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03
102화 행운일까, 불행일까?
범한은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행운을 얻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경도에 온 뒤 복잡한 상황에 휩쓸리게 되자 짜증이 나고 피곤했다.
책방은 장사가 괜찮았기에 《석두기》 뒤 내용을 인쇄해 팔기 시작한다면 더 많은 수입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범한은 나중에 자신이 황실의 금고를 받으면 책방 운영은 경여당과 범사철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조정의 일은 사남 백작과 진평평 원장이 보호해 주고 있으므로 범한은 정치 문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눈에 띄지 않는 위험은 오죽이 해결해 주었지만 드러난 위험을 그러지 못하는 게 걱정되었다. 외양간 거리에서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도 오죽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나서지 않았었다. 그러니 범한도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창문 밖 흙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경도 주변에만 열세 채의 별궁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 피서 장원에 오신 걸까요? 피서 장원은 경도에서 멀고 조용해서 우리가 이곳을 먼저 선택한 것인데.”
마차 안에는 범한과 왕계년 단둘만 타고 있었기에 그가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왕계년도 수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황태자를 피서 장원으로 보내 갈등을 조장하려 했어도 황태자가 피서 장소를 고르고 준비하는 절차가 복잡하므로 실행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황태자 측근이라면 피서 장소를 고를 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나는 경도에서 망나니라고 소문이 났으니 황태자와 만나게만 한다면 갈등이 생길 거라 생각했겠지요. 다만 황태자가 나를 적대시하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이 점은 나도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저도 황실의 규율을 알지는 못하지만, 황태자가 피서 가는 일은 오랜 시간 준비가 필요했을 겁니다. 만약 황태자가 며칠 전에 피서 장소를 정해 두었다면 오늘 일은 우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계년이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내가 마차에 오르기 전에 군주에게 물어보니 황태자가 경도에서 28리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나갈 때는 준비하는 데 대략 하루 정도면 충분하다는 대답을 들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만난 시간을 계산해 보면 황태자는 오늘 아침에 궁을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왕계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런 일을 꾸며서 얻는 게 뭐가 있습니까?”
범한이 웃었다.
“생각해 보면 얻는 거야 많습니다. 만약 황태자가 나를 적대시해 창피를 준다면 백작가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확실해질 테니까요.”
“그럼 2 황자가 꾸민 일이란 말입니까?”
왕계년은 은근슬쩍 떠보았다.
2 황자의 여러 번의 부름에도 그를 만나지 않은 범한은 2 황자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단정을 짓지 않고 가볍게 말했다.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황궁 안에서의 일은 나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왕계년에게 마차에 내려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게 했다. 그는 왕계년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누군가가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다면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미행하는 사람이 없다면 황태자와의 만남은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니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뜻이었다.
범한은 마차에 기대앉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왕계년의 말처럼 자신이 예민하게 행동한 것이기를 바랐다.
경도 심정 도로에 위치한 작은 집은 왕계년이 은전 120냥에 사들인 것이었다. 중간에 여러 사람을 거쳐 샀기 때문에 아무도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구석에 묶여 있는 두 남자를 바라봤다.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머금고 있는 두 남자는 냄새 나는 걸레를 입에 물고 있어 말할 수도, 혀를 깨물고 자결할 수도 없었다.
“어디서 잡은 건가요?”
범한은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왕계년 뒤에 있던 4부 요원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성에서 7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왕 대인이 이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잡은 뒤로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부인하고 있고, 대인께서도 이들을 미행하면서 동궁과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편에 발각된 사실을 몰래 알린 것 같습니다.”
범한은 자신의 의심으로 음모를 파헤칠 실마리를 찾게 되자 놀라웠다. 이건 그가 영리하다기보다는 상대가 너무 멍청하게 행동한 결과였다. 그는 자신이 허락한다면 왕계년이 어떤 방법이든 사용해서 자백을 받아 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 밑에 있는 사람인지 심문해 봤나요?”
왕계년이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기에 대인께서 직접 심문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계년의 주도면밀함에 감탄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두 남자를 바라봤다. 두 남자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지만 고문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감찰원 사람일 가능성도 없었고 황궁의 사람일 리도 없었다.
2 황자의 개인 세력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멀리 음산 근처에 있는 1 황자의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 순간 범한의 머릿속에 누가 자신의 적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경솔하게 적을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사남 백작의 말이 떠올랐다.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도 어쩌겠어? 가령 2 황자가 한 짓이라 하더라도 황족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잖아.’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 일은 따지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심문하지 않는 편이 낫겠군요.”
그가 미간을 만지며 고민하더니 이어 말했다.
“그냥 죽이세요.”
“네, 알겠습니다.”
모두 감찰원 요원들이었기에 범한의 잔인한 명령에도 놀라지 않았다. 요원 두 명이 담담히 걸어가서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고 가슴 부위를 찌르자 푹! 하는 소리가 두 번 집 안에 퍼졌다. 두 남자는 발을 몇 번 구르더니 눈을 까뒤집고 죽었다.
“장례를 치러 주십시오.”
범한의 담담한 표정에는 슬픔이 묻어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요원들이 대답했다.
집을 나온 두 사람은 미행당하지 않기 위해 경도의 작은 골목길을 한동안 배회하다 대로로 나왔다. 범한이 조용히 뒤따르고 있는 왕계년에게 말했다.
“북제와 동이성 사절단이 언제 도착한다고 그랬죠? 이에 대한 보고가 감찰원에서 있었을 거 아닙니까.”
왕계년이 대답했다.
