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08
107화 자신을 지키는 방법
높은 곳에 앉은 황태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여색을 좋아하고 성격이 유약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본다면 신 소경의 견해가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정치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자신이 조심한다고 해서 줄곧 황위 자리를 탐내고 있는 두 형이 가만히 있으란 법은 없었다.
황태자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일국의 황태자인 나도 나라의 인재를 영입하고 싶은 뜻이 있네. 그리고 형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말게.”
“범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곽보곤이 고집을 꺾지 않고 묻자 신기물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 일에 대해 곽 대인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말하는 건가?”
황태자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신기물이 곽보곤을 흘겨보며 말했다.
“곽 대인을 포함한 많은 관리들이 정왕부가 가깝다는 이유로 백작가가 2 황자의 편에 섰다고 말하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만약 백작가가 곽 대인의 말처럼 2 황자 편에 섰다면 범한은 이번에 동궁에서 준 관직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범한이 곧 재상의 사위가 돼서 황태자 저하께 충성할 수 없다는 곽 대인의 판단은 황당한 억측일 뿐이지요.”
신기물의 말에 곽보곤이 눈을 부릅떴다.
“억측이라고요? 조정에서나 밖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재상이 장 공주와 결별하고 동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는 게 분명한데 억측이라니요!”
“일국의 재상이 황실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흥분해 말하던 신기물은 자신의 말이 지나쳤음을 깨닫고는 황태자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황태자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해 보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신기물은 다시 입을 열었다.
“곽 대인의 말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모두 재상 대인과 장 공주가 결별한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게 동궁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것이 재상 대인의 충성심이 변했다거나 황태자 저하에게 등을 돌렸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재상 대인 때문에 고모께서 매우 화가 나셨는걸.”
“저하, 외람되지만 장 공주의 입장만 보고 재상 대인의 충심이 변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기물이 당당하게 말하자 황태자가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려다 멈추자 곽보곤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재상 대인의 충심이 변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이전처럼 조회 뒤 동궁을 찾지 않으시는 겁니까?”
신기물이 자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소신도 그 점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먼 미래에 힘을 겨루게 된다면 총명한 신하는 저하의 편에 서서 자기 집안을 보존하려 할 것입니다. 재상 대인 역시 지금은 저하와 2 황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저하의 뜻을 따라 우리 편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재상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라도 범한을 편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재상 대인에게 가문을 이끌 아들이 없는 상황이니 범한이 재상가의 미래도 짊어진 셈입니다. 그러니 만약 범한이 저하의 편에 선다면 재상 대인도 따라올 것입니다.”
“정왕 세자와 범한의 관계가 어떤지나 잊지 마시오.”
곽보곤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신기물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얼마 전에 일을 꾸민 자들이 누구의 부하였는지나 잊지 마십시오. 그쪽에서 교묘한 수를 써서 범한과 저하를 만나게 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저하께서 범한을 모욕하게 한 다음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한 속셈이었지만, 다행히 저하께서 영리하게 행동하시어 그쪽에서 원하는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황태자가 기분이 좋은지 웃자 신기물은 계속 말했다.
“백작가가 그쪽 편에 섰다면 왜 그런 짓을 벌였겠습니까. 저는 백작작가 이 일의 감춰진 배후를 언젠가는 밝혀낼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만약 진상이 밝혀진다면 범한도 그쪽에 환멸을 느낄 것이니 지금 백작가의 태도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지요.”
황태자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이 아직 배후를 모르고 있으니 내가 은근슬쩍 알려 줘도 괜찮겠군.”
“범한을 얻는 것은 경국에서 가장 큰 세력인 백작가와 재상가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문관과 귀족 중 최소 절반이 두 가문 출신입니다. 더구나 몇 년이 지난 뒤 황실 금고를 범한이 관리하게 된다면…….”
신기물이 목소리를 낮춰 황태자에게 속삭였다.
“결코 시 몇 편 지은 8품 말직 관리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황태자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동안 마음속으로 상황을 계산했다. 이윽고 그가 탁자를 치며 말했다.
“범한에게 기회를 줄 것이니 그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소.”
동궁의 계획이 정해지자 곽보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신기물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자신이 영리하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황후와 장 공주가 과거 범한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동궁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한 힘과 범한의 지키는 힘이 이미 담주와 외양간 거리 그리고 창산에서 충돌했었다는 걸 그들은 몰랐다.
물론 그들은 몇 년 뒤 상황이 놀랍고 불가사의하게 변할 거라는 것도 예측하지 못했다. 황궁의 어둠은 다른 곳보다 더욱 짙었기에 모든 진상과 과거를 가려 버렸고, 멀리 있지 않은 미래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 * *
감찰원의 정보가 만들어 낸 자신감은 이후 협상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북제는 경국 사람들이 인내심을 드러낼 때까지 협상을 끌었다. 하지만 북제의 예상과 다르게 홍려사 소경 신기물은 기세등등한 태도로 이틀간 열린 협상에서 북제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세 번의 협상을 통해 포로 교환과 공납과 같은 문제들이 전부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제후국 사이 영토를 다시 나누는 일이었다.
범한은 접대 부사이기에 줄곧 초연한 태도로 과정을 지켜보며 신기물의 학식과 패기 그리고 협상에서의 언변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황태자 주위에서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는 곽보곤과 같은 사람들과는 달랐다. 한편 신기물은 시간이 있을 때 범한과 교류하며 그를 관찰했다. 그는 범한이 나이가 어림에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감찰원의 도움을 받은 보고서를 신기물에게 준 뒤로 범한은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적은 공적만 인정을 받더라도 지금 생황에 만족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책방 운영은 경여당 일곱째 섭 대행수가 관리하고 있었고 범사철이 항상 가서 회계를 점검했기에 범한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한편 두 달 뒤 있을 혼인 준비로 재상가와 백작가 부인들은 바빴다. 더구나 유씨 부인은 범한이 가짜 부마가 되는 일을 반기면서 새어머니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범한이 황제의 수양딸과 결혼한다면 집안의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누구보다도 혼사에 기뻐했다.
하지만 임완아의 어머니이자 황궁 안 노처녀인 장 공주가 자주 찾아와 이러쿵저러쿵 불평하며 사남 백작 범건의 체면을 깎으려 했다. 궁전 예절에 대해 전혀 모르는 범한은 매번 꽁무니를 빼기 바빴기에 임완아와 범한을 돕는 범약약은 매일 밤 머리를 싸안고 고민해야 했다.
2 황자는 정왕 세자를 두 차례 보내 만남을 요청했다. 하지만 범한은 지난번 피서 때 황태자를 우연히 만난 일이 신경 쓰여 만남을 월말로 미루고 그때까지 진상이 밝혀지기를 바랐다. 어쨌든 백작가에 대한 동궁의 태도가 조금은 변한 건 사실이었지만 2 황자의 요청을 계속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협상에 전념해야 한다는 핑계로 만남을 미룰 수 있어 다행이었다.
최근 유일하게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북제 사신 장묵한과 동이성 사신인 사고검의 수제자였다. 두 사람은 각각 문예와 무공에서 최정상에 있는 인물임에도 경도 안에서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게 행동했다. 장묵한은 황태후의 요청을 받아 황궁에서 학술 강연을 했고, 사고검의 수제자 운지란은 줄곧 사절단 안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두 사람 중 범한은 운지란을 가장 경계했다. 어쨌든 문장가로 명성이 자자한 장묵한은 자신과 부딪칠 일이 없었지만 운지란은 자신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원수였다. 하지만 경도에 있는 이상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범한이 지금 가장 골몰하고 있는 것은 사실 열쇠를 찾는 일이었다.
어두운 밤 범한은 검은색 가죽 상자를 바라봤다. 열쇠 구멍이 있는 황동에는 비개 선생이 준 비수로 열려고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지만 열쇠가 없는 이상 알 수는 없었다.
범한은 황궁에 있는 홍 태감과 연락을 시도하던 중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비록 현재 자신은 경도에서 돈을 쓸어 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천하 최고봉에 있는 사람들과는 아주 많은 격차가 있다는 것이었다. 황태자와 2 황자가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이유는 자신의 뒤에 있는 재상가와 백작가 때문이지 본인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명성에 기대 황궁에 들어가 홍 태감을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임완아도 아무 때나 황궁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홍사상을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오죽의 말대로 황궁 밖에서 두 시간 동안 잡아 두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2 황자의 부탁을 받고 정왕 세자 이홍성이 범한을 찾아왔을 때 그가 은근슬쩍 황궁에 있는 홍 태감을 만나게 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홍성을 고개를 저으면서 홍 태감은 황태후 궁에만 머무르고 절대 황궁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방법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범한이 상자를 침대 아래로 밀어 넣고는 벽 구석에서 자고 있는 듯한 오죽에게 말했다.
“홍 태감을 나오게 할 방법이 없어요.”
오죽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럼 제가 그의 시선을 붙잡아 둘 수 있으니 도련님께서 황궁에 들어가 열쇠를 찾으십시오.”
오죽의 말에 범한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 6등급이 채 되지 않은 내가 황궁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잖아.’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하던 범한은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죽은 항상 자신에게 3품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정거수를 죽인 걸 보면 자신의 능력을 오죽이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을 오죽에게 직접 할 수는 없었다.
“왜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열쇠를 찾아야 하는 거죠? 호기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 게 너무 무모해 보여요.”
한동안 고민하던 범한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질문을 토해 냈다.
“도련님은 아가씨가 뭘 남겼는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알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님도 제가 즐겁고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라실 거예요. 자신이 남긴 물건 때문에 아들이 위험을 자초하는 건 바라지 않으실 거라고요.”
침대에 앉은 범한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오죽도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가린 검은 천과 주변의 어둠이 어우러지면서 범한은 왠지 모르게 한기가 느껴졌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시는군요.”
오죽의 말에 범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도에 온 뒤, 더욱이 여름 동안 귀족 자제로서 권력과 부를 누리며 안락한 삶을 즐기게 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자발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고 계십니다. 지금 도련님의 삶은 진평평 원장과 범건 대인이 계획한 것입니다.”
오죽이 계속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범한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알면서도 여전히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두 분을 믿지 말라는 말인가요?”
오죽이 더욱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삶은 너무 힘들잖아요.”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는 어쩌실 겁니까?”
오죽이 범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을 공격해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오죽은 범한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듯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보호하려면 더러운 음모나 강력한 권력이 아닌 이 점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범한이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하인이자 스승인 오죽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아가씨께서 상자 안에 뭘 남기셨는지 모르지만, 도련님이 자신이 지키기 위해서는 적들이 두려워할 만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알았어요. 찾을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오죽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10여 년 동안 비 오는 밤 오죽이 어머니를 회상했을 때 빼고는 그와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범한은 오죽의 뜻을 이해했다. 경도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어렸을 때부터 길렀던 경계심이 많이 느슨해진 건 사실이었다. 오죽은 범한에게 집안의 권력이나 어머니가 남긴 혜택에 의지해 나약해 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동안 범한은 비록 몸 안에 난폭한 정기를 수련하고 독침 쏘는 기술을 연마했지만, 오죽의 말대로 마음은 담주에 있을 때처럼 강인하지 못했다.
자신을 보호하려면 스스로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없는 아이는 뿌리가 연약한 새싹과 같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힘으로 돌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와 뿌리를 깊이 박고 줄기를 단단하게 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108화
동쪽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면에 붙어 있던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더니 아직 깨어나지 못한 구름 위로 올라가 경도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을 밝게 비추었다. 황궁의 붉은 외벽은 마치 광장에 있는 사람들을 무섭게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범한은 광장에 서서 높이 솟은 황궁 벽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입구를 바라봤다. 입구는 괴수의 입처럼 깊고 어두워서 보기만 해도 긴장되었다.
범한은 이 세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장엄한 건축물을 보면서 경외감이 들었다. 하지만 경외감이 순종이나 굴복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세계 사람들과는 달랐다. 황궁 입구에 있던 호위병이 모두를 검사한 뒤에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범한은 일행들과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범한이 황궁에 찾아온 이유는 8품 협률랑은 궁에 입궁하라는 교지가 어제 갑작스럽게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백작가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 입궁할 사람을 정했다. 범건은 갈 수가 없었고 백작가는 가족도 적었기에 경도에 있는 먼 친척들이 자진해서 나서 주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범한과 유씨 부인, 범약약 그리고 늙은 여종 두 명이 같이 입궁하기로 했다. 두 여종은 담주 노부인과 함께 지내 온 사람들로 황실 규율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범한은 유씨 부인이 자신과 같이 궁에 들어가는 게 의외였지만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황족들과 교류한 그녀가 옆에 있어 준다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굴처럼 생긴 입구에 들어가니 요란하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입구의 길이가 상당히 길어서 햇볕이 절반만 비추고 있었기에 안으로 들어갈수록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눈앞이 어두워졌다. 팔구월의 날씨가 겨울처럼 서늘하게 느껴졌다.
슬쩍 자신의 허리에 손을 올린 범한은 콩보다 작은 크기의 환약들이 만져지자 속으로 안심했다. 입궁할 때 엄격한 몸수색을 거치므로 범한은 저택에서 나서기 전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석궁과 비수를 방 안에 숨겨 두었다. 하지만 오죽이 며칠 전에 했던 경고가 머릿속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황궁에 들어가더라도 자신을 보호할 방법은 준비해 둬야 했다.
조용히 걸어가면서 여섯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차 같아졌다. 앞에 인솔하는 젊은 내관의 걸음에 따라 동시에 땅을 내디디고 떼면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이에 범한은 자신의 발걸음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소리가 일치하지 않자 불안함에 누이의 소매를 당겨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긴장되는 것 같아.”
범약약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격려했다. 그러자 젊은 내관이 고개를 돌리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범한을 노려봤다. 그때 유씨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황궁은 다른 곳과는 다르니 언행을 조심해야 해.”
우거지상을 하던 젊은 내관이 유씨 부인의 말을 들었는지 순간 당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범한이 쓴웃음을 짓자 유씨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긴장할 거 없어. 나도 어렸을 때 와봤는데 그때가…… 홍 내관이 태감으로 임명될 때였을 거야. 벌써 오래전이네.”
유씨 부인의 말에 범한 일행을 시골뜨기라 생각하며 무시하던 젊은 내관이 슬며시 펴고 있던 허리를 구부리고는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처럼 생긴 입구를 나오자 확 트인 광장이 나타났다. 갑갑하고 어두운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이자 마음마저 시원해졌다. 청색 돌이 깔린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햇살을 반사하며 웅장한 기세를 내뿜는 황금색 기와였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둥근 기둥과 건물 앞 하얀 돌계단도 정갈하면서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눈을 찌푸리며 앞의 건물을 보던 범한은 순간 이전 세계에서 입장료를 내고 황궁을 관람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런 황당한 생각 때문에 범한은 궁전이 가져다주는 괴리감과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었다. 평소와 같은 침착함을 되찾은 그는 처음 백작가 본가에 왔을 때처럼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지나다니는 궁녀와 내관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관찰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어느 궁에 머무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신의 아들답지 않게 유유자적한 범한의 모습에 젊은 내관이 고개를 저었다. 한편 유씨 부인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범한이 무서워하는 게 없는 대담한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오늘 황궁에서 그를 부른 이유는 혼인을 앞두고 황후와 후궁들에게 인사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간단한 이유였지만 과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래서 백작가 사람들은 새벽녘에 일어나 씻고 꾸민 뒤 서둘러 입궁해서는 구석에 있는 방에서 황실 사람이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 부르는 사람이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오늘 만날 사람들은 기다리는 걸 반기지 않았다.
너무 일찍 일어난 터라 범한은 황궁의 고급 차를 연신 마셔도 좀처럼 잠이 깨질 않았다. 유씨 부인이 그런 범한을 보고는 미소 지으며 일어나더니 황궁 안에서 그들의 접대를 맡은 내관에게 말했다.
“후 내관, 오랜만에 보네요.”
그러더니 우아한 손짓으로 은근슬쩍 은전을 건네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범한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유씨 부인은 범건의 지도 덕분에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후 내관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백작가 부인, 제 체면을 깎으시려는 겁니까? 부인께서 궁 안 분들과 함께 자란 것을 아는데 어찌 제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내관의 말에 유씨 부인이 웃었다.
“이건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거예요. 제가 후 내관을 제 편으로 끌어들일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누가 두려워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후 내관이 얼굴에 주름을 지으며 씩 웃었다.
“백작가 부인께서 입궁하셨는데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너무 일러 아직 몸단장을 끝내지 못하셔서 그런 것이니 잠시 앉아 계시면 될 겁니다.”
그때 범한이 귀를 쫑긋 세우며 생각했다. 늙은 내관이 유씨 부인을 백작가 부인이라 말하는 걸 보니 황궁 안에서는 유씨 부인을 본부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황궁에 들어와 정원에 물을 뿌리고 손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너무 일찍 왔다고 생각하던 차에 내관의 말을 들으니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후 내관의 말대로 세 사람은 후궁에 들어섰고 같이 온 늙은 여종들은 바깥에서 접대를 맡았다.
맨 처음 간 곳은 의 귀빈의 거처였다. 그녀는 3 황자의 생모로 아들은 낳은 덕분에 재인에서 귀빈으로 지위가 승격됐다. 범한이 규범에 따라 공손히 인사하자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게.”
아름답고 화려한 사람일 거라 상상한 것과 다르게 의 귀빈은 상당히 수수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의외인 점은 유씨 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의 귀빈에게 인사하자 두 사람이 다정히 손을 잡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범한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범약약을 바라봤다.
얼마 뒤 오가는 대화를 통해 범한은 비로소 의 귀빈이 유씨 부인의 사촌 동생인 걸 알아챘다. 범한은 속으로 놀라며 유씨 부인 집안의 세력이 상당히 크다는 걸 깨달았다. 경도에 온 뒤로 유씨 부인과 사이를 좁혀서 가까워지길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충돌했다면 누가 이겼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왜 그동안 나를 보러 오지 않았어요.”
의 귀빈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유씨 부인을 바라보며 원망 섞인 물음을 내뱉었다.
“내가 궁에서 외롭게 지내는 걸 알면서 어떻게 지난 4년 동안 한 번도 오지 않을 수 있어요. 몇 번이나 대화를 나누자고 요청해도 응하지 않아서 얼마나 슬펐는지 알아요?”
유씨 부인은 한동안 침울한 표정으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제 잘못입니다.”
그 말에 유씨 부인의 가녀린 어깨를 바라보던 범한의 눈빛이 번뜩였다. 지난 4년 동안이란 말에 자연스럽게 담주에서의 암살 사건이 떠오른 것이다. 사남 백작의 말에 따르면 그 암살 사건에서 유씨 부인은 방패막이일 뿐이고 진짜 범인은 황궁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 때문에 유씨 부인은 4년 동안 궁에 들어오지 못했다.
“앞으로는 자주 뵈러 오겠습니다.”
유씨 부인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귀빈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러자 의 귀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 황궁에서 가장 귀염받는 아이와 혼인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오지도 않으셨겠죠.”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가 범한인가?”
범한이 재빨리 일어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소신 범한, 이모님을 뵙니다.”
그 말에 궁녀와 내관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씨 부인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생모도 아닌데 이모라니…….’
다행히 황실 규범을 싫어하는 의 귀빈은 뻔뻔스럽게 자신을 이모라 칭하는 범한이 마음에 드는지 빙그레 웃었다.
“소문대로 대단한 아이군요.”
범한은 황실 규범에 맞지 않는 말에 대단한 아이라는 칭찬을 받자 속으로 황궁 안에서만 지내는 후궁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비록 유씨 부인과 의 귀빈이 친척 관계인 것은 몰랐지만 임완아의 말을 통해서 의 귀빈이 현재 황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후궁이란 건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황제가 여자를 멀리함에도 황자를 낳을 수 있었다.
담소를 나누면서 의 귀빈은 범한이 갈수록 좋아졌다. 범한은 의 귀빈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자 용기를 내서 이전 세계에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했고, 곧이어 안에서는 은구슬 같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 귀빈의 성격은 황궁에서 사는 사람답지 않게 명랑하고 밝았다. 범한은 의 귀빈이 음침한 황궁 안에서 밝은 성격을 잃지 않은 게 놀라웠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해는 이미 떠올라 있었다. 유씨 부인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3 황자는 잘 지내시나요?”
그러자 의 귀빈이 한숨을 쉬었다.
“낯가림이 심해서 일어난 뒤에도 후전에 머물면서 나오려 하지 않네요. 식사할 때나 나올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유씨 부인이 웃었다.
“저희도 3 황자 보기 쑥스러워요.”
유씨 부인과 의 귀빈은 자매와 같은 사이였기에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유씨 부인의 말에 의 귀빈이 가늘고 긴 집게손가락을 뻗어 범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백작가 아들은 낯가림이 없잖아요.”
그러자 범한이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언니와 약약이는 여기서 나와 담소를 나누어요. 성아에게 범 공자를 안내하라고 할 테니.”
의 귀빈은 유씨 부인이 황후와 장 공주가 있는 곳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듯 말했다. 유씨 부인은 어두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황실 분들을 모두 만나 뵙기 위해 입궁한 것인 만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만 머무르다 간다면 다른 분들이 기분 나빠 하실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의 귀빈이 콧방귀를 뀌었다.
“제가 봤을 때 언니는 가지 않는 게 좋아요. 원래 범한을 인사시키려고 부른 것이니까 언니는 여기서 나와 있어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명랑한 성격인 의 귀빈이 뜻밖에 고집을 부렸다. 그녀가 엄격한 표정으로 말하자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눈을 굴리며 분위기를 살피던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저 혼자 가도 괜찮으니 새……어머님께서는 이모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세요.”
범한까지 그렇게 말하자 유씨 부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아라는 궁녀에게 몇 가지 당부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범한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모깃소리로 말했다.
“황궁 사람들에게 뇌물을 줬으니 어디를 가든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범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범약약을 바라봤다. 격려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범한은 따뜻한 감정을 느끼면서 말했다.
“장모가 사위를 보겠다는 건 원래부터 좋은 일이니까 걱정하지 마.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범한이 떠나자 유씨 부인은 범약약에게 몇 가지 주의를 시키고는 의 귀빈과 내실로 들어갔다. 의 귀빈이 가만히 유씨 부인의 두 눈을 바라봤다.
“4년 전에 제가 두 분의 말을 듣지 말라고 했잖아요. 범한은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도리어 언니만 범건 대인의 미움을 받게 되었잖아요. 머리도 좋으면서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한 거예요?”
유씨 부인이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다 원망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귀빈도 어미가 된 여자의 마음을 알지 않습니까. 제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3 황자가 아직 어려 모르시겠지만 몇 년이 지나면 제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109화
성아는 대략 열네 살 정도로 눈매가 아름다운 여자아이였다. 성아가 계속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가자 범한이 놀리며 말했다.
“앞에 길이 잘 안 보이는 거야?”
성아가 옥수수처럼 작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황궁 안에서는 불필요한 말은 말을 삼가야 합니다.”
범한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황실 규범이 삼엄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린 여자아이까지 융통성 없이 규범을 따질 줄은 몰랐다.
성아를 뒤따라가던 범한은 궁녀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허리를 훑어보다 고개를 돌려 황궁의 건축물을 바라봤다. 그는 나중을 대비해 최대한 건물과 주변 길을 외워 둘 생각이었다. 황궁은 비록 넓고 건물도 많았지만 모든 건물이 휘황찬란하지는 않았다.
정갈한 정원이 있는 건물에 들어서자 범한은 한숨을 쉬며 궁녀 성아의 뒤를 따라갔다. 이곳은 2 황자의 생모인 숙 귀비의 거처였다. 숙 귀비는 조용하고 소박한 걸 좋아하는지 집 안은 정갈하고 깨끗했고, 나무와 화초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대나무 발로 가려진 안에서 은은하게 책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귀비를 뵙니다.”
“범 공자, 앉게.”
숙 귀비의 말에 범한이 발을 사이에 두고 앞에 앉자 그녀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되는 범 공자께서는 어려서부터 담주에서 자랐으니 경도가 낯설지 않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범한이 대답하는 걸 시작으로 두 사람은 각종 경서와 문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입 안이 마르고 목이 아파질 때까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2 황자의 생모에 황궁의 숨은 재원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범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식견이 너무 넓고 깊어서 범한은 대답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렇게 학식 깊은 부인에게 교육을 받는 황자는 어떤 사람일까?’
“긴장할 것 없네.”
숙 귀비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대나무 발이 가려져 있어 범한은 숙 귀비의 머리에 꽂힌 비녀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런데 그 비녀도 화려한 황궁과는 어울리지 않게 소박했다.
“완아가 황궁에서 자란 건 알고 있겠지? 폐하의 수양딸이 되기 전부터 그 아이는 황궁에서 딸처럼 길러졌어. 그러니까 황궁 사람들 모두가 아끼는 가장 귀한 보물을 가져가는 범 공자는 앞으로 우리를 자주 보게 될 거야.”
그 말에 범한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비록 정혼자인 임완아가 황실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 비로소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하자 긴장되었다. 범한이 떠나려 하자 숙 귀비가 말했다.
“내가 독서를 좋아해 폐하께서 가끔 책을 구해 주시는데, 사람들을 시켜 그중 가장 귀한 책 몇 권을 베끼게 했네. 내가 사람을 시켜 의 귀빈 거처에 가져다 놓게 할 테니 다른 분들을 뵌 뒤 가져가도록 하게.”
범한은 숙 귀비가 2 황자를 대신해 선물을 주려 한다는 걸 알고는 아무 말 없이 인사한 뒤 빠져나왔다. 숙 귀비의 거처를 나온 범한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이미 조금 친해진 궁녀 성아가 발끝으로 종종 걸어가다 뒤돌아보고는 물었다.
“더우신가요?”
범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의상 인사를 하러 궁에 왔을 뿐인데도 과거 시험을 볼 때보다 긴장되었다. 그는 숙 귀비가 임완아와 결혼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재능을 시험해 본 것이라 생각했다. 이어서 두 사람은 1 황자의 생모인 영 재인의 거처로 갔다. 영 재인은 지위가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범한은 임완아를 통해서 그녀가 동이성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행동에 특히 신경을 썼다.
영 재인은 나이가 이미 사십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였고, 특히 눈매가 우아한 것이 동이성 여인들의 특징이 보였다. 1 황자가 몇 년간 서만 지역에 머무르고 있어 적적할 때 임완아가 자주 영 재인의 거처를 찾아가 놀았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임완아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범한을 흘겨보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네가 범한이구나.”
범한은 영 재인이 전쟁에서 황제를 구하고 또 1 황자를 용맹한 사람으로 낳아 길렀기 때문에 분명 상당히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 재인의 말에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영 재인이 그를 한참 훑어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신아를 잘 보살피도록 해.”
단도직입적인 영 재인의 말에 범한은 기뻐하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영 재인이 범한의 골격을 살펴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네가 외양간 거리에서 8등급의 고수를 죽였다는 걸 믿지 않아. 몸이 말라비틀어져서는 싸움을 잘할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고수를 쓰러트릴 수 있었겠어.”
범한이 당황해 주위 분위기를 살피며 생각했다.
‘방금 학문 수준을 시험받았는데 이번에는 무공 수준을 시험받는 건가. 설마 내일모레 사십을 바라보시는 분이 나에게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겠지?’
“하지만 섭령아가 네 무공 실력을 인정한 만큼 믿어야겠지. 오늘은 이만 됐으니 시간 끌지 말고 다른 분들에게도 인사하도록 하게.”
영 재인이 말이 끝나자 범한은 급히 인사하고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범한은 뒤통수를 매만지며 굳게 닫힌 나무문을 돌아봤다. 그는 이처럼 ‘다양한 매력’을 가진 후궁을 거느린 황제 폐하야말로 가장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의 귀빈은 순진하면서 명랑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숙 귀비는 지적이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 재인은 호탕하면서도 거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엄청난 학식을 가진 숙 귀비와 거친 성격을 가진 영 재인 그리고 자기 아들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려 하는 황후가 충돌하지 않고 지내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그러니 지난 몇 년 동안 황궁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했던 것을 보면 황제 폐하가 사람을 얼마나 잘 통솔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범한은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다 최소한 자신은 이런 일에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점차 황궁 안을 돌아다니면서 후궁들을 만나 대화하고 하사품을 받는 일이 지루해졌다. 하지만 얼굴에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는 옆에 있는 내관이 누구의 부하인지 몰랐고, 버드나무 가지를 꺾는 어린 궁녀가 누구의 심복인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지루해하는 표정을 비쳤다가 누군가가 그걸 자신이 모시는 후궁에게 알린다면 곧 황제의 귀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비록 황제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비방에 흔들리지 않을 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몇 차례 후궁을 만나면서 긴장감이 풀린 범한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황궁의 풍경을 감상했다. 곧이어 도착한 요화궁은 다른 궁보다 규모가 상당히 커서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짐작하게 했다. 바로 이곳은 경국 황후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범한은 황후와의 만남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황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에게 덕담을 몇 마디 해주었다. 황후는 아름다우면서 귀티가 나는 얼굴에 평온한 두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범한은 황후의 말에 공손히 대답하면서도 모순된 감정이 들었다. 아름다우면서 사람을 편하게 만들 줄 아는 황후는 어쨌든 4년 전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이었다.
엎드려 두 번 머리를 조아린 범한은 빨리 요화궁을 떠나고만 싶었다. 황후와의 면담은 이렇게 간단하게 시작해서 순식간에 끝났다. 범한을 바라보는 황후의 눈빛에서는 이상한 감정이나 불안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감정을 숨기면서 속으로 천하의 어머니인 황후에게 4년 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일은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할 거라 생각했다.
* * *
광신궁 문밖에 이르자 줄곧 따라오던 내관이 뒤에 서서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궁녀 성아가 조용히 말했다.
“범 공자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들어가는 건 예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만일에라도 장 공주가 이걸 빌미로 자신을 모함한다면 어떻게 해명한단 말인가. 하지만 범한은 내관과 궁녀들이 이유 없이 장 공주를 두려워할 뿐이지 무슨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 공주의 본명은 이운예로 황실 금고의 실질적인 관리자이자 재상의 연인이었다. 또 황제의 정치적 지원자였고 후궁 사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자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딸이었다.
그리고 범한의 입장에서 장 공주는 과거 자신을 죽이려 한 원수이자 미래의 장모였다.
광신궁은 한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문밖에서도 안에 심어진 겨울 매화와 여름을 싫어하는 한란 그리고 오래된 대나무와 아직 피지 않은 국화를 볼 수 있었다. 하얀 색깔로 가득한 광신궁은 마치 동화 속 세상처럼 순수하고 맑아 보였다. 범한도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감화되었는지 서늘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봤다.
그때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궁녀가 문 앞으로 나오더니 범한을 향해 인사했다. 궁녀는 속눈썹이 아주 길고 눈빛이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말과 행동은 예의가 있었다. 그녀가 범한을 공손히 안으로 안내했다.
순간 범한의 눈앞에 하얀 천이 보였다. 안은 사방이 하얀 천이었다. 범한은 놀란 표정으로 하얀 천으로 만든 장막을 바라봤다. 광신궁 안에는 예전에 정왕부 후원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많은 천이 걸려 있었다. 사방에 하얀 천이 걸려 있는 광신궁은 황궁의 장엄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결혼하지 않은 어린 소녀가 사는 동화 속 세상 같았다.
겹겹이 이어진 천의 가장 끝부분에는 낮은 침대가 놓여 있었고 연분홍 치마를 입은 여자가 그곳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고상하고 멋진 풍류가 느껴지면서도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가련한 몸매와 수줍은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으로 장 공주를 본 범한은 눈만 휘둥그렇게 뜬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앞에 있는 여자는 그림 속 인물이나 물속에 사는 선녀 같아서 진짜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장 공주는 올해 서른이 되었음에도 모습은 이제 막 열여섯 살이 된 앳된 소녀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남자들이 반할 만한 외모였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범한은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속으로 자신의 장모가 임완아와 닮았을뿐더러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비록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상대방을 장모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장모라는 호칭은 장 공주의 여리고 앳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장 공주는 귀여운 두 눈으로 범한을 슬쩍 보고는 얇은 입술을 벌리며 말했다.
“알아서 의자를 찾아 앉도록 해. 나는 머리가 좀 아파서…….”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며 의자를 찾던 범한은 장 공주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넓은 광신궁 안에는 의자가 하나도 없었다. 범한이 어색하게 주변을 살피는데 장 공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범 공자의 의술이 뛰어나다고 들었어. 자네 덕분에 신아의 몸이 좋아졌다며?”
범한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황궁 어의의 실력과 비교하면 저는 보잘것없습니다.”
“그래? 그럼 그 보잘것없는 실력으로 진찰 좀 해봐. 요새 두통이 너무 심해.”
장 공주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장 공주의 두통은 고질병으로 임완아도 자주 언급했고 피서 장원에 갔을 때 황태자에게도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지금 가장 주의 깊게 생각하는 건 장 공주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장 공주의 말에서 친숙함이 묻어나자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통의 종류가 무척 다양해서 당시 스승님께 배웠을 때 머리가 아주 아팠습니다.”
그가 두통을 소재로 농담을 하자 장 공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범한은 자신과 비개의 관계가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니기에 장 공주에게도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 좋아질 방법이 없을까? 요즘 두통이 심해서 죽을 것 같아.”
장 공주는 정말 두통이 심한지 다른 건 묻지 않고 오로지 두통에 대해서만 물었다. 근심에 찬 눈빛으로 애달피 말하는 모습에 범한이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안마하는 법을 배우기는 했습니다. 비록 두통을 치료할 수는 없지만 증상을 완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장 공주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빨리 해봐.”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거북하게 느끼실까 봐 걱정입니다.”
장 공주가 빙그레 웃었다.
“장안에 명성이 자자한 범 공자가 규범에 전전긍긍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 며칠 뒤면 내 아들이 될 텐데 걱정될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장 공주의 실제 나이를 생각하면 소녀 같은 모습에 거부감이 들어야 마땅했지만 범한은 왠지 장 공주의 보드라운 볼과 앳된 눈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란 말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110화
내관이 가져온 깨끗한 물에 손을 씻은 뒤 곁으로 다가간 범한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최대한 장 공주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흰 목덜미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손가락 사이에 스치는 머리카락이 따뜻하면서도 간지러웠다. 범한은 두 눈을 감고 자신도 오죽처럼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고 상상하며 손가락을 두피에 가져다 대었다. 그는 가볍게 양손의 엄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는 동시에 집게손가락으로 그녀의 미간을 살며시 안마했다.
장 공주는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건지 작게 앓는 소리를 냈지만 아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범한은 침착하게 자신의 경험에 의지해 장 공주의 두피를 안마했다.
“음~.”
장 공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조심성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범한은 정말 실력이 있었다. 마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기운이 나와 두통이 생기는 부분을 만져 주는 것 같았다. 안마할수록 머리가 편안해지고 정신이 맑아져서 졸음이 몰려왔다.
“이것도 비개에게 배운 건가?”
그녀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물었다.
“혈의 위치는 비개 대인에게 배웠지만 안마하는 방법은 혼자 터득한 것입니다.”
범한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끄러운 피부를 안마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이전 세계에서 않아 누웠을 때 처음에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물론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지만 간호사들이 그의 허벅지나 몸을 안마해 줬기에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대단하군.”
범한의 실력에 진심으로 감탄한 장 공주가 천천히 눈을 감고는 안마를 즐겼다. 그때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더니 조용한 광신궁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신아와 혼인하면 4년 전 일은 잊어야 할 거야.”
순간 안마하던 범한의 손가락이 장 공주의 귀 아랫부분에서 멈췄다. 그곳은 보기에는 평범한 곳 같지만 치명적인 혈이 있는 자리였다.
순간적인 일에 불과했다.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안마를 시작했다.
“4년 전이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목소리로 범한이 묻자 장 공주가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입술이 마치 속으로 범한의 능청스러움에 감탄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그녀가 화제를 바꿔 물었다.
“비개 밑에서 언제부터 배운 거지?”
범한은 장 공주가 은근슬쩍 정보를 캐내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였습니다.”
범한의 모호한 대답에 장 공주는 더는 자세히 묻지 않고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개가 네 스승인 걸 몰랐다면 나를 포함해서 황실 사람 누구도 너희 백작가와 감찰원이 긴밀한 사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거야.”
범한이 더욱 부드럽고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버님과 비개 대인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알지. 과거 첫 북벌 때 너희 부친과 비개가 황제 오라버니를 따라 같은 진영에 있었으니까 모르는 게 이상한 거지.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이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네. 그렇습니다.”
범한은 말을 많이 할수록 불리하다고 생각했기에 대답만 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 공주가 계속 물었다.
“네 할머니 건강은 어떠시니?”
“아주 건강하십니다.”
“그래, 못 본 지도 오래되었어.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사람인데. 오라버니가 나를 괴롭힐 때마다 네 할머니가 보호해 줬거든.”
장 공주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말하자 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한 걸 할머님이 아셨다면 진작 몽둥이로 때려 죽이셨을걸.’
“범건 대인이 폐하의 뜻을 정확히 말해 줬겠지.”
갑자기 화제가 진지한 쪽으로 향하자 온화하던 장 공주의 목소리에 차가움이 묻어났다.
장 공주가 황실의 금고 일을 언급하자 범한은 더는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공주께 맡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최근에 경도에서 서점과 두부 가게를 열었다고 들었어. 하는 것 없이 놀기만 하는 자제들과 다르게 그런 일을 벌이는 건 나중에 황실 금고를 넘겨받기 위해 준비를 해두기 위함이겠지. 나도 잘하는 일이라 생각해. 다만 두부 가게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마땅히 대답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범한은 헤헤 웃었다.
“나는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온화하던 분위기가 장 공주의 서늘한 말에 북쪽의 추운 겨울날처럼 얼어붙었다. 광신궁이 순간 침묵에 휩싸였고 사방에 걸려 있는 하얀 천들도 순간 무기력하게 축 늘어졌다.
범한은 온화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오른손을 살짝 뒤로 빼서 바늘을 꺼내기 좋게 만들었다.
감찰원은 이미 오백안과 장 공주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장 공주는 이미 두 번이나 범한을 죽이려 했던 만큼 살기가 가득한 광신궁 안에서 세 번째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물론 범한이 입궁한 사실은 경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만큼 미치지 않고서야 황궁 안에서 자신을 죽이려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광신궁에 들어와 장 공주의 앳된 모습과 말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꼭 미친 여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범한이 장 공주를 안마한 것은 그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고 또 임완아와 혼인을 앞두고 미래의 장모를 위해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분과 성별 구분이 엄격한 이곳에서 만일 장 공주가 자신을 희롱했다고 모함한다면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범한은 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어린아이와 여자 그리고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이라면 두려워서 하지 못할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자신의 앞에 있는 장 공주를 바라보며 그녀가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같이 유치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하지 못할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장 공주는 분명 무서운 사람이었다.
바로 그때 궁녀 몇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옅은 붉은색 궁녀복을 입은 그녀들은 넓은 허리끈을 차고 있었다. 담주에서 오랜 시간 암살 훈련을 받은 범한은 한눈에 그 안에 예리한 검이 숨겨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부드럽게 장 공주의 귀 아랫부분을 안마하며 물었다.
“왜 제가 죽기를 바라십니까?”
“내가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잖아.”
장 공주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마치 범한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범한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가락에 시선을 집중한 듯 보였지만 사실 두 눈을 여전히 감고 있는 상태였다.
조용한 광신궁 안에서 살금살금 발소리가 들리더니 궁녀들이 장 공주 옆에 섰다. 범한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범 공자께서는 손을 닦으시지요.”
궁녀들이 따뜻한 물과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눈을 뜬 범한은 장 공주에게 인사한 뒤 궁녀들에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하고는 살짝 저리는 두 손을 따뜻한 물에 담갔다. 이후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공주께서는 좀 나아지셨는지요?”
그 말에 장 공주가 여린 표정을 지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장 공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많이 좋아졌어.”
장 공주가 일어나 앉아 어깨 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신아와 혼인할 사람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솔직히 범 공자가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하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차라리 말을 삼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좀 피곤하니 이만 가보도록 해. 그리고 유씨에게 오늘 나를 보러 오지 않아 실망했다고 전해.”
장 공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범한이 광신궁을 나가자 장 공주의 심복인 궁녀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공주님, 어쩔까요? 죽일까요?”
“하도 심심해서 그냥 놀래려고 한 말이야.”
장 공주가 고양이처럼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그런데 상당히 의외였어. 어린애가 어른처럼 참을 줄도 알고 속마음을 숨길 줄도 알다니…….”
장 공주는 애초부터 오늘 범한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의 허점도 드러내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범한이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였다면 그녀는 정말 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겹겹이 걸려 있는 하얀 천을 바라보던 장 공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반격하지 않고 머리만 살짝 기울인 이유는 뭐지? 정말 궁금하네. 범한이란 아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까? 정말 아까워.’
무엇이 아까운 것일까? 혹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인 걸까?
* * *
범한은 독약을 가지고 놀며 자랐기 때문에 장 공주가 평생 보기 드문 매서운 독약같이 느껴졌다. 지금의 그로서는 그녀에게 대적할 힘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광신궁에서 나온 범한은 졸고 있는 궁녀 성아를 깨웠다.
“돌아가자.”
그러고는 곧장 의 귀빈의 궁으로 돌아갔다.
궁녀 성아가 바라보니 범한의 등이 땀에 젖어 담청색 옷이 짙은 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황궁을 나온 뒤 광장에 세워 둔 마차에 오른 범한은 안색이 약간 창백했다. 그는 허리끈 안에 숨긴 환약을 만지며 자신이 겁에 질린 쥐 같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자신을 죽이고 싶어도 광신궁에서 죽일 리는 없었다.
“괜찮아요?”
범약약이 걱정되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광신궁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는 범약약으로서는 그저 오라버니가 여러 사람을 만나서 피곤해한다고만 생각했다.
범약약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범한은 유씨 부인에게 후궁들이 남긴 인사말을 전하고는 마부에게 빨리 백작가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유씨 부인과 범약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차가 백작가 근처 골목길에 들어서자 범한은 유씨 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범약약의 작은 손을 덥석 잡고 후원을 내달려 서재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달리기에 범약약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범약약의 질문에 범한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지시했다.
“내가 말하는 걸 기록해.”
그러고는 먹을 갈지도 않은 채 거위 깃털 붓을 집어 벼루에 조금 남아 있는 먹물에 찍고는 누이에게 건네주었다. 범약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붓을 건네받자 그는 두 눈을 감고 황궁 안 복잡한 길과 건물들을 떠올렸다.
범한의 설명에 따라 서둘러 그리던 범약약의 얼굴이 갈수록 창백해졌다. 기억을 짜내는 데 정력을 소모하는 범한의 얼굴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애를 썼지만 황궁의 지도는 갈수록 뒤죽박죽이 되었다. 범약약이 결국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이건 모반이야. 엄청난 중죄라고요.”
범한은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앉아 한동안 침묵했다. 반나절 동안 황궁에서 후궁들을 만나 대화하고 복잡한 길을 외우느라 정력을 소모한 데다가 마지막에 장 공주와 긴장된 대화를 주고받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범한도 경국의 법률을 잘 알기에 황궁의 지도를 만드는 게 금지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누군가 황궁에 침입해 대역무도한 짓을 벌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범한은 깊은 밤 몰래 황궁에 들어가 열쇠를 찾아야 했기에 지도가 필요했다.
임완아를 통해서 황궁의 길을 알아낼 수도 있었지만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황궁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범한이 심혈을 기울여 계획한 길은 완전히 달랐다. 오죽도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오늘처럼 직접 가서 보지 않는다면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나 사람의 시선을 피하는 장소 등을 담은 만족스러운 지도를 만들 수 없었다.
111화
범한이 일어나 누이가 그린 지도를 바라봤다. 급히 그려 난잡하기는 하나 자신이 설명한 그대로였다. 범한은 만족스러운 듯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은 이미 정해졌어. 여기에 대해서는 모른 척해.”
그 말에 범약약은 발끈하며 지도를 빼앗았다.
“일이 정해졌다고요? 무슨 일이 정해졌는데요? 이게 엄청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절대 모른 척할 수 없어요. 아버님께 가서 다 말할 거예요.”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누이의 머릿속에는 황제의 권력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도 누이가 자신의 안전과 집안의 미래를 걱정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몰래 황궁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백작가와 황실의 관계는 틀어질 게 분명했다.
“걱정하지 마. 지도를 모두 외우면 태울 거니까 아무도 모를 거야.”
범한이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러자 범약약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오라버니,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예요?”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허리를 굽혀 누이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궁 안에 내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거든.”
“황궁 안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겠다는…… 거예요?”
놀란 범약약이 큰 소리로 말하다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는지 살피며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맞아. 하지만 원래 내 것을 가져오는 거니까 훔치는 건 아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범약약은 침착하게 이유를 고민해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오라버니의 생모인 섭 부인과 관련된 일인가요?”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거짓말할 수는 없지.”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서로에 대한 견실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범한이 계속 말했다.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네 오라버니가 어떤 사람이니? 일곱 살 어린아이와 주먹질을 하고 칠순 노인을 발로 차며 공동묘지에서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이잖아. 이런 나를 누가 건드리겠어?”
범한이 장난치며 농담을 하자 범약약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범한은 겉으로는 밝고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속은 차갑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범약약은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집 안에서 아무 일 없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이의 얼굴에 깃든 수심을 본 범한이 자책하며 말했다.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야. 매번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는 너에게 사실을 알려 주잖아. 겉으로는 믿기 때문에 알려 주는 척했지만 사실은 부담을 나눌 사람이 필요해서였어. 하지만 돌이켜 보니 너를 괴롭히는 일이었던 것 같아. 나야 너에게 털어놓고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가 없잖아. 내 어머님이 섭가의 주인이라는 거나 내가 황궁에 잠입해 물건을 훔칠 거라는 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어?”
범약약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다 말했다.
“믿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오라버니가 나에게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좋아요.”
* * *
여전히 진행되는 협상에서 국경을 다시 구분하는 일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범한이 준 분석 보고서를 기반으로 협상을 책임진 홍려사 관리들은 강경한 태도로 북제를 압박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북제 사신들은 노골적으로 협상을 미루었다. 마치 어떤 소식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경험이 풍부한 홍려사 소경 신기물은 북제 사신들에게 꿍꿍이가 있음을 단박에 눈치챘다. 이날 오후 조금의 진전도 없이 협상이 끝나자 신기물은 작은 찻주전자를 들고 범한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다른 관리들을 피해 가까스로 조용한 장소를 찾은 뒤 신기물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번 협상에서 범한은 줄곧 지켜만 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역시 북제 사신들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협상에 유리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협상을 미룰 리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도 북제 사신들은 협상에 유리한 상황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신기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 입궁해 폐하께 감찰원 4처가 홍려사의 일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할 생각입니다. 북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도통 알 수가 없느니 불안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난간에 기대 북제가 뭘 하려는 건지 곰곰이 생각하던 범한의 머릿속에 불현듯 감찰원이 북제에 설치한 첩보망과 언빙운 공자가 떠올랐다.
범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신기물이 다시 말했다.
“오늘 밤에 궁에 들어가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혹시 아는 게 있으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신기물은 지난번 보고서가 사남 백작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사실 사남 백작이 황제를 도와 어떤 힘을 휘두르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속으로 최소한 언빙운의 안전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근거지로 사용하는 작은 집에서 왕계년을 만난 범한은 자신과 신기물이 걱정하는 바를 털어놓던 중 그의 얼굴에서 불길한 징조를 감지했다.
“소식이 안 온 지 이미 8일이 넘었습니다.”
왕계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인의 직급에서 이런 정보를 얻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단지 언 공자에게 안전에 주의하라는 말을 전해 달라는 것뿐이에요.”
왕계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단선 연락이라 끊기면 다시 연락을 잇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언 공자는 북제 밀정의 총책임자인 만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차라리 연락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어쨌든 그에게 몸조심하라는 말을 전해 주십시오.”
범한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욱이 언빙운은 고관대작의 자식임에도 4년 동안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 이미 자신을 경국의 한 일원이자 감찰원 조직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범한은 만난 적도 없는 언빙운을 진심으로 공경했다.
언빙운에 대한 지시가 마무리되자 범한은 다시 말했다.
“제가 감찰원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인께서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요.”
갑작스러운 말에 왕계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이 일은 진평평 원장에게 보고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담담한 말투였지만 왕계년은 그 속에 담긴 서늘한 기운을 감지했다.
“알겠습니다.”
왕계년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온화해 보이지만 무서운 마음을 품고 있는 범한에게 달려 있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진평평 원장도 범한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말했기에 그는 순순히 답했다.
그날 밤 불길한 징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감찰원 4처의 북제 첩보망은 다행히도 대부분 유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밀정 총책임자인 언빙운은 북제 수도에 있는 포목점에서 북제 황궁 고수를 만나 생포된 뒤였다.
이런 일은 일반적으로 하부 조직을 먼저 알아낸 뒤 서서히 위로 올라가 최종 첩보망을 포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니 사건이 갑작스럽게 발생했다는 것은 경국 내부 고위층 중에서 북제와 내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언빙운이 생포되었다는 소식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다. 이 일로 경국의 명성에 흠집이 생겼지만 북제도 이득을 얻은 건 없었다. 언빙운을 잡아 자신들이 원하는 이익과 교환하려 했던 북제의 의도와 다르게 그저 경국의 사기에 약간 타격만 줬을 뿐이었다.
경국 조정에서 감찰원 4처를 주관하는 언약해의 장자 언빙운은 이미 4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그가 북제 밀정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홍려사 가장 은밀한 방 안에서 신기물이 두 눈을 감고 손에 들린 종이를 범한에게 건네주었다. 종이에는 옅은 구름이 얼음 위를 떠다니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은 오늘 협상에서 북제 사신 중 한 명이 신기물에게 몰래 준 것이었다. 당시 북제 사신의 눈빛이 너무 의미심장해서 하마터면 신기물 옆을 지키던 호위병이 그를 공격할 뻔했다.
그림에는 ‘빙운’이라는 두 글자가 희미하게 숨겨져 있었다. 바로 북제 사신들이 이 소식을 이미 알고 있으며. 곧 협상에 이용할 거라는 의미였다.
“내부 첩자가 있는 게 틀림없어!”
범한과 신기물이 동시에 소리친 뒤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은 북제 밀정 총책임자인 언빙운은 절대 고문에 입을 열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북제가 이처럼 쉽게 언빙운을 생포하고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경국 조정 안에 북제와 은밀히 연락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였다.
신기물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황태자와 저도 언 공자가 북제에 간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언빙운이 북제에 간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고작 다섯 명 정도입니다. 그들 중 북제와 내통한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지요.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이 다른 나라와 내통해서 얻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근심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만일 내부 첩자가 벌인 일이 아니라면? 만일 어느 대신이 감찰원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일이라면?
범한은 처음 왕계년에게 언빙운이 북제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런 기밀을 왕계년이 알고 있는 게 이상했다. 감찰원 내부 정보 보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됐던 것이다. 나중에 진평평 원장이 자신에게 알려 주기 위해 왕계년에게 말해 줬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일 이 정보가 자신을 통해 새어 나간 것이라면 그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분명 미친놈이 아닙니까? 조정의 권력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나라의 이익을 저버리다니요.”
신기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에 범한은 황궁에 들어갔던 때를 떠올리며 경국에 이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신을 집중하며 물었다.
“언 공자가 잡힌 일에 대해서 폐하께서는 뭐라 하셨습니까?”
“북제는 폐하를 너무 쉽게 봤어요.”
신기물은 높은 황위에 앉아 있는 황제를 떠올리고는 두려운지 심호흡을 했다.
“영토 협상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범한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언 공자는 어찌합니까?”
“교환해야지요!”
신기물이 독하게 마음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포로 교환을 할 겁니다. 지난번 포로 협상을 전면 취소한 뒤 북제가 언 공자를 잡았다는 증거물을 가져오면 재협상을 벌일 겁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북제는 대어를 낚았다고 의기양양해 있으니 재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신기물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협상에서 두 명의 북제 포로와 언 공자를 교환할 겁니다. 만일 북제가 이 협상에 응하지 않는다면 석 달 뒤 북제 포로 천 명의 목을 베서 북제로 보낼 생각입니다.”
“세력으로 상대를 억누르는 방법은 어쩔 수 없을 때만 사용하는 것이지요. 만일 북제가 똑같은 방법으로 대항한다면 3천 명이 넘는 포로들이 죽임을 당할 겁니다.”
범한은 문서를 뒤적거리며 말하다가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물었다.
“이번에 교환할 두 명은 누구입니까? 북제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은 20년간 포로로 잡혀 있던 소은입니다.”
온화한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던 신기물은 그가 소은을 모를 거란 생각에 덧붙여 설명했다.
“소은은 당시 북위 밀정 총책임자였습니다. 두 번째 북벌전에 감찰원 진평평 원장과 비개 대인이 직접 말을 몰고 천 리를 내질러 소은의 아들 혼례식에서 그를 생포했지요. 그가 잡힌 뒤 총책임자를 잃은 북위의 첩보망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이후 폐하께서 직접 출정해 파죽지세로 군대를 몰아 거대하던 북위를 일개 약소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소은이 무모하게 아들의 혼례식에 참석하려 북제 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감찰원은 그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고 북벌이 순탄하게 진행되지도 못했을 겁니다.”
범한이 알지 못하는 수십 년 전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하자 신기물은 이어 말했다.
“수도를 떠난 소은도 대담했지만 적국에 깊숙이 침투한 진평평 원장이 더 대담했지요. 어쨌든 두 다리를 잃는 대가로 소은을 잡지 않았습니까. 당시만 하더라도 북위에는 소은이 있고 남경에는 진평평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은은 진평평 원장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소은이 생포되면서 더는 진평평 원장과 나란히 이름이 불리지 않게 되었지만.”
진평평이 다리를 잃은 이유를 듣게 된 범한은 속으로 그에게 그런 초인적인 용기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곰곰이 생각하던 범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소은을 언 공자와 교환하는 건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신기물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에 몇몇 대신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폐하와 진평평 원장의 생각은 다릅니다. 소은은 이미 일흔이 넘었고 진평평 원장에게 패했으니 이전처럼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도 없지요. 반면 언 공자는 적국에서 4년 동안 잠복해 있으면서 상당한 공을 세웠습니다. 늙은 노인과 경국의 미래를 바꾸는 것인데 손해 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만일 북제가 원치 않는다면 누구를 추가하실 생각입니까?”
“북제가 이전에 요구했던 여자입니다.”
대답하던 신기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을 보고는 다시 말했다.
“북제 황제가 그 여자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이미 범 공자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범한은 화들짝 놀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사리리를 말하는 겁니까?”
112화
이후 협상은 두 부분으로 진행되었다. 경국과 북제는 협상 탁자에서 단어 하나까지 신중하게 검토하며 국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매일 홍려사 안에는 싸우는 고성과 함께 탁자를 내리치거나 의자를 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소 시장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가격을 흥정하는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반면 다른 협상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은밀하고 조용히 진행된 이 협상에는 홍려사 관리들이나 북제 사신단이 아닌 진짜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감찰원 4처를 주관하는 언약해는 포로 교환 기밀 협정 문서에 서명한 뒤 문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그는 친아들과 관련된 이 협상을 맡지 않으려 거절했지만 진평평의 고집스러운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것이었다.
북제의 볼품없는 관리가 빙그레 웃으며 문서에 서명한 뒤 언약해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언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드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언약해가 무표정한 얼굴로 쌀쌀맞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르친 놈을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했는데, 오늘 네놈의 바보 같은 모습을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군.”
북제 관리는 언약해의 거친 말에도 화내지 않고 능글맞게 반박했다.
“언 대인, 말을 삼가시지요. 아드님이 아직 저희 손에 잡혀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저희가 바보라면 저희에게 잡힌 아드님은 뭐가 되고, 또 그런 아드님을 가르친 대인은 뭐가 됩니까.”
그 말에 언약해는 냉소를 지으며 나가려다 말했다.
“내 아들은 너희에게 잡힌 게 아니지 않은가.”
문을 나가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이 그를 향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한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인내심이 예전만 못하군.”
“저도 인내심은 아직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뒤에서 펼쳐지는 중상모략까지 참을 수는 없지요.”
언약해가 자신의 상사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가 진평평의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이 손가락 하나를 펼치며 말했다.
“조정 안에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네. 이번에는 빙운이를 소은과 교환해서 데려올 수 있겠지만 이제는 소은과 같은 인물이 없으니 그러지 못할걸세.”
“다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을 찾을 방도를 생각해야겠어. 이번에 폐하가 우리 편을 들어준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가르치려 한다는 걸 분명히 아시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농락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저도 그렇습니다. 비록 포로 교환이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빙운은 죽지는 않았으니 젊은 시절 쓰라린 교훈을 얻은 셈으로 치면 됩니다.”
언약해는 자신의 상사가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맞아. 그래서 이번에 그 애를 보내서 경험을 시키기로 결정했네. 몇 달이면 족할 테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몇 달이요? 이번에 사신이 북제로 돌아가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까?”
“맞네. 그가 언빙운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잘 처리해 주기를 바라.”
“누구입니까?”
“가기 전에 내가 자네들과 한번 만나게 해주지.”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식적인 포로 교환과 비공식 밀정 교환 협약을 통해서 모두 만족한 결과였다. 경국은 체면과 토지를 얻을 수 있었고, 북제는 체면과 소은 그리고 황제가 좋아하는 여인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동이성 사절단은 줄곧 조용히 경도에 머물고 있었다. 경도 조정도 창산 부근에서 발생한 일을 빌미로 더 많은 돈을 받아 내기 위해 동이성 사절단을 일부러 냉대했다. 동이성은 천하의 거상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경국 조정에서 남쪽 항구를 개방하기 전에 먼저 다른 나라들과 무역을 벌일 정도로 동이성은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흘 뒤 경국 황제가 황궁으로 양국의 사신을 불러 연회를 베푸는 날, 범한은 부사 신분으로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두 번째 입궁이자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날이었다.
자신의 방에서 모든 일을 세심하게 준비하던 그는 침대 아래 검은색 가죽 상자를 바라봤다. 요 며칠 공무를 보며 몇 가지 일들의 내막을 알게 되면서 그는 경국은 강성하고 거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정 안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생각에 얽매여 여전히 검은 속내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무자비하다고 해서 황족에게 무자비한 것은 아니었고 더욱이 천하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범한은 황제가 감찰원에 맞서려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대를 죽여 본보기로 삼지 않는 건 그 사람이 자신의 아내, 누이, 아들이거나 심지어 어머니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 고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이것은 범한이 이 세계에 오고 난 뒤 수시로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그의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변하더니 가늘고 긴 비수를 숨기고는 독을 묻힌 바늘 세 개를 조심히 자신의 머리카락에 꽂았다.
사흘 뒤 연회가 개최되는 날 거리에는 홍등이 걸렸고 경도 전체는 시끌벅적했다. 북제 사신단과 동이성 사신단은 환영을 받으며 경국에서 가장 웅장한 황궁에 들어갔다. 마치 삼국이 서로 전쟁하고 암살하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연회 장소는 황궁 외성인 기년전으로 정해졌다.
곧이어 아름답게 생긴 궁녀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와 술을 들고 들어왔다. 범한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넓을 황궁 안을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궁녀들을 바라봤다. 잘생긴 범한의 시선을 의식한 궁녀들이 볼을 붉히며 슬쩍슬쩍 그를 훔쳐봤다.
나라를 주름잡는 유명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음에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연회에는 병을 핑계로 진평평 원장과 재상 대인이 오지 않은 걸 제외하고 각 부처를 주관하는 대신들과 귀족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북제 사신단과 동이성 사신단이 앉아 있었다.
범한은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부사라는 이유로 중앙에서 약간 아랫자리에 앉았으나 나이가 지긋한 고관의 옆자리라서 거북하고 불편했다. 그걸 느꼈는지 옆에 앉은 고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회에서 지켜야 하는 규범이 많기는 하지만 폐하께서는 너그러운 분이시니 너무 긴장할 것 없습니다.”
범한의 옆자리에 앉은 고관은 바로 예부 시랑 장자건이었다. 범한은 예부 상서 곽유지의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자건의 말에 악의가 없자 안심하며 말했다.
“제가 시골에서 자라 이런 중요한 자리를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제가 실수를 한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자건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오늘 조회에서 범 공자가 협상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임 소경이 극찬하더이다. 조정에는 범 공자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사람은 없소. 맞은편에 있는 저 사람들을 경계할 뿐이지.”
두 사람이 동시에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북제 사신단 장영후가 따분한 표정으로 연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어 있는 상석은 신출귀몰한 장묵한의 자리로 보였다. 한편 동이성 사절단의 상석에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허리에 찬 검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검을 차고 입궁하다니.’
“사고검의 제자인데 검과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해서 폐하께서 허락하셨답니다.”
장자건이 범한의 생각을 읽은 듯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고검의 수제자 운지란?”
범한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을 자세히 바라봤다. 순간 검을 차고 있는 남자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다.
그동안 동이성 사절단을 냉대한 것 때문에 9등급 무예를 가진 운지란의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경국 황궁에 앉아 있으면서도 줄곧 냉랭한 모습이었다.
범한이 운지란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을 때 마침 그도 범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치자 범한은 기죽은 척 고개를 숙이고는 헛기침을 했다. 상대방의 눈빛에서 흔들리지 않는 무인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면서 기년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을 바라봤다. 다들 범한이 외양간 거리에서 사고검의 여제자 두 명을 죽인 일을 알고 있었다. 동이성이 이번에 공납을 바친 것도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모두 상당한 무예 실력을 갖춘 운지란이 범한을 죽이려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 황태자가 범한을 협상에 참여하게 해서 공을 세울 기회를 준 덕분에 조정에서는 어느 쪽도 범한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각 부처 관리들과 장군들은 범한과 같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동이성 수석 검사를 바라봤다. 순간 기년전 분위기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몸 안에 정기를 운용할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 은은하게 장엄한 황궁 음악이 들리더니 내관이 나와 소리쳤다.
“폐하께서 듭십니다.”
천하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경국의 유일한 주인인 황제 폐하가 황후와 함께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온화한 미소 가득한 얼굴로 용좌 앞에 섰다.
“만세 만세 만만세!”
경국 관리들이 모두 엎드려 절하고 사절단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기년전 안에 가득했던 긴장된 분위기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황제가 앉은 높은 용좌 옆에는 황후의 자리가 있었고 황태자의 자리는 두 계단 아래였다. 다만 황태자 옆에는 다른 좌석이 없어 그 위엄이 드러났다. 황제가 아래 대신들을 둘러본 뒤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편하게 앉으시오.”
이로써 연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북제 사절단 대표가 앞으로 나와 황제의 공덕을 찬양한 뒤 경국과의 우애를 밝히고는 돌아갔다. 이후 동이성 운지란이 앞으로 나와 무표정한 얼굴로 몇 마디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던 황후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저 동이성 사람은 거만하기 이를 데가 없군요.”
그러자 황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사고검의 수제자가 아니오. 저렇게 거만하니까 짐이 있는 곳에 검을 차고 올 용기도 있는 거겠지.”
곧이어 궁녀들이 요리를 들고 나오자 대신들은 머리를 파묻고 먹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도 입을 다물자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범한은 슬쩍슬쩍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관찰했다. 비어 있던 북제 상석에는 이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창백하고 기운 없는 얼굴이었지만 두 눈만큼은 맑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이마에는 마치 무수히 많은 지혜가 담겨 있는 듯했고, 입고 있는 구름처럼 하얀 도포는 왜소한 체구를 가려 주었다. 그가 누군지는 굳이 물을 것도 없었다. 문장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장묵한이었다.
장묵한이 언제 들어왔을지 생각하던 범한은 황제 폐하가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왔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소문대로 장묵한의 글을 좋아하는 황태후 덕분에 줄곧 황궁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범한이 몰래 장묵한을 바라볼 때 높은 곳에 앉은 누군가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술을 홀짝이는 황후의 시선이 범한이 있는 자리를 향해 있었다. 황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청년이 완아와 결혼해 부마가 될 범한이군요.”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젊은 사람이 경도에서 시로 이름을 알리더니 오늘 조회에서는 신기물과 임소안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더이다. 황태자의 측근인 신기물과 재상의 문하생인 임소안이 앞다투어 칭찬하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황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황태자가 인간관계를 이해한 것 아닐까요? 게다가 곧 있으면 재상의 사위가 될 사람이잖아요.”
“인간관계를 이해했다고?”
황제가 웃는 듯 아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아래 앉아 있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짐의 아들도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아는군.”
약간은 못마땅하다는 듯한 말투였음에도 황후는 이전처럼 질책하지 않고 냉정한 평가를 하는 것에 안심하고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승건이도 이제 세상일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황제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반면 범한은 연회가 진행될수록 긴장되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비록 황주처럼 도수가 높지 않은 새콤달콤한 술이었지만 주변 관리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했다. 술에 취해 행패라도 부릴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예부 시랑 장자건이 보다 못해 말했다.
“범한 대인, 너무 많이 마시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가는 큰 벌을 받게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은 장자건이 자신에게 이곳은 풍류를 즐기는 유정강이 아닌 삼엄한 황궁이며, 그의 신분은 취객이 아니라 관리임을 일깨워 주려 한다는 걸 이해했다.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정기를 운용해 불그스름한 얼굴에 풀린 눈동자를 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너무 긴장돼서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범한이 술기운이 달아오른 얼굴로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하자 장자건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재상 대인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으시고, 사남 백작은 일이 있어 못 온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범 공자를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만약 범 공자가 취해 추태라도 부린다면 제가 두 분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113화
반면 며칠 동안 홍려사 외교 관리들에게 시달린 북제 사신단은 범한을 보고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범한은 줄곧 아무 말 없이 있었지만 북제 사신단들은 그를 무척 미워했다. 북제 역시 경국에 많은 밀정을 포진해 두었기 때문에 홍려사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강경하게 나온 이유가 범한이 배후에서 의견을 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의견을 냈는지만 모를 뿐이었다.
이미 양측 황족이 서명까지 해서 협상을 마무리했음에도 북제 사신단은 마음이 불편했다. 범한이 취한 모습을 본 장영후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더니 공손히 말했다.
“폐하, 이번 협상이 쉽지 않아 홍려사 분들도 힘드셨을 것입니다. 제가 홍려사 관리분들에게 한잔 올려 양국의 우정을 표현해도 되겠습니까?”
장영후의 말에 옆에 앉아 있는 동이성 사신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해롱해롱하고 있는 범한에게로 향했다. 동이성 사신단은 북제 사람들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무덤덤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황제와 황후는 긴장된 분위기와 범한의 눈빛이 보이지 않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허락했다. 그러자 황태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전장에서는 적이라도 밖에서는 친구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술상에서도 적일 뿐이지만.”
분위기를 돋우려던 황태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홍려사 관리들을 보고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이번 협상을 진행하면서 홍려사 관리들은 범한을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범한에게 북제 사신들이 강제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하려 하자 도와주고 싶었지만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도울 방법이 없었다.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북제 사신단이 따라 주는 술을 마셨지만 마음은 불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최근 장 공주가 관리하는 상회가 책방을 공격하기 시작해 범사철과 섭 대행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장 공주의 진정한 힘은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오늘 그가 하려는 일에는 술의 도움이 필요했다.
범한은 취하기도 어렵지만 술에 취한 척 연기하는 건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북제 사신단 중 아무도 범한을 건들려 하지 않자 마지막 순서로 나선 장영후가 용감히 범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줄곧 황후와 장묵한과 대화를 주고받던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궁 안이 이렇게 시끌벅적한 건 오랜만인 것 같소.”
명사답게 거만한 표정의 장묵한은 황제가 물을 때만 몇 마디 답변하고는 말이 없었다. 그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시끌벅적한 곳을 바라봤다. 마침 장영후가 잘생긴 청년을 잡고는 술을 따라 먹이는 모습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묵한이 물었다.
“저 청년은 범 공자가 아닙니까?”
장묵한은 마치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 시 세 편으로 명성을 떨친 청년이 술고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황제가 약간 화난 표정으로 외쳤다.
“범한.”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황제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기에 황제의 말 한마디에 모두 조용해졌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연회장에서 범한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마셔라! 마시자!”
혀 꼬인 발음으로 소리치는 범한의 모습은 확실히 취한 것 같았다.
“범한!”
범한이 취한 모습을 본 황태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쨌든 범한이 부사가 된 건 동궁의 추천 때문이었고 그래서 연회에도 참석할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추태를 부린다면 황태자 처지에서도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범한이 서서 주변을 살폈다. 초점을 잃은 흐리멍덩한 눈에 달아오른 얼굴이 한눈에 봐도 취한 것 같았다.
“누가 나 불렀지?”
범한의 말에 백작가와 재상가와 교우가 깊은 대신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범한의 입을 틀어막은 뒤 마차에 태워 백작가로 돌려보내고 싶은 모습이었다.
의외였던 점은 높은 용상에 앉은 황제가 범한의 실언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는 점이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짐이 불렀다.”
황제의 말을 들은 범한은 정신을 차린 듯 급히 엎드렸다.
“소…… 소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범한이 갑자기 움직이자 그를 잡고 술을 먹이느라 취해 있던 장영후가 땅에 자빠졌다. 경국 대신들은 적국의 수장이 넘어지자 고소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북제 사신단 중 유일하게 취하지 않은 두 사신이 급히 달려 나와 장영후를 부축해 자리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궁녀들이 재빨리 해장국을 가져다줬다.
황제가 말했다.
“짐도 네가 술을 많이 마신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궁 안에서 추태를 부린 일은 벌을 받아야 할 것이야.”
범한이 엎드린 자세를 유지한 채 쓴웃음을 지었다.
“소신, 폐하께서 내리시는 벌을 달갑게 받겠지만 멀리서 손님이 오셔 너무 기뻐 그리된 것입니다. 북제 사신들을 대접하는 게 부사가 해야 할 일이라 최선을 다하려 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폐하의 말에 토를 달더니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나.”
황제 옆에 앉아 있던 황후가 말했다. 그녀는 폐하가 완아를 가장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혼인할 범한까지 아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따끔하게 질책했다.
“범한.”
황제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모든 사람이 귀를 쫑긋 세우고 황제의 목소리에 담긴 의미를 음미했다. 여러 차례 범한의 이름을 부른 걸 보면 백작가와 황실의 관계는 확실히 평범하지 않은 듯했다.
황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가와 짐의 사이가 돈독하지만 내 눈에 너는 일개 아랫사람에 불과하다. 게다가 신하라면 마땅히 짐이 말할 때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들어야 하는 법이야! 네가 이전에 식당에서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일을 짐이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혈기 왕성한 나이라서 그런지 말이 거침없고 오만방자하군.”
황제는 질책하면서도 은연중에 범한을 감싸 주고 있었다. 경국 대신들과 양국 사신단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황제의 뜻을 알아챘다.
황제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늦여름 밤에 세 나라가 우애를 다지기 위해 모였으니 시를 잘 쓰기로 유명한 범한이 시를 한 편 써보도록 하게.”
황제가 범한의 체면을 살려 주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챈 대신들은 연거푸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황제가 이번 연회를 기회로 신하들에게 8품 협률랑인 범한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 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범한이 만취해 있어 이 기회를 놓칠까 봐 모두 불안한 모습이었다.
범한은 취기가 올라 머리가 어지럽기는 했지만 주변의 대화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용상에 앉은 황제에게 조심히 말했다.
“폐하, 소신이 어찌 장묵한 선생 앞에서 비천한 실력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경국 대신들의 시선이 장묵한에게로 쏠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황제의 뜻을 정확히 파악했다. 바로 범한에게 체면을 세울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경국에도 장묵한과 필적할 만한 인재가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이었다.
범한이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된다’는 별명으로 불린 지도 이미 여러 달이 흐른 데다가 이후 시를 쓰지 않았기에 그의 명성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대신들은 범한이 장묵한을 끌어들이자 속으로 범한과 황제가 은연중에 북제 문단의 대가 장묵한을 공격할 계획을 주고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사실 범한이 추측해서 한 일이었다. 그는 황제의 마음을 파악하는 경험은 부족했지만, 문예를 좋아하는 황제가 군사에서는 적수가 없는 상황임에도 문학에서는 시종일관 북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장묵한은 경국에 온 뒤로 황궁에서 지내면서 황태후와 후궁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황제가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만족하는 눈빛을 짓자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황제의 눈빛에는 자기 뜻을 알아챈 범한을 칭찬하는 동시에 반드시 장묵한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라는 경고도 담겨 있었다.
“그럼 범 공자가 지은 시를 장묵한 선생이 품평하면 되겠군요. 만약 시가 좋지 않으면 벌주를 마시는 걸로 하지요.”
황제가 무슨 생각인지 알고 있었기에 황후도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범한은 자리로 돌아가 술을 따라서 천천히 음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 범한이 단숨에 시를 쓴다는 걸 알고 있기에 몰래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기다렸다. 대략 열다섯까지 셌을 때 범한이 두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술을 마주하고 노래하자꾸나. 인생 얼마나 살겠는가. 아침 이슬처럼 짧은 인생, 괴로운 일들도 많았네. 푸릇푸릇한 옷깃은 내 마음에 은은히 남아 있지만 그대가 있기에 지금까지 노래하네. 귀한 손님이 있어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부니, 밝은 달 같은 그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인연이 되어 연회를 열고 대화를 나누면 마음속 옛 은혜가 떠오를 것인데. 달이 밝아 별빛이 흐릿하니 까마귀와 까치는 남쪽으로 날아가는구나. 나무를 세 번이나빙빙 돌지만 어느 가지에 의지할 수 있을까. 산은 높은 것을 싫어하지 않고 바다는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주공은 입 속에 음식을 뱉어 천하의 마음을 얻었다네.”
예전과 다름없이 범한이 시를 읊자 정적이 감돌았다.
조조가 쓴 시 중에서 오늘 상황과 맞고 황제의 뜻과 부합하는 구절을 골라 읊은 것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주공이 입 속에 음식을 뱉어 천하의 마음을 얻었다는 구절로, 실제로 이 세계에도 주공이 있었다. 게다가 이곳의 주공은 황제를 보필한 충신이 아니라 정말 황제가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이 구절을 당당하게 베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침묵이 감돌던 기년전 안에 환호성이 들렸다.
“좋은 시야!”
대신들의 환호성에 황제도 만족한 표정으로 장묵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 선생은 이 시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묵한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는 살면서 이런 상황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부딪쳤고 품평한 시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관리 중에서도 그의 문장을 공부해 관직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이처럼 세상 문인들의 공경을 받는 이유는 덕행과 안목이 뛰어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학식이 깊기 때문이었다.
“좋은 시입니다.”
장묵한이 가벼운 목소리로 안주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중간에 의미가 끊기기는 하지만 문장이 좋습니다. 시는 모름지기 의미와 문장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범 공자의 시는 뜻도 좋고 문장도 훌륭하니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경에서 이런 인재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장묵한의 평가에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범한은 문단 대가인 그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다만 잘난 체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기에 대충 인사하고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범한의 시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대신들은 장묵한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순간 연회장 분위기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으면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 선생이 바로 전에 경국을 남경이라 칭한 것은 타당하지 않소. 선생의 문장이 뛰어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시에서만큼은 범 공자보다 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 없으니 멋대로 지껄이는 평가를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오. 여기 범 공자만큼 뛰어난 인물이 어디 있습니까? 범 공자는 15초 만에 이렇게 훌륭한 시를 써냈습니다. 북제에도 이렇게 시를 쓸 사람이 있습니까?”
상당히 무례한 말이었다. 더욱이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었다. 경국 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뿐더러 나라를 위해 한 말이므로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자리로 돌아가던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장묵한을 향해 허리를 굽혀 대신 사과했다. 장묵한이 헛기침을 하며 힘들게 일어나려 하자 황태후가 보낸 젊은 내관이 부축해 일으켰다. 그가 범한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범 공자의 명성은 이미 대제에도 전해졌습니다. 저도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된다’는 구절이 있는 시를 자주 읽곤 합니다.”
장묵한의 눈빛에서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을 읽은 범한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는 순간 자신이 감지하지 못한 위기가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가 술기운이 달아오른 얼굴을 홱 돌렸다. 순간 연회석 끝자리에서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114화
곽보곤.
황태자의 측근이자 황궁 편찬인 곽보곤도 오늘 연회에 와 있었다. 범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던 황태자도 범한처럼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곽보곤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이때 장묵한이 헛기침을 하고는 황제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소신의 몸은 비록 대제에 속해 있지만 마음은 항상 문학에 있습니다. 양국의 우애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문학가인 이상 냉정한 평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황제의 표정도 점점 풀리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 선생, 괜찮네.”
황제의 말과 동시에 황후가 술잔을 내밀자 장묵한이 말했다.
“바람은 거세고 하늘은 높으니 원숭이가 슬피 울고, 맑은 하천가 하얀 모래섬에 새들이 날아돌아 오네. 끝없이 아득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무궁한 큰 강은 세차게 흐른다.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되어 평생 많은 병을 앓으며 홀로 높은 곳에 올랐구나. 고난과 힘겨움에 어느새 머리는 하얗게 새어 버려 초라한 심정에 마시던 탁주 잔을 새로 멈춘다.”
천하를 움직이는 문학 대가의 말에 기년전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 시에서 앞에 네 문장이 특히 좋습니다.”
장묵한이 말을 마치자 중신들은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시는 올해 초 처음 등장한 후 일찌감치 널리 경도에 퍼져 있었다. 여러 시인들은 ‘큰 강’이라고 된 부분에서 ‘큰’ 자가 조금 거슬리게 들리는 것 빼고는 이 시는 천의무봉이라 할 만큼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시의 정수는 후반 네 구절이었다. 그런데 왜 장묵한은 사람들과 반대의 생각을 말하는 건지.
사람들은 장묵한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전반의 네 구절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후반의 네 구절은 그저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지막 네 구절은 범 공자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기년전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모두 입을 꾹 닫아 버렸고 한순간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범한은 짐짓 경악한 척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뒤에 숨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오히려 금세 차분한 모양새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잔뜩 취한 몸을 탁자에 기울인 채 미소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장묵한을 바라보았다.
몇 달 전 임완아가 그의 시가 베낀 것이란 이야기가 나돈다고 범한에게 말해 준 적 있었다. 그때 범한 자신은 그 이야기를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와서, 그것도 이렇게나 공개적으로 표절 시비가 터져 버릴 줄이야. 곽보곤이 이런 일을 벌이려면 분명 어느 지체 높은 분의 명령을 받아야만 가능할 터인데.
범한이 경도로 들어온 후 가질 수 있던 유일한 것이 바로 문인으로서의 명성이었다. 그런데 그 명성이 지금 모두 손상된다면 글재주와 인품을 중요시하는 이 세계에서 자신은 자진해 파혼을 선언해야만 했다.
그런데 범한은 장묵한이 앞 네 구절을 읽기 시작할 때 이와 같은 걱정을 일찌감치 내려놓았다. 자신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확신해서였다. 이 시에서 나온 ‘큰 강’은 원래 원문에서는 전생의 양쯔강을 이르는 표현, 즉 ‘장강(長江)’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보기에 장묵한 대가는 그 점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말인즉슨 장묵한은 범한이 표절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학문적인 역량과 도덕적 명성만 내세워 범한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데 장 공주가 장묵한을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이 명성이 자자한 장묵한께서 천리를 마다 않고 경국까지 와 소인배 짓거리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범한으로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 *
침묵이 흐르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다.
황제의 미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표절에 대해 말하면서도 장묵한에게 근거도 없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된다며 오히려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줄곧 범한 옆에 앉아 있던 예부 시랑 장자건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장묵한 선생은 대가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배우는 입장이었을 때는 선생이 주를 단 경서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공부했습니다. 그러니 천하에 선생의 말을 의심할 자는 감히 없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이번 일은 남의 글을 베낀 것과 관련되어 있으니 어쩌면 선생께서 소인배에게 속아 이러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장자건은 자신의 윗사람인 공자 곽보곤을 한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말한 소인배가 누구인지 기탄없이 드러내려는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장묵한이 고개를 들었다. 지혜로 빛나는 두 눈에는 복잡한 심경이 언뜻언뜻 비치고 있었다.
“이 시에서 뒤의 네 구절은 제 스승이 옛날에 정주를 지나면서 지은 시옵니다. 스승의 유작이기에 제가 수십 년 동안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지요. 하온데 범 공자가 대체 어디에서 연이 닿아 이 구절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속세의 먼지에 가려져 있던 진주가 다시 태양을 보게 되었으니 이 늙은이는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오나 범 공자는 이 시로 명성을 얻으려 하다가 도리어 이 늙은이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군요. 선비란 모름지기 마음을 닦고 덖을 닦아야 하는 법. 문장을 쓰는 재주는 그다음입니다. 이 늙은이, 재주를 목숨만큼 아끼기에 경솔하게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으나, 제가 경국까지 온 건 모두 범한 공자의 사람됨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온데 제 생각과 달리 범한 공자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기고만장해하는 것 같습니다.”
범한은 장묵한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런데 주변에 웃는 이가 단 한 명도 없고 내부 분위기도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아 감히 웃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장묵한의 지적이 기정사실화된다면 범한은 이제 관리들이 모이는 문단에 얼굴을 내밀기는커녕 조정에서 낯조차 들 수 없게 될 게 뻔했다.
천하 선비들은 장묵한이 평생 보여 준 품성, 도덕성 그리고 문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에 그 누구도 장묵한이 한 말에 토를 단다거나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범한이 읊은 시를 두고 장묵한이 자기 스승의 유작이라고 주장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스승 된 자의 인품을 가늠하는 잣대가 온전히 천하 선비들이 보이는 존경심이었으니 누가 감히 의심 따위를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중신들은 이미 모두 범한이 시를 베꼈다고 인정하고 있었고 이에 범한을 바라보는 그들의 기괴한 눈빛에는 은근하게 혐오감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중신들이라고 해도 장묵한의 명성만 믿고 그의 주장을 기정사실화해 버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경국의 체면과도 연계된 문제이니 말이다.
황제가 문연각 대학사 서무를 잠시 차갑게 쳐다보았다. 잠시 어색함이 흐른 후 대학사 서무가 난처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장묵한에게 인사부터 올렸다.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대학사 서무가 장묵한에게 스스로를 제자라 칭하며 예를 갖춰 인사부터 한 이유는 그가 과거에 북제에 있는 장묵한에게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공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이 순간 서무는 장묵한의 말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근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어쩔 수 없이 범한을 위해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범 공자는 줄곧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왔습니다. 그리고 앞의 네 구절 역시 매우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 시를 베꼈다고 하신다면 저로서는 실로 믿기 힘듭니다. 범 공자의 실력을 보면 굳이 남의 것을 베낄 필요도 없어 보이니까요.”
그가 말하는 사이 장묵한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장묵한은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온화하게 꾸짖었다.
“서무야, 설마 이 늙은이가 내 스승님의 명성을 도용했다 의심하는 것이냐?”
서무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감히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황제의 싸늘한 눈빛까지 더해지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정중히 뒤로 물러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누군가가 다시 장묵한의 말에 의구심을 표한다면 이는 곧 장묵한을 스승도 부모도 몰라보는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는 꼴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감히 나서서 스승을 모욕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려 하지 않았다.
한데 황제는 저들과 같은 평범한 문인도, 황후도, 황태후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장묵한이란 작자를 원래 싫어하고 있던 터라 냉랭하게 말했다.
“경국은 무엇보다 법률을 우선시하므로 북제처럼 어수룩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장 선생, 만약 누군가의 죄를 알리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신하들은 황제의 말에 노기가 서려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니 장묵한이 정말로 범한이 표절했다는 증거를 내놓는다면 어쩌면 범한은 재기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장묵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족자를 꺼내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제 스승이 친필로 쓴 시입니다. 여기에 방씨 가문 사람이 있다면 이내 이 글이 작성된 연대를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어 장묵한은 범한을 바라보며 그를 동정하는 것처럼 말했다.
“범한 공자는 본디 시문에 재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외연 묘사에만 치중하고 시 속에 숨은 마음의 소리는 모른단 말입니까! 즉 시의 마지막 네 구절이 어떻든지 간에 범한 공자의 나이와 경험에 비추어 과연 그런 시가 나올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장묵한의 노쇠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장묵한은 다음과 같이 시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만 리 쓸쓸한 가을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 시린 상황이란 말입니까! 평생 많은 병을 앓았다는 구절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제 스승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 홀로 높은 곳에 올라 도도히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져 쓴 구절이니…… 아직 나이 어린 범한 공자가 평생 많은 병을 앓았다는 구절을 어찌 쓸 수 있겠습니까!”
장묵한이 말을 이어갈수록 사람들은 이 젊은이가 그와 같은 시를 쓸 수 없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갖게 되었다. 장묵한의 설명이 다시 차분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머리는 하얗게 새어 버렸다는 구절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범한 공자의 머리카락은 아직 칠흑같이 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시를 범한 공자가 썼다면 억지로 구슬픈 척한 것이겠지요.”
* * *
장묵한은 마지막 구절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아까보다 소리를 낮췄다.
“마지막 구절에서 마시던 탁주 잔을 새로 멈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범한 공자처럼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 어찌 ‘초라한 심정’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 마시던 탁주 잔을 새로 멈춘다는 표현에서도 범한 공자는 제 스승이 어떤 심정으로 이 구절을 썼는지 모를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 장묵한은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썹 언저리에서는 살짝 조급함 같은 것이 보였다.
“제 스승은 만년에 폐병으로 고생해 술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멈춘다’란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종이에 적힌 증거가 애당초 필요 없었다니. 장묵한의 말이 끝나자 중신들은 맥이 풀리고 말았다. 범한이 해명할 수 없는 문제들만 장묵한이 콕콕 집어 설명했으니 그들이 보기에 범한이 표절이라는 죄명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바로 이 순간, 조용했던 기년전에서 뜬금없이 박수 소리가 울리 퍼졌다.
취해 탁자에 엎드려 있던 범한이 느닷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미소 띤 채 장묵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뼉을 쳤던 것이다. 범한은 장묵한의 설명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장 선생의 스승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쨌든 그는 시만 가지고 원작자인 두보가 겪은 일, 예를 들어 병환이 깊었던 것 같은 정황들을 정확히 추리해 냈다. 이에 범한은 세상이 장묵한을 두고 문학계의 일대 대가라고 부르는 데 이는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범한은 장묵한이 오늘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일찌감치 가짜 족자까지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던 터라 그의 능력에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범한은 때 묻지 않은 맑은 얼굴로 거친 표정을 짓더니 술김에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뗐다.
“장묵한 선생, 오늘 댁의 사부님 체면까지 모두 깎을 셈이시군요. 대체 무슨 영문으로 과거 쌓아 둔 명성을 다 내팽개치고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진실이 까발려지자 범한이 실성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한에게서 갈수록 심한 말이 튀어나오자 그들의 이맛살은 점점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러자 황후도 조용히 옆 사람에게 범 공자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시위를 불러오라 분부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황제가 싸늘하게 손을 내저으며 모두에게 범한의 말을 들어 보라고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115화
범한이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가소롭고 우습다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술을 대령하시오!”
범한이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자 궁녀는 감히 술을 내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범한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어느 대신이 뒤에서 술 단지를 안고 와 범한 앞에 놓았다.
“고맙습니다!”
범한은 웃은 후 술 단지 입구를 막고 있던 진흙을 깨더니 단지째 들고 고래가 바닷물을 흡입하는 것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술 한 동이를 모두 배 속으로 들이부은 범한은 취기가 강하게 올랐는지 한차례 딸꾹질을 했다. 그는 이미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상태였다. 그런데도 술 한 동이를 더 급하게 들이붓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눈동자가 윤기가 돌았다. 한데 몸만은 계속해서 비틀거렸다.
범한은 춤이라도 추듯 비틀거리며 맨 앞쪽 좌석까지 걸어 나갔다. 그리고 장묵한의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가님. 아까 하신 말씀, 정말로 끝까지 안 바꾸실 건가요?”
술 냄새가 코를 훅 덮치자 장묵한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공자, 후회하고 뉘우치면 되는 것을 무엇 하러 이리도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한단 말이오?”
범한이 장묵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더니 혀 꼬인 소리로 말했다.
“세상 모든 일은 다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지요. 장 선생께서는 제가 댁의 스승님 시를 베꼈다고 하시는데 제가 그걸 왜 베끼겠습니까! 설마 앞 네 구절을 들으시고도 이 후배가 사후에나 얻게 될 명성을 살아생전에 앞당겨 얻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신지요?”
‘사후에나 얻게 될 명성을 살아생전 앞당겨 얻는다’란 표현에 장묵한은 슬쩍 감동하고 말았다. 그는 말 못 할 중요한 일 때문에 평생 쌓아 온 명성을 걸고 일부러 이 청년을 모함하러 온 터였다. 그런데 범한이 멋진 표현을 내놓자 더 이상은 못 하겠는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다른 쪽으로 천천히 돌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공자가 썼다는 구절도 베낀 것일 수 있겠군요.”
“누구 것을 베꼈다는 거죠? 설마 제가 제 시를 베꼈다는 겁니까? 아니면 장 선생의 문하생들이 천하에 널리 퍼져 있고, 알고 계신 시와 글의 양이 땅만큼 바다만큼 되기 때문입니까? 그래서 이 후배가 누군가의 문장을 베꼈다고 선생께서 인정할 자격을 지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순간 장묵한은 탁자 위에 놓인 족자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치고 있었다. 그 행동을 본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장묵한 대인, 그런 장난은 아이나 하는 것입니다. 제가 댁의 스승님 시를 베꼈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저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걸까요? 왜 제가 그 시를 짓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세상에 소개된 적 없었냐는 말입니다!”
장묵한은 더 이상 범한과 입씨름하기 싫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범한은 작고 낮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선생께서는 이 후배가 아직 백발이 아니란 이유로 백발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 하셨고, 제가 몸이 성하다는 이유로 평생 많은 병을 앓았다는 등의 표현은 못 쓸 거라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이 후배가 평소에 터무니없는 행동을 잘해 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건 모르셨을 겁니다. 즉 제 과거도 모르시면서 저를 억울하게 모함하고 계신 거라고요! 그런데도 이게 재미있으십니까!”
정말로 잔뜩 취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오랫동안 마음에 쌓아 두었던 울분을 이참에 모두 쏟아 버리려 작정한 건지. 그런데 범한의 말간 얼굴에서 돌연 광기가 번득였다.
“시는 마음의 소리라네.”
입을 뗀 장묵한이 범한을 온화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범한 공자는 그와 같은 경험이 없는데도 어찌 그러한 시를 쓸 수 있는 겐가?”
“시는 문도(文道)이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장묵한을 바라보며 계속 싸늘하게 말했다.
“시를 포함한 문장의 도(道)에서는 언제나 천재적인 재능을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제 시가 슬픔의 정서를 강하게 띠고 있어서일 수도 있겠지요. 하오나 경험하지 못한 일은 자신의 시에 녹여 낼 수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참으로 시건방진 말이었다. 스스로 천재임을 내세워 앞서 장묵한이 시를 해석하면서 주장했던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려 들다니.
여기까지 들은 장묵한은 두 눈을 살짝 찌푸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공자는 언제 어디서나 실제로 겪어 보지도 않은 상황을 시로 쓸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천재적인 시인일지라도 그 같은 재주는 없으므로 장묵한 대가는 범한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범한은 상대방이 자신이 쳐놓은 덫에 들어오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무례하게 정묵한의 탁자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에 점차 취기가 짙어지고 있는데 범은 불쑥 소매를 흔들며 세 차례 소리쳤다.
“종이를 가져오시오!”
“먹물을 가져오시오!”
“누구 한 사람 이리 오시오!”
취한 범한이 세 번 소리치자 사람들은 그가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데 황제만은 궁녀들에게 차분하게 명령을 내려 범한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라고 했다.
잠시 후 범한이 요구한 세 가지가 모두 구비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 준 기년전 한가운데에 종이, 먹물, 사람 한 명이 남게 되었다.
범한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황제에게 절을 했다.
“폐하, 부디 폐하의 붓을 태감이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황제는 영문을 몰랐지만 그래도 턱을 살짝 아래로 당기며 범한의 요청을 윤허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붓을 잡게 된 태감이 탁자 옆으로 나와 종이를 펼치고는 먹을 갈았다. 그런데 취기를 억지로 참고 있던 범한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한 명으로는 모자랍니다.”
“범한, 무슨 소란을 벌이려는 것이오!”
범한과 가까운 곳에 있던 황태자가 참지 못하고 참견을 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범한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황제의 눈에 점점 장난기가 차오르고 있는 걸 보니 그는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눈치챈 것만 같았다.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장묵한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눈빛에 한껏 취기가 올라 있는 상태에서 자기 옆에서 붓을 쥔 채 기다리고 있는 세 명의 태감에게 말했다.
“내가 말하면 그대들이 받아 적으세요. 쓰는 속도가 느려 다 받아 적지 못해도 다시 말해 주지 않을 테니 유념하시고요.”
세 태감은 이유 없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범한이 세상 사람에게 시대를 풍미하고 대표할 진짜 시인은 장묵한이 아닌 자신임을 믿게 할 일을 벌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 하늘은 더 어두워져 밤으로 들어가는 무렵이었다. 여름이 끝나 가는 시점이었지만 밤바람은 시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범한이 있는 이곳 기년전의 분위기는 마치 북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고 있는 전쟁터 같았다.
* * *
“들불이 다 타지 않았거늘 봄바람 또 불어오는구나. 어지럽게 핀 꽃이 사람들의 눈을 점점 유혹하려 하는데 이제 갓 나온 새싹은 말발굽 높이만큼도 못 자랐구나. 하늘과 땅처럼 오래된 것도 언젠가는 다하게 되거늘, 이 한은 면면히 이어져 끝나지 않으리라.”
시를 짓겠다는 예고도 없이, 그리고 전혀 시를 지을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는데 범한은 시 한 수를 금세 뚝딱 지어 버렸다. 이 시는 원래 전생의 백거이란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범한은 또 십여 수에 달하는 시를 읊었다. 탁자 옆에 서서 어둠이 내려앉은 황궁 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기이한 대뇌에 저장되어 있는 유명한 시들을 줄줄 읊어 내려갔다.
태감들은 범한이 읊은 시를 최대한 빨리 휘갈겨 썼다. 하지만 자칫하다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받아 적는 중이었다.
그리고 기년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시를 음미했다.
계속되는 음모와 권모술수에 강한 압박감을 느낀 범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발광해 버린 것이다. 그는 머릿속에 있는 시를 읊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태감이 잘 받아 적고 있는지 그리고 옆 사람이 제대로 들었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에 언제 읊어도 아름다운 전생의 시들이 범한의 얇은 입술을 통해 흘러나와 황궁에 울려 퍼졌다.
그동안 장묵한의 눈빛은 점차 그것도 매우 기묘하게 변해 갔다.
처음부터 단순히 구경이나 하려던 신하들은 어느샌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난생처음 듣는 문장임에도 구절구절이 너무나도 오묘하고 훌륭해, ‘설마…… 이 시들을 전부 범 공자가 지었다고?’라고 생각했다.
“저녁 하늘에서 눈 내리려 할 제, 한 모금 마시고…….”
이 시는 백거이가 지은 란 시의 한 구절이었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범한은 이어서 또 이백이 지은 란 시를 읊었다.
“그림자와 함께 세 사람이…….”
이 역시 이백의 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
“주인이 손님을 취하게 할 수만 있다면…….”
여전히 계속 이백의 를 읊는 중이었다.
“어제는 날 버리고 간 사람 붙잡지 않았고, 오늘은 내 마음을 어지럽힌 사람 때문에 근심이 많아라…….”
이 역시 이백이 쓴 문장으로 또 술에 관한 시였다.
* * *
조금 전 자신들의 무례한 행동은 잊었는지 사람들은 하나둘 범한 곁으로 다가가 빙 둘러앉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시를 경청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랍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 귀가 있으니 이 시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잘 아는 것이다. 게다가 세상에 기이한 재주를 지닌 자가 아무리 많아도 고대부터 지금까지를 통틀어 이런 광경을 연출할 수 있는 자는 더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껏 시를 짓는 걸 많이 보았겠지만 오늘처럼 이런 식으로 시를 짓는 광경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시를 짓는 건 이미 생산된 배추를 장터에서 사다가 옮겨 놓는 게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범한의 입에서는 무수한 시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생각이란 걸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한데 이런 식으로 시를 짓는 게 장터에서 배추를 옮겨다 놓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물론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끔씩 기괴하게 여겨지는 구절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전생의 원작자가 시를 지을 때 인용한 구절, 그 구절과 연계된 고사를 몰랐기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들 시가 여전히…… 구구절절 빼어나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범한은 쉬지 않고 시를 읊어 나갔다. 그의 눈빛이 갈수록 기이하게 변해 가자 사람들은 그들 앞에 있는 이 청초한 젊은이를 인간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넋을 놓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린 문연각 서무는 태감들이 범한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고개를 푹 박고 태감들 대신 열심히 시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앞서 범한 대인이 말했듯이 이번에 받아 적지 못하면 이 시들은 그냥 흘려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범한은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눈을 감고 최대한 머리를 굴리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는 입으로 읊을 시구를 열심히 생각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계산하고 있었다. 범한이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다는 걸 중신들이 알아차린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짝 갈증이 난 범한은 손을 옆으로 뻗었다. 범한의 손이 허공에 떠 있자 눈치 빠른 태학사가 술을 가져다가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의 손에 조심스레 술을 들려 주었다.
《시경》에 있는 라는 시부터 고아진의 ‘만 필의 말이 한 마리도 울지 않는다’는 까지, 또 당나라 때 밝은 달을 칭송한 시, 송나라 때 봄날의 강물에 관한 시, 두보가 초가집을 지었다는 내용의 시, 소동파의 황주어를 요리해 먹은 시, 두목의 창녀에 관한 시,유삼변의 창녀에 관한 시, 원진의 를 살짝 바꾼 시, 이안거의 ‘화려하게 장식된 비단은 까닭 없이 화려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는 내용의 시, 구양수의 외손녀 사랑에 관한 시까지 읊어 버렸다. 범한은 이 시들로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억울한 사건을 미제 사건으로 만들고 있었다.
범한은 눈을 감은 채 술 한 사발에 시 한 수를 짓더니 어느새 술 세 병을 마시는 동안 시 300편을 ‘짓고’ 말았다.
넓은 기년전 안에 무수히 많은 불빛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더니 점차 눈을 감은 범한만 볼 수 있는 또렷한 화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생에 있던 시의 대가들, 전생의 쾌남자들 그리고 죽림에서 노래하던 이들이 쓴 시, 침대에서 벌어진 일들, 정자에서 결의를 하고 강가에서 눈물을 흘리는 내용이 들어간 시들이었다.
이는 범한이 살아온 전생의 전부였다. 그리고 범한은 그것을 대단히 튀는 방식으로 이 경국이란 세계에 던져 넣어 사람들의 마음에 강타를 날리고 있었다. 즉 범한은 전생의 천고(千古) 풍류 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장묵한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범한이 느닷없이 눈을 뜨더니 싸늘한 시선으로 장묵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범한의 눈은 장묵한이 아닌 저 먼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을.”
이백보다 더 대담한 시인이 어디 있겠는가.
“거대한 물결도 잠잠해지나니, 천고의 풍류 가인들이여.”
소동파보다 호방하게 시를 쓸 수 있는 이 누가 있겠는가.
“어젯밤 소슬비가 내렸으나 바람은 거세었구나. 밤새 잠이 들었건만 취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네.”
이청조보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게 시를 쓸 수 있는 이가 또 어디 있겠나.
전생의 천고 풍류 가인을 어찌 장묵한 혼자서 대적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116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묵한의 떨리는 손이 더 이상 술잔을 잡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바닥으로 떨어진 술잔은 이미 무수한 파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년전에는 이내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모를 무렵 범한은 드디어 이 미친 연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연회 석상에서 시에 흠뻑 취해 있던 사람들은 곧바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편 그동안 시를 번갈아 가며 받아 적던 학사와 태감들은 범한이 시 읊기를 멈추자 곧장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욱신거리는 오른팔을 주무르며 신선을 대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술을 많이 마신 범한이 장묵한 앞으로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그러고는 검지를 들어 장묵한 코앞에 들이대더니 그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어 딸꾹질을 하고는 그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문장을 해석하는 건 제가 당신보다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를 짓는 재주는 당신보다…… 제가 더 낫습니다.”
기년전 안은 여전히 쥐 죽은 듯 조용한 상태였다. 그래서 범한이 매우 작은 소리로 말했는데도 뭇사람들 귀에 매우 또렷하게 내리꽂혔다. 물론 이 순간 신하들은 모두 범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범한 대인의 시를 짓는 재주를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인정한 것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장묵한이 얼마나 명망 높은 사람인지는 상관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범한이 전생의 고대 명시 300수를 ‘낭송’하는 걸 들은 사람이라면 모두 시와 문장을 쓰는 재주에 있어 범한보다 뛰어난 자는 나오지 않으리라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범한이 남의 글을 베꼈느니 하는 말 따위는 제기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사람들 모두 범한의 말을 믿게 되어서였다. 즉 소위 천재라는 사람은 어떤 특별한 경험 없이도 상황에 맞는 감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시를 쓸 수 있음을 이제는 믿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그들이 본 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시선(詩仙)만 부릴 수 있다는 특별한 재주였다. 그러니 표절? 베꼈다고? 이런, 엿이나 먹어라!
범한이 다른 사람의 시를 베낄 필요가 없다는 걸 사람들이 믿게 되자 장묵한은 자연스레 거짓말쟁이로 전락했다. 그러자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장묵한을 실망, 연민,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평생 올바르게 살아온 대가가 갑자기 늘그막에 욕심이 생겨 후배와 명성을 겨루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장묵한은 범한을 괴물 대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자 흰 소맷자락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황제가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재주를 지니고도 평소에는 왜 드러내지 않았느냐?”
범한이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시문은 정서를 도야하게 해주는 것이지 누군가와 싸우고 경쟁하는 기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내뱉기에는 조금 염치없는 말이기는 했다. 오늘 밤 그가 한 행동은 누군가와 싸우고 경쟁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술 때문에 속이 불편했던 범한은 그만 참지 못하고 황제 앞에 있는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고는 삐딱한 시선으로 장묵한을 바라보며 입가를 살짝 떨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내 취하여 자고 싶으니 그대는 이만 가보시지요(我醉欲眠君且去). 이런 제기랄.”
범한은 이태백의 이란 시로 대미를 장식하고는 황제의 발밑에서 잠들었다.
* * *
이날 밤은 원래 평소와는 다른 밤이 될 예정이었다.
범한이 시선이 된 듯 발작하자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 장묵한은 암담한 심정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사남 백작가의 큰 공자를 등용하겠다고 표명했으며 황태자의 지위는 여전히 굳건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따져 보아야 할 정보가 너무나 많이 나온 상태였다. 이에 동이성 사절단이며 각부의 대신들은 돌아가 자신의 참모 내지는 동행자들에게 오늘 본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상의부터 했다. 그리고 오늘 정보 중 그들이 가장 놀라워하고 가장 많이 논의한 것은 바로 8품 협률랑이 오늘 밤 보여 준 놀라운 능력이었다.
그리고 모두 공통적으로 범한 대인이 진정한 시의 신선, 즉 시선이라는 최종 결론을 내놓았다.
물론 ‘범한이 그동안 써놓은 시를 그날 밤 한꺼번에 발표한 건 아닐까?’라며 의문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왜냐하면 소재, 배경, 그 안에 깃든 정서까지 모두 다른 시를 지었는데, 널뛰기하듯 여러 내용을 오갔고 또 그 안에 격렬한 감정을 담았으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완성도 높은 시를 완성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범한이 미친 게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테니.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 범한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점은 똑같았다. 그런데 웃기지 않은가.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그리 좋은 시들을 장터에서 배추를 가져오듯 지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배추를 그냥 집어 온다 하더라도 우선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배추부터 심어야 하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경국과 비슷한 전생에서 아름답고 격앙되고 침울한 모든 문학의 정수가 오늘 밤 범한의 입을 통해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세계로 떨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시들은 이 세계 사람들의 일부가 되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세상의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시에는 이곳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단어나 구절도 있었다. 한데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모두 범한 대인이 술이 너무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기 때문이라 생각했고, 이에 그가 술에서 깨면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할 참이었다. 이로써 범한이 이리저리 둘러대며 거짓말을 하거나, 억지로 가짜 중국 통사를 쓰거나, 4대 명저를 옮겨 쓰거나 아니면 결연한 자세로 스스로 거세하고 귀찮은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거나 하는 것은 나중에 더 두고 볼 일이 되었다.
* * *
마차가 백작가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범한은 내내 깊이 잠들어 있었다. 호사가가 범한 대신 계산해 준 내용을 보면 일단 범한이 시를 몇 수를 지었는가는 차치하고 연회 석상에서 범한이 마신 황제의 술은 아홉 근이나 되었다. 그의 시가 천하 문인들을 도취시키고 있을 때 그 자신은 이미 인사불성으로 취한 것이었다.
태감들이 황제의 발치에서 범한을 일으켰을 때 그에게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별말 하지 않았지만 범한은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래도 다행히 태감들의 부축을 받으며 출궁한 터라 범한은 자신을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혼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차에 범한이 올라타자 태감들은 종들에게 조심해서 모시라며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이 늙은 태감들은 종들에게 그들이 모시는 범한 어르신의 머리는 경국의 보배이니 넘어져 바닥에 머리를 찧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마차가 백작가에 도착했다. 백작가에는 원래 소식이 빨리 전달되는 편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큰 도련님이 황제 폐하 앞에서 능력을 십분 발휘해 장묵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일을 벌써 알고 뿌듯해하고 있었다. 종이 신바람이 나서 범한을 업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유씨 부인이 직접 마중 나가 침소까지 길을 터주고 또 직접 주방에서 들어가 해장국까지 끓여다 주었다. 범약약은 여종이 자칫 작은 실수라도 할까 염려되어 직접 수건을 쥐고는 오라버니의 바짝 마른 입술부터 조심스레 축여 주었다.
범사철은 시끄러운 소리에 깨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는 형님을 질투와 탄복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때 범건은 서재에서 붓을 든 채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안도의 마음은 옆에 있던 종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폐하께 올리는 상소문에 어떻게 써야 좋을까?’라고 고민하는 중이었다. 한편 폐하께서는 범한이 일으킨 일을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실 거란 생각도 했다. 어찌 되었든 범한은 하늘의 자손이니까.
밤은 깊어 가고 한바탕 일었던 흥분도 가시자 모두 취해 잠든 범한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으려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데 사람들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범한은 느닷없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침대 곁을 지키던 누이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허리끈 안에 옅은 청색의 환약이 있으니 꺼내 다오.”
범약약은 범한이 깨어나자 이유도 묻지 않고 서둘러 허리끈 안에 있는 환약을 꺼내 범한에게 조심스레 먹였다.
약을 먹은 범한은 한동안 눈을 감고서 온몸에 천천히 정기를 흘려보내 돌게 했다. 그러던 중 범한은 조금 전 먹은 환약이 효과가 정말로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슴팍에서 느껴졌던 불편한 느낌뿐만 아니라 머리에도 남아 있던 취기도 모두 사라졌다. 물론 범한은 정말로 취한 게 아니었다. 만약 진짜로 취했다면 황궁 연회 석상에서 시를 낭송할 때 원작자의 이름까지 모두 읊어 버리는 불상사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랬다면 그 뒤에 벌어질 상황은 정말로 볼만했을 것이다.
“밤중에 누가 날 보러 오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구나. 어쨌거나 지금 나는 술에 잔뜩 취해 자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범한은 누이동생의 도움을 받으며 잠행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는 내내 범한은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은 맑고 또랑또랑했다. 실은 아까 황궁에서 그리 심하게 취하지 않아서였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오늘은 제가 직접 오라버니를 돌볼 테니 아무도 들지 말라고 분부해 뒀거든요.”
범약약은 범한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어머님께서…….”
범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나를 살펴보러 오시지 않을까?”
“제가 여기에서 오라버니를 돌보고 있으니 안 오실 겁니다.”
범약약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더니 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오라버니, 그래도 가급적 빨리 돌아오세요.”
범한은 신발 밑창에 숨겨 놓은 비수, 머리카락 사이에 숨겨 놓은 가느다란 침 세 개, 허리춤에 넣어 둔 환약을 차례대로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 그리고 지녀야 할 물건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 걸 확인하자 누이동생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빨리 돌아오마.”
범한은 백작가 뒤편에 마련된 혼례 예식을 거행할 저택까지 돌아갔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잠행복과 내리깔린 어둠의 엄호를 받고 있어 누군가에게 발각될 염려는 거의 없었다. 다만 그가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그 옆에서 검은 빛도 동시에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 기이한 느낌을 자아내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미리 봐둔 담벼락 아래를 뚫고 나가자 그곳에는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범한이 복면 위로 드러낸 두 눈을 살며시 찡그렸다. 경도에는 야간 통행 금지는 없었지만 한밤이 되면 거리 경비는 더욱 삼엄해졌다. 순성사도 외양간 거리 사건 이후 처참하게 정리되었으며 그 때문에 지금 경도는 그 어느 때보다 경비가 삼엄한 상태였다. 이에 범한은 마차로 이동하려던 생각을 포기했다. 범한이 몸을 떨었다. 그러자 정기가 온몸을 돌면서 움직임을 더 빠르게 만들어 주었고 그는 이내 경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황궁과 백작가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은 금세 황궁 서쪽 담벼락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는 황궁과 관련한 잡일을 하는 곳인 동시에 내성과 이어지는 곳이었다. 원래 사람이 많이 다녀 시끌벅적한 곳이지만 지금은 한밤중이고 인적이 끊겨 매우 고요했다. 범한은 키 작은 나무들의 엄호를 받으며 몸을 반만 굽힌 상태에서 강 쪽으로 폴짝 뛰었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강가에 놓인 돌난간을 잡고 코알라처럼 앞쪽으로 기어갔다.
전방에 불이 몇 개 켜져 있기는 했지만 강가는 여전히 어두웠다. 그래서 범한은 조심에 조심을 기했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패도의 기에 기댄 채 숨 쉬는 것도 절반으로 줄이고 매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두 개의 다리를 지나 황궁 한쪽에 자리 잡은 고요한 숲까지 왔다. 범한은 그제야 살짝 안심이 되는지 입을 벌리고 두어 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순간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극도의 흥분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위험한 행동을 대단히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숲 바로 옆 황궁 담벼락은 높이가 다섯 장이나 되었다. 더군다나 벽면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어 어디 한 군데 붙잡고 올라갈 만한 곳이 없었다. 제아무리 무공 고수라 할지라도 단번에 이 담장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물론 이미 종사가 된 몇몇이 이 담벼락을 넘어갈 수 있는지는 아직까지 검증된 바 없었다.
범한은 4대 종사 중 하나는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묘수가 있었다. 눈앞에 놓인 주홍색 담벼락은 어둠에 물들어 푸르스름해 보였다. 범한은 그림자처럼 바닥에 찰싹 붙어 숲에서 담벼락까지 이동했다. 그런 후 등불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지대를 찾아 들어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고는 체내 패도의 기를 설산에서 따뜻하게 덥힌 후 몸 상태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117화
황궁 깊이 자리 잡은 함광전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태감 홍사상의 거처가 있었다. 홍사상은 자신의 거처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황태후는 오늘따라 몸이 안 좋았다. 하지만 황제가 오늘 연회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과 기다리고 있던 장묵한 소식에서 그가 범한 때문에 객혈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같은 노인 된 입장에서 느끼는 비애 같은 게 있었는지 황태후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홍사상은 황궁 안에서 수십 년을 지낸 태감이었다. 어린 태감들은 그의 정확한 나이를 모르고 있었으며 그저 ‘대략 그가 칠팔십 정도 되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한데 그의 나이가 어떻든 현재 홍사상이 황궁에서 맡고 있는 유일한 업무는 바로 황태후 마마의 말동무가 되어 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경국이 개국한 이래로 줄곧 황궁에서만 지냈다. 물론 젊은 시절에는 황궁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황궁 밖이나 안이나 그게 그거란 걸 알게 되자 거의 나가지 않았다.
홍사상은 땅콩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소리를 내며 씹다가 작은 술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술을 음미하듯 한 모금을 마셨다. 탁자 위에 희미하게 등잔불이 켜져 있는 가운데 오늘 기년전에서 범 공자가 술주정을 부린 일을 회상하던 늙은 태감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경국의 태감이라는 자부심이 있던 터라 범한이 북제 사람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자 나름 기분이 좋았다.
황궁 안 다른 곳에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바로 황제 폐하의 서재로, 이곳은 태감들의 방보다 훨씬 밝았다. 그는 열심히 국사를 돌보고 백성을 사랑하는 명군이었다. 이에 항상 밤에도 상소문을 읽었으며 밤참으로 따뜻한 물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황제의 습관에 익숙해진 태감들도 언제든 물을 대령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 연회는 밤 깊은 시각에 끝을 맺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서재로 들어 국정을 돌보았다. 황제는 탁자 앞에 앉아 붓을 쥐고 있었고 그 붓의 끝부분에는 붉은 먹물이 묻어 있었다. 그것도 마치 소리 없이 날아드는 살인을 위한 칼날처럼 말이다. 붓끝이 상소 위에서 움직이는가 싶더니 순간 허공에서 멈추었다. 이 순간 황제는 이맛살을 점점 더 강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옆에서 붓을 들고 있던 태감이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피곤하지 않으신지요. 그만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웃으며 질책했다.
“오늘 밤 기년전에서 네가 시를 받아 적지 않았느냐. 왜 단 한 번도 붓을 놓지 않았던 게냐?”
그러자 태감은 입술을 꿈틀거리며 잠시 웃다가 황제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라에 시의 천재가 탄생하였으니 소인, 그와 같은 일이라면 매일매일 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자 황제는 잠시 웃기만 하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밤의 어둠 속에서 이상한 존재를 느끼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황궁은 넓디넓었다. 그리고 여름밤 황궁은 참으로 고요했다. 궁녀들은 졸음이 몰려와 눈을 반쯤 감고 있었지만 감히 잠들지는 못했다. 호위병들은 성 밖에서 조심스레 황궁을 수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궁은 천하태평하기만 했다.
담벼락 한 귀퉁이, 가짜 산 옆에 오죽이 온통 연한 갈색으로 된 옷을 입고 어둠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 드러나 있어야 하는 두 눈은 여전히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 순간 오죽의 온몸은 어떤 무공의 도움이라도 받은 듯 주변 무생물과 매우 유사한 존재로 변해 있었다.
심장 박동과 호흡은 최대한으로 느려진 상태였고 이미 주변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밤바람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누가 오죽 옆으로 지나간다 하더라도 일부러 살펴보지 않는 이상은 절대 발각될 염려가 없었다.
오죽은 등불이 밝혀진 황제의 서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쓰더니 말없이 서재 맞은편 방향으로 걸어갔다. 오죽은 불빛이 비치는 곳만 교묘하게 피하며 걷고 있었다. 지형을 따라, 화초를 따라 걸었으며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산으로 들어갔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호수를 건넜다. 형체도 없는 귀신처럼 호위병들이 삼엄히 지키는 내궁 안을 무서울 정도로 느긋하게 걸어 다녔다.
방 안에 있던 등잔불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이는 원래 좋은 징조였다. 하지만 홍사상의 흰 눈썹은 오히려 불만스러운 것이 있는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 그런데도 그는 늙어 빠진 오른손에 젓가락을 쥐고 별다른 큰 동작 없이 차분하게 기름에 튀긴 땅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씹어 으깨 천천히 삼키고는 이 사이에 남은 땅콩 향을 즐겼다. 그러고는 다시 술잔을 들어 마시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주 오랜만이군, 이 황궁 안에 누군가가 들어와 돌아다니기는.”
홍사상 태감은 눈이 조금 어두웠기에 조금 멀뚱멀뚱 창밖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벌써 가볍게 한 번 튕긴 상태였다.
뜰 밖으로 통하는 문은 열려 있었다.
홍사상 태감이 들고 있던 젓가락이 강한 정기에 의해 화살처럼 밖으로 튕겨 나갔다. 슉슉, 하고 동시에 두 번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창문을 뚫고 문밖 어두운 구석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바로 오죽의 얼굴을 향해서였다.
젓가락은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이 바람 소리는 누군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만약 제대로 날아갔다면 젓가락은 화살처럼 그 누군가에게 꽂혔을 것이다. 대충 손가락을 튕겼을 뿐인데 이렇게나 신묘한 능력을 발휘하다니. 홍사상 태감은 참으로 무서운 실력을 지닌 자였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오죽은 평소보다 반응이 약간 느린 것 같았다. 몸을 늦게 돌리는 바람에 젓가락에 옷의 오른쪽 어깨 부분이 찢겼다.
슉! 젓가락이 진흙 바닥에 사선으로 박히더니 미세하게 부르르 떨었다.
정원 밖에 있는 갈색 옷의 손님을 바라보는 홍사상 태감의 눈가도 살며시 떨렸다. 상대방의 얼굴이 복면에 가려져 있어 용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누구냐?”
늙은 홍사상 태감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보아하니 신분이 낮은 시종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무서운 존재임은 분명할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오죽이 오늘 입은 갈색 의상은 새 옷이었다. 그래서 한쪽이 찢어지자 그는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범한의 계획만은 엄격히 따랐다. 이에 상대방을 주시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해하셨습니다.”
“오해라고? 설마 길을 잃었단 말이오?”
홍사상 태감이 아까보다 훨씬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황궁 안에서 길을 잃은 이는 귀하가 처음이구려. 닷새 전에도 한 번 온 걸로 아는데 줄곧 귀하를 기다렸소이다. 그대가 누군지 참으로 궁금했는데, 생각해 보니 내 옛 친구 몇몇 외에는 이리 담 큰 행동을 할 사람이 없더군요.”
오죽은 자신의 말소리에 황급해하는 느낌을 가미했다. 하지만 감정을 꾸미는 데 워낙 미숙한 터라 도리어 거짓이란 느낌이 더 강하게 났다.
“나랏일을 하고 있는 몸이라 감히 그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면전까지 가 인사를 드리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는 점, 선배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홍사상 태감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이후로 다시는 이맛살을 펴고 웃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이 후배임을 자인했으니 이는 곧 그가 몇몇 괴물 같은 늙은 친구들의 제자란 뜻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몸놀림을 보니 그는 적어도 9등급에 이르는 초강력 고수였다. 그래야 황궁 잠입에 성공해 자신에게 발각될 수 있었다. 한데 상대방의 갈라진 목소리는 일부러 후두부 근육을 눌러 변형시킨 것이어서 홍사상 태감은 음성만으로는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얘야, 이곳은 황궁이란다.”
홍사상 태감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설마 이곳이 오고 싶으면 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더냐.”
홍사상 태감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의 오른손을 활짝 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지면 위를 미끄러지듯 일어나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오죽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게다가 그의 비쩍 마른 손은 오죽의 얼굴을 거머쥐려 하고 있었다.
* * *
검은 복면 아래에 숨겨진 오죽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잘못 판단했다는 것과, 지금이 상대방을 죽일 절호의 기회란 것을 지금 오죽은 잘 알고 있었다. 죽일까, 말까? 예전 오죽이었다면 사실 고민거리가 전혀 안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오늘 밤 오죽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죽의 머리는 순식간에 계산에 들어가 벌써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는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이 순간 상대방을 죽이면 자신도 약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치를 대가보다 더 큰 문제로는 황궁 안을 지키는 호위병들을 움직이게 만들어 범한의 다음 행동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오죽은 뒤로 물러서서 무릎을 굽히고 팔을 접고는 팔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팔꿈치 아래에 있던 일반 검이 팔을 접는 순간 위로 튀어나와 홍사상 태감의 팔을 찔렀다. 오죽의 계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기술은 상대방이 검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검 끝을 겨누는 순간 상대가 실수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사상 태감도 비범한 인물인지라 오죽의 공격을 은근슬쩍 비웃고는 날카로운 소리로 꾸짖었다.
“왼쪽이냐?”
목소리만 들었을 때 홍사상 태감은 약간 놀란 사람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반격했다. 순간 그의 왼손이 소매 안에서 용처럼 튀어나와 바람보다도 빠르게 어마어마한 힘으로 오죽의 가슴팍을 쳤다. 그야말로 세계 최강의 실력이었다.
오죽은 다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무릎을 세우고 팔꿈치를 가로로 휘둘렀다. 그러자 팔꿈치 부분에 들어 있던 검이 몸 앞쪽을 가로질렀다. 스스로 목을 자르려는 행동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가슴팍을 보호하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이 동작으로 오죽은 홍사상 태감의 비쩍 마른 손바닥을 절묘하게 막아 냈다.
“앞쪽이냐?”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날카로워지더니 그가 손을 거두어들이고는 허리춤에서부터 위로 끌어 올렸다. 이 동작을 하는 동안 홍사상 태감은 매우 이상해 보일 정도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정기를 재정비했다. 그러자 그에게서 무수히 많은 기가 앞으로 쏟아져 나와 오죽을 묶어 두려 했다.
하지만 오죽은 홍사상 태감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차분하게 다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뒤로 두 걸음 옮겼을 뿐이니 쉬운 행동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산책이라도 하는 양 자연스럽게 뒷걸음치며 슬쩍 빠져나갔다고 해도, 그 순간은 홍사상 태감이라는 절대 고수와 대결하는 와중이었고 또한 홍사상 태감이 발산한 기운이 오죽을 잡으려 여러 갈래로 나뉘어 공격해 들어오는 찰나였다. 그러니 오죽이 교묘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은 피했을지는 몰라도, 홍사상 태감이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내공 공격에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어 이 순간만큼은 오죽도 살짝 허둥대기는 했다.
홍사상 태감의 이마 주름이 더욱 깊게 파였다. 그런 그가 오죽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검을 내보내는 방향을 바꾼다고 사람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출입이 금지된 황궁 안에 들어오기는 했어도 이 태감인 내가 너를 좋게 보았으니 내 곁에 머무르거라!”
오죽은 살짝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두 손을 모아 잡고 가슴팍 위로 끌어 올려 홍사상 태감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홍사상 태감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 * *
사사사삭,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오죽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마치 자기 뒤에 홍사상 태감이 없는 것처럼 검을 몸 뒤쪽으로 보내더니 이내 황궁 담벼락을 향해 내달렸다. 오죽은 참으로 빨랐다. 풀을 밟고 뛰어가더니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검을 뒤로한 자세는 쉽게 할 수 있는 동작이다. 하지만 완벽한 방어 자세이기도 했다.
“뒤쪽인가?”
순간 홍사상 태감의 두 눈에서 음침한 눈빛이 번뜩이더니 황궁 호위병을 부르지도 않은 채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그의 말라비틀어진 몸은 날개를 활짝 편 검은 새처럼 이내 오죽을 뒤쫓고 있었다.
118화
그로부터 잠시 후, 오죽이 먼저 그리고 홍사상 태감 순으로 두 사람은 높은 담벼락 앞에 와 있었다. 홍사상 태감은 자기 눈앞에 있는 갈색 옷을 입은 자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홍사상 태감은 이 갈색 옷을 입은 자가 어떻게 담벼락을 뛰어내려 도망가는지 일단 지켜보는 중이었다.
오죽은 곧장 담벼락 아래로 뛰어내렸다. 내려가는 와중에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오른발로 담벼락 아래 있던 돌을 인정사정없이 밟아 돌은 순식간에 진흙 바닥 속으로 박히고 말았다. 오른발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녔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방금 돌을 찍어 눌러 버린 힘은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가지 않고 위로 솟구치도록 해주는 힘으로 변하였다. 오죽은 하늘을 날기 시작했고 그의 몸은 어두컴컴한 담벼락을 따라 귀신처럼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죽은 세 장에 이르는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그리고 위로 도약하게 해준 힘이 다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바람 소리와 함께 그가 쥐고 있던 검이,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황궁 담벼락에 깊숙이 꽂혔다. 그러자 검을 꽂았을 때 생긴 힘으로 오죽은 몸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에 오죽은 집어 던진 돌멩이처럼 담벼락 밖으로 내던져졌다.
홍사상 태감은 헉, 소리를 냈다. 그는 방금 상황을 통해 오죽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계산한 후 체내의 정기를 재빨리 발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벽과 부딪치려던 순간 공중으로 몸을 띄울 때 자세가 아름다웠던 이유는 정기를 아주 조금만 이용했기 때문이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는 조금 전 오죽의 난폭한 행동에 비하면 많이 소심한 행동이었다.
늙고 마른 태감이 도약해 세 장 높이까지 몸을 띄웠다. 그러고는 손가락 하나를 뻗어 오죽이 담벼락에 남겨 놓은 칼자국 부분에 대고 밀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조금 더 높이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그 역시 담벼락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어 홍사상 태감은 어두컴컴한 밤에 거대한 검은 새가 움직이는 것처럼 황궁 담벼락 바깥쪽의 매끄러운 면을 피해 천천히 날아 내려갔다.
날아 내려가는 동안 홍사상 태감의 두 눈은 매가 먹잇감을 노려보듯 갈색 옷의 침입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갈색 옷을 입은 자는 매우 수상한 낌새를 풍기며 앞서 나가고 있었다. 홍사상 태감은 잠시 음험하게 웃더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나뭇가지 끝을 밟으며 민가까지 날아가 갈색 옷을 입은 자를 뒤쫓았다.
한편 호위병들은 두 절대 고수가 황궁 안에서 겨루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모두 두 사람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까닭이었다.
* * *
황궁 담벼락 아래, 암흑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범한은 쥐새끼처럼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고 저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궁둥이에 묻은 덤불과 먼지를 살살 떨어내고는 매끄러운 황궁 외벽 위에 양쪽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는 오죽처럼 강인한 육체를 지녔다거나 홍사상 태감처럼 절정의 내공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기를 운용하는 방법만큼은 이 세계의 무공 연마자들과는 달랐다. 게다가 담주성 밖에 있는 이끼가 가득 낀 미끄러운 절벽도 기어올랐었는데 이까짓 황궁 담벼락 정도야.
이 방법은 범한이 가장 믿고 있는 구석이기도 했다.
범한은 날지 못하는 박쥐처럼 황궁 담벼락 위를 천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느리기는 했어도 안정적이어서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질 일은 절대로 없었다. 만약 이 순간 아침이 밝아 누군가 먼 곳에서 발견한다면 분명 붉은색 담벼락 위에 갑자기 검고 흉측한 점이 생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담벼락을 넘어간 범한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보초에게 들킬세라 조심했고, 이에 그의 두 발을 황궁 안 풀밭 위에 안전하게 내디딜 수 있었다. 밖에 앉아 명상할 때 범한은 자신이 제작한 황궁 지도를 머릿속에서 여러 번 반복해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제 황궁 안으로 들어와 서게 되자 범한은 밤하늘 아래 놓인 거대한 궁들을 바라보며 저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들려오는 북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범한은 긴장감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범한의 머릿속에 있던 지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 통로로 변해 있었다. 범한은 마지막으로 숨을 고른 후 어둠이 짙게 깔린 황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로지 머릿속 기억에 의지한 채 인공으로 조성된 산과 화초들의 엄호를 받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범한이 황궁으로 잠입한 방법은 오죽과 유사했다. 하지만 자잘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차이가 있었다. 범한의 계산 능력이 여전히 오죽만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밤은 더 깊었고 궁 안 사람들 대부분은 자고 있었다.
범한은 함광전 밖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내궁에 고수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고수가 없는 걸로 보아 칼을 찬 호위병들은 모두 함광전 앞부분과 모퉁이 부분에 있는 것 같았다. 한데 호위병들의 위치를 대충 확인한 범한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황궁을 호위하는 사람들이 이리도 허술하다니.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 북제가 황궁에 고수라도 잠입시키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한밤중에 몰래 황궁에 잠입한 도둑 주제에 나라와 백성 걱정이라니 범한은 참으로 희한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범한의 이러한 계산에는 착오가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세계에서 호위병들에게 들키지 않고 한 번에 다섯 장 높이의 담벼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의 최고 고수밖에 없다는 걸 우선 생각해 냈어야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정말로 고수인 종사가 나타난다면 일반 호위병들로서는 속수무책일 것이란 점도 생각했어야 했다.
게다가 범한은 이 세계에서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타는 무공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란 사실도 잊고 있었다.
오죽은 닷새 전에 황궁에 들어온 적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열쇠가 함광전의 모처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범한이 가장 먼저 탐색해 볼 장소는 바로 오죽이 알아낸 장소였다. 한데 너무 오랫동안 아무 일도 없어서 그런지 황태후의 거처인 함광전은 불침번을 서는 궁녀들마저 잠들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향로를 관리하는 어린 태감들만큼은 몰려오는 졸음을 참아 가며 멍하니 깨 있었다.
희미한 향냄새가 함광전에 깔렸다. 그러자 어린 태감도 궁녀들처럼 모두 죽은 듯이 잠들어 버렸다.
등불이 희미하게 켜진 가운데 범한은 외지고 어두운 곳을 따라 침소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 침소에 들어서서 멀찌감치 놓인 거대하고 화려한 침대를 보는 순간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침대 위에는 얇은 비단 이불을 덮고 있는 노부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과연 황태후일까.
한데 이 순간 범한은 크게 탄성을 지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역사를 자신의 손으로 바꿀 수 있다는 무료한 환상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냉정하게 침대 앞으로 그리고 다시 침대 옆에까지 다가갔다. 그런 후 세상에서 최고 권력을 쥔 이 아녀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는 냉정함 까닭이었다. 바로 오죽과 비개가 범한에게 가르친 최고의 품성 말이다.
황태후의 침소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고수가 잠복해 있지는 않았다. 전생의 유명 무협 소설가 구롱(古龍)의 책에서는 황제와 황태후 곁에는 항상 숨어 있는 궁사가 붙어 있었다. 그래서 계획대로라면 분명 소설에서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범한은 보물을 숨겨 놓을 만한 곳을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바로 황태후의 침대 밑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는 아래에 깔린 나무 바닥을 손바닥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참으로 좋은 재질의 나무라고 생각하던 찰나 손끝으로 이상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두컴컴한 침대 아래 있던 범한은 두 눈을 떴다. 맑게 반짝이는 그의 눈에 황당함이 뒤섞인 기쁨이 잠시 스쳐 갔다.
범한은 담주에 있을 때 아무 제목도 쓰여 있지 않은 무공 비급을 침대 아래에, 그것도 나무 바닥 아래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넣어두었다. 전생에 본 《녹정기》라는 소설에서도 모동주라는 인물이 침대 밑 비밀 공간에 물건을 넣어 보관했다. 그런데 경국의 황태후도 침대 아래에 이런 비밀 공간을 만들어 두었을 줄이야. 사람의 상상력은 어느 때 보면 참으로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 같다.
범한은 지니고 있던 날카로운 칼을 마루판 옆으로 끼워 넣고는 살그머니 힘을 주었다. 그러자 나무판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 순간 침대 위에 있는 황태후가 몸을 뒤척이며 무어라 몇 마디 중얼거렸다. 하지만 범한은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표정 변화 없이 계속 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범한은 비밀 공간을 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안에 손을 넣어 헤집어 놓아서는 안 되었다. 한데 다행히 범한은 밤눈이 밝은 편이라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직접 들여다보았다.
비밀 공간 안에는 보석이니 은표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았다. 겨우 종이만 한 장 들어 있었다. 서한이었다. 그리고 열쇠가 하나 있었다.
범한은 열쇠의 형태를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서 매우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범한은 흰 천과 서신은 그대로 둔 채 열쇠만 꺼내 품에 넣고 침대 아래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잠시 후 범한은 다시 황궁 담벼락 아래에 나타났다.
* * *
범한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왕계년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가요.”
“알겠습니다.”
왕계년은 오늘 자신이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길 입구에서 대인을 태운 후 자신이 약속을 잡아 놓은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지금 이 마차에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대인, 염려 놓으십시오. 추밀원에서 빌려 온 마차이니 감히 막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타고 계신 것도 모를 겁니다.”
“잘했습니다.”
범한은 마음이 좀 놓이자 의자 위에 몸을 반쯤 누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늘 가짜로 취한 상태에서 발광을 하듯 시를 지은 후 다시 한밤중에 황궁으로 잠입해 물건을 찾았으니, 정신 소모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마차가 어느 뜰에 당도했다. 범한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마차에서 내려 복면을 뒤집어쓰고는 곧장 지하에 있는 밀실로 들어갔다. 왕계년이 소리를 죽여 말했다.
“대인, 이곳이 열쇠장이가 있는 곳입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의 눈에 작은 탁자가 들어왔다. 불빛 아래 놓인 작은 나무 탁자 위에 낯선 금속 공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이 공구들의 주인은 성실해 보이는 중년의 사람이었고 까무잡잡한 얼굴로 우직한 느낌을 주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열쇠장이는 일종의 직업이자 호칭이다. 그런데 중년의 사람은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 그대로 이름도 열쇠장이였다. 그러니 그의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름만 듣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왕계년에게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요.”
왕계년은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자신은 절대 알아서는 안 되며 또 그리하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곧장 밀실에서 나갔다.
“조정의 이익과 직결된 일입니다. 추밀원의 일원으로서 부탁드립니다. 나라를 위해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복면을 벗지 않은 채 조용조용하게 열쇠장이에게 말했다.
열쇠장이는 놀랐다. 그러고는 이내 최근 경도에 외국 사절단이 많이 왔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서둘러 범한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서두르되 정확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범한이 허리끈 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똑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열쇠장이가 열쇠를 받아 들고 세세히 살펴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세상에 이런 열쇠에 맞는 자물쇠는 없는데요.”
“상관없습니다. 이 열쇠를 똑같이 복제만 해주면 됩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어렵겠군요. 참으로 복잡하게 생긴 열쇠입니다. 설령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똑같이 만들어 낸다 해도 이것에 맞는 자물쇠가 있을지는 저도 보장 못 합니다.”
“잘됐군요. 그러면 어서 시작해 줘요.”
범한은 열쇠장이의 답변이 의외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그의 음성에는 오히려 냉랭함만 감돌았다.
119화
열쇠장이는 긴장한 상태에서 열쇠 복제에 들어갔다. 이후 밀실에서는 철을 연마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범한은 긴장한 상태에서 밀실 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오죽이 홍사상 태감을 얼마나 잡아 둘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늙은 홍사상 태감은 함광전 지근거리에서 기거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그가 벌써 황궁에 돌아와 있다면 아무리 열쇠 복제에 성공해도 범한이 다시 황태후의 방으로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열쇠장이가 드디어 열쇠를 복제해 냈다. 땀범벅이 된 그가 범한에게 열쇠를 건넸다. 두 열쇠를 비교해 보니 정말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았다. 더군다나 녹슬어 생긴 얼룩도 거의 똑같아 보였다. 드디어 마음이 놓인 범한은 살며시 웃으며 물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범한은 여전히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터라 그의 웃는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소인은…… 도둑질을 했습니다.”
여전히 땀에 절어 있는 열쇠장이는 비밀스러운 일을 마친 자신에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고 있었다.
범한은 열쇠장이가 자신의 동업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실눈을 뜨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공구와 거푸집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범한은 거푸집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푸집을 손에 쥐고는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패도의 기를 몸 밖으로 빠르게 발산해 거푸집을 산산조각 냈다.
범한은 다시 왕계년에게 모든 금속 공구들을 다시는 쓸 수 없도록 망가뜨리라고 했다. 그리고 열쇠장이에게는 남쪽으로 가 한동안 머물라고 했다. 한시름 놓은 범한은 황궁에 다시 잠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 * *
범한이 함광전으로 다시 들어왔을 무렵, 그가 뿌려 놓은 향은 냄새가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는 함광전은 여전히 평화롭고 조용했다. 범한은 귀신처럼 다시 침대 아래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복제한 열쇠를 넣은 후 들고 온 접착제를 발라 비밀 공간을 감쪽같이 원래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이제 조용히 궁전에서 나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무렵, 범한은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때 범한의 눈이 황궁 다른 쪽에 자리 잡은 작은 별궁으로 향했다. 그곳은 지금은 광신궁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장 공주의 처소였다.
만약 범한이 다른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오늘 완벽하게 일을 마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즉각 황궁에서 나가야 했다. 그런 후 일이 점차 커지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열쇠를 얻었다는 기쁨에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범한은 이내 조금 의외의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범한은 암흑이 엄호만 해준다면 아무리 경비가 삼엄한 황궁 안일지라도 자유롭게 다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오죽과 비개라는 야행성인 두 암흑 대사의 방법을 따라 광신궁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복도를 따라 오던 중 계속 하품하던 궁녀와 스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광신궁 안에 아직 불이 밝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광신궁은 문이 하나밖에 없는 별궁이었고 다른 궁과 달리 궁 밖에 작은 담벼락이 하나 더 둘러쳐져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조그맣고 더러운 고랑 따위 뭐가 무섭겠는가. 한데 범한은 시대를 풍미하던 많은 고수들이 평범한 사람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신중하게 행동했다. 범한은 조심스럽게 광신궁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우선 눈을 감고 숨부터 죽인 후 복도에 있는 굵은 기둥을 타고 위로 기어 올라갔다.
범한은 매끄러운 기둥을 손바닥으로 붙잡았다. 그런데 오늘 정신을 너무 많이 소모한 터라 조금 조바심을 내서 그런지 기둥 위로 올라간 범한은 꽤 힘들어 보였다. 범한은 다시 조심스럽게 광신궁 천장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감히 기와를 열고 훔쳐보는 행동까지는 하지 못했다. 결국 범한은 실눈을 뜨고 유리 기와 중 가장 들킬 염려가 없는 반투명의 기와를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운이 너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궁전 꼭대기에는 원래 반투명의 기와가 필요 없었다. 한데 장 공주가 태양 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을 좋아한 터라 범한은 지붕 꼭대기에서 반투명 기와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범한은 이내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매 동작을 간결하고 안정적으로 해나갔다.
반투명한 기와 아래에는 등불이 켜 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범한은 밤에도 잘 보이는 시력을 활용해 모든 걸 똑똑히 보았다. 게다가 뛰어난 청력으로 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었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고 게다가 운까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어서였다.
* * *
장 공주 이운예는 나른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평상에 기대 있었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새하얗고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 아래로 명확히 드러난 신체 곡선은 성숙하면서도 풋풋함이 있었다. 만약 그녀의 이러한 모습을 세상 남자들이 보았다면 모두 그녀의 맨발 아래에 엎드려 그녀를 경배했을 것이다.
한데 장 공주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누이동생이었다. 그러니 미색으로 누군가를 유혹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있는 일흔은 족히 되어 보이는 자, 그러니까 오늘 밤이 오기 전까지 세계 제일의 도덕군자이자 문장의 대가라고 불렸던 그 역시 미색으로 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묵한이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저는 할 일을 마쳤습니다. 그러니 장 공주마마께서는 협의한 내용을 이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 공주는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가짜 족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환하게 웃자 순간 방 안에는 봄기운이 도는 것만 같았다. 장 공주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대, 장묵한 대가가 범한을 밟아 버리길 바랐소. 다시는 경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말이오. 한데 그대는 내가 원한대로 해주었소?”
장묵한이 흐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오늘 그자를 궁지로 몰아넣은 일은 제가 17년 동안 쌓아 온 청렴한 명성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제가 졌으니 결과에 깨끗이 승복합니다. 범한 공자는 실로 하늘에서 인간계로 떨어진 시의 신선 같았습니다. 만약 공주마마께서 제게 그사실을 상세히 알려 주셨다면 이 같은 굴욕은 감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장 공주가 한탄했다.
“나도 그 어린애가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것만 알았을 뿐, 그러한 광기가 있는 줄은 몰랐소.”
눈을 감은 장묵한의 얼굴 위로 안타까운 표정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안타까워하는 건 다름이 아닙니다. 반평생 도리를 지키며 살았는데 늙어 이리 추한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범한 공자가 인간의 모든 마음을 담은 300편의 시를 짓지 않았더라면 천하 사람들은 이 늙은이의 말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범 공자는 남의 글이나 베끼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혔겠지요.”
노인이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그가 담담하고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돌아왔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눈을 뜬 장묵한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괜찮겠지요.”
“괜찮겠지요?”
장 공주가 맨발을 동동 구르며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장묵한 대가! 황태후마마께서 당신의 재능과 덕을 높이 사, 내 그대를 궁에 초대해 머물게 했소. 게다가 나는 그대가 요청한 일을 이미 잘 처리해 주었단 말이오. 그런데 그대도 나처럼 약속을 지켰소? 설마 두 나라 간에 협의가 체결돼 그대의 형제가 곧 영접을 받으며 귀국하게 되니, 범한이 명성을 이어 가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것 아니오? 이 늙은 여우 같으니, 거짓으로 재주를 아끼는 척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소?”
장묵한이 엷게 웃음을 지었다.
“잘못된 건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이 늙은이가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에 장 공주마마의 계략에 빠져 경국으로 오게 된 것이지요. 제 형제는 반평생 수없이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장 공주마마께서 약속을 되돌릴 생각이시라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북제로 돌아간 후 제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수밖에요. 귀국의 감찰원 감옥에 갇혀 있는 제 형제가 조금이라도 더 편히 지내게 해달라고 말이지요.”
장 공주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북제가 소은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 건 내가 그대의 제자인 황제에게 언빙운을 팔아넘겼기 때문이거늘. 즉 이 거래는 나와 그대가 아닌, 그대의 황제와 나와의 거래란 말이오. 한데 나는 약속을 이행했는데도 그대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 오늘 밤 기년전에서 피를 토하는 척하며 패배를 인정할 게 아니라 오히려 범한이 그 시를 베꼈다고 쐐기를 박았다면, 일이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모를 일 아니오! 그러니…… 장묵한 대가, 북제로 돌아간 후 자네 제자인 황제에게 내 말을 똑똑히 전달하시오. 북제는 광신궁에 있는 나에게 선심을 하나 빚졌다고 말이오.”
그러자 장묵한이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범한 공자는 큰 재목입니다. 시 쓰는 재능은 그를 따라갈 자가 없는데 이는 장 공주마마께서도 충분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범 공자는 한동안 이 세계에 출현하지 않았던 하늘의 자손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늘의 자손이 태어났는데 왜 경국에서는 서둘러 보호하기는커녕 도리어 죽여 없애려 하는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참으로 괴이합니다. 게다가 범한 공자가 정말로 시를 베꼈고 그게 사실로 드러났다고 해도 대체 왜 해쳐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장 공주가 담담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나는 하늘의 자손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말 따위는 안 믿소. 장묵한 대가는 경서에 통달했으니 성인의 말을 잘 알고 있겠지. 만약 범한이 하늘의 자손 따위인데도 그의 능력이 고작 시나 읊어 대는 작은 재주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경국 조정으로서는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거 아니오! 게다가 내가 왜 범한을 그리 대하는지는 대가가 신경 쓸 일 아니오.”
장묵한이 수십 년 동안 천하 지식인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자신의 지위를 걸고 범한을 밟으려 했던 건 모두 장 공주의 부탁 때문이었다. 한데 그는 경국 조정의 얽히고설킨 내부 사정을 하나도 몰랐을뿐더러 장 공주와 범한이 곧 장모와 사위 사이가 될 것이란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반면 범한은 장 공주가 왜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은 광신궁 지붕 위에서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이 상황을 엿보고 있었다. 한데 반투명 유리 기와에 얹어 놓은 손가락 세 개가 살짝 시려 왔다. 더군다나 유리 기와를 통해 30대의 아름다운 공주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범한의 두 눈은 점점 차갑게 변하고 있었다. 연회가 열린 기년전에서 곽보곤이 발언을 할 때 범한은 황궁 내 어느 귀한 분과 장묵한이 연합해 자신을 경도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표절 사건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인품과 연계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때 만약 범한이 발광하듯 시를 쏟아 내 신하들과 황족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면 모두 인품이 뛰어난 장묵한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범한 자신은 글 도둑으로 낙인이 찍혔을 게 뻔했다. 비록 처벌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고 벼슬길도 어찌어찌해 볼 수 있었겠지만 임완아와의 혼사는 엎어졌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황태후가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는 장 공주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범한의 가슴을 더욱 철렁 내려앉게 한 건 다른 내용이었다. 바로 이번 두 나라 간 비밀 협의의 중심 인물이자 북위의 밀정 우두머리 소은이 장묵한의 형님이란 사실이었다. 이는 곧 장 공주가 장묵한까지 동원해 자신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경국이 북제에 심어 두었던 밀정 우두머리, 그러니까 조정 대신의 아들인 언빙운을 그녀가 직접 적국에 바쳤다는 의미였다.
참으로 대담한 짓거리 아닌가. 이런 음험한 짓까지 했는데 황제는 어찌하여 자신의 친누이가 나라의 체통을 깎아 먹는 짓을 해도 그냥 내버려 두는 건지…….
