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ryeo that fall to a new world RAW novel - Chapter 441
◈ 불가리아(2)
그리스.
테살로니키 비행장.
개전 이후, 고려는 여러 전선을 동시에 유지하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보급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병력은 문제가 되었다.
전쟁 2년 차가 다 되어가자 중서성도 이 세계대전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2차 징병안을 통과시켰다.
고려는 이번엔 백만의 병력을 더 징집해 유럽 전선에 보낼 수 있었다.
다만 이 병력도 훈련 중이었다.
베네치아를 공격해 무너뜨리고, 도이치 전선을 안정화하고 있는 고려가 불가리아 전선에까지 동시에 파병하긴 힘들었다.
다만 물자지원을 중심으로 이들이 버티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규모의 지원은 모자랐다.
특히나 러시아의 비밀무기가 등장한 이상에는 더더욱.
제공권의 우위를 지닌 측의 심리적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고려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고려는 빠르게 안전한 그리스 본토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그리스 놈들은 굉장히 짜증 나는 놈들이지만, 적어도 적군은 아니었고 해원이 명령하면 말도 잘 들었다.
테살로니키는 불가리아와 가까우면서도 에게해에서 곧바로 접근할 수 있으니 지리적으로 좋았다.
그리고 고려는 수송선으로 이곳에 비행기들을 내려놓았다.
“그냥 비행기를 배 위에서 띄우면 안 됩니까?”
“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해군 장교가 그다음 날 사라진 것을 제외하고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달달달달
비행기 기관 소리가 요란한 이 공군 기지는 잔디밭이 드넓게 펼쳐진 평지에 지어져 있었다.
다르크 상현은 자신의 천막에서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한때는 군의 경력을 망칠 뻔한 위기에 처했었지만, 지금은 이 역사적인 자리에 예전의 전우들과 함께 공군 조종사로 올 수 있었다.
명예로운 일이었다.
“…….”
가슴 한편엔 아직도 그녀가 울면서 가지 말라고 했던 그날 밤의 광경이 머리에 남아 있지만.
고려의 건아로서, 장교로서 그는 육십만이 넘는 병력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본토에 남아 한가롭게 문서를 뒤적이고 싶지는 않았다.
세희도 처음부터 그를 따라 이곳에 오길 원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순 없었다.
해청의 명령도 있었지만, 자신부터가 절대 용납할 수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세희가 행여 자신을 따라올까 봐 미리 선수 쳐 해청에게 고자질을 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황실에 의해 저지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무사할 것이다.
자신이 죽어도 그녀는 죽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상현은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전쟁이 끝난다면, 기필코….
“계십니까?”
누군가 천막 밖에서 묻는 소리에 상현은 헛기침을 하며 상념을 잘라내고는 대답했다.
“예.”
모습을 드러낸 자는 자신의 기체를 담당하는 부교였다.
“정위님, 기체점검 완료되었습니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예, 건승하십쇼.”
그는 밖으로 나갔다.
부익 3호, 속칭 ‘까치’는 예전에 상현이 부익사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겉모습은 살짝 달라지긴 했다.
훈련용이 아닌 군용으로 쓰이는 전투기라 군부에서는 자우어 450이 발명된 이후 까치에도 기관총을 달길 원했다.
날아다니는 기관총좌라, 맞서 싸우는 입장에선 정말로 끔찍할 것이다.
구조상, 조종사는 복엽기 위층 날개 위에 기관총을 달았다.
운전을 하다가 몸을 일으켜 세워 기관총을 잡고 쏘라는 의미인데, 조종사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다.
복좌기는 조금 더 괜찮았다.
할 것 없이 마냥 풍경만 바라보던 복엽기 후방 탑승자는 이제 기관총으로 적을 공격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분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쟁 발발 이후 고려는 복좌기의 비율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산된 까치 자체는 단좌기가 더 많았으니 골치 아팠다.
“애초에 단좌기로 할 거면 그냥 조종석에서 쏘게 해 달라고.”
