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Chinese warlord from Joseon RAW novel - chapter 10
“그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각오로 육사에서 수학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이 생활을 이어 나가야 할지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다.”
“이곳에서 착실하게 배워야 나중에 써먹지.”
“맞아. 그 이유가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적국에서 수모를 참고 있겠나?”
가끔은 내게도 권유해왔다.
“넌 중국인으로 살 건가?”
“글쎄.”
“너를 안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네 가슴 한편에 언제나 조선이 자리 잡은 것을 안다. 어때? 육사를 졸업하면 나와 함께 일제의 침탈을 몰아내는 데 힘을 쏟는 것이.”
“고민해 보지.”
“이대로면 우리나라는 일제에 잡아먹히고 말 거야. 급하다. 나는 언제나 급해. 빨리 돌아가서 조국을 구하고 싶다.”
근래 들어 김경천은 부쩍 안달했다.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저 말을 했을 때 이미 1910년의 여름이 다 가는 중이었으니.
그리고 운명의 날.
도쿄 아사히 신문 1면에 한일병합조서(韓日倂合條書)의 전문이 실렸다.
여러 면에 걸쳐 조선의 장래와 유용성에 관한 특집기사도 빽빽하였다.
걱정되어 찾은 김경천은 눈시울이 붉었다.
“괜찮냐?”
김경천은 질문에 대답 대신 다른 얘기를 했다.
“갈 데가 있어. 너도 가자.”
“어딘데?”
“가보면 알아.”
김경천을 따라 도착한 곳은 아오야마 묘지였다.
한국인에게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묻힌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묘지는 조용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흘렀다.
김경천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가 먼저 왔다. 기다리자.”
나는 짐작 가는 것이 있어 더 묻지 않았다.
과연 잠시 후 입구에서 일단의 청년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보통의 일본 청년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모두 조선인이었다.
“형!”
맨 앞의 청년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 뛰어와 김경천과 부둥켜안았다.
꺼이꺼이 통곡하며 눈물을 흩뿌렸다.
그때까지 참던 김경천도 터졌는지 같이 눈물을 흘렸다.
망국의 슬픔이 묘지를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껴안고 있다가 겨우 진정이 되었다.
함께 온 강인한 인상의 청년이 날 보고 말했다.
“김 형. 이 사람은 누구요?”
“내 친구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잠깐만, 설마 일본인인가?”
“아니. 그도 조선인이다.”
“그럴 리가.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은 모두 알고 있는데.”
청년이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날 노려보았다.
“김 형. 믿을 수 없는 자를 데려온 것은 아니겠지요.”
“그의 이름은 한신이다. 믿을 수 있는 친구야.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왔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조선인이시니 이 친구도 조선인이나 다름없다.”
“청나라에서 왔다고?”
더 눈총을 받는 것이 내키지 않아 나는 입을 열었다.
“말했듯이 한신이다. 당신들만큼이나 일제를 미워하니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하든 새어나갈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 내 소개를 했으니 당신들 소개를 듣고 싶은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다가 처음에 김경천과 얼싸안았던 청년이 말했다.
“나는 지대형(池大亨)이오. 도쿄 육군유년학교에 유학하고 있소.”
본명 지대형. 훗날 지청천(池靑天)으로 불리는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
지청천의 정체를 알자 다른 청년들도 알아볼 것 같았다.
과연 하나둘씩 밝혀지는 성명이 익숙하였다.
이응준(李應俊), 신태영(申泰永), 조철호(趙喆鎬) 등 죄다 아는 이름들.
내게 시비를 걸던 청년은 나중에 일본 육군중장 자리까지 오르는 홍사익(洪思翊)이었다.
역시 친일파 아니랄까 봐.
찔리는 게 있으니 남을 쉽게 의심하는 거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듯 지청천이 크게 발을 굴렀다.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이대로는 참을 수 없다. 한일병합이라니.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이냐? 이 울분을 풀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당장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해 반란을 일으키자!”
지청천의 발언에 홍사익이 심드렁한 투로 꼬장을 놓았다.