이맛살을 찌푸린 채 훔쳐보고 있던 범한에게 한여름 밤의 살랑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범한의 마음을 살짝 진정시켜 주었다. 범한은 자신이 들은 비밀 내용으로 상대를 협박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누이동생이자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딸이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신분만으로도 그녀에게는 경국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더군다나 신하까지 팔아 가면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120화
범한은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있었지만 순간 자신도 모르게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범한에게 이 여인은 미치광이이자 변태였다.
범한은 음모의 전모를 본 것만 같았다. 장 공주와 북제 황제 간의 협의란 것은 정리해 보면 결국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감찰원이 네 해 동안 북제에 심어 두었던 밀정의 우두머리 언빙운을 장 공주가 팔아 넘긴다. 둘째, 북제가 언빙운을 가지고 경국에 있는 소은, 사리리와 맞교환한다. 셋째, 두 사람을 돌려받기 위해 북제가 지불하는 대가는 고작 도덕적이기로 유명한 대가 장묵한을 경도로 파견해 그의 입을 통해 범한 자신을 망쳐 놓는 것이다. 넷째, 장 공주는 이번 일을 통해 겸사겸사 지금껏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던 감찰원을 혼내 주려 한다.
한데 범한은 장 공주와 북제 황제 간 협의에 어떤 내용이 더 들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국 밀정 우두머리를 북제에 팔아 버린 공주가 겨우 그 정도의 대가만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뒤에는 더 무서운 게 도사리고 있을 거라 추측만 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런데도 자기 친누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황제는 정말로 모르고 있는 걸까.
허리춤에 넣어 둔 딱딱한 열쇠를 더듬어 보던 범한의 두 눈에서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장 공주에게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범한은 밤바람을 맞으며 숨을 고르고는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황궁은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다. 그러니 좋은 운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붕에서 기둥을 타고 내려온 순간, 범한은 복도 끝에서 두 사람이 등불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 깜짝 놀란 범한은 조심스레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겼다. 그리고 등불이 가까이 다가오자 어둠 밖으로 몸이 나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발의 위치를 조금씩 옮겼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과 스치고도 알아채지 못한 궁녀처럼 이들도 그냥 지나쳐 가게 해달라고 어둠 속에서 기도했다.
궁녀들이 기둥이 있는 곳을 지나쳐 가는 순간 범한은 기둥의 반대편으로 이동해 온 상태였다. 그런데 궁녀 하나가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얼핏 보기에도 어느 정도 지위가 있어 보이는 궁녀는 자신을 따라온 어린 궁녀에게 작게 몇 마디 건넸다. 어린 궁녀는 맑고 고운 소리로 조심스레 대답하고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중년의 궁녀는 제자리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중년의 궁녀는 범한과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범한은 조심스럽게 정기를 이용해 호흡을 조절했다. 그리고 기둥 뒤편에 있는 궁녀의 호흡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호흡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걸 범한도 알게 되었다. 이제 보니 단순히 우연히 멈추어 선 것일 뿐 자신을 발견해서 그런 게 아니란 생각에 안심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기둥을 가운데 두고 서 있었다.
갑자기 복면 밖으로 드러난 두 눈에서 차가운 빛이 반짝였다. 범한은 왼쪽으로 수십 촌 되는 곳까지 몸을 틀어 옮겼다. 타고난 위험 감지 능력이 그를 순간적으로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해준 것이다.
범한이 서 있던 지점에는 아주 예리한 칼날이 쥐도 새도 모르게 나무 기둥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그런데 기둥이 너무 굵은 탓에 검 끝만 빼꼼 삐져나온 정도였다. 하지만 범한에게 살기등등한 경고도 날리고 있었다. 범한이 몸을 틀지 않았다면 바로 이 순간 검 끝이 범한의 요골 한가운데를 찔렀을 것이라고 말이다.
범한은 차분하게 흡사 미꾸라지처럼 기둥을 감고 돌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 중년 궁녀의 왼쪽 팔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무공을 할 줄 아는 사람들과 달리 범한은 상대방이 검을 뽑는 동작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궁녀는 자신이 검을 뽑는 걸 자객이 저지할 거라 생각해 모든 정기를 오른팔에 집중했다. 한데 그러는 바람에 왼팔의 방어력이 많이 약해지게 되었다. 그 바람에 범한의 작전은 제대로 효과를 보았고 궁녀는 기습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종이를 찢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궁녀가 기둥에 박힌 장검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지만 범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패도의 기를 상대방의 왼쪽 팔에 무지막지하게 주입해 버렸다. 이 궁녀는 무려 7등급에 달하는 무공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정기는 처음 접해 보는 터라 경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그것도 무수한 작은 칼날이 부드러운 혈관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는 것과 같은 통증을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선명한 통증에 궁녀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결국 내려던 경고음 대신 작고 기괴한 소리만 그녀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범한은 궁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이 광신궁에 들 때 마중 나왔던 사람이란 걸 알아차렸다. 눈썹이 유난히 길었고 생김새가 특이해 기억하고 있었다.
궁녀의 눈썹은 심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 체내에 있는 정기가 범한의 것과 억지로 힘겨루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상대방이 자신의 손을 잡는 순간 정기가 약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기가 약해진 부분에 몸 밖에 있는 정기가 들어가도록 했다. 한데 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가 고통만 밀려들 뿐이었다. 더군다나 온몸은 갑자기 찾아온 불균형 때문에 이내 살짝 마비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하는 순간, 그녀는 오른쪽 목에 살짝 마비가 오더니 이어 온몸이 약간 굳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손가락 두 개를 그녀의 목에서 막 뗀 상태였다. 그런 후 범한은 침 위에 발라 놓은 독약으로는 그녀의 목구멍을 확실히 막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해 즉각 궁녀의 상복부와 늑골이 연결된 부위를 오른쪽 손등으로 내리쳤다.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궁녀의 가슴 부분이 함몰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신체의 다섯 곳에서 피를 쏟으며 즉사했다.
아까 그 어린 궁녀가 자객이 침입했음을 알리러 간 것인지 아니면 범한 자신의 손에 죽은 고수 궁녀의 명령을 받아 유인용 진을 치러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방금 대결에서 고수 궁녀가 소리치려는 것을 저지했다고는 해도 분명 황궁 내 진짜 고수의 이목을 끌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에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는 처리도 하지 않은 채 앞발을 바닥에 내딛고는 쏜 살처럼 몸을 날려 곧장 자신이 황궁에 침투할 때 이용한 담벼락 방향으로 내뺐다.
범한에게 담벼락은 여전히 높았고 더 빨리 올라가지 못한 범한은 슬슬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겨우 담벼락 꼭대기까지 올라온 순간 몸 뒤쪽에 있는 공기가 몸서리치는 것처럼 머리 뒤쪽에서 웅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범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황궁 저 멀리에 있는 동태를 살피기 위해 세워진 각루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웬 장군 하나가 자신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이내 화살 하나가 영혼을 잡아먹는 신물(神物)처럼 밤공기를 가르며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범한이 숨을 들이마실 때 하늘을 가르기 시작한 화살은 그가 숨을 내쉬는 순간에는 이미 눈앞에 와 있었다.
화살은 무슨 괴팍한 영혼이라도 실은 것처럼 인정사정없이 범한에게 향했다. 범한은 크게 소리를 질렀고 그 순간 그의 얼굴을 덮고 있던 복면이 갈가리 찢어졌다. 범한이 생사의 기로에 선 바로 그 순간, 열여섯 해 동안 묵묵히 연마한 이름조차 모르는 패도의 기가 미친 듯이 날뛰며 그의 양손으로 거칠게 밀고 올라왔다.
순간 범한은 공중을 향해 두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주먹은 기가 막히게 정확히 화살의 대를 가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 두 주먹에 실린 광폭한 정기와 화살에 실린 강력한 힘이 맞섰다. 화살대는 산산조각이 났고 화살촉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범한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 밤하늘을 갈랐다.
범한이 화살을 조각내는 순간 황궁의 밤하늘에도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 굉음 탓에 사람들은 담벼락에 내리친 천둥소리라도 들은 듯 놀라 잠에서 깼다.
범한이 두 주먹으로 막아 낸 화살은 일반인이 쏘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맹렬하고 강력했다. 비록 막아 내기는 했어도 범한은 온몸의 정기가 소진되고 말았다. 결국 비틀대던 범한은 검은 잠행복을 밤바람에 펄럭이며 처참하게 담벼락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저 멀리 각루 위에 있는 자는 황궁의 대내통령 연소을이었다. 연소을은 자객이 담벼락 아래로 떨어지자 실눈을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무서운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아직 죽지 않았다. 가서 잡아 오너라.”
“네!”
수하 호위병이 그의 명령을 따라 범한에게 향했다.
바로 이때,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던 범한은 바닥과 부딪치려는 찰나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 한쪽 손, 한쪽 발을 땅에 댄 자세로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착지하는 순간 발생한 큰 충격 때문에 소리가 크게 난 것은 물론 찢어진 검은 복면 위에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범한은 신음하며 서둘러 황궁 밖으로 향하는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각루에 있던 호위병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경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다음 날. 황궁 담벼락 아래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은 작은 방이 있었다. 그 안에는 늙은 홍사상 태감이 기분이 조금 안 좋은 사람처럼 눈을 반쯤 감고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두 명의 고위 무관들이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은 채 묵묵히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지난밤 집으로 돌아가 쉬었던 부통령 궁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크게 놀라셨습니다.”
지난밤 화살을 쏘아 범한을 담벼락으로 추락시킨 대내통령 연소을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보좌하던 궁녀 하나가 죽어 장 공주마마께서 지금 단단히 화가 나 계십니다.”
두 사람이 입을 떼자 홍사상 태감이 그제야 천천히 눈을 뜨고 힘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제는 내가 유인책에 당했다네. 그래서 황태후 어르신께서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으시네.”
“대체 어떤 자였습니까?”
궁전이 질문을 던진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홍사상 태감이 병환 중이기는 해도 이 위협적인 절대 고수의 눈에 띈 이상은 상대가 아무리 유인책을 구사해도 도망갈 구석은 없기 때문이었다.
“모르겠네.”
홍사상 태감이 엷게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자 수준은 9등급 중에서도 중상 사이였네. 한데 경도 곳곳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더군. 그것도 한밤에. 내가 그자를 따라 경도를 한 바퀴 돌고도 결국에는 놓쳤으니 그자는…… 대단한 실력자란 뜻이라네.”
연소을은 올해 서른다섯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왕성하고 기개 넘치는 시기에 황궁 호위 책임자인 시위대내통령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는 홍사상 태감이 말을 마치자 싸늘하게 쓱 한 번 쳐다보고는 질문을 던졌다.
“홍사상 태감께서는 그자를 어디에서 놓치셨나요?”
“동이성 사절단이 머무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골목일세.”
그러자 궁전이 말했다.
“오늘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홍사상 태감께서 젓가락으로 찢어 놓은 자객의 옷 조각을 감찰원이 조사한 결과 천상단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연소을이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사이 궁전은 말을 이어 나갔다.
“감찰원 조사 내용에 따르면 동이성 사절단이 얼마 전 천상단에서 옷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사절단 명의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명의로 옷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홍사상 태감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부통령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궁전이 미소를 짓고 설명했다.
“옷을 맞추는데 왜 가명으로 해야 할까요? 분명 아주 작은 흔적조차 우리에게 남기지 않기 위해서겠지요. 이런저런 정황을 놓고 보았을 때 첫 번째 자객은 분명 동이성에서 온 자입니다. 게다가 9등급의 실력이라면 사고검의 수제자이자, 요 며칠 동안 경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운지란이 있습니다.”
궁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소을이 별안간 눈을 부릅떴다.
“운지란이 아니네. 동이성 사람이 황궁에 잠입하는데 무엇 하러 새 옷을 살 필요가 있겠는가.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아무나 때려눕힌 후 옷을 빼앗아 입으면 될 것을. 운지란이라면 그런 식으로 쉽게 처리했을 걸세.”
이에 홍사상 태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자는 9등급의 실력자임에도 자신의 검법을 다른 사람 것처럼 꾸미더군. 하지만 사고검과 같은 보법을 쓰기에 내 흥미를 끌었다네. 그런데도 만약 운지란이 아니라면 동이성에서 또 다른 고수가 경도에 왔다는 말인가? 그것도 운지란의 명령도 무시하면서까지?”
“뒤집어씌우려는 가능성이 매우 크군요.”
121화
궁전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참으로 교묘한 수법입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운지란에게 다 덮어씌우려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동이성에서 사고검으로부터 검법을 전수받은 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운지란을 포함해 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사람 모두 용의자겠군.”
“그러면 대내통령이 담벼락 아래로 떨어뜨린 침입자에 대해 이야기해 봄세. 대내통령이 쏜 화살 때문에 온 황궁이 깜짝 놀랐다지. 한데 안타깝게도 침입자는 맞히지 못했다고 들었네.”
전해 들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홍사상 태감의 말투만 보면 그와 대내통령은 손발이 척척 맞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한데 대내통령 연소을도 애당초 이 고자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터였다. 하지만 이 고자 홍사상 태감이 황궁에서 막강한 실력을 지닌 자란 것은 알고 있으므로 먼저 차갑게 비웃는 소리를 내고는 대꾸했다.
“두 번째 자객의 무공 실력도 9등급이었습니다. 비록 9등급 하(下)의 실력이기는 했지만, 제 활로 단번에 죽였다면 저는 왜 4대 종사 중 한 명이 되지 못했을까요?”
“그자도 9등급이라고요?”
궁전은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무공 실력은 지금까지도 8등급 언저리에서 오가며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어젯밤 9등급의 고수가 그것도 두 명이나 황궁으로 잠입했다는 말을 듣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이 복잡해져 놀라고 말았다.
“경국에서 9등급 실력의 고수는 겨우 일곱 명밖에 없고 경도에 있는 건 모두 네 명이네. 세상에 9등급의 고수가 그리 많을 리 없지.”
홍사상 태감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분명 연소을의 판단을 믿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연소을이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난감한 사람은 늘 궁전이었다. 이에 궁전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폐하께서 우리에게 이번 사건을 열흘 안에 마무리를 지으라 엄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조금 있다가 저는 감찰원과 함께 각 궁의 상황을 살펴보고 자객이 왜 그런 큰 위험을 무릅쓰고 황궁에 잠입했는지부터 알아보려 합니다.”
그러자 연소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중에 나타난 자와 관련해서는 단서가 없다네. 하지만 홍사상 태감께서 따라간 자는 분명 동이성과 연관이 있었어. 그러니 동이성 사절단부터 살펴보게. 그 옷이 어떤 경로로 주문된 것인지부터 살펴보란 걸세.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구에게 어떤 옷이 돌아갔는지 알아보는 거겠지.”
이제야 막 조사 방향을 잡고 있는데 어린 태감 하나가 갑자기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황제가 내린 성지를 읽었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에 대한 조사를 경도 수비대장 섭중에게 모두 일임하고 황궁 금위(禁衛)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모든 걸 함구라는 내용이었다.
어린 태감이 나가자 방 안에 남은 세 사람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연소을이 먼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황제 폐하가 이 셋 중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상태였다. 이어서 홍사상 태감이 뒷짐을 진 채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무척 평온하기만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경도에서 자객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 * *
황제가 세 사람에게 성지를 내린 이유는 사실 범한을 구해 주기 위한 처사였다. 원래 범한이 세운 황궁 잠입 계획은 여러모로 완벽에 가까웠다. 오죽에게 갈색의 새 옷을 입도록 강요해 꼬리가 잡힌 것만 빼면 말이다.
범한은 동이성과 관련해 조용히 조사하던 중 동이성 성주의 아들이 경도에서 입는 복고 양식의 의복을 좋아해 천상단에서 옷을 대량으로 주문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천상단에 주문할 때 다른 사람 명의로 옷을 주문하는 이유도 알아냈다. 이유는 단순했다. 원래 동이성은 천하 상인들의 집결지였다. 어린 성주가 남쪽 오랑캐인 경국의 복식을 흠모한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동이성에서 한가락 한다는 상인들에게 욕을 잔뜩 얻어먹을 수 있어서였다.
물론 범한이 이런 사족 같은 계획을 덧붙인 이유는 전부 오죽 아저씨가 완벽하게 사고검의 검술을 재현해 내길 바라서였다. 그러니 오죽이 그리도 완벽히 사고검으로 변신할 줄 미리 알았다면 범한의 뒤집어씌우기 계략은 더욱 완벽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황궁에서는 동이성에 있는 다른 두 명의 9등급 고수를 계속 의심했고, 감찰원 역시 황궁에 자객이 침입한 날 사고검의 다른 두 제자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자객과 범한을 한데 놓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모두 자객이 침입한 날 밤 경도의 높은 관리들이 범한이 기년전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300편에 달하는 시를 짓고, 북제의 고명한 대가 장묵한이 피를 토하는 광경을 목격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에 떡이 되도록 취한 범한이 황제 폐하의 발아래 쪽에 쓰러진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한 때문이었다.
한데 이는 모두 인간의 사유 능력에 맹점이 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즉 취한 범한이 침대에 뻗어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 그리고 사람이 어떤 놀라운 일을 하고 나면 곧장 다른 일에 착수할 수 없기에 생겨난 착각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는 ‘불응기’란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생물학에서 흥분이 있은 후 휴식 상태에 들어가면 연이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기간을 일러 불응기라고 한다. 그런데 범한처럼 능력을 최고치로 발휘하고 난 후 곧바로 또 최고치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불응기가 없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범한은 안전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창백했다. 침대 옆에는 그가 숙취에서 덜 깬 사람이란 걸 보여 주는 것처럼 동으로 된 대야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대야는 깨끗하기만 했다. 그가 토해 놓은 토사물은 일찌감치 비워졌기 때문이다.
지금 범한의 시중을 들고 있는 건 여종이었다. 범약약은 범한의 성화로 침소로 돌아가 잠든 상태였다. 지금 범한의 얼굴이 창백한 건 변장을 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리고 구토를 한 것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모두 연소을이 정기를 실어 쏜 화살에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에 범한은 가슴과 복부가 답답해 며칠간 요양을 해야만 했다.
영혼을 잡아먹을 듯했던 치명적인 화살 공격을 떠올릴 때마다 범한은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생사의 경계에서 만약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폭발력을 발휘하지 못했더라면 범한은 어쩌면 그때 화살에 맞아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도 먼 거리에서 날아온 화살이 그처럼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녔을 줄은 범한으로서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은 황실 시위대내통령은 9등급 상(上)에 달하는 무공 실력을 지닌 자로, 언제든지 공격 능력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실력자란 걸 알게 되었다.
범한의 양손이 화살을 산산조각 내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방어 능력은 빠르고 맹렬히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기에 겨우 화살대 부분만 파괴해 위험에 빠질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손에 상처를 입지 않은 건 모두 화살대만 파괴된 까닭이기도 했다. 만약 손에 상처라도 나서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그때는 범한으로서도 달리 해명할 방도가 없었다.
범한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광신궁에 잠입했던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무언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나머지 이유는 열쇠 때문이었다. 오죽이 홍사상 태감을 유인해 밖으로 나갔으니 그로서는 황궁 사람들이 함광전과 열쇠를 연관 지어 생각할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다.
범한이 허리춤에 손가락을 살포시 얹더니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허리 쪽에 숨겨 놓은 단단한 물건이 만져지자 범한은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렇게나 좋은 운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은 다시는 침대 아래 비밀 공간에 물건을 숨겨 두지 않기로 그리고 다시는 함부로 황궁에 잠입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며칠 동안 술병이 나 요양하는 척하는 사이 황궁 내에서 일어난 ‘시선 강림 사건’ 이야기는 경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그 며칠 동안 권문귀족 지식인들이 수도 없이 사남 백작가의 문지방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이때마다 범건은 아들이 정신을 과도하게 소모해 휴식이 필요한 상태라며 손님들을 들이지 않고 냉정하게 돌려보냈다.
그런데도 방문객은 끊기기는커녕 갈수록 더 높은 신분, 더 큰 명성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개국 공신들까지 찾아오고 나자 그다음에는 고위급 장군들까지 범한을 만나러 찾아왔다. 이에 범건이 골치를 썩이고 있을 무렵, 범한은 백작가 사람을 시켜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그들을 매우 애석하게 할 결정을 선포해 버렸다.
바로 ‘범한은 오늘부로 시를 짓지 않겠습니다!’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범한이 허튼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뿐 그 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나마 범한의 성정을 조금 이해하고 있는 정왕부, 임 소경과 신 소경 정도만 범한의 말이 사실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아직 모든 여파가 가시지 않았으니 나중에 천천히 다시 논의해 보자는 입장이었다.
경도를 덮쳤던 한여름의 열기도 점점 끝 무렵으로 치달을 때, 가을을 알리는 비가 가볍게 흩뿌려졌다.
사실 입궁한 날로부터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범한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긴 사흘로 느껴졌다. 상자는 침대 아래에 있고 이제 열쇠도 수중에 들어왔으니 무엇보다 가장 먼저 열쇠로 상자를 열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범한은 사흘 동안 참고 또 참았다. 어린아이가 엄마가 먹지 말라는 과자를 주방에서 훔친 후 옷장에 몰래 숨겨 놓고는 그 과자가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감에 잠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매일 잠자기 전 옷장을 한번 쳐다보기만 하고 정작 과자는 먹지 않다가 결국에는 그 과자를 썩혀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상자는 부패하거나 변질될 리 없어 그대로 놔둬도 됐고, 범한은 사흘이 지난 오늘 저녁에 그것을 잊지 않고 꼭 먹어 버릴 작정이었다.
창밖에는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비는 후원에도 곧 가을 서리를 맞아야 하는 화초 위에도 떨어졌다. 범한은 불도 켜지 않은 채 방 안에 있었다. 그의 눈은 한밤중에도 충분히 잘 보였기 때문이다. 상자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황동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구멍 안으로 차분히 열쇠를 집어넣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 앞쪽에 있던 판이 튀어 오르며 작고 검은 판 같은 게 드러났다. 판 위에는 희한하게 생긴 작고 네모난 격자무늬 같은 게 있었다. 범한은 그것을 가볍게 눌러 보았다. 그러자 격자무늬가 아래로 내려갔다. 모든 격자 위에는 이 세계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이 있었다.
범한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는 쓴웃음이었으며, 확신에 찬 웃음이었고, 한참을 추측하다가 드디어 확답을 얻게 되자 안도감에 지은 웃음이었다.
범한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눈을 감으며 그냥 웃어 버렸다. 이 세계가 정말로 미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범한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등자경이 보내온 최상품 담뱃잎을 담뱃대에 넣고는 불을 붙여 마음부터 진정시켰다.
담배 냄새가 너무나도 좋았다. 경국이라는 세계로 온 후 처음 피우는 담배였기 때문이다. 흰 연기가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사이 뜰에서는 가을비가 부슬부슬 적막하게 내렸다.
이제 범한은 자신이 더 이상 외톨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 * *
이 세계 사람들은 이 검은색 격자가 대체 무엇이며 이 위에 드러난 이상한 무늬가 무엇인지 절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달랐다.
상자가 열린 후 나타난 것은 바로 범한이 전생에 익숙하게 사용했던 ‘자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이상한 무늬는 사실 스물여섯 개의 알파벳과 아라비아 숫자 그리고 범한에게 가장 익숙한 F5 키였다.
자판을 보는 순간 범한은 자신이 오랫동안 혼자 추측만 해왔던 것의 가장 유력한 증거를 찾게 된 셈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그러니까 섭경미라는 여인은 자신과 같은 세계에서 넘어온 사람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범한은 광신궁에서 장 공주와 장묵한이 대화 중에 나온 ‘하늘의 자손’이란 단어와 자신의 전생을 연계시켜 생각하지는 못했다.
122화
등불 하나 켜놓지 않은 어두운 방, 담뱃대의 불씨가 깜박이자 범한의 얼굴에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범한은 이내 두 손을 자판기 위에 살포시 얹어 놓고 암호를 찾기 시작했다.
“이름입니다.”
오죽은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와 구석에 서 있었다. 두 눈에는 여전히 검은 천이 둘러져 있었지만 상자를 향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사람들이 ‘슬픔’이라고 부르는 정서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이름이라는 것만 기억합니다. 아가씨께서는 오필(五筆)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범한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타를 치는 순간 범한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열여섯 해 동안 자판을 구경조차 못 해서였다. 하지만 여러 차례 시도하는 동안 몸과 손이 전생의 감각을 기억해 내 이내 자판을 익숙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손가락은 자판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암호를 여러 가지 입력해 보던 범한이 쓴웃음을 지은 채 불쑥 고개를 치켜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오필이면 이 세계에서 다섯 획으로 된 이름이 뭐가 있으려나.”
말을 마치자마자 범한은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이에 담배 두 모금을 빨고는 상자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어머님, 정말 극성스러우셨군요! 설마 오죽 아저씨한테 ‘오필’이란 것만 가르쳐 주신 건가요?”
범한은 오필이 다섯 획을 뜻하는 게 아닌, 중국어인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할 때 쓰는 ‘오필(五筆: 우비) 입력법’이란 사실을 알아챘다.
– kfh lca nhd
섭경미란 이름을 ‘오필 입력법’에 따라 자판으로 친 것이었다. 하지만 상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에 범한은 자신 없이 ‘오필 입력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넣어 보았다.
– aib usi
그런데도 상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범한은 자신의 이름이 오래전에 지어진 것이기는 해도 섭경미가 알 리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씁쓸하게 웃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범한의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범한은 웃는 것도 안 웃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으로 방구석에 서 있는 오죽을 바라보았다.
오죽은 이상한 눈빛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범한은 질문에 대답도 않고 오필 입력법에 맞춰 오죽의 이름을 자판으로 쳐보았다.
– gg ttgh
작은 소리가 나더니 상자가 열렸다. 이에 범한은 오죽을 쳐다보고는 웃었다.
“아저씨, 저 지금 아저씨와 어머님 사이에 어떤 이상한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어요.”
* * *
이 상자를 담주에서 경도까지 들고 온 건 범한이니 그는 당연히 상자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상자 안에 수소 폭탄 같은 게 들어 있을 거란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자 안에 든 게 무엇인지 확인하자 범한은 방 밖으로 나가 정신이 살짝 이상해진 사람처럼 빗속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친께서 참으로 창의력이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상자는 모두 세 개의 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크기와 모양 때문에 각 단에는 좁고 긴 물건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단에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금속으로 된 도구가 들어 있었다. 어떤 부분은 둥근 관 모양이었고 또 어떤 부분은 손에 쥐기 편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이 금속의 관을 살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지구에서 온 사람이기는 해도 이 물건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러다 손가락을 관 속으로 집어넣어 본 후에야 이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범한은 손가락을 넣었던 부분을 들어 눈 가까이 댄 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 위에 새겨진 ‘M82A1’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어머님 아버님!”
범한의 손가락이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전생에 범한은 군사 마니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글자들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저격총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가장 좋은 저격총을 나타내는 글자였던 것이다. 만약 대전차 유탄(HEAT: High-Explosive Anti-Tank)을 장착할 수만 있다면 1킬로미터 거리에서도 두꺼운 벽을 거뜬히 뚫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총을 들고 있는 범한의 오른손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에 만약 저격총이 있다면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범한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는 곧 범한이 몇 리나 떨어진 곳에서 아무나, 그것도 전혀 발각되지 않고 누구든 죽일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다시 말해 어마어마한 위력의 화살을 쏜 대내통령 연소을 그리고 동이성 사절단 중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 운지란을 범한이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종사급 절대 고수에게도 이것이 과연 먹힐지는 범한으로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범한은 살짝 긴장한 상태에서 세 개로 나뉘어 있는 저격총을 탁자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탁자 위에 있던 담뱃대는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치워 놓고 없었다. 범한은 탁자 위에 두 손을 얹어 놓고 심호흡부터 하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 순간 범한은 자신이 이제 막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밤의 악마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물론 악마가 되는 최종 단계에서는 총알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 단을 연 범한은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안에는 서한밖에 없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열 개 이상의 총알은 아무리 봐도 없었다. 총알이 없으면 이 저격총은 아궁이에 불붙일 때 쓰는 부지깽이보다 못한 물건이잖아.
* * *
“총알은요?”
이 순간 범한은 꿈에서 깬 소녀 같았다.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는데 꿈에서 깨어났더니 자신은 여전히 장작더미 위에 앉아 있는 걸 발견한 소녀 말이다. 이에 범한은 화가 나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오죽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죽은 범한의 질문에 매우 고분고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묘한 기분이 들도록 말했다.
“총알이 뭡니까?”
범한은 기가 막혔다. 그래도 오죽에게 총알의 모양, 크기, 길이, 용도에 대해 설명해 주고는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예전에 어머님께서 이 물건을 쓰신 걸 아저씨도 보신 적 있죠?”
그러자 오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여러 일들을 잊었다고요.”
범한은 오죽의 대답에 실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오죽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도련님이 말씀하신 그 물건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 같아 도련님을 품에 안고 도망칠 때 태평 별저에 있는 굴에 버렸습니다.”
범한은 일찌감치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을 익힌 상태였다. 그런데 대답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이 귀여운 맹인 아저씨를 끌어안고 진하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번째 단에 든 서한의 상태를 보니 그동안 상자가 얼마나 잘 밀봉되어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범한은 서한을 집어 들고 가볍게 튕기며 털어 보았는데 역시나 먼지 한 점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죽에게.”
이 상자가 범한 자신이 아닌 자기 옆 사람에게 남겨진 것이란 사실을 아는 순간이었다. 범한은 착잡한 마음으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서한을 오죽에게 건넸다. 그는 오죽이 맹인이란 사실을 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오죽은 서한을 건네받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아가씨께서 제게 보라고 하신 이유는 도련님께 읽어 드리란 뜻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서 직접 보시지요.”
범한은 웃으며 봉투를 찢고 서한을 꺼내 읽어 보았다. 그런데 몇 줄 읽지 않았는데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감정 변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범한은 상자에 있던 유서에는 신기한 병기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별 볼 일 없는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에 범한은 어머니가 해놓은 장치들을 조금 유치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서한을 읽어 나가다가 알게 된 사실은 섭경미란 여인은 세상 남자들을 하찮게 여기는…… 말투를 지닌 사람이었다.
게다가 악필이었다. 누이동생 범약약의 글씨체처럼 수려한 맛이라곤 전혀 없이 글자를 아무렇게나 대충 갈겨써 놓았으며 어투 역시 괴상했다. 더군다나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걸로 보아 여러 번에 걸쳐 나누어 쓴 것만 같았다.
“귀여운 주주, 뽀뽀……. 이 누나는 네가 정말로 좋아. 여러 번 너에게 네 처가 될 사람을 소개해 주려 했지만 너는 항상 싸늘하게 반응하더라. 네 어미인 내게……. 그렇지,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 줘. 이 누나는 정말로 화가 많이 났어요. 네가 그 묘에서 싸울 때 나는 네가 질 거고 또 얻어맞은 개처럼 도망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를 놀려 주려고 이렇게 글로 남겨 봤어.”
이 내용을 읽은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오죽을 곁눈질로 바라보고 말았다. 이리도 멋진 종사급 고수에게 어디 개 같은 구석이 있다고 그러지? 잠시 이런 생각을 하고는 범한은 다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나 말이지, 네가 어디 갔을 때 다른 사람에게 춘약을 조금 써서 씨를 받는 데 성공했지. 다만 나중에 귀여운 딸을 낳을지, 막돼먹은 아들을 낳을지 모르지만 말이야. 이 상자는 내가 이 세계에 남기는 유일한 물건일 거야. 모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그러더라. 그의 일생은 베이징 변두리에나 영향을 미쳤다고. 그러니 기억해 줘. 이 어미가 이 세계에 온 후, 남길 수 있었던 건 겨우 이 상자 하나뿐이란 사실을 말이야.”
범한은 ‘씨를 받았다’와 ‘막돼먹은 아들’이란 표현을 본 순간 하마터면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자신의 처지가 원래 예사롭지 않았으며 단어 사용이 너무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씨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아 마음속에 커다란 의문표가 하나 생기고 말았다.
범한의 모친인 섭경미가 남긴 나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하 내용은 모두 범한의 모친이자 일찍이 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섭경미가 서한에 남긴 것이다.
– 참 서글퍼. 안 그래? 그래도 아마 이 세계에서는 이 상자를 열 수 있는 사람이 너 말고는 없을 거야. 세상에 누가 너에게 이 세계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오필을 가르치겠니? 귀여운 작은 마론 인형 주주, 이 어미는 널 품에 안고 잠들고 싶구나. 그러니 얼른 돌아오렴.
– 상자를 옛날 그곳에 가져다 두었어. 분명 어딘지 알고 있을 거야. 아, 만약 네가 이 상자를 열고 이 서한을 읽는다면 분명 어딘지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 어미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
– 너무 궁금해. 내가 딸을 낳게 될까, 아니면 아들을 낳게 될까? 딸이었으면 좋겠어. 만약 아들이라면 그 아빠란 사람이 골치 아파할 거야. 게다가 남자들은 말이지, 야심이 너무나 커. 그러니 내 아들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야.
– 알았어, 알았어. 나도 내 야심이 큰 거 인정할게. 하지만 이 세계를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어. 그런데 이 어린 소녀의 아름다운 바람을 두고 야심이란 단어를 써서 설명해야 할까?
– 왜 내가 꼭 유서를 쓰고 있는 기분인 거지? 이런 염병! 퉤퉤, 너무 불길해!
– 음, 누가 알겠어! 그냥 유언이라 칠게. 어차피 다 글로 남기는 거니까. 명심해. 이 낡은 총은 쓰지 마. 커다란 칼로 개미를 치는 꼴이니 기분이 별로일 거야. 이 서한을 읽는다면 이 상자를 파괴해 줘. 이 세계에서 관계자 말고는 이 어미의 찬란한 일생을 알지 못하게 해줘. 그들은 나의 인생을 알 가치가 없거든.
– 어미는 왔고 봤고 놀았고 가장 부유한 사람도 되어 봤어. 그리고 친왕을 죽이고 옛 황제의 수염도 뽑아 봤지. 이 세상의 찬란함을 빌려 거의 천하를 통일할 뻔도 했어. 그런데도 기어코 이 어미를 무시하는 건 왜지? 내 귀한 딸이나 내 막돼먹은 아들은 말이지, 내가 들들 볶지는 못할 것 같으니 평안히 살았으면 좋겠어.
– 아…… 내가 늙어 죽으면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 아버지, 어머니, 너무 보고 싶어요!
– 주주, 사실 너는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너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지. 그래서 나는 외로웠어. 이 세계에서도 사람은 오가지만 그래도 나는 줄곧 외로웠단다.
– 나는 너무 외로워.
– 이 어미는 너무 외롭구나.
123화
서한을 모두 읽은 범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 미소를 지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머님은 이 세계 분이 아니었어요. 기억하고 계셨나요?”
그러자 오죽이 약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기억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 옛날에 신묘에 간 사람들과 아저씨가 싸웠다고 하셨어요. 그 대결이 있은 후에 기억 일부가 사라지신 건가요?”
범한이 손으로 상자 가장자리를 문지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만약 그때의 기억을 잃지 않으셨다면 이 상자는 분명 아저씨께서 열어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상자를 연 후 아저씨께서 이 모든 내용을 제게 말씀해 주셨을까요?”
“분명 아닐 겁니다.”
“그렇군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추측이 맞아떨어졌네요. 어쩌면 아저씨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산골로 들어가 저와 함께 느긋하게 지내셨겠지요.”
범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이내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어쩌면 그리 살아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말을 마친 범한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타까워요. 이제는 다시 시작할 수 없잖아요.”
“제가 이 상자를 열었는데 왜 궁금해하지 않으시죠?”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알게 된 오죽이 놀란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왜 궁금해해야 하는 겁니까?”
오죽은 여전히 냉정했다. 하지만 도련님이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재미없고 시끄러운 부류란 생각을 얼핏 하기는 했다.
순간 범한은 바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서둘러 화제를 바꾸어 오죽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머님의 죽음과 신묘가 무슨 관계가 있나요?”
“모릅니다.”
오죽의 반응에 범한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의 마지막 단 위에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범한은 마지막 단의 안과 밖의 높이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비교해 보았다. 이번 단은 깊이가 매우 얕았고 종이를 벗겨 내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범한은 너무 놀라 잠시 멍하니 있고 말았다. 종이쪽지 위에 달랑 다음과 같은 내용만 쓰여 있어서였다.
– 이봐, 만약 오죽이 보는 거라면 그 서한을 읽었을 테니 이 상자부터 없앴을 거 아냐. 그런데도 계속 본 거라면 우리 솔직해져 볼까? 너 누구야! 대체 누군데 이 상자를 연 거야?
범한이 보기에 어머니는 정말로 총명한 사람이었다. 이에 순간 머리가 멍해져 서한에 쓰여 있는 질문에 멍청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당신 아들인데요.”
물론 그녀는 아들의 대답을 듣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쪽지는 매우 짧았으며 그 위에는 몇 자 적혀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경고 문구가 있었다.
– 내 딸이거나 아들이면 누군가를 살려야 할 때 아래에 있는 물건을 보거라. 이 점 꼭 명심하기 바란다!
범한은 지나치게 과장되게 그려진 감탄 부호를 보다가 다시 그 아래에는 있는 텅 빈 동그라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쪽지를 원래 있던 자리에 잘 붙여 놓았다. 어머니의 유언이고 신중을 기하라는 경고였기에 범한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가서 좀 걷고 올게요.”
범한은 오죽에게 몇 마디 툭 던져 놓고는 방 안에서 나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자는 오죽과 함께 있으니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해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범한이 무기력하게 빗속으로 사라지자 오죽은 그제야 천천히 구석에서 걸어 나와 어색하게 탁자 옆에 앉았다. 그의 손가락은 상자와 탁자 위에 놓인 총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다 서한에 닿자 그의 손가락은 가볍게 서한 위를 맴돌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손가락이 서한 위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아주 작게 종이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빗물과 뜰 화초 사이로 퍼져 나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서 오죽은 혼자 상자 옆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 위 검은 천이 느슨해지더니 그의 얼굴에 온화한 표정이 번져 나갔다.
* * *
범한은 비 내리는 거리를 홀로 걸으며 얼굴과 몸을 내맡겼다. 그러자 빗물은 범한의 얼굴을 타고 흐르며 몸을 축축이 적셔 나갔다. 그사이 범한의 얼굴에서는 언뜻언뜻 미소가 흘러나왔다가 순식간에 다시 옅은 슬픔이 번졌다가, 또 잠시 후에는 평온을 찾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감정이 스치고 가는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 범한의 마음은 숙성되고 교차하고 부딪치고 있었다.
섭경미, 빛처럼 반짝이는 이름이 오늘에서야 진정으로 그의 삶과 머릿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어머니의 출신 그리고 그녀가 이 세계에서 대체 무엇을 했는지 등 많은 것을 알게 되어서였다.
범한은 담주에 계신 할머니로부터 현 황제의 부왕이 즉위하기 전, 경국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았던 이는 원래 두 명의 친왕이었으며, 그들 모두 황당하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그런데 서한을 읽고 나니 친왕이 자객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암살당한 건 모두 어머니의 저격총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이는 곧 현 경국 황실이 천하를 갖게 된 건 온전히 어머니 덕분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경여당과 감찰원을 세움으로써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 기틀도 다졌던 것이다. 즉 섭경미란 인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경국도 없는 것이다.
범한은 아무 생각 없이 비 오는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보니 차가운 빗물이 그의 옷 속으로 스며들어 온몸은 얼음덩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마음은 후끈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범한은 거리를 걸으며 경도의 거리를, 다시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륜마차를 그리고 길가에 세워진 부호 저택의 유리창을 다시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과거 보았던 만화경, 반들반들한 비누 등등 이러한 모든 사물이 순간 범한의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그 자신과 하나가 되고 있었다.
범한에게는 이 모든 사물에 어머니의 숨결이 녹아 있는 것만 같았다. 거리며 저택이며 그리고 이 천하까지, 세상 곳곳에 그 여인의 향이 스며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서한의 마지막 말은 ‘이 어미는 너무 외롭구나.’였다.
오늘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범한도 항상 외로웠다. 하지만 오늘부터 범한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은 길 한가운데서 큰 소리로 길게 웃었다. 범한의 웃음소리는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갔고 밤비에 일찌감치 거리에서 잠든 행인들을 깨웠다.
누군가가 범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계속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섭경미는 절대 서한에서 만난 어린 여학생이 아니었다. 그리고 범한은 자신의 어머니가 그 누구보다 강한 마음을 지녔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야 이 낯선 세계에서 낯선 태양을 맞으면서도 그리 찬란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경국이여, 그대들은 섭경미란 여인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는 범한의 얼굴을 거세게 내리치고 있었다. 범한은 괴물처럼 칠흑 같은 밤과 점점 혼연일체가 되어 갔다. 어쩌면 이 상자는 자신의 인생에 근본적인 도움까지는 주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혀 외롭지 않다는 느낌은 범한에게 이 세계에서 그리고 빗속을 걷고 있는 와중인데도 점점 더 자유로운 기분이 들도록 해주었다.
범한은 홀로 비바람을 뚫고 걷고 있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기왕 다시 태어난 거, 조금이라도 더 시원시원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예전이 누이동생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과거의 일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신의 얼굴에 ‘비굴’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느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데 가을바람, 가을비는 사람들을 더 깊은 시름에 애가 타도록 만들 뿐이었다.
* * *
한밤의 황궁 잠입 사건은 당연히 흐지부지 마무리될 리 없었다. 경도 수비대장 섭중은 아직 정식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황명을 받자 이내 사건 조사에 들어갔다. 그의 관직명은 경도 수비대장이었으나 최근 몇 년 동안은 황명에 따라 줄곧 서쪽에 있는 정주에서 경도를 수비하는 중이었다. 이에 그가 서둘러 경도로 돌아왔다고는 해도 그때는 이미 사건 발생일로부터 사흘이나 지난 후였다.
황궁에서도 눈썰미 있는 사람들은 황제가 왜 그를 선택했는지 이유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섭씨 가문은 대대손손 황은을 입은 충신 가문으로 진평평 원장 바로 다음으로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어서였다. 진평평 원장의 경우 당연히 불구의 몸을 이끌며 이번 사건을 조사할 테지만 이번 일은 그가 맡기에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사건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황궁 금위 체계에서 최정점에 있는 세 명이 모두 의심을 받고 있어서였다.
섭중도 이번 사건이 대단히 복잡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의심을 받고 있는 세 인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대내통령인 연소을은 몇 년 전 장 공주에 의해 발탁된 인물로 무공 실력은 황궁 안에서는 으뜸이었다. 다음으로 부통령인 궁전은 섭중의 사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홍사상 태감은 섭중도 건드리기 싫어하는 인물이니 그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섭중은 이 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황궁에 잠입한 두 번째 인물이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왜 광신궁에서 장 공주의 측근 궁녀를 죽였는지만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는 감찰원 도움 없이 암암리에 조사를 진행했다. 북제로 파견한 밀정이 발각된 일로 감찰원은 진노한 황제를 감당하느라 합류할 경황이 없어서였다. 이에 조사는 실질적인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섭중이 조심스럽게 황궁 내 몇몇 궁을 조사한 후 함광전으로 들었을 때였다. 그는 함광전에서 희미하게 깔려 있는 이상한 향을 맡자마자 자신이 북벌을 진행하고 있을 때 황제 폐하의 군장 안에서 났던 독 냄새를 떠올렸다. 그리고 호위병의 증언 중에 자객이 침입한 날 밤 북제의 장묵한 대가가 광신궁에 있었다는 말도 순간 생각해 냈다. 이에 황궁 내 잔혹한 암투를 잘 알고 있던 섭중은 이 사건을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섭중은 즉각 황제 폐하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자신의 죄를 빌었다.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이오, 아니면 감히 조사를 못 하는 것이오?”
황제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미소는 가끔씩 진짜 측근들에게도 저의를 의심받고 있었다. 황제가 다 아는 척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섭중은 자신이 충성을 바치고 있는 황제 폐하가 어떤 지혜를 가진 분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황제의 질문에 고분고분 대답하기 시작했다.
“소신이 조사를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을뿐더러 소신은 감히 조사를 하지도 못하옵니다. 이번 사건은 황실과 연계된 일로 신하된 입장으로서 조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사옵니다.”
“섭중 경, 설마 짐이 그대가 불충하고 공사를 구분 못 하며 목숨을 아끼는 의(義)가 없다고 비난해도 괜찮겠는가?”
섭중은 황송하여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대답했다.
“소신은 감히 폐하의 말씀에 담긴 의미를 가늠할 수 없나이다. 다만 소신은 우둔하여 어디에서부터 조사해야 할지 모르고 있나이다.”
“이번 사건은 조사할 필요가 없소. 짐이 다 생각하는 바가 있다오.”
황제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음험하고 차가워 보였다. 하지만 섭중은 꿇어앉아 있는 터라 그와 같은 황제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 * *
한편 진짜 범인인 범한은 그동안 백작가 저택 안에 숨어 있었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드높아진 후에는 태상사로 가 출근 도장이나 찍고 차를 마시거나 아니면 홍려사에 가 싸늘한 시선으로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이 모두 사치스러운 상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담판은 이미 끝났고 북제의 사절단도 벌써 경도를 떠난 후였다. 하지만 동이성 사절단은 경도를 떠나지 않고 한동안 꾸물거렸다.
그들은 이번 사건이 확실히 잦아들었다고 판단한 후에야 은자를 잔뜩 남겨 둔 채 조금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경도를 떠났다. 하지만 황궁 침입 사건 후 그들 모두가 구금되지 않았던 건 경국 황제가 어마어마한 관용을 베푼 덕분임은 모르고 있었다.
124화
한편 범한은 말 그대로 경도를 들썩이게 만드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범한보다 범한의 배후에 있는 세력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범한이란 인물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이 세상에서 일대 대가인 장묵한에게 피를 토하게 만들 정도로 직접 충격을 준 이는 범한 한 사람뿐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그렇게나 어린 나이에.
그리고 범한을 끌어들이려던 황태자와 2 황자의 행동은 둘이 같이 짠 것처럼 동시에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홍성은 자주 유가 군주를 대동하고 백작가로 찾아와 차를 마셨으며, 신기물 역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걸 핑계로 범한의 마음을 떠보러 찾아왔다.
하지만 범한은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아 만나는 걸 잠시 고사했다. 연회가 있던 날 준비한 계획 가운데 범한은 두 개만 완성한 상태였다. 그중 하나는 열쇠를 찾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동이성의 운지란을 모함해 범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운지란을 모함한 이유는 조정에서 그를 밀착 감시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고 이는 거의 성공적이었다. 경국의 감시가 강화되자 낭패에 빠진 이 9등급 고수는 경도를 떠나는 날까지 범한을 찾아가 대결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범한은 장 공주와 북제가 결탁했음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들을 한꺼번에 궁지에 몰아넣을 기회만 노렸다. 그러다 동이성 사절단이 경도에서 떠나기 이틀 전에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장 공주와 북제의 젊은 황제는 밀약을 맺고 있었지만 범한은 그 사실을 이용해 그들을 칠 방법이 없었다. 어떤 물적 증거나 인적 증거도 확보하지 못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범한이 감히 황제 앞에 나가 그 사실을 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아무리 경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고는 해도 황제를 접견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직접 고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에게 경국 황제는 복잡한 인물이었고 또한 황제가 장 공주와 관련된 추문을 듣고서 황실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죽여 입막음할 가능성도 있어서였다.
만약 경국의 일반 백성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비밀을 평생 마음속에 묻어 둬야 한다. 그리고 평생 말조차 꺼내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답답함에 피를 토하고 죽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범한은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는 두 세계의 기억과 지식이 있었다. 그리고 여론과 선전의 중요성 그리고 파급력을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미치광이에 가까운 장 공주와 맞서려면 그에 상응하는 정신 나간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회가 열린 후로 경도의 종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서산 제지소와 황실 금고와 관련 있는 곳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담박서국의 장사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 공주 쪽에서는 감찰원 8처를 움직여 제재할 방도가 없었는지 작게 치고 빠지는 식의 방해 작전만 펼쳤다. 하지만 범한은 이 모든 방해가 폭풍이 몰아치기 전 고요함 같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오죽은 구석에 서서 범한이 하는 말을 들고 있었다. 상자를 연 후 오죽은 분명 백작가에 더 자주 찾아오고 있었다. 범한의 안위를 걱정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한은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말을 이어 갔다.
“만약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 뭐든 뺏어야 합니다.”
그러자 오죽은 몸을 살짝 기울여 범한의 말을 이해했다는 행동을 보였다.
범한이 계속 말했다.
“요 며칠 동안 황실 금고 소속인 서산 제지소와 만송당이 담박서국 장사에 압박을 가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황실 금고가 갖고 있는 종이를 훔치고 만송당의 먹물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가 쓴 글씨를 누가 본 적 있나요?”
그러자 오죽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범한은 이 황당해 보이는 계획이 분명 주효할 것임을 알기에 활짝 웃었다.
“전단지란 것은 크기가 너무 클 필요 없습니다.”
범한은 두 손을 움직여 전단지의 크기를 나타냈다.
“중요한 건 수량입니다. 가급적 많은 곳에 붙이고 뿌려야 하니까요. 특히 태학 같은 곳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문연각의 교학원 같은 곳에는 더 많이 붙어야 하고요. 젊은 혈기의 학생들이 더 쉽게 선동되는 법이에요. 그러니 문연각에 있는 학사들은 이런 풍격의 것들을 좋아할 거예요. 아마 전단지를 본 후 화가 나서 자신들의 수염을 쥐어뜯을걸요.”
그런데도 오죽은 여전히 차갑게 물었다.
“내용은요?”
“네?”
범한이 눈썹을 씰룩이며 탄식했다.
“제가 무슨 지하당원이라도 된 것 같네요.”
범한은 전단지가 어떻게 선동이란 걸 할 수 있는지 재차 자세히 설명하며 전단지 내용은 진짜 같기도 하고 가짜 같기도 한 세부 사항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장 공주가 어떻게 장묵한과 대화하게 되었으며, 북제에 잠복해 있던 언빙운은 어떤 고초를 겪고 있고, 또 그가 어떻게 황궁의 지체 높은 분들께 버림을 받았으며, 장 공주가 조정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은 어떤 이득을 얻었는지. 그리고 황궁에 얼마나 많은 가짜 태감이 있으며 그 태감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부를 두고 있는지 등등을 오죽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오죽은 냉정하게 분석했다.
“장 공주가 그렇게나 큰 이익을 희생하고 겨우 금전적인 이득 일부만 취했다는 걸 믿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범한은 또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이 세상에 아저씨처럼 총명한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단순히 백성들이 믿어 주었으면 하는 것뿐인 거죠. 그리고 이번 일은 황제 페하께 일깨워 드리기 위해 저지르는 일이에요.”
그러자 오죽이 이번에도 냉정하게 말했다.
“황제께는 도련님의 일깨움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범한이 슬그머니 웃었다. 황궁에 사는 장 공주와 북제가 연계되어 있다면 무수한 밀정을 수하로 둔 황제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이에 범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서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왜 장 공주를 그녀의 영지가 아닌 황궁에 살도록 내버려 두는 걸까요?”
“장 공주는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막내딸입니다. 그리고 황제의 누이동생이고요. 게다가 황제는 무언가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저씨가 보시기에 제가 계획한 일이 일어나면 황제께서 어떻게 반응하실 것 같나요?”
범한은 오죽의 분석력을 신임하고 있던 터였다.
“즉각 감찰원을 움직여 도련님께서 일으키신 영향력을 일거에 불식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장 공주에게 큰 상을 내려 황실의 단결력을 외부에 보여 줄 겁니다. 또한 전단지 사건이 잠잠해지면 적당한 기회에 장 공주를 그녀의 영지인 신양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이어 오죽은 자신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장 공주에게 상을 줄 때 완아 군주께도 함께 상을 내릴 것이며 도련님의 관직도 높여 줄 것입니다.”
오죽의 분석에 범한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 있는 일이란 건 범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오죽의 입에서 나오니 왜 조금은 썰렁한 농담처럼 들리는 건지.
“그렇다면 왜 황제 폐하께서는 장 공주를 황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저처럼 이런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시는 걸까요? 만약 아저씨 말씀대로라면 황제 폐하께서는 장 공주와 북제가 결탁했다는 걸 벌써 알고 계실 텐데요.”
“첫째, 도련님의 방법은 너무 변태 같습니다. 둘째, 황제는 자신의 누이를 출궁시키기 위해 그녀를 압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수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일망타진하는 걸 즐깁니다. 그리고 이는 그분의 습관이기도 하고요.”
범한은 오죽이 황제의 능력을 십분 신뢰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이맛살을 더 강하게 찌푸렸다. 황실 사람들은 몽땅 인정머리 없는 나쁜 놈들이기는 하다. 그래도 황제와 장 공주를 비교했을 때 겨우 두 번 만난 황제가 장 공주보다 자신에게 훨씬 따뜻하게 대해 준 건 사실이었다. 이에 범한은 몇 년 후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반역을 두고 자기도 모르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번 계획으로 황궁의 내부 국면이 완화되는 건가요? 장 공주에게도 황궁 내부에 조력자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오죽은 여전히 냉담한 말투였다.
범한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계획대로 하는 편이 낫다고 결정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든 장 공주를 한동안 황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황제 폐하께서 그들을 일망타진할 시기를 놓치실 거예요. 그러니 제가 먼저 그들 손에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상대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 능력과 담력을 지니신 분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감히 외국과도 결탁하는 세력이 집요하게 범한을 노리는 중이라면 범한에게는 오죽의 뒤꽁무니에 바짝 붙어 도망 다니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 일주가 소원인 범한도 이런 식으로 도망 다니는 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세요.”
범한은 오죽을 향해 오른팔을 한번 휙 휘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은 확실히 청년 지도자의 기백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범한은 항일 전쟁과 관련된 영화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순간 어두운 밤에 휩싸여 있는 경국은 일본군에게 점령된 베이징이고 자신과 오죽은 침략자에 맞서는 용감한 학생이며, 지금은 조심스럽게 전단지를 뿌리며 경국 백성들을 향해 후안무치한 통치자에 맞서 일어나라 호소하는 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미소를 띤 채 침대에 누웠다. 침대 아래에는 상자가 놓여 있었지만 범한에게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죽이 상자와 관련한 기억을 모두 잃었으니 이 세계에서 저 상자를 열 수 있는 사람은 범한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마음 편히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달콤한 꿈까지 꾸었다. 가을로 접어든 경도에 대설이 내렸다. 장 공주는 겁에 질려 쭈뼛거리며 마차에 올라타더니 원망이 깊게 밴 눈으로 경도를 한번 돌아보고 이내 자신이 사는 세계로 떠났다.
* * *
구월 초로 접어든 경도에 정말로 큰 눈이 내렸다. 하늘 가득 흰색 전단지가 눈처럼 휘날리며 경도 곳곳에 흩뿌려진 것이다. 특히 태학과 문연각 부근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전단지가 뿌려졌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인데도 일찌감치 일어난 학생들과 백성들은 이 낯선 종잇조각을 주워 들고 들여다보고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는 경국에서 일어난 첫 전단지 전쟁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여전히 경국 백성들의 피는 뜨겁다며 그들은 과대평가하고 동시에 감찰원과 6처 관아의 통제 능력은 저평가하고 있었다. 불과 두 시진(네 시간)도 안 되어 온 경도에 뿌려진 전단지가 천하대도 근처 강가에 위치한 관청에 모두 수거되어 왔는데도 말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그 누구도 감히 사적으로 전단지를 지닐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원래 감찰원과 접촉할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이 흉악하기로 유명한 감찰원이 나서자 모두 겁을 집어먹고는 자신의 목숨과 가정을 걸고 도박을 하려 들지 않았다.
태학에서는 그 어느 곳보다도 빠르게 대응에 나섰다. 전단지가 뿌려진 당일에 황제에게 허가를 받아 가을 시험을 앞당겨 시행했다.
이 모든 조치는 반나절 만에 연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전단지로 인한 혼란 국면은 조기에 진압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문이란 놈은 날개가 없어도 날아가고 공기가 없어도 살아 숨 쉬는 것. 사건은 조기 진압되었을지라도 소문은 곧장 경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볼 때 ‘밥 먹었어?’가 아닌 ‘너도 봤어?’라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장 공주는 원래 경도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서른이나 먹고도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그녀는 꽤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전단지에 적힌 장 공주가 외국과 밀약한 죄상에 대해 백성들은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고 여기기는 했다. 아낙네들은 훨씬 더 간단한 논리로 장 공주를 이해하고 있었다. 바로 ‘늙어서 시집도 안 간 건 분명 문제가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황실 입장에서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감찰원이 나서서 제대로 조치를 했음에도 황궁의 높은 분들은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황궁 안에서는 황제 폐하가 서재에서 불같이 화를 냈으며, 황태후가 광신궁에 들어간 후 뺨 때리는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장 공주가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퍼져, 궁녀들과 태감들은 발소리마저 죽이며 걸어야 했다.
125화
감찰원 내부에 위치한 방 안에서는 난처함이 섞인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감찰원 8처 수장들이 모두 입을 꾹 닫은 채 상석만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진평평 원장은 의자에 앉아 몇 가닥 없는 턱수염을 잡아당기며 전단지를 바라보다가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괴이하게 웃기 시작했다.
모두 전단지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랫자리에 앉은 8처 수장들은 감히 웃을 수 없었다.
“어디, 이 종이에 써진 내용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말들 해보게나.”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누른 진평평 원장이 아랫사람들을 바라보며 꺼낸 말이었다.
가장 먼저 공격을 당한 건 8처의 수장이었다. 경도에서 발행되는 모든 글자가 적힌 것들은 감찰원 8처 수장과 교육원의 담당자가 관리하고 있었다. 8처 수장은 오늘 경도에서 너무나도 큰일이 발생해 경황이 없었고, 진평평 원장의 물음에도 제때 대답하지 못한 터였다. 이에 그는 묻지도 않은 조사 결과부터 먼저 보고하고 말았다.
“종이는 서산 제지소에서 만든 것으로 그곳은 황실 금고 관할입니다. 먹은 만송당에서 만들었고 만송당은 별다른 게 없는 곳입니다.”
그러자 진평평 원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를 두어 번 쳐다보고는 질책했다.
“진짜와 가짜가 얼마나 되는지 말하라고 했지, 누구 소행인지 말하라고 했는가!”
8처 수장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공주님을 모욕했고 나랏일에 대해 함부로 말했고 옳고 그름의 문제를 두고 조롱하듯 말했으니, 내용 중 진짜는 하나도 없사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진평평 원장이 살짝 음험한 표정으로 웃었다. 창문도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는 터라 조금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렇다면 모두 가짜란 것인가?”
전단에는 장 공주와 북제 사이의 비밀 협약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경국이 북제로 파견한 밀정의 우두머리 언빙운을 장 공주가 북제 황제에게 직접 바쳤다는 것이었다. 4처 수장 언약해가 눈살을 찌푸렸다.
“언빙운을 밀고한 건 조정 내부 인사일 겁니다. 그것도 품계가 매우 높은 사람이요. 하지만 장 공주마마께서 그런 행동을 하셨다는 부분에서 사실 저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공주마마께서 그리하신들 대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 전단지에는 과거 장묵한과 장 공주마마께서 광신궁에서 사사로이 만났다고 나와 있네.”
진평평 원장이 은근슬쩍 끼어들며 이 점을 부각했다. 그러자 언약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대했다.
“장묵한 대가는 황태후 마마의 초청을 받고 황궁에서 머무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증거가 될 수 없는 사항입니다.”
진평평이 마음에 든다는 듯 언약해를 바라보았다.
“언빙운은 북제 감옥에 갇혀 있네. 그런데도 냉정하게 분석하다니 잘했네!”
그런데 진평평이 돌연 목소리를 낮게 깔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 의심해야 하는 대상은 의심하는 게 당연한 걸세. 잊지 말게나. 감찰원은 폐하와 황실에만 충성을 바치는 곳이라네. 황궁에 있는 다른 개인에게는 충성해서는 안 되네.”
어느새 진평평의 눈은 맨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을 평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감찰원 1처의 수장 주격이었다. 그는 조정 내부의 관리들을 감시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감찰원 8처 수장 가운데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
진평평 원장의 시선을 감지한 주격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언빙운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와 언약해를 포함해 모두 다섯 정도밖에 안 됩니다. 만약 장 공주마마께서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분은 대체 어디에서 그 정보를 얻으신 걸까요?”
진평평 원장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주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른 일곱 수장들은 이 괴이한 분위기가 갈수록 굳어져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주격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평온해 보였으며 가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 전단지 내용이 진짜라면 장 공주는 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주격 옆에 앉아 있는 8처의 수장은 그에게서 식은땀이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도 머릿속에서 흘러내린 땀방울 말이다. 그사이 진평평 원장은 계속 평온한 표정으로 주격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 *
주격이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대인, 어찌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가 드디어 입을 열자 진평평 원장은 천천히 두 눈을 감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가 매우 우둔하기 때문일세.”
“왜 언약해를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이 세상에서 아들을 팔아넘기고 영화를 누린 예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주격은 언빙운이 북제에게 잡힌 걸 안 후부터는 언젠가 자신에게 일이 터질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씁쓸히 웃으며 언약해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1처의 수장일세. 비개도 이제는 늙었고 나까지 퇴임하면 규칙에 따라 자네가 이 감찰원을 물려받아야 하지.”
진평평 원장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평온히 말을 이어 갔다.
“안타깝군. 내게 다른 계획이 있다는 걸 알고 기분이 나빴을 거야. 반면 상대방은 자네에게 감찰원 원장 자리를 약속했을 테고. 폐하의 의중에 따라 이 재밌는 일을 한동안 더 두고 봐도 됐을 터인데 오늘 새벽에 종이 눈이 내려 모든 내막이 앞당겨 공개될 줄은 자네도 몰랐겠지.”
진평평 원장은 계속 담담하게 말을 해나갔다.
“그러니 우리 감찰원도 앞당겨 처리하는 수밖에.”
“대인,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일 황제가 직접 이번 사건을 처리했다면 자신은 분명 비참한 결과를 맞을 거란 걸 주격도 잘 알고 있었다. 목구멍에서 꿀렁꿀렁 두어 번 소리가 나더니 주격은 힘겹게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진평평 원장은 주격의 상태를 보고도 전혀 연민이 들지 않았다.
“자네는 나를 열두 해 동안 따랐네. 죽기 전에 마지막 말을 할 기회를 주겠네.”
1처 수장, 주격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일개 보통 관원이었던 자신을 감찰원의 3인자로 만들어 준 대인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여인을 믿지 마십시오. 그들은 전부 미치광이며 천생이 정치와는 맞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주격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터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흐느적거리더니 책상 위로 엎어져 숨을 쉬지 않았다.
주격의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주격은 범한처럼 장 공주와 장묵한의 밤 대화를 엿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진평평 원장의 표정만 보고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장 공주는 이미 감찰원의 감시 대상이었으며 장 공주가 정신이 나가 언빙운을 팔아넘긴 순간 1처의 수장인 주격 자신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이다.
주격의 주검이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관련 규정에 따라 후속 조치가 이루어졌다. 진평평 원장은 자기 눈앞에 놓인 종잇조각을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자가 모든 걸 다 폭로했는지 계속 분석들 하게나.”
진평평은 오래된 마른 우물과도 같은 사람이어서 주격의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은 일곱 명의 수장들은 10여 년을 함께 일해 온 동료의 처참한 결말을 보자 마음에 동요가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진평평의 질문에 대답했다.
“얼마 전 동이성 사절단이 맨 마지막으로 떠났고 오늘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동이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황궁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어찌 되었든 폐하께서 두 나라 사신들을 초대한 날 밤에 벌어진 일이니 황궁에 잠입한 자객은 분명 동이성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입니다. 자객이 광신궁에 나타나 궁녀 하나를 죽인 날 말입니다. 그러니 바로 그때 장 공주마마와 장묵한의 대화를 엿들은 것 같습니다.”
“동이성이 이제 와서 이러한 소문을 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 우리 경국과 동이성 간에는 북제와 한 것처럼 유효한 협의를 이뤄 낸 게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동이성은 우리 조정이 출병할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일이 알려져 황제 폐하께서 진노하시면 북제와의 협의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경국과 북제 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겠지요. 그렇다면 이 국면을 보고 가장 즐거워할 곳은 줄곧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던 동이성입니다.”
“동기든, 마지막에 일어날 결과든 동이성이 손썼을 가능성이 가장 크고, 또한 이번 일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될 당사자 역시 동이성입니다.”
“유일한 의문점은 서산 제지소가 종이를 도난당한 건 어젯밤인데, 동이성 쪽에서 어떻게 하룻밤 만에 그 많은 걸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경도에 파견한 사람 대부분을 우리 감찰원이 감시하고 있고 또 이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다면 우리 감시권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동원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분명 많은 사람을 동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언약해가 계속해서 분석을 내놓았다.
“하룻밤 사이에 이 일을 해낸 자들입니다. 그 정도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훈련을 마흔 가지 정도는 받은 자여야 하고요.”
진평평은 부하들의 조리 있는 분석을 듣고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러자 방 안은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포로 교환 협의는요?”
“계속 말하게.”
진평평 원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소은을 잡느라 대인의 두 다리가 망가졌습니다. 그런데도 장 공주마마께서는 언빙운을 넘겨 버리고 소은은 풀어 주려 하시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소은을 풀어 주고 싶지 않다고? 그렇다면 언빙운을 산 채로 돌려받는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진평평 원장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을 해나갔다.
“어떻게든 돌려는 받아야겠지. 우리는 소은을 산 채로 북제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걸세. 하나 소은이 북제의 하늘을 한 번만 바라보도록 만들어야 하네.”
진평평 원장에게 계획이 있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터였다. 이에 일곱 수장은 진평평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모두 소은을 북제에 얌전히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 늙은이는 옛날 북위가 파견한 밀정의 우두머리로 활동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경국의 밀정들을 죽였다. 게다가 그의 머릿속에 든 정보들은 오늘날까지도 경국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만약 북제가 잡은 사람이 4처 언약해의 아들이 아닌 다른 자였다면, 이 냉혹한 경국의 감시자들은 진평평 원장에게 그 불운한 사람을 국가를 위해 희생시키라는 상소를 올리고 황제 폐하까지 설득하라고 했을 게 뻔했다.
언약해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내심 진평평에게 무한히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장 공주마마 쪽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황제 폐하께 충성을 하는 사람들이네. 그러니 폐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일은 우리도 알 수 없으니 우리가 먼저 나서면 안 되는 거네.”
진평평 원장이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동이성 사절단을 잡아 와야 하지 않을까요?”
“잡아 와서 무엇 하겠는가? 조정이 체통을 구겼다는 걸 확인시키려고 그러나? 이번 일은 8처가 해결하게. 즉 남방의 옛 월나라의 잔당들이 나라가 전복된 것에 앙심을 품고 경도에 이상한 소문을 퍼뜨려 우리가 그들을 이미 전부 잡아들인 걸세. 그리고 감옥에서 몇 명 꺼내다가 시장 바닥에서 처형한 거야. 죽이기 전에 모든 경도 백성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구경까지 시켰단 말일세.”
진평평 원장이 담담히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감찰원의 수장들은 명령대로 없애야 할 것은 없애고, 소문을 퍼뜨릴 것은 퍼뜨리고, 잡아들일 사람은 잡아들였다.
그런데 언약해는 진평평의 명령을 곧바로 따르지 않고 계속 버티고 있었다. 언약해가 진평평 원장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이 세상에 소은을 인솔하는 동안에는 살려 두었다가 북제 신하들에게 넘겨주는 즉시 죽게 할 독약은 없습니다.”
그러자 진평평 원장이 물었다.
“자네의 뜻은?”
언약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는 제 아들을 압니다. 그 녀석은 폐하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아들은 기꺼이 소은과 목숨을 맞바꿀 겁니다.”
진평평 원장이 냉랭한 표정으로 언약해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번 일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네. 그 어떤 의견도 내놓아서는 안 돼. 어떻게 할지는 모두 내 주관이란 말일세. 그렇네. 이 세상에 자네가 말한 것처럼 신묘한 독약은 없네. 아무리 비개라 할지라도 경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하나 소은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언빙운은 반드시 돌아와야 하네.”
126화
말을 마친 진평평 원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잊지 말게나. 4년 전, 내가 자네 아들을 북쪽으로 내쫓았단 걸 말일세.”
이에 언약해가 뭐라 말하려 하자 진평평은 냉정하게 손을 흔들며 그를 저지했다. 그러고는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빙운이가 돌아오면 주격의 자리에 앉힐 계획이라네. 주격은 며칠 더 살 수 있었는데 말이야. 한데 오늘 종잇조각이 여기저기 뿌려지고 경도 민심도 술렁이고 있으니 자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네.”
진평평 원장은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쉬고는 계속 자신의 생각을 이어 갔다.
“줄곧 그늘 속에 숨어 있던 일인데 느닷없이 온 경도가 알아 버렸지 않나. 이리도 황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쓴 걸 보면 십중팔구는 폐하를 압박하고 있는 거야. 이 일을 알고 있는 신하들에게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도록 말일세.”
진평평 원장이 두 번 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지금 감사원에 제사가 있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지난번 자네에게도 말해 줬으니. 그 사람을 북제로 보낼 생각이네.”
언약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무 위험합니다.”
언약해는 진평평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제사에게 소은을 죽이라는 임무를 내리려는 것이다.
“제대로 갈고닦지 않으면 제대로 된 그릇이 되지 않는 법이네.”
진평평 원장의 두 눈에 피로가 고여 있었다.
“만약 그가 성공한다면 훗날 자네가 그를 도와 이 감찰원을 잘 이끌어 주기 바라네.”
드디어 진평평 원장의 본심을 알게 된 언약해는 놀라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진평평 원장이 앉아 있는 의자 앞에 꿇어앉아 정중히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 * *
“대체 누구 짓인 건지!”
진평평 원장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창가로 가더니 마른 손가락으로 검은 천 한쪽 자락을 잡고 천천히 젖혔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머리를 빼꼼 내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며칠간 내리던 가을비도 멈춘지라 밖에는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황궁도 다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진평평은 바퀴 달린 의자에 몸을 반쯤 누인 채 검은 천으로 가려진 창문 끝자락에서 들어오는 빛에 기대어 손에 들고 있던 종잇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북제와 결탁한 것만 써도 될 것을, 황궁 안에 미남자를 두고 음란한 행동을 한다는 건 대체 왜 쓴 거지?”
이 문제는 황궁의 명예와 연관된 터였다. 이에 진평평 원장은 회의에서 이것을 의제로 상정하기에는 좀 거북해 그냥 넘겼다.
진평평이 성냥개비처럼 가지런하게 적힌 종이 위 글자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웃기군. 정말로 못 봐주게 악필이야. 한데 글씨체만 보면 동이성의 그 바보가 쓴 것 같아.”
“동이성아, 동이성아, 정말 너희가 한 짓이냐?”
진평평은 자문자답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생각났는지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옛날 사고검은 그냥 바보였지 이런 미치광이는 아니었어. 장 공주에게 맞서고 있는 그 미친 녀석이 참으로 쓸모 있는 방법을 썼군. 이것저것 가져다가 한데 몰아넣고는 아무도 모르게 해놓았으니 말이야. 하나 폐하께서 정한 규칙을 어지럽혔으니 폐하의 심기를 건드린 거야!”
한데 언제나 빈틈없는 진평평 원장도, 음험한 미치광이인 장 공주도, 이러한 큰일을 저지른 게 겨우 두 사람, 즉 주인인 범한과 종인 오죽의 짓일 거라는 건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 * *
범한은 냉정하게, 심지어는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이번 일의 여파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써놓은 색정문학(色情文學: 음란한 글)은 이 나라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 같았다. 황제의 진짜 속마음이 어떤지 그리고 장 공주의 진짜 실력이 이번 일로 크게 손상을 입은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범한이 원하던 일이 드디어 일어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장 공주는 아무도 모르게 황궁을 떠나 자신의 영지인 신양으로 돌아갔다. 한데 범한은 전단지 사건 때문에 황실에서 어떤 충돌과 힘겨루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오죽이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황제 폐하는 장 공주가 경도에서 떠나기 전에 정말로 상을 내렸고 그 바람에 범한도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이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었기에 단순히 폐하께서 범한이 나라의 체면을 세웠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지가 당도하자 범한은 즉각 8품 협률랑에서 5품 태학원 봉정이 되었다.
잘 꾸며진 응접실에서 성지를 받아 든 범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태학원 봉정은 무슨 일을 합니까?”
“태학 학생들을 가르친단다.”
범건 역시 이번 성지 내용이 너무 뜬금없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정식으로 과거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태학원 봉정이 될 수 있단 말인지…….”
“그렇다면 내년에 과거를 볼 필요가 없는 건가요?”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구나.”
범건은 그리 기쁘지만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과거를 치르지 않는 건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란다. 당장은 순조로워 보일지라도 나중에 벼슬길에 많은 장애가 따르기 마련이지.”
하지만 범건은 잠시 바꾸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원한 건 범한이 평생 편하게 사는 것 아니었냐고.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이 고운 청년이 마음 편히 살다 생을 마치는 거 아니었냐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는 그 사람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아이에게 한가롭게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한(閑)’으로, 자(字) 역시 편안하게 살라는 의미로 ‘안지(安之)’로 짓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 * *
범한은 자신이 과거를 치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날아갈 것처럼 기뻐 서재로 돌아가는 내내 활짝 웃었다. 그런데 서재로 들어선 순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범사철이 눈에 들어왔다. 범사철은 먹을 갈면서 범한을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니?”
“기념으로 몇 자 쓰려고요.”
“뭐라고 쓸 건데?”
“반한재 시집(半閑齋詩集).”
“반한재가 뭔데?”
“바로 이 서재지요. 아버님께서 나중에 이 서재를 형님에게 주신댔어요. 물론 형님이 혼인한 후 일이지만요. 벌써 섭 대행수에게 노형거에 가서 가로로 내거는 편액 제작을 의뢰해 달라고 해놨어요. ‘반한재’라고 써서 말이죠.”
범한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따지듯 물었다.
“그렇다면 반한재 시집은 대체 뭐야!”
“어? 형님이 기년전에서 지은 시요. 벌써 태학사에서 시집으로 엮었어요. 폐하께서 문연각 명의로 책을 찍어 낼 준비를 하고 계세요. 그래서 내가 아버님께 이번 일을 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서산 제지소에 도둑이 든 후 황실 상단에 소속되어 있던 그들은 해체되었고, 담당 관리에게 조사를 받아 오랫동안 무력한 상태로 있었다. 황실 금고도 황궁으로부터 경고를 받아 더 이상 담박서국을 괴롭히지 못했다. 다시 말해 담박서국이 드디어 기를 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섭 대행수와 어린 대행수 범사철은 단번에 황제가 편찬하는 시집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제작비 일부를 지원해 주는 데다가 인쇄와 발행 후에는 개인적으로 판매해도 된다는 황궁의 윤허도 받았으니, 이 두 사람이 봤을 때 이 시집은 틀림없이 큰돈을 벌게 해줄 사업이었다.
시집 속 시를 쓴 사람이 누구냐고? 바로 범한이었다. 범한은 누구? 바로 담박서국의 숨은 주인이었다. 이런 사업을 두고 경여당의 대행수나 그 뒤에 서서 음험하게 웃고 있는 범사철이나 모두 그 이익을 조정에 양보할 리 없었다. 범사철은 본래 형이 《석두기》의 다음 열 편을 내놓지 않아 뿔이 난 상태였다. 그러니 수중에 시집이 들어오게 된 지금,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범한은 종이 위에 ‘반한재 시집’이란 다섯 글자를 써보았다. 또 자신의 이름도 써보았다. 그의 마음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그날 밤 범한은 자신의 밤중 행적을 지우기 위해 기년전에서 취한 척하다가 미치광이처럼 성미가 크게 발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시를 쏟아 내기 시작한 자신의 입을 거두지 못했다. 그 시에는 수많은 전고(典故), 그러니까 옛날 고사와 경서 내용 등이 응축돼 있었으며 그중 많은 부분을 범한은 설명해 줄 수 없었다. 게다가 만약 이들 전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몇 권에 달하는 역사책과 이야기책을 써야만 했다.
우선 4대 명저인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있어야 했다. 《신설신어》도 있어야겠지, 《논어》도, 《시경》도! 이런, 이건 많은 것도 아니다. 사마광이 쓴 역사서 《자치통감》도 있어야 한다. 사마천의 《사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전부 써서 보여 준다면 그 전고들에 대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작업량을 생각하니 범한은 몸서리쳐졌다. 만약 정말로 이렇게 확대해 나간다면, 어쩌면 이 담박서국은 전생 세계의 전파소로 전락할 것이고, 옛날 담주에서 범한이 세웠던 원대한 계획은 이루어질 게 뻔했다.
범한이 범사철에게 말했다.
“문연각에서 교정하면 안 돼. 그러니 네가 가져와 줘. 그러면 내가 다시 교정을 볼 테니.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내가 무슨 허튼소리를 한 게 있을지도 모르거든.”
범한은 머리를 굴렸다. 얼버무릴 것은 얼버무리고 안 될 것 같은 것은 고통을 참으며 살점을 도려내자고 말이다. 즉 취기를 구실로 몽땅 잊어버렸다고 하는 거다. 어찌 되었든 거나하게 취한 다음 날에는 대개 기억 상실증 같은 것이 오지 않던가.
“걸작이 될 거예요!”
범사철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한 5년 후에 말이죠. 형님이 절필 선언한 게 사람들에게 잊힐 즈음에 다시 문단에 복귀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돈을 긁어모으게 될걸요!”
범사철의 말에 범한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별안간 서재 한구석에 놓여 있는 분홍색 종이에 시선이 꽂혀 궁금한 마음에 범사철에게 물었다.
“저건 뭐니?”
범한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제야 자신의 혼례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나서였다. 그런데 최근에 너무나 많은 일이 발생해 툭 까놓고 말하자면, 지금 임완아를 향한 범한의 마음은 경묘에서 느꼈던 첫 느낌과는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범한은 이제는 자신과 그녀의 어머니가 어떻게 해도 함께할 수 없는 사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황제 폐하가 모든 걸 통제해 주고 있기는 해도 일단 그가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그날부로 장 공주는 자신을 죽이려 들 게 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범한 자신이 장 공주를 죽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고대하던 혼례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범한의 마음은 오히려 불안하고 슬펐다.
* * *
며칠 후 담박서국의 주력 서적인 《반한재 시집》이 출간되었다. 범한은 담박서국이 출판권을 쥐게 되자 많은 부분을 대대적으로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이제 조금 숨 좀 돌리나 싶을 때 예상하지도 못한 출판 기념회가 시작되어 범한의 이름으로 세자 이홍성과 홍려사 소경 신기물 등이 초대되어 왔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재능을 겸비한 누이동생 범약약을 자기 대신 출판 기념회에 보냈다. 《반한재 시집》의 판매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범한은 ‘시선은 신비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핑계를 들어 참석하지 않고 대신 별궁으로 숨어들어 임완아와 만났다.
기년전 연회에서 8품 협률랑이 시 300수를 즉석에서 지어 대가 장묵한이 피를 뿜었다는 이야기는 벌써 경도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범한이 읊은 시 중 일부도 벌써 민간에까지 흘러든 터였다. 그런데 작가가 직접 수정한 판본까지 출간되다니 이는 정말로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집은 출간되자마자 폭발적으로 팔려 나가 ‘종이 품귀 현상’과 ‘종잇값 상승’을 불러왔고 범한의 명성은 순식간에 한 단계 더 도약했다.
지난밤, 작은 누각에는 또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범한이 따스한 눈으로 자신의 정혼자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그대가 말해 준 그 방법은 안 되겠네요.”
그러자 임완아가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귀엽게 오물거리며 말했다.
“며칠 동안 바깥출입을 전혀 못 했어요.”
사실 이 어린 아가씨도 최근 경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황궁 후궁들 손에 금이야 옥이야 하며 자랐어도 말이다. 물론 후궁들이 잘 대해 준 건 그녀도 잘 알다시피 그녀가 병약해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아서였고, 황제 폐하가 유난히 아껴서였다.
127화
임완아는 직접 전단지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장 공주와 관련한 ‘글 종이’ 사건은 조금씩 소문으로 들어 알고는 있었다. 장 공주는 신양으로 돌아가기 전 임완아가 있는 별궁에 들렀었다. 그런데 그녀의 행동은 딸과 잠시 어색하게 마주 보고 앉아만 있다가 곧장 마차를 타고 경도를 떠난 게 전부였다.
그러니 임완아도 어머니 장 공주가 경도를 떠난 것과 범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민감한 그녀로서는 범한이 예전처럼 경쾌하고 행복해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이에 범한에게 경도 서산이 단풍으로 유명하니 날을 잡아 가을 경치나 구경하러 다녀오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한데 범한은 ‘서산’이란 두 글자를 듣자마자 경도의 종이를 독점하고 있는 서산 제지소가 생각났다. 또 제지소의 뒷배이자, 음침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장 공주가 생각나 버렸다.
범한은 장 공주를 경도에서 떠나게 만든 가장 큰 힘은 황제 폐하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글 종이’는 황제가 그 자신을 설득하고 황태후를 설득하는 구실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 하나 하고 넘어가겠다. 지금 조정에서는 그날 눈처럼 뿌려졌던 전단지를 일러 ‘글 종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백성이 자신의 요구 사항을 알리려고 해도 방도가 없을 때 그것을 알릴 통로나 방도로 삼기 위해 종이에 글을 써 넣었는데, 범한의 전단지도 바로 이 ‘글 종이’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였다.
그사이 경도에서는 ‘글 종이’가 뿌려지는 일이 몇 차례 더 발생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감찰원은 한동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중 한 건은 체포를 한 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원래 태원로에 있는 동(銅) 광산에서 힘들게 역을 살던 자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고발하기 위해 경도로 올라왔지만 등문원의 문턱조차 밟지 못했다. 그러자 범한이 일으킨 전단지 사건에 착안해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
감찰원이 발본색원에 나섰다. 그런데 알아내고 보니 ‘글 종이’를 뿌린 자들에게 종이를 제공해 준 건 뜻밖에도 서산 제지소였다.
더군다나 대신 고발장을 써준 사람은 아무리 조사해도 찾아낼 수 없었다. 단지 글 종이에 있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글씨체가 경묘 근처에 있는 점쟁이의 것이란 것만 알아낼 수 있었다. 감찰원은 경묘로 들어가 조사를 시작했고 그 결과 경묘에는 평생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을 것만 같은 대제사장만 있고 점쟁이 따위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 광산 일은 자연스레 감찰원 1처로 넘겨져 처리되었으며, 태원로 관원은 그 즉시 경도로 끌려와 한 달 후에 참수되었다. 그러나 이 글 종이를 뿌리는 행위와 관련해 조정은 더 이상 참을성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에 관리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감찰원의 진평평은 고발자인 광산에서 고역을 한 사람은 처벌하지 않았다. 이에 관원들은 진평평 원장의 마음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정신을 차리고 살짝 수심에 잠겨 있는 임완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범한은 미소를 지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임완아의 둥그런 턱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생각 중입니까? 장 공주마마께서 신양으로 돌아가셨지만 우리가 혼례를 올리고 나면 자연히 인사드리러 갈 기회가 있을 거예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범한은 남은 평생 절대 신양으로 가는 일은 없기만을, 또한 장 공주가 늙어 죽을 때까지 신양에서 살기만을 바랐다. 장 공주와 그늘에 가려진 그녀의 조력자들을 제대로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황제 폐하는 적을 유인하는 수법을 좋아하니 언젠가는 장 공주가 경도로 돌아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임완아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뵈러 가요. 공자님도 최근 경도에서 있었던 일을 알 거예요. 마마님들께서는 그럭저럭 괜찮으세요. 그런데 황태후마마께서 몸이 조금 불편하신 것 같고 황제 폐하께서도 나를 예전처럼 친근하게 대해 주시지 않았어요.”
범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황제께서 당신의 어머님과 결탁한 황자를 밝혀내려 골치를 썩이고 계신데 어찌 과거처럼 당신을 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생각했다.
이후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눴다. 그러다 늙은 보모가 위층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조건 반사처럼 창틀 위로 올라가 여차하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임완아가 푸흡, 하고 웃었다.
“그게 아예 습관이 되었군요.”
범한은 난처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살짝 하얗게 질린 임완아의 얼굴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말했다.
“혼인을 올리기 전에 절대 무리하지 말아요. 병이란 건 실은 별거 아니에요.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아요. 이제는 내가 있으니 전부 내가 해줄게요!”
창밖 나뭇가지에 달린 파란 잎들은 가을바람 속에서도 고집스레 선명한 초록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외부 환경이 스산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아름다운 미래를 꿈꾼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래층 모퉁이에 있던 몸종 사기가 아가씨와 그녀의 약혼자가 껴안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리고 속으로 ‘범씨 성의 도련님은 세상이 알아주는 인재라는데 어찌 저리도 수치심을 모시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 * *
혼례일이 거의 코앞으로 다가오자 사남 백작가 사람들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장 공주가 경도에 없으니 챙겨야 할 일은 모두 숙 귀비가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다. 사남 백작가에서는 군주와 혼례를 올리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 그만큼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예법과 규범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예법과 규범이란 건 본디 사람을 매우 곤란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임완아의 군주 신분은 황궁에서만 힘을 발휘할 뿐 궁 밖 세계에서 그녀는 애초에 황제 폐하가 누군가를 압박해서 알아낸 임약보 재상의 사생아 딸에 불과했다.
그사이 유씨 부인도 황실에 들어가 황태후의 최종 지시 사항을 전달받았다. 황태후는 자신의 보배 같은 외손녀 혼례에 임약보 재상이 참석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 자식 간의 도리를 생각해 고집을 꺾어야 했다. 그리하여 황태후는 재상가 사람들이 혼례에 참석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면서도 동시에 이번 혼례에서 임완아는 군주의 신분으로 혼례를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내부 사정에 훤했던 범씨 가문의 서열 높은 여인들은 황태후의 결정에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재상가와 연을 맺는다는 것 역시 체면이 서는 일이었으므로 이들은 다시 혼례 준비에 나섰다.
한데 그 누구도 범한과 임완아의 혼례가 공주와 부마의 혼례보다 사람들의 뇌리에 더 오래 남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도의 가을은 다른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산의 단풍은 젊은 아가씨들이 꺾어다가 거리에서 꽃처럼 팔고 있었고, 남쪽의 영휘집 대호수에서 나는 흰 들풀은 다발로 묶여 악귀를 쫓는 용으로 부잣집으로 팔려 나가 그들의 집을 장식했다. 살짝 차가운 가을바람이 경도 거리 곳곳에, 나무 끝자락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미녀들의 매끈한 얼굴에 불었고, 요릿집에서 내뿜는 음식의 뜨거운 열기를 흐트러뜨렸다. 가을바람은 이번 연도에 있었던 나쁘고 어두운 것들을 몽땅 날려 버리는 것 같았다.
천하대도는 경도에서 가장 조용하고 정갈하며 아름다운 거리이자, 양옆으로 각처의 관청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 시월 초하루는 관원들에게는 쉬는 날이었다. 한데 관원들은 오랜만에 얻은 휴일인데도 온전히 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남 백작가 큰 공자인 범한의 혼례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남 백작이 맡고 있는 호부 관원이 아님에도 범한의 혼례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범한의 혼례는 경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우선 범씨 일족만 보아도 원래 경도에서 꽤나 큰 집안이었다. 그리고 범한의 아버지 범건과 황실과의 관계만 보아도 그는 근래 몇 년 동안 황제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게다가 호부 상서는 병들어 두문불출한 지 오래되었으니 한두 해만 지나면 호부 상서 직을 계승할 것이 뻔했다.
또한 신랑 범한은 최근 경도에서 가장 유명 인사로 등극한 사람이었다. 반년 전 외양간 거리에서 보여 준 영웅의 기개는 말할 것도 없고, 한 달 전 기년전에서 미친 듯이 시를 지은 것 때문에도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연회가 있은 후로 줄곧 집에서만 숨어 지냈다. 이에 사람들은 새로 5품 태학원 봉정에 임명된 인물이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부 측도 대단하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올해 초에 겨우 임씨 집안 자식으로 인정을 받기는 했어도 어찌 되었든 당당한 재상가의 여식이었다. 재상이라 함은 조정 문관의 우두머리로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에 있는 인물 아니던가. 그러니 그런 사람의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으니 당연히 큰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최근 조정에서 일어난 일로 재상의 지위가 과거에 비해 흔들리고 있기는 했지만, 혼례가 거행되는 장소는 어떤 정치적인 위험이 도사린 곳이 아니므로 관료라면 누구나 이번 혼례에 참석하기를 바랐다.
이에 신랑과 신부 모두 서자와 사생아였지만 경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집단적으로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신부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일부 고위 관료들은 자기들만 슬그머니 등급을 올려 준비한 혼례 축하 선물을 가지고 사남 백작가로 찾아가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오늘 황궁에서 어떻게 나오려나.’ 생각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궁금해했다.
* * *
범한은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앉은 채 다섯 명의 나이 많은 여종들에게 둘러싸여 화장을 받고 있었다. 그사이 범한은 무언가를 다짐하고 있었다. 만약 다음에도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면 혼례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가거나 용감히 비혼 주의자가 되어 연애만 하고 살 거야, 하고.
경국의 혼례는 일반적으로 저녁 무렵에 시작했다. 그런데도 범한은 날이 밝기도 전에 침대에서 끌려 내려와 세수를 해야 했다. 칫솔질은 그나마 하기 편했다. 어쨌든 자신이 담주에서 쓰기 편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썼으니. 그런데 바로 얼마 후 나이 많은 여종이 뜨거운 물로 연지분을 개야 한다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악한 범한은 곧장 여종에게 무엇을 준비하는 건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글쎄, 신랑도 화장을 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범한은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고 결국 고개를 내저으며 화장을 하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아버지 범건까지 나서서 설득했지만 범한은 한사코 화장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대치 상태는 한동안 계속되었고 최후의 승자는 범한이었다. 그런데 범한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자 갑자기 나이 든 여종 다섯이 달려들어 범한의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범한은 일찌감치 이 세계 의상에 익숙해져 있던 터였다. 하지만 오늘 옷은 정말로 거북해 참을 수 없었다. 우선 크고 붉은 예복 안쪽으로 옷을 세 겹이나 덧입어야 했다. 그리고 예복 위에 옥패며 알록달록한 끈, 꽃술 등을 달아야 했고 이들은 단번에 눈에 띌 정도로 선명하고 화려한 색상 일색이었다.
그래서 의복을 갖춰 입는 것만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결국 범한의 몸은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그사이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두뇌뿐이었다. 범한의 두뇌는 오죽 아저씨에게 나무 막대로 맞던 어린 시절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눈언저리 쪽으로 유씨 부인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범한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방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유씨 부인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속으로 ‘정말로 바쁜 겁니까, 아니면 이번 기회에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겁니까?’라고 생각해 버렸다.
머리에 관을 쓰고 옥패를 달고 은으로 된 신발의 단추를 채우고 황금을 새겨 넣은 옷깃을 목에 둘렀다. 그런 후 범한은 바보처럼 나이 든 여종들에게 떠밀려 대청으로 나갔다.
128화
범약약과 범사철도 오늘은 보기 좋고 활기차게 꾸미고 있었다. 특히 범약약의 경우 평소 약간 도도하고 차가운 얼굴에 분홍 의상을 입으니 유난히 활기차 보였다. 그런데 범약약과 범사철은 그들의 오라버니이자 형인 사람이 불쌍한 몰골을 하고 있자 입을 막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범사철이 툭 농담을 던졌다.
“어디서 온 꽃 떡이냐?”
범한은 화가 났지만 꾹 참고 앞으로 두 발자국 나아갔다. 한데 몸에 단 옥이며 장신구가 너무 많아 계속해서 딩당딩당 울려 범한은 자조하며 구시렁거렸다.
“어디서 온 꽃 떡은 고사하고 알록달록 움직이는 대형 풍경이 됐잖아.”
범한은 너무나 괴롭게도 알록달록 대형 풍경이 된 상태에서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말이 아닌 가마를 타고서였다. 만약 말을 타야 했다면 범한은 분명 부끄러워서 담주로 미친 듯이 내뺐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신부를 맞이하는 행렬이 겨우겨우 재상가 저택에 당도했다. 임완아는 이미 10여 일 전에 재상가로 건너와 있던 터였다. 온 경도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궁으로 신부를 맞이하러 갈 수 없기에 나온 방법이었다.
폭죽이 터지자 가마에 앉아 있던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희미한 폭죽 냄새가 코로 밀려들자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 물건이 떠올랐다. 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는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고 가마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예식 규율에 따라 범한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재상도 오늘은 사남 백작가로 들어갈 수 없었다. 폭죽과 나팔, 피리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재상가 대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택에서 원굉도가 나왔다. 재상의 책사, 원굉도는 오늘만큼은 평소와 달리 특이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붉은 꽃이 달린 나뭇가지가 꽂혀 있는 모자로 생각 외로 꽤 풍류가 있어 보였다.
“범한 공자.”
원굉도가 활짝 웃는 얼굴로 범한을 맞았다.
범한은 속으로 씁쓸히 웃으며 상대방을 욕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활기찬 모습을 하고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원굉도 선생.”
두 사람은 과거 재상부에서 몇 차례 본 적 있어 각자의 신분을 알고 있던 터라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경도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일을 해주는 사람 중 절반 정도가 사남 백작가로 고용된 상태였다. 이들 아낙들은 재상가 대문이 열리자 곧바로 복을 비는 말들을 쏟아 내기 시작해 신랑을 맞이하러 나온 원굉도를 얼떨떨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들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곳에는 진짜 강력한 저항 세력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오늘 경도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사람 중 절반을 사남 백작가가 빼앗아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어디로 갔을까. 바로 재상가였다. 두 집안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서로 침을 튀기며 축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만 축하하는 것일 뿐 실은 보이지 않는 칼을 겨누고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였다. 이들은 서로 자신을 고용해 준 쪽을 높이고 상대방을 낮추는 데 열을 올렸다. 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이번 혼례가 재상가 딸이 백작가 아들에게 시집가는 게 아닌 그냥 돈 많은 토호들의 혼례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범한은 그저 쓴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도 이 상황이 경국의 풍습이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기 전에 신부의 집 앞에서 반드시 한바탕 떠들썩하게 해주어야 했다. 이것은 신혼부부가 나중에 언성 높여 싸우게 될 걸 다른 사람들이 미리 해주는 의식이었다.
풍습이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의식에서는 어느 쪽이 이기느냐가 중요했다. 신랑 쪽이 신부 쪽을 누르는 게 아니라 신부 쪽이 신랑 쪽을 눌러야 했다. 혼례를 올리면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그러니 신부 입장에서는 힘든 시집살이가 시작되기 전에 합당한 지위를 보장받을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본때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혼인을 하는 두 집안이 아낙들을고용해 혼례의 첫 관문인 입씨름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범한은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소리가 잦아들자 범한은 기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다 끝난 거죠?”
* * *
그러자 잠시 난처한 침묵이 흘렀고 그사이 누군가가 범한에게 속삭였다.
“범한 공자님, 아직입니다.”
잠시 후 재상가에 고용된 아낙이 말할 거리를 찾았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신랑 어르신이 급했나 보네! 그럴 만도 할 겨. 우리 아가씨가…….”
이들은 자기 집 아가씨를 또 한 번 한껏 치켜세웠다.
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원굉도의 눈에 비친 범한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에 원굉도는 사람들을 헤치고 범한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
“공자, 참아야 합니다. 경도는 담주와 달리 규칙이 좀 많아요.”
그러자 범한은 억지로 기쁜 얼굴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얼마든 참을 수 있습니다.”
범한은 이 몸께서 전생까지 합쳐 서른 몇 해를 기다렸으니 당연히 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참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지옥 같은 전통 의식이 드디어 끝났다. 첫 번째 의식이 즐겁게 막을 내린 가운데 대문이 열리면서 다시 두 번째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두 명의 수모(手母)의 부축을 받으며 신부 임완아가 걸어 나왔다.
범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한 임완아는 넓은 소매가 포개지도록 팔을 들고 있었다. 머리에는 진주 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붉은색 천이 덮여 있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얼굴은 가려져 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의 그녀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태와 혼례의 경사스러움만큼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재상가가 둘러놓은 경계선 밖에서 혼례를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이 신부를 보자 범한보다도 먼저 눈을 반짝이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몇몇 젊은 사람들은 신부의 아름다운 얼굴 좀 구경하게 머리를 덮고 있는 붉은 천을 벗기라며 소리치기도 했다.
만약 평소 이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면 이들은 재상가 사람들에게 초주검이 될 때까지 맞았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 군중들 사이에 숨어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왕계년의 부하들에게 그들의 미래 마님을 욕보인 우라질 놈으로 간주되어 감찰원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갇혀 지내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고 황제가 사위를 맞이하는 날이니 천하가 함께 기뻐해야 했다. 이에 재상가와 백작가는 그런 저속한 말을 듣고도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깨는 행동을 할 수 없어 그냥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기분이 조금 상한 범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한번 쳐다보았다. 왕계년의 부하들은 범한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 군중 속에서 너무 작아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야, 하는 소리가 몇 번 흘러나왔다. 가장 흥분하면서 소리 질렀던 젊은이가 당하는 소리였을 게다.
그 후로 몇 가지 의식이 더 치러졌고 온통 붉은색으로 꾸민 임완아는 그것을 다 치른 후에야 겨우 발을 떼고 앞에 놓인 혼례용 가마에 올라탈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을 치르는 동안 범한은 임완아에게 한마디도 건넬 수 없어 그저 그녀를 바라보거나 슬쩍 그녀의 손가락 끝을 건들이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 *
사남 백작가는 이미 도착한 하객들과 울려 퍼지는 풍악 소리로 매우 흥겹고 떠들썩했다.
신부는 우선 내실로 들어가 잠시 앉아 있었다. 신랑은 본관 대청 앞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범한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일면식이 있든 없든 모든 하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옆에 있는 사람에게 조바심을 드러냈다.
“예식은 언제 하나요?”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도련님. 부부 합환주, 부부 합석, 부부 동시 식사 그리고 또…….”
이어서 나오는 말들을 범한은 흘려버렸다. 대신 욕을 내뱉어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급할 거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앞서 말했듯이 범한은 서른 몇 해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까짓 거 더 참을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 범한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술을 많이 마셨고 하객으로 온 관리들로부터 지금 이 순간을 담은, 그러니까 아름다운 여인과 아름다운 광경을 담은 시 두 수를 지어보라는 호의, 또는 사욕에 찬 요구를 들어야 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어도 자신이 시단에 선언한 내용을 굳건히 기억하고 있던 지라 그들의 요구에 일일이 웃으며 사양의 의사를 내비추었다.
축하연이 시작되고 나자 정왕부에서도 드디어 하객이 도착했다. 그러자 모든 관리들이 일제히 일어나 사람들을 맞이했다. 범한은 꽃을 재배하는 농민처럼 입고 나타난 정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속으로 ‘처음 왕야를 만났을 때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라고 생각했다.
정왕은 줄곧 범한을 좋아했다. 그래서 오늘 화려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는 목소리를 죽여 작은 소리로 질책했다.
“꾸며 놓은 꼴하고는.”
범한은 정왕의 성정을 잘 알기에 웃어넘겼다.
“정왕께서도 혼례를 올리실 때 저처럼 꾸미셨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세자 이홍성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맞받아쳤다.
“어쩌면 자네만도 못했을 것이네.”
그러자 정왕이 성을 내며 질책했다.
“네가 아닌 이 몸이 혼례를 올린 것이니라. 네가 알긴 뭘 안다 나서느냐!”
옆에서 정왕과 세자가 말다툼하는 걸 본 관리들은 감히 나서서 무어라 하지는 못하고 대신 숨어서 키득거렸다. 그런데 혼례를 주관하고 있던 사남 백작 범건은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은 채 권했다.
“왕야, 오늘 말이 좀 많으십니다.”
겨우 백작 지위에 있는 범건이 정왕에게 이리도 편히 말할 수 있는 건 그와 10여 년을 교류해 온 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왕이 아들과 다투는 일 따위는 이제 관심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곧장 범건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정왕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범한에게 정색하며 말했다.
“오늘 꽤 멋지구나!”
범한은 순간 깜짝 놀라 서둘러 감사의 예를 올렸다. 그런데 정왕은 또 이맛살을 찌푸렸다.
“원래는 두 해 후에 유가 군주를 자네에게 주려 했는데 우리 누님께서 내가 점찍은 사윗감을 빼앗아 가실 줄이야.”
정왕은 정말로 깊이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왕의 누님이 누구냐고? 당연히 범한의 장모인 장 공주다. 정왕이 이 말을 할 때 목소리가 작았길 다행이지 하마터면 주위 사람들 모두 그 이야기를 들을 뻔했다. 범한은 정왕이 유가 군주를 자신에게 시집보내려 했다는 걸 듣고 나서는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이 밀려들어 가슴이 답답했다.
이 와중에 이홍성이 옆에서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범한의 어깨를 한 대 툭 치며 작게 이야기했다.
“자네와 교분을 생각해 더 일찍 왔어야 하나 자네도 알지 않나. 이런 장소에는 내가 일찍 오기 좀 그렇다는 걸 말일세.”
세자의 말뜻은 범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비록 상대방과 자신이 꽤 교분이 있다고는 해도 그는 정왕의 세자였다. 그러니 대신들보다 일찍 나타나 범한을 도와주는 건 예법에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에 범한이 엷게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 하는데 이홍성이 먼저 또 작은 소리로 범한에게 말했다.
“유가는 오늘 오지 않았다네. 대신 내게 자신의 말을 전해 달라더군.”
범한의 눈썹이 살짝 씰룩이며 ‘유가 군주가 평소 약약이와 친하고 자기하고도 친한데 왜 오늘 혼례에는 나타나지 않은 걸까.’라고 생각했다.
이 순간 이홍성이 범한의 표정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누이동생은 지금 왕부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네. 부왕께서 조금 전 하신 말씀은 진심이셨단 말일세. 만약 자네 정혼자가 대단한 가문의 여식이 아니었다면 부왕께서 분명 황태후마마께 자네와 유가가 혼인할 수 있도록 직접 나서 달라며 부탁했을 수도 있다네.”
범한은 잠시 놀랐다가 이내 고심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으니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129화
드디어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범한과 임완아는 붉은 줄을 한쪽씩 잡았다. 두 사람은 줄을 사이에 둔 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몸을 굽혀 살포시 맞절을 했다. 그러자 이 질투 나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있던 범약약은 감동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반면 옆에 앉아 있던 범사철은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모습이 너무 닭살 돋아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부모에게 절을 할 때 범건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유씨 부인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어머니가 앉아야 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혼례를 보고 있던 관원들과 귀족들은 ‘유씨 부인이 언제 정부인이 되었던 거지?’라고 생각하며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지금 이 장면이 범한이 한 달 동안 몰래 계획한 결과라는 걸 알지 못했다. 범한은 원한을 덕으로 갚는 부류는 절대 아니었지만 원수를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기고 있는 부류도 아니었다. 이에 유씨 부인을 향한 경계를 풀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아버지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경 쓰는 것을 보고는 유씨를 정부인으로 만든다면 유씨 쪽 세력을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그녀의 마음을 더욱 편히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혹시라도 유씨 부인이 나중에 범한에게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제 범한에게는 자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적에게는 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었으므로 그녀가 두렵지 않았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그가 보기에 유씨 부인도 사실은 불운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범사철까지 낳지 않았는가. 그러니 범한은 유씨 부인을 저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한데 범건은 범한의 요청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젯밤 황궁에서 황태후의 허락이 담긴 서신이 도착하자 그제야 요구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유씨 부인 입장에서는 10년을 참고 견딘 끝에 정부인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색한지 앉아 있는 내내 매끄러운 의자 팔걸이 부분을 만지작거렸고 신부가 건네는 찻잔도 불안하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 차의 맛을 음미하기는커녕 단번에 호로록 마셔 버리고는 이내 신부 옆에 있는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범한을 바라보는 유씨 부인의 눈빛은 어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범한의 눈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범한은 미소 띤 얼굴로 아버지에게 차를 올리고 있었다.
이때 유씨 부인의 입꼬리에 아주 힘겹게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혼례식에 참석한 관리들은 내부 사정을 모르기에 당황해서 예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반면 대청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유씨 부인의 친정 쪽 관리들은 지금 이 상황을 보며 탄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수모가 임완아를 부축해 일으켰으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밖을 바라보았다.
“성지요! 범씨는 성지를 받으라!”
사남 백작가와 잘 아는 황궁의 후 태감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와 성지를 읽어 내려갔다. 오늘이 혼례를 치르는 날이니 범건이든 범한이든 모두 황궁에서도 무슨 계획이 있을 거라 예측하고 있던 터라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정원에 있던 6처의 관리들은 성지의 내용에 놀라고 말았다. 후 태감이 성지를 낭독할 때 등장한 하사품들이 아무리 봐도 예법에 맞지 않아서였다. 황궁에서 보낸 하사품은 비단이었다. 한데 그 수량이 규정된 양보다 훨씬 많았다. 일부 하사품은 품계에 따라 주어지는 양이 정해져 있으므로 일개 대신의 아들 혼례에 보내는 하사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군주나 황자의 혼례식 때 내려지는 하사품처럼 보였다.
그러니 아무리 재상가와 백작가의 혼인이라고는 해도 대신들 눈에는 황실의 관심이 과해 보였다.
범한은 성지의 내용을 들으면서 붉은 천을 쓰고 있는 처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나요? 내가 당신 덕을 본 것 같아요.”
붉은 천에 얼굴이 가려져 있는 임완아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 * *
후 태감이 물러나자 대신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또 밖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범가와 임가의 혼인은 하늘이 맺어 준 아름다운 인연이라 이에 숙 귀비마마께서 선물을 내리셨습니다.”
범한은 깜짝 놀라 임완아와 함께 다시 예를 갖추었다. 숙 귀비가 상으로 내린 것은 진귀한 원서였다. 2 황자의 모친인 숙 귀비가 범씨 가문과 오랜 친분이 있었다니 대신들은 절로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한참 후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범가와 임가의 혼인은 하늘이 맺어 준 아름다운 인연이라 영 재인께서 축하하시었소.”
관리들은 또 놀라고 말았다. 영 재인은 비록 품계는 높지 않았지만 1 황자의 친모로, 1 황자는 줄곧 병사를 이끌고 변방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영 재인의 선물은 한 자루의 검으로 동이성 출신인 그녀의 성정과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범한 부부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예를 차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받았다. 범한이 처에게 속삭였다.
“보았습니까? 마마님들께서도 선물을 내려 주셨군요. 영 재인마마께서 내려 주신 이 검은 당신께 주신 거예요.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 검으로 찌르라는 뜻일 것입니다.”
임완아는 범한의 말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으니 이 뒈질 낭군 놈을 깨물어 줄 수도 없고 참.
숙 귀비와 영 재인이 선물을 보냈으니 황제의 다른 비빈들도 성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몇 명은 공동으로 성의를 표했다. 그런데 영 귀빈이 선물을 보낸 이유는 다른 후궁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본래 유씨 집안의 사람이었고 어젯밤 유씨 부인이 백작가 정부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축하를 빙자해서 골탕 먹이기에 나선 것이다. 그녀의 선물은 하나였는데 그 하나의 높이가 두 척이나 되어 혼례식에 참석했던 관원들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황후의 선물이 도착했다. 황후는 일국의 국모여서 그 선물의 격이 남달랐다. 그녀가 선물로 보낸 것은 맑고 투명한 옥으로 만든 여의(如意)였다. 그야말로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귀한 보물이다.
오늘 혼례에 참석한 대신들은 그야말로 진귀한 구경을 한 셈이었다. 개국한 이래 대신 여럿이 여식의 혼사를 치렀지만 황궁의 높은 분들이, 그것도 이리도 많은 분들이 선물을 보내 주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임완아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고위 관료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다 알고 있었다. 임완아는 단순히 장 공주의 사생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와 황태후의 총애를 받으며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랐다. 그러니 후궁들도 그녀에게 남다른 정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츰 손님들이 안정을 찾을 무렵 6처 관원들은 조금 전에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제법 진중한 표정과 아까와는 다른 눈빛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드디어 핵폭탄급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황제의 친필이 들어간 어서(御書)를 태감들이 보물처럼 떠받들고 백작가로 들어온 것이었다. 정원에 있던 사람들 모두 무릎을 꿇고 황제의 어서를 맞이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황제께서 이르노니, 범한과 임완아의 혼인은 아름다운 시기에 하늘이 맺어 주신 것이니 친히 글 한 폭을 써 기념으로 남기노라.”
범건과 범한은 조심스럽게 어서를 받아 들고 그것을 펼쳐 하객들에게 보여 주었다. 새하얀 종이에 행복한 백년해로를 바란다는 ‘백년호합(百年好合)’이라는 네 글자가 들어 있었다.
내용은 매우 간결했다. 하지만 줄곧 신하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걸 꺼리던 황제 폐하가 친히 글까지 써주었으니 그 속에 담긴 뜻은 절대 간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객들은 범한이 임완아를 처로 맞이한 건 황금 덩어리를 얻게 된 것과 같은 행운이라고 여겼다.
* * *
황궁 깊숙한 곳, 그곳에 자리 잡은 방 안에서 경국의 황제가 미소 지은 얼굴로 그림 한 폭을 보고 있었다. 그림에는 화공이 그린 황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황제는 가장 아끼는 완아를 범한에게 시집보냈으니 그림 속 여인도 그녀의 며느리를 좋아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황제의 주변 인물들은 오늘 범한과 임완아의 혼인이 이렇게도 크고 성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황제가 임완아를 아껴서라고 생각했다. 비빈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오지존인 황제는 범한에게 부마로서 혼례를 치르게 해주지 못해 그에 맞는 보상을 해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을 바라보는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대도 예전에 이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좋아했지. 그러니 그 아이도 좋아했으면 좋겠군.”
혼례식장에서 벌어진 광경은 남녀의 애정 소설을 많이 읽은 어린 소녀들이나 좋아할 법한 일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그 선물들을 보고도 좋은 기분 같은 건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범한의 마음은 황궁에서 쏟아져 들어온 선물들로 동요되기에는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마음은 그리고 예식을 지켜본 하객들의 마음까지 포함해, 선물은 모두 ‘군주’인 임완아에게 들어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선물이 들어올 때마다 범한은 살짝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선물이 올 때마다 이렇게 무릎이 남아나지 않게 끓어 대느니 차라리 오죽 아저씨에게 막대로 몇 대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혼례 분위기를 돋우는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범한과 임완아의 혼인 예식이 막을 내렸다. 신혼부부는 화촉동방으로 인도되었고 하객들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이상하게도 정왕 말고는 단 한 사람도 술에 취한 이가 없었다.
신혼방으로 향하는 부부를 보며 사남 백작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장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아 안도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황태자와 2 황자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신분은 고려하지도 않고 범한의 혼례에 하객으로 참석했다면 황궁의 경계와 범한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리란 걸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황태자와 2 황자는 사람을 시켜 귀한 선물을 보내기는 했다.
밤이 되고 신랑 신부가 여종의 안내에 따라 최근에 수리한 저택이자 그들의 신혼집에 도착했다. 저택에는 붉은 촛불이 밝게 켜 있었고 곳곳에 붉은색으로 된 기쁠 ‘희(喜)’ 자가 곳곳에 붙어 있어 경사스러운 분위기 가득했다.
범한은 도착하자마자 한숨부터 돌렸다. 반면 이곳에 있던 종들은 젊은 주인들을 아직 무서워했다. 그들은 모두 범한이 사 온 사람, 정왕부에서 보내준 사람 그리고 황궁에서 임완아를 따라온 보모였다.
범한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허리부터 쭉 펴더니 활짝 웃으며 종들에게 모두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모든 종들이 문밖에 모여 신랑 신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하자 임완아의 몸종 사기가 서둘러 그들에게 상여금부터 나누어 주었다.
“사기야, 너도 피곤할 테니 그만 가서 자려무나.”
범한은 처음에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지만 이내 사기를 향해 미간을 좁히며 ‘Y’자 주름을 만들어 보였다.
사기는 조금 난감하다는 듯 ‘아직 합환주도 안 마셨는데.’라고 생각하며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로 이때 붉은 천을 쓰고 있던 임완아가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을 보일 듯 말 듯 흔드는 게 보였다. 어서 나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몸종 사기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서둘러 신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이제 신방에는 범한과 임완아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나와! 나한테 맞고 싶지 않으면.”
범한은 임완아의 생각과 달리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범사철이 뚱뚱한 몸을 꿈틀거리며 난처하다는 듯 침대 아래에서 기어 나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침대 뒤에 있는 변기통 냄새에 질식해 죽게 놔둘 걸 그랬나.”
여전히 붉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임완아가 푸흡, 하고 웃었다.
“그 변기통은 아직 쓰지도 않은 거예요.”
범한은 임완아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금색 테두리가 칠해져 있는 변기통 안에는 향초가 들어 있었다.
이제 다른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붉은 촛불이 은은하게 켜져 있자 범한은 눈을 한번 또르르 굴렸다. 그리고 두 번 헤헤, 소리 내며 웃고는 앞으로 걸어가 넓은 소매 밖으로 나와 있어 찬기가 있는 임완아의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130화
그런데 느닷없이 범한의 머릿속에 오죽 아저씨가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이 대종사님이 평소처럼 구석에 서 있는 걸 좋아한다면 잠시 후 자신들이 침대 위에서 한창 즐거워하고 있을 때 구석에 있는 오죽이라는 유령을 보게 될 게 뻔했다. 그러면 범한은 놀랐을 때 하는 행동을 할 게 뻔했다. 이에 범한이 서둘러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작게 말했다.
“아저씨, 여기 계세요?”
아저씨는 방 안에 없었다.
범한에게 손이 잡혀 있는 임완아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미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갑자기 범한이 아저씨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궁금증이 일어 불쑥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네?”
“별거 아니에요.”
범한이 미소 지으며 부가 설명을 했다.
“나중에 진정이 좀 되면 당신과 만나게 해줄게요.”
“네.”
임완아는 얼떨떨하기만 할 뿐 누구를 두고 한 얘기인지는 몰랐다.
“부인.”
임완아의 머리 위에는 붉은 천이 씌워져 있었다. 예법에 따르면 이 천은 원래 신랑이 자를 이용해 벗겨야 했다. 한데 범한은 그 규칙을 무시하고 두 손으로 천 양쪽을 살포시 잡고 천천히 벗겼다. 붉은 천이 움직이자 부끄러워하는 여인의 백옥같이 하얀 아래턱이, 또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솟은 코끝이, 긴장해 꼭 감겨 있는 두 눈이, 살며시 떨리는 두 눈썹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촛불은 점점 어두워지고 범한은 살짝 긴장한 채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오른손 엄지로 부인의 귀밑에 자리 잡은 부드러운 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 * *
“컥! 컥!”
방 밖에서 때마침 분위기를 깨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호위병들이 검을 칼집에서 빼는 소리, 그리고 신음하며 누군가가 땅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 마지막으로 오늘 밤 당직인 왕계년이 놀라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어느새 문밖으로 나와 있었다. 몸에 걸친 혼례복이 어두컴컴한 밤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더 매력적으로 펄럭였다.
붉은 구름이 지나갔지만 범한은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볼 수 없었다. 범한은 손을 털고 발걸음을 옮겨 상대방이 자신의 어깨를 치려는 걸 피했다. 그사이 범한은 머리카락에서 가느다란 침을 꺼내 상대방의 어깨에 꽂아 넣은 상태였다. 이 침에는 강력한 독이 발라져 있어 범한은 상대방이 몸이 굳어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보니 돌계단 앞에 있는 시위들은 이미 서너 명이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고 왕계년은 겁에 질려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이 세상에 내가 만든 독을 맞고도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있다니. 몸 뒤쪽에서 전해 오는 바람을 뚫는 소리와 함께 범한은 끄응 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칼처럼 공중으로 휘둘렀다. 한데 손날로 그자의 얼굴을 베려던 순간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 버렸다.
그자는 범한이 벨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독까지 당한 상태였다.
범한이 본 자의 모습은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온갖 고초를 겪은 얼굴에 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제대로 본 건 아직 아니었다. 하지만 염색이라도 해놓은 듯한 음침한 담갈색 눈동자는 얼핏 보기에도 공포 그 자체였다.
“스승님?”
범한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한데 배가 뒤틀리듯 아파 오자 우선 서둘러 허리춤에서 아무 환약이나 대충 꺼내 먹었다.
그리고 10년 만에 본 비개 스승이 오늘 느닷없는 방문해 준 것에 너무나 감동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올리고 끌어안고 속으로 욕을 퍼부어 주었다.
* * *
“어째 겉모습은 하나도 안 변했군.”
비개는 서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여종이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을 즐기면서 옆에 서 있는 범한을 바라았다.
“10년이나 못 봤으니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네 녀석은 아직도 예쁘장하구나.”
범한은 한숨은 내쉬었지만 감히 자리에 앉지는 못한 채 비개의 말에 대꾸했다.
“스승님,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한밤중에 슬그머니 오지 마십시오.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제자, 이제는 침소에서 폭신한 베개를 쓰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조금 전 제가 칼로 스승님을 공격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스승님은 감찰원 8처를 통틀어 무공이 가장 약하신 분인데 이리도 야행 잠행을 좋아하시면 아주 위험합니다.”
사실 범한은 스승 비개와 재회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그리고 만약 만나게 된다면 제자와 스승이 부둥켜안고 울거나, 서로 독을 넣은 차를 마시며 각자의 기량을 겨룬다거나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혼례를 치른 날, 그것도 화촉동방에 이 스승이란 자가 뜬금없이 나타나 분위기를 깰 거란 생각은 결단코 한 적 없었다.
이에 스승과 헤어진 후 지니고 있던 그리움은 어느 순간 욕구 불만이 섞인 분노로 변해 버렸다. 범한은 하루 종일 ‘서른 몇 해를 참아 왔는데 뭐가 그리 급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독이고 마음을 억눌러 왔던 터다. 한데 소원 성취를 바로 코앞에 두고 늙은 독쟁이가 훼방을 놓으니 꾹꾹 참아 왔던 범한은 급한 마음에 ‘언제든 오셔도 되지만 왜 하필 오늘입니까.’라며 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한데 비개는 범한의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방금 동이성에서 돌아왔다. 네가 혼례를 올린다기에 며칠 서둘렀더니 드디어 도착했구나.”
비개의 말에 감동한 범한은 서둘러 허리를 굽혀 큰절을 올렸다. 더군다나 비개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가장 많이 힘써 준 두 사람 중 한 명 아니던가.
비개가 범한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상자에서는 옅은 향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범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제자에게 주는 혼례 선물이다. 마음에 드느냐?”
범한은 비개 스승이 준 선물이니 분명 비범한 물건일 거라 생각하며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을 보니 손톱만 한 크기의 환약이 몇 알 들어 있었다. 범한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손톱으로 환약 위를 살며시 긁어 내 입 안에 넣고 맛을 보았다.
비개는 범한의 행동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옛날 그 예쁘장한 소년이 이제는 청년이 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특히 범한이 옛날 자신이 가르친 직업적인 습관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놓였다.
“거북이 등껍질이고 초제(醋制)한 것이군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열심히 환약의 성분을 분석해 나갔다.
“지황, 아교, 밀랍……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연빙.”
비개의 입꼬리가 득의양양해진 사람처럼 위로 올라갔다.
“일연빙이요?”
순간 범한은 이 환약이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스승님의 놀라운 수완을 생각하니 강하게 믿음이 가서 기쁜 마음에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래. 대양 밖에서 나는 약재다. 네 해 전에 동이성에서 장사하는 이에게 구해 달라고 했는데 올해 드디어 구했다더구나. 거기에서 한동안 있었던 건 모두 배 들어올 때를 기다린 거였어.”
말을 마친 비개가 손을 흔들며 시중을 들던 여종을 밖으로 내보냈다.
네 해 전 황궁에서 처음 두 가문의 혼사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비개는 임완아의 폐병을 고칠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제자가 건강한 부인을 얻도록 해주려고 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범한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이성에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도 다녀왔단다.”
범한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과거 사고검을 치료해 준 인연을 팔아 그들에게 약속을 하나 받아 왔단다. 그들이 나서서 너를 괴롭히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말이다.”
스승의 말을 들은 범한은 그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첫날밤이 시작되려는 순간 흐름을 툭 끊어 버린 것에 대한 원망은 어느새 사라지고 범한은 감격해 말했다.
“스승님, 환약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 약은 처음으로 조제해 보는 것이다만 시험은 해보았다. 효험이 있더구나.”
이 말을 할 때 비개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잠시 반짝 빛나더니 그가 말을 이어 갔다.
“한데 부작용이 조금 있으니 똑똑히 들어 두거라.”
“말씀하십시오.”
스승 비개의 신중한 모습을 보니 범한도 절로 엄숙한 표정으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복용한 후 한 달간 부부 합방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비개는 미소만 지을 뿐 진짜 부작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 * *
“정말 독한 분이십니다.”
상대방을 물어뜯어 죽이고 싶은 표정으로 스승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어 범한은 고통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러면 내일 완아에게 약을 먹여야겠습니다.”
비개는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범한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 비개가 범한의 코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경도에 청루가 저리 많은데 오늘 밤 꼭 그 일을 치러야겠느냐.”
범한이 껄껄 웃었다.
“스승님께서 일부러 절 놀리고 계신 거 다 알고 있거든요.”
비개는 이 예쁘장한 놈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생각했다. 10년 전에도 요 녀석을 어쩌지 못했는데 지금은 더 강해져 있다니. 잔뜩 성난 비개가 뾰로통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전생에 네놈한테 신세라도 졌나 보다. 하는 것마다 어찌 다 네놈한테 들켜 버리는 건지, 원!”
그러자 범한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을 위로했다.
“그거야 스승님께서 절 아껴 주셔서 그런 거죠.”
비개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새로 꾸민 서재라 아직 나무 냄새가 나는 가운데 침묵이 더해지자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한참 후 비개가 입을 열고 담담하게 물었다.
“경도에 온 지 오래되었으니 감찰원에도 가보았겠구나.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어떤 일들은 알게 되었겠구나.”
“일부는 알게 되었습니다.”
범한은 순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머님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는데 아버님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범한은 비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비개는 범한에게서 자신과 같은 노련함, 악랄함, 독함, 부패를 보았고 무언가 압박감 같은 게 느껴져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화제를 너무 교묘하게 돌린 터라 범한은 순간 되물을 수 없었다.
“너도 잘 알고 있을 것 같구나. 아가씨께서는 왼손으로는 섭가를 세우시고 오른손으로는 감찰원을 건립하셨단다. 지금 사남 백작과 진평평 원장은 모두 네가 그것들을 이어받기를 바라고 계신다. 다만 사남 백작께서는 네가 황실 금고 사업을 물려받기를 바라고 있고, 진평평 원장께서는 네게 감찰원을 물려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구나.”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 예전에 제게 주신 요패가 제사패더라고요. 사실 그 제사패가 지닌 의미를 알았을 때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알아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하십니까?”
“내 생각은 사실 진평평 원장과 다르다.”
비개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 갔다.
“감찰원은 천자이신 황제 폐하와 지근거리에 있단다. 그러니 무서운 정치적인 투쟁에 쉽게 휘말릴 수 있어. 황실 금고는 비록 단번에 손에 쥐기는 힘든 곳이지만 감찰원보다는 통제하기 쉬울 거야.”
범한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장 공주가 쫓겨나듯 경도를 떠나기는 했지만 자신과 관련 있었기에 이미 황실 투쟁 속에 빨려든 것만 같아서였다. 범한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 이제 그만 신경 쓰세요. 긴 여정으로 피곤하실 테니 우선 댁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제가 어머님의 유산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진 원장 대인과 아버님께서는 모두 제게 물려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비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하게 말했다.
“복잡하게 얽힌 일이지. 더군다나 내 보기엔 재상 대인은 조정에 오래 붙어 계시지 못할 것 같구나.”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장인이 오백안 사건에서 벗어났는데 또 무슨 일이 난 걸까 하며 궁금해했다.
비개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작은 소리로 다른 질문을 던지기만 했다.
“오죽 대인께서는 지금 경도에 안 계시지?”
범한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제가 경도로 온 후 곧바로 떠나셨습니다. 남해 쪽으로 섭류운을 찾으러 가신 것 같은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모릅니다.”
비개가 고개를 내젓다가 별안간 범한을 쳐다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훈계했다.
“듣자 하니 경도에서 시를 즐겨 짓다가 유명해졌다지?”
범한이 쑥스럽게 웃었다.
“스승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어려서부터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글을 쓰길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비개가 탄식했다.
“이제 보니 그 도 네 녀석이 지어낸 거였구나!”
범한은 그저 소리 내며 웃기만 했다.
비개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범한을 보고 말했다.
“네 모친은 누가 봐도 놀랄 만한 재주를 지닌 분이셨단다. 그리고 쉰내 나는 썩은 글쟁이들을 제일 얕잡아 보셨어. 그런데 네가 경도로 들어온 후에 그런 조잔한 기술이나 연마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니. 만약 하늘에 계신 네 모친께서 보셨다면 열받아 졸도하셨을 거다.”
범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어머니는 전생에 공포 그 자체인 이과 출신 박사였을 테니 분명 자신과 가는 길이 달랐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승님, 옛날에 스승님과 진평평 대인 그리고 오죽 아저씨까지 모두 제 어머님을 따르셨습니까?”
“그렇단다.”
“모친께서는 일찍이 스승님께 약들을 구해 달라 하지 않으셨나요?”
“무슨 약 말이냐?”
“음…….”
범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겨우 입을 뗐다.
“춘약이나 사람을 유혹하는 미약이요.”
그러자 비개가 무언가가 생각이라도 난 듯 이상한 표정을 짓고 음흉하게 웃었다.
“이제 막 신혼인데 벌써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냐?”
131화
다음 날 새벽, 까치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계속해서 울어 댔다. 까치 소리가 들리니 점점 노랗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도 경사스러운 기운이 물들어 훨씬 노곤해지는 것만 같았다.
범한이 문을 열고 기지개를 활짝 켰다. 얼굴에는 아직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게 빛나고 있었다. 범한이 하품을 한 후 웃음을 짓더니 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나오지 않고 뭐 해요, 하루 계획은 새벽에 세운다 하지 않습니까. 당신 이름이 신아(晨儿)인데, 그건 새벽이란 뜻 아닙니까. 당신이 바로 새벽인데 계속 늦잠 자기예요?”
그러자 부끄럼 섞인 임완아의 다급한 대답이 방 안에서 들려왔다.
“당신처럼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얼른 문 닫아요.”
범한이 하하 웃었다.
“어제 혼례를 치렀으니 지금은 모두 피곤할 거예요. 그러니 이리 이른 아침에 깨 있는 건 우리 둘뿐일걸요!”
범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뜰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나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범한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범한은 깜짝 놀라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어린 여종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신혼부부를 도와 씻기고 옷을 입힌 후 두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범한이 조심스레 임완아의 손을 잡아 주더니 불만에 찬 처의 얼굴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에는 스승님을 모시느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었네요. 그러니 오늘은 더 일찍 들어오리다.”
임완아는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란 터라 언행이 각별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이상한 소리를 즐겨 하는 사람을 부군으로 삼았다는 걸 알게 되자 부끄러워하며 범한을 꾸짖었다.
“또 점잖지 못하게…….”
범한은 살짝 차가운 임완아의 작은 손을 잡아끌며 미소 지은 얼굴로 정색하며 말했다.
“호수에 다녀온 후 우리 둘 다 경전을 삐딱하게 보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또 그러는군요.”
“오늘부터 나를 상공이라 불러 줘요.”
“그러죠, 상공.”
임완아가 부끄러워하며 부탁을 들어주는 모습은 범한에게는 그야말로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범한은 ‘상공’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패를 가지고 노는 마작이 생각났다. 그러다 이번 생의 기묘한 만남이, 또 광란의 지난밤이, 화촉동방의 아름다움이, 황제에게 쫓겨난 장 공주가 연달아 떠올라 저도 모르게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확실히 더 많은 패를 가진 것 같습니다.”
경도에 들어온 후 범한은 이제야 비로소 행복을 찾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에 소리를 낮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원 나이트 인(ONE NIGHT IN) 경도, 우리는 수많은 정을 나누었지요.”
범한의 품에 있던 임완아는 범한의 노랫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고한 큰 눈동자는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 * *
화원 모퉁이를 돌면 백작가 본가였다. 이곳은 지금 온통 들뜬 분위기였다. 남녀 종들이 열을 맞춰 양쪽으로 서서 신혼부부를 맞이했다. 종들은 아씨 마님이 대단한 신분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범씨 일족들도 어젯 혼례식 때 황궁에서 보내 준 하례품들에 압도되어 있는 상태였다.
며느리가 건넨 차를 마신 범건은 행복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 임완아에게 재상의 건강이 어떤지에 대해 물으며 대화를 나눈 후 두 사람에게 편히 지내라는 말을 건넸다. 범건은 아들과 며느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옆에 있던 범약약도 오라버니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 주었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저택에 돌아와 있을 때였다.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나 어린 종이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경도 외곽에 위치한 범씨 가문 장원 사람들이 선물을 들고 찾아와 있었다. 이들은 굳이 범한과 임완아를 찾아올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그냥 오고 싶어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등자경 부부도 있어 범한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다리는 다 나았나요?”
범한이 상석에 앉아 등자경의 다리를 관심을 갖고 바라보았다. 이에 등자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찌감치 다 나았습니다. 하오나 걸을 때 조금 불편하긴 합니다.”
범한이 옆에 있는 임완아에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전에 당신에게 보낸 준 노루 고기며 흰 고라니 고기는 모두 등자경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임완아가 살며시 미소를 짓고 고개를 살짝 까딱하며 인사했다. 하룻밤 사이에 일개 소녀에서 한 집안의 안주인이라니. 그녀가 안주인 노릇을 하는 걸 보니 인생이란 언제나 갑자기 변하기 마련이라는 말이 맞긴 맞나 보다.
잠깐 대화를 나눈 후 등자경 부부는 쉬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을 나설 때 등자경의 아내가 이상하다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씨 마님에게 유난히 귀티가 나네요. 한데 몸이 연약해서 도련님과는 맞지 않는 분 같아요.”
그러자 등자경이 깜짝 놀라 아내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씨 마님께서는 진짜 귀한 분이셔. 그러니 말조심해. 들키는 날에는 그날로 입 찢어지니까.”
그런데도 아내는 어린 티 나는 임완아를 생각하며 이유도 없이 웃다가 불쑥 몇 마디 했다.
“한데 신부가 신랑보다 인물이 떨어져서 조금 웃기네요.”
그러자 등자경 역시 웃으며 말했다.
“경도에서 도련님보다 더 예쁘장한 아가씨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
이제 다른 말을 해볼까. 담주 별저에 있는 노부인도 범한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노부인의 선물은 거리에서 며칠 지체되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경도 본가에 도착했다. 어머니의 선물이 도착했으니 범건은 이유 불문하고 친히 문밖까지 나가 선물을 맞았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신혼부부에게 이 사실을 전하도록 했다. 범한은 한껏 기분이 들떠 임완아의 손을 이끌고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사이 그녀에게 말했다.
“나를 제일 예뻐해 주는 사람은 할머님이십니다. 그런데 대체 뭘 보내셨을까요?”
문 앞에 당도한 범한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 버렸다. 할머니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보내 주었다. 바로 한 사람이었다.
사사가 한껏 즐겁고 들뜬 표정으로 자신이 몇 년 동안 모신 도련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새 고운 자태로 인사를 올렸다.
“도련님을 뵈옵나이다. 아씨 마님도 뵈옵나이다.”
범한은 할머니가 저 먼 담주에서 사사를 경도로 보낼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범한은 자신과 함께 몇 년 동안 평온한 세월을 보낸 이 여인을 보니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일을 대체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 왔다. 할머니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자신에게 사사를 방으로 들이란 것이었다. 게다가 사사의 모습을 보니 할머니가 원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 방안이 없어 보였다.
“우선 가서 쉬어요.”
범한은 최대한 온화해 보이려 노력했다.
그런데 사사에게는 앞에 있는 도련님이 여전히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경도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었을 테니 성정이 자연스레 침착하게 변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말로는 표현 못 할 기질 같은 게 생긴 것 같았다.
사사가 조금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범한은 웃긴다는 듯 말했다.
“이런,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배불리 먹고 충분히 쉬면 내가 데리고 나가 경도 구경을 시켜 줄 텐데.”
그러자 사사가 섭섭해하며 말했다.
“사사는 도련님 시중을 들기 위해 왔습니다. 도련님께 제 시중을 들어 달란 적 없습니다.”
범한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신과 함께 자란 여인이라 그런지 사사는 말과 행동이 꽤 직설적이었다. 자기에게 크게 화조차 내지 못하고, 더욱이 자신의 의견에 대놓고 반박도 못 하는 본가의 다른 여종들과는 사뭇 달랐다.
범한이 사사 앞으로 다가가 조금 마른 그녀의 얼굴을 토닥이더니 웃었다.
“그렇고말고요. 사사가 날 시중들어야지요. 그런데 책을 쓸 먹을 갈아 주기 전에 먼저 씻기는 해야겠지요. 온몸에서 식초 냄새 같은 땀내가 나잖아요. 붉은 소맷자락과 향기에 싸여 한밤의 독서를 하는데 사사가 내게 그 식초 냄새를 풍기고 있다고 다른 이들이 말하게 만들 건가요?”
경국에는 ‘방현령의 부인이 식초를 마셔 자신의 뜻을 밝힌다.’는 전고도, 그와 연관된 이야기도 없었다. 일단 ‘방현령의 부인이 식초를 마셨다’에 관한 전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현령은 전생 당나라 태종 이세민 때의 재상이었다. 그에게는 무섭고 엄하지만 살뜰히 챙겨 주는 부인이 있었다. 어느 날 방현령과 태종 이세민이 술을 마시다가 농담을 나누었는데 이세민이 농담으로 한 말을 지키고 말았다. 바로 미인 두 명을 내려 준 것이었다. 무서운 부인 때문에 걱정하던 방현령은 하는 수 없이 그녀들을 집으로 데려갔고 화가 난 부인은 그녀들을 내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가 재상 부부를 불러들여 혼내 주는데 미인들을 집으로 들이거나 방현령의 부인에게 독주를 마시라고 했다. 방현령이 울며 황제에게 아내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가운데 부인은 독주를 마셔 버렸고, 이걸 본 황제가 질투심은 대단하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 역시 지극하다는 것을 알고, 그녀가 마신 건 독주가 아닌 식초임을 알려 주면서 그들을 용서해 주었다. 이후 사람들은 ‘식초를 먹는다(吃醋)’를 ‘질투심’, ‘질투하다’와 같은 의미로 쓰게 되었다. 그러니 방현령 부인이 식초를 마셔 뜻을 밝혔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방현령 부인이 질투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방금 범한은 식초 냄새란 말을 통해 은근슬쩍 여인 간 질투심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암시하며 비꼰 것이었다. 한데 그 말에 담긴 은근한 맛을 알아듣는 이가 경국에는 없었다. 결국 범한은 조금 전 한 말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같았다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부끄럽고 난처해진 사사는 범한에게 다시 인사를 올리고 여종을 따라 씻으러 갔다. 본가 여종들은 사사라는 여종이 자신들과는 처지가 많이 다른 듯 보여 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대해 주었다.
* * *
“저 여인이 바로 사사인가요?”
“예전에 담주에 있는 여종이 사기보다 부지런하다며 자주 얘기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사람을 보게 되었네요.”
아무리 임완아가 귀한 군주 신분이고 경국이 아직 남존여비 사회란 걸 감안해도 범한이 보기에 임완아는 사사의 등장으로 까칠하게 변했다거나 앞서 생각하는 구석이 없었다. 이에 범한은 나중에 자신이 첩을 여럿 두려 할 때 당당한 군주 신분인 그녀가 그 여자들을 질투하긴 할까, 궁금증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은 다행히 그런 일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정말로 첩을 들이려 한다면 그때는 단단히 화가 난 이 작은 호랑이에게 자신의 두 팔이 물어뜯길 거라 생각했다.
* * *
“혼인은 사랑의 무덤입니다.”
범한이 케케묵은 말을 툭 내뱉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우리는 많이 걷고 한 쌍의 산송장은 되지 말자고요.”
임완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더니 불쌍한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요.”
“창산은 눈이 멋져요. 가을과 겨울에 유난히 아름다운 곳이에요.”
범한이 살짝 미소를 머금고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여행사 직원처럼 상대를 혹하게 만들려 했다.
“스승님이 만든 약을 먹고 효과를 봐 어의에게 경하한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래도 해발 고도가 높은 곳에 가 있는 편이 당신 몸에 훨씬 좋아요.”
임완아가 고개를 기울여 범한의 품에 기대더니 두어 번 머뭇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해발 고도가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건 해면보다 얼마나 더 높은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막상 범한도 쉬이 설명할 수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임완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안 가면 안 되나요? 산에 올라가는 것도 추위도 모두 무서워요.”
그러자 범한은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당신 얼굴이 얼마나 동그래졌는지 좀 봐요. 나쁠 건 없으니 운동 좀 합시다.”
순간 흥, 소리를 내며 임완아가 범한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어젯밤에는 내가 살이 붙어 좋다면서요!”
범한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하지만 계속 정색하며 임완아를 진정시키려 했다.
“등불이 꺼진 후에는 통통한 게 좋지요. 하지만 밝은 낮에는 눈으로 보는 거니…… 마른 게 보기 좋죠.”
임완아가 화가나 끄응, 소리를 내더니 앞서 행랑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범한은 서둘러 따라가기는 했지만 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다. 대신 한 발자국 정도 앞으로 더 나아가 작은 소리로 웅얼웅얼 말했다.
“난 당신의 그 포동포동한 살들이 가장 좋은데 설마 모르고 있었어요?”
가을날 황궁 안에서 임완아는 정면으로 여름 바람이라도 맞은 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앞으로 두 걸음 걸어가 범한의 손을 잡고는 살그머니 말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도 많은데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나 봐요.”
132화
두 사람은 지금 황궁 안이라 그들 뒤에는 상궁이며 태감, 궁녀 등이 잔뜩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조금 전까지 신혼부부가 한 말들을 그들은 듣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범한이 임완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부인, 나에게 좀 배우십시오. 그래야 표정 하나 안 바꾸고도 경천동지할 일들을 할 수 있어요.”
이 말에는 다른 의미도 숨어 있었다. 하지만 임완아는 그 숨은 의미까지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오늘 두 사람은 혼인 후 첫 입궁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후궁들은 임완아가 찾아오자 이 귀여운 여인을 끌어안고 기쁨의 환성을 질렀고 이것저것 선물을 챙겨 주었다. 범한은 그녀들이 주는 선물을 거절하지 않고 넙죽넙죽 받았다. 그런데 마마님들이 임완아를 예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황족인 장모님을 두었으니 나중에 부부간 다툼이라도 난다면 자신은 처형되어 땅에 묻히지도 못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황제에게는 모두 네 명의 아들, 즉 한 명의 황태자와 세 명의 황자가 있었다. 이는 어떻게 보면 그가 호색한은 아니란 걸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정말 희한한 건 황궁에 후궁이 이리 많은데도 공주를 낳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란 임완아는 마마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임완아는 황궁 생활이 익숙했기에 범한이 처음 입궁했을 때처럼 긴장해 조심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제집에 돌아온 양 뒤뜰에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이런 임완아에게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또 자기가 가장 꺼리는 장 공주가 지금 신양에 가 있기도 해 범한은 마음 편히 임완아를 따라 황궁 곳곳을 거닐었다.
아까 두 사람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눈 창산 휴가 건은 황후를 알현했을 때 범한이 제안한 사항으로 이미 여러 마마님들에게까지 허락을 받은 일이었다.
그런데 임완아가 추위를 잘 타는 바보였다니.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내년에는 경국과 북제가 정식으로 포로 교환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왕계년을 통해 감찰원 쪽 일을 듣고 있던 범한은 이 포로 교환이 자신과 연관이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용한 곳에서 일련의 일을 처리하고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번 황궁행에서 범한은 처외삼촌인 황제 폐하를 알현하지 못했다. 이에 임완아는 살짝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반면 범한은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했다.
* * *
백작가에서 마차 행렬이 위풍당당하게 출발했다. 오늘 임약보 재상까지 딸을 배웅하기 위해 나서다 보니 마차 행렬 규모가 처음보다 훨씬 커지고 말았다. 그러자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며칠 전 재상가와 백작가가 혼례를 치를 때도 경도의 절반이 들썩였는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백작가의 ‘시선’ 공자는 또 이런 야단법석이냐고 말이다.
“어째 혼례를 올리자마자 경도를 떠날꼬.”
인파 속에 있던 한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이맛살을 찌푸렸다.
“요즘 젊은것들은 가문 위세만 믿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노는 것만 알지. 범 공자란 자도 듣자 하니 태학원 봉정씩이나 된다던데 왜 또 창산으로 가느냔 말이여.”
“이보세요. 뭘 모르시나 보죠?”
옆에 있던 젊은 사람이 노인을 비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범 공자는 이번에 밀월을 하러 떠나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아가는 거라고요.”
“밀월이 무엇이여?”
한 아주머니가 흥에 올라 질문을 던졌다.
“꿀처럼 달콤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백작가와 먼 친척 관계에 있는 어느 가난뱅이 서생이 비웃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여태 그것도 몰랐습니까? 범 공자가 직접 만든 신조어라고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화를 냈다.
“그런 이상한 단어를 왜 알아 둬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그 밀월인가 하는 게 조용한 데 가서 며칠 지내는 거면 거기서 즐겁게 지내다가 포동포동한 아기 만드는 거 아닌감?”
* * *
경도를 떠나는 마차 안 왼쪽에는 임완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피 안에 웅크리고 앉아 봄을 머금은 것 같은 촉촉한 눈동자와 웃는 눈매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오른쪽에는 상냥하고 예절 바른 범약약이 있었다. 범약약은 귤의 껍질을 까고 다시 세심하게 흰 부분까지 벗겨 내더니 과육을 쪼개 범한의 입에 넣어 주었다.
범한은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 임완아의 표정을 곁눈질로 보다가 참지 못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꺼내고 말았다.
“이제 겨우 가을인데 아무리 추운 게 싫어도 그렇지 어찌 벌써부터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임완아가 웃으며 모피 속에서 기어 나오더니 범한에게 찰싹 붙어 입을 벌렸다. 범한은 그 순간 가슴이 설레서 그녀가 범약약에게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언니, 나도 귤 먹여 줘요.”
범약약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병에는 귤을 먹으면 안 돼요. 화(火) 기운이 위로 솟구친다고요.”
그러자 임완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 짜증 나.”
범한은 뜻밖에도 처와 누이동생 간에 호칭 정리가 안 된 것을 알고 두 사람에게 물었다.
“대체 호칭이 어떻게 된 거지?”
그러자 임완아가 혀를 입술 밖으로 살짝 내밀었다.
“전부터 언니라고 부르던 게 습관이 되어 그래요.”
범약약도 웃음을 터트리더니 손가락으로 범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이 혼례를 치르기 전에 부르던 게 습관으로 굳어졌나 봐요.”
범한은 체념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차 안은 따뜻했다. 그리고 경도를 나선 후로는 계속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렸으니 쉬이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임완아는 범한의 어깨에 더 가까이 기대기 시작했고 범약약 역시 턱을 괸 채 마차 벽에 기대어 쉬었다.
임완아는 범한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마차가 흔들리자 놀라 잠에서 깨 두 눈을 비비며 물었다.
“도착했나요?”
“어찌 벌써 왔겠습니까?”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창산 별장은 별궁만 못할 겁니다. 게다가 산허리에 있어서 경도에서 나와 사흘 정도를 가야 해요.”
임완아가 평온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혼인 후 서둘러 경도를 떠난 거잖아요. 요양 때문만은 아니고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요?”
범한은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속일 생각도 없었다. 이에 미소를 지으며 임완아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당신의 두 사촌 오라버니들이 매일 백작가로 사람을 보내고 있어요. 나는 그들이 무섭거든요. 그러니 숨는 수밖에요. 지금 어느 쪽으로 붙을지 정한다면 어느 쪽에 서든 둘 다 바보 같은 선택이 될 거예요.”
경도를 떠난 지 이틀이 지났을 무렵 마차 행렬은 산허리를 느긋하게 지나고 있었다.
창산의 웅장함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백 년 전 한 제왕이 수십만 명의 사람을 동원해 산에 마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을 닦는 공사를 강행했었다. 창산을 자신의 피서지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도로에 어마어마한 비용과 백성들의 노동력이 동원돼 보수 공사가 진행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보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공사를 진행했던 제왕이 자기 비(妃)들의 보드라운 몸 위에서 죽고 말았다. 그것도 이 보수한 도로를 단 한 번도 직접 이용해 보지 못한 채로.
