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4
제24화
차고 축축한 밤의 공기가 옷깃 안쪽을 파고든다.
옆구리를 강하게 압박하는 붕대 밖으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다.
묵빛 지렁이가 끈질기게 흑마법사만을 노리고 있었지만 니게르만은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나를 견제한다.
놈의 견제를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옆구리의 상처가 더 크게 벌어졌다.
“곧 끝나겠는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결심을 끝내고 곧장 뒤를 돌아 내달렸다.
그와 동시에 이곳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니게르만에게서 흑마법 몇 개가 날아왔다.
콰과과과곽!!
5개의 다크 에로우가 섬뜩한 파공음을 자아내며 모랫바닥에 박힌다.
다행히 한 발도 맞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피한 탓도 있겠지만, 지렁이를 신경 쓰느라 놈의 조준력이 많이 떨어진 탓도 있었다.
“이판사판이지!”
내가 황급히 달려간 곳은 붉은 달 부족의 무덤.
이미 한 번의 강령으로 인해 영력이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힘만으로는 놈을 벗어날 수 없으니.
“잘라탄 님!”
– 뭐냐?
콧구멍을 후비던 잘라탄이 내 모습을 보고는 심드렁하게 묻는다.
“바깥에 또 흑마법사 놈이 나타났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흠, 네 놈은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는 거냐?
“이것 또한 제 능력이라면 능력이죠. 더구나 밖에 잘라탄님이 잡고 싶어 하시던 지렁이 놈도 있습니다. 이참에 혼쭐을 내시죠.”
– 크흠…….
잘라탄이 고민에 빠진 듯 눈썹을 씰룩이더니 나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 내가 아니라 네가 문제겠지. 버틸 수 있겠느냐?
그의 걱정스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순간 움찔했다.
잘라탄은 단 한 번의 강령으로 내 상태를 눈치챈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 네 몸이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정신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겠지.
“선택지가 없습니다.”
– 그런가. 너도 전사로군.
그러한 말에 수긍한 듯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강령 – 잘라탄]
그리고 들어오는 잘라탄의 영혼.
눈에 시뻘건 정광이 번뜩인다.
타다닷.
재빠르게 튀어 오른 잘라탄이 향하는 방향은 입구가 아닌 반대쪽 자신의 무덤 뒤.
들어 올린 검에 얕은 기가 담기더니 그대로 쭉 내뻗는다.
콰아아앙!!
거친 폭음과 함께 벽면의 일부분이 터지며 돌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드러나는 작은 목함.
목함을 연 잘라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그 안에 든 동그란 알 3개 중 2개를 꺼내 입안에 쑤셔 넣었다.
꿀꺽-.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알이 위장에서 녹아내리더니 온몸을 용암에 집어넣은 것처럼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다.
내장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불씨가 점점 번져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감각.
정신이 아찔해지는 이 상황에서도 잘라탄은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알 속에 담긴 에너지를 천천히 움직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성난 화염이 점차 사그라든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불길이 몸속에 남은 작은 기에 이끌려 흩어지더니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힘이 0.3 증가합니다.] [민첩이 0.4 증가합니다.] [체력이 0.3 증가합니다.] [기력이 1.5 증가합니다.] [기(氣)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충만하게 차오르는 이 감각.
비록 현재 몸을 조종하는 건 잘라탄일지라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 톨의 감각조차 찾기 힘들던 기(氣)가 내 몸속에서 꿈틀대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쓸 만해졌군.”
– 왜 3개 중 2개만 먹은 겁니까?
“지금 네 상태에선 2개가 한계다. 신체가 버티질 못해. 물론 나라면 그것조차 이겨낼 수 있겠지만 지금 네 정신으론 그 전에 이 강령이 풀리겠지.”
그 말을 끝으로 잘라탄이 허리에 감긴 붕대를 촤르륵 풀었다.
시뻘게진 붕대를 내던지자, 그 안에는 빠르게 아물고 있는 상처가 보였다.
– 상처 치유 효과도 있는 겁니까?
“신체가 강해지면 회복도 빨라지는 법이지.”
쿵.
허벅지 근육을 단단하게 부풀린 그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간다.
어두운 계단을 지나쳐 보이는 것은 자욱한 모래 먼지.
그 안에서 시뻘건 안광이 잔상을 남기며 안쪽으로 향한다.
“상황이 어렵게 됐군.”
잘라탄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기력이 대폭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그건 내 수준에서나 유의미한 변화일 뿐.