“일제의 심장부에서 고작 이 인원으로? 그건 반란이 아니라 자살이야.”
“자살이라도 좋다! 일제가 아닌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지금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다!”
“죽고 싶다면 말리지 않아. 하지만 난 사절이야.”
“뭐? 네가 그러고도 대한제국의 군인이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대한제국의 군대는 이미 3년 전에 해산당했다. 지금 우리는 일본제국의 군인이야.”
“이 개자식이!”
지청천이 홍사익의 멱살을 잡았다.
다른 청년들이 말려 겨우 떼어냈다.
광경을 지켜보던 김경천이 입을 열었다.
“홍사익. 어제부로 우리는 모두 식민지인(植民地人)으로 전락하였다. 같은 처지에 놓인 동지에게 그저 꼽을 주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 네가 생각하는 방안을 말해봐라.”
가장 나이가 많은 김경천이 은연중에 모임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홍사익도 김경천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의 역량으로는 뭘 해보기도 전에 바로 사살당할 거요. 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였다고는 하나 역사적으로 투쟁 끝에 독립을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독립을 도모할 수 있는 자체 역량을 기르는 것이요.”
“비겁한 새끼! 죽음이 두렵냐? 이미 조국이 적의 손에 떨어졌는데 그 역량이란 걸 어느 세월에 키운단 말이냐!”
지청천이 또다시 홍사익을 공격하려 하였다.
겨우 제지한 김경천이 다시 말했다.
“지대형과 홍사익의 의견은 알았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생각하는 방안을 말해보자.”
여러 의견이 나왔다.
항의의 표시로 전원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의견.
그 정도로 항의가 되겠느냐며 일본 천황이 있는 황궁 앞에서 다 함께 할복자살하자는 극단적인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대체적인 여론은 참고 기다리자는 쪽이었다.
“으으.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조국이 병합당한 이 하늘 밑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단 말이냐? 나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다고!”
지청천이 강하게 불만을 표시하였으나 다른 청년들은 미온적. 달리 말하면 현실적이었다.
김경천이 내 쪽을 보았다.
“한신. 네 생각은 어떠냐? 무슨 말을 해줄지 기대하고 있다.”
나는 묵묵히 말했다.
“홍사익의 말이 맞다. 우린 역량이 모자라. 실력을 키워야 해.”
내가 홍사익의 편을 들 줄은 몰랐는지 김경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청천도 매서운 눈빛을 날렸다. 홍사익은 얼떨떨해 보였다.
“실력을 양성하자고? 진심이냐?”
“두차례에 걸친 전쟁에 승리하면서 현재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다. 동아병부(東亞病夫)의 청나라는 이미 맛이 간 지 오래고, 러시아는 집안 대들보가 무너지지 않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지. 일본은 이미 세계열강인 영국과 미국을 등에 업은 상태. 외교적인 시도도 먹히지 않는다. 그래.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내 말을 들은 김경천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청천이 재촉했다.
“형! 뭘 생각해! 나는 이미 두 번 죽음을 각오했었어. 저 을사년에 보호조약을 맺었을 때와 정미년에 군대가 강제해산 당했을 때지. 더는 못 참아. 나는 싸우다 죽겠어.”
“참아라.”
“형!”
“두 번 참았으니 한 번 더 참아 세 번을 채워라.”
김경천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말했다.
쉬이 볼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에 지청천도 입을 닫았다.
김경천은 어디서 났는지 술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그러더니 군용단검으로 새끼손가락을 따서 병 속에 피를 흘려 넣었다.
“여기서 맹세한다. 훗날 조선이 떨쳐 일어나는 때가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일본군을 탈출하여 무기를 들고 다시 모이자.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일본군의 장교로 암약하며 놈들의 군사기밀을 빼 오자. 놈들의 지식과 정보로 무장하면서 언제고 올 그날을 기다리며 비분강개(悲憤慷慨)를 감내하자.”
김경천이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나도 새끼손가락을 그어 핏방울을 떨구고 옆 사람에게 전했다.
침묵 속에 술병이 돌았다.
망설이던 지청천도 술병에 피를 섞었다.
