구제를 위해 쓰일 것으로 보인다.]
↳Moon코인 이제 정말 끝났네ㅠㅠ
↳시팔. 절대 안 망한다고 해서 현금 서비스까지 받아서 넣었는데. 한순간에 돈이 다 사라졌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10만 원이 넘던 코인이 천 원도 안 된다니……. 미치겠네
↳이제 다른 코인들도 폭망한다. 침몰하기 전에 어서 내려라.
↳2030 영끌족들이 많이 투자한 코인인데 정말 어쩌냐.
↳끔찍한 꼴 보기 싫으면 어서 한강 다리 출입 금지 시켜라.
↳그래도 박 회장이 마지막 동아줄을 던져주네.
↳이럴 줄 알았으면 비트스타 쓰는 건데.
↳잃은 돈이 얼만데 고작 이천억도 안 되는 돈 가지고 보상이 되겠냐.
↳미친, 저거라도 주는 게 어디냐.
↳2222
재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신속하게 동결시킨 Moon코인 발행사 계좌에 들어 있는 3천여 개의 비트코인을 지급 요청에도 돌려주지 않고 사건이 모두 마무리된 이후 피해자 보상에 쓰일 수 있도록 보관했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23년 11월 10일.
재성은 화성 이주 프로젝트의 첫 단계인 탐사선 발사를 지켜보기 위해 나로우주센터 제2발사장에 와 있었다.
하늘도 오늘 발사 성공을 기원하듯 구름 한 점 없이 아주 맑았다.
바람도 잔잔했으므로 로켓을 쏘아 올리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새롭게 확장 공사를 끝낸 발사대에는 높이 55m, 폭 9.5m 그리고 무게가 95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우주왕복선 셀레네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육중한 동체를 우뚝 세우고 있었다.
발사 통제실 정면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셀레네의 모습을 감개무량하게 쳐다보던 재성은 옆에 있던 조효준 스타테크놀로지 사장에게 시선을 향했다.
“드디어 이날이 왔네요.”
“예.”
대답하는 조효준 사장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이미 몇 번의 실험과 달 착륙을 성공적으로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실전이 닥치니 한껏 긴장한 모습이었다.
만약 셀레네 호가 이번 화성 탐사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다면 스타테크놀로지, 아니, 인류의 우주개발 역사에 있어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순간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지금 조효준 사장은 불안과 기대가 반씩 섞인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다음에는 직접 함께 화성에 받을 디딜 수 있기를 기대하죠.”
굳은 신뢰가 담긴 격려에 조효준 사장도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날이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성은 조효준 사장의 얼굴의 불안이 어느 정도 걷힌 걸 보고 만족스레 웃었다.
잠시 뒤 모든 준비가 정상적으로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발사 15분 전. 자동 시퀀스를 작동합니다.] [……3, 2, 1, 발사!]쿠우웅!
지축을 울리는 엄청난 진동과 함께 95톤에 달하는 거대한 동체가 시뻘건 화염을 뿜어내었다.
셀레네 호가 천천히 발사대를 벗어나 하늘 위로 솟구치는 장면을 재성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쳐다봤다.
이내 보조 로켓들이 분리되고 셀레네가 무사히 대기권을 벗어나 화성을 향해 날아가자 통제실 안에선 열띤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기뻐하며 프로젝트의 성공을 축하하는 가운데 재성 역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드디어!”
본인이 추진한 일이지만 이걸 진짜로 해내다니.
현장에 있으면서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뉴 스페이스 시대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개척자가 되어라.
마지막 성공 조건을 모두 달성하셨습니다.
성공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명성 50,000 상승!
칭호가 부여됩니다.
역사가 [플레이어]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칭호가 부여됩니다.] [SYSTEM: 메인 퀘스트를 최종장까지 모두 완료하신 [플레이어]님에게 특별 아이템이 지급됩니다]
획득!
눈앞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한꺼번에 여러 개의 메시지가 떠오르는 가운데 유일하게 재성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열쇠 모양의 아이템이었다.
그 아이템은 사라지지 않고 찬란한 빛을 흩뿌리면서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어?”
순간 위화감을 느낀 재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멈춰 있었다.
통제실을 가득 메우던 환호성도 어느새 사라졌고, 사람들은 각자 기뻐하거나 박수를 치던 모습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조효준 사장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은 뺨 위에서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고, 샴페인을 들고 오던 권혁재 실장도 발이 허공에 뜬 채 멈춰 있었다.
여태껏 수많은 퀘스트를 깨왔지만 이렇게 시간이 멈춘 것은 처음이었다.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엔딩인가? 드디어 게임이 끝난 거야?”
그러자 재성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뉴라이프 메인 퀘스트 완수를 축하드립니다.] [플레이어] 님에겐 엔딩 후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무엇을 고를지는 [플레이어]님의 자유입니다.]그러곤 눈앞에 화면이 갈라지는 것처럼 두 개의 선택지 버튼이 생겨났다.
[ 1. 계속 지금 인생을 산다.] [ 2. 원래 인생으로 돌아간다.]‘원래 인생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재성이 선택지를 보며 의문을 품자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메시지가 이어 떠올랐다.
[만약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르신다면 게임 시작 버튼을 눌렀던 시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게임 완료 특전으로 10조 원의 현금이 든 스위스 은행 계좌가 보상으로 주어집니다.]순간 원래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은 얼굴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그를 망설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어떻게 할까……?’
지금 이 세계에도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항상 그를 믿고 지지해 준 단청백.
엄한 아버지인 것과 동시에 존경할 만한 기업인인 박경수 회장.
항상 얄밉게 굴어도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게 만드는 누나 재경과 큰형인 박재현, 그리고 단가연 여사.
재성은 고개를 돌려 권혁재 실장을 쳐다봤다.
그가 처음부터 쌓아 올린 유니콘 그룹.
재성을 믿고 따라온 수많은 직원들.
한순간 평정을 잃고 흔들리던 재성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돌아왔다.
메인 스크린엔 화성으로 날아가는 셀레네 호가 여전히 그래프로 띄워져 있었다.
“아직 남은 일이 있는데 한번 시작한 건 끝을 봐야지.”
중도 포기란 말은 내 사전에 없거든.
재성은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환한 빛이 재성을 감쌌고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장님! 샴페인을 가져왔습니다, 기념으로 하나 터트리시죠!”
“하하,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 우리 연구원들은 세계 최고예요!”
“셀레네 호 만세!”
“쭉쭉 앞으로 뻗어가라!”
와아아, 하면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재성은 가슴에 한껏 충만한 마음을 안고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