“사절단이 국경에 들어온 뒤로 4부에서 접대를 맡은 관아들과 협력하기 시작했으니 아마도 다음 달 초에는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들인지 조사해 보도록 하세요. 그리고…….”
그가 잠시 망설였다.
“만약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북제에 있는 감찰원 밀정을 동원해 북제 사절단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봤으면 합니다.”
왕계년은 이전에 범한과 황태자의 대화를 들었기에 범한이 접대 부사 관직을 맡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언약해의 아들 언빙운이 북제에서 4년 동안 밀정으로 잠복해 상당한 성과를 올렸으니 이 일에 적격이라 생각됩니다.”
“이 일은 되도록 적은 사람만 알아야 합니다. 북제에서 눈치채 언 대인의 아들이 위험에 빠지는 건 싫으니까.”
왕계년이 웃으며 설명했다.
“대인은 제사시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한 권한이 있으십니다.”
범한도 웃었다.
“이처럼 중요한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잖아요.”
왕계년은 범한의 온화한 미소를 보니 방금 집 안에서 사람을 죽인 일이 떠올라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나은 데도 왜 미행자를 찾아내라 하셨습니까? 배후를 알아내지 못한 채 미행자들만 죽였으니 애초에 필요 없던 게 아닙니까.”
범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비록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낫지만 두 사람은 반드시 찾아내서 죽여야 했어요.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으니까. 두 사람의 죽음으로 다시는 나를 시험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 셈이죠. 외양간 거리에서 고수를 보내 공격하고, 창산 부근에서 임공을 사고검에게 죽게 한 걸 보면 그들이 나를 우습게 보고 있는 게 아닙니까?”
범한이 빙빙 돌려 말했기에 왕계년은 의미를 파악하기가 다소 어려웠지만 대략적인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범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사람이 죽는 모습을 처음 봤을 거라 걱정하지는 마세요.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모르잖아요.”
* * *
천하는 태평하기만 했다. 이름 없는 두 남자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 일이 이미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짐작했다. 요 며칠 동안 그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일상을 보냈다. 태상사에 가서 얼굴을 비치고, 책방에서 돈을 수금하고, 두부 가게 일을 살피며, 재상가에서 미래의 장인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밤에 별궁에 잠입해 연애도 했다.
이날 밤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들려던 그의 눈에 아무 데나 던져 놓은 검은색 가죽 상자가 들어왔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했지만 열쇠의 행방을 몰랐기에 오랫동안 내버려 두고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가 만일 진평평이 이 상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분명 상자의 가치를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쓰레기처럼 방에 내던져 두지 않고 침대 아래 구멍을 판 뒤 철판으로 덮어 철저하게 감췄을 것이었다.
‘열쇠는 어디 있는 거지?’
그의 마음속 질문에 신이 대답이라도 한 것인지 쓸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쇠는 황궁 안에 있습니다.”
이어서 검은색 몽둥이가 소리 없이 날아와 범한의 등을 매섭게 때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그가 바닥에 쓰러져 기침하자 눈앞에 먼지가 일었다.
“반격하지 못하시는군요.”
오죽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범한이 속수무책으로 맞는 모습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아저씨?”
범한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 상황에 익숙했기에 일어나 몸 안의 정기를 운용해 등의 통증을 가라앉혔다. 그가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아서 죽은 건 아닌가 걱정했어요.”
그 말에 오죽은 진저리를 치며 반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걱정하지 않으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범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종사급 실력을 가진 괴짜 자객 오죽이 어디서 무얼 하든 무사할 거란 믿음이 있었기에 걱정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보고 싶기도 하고 근황이 궁금하기도 했다.
‘설마 며칠 동안 줄곧 내 곁을 지켰는데도 몰랐던 건가.’
오죽이 계속 말했다.
“열쇠는 황궁 안에 있습니다.”
오죽이 두 차례 반복해서 알려 주자 범한은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듯 화들짝 놀랐다.
“그동안 열쇠를 찾고 계셨던 거군요.”
“이건 아가씨의 유품입니다. 당시 진평평 원장의 말을 듣고 열쇠를 경도에 두고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오죽의 말투는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며칠간 황궁에서 열쇠를 찾아본 결과 세 곳 중 한 곳에 보관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위험해요!”
놀란 범한이 애써 소리를 낮춰 화를 냈다. 오죽은 비록 종사급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황궁 안은 위험했다. 황궁을 지키는 시위들이 모두 고수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개 대인의 말에 따르면 4대 종사 중 가장 베일에 싸인 인물이 황궁 안에 매복해 있었다. 그러니 황궁 안에서 그 신비한 종사에게 발각되어 맞붙게 된다면 아무리 신통한 무예를 할 줄 아는 오죽이라도 살아서 나올 수 없었다.
범한의 걱정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오죽은 계속 담담하게 말했다.
“열쇠를 찾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오죽이 오늘 온 이유를 생각했다. 오죽은 항상 어둠 속에 숨어서 아무 말 없이 일을 처리했다. 그래서 그는 오죽이 평생 자신은 만나지 않고 어둠 속에서 자신을 보호만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오죽이 오늘 밤 열쇠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일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오죽 아저씨 혼자서도 하기 힘든 일을 내가 도운다고 할 수 있을까.’
범한은 고민하다 침착하게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제가 말한 세 곳은 황궁 안에서도 들어가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오죽은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했다. 범한이 세 곳이 어디냐고 묻자 오죽이 다시 대답했다.
“흥경궁, 함광전, 광신궁입니다.”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죽이 말한 세 곳은 황궁 안에서도 경비가 삼엄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황제와 황태후, 장 공주가 거처하는 곳으로 황궁 안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장소다.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