아직 기사급의 근처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는 상급 기사와 비슷한 수준.
묵빛의 지렁이가 어느 정도 멀쩡히 버티고 있었다면 놈의 힘을 빌려 흑마법사를 상대해 보려 했지만, 이미 놈은 반죽음 상태였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잘라탄 역시 강령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기력을 올린 것일 터.
기껏해야 기를 이용한 기술을 한 번 사용하면 강령이 풀릴 게 분명했기에 단 한 방으로 흑마법사를 끝낼 생각이었던 거다.
카이든 때와 같은 요행이 한 번 더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에 기대다간 죽기 딱 좋겠지.
“어쩔 수 없군.”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쥔 잘라탄이 불투명한 모래바람 속에서 흑마법사를 발견하고 내달린다.
“호오……, 도망가지 않고 다시 돌아오다니. 죽을 자리를 알고 찾아온 건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니게르만이 여유롭게 웃어대고 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마력은 빠르게 술식을 구성하고 있다.
잘라탄의 검 위로 시뻘건 기가 피어오른다.
정신적 압박이 강하게 나를 짓누름과 동시에, 허공에 만들어진 마법진에서 쏘아진 보랏빛 안개가 잘라탄의 몸을 덮친다.
“키키킥, 아무것도 안 보이-.”
자신의 마법이 적중했다는 확신에 비웃음을 흘리던 니게르만이 눈을 부릅떴다.
후우우우웅…!!
휘몰아치는 풍압이 보랏빛 안개를 밀어냄과 동시에.
콰드드드드득!! 파앙―!
세차게 쇄도하는 검기가 안쪽으로 쭉 파고든다.
마지막 일격이라 생각하고 내지른 검기.
날카롭게 벼려진 붉은 검기가 니게르만의 급조한 실드를 부수고 놈의 어깨를 베어낸다.
“크허억……!”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으며 모랫바닥 위를 나뒹구는 니게르만.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윽!”
반동을 버티지 못하고 검과 함께 바닥을 몇 바퀴 구르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강령이 풀립니다.]
더 이상 강령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크하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덜렁거리는 어깨를 붙잡고 니게르만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나 또한 몰려오는 두통에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아직 전투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기에.
망할, 조금 전에 어깨가 아닌 심장을 찔렀어야 했는데.
그 와중에도 실드를 펼쳐 궤도를 틀어낼 줄이야.
– 일어나라. 고작 그따위 정신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강령이 풀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잘라탄이 옆에서 소리쳤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냐고.’
드드득-
손가락 끝에 힘을 잔뜩 줘 모래를 긁어낸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움켜쥐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으그득! 아그작!
그때, 니게르만의 덜렁거리는 어깨 위로 보랏빛 마력이 휘감기더니 기괴하게 팔이 비틀리며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런 씨…….’
저것도 악마의 낙인인가 뭔가 하는 그것 때문인가?
저 기괴한 모습을 보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만든 현상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 허, 몸을 회복시키는 건가? 까다로운 놈이군.
나는 최대한 몸 안에서 느껴지는 기력을 움직였다.
아직 아까 먹은 약효가 남아 있는 탓인지 그래도 제법 빠르게 몸이 회복하고 있었다.
“반드시 네놈은 내가 꼭 죽인…….”
쿠구구구구구…!!
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진동.
나와 니게르만이 잠깐의 공방을 나누는 사이 모래 안으로 모습을 숨긴 묵빛 지렁이가 날카로운 이빨이 박힌 아가리를 쫙 벌리고는 흑마법사를 삼켰다.
몸을 회복하느라 흑마법사가 미처 대응하지 못한 듯했다.
“끝난…건가?”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묵빛 지렁이를 경계하고 있을 때.
땅바닥을 몸으로 쓸어내며 묵빛 지렁이가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웅!!
안쪽에서 니게르만이 지렁이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듯 몸부림을 치던 지렁이가 붉은 달 부족의 묘지 입구를 부수고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놈의 가죽을 뚫고 튀어나온 한 줄기의 시꺼먼 광선.
핏물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지렁이가 괴성을 내지른다.
그곳에서 점액질에 온몸이 뒤덮인, 비 맞은 쥐 꼴이 된 니게르만이 얼굴을 구기고는 걸어 나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상당히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구나.”
니게르만이 제법 커다란 구멍을 꿰뚫었지만, 어찌나 생명력이 질긴지 지렁이는 여전히 죽지 않고 발버둥 치고 있다.
후우웅―!!
