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Chinese warlord from Joseon RAW novel - chapter 55
“그럼요?”
“공화.”
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루쉰의 대답은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아아, 또 그놈의 ‘주의’의 등장이군요. 오늘날 범람하는 여러 사상의 무가치함은 아까 다 얘기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고 사상의 중요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네. 독군은 공화에 진심이야, 그것만은 틀림없어.”
“좀 전엔 그리 살벌하게 말씀하시더니···. 한신을 긍정하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를 좋아하네. 게다가···.”
언제나 미리 생각하고 말하는 루쉰.
그가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은 흔하지 않다.
“게다가 뭡니까?”
“내가 영웅을 칭하는 자를 싫어한다는 건 자네도 알지? 하지만, 하지만 말일세. 그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뽐낸 적이 없네. 오직 남들의 평가만으로 국사무쌍이라 불리는 거야.”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후스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세간에서 한신이 불세출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왔던 후스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한신이 스스로를 치켜세운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대총통에게 술 시중을 시켰다든가 하는 얘기들은 야사(野史)에 불과하다.
워낙 주목받는 인간이니 오만할 거라 지레짐작했을 뿐이다.
“확실히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난 자인 것은 인정하지요. 본인을 힐난하는 언사에도 반박 없이 수긍하는 점이 인상 깊더군요. 권력자들은 으레 우리 같은 인간을 우습게 보잖습니까. 자기가 일선에서 뛰는 동안 대학물 먹은 놈들은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낸다고요. 하지만 그자는···. 그저 수긍했지요.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고개를 숙이기 어려운 법일진대. 남다르긴 합니다.
“나는 스스로를 영웅으로 칭하는 자를 싫어하는 것이지. 진정한 영웅을 배척하는 건 아니네.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해야 맞을 터. 그 두 사람은 가능성이 있네.”
“으엑, 한신이 영웅이라고요? 아니, 한신은 그렇다 쳐도 마오쩌둥도요?”
루쉰은 담담하게 말했다.
“청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 독군이나, 그 마오라는 사서나, 범인은 가슴속에 품고 있기에도 버거운 광대무변한 꿈을 꾸고 있네.”
“꿈은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꿈인 겁니다. 그놈들은 해내지 못할 겁니다. 중국의 병폐는 이미 수천 년간 쌓여 개인의 힘으로는 씻겨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유럽이 중세의 암흑기를 탈출하는데 수백 년이 걸린 것처럼 중국 또한 비슷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후스는 딱 잘라 말했으나.
루쉰은 미련이 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네. 기대를 걸어봄직 해.”
“설마, 정부에 들어가 일을 하실 생각은 아니지요? 권력자에 빌붙어 떡고물을 챙기는 놈이라 저를 비난하신 건 선생님입니다.”
루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얘기를 했다.
“하지만 중국이 정말로 바뀔 수 있다면?”
“예?”
“지난한 교육과 사회개혁을 통해, 중국인들 특유의 게으르고 비열한 노예근성을 개조하는 데 성공한다면?”
“안 된다니까요.”
“장강의 물줄기처럼 온 중국에 단단히 뿌리내린 기득권층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대의를 반영하는 시민의 지도부로 자치를 실현시킬 수 있다면?”
“그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온 중국이 자신을 찬양하며 우러르는 가운데, 절대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을 때. 오히려 젊은 날 꿈꾸었던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라면?”
후스는 입을 다물었다.
마오쩌둥 같은 머저리가 그런 지위에 오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지만.
설사 놈이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걸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놈은 권력을 사랑해. 매일 박을 수도 있을걸.
후스는 머릿속으로 뇌까렸다.
하지만 한신이라면?
채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신은 후스가 보아온 그 누구보다 독특한 인간이었다.
후스는 지금껏 살아오며 나름대로 인간의 본질을 정의내렸다.
권력을 추구하며, 과시하길 좋아하고, 자신과 다른 편은 배척하여 공격한다.
인간은 구제불능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야망에 찬 사기꾼들의 거짓말이다!
라는 것이 후스의 인생철학이었는데.
