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06
105화 고성만 오고 간 협상
한가롭게 경도 안에서 사절단을 기다리는 시민들과 다르게 범한은 협상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감찰원 보고서를 젊은 서생의 어수룩한 판단처럼 말투를 바꿔서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홍려사 관리들이 자신의 말을 감찰원이나 다른 정보기관에서 나온 것이라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범한을 도와 정신없이 해서체로 글을 옮겨 적던 범약약이 궁금한 듯 물었다.
“오라버니, 이건 어디서 얻은 정보예요? 왜 직접 사용하지 않고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거죠?”
범한은 자신의 누이에게만큼은 숨기는 게 없었기에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저 왕계년의 힘을 빌려서 일을 쉽게 처리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극비 보고서가 올 줄 누가 알았겠니. 이 보고서는 출처를 밝힐 수 없기 때문에 홍려사에 그대로 낼 수가 없어.”
“이번 북제 사신으로는 누가 왔는데요?”
범약약은 자신의 오라버니가 당당하게 조정의 일에 참여하는 게 좋았다. 어려서부터 범한에게 교육을 받았음에도 경국에서 성장한 그녀는 남자라면 모름지기 두부 장사보다는 나랏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제파도 태후파도, 태자파도 아니야.”
범한이 탁자 위 보고서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북제 황후의 남동생인 장영후도 인재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번 북제 사절단에서 가장 눈여겨볼 인물은 그가 아니라 그의 스승이자 북제 문단 대가인 장묵한이야. 천하에 책 읽는 사람들은 모두 공경하는 인물이지. 북제가 얼마만큼의 대가를 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 사신단에 합류했어. 그가 온 이상 폐하께서도 그의 체면을 봐서 막무가내로 요구하지는 못하실 거야.”
“장묵한이 왔다고요?”
놀란 범약약이 마치 연예인 얘기를 들은 양 설렌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에게 보이던 표정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자 범한은 왠지 질투심이 났다.
“다행히 보고서에 장묵한의 나이가 이미 일흔이 넘었다고 나와 있어서 이번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올 거란 걱정은 안 하고 있어.”
범약약은 쑥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 많은 분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죠.”
범한이 하하 웃었다.
“노인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러다 범약약이 발끈하자 손을 저었다.
“지난 농가에서 네가 했던 말, 잊은 거야?”
별이 드문드문 보이던 그날 밤 논두렁에서 혼사를 이야기하던 범약약은 주위 인재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그때를 생각하던 범한이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에 강변에서 폐하를 우연히 만났을 때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이요?”
범약약은 기억이 안 나는 듯 인상을 쓰며 물었다. 둘 다 당시 너무 놀랐기에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하던 범한은 눈을 번쩍 뜨고는 탁자를 치며 말했다.
“폐하께서 너한테 좋은 혼처가 나올 거라고 말씀하셨잖아!”
“뭐요?”
범약약은 화들짝 놀랐다.
관리 집안 자제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 바로 혼사였다. 운이 좋으면 범한과 임완아처럼 서로 원하는 사람과 이어질 수 있었지만, 운이 나쁘면 태상사 임 소경처럼 사나운 군주를 만나 기죽은 채 불쌍히 살아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황실에서 정해 주는 혼사였다. 황제의 뜻을 거역할 수 없기에 정해 주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따라야 했다.
예전에는 관리 집안에서 딸을 황궁에 보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일이 있었지만 지금 황제는 여색을 밝히지 않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이에 황태자와 성년이 된 두 황자들도 함부로 첩을 많이 들이지 않았다. 비록 황태자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경도에 파다했지만 아내는 셋뿐이었다.
범약약도 폐하가 무심결에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눈물을 머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범한이 재빨리 머리를 굴려 가능성이 있는 가문을 생각하고는 말했다.
“비록 아버님의 관직이 시랑이지만 백작가의 지위를 보면 폐하께서 1 황자, 2 황자, 정왕 세자 중에 선택하실 가능성이 있어. 만일 다른 대신의 아들을 정하더라도 걱정하지 마. 네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혼사를 막아 줄 테니까.”
