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07
106화 노련하고 악랄한 신 소경
순간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기 전 경국 사람들은 항상 강대한 북위의 위세에 짓눌려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후 북위는 세 차례의 북벌로 영토 절반을 잃고 현재의 북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경국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 북위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경국 관리와 백성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북제와 부딪치는 걸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북제의 의도를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번 협상은 교착 국면에 빠질 수 있었다.
“내가 오늘 밤에 다시 궁에 들어가 폐하께 청해 보겠소.”
인상을 구기며 마지못해 말하는 신기물의 눈에 가장 뒷자리에 앉아 있는 범한이 보였다. 범한은 자신이 부사라는 걸 모르는지 협상 과정에 나서지 않았다. 그저 무슨 생각이 있는 듯 뒷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은은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신기물이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범한 대인은 협상을 어떻게 해야 한다 생각합니까?”
신기물의 말에 범한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했다.
“소신은 북제가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에게 정말 싸울 힘과 의지가 있다면 이렇게 급히 사절단을 파견해 강화를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관리들은 범한이 글을 잘 쓰고 무공도 뛰어난 데다가 며칠 동안 자신들과 성과를 가지고 다투려 하지도 않았기에 은근히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있는 견해를 이야기하자 상당히 실망스러웠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호응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양국은 진심을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요. 국가는 사람처럼 어떤 때는 감정에 휘둘리기 때문에 이치로만 예측하기가 힘듭니다. 범 부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신기물은 마음속으로 범한이 홍려사 관리들에게 협상에 대한 믿음을 주기를 바랐다.
범한은 속으로 신기물의 ‘국가는 사람과 같다’는 말에 감탄하며 말했다.
“장묵한이 사절단으로 온 것이 핵심이지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그는 천하 서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만약 북제가 강화를 맺을 생각이 없었다면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장묵한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홍려사 관리들은 모두 과거 시험을 봐서 들어온 사람들이기에 장묵한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협상 방향을 잡기에는 부족했다.
신기물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장문한이 온 이유를 알면 협상하는 데 도움이 될 텐데.”
감찰원 보고서에는 장묵한이 사절단으로 온 이유를 세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북제 황태후와 황제가 간곡하게 요청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스스로 성인이라 자처하며 양국의 싸움을 화해시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알아내지 못한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범한은 비록 장묵한이 ‘성인’이라 자처하는 태도가 꼴 보기 싫었지만 상대방의 명성을 얕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 관리들 앞에서 이러한 이유를 말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만난다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소 주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양국의 외교 관례상 장묵한 같은 인물은 일반적으로 궁에서 개최하는 연회에만 얼굴을 비칩니다. 그러니 홍려사에서 만나자고 요청해도 그가 응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창피를 자초하는 꼴이지요.”
그러더니 소 주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지만 범 부사가 시를 잘 쓰기로 유명하니 그것을 핑계로 만남을 요청하면 장묵한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뜻밖의 말에 범한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시 세 편밖에 안 쓴 나를 만나 주려 할까.’
다행히 신기물이 고개를 저으며 범한을 대신해 설명했다.
“장묵한은 거만해서 범 부사가 만남을 요청해도 응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봤을 때 북제가 그를 사절단에 넣은 것은 그의 명성을 빌려 폐하를 설득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범한은 주변을 둘러본 뒤 신기물을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과 누이가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정리’한 문서를 건네주었다.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문서를 받아 든 신기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범한이 건네준 문서에는 상당히 황당한 내용도 있었지만 그래도 북제의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홍려사가 자신감을 갖고 협상을 해도 되겠어. 근데…… 왜 이걸 아까 말하지 않고 나에게 몰래 주는 겁니까?”
의심하는 신기물을 향해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그저 소신의 의견일 뿐이라서 터무니없는 예측도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어 소경 대인께만 참고하시라 드리는 것입니다.”
범한의 말에 감격한 신기물은 복도에 서서 자세히 문서를 읽어 봤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범 공자, 이 안에 담긴 내용은 조정에서도 알지 못하는 기밀입니다.”
범한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상대에게 진심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행히 이미 10여 년 동안 마음 수양을 해왔기에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으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신기물은 더는 추궁하지 않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협상에 성공하면 내가 폐하께 범 공자의 공을 치하해 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인사한 뒤 떠났다.
범한이 떠나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기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황태자의 측근인 그는 사남 백작 범건이 황제의 신임을 두텁게 받는다는 건 알았지만 그 힘을 드러내 사용한 걸 본 적은 없었다.
‘설마 사남 백작이 범 공자를 도와준 것인가.’
그는 범한이 감찰원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감찰원은 황제 밑에 있는 특수 기관으로 황자들도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니 대신의 서자가 감찰원의 도움을 받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마에 앉은 신기물은 턱을 괴고 고민했다. 가마가 멈추자 그는 높은 붉은색 담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황태자에게 범한은 공격하기보다는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했던 자신의 말이 정확했다고 생각했다.