공군은 조종사들의 원망을 들어 이내 바람개비 동조장치의 개념을 제시했지만, 부익사가 그것을 구현해낼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작전 회의 모이시랍니다!”
상현은 동료 조종사들과 같이 지휘부 막사에 모였다.
동료들도 그와 비슷한 옷차림, 가죽 외투에 가죽 모자 보안경과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던 그들은 비행단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귀관들이 바라 마지않던 때다!”
비행단장의 걸걸한 말에, 조종사들은 코를 훌쩍이거나 침을 삼켰다.
모두의 눈동자 속에는 아주 약간의 두려움과 그보다 훨씬 큰 기대감, 설렘이 내포되어 있었다.
“우리의 처음 전장은 불가리아의 터르노보다. 일리안 아센 대공이 홀로 러시아에 맞서 저항하고 있는 곳이지.”
하지만 곧바로 비행단장의 말을 지적하듯, 한 줄기 청아한 목소리가 막사에 울려 퍼졌다.
“…그는 혼자가 아닙니다.”
― 저벅저벅.
‘뭐야.’
상현이 방금 여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는 모골이 송연하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공군 조종사들은 놀라서 턱이 빠진 것마냥 입을 벌리고 새롭게 등장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들과 비슷하게 가죽 외투에 모자, 보안경을 쓰지 않고 머리에 올려놓은 채로, 보랏빛 목도리를 한 여인은, 그 유명한 고려 최초의 여자 조종사이자 종통 공주인 해세희였다.
지금 이 시점, 그녀의 비행은 민간에서 이미 너무 유명해졌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었다.
자신의 꿈을 개척하는 공주라, 어찌 동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사업을 일구는 세희의 언니, 해연희도 굉장히 유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상류층이나 사업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반면 세희의 인기는 연희의 인기와는 별개로 범사회적이었다.
세희도 어느 순간부터 이를 인식했다.
그녀는 대중들의 지지와 동경, 그리고 자신의 인기가 그녀가 비행할 수 있는 또 다른 명분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는 영악하게 언론을 이용했다.
그녀는 과시용으로 상현이 가진 신기록, 기존의 최대 비행시간을 갱신하기도 했다.
물론 자존심이 상한 상현이 2개월 뒤에 그 기록을 갈아치웠지만, 세희도 다시 5개월 뒤에 신기록을 갈아치웠으니 둘은 한동안 평소 그들 사이마냥 엎치락뒤치락했다.
대중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아버지의 입김이 들어간 제국신문 정도가 아주 조심스러운 어조로 행여 옥체가 상할까 우려된다는 말을 남겼을 뿐, 다른 신문들은 제각기 미친 듯이 그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전국에 뿌려대었다.
외모만큼이나 그 실력도 빼어나니, 몇몇 조종사들은 행운의 여신이라며 그 사진을 오려 조종석에 붙여놓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는 자신들의 기체에 공주 그림을 그렸다가 상관에게 혼쭐이 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여자친구라고 거짓말을 해보려다가 씨알도 안 먹히는 것을 알고 도색을 새로이 해야 했을 정도였다.
비행단장의 말을 지적한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이윽고 상현의 옆 의자에 앉아있는 조종사를 눈짓해 쫓아낸 다음 그의 옆에 앉았다.
“…….”
“…….”
역시 그녀의 이름만큼이나, 상현과 세희의 관계도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다.
“그렇긴 하지. 우리가 갈 테니. 어쨌든.”
비행단장은 이 괴상한 분위기를 필사적으로 수습했다.
“터르노보는 이곳에서 삼백 킬로미터가 넘는다. 항속거리는 가능하지만, 전투에 들어간 뒤엔 연료가 모자랄 수 있다. 그 이후엔 재량껏 후방으로 빠져 재정비하도록. 되도록 스타라자고라로 집결하라.”
“알겠습니다.”