망설이던 홍사익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행동은 같았으나 그 속마음은 딴판일지 모른다는 것이 애석하였다.
술병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김경천에게 쥐어졌다.
김경천은 망설임 없이 술병을 마시고 내게 건넸다.
나는 병의 입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액체의 색깔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안에 떠다니는 핏빛 애환이 느껴졌다.
이 응어리를 풀 수 있는 날은 올 것이다. 분명.
술병이 돌아, 자리한 모두가 한 모금씩 머금었다.
1910년 8월 30일.
아오야마 묘지의 맹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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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사관생도
경술년이 다 가고 육사에 24기가 들어왔다.
연병장에 집합하는 신입생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기들.
입은 근엄한 무표정인데 눈가에는 실실거리는 웃음기가 보였다.
“새끼들, 저거 군기 빠진 거 봐라. 걷는 거 봐.”
“이야. 저건 딱 너 맨 처음 입학했을 때 걸음걸이인데?”
“지랄. 내가 언제 저렇게 걸었냐.”
나는 모범 학생으로 추천받아 24기 신입생도들과 함께 내무반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무다구치 렌야가 수행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미래의 일본 장교 후보생들을 특별히 사근사근대할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다구치처럼 오바할 마음도 없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각한 대로는 흘러가지 않았다.
24기 1중대 1구대에 배정받은 나는 먼저 구대장을 대면했다.
육사의 구대장은 전통적으로 몇기수 선배가 부임하였는데 특히 근무실적이 좋은 중위 중에서 선발하였다.
이번에 오는 구대장은 17기의 선배였다.
문을 열고 신임 구대장이 나타났다.
비쩍 마른 몸에 신경질적인 인상.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중위다.”
목소리가 마치 쇠를 긁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멍하니 도조를 바라보다 조금 늦게 대답했다.
“23기 생도 한신입니다.”
“5초 걸렸군.”
“예?”
“상관이 먼저 신분을 밝혔는데 대답하는 데 5초가 걸렸어. 이게 맞나?”
어느새 회중시계를 꺼내든 도조 히데키였다.
나, 지금 갈굼당하고 있는 건가?
이 느낌 오랜만이다.
“아닙니다.”
“네가 모범 학생이건 뭐건 상관치 않는다. 내게는 교육 중인 사관생도 일인일 뿐이야.”
“예.”
“지나인인가?”
“예.”
도조는 아무 말 안 하고 그저 나를 쏘아봤을 뿐인데 눈빛에 혐오감이 가득하였다.
단순한 사람의 시선에 그와 같은 미움과 경멸의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밟아죽일 바퀴벌레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내가 졸업하고 몇 년 새에 육사가 왜 이리 되었는지.”
“···.”
“지나인에게 모범 학생 자리를 주다니. 부임하기 전에 혹시 모범 학생으로 D가 올까 봐 걱정하였는데 이건 더한 막장이로군.”
아씨. 때려치우고 싶네.
도쿄의 암흑가에서 부하들이 떠받들어주는데 너무 익숙해졌나 보다.
사소한 갈굼인데 뭔가 예전처럼 참기가 힘들었다.
아니면 상대가 도조라서 그런지도.
“지나인이 신입생도의 생활지도는 제대로 할 수 있나?”
“육군사관학교의 내규에 따르면 모범 학생에게 생활지도의 의무는 없습니다. 그저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신입생도들과 함께 내무반을 쓰며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생활하면 될 뿐입니다.”
“내가 있을 때랑은 다른데.”
“그렇습니까. 그새 내규가 수정되었나 봅니다.”
도조는 탐탁잖은 얼굴로 있다가 벌레를 씹듯 말했다.
“너는 좀 있다 들어와라. 점호를 할 거니까.”
“예.”
24기 1중대 1구대의 내무반 앞.
한참을 기다렸으나 점호가 끝나지 않았다.
구대장이면 교련 때나 열심히 지도할 것이지 점호 때까지 신입을 들볶는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내무반 안쪽에서 고성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들어와.”
마침내 도조가 날 불러들였다.