거칠게 휘둘러지는 놈의 꼬리가 니게르만의 실드를 후려쳤다.
죽기 직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묵직한 위력.
니게르만이 짜증스런 얼굴로 지렁이를 끝내기 위해 마력을 그러모으는 사이.
욱신거리는 머리의 고통을 억지로 내리누른 채, 조금 전 잘라탄이 운용했던 기의 흐름을 떠올렸다.
예전 기력이 낮을 때는 기의 존재조차 희미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단숨에 2.3이라는 기력이 되어 이제는 제법 선명하게 기의 존재가 느껴진다.
거칠고 패도적인 기의 운용.
시원시원한 검술과 움직임의 형에 딱히 얽매이지 않는 특성.
‘이런 식이었나?’
내 힘으로 직접 기를 움직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타닷!
한껏 짓누른 모랫바닥에서 모래가 튀어 오른다.
동시에 점점 가까워지는 니게르만과의 거리.
놈의 시선은 모랫바닥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묵빛 지렁이에게로 향해 있다.
‘잘라탄과 똑같은 검기를 쓰려는 건 과욕이다.’
도약력을 이용해서 충격량을 늘리고 기를 한점에 모으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우웅-
기를 방출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모을 뿐.
찌른다.
“또 당할 것 같아?”
니게르만이 눈살을 구기며 허공에 마력을 뭉친다.
동시에 내 검이 그의 마력의 덩어리 위로 쇄도했다.
쉬이이익!!
마치 마력에 빨려 들어가듯 안쪽으로 빨려 들어간 검이 방향을 틀어 니게르만의 뒤쪽으로 튕겨지듯 날아간다.
상대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검 끝이 돌아간 것을 보며 상대가 잘라탄이 내보였던 위력에 겁을 먹고 피했다는 것을 느낄 뿐.
콰가가가가가각!!
내 검은 니게르만에 의해 만신창이로 쓰러져 있던 묵빛 지렁이의 머리를 파고들며 가죽을 일부 잘라내고는 멈췄다.
[「서브 퀘스트 – 붉은 달 부족장의 부탁」을 해결했습니다.] [「힘 +0.8, 체력 +0.5, 기력 +0.3」을 획득합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를 볼 새도 없이, 날아가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친 채 바닥을 몇 바퀴 구르다가 지렁이의 꼬리 부분에 부딪혀 멈췄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갈비뼈도 몇 대 나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숨쉬기가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브 퀘스트의 보상으로 체력이 조금 회복되었다는 것 정도.
저벅, 저벅…….
퀘스트의 성공에 기뻐할 수가 없다.
적막한 사막 속에서 들려오는 느린 발소리가 다가오는 사형 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대로 또 죽는 건가…….’
어쩌면 사막에 온 것은 너무 큰 욕심이 아니었을까.
제대로 준비도 채 되지 않은 내게 흑마법사들의 계획을 막는 것은 어쩌면 무리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가기 전에 흑마법사 한 놈은 보냈으니 나쁘지는 않은 결과인가.
“킥, 건방진 새끼. 꼴이 참 보기 좋구나.”
니게르만이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 끝을 내 머리에 가져다 댄다.
“마지막 그 일격은 뭐였지? 나를 봐주기라도 한 거야?”
놈의 입장에선 지레 겁먹고 공격을 흘렸는데 생각보다 너무 약하니 당황할 만했다.
애초에 내 기력 수준으로는 상대의 실드를 뚫을 방법이 없다.
잘라탄이나 하벤베르크 조상님 정도라면 모를까.
“그래. 네가 하도 약해빠져서 말이야.”
놈의 관자놀이의 핏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네놈은 내가 직접 우리 ‘흑성(黑星)’으로 데려가 ‘위대하신 분’의 제물로 삼아줄게.”
‘흑성? 위대하신 분? 제물?’
제법 중요한 단서들을 들은 것 같다.
근데 죽기 직전에 들으면 뭐 하나…….
“우선 고통에 좀 몸부림쳐…….”
쌔애애애애액!!
대기를 가르는 거친 파공음.
붉은빛의 반월형 검기가 기습적으로 니게르만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온다.
“크윽……!”
다급히 실드를 펼쳐내 검기를 막아냈지만, 실드가 터지며 반동에 그대로 튕겨 나간 니게르만이 검기가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검사.
형형하게 빛나는 은색의 안광이 허공을 가로질러 숨을 몰아쉬고 있던 내게 향한다.
“너, 정체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