“제군들, 역사적인 순간에 그대들 모두에게 무운을 빈다. 부디 무사히 만나 이번의 일을 술집에서 웃으며 떠들 수 있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경례를 붙이며 나가는 조종사들은 흘깃흘깃 상현과 세희를 바라보았지만, 이윽고 그들도 첫 공격 출격에 긴장이 되는지 손바닥을 비비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전하.”
“전하라 부르지 마. 이제는 참령이니까.”
본래 세희는 대체로 상현에게 반존댓말을 하곤 했다.
관계가 깊어지며 사석에서는 서로 가끔 반말을 하곤 했지만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분노에 받쳐 반말을 쏘아대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
“귀먹었어?”
“…….”
단단히 화가 난 세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일은 다음에 이야기해. 일단 출격하자고.”
“아, 알겠습니다, 전….”
“참령!”
“예, 참령님.”
상현은 뒤죽박죽 뒤엉킨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밖으로 따라 나갔다.
“계급은 내가 높지만, 지휘권은 여전히 제대로 교육받은 당신한테 있어. 무슨 말인지 알지?”
상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까치 둘에 배정해드릴 테니 제 옆에 붙어 계세요.”
“좋아.”
세희는 자신의 기체에 올라탔다.
붉은색으로 도색한 그녀의 기체는 굉장히 독특했다.
일반적인 기체들도 조종사의 개성에 따라 도색을 하긴 했지만 기본적인 색은 비슷했다.
하지만 공주의 기체는 몹시 독특해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있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붉은색으로 칠하신 겁니까?”
상현은 첫째로는 이 가시성이 불안했고, 둘째로는 궁금해서 분위기도 좀 풀어볼 겸 질문했다.
다소 화가 가라앉은 세희는 마뜩잖은 얼굴을 하면서도 상현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그래야 고려의 병사들이 내가 당신들과 같이 싸운다는 것을 알 테니까.”
“…….”
“그럼 내가 당신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아?”
상현은 실소를 참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 지경이 되자, 세희도 피식 웃었다.
완전히 화가 풀렸는지,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고는 조종사들이 다 탑승한 것을 확인한 뒤 상현을 껴안았다.
“진짜 나쁜 사람. 나중에 내려와서 이야기해요.”
조종사들은 다 탑승했지만, 비행기를 관리하는 소수의 부사관들은 남아 있었다.
그들이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로 두 사람은 기체에 탑승했다.
* * *
유 부령의 경고는 한동안 일리안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경고까지 해줬는데 대비를 하지 않으면 바보였다.
제아무리 비행선에 장갑을 달았느니 뭐니 해도,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봐야 했다.
그는 너무나 사랑스러워 어느새 성 자우어라고 불릴 정도로 아끼는 자우어 기관총을 몇 정 전선에서 빼냈다.
그런 뒤 대장장이들로 하여금 하늘로 발사할 수 있게끔 각도를 조절하도록 지시했다.
러시아는 예전 콘스탄티노플의 바로 앞에서, 고려의 비행선에게 굴욕을 당했다.
그때의 일을 러시아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바다에 고려의 전함이 있다면 하늘엔 비행선이 있는 그 광경을.
그때 러시아가 느꼈던 비행선의 감상은 정말 창공의 전함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이후 러시아인들도 혼신의 힘을 다해 비행선을 제작하기 위해 매달렸다.
모방자는 개척자에 비해 기술의 발전이 항상 빨랐다.
또한 고려가 제시한 비행선의 개념은 독창적이었지만, 딱히 어렵진 않았다.
러시아도 증기기관을 만들 순 있었다.
게다가 기체로 수소를 쓴다는 것과 재료로 동물 내장을 쓴다는 것 자체는 비밀이 아니었다.
앞서 걸어간 자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며 마침내 러시아도 전쟁 전부터 비행선을 개발해냈고, 전쟁이 터진 뒤 거진 2년이 지날 무렵엔 마침내 이 비행선을 군용 작전에서 쓸 수 있을 정도로 개량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지금까지도 러시아의 비행선은 고려가 가진 비행선 기술력에 미치지 못했다.