한겨울인데도 내무반 안쪽에서 후끈거리는 열기가 전해져왔다.
신입생도들의 꼴은 무다구치때와는 전혀 달랐다.
겉으로 피가 나거나 멍이 든 생도는 없었지만, 그 분위기가 아주 기괴했다.
내가 들어왔는데도 눈동자 하나 굴리는 생도가 없었다.
다들 뻣뻣한 차려 자세로 형형한 눈빛을 뿌리며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헌데 그렇다고 군기가 잘 들어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대신 신입생도들이 무언가를 강하게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생도들이 있었으니.
나는 묻지 않고도 그들의 출신학교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귀관들에게 소개할 생도가 있다. 한신 생도, 앞으로.”
“23기 한신이다. 앞으로 너희들과 함께 내무반을 쓸 거다. 어려운 거 있으면 물어보고.”
내가 간단히 소개 인사를 마치자 도조 히데키가 언짢은 듯 다시 말했다.
“한신 생도는 모범 학생으로 같이 지내며 앞으로 귀관들의 생활지도를 담당한다.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랑스러운 육군사관학교의 신입생도로서 타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생활해야 한다. 알겠나!”
“예!!!”
“좋아. 오늘 육군사관학교에서의 첫날밤을 잊지 말아라.”
도조가 나가고 나와 24기 생도들만이 남았다.
“자자. 불 끄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신입생도들이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없는 생도들을 대신하여 내가 불을 껐다. 곧장 침대에 누웠다.
“다 누워. 내일 다섯 시 기상이니까.”
그제야 주섬주섬 침구류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식들아. 행운인 줄 알아. 나 같은 천사는 없다고.
신입생도들에게는 흔치 않을 평화로운 밤이었다.
***
도조 히데키가 굴리는 방식은 독특하면서도 지독했다.
물리적인 폭력은 없이 오직 말로만 쪼았는데 그 쪼기가 딱따구리처럼 매몰찼다.
아픈 곳을 자비 없이 후벼파며 생도를 복종시켰다.
“너희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대일본제국 천황폐하의 덕이다! 그 은덕에 보답하는 방식이 고작 이거란 말이냐! 다시!”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께서 통솔해 주시었다! 저 옛날 진무 천황께서 몸소 오토모와 모노노베의 병사를 이끌고 중앙에 있는 나라 가운데 아직 복종하지 않은 곳을 평정하신 후, 옥좌에 즉위하시어 천하를 다스리신 지 25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세상의 모습이 바뀜에 따라 병제의 연혁도 여러 번 바뀌었다···!”
도조가 있는 곳은 멀리서부터 알 수 있었다.
어디서나 집요하게 군인칙유의 복창을 요구하는 그였다.
“너희들은 군인이다! 군인칙유는 헌법이다! 두 번 틀렸으니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복창해라!”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께서 통솔해 주시었다···!”
내가 첫날 보았던 회중시계도 항상 가지고 다니며 써먹었다.
“틀렸어! 3초 늦었어! 언제든 사태가 발생하면 곧장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지로 향해야 하는 것이 군인이다! 어찌 지금과 같은 평시에도 집합에 시간이 이리 걸린단 말이냐! 다시 원위치!”
헐레벌떡 생도들이 뛰어갔다 오면.
“1초 늦다! 전장에서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시간이야! 너희의 목숨은 너희들 것이 아니다! 천황폐하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원위치!”
초 단위로 생도들을 압박하며 미칠듯한 뺑뺑이가 돌아가곤 했다.
확실히 도조 히데키는 남다른 인간이었다.
무다구치와 같은 자가 똥군기를 부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재밌으니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즐거우니까.
하지만 도조는 달랐다.
그는 진심으로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릴 적부터 다년간 함양한 군인정신이 제2의 천성이 되어 그의 뇌를 단단히 지배하고 있었다.
군인칙유에 광적으로 집착하며 정신교육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그였다.
그런 도조 히데키도 남들과 비슷한 점이 있었으니.
육군유년학교 출신이 아닌 자들에 대한 강한 우월의식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
1중대 2구대의 구대장이 낑낑거렸다.