수백 년 동안 천하의 흥망성쇠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경도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이 거대한 산은 차츰 황족들과 관료들의 후원으로 자리 잡아 갔다. 그리고 이전 황제 때부터 몇 가지 법령이 반포되자 그러한 분위기는 더욱 견고해져, 춥고 매서운 산바람조차도 창산을 파고든 관리들의 입김을 내몰지 못했다.
법령이 반포되자 창산에서는 수렵, 개간, 나무 태우기 등의 행위가 금지되었다. 가난한 민중들이 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금지된 것이다. 그리고 창산은 순전히 돈 있는 자들을 위한 휴가 명승지로 자리 잡았다. 이에 지금의 창산은 몇 군데 남아 있는 사당에서 고행하는 수련자, 은둔자가 지내는 곳을 빼면 모두 황제가 일부 대신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준 땅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이곳은 조정 대신들이 별장을 짓고 정사를 돌보면서 쌓인고단함을 푸는 곳이 되었다.
범씨 일족의 별장은 산허리에 지어졌다. 선대 황제가 붕어하기 반년 전에 좋은 자리를 골라 하사해 준 곳이었다. 사방이 고요했고 별장 앞에는 맑고 작은 계곡물이 흘렀는데 산봉우리에서 떨어진 단풍잎이 이 계곡물을 타고 흘러내려 왔다. 계곡 옆에는 노란 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공연을 할 수 있는 누각이 있었다. 한데 때마침 맑고 서늘한 늦가을이고 하늘에서는 가끔씩 기러기가 날아가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적막하고 고요했다.
범한 일행이 도착하자 산장 안은 금세 사람들 소리로 넘쳐났다. 산장 청소는 선발대로 출발해 도착한 사람들이 일찌감치 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말린 과일이며 산짐승 고기 등을 백작가에서 별도로 넉넉히 준비해서 보냈다. 도련님, 아씨 마님 그리고 아가씨가 이곳에서 얼마나 지내다 갈지 딱히 정해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백작가에서는 본가에서 노래 부르는 여인 셋도 함께 딸려 보냈다. 이에 산장에서는 날마다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어쩌면 노랫소리에 겨울나기를 준비하던 다람쥐들이 수도 없이 놀라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좋은 곳이구나.”
종이 방을 정리하는 사이 범한은 평평한 바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발밑 멀지 않은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운무(雲霧)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저 멀리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푸른 숲이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자 범한은 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임완아가 범한의 몸에 살며시 기대고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좋아요. 어렸을 때 창산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수려함이라든가 그윽한 느낌은 여기 당신 집안의 산장만 못했어요.”
“이제 우리 둘의 집안이지요.”
범한은 표현을 바로잡아 주고는 아내의 옷깃을 조심스레 여며 주었다. 창산은 본래 한기가 강하니 자칫 임완아가 감기에나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러자 임완아가 소리 내어 활짝 웃었다.
“알았어요, 상공.”
이로부터 수일 동안 이들 젊은 남녀는 조용한 산중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 평안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지냈다. 범한은 세상과 단절된 채 여러 날을 지내는 이 상태를 즐겼다. 매일 임완아를 데리고 미끄러운 산길을 걷거나 아니면 누이동생 뒤에 서서 그녀의 긴 속눈썹을 본다든가, 창산의 아름다움을 어찌 종이 위에 옮길지 고민을 하면서 말이다.
청산에서 지내는 나날 동안 혼례를 치른 임안와와 범한은 제대로 된 부부의 삶을 보내고 있었다. 이 신혼부부는 서로 반하고, 담벼락을 넘나들며 만나는 전율을 느끼고, 또 한껏 걱정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이곳에서 최종적으로 마음 놓고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격정이 끝난 후 찾아온 은은한 향기가 더욱 지속적인 향을 내뿜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새벽녘이었다. 임완아가 부스스 눈을 뜨고 무의식적으로 통통한 팔을 살며시 움직이다가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사라지고 없는 걸 발견했다. 이리도 따스한 이불을 마다하고 상공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하지만 임완아는 놀라지 않았다. 첫날밤 이후로 그녀는 범한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디에 갔다 오는지는 몰랐지만 나중에 자신이 잠에서 깨기 전에는 슬그머니 방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임완아는 줄곧 궁금했었지만 본가에 있을 때는 알아볼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집안 어르신이나 자신을 성가시기 따라다니는 보모도 없는 창산 아닌가. 임완아는 눈을 또르르 굴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두툼한 방한용 옷을 몸에 걸치고 부드러운 신발을 신고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나갔다.
133화
문밖을 나서니 창산의 새벽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와 임완아는 꽁꽁 얼어붙어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기에 슬그머니 웃고는 끝에 있는 다른 방으로 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범약약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서둘러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옷을 한 겹 밖에 걸치고 있지 않아 너무 추웠던 범약은 손을 비비고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리 일찍 무슨 일이세요?”
지금까지 수줍고 귀엽기만 한 모습에 가려져 있던 임완아의 살짝 극성스러운 성격이 창산에 오더니 드디어 드러나고야 말았다. 임완아는 혀를 빼꼼 내밀더니 범약약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그녀를 이끌고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편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범약약은 다른 사람과 한 침대를 써본 적이 없어 그런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런데 범약약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임완아는 너무 친밀하게 굴었다. 안은 것도 모자라 그녀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더니 그 자세로 질문을 던졌다.
“언니의 오라버니가 매일 날이 밝기 전에 어디에 가는지 알아요?”
범약약은 허리에 둘린 손이 차게 느껴졌다. 만약 오라버니가 지금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가슴 아파할 거란 생각에 서둘러 그녀의 손부터 덥혀 주며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부부인데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러자 임완아가 우습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분은 매일매일이 비밀투성이예요. 그 비밀을 얘기해 주기 싫은 거라면 매일 저녁 우리 둘이 방 안에서 이야기 나누며 바둑을 둘 때 오라버니가 어디 가는 건지 말해 줄래요? 안 궁금했어요?”
듣고 보니 원래 차분했던 범약약도 조금 의심이 들기는 했다. 오라버니는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무공을 연마했고 이는 범약약도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근 요 며칠 저녁마다 잠시 사라졌다 돌아오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녀도 모르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아침에는 무공을 연마하시고 저녁에는…… 잘 모르겠어요. 다음에 또 그리 나가시면 물어보지요, 뭐.”
임완아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무공 연마요? 무슨 무공이요?”
“많이 궁금하셨군요.”
“당연하죠!”
임완아의 눈동자가 산장에 있는 물이 가득한 호수처럼 반짝 빛났다.
“지아비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부인으로서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범약약은 새언니에게는 황실 사람 같은 습성이 그다지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자신보다 조금 더 극성스러운 면이 있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만약 제가 혼인한 사람이라면 이렇게나 추운 날에는 차라리 이불 속에서 실컷 자는 편을 택할 거예요. 이렇게 추울 때 방에서 뛰쳐나온 걸 오라버니가 아시게 되면 꾸지람을 들어야 할걸요. 그러면 제가 끼어들어서 편들어 주지도 못해요.”
임완아는 범한이 화를 내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게 없었다. 다만 부군의 성정은 알고 있던 터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방긋 웃으며 물었다.
“‘만약 혼인한 사람이라면’이라고요? 지금은 늦가을이니 이제 보니 우리 집안 아가씨에게도 이제 곧 춘곤증이 오겠군요!”
이불 속에서 두 사람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져서인지 몰라도 범약약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런 범약약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대체 왜 그러세요!”
말을 마친 범약약은 손을 뻗어 간지럼을 태웠다. 그러자 임완아가 어머, 하고 소리치며 손을 뻗어 반격했다. 침대에서 이리저리 장난을 치니 청춘 소녀들의 호흡은 더욱 거칠어져만 갔다.
* * *
범약약은 결혼한 아낙의 손놀림을 이길 수 없었다. 이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임완아를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바람이 목으로 파고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자 범약약은 그제야 그녀의 손을 이끌고 오라버니를 찾으러 산장을 나섰다.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산장 사람들도 새벽일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두 사람이 도둑처럼 밖으로 나가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창산 산허리 일대가 범씨 가문의 영지였으니 아무도 이들을 방해하지 않은 것이다. 두 여인은 새벽이슬을 밟으며 조심스레 숲속 작은 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이쪽이 맞아요?”
범약약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산이 크니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염려 마요!”
임완아가 웃으며 범약약을 안심시켰다.
“감이 왔어요. 상공이 어디에 있는지 느낌이 왔거든요.”
범약약은 미덥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직감을 믿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만 그리했을 뿐 실제로는 발아래 흙을 유심히 살피며 걸었고 결국에는 누군가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리도 조용하고 한적한 산길을 걸어간 사람은 오라버니일 것이며, 오라버니가 아니라면 이렇게 아무도 없는 산을 올라갈 만큼 고아한 흥취를 지닌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두 여인은 단풍이 든 나뭇잎을 헤치고 옷에 이슬방울을 묻히며 숲을 지나 산기슭까지 이르렀다. 비개가 준 약을 먹고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임완아는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새언니의 얼굴과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자 범약약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바람막이 옷의 단추가 풀렸다는 걸 알려 주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앞만 보며 나아갔다.
그러다 두 사람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도 않고 몰랐을 깜짝 놀랄 장면과 마주하고 말았다.
산기슭 아래로 창산에서는 보기 힘든 완만한 구릉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가을 서리를 맞았는데도 유난히 파릇파릇한 풀이 습지를 덥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열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기이한 형세의 험준한 암벽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암벽 사이사이에는 황죽(黃竹)이 검처럼 삐쭉삐쭉 하늘을 향해 솟아나 있었다.
암벽 위에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홑옷만 입고 있는 범한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암벽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임완아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너무 놀라 비명을 질러 범한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다. 한데 순간 부드럽고 차가운 손이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범약약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절벽 위에 있는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임완아에게 강한 척 냉정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범약약은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말을 한 건지…….
범한은 이내 절벽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리저리 튀어나온 암벽 사이를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밟을 수 있는 곳만 아슬아슬하게 밟으며 수직으로 내려왔고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게다가 대나무 끝에 찔릴 뻔한 적도 여러 차례.
하지만 범한은 타고난 예측 능력이라도 지닌 사람처럼 장애물을 만나기 전 한발 앞서 방향을 돌리거나, 두 번 방향을 틀기 전에 발이 떨어지는 위치를 선정하거나, 반동으로 만들어진 힘을 이용하거나 해가며 대나무에 찔리지 않고 스치듯 피했다.
이는 모두 체내에 흐르는 패도의 기를 따른 덕분이었으며 이로써 지니게 된 강한 통제력 덕분이었고, 오죽에게 배워 자연스레 익힌 본능 덕분이었다.
범한은 그 모든 동작들을 번개처럼 짧은 순간에 해냈다. 검은 광선이 내리치는 것처럼 죽림 사이를 이리저리 피하고 암벽을 지난 범한은 습지에 안착했다. 바닥으로 내려온 범한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헌데 그 순간 두 여인이 서 있자 깜짝 놀라 물었다.
“어떻게 두 사람이 여기에……?”
숨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범한이 스치고 내려온 험준한 절벽 위 군데군데 솟은 대나무들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라도 하는 듯 촤라락 흔들리고 있었다.
임완아와 범약약은 그 장면에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두 여인은 범한이 외양간 거리에서 8등급 고수를 죽인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벽 위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는 위험한 장면은 그녀들이 생각하고 있던 무공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범한의 정확도, 냉정함 그리고 능력, 이 모든 것이 그녀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오라버니인 범한을 가장 신뢰하고 있고 임완아보다 훨씬 담담한 범약약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저도 모르게 가볍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오라버니,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범한이 풀밭에서 걸어 나오더니 두 여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정수리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평소에 늘 하는 무공 연습일 뿐인데.”
범한은 과거 담주에서 본, 오죽 아저씨의 무시무시한 절벽 수직 낙하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만약 이 두 사람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분명 이 둘은 조금 전 본 자신의 낙하 장면은 별 볼 일 없어 쳐다도 안 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범한이 이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리 이른 새벽에 여기까지 온 거야? 산에 산짐승도 많은데 말이야.”
범약약이 임완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새언니가 깰 때마다 오라버니가 안 보인다고 해서 제가 오라버니를 찾으러 데리고 나왔어요. 오라버니가 어떻게 무공을 연마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범은 추위로 붉게 상기된 아내의 얼굴을 보고는 그녀의 코끝을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임완아는 상공이 누이동생 앞에서 자신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게 적절한 행동이 아니란 생각에 부끄러워하며 범한의 손을 살짝 피했다. 한데 이때 임완아는 상공이 이리도 대단한 고수일 줄 몰랐다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조금 전 본 광경 속으로 마음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누가 그러던데 내 실력은 4등급 이상, 6등급 미만이라고 하더군요.”
임완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라 7, 8등급 이상의 고수는 수도 없이 봐왔어요. 그런데 상공, 당신이 그들보다 훨씬 대단하던데요.”
“그렇습니까?”
범한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흘려버리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 말했다.
“비개 스승님의 약이 효과가 있기는 해도 창산의 새벽바람은 거세요.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러면서 범한은 그녀 목에 둘린 모피를 단단히 여며 주었다. 그리고 당부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매일 무공 수련하는 게 습관이 돼 있어요. 그리고 일찌감치 말해 주지 않은 건 내 잘못이 커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절대 이렇게 나오지 말아요.”
범약약은 오라버니가 새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자 저도 모르게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미소 지은 얼굴로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한데 범한은 느닷없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약약아, 너도 다음부터 이렇게 나오지 말아라!”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화를 내자 범약약도 서둘러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잠겨 버리고 말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후로는 꼭…….”
범약약이 하려던 나머지 말은 ‘새언니를 잘 돌보겠습니다.’였다. 한데 임완아가 다급히 불쑥 끼어들어 자신이 그녀를 끌고 나왔다며 범약약을 두둔했다.
그러자 범한이 돌연 범약약의 머리카락과 차가운 귀를 문지르며 따스하게 말했다.
“새언니는 원래 몸이 약하니 그렇다 쳐. 그렇다고 너는 이 추위에 멀쩡할 줄 알았니? 동상에라도 걸리면 어찌 시집을 가겠니?”
범한이 말을 마치자 두 여인은 그가 정말로 화나서 그런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젊은 남자가 보여 준 처를 향한 사랑과 누이에 대한 다정함에 절로 행복해졌다.
134화
세 사람 중 가장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건 바로 범한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고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범한은 경도의 일은 다 잊은 사람 같았다. 물론 사남 백작이 정기적으로 사람을 시켜 비밀 서한을 보내고 있고, 왕계년도 범한이 만들어 놓은 경로를 이용해 경도의 일을 보고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경도에서도 별다른 이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유일한 큰 사건이라고 한다면, 바로 범한 자신에게 활을 쏜 대내통령 연소을이 북방으로 보내졌고, 또 그가 무북신책군 대도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정도였다. 비록 동일 품계 내 이동이었지만 황궁 호위병을 북쪽에 배치했기 때문에 황제가 연소을에게 한 차례 주의를 준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경국과 북제 간의 평화 협의는 이미 지난달부터 공식적으로 효력이 발생한 상태였다. 그러니 무북신책군은 무력을 쓸 수도 없는 처지였다. 비록 연소을이 북방의 대도독이기는 해도 지금 그가 처한 국면을 보면 실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답답한 처지가 된 것이었다.
범한은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왕계년의 서한을 보며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연소을이 갑자기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모두 9등급 상에 달하는 무공 실력과 장 공주의 전폭적인 도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지밀한 황궁 내부에서 황제가 장 공주를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감찰원이 지근거리에서 감시하기 쉽도록 연소을을 경도에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 방법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연소을을 추밀원으로 올려 보내면서 품계도 올려 주되 문관의 업무를 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면 그가 북쪽에서 군대를 장악할 기회도 함께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범한은 탁자를 가볍게 두 번 두드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조정의 다른 세력들에게 경고를 날렸던 것이다. 이제 보니 경도는 아직 충분히 안전했다. 한데 제왕의 자리에 십수 년이나 앉아 있는 영웅 군주가 왜 상대방이 안전하게 세를 불리는 걸 용인하는 거지? 제왕의 위엄, 감찰원의 능력, 경도 수비대장 섭중의 충성심을 한데 모은다면 장 공주와 그 숨어 있는 황자를 소탕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말이다.
범한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황제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게 대체 무엇이길래 이리도 담대하고 느긋하게 상대방을 지켜보기만 하면서 먼저 손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지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도가 안전한 건 확실하다고 생각하니 범한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애초에 자신이 황제처럼 막강한 실력자가 아닌 터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국면 완화를 위한 전단지 사건을 일으킨 게 생각났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두고 살짝 후회하기도 했다.
범한은 장 공주와 황실 금고를 둘러싸고 다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은 별거 아니었다. 하지만 몇 번 은근슬쩍 겨룰 기회가 생겨 그때마다 이득을 본 건, 범한으로서는 걱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장 공주의 성정을 고려해 본다면 그녀가 자유를 얻는 즉시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게 뻔해서였다. 그래서 범한은 생각했다. ‘만약 황제 폐하께서 이 위험해 보이는 놀이를 계속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어쩌면 장 공주를 죽여 버리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한데 이는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첫째, 오죽이 상대방을 죽인 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공주를 죽이는 일은 황실의 존엄을 대놓고 훼손하는 것이니 황제 폐하는 참지 않을 게 뻔했다. 둘째, 장 공주는 범한 처의 모친이다. 그러니 만약 범한이 정말로 장 공주를 죽인다면 그리고 임완아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범한은 부부 관계를어떻게 이어 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둘째 처남의 죽음만으로도 범한은 여전히 가슴에 가시가 박혀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범한과 오죽은 장 공주를 죽일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장 공주는 이미 자신의 영지인 신양으로 돌아갔고 신양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있는지 두 사람은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범한은 수중에 있는 총은…… 감히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범한은 총 때문에 경도에 있는 높은 분들이 다시 옛날 황위 계승자이면서 암살당한 친왕을 그리고 더 나아가 섭경미란 이름까지 떠올릴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범한은 창밖을 잠시 바라보았다. 창산에는 벌써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일찌감치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눈꽃 송이 덕분에 산속 장원이 유난히 희고 깨끗하게 변한 상태였다.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왕계년이 보낸 서한을 불태워 버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가을비가 내리던 밤에 범한은 이미 결심을 했었다. 어머니의 일은 계속 마음속에 묻어 두자고. 자신이 진정으로 모든 국면을 통제할 수 있는 그날까지 숨겨 두자고.
별장 한가운데에 있는 방은 난로에 불이 켜져 있어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임완아와 범약약은 백작가에서 함께 온 세 명의 노래 부르는 여인들을 데리고 마작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옆에서 계산을 해주고 있었다.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 세 명의 여인이 서둘러 일어나 범한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안쪽에서 이부자리를 깔고 있던 어린 여종도 서둘러 나와 도련님께 인사를 올렸다.
범한은 하던 일을 마저 하라는 의미로 그들에게 손을 내젓고는 범약약과 임완아 사이에 앉아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만약 사철이가 왔더라면 두 사람은 모두 울었을걸요.”
임완아가 살짝 웃었다.
“본가에서 한 번 겨뤄 봤는데 지지는 않았어요.”
범한은 임완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범사철이 변태에 가까운 고집스러운 계산 능력으로 자신의 이 귀여운 아내를 이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옆에 있던 범약약이 웃으며 증인을 자처했다
“새언니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사철이는 그날 밤 동전 두 개만 땄을 뿐인걸요.”
범한이 눈을 반짝이며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우리 완아, 진짜 대단한데요.”
“황궁 안에서는 할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마마님들 모두 마작을 즐겨 하십니다.”
임완아가 놀리듯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상공도 알다시피 황궁 여인들의 계산 능력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요. 이런 놀이를 할 때도 예외는 아니고요. 나도 황궁에서 몇 년 동안 살다 보니 당연히 실력이 대단할 수밖에요.”
그러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었군요.”
* * *
장원에 있는 다른 종들도 모두 어느 한곳에 모여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범한은 푸른색 돌바닥 위로 내리는 눈송이를 밟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흐릿한 등불과 마작 패를 바닥에 내려놓는 희미한 소리, 여인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전생에 보았던 영화, 저우싱치 주연의 에서 지금과 같은 장면이 나왔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다른 게 있었다. 바로 그 장면에서 당백호는 처참한 심정이었던 반면 자신은 지금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점이다.
임완아와 범약약은 범한이 저녁마다 나갔다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날 범한이 무공을 연마하는 장면을 본 후로는 다시 묻는 일 없이 그냥 조용히 범한의 외출을 묵인해 주고 있었다.
범한은 소담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은밀하게 난 오솔길을 따라 곧장 죽림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매화나무 가장자리에 위치한 절벽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창산 산허리에서 가장 외지고 조용한 곳이었다. 범한은 손을 위로 대충 뻗었다. 그러자 오죽의 손이 하늘에서 내려와 범한의 손을 잡았다. 두 손이 교차할 때 힘을 주자 범한의 몸은 이내 외진 봉우리 위에 올라서 있었다. 이곳은 지형 특성상 시야는 탁 트여 있지만 다른 사람이 여기에 있는 사람을 보는 건 쉽지 않게 되어 있었다.
눈이 내리고 달빛이 비치는 창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범한은 오죽이 건네준 차갑고 거무칙칙한 금속의 물건을 받아 들고는 바닥에 엎드려 눈에 묻힌 바위를 조준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범한이 눈 속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의 동작은 느렸고 조금 전 기분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 부지깽이는 보관 상태가 좋았다.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이것을 재조립하는 데 여러 날이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범한은 각 부분이 잘 만들어졌고 광학 조준경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순간 범한은 예전에 상자를 두어 번 걷어찬 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반성도 했다.
범한은 군사 방면으로는 문외한이었다. 이제는 이 무기가 익숙해졌지만 이것을 알아 가는 데 여러 날이 필요했다. 정식으로 훈련에 돌입한 후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크다는 점도 깨달았다. 햇살이 꿈속으로 비쳐 들어온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제야 비로소 꿈이 가짜였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처럼 말이다.
거리 측정이며 조준, 원활하게 작동하는 방법, 모두 이 세계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지식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범한에게는 총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줄 스승이 없었으므로 그는 혼자서 천천히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조준 거리가 멀어질수록 목표물을 맞히는 건 더 어려웠다. 그리고 바람에 의한 영향을 계산하고 거리를 측정하는 건 범한에게는 최고의 난제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부족한 실력을 범한의 여러 기질들이 잘 메워 주고 있었다. 우선 범한은 매우 냉정했다. 오죽만큼 냉정한 면이 있었다. 둘째, 범한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패도의 기가 그의 몸을 시종일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기질인 인내심이었다. 범한에게는 사냥꾼 같은 강한 인내심이 있었다. 이는 모두 전생의 불행한 병과 이번 생의 낮잠 때문에 길러진 것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몸에 비축된 힘만 충분하다면 사냥꾼처럼 한곳에서 종일 움직이지 않고서도 기다릴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눈 속에서 일어난 범한은 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이에 천천히 체내의 정기가 몸에 돌게 해 살짝 마비된 사지를 풀어 주었다. 그러고는 옆에서 깃대처럼 서 있는 오죽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만약 연소을을 대적해야 한다면 제가 명중시키기도 전에 그가 쏜 화살에 맞아 죽을 것 같아요.”
그러자 오죽이 냉담하게 받아쳤다.
“도련님께서는 그 물건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범한은 오죽이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만히 앉은 채로 저격총을 품에 안고 눈을 맞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실 제 실력이 8등급 상에서 9등급 하 사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아저씨께서는 제가 자만할까 봐 줄곧 저를 속이셨고요. 하지만 나중에 9등급 상의 고수들과 대적해야 한다면 남들이 모르는 무기 정도는 쥐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오죽이 범한의 말에 반박했다.
“제가 보기에는 도련님은 여전히 7등급 수준밖에 안 됩니다.”
범한이 자조하듯 웃었다.
“그렇다면 제가 정거수를 죽인 것과 궁전과 맞설 수 있었던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오죽이 느릿느릿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궁전은 8등급, 정거수는 기껏해야 7등급, 어쩌면…… 제가 담주에서 10여 년 있는 동안 천하 무공 수련자들의 실력이 전체적으로 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군요.”
* * *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툭툭 떨어냈다. 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죽의 설명은 아무래도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점이 이상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콕 집어 설명하지 못해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더 강해져야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할 테니까요. 완아에게는 황실과 장 공주가 있지만 약약은요? 사실 약약이는 어머니도 안 계신 불쌍한 아이니 이 점 꼭 기억해 주세요.”
하지만 오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범한이 살며시 웃었다. 이 순간 달빛이 눈 내린 산을 비추어 밤을 살짝 밝히고는 이어 범한의 얼굴도 비추었다. 달빛을 받은 범한의 얼굴은 유난히 티 없이 맑고 아름다웠다. 이때 범한은 눈송이 몇 개가 오죽의 두 눈을 감싼 검은 천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감히 하지 못했던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범한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오죽의 눈 위를 덮은 천에 떨어진 눈송이를 떨어 주기 위해서였다. 범한의 동작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그러자 오죽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 한 발짝 때문에 범한의 오른손은 뻘쭘하게 공중에 떠 있게 되었다. 그리고 범한의 손과 오죽과의 거리는 어느새 반 자나 떨어져 있었다.
“돌아가시죠.”
오죽이 그의 손에서 저격총을 받아 들고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범한은 오죽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절대 고수는 기억을 잃어 과거의 추억을 조금만 가지고 있는데 훗날 어찌 될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범한은 살짝 서글퍼졌다.
135화
산속 생활은 세월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범한은 자발적으로 새벽에는 무공 수련을 하고 저녁에는 시간을 내 오죽에게 암행의 기본기를 배웠다. 이 밖에 대부분 시간은 아내 임완아와 누이동생 범약약과 함께 마음 편히 지내거나, 여인들끼리 모여서 시, 그림, 노래, 마작을 겨루는 걸 바라보며 지냈다. 그러자 하루하루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섭령아와 유가 군주가 잠깐 들러 며칠 묶기도 했다. 그러자 그들만의 작은 시 모임도 열렸다. 유가 군주는 범한이 혼례를 올린 것 때문에 받았던 충격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한데 열두 살짜리라고는 믿기지 않게 촉촉한 두 눈을 반짝이며 범한에게 시를 지어 들려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러면 범한은 말려들지 않고 산으로 호랑이를 잡으러 갈 거라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연말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가문 학당의 수업에서 겨우 벗어난 범사철은 거들먹거리며 마차에 올라타더니 창산으로 향했다. 창산에 도착한 범사철은 한 달가량 보지 못한 형수를 이끌고 흥겹게 마작을 하기 시작했다. 범사철 입장에서는 도박판에서 임완아란 인재를 만나게 된 건, 절대 고수인 검객이 자신만 상대할 수 있는 또 다른 고수를 찾아낸 것과도 같았다. 다시 말해 범사철은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자 또 누가 있겠는가!’ 그런 심정으로 임완아를 대하고 있었다.
장원에는 범한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러자 범한은 자신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자기 처의 형제도 잊지 않고 챙겼다. 범한은 이미 상처가 다 나은 등자경을 시켜 임완아의 큰 오라버니 임대보를 장원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또한 데려오는 동안에는 왕계년과 그의 일행에게 암암리에 호위를 명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이날 점심 식사를 끝낸 후 범한은 종에게 마차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임완아와 단둘이서 산 아래 10리 떨어진 곳까지 나가 임대보를 맞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대열이 보였다. 마차가 멈추자 등자경이 서둘러 범한 내외에게 문안 인사부터 올렸다. 임완아는 그가 범한의 첫 번째 수하임을 알고 있던 터라 그에게 온화하게 화답해 주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임완아의 마음은 벌써 마차 안으로 가 있었다.
“꼬마 범한!”
더 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 호칭을 듣는 순간 대보가 마차에서 내렸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범한이 씁쓸하게 잠시 소리 내어 웃더니 이내 주먹 하나를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고 인사부터 올렸다. 그런 후 다가가 몇 달 보지 못한 사이 몸이 더 불어난 손위 처남을 맞이했다. 임대보는 주변 산세와 경치를 보고 조금 이상했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바보처럼 웃었다.
“경도에는 눈이 훨씬 조금 내렸는데.”
창산에는 눈이 크게 내려 길가에도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오라버니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에 임완아는 다가가 눈을 떨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여우 털로 만든 외투를 몸 위에 걸쳐 주며 원망하듯 말했다.
“아버님도 너무하시지. 창산이 추운 건 잘 알고 계셨을 텐데 옷을 여러 겹 입혀 보내야 한다는 건 모르셨나 보네.”
그러자 범한이 살며시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재상 대인은 남자고 또 지금 재상가에는 여인이 몇 없으니 아무리 대보를 아낀다 한들 알뜰하게 챙겨 줄 수는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범한은 이내 고개를 돌려 등자경에게 물었다.
“오는 길에 무슨 일 없었죠?”
“네, 없었습니다.”
등자경이 침착하게 대답을 이어 갔다.
“산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겨울을 나러 들어오는 다른 마차가 샛길을 빼앗는 일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쪽이 재상가 마차인 것을 보고는 길을 양보해 주었습니다.”
경도의 지체 높은 분들은 겨울에는 설경을 구경하러, 여름에는 피서를 즐기러 창산에 오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산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등자경에게 일어났던 일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인사차 두어 마디 한 후 곧장 산으로 올라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뒤쪽에서 갑자기 급히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마차 한 대가 범한이 있는 곳으로 기세등등하게 올라왔다. 한데 범한이 있던 곳이 하필 길이 갈라지는 길목이어서 순간 여러 대의 마차게 모이게 되자 그 마차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바로 저들입니다.”
등자경이 조금 난처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도련님, 도련님이 화내실까 봐 말씀 안 드린 게 있습니다.”
그 마차 안에 있는 종들은 길목이 막혀 있자 욕부터 내뱉었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그 마차가 예부 상서 곽유지의 것이란 알게 되자 저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범한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저쪽에서는 이쪽 마차가 누구네 것인지 정확히 본 상태였다. 아까 산 아래에서 먼저 길을 차지했던 재상가 마차였다. 재상가 마차여서 싸움을 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예부 상서가의 종들은 순식간에 화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재상가의 마차라지만 이렇게 길을 막아 놓고 못 가게 하면 안 되지! 우리가 길을 양보해 줬으면 서둘러 지나가 줘야 하지 않나?”
예부 상서가의 마차 안에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화려하게 차려입은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등자경 일행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훈계하기 시작했다.
“얼른 비키지 못할까! 임약보 재상께서는 아직 경도에 계신데 너희는 창산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게냐!”
“곽보곤 형님?”
범한이 너무나 반가워하며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올리고 인사했다.
곽보곤은 자신을 유난히 친근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아는 사람과 마주쳤다는 생각에 활짝 웃는 얼굴을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럴 수가! 검은 주먹 놈이라니! 곽보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난처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누구라고? 범한이 왜…….’라고 생각하는 그의 눈에는 긴장 말고도 두려움도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시 모임에서, 경도 관아에서, 기년전에서 곽보곤은 범한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상대방은 경도에서 더 유명해졌다. 다시 말해 자신이 범한을 못살게 굴면 범한은 그때마다 오히려 명성이 훌쩍 올라갔다. 게다가 범한은 이미 그 여인과 혼인을 했고 또 혼례를 올릴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곽보곤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이에 곽보곤은 재수 옴 붙었다는 생각에 다시는 범한을 만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마주치다니.
범한은 곽보곤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차며 탄식했다. 그리고 속으로 ‘곽보곤이야말로 운 나쁘기로는 사람도 신도 다 애석해하겠는데. 왜 또 나와 마주쳐 가지고!’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예부 상서가의 마차가 10여 마리 토끼처럼 산 아래로 질주해 내려가는 걸 보며 손목을 문질렀다. 그때 임완아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산 아래로 쫓아내면 어떡해요! 겨우 황궁 편찬이기는 해도 황태자 오라버니의 측근이에요. 그러니 언젠가는 정무에 참여하게 되겠죠. 게다가 창산이 우리 가문만의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가 횡포를 부렸다고 할 거예요.”
“쫓아내지 않았어요.”
범한은 서둘러 아내의 말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런데 범한의 맑고 아름다운 얼굴 위에 조금 이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냥 밤중에 차나 마시러 찾아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저렇게 내빼지 않습니까.”
임완아는 범한이 온화하게 말하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경도에서 상공이 싸움꾼 검은 주먹인 건 다 아는 사실이에요. 한밤중에 찾아간다고 했으니 곽보곤이 이상하게 여기고 당연히 도망갈 수밖에요. 상공보다 명성도 떨어지고 주먹도 약하잖아요. 그러니 도망가는 거 말고 다른 수가 있겠어요?”
등자경이 또 서신을 들고 왔다. 서신에 범건의 걱정이 은근히 드러나 있는 것을 보니 범한이 조금 우려하고 있던 일이 조정에서 일어난 듯했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만 가지고 판단해 보면 이번 일은 장 공주 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였다.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체 어떤 일이길래.’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왕계년으로부터 정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왕계년이 적어 온 내용과 아버지의 서한 두 장을 서로 대조해 본 후에야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경상(經商)에서 처리하던 정무를 지금은 감찰원에서 처리하고 있다니. 그런데 이런 방식이 얼마나 더 지속될까?”
범한은 한밤중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한은 북제에 가는 임무가 결국에는 자신에게 떨어졌고 자신은 ‘접대 부사’라는 감투를 쓰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지난번 연회 석상에서 술을 마시고 저지른 짓 때문에 너무 튀는 사람이 되어서였다. 그래서 창산으로 들어와 숨어 지냈음에도 그 여파를 잠재울 수 없었다.
다음으로는 직접적으로 만난 적 없는 진평평이 원장이, 그러니까 어머니의 옛날 전우가 자신에게 감찰원을 맡기겠다는 의사를 매우 명확히 표시한 것 때문이었다. 이 점은 비개로부터 증명된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감찰원을 범한 자신이 이어받는다면 재상이 하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을 떠맡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겨우 집안 배경과 자신의 별 볼 일 없는 명성만 가지고는 천여 명에 달하는 감찰원의 음험한 밀정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감찰원은 6처에 속한 일반적인 관청이나 기관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능력 없는 사람이 맡는다면 잠시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있어도 제대로 통제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감찰원은 황제 폐하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특무 기관이라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안정이었다.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 진평평 원장이 북제로 가는 임무를 범한에게 넘긴 것이었다. 만약 언빙운을 성공적으로 구출해 오면 범한은 단번에 1처 수장 언약해의 호감을 사게 돼 언빙운 공자가 경도로 돌아온 후에는 즉시 감찰원 원장직을 이어받아도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비개와 진평평이 암암리에 작업해 놓은 터라 범한은 감찰원 8처 수장 중 절반 정도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한데 문제는 아버지 범건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안전하게 황실 금고를 이어받아 편안히 부자나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둘 중 대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 건지. 사실 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발언권이 크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관건은 황제 폐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를 떠올리니 이맛살이 더욱 강하게 일그러졌다. 만약 자신이 지금 조금씩 감찰원을 이어받고 있는 중이라면 이는 어떤 두려운 예상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서였다.
외교 사절단으로 북제에 가는 일은 자신의 이름에 도금을 하고 더 빛을 낼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범한은 만약 자신이 고작 누런 동에 불과하다면 아무리 도금을 해도 진짜 황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직까지 감찰원 계획 중 가장 위험한 부분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 북제행에서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리란 것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창밖에는 눈보라가 일고 있었다. 하지만 장원 내부에서는 길게 뻗은 행랑을 통해 간혹 즐겁게 웃는 소리며 붉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눈은 내리고 있었지만 범한에게는 참으로 따뜻한 밤이었다.
범한은 서한 두 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더니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는 창문을 열고 그 가루를 눈밭에 뿌려 다시는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차가운 밤바람이 범한의 얼굴을 덮쳤다.
방 안의 촛불도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게 타올랐다.
“얼른 창문 닫아 줘요. 얼어 죽겠어요.”
일찌감치 이불 속으로 들어간 임완아가 입과 코는 따뜻한 이불 속에 그대로 둔 채 얼굴을 반만 내밀었다. 그리고 범한을 바라보며 두 눈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얼른 자요! 대보 오라버니는 원래 말을 잘 들으니까 그냥 여자들과 저러고 놀게 두고 걱정하지 말아요.’
범한은 미소 띤 얼굴로 침대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이불 속에 넣더니 아내의 풍만한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러고는 입으로는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대보 형님은 당연히 착하죠. 한데 우리의 저 착한 남동생에 대해서도 알아 둘 필요가 있어요. 그냥 내버려 두면 또 내일 형님을 데리고 곰을 잡으러 간다고 할 거예요.”
혼례를 치른 지 이미 오래건만 임완아는 아무 때나 불쑥 들어오는 상공의 늑대 같은 손길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임완아는 손을 들어 자기 가슴 위에 놓여 있는 음탕한 손을 잡아 저지했다.
“왜 또 점잖지 못하게 이러는 거예요!”
“부인께서 내게 자러 들어오라 하니 내 어찌 점잖게 굴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웃으며 손으로 등불을 껐다. 그러자 부부만 있는 방에는 고요함이 흘렀다. 부스럭대며 옷 벗는 소리가 나더니 범한은 걸치고 있던 마지막 옷마저 벗어 버리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임완아는 범한의 차가운 몸이 닿자 부르르 떨며 말했다.
“매일 이렇게 늦게 침소에 드는데도 나는 상공이 책상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이게 바가지 긁는 건가요?”
범한은 어린 처를 놀렸다. 임완아의 나이는 아직 만 열여섯도 안 된 상태였다. 만약 전생의 세계에 살고 있는 중이라면 현재 완아는 아직 부모님 품에 있는 어린 아가씨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지금 자신의 처가 되어 밤마다 잠자리를 요구받고 있으니 그녀가 좋아서 받아주는 건지, 아니면 참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범한의 손바닥은 저절로 임완아의 부드러운 가슴을 만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범한은 얇은 옷 한 겹 위로 느껴지는 풍만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너무나도 좋았다.
임완아가 작게 음, 하고 소리를 내더니 범한의 품으로 쏙 들어왔다. 범한은 고개를 숙여 임완아의 통통한 입술을 자신의 입에 담았다. 두 사람의 몸이 서서히 부대끼기 시작하자 실내 온도도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몸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 * *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멈추고 안개도 사라지면 언젠가는 꽃도 피고 지기 마련이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지만 이불 속은 여전히 따뜻한 봄이었다. 피곤해진 임완아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범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범한은 그런 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불쑥 경묘에서의 닭 다리가 생각나는 건 뭔지…….
“당신…… 당신…… 손도 안 닦았잖아요.”
임완아가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범한은 웃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뭐가 더럽다고 그럽니까? 우리 완아 몸은 안 깨끗한 데가 없는데!”
임완아는 부군이 부끄러운 말을 더 하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북제에 가는 건가요?”
범한이 임완아를 꽉 끌어안고는 반문했다.
“나랑 한평생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네?”
범한은 어둠 속에서 완아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상공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긴장하고 있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는 여인이 출가하면 남편을 따르게 되어 있었고 중도에 이혼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완아는 화가 나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상공, 왜 그런 질문을 하나요?”
이제야 자신이 부적절한 질문을 던졌음을 안 범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그냥 물어본 것뿐입니다.”
사실 범한은 아직도 전생의 습성을 몇 가지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완아와 혼인을 하고 합환주까지 마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귀여워 죽겠는 소녀 입에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냥 물어본 거라고요?”
임완아가 반신반의하며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상공은 지금 사사와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군요.”
그 말에 범한은 경도에 일부러 두고 온 사사 생각이 났다. 등자경은 그녀가 경도에서 꽤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한데 할머니께서 벌여 놓은 이 일은 결국 언젠가는 범한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범한이 임완아를 안심시켰다.
“그런 생각을 할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두 사람이 평생 함께 지내기로 약속했으니 당연히 오래오래 같이 지내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당신 어머님께서 나를 탐탁지 않게 보시는 거 잘 알잖아요.”
범한의 말은 임완아에게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특히 ‘평생 함께 지내다’란 표현은 귀로 쏙 들어와 그녀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범한의 해명에 매우 만족한 임완아가 은근하게 화답했다.
“시집을 왔으니 남편을 따라야죠. 그게 내가 할 도리니까요.”
“그럼 다 끝난 얘깁니다!”
어둠 속에서 범한은 온화해 보이게 살짝 미소를 짓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경도에 계신 황실 어르신들께서 마작판을 크게 벌이셨는데 당신의 상공인 내가 패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러자 임완아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때리는 건 제가 상공만 못하죠. 하지만 마작은 당신보다 내가 더 낫습니다.”
이는 범한이 기년전에서 장묵한이 피를 토하도록 만들 때 한 말을 응용한 것이었다. 이 말이 벌써 경도에 파다하게 퍼졌던 것이다.
* * *
창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잠을 이루지 못한 범약약은 우산을 들고 밤하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암석 절벽 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심스레 서 있었다. 그녀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장 존경하고 흠모했던 오라버니가 혼인을 했으니 자신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공허한 상태였다. 오라버니인 범한은 자신에게 범사철처럼 평생을 바칠 무언가를 찾으라고 했다. 이때 그 무언가는 감정일 수도 시와 그림일 수도 있었다. 한데 범약약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눈송이가 우산 위로 떨어지며 범약약의 마음을 때렸다.
그 순간 언제나 검은 천을 얼굴에 두르고 다니는 오죽이 아무도 모르게 뒤로 다가와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비밀을 지킬 수 있습니까?”
* * *
다음 날 새벽, 범한이 무공을 연마하고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임대보가 여우 털로 된 외투를 두르고 만족한 표정으로 장원 아래쪽 절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범한의 눈에 들어왔다. 범한은 까딱 잘못하다가는 임대보가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에 서둘러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보, 지금 뭘 보고 있어요?”
그러자 임대보는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웃으며 범한에게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꼬마 범한, 저기에 크고 흰 새가 있어.”
저 멀리 산속에 흰 안개가 보일락 말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검은 목과 검은 꼬리 깃털을 가진 백학이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먹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는 노래를 불렀다. 학은 한동안 맑게 노래를 부르더니 다시 날개를 펼치고 아름답게 춤추기 시작했다.
범한은 살짝 놀랐다. 이리 추운 겨울에 어떻게 창산에 학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건지, 설마 저기에 온천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학은 본래 구속을 싫어하고 자유로운 걸 좋아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저 멀리서 춤을 추고 있는 학은 보기에도 기분 좋고 자유로워 보였다. 범한은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보, 저 학들이 좋아요?”
“싫어!”
의외의 답변이 돌아와 놀랐지만 범한은 미소 짓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왜요? 설마 춤이 안 예뻐서 그래요?”
그러자 임대보가 두툼한 입술을 모으고는 말했다.
“계속 뛰니까 너무 피곤할 거야. 그래서 대보는 놀랐어.”
범한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손위 처남의 튼실한 어깨를 토닥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경도로 온 후 범한을 가장 편하게 해준 건 임대보와의 세 차례 대화였다. 어쩌면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정말로 어린아이 같아서 자신이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학들의 춤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임대보 말대로 피곤해 보이기는 했다.
“대보, 한동안 어떻게 놀았어요?”
그러자 임대보는 미간을 활짝 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데 어떻게 해서든 똑똑히 설명해 보려 더듬거리면서 대답하기 시작했다.
“정…… 정……말 좋았어. 마작도…… 하는데 꼬마 뚱땡이가 화냈지만, 정……말 재밌었어.”
범한은 웃으며 돌바닥 아래로 펼쳐진 소복하게 눈 쌓인 수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안개와 안개 속 백학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136화
설 연휴가 되면 황실 관례에 따라 황궁에서 모든 황자와 공주들에게 하사품을 내렸다. 올해 하사품은 사람마다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황태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몫을 받았다. 예년에 비해 훨씬 많은 양에 황제의 친서가 담긴 서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다음으로 2 황자 또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하사품을 받았다. 저 멀리 변방에 있는 1 황자도 활과 화살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늦여름이 되면 경도로 돌아와 왕으로 책봉될 것이라는 황제의 뜻도 함께 전달되었다.
대체 황제의 의중이 무엇인지 경도의 신하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지금 황태자의 지위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안정적이었기에 이 상황에서 왜 굳이 1 황자를 불러들이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황자는 오랫동안 밖에서 군대를 통솔한 데다가 적자도 아닌 장자인 그가 경도로 돌아온다면 앞으로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다소 불안했다.
궁에서 내린 하사품 중 사람들의 이목을 끈 또 다른 것은, 청산에 들어가 있는 태학 5품에 봉해진 범한에게 관례에 따라 황제가 부마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모든 대신은 틀림없이 임씨 아가씨의 체면을 생각해서 보낸 것이라고 여겼다.
연말이 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각 지방의 유지끼리도 선물을 주고받았고 특별히 친한 사람들은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서로 관계없는 사신 두 명도 선물을 한 아름 챙겨서 창산으로 올라갔다. 이 선물들은 황태자의 동궁과 2 황자 쪽에서 범한에게 각각 보낸 것이었다.
모두가 회시(春闱: 황제가 있는 도시에서 3년에 한 번 치르던 과거 시험)가 끝나고 나면 범한은 부마라는 신분에 얽매여 더 이상 신분 상승이 어려워질 게 뻔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께서 직접 명령을 내려 그에게 나라의 국고를 대신하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와 2 황자는 그 전에 반드시 범한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매우 은밀하게 진행해야 했기에 양측 모두 선물을 전달하는 사신이 그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도록 극도로 신경 써야 했다.
* * *
“정왕 세자는 뭘 보냈지?”
경국의 황제는 연탑(소파 비슷한 긴 의자)에 기대앉아 검은색 담요를 걸치고 있었다. 평온한 안색의 윤기 넘치는 얼굴에 진하게 몇 가닥 주름이 잡혔다. 그는 서재 밖에 내리는 거위 털처럼 큰 눈송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평평이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자기 무릎에 덮고 있던 담요를 다시 정돈하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전 왕조의 시집입니다.”
황제가 웃음을 지어 보이긴 했지만 입술 끝에 살짝 비웃음이 묻어났다.
“둘째 아들이 문예를 좋아하더니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줄 아나 보군. 범한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시를 한 수 읊으면 전조 시인들보다 훨씬 나을 텐데, 선물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은 것 같군.”
황제가 이어서 물었다.
“그럼 황태자는 무엇을 보냈는가?”
“비취옥으로 만든 마작을 보냈다고 합니다.”
진평평은 매끈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황제의 시선을 따라 황궁 안의 넓은 눈밭을 바라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범한이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합니다.”
“범……한, 가만 보면 확실히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 보입니다.”
황제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황태자가 아주 훌륭한 선물을 보냈군. 동궁의 누가 그런 생각을 해낸 건지 모르겠구나.”
“분명 신기물일 겁니다.”
진평평이 웃으며 대답했다.
“범한이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신은 아옵니다. 신 군주와 백작가의 둘째 도련님이 마작을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황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신아는 요즘 어떤가?”
진편평이 소심하게 대답했다.
“범한이 옆에서 일거수일투족 잘 보살펴 주고 있으니 황궁 생활보다 훨씬 재미있으시겠죠.”
“황궁에서 정말 즐거운 사람을 찾는 건 정말 힘든 일이긴 하지.”
황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 정말 범한을 북제로 보내기로 한 것인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던 진평평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은지 고개를 숙인 채 예를 갖춰 대답했다.
“예. 폐하께서 신의 의견에 동의하신 이상 신은 그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한이 감찰원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감찰원을 장악하는 데 분명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를 위해 공을 세우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황제는 차가운 눈초리로 진평평을 쏘아보다가 잠시 후 나지막이 말했다.
“황가의 핏줄인 그가 이런 모험을 해야 하다니! 자네도 이 점을 절대 잊어선 안 될 거야.”
오랜 침묵이 흐른 후, 진평평은 살짝 곤란한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여전히 굽히지 않았다.
“폐하, 문제는 그가 영원히 황가의 핏줄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폐하의 신하 된 제가 그를 위해 조금 더 안전한 미래를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만약 그가 내고를 대신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다른 황자들이 어떻게서든 그를 포섭하려고 들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그런 상황을 바라진 않으시지 않습니까. 우선 그를 밖으로 한번 내보내는 게 바람을 피해서 평생을 창산에 숨어 살게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하라.”
황제는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 순간 황궁에 불던 눈보라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진평평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 가만히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사남 백작과 임 재상이 결코 동의하지 않을 걸세. 잠시 후 조의 때 심하게 반발하고 나설 거야.”
“가자!”
어린 태감의 낭랑한 목소리가 흥경궁 처마 밑에서 울려 퍼지자 궁녀들이 일사불란하게 나타나 황제의 가마를 멨다. 황제가 가마에 오르자 바로 대전으로 향했다.
엄청난 눈보라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밀폐된 가마에 오른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반쯤 감은 채 턱을 괴고 있었다. 그러다 따뜻하게 달아오른 작은 난로를 손으로 천천히 어루만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너무나도 익숙한 황궁의 경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황궁 중앙에 이르자 태감이 불진(拂塵. 환관의 신분을 상징하는 도구)을 쥔 채 앞으로 나와 낭랑한 소리로 고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신하들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땅에 엎드려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만세를 외쳤다. 황제는 신하들을 쓱 지나쳐 천천히 용상에 앉았다.
“모두 일어나거라.”
황제의 말에 모든 신하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고위 고관들은 경도에서 윤택한 삶을 보내면서 몸에 살이 붙어서 동작이 느릿느릿했다. 이 모습이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다른 일은 모두 협의를 마쳤사옵니다. 이제 봄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춘시 이후에 작년에 북제와 잠정적으로 협의한 사안을 이행할 때가 되었사옵니다.”
황제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용상에 반쯤 기대앉은 채로 물었다.
“모든 대신에게 묻겠다. 사신으로 보낼 적당한 인물이 있느냐?”
재상의 사위인 태상 5품에 봉해진 범한이 북제로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최근 몇 달간 떠돌고 있었다. 재상 임약보는 자신을 견제하는 조정 세력들이 작당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백작가와 재상가 모두 조정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모두 아주 충성스러운 황제파로 그중 한 명이 장 공주와 딱히 설명하기 힘든 관계였는데 범한이 경도로 온 후로 모든 것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재상과 장 공주의 관계는 끝났지만 범 시랑이 새로운 가족이 된 것이다.
뒤에 있던 호부 시랑 범건은 앞쪽을 쓱 살펴보다가 재상 임약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난번 홍려사에서 소경 신기물이 협상할 때 일 처리가 깔끔하고 나라를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보면 실력이 출중한 훌륭한 인재라고 사료되옵니다. 신 소경이 이번 북제 사신 답방에 가장 적합한 인재라고 생각하옵니다.”
앞서 치고 나온 사람은 재상 임약보의 제자 태상사 소경 임소안이었다. 오늘 조의에서 답방에 대한 안건이 논의될 게 뻔했고 의례적인 규칙에 따라 그의 의견에 대해 질문을 해야 했기에 그와 홍려사의 소경 신기물은 모두 대전에 있었다.
신기물은 무슨 연유로 자신을 추천한 건지 영문을 알지 못해 살짝 놀랐다. 재상 측에서 자기 사위가 천 리나 떨어진 적국에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안전에는 크게 문제가 없겠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였다. 춘시를 보고 나면 범한은 또 승진할 게 분명했으니 만약에 그 즉시 사신으로 보냈다가 그 후 조정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사실 황태자 측 의견도 재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황태자 뒤에 미쳐 날뛰는 장 공주가 없으니 황태자는 문제를 고려하는 데 아주 성숙한 태도를 보였다. 범한이 경도에 남아서 국고 대신을 하게 되면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이익이 생기니 크게 손해 볼 게 없었다. 그리고 이참에 범 시랑을 포섭해서 재상과의 관계도 회복한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었다. 하물며 춘시가 곧 가까워지고 있으니 동궁에서는 범한을 밀어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 조의에서 범한을 북제로 파견하자고 건의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3대째 원로 집안 출신에 일부 상서라 하더라도 두 집안의 심기를 건드려 미움을 산다면 앞으로 일을 장담하기 어려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전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모든 대신이 신기물이 북제 사신으로 가야 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한 셈이었다. 심지어 신기물 자신조차도 범한을 대신해 이 명령을 받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생각지도 못한 듯 손에 든 난로를 옆에 있는 노란 단자 위에 내려놓았다.
바로 그때, 신하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북제 사신 파견에 태학에 봉해진 범한을 추천드리는 바이옵니다.”
감히 누구도 두 집안에 미움 살 행동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대신들이 모두 말한 이를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그는 추밀원(황제의 고문 기관)의 참사관 진항이었다. 무관 출신인 그가 문관들의 시선 따위가 두려울 리 없었다. 하지만 대신들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추밀원의 사람이 왜 굳이 재상과 백작가에게 미움을 사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항의 제안에 재상 임약보의 안색이 확 달라지더니 매우 조용해졌다. 사남 백작 범건은 유감스럽다는 듯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범한과의 관계 때문에 두 늙은 여우는 무슨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과 친분 있는 대신들이 대신하여 앞에 나섰다. 논의가 계속되자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신하가 입을 열었다.
“신은 진항의 제안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옵니다. 범한 대인은 아직 17세에 불과한 데다 관청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한 면이 있어 북제로 파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북제 파견은 국위 선양과 나라 간 우정을 맺는 큰일이지 않습니까. 비록 범한 대인이 재기가 뛰어나긴 하지만 경험이 부족하여 이런 중책을 감당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제가 신 소경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 침착하고 착실하여 북제로 보내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거라 생각됩니다.”
신기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차례인 것을 깨닫고 몸을 굽혀 황제께 아뢰었다.
“폐하! 신,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용상에 앉아 있던 황제는 신하들의 ‘연기’가 탐탁지 않았다. 그는 입가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어 신기물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럼 그대들 모두가 신기물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대신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려 말끝을 길게 늘이며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범한을 북제로 보내자고 한 추밀원의 참사관 진항은 왠지 모르게 의아함을 느끼고 황제를 한번 보고는 얼른 눈을 돌렸다. 이때 다른 신하들은 모두 범한이 사신으로 북제에 가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았기 때문에 황제 또한 마음을 바꿀 거라고 생각했다.
137화
“짐은 그대들과 생각이 다르오.”
순식간에 조용해진 대전에 황제의 담담한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무릇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는다고 했소. 그대들도 잘 알다시피 범한은 문관이기는 하나 외양간 거리에서 자객과 맞서 싸울 만한 용기를 가진 자요. 이렇게 훌륭한 인재가 어찌 태상사, 태학원 관아에서만 지낼 수 있단 말이오?”
이 말을 듣고서야 대신들은 황제가 아주 뜻밖에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만 왜 굳이 범한을 북제로 보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는 대신들을 빤히 쳐다봤다.
“경험이 부족하면 그만큼 연습을 하면 될 일이오. 범한의 지금까지 행실을 살펴보면 이번 일은 그에게 맡겨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오.”
황제가 이미 결정한 사안이라 어느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신하들은 감히 말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임약보와 범건의 얼굴에는 어느새 근심이 드리워졌다. 부모로서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에 두 사람은 일부러 표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만약 억지로라도 매우 기쁜 척했다면 황제와 신하들 모두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범건.”
황제가 호부 시랑 범건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예, 폐하.”
범건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살짝 긴장하긴 했지만 재빨리 황제 앞으로 나갔다.
황제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대의 아들에게 이번 일을 맡기고자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범건은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웃으면서 대답했다.
“신이 감히 무슨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할 말이 있으나 하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면 없다는 말인가?”
“말씀드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말해 보거라. 짐의 생각은 어떠한가?”
대전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안은 봄처럼 따뜻했다. 하지만 황제와 범건의 대화로 대전 안에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몰아칠 것 같았다. 범건과 친분이 있는 대신들은 사남 백작이 여느 때와 달리 황제 앞에서 왜 저렇게 무리수를 두는지 몰라서 초조했다.
잠시 후, 범건의 목소리가 대전에 조용히 울렸다.
“신 범건, 아들과 떨어져 지낸 지 16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만난 지 몇 개월인데 또다시 떨어져 지내야 한다니 참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범건의 ‘참기 어렵다’는 말이 대전에 메아리치다가 누구의 귀로 흘러 들어갔는지 모르게 흩어졌다.
황제는 상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빙긋이 웃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이긴 하지만 자신이 범한을 북제로 보내려는 진정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진평평뿐인 듯했다.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네. 봄에 갔다가 가을이 되면 돌아올 걸세. 그것도 못 참는다는 말인가?”
황제는 범건이 다른 말을 꺼내지 않자 미소를 지으며 바로 명령을 내렸다.
“호부 상서가 늙고 병약하여 이미 요양을 떠난 지 오래이니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 이에 호부 좌시랑 범건이 그 직위를 이어받아 상서직을 받들도록 하라.”
조정 대신들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범건은 호부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직위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에 시커먼 속내를 가진 몇몇 대신들은 범 시랑이 자신의 처 유씨를 정실로 맞이했기 때문에 황제가 그를 호부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이라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범 시랑이 유씨 부인을 정실로 맞이했어야 한다는 둥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조정 대신들은 황제가 범건에게 하사한 직위가 범한을 북제로 보내는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범건은 이 일을 더 이상 돌이킬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평온한 얼굴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다시 임약보에게 발길을 돌려 웃으면서 말했다.
“재상 대인, 따님이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범한을 북제로 내보내려 하는데,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재상 임약보는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경국의 황제와 신하들 사이가 서로 스스럼없이 좋아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위엄이 있어 아무리 측근이라도 감히 선을 넘을 수 없었다. 그는 앞서 범건의 반응이 살짝 이해되지 않았는데 막상 황제가 자신을 지목하여 물어보니 두말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침착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도 이제 단련이 필요한 때인 듯하옵니다.”
조회 후 황제는 기분이 좀 나아진 듯 가마에 올라 후궁으로 돌아갔다. 대신들은 높은 궁의 담장을 따라 난 길로 나서며 호부 상서 자리에 오른 범건에게 잇달아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제 앞으로 경국의 모든 재물을 관리할 정당한 명분이 생긴 것이다.
예부 상서 곽유지가 빈정거렸다.
“범건 대인, 앞으로 저희 대신들의 봉급이 모두 대인 손에 달렸습니다. 너무 인색하게 굴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범건이 허허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곽 대인, 농담도 잘하십니다.”
곽보곤이 몇 차례 범한에게 혼쭐나긴 했지만 조정에서 두 사람의 사이에 반감이 있진 않았다.
밖으로 나가던 임약보가 헛기침을 하자 앞서가던 신하들이 재상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분명히 사돈과 따로 할 얘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범건 대인, 폐하께서 왜 굳이 범한을 북제로 보내시려고 하는 걸까요?”
이미 사돈 관계를 맺은 두 사람 사이에 겉치레는 불필요했다. 범건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범한을 진짜로 훈련시킬 생각이신 건지…….”
그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빌어먹을 절름발이가 틀림없이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범한이 경도를 떠나면 황태자와 2 황자의 포섭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고, 황자가 군사를 이끌고 경도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약보도 범건과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황제가 자신의 사위에 대해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무척이나 염려스러웠다. 설마 정말 신아 때문은 아니겠지?
재상 대인은 고개를 흔들더니 웃었다.
“대보가 요즘 계속 산에 있으니 범건 대인께 너무 많은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모두 한 가족이지 않습니까. 이제 한 달 정도 지나 완연한 봄이 돼서 범한이 경도를 떠나고 나면 완아를 재상 댁으로 자주 찾아뵙게 하겠습니다.”
“예. 요즘은 대보도 그 댁에 가 있으니 집 안이 조용합니다. 범건 대인께서도 시간이 나시면 저희 집에 한번 들러 주시지요.”
범건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상께서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 * *
인적이 드문 외진 곳. 두 대의 마차 그리고 십수 년간 범한의 뒤에 있던 늙지도 않는 음모자, 두 사람은 여전히 각자의 마차에 숨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를 감찰원과의 관계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방금 호부 상서가 된 범건의 목소리는 기쁜 내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냉담했다.
맞은편 마차에 있던 진평평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범한을 북제로 보내는 건 나와 감찰원과는 아무런 상관 없다네.”
범건은 마차 옆으로 난 가림막을 열어젖히고 차갑게 말했다.
“상관이 없다고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거란 생각은 마시오. 소은이 지금 당신 손에 있으니 죽이고 싶으면 그냥 죽이시지요. 뭐 하러 그 명성에 도전하라고 하겠습니까? 소은은 어떤 사람인가요? 정확히 말씀해 주시지요. 그가 북제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를 죽이려는 거라면 이에 따르는 위험 부담이 얼마나 큰지 분명히 아셔야 할 겁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에도 폐하의 힘이 일부 실려 있으니 감찰원 안에도 당신 사람이 있는 셈이죠.”
진평평은 여전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 속에 은밀한 분위기가 숨겨져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나는 걸 아시면 폐하께서도 썩 기뻐하진 않으실 겁니다. 소은은 죽이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이미 20년 동안 그의 골수까지 쥐어 짜낸 거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남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북제의 젊은 황제도 우리 황자들처럼 큰 포부를 가진 건 아니기 때문에 감히 북위의 밀정 수장을 사용하느냐 마냐는 또 다른 말이죠. 이번에 범한이 북제 사신으로 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폐하의 뜻이었어요. 이참에 범건 대인도 생각해 보시죠. 아드님이 경도에 남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황태자와 2 황자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면 앞으로 더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 순간 범건은 조용해졌다. 그는 이것이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인지 눈치챘다. 범한이 황실의 상속 다툼에 절대 끼어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젖혔던 가림막을 내리고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앉았다. 자신이 10여 년간 보살펴 온 아이와 무시무시한 감찰원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 진평평이 차갑게 말했다.
“이미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니 안심하시죠.”
아무도 범건의 입가에 냉소가 번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언빙운이 잡혀갔을 때 감찰원에서 어떻게 하셨죠?”
“당연히 다른 사람이 이어받았죠.”
“평범한 사람을 내몰지 마세요!”
진평평이 웃으면서 맞받아쳤다.
“힘을 더 내셔야겠습니다. 지난번 동이성에서 사람을 보내 장 공주의 궁녀를 찔러 죽인 사건을 가지고 섭중이 줄곧 감찰원에서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어 왔는데, 지금까지도 소문이 돌고 있어 저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범건은 순간 움찔했다.
* * *
창산에는 이미 눈이 수북이 쌓였고 저 멀리 온천에서는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두루미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범한은 아버지와 왕계년이 보낸 편지를 꼼꼼히 읽고 나서 손으로 열심히 가루로 만들어 창밖에 내버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대보와 범사철은 눈사람을 만드느라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범사철도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더 이상 장부만 들여다보는 고리타분한 장사꾼처럼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하늘에서 내리는 이 큰 눈 때문에 경도의 담박서국에서 장부를 가지고 이곳까지는 오는 길은 힘들긴 하지만 일곱째 섭 대행수가 여전히 잘해 주고 있어서 걱정이 없었다. 요즘 들어 서점 사업이 점점 잘되고 있어서 경도의 몇몇 지점은 《반한재 시집》 덕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는 상황이었고 근처 몇 개 지점도 수금을 시작했다.
어젯밤 범사철은 장부를 하나하나 조사하다가 은전 2만 3천 냥이 들어온 것을 보고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범한에게 단숨에 달려가 《석두기》 후반의 10회 원고를 내놓으라며 닦달했다. 범한은 흔쾌히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석두기》를 쓰는 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일을 초래할지, 혹시라도 《석두기》를 범한이 쓴 것이라고 알기라도 한다면 이 집안에 무슨 풍파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 공주도 회신을 했지만 조정에서 그녀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관건은 그녀와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과연 황태자인지 아니면 아직 만나 보지 못한 2 황자인지 알 수 없었다.
범한은 발길이 닿는 대로 서재를 나서며 한겨울 창산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더니 기지개를 폈켰다. 어디선가 들리는 마작 소리를 따라가 보니 아내와 몇몇 여인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희고 부드러운 손으로 푸른 마작을 이리저리 굴리는 걸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감동이 밀려왔다.
그는 옆에 있던 여동생이 설광에 의지해 2 황자가 보낸 《전조 시집》을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을 보니 또 한 번 감동이 밀려왔다.
돼지가 살찌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역시 너무 유명해지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범한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날 밤 연회 후 황태자와 2 황자는 겉으론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신 소경과 정왕 세자 이홍성은 백작가에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자신이 창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였지만 상대방이 보낸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다.
새해가 되고 30일쯤 되었을까, 창산에 있던 범한이 경도를 아주 잠깐씩 왔다 갈 때마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한걸음에 달려와 창산에 같이 가자고 끈질기게 졸라댔다. 범한이 승낙하고 말 처지는 아니었기에 결국 마지못해 유가군주를 데리고 올라왔었다.
범한이 방으로 들어가서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다름 아닌 유가 군주였다. 그녀가 해맑게 말했다.
“범한 오라버니, 마작 하실래요?”
범한은 ‘오라버니’라는 말에 대보 형님이 생각나서 얼른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계속하시죠. 저는 산책이나 하고 오겠습니다.”
그가 일부러 마다하는 것을 알고 유가 군주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혹여나 기분 나쁜 표정이 드러날까 조심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임완아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여보, 그러지 말고 와서 한번 하세요.”
“괜찮아요.”
범한은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얼른 방을 빠져나왔다. 너무 서둘렀는지 자기도 모르게 발밑에 있던 부드러운 물체를 밟고 말았다. 순간 얼어붙은 범한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수북이 쌓인 건초에 천 조각이 덮여 있었고 그 위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잠을 자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검은 코끝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138화
깜짝 놀란 범한이 물었다.
“대체 이게 뭔가요?”
임완아가 그제야 고양이들이 범한의 발밑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혹시라도 고양이들이 놀랐을까 얼른 상자를 옆으로 치우더니 살며시 웃었다.
“등자경의 아내가 우리가 산에서 지내면 무료할까 봐 오늘 고양이 세 마리를 보내 줬어요.”
범한은 가까이 다가가 고양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한 마리는 노랗고 또 한 마리는 하얗고 다른 한 마리는 검은 게 털 색깔의 차이가 매우 컸다. 이 모습이 신기했는지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애도 길러 보지 않은 처자들이 고양이를 기를 수 있겠어요?”
그는 상자 안에서 검은 고양이를 꺼내 품속에 안아 보았다. 가슴팍에서 작은 동물이 움직이는 게 여간 재밌는 일이 아니었다. 뒷머리를 살짝 긁어 주자 고양이가 눈을 떠서 그를 한번 보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범한의 손길이 그리 싫은 건 아니었나 보다.
“고양이들 이름은 지었어요?”
“아직이요. 우선 누렁이, 검둥이, 흰둥이라고 부를까 봐요.”
“음, 흰둥이라…… 듣기 좋네요.”
* * *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범한과 범사철 형제는 나란히 앉아서 경도 백작가에서 온 사람에게서 근황을 보고받았다. 연말인지라 경도 교외의 전장과 담주의 영지를 비롯해서 자질구레한 재산까지도 모두 결산 보고를 받았다. 경도 백작가의 재산은 지금까지 유씨가 관리해 왔기 때문에 이미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올해는 그녀가 일 처리를 모두 마친 후 집안의 최 선생에게 중요한 몇 가지 지출 사항을 써서 창산에 있는 큰 도련님에게 전달하게 했다.
새어머니의 의도를 알아차린 범한은 일부러 무엇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저 보고 내용을 열심히 듣다가 가끔 몇 마디 물어보는 정도가 다였다.
집사가 모든 보고를 마치자 범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옆에 있던 범사철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 어떤 것 같아?”
범사철은 왼쪽 뺨에 난 곰보 자국을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 근데 이건 다 어머님께서 맡아서 관리하시던 건데 왜 갑자기 우리한테 넘어온 거야?”
범한은 제멋대로 구는 범사철이 어떤 면에서 보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장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집사가 아주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각지에서 보내는 설맞이 용품은 설 전에 모두 경도로 들어오는데, 올해는 동북쪽에 눈이 많이 내려서 며칠 지체될 예정입니다. 지난번 보낸 남쪽 과일과 요전 날 북쪽 장자의 육포와 산짐승 외에도 담주에서 보낸 꽃 차가 있습니다. 금액은 모두 편지에 적혀 있습니다. 큰 도련님과 작은 도련님, 아가씨와 군주님 모두 별장에 계시니 부인께서 여러모로 준비하셔서 세 번에 나눠서 보내실 예정입니다. 아마 봄까지 쓰시기에 문제없을 겁니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네. 그저 재미난 놀거리만 보내 주셔도 된다네. 세 번은 너무 많아. 앞으로 한 번 만 더 보내시면 될 거라 전해 드리게.”
범한이 연이어 말했다.
“할머님께서 보내신 꽃 차만 좀 더 가져다주세요.”
범한은 시시때때로 완아에게 담주 생활에 대해 얘기해 주곤 했다. 그중 담주 꽃 차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집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꽃 차는 오늘 도착했습니다. 다음번에는 주로 식량과 작은 물건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두 도련님께서 봄까지 머무시는 데 문제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범한은 유씨 부인의 의중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이해해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기에 집사를 돌려보내 쉬도록 했다.
* * *
봄기운이 완연해지자, 태학 5품에 책봉된 범한은 더 이상 창산에 머물 수 없게 되어 경도로 돌아가야 했다. 게다가 4월 과거 시험을 보고 나면 바로 비밀스러운 포로 교환을 위한 양국 간의 합의를 위한 북제 파견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범한은 포로를 바꾸는 일은 작년에 시작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포로로 잡힌 경국 병사가 낯선 이국땅에서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겠는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남몰래 존경해 온 언빙운만 보더라도 북제로 파견된 경국 밀정으로서 적국에서 반년 넘게 수감되어 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다만 양국 간에 왕래가 빈번하긴 했지만 시기적으로 겨울로 접어들면서 북강의 매서운 추위 때문에 포로 귀환이 봄까지 미뤄진 상황이었다. 범한이 창산에서 겨울을 즐기는 동안 언빙운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고통스럽게 지냈을 거라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일찍이 자신이 북제로 파견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고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감찰원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만 있다면 멀리 봤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담주에 있었든 경도에 있었든 지난 17년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경국의 일원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범한은 이 조정이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다.
* * *
깊은 밤 훈련을 마친 범한은 약간 피곤한 듯 산장에 돌아와 녹은 눈 때문에 얼룩진 옷을 준비해 온 자루에 넣고는 한쪽으로 던져 두었다.
범한은 훈련하는 동안 혼자 눈밭에 누워서 희미한 달빛 아래 비치는 목표물을 좇았다. 천년 동안 꿈쩍도 하지 않은 검은 바위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토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보니 급격히 피로해졌다. 게다가 며칠 동안 오죽은 어머니의 물건이라며 저격총을 그에게 주고 난 후 또 사라져 버렸기에 훈련을 하면서 말할 사람도 자신을 봐줄 사람도 없었다. 밀려오는 외로움과 적막함이 느껴지자 다시 전생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산장 안은 매우 고요했다. 침실에 오롯이 등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 완아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날이 밝아 태양이 떠오르자 청석에 물이 고이고 다시 밤이 되니 달빛 아래 반사되었다. 그는 돌아서 복도를 뛰어넘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서 있는 긴 복도 끝은 누이동생의 방문 앞이었다. 별안간 그의 귀가 쫑긋하고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몸을 돌려 손을 문에 갖다 댔다. 그때 패도의 기가 나타나 나무로 만들어진 빗장을 두 동강 내더니 그도 바람에 날리듯 침대 옆으로 밀려갔다.
침대 위 이부자리가 어지럽혀져 있고 아무도 없었다. 역시 범약약은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차분하게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보니 난로가 있는 곳 외에 다른 부분은 차가운 얼음장 같았다. 범약약이 이부자리를 떠난 지 꽤 된 모양이었다. 그는 설마 자기도 모르는 적이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살짝 떨렸다. 하지만 의연하게 평정심을 되찾고 이내 번쩍이는 가늘고 긴 비수를 꺼내 왼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밤새 적을 찾을 준비를 했다.
“오라버니!”
문밖에서 등불을 든 채 서 있는 범약약이 자신의 침대에서 칼을 들고 서 있는 범한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그녀가 안전한 걸 확인하자 멍한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질문을 마구 퍼부었다.
“너 어디 갔었어?”
“괜찮아?”
한 겹으로 된 얇은 옷에다가 은빛 털의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는 범약약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불쌍해 보였다. 그녀는 범한을 보며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얼떨떨해하는 것 같더니 간신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그렇게 칼을 든 채로 물어보니까 너무 무서운데.”
범한이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비수를 허리춤에 넣고 그녀에게 다가가 앙상한 어깨를 꼭 잡았다.
“나야말로 무서웠거든. 안이 너무 쥐 죽은 듯 조용하잖아, 네 숨소리도 안 들리고. 얼마나 놀랐는데.”
“정말 못 말려. 한밤중에 밖에서 뛰어다닌 게 누군데, 놀랐다고?”
“너 대체 어딜 갔던 거야?”
범한이 궁금한지 계속해서 묻자 범약약은 이내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일이 좀 있었어. 너무 자세하게는 묻지 말아 줘.”
잠시 멍해 있던 범한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 안에 변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산이라 바람도 이렇게 찬데 그러다 얼어 죽는다!”
“알았어, 알았다고.”
범약약이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
“얼른 가, 새언니가 오라버니 기다리겠다.”
* * *
방문 밖에서 범한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가락으로 여동생의 이불의 온기를 확인해보았다. 역시 그녀는 단순히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밖으로 나간 지 한참 지난 듯 보였다. 아마 자신이 산장을 떠난 후 바로 어디론가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일단 조용히 묻어 두기로 했다. 누구나 한 가지 비밀은 가질 수 있었기에 범한은 그녀의 비밀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예전에 담주와 경도를 오가며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그녀에게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었기에 범한 자신도 몸소 모범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봄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오니 말발굽 소리가 바빠졌다. 겨우내 창산에서 지내던 범한이 드디어 큰 무리를 이끌고 창산을 나오는 날이었다. 그는 마차 여섯 대와 쓰던 물건 일부만 가지고 나왔다. 산에는 곽보곤 같은 눈치라곤 전혀 없는 고위 집안 자제도 고민할 일도 없으니 그냥 봄이 몰고 오는 바람에 도취되어 살았었다.
범한은 기분이 좋았다. 창산에서 겨울을 난 건 경도에 들어온 후 모처럼 얻은 재정비의 시간이었다. 무술 연마에도 정신 수련에도 모두 장족의 발전이 있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그때 멀리 바라보니 이미 푸르게 변한 산기슭과 겨울을 이겨 내고 자란 파란 새싹들이 눈에 들어왔다. 경도로 가는 길이 온통 생기로 가득한 것 같았다.
맑은 하늘 저 멀리 먹구름이 보였다. 뒤쪽에는 잿빛 하늘이, 앞쪽에는 흰 구름이 보이는 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괜스레 무거운 마음이 들게 했다.
마차가 산을 돌아 창산을 아예 벗어나자 갑자기 하늘에서 태양이 반짝이더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비췄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장관이었다.
담담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아내에게 돌려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산속에서 너무 오래 지내서 답답했죠?”
임완아가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봤다.
“답답하긴요.”
범한은 살짝 어리둥절했다.
“산이 좋긴 한데, 눈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눈이랑 나무뿐이라 아무래도 싫증 나고 지루하긴 하잖아요. 부인은 경도 생활이 전혀 그립지 않았어요?”
임완아가 빙그레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뽀얀 얼굴에 담담한 염려가 비쳐 보였다.
“경도에서는 황궁이 아니라 별궁에 있었잖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재상가에 산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밖으로 나갈 기회가 많이 있었잖아요. 산에서의 생활은 단조롭긴 했지만 예전에 살던 높은 담벼락에 갇혀 사는 것보다는 훨씬 편했어요.”
그녀는 범한이 안쓰러워하는 게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산에서는 항상 당신과 같이 있었잖아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범한과 달리 그녀는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범한이 하하 웃더니 무슨 일이 생각났는지 부드럽게 운을 뗐다.
“바쁜 일이 마무리되면 난 북제 사신으로 파견을 나갈 것 같아요.”
순간 마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오직 말발굽 소리와 마부의 채찍질 소리, 산길을 달리는 바퀴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잠시 후 임완아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경도에는 제가 있을게요.”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아마 왕계년을 데리고 갈 것 같아요.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님께 조언을 구하면 되고 혹시라도 비개 스승님이 경도에 계시면 그분께 도움을 요청해도 돼요.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이미 등자경에게 분부해 두었으니 그를 통해 처리하면 될 거예요. 물론…….”
범한이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 * *
경도로 돌아오니 설 연휴 내내 걸려 있던 등불의 흔적과 외진 골목 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폭죽과 종이 부스러기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범한은 새 옷을 입고 설맞이 분위기에 흠뻑 빠진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연초에 다시 창산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정월 대보름의 등불놀이를 또 놓치게 될 것이다.
마차가 백작가에 도착하면 한바탕 들볶일 수밖에 없었다. 혼례를 갓 마친 신혼부부는 아니지만 두 사람은 부모님께 절을 올리고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제야 범한은 백작가가 명불허전임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조정에서 이렇다 할 고위직에 오른 사람은 없었지만 먼 친척들 대부분이 조정의 핵심 부서에서 봉급을 받으며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범한은 완아와 함께 재상가로 가서 장인어른께 인사를 드리고 대보와 애틋한 작별을 나눈 뒤 정왕부에 가서 정왕 세자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태상사 소경 임소안과 홍려사 소경 신기물이 연회를 베풀었다. 범한은 두 사람 다 함께 일했던 사이인지라 쉽게 거절을 못 하고 하는 수없이 연회에 참석했다.
어느덧 2월이 되자, 각 주와 현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경도로 올라왔다. 돈이 많은 사람은 여관에 묵었고, 경도에 친척을 둔 사람은 친척 집에, 돈이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경도 근처에 있는 서당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때 태학의 기숙사도 딱히 머물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동안 개방했다.
139화
회시는 예부 주관으로 각각 세 번에 걸쳐 2월 9일과 12일, 15일에 각각 진행되기 때문에 범한이 태학에서 일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시간상 상당히 촉박한 상태였다. 그리고 유명무실한 직위이긴 하지만 5품에 봉해져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상이 기쁜 나머지 그냥 봉한 직위라 태학 쪽으로 그에게 아무런 직무를 맡기지 않았고,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태학에서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강의를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한가해졌다.
단지 가끔씩 태학에서 수학하는 과거 응시자들이 그의 방을 이리저리 휘저어 놓곤 해서 굶주린 늑대처럼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면밀히 감시해야 했다.
범한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쳤다. 겨울이 가고 봄기운이 감돌긴 했지만 범한이 만들어 내는 바람에 옆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거리를 두고 앉자 그제야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분, 본관이 아직 나이가 어려서 교육에 대해 언급하기에 이른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 다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군요.”
어린 나이에 벌써 5품 벼슬에 올라 모든 조정의 총애를 받는 것도 모자라 뛰어난 말솜씨까지 겸비한 범한에게서는 흔히 말하는 권력가의 교만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이 갖고 있던 범한에 대한 선입견은 점점 사라졌다. 그들 가운데 나름 대범해 보이는 사람이 농담을 던졌다.
“범한 대인이 경도에 막 들어왔을 때 ‘기개’가 어쩌고 하면서 누구를 비웃으셨다고 하던데, 지금은 마음이 바뀌셨나 봅니다. 부채질까지 하시고.”
범한이 하하 웃었다.
“그게 뭘 보여 준다고 생각하시오? 난 원래 소란 피우는 걸 좋아해서 말이지요. 무슨 말을 해도 정확하게 하는 걸 좋아한답니다.”
* * *
조정에서는 이번 과거의 감독관과 책임자에 대한 선발을 마친 상태였다. 범한의 17세라는 나이로 봤을 때 5품 관직은 엄청난 자리이긴 했다. 하지만 앞으로 그가 감당하게 될 막중한 임무를 생각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자리였다.
그의 시명(詩名)은 오래전부터 유명세를 탔기 때문에 설령 그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 응시한 유생들은 그의 입에서 뭔가를 더 끌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범한의 찬사를 얻어 낸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담박서국의 《반한재 시집》이 이미 전국적으로 팔리고 있었기 때문에 각지에서 모인 응시생들은 경도에서 유명한 젊은이에 대한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다. 몇몇 막무가내인 사람들은 물어물어 무턱대고 백작가를 찾아가서 으리으리한 문과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돌사자를 보고 나면 그제야 범한이 금반지를 끼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실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문을 두드려 범한을 만날 엄두를 낼 수 있을까. 그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태학에서 오래 머물진 않았다. 하지만 상사 4처를 통해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도로 들어온 학생들의 상황에 대해 조사한 결과,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힘들게 지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찍이 조정에서 경도 외곽에 있는 큰 서당들을 개방하여 임시 숙소로 사용하게 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이들에게는 이 또한 쉽지 않아 끼니를 거르는 날도 허다했다.
범한은 담주에서 오죽이 해줬던 이야기가 생각나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서점의 장부에서 은전 얼마를 꺼내 경여당의 대행수를 통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었다.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 되도록 그들이 몰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곤 바로 집으로 돌아가 호부 상서인 아버지에게 불평을 쏟아 냈다.
범 상서는 자신의 아들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살짝 의아했다. 하지만 앞으로 벼슬길에 오를 범한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2월 7일, 회시를 이틀 남겨 놓고 범한은 몰래 태학에서 빠져나와 반나절을 뒹굴거렸다. 사실 그는 경서를 열심히 읽지도 않고 매일같이 자기에게 시문을 들고 찾아와서 봐달라고 하는 학생들을 참을 수 없었다. 그중에 아버지뻘 되는 사람도 있어서 살짝 겸연쩍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황궁 밖 해자로 흐르는 맑은 물을 보니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사실 아직까지도 범한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거리를 걷는 것이 아무 편안했다. 특히 붉은 담장 아래를 걸으면서 곁눈질로 담장의 높이를 예측하고 멀리 있는 호위 무사의 위치까지 파악했다. 아무리 침착한 성격이라고 해도 흡족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이전에 몰래 숨어 들어간 적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 구석에 있는 호위병의 각루는 먼 곳을 감시하기 위한 곳으로 지난번 연소을이 바로 이곳에서 황궁 벽 너머에 있던 범한에게 화살을 쏘아 올렸었다.
범한은 그곳에서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연소을은 대도독으로 임명되어 북방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만약 자신이 북제로 가게 된다면 그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을 지나야만 했다. 범한은 제발 연소을이 그날 밤 자객이 자기라는 걸 눈치채지 않았으면 했다.
황궁을 둘러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천하대도로 접어들었다. 길옆으로 전과 다름없이 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앞으로 감찰원 앞의 금문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범한은 그 글자를 전혀 보지 못한 듯 태연한 얼굴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범한 대인, 안 그래도 한번 뵙고 싶었는데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다니요. 벌써 경도 유명인이 다 되셨나 봅니다.”
범한은 애써 웃었다. 고개를 돌려 말에 탄 정왕 세자를 보니 그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얼른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정왕 세자를 뵈옵니다. 소인은 그저 조용히 있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연이 아니오.”
이홍성이 들고 있던 채찍을 휘두르며 웃었다.
“그대가 태학에서 나올 때부터 따라왔소.”
범한은 흠칫 놀랐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건지요?”
정왕 세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늘은 다른 이가 청한 거요.”
“그게 누구신지요?”
범한은 직감적으로 오늘 연회에 문제가 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황자요.”
이홍성이 웃으면서 말했다.
범한은 2 황자가 별안간 이렇게 만나기를 청하니 그의 청을 고사할 만한 별다른 핑계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유정강 꽃배 위에서 열리는 아주 은밀하고 사적인 연회였다. 특히 이 꽃배는 우아해 보이긴 하지만 강 건너편 여인들의 시선을 끌 정도는 아니었다. 비도 구름도 없는 맑은 날에 강물 위로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자 부드러운 물결이 일렁였다. 멀리서 어슴푸레 들려오는 맑은 소리와 달리 2 황자의 배는 어딘지 모르게 고독함이 느껴졌다.
범한과 정왕 세자 이홍성은 강가를 걷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타고 온 말을 호위 무사에게 넘겨주고 두 사람은 서로 양보 해가며 배에 올랐다. 범한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 황자는 참 고상해 보이긴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황자의 본문을 망각하고 자꾸 이런저런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범한의 발이 뱃전을 디디자 갑자기 안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자못 진지하게 맑은 가락의 곡조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강산을 떠나 대나무 울타리를 친 초가집을 찾았네. 길가에는 들꽃이 무성하고 새로 빚은 술 내음이 진하게 퍼지는구나. 술독을 다 비우도록 취해도 누구도 상관하지 않으니, 길가에 꽃 한 송이를 따다가 다 희어진 머리에 멋대로 꽂아 보자꾸나.”
범한의 입가에 웃음기가 돌면서 이홍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곡 안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니 2 황자가 어떤 인물일지 더욱 궁금해졌다.
주렴이 열리자 푸른 비단옷을 입은 젊은이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이상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서 두 눈은 살짝 감은 채 곡을 감상하고 있었다. 심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이, 그는 바로 경국 황제 폐하와 숙 귀비 사이에서 태어난 2 황자였다.
2 황자의 모습은 정말 특이했다. 그는 논에서 쉬고 있는 농부처럼 의자에 반쯤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푸른색 비단옷이 그의 다리를 모두 덮어버렸다. 그런데 더 기이한 것은 그의 취한 표정과 우수한 이목구비를 보고 있으니 무척 평온해 보였다. 마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초월한 듯 지금 울려 퍼지는 곡의 느낌과 비슷했다.
범한이 2 황자에 대해 가진 첫 번째 생각은 친숙함이었고, 두 번째 생각은 2 황자의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2 황자의 마음이 누구보다 무거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범한은 나름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자신해 왔는데, 이 순간만큼은 너무 어색해서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곁눈질로 보니 이홍성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범한은 가만히 선 채 그저 2 황자만 바라보고 있을 뿐 어떻게 예를 갖춰야 할지 몰랐다.
2 황자는 곡에 심취한 나머지 손님이 온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신분으로 따지자면 2 황자의 태도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 *
드디어 곡이 끝나자 가녀는 세 사람에게 인사를 올리고 거문고를 가지고 조용히 물러갔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2 황자는 거문고 소리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은지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오른손을 허공에 휘저었다가 천천히 옆으로 옮겨 접시에 담긴 포도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포도송이 하나를 높이 들더니 고개를 젖힌 채로 한 알 한 알 똑똑 떼어 물고는 턱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두어 번 씹은 후 꿀꺽 삼켰다. 포도 하나를 먹는 것도 꽤나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범한은 서두르지 않고 상대방의 작은 행동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가만히 2 황자를 지켜보았다. 그가 어떤 사람일지 정말 너무 궁금했다.
* * *
한참 뒤 2 황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포도를 다시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초대한 손님이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눈가에 묘한 웃음이 번지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수줍은 미소를 자아냈다.
범한은 2 황자가 이상하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2 황자는 앞에 서 있는 범한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니, 왜 앉지 않고 서 있는가?”
옆에 앉아 있는 이홍성은 웃으면서 차를 홀짝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거들어 주지 않았다. 범한은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며 포권으로 예를 표했다.
“황자 앞에서 어찌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2 황자가 웃으면서 범한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대를 제대로 맞이해 주지 못했으니 그대도 나에게 예를 다 할 필요는 없네.”
그러자 범한이 대답했다.
“저하께서 신을 환영하지 않으셔도 신이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황자가 웃으면서 고개를 젓더니, 포도 물이 든 오른손을 자신의 옷에 아무렇게나 닦았다.
“이 배에는 나와 형제지간인 이홍성과 매제 한 명이 다인 것을. 여기에 황제와 신하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범한은 웃기만 하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곤 정왕 세자 맞은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2 황자가 유명한 문장가와 노는 걸 즐기는 눈치니, 크게 소질은 없지만 막상 실력을 뽐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앞서 나눈 두 사람의 대화가 그리 심오하진 않았지만 범한을 끌어들이기에는 충분했다. 2 황자는 말하는 속도가 유난히 느린 데다가 입을 열 때마다 상대방보다 반 박자씩 느리게 말하는 감이 있어 대화를 나누는 내내 어딘지 모르게 갑작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범한이 흥미롭게 생각한 점은 2 황자를 볼 때마다 어디서 본 듯한 친숙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대체 어디서 온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완아와의 관계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이 배는 내가 직접 돈을 들여 만든 걸세. 어떤가?”
2 황자는 범한이 이 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척이나 알고 싶었다. 범한은 배의 구조와 구석에 놓인 파란 그릇, 비스듬히 걸려 있는 서화를 이리저리 살펴본 후 이 배는 꽃배가 아니라 서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140화
“저하, 이 꽃배는 아주 조용한 게 꽃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옵니다.”
2 황자가 싱긋 웃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조용한 게 좋지.”
갑자기 이런 대화가 지루하고 힘들게 느껴진 범한은 그나마 친분이 있는 정왕 세자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려 했다. 때마침 정왕 세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두 분이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실 건가요?”
이홍성이 웃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2 황자가 웃더니 범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 황족들이 다 재미없는 사람들이라곤 생각하지 말게나. 그래, 자네가 완아와 결혼하여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앞으로 자주 왕래하도록 하지.”
이홍성은 범한이 대답하기 전에 얼른 몇 마디 거들었다.
“우리가 왕가이긴 하지만 저하는 2 황자이시지 않습니까. 왔다 갔다 하시다가 자칫하면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은 정왕 세자가 몇 달 전 2 황자의 연회에 초대되어 가던 범한이 외양간 거리에서 북제 자객의 공격을 받은 사건을 얘기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이유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잦아들면서 그 사건도 자연스럽게 끝을 맺었다. 범한이 씁쓸한 듯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준비하신 연회가 홍문연(중국 진나라 말기에 항우와 유방이 함양(咸陽) 쟁탈을 둘러싸고 홍문에서 회동한 일. 손님을 모해할 목적으로 마련한 연회)도 아닌데 식사 한 끼를 위해 이렇게 큰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니 참으로 무섭습니다.”
2 황자와 이홍성은 ‘홍문연’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차마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2 황자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하라고 부르지 말고 완아처럼 둘째 형님이라고 부르시게나.”
범한은 얼굴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내심 살짝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관계가 너무 가까워지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이라도 한 듯 2 황자가 양손을 자신의 무릎 앞에 늘어뜨리고 여전히 반쯤 쭈그리고 앉은 채로 웃으며 말했다.
“모든 일에 너무 조심스러울 필요는 없다네. 완아가 황궁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아이라는 건 자네도 잘 알 거야. 그냥 형님 하나가 더 생겼다고 생각하면 되네. 난 여전히 한림원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만들고 있지 않은가. 3 황자와 더 친해져도 좋을 걸세. 친척이 많으면 좋지 복잡할 게 뭐 있나?”
범한은 웃고는 있었지만 속으로 황가 사람들 모두 골칫거리의 근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제가 복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하지만 저하라고 칭하지 않는 것은 큰 결례라고 생각되옵니다.”
2 황자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집에 가서 완아에게 물어보시게나, 그 애가 날 뭐라고 부르는지.”
* * *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니 연회석이 마련되었다. 탁자 위에는 신선한 제철 음식과 진귀한 요리들로 가득했다. 범한은 매우 신이 났다. 그는 이미 모든 방안을 생각해 두고 있었기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세 사람은 경도 인물들의 과거사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역시 2 황자는 숙 귀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범한과 함께 시를 읊는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렸다. 옆에 있던 이홍성은 여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들어 댔다. 얘기를 하다 보니 역시 사남 백작 범건의 당대 찬란했던 전적을 빼놓을 수 없었다.
남자들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자 2 황자는 범한에게 말을 걸기가 불편했지만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다행이었다. 범한은 혹시 실수라도 할세라 담주 이야기와 오면서 보고 들은 것만 이야기했다.
이번 연회로 2 황자와 범한은 서로 얻은 게 있는지 미소 띤 얼굴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2 황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지 계속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다가 범한과 이홍성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저하께서 보시기에 범한이라는 자는 어떤 것 같습니까?”
제자가 공손히 물었다. 그러자 2 황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매제는 너무 조심스럽단 말이지. 수십 년간 경국인의 뼛속 깊이 스며든 교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솔직히 황궁 연회 날, 술에 잔뜩 취했던 사람이 오늘 내가 만난 사람인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이 말을 마친 후 그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한쪽 손을 뻗어 포도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2 황자가 국가의 중대한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얼른 조용히 문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2 황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는 국가의 중대사를 고민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범한이 말한 ‘홍문연’을 곱씹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경전을 읽긴 했지만 ‘홍문연’이라는 전고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매제가 역시 학식이 높군. 돌아가서 책을 봐야 할 것 같군.”
2 황자가 입에 물고 있던 포도를 깨물자 달콤함이 퍼졌다.
말에 올라탄 범한은 궁둥이가 배기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2 황자를 생각하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딘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서로 깊은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황실 금고도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만남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범한은 길가에 뻗은 버들잎을 뽑으며 옆에 있는 이홍성에게 물었다.
“오늘 2 황자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거군요.”
이홍성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가 자넬 얼마나 좋아한다고. 공교롭게도 신 군주와 결혼했으니 이참에 매제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자네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던 거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시선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셨네.”
범한은 설마 고작 그런 연유로 자신을 보자고 했을까 싶어 어이없어 연신 쓴웃음을 지었다. 한참 생각한 후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2 황자가 이렇게 낯이 익은 거지?”
이홍성과 그는 이미 알고 지낸 지 수개월이 지났기 때문에 이미 속은 강직하나 겉으로는 온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미치광이 같은 모습이 나오는 것 외에는 오히려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 살짝 정신이 나간 것 같아서 답답해하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을 거야.”
범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2 황자의 용모가 수려한 건 사실이지만 ‘임 누이’는 아니었고 자신도 ‘용양’(전국시대 사람으로, 중국 정사에서 처음 기록된 동성애자)이 아닌데, 왜 이렇게 자꾸 생각이 나는지 범한 자신도 알 수 없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이홍성은 범한이 웃는 걸 쳐다보고 있으니 얼떨떨해져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중얼거렸다.
“자네가 왜 2 황자가 낯이 익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범한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왜?”
이홍성은 습관적으로 구역질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끔씩 두 사람 다 여인네처럼 수줍게 웃는 걸 좋아하거든.”
범한이 멍하니 있다가 표정 변화 없이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이홍성은 범한의 말끔한 얼굴에 순간 몸이 부르르 떨었다.
“두 사람이 기질도 서로 비슷해. 확실히 사내보다는 여인네 같단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범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지만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정말 2 황자랑 나랑 닮은 구석이 있는 건가.’
범한 자신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정왕 세자를 향해 또 한 번 살인 미소를 보낸 후 채찍을 휘둘러 말 머리를 경도로 돌렸다.
강을 따라 말을 타고 내달리니 봄바람 불어와 강가의 파릇파릇한 버들가지가 범한의 얼굴을 간질였다. 범한은 일일이 피해 가기 귀찮았는지 패도의 기를 얼굴에 끌어모아 아주 뻔뻔한 얼굴로 버들가지를 모두 날려 버렸다.
어느새 정왕 세자와 호위병들과 격차가 벌어졌다. 말도 지쳤는지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범한은 말 위에 탄 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자기가 온 길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물 위로 보이는 꽃배 하나가 덮개를 쓴 채 강가에 세워져 있었다. 손님을 가득 태운 화려한 기생집 배와 비교하니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보아하니 사릉의 꽃배로 당대 경도에서 제일 잘나가는 여인들이 있던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범한은 갑자기 감찰원 감옥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리리가 떠올랐다. 춘시가 끝난 후 경국 조정은 사리리를 북제로 넘길 예정이었다. 그 일을 맡게 될 사람이 공교롭게도 범한이라니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떤 모습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독약과 언어, 심리 공세를 통해 간신히 그녀 입에서 자신을 살해하려 한 자객의 배우가 오백안이라는 사실을 얻어 낸 후, 그녀를 풀어 주겠다는 맹세 아닌 맹세를 했었다. 그 후 범한이 일부러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돼 버리고 말았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조금 전 이홍성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이쯤 되니 범한도 스스로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정왕 세자도 호위병과 떨어져 혼자 범한을 따라 왔다. 강가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가만히 평온한 강물을 바라보다가 이따금 과거의 영화로움을 잃은 그곳에 눈길을 주었다.
잠시 후 이홍성이 나지막이 물었다.
“네가 곽보곤을 때린 그날 밤 바로 저기서 함께 술을 마셨었지.”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네. 우리가 그날 저기서 하룻밤을 보냈었군.”
“뭐라고?”
이홍성이 범한을 흘끔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뭇 여인들 생각에 빠진 건 아니지? 지금 자네 신분은 나랑은 또 다르다고. 감옥에 있는 사리리는커녕 저기 있는 여인네들도 아니 될 말일세. 만약 나처럼 밤마다 술에 취해 여색을 즐긴다면 바로 다음 날 황궁에서 병사들을 보내 혼쭐을 내줄 테니 말이야.”
범한이 씁쓸해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저 저 배를 보고 잠시 감상에 빠진 것뿐이야.”
“오백안은 자네 장인의 사람이 아니라네.”
이홍성은 범한이 뒷이야기를 모르는 줄 알고 작은 소리로 언질을 준 것이다.
“나도 이미 알고 있어, 그자가 장 공주 사람이라는 건. 다만 장 공주가 지금 경도에 없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
“장 공주와 황후가 끈끈한 사이고 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돼.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황태자도 그녀를 믿고 따르게 됐다는 것도 말이야.”
이홍성은 조용히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 몇 마디 말로 뭔가 표현하고 싶은 눈치였다.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지. 2 황자와 나는 초면이니 무슨 말을 해도 불편한 게 당연하지 않겠어? 마침 호위병들도 없으니 그냥 편하게 말하지 그래?”
두 마리 말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다가 가끔씩 애정 표현이라도 하는지 서로 머리를 문지르곤 했다. 이홍성이 버들가지를 걷으며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네가 북제에서 돌아오면 황실 금고를 관리하게 될 거야. 그럼 동궁이든 2 황자든 모두 널 필요로 하겠지. 이 정도는 물론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범한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금 동궁이 너에게 호의적인 건 장 공주가 경도를 떠났기 때문이야. 장 공주가 널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가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더라도 장 공주 말 한마디면 동궁의 태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걸 명심해. 그러니 절대 그들을 믿어선 안 돼.”
이홍성은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 두 집안이 서로 사돈 관계인 데다 자네와 나 또한 친구 사이니까 얘기하는 걸세. 공적이든 사적이든 네가 방향을 잡아야 한다면 나는 저쪽으로 잡아 주길 바랄 뿐이네.”
그가 강 건너편 산을 가리켰다. 그 산 뒤편으로 수풀이 갈라져 ‘이(二)’ 자처럼 보였다.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군.”
범한은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 줄을 서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네. 홍성, 자네도 너무 일찍 자리를 잡지 말길 바라네.”
“우연이 아닐세. 저기가 바로 이호아자의 별저라네. 어째 부친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하지만 이 세상은 할 일이 아주 많다네.”
이홍성이 웃으면서 대답하자 범한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 2 황자를 만나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들더군. 이런 유정강 같은 사람이 왜 정왕처럼 왕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자 이홍성의 눈매가 차갑게 변하더니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싹 사라졌다.
141화
“천자의 집에는 개인적인 일이라곤 전혀 없지. 숨고 싶다고 절대 숨을 수 없다는 말이야. 우리 할아버님, 그러니까 선대 황제께서 어떻게 황좌에 올랐는지 알고 있을 거야. 두 황자가 같은 날 참혹하게 살해를 당했지. 그때 경도에 피비린내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몰라.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과연 그들에게 왜 서로 양보하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을까?”
범한은 순간 오싹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애써 웃어 보였다.
“그때는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평안한 지금이랑은 또 다르지. 2 황자가 양보한다면 동궁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야. 정왕께서도 매일 왕부에서 꽃과 풀을 심으면서 즐겁게 지내시잖나. 2 황자도 문예에 조예가 깊은 것 같던데 왜 자기 부친처럼 살 수 없는 거야?”
“넌 이미 황제도 만나 봤고 장 공주도 만나 봤지. 우리 아버님의 서열은 두 번째야. 근데 어떤 것 같아? 우리 아버님은 이미 뒷방 늙은이가 다 됐다고.”
이홍성이 웃는 듯 아닌 듯 말을 이었다.
“양보라, 양보하면 정말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해? 우리 아버님은 평생을 한이 맺힌 채로 살아오셨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형제간의 해묵은 사건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사실 정왕 세자는 정왕이 화초만 가꾸면서 살게 된 진짜 이유는 모르는 것 같았다.
범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2 황자 뒤에 바짝 붙어 있을 필요는 없어. 어디로 보나 2 황자는 제일 가능성이 없어 보이거든.”
범한은 이홍성과의 친분을 생각한 나머지 너무 솔직하게 말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이 말에 순간 멍해 있던 이홍성은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도 범한이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맛있는 간식을 가져와서 아이들 앞에 두면 우리는 반드시 무엇이 먹고 싶은지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해. 그래야 나중에 부모님이 간식을 나눠 줄 때 내가 뭘 원했었는지 먼저 생각하시거든”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 2 황자는 자기가 뭘 먹고 싶은지 얘기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군.”
“그렇지.”
이홍성은 유정강 맞은편 작은 산으로 시선을 옮기고 아주 먼 하늘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창산의 줄기를 바라보았다.
“선대 황제는 참 다행이야, 아들이 둘밖에 없으셨으니. 황제도 다행이긴 하지, 아들이 셋이니……. 다만 태황자가 돌아오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지. 그래서 2 황자가 먼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면서 쟁취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쟁취하려고 하는 거지.”
“난 네가 왜 2 황자를 선택했는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어.”
* * *
“아주 간단해.”
이홍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보고 마음에 들었어.”
범한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기에 그저 온화한 미소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결함을 독선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피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이인자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도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홍성이 자연스럽게 어디 한군데 들렀다 가자고 했지만 범한은 귀찮은 듯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그러자 이홍성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얼굴로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 2 황자가 먼저 자네를 보자고 한 건 회시 후에는 네가 황태자의 청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네.”
범한은 이홍성의 말 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고 나니, 후일에 있을 회시에서 비록 자신이 시험을 채점할 만한 자격은 안 되지만 태학과 예부를 지키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 *
그날 저녁 범한은 집으로 돌아가 완아에게 낮에 2 황자를 만난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역시 그의 짐작대로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바로 황태자 동궁의 측근인 신기물이었다.
앉아서 차를 마시다가 손에 들린 몇몇 이름들이 적인 종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범한은 황태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지만 상대방이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진 알 수 없었다.
“왜 이걸 저에게 보여 주시는 거죠?”
범한이 종이를 들어 보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소경 대인, 저는 회시와 관련해서는 어떤 개입도 할 수 없습니다.”
몇 달 전 두 사람은 북제와 협상 과정에서 한 사람은 정사로, 또 한 사람은 부사로 만나 꽤 좋은 호흡을 보여 줬었고 성격 면에서도 크게 부딪치는 부분이 없었다. 며칠 전 두 사람 다 거하게 취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계기로 더욱 가까워진 건 사실이었다. 신기물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누군지 자세히 보게나.”
물론 범한도 이들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회시가 시작되는 모레는 아주 중요한 시기인 만큼 너 나 할 것 없이 각 집안에서 은밀하게 뒷돈을 주고받느라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 듣기로 예부 원로 곽유지도 이 일로 번거로워지거나 혹시라도 황족들에게 미움을 살까 두려워 차라리 황궁 안으로 들어가 숨을 정도였다. 또 시험관과 회시 책임자 네 명도 역시 이미 예부 태학을 관저로 두고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이번 회시 응시자 중 황태자가 직접 키우고 싶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서는 동궁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슨 방법이든 써야 했다. 이번 회시 책임자는 곽유지로, 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동궁을 절대적인 지지하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가서 몇 마디만 나눠도 아무 문제 없이 해결될 일을 가지고 왜 범한을 찾아온 것일까.
신기물이 범한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범한 대인의 기지는 실로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경도의 법도에 있어서는 아직 그리 밝지 못하신 듯합니다. 지금 조정의 과거 시험 법도는 모두 선대 조정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크게 변한 건 없습니다. 다만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응시생들은 시험지에도 답안을 그대로 적어 내야 합니다. 거기다가 누구의 필적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호명(과거 시험을 볼 때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시험지에 성명과 생년월일, 주소 등을 적은 부분을 풀로 칠하여 봉하는 것을 말함)의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죠.”
신기물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종이에 적힌 여섯 명은 모두 제가 직접 만나 본 사람들입니다. 모두 인재들이죠.”
* * *
범한은 자신이 냉정한 사람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신기물이 돌아간 후 서재에 조용히 앉아 있던 그는 손에 쥔 종이를 보고 스멀스멀 분노가 치밀었다. 바로 모레면 회시가 시작된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회시를 담당하는 총책임자가 누구인지 또 회시와 관련된 관리 중 자신이 아주 귀찮은 일을 맡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앞서 신기물과의 대화에서 이미 조정에서 태학 5품 범한에게 이번 회시의 거중랑이라는 직위를 맡기도록 지시가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이한 직위인 거중랑은 사실상 이번 회시의 질서를 전담하는 관리로 상당한 실권자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날 밤 시험지를 봉하고 다시 채점을 시작하기 전, 그사이의 시간 동안 예부 관원과 태학 교자가 시험지를 베끼기 바로 직전에 호명하는 일이 바로 거중랑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번 회시에서 이런저런 방법을 써보려고 생각 중인 사람들이라면 우선적으로 호명 단계에 개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사람들이 가진 배경이라면 이미 예부 관원은 물론이고 시험관까지도 매수가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호명 단계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답안지를 채점하는 시험관이라고 해도 손쓰기는 힘들었다.
수년간 과거 시험을 치러 오면서 이러한 부정행위들은 경국 관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각 세력을 분배함에 있어 일정 부분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국의 유명인인 범한이 거중랑 자리에 앉았으니 조정에서도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시선 범한이 거중랑으로서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태자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기물을 범한에게 보냈으니 범한이 자신의 뜻을 결코 거스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 동궁에서 범한에게 충분한 은덕을 베풀었으니 이제는 범한이 분명한 태도를 취할 때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여섯 명의 이름을 다시 한번 살펴본 후 피식 웃고는 종이를 찢어 버렸다. 그리고 침실로 돌아가면서 2 황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되짚어 보고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만약 2 황자 역시 이와 같은 수법을 사용했다면 중간에 낀 자신이 더 힘들어졌을 게 뻔했다.
하지만 범한은 이 사안을 그리 복잡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완아가 책상 옆에 앉아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다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녀의 손가락에 껴 있는 종이는 너무 깨끗해서 오싹할 정도였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종이에 쓰인 이름은 나한테 말하지 말아요.”
임완아가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범한 곁으로 다가오더니 팔짱을 꼈다.
“역시 대단해요.”
“원래 북제로 가기 전에 경도에서 좀 쉬려고 했는데 누가 알았겠어요.”
결국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내가 거중랑이라니,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우리 아버님과 당신 아버님이요.”
임완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거중랑이라는 직위가 책임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한 자리랍니다. 관례대로라면 회시에서 선발된 학생이 조정에 들어가서 당신을 만나면, 당신에게 스승님이라고 불러야 하거든요. 정말 대단한 일이죠.”
하지만 범한은 여전히 언짢은 눈치였다.
“서로 친하지도 않은 두 분이 언제부터 이리도 뜻이 잘 맞은 건지……. 이제 겨우 열일곱인 제가 앞으로 조정에서 중년의 한림원 학자에게 나에게 예를 갖추도록 하라는 말인가요?”
그러자 임완아가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경도에서 당신의 명성이 자자하다 보니 이번에는 회시 시험관으로 추천까지 한 모양이네요. 그래도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황궁에서 반대하지 않은 거 보니 앞으로 수백 년 동안은 최연소 회시 시험관이 될 수 있겠어요.”
“이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에요. 얼마 전 대전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게 얼마나 후회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후회해도 결코 되돌릴 수 없었다. 그는 임완아가 건네준 종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안에 경도 유명한 학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중에는 범한이 직접 만나 본 사람도 있었다. 다들 나름 뛰어난 학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라 그나마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정됐다.
“내가 거중랑이 된 걸 알면서도 이리도 노골적으로 우리 집에 찾아오다니.”
범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종이야말로 그들이 부정행위를 했다는 증건데 이걸 내 손에 들려 주다니, 그들의 배짱도 대단하군요.”
“다들 이렇게 해온걸요.”
오랫동안 황궁에서 지낸 임완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옛날 거중랑은 요직이긴 했지만 직위가 낮아서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황궁의 누군가가 자기가 원하는 심복을 두려고 하더라도 거중랑이 나서서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못 본 척 넘어가는 일이 많았죠. 근데 올해는 당신에게 이 자리가 돌아왔으니, 당신에 대한 소문과 배경에 겁먹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치 회시의 총재(회시를 관장하는 대신) 대하듯 미리 와서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유난을 떠는 것이지요. 물론 당신의 비위를 맞추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전 방식대로 시험관에게 연줄을 대겠죠. 감히 당신을 찾아와서 귀찮게 하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그저 관례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되는 거군요.”
범한은 경국의 관료 사회가 이 정도까지 부패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경도 밖 서당에서 힘들게 버티며 회시를 준비하고 있을 학생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임완아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 사람들도 체면이 있으니 당신한테 뭐라고 하지는 못할 거예요.”
범한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군주이니 당연히 두려운 사람이 없겠지. 지금 내가 가진 배경이 별 볼 일 없는 건 아니지만 당신의 오라버니인 황태자가 내게 바라는 게 있단 말이오.’
범한이 돌아서서 물었다.
“그 이름들은 다 어디서 보낸 건가요?”
종이는 딱 세 장뿐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은 수였다.
임완아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사실은 제가 그런 거예요.”
“뭐요?”
“오늘 황궁에 들어간 김에 영 재인 궁에 들렀어요. 당신도 알죠? 내가 어렸을 때 그녀랑 같이 자란 거. 그래서 받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임완아에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듯 보였다.
“나머지 두 장은 하나는 아버님께서 원 선생을 통해 보내신 거고, 나머지 하나는 추밀원의 원로이신 진 대인께서 보내신 거예요.”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영 재인은 멀리 서방에 나가 있는 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그리고 재상 대인은 자신을 거중랑에 앉혀 놓은 장본인이었기에 이 기회를 그냥 넘길 리 없었다. 추밀원의 원로 진 대인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삼대째 내려오는 원로 집안 출신으로 경도의 군사들을 꽉 쥐고 있었다. 무관을 뽑는 자리도 아닌데 왜 여기까지 손을 뻗친 건지 알 수 없었다.
“됐소.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요. 경국 전체가 이렇게 된 이상 나 혼자서 고귀한 척하진 않을 테니.”
범한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모두 찢어 버리고 아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142화
2월 9일, 회시 날이 밝았다. 경국의 모든 지식인이 10년 동안 힘들게 공부한 것을 최대한 모두 제왕가에 팔아야 한다. 제왕가가 산다는 것은 정말 사고파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번 시험을 잘 보아야 벼슬에 올라 나라의 녹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거였다.
긴소매를 입은 응시생들은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처럼 조금은 떨리고 상기된 모습으로 예부에 마련된 시험장으로 향했다. 좁은 어망에 용기 있게 몸을 던져 파고드는 물고기처럼 보였다.
범한은 어제저녁에 회시의 총재 곽 상서와 시험관들과 만나 다음 날 진행될 각자의 업무에 대한 점검을 마쳤다. 다소 긴장되긴 했지만 잘 마쳤다.
문 옆에 오래된 팔걸이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는 관아에서 보낸 하인과 감찰원에서 직접 파견한 관원이 서 있었다. 범한은 조용히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자기 앞을 지나가는 응시생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 응시생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범한을 아는 사람은 그의 명성에, 범한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자리에 존경을 표했다. 입구에서는 범한 옆을 지키고 있던 관원들이 응시생들이 금지 물품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몸수색을 시작했다.
범한은 차를 마시다가 시골 마을 머슴처럼 생긴 학생이 이불과 요강, 음식 할 것 없이 잔뜩 메고 온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몸수색을 다 마친 학생이 시험장으로 들오려고 하자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거기, 잠깐만.”
범한의 한마디에 시험장 밖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잔뜩 겁에 질린 응시생들의 시선이 모두 범한을 향했다. 이 학생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다들 궁금한 눈치였다. 범한은 낡은 짐 보따리를 메고 있는 학생의 눈을 보았다.
“조사 다 받았나?”
예부 관리와 감찰원 관원이 동시에 대답했다.
“예. 이미 다 확인해 봤는데 아무 이상 없었습니다.”
그 학생은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편 채로 침착하게 범한을 바라봤다.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범한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래? 옷을 벗고 검사를 한 건가?”
“그러하옵니다, 대인.”
옆에 있던 관리는 입구로 점점 몰려드는 사람이 많아지자 덩달아 초조해졌다. 이제 반 시진 후면 황궁에서 어령이 내려질 텐데, 그 전에 모든 학생이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때 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 학생에게 다가가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자네 옷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범한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 학생에게만 들렸다. 2월 초, 아직은 추운 날씨인데도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성은 양, 이름은 만리인 그는 시재로 명성이 자자한 범한이 어떻게 자신의 비밀을 알아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빛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범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일단 들어가게. 이 일이 밝혀지면 자네가 그동안 고생한 건 모두 헛수고가 아닌가.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두게. 시험이 치러지는 이틀간 혹여라도 이 옷을 사용하는 게 눈에 띈다면 그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걸세.”
양만리는 희비가 교차하여 울먹거렸다.
“감사합니다, 대인.”
혹시라도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거중랑이 마음을 돌릴까 싶어 얼른 짐을 메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시험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앞으로 이틀 동안 절대로 옷을 뜯어 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 뒤로 범한은 부정행위용 종이를 몰래 숨겨 들어가는 학생들에게 경고했다. 범한 곁에 있던 관리들은 범한의 눈썰미와 판단에 감동하기도 했지만 시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자 밀려드는 초조함은 어쩔 수 없었다.
범한이 관직에 오른 후 관리다운 일을 하는 게 처음이어서인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는 시험장에 들어오는 학생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핀 까닭에 시험장 입구에 버리고 간 신발과 모자, 종이 뭉치에 숨겨 온 붓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시험장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은 소문으로 들었던 범한에게 시선의 여유로움은 온데간데없고 살기 가득한 거중랑의 모습만 남아 있자, 몸 안에 숨기고 있던 금지 물품들을 얼른 꺼내 시험장 뒤편 하수도에 버리고 오기 바빴다.
오늘 감찰원의 책임 관리는 범한과 아는 사이로 지금은 잠깐 1처를 대신 맡고 있는 목철이었다. 그는 부하의 보고를 받으며 걸어오다가 범한을 보고는 두말없이 큰절을 올리더니 매우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대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예부 하급 관리는 감찰원 관원인 목철이 범한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감찰원 사람이 한낱 문관에게 왜 이렇게 정중하게 대할까 생각해 보니 역시나 범한이 가진 배경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나라의 재상과 상서 그리고 군주까지. 그래서인지 말을 아끼고 범한의 대답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시각을 확인한 범한도 시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제야 재미있어하던 게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시험장 입구에 있는 수백 명의 학생에게 맑고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자, 지금부터 회시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옷을 벗지 않은 채로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은 너무 기뻤다.
범한은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
“몰래 숨겨 온 물건을 자진하여 여기 있는 대나무 바구니 안에 넣는 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 하나 내 눈에 띈다면 사람을 시켜 옷을 다 벗겨서 황궁 앞에 던져 두어, 너희의 점잖은 모습이 어떤 것인지 온 세상이 다 알게 하겠다.”
깜짝 놀란 학생들은 그제야 범한의 미소 뒤에 골수를 파고드는 살기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감히 모험을 시도하려는 학생 없이 순서대로 줄을 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의 행렬에 갑자기 속도가 붙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장 입구는 어느새 조용해졌다. 냄새나는 신발과 종잇조각들만 잔뜩 남아 있어 처량해 보였다. 예부 하급 관리는 얼른 사람을 시켜 깨끗이 청소하게 하고 황궁에서 내려오는 시험 시작 명령을 받들기 위해 향안을 배치하고 폭죽을 터트리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역시 범한 대인은 경국의 다른 관리들과 크게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이런 부정행위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고 오늘처럼 조사를 하고도 학생들을 시험장으로 그냥 들여보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또 이 일을 다른 사람이 맡게 됐다면 어사대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어사대도 두렵지 않다는 의미였다.
범한이 팔걸이의자에 앉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목철이 말을 걸었다.
“범한 대인, 고생이 많으십니다. 잠시 후 시험 시작을 알리는 포성이 울리면 원에 돌아가셔서 좀 쉬시지요. 남은 일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그를 쳐다본 후 말했다.
“쉬다니요, 이따가 시험장도 좀 둘러봐야죠.”
“대인께서 처음 하셔서 잘 모르시나 봅니다. 사실 시험장에 들어가면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습니다.”
목철은 어린 도련님이 회시의 규칙을 잘 모른다고 생각해서 피식 웃었다.
범한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북제에 가는데 대인도 가십니까?”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목철은 잠시 얼떨떨해며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감찰원에서 아직 조정 중인 것으로 압니다만, 제4처에서 진행 중인 일이라 저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목철은 범한이 시를 쓰는 재주는 탁월하나 시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장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러자 나름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북제에서 무슨 물건이라도 들여오실 생각인지요? 그런 거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범한이 웃었다.
“아닙니다. 그냥 한번 물어본 겁니다.”
그러자 목철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범한 대인,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범한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고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드리우더니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사실, 독서는 시험을 볼 필요가 없는 인생의 즐거움 그 자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경도에 온 후 가장 두려웠던 게 바로 회시였지요. 근데 일 년 만에 제가 거중랑이 되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데다가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고요. 훨씬 편안하게 저 사람들이 열심히 시험을 보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게 바로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인 듯합니다.”
성지가 내려오자 춘포가 울리고 향안이 철거됐다. 시험장 문이 닫히면서 경국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회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범한은 묵직한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전생의 대학 입학시험이 생각났다. 시험을 보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웠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서도 회시에 참가할 수 없다니 나름 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 아쉬움은 남아 있었다.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대청에 들어서자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문밖에서 불어닥쳤다. 범한이 정중앙에 앉아 있는 예부 상서 곽유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시험장 문은 이제 닫혔습니다. 대인의 지시 없이는 다시 열리지 않을 겁니다. 또한 시험지가 도착하여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한 음식과 물은 시험장 내에 마련해 두었으며, 이 일은 감찰원 목철 대인과 예부 관원들이 함께 담당하고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곽유지는 5품 관원의 수려한 외모를 보고 뭐가 못마땅한지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인상을 쓰고는 이내 웃어 보였다.
“수고 많았소.”
그리고 옆에 있던 시험관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관례대로 한 시진이 지나면 시험장을 한번 살펴보고 오시게나.”
올해 시험관은 태학정과 동문각의 대학사로 모두 황제가 직접 지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곽 상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곽유지가 몸을 돌리더니 범한에게 말했다.
“범한 대인, 시험장 질서를 맡고 있으니 여기 두 분과 협조하여 불시로 순찰하고 쪽문 쪽의 동정도 살펴 주게나.”
예부 상서는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향해 포권을 올렸다.
“춘시는 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인재를 고르는 일이니 무엇 하나 허투루 해서는 안 되네. 그러니 여러분들도 정성을 다해 주길 바라오.”
곽 상서의 말에 모든 관원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엄숙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시험장 곳곳에 퍼져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황제가 이미 수차례 북벌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는 치국의 중심이 문치로 옮겨졌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 년에 한 번씩 보는 시험을 매우 중요했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몰래 시험장에 들어가 사찰을 한 적도 있었기에 누구도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회시를 보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일생일대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시험에 합격한다면 말 그대로 용문을 밟게 되는 것이고 그러지 못하다면 침울하게 고향으로 돌아가 내년에 있을 향시를 준비해야 했다. 청춘을 얼마나 더 쏟아부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누구든 한번 떨어지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경도를 맴돌다가 오히려 바닥까지 미끄러지거나 아예 종적을 감추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라의 대사이기도 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생사의 장이었다.
범한은 돌계단에 서서 눈을 감고 시험장 사방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를 듣고 있다가 황태자가 전해 준 종이가 떠오르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143화
해가 점점 떠올라 시험장 안의 한기를 몰아내자 한참 긴장하던 학생들에게도 드디어 몸을 녹일 기회가 생겼다. 그들은 시험지에 눌러 쓴 필체가 혹시라도 어색해 보일까 계속해서 손을 비벼 댔다. 이번 시험인 서예도 평가 일부분이었기에 시험이 진행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여전히 머릿속으로 구상만 할 뿐 섣불리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 있는 학생들 대부분은 일찍이 시험에서 쓴잔을 마셔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미소를 머금고 시험장을 둘러보던 범한은 학생들이 생각하는 데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봐 가능한 한 작은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학생들은 파제(팔고문(八股文)을 지을 때 첫 단락에서 한두 구절로 제목의 뜻을 밝히는 것)를 할 때, 시험관이 자기 옆을 지나가거나 자신의 시험지를 보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 옆에 서서 구경하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범한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오히려 자신감이 솟아났다.
엄격해 보이는 다른 시험관들과는 달리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다 고개를 들어 범한을 본 학생은 그의 여유로운 미소가 자신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충분했다.
범한이 시험장 곳곳을 둘러보고 각문으로 돌아오자 목철이 이미 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가 의자에 앉자마자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답답하시죠? 여기서 좀 쉬시죠. 각문은 바깥세상과 소통을 할 수 있어서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범한이 씩 웃어 보였다. 만약에 대청으로 돌아가 곽 상서와 같이 앉아 있었다면 상대방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정말 불편했을 것이다. 범한은 차를 마시다가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다. 황태자 쪽에서 준 명단에는 여섯 명뿐이었는데 하종우의 이름이 없었다. 그가 경도에 온 이후 하종위가 대학사의 제자로 동궁의 측근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본다면 이번 춘시에 참가를 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는 잠시 이 일을 접어 두고 작은 문틈으로 시험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날 밤 술김에 이태백의 시를 몇 수 읊은 것뿐인데 지금 여기서 시험 감독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황당하기도 하고 무척이나 엉뚱해서 역시 인생은 참으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붓을 들고 열심히 쓰느라 여념이 없는 학생들이 이번 회시가 조정과 황실의 개입으로 일찍부터 미리 정해 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더니 어느덧 해가 각문 의자에 앉아서 깜박 잠든 범한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해당 관아에서 사람을 보내 점심을 가져다주었다. 아직 시험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식기도 자세히 검사한 결과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서 이 중 6인분을 중청으로 옮겼다.
범한도 중청으로 가서 몇몇 대인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오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동남쪽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던 학생이 적발되었는데 시험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까지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들은 많이 봐왔는데, 이렇게 대범하게 하는 학생은 처음 봤네. 파제 답안지를 버젓이 책상 아래에 두고 베끼는 게 아닌가. 아마 사방에 칸막이가 있어서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우리가 바본가? 그걸 못 잡아내게.”
이번 회시의 총재 예부 상서 곽유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책은 어떻게 가지고 들어온 거지?”
범한은 자신의 실수란 걸 알고 있었기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앞서 몸수색을 할 때 시간이 오래 소요되어 감찰원 관원이 혹여나 시험 시간이 지연될까 우려하더군요. 그래서 소인이 서둘러 한다는 것이 그만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범한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감찰원 관원에게도 일부 책임을 떠넘겼다.
곽유지는 범한을 한번 쳐다보고 작게 신음을 흘릴 뿐 크게 꾸짖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없이 과거 시험을 치러 오면서도 역대 왕조에서도 이 작은 일을 근절하지 못했는데 범한이라고 별수 있었을까.
“범한 대인은 회시는 처음이라 경험이 부족할 것이니, 옆에서 너희가 잘 도와주거라.”
범한이 웃으면서 주변에 있는 대인들에게 공손을 표했다. 특히 자신의 직속 상관인 태학정에게 말을 건넸다.
“학정 대인, 소인 아직 미숙한 점이 많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태학정은 그날 황제에게 지목받은 대학사 서무였다. 그는 장묵한의 문하생이긴 하지만 스스로 경국인의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범한으로 인해 장묵한이 피를 토한 일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봉정 대인, 대인께서 미숙하다 하시면 경국 어느 누가 성숙을 논하겠습니까?”
다른 시험관들도 웃으면서 몇 마디 거드는 척 범한을 비웃었다.
“엄연한 경국의 재자(才子)가 학식이 없다니요. 그럼 얼른 시험장에 들어가서 붓을 잡으셔야지요. 배고프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에 곽유지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신의 재능과 학문이 어떤지 범한도 전혀 확신이 없었으나 경도 관료 사회든 더 크게 경국 전체든 범한에 대한 신뢰도는 확고했다.
* * *
시험장 안 학생들은 여전히 긴장한 상태로 문제 풀기에 바빴다. 날도 어느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범한은 시험장을 몇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다 여러 사람의 시험지를 보다가 정말 재능이 있어 보이는 학생을 발견하면 저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는 담주에 있을 때 이 세계의 경전을 통독한 적은 있었지만 과거 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오를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쓰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독서광인 데다가 좋은 안목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몰래 몇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고 각문 쪽으로 가서 일부러 하품하는 척했다. 그러고 나서 옆을 힐끗 보니 목철은 반쯤 누운 채로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범한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목철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일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평평도 그를 감찰원 1처의 일부 권력을 쥐여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사람됨이 좀 부족해 보였다. 이제 막 아첨하는 걸 배우기 시작했는지 범한만 봤다 하면 더없이 공손하게 구는 터라 범한은 그가 무척이나 불편하게 느껴졌다.
“대인, 각문은 열 수 없습니다.”
거중랑 범한이 각문 근처 외진 곳으로 향하자 감찰원 관원이 난감해하며 가로막았다.
“음식이 오가는 것 외에는 이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나도 잘 알고 있네.”
범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저 산책이나 해볼까 해서 그런 거네. 재미난 거라도 있을까 해서 말일세.”
지금 대전에서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는 춘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거중랑이나 돼서 시험장에서 재미난 게 없나 찾아본다는 말은 참으로 엉뚱하고 체통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감찰원 관원은 싱긋 웃어 보였다.
“감찰원 안에는 재미난 것들이 많으니 앞으로 자주 오시지요.”
범한은 평정을 되찾은 후 평범한 관원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내가 찾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자네인가?”
“네, 그렇습니다. 말씀하시지요.”
그 관원은 고개를 숙였다.
범한은 그의 두 눈을 보고 관직은 그리 높지 않으나 분명 진평평이 심어 둔 심복이라는 걸 알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진 대인께서 구체적인 시간을 말씀하셨나?”
“춘시가 끝난 후 사흘 안입니다.”
관원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알겠네. 내 자네의 도움이 좀 필요한데 이 사람들에 대해 좀 알고 싶어서 말이야.”
범한은 앞서 자신이 적어 둔 사람들의 이름을 관원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였다.
“집안에 대한 건 필요 없네. 그저 사람 됨됨이가 어떤지 알아봐 주게.”
“예. 대인께서는 요패를 보여 주시지요.”
범한은 허리춤에서 이미 몇 번이고 자신을 도와준 감찰원 제사 요패를 꺼내 관원에게 한번 보여 주고는 물었다.
“기억할 수 있겠나?”
관원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도 진평평 어른께 보고해야 합니다.”
“알겠네.”
범한이 온화하게 웃었다.
“시험지를 봉하기 전까지 알아봐 줬으면 좋겠네.”
“예. 그리하겠습니다.”
“내가 자네 이름을 알아야 하나?”
“아니옵니다. 소인 그저 감찰원의 하급 관리일 뿐입니다. 대인께서 제 이름을 기억하실 필요는 없읍니다.”
* * *
황태자는 앞으로 십수 년 후를 생각하여 조정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 둘 생각이었다. 이는 태황자도 마찬가지였다. 장인과 추밀원 쪽은 전형적인 간신의 길을 택했다. 범한은 장인이 자신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 절로 쓴웃음이 났다.
그 또한 이것이 관료 사회의 정상적인 모습이며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이런 날이 올 것이란 걸 알았다.
범한은 훗날 시간이 흘러 온전한 성인이 되고 나면 조정에 자신의 사람을 심기 위해 게임판 같은 관료 사회에 뛰어들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감찰원과 협력하여 이번 춘시를 잘 마무리 짓는 일이 급선무였다. 괜한 일로 자신을 귀찮게 할 필요는 없었다.
장 공주를 궁 밖으로 내보내는 데 성공한 범한은 아주 안정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이번에 동궁 측에서 취한 수법이 지나치지 않았다면 그냥 참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계획이 별로 모험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힘에 앞서 그의 뒤에는 어둠 속에 가려진 대종사와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감찰원이 버티고 있었다. 이건 대부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힘이었다. 범한은 황실의 가장 근본적인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한, 실제적으로 서로 견제가 가능한 관료 사회에서 자신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환생해서 새로운 생이 주어진 마당에 계속 뒤로 물러나기만 한다면 어머니께서 남기신 많은 도움의 손길들이 다 헛된 일이 되지 않을까. 황자와 고위 관리들도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라고 못 할 것은 또 무언가? 당연히 할 수 있을뿐더러 더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
“난 뼛속부터 나쁜 놈이야.”
범한은 시험장에서 고생하는 학생들을 보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다른 사람은 되는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아주 제대로 보여 주겠어. 다른 사람은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겠어.’
“난장판이군!”
진평평의 한마디에 책상 옆에 있던 몇 명의 감찰원 수장들이 눈치를 살폈다. 진평평은 무릎을 덮고 있던 담요를 끌어당기고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새하얀 머리가 헝클어져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감찰원의 법도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명령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따르지 않는다.”
4처 수장 언약해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조금 안타까운 것은 과거 이런 부정행위를 조사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알 만한 높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데다가 저희 쪽에서도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하여 실마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 이번에는 입수한 명단을 토대로 진상을 밝혀 사건의 배후에 있는 관원들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동궁이 연루되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감찰원 내부에서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얘기하는 것 외에 이토록 대담하고 신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다니, 밀정 수장들은 다른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창가로 가까이 가자 그의 흰머리와 검은 가림막이 명확하게 대조를 이뤘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제사 대인은 참으로 운이 좋군요. 어젯밤 폐하께서 이번 시험의 부정행위를 철저히 조사하라 하셨는데, 이렇게 빨리 선물을 보내 주시다니요.”
언약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사 대인이라는 사람이 누구일지 몹시 궁금했다. 무엇보다 어떻게 명단을 입수했는지 알고 싶었다.
“진작 찾았어야 했는데.”
“음.”
진평평이 손을 흔들자 부하들은 각 부에 배치하여 수일 후 있을 특단의 조치를 위한 준비를 하도록 했다. 남아 있던 언약해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사의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이번 일을 비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황태자의 체면을 지켜 주기 원하셔서 동궁 쪽 사람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럼 재상은?”
언약해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사의 신분이 짐작이 가고 나니 당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평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제사가 누군인지 알았으니 당연히 그의 장인도 건드려서는 안 돼.”
“사실 이들 모두 건드려서는 안 되죠.”
언약해의 얼굴에 또다시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144화
“황태자 외에는 한 분은 황궁의 귀인이고, 한 분은 재상에 추밀원의 원로까지. 저희 감찰원과 군부의 사이가 줄곧 좋았는데 이런 사소한 일로 사이를 깨뜨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흥.”
진평평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세 사람 모두를 쫓되 끝까지 쫓아서는 안 되네. 그렇게 되면 온 조정이 흔들려 폐하조차도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 거야. 이 사람들은 폐하께서 시험장의 부정행위로 자신들을 철저하게 다스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이리도 대담하게 행동한 것이니 말이야.”
그러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세상에 저들보다 배짱이 더 큰 사람이 있다는 건 몰랐던 거지.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팔려 나갈 줄이야.”
언약해사 미간을 찌푸렸다.
“범 제사의 이번 행동을 매우 경솔했군요. 많은 사람의 원망을 듣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수습할까요?”
“지금 이 늙은이에게 넘겨준 거군.”
진평평은 화가 난 건지 실성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내가 자신을 치열한 전장에 내보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건 거야. 그래서 내게 명단을 보낸 거고. 이제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던 거야.”
언약해는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작가의 큰아들과 진 원장은 대체 무슨 관계지? 어떻게 감히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진 원장의 표정을 보니 정말 그의 방법대로 할 생각이었다.
냉정을 되찾은 진평평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날카로워서 듣기 거북했다.
“재미있군. 역시 재미있어.”
언약해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범 제사가 이렇게 해서 얻는 게 무엇인가요?”
“이 세상에 가끔 이런 괴짜들이 있긴 하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진평평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얼굴에 보기 드문 존경심이 나타났다. 심지어 그가 황제를 언급할 때에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번 부정행위 건은 어느 선까지 정리하면 될까요?”
진평평은 살짝 고개를 들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곽씨 가문이 너무 오랫동안 예부를 맡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네.”
“잘 알겠습니다.”
“1처에는 지금 사람이 없어. 목철은 그치 똑똑하지 않으니 이번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나.”
“예, 알겠습니다.”
* * *
회시는 이미 세 번째 순서에 접어들었다. 범한은 최근 며칠간 피곤해서 그런지 눈곱이 부쩍 많이 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따뜻한 물수건으로 눈가를 닦아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을 살피며 시험관인 자기도 이렇게 피곤한데 몇 시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시험을 보는 학생들이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회시 마지막 날로 범한도 이곳에서 지낸 지 수일이 지났다. 집에서 항상 몸에 좋은 음식을 보내 줬지만 이미 심신이 모두 지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하품을 하고는 양만리 곁으로 갔다. 며칠째 지켜본 결과 양만리는 옷 속에 숨겨 온 것은 아예 꺼내 보지도 않고 범한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범한은 몹시 흐뭇했다.
더욱 뜻밖이었던 것은 양만리는 상당한 재능과 학식을 갖췄다. 게다가 소론에서 보여 준 견해는 그럴듯해 보이진 않았지만 꾸밈없는 모습이 범한의 성정과 잘 맞아떨어졌다. 무명의 감찰원 관원의 보고에 따르면 양만리의 집안은 가난하고 어려서부터 천주(泉州)에서 공부를 했으며 향시 성적도 꽤 괜찮았다. 하지만 범한은 그가 옷 속에 숨겨 온 물건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때 양만리는 마지막 시험까지 다 마친 상태로 잔뜩 피곤한 얼굴로 혹시나 빼 먹은 내용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범한이 또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시험관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지만 며칠간 고민하느라 이미 정신이 얼떨떨해진 양만리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옷자락을 쥐고는 불쌍한 표정으로 범한을 한번 쳐다봤다. 그의 표정만 봐도 그가 젊은 시험관에게 당초 시험장 밖에서 어떻게 자신이 몰래 숨겨 온 사실을 알았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범한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정도 재능인데 굳이 그런 방법이 필요한가.’
범한은 그와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양만리의 이불을 살짝 건드렸다.
영문을 모르는 양만리는 뒤에 있는 이불 보따리만 보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씻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귀티를 내는 비단옷을 다시 보고 나니 자신의 엉큼한 수법이 어떻게 드러난 것인지 이해가 갔다. 비단옷을 잘 차려입을 형편인데 누가 굳이 축 처진 이불 보따리를 시험장에 메고 들어올까.
그가 멋쩍게 웃어 보이자 범한도 씩 웃고는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렸는지 뒷짐을 지고 시험장을 서성거렸다.
* * *
밤이 되자 학생들도 점점 시험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며칠간 계속된 강행군으로 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칠 줄 모르는 하품에 온몸이 시큰거리고 정신도 반쯤 나가 있었다. 붓놀림이 느려서 아직도 마무리를 못 한 학생들은 책상 앞에 앉아서 애먼 붓만 깨물고 있었고 등잔 밑에서 옷을 입은 채로 잠든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서 시험관들도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때 갑자기 경도에 깔린 어둠을 깨우려는 듯 맑은 징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모두 붓을 놓으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예부 소속 관리들이 시험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붓을 놓지 않고 잡고 있는 학생은 시험장 밖으로 쫓겨났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적어도 40대 정도 돼 보이는 학생은 시험 문제를 다 풀지 못해서 차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울먹이며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감찰원 관리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다.
한 참 후에 모든 사람이 그의 울음소리를 들을 정도로 귀신 울음소리를 내며 시험장 밖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을 마친 학생들을 향한 동정심은 조금도 없었다. 이 세계든 저 세계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잘 하는지는 언제나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가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학생들의 회시가 끝났으니 이제 감독관인 그의 역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회시가 끝난 그날 밤 바로 시험지를 봉인해야 했다. 이것은 범한의 임무이긴 했지만 회시의 총재와 시험관 모두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범한이 호명 초록을 작성하는 작업을 마쳐야 시험지를 봉인하고 사인을 할 수 있었다.
촛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예부 밖에서는 수십 명의 나이 든 관리들이 시험지를 나눠서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작은 방에는 범한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예부 관리 둘이서 호명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시험지는 호명 전에 모두 범한이 먼저 확인 작업을 해야 했기에 잠시도 쉴 새 없이 시험지의 이름을 확인한 후 네 장의 종이에 적힌 이름과 맞춰 보았다. 한참 후에 보니 그는 이미 시험지 열 장을 이미 골라내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의 오른편에 놓아두었다.
그의 옆에 있던 예부 관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도 범한이 빼둔 시험지가 황실과 조정의 거물이 개입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범한은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호명을 시작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서둘러 시험지 위에 적힌 학생의 이름과 고향을 종이로 덮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범한은 경국 관리들이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해내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이 골라낸 시험지에 붙인 종이가 일반 다른 학생들 시험지에 붙인 종이보다 살짝 짧았다.
예부 관리들이 자신이 고른 시험지에 호명을 할 때 자못 진지하게 짧은 종이를 붙이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범한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곽유지가 이 시험지 모두가 조정의 누군가로부터의 부탁이 아니라 그중 몇 개는 범한이 마음에 드는 사람, 예를 들어 양만리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한은 이미 자신의 계략을 감찰원 원장의 손에 넘긴 상태였던 터라 곽 상서가 피를 토할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호명에 붙인 종이 길이의 차이가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라서 무심코 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베껴 쓰던 관원이 흑심이라도 품고 있었다면 충분히 분별해 낼 수는 있었다. 범한은 짧은 종이로 봉해진 양만리의 시험지를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이 절로 났다.
“골라냈다곤 하지만 시험지 답안을 베껴 쓸 때 어떻게 표시해 두는 거요?”
옆에 있던 관원이 난감한 듯 웃어 보였다. 이번에 신참으로 온 거중랑은 경도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이긴 하나 회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직 모른다는 생각에 이참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대답했다.
“범한 대인, 초록을 할 때 몇몇 글자에 공들여 써놓으면 채점하시는 대인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시는 거죠.”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은 범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럼 채점을 하는 대인이 시험지가 누구의 것인지는 몰라도 합격을 시켜야 하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게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대인.”
예부 관원은 아주 공손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천하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는 사람이 관료 사회에서 내려오는 이런 법도도 모르고 있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걸 알고 나니 범한도 이들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국 관리들이 지나치게 오만하게 굴어서 이런 허술한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터. 지금 범한 또한 ‘관례’대로 진짜 지식인을 선발하려고 역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득권을 가진 관료 기관이 이 사실을 알면서 묵인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은 정적(政敵)이든 아니든 이미 암묵적으로 묵인되어 왔다. 때문에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선뜻 문제 삼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동궁과 몇몇 원로들, 심지어 재상 대인까지도 다양한 수법으로 이 일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범한을 찾아왔다. 그 이유는 역시 거중랑이 합격자 선발에 가장 중요한 호명을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임 재상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범한이 어떻게 나올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범한의 입장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흥, 어림없는 소리 말라고!’
밤새 분주했던 그날 밤, 그동안 열심히 회시를 준비해 온 수많은 학생의 인생에 마침내 회시의 종지부가 찍혔다. 모든 관원은 졸린 눈을 비비며 본청에 모여 이번 회시의 주관자 예부 상서 곽유지의 훈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이번 회시를 통해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인재를 얻는다는 둥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거짓말을 설파했다. 그러고 난 뒤 피곤한지 바로 손을 내저어 본청에 모여 있던 관리들을 물렸다. 그리고 범한에게 상냥한 투로 말했다.
“범한 대인도 며칠간 고생하셨소.”
“아니옵니다.”
범한은 억지로 정신을 차리며 웃어 보였다.
“대인께서 이리도 고생하시는데, 일개 거중랑인 소인이 무슨 고생을 했다 하겠습니까.”
곽유지가 미소를 지었다.
“모두 고생 많으셨소.”
사실 당시 본처에 있던 고위 관원들은 이번 회시의 결과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 이득을 본 사람은 곽유지와 두 명의 시험관뿐만 아니라 범한도 미처 몰랐는데 며칠 전 그가 받아야 할 은전을 백작가로 보낸 사람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가 보낸 금액은 담박서국의 반년 수입보다 훨씬 큰돈이었다.
며칠간 연달아 회시를 치르고 나니 시험장 여기저기에서 썩은 내가 진동했다. 범한은 돌계단에 올라 코를 만지작거리고는 캄캄한 시험장을 쳐다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세계에 온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 마음을 먹고 나니 원래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꽤 괜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한테나 잘 대해 주어 미움을 사지 않는다는 그런 케케묵은 의미는 아니었다.
3부 관원은 이미 시험지를 모아 황궁 문하성 태감의 명령에 따라 대내시위와 감찰원 밀정의 보호하에 경도의 하얀 밤을 지나 태학으로 떠났다. 이제 수일 내로 호명된 시험지가 검사를 마치게 되면 대략적인 순위가 매겨지고 그 후 다시 황제가 친히 주지하는 최종 시험인 어람전시(御览殿试, 과거 제도 중 최고의 시험으로 황궁의 대전에서 거행하며 황제가 친히 주재함)를 통해 최종적으로 이번 회시의 장원과 방안(옛날 과거 시험에서 2등으로 진사에 급제한 사람), 탐화(황제가 직접 주재하는 전시에서 3등으로 진사에 급제한 사람)가 선발됐다.
145화
범한은 썩은 내가 하늘을 찌르는 시험장을 떠났다. 입구에는 백작가의 마차가 일찍부터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탄 후 등자경이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아 냈다. 역시나 몹시도 지쳐 보였다.
“내 의견에 대해 아버님께서는 다른 말씀 없으신가?”
“없습니다.”
등자경은 다친 다리를 옮기며 대답했다.
“그런데 백작 대인께서 그리 반기는 눈치는 아니셨습니다. 재상 대인께 미리 알려 드렸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게다가 이번 일에 적지 않게 연루되어 계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백작 대인과 재상 대인도 도련님을 보호하기 힘들어질까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범한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감찰원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평평이 왕계년을 통해 황제께서 올해 관리들을 재정비하려 한다는 의중을 전했으니, 그는 그저 겸사겸사 일했을 뿐이다. 진평평은 겉으로 범한이 일을 저질렀다고 꾸짖긴 하지만 내심 움직일 구실이 생겨서 은근히 기뻐했다.
범한은 단지 감찰원에 이유를 제공한 것뿐이고 감찰원에서는 이 이유를 가지고 황제에게 알려 황제가 결단을 내리도록 했다. 황태자와 영 재인 쪽에는 따로 조치해 두었다. 앞서 호명할 때 동궁이나 태황자 측에서 부탁한 사람 중 재능이 있는 학생들은 뽑아서 이름을 살짝 숨겨 두었다. 이를테면 그들과도 등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범한은 회시 결과가 나왔을 때 모든 사람이 자신이 조정의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은 때 묻지 않은 문인이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그저 고리타분한 집념대로 ‘고결’하고 미친 결정을 내렸다고 말이다.
* * *
며칠 후 경도는 다시 잠잠해졌다. 범한이 일을 벌였으니 감찰원에서도 은근슬쩍 숨겨 둔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회시의 상위권 명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깜짝 놀랄 만한 소식 같은 건 떠돌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진사 세 명을 정할 때는 범한이 몰래 끼워 넣은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았고 태학과 예부에 있는 진평평의 밀정들이 아무도 모르게 범한을 돕고 있었다.
곽유지 같은 고위 관리들은 몇 년 전만 해도 회시에서 부정행위 하는 게 수월했던 데다가, 뒤에는 동궁처럼 든든한 보호자가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은 아무도 몰랐다.
* * *
2월 22일, 길 양옆으로 봄소식을 알리는 꽃이 피어나고 나뭇가지 위로 작은 새들이 짝을 이뤄 즐겁게 지저귀고 있었다. 태학과 멀지 않은 경도 서쪽의 한 객잔 아래층에서는 마음을 졸이며 회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회시 결과에 맞춰 있어 다른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는지 탁자에는 그 흔한 술과 안주도 없었다.