고려는 기동성을 추구해 기관부를 개조하고,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일부 비행선들은 그 희귀하다는 부소를 사용했다.
그런 혁신들은 러시아가 당장 따라 하기엔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니 러시아는 고려가 간 길 대신 다른 길을 가야 했다.
비행선은 본래 밑에서의 공격에 취약했다.
대공 목적으로 개량된 다혈포는 아래의 각도에서 쏜다면 충분히 비행선의 고도까지 도달할 수 있어 위협적이었다.
러시아는 개발 당시 자우어 450식의 존재를 몰랐지만, 일반적인 총탄보다 연사속도가 빠른 기관총은 더더욱 비행선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경식 비행선 기낭의 아래 뼈대와 몸체에 얇은 철판 장갑을 두르기까지 했다.
이 얇은 철판은 지상에서 쏘아 올린 소총탄이나 다혈포 사격 정도는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철판을 덧댄 덕에 무게가 증가했고, 러시아는 기낭의 크기를 크게 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원래도 큰 비행선이 더더욱 커진 셈이다.
덕분에 러시아는 장갑과 더불어 비행선의 중요한 장점, 즉 큰 수송량을 유지하면서 머리 위에서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으니, 이제는 일방적으로 적에게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이 자랑스러운 비행선에 ‘키로프급 폭격비행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저런 기능이 추가되고 덩치가 커지면 가격은 더더욱 비싸졌다.
현시점, 비행선의 주요 가격은 주로 기낭의 재료인 내장의 가격에서 기원했다.
이를 위해 러시아의 도축업자들은 의무적으로 가축을 도살할 시 모든 내장을 국가에 바쳐야 했다.
이 내장의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지, 러시아에서는 차르가 죽은 병사와 포로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뜯어낸다는 괴담까지 돌 정도였다.
그것이 괴담인지, 실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크레믈은 오흐라나에 신무기에 대한 철저한 기밀을 유지하라 했지만, 고려는 내장 가격이니 뭐니 하는 여러 징조들로 사전부터 이를 눈치채고 있었고 일리안에게 경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고했다고 모든 위협이 다 극복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 부령이 떠난 지 마침내 고려 기준 일주일이 되는 날, 일리안은 마침내 러시아의 야심 찬 무기를 볼 수 있었다.
위압적인 모습을 한 키로프급 폭격비행선 네 대가 터르노보를 향해 오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 포병이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했고, 이후 러시아 보병대가 다시금 대대적으로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
공격준비사격 동안 엄폐해 있던 불가리아군은 재빨리 일어나 총탄을 러시아군들에게 다시금 퍼부으며 얀트라 방어선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이전과는 살짝 달랐다.
일부 자우어 기관총이 후방으로 빠졌고, 저 하늘 위에서 무언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는 중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그토록 결의에 가득 찬 불가리아 병사들마저도 온몸을 떨어대었다.
대응사격도 있긴 했다.
비행선이 예상 사거리 내에 들어왔다고 판단한 불가리아 지휘관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쏴라! 저놈을 쏴서 떨어뜨려라!”
― 타타타타
대공용으로 개조된 자우어 기관총은 우렁차게 하늘로 발사되었다.
하지만 하늘 높이 떠 있는 비행선은 별 반응이 없었다.
자우어 450식 기관총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평가받는 명품 무기였지만 개념 자체는 어디까지나 보병용 총탄을 훨씬 빠르게 발사하는 무기에 지나지 않았다.
특별히 대공을 위해 설계되진 않았다.
적 비행선이 본격적으로 활약한다면 고려 군부도 제작자인 로렌츠 자우어에게 구경을 키워달라는 주문을 하겠지만 그게 불가리아에 올 시기는 언제가 될지 미지수였다.
‘그래도 유 부령이 뭔가 대응책이 있으니 테살로니키로 떠났겠지.’
일리안은 처음부터 희망을 놓지 않았다.