한신은 소탈하고, 지혜로우며, 인간적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신이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천부적인 연기력을 지닌 재능꾼인지.
그게 아니면···.
“어떤가, 후스. 말해보게, 그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다면 어찌 될 것 같은가?”
후스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겨우 침을 삼키곤 못 담을 말을 입에 머금었다는 듯이 황급히 내뱉었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은 진짜 영웅의 출현을 목도하겠지요.”
***
나는 최소한의 경호 인력만 배치하고, 마오쩌둥과 천안문까지 걷기로 했다.
그런데 이 친구.
지나치게 굽실댄다. 부담되게시리.
“사령관님, 아직 말씀 안 드렸지요. 실은 제가 사령관님을 뵌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닙니다.”
“언제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요.”
“하하! 아닙니다. 제가 그저 먼 발치에서 일방적으로 사령관님을 뵈었을 뿐입니다. 실은 저는 후난성 창사 출신입니다. 작년에 창사에 입성하는 사령관님의 군대를 목격했습니다.”
여단전쟁 때 돤치루이를 토벌하러 가기 전.
나는 후방의 안정을 위해 후난성을 먼저 쳤던 적이 있다.
그 일환으로 후난성의 성도인 창사에 입성했던 것인데, 마오쩌둥이 그때 나를 본 모양이다.
“당시 저와 제 친구들은 이층집 지붕 위에 올라서 사령관님이 지나가는 광경을 보았지요. 우리끼리 떠들었습니다. 저기 절대정신이 말을 타고 간다고요!”
“그건 헤겔이 나폴레옹을 두고 한 말 아닙니까?”
“어엇, 헤겔을 읽으셨습니까? 역시 문무에 모두 출중하시다더니, 대단하십니다!”
나를 나폴레옹에 비견하지 마.
그놈은 최후가 안 좋았다고···.
“어쨌건, 제 사상에 동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정을 받는 것이 제겐 흔한 일이 아니거든요.”
“오해가 있군요. 저는 특별히 마오군의 사상에 동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후스 선생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이지요. 사상은 그저 사상일 뿐. 그 안에 내재한 진리라든가 하는 것은 별로 믿지 않습니다.”
마오쩌둥이 문득 길거리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하, 하지만 사령관님은 분명 공화주의를 강조하셨잖습니까!”
“공화는 수단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의 정치 체제라는 생각에 기치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시민들 개개인이 정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안 걸을 겁니까?”
마지못해 날 따라오며 마오쩌둥이 말했다.
“공화주의를 계승한 것이 사회주의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한신 사령관님과 같이 절대정신을 지니신 분이 국가를 통치하면, 곧 그 절대정신이 국가의 정신이 되는 겁니다. 그게 곧 공화이자, 사회주의 혁명입니다.”
“아니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공화주의의 주체는 모든 시민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오직 노동자들만 인정받으니, 그것이 제가 사회주의를 배격하는 이유입니다. 편을 가르는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마오쩌둥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자본가들은 중국의 암 덩어리일 뿐입니다. 마땅히 도려내야 할 텐데요.”
“그들도 시민입니다. 어찌 그러겠습니까?”
실망한 기색이 절로 느껴졌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마오쩌둥은 또다시 떠들어댔다.
저돌성과 끈기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슬슬 피곤하다.
아무래도 내가 다루기에는 골치가 아프니.
이 미친 인간을 상대할 만한 또 다른 미친 인간이 국회에 거주하고 있지.
“실은, 같이 걷자고 한 것은 마오 군을 가늠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생디칼리슴의 멋짐에 대하여 지껄이던 마오쩌둥이 재빨리 물어왔다.
“가늠하다니요?”
“공화정부 2기가 출범한 지 상당한 시일이 흘렀지만, 여전히 인재 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게도 주변에 전도유망한 청년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오고 있지요.”
“그, 그 말씀은?”
“제 정치적 동지이자, 사석에서는 각별한 사이이기도 한 쑹자오런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
마오쩌둥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지요! 국무총리를 역임하시고, 지금은 공화당의 당수로 계시잖습니까.”