동궁은 의견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신기물과 대치하는 쪽에서는 사남 백작과 정왕의 관계가 두텁고 현재 재상가와도 혼인을 맺고 있으니 정왕 세자와 2 황자가 반역을 꾀한다면 재상 대인은 동궁을 멀리할 것이고 백작가는 2 황자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기물은 이 의견에 반대했는데 이유는 범건이 정왕과 재상의 의견에 따라 움직일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깊은 궁 안에 들어간 신기물은 서재 문 앞에서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는 바짝 엎드렸다. 다행히 관복이 가려 줘서 추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어나게.”
황제의 목소리가 장막 안에서 들렸다.
신기물은 일어나 양손을 몸에 바짝 붙인 채 미동도 없어 섰다. 서재에 몇 번이고 왔지만 풍기는 압박감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늦여름의 더위 탓인지 긴장한 탓인지 관자놀이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닦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장막 안에서 종이를 뒤적거리며 읽은 소리가 들리더니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일리 있는 내용이야. 북쪽 상황이 좋지 않다니 다행이군. 자네가 짐을 대신해 수고를 해주게.”
신기물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폐하!”
“그런데 자네가 범 시랑의 아들을 부사로 임명했나?”
황제가 이전과는 다른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가 범한에게 관심을 가질 줄 몰랐던 신기물이 땀을 흘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신기물의 대답에 황제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군. 범한은 짐이 태상사에서 협률랑으로 일하라 명한 사람인데 왜 홍려사로 데려간 건가?”
비록 황제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신기물은 너무 긴장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감히 황제를 속일 수는 없으므로 사실대로 대답했다.
“며칠 전 폐하의 명을 받들어 동궁에 강의를 하러 갔는데 황태자 저하께서 북제의 사신이 오는 일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범한이 이 일과 관련이 있고, 경도에서 인재로 유명한 데다가 북제 사신으로 장묵한이 오니 접대하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황태자 저하의 의견을 받들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장막 뒤에 황제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정 대신들이 파벌을 형성하는 게 무섭지는 않았지만 정황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 이 일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네. 짐이 이 일의 전권을 자네에게 맡겼으니 설사 황태자가 개입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신기물은 황제가 직접 동궁을 보좌하라고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황태자와의 관계를 황제에게 숨길 필요도 없었다.
황제가 다시 보고서를 들춰 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범한은 거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신기물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지금 보고 계시는 보고서는 사실 범 부사가 힘들게 분석해서 작성한 것입니다.”
“힘들게 분석했다고?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하는군!”
대답을 들은 황제가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쳤다. 신기물은 황제가 왜 화를 내는지 몰라 당황하면서도 이번 협상 때문에 화를 내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서재를 나가자 황제가 굳은 얼굴로 장막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옆에 있는 태감에게 말했다.
“진평평에게 입궁하라고 전해.”
태감이 명령을 받고 나가자 경국의 주인이자 천하의 권력을 손에 쥔 중년 남자가 서재를 나갔다. 황궁 복도에 서서 은은한 달빛을 바라보던 그가 미소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나라의 가장 큰 권력 기관이 홍려사를 도울 생각은 안 하고 어린아이 출셋길이나 닦아 줄 생각을 하다니. 진평평, 자네는 정말 감찰원을 그 아이에게 넘길 생각인가 보군.”
황제는 범한의 보고서가 감찰원에서 작성된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즐거워 보였다. 신기물이 범한을 황태자 쪽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사실 황제의 생각과 일치했다. 황제는 마침내 황태자가 이제 조금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긴 것 같아 기뻤다.
* * *
한편 동궁에서는 격렬한 쟁론이 오가고 있었다. 쟁론을 벌이는 양측은 홍려사 소경 신기물과 황궁 편찬 곽보곤이었다. 그리고 쟁론의 내용은 자연히 8품 말직에 있는 범한에 대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신기물이 곽보곤을 멸시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모름지기 신하라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저는 폐하의 뜻에 따라 예전부터 황태자 저하를 보좌해 왔습니다. 황태자 저하께서 영원불멸의 대업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좋은 인재를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협률랑 범한은 경도에서 손꼽히는 인재고, 또 최근 옆에서 관찰해 보니 확실히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백작가는 줄곧 황실을 보좌해 온 명문가입니다. 그러니 그를 같은 편으로 영입해야지 절대 적으로 등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곽보곤이 냉소를 지었다.
“설마 소경 대인께서는 제가 폭행당한 사실을 잊으신 겁니까? 저는 절대 못 잊습니다. 더구나 백작가는 정왕부와 돈독한 사이고, 그 범한이란 사람은 곧 재상 대인의 사위가 되지 않습니까. 재상 대인의 최근 행동을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신기물이 목을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경국에는 단 한 분의 폐하와 단 한 분의 황태자 저하만 계신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분파를 가르려 하는 생각만큼 멍청한 것도 없지요!”
신기물은 원리원칙만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최근 2 황자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동궁이 2 황자와 대적해서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황태자가 몸가짐에 유념하면서 두루 포용할 수 있다면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