“에이, 이번에도 아닌가 보군.”
산동로에서 온 학생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번에도 틀린 게야.”
“가림 형님, 왜 그런 말을 하세요.”
그 옆에 앉아 있던 얼굴이 까무잡잡한 학생은 다름 아닌 회시 때 범한과 눈이 마주쳤던 양만리다.
천주 출신에 항상 바닷가로 벌이를 나섰던 그는 부유한 집안 덕에 반평생을 서당에서 보낸 재자 선비들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식초에 절인 땅콩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면서 아리송하게 말했다.
“그래도 가림 형님은 산동로에서 유명한 분이 아니오. 며칠 전 형님이 쓴 책론을 보고 모두가 칭찬 일색이지 않았습니까. 저야말로 그쪽으로는 영 소질도 없고 글솜씨도 부족하여 합격할 가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산동로에서 온 성가림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참가하는 회시였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아직도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합격시킬 사람은 정해져 있어. 조정에서 몇 명 부탁하고 황실에서 몇 명 뽑고 또 태학에서 몇 명 데려가고 나면 끝이라고. 우리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고향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해도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니지. 조정에서 그나마 뛰어나다는 몇 사람을 병풍으로 세워 관리들의 입을 막으려고 한들 우리한테까지 차례가 오진 않을 거야.”
탁자 앞에 깡마른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딱 봐도 부유해 보이지 않았고 술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는지 아주 냉소적인 말투로 대담하게 말을 시작했다.
“가림 형님 말이 다 맞습니다. 이번 회시를 보고 나니 다음번은 보지 않는 게 좋을 듯하네. 괜히 은전만 갖다 버리는 꼴이니 말이요. 개뿔, 회시는 무슨! 그저 조정 관리들이 자기 말을 잘 들은 개를 고르는 거지.”
성가림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살짝 놀란 마음에 몇 마디 충고해 주었다.
“계상 아우, 목소리 좀 낮추게. 감찰원에서 나온 밀정이 듣기라도 하면 자네와 내 앞길은 말할 것도 없고 딸린 식구들 목숨도 어찌 될지 모른다네.”
계상이라는 사람은 성은 후이며 권력의 길로 가길 좋아하지 않는 괴짜였다. 지금까지 줄곧 경도에서 하종위만큼 이름이 난 인물이었지만 거침없는 말투와 성격 때문에 여태 외롭게 지내 오고 있었다. 친구의 걱정스러운 충고에 계상은 크게 웃었다.
“감찰원이 두려운 존재이긴 하나 어찌 자네와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들한테까지 신경을 쓰겠나? 또 그들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시험장에 판치는 비리를 가만두고 보겠는가?”
양만리가 고개를 저었다.
“감찰원에 대한 평판이 좋진 않지만 관리를 단속하는 데 있어서는 확실하다네.”
후계상이 손을 내저었다.
“관리 중에 결백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혹시라도 감찰원에 기대를 걸고 있다면 호랑이한테 가죽을 달라는 것과 뭐가 다르겠나?”
그러자 양만리가 반박하고 나섰다.
“관리도 지식인 가운데서 선발된 사람들인데 어찌 다 나쁜 놈이라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갑자기 그는 경도에서 청렴함으로 유명한 인물을 선뜻 꼽을 수 없어서 잠시 말을 더듬었다. 한참 후 그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태학 봉정 범한 대인, 그분은 정말 좋은 관리라네.”
그러자 옆에 있던 두 사람은 양만리가 옷 속에 숨긴 것을 범한에게 틀긴 일이 떠올라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시험을 끝까지 볼 수 있게 해줬다고 좋은 관리라니, 좋은 관리 되기 참 쉽군그래.”
술기운이 오른 세 사람은 껄껄 웃더니 조정 안에서 벌어지는 폐단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감찰원이 제구실을 해준다면 시험장의 풍조가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함께 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객잔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세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험장에서 부정행위가 발생하여 예부 상서 곽유지가 면직되고 투옥되었다.”
맑은 봄날에 천둥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더니 객잔 안팎의 학생들 머리 위로 봄비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빗방울이 객잔 주변에 내리기 시작하더니 벼락까지 내리쳤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객잔 밖에서 멍한 표정으로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객잔이 있는 골목은 회시를 보기 위해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 몰리는 곳이라 항상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학생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모두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학생들은 방금 곽유지에 대한 소식을 전한 학생 주변으로 몰려들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러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제각기 떠들어 댔다. 후계상과 양만리 세 사람의 얼굴에도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억지로 흥분을 감추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묻는 사람은 여럿인데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다 보니 한참 후에야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어젯밤 감찰원 1처에서 백여 명이나 되는 밀정을 동원하여 모두 다섯 조로 나눠 경도 남쪽에 있는 곽유지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다른 저택으로 향한 4조에게 강남에서 온 학생 네 명이 잡히고 만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밤새 소문이 나지 않다가 오늘 조회 때 황제가 친히 감찰원에게 이번 회시에 발생한 부정행위에 대해 샅샅이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려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제야 대신들은 예부 상서 곽유지가 조회에 들지 않은 걸 알게 되었다.
이 혼란한 상황에서 재상 대인과 호부 상서만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조회에는 들지 않았지만 감찰원의 진평평 또한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감찰원의 행동이 매우 빨랐을 뿐 아니라 정확하기까지 했다. 특히 강남 출신의 학생들을 체포할 때 현장에서 몇몇 관리들과 주고받은 서신들도 찾아냈고 곽유지의 저택에서 상당한 액수의 은전을 몰수했다. 초동 수사에서 밝혀진 대로 체포된 네 명 중 세 명이 소금 장수 집안으로 이번에 경도에 들어올 때 상당량의 은전을 가지고 들어와서 여러 경로를 통해 곽 상서 집안으로 흘려 보냈다.
그리하여 곽유지는 감찰원 감옥에 투옥되었고 네 명의 학생들도 갈 곳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감찰원 4처에서는 어젯밤을 시작으로 강남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일제 단속을 벌이기 시작했다. 명분상 보면 이들이 예부 상서 곽유지를 매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은전은 동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이 사건의 배경에는 결국 황태자가 있었다.
물론 이런 세부적인 내용까지 학생들이 알 리 없었기에 모든 비난은 곽 상서를 향했고 불쌍한 곽유지의 노쇠한 모친까지 걸고넘어졌다.
이번 회시의 부정행위를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황제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예부 말고도 적어도 10여 명이나 되는 관리들이 직무가 정지된 채 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이번 조사가 이처럼 빨리 정확하게 이루어진 데에는 감시자 명단의 역할이 컸다. 그 명단에는 이번 회시에서 학생들과 내통한 관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감찰원에서 바로 착수한 터라 성과가 좋았다.
깜짝 놀란 후계상은 탁자로 돌아가며 술을 들이켰다. 이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은 눈치였다.
“세상에,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런 일도 다 있네.”
“뭘 생각지도 못했다는 거야?”
양만리와 성가림 두 사람도 아직 멍한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러자 후계상은 하하 웃더니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감찰원이 이렇게 정확하고 치밀하게 움직일 줄 몰랐다는 말이야. 조정 관리들의 살생부를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않나.”
그는 술병을 들어 앞에 앉은 두 사람의 잔을 가득 채운 후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자, 한잔하세. 감찰원을 위하여, 건배!”
“건배!”
두 사람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잔을 들어 건배를 외쳤다.
객잔에 있던 젊은 학생 모두가 흥분하여 열심히 술을 마셔 댔다. 회시의 부정행위는 이미 인이 박일 대로 박혀 있는 상태인 데다 예부 상서 하나만 잡는다고 해서 이 상황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았나. 황제가 이 문제를 인지하였으니 앞으로 잘 해결될 거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젊고 패기 넘치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지식인들은 모두 경국의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한참 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오른 양만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보처럼 웃었다.
“정말 통쾌하다. 설사 이번에 합격하지 못한다고 해도 천지개벽할 일이 벌어졌으니 그걸로 만족하네.”
성가림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 그나마 정신이 멀쩡했다. 그는 벼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살짝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번 회시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었으니 차라리 시험을 다시 보면 안 되나?”
“그건 불가능해.”
벌써 술 몇 주전자를 마신 후계상의 불콰한 얼굴이 차분해지더니 눈동자가 말똥말똥해졌다.
“이건 황제의 경고에 불과해.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12년 전, 경국이 막 세워졌을 때 사건이 있었어. 그해 열네 명의 예부 관리가 참수당했지만 회시 결과는 그대로 발표됐지. 물론 관리들과 결탁한 학생들이 제명당하는 바람에 그 뒤에 있던 사람들은 합격하게 되었고.”
“그럼 이번에도 그런 기회가 생길 수도 있잖아?”
양만리는 순진한 성격대로 어수룩하게 웃으며 물었다.
“삼갑(三甲,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제3급으로 합격한 사람들)은 인원이 정해져 있지만 혹시라도 제명된 사람이 있으면 우리한테도 기회가 생길지 모르지.”
후계상이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146화
“곽 상서도 한낱 대신에 불과한데 어찌 감히 이 나라의 대전을 함부로 주무를 수 있겠어. 그 위에 더 큰 세력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해. 그 사람이 지명한 학생이 더 많을지도 몰라. 겨우 소금 장수 아들 네 명을 솎아 낸 게 뭐 그리 큰 도움이 되겠어?”
두 사람은 후계상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생각에 낯빛이 또다시 어두워졌다. 그리고 한참 후 갑자기 양만리가 탁자를 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어찌 됐든 속은 시원하잖아. 작년에 경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은 장 공주를 신양으로 돌려보낸 일인데, 올해는 그 무시무시한 명단이군그래. 조정의 상서를 내치다니 정말 대단해.”
성가림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내일 삼갑 결과가 나오면 다시 얘기하세.”
후계상과 양만리는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역시나 이번 회시에도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미소만 지어 보이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얼른 가서 사천립을 깨워서 이 소식을 전해 줘야겠어!”
양만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천립한테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전해 주게.”
* * *
“훌륭해. 아주 훌륭해.”
범한은 기분이 좋은지 왕계년이 가져온 종이를 톡톡 튕겨 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완아는 어쩐지 걱정스러웠다.
“회시의 부정행위를 폭로한 사람이 당신이라는 걸 황태자가 아는데 걱정되지도 않아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버지께 심한 꾸중을 들은 범한은 외출 금지까지 당해 집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 범한 자신도 이번 일이 황당하긴 했다. 만약 사전에 감찰원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것이 아니고 황제가 올해 회시를 본보기로 삼을 것을 알았다면 범한 역시도 감히 ‘공범 증인’이 되어 온 조정 대신들과 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 명단이 기밀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범한의 손에도 몇 장이 있었고 회시 시험관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대체 누가 결백할 수 있었을까. 정정당당해야 할 시험장에 부정행위가 난무하니 이것만 봐도 경국의 관료 사회가 이미 얼마나 썩었는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감찰원 조사는 모두에게 뜻밖의 일일 수밖에 없는 반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가장 먼저 범한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내의 말에 범한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의 오라버니인 황태자의 배짱이 대단한 데 비해 수단이 좀 허술했죠. 조정 대신들 역시 간덩이가 부었다니까요. 이번에 있었던 부정행위가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큰일인지라 내가 불지 않았더라도 황제께서 조사하셨을 일이에요. 설마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려고요?”
완아는 이불에서 나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보, 앞으로 이렇게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세상에 바람을 이길 벽은 없어요. 혹시라도 사람들이 이번 일에 당신이 관련된 걸 알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쩐긴요, 어쩔 수 없죠.”
범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장난을 치며 웃었다.
“이번 일의 관건은 바로 황실이에요. 과거 시험이란 게 뭐예요? 황제가 자신을 위해 일할 인재를 뽑는 일종의 수단이잖아요. 전대의 한 황제는 과거 시험장에 들어와서 천하의 영웅들이 자기 손에 들어왔다며 크게 웃었다고 하잖아요. 황제께서는 조정 관리들이 과거의 정원과 재산을 맞바꾸는 것을 용인하시지만 정원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으시죠. 게다가 황태자와 황자가 모두 이 일에 연루되어 있으니 황제께서도 자문해 봐야 할 거예요. 두 아들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말이에요.”
완아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궁금하긴 했다.
“당연히 앞으로 조정의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범한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황제께서 물어보셔야죠. 그 권력을 잡아서 무얼 하려고 하는지요. 황자는 군대를 통솔하고 있는데 조정의 권력을 잡아서 뭘 어쩌려는지 말이죠.”
완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황태자는요? 뭐, 황태자이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어느 정도 말은 되죠. 그리고 점차 조정을 지배하려고 들겠죠. 예전에 동궁에서 태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데, 왕은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동궁에서는 앞으로 쓸 관리를 준비하여야 한다고 했어요. 그게 진정 적자의 도리라고 말이에요.”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살짝 비웃는 말투로 대답했다.
“태부의 말씀도, 도리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지금 황제께서 건재하신데 동궁에서 나서 인재를 발탁하고 등용한다면 황제께서는 당연히 의문을 가지실 수밖에 없죠.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겠어요?”
이번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완아는 범한의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께서 관리들의 부정행위는 그냥 넘겨도 자신의 아들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거예요.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생겨나는 문제들을 제어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참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뽑으시려는 거죠.”
임완아는 범한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사실 말로 하면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 나도 알려면 알 수 있는 일은 왜 황태자 오라버니는 모르시는 걸까요?”
“모르는 게 아니라 황태자 스스로도 이제 불안해졌다는 얘기겠죠.”
범한은 올해 초 황제께서 세 황자들에게 하사품을 내린 일이 생각났다. 분명 그 안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을 텐데 범한도 도통 깨닫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황태자든 황자든 하나같이 불안함을 느꼈기 때문에 이번 회시에서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니었을까.
임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당신이 왕의 칭호를 하사받아 영토를 받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후작 어르신으로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일은 하나같이 다 성가신 일이잖아요.”
“부유한 한량이라, 나도 바라는 바요.”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홍루몽》의 가보옥의 별명이 떠올랐다.
“눈에 거슬리는 일만 있어도 늘 미움을 사기 바쁘니, 내가 아버님의 이름으로 산다고 해도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요.”
그가 아버지까지 들먹이자 임완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아버님 쪽은 아무 문제가 없잖아요.”
“걱정 말아요. 아버님은 그날 밤 바로 재상 댁으로 가셨어요.”
범한은 맨 처음 시작했던 말을 되짚으며 감탄했다.
“그래서 아까 내가 감찰원이 이 일을 아주 잘 처리했다고 감탄한 거예요. 이번에 걸린 관리만 해도 곽 상서 외에도 동궁과 추밀원 사람들도 있잖아요. 장인 쪽에도 후시랑이 잘려 나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땐 근본적인 손해는 없었어요. 이 정도는 수십 년 동안 관료 사회에 틀어박혀 있던 노련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범한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아주 어렵죠. 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황제께서 처리하기 힘들어지거든요.”
말을 마치자 그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왜 그래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완아가 범한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범한은 고개를 저어 보였지만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 부정행위를 파헤친 일을 천하가 알게 되어서 도저히 숨길 수 없으니, 만발의 준비를 해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감찰원이 이렇게까지 날 보호하고 있을 줄 생각도 못 했어요. 당신 말이 맞긴 하지만 이 세상에는 시멘트로 만든 벽은 없으니 언젠가는 동궁에서 나와 감찰원의 관계를 알게 되겠죠. 게다가 이 나라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특히 그 절름발이가 걱정스럽긴 하네요.”
“진평평이요?”
임완아는 범한이 누구 얘기를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범한이 회시의 부정행위를 밝힌 것 외에도 무시무시한 기관인 감찰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의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방금 그가 말한 ‘시멘트’라는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걱정인 건 처음부터 진평평이 이 일을 숨기려 했으면 어쩌나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라면 가능하죠.”
모든 여인은 자신의 남편이 정의감 넘치는 영웅이길 바란다. 임완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번 일로 범한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내심 만족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때 진평평이 범한을 세상 사람들 앞에 내세우려 한다는 걸 듣고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는 그녀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일 당장 입궁해서 황태후마마를 만나 봐야겠어요.”
범한이 박장대소하며 그녀를 위로했다.
“진평평이 나를 핑계 삼는다고 해도 나쁜 의도는 아닐 거요.”
임완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범한은 이번이 좋은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연회 후로 경국 백성들에게 자신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든든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이번 부정행위를 폭로한 것이야말로 기막힌 신의 한 수였다.
비개 스승님이 일찍이 말한 대로 어머니와 친밀한 사이였던 진평평. 그가 범한이 황실 금고의 관리를 맡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기필코 감사원을 관리하게 한 이상, 흔히들 알고 있는 진평평이라면 춘시의 부정행위를 빌미로 본인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득과 실의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 이에 대해 범한도 여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에 내리는 비를 쳐다보고 있자니 이미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아내와 같이 뒹굴거리고 있다 보니 즐겁긴 했지만 살짝 묻어나는 피곤함은 숨길 수 없었다. 범한이 부정행위를 폭로한 이유는 정말 재능 있는 학생들이 불쌍하기도 했고, 또 황자들이 자신을 밧줄처럼 이리저리 당겨 대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지막으로 진평평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제 곧 북제로 떠나게 되니 그 전에 무시무시한 권력자인 감찰원의 늙은이가 대체 어떤 태도로 나올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진평평 뒤에 숨어 있는 황제의 반응도 알아보고 싶었다.
태도는 관계뿐 아니라 모든 것을 결정하며, 심지어 역사를 투영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머니의 숨결이 느껴지는 유리창 밖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경국의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걸 보니 자신도 진실에 다다른 것 같았다.
* * *
백작가 밖 축축한 거리에 아무런 표식 없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사람 그림자가 나뭇잎처럼 날리다가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순식간에 사람들이 마차에 올라탔다.
“가자.”
범한이 자리에 막 앉자마자 출발 신호를 보냈다. 마부 자리에 앉은 등자경이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련님, 지금 이 시기에 도련님이 외출하신 걸 백작 어른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제가 혼쭐이 납니다.”
“그러니까 어서 가자꾸나! 아버님께 걸리면 나라도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다들 날 잡으려고 한바탕 난리를 칠 거라고.”
이때야말로 경도 인심이 흉흉한 때로, 예부 상서 곽유지가 감옥에 갇힌 지 한 시진 만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리고 이번 회시와 관련된 관리들은 혹시라도 감찰원에서 쳐들어오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며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사남 백작과 신 군주는 이 사건의 중심인물인 범한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기에 이런 식으로 몰래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 같은 심복이 있었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문밖에 나가지도 못했겠군.”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왕계년이 그나마 웃는 얼굴에서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대인, 소인은 대인의 심복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범한이 하하 웃었다.
“왕계년, 그대가 만담에 재주가 있는지 몰랐소.”
채찍 소리에 검은색 마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바퀴가 물웅덩이를 지나면서 사방으로 튄 물에 나뭇잎에 묻은 흙들이 씻겨 내려가자 더 푸릇푸릇하게 보였다. 마차 뒤편에는 각양각색의 우비를 입은 감찰원 밀정 몇 명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모두 왕계년의 부하들로 범한의 안전을 전담하고 있었다.
“조정 관리들이 보복이라도 하면 어쩝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로는 부족합니다.”
왕계년은 범한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몹시 걱정스러웠다.
범한의 웃음 띤 얼굴에 살짝 한기가 돌았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외양간 거리가 아니야. 나는 그 미친 할망구 말고 경도에서 누가 날 죽이려 하는지 보고 싶은 것뿐이야.”
“어디로 가시는데요?”
범한이 왕계년을 보자 왕계년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공교롭게도 대인께서 지목한 그 학생들이 모두 같은 객잔에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147화
마차가 골목 입구에서 멈췄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범한은 마차에서 내려 등자경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왕계년은 이미 사람들 무리 속으로 흔적을 감췄다.
이 골목은 타지에서 회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오늘은 부정행위 소식 때문인지 특히나 더 시끌벅적했다. 범한은 혹시나 우산에서 빗물이 떨어져 노점에 피해를 줄까 싶어 우산을 살짝 기울인 채로 조심스럽게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술 주전자를 든 마른 몸의 한 사내가 다급하게 외치면서 범한과 등자경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황급히 지나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범한을 힐끔 쳐다봤다.
범한은 빗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전 세상에 살던 모양과 크게 다를 게 없군. 시험만 끝났다 하면 이렇게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퍼마시다니.”
그는 몸이 아파서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게 여전히 아쉬운지 혀를 찼다. 등자경은 범한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지만 공손하게 말했다.
“소인의 생각으로는 곽유지의 일로 다들 흥분을 한 듯하옵니다.”
“곽 상서의 평판이 이리도 좋지 않았단 말인가?”
범한은 앞서 걸으며 빗속을 스스럼없이 활보하고 다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등자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경도 관리 중 평판이 좋은 분은 몇 안 됩니다. 6처의 관리들을 쭉 세워 놓고 목을 친다면 그중 딱 한 사람만 억울할 거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니까요.”
범한은 이전 세계에서 이와 비슷한 말이 떠올라서 신나 하며 말했다.
“그럼 우리 아버님은 어떠실까? 억울한 관리일까?”
사남 백작 범건은 호부 시랑에서 상서가 된 인물로 국고에서 얼마나 많은 은전을 챙겼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탐관을 꼽는다면 범한의 아버지와 장인은 3등 안에 충분히 들고도 남을지 모른다. 하지만 등자경의 입장에서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범한의 질문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도련님, 소인 그냥 한 소리니 너무 개의치 마세요.”
“탐관이 두려울 게 뭐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걱정하지 않아. 그들의 무능함을 걱정할 뿐이지.”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범한의 우산 안으로 들어와 비를 피했다. 손에 들고 있는 종이에 싼 통닭구이 냄새가 내리는 비조차 덮지 못했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자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우산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가녀린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범한은 자기 옆에 불쑥 나타난 젊은이를 보니 이미 반쯤 젖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면 범한은 그를 한 손으로 충분히 저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젊은이는 통닭구이를 사서 술자리에 가는 중인, 한낱 가난한 학생일 뿐이었다. 범한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우산을 든 채로 걸어 나갔다. 무슨 우연인지 범한이 가려던 객잔이 바로 우산 안으로 끼어든 젊은이가 가려는 객잔과 동일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범한의 오른편에 서서 우산 깊숙이 머리를 들이밀고 태연하게 따라갔다.
이 상태로 열 걸음을 더 가다 보니 범한은 이 젊은이에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디 이렇게 남의 우산 밑을 파고 들어올 수 있었을까. 게다가 아무 말도 없이 수십 걸음을 걸어오는 동안 아무런 거리낌도 없으니 참 희한했다. 범한은 고개를 살짝 돌려 젊은이를 자세히 살펴봤다. 평범한 외모에 눈썹만 짙게 뻗어 나와 언뜻 보면 붓으로 두껍게 칠한 것처럼 보였다.
등자경은 두 걸음 뒤떨어져 걸어오고 있었다.
앞서가는 우산 속 두 사람은 여전히 침묵 속에서 길을 걷고 있었다. 서로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끝내 범한이 웃으면서 물었다.
“아까 내 말이 틀렸다고 했는데 나는 어디가 틀렸는지 모르겠는데.”
우산 주인이 말을 걸자 젊은이는 예의 바르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관리가 탐심이 있으면 당연히 정사에 마음을 둘 수 없으니 탐관이 능력이 있다는 말 자체가 웃기다고 생각됩니다.”
범한도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젊은이의 오른쪽 어깨가 비에 젖은 걸 보고 이 작은 우산으로 남자 두 명이 비를 피하기는 역부족이라는 걸 깨달아 우산을 젊은이 쪽으로 살짝 옮겨 주었다.
“탐관오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사에 소홀하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관리가 돼서 아무렇게나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소?”
젊은이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일을 해보려고 하는 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낫지요.”
범한이 우산을 꼭 쥐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둑을 제때 고치지 않으면 며칠 내에 무너지고 말죠. 그런데 기술도 지식도 없는 청렴한 관리가 강둑의 함부로 고친다면 해마다 몇 번씩은 고쳐야 하지 않겠소. 그렇다면 강가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무능하지만 부지런한 청렴한 관리를 원하겠소, 아니면 무능하고 게으른 탐관을 원하겠소?”
젊은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후에 하하 웃었다.
“이 또한 예외일지 모르겠지만 사또에 임명되면 토지를 측량하거나 백성을 구제하고 그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 같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만약 게으른 관리라면 그 지방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범한은 덩달아 웃었다.
“그렇기에 능력이 관건이지 청렴함이나 탐심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사실 그의 견해가 반드시 맞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전생에서 봤던 정계나 관계에 관련된 소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점은 지금 경국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신선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기에 같이 우산을 쓴 젊은이는 귀가 솔깃해졌다.
“그럼 아주 유능하지만 부패한 관리의 경우에는 조정에서 그냥 두나요?”
어찌 된 일인지 범한은 그의 말에 갑자기 장인이 떠올랐다. 경국의 유명한 간신 임약보의 탐심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심각했지만 그의 재능을 높이 산 황제는 지금까지 그를 옆에 두고 있었다. 이 젊은이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관리의 됨됨이는 본래 어렵고 복잡한 법인데 어찌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조정이 관리를 감독하고 덕을 쌓기만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관료 사회에서 청렴함만 고집하는 이상 뜬구름 잡는 생각이라고 생각하오.”
“조정에서 감독을 강화한다고 해도 탐관들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는 말인가요?”
젊은이가 눈을 찡그리니 굵은 눈썹이 확 돋보였다.
“오늘 예부 상서 곽유지가 투옥됐다죠. 감찰원이 몇 년 전에도 이렇게 처신했다면 시험장 분위기가 지금처럼 타락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범한은 사실 정치적으로 별다른 의견은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담론이 설령 나라를 망치는 망령이라 할지라도 서로 힘을 합치면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감찰원 원장이 곽유지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의 아들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내주었다면, 이 일은 누가 감독해야 한단 말이오?”
그가 못마땅한지 한마디 내뱉었다.
“당연히 황제께서 엄벌을 내리셔야죠!”
더 못마땅한 범한이 받아쳤다.
“혼자서 나라를 다스리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요?”
사실 범한은 황제에게 비밀리에 감찰원을 견제하는 방법이 있으며 그 안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아버지의 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생에 단순했던 정치 이념으로 황제의 이런 행동을 줄곧 비웃어 왔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자라느니 그런 말은 더없이 우스웠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두 사람은 객잔 앞에 멈췄다. 젊은이가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공자님, 우산을 씌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왔습니다.”
범한은 우산을 뒤로 젖히고 객잔의 이름을 확인하니 공교롭게도 자신이 가려고 했던 곳과 동일했다.
“같이 들어갑시다. 나도 여기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
동복 객잔. 아주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이름이었다. 젊은이와 객잔에 들어가면서 상대방의 이름이 사천립이고 그도 이번 회시에 응시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범한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가 애매해 자신의 성만 알려 주었다.
“범 공자께서는 누구를 찾아오셨나요?”
사천립은 범한의 옷차림새를 보고 그제야 자기와 함께 빗속을 걸었던 이 공자가 부잣집 자제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아까와 달리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친구들이 기다려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인연이 되면 또 보시죠.”
그는 말을 마치고 범한에게 예를 갖추고 객잔 구석으로 향했다. 구석 탁자에는 역시 학생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으로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탁자 위에 술과 함께 먹을 안주가 없는 걸로 봐서는 사천립이 가져올 통닭구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범한은 술에 잔뜩 취해 탁자에 엎으려 있는 사람이 자신이 만나러 온 양만리라는 것을 알고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사천립을 따라서 구석으로 걸어갔다.
사천립은 범한이 여전히 자기 뒤를 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종이에 싼 통닭구이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열심히 술을 마시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게 뭐 하는 건가, 나한테 먹을 걸 사 오라고 하고는 자기들끼리 술을 다 먹어 버리다니. 어허, 이 사람들.”
그러자 후계상이 웃어 보였다.
“이것도 내가 저 앞 골목에서 사 온 싼 술인데 맛은 없어도 양은 아주 충분합니다. 자, 여기 앉게나. 이 사람은 산동로에서 온 성가림이라고 하네.”
그는 성가림을 향해 손을 내밀다가 사천립 뒤에 서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범한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끔한 부잣집 자제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어서 오세요, 사형. 근데 이분은 누구요?”
후계상이 물었다. 사천립은 순간 멍해 있다가 범한이 자신을 따라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범 공자시네. 비를 피하도록 우산을 반쪽을 내어 주셨다네.”
범한은 상대방이 자신을 다소 어려워하는 것을 눈치채고 혹시라도 자신의 신분을 알아차릴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저 사 공자께서 가져온 통닭이 먹고 싶어서 따라왔네.”
사천립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범 공자께서 누굴 만나러 오신 거 아니신가요?”
“그렇죠. 근데 별로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여기 계시니 말이오.”
지난번 유정강 근처에서 황제를 만났을 때 아무렇게나 던졌다가 아무런 반응도 얻어 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나 다를까, 이 사람들은 바로 알아듣는 것도 모자라 무척이나 재미있어했다.
“범 공자께서 우리를 보러 오신 건가요?”
범한은 술에 취한 양만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양 공자와 인연이 있어 오늘 예까지 찾아온 겁니다.”
후계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양만리에게 경도에 이런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자자자, 여기 앉으시죠. 앉아서 한잔하시면서 통닭도 좀 드시고요.”
사천립은 범한의 말투가 꽤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마침 친구의 친구라고 하니 더 이상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자리까지 양보해 주었다.
저쪽에 있던 성가림은 한참을 깨워도 양만리가 일어나지 않자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범한의 관심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기에 후계상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분은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후계상이라고 합니다.”
“후 공자는 왜 저를 부잣집 자제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범한은 ‘계상’이라는 이름을 듣고 웃음을 꾹 참았다.
“나는 내가 뒤룩뒤룩 살이 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딱 보면 하루 종일 먹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나 보군요.”
후계상이 웃으면서 사과를 건넸다.
“공자께서 지금 입고 계신 옷만 봐도 은전 몇 냥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아서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옷이지요. 부유하다는 말은 저희끼리 농담으로 하는 소리니 공자께서는 크게 개의치 마십시오.”
그는 어딘지 모르게 공자가 낯이 익었지만 술 때문인지 눈이 침침해서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별말씀을요.”
범한은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탁자 옆에 앉았다. 다들 소탈한 성격이어서 불청객인 범한을 편하게 대해 주었다. 양만리가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자 성가림은 범한에게 술 몇 잔을 권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은 옆에 아무도 없다는 듯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취한 것도 아닌데 의욕이 어디서 생긴 건지 탁상공론을 시작했다.
그들이 나누는 얘기는 오묘해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경제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범한은 닭 다리 하나를 쥐고 느긋하게 뜯으면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귀 기울였다. 후계상의 생각은 약간 법가 사상에 편향되어 있어 율법을 중시하는 반면, 사천립은 감성적인 인물이라 교화적인 부분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범한은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들었다. 이 후계상이라는 이름도 그가 호명한 사람 중 하나였기에 자신의 안목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천립을 보고 있으니 이처럼 온화하고 소탈한 사람을 왜 시험장에서 알아보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범한이 분위기에 흠뻑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사천립이 탁자를 탁 치더니 분개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범한 대인이라는 분이 잘못했어.”
범한은 깜짝 놀랐다.
148화
이 술자리의 대화 주제는 이미 관료 사회에서 과거 시험 장소로 옮겨 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난해 별명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범한 대인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일부러 술잔을 들어 입을 가볍게 대며 혹시라도 이 사람이 자신에 대해 나쁜 얘기라도 하면 바로 손에 든 술을 뿌려서 우울한 기운을 좀 달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천립이 벌떡 일어나더니 예쁘장한 얼굴로 느글거리는 말을 하며 구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내가 몇 개월 동안 《반한재 시집》을 몇 개월째 읽다 보니 앞으로 다른 사람의 시집을 어찌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조차도 어찌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네. 비록 그중에 다소 이상한 시도 몇 편 있었지만 범한 대인 앞에서 소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슬프구나. 아주 슬퍼.”
범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후계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는 우리가 말하는 글쓰기와 다른 영역이지 그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
말을 마치고는 한참 동안 냉대하던 범한에게 도움을 청했다.
“범 공자의 생각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바로 당신이었군요!”
‘설마 날 알아본 건 아니겠지?’
범한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시험장 불빛이 그리 밝지 않았기 때문에 양만리처럼 별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시험관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후계상이 바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술을 사러 갔다가 범 공자와 살짝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순간 범한도 양손에 술병을 들고 지나가던 유생이 떠올랐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후계상은 이 사소한 일로 범한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범한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고 범한에게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을 멈췄다. 옆에 있던 사천립조차 종잡을 수가 없었다.
“범 공자와 그 범건 대인이 같은 집안 출신이시니, 반한재에 대한 견해가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그저 선인들이 한 말을 모아 놓은 것뿐인걸요.”
범한이 아무리 뻔뻔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칭찬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사천립이 이 말에 벌컥 화를 내더니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정말 뜻밖이었다.
“범 공자도 그 사람들과 같은 거요? 소인은 본래 장묵한의 인품을 높이 샀는데 그런 어리석은 영감탱이일 줄이야 생각도 못 했소. 범 공자가 시를 적게 읽었다면 이런 터무니없고 우스운 말은 할 필요가 없겠군요.”
범한은 얼떨떨했다. 그제야 자신이 경국 내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 사이에게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나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수줍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사천립이 술기운에 힘입어 한마디 던졌다.
“아니, 성이 같은데 왜 이렇게 차이가 큰 거야?”
* * *
바로 그때, 드디어 양만리가 성가림의 도움으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예쁘장한 범한의 얼굴이 들어오자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범한에게 예를 갖췄다.
“범한 대…… 대인, 어떻게 여기에? 언제 오셨습니까?”
“범한 대인? 누가 범한 대인이야?”
술자리에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양만리가 이토록 긴장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양만리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분이 전에 내가 얘기했던 그분이야. 시험장 입구에서 유생들을 검사하던 범한 대인…… 사형, 반한재를 엄청 좋아하시잖아요?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뭐 하고 있어요!”
사천립은 그제야 방금 자신이 비판했던 그 시집의 지은이가 바로 범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범한에게 절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후계상과 성가림 두 사람도 입이 떡 벌어져 범한이 무슨 말을 할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범한은 이미 유생들 사이에서 극찬받는 인물이었다. 재상의 딸과 결혼한 후에 17세의 나이로 태학 5품 봉정에 올랐기에 여러모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시집인 반한재도 이미 널리 유행하여 구름 위를 떠도는 붉은 빛의 이미지는 이미 범한의 이름 두 자와 하나가 되었다.
범한은 멋쩍은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을 보고 왜 그렇게 놀라요?”
후계상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범한에게 인사를 올렸다.
“공자가 범한 대인이셨군요. 앞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사천립도 두 눈이 번쩍 뜨여 몸을 90도로 꺾어 인사를 올렸다.
“기대도 안 했는데 오늘 양 형 덕분에 이렇게 범한 대인을 뵙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회시도 끝난 데다가 나 역시 하루 종일 관아에 죽치고 있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나와 봤는데, 여기 양만리가 있다기에 한번 보러 온 거요. 이리도 운이 좋을지 몰랐는데, 술자리에서 벌어진 고론을 듣고 있으니 내 헛걸음을 한 게 아니라 풍성한 수확을 거둬 가네요.”
자리에 있던 네 사람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재자 앞에서 자신들이 끊임없이 탁상공론을 늘어놓은 걸 돌이켜 보니 참으로 황당하기도 했다. 항상 자신감에 차 있던 후계상도 쓴웃음을 지었다.
“다 만리 때문이 아닌가, 저렇게 계속 취해 있었으니 말일세.”
그때 말이 조금 어눌한 성가림이 마침내 더듬더듬 자기소개를 했다.
“범한 대인, 소생 성은 성, 이름은 가림이라고 합니다.”
당대 최고의 유명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산동로의 재자 성가림은 긴장이 됐는지 말을 더듬었다.
사람들은 얼떨떨해하다가 바로 그의 말에 틀린 부분을 알아차리고 박장대소했다. 얼굴이 빨개진 성가림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나마 웃음 덕분에 사람들의 놀란 마음이 진정을 되찾았다.
양만리는 범한이 자신을 보러 왔다는 말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과분한 관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혹시라도 무슨 분부를 내리실 게 있으신지요?”
다행히도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분별력도 있고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내려놓을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면도 있었기에 허투루 떠들어 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객잔에 있는 유생들은 여전히 술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범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실제로 범한이 그 객잔 안에 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 범한은 양만리를 보러 온 것뿐이라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당연히 깊은 얘기는 나누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와 양 형도 ‘옷깃’으로 생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천립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우산으로 맺어진 인연이고요.”
그리고 또다시 후계상을 향해 말했다.
“후 형과도 몸이 스친 인연이네요. 그래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범한이 운을 띄우자 이번 회시의 거중랑이었던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기에 그가 언급하지 않은 성가림도 잔뜩 긴장해서 범한을 바라봤다. 후계상도 침착하게 범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임이 틀림없었다.
범한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적절한 단어를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3월 초하루에 전시가 있을 터이니 여기 몇 분들은 준비해 두시죠.”
생각지도 못한 범한의 말에 모두 놀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말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숨은 속뜻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조정의 유명인 범한 대인은 재상과 사남 백작이 총애하는 인물이다. 만약에 삼갑 명단에 오른 사람을 미리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범한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전시를 준비하라고 했으니 그 말인즉슨 모두 합격이라는 말이었다.
범한은 자기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댄 채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확정은 아닐 수도 있다네. 그냥 준비는 해두시게.”
후계상은 약간 실망한 듯 말했다.
“곽 상서가 투옥되었으니 명단에도 변동이 생길 수 있는 것 아니오?”
범한이 조용히 대답했다.
“성 형과 사 형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후와 양만리 자네는 확실하네.”
후계상과 양만리는 크게 기뻐하며 벌떡 일어나 범한에게 예를 표했다. 앞으로 이 젊은 스승이 자신들을 이끌어 줄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평탄한 앞날을 꿈꾸지 않는다면 몰라도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성가림과 사천립은 실망스럽긴 했지만 범한 대인이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내일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객잔 안은 이미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장소가 아니었기에 양만리는 범한을 자신의 방으로 모시고 공손하게 차를 대접했다.
“범한 대인, 아무리 생각해도 소인은 가진 것도 없고 집안도 변변치 않은데, 어떻게 대인의 눈에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왜 대인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오셔서 전시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셨는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가진 것 없고 집안도 변변치 않다는 말은 가난한 유생들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말이었다. 범한이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요즘 과거 시험장에서 생긴 일 때문에 아직 삼갑의 명단이 나오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정해지긴 했소.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자네가 자포자기해서 책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쓰지 않아 전시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서요. 그렇게 되면 내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거든. 그날 시험장 밖에서 내가 자네를 시험장에 들여보내는 걸 본 사람이 많거든.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자네를 찾아온 건 위험한 일이 맞지만 그래도 상관없네.”
며칠간 시험 감독관 모두가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범한이 오히려 상관없다고 하니 유생들은 하나같이 의아해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함께 있던 이 똑똑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범한의 뜻을 헤아리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후 후계상은 먼저 물러갔다.
“감사드립니다.”
양만리가 다시 인사를 하고 사천립과 성가림 두 사람도 계속 앉아 있지 않고 범한에게 인사를 올렸다.
범한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자시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난 재상도 아니고 곽 상서도 아니오. 돈도 있죠. 앞으로도 더 많아질 테고. 그러니 안심하시오. 나에게는 여러분의 재능과 인성만 중요하니 말이요. 전시 이후에 조정에 들어가게 되면 충심으로 정사를 행하고 경국의 이익만 생각해 주면 되오. 나는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었다.
범한은 객잔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등자경을 바라봤다.
“난 왜 아직도 이런 일이 자연스럽게 안 되는 걸까?”
둘 사이에서 감초 역할을 하는 왕계년이 나타나 마차에 올랐다.
“대인은 뼛속까지 지식인이지 대인은 아니니까요.”
범한이 동복 객잔을 떠난 후 방 안에 있던 네 사람은 서로 빤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떡이 떨어질 줄이야.
“어떻게 하면 좋겠나?”
양만리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성가림과 사천립이 그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 양 형은 재상과 호부 상서를 등에 업은 거나 마찬가지니 벼슬길이 아주 순조롭겠어요.”
양만리의 천진난만한 얼굴에 순간 수심이 드리워졌다.
“나는 지금까지 범한 대인의 재학을 몹시 좋아했는데 이번 회시도 대인께서 융통성을 발휘해 준 덕분이네. 나중에 시험지를 채점할 때도 적지 않은 힘을 쓰셨겠지. 다만 나는 범한 대인이 오늘 오시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네.”
성가림과 사천립 두 사람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양만리가 범한에게 부담스러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네 사람 중 대장 격인 후계상이 미소를 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한 대인이 설사 은혜로 인심을 살 생각이었다면 친히 여길 오지도 않았겠지. 양만리, 자네는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 난 이미 결정했네. 오늘 이후로 조정에 들어가면 반드시 범한 대인과 함께 열심히 일할 걸세.”
사천립은 지금까지 고상한 척 허풍을 떨던 후계상이 갑자기 왜 저렇게 변한 건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양만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49화
“나도 알고 있네. 매번 시험 때마다 감독관과 유생이 서로 결탁하는 건 일종의 관례니 말일세. 단지 후 형도 알고 있듯이 난 범한 대인의 재능을 존경해 왔네. 시험장에서도 내가 몰래 답안을 숨겨 간 일로 대인의 인품까지 존경하게 되었지. 그래서 범한 대인이 다른 조정 관리들과 좀 달랐으면 하는 것뿐이네.”
“그럴 거야. 하지만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다네.”
성가림이 책망하듯 말했다.
“범한 대인은 시에 일가견이 있긴 하지만 그 또한 조정 관리 신분에 높은 집 자제이지 않은가. 그런 분이 직접 이곳에 오시긴 쉽지 않았을 거야. 자네는 범한 대인이 신선 생활을 하는 선인이 되길 바라는 건가? 설사 선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힘든 세상에서는 유능한 관리가 되는 게 훨씬 나은 일 아닌가?”
사천립이 맞장구를 쳤다.
“평소에 말도 없는 자네가 오늘은 맞는 말만 하는구려.”
그는 양만리에게 고개를 돌려 몇 마디 덧붙였다.
“숭배하는 마음으로만 본다면 자네는 날 못 따라올 거야. 난 한 번도 반한재를 손에서 떼본 적이 없어 그 안에 있는 시 백 수를 모두 다 외울 정도라고. 그런데 오늘 범한 대인을 봐도 난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네. 왜냐고? 시라는 건 마음의 소리거든. 이분은 확실히 우리와 비슷한 소탈한 사람이야. 조정에 있는 썩어 빠진 관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그는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아까 내가 통닭구이를 들고 올 때 골목에 우산을 쓴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 근데 내가 원래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나. 그래서 예쁘장하니 젊은 사람이 우산을 쓰고 가기에 얼른 뛰어 들어갔지. 그렇게 몇 마디 나눠 봤는데 생각이 기발하고 대단하더군.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함부로 우산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데 어느 권세 있는 양반이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근데 그분은 그저 웃기만 하고 어색한 기색도 없이 나와 같이 걸어왔다네. 나중에 그분이 범한 대인인지 알고 나서 솔직히 깜짝 놀란 건 사실이네. 범한 대인은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으셨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 전 범한이 사천립과 우산으로 맺어진 인연이라고 한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게 되었다.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양만리는 난감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환상이 깨지는 느낌이랄까? 범한 대인은 한가하게 시만 쓰고 조정의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고 외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후계상이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사람은 안락해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나라와 백성에게 무익할 뿐이지. 범한 대인이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오히려 내가 그분을 무시했을 거야.”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양만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계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자네들이 하는 농담은 하나도 안 무섭네. 지식인이 무엇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나.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되고 국정의 심오함을 이해하는 게 어렵겠지. 그래, 우리 같은 이방인이 그걸 어찌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러니 범한 대인이 오늘 여기까지 오신 건 사실 따지고 보면 그분이 우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분이 필요한 거지.”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좀 강직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들어갈 때와 빠질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융통성 없는 사람은 아니라네.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니 당연히 잡아야지. 그리고 우리가 조정에서 누군가의 줄에 서야 한다면 범한 대인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고말고. 조정에 가게 되면 우리와 의견 충돌이 거의 없을 테니 말이야.”
그들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나머지 사람들은 후계상의 확고한 태도가 왠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다시 강조하고 나서자 더 의심스러웠다.
후계상은 탁자에서 찻잔을 들고 옆에 범한이 마시다 남기고 간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비 오는 날 골목길을 걷던 조정의 유명 인사가 자신의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자칫 노점상 냄비에 떨어질까 봐 우산을 바깥쪽으로 기울이고 가느라 자신의 옷을 흠뻑 적셨네. 이리도 세심하고 인정 넘치는 사람은 간신도 악신도 아니라 그야말로 성인군자일 수밖에 없지 않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청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런 것까지 치밀하게 숨길 수 없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범한 대인이 아주 된 사람이라고 확신하네. 내 결정은 그래서 이리도 간단한 걸세. 난 빗속에서 이미 결정을 했다네.”
방 안은 침묵으로 휩싸였다. 그 후로 한참 있다가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 * *
둘째 날, 시험장 왼쪽 붉은 담벼락에 드디어 유생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고지가 붙었다. 경국 회시의 과정은 그리 복잡한 편은 아니었다. 향시를 본 후 회시를 보고, 회시를 본 후 삼갑에 선발되면 등수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획수 순서대로 황방에 이름이 올랐다.
삼갑에 선발된 인원은 해마다 달랐다. 경국 3년에 은과(恩科,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과거)가 열린 적이 있어서 그 후로 2년간 선발된 인원은 아주 적은 수에 불과했다. 올해 황방에 오른 인원수는 총 108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태학 출신 유생이든 각 지방에서 올라온 유생이든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장 서쪽으로 다리가 하나 있었다. 누구든 황방을 보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려 몰려든 사람들로 둘러싸여 도저히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다리 저편으로는 범한의 언지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후계상과 양만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다리 위에는 어제 내린 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벽돌 사이사이에 낀 이끼도 유난히 촉촉해 보였다. 네 사람이 함께 걸어오다 갑자기 성가림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성가림도 피식 웃어넘겼다. 그와 사천립도 양만리와 후계상처럼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긴장감은 숨길 수 없었다.
붉은 담벼락 앞에 도착한 네 사람은 겨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각자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얼마다 보고 있었을까, 사천립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후 형, 후 형! 합격이요, 합격이야!”
나머지 세 사람이 사천립의 소리를 듣고 서둘러 그의 곁으로 갔다. 역시나 위에서 세 번째 줄에 후계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양만리가 후계상의 어깨를 두드렸다.
후계상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심 으스대고 싶었지만 이 일이 얼마나 큰일인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힘들게 견뎌 왔는지 은근히 기대하던 부모님과 주변 유생들의 시선이 바람에 흩날리듯 스쳐 지나갔다.
황방에 올라온 ‘후계상’ 이름 세 글자가 햇빛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귀하고 밝은 미래가 앞으로 펼쳐질 일만 남았다.
* * *
네 사람은 흩어지지 않고 이번에는 오른쪽부터 훑어 나가기 시작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양만리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제야 비로소 어제 범한이 한 얘기가 믿어졌다. 양만리는 자신의 이름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말까지 더듬었다.
“진짜 붙었네. 정말 합격이야!”
그는 갑자기 괴성을 지르더니 인파를 비집고 나가더니 다리 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에 대고 큰 소리를 질러 댔다.
남은 세 사람은 양만리가 왜 흥분했는지 알고 있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양만리는 여덟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시절 천주에서 혼자 자랐다. 비록 주변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배고픔과 추위를 참아 내며 책을 사주신 덕분에 힘겹게 향시에 합격해서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경도에 온 그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토론할 때 자신의 논리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서, 게다가 집에서 배운 게 다인 학문으로 책론을 써내면 항상 딱딱하고 흥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준에 그쳤기에 경도 출신의 유생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막역한 사이인 후계상과 사천립조차도 그가 합격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고 양만리 자신도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은전 한 냥으로 유생들 사이에서 가장 유행하는 모의 답안지를 사서 사천립의 글에 끼워 들어오는 도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험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거중랑 범한에게 들킬 줄 누가 알았을까. 당시 양만리는 10년 동안 한 고생이 수포로 되는 줄 알고 상심하여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범한 대인이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면서도 그는 감히 옷 안에 손을 넣지 못했다. 당연히 책론에도 그럴듯한 말을 풀어내지 못했기에 합격은커녕 모든 걸 잊고자 계속해서 술을 마셨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알게 된 곽 상서가 불미스러운 일로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까지도 범한 대인이 친히 객잔에 찾아와서 삼갑에 들 거라는 얘기를 해줄 줄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슬픔 뒤에 오는 기쁨과, 절망 뒤에 따르는 희망의 두 감정의 충격은 오후 내내 가시지 않았다. 양만리는 다리를 건넌 후 붉은 담벼락 앞에 서서 어제 범한 대인의 방문이 꿈은 아닌지 계속해서 되새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합격은 불가능했는데 그런데 정말 합격이라니.
양만리는 출렁이는 강물에 비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며칠 만에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이 다 젊은 범한 대인 덕분이었다.
양만리의 돌발 행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강 건너편을 지나던 백성들조차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매해 회시가 끝나고 황방이 붙을 때마다 볼 수 있는 광경이기에 무엇 하나 새로울 게 없었다. 시험장 붉은 담벼락 근처에는 항상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곤 했다.
이때 다리 너머로 황방을 바라보던 유생들의 얼굴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몇몇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로 여기저리 뛰어다니고 몇몇은 실의에 빠져 축 처져 있었다. 합격한 이들은 하늘을 향해 환호했고 떨어진 이들은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이 광경을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낙방한 이들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담벼락 옆에 있는 커다란 홰나무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 대느라 피가 날 정도였다. 옆사람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손을 떼지 않았다.
경국은 과거 시험을 통해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귀족가 자제가 아닌 이상 은과를 볼 수 없었기에 일반 백성들에게 회시는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압박과 동기는 평소 유순하고 침착한 유생들을 광기 어린 미치광이로 만들기 충분했다. 강가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하늘에다 감사의 절을 올리는 유생에 비하면 양만리는 두어 번 소리를 지른 게 다이니 평범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물론 후계상과 다른 사람들의 침착함이 더욱 돋보이긴 했다.
양만리가 이성을 되찾고 여전히 기쁨이 가시지 않은 채 붉은 담벼락으로 돌아왔을 때, 나머지 세 사람은 이미 황방을 자세히 살펴본 뒤였다. 예상과 달리 사천립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 살짝 실망한 상태였다. 한편 맨 마지막 줄에 있는 성가림의 이름을 발견하고 모두가 기뻐했다.
성가림은 옆에서 실의에 차 있는 사천립을 위해 애써 흥분된 감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어떻게 해도 위로가 안 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올해는 그냥 잊어버리고 내년을 기약해 보세.”
상투적인 위로의 말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 말보다 더 적합한 말을 찾기는 힘들었다. 사천립을 씁쓸해하며 주변에 낙방한 유생들을 쓱 둘러보고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올해 우리 네 명 중 세 명이 합격했으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오. 그래도 작년 회시에 비하면 올해는 나름 공평했다고 할 수 있으니 나도 내년에 다시 보면 되지 않겠소.”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후계상이 사천립의 어깨를 도닥여 줬다. 그는 네 사람 중 사천립이 가장 털털한 편이긴 하지만 이번 일은 충격이 작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범한 대인이 어찌하실지 모르겠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붙을 줄이야. 황방도 작년이랑은 많이 다르고 진짜 재능과 학문적 지식을 가진 유생들은 늘어났고 어리석고 집안만 좋은 사람들은 확실히 줄어들었어.”
“이번에 감찰원에서 시험장 부정행위를 철저하게 감독한 덕분이지.”
그들 중 몇 명은 한적한 곳을 찾아 이미 강 건너편으로 넘어간 뒤였다. 그들은 혹시라도 누가 들어 범한에게 해가 될까 봐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역시 후계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걸린 관리들은 적은 수는 아니지만 강남 출신 관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노출되지 않았네. 이걸 보면 감찰원이 움직이기 전에 범한 대인이 먼저 손을 쓴 거라고 볼 수 있지.”
그는 고개를 흔들더니 깊은 탄식을 흘렸다. 역시 젊은 범한 대인이 등에 업고 있는 가문의 권력 정도 되니 조정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 황방을 보니 그래도 공평하게 정리된 듯하여 자신이 범한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경국의 정세에 대한 잡담을 늘어놓았다. 며칠간 관직을 잃은 관리들이 적지 않아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는데 유일하게 범한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사천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번 부정행위와 관련된 얘기가 드러나면 범한 대인도 쉽게 벗어날 순 없을 거야.”
나머지 세 사람이 깜짝 놀란 나머지 중얼거렸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범한 대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 거지.”
150화
과거 시험장의 부정행위 관련 사항도 범한과 결코 무관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찰원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부 상서 곽유지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동궁에 크게 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주 잠시 황태자 쪽에서 범한을 의심하는 정도였다. 게다가 합격자 명단 중 동궁에서 필요로 하던 사람들 세 명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자와 추밀원을 비교해 봤을 때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범한은 서재에 앉아서 왕계년이 베껴 온 황방을 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최근 이틀간 경도는 매우 떠들썩했다. 회시 총감독관인 곽유지와 시험관 두 명이 감찰원에 끌려갔는데 회시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인 호명을 맡은 거중랑 범한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눈여겨봤던 유생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사천립을 제외한 나머지 유생들이 무난하게 합격했다. 전시 후의 결과가 어떻든 그건 순수하게 개인의 운에 달려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도울 길이 없었다.
서재에서 나와 정면에 파란색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범한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얼른 몸을 숨기려 다시 방에 들었다. 아버지가 오늘 자기 집까지 찾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사남 백작 범건은 이미 호부 상서로 임명되었지만 근엄한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범한이 차마 닫지 못한 방문을 열어젖히며 여전히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넌 어제 또 어딜 갔다 온 거냐!”
범한은 먼저 인사를 올린 뒤 대답했다.
“아버님, 어젯밤 경도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잠시 산책을 하고 온 것뿐입니다.”
“쯧, 네가 어제 동복 객잔에 간 걸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범건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넌방에 있던 임완아도 범건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 나와 여종에게 얼른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범건은 며느리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며 방에 들어가 쉬라고 손짓을 보내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범한에게 아주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험장 일과 관련된 사안이 얼마나 복잡한데 그렇게 함부로 돌아다니는 게냐! 지금까지 네 마음대로 했으니 됐다. 내가 너에게 집에만 있으라고 한 건 이 풍파에 몸을 숨기고 있으라는 거였다. 그런데 어젯밤 동복 객잔에 가 유생들을 만나다니. 오늘 합격자가 나왔으니 이제 다 알겠구나. 네가 어제 만난 유생 중 몇 명이 합격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소자, 나이는 어리나 나름 스승의 신분으로 별 뜻 없이 유생들을 보러 간 것뿐입니다. 황방은…… 그 정도면 어찌 된 일인지 다들 알 텐데 크게 개의치 마시옵소서.”
“안 그래도 요즘 감찰원에서 비리를 파헤치고 있는데 그 계기가 다 네가 건네준 쪽지 때문이라던데.”
범건이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정말 나라를 위해서 계획한 일이라면 네가 마음에 둔 사람을 삼갑 명단에 넣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단지 이번 회시를 통해 네 세력을 키우고 싶었던 거라면 더더군다나 곽유지를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말아야 했단 말이다.”
사남 백작은 앞에 있는 아들을 보고 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곳이든 저마다 규칙이란 게 있기 마련이란다. 경도의 관료 사회도 예외는 아니란다. 조정에는 청렴한 관리도 있고 탐욕스러운 관리도 있지. 그리고 참언을 하는 신하와 간언을 하는 신하도 있고 말이다. 둘은 서로 구분이 아주 명확하지. 네가 간언을 하는 신하가 되고 싶다면 절대 중상모략을 피해야 할 것이다.”
범한은 아버지의 화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것을 알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저는 간언을 하는 신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참언을 하는 신하도 물론이고요. 그저 저는 힘이 있는 신하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범한의 말에 방안의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다. 한참 후 범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권력을 쥔 신하? 대체 어떤 신하가 권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재상도 권력을 갖고 있지. 네 아비인 나도 그렇고 진평평도 권력을 가지고 있지. 그럼 너는 그런 신하들을 보고 권력을 가진 신하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요. 권력은 황제만이 갖고 계시지요.”
“그럼 어떤 권력을 가진 신하가 되겠다는 것이냐?”
“말 그대로 손에 권력을 쥐고 있어 아무 걱정 없는 신하요.”
범한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범건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런 험난한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내면 깊은 곳에 드리워진 짙은 검은 그림자 때문이었다.
* * *
한참 뒤 범건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앞으로 이런 소란은 피우지 말거라. 진평평이 한 번은 널 보호해 줄 수 있지만 평생 보호해 줄 순 없어. 그러니 경고하는데 감찰원과는 가까이하지 말거라.”
범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으니 계속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범한은 아버지가 자신이 감찰원 일을 하게 될까 걱정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범건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네가 경솔했다. 곽보곤이 대전에서 한 발언으로 곽씨 집안이 장 공주 사람이란 걸 알게 됐더라도 네가 직접 움직여서는 안 된다. 사전에 나에게 말해 줬더라면 나와 재상이 함께 힘을 써서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었던 일이야. 지금처럼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다.”
범한은 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다. 혼자서 감찰원과 손을 잡고 위험을 무릅써 가며 곽 상서를 몰아내어 모든 사람이 아는 결말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오히려 주도권은 감찰원에 넘어가 버렸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 이번 일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값싼 정의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범한은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지금은 앞으로 진평평이 어떤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을 눈치챈 범건은 눈을 부릅떴다.
“이제 그만 환상에서 깨어나거라. 진평평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에 네가 관련되어 있단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만들 거야.”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진평평은 동궁의 황태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명성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감찰원을 손에 쥐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들의 서재에서 나오기 전에 사남 백작은 담담하게 말을 전했다.
“앞으로는 성숙한 모습을 기대하마. 권세를 가진 신하가 되겠다는 유치한 말을 접어 두거라. 더 이상 나한테 말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 * *
2월 말의 어느 날, 갑자기 경도 관료 사회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번 회시의 부정행위에 대해 이처럼 신속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감찰원에서 뇌물을 준 유생 명단을 입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명단의 출처가 바로 거중랑인데 다름 아닌 시선으로 잘 알려진 범한이었다.
그는 관료 사회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폐단에 신물이 난 데다가 가난한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한 유생들은 그 노력에 비해 정당한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나 조정에서 활개를 치는 탐관을 속출해 내고자 몰래 명단을 얻어 황제에게 상서를 올렸다는 내용이었다.
소문은 신기하게도 범한의 용기와 지혜가 더욱 화제가 되었다. 분명히 그 명단이 기밀이라곤 할 수 없지만 경국 관리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쪽지로 꼽혔다. 범한이 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감찰원 8처의 그 관원이 속임수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 소문이 돌자 범한은 잠시 예부 관리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국 백성과 유생들에게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태학과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는 침묵을 지켰지만 오늘날 범한은 유생들에게 엄연한 정신적 지도자가 된 셈이었다.
* * *
범한은 옷깃과 소매를 매만지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옷이 너무 새것 같나?”
그러곤 옆에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범한을 쳐다보는 누이동생에게 말했다.
“무슨 걱정이야? 난 경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황태자 쪽 사람인데.”
목소리도 작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범약약은 범한의 의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임완아는 범한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듣지 못했지만 아마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범약약처럼 크게 걱정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황후마마가 하사한 옥 여의 같은 작은 장식품을 남편의 허리춤에 달아 주며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일찍 돌아오세요.”
사남 백작이 말한 대로 범한의 행동은 과했는지 역시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소문이 돌아 경도가 발칵 뒤집히자 모든 사람의 시선과 관심이 범한에게 쏠렸다. 부정행위로 자리에서 물러난 관리들의 배후에 있는 인물은 범한이 가진 배경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슬슬 반기를 들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 새벽, 어사대의 어린 어사들이 상서를 올려 범한도 부정행위에 가담했는지에 대해 탄핵하고 나섰다.
범한은 집을 나서는 대로 형부 관아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원래 시험장 내 발생한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감찰원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이번 부정행위로 인해 물러난 관리들은 감찰원이 범한을 조사하도록 결코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형부에서 나서게 된 것이다. 형부는 재상과도 거리가 멀었고 범건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도련님, 안녕히 다녀오세요.”
문까지 따라와서 인사를 올리는 여종 사사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묻어났다. 범한은 경도에 온 후로 좀처럼 얼굴을 보지 못했던 여종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어렸을 때 안녕히 다녀오라는 말은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얘기를 했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자 사사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인사를 올렸다.
“그럼 도련님, 속히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어. 그럼 죽 좀 끓여 줄래요? 담주에서 가져온 대추도 좀 넣고요. 솜씨가 녹슬지 않았나 오랜만에 맛 좀 봐야겠어요.”
그러곤 범한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물었다.
“지금 베끼고 있는 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요?”
최근 들어 범한은 자신과 함께 자란 사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예 서점으로 보내 자신의 책을 베끼게 했다. 더 이상 이 집에서 여종으로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근 책을 베끼는 일이 많아서 범한과 얘기를 많이 나누지 못해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던 사사는 범한의 한마디에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거의 다 해갑니다.”
“그 정도면 아주 잘하고 있어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서며 곁에 있는 아내와 누이동생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라고, 사사가 약약보다 더 침착하잖아.”
범약약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사사가 오늘 일이 얼마나 심각하지 모르니까 그러지.”
실제로 심각했다. 범한 때문에 옥에 갇히고 자리에서 물러난 관리들이 많았다. 그래서 조정 관리들도 재상과 범건에게 얼굴을 돌릴 각오를 하고서라도 상서를 올려서 형부가 이 일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할 정도면 그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북적인 적 없는 남쪽 거리에 사람이 가득 몰려들었다. 형부 관아에서 보낸 관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둑인 양 사자 석상 뒤에 숨어 있었다. 저택 앞에는 범사철이 집안 호위 무사와 하인들을 거느리고 나와 기다란 빗자루로 관리를 때리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범한이 오늘 형부로 넘겨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백성들은 이미 범한과 이번 시험에서 벌어진 부정행위가 관계가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단순하게 범한이 한 행동은 옳았고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범한은 그들에게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형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니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범한이 입구에 서서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어린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진평평이 둔 이번 수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범한은 옆에 있는 등자경에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사천립과 그 친구들은 오늘 어디에 있는가?”
“도련님 분부대로 감찰원 관리들이 아무도 모르게 살피고 있습니다. 왕계년 대인이 네 사람을 정왕 세자에게 보내면 조정에 도련님을 견제하는 관리들도 이번 일로 도련님을 걸고넘어지지 못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도련님께서 이번 일로 정왕 세자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거절했습니다.”
등자경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범한은 등자경이 자신이 절대로 원하지 않았던 상황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기에 참으로 뜻밖이었다. 자신이 이 네 사람을 정왕 세자에게 보낸다면 안전해 보이긴 할 터. 하지만 동궁에서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자신도 이번 부정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단순한 정의감에서 한 행동으로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2 황자의 입장에서 보면 황태자를 공경하는 데 있어 자신과 동궁의 관계를 결코 되돌릴 수 없었다.
151화
문을 나서는 범한을 향해 주변에 있던 유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앞으로 몰려나왔다. 이미 범한을 앞으로 경도를 짊어지고 갈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존경과 성원이었다.
범한은 전생의 스타라도 된 것처럼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등자경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책 좀 읽었다는 지식인들의 문제가 뭔지 아나? 바로 아주 단순하다는 거라네.”
등자경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기 시작했다.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궁에서 일할 생각 없나? 우리 집안 정도면 자네에게 6, 7품 관리 자리는 줄 수 있네.”
등자경은 흠칫 놀랐다. 예전에 잠깐 공부를 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줄곧 호위 무사로 살아온 그가 범한에게 이끌려 관리가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범한이 경국의 주군이 되면 믿을 만한 수하가 필요하다는 것이 생각나 얼떨결에 대답했다.
“도련님이 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하는 대로?”
범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타깝게도 경국에는 파릉군이 없군.”
범한의 외모가 수려하기도 했지만 이처럼 웃으니 밝은 태양과 살랑대는 봄바람처럼 화려하게 빛났다. 그를 보러 나온 사람들도 범한의 이런 모습에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범사철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다독였다. 그러곤 예를 갖춰 형부에서 나온 관리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차에 올라타 형부로 향했다.
* * *
범한의 집 앞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점점 흩어지고 시험을 보러 가던 유생들도 마차 뒤를 쫓아 형부 관아로 향했다. 백작가의 용맹스러운 호위 무사의 호위를 받으며 또 다른 마차 한 대가 남쪽 거리를 빠져나와 황궁으로 향하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차 안에는 임완아가 타고 있었다. 어젯밤 범한과 이야기를 나눈 대로 오늘 반드시 입궁하여 동궁과 다른 관리들에게 알려 사태를 전환해야 했다.
한편 그때 범한은 홀로 형부 관아에 들어섰다. 관아 안의 분위기가 으스스해서 봄기운치고는 어딘지 모르게 쌀쌀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세 명의 관리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소인, 대인들을 뵈옵니다.”
부정행위 사건도 큰일인 데다 범한도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늘은 형부 상서 외에도 대리사와 어사대의 고관들도 참석했다. 형부 관아 양쪽으로 형부의 열세 개 관청의 관리들이 일렬로 서 있어서 더욱 공포감을 조성했다.
막상 선뜻 나서서 질문하는 사람이 없자 범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형부 상서 한지유가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 거기 서 있는 자네가 태학 5품 봉정인 범한이 맞는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범한은 이전부터 경도에서 지내 왔던 것도 아니기에 경도 관아에 서 있는데도 마치 처음 팔려 나온 송아지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그러하옵니다.”
“오늘 그대를 이곳에 부른 까닭은 회시에 대해 물어보려 함이니라.”
범한이 웃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소인이 아는 바에 의하면 회시의 부정행위와 관련된 사안은 황제의 명을 받고 감찰원에서 처리하는 것이온데, 어찌 형부에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상석에 앉아 있던 관리들은 범한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났다. 하지만 앞에 있는 이 사내는 경도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이고 그의 뒤에 재상과 상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데다가 이번 일로 모든 유생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딱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형부 상서 한지유도 자신의 청렴함을 자랑삼아 살아온 사람이었기에 범한의 이런 행동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본인 역시 황제의 명을 받고 이리하는 것이니 대답을 회피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요.”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인은 회피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상서 어르신께서 저에게 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만약 시험장에서 발생한 부정행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죄송하지만 감찰원에서 이미 엄명이 있어 이 사건이 종결되기 전까지 함부로 발설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대리사 소경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조정에서 심문을 하는데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말이요?”
“감찰원도 형부 관아도 모두 조정에 속한 곳이 아닙니까.”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 분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 일은 너무 광범위하게 얽혀 있어 저로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경국의 법도에도 제대로 쓰여 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말하는 것마다 계속해서 은근히 거절을 당하자 세 명의 관리 중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 상황이 불편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범한이 예부 상서 곽유지를 예의를 갖추지 않고 자리에서 끌어낸 일로 실제로 많은 관리들은 화가 난 상태였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대다수 관리들은 재상과 범 상서의 후광 때문에 감히 범한을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그들 나름대로 든든한 배경과 속셈이 있었다.
한참 뒤 형부 상서 한지유가 차갑게 말했다.
“어젯밤 어사대에서 자네를 감시하도록 사람을 보냈는데 미리 알고 있었나?”
“알고는 있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범한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한지유가 두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범한, 더 이상 유명세와 집안을 믿고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또한 자네가 이번 시험의 부정행위를 밝혀낸 이유가 백성과 나라를 위해 했다고 내가 믿을 거라는 생각은 말게나. 너의 옹졸한 행동을 모두 제대로 고하지 않으면 나 또한 너에게 예를 갖추지 않을 것이니 이 점에 대해 언짢아하지 마시게.”
범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대인께서 하시는 말씀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회시에서 무슨 일을 했다면 제가 이 일에 대해 조정에 어찌 고할 수 있었겠습니까? 옹졸하다는 말은 그대로 돌려 드리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무엄하구나!”
심문하던 관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오랫동안 경도에 있었지만 이렇게 경거망동한 젊은 관리는 처음이었다. 한지유는 수염을 파르르 떨며 호되게 꾸짖었다.
“경도에 있는 모든 관리가 너의 배경을 두려워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8년 동안 형부 상서 자리를 지켜 올 수 있었던 건 너처럼 비겁한 수작을 부려서가 아니라 오직 공명정대한 태도로 임했기 때문이란 걸 알아 두어라.”
범한이 우스운 듯 대답했다.
“모든 사건은 사실에 기반하여 조사하기 마련인데 대인처럼 그렇게 격앙된 태도로 질문하는 경우가 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소인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한지유는 몹시 기막혔다.
“그래, 좋다.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보지. 2월 16일 동복 객잔에 간 적이 있느냐 없느냐?”
범한은 그가 비 오는 날의 일을 묻는다는 것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
“있습니다.”
“거기서 양만리와 그의 친구들을 만났느냐?”
“예, 그렇습니다.”
“양만리가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그와 귓속말을 나눈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이번 회시에서 호명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담당하는 거중랑인 네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양만리가 삼갑 명단에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그날 시험장 밖에서 네가 양만리가 옷 속에서 몰래 숨겨 둔 쪽지를 찾은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구나. 그런데도 왜 그를 시험장에 들여보낸 것이냐?”
범한은 그날 양만리가 입은 옷을 왕계년을 시켜 진작 없애 버렸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내심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없었다?”
한지유가 크게 흥분했다.
“그러하옵니다.”
“좋다. 그럼 하나 더 묻겠다. 그날 시험장 밖에서 무수히 많은 학생의 옷가지와 짐을 수색했는데, 그들만 그냥 들여보낸 것이 아닌가?”
범한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따지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데 굳이 물고 늘어지자면 귀찮아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범한은 여전히 이성적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좋다.”
핼쑥하고 까무잡잡한 한지유의 얼굴에 순간 환한 빛이 감돌더니 범한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네 입으로 인정했으니 나는 널 옥에 가두고 자세히 조사할 수밖에 없구나.”
범한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제가 뭘 인정했다는 말씀인가요?”
한지유는 잔뜩 인상 쓴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물어본 것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느냐. 이번 일은 5품 봉정 범한이 거중랑의 신분으로 유생 양만리를 비롯해 그 무리와 암암리에 결탁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한 사실이 명백하다. 그러니 이는 쉽게 용서받지 못할 일임이 틀림없다.”
범한은 한지유를 흘끔 쳐다보고 본격적인 변론을 시작했다.
“대인, 제가 언제 인정했다는 말씀인가요? 저는 확실히 2월 16일에 양만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유생의 능력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때 부정행위 사건이 터졌는데, 제가 그들과 결탁해서 사리사욕을 취했다면 과연 그날 그들을 만나러 갔을까요? 게다가 그들을 만난 동복 객잔은 이번 시험을 치른 유생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제가 무슨 생각으로 그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범한이 계속해서 변론을 이어 갔다.
“제가 그들을 찾아갔으니 저에게 아무런 속셈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제가 양만리 무리와 결탁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인께서 제가 양만리를 시험장 밖에서 만난 것 외에 사전에 결탁했다고 생각하신다면 정말 억울합니다.”
“그럼 반입해서는 안 되는 물건을 가진 유생을 시험장으로 들여보낸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범한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당시 자신을 본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경국의 회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형부까지 나서서 설치는 것은 모두 자신의 경솔한 행동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소인은 감찰원의 명령에 따라 아무도 모르게 시험장에서 부정을 일삼는 탐관들을 지켜봐야 했기에 작은 일로 큰일을 그르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자세한 연유에 대해서는 상서께서 직접 감찰원에 서신을 보내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한지유는 콧방귀를 뀌고는 감찰원은 황제가 직접 움직이는 기관이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범한의 얼굴을 볼수록 화가 난 나머지 첨통을 저만치 밀어 던지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 네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구나. 누구 없느냐! 이 파렴치한 놈을 혼쭐을 내주 거라!”
* * *
“당치 않습니다!”
그곳에 있던 관리 중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중 하나였던 다리사 소경이 씁쓸한 얼굴로 형부 상서에게 속삭였다.
“여기 있는 범한은 보통 집안의 자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때리다니요?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그들 배후에 있는 사람도 그저 훈계 정도에서 그치려고 했지 범한에게 형을 내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감히 누굴 때리라는 걸까.
한 상서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범한이 재상의 사위일 뿐 아니라 상서의 아들이자 황제가 아끼는 문신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게다가 6처 관리인 한지유가 임완아의 신분을 모를 리 없었다. 그 두 사람의 만류 덕분에 별일 없었지만 한지유는 여전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범한을 때린다면 앞으로 조정에 들지 않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순간 세 명의 관리는 범한을 때리라는 명을 만류한 다른 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들은 범한이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리사 소경은 이 상황이 우스워서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럴 수 없다는 거지?”
범한이 꽤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소인은 향시에 급제한 사람으로 경국의 법도에 따라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고 누구든 함부로 고문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저를 때려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일 때리신다면 어사대에서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한 상서께서 경국의 법도를 어긴 걸 가지고 문제 삼을 것입니다. 상서께서 저 같은 어린 관리보다 경도의 법도를 더 모르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세 명의 관리 중 감찰원 어사대부 곽정은 사실 곽유지의 먼 친척으로 범한을 탄핵하려는 이번 조사에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범한의 말에 가시가 있는 걸 알아채고 자기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범한 대인은 재능과 학식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경국의 법도까지 아주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경국의 수소(首疏, 상서의 첫머리)에 열다섯 개의 죄목이 있는데 거기에는 대인께서 앞서 말씀하신 규율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152화
곽정은 애초부터 범한에게 형벌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저 말로라도 겁을 줘서 경도의 관리들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여전히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래선 아니 되지요.”
대리사 소경도 이번 부정행위에 연루되어서인지 궁금한 게 많았다.
“이리도 큰일에 연루된 범한 대인이 변명하려 하지 않는데 어째서 형벌을 받으면 안 된다는 거요?”
그런데도 범한은 여전히 이런저런 말을 둘러대며 감찰원을 끌어들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감찰원 기밀인지라 소인은 감찰원 허락 없이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사가 진행되다 보니 세 사람은 실로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분노가 가득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범한의 입을 열 수 있을까. 그들 배후에 있는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범한을 데려와 결코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바로 그때, 구석에 있던 사제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뛰어 들어와 한지유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러자 바로 얼굴색이 변하더니 두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위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몸 안에서 패도의 기가 돌기 시작하여 한지유의 대화 중 몇 단어가 들려서 동궁이라는 두 글자는 확실히 알아차렸다. 누가 소식을 전한 건지 또 형부 상서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같은 시각, 쪽지 두 장이 어사대부 곽정과 대리사 소경에서 전달됐다. 무표정한 얼굴로 쪽지를 받아 든 곽정과 달리 대리사 소경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두 분이 남아서 마저 조사하시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도 내심 놀랐다. 대체 무슨 쪽지기에 대리사 소경이 저리도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걸까? 형부에 오기 훨씬 전에 범한은 이들에 대한 파악을 끝낸 상태였다. 형부 상서는 겉으론 공명정대해 보이지만 실제 동궁 사람이었고 대리사 소경은 추밀원의 진씨 집안과 밀접한 사이였다. 그리고 어사대부 곽정은 젊었을 때 장 공주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물론 범한 뒤에 감찰원이라는 무시무시한 힘이 없었다면 이 또한 오랫동안 숨겨 왔던 이 관계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관아에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봐라, 태학 봉정 범한은 관아에서 행패를 부리고 이번 부정행위 사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이에 따라 대죄를 물으니 저자를 힘껏 치거라!”
한지유는 얼굴 근육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보였다.
대리사 소경이 먼저 자리를 떠난 걸 보고 그 또한 앞으로 형부 관아에 훨씬 험악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 버티고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재상가와 백작가를 그냥 둘 생각이 아니었다. 범한은 사늘한 눈빛으로 한지유의 눈을 바라봤다.
“설마 상서 대인께서 무슨 술수를 부리시려는 건 아니죠?”
어사대부 곽정 또한 한기 서린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가져오너라!”
막대기 두 개가 범한의 가장 연약한 정강이뼈 부위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형부의 13 아문에서 주로 해왔던 일이기에 큰 힘은 들지 않았지만 그 강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파랗게 질린 범한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저 탁탁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의 다리 밑으로 조각들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의 정강이뼈가 부러진 게 아니라 중간에 막대기 두 개가 부러져 나간 것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가 나타났다.
범한이 깊이 심호흡해 몸 안에 있는 난폭한 정기를 일으키자 입고 있는 옷이 펄럭이며 황후가 하사한 옥으로 만든 여의가 움직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13개 관청의 관리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던 그는 상황이 자신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들이 재상과 사남 백작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어코 자신을 고문하려 한다면 가볍게 맞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두 발자국 정도 앞으로 걸어가 두 동강 난 몽둥이를 발로 찼다. 그러고는 애써 침착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곽정과 한지유를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멀리 신양에서 지내고 있는 미친 여자의 존재를 잊은 것이었다. 다만 한지유를 움직인 것이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난 황태자인지 아니면 황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외양간 거리 사건이 일어난 지도 오래되었기에 경도 사람들은 범한을 시를 잘 쓰는 문관으로만 생각했지 무예 고수라는 건 잊고 있었다.
모두가 화들짝 놀란 가운데 칼집에서 칼을 빼는 서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수히 많은 칼날이 형부 법정에 서 있는 범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형부의 관리들이 사용하는 고문 기구는 특별하게 제작된 것이라서 7등급 고수들도 이겨 내지 못했다. 하지만 범한의 몸 안에 있는 난폭한 정기는 미친 듯이 강렬해서 고문에 사용하는 막대기를 절단해 버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힌 관리들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연약해 보이는 문관이 사실은 북제 8등급 고수 정거수의 배를 가른 사람이란 걸 기억해 냈다.
관리들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서 범한을 향해 겨누었다. 서슬이 퍼런 칼날이 자신을 둘러싸자 두 발자국 앞으로 갔던 범한은 다시 뒷걸음을 쳤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법정에 있는 한지유와 곽쟁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함부로 행동해서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 말에 한지유와 곽쟁이 흠칫 놀라며 법정에 서 있는 아름다운 청년을 바라봤다. 범한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안에 담긴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재상 임약보는 오백안의 일 때문에 조정에서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지만 여전히 경국 백관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리고 호부 상서 범건은 어려서부터 황제 폐하와 같이 자란 사이였다. 순간 한지유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면서 지금까지 한 일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곽유지가 실각한 것에 원망을 품은 곽쟁은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몰래 장 공주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조용히 끝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를 갈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명에 따라 심문하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곽쟁의 당당한 말에 한지유도 번뜩 정신이 들었다. 범한을 형부 법정에 세운 이상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렇소. 범한 대인이 이번 부정행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다면 고문을 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경국의 법률에 따라 고문할 수밖에 없소.”
그 말에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
“열다섯 개의 대죄, 열다섯 개의 대죄라니…….”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경국 법률은 고칠 필요가 있어.”
법률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황제만이 고칠 수 있었다. 그러니 그 말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못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백작가 전체가 반역으로 참수당할 수 있었다.
한지유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저 부패한 관리를 붙잡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검을 빼 들고 있던 관리 중 두 명이 범한의 목덜미에 검을 겨누었다.
범한이 한숨을 쉰 뒤 소매 안에 넣고 있던 두 손을 조용히 꺼냈다. 그러고는 총알처럼 재빨리 손을 움직여 두 관리의 손목을 공격한 뒤 그들의 가슴을 밀었다.
행동이 너무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서걱,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두 관리의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가 퍼졌다.
서걱, 하는 소리는 두 관리의 손목이 잘리는 소리였고, 이후 울린 소리는 그들이 쥐고 있던 검이 날아가는 소리였다. 날아간 검은 어느새 형부 편액 양 끝에 꽂혀 태양이 낳은 악마의 뿔처럼 섬뜩해 보였다.
범한이 두 관리의 가슴을 밀자 휙 날아가더니 뒤에 있던 의자에 부딪쳤다. 의자가 산산조각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신음이 들렸다.
범한의 예상치 못한 무예 실력에 놀란 관리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침착하게 범한의 모습을 바라보던 곽쟁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관리를 구타한 죄도 추가되었군.”
그의 말을 이해한 한지유도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범한에게 죄명을 씌우는 게 중요했으므로 그가 반항을 거세게 하면 할수록 두 사람에게 유리했다.
곽쟁이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 대인께서는 고분고분하게 행동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학식과 무술 실력 모두 갖추고 계신 분이니 형부 법정에서 도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어명을 어겨 반역자가 되고 싶으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상황이 만족스러운지 곽쟁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며 계속 말했다.
“범한 대인께서는 반역할 마음이 없으시다면 순순히 형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시선이라 불리며 서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대인께서 형부에서 도망치는 대죄를 저질러 집안을 몰락시킨다면…… 생각만 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범한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소신이 너무 놀라서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이 형부에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문을 받고 싶지도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시간을 끌며 벗어날 방법을 모색할 계획이었다. 그가 냉철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도 형부에서 도망치는 대죄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으니 여기서 두 분과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은 뒤 눈을 내리감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두 분이 계속 고문하려 한다면 반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문을 하지 않는다면 저도 두 분의 심문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을 것입니다.”
“제멋대로군! 저놈을 붙잡아라!”
범한의 당당한 말에 한지유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있는 탁자를 내리쳤다. 손바닥에 모여 있던 정기에 나무 탁자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그가 온화한 눈빛으로 주변 쓱 훑어보자 평상시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관리들이 겁을 먹고 움직이지 못했다.
경국이 세워진 이래 형부 법정에서 이처럼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 이전 세계에서 봤던 연극 무대 같다고 생각했다. 태연하게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는 범한을 앞에 두고도 관리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형부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고 그를 잡아서 고문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이어졌다.
등받이 의자에 앉은 범한은 속으로 자신이 화를 내거나 반격을 준비할 때 항상 의자를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열두 살 때 주 집사에게 따귀를 때렸을 때도 의자를 이용했고, 경도에 처음 온 날도 처마 아래에서 분노를 억누르며 유씨 부인을 상대했을 때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늘 형부 법정에서도 그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몽둥이로 자신을 가르치려 하는 고관들을 바라보던 그는 속으로 배후에 장 공주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형부에는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검을 쥔 13개 관청의 관리들에게 둘러싸인 범한을 보며 곽 어사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오늘 호부 상서 범건과 재상 임약보가 다른 일에 붙잡혀 꼼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양만리만 증인으로 오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는 그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일을 폐하께 알린다면 더는 부친 사남 백작의 권력에 기대 오만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범한 대인의 죄를 밝히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잠시 뒤 양만리가 증언한 뒤에도 반항한다면 역모죄로 처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한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곽 대인,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된 이상 저도 체면 차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만일 대인의 말과 다르게 양만리가 오늘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 후환에 대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적나라한 위협이었다. 경국이 세워진 이래 형부 법정에서 5품 관리가 형부 상서와 도찰원 어사를 위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담담한 범한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지자 한지유는 불길한 기분에 흠칫 놀라 말했다.
“범한, 자네는 조정의 관리이지 검으로 위협하는 무인이 아니지. 오늘 형부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앞으로 어떻게 자네를 처벌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러자 범한이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곽유지 대감이 부정행위로 실각한 것에 대해 보복을 하려고 죄 없는 저를 고문해 자백시키려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누가 조정을 우러러볼 수 있겠습니까.”
곽쟁이 차가운 말투로 냉담하게 말했다.
“말하고 싶은 대로 지껄이시오. 범한 대인은 부정행위에 대해 자세한 정보가 있으면서도 왜 조정이 아닌 감찰원을 이용해 처리하였소? 이건 조정을 무시한 것 아니오?! 내가 내일 조정에 가서 사남 백작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것이오!”
곽쟁의 당당한 말에 범한의 수려한 얼굴이 순간 살기로 번뜩였다. 그가 일어나 두 명의 고관을 노려보면서 주변 분위기가 긴장되자 관리들이 칼날을 급소에 겨누었다. 당장이라도 찌를 듯한 모습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형부 밖에서 언약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찰원이 명을 받아 처리하는 일에 형부가 개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감찰원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지자 범한은 아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153화
밖에서 질서 있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감찰원 4처 수장인 언약해가 형부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위풍당당하게 따라오는 감찰원 밀정들이 보였다.
감찰원 사람들을 본 곽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 대인께서 재판을 보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언약해는 도찰원 어사인 곽쟁의 말을 무시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청년을 보며 공손히 말했다.
“언약해, 범 공자를 뵙니다.”
범한도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언 대인께서 오시지 않았으면 제가 무력을 사용해 도망칠 뻔했습니다.”
그의 농담에 언약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한지유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찰원이 온 이유를 추측하다가 말했다.
“범한 대인은 법정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관리들을 구타하여 그 죄가 무겁습니다. 더구나 곧 양만리를 비롯한 범인들이 이곳에 올 것이니 대질 신문한다면 부정행위의 진상이 명명백백 밝혀질 것입니다.”
“필요 없습니다. 동복 객잔에 갔던 관리들은 현재 감찰원 목철 대인에게 체포된 상황입니다. 지금 감찰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으니 한 상서께서 시간이 되실 때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체포하러 간 사람이 체포당하다니 형부의 체면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일이었다. 화가 난 한지유가 언약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감찰원이 언제부터 형부의 일에 관여했던 것입니까? 왜 체포하는 걸 방해한 겁니까?”
“회시 부정행위는 감찰원에서 처리하고 형부와 대리사는 협조만 하라는 게 폐하의 뜻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던 언약해는 대리사 소경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미소 지으며 계속 말했다.
“협력하기로 한 이상 순순히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양만리를 포함한 네 사람은 감찰원에서 조사한 결과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났습니다. 혐의가 없는 사람을 형부에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수사가 잘못되는 걸 막으려 목철 대인이 관리들을 체포한 것인데 어찌 잘못된 일이겠습니까?”
그러자 곽쟁이 정색했다.
“그래도 조정의 법률에 따라서 범한 대인은 형부의 소관에 있습니다. 감찰원이라 해도 형부 법정에 서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범한과 감찰원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곽쟁과 한지유는 범한이 감찰원에 부정행위를 신고했고, 비개 대인과 사제 간이라서 감찰원이 그를 보호하려 한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곽쟁이 규정을 들먹이자 언약해가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은 그때까지도 관리들의 칼날에 둘러싸여 있었다.
“감히 범한 대인에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언약해의 말에 곽쟁이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관직이 낮은 범한에게 무례를 저지를 게 뭐가 있을까. 더구나 도찰원 어사인 그는 평소 감찰원과 부딪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감찰원의 무서움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길길이 날뛰는 곽쟁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언약해가 한지유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말했다.
“한 대인, 본관이 범한 대인을 모시고 가려 하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한지유는 감찰원 사람들이 온 이상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그의 배후에서 일을 꾸민 사람도 진평평이 이 일에 관여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사람을 데리고 가겠다니요. 언 대인, 그건 규정상 맞지 않습니다.”
그 역시 조정의 법률을 핑계로 거절하자 언약해는 난처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그러자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불만 섞인 신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감찰원 관리들의 공격에 13개 관청의 관리들은 아무런 반격도 못 하고 무기를 압수당한 것이다. 감찰원 4처는 5처 다음으로 무예를 잘하는 부서라서 형부 관리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포위가 풀리자 범한은 옷을 털며 언약해 옆으로 걸어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왕계년 대인을 부를 생각이었는데 언 대인께서 수고해 주시는군요.”
당황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한지유가 탁자를 내리치며 고함쳤다.
“조정의 법률을 이런 식으로 무시하다니 감찰원에서 모반을 꾀하는 것인가? 내가 내일 상소를 올려 폐하께 너희들을 모두 처벌해 달라 요청할 것이야.”
언약해가 담담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감찰원 여덟 부처에 소속된 관리들은 오로지 황제의 명만 따릅니다. 그래서 감찰원 관리는 긴급한 상황에서 경국 법률을 무시하더라도 폐하의 명이 있지 않은 이상 6처 3사 2원 중 어느 곳의 심문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설마 한 대인께서는 이 조항을 잊으신 것입니까?”
곽쟁이 비웃었다.
“언 대인은 심문을 받지 않을 수 있지만 범한 대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범한 대인이 언제 감찰원 사람이었습니까? 게다가 그 조항은 감찰원에서 5년 이상 직책을 유지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올해 열일곱인 범한 대인이 설마 열두 살 때부터 감찰원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건 아니겠지요?”
범한이 감찰원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곽쟁과 한지유는 그가 오늘 형부의 문을 나갈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게다가 만약 강제로 나가려 한다면 경국의 법률을 무시하는 대죄를 저지르는 것이므로 재상과 사남 백작도 더는 그를 보호해 줄 수 없거니와 폐하도 죄를 물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곽쟁과 한지유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두 사람을 바라보던 언약해는 고개를 돌려 범한을 향해 미소 지었다.
언약해와 눈이 마주친 범한이 웃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옥으로 만든 여의를 열더니 뚜껑을 감찰원 하급 관리에게 던져 주고는 안에서 나무로 만든 요패를 꺼냈다. 옅은 황색 나무 요패에는 ‘제사’라는 두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곽쟁과 한지유가 목을 길게 빼고 요패에 적힌 글자를 바라봤다. 단박에 의미를 이해한 두 사람은 쓰러지듯이 풀썩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언약해와 함께 감찰원 하급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형부 법정에서 빠져나왔다.
법정 탁자 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곽쟁은 화가 나 안색이 푸르딩딩하게 변했고, 그 옆에 앉은 한지유는 의자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누구도 범한이 감찰원 제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사란 무엇일까? 감찰원 여덟 부처에서 독립된 초월적인 직책으로 감찰원 안에서도 가장 베일에 싸여 있었다. 조정에서도 감찰원 제사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한 수단을 부리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소문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제사가 문장가로 소문난 범한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폐하께서 어명을 내리시지 않는 이상 아무도 감찰원 제사를 심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범한을 심문하라 말씀하지 않을 테니 이제 어쩌실 겁니까?”
한지유가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형부 계단을 내려가는 범한과 감찰원 사람들을 바라보던 곽쟁이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빠져나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왜 처음부터 자신이 감찰원 제사라는 걸 밝히지 않은 걸까요? 언약해가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자백을 받아 체포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은 걸까요?”
한지유도 그 점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었다. 범한이 풀려난 이상 곧이어 보복이 있을 게 분명했다. 범한이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 * *
형부 법정에서 나온 범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원장 대인에 의해서 제가 제사라는 게 밝혀지니 허무하군요.”
언약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원장께서는 알맞은 시기가 오면 대인이 제사라는 걸 밝힐 생각이셨습니다. 다소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대인을 위해 서생들이 형부 법정 밖에 모여 있으니 신분을 밝히기 좋은 기회인 셈이지요.”
범한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오늘은 그에게도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들 뒤에 숨은 강력한 세력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 더 심한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만일 창산에서의 수행으로 실력을 기르지 못했다면 삼엄한 법정에서 그렇게 웃으며 태연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언약해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감찰원은 특수한 기구라서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장 대인께서는 범한 대인이 부정행위를 폭로한 걸 널리 알려 호응을 받은 뒤 감찰원 제사인 걸 밝힌다면 사람들의 반감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그랬군요……. 이미지 메이킹을 한 셈이군.”
범한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언약해가 옆에 있는 부하가 건네준 여의 뚜껑을 다시 돌려줬다.
자신의 손에 들린 옥 여의를 매만지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의 체면을 깎기 위해서 이번 부정행위를 폭로한 게 아닌데 한 상서가 저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을 보니…… 동궁의 힘을 믿고 저러는 게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언약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가 아닌 황후를 믿는 것입니다.”
“황후요?”
범한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진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황후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알아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옥 여의를 버리고 싶어졌다.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언약해가 웃었다.
“황궁에서 하사한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것도 대죄에 해당합니다.”
언약해의 지적에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감찰원 제사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니 관아에서도 저를 심문하려 하지 않겠군요?”
“관아에서는 심문할 수 없지만 황궁에서는 가능합니다.”
언약해가 자기 아들보다도 체구가 작은 범한의 어깨를 두드리다 걱정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한숨의 의미를 알고 있는 범한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 대인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안전하게 데리고 오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형부 문을 나가자 거리에 나와 있는 서생과 백성들이 보였다. 부정행위를 폭로한 범한이 무사히 형부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던 범한은 비로소 오늘 형부에서 자신이 반항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생각했을 때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권력의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밝게 미소를 지었다.
형부에서 벌어진 일은 곧장 경도 전체에 전해졌다. 관리들을 비롯한 경도 사람들은 감찰원과 재상 그리고 백작가가 당장 형부와 도찰원에 반격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 진행된 전시에서 태학 5품 봉정인 범한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황태자와 2 황자의 바로 아랫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회시 부정행위에 대한 황제의 태도가 명확해진 셈이었다.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은 범한은 술도 마시지 않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형부에서의 일을 계기로 경도 백관들은 이미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감찰원이 범한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형부 상서인 한지유와 도찰원 어사인 곽쟁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고, 그날 밤 황궁 안에서 상당한 소란이 있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감찰원 제사는 수많은 밀정을 통솔하며 관리들의 생사에 관여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에 범한을 단순히 글을 잘 쓰는 명문가 자제라 생각하던 백관들은 비로소 그의 능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감찰원은 회시의 부정행위를 꾸준히 조사했다. 하지만 범한은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범한이 며칠 뒤 사신으로 나갈 준비를 하려고 그런 거라 짐작했다.
154화
삼월 초사흗날, 전시와 연회가 모두 끝난 뒤 양만리, 후계상, 성가림 그리고 사천립은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중 마차가 백작가 앞에 도착했다.
양만리가 고개를 들어 호화로운 저택을 바라봤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사자상을 본 그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더듬더듬 말했다.
“너무 긴장돼서 어쩌질 못하겠네.”
네 사람 중 성격이 가장 침착한 후계상도 난생처음 호화로운 귀족 저택을 방문해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범한 대인을 만나 보지 않았나. 무료한 관리들과 다르게 누구와도 재미있게 대화할 줄 아시는 분이네. 그러니 긴장될 게 뭐가 있겠나.”
성가림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형부와 감찰원이 부딪친 이상 네 사람은 도리상으로나 소문으로나 이미 범한의 문하생에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전시가 끝난 뒤 백작가에 찾아와 인사를 드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날 동복 객잔에서 네 사람은 경국에서 가장 두려운 감찰원이 자신들을 위해 13개 관청의 관리들과 싸움을 벌였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 놀라 자지러질 뻔했다.
사천립이 그런 세 사람을 보고는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번 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했기에 다른 세 명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내가 봤을 때 자네들은 백작가를 방문해서 긴장한 게 아닌 것 같네. 범한 대인이 감찰원 제사라는 사실을 알고는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이지. 내 말이 틀렸는가?”
그러자 사자상을 바라보고 있던 양만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시선으로 알려진 범한 대인이 감찰원에서 권력이 가장 큰 인물 중 하나일 줄 누가 알았겠나. 감찰원은 조정 관리들도 무서워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 감찰원 관리인 게 밝혀진 이상 범한 대인에 대해서도 안 좋은 말들이 나올 수 있네.”
“무지한 사람들이 편견으로 하는 말이지.”
사천립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동복 객잔에서 내가 감찰원이 관리들을 감독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과 생각이 달라 보이는 후계상을 힐끗 쳐다보았했다.
“곽유지 상서가 투옥되었을 때 자네들도 감찰원을 칭찬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스승이 감찰원 고관이라는 걸 알게 되니 다른 사람들처럼 멀리하고 싶어진 건가?”
양만리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 회시 부정행위를 폭로한 범한 대인이 감찰원 사람이라는 게 알려졌으니 뒷말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범한 대인의 폭로로 우리 세 사람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고 게다가 다른 서생들도 더욱 공평한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지 않았나. 그러니 범한 대인이 감찰원 제사인 게 밝혀졌어도 서생들은 모두 공경하고 따를 걸세. 더구나 우리는 말할 것도 없지. 나는 범한 대인이 감찰원 사람이라도 믿고 따르기로 했네. 그러니 사천립 자네도 더는 왈가불가하지 말게.”
그의 말에 후계상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네. 나는 그저 감찰원 고관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조정의 규율 때문에 범한 대인이 관직에 나설 수 없는 게 아쉬워서 그러네. 감찰원에만 있기에는 범한 대인의 재능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러자 성가림이 끼어들었다.
“범한 대인의 신분상 어차피 벼슬길에 오르기는 힘드네. 내년에 황실 금고를 관리한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만약 그렇다면 감찰원에 들어간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네.”
성가림은 ‘군주의 부마’는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걸 지적한 것이었다. 그 말에 네 사람은 순간 젊은 범한이 여러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게 놀라우면서도 이상했다. 오랜 시간 백작가 앞에 머무르며 대화한 덕분에 긴장감을 해소한 네 사람은 마차에서 나왔다. 저택 앞으로 걸어간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둔 명찰을 꺼내 문지기에게 건넸다.
진작부터 네 사람을 감시하고 있던 문지기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명찰을 받아 들었다. 명찰을 바라본 문지기는 이번 회시에서 범한이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는 공손하게 안으로 안내하고는 차를 내왔다.
네 사람도 귀족 저택에서는 먼저 문지기가 주는 차를 마시며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게 예의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지기는 저택에 들어가 알리지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큰 도련님께서는 현재 출타 중이라 안 계십니다. 네 분께서는 전갈을 남기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날 다시 찾아오시겠습니까?”
네 사람은 실망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이때 가마 한 대가 백작가 앞으로 다가오자 문지기가 황급히 달려가 문을 열었다. 가마에서 내린 중년의 관리는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추고는 네 사람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문지기가 재빨리 다가가 설명하려 하자 중년의 남자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젓고는 네 사람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이 양만리, 사천립, 후계상, 성가림인가?”
네 사람의 이름을 모두 말하자 후계상은 화들짝 놀랐다. 한 사람이 아닌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니 범한의 아버지가 분명했다. 그가 급히 일어나 인사했다.
“후계상, 상서 대인을 뵙니다.”
나머지 세 사람도 그제야 앞에 있는 고관이 범한의 아버지라는 걸 알고는 급히 일어나 인사했다.
사남 백작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후계상을 바라보았다.
“과연 범한이 사람을 볼 줄 아는군. 괜찮다면 나와 함께 담소를 나누지 않겠나?”
‘스승의 부친은 뭐라 호칭해야 하는 거지?’
네 사람이 눈만 데구루루 굴리며 속으로 고민했다. 그들은 경국 관료 사회에서 신진 세력이 될 사람들이었지만 정치 경험이 많은 범건 앞에서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순순히 범건을 뒤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 *
천하대로에 우뚝 서 있는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건물 주변으로 봄 풍경이 펼쳐졌다. 아직 초봄이라 거리 양쪽에는 만개하지 않은 꽃망울들이 올망졸망 맺혀 있었다. 경도 사람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감찰원에서 멀리 떨어져 걸어갔다. 감찰원 문 앞에 서 있는 비석은 마치 그런 사람들에게 ‘감찰원은 너희들을 보호하는 데 왜 두려워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사람들이 감찰원을 두려워하는 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특수 임무를 담당하는 감찰원에서 나오는 음산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싫을 뿐이었다.
감찰원의 네모반듯한 방 안에 놓인 긴 탁자에 각 부처 수장들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오늘 회의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들은 의문 섞인 눈빛으로 탁자 끝에 앉은 진평평을 바라봤다. 주격이 이 방에서 자살한 뒤 1처 책임자 자리는 줄곧 비어 있어 오늘 회의에는 일곱 명만 모여 있었다.
그때 방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음에도 감찰원 최고 지위에 있는 일곱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탁자 끝에 앉은 진평평도 고개를 들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문을 바라봤다.
산발에 등이 굽은 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비개가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얼른 들어와.”
곧이어 그의 뒤에 서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다. 범한, 인사드립니다.”
감찰원 회의실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도 범 제사가 이런 모습으로 처음 감찰원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감찰원의 음습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범한의 천진한 미소에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은은한 미소를 지은 범한이 두 손을 모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아 있는 일곱 명 중 언약해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비개가 옆에 있어 주었음에도 범한은 경국에서, 아니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밀정 수장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그때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진평평을 보자 범한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앞으로 걸어갔다. 범한은 16년 전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후 16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진평평이 감회에 젖은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젊은 청년을 바라봤다. 범한이 자신의 옆에 서자 그가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라.”
범한이 몸을 숙여 진평평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넓지 않은 가슴에 안겼다. 진평평의 메마른 몸에 가볍게 안긴 범한은 두 눈을 감고 온기를 느꼈다.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 친밀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안겨 있다 진평평의 품에서 벗어난 범한은 공손히 인사했다.
“마침내 대인을 뵙니다.”
진평평이 기쁜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내부 사정을 아는 비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범 제사와 진평평이 어떤 관계인지 알지 못했기에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상당히 놀랐다.
오늘은 범한이 제사 신분으로 처음 감찰원에 들어온 날이었다. 그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 뒤 진평평의 왼쪽 자리에 앉자 비개가 오른쪽 자리에 가서 앉았다.
“얘가 범한일세.”
진평평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감찰원 제사로 자네들과 같이 일할 사람이니 신경을 써주길 바라네.”
진평평이 이처럼 진지하게 새로 들어온 사람을 소개하는 건 처음이었다. 말의 의미를 이해한 일곱 수장이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범한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다섯 살 때부터 비개에게 가르침을 받은 범한은 천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찰원이 자신과 특별한 관계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더구나 자신의 어머니와 감찰원의 관계를 알고 나서부터는 자신이 언젠가는 이곳과 기묘한 관계에 놓이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비개에게 감찰원의 부처와 작업 과정을 들어서 알고 있던 그는, 경도에 들어와 감찰원과 여러 일을 협력하고 또 독립적으로 왕계년과 함께 조직을 만들어 이끌면서 감찰원에 대해서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황제의 직속 기관인 감찰원은 6처와 법률의 간섭 없어 오로지 황제의 명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곳이었다. 내부는 여덟 부처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중 제1처는 경도 관리들을 감찰하는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주요 기관에 밀정을 파견해 감시하는 업무를 해서 감찰원에서도 가장 핵심 부처로 통하는 이곳의 책임자는 과거 장 공주의 편에서 활동하다가 자살한 주격이었다. 제2처는 각 부처의 정보를 모아 분석한 뒤 황제와 군부에 전략을 제공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3처는 범한이 가장 친근감을 느끼는 부처로 그의 스승인 비개가 물러나기 전까지 담당했던 부처였다. 독약과 각종 비밀스러운 무기를 연구하고 제작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범한이 만들어 사용하는 마취 약도 3처가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살짝 변형한 것이었다.
제4처는 언약해가 담당하는 부처로 경도 밖 지방 관리들을 감찰하고 관련 정보를 조사하는 업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사 범위가 국경을 넘어 북제와 동이성까지 포함하고 있어 1부 다음으로 권한이 가장 많은 부처였다.
경도 밖에 머무르는 감찰원 제5부는 황제 폐하의 명에 의해 세워진 부처로 진평평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병 조직이었다. 흑기들은 필요하면 먼 곳까지 파견을 나갈 수 있으며 과거 북위에 침입해 소은을 붙잡은 것은 5처가 세운 가장 유명한 전적이었다. 그야말로 5처는 감찰원 부처 중에서 가장 강한 부처였다.
제6처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두려워할 만한 곳이었다. 심지어 범한도 경도에 온 뒤로 6처와는 접촉할 일이 없었는데 이는 암살을 전문적으로 책임지는 부처였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이곳은 폐하가 지정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제7처는 죄인을 고문하는 일을 맡고 있었으며 형부의 관리들보다도 더욱 전문적이었다. 범한이 과거 감찰원 감옥에서 봤던 볼품없던 간수가 바로 7처 전임 담당자였다.
제8처는 범한과 가장 많이 접촉한 부서였다. 8처를 담당하는 중년의 관리를 보던 범한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왜냐하면 책방 운영을 담당하는 섭 대행수가 매달 8처에 돈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한은 8처가 권력이 세고 독립적인 걸 빼면 이전 세계 관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각 부서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범한의 이력은 경국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일곱 부처 수장 중에서 범한이 아는 사람은 언약해뿐이었다. 더구나 6처에서 온 사람은 수장이 아니었다. 경국에서 가장 뛰어난 자객이 누군지 궁금했던 범한은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심이 가는 사람은 비개의 수제자이자 3처 수장인 령 수령으로 범한과는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동문이었다.
155화
만남이 끝난 뒤에도 자리에 남아 있던 언약해는 범한과 령 책임자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독약과 암살 무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범한이 비개의 마지막 제자라는 사실을 떠올린 그는 앞으로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관심사가 같은 두 사람이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대화를 나누자 비개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은이 어떤 인물인지 잊은 거냐. 그는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 둔 상태일 거야. 사신단이 북제에 들어서면 아마도 무도하강(江) 앞에서 한 달 동안 머무르려 할 것이다. 양국의 보호 아래서 자신의 몸 안에 여독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인질 교환을 하려 하겠지. 그런 상황에 맞는 독약을 만들려면 그렇게 수다를 떨 여유가 없을 텐데?”
스승의 말에 두 사람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진평평이 손뼉을 쳐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북제에 가서 해야 할 임무는 총 네 가지네. 첫째는 언빙운을 무사히 데리고 와 1처 직무를 인계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포로 교환을 끝으로 양국의 협상이 완료된 걸 확인한 직후 소은을 죽이는 것이네.”
진평평의 목소리는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셋째는 미인계 임무를 진행하는 것인데, 이 임무의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문서로 확인하도록 하게. 마지막으로 넷째는 앞에 세 가지 임무를 모두 끝낸 상황에서 북제의 첩보망을 새롭게 조정해 언빙운이 떠난 뒤에도 첩보가 차질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네.”
네 가지 임무 모두 쉽지 않았다. 범한은 겉으로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긴장되고 불안했다. 진평평이 표정 없는 얼굴로 언약해를 향해 말했다.
“관련 자료는 자네가 준비해서 범한이 떠나기 전에 주도록 하게.”
언약해가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이제 방에는 범한, 진평평, 비개만 남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릎 위 양털 담요의 주름을 매만지던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감찰원 밖에 있는 그 이름을 봤으니 이미 많은 일을 알고 있겠지.”
“오죽 아저씨가 말해 주었습니다.”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그는 진평평 원장이 자신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일반인과 다르게 진평평에게 믿음이 갔다. 경국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그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한 직감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오죽 대인이?”
진평평이 두 눈을 감고 인상을 쓰며 무언가를 생각하다 말했다.
“오죽 대인은 기억력이 좀 좋아졌나?”
범한이 대답했다.
“기억하고 싶은 건 모두 기억하고 잊고 싶은 건 모두 잊는 것 같습니다.”
진평평은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투박한 손가락을 만졌다.
“오죽 대인은 지금 경도에 있나?”
비개가 혼인날 밤에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저번과 똑같이 답했다.
“섭류운을 찾아 남쪽으로 간다고 했으니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방구석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잔뜩 긴장한 범한이 소매에 손을 넣어 암살 쇠뇌를 쥐었다. 지금의 대화는 다른 사람이 듣게 해서는 안 됐다. 범한과 진평평 모두 내용이 새어 나간 뒤 벌어질 파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긴장할 것 없다.”
진평평은 그의 소매 안 상황이 보이는 듯 침착하게 말했다.
“계속 6처 책임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길 바랐는데.”
그 순간 방구석에서 검은 그림자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검은 그림자가 진평평의 뒤로 다가오더니 점차 사람의 형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온몸에 검은 천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고수가 틀림없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범한은 온몸이 긴장되었다.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던 범한은 그가 16년 전 그날에 진평평의 마차 옆에 서 있다가 매처럼 돌진해 신비한 법사를 죽인 사람이라는 걸 알아냈다.
“외부 사람은 볼 수 없는 감찰원 6처 책임자 그림자이다.”
비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경국 자객들의 우두머리인 그는 범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 진평평의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진평평이 쉰 목소리로 이어서 설명했다.
“오죽 대인 다음으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자객이자 호위 무사다.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사람 덕분이니까.”
진평평의 칭찬에 감사 인사를 하려는 듯 뒤에 있던 그림자가 허리를 숙였다.
진평평이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림자는 오죽 대인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사람이란다. 심지어 그가 사용하는 기술 중에는 어린 시절 오죽 대인의 기술을 보고 모방한 것들이 많이 있어. 그래서 네가 오죽 대인이 경도에 없다고 말했을 때 실망해서 한숨을 쉰 거야.”
혼자서 오죽의 기술을 모방해 고수가 되었다는 말에 범한은 놀란 눈으로 그림자 자객을 바라봤다.
* * *
잠시 뒤 비개가 진평평 원장이 타고 있는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감찰원 후원으로 나왔다. 뒤를 따르던 그림자는 이미 햇살을 피해 어딘가로 숨어 버린 뒤였다. 바퀴 달린 의자를 따라 걸어가던 범한은 오죽과 흡사한 그림자 자객의 행동에 마음이 심란해지면서, 곧 있을 임무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인 오죽이 그리워졌다.
경비가 삼엄한 후원은 생각보다 넓었고 담장 주변에는 높은 건물이 없어서 후원 안의 상황을 밖에서는 볼 수 없었다. 음침하기만 할 거라는 세상 사람들의 상상과 다르게 감찰원 후원은 상당히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푸릇푸릇한 잔디 위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자란 나무들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주변에는 드문드문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멀리서 검은색 바퀴 달린 의자를 본 감찰원 관리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가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름다운 가짜 산 아래 있는 수풀에 숨어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궁보다 경비가 더욱 삼엄한 것 같았다.
“앞으로 네 것이 될 거니 익숙해져야 한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진평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마치 평범한 물건을 건네주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에 범한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진작부터 진평평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건 눈치챘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그 모습을 본 진평평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쉬었다. 그가 한숨 쉬는 이유를 모르는 범한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봐라.”
바퀴 달린 의자가 얕은 연못가에 멈춰 섰다. 연못 물이 투명해서 안에서 헤엄치는 금빛 물고기의 모습이 보였다. 진평평은 연못을 가만히 바라보며 범한의 질문을 기다렸다.
“제가 부정행위를 폭로해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산 건 알고 있지만 곽 어사와 한 상서가 저를 건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들이 아버님과 재상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황후가 저를 건들려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질문에 진평평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비개가 범한의 어깨를 두드려 용기를 북돋아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범한이 바퀴가 달린 의자를 살며시 밀며 걸어가자 침묵하던 진평평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패를 알고 싶은 것이냐?”
“최소한 그들이 저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말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평평이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역시 신중한 아이야. 너는 네가 짐작하고 있는 일들을 황후도 알고 있을까 봐 걱정하는 거지?”
“네, 맞습니다. 제가 짐작하는 일들을 황후가 알고 있다면 저를 해치려는 것도 이해됩니다. 문제는 제가 지금 가진 힘으로는 동궁과 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들은 모두 종이호랑이일 뿐이야.”
진평평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오자 범한은 흠칫 놀라며 그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은 네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그러면서 상황을 파악할 때는 적을 얕잡아 보고 계획을 세우고 행동할 때는 적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지. 지금 네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이걸 반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황을 파악할 때 적을 지나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두려워해서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지 않느냐? 형부 법정에서 네가 무력을 써서 도망친들 누가 뭘 어쩔 수 있었겠느냐? 반대로 계획을 세워 행동할 때는 적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어. 그동안 감찰원에서 지켜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경도에서 벌써 수백 번은 죽었을 거야.”
진평평이 양손을 허벅지에 편안히 올린 채 담담히 말했다.
“동궁을 너무 두려워할 것 없다. 재상 대인과 사남 백작을 포함해 경국 안에서 진정으로 강한 세력은 없어.”
범한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무력을 가진 군부와 감찰원만이 진정으로 강한 세력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진평평이 창백한 집게손가락을 가로로 흔들었다.
“아니. 경국에서 진정한 강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단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 말입니까?”
그의 대답에 진평평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천하의 군권을 장악한 폐하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고도 백관들과 후궁들을 휘어잡을 수 있단다.”
범한이 약간은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황제께서는 참 태평하시겠습니다.”
그러자 진평평이 자신의 마른 양손을 비볐다.
“감찰원은 폐하의 것이다. 나는 그저 대신 관리하는 것뿐이지. 너도 이점을 잊지 말거라.”
범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감찰원 원장을 바라봤다. 그는 황제에 대한 진평평의 충심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검은 바퀴 달린 의자가 여러 차례 얕은 연못가를 맴돌자 헤엄치던 금색 물고기는 어지러운지 더욱 깊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한편 감찰원 관리들은 진평평과 범 제사의 친밀한 모습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뒤 진평평이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참 빨라. 그녀의 아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커버리다니.”
진평평의 말에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아들이라고?’
잠시 고민하던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의 얼굴이 궁금합니다.”
“네 어머니의 초상화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단다. 가장 뛰어난 화공이 그린 것인데 그 화공은 결국 오죽의 손에 죽임을 당했지.”
“초상화는 황궁 안에 있습니까?”
진평평은 범한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12년 전에 폐하께서 황후의 세력을 거의 다 제거했으니 동궁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범한은 경도에 피가 흐르던 그날 밤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께서 황후를 폐위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거야 황태자의 생모이고 황태후께서 총애하시기 때문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진평평이 말끝을 흐리며 웃는 듯 마는 듯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의지할 세력도 없고 멍청하기까지 한 황후를 어디서 또 찾으실 수 있겠니?”
그 말에 범한은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황제는 쉬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황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는 진평평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정체가 드러날 거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 갓난아기는 16년 전 그날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멍청한 황후가 한지유를 시켜 너를 건든 것은 단순히 2 황자와 만난 사실에 화가 나 그런 것일 뿐이다.”
순간 진평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남 백작이 너에게 황자들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말해 준 거로 아는데? 네가 2 황자와 만난 사실을 경도 귀족들이 모를 거라 생각한 것이냐?”
범한은 황후가 2 황자를 경계해 자신을 해치려 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156화
진평평이 작은 분홍색 꽃을 꺾어 조심히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꽃이 머리 위에서 흔들리다 떨어지자 범한이 진평평의 머리를 다듬은 뒤 다시 꽂아 주었다. 그러자 진평평이 즐거운 표정으로 범한의 손을 토닥였다.
“네가 경도에 와서 이렇게 성장했으니 네 어머니를 볼 면목이 서는구나.”
당시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범한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몇 분이셨나요?”
이 질문은 당연히 자신의 어머니를 따르며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 사람이 몇 명이냐는 질문이었다.
“네가 직접 세어 보아라.”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어 본 범한이 대답했다.
“여섯 명입니다.”
“그래. 너도 총명하긴 하다만 네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렸을 때 비개 대인께서도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네 어머니를 무척 그리워한다는 건 이야기하지 않았겠지. 어떻게 보면 그녀는 우리의 지도자였어.”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짐작이 가기는 합니다.”
“그래. 항상 너를 지키기 위해 사남 백작과 백작가가 헌신했다는 걸 잊지 말고 감사하도록 해라.”
진평평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범한은 두 눈을 감고 생각했다. 위험천만했던 그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분명 많은 것을 내주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당시 황실 사람들이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자신은 살 수 없었을지 모른다.
“장 공주는 불쌍한 여자일 뿐이야. 그녀는 평생 아가씨의 광채에 가려져 살아야 했어. 경국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항상 네 어머니에게 가려져 폐하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그렇게 무시당했으니 질투에 눈이 멀어 미쳐 버린 것도 이상할 게 없지. 진짜 적은…… 아니다. 진짜 적 같은 건 없어. 그런 건…….”
담담히 말하던 진평평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다 고개를 저었다.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것 같았다. 한참을 혼자 중얼거리던 진평평이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먼저 감찰원을 장악한 뒤 황실 금고를 차지하면 누군가는 심상치 않음을 눈치챌 거야.”
“제가 뭘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진평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권력을 가진 신하가 되고 싶지 않으냐?”
범한이 침착한 눈빛으로 진평평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대인께서 저를 통해서 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자 진평평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든 네가 계속 모르는 척해 주기를 바란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비록 그들과 친분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는 건 원치 않습니다.”
“성급한 생각이구나. 피는 다른 사람의 목덜미를 노리면서 정작 자신의 목덜미는 조심하지 않는 멍청한 사람들이나 흘리는 것이다. 본인이 조심하지 않는 걸 네가 어쩌겠다는 거냐?”
그 말에 범한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노인을 존경하고 신뢰했지만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 싶었다. 경도에서 감찰원 원장이 몰래 자신의 일을 도와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먼저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동할 생각이었다.
진평평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을 흔들었다.
“이제는 한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높은 곳에 서는 법도 배워야 해.”
“설마 천하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보다 더 높은 곳을 봐야 할 거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범한이 멍하니 서 있자 진평평이 말했다.
“이만 가보도록 해라. 북제에 가서는 조심하도록 하고.”
그러고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다가 머리에 꽂은 분홍색 꽃을 뽑아 손으로 짓이겼다.
“소은을 죽이기 전에 먼저 너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거라. 그리고 다른 세 가지 임무는 요령껏 알아서 하도록 해. 만약 상황이 허락한다면 신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신묘와 접촉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는 북제 고하 국사가 유일하니까.”
“신묘까지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보겠습니다.”
진평평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도 모험을 즐기셨지. 나는 네가 북제에 가서 죽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단다. 오죽이 몇 년간 너를 가르쳤는데도 북제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무척 실망스러울 거야.”
그의 메마른 손가락 사이로 분홍색 꽃잎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은은한 미소를 띤 그가 범한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이렇게 어린데 진정한 적과 대적할 수 있을까?’
* * *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진평평을 만나 대화를 나눈 범한은 이후 언약해를 만나 임무와 관련된 자료를 건네받았다. 자료 안에 담긴 북제의 상황은 상당히 복잡했다. 진평평은 이번 임무에 성공해 범한이 감찰원을 장악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만일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에게 목숨을 걸고 낯선 타국에 가라고 등 떠밀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정말 가고 싶었다.
이전 세계에서 병약한 몸에 갇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고 이번 세계에서는 남들과 다른 처지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북제에 가서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다. 그는 언약해가 알려 주는 북제에 가서 주의해야 할 부분과 조심해야 할 사람들을 머릿속에 깊이 넣어 두었다.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는 범한의 모습에 언약해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범한이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북제는 항상 정세가 불안정합니다. 황태후는 너무 젊고 황제는 너무 어린 탓이지요. 하지만 작년 전쟁 이후 북제 수도는 많이 안정되었다고 하더군요. 제사 대인이 조심해야 할 사람은 세 명입니다. 하도인, 삼호 그리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하 국사입니다.”
“무슨 도인이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는 도교가 없는데 어떻게 도인이 있을 수 있지?’
범한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언약해가 계속 말했다.
“하도인은 후당 쪽에 있는 무공 고수로 범 제사께서 작년에 죽인 정거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상삼호는 북제에서 보기 드문 용맹한 장수로 북쪽 설원에서 오랑캐들을 막고 있습니다. 작년에 북제가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젊은 황제가 그를 수도로 불러들였다고 하니 이번에 북제에 가시면 모쪼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하 국사는 4대 종사 중 한 명으로 속세 일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설명하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히 말했다.
“고하의 마지막 제자가 올해 정식으로 수련을 끝내고 세상에 나왔다고 합니다. 제사 대인께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니 괜히 그와 얽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멍한 표정을 짓던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이전 세계 소설에서 여자 무예 고수가 실력을 숨기고 기녀로 살아가는 내용을 떠올리고는 씁쓸히 웃으며 물었다.
“설마 여자는 아니겠죠?”
언약해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릅니다. 아는 건 대종사의 마지막 제자가 최근 3개월 동안 북제 전역을 돌면서 무수히 많은 고수를 쓰러뜨렸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가 전설에 나오는 하늘의 자손이란 말까지 돌고 있습니다.”
그가 범한을 힐끗 보고는 물었다.
“제사 대인께서는 하늘의 자손에 대해 아십니까?”
그 말을 들은 범한의 머릿속에 순간 어린 시절 비개가 자신에게 ‘하늘의 자손’에 대해 말해 주던 게 생각났다. 더구나 광신궁에 잠입해 장 공주와 장묵한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도 들었었다.
언약해의 설명을 모두 들은 범한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5백 년 만에 한 번씩 세상에 내려오는 하늘의 자손이라…… 저는 그런 말은 믿지 않습니다.”
언약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원에서도 연이어 전쟁에서 패배한 북제가 백성들의 믿음을 단결시키기 위해 절대 강자가 자국에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더 가능성 있네요. 감찰원에서도 제가 제사인 걸 이용해 민심을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 마지막 제자는 이름이 뭔가요?”
“해당타타입니다.”
“다소 여자 이름 같지만 남자였으면 좋겠군요.”
범한을 바라보는 언약해의 눈가 주름이 힘없이 처져 있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제 아들 때문에 범 제사께서 고생이시군요.”
“형부에서 나갈 때 말하지 않았습니까. 반드시 언 공자를 무사히 데려오겠다고요.”
* * *
감찰원 4처 방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왕계년이 급히 뛰어와 범한의 손에 들려 있던 문서를 받아 들었다. 멀리 앞을 바라보던 범한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북제에 갈 때 대인을 데려갈 생각입니다.”
“범 제사에게 신임을 받은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왕계년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사신을 공격하는 나라는 없으니 다른 계획만 없다면 편안하게 북제에 다녀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범한이 웃었다.
“대인을 데려가는 이유는 종추 대인 다음으로 감찰원에서 발이 가장 빨라 미행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왕계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전에 종추를 만났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가 종추를 찾아가 한나절 정도 대화를 나눴을 때 종추는 과거 감찰원에서 추격자로 이름을 나란히 했던 왕계년이 문서 업무를 하며 별 볼 일 없이 지내는 것에 우울해했다. 그러던 중 왕계년이 범한의 심복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오랜 벗이 이전의 영광을 되찾았다고 뛸 듯이 기뻐했던 것이다.
한편 3처의 령 수령은 밀실 앞에서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한이 다가오자 그가 아무 말 없이 밀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갑작스럽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난데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놀란 범한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공기가 흐르는 걸 보았다. 그러고는 독약을 제조하는 곳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령 수령이 범한을 힐끗 쳐다보고는 헤벌쭉 웃었다.
“몸매가 좋군요.”
그 말에 범한은 왠지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령 수령의 기쁨에 겨운 외침이 들렸다.
“딱 맞겠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범한의 눈에 탁자를 밀고 있는 대여섯 명의 사람이 보였다. 탁자 위에는 상자 몇 개와 이상한 재질로 만든 옷이 놓여 있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범한을 바라봤다. 한결같이 무표정한 표정인 게 아무래도 3처에서 오랜 시간 근무하면서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범한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던 그들이 감격한 눈빛으로 말했다.
“몸매가 정말 좋으시군요.”
감찰원 3처 사람들이 몸매가 좋다고 칭찬한 것은 자신들이 연구 제작한 옷을 시험하기에 딱 적합한 몸매였기 때문이었다.
옷을 입은 범한은 속으로 과거 비개가 자신의 침실에 들어왔을 때 이런 재질의 옷을 입고 있던 걸 떠올렸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령 책임자가 말했다.
“불을 막고 예리한 무기의 공격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옷입니다. 하지만 만약 상대방이 개산부와 같이 산을 가를 정도의 위협을 가진 무기를 들고 있다면 위험하니 피해야 합니다.”
범한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폈다. 경도에서 가장 유행하는 양식에 따라 만든 옷으로 뒤에는 모자도 숨겨져 있었다.
“암살 쇠뇌는 이리 내놓으십시오.”
령 책임자가 그의 왼손 팔뚝에 감추어진 암살 쇠뇌를 보고는 말했다.
그 말에 범한은 한숨을 쉬며 4, 5년 동안 가지고 다니던 암살 쇠뇌를 마지못해 탁자에 올려놓았다.
령 책임자가 그의 팔뚝을 보더니 탁자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어 전체가 검게 칠해진 작은 모양의 암살 쇠뇌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의 소매 안에 넣어 맞는지 확인하고는 물었다.
“7년 전에나 사용하던 낡은 물건을 아직도 가지고 다녔습니까?”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직 쓸 만해서 괜찮았습니다.”
령 책임자가 새로운 암살 쇠뇌의 구조와 발사 원리를 설명했다.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지만 크기가 작아서 세 발밖에는 장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화살의 표면에는 갑 4호 독약이 발라져 있습니다. 갑 4호 독약이 뭔지는 아시겠지요?”
갑 4호 독약은 노란 박에서 추출한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새끼손가락으로 방아쇠의 민감도를 확인하던 범한이 물었다.
“세 장 정도 거리에서 쏠 수 있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한 장 정도 거리에서는 가능한데 세 장 거리에서는 눈이나 목, 음낭 같은 부위를 조준해 맞힐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대인께서 사용하시는 비수는 비개 대인께서 무척이나 아끼시는 무기입니다. 칼날이 무척이나 예리해서 다른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겠군요. 저희가 이것 말고도 다른 무기와 도구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보시고 이번 임무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보십시오.”
범한은 탁자에 놓인 물건들을 신중하게 살펴보다가 몇 가지 물건을 골랐다. 다만 벽을 쉽게 오르게 해주는 쇠갈고리 장갑은 선택하지 않았다.
157화
3처 관리 중 한 명이 말했다.
“소신이 비록 제사 대인이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북제 황궁에 잠입해야 할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북제 황궁의 담장도 경국 황궁 못지않게 높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범한은 아무런 설명 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 세계에서 자신만큼 벽을 잘 타는 사람도 없었다.
“비개 대인께서 제사가 3처 사람들보다 독약 제조를 잘한다고 해서 독약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범한의 장비를 꼼꼼히 점검하던 령 책임자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범한이 군침을 삼켰다.
“재료가 부족해서 독약 제조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재료가 부족하십니까?”
“고양이 매듭과 비석, 마전자, 남해장이 부족합니다.”
“고양이 매듭은 쓴맛이 강해서 이번 임무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석과 마전자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입니다.”
“사람들 이목을 끌 수 있는 처지다 보니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 가라방을 쓰심이 어떠합니까? 스승님께서 재작년에 시험하셨는데 마전자보다 마취 효과가 좋았습니다.”
령 책임자가 신난 목소리로 말하자 범한도 같이 신이 나서 말했다.
“하지만 비석은 꼭 필요합니다. 제가 담주에 있을 때 시험해 봤는데 비석이 화살촉에 바른 독약보다 효과가 빨랐거든요.”
관심 분야인 독약 이야기가 나오자 두 사람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옆에 있던 관리들도 똑같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함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토론 주제는 가장 느리게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 무엇인지, 가장 고통스럽게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 무엇인지부터 과부의 정조를 무너뜨릴 만큼 효과가 좋은 춘약은 무엇인지까지 다양했다.
과연 유명한 감찰원 3처답게 변태들만 모여 있었다.
3처를 나온 범한은 양 볼이 발그스름한 것이 평소와 다르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왕계년은 속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범한이 행복에 겨운 얼굴로 헤벌쭉 웃었다.
“매일 인재 소리를 들으며 얌전하게 지내다 이렇게 실용적인 기술에 관한 대화를 나누니 정말 즐겁군요.”
그때 찻잔을 든 채 복도 끝에 서서 자신의 젊은 제자를 바라보던 비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럼 3처에서 머무는 게 어떠냐? 북제에도 가지 말고, 벼슬에도 오르지 말고, 황실 금고도 받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3처에서 지낼 생각은 없냐?”
범한은 비개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하고 싶은 게 분명하지 않았냐?”
비개가 혼탁한 갈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도에 와서 마음은 더 단단해진 것 같다만 권력을 맛보면 쉽게 길을 잃을 수 있단다. 지금도 어렸을 때처럼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느냐?”
범한이 한동안 머뭇거리다 공손히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비개가 껄껄 웃었다.
“정말 그 길을 가고 싶다면 아무런 가책 없이 사람을 죽일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죽이는 걸 즐길 줄 알아야 해.”
범한이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저도 변태스럽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비개가 피곤해 보이는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헛기침을 했다.
“네가 변태가 아니라면 어떻게 변태스러운 세상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
비개 앞에 서 있으니 범한은 자침을 들고 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즐겁게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 아까 원장 대인께서는 왜 저를 보고 한숨을 쉰 겁니까?”
“그건 네가 아가씨처럼…… 담력이 세지 않아 실망스러운 게지.”
대화가 끝나자 그는 스승 비개와 함께 거나하게 마실 생각에 일석거로 향했다. 이제 자신과 감찰원의 관계를 경도 사람 모두가 알았으니 비개와 함께 다녀도 문제가 없었다. 무거운 문서 더미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따라가던 왕계년은 자신의 손에 극비 자료가 들려 있음을 알았기에 일석거에 같이 갈 수 없었다. 그는 수하의 밀정들을 불러 경계를 세운 뒤 마차를 타고 백작가로 향했다.
* * *
어두운 얼굴로 동궁 안에 앉아 있던 황태자는 손이 떨릴 정도로 세게 술잔을 움켜쥐었다. 한참을 씩씩대던 그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왜 동궁에 있는 여자들은 주제를 모르는 걸까?”
오늘 황태자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태상사 신 소경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요 며칠간 발생한 일로 동궁 사람들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항상 온화하던 태부 대인까지도 불같이 화를 낼 정도였다.
그래도 동궁의 손해가 크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부정행위에 연루된 관리 중에서 동궁과 관련된 사람은 극소수였다. 비록 예부 상서 곽유지가 감옥에 갇히긴 했지만 어차피 황태자 사람은 아니므로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황태자는 지난번 연회에서 곽보곤이 다른 사람 편에 서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이후 곽씨 일가가 장 공주 편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범한이 곽유지를 실각시킨 데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고소했다.
“범한이 감찰원 제사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신기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범한과 여러 차례 술을 마시면서도 한 번도 감찰원 고위직에 있을 거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젊은 청년이 감찰원 제사일 거란 상상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이승건이 고개를 저으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범한은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오. 자신의 소임을 다 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폭로한 것이니 미리 동궁에 알리지 않은 것도 일리가 있소. 더구나 동궁의 체면을 많이 생각해 이번 일을 처리하였고, 일이 터지고 난 뒤에는 완아를 입궁시켜 직접 쓴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소. 그러니 나는 그가 동궁을 공격하려 일을 꾸몄다고 보지는 않소.”
신 소경은 범한과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내심 동궁이 그를 도와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에 황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습니다. 범 제사가 비록 사전에 알리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충분한 해명을 하였습니다. 다만…… 범 제사가 곧 북제로 떠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소신이 시간을 봐서 저하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습니다.”
황태자가 콧방귀를 뀌며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남을 주선한들 형부에서 있었던 일로 말이 많은 상황에서 범한이 나를 믿어 주겠소? 재상과 사남 백작이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나와 한지유의 관계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오. 솔직히 나는 백작가의 분노가 동궁에까지 미칠까 두렵소.”
황태자가 화를 내자 신 소경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황태자가 이번 일을 신중하게 처리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동궁의 주인이 두 명이라는 데 있었다.
두 사람이 답답한 표정으로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태감의 고성이 들렸다.
“황후께서 오셨다!”
놀란 신 소경이 재빨리 황태자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당부를 하고는 한쪽에 엎드려 황후에게 예를 취한 뒤 동궁전을 뒤로했다.
황후가 아무 말 없이 아들을 바라봤다. 황태자도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황후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실망과 슬픔이 뒤섞인 눈빛을 짓더니 한쪽 손을 들어 내리쳤다.
황후의 손찌검을 피한 황태자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차갑게 노려봤다. 겁이 많은 황태자에게 이런 날카로운 눈빛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황후는 놀라 몸을 떨었다. 그녀가 아들의 손을 뿌리쳤다.
“이 어미가 잘못한 거라 말하고 싶은 겁니까?”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자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러자 황후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범한이 2 황자와 유정강 놀잇배에서 만난 걸 모르십니까?”
황태자가 고개를 들어 황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후마마께서는 이 일을 제게 맡기실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시로 명성을 떨친 범한이 둘째 형님을 만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황후는 씩씩대면서도 겁을 먹은 황태자에게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그런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마마께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시면 제 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형님들에게 가버릴 것입니다.”
황후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나는 여전히 한 나라의 국모입니다. 이런 내가 말직 관리를 좀 혼냈다고 원망하는 것입니까?”
황태자가 비꼬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황후마마께서는 그날 한지유 상서를 움직여 범한을 건드려서는 안 됐습니다. 범한을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뭣 하러 백작가와 재상가에 미움을 산 것입니까? 며칠 뒤에 한 상서를 조정에서 내쫓을 생각입니다. 가뜩이나 동궁 편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없는 상황인데, 마마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편까지 쳐내게 된 것입니다.”
“한지유는 명을 받들어 법률에 따라 일을 진행한 것뿐인데 재상가와 백작가가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동궁에서 그를 보호한다면 폐하께서도 황태자의 체면을 봐서라도 함부로 내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부황께서 감찰원 제사인 범한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황태자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한지유는 이번에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회시 부정행위를 밝히라는 건 부황의 뜻이었지 않습니까. 그런 부황의 뜻을 거스른 사람을 동궁에서 어찌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황후가 냉소를 지었다.
“이번 일로 대신들이 범한을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게다가 그 일에는 도찰원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전하의 고모가 현재 신양에 계시기는 하지만 고모를 따르는 세력은 여전히 조정에 남아 있습니다.”
“고모를 끌어들이지 마세요.”
황태자가 역겹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2년 동안 고모께서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르셨어요. 게다가 북제와 결탁해 경국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습니까. 도찰원에 있는 곽정 어사는 고모가 잠시 데리고 놀던 사람일 뿐입니다. 그가 감찰원에게 암살을 당해도 고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실걸요.”
비록 몇 년 동안 장 공주와 동궁의 사이가 가까웠으나 범한의 글 종이가 눈송이처럼 경도 전체에 뿌려진 이후 황태자는 장 공주를 멀리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장 공주를 멀리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황후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의지할 사람은 장 공주뿐입니다.”
“동궁은 부황에게 의지할 것입니다.”
황태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그는 유약한 모습을 버리고 황실 자제로서 정치적 판단 능력을 갖춘 것 같았다.
그러자 황후가 두 눈을 감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범한이 싫습니다. 반드시 그를 죽일 방법을 찾아낼 생각입니다.”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황태자가 힘껏 탁자를 내리치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죽인다고요? 범한이 신아의 남편인 걸 잊은 겁니까! 제발 고모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마세요. 고모는 미쳤습니다. 미쳤다고요. 고모처럼 미쳐서 황궁에서 쫓겨나고 싶으신 겁니까?”
그 말에 발끈한 황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으로 황태자의 코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네가 뭘 안다고, 어?! 네가…… 네가 뭘 아는데!”
아마도 황태자의 말이 황후의 마음속에 있는 오래된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태감과 궁녀들은 일찌감치 멀리 숨어 버렸기에 동궁 안에는 황후와 황태자만이 남아 있었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쇠약한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자 황태자가 급히 일어나 부축했다.
황후가 슬픈 눈빛으로 자기 아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주름이 지더니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대 왕조를 보면 황태자는 힘든 자리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해요. 어미의 집안에는 지켜 줄 사람이 없습니다. 전하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12년 전에 일어난 동란을 어미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저하가 자신의 것을 쟁취하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저하의 것을 모두 뺏어가 버릴 거예요.”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던 황태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소자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황후마마께서는 궁에 돌아가 쉬세요.”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저하는 모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요 며칠 동안 계속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어요. 과거 그녀가 경도에 왔을 때처럼…….”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황태자가 궁금증에 물었다.
바로 그때 동궁의 육중한 문이 활짝 열렸다.
“누구냐?”
놀란 황태자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등이 굽은 늙은 태감이 안으로 들어와 공손히 말했다.
“소신 홍사상, 명을 받아 왔습니다. 황태후께서 황후마마와 함께 함광전에서 담소를 나누길 바라십니다.”
그 말에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황후가 돌연 표정을 바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홍 태감을 따라 황궁의 진정한 여주인이 있는 궁으로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홍 태감의 무례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태후의 측근인 그를 함부로 건들 수는 없었다.
황궁 안이 점차 어두워졌다. 황태자 이승건은 형부에서 있었던 황당한 일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기분이 울적해졌다. 정말이지 황후가 장 공주의 말에 휘둘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순간 고모의 아름다운 얼굴을 생각한 그는 부끄러우면서도 강렬한 욕정에 사로잡혔다.
그가 동궁 안쪽으로 들어가고 얼마 뒤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궁녀의 옷을 목덜미까지 올려 얼굴을 가리자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쾌락에 휩싸이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을 떠올리며 자신의 멍청한 수단을 굳이 왜 뽐내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58화
꽃이 만개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화창한 봄날, 양만리를 비롯한 네 사람은 범한과 함께 봄바람을 즐기기 위해 백작가를 찾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범한은 집에 없었다. 더욱이 범한이 어떤 임무를 위해서 내일 북제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자 더욱 머리가 아파 왔다.
이갑 진사는 한림에 들어갈 수 없었고 옛날 규정에 따라 지방 어느 곳의 관직을 맡아야 했다. 이부가 파견을 시작하자 사천립을 제외한 세 사람은 범한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세 사람은 범한 덕분에 회시에 합격했으니 이번에도 조언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범한이 남긴 편지 두 통이 전부였다. 한 통은 곧 경도를 떠나야 하는 세 명의 신임 관리에게 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향에 돌아가 다시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사천립에게 남긴 것이었다.
백작가 서재에 앉은 네 사람은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차를 홀짝이며 급히 편지를 뜯어 봤다.
후계상을 비롯한 세 명에게 남긴 편지에는 한 줄만 달랑 적혀 있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관리가 되시게.
그리고 편지지 끝에는 후계상에게 보내는 당부가 있었다.
-계상은 아내를 너무 무서워하지 마시게.
범한은 썰렁한 농담을 한 것이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세 사람은 첫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관리가 되라고?’
세 사람은 문장을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좋은 관리가 되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들은 이 문장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첫 번째 편지를 보고 나자 양만리는 사천립에게 남긴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했다. 사실 네 사람 중에서 장래가 불투명한 사람은 사천립뿐이었다.
세 사람의 눈빛에 사천립이 떨리는 표정으로 편지를 열었다. 편지지를 바라본 그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거기에는 ‘기다리게.’라는 말만 적혀 있었다.
* * *
한편으로 범한은 자신의 근거지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허리끈을 쓰다듬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비개가 자신에게 준 환약이 만져지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시 비개는 몸속 난폭한 정기에 문제가 생기면 이 환약을 먹고 목숨을 부지하라고 말했었다. 이후 경도에 오고 난 뒤 난폭한 정기가 줄곧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 환약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낮에 장비를 정리하던 중 비로소 환약을 기억해 냈지만 몇 년이 지난 뒤에도 효과가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왕계년이 의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이미 찾았습니다. 닮기도 닮았지만 제사 대인께서 분장을 잘하시니 조금만 꾸민다면 일반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요? 외모가 닮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한 달 동안 가꾸면 피부 색깔도 비슷해질 텐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입니까?”
왕계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멍청한 남자 중에서 가까스로 대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을 찾기는 했는데, 인품과 문장력까지 겸비한 사람으로 꾸밀 자신은 없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있던 범한이 의미를 이해하고는 웃었다.
“갈수록 아첨하는 솜씨가 느는군요.”
저택에 돌아온 범한은 양만리를 비롯한 네 명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동복 객잔에서 말했듯이 그들이 백성을 위하는 좋은 관리가 돼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만이었다. 그는 자신은 비록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문하생 중에서 그런 인물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별이 다가오자 그는 누이인 범약약과 아무 말 없이 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사철에게 비자금 마련하는 문제에 대해 당부했다. 그런 뒤 사남 백작과 유씨 부인에게 인사한 뒤 침실로 돌아왔다.
옷을 벗고 침대에 오른 그가 불쌍한 자신의 아내를 위로하려는 순간 대보가 방 안에 있는 걸 발견했다.
웃으며 대보와 이야기하는 범안을 임완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인내심을 가지고 대보와 대화를 나누는 게 신기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대보와 어깨동무를 한 범한이 헤벌쭉 웃으며 큰 소리로 종을 불렀다. 종이 대보를 데리고 가자 임완아가 물었다.
“오라버니랑 무슨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불을 덮은 채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게 자신의 오라버니를 질투하는 것 같았다. 이불 밖으로 삐죽 나온 하얀 발이 유달리 사랑스러워 보였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앉아서는 아내의 발을 주물렀다.
“내가 경도에 없어 놀아 주지 못한다고 하니까 얌전히 있겠다고 하더라고요.”
발바닥 가운데를 꾹 누르자 임완아의 눈처럼 하얀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귀까지 빨개졌다. 그녀가 발을 오므리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일러요.”
그러자 범한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혀 이르지 않아요. 게다가 내일은 떠나는 날이니까 이를수록 좋죠.”
“그러고 보니 낮에 아버님께 갔다 왔나요?”
밖에서는 점잖게 행동하면서 침실에만 들어오면 음란해지는 남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던 임완아가 화제를 바꿨다. 하지만 범한은 이미 이런 수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장인어른께 욕 한 바가지 먹고 왔어요. 회시 부정행위 때문에 야단맞고 또 북제 사신으로 가는 일에 대해 아버님과 장인어른의 계획에 따르지 않았다고 야단 먹었어요.”
낮에 재상가를 방문한 그는 장인어른이 걱정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녀의 발을 만지던 범한의 손이 점차 위로 올라가 부드러운 곳을 움켜잡자 임완아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 * *
부부가 나란히 누워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게 꼭 경묘에서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달콤한 시간을 보내던 범한은 순간 북제의 대종사 고하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신묘가 생각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기분이 가라앉는 걸 알아챈 임완아가 품에 안기며 물었다.
“내일 떠나는 분이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임완아의 머리카락이 가슴을 간지럽히자 범한은 미소를 지으면서 음흉한 눈빛으로 머리 너머 보들보들한 젖가슴을 바라봤다.
한편 임완아는 여자들보다도 아름다운 범한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음탕한 표정을 짓는 거야.’
그러고는 범한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그녀는 입고 있던 침의가 이미 허리 부분까지 내려가 상반신이 드러나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부끄러워 소리를 지르면서 잽싸게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부부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다고 숨는 거예요.”
범한이 짐짓 화난 척 이야기하자 이불 안에 들어가 있던 임완아가 얼굴 절반을 내밀었다. 쭈뼛대며 남편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작은 목소리로 뭐라 말했다.
입술을 가리고 말해서 범한이 못 알아듣자 임완아는 하얀 발가락을 드러내며 발을 동동 구른 뒤 이불 밖으로 입술을 내놓았다. 마침 검은색 머리카락이 입술에 붙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상공이 지난번에 그…… 신…… 신비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관능적인 모습에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불을 확 젖히고는 아내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임완아는 호수 같은 두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돌아오세요.”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임완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범한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니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 * *
다음 날 범한이 이전에 만난 적 있는 간수가 감찰원 감옥 밖에 서 있었다. 과거 감찰원 수장 중 한 명이었던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철문 밖에서 범한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범한은 순간 그의 눈빛에 불안감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챘다.
주변에는 이미 감찰원 밀정과 6처 검사가 포진되어 있었고 몇 대의 마차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범한은 마차에서 대략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감찰원 사람들을 바라봤다. 철판을 끼워 특수 제작한 마차에는 주변 상황에 겁을 먹지 않도록 훈련된 말들이 묶여 있었다.
감옥 밖 분위기가 이렇게 긴장된 것은 안에서 나올 사람 때문이었다.
북위 밀정의 수장이었던 소은은 과거 무수히 많은 근위병을 이끌고 천하를 종횡무진하며 적국 안에 밀정을 심어 넣은 사람이었다. 특히나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탁월했던 그는 악랄한 방법을 써서 수많은 나라를 무너뜨렸다. 그러니 그가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죽인 사람을 쌓으면 시체가 산이 될 만큼 많을 것이었다.
당시 북위 황제는 문신으로는 장묵한, 무신으로는 전청풍을 가장 신뢰했지만 실제로 나라 기둥을 지탱한 사람은 어두운 곳에 숨어 활약하는 소은이었다.
천하가 어지럽던 시기 소은은 주변국들을 제거해 영토를 넓혔는데 이게 도리어 경국이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경국이 점차 성장하자 소은의 검은 손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국은 개국 황제가 서거할 무렵 두 친왕이 대립해 조정이 어지러웠다. 이것은 모두 소은이 배후에서 조종한 결과였다. 더구나 북위 기마병들은 두 친왕 중 누군가가 황위를 차지하면 경국을 공격할 생각으로 남쪽을 주시하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겼다. 섭경미란 여자가 검은 상자를 멘 장님 종을 데리고 경도로 온 것이다.