만약 혼인할 사람이 대신의 아들이고, 누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범한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어쨌든 자신의 뒤에는 아버지와 진평평 원장 그리고 재상 대인이 서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동궁의 황태자도 자신과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그러니 두 황자와 정왕 세자가 아니라면 범한은 누이가 원하지 않는 혼사를 무산시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1 황자와 2 황자 그리고 정왕 세자 중에 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컸다. 잠시 생각하던 범한은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홍성이 매일 기생집에 들락거리면서 혼인하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군!”
의기소침해하는 누이를 본 범한이 위로하며 말했다.
“서쪽 오랑캐 서만과 싸우는 1 황자는 영민하고 용맹한 사람이라고 들었어. 2 황자는 비록 만난 적은 없지만 대단한 사람이라고 들었고. 정왕 세자 이홍성은 모두 잘 알다시피 여색을 밝히는 것 빼면 나쁜 점은 없으니까. 만약 이홍성과 혼인을 하게 되면 내가 기생집은 말할 것도 없고 첩실에도 못 들어가게 만들 테니 걱정하지 마.”
범한이 위로하려 한 말에 더욱 좌절한 범약약은 울먹였다.
“나는 세 사람 다 싫어요.”
범한이 한숨을 쉬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쁠 것도 없어. 미래를 생각하면 누구에게 시집을 가도 좋아. 만일 2 황자가 미래에 황위에 오른다면 너는 황후가 될 수도 있잖아. 그렇지 않니?”
범한의 말에 범약약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서재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범약약이 심란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과 다르게 범한은 의욕을 불태우며 모든 경우를 대비해 방법을 준비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작은 협상 장소에는 북제 사신과 경국 관리 사이에 커다랗고 긴 탁자도 놓여 있지 않았다. 한담을 나누는 것처럼 양측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협상을 진행했다. 눈에 띄지 않는 가장자리에 앉아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범한은 다과회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명목상 접대 부사였지만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아 계속 아랫자리에 앉아 있었다.
본심을 숨긴 채 온화한 말투로 이어지던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감정의 골이 깊을 대로 깊어진 양국의 대신들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고, 몇 명 성격 급한 대신들은 의자 위에서 궁둥이가 들썩들썩하기 시작했다.
“흥! 전쟁에서 북제가 이겼소, 아니면 우리가 이겼소?”
홍려사 6품 주부가 상대방의 말에 화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무슨 소립니까! 천하의 만백성을 아끼시는 우리 폐하께서 무고한 살상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전쟁을 중단한 것 아닙니까! 승부가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이겼다는 겁니까!”
당당하게 반박하는 북제 사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뻔뻔해서 줄곧 침착하게 있던 범한도 앞으로 나가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홍려사 소경 신기물이 보였다. 범한은 경국이 20년 동안 승리하면서 축적된 배짱으로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계속 듣고만 있던 신기물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돌아가십시오. 두 나라가 다시 전쟁해서 승부를 가린 뒤 협상을 진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신기물의 말은 적나라한 위협이자 북제 사신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과연 신기물의 말에 북제 사신들은 발끈하며 경국 관리가 함부로 말을 해 두 나라 사이의 우호를 모두 없애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신기물이 차갑게 되받아쳤다.
“두 나라 사이에 우호랄 게 있습니까?”
홍려사 소경이 대놓고 상대국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며 범한은 혀를 찼다. 경국이 강대국이 아니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협상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양쪽에서 얼굴을 붉히며 감정싸움을 하자 곧이어 인자한 얼굴의 주부가 일어나 말했다.
“모두 자신의 직책을 잊지 마십시오. 이렇게 흥분하는 건 폐하의 뜻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양측이 씩씩대며 나가는 것으로 협상은 끝났다. 고위 관리들이 서로 만났으니 탁자에서 머리를 맞대고 하는 진짜 협상은 하급 관리들의 몫이었다.