나무 밥통의 뚜껑이 안 열리는 모양이었다.
언뜻 보아도 뚜껑이 움푹 파여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밥통 안에 쑤셔 넣은 모습이었다.
신경 쓰지 않고 밥이나 먹으려 했으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에 자꾸 눈이 돌아갔다.
안간힘을 쓰며 뚜껑을 열려고 하는 2구대장을 식당의 생도들이 비웃고 있었다.
참다못한 2구대장이 소리쳤다.
“누가 웃어!”
웃음소리는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빙글거리는 생도들이었다.
도조는 바로 옆에서 식사 중이었으나 못 본 척 자신의 식사에만 열중했다.
2구대장이 다시 외쳤다.
“이 밥통 뚜껑을 짓눌러 열지 못하게 한 사람이 누구냐?”
조용한 가운데 누군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밥통을 부수면 되지. 그걸 못하나.”
속삭임을 들은 2구대장이 식탁 위로 성큼 올라섰다.
“방금 말한 사람 누구야! 어떤 자식이야!”
식탁 위를 걸으며 한 사람씩 취조했다.
“너야? 네가 말했어? 너 입에 웃음기 안 빼?”
분명 군 계급상 이곳의 최고 상관은 구대장.
식당에 있는 누구보다 계급이 높다.
하지만 일본식 상명하복 정신에 일반 구제중 출신의 구대장은 인정받지 못했다.
훗날 일본육군을 좀먹을 파벌이 이미 육사에서부터 자라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수백의 생도들이 1명의 구대장을 따돌리는 것과 같은 광경.
참다못한 2구대장이 낄낄대는 한명을 군홧발로 걷어찼다.
의자에서 떨어진 생도를 마구 발로 밟았다.
아주 기이한 광경이었다.
화가 난 구대장은 수백명이 보는 앞에서 생도를 폭행하고.
맞는 생도는 몸을 웅크린 채 처맞으면서도 웃고.
또 그 광경을 수백명의 생도들이 빙글거리며 관람하고 있었다.
우웩.
토할 듯 메스꺼운 느낌이 올라왔다.
그때 도조 히데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조가 2구대장을 잡았다.
“어이, 타카하시. 그쯤 해둬.”
“닥쳐. 이놈이 날 모욕했다고.”
“뭐 어떻게 모욕했다는 거야?”
“날 비웃었어.”
도조는 쓰러진 생도에게 몸을 굽혀 직접 일으켜 세웠다.
“이름이 뭐지?”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입니다.”
“왜 웃었는가?”
“재밌어서 웃었습니다.”
아마카스 생도의 말을 들은 2구대장은 화가 솟구쳤는지 또 군홧발을 들어 올렸으나 도조가 제지했다.
항의하려던 2구대장이 멈칫했다.
도조가 킬킬대고 있었다.
“자네, 왜 웃나?”
“옛날 생각이 나서.”
“뭐?”
“나도 과거에 이런 적이 있었거든.”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도조는 2구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마카스의 옷매무새를 단정히 잡아주었다.
처음 보는 인자한 미소가 만면에 가득하였다.
“몇 년 만에 육군사관학교에 돌아오고 보니 바뀐 게 너무 많아 적응이 어려웠었지. 그런데 오늘 자네를 보니 내 육사시절이 생각나는군. 나도 똑같이 밥통 뚜껑을 주걱으로 후려갈겨서 열리지 않게 했었는데···.”
“뭐? 도조,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당시에도 구제중 출신의 D 구대장이 식당을 헤집으며 소란을 피웠었지. 그놈이 날 잡고 사정없이 팼어. 그래도 나는 웃음이 나왔었다. 아마카스 생도. 자네라면 왜 그런지 알겠지?”
2구대장이 옆에서 떠들든 말든 도조와 아마카스의 대화가 이어졌다.
“예. 알 것 같습니다.”
“그래. 너는 잘못한 게 없다. 가서 쉬어라.”
“예.”
아마카스가 식당을 떠나자 2구대장이 도조 히데키를 노려보았다.