이후 두 친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지금 황제의 부친인 성왕 폐하가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경국은 별다른 국력 손실 없이 서서히 안정을 찾았고 북위는 공격할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바로 이때 진평평이란 사람이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성왕가의 종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왕 세자에게 신임을 받으면서 평생을 충성하며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구인 감찰원이 설립되자 진평평은 줄곧 원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감찰원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감찰원 뒤에 섭가의 여주인이 있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진평평이 날이 갈수록 악랄한 수단을 사용하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드러낸다는 것뿐이었다.
두 첩보 기관으로 인해 사이가 경직된 북위와 경국은 상대국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해에 경국이 첫 번째 북벌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행동이었고 경국은 북위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당시 황태자였던 지금의 황제는 전청풍의 정예 기병과 소은의 기밀한 첩보망에 밀려 연거푸 패배하면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진평평은 흑기들과 함께 가까스로 혈로를 뚫어 황태자를 구했다. 동시에 그는 북위 수도에 잠복해 있는 밀정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고관들을 매수해 전청풍을 모함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황태자를 가까스로 구하기는 했지만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물과 식량마저 부족한 지경에 처하게 되자 당시 젊고 건강했던 진평평은 황태자에게 물과 식량을 모두 넘긴 뒤 자신은 말의 오줌과 풀뿌리를 먹으며 버텼다. 마침내 경도에 돌아왔을 때 진평평의 흑기들은 기존의 10분의 1 정도만 남아 있었다.
더구나 당시 중상을 입은 황태자는 동이성 여자 포로의 간호 덕분에 회복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녀가 1 황자의 생모인 영 재인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은 진평평이 무슨 음모를 꾸며 정청풍이 북위 황제의 신임을 잃게 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진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경국의 황태후도 진실은 알지 못했다. 다만 몇몇 사람들만이 북위 황후의 사적인 일과 관련 있다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부터 진평평은 황제 폐하와 황태자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고 동시에 천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북쪽에는 소은이 있고, 남쪽에는 진평평이 있다.
얼마 뒤 기름을 바른 육중한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순간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면서 문밖을 지키고 있던 감찰원 관리들이 뻣뻣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약간 숙인 범한의 왼쪽 눈꺼풀이 두어 번 가늘게 떨렸다. 그는 감옥 안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20여 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칠팔십 노인이 되었음에도 소은은 여전히 밀정 수장다운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안에 있는 사람이 철문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철문을 바라봤다. 2차 북벌이 있던 무렵 흑기들을 이끌고 고향에 내려간 소은을 잡은 진평평도 강자였지만, 그의 두 다리를 잃게 만든 소은도 만만치 않은 강자였다.
소은이 포로로 잡힌 뒤 경국은 두 차례 북벌을 단행했고 마지막 3차 북벌에서 위태롭던 북위를 결국 분열시켰다. 이후 북위 절도사였던 전씨 집안은 북위의 힘과 남아 있던 영토를 넘겨받아 지금의 북제를 세웠다.
159화
봄날 햇볕이 감옥 밖에 서 있는 나무를 지나 철문을 비추자 햇볕이 만들어 낸 알록달록한 얼룩이 감옥 문과 창백한 노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쇠사슬이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뚝 끊어지더니 노인의 힘없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철문 밖에 있는 감찰원 6처 소속 네 명의 검수가 긴장한 표정으로 쇠사슬을 꽉 움켜쥐었다. 쇠사슬 중앙에 묶여 있는 노인은 산발에 손목과 발목에는 강철 수갑을 차고 있었다. 다만 입은 옷만은 최근에 빨았는지 상당히 깨끗했다.
노인이 백발 아래 마른 입술을 벌리고는 한숨 쉬며 말했다.
“햇빛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20년간 투옥되어 있던 소은이 나오자 왠지 공기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그의 호위를 책임진 감찰원 관리들은 더욱 긴장되었다. 모두가 허리에 찬 검을 꽉 움켜쥔 채 등이 굽은 노인을 바라봤다.
바로 그때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7처 전임 수장이었던 간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소은의 등을 때렸다.
소은은 아무런 느낌이 없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7처 전임 책임자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한숨에 산발이 날리면서 그윽한 두 눈동자가 보였다. 마른 입술이 벌어지면서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20여 년 동안 함께 지냈던 사람을 이런 식으로 배웅해 주는 건가?”
7처 전임 수장은 나무 몽둥이를 내리고는 소은의 두 눈동자가 무서운지 힘껏 심호흡했다.
“내 후배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내 후배들이 실수로 자네를 죽이는 건 원치 않을 텐데.”
그러자 소은이 천천히 눈을 들어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아름다운 청년을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범한은 정기를 운용해 마음을 진정시킨 뒤 미소를 지었다.
소은은 나이에 맞지 않는 범한의 침착한 모습에 놀란 듯 고개를 저으며 간수에게 말했다.
“내가 경국을 떠나면 자네도 감옥에 머무를 필요가 없겠군. 자네는 분명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나는 20년 동안 자네에게 받은 걸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네.”
간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잘 가고 영원히 돌아오지 마시게.”
그러자 소은이 간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네. 그리고 자네가 나를 고문했던 방식 그대로 자네의 자식들에게 해줄 거야.”
간수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는 북제로 돌아가 힘을 회복한 소은이 자신에게 보복한다면 가족을 보호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은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웃었다. 그의 몸을 묶고 있는 무거운 쇠사슬이 흔들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자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잔뜩 긴장해 있는 감찰원 사람들과 함께 소은의 원망 섞인 웃음소리를 듣던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했다. 장 공주가 소은을 풀어 주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었다.
감찰원 감옥 밖에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로 그때 비개가 진평평이 앉은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다가왔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는 은은한 범종 소리처럼 사람들의 긴장감을 거둬 주었다. 원장 대인이 다가오자 감찰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감찰원 사람들이 소은을 보고 긴장하는 이유는 전설적인 인물이 감옥을 나오면 무슨 일을 할지 몰라서였다.
그리고 진평평의 등장으로 안심하는 이유는 그가 있는 한 소은이 함부로 날뛰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평평이 고개를 돌려 쇠사슬에 묶여 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뭐가 그리 좋길래 웃는 건가?”
“내 두 손으로 망가뜨린 자네의 다리를 보고 웃는 게지.”
진평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보기에 자네는 자신의 비참한 인생을 비웃는 것 같은데. 자네가 20년 동안 갇혀 있었다는 게 뭘 의미하는 줄 아나? 바로 내가 승리했고, 자네가 패배했다는 뜻이네. 역사에 이미 정해진 사실을 바꿀 수는 없을 거야.”
소은이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분노의 괴성을 질렀다. 그가 두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자 6처 검수들이 있는 힘껏 쇠사슬을 잡아당겨 그를 붙잡았다. 순간 두 힘이 충돌하면서 사방에 먼지가 일었다.
진평평이 불쌍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성질은 여전히 괄괄하구먼.”
소은이 두 눈을 감은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두 눈을 뜨고는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평평, 정말 나를 놓아줄 건가?”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돌아가서 남은 시간 편하게 보내시게. 나도 이제는 팔다리가 시큰거려서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자네를 잡지 못하네.”
“혼인날 내 아들도 자네 부하에게 죽었으니 자네는 더는 나를 잡을 수 없을 거야.”
쇠약한 것 같으면서도 예리할 칼처럼 날카로운 소은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울렸다.
진평평이 손짓하자 범한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그는 소은의 무서운 기운을 느끼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미 늙은 마당에 뭘 할 수 있다고 그러나. 만일 자네를 다시 잡아야 한다면…….”
진평평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는 내 후계자인 범한일세. 자네가 적적하지 않도록 이번에 같이 갈 거야.”
소은이 몸을 살짝 돌리자 손과 발에 묶여 있는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봤다. 그때 범한은 그의 눈동자에 담긴 원망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바퀴 달리 의자 뒤에 서 있던 비개가 웃으며 말했다.
“소은 대인, 그날 혼인식에서 독약을 탄 사람은 저입니다. 그러고 보니 참 공교롭게도 저의 제자와 함께 가시게 되셨군요.”
진평평과 비개가 동시에 미소를 짓자 범한이 말했다.
“앞으로는 제가 소은 대인과 함께할 것입니다.”
소은이 껄껄 웃었다. 즐거움보다는 살기가 묻어나는 웃음소리였다. 그는 자신을 북으로 데리고 갈 젊은 청년이 자신에게 최대의 패배를 안긴 두 사람과 밀접한 관계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범한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렇게 어려서 여정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범한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인께서 잘 가르쳐 주십시오.”
* * *
옥처럼 푸릇푸릇한 풀들과 나뭇가지 사이를 마차 대열이 조용히 지나갔다. 감찰원 감옥을 떠난 마차 대열이 천하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이미 관아에서 관문을 설치해 길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저 각 부분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과 처마 위에서 마차 행렬을 주시하는 감찰원 6처 궁수들만 있을 뿐이었다.
황궁의 닫힌 측문에서 멀리 마차 행렬을 보고 있던 궁전이 말했다.
“범한은 정말 대단하군.”
옆에 있던 장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인 뭐라고 하셨습니까?”
궁전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자네들은 소은을 상대해 본 적이 없으니 저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겠지. 범한은 황실의 외척이자 천하에 명성을 날린 인재인 만큼 굳이 북제에 갈 필요가 없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가니…… 대단하지 않은가.”
* * *
범한은 마차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진짜 사신단은 이미 어제 경도를 나간 뒤였다. 그가 사신단보다 하루 늦게 움직이는 것은 소은과 언빙운을 교환하는 기밀 협상은 맨 마지막에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차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여러 일을 고민했다. 소은과 관련된 임무뿐만 아니라 사리리와 함께 진행해야 하는 미인계 임무도 상당히 까다로웠다. 순간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아름다운 여자가 같은 장소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약간 아득해졌다.
그 순간 마차가 흔들렸다. 마차가 경도성 북문 문턱을 지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을 무렵 경도를 나온 마차 행렬은 역참에 멈추지 않고 버드나무 길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향해 갔다.
순성사 관병들은 사신단을 경도 밖 18리까지 호송한 뒤 임무를 경도 수비사에게 넘겨주었다. 10여 대의 마차에는 사람 말고도 사신단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수갑을 찬 소은은 특별히 제작된 두 번째 마차를 타고 감찰원 관리 한 명과 함께 가고 있었다. 그를 돌봐 주는 임무를 맡은 관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수건으로 얼굴을 조심히 닦아 줬다.
“내가 너를 잡아 범한을 협박한다면 통할까?”
쇠사슬 소리와 함께 소은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알고 있는 듯 담담한 말투였다.
소은의 생활을 담당한 관리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말했다.
“소 선생을 모시기로 결정되었을 때 저도 미리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범한 대인이 난처해지지 않도록 독약을 먹고 자결할 생각입니다.”
그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소은이 서늘한 한기를 거두며 말했다.
“긴 머리를 좀 다듬어 주게나.”
쇠사슬을 차고 있는 소은이 감찰원 관리를 잡아 협박한다는 말이 두 사람에게는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사신단이 경도에서 멀리 벗어나면 쇠사슬만으로는 소은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소은의 곁으로 걸어가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조심히 빗겨 주는 관리의 손은 침착했다.
수십 년 전 소은은 천하에서 몇 안 되는 9등급 고수 중 한 명이었다. 만약 20년 동안 감찰원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고, 감찰원 3처가 제조한 독약으로 육체와 정신이 손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는 대종사의 경지에 들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이 약해졌음에도 그는 여전히 강했다. 그가 감옥을 나올 때 감찰원 사람들이 긴장했던 것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세 때문이었다. 여전히 그는 상당히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소은이 만약 반항한다면 이 중년의 관리는 조금의 반격도 못 해 보고 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관리는 조금도 떨지 않았다. 그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소은은 그가 일찌감치 독약을 먹고 자결하기로 결심했으리라 짐작했다. 다만 독약을 어디에 숨겼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도 웃을 수 있을 만큼 경국이 좋은가?”
자신이 목숨을 바쳐 헌신한 북위가 갑작스럽게 붕괴한 이유는 자신과 전청풍이 세력을 잃은 탓도 있었지만 경국의 군사력이 이상하리만큼 강해진 것도 있었다. 소은은 여전히 이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중년의 관리가 공손하게 말했다.
“제가 죽게 된다면 감찰원에서 제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져 주고 제 아들이 열두살 이 되면 훈장도 받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범한 대인께서도 가족을 돌봐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 보잘것없는 목숨을 버려 범한 대인에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요.”
소은이 손목을 움직이자 다시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낡은 수법을 아직도 쓰고 있군. 자네 이름이 뭔가?”
중년의 관리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왕계년이라 합니다.”
* * *
범한이 가림막을 들춰 소은이 타고 있는 두 번째 마차를 바라보고는 호위를 불러 물었다.
“마차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나?”
사남 백작 범건은 아들이 떠나기 직전에 결국 그동안 숨기고 있던 자신이 가진 은밀한 힘 중 일부를 꺼내 보였다.
호위의 암살 실력은 감찰원 6처만 못했고, 집단 전투력은 감찰원 5처만 못했지만 모두 신중하게 선발된 인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보호하는 주인에게 강한 충성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꺾이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었다.
범한은 아버지가 황제 폐하를 대신해 관리하는 호위가 감찰원을 제약하는 역할을 하리라 짐작했다. 그러니 사남 백작이 호위 일곱 명을 자신의 아들과 같이 보내려면 황궁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호위 수장 고달이 마차를 따라가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도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록 감찰원 6처 사람이 없어도 저희가 안전하게 호송할 수 있습니다.”
고달은 공개적으로 사남 백작의 개인 병력이었기에 범한을 대인이 아닌 도련님이라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어색해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 수상한 사신단을 호위하며 북쪽으로 향하는 경도 수비사 관병들은 침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막을 알고 있는 장군들은 다소 의기소침했다.
10년 동안 지금의 황제 폐하와 함께 천하를 누비며 전쟁한 경국 군사들은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승리에 익숙했다. 더구나 그들은 작년 전쟁에서 경국이 승리했는데도 소은을 북제에 돌려줘야 한다는 게 못마땅했다.
범한이 경도에 뿌린 글 종이는 흩날리는 깃털처럼 방방곡곡으로 날아갔다. 그래서 이번 일이 장 공주의 소행이라는 걸 아는 장군들은 특히 황실의 미친 여자에게 상당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160화
범한 역시 이 일이 의심스러웠다. 장 공주는 미쳤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북제 밀정을 통솔하는 언 공자를 팔아넘겨서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단순히 장묵한을 시켜 범한을 표절자로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범한은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장 공주가 그렇게 움직일 정도로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장 공주가 앞으로의 권력 싸움에 대비해 북제의 도움을 받으려 그런 일을 한 거라면 경국 군대에게 미움을 한 몸에 받게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어떻게 보든 장 공주에게 손해인 거래였다.
한나절 동안 달린 사신단의 마차는 태양이 산봉우리 안으로 들어가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숲 옆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사신단 부관이 범한에게 규정에 따라 3리 앞에 있는 역참에서 밤을 보낼 건지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으며 먼저 이곳에 머무르다 나중에 다시 결정하자고 했다. 그러고는 오랜 시간 마차를 타느라 뻐근해진 몸을 풀기 위해 뒤로 걸어갔다.
호위 수장 고달이 장검을 쥔 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범한이 흘끗 그의 검을 보고는 물었다.
“뽑기에 불편하지 않은가?”
그는 오죽에게 무기는 길수록 반응 속도가 느리다고 배우기도 했거니와 더욱이 자신도 전투에서 반응 속도를 중요시 생각했기에 호위가 장검을 사용하는 게 신기했다.
호위 수장이 소리를 내며 장검을 뽑아 범한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 검을 빠르게 뽑을 수 있는 기관이 있습니다. 이렇게 긴 장검을 사용하는 것은 공격 범위를 넓혀 엄호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그가 두 번째 마차 옆에 서서 마차 안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으려는 듯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괴물과 함께 있을 왕계년이 미쳐 버리진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마차에 오르자 왕계년이 객실 입구에서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인, 저는 언제 쉴 수 있습니까?”
“이틀만 버티십시오.”
범한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물었다.
“소은이 이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왕계년이 고개를 저으며 한나절 동안 있었던 소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범한에게 말해 주었다. 범한은 왕계년의 말을 소은이 뒤에서 듣고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잠시 뒤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위험합니다.”
왕계년이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병든 호랑이도 호랑이입니다.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9등급 이상의 절대 고수입니다. 만일 들어가셨다가 그가 대인을 붙잡아 인질로 삼는다면 저희가 어쩔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은도 바보는 아닙니다. 경도에서 10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상한 짓을 했다간 죽임당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습니다.”
범한도 소은의 무시무시한 실력을 알고 있었다. 9등급 절대 고수라는 말에 순간 황궁에 잠입했을 때 만난 연소을이 떠올랐다.
“게다가 같이 가면서 계속 안 만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두운 마차 안에 백발을 묶은 소은의 얼굴이 보였다. 작은 상자를 든 범한이 활짝 웃으며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은 선생, 북제 수도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으니 일단 요기부터 하십시오.”
그러자 소은이 음산한 눈빛을 거두고 웃었다.
“범한 대인이 고생이 많군.”
그는 소은이 두렵지 않은 듯 활짝 웃으며 상자를 열고는 조심히 안에 든 과자를 입에 넣어 주고 물도 먹여 줬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소은이 말했다.
“이런 독약은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네.”
과자에는 범한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최상급 독약이 들어 있었다. 그런 독약을 소은이 단박에 알아맞히자 범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독약에 아무런 맛도 안 났을 텐데 어떻게 알아맞힌 겁니까?”
소은이 그를 힐끗 보고는 두 눈을 감았다.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해도 비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 나는 감찰원 감옥에서 갇혀 10여 년 동안 비개가 만든 독약을 먹어 왔네. 다행이었던 건 나를 죽이기 아까워한 진평평과 비개가 경맥을 손상하는 독약만 줬다는 거지. 생각해 보게, 자네가 만약 한 가게에서 10여 년 동안 같은 과자만 먹어 왔다면 그 제자가 만든 과자도 알아맞히지 않겠나.”
속으로 소은의 실력에 감탄한 범한이 말했다.
“노점마다 밀가루와 물의 함량이 달라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은 거군요.”
“그렇지. 독약도 마찬가지이네. 나 같은 사람은 독약의 맛이 아닌 식감으로 판단할 수 있네.”
범한이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런 경지가 있습니까? 독약을 먹어도 괜찮을 수 있다니.”
독약이든 과자를 태연히 먹는 소은을 바라보며 범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독약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천하에 독약 종사가 세 명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저희 스승님이시고 다른 한 명은 이미 죽었지요.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소은 선생이셨군요. 제가 거만하게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소은이 손을 들자 범한이 물을 건네주었다.
눈을 감은 채 물을 마신 소은이 미소 지었다.
“내가 볼일을 봐야 한다고 하면 어쩔 건가?”
“마차 안에 요강이 있습니다.”
“밖에 태양이 아름다운데.”
“이미 졌습니다.”
“경국의 밤도 아름다운데.”
“밤공기가 차니 마차 안에서 쉬시는 게 좋을 겁니다.”
계속되는 거절에 소은이 두 눈을 뜨고 말했다.
“오랫동안 감옥에 있어 햇살을 보고 싶은 것뿐이니 허락해 주면 안 되겠나?”
범한이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나.”
소은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협상이 이뤄진 이상 사신단을 따라 순순히 가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네.”
그러자 범한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소은 선생도 사신단의 안전을 경도 수비사에서 책임지고 있다는 걸 아시지요? 그리고 경국이 선생을 북제에 돌려보내는 굴욕적인 결정을 한 이유도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히 선생이 수갑을 차고 마차에서 나갔다가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소은은 적국 젊은이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미소 지었다.
“내가 죽길 바라지 않는 건가? 내가 북으로 돌아가면 경국은 3년 안에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될 거네.”
범한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선생이 과거 얼마나 대단하셨는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북으로 돌아가셔서 당시와 같은 능력을 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선생을 지금 죽이는 것이 가장 손쉬운 처리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선생과 교환할 분의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반드시 북제 수도에서 포로 교환을 할 때까지 지켜 드릴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소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범한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
“지금까지도 선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에 마차 밖에도 충분한 병력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만약 선생이 마차에 나가 바람을 쐬려 한다면 우리 쪽에서도 상응하는 조치를 바로 할 것입니다.”
소은은 웃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몰래 넣은 독약이 아무 효과가 없으니 이제는 거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낮게 한숨을 쉬고는 일어났다. 그가 발로 소은의 손목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발로 밟더니 검은 천으로 소은의 한쪽 팔꿈치를 꽉 묶었다. 그러고는 소은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납작한 금속 상자를 열자 안에서 긴 바늘이 달린 주사기가 나왔다. 소은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범한의 두 눈을 노려봤다.
곧이어 마차의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피비린내가 마차 안에 가득 퍼졌다.
마차 밖에 있던 호위와 감찰원 밀정들도 이상한 기운을 직감하고는 재빨리 뛰어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마차 앞을 지키고 있던 왕계년이 힐끗 안쪽을 바라보고는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안심시켰다.
마차에서 범한이 비단으로 소은의 손등과 바늘을 닦고는 고개를 들어 웃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늘이 급소를 찌른 것인지 아니면 그 안에 약이 들어 있었던 것인지 소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제가 선생을 존중하는 것은 연장자이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몸을 숙여 마차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선생은 이제 더 이상 북위 밀정의 수장도, 천하를 호령한 영웅도 아닙니다. 그저 저의 죄수일 뿐이지요. 만일 도망치려 하신다면 선생을 죽일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 * *
“대인,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왕계년이 그를 따라 나무 아래 앉으면서 말했다. 마차에서 나온 범한은 다소 피곤한 모습이었다.
“협상이 이뤄졌으니 자유를 얻고 싶은 소은도 순순히 저희와 같이 갈 것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소은이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서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그의 눈에 원망 말고 다른 건 보지 못하신 겁니까? 그의 마음속에는 절대 사그라지지 않을 야심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가 단순히 자유만 바라고 있다면 우리를 따르겠지만, 만일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면 반드시 도망치려 할 것입니다. 감찰원 감옥에서는 도망칠 기회가 없었지만, 북으로 가고 있는 지금은 기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의 전투력과 의지를 약하게 만들 생각입니다.”
“도망치려는 이유가 뭘까요?”
“지금 북쪽에는 그가 오랫동안 충성한 북위가 아닌 북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 북제 황실이 전씨 일가이고, 또 소은이 과거 전청풍 장군과 돈독한 사이이긴 했지만 상황은 이전과는 다르지요. 소은은 오랜 시간 갇혀 있어서 북제 황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북제 황실에서 소은을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귀빈으로 모시겠지만 만일 반대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북제 황실은 과거 밀정의 수장이었던 소은을 수도에 들이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북제는 왜 언 공자와 소은을 바꾸려 한 것입니까?”
“아마도 장묵한과 상삼호 때문일 것입니다.”
“대인께서는 소은이 북제의 황실을 믿지 못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갈 거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범한은 오죽이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와 같은 직업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소은에게 제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생각이 있을 수도 있지요. 제가 아는 것은 소은을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겁니다.”
“소은이 언제 도망치려 할까요?”
“국경을 넘기 전에 도망치려 하겠지요. 북제 영토에 진입한 뒤 도망친다면 북제의 책임이 되니까요. 북제에게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길 원하는 소은으로서는 이번 협상을 망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
범한이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명령했다.
“오늘은 역참에 가지 않고 밖에서 야영하도록 한다.”
부하들이 일제히 대답한 뒤 각자 부대에 돌아가 야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범한이 옆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왕계년에게 말했다.
“창주를 지나면 사용할 만한 역참이 없으니 경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금 야영에 미리 적응해 두는 게 좋지요.”
“야영이 소꿉놀이처럼 쉬운 건 아니니 미리 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근심 어린 범한의 얼굴을 보며 왕계년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계년이 떠나자 범한은 다시 나무에 앉아 소은이 타고 있는 마차를 바라봤다.
아까 마차 안에서 주사기로 독을 넣었을 때 범한은 소은이 반항할까 봐 긴장했었다. 소은을 여러 차례 관찰했음에도 그는 9등급 고수였던 소은이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얼마만큼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가장 좋은 기회를 찾아내 반격하기 전에 무기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등지고 있는 숲속에서 산바람이 불어오자 땀에 젖은 옷이 마르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잠시 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 사리리가 타고 있는 마차로 걸어갔다.
161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의 외모나 정신 상태도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차 안으로 들어간 범한의 눈에 사리리는 초췌하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반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음에도 유정강에서 보았던 아리따운 모습은 그대로였다.
범한이 들어오자 사리리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것 같았다.
사리리의 눈썹은 여전히 버들잎처럼 가늘고 길었고, 검은 두 눈동자는 강물처럼 반짝였다. 다만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입술은 약간 창백해 보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범한은 경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귀족 집안 서자였고, 사리리는 유정강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생이었다.
하지만 사리리는 사실 북제에서 심어 놓은 첩자로 오백안과 결탁해 2 황자의 연회에 가는 범한을 암살하려 했었다. 가까스로 위험에서 벗어난 범한이 이후 감찰원에 들어와 사리리를 북제로 되돌려 보내는 일을 맡은 건 정말 기묘한 우연이었다.
가만히 사리리의 이목구비를 바라보던 범한은 이상하게 그날 밤 놀잇배에서 서로의 몸을 겹쳤던 때가 생각났다. 물론 그런 생각에 마음이 설레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그녀는 담주에서 함께 지낸 몇몇 여종을 제외하면 혼인 전에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여자다.
“며칠 전에 말을 타고 유정강 강변을 달렸는데 놀잇배가 보이더군요.”
범한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을 이런 말로 시작할 줄 몰랐던 사리리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낭자는 이미 허물어진 그곳이 그립지 않은 모양이군요.”
사리리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소첩을 놀리지 마세요.”
“나는 소첩이란 말을 듣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범한이 그녀의 촉촉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참 세상일이 기묘하지 않습니까. 낭자는 나를 죽여야 한다는 사명을 품고 있었고, 나는 비록 그런 낭자를 용서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낭자에 대한 편견 같은 건 없으니. 감찰원 감옥에서 주모자를 알려 주면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하긴 했으나 낭자가 북제로 돌아가는 일에 내가 한 건 없으니 굳이 고마워할 건 없습니다.”
사리리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 그녀는 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무서운 범한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낭자가 감옥을 떠난 그날부터 우리는 동료가 된 셈입니다.”
범한이 그녀 옆에 앉아 마차 벽에 몸을 기대자 은은한 향기가 났다. 사리리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낭자와 진평평 원장 사이에서 무슨 협의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대인이 낭자를 믿는다면 나도 낭자를 믿을 것입니다. 그러니 낭자도 나를 믿고 미인계 임무를 잘 완수해 주십시오.”
연두색 소매를 움켜쥐고 있던 사리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안마를 좀 해주시겠소? 앞 마차에 타고 있는 노인이 언제 폭주할 줄 몰라 마음을 졸였더니 피곤해 죽을 지경입니다.”
두 눈에 피로가 가득한 것이 범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리리가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부드러운 방석에 무릎을 꿇고는 조심히 범한의 머리를 안마했다. 두 눈을 감고 편안히 안마를 즐기던 범한은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다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프신가요?”
진평평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사리리는 감옥에서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예전 기생이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범한의 마음을 울렸다.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내가 한 고문으로 낭자의 아름다운 손이 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리리가 아무 말 없이 범한의 관자놀이를 안마하다 말했다.
“불운한 사람은 그렇게 쉽게 망가지지 않습니다.”
“원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좋을 게 없으니.”
범한이 두 눈을 감은 채 차분히 말했다.
“낭자가 나를 죽이려 해서 고문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낭자가 나에게 빚을 진 셈이지요.”
사리리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소첩…… 아니, 제가 대인에게 빚을 졌으니 언제든 받아 가셔도 좋습니다.”
“어떻게 받아 가란 말이오? 그날 밤처럼 받아 가도 되겠소?”
범한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리리가 고집스럽게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준수한 얼굴의 젊은 관리를 바라보던 그녀는 놀잇배에서 있었던 부끄러운 일을 떠오르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계속 머리를 안마하면서 담담히 말했다.
“불운한 운명을 타고난 저는 대인이 어떻게 받아 가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리리가 정색하고 바라본 것은 범한이 그날 놀잇배에서 마취 약을 사용한 걸 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감옥에서 범한이 자신에게 모진 고문을 한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도 약간은 있었다.
범한은 오른쪽 어깨로 사리리의 부드러운 가슴이 느껴지자 상대방이 자신을 유혹하려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이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이후 사리리의 그윽한 체취를 맡자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꿔 물었다.
“사능은 어디로 갔습니까?”
“여전히 경도에 잡혀 있습니다.”
사리리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능도 그녀의 진정한 혈육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진평평이 무슨 수를 써서 사리리를 설득한 것이지 더욱 궁금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다시 말했다.
“북제의 어린 황제가 낭자를 계속 그리워하고 있다고 위안이 되겠습니다.”
사리리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 쉬었다.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내가 궁금했던 부분입니다. 낭자가 북제 황제와 만났던 일들을 자세히 말해 준다면 임무를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오.”
범한이 보기에 이번 미인계 임무는 이전 세계에서 월나라가 서시를 오나라 왕에게 보내 나랏일을 게을리하게 만들어 망하게 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번 비밀 협정의 내용만 봐도 북제 황제가 사리리에게 애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그녀를 콕 집어서 포로 교환을 요구하지도 않았을 터.
그러나 북제 조정 관리들이 신분이 낮은 사리리를 존중하는 것은 순전히 그녀가 나라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황제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북제는 경국보다 더 혈통을 더 중요시했기에 기생 출신인 그녀가 궁에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일을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범한 대인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를 수도로 데려다주시면 뒷일들은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
마차 안에는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리리의 향기를 맡으며 옆에 앉아 있던 범한은 그녀의 손길이 떠난 게 아쉬웠다. 조용히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낭자도 쉬십시오.”
그때 사리리가 급히 입을 열었다.
“대인, 안마를 더 해드릴까요?”
“괜찮아요.”
범한이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대답하자 사리리가 약간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화가 끝난 뒤 두 사람은 마차 안 분위기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마치 어렴풋하게 무언가 느낀 것 같았다. 애매한 분위기가 점차 달아올라 공기가 따뜻해졌다.
아랫입술을 깨문 사리리는 두 손으로 범한의 양어깨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혼자 마차에 남겨지는 게 싫어서…… 원수의 시중을 들고 싶어진 거야.’
한편 등 뒤로 사리리의 부드러운 몸을 느낀 범한은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환심을 사려 한다고 생각했다.
‘왜 환심을 사려는 거지? 설마…… 나를 좋아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은 마음속으로 뺨을 갈기며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내가 잘생겼다고 해서 여자를 홀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 건 아니야.’
자신은 왜 사리리의 마차를 찾아온 걸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설득할 답을 찾았다. 어쩌면 북제로 가는 게 불안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소은은 너무 못생겨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신이 평범한 남자여서일 수도 있었다. 사리리는 과거 자신과 함께 밤을 보낸 여자니 함께 있고 싶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호색가이긴 해도 여색에 빠져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유혹을 뿌리치고 마차에서 내리니 왕계년이 곧장 다가와 마차 뒤편으로 안내했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대인, 주변의 눈과 귀를 신경 쓰셔야 합니다. 사리리는 북제 황제에 보낼 사람이 아닙니까. 오늘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중에 대인이 사리리의 마차에 오래 머무는 걸 본 누군가가 소문을 낸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범한은 왕계년의 엉큼한 오해를 풀어 주지 않고 조용히 관자놀이만 눌렀다.
경도 길을 벗어나자 사신단은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감찰원을 비롯한 사신단은 경도 수비사 장군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자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더욱이 각 지방에 도착할 때마다 현지 관아의 관리들이 나와 사신단을 극진히 접대했다. 북제로 가는 사신단에 경국에서 가장 유명한 범한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아는 지방 관리들은 더욱 신경 써서 대접하려 했다. 그들은 사신단의 일정이 지체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도 성대한 연회를 열어 범한의 옆에 미녀들을 앉히고는 온갖 아첨을 해댔다.
경국에서 자신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한 범한은 우쭐한 마음에 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연회가 열리니 지루한 데다가 매번 시를 쓰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반복해야 해서 피곤했다.
반면 왕계년은 연회에 가는 걸 무척 좋아했다. 이유는 연회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기녀들을 보는 게 즐거운 데다가 또 지방 관리들이 경도에 있는 아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기생을 붙여 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신단에는 북제 황제가 그리워하는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 사리리가 있는 만큼 범한은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은 점차 연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는 그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고관들에게 방문하는 걸 제외하면 대부분은 사신단 야영지에 머무르며 소은을 감시하고 사리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경도를 떠난 지도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범한은 시간 대부분을 사리리의 마차 안에서 보냈다.
사리리가 껍질 벗긴 귤을 범한의 입에 넣어 줬다.
사신단이나 감찰원 밀정들은 그를 따르는 신분이었고, 호위는 그에게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귤을 먹는 범한의 머릿속에 경도에 있을 때 자신에게 과일을 먹여 주던 누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집에서 홀로 외롭게 있을 아내 완아의 얼굴도 떠올랐다. 순간 그가 불안한 마음에 눈을 살며시 뜨고 정성껏 귤껍질을 벗기고 있는 사리리를 바라봤다.
사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과일을 먹으며 무료한 시간을 함께 보낸 것뿐이었다. 심지어 북제 수도에서 할 임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도 않았다. 물론 가끔 피곤한 몸을 안마받거나 껴안고 바깥 풍경을 감상한 적은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범한을 본 사리리가 웃었다. 그동안 같이 있으면서 범한의 온화한 모습만 본 그녀는 감옥에서의 무지막지했던 모습을 서서히 잊고 있었다. 게다가 마차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아서 자꾸만 여정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요즘 몸을 잘 추스르고 있는지 예전의 풍만했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농담했다.
“경도에서 막 나왔을 때는 몸을 만지면…… 머리부터 손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말하던 사리리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타이르듯 말했다.
“만지지 마세요.”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만지며 물었다.
“싫습니까?”
“줄곧 대인께 속기만 했으니 그러는 거지요. 놀잇배에서는 제게 마취 약을 사용하시고, 감옥에서는 고문하시더니 오늘 마차 안에서는 음흉한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
사리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몸은 이미 범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범한의 품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던 그녀는 범한의 손이 자신의 엉덩이 부분으로 옮겨 가자 흠칫 놀라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범한의 귓가에 한숨을 쉬었다.
범한은 귀가 가렵고 뜨거웠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숨을 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저를 가지세요. 어차피 북제 수도에 가도 좋은 결과는 없을 테니.”
162화
잠시 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어쩐지 평상시와 달라 보였다.
사실 사리리의 몸에는 독약이 있었다.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범한은 일찌감치 그녀의 몸에 만성 독약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감찰원에서 사전에 수를 쓴 것 같았다.
이런 독약을 범한은 비개가 남긴 책에서 본 적 있었지만 실제 사례를 본 건 처음이었다. 이런 독약은 여성의 몸속에서 천천히 뿜어져 나와 함께 관계한 남자를 중독시켰다. 그러니 이대로라면 사리리는 아마 북제 황제를 감염시킬 것이다. 게다가 독약에 중독된 증상도 성병과 아주 비슷했다.
모든 일에 신중한 진평평답게 미인계는 사리리로 북제 황제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독살하는 계획이었다.
해독제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감염자의 몸과 정신을 약하게 만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북제 황제는 자신이 아끼는 사리리와 관계를 하다가 중병에 걸릴 운명인 셈이다. 만약 후당과 제당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젊은 황제가 중병에 걸린다면 북제 조정은 다시 한번 대혼란에 빠질 것이었다.
범한은 한숨을 쉬며 사리리가 자신의 몸에 독약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는 건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진평평이 이 일을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사리리와 가깝게 지내면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면 알지 못한 채 자신도 중독될 수 있었다. 물론 독약에 중독되더라도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치료하면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불쾌했다.
“미인계는 무슨.”
범한이 자신의 마차에 돌아와 앉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미인계 임무가 아니라 독살 임무잖아.”
진평평, 비개, 심지어 뒤에 있는 마차에 타고 있는 소은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여전히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냉혹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이번 임무에서 사리리는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장기판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가 기꺼이 장기판의 말이 되도록 진평평이 무슨 말로 설득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범한을 정말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이것이 바로 범한이 사리리와 같이 있으면서도 관계를 맺지 않은 진짜 이유였다.
그건 바로 사리리가 아직도 처녀라는 사실이었다.
* * *
이미 경국 북부에 도착한 사신단은 최북단인 창주를 앞두고 있었다. 멀리 성의 외곽이 보이자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흐린 하늘을 바라봤다. 강한 북풍에 봄기운은 모두 사라진 하늘에 먹구름까지 껴서 어두침침한 분위기였다.
경국에서의 마지막 호송을 책임진 주군(州軍)이 앞으로 와서 인사한 뒤 말고삐를 돌려 돌아갔다. 창주성 밖에 황량한 들판에 있으니 기나긴 사신단의 마차 행렬도 초래해 보였다.
“창주를 지나 국경선에 도착하면 이후에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대호를 돌아서 가니 최소 20일은 걸릴 겁니다.”
왕계년의 대답을 들은 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위험한 상황은 20일 안에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마차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은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조용히 있는 게 대인께서 매일 주사하는 독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 며칠 동안은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 같더군요.”
“조심하십시오.”
갈수록 강해지는 마차 안 피비린내를 맡은 듯 범한이 코를 비볐다.
“알겠습니다. 주군은 이미 돌아갔고 창주군은 믿을 수 없으니 걱정입니다. 대인께서도 지난번 사리리를 경도로 압송할 때 있었던 일을 아시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창주를 지나면 호송은 오히려 편해질 겁니다. 우리가 가장 걱정해야 할 건 사신단 내부에 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량한 들판 멀리 있는 낮은 언덕에서 대략 5백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기마병 부대가 나타났다. 검은색 투구와 갑옷을 갖춘 기마병들은 흐릿한 햇빛 아래서 서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왕계년이 미소 지었다.
“흑기가 왔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강한 바람에 자갈들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왕계년과 범한은 마차에서 내려 창주성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떼던 범한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마차에서 내린 사리리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을 시켜 사 낭자에게 옷을 더 가져다주라고 하십시오. 북으로 갈수록 날씨가 추워질 테니.”
요 며칠 동안 사리리의 마차에 거의 가지 않았던 범한은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지만 마음은 떨렸다.
왕계년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고는 부하에게 지시했다. 사신단에는 세 명의 여종이 있는 이유는 북제 황제의 여자가 될 사리리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범한이 사리리의 마차에 머물러서 세 명의 여종은 사신단 마차 행렬 뒤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잠시 뒤 여종들이 사리리 옆으로 다가와 진홍색 망토를 덮어 주고는 마차에 들어가 쉬라고 말했다.
사리리는 마차에는 돌아가지 않고 범한을 계속 바라봤다. 범한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것 같았다.
멀리서 검은색 기마병들이 진홍색 망토를 걸친 연약한 여자 옆으로 다가왔다. 하늘에 비스듬히 걸쳐 있는 옅은 태양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창주를 나간 뒤 사신단은 멀리서 따라오는 흑기의 보호를 받으며 느리지만 꾸준히 북쪽으로 향했다. 북제는 경국에서 정북 방향에 있지 않기에 빨리 가려면 여러 제후국을 거쳐야 했다. 그중에는 가장 동쪽 해안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번화한 항구 도시인 동의성도 있었다.
이번 사신단은 제후국을 거치지 않을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거치는 도시가 많을수록 경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밀 협정을 하러 가는 마당에 동이성을 지날 수는 없었다. 만일 그랬다가 사고검이 갑자기 미쳐서 날뛰기라도 한다면 세 나라 사이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신단은 황야를 따라서 북상한 뒤 대호를 돌아 동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비록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마적을 제외하면 위험이 될 만한 세력은 없었다.
사신단이 가는 길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소은도 침묵했고 사리리도 침묵했으며 사신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범한도 침묵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유로 침묵하고 있었다.
범한은 소은의 팔에서 바늘을 뽑은 뒤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때 소은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당장이라도 범한의 얼굴을 때리고 싶다는 눈빛으로 노려보고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궁금한 게 있네. 왜 그 끈을 내 팔에 묶는 건가? 내가 보기에 혈관을 더욱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그렇게 고생해서 내 혈관에 독약을 주입할 필요가 있는가?”
“그럼요.”
범한이 미소 지었다. 정맥 주사가 복용하는 것보다 효과가 빠르다는 걸 이 세계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소은의 경우 상당한 정기를 가지고 있어 정맥 주사가 아닌 평범한 방법으로는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소은이 미간을 찌푸리고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게다가 왠지 모르게 익숙하단 말이야. 안타깝게도 늙어서 그 방법을 쓴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아.”
범한은 속으로는 흠칫 놀랐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멀리 있는 기마병은 진평평의 수하인 흑기겠지?”
소은이 갑자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범한이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창문도 없고 벽에는 철판이 끼워져 있는데도 소은은 흑기가 멀리서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범한은 재빨리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과거 천 리를 돌진해 용맹을 떨쳤던 분들의 후배들이지요.”
진평평이 흑기들을 이끌고 소은을 생포해 왔던 때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 일은 소은의 삶에서 가장 큰 굴욕을 안겨 줬을 뿐 아니라 씻을 수 없는 상처도 주었다.
“자네는 언제 나를 죽일 생각인가?”
소은이 일상생활을 이야기하듯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사실 이건 상대방을 도발하려는 질문이었다. 일반 사람이었다면 무의식적으로 넘어갔겠지만 범한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소 짓는 소은의 두 눈이 점차 붉어졌다.
“진평평은 순순히 나를 북에 돌려보내지 않을 거야.”
범한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가 맡은 일만 완수하면 그만입니다.”
“자네는 괜찮은 젊은이야.”
소은은 그를 바라보며 손목을 들어 무거운 쇠사슬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소 선생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함께 길을 나선 지도 오래되지 않았나. 자네는 저기 아가씨가 타고 있는 마차에 자주 머물면서도 여색에 빠져 직무를 잊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더군. 더구나 가장 놀라운 건 매일 어두울 때마다 수련한다는 거야. 나도 그 정도의 의지력은 없었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둔한 새가 먼저 나는 법이지요. 실력이 보잘것없고 재능도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수련을 더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동의할 수 없는지 소은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실력도 좋고 재능도 출중하네만, 강자와 맞서며 자신의 몸에 있는 정기를 자극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범한이 소은의 늙은 얼굴과 메마른 두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혼자서 절대 강자와 대적해야 한다는 건가?’
* * *
창주성에서 나온 사신단은 북군 관할 구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 초원에서 군영은 백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범한은 9등급 강자인 연소을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길을 돌아서 갔다. 물론 흑기들이 따라오며 보호해 주고 있으므로 사신단을 공격할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사실 며칠 전에 산에서 내려온 산적들이 정탐하다가 사신단을 호위하는 흑기들을 보고는 겁을 먹고 산으로 다시 돌아간 일도 있었다.
한편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소은과 사리리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 갔다.
범한이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압송되는 두 사람을 냉담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요 며칠 동안 함께 있으면서 그는 자꾸만 사리리에게 연민의 정이 생겼다. 그는 사리리의 신분과 또 그녀가 앞으로 겪을 상황이 안쓰러웠지만, 목적이 분명했기에 작은 정에 이끌려 계획을 망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사리리에게 어떤 감정이 싹튼다면 감찰원이 세운 북제 계획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사리리가 아직도 처녀인 걸 북제의 젊은 황제가 어떻게 아는지 모르지만, 만약 나중에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미인계 임무는 성공할 수가 없었다.
범한이 최근 사리리의 마차에 가지 않는 게 그녀의 실의에 빠진 얼굴이 보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소은의 마차에 더 오래 머무르며 그에게서 과거 스캔들이나 비밀 정보들을 얻어 내려 했다. 이것은 천하를 호령했던 그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것이자 그가 뒤에서 꿍꿍이를 벌일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마차 밖에는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이야기는 과거 북위에서 시작해 지금의 세상으로까지 이어졌다.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네.”
소은이 그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점차 대화를 나누는 데 익숙해진 소은은 범한이 대화하기 좋은 상대라고 생각했다.
“저희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두 차례 통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3차 북벌 이후로, 경국은 마음만 먹었다면 막강한 군사력으로 한 번에 북제를 없애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소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나는 감옥에 갇혀 있어서 아는 게 없지만, 자네가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당시 경국 황제가 공격을 멈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네. 하나는 조정 내부의 문제였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강력한 저항을 만난 것이지. 그래서 북상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한 거야.”
소은의 말을 들은 범한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 섭가가 무너지기 전이었으니 황제와 그의 모친이 선발한 사람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을 거야. 그런 조정 안에서 문제가 있었을 리 없어. 하지만 외부의 적이라면…… 이 세계에 경국을 두렵게 할 만한 힘을 가진 곳이 어디 있을까?’
“신묘.”
범한의 생각을 읽은 듯 소은이 짧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어떻게 인간의 야심이나 권력의 욕망을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천하 통일은 황제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소은이 그의 말에 공감하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남경이 북위를 무너뜨리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네. 만약 남은 세력까지 완전히 제거하고 통일하려 했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 같나? 최소 수십 년은 걸렸을 거네. 게다가 동이성의 존재도 잊어서는 안 되지. 동이성은 비록 국가를 지킬 병력은 부족하지만 계속 땅을 개간해 영토를 확장해 왔고, 9등급 고수들도 많이 포진되어 있네. 만약 전쟁이 계속되는 어지러운 국면 속에서 사고검이 미쳐 날뛰기라도 한다면 그 후환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나?”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각형이 가장 안정적이듯 세 나라가 서로 대치해 있는 게 가장 안정적이긴 하지요. 세 나라의 국력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먼저 균형을 깨뜨리는 나라가 두 나라의 반격을 받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 평화가 유지되기도 더 쉽겠군요.”
“지금 경국의 조정도 마찬가지일세.”
소은이 그를 바라보며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신하 그리고 자네가 미쳤다고 말하는 장 공주까지 삼각형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먼저 균형을 깬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될 거야.”
그동안 범한은 경국 조정의 상황을 소은에게 숨김없이 말해 주었다. 만일 자신이 소은을 죽이지 못한다면 어차피 이런 정보는 손쉽게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은에게 이 정도 정보는 기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관자놀이가 다시 아파지자 범한은 사리리의 부드러운 손이 그리워졌다.
“모두 지금의 균형을 일단 유지하려 하겠군요.”
“그건 불가능하네. 왜냐하면 자네가 이미 움직여서 상대방도 반응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아마도 지금 경도는 아수라장이 되었을 거야. 하필 이때 북방으로 돌아가 그 상황을 지켜보지 못하게 된 게 아쉬워.”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진 범한의 귓가에 경도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소은의 말이 들렸다.
163화
북쪽보다 따뜻한 경도에는 이미 완연한 봄기운이 가지에 맺힌 꽃봉오리에게 빨리 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매일 밤이면 집마다 등불이 켜졌고 십 리 강변에도 화려한 붉은 등이 켜져 봄 경치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낮의 경도는 조용했다. 백성들과 관리들 모두 춘곤증인 것처럼 기운이 없었고 길거리에 행인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정오 무렵 음침한 안색을 한 서생이 여인을 부축하며 경도성 동문 안으로 들어왔다. 모자 사이처럼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은 객잔으로 가지 않고 곧장 경도 서쪽에 있는 볼품없는 저택으로 걸어갔다. 이 저택의 실제 주인은 도찰원 어사 대인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춘곤증을 해소할 순 없지만 잠시나마 사라지게 만들 만한 일이 3월 중순 어느 날에 벌어졌다. 회시 이후 그날처럼 난데없이 벼락이 치면서 억수 같은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세찬 비는 경도의 모든 건물과 골목을 적셨다.
감찰원 4처에서 맡은 회시 부정행위에 대한 심리와 재판은 시랑 한 명을 유배하고 나머지 열일곱 명의 탐관들은 사형하는 것으로 끝났다. 감찰원의 결정 뒤에 황제 폐하의 뜻이 있거니와 증거까지 명확해서 어느 세력도 이견을 말하지 못했고 문신들도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죽일 뿐이었다.
예부 상서 곽유지도 참수형에 처할 운명이었다. 경국 개국 이래 처음으로 사형을 받는 고관이 생겨나자 조정과 재야 모두 발칵 뒤집혔다. 이후 황태후가 황제를 직접 찾아가 관용을 베풀라고 호소하자 이에 마음이 약해진 황제가 눈물을 닦으며 옥중 교수형으로 바꾸고 곽 상서의 시신도 보존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황태후도 슬퍼할 뿐 더는 황제를 설득하지 않았다.
더구나 곽유지 말고도 참수형에 처할 죄수는 열여섯 명이나 있었다.
평일 시끌벅적한 소금 시장 입구에 억수 같은 빗물이 떨어졌지만 관람하고 싶어 하는 백성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백색 죄수복을 입은 열여섯 명의 죄수가 형벌대 위에 무릎을 꿇었다. 옷에 핏자국이 있는 걸 보니 이미 상당한 고문을 받은 것 같았다. 과거 부귀영화를 누리던 관리들이 죄수가 되어 산발한 채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있는 것이 비참해 보였다. 더구나 감찰원이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 평소 정신이 멀쩡했던 관리들의 눈은 초점 없이 흐리멍덩했고,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가족을 찾으며 뭐라 말했지만,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조정의 3사 관리들과 감찰원 1처 대리 수장인 목철이 장막 안에 앉아서 광경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목철과 다르게 다른 관리들은 불편한 모습이었다. 형벌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과거 그들의 동료였다. 같이 놀잇배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놀던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비는 소금 시장 옆에 있는 술집 처마에도 내렸다. 처마 옆 수로를 따라 모인 빗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흘러내렸다. 여러 층에서 만들어진 작은 폭포 수십 개가 땅에 떨어지면서 소리를 냈다.
한 고관이 일어나 큰 목소리로 조서를 말했지만 작은 폭포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고관의 입 모양을 자세히 바라봤지만 뭐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고관이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아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시행하라!”
그 말에 흥분한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지르더니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을 더 자세히 구경하기 위해 형벌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형벌대에 서 있던 망나니가 침을 뱉고는 얼굴에 묻은 빗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큰 칼을 뒤에 찬 채 앞으로 걸어가 첫 번째 죄수의 목덜미를 왼손으로 만졌다. 곧이어 뼈마디의 위치를 확인한 그가 고함을 지르며 큰 칼을 뽑아 휘둘렀다.
칼이 떨어지자 돼지고기가 썰릴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후 새빨간 피가 뿜어져 멀리까지 튀었다. 형벌대로 떨어진 죄인의 머리는 마치 큰 칼이 두려워 도망가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굴러가더니 결국 빗물과 함께 형벌대 아래로 떨어졌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광경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피범벅이 된 머리가 자신의 발밑으로 떨어지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머리가 굴러간 자리에 남아 있던 핏자국은 빗물이 씻겨 금세 사라졌다.
몇몇 사람들만이 손뼉 치며 환호할 뿐 대부분은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이 못마땅한지 형 집행을 바라보던 목철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비쳤다.
망나니가 다시 칼을 휘두르자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서 사방이 핏빛이 되었다. 세 명의 망나니들이 번갈아 가며 칼을 휘두르며 남은 죄인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잘랐다. 어느새 피로 물든 형벌대 위에는 시체만 남았다.
참수가 진행될수록 구경꾼들도 점차 대담해져서는 박수와 환호성이 갈수록 커졌다. 마지막에 예부 봉정의 목이 떨어질 때는 땅이 울릴 정도로 큰 함성이 들렸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내리던 빗줄기도 놀라 흩어질 정도였다.
한편 형벌대에서 떨어진 머리를 찾기 위해서 경도부 관리 몇 명이 구경꾼들을 해치며 돌아다녔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잠시 뒤 검은 개가 입에 머리를 물고 구경꾼들 속에서 뛰쳐나왔다. 검은 개는 날카로운 이빨로 머리의 귀 부분을 물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개의 눈빛은 한기가 느껴질 만큼 서늘하고 무서웠다.
“깨갱!”
경도부 관리가 휘두른 칼집에 궁둥이를 맞은 개가 물고 있는 머리를 떨어뜨리고는 울면서 빗속으로 뛰어갔다.
* * *
며칠 뒤 이어서 사건이 터졌다. 형부 상서 한지유가 뇌물을 받아 법을 어긴 사실이 적발된 것이다. 감찰원이 그의 첩들이 지내는 별저에서 금은과 금지 품목을 찾아내 조정에 보고하자, 대리사에서 그의 관직을 1품에서 7품으로 내리고 이주(夷州)로 내려가 주판직을 수행하게 했다.
이주는 남쪽 멀리 있는 지방으로 날씨가 덥고 습해서 풍토병이 성행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한지유가 다시 경도로 돌아오는 날은 없을 터였다.
한편 아무런 꼬투리도 보이지 않았던 도찰원 곽쟁은 조정에서 직접 이유를 찾아 강남으로 보내 버렸다. 물 좋고 미인들도 많은 강남은 감찰원 4처에서 배치한 밀정들도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곽쟁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감찰원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조정의 문관들은 이 일에 재상이 손을 썼거나 감찰원에서 확실한 증거를 쥐고 움직인 거라 생각했다. 다만 한지유과 곽쟁에게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기에 재상과 감찰원이 결탁해서 일을 꾸몄다고는 볼 수 없었다.
잔인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보복은 보복이었다. 이것은 범한이 형부에서 겪은 일에 대한 감찰원의 적나라한 보복이었다.
이처럼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보복이 끝나면 항상 평화가 찾아왔다. 이건 경국 관료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묵인된 약속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곧이어 장 공주와 황후 측에서 반격이 들어왔다.
앞에서 언급했던 음침한 안색을 한 서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회시에 응시하지 못한 하종위였다. 대학사 증문상의 제자로 곽씨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던 그는 고향에서 뜻밖의 소식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곽유지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으며, 자신의 친우인 곽보곤은 어디를 떠돌아다니는지 행적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가장 그를 분노하게 한 사실은 동궁에 있는 황태자가 이번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종위와 함께 경도에 들어온 부인은 오백안의 아내였다. 오백안은 장 공주가 재상가에 침투시킨 모사로 작년에 재상의 둘째 아들을 끌어들여 범한을 암살하려 했다가 포도나무 울타리에서 죽임을 당한 인물이었다.
재상 임약보는 유일하게 멀쩡한 아들을 죽게 만든 오백안에게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오백안은 이미 죽었지만 산동에 있는 그의 집안은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재상의 제자 출신이자 산동 관리인 팽정생은 오백안의 집안을 괴롭혀 6개월 만에 상당히 많은 재산을 수탈했으며, 오백안의 친아들을 이유 없이 감옥에 가두고 고문해 죽게 했다.
오백안의 아내 오씨는 글을 알기는커녕 재상의 세력이 어떤지도 몰랐으며 저항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아들을 잃은 슬픔에 홀로 경도에 가서 재상을 고발할 결심을 했다.
성 밖에서 잠시 휴식하고 있을 때 오씨는 마침 경도로 돌아온 하종위를 만나게 되었다.
하종위는 총명한 사람이었기에 단박에 오씨의 사연이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에 오씨에게 억울함을 풀 방법을 찾아 주겠다고 설득해 같이 경도로 들어온 것이다.
경도로 들어온 뒤 하종위는 스승과의 관계를 이용해 오씨를 어사 대인의 저택에 머물게 했다. 머무는 동안 종종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인물이 저택에 출입해서 오씨에게 집안에서 벌어진 비극을 자세히 물어봤다.
하종위는 이 모든 과정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가끔 오씨가 불안감을 못 이겨 찾아오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정의로운 관리분이 손을 쓰고 있으니 재상 대인은 곧 벌을 받게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어사의 저택 화원에 있는 가짜 산 뒤에서 하종위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신양에서 온 밀서를 찢었다. 그는 재상이 실각하면 경도 조정이 어떻게 변하게 될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사남 백작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떠올리고는 두 눈을 번뜩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뒤 도찰원 어사가 상소를 올려 재상 임약보를 파면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해 죄 없는 백성을 죽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로 한바탕 뒤집혔지만 오백안은 이미 북제 첩자로 낙인이 찍혔기에 여론은 재상에게 더 기울어 있었다.
그러던 중 오씨가 대리사에 진술하러 가는 길에 자객을 만나게 되고 이걸 또 우연히 2 황자와 정왕 세자가 보고 구출한다. 오씨의 명이 길어서 화를 면한 건지 아니면 재상의 운이 나빠서 암살에 실패한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일로 상황은 역전되었다.
소식을 들은 황제는 황태자와 2 황자를 불러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고 질문했다. 이에 황태자는 한동안 고민하다 증거가 부족하고 재상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니 함부로 내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엉겁결에 거리에서 오씨를 구한 2 황자는 난처한 마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재상이 관리들의 수장인 이상 어떤 식으로 처리하든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한편 정왕 세자를 통해 이 일을 들은 정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좀처럼 가지 않던 황궁에 입궁해 황제와 밤새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이야기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그날 밤 십몇 년 동안의 상소를 뒤적거리면서 재상 대인이 고생스럽게 일군 치적들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한숨을 쉬었다.
* * *
“산동로 자사 팽정생은…… 11년 전에 향시에 급제한 사람입니다. 내가 처음 재상이 된 해였는데 순박하고 말 잘 드는 사람이라 생각했었지요.”
재상 임약보는 이제 마흔 대였지만 얼굴은 수척해서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내 말을 들어줄 줄은 몰랐습니다. 원 형도 아시겠지만 나는 팽정생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 않았어요. 죽은 오백안의 가족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될 일인가요.”
“아마도 팽 대인께서 재상의 마음을 짐작하고 어리석은 짓을 벌인 것 같습니다.”
임약보의 심복이자 친구인 원굉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가요?”
임약보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원굉도를 바라보았다.
“팽정생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성을 걸면서까지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인 이유가 궁금하군요. 게다가 며칠 전에 경도 거리에서 벌어졌던 암살 사건을 계획한 사람은 누구이며, 왜 재상부를 조사하려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원굉도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자신의 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종위는 동궁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혼자 벌일 정도로 배짱 있는 사람은 아니지요. 분명 뒤에서 봐주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게 황후인지 장 공주인지 모르겠군요.”
“운예입니다.”
재상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조정에서 그녀의 세력은 대부분 도찰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건 그녀가 저에게 복수하는 겁니다.”
“복수할 게 뭐가 있습니까?”
“복수할 거야…… 많지요.”
재상이 한숨을 쉬었다.
“신아의 일도 그렇고, 사위 일도 그렇고, 나와 그녀 사이의 일도 그렇지요.”
“그럼…….”
원굉도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자 재상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말해 보십시오.”
원굉도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폐하의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폐하께서 이 일을 믿지 않으신다면 재상의 지위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이런 졸렬한 방법을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성상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재상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문제는 폐하께서 무얼 원하시느냐에 달려 있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최근에 문관 여럿이 참형당했습니다. 문관의 수장인 제가 책임을 져야겠지요.”
재상이 체념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164화
“가장 중요한 것은 폐하께서 제가 재상직에서 내려오기를 바라신다는 겁니다.”
원굉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상, 아직 수습할 기회가 있습니다. 감찰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남 백작에게 말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만약 진평평 원장께서 재상 편에 서기로 하신다면 폐하께서도 내치지 못하실 겁니다.”
임약보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길을 내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길을 내준단 말입니까?”
“황태자 혹은 미래의 황제에게요.”
임약보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계속 조정에 남아 있으면 범한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지 않습니까. 한 손에는 감찰원을 쥐고 또 다른 한 손에는 황실 금고를 쥔 채 뒤로는 재상의 든든한 후원까지 받게 되는 셈이니까요. 그야말로 황자들도 무서워할 만한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누누이 무리보다 아름다운 꽃은 가장 먼저 꺾이는 법이니 늘 조심하라고 말했는데……. 범한이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제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임약보가 초연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내가 자리를 지키려 한다면 범한이 위험해질 겁니다.”
원굉도는 흠칫 놀라면서 곁눈질로 재상의 입가에 걸린 은은한 미소를 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창밖에서 대보가 물놀이하는 소리가 들리자 재상은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창가로 걸어가 바보 아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신아에게 대보를 데리고 가라고 말해야겠습니다.”
원굉도는 침착하게 재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궁에 들어가 사직을 청할 겁니다. 폐하께서 저의 지난날 고생을 생각해 여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원굉도가 뭐라 말하려 하자 재상이 손을 내저으며 막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임약보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팽정생에게 편지를 써주십시오.”
서재 안 분위기가 순간 무거워졌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원굉도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도 암살 사건은 제가 재상부 시위에게 시킨 것입니다.”
“뭐라고요?”
재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된 뒤로 내게 친구라고는 원 형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아껴 주었는데 빠져나갈 구멍도 마련해 주지 않고 사지로 모는 겁니까?”
원굉도와 재상은 반평생 어울린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 그가 재상을 궁지로 모는 일을 벌이다니. 만약 재상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가 모함하려 한다면 임약보는 아무 힘 없이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재상의 수척한 얼굴을 보던 원굉도가 미안해하는 말투로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목적과 의도가 있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재상의 서재에 갇혀 있었던 것은 사실 오늘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전에 저는 어느 사람에게 그가 재상을 끌어내리고 싶어 할 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임약보가 오래된 친구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도대체 운예가 원 형에게 얼마나 많은 걸 약속했길래 나를 팔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 것입니까.”
원굉도가 고개를 저었다.
“친구를 파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재상이 관직에 물러나길 바라시고 장 공주도, 조정도 재상이 경도를 떠나길 원하고 있습니다. 부귀영화를 탐내는 건…….”
그가 말끝을 흐리며 씁쓸히 웃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재상께서 제가 한 일을 알아채지 못하신다면 함께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임약보는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책사를 바라봤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 *
어둠이 깔린 경도에서 시동과 함께 짐을 정리하던 원굉도는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굳게 닫힌 재상부의 문을 한번 본 뒤 낮게 한숨을 쉬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타고 있던 도찰원 어사가 냉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원 선생, 언제 대리사에 와서 증인을 할 겁니까?”
원굉도는 중년의 남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잠시 오른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재상 대인께서 내일 궁에 들어가 사직을 청하면 폐하께서도 이번 조사를 멈추게 할 것입니다.”
도찰원 어사가 그 말을 듣고는 벌컥 화를 냈다.
“증거를 다 갖추면 폐하께서도 감옥에 가두라 말씀하실 겁니다!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지 않으신다면 원 선생도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간신과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면 같이 손이 더러워지는 법이지요.”
원굉도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 기품 있기로 소문이 난 그의 눈빛이 예리한 칼처럼 번뜩였다. 마치 눈빛만으로도 어사를 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굉도가 겁먹은 어사를 노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저는 신양에서 오는 명령만 받습니다. 제 결정에 관여할 권한은 없으실 텐데요?”
어사가 대경실색하더니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오랜 시간 재상의 심복으로 있었던 그가 가장 중요한 시기에 배신한 이유는…… 애초에 장 공주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 * *
새벽녘 성문이 처음 열리는 시간이 되자 마차 한 대가 서쪽 성문을 나와 신양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원굉도는 우산대 안에 숨겨진 검을 누르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면서 신양에 있는 미친 장 공주가 오랜 시간 숨겨 둔 부하인 자신을 어떻게 처리하려 할지 생각했다.
사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재상 임약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수십 년을 함께한 친구였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처럼 오랜 시간 돈독한 사이로 지냈으면서도 그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과거의 약속을 지켜 재상을 궁지로 몰았다. 그는 재상을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신을 재상이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마차에는 그와 마부만 남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마부를 보던 원굉도는 그의 손짓이 상당히 민첩한 걸 알아챘다. 분명 무예에 정통한 고수가 틀림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마차는 역참을 지나 인적 없는 산길에서 멈춰 섰다. 마부가 고개를 돌려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원굉도를 노려봤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마부가 입을 열었다.
“원장 대인께서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깐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 마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선생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원굉도가 약간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신양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장 공주의 신뢰가 필요하기에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그는 아주 오래전 진평평의 명령을 받고 재상에게 접근한 비밀 밀정이었다.
‘정말 모든 게 경국을 위해서인 건가?’
마차를 타고 신양 장 공주에게 가는 원굉도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 옳다고 믿어 온 이 말이 왠지 황당하게 느껴졌다.
오래전 장 공주가 지금의 재상 대인을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당시 감찰원 2처 비밀 요원이었던 원굉도는 진평평의 명을 받아 새로운 신분과 인생을 가지고 임약보의 친구가 되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두 서생이 우연히 만난 것으로 보였다.
당시 패기 넘치던 임약보와 신중하고 침착한 원굉도는 감찰원이 계획한 여러 일이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장 공주의 지원 아래서 임약보는 순조롭게 관직 생활을 하였고 원굉도는 문객으로 그의 곁에 남았다. 임약보가 그에게 여러 차례 지방 고위직 정도는 줄 수 있다고 넌지시 권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할 뿐이었다.
바로 이처럼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임약보는 그를 자신의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다. 임약보는 원굉도가 처음부터 다른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원굉도는 사실 이런 인생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감찰원에서 그에게 따로 맡기는 임무가 없는 데다가 그의 신분을 아는 몇몇 사람들과도 계속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원굉도가 감찰원을 위해 한 일이라고는 창산 장원에서 임 공이 죽임을 당했을 때 동이성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그가 이 일을 맡은 이유는 재상 임약보가 그의 말은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원굉도는 평생에 걸쳐 단 한 번 임약보를 배신했고 이 한 번의 배신은 재상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폐하의 뜻이었고 감찰원의 지시였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재상은 좀 더 세상을 냉철하게 보게 되었다. 다음 날 결심이 선 듯 단호한 표정으로 입궁한 그는 범건에게 여러 차례 나서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임씨 집안의 미래를 사위 범한에게 모두 맡겼기에 그는 사돈댁이 더러운 일에 엮이지 않기를 바랐다.
3월 중순 예부 상서 곽유지가 사망했고 형부 상서 한유지가 강등되었다. 그리고 폐하의 만류에도 퇴직을 청한 임약보는 은전을 하사받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로써 오백안 사건에 대한 도찰원의 모든 조치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오씨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하종위는 학식과 덕행을 두루 갖춘 인재란 칭송을 받으며 입궁해 상을 받고 도찰원 어사로 임명되었다.
* * *
“어째서?”
마차에 앉아 조정의 상황을 기록한 감찰원의 보고서를 읽던 범한이 소리쳤다. 제사인 그는 멀리 북쪽 변방에 있어도 며칠이면 경도의 소식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장인어른은 좋은 관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간신이라 하는 건 부당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황당한 것은 일국의 재상이 정치 투쟁에서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고민해야 했다. 재상이 그를 도와준 적이 없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회시 부정행위를 포함해 여러 일이 벌어지는 동안 조정의 문관들이 잠자코 있었던 것은 재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곽쟁과 한지유를 제외하면 경국 관료 사회에서 별다른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범한이 지금 물어볼 대상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소은뿐이었다.
“왜냐니?”
소은이 범한을 힐끗 쳐다보고는 냉담하게 분석했다.
“네가 한 일을 기회로 삼아 경국 황제가 문관의 세력을 약화하려는 것이지. 두 상서를 없애는 것으로 황제가 만족할 거라 생각한 것이냐? 너는 재상의 사위이자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 아니냐. 황제는 그런 네가 나중에 감찰원을 장악할 걸 대비해 재상을 미리 물러나게 한 거야. 물러나게 하는 방법이야…….”
소은이 말을 흐리며 범한을 비웃고는 다시 말했다.
“황제가 신하를 물러나게 하고 싶다면야 방법이야 셀 수 없이 많지. 게다가 너희 황제는 원래부터 감찰원에 있는 변태를 이용하길 좋아하는 괴짜이지 않냐.”
소은이 경국 황제를 괴짜라고 말하는 것은 진평평을 지나치게 신뢰해 감찰원의 힘을 과도하게 키웠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장인어른께서 둘째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려 오백안의 후손을 끊은 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오씨를 암살하는 장면을 2 황자와 정왕 세자에게 들켜 실패했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실 분이 아닙니다.”
“재상 주변에 배신자가 있는 것이지.”
소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장 공주의 사람이든 아니면 황제의 사람이든 사실…… 누구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그러자 범한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인어른을 물러나게 하려면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장인어른처럼 신중하신 분이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약점을 들켰겠습니까?”
그는 장인어른을 배반한 사람이 원굉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이 일을 감찰원에서 꾸몄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소은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한바탕 웃었다.
“어둠 속에 감춰진 일을 너같이 젊은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느냐?”
그는 과거 경국 조정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사람이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만약 두 명의 친왕이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 지금의 경국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범한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소은은 감옥에 오래 갇혀 있던 터라 경국의 정치 상황을 명확하게 분석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범한이 조금만 설명해 주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 냈다. 심지어 이번 회시 부정행위에 연루된 관리들을 어떻게 처벌할지도 정확하게 맞혔다.
165화
더구나 소은은 재상이 이번 일로 자리에서 내려올 거라고도 말했었다. 하지만 그런 조짐은 전혀 없는 데다가 회시 부정행위에 재상은 연루되지 않았고, 재상과 원수가 된 장 공주는 멀리 신양에 있기에 범한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말대로 진행되었고 범한은 그가 명성대로 대단한 실력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소은을 바라보았다.
“정말 궁금한 게 있습니다. 감찰원은 왜 선생을 잡았을 때 바로 죽이지 않았을까요?”
“그건 내 머릿속에 유용한 것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
“그럼 최소한 사지를 자르는 등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뭐라고? 어떤 일이든 용납할 수 있는 선이 존재하는 법이다. 만일 그 선을 넘었다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야. 그건 감찰원이 원한 결과가 아니지 않으냐.”
눈썹을 치켜세우며 고민하던 범한은 소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인사하고 마차에서 나왔다.
마차 옆에 서서 멀리 호숫가 갈대밭을 바라보던 그는 황제 폐하의 진정한 뜻을 이해했다. 고인 물은 언젠가 썩듯이 조정에는 새로운 피가 필요했고, 재상은 이미 너무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경도에서 우뚝 서려면 먼저 재상이 자리를 비워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임약보가 백관의 수장인 이상 황실은 범한이 감찰원을 장악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년에 황제가 범한을 중용하려면 재상이 먼저 떠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범한이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왠지 황제가 자신이 압박받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항상 흐르며 맑음을 유지하는 강물처럼 조정도 항상 새로운 물결이 필요했다. 범한은 새로운 물결이었고 재상은 밀려나야 할 낡은 물결이었다. 그는 역사 무대에서 내려와 앞 세대를 위해 공간을 비워 줘야 했다.
이건 관료 사회의 정상적인 흐름인 만큼 재상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하지만 범한은 경도에 남아 있는 완아와 대보를 생각하니 걱정스러웠다.
“아버님과 진평평 원장이 남은 임씨 가문 사람들을 보살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를 바라보았다.
“갈대는 왜 녹색이 아닐까?”
순간 가슴이 울렁대면서 이번 사건에서 감찰원이 맡았을 역할이 생각났다.
진평평 원장이 황제의 뜻을 몰랐을 리 없다. 재상의 일에 감찰원이 관련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이 분노로 일렁였다. 그때 사리리의 몸 안에 독약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진평평은 범한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있었다. 설사 그것이 범한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정하고 잔인한 방법을 쓰는 것이 당사자인 범한의 기분마저도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았다.
* * *
오랜 시간을 달린 사신단은 오후 무렵에 국경 가까이 있는 커다란 호수에 도착했다. 이름 없는 이 호수는 유달리 커서 그냥 대호라고 불렸다. 범한이 마차에 내려 드넓게 펼쳐진 호수를 바라봤다. 수면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모두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대호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호수를 돌아 북제의 국경에 들어가려면 며칠은 더 가야 했다. 범한은 소은이 정말 도망치려 한다면 이 며칠 동안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멀리서 물새가 호수 수면에 바짝 붙어 날다가 긴 부리를 물속에 넣더니 순식간에 물고기를 잡아 날아갔다. 호숫가로 날아간 물새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팔딱이는 물고기를 단숨에 삼켜 버렸다. 무척이나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짓던 사리리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한동안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던 범한이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사리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 멍하게 범한을 바라보던 그녀는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작은 미물도 편하게 살고 싶어 하듯이, 소첩도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있지요.”
이때 마차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가볍게 흔들리자 범한이 사리리 옆에 주저앉았다. 그와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 사리리가 슬쩍 옆으로 옮기자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본인의 몸에 독약이 있다는 걸 낭자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리리가 아름다운 두 눈으로 범한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입니까?”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감옥에서 살다 나온 제가 놀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자조하는 목소리로 탄식하듯 말하는 사리리는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독약에 정통하신 범한 대인께서 제 몸에 독약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사실이겠지요. 감찰원에서 저를 통제하기 위해 무슨 수를 썼을 거라고는 예상하였습니다.”
범한은 말없이 아름다운 사리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경도에서 지금까지 본 여자들 중에서 사시리만큼 요염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 없었다.
“낭자를 통제하려는 게 아닙니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북제 황제를 다루기 위해 그리한 것입니다.”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던 사리리가 화들짝 놀라 자신의 입을 막고는 범한을 바라봤다. 잠시 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의미인가요?”
그녀의 모습에 범한은 까닭 없이 마음이 불편해졌다. 상대방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녀의 마음속에 젊은 황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그 독약은 낭자의 몸을 거쳐 북제 황제를 중독시킬 겁니다.”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사리리가 입술을 깨물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실을 왜 알려 주시는 겁니까?”
“왜냐하면 낭자가 이 일을 바꾸길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더구나 아직은 임무를 시작되지 않았으니 바꿀 수 있습니다.”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진평평 원장이 무슨 방법으로 낭자를 설득했는지 알려 줬으면 좋겠군요.”
잠시 고민하던 사리리는 범한이 원하는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오히려 활짝 웃었다.
“됐습니다. 소첩에게 사실을 말해 주셨으니 나중에 북제 수도에 도착하면 해독할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약간 비웃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낭자의 몸속에 있는 독약의 해독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나를 제외하고 천하에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은 황궁의 어의 정도지요. 설마 북제 황제에게 감찰원에서 독약을 넣었다고 말할 건 아니겠지요? 그러면 북제 황제가 낭자에게 애정이 있은들 황궁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사리리가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궁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떠합니까? 감찰원의 미인계 임무가 실패한들 소첩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범한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소첩이란 말을 듣기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연유에서인지 사리리가 이를 갈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제가 대인의 마음속에 노비만도 못한 사람이란 말입니까?”
사리리의 발그스름한 볼을 바라보던 범한이 더욱 인상을 썼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던 그는 잠시 뒤 침착하게 말했다.
“낭자도 지금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저는 낭자가 아주…… 터무니없는 일을 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터무니없는 일이라니요?”
사리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죠. 확실히 터무니없는 일이긴 하죠. 인생의 길에서 우연히 만난 대인과 저는 그저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니까요.”
“낭자도 그 점을 알고 있다니 기쁘군요.”
범한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저와 진평평 원장 사이의 약속을 궁금해하신 이유가 뭔가요?”
사리리는 살며시 몸을 돌려 소매로 눈가를 슬쩍 닦고는 막 피어난 꽃과 같은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대인은 감찰원 제사시니 미인계 임무를 자세히 알고 계시잖아요.”
“미인계 임무야 잘 알고 있지만 진평평 원장께서 낭자를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르겠군요.”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하던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낭자는 자신이 진평평 원장의 독을 전달하는 장기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나에게 자초지종을 알려 주지 않는 거요?”
“대인에게 말해서 제게 좋은 점이 있나요?”
사리리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잘생긴 범한을 바라보려니 마음이 쓰라렸다. 사실 그녀는 짧은 여정 동안 이따금 보이는 범한의 순진한 미소에 점차 빠져들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그가 감옥에서 매몰차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진평평 원장이 줄 수 있는 것을 대인도 줄 수 있습니까?”
“그는 늙었고 나는 젊소.”
범한과 사리리 모두 이 말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익을 엄격히 따지는 협상이 순간 유치한 애정 싸움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옅은 치자꽃 향기가 마차 안에 가득 퍼졌다.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자 사리리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 꺼림칙한 게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대화 두 마디에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난처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듯 눈을 굴리던 사리리는 난처해하는 범한을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범한이 헛기침을 하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임무인데 진평평 원장은 나이가 많이 드셔서 2년 안에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젊은 나와 거래를 해야 원하는 걸 얻을 확률이 더 커진다는 것이지요.”
사리리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애써 억누르고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렇게 해서 저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낭자의 몸에 있는 독을 해독할 수 있어요. 게다가 일단 내가 감찰원을 쥐게 되면 힘을 동원해서 낭자가 북제 황실에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줄 거요.”
사리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경국이 강하고 감찰원 밀정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북제 황궁에까지 손을 뻗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북제 황실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한다고 누가 말하던가요?”
순간 말문이 막힌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리리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애완동물 부르듯 범한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대인, 가까이 오십시오. 이 일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범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사리리가 며칠 동안 자신이 찾아오지 않은 것에 관한 분풀이를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귀를 가져다 대자 사리리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숨결을 그의 귓불에 내뱉었다.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희미한 살 냄새가 코끝에 스치자 범한은 의미를 이해한 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참 뒤 젊은 남녀가 헤어지려 할 때 사리리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했다.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범한 대인에게 협상의 내용을 알려 드렸으니 저를 도와주시겠지요?”
아직도 놀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범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나는 진평평 원장을 믿지 않습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낭자에게 순순히 알려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리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대인께서도 믿지 않으시는군요. 아마 진평평 원장은 내가 말하는 걸 걱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천하에서 그분의 생각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겠지요.”
잠시 고민한 범한은 이 일의 자초지종을 이해하고는 웃었다.
“그랬던 거군요.”
그가 사리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대뜸 말했다.
“몇 해 전 경도에서 낭자가 개국 초기 어느 황족의 자손이란 소문이 퍼졌었죠. 당시 백성들은 낭자가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그런 말을 꾸며 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정말인가 보군요.”
사리리가 두 눈을 천천히 감고는 한참 뒤에 말했다.
“제 이름은 이리사입니다.”
그녀의 매끈한 턱을 바라보니 당장이라도 쓰다듬고 싶었다. 범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북제 황제가 낭자의 신분에 관여치 않는 것이나 낭자가 기꺼이 진평평에게 이용당하려 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그래도 낭자는 그 백 년 묶은 독사보다는 실력이 부족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북제 황궁에서 상황이 안정되면 조용히 진평평 원장의 계획을 실행하고 그와 맞서려 하지는 마세요.”
그의 두 눈을 바라보던 사리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협상 내용을 알려 드렸으니 대인께서는 언제 저의 몸 안에 있는 독을 해독해 주실 건가요?”
“내일 시작하죠. 재료를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고 또…… 이번 사신단 일을 마무리 짓고 감찰원을 넘겨받을 방법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낭자의 남동생, 그러니까 세자의 안전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담당하는 한 세자가 경국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리리가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보더니 좁은 마차 안에서 일어서 힘들게 절을 했다.
한편 소은은 조용히 앉아 연꽃이 활짝 핀 것처럼 두 손을 펴고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냄새나는 요강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러고는 몸 안에 있는 정기를 천천히 움직였다. 마차에 옅은 피비린내가 풍기기 시작할 때쯤 그의 경락 안에 있던 검은색 걸쭉한 액체가 서서히 새끼손톱으로 모이더니 요강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166화
농축된 독액이 요강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소은의 눈빛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두 손을 합장해 어지럽게 움직이던 몸속의 정기를 안정시켰다. 감찰원 감옥에서 그를 감시하고 고문했던 7처 전임 수장은 그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방심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은 달랐다. 경도를 나온 뒤 범한은 소은을 통제하기 위해 7처 전임 수장보다 더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다. 직접 정맥에다가 독약을 주입한 것이다. 이 방법은 소은의 신체 기능에 상당한 손상을 입혔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과거 비개가 범한에게 말했듯이 독약을 사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넣느냐’였다. 독약의 효능이 독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건 아니었다.
범한은 소은과 같은 비범한 인물을 만난 경험이 적었기에 그가 20년 동안 겪은 고통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소은의 몸은 이미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독소에 중독되어 있었다. 이런 독소들은 그의 몸에서 어떤 균형을 형성해 독약 중독으로 죽지 않게 했을뿐더러 정기로 독소를 배출하지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범한이 이번에 사용한 강력한 독약은 복잡하게 얽혀 있던 균형을 깨뜨렸다. 이에 소은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수십 년 동안 시달려 온 독소들을 배출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백발을 늘어뜨린 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번뜩이고는 몸을 비틀거리며 안색을 창백하게 바꿨다. 누가 봐도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한편 사신단은 호숫가에 마차를 세우고 야영하기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멀리서 흑기들이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사신단 우측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앞쪽을 살펴보고는 다시 돌아왔다. 마차에 다가온 왕계년이 열쇠를 찾아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은에게 물과 음식을 먹이고 젖은 수건으로 세심하게 얼굴을 닦아 준 그가 물었다.
“오늘도 머리를 빗겨 드릴까요?”
소은이 고개를 저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지만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범한은 언제 방문하나?”
범한이 언제 주사를 놓으러 오냐고 묻자 왕계년이 웃으며 대답했다.
“국경에서 멀지 않으니 매일 독약을 맞을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소은은 기뻐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그저 두 눈을 감았다.
“범한 대인이 내년에 황실 금고를 장악하게 될 거라고 하던데?”
범한이 알려 줬을 거라 짐작한 왕계년은 아무 의심 없이 말했다.
“맞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곳을 장악하게 되시는 거죠.”
“설마 섭가보다 돈이 많겠는가?”
소은이 약간 멸시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낯선 이름에 당황한 왕계년은 웃으며 말했다.
“섭가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뭐라고?”
무언가 생각난 듯 소은의 두 눈이 흔들렸다. 급히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계년은 조용히 요강을 들고 마차에서 나갔다.
왕계년이 인상을 구기며 요강을 들고는 가장 가운데에 있는 천막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 사람이 하루에 똥을 이렇게나 많이 쌉니다.”
“20년 동안 갇혀 있었는데도 신체 기능 회복 속도가 이렇게 빠르다니 영감탱이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럽군요.”
몸을 돌려 왕계년 옆으로 걸어간 범한은 요강 뚜껑을 열고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냄새가 고약하군요.”
* * *
“정말 형편없군.”
신양성 화려한 이궁 안에 걸려 있는 하얀색 면사포가 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거렸다. 경도 황궁에 있는 광신궁처럼 궁 안에는 겨울 매화만 심겨 있어 초봄인데도 분위기는 초겨울처럼 서늘했다. 하얀 면사포 뒤에 놓인 평상에 앉은 여인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허름한 차림의 남자를 바라봤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의 이름은 황의로 평범한 이름과는 다르게 상당한 실력을 가진 지략가였다. 장 공주의 말을 들은 그가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했다.
“장 공주께서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지략가시니 모든 사람이 형편없어 보일 수밖에요.”
“그렇지만도 않아.”
장 공주 이운예가 수려한 얼굴을 가진 청년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도 상당히 영리해. 그 애가 지금의 명성을 얻은 이유를 황제 오라버니와 가까운 사이인 범건이 도와줘서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하지만 진평평이 그 아이를 아끼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황의가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리더니 말했다.
“속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굳이 추측해 보자면 황제 폐하가 범한을 아끼시니 진평평도 그런 걸 수 있지요.”
“황제 오라버니야 신아를 예뻐하는 마음에 범한을 아끼실 수 있겠지. 게다가 범한은 문예면 문예, 무예면 무예 빠지는 게 없잖아. 황제 오라버니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어.”
장 공주가 앳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영리한 애가 바보 같은 결정을 한 게 안타깝군. 제후국들을 피해 돌아가는 게 나아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대호가 있는 황량한 초원은 탈출하기 딱 좋은 장소잖아.”
“보고에 의하면 흑기들도 같이 있다고 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장 공주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은이 도망가지 못할 것 같아?”
“소은이 왜 도망치겠습니까?”
황의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장 공주께서 상삼호와 맺은 계약에 따르면 소은은 북제로 돌아가 과거 힘을 회복한 뒤 안으로는 조정과 연합하고 밖으로는 두 제자와 힘을 합쳐 북제 황실을 전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소은은 진평평처럼……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북제 황실에서 내버려 둘 것 같아? 이대로 북제로 간다면 그는 완전히 북제 황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고, 어쩌면 다시 감옥에 갇혀 늙어 죽을 수 있어. 그럼 나와 상삼호가 세운 계획도 실패하는 것이지. 내가 명성을 버리고 불쌍한 언빙운을 팔아넘기면서까지 소은에게 자유를 준 건 그렇게 해야 상삼호가 약속을 이행할 것이지 때문이야. 그러니 나는 이 일을 망치는 꼴은 볼 수없어.”
“만약 상삼호가 마음을 바꾸면 어찌합니까? 그는 어쨌든 북제의 장군입니다.”
“소은이 북제에게 헌신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나? 두고 봐. 상삼호가 굳이 반역을 저지르고 싶어 하지 않아도 멍청한 전씨 집안이 알아서 그렇게 만들 거니까.”
황의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세심한 부분까지 생각해 두셨군요. 이렇게 주도면밀하시니 누가 장 공주마마의 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부 떨지 마.”
부끄러운 장 공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래도 나는 황제 오라버니보다는 부족하지.”
그녀가 한숨을 쉬며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봤다. 걸려 있는 하얀색 면사포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옆에 있는 황의도 그녀의 미모에 반한 듯 정신을 잃고 바라봤다.
“지난번 글 종이 사건 때문에 공주마마의 명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황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배후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아 안타깝지만, 경도 수비사가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광신궁에 자객이 잠입했던 일은 감찰원과 관계가 있을 거라 합니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턱을 괴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장 공주가 잠시 뒤 중얼거렸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마. 지금은 상삼호를 완전히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집중해야 하니까.”
그 말에 입을 다문 황의가 잠시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이 봤을 때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공주께서 밤낮으로 조정을 위해 헌신하시지 않습니까. 작년 외양간 거리 사건만 해도 멍청한 관리와 백성들은 그저 장 공주께서 황실 금고 관리권을 되찾고자 범한을 죽이려 한 일이라고만 생각할 뿐, 폐하께서 북쪽으로 병사를 보낼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조정은 이 일로 많은 영토를 얻었으면서도 이 일이 공주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을 듣던 장 공주 이윤예가 조금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만해.”
황의가 아랑곳하지 않고 장 공주의 청초한 얼굴을 보며 계속 말했다.
“언빙운의 일도 그렇습니다. 공주께서 몰래 계획을 세우시던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신분이 드러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경국 백성들은 공주께서 다른 나라와 내통했다고만 생각합니다. 공주처럼 존귀하신 분이 다른 나라와 내통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입니까. 아둔한 사람들은 사건의 겉만 보지 공주께서 세운 교묘한 계획으로 조정이 얻을 이득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장 공주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대뜸 말했다.
“원굉도가 도착하면 나에게 알려 줘.”
말을 잘린 황의가 입을 다물자 잠시 뒤 장 공주가 키득키득 웃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비웃고 나는 세상 사람들이 식견이 없다고 비웃지. 황제 오라버니가 잘 지내고 경국이 번성한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황의는 더는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진평평은 자신만의 계획이 있을 거야.”
장 공주는 그런 황의의 모습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범한도 자신만의 계획이 있겠지. 사실 모두의 계획은 내용상 차이가 있을 뿐 방향은 거의 비슷해. 만약 소은이 이번에 도망간다면 북제 수도에 도착한 사신단에게 연락해 범한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게 할 거야.”
황의가 화들짝 놀랐다.
‘설마 적과 손을 잡겠단 말인가?’
그의 속마음을 읽은 장 공주가 빙그레 웃었다.
“별일 아닌 걸로 장광설을 늘어놓는 건 나를 감동하게 하려는 속셈인 거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너희 같은 보잘것없는 것들이 그렇게 아부하는 거야.”
“소신이 어찌 그러겠습니까.”
황의는 비지땀을 흘리며 장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럼 연소을이 추진하고 있는 계획을 잠시 중단시킬까요?”
“왜 중단하려는 거지?”
장 공주가 웃으며 바라보자 한기를 느낀 황의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범한이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어. 그래서 그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너무 아쉬워. 생사를 막론하고 아름다운 청년인 건 사실이잖아.”
경국에서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여인인 장 공주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라고 천하의 무대에 서지 말란 법은 없잖아. 이전에 그 여자처럼 나도 세상에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고 말겠어.’
과거 범한은 진짜 마음을 두고 사리리를 대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항상 마음속에 누군가의 얼굴을 두고 있었기에 사리리의 빼어난 외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경도를 나온 뒤 오랜 시간 함께 이동하면서 사리리는 범한의 마음속에 옅은 흔적을 남겼다.
그녀가 불쌍해서일 수도 있고 감찰원에서 사용한 방법이 너무 잔인해서이거나, 아니면 감찰원 감옥을 처음 찾아갔을 때 7처 전임 수장이 했던 말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마음을 단호하게 먹으려는 것과는 다르게 범한은 사리리가 가엽게 느껴졌다. 사리리에게서 느껴지는 가련함은 인생의 시련에서 생긴 자연스러운 모습이기에 장 공주에게서 느껴지던 것과는 달랐다.
요 며칠 동안 범한은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약물과 호숫가에서 찾은 식물을 배합해 해독약을 만들었다. 사리리가 알려 준 진평평의 생각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속인 만큼 해독약을 만든 것이다.
범한의 머릿속에는 이미 진평평 원장이 계획한 미인계 임무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더욱 간단하고 확실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해독하면서 사리리는 표면적으로는 달라진 건 없어 보였지만 볼일을 보는 횟수가 늘었다. 그때마다 범한이 옆에서 조용히 지키고 있어서 사리리는 부끄러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신단 마차 행렬은 점차 동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틀 정도 대호를 돌아가면 북위 군사들에게 호위 업무를 넘길 장소인 무도하강에 도착할 터였다.
“북제에서는 이 호수를 북해라고 부릅니다.”
사리리가 호숫가에 서서 손가락으로 갈대를 쓸며 말했다. 그러자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이 물었다.
“언제 경국을 떠났습니까?”
“어렸을 때입니다. 부모님께서 저와 남동생을 데리고 도망을 다니셨는데 감찰원의 추격이 거세서 심복들도 모두 죽고 우리를 받아 주려는 사람도 없었지요.”
사리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사실 저는 아버님의 모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황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던 친왕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사리리의 말을 들은 범한은 속으로 시기를 계산해 보았다. 경국에서 친왕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사리리의 치맛자락을 보며 범한은 속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자신의 어머니가 죽였다는 사실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167화
호수 풍경을 감상하던 사리리가 한숨을 쉬더니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정돈하며 말했다.
“아버님은 결국 감찰원에게 추격당해 황궁 시위에게 살해당하셨지만 저와 동생은 어머님과 함께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어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겨우 북제에 정착한 것입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집안이 몰락해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고 남은 가족들은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니…… 정말이지 기구한 삶이었다.
호수 표면에 옅게 깔린 안개를 바라보던 사리리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찾은 평온한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북제 황실에서 저희의 신분을 알아채고는 수도로 불렀거든요.”
“좋은 뜻에서 부른 건 아니었겠군요.”
사리리가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았다.
“대인은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십니까? 경국 황제나 조정은 우리에게 좋은 뜻을 품고 있었습니까?”
말문이 막힌 범한이 멋쩍게 웃었다.
“어쨌든 적국이 아닙니까.”
“아버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가 두 눈을 감자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어머님께서 병으로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의 없어진 저와 남동생은 저희의 신분을 이용하려 하는 북제 황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어려서부터 북제 황궁에서 자랐지요.”
범한이 그녀의 옆으로 걸어가 바람을 막아 주었다.
“그럼 그때 북제 황제를 알게 된 겁니까? 젊은 황제와 소꿉친구인 셈이군요.”
“그 당시에는 황제가 될 거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나이가 비슷하니 논 것이지요.”
“그럼 북제 밀정이 돼서 경도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녀의 인생에 흥미를 느낀 범한이 물었다.
“북제 황제는 저와 혼인하고 싶어 했지만 지금 경국 황실에 원한이 깊은 저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로 돌아온 것 같지는 않군요.”
사리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사실 제가 황제와 결혼하는 걸 허락하지 않으시던 황태후가 저에게 북제 밀정으로 경국에 돌아가 유정강에 근거지를 마련하라 하셨습니다.”
취선거에 갔던 일을 떠올린 범한은 무언가 말하려다 말았다. 그러자 그의 생각을 알아챈 사리리가 웃었다.
“같이 있었던 사능과 종들은 모두 마취 약을 잘 다루는 북제 고수들입니다. 그래서 마취 약으로 손님이 저를 건들지 못하게 한 뒤 다른 사람이 저를 대신하게 했지요.”
범한이 불쾌한 기색을 내보이며 물었다.
“이걸 나에게 말해 주는 이유가 뭡니까?”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범한이 자신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한다는 걸 아는 사리리는 오히려 화내지 않고 웃었다.
“처음부터 대인이 비개의 제자인 걸 알았다면 거리를 두고 피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그날 대인의 약에 취하는 일을 피했겠지요.”
사리리가 살며시 웃으며 범한을 바라보자 머쓱해진 범한은 웃었다.
“그날 약에 취했다는 걸 알고 무섭지는 않았습니까?”
봄이었음에도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조금도 따뜻하지 않았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갈대들이 휘청거렸다. 시원한 바람에도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자 사리가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그녀가 우물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깨어났을 때는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용기를 내 범한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인처럼 아름다운 분과 첫날 밤을 보냈으니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리리의 대담하고 솔직한 말에 당황한 범한은 뭐라 말해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게…… 그…….”
“뭐라고요?”
사리리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범한을 바라보았다.
“황실의 후손이 매일 놀잇배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 않습니까. 만약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고 마취 약을 사용했으면 어쩌려고 했습니까.”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왜 이제 와서 관심이 생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당시 사리리가 위험한 상황에 놓였던 게 마음 쓰였다.
사리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범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는 제가 황실의 후손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도 보복할 방법이 없는 가련한 여자일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 * *
호숫가 높은 곳에 세워진 야영지를 마차들이 호위하듯 반원형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안에 있는 천막들은 일찌감치 불이 꺼진 상태였다. 서로 가까이에 있는 사리리와 범한은 낮에 대화을 하며 감정 소모를 많이 해서인지 조용했다. 종종 이와 같은 깊은 밤에 생겨나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오늘 밤에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게 조용하기만 했다. 흑기들은 멀리 언덕에서 진영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고 호위와 감찰원 밀정은 조를 나누어 진영 안을 순찰했다.
하늘 위 달빛이 땅의 모든 구석을 비추었다. 오늘 밤에는 구름도 바람도 별도 없어서 그런지 달빛이 마치 선녀의 고운 손처럼 진영 안의 사람들을 보듬어 주며 빨리 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소은이 마차에서 내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범한은 굳게 잠긴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검은색 마차에 달빛이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모든 사람이 깊이 잠들었을 무렵 검은색 그림자가 돌풍처럼 소은이 탄 마차로 다가왔다. 그림자가 소리를 낼세라 기름 묻은 수건으로 열쇠를 닦은 뒤 마차 열쇠 구멍에 넣어 조심스럽게 돌렸다.
마차 문이 열리자 소은이 고개를 들어 앞에 앞을 바라봤다. 그의 손발에 묶여 있어야 할 쇠사슬은 일찌감치 풀어져 옆에 놓여 있었다.
소은이 마차에서 나오자 어깨까지 내려온 백발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민할 여유가 없었기에 범한이 있는 진영을 바라보고는 검은색 그림자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범한은 이때 두 눈을 뜨고 탁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만지고 있었다. 찻잔에는 차향에 섞여 구분하기 어려운 마취 약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밖에서 심상치 않은 기분이 느껴지자 그는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30까지 숫자를 센 뒤 범한은 천막을 열고 밖으로 나가 검은색 마차를 바라봤다. 이상한 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왕계년이 몰래 마차 앞에 설치해 둔 장치도 움직이지 않은 걸 보면 문을 연 사람이 고수인 게 틀림없었다.
이때 갑자기 진영 전체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범한의 신호에 마취 약에 취해 있는 사신단을 제외한 왕계년과 심복들이 그의 앞에 섰다. 심복들 뒤에는 검은색 개 세 마리가 거친 숨을 내쉬며 서 있었다. 개들은 입에 가죽 덮개가 씌워져 있어서 짖을 수 없었다.
머리를 긁던 범한이 손을 휘저었다.
“문을 열고 개를 풀게.”
왕계년이 조용히 손짓하자 부하들은 개들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한 달 동안 묶여 있던 터라 난폭한 야생성을 분출하지 못한 개들이 추적할 냄새를 맡고는 쏜살같이 야영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챙! 챙! 챙! 챙! 빗발치듯 칼이 쏟아지면서 칼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달빛 아래 칼날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번쩍번쩍 섬광을 만들어 냈다. 이윽고 칼날들이 자객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잇따라 들리더니 곧이어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명의 자객의 몸이 삼등분으로 잘려 나가 있었다. 머리가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사방에 피가 뿌려졌다.
장검이 빠르게 공기를 가르며 마지막 자객을 향해 달려들었다. 촤악! 촤악! 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자객의 두 팔이 몸에서 떨어져 통나무처럼 땅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호위 수장 고달이 재빨리 장검을 다시 등에 찼다. 그의 뒤에 있는 호위 여섯 명도 동시에 칼을 거뒀다. 호위들이 달빛을 받으며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모습이 멋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게 잡고 서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빨리 달려오던 왕계년이 팔이 잘린 자객을 지나쳐 가다가 멈춰 섰다.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오는 걸 보니 과연 최고의 추격자라 불릴 만했다.
그가 재빨리 손에 있던 쇠 봉을 자객의 입 안에 꽂아 넣은 뒤 흔들자 듣기 힘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그는 피범벅이 된 자객의 입 안에 손을 넣고는 독약을 숨긴 이빨을 꺼내 조심이 천에 감쌌다. 마지막으로 자객이 혀를 깨물어 자살하지 못하도록 품 안에서 밧줄이 달려 있는 원형 나무 구슬을 꺼내 자객의 입 안에 넣었다.
두 팔이 잘려 피를 강물처럼 흘리는 자객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더구나 입 안에 나무 구슬까지 물고 있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침까지 질질 흘리는 모습이 안타깝고 참혹해 보였다.
“역시 감찰원 안에 잠입해 있었구먼.”
왕계년에 낯익은 얼굴을 한 자객을 보았다.
“오래된 방법으로 독을 숨겨서 다행이야.”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부하에게 말했다.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도록 해. 절대 죽어서는 안 되니 잘 돌봐야 한다. 반드시 자백을 받아 내야 해.”
고개를 끄덕이던 부하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대인께서 쇠 봉으로 이빨을 부술 때 독약이 몸 안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왕계년이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 세월 문서를 담당하는 자리에 있다 보니 확실히 예전보다 서툰 점이 있었다. 그는 급히 자객의 입에 물린 나무 구슬을 빼고는 물로 입을 헹구게 한 뒤 범한이 준 해독 환약을 먹였다.
한숨을 돌린 그가 다시 나무 구슬을 입에 넣으려 하자 부하가 참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이빨이 모두 부서졌는데 혀를 깨물 수 있을까요?”
정곡을 찔려 머쓱해진 왕계년은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내가 나무 구슬로 입을 틀어막는 걸 좋아해서 그런다! 그럼 안 되느냐?”
* * *
진영이 혼란에 빠졌을 때 범한은 이미 옷소매와 바짓단을 단단히 묶고는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검은색 옷은 어둠에 들어가자 잘 보이지 않았다. 상당한 검술을 가진 호위 일곱 명이 그를 따라 개들이 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주변은 고요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갈대들만 나부낄 뿐이었다.
진영 안은 감찰원 밀정이 감시하고 있었고 흑기들이 밖을 지키고 있어 범한은 진영에서의 상황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소은의 몸 안에 주사한 독약은 독하기도 했지만 다른 기능도 있었다. 그 독약은 정기를 운용해 몸 안에서 배출하더라도 모공에 잔여 성분이 남아 있어 냄새로 추격할 수 있었다.
소은은 맡을 수 없었겠지만 후각이 사람보다 뛰어난 개들은 맡을 수 있었다.
하늘에 구름 하나가 보이더니 어느새 먹구름이 달빛을 가렸다. 주변에는 밤바람이 호수 수면에 부는 소리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범한은 온몸을 검은색 천으로 두른 채 두 눈만 드러내고 있었다.
소은이 독약을 배출한 걸 눈치챈 뒤 그는 독단적으로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사신단이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은 것은 내부 사정을 아는 감찰원 밀정들이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은이 도망쳐 버린다면 언빙운을 경국에 데려올 수 없으며, 도망에 성공한 소은이 독사처럼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경국에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범한의 이번 결정은 경국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앞쪽 갈대밭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오자 범한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특수하게 만든 천을 통과한 바람에서 옅은 피비린내가 났다. 기괴한 소리와 희미한 피비린내는 소은을 추격하던 세 마리의 개들이 죽으면서 풍기는 것이었다. 사나운 개들을 조용히 처치한 걸 보니 소은의 신체 기능이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
범한은 젖은 진흙 위에 가만히 서서 앞에 펼쳐진 갈대밭을 바라보며 소은과의 거리를 계산했다. 그러더니 오른손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호위들은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아차리고는 갈대밭으로 피해 거리를 벌렸다.
소은은 당시 자신을 쫓은 사람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어둠을 따라 움직이며 갈대로 몸을 숨기고 호숫가 바람으로 자신의 냄새를 지우는 등 도망치는 기술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국경선이 있는 동북 방향으로 도망쳤다.
범한도 소은이 어디로 가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날듯 달리자 몸 안에 있는 정기가 점차 움직이면서 화살처럼 빠르게 앞으로 내지르면서 갈대들이 양 갈래로 벌어졌다. 빠르게 달려가던 그가 갑자기 멈춰서 주변을 관찰했다. 갈대에 방금 끊긴 것 같은 흔적이 보였고 진흙 위에 또렷하게 찍힌 발자국도 보였다.
소은은 빙빙 돌아서 가고 있었다.
범한도 그를 쫓아 빙빙 돌아서 달려가고 있었다.
168화
깊은 밤 사냥감과 사냥꾼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지만 언제 두 사람의 입장이 번할지는 알 수 없었다. 소은은 반드시 도망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야 했다. 그리고 범한은 반드시 소은을 잡아 기회로 삼아야 했다.
소은의 흔적이 선명해질수록 검은 천 밖으로 드러난 범한의 눈이 번뜩였다. 흔적을 보니 연로한 탓인지 과거와 같은 대담함은 보이지 않았고 주사한 독약의 영향에 몸도 둔한 것 같았다.
호숫가 갈대밭을 지나 삼나무 숲에 이르자 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눈이 예리했기에 짙은 어둠 속에서도 숲 입구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 위험을 직감한 그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숲의 측면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무 밑 수풀 속에서 밧줄이 튀어 올라 범한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온 호위의 목을 옭아맸다. 공중에 뜬 호위는 재빨리 등에 차고 있는 장검을 빼서 밧줄을 잘랐다.
밧줄에서 벗어난 호위가 평탄한 땅 위로 착지하자 곧이어 화살이 날아왔다. 장검으로 화살을 막으며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던 그가 발밑에 있는 구덩이를 보고는 급히 걸음을 멈췄다. 구덩이는 날카로운 가지를 꽂아서 만든 함정이었다.
범한이 나무에 붙어 서서 자동으로 화살이 나가도록 설계된 쇠뇌를 해체했다. 호위가 무사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본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때 숲속에서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살며시 흔들거리자 갑자기 검의 그림자가 나타나 주변의 모든 공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살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피를 뒤집어썼다. 칼을 휘두르는 소리가 잠잠해지자 호위의 수장인 고달이 횃불을 밝혀 죽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죽은 사람은 소은이 아니었다.
호위들은 횃불을 끄고 반원형 진형을 갖춘 뒤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범한은 나무에 붙어서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다. 소은이 마차 문을 열어 준 사람과 함께 이동하지 않은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하지만 소은의 몸속에 주입한 독약 냄새가 숲속에서 은은하게 나는 걸 봤을 때 그가 이곳에 있는 건 확실했다.
달이 구름 위로 떠오르면서 숲속에 달빛이 비쳤다. 나무를 잡은 손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을 감지해 낸 그는 상대방을 죽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소은은 분명 숲속에 있었다.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몸에 회복하기 힘든 손상을 입은 소은은 멀리 도망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범한이 주입한 강력한 독약을 경락을 통해 몸으로 배출해 내는 데 힘을 많이 소모한 데다가 도망치면서는 추격해 오는 개들을 죽이는 데 체력을 소모해서 지쳐 있기도 했다.
나무 위로 숨은 그는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호흡이 가빠지자 속으로 늙으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실감했다.
달빛이 숲속을 비추자 그의 눈에 등에 장검을 찬 일곱 명의 호위들이 보였다. 그들은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며 그가 숨은 장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맨 처음 사신단에서 호위들을 봤을 때 그는 정말 놀랐었다. 경국에 감찰원 6처 말고도 이렇게 상당한 실력을 갖춘 조직이 있다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범한이라는 젊은 청년이었다. 소은은 범한이 자신을 죽일 명분을 세우려고 일부러 허점을 보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숲 옆에 있는 산만 넘으면 바로 무도하강이었다. 소은의 가장 비밀스러운 제자가 보낸 사람들이 국경선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은은 주변을 침착하게 둘러보고는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사신단에서 도망친 지 두 시진이 지나 있었다. 그사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면서 해는 벌써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었고, 대호의 뽀얀 안개는 숲속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숲속에 안개가 짙게 깔리는 때가 소은에게는 기회였다. 그는 소리 없이 나무 아래로 내려와 검은 진흙 위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고는 미꾸라지처럼 조심조심 수색하고 있는 호위들을 향해 기어갔다. 진흙 위를 기어가는 그의 마음속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용솟음쳤다. 바로 오래전 북위 밀정이었을 때 생사를 넘나들며 느꼈던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는 거친 호흡을 진정시킨 뒤 몸 안에 있는 순수한 정기로 약한 기력을 보완했다. 그러고는 안개를 엄폐물로 삼아 일곱 호위의 발밑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비록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이 숲을 지나 북쪽으로 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휙! 휙! 휙! 세 발의 화살이 독사의 눈처럼 번쩍이며 소은을 향해 날아왔다. 낌새를 미리 알아챈 그가 왼쪽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화살을 피했다.
화살이 몸에 박히는 상황은 면했지만 호위들에게 위치가 노출된 건 어쩔 수 없었다. 서슬 퍼런 장검이 그물처럼 그가 있는 곳을 덮쳤다.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소은은 이미 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대 강자의 모습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숲속에서 촤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찰나의 순간에 그가 일곱 장검의 포위망 밖에 서서 두 손으로 장검을 밀어냈다.
장검이 힘없이 부러지면서 호위 두 명이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힘이 어찌나 센지 나무에 몸이 부딪치자 충격에 나무가 부러져 쓰러졌다.
소은은 귀신처럼 백발을 늘어뜨리고 두 손에 장검을 쥐고 있었다. 이때 검 하나가 휙 소리를 내자 백발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이 번쩍이더니 두 손을 합장하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검을 피해 안개 속으로 사라진 그의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피할 겨를도 없이 강한 장풍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네 명만 남게 된 호위들은 장검을 휘둘러 소은의 몸을 옭아매었다.
소은이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는 두 발을 굴러 아래 있는 진흙을 튀어 오르게 만들더니 호위들이 방심한 틈을 이용해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사방으로 쏘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은 호위들은 장검을 휘둘러 몸을 보호하면서 눈이 찔리지 않도록 칼자루를 얼굴 앞에 붙였다. 그런데도 나뭇가지가 박혔는지 몸이 아팠고 손등에는 나무 파편이 묻어 있었다.
높은 곳에서 다시 날카로운 나뭇가지들이 쏟아져 내렸다. 두 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소은은 이미 연기처럼 사라진 뒤였다. 그는 이미 짙은 안개를 헤치며 숲 끝으로 가고 있었다.
촤르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최근에 자라나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강력한 힘에 떨었다. 검은색 천을 두른 범한은 하늘을 가로질러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는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으려 하는 소은을 바라봤다.
몸을 숨긴 범한은 먼저 쇠뇌 세 발을 그에게 쏘았다.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좋은 기회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화살은 빗나갔다. 그러자 그가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소은에게 달려들어 검은 빛을 내뿜는 비수를 왼손으로 꺼내 목을 겨누었다.
그 순간 범한의 눈에 백발에 가려진 소은의 두 눈이 보였다. 목에 칼이 와 닿았는데도 너무나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사실 소은은 범한에게 모든 정신을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유에 목마른 소은이 마른 입술을 벌리고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그가 칼을 쥔 범한의 왼쪽 손목을 잡고는 다른 손가락을 독사의 송곳니처럼 구부려 범한의 두 눈을 찌르려 했다.
두 사람이 나무 위에서 엄청난 기세로 힘을 겨루었다. 소은은 마치 이런 힘도 모두 계산해 둔 듯 힘의 반동을 이용해 더욱 빠른 속도로 범한의 눈을 찌르려 했다.
소은의 가는 손가락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범한의 눈을 향해 다가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피부 색깔이 다른 두 손이 엉겨 붙었다. 그 순간 범한은 오른손을 꺼내 자신의 눈을 파고들려 하는 소은의 손을 잡았다. 순간 놀란 소은의 두 눈이 흔들렸다. 범한이 검은 옷 안에서 손을 꺼낼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것 같았다.
범한이 상대방의 행동을 순발력 있게 예측해 움직일 수 있는 건 바로 어린 시절 오죽에게 사정없이 맞으며 기른 실력 덕분이었다.
소은은 분명 무서운 상대였지만 오죽만큼은 아니었다. 범한이 깊이 심호흡하며 소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자 난폭한 정기가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때 풀린 반대쪽 손이 움직이면서 섬광이 안개를 찢었다.
비수의 칼끝이 빠르게 움직이며 만들어 낸 섬광이었다.
다급해진 소은은 범한의 손목을 움켜쥔 채 무릎으로 그의 아랫배를 찼다. 그러고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순간 엄지손톱 안에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검은 빛이 희미하게 나오더니 범한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은이 다시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려 하자 범한이 몸을 비튼 뒤 몸속 정기를 이용해 가까스로 상대방의 발길질을 피했다. 범한은 자신의 왼쪽 어깨가 축축해지는 걸 느끼면서 방금 소은의 엄지손톱 안에서 나온 칼날에 베여 피를 흘리는 것이라 짐작했다.
범한은 왼손에 들고 있는 비수로 소은의 목덜미를 노리면서 오른손으로는 끊임없이 소은과 내공을 겨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당량의 체력이 소모돼 어깨가 아파 왔다. 고민하던 범한은 한숨을 쉬며 비수를 아래로 내려 순식간에 소은의 손가락을 잘랐다.
소은이 굉장히 강한 사람인 건 분명했지만 어쨌거나 노인이었다. 손가락이 잘린 통증에 그의 오른손에 힘이 약간 풀리자 범한은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얇고 긴 비수가 검은 빛을 번뜩이며 다가오더니…… 소은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이때 두 사람은 여전히 추락하고 있었다. 칼날이 몸을 파고들자 소은은 고통에 겨운지 입을 벌렸다. 이때 그의 입 속에서 가는 바늘이 튀어나와 범한의 얼굴로 향했다.
범한이 왼발을 들어 소은의 무릎을 밟자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범한이 몸을 일부러 반 자 정도 올려 가는 바늘이 자신의 가슴에 박히도록 했다. 가슴에 통증이 전해지자 왼손을 돌려 검은색 비수를 두 개로 나누어 풍차처럼 휘두르며 소은의 오른손 손목을 벴다.
그러자 퍽 소리와 함께 범한의 눈을 파고들려 하던 소은의 왼손이 뒤로 물러났다. 순수한 정기를 가진 그는 범한의 오른손을 이길 힘이 있었다.
범한이 왼손을 힘없이 거둬들이는 듯하더니 머리칼 언저리에서…… 번개처럼 빠르게 튀어나오면서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작은 바늘을 소은의 목에 꽂았다.
소은의 몸이 경직되었고 범한도 가슴이 답답했다. 두 사람이 마침내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쌓인 썩은 나뭇잎에서 악취가 났다.
장검이 가로지르자 살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짙은 안개 속에서 검을 쥔 고달은 피범벅이 된 범한을 발견했지만 소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소은과 아주 오래 격전을 벌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나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목숨을 내건 싸움을 벌였다. 손목과 무릎으로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은 투박해 보였다. 하지만 실은 이 싸움에는 과거 북위가 가지고 있던 가장 정교한 살인 기술과 범한이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무예가 응축되어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실용적인 기술이었다. 만약 어떤 강자든 소은이나 범한과 안개 짙은 밤에 대결했다면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9등급 암살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소은은 끝났어.”
범한이 마른기침을 하며 얇은 장갑을 낀 손으로 감찰원에서 특수 제작한 옷에 박힌 바늘을 뽑았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바늘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어깨 상처에 독약이 심하게 묻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소은이 도망간 방향을 바라봤다.
소은은 자신이 이미 끝났다는 걸 알았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 본능적으로 썩은 나뭇잎을 몸에 문질러 냄새를 숨긴 뒤 숲 밖으로 도망쳤다.
범한과 호위들이 행적을 따라서 갈대밭을 지나 숲으로 왔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상대방이 알아챌 수 있는 냄새가 난다는 증거였다. 소은은 기침이 나려 하자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았다. 20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그의 심장은 이미 손상되어 있었다. 나무 위에서 떨어질 때 그는 머리보다 반응이 느린 몸 때문에 비참하면서도 슬픈 기분이 들었다.
만약 20년 전이었다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쉽게 범한을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북해무 동료들이 있었다면 일곱 명의 호위들도 손쉽게 처치하고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늙은 몸뚱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169화
한편 범한은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하지도 않은 채 기괴할 정도로 날카로운 비수를 들고 있었다. 그런 범한을 피해 도망가던 소은은 피를 많이 흘려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옷을 찢어 상처 부위를 지혈했다.
과거 밀정의 수장이었던 그는 무릎뼈가 부러져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나른해져 가는 몸을 이끌고 꿋꿋하게 짙은 안개 속을 걸어 나갔다.
바로 그때, 호위 수장 고달이 나무 위에서 내려와 소은의 복부를 겨냥해 섬광처럼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소은이 재빨리 피하기는 했지만 칼이 워낙에 빠른 탓에 살이 벌어져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피 묻은 옷을 입은 채 걸어가는 소은은 이미 깊은 부상을 여러 번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진짜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목에 꽂힌 작은 바늘 때문이었다. 그는 바늘을 뽑은 뒤 어떤 결과가 생길지 알지 못했기에 뽑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온몸의 혈관이 점차 엉겨 붙는 느낌이 들면서 발걸음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마르고 창백한 손으로 나무 아래를 파서 버섯을 캐내더니 생으로 씹어 먹었다. 피를 멎게 하고 해독하는 효과가 있는 버섯이었다. 사실 그에게 이 숲은 수십 년 전에 와봤던 익숙한 장소이기에 이곳을 도주로로 정하면 추격자를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하늘은 점차 밝아졌지만 숲에 깔린 안개는 사라질 줄 몰랐다. 아침 햇살이 안개 속으로 들어오자 주변이 신성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지혈한 부위에서 피가 새어 나오더니 결국 핏방울이 진흙 위에 떨어지면서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그는 젊은 범한이 맹수처럼 숨어서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왜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자신이 이미 끝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 * *
도대체 무슨 힘으로 2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버티고 또 오늘 중상을 입고도 늙은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걸까. 짙은 안개가 깔린 숲을 통과한 뒤 산을 기어올라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걸어가자 그의 눈에 마침내 북제의 영토가 보였다.
무도하강이라 불리는 작은 도시가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모습을 본 소은은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가 망가져 버린 오른쪽 다리를 손으로 들어 왼쪽으로 살짝 옮기며 마른기침을 했다.
도시에 나오는 밝은 빛은 유리 기와에 햇볕이 반사돼 생기는 것이었다. 유리를 살 여유가 없는 외딴 시골집 지붕들이 유리 기와로 되어 있는 이유를 소은은 알고 있었다. 과거 이 도시 뒤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던 유리 공장이 파산하자 도시 주민들은 유리 조각을 주워서 자신들의 지붕에 붙인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암흑같이 어두운 세상에서 자신만의 빛이 필요한 법이다.
이것은 소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빛나는 작은 도시를 바라보며 10여 년이 흘렀어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은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부대는 도시 밖 초원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들을 죽인 2백여 명 정도 되는 흑기들은 조금의 생기도 없는 검은 장벽처럼 초원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순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적군이 보이자 순식간에 흑기 몇 명이 피바다가 된 전장을 지나 달려들었고 다시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저 초원에 쓰러져 있는 젊은이들은 호아(虎兒: 상삼호를 부르는 명칭)의 부하들이겠지?”
소은이 눈을 가늘게 뜨고 광경을 지켜보다가 피곤함에 마른기침을 했다. 그는 범한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이해되었다. 범한은 비록 경험은 부족하지만 이기기 위해 과감히 행동하는 패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무도하강까지 쫓아온 이유는 초원에 죽은 채 있는 북제 사병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함이었다.
가늘고 긴 비수가 소리 없어 다가오자 뒷덜미가 서늘해지면서 소름이 돋았다.
“제가 생각한 것만큼 강하지는 않으시군요.”
범한의 평온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소은이 마른 입술을 오므리고 씁쓸히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왜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탈출한 것입니까?”
범한은 밤새도록 추격전을 벌이면서도 이 부분이 가장 이해되지 않았다.
소은은 범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무도하강을 바라봤다. 그는 왕계년이 무심결에 한 말 때문에 아가씨와 사원이 생각나서 탈출한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직도 가만히 있는 이유가 뭔가?”
소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도시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자네처럼 임무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은 일을 미루면 미룰수록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알 텐데.”
“제가 뭔가 실수한 기분이 들어서 그럽니다.”
범한이 비수를 꽉 쥐며 말했다. 검은 천 밖으로 드러난 그의 두 눈에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사실 선생을 맞이하러 장 공주가 보낸 사람이 올 것이란 저의 예상과 다르게 북제 사람이 나타나 당황했습니다.”
“나는 장 공주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네.”
소은은 죽든 살든 상관없다는 듯이 초원에서 나는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처럼 자연에서 나는 신선한 냄새를 맡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감찰원 감옥 안에서 맡던 녹슨 철 냄새와 건초 냄새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순간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범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발이 된 소은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다시 말하지만 나를 죽이려면 국경선에서 죽이는 게 좋아. 그렇게 해야 나의 탈출을 도운 사람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울 수 있을 테니.”
소은이 초연한 표정으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지 않고 환대하러 온 북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죽인다면 자네 동료의 생사도 장담할 수 없을 거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국경선에서 소은을 죽이는 계획은 사실 언빙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계획이지. 물론 소은을 탈출시키기 위해 상삼호가 군대를 보냈고, 그래서 싸우다가 소은이 죽었다고 한다면 북제 황제도 이해할 수밖에 없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예상과 다르게 연소을의 군대가 오지 않았다는 건데, 장 공주를 끌어들이지 못한 채 소은을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때 범한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비수를 꽉 잡았다.
“자네들이 나를 용맹한 호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소은은 자신의 목덜미에 칼끝이 겨눠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문자답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이빨 빠진 병든 호랑이일 뿐이네.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한 건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어. 나는 경국에서 갇혀 있었듯이 북제로 돌아가도 갇혀 있게 될 거네. 이 나이까지 살면 사실 죽는 건 별로 두렵지 않아. 자유가 없는 게 두렵지.”
“진평평 원장이 선생을 북제로 돌려보내면서 저에게 죽이라고 말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범한은 소은이 준 실마리를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시험입니다. 선생이 말했던 것처럼 저는 재능도 있고 실력도 강하지만 혼자서 진정한 강자와 겨뤄 본 경험이 없지요. 선생은 제가 처음 혼자서 싸워 본 진정한 강자입니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고향을 바라보던 소은이 고개를 저었다.
“말만 그렇게 했을 뿐 나는 진정한 강자가 아니네. 진평평은…….”
그가 갑자기 원망과 즐거움이 섞인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진평평은 사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놈은 오랜 세월 나를 가둬 두면서도 나를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도,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어. 진평평이란 놈은 사실 천하를 휘어잡을 힘이 있다고 허풍만 떨 뿐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야!”
격하게 소리친 소은이 마른기침을 하자 상처가 벌어지면서 초원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초원에 핀 풀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렸다.
“무슨 비밀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선생께서 알고 있는 게 뭡니까?”
“20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도 나는 침묵을 지켰네. 그래서 인내심이 바닥난 진평평이 너의 사냥감으로 나를 던져 준 것이지.”
소은이 말하다 말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런다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것 같으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선생이 무서울 게 뭐가 있다고 비밀을 지키려 하십니까?”
“이 세상에는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 많으니까.”
범한은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뒤에서 장검을 찬 일곱 명의 호위들이 조용히 다가오는 게 느껴지자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흑기들이 상황을 주시하며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그 순간, 그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왼쪽으로 미끄러지듯 숙이면서 손에 있던 독침을 수풀에 쏘았다. 그러고는 마치 독사처럼 공중으로 튀어 올라 비수를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그의 몸 안에 있는 난폭한 정기가 모이면서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수가 공중을 가르며 떨어졌다.
유리한 지형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은 범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장검을 뽑아 수풀을 공격했다. 일곱 개의 장검들이 공중을 가르자 순간 하얀 섬광이 번쩍였다. 경도 황궁에 있는 대종사 홍 태감이라도 빠져나갈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매서운 공격이었다.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질풍 폭우와 같은 공격이 시작될 때 수풀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건 하얗고 고운 손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반딧불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작고 귀여운 손이 불쑥 나오더니 범한이 쏜 독침을 가볍게 잡았다.
이어서 수풀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풀거리며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내리꽂히는 비수를 피했다.
곧이어 장검들이 돌풍처럼 빠르게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하늘하늘 아름다운 몸짓으로 날아오른 그림자는 춤을 추듯 장검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더니 마지막으로 가장 기세등등한 칼날을 발끝으로 살짝 밟고는 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본 고달은 감탄하며 검을 거둬들였다. 나머지 호위 여섯 명은 갑자기 나타난 고수가 공격할세라 범한과 소은 앞을 가로막았다.
수풀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모두를 놀라게 한 고수는 여자였다. 머리에 꽃무늬 두건을 두른 채 신선한 버섯이 든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락없는 시골 처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범한이 쏜 독침을 손으로 잡고, 모든 정기를 모아 날린 일격을 가뿐히 피했을 뿐만 아니라 폭풍처럼 휘두르는 장검의 공격도 피한 걸 보면 분명 평범한 시골 처녀는 아닐 것이다.
* * *
범한이 곁눈질로 자신의 뒤에 있는 소은을 슬쩍 바라봤다. 죽음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던 소은이 난데없이 나타난 시골 처녀의 모습에 눈꺼풀을 가늘게 떨었다. 범한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시골 처녀를 바라봤다. 이 여자는 왜 수풀 속에 매복해 있었던 걸까.
그가 앞으로 걸어가 호위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하자 고달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고달이 장검을 두 손에 꽉 쥐고 소은의 뒤를 지키며 이상한 낌새가 나면 벼락같은 일격으로 목을 자를 준비했다.
“낭자는 누구십니까?”
범한이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자에게 물었다.
고개를 든 여자는 평범한 외모로 미인은 아니었지만 두 눈이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그녀의 눈은 드넓은 초원과 푸른 새벽하늘을 모두 비출 만큼 맑고 투명했다.
범한도 그녀의 맑은 눈에 압도당했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했다.
“저는 경국 감찰원 사람으로 황제의 명을 받아 중죄인을 북제로 압송하던 중이었습니다. 낭자께서 왜 이곳에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저희가 먼저 실례를 범했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시골 처녀가 살짝 미소를 짓자 볼에 생기가 돌면서 머리에 쓰고 있는 촌스러운 두건도 어울려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손에 쥐고 있던 가느다란 바늘을 보더니 잠시 뒤 말했다.
“범한 대인이 작은 바늘을 무기로 사용하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머쓱해진 범한은 코를 쓱 문질렀다.
“제가 알아보기 쉬운 사람인가 보군요. 혹시 저의 명성이 북제까지 전해진 겁니까?”
“범한 대인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선이라는 건 모두가 들어 알고 있지요. 더구나 시선이란 분이 하루아침에 경국 감찰원 제사가 되었으니 이처럼 황당한 일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그녀는 손에 있던 작은 바늘을 하늘 위로 들더니 눈을 초승달처럼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라보니 바늘이 전설 속 선인들이 사용했다는 비도처럼 보였다.
“음, 평범한 바늘이군요.”
시골 처녀가 실을 꿰는 바늘귀를 발견하고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이에게 받았으니 당연히 평범한 바늘이지.’
범한이 씁쓸히 웃으며 그렇게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낭자, 이렇게 한가롭게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소 선생이 피를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은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시골 처녀도 웃었다.
“소 선생은 대인이 파놓은 함정에 걸린 것 아니었나요?”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북제 반군이 소 선생을 탈출시켜 두 나라가 맺은 평화 협상을 무산시키려 하는 바람에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소 선생이 다친 거지요.”
시골 처녀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시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거짓말도 태연하게 잘하시는군요. 과연 하늘의 자손답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어찌 하늘의 자손일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낭자 같은 분이 하늘의 자손이라 할 수 있지요. 저는 그저 노력하는 행운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골 처녀의 얼굴색이 변하더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던 중 새 한 마리가 즐겁게 재잘거리며 초원 근처로 날아오다가 피비린내를 맡고는 놀라 떠나 버렸다. 잠시 뒤 시골 처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저는 해당타타라고 합니다.”
“낭자가 해당타타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해당타타는 북제 젊은이 중 가장 특출한 인재로 고하 국사의 제자이자 하늘의 자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 속 주인공이었다. 감찰원에서 언약해에게 들었을 때 여자가 아니기를 바랐던 것과는 다르게 해당타타는 역시나 여자였다.
170화
상대방의 신분을 알게 된 범한은 놀란 마음을 감추며 고개를 돌려 소은을 바라봤다. 소은은 여전히 피가 낭자한 초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해당 낭자는 소 선생을 데리고 북제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이렇게 빨리 낭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시골 처녀로 분장한 해당타타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인재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타타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합니다.”
이때 소은이 갑자기 쉰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들은 하늘의 자손이 아니야. 그저 쓸데없는 허장성세만 늘어놓기 좋아하는 멍청이들일 뿐이지.”
그 말을 듣자 범한은 부끄러워졌다. 소은은 비록 젊은 시절만큼 강인하지는 못했지만 사람과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은 뛰어났다.
이때 해당타타가 힘없이 초원이 주저앉아 있는 소은에게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스승님의 명을 받아 초 대인을 수도까지 모셔 가려고 왔습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두 손을 늘어뜨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국경 밖인데 벌써 오시다니 해당타타, 아니…… 해당 낭자께서 조급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그가 뒤를 향해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여섯 명의 호위들이 당장이라도 돌격할 수 있는 진영을 취했고 범한도 화살촉을 상대방에게 조준했다. 뒤에 있는 고달은 이미 장검을 꽉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벼락같은 일격을 날려 소은의 목을 베어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해당타타는 눈을 반짝이며 기괴한 웃음을 짓더니 손에 들고 있던 독침을 수풀 안으로 던졌다. 그녀가 입고 있는 꽃무늬 치맛자락이 아침 바람에 흔들렸다.
“설마 제 앞에서 사람을 죽이려는 것입니까?”
범한은 겉으로는 태연하게 미소 지었지만 머릿속은 여러 생각에 복잡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소은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소은을 죽이는 걸 보려고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소은이 알고 있는 비밀이 무엇이길래 오랜 시간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던 고하 국사까지도 자신의 원칙을 깨고 9등급 절대 강자인 제자를 보내 죽이려 하는 것일까.’
* * *
살다 보면 때로 짧은 시간 안에 내리기 힘든 판단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범한은 소은을 함정으로 몰아 죽일 기회를 잡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였다. 하지만 성공을 앞둔 지금 그는 기존의 계획을 철회하기로 결심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황당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과감하게 자신의 계획을 포기했다. 이번 계획에 연소을이 얽혀들지 않은 이상 소은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소은이 알고 있는 비밀이 더 궁금했다.
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촌스러운 두건을 머리에 쓰고 허리춤에 바구니를 들고 있는 해당 낭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동시에 일곱 명의 호위들에게 소은을 엄호해 흑기들이 있는 방향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 * *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질서 정연하게 일곱 번 들렸다. 초원 위, 새벽 미풍조차도 검은색 독약을 칠한 비수에 의해 무수히 많은 파편으로 베어졌다. 정기의 조각들이 무수히 많은 단도처럼 해당타타의 촌스러운 두건 주위를 날았다.
범한은 일곱 번 연달아 이어지는 자신의 공격이 만족스러웠다. 밤새도록 추격전을 벌이느라 피곤한 상태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고수를 만나니 잠재 능력이 마구 솟구쳤다.
일곱 송이 검은 연꽃처럼 정기 파편들이 해당타타에게 날아가더니 앞에서 힘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 낸 해당타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지푸라기 묻은 소박한 단검을 손에 쥐었다.
범한이 맹렬한 기세로 빠르게 공격하자 해당타타는 단검으로 부드럽게 막았다. 충격에 그의 칼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행동은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무기력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정기로 범한의 비수를 막아 내 난폭한 정기를 옅은 구름처럼 흐트러트렸다.
범한이 놀란 눈빛으로 감탄했다.
“과연 고하 국사의 제자답군요. 제 공격을 쉽게 막아 내시는 게 9등급 강자다운 모습이십니다.”
그의 표정은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었고 말은 일부만 진실이었다. 그는 오죽에게 주입식 훈련을 받은 자신이 해당타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독을 바른 비수를 장화 속에 넣고는 오른손을 흔들며 말했다.
“낭자와 싸우기에 무기는 적합하지 않으니 권법으로만 겨뤄 보고 싶습니다.”
해당타타가 잠시 당황하더니 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녀가 휴대하고 다니는 검은 길이가 길지 않기에 촌스러운 치맛자락에 쏙 숨겨졌다.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그러고는 발끝으로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가 곧장 해당타타를 향해 돌진했다.
해당타타는 맑고 아름다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스승 밑에서 나와 북쪽 고수들을 만나면서도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사람은 본 적 없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자신에게 달려드는 범한을 보며 생각했다.
‘멍청하게 전력투구만 하는 걸 보니 싸움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을 모르는 모양이지?’
그녀는 사실 스승에게 다른 일에는 얽혀들지 말라는 당부를 듣기는 했지만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무기를 내려놓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저 곱상한 청년을 죽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돌진해 오는 범한을 보면서 그녀는 발뒤꿈치를 살짝 돌려 몸의 중심을 약간 뒤로 기울였다.
* * *
순식간에 앞으로 돌진해 온 범한은 꽃무늬 옷 아래로 볼록하게 튀어나온 가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범한의 주먹이 해당타타의 몸에서 세 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을 때 그녀는 몸을 버드나무처럼 뒤로 젖히더니 발뒤꿈치를 축으로 삼아 반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바람처럼 가뿐히 범한의 몸 뒤로 날아가 오른손 손바닥으로 그의 뒤통수를 때리려 했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범한의 공격 속도에 맞춰 짧은 시간에 이뤄진 대응인 것을 보면 분명 엄청난 실력이었다.
파리를 잡는 것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공격임에도 위력은 상당했다. 만일 범한의 뒤통수를 가격하게 된다면 한 시대를 풍미한 시선은 이제 저승의 시귀(詩鬼)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범한의 반응 속도와 몸을 통제하는 능력 그리고 몸 안에 있는 난폭한 정기의 위력을 모르고 있었다.
돌진하던 범한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급히 몸을 세우자 거센 반동으로 한쪽 발이 진흙 속에 깊이 파묻혔다. 만일 일반 사람이 같은 속도로 달리다가 갑자기 멈췄다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엄청난 정기를 이용해 순식간에 멈춰 섰다.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장화에서 비수를 꺼내 겨드랑이 아래로 찔렀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 검을 사용한 범한의 모습에 해당타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독사처럼 검은 빛을 번뜩이는 칼날에도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번개처럼 재빨리 칼날을 손가락으로 튕기고는 손바닥을 살짝 들어 공격을 피했다. 옷소매가 찢어지면서 가까스로 공격을 피하기는 했지만 정기가 응축된 범한의 일격을 무력화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왼쪽 팔에 들린 바구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수가 바구니를 파고들자 후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 대나무 조각이 날렸다.
순간 옅은 향기와 함께 하얀 연기가 두 사람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해당타타는 코를 벌름거리더니 재빨리 숨을 참았다. 그녀가 잠시 뒤로 물러나려 할 때 하얀 연기를 뚫고 화살 세 발이 그녀의 코앞까지 날아왔다.
평범한 9등급 고수라면 숨을 참는 와중에 날아드는 화살을 피라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하늘의 자손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침착하게 머리에 두르고 있던 꽃무늬 두건을 벗어 자신의 얼굴 앞에 펼치자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처럼 변했다.
챙! 챙! 챙! 소리가 세 번 울리더니 화살들이 강철에 부딪친 것처럼 구부러졌다. 그리고 해당타타의 손에 들려 있던 꽃무늬 두건도 힘없이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범한의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해당타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치맛자락에서 단검을 꺼내 번개처럼 빠르게 던졌다. 단검은 하얀 연기를 가르며 이상한 궤적으로 날아가더니 어느새 범한의 앞까지 다가왔다.
범한이 양손을 교차하며 몸 안에 있는 난폭한 정기를 배출했다. 곧이어 펑! 소리와 함께 그가 단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순수한 정기가 깃들어 더욱 예리한 칼날을 손으로 잡다 보니 손바닥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그때 그림자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그녀가 범한이 칼날을 쥐고 있는 단검의 칼자루를 잡고는 돌리려 했다. 예리한 칼날로 범한의 양손을 두 동강 낼 기세였다.
범한이 심호흡을 하며 정기를 두 손바닥에 모아 더욱 단단히 칼날을 잡았다. 몸에 난폭한 정기가 전해지자 해당타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범한의 손에서 칼을 뽑아 그의 얼굴에 내리꽂았다.
범한마저도 피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간단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공격이었다. 양 손바닥 사이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빠져나간 단검이 어느새 그의 눈앞에 와 있었다.
* * *
해당타타는 낮게 소리를 치며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뛰어올랐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검은색 비수가 그녀의 아랫배를 찌르려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 명은 초원 위에 서서, 다른 한 명은 공중을 날아다니며 두 명의 젊은 강자가 조금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범한은 날카로운 공격을 통해서 해당타타에게 공격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범한보다 빠르고 유연한 그녀가 날아오를 때마다 꽃무늬 치마가 만개한 꽃처럼 아름답게 펄럭였다.
꽃무늬 사이에서 손 하나가 불쑥 나와 범한의 가슴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범한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장풍을 피하더니 난폭한 정기를 머금은 오른손 손바닥으로 해당타타의 부드러운 가슴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피하면서 몸 옆에서 단검을 꺼냈고 곧이어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날린 장풍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날카로운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찰나의 순간이 흐른 뒤 오른손에 단검을 든 해당타타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뒤로 미끄러졌다.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이 망가져 검은 머리가 흘러내렸다. 촌스러운 무명옷을 입고 있었지만 검을 잡은 기세 때문인지 촌스러운 시골 처녀처럼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한편 범한은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비수 잡은 손을 가늘게 떨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패배의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초식이 해당타타보다 부족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이 자부하는 난폭한 정기마저도 그녀의 부드럽고 순수한 정기 앞에서 힘을 못 쓰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의구심을 가지기는 해당타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스승 밑에서 나온 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고수를 만났고 그중에는 범한보다 강한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기껏해야 9등급 문턱에 있는 범한이 다른 고수들보다 더욱 매섭게 자신을 궁지로 몰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마 연소을이었다면 해당타타의 실력에 놀라 꽁무니 빠지게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달랐다. 그는 9등급 절대 강자라 할지라도 여자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용맹하면서도 바보스럽게 달려든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일반 강자들의 대결과는 다르게 후안무치한 방법도 서슴없이 사용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던 해당타타가 갑자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범한 대인도 젊은 사람치고는 고수이신데, 치사한 방법만 사용하니 무도 정신은 조금도 없으신가 봅니다?”
맞는 말이었다. 권법으로만 싸우자고 말해 놓고 비수로 기습 공격을 하거나 독가스를 살포해 상대방의 눈을 가린 뒤 화살을 날리는 방법은 고수들은 사용하지 않는 비열한 수법이었다.
가슴을 쭉 펴고 거친 숨을 가다듬던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무공 고수가 아니므로 세상의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북제 사람인 낭자께서는 무단으로 경국 영토를 침입하고 있지 않습니까. 경국 감찰원의 제사인 제가 자국의 영토를 침입한 사람을 체포하는 데 사용하지 말아야 할 규칙이 있단 말입니까?”
해당타타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71화
그녀가 두 눈을 살짝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맑은 기운이 그녀의 몸 주변에서 생겨났다.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풀잎에 맺혀 있던 이슬들도 춤을 추는 것처럼 날아오르더니 옅은 안개로 변하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은 속으로 자신이 가슴을 때리려 해서 정말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면서 햇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새벽 봄바람에 초원의 풀잎들이 가볍게 흔들리자 해당타타의 단검도 바람에 따라 움직이면서 부드럽게 범한을 향해 다가왔다. 저번보다도 부드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만큼 훨씬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밤새도록 격전을 펼친 탓에 범한은 양손이 저리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9등급 절대 강자의 공격을 맞받아칠 정도의 실력도 없었다.
범한이 비수를 내려놓고는 양손을 거둬들였다. 공격하지 않고 몸에 근육과 공기 접촉을 이용해 단검의 공격을 피할 생각이었다. 이건 오래전에 오죽의 방망이를 피하려 사용했던 방법이다. 오늘 그는 이 방법을 사용해 상대방의 단검을 피할 생각이었다.
오죽에게는 실패한 방법이었지만 해당타타는 오죽이 아니었다. 9등급 절대 고수라 할지라도 오죽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해당타타의 손에 있는 단검이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범한의 몸을 휘감았다. 범한은 펄쩍 뛰거나 털썩 주저앉거나 벌러덩 눕거나 하는 등 각양각색의 익살스러운 자세로 공격을 피했다. 몸을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난 덕분에 자세를 정확하고 빠르게 바꿀 수 있었다.
칼날은 그의 왼쪽 귀를 스쳐 진흙에 박히거나 오른손 새끼손가락 아래 풀잎에 박히거나 목 옆 이슬에 꽂힐 뿐 몸을 맞히지는 못했다.
공격이 계속될수록 해당타타의 눈에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출중한 재능을 보이며 무예를 익힌 그녀는 손에 단검만 쥐고 있으면 무서운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천하 4대 종사를 제외하고 어떤 고수도 두렵지 않았고 지금 싸우고 있는 범한도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녀는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 공격하는데도 자신의 검이 계속 빗나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매번 그녀가 공격할 때마다 상대방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가장 위험한 순간에 살짝 몸을 움직여 칼날을 피했다.
범한은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닦을 수가 없었다. 매서운 공격을 피하면서 자칫하면 칼에 찔릴 뻔한 위험한 상황도 몇 번이나 있었다. 상대방의 검은 오죽만큼 빠르고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이에 범한은 피하지 않고 차라리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달려들어 상대를 압박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에 범한은 젖은 풀잎을 밟고 넘어졌다. 상황이 너무나도 위태로워서 오죽의 교육 방법을 원망하거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신의 능력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색 화살이 공중을 가르며 해당타타의 얼굴까지 날아왔다. 그를 죽이려고 몸을 살짝 돌리는 찰나 날아온 화살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발의 화살이 더 날아오더니 이어서 세 발의 화살이 연달아 날아왔다.
화살들은 강아지처럼 바닥을 구르고 있는 범한을 정교하게 피해 해당타타를 향해 날아왔다.
비처럼 내리는 화살을 정신없이 막던 해당타타은 손목이 저리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병풍처럼 서 있던 흑기들이 휴대용 화살로 이처럼 정확하고 매섭게 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어서 장검이 엄청난 기세로 날아왔다. 바로 호위 수장인 고달이 휘두른 검이었다. 예리한 검 끝이 바로 앞 진흙에 박히자 놀란 해당타타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 * *
천둥소리처럼 거센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흑기들이 초원 안으로 들어왔다. 백여 필의 말이 내는 말발굽 소리에 초원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았고 말 위에 타고 있는 기병들은 절대 고수 해당타타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운이 좋군요.”
해당타타가 가볍게 날아올라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내는 흑기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산발이 된 머리를 다듬으며 힘겹게 일어나는 범한을 바라보고 말했다.
범한은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멀리 서 있는 해당타타를 바라보던 그가 손을 흔들어 작별의 인사를 했다.
초원이 조용해지자 흑기들이 명령에 따라 일제히 말에서 내려 외쳤다.
“제사 대인을 뵙니다!”
몸을 돌려 음산한 기운을 뿜는 흑기들을 바라본 범한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가 피곤함에 전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퍼져 있는 독을 조금만 마셔도 말들이 불안해할 거네. 그러니 조심하도록 하게.”
* * *
진영으로 돌아가자 사신단과 동행하던 의원이 범한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후 막사로 들어간 범한은 부하들에게 오늘은 쉬고 내일 무도하강에 들어갈 거니 준비하라고 지시하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왕계년을 바라보았다.
“누구 짓인지 알아내셨습니까?”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범한의 눈치를 보며 왕계년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대답했다.
“마차 문을 열어 준 건 신양 측 사람입니다. 감찰원 안에 있던 첩자도 신양 측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도하강에서 소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군대들은 위장하기는 했지만 조사해 보니 북제 대장군 여정의 사병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여정은 10년 전 상삼호 밑에서 일한 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급한 사람입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에 입은 상처가 아파져 오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은과 상삼호의 관계를 생각하면 여정이 마중을 나오는 게 이상할 게 없지요. 소은의 탈옥은 분명 신양에서 계획한 일일 겁니다. 다만 북제 수도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데도 소은이 굳이 탈옥하려 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는 통증 때문에 장 공주가 북제와 어떤 협의를 맺은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왕계년이 상황을 분석해 설명했다.
“분명 장 공주와 상삼호 모두 소은이 북제 황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더구나 제가 봤을 때 북제 황실은 소은이 가진 비밀을 알고 싶어 하나 소은은 북제 황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은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북제로 가면 과거의 권력을 찾지 못한 채 평생 감옥에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북제의 젊은 황제도 바보는 아니니 상삼호와 소은의 관계를 알고 있겠지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 낮게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길래 북제 황실에서 그를 감시하려는 걸까. 고하 국사는 왜 해당타타를 보내 그를 죽이려 한 걸까. 설마 입을 막게 하려고? 그럼 진평평 원장은 어째서 소은을 죽이지 않고 그냥 놓아준 거지?’
* * *
“제가 멍청했던 것 같습니다.”
턱을 괴고 중상을 입은 소은을 바라보던 범한이 말했다. 맞붙기 전에는 용맹한 호랑이라 생각했던 소은이 사실은 종이호랑이인 걸 보면 적은 모두 종이호랑이라고 말한 어머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선생을 죽이기 위해 오랜 시간 힘겹게 노력했는데 최후의 순간에는 보호하게 되는군요.”
지난 일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황당한 결과였다. 그때 소은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 사는 일이 그런 것 아니겠나. 마음대로 되면 세상일이 아닌 게지.”
그러자 범한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대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있습니다.”
“해당타타는 고하의 제자고 북제에서 그 대머리 놈의 말을 무시할 사람은 없지. 내가 살아 있는 걸 해당타타가 알고 있으니 초원에서 죽어 간 군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도 없게 된 거 아닌가. 만약 이런 상황에서 나를 죽인다면 언 공자가 무사히 경국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나?”
“도대체 어떤 비밀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범한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고하 국사가 선생을 죽이려는 이유가 뭡니까?”
“오래된 이야기일 뿐이네.”
“초원에서 선생의 비밀에 관해 이야기하자 잠복해 있던 해당타타가 살기를 드러냈습니다.”
범한은 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다는 건 그 비밀이 9등급 절대 강자의 마음도 조급하게 만들 만큼 대단하다는 것이지요.”
소은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해당타타가 자네를 죽이려 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무 원한도 없는 저를 왜 죽이려 합니까?”
범한이 소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살기가 빠진 그의 두 눈에서 오래된 비밀을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네. 해당타타는 자네를 정말 죽이려 했어.”