“그 친구가 마오 군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공화당 의원실에서 비서로 일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오쩌둥이 연신 포권을 해왔다.
“생각은 하고 말합니까?”
“저는 오랫동안 이런 기회를 기다려 왔습니다. 저는 목표를 정하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돌진하는 성격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마오쩌둥 못지않은 정치병 환자에 공화주의에 미친 놈인 쑹자오런이라면.
이 녀석을 억제할 수 있겠지.
어느새, 천안문 앞에 도착하였다.
시위를 위해 모인 학생들이 바글바글 하였다.
구호는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었으나, 관통하는 테마는 있었다.
중화민족주의였다.
우수한 역사를 지닌 중국 민족이 다시 세계의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외침이었다.
“어?”
천안문 광장에 내가 들어서자,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전해져 왔다.
“한신이다!”
“무쌍장군이다!”
“와아아! 한신! 한신!”
인기는 좋네.
정부에 불만이 있어 시위하러 나온 학생들이었으나.
그래도 나는 좋아하나 보다.
나는 자연스레 광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파도치던 인파가 양 옆으로 쫙 갈라졌다.
“한신 장군님! 한 말씀 해주십시오!”
“돤치루이에게 사형을 내려주십시오!”
“니시하라 조약 철폐! 외국인 추방!”
나는 갖가지 요구를 쏟아내는 군중의 한복판에 섰다.
마오쩌둥은 내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늘, 여러분이 모인 이유는 짐작이 갑니다. 정부에 바라는 게 많을 겁니다.”
학생들이 그렇다고 아우성을 쳤다.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저 역시 중국의 한 시민으로서 돌아가는 현실을 믿을 수 없어, 광장에 나왔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심정입니다.”
처음에는 일단 공감을 해준다.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라는 사실만 주지시켜도 일이 편해진다.
과연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정부를 규탄하던 광장은 마치 내 팬클럽장처럼 변모하고 있었다.
“중대 발표를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다음 주에 외무를 위해 유럽에 갑니다. 목적지는 파리, 외교특사 자격입니다. 하지만 저는 군인에 불과하여 정치적 식견이 모자라니, 가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중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식인들이 오늘 여기 모여있다 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나는 차분하게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하겠노라 설명했다.
경호원들을 시켜 군중을 통제하고, 지원자를 받아 의견을 말할 시간을 주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뻔한 얘기.
돤치루이와 쉬수정을 잡아 족치고, 니시하라 차관은 그냥 좆까고.
조계는 죄다 없애며, 안하무인인 서양인들을 추방하라는 얘기.
나는 참을성 있게 경청했다.
결국은 보여주기지만, 이 보여주기가 얼마나 커다란 파급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치는 결코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정책을 펴는 만큼,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소식을 듣고 몰려든 언론사 기자들이 이미 천안문 앞에 북적대고 있었다.
“의견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웠지만 공청회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질서있게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유혈사태를 불러오고, 몇 달 동안이나 전국을 불태웠을 5.4 운동을 소박한 공청회로 틀어막았다.
마오쩌둥은 헤어지기 전 중얼거렸다.
“저는 또 다시 느꼈습니다. 창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 천안문에서 사령관님은 절대정신이셨습니다···. 광장에 자리한 모든 군중이 사령관님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한걸음 성장하였습니다···.”
이 녀석은 찬양도 찝찝하게 한다.
그 절대정신이라는 게 결국 마오주의가 이상향으로 꿈꾸던 길이잖아.
온 중국이 한 사람의 사상만을 진리로 추앙하며 받들어 모시는 주체사상이잖아.
하지만, 다음날 베이징의 16개 신문이 일제히 쏟아낸 기사들은 마음에 들었다.
– 천안문의 기적. 한신, 분노한 학생들을 설득하다. 이것이 공화주의인가.
–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될 외교특사단, 한신을 중심으로 27명 규모. 천안문 시위에서 문제해결 약속.
– 시위 현장이 공청회로 변한 사연. 니시하라 차관 관련자 처벌과 외국과의 조약 철폐 의견 나눠.