“이럴 건가? 나도 자네와 같은 행동 지도의 권한이 있어!”
아마카스 생도에게 향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던 도조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타카하시. 적당히 해라.”
“뭐야?”
“내가 그간 네놈에게 맞춰줬다고 진심으로 너와 내가 동급이라고 믿기라도 했단 말이냐? 기억해라. 너와 나는 태생적으로 신분이 달라. 내가 육군 장성 자리에 오를 때 너는 이 구대장 자리가 마지막으로 얻는 요직일 거다.”
“이, 이 새끼가!”
2구대장이 주먹을 쥐었으나 일반 생도를 패는 것처럼 같은 구대장을 폭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여전한 비웃음을 받으며 식사를 위해 조용히 밥통을 깨뜨리는 수밖에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본 나는 다짐했다.
얼른 탈출하자고.
이 사방이 적인 꽉 막히고 답답한 상황을 가능한 한 빨리 탈피하자고.
이제 클만큼 컸다.
자금도 빵빵하고 명성도 얻었다.
중원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횡행해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하게 울렸다.
마침내 1911년의 5월 27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23기의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파칭코 사업을 위해 기타 잇키와 두징쯔를 일본에 남겨둔 채 중국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바야흐로 신해년의 혁명이 폭발 조짐을 보이며 대륙이 들끓는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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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폭탄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다.
질펀하게 늦잠을 잘 생각이었는데 생각처럼은 되지 않는다.
기상나팔이 없는 평온한 아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모두 벌써 나간 모양.
새로 쌓아 올린 영국식 벽돌집이 아주 아늑하였다.
탁자엔 밥과 김치, 뭇국과 나물 반찬이 소박하게 올려져 있었다.
어머니의 집밥이었다.
느긋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홍콩의 거리는 확연히 근대화된 도시의 풍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댕이 묻은 노동자들이 어딜 가나 바글거렸고 하늘에는 매연이 가득했다.
나는 곧장 홍콩섬의 센트럴가로 향했다.
다른 건물들에 비하여 확연히 현대적인 빌딩이 눈에 띄었다.
홍콩상하이은행(The Hongkong and Shanghai Banking Corporation).
줄여서 HSBC로 불리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은행이다.
중국인들은 회풍은행(雅豊銀行)이라고 불렀다.
회풍은행의 악명은 대단하였다.
나라가 망해도 회풍은행은 믿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신용도를 자랑했다.
물론 좋게 말해서 신용이지 나쁘게 말하면 돈세탁을 도울 뿐이다.
대영제국의 위명을 등에 업고 오로지 악마적인 수준의 이익만을 탐하는 기업이 HSBC였다.
은행에 들어가려 하니 경비가 제지했다.
경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골목에 회풍은행을 이용하는 중국인 전용의 매판(買辦)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놈의 인종차별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별수 없이 매판 골목으로 향했다. 중개상을 통하면 분명 수수료를 떼먹으려 들 텐데.
중년의 중국인 직원이 물었다.
“뭐 도와드릴까?”
“예금을 하고 싶은데요.”
“계좌는 있소?”
“없지요.”
“이 종이를 작성해주시오.”
직원이 누렇게 빛바랜 종이를 내밀었다.
일반적인 예금계좌 개설을 위한 것이었다. 내게는 맞지 않았다.
“이런 거 말고 한 번에 좀 많이 맡기려 합니다. 영국인 직원하고 직접 말하고 싶은데요.”
“뭐 얼마나 많이 맡기려고? 중국인 거래는 내가 도맡아 하오. 내게 말하시오.”
“액수를 말하기 전에, 이자는 얼마나 가능합니까?”
“은화 1000냥 이상의 저금은 3리(釐)가 기준이오. 그것도 꾸준히 정기적으로 예금할 때에 한하오.”
3리?
고작 0.3퍼센트?
자본금이 있어도 돈놀이 할 곳이 마땅찮은 이 시대의 금리다웠다.
“10만냥 이상은 어떻습니까?”
직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도 훠이훠이 내저었다.
“일 안 볼 거면 가시오. 농지거리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