소은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감찰원 감옥을 나온 뒤로 계속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음습한 기운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제가 봤을 때 고하 국사는 선생이 살아서 북제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맞네.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친 이유는 북제 황실뿐만 아니라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장 공주도 내가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네. 자네가 말한 장 공주는 아마도 나의 생사를 이용해 호아와 어떤 협의를 성사시키려 하는 거겠지. 그녀는 너무 어려서 당시의 비밀을 알지는 못할 거야.”
소은이 계속 말했다.
“중요한 건 고하가 내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어 한다는 거네. 그래서 사신단이 북제 국경에 들어오기 전에 나를 죽이려 한 거지. 게다가 자네는 호기심이 많은 젊은이라서 어떤 비밀인지 알아내고 싶어 할 테니, 그런 점도 고하가 나를 죽이려 한 이유라 할 수 있지. 그러니 이제 자네는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서 나를 보호할 수밖에 없네.”
범한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묵했다.
“자네가 만든 함정을 깨뜨리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진 마지막 패로 자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있었지. 내일 북제에 들어가면 자네에게 더는 기회가 없네. 그러니 이번에는…… 자네가 진 셈이야.”
소은이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늙어서 예전만큼의 무예 실력은 없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영리했다. 마치 백 년 묵은 여우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선생이 가진 마지막 패에는 흥미가 생기는군요. 다른 누구보다도 구미가 당깁니다. 선생이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범한은 의기소침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운 듯 웃었다.
“하지만 무사히 상경에 도착한다 해도 상삼호가 선생을 구해 내지 못한다면 북제 황실의 감옥에 갇혀 늙어 죽거나 비밀을 말할 때까지 고문을 당하시겠지요.”
그 말에 소은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늘의 대결에서 중상을 입어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
“무슨 비밀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범한이 초원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말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저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어서 선생이 말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은은 범한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두운 부분을 발견한 듯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눈을 감고 고민하더니 손을 부드럽게 뻗어 소은의 목에 꽂혀 있는 바늘을 잡았다. 숲에서 벌어진 결투에서 소은의 경혈에 꽂은 바늘이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다. 작은 바늘을 움직이자 소은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동시에 몸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의 순환을 느리게 하는 효과가 있으니 지혈을 돕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바늘을 뽑은 뒤 대략 20시간 정도 뒤에 죽게 되실 겁니다.”
범한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천천히 바늘 끝을 움직였다.
“이건 저 혼자서 수련해 얻은 무기입니다. 제가 공들여 만든 필살기지요.”
분출된 피가 입고 있는 옷과 의자를 적혔다.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몸도 축 처지면서 소은에게서 점차 죽음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꾹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뚝뚝 피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바늘을 다른 혈에 꽂아 지혈시켰다. 그러고는 반 혼수상태에 있는 소은의 코밑에 조심히 마취 약을 발랐다.
172화
쓴 냄새가 코로 들어오자 소은은 천천히 깨어났다. 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진평평은 분명 자네에게 실망했을 거네. 죽이려면 죽이고, 놓아주려면 놓아주는 거지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행동해서야 앞으로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나!”
범한은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점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우유부단한 소인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호기심을 이용했다는 것도 알았고 상대방에게 북제 황실과 1대 종사 모두 관심을 가지는 비밀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소은을 죽이려 세웠던 계획은 베일에 싸인 비밀과 난데없이 나타난 시골 처녀 때문에 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계획에서 생기는 변수를 참고 받아들이는 방법은 배웠기 때문에 조금도 울적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장묵한을 잡아 선생을 위협한다면 비밀을 털어놓으시겠습니까?”
소은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총기를 잃어 흐리멍덩한 두 눈이 약간 흔들렸다. 자신과 장묵한이 형제인 걸 범한이 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선생은 독사 같은 분이니 자신의 생사만을 고려할 뿐 장묵한이 선생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요.”
계속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압박하며 범한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니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저에게 비밀을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제가 스스로…… 신묘에 대한 비밀을 알아낸다면 제 손으로 직접 장묵한을 죽일 테니까요.”
“신묘? 신묘라니!”
범한의 말에 소은이 쉰 소리를 내며 앙상한 팔뚝을 들어 범한을 가리켰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게 자신이 아는 비밀이 신묘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어떻게 아는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평평 원장을 바탕으로 추측한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원장이 자신이 가진 비밀을 전혀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천하에서 원장이 모르는 건 신묘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아시는 비밀은 신묘와 관련 있는 것이겠지요. 선생께서 대단한 비밀을 가지고 계신 만큼 저도 해당타타가 선생을 죽이지 못하도록 지켜 드리겠습니다.”
약간 조롱하는 말투로 말하던 범한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장님 오죽을 떠올렸다.
‘오죽 아저씨의 기억만 회복된다면 소은의 비밀을 알지 않아도 신묘에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소은을 죽일 수 없었다. 첫 번째는 해당타타가 진영 근처에 있는 상황에서 소은을 죽이려 했다가는 오히려 기습을 당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라도 신묘가 어디 있는지 정말 알고 싶었지만 오죽이 그날의 기억을 찾을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반드시 소은이 가진 신묘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야 했다.
마차에서 나온 범한은 피곤한 표정으로 의원에게 소은을 치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피로한 눈을 잠시 감고 있다가 고달을 불러 손짓으로 뭐라 지시를 하려 했다. 그 순간 마차 안에서 섬뜩한 비명 소리와 함께 옅은 피비린내가 났다.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간 범한은 독기 오른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소은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
“도망친 선생을 죽일 수는 없으니 다리라도 부러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평평 원장은 선생이 가진 비밀을 몰라도 그만이었겠지만 저는 반드시 알아야겠습니다. 자살로 저를 위협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이제 보니 선생께는 자살할 용기도 없는 것 같군요.”
말을 마친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서 내려갔다.
소은은 무릎 아래로 부러진 다리에서 배어나는 피를 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감찰원을 이끈다면 미래 남쪽에서 가장 잔혹한 존재로 성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정오 햇살이 비치는 영지를 바라보던 그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은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마취 약의 도움을 받아 그가 가진 비밀이 신묘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절대 고수 해당타타와 풀기 힘든 원한을 맺게 된 이상 이번 계획으로 이득을 봤다고 할 수는 없었다.
멀리서 흑기들이 주둔한 곳에서 말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찌푸리고 그곳을 바라보던 범한은 초원에서 맡은 독약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호위 한 명을 손으로 불러 흑기들에게 전할 말을 알려 줬다.
“말들이 진정이 안 된다면 맑은 물로 충분히 씻겨 주라고 하게. 암말에게 특히 효과가 있을 거야.”
호위가 말을 전달하러 가자 범한은 웃으며 사리리의 마차로 갔다. 마차에 오른 그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마주 보고 있는 여자는 작년에 자신을 죽이려 한 주모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사람과 있는데 마음이 이렇게 편안해진다는 게 이상했다. 마차 안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사리리는 범한의 피 묻은 옷을 뜨거운 물에 담가 빨고는 수건으로 범한의 단단한 몸을 닦아 줬다.
“해당타타를 만난 적 있습니까?”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질문했다.
북제 황실에서 생활하던 때가 기억난 듯 사리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범한이 계속 말했다.
“고하 국사의 여제자 말입니다.”
그러자 사리리가 화들짝 놀랐다.
“타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범한이 근심 어린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신선 같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골 처녀 같더군요. 말하는 모습이나 움직임 모두 절대 고수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타는 예사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리리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어려서부터 무예만 좋아할 뿐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고하 국사 밑에서 무예를 수련할 때도 남은 시간에는 항상 채소를 심고 밭을 갈면서 지냈으니 시골 처녀처럼 보였겠지요.”
그 말을 들은 범한은 순간 해당타타가 정왕과 비슷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천인합일을 추구하며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걸 중요시하는 고하 국사의 제자인 만큼 시골 처녀의 모습인 게 이해가 됐다.
“위험한 사람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리리가 마른 수건으로 몸에 있는 물기를 닦아 주었다.
“하마터면 오늘 돌아오지 못하실 뻔하셨습니다.”
당시 상황을 비춰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하다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저의 무예 실력이 해당타타보다 부족하긴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쯤이면 해당타타가 더 괴로워하고 있을 겁니다.”
사리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북제 영토로 들어가면 만약 해당타타가 대인을 죽이러 온다고 해도 저는 대인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범한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북제 영토에 들어가서 그녀가 저를 죽이려 한다면 깨끗하게 죽일 수 있게 옷을 벗어 줄 겁니다. 이로 인해 양국에 전쟁이 초래되는 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를 죽이겠지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사리리의 풍만한 몸을 보던 그는 그날 밤 놀잇배에서 자신이 마취 약을 사용했던 게 떠올랐다. 이어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해당타타와 그녀의 단검이 떠오르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가 진저리를 치자 추워한다고 생각한 사리리는 서둘러 옷을 입혀 줬다.
범한이 아는 건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해당타타란 여자가 든 단검이 무서웠다. 오늘 호위와 흑기들이 제때 개입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상대방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역시나 자신에게는 9등급 절대 강자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없었다. 연소을의 공격을 받고 성벽 꼭대기에서 떨어졌을 때보다 실력이 향상됐음에도 해당타타와는 차이가 크게 났다.
사실 범한이 밤과 새벽 사이에 일어난 두 번의 싸움에서 보인 용기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그는 어둠 속에서 암살하는 방법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방법보다 더 좋았다.
한참 뒤 하늘을 올려다본 그가 한숨을 쉬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오죽 아저씨는 여기 없으니까 내 말을 들을 수 없겠죠? 검은색 가죽 상자가 필요해요. 상자를 줘요.’
* * *
멀리 국경선과 맞닿은 갈대밭 옆 호수에서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1대 종사의 제자이자 북제 사람들에게 하늘의 자손이라 칭송받는 해당타타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살기 가득한 눈빛을 띠었다. 물이 연신 떨어지는 젖은 머리카락에 허공을 노려보는 눈빛이 섬뜩했다.
그녀는 한 시간 동안 독을 몰아내려 애썼지만 여전히 몸 안은 불이 난 것처럼 뜨거웠다. 차가운 호숫물도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생각하던 그녀가 무언가 깨달은 듯 두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범한, 이 후안무치한 놈!”
사실 범한이 사용한 건 독약이 아니라 춘약이었다. 사람의 몸에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 품질 좋은 춘약. 그런데 해당타타가 정기를 운용해 독을 빼내려 한 게 문제였다. 정기를 운용하면서 체내에 약물을 더 빨리 순환시켰고 이에 초봄 차가운 호숫물 안에 있어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온몸이 불난 것처럼 뜨거웠다.
이를 갈던 해당타타는 한 나라의 관리이자 무예를 수련한 9등급 고수가 이런 저질스러운 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탄식하며 욕을 퍼부었다. 더구나 그녀는 연기가 퍼졌을 때 숨을 참았는데도 증상이 나타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싸우면서 무의식적으로 숨을 살짝 들이켜서 이렇게 된 건가?’
생각하던 그녀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자세히 살펴봤다. 그제야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에 살짝 그을린 자국이 있는 게 보였다. 전혀 통증이 없는 게 아마도 독침을 손으로 잡을 때 독이 묻어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해당타타는 자신의 무예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동안 독약에 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이 쏜 독침도 서슴없이 손가락으로 잡았다. 그녀는 범한이 독을 사용하는 수법이 이처럼 복잡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먼저 독침을 쏴서 손가락에 작은 화상을 입힌 다음 연기를 피워 작은 상처에 독약이 침투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을 깨달은 해당타타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범한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먼저 독침으로 화상을 입히고 춘약으로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다니, 이런 더러운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고!’
해당타타는 고통스러운 듯 작게 신음하고는 다시 차가운 호수 깊숙이 잠수했다. 자신의 몸 안을 불태우는 화염을 잠재우기 위해 물속에서 몸을 뒹굴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하는 게 흰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는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멀리 있던 물고기들도 다가와 수영하는 그녀의 주변을 따라 움직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호수에 하얀 물보라가 폭발했다. 해당타타가 물을 뚝뚝 흘리며 나오더니 호숫가로 걸어갔다. 이후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풀숲 사이로 사라진 그녀가 무명옷을 입고 다시 나왔다.
그녀는 매력 있는 얼굴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눈매가 시골 처녀처럼 정다워서 친근감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그녀의 맑은 두 눈에 강가 모래섬에서 노는 새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가 분노에 가득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범한,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아직도 남아 있는 약 기운에 괴로움이 섞인 외침이었다.
* * *
명상하고 있던 범한이 눈을 뜨더니 발길 닿는 대로 영지를 걸었다. 초원에 널브러져 있는 북제 군인들의 시체는 먼저 무도하강을 건너간 사신단이 북제에게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는 증거가 되어 주었다.
“안타깝습니다.”
왕계년이 그의 뒤를 따라가다 한숨을 쉬었다.
“상대측이 움직일 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해서 소은의 사망을 저쪽에 뒤집어씌울 증거를 확실하게 마련해 두었는데, 갑자기 해당타타가 나타나 대인의 계획을 망치지 않았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그는 멀리 산골짜기에 유유히 다가오는 안개를 보았다.
“아마 저도 그녀의 계획을 망쳤을 겁니다. 게다가 소은을 알맞은 장소, 알맞은 시기에 죽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그가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는 알지 않았습니까.”
“고문을 해서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 건 어떠신가요?”
왕계년이 틀에 박힌 방법을 제안하자 범한은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진평평 원장이 20년간 고문해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저희가 이틀 고문한들 입을 열겠습니까?”
“그럼 어떡합니까? 정말 이대로 소은을 북제에 넘겨주실 생각입니까?”
왕계년은 소은이 무슨 비밀을 가졌는지는 몰랐지만 감찰원 관리로서 중요한 비밀을 가진 사람을 적국에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소은을 죽이고 싶어 하는 세력도 강대하고, 그를 지키려는 세력도 강대하니 일단은 북제에 넘겨주도록 하죠.”
말을 마친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그 상자를 이용해야 할까? 하지만 상자가 나한테 없잖아. 이럴 때 오죽 아저씨는 어디 간 거야?’
173화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왕계년에게 말했다.
“이 점은 마음에 두지 말고 일단은 내일 무도하강을 넘을 준비를 하는 데 전념하십시오. 해당타타란 여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국경 안에서 소은이 죽는다면 저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흑기들에게 수색해서 죽이라 하면 안 됩니까?”
“오늘따라 이상한 주장만 내놓으시는군요.”
범한이 마른기침을 하다가 흉부에서 통증이 전해지자 나무에 기대며 말했다.
“흑기들은 진형을 갖춰 공격할 때는 대종사라도 두려워할 만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진형을 갖추지 않고 수색한다면 그녀의 단검에 소리 없이 죽어 나갈 거예요.”
“잘 알고 있군요.”
앞쪽 산길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장발을 어깨까지 내리고 무명옷을 입은 여자가 어둠 속에서 범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진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밤새도록 추격전을 벌여 지친 호위들은 범한이 쉬라고 명령해 옆에 없는 상태였다. 그녀를 발견한 왕계년은 화들짝 놀라며 범한을 힐끗 바라봤다.
‘저 여자는…… 오늘 새벽에 범 제사를 죽이려 한 9등급 절대 고수 해당타타잖아!’
범한이 침착한 얼굴로 왕계년을 향해 말했다.
“먼저 가보세요.”
겁에 질린 왕계년은 허겁지겁 진영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빨리 돌아가서 고달에게 알려야 해.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하필이면 오늘따라 흑기들의 말이 집단 발정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니!’
범한이 슬쩍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왕계년이 사람을 불러올 걱정은 하지 않나 보군요?”
“범한 대인도 저한테 당장 죽을 수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군요?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삼 합 안에 목을 쳐주겠습니다.”
“몸에서 독약이 모두 빠져나갔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범약이 약 올리듯 말하자 해당타타는 분노에 이를 갈며 원망 섞인 눈빛으로 범한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대인은 정말 후안무치한 사람입니다.”
범한이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마른 입술을 살짝 핥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아주니 고맙습니다.”
“이만 해독약을 내놓으시지요.”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내놓지 않으면 제가 대인을 죽일 거니까요.”
해당타타가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범한의 예리한 눈에는 그녀의 눈빛이 떨리는 게 보였다.
“저를 죽이시면 매일 북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야 할 텐데요.”
범한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은 채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아이들처럼 씩씩대며 서로를 노려보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때 해당타타가 갑자기 화제를 바꿔서 물었다.
“소은은 죽였습니까? 만약 대인이 제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저도 이 일을 모른 척했을 겁니다. 애초에 저는 그를 살리기 위해 남쪽에 내려온 게 아니었으니까요.”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소은을 죽이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낭자가 그를 죽이려 하는 이상 저는 그를 보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죠?”
“이유랄 게 있나요.”
범한은 소은의 비밀을 알기 위해 지켜 주려 한다는 말을 해당타타에게 할 수는 없었다.
범한의 성의 없는 대답에 해당타타가 발끈하며 검을 뽑았다. 새벽과는 다르게 살기를 내뿜는 칼날이 아직 꽃을 피우지도 못한 나뭇가지를 잘라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표정은 침착했지만 마음은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저 시골 처녀가 정말 나를 죽이려고 하잖아. 흑기도, 호위도 없는데 어쩌란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 해당타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난데없이 산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관계없는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습니다. 대인도 오실 겁니까 말 겁니까?”
“어딜 간다는 말입니까?”
‘어딜 간다는 거지? 저승길로 가라는 건가? 아니면 달콤한…… 밀회?’
범한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해당타타의 뒷모습을 보다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뒷짐을 지고 따라갔다. 감찰원 관리 중에서 그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자신의 목숨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남녀 두 사람이 산길 끝으로 사라지자 석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림자가 수풀 안에서 튀어 나왔다. 장검을 등에 찬 고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산길을 바라보다 왕계년에게 말했다.
“왕 대인,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계년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은 당대 제일의 영명한 인재이면서 여색을 너무 밝히십니다.”
* * *
범한은 해당타타의 미모가 탐나서 따라온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칠 의도가 없는 걸 알아서 따라온 것이었다. 게다가 이어지는 대화를 다른 사람이 들어서도 안 됐다. 왜냐하면 누군가 듣기라도 한다면 해당타타가 부끄러움에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독제를 드릴 수는 있습니다.”
범한이 나무에 반쯤 기대 있는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그녀의 머리뿐만 아니라 몸과 옷도 약간 젖어 있었다.
“저와 약속을 하신다면 해독제를 드리겠습니다.”
“협박은 통하지 않습니다.”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범한의 얼굴에 약간 근심하는 기색이 비쳤다.
“저는 경국 감찰원 관리입니다. 그러니 낭자가 국경에 들어와서 제가 압송하는 죄인을 죽이려 한다면 모든 방법을 써서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저급한 방법을 사용하는 걸 좋아한다는 건 아시겠지요?”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해당타타가 말했다.
“무슨 약속을 해야 합니까?”
“무도하강까지 가는 하루 동안 소은을 공격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해당타타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북제 영토에서는 제가 공격할 수 없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왜 그렇지요?”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야…… 저는 북제의 백성이니까요. 내 조국의 백성들을 위해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북제의 영토 안에서 소은이 죽어 이번 협상을 망치게 된다면 황실이 분노할 것이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그럼 결국 죽게 되는 건 아무런 힘 없는 백성들이지요.”
해당타타의 얼굴에 점차 근심이 나타났다.
“하지만 소은이 북제로 돌아가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리리 낭자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 세상을 바꾸고 싶은 건가?’
그때 해당타타가 불만 섞인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소은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 소은이 죽으면 북제에 잡혀 있는 경국 고관도 죽는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
상대방에게 모든 상황을 알려 줄 수 없었기에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약속할 수 없다는 겁니까? 만약 지금 여기서 소은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책임은 북제에 있습니다. 설마 북제 병사들이 국경을 넘어 잠입했는데 의심을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렇게 된 이상 소은이 죽더라도 언 공자는 무사히 넘겨 줘야 할 겁니다.”
그러고는 그가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낭자는 왜 소은을 죽이려 하는 거요?”
범한이 천진하면서도 약간은 아둔한 표정을 묻자 해당타타는 째려보며 쌀쌀맞게 대답했다.
“제가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텐데요.”
범한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품속에서 환약을 꺼내 보여 주었다.
“낭자의 몸속에 있는 춘약은 제가 혼자 연구해 제작한 것으로 정기를 사용해서는 배출할 수 없습니다.”
말을 끝내고는 환약을 해당타타에게 던져 줬다. 범한이 던져 준 환약을 받은 해당타타는 화도 나도 부끄럽기도 해서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손에 들린 환약을 바라보던 그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해독제를 주는 이유는 뭡니까?”
범한은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돌아서더니 나무에 기댔다. 그러고는 연녹색으로 물들어 가는 산봉우리와 멀리 산등성이에 핀 야생화를 바라봤다.
“어젯밤 소슬비가 내렸으나 바람은 거세었구나. 밤새 잠이 들었건만, 취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네. 발을 걷는 종에게 물어보니 뜻밖에도 해당화는 여전히 피어 있다고 하네. 모르는가? 모르는가? 푸른 잎만 짙어지고 붉은 꽃은 시들었을 거란 걸.”
나무 아래서 풍경을 감상하던 범한이 혼잣말하듯 온화한 목소리로 낮게 시를 읊었다. 시를 짓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처음 읊는 시였다.
날씬하다 못해 오히려 말라 보이는 그를 바라보던 해당타타가 천천히 단검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낭자가 싸우겠다고 하면 싸울 수밖에요.”
범한이 은은하게 웃는 얼굴로 갑자기 몸을 돌려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아 술기운이 남아 있을 터인데 싸울 수 있겠습니까?”
술기운이 남아 있다는 말은 바로 춘약에 취해 있다는 뜻이었다.
범한의 자극에도 해당타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했다. 마치 범한이 시를 읊으면서 남자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기개와 용기를 드러낸 게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절대 고수인 그녀는 범한에게 수치를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데다가 그가 혼자서 자신을 만날 거라고는 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범한을 바라보던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잠시 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 대인은 더는 시를 짓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어째서 시를 지으신 겁니까?”
“소나무를 보면 겨울이 떠오르고 국화꽃을 보면 가을이 생각나고 해당 낭자를 보면…….”
범한은 봄이 생각난다는 말을 하려다가 빙그레 웃었다.
“시와 문장에는 도가 없고, 나라의 번영이나 백성의 행복에 도움도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본관이 경국에서 시로 약간의 명성을 떨치기는 했지만 그게 불만스러워 더는 쓰지 않겠다 한 것입니다. 이 시는 작년 폭우가 내릴 때 생각해 둔 것인데 오늘 해당 낭자의 여린 모습을 보니 순간 생각이 나서 읊었습니다. 난데없이 시를 읊었다고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해당타타가 고개를 들어 범한을 바라보다 갑자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대인이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고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인이 한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대인이 경국의 관리로서 무슨 방법을 사용하든 그건 대인의 자유인만큼 제가 참견하거나 원망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인께서 방금 읊으신 시가 좋기는 하나 저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해당은 비에 젖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화분에 물이 차서 뿌리가 썩는다면 푸른 잎만 짙어지고 붉은 꽃은 시드는 상태가 되는 걸 걱정하기보다는 가지까지 모두 썩어 버리지 않을까를 걱정해야 할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몸을 돌려 순식간에 조용한 숲속 길로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청량한 숲속 공기와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어이없어하는 범한뿐이었다.
“어떻게 가버릴 수가 있지?”
범한이 심란한 표정으로 한탄하듯 말했다.
“내가 버섯 줍는 공주 이야기도 말해 주려고 했는데.”
해당타타가 미련 없이 떠나 버리자 범한도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이끼 낀 산길을 걸어 돌아가는데 산길이 굽어지는 수풀 속에서 호위들과 왕계년이 이끄는 감찰원 밀정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살벌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범한이 무사히 돌아오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수풀에서 일어나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과 몸에 초록색 잎이 달라붙은 게 우스꽝스러웠다.
“대인, 어떻게 된 겁니까?”
왕계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범한의 뒤쪽을 바라보다 물었다.
“해당타타는 9등급 고수로 북제에서 하늘의 자손이라고 칭송받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렇게 평범하게 생겼을 줄은……. 대인을 건들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나를 건들었냐고요?”
왕계년이 음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범한이 버럭 소리쳤다.
“그녀가 나에게 손을 댔으면 제가 이렇게 태평하게 돌아왔겠습니까!”
그러고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는 의심하는 눈초리로 왕계년을 바라보았다.
“추격에 일가견이 있으니 청력도 좋으시겠군요?”
“그럼요.”
범한의 의도를 모르는 왕계년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 방금 제가 해당타타와 나눈 대화도 들으셨습니까?”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지만 상당한 위협감이 느껴지자 왕계년은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조금은 들었습니다.”
“무슨 내용을 들었습니까?”
왕계년이 괴로운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다.
“그게 대인이 아름다운 시를 읊는 소리와 무슨 약에 관한 내용도 들었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눈을 번뜩이며 경고했다.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하늘의 자손으로 칭송받는 해당타타에게 춘약을 사용한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는 북제 모든 백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며, 해당타타는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왕계년이 감복한 얼굴로 말했다.
“몇 마디 말로 9등급 고수를 물리치신 걸 보면 대인은 정말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174화
범한은 왕계년의 아첨에는 귀 기울이지 않은 채 깊이 생각에 잠겼다. 오늘 일은 단순해 보이겠지만 사실 범한으로서는 엄청 머리를 굴린 것이었다. 먼저 그가 자신을 본관이라고 칭한 것은 자신이 관리 신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춘약 때문에 화가 난 해당타타가 더 중요한 일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늘 읊은 시는 송대 여류 시인인 이청조가 지은 이란 작품으로 언약해을 통해 해당타타를 알게 된 이후 준비한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어젯밤 비가 내리더니 아침엔 한기가 느껴지는구나. 해당화는 피었는가? 옆으로 누워 발을 올려 살펴보네.’라는 구절이 있는 당나라 시인 한악이 지은 란 시도 준비한 상태였다.
하지만 상황상 이청조의 시가 더 어울려서 한악의 시는 읊지 않았다. 더구나 ‘해당’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시를 골라 읊으며 그녀에게 여려 보인다고 말한 것도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는 춘약에 중독된 해당타타가 여려 보인다고 한 말에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1대 종사의 제자로 자란 그녀는 아둔한 백성들에게 하늘의 자손이란 칭송을 받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지닌 무공 고수였지만 어쨌거나 여자였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여자라면 다른 사람의 눈에 약하고 여려 보이기를 원하는 법이었다.
범한은 다른 이의 마음을 잘 간파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자의 마음은 가장 잘 이해할 줄 아는 남자였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이 세계에서 남자들은 여자를 평등한 태도로 대하려고 하기는커녕 여자들이 뭘 원하는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가 품 안에서 해당타타에게 줬던 것과 똑같은 해독제를 꺼내 꼴깍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왕계년이 호기심에 물었다.
“무슨 약입니까?”
범한이 그에게도 한 알 건네주었다.
“진피로 만든 환약입니다. 몸속 열을 제거해 주는 효과가 있어 항상 지니고 다니며 먹습니다.”
범한이 만든 춘약은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면 곧 좋아졌기 때문에 해독약 같은 건 없었다. 해당타타가 호수에 몸을 반나절 동안 담그고 있어도 나아지지 않았던 것은 북해에 있는 갈대 때문이었다. 그곳에 있는 갈대는 매년 봄이 되면 원통형 모양의 줄기에서 하얀 털이 자란다. 그리고 그 하얀 털은 범한이 만든 춘약과 상호 작용을 하는 성질이 있었다. 특히 여성의 경우 몸이 가렵고 마비가 되는 데다 춘약의 효과를 제거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해당타타는 아마도 해독약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약속을 지킬 것이었다.
해당타타와의 만남을 곰곰이 떠올려 보던 범한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신이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 * *
그날 사신단은 호숫가 산골짜기에서 정박했다. 다리가 부러진 채 무기력하게 마차 안에 있는 소은은 자신이 북제 황실의 감옥에 갇힐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전씨 일가들은 신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고, 고하 국사는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리고 호아는…… 순간 권력 싸움에 진저리가 난 그는 차라리 새벽에 범한의 손에 죽었어도 나쁜 결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을 넘은 사신단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북제 관리들과 술자리에서 이 문제를 따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경국은 무도하강 도시 밖에 있는 시체들을 수거해 북제 군대가 무단으로 영토를 침범해 죄인을 탈옥시키려 했다는 증거로 삼으려 할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상황은 경국이 유리했기에 북제는 범한이 속해 있는 사신단이 화를 못 참고 소란을 일으키면 뭐라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북제 관리들은 오랜 시간 경국 사신단의 분노를 잠재우는 데 공을 들였다.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비밀 협상과 공식 협상은 다음 단계로 이어졌다.
기나긴 사신단 마차 행렬이 북해 호숫가를 돌아 다른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마차에 앉아 드넓은 대호와 그 위를 떠다니는 안개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범한은 겉모습과 다르게 마음이 복잡했다.
마차가 초원을 지나가자 땅이 바퀴에 파이면서 풀에 가려져 있던 진흙이 드러났다. 사륜마차는 바퀴가 돌아가는 힘이 상당했기에 질척한 진흙 길에서도 바퀴가 빠지지 않았다.
도시에 들어가기 전 범한은 마지막으로 사리리가 탄 마차를 찾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범한이 입을 열었다.
“북제에 들어간 후에는 낭자를 보기 힘들 겁니다.”
사리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평온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동안 대인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과 풍만하고 부드러운 몸을 바라보던 범한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조용히 마차에서 내려왔다.
무도하강 도시 밖 초원에는 여전히 어제 잔혹했던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특히 흙 언덕 아래 있는 풀숲에는 잘린 사지와 주인 없는 무기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마차에 기대 차창 밖 초원의 흔적들을 바라보던 범한은 어제 흑기들의 두려운 모습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시체는 이미 북제로 돌려보냈으니 배상이니 지급 문제 같은 건 범한이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도시에 들어선 마차 행렬은 무심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청색 돌길을 따라 동북동 방향으로 갔다. 범한이 탄 마차 가림막은 항상 열려 있었다. 그는 마차에 앉아 사람과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검은 천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무도하강은 경국과 북제의 국경이 맞닿은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다. 이렇듯 위치상으로는 국경 지대였지만 군사적 요충지는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 다만 양국이 배치한 병사들 사이에 작은 충돌이 종종 발생했었다. 나중에 양국의 무역과 전쟁의 중심이 무도하강에서 남쪽에 위치한 제후국으로 이동하면서 무도하강은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범한은 20년 전에 북위 영토였던 이곳이 나중에 경국 영토로 병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시 주민들은 사신단에게 친밀한 감정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통치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도시의 유리 기와가 반사하는 빛이 강렬하지는 않은데도 마차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범한은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그는 북제 영토로 들어간 뒤에 일어날 일들을 고민하느라 눈이 부신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소은에게서 반드시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에게 이것은 경국 조정의 임무나 이익보다도 중요했다. 왜냐하면 오죽이 신묘에 접근한 적도 있었고, 어머니가 남긴 편지에 그녀가 몰래 신묘로 들어가 어떤 물건을 훔쳐 왔다는 걸 암시하는 문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범한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는 한 번도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음에도 이상하게 섭경미란 여자에게 애정이 갔다. 오래전에 여자 혼자서 세상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신묘를 찾아 몰래 들어갔다는 사실이 감탄스러웠고, 자신의 어머니가 가진 용기와 담력, 지혜가 존경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보다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를 주눅 들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두 번째 인생을 더욱 적극적으로 살게 했다. 그래서 그는 신묘에 찾아가 당시 어머니가 섰던 곳에 서서 그녀가 남긴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 * *
무도하강 도시 외곽에 있는 작은 강은 지금 북제와 경국의 경계선이 되는 곳이었다. 강에는 마차 한 대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임시 다리가 놓여 있었다.
북제 관리와 사신단으로 온 경국 홍려사 관리들은 다리 건너편에서 범한의 사신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맞은편에는 얼굴이 누렇게 뜬 수척한 모습에 허름한 갑옷을 입은 현지 주둔군이 서 있었다. 북제의 위엄을 보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창에 기대 졸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첫 번째 마차가 울퉁불퉁한 나무다리에 오르자 끼익끼익 소리가 들리면서 다리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미 마차에서 내려 다리 건너편으로 건너간 범한은 북제 관리들과 인사를 한 뒤 고개를 돌려 마차들이 차례대로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바라봤다. 한 대 한 대 마차가 지날수록 다리에서 나는 소리도 요란했다.
범한이 걱정되는 눈빛으로 다리를 바라보자 성이 후씨인 북제 관리가 급히 말했다.
“시험해 봤는데 문제없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열정이 넘치는 하급 관리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해당타타가 소은을 죽이려 한다면 마차가 다리를 건널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고하 국사의 제자인 그녀는 스승의 명성을 더럽히거나 북제 백성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북제 영토 안에서는 소은을 공격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범한은 순간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는 급히 몸을 돌려 동남쪽 강기슭에 있는 백양나무 숲을 바라봤다. 길쭉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어 있는 게 창을 쥐고 서 있는 군대처럼 엄중한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꽃무늬 옷을 입은 시골 처녀가 바구니를 허리춤에 들고 다리를 건너는 마차 행렬을 보고 있었다. 강가에 청량한 바람이 불자 머리에 쓴 꽃무늬 두건이 펄럭이면서 수수한 얼굴과 맑은 눈이 보였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북제 수도에 도착하면 그녀와 다시 인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더구나 진평평의 지시대로 고하 국사와 접촉해야 했기에 관계를 더는 악화시킬 수 없었다.
비록 소은을 암살하려 했고 자신도 죽이려 했지만 범한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실력이 감탄스러웠고, 또 초원에서 시골 처녀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삿대질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잠시 뒤 마차가 옆에 멈추자 곧장 안으로 들어간 그는 더는 강기슭을 바라보지 않았다.
* * *
강을 건너고 숲을 지난 사신단은 북제의 호위를 받으며 국도에 진입했다. 코를 벌름거리며 공기의 냄새를 맡던 범한은 푸릇푸릇해진 국도 옆 나무를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다른 나라에 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더구나 국도에서 호위하는 북제 군사들의 모습도 희한했다. 도로 양쪽을 호위하는 두 진영은 한쪽은 모두 여자였고 다른 한쪽은 모두 남자였다. 여자인 쪽은 어린 여종과 민첩해 보이는 젊은 여종 그리고 연로한 노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자 쪽은 모두 비단옷을 입고 허리에는 낫 모양으로 칼날이 휘어진 곡도를 차고 있어 여자 쪽보다는 삼엄한 분위기였다.
더구나 사신단 중 최소한 절반은 경국 감찰원 관리들이었다. 마차 대열 주변으로 적대적인 감정이 피어오르면서 모든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곧게 뻗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양국의 기밀 기구인 경국 감찰원과 북제 금의위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첩보전에서 이기기 위해서 두 기구는 그동안 서로의 손에 서로의 피를 묻히며 잔혹하고 무정한 싸움을 해왔다.
그러던 양측이 오늘 북제 국도에서 마주쳤으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북제 관리들이 재빨리 범한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아랫사람들에게 경계를 늦추라고 지시했다. 어쨌든 오늘은 양국의 화친을 위해 온 것이지 칼날을 부딪치며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있는 일곱 명의 호위들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범한이 북제 영토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포로를 넘기려 하자 왕계년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상경까지는 저희가 소은을 압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는 길에 심문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북제 밀정들과 함께 가는 이상 심문할 기회는 없을 겁니다. 차라리 상대방에게 소은을 넘기는 게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럼 도중에 소은에게 문제가 생겨도 북제의 책임이 되니 언빙운 공자를 데려오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답답했다. 일단 수도로 들어가면 고하 국사의 손아귀에서 소은의 목숨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상삼호의 도움을 받아 소은이 다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175화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고개를 돌려 소은이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두 다리가 부러져서 마차에서 내려오는 게 쉽지 않았다. 무릎 아래 바지 안에서 은은한 피비린내가 났다.
북제 금의위는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소은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풍문으로 들어 본 적이 있었기에 그들도 북위의 기밀 기구가 이 볼품없는 노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백발이 성성한 이 노인은 자신들이 속한 금의위의 창시자라 할 수 있었다.
소은을 데리고 가는 북제 금위의의 분위기는 무겁고 어색했다. 그들은 소은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국가의 영웅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이전 왕조의 잔여 세력으로 봐야 할까. 자신들의 선배로 대해야 할까, 아니면 중범죄자로 대해야 할까.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그들은 자신들의 핏속에서 용솟음치는 감정을 따르기로 했다. 도로에서 위풍당당하게 있던 금의위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소은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외쳤다.
“초 대인을 뵙니다!”
용맹스러운 인사에 백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금의위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소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 없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범한은 순간 섬뜩했다. 몸을 곧게 편 소은의 뒷모습은 천하를 무게를 다 짊어질 수 있을 것처럼 단단하고 용맹해 보였다.
* * *
한편 여종들은 사리리의 마차에 올라 있었다. 어떻게 몸 안에 그렇게 많은 장식품과 도구들을 지닐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차에 오른 그들은 먼저 사리리를 씻겼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사리리가 수가 새겨진 카펫을 밟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범한도 순간 눈빛이 흔들리더니 금방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드러나는 연청색 소매에 풍만한 몸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화려하게 수 놓인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머리는 흑단으로 고정해 말아 올렸고 얇은 입술은 붉게 칠해져 있었다. 마차에서 나온 그녀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구슬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봤다.
과연 경국의 가장 유명한 기생이자 북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절세 미녀답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왕계년이 곁눈질로 범한의 안색을 살폈다. 사리리가 북제 황궁으로 들어가면 두 사람은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범한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고 두 눈도 맑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다가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인사한 뒤 뭐라 말하려 할 때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범한이 불쾌함에 고개를 돌리자 노파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노파는 거만한 표정으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우리 영토에 들어와서도 사씨 아가씨께서 남쪽 관리의 말을 들어야겠습니까?”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뭐라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노파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를 빤히 바라보기나 하고 남쪽 관리들은 어쩜 저렇게 예의가 없는지, 쯧쯧.”
북제 황궁 사람으로 상당한 지위를 가진 노파는 사리리가 어렸을 때 보살핀 적이 있었다. 더구나 사리리는 북제 황제가 아끼는 여자로 경국에서 고생하며 관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국경에서 만나면 잘 보살피리라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범한이 사리리가 서 있는 마차 쪽으로 걸어가 몸 안의 난폭한 정기를 서서히 배출했다. 막고 있던 여종들이 겁을 내며 슬쩍 옆으로 비켜 주자 마차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리리가 보였다.
“방자한 놈!”
노파가 버럭 화를 냈다.
“남쪽 오랑캐 주제에 뭘 하려는 거냐? 당장 이놈을 쫓아내지 않고 뭐 해!”
그 말에 달려온 금의위 중에서 눈치 없는 몇 명이 허리에 찬 곡도를 뽑으려 했다.
사신단을 접대하는 북제 관리들은 범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범한은 재상의 사위였고, 상서의 장남이었으며, 국경 황제가 아끼는 군주의 남편이었다. 더구나 북제 대가 장묵한이 피를 토하게 만든 시선으로 절대 평범한 관리가 아니었다.
작년 전쟁에서 연패한 북제는 이번 평화 협상에서 불리한 처지에 있었기에 범한처럼 중요한 사람의 화를 돋울 수는 없었다. 이에 북제 관리들이 급히 손을 휘두르며 금의위를 물리쳤다.
그러자 노파가 더욱 화를 내며 북제 관리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우리 강토 안에서 남쪽 오랑캐 놈이 멋대로 구는 걸 허락한단 말이냐!”
노파는 황실 안에서만 지냈기에 세상의 흐름을 잘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이를 갈더니 쪼글쪼글한 손바닥을 들어 있는 힘껏 범한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미소를 띤 범한이 노파의 손을 잡은 채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는 약간 겁에 질린 눈빛을 하면서도 여전히 완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놔라, 늙은이 뺨이라도 때리려는 거냐!”
짝! 노파는 정말 뺨을 맞고는 다리에 힘을 풀려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빨갛게 부은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놀란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당해 본 적이 없는데 맞았으니 너무 놀라서 통증마저 잊은 듯했다.
범한은 노파의 얼굴에 닿은 손바닥을 옷에 닦으며 말했다.
“계속 남쪽 오랑캐라고 하시니 거칠게 대해 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아연실색했다. 시선이라 불리는 범한 제사가 노파를 때리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노인을 말리던 북제 관리가 땀을 닦으며 범한에게 설명했다.
“이분은 황실 어르신으로 저희 관리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자 범한은 하늘을 향해 통곡하고 있는 노파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북제 관리가 아니니 저분의 체면을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황궁에 있는 노인들 체면 살려 주는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이것은 북제 황궁의 체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이므로 상당히 오만한 말이었다. 그 뜻을 알고 있는 북제 관리가 고개를 숙이고 이를 갈았다. 범한이 북제 황실 사람을 때리고 거만한 말을 했어도 자신보다 강대국인 경국 관리인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범한이 비켜선 길을 따라 마차 옆으로 걸어갔지만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다정하게 사리리를 바라보았다.
“황궁에 가시면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당황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던 사리리는 그 말에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동안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의 은덕에 보답할 방법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범한이 웃었다.
“보답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간단한 몇 마디 대화로 사리리의 동생의 미래가 결정된 것이다. 이후 조용히 돌아간 범한은 사신단 마차 행렬 중간에 서서 멀리 소은과 사리리가 북제 마차에 타는 걸 지켜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상황이 녹록지 않다고 생각했다. 포로 교환은 기밀 협상임에도 북제 쪽은 이 일을 기밀로 다루지 않은 듯했다. 소은 같은 경우 은밀하게 수도로 이송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오늘 파견된 금의위는 너무 많았다. 사람이 많으면 기밀도 새어 나가는 법이었다.
젊은 황제가 소은을 빼내려 하는 상삼호와 소은을 죽이려 하는 해당타타 사이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도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황실의 중요 인물인 이상 이들 사이에 낀 북제 황실의 고민도 상당할 터였다.
더욱이 이상한 점은 북제 사람들이 사리리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신경 써서 대하는 걸 보면 북제 황제가 사리리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나 보군. 하지만 사리리가 경국 친왕의 자식이라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이용할 가치는 없을 텐데……. 설마 정말 사리리에게 마음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황태후가 있는 이상 사리리를 황궁에 들이기 쉽지 않을 텐데…….’
그때 다리가 부러진 소은이 조용히 호송 마차에 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본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호송 마차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소은의 신세를 한탄했다.
* * *
사신단이 북제 영토로 들어가자 흑기들은 조용히 경국으로 돌아갔다. 사신단의 모든 안전을 북제 금의위가 책임지면서 오랜만에 쉴 수 있게 된 범한은 마음이 홀가분했다. 어쨌든 북제 영토에 있는 이상 누구도 사신단을 공격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사신단 사람 중 대부분은 과거 북제에 와본 적 있는 노인들이었고 왕계년도 과거 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사신단 중 해외에 나와 흥분되는 사람은 범한과 일곱 명의 호위들뿐이었다.
고달을 수장으로 한 호위들은 무예 고수답게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외국 풍경이 궁금한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연신 창밖을 바라봤다.
범한이 웃었다.
“처음 방문해서 보니 나무 종류들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풍경은 북제나 경국이나 거의 비슷하군요. 날씨도 춥지 않은 것이 대호 서남쪽에 있는 황량한 초원보다는 따뜻하고.”
그러자 왕계년이 설명했다.
“북제는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좋은 편입니다.”
그러자 고달이 갑자기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워낙에 말이 없는 사람이라 범한도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북제의 풍경이 정말 좋습니다. 소신이 이번 생에 가장 바라는 일이 있다면 폐하가 네 번째 북벌을 단행하실 때 소신도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마차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도로를 질주했고, 창밖 낙엽 교목에 걸린 크고 작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렸다.
풍경을 감상하던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봄 경치가 이처럼 아름다우니 잔인한 일은 말하지 맙시다.”
말은 비록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북제 수도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을 조용히 일러줬다. 추가로 협상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지만 신경 써서 조심해야 할 부분은 있었다. 범한이 탄 마차에는 왕계년과 고달 말고도 홍려사 출신 임정이 사신단 부사로 타고 있었다. 네 사람은 밖에 있는 북제 사람들이 엿들을세라 조심하면서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다.
무도하강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기에 마차는 매일같이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무심하게 창밖의 무미건조한 풍경을 바라보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은과 사리리 낭자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녀가 황궁에 들어가기 전에 젊은 황제는 그녀에게 어떤 신분을 주려고 할까? 내가 진평평 원장의 암살 계획을 수포로 돌리면서 계획한 미인계는 성공할 수 있을까?’
범 제사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자 옆에 있던 부사 임정이 공손하게 말했다.
“대인, 길이 멀고 힘드니 지치지 않도록 마음을 다독이셔야 합니다.”
임정은 범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며칠 전 노파의 뺨을 때린 것이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 곽보곤의 호위 무사와 수비대장 섭중의 외동딸의 코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또 이번 사신단의 모든 일이 범 제사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며 자신은 그저 자질구레한 일만 처리할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의 기분이 좋지 않아 중요한 일을 그르칠까 봐 걱정되었기에 조심히 말했다.
“북제 수도에는 세상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 여자들도 유정강 못지않게 예쁘다고 하니 도착하면 한번 가보시지요.”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들어 적적하지 않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매일 사리리 마차에 머무르는 바람에 사람들이 자신을 호색한으로 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갑자기 말했다.
“며칠을 빠른 속도로 달렸는데도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네요. 경도라면 이미 국경에서 경도까지 도착하고도 남을 거리가 아닙니까. 북제 영토가 넓긴 넓군요.”
마차 안에 순간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임정이 웃었다.
“그렇습니다. 비록 작년에 북제의 영토를 많이 가져오긴 했지만 그래도 영토와 사람 숫자로 말하면 북제가 천하에서 가장 큰 나라입니다. 내란이 끊이질 않고 민심이 분열되어 저희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북제가 뭉쳐서 일어난다면 경국에 큰 위협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고달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가져올 영토가 그만큼 많은 것이기도 합니다.”
고달은 말수가 아주 적은 사람이긴 했지만 최근 압송 임무에서 해방되면서 조금씩 대화에 끼어들었다. 북제의 영토를 경국이 당연히 가져와야 한다는 듯이 말하는 고달을 보고 범한이 실소를 터뜨렸다. 십여 년 동안 승리만 해온 경국 관리들은 무조건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왕계년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달 대인께서 웃기기까지 하시면 저는 뭐가 됩니까.”
176화
북제에서 사신단이 머문 역참 가운데 도시에 있는 건 극히 드물었다. 경국 사신단은 이 점이 불만스러웠지만 북제 관리들이 정성스럽게 대접했기에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더구나 북제의 체면을 깎는 협상인 만큼 백성들에게 경국 사신단이 위풍당당하게 도시를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는 곤란할 것이었다.
하지만 길가에서는 평범한 백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날 범한이 오랫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북제 사람들은 왜 우리를 미워하기보다는 멸시하거나 동정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입니까?”
“그건 북제 사람들이 저희를 야만적인 남쪽 오랑캐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임정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두 나라가 전쟁한 것을 북제 황제가 감추었기 때문에 북제 백성들은 경국이 강성하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깔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자신이 검은 줄 모르는 법이지요.”
“북제는 북위의 명맥을 이은 나라인 만큼 자신들이 천하의 정통이라 자부하며 상대국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북위는 이미 20년 전에 멸망했지만 주변 나라가 모두 오랑캐라는 생각은 여전히 북제 백성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줄곧 북제가 과거의 영광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은 여전히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백성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을 볼 때는 습관적으로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며 거만하거나 동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 머무르고 싶어 했다. 물론 북제 관리들은 세계가 이미 변했다는 걸 알았기에 경국 사신단을 정성껏 대접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임정이 계속해서 북제의 상황을 설명했다.
“북제는 과거 북위가 가진 영토와 관리들을 대부분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서생들도 북제를 정통으로 치켜세우고 문학의 뿌리도 북제에 있다고 하는데 이 점은 맞는 말입니다. 매년 춘시 때마다 북제의 과거 시험장은 경국보다 훨씬 왁자지껄합니다. 북제의 인재들뿐만 아니라 동이성의 서생들도 모두 천 리 길을 마다치 않고 몰려드니까요.”
왕계년이 입술을 샐쭉였다.
“맞는 말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국 서생들이 북제 상경까지 달려가서 과거 시험을 봤으니까요.”
범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가 막히는군요. 경국 사람이 북제에서 관리가 될 수 있습니까?”
임정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당연히 불가능하지요. 다만 북제 춘시에서 삼갑에 든 인재는 어느 나라에서든 관리가 될 자격이 있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건 경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인께서도 태학 봉정이셨으니 서무 대학사를 알고 계시겠지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임정이 탄식하며 말했다.
“서무 대학사도 북제에서 과거를 본 사람입니다. 그때 시험관이 장묵한이라서 그가 자신을 장묵한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서무 대학사가 북제에서 과거를 본 뒤 돌아와 경국에서 관직을 하는 것만 봐도 북제의 학문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알 수 있지요.”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오랜 시간 문치에 공을 들이셨는데도 상황이 이러니 화가 나시겠습니다.”
“그렇지요. 무예는 천하 어느 나라도 우리를 능가할 수 없지만 문예에서는 아직 진정한 인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문학은 하찮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범한의 말에 임정이 무언가 생각난 듯 활짝 웃었다.
“북제 대가 장묵한이 피를 토하게 만든 범 제사가 경국에 계시니 아무도 우리가 뒤떨어진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자 왕계년도 재빨리 그렇다고 호응했고 무뚝뚝한 고달도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의 명성을 경도 세력이 모두 좋게 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전쟁 이외의 분야에서 북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인재가 나오기를 모두가 원했다.
* * *
범한은 미녀도 없는 무미건조한 여정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나긴 도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차들이 달리면서 뿜어내는 흙먼지가 길 양쪽 빽빽한 나무 사이에 갇히면서 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해 발악하는 황룡처럼 일렁거렸다.
흙먼지를 가로막는 가로수 나뭇잎들은 크기가 일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경국보다는 잎이 크고 줄기도 굵고 단단했다.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람을 맞으며 지나가는 나무들을 보던 범한은 갑작스럽게 한동안 잊고 살았던 이전 세계가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에 허베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도 똑같은 풍경을 봤었다.
범한은 사신단 대표로 첫 번째 마차를 탔기에 창문 열고 머리를 내밀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았다. 불쌍하게 먼지를 맞고 있는 건 뒤에 있는 부하들과 북제 관리들이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길 끝에서부터 서서히 검은색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울창한 나무들 위로 검게 변한 하늘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먹구름을 올려다보던 범한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다만 어린 시절 담주에서처럼 지붕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빨래를 걷고 비옷을 입으라고 소리치지는 않았다.
마차는 점차 어두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주변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갑자기 구름이 흩어지면서 주변이 환해지더니 멀리서 온 손님을 맞이하려는 듯이 따뜻한 봄 햇살이 비쳤다. 그리고 눈앞에는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경도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도시였다. 청색 벽돌을 세 장 높이로 쌓아 올린 성벽은 약간 기울어져 있었지만 멀리서 온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압감을 주었다. 성벽은 언제든지 자신들을 향해 쓰러질 것 같았다. 높이 있는 누각이나 각루에는 성벽을 순찰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보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장엄한 성벽이었다.
성문 앞은 일찌감치 정돈되어 관계없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북제 관리들만 사신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를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자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던 범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북제의 수도 상경이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상경에 도착했다.
* * *
예절에 따라 양측이 서로 인사를 나눴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꾸민 북제 관리들과 다르게 경국 사신단은 오랜 시간 마차로 이동해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침착하게 장황한 절차를 바라보던 범한은 자신을 소개하자 고개를 약간 끄덕여 보였다. 그는 북제 사람들의 눈에 건방져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북제 상경의 건축물에 있었다. 상경은 오랜 시간 갖은 풍파를 견디면서도 무너지지 않은 거대 도시였다. 커다란 청색 돌 가장자리는 이미 오랜 세월에 풍화되었지만 여전히 굳건해 보였다.
범한은 왠지 감격스러웠다. 그가 느끼는 감격은 여행자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이곳 역사의 흔적을 만난 듯했다. 경국의 경도도 물론 거대한 도시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남긴 것이란 생각 때문인지 오래되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건축물들은 오랜 역사의 흔적이 느껴졌다.
“제사 대인을 뵙니다.”
생각에 잠긴 범한을 향해 임문 대인이 말했다. 임문은 북제에 설치한 경국 회관의 동사로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범한이 알록달록한 성벽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범 정사라 불러 주십시오.”
임문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멀리 외국에서 머무르고 있어 경도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범 제사가 조정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처음 보는 자리에서 면박을 주자 사남 백작의 힘을 등에 업고 거만하게 군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임문의 생각을 읽었는지 사신단 부사 임정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해명했다.
“범한 대인의 뜻은 양국의 우의를 다지러 온 만큼 괜히 감찰원 신분을 사용해 북제 관리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제야 범한의 뜻을 이해한 임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요. 범한 대인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북제에 상주해 있는 임문을 바라봤다. 외모가 단정한 것이 왠지 눈에 익은 듯했다. 그러자 임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임문 대인은 제 사촌 형입니다.”
범한이 화들짝 놀라 웃었다.
“그랬군요.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습니다. 부자가 함께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승리하고 형제가 뭉치면 호랑이도 때려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두 분이 함께하시니 일이 순조롭게 풀리겠군요.”
북제 관리 한 명이 걸어오자 세 사람은 재빨리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돌려 성벽에 새겨진 흔적과 개미들이 기어가는 노선을 구경하는 척했다. 북제 관리가 세 사람 뒤로 가까이 오자 임문이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화 대인께서도 오늘 오셨습니까?”
범한도 몸을 돌려 위화란 이름의 북제 관리를 바라봤다.
두 손을 모아 정중히 인사한 위화는 임문과 잘 아는 사이인지 웃으며 타박하듯 말했다.
“자네 사신단을 맞이하는 일만 아니었으면 지금 여향원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을 거네.”
그의 말을 들은 범한은 그가 이홍성과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아 흥미가 생겼다.
임문이 서둘러 범한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북제 홍려사 소경, 위화 대인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임문이 범한을 소개하려 하자 위화는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범한 대인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신 분인데 소개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서둘러 인사를 하며 말했다.
“보잘것없는 명성일 뿐입니다.”
“겸손하신 분이시군요.”
위화란 사람은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남이었지만 눈동자가 산만한 것이 관리라기보다는 방탕한 사람 같았다.
“시선이라 불릴 만큼 시 짓는 솜씨도 뛰어나시고 감찰원 제사도 맡고 계시면서 내년에는 경국 황실의 금고도 관리하게 되실 분이 아닙니까. 더구나 최근에는 춘시 부정행위를 들춰 부패한 관리 일곱 명의 목을 날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분이 오셨으니 모를 수가 없지요.”
그러고는 호탕하게 웃더니 다시 말했다.
“경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범한 대인처럼 재능이 많은 인재를 경도에서 잘 성장하게 두지 않으시고 어째서 이곳으로 보내신 것입니까? 만일 도중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건지…….”
위화가 약간은 겁을 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지만 범한은 상관없는 듯 태연하게 웃었다.
“온실 속에서 약하게 성장해서 되겠습니까.”
그러자 위화는 젊은 관리인 범한이 상경의 성벽에 관심을 보이던 걸 생각하고는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성은 지어진 지 3백 년이나 됐는데 한 번도 적군의 공격에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범한 대인이 보시기에도 웅장하지 않습니까? 경국의 성벽도 이러한지 모르겠군요.”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웅장하기는 한데 낡아서 수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두 사람이 기 싸움을 하자 다른 사람들은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잠시 뒤 위화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본관의 접대가 부족하더라도 범한 대인께서 모쪼록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그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더구나 악의적인 적의라기보다는 경쟁자를 보는 듯한 적의였다.
‘오늘 처음 만났으니 미움을 살 일도 없는데 왜 나를 싫어하는 거지?’
이때 분위기를 살피던 임문이 두 사람 옆으로 다가와 하하 웃었다.
“위화 대인은 작년 경국에 사신으로 방문했던 장영후의 맏아들이십니다. 당시 장영후께서 범 정사와 함께 주량을 겨루다가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귀국한 뒤에도 당시 일을 잊지 못하고 경국에 시도 잘 쓰고 술도 잘 마시는 젊은 인재가 있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위화 대인께서 대인과 겨뤄 보고 싶어 그러는 모양입니다.”
“그랬군요.”
범한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위화 대인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이목구비가 장영후와 비슷한 듯했다. 작년에 부사로 북제 사신단을 대접하면서 장영후와 여러 차례 만나 연회에서는 주량을 겨루기도 했다. 그렇다고 술친구가 됐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에 그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공손하게 말했다.
“위화 대인께서 부친의 복수를 하고 싶으시다면야 날을 봐서 응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다만 제가 인사불성으로 취해 양국의 일을 망칠까 걱정되는군요.”
모두가 호탕하게 웃으며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했다.
177화
북제 수도 상경은 번화한 도시였다. 대로는 넓지 않았지만 거리마다 술집과 식당이 즐비했고 청색 기와와 푸른 나무가 어우러지는 경치도 일품이었다. 사람들의 온화한 얼굴에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가득한 게 패전국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신단은 위화의 안내에 따라 성의 서쪽으로 갔다. 사신단이 머무를 곳은 홍려사 뒤쪽 황실 별궁으로 북제 황제가 사신단의 체면을 고려해 내린 조치였다.
길을 가면서도 범한은 계속 위화와 대화를 나눴다. 위화는 경국의 관료 사회를 잘 알고 있거니와 중요 세력가들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말하는 걸로 봐서는 정왕 세자 이홍성과도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 사실은 안 범한은 속으로 놀라면서 양국의 수도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두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범한은 지금 북제의 조정이 자신이 아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읽었던 감찰원 보고서에는 위화가 말하는 것처럼 북제 조정이 화목하다고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제 황태후가 30대로 젊은 나이인 데다가 황제가 친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조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제당과 후당의 소리 없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작년 경국과 전쟁에서 패하면서 권력 싸움이 잠시 중단되기는 했으나 사신단이 상경에 도착했을 때는 다시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이러한 이유로 북방 장군 상삼호도 상경에 돌아와 있었다.
범한이 무심한 척 말했다.
“상삼호 장군은 세상에 둘도 없는 용맹한 장군이라 하던데 언제 시간 되시면 뵙고 싶군요.”
위화가 의외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삼호 장군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오랑캐와 용맹하게 싸우는 게 감탄스러워서 그럽니다.”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위화는 상삼호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더는 말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사신단이 별궁에 도착하자 종들이 한바탕 바쁘게 움직이더니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홍려사 소경인 위화는 저녁 식사 자리까지 머무르며 사신단을 대접했다. 식사하며 몰래 범한의 주량을 확인해 보던 그는 술을 물처럼 마시는 모습에 감탄하며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마음도 약해졌다.
식사가 끝나자 별궁에는 사신단만 남게 되었다. 북제 시위들은 예의상 밖에서만 보초를 서고 별궁 안의 일은 모두 사신단이 처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방 안에는 범한, 임문, 임정, 고달 그리고 왕계년만 남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주변에 엿듣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범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적국의 심장에 있는 셈이니 일을 신중하게 진행해야겠습니다.”
임문과 임정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의 심복인 왕계년과 고달이 북제의 상황을 자세히 모르는 것 같았기에 잠시 고민하던 임문이 천천히 최근 상경의 상황을 보고했다.
“상삼호는 한직에 있는 겁니까?”
의외라는 듯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원래 빙원이 펼쳐진 북쪽 외지에 머물던 상삼호는 북제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였다. 그래서 감찰원은 경국의 기세등등한 공세를 막기 위해서라도 북제가 그를 이용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직에 있다니…….
“회원 대장군은 이름은 듣기 좋지만 수도에서 백 명의 사병만 거느릴 뿐이지요. 이곳에는 상경 수비와 세 명의 대통령, 표기장군이 있습니다. 회원 대장군은 비록 존경받는 자리이지만 병사를 가질 수 없으니 상삼호가 아무리 용맹한 사람이라 해도 첩의 품 안에서 한숨을 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겠지요. 우리에 갇힌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사람이 놀랄 수는 있어도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임문이 적국의 장수를 조롱하며 말했다.
탁자를 툭툭 치던 범한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뭘 하려는 걸까요? 수도로 불러 놓고 내버려 두고 있다니.”
임문이 한숨을 쉬었다.
“제당과 후당 모두 상삼호의 지지를 얻고 싶어 하면서도 상대편에 완전히 기울까 봐 걱정되어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상삼호는 명성도 대단해서 군대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한데 경중에는 백 명의 친위군밖에 없으니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지요.”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상삼호가 무슨 배짱으로 무도하강 근처에 사병을 보내 소은을 탈출시키려 했는지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 두려운 게 없어 그랬던 거군요.”
그 말을 들은 임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신단이 오는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임정이 낮은 목소리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자 임문은 화들짝 놀라며 범한이 무사한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상삼호 장군은 소은과 무슨 관계입니까?”
범한은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감찰원의 판단이 틀리지 않는다면 상삼호는 소은이 맡아 키운 고아일 겁니다.”
“맡아서 키운 고아라고요?”
모두가 대경실색하자 범한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러리라 추측하는 것입니다. 소은이 잡힌 뒤 북위가 멸망하고 천하가 어지러웠을 때 상삼호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요.”
감찰원은 이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확실한 결론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범한의 이번 임무 중에는 상삼호의 스승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확인하는 것도 있었다.
“그렇다면 상삼호가 소은을 구출하려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북제 조정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겁니다.”
범한은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해당타타는 소은을 죽이고 싶어 했고, 황제는 소은을 감옥에 가둬 두고 신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려 했으며, 상삼호는 단순히 소은이 행복한 만년을 보내길 바랐다. 이처럼 북제에서 가장 큰 세력들이 소은을 두고 대치하는 이상 언제든지 혼란이 발생할 수 있었다.
흥미진진한 상황이었지만 신묘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범한으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날이 이미 늦었기에 모두 피로한 몸을 끌고 쉬러 들어갔다. 임문은 내일 해야 할 일 중에서 중요한 사항 몇 가지를 골라 범한에게 보고했다. 내일 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궁해서 황제를 만난 뒤 홍려사에서 포로 교환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오전에 입궁하면 홍려사에는 오후쯤에 가겠군요. 그럼 홍려사 일은 부사 대인께서 고생해 주십시오.”
“대인은 안 가실 생각입니까?”
임정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포로 교환처럼 중요한 일에 사신단 정사가 참석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러자 범한은 눈꺼풀을 살짝 내리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포로 교환 협상은 공식적인 교환과 비공식적인 교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범한은 그중에서 비공식적인 교환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소은과 사리리를 넘겨준 이상 언빙운의 소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 * *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범한은 연신 하품을 했다. 잠자리를 가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젯밤에는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고달과 왕계년의 얼굴도 푸석푸석한 걸 보니 어젯밤에 사신단 전체가 잠을 설친 게 분명했다.
이 일은 발단은 어젯밤에 일어난 소동에 있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홍려사 소경 위화가 아름다운 기생들을 데리고 별궁에 찾아와 경국 관리들 방에 한 명씩 들여보낸 것이다. 이 때문에 별궁 안은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북제에서 이런 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줄 몰랐던 범한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비록 침대 아래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과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유혹적이긴 했다. 하지만 북제 수도에 도착한 첫날 이런 일이 벌어지자 당황스러워서 그녀를 조용히 돌려보냈다.
이렇게 한바탕 벌어진 소동에 모두가 잠을 이루지 못한 가운데 임정의 방에 들어간 기생만 나오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할 때 범한이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이상함을 느낀 임정이 웃으며 북제 사신단이 경도에 왔을 때도 홍려사에서 똑같이 대접했다고 설명했다.
* * *
범한이 손으로 눈곱을 떼고는 잔뜩 기합이 든 채로 대열 맨 앞에 서 있는 위화를 바라봤다. 순간 그는 일부러 잠자리를 방해했을 거란 생각에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사신으로 가는 건 이전 세계의 출장과 다르지 않았다. 범한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나아가는 마차 안에 앉은 그가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사실 그는 입궁해서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려 황궁에 들어선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굴처럼 생긴 문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빛이 비쳤다. 그곳은 겹겹이 둘러싸인 처마였다. 대부분 검은색인 황궁 건물들은 장엄하고 고풍스러웠다.
그 모습에 감명받은 범한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처음 수도를 구경 온 촌사람처럼 넋을 잃고 바라봤다. 북제 황궁과 경국 황궁은 완전히 달랐다. 규모 면에서는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훨씬 조용하고 아늑했다. 검게 칠해진 대들보들은 이 황궁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긴 나무로 된 행랑은 손님이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과거 천하를 호령했던 위대한 인물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쳤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호위들은 장검을 차고 있어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머물렀다. 그래서 범한의 옆을 지키는 사람은 임문과 임정, 왕계년 그리고 오늘 반드시 필요한 예부 관리들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 옆에 흐르는 물을 건넌 일행은 계속 위로 올라간 끝에 마침내 정전에 도착했다. 정전 앞에는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대내시위는 한눈에 보아도 최소 7등급은 되는 고수였다.
육중한 나무문 밖에서 등이 굽은 태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문 앞에 서자 태감은 기운 없는 눈빛으로 남쪽에서 온 오랑캐를 힐끗 바라봤다. 그러고는 소매를 펄럭이며 높고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경국 사신이 도착했다!”
태감의 거친 목소리에 뒤에 있던 나무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그들의 눈앞에 북제 권력의 핵심이 모습이 드러냈다.
* * *
북제 황궁의 정전은 정말이지 공간도 넓고 웅장했다. 더구나 두 겹으로 된 지붕은 전부 값비싼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서 내부는 음산한 기운 없이 밝고 산뜻했다. 또 정전 양쪽은 굵은 나무 기둥이 지탱하고 있었다.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무슨 나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구름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용의 문양이 금박으로 장식되어 무척 화려했다. 기둥 뒤로는 겹겹이 천이 걸려 있었고 그 뒤로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는데 궁녀인지 태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범한이 정전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문 앞에 직선으로 드리운 긴 길과 길 양쪽에 흐르고 있는 맑은 물이었다.
사신단은 태감의 안내에 따라 곧게 펼쳐진 길을 걸어갔다. 처음으로 정전에 들어간 경국 관리들은 범한과 마찬가지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청옥으로 만든 길 위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양탄자가 깔려 있어 걸을 때마다 온기가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건 길 양옆에 흐르는 물이었다. 이렇게 큰 궁전 안에 수로를 설치하다니. 안까지 환하게 보일 만큼 맑은 물에 금색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더구나 범한처럼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물 깊은 곳에서 커다란 검은색 물고기와 흰색 물고기가 꼬리를 흔들며 모래에 엎드려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부사 임정이 이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렇게 화려한 궁전을 보니 북제가 북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는군. 황실에서 이렇게 사치를 부리니 상당한 국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힘을 잃고 우리에게 패배한 것이겠지.’
길을 다 걸어가자 북제 황제와 관리들이 정사를 의논하는 장소인 정전이 나타났다. 뒤에서 물결이 가볍게 일렁이는 소리와 함께 정전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박달나무 판자가 깔려 있어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정중앙 가장 높은 용상에 앉아 있는 북제 황제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사신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신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적국의 황제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일어나시게.”
경국 신하가 자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은 게 만족스러운 듯 북제 황제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소리 없이 한숨을 내뱉으며 일어난 범한은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살짝 들어 보니 용상에 앉은 젊은 황제가 애매모호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북제의 젊은 황제는 올해 열일곱 살로 그와 동갑이었다. 문학은 장묵한의 둘째 아들에게서 배웠고 무예는 고하 국사의 수제자에게 배웠으나 어느 것 하나 잘하지 못했다.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건 경국 황제와 비슷했지만 노는 걸 무척 좋아했다. 또 황태후를 존경하면서도 무서워하고 미워했으며, 신하들은 상을 많이 주고 벌을 적게 주는 식으로 다루었다.
이런 젊은 황제는 아직도 사랑을 믿는 것 같았다.
178화
범한은 황제의 앳된 얼굴을 보자 순간 여러 가지 정보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예의 없이 황제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황제가 바라보고 있을 때 신하는 눈을 똑바로 보아서는 안 됐다.
그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북제 황제가 왜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했지만 감히 물을 수 없었다.
이때 옆에 선 임정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사인 범한이 맡은 일을 하지 않으니 부사인 그가 대신 복잡한 예절과 공무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경국 황제가 보낸 국서를 읽는 중이었다.
옆에서 양국이 우정을 영원히 공고히 하고 형제로 지내자는 내용을 엄숙하게 읽는 소리를 듣던 범한은 속으로 담주에서 두부 장사를 하는 동아도 믿지 않을 만큼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북제 황제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찬성을 표시했다. 그 모습을 보며 범한은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양국의 우애로운 분위기에 도취한 것처럼 공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어서 북제 예부 관리가 앞으로 나와 아름다운 문장을 읊으며 화답했다.
평범한 과정이었지만 범한은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젊은 황제 이외에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마음이 무겁기는 북제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경국 사신단 정사가 시선이라 칭송받는 범한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자국의 대가인 장묵한에게 창피를 준 젊은 풍류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궁금했던 것이다. 더구나 오늘 정전에서 입을 꾹 다물고 국사를 읽는 중요한 일마저 부사에게 넘기자 북제 군신들의 눈은 더욱 범한에게로 쏠렸다.
범한은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을 의식하면서 반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정전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북제 조정의 대신 중에서 특별한 인물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높은 용상 옆에서 흔들거리는 주렴이었다. 뒤에 있는 물이 주발에 비치면서 푸른 빛을 내뿜는 것이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는 북제의 진정한 권력자인 황태후가 주렴 뒤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가 지루한 듯 하품을 했다.
“멀리서 와서 피곤할 텐데 이만 물러가 쉬시게.”
젊은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은 체증이 내려간 듯 홀가분했다. 사신단과 함께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절한 그는 속으로 북제 실무자를 만나 언 공자의 소재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범…… 공자?”
북제 황제가 웃는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범한을 부른 것이다.
“짐과 함께 한담을 나누지 않겠나?”
대신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상대국의 사신에게 공자라고 칭하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너무 놀라 이 부분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젊은 황제가 왜 자신과 대화를 나누려 하는지 생각했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외국 신하가 폐하를 대면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네. 아무 문제 없어.”
젊은 황제가 두 눈을 반짝였다.
“짐은 범 공자와 마주 보고 대화하면 아주 좋겠어. 짐이 범 공자의 《반한재 시집》을 읽을 때마다 태부 대인이 범 공자의 재능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거든. 오늘 국사는 모두 끝났으니 짐과 함께 산책하면서 황궁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건 어떤가?”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범한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북제 태부는 장묵한의 아들이 아닌가? 나 때문에 아비가 경국 황궁에서 창피를 당했는데 내 재능을 칭찬했다고?’
사신단이 정전을 나갈 때 임정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북제 대신들과 사신단이 정전을 나가자 안은 더욱 넓어 보였다.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소리나 멀리 궁녀들이 걸어 다니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모두 나가자 용상에 앉아 있던 젊은 황제는 긴장이 풀렸는지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헤벌쭉 웃으며 범한을 바라보다가 곧장 용상에서 뛰어 내려와 태감이 건네준 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았다. 그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범한의 어깨를 쳤다.
“가세, 남조의 시선에게 북제의 선궁을 보여 줄 테니.”
범한이 속으로 통곡하며 어린아이 같은 황제를 따라가려 할 때 그가 계속 주시하고 있던 주렴 뒤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 순간 북제 황제가 멈칫하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소자가 범 공자를 만난 기쁨에 예의 없이 굴었습니다. 모후께서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궁녀들이 살며시 주렴을 걷어 내자 구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귀부인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범한은 급히 고개를 숙여 주렴 안에서 나온 사람의 발끝을 바라봤다.
귀부인은 금실로 수놓은 비단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가 가장 놀랐던 점은 비단 신발을 따라 다른 발이 주렴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하에 북제 황태후와 함께 나란히 앉아 황제와 외국 사신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뒤에 따라 나온 사람은 헝겊신을 신고 있었다. 발목 부분에 흑백 띠가 둘려 있고 발꿈치 부분에는 꽃이 그려진 평범한 헝겊신이었다. 시골에서 새해에 자주 보는 헝겊신을 북제 황궁에서 보게 되니 이상했다.
난데없이 나온 헝겊신에 놀란 범한은 예의를 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경계하며 올려다본 곳에는 꽃무늬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해당타타가 서 있었다. 해당타타가 바로 황태후와 함께 주렴 안에 있던 사람이었다.
범한과 해당타타의 눈빛이 서로 마주치자 정전의 분위기가 경직되기 시작했다. 범한은 재빨리 눈길을 거둬들이고는 해당타타 옆에 서 있는 귀부인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소신 범한, 황태후를 뵙니다.”
그를 본 황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범한이란 경국 관리는 왜 이렇게 잘생긴 거야. 어쩐지 타타가 오늘 기어코 정전에 오려고 하더니 이유가 있었군. 설마 이놈한테 마음이 있는 건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뒤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의 여승이 돌아왔으니 범한 대인과 함께 궁궐을 다니시려면 여승도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황제는 해당타타와 같이 가고 싶지 않은 듯 난색을 보였지만 황태후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씁쓸히 웃었다.
“여승은 언제 상경에 돌아오셨소?”
차가운 눈빛으로 범한을 쏘아보고 있던 해당타타가 황제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폐하, 어젯밤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스승님께서 상경에 악한 사람이 너무 많아 걱정된다며 저를 황궁에 돌려보내셨습니다.”
그 말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악한 사람이 많다고? 분명 춘약을 사용한 나를 지칭하는 것이겠지.’
* * *
북제 황제를 따라 황궁을 구경하던 범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감탄했다. 황궁은 젊은 황제가 말했듯이 신선이 사는 ‘선궁’이라 할 만큼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전체적으로 색깔이 어두운 황궁 건물들 사이로 높고 푸른 나무가 뻗어 나와 있는 것이 마치 쌀쌀맞으면서도 세심한 여자가 누군가를 향해 부채를 흔들어 주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높이 솟은 푸른 나뭇가지들은 검은색 처마를 훔쳐보거나 청색 기와에 기대 기지개를 켜거나 땅에 피어 있는 꽃들을 깔보는 듯했다.
황궁의 검은색과 나무의 초록색이 어우러지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도 여러 층으로 된 궁들이 푸른 산을 따라 지어진 것이 특이했다.
세 사람은 태감들의 시중을 받으며 산 중간에 시냇물을 따라 이어진 긴 복도를 걸어 2층으로 올라갔다. 비로소 놀란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범한은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보면 볼수록 감탄스러웠다. 산세를 따라서 황궁을 지은 것은 전쟁이나 거주 목적에서 보면 바보 같은 선택이었지만, 긴 복도 옆으로 유유히 흐르는 시냇물과 사방으로 탁 트인 푸른 경치를 보니 오래전 사람들이 이곳을 황궁 장소로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웠다.
하지만 범한은 북제 사람이 아니었고 양옆에 아름다운 미인을 품고 풍경을 즐길 만한 신분도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옆에는 북제의 젊은 황제와 해당타타밖에 없었다.
황제는 소매가 넓은 검은색 외투에 허리에는 금실로 꾸며진 옥패를 찬 것이 고풍스러워 보였다. 그가 뒷짐을 지고 앞장서서 황궁 안을 안내했다.
범한은 쭈뼛대며 어색하게 황제를 따라가면서 이따금 옆에 있는 해당타타를 슬쩍 쳐다봤다. 그녀가 황궁 안에서는 자신을 공격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긴장되었다.
반면 해당타타는 범한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그를 만난 적도 없고, 춘약에 중독된 적도 없으며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다는 듯이.
범한도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젊은 황제가 지친 표정으로 평지에 있는 정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따라오던 태감들이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순식간에 정자를 깨끗하게 치우고는 불을 피운 뒤 찻잔을 가지고 왔다.
정자로 걸어가자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황제가 뒷짐을 지고 난간 옆에 서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간을 치니 차가운 산바람 불어와 꽃과 나무가 나부끼고, 목 놓아 부르는 노랫소리에 뜬구름이 흩어지네.”
듣고 있던 범한이 맞장구쳤다.
“좋은 문장입니다.”
황제가 몸을 돌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짐에게 이렇게 성의 없이 아첨한 사람은 범 공자가 처음이오.”
당황한 범한이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불안해할 것 없소.”
황제가 앉아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뒤 해당타타를 바라보고는 웃었다.
“오늘따라 여승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군. 이전에는 오라고 해도 응하지 않고 정원에서 채소만 가꾸지 않았는가. 이왕 이렇게 입궁했으니 마음 푹 놓고 풍경을 즐기도록 하게.”
그러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황궁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야.”
젊은 황제의 말에 무슨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지만 범한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가 앉으라는 표시를 하자 그가 앉아서 태감이 건네주는 차를 홀짝이며 마셨다. 젊은 황제가 무슨 심경의 변화로 자신에게 남으라고 한 것인지 궁금했다.
해당타타는 정자 밖 난간에 앉아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범 공자, 황궁의 경치가 어떠하오?”
범한이 긴장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황제가 오늘 여러 번 말한 화제가 아닌가?’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황궁이 산속에 지어져 있어 주변 나무들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특히 겹겹이 있는 처마가 산의 풍경과 어우러지는 것이 가장 특이했습니다. 산의 경치가 황궁의 위엄을 해치지 않고, 황궁의 화려함이 푸른 경치를 가리지 않는 것이 마치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을 이룬 것 같아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가?”
범한의 품평에 북제 황제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북제 황제와 해당타타가 동시에 의심쩍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황제가 내키는 대로 한 질문에 범한이 천인합일을 거론하자 두 사람 모두 놀란 것이다. 4대 종사 중 한 명인 고하 국사가 이끄는 일파는 천인합일을 중요시했지만 이것을 외부인에게 알린 적은 없었다. 그러니 범한이 풍경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레 천인합일을 말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타타가 밝게 빛나는 눈으로 범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그가 우연히 천인합일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황궁의 경치를 보고 알아챈 것인지 확인하려 하는 것 같았다.
오래전 철학 수업에서 지루하게 들었던 ‘천인합일’이란 말을 은연중에 꺼낸 범한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제와 해당타타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자 그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조심히 물었다.
“소신이 말실수한 것입니까?”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실수할 게 뭐가 있겠는가. 정말 시선이라 불릴 만한 사람일세. 아무 생각 없이 한 말도 이치에 맞으니 정말 대단해.”
황제가 부드럽게 웃으며 해당타타를 슬쩍 바라보았다.
“여승이 보기에 범 공자의 말이 어떠한가?”
해당타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풍경을 통해 이치를 설명하니 인재라 할 만합니다.”
이후 계속 한담을 나누면서 이 문제는 세 사람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난달에도 여기 정자에서 오랜 시간 머무른 적이 있었네. 울창한 나무들과 구름에 걸친 달을 구경하며 시냇물 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좋은지 세상의 근심도 모두 잊을 정도였지. 그런데 요즘은 이곳에 있어도 세상일을 잊지 못하니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 말에 해당타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는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북제의 군주십니다. 폐하에게 천하의 안위와 백성들의 행복이 달려 있는데 어찌 일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세상의 근심을 잊으려 하십니까. 지금 천하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백성의 근심을 자신의 근심으로 여기시는 것이 제왕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해당타타의 진지한 충고에 황제가 몸을 일으켜 공손히 말했다.
“일깨워 주니 고맙네.”
범한은 해당타타의 가르침에 황제가 진지한 모습으로 감사를 표하자 상당히 놀랐다.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해당타타가 실은 북제에서 상당히 존경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당타타의 견해가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눈빛에 조롱기가 묻어났다.
179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9등급 고수가 놓칠 리 없었다.
“범한 대인은 다른 견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다만 의외인 점은 해당타타가 적의나 비꼬는 말투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는 것이다. 북제는 치세에 관해 토론하는 문화가 발전되었기에 경국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데 관대했다.
잠시 고민하던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백성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움을 좇는 것은 제왕이나 신하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해당 낭자의 말처럼 폐하께서 밤낮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신다면, 자각심을 가지고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렇게 한다면 지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기력이 떨어지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소신은 세상의 근심을 계속 고민하기보다는 잊을 수 있을 때는 완전히 잊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설득력 있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그가 맨 처음 한 말이 너무 좋아서 뒤에 뭐라고 하는지는 듣지 않은 채 앞말만 여러 번 곱씹었다.
황제는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백성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움을 좇아야 한다니, 범 경의 말이야말로 진심 어린 충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할 만하군.”
주변을 지키고 있던 태감과 궁녀들은 황제의 말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남쪽에서 온 사신의 말에 황제가 기뻐하자 미소를 지으며 범한에게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범한도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남몰래 속으로 이 말의 원작자인 북송 시대 위인, 범중엄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젊은 황제가 범한을 범 경이라 칭한 걸 보면 그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분명했다. 황제는 원래 범한과 다른 주제에 관해 대화하며 풍경을 감상할 계획이었지만 황태후가 해당타타와 함께 가라고 말하면서 범한과 편하게 대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화제를 바꿔서 말한 것이었는데 범한이 이렇게 대답하니 더욱 흥미가 돋았다.
만족하는 얼굴로 웃던 황제가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 공자는 문예와 무예 모두 출중하니 정말 세상에 나오기 힘든 인재입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미소 짓자 옆에서 해당타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럼 범 공자께서는 천인의 도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범한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도가 사상처럼 두루뭉술한 현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가장 어려워하는 그로서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처해했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해당타타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범 공자가 보기에 짐이 그날 밤처럼 세상 근심을 모두 잊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같소?”
그러자 범한은 정자 주변을 둘러보더니 향로를 가리켰다.
“폐하, 저 향로를 옮기고 옆에 있는 시종들을 뒤로 물리신다면 그날 밤과 같은 기분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태감과 궁녀들에게 향로를 멀리 치운 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지시했다. 이후 시원한 산바람이 숲의 향기를 머금고 불어왔다.
두 눈을 감고 있던 황제의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비쳤다. 잠시 뒤 눈을 뜬 황제가 웃었다.
“맞소, 이런 기분이었지.”
범한도 웃으면서 설명했다.
“황궁에서 아무리 최고급 향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산에서 불어오는 향기와 비교할 수는 없지요.”
옆에서 해당타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범한의 말에 동의했다.
다시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범한은 마음속 의문이 갈수록 짙어졌다. 젊은 황제가 자신을 황궁에 남게 한 것은 분명 규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양국은 겉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뒤로는 서로를 무너뜨릴 수단을 고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왜 자신을 황궁에 머무르게 한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황제가 갑자기 탄식했다.
“짐이 공자를 황궁에 남으라고 한 이유를 아오?”
자신이 고민하던 것을 황제가 물어보자 범한은 놀랐다.
‘내 생각을 읽은 것인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 뿐인 건가.’
범한이 황제의 눈치를 보다가 공손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반한재 시집》이 좋아 남으라고 한 것은 핑계였소.”
그러고는 웃는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물론 경의 시를 정말 좋아하기는 하오. 담박서국에서 가격을 너무 비싸게 팔기에 나랏돈으로 범 경의 시집을 발행해서 각지 서원에 보낼 정도로 좋아한다오. 짐이 이렇게까지 경을 생각하는데 느끼는 바가 없소?”
한 나라의 군주가 젊은 시인의 명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나랏돈까지 사용했는데 어째서 당사자는 감동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똥 씹은 표정으로 느릿느릿하게 일어나 황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는 예의를 차리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욕을 했다.
‘이 세계는 해적판에 관한 자각심이 없다니까. 올해 북방 쪽 수입이 3할이나 줄어서 섭 대행수가 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심하고 있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하다니.’
해당타타가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담박서국은 범한 대인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범한 대인은 폐하께서 하신 일에 고마워하기보다는 원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급히 웃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를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놀란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 경은 시인이면서 장사도 하는 것이오?”
범한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소소하게 용돈 벌이를 하는 것뿐입니다.”
그 말에 해당타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천하에서 가장 큰 서점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범 공자에게는 용돈 벌이밖에는 안 되는 모양입니다.”
무도하강에서 범한과 해당타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황제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둘이 티격태격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승과 범 경은 남과 북을 대표하는 인물이지 않소. 그런데 왜 어린아이처럼 말싸움하는 것이오?”
해당타타도 자신이 평소 온화한 말투와는 다르게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설명했다.
“아마도 해당 낭자께서는 장사가 천한 직업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섭가로 인해 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났지만, 각 나라 황실은 여전히 상업을 경시했고 사람들도 장사를 천한 직업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범한의 짐작과는 다르게 해당타타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일에 귀천의 구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농업과 상업 모두 중요하지요.”
그 말에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황태후의 명으로 해당타타가 동행하면서 젊은 황제는 범한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답답한 마음에 황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황제의 심경을 눈치챈 범한이 해당타타에게 눈짓을 했다. 둘만 있을 수 있게 물러나라는 표시였지만 해당타타는 모르는지 계속 황제 옆에 머물렀다.
황제가 갑자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정자 옆으로 걸어가더니 발밑에 흐르는 시냇물을 보았다.
“범한, 대제국의 모습이 어떠하오?”
범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북제는 산수풍경이 아름답고 땅이 넓어 생산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편안하게 살면서 즐겁게 일하니 저로서는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황제가 갑자기 몸을 돌려 열일곱 살답지 않은 침착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럼 짐의 천하와 경국을 비교하면 어떻소?”
‘북제와 경국을 비교하라고?’
상당히 민감한 주제였다. 경국의 관리로서 자국을 낮게 평가할 수도 없었고 사신으로서 북제를 깎아내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꼭 태어나면서부터 답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당당하고 힘차게 말한 것이다. 그의 대답에 줄곧 평온한 표정을 짓던 해당타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황제도 잘 관리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입을 쩍 벌렸다.
범한이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말은 한마디였다.
“외국에서 온 신하는 알지 못합니다.”
이 말에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어쨌든 외국에서 온 신하이니 경국이 어떤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모른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범한을 꾸짖을 수는 없었다.
황제가 웃었다.
“태학의 학생들에게 시선이라 불리는 범 경의 강연을 들려주면 좋을 것 같소.”
범한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경도 태학에서도 강의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내가 어떻게 북쪽에서 강연을 할 수 있겠어.’
“범 경이 보기에 짐이 남벌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위엄을 드러내며 황제가 물었다. 이런 민감하면서도 황당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다만 적국의 사신에게 한 질문인 만큼 농담 섞인 질문이기도 했다. 이에 범한은 침착한 얼굴로 담담히 대답했다.
“조금의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북제는 현실에만 안주해 싸우려 하지 않는다면 위태로워질 것이고, 경국은 힘을 믿고 싸우길 좋아하면 위험해질 것입니다. 다행히 두 분 폐하 중 한 분은 강성해지려 노력하시고 다른 분은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려 하시니 양쪽의 균형이 갖춰지리라 생각됩니다.”
범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황제가 다시 물었다.
“경국의 황제는 어떤 사람인가? 두 통의 서신을 받기는 했지만 도통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범한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경국의 신하인 나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야? 이유가 뭐지?’
범한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북제 황제가 오히려 웃었다.
“자네 황제는 언젠가 늙을 것이고 짐은 언젠가 장성할 것이네. 나중에 내가 말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범 경을 나의 문학 시종 대신으로 삼을 거야.”
황제의 당돌한 말에 범한은 당당하면서도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폐하께서 손님으로 남쪽에 내려오신다면 소신이 시를 써서 축하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는 각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북제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경국의 영토를 장악하겠다는 의미였고, 반대로 범한은 북제 황제가 손님으로 남쪽을 방문하면 대접하겠다는 의미였다.
서로의 의견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와중에도 범한의 표정은 침착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젊은 황제는 분명 큰 포부를 가진 인물이었다. 다만 제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왕성한 혈기에 실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입을 통해 그의 생각을 경국 조정에 전달하려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북제 황제의 얼굴에 순간 근심하는 기색이 비쳤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손을 가볍게 저었다.
“상경은 항상 평온하지만 양국 사이에 여태까지 많은 오해가 있었기에 누군가가 범 경을 방해할까 걱정스럽네. 비록 그런 사람들이 범 경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도발하려 한다면 짐을 봐서 양해해 주게.”
범한은 화들짝 놀랐다. 황제가 한 말의 내용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젊은 황제의 말투 때문이었다.
‘황제의 체면을 봐서 뭘 양해해 달라는 거지?’
범한은 자신이 한 나라의 황제가 중요하게 생각할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젊은 황제가 자신을 중요시 생각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짐이 좀 피곤하니 범 경은 먼저 돌아가시게.”
젊은 황제가 난간을 가볍게 치며 고개를 돌려 줄곧 침묵하고 있던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범한 대인이 길을 잃지 않게 여승께서도 함께 가시오. 그리고 그동안 경국에서 온 사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면 여승이 혼내 주시오.”
해당타타의 말은 애국주의에 심취해 거칠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귀담아듣기 때문이었다.
해당타타가 두 손을 모아 절했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속으로 생각했다.
‘해당타타를 자꾸 만나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어.’
그때 황제가 갑자기 미소 띤 얼굴로 범한을 향해 말했다.
“범 공자가 더는 시를 짓지 않는다는 말들 듣고 굉장히 실망했소.”
범한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는 모름지기 마음의 언어인 법인데 요새 외국의 사신으로 나와 마음이 편치 않으니 쓰기가 어렵습니다.”
황제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처럼 멍청한 사람과 있으니 쓸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이겠지요.”
그 말에 범한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자 황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어제 황태후께서 짐에게 짧은 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게…… ‘모르는가? 모르는가? 푸른 잎만 짙어지고 붉은 꽃은 시들었을 거란 걸.’이란 구절이었지요. 범 경은 과연 좋은 재주를 타고났습니다.”
범한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는 해당타타를 슬쩍 보자 그녀는 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180화
정자에서 나온 범한은 해당타타를 따라서 아늑하고 좁은 산길을 내려왔다. 한편, 아무 말 없이 정자에 서 있는 젊은 황제의 얼굴에는 이미 대화하면서 보였던 흥분한 기색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두 눈을 감고는 두 번 깊이 숨을 들이켰다. 마치 그날 밤 홀로 달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느끼려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태감이 시중을 들기 위해 온 것을 알고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저으며 정자에 들어오는 걸 막았다. 그러고는 한동안 정자에 홀로 서서 무언가를 생각했다.
한참 뒤 그가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범한이란 사람이 저렇게 생긴 인물이었군. 리리도 도착했으려나.”
* * *
한편 범한은 긴장한 채 해당타타를 뒤따라가느라 산의 경치나 시원한 바람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저 얼굴 가득 거짓 미소를 띤 채 앞서가는 해당타타와 거리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그런 범한과는 다르게 해당타타는 위풍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요염하면서도 얌전한 걸음걸이라기보다는 농촌 분위기가 물씬 나는 그런 걸음걸이였다. 촌스러운 옷에 달린 호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상반신은 고정한 채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는 게 상당히 나태해 보였다. 그렇다고 목욕을 마치고 나온 미인에게 보이는 육감적인 나태함은 또 아니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해당타타의 걸음걸이를 바라봤다.
‘도대체 왜 저렇게 걷는 거지? 무슨 공법을 수행하고 있는 건가?’
범한은 속으로 탄복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다. 매일 어두운 시간에 수행하는 걸 담주에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길을 걸어가면서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과연 해당타타는 자신이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겨우 9등급 문턱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쉽게 9등급 절대 고수가 될 만했다. 본인의 능력으로 북제 사람들에게 하늘의 자손이라 칭송받는 그녀와 비교하면 자신은 뻔뻔하게 다른 사람의 문장을 빌려 ‘강호의 지위’를 얻은 셈이니 말이다. 더구나 자신은 그녀의 가벼운 공격에도 바닥을 뒹굴며 버거워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이 비겁하게 사용한 춘약에 중독된 뒤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런 점을 보면 절대 낮잡아 보거나 미워할 수 없는 상대였다.
‘이렇게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으면서도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오죽 아저씨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만이 상대할 수 있겠지.’
반면 해당타타는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엉덩이와 허리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바라보는 범한의 청순한 표정이 보였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 낯짝을 벗겨 안에 있는 음흉한 모습을 드러내게 하고 싶다는 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다른 생각 없이 순수한 의도로 바라보고 있던 범한은 상대방이 오해했다는 걸 눈치채고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낭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특이해서 혹시 무공을 수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세히 보고 있던 것뿐입니다.”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선에 범한도 놀랐지만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해당타타가 더 놀랐다. 그녀는 경국에서 온 청년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인생 대부분을 산속이나 황궁 안에서 지내면서 돌처럼 무덤덤해진 마음이 그의 앞에만 서면 흔들렸던 것이다. 얄미운 범한의 얼굴과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는 이유를 그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범한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수련하는 게 아닙니다.”
말을 하고 나서 해당타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내가 저놈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 거지?’
그러고는 약간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려서부터 걸음걸이가 이래서 황태후께서 여러 번 고치라고 말씀하셨는데 고치질 못했습니다. 눈에 거슬리시면 앞장서서 가셔도 좋습니다.”
자신의 예상과 다른 대답이 나오자 범한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마친 해당타타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자 그는 그녀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해당타타가 다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발을 땅에 끌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던 범한이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해당타타의 걸음걸이는 농촌에서 게으른 아낙네들이 걷는 걸음걸이와 완전 똑같았다.
9등급 절대 고수로 세상 사람들에게 선녀로 추앙받는 해당타타는 사실 뼛속까지 시골 처녀였다. 그래서 시골 논두렁을 걷듯이 황궁 안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범한은 고개를 젖히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해당타타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 예상한 범한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낭자의 걸음걸이가 보기 좋아서 그럽니다.”
그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해당타타의 눈이 분노로 번뜩였다. 그러자 당황한 범한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설명했다.
“정말입니다. 만약 거짓말이라면 천벌을 받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해당타타도 범한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실 사람들에게 놀림 받는 내 걸음걸이가 보기 좋다고?’
더구나 범한은 북해에서 자신에게 후안무치한 방법을 사용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믿음이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아무 말 없이 울창한 나무와 황궁 처마가 어우러진 길을 따라 걸어갔다. 해당타타가 북제에서 상당한 존중을 받는 건 확실했다. 길에 있던 태감과 궁녀들은 그녀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면 앞다투어 길을 터주고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지나갈 때까지 눈이 마주칠세라 고개도 들지 못했다.
“폐하께서 외국 사신을 이렇게까지 아껴 주시니 황송합니다.”
범한이 은근슬쩍 떠보자 해당타타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굳이 겸손하게 행동하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께서 워낙에 시를 좋아하시니 《반한재 시집》을 쓴 범한 대인을 반기시는 것이지요. 남경에서 돌아온 장묵한이 입궁해 폐하와 오랜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도 폐하의 입에서 여러 번 범한 대인의 이름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폐하께서 대인과 같은 인재가 북제에 나오지 않은 걸 무척 유감스러워하셨지요. 또 최근에는 양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범한 대인이 소은을 압송해 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안전을 걱정하셨습니다.”
해당타타의 말에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난 적도 없는 나에게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다라. 무엇보다도 황제의 미간에 수심이 담겨 있는 걸 보면 분명 나에게 알려 주고 싶은 일이 있었던 거야. 황궁에는 눈과 귀가 많다 보니 해당타타 앞에서는 말할 수 없었겠지. 도대체 무얼 알려 주고 싶어 한 걸까.’
“그렇군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해당타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대인께서 황궁의 풍경을 이야기하며 무의식적으로 천인합일을 언급하시는 걸 보고 저도 감탄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강연을 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저희 스승님께서 《반한재 시집》을 읽으신 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하시다 범한 대인을 칭찬하셨는데 그때도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대화를 나눠 보니 정말 명성에 맞는 실력을 갖추신 분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해당타타가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말하자 범한도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낮췄다.
“언빙운 공자의 일이 잘 끝날 수 있도록 낭자께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해당타타가 단칼에 거절하자 범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왜 홀로 북해를 넘어 소은을 죽이려 하신 겁니까? 소은의 죽음이 이번 협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걸 모르셨습니까?”
해당타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대인도 소은을 죽이려 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신 겁니까?”
“그건 소은이 가진 비밀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지요.”
범한이 땀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황궁의 경치를 바라봤다.
“제가 소은을 죽이려 한 것은 그가 가진 비밀이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커다란 나무 아래서 발걸음을 멈췄다. 머리 위 푸른 나뭇잎이 햇살을 가려 주니 시원했다. 해당타타의 평온한 양쪽 어깨를 바라보던 범한이 말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습니다.”
“소은이 살면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해당타타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몇 마디 말로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 범한을 바라보다가 해당타타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대인에게 부탁하고 싶으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이야기하자 범한은 잠시 고민하다 진지하게 물었다.
“해당 낭자께서 짐작하고 계신 바가 있습니까?”
“저도 알지 못합니다. 만약 그 일이 사리리와 관련 있다면 범한 대인께서 제게 알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범한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한 나라의 황제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정말 사리리 낭자와 관련된 일일까. 북제에 아는 사람도 없고 힘도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여전히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해당타타가 말했다.
“리리는 가여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범한 대인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순간 북제로 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 범한은 머리가 아득해지면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길을 걸었다. 푸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청색 장삼과 꽃무늬 무명옷에 알록달록한 무늬를 만들어 냈다.
그때 범한이 갑자기 발걸음을 빨리해서 해당타타와 나란히 걸어갔다. 해당타타는 옆으로 온 범한을 슬쩍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해당타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범한은 마음을 놓고 시골 처녀의 자세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먼저 턱을 살짝 올린 뒤 게으른 눈동자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장삼에는 주머니가 없으므로 손은 거들먹거리는 늙은 서생처럼 뒷짐을 지고 골반을 앞으로 내밀어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러고는 몸에서 힘을 풀고는 발을 땅에 질질 끌며 느릿느릿 걸었다.
해당타타가 옆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걸음걸이를 따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듯 범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함께 맥이 풀린 자세로 걸어갔다. 해당타타가 그의 뻔뻔스러운 모습에 뭐라 말할 기분이 나지 않는지 고개를 돌리며 그냥 걷자 범한은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했다.
시간은 이미 정오를 넘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바닥을 끄는 소리가 점차 하나로 합쳐지자 졸음이 몰려왔다.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느릿느릿하게 황궁 안을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밭일을 마친 아낙네가 낮잠을 자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해당타타의 콧등에 땀방울이 맺힌 모습이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지난번에 주신 해독제는 진피가 많이 들어갔는지 굉장히 쓰더군요.”
해당타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짜 해독약이었다는 사실을 해당타타가 알아챘을 거라 짐작한 범한이 웃었다.
“저는 감찰원 제사이지 하늘의 도를 따르는 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낭자께서도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정 그렇게 못마땅하시다면 낭자도 제게 그 약을…… 사용하시든지요.”
억울하면 자신에게도 춘약을 사용하라는 도발에 해당타타는 다른 여자들처럼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담담히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고 싶군요.”
당황한 범한이 비지땀을 흘리자 해당타타가 다시 말했다.
“감찰원 제사라면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경도에서 사람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한 것입니까?”
“어둠은 저에게 검은 눈을 주었지만 저는 그 눈을 통해 빛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재주는 있었지만 결국 비겁하고 멍청한 방법으로 자살한 구청(顧城)의 문장을 인용한 말이었다. 그 말에 해당타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게 범한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가 미소 지으며 계속 말했다.
“물론 어둠은 저에게 검은 눈을 주었지만 제게는 그 눈을…… 까뒤집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해당타타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대나무 울타리 안에서 생긋 웃는 시골 처녀처럼 순수하고 맑은 웃음이었다.
181화
황궁에서 나온 범한은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위와 왕계년을 만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북제 황제의 친위대인 어림군의 보호를 받으며 마차를 타고 별궁으로 돌아갔다. 별궁은 예상치 못한 소란에 시끌벅적한 모습이었다.
정문 앞으로 걸어가던 그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별궁 문 앞 공터에서 북제 관리와 시위들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물건을 줍고 있었고, 뒤에 커다란 마대가 놓여 있었다. 물건을 골라잡으며 뒤에 있는 마대에 던져 넣었는데 마대를 힘겹게 끄는 모습이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범한이 토끼 눈을 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왕계년에게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왕계년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공터에는 각양각색의 작은 검들이 버려져 있었다. 녹주석으로 장식된 검도 있었고, 예전 양식으로 만들었거나 최신 유행하는 양식으로 만든 검도 있었다. 물론 가장 많은 건 북제 사람들이 항상 차고 다니는 곡도였다.
범한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말했다.
“빨리 저 마대들을 뺏어 오세요. 우리가 머무르는 별궁 앞에 버렸으니 우리가 가져와야지요. 고철도 모아서 팔면 돈이 되는 법입니다.”
오늘 황궁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돌아온 그는 기분이 좋아 농담 삼아 범사철과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그러자 왕계년이 씁쓸히 웃었다.
“이런 농담까지 하시는 걸 보니 정말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범한도 씁쓸히 웃었다.
“정말 저 단검들을 다 주웠다가는 큰일 나겠지요?”
경도에서 수비대장의 딸 섭령아의 콧등을 때린 뒤로 범한은 이 세계 무예가들의 결전 규칙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바로 상대방이 자신의 발밑에 버린 칼을 줍는다면 그건 결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소란이 벌어진 겁니까?”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때 노심초사하며 별궁 문 앞을 서성이고 있던 임정과 임문이 범한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가 이번 협상 내용 일부를 노출하는 바람에 북제가 영토를 잃었다는 걸 알게 된 백성들이 굉장히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귀족 자제들이 별궁 문 앞까지 찾아와 남쪽 사람과 무예를 겨뤄 치욕을 씻겠다고 소란을 피운 것입니다.”
범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포로 교환과 영토 분할 내용은 북제 조정에서 절대 공개하지 않으려 한 내용인데 누가 폭로를 했다는 걸까.
‘이런 걸 보면 황궁 안에 있는 젊은 황제도 편하게 지내는 건 아닌가 보군.’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에 널려 있는 단검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저는 예부 관아에 다녀올 테니.”
그는 포로 교환이나 영토 분할, 국서 교환 등과 같은 일들은 담당하는 관리가 처리하도록 두더라도 언약해 문제만큼은 자신이 직접 하려고 했다.
“대인, 가시면 안 됩니다.”
임문과 임정은 뼛속까지 문신이라서 싸울 줄 몰랐다. 게다가 사신단에서 무예 솜씨가 가장 뛰어난 호위들은 항상 범한 곁을 지켰고, 각종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는 감찰원 고수들도 범 제사의 명령만 따랐다. 그래서 적국의 심장에서 날아오는 단검에 벌벌 떨던 두 사람은 범한마저 가버리면 북제 귀족 자제들이 소란을 피울까 봐 겁이 났다.
범한이 그런 두 사람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경국의 관리답게 체면을 지키십시오. 이만한 일로 약한 모습을 보여서 되겠습니까. 북제 조정에서 보낸 군대가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저들이 별궁 안으로 쳐들어오기야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범한의 눈빛에 기가 죽은 임문와 임정이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저 사람들은 범한 대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인께서 떠나 버리신다면 사람들이 겁쟁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순간 범한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사신단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어림군의 표정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호위 수장인 고달도 느꼈는지 차고 있던 칼자루를 단단히 쥐었다.
범한이 몸을 돌리니 다시 문 앞으로 다가오는 무리가 보였다. 범한이 앞으로 나오자 맨 앞에서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있던 귀족 자제도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범한이 손바닥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토실토실한 주먹을 인정사정없이 밀어냈다. 그는 천하에서 손꼽을 정도로 난폭한 정기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오죽의 가르침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그렇기에 갑자기 날아오는 주먹에도 당황하지 않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장풍을 쏘아 상대방의 주먹을 막을 수 있었다.
사실 그가 해당타타와 싸움을 주도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너무나도 강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범한의 무예 수준은 이미 동년배 중에서는 최상위에 속했다.
게다가 겁도 모르고 그에게 덤벼든 귀족 자제는 기껏해야 열 살 정도 되는 어린 소년이었다. 범한의 공격에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은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를 냈다. 소년은 약하게 생긴 범한이 이렇게 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을 넘어뜨린 범한을 노려보며 소년이 소리쳤다.
“남쪽 오랑캐가 미쳐서 날뛰는구나.”
별궁으로 돌아가려 했던 범한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웃으면서 돌아와 소년의 팔을 잡아 부축해 주려 했다. 소년의 옆에 있던 종이 긴장한 표정으로 범한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뭐라 말하려 했다.
바로 그때 관절이 분해되는 소리와 함께 비명과 분노에 찬 호통이 동시에 들렸다.
‘만약 내 어머님께서 그 말을 들었다면 너를 갈가리 찢어 죽이려 하셨을 거야.’
범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을 보았다. 경국 사신단 앞에서 소란을 부리는데도 북제 어림군이 막지 못한 걸 보면 분명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일 터.
그 소리에 소년을 따라온 종들이 몰려와 모시는 도련님이 축 처진 손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저놈이 우리 도련님의 손목을 부러뜨렸어!’
분에 받친 종들이 일어나 범한을 노려보며 뭐라 말하려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어림군이 급히 달려와 앞을 막아섰다. 이어서 남쪽 오랑캐 어쩌고 하는 상스러운 욕설이 계속 들려왔다.
범한이 임정을 잡고는 물었다.
“저놈은 어느 집 자제입니까?”
그러자 북제 관료 사회를 잘 알고 있는 임문이 끼어들었다.
“장안후 집안 자제입니다.”
그는 장안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자신과 주량을 겨뤘던 장영후가 떠올라 말했다.
“설마 황태후의 친동생입니까? 작년 전쟁에서 패배한 뒤 집에서 휴양하고 있다는 장영후의 동생 말입니다.”
임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안후는 작년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으로 권세를 잃은 뒤 올해 황태후의 명령으로 다시 중용되어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는 중입니다. 아마도 장안후 집안 자제가 상경 사람들이 사신단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걸 틈타 집안의 복수를 하려 한 모양입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군요.”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사신단이 머무르는 건물로 들어가려 했다.
“사람을 때리고 도망치려 하다니!”
뒤에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감히 우리 도련님을 때리다니 너희들이 정말 간덩이가 부었구나.”
어림군을 이끄는 수장이 상황을 통솔하고 있었기에 범한은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용히 떠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지 그는 몸을 돌려 북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공자가 갑자기 휘두르는 주먹을 막으려다 보니 세게 때린 것뿐이오. 이따가 저택으로 탕약값을 보내 줄 테니 그만 물러들 가시오.”
싸운 뒤에 탕약값을 배상해 주는 것은 귀족 자제들끼리 상황을 해결할 때 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범한은 경국의 정사이며 그가 때린 소년은 북제의 귀족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상대측에서 이 방법을 따를 리가 없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계단 밑에 서 있는 어림군 수장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위 통령, 설마 사신단과 북제 백성들이 싸우도록 해서 양국이 다시 전쟁을 치르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의 말을 들은 위 통령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상황이 악화하지는 않겠지만 범한이 북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라도 당한다면 자신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난 그가 서둘러 장안후의 집안사람들을 막았다. 이후 범한이 별궁 안으로 들어가자 대문을 굳게 잠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무지막지한 방법을 사용한 젊은 청년이 남쪽 사신단의 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범한의 조상까지 들먹이며 상스러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얼마 뒤 별궁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자 밖에서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온 사람이 범한이 아니자 범한을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문 앞에 선 왕계년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모으고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손에 들고 있던 벽돌과 몽둥이를 내려놓고는 그가 뭐라 말하는지 들을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 왕계년이 손짓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쳐라.”
그 말과 함께 뒤에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북제 사람들을 향해 돌진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위 통령이 놀라 뭐라 명령을 하려 하자 왕계년이 은근슬쩍 다가와 팔짱을 끼며 한가할 때 자신과 함께 유흥가에 가서 놀자고 말했다.
말문이 막힌 위 통령이 명령할 기회를 놓치자 어림군은 멍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남경 사신단을 안전하게 지키는 임무를 맡은 그들로서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남경 사신단을 보호해야 하는 건지 북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별궁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곳곳에서 돼지 멱따는 것 같은 비명과 함께 공중을 가르는 몽둥이 소리가 들렸다.
위 통령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왕 대인, 상황을 너무 악화시키는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겁니까?”
왕계년이 큰 소리로 일갈했다.
“사신단이 상경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북제 조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왕계년의 지시에 따라 돌진한 사람들은 비록 검은 차고 있지 않았지만 네 명의 호위와 감찰원 고수들로 북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범씨 집안 조상들을 욕한 건 상관없지만.”
범한이 고달과 함께 별궁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담주에 계시는 할머님과 어머님을 욕한 건 절대 참을 수 없어.”
일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은 범한이 손짓해 부하들을 불러들이자 어림군도 다시 문 앞의 질서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광경을 못마땅한 표정을 지켜보던 위 통령이 땅에 침을 뱉었다.
‘장안후 집안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굳이 집안 자제까지 나서서 결투를 신청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북위가 천하를 호령하던 건 예전이고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는데 경국을 건드려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이때 어떤 남자가 인파를 뚫고 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갑자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서는 주먹을 휘둘렀다.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걸 봐서는 무예 실력이 7, 8등급은 되어 보였다.
남자의 주먹은 단순했지만 상당히 빨랐다. 범 제사의 명령에 따라 돌아가고 있던 감찰원 관리들은 난데없는 공격에 재빨리 몸을 피하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 군대에서 온 고수지?’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만으로는 상대방의 무예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위풍당당한 기세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특히 군인 특유의 강인한 기세에 범한의 부하들조차도 슬금슬금 물러섰다.
장안후 가솔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해준 남자는 자리에 우뚝 서서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응당 자신에게도 몽둥이 세례가 쏟아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자 의심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던 중 돌계단 위에 서 있는 범한을 바라본 그가 소리쳤다.
“우리는 부대에서는 누가 나와도 6등급 이상의 고수가 온다. 콧대 높은 남경 사신아, 한번 붙어 보자!”
범한이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외국에 방문한 사신은 국가의 위세를 더럽히지 않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오. 군대에 소속된 분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오?”
땅을 구르며 곡소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 남자가 인상을 썼다.
“그럼 어린아이가 무례하게 굴었다고 집안의 종들까지 무지막지로 폭행하는 건 옳은 일이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대인은 조상과 가족을 모욕해도 참을 수 있소?”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아는 위 통령은 존경 어린 표정으로 다가가 말했다.
“담 장군께서 여긴 왜 오셨습니까?”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그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하관은 위무기라고 합니다.”
182화
담 장군의 본명은 담무로 대장군 상삼호의 유능한 부하였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북방 설원에서 오랑캐와 싸우던 그는 작년 상삼호 대장군을 따라 수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상경에서는 아무런 직책 없이 한가롭게 쉬면서 가끔 군대 점호를 감독할 뿐이었다. 그래서 무료함에 오늘은 길을 걷다가 우연히 경국의 사신들이 머무르는 별궁 앞에서의 소란을 보게 된 것이었다.
담무는 위 통령을 힐끔 보고는 무심하게 물었다.
“어째서 경국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게 그냥 두는 것이오?”
위무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신단의 안전을 지키는 일은 황궁에서 내린 엄명이고 국가의 일과 관련된 사항인데 제가 어찌 태만할 수 있겠습니까.”
담무는 북제가 전쟁에서 연패하는 와중에도 자신과 상삼호에게 출전할 기회가 오지 않는 게 아쉬웠었다. 그런데 경국 사람들에게 북제 사람들이 맞자 더욱 화가 치솟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돌계단 위에 있는 범한을 바라보고는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혹시 경국 정사인 범한 대인이십니까?”
범한도 공손히 손을 모아 인사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담무는 표정이 굳더니 당당하게 소리쳤다.
“북제 담무, 범한 대인에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범한은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관직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민간의 결투 법칙에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담 대인, 본관은 이미 마대 두 포대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결투를 하려면 차례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기회가 되었으니 당장 범한 대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응하지 않자 담무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저도 범한 대인이 시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탁월한 실력을 갖추신 걸 알고 있습니다. 설마 작년에 혼자서 정거수를 쓰러뜨리셨다고 저 같은 사람은 눈에 차지 않으신 겁니까?”
정의감에 불타는 담무를 바라보던 범한이 웃었다.
“소신이 사신단의 대표이고 대인의 방금 행동이 문제가 되는 건 맞지만, 그래도 대인을 무시할 마음은 없습니다. 오랜 시간 북방 설원에서 오랑캐들과 싸우신 분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성격의 담무는 범한의 온화한 말에 약간은 화를 누그러뜨리면서도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이 한숨을 쉬며 뒤에 있는 고달에게 조용히 말했다.
“살짝 상대해 주게.”
고달이 등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땅에 던진 뒤 돌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북제에서 용맹하기로 유명한 담무도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대결할 자세를 취했다.
고달에게서 위협적인 기운이 느껴지자 담무는 속으로 상당한 고수일 거라 짐작했다.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먹을 쥐고 고달을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두 힘이 맞붙은 충격으로 먼지가 일었다.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자 오른쪽 가슴을 맞아 입가에 피가 고인 고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고달의 오른손은 이미 담무의 목을 쥐고 있었다. 오랜 수련으로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목 부분의 살점을 찢자 공포를 모르던 담무도 순간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고달이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오른손을 풀었다.
담무가 이름 모를 고수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사신단으로 온 사람에게 일격에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고달의 가슴을 공격하면서도 그의 손이 자신의 목을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상대방이 봐주지 않았다면 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담무도 만약 목숨을 걸고 싸웠다면 고달에게 공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고달과 범한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해 패배를 인정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단 한 번의 결투였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 * *
마차가 상경 도로를 따라 예부를 향해 나아가자 경국 사신단에게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어림군 병사들이 마차 주변을 빼곡히 둘러쌌다. 마차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던 범한이 옆에 있는 고달에게 물었다.
“담무의 공격을 막지 않은 이유가 뭔가?”
고달이 마른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상대방이 군인인 만큼 저의 실력을 모두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범한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더구나 도련님께서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하시는데 제가 어찌 함부로 다룰 수 있겠습니까.”
호위는 경국 황제의 비밀 조직이었지만 사남 백작 범건 밑에서 오랜 시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을 따라온 호위들을 등자경처럼 친절하면서도 엄하게 대했다. 그가 매서운 눈초리로 고달을 바라보았다.
“담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친하게 지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천하에 뛰어난 인재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용맹한 것 빼고는 내세울 거 없는 담무 같은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한 건가?”
범한이 쏘아붙이자 당황한 고달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명문가 자제들은 고수들과 사귀는 걸 좋아하지 않나? 내가 잘못한 건가?’
범한이 품에서 환약을 하나 꺼내더니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고달에게 쥐여 줬다.
그 모습을 본 왕계년이 물었다.
“진피로 만든 환약입니까?”
“이건 상처를 회복시키는 환약입니다.”
환약을 받은 고달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살짝만 상대해 주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범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목을 조른 게 살짝 상대한 건가?”
고달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고민하던 왕계년이 말했다.
“누가 장안후의 아들을 나서게 만든 걸까요? 상경에 있는 사람들이 전해 온 정보를 종합해 보면 북제 황제는 이번 협상이 이행되기를 바라고 제사 대인에게도 호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신단의 안전을 위해 어림군을 보낸 것이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게 이상합니다.”
손가락으로 마차 창살을 가볍게 두드리던 범한이 밖에 있는 북제 병사들을 의식하며 조용히 말했다.
“저도 양국의 협상이 누설된 것에 마음이 쓰입니다. 젊은 황제가 권력을 확고하게 다지지 못해서 그런데 북제는 경국보다 상황이 어수선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이 우리가 맡은 임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는 오늘 비교적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새벽에 입궁해서 황제와 함께 대화를 나눠야 했고 해당타타와 함께 황궁에서 나오고 나서는 별궁 앞에서 생긴 소란을 수습해야 했다. 북제에서 머무는 첫날부터 너무 바빠서 제대로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그가 오늘 하루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황제가 준 차 한 잔이 전부였다.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생을 타고난 팔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오늘 이렇게 피곤한 이유는 되도록 빨리 언빙운을 북제 감옥에서 꺼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배불리 먹고 쉬는 건 그다음 문제였다.
북제 상경에서 경국 사신단이 거쳐야 할 과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관례상 범한과 같은 신분의 사람이 상경에서 돌아다니려면 해당 관계자가 동행해야 했다. 하지만 범한은 이런 관례가 너무나도 귀찮고 신경 쓰였다. 이미 상주해 있는 관리가 협상을 시작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북제 황실의 허락을 받아 예부를 방문하려 했다.
비밀 협상에서 소은, 사리리를 북제에 넘기는 것은 경국이 큰 손해를 감수하고 결정한 일이었으므로 범한은 최대한 빨리 관련자를 만나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명의상 예부 소의랑이자 진정한 북제 금의위 부초무사가 숨어 만나려 하지 않았다.
북제 측에서 며칠 시간을 끌려고 하자 화가 난 범한은 다른 관리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예부 대문을 나왔다. 그렇게 예부를 나서는데 급히 홍려사에 다녀온 임정이 범한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네 사람이 다시 마차에 오르자 임정이 입을 열었다.
“위화 소경도 황궁에서 나온 뒤로 사라져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북제 사람들이 며칠 시간을 끌려고 하니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게 미뤄서 좋은 점이 뭐란 말입니까?”
왕계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범한이 근심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빙운 공자를 당장 꺼내 와야 합니다.”
“어떻게요?”
“위화 소경의 집으로 갑시다.”
“장영후의 저택에 간다는 말씀입니까?”
임정이 화들짝 놀라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외국 사신인 저희가 황태후 친동생의 집에 찾아가는 건 법률에도 그렇고 관례상에도 맞지 않습니다. 혹여 갈등이 생긴다면 수습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범한이 상관없다는 듯 초연한 웃음을 지었다.
“북제 황제 편에 서 있는 어사가 내일 조회 때 장영후가 외국 사신과 내통했다고 말하면 가장 좋겠군요.”
마차가 예부 관아를 떠나자 호위하는 어림군 말고도 멀리서 행인으로 위장한 밀정이 따라왔다. 왕계년이 마차 안에서 멀리 있는 사람을 보며 조용히 범한에게 말했다.
“제사 대인, 분명 금의위 사람이 미행하는 걸 겁니다.”
“어림군과 함께 가고 있는데도 우리가 길을 잃을까 걱정되나 봅니다? 아무튼 저들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요 며칠 동안은 북제에 있는 감찰원 밀정들과 연락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굳이 연락해서 밀정들을 위험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한편 조정의 지시에 따라 사신단을 감시하던 북제 밀정들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부에서 떠난 사신단이 돌연 상경에서 가장 번화한 수수 거리로 향했기 때문이다. 수수 거리는 유리 가공품과 같은 최고급 사치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일반 백성들은 가까이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몰래 사신단을 따라가던 밀정 중 한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했다.
“남쪽 오랑캐들이 수수 거리에 가는 이유가 뭐지?”
그러자 옆에 있는 부하가 대답했다.
“외국에 나왔으니 좋은 물건을 사서 돌아가고 싶겠지요. 남쪽 오랑캐들은 돈도 많으니 유리잔이라도 사서 돌아가야 집안에서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바보 같은 놈!”
가장 앞장서서 가고 있던 밀정이 버럭 화를 냈다.
“천하의 유리는 모두 경도에서 나오고 있어. 그런데 굳이 상경에서 살 필요가 있겠느냐.”
* * *
한적한 수수 거리를 걸어 다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배가 볼록 나오고 여자들은 머리에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모두 은전을 두둑이 가지고 있는 부자들이었다. 거리에 상점들도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어 정돈된 모습이었다.
가게에는 옻칠한 뒤에 금색 글자를 쓴 현판들이 세로로 걸려 있었는데 그중에는 이미 색이 바랜 것들도 있었다. 상인들이 오래된 현판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찍힌 낙관 때문이었다. 낙관에는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이름, 심지어는 수백 년 전에 명성을 떨쳤던 인물의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글자색이 바래도 가치를 아는 상인들은 현판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상점들은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다만 수수 거리에서 가장 중앙에 있는 가게 일곱 곳은 다른 곳과는 달랐다. 다른 곳과 다르게 가로로 걸린 현판은 비록 새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다른 현판들과 비교하면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가게들은 유리 제품을 팔거나 비누, 향수, 면직물, 술 등을 팔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특이한 가게는 장난감을 전문으로 파는 곳이었다.
어림군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가 수수 거리 입구에 멈췄지만 콧대 높은 상인들은 아무도 손님을 맞이하러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마차에서 내린 네 사람이 수수 거리로 들어가더니 면직물을 파는 상점 입구에 멈춰 섰다. 네 명 중 가장 수려하게 생긴 청년이 면직물이 사치품인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가게로 들어서자 상인이 처음 보는 손님들에게 설명했다.
“목화를 심어 면직물을 만드는 방법은 수백 년 전 왕씨 성을 가진 천재가 개발했는데, 이후 점차 기술이 소실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20년 전에 천부적인 재주가 있으신 저희 주인께서 다시 이 방법을 복원해 내셨습니다. 면직물은 비단보다 따뜻하고 가격도 저렴합니다. 게다가 저희가 파는 제품은 품질이 아주 좋아서 경국 경도에서 파는 제품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자 수려하게 생긴 청년이 흥미를 느끼며 말했다.
“한 치 정도 주시게.”
청년이 경국 억양으로 말하자 상인은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보니 같은 고향 사람이군요. 경국 사람이 북제에 와서 면직물을 사는 일도 있습니까? 더구나 다른 사람들은 한 묶음씩 사는 걸 한 치 정도만 달라고 하십니까?”
청년이 웃으며 사과한 뒤 가게를 나갔다. 그러고는 상점에 가로로 걸린 글자를 보았다.
“글씨가 정말 형편없군.”
그 말을 들은 상인은 불같이 화를 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주인께서 직접 쓰신 글씨를 험담하다니 당장 꺼지십시오!”
청년이 다시 웃으며 부하 세 명과 함께 옆 가게로 갔다. 수려하게 생긴 청년은 바로 범한이었고, 그가 형편없다고 말한 글씨는 오래전 자신의 어머니가 남긴 필적이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편지의 필적과 똑같이 정말 악필이었다.
183화
범한은 이곳에 경국 황실에서 운영하는 상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오래전에 섭가의 재산이었던 곳이다. 팔고 있는 물건들만 보아도 당시 어머니가 귀족들을 상대로 상당히 많은 은전을 벌어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수 거리를 걸으면서 어머니의 글씨가 적힌 현판을 보자 범한은 마음이 울적해져 구경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대인, 장영후 저택에 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임정이 옆에서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순간 정신이 든 범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 선물을 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팔을 걷어붙이고 가장 큰 유리 상점으로 들어섰다. 가게에는 각양각색의 유리로 만든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술잔이나 양쪽에 귀 모양 손잡이가 있는 술병 그리고 투명한 주전자 등 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외에도 다양한 생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그중에는 유리로 만든 작은 상자나 바둑 도구, 심지어 맑고 투명한 등잔도 있었다.
수정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 제품들을 보던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자부심이 생겼다. 이 세계에서 유유자적 살던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남긴 물건들을 보니 감탄스러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미 모두 다 해놨는데 내가 할 게 뭐가 있겠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동향 사람인 걸 엿들어서 아는 상인이 해맑게 웃었다.
“제가 장사를 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경국 사람이 상경에서 유리를 사는 건 손해 보는 겁니다.”
상인의 솔직한 말에 범한이 실실 웃었다.
“나도 상경이 경국보다 비싸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러고 보니 북제 황궁에 유리가 굉장히 많이 쓰인 걸 보면 여기 사람들은 가격이 비싸도 신경 쓰지 않나 보네?”
그러자 사장이 눈썹을 씰룩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천하에서 가장 멍청한 손님이 누군 줄 아십니까? 바로 황제입니다. 심지어 예전에 우리 주인께서는 북제 황궁을 상대로 천하 거상들도 기겁할 정도의 거금을 벌어들이셨다고 합니다.”
범한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담력도 좋군. 북제에서 장사하면서 그런 말을 했다가 관리들이 잡아가면 어쩌려고 그러나?”
“무서울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 경국이 천하에서 제일 강한데. 덕분에 저희 상인들도 어디 가서 무시받거나 하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겁이 난 듯 상인은 더듬거리며 살며시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손님이 어쩌고 한 말은…… 실은 제가 한 말은 아니고 저희 스승께서 예전에 주인께 들었던 말입니다.”
범한이 웃으며 물었다.
“스승은 몇 번째 섭 대행수인가?”
화들짝 놀란 상인은 고개를 들어 범한을 자세히 바라봤다. 젊은 청년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자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임정이 옆에서 웃으며 설명했다.
“이분은 이번 사신단의 정사이신 범한 대인이네. 설마 멀리 북방에 있다고 해서 범한 대인이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유리 가게 사장이 대경실색했다.
‘범한 대인이라고? 몇 년 뒤에 황실 금고를 물려받을 범한 대인이라고?!’
그러고는 재빨리 앞섶을 들추며 주저앉더니 범한을 향해 엎드려 절했다.
범한이 급히 일으키려 하자 상인은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절했다. 몇 번이나 범한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상인이 감격한 표정으로 일어나 말했다.
“미래의 주인이 사신단의 정사로 이렇게 오셨는데 어찌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있는 탓에 평소에 고향을 향해 절을 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문득 자신이 경국 사람 앞에서 금기시되는 말을 했다는 생각에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 대인께서는 무슨 일로 여기 오신 겁니까?”
북제는 경국 황제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기에 이곳에 있는 상인들은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오래된 현판을 사용하며 서슴없이 이전 주인인 섭경미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범한도 그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상인은 자신이 한 말이 경도에 들어가서 황실의 미움을 받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범한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인가?”
범한이 사신으로 온 김에 나중에 물려받을 상점을 조사하러 왔을 뿐 정말 물건을 사러 온 건 아니라고 생각한 상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임정이 상황을 설명하자 상인은 급히 종을 부르더니 당장 창고에 있는 최고급 상품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범한은 상인과 대화를 나눴다. 그가 뭘 알고 싶어 하는지 아는 상인이 몇 년 동안 경국에서 북제로 들여온 유리 제품의 수량을 보고했다.
대략적인 수량임에도 범한은 속으로 놀랐다. 상경에 하나밖에 없는 유리 상점에서 팔리는 수량이 어마어마했다. 아마도 북제의 생산물이 풍부하다 보니 경제력이 경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던 사장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요 몇 년 동안은 무슨 이유인지 경도에서 보내오는 상품들이 질이 좋지 못한 데다가 새로울 것도 없어서 장사가 잘되지 않습니다.”
“가장 좋았을 때와 차이가 얼마나 나는가?”
“3할 정도 차이가 납니다.”
범한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섭가가 황실 금고로 들어간 뒤 장 공주가 모든 권한을 쥐게 된 게 문제였다. 그 미친 여자는 정치적 지혜와 수완은 대단했지만 유리나 비누를 만드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유리의 질이 나빠지는 것은 분명 원료 배합이나 제조 공정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금 경여당 섭 대행수들이 직접 관리하지 못하는 이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수익이 3할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경영 방식의 문제였다. 장 공주는 황실 상점들이 경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고 이전의 방식대로만 운영했다. 가장 안정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이렇게 옛날 방식만을 고수한다면 발전할 수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종들이 가게에서 가장 진귀한 유리 술잔을 들고 왔다. 범한이 가게 밖 햇빛에 비춰 보니 유리에 아무런 이물질도 없는 게 경도 유리창보다 더 품질이 좋아 보였다.
“아주 좋군.”
범한의 말에 사장은 종에게 포장하라고 이르면서도 안색이 약간 어두웠다. 눈치 빠른 범한이 그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주인장은 성이 어떻게 되나?”
“저는 여씨입니다.”
사장이 급히 대답했다.
‘경여당 제자 중에 여씨도 있나.’
범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여 사장께서는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건가?”
그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범한 대인, 사실 이 술잔은 월말 황태후의 생일 때 쓰려고 준비해 둔 것입니다.”
범한이 놀라 말했다.
“북제 집권자들이 자네에게 황실 생일 선물도 제작을 의뢰하는가? 그런 거면 다른 걸 보여 주시게나.”
그가 이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여 사장은 급히 해명했다.
“북제 집권자들은 저희 가게에 좋은 물건이 많다는 걸 알고 있기에 따로 주문하지는 않습니다. 또 보여 드린 유리 술잔이 가장 비싼 물건도 아닙니다. 다만 황실 금고가 정한 규칙이 너무 엄하다 보니 대인께서 물건을 가져가시면 월말에 남쪽에서 정산할 때 금액이 많이 모자라게 돼서…….”
여 사장이 걱정하는 게 뭔지 이해한 범한이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돈을 내고 갈 테니.”
왕계년도 옆에서 같이 웃으며 타박하듯 말했다.
“황실 금고에서 장부를 조사하러 올까 무섭다고? 자네 바로 앞에 계신 분이 미래에 황실 금고의 주인 되실 분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여 사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쭈뼛대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범한 대인이 나중에 황실 금고를 차지할 분이라는 건 알지만, 문제는 지금 황실 금고를 관리하며 천하에 흩어진 몇천 개의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은…… 범한 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이지.’
여 사장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범한이 차고 있던 돈주머니를 치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북제 사신으로 오면서 돈을 가져오지 않았구먼.”
사신단 정사 신분으로 북제에 오다 보니 개인 돈을 많이 준비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여 사장이 땀을 닦으며 한 가지 생각을 내놓았다.
“대인, 공무에 필요하신 거라면 공금으로 보고할 수 있습니다. 대인께서 써주신 명세서를 제가 경도에 보내면 해결될 것입니다.”
“그래, 좋은 방법이군.”
범한이 말하자 여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 먹과 벼루를 준비했다. 이곳에 와서 명세서를 쓰는 사신단이 많은 것 같았다. 그가 종이 위에 쓱쓱 글을 쓰자 여 사장이 조심스럽게 은전 액수를 적었다. 마지막으로 범한이 서명을 하려다가 머뭇거리며 왕계년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감찰원에 돈이 있습니까?”
왕계년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감찰원 재정 중 삼 분의 일은 폐하께서 관리하시고 삼 분의 이는 호부에서 관리하는데, 대인의 부친께서 어찌나 꼼꼼하신지 요새 재정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범한은 고개를 돌려 고달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니 돈을 많이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시선을 느낀 고달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련님, 어르신께서 호위 재정 역시 깐깐하게 관리하십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임정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홍려사 명의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임정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홍려사가 뒤집어써야 하는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공무 자금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임정도 아쉬울 건 없었다.
“황실 금고든 개인 금고든 국고만 한 게 없지요.”
이 말은 장 공주가 관리하는 황실 금고의 돈이든 사남 백작 범건이 관리하는 호부의 돈이든 모두 경국 금고로 흘러 들어간다는 소리였다.
사신단 정사인 범한과 부사인 임정은 각각 서명한 뒤 2,200냥이란 금액을 확인하고는 유리 가게에서 나왔다.
따라온 종이 없는 데다가 범한이 상품을 어디에 쓸지 말하지 않았기에 여 사장은 가게 종들에게 유리 술잔을 들고 따라가라고 분부했다.
이어서 범한은 장난감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을 쓱 본 뒤 술을 파는 가게로 갔다. 그가 오기 전부터 고향에서 온 고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주인이 문 앞까지 나와 공손히 맞이했다.
의자에 앉아 가게 안을 둘러보던 범한은 이곳에서도 술을 담는 주기를 판다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자신이 ‘구입’한 유리 술잔보다는 품질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앞에 있는 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서 가장 좋은 술은 뭔가?”
성씨인 사장이 어디선가 투명한 호리병을 꺼내 왔다. 안에 담긴 술은 사람을 매혹하는 붉은색으로 색깔이 진하면서도 탁하지는 않았다.
범한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포도주인가?”
“과연 범한 대인께서는 술과 시의 신선이라 불릴 만하십니다. 아주 맛 좋은 포도주입니다.”
일찌감치 사신단 사람들이 누군지 들어 알고 있는 성 사장이 아첨하는 눈빛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잔을 가져와 따라 주자 범한이 눈을 감고 잔을 살짝 흔들어 냄새를 맡았다. 그 모습에 과거 도둑질을 하며 호화롭게 생활했던 왕계년뿐만 아니라 임정과 성 사장 모두 속으로 과연 명문가 자제답다고 감탄했다.
하지만 사실 범한은 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할 뿐이었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이거보다 더 강한 술을 가져와 보게.”
그의 말에 성 사장은 재빨리 다른 술을 내왔다. 범한이 살짝 맛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도 자신이 평소 마시던 술과 별반 차이가 없는 데다가 도수도 너무 낮았다. 담주에 있을 때 오죽이 자신에게 줬던 고량주나 공물로 진상하는 술인 공주만도 못했다.
범한의 표정을 본 성 사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쪽은 독한 술을 금지하고 있어서 그러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범한은 사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돈으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은 없었고 이건 북제 귀족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난처해진 사장이 다시 더 좋은 술을 내놓았지만 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눈치를 보던 성 사장은 다시 두 병의 술을 꺼내더니 작은 잔에 따라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한 모금 마신 범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술맛이 좋지 않아 그런다고 생각한 왕계년은 급히 물었다.
“대인, 왜 그러십니까?”
범한이 쓰읍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켜자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던 목구멍에 기분 좋은 자극이 일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좋아! 아주 좋은 술이야. 이건 이름이 뭔가?”
성 사장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오량액입니다.”
범한이 침착한 표정으로 술을 살펴보았다.
“좋은 이름이군,”
그러고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은 정말 풍류를 아시는 분이었군.’
볼일을 끝낸 일행이 가게를 나서려 하자 성 사장이 범한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궁금한 마음에 그가 세 사람을 먼저 보낸 뒤 성 사장을 따라서 뒤편에 있는 장부를 정리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방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성 사장이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은 범한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절했다.
“황실의 금고 성회인, 어르신을 뵙니다.”
184화
예상하였다는 듯 범한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수수 거리에 온 진짜 이유는 북쪽에 있는 황실 상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성 사장이 자신을 향해 어르신이라 말했을 때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황실 금고를 현재 장 공주가 관리하는 이상 그녀의 측근도 북제에 매복해 있을 터.
왜인지 모르겠지만 범한은 장 공주가 먼저 자신에게 사람을 보낼 거라 생각했다. 이건 직감이자 경국 사람의 성향을 고려한 추측이었다. 경국 사람들은 똑똑하든 멍청하든 편집적인 자신감과 거만함을 가지고 있었다.
장 공주가 소은을 놓아준 것은 분명 어떠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고 이것이 신묘의 비밀과 관련 없는 것이라면 분명 한가롭게 상경에 머무는 상삼호와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소은이 상삼호가 아닌 북제 황실의 손에 넘어간 이상 장 공주는 그를 꺼내기 위해 사신단의 정사이자 딸의 사위인 범한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을 터.
범한은 성회인이란 사람이 자신을 직접 부른 걸 보면 장 공주의 심복 중 심복일 거라 생각했다. 그가 성화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나에게 전해 줄 말이 무엇인가?”
성회인이 아무 말 없이 편지 한 통을 그에게 건넸다.
* * *
마차 안에서 범한이 소매 안에 있던 편지를 꺼냈다. 아직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 편지가 가진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최고의 추적자인 왕계년과 상당한 무예 실력을 가진 고달이 있었지만 상황을 판단하고 정보를 분석할 사람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의 머릿속으로 춘시에서 자신이 거둔 서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관리는 될 수 있을지라도 음모를 꾸미고 적의 생각을 간파해 내는 능력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범한의 머릿속에 순간 언빙운이 떠올랐다. 만약 언빙운을 빨리 구해 올 수만 있다면 앞으로 계획을 세우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이때 왕계년이 얇은 종이를 그에게 건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든 범한이 자세히 살펴보자 놀랍게도 5백 냥짜리 지폐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뭡니까?”
“유리 가게 여 사장이 준 수수료입니다.”
“명세서를 쓰는 데도 수수료를 주다니…… 대인과 고달이 나눠 가지십시오. 아, 호위들에게도 좀 남겨 주고요.”
은전 5백 냥은 상당한 금액이었지만 범한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백작가처럼 상당한 재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임정이 옆에서 웃었다.
“돈을 돌 보듯 하시니 감탄스럽습니다.”
범한은 임정이 청렴함이 아니라 사남 백작가의 재력에 감탄한 걸 알고 있었기에 같이 웃으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마차는 아름다운 거리를 지나 장영후의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경국 경도성 남쪽 지역과 유사했다. 담 너머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가 봄바람에 흔들렸고 나뭇잎이 햇살을 막아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범한이 마차 옆에 서서 거리와 호화로운 저택 문 옆에 있는 돌사자를 바라봤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맨 처음 담주에서 경도로 왔을 때가 생각났다.
마차가 어림군의 호위를 받으며 장영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주변은 고요했지만 분명 사람들이 그늘 속에 숨어서 훔쳐보고 있을 것이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는 마차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주인에게 보고하러 쏜살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자 문지기들의 눈은 더 휘둥그레졌다. 복식을 보니 경국에서 온 사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신이 다른 나라 대신의 집에 찾아오는 일도 있단 말인가. 미리 정해진 일이었으면 어르신이 준비하라고 지시하셨을 텐데…… 사신이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법도 있나.’
사신단은 오늘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장영후의 집에 온 게 아니었다. 더구나 범한은 북제 홍려사에서 보낸 관리도 따돌리고 온 상황이기에 같이 온 북제 사람으로는 호위를 책임지는 위 통령이 전부였다. 범한을 비롯한 네 사람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위 통령이 급히 앞을 막았다.
“범한 대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신은 조정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대신과 만날 수 없습니다. 범한 대인이 장영후 대인과 교분이 두텁다 하더라도 이렇게 들어가셔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러다가 장영후 대인께서 화를 입으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장영후는 황태후의 친동생이니 화를 입을 리 없잖아. 더구나 화를 입으면 더 좋지. 그의 아들이 오늘 종일 나를 피해 다녔는데 본때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범한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늘 새벽 황궁에서 폐하께서 괜찮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북제 황제가 거론되자 위 통령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범한 일행이 저택에 들어서자 문지기가 인사하며 예의에 맞게 일행을 안내했다. 살갑게 일행을 맞이하는 문지기의 모습에 범한은 속으로 명문가답게 질서가 잘 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남쪽에서 술친구가 왔다고 전해 주게.”
지난 1년 동안 관리들과 술자리를 하면서 상당한 경험을 쌓은 범한이 자신 있게 말하자 문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작년에 어르신이 경국에 사신으로 가셨을 때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고 들었는데 설마 저 젊은 사신과 마셨던 건가?’
하지만 외국 사신을 저택에 들이는 건 상당히 큰일이었기에 문지기는 섣불리 알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때 누군가가 살며시 걸어 들어오더니 범한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어르신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이렇게 쉽게 들어갈 거라고는 범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거실에 들어선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를 보고는 크게 웃으며 반갑게 포옹했다.
“1년 동안 풍채가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사실 작년 경도에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던 데다가 마지막으로 만난 연회 자리에서는 둘 다 고주망태가 돼서 서로에 대한 인상이 별로 없었다.
범한이 살갑게 인사하자 장영후는 어색한 듯 헛기침을 했다. 사실 황태후의 동생을 이렇게 서슴없이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못 본 사이에 범한 대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셨더군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오늘 새벽 입궁해 폐하를 뵈었는데 아는 분이 한 분도 없지 뭡니까. 그래서 후작 어르신이 생각나서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장영후의 얼굴은 부어 있었고 몸에서 희미한 술 냄새도 풍겼다. 어젯밤에 밤새도록 술을 마신 게 분명했다. 범한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물로 술을 준비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장영후는 술을 좋아하는 호색한인 데다가 변변치 않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황태후에게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그중에서 군대를 이끄는 장안후는 비록 패전한 장수지만 그보다는 뛰어났다. 항상 상경에 틀어박혀 안락한 삶을 사는 장영후는 세상 물정도 모른 채 황태후의 힘만 믿었다. 그렇기에 일의 심각함도 모른 채 경국의 사신인 범한을 집안에 들인 것이다.
범한은 오늘 황태후의 친동생과 술을 마시면서 아들인 위화 소경을 불러낼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종들이 고급술을 올리자 장영후는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했다. 그는 높은 관직에 올라 있지는 않았지만 황태후의 동생인 만큼 모든 사람을 무시했고 경국 감찰원 제사인 범한도 풋내기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범한을 자신의 집으로 들인 이유는 쓰디쓴 기억 때문이었다.
사신이 찾아 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술을 유달리 잘 마시던 젊은이가 떠올랐다. 사실 그는 북제로 돌아온 이후에도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범한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고급술과 정교하게 만든 유리 술잔을 보자 화색이 돈 장영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내가 사람을 볼 줄 알아.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일 줄 알았어.’
감찰원의 정보에 따르면 장영후는 비록 과거 장묵한 밑에서 배웠지만 북제 조정에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북제 대신들은 그가 황태후 동생이라는 이유로 존중할 뿐 그의 명성은 아들인 위화보다도 낮았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술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대낮부터 술상을 차려 놓고 외국 사신들과 마시기 시작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술을 한 잔 마신 뒤 감질나는 표정으로 있는 장영후를 향해 말했다.
“좀 전에 후작 어르신의 집에 들어오려고 하니 위 통령께서 불편해하실 거라고 막더군요.”
“무슨 소립니까!”
장영후가 펄쩍 뛰었다.
“찾아온 손님을 돌려보내는 경우가 어디 있답니까! 작년에 경도에서 대인과 신기물 소경께서 저를 잘 대접해 주셨기에 오늘 보답하려는 건데 누가 토를 단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범한은 안심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이 세 순배 돌자 장영후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눈동자는 풀리기 시작했다. 장영후가 취하자 범한은 기회를 봐서 자신이 묻고 싶었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장영후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 진무사 지휘사 심중 대인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상경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후작 어르신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궁을 나가 황태후의 친필 편지를 심 대감이 이끄는 금의위에게 전달한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들었습니다. 심 대감은 명망 높은 관리기도 하시고 후작 어르신과도 교분이 두터우니 소개해 달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은 장영후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취해서 얼굴이 불콰해진 그가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딸꾹질을 하다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사신인 범한 대인이 진무사 지휘사를 만난다는 게…… 규정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범한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후작 어르신께서도 아시겠지만 사신은 뭐 하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도 경도 대신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어 폐하조차도 저를 보호할 수 없어 사신으로 북제에 오게 된 것입니다.”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 장영후는 딸꾹질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북제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황태후와 관련 있는 권세가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래서 장안후도 좌천당해야 했고 자신은 황태후의 친동생임에도 경국 사신으로 가서 치욕적인 협상에 서명해야 했다.
범한이 경도 대신들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건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재상이 사직하고 예부 상서는 교수형을 처해졌으며 열여섯 명의 고관은 참수형에 처해진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회시 부정행위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북제 조정 대신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장영후는 범한의 말이 진실이라 믿었다.
“진무사 지휘사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뭡니까?”
장영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정말이지 경국에서 온 젊은 사신이 뭘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돈을 벌고 싶어서입니다. 대인께서도 벌고 싶지 않으십니까?”
돈을 번다는 말에 장영후가 순간 관심을 보였다. 범한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술자리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본 범한이 소곤소곤 말했다.
“장사를 하는 겁니다. 늦어도 내후년에는 제가 경국의 황실 금고를 물려받을 거라는 소문을 들으셨겠지요? 황실 금고 상품 중 최소 4할이 북쪽으로 운반됩니다. 그러니 진무사 지휘사와 교분을 쌓아 두어야 길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장영후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소리쳤다.
“밀수를 하겠다는 겁니까?!”
범한이 집게손가락을 입술을 갔다 대고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호탕하게 술을 한 잔 들이켠 뒤 말했다.
“후작 어르신이 보시기에 할 만한 것 같습니까?”
범한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장영후는 너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술기운이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경도 관리의 배짱이 이렇게 크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장영후는 눈을 굴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정말 밀수를 하려 한다면 진무사 지휘사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좋은 건 사실이지. 더군다나 범한이 가로채려는 건 경국 황실 금고의 돈이니 북제 조정이 손해 보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밀수로 상품 가격이 내려가면 조정은 돈을 아낄 수 있을 테니 황태후나 황제에게도 좋은 일인데 내가 굳이 안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생각을 마친 장영후는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말했다.
“합시다! 제가 심중 대인과 만날 수 있는 주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무엇입니까?”
장영후가 입맛을 다시며 범한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반드시 황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오늘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장사라고 충분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후작 어르신께서는 저를 북제 조정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장영후도 범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렇게 큰일을 할 배짱이 없습니다.”
“그럼 후작 어르신께서는 할지 말지 더 고민해 보십시오.”
범한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갑자기 장영후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이 일에 제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비밀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범한의 눈빛이 순간 표독스럽게 빛나자 장영후는 무서워하기는커녕 냉소를 띠었다.
‘문신 주제에 아무리 음흉한 수단을 부린다 해도 진무사의 적수는 없지.’