천안문에서의 한바탕 소동으로 파리에 파견되는 평화특사단은 국민적 기대를 받게 되었다.
바라던 바였다.
예정대로 다음 주가 다가왔을 때.
나는 상하이로 이동해 배를 탔다.
파리는 처음인데. 어떠려나.
“야호!”
“떨어진다, 조심해.”
“그럼 잡아주던가.”
“보는 눈이 많잖아.”
“뭐 어때? 부부인데. 내가 부끄러워?”
응, 조금.
입항하는 뱃머리에 서서 시시우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바닷물이 이슬처럼 날아와, 그녀의 감청색 머리카락이 삽시간에 젖어 들었다.
“내린다. 준비해. 이제부터는 언론도 많아질 테니, 조금 근엄하게 굴자.”
“응, 그래야지. 사막의 전쟁을 신승으로 이끈 신비로운 중국의 장수, 한신의 영부인 되시는 몸이니까.”
“그게 아니라, 중국 특사단의 경제 부문 책임자로서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얘기야.”
“난 한신의 영부인이 더 좋아.”
시시우가 생긋 웃었다.
때마침 하늘이 노을빛으로 발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르세유항의 첨탑에 그녀의 어깨가 걸렸다.
“서시는 멀미 그쳤으려나. 깨우고 올게.”
시시우는 말괄량이처럼 갑판을 달려 지하로 내려갔다.
이번 특사단은 규모가 크진 않았으나, 내 재량에 의해 나름의 정예들로 꾸려졌다.
특히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시시우와 한서시를 포함한, 신양(信洋)그룹의 경영진들을 경제 자문 명목으로 특사단 명단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개발새발마냥 어지럽게 얽혀있던 한양 은행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업무는 얼추 마무리되었다.
시시우가 중심이 된 경영진에 의해 지분투자를 바탕으로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지주회사가 설립되었다.
신양그룹의 탄생이었다.
이번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 평화특사단의 목적은 니시하라 차관 조약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중영방적협상에 따라 전국에 산재한 조계 철폐를 요구하기 위함.
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한 달이 넘게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소란.
베트남이나 조선 같은 각 민족의 독립 청원.
다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한 가지 이슈 아래 평등하다.
두 번째 생이 주어진 이후, 언제나 나의 목적은 하나였다.
이 세계를, 내가 살았던 세계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
그거면 족했다.
처칠이 회고했듯, 2차 세계대전은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그 거대한 규모와 어울리지 않게, 믿을 수 없으리 만큼 예방하기 쉬운 전쟁이었다.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명령하기 전까지.
수십, 수백 번의 골든타임이 있었고.
안일함일까, 두려움일까, 역사는 그 모든 순간을 허투루 흘려보냈다.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전간기에 해당하는 지금.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치료받기에 적합한 상태다.
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표어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대전쟁의 화마가 유럽을 박살낸 지금이 바로, 새로운 전쟁의 싹을 잘라내는 최적의 시간인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얼마간의 영향력으로 전쟁을 막아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유럽의 재건, 경제적인 회복이다.
신양그룹은 중국의 공업시장을 잠식하고 독점하여, 이제는 조금씩 해외시장을 넘보고 있었다.
시시우를 특사단에 포함시킨 이유였다.
1919년 6월 15일.
사실상 2차 대전을 조장한 거나 다름없다는 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되기까지는 이주일 가량밖에 남지 않았지만.
오히려 나는 일부러 뒤늦게 합류하는 계획을 짰다.
베르사유 조약은 마지막까지 난항을 거듭했다.
이탈리아 총리는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원하는 만큼 차지하지 못하자,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남은 사람은 빅3.
독일을 회생 불가의 나락으로 처박고 싶은 프랑스의 클레망소와.
끝까지 도덕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길 원하는 미국의 윌슨과.
그 양쪽에서 눈치를 보며 영국의 이익을 고민하는 로이드조지까지.
세계 최강국 세 지도자의 회담은 막바지 5일간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 5일을 내 것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모든 제안을 검토하고, 모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감안해 보아도, 앞이 안 보여 어두컴컴할 때.