협상이 교착 국면에 빠진 이상 당분간은 진행될 수 없었다. 게다가 북제 사신단에 있는 장묵한은 꿍꿍이를 벌이는 것인지 궁에 들어가 황태후와 한차례 대화를 나눈 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이틀 뒤 홍려사 안.
“포로를 교환하는 일을 첫 번째로 해야 하오.”
신기물은 양국이 협상할 때 보였던 무모한 모습과 다르게 신중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포로로 잡힌 장군과 병사들을 데리고 오라 명하셨으니 다른 작은 일들은 우리가 좀 물러서더라도 이 일은 반드시 추진해야 하오.”
하급 관리가 그러겠다 대답한 뒤 말했다.
“우리가 잡은 북제 포로들과 제압한 소국의 인원수가 대략 계산이 끝났습니다. 전부 합해서 2,400명 정도 되는데 포로로 잡힌 경국 병사들은 대략 1천 명 정도니 폐하의 뜻대로 교환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신기물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영토를 나누는 문제에 대해서는 폐하의 뜻이 아주 명확하오. 이번에 장악한 토지를 조금도 양보해 줘서는 안 되며, 만약 북제에서 토지를 되돌려 받길 원한다면 잠용만의 초원과 바꾸라 말씀하셨소.”
경국 서북쪽에 있는 잠용만은 유일하게 경국의 영토이면서 북제에 예속되어 있는 비지와 서로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만약 잠용만 지역 토지를 받는다면 비지 지역도 지킬 수 있었다.
상사인 신기물의 말을 기록하던 하급 관리 중 하나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북제에서 토지 부분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습니다. 은전과 말로 교환할 수는 있어도 토지는 절대 줄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 말에 저번 양국 협상에서 일어나 소리쳤던 주부가 이번에도 탁자를 치며 화를 냈다.
“그 토지들은 우리가 이미 점령하고 있는데 그럼 그냥 순순히 내놓으란 말입니까!”
신기물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소 대인이 말은 직설적으로 했지만 일리가 있소.”
그러고는 손에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점령하고 있는 토지는 모두 병사들이 싸워서 얻은 거라는 걸 잊지 마시오. 병사들이 피와 살로 얻어 낸 만큼 우리도 쉽게 돌려줘서는 안 되오. 병사들이 생명을 바쳐 싸우는 것에 비교하면 우리는 단지 입으로만 싸우지 않소? 그러니 우리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측과 있는 힘을 다해 싸워야 하오.”
그러자 말을 꺼냈던 하급 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의 말씀은 타당하나, 북제 수도에서 머무르고 있는 사신이 보낸 보고에 따르면 이번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북제 황태후와 황제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합니다. 황태후의 남동생이 이미 패배한 책임으로 돌아간 마당에 우리가 너무 많은 요구를 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된다면, 이것 역시 폐하의 뜻과 맞지 않습니다. 모두가 알고 계시겠지만 만약 북제가 이 일을 계기로 한마음으로 뭉쳐 대항한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입니다.”
“북제의 수도는 너무 멀리 있어서 그곳에서 보내온 정보는 믿을 게 못 되오.”
신기물은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찌푸렸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측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비록 승자로서 유리한 상황에 있기는 하지만 북제 사신단보다 정보에서는 뒤처져 있다. 북제는 이미 경국 수도에 머무르며 이번 협상에 대한 조정의 의도를 알아낸 반면, 경국은 북제의 의도를 알아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누군가가 나섰다.
“폐하께 감찰원 4처와 협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면 안 됩니까? 북제에 잠복해 있는 4처 요원의 정보가 다른 관아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지 않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경도 관리들은 모두 감찰원의 세력과 실력을 무서워했지만 그래도 그 힘을 이용한다면 쉽게 협상을 끝낼 수 있을 터.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말이 나오자마자 신기물이 버럭 화를 냈다.
“나와 사경 대인도 감찰원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안 했을 것 같소? 하지만 감찰원에서 자료를 주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지금 나보고 폐하의 침소 앞에서 울며 사정이라도 하란 말입니까?”
사정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흥경궁 앞에서 울며 사정해서라도 북제의 정보를 알아낸다면 좋은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