장영후는 밀수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 범한의 진짜 신분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 장영후의 눈빛을 살피던 범한은 상대방이 자신이 미끼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웃으며 화제를 돌려 오늘 별궁 앞에서 장안후 집안사람들과 충돌했던 일을 털어놓으며 화해를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범한과 심 지휘사를 어떻게 만나게 할지 그리고 황태후를 어떻게 설득할지 고심하고 있던 장영후는 생각도 하지 않고 호탕하게 대답했다.
“그 일은 해결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185화
술기운이 잔뜩 오른 범한이 장영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올랐다. 바로 그때 빠르게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말이 마차 옆에 멈춰 섰다.
범한이 창문 가림막을 걷어 보자 장영후의 큰아들이자 홍려사 소경인 위화가 급히 돌아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장영후 집에 찾아온 목적 네 가지를 모두 달성한 것이다.
“범한 대인, 뭘 하려는 것입니까?”
위화가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범한이 뭐라 말하려 입을 열자 지독한 술 냄새가 위화의 얼굴에 엄습했다. 위화가 급히 손으로 코를 막자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상경에 왔으니 오랜 술친구를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화가 발끈했다.
“범한 대인은 사신이신 만큼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친분으로 만나는 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홍려사나 예부가 황궁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겁니다. 이렇게 갑자기 만난 사실이 조정 대신들 귀에 들어간다면 내일 저희 부친께서 얼마나 난처해하시겠습니까!”
범한이 빙그레 웃었다.
“소경의 부친은 소탈하신 분이셔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시던데요. 대인도 부친의 풍모를 좀 본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위화가 가슴속 깊이 치솟아 오르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듯이 저희 부친께서 술을 좋아하셔서……. 범한 대인,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겁니까?”
범한이 위화를 바라봤다. 그때 범한의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위화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술에 취해 해롱대는 것과는 다르게 범한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침착했던 것이다.
“무슨 생각이냐고요? 부친에게 돈 버는 방법을 제안해 드렸습니다.”
범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직감적으로 위험한 일이란 생각이 든 위화는 마차 창틀을 붙잡았다.
“범한 대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제가 오늘 대인을 찾아갔는데 숨으셨더군요.”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부초무사를 만나려 했는데 그분 역시 예부에 안 계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누구를 찾아가야겠습니까?”
위화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일은 경국 사신단과 예부 관리들이 협의해 진행하는 것 아닙니까?”
“영토 분할도 처리했고 포로 교환도 끝났습니다.”
범한이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무섭게 말했다.
“홍려사 소경이시니 제가 처리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내일 안에 반드시 만나야겠습니다.”
위화가 고집을 부렸다.
“만난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절차가 복잡한 걸 어쩌란 것입니까.”
“그럼 내일도 부친을 계속 만나야겠군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범한은 오히려 웃었다.
“술도 마시고 대화도 하면서 돈 버는 일도 상의하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마차가 호위를 받으며 떠났다.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위화가 말고삐를 종에게 건네주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저택으로 들어가면서 종에게 범한이 언제 집에 방문했으며 뭘 했는지를 물었다. 종이 위 통령과 함께 왔다고 말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폐하 쪽 대신들이 이 일을 빌미로 삼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위하가 거실에 들어가자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는 부친이 보였다. 그가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아들은 본 장영후가 술에 취해 혀 짧은 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봐라. 오늘 집에 손님으로 누가 온 줄 아냐? 내가 항상 말했던 범한이 찾아왔더구나. 오늘 그놈이 수수 거리에서 가장 비싼 술을 두 단지나 사서 왔어.”
결국 참지 못한 위화가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 어쨌거나 적국의 사신이 아닙니까. 지금 조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희 집안을 주시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런 상황에 아버님께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영후가 크게 소리쳤다.
“뭐가 어때서? 황태후의 친동생인 내가 손님이 찾아와서 대접했는데 뭐가 나쁘단 말이냐!”
“범한 대인은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 경국의 사신입니다!”
그러자 위화도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저희 집안은 다른 집안과는 다릅니다. 아버님께서 고모님의 체면을 생각하셨다면 오늘 범한 대인을 집안에 들여선 안 됐습니다.”
위화가 큰소리로 나무라자 기가 죽은 장영후가 술병을 끌어안고 울먹였다.
“무슨 체면을 생각하라는 거야. 네 고모가 황궁에 들어간 그날부터 나는 어떻게 산 줄 아느냐? 내가 어떤 사람이냐? 나는 장묵한의 제자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 줄 아느냐? 너도 오래 봐서 알지 않으냐. 조정의 대신 중에서 나를 만나러 오려는 사람이 있느냐? 찾아오는 것들이라고는 뱃속이 검은 후안무치한 놈들뿐이라서 싫증 날 지경이야!”
“모처럼 나를 만나러 온 사신이 있구나.”
장영후가 떨리는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아들아, 이 아비가 황태후마마의 친동생이란 생각은 말거라. 그 범한이란 자가, 세상이 알아주는 시선 범한이 말이다, 이 아비의 체면을 살려 주었구나!”
아버지의 말에 위화도 마음이 슬프고 괴로웠다. 자신들의 집안이 호사스럽고 권력을 누리며 살고 있기는 해도 명성을 중시하는 북제 조정과 재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떨어지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참고 견디며 겨우겨우 홍려사 소경이라는 직위에 올라 드디어 소인배들의 입을 막아 버리는 권력을 쥐게 되었는데도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황실이 황태후의 집안에 하사한 자리라고 여기고 있어서였다.
위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버지가 옛날에 장묵한의 가르침을 받아 천하에 도움이 되는 큰일을 도모하려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모 때문에 한직인 후작으로밖에 살 수 없어 마음속 응어리를 술로 삭여 온 것도 잘 알기에 무언가 말을 더 하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범한이 떠나기 전해 말한 것들을 생각하니 은근슬쩍 두려워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한이 아버님과 장사를 한다고 말했습니까? 그자는 경국 감찰원에서 제사로 있는 자인데 어찌 장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체 어떤 장사이기에 아버님께서 직접 나서셔야 합니까?”
그러자 장영후가 대답했다.
“나는 주선자일 뿐이고 그가 진짜로 원하는 사람은 심중 대인이다.”
“심중 아저씨요?”
“그렇다. 범한의 부친은 경국의 호부 상서다. 범한 그자는 사생아 군주의 남편이기도 하지. 나중에 경국 장 공주의 황실 금고에서 운영하는 일은 모두 그자가 이어받을 게다. 그러니 그의 의중은 몸이나 좀 풀어 보려는 거야. 북쪽으로 오는 동안 심중 대인의 호위가 없다면 오래 하는 건 고사하고 시작도 못 할 테니.”
위화는 아버지 입에서 나온 사전 정보에 많이 놀란 사람처럼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설마 그자가…… 밀수를 하려는 것입니까?”
“함정입니다!”
위화의 첫 번째 반응은 위와 같았다.
“그자는 나를 위협할 필요가 없단다.”
아들의 말에 찬성하지 않는 장영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위화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번에 양국 간에 협의가 있었는데 모르셨군요. 범한이 지금 그 일 때문에 조급해서 그런 겁니다. 폐하께서는 최대한 시간을 끈 후 경국 사신단이 조급해하면 그때 다시 말하자는 입장이십니다. 하온데 아버님께서 이리 나오시면 그 장사 제안이라는 게 사실인 걸 떠나, 심중 대인과의 만남이 성사되는 즉시 우리도 연루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범한이 저에게까지 찾아와 사람을 내놓으라 하면 제가 어찌 시간을 끌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시간을 끌고 싶어 하신들 그리될 것 같으냐?”
장영후가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어쨌거나 그는 풀어 줘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득이 좀 되면 범한을 도와줄 수도 있지 뭘 그리 벌벌 떠는 게냐? 네 고모님께서도 아직 황궁에 계시지 않으냐!”
위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한참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범한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북제까지 와서 밀수를 하려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새는 먹이를 위해 죽는다고 했다!”
장영후는 아직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꿰고 있다는 듯 멸시와 조소를 쏟아 냈다.
“황실 금고라고? 참으로 큰 먹을거리로다. 하나 안타깝게도 범가 것이 되지는 않을 게다! 그자의 부친이 경국 호부 상서로 있어 국고를 통해 이득을 보는 건 있겠지. 한데 그렇다 한들 그 액수가 대체 얼마나 되겠느냐? 반면 범한이 나중에 황실 금고 물건들을 몰래 북쪽에 판다고 해보자꾸나. 그러면 그걸로 벌어들이는 돈이 대체 얼마나 되는 줄 알고는 있는 것이냐?”
위화는 지혜롭고 영민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대략적인 계산을 금세 마쳤다. 십여 년 동안 경국의 모든 경비는 우선 기본적으로 섭가가 남겨 둔 사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다른 나라에서 벌어들인 은자였다. 그러니 범한이 그런 경천동지할 일을 정말로 할 수 있고 또 그 속에서 이익을 낼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액수임이 분명했다.
“범한이…… 그런 돈으로 속이려 한다고?”
위화는 세상이 다 아는 인재 범한과 방금 들어 알게 된 탐욕스러운 범한이 선뜻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장영후가 고개를 젖히고 다시 독한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딸꾹질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시인도 먹고는 살아야 하느니라.”
과거에는 북제의 인재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나라의 좀벌레가 된 장영후는 말을 마치자마자 탁자 위에 엎어져 깊이 잠들어 버렸다. 온몸은 향이 좋은 술에 찌들어 있건만 그에게서는 향기롭지 않은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 * *
마차 안. 왕계년이 옆에서 잠든 척하고 있는 임정을 잠깐 쳐다보더니 범한에게 자기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눈빛으로 보냈다. 제사 대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조정 대신의 면전에서 밀수 따위의 경솔한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고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범한이 씨익 웃었다.
“임정 대인은 정말로 믿을 수 없으신가 보군요.”
반면 왕계년은 정말로 믿고 있었고 고달도 그러했다. 황실 금고를 전부 장악할 수 있고 또 앞에 있는 투명 유리통에 손만 뻗으면 몇 배의 폭리를 얻을 수 있는 게 확실한 상황이라 해보자. 그렇다면 정말로 꿈쩍하지도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한데 범한은 그런 사람이었다. 장 공주 입장에서 보면 황실 금고는 조정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범한의 입장에서 보면 황실 금고는 섭가의 것이고, 그러니 자신의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언젠가는 온전히 자기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집 물건을 훔쳐다가 북쪽에서 싼 가격으로 팔아 버리겠다고?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누구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문제의 묘미는 범한의 진짜 생각 그리고 범한과 소위 황실 금고로 불리는 황실 상단 간의 역사적인 연관성을 아는 이가 없다는 데 있었다. 이에 범한의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음처럼 생각했다.
‘범가 자식 놈이 황실 금고라는 황금 광산에서 아예 자기 금광을 발굴하려 드는구나!’
하지만 범한에게는 금광 따위나 발굴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 모든 산을 몽땅 가질 생각이었다.
“자는 척하지 마세요.”
범한이 조금 피곤해 하품을 했다. 그사이 옆에 있던 임정이 약간 난처하다는 듯 눈을 뜨고는 얼핏 두려움 담긴 시선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자신은 고작 부사인데 자기 앞에 있는 이 젊은 관리는 직급이 정사이고 동시에 감찰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관청의 제사 대인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재산 몰수의 형벌을 당하고 멸족에까지 이를 수 있는 이야기를 자기 앞에서 거리낌 없이 해대다니. 임정은 어쩌면 귀국길에 자신이 해코지당할 수도 있으리라 은근슬쩍 걱정하고 말았다.
범한은 웃긴다는 듯 임정을 잠시 바라보고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바보예요? 내가 대놓고 말했다는 건 임정 대인이 알아도 게 무서울 게 없다는 뜻 아닙니까. 저녁에 돌아가서 경도로 보낼 서한을 작성하세요. 걱정 마시고요! 조정에서도 내 뜻을 분명히 알아챌 겁니다.”
실은 조정에서 분명히 알아채지 못해도 황제만 정확히 이해하면 되는 일이었다.
임정은 자기 앞에 있는 젊은 대인이 경국 건국 이래 최고의 탐관일 리 없다며 자신에게 강제적으로 최면을 걸었다. 그런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뗐다.
186화
“대인, 오늘 왜 장영후를 찾으신 겁니까?”
“첫째, 북제 황태후와 좀 친해져 보려고요. 음, 그래요. 지금 보니 북제 황제는 사신단을 그럭저럭 잘 대해 주고 있군요.”
범한이은 고개를 숙이고는 피곤한 눈을 감고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겸사겸사 앞서 입구에서 사신단이 당한 사건을 장영후에게 처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찌 되었든 북제 후작 어르신의 금쪽같은 후레자식 놈을 때린 것이니 그 일도 처리해 놔야…….”
왕계년과 고달은 ‘금쪽같은 후레자식’이란 말을 듣고는 대인의 표현이 아주 정확하다는 생각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 이번에 사신단이 해야 할 일에 영향을 주지 않겠죠. 셋째, 그 심중 대인이란 자를 만나려면 장영후를 통해야만 가능해서입니다. 넷째, 위화를 좀 놀려 주려고 합니다. 장영후가 내가 던진 미끼를 물든 안 물든 상관없이 그자는 분명 아무도 모르게 더 빨리 진행시키려 할 것 같아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몇 다리를 건너 진무사의 심중 지휘사를 만나려 하시는 겁니까?”
임정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 갔다.
“그 사람은 실권을 쥔 고위 관리라 장영후와는 처지가 다릅니다. 그러니 북제에서도 심중 대인과의 만남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장영후의 생각을 떠봐야죠. 어찌 되었든 성사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그리 나쁠 거 없잖아요.”
범한이 눈을 떴다. 그리고 하품을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왜 만나려 하는가에 대해서는 말이죠, 그건 감찰원의 일입니다. 그러니 임정 대인에게는 말하기 곤란합니다.”
임정은 순간 범한의 진짜 신분이 생각나 깜짝 놀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다시 하품했다.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하품을 한 걸로 보아 분명 피곤한 모양이다. 오늘 입궁한 후로는 조금도 쉬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따가 뭘 하실 겁니까?”
왕계년이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상경은 적국의 수도입니다. 우리의 눈은 모두 가려진 상태고요. 그러니 상경에 있는 눈과 귀에게 연락을 해볼까요?”
“이미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범한이 주먹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더니 입을 뚫고 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왕계년에게 계속 말했다.
“우리 밀정들에게 모험하게 하지 말죠. 아직 때가 안 됐는데 만나 무엇 하겠습니까? 그냥 잠이나 자둬요. 내일 위화를 따라 언빙운 공자나 만나러 가자고요.”
그는 옷 안에 넣어 둔 단단한 질감의 서신을 잠시 만져 보았다. 미간에서 걱정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 * *
범한은 다 읽은 서한을 무표정하게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손으로 비벼 잘게 조각으로 만들었다. 다 읽은 서한을 이렇게 잘게 부수는 건 창산에 있을 때 생긴 버릇이었다. 편지 조각들은 어느새 가루가 되었고 감찰원 2처의 정보 처리 고수가 수거해 가도 절대 복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번 서한은 황의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다. 범한은 그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었다. 바로 신양 이궁에 있는 장 공주의 책사였다. 감찰원의 가장 은밀한 정보 중에는 책사 황의와 장 공주 사이가 조금 애매한 관계라고 밝혀 놓은 내용이 있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내가 무슨 소년 소방관도 아니고, 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건 배후에 그런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소은이 신묘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 진평평 원장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 또한 장 공주도 그와 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을 편지를 읽은 후 알게 되어서였다. 그러니 범한이 보았을 때 그들의 목적은 모두 간단하고 명확했다.
우선 진평평 원장이 바라는 건 언빙운은 돌아오고 소은은 죽는 것이었다. 그는 북방에 오랫동안 알아 온 숙적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게 싫은 것이다. 더군다나 언빙운은 데려오고 소은을 죽이는 일은 그가 봤을 때는 범한을 성장시키는 데 매우 좋은 수련의 기회였다.
다음으로 장 공주는 언빙운이 죽든 말든 상관 안 했지만 소은이 다시 금의위의 대권을 쥐는 건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상삼호와 소은이라는 고집스러운 두 사람이 연합해 북제 황태후와 황제 사이에서 틈을 노리고 있다가 북쪽 대국을 더 괴롭히는 걸 보고 싶은 것이었다.
비록 장 공주의 전체적인 계획은 몰랐지만, 그래도 범한은 신양에 있는 장모가 상삼호와 어떤 비밀 협약을 체결한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리도 큰 본전을 내줄 리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광신궁에 잠입한 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장 공주가 글 종이의 배후를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장본인이었으므로 자연스레 장 공주에게는 경이원지한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고 기회를 보아 가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런 입장에서 그것도 이국 타향에서 그녀의 서신을 받게 되자 범한으로서는 조금 황당했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이게 범 경과 무슨 상관이지?’란 심정이었다.
여러 사람에게 수집된 정보들이 각종 경로를 통해 상경 서남쪽 구석에 자리 잡은 사신단의 거처로 모였다. 사신단은 소은이 비밀리에 상경한 사실을 확인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압송된 장소는 황태후와 황제, 진무사의 심중 대인만 알고 있으리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소은의 압송과 관련해서는 무언가 이상했다. 북제 조정이 무도하강에서는 소은을 대대적으로 맞이해 놓고는 상경으로 온 후에는 모든 걸 은닉하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어쩌면 상삼호가 소은이 죽기를 바라는 세력과 아직도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범한은 소은의 생사에 관심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북제 상경까지 온 이상 감찰원 4처가 잠복시켜 놓은 밀정들의 역량을 충분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소은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아직 없었다.
오죽이 오지 않는 이상은, 어쩌면 오죽이 그 상자를 범한에게 가져다주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래서 범한에게는 오죽이 왔으면, 그리고 오죽이 그 상자를 가져다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다.
오죽과 관련해 범한의 머릿속에서는 항상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일었다.
‘오죽 아저씨는 사람답지 않게 냉정한데 왜 이번에는 한사코 북쪽 땅에는 오지 않으시려는 거지? 설마 이 땅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범한이 장영후에게 던져 놓은 제안이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 막대한 이익이 딸린 제안이었기에 진무사 심중 대인이란 자와의 만남이 아무도 모르게 추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더라도 상경 황궁에 있는 황태후가 모든 상황을 지켜보리란 것쯤은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은 범한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번 만나 보려는 것이었다. 범한도 상대방을 완전히 믿지 않았지만 미끼를 던졌으니 뭐라도 건져 올리기를 바라는 중이었다.
위화의 경우 겉으로는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지만 협상 당사자들은 처리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었다. 비록 범한이 강력히 원했던 날짜보다 조금 늦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홍려사와 진무사가 은밀히 연합해 발송한 공문 덕분에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 경국 사신단은 언빙운과 만날 수 있었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 범한은 작열하는 태양을 막으려 손 그늘을 만들었다. 그는 입가에 장난기 어린 웃음을 걸고 있었다. 문득 지난 생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작문을 할 때마다 썼던 첫 구절, 즉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이란 표현이 생각나서였다.
범한은 즐겁고 은근히 들떠 있는 상태였다. 뭐, 다행히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타국에서 거래가 성사되기도 전에 마음 깊이 숨어 있던 어둠 때문에 하마터면 어떤 거래를 할뻔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주 오래전에 말했던 것처럼 범한은 아직 일면식도 없지만 대단하게 생각하던 언빙운 공자를 만나게 되자 살짝 들뜨고 말았다.
언빙운은 고관의 자제지만 기꺼이 부귀영화를 버리고 이 먼 타국까지 와 험난하고 어렵기로 유명한 북제 밀정의 임무를 짊어진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발군의 실력으로 북제 상층부까지 성공적으로 잠입하지 않았던가. 이 점만으로도 범한은 언빙운 공자가 다방면으로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빙운이 갇혀 있는 곳은 상경 외곽에 위치한 경계가 삼엄한 장원이었다. 장원 밖 멀지 않은 곳에는 병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장원 안팎은 북제의 금의위가 지키고 있었다. 장원의 거대한 철문이 서서히 열리자 마차는 아무도 내려 주지 않은 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돌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더니 잠시 후 작은 건물 밖에서 멈추었다.
이 건물은 상경의 다른 건축물들처럼 고색창연한 느낌은 없었다. 순전히 견고한 돌을 쪼아 만든 곳이었으며 뜰이 없었다. 그리고 각루에서 초원으로 이동하는 모든 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를 구금해 놓기에는 적격이었다.
오늘 범한을 따라 언빙운을 살펴보러 온 사람은 왕계년뿐이었다. 고달은 호위에 속해 있었고 임정과 임문은 홍려사 계통이어서 감찰원 사무와 크게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 오늘 이 자리까지 따라오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위화가 평온한 얼굴로 범한에게 말했다.
“범한 대인, 이곳은 꽃향기도 나고 새도 지저귀고 게다가 풍광과 날씨까지 좋습니다. 여러분 쪽 사람에 대한 우리 조정의 대우가 꽤 괜찮지 않습니까?”
한데 범한은 위화의 말을 냉담하면서도 담담하게 받아쳤다.
“아무리 신선계에 있는 궁일지라도 그곳에만 오래 머물면 그저 감옥에 불과하지요.”
그러자 두 사람 옆에 있던 금의위의 부초무사가 끼어들었다.
“아무리 감옥이라 해도 당신네 감찰원 감옥보다는 훨씬 편할 것이오.”
금의위의 고위 관리인 부초무사는 변경에서 소은을 맞이할 때 그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 분을 삭이고 있던 부하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편 범한은 이 부초무사란 자가 너무나도 싫었던 터라 절로 이맛살이 구겨지고 말았다. 이자는 사신단이 상경으로 들어온 후 양측 연락을 책임져야 하는 담당자였다. 한데 황당하게도 자기가 할 일은 하지 않고 그냥 숨어 버렸다.
이에 범한은 지금까지도 북제의 관직 체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누군가가 금의위 소속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왜 우두머리를 진무사 지휘사라고 부르는지 그리고 그 수하인 밀정을 초무사라고 부르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진무사 지휘사니 초무사니 하는 관직명을 처음 들었을 때 하마터면 상대방을 군에 속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우를 범할 뻔했다.
“쓸데없는 말은 해 무엇 하겠습니까? 들어가서 사람이나 만나 보겠습니다.”
범한이 잠시 싸늘하게 부초무사를 바라봤다. 그리고 소은은 남쪽에서 20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지만, 언빙운이 어떤 고초를 당했는지는 모르고 있으므로 아직까지 살아 있어 준 그가 참으로 장하다고 생각했다.
* * *
언빙운을 만나기 전 범한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언 공자가 형틀에 묶인 채로 살점이 떨어져 있고, 몸 열 곳에 못이 박혀 있고, 손톱은 모두 빠져 있고, 옷은 벗겨져 있고, 맨살이 드러난 곳에는 인두로 지진 자국이 있고, 아직 한창 젊은 사람이 늙은이처럼 치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장면이었다.
물론 이는 가장 참담한 상황을 상상한 것이었다.
범한은 다른 경우도 상상했다. 이번 상상에서 언 공자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구름이 수놓아진 최고급 비단 이불이 있었으며 또 그 이불 아래로 맨다리가 네다섯 개 드러나 있었다. 이어 뽀얗고 풍만한 가슴을 반쯤 드러낸 북제의 최고 미인들이 포도주를 들어 그에게 먹였다. 그러다 언 공자의 탄력 있는 가슴 근육 위로 포도주가 흘러내리자 옆에 있던 미인들이 그것을 부드러운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 내고 있었다.
물론 이는 가장 저질스러운 상황을 상상한 것이었다.
범한의 머릿속에는 이것들 말고도 다른 이상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언빙운은 머리를 다친 사나운 호랑이가 되어 처음 만난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런 후 자신을 갈가리 찢어 놓고는 눈물 콧물을 쏟아 가며 감찰원 사람들이 자신의 생사에는 무관심했다고, 조국의 대인들이 너무 늦게 와주었다고 원망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가능성이 가장 낮은 상상이었다.
하지만 어떤 상상을 했든 범한은 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은 역시나 궁핍하기 그지없다는 걸 다시 깨닫고 말았다. 자신의 상상력이 그곳에서 펼쳐진 광경만 못했던 것이다.
범한은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이를 보자마자 너무나도 놀라 입이 쩍 벌어져 버렸다. 자기 눈앞에 있는 언빙운이 이런 모습으로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해서였다.
위화와 부초무사도 이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터라 절로 입을 벌어지면서 헉, 하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187화
방 안은 매우 단출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일상적인 물건들 몇 점뿐이었다. 감옥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방처럼 보였다. 범한은 북제 측이 자신이 올 걸 알고 임시방편으로 이런 곳을 마련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의자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는 냉담한 표정의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영민하게 생겼으며 얇은 입술과 위로 올라간 눈썹은 관상학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이 박한 부류였다. 하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이 젊은이의 무릎 위에 엎어져 있는 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작게 울먹이고 있었으며 고요한 방 안에서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범한은 깜짝 놀라 벌어져 있던 입부터 꾹 다물었다. 그리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돼 씁쓸하게 웃었다.
‘북제로 보낸 밀정 우두머리라 걱정했는데 감옥 안에서는 로맨스물이나 찍고 있었다니, 이게 무슨 에 나오는 고문 장면도 아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이는 당연히 언빙운이었다. 그는 바깥에서 들어온 몇 사람 중 두 사람이 경국의 복장을 하고 있자 이내 이맛살부터 찌푸렸다. 그가 인상을 쓰자 방 안에는 순식간에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지자 언빙운의 무릎 위에 엎어져 울고 있던 여인도 놀라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범한은 그녀가 아름답기도 하고 또 미간에 유순한 느낌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대부호 가문의 여식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경비가 삼엄한 구금실 안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심 낭자?”
아연실색한 위화가 소리쳤다.
“여봐라, 심 낭자를 밖으로 모시거라!”
“심씨라고?”
범한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한데 속으로는 일이 점점 재밌어진다고 생각했다.
문밖에서 금의위 몇 명이 들어왔다. 그러자 위화는 새파랗게 질린 채로 그들을 꾸짖었다.
“일을 어찌하는 것이냐, 심 낭자가 이런 위험한 곳에 있도록 하다니!”
부초무사 역시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금의위들의 뺨을 몇 대 후려갈겼다. 찰싹! 하고 몇 번 소리가 울린 후 중범죄인을 지키는 금의위가 얼굴을 부여잡고 심 낭자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그녀에게 손대지는 못했다.
“심 낭자, 계속 여기 계실 거면 하관이 거칠게 행동해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부초무사가 주먹 쥔 한 손을 나머지 한 손으로 감싸 쥐고는 심 낭자를 향해 실례하겠다는 인사부터 했다.
위화도 그녀 곁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권유했다.
“누이, 돌아가지. 만약 심 아저씨께서 아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누이를 때려죽이려 하실 거야.”
* * *
범한은 단 한 번도 언빙운과 눈빛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계속 언빙운의 무릎 위에 있던 여인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낭자의 성이 심씨이고 금의위가 지키는 삼엄한 장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면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분명히 심중 대인 댁의 아가씨일 게 뻔했다.
한데 이 심 낭자와 언빙운이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설마 우리의 언빙운 대공자께서 미남계를 쓰신 건가?’라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심 낭자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껏 말 한마디 않는 언빙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유순한 두 눈에서는 이내 광기 어린 원망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고 결국 아랫입술을 깨물고 단어 하나하나에 힘주어 말했다.
“하나만 물을게요. 당신이 한 말 중에 진실이 있기는 했나요?”
언빙운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기만 할 뿐 감정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심 낭자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본관은 경국 감찰원 4처의 관원입니다. 그러니 심 낭자도 내가 한 말 중에 사실은 단 한 마디도 없다는 걸 알 겁니다.”
이 광경을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는 범한을 위화가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심 낭자가 계속 말하도록 놔둔다면 경국의 관리들에게 우스운 꼴만 보일 거란 생각에 금의위에게 서둘러 이 여인을 문밖으로 끌고 나고도록 했다.
그러자 심 낭자가 금의위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며 가만히 앉아만 있는 언빙운을 향해 구슬프게 말했다.
“네, 네. 그럴게요, 사랑 가득한 언빙운 님.”
사랑 가득한 언빙운 님이라니!
찢겨 나간 마음과 절망으로 무수히 점철된 참으로 간절한 말 아니던가. 심장이 단단한 돌덩이 같은 범한도 절로 감탄하게 만든 말이건만 위화는 분노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언빙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도 적국의 밀정 우두머리를 지금이라도 당장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로 말이다.
들릴 듯 말 듯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심 낭자가 드디어 구금실 밖으로 나갔다.
범한이 다시 한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랑 가득한 여인이로군.”
한데 말만 그렇게 했을 뿐 범한은 외려 궁금증만 더 커진 상태였다. 일단 그 아가씨가 북제 금의위의 총괄책임자 심중의 여식이라 치고, 언빙운이 북제에 잠복해 있는 동안 그녀와 감정적으로 얽히게 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언빙운이 어떤 사람인데! 북제가 열다섯 해 만에 붙잡은 경국의 최고위 밀정이고 또 삼엄한 곳에 갇힌 사람 아니던가. 그런데 심 낭자는 어떻게 구금실 안까지 당당하게 걸어 들어올 수 있었으며 더군다나 하필이면 경국 사신들 앞에서 이런 상황까지 연출하게 된 거지?
범한은 순간 자신들과 동행한 북제 사람들의 생각을 알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이 구금실 같지도 않은 구금실도 제법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언빙운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천천히 차나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다년간 북제에 잠입해 있던 대단한 인물이라 그런가. 그는 서리같이 싸늘한 양미간과 냉담한 얼굴로 자신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위화도 앞서 일었던 분노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였다. 그런 그가 언빙운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언빙운 공자, 어떤 말을 하든 두 해 전 우리는 좋은 친구였고 우리 모두 자국을 위해 그런 것이니 애당초 별일 아닌 것일 수 있겠지. 하지만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영원히 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그 점 부디 기억해 주기 바란다!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우리 북제에 단 한 발자국도 들이지 말란 뜻이다! 폐하께서는 심중 대인의 밀지를 이미 윤허하셨다. 그러니 오늘 이후로 다시 우리 제국에 발을 들인다면 3천 명에 이르는 철갑으로 무장한기마병 부대가 네놈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한데 언빙운은 위화의 말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 듯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찻잔의 자그마한 손잡이를 만지며 손장난이나 치고 있었다. 그는 작년에 신분이 드러나고 감옥에 갇힌 후로는 더 이상 북제 상경의 사교계에서 넓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멋들어지게 춤추던 ‘재주꾼 운’이 아닌 타고난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저분을 보러 온 것입니다.”
범한이 아무런 표정 없이 위화에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저분을 언제 사신단으로 데려갈 수 있을지 확실한 날짜를 약속받고 싶습니다.”
“사신단으로는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저자는 아무도 모르게 상경을 떠나야 하니까요. 상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언빙운이란 자를 산 채로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어 하는지 모를 겁니다.”
위화의 말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러자 범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폐하께서는 언 대인을 반드시 사신단으로 데려가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알아보는 사람이 없도록 언빙운 대인을 위장하는 작업도 우리 측에서 할 겁니다. 설마 우리가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길 바라시는 건 아니겠지요?”
위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우선 소은과 사리리는 이미 상경으로 돌아왔다. 다음으로 이번 비밀 협의에서 경국 측이 이미 충분히 선수를 친 터라 자신들이 날짜를 미루며 시간을 끄는 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한이 지난번에 장영후 저택에 쳐들어가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때 내놓은 황당한 제의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황궁 쪽과 권력을 잔뜩 쥔 심중 대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에 그는 대답했다.
“곧 수속에 들어가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편의를 좀 봐주시겠습니까? 언 대인과 단독으로 두어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럽니다.”
위화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무언가를 상의할 생각이라면 언빙운이 사신단으로 돌아간 후에 더 은밀히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리저리 범한의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자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부초무사와 함께 잠시 나가 있겠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방 안에는 범한과 왕계년 그리고 계속 고개를 반만 숙인 채 냉담한 태도로 일관 중인 언빙운만 남게 되었다.
* * *
범한은 적국의 금의위 대감옥에 있었지만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사람처럼 따사롭게 활짝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빙운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잘생긴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범한이라고 합니다.”
범한은 자신이 경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언빙운이 붙잡히기 전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찰원이 북쪽에 파견한 밀정의 총우두머리는 분명 자신의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였다. 범한이라는 이름을 들은 언빙운은 매끈한 찻잔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떼고는 고개를 들어 잠시 범한을 바라보았다.
한데 언빙운의 눈에 비웃음과 무시만 담겨 있어 범한으로서는 그의 반응이 의외였다.
“범한? 호부 시랑 범건의 서자? 어릴 때 담주에서 자랐고 음주를 즐기고 재능도 없다는 그 사람이군.”
언빙운이 다시 입을 뗐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매우 부드러웠다.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조금 전 냉담한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왜 온 것입니까?”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에 답했다.
“저기요, 언빙운 대인. 반년 정도 갇혀 계시는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우선 내 아버님은 벌써 호부 상서가 되셨습니다. 둘째, 말씀하신 이 재주 없는 인간이 지금 사신단 정사로 있습니다. 이번에 북제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대인을 데려가기 위해서고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빙운은 범한이란 이름에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범한은 그 이유를 몰랐다.
“날 본국으로 데려간다고?”
언빙운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겨우 스물하고도 몇 살 더 먹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흰 눈썹이 희끗희끗 섞여 있어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내가 왜 너를 믿어야 하지?”
“본인은 범한이고 지금 감찰원 제사로 있습니다.”
범한은 언빙운이 밀정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현재 극도로 조심하는 중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자신이 북제가 친 덫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허리춤에서 요패를 꺼내 언빙운의 눈앞에 대고 잠시 확인시켜 주었다.
언빙운은 두 눈으로 나무로 된 패를 훑어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제사 패가 위조하기 매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이가 감찰원 제사 대인이란 사실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제사 대인은 원장 바로 아래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감찰원 8대처에 대해 명의상 관할권은 없지만 실제로는 감찰원을 견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언빙운은 반년 동안 구금 생활을 한 탓에 어느덧 마음을 꽁꽁 닫아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변화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위험도 감수해서는 안 되서였다. 그가 털어놓는 정보는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북제에 숨어 있는 밀정의 첩보망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내 옆에서 조용히 있던 왕계년이 앞으로 나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언빙운 대인, 범한 대인께서는 최근에 임명된 제사이십니다. 이번에 북제로 오신 건 대인을 감옥에서 구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언빙운이 냉담한 표정으로 왕계년을 쓱 보았다.
“1처의 왕계년 대인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왕계년은 의자에만 앉아 있는 언빙운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그가 벌써 반년이란 시간 동안 갇혀 지냈다는 생각을 하니 탄복해야 할지, 그를 동정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분명 힘든 시간을 보냈을 거란 생각은 들었다.
“직접 내 신분을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범한이 언빙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이번 일은 빨리 끝내는 게 좋겠죠. 그리고 계속 이렇게 침묵해도 괜찮습니다. 사신단과 함께 귀국해 진평평 원장 대인이나 댁의 부친을 만나 뵌 후 그때 입을 떼도 늦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편이 마음이 놓일 것 같군요.”
언빙운이 들어도 이는 절대로 북제 사람들의 셈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188화
이 순간 범한은 상대방의 미간에서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언빙운의 옷깃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언빙운이 고개를 들어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냉랭하지만 장난기 살짝 섞인 눈빛을 하고는 작게 말했다.
“보고 싶습니까?”
“네.”
범한은 차분하게 대답한 후 언빙운이 걸치고 있는 흰색 도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끌어 내렸다. 도포는 구름과 눈처럼 희고 깨끗했다. 한데 도포의 옷감이 언빙운의 몸과 분리될 때 뜯어지고 쓸리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언빙운은 낯빛이 변한다거나 눈썹을 움찔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범한의 낯빛이 일그러지면서 흰색 도포에 가려져 있던 끔찍하게 변한 목덜미 쪽 피부가 드러났다. 온통 불그죽죽한 상처뿐이었다. 분명 새로 돋은 피부였지만 이만큼 회복하려면 분명 오랫동안 요양해야만 가능했다. 목덜미에 난 수많은 상처는 커다란 흰 도포 밑에 가려진 언빙운의 몸에 대체 얼마나 많은 고문의 흔적이 있을지 짐작하고도 남게 해주었다.
분노한 왕계년이 욕을 몇 마디 내질렀다. 반면 평정심을 되찾은 얼굴을 하고 있던 범한은 여전히 냉정한 표정의 언빙운을 보며 물었다.
“고문을 안 당한 지 꽤 오래되었군요.”
“석 달입니다.”
언빙운이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반년 동안 끔찍한 고초를 겪은 몸은 절대 자신이 아니란 것처럼 말이다.
범한이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을 여며 주며 한탄했다.
“북제에서는 우리가 올 때를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석 달 동안 고문을 하지 않은 거지요. 한데 석 달이 지난 후에도 이리 끔찍한 걸 보니 언빙운 대인, 참으로 고생 많았습니다.”
그러자 언빙운이 범한의 눈을 냉담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오지랖이 넓은 것 같군요.”
범한은 말문이 턱 막혀 순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은 그저 관심을 보여 준 것뿐인데 저 형님께 형편없다고 비웃음만 사다니…….
* * *
“협의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언빙운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저 조정에서 나를 북제에서 구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썼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언빙운은 범한과 왕계년이 대답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숨을 고르고는 곧장 음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말해 주지 않는다면 나란 쓸모없는 놈 때문에 조정이 잠룡만의 초원을 내주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폐하께서는 그 정도로 어리석은 분이 아니십니다.”
범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이번 협의의 대체적인 내용을 언 공자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실내에 갑자기 기괴한 침묵이 흘렀다. 언빙운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혼잣말이 범한에게 들렸다.
“소은과 나를 맞바꾸기로 했다고? 얼간이들!”
언빙운이 느닷없이 고개를 치켜들더니 조소와 분노가 담긴 눈빛으로 범한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차분했다.
언빙운은 줄곧 그가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차분함과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매우 우수한 밀정이란 걸 보여 주는 예였다. 한데 조금 전 분노를 폭발시킨 모습도 경국이 북제에 심어 놓은 밀정의 우두머리가 얼마나 강한 위세와 장악력을 지녔는지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구금되어 있는 자가 눈에서 뿜어낸 분노의 불꽃에 범한도 무의식적으로 움찔해 피하려 했으니 말이다.
언빙운이 입술을 두어 번 떨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범한의 귀를 때렸다.
“소은이 아직 우리 통제권 안에 있습니까?”
범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작은 소리로 답해 주었다.
“무도하강을 지난 후 북제 금의위에 넘겨주었으니 어쩌면 벌써 상경했을 겁니다.”
“그자를 죽일 방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자가 입에 담고 있는 비밀을 물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깜짝 놀란 범한은 언빙운에게 바짝 다가가 그를 차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자가 입에 담고만 있는 비밀을 알고 있습니까?”
언빙운은 이 젊은 대사 대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이상하게 올렸다.
“북제에서 네 해를 지내다 보니 북제 황실이 소은을 잊지 않고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요. 비록 그 비밀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북제 황실이 그리 중히 여기는 걸 보면 분명 별것 아닌 건 아닐 겁니다.”
말을 마친 언빙운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별안간 질문을 던졌다.
“소은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며 답했다.
“소은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언빙운이 또 속사포처럼 범한을 질책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뒀습니까!”
범한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폐하와 진평평 원장 대인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소은은 이미 많이 늙었고 언빙운 대인은 아직 젊으니 이번 거래에서 실제로 이득을 본 쪽은 우리라고 말입니다.”
언빙운이 다시 침묵했다. 자기 때문에 경국 조정이 소은을 맞교환 상대로 쓰다니. 북제로 파견된 밀정 우두머리는 좌절하고 말았다. 자신이 북제 금의위에게 생포된 것도 굴욕적인 일인데 경국 조정까지 나서서 자기 때문에 큰 대가를 지불하다니,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굴욕이었다.
잔뜩 실망한 언빙운은 몸을 웅크리려는 것처럼 새하얀 도포로 온몸을 뒤덮었다.
범한이 가만히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대인은 총명한 분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된 이상 안전하게 남쪽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게 우리 쪽에서 손해를 덜 보는 거고요.”
언빙운은 냉담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쑥 찾아온 감찰원 제사가 제대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어서였다.
“사흘 후 사신단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범한은 미소 띤 얼굴로 왕계년과 나란히 문을 나섰다. 그리고 문밖에서 지키고 서 있던 위화와 부초무사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 올라타고는 곧장 사신단으로 돌아갔다.
범한이 사신단으로 돌아오자 경국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근 있었던 일들을 모두 취합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후 모두 돌아가고 범한과 왕계년 두 사람만 남자, 범한은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계년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대인, 무슨 생각 중이십니까?”
“왜 심 낭자가 그곳에 있었던 걸까요?”
범한은 하품을 하고는 하려던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북제가 우리의 생각을 흩뜨려 놓기 위해 벌인 수작일 수도 있겠네요. 적어도 언빙운 공자를 향한 우리 조정의 믿음을 약화시키려고 말이죠.”
“어떻게요?”
왕계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언빙운 대인이 사용한 수단은 당연히 조정에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일이란 건 원래 복잡해지기 마련이니까요.”
범한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만약 누군가가 대놓고 일을 꾸미려고 한다면 분명 트집거리가 되겠지요.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언빙운 대인을 만나러 갔을 때 분명 귀국하게 될 거란 걸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분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전혀 없었을까요? 왕 대인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분을 귀국시키기 위해 조정이 지불한 대가가 너무 커서겠지요.”
왕계년은 감찰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감찰원에 몸담고 있는 이상한 대인 중 하나였던 그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범한보다 훨씬 더 정확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왕계년이 공손하게 설명했다.
“조정에서 소은과 자신을 맞교환할 걸 알고 있었다면 어쩌면 언빙운 대인은 붙잡히자마자 자결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않았겠지요.”
감찰원 관원들의 심리 상태를 잘 이해할 수 없었던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뛰어난 감찰원 관리가 정말로…….”
범한은 여러 차례 주저하며 바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소심하게 물었다.
“정말로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왕계년이 범한을 슬쩍 보았다. 한데 얼굴에 망연자실함이 보이자 다시 공손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하관은 언빙운 대인에게 감명받았습니다. 감찰원 관원으로서, 조정의 밀정으로서 감찰원에 들어온 초기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가짐이 분명 있었을 테니까요. 감찰원 밀정들이 신봉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목적이란 걸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목적인데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경국을 위한 모든 목적입니다.”
대답을 마친 왕계년의 얼굴에서 은근히 광적인 기색이 감돌았다.
* * *
범한의 손가락이 약간은 무의식적으로 탁자 위에 어떤 글자를 쓰고 있었다. 범한은 오늘 처음으로 언빙운을 보았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언빙운은 범한이 있는 내내 의자에 앉아만 있었다. 그것도 무슨 창끝에라도 앉은 사람처럼 궁둥이만 의자에 붙인 채 신체의 다른 부분은 의자에 닿지 않도록 이상한 자세로 말이다. 그의 두 발이 쇠사슬에 묶여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범한 자신이 구금실을 나가면서였다. 그러니 앉은 자세가 이상했던 이유는 범한이 보았을 때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언빙운의 몸에 성한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온통 불에 지져진 탓에 그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국을 위한 모든 것이라고요?”
범한은 이맛살을 더욱 강하게 찌푸렸다.
“이제 보니 모두들 이상주의자였군요!”
* * *
경국 조정의 문서가 공식적인 경로로 사신단에 도착했다. 그러니 이 서한에는 비밀 내용 같은 게 숨어 있지 않았다. 이제 곧 북제 황태후의 생신날이니 사신단은 귀국을 연기하고 그 중요한 일을 제대로 완수한 후 귀국길에 오르라는 내용뿐이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두 나라가 외교적인 왕래를 하는 와중에 황태후의 생일이 겹치게 되었으니 응당 분위기는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상경에서 범한은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조금 더 남아 있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며칠 더 묶기로 했다. 한데 그렇다고는 해도 집에 두고 온 아름다운 아내와 누이동생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황태후의 생신이니 우리도 조정을 대표해 얼굴을 비쳐야겠지요. 그리고 선물을 초라한 것으로 준비해도 안 될 것입니다.”
부사 임정이 골똘히 생각하며 말을 이어 갔다.
“사신단의 다른 대인들을 불러 함께 수수 거리에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수수 거리’라는 네 글자에 범한은 술 가게 주인 성회인와 그가 건네준 서한이 생각나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상경의 물 자체도 충분히 깊은데 신양에 있는 장 공주마저 멀리서 타국의 내란을 지휘하려 하고 있으니 이런 혼탁한 물에는 도무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선물을 보내야 할까요?”
임정은 연회에 보낼 선물 때문에 골치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한데 일찌감치 생각해 둔 것이 있던 범한은 손을 한번 휘 내저었다.
“내가 시 한 수를 짓고 그걸 표구해서 가져가면 그만입니다.”
참으로 시건방진 말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수하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시선 범한이 시를 짓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은 천하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북제 황태후의 생신에 예외를 두어 시를 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체면을 세워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 시를 손수 쓸 수는 없었다. 그러자 왕계년이 또 유치한 생각을 내놓았다.
“언빙운 대인이 북제에서 지녔던 신분은 ‘재주꾼 운’이었습니다. 바둑, 금(琴), 서화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지요. 서예 실력도 대가이신 반령 대인께 전수받았고요. 요전에 북제에서 중간 정도 크기의 서예 작품 한 점이 은자 천 냥 정도에 거래됐습니다. 범한 대인께서 지은 시에 언빙운 대인이 글씨를 더한다면 경국의 두 젊은 인재들이 나선 게 되니 북제 황태후도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을까요?”
임정과 임문 두 사람은 왕계년이 범한의 심복인 걸 알고 있던 터라 그의 제의가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언빙운의 북제에서의 신분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무언가 이상하기는 해도 왕계년의 제안에서 콕 집어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범한이 웃으며 질책했다.
“언빙운 대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북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의 살점을 씹고 피를 마시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분의 필체가 들어간 시를 황태후 생신 선물로 보낸다면 황궁 안은 분명 제삿날 같은 분위기가 될 거예요.”
왕계년은 그제야 자신이 내놓은 의견이 황당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난처해했다. 하지만 이내 뻔뻔하게 웃었다.
“만약 북제의 황태후가 화병이 나 죽게 만든다면 우리 감찰원 입장에서는 멋진 미담이 되겠죠.”
그런데 범한은 왕계년이라는 중년 남성의 재미없고 썰렁한 농담이 귀찮아 이미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든 상태였다. 만약 언빙운이 무탈하게 경국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곧장 감찰원 윗자리로 올라갈 게 분명했다. 그에게는 네 해 동안 북제에서 경국 밀정이 활동할 기반을 닦은 공과 최근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는 전적이 있어서였다.
189화
더군다나 그의 부친 언약해는 4처의 수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1처 수장 자리가 아직 공석이다 보니 감찰원 내부 인사들도 진평평 원장이 북제에 감금된 언빙운을 1처 수장 자리에 앉히려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의외의 사건만 터지지 않는다면 범한은 자신도 점차 감찰원의 모든 걸 접수해 나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진평평 원장이 죽은 후가 되겠지만 그래도 범한은 훨씬 나중에라도 아니면 훨씬 일찍 그런 날이 오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감찰원을 제대로 장악하려면 8대처에 있는 사람들부터 틀어쥐어야 했다. 한데 이는 범한에게는 가장 큰 문제였다. 3처와 8처를 제외하고는 감찰원 내부에 자신의 측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이번 북제행을 통해 언빙운과 우의를 다지고 1처와 4처의 지지를 한꺼번에 얻어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언빙운은 첫 만남에서부터 자신에게 은근히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걸까? 그런데 범한은 언빙운이 굳이 적의를 숨길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에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대인, 시간이 되었습니다.”
왕계년이 옆에서 조심스레 일러 주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사신단 거처를 나섰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사촌 형제 임정과 임문이 ‘정사 대인이 오늘은 또 어디를 가시려고 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사신단 거처 밖에는 장영후가 보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의 누군가가 이미 말을 전했는지 사신단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어림군은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기들 대신 마차를 호위해 북제 상경의 최대 번화가인 태평항 골목으로 가는 걸 묵인했다.
하늘에서는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데 이 빗물은 마차 행렬이 지나간 흔적을 순식간에 삼켜 버리고 있었다.
경국 감찰원 제사 범한은 오늘 북제 금의위의 진무사 심중 대인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밀정 우두머리와의 만남이니 아무래도 모든 게 범한에게는 신비로울 수밖에 없었다.
빗방울이 마차 지붕 위로 떨어지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있었다. 범한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마차가 드디어 멈추어 섰다.
범한은 두 손으로 마차 문을 열고 살며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비 내리는 마차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머리 위에는 일찌감치 우산이 있었다. 그리고 우산이 비바람을 막아 준 덕분에 주변 골목에서 불어오는 봄의 찬 기운만 우산 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온통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왕계년이 범한 머리 위로 우산을 들고 있었다. 왕계년 뒤로는 등에 긴 칼을 찬 일곱 명의 호위들이 조용히 두 줄로 범한의 양옆에 늘어서 있었다.
범한은 오늘 깃털로 장식된 짙은 색 외투를 입었다. 외투 안에는 흰색의 장삼을 입고 있었고 또 그 안에는 경도를 떠날 때 챙겨 두었던 잠행복을 입고 있었다. 수수한 차림새 속으로 궁사의 의상을 입고 여기에 영웅 같은 얼굴을 더하니 범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범한 제사님, 이리로 드십시오.”
길 안내를 맡은 금의위가 무표정하게 손을 내밀며 범한 일행을 어느 후원 안으로 인도했다. 후원은 옆쪽으로 난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앞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청루 후원이었군요.”
길잡이 금의위의 얼굴이 아까보다 경직되었지만 그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제사 대인의 청력이 참으로 놀랐습니다. 이곳은 반산림의 후원입니다. 심중 대인께서는 이곳에서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범한은 반산림이란 곳을 알고 있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북제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기루로 북제의 개국 황제가 자주 들르던 곳이다. 이에 범한은 미소 띤 얼굴로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 석판 위에 고인 물을 밟으며 후원으로 들어갔다. 후원으로 들어서니 겹겹이 둘러쳐진 대나무, 층층이 쌓인 가짜 산 그리고 사방에 깔린 금의위 밀정들이 보였다.
왕계년은 줄곧 우산을 들고 있었고 일곱 명의 호위는 묵묵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앞장서서 쏜살처럼 나아가고 있는 범한을 따라 냉랭하고 자신만만하게 후원 내 깊숙이 자리 잡은 곳으로 향했다.
어린 대인과 그의 일행은 가는 내내 배짱 두둑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같은 일을 하는 적국 금의위에게는 살짝 놀랍게 느껴질 정도였다.
* * *
왕계년이 우산을 접고는 조용히 범한의 뒤를 따랐다. 범한은 뒷짐을 지고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꽤 넓은 거실에 들어와 있었다. 거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공간은 여러 양식으로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원탁은 열대여섯 명 정도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딱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평범한 부자처럼 보였다. 비단 모자를 쓰고 손가락에는 커다란 옥가락지를 끼고 있었다. 이자는 게다가 너무나도 평범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범한이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범상치 않은 싸늘한 눈빛을 뿜어내며 범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범한 제사입니까? 오래전부터 흠모했는데 오늘 보니 역시나 비범한 사람이었군요.”
일상적인 인사치레의 말이었으므로 범한은 즉시 반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잠시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금의위들은 모두 자신을 제사라는 관명으로 불렀다. 그러니 오늘은 경국 감찰원과 북제 금의위 간의 만남이지 조정 간 외교 담판 자리는 아니었다.
범한이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로 목에 채워진 단추를 풀었다. 이때 단추를 교묘하게 풀어 걸치고 있던 얇은 외투가 그의 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왕계년은 일찌감치 범한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범한은 커다란 원탁 한쪽에 앉아 맞은편에 앉아 있는 부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썹이 그려 놓은 것처럼 두꺼운 걸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심중 대인께서는 천하 사람들을 차갑고 화난 눈초리로 바라보신다던데 제게는 어찌 이리도 겸손히 대해 주시는 건가요?”
이제 보니 이 사람은 북제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인 심중 대인이었다. 심중은 북방에서 금의위를 무수히 많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서 손꼽히는 대단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한데 이처럼 평범한 부자로 보일 줄이야. 만약 감찰원이 심중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기입해 놓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의 진짜 신분을 범한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겸손한 게 아닙니다.”
심중 지휘사가 탄식하며 대답했다. 그는 범한의 맑고 수려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절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한 대인이 시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고 하니 이 늙고 거친 이의 입장에서는 그저 탄복하게 되더군요. 두 달 전에 갑자기 범한이라는 시인이 남경 감찰원의 제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게…… 그게 본관으로서는 진평평 선생께서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범한 대인 같은 인물을 어찌 우리 같은 시궁창 쥐처럼 살게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심중 대인께서는 겸허하시군요. 천 리를 마다 않고 관직을 수행하는 것은 모두 돈 때문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 첫째는 조정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제 집안이 근심 걱정 없이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범한이 조금은 대놓고 말한 게 있다 보니 심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일을 하는 남쪽 조정 사람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체면이 좀 깎인 탓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고는 해도 말을 조금 막하는 걸 보니 심중은 진평평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남쪽의 무서운 황제도 왜 이 황당해 보이는 감찰원 인사에 동의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심중은 그 자신이 북제의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였지만 속으로는 경국 감찰원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그리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절름발이에게도 존경심과 더불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남쪽의 감찰원이 어떻게 황제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얻게 되었으며 그리고 황궁 사람에게 언제 헌 신발짝처럼 내쳐질지 몰라 조정에서 떨며 버티는 중인 자신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 건지 늘 궁금해하고 있었다.
살짝 정신이 흐트러졌던 심중이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상대방이 정사라는 직위에 있으며 왜 장영후를 통해 자신을 만나려는 모험을 한 건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거래에 어마어마한 이득이 걸려 있기는 해도 그것 때문에 심중 자신과 북제 황궁이 흔들리지 않을 거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황금이나 은과 같은 걸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심중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다만 이 늙은이 입장에서는 그 일을 했을 때 우리 진무사가 어떤 이득을 보게 될지는 모르겠더군요.”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왕계년과 일곱 명의 호위들이 모두 물러났다. 심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거실에 있던 나머지 관련 없는 사람들도 모두 물러났다.
다만 심중 옆에 한 사람이 나가지 않고 앉아 있자 범한은 의아해하며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는 호화롭고 비싼 의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봤을 때 그의 미간과 눈매에서는 황가 사람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북제 황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도록 보낸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범한은 ‘그렇다면 저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이쪽은 최 공자입니다.”
심중이 소개했다. 그러자 최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에게 인사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오만함이 살짝 엿보였다. 이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경국 사람입니까?”
그러자 심중이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이 원래 알는 사이인 줄 알았습니다. 범한 제사께서 좋은 걸 알려 주었군요. 여기 최 공자는 경국 최씨 가문의 둘째 공자입니다. 경국에서 최씨 가문과 범씨 가문은 늘 함께 거론되고 있으니 둘 다 세도가 자제 아닙니까.”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심중 대인,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그러자 심중의 눈에서 순간 음험한 기색이 번뜩했다. 하지만 심중은 담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범한 대인은 거래를 하려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니 대인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사실은 말이지요, 대인이 제안한 거래는 본관이 수년 동안 해오던 것입니다. 그러니 범한 대인이 내게 얼마나 더 좋은 걸 줄지 알아야겠습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최 공자란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얼굴에서 무엇이든 읽어 내 보려 했다. 그러다가 범한이 갑자기 입을 뗐다.
“최 공자, 오늘 이 만남 자리는 공자가 원해 온 것입니까, 아니면 집안 어르신께서 원해 온 것입니까?”
“이리도 융숭한 자리에서 내 어찌 실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최 공자는 범한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이 이쯤 되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최 공자란 사람은 최씨 일족의 이익을 대표해 온 게 분명했고, 최씨 가문 뒤에는 당연히 저 멀리 신양 땅에 있는 장 공주가 있는 것이었다. 범한은 장 공주가 황실 금고에서 많은 이익을 가로채기 위해 밀수라는 경로를 이용할 거란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가 장 공주의 대리인을 이 자리까지 끌고 나오리란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최가 놈이 감히 이 자리에서 협상의 추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범한은 너무 화가 났다. 그런데 장 공주는 지금 자신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일을 망쳐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분명 최씨 공자의 독단적인 행동이란 뜻이었다.
범한이 자진해서 심중과 연락한 이유는 첫째, 관계를 트기 위해서였으며 둘째, 신양 장 공주의 돈줄을 칠 생각에서였다. 한데 북제 조정이 끼어들어 장난질을 칠 줄이야. 원래 아무도 모르게 거래해야 하는 계획이었는데 몽땅 들통나 버린 것이다.
범한이 씁쓸해하는 것처럼 보이자 심중이 미소를 지었다.
“범한 대인, 어찌 된 일인지 다 말해 주리다. 모두 돈 벌자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한데 최 공자와 범한 대인이 거래하려는 것 중에 겹치는 부분이 있지 뭡니까. 내가 양쪽을 다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해서 여러분의 의견부터 들어 보자 생각했지요.”
범한은 마음을 진정시킨 후 최 공자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최 공자께서는 이리도 큰 거래를 할 만큼 배포가 있는 분이셨군요.”
“어디 범한 대인만 하겠습니까.”
최 공자가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심중이 두 사람의 대화에 조금 난처했는지 잠시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최 공자도 세도가의 자제입니다. 집안 분 중 경국 조정에서 관직에 오르신 분도 여럿 계시지요. 최 공자가 지금은 외지에 나와 있어도 언젠가는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두 사람이 많이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심중이 말하는 내내 범한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이에 심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심중 대인, 제 신분을 잊으신 겝니까? 세도가 따위 제게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인사도 없이 곧장 거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일찌감치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왕계년이 맞이하러 나왔고, 일곱 명의 호위들도 긴 칼을 쥐고 후원 밖으로 나가는 대인을 호위했다. 한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심각해 금의위 중 그 누구도 감히 그들을 막아서지 못했다.
후원 밖에서 마차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범한은 그냥 그렇게 무례하게 떠나 버린 것이었다.
190화
심중은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범한이 이렇게나 격렬하게 반응할 줄 예상 못 한 탓이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이익을 둘러싼 별의별 협상을 다 겪어 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생전 처음이었다. 범씨 성의 나이 어린 제사가 보여 준 행동과 방식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의외였던 것이다.
그가 눈을 잠시 굴리고는 몸을 돌려 온화한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
“최 공자, 범한 대인이란 자는 참으로 기분파군요.”
최 공자는 앞서 범한이 내뱉은 말 때문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세도가 따위, 범한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고? 대체 범씨 가문이 뭐 그리 대단한데!’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이를 박박 갈았다.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술을 들이켜 보았지만 화를 삭이기 어려웠다.
심중은 아무 말 없이 그런 최 공자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최 공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범한이 감찰원 소속이고 그가 장 공주의 사위란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새하얗게 질린 그가 원망과 독기를 품은 눈으로 심중을 바라보며 버럭 화를 냈다.
“심중 대인, 나를 속여 이곳까지 오도록 한 이유가 설마 죽이기 위해서였습니까!”
타국 대지에 내리는 밤비건만 비는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범한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옆에 있는 왕계년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감찰원에 밀서를 써서 최씨 가문과 신양 장 공주 쪽과의 관계를 조사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왕계년이 범한을 슬쩍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 공주 쪽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움직일 수 없다는 건 나도 압니다.”
범한은 장 공주가 하고 있는 그 일들이 실은 모두 황제 폐하의 묵인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 심중과의 만남에서 기분 나쁘게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되자 어떤 생각이 더 견고해졌다.
“그냥 신양 쪽이 조정에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지 명확히 알고 싶어서예요.”
“알겠습니다.”
왕계년은 대답을 마쳤지만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 최 공자란 자가 아직도 밖에 꿇어앉아 있습니다. 대인, 일어나라고 안 하실 건가요? 최씨는 경도에서 꽤 큰 일족 중 하나로 그들 중에는 조정 고위 관료도 있습니다.”
범한은 감찰원에서 보내온 정보를 주시하느라 왕계년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요 며칠 사신단은 상경에 있었지만 언빙운이 돌아오기 전에는 북제에 깔아 둔 첩보망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정보 범위가 어느 정도는 축소될 수밖에 없어 범한은 골치가 아픈 상태였다.
잠시 후, 범한이 그제야 왕계년의 말을 들은 것처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계속 꿇고 있게 둬요. 경국 사람이 북제 사람에게 이용이나 당하다니 장모님 대신 좀 혼내 줘야겠습니다.”
* * *
비가 점점 잦아들자 처마 위에 있던 물방울이 아래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곳 사신단의 거처는 지어진 지 오래된 건축물로 빗물이 떨어지는 곳은 미세하게 움푹 파여 있었다. 범한은 옷을 걸치고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돌계단 앞에 꿇어앉아 있는 최 공자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신단 내 다른 사람들은 일찌감치 이 작은 안뜰은 피해 다니고 있던 터라 여기는 유난히도 조용해 보이는 곳이었다.
“북쪽에서 당신네 가문이 장사를 하려면 어찌해야 할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범한이 흠뻑 비에 젖은 최 공자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오늘 일과 관련해서는 우선 살려 주겠습니다. 신양으로는 서한을 보냈으니 장 공주마마께서 당신을 어찌 처리하시든 그건 당신네들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상경에 있는 동안에는 북제 사람들과 당신이 함께 있는 꼴은 안 보았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최 공자는 땅에 물이 고여 있는데도 상반신이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바닥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감히 입도 뻥끗 못 했다.
“다시 한번 일러두죠. 나는 감찰원의 제사입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장 공주마마의 비호를 받고 있어도 내가 당신네 최씨 가문을 엿 먹이고 싶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아 둬야 할 겁니다.”
범한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너무 거칠게 위협했나요? 한데 당신처럼 우둔한 사람에게는 똑똑히 말해 둬야 합니다. 안 그러면 또 북제 사람에게 끌려 나와 그들을 돕고 있을 게 뻔하니까요. 그래서는 안 되겠죠?”
최 공자는 여전히 비참한 몰골로 고통스럽게 꿇어앉아 있었다. 그가 반산림 후원에서 정신을 차리고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음을 알게 되었을 때 범한이 감찰원 소속인 건 차치하고 그가 장 공주의 사위란 사실만으로도 최 공자 자신은 상대방에게 별 볼 일 없는 땅강아지일 뿐이었다. 오늘 그가 멋대로 감찰원이 북제와 어떻게 거래하는지 보려 했던 건 원래는 장 공주 입장에서 저지른 일이었다. 하지만 범한이 자신을 제대로 상대하려 했을 때 장 공주가 자신을 향한 비호를 거둘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범한의 권세를 놓고 봤을 때 세도가 따위가 눈에 안 차는 건 당연했다.
“솔직히 말해 주죠.”
범한이 최 공자를 바라보며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똑똑히 말했다.
“당신은 장 공주마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내가 당신을 난처하게 할 수는 없어요. 하나 내가 하려는 일들이 있으니 당신이 지금 상황을 똑똑히 알았으면 좋겠군요.”
“네, 범한 대인.”
최 공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우리 모두 경국의 신하입니다. 조정에서 서로 어떤 사이인지는 떠나, 나라 밖으로 나온 이상은 모두 같은 경국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 사람에게 우습게 보여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내가 화냈던 겁니다.”
* * *
이 작은 사건으로 신양 쪽은 사신단을 향해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북제는 범한이 지닌 힘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경국 감찰원의 힘을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심중은 원래 신양 쪽과 거래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영후를 통해 들어온 거래 제안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형세를 보니 전해 들은 말이 정말인 것만 같았다. 들은 대로 범한이 내년에 황실 금고를 손에 넣게 된다면 장 공주는 권세를 잃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심중의 진무사는 범한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고 이는 곧 큰돈이 들어오는 통로 하나를 끊어 버린 것이었다.
이번 일은 북제 황궁에서도 알고 있었다. 이에 황태후가 심중을 매섭게 질책했고 심중은 ‘범 제사가 제게 흥정할 기회도 주지 않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라고 생각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 했다. 더군다나 최 공자가 그날 밤 곧장 사신단으로 찾아가 밤새 문밖에서 꿇어앉아 있었다는 소식이 금의위 귀에도 들어가자 이것을 계기로 심중은 범한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사실 범한은 심중과 거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심중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도 그때마다 냉정하게 물리며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는 모양새를 취했다.
“대인,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왕계년은 범한의 심복 중에서도 심복이라 감찰원에서도 모르는 수많은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 공주 쪽에서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대인이 신양 장 공주에게 대적하기 위해 많은 일을 몰래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최근 범한이 장 공주와 화해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으니 왕계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하려는 걸 다른 이들이 모르게 하고 싶어요.”
범한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왕계년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장 공주는 지금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약간이나마 이득을 봐야겠지요.”
왕계년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그 이상은 설명해 주지 않았다.
* * *
그날 오후, 마차 한 대가 쪽문을 통해 사신단 거처로 들어왔다. 허름하고 평범해 보이는 마차는 꾸밈새나 마부의 차림만 봐도 이상한 점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신단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감도는 긴장감을 똑똑히 감지할 수 있었다. 마차 바깥 부분에 모호하지만 온통 북제 금의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였다.
범한이 마차를 보며 현재 상황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말을 툭 내뱉었다.
“이제 보니 사리리도 상경으로 온 것 같군.”
희고 얇은 옷을 입은 젊은이가 마차 문을 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제자리에 서서 머리 위 하늘을 바라보며 살며시 눈을 찡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숙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는 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감찰원 소속이란 걸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에 입꼬리가 절로 위로 올라가더니 엷게 미소를 지었다.
범한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귀한 사람을 대하듯 언빙운의 오른손을 잡아 부축하고는 조심스레 마차 아래로 향하며 말했다.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경국 사람에게는 사신단이 머물고 있는 곳은 고국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빙운은 1년 동안 갇혀 지내면서 일찌감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소은과 자신을 맞바꾼 협의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사신단이 머물고 있는 땅을 밟고 범한 대인의 환영사를 듣는 순간 무언가 울컥하는 게 있었다.
작은 안뜰에는 홍려사에서 나온 문관은 없었고 일곱 명의 호위를 빼면 모두 사신단에 잠복해 있는 감찰원 관원들이었다. 이에 이들은 힘겹게 이 자리까지 온 젊은이를 향해 한목소리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언빙운 대인을 뵈옵니다!”
결코 격앙되지도, 쩌렁쩌렁 울려 퍼질 만큼 크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언빙운은 잠시 웃더니 자그마한 소리로 몇 마디만 했다.
“이렇게 살아 나오다니 참으로 이상하네요.”
여전히 그의 손을 부축하고 있던 범한이 웃었다.
“손톱이 몽땅 뽑힌 건 아니었군요. 내게는 그게 이상합니다.”
감찰원의 미래 두 지도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 순간 서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 * *
언빙운이 사신단으로 돌아왔으니 이번 북제 파견 임무는 절반이 완성된 셈이었다. 이에 범한은 큰맘 먹고 왕계년에게 몇 마디를 건넨 후 언빙운을 부축하고 내실로 들었다. 그가 언빙운에게 말했다.
“옷을 벗어 보세요. 내가 좀 세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언빙운은 오해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에 몸에 두르고 있던 흰색 의복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그러자 날렵하고 균형 잡힌 맨몸이 드러났다. 범한은 경도 3처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느꼈던 기분이 떠올라 눈썹을 씰룩였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상자에서 약이 든 함을 꺼내 손가락으로 약을 떠 언빙운 몸 위에 고루 펴 발랐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의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당신이 운이 좋은 사람인 줄만 알았습니다.”
냉담하게 입을 연 언빙운이 말을 이어 갔다.
“하나 하관의 몸에 있는 상처를 보고도 침착하신 걸 보니 범한 제사께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분 같습니다.”
범한의 손가락이 언빙운의 가슴팍에서 멈추었다. 뼈가 크게 부풀어 오른 것으로 보아 분명히 부러졌던 흔적이다. 바깥쪽으로 붉게 새 피부가 돋아나기는 했지만 얼핏 보기에도 매우 흉측했다.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모르니 그리 말하는 거겠죠.”
“저는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언빙운이 냉담하게 범한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범한 대인, 대인이 열두 살이 되던 해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많이 알고 있답니다.”
범한은 살며시 고개를 갸우뚱한 채 아무 말이 없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언빙운도 조금 전 화제에 대해서는 계속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침묵했다. 그러다 잠시 후 언빙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한데 상처에 바르는 약은 하관이 대인보다 조금 더 잘 만들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잠시 후 하관이 처방전을 쓸 터이니 약재로 쓸 부재료 몇 가지 좀 사신단 사람을 시켜 사다 주십시오.”
범한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상처에 약을 발랐다. 그리고 여기에 어렸을 때 배운 상처 치료 방법을 가미했다.
“이거나 드세요.”
범한이 환약을 언빙운 입에 막무가내로 집어넣고는 냉정하게 말했다.
“천하에서 상처와 독을 치료하는 데 비개를 따라올 자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게 군소리 그만해요.”
191화
“비개가 누구입니까?”
“감찰원에 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대인께서 말한 자가 혹시 비 노인입니까?”
“바로 그 늙은 괴물입니다.”
범한은 모든 조치를 마치자 사람을 시켜 따뜻한 물을 떠 오도록 했다. 그 물에 깨끗하게 손을 씻고 물기를 닦아 내고는 언빙운에게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고문을 받아 심맥이 다친 상태입니다. 그러니 무공 실력이 회복된다고는 해도 크게 손상되어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친 범한은 상대방의 표정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한데 언빙운의 얼굴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범한은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리고 냉담해 보여도 기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젊은이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노라 결심했다.
“귀국하면 몸조리부터 해요. 치료를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뽑힌 손톱은 다시 자랄 테고 어긋난 뼈는 7처 대머리에게 다시 부러뜨리도록 한 후 내가 치료해 주겠습니다. 그러니 진평평 원장 대인처럼 절름발이가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범한은 농담을 하고 있는데 언빙운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감찰원 사람들과 천하에 숨어들어 있는 밀정 중 그 누구도 자기 옆 사람에게 진평평 원장을 감히 절름발이라고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언빙운이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이 마치 사건 뒤에 있는 진상을 꿰뚫어 보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예를 들어 이렇게나 젊은 범한이 왜 벌써 감찰원 제사가 되었느냐와 같은 것 말이다. 바로 이때, 무언가 후끈한 느낌이 그의 가슴을 훅 치고 올라왔다. 그는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지만 느닷없이 밀려드는 통증에 눈썹 꼬리 부분이 움찔했다.
“괜찮습니다. 독을 몰아내는 중이에요. 오랫동안 몸 안에 있던 독이 무엇인지 몰라 조금 독한 약을 썼습니다. 하나 내가 옆에 있으니 죽지는 않을 겁니다.”
범한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언빙운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참아요.”
언빙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증이 극심했는지 잔뜩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염병할, 중독됐을 때보다 더 힘들군요. 대체 무슨 약입니까?”
그러자 범한은 기뻐하며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바닥까지 쳐가며 감탄했다.
“언 형이 그런 욕도 할 줄 알다니! 그랬었군요. 대체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그런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겁니까? 북제 금의위 앞에서는 멋진 척해도 되지만 내 앞에서는 그런 수는 쓰지 말아요. 어려서부터 지겹도록 봐왔답니다.”
범한이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봤다는 건 멋진 오죽 아저씨를 두고 한 말이었다.
“해독하는 방법은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저로서는 대인이 미덥지 않습니다.”
약을 바른 상처 부위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오자 언빙운이 싸늘하게 던진 질문이었다.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언빙운의 눈에서 잠시 이상한 빛이 번뜩였지만 몸 안팎으로 밀려드는 어마어마한 통증에 그는 다른 건 다 잊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비개의 제자이시라고요?”
놀라움이 섞인 말투였다. 한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에게는 당신 같은 제자가 없는데요.”
“언제는 내가 열두 살 되던 해까지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안다면서요.”
범한이 꺼내 두었던 병들과 상자들을 치우며 놀리듯 말했다.
“그런데 어째 내 스승님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겁니까?”
언빙운은 범한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돌아보더니 턱을 괴고 언빙운 공자 몸에 난 지렁이 같은 상처를 보며 소리를 낮췄다.
“언 형, 그런데 언 형께서는 왜 나를 볼 때마다 그리 노기등등한 얼굴인 겁니까?”
범한은 언빙운의 태도가 가시라도 박힌 듯 계속 거슬렸던 터였다. 그래서 언빙운을 굴복시키려면 우선 상대가 자신에게 강한 심리적 반감을 갖고 있는 이유부터 알아내고 그것을 제거해야 했다. 그러니 만약 이번에 알아내지 못한다면 훗날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불편해질 게 뻔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언빙운은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몸 안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점차 사라지자 북쪽에 잠입해 있던 감찰원 밀정 우두머리의 판단력은 살짝 흐려지기 시작했다.
우선 범한의 예쁘장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냥 미웠다. 그리고 그동안 북제 조정과 재야에서 목숨을 걸고 지내 온 자극적인 삶이 생각났다. 그러자 통제력을 잃은 생기 없는 두 입술에서 단어들이 속박을 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제사 대인, 아직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다섯 해 전에 담주에서 험악한 사건이 벌어졌지요.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요.”
상자를 닫고 있던 범한은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범한은 당연히 그때 살인 사건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자신에게는 첫 살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자객의 목구멍에서 터진 차가운 밤알은 아직도 범한의 손바닥을 자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일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그러자 언빙운이 괴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자객은 4처 소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제가 여기 북쪽까지 와 쥐새끼 노릇을 하게 된 거고요.”
“그래서 내가 밉습니까?”
말을 마친 범한은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 후 갑자기 쾌활하게 웃었다.
“내가 보기에는 언 형이 내게 고마워해야 옳습니다.”
* * *
“왜죠?”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 조금 가신 언빙운이 조금 의외란 생각을 하다가 냉정을 되찾고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언빙운의 두 눈을 주시하며 한 자, 한 자 똑똑히 말하기 시작했다.
“내게는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언 형은 뼛골까지 밀정이고 이런 생활을 즐기고 있거든요. 그러니 네 해 전에 북제에 잠복했을 때는 날마다 불안하고 긴장되었겠지만 그래도 본인 입장에서는 자극적이면서도 충실한 삶이었을 겁니다.”
그러자 언빙운이 대꾸했다.
“그렇게 좋은 거라면 대인께서 그리 한번 살아 보시지요.”
범한이 잠시 웃고는 의원처럼 약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방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손을 뒤로 뻗어 문을 닫고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후 손톱 안에 끼워 둔 미약을 상자 가장자리에 밀어 넣으며 속으로 자신에게 경고를 날렸다.
‘내 사람에게 미약을 쓰는 건 딱 오늘 한 번뿐이다!’
언빙운은 역시나 대단했다. 가라방을 썼는데도 금방 깨어났으니 말이다. 그러니 만약 자신이 언빙운에게 미약을 썼다는 걸 들키기라도 했다면 둘의 관계는 절대 융합될 수 없는 지경이 됐을 거라 범한은 생각했다.
언빙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범한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가 자신을 아니꼬운 눈으로 보는 이유를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언빙운과 자신이 그리 이상한 인연으로 얽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섯 해 전 담주에서 일어난 미결 살인 사건으로 언빙운은 북쪽으로 오게 되었고 감찰원의 북제 밀정 우두머리까지 되었다. 그리고 다섯 해가 지난 지금, 언빙운을 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사람이 범한 자신인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범한은 세상일이란 언제 다시 돌고 돌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 * *
“대인, 술 가게 주인 성회인이 술을 가져왔습니다.”
부하 하나가 범한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여러분이나 만나 봐요. 나는 그자가 보고 싶지 않네요.”
부하들이 대답을 하고 곧장 밖으로 나가자 범한은 이맛살이 찌푸렸다. 최 공자에게 훈계를 좀 했더니 신양 쪽에서 곧장 서한을 보내오다니 장 공주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왕계년이 손에 서한을 쥐고 들어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성회인이 가져온 서한입니다.”
범한은 봉투를 뜯고 서한의 내용을 세세히 읽어 나갔다. 그리고 미간에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이자들이 대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 거야!”
범한이 눈썹을 한번 씰룩이고는 후원으로 향했다.
범한이 문을 여는 순간 언빙운은 곁에 둔 검에 손을 얹으며 경계했다.
“마음 놓으세요.”
범한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당신을 암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언빙운이 서서히 두 눈을 뜨고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에 쌀쌀맞은 기색을 드러냈다.
“제게 무슨 약을 썼습니까? 왜 머리가 계속 어지러운 거죠?”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약입니다.”
범한이 조용조용히 설명을 해나갔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모가 많은 상태입니다. 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면 잠을 제대로 자야 합니다. 한데 생각했던 것보다 대인의 몸이 약물에 저항을 해 안타깝지만 쓸모가 없었을 뿐이고요.”
범한은 앞서 미약을 사용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때 그의 순진무구한 얼굴은 자신이 저지른 이상한 짓을 가리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언빙운은 범한이 되돌아온 걸 보면 분명 무슨 질문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에 범한의 손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말했다.
“범한 대인,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범한이 손에 쥐고 있던 서한을 흔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장 공주마마의 서한입니다.”
언빙운은 조금 놀라웠지만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그것과 하관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경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언빙운 대인은 경국 감찰원이 북제에 파견한 밀정의 총지휘관입니다.”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조정 일이라 언빙운 대인의 의견을 들어 보려고요.”
“대인, 말씀하시지요.”
언빙운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 * *
범한이 신양 쪽에서 연속으로 보내온 두 개 서한의 내용을 말해 주자 언빙운의 미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흰 눈썹이 몇 가닥 섞여 있어 언뜻 보면 맥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런 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장 공주마마께서는 왜 이런 일들에 관여하시는 겁니까?”
이에 범한이 말해 주었다.
“이번 일에 감찰원이 손을 대야 하는지 대인의 의견을 묻고 싶었습니다.”
언빙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감찰원에서는 소은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장 공주마마께서는 우리가 상삼호와 함께 소은을 구하기를 바라시는군요. 애초에 목적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어찌 따를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아예 자리까지 잡고 앉아 언빙운의 냉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문제는 일단 접어 두죠. 현재 북제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듣고 싶습니다.”
언빙운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세 가지 국면입니다. 첫째는 황태후, 둘째는 황제, 셋째는 상삼호. 한데 상삼호는 상경으로 불려 온 이상 세력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황태후와 황제 사이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매우 투박해 보이고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확신에 찬 판단이었다. 이에 범한은 침묵으로써 언빙운에게 계속 말하라는 의사를 표시했고 언빙운은 그렇게 했다.
“대인의 말씀대로 소은은 상삼호의 양아버지이고, 고하 국사가 소은이 죽기를 바란다면 상삼호는 황제 쪽으로 기울 게 분명합니다.”
“왜죠?”
“황태후는 분명 고하의 말을 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망설이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황태후는 아직도 상당히 젊던데…… 한데 고하 국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건가요?”
언빙운은 놀라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얼굴은 말끔한데 생각은 자질구레한 젊은 대인이 자기 말뜻을 오해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에 범한을 얕보는 것처럼 바라보고는 말했다.
“대인이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언빙운의 설명으로 범한은 ‘원래 그런 거였구나.’라며 알게 되었다.
경국에서 세 차례 북벌을 진행하는 동안 전(戰)씨가 그 틈을 타 북제를 세웠다. 그런데 나라를 세운 황제는 열두 해 전에 불행히도 사망했고, 황후와 겨우 몇 살 되지 않은 황세자만 넓고 휑한 황궁에 남게 되었다.
경국이 북벌을 멈춘 상태이기는 했지만 악독한 진평평 원장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북제 상경에 남아 있는 일부 이전 왕조 사람들과 전씨 가문의 방계 귀족들에게 자금을 대며 황궁을 압박하라고 사주했다. 그리고 과부와 고아가 된 황후와 황태자가 반역자들에 의해 황궁에서 끌려 나오게 된 순간, 고하가 전청풍 총독의 친구 자격으로 황궁으로 들어갔다.
당시 3천 명에 이르는 병사가 황궁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고하는 대전 앞에 떡 버티고 앉았다. 이때 고하 뒤로는 불쌍한 모자와 촛대며 빗자루를 들고 벌벌 떠는 한 무리의 내관과 궁녀만 있을 뿐이었다.
무수히 많은 창과 화살이 겨누고 있는 가운데 고하 홀로 대전 앞에 앉아 있었지만 그 누구 하나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192화
그사이 황후의 남동생, 즉 지금의 장영후가 황궁 한구석으로 난 하수구 구멍으로 기어 나갔다. 그런 후 금의위 심중과 몰래 접촉해 황실에 충성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고 반역자들을 죽인 후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로써 위태로웠던 북제 상경의 국면은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하는 이 일과 관련해 그 누구도 추궁하지 않았다. 황후 역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에 황궁을 겁박했던 왕족과 귀족들은 당시에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후 자연스레 험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쨌든 지금 황태후가 된 황후가 안정적으로 황궁에 있을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모두 고하라는 한 사람의 명망과 그자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실력 덕분이었다.
* * *
“고하, 정말 미쳤네!”
범한이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혼자서 천군만마를 막아 내다니 천만이 덤벼도 거뜬하겠어. 대단해. 실로 대단해!”
언빙운은 범한의 말투가 너무 저속해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4대 종사에게 너무 존경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아 몇 마디 했다.
“고하는 4대 종사 중 한 분으로 초월적 존재이십니다. 그분이 나서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꺼리게 되는 거죠.”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궁을 에워싸고 있던 바보들이 동시에 화살을 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고하도 어쩌지 못했을 거예요.”
“그때 고하는 피의 맹세를 했습니다. 누구든 감히 용좌에 앉는다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말이죠.”
언빙운은 순간 감찰원의 제사 대인이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어 갔다.
“고하처럼 무서운 실력자라면 여기 북쪽 천하에서는 누구든 죽이고 싶다면 그냥 죽여 버렸을 겁니다. 그리고 용상에 궁둥이만 살짝 걸쳐도 곧장 몸에서 머리가 분리될 판인데 그런 황제를 누가 하고 싶었겠습니까?”
“대종사라…….”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생처음 초월적 실력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성가시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범한 대인은 젊고 장래가 유망하니 대종사도 별거 아닌 걸로 보이십니까?”
언빙운이 냉담하게 범한을 쳐다보았다.
범한은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천하 4대 종사 중 직접 만나 본 건 섭류운뿐이었다. 그때는 섭류운의 노랫가락이 정말로 듣기 좋다고만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명성은 없는, 그런데도 그들 4대 종사와 동등한 실력을 지닌 오죽 아저씨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터라 그는 섭류운에게는 전혀 마음의 동요란 게 일지 않았었다.
“상경에 관해서 계속 얘기해 줘요.”
그런데 범한은 손을 들어 잠시 먼저 말하고 넘어가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만약 황태후가 고하의 말을 듣는다면 고하가 소은을 죽이려 드는 거니…….”
언빙운이 중간이 끼어들었다.
“대인은 왜 고하가 소은이 죽기를 바란다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나에게도 나만의 정보원이 있습니다.”
범한은 웃기만 할 뿐 해당타타와의 일과 신묘의 비밀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상삼호는 황제에게 붙어서 황제와 연합한 사람들의 힘을 모아야 늙은 소은의 목숨을 지킬 수 있을 테고……. 언빙운 대인, 대인이 보기에 우리가 그 속에서 이득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언빙운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미소를 지었다.
“실력으로 치면 북제는 약자가 아니었습니다. 최근 네 해 동안 저 역시 수없이 많은 걸 봐왔으니……. 하지만 우리 경국과 비교한다면 북제는 영원히 승기를 잡을 수 없을 거라 믿습니다.”
범한은 그가 왜 갑자기 그러한 결론을 내렸는지 이해가 안 돼 살짝 의아했다. 한데 언빙운은 기분 좋게 웃기 시작하며 말을 이어 갔다.
“조정이 소은을 북제로 돌려보낸 것만 봐도 요 1년 동안 북제 황태후와 황제 사이에 겨우 유지되던 균형과 평화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관은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그러한 계획을 세운 분에게 말이죠.”
소은이 귀국할 수 있게 만든 인물은 장 공주였다. 그래서 범한은 차분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범한이 말했다.
“그다지 감탄할 거리가 못 됩니다. 그 거래의 대가가 대인 본인이었다는 걸 안다면 말이죠.”
“무슨 뜻입니까?”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장 공주마마께서 언빙운 대인을 직접 북제 조정에 넘기셨습니다. 그런 후 상삼호와 짜고 소은을 북제로 돌려보냈고요. 소은 때문에 북제 조정에 풍파가 조금 일기는 했는데 대인은 그 파도가 대체 얼마나 커질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대인은 높은 분들에게 휘둘리는 장기판의 장기짝에 불과했어요. 아무리 장기짝이라고 해도 자각이란 걸 해야지요. 대인처럼 자기 머리를 쥐고 있는 손에게 감탄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갑니다.”
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범한이 언빙운의 마음에 장 공주에 대한 미움의 씨앗을 심으려 일부러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예상과 달리 언빙운의 얼굴은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오히려 계속 범한에게 훈수하는 말만 했다.
“이번 일에 우리가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소은의 생사를 고하가 쥐고 있는 이상 사신단은 타국에 있는 입장이니 끼어들 능력도, 끼어들 필요도 없는 겁니다.”
“언 대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범한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내게 다른 일이 하나 더 있는데 듣고 의견을 주었으면 합니다.”
범한은 최 공자와 있었던 일을 언빙운에게 말했다. 그러자 언빙운은 또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대인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범한은 한동안 침묵했다. 한데 말문이란 건 일단 열리면 자연스레 계속 말하기 마련이다.
“감찰원의 의견을 따르면 신양이 북쪽에서 얻는 이익을 점차적으로 축소해야 합니다.”
“감찰원의 의견이요?”
언빙운이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소리를 낮췄다.
“제사 대인께서 내년에 황실 금고를 관리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자 범한은 못 들은 척하며 미소 지었다.
“언빙운 대인은 감옥에 반년이나 갇혀 있었는데도 소식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네요.”
* * *
오랜 침묵이 흐른 후 언빙운이 문득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일을 왜 저와 논의하시는 겁니까?”
“북쪽 노선들은 대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중에 첩보망을 거두어들이는 날이 온다 해도 그래도 지금부터 바짝 주시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언빙운 대인께서 떠나고 나면 내가 북쪽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어서입니다.”
언빙운이 차분히 말했다.
“범한 대인께서는 하관을 너무 대단하게 보시는군요.”
“언빙운 대인이 단순히 환자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범한이 냉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언빙운 대인이 그걸 바라신다면 여전히 북쪽을 호령하는 인물로 남아 있을 수 있으리라 믿거든요.”
“제가 왜 대인을 도와야 합니까?”
“내가 대인의 상사니까요.”
범한의 낯빛이 점점 싸늘해졌다.
“지금 언빙운 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해 주시길 요청하는 겁니다.”
언빙운은 이 식상한 말에 넘어가지 않고 싸늘하게 웃었다.
“제사 대인께서 감찰원을 제대로 이어받는 날 다시 얘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요.”
범한이 웃기 시작하더니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이런 장난이 안 통하리란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범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매우 간단한 이유에서입니다. 장 공주마마는 우리의 공동의 적이거든요. 그러니 나만 언빙운 대인이 필요한 게 아니라 생각해 보면 언빙운 대인에게도 내가 필요하답니다.”
언빙운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툭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제사 대인의 계획은 처음부터 제대로 잘못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거죠?”
“만약 장 공주마마의 밀수로 벌어들이는 이익을 차츰 줄여 나갈 작정이라면 심중을 찾아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심중은 금의위 진무사의 지휘사로 줄곧 북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찾아가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를 찾아가야 했나요?”
언빙운이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심중과 장영후, 이들은 모두 황태후의 측근으로 그들과 장 공주마마의 거래는 이미 여러 해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만약 다른 방도를 생각 중이라면 왜 젊은 황제는 찾아가시지 않은 겁니까?”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황제의 생각을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북제 황제는 순수해서 쉽게 흥분하는 사람입니다.”
언빙운이 당부하듯 손가락 하나를 들더니 설명을 이어 갔다.
“순수한 급진파에게는 은자를 써야 합니다.”
범한이 언빙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잠시 후 입을 뗐다.
“언빙운 대인의 말을 믿겠습니다.”
“지금은 저를 믿으셔도 됩니다.”
언빙운이 맞받아쳤다.
한 시름 놓은 범한이 언빙운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말아요. 지금 세계는 저들의 것이지만 결국에는 우리 것이 될 겁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방을 나섰다. 자신의 이상한 말을 곱씹고 있는 언빙운을 뒤로한 채.
* * *
그 후로 연속 사흘 동안 사신단은 북제와의 외교 사무를 처리했다. 한편 그사이 범한은 언빙운과 함께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언빙운 역시 더는 숨기는 것 없이 자신이 쥐고 있던 정보들을 범한과 함께 분석하면서 향후 행동 방향을 결정했다.
신양 쪽과 마찬가지로 북제 황태후 쪽도 시간 끌기 작전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어떻게든 황궁 쪽과 접촉해 볼 필요는 있었다. 이에 범한이 상삼호 대장을 찾아가 봐야겠다고 했다가 언빙운에게 싸늘하게 저지만 당했다.
언빙운은 그런 일들 때문에 상삼호 대장을 직접 찾아갈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한이 상경에 와서 한 일은 그의 전문가적 안목으로 봤을 때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다.
이에 범한은 입 다물고 언빙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일에서는 자신이 언빙운보다 확실히 뒤처진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한담을 나눌 여유가 생기자 범한은 북제 밀정의 첩보망을 재정비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언빙운은 범한의 능력에 확신이 서지 않아 자신이 지니고 있던 밀정들의 정보를 계속 혼자만 꼭 쥐고 있었다.
하루는 식사 후 범한이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심 낭자는 매우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언빙운 대인이 사신단에 숨어 있는 걸 알고는 또 찾아오다니 말입니다.”
그러자 언빙운은 찬바람이 이는 얼굴로 몰인정하고 담담하게 답했다.
“심중에게 알리십시오. 자기 딸 일이니 그가 직접 처리할 것입니다.”
범한은 언빙운을 잠시 쳐다보았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젊은 관원이었다. 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마음이 이다지도 냉정하고 몰인정한지 문득 궁금해졌다.
경국의 사신단이 안정을 찾아 가고 있을 무렵 다른 세력들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술집 주인 성회인은 자주 술을 들고 찾아와 납작 몸을 낮추며 신양 쪽의 의중을 전달했다. 심중도 범한을 몇 차례 초대했다. 그런데 범한은 상대방이 신경질조차 낼 수 없는 적절한 핑계를 둘러대며 초청을 거절했다. 그런데도 장영후는 빈정이 상해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울상을 지은 채 몇 번이나 심중을 다그쳤다.
장 공주와 상삼호 간에 어쩌면 어떤 협의가 있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양 쪽은 북제에 굳게 뿌리를 내린 상태도 아니어서 시종일관 감찰원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범한의 설득 끝에 언빙운이 그의 계획에 동의했고 네 해 동안 깔아 놓은 밀정들의 첩보망을 움직일 준비를 했다.
남쪽에서 날아든 소식에 따르면 경국 조정은 겉으로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건 감찰원 보고서에 있는 최근에 산동로 쪽에서 발생한 수상한 살인 사건 몇 건뿐이었다. 살인범이 죽인 건 일반 백성이었다. 한데 그 행위와 수법이 너무나도 흉포하고 잔인했다. 원래는 형부에서 처리해야 했지만 줄곧 해결을 하지 못한 터라 지금은 감찰원 4처가 이어받아 처리하고 있었다.
범한은 이 살인 사건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언빙운 역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상경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고 지금 두 사람은 어떤 일을 준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193화
범한에게는 모든 연회 초대를 거절해도 될 만한 충분한 핑곗거리가 있었다. 최근 이틀 동안 한 촌부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였다. 이 시골 아낙의 손님이 된 이상은 심중이든 장영후든 그 누구도 감히 범한을 자기 손님으로 빼앗아 가지 못했다.
어느 조용한 골목에서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말이 사뿐히 하늘로 날아오르며 꽃밭에 앉아 꿀을 빨고 있던 나비들을 귀찮게 하고 있었다.
“자연은 하나의 천지이고 한 사람도 하나의 천지이니, 그리하여 천인합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일은 반드시 천지자연의 도를 따라야 하고, 그래야 둘 사이에 조화와 화합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조화와 화합은 겉으로 드러난 형상일 뿐이에요. 대인은 천인합일과 천인상통(天人相通: 하늘과 사람이 서로 통하다)이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 그 점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다만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조화와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것이 조화와 화합이라고요?”
“최고 경지의 조화와 화합이지요.”
* * *
“범한 대인, 오늘 이야기는 참신한 품격이 느껴져 듣는 내내 감탄했답니다.”
입으로는 감탄했다고는 말하지만 촌부 해당타타는 여전히 거리의 게으른 아낙처럼 두 손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발을 질질 끌며 걷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해 감탄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머쓱해진 범한이 코를 문질렀다. 그리고 황궁에서의 그날처럼 해당타타에게서 배운 ‘발을 땅에 질질 끄는 보법’으로 걸으며 여기가 비교적 한적한 골목이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사람들로 붐비는 곳을 함께 거니는 중이었다면 행인들에게 비웃음을 샀을 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침 해당타타가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이렇게 걷는 게 편하네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범한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사람이란 힘든 것보다 편안한 걸 좋아하니 그녀의 말은 꽤 일리가 있었다. 해당타타처럼 걸으면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 가슴을 펴고 걷는 것보다 훨씬 편한 건 사실이었다. 한데 정말로 게을러서 이러는 거라면 차라리 침대에 누워 있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라면 침대에 누워 있는 편이 더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해당 낭자가 원하신다면 우리 함께 침대에 누워 문학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심이…….”
그러자 해당타타가 범한을 잠깐 쳐다봤다.
범한은 궁색하게 웃기만 할 뿐 다른 변명은 하지 않았다. 범한은 해당타타라는 이 기묘한 여인과 함께할 때 남녀 간에 있을 법한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환생한 후 범한은 줄곧 여러 가지 재밌는 일을 경험해 보고, 재밌는 사람들을 만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북제행은 그가 원했던 정신적인 욕구를 많은 부분 충족해 주었다. 비록 내내 암살과 음모에 시달렸고 그게 재미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빙운과 해당타타라는 두 재밌는 사람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범한은 비교적 수지맞았다고 생각했다.
“듣자 하니 얼마 전 심중 대인과 만났다면서요?”
해당타타가 조심스레 물으며 거리에 늘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손으로 치웠다. 지금은 여름 초입이다. 한데 며칠 전까지 자주 비가 내려 날씨는 그다지 무덥지 않았고 나무와 꽃에도 아직 봄기운이 남아 있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하게 헤어졌어요.”
비록 고하가 조정 일에 초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황태후에게 힘을 보태 주는 사람이었다. 이에 범한은 해당타타가 질문한 이유를 금세 알아차렸다.
“불쾌하게 헤어졌다고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따스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범한 대인이 그리도 급히 제안하는 바람에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 일이 경국에까지 알려져 관리로서의 명성에 영향을 줄까 두렵지는 않나요?”
범한은 살짝 놀랐지만 그러한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낭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설명했다.
“대인의 제안에 황태후마마께서 매우 솔깃해하셨습니다.”
범한이 살짝 차분해진 낯빛으로 말했다.
“내가 요 며칠 문을 걸어 닫고 손님을 받지 않았다는 걸 해당 낭자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도 당신의 요청에 곧바로 나와 함께 산책한 이유는, 낭자가 비록 무도하강에서 공격하긴 했어도 속세 일에는 관심 없는 고수라 세상의 파리나 개 따위 일들은 언급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는데…… 본관, 해당 낭자에게 실망했습니다.”
“내가 미리 말하지 않으면 범한 대인이 더 크게 실망할 것 같아 그리했어요.”
해당타타는 영특해 범한의 교언영색에 속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황태후마마께서 범한 대인을 들라 하십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두 손을 모아 잡고 해당타타에게 예를 차렸다.
“해당 낭자, 황태후마마의 말씀을 전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범한 대인, 전에 진실함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함을 따르는 것은 곧 사람의 도라고 얘기했었지요?”
해당타타가 보석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범한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그 도리를 알면서도 어찌 행하지 않습니까? 진실함으로 사람과 일을 대하면 훨씬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요?”
범한은 숨을 들이마셔 체내의 이상한 패도의 정기를 천천히 운기시키며 해당타타에게서 전해져 오는 압박감에 저항했다. 범한이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진실함으로 사람과 일을 대한다 했으니 진실함의 크기를 말해 보죠. 진실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작은 도이고 진실함으로 천하를 대하는 건 큰 도이지요. 한데 해당 낭자가 진실함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 중이라면 어찌 제게 말해 주지 않는 건가요? 소은이 대체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기에 낭자의 스승님처럼 속세에서 벗어난 고수께서도 신경을 쓰고 계신 건지 말입니다.”
“진실함으로 천하를 대한다?”
해당타타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스승님께서는 진실함으로 천하를 대하고 계세요. 그렇기에 말을 아끼시는 거고요. 소은은 자신이 간직한 비밀 덕분에 스무 해 동안 생명을 보장받았어요. 그런데 만약 그 비밀이 세상에 흘러 들어가면 천하는 스무 해 동안 혼란에 빠지게 될 거예요.”
범한은 해당타타가 자기 주변 사람들도 모르는 일을 알고 있어 살며시 놀랐다.
‘설마 해당의 말처럼 신묘란 곳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걸까?’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청담(清談)의 도로 돌아왔다. 즉 현묘한 철학과 신학이 뒤섞인 내용을 가지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어쨌든 범한은 전생에 중국 중세 철학에 통달했었다. 그래서 동중서, 육구연, 왕양명의 이론에 몇 가지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덧붙여 해당타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한데 해당타타가 이 젊은이가 실은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했음을 알아차린 건 이 대화를 나누고 몇 년이 지나 그녀가 범한의 이론을 천천히 음미하며 정리하던 도중이었다.
* * *
이유는 모르겠지만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는 북제의 상경성에는 비가 자주 내리는 편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렴풋이 따스한 햇살이 비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살짝 찬 바람이 불더니 두 사람의 정수리를 덮고 있던 나뭇가지를 뚫고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범한은 지니고 있던 천 우산을 펼쳐 들고 해당타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 주었다. 평소 같으면 신분 때문에라도 수하가 그에게 우산을 씌워 줘야 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순전히 품위를 생각해 범한이 해당타타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게 당연했다.
빗물이 점점 길을 적셨다. 거리 위 범한은 평온한 얼굴로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실은 소심하게 해당타타의 걸음걸이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신발은 모두 물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일찌감치 촌부의 발걸음을 버렸고 이제 해당타타가 어떻게 걸을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당타타는 여전히 같은 걸음걸이로 걸었다.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순간 해당타타가 빗물에 담근 채 질질 끌고 있는 신발 아래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힘 같은 게 보였다. 온몸을 이용해 끌면서 걷고 있는데도 신발 바닥을 수면과 접촉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 정도의 공력이면 자신은 따라가지도 못할 수준이란 생각에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자조하듯이 말했다.
“해당 님은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군요.”
해당타타는 범한을 무시한 채 계속 똑같이 걸었다. 이에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 걷고 있는데 편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나는 언빙운이란 사람이 싫어요.”
해당타타가 갑자기 내뱉은 말이었다.
“해당 낭자는 산속 궁에서 지냈으니 우리 대경국의 재주꾼 언빙운 대인과는 교류가 없어서 그럴 겁니다.”
“여인을 속여서 자기 이익을 도모한 사람이에요. 그 점만으로도 나는 모욕적인 기분이 들어요.”
“우리는 관리이지 일반 백성이 아닙니다.”
범한이 언빙운을 옹호해 주었다. 그리고 언빙운 공자가 해당타타라는 9등급 고수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마디 더 덧붙였다.
“경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도 해야만 하거든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반박했다.
“추한 건 추한 거예요. 관리라는 신분으로 덮으려고 하지 말아요.”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무정하면 진짜 영웅호걸이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마음이 너무 유약하다면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범한 대인은 지금의 천하가 어지럽다고 보나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어지러운 법이지요.”
“범한 대인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영웅이 태어난다고 생각하나요?”
“영웅의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다만 후회 없이 이번 생을 사는 대장부가 되고 싶을 뿐이죠.”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다가 끊어지다가를 반복하는 가운데 둘은 작은 사당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신기하게도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그쳤다. 이곳은 상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고요했으며 주위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당 앞에 놓인 돌계단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있었다.
사당 문이 서서히 열리자 범한은 향로 옆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놀라 정신을 놓고 있다가 이내 예를 차려 인사했다.
“사리리 낭자, 오랜만이군요.”
해당타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범한 대인은 대장부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요. 한데 내 추측대로 정말로 여색을 밝히는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범한이 젖은 우산을 접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아 주는 사리리를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무정하면 진짜 영웅호걸이라 할 수 없듯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자, 어찌 대장부라 할 수 있으랴.”
해당타타가 천천히 그리고 똑같이 읊어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범한을 데리고 사당의 나무 문지방을 넘었다.
“범한 대인.”
사리리가 절을 올렸다. 범한은 온화함과 소원함이 담긴 웃음을 짓고는 두 손을 모아 사리리에게 인사했다.
“사리리 낭자, 언제 상경으로 온 것입니까?”
“대인 덕분에 사흘 전에 상경으로 왔습니다. 오는 내내 평안히 왔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리리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곳은 벌써 날씨가 더워져 추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사리리는 북제에 올 때 입고 있던 연두색의 가벼운 옷을 아직까지 입고 있었다.
범한은 그녀에게 작은 소리로 몇 마디를 더 건넸다.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해당타타의 눈에서 장난기 같은 게 반짝 나타났다 사라졌다. 두 사람의 얼굴에 드러난 낯섦이 해당타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범한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해당타타는 왜 자신을 사리리가 기거하는 사당으로 데려온 것이며, 줄곧 사리리를 시중들던 궁녀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설마 북제 황제가 원하는 여인과 외국 사신인 자신이 3천 리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걸 해당타타는 모르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여기가 내가 기거하는 곳이에요.”
해당타타가 범한이 지닌 의문에 답을 주기 시작했다.
“사리리는 지금 궁으로 들어가기 좀 그래요. 그래서 폐하께서 내게 돌봐 달라 하신 거고요.”
범한은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사리리가 예전에 북제 황궁에서 자신과 해당타타가 단짝 친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다 돌연 ‘설마 고하 국사도 황궁에서 지내는 건가?’라는 생각이 났다.
해당타타가 기거하는 사당은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지만 그래도 범한은 여전히 조심하는 중이었다. 이에 한가롭게 몇 마디 더 하고는 해당타타를 향해 말했다.
“나는 밖에서 낭자를 기다리겠습니다.”
범한은 대답은 듣지도 않고 곧장 문밖으로 나와 마당에서 해당타타를 기다렸다.
범한이 밖으로 나가자 해당타타는 한동안 사리리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뗐다.
“보여 주려고 데려왔어. 저 사람에게 할 말 없어?”
사리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얼굴에는 망연자실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말했잖아, 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 저 사람도 내가 보고 싶지 않았을 거야. 지금 문밖에서 너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몰라. 해당아, 타타,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했어. 네가 아무리 고하 님의 제자라고 해도 이런 금지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해당타타가 차분하고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냥 보는 건데 뭐 어때, 우리 폐하가 속 좁은 분도 아니잖아.”
194화
다른 운치 있고 깨끗하고 자그마한 방에 맑은 향이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차와 찻잔이 어우러져 빚어낸 호박색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편안히 해주었다.
“왜 내게 사리리를 만나게 해준 거죠?”
차를 낸 탁자를 가운데 두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속세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던 그의 얼굴에 드디어 번뇌가 드리워졌다. 소은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느라 열심히 계획을 짜고 있는 중에 갑자기 사리리라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내가 아까 언빙운에 대해 말했었죠?”
해당타타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범한 대인이 세상 사람들처럼 바보 멍텅구리인지 알고 싶어서 한 말이었어요.”
“바보 멍텅구리라는 말 자체가 참으로 신기하고 황당하네요.”
“범한 대인은 《석두기》를 본 적 없나요?”
해당타타가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범한은 속으로만 끙, 하고 소리 냈을 뿐 해당타타의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다른 말을 했다.
“해당 낭자, 무언가 오해를 한 것 아닙니까? 사리리는 내가 직접 압송해 온 범인이에요. 협의 조건이었을 뿐이라고요. 나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단 말입니다.”
“대인, 내 뜻을 오해했군요.”
해당타타가 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어 갔다.
“오늘 대인을 이 누추한 곳에 잠시 안내한 건 대인에게 도움을 청할 게 있어서예요.”
“무슨 일입니까?”
범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사실 지난번 폐하께서 범한 대인을 황궁에 부르셨을 때 고민하고 계셨던 일입니다.”
범한은 그녀를 잠깐 바라보았다. 해당타타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사람에게 친근감을 주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호기심에 대꾸했다.
“분명히 그때 폐하께서는 자신의 고민을 해당 낭자가 모르도록 하고 싶어 하셨어요.”
해당타타가 왼손으로 오른손 소매를 잡았다. 그런 후 오른손 두 손가락으로 작은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폐하께서 처음에는 분명 나에게는 알리고 싶어 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그분의 고민은 나와 여러 해 정을 나눈 좋은 친구예요. 더군다나 북제 조정에서 그분의 고민을 풀어 줄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몇 안 되고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범한은 북제 젊은 천자의 고민이 무엇인지 이미 추측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조정 안팎으로 사리리의 입궁을 크게 반대하는데 귀국의 황제께서는 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시는 건가요? 현 상황을 보니 사리리가 해당 낭자의 거처에 기거할 수 있는 것도 잠시뿐이고 또 황태후께서도 그녀의 입궁을 불허하실 것 같은데요.”
“범한 대인은 이 일 이면에 말 못 할 속사정이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요?”
“네. 나는 황실 사람들에게는 소위 감정이란 게 없다고 믿거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범한은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아 기분이 은근히 안 좋았다.
해당타타는 깜짝 놀라 가만히 범한만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후 그녀가 다시 입을 뗐다.
“황제도 사람이에요. 게다가 남녀의 일인데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요?”
범한은 전생 황제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당나라 현종은 다른 부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양귀비도 마외파에서 홀로 죽었다.
“범한 대인은 이미 혼인을 했군요.”
해당타타가 무의식중에 꺼낸 것처럼 말했다.
그녀의 말에 살짝 놀란 범한은 문득 집에 두고 온 처 생각이 났다. 그리고 경묘 향로 앞에서의 첫 만남도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해당타타는 범한의 표정에 주목하더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 대인 부부가 금실이 좋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방해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범한은 눈썹만 씰룩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기와 완아 사이에 감히 끼어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는 분명 죽기를 자처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자 범한은 젊은 황제의 감정을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비록 범한과 사리리는 협의에 따라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데 황제가 좋아하는 대상이 사리리라니 범한에게 그 점은 여전히 의외였다.
이번 자리는 해당타타가 청한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범한도 바라던 바였다. 만약 사리리가 입궁할 수 없게 된다면 경국의 감찰원만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범한으로서는 상대방이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해당타타가 말했다.
“조정에서 폐하 편에 서서 사리리를 궁으로 들이려는 사람은 없어요. 대인은 잘 알 거예요. 리리가 남쪽에서 지녔던 신분이 조금 문제가 될 거란 걸요. 그리고 결국 신분 문제 때문에 나도 이번 일에서 발언권이 없어요.”
범한이 냉소를 띠었다.
“당신들, 북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에요.”
그러고는 되물었다.
“설마 나라고 발언권이 있는 줄 알아요? 나는 외국 사신일 뿐입니다. 이번 일은 무도하강을 건넌 순간부터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란 뜻이에요.”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폐하와 나는 그저 범한 대인의 지혜를 빌리고 싶은 것뿐이에요.”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손으로 흐트러진 정수리 쪽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쓸어내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해당 낭자는 저를 정말로 아끼시는군요.”
해당타타가 평온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아무 명성도 없던 범한 대인은 불과 1년 만에 천하가 주목하는 시선이 되었어요. 그리고 경국 조정에서 실권을 쥔 큰 인물로 성장했죠. 그러니 대인에게 지혜가 없다고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방도를 생각해 보죠. 한데 그 방도가 먹힐지는 장담 못 합니다.”
범한이 찻상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냉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관건은 황태후마마예요. 황태후께서 원치 않으시면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실패할 거예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몸을 굽혀 인사했다.
“먼저 고맙다는 인사부터 하겠습니다.”
“이제 보니 낭자와 사리리 사이에 정이 꽤 깊었군요.”
말을 마친 범한도 몸을 굽혀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다시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훗날 제가 낭자께 도움을 청한다면 오늘 일을 떠올려 주기 바랍니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본국 조정과 관련된 일만 아니면 약속 못 할 것도 없지요.”
이에 범한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낭자께 부탁할 일은 영원히 없을 거예요. 혹시라도 부탁할 일이 생긴다면 우리 경국 내부의 문제 때문일 것이니 낭자가 평생 추구하는 자연의 도를 그르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고요.”
범한의 설명에 해당타타는 부담감이 조금 줄어들었다.
* * *
범한은 경국 조정의 정사이므로 상경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북제 조정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는 양측의 외교적 사무와 관련해 일종의 묵계이자 관습처럼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범한에게는 자유롭게 행동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해당 낭자와 산책을 한 덕분이었다. 해당 낭자는 금의위라는 쥐새끼들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걸 대놓고 싫어했다. 그래서 범한과 우산을 함께 쓰고 동행하는 동안에도 한가하게 마음 내키는 대로 걷는 척하며 따라붙은 이들을 모두 떨쳐 버렸다. 물론 금의위는 해당타타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만큼 용기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범한은 두 사람을 뒤따라왔을 거라 믿고 있었다.
두 낭자가 기거하는 기묘한 작은 사당에서 나온 후 범한은 허리를 쭉 폈다. 그러다가 길거리에 늘 보던 금의위가 정말로 없자 기쁜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에 범한은 모퉁이로 난 좁은 골목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아직 개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상쾌한 바람은 가지 끝에 맺힌 빗방울이 그의 얼굴 위로 떨어져 미끄러져 내리도록 했다.
사리리와 황제 일을 생각하면 범한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하지만 방금 해당타타가 꺼낸 화제 때문에 만 열일곱에 불과한 남자의 마음은 송두리째 경도로 돌아가 처와 누이동생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향 생각이 간절해진 범한은 가슴 가득 훈훈했다.
골목 입구에 어떤 행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행인은 큰 짐수레를 밀고 있었고 일하는 가게에 서둘러 가기 위해 지름길을 이용하는 중이었다. 범한은 햇살처럼 아름답고 따스한 웃음을 지은 채 느긋하게 골목 입구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커다란 짐수레가 범한의 뒤쪽에서 다가왔다. 수레가 몸을 스치고 지나가려 할 때 범한은 손목을 젖혔다. 그러자 순간 손바닥에 숨어 있던 검은색 비수가 횡으로 날았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힘들게 일하는 척하던 밀정의 목구멍에 비수가 꽂혔다. 차가운 칼날이 살을 파고 들어가자 미행자는 즉사했다.
잠시 후 범한은 넘어진 수레를 밟고 있다가 그림자처럼 골목 끝으로 옮겨 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독침을 누군가의 가슴팍 혈 자리에 꽂아 넣었다. 이어 왼손을 괴상하게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에 끼워 넣더니 쇠뇌의 화살 세 발을 한꺼번에 날려 겁에 질려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죽였다.
그런 후 범한은 아까 독침에 찔려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경추를 손으로 으스러뜨려 버렸다. 범한은 곧장 옷을 벗어 뒤집어 입고 비 모자로 햇살처럼 따뜻하게 생긴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러고는 죽은 사람 몸에서 쇠뇌의 화살을 뽑아 들고 골목에서 걸어 나갔다.
작은 사당에서 나온 후로 줄곧 세 사람이 범한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이 금의위 소속 밀정인지 아니면 북제 황궁 사람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범한은 오늘만큼은 그 누구도 자기 뒤를 쫓는 걸 허용할 수 없었다.
미행자 셋을 없애 버린 범한은 자신을 쫓는 이가 더 이상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골목에서 나온 후에는 마차에도 올라타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접촉하게 된다면 이는 곧 북제에게 단서를 남기는 꼴이 되어서였다.
축축하게 젖은 거리에 행인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범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타국 백성들 사이로 숨어들어 그들의 엄호를 받으며 걸었다.
감찰원의 미행 방지 수칙에 따르면 범한은 지금 포목전 같은 곳을 찾아 들어가야 했다. 그런 후 포목전 뒷문으로 나가 몇 차례 길을 돌아 나간 후 목적지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 수칙을 따르지 않았다. 우선은 자기 뒤를 밟는 사람이 없다고 확신해서였고 다음으로는 길을 너무 많이 돌아가게 되면 그만큼 접촉하게 되는 사람이 늘어나 외려 발각될 위험이 커져서였다.
그리고 대체 거기에는 왜 간 건지는 모르겠으나 범한은 도중에 어느 관리의 저택으로 몰래 숨어 들어갔다. 그런데 때마침 하늘에서 비가 다시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본디 소리는 없지만 형체는 있는 것이라 범한의 행적을 제법 잘 감추어 주었다.
* * *
상경의 성 남쪽에는 기녀 양성소인 교방이 있었고 그 부근에는 장가점이라고 부르는 평민 거주지가 있었다. 이곳에는 착한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뒤섞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치안 상태가 좋아지고 생활이 편리해지자 점점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자기 자본이 별로 없는 소규모 행상 중에도 가진 돈을 긁어모아 좌판을 깔고 장사하기 시작한 이가 늘었다.
이곳은 수수 거리와 달리 가격이 싼 일상용품만 팔았다. 그러니 이곳 물건은 수수 거리 것보다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쪽으로 향하는 길목의 세 번째 점포도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여기에서는 동이성에서 가져온 외국산 종려나무 기름을 팔았다. 가격은 쌌지만 맛은 괜찮았다. 하지만 색상이 별로인 데다 특히나 겨울에는 하얗게 침전물이 생기는 바람에 돈깨나 있는 부호들은 차라리 북제 동쪽에서 생산되는 유채 기름을 샀다.
한데 다행히도 장가점에서는 여윳돈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이 기름 가게는 현판을 내건 것도 아닌데 그럭저럭 장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을 많이 고용할 형편은 안 되어 나이 많은 주인장과 일을 도와주는 일꾼 정도가 다였다.
195화
장가점은 원래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따라 비가 여러 차례 내리다 말다 반복하자 가뜩이나 사람 없는 거리는 유난히 더 휑했다. 하지만 기름 가게는 누구든 기름이 떨어지면 찾아오게 되어 있어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었다. 때문에 기름 가게 주인장은 오늘따라 가게 앞이 더 한산하다고 해서 조급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게 밖에 긴 의자를 내다 놓고는 멍하니 앉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감상했다.
어쩌면 주인장이 늙어서일수도 있을 것이나 가게의 젊은 일꾼은 최근 한 해 동안 주인장이 예년에 비해 멍하게 지내는 날이 부쩍 늘었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주인장, 기름 사러 왔소이다.”
누군가가 문 앞에 서서 점포 밖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는 햇빛을 가로막았다. 늙은 주인은 손짓으로 그에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자 손님은 비 모자를 벗어 수수한 얼굴을 드러내고는 잠시 웃었다. 그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막 하품하고 있던 일꾼에게 말했다.
“여보게, 기름 사러 왔네.”
일꾼이 빙그레 웃었다.
“어떤 기름을 사시렵니까? 종려나무 기름 말고도 새로 들어온 동쪽산 유채 기름도 있습니다.”
일꾼은 손님에게 공손히 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우리 가게에 온 거면 당연히 기름 사러 온 건데 무슨 군소리가 이리도 많아!’라고 구시렁댔다.
손님이 점원에게 말했다.
“종려나무 기름 반 근 주게.”
그러자 일꾼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통에 든 기름을 저울에 올렸다. 그리고 기름 사러 온 사람의 양손이 빈 걸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손님, 어디에 담아 가시렵니까?”
“여기에 주전자가 있는가?”
“있지요. 나무 주전자는 하나에 석 문(三文)입니다.”
일꾼은 물건 하나를 더 팔게 되자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손님은 기름이 든 주전자를 건네받은 후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일꾼이 궁금한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뭐, 더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향유도 있는가?”
* * *
“향유도 있는가?”
손님이 크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가게 밖에 앉아 있던 주인이 긴 의자에서 잠시 비쩍 마른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일꾼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우리 가게에는 그런 고급 물건은 없습니다. 장가점 안에서 향유를 먹을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점원이 말하고 있는데 주인장이 느긋하게 계산대로 걸어왔다. 그리고 손짓으로 일꾼을 내보내며 환한 미소로 손님을 바라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향유는 너무 비쌉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나 쓰는 것이라 일반인 중에는 사는 이가 없어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날까지는 아직 반년이나 더 남았고요. 그러니 저희 같은 작은 가게에서는 그 물건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손님이 웃으며 물었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말고도 사람에게 제사 지낼 때 써도 되지요?”
그러자 주인장은 아까보다 훨씬 더 공손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필요한 양을 말씀해 주시지요. 저희 가게에서는 물건을 대신 구해다 드리기도 하니까요.”
대화 내용이 중요한 대목에 이르자 두 사람 모두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기억력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 손님은 많은 내용을 빠른 속도로 똑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7근 329전 4호…… 종려나무 기름을 사려 합니다.”
주인장이 주판을 튕기더니 난색을 표했다.
“가격에 조금 문제가 있네요. 그러니 손님, 내실로 들어가 다시 얘기하실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늙은 주인장은 일꾼에게 바깥을 지키고 있으라고 분부하고는 손님을 데리고 뒤쪽에 자리 잡은 내실로 들어갔다. 이제야 손님이 기름을 사러 온 게 아니라 기름을 팔러 온 것이란 걸 눈치챈 일꾼은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방금 향유를 팔러 온 손님에게 자신이 잘못한 게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향유를 팔러 온 상인은 당연히 변장한 범한이었다. 주인장을 따라 내실로 들어온 범한은 접선 장소라는 게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햇살이 맑고 가득히 비추고 있어서였다.
주인장은 차를 내오지도, 인사말을 하지도 않은 채 범한의 두 눈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늙고 혼탁한 눈에는 세밀함과 신중함이 엿보였다. 주인장이 말했다.
“손님께서는 남쪽에서 오셨나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이 무언가를 요청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범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언빙운이 만들어 놓은 절차가 살짝 번거로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내 기억하고 있던 다른 숫자들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분 확인을 마친 주인장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소매 안에 감춰 두었던 칼을 꺼내 손 옆에 두었다. 독이 묻어 있는 칼이다 보니 주인장은 이것을 소매에서 꺼낼 때 손을 벌벌 떨었다. 범한은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제국의 밀정이라면 이 늙은 주인장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자결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상황은 왜 언빙운이 생포되어 줄곧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주인장이 범한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대인, 감찰원에서는 어느 직책에 계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렇게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주인장이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1년입니다. 꼬박 1년 동안 상부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습니다. 우두머리께서 잡혀 가신 후 조정에서 후임자를 파견하지 않아 조정이 우리에게 침묵기로 들어갈 준비를 시키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침묵기’란 적국에 잠복해 있는데 첩보 체계에 틈이 생기면 곧장 모든 활동을 중지해 정보 유출을 막는 걸 의미했다. 이때 기간은 한 달이 될 수도 아니면 10년이 될 수도 있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두머리인 언빙운이 붙잡힌 사건은 원래 양국 첩보전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언빙운 자체는 정보를 지니고 귀국하거나 직접 위험한 일들을 알아보고 다닐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장 공주는 그런 언빙운을 적국에 넘겨 감찰원이 북쪽에 깔아 놓은 모든 첩보망을 마비시켰다.
언빙운이 줄곧 북제 사람들 손아귀에 있으니 조정과 감찰원에서도 하위 밀정들에게 연락하는 모험을 감행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공백기가 생긴 것이었다.
“한 해 동안 활동을 멈춘 것 때문에 몸이 녹슬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대인, 염려 마십시오.”
주인장은 앞에 있는 사람이 언빙운 대인의 후임이라면 분명 감찰원에서도 대단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상대방의 몸에서 어렴풋이 피비린내가 풍겨 오자 주인장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대인,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세 가지입니다. 급히 할 것과 천천히 할 것이 모두 있습니다.”
범한은 자기 앞에 있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이 노인과 그 밑에 있는 정확한 인원수를 알 수 없는 감찰원 밀정들이 한 해 동안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갈 집이 없어 정처 없이 떠도는 고아처럼 말이다. 이에 범한은 말을 할 때 일부러 더 부드럽고 편안하게 하려 노력했다.
“가장 시급히 할 일입니다. 곧장 소은이 갇혀 있는 곳을 알아내 주세요. 두 번째는 황태후와 황제 사이가 틀어진 진짜 이유를 조사해 주세요.”
북제 황제와 관련해서 범한은 줄곧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범한에게 북제 황제는 배가 불러도 너무 부른 사람에 불과했다.
주인장은 이 두 임무가 모두 매우 어려운 일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가만히 세 번째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렸다.
“소은의 일이 빨리 처리해야 하는 거고, 황궁의 일은 천천히 해도 됩니다.”
범한이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 갔다.
“세 번째 명령은 내 생각엔 주인장께서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황실 금고에서 최근 북쪽에 밀수를 했습니다.”
그러자 늙은 주인장이 실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잠시 이상한 광채가 번쩍하고 스쳤다.
“그 건은 신양 쪽 일인데 대인, 감찰원에서 드디어 손을 쓰기로 결정한 것입니까?”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조사를…… 확실하게 해주세요. 그런데 그들의 털끝 하나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모두 통제해야 합니다. 나중에 감찰원에서 손을 쓰려 할 때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이 그 밀수 통로를 깨끗이 쓸어 버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주인장은 이미 이 건도 천천히 해도 되는 장기적인 임무란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은 임무를 내려놓고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최 공자 일은 장모가 자신을 시험해 보려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게 있어 잠시 참고 있는 것인지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글 종이 사건과 광신궁 침입 사건이 범한의 소행임을 신양 쪽에서는 모르고 있다고 해도, 형부 법정에서의 충돌로 장 공주와 범한 간의 대립은 이미 점차 수면 위로 떠 오르고 있었다.
“대인께는 어떻게 알려 드려야 할까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한데 범한은 애당초 언빙운이 수하들과 어떻게 몰래 연락을 취했는지 아는 게 없었다. 이에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어 소리를 낮춰 말했다.
“두 달 안에는 특정 집행자가 상경에 오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과 연락할 사람을 파견할 예정이기는 합니다.”
그러자 주인장이 살짝 걱정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대인, 부디 신중하십시오. 소은이 잡혀 있던 스무 해 동안 북제의 금의위가 북위의 근위병보다 형편없어졌다고는 해도 그래도 대인은 적국에 와 계시는 중입니다. 그러니 아랫사람 관련 일들은 제가 알아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주인장이 한 말은 감찰원이 1년 동안 미루고 또 미루며 북쪽에 보낸 ‘고아’와 감히 연락할 수 없었던 이유다. 이에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내가 보낼 사람은 감찰원에서도 가장 추격하기 힘든 작자니까요.”
그 작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왕계년이었다. 그는 평생 다른 사람을 뒤쫓기만 하고 절대 미행당해 본 적이 없어 이 분야에서는 보기 드문 인재였다.
여기는 오래 머물 곳이 못 되었다. 이에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말했다.
“접선 암호를 바꾸었습니다.”
“네, 대인.”
주인장이 미소 지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일, 삼, 일, 사, 오, 이, 칠, 칠, 칠.”
“네, 대인.”
얼핏 듣기에 아무런 규칙도 없어 보이는 숫자를 주인장이 다시 한 차례 암송했고 그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만족한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에서 나왔다. 이어 그는 여느 손님처럼 주인장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종려나무 기름 두 주전자도 잊지 않고 챙겼다. 그런데 손님이 나가자 일꾼이 농담하듯이 말했다.
“주인어른, 향유를 그렇게나 일찍 들이시려고요?”
주인장이 가게의 유일한 일꾼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큰 건이지 않냐.”
일꾼은 ‘이런 싸구려 기름 가게에서 배를 몇 척이나 굴리는 동이성 기름 장사꾼처럼 크게 장사를 하겠다고?’라고 생각했다.
196화
길을 나선 범한은 가는 도중에 손에 들고 있던 기름을 처리해야 했다. 한데 거리에 있는 거지에게 줄 수도 아무 데나 버릴 수도 없었다. 감찰원이 정한 밀정의 행동 준칙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적의 능력을 얕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진무사 지휘사 심중이 비 오는 날 밤 청루에서 강인한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범한이 보기에 그것은 완벽히 위장된 모습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기름을 조심스럽게 처리했다.
기름 주전자를 깔끔하게 처리한 후 범한은 사신단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행인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상경의 옥천하강(江)에 놓인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범한은 비옷 안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아가씨들이 바르는 연지분을 전부 닦아 내자 손바닥에 노랗고 붉은 연지분이 가득 묻어났다.
범한은 무지개다리 위 사자 석상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러자 손바닥에 뭉쳐 있던 연지분 덩어리는 물속으로 떨어져 물에 섞이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고 골목을 지나 어느 민가를 끼고 돌아 나갈 무렵 범한은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리고 비옷을 벗고 긴 옷을 다시 뒤집어 입으니 아까 해당타타와 헤어질 때처럼 맑고 때 묻지 않은 외모의 범한으로 돌아와 있었다.
* * *
범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목에 힘을 주고 사신단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문 맞은편에서 연신 차를 들이켜고 있던 금의위가 이상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에 범한은 자신을 미행하던 세 사람의 사망 소식이 벌써 심중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지만 금의위는 말도 못 한 채 속으로만 삭이는 중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도 범한은 저들에게 보복당하는 일까지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사신단 거처에서 가장 조용한 곳은 후원이었다. 긴 처마 아래에는 언빙운이 좁고 낮은 침대에 몸을 반쯤 누인 채로 있었고 침대 위에는 포근한 목화 이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비록 범한에게 치료받기는 했어도 1년 동안 당한 고통을 단시간에 회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의 몸은 여전히 상처투성이였고 어딘가에 닿는 걸 견디지 못했다. 이에 다행히 날도 크게 덥지 않아 범한이 내놓은 방법에 따라 언빙운은 푹신한 목화 이불에 파묻혀 지내는 중이었다.
이 냉정한 경국의 밀정 우두머리는 지금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라 휴양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범한은 민망할 정도로 계속해서 그를 성가시게 했다. 북제에 머무는 마지막 며칠 동안 범한에게는 언빙운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오늘 있었던 일과 관련해 서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난 뒤였다. 언빙운이 범한의 두 눈을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인께서 흔적은 안 남기셨길 바랍니다. 자칫했다가는 우리 수하들이 전부 노출될 테니까요. 그러니 대인이 감찰원 제사이기는 해도 저는 대인을 조사해야 합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빙운 대인이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이번 연락책 말고도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한데 통로를 하나만 이용하면 안전하기는 해도 효율은 많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다른 일과 관련해서도 언 대인은 사람들을 움직일 방법을 생각해 둬야 해요. 그리고 내게는 처리할 시간이 거의 없어 왕계년을 연락책으로 쓸 생각인데 대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언빙운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번뜩였다. 눈앞에 있는 감찰원 내 가장 젊은 고위 관료가 요 며칠 규칙은 말로만 지키겠다고 하고 장점이라곤 자기 의견을 듣는 것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오늘 북쪽에 깔아 놓은 밀정의 첩보망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능력은 있는 사람 같아 보여서였다.
“왕계년이면 저도 마음이 놓이는데…….”
언빙운이 잠시 고민을 해보더니 말을 이어 갔다.
“감찰원에서 최근 북쪽에 잠복시켜 놓은 사람들이 있는데 왕계년 대인도 그중 한 사람이니까요.”
범한은 왕계년이 일찌감치 밀정 일을 하고 있는 줄 예상도 못 하고 있던 터였다. 이에 머리가 잠시 멍해져 언빙운이 하는 말을 계속 듣고만 있었다.
“대인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상삼호와 함께 소은의 소재지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찰원 사람이 너무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범한이 언빙운의 요청에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북쪽에 잠복시켜 놓은 사람들이 조정의 내부 분란으로 희생을 치르지 않기를 바라는 언빙운의 마음을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범한이 다짐했다.
“염려 말아요. 내게도 생각은 있으니까요.”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삼호는 수사자 같은 사람이라 애석하게도 상경이라는 깊은 바닷속에서 그에게 힘을 보태 줄 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 공주께 도움을 구한 것이지요. 신하 된 입장으로 대인과 제가 장 공주의 뜻에 따르는 건 당연지사일 겁니다. 하지만 대인께서는 생각을 잘하셔야 합니다. 상삼호가 직접 나서서 소은을 구하면 그때는 황태후와 심중이 군부의 힘을 제거하는 날이 될 테니까요.”
범한은 겉보기에 냉정한 이 감찰원 관원이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꿰뚫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소리를 낮췄다.
“그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 심중이 상경을 통제하는 능력을 얕잡아 보지 말고 그냥 그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 두려고요. 어쨌거나 우리 경국 입장에서는 아무런 손해가 없는 거잖아요.”
후원에서 나온 범한은 왕계년을 불러 임무를 내렸다. 왕계년은 범한이 일러 준 숫자를 정확히 기억했다. 그리고 향후 며칠 동안은 자신이 위험하고도 중차대한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름 가게의 늙은 주인장이 아닌 범한의 심복 중 심복으로 과감하게 질문을 던졌다.
“일, 삼, 일, 사, 오, 이, 칠, 칠, 칠……. 대인, 숫자들이 무언가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일생(一生) 일세(一世) 오~ 이 몸은 쩐이 좋아! 쨍그랑, 쨍그랑.”
말을 마친 범한은 살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담주 사투리로 돈을 쩐이라고도 불렀는데 범한은 여기에서 착안해 암호를 만든 것이었다.
* * *
기름 가게의 늙은 주인장은 요 며칠 장사가 잘되어 기름을 몇 통이나 팔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정보들이 1년 동안 잠잠했던 감찰원 4처 북방사의 첩보 연락망을 타고 상류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제에서 이런저런 모습의 평민으로 위장하고 있던 밀정들이 1년 후에나 착수하게 될 첫 임무를 수령하게 되었다.
그러자 다시 정보들이 각종 경로를 통해 모이기 시작했고 몇몇 끊긴 연락망들은 통합된 후 최종적으로 장가점의 기름 가게로 모였다.
그동안 경국 사신단 사람들은 몇 차례 연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술은 더 많이 필요했고 수수 거리의 술 가게 주인 성회인도 사신단이 머무는 거처에 자연스레 몇 차례 오가며 범한에게 아첨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범한으로부터 신양 쪽과 상삼호가 줄곧 원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사신단 거처에서는 많은 정보를 처리했고 그 정보 중에 유용한 것들은 분석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상대적으로 정확한 결론을 내리는 일은 언빙운이 맡아 처리했다. 이에 요 며칠 동안 후원 쪽에서는 언빙운의 기침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범한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대신 사신단의 정사였으므로 술을 마시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마중하는 게 그의 업무였다. 그러다 하루는 해당타타와 함께 궁에 들어갔다. 그녀가 며칠 전 그에게 전해 준 황태후의 상담 요청 때문이었다.
범한에게 술을 마시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언제나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적국의 황태후와 술을 마시는 건 그에게는 전혀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신단으로 돌아갔을 때 모든 관원 및 부하들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가 기분 나쁜 상태란 걸 알 수 있었다.
방 안에서 범한이 임정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사신단에서 내가 정사입니까, 아니면 임정 대인이 정사입니까?”
임정이 살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범한 대인,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신단은 당연히 범한 대인을 따라야 합니다.”
“네, 네, 네.”
범한은 두어 번 소리 내어 웃고는 임정을 질책했다.
“그렇다면 어디 임정 대인이 이야기를 좀 해보시죠. 오늘 입궁했을 때 북제의 황태후께서 왜 북제 큰 공주마마를 우리 1 황자마마께 시집보내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는지 말입니다. 이건 중차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북제에 온 후로 정사인 내가 그 일을 모르고 있던 겁니까. 홍려사와 태상사에서는 그동안 공주의 혼인 문제를 다 정해 놓았을 텐데 왜 나는 오늘에서야 귀국길에 공주를 데려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느냔 말입니다!”
임정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작 그 일로 화를 낸 거냐는 생각에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대인, 그 일로 하관과 임문 대인을 질책하시면 안 됩니다. 사신단에서는 그저 우리 황태후마마의 친필 서한을 북제 황태후께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관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요. 두 마마님께서 서한으로 따님의 혼사를 정한 거니까요. 그러니 궁에서 그런 일이 들려온들 저희로서는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원래 대인께 통지를 해드렸어야 하나 그동안 대인께서는 사신단에 계신 날이 별로 없어 말씀드릴 때를 놓친 것뿐입니다.”
임정이 눈을 굴려서 보니 젊은 대인이 화가 좀 난 것처럼 보였다. 이에 웃는 얼굴로 편지를 건넸다.
“공식적으로 국서가 곧 도착할 것입니다. 이는 조정에서 보낸 밀서입니다. 황제 폐하와 황태후마마의 입장이 표명되어 있고, 당연히 이번 혼사를 바라신다는 내용으로……. 사실 여기에는 또 다른 경사스러운 일이 담겨 있습니다. 범한 대인,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헛소리, 다 헛소리!”
범한은 생각할수록 이런저런 일들이 떠올라 열불이 났다. 그리고 언제 진평평 원장의 말버릇을 배웠는지 비웃으며 욕하고 있었다.
“무슨 짠지나 잔뜩 먹어 놓고 싱겁다고 투정하는 것도 아니고, 원! 우리 같은 심부름꾼들이 피곤해 죽겠는 건 생각도 않고!”
임문은 깜짝 놀랐다. 방금 범한이 대역무도한 짓을 범했다는 생각에 그가 서둘러 저지했다.
“조정 일에는 조정의 규칙이 있듯 황실의 일은 황실만의 법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혼사가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 같기는 해도 각국 조정에서 서두르는 걸 보니 모두가 원하는 국면인 것 같다고 범한은 생각했다. 반면 양대 강국으로 불리는 남쪽의 경국과 북쪽의 북제가 혼사로 맺어진다면 한쪽 구석에서 은근슬쩍 비웃는 것밖에 못 하는 소국의 황제들에게는 기분 상하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파하는 쪽은 사고검이 지키고 있는 동이성일 테고.
“그렇지, 방금 내게도 기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범한은 가을 초엽에 경도에서 혼례를 치르게 될 1 황자와 자기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몰라 인상을 찌푸렸다.
사촌지간인 임정과 임문은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다가 입을 열었다.
“대인께서 조정에서 보낸 서한을 직접 보시면 알 겁니다.”
관례에 따르면 조정에서 서한이 왔을 때 정사가 자리에 없다면 부사인 임정이 대신해서 볼 권한이 있었다.
“두 분, 어서 말해 보세요!”
범한은 미간을 문질렀다. 이유 없이 불안감이 들고 그 느낌이 갈수록 강해졌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임정이 대답하고는 미소 지었다.
“1 황자마마의 혼사가 정해진 후 2 황자마마의 혼사도 함께 정해졌습니다. 폐하의 성지로 2 황자마마와 경도 수비대장 섭씨 가문의 섭령아 아가씨의 혼사가 정해졌고 혼례는 내년 봄에 올린다고 합니다.”
범한은 살짝 놀라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호숫가에서 자신을 사부라고 부르던 어린 여인이 혼례를 올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2 황자는 만나 본 적 있었다. 그는 독서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섭령아가 2 황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불쑥 그녀가 걱정되었다.
197화
그리고 동시에 대체 황제 폐하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이 둘의 혼인은 분명 경도를 수비하는 섭가와 2 황자를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었으므로 ‘설마 황제가 정말로…… 황태자를 바꿀 생각인 건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범한은 깜짝 놀란 상태였지만 낯빛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그런 그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 일과 본관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임문은 말할 차례를 놓칠세라 아첨하듯 웃었다.
“범한 대인, 축하드립니다. 폐하의 성지에는 귀댁의 아가씨께서 어질고 현명하고 정숙하고 덕이 있으며, 재능과 식견까지 뛰어나니 정왕 세자이신 이홍성 님과의 혼사를 내리셨…….”
* * *
귀댁의 아가씨라고? 범한은 망연자실해 살짝 멍한 기분이었다. 귀댁이면 어디야? 범한은 한참 후에야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설마 약약이를 말하는 거였어? 누이동생 약약이 이홍성에게 시집을 간다고?
“안 돼!”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범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한번 힘껏 털었다.
옆에 있던 관원들은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범한 대인이 누이동생의 혼사 소식을 듣고 이리도 강한 반응을 보일 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이들에게 “범한 대인, 축하합니다.”란 말은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 한 말이었다.
범한의 아버지 사남 백작 범건은 호부 상서로 경국의 돈과 식량을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범한은 감찰원 제사로 폐하의 명으로 재상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의 처는 모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하는 신분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사남 백작가의 아가씨마저 폐하의 명으로 당당한 신분인 이홍성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조정에서 이만큼 성은을 입은 집안은 없었다.
그런데도 범한 대인의 반응은…… “안 돼!”라고?!
범한은 순간 자제력을 잃었다. 그런데 얼핏 주변 사람들이 놀라는 게 보여 잠시 어리둥절해졌다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고는 말했다.
“그거야 안 될 일이지. 이홍성, 고 녀석은 날마다 청루로 놀러 다니니 이 손위 처남에게 좋은 술을 수백 번 가져다 바쳐도 내 누이동생을 고 녀석에게는 줄 수는 없지!”
범한은 상황을 잘 포장해서 넘겼다. 다른 관원들도 백작가와 정왕부가 교분이 깊고 범한과 정왕 세자 역시 절친한 친구 사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하는 말이 정말로 농담처럼 들렸다.
관원들이 웃기 시작하며 서로 한마디씩 했다
“범한 대인께서 농담을 하셨네!”
“경도로 돌아가신 후에는 정왕부에 찾아가 폐를 끼쳤다고 말씀하실걸!”
“범한 대인을 따라가서 정왕 세자께 좋은 술이나 제대로 얻어먹고 와야겠구먼!”
범한도 얼굴 가득 기쁜 기색을 하고 다른 관원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누이동생이 곧 시집을 가게 돼 기뻐하는 오라비의 모습이었다.
* * *
모두 물러나자 범한은 홀로 조용히 후원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대들보 옆에 서서 남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낀 먹구름 사이로 별이 빛나고 있었다.
누이동생이 시집을 간다. 누이동생이 시집을 간다고!
범한은 실눈을 뜨고 겹겹이 둘러싸인 구름 사이에서 가끔씩 희미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이 밀려오고 머릿속에는 온통 ‘누이동생이 시집을 간다’는 말과 그 일만 떠올랐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담주에서 어린 꼬마에게 백설 공주 이야기를 해줄 때부터 그 꼬마가 언젠가는 시집을 갈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담주에서 경도에 있는 누이동생에게 서한을 보낼 때에도 몰라보게 자란 어린 낭자가 언젠가는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갈 것이란 걸 가끔씩 떠올리곤 했다.
훗날 경도에 도착해 지혜를 지니고 오라비를 스승처럼 여기며 존경심을 보이는, 차가운 표정의 다 큰 아가씨를 만났을 때도 범한은 언젠가는 누이동생이 시집을 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범한은 소리 내어 웃으면서도 그녀가 평범한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면 분명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범한이 자신의 처지를 알았을 때부터인 것 같은데 그의 무의식이 누이동생의 혼인 문제를 생각하는 걸 애써 거부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처럼 꾸미고 찾아온 황제가 유정강 강가 찻집에서 남매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중에 그녀에게 좋은 혼처를 구해 주겠노라 했을 때 범한은 누이동생의 혼사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일이란 건 사람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범한이 혼례를 치르자 범약약의 혼사도 자연스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 것이었다.
마음이 어지러워진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대들보를 툭툭 치고 있었다. 누이동생의 혼사 문제에 관해서는 애당초 이 오라비가 꼭 좋은 신랑감을 찾아 주겠노라 자신만만하게 공언해 왔던 터였다. 한데 막상 일이 터지고 나니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은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언제나 정신이 맑은 범한이었건만 지금은 머리가 멍하기만 했다. 머릿속에 무수한 선들이 꽂히는 통에 숨조차 쉬기 힘들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대들보를 치는 소리가 후원 안에 작게 울려 퍼졌다.
“거참, 시끄럽네!”
싸늘한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전해져 왔다.
범한이 소리 내어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요동치는 마음 탓에 자신이 후원에 와 있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후원에는 아직도 변함없이 냉랭한 언빙운이 지내고 있는데 말이다.
“대인, 오늘따라 마음이 어지러우신가 봅니다.”
언빙운이 그에게 관심을 보인 건 아니었다. 단순히 습관적으로 모든 생각을 숨긴 채 다른 사람에게는 해탈한 듯 때 묻지 않은 모습만 보여 주는 감찰원 제사가 오늘 저녁에는 왜 이리 한숨을 쉬어 대는지 궁금한 것뿐이었다.
범한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눈을 거두고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뗐다.
“누이동생이 시집을 가게 됐습니다.”
“사남 백작가의 아가씨 말입니까?”
언빙운이 조용조용 말을 이어 갔다.
“경도에서 재능이 뛰어난 여인으로 유명하던데 그러니 폐하께서 혼처를 정해 주신 거군요.”
“네. 미래 매제가 정왕 세자 이홍성이랍니다.”
그러자 언빙운이 말했다.
“경도 젊은이들은 세자께서 대인의 누이동생을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랬습니까? 그런데 왜 나는 모르고 있었죠?”
“대인과 정왕 세자, 두 분의 교분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황실 사람들을 제외하고 혼처를 찾는다면 조정 내 신하 중에서는 사남 백작가를 따라올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귀댁과 정왕부가 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하관, 대인께 경하 인사를 드립니다.”
범한은 언빙운의 쌀쌀맞은 경하 인사에 무언가 악독한 의미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이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채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경하할 일은 맞네요.”
“한데 기쁜 일을 앞두고 대인께서는 왜 근심이신 겁니까?”
범한이 잠시 웃다가 말했다.
“홍성은 내 친구이니 자연히 그의 성정을 좋아해요. 한데…….”
범한은 어깨를 으쓱이다가 말을 이어 갔다.
“자주 놀잇배를 드나드는 방탕한 세자가 매제가 된다고 생각해 봐요. 오라비라면 누구든 걱정할 겁니다.”
언빙운이 작게 두 번 기침하고는 조소하듯 말했다.
“설마 범한 대인께서는 한 번도 청루에 가보신 적 없다는 겁니까?”
그러자 범한은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했다. 오늘은 기분이 조금 이상해 더 이상 언빙운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방에는 불도 켜지 않은 데다 하필 하늘에는 별도 몇 개 보이지 않아 후원에는 어둠만 깔려 있었다. 범한은 고개를 돌려 밤의 어둠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언빙운의 냉담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나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내 누이동생을 처로 맞이할래요?”
* * *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언빙운이 황당한 질문을 던진 제사 대인을 호되게 꾸짖었다.
범한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탄식했다.
“그렇네요. 언빙운 대인은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이니 여인을 사랑하는 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언빙운은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범한이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심 낭자와의 일은 어찌 마무리 지을 겁니까? 멀쩡한 규수를 꾀어 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심중이 살생을 하지 않는 자도 아니고요.”
그러자 언빙운의 얼굴이 서리가 내린 듯 차갑게 변했다. 하지만 예리한 범한에게는 드디어 처음으로 상대방의 눈에서 그를 침울하게 만드는 것을 찾아내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언빙운이 조근조근 말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저는 범한 대인 같은 음탕한 사람이 아닙니다. 심 낭…… 저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범한도 언빙운과 심 낭자가 이제는 평생 만나지 못하고 멀리서 서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처지란 걸 알고 있었다. 비록 언빙운이 이 과정에서 감정이 움직였는지는 범한으로서 알 수 없었으나 사랑에 눈먼 여인을 생각해 언빙운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범한은 다시 약약의 혼사를 떠올리게 되었고 어렴풋하지만 슬퍼졌다. 사실 사람들 말이 옳았다. 누이동생이 이홍성에게 시집가는 건 황자 중 하나에게 시집가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 범한은 기뻐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도무지 기쁘지 않았다.
사실 범한은 자기가 무얼 원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가 자신만만했다가 씁쓸하게 박수 쳐주게 되는 것 같은 일은 처음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실은 별것 아닌 부분들에서 이처럼 처음으로 반응이란 걸 하게 되자 마음속 깊이 숨어 있어 의식하지도 못했던 바람들이 드러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범한이 복도에 함께 있던 언빙운에게 말했다.