촛불을 들고 길을 인도하고 싶었다.
일종의 출구전략을 제시하는 거다.
“와씨, 드디어 도착이네.”
여동생 한서시가 투덜거리며 갑판에 나타났다.
그녀 역시 신양그룹의 경영진으로 이번 특사단에 참가한 터.
마르세유항에 배가 입항했다.
저 소란스러운 난리통을 환영식이라고 칭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항구는 프랑스인들로 북적였다.
날 보러 온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어째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삐이익!”
내가 항구에 발을 디디자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뭔 의미여?
마음에 든다는 건지 안 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 다음에 중국식 장포를 걸친 독일인들이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자, 휘파람 소리가 더욱 격해졌다.
“삐이이이이익!!!”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꺼지라는 거였다.
나는 의기소침해진 독일군 병사를 다독였다.
상하이에서 마르세유까지 오는 도중에 제법 친해진 터였다.
“마음 쓰지 마. 너는 잘못이 없다.”
“하지만 제 조국은 죄를 저질렀지요···. 그건 사라지지 않는 사실입니다.”
어설픈 중국어로 중얼거리는 독일 병사에게 나는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다시 한 번 어깨를 두드려줄 뿐이었다.
중국에서 온 사람들은 외교단만이 아니었다.
특사단을 제외하고도 150명 규모의 독일군 포로와 함께였다.
그들은 대전쟁 개전 직후 벌어진 칭다오 공략전에서 중국에 항복한 병사들.
그동안 쭉 억류되어 왔다가, 시범적으로 1차 인원이 이번에 고향으로 송환되는 것이었다.
전쟁의 공포에서 막 해방된 프랑스인들이 독일인들에 대해 지닌 적개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빈약한 내 프랑스어 실력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욕지거리가 시내를 지나는 내내 들려왔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욕에서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다. 내뱉는 억양과 표정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프랑스어가 그리 빠르고 어조가 높은지 처음 알았다.
사사건건 날아오는 주먹감자는 덤이었다.
철도를 타고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좀 상황이 나아지려나 했으나.
뭐, 똑같았다. 주먹감자 파티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달려드는 언론의 수가 몇 배는 불어났다는 점.
베이징에서든, 예루살렘에서든 겪을 만큼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웬걸. 차원이 달랐다.
“이번 파리 방문 목적이 억류한 독일군들을 집단으로 단두대에 올리기 위함이라던데, 맞습니까?”
“영국의 타운센드 장군과 약속을 잡았는데, 장소를 착각하여 런던이 아닌 파리에 도착했다는 것이 사실인지요.”
“예루살렘에 동양식 황제를 옹립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확인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이 많으면 뭐 하나.
죄다 헛소리들뿐인데.
환영받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파리의 언론들은 무지와 증오를 넘나드는 질문들을 던져왔다.
오리엔탈리즘까지 갈 것도 없었다.
그냥 대놓고 악의적이었다.
나는 중동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협상국의 사령관이었으나.
그들이 보기에는 미개하고 더러운 한 명의 중국인일 뿐이었다.
겨우 들어온 파리의 호텔 방에서 시시우는.
“달팽이나 처먹는 새끼들이 무슨 남의 나라 식문화에 지랄이야, 지랄은. 강아지가 귀엽긴 하지만, 까짓거 먹을 수도 있지. 우씨.”
라며 점점 늘어나는 욕 실력을 뽐냈으나.
나는 중국도 달팽이를 먹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언론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놈들은 하이에나다.
중국 외교단을 물어뜯는 것은 먹잇감을 찾는 일련의 행위일 뿐.
다른 먹잇감이 나타나면, 그깟 찌라시들은 금방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번 파리 강화회의는 소문난 잔치이니, 고기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다.
***
첫 출근날.
나는 시시우를 비롯한 경제 부문의 인사들을 내버려 두고 소수의 인원만을 대동한 채 호텔을 나섰다.
2차 대전을 막는다 어쩐다 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은 해야 하니까.
철 지난 일본의 음모를 분쇄하고.
만주를 비롯한 중국의 이권을 지켜내어 정의를 바로 세워야지.