― 쾅
하늘에서 떨어지는 항공폭탄의 위력은 그렇게 크진 않았다.
척탄병들이 던지는 수류탄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였다.
아마 추측하건대 투하할 때 명중률이 낮은 것을 보완하기 위해 크기와 위력보다는 폭탄 자체의 개수를 늘린 것 같았다.
그러나 비행선 공격이 전선의 불가리아인들에게 끼치는 심리적 영향은 지대했다.
참호전이야, 참호에 앉아 방어하는 입장에선 그래도 괜찮았다.
얼굴 빼고 몸은 보호받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이렇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운이 나쁘면 그대로 황천길로 직행했다.
작은 폭탄이 참호에 떨어져 터져나가자, 그 견고하던 불가리아 전선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세는 하루 동안 펼쳐진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번에야말로 작정한 듯 거의 사흘 동안 공세를 펼쳤다.
1차 얀트라강 방어선은 공세 시작 후 사흘 만에 돌파되었다.
얀트라강도 지류가 여러 군데라, 그 뒤에 2차와 3차 방어선이 있었지만 규모 자체는 고르나오랴호비차를 중심으로 만들어놓은 1차가 제일 컸었다.
불가리아군은 이후 2차 참호선에서 재정비하려고 했지만, 한번 밀린 방어선은 빠르게 복구하기 어려웠다.
2차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고, 불가리아는 3차 방어선에서야 겨우겨우 잔존병력을 수습했다.
하지만 그동안 어물쩍거린 만큼 러시아의 이번 공세는 너무 강했다.
공세 시작 후 닷새째 되는 날엔 러시아 본부가 고르나오랴호비챠에 완전히 입성했고, 최전선은 3차 방어선 너머 성 마리아 수도원과 성 니콜라이 수도원에 형성되었다.
두 수도원은 터르노보 북문 다리와 터르노보에 속하는 트라페지차 요새에서 겨우 사백 미터 떨어져 있었다.
한때 단아하고 아름다웠던 수도원은 포격과 총탄의 흔적으로 처참히 박살이 나 있었다.
그 잔해 속에서 러시아군과 불가리아군은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벌였다.
하지만 3차 방어선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공세 시작 후 여드레가 지나자, 러시아 보병대는 비로소 터르노보―트라페지차 요새와 터르노보의 북문을 두드렸다.
불가리아군은 트라페지차 요새의 고저 차로 많은 교환비를 내곤 했지만, 러시아도 무겁고 포신이 극단적으로 짧은 구포(구형 박격포)를 끌고 와 언덕 위에 포격을 실시해 방어병력에 피해를 입혔다.
지금 이 시대엔 사실 성벽과 성문이라는 것이 전술적으로 중요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접근 방해의 기능은 여전했기에 북문이 돌파당한다면 러시아군은 물밀듯이 들어와 시가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 공세 이후 열흘이 되는 날이 되었다.
― 쿠웅
밤중에도 적의 포격은 끊이지 않았다.
웅크린 사람들 위에는 저 빌어먹을 키로프 비행선이 떠 있었다.
항공포탄은 잊을 만하면 날아와 끔찍한 악몽을 선사해 주었다.
― 콰앙
불가리아의 지휘부는 공습에 대비해 지휘부를 다른 곳에 옮겼지만 그곳에도 포탄이 떨어졌다.
귀족들과 장수들 중 두 명이 즉사하고 여섯 명이 부상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일리안 아센도 이전의 그 순박한 얼굴의 뺨에 기다랗게 포탄의 파편이 스쳐 지나간 상처를 입었다.
날카로운 통증과 더불어 상처에는 피가 흘러나왔다.
병사들이 서둘러 면포를 가져왔다.
“괜찮다, 괜찮아.”
사실 괜찮지 않았다.
말과는 달리 일리안은 정말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다.
눈물이 흐른다면 이 상처에 스며들어 더더욱 아프겠지만, 지금은 정말 오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는 눈만 없었다면.