나를 일본 킬러라 불러 다오.
파리의 외무부 건물은 비무장 인간 바리케이드로 꽁꽁 봉쇄되어 있었다.
기자들이야 어디에나 있는 거지만.
온갖 나라에서 날아온, 온갖 단체의 회원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외교 대사를 찾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 놈만, 아니 한 국가만 걸려라인데.
결국, 이러저러하니 자기네 민족을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그 과정은 마치 사이비 종교 전도과정과 흡사했다.
예컨대, 저기 보이는 것처럼.
“눈이 맑으십니다. 말씀 한마디 들어주시겠습니까?”
“바빠서요.”
“긴 이야기 아닙니다. 민족의 독립 열망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커서, 이미 이와 같은 대규모 만세 운동을 진행한 이력이 있고···.”
“아아, 바쁘다니까.”
“그럼 서명이라도···.”
그리스 외교 대사는 손을 내저으며 휑하고 사라졌다.
서명을 부탁하던 남자는 서글픈 눈으로 대사가 사라진 방향을 쫓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실시간으로 커지는 것이 보였다.
와다다다.
남자가 내게 달려왔다.
“호, 혹시 평화회담에 새로 오셨다는 중국의 한신 장군님입니까?”
나는 입을 한 번 풀고 말했다.
한국어를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맞습니다.”
“헉! 우리나라 말을 하시는군요! 조선 출신이시라는 소문이 정말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인천 분입니다. 선원이셨고, 이민을 가신 거지요.”
“이런 머나먼 타지에서, 동포를 만나다니···. 그것도 중국이란 커다란 나라에서 장군을 하고 계시는 대단하신 분을···.”
멋대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남자의 이름은 김규식.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이번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대표다.
연이은 실정으로 국체는 일본의 손에 떨어졌으나.
조선은 그리 쉽게 거꾸러지는 나라가 아니었으니.
일본이 아무리 총칼로 짓밟더라도 김규식과 같은 독립열사가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쭉 지켜보니, 알리고 싶은 얘기가 있으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지난 3월 1일 일어난 만세운동은···.”
당연하지만 다 아는 얘기.
하지만 성의있게 경청하며, 동시에 전략을 수립했다.
내게는 파리 강화회의가 거대한 던전처럼 느껴졌다.
온갖 함정과 마물들이 우글거리는 마귀 소굴.
그러나 그 위험도만큼 곳곳에는 아이템과 보상들이 숨겨져 있으니.
파리 강화회의장에 나타난 대한민국의 외교단은 내게 커다란 자산이 될 수 있었다.
오늘 쓰러뜨려야 할 던전의 1차 보스는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에 가해지는 부당한 식민 지배는, 일본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다.
“···그래서 각 나라의 대표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서명을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서명입니다.”
한참 만에 김규식이 이야기를 마쳤다.
나는 서명판을 내려다보았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명단.
외교 대사의 이름은 없고, 무슨 기자나, 하급 장교, 기업인 등의 이름만 가득하다.
예를 들면, 로렌스 따위의 서명 말이다. 이 친구가 무슨 힘이 있겠냐고.
“이런 서명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 어떤···?”
“강화회의에 정식으로 한국의 독립을 안건으로 올리는 겁니다.”
김규식이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것이 바로 독립 안건 청원이었습니다. 그걸 위해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도 만남을 가졌었지요.”
“어떻게 됐습니까?”
“만남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노라 말했었지요. 하지만···. 이후, 저희는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윌슨이 배신한 겁니까?”
“···그렇게 믿고 싶진 않습니다. 사정이 있었겠지요. 물론 다시 만남을 요청하여도 회신은 없었고, 저희는 회담장 입장을 거부당하였습니다. 정식 국가로 인정받은 대표단만이 들어갈 수 있다더군요.”
윌슨의 고결함이야 누가 모르겠냐만.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제가 도와드리지요.”
김규식은 언뜻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한국의 독립 청원.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다만, 청원을 위해 몇 가지 도와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돕지요, 뭐든 돕지요!”
김규식은 또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