일리안은 헐레벌떡 뛰어온 의원이 그의 얼굴에 붕대를 감는 동안 밤중에도 불타는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터르노보 시내에는 이제 시신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황급히 움직이는 병사들도 전우의 시신을 수습할 시간 없어 보였다.
그 와중, 일리안은 부릅떠진 젊은 소년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본래라면 어둠에 보여야 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횃불이 근처에 떨어져 있는 바람에 소년의 얼굴이 너무 자세하게도 보였다.
저 아이가 눈을 깜박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허나 그 희망이 무색하게, 소년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대항하지 말았어야 했나.”
일리안은 행여 근처의 누가 알아들을까 고려어로 중얼거렸다.
고려어에 관심 있는 귀족이 아닌 이상 그의 나약한 말을 알아듣긴 힘들 것이다.
싸우지 말았어야 했나.
맞서 싸우기로 한 뒤에도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의 결의는 흔들렸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모든 머리를 쥐어뜯어 버리고 싶을 만큼 후회했다가, 후회하지 않았다가, 다시금 후회하고 있었다.
일리안은 문득 허리춤에 꽂혀 있는 고풍스러운 다혈권총을 바라보았다.
권총은 가끔 저항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선택을 내려야 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철컥
일리안은 권총을 뽑아 떨리는 손으로 만지작거리곤 약실 안을 확인했다.
일곱 발.
만약 그가 선택을 내린다면, 그는 일곱 발 중 여섯 발을 적에게 박아넣고 마지막 한 발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밤이 서서히 지나고, 마침내 새벽이 밝아왔다.
보통 새벽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일리안에겐 오늘의 새벽은 다가올 참혹한 모습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와 다름없었다.
터르노보가 오늘을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다.
사태가 악화되자 일리안은 전령을 통해 가브로보에 있는 옐레나와 불가리아의 난민들에게 그리스로 도망가라고 명령했었다.
하지만 그 전령이 제때 도착할지는 모르겠다.
“와 준다고 했잖소, 와 준다고. 유 부령. 대체 언제 와 줄 거요?”
그는 남쪽을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 부령은 아마 고려의 비행선을 끌고 올 계획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와준다고 얼마나 달라질까.
저 빌어먹을 비행선과, 저 빌어먹을 러시아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그때가 되면 너무 늦었을지도.
― 와아아아!
해가 뜨기도 전에, 적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불가리아 군영 내에서도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총소리와 대포 소리,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오늘의 전투가 막을 올렸다.
일리안은 마지막으로 남쪽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고려의 비행선은 보이지 않았다.
무덤덤하게 그 모습을 바라본 일리안이 자신의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태어나기는 고려에서 태어났지만, 죽을 땐 이곳에 묻히리.”
내 백성들 옆에서.
하지만 일리안이 성큼성큼 걸어가기가 무섭게, 누군가 그에게 외쳤다.
“전하, 전하!”
병사 하나가 급박하게 그를 불렀다.
대공을 불러세운 이유를 직접 말하는 대신, 불경하게도 저 너머의 하늘에 손가락질을 하는 병사는 뒷말을 이을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워 보였다.
“저것이….”
남서쪽, 해가 뜨는 방향과는 조금 반대편의 창공, 어둑어둑한 새벽하늘을 찢으며 희끄무레한 물체들이 점점이 출현했다.
어쩌면 이미 출현했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은 보였다.
명확히 보였다.
볼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이 근처의 불가리아 병사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습게도 일리안은 지금 이 순간, 일시적으로나마 전쟁터가 고요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빠르게 다가왔다.
― 우우우우웅
저들이 내는 소리는 비행선이 떠다니는 고요한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덩치 큰 벌 떼가 웅웅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개개의 기체의 덩치는 비행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저 군집의 숫자는, 정말 과장 보태지 않고 거의 오십 개가 넘었다.
속도는 빨랐다.
무겁고 둔중한 키로프 비행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 새 떼들은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