“심 낭자는 언빙운 대인에게 시집갈 방도가 없지만 만약에라도, 그러니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저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은 생각조차 않습니다.”
언빙운이 냉담하게 대답했다.
범한은 잠깐 웃다가 복도를 떠났다. 언빙운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고독하고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 건의 혼인은 그냥 별개의 사소한 일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범한이 분명하지 않은 가능성을 떠올리며 가끔씩 온몸에 오한이 든 듯 몸서리를 치며 할 말을 잃는다는 걸 알지 못했다. 게다가 이역만리에서 유일하게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오죽 아저씨는 실종에 가까운 상태이니 범한에게는 약약의 혼사 건으로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세상에 다른 이들과 이야기 나누지 못할 일은 없다지만 이번 일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눈에 비친 범한 대인은 기분 좋아 보였고 벌써 사신단의 귀국 방침을 마련하는 중인 것 같았다. 이에 관원들은 범한 대인이 경도로 돌아가 누이동생의 혼사를 준비하기 위해 그리고 겸사겸사 혼사 후 있을 조정의 이익 배분을 앞서 챙기기 위해 서두르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평온하고 유쾌한 범한이 일찌감치 동생의 혼사 때문에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 오래전부터 계획해 놓은 일들을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이는 언빙운이 해준 말 덕분이었다. ‘불가능한 일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언빙운의 말을 범한은 어느 정도 옳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범한은 여전히 만약 약약이 시집가기를 원한다면 오라비로서 동생의 위신을 한껏 세워 준 채 즐겁고 행복하게 시집가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홍성이 2 황자를 황태자로 추대하는 일을 꾸미고 있다면 자신은 약약을 위해서라도 정왕부의 안녕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약약이 시집을 가길 원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게 되자 범한은 평정을 되찾은 것이었다. 아니, 적어도 겉으로는 평정심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198화
범한은 요 며칠 두 차례 입궁했다. 두 나라가 개국 이래 처음 맺는 혼사이기에 범한을 포함한 그 누구도 태만하게 처리할 수 없어서였다. 그사이 범한을 기쁘게 해주는 일도 있었다. 북제 황실의 압박으로 심중과 장영후가 드디어 머리를 숙인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양국의 특무 기관이 ‘내년 북방 화물의 비정상 통로 수입에 대한 이익 분배 및 구체적인 조치’에 관해 초보적인 구상을 내놓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조치로 가장 큰 이득을 얻게 되는 사람은 당연히 감찰원 및 황실 금고를 물려받게 될 중요 인물, 즉 범한이었다.
그런데 사실 범한을 기쁘고 안도하게 한 건 단순히 양국 간 조치가 체결되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향후 계획을 위해 돈은 필요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도모하는 것에 비하면 밀수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적었다. 대신 이번 조치 체결로 신양 쪽은 밀수 통로를 바꾸어야 하니 그만큼 수출 물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신양 쪽의 수입 감소로 이어질 게 뻔했다. 그러면 결국 장 공주 세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범한은 이 점에서 가장 기뻐하고 있었다.
장 공주는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좌시하고 있었고 범한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범한이 상삼호와 협력해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소은을 구출해 내기를 그녀가 바라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장 공주의 이런 행동은 뜻밖에도 자신의 이익보다 경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 범한은 그녀의 이타적인 행동이 놀랍고 이상했다.
요 며칠 동안 언빙운의 총괄 능력은 최고조로 발휘되었다. 그가 내놓은 방안들은 간단하면서도 안전하고 적절했다. 그러면서도 북쪽에 잠복해 놓은 경국 첩자들의 안전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있어 범한을 절로 감탄하게 했다.
경국에는 여러 계통의 밀정이 있었다. 그중 언빙운이 지휘하고 있는 계통은 암첩(暗谍)이라 불렸다. 기름 가게 주인장, 왕부와 고위 관료들 사이에 잠복해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관리들까지 있었다.
그리고 명첩(明諜)이라 불리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수수 거리의 장사꾼, 각 군과 지역에 있는 남쪽에서 온 행상들이 그런 경우였다. 이들은 주로 장사하면서 첩보 활동을 했으며 천하를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정보를 경국까지 전달하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요 며칠 곳곳에 있던 명첩들과 암첩들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년 동안 동면해 있던 첩보망이 깨어나 짧은 시간 안에 강대한 첩보력을 발휘했다.
범한 쪽에서는 준비를 끝냈고 이제 상삼호가 움직여 줄 차례였다.
범한과 언빙운이 가벼운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범한이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언빙운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을 건넸다.
“언빙운 대인, 당신은 명색이 나의 부하예요. 그러니 날마다 그런 인상 쓴 얼굴 좀 그만 보여 주면 안 되나요?”
“저는 아첨이나 하는 부하가 아닙니다.”
언빙운은 싸늘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범한은 보일 듯 말 듯 살짝 웃고 말았다. 범한은 이자가 네 해 동안 북제에 잠복해 있으면서 여러 모습으로 활동해 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왕족과 귀족들 사이를 오가면서도 해상 무역상 집안의 막내아들 ‘재주꾼 운’이 경국에서 보낸 밀정의 우두머리란 사실을 예측 못 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교제 능력도 뛰어날 게 뻔했고 넓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춤도 멋지게 출 줄 알 터.
그런데도 자신을 이리 냉랭하게 대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범한은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을 목표를 갖고 접근해야 할 인물이 아닌 상사로 보고 있어서였다.
“북제 쪽은 확실히 멍청하네요.”
범한이 차를 마시고는 말을 이어 갔다.
“언빙운 대인을 이리 일찍 석방해 준 것도 그렇고 사신단 내부에서 안전하게 며칠 보내도록 한 것도 그렇고요. 만약 나였다면 사(師) 직위의 사람을 열 명 준다고 해도 안 내보내 줬을 겁니다.”
이는 전생의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 주석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러니 언빙운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감흥도, 감동도 받지 않았다.
“어쩌면 경국 조정에서 소은으로 저를 교환할 걸 예상했을지도 모르죠. 원래 충분히 멍청한 사람들이니까요.”
언빙운은 경국이 자신을 소은과 교환한 사실만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한데 북제가 소은을 돌려받아도 크게 쓸모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죽일 생각을 하는 건 더 바보짓이지요.”
그러자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나라는 사람과 같은 거라 영원히 완전하게 움직이는 기계는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라는 종종 통치자의 감정 변화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북제 황실에서 의견 대립이 있는 건 단지 고하 국사의 빛이 너무 강해서예요. 그래서 소은을 다시 구금하게 된 거죠. 그러니 상삼호가 소은의 양아들만 아니었다면 감히 황실의 결정을 흔드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범한 대인께서는 왜 그러셨죠?”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북쪽으로 오는 내내 분명 소은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자를 풀어 주셨지요. 그런데 또 대인은 상경에 있는 자를 구하려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구한 다음에는 또…….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상합니다.”
범한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는 소은이 지닌 비밀을 절대 다른 누구에게 말해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번 일과 관련된 과정들이 갈수록 황당하고 웃겨 보이게 되었을지라도 말이다.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언빙운에게 설명했다.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돼요. 최종적으로는 상대방의 왕을 죽이는 건 같아요. 하지만 병(兵)과 졸(卒)은 각기 다른 과정을 거치고 서로 다른 길을 사용하잖아요. 그사이 얻게 되는 이익도 달라지는 거지요.”
만약 범한이 무도하강에서 소은을 죽였다면 당시 그가 버리려던 ‘졸’을 산 채로 귀국시키는 건 고사하고 영원히 ‘신묘의 위치’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감찰원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소은을 구출할 때 장기판에서 자주 등장하는 압박 작전인 ‘핍궁격(逼宫局)’을 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길을 돌아감으로써 진평평 원장도 얻지 못했던 이익을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소은이 탈옥하지 않으면 금의위도 죽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상삼호는 군 내부에서 명망이 높으니까요.”
“소은, 그 늙은 괴물은 어째 살아 있어도 불쌍하네요.”
범한이 탄식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아무래도 늙으면 옛날로 돌아가지 못하는군요.”
“직접 나서시라고 건의한 적 없습니다.”
언빙운이 범한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만약 고하가 나선다면 대인이 살아오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범한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소은이 간직한 비밀이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려면 범한이 직접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천천히 찻잔을 두드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장기를 두는 사람처럼 어설프게 장기짝을 움직이는 동작을 취했다. 장기판 양쪽에 앉은 쪽은 당연히 노련하고 용의주도한 사람들이었다. 한데 막상 고하와 장 공주, 황태후와 상삼호를 놓고 비교하자니 범한으로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개구쟁이에게는 장기판을 엎어 버리는 용기 말고는 다른 재능이 없었다.
* * *
문서 작업이 모두 끝나자 사신단과 북제 조정은 동시에 한시름 놓고 마음 편히 연회를 즐겼다. 하지만 범한만은 예외였다. 고요한 상경성에서 유달리 이상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였다. 바로 옥천하강 양안을 따라 발생한 몇 건의 수상한 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끔찍한 방화로까지 이어져 며칠 동안 북제 사람들이 사랑하는 옥천하강을 붉게 물들였다.
범한은 이 살인 사건들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잘 알고 있었다. 1년 동안 동면 중이었던 경국의 정보 요원들이 행동을 개시하자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인 심중이 그 낌새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래서 군중 속에 숨어 있던 금의위도 격렬했지만 적절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이에 예전에 언빙운이 깔아 놓은 연락책도 이번 살인 사건으로 인해 일부 손실되었을 수도 있었다. 타국에서, 그것도 상대방의 바로 코앞에서 큰 거래를 하려 했으니 상대가 아예 모르도록 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문에 4처가 북쪽에 설치해 놓은 첩보망이 여러 조각으로 찢어지기는 했어도 그 바람에 경국의 첩보망이 북제 금의위에게 파헤쳐져 너무 많은 거점이 밝혀질 염려는 오히려 없었다.
밀정들이 죽어 나가자 언빙운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져 갔다. 감찰원 4처가 상경에 보낸 밀정 수는 겨우 열일곱 명뿐. 그런데도 장 공주와 소은 때문에 이리도 큰 희생을 치르자 언빙운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언빙운을 위로하기는커녕 무언가를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계속 술이나 마시고 쾌락을 좇고 향락을 즐기며 기녀를 찾았다.
* * *
북제 천보 6년, 6월 초엿새는 숫자 ‘6’이 연이어 있는 길일 중에서도 대길일이었다. 범한은 전생 서양에 있었던 ‘666’과 악마에 관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한없이 안정적이고 믿음이 충만한 손길로 옷깃을 여몄다.
그는 몸에 지닐 무기와 약물 등을 신경 써서 분류하고 제자리에 넣었다. 우선 허리끈 안에 그리고 몸에 달라붙는 내의에 물건들을 넣었다. 또한 왼 팔뚝 아래에는 한꺼번에 세 발이 발사되는 쇠뇌의 화살을 넣었고다. 그리고 감찰원 3처에서 비밀리에 제작한 연막 약품은 오른쪽 손목에 단 손가락 마디 크기의 주머니에 넣었다.
이어 범한은 탁자 위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놓여 있는 금속 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환약 세 알이 있었다. 붉은색, 초록색, 흰색으로 그냥 보기에도 괴상했고 어떤 이상한 일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붉은색 환약은 크기가 작지 않았다. 약 냄새가 많이 사라진 상태라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냄새로는 알 수 없었다. 이는 범한의 몸에 흐르는 패도의 기를 걱정한 비개가 꽤 여러 해 전에 준 것이었다. 범한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이 용의 눈알같이 생긴 환약을 허리끈 안에 넣었다.
이어 범한은 나머지 환약들을 바라보다가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어 그것들을 전부 가져가기로 했다. 어쩌면 무공 최고수인 그 종사를 만날 수도 있으니 목숨을 지켜 줄 물건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환약을 감춘 후 범한은 코를 비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이 흥분되면서 체내 패도의 기가 남들보다 넓은 경맥을 타고 급속히 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신의 모공이 활짝 열리고 있는지 없는지 모를 천지간의 원기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연한 마황 나뭇잎 향기가 더해지자 범한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범한은 개조해 모양이 바뀐 호위 장도를 탁자 위에서 집어 들고는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그런 후 장도를 등 뒤에 끼워 놓고 꺼내기 쉽도록 방향과 각도를 잡은 후 천을 이용해 등에 고정했다. 다리에도 검은색의 가느다란 비수를 숨겼다. 한데 이 비수는 다년간 사용해 몸과 혼연일체가 된 터라 범한은 특별히 이 비수를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왕계년이 들어와 범한에게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범한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고 탁자 위에 남겨 놓은 몇 가지 기물들을 눈으로 훑어본 후 왕계년에게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왕계년이 난처하게 웃었다.
“제 솜씨가 대인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러자 범한이 질책했다.
“내가 화장한 모습을 본 적 없잖아요. 그런데도 나보다 솜씨가 떨어진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 겁니까? 게다가 예전에 여러 나라를 오가던 큰 도적이었다면서 분장도 할 줄 모른다고요?”
“저 벽 너머 있는 사람은 대인께서 화장을 해주신 겁니까?”
왕계년이 슬그머니 아첨을 떨기 시작했다.
“이런, 옆에 있는 저도 못 알아볼 정도도 대단한 솜씨이십니다. 하관이 보기엔 대인의 솜씨는 인간 세상에 떨어진 신선의 경지이십니다.”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군요.”
범한이 긴 의자에 앉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경도 근처 야선묘에 가면 진흙으로 만들어진 신선상이 있어요. 그들도 전부 나보다는 잘생겼을 겁니다.”
낯짝이 두꺼운 한 사람과 그보다 낯짝이 더 두꺼운 한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은 대충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주고받았다. 그 바람에 범한은 남아 있던 긴장감을 놓아 버릴 수 있었다. 왕계년은 범한의 최측근이지만 창주성 밖 추적과 최근 정보 연락책이 된 것 말고는 그다지 활약한 게 없었다. 한데 다행히도 만담꾼 보조 정도의 재주는 있는 터라 범한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만들어 주는 데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왕계년이 작은 칼을 들고는 범한의 눈썹을 깎았다. 그런 후 물에 개어 놓은 석회를 탁자 위에서 가져다가 범한의 얼굴에 발라 보수하기 시작했다. 한데 석회의 점성과 색상이 제사 대인의 얼굴 피부와 차이가 많이 나자 그가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옥수숫가루를 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어디에서 구합니까? 어제 어느 관리 집에 숨어들어 가 아낙들이 쓰는 연지분을 훔쳐 왔는데 효과가 꽤 괜찮더라고요.”
199화
성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 내부, 널따란 뜰에 횃불이 높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꾸민 십여 명의 사람들이 묵묵히 대기 중이었다.
그들 맞은편에 있는 등받이가 있는 팔걸이의자에는 중년의 누군가가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사람은 매끄러운 오른손으로 까만 의자 팔걸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대충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린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육중한 산처럼 바닥 벽돌을 지그시 밟고 있었다.
이자는 바로 17년 넘게 북제 북방에서 오랑캐와 맞서 온 상삼호 대장이었다. 지금 천하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장 중 하나로 북제군 내부에서는 최강자이자 명망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한참 후 상삼호가 호랑이 같은 눈을 서서히 떴다. 그리고 위협적인 차가운 눈빛으로 꿇어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황궁에서 퇴각로를 열어 주지 않으니 나 역시 가만히 앉아 죽을 수만은 없구나. 이번에 가면 조심하거라. 남쪽의 그자들이 나 하나 팔아넘기는 건 괜찮지만 그래도 그자들에게 또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조금 전 상삼호의 목소리는 사실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종이 울리는 것처럼 웅장한 소리가 나 그가 얼마나 강한 내공의 소유자인지 충분히 보여 주었다.
상삼호 앞에 꿇어앉아 있는 사람은 상경성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담무였다. 그는 사신단 앞에서 고달에게 한 초식 만에 제압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북제군의 맹장이었다. 그런 그가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올려 예를 차렸다.
“총독님, 남쪽 사람들은 교활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상삼호가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는 오늘 입궁을 했었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마지막 입궁이었다. 젊은 황제는 여전히 그에게 믿을 만한 소식을 주지 않았다. 황태후 쪽도 계속 소은을 가둬 두기를 고집했다. 그러니 상삼호로서는 양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해야만 했고 어쩔 수 없이 금지된 일을 저지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전씨 집안 자손은 역시나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는군.”
상삼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만약 양아버지께서 비밀 따위 감추고 있지 않았다면 젊은 황제는 자신에게 선심 쓰는 척이라도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상삼호가 보기에 젊은 황제는 조금 여성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질 자체는 전청풍 총독의 강단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단시간에 국력을 증강하고 심지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군을 이끌고 남하한 것이었다.
이에 소은은 양아버지가 감옥에서 살아 나올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양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당한 처참한 일들을 생각하니 상경으로 불려온 명망 높은 명장은 슬프고 침울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가거라!”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 후 아내가 황태후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후원으로 돌아갔다.
“알겠습니다.”
담무가 자세를 바꿔 한쪽 무릎을 세우며 대답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나섰다.
* * *
상경성 숭무문 바깥쪽에 있는 어느 민가에 정말 보잘것없는 작은 뜰이 있었다. 이곳은 좁은 골목이 밀집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감찰원 4처가 이 골목에 있는 민가에 교대로 드나들고 있었다. 한데 이 골목길은 토박이들도 쉽게 길을 잃는 곳이다 보니, 이곳에서 수십 장 떨어진 곳에 북쪽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큰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칼처럼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는 수피가 미백색이라 한밤에도 잘 보였다. 그리고 이미 시기적으로 여름으로 들어서며 올해 들어 유난히 비가 충분히 내려 준 덕분에 나뭇잎은 유난히 무성했다.
범한은 조심스럽게 정기를 조절해 맥박을 강하게 억제하고 있었다. 모두 검은 옷으로 가려 둔 몸을 주변 환경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시선은 손바닥 크기의 나뭇잎을 뚫고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 민가 내부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삼호 쪽에서 소은을 구출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하기만을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소은이 바로 이 작은 뜰 안에 있었다. 이는 감찰원 4처가 공을 들여 찾아낸 정보였다. 오늘 저녁 행동 대원으로 나선 이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온 상삼호 밑에 있는 무사들뿐이었다. 그리고 언빙운의 부하들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여서 신양 쪽에서 돕기 위해 어떤 고수를 파견할지는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상삼호는 상경 요충지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을 빼내려는 중이었고 이는 금기시된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성공 여부를 떠나 상삼호는 북제 황실과 군 측의 관계를 파탄 낼 수도 있는 일을 저지르려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어느새 남방의 어느 귀인에게 무한히 탄복하고 있었다.
장 공주는 정말로 대단하게 미친 여인이라고 말이다. 손바닥 뒤집듯 언빙운을 팔아넘긴 날부터 어쩌면 그녀는 그 후에 일어날 모든 변수를 다 계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그 변화가 무엇이든 간에 경국 조정은 큰 이익을 얻게 되어 있었다고 말이다. 장 공주는 그야말로 만만하게 볼 여인이 아니었다.
* * *
밤이 깊어졌음에도 높은 나무 아래쪽에 위치한 민가의 뜰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여느 때처럼 저 멀리 강가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근처 마차 가게에 있는 늙은 말은 힘없이 건초를 씹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은 구름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밤바람이 불자 범한 곁을 감싸고 있던 나뭇잎은 자기 연민에 빠진 듯 몸을 비벼 댔다. 그야말로 상경의 여느 밤과 똑같은 밤이었으며 조금도 이상하거나 다를 게 없는 밤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뭇가지에 엎드려 있던 범한이 눈을 번쩍 뜨더니 아래쪽 민가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탈옥이 시작된 것이다.
마차 한 대가 작은 뜰로 통하는 문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같은 시각, 회색 천에 싸인 작은 수레도 아무도 모르게 뜰 뒤쪽 담벼락으로 다가갔다. 뜰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한편 높은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범한은 이 모든 장면을 눈에 담고 있었다.
마차에서 중년의 누군가가 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몇 개의 검은 그림자가 뜰 주위로 사라지는 게 범한의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
소은을 지키고 있던 금의위가 경계심을 보였다. 그는 담벼락 위에 몸을 반 정도 드러내 놓고 육중한 쇠뇌를 들어 뜰 문 앞에 있는 중년에게 겨누었다.
마차에서 내린 중년의 사람은 바로 범한도 만난 적 있는 담무였다. 담무가 웃다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검은 그림자 두 개가 어느새 금의위의 왼쪽과 오른쪽에 나타나 그의 후두부에 쇠뇌의 화살을 인정사정없이 내리꽂았고 그 순간 피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금의위의 목에는 쇠막대기 두 개가 삐죽 솟아 있었다. 보기만 해도 피비린내 진동하는 광경이었다.
* * *
“공격!”
담무가 작은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내 큰 소리가 울렸다. 마차에서 약 여덟 척 정도 되는 키에 손에 커다란 쇠망치를 든 장사 하나가 내렸다. 그리고 뜰을 막고 있는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왼쪽 팔을 쭉 뻗어 문을 내려쳤다. 한데 손을 뻗는 위세만 봐도 나무문은 수많은 나무 파편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펑!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로 정말 큰 소리였다.
역시 예상대로 수많은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데 문은 부서진 게 아니었다. 문 사이에 강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높은 나무 위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범한도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금의위가 중범죄자를 가둬 둔 곳이니 과연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문이 부서진 찰나, 뜰에 있던 금의위도 어느새 대응에 들어가 뜰 입구에 사람들을 모아 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거인은 강철로 된 문을 계속해서 두드렸고 쿵쾅거리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그리고 넘어갈 듯 떨리는 것을 보니 이제 몇 번만 더 때리면 될 것 같았다.
“죽여!”라는 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사람이 담장 위로 올라가더니 이내 안쪽에 있던 금의위를 죽이기 시작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무공 실력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고 모든 공격 동작에는 피를 보겠다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더군다나 죽음을 불사한 움직임이다 보니 마치 광풍과 우레가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늘 번화한 상경만 수호하던 금의위는 군에서 온 장사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하늘 가득 선혈이 흩뿌려지는 동안 금의위는 뒤로 밀리기만 할 뿐이었다.
범한은 나무 위에서 모든 상황을 냉철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두 다리가 잘린 소은이 높은 담벼락을 넘을 수 없기에 상삼호의 부하가 문을 부수려 애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장사가 하층민 노동자처럼 죽어라 철문만 두드리고 있으니 보다 못해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담벼락을 부수라고!”
마치 소은의 두 다리가 잘린 게 자기 때문이란 걸 잊은 사람 같았다.
징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무판 사이에 끼워 두었던 강철판을 장사가 드디어 부순 것이다. 한데 그걸 보고서도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도 또 금의위 중에서는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뜰을 막고 있던 문이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그러자 일찌감치 공격 준비를 하고 있던 금의위는 쇠뇌를 쏘아 댔고 화살이 흉악하게 공기를 갈랐다.
장사는 문을 수없이 내려친 탓에 오른팔이 견딜 수 없이 시큰거리고 체내의 정기마저 모두 소모된 상태였다. 반격할 여력조차 없던 그는 정면에서 날아오는 쇠뇌의 화살을 보고만 있었다. 결국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이 소리와 함께 그의 널따란 몸을 뚫었다. 그중 한 발은 그의 안구로 직행했다. 그리고 이내 척,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정처럼 생긴 새빨간 물체가 그의 눈에서 튀어나왔다.
“으악!”
장사가 고통스러워하며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그러더니 몸에 수많은 쇠뇌의 화살을 꽂은 채 뜰 안쪽으로 돌진했다. 그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쏟아져 내렸다.
겨우 세 걸음 앞으로 내디뎠을 뿐인데 산처럼 거대한 장사의 몸이 바닥 석판 위로 고꾸라졌다. 순간 석판이 깨지면서 사방으로 먼지가 날렸고 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그리고 엄청난 기세에 뜰에 있던 금의위도 세 걸음 뒷걸음치고 말았다.
죽은 장사의 어마어마하게 큰 덩치는 뜰 밖으로 향하는 화살을 거의 다 막아 주었다. 이에 담무와 고수 몇몇은 장사의 거대한 몸 뒤에 숨어 뜰 안으로 바람처럼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리고 죽은 장사의 몸이 금의위들을 덮치려 할 때 측면에 있던 금의위들을 해치워 버렸다.
이 순간 높은 담벼락 위에서 싸우던 금의위는 뜰 안으로 퇴각을 한 상태였고 십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자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상경성에서는 보기 힘든 곡도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지근거리에 있는 스물 몇 명에 달하는 금의위를 지독하고 철저하게 해치워 나갔다. 이에 금의위는 수적으로 우세였는데도 이들을 막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금의위를 공격하는 모습은 심해 상어가 물고기를 사냥하기 위해 에워싼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데 몰린 물고기가 상처 입고 피를 흘리자 상어가 그것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하고 이내 깨끗하게 처리해 버린 것만 같았다.
담무는 대장군의 양아버지가 아직 이 안에 있어 마음이 조급했다. 남쪽 사람들이 전해 준 소식에 따르면 요 며칠 궁에서도 누군가를 이동시키는 것 같은 기미는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가 오른손을 휘둘러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무공이 가장 높은 고수 셋이 앞으로 나와 건물 안을 향해 나아가며 금의위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나 줄어들었지만 금의위가 느끼는 압박감은 여전했다. 검이 빛을 내고 지나갈 때마다 핏방울이 튀었고, 그중에는 팔이 잘려 나가고 가슴이 터져 피가 흥건한 바닥에 고꾸라지는 이들도 있었다.
높은 나무 위에서 모든 국면을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범한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비록 언빙운이 계획한 이번 급습이 술 가게 성회인를 통해 상삼호와 신양 쪽으로부터 만족해한다는 답변을 받기는 했어도 범한은 언빙운만 아는 금의위의 다음 수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담무도 이렇게나 순조로울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
200화
“억!”
다친 자의 비명 소리가 경고음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앞서 건물로 들어갔던 세 명의 고수가 몸을 가로로 날리며 다급히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들은 입에서 피를 뿜고 있었다. 건물 안에 매복해 있던 금의위 고수의 실력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담무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돌바닥에 발을 굴러 공중으로 치솟았다. 팍, 팍, 팍, 소리가 정확히 세 번 울렸다. 어느새 담무가 건물에서 따라 나온 금의위 고수에게 세 번의 공격을 펼친 것이다.
“소원병 부지휘사께서 이곳을 지키고 계셨군요.”
담무가 냉랭하게 앞에 있는 푸른 옷의 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방은 금의위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로, 진무사 부지휘사인 소원병이었다. 깊은 눈매의 소원병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담무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황태후마마께서는 너희 역도들이 올 줄 알고 계셨다. 이에 본관이 직접 지키며 대체 어느 놈이 소은을 구출해 갈지 기다리고 있었지!”
부지휘사 소원병의 말투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사이 담무는 손으로 입을 가로막고 기침을 두 번 했고 그의 입에서는 피가 나오고 있었다. 담무는 부지휘사의 적수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살짝 실눈을 뜨고 뜰 뒤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나무 위에 있던 범한도 이제 더 이상 뜰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뜰 뒤편에 있는 작은 수레에 고정되어 있었다. 작은 수레가 돌 담벼락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한데 이 담벼락은 평범해 보여도 실은 무엇보다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주 작게 샤라락,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소원병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히 자신에게 달려드는 담무의 공격을 한 손으로 막아 내고는 고개를 돌려 건물 뒤편을 바라보았다.
* * *
범한은 조심스럽게 다시 자세를 잡고는 언제든 나무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는 그 작은 수레를 바라보며 소리는 내지 않고 살며시 입만 벌려 한마디 내뱉었다.
“터져라!”
순간 폭발음이 울리며 거대한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수레가 폭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담벼락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담벼락 아래에 매복해 있던 서른 명 정도의 금의위는 순식간에 화살처럼 날아드는 담벼락 파편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사망하고 말았다.
조금 전 일은 감찰원이 상삼호를 향해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즉 3처에서 만든 폭탄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이는 범한이 계획해 놓은 일이었다. 다만 3처에서 보여 준 성의가 범한의 예상보다 훨씬 충분해 범한은 다시 생각해도 너무 무서웠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한데 범한은 건물 안에 있는 소은이 폭발로 죽었으리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돌 파편이 처음 떨어진 곳에서 소리가 나더니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마차 한 대가 죽음을 무릅쓰고 담벼락 구멍 난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이내 몇몇 사람이 여기저기서 떨어지고 있는 돌멩이와 자욱이 날리는 먼지를 뚫고 뜰로 들어왔다. 이들은 얼마 후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업고 나와 구멍을 빠져나간 후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마차는 저 멀리 골목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조금 전 등에 업힌 헝클어진 백발의 사람은 멀리서 보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소은이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범한은 실눈을 뜨고 보기만 할 뿐 나무 아래로 내려가 그를 쫓아가지 않았다.
* * *
마차는 용맹하게 질주하며 말발굽 소리만 남긴 채 한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거대한 폭발음이 메아리친 후 정적이 찾아온 상경성 안에는 마차가 석판 바닥을 때리며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한편 소원병은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드는 담무에게 저지당해 담벼락에서 일어난 변고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오늘 상삼호는 줄곧 뜰 문 쪽에만 강공을 퍼붓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뒤쪽 담벼락을 공격하는 성동격서 전략을 펼쳤다. 이에 뜰을 방비하고 있던 금의위는 모두 앞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렇다고는 해도 소원병 부지휘사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뒤쪽 담벼락에 금의위 내 칼잡이를 매복시켜 놓았었다.
그런데 소원병의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거대한 소리가 울리고 난 후 그가 생각했던 싸우는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이다.
소원병도 거대한 울림 소리만 생각하면 두려움이 밀려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 소리가 어찌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란 말인가. 설마 천신이 강림하셔서 노기라도 부리신 건가? 결국 그는 이런 생각들 때문에 손놀림마저 점점 느려졌다.
그러자 이 기회를 틈타 담무가 앞쪽으로 주먹을 내질러 공격했다. 한데 담무의 몸은 도리어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담무는 그 후로 몇몇 부하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그런 후 남은 여덟아홉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자들과 함께 문을 뚫고 나가서는 곧장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 했다.
* * *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마차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전속력으로 되돌아왔다.
담무는 깜짝 놀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데리고 서둘러 되돌아갔다. 이들은 뜰 남쪽으로 난 세 갈래 길목에서 마차와 합류할 수 있었다. 담무가 헉, 소리를 냈다.
“왜 되돌아왔지?”
마차는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다. 돌에 맞아 부서진 흔적이라기보다는 먼 거리에서 날아든 병기에 당한 흔적이었다. 마부석에 있던 절망한 모습의 군인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 매복에 당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가슴 위 처참한 상처를 누르고 있던 왼손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머리를 옆으로 기우뚱하더니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앞쪽에서 마차를 끌던 말은 다행히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주인의 죽음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불안하게 뒷발을 굴러 잠깐 동안 느리고 가볍게 소리를 냈다. 그런데 이 적막한 말발굽 소리에 호응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뜰 사방에 그물처럼 촘촘히 연결된 골목에서 타다다닥,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담무 일행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늘의 별도 놀랐는지 고개를 내밀어 주변이 잠시 밝아졌다. 그제야 담무 일행은 말발굽 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사방팔방으로 난 골목에서 금의위가 조용히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상경부의 장병들도 있었다. 스산한 매복자들은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덩그러니 혼자 있는 마차와 검은 옷의 아홉 명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망갈 곳 하나 없도록 긴 창으로 그들을 겨누었다.
“붙잡아라!”
말이 떨어지자 금의위의 대열이 갈라졌다. 그리고 범한이 부자로 생각했던 북제의 유명 인사, 즉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 심중 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상삼호 장군이 본관에게 기회를 주었군. 정말로 대단히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해요.”
탈옥은 실패로 끝나고 심중에게 드디어 상삼호를 무너뜨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담무의 얼굴에는 절망하는 기색도 경악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분노와 원망만 가득했다. 오늘 밤 소은을 빼내는 계획에서 그는 실패했을 때도 고려해 둔 터였다. 게다가 자신은 과거 상삼호 대장의 호위병이었으니 애당초 자기 목숨을 아끼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한데…… 그런데도 담무는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다. 모두 그의 계획 중에 심중이 매복해 있을 거란 걸 알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둔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마차가 도망갔던 방향 쪽 민가에서 이때쯤이면 분명 불길이 치솟아야 하는데 아직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이들 금의위가 매복해 있는 좁은 골목에 분명 혼란이 일어났어야 하는데 오늘 그 어떤 혼란도 일어날 기미가 안 보여서였다.
* * *
범한은 나무와 혼연일체가 되어 저 멀리서 일어나는 일들을 차분하게 주시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친 독수리처럼 분노하고 있는 담무를 보면서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 이번 탈옥 계획에서 공격은 상삼호 쪽이, 철수하는 이들을 엄호하는 임무는 신양 쪽과 감찰원의 상경 밀정들이 맡았던 것이다. 그런데 장 공주는 움직이지 않았고 언빙운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범한도 움직이지 않았다.
경국 사람들도 대외적인 일에서는 상삼호 수하의 군인들에 뒤지지 않게, 의심할 바 없이 상당히 일치된 음흉함과 말없이도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천보 5년 가을, 젊은 황제는 저 멀리 북쪽 눈의 땅에 있는 상삼호에게 밀서로 답변을 주었다.
-짐은 소은을 돌려받아 본국으로 데려올 것이니라.”
그러자 세상을 호령하던 명장 상삼호는 십여 년을 지켜 오던 북방 요새를 버리고 호위병과 담무만 데리고 상경으로 돌아왔다. 천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믿어서였다.
소은이 북제로 돌아온 건 맞았다. 하지만 황제는 소은이 지닌 비밀이 알고 싶어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태후는 소은을 죽이고 싶어 했다. 고하 국사가 소은만이 아는 비밀을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금의위에서는 소은을 밀착 감시했다. 그래서 상삼호는 상경에 있으면서도 소은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한편 황태후와 황제의 경우도 상삼호가 군에서 지닌 명망 때문에 조금이나마 그의 체면을 세워 줘야 하기에 그를 심하게 몰아붙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는 북제 황궁에서 가장 꺼리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상삼호의 실력과 명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기회만 생긴다면 황궁 쪽에서는 그것을 잡으려 했다. 바로 오늘과 같은 기회 말이다.
심중은 마차 옆에 있는 담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일로 상삼호를 단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의 호위병을 붙잡았으니 군 내부에서 상삼호가 지닌 명성에 타격은 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경국과 결탁한 죄는 군인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죄명이었다.
바로 이때 담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입을 크게 벌려 가며 욕을 퍼부었다.
“개 같은 경국 놈들!”
심중이 살며시 미소 짓고는 말했다.
“앞서 울린 굉음은 본관도 똑똑히 들었다. 경국의 감찰원 3처 말고는 그런 화려한 장난을 할 곳이 없지. 경국 사람들이 담무 장군을 도와 수감자를 탈옥시키려 했던 게 맞았어.”
한데 담무는 심중을 본체만체하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아홉 명의 수하만 잠시 바라보았다. 이들은 상삼호 총독의 친위영 소속 친위병으로 자신이 직접 훈련한 자들이었다. 오늘 밤 이미 적지 않은 수가 죽은 걸 보고 만약 경국 놈들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면 분명 자신이 이들을 데리고 살아서 도망갔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담무가 고개를 돌려 심중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예를 올렸다.
“심중 대인, 부디 제 말을 전해 주십시오.”
“무슨 말이냐?”
심중은 밀어붙이지 않았다. 이자를 생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조금이나마 있어서였다.
“저를 죽인 자는…… 범한입니다.”
담무는 총독의 심복이니 당연히 이번 계획과 연관된 몇몇 당사자를 알고 있었다. 범한은 경국의 감찰원 제사이고 때마침 상경에 있으니 그가 어떤 역할을 했을지는 자명했다. 범한이라는 이름이 그의 입을 통해 비명처럼 갈라지며 나올 때, 그 안에는 분개와 원망이 섞인 독기가 가득했다. 게다가 그 느낌은 현장에 있는 수백 명의 귀에 생생하게 전달될 정도였다.
이때 나무 위에 있던 범한은 담무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삼호가 이번 일에서 범한 자신이 맡은 꺼림칙한 역할을 명확히 알고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담무가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발설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였다.
담무는 말을 마치자마자 팔을 들었다. 순간 검이 번쩍이며 아래에서 위로 향했다. 그가 자신의 뺨을 칼로 베어 버린 것이었다. 검이 다시 한번 번쩍이며 그의 목을 스쳐 갔다. 그러자 그의 목이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곧이어 슥삭, 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아홉 번 울렸다. 그리고 아홉 명의 머리가 검은 옷을 입고 피를 뿜어내고 있는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을 뒹굴었다. 이들 머리는 분노에 차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피범벅이 되어 처참하기 짝이 없는 담무의 머리 쪽으로 굴러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들이 자결하는데도 심중이 막지 않은 것이다. 그는 냉정하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한참 후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모두 나라를 위해 죽은 용사들이다. 안타깝게도 경국 사람의 음모에 당했을 뿐이다. 그러니 이들 모두에게 제대로 장례를 치러 주거라.”
담무가 자신의 얼굴을 훼손하고 자결하자 나무 위에 있던 범한은 심장이 떨렸다. 그런데도 그는 유난히 뛰어난 청력으로 심중이 내뱉은 헛소리까지 다 들었다. 그제야 안 사실이었지만 심중은 그야말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201화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었다. 그리고 금의위에 에워싸인 마차 한 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금의위는 자신들의 시조인 소은이 더 이상 과거처럼 용맹함을 발휘할 수 없는 노인임을 그리고 그런 그가 이 마차 안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한데 마차 위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는지 별안간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어찌나 맹렬한지 잠깐 사이 마차 전체를 휘감아 버릴 정도였다. 앞쪽에 있던 말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소리조차 낼 수 없게 되자 말은 마차를 매단 채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 순간 칼이 번쩍였다. 두 마리 말이 그대로 주저앉더니 두 번 턱턱,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말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심중은 싸늘한 눈빛으로 불길에 휩싸인 마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소원병 부지휘사가 대인을 한번 쓱 보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대인, 얼른 불을 끄셔야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소은을 살리라 하셨습니다.”
심중이 슬며시 웃으며 손을 휘휘 휘두르며 불을 끄려는 부하들의 행동을 말렸다. 그러고는 소원병을 자기 곁으로 불러들인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한데 황태후께서는 소은이 죽기를 바라신다네.”
소원병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앞서 자신이 한 말이 조금 섣부른 언행이었음을 알아차려서였다. 곧이어 그는 심중의 눈빛에 이상한 기색이 나타나는 걸 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심중 대인이 작게 혼잣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 오래 갇혀 있었으니 벗어나지 못할 바에야 죽음이라…… 어쩌면 괜찮은 선택일 수도 있겠군.”
불길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차가 길 위로 무너져 내리면서 검은 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센 열기는 금의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불길이 사그라지자마자 금의위 소속 검시관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마차 안에 있는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했다.
“소은이 맞습니다.”
심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리에 있는 상처는 새로 생긴 것인가?”
“네. 두 달 이내에 생긴 것입니다.”
“치아는?”
“무도하강에서 인계받을 때 기록한 것과 일치합니다. 세 개가 없습니다.”
심중은 살짝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은이 이렇게 죽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의 미소는 조금은 기괴했고 조금은 냉담해 보였다.
* * *
상삼호는 성 남쪽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서 부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 있는 찻상 위에는 선물 명단이 놓여 있었다. 안채에서도 아득하기는 했지만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기는 했다. 상삼호의 부인이 미간에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나으리, 황태후마마의 생신이니 며칠 동안은 상경을 떠나시지 못합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평소 같으면 이맘때 저택 안은 분명 평온했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은 부인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상삼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못 떠나겠지요.”
“이번 생신 때 드릴 선물은…….”
부인이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제대로 챙기지 못했겠군요. 부인, 가서 짐이나 싸세요.”
부부가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 갑자기 기골이 장대한 장수가 빠른 걸음으로 안채로 들어왔다. 부인은 그가 총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측근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이 다 된 시간에 말도 없이 불쑥 들어오자 자신의 불길한 생각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이에 살짝 당황한 그녀가 상삼호를 잠깐 바라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하셨습니까?”
상삼호는 성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위엄 있게 시커멓고 굵은 송충이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세우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 장군은 조정에 충성해 왔어요. 한데 일이란 건 어쨌든 의견 충돌이 있을 수 있으니 내가 다소 제멋대로군 건 윤허해 줘야 할 겁니다.”
그러자 부인은 군말하지 않고 조용히 뒤편에 있는 방으로 물러갔다. 그러고는 다시는 황태후의 생신 선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총독님, 저택 밖에 감시하는 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상삼호의 최측근들은 그를 대장군이 아닌 총독이라고 고집스레 부르고 있었다. 지금 말한 사내는 원래 성씨가 없는 고아였다. 그런데 어느 날 상삼호가 그를 눈 덮인 숲에서 데려와 이만큼 키워 주고는 ‘상삼’이라는 자신의 성씨를 붙여 주고 이름도 ‘파’라고 지어 주었다. 그러니 그와 상삼호와의 관계는 상삼호와 소은의 관계와 비슷했다. 차이라면 상삼파는 상삼호에게 친근감보다는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소식을 기다려 보자꾸나.”
상삼호는 차분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도 차분함만 있을 뿐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상삼파는 명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깥 동정을 살피는 동시에 후속 대책을 준비했다.
* * *
한참 후 상삼파가 다시 안채로 돌아오더니 무릎을 세우고 바닥에 꿇어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패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가려지지 않는 슬픔이 그의 목소리를 뚫고 흘러나왔다.
의자 팔걸이 위에 올려 두었던 오른손이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상삼호는 이내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데 어찌나 힘을 주어 감았는지 눈가에 명장의 실제 나이를 고스란히 알려 주는 국화꽃 같은 주름이 피어났다.
그는 뒤편에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침대 옆에 불안하게 앉아 있는 처를 바라보며 잠시 웃고는 말했다.
“이미 늦은 시간입니다. 왜 아직 자지 않고 있어요?”
부인이 살짝 불안한 미소를 띠었다.
“잠이 오지 않네요.”
그러자 상삼호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상경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며칠 뒤 입궁해서 황태후마마께 어떤 선물을 드릴지나 상의해 봅시다.”
* * *
여명이 밝아 오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난잡하게 어질러진 작은 뜰은 정리에 들어갔다.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금의위 역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용히 흩어졌다. 불타 재가 된 마차와 땅에 있던 시신의 머리는 이미 진무사의 전문 요원들이 맡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 이곳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제국의 강대한 조직에게는 경천동지할 굉음 사건을 덮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었다.
담벼락 쪽에 있다가 다친 금의위는 아직 바닥에 누워 가끔씩 잠긴 소리로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폭발로 인한 결과는 실로 처참했다. 대부분이 죽었으며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도 먼지를 뒤집어쓴 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리가 거의 끝나고 안정을 찾았을 무렵 누군가가 다친 금의위를 들어 올려 북쪽 성 방향에 있는 관아로 향했다. 의원들도 긴장한 채 그 뒤를 따랐고 들것들은 지네처럼 가느다랗게 대열을 이룬 채 앞으로 나아갔다.
범한은 여전히 조심스레 나무 위에 매복해 있었다. 그동안 그는 온몸의 근육을 꽉 경직시켰다가 이완시켰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무에 매달려 있느라 반응이 느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골목을 지나고 있는 들것에 실린 부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전생에 영화 과 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저 노인이 도망가고 있는데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무 아래 전쟁터는 이미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금의위는 마차로 옥천하강의 강물을 떠다가 커다란 들통으로 물을 부어 가며 거리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재와 핏자국은 순식간에 깨끗하게 씻겨 나가고 물기를 머금어 축축한 석판 바닥만이 남았다.
주위에서는 온통 금의위가 망을 보고 있었고 관련 관아에서는 각각의 민가를 상대로 입막음에 들어갔다. 이에 세 갈래 길로 난 골목에는 다른 수상한 움직임이 없었다. 뚫린 벽도 임시로 보수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진무사는 최대한 빨리 이 구역을 원래 모양대로 돌려놔야 하는 것이었다.
황궁에서는 이 사건을 들추려 하지 않았다. 담무 등 몇 명이 장렬히 자결했으니 상삼호를 모함하는 것도 이제는 조금 어려운 일이 된 터였다. 게다가 군 측의 태도도 고려해야 했으므로 일단은 한동안 이 사건을 덮어 두려 했다.
짹짹, 새벽을 알리는 새소리가 들리자 금의위들은 고개를 들고 아직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새가 너무 일찍 일어났는데 저 녀석들도 여기에서 무슨 일이 터졌던 걸 아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 * *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범한은 관자놀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냈다. 그리고 불면증 걸린 새의 울음소리에 속으로 투덜거리며 조심스럽게 여명이 밝아 오기 전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 후 멀찌감치 떨어져서 부상자를 옮기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 중인 금의위의 대열을 따라갔다.
길게 이어진 길에는 행인도, 전생에서처럼 길거리에 빗자루질하는 소리도 없었다. 범한은 거리 쪽에 있는 2층 높이의 건물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할 거라 믿고 있었다.
들것을 든 사람들은 아주 멀리 이동한 후 다른 뜰 안으로 들어갔다. 한데 이곳이 북 진무사인지 아니면 13관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부상자들은 방 몇 칸에 나뉘어 들어가 치료를 기다렸고 피 묻은 옷을 입고 있는 의원 몇 명이 이 방 저 방을 바삐 드나들었다.
범한은 우회해 뒤쪽으로 다가가 담벼락 모퉁이 아래 놓인 여러 개의 대광주리 뒤편에 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석에 있는 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범한의 귀에는 똑똑히 들려왔다. 그리고 누군가가 호흡을 가다듬더니 방에서 느릿하게 기어 내려왔다. 그 사람은 바닥으로 내려온 후 조심스럽게 자신의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그리고 요패를 확인하고는 서쪽 거리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범한은 금의위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모자로 머리를 꽁꽁 감싼 상태였지만 새하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삐져나와 흩날리고 있었다. 느릿한 발걸음에 맞춰 살짝 나부끼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밤바람에 더욱 처량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금의위 옷을 입은 자가 점점 멀어져 가는 동안 범한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싸늘한 눈빛만 살짝 드러내고 있었다. 상대방은 조금 이상한 걸음걸이로 길을 걷고 있었고, 이로써 범한은 자기 때문에 부러진 늙은 동지의 두 다리가 아직 제대로 낫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범한은 계속 따라갔다. 두 사람은 길게 뻗은 조용한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갔다. 길 입구마다 지키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소은은 입고 있는 금의위 옷과 방에서 사람을 죽여 빼앗은 요패 덕분에 아슬아슬하긴 해도 무탈하게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범한도 어둠 속으로 사라진 유령처럼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를 뒤따르며 가볍게 관문들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던 중 소은이 어느 평범한 민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자 그 뒤편에서는 범한은 다른 평범한 민가의 옥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런 후 두 사람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날이 더 밝아 오기 전에 금의위가 포진되어 있는 거대한 망을 뚫고 상경성 서쪽 문 앞까지 이동했다.
* * *
성문이 열리자 문밖에서 벌써 반 시진 동안 기다리고 있던 농민들이 마을 이장들이 내준 통행증을 건네며 밀려 들어왔다. 그러자 소은은 이 난리를 틈타 농민들 사이에 섞여 높이 솟아 있는 성문 담벼락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잠시 후, 이 난리에서도 살아남은 노인은 어렵사리 상경성 서쪽에 위치한 연산 산자락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은 수풀이 어지럽게 우거진 곳이었다.
범한은 멀리서 그를 쫓고 있었고 예리한 두 눈으로 앞에서 나아가고 있는 늙은 동지의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은이 낡아 빠진 옷으로 갈아입고 산에서 나왔다. 옷자락에는 시골 노인처럼 부뚜막 그을음이 검게 묻어 있었다. 등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땔감을 지고 있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태양이 조용한 숲을 비추기 시작하자 잠깐 사이에 엷은 안개가 걷히고 한없이 깨끗하고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소은의 모습은 아침 일찍 부지런하게 땔감을 구하러 온 늙은 농민처럼 보였다. 조금도 스무 해 전에 천하를 호령하던 밀정 우두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차분하게 나무 위에 앉아 소은의 구부정한 몸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걸 냉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소은은 늙고 신체 기능도 예전보다 못하며 머리 회전도 조금 떨어지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침 이슬도 마르지 않은 이른 새벽에 대체 누가 땔감을 구하러 온다는 걸까. 진짜 농민이라면 땔감을 구하러 산에 들어가는 때는 저녁인데 말이다.
202화
성 밖은 평화로웠고 성 안도 평화로웠다.
금의위의 밀정이 보고하고 있었다.
“경국 사신단은 지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습니다. 임문 대인이 어제 범한 정사에게 기녀 두 명을 불러 주었는데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범한이 사신단 안에 있는 게 확실하냐?”
심중은 이미 관복을 벗고 부자로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불에 구운 당나귀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당나귀 고기를 베어 물고 씹기 시작하자 그의 입가는 온통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그렇습니다, 대인.”
밀정이 공손하게 보고를 이어 갔다.
“범한의 외모를 알고 있는 형제들이 사신단 거처 밖에서 줄곧 지키고 있었습니다.”
살짝 놀란 심중은 기름진 당나귀 고기를 탁자 위에 던져 놓았다. 그의 두 눈은 유난히 정신이 없어 보였다. 강철로 된 몸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난밤에 신경 쓴 탓이었다. 심중이 느닷없이 웃다가 말했다.
“그리 고분고분한 자가 아니다. 하도인은 벌써 간 게냐?”
“네.”
말을 마친 밀정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몇 마디 더 보탰다.
“랑도 대인도 갔습니다.”
심중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참 후 작은 소리로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남쪽 오랑캐 놈들이 범한이 아직 사신단에 있다고 우리를 속이는 중이군. 그렇다면 만약 이럴 때 범한을 죽여 버린다면 그자들은 말도 못 하고 속깨나 끓이겠어.”
심중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순간 노련한 독수리처럼 잔인하고 표독하고 인정머리라고는 없어 보였다. 심중이 말했다.
“남쪽 오랑캐 놈들이 요 십여 년 동안 남을 모함하는 짓만 익혔구나. 이제는 제 꾀에 넘어갈 차례군.”
* * *
범한은 밤새도록 지켜보느라 지치고 피곤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가득 차 있는 패도의 정기 덕분에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 그래서 저 멀리 좁은 숲길에 있는 노인이 거동이 불편한데도 계속 걷는 걸 보며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흔에서 여든 사이의 노인인 그는 몇십 년 동안 고초를 당했으며 탈옥이라는 수를 철저히 가지고 놀았다. 그렇기에 저런 강인한 정신력이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며 범한은 감탄하고 있었다.
범한은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소은이 성 밖으로 나온 후로는 모든 게 순조롭기만 해 자신도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심장이 떨려 오면서 어떤 가능성 같은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나무를 타고 내려오더니 소은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내 어디론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태양도 소은도 한 걸음 두 걸음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서쪽은 서역 하늘을 말하는 것이니 소은이 나아가는 방향은 죽음일 수도 또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정토 세계일 수도 있었다.
사신단과 신양 쪽에서 모든 계획을 상삼호에게 알린 건 당연히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소은에게도 그를 마중 나올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계속 위쪽으로 오르고 올라 끝까지 가자 깎아지를 듯한 절벽 옆에 펼쳐진 키 작은 풀이 어지럽게 자라 있는 구릉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왼쪽으로는 상경 군영의 마장(馬場)으로 향하는 돌길이 나 있었다. 상삼호와 소은이 이곳을 접선 장소로 정한 건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소은의 눈동자를 덮고 있던 붉은 핏발이 많이 어두워진 상태였다. 소은은 어깨를 살짝 기울여 등 뒤에 산처럼 지고 있던 젖은 땔감부터 바닥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허리를 두드리며 주저앉았다.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지만 분명 황궁에서 첩보를 통해 이 계획을 알아냈을 테니 두말할 필요 없이 분명 누군가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무도하강 습지대에서 정신이 아득해졌던 것처럼 소은은 다시 한차례 피로가 밀려오자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았다.
“어서 나오너라.”
그의 살짝 마른 입술이 열리며 몇 글자가 튀어나왔다.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풀들이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통 검게 차려입은 검객이 산길로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검객은 높은 이마에 새하얀 낯빛 그리고 침착함과 노련함이 돋보이는 미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이는 대략 마흔 정도로 보였다.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 자루를 안정적으로 받치고 있었고 손가락 뼈마디는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사람 자체가 차가운 검 같았다.
“하도인?”
소은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한 눈빛을 발사했다.
이 검객은 북제에 몇 안 되는 9등급 고수, 하도인이었다. 한 해 반 전에 경국 외양간 거리에서 범한이 배를 갈라 죽인 8등급 고수 정거수의 스승이었다.
하도인은 얼굴은 창백한데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마치 눈에 숯을 얹어 놓은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그가 검날이 아래로 가도록 검 자루를 정중히 쥐고 일어나더니 검자루를 잡은 손 위를 다른 한 손으로 감싸 쥐고 공손히 인사부터 올렸다.
“후배, 소은 선생께 인사드립니다.”
북제에서 고하 국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소은에게 후배의 예를 갖춰야만 했다.
“옛날 젊은 칼잡이가 이제는 금의위의 최고 검객이 되었군.”
말을 마친 소은은 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리고 계속 자리에 앉은 채로 무릎만 툭툭 두드렸다.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소은을 바라보고 있는 하도인은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금의위의 개가 아닙니다. 황태후마마의 사람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소은 선생을 편히 쉬도록 해드리러 왔습니다.”
소은이 소리를 낮췄다.
“천하는 결국 폐하의 것이란 걸 알아야 하네.”
하도인은 노인이 한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소은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자신은 줄곧 황태후의 입장에 서 있었으므로 자신이 분명 젊은 황제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에 하도인이 살짝 웃음을 짓더니 주변을 잠시 바라보고 말했다.
“오늘 경국에서 온 범씨 성의 잘생긴 젊은이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자 소은이 두 번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이 늙은이도 한 시대를 풍미했건만 죽기 전에는 미끼나 되다니.”
“대인, 상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때 물러난 거니 그로서는 운이 좋은 게지요.”
챙, 소리와 함께 하도인이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그리고 하늘에서 전속력으로 하강하는 새처럼 손목, 팔꿈치, 어깨가 일직선이 되도록 쭉 뻗고 소은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검 끝이 인정사정없이 소은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가 순식간에 뽑혔다. 그러자 꽃잎이 날리듯 피가 솟구쳤지만 그 꽃은 아름답지 않았다. 늙고 부패한 몸이니 피마저도 젊은이들보다 적은 탓이었다.
하도인이 검으로 가슴 쪽을 겨누려다가 끙, 소리와 함께 순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소은은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고 말라비틀어진 오른손으로는 팔뚝 굵기만 한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앞서 하도인의 검이 자신을 찌르려 할 때였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내주었다. 그러더니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각도인데도 쥐고 있던 나뭇가지로 하도인의 정강이뼈를 힘껏 내리쳤다.
그 결과 나뭇가지 앞부분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조금 전 소은의 매질 공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나무 모양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도인은 왼쪽 다리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자 원래 하얗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검 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나뭇가지에 얻어맞은 왼쪽 다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도인은 9등급에 달하는 자신의 강력한 실력이면 늙고 다치고 아무런 힘도 없는 노인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이 노인이 두려움의 대상이어서 충분한 준비를 하고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이리도 종잡을 수 없고 게다가 괴상하기까지 한 공격은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 * *
소은이 기침을 두 번 하고는 말했다.
“범한 녀석이 내 다리를 부러뜨려 놔서 자네 다리부터 부러뜨리려 했는데…….”
아직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도인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고는 용처럼 맹렬한 기세로 힘겹게 앉아 있는 소은 주변을 맴돌며 공격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적을 얕잡아 보는 마음 따위는 버리고 순전히 종사급 고수를 대하는 자세로 신중하게 공격을 펼쳐 나가는 중이었다.
하도인의 검술은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파들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소문에는 산 북쪽의 모 오랑캐로부터 용을 연상시키는 맹렬한 검술을 전수받았는데 중간에 고하 국사의 자연을 따르는 검법을 받아들여 원래의 것이 조금 희석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소문에는 일찌감치 고하에게서 진리에 대해 물었다가 많은 걸 깨닫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소은은 지금 나뭇가지 하나만 쥔 채 거동이 불편해 힘겹게 앉아 있는 상태였다. 한데 그렇다 할지라도 소은이 쥐고 있는 나뭇가지는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주변을 탐색하다가 가끔씩 옆 찌르기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하도인은 멀리 피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하도인의 정기가 점점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가 검 끝을 몸 쪽으로 붙이자 공중에서 웅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은도 손에 쥐고 있는 나뭇가지로는 하도인을 당해 낼 수 없게 되었다.
샥샥, 하는 소리가 수십 번 연달아 울렸다. 검과 나뭇가지가 서로 맞닿는 동안 소은이 쥐고 있던 나뭇가지는 무수히 작은 파편이 되어 공중에 날렸다.
소은이 손을 옆으로 뻗더니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우측 사선 방향으로 찔러 하도인의 살기등등한 검을 막아 냈다. 그가 산속에서 땔감 한 뭉치를 들고 온 건 오늘 이 젖은 나뭇가지들을 몽땅 써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태양이 독하게 빛을 발산했고 산길 끄트머리에서도 더위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소은이 입고 있던 낡은 옷에는 여기저기 작은 구멍들이 생겼고 구멍 안쪽에서는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가슴과 배 사이에는 몇 군데 깊은 상처가 생겼으며 심지어는 검의 공격으로 살이 벌어진 게 고스란히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터라 이 노인의 상처 부위는 빨갛다기보다는 허옇게 보일 정도였다.
소은 주변에는 모기와 파리의 날개 그리고 조각난 몸통이 빽빽하게 떨어져 있었다. 피 냄새만 맡고 살 자리인지 죽을 자리인지 가늠도 못 하고 다가왔다가 순간 검이 내뿜는 기운에 조각조각 나고 만 녀석들이었다.
소은은 하도인으로부터 앞쪽으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도인은 검을 들고 서 있었으며 창백한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검 자루를 쥐고 있는 오른손은 결국 떨리기 시작했다.
그도 참으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걸치고 있던 검정 옷이 젖은 막대기 공격에 다 해져 버린 것은 물론 몸 곳곳에 상처까지 입었으니 말이다. 한데 무엇보다도 끔찍한 건 상처 주변에 조밀하게 꽂혀 있는 가는 파편들, 즉 젖은 땔감의 파편들이었다.
“나오너라, 범씨 성의 녀석이 안 왔을 리 없으니 말이다!”
하도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노인의 살고자 하는 욕구가 이리도 강하리란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한데 예상했던 경국 사람은 소은의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인데도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한 하도인이 동료를 불러냈다.
소은이 힘없이 눈꺼풀을 들고는 내내 옆에 숨어 있던 적을 바라보았다.
“고하가 후배들을 불러들이다니 이 늙은이 체면은 생각도 안 해주는구먼.”
하도인의 동료가 조용히 소은에게 다가갔다. 그자는 양손에 곡도를 쥐고 있었다. 곡도의 칼날 위에는 가는 강철 가시가 수없이 많이 돋아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하도인의 상처 옆에 박혀 있는 가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는 일단 아무 말 없이 소은에게 인사부터 올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해당 사매가 소은 선생을 상경까지 모셔다드린 건 폐하께서 죽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한데 오늘은 선생께서 탈옥하셔서 이 후배가 어쩔 수 없이 손쓰는 것이니 선생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오.”
소은이 싸늘하게 웃었다.
“과연 고하의 제자와 손제자는 위협하는 재주 하나는 제대로 배웠군. 겉으로는 인자하고 의로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간교하고 악랄한 걸 보니. 그냥 나를 죽일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찌 자신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건가?”
이자는 고하의 수제자이자 황제의 무술 스승인 랑도였다. 그는 스승뻘인 소은을 보자 말을 길게 하기 불편했다. 이에 곧바로 양 손목을 엇갈리게 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엇갈리도록 쥐고 있던 곡도를 소은의 머리에 재빨리 뒤집어씌우려 했다.
203화
소은이 갑자기 격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50년 동안 연마한 순수한 내공을 그 순간 폭발시켰다. 한데 그가 보여 준 동작이라곤 양 손바닥을 동시에 미는 것뿐이었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소은의 장풍이 랑도의 칼 사이를 파고들었다. 장풍은 위력적이었다. 만약 이때 소은의 장풍이 랑도의 양 손목을 쳤다면 아마도 그의 팔목은 금세 산산조각이 나버렸을 것이다.
랑도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팔목을 돌려 손에 쥐고 있던 곡도를 희한하게 회전시키더니 칼등으로 소은의 손등을 정확히 내리쳤다.
슥,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렸고 곡도의 가시가 소은의 손등 피부를 벗겨 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소은의 양 손바닥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이 순간, 랑도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쥐고 있던 곡도를 놓아 버리고 양 손바닥으로 소은의 손바닥을 밀어냈다. 한차례 가볍게 소리가 울린 후 서른 살가량 차이 나는 두 쌍의 손바닥이 인정사정없이 서로를 공격했다. 그야말로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순수한 실력 대결이었다.
랑도는 고하의 수제자로 정신력이며 기세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반면 소은은 여러 해 동안 갇혀 지내며 세상의 온갖 고초를 다 겪은 탓에 실력이 녹슬어 예전만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우세한 쪽은 랑도였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랑도의 손바닥이 소은을 밀쳤다. 그가 손목을 튕기자 칼날이 다시 번뜩이며 소은의 양어깨를 내리찍었다. 애초에 가느다란 사슬로 곡도를 팔목에 연결해 두었기에 가능한 공격이었다.
* * *
칼날이 두 번 번뜩이며 소은에게로 향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시뻘건 태양 빛을 품은 칼날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소은은 죽기 직전이었다. 한데 그런 힘은 갑자기 어디에서 나온 건지 그가 두 눈을 감더니 중지를 살짝 굽혀 하늘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랑도의 양손 아래 가장자리 쪽, 힘이 가장 약한 곳에 손가락을 끼우더니 버티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였다.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풀숲에서 사람 하나가 회색의 용처럼 비스듬하게 튀어나와 교전 중인 두 사람에게 돌진했다.
줄곧 검을 들고 서 있던 하도인에게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온 것이다. 바로 범한이 나타나는 순간 말이다.
하도인은 양손에 검을 쥐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아껴 두었던 경천동지할 공격을 감행했다. 바로 단번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수직으로 베어 버리는 기술이었다. 그는 그 어떤 군더더기 동작도 없이 단번에 상대를 베어 버렸다.
공기마저도 베어 버릴 것 같은 소리였다. 그러니 빠른 속도로 뛰어 들어오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죽했을까.
그런데 하도인은 모르는 게 있었다. 자신이 베려던 사람은 몸을 숨기는 데 있어서는 세계 최강의 실력자였다. 그래서 하도인이 본 것은 범한이 공중에서 몸을 이상하게 비틀더니 그 어떤 것의 도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장면뿐이었다.
옛날 일을 들춰 말하자면, 오죽의 매타작 덕분에 범한은 다른 사람한테는 호락호락 얻어맞지 않게 된 것이었다.
* * *
검은 하늘을 베었고 하도인은 가슴이 답답해 왔다. 게다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그것도 무수히 많이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는 사납게 검을 거둬들이고는 가로로 세 번 휘둘러 자신을 향해 오던 암기 대부분을 막아 냈다. 한데 땅에 떨어진 걸 보니 암기로 생각했던 것은 돌조각 몇 개였다.
그는 다시 억지로 검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혈맥이 크게 진동하며 목구멍을 타고 느닷없이 선혈이 왈칵 올라왔다. 그는 그 피를 억지로 삼켰다. 그런데 이렇게 잠시 멈칫하는 사이, 세 개의 검은 빛이 자신의 정수리 쪽에서 발사되었다.
모두 두 사람이 순간적으로 가까이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도인이 손목을 뒤집었다. 그러자 검 끝이 정확하게 세 개의 검은 빛과 부딪혔다. 그런데 하도인의 검이 마지막 검은 빛과 부딪칠 때는 그의 정기의 위력이 잠시 약해진 상태였다. 이에 그를 향해 날아들던 쇠뇌의 화살은 검의 힘에 밀리기는 했어도 방향이 크게 틀어지지 않은 채 비스듬히 날아가 그의 대퇴부를 스친 후 풀밭에 꽂혔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이제야 범한이 대적하기 힘든 상대란 걸 안 하도인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범한도 공중에서 억지로 몸을 비틀어 하도인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 검을 피했다. 하지만 그만큼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범한의 경맥은 일반 무공 수련자들보다 훨씬 넓었다. 그런 탓에 심장에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정기가 경락을 갈가리 찢어 놓을 듯 부딪치기 시작하자 범한은 그걸 멈출 수 없었다.
범한은 무도자로서 자신의 몸부터 살펴야 했다. 하지만 다시 양손에 칼을 쥐고 있는 고수를 향해 공중 공격에 들어갔다. 그러자 처참해 보일 정도로 입에서 선혈이 잔뜩 뿜어져 나왔다. 한데 그 순간 경맥이 뚫리고 기가 제대로 소통되기 시작했다.
범한과 하도인이 맞붙고 있는 이때, 랑도의 무시무시한 칼들은 이미 소은의 양어깨를 깊숙이 파고든 상태였다.
갑자기 범한이 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공중에서 등에 숨겨 두었던 반쪽짜리 장도를 꺼내 랑도의 뒤통수를 공격했다.
한데 랑도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소리와 함께 칼을 돌렸다. 그리고 범한이 쥐고 있는 칼에, 그것도 칼자루 아래쪽에 위치한 칼 중간 지점에 곡도 끝을 정확히 가져다 대고 막았다. 그 지점은 칼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
탕, 소리와 함께 원래 반 토막 나 있던 범한의 칼이 다시 반 토막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반 토막만 남은 불쌍한 칼은 오히려 랑도가 쥐고 있던 곡도 위 강철 가시를 딩딩딩딩 소리를 내며 난폭하게 몽땅 훑어 버렸다.
범한은 칼을 버렸다. 그리고 몸 안의 정기를 끌어올린 후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은 주먹의 주특기였던 치명적인 주먹질이 이번에는 두 마리 용이 되어 랑도의 태양혈을 가격했다. 이때 범한은 상대의 칼끝이 자신의 아랫배를 겨누고 있었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에 몇 안 되는 고수와 맞서려면 안정적이고 정확하고 인정사정없는 공격을 날려야 하고, 자신에게든 상대에게든 퇴로를 열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랑도가 갑작스레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동자를 하고는 양 손바닥을 번갈아 움직이며 범한의 양 주먹을 막아 냈다. 강한 기운들이 서로 맞붙는 순간이었다. 이름도 없는 무공 비결인 패도의 정기와 고하로부터 물려받은 천일(天一) 정기가 이 순간 드디어 정면 대결에 돌입한 것이었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 옆, 작은 풀들이 가득한 구릉에서 하늘을 뒤흔드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중에 몸을 띄우고 있는 범한은 고도에서 우세를 점한 상태였다. 땅을 밟고 있는 랑도는 안정이라는 우세를 점하고 있는 상태였다. 두 어마어마한 정기가 충돌하자 주위에 있던 풀이 기의 압력에 차례로 밀려나며 가루로 변해 나갔다.
랑도가 신음 소리를 내며 팔목에 걸어 두었던 곡도를 등 뒤로 돌렸다. 그리고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칼끝으로 소은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두 사람을 상대하는 상황에서 범한을 죽이지 못할 바에는 소은부터 먼저 죽여야 했다. 소은을 죽이는 건 그의 스승 고하가 줄곧 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범한의 양 손바닥은 이글이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랑도는 원통처럼 보이게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두 자루의 곡도를 풍차처럼 움직이며 범한의 가슴과 배 가운데를 향해 공격에 들어갔다. 그러자 두 개의 곡도가 마치 눈발이 날리는 듯 그리고 영혼을 앗아 갈 듯 범한에게 향했다.
이 순간 소은은 숨이 거의 끊어질 듯한 상태였다. 그러자 범한도 더 이상은 고양이와 쥐가 쫓고 쫓기는 놀이를 하듯 마냥 도망만 다닐 수는 없었다. 이에 범한은 이를 악물고 환생 후 가장 모험적인 일을 감행했다. 랑도의 어마어마한 힘이 응축된 곡도는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뻗어 힘없이 비틀거리는 소은의 옷깃을 거머쥐었다. 그런 후 전광석화처럼 재빠르게 살짝 무릎을 굽히고 자신의 왼쪽 종아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을 했다.
탕, 하는 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이는 곡도가 사람의 몸을 찔렀을 때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범한은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을 뒤집어 랑도의 정수리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왼손 손가락을 아주 조금만 뻗었다. 이건 그의 잔재주였다.
랑도는 귓불이 살짝 아파 오자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범한은 종아리에서 천둥 공격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온몸으로 랑도가 휘두르는 칼의 힘을 역이용해 소은을 잡아챘다. 그리고 아직 온전한 오른발을 지면에 살짝 내디뎌 아무도 없는 앞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그는 곧장 절벽 쪽으로 향했고 이내 아래로 뛰어내렸다.
* * *
랑도는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칼로 범한의 다리를 공격했을 때 왜 강철을 내리치는 기분이 든 건지 몰라 속으로는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칼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녔다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만의 비기를 더하면 금속과 철도 충분히 부수고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상대방이 다리에 철갑을 두르고 있어도 단번에 베어 버릴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한데…… 범한은 어떻게 해서 공격을 막아 냈던 거지?
랑도와 하도인은 절벽으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강렬해지고 있었지만 계곡을 두르고 있는 운무까지 흩어 버린 건 아니었다. 그래서 노인과 젊은이가 안개 속으로 떨어진 후로 이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대신 아주 한참 후에 무거운 물건이 떨어질 때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매우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이렇게나 깊은 절벽 위에 있는 두 사람에게 소리가 들렸다는 건 정말로 험하게 부딪쳤다는 뜻이었다.
“떨어져 죽었군.”
하도인이 말했다. 그러자 랑도가 고개를 내저었다.
“소은이 쉽게 죽을 리 없지. 범한은…… 내 보기엔 더 쉽게 안 죽을 것 같은데.”
랑도와 하도인 두 사람은 상경성에서도 손꼽히는 9등급 고수였다. 그런데도 중상을 입은 소은과 무공 실력이 이제 막 9등급 초입에 들어선 범한을 현장에서 죽이지 못했다. 이에 이 두 고수는 살짝 공포감 같은 걸 느꼈다.
“이 산봉우리까지 기어 올라올 수는 없겠지.”
하도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랑도가 절벽 아래를 두어 번 쳐다보았다. 연산의 암석 절벽은 칼날처럼 깎아지를 듯했고 거울만큼 미끄러워 보였다. 일반 무공 고수뿐만 아니라 범인의 경지를 넘어 성인의 경지에 오른 4대 종사일지라도 사람의 힘만으로는 이 절벽을 기어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에 랑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도인의 판단에 동의하며 말했다.
“심중에게 산 아래를 수색해 보라고 하게.”
* * *
후속 조치를 마친 후 두 고수는 운무가 떠다니는 절벽 아래를 바라보다가 앞서 대결했던 장면이 생각나 절로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한데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걸 떠올리고 있었다.
“왜 범한은 목숨까지 걸고 소은을 구하려 한 걸까?”
이는 하도인이 던진 질문이었다.
“왜 범한이 보여 준 실력은 사매의 평가를 훨씬 뛰어넘는 거지?”
이는 랑도가 던진 질문이었다.
랑도의 두 눈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그리고 그의 손목이 살짝 움직이더니 늘어져 있는 자신의 귓불을 칼끝으로 싹둑 잘라 냈다. 이어 줄곧 고하 문파의 식견을 믿고 따르고 있는 하도인도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대퇴부를 쳐다보았다. 쇠뇌의 화살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였다. 상처가 난 건 아니었지만 살짝 검게 변한 게 사라지지 않자 싸늘하게 몇 마디 내뱉었다.
“범가 놈이 독을 좋아하는군.”
랑도가 목소리를 깔았다.
“설마 잊은 것인가? 경국 범한에게 제일 유명한 기술은 바로 ‘잔재주’일세.”
말은 그렇게 했어도 랑도는 앞서 대결했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범한의 양 주먹에 실려 있던 패도의 정기는 정말로 기괴했다. 예상외로 무섭게 파고들려는 습성까지 있었으며 더군다나 난폭함에 있어서는 세상 그 어떤 내공의 정기보다 사나웠다.
204화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나면 대개 무엇과 만나게 될까? 대개는 고수, 미인, 절세의 무공 비급, 막대한 재화와 부를 만나게 되어 있다.
범한은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연달아 하고 있었다. 우선 자기가 업고 있는 자가 고수란 걸 확신했다. 그리고 만약 계산해 놓은 착지점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난 곳으로 간다면 집에 두고 온 미녀와는 바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러면 어머니가 남겨 놓은 막대한 재산도 누려 보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연마해 오던 이름 모를 무명의 비급도 어쩌면 오죽 아저씨가 저승에서나 보라며 불태워 줄지도 모른다.
오죽이라는 스승은 교육 수준은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어도 주입식 교육에 있어서는 충실한 집행자였다. 그러니 자신이 지옥 명부에 가더라도 오죽 아저씨는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옛날에 오죽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걸 봤을 때 범한은 놀라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했었다. 이에 자주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했고 심지어는 창산에서도 연습을 빼먹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조금이나마 그 효과를 보고 있었다.
사람을 업은 채로, 더군다나 안개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미끄러운 암벽 절벽에서 속도를 줄이기 위해 짧게 끊어 가며 내려오며 앞서 물색해 놓은 착지점을 정확히 찾아낸 것이었다. 한데 그 착지점이란 건 바로 살짝 삐져나온 암석이었다.
범한의 양다리가 착지점인 암석 위로 떨어지자 체내 패도의 정기가 자연스레 반동하는 힘을 내보내 충격을 완화해 주었다. 하지만 랑도의 무서운 칼에 당해 시큰거리고 힘없는 왼쪽 다리 때문에 범한은 신음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무릎을 찧고 말았다.
한데 이 순간에도 그는 자신들이 그 커다란 암석을 타고 절벽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중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범한에게 암석이 땅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자네, 바보지?”
암석 뒤에는 깊지 않은 작은 동굴이 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소은이 동굴 벽에 기댄 채 비웃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어디, 이제 어떻게 올라가는지 볼까.”
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곧 목숨이 끊어질 노인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잠시 동굴 쪽부터 힐끔 쳐다봤다. 동굴과 전씨들이 아무 관련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소은에게 약을 한 알 먹였다.
소은은 사양 않고 그 약을 삼켰다. 그리고 대놓고 비웃는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스무 해 전이라면 랑도와 하도인 같은 후배는 내 상대가 안 됐을 거야. 한데 자네는 왜 그랬나? 당당한 경국 감찰원 제사에, 진평평과 비개의 후계자인 자네가 궁지에 몰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기나 하고. 이제 천천히 굶어 죽을 일만 남지 않았나.”
범한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노인이 옛날이야기 하는 거 좋아하면 죽을 때가 다 되어서라던데요.”
소은은 아까와 똑같은 표정으로 범한의 말을 되받아쳤다.
“나는 원래 죽게 되어 있던 몸이야. 그런데도 이리 오래 살았으면 죽어도 손해는 아니지. 한데 문제는 자네는 아직 젊다는 거고. 그러니 당최 모르겠단 말이지. 대체 왜 나를 구한 건가?”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어떻게 운무 속으로 뛰어내릴 생각을 한 건가?”
“선생 양 아드님은 싸움이나 할 줄 알았지 이런 일은 아예 할 줄 모르더라고요.”
범한이 머리카락 사이에서 가는 침을 꺼내 소은의 몸에 찔러 넣었다. 지혈을 하기 위해서였다.
“금의위도 두 사람이 정한 접선지를 알아냈습니다. 그러니 저도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기에 가능했던 거고요.”
소은은 범한이 치료하도록 내버려 두고는 눈을 흘겼다.
“침에 독이 있었군.”
범한이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어쨌든 곧 돌아가시게 될 거잖아요. 더군다나 몸이 수백 종의 독에 중독돼 있는데 뭐, 이까짓 걸로 무서워하시는 겁니까.”
소은이 기침을 두어 번 했다. 눈빛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하고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는 걸 보니 성미까지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한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창백해진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질문을 던졌다.
“심중이 그 뜰을 포위했을 때 상삼호의 탈옥 계획이 이미 금의위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걸 선생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계속 그리하신 겁니까?”
“뭘 계속했다는 건가?”
“부상당한 금의위인 척하면서 힘들게 성 밖으로 도망 나오신 거요. 분명 고수가 기다리고 있는 거며 마중 나온 사람이 이미 제거됐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계셨으면서 말이죠.”
소은은 범한을 쳐다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날카로운 소리로 웃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바라던 대로 자네를 유인해 낸 후 자네와 함께 묻히고 싶었나 보지.”
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좀 진지하게 하시죠.”
소은의 시선이 장애물을 뛰어넘듯이 가볍게 범한의 어깨를 넘어 고요한 계곡 쪽으로 향했다. 뜨거워진 태양이 암벽을 가리고 있던 운무를 서서히 걷어 내고 있었다. 그러자 저 멀리로 깨진 누런 거울 같은 절벽이 기이하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세. 내가 오래 갇혀 있어서 그랬네. 그래서…… 죽는다 해도 감옥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거든.”
소은의 대답이었다.
범한도 그의 눈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는 매끄러운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연히 벼락을 맞아 산산조각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꽤나 오래전에 갈라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작은 나무 한 그루가 굳건히 자라나 불쌍하지만 경이로운 녹색을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누런 산에 푸르른 나무 그리고 그 아래에 흐르는 새파란 물과 흰 안개라. 그야말로 무덤으로는 적격이군.”
범한이 살짝 웃으며 자신의 왼쪽 바지통을 손보기 시작했다. 이 바지는 감찰원에서 내놓은 불, 도둑, 암기 공격을 막아 주는 옷이었다. 그런데 구멍이 난 걸 보니 랑도가 휘두른 칼의 공격까지는 당할 재간이 없었나 보다. 범한은 스승 비개가 남겨 준 검은색의 가는 비수를 꺼내 들고 살짝 변형된 칼 본체의 윗면을 살살 다듬어 나가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고맙지만 나는 범평평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고요.”
* * *
“왜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우둔한 짓을 한 것이냐?”
소은이 변장한 범한의 얼굴을 살짝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그의 입가에서는 불길한 피거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호기심이 강해진다던데 어쩌면 그런 맥락에서 던진 질문이 아닐까.
범한은 비수를 다리에 집어넣더니 경직된 종아리의 경락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소은의 질문에 답했다.
“북제 사람이 매복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분명 물러서려 했어요. 그런데 곧 있으면 선생께서 돌아가실 거 같더라고요. 순간 제 머리가 이상해졌는지 그냥 뛰쳐나오고 말았지 뭡니까.”
그런데 사실 이치는 간단했다. 범한은 소은의 비밀, 신묘의 위치, 신묘와 섭경미와의 관계, 자신이 이 세계에서 환생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과 사, 처지 그리고 방자하고 오만한 어머니 사이에 얽힌 일들 때문에 줄곧 자기 목숨 부지에만 연연했던 범한은 결국에는 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햇살이 골짜기 곳곳을 빈틈없이 비추며 모든 것을 돌봐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로 휘저어 놓은 물결처럼 운무가 넘실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부분의 운무는 사라졌지만 아직 일부는 연기처럼, 실처럼 절벽 앞쪽에 남아 드문드문 야트막하게 자라난 푸르른 나무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암벽으로 된 작은 동굴 위쪽은 살짝 돌출되어 있었다. 맞은편 절벽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계곡 밑바닥도 동굴로부터 한참 아래에 있어, 범한은 청력이 아무리 좋아도 계곡 밑바닥에서 나는 소리는 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겨우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상경의 금의위는 아래쪽에서 두 사람의 시체를 찾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계곡 밑바닥은 습하고 어두울 테니 금의위는 잠시 동안은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자신과 소은이 계곡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건 알게 될 게 뻔했다. 그래서 범한은 북제 사람들이 자신과 소은의 명줄이 길다고 생각하며 계곡 밖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 수색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범한 입장에서는 노련하고 독한 심중은 절대 얕잡아 봐서는 안 됐다. 언제든 상대방이 이 거울처럼 매끈한 암벽도 관심을 갖고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해당타타의 사형 랑도도 떠올리고 있었다. 겨우 한차례 맞붙어 봤지만 과연 인간 세상의 최강자 중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정신이 의연하고 굳세 과거 자신에게 쉽게 속아 넘어갔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였다.
산바람이 살랑 불고 있었다. 소은의 늙고 창백한 얼굴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노인은 이미 반 혼수상태로 들어가 언제든 사망할 것만 같았다. 필사적으로 이 산에 올라와 죽으려는 늙은 몸에게는 동굴 밖에 내리쬐고 있는 태양도 자신의 따뜻함을 조금이라도 전달해 줄 방도가 없는 것 같았다.
범한이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는 소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늙은 동지의 피부는 흡사 석회를 개어 한 겹 씌워 놓은 귤껍질처럼 보였다. 잠시 생각해 보던 범한은 허리끈 안에서 조심스레 환약을 꺼냈다. 초록색 환약이었다.
환약에서는 마황 나뭇잎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범한은 작은 칼로 그것을 반으로 자른 후 반쪽을 잘게 부수어 소은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이어 소매에서 가느다란 빨대를 꺼내 옷에 감춰 둔 물주머니에 연결한 후 소은의 말라붙은 입술에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 * *
잠시 후 죽어 가던 소은이 깨어나 두 눈을 떴다. 한데 많이 옅어졌던 눈동자의 붉은 기도 다시 나타났다. 그래도 노인은 죽기 직전에 다시 살아나 옛 위용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
“어떤 약을 먹인 거지?”
“초록색 환약이요.”
범한이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정신이 들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도 옛날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는 되돌아가시지는 못할 겁니다.”
소은은 당연히 그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격하러 나서기 전에 먹었구나?”
소은은 아까보다는 훨씬 힘차게 숨 쉬고 있었고 정신도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만약 죽기 직전에 잠깐 정신이 맑아지는 현상이 아니라면 약물이 노인 몸에 남아 있는 힘을 자극한 것이었다.
범한은 그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대신 손가락을 뻗어 소은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이 점점 힘차게 뛰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약간 건조했다. 마황 환약이 효험을 발휘한 것이다. 한데 이런 원시적인 흥분제는 소은의 심장에 일시적인 기운만 북돋아 줄 뿐,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늙은 목숨을구할 수는 없었다.
범한이 깊이 숨을 들이쉰 후 차분하게 소은을 바라보았다.
“랑도에 하도인이라. 제가 선생의 다리를 부러뜨려 놨잖아요. 우리가 연합한다고 해도 그 둘의 적수는 못 되겠죠. 그러니 저로서는 약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게 말까지 동원한 군대가 아니라 그 두 고수였는지는 이해가 안 되네요.”
소은이 기침을 심하게 두 번 했다. 약물이 강하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소은이 곤란하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게지. 이번에 젊은 황제를 속이지 못한다면 나중에 골치가 아플 테니까.”
범한은 소은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북제 황제가 이 늙은이의 목숨을 살려 주려는 이유가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란 것을 계속 화제로 삼아 말을 이어 가지는 않았다.
“이 늙은이를 살려 준 건 내가 가슴에 간직한 비밀 때문이겠지.”
소은은 계곡 사이를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작은 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에 부러운 기색이 잠깐 스치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말해 그 비밀이란 게 대체 뭐라고! 황제는 신묘의 도움을 받아 천하를 통일하고 싶어서라지만, 자네는 대체 왜 신묘에 가고 싶어 하는 건가?”
“당연히 저만의 이유가 있어서예요.”
“말해 줄 수는 없는 건가?”
하나는 늙고 하나는 젊은, 각기 다른 시기에 활동한 밀정 두목들이 이 순간만큼은 그냥 시골 노인과 청년이 되어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죠. 조금만 말해 드릴게요.”
범한은 몸이 살짝 지치는 느낌이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마황 환약의 약효가 떨어지고 있는지 정신적으로도 살짝 처지는 기분이었다.
205화
“사실 믿으실지는 모르겠어요. 이 세계에서 살고는 있어도 여행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더 많아요. 세계 곳곳에 있는 재밌는 곳을 둘러보고 싶거든요. 그리고 신묘는…… 당연히 제게는 가장 흥미진진한 곳이고요.”
“여행자라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변장 후 지극히 평범해진 모습의 범한을 주시했다.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이상하죠? 무릇 천지라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며 빛과 그림자는 백 년의 과객이라 하잖아요. 천지라는 커다란 객잔에 살고 있으니 객잔 안에 있는 모든 방에 대체 뭐가 있는지 똑똑히 보고 싶은 것이지요.”
“2층 맨 끝 방에는 독사가 있을 수도 있다네.”
소은은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며 뒤쪽으로 움직였다. 체내에 있는 생명의 기운이 건조해지는 걸 느껴서였다. 이에 자신의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무의식적으로 조금 편히 앉아 있으려 한 것이었다.
“어쩌면 목욕통에서 목욕 중인 미녀일 수도 있지요.”
범한이 웃어 보였다.
소은은 이 젊은이를 바라보며 살며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호기심이 늙은 고양이를 죽일 수도 있다고 했어. 그런 황당무계한 이유로 날 구하는 모험을 하다가 사지에 빠지지 않았는가. 후회하지 않나?”
범한이 고개를 돌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네, 바보지?”
소은이 똑같은 말을 다시 한번 꺼내더니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개똥만도 못한 비밀 때문에 멀쩡히 살아 있는 목숨을 버리려 하다니.”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비밀도 부질없는 거지요.”
소은이 갑자기 이상한 느낌으로 범한을 슬쩍 바라보고는 말했다.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는가?”
범한은 마음이 떨렸다. 이 노인은 오래전에 과거의 위용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생각해 북으로 오는 내내 ‘부탁’이란 단어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범한도 질문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그러자 소은은 살짝 괴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 하지만 내가 죽으면 자네 혼자 이 동굴에 갇혀 있을 텐데 결국에는 굶주릴 대로 굶주려 내 시체에 흥미를 갖게 될 거네.”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금세 이 노인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이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기분으로 말했다.
“그 늙어 빠진 팔이며 다리에 있는 질긴 살점을 물어뜯다가는 오히려 제 이가 빠질 텐데요.”
그러자 소은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배가 고파지면 못 할 것도 없지 않을까?”
범한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분께서 제가 당신 살점을 뜯어 먹을까 봐 겁나신다고요?”
소은이 범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 않는 사람은 많다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사마귀는 무서워하지.”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 그래도 죽은 후에 누군가에게 먹히는 건 무서워.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거든.”
약물의 작용으로 소은은 잠시 힘이 났는지 말하는 게 점점 유창해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상처에서 흐르던 피도 이미 멎은 상태였다. 하지만 눈동자의 충혈 정도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어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범한이 그를 잠깐 쳐다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염려 마세요. 돌아가시면 계곡 아래에 던져 놓겠습니다.”
범한의 동공이 갑자기 작아지더니 소은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영감님, 예전에 인육을 드셔 보셨나요?”
* * *
동굴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한동안 소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후 노인은 무표정하게 입을 뗐다.
“옛날 신묘에 갔을 때 큰 눈이 내려 산에 갇혔지.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인육을 먹는 수밖에 없었지.”
범한의 심장이 울렸다. 어려서부터 무덤에서 시체를 해부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인육을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여전히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런데도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소은의 말라붙은 입을 향하고 있었다.
소은이 껄껄껄 기괴하게 웃었다.
“인육은 말이지, 정말로 고역이더군. 한데 고하는 나보다 훨씬 맛나게 먹더라고.”
다시 심장이 떨렸다. 현재 저 높은 곳에서 만인의 숭배를 받는 종사가, 게다가 북제 국사인 고하가 과거에 인육을 먹었다고?
범한은 즉각 중요한 부분을 잡아냈다. 소은이 신묘의 위치를 알고 있고 고하도 신묘의 기술을 이어받았으니 옛날에 두 사람은 분명 함께 신묘에 갔던 것이다. 더군다나 두 강자가 동반자의 인육을 먹는 지경까지 갔다는 건 분명 길이 험난하다는 뜻이다. 한데 왜 고하가 소은을 죽이려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자신이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고하와 언제 같이 신묘에 가셨습니까?”
소은은 이 질문에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이 순간 범한은 식객과도 같았다. 종업원이 내온 달달한 간장 양념과 대파를 얹은 오리 껍질 요리를 한껏 감상한 후 이제 먹는 일만 남았는데, 종업원이 도로 내가는 걸 두 눈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식객 말이다. 이에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버렸다.
“같이 죽게 된 마당에 좀 기분 좋게 죽게 해주시죠!”
소은은 범한을 잠시 흘겨보고는 조롱하는 말을 던졌다.
“자네, 바보지?”
이에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비밀 가지고는 이제 목숨 부지도 할 수 없으세요. 그런데 무엇 하러 감추시는 겁니까!”
* * *
“신묘는 북쪽에 있네.”
너무나 갑작스럽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소은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북쪽에요?”
“북쪽 끝, 눈의 땅에. 북뢰관을 따라 나간 후 거기에서부터 석 달을 더 걸어가야 하지.”
이 순간 동굴 밖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범한은 살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드디어 절반의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적어도 신묘의 대략적인 방위까지는 알아내야 했으므로 심장이 살짝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산바람이 점점 강해지자 여름인데도 연산에 살짝 한기가 감돌았다. 범한은 눈을 감고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는 소은을 바라보며 친구 대하듯 편하게 말을 건넸다.
“곧 죽을 영감님, 신묘는 풍광이 어떤지 얘기 좀 해주시죠.”
소은은 눈을 뜨지 않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커다란 사당인데 무슨 풍광 따위가 있겠나. 자네 말이야, 자네는 대체 어느 돌에서 튀어나온 겐가?”
범한이 살짝 피곤한 듯 하품부터 하고 대답했다.
“저는 담주 사람입니다. 담주에도 뭐, 대단한 경관이랄 게 없거든요. 집 뒤뜰에 나무 두 그루 심은 것 빼고는 말이에요. 그런데 한 그루는 대추나무고 다른 한 그루도 대추나무입니다.”
“신묘에는 나무가 없다네. 설산에 가려져 있는데 전설로는 1년에 딱 두 번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더군. 더군다나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볼 수 없다고 했어.”
소은은 늙고 쇠약한 목소리로 차분히 이야기해 나갔다. 신묘는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우선 소은이 신묘와 그 어린 낭자와의 관계를 안다는 이유로 진평평 원장은 그렇게나 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를 붙잡아 경국까지 데려갔다. 그리고 그가 신묘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고하는 그곳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었음에도 그를 죽여 입막음하려 했으며, 북제의 황제는 신묘를 통해 하늘의 도움을 받으려는 헛된 욕망을 품게 되었다.
한데 신묘가 대체 뭐라고, 단순히 사당일 뿐이잖아!
소은은 별안간 자신이 마음껏 멋지게 산 반평생은 가짜고 나머지 철창 안에서 산 반평생이 진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노인은 점점 어두워지는 동굴 밖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 이 세상에 정말로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범한은 즉시 답하지 않고 일단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환생과 상자가 생각나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세상 그 누구보다 신의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신이란 무엇일까?”
“신이 무엇인지 안다면 제가 신일 것입니다.”
소은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젊은 나이에 사리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은 별로 없는데 말이지.”
소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한데 그때 폐하께서는 아직 젊었을 때였으니 사리 분별력이 떨어졌던 게야.”
범한은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살짝 기대감에 부풀어 절로 긴장하고 말았다.
“서른 몇 해 전 세상이 어떤 상태였는지 알고 있는가?”
“북위가 언제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정도로 최강대국이었지요.”
“그랬었지. 그때 이 늙은이는 벌써 북위 근위병 수령이자 폐하의 심복이었다네.”
소은은 과거를 추억하고 있는데도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과거의 영광에 도취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망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곧 죽을 몸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소은은 담담하고 평온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때는 북위의 천하였다네. 그러니 조정에는 세상 인재들이 다 모여 있었지. 그런데 그때 조정을 떠받치고 있던 사람은 황제를 포함한 두 형제였다네.”
범한이 노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계속 말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자 안심하고 작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 두 형제 중 한쪽은 당연히 선생과 장묵한이겠군요.”
“그래. 그런데 내 형제가 나보다 훨씬 잘났었지.”
소은의 표정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더군다나 나보다 훨씬 다정하고 말이지. 내가 경국에 스무 해 동안 갇혀 있었는데도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니 동생에게 빚을 진 거네.”
“그런데 왜 두 분이 형제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는 거죠?”
“이유는 간단하다네. 나는 흉악하기 그지없는 놈으로 유명했거든. 고결한 선비들이 내 손아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셀 수도 없이 죽어 나갔어. 학자였던 동생은 날 싫어할 수밖에. 물론 나도 동생하고 얽히는 게 싫었지만 말일세.”
소은은 모든 걸 담담하게 말했다.
범한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화제를 전환했다.
“다른 형제는 또 누군가요?”
“전청풍과 고하.”
“전청풍요? 북제 개국 황제의 부친이자 옛날에 유명했던 명장 말씀이십니까?”
범한에게는 이제야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고하가 북제 황실과 그리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니. 어쩐지 혼자서 황태후와 황제를 보호하고 황실도 고하를 항상 존중하고 우러러보더라니.
“고하는 전청풍의 어린 동생이었는데 그 동생이 고행하는 수행자가 되어 천인의 도를 수행하겠노라 뜻을 세웠지. 그래서 이 세상의 궁극의 도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든 신묘에 가려 노력했다네.”
소은이 살짝 비웃는 듯한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세상 사람들이 신묘의 존재를 믿고 있었음에도 천 년 동안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니! 거지보다 더 비참하게 지내는 고행자들이 각지에서 도를 전파하면서 함께 퍼뜨리고 다닌 이야기였던 게지.”
“그런데 신묘는 진짜 존재하잖아요.”
소은이 신묘의 존재를 잊지 않도록 범한이 일러둔 것이었다.
“그렇지.”
소은은 두 눈을 꼭 감고 말을 계속해 나갔다.
“선제께서 붕어하시자 젊은 황제가 등극했다네. 새 황제는 우리 신하들에게 제법 잘하시는 편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난히도 죽는 걸 두려워하셨어. 하루 종일 불로장생의 술법을 익혀야 한다는 생각만 하실 정도로.”
범한이 말했다.
“당시 북위는 유일한 강대국이었으니 황제 입장에서는 조바심 낼 게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불로장생 같은 거에 관심을 가졌을 거고요.”
소은이 범한이 한 말을 이어받았다.
“그래서 고하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궁한 거였네. 사신단을 꾸려 바다 밖으로 나가 신묘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황제께 권했어. 신묘의 신선들로부터 폐하께서 신선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얻게 된다면 자연스레 불로장생하시게 될 거라고 말이지. 폐하께서 어찌 그 제안을 윤허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나.”
소은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폐하의 심복이자 근위병 대장인 내게도 자연스레 그 일이 떨어질 수밖에.”
“고하는 제안자였고 신묘에 극도로 미쳐 있었으니 당연히 자신이 빠지면 안 된다고 주장했지.”
소은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북위의 역량을 한데 모아 얼마나 오랫동안 신묘를 찾아다녔는지 모를 때였지. 드디어 단서를 찾아내고 말았다네. 그리고 그길로 나와 고하는 천 명으로 구성된 신묘 원정대를 끌고 북으로 향했다네.”
곧 죽을 노인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나갔다. 하지만 범한은 그때 상황이 분명 복잡했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신묘는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곳이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뜬소문 같은 곳이었다. 그러니 정말로 확실한 단서를 찾았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을 터.
늙고 쇠약하지만 담담한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쉼 없이 울려 퍼졌다. 동굴 밖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범한은 가만히 경청하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가며 질문도 던졌다. 계속 재빨리 머리를 굴려 소은의 기억 속에 있는 신묘 가는 길을 자기 머릿속에서 저장하며 대략적인 지도를 만들어 나갔다.
206화
두 사람의 시간은 어느덧 서른 몇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동굴 밖 황무지 산에는 어느새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노인의 기억을 통해 수천 명으로 이루어진 원정대가 쏟아지는 눈을 뚫고 사람이 살지 않는 북쪽으로 힘겹게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가죽 신발을 신었고, 눈만 밖으로 내놓은 채 두툼한 모피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추위는 몸속으로 그리고 뼛골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원정대의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두 사람은 바로 한창 혈기 왕성한 소은과 경건한 표정의 고행자 고하였다.
탐험대는 북으로 향했고 지대는 갈수록 험난해졌으며 그로 인해 사람 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어떤 이는 얼어 죽고 어떤 이는 빙곡에서 실족해 실종되었으며 또 어떤 이는 공중 공격을 퍼붓는 맹금류에 의해 갈가리 찢겨 죽음을 맞이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날수록 원정대의 길이는 갈수록 짧아졌고 내부 분위기도 점점 험악해져 갔다.
천지가 온통 흰 눈뿐이다 보니 어떤 이들은 혹한의 환경까지 더해지자 점점 시력을 잃어 갔다. 소은은 이들을 매정하게 버렸다. 그리고 이때 버려진 이들은 내내 그들을 노리며 따라오던 승냥이들에게 잡아먹혔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모든 일이, 죽음과 같은 참혹한 일조차도 조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원정대는 한참을 걸은 후에야 북극에 있는 거대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에는 안쪽으로 향하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말이 산이지 두껍게 내려앉은 눈 탓에 얼음 산만 끝없이 이어져 있을 뿐, 제대로 된 산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겨우겨우 살아남은 백여 명의 대원은 통로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한데 산 뒤에도 여전히 빙설로 덮여 있어 이곳에서는 동물조차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대원들은 고집스레 이곳에서 주둔했고 이로써 신묘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겨울이 되어 큰 눈이 내려 산이 봉쇄되고 해까지 사라졌는데 식량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가장 강인한 자가 끝까지 살아남는 법.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밤 동안 소은과 고하는 등을 맞댄 채 움막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시체가 쌓여 갔으며 이들이 피워 놓은 불꽃은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대원들이 남긴 움막 잔해와 옷가지들이 두 강자를 따뜻하게 해준 덕분에 이들은 희망 한 가닥을 쥐고 있을 수 있었다.
* * *
“그건 하늘의 분노였어.”
동굴 안에 있는 소은이 살짝 곤란한 듯 눈을 떴다. 충혈이 더욱 심해진 눈동자에 갑자기 끝없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었다.
“하늘께서 평범한 인간이 신묘를 찾으려 한다는 걸 아시고는 진노한 거였지. 그래서 끝도 없는 암흑도 내린 거였고.”
범한이 노인의 눈을 잠깐 보고는 잠시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건 극야라고 부르는 현상이에요.”
범한에게는 다시 한번 신묘의 위치를 확인하게 해주는 단서였다.
소은은 당연히 극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너무 깊게 박혀 버린 기억 때문에 망연자실한 상태가 되어 계속 말할 뿐이었다.
“그때 고하는 매우 맛나게, 그것도 자기만 챙기며 인육을 먹었다네. 그런데 그런 짓을 하고도 하늘에 무척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더군. 그자에게 경멸감이 들었다네. 그런데…… 아마도 신묘의 신선을 정말로 감동하게 만든 건지도 모르지. 그러니 하늘이 갑자기 밝아진 걸 테고.”
범한은 초조하게 소은을 바라보며 ‘두 사람이 어떻게 수개월의 극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인육을 먹고 움막을 태워 가며 버텼다지만 고독과 갈등 때문에 미치광이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소은이 별안간 웃기 시작했다.
“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고. 그것도 나와 고하가 죽기 직전에 말이야. 그렇게 갑자기 희망이 찾아오니 계속 살아갈 힘이 솟더란 말이지.”
“그런 후 신묘를 찾으신 거군요.”
범한이 비수를 챙겨 자기 옆에 놓고는 다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신묘는 어떻게 생겼어요?”
* * *
여러 해 전 대설산(大雪山) 바깥쪽, 뼈만 앙상하게 남은 두 사람이 힘겹게 움막에서 걸어 나왔다. 움푹 팬 눈두덩과 누렇게 뜬 얼굴, 숨 쉴 때마다 드러나는 퉁퉁 부은 잇몸. 이것이 알려 주고 있는 신호는 건 딱 하나였다. 두 사람에게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
날을 훤히 밝히기 시작한 빛은 더 이상 인색하게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물 일부도 깊은 동면에서 깨났다. 하지만 화살 끝에 서 있던 둘은 맹수보다 거칠고 흉포했던지라 동물들로 배를 채우고 다시 일어섰다.
그날도 두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대설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게 찾아온 신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이들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게다가 새하얗게 펼쳐진 대지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그런데 별안간 푸른 하늘에서 빛이 한 줄기 내려왔다. 대설산이 있는 쪽으로 내려온 빛이 이상하게 굴절되고 우툴두툴해지더니 아름다운 사당 하나가 산 위에 나타났다.
웅장하고 거대한 사당이 산을 끼고 서 있었다. 길게 이어진 검은 담벼락과 옅은 회색의 처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자태였다.
그 순간 고하는 넋 나간 사람처럼 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땅바닥에 엎드려 사당을 향해 구슬프게 대성통곡했다. 소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눈 바닥에 주저앉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드디어 신묘가 나타난 것이었다.
빙설을 따라 돌계단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젊은 고하와 한껏 놀란 표정의 소은은 대설산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늘 가득 흩날리는 눈바람도 이제는 이들의 얼굴을 얼어붙게 만들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감동, 행복과 안도감, 긴장, 흥분 그리고 가끔씩 공포와 같은 감정으로 시시각각 변했기 때문이다.
고하의 얼굴에서는 무한한 광기 외에는 그 어떤 공포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행자였다. 이에 평생의 소원 중 하나가 직접 신묘의 문을 열고 돌계단에 이마를 조아리며 절하는 것이었다.
대설산 위에 있는 거대한 사당은 지근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다가가도 두 사람에게 신묘는 여전히 요원한 곳에 있었다. 반나절이나 올라갔건만 느낌상으로는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었다. 이에 검고 장엄한 석벽으로 되어 있는데도 형체 없이 떠도는 그림자 같았고 언제든지 신기루처럼 대설산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전설에 따르면 신묘는 1년에 딱 두 번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러니 고하와 소은은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전력을 다해 대설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얼마나 올랐을까, 고드름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흥건히 배어난 탓에 눈밭 위에는 희미하게 두 줄기 핏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 * *
척, 하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고하의 손바닥이 신묘 앞 돌계단에 닿았다. 젊은 수행자는 미칠 듯한 희열과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신묘 돌계단을 방자하게 두 번 척척 내리쳤다.
소은은 그보다 조금 느렸다. 그리고 고하 몰래 소맷자락에 숨겨 두었던 암기를 쥐고 살짝 두려워하며 신묘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신묘의 문은 높이가 일곱 장 정도였으며 천신이 인간 세계에 던져 놓은 책처럼 보였다. 대(大)위나라 황궁 미닫이문의 확대판처럼 생겼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웅장했다. 그러니 어떻게 보아도 평범한 사람이 사는 곳처럼은 안 보였다.
신묘의 돌담 위는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이것만 봐도 오랜 세월 동안 이 신비한 곳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소은은 침을 꿀꺽 삼키고 신묘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았다. 그는 황제로부터 불로장생의 비방을 알아 오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태였다. 이에 임무 완성이 코앞에 다가오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반면 고하는 사당 앞에 경건하게 꿇어앉아 머리를 연신 바닥에 찧으며 조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소은은 문으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문에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수록 이상하게도 문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는 것만 같았다.
신묘는 눈으로 보기에는 가까이 있었지만 손을 뻗으면 하늘 저 멀리에 있었다.
* * *
30년 후 동굴에서는 죽음을 앞둔 소은이 두 눈 가득 슬픔과 낙담을 쏟아 내고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네.”
범한이 꽉 움켜쥐고 있던 두 손에서 힘을 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럴 거 같았습니다. 만약 그때 들어가셨다면 지금 4대 종사가 아니라 5대 종사가 있었겠죠.”
“고하가 나보다 강했던 거네. 내가 그와 똑같이 운이 좋았다 해도 대종사의 경지에 들어갈 방법은 없었을 걸세.”
소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한데 고하도 들어갈 수 없었지. 그 사당은 신비한 힘의 엄호를 받고 있는 것 같았거든. 당시 나와 고하가 세상 최강의 실력자였는데도 들어갈 수 없었다네.”
범한에게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다. 스승 비개로부터 들은 천하에 떠도는 비밀 중 하나였다. 바로 고하가 신묘 앞 푸른 돌계단에 여러 날 동안 꿇어앉아 있었, 그 덕분에 지금과 같은 불세출의 무공 실력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보니 그 소문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범한은 순간 이맛살을 찌푸린 채 진지한 표정으로 소은에게 물었다.
“신묘는 대체 무엇이었나요?”
범한의 질문에 소은도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해줄 수 없어 무력하게 말했다.
“신묘 정문에는 정말로 오래된 걸로 보이는 거대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네. 그 위에 쓰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하늘이 세상 사람들에게 남긴 부호일 거라 생각하고 있지.”
범한은 살며시 떨리는 가슴을 안았다.
“어떻게 생긴 부호인데요?”
소은은 범한이 흥분하는 것을 보고 미간을 움찔했다. 죽음을 앞둔 젊은이가 미지의 것에 이리도 강한 호기심을 느끼는 것을 보자 기분이 살짝 들떠서였다.
“‘물(勿)’ 자가 쓰여 있었고…….”
노인은 조금 곤란하다는 듯 손을 뻗어 공중에 획을 하나 그었다.
범한은 곧장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혼잣말로 말했다.
“잠룡물용?(潛龍勿用: 천하를 품은 영웅은 자신의 때가 올 때까지 조용히 실력을 기르며 기다린다는 뜻.)”
“그리고 똑같이 생긴 부호가 세 개 있었다네.”
소은은 이 말을 해줄 때 손가락으로 공중에 획을 긋고 있었다. 직선으로 손가락이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오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오고는 다시 원호를 두 개 그렸다. 그런 후 손가락 끝으로 허공을 톡 치는 동작을 취해 신비감을 더했다.
범한은 어리둥절했다. 그 부호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였다. 신묘와 자신의 환생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까. 어머니와도 관계가 없었던 거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범한은 이 문제는 살면서 알아 가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데 고하와 소은처럼 기나긴 극야를 이겨 낼 만큼 자신도 운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 간단히 끝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요.”
소은이 두어 번 기침하고는 다시 입을 뗐다.
“그럴 걸세. 겨우겨우 힘들게 목표물 앞까지 간 거였어. 그런데 어떻게 해도 만지지도 못한다고 생각해 보게. 그 허탈함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네.”
“고하는 문 앞에 놓인 돌계단에 간절한 모습으로 꿇어앉아 있었어. 그런데 나는 산 옆으로 솟아 있는 높은 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봤지.”
동굴 밖에 드리워진 밤의 어둠이 두 사람마저 감싸 버렸다. 불을 켜지 않았으니 당연히 불빛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소은까지 담담하게 수십 년 전 일을 말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기괴했다. 이런 와중에 범한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하수도를 찾으셨던 거군요?”
소은은 동굴 입구에 있는 젊은이의 그림자를 잠시 보고는 말했다.
“자네도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그때 내가 무엇을 했을지 잘 알 걸세.”
“담벼락에도 닿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수도를 통해 신묘로 기어들어 갈 생각을 하신 거죠? 게다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땅 같은 곳인데 하수도가 있으리란 보장은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실패한 거라네.”
소은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정말 담이 컸던 것 같아. 신묘를 앞에 두고 세속적인 방법을 쓰려 했으니 말일세.”
“그다음에는요?”
“그다음에는…….”
소은은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다음에는 신묘 정문으로 돌아갔는데 고하가 품에 무언가를 넣는 걸 봤어.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때…….”
노인의 말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순간 범한은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신묘의 문이…… 열렸어.”
“네?”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소은 쪽으로 다가갔다. 마치 서른 해 전의 소은을 보호해 주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소은의 입에서 황당한 웃음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묘 문이 아무 소리도 없이 열렸어. 너무나 기쁜 마음에 들여다보고 들어가려 했고.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문에서 느닷없이 정말로 묘하게 사람처럼 생긴 것 하나가 툭 튀어나오더군.”
“묘하게 사람처럼 생긴 거요?”
“그래. 꼬마 선녀였지.”
207화
소은은 멍하니 서서 꼬마 소녀가 자신의 품으로 뛰어오는 걸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하마터면 입에서 피를 뿜을 뻔했는데도 고하는 호랑이처럼 맹렬하게 신묘 입구로 뛰어가 검은 빛과 맞붙어 싸우는 걸 곁눈질로 보고만 있었다.
젊은 고하는 그때 벌써 세상에서 가장 젊은 9등급 고수였다. 그리고 그 순간 무슨 자극을 받은 건지는 몰라도 자기 몸 안에 있는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 신묘의 신비한 검은 그림자와 한데 얽혀 싸웠다. 그러자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이에 산을 덮고 있던 눈이 무너져 내렸다.
소은은 호흡을 가다듬고 난 후에야 자기 품 안에 소녀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리고 미처 무슨 반응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녀가 푸른 돌계단 위에 있는 고하에게 고함치는 걸 듣고 말았다.
“물러서!”
소녀는 짧게 한마디 내지른 것뿐이었다. 한데 제왕의 말처럼 위엄이 있어 소은은 놀라고 말았다. 그런 후 소녀는 곧장 찰싹, 하고 소리가 나도록 소은의 따귀를 갈겼다.
“너도 물러서!”
* * *
고하는 민첩하게 뒤로 물러났다. 소은도 당황해 소녀를 품에 안은 채 돌계단에서 내려와 신묘 문으로부터 열 장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물러섰다.
검은 빛은 슈욱, 소리를 내며 신묘 안으로 물러나더니 다시는 이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은은 여전히 경계하며 거대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빛이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에 불현듯 두려워졌고 신묘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기 옆에 엎어져 피를 토하고 있는 고하가 1합 정도도 버텨 내지 못할 정도의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소은은 알 것 같았다. 분명 조금 전 자신이 하수도를 찾으러 갔을 때 돌계단에 꿇어앉아 있던 고하가 자기 품에 있는 소녀와 모종의 협의를 했고 이에 소녀가 신묘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녀는 대체 누구지?
“나는 안고, 저자는 끌어. 가자.”
소녀는 추웠는지 소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명령을 내렸다. 소은은 감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한 손으로 고하의 옷깃을 움켜쥐고는 대설산을 뛰어 내려왔다.
대체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은은 어느새 자신의 움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건 장막 안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을 때였던가? 그런데 왜 뛰어온 거지? 폐하께서 당부한 불로장생약은 아직 구하지도 못했는데 왜 이 꼬마 소녀의 말을 따르고 있는 거고? 게다가 더 이상했던 건 신묘에 있던 선인들이 자신을 뒤쫓아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소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코를 막은 채 움막 한쪽 구석에 남아 있던 먹다 남은 인육과 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류란 참으로 불쌍하고 꼴 보기 싫은 것들이야!”
소녀가 몸을 돌려 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순간, 소은은 그제야 꼬마의 생김새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물처럼 맑고 눈처럼 순수하고 별 같은 눈동자가 박혀 있는 게, 범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지극히 아름다운 미모였다.
* * *
동굴 내부는 어두컴컴했으므로 범한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에서만큼은 살짝 이상한 낌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소녀는 몇 살처럼 보였나요?”
“네 살. 많아야 네 살.”
소은은 그때 본 속세의 때 묻지 않은 얼굴을 지금도 보고 있는 것처럼 두 눈을 뜨고 있었다.
“그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너무나 가벼워서 안고 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지.”
범한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네 살인 건가.”
“왜 ‘역시’란 단어를 붙인 건가?”
“별것 아니에요.”
범한은 잠시 웃고는 두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아셨나요?”
소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알지. 홍진(紅塵: 속세) 속세를 사모해 신묘에서 도망쳐 나온 꼬마 선녀였어.”
범한이 웃기 시작하며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리더니 아니라는 듯 흔들며 말했다.
“제 생각이 맞을 거예요. 그냥 신묘에 물건 훔치러 들어갔던…… 평범한 꼬마 아가씨였을걸요.”
소은은 범한의 확신에 찬 말을 듣더니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한밤에 절벽 위에 있다지만 아래쪽에서 수색 중인 금의위가 이 기침 소리를 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에 살짝 걱정된 범한은 가느다란 침을 꺼내 소은의 목에 찔러 넣었다. 그의 심맥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조치였다.
범한은 소은의 목에 손가락을 살짝 대보았다. 축축하고 끈적한 느낌이 들어 콧물을 찍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객혈을 한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도 범한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촉이 온 상태였다.
“그건 선녀였어.”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은 서른 해 전 자신의 판단을 집요할 정도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범한도 더 이상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그냥 질문을 던졌다.
“네 살짜리 여자아이였으니 상자를 들 수는 없었겠죠? 상자는 누가 들고 있었어요?”
“어떤 상자?”
소은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범한은 살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상대방은 이제 와서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고 더군다나 이번 이야기에서 오죽 아저씨는 등장도 하지 않아서였다. 오죽 아저씨는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집을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집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어머니의 유서에는 오죽 아저씨가 일찌감치 신묘에서 강자와 한차례 싸웠고 그때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왜 오죽 아저씨는 신묘에 있던 사람과 싸운 거지? 설마 질투심 때문에?
“그다음은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소은,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 중인 늙은이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그러니 범한도 자연스레 다음 내용을 재촉해야만 했다.
* * *
움막 안에서 고하는 모피 위에 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체 네 살짜리 꼬마 아가씨와 무슨 약속을 했기에 줄곧 믿고 있던 신앙을 거역하고 신묘에서 나온 사람에게 공격을 감행한 것인지.
소은은 움막의 장막을 열어젖힌 채 설원을 보고 있는 꼬마를 잠시 바라보았다. 눈보라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작달막한 키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의 소녀는 작은 손으로 두꺼운 장막을 꽉 움켜쥔 채 광활한 바깥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는 나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적막감 같은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은은 조심스레 고하 곁으로 다가가 옷섶이 열려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건 내가 그 사람에게 준 거야.”
소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당신은 함부로 건드리지 마.”
소은은 순간 험악한 눈동자를 번뜩이며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고하가 지금 품에 숨겨 둔 물건이 분명 천계에서도 최고로 좋은 책일 거란 생각에 꺼내서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문득 소녀가 신묘에서 도망 나온 어린 선녀란 생각이 들자 그런 생각은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이에 소은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는 꼬마 선녀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은 대위나라의 진무사 쌍영 지휘사입니다. 폐하의 명으로 하늘의 뜻을 듣기 위해 신묘까지 왔으니 신선께서는 불로장생의 약을 내려 주십시오.”
소은은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입구에 서 있던 소녀가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녀가 환약 하나를 소은에게 던졌다.
“나를 도와줬으니 나도 당신을 도와줄게. 저 수도자가 나에게 얻은 게 있으니 당신에게도 뭔가를 줘야겠어.”
소은은 환약을 받아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선녀가 준 물건이라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없어 그것을 옥으로 된 작은 상자에 조심스레 넣었다.
“돌아들 가.”
소녀의 말투는 살짝 노인네 같은 구석이 있었다.
“여기는 있을 곳이 못 돼.”
소은은 살짝 실망했다. 겨우 신묘에 찾아왔는데 들어가 보기는커녕 신묘 안 선인들이 어찌 생겼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약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녀님.”
* * *
“이후로는 여기에 오지 말고.”
소녀가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신묘의 위치를 말해서는 안 돼.”
“너희가 신묘의 위치를 누설한 사실이 내 귀에 들어온다면 너희를 죽여 버릴 테야.”
소녀가 몸을 획 돌려 아직 앳된 얼굴에 얼음 같은 싸늘함을 담은 채 말했다.
“들었어?”
소은은 계속 머리를 조아리며 그러겠노라 답했다. 얼음 조각을 깎아 놓은 것 같은 여아의 입에서 쌀쌀맞은 말이 나와 조금 익살스러운 느낌이었지만, 네 살 여아가 이리도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니 소은이 아무리 대위나라 근위대 대장이라 할지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소은은 그냥 소녀의 말을 따랐다.
* * *
“고하가 깨어나자 어린 선녀는 우리 두 사람에게 맹세를 강요했다네. 그런 후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어. 그로부터 며칠 동안 어린 선녀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이 늘더군.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게 그녀로서는 매우 즐거운 일인 것처럼 보였다네.”
소은이 머릿속 기억을 계속 떠올려 나갔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나와 고하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네. 그런데 그녀의 몸에서는 어떤 신묘한 힘 같은 게 느껴지지 않더군. 아, 신선과 인간은 본디 다른 존재니 인간인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게야. 그런데 어느 날, 꼬마 선녀가 고개를 돌려 자기 등 뒤에 있는 대설산을 바라보며 불쑥 혼잣말 몇 마디를 내뱉었지. “그도 너무 불쌍해.”라며. 아직도 그 말이 생생하게 기억나. 그때까지 사람 얼굴에서 그렇게 자애와연민이 가득 찬 표정을 본 적 없었으니.”
범한은 자기 어머니가 선녀 따위가 아닌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강력한 힘이 없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양대 강자를 공갈 협박해 쩔쩔매게 만든 걸 보면 머리만큼은 비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범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연민의 감정이라니.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잠시 실소하고 말았다.
그러자 소은이 조소하듯 말했다.
“나처럼 더러운 물에서 사는 쥐새끼 같은 자네가 어떻게 하늘나라 구름 위에 사는 선학(仙鶴)의 자태를 알 수 있겠는가. 그 어린 선녀의 눈이 어땠는지는 내 말솜씨로는 도무지 형용할 수가 없군. 그렇다 해도 우리 두 사람은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네.”
범한은 잠자코 있었다.
“다음 날, 꼬마 선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어디로 간 건지 원, 눈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극한의 땅에서 혼자 묘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으니 나와 고하는 까무러치고 말았다네.”
“그 후에 선생과 고하가 북위로 돌아가신 겁니까?”
범한이 물었다.
“그랬지. 돌아가는 길은 더 험난했어. 그렇다 해도 결국에는 무사히 돌아갔지.”
소은이 말을 이어 갔다.
“선녀께서 준 환약을 폐하께 바쳤다네. 결과만큼은 괜찮았던 거지.”
그러자 범한이 받아쳤다.
“거짓말 그만하세요. 그 환약은 진즉에 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소은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자네는 속일 수 없구먼.”
범한이 말했다.
“이 세상에 불로장생의 약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사람이라면 그 정도 유혹은 거절 못 하는 걸세.”
소은이 다시 탄식하며 말을 이어 갔다.
“물론 그 환약을 먹은 후 애당초 불로장생은커녕 단순히 체질을 보강해 주는 약이란 걸 알게 되었네. 그래서 결국에는 꼬마 선녀에게 속았다는 걸 알았지.”
“분명 그 꼬마 선녀는 평생 누군가를 속이는 걸 즐겼을 겁니다.”
범한이 살짝 당황한 사람처럼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그녀의 죽음도 거짓일 수 있겠네요.”
208화
“죽음이라니?”
소은이 이어서 물었다.
“선녀가 어찌 죽는단 말인가?”
범한은 소은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고 그가 해준 말들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수를 움켜쥐었다. 사방에는 빛 한 점 없었다. 먹구름이 달빛마저 가려 버린 탓에 소은은 범한의 몸동작을 볼 수 없었다.
“고하가 왜 선생을 죽이려 하는 거죠?”
마지막 의문점이었다.
“신묘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 큰 소동을 벌일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소은은 순간 범한의 질문이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신묘가 인간 세상에 지니는 의미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네. 그런 중요한 정보가 새어 나가 보게,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일 걸세. 북제의 전씨 가문의 아이도, 경국의 음험하고 독한 황제도 모두 원정대를 꾸려 북쪽에 있는 신묘를 찾아가 참배하려 할 걸세. 천하의 강자들이 신묘를 찾으려 혈안이 될 거란 말일세.”
범한이 코를 잠시 문지르고는 말했다.
“신묘에요? 가보셨다면서요. 단순히 거대한 사당인데 뭐 참배할 것까지야…….”
그러자 소은이 싸늘하게 웃었다.
“고하는 신묘 앞에 꿇었다는 이유로 인간계에서 최고 실력자라 불리는 대종사가 되었어. 무공 수련자에게 이 정도 유혹이라면 자네는 상상도 못 할 강력한. 더군다나 자네가 보기에 고하가 정말로 대단한 성인인 것 같은가? 신묘 앞에 간절히 꿇어앉아 있던 사람이 꼬마 선녀로부터 달랑 책 한 권 받더니 순식간에 평생 신봉했던 신묘를 배신하고 공격을 했네. 그러니 그자는 이익 앞에서는 선한 척하는 악인일 뿐이야.”
소은이 계속 말했다.
“내가 죽으면 천하에 신묘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고하 하나뿐이네. 신묘 안에 대체 뭐가 있는 거냐고? 고하는 어쩌면 평생 모를 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는 이미 충분히 많은 이득을 얻었어. 그러니 세상의 다른 강자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는 모험 따위는 하지 않을 걸세.”
범한은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그런 것 같았고 고하가 어떻든 소은을 죽이려는 게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래서 북쪽에서 저지른 추악한 일을 덮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쩌면 국사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신묘가 이 세계에 가져올 미지의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묘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지?”
범한은 순간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소은이 말해 준 신묘 현판에 써 있다던 글자를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써보고 있었다. 획을 쓸 때마다 속도가 붙어 바람 소리까지 났다.
“천 년 동안 세상 사람들은 신묘가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지. 그런데도 나와 고하는 신묘를 찾아갔고. 그야말로 도박과도 같은 모험이었어. 우리가 떠난 후로 신묘에 있던 사람이 우리를 찾아와 못살게 굴거나 하지도 않았고…… 고하는 지금의 북제를 보호하고 있는 사람이라네. 그러니 감히 하늘의 위엄에 저촉되는 행동을 할 수는 없겠지.”
기력이 다해 가는지 소은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두려움만은 떨쳐 내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군다나 어린 선녀도 우리에게 맹세를 강요하지 않았는가. 고하는 하늘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갔던 사람이니 어찌 감히 맹세를 어기려 하겠는가.”
“그 맹세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선생께서는 이미 제게 신묘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그거야 나는 곧 죽을 사람이니까.”
소은이 살짝 곤란한 듯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게다가 자네도 이 동굴에서 함께 죽게 될 테고.”
그러자 범한이 미안한 듯 웃었다.
“한데 저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적막한 계곡은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곧게 뻗어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절벽 사이에는 보이는 것이라곤 짙은 어둠뿐이었다. 범한은 찢어진 왼쪽 바지통을 묶고 옷을 고쳐 입으면서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그 꼬마 선녀는 성이 ‘섭’입니다. 이름은 ‘경미’고요.”
* * *
“섭경미?”
소은은 자지러질 듯 놀랐다.
“무슨 소린가? 설마 섭가의 여주인이 내가 전에 만났던 꼬마 선녀란 말인가?”
섭가가 세상에 갑자기 나타났을 때 소은은 북위의 밀정 우두머리였고 그 때문에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소은의 반응이 범한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에 범한이 웃었다.
“선생께서 직접 말씀하신 선녀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겨우 몇 년 안에 천하 판도를 바꿀 수 있었겠습니까?”
“그랬었군. 그랬었어.”
소은이 다시 쿨럭이며 말을 이어 갔다.
“경국이 그리 빨리 성장한 게 다 신묘 덕분이었군!”
“맞습니다.”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곧 돌아가실 분이니 이야기해 드리죠. 섭경미가 말씀하신 그 꼬마 선녀입니다. 무슨 신묘의 신선 따위가 아니에요. 그분은…… 저와 마찬가지로 그냥 사람입니다.”
소은은 조금 전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범한이 한 말을 도무지 믿지 못하고 죽음이 코앞인데도 마지막 의문 속에서 허우적댔다.
“왜…… 꼬마 선녀가 나를 경국으로 잡아간 거지?”
그는 북위의 밀정 우두머리였으므로 섭가와 경국 감찰원의 관계를 알고 있던 터였다.
범한이 말했다.
“경국에서는 그때 선생을 죽였어야 했거든요.”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그때 선생은 정말로 두려운 인물이었답니다. 그래서 섭경미가 진평평을 시켜 당신을 죽이는 게 아닌 잡아 오도록 한 것이고요. 어쩌면 옛정을 생각해서겠지요. 어쨌거나 두 사람이 신묘에 쳐들어간 것 때문에 그분이 이 세계로 오게 됐거든요.”
* * *
“그러면 자네는…… 대체…… 쿨럭쿨럭…… 정체가 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밤이었지만 놀란 소은은 날카로운 화살처럼 범한을 쏘아보고 있었다. 곧 죽을 늙은 동지가 자신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으니 범한도 살짝 놀랐다. 하지만 범한은 작은 소리로 잠시 웃은 후 말했다.
“저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섭경미의 아들입니다.”
섭경미의 아들. 익숙하지만 낯설고 또 친절해도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 세계에서 범한은 사람들을 향해 대놓고 이 단어를 말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나 현 상황을 보니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에 밤이 깊어 여명 전 어둠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두 사람만 있는 동굴에서 범한은 그윽한 음성으로 그 사실을 말해 버렸다.
―저는 섭경미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영문은 모르겠지만 범한은 이 말을 뱉어 버린 후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동안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잠깐 내려놓은 것 같자 범한은 밤바람에 깃든 자유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 * *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소은은 많지 않은 기억을 느릿느릿 말한 것이었지만 그 덕분에 범한은 하루 반 만에 이번 북제행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이에 소은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더 남기실 말은 없나요?”
소은은 기괴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잠시 후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말했다.
“자네가…… 그녀의 아들이라고?”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머님이 누군지 쉽게 말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 놔서요.”
소은이 거칠게 기침을 몰아서 했다. 그러자 심맥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핏방울이 모조리 밖으로 배출되었다. 소은이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사람처럼 말했다.
“어쩐지 아는 것도 많고 신묘에 흥미도 많더라니…….”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일의 전말을 알게 된 노인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제 보니 이 동굴도 자네를 묶어 두지는 못하겠군.”
“저 자신을 사지로 모는 버릇은 없거든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범한이 소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소은은 갑자기 범한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듯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만약 곱게 살아 있고 싶다면 신묘에는 가지 말거라.”
범한은 차분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은도 그런 범한을 무시한 채 범한 뒤로 보이는 누런 절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아까보다 짧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죽음도 두려워 않는 무시무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냥 자유를 원해서인 줄 알았는데 죽음이 임박하니 알겠구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였어.”
“이 세상에 죽는 걸 두려워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범한이 죽기 직전의 소은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손에서 힘을 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죽음이 꼭 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와는 완전히 다른 낯선 세상으로 갈 수도 있거든요.”
이는 범한을 가장 감상적이게 만드는 비밀이었다.
소은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에 있던 붉은 기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자네가 정말로 꼬마 선녀…… 아니, 섭경미의 아들이라고?”
한데 범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녀를 하나도 닮지 않았군.”
범한이 말했다.
“그분이 네 살 때 보신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러자 소은이 웃었다.
“왜냐하면 자네는 그 꼬마 선녀보다 훨씬 덜 아름답거든.”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우뚱한 채 말했다.
“이 세상에 저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 없는데요.”
“안목이 다른 거겠지.”
“어떻게 다른데요?”
소은이 범한을 슬쩍 보더니 옅게 냉소를 띠었다.
“이제야 알겠어. 눈밭 황무지에서 꼬마 선녀는 새하얀 허허벌판을 바라보고 있었지. 눈매에는 부드러움과 슬픔, 연민이 담겨 있었고. 그때 그 눈빛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제 어둠이 오니 좀 알 것만 같군.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무슨 일이요?”
범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 *
“생명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집념.”
소은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도 맑게 웃는 얼굴이지만 자네와는 달랐지. 자네 어머니는 분명 지극한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이었어. 반면 자네는 골수부터 무정한 사람이고.”
범한이 잠시 웃더니 말했다.
“그 점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평생 많은 사람을 죽여서 곱게 죽고 싶다는 헛된 욕심은 없었다네.”
소은은 이 화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멍한 표정으로 엷게 피어오르는 빛을 바라보았다.
“이 동굴 안에서 죽을 수 있다면 자네가 한 말처럼 이만한 무덤도 없겠지.”
범한은 소은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의 어깨 위에 왼손을 얹었다. 소은의 근육에서 벌써 힘이 풀리고 있었다.
절벽 바깥쪽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계곡 사이에 깔린 안개는 성스러운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이 부드럽게 소은의 늙고 마른 얼굴 위를 비추고 다시 피로 물든 그의 손을 물들이자, 반평생 외롭고 처참하게 산 밀정 우두머리는 절로 해탈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 말했던 담주의 대추나무 두 그루는 원래 없는 거겠지?”
이 세계에서 던진 소은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 * *
범한은 노인의 귀밑에서 마지막 침을 뽑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사망을 확인하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주검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작은 소리로 무어라 말했다.
“담주에 대추나무 두 그루는 없지만 돌아가신 후 더 좋은 세계로 갈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
소은의 두 눈은 이미 온화하게 감겨 있었다. 다시는 이 괴상한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범한은 탁한 기운을 뱉어 낸 후 소은의 주검을 깊지 않은 동굴의 가장 안쪽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와서 시신을 쪼아 먹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무정하게 그냥 방치했다.
범한은 동굴 입구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공중을 향해 손을 뻗어 휘저었다. 하얀 안개는 그의 손놀림에 따라 움직이기만 할 뿐이니 그가 손에 쥘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금의위는 분명 계곡 아래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두 사람의 시체며 흔적을 찾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데 연산 절벽이 거울처럼 매끄러운 탓에 절벽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착지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매끄럽고 눅눅한 절벽을 타고 위로 기어 올라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범한의 온몸은 종잇장처럼 절벽에 찰싹 붙어 있었다. 등 뒤로 깔린 짙은 새벽안개는 범한의 몸을 효과적으로 숨겨 주고 있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누군가가 맞은편 절벽에 있다 하더라도 범한이 절벽 위를 도마뱀처럼 천천히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열두 살부터 열여섯 살 때까지 범한은 네 해 동안 자신의 정기를 몸 밖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익히려 노력했다. 물론 매우 우둔한 수련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오죽은 그런 범한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았고 범한 자신도 그것을 연마하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그때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마황 환약의 약효가 벌써 떨어진 터라 그의 정기도 어느 정도 고갈된 상태였다. 이에 조금도 부주의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범한은 도마뱀처럼 절벽에 찰싹 붙어 조심해서 위로 또 위로 기어 올라갔다.
209화
작은 풀들이 가볍게 떨리더니 손 하나가 절벽에 솟아 있는 돌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색 잠행복을 입은 사람이 유령처럼 계곡에서 기어 올라왔다.
모자로 얼굴을 가린 범한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득한 계곡 절벽만 보일 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범한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새벽안개로 겹겹이 둘러쳐진 반대편 숲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그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범한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런 후 더 이상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검은 화살처럼 짙은 안개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상경을 향해 뛰었다.
* * *
고달이 경국 사신단 거처 문밖에 서 있었다. 그는 장도를 들고 호랑이같이 큰 눈을 부릅뜬 채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련님은 하루 밤낮으로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북제 관원들의 방문을 내치고 있고, 금의위에서 온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젊은 황제가 범한과 한담을 나누려 한다는 말을 전하겠다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어서였다.
지금 범한이 부재중이란 걸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무사 지휘사 심중은 범한이 지금 사신단 거처에 없기만을 바라는 중이었다. 밤새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펼쳤지만 시체를 찾지 못하자 범한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북제 측에서 의심하며 확인하러 나선 것이었다.
한데 경국 사람이 이리도 야만적이고 막무가내로 나올 줄이야. 고달은 범한 정사가 많이 취했다며 북제 관원의 출입을 강력히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바탕 충돌이 벌어지려던 찰나, 거리에서 슥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북제 관원들은 너무나도 기뻤다. 그것은 거리를 쓰는 빗자루 소리가 아닌 발걸음 소리였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상경의 새벽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사신단 문 앞에 유명 인사가 등장하자 북제 관원과 금의위는 서둘러 길을 내어 주고는 느릿느릿 걸어오는 낭자를 향해 몸을 깊숙이 굽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해당 낭자께 인사드립니다.”
해당타타는 눈이 게슴츠레한 것이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가 두 손을 꽃무늬 옷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하품을 하며 물었다.
“이곳에서 왜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겁니까?”
한 관원이 서둘러 보고했다.
“하관, 성지를 받들어 경국 정사 범한 대인께 입궁을 청하러 왔습니다. 한데 대인의 호위가 성지 전달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자 금의위와 홍려사 관원들도 앞으로 나와 사정을 설명하며 자신들도 범한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해당타타는 이틀 동안 상경에 그리 많은 일이 일어난 줄 모르고 있던 터라 깜짝 놀라 살짝 멍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알리지 않은 건가요?”
호위 수장 고달은 촌부처럼 보이는 여인이 사실은 북제의 중요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사신단이 상경에 머무는 동안 도련님이 이 기이한 여인과 함께 나가 산책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앞으로 나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대인께서 어젯밤 음주를 과하게 하셨습니다. 하여 몸이 조금 불편해 쉬고 계시는 중이니 방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해당타타가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 보리다.”
말을 마치자마자 해당타타는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며칠 동안 이곳을 찾아와서인지 그녀의 출입이 익숙한 사신단 사람들은 그 상황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돌계단에 서 있던 임문의 눈에 잠시 당황스러움이 스치기는 했지만 그 역시 감히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달은 달랐다. 주인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쥐고 있던 장도를 앞쪽으로 내밀어 해당타타를 막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 끙!”
하지만 결국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답답해하는 소리로 마무리했다.
해당타타는 그의 행동에 반격하지 않고 몸만 슬쩍 돌렸다. 언제나처럼 땅바닥에 발을 붙인 채 슥슥,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돌린 건데 그녀는 어느새 고달 뒤쪽에 가 있었다.
그사이 정기를 내보낼 길을 차단당한 고달은 양어깨를 미세하게 떨며 거친 눈빛만 쏟아 냈다.
해당타타가 미소 지으며 몸을 돌리더니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 그 수수한 얼굴로 잠깐 묘한 느낌을 풍기며 말했다.
“나와 범한 대인은 친구입니다. 그도 지금 나를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해당타타의 손바닥이 어깨 위에 떨어질 때 온화한 기운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고달이 서서히 두 눈을 감더니 오른손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장도를 몸 옆으로 절도 있게 휘익 돌리고는 발 옆에 놓인 석판 바닥에 매섭게 내리꽂았다. 칼끝은 석판을 뚫고 들어가 세 촌 정도 깊이로 땅바닥에 박혔다. 석판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모양은 거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 광경만 봐도 고달은 굉장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경지는 아직 해당타타만 못했다. 더욱이 그녀의 신분이 특수해 공격할 수도 없자 고달은 혼자서 화를 삭여야만 했다.
고달은 자신이 해당타타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 안에 계신 도련님과 단독으로 대면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악역을 자처하기로 마음먹고 몸을 휙 돌려 비틀거리며 범한에게 가고 있는 해당타타의 뒤를 따라갔다.
뒤쪽에 있던 북제 관원과 금의위는 약삭빠르게도 고달을 따라가지 않았다. 해당타타가 범한이 방 안에 있는지 확인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자신들은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 * *
“해당 낭자, 어서 오세요.”
소금을 살짝 푼 물과 소형 낭야봉(狼牙棒: 끝에 못이 잔뜩 달린 무기)처럼 생긴 것을 들고 있는 왕계년이 입에 거품을 가득 물고 해당타타가 매번 지나치는 정원 복도에 나타나 인사했다. 왕계년은 범한의 심복이었으니 그녀와 마주치는 건 비교적 익숙한 일이었다.
해당타타는 상대방이 시간을 끄는 중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이며 느긋하게 물었다.
“왕계년 대인, 손에 든 것은 무엇입니까?”
왕계년이 소형 낭야봉을 입 안에서 꺼내 면전에 들이댔다. 그리고 웃었다.
“우리 대인께서 발명하신 칫솔입니다.”
“칫솔이요?”
해당타타는 살짝 놀라워하며 다시 물었다.
“칫솔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왜 버드나무 가지를 쓰지 않는 거죠?”
“요놈이 쓰기 편해서지요. 부드럽고 꼼꼼하게 닦아 주거든요.”
왕계년이 해당타타의 비위를 맞춰 가며 이야기하다가 냄새나는 입 속에 있던 칫솔을 불경하게 면전에 들이댄 걸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거둬들인 후 연거푸 죄송하다고 말했다.
해당타타는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왕계년도 들고 있던 물건들을 부하에게 던져 놓고 거들먹거리며 따라갔다. 이제 곧 마흔 줄에 들어서는 사람이 토끼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해당타타에게 억지로 말을 걸었다. 그는 범한 대인이 지난밤 과음을 한 탓에 지금 쉬는 중일 것이라며 잠시 기다려 주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사실 사신단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해당타타가 갑자기 거처에 나타난 건 그냥 지나가던 길에 들른 게 아닌 반드시 범한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 *
복도 저 멀리에서 새하얀 옷을 입은 그림자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당타타는 기분이 이상해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싸늘한 눈을 하고는 말했다.
“이제 보니 재주꾼 운 공자였군.”
언빙운이 보기에도 고하의 마지막 제자는 자기를 언짢게 여기고 있었다. 금의위에게 풀려나기는 했어도 그는 북제 관원들과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숙소 후원에만 머물며 쥐 죽은 듯 지내고 있던 터였다. 더군다나 언빙운은 감옥에 갇히기 바로 직전, 재주꾼 운으로 지낼 때 황궁에 돌아온 해당타타와 만난 적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해당타타와 마주치자 난처한 기분이 들어 그냥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여닫이문이 굳게 닫혀 있자 해당타타는 이맛살을 잠시 찌푸리고는 문을 밀었다.
그녀는 여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알 정도로 범한과 친해도 이런 식으로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에 깜짝 놀란 왕계년이 문을 열지 못하게 막아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경공에 뛰어난 왕계년이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하늘의 여인 해당타타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결국 방문은 살랑바람과 함께 소리를 내며 열리고 말았다.
‘설마 늦은 건 아니겠지.’
왕계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해당타타는 방 안에 놓여 있는 침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왕계년 대인은 물러서요!”
왕계년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런데 방 안에서 피곤함에 찌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계년, 그만 물러가요.”
왕계년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기쁜 기색이 돌며 안정을 되찾은 그가 허리를 굽혔다.
“알겠습니다, 범한 대인.”
* * *
해당타타가 여인의 맵시 있는 걸음걸이로 방에 들어서자 등 뒤에 있는 나무문이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저절로 닫혔다. 그녀는 의외랄 것도 없이 느긋하게 탁자 위 찻주전자를 들어 차게 식은 차부터 잔에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호로록 마시고는 침대 옆에 놓인 둥그런 의자에 앉았다.
비단 이불 아래에 안색이 살짝 창백한 범한이 두 눈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앉은 촌부를 상당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입을 뗐다.
“계속 그렇게 보고 있을 건가 보군요.”
해당타타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더니 하품을 몇 차례 했다.
“황태후마마의 명이 없었다면 내가 아침 일찍 대인을 만나러 오는 추태를 보이지 않았겠죠?”
범한이 웃으며 받아쳤다.
“나로서도 내 용모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추태와 내 외모가 관계없다는 건 알겠네요.”
범한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도 추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커다란 이불을 덮고 있는 범한은 옷섶이 열어젖혀진 상태였다. 그리고 맨살 가슴팍 위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폭포수처럼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엎어져 있었다.
“하루 밤낮 동안 여인과 술을 마신 거로군요.”
해당타타는 범한의 품에 있는 여인을 못 본 것처럼 하품을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도 없군요.”
“계속 이렇게 보고 있을 건가요?”
“내가 보는 걸 막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해당타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난처한 쪽은 결국 범한이었다.
“낭자 잠시만 비켜 주겠어요? 품에 있는 기녀에게 옷 좀 입히려고요.”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이 내 체면은 생각 안 해줘도 좋아요. 하나 여인으로서의 체면은 지켜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인이 여인을 난처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 * *
기녀는 옷을 갖춰 입고는 가기 싫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돌아보았다. 범한도 감탄할 정도의 연기력을 발휘해 다시 한번 원망과 부끄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을 만들었다. 그런 후 약간의 경외심을 담아 해당타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는 치마 앞자락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해당타타와 범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범한은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양손을 뒤통수에 둔 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의 적나라한 상반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해당타타 역시 특이한 사람이었던지라 일부러 부끄러워하는 척하지도, 꾸짖듯 큰소리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침대 위 젊은 남자를 나무토막 취급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최근 이틀 동안 상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해당타타의 질문에 범한은 살짝 놀랐다. 그러더니 잠시 후 웃으며 말했다.
“됐어요. 해당 낭자와 말씨름은 그만하고 싶어요. 상경에 있는 이상 다 알게 되더군요. 상삼호가 이번에 부하들을 잔뜩 잃었고 소은도 그쪽에서 죽였다면서요. 해당 낭자의 스승님께는 분명 기쁜 일이니 축하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낭자.”
해당타타는 범한을 차분하게 바라보며 눈빛으로 강하게 압박해 갔다. 그런데 범한은 오히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의연히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피했던 거예요. 그래서 사신단 거처에 나를 이틀 동안 가두어 뒀던 거라고요. 낭자는 이해할 거라 믿습니다.”
해당타타는 범한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해당타타는 아까 왕계년의 시간 끌기 작전을 받아 주며 범한이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던가. 대체 그녀가 왜 그런 건지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해당타타는 범한이 거처에 있는 이상은 더 이상 캐물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이 맑고 아름답고 젊은 경국 관원은 실제로는 빈틈없는 사람이니 절대 자기에게 꼬리 잡힐 일은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210화
해당타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흥미롭다는 듯 범한의 노출된 상체를 두어 번 쳐다보았다. 범한은 몰래 패도의 정기를 운기해 지금 상황에 맞게 맑고 청순한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거죠?”
해당타타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얼굴빛을 환하게 밝히려고요.”
한데 범한은 갑자기 알 수 없는 위험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틀 밤낮 동안 정신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탓에 붉힌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던 것이다.
“왜 또 창백해진 거죠?”
그러자 범한은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미소 지었다.
“봄날 밤이 사람을 힘겹게 만들어서지요.”
“봄날 밤이 짧아서 아쉬운 게 아니고요?”
“너무 길어도 힘겹답니다.”
* * *
“범한 대인이 만든 칫솔…… 나도 하나 줘요.”
느닷없는 요구에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수수 거리에서도 팔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대인이 만든 것이 더 좋아 보이더라고요.”
“과분한 칭찬이네요.”
“권문세가의 자제께서 그런 데까지 관심을 두다니 정말 의외네요.”
해당타타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을 다시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범한이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나에 대해서 말입니다, 해당 낭자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해당타타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태후마마 생신 후 귀국길에 오르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걸로 칠게요. 어때요?”
범한이 귀찮다는 듯 눈꺼풀을 슬쩍 들었다.
“잠부터 좀 자야겠네요. 그런 후 내 직접 찾아갈 테니 그때 이야기하죠.”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참, 좋은 생각이네요.”
그러자 범한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러니 대화는 이만 마치죠.”
“그럼 이만.”
범한이 이리 냉담하게 구는 건 해당타타에게는 처음이었다. 이에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곧장 방에서 나갔다.
범한이 침대에 누운 건 분명 많이 피곤해서였다. 하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표정은 차분해 보였지만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어젯밤에 들은 것들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또랑또랑 뜨고 침대 머리맡에 있는 수놓여 있는 장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마치 천장을 꿰뚫고, 구천층(九天層) 구름도 뚫고 하늘 가장 먼 곳까지 가 있는 것만 같았다.
* * *
범한이 사신단 내부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북제 쪽에서는 연산 절벽에서 소은을 구한 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러니 그것을 둘러싼 질문들이 자연스레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랑도, 하도인, 심중 세 사람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앉아 있었다. 세 사람 중에서 직위가 가장 높은 이는 심중이었나 신분이 가장 높은 건 랑도였다. 고하의 수제자이자 청년 천자의 무술 스승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도인은 별말 않고 있었다.
하루 전 랑도와 하도인은 연합해 범한과 소은을 절벽 아래로 내몰았다. 그리고 금의위는 밤새도록 상경성 밖을 비밀리에 수색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자 이들은 결국 꼭두새벽부터 황궁에 도움을 청하면서까지 경국 사신단 거처로 밀고 들어갔다. 한데 범한은 멀쩡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범한이 아니었던 걸까요?”
하도인의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져 있었다. 다리 위에 있던 독 자국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독을 없애기 위해 하도인은 적지 않은 정기를 소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랑도가 눈을 감았다.
“그자는 분명 범한이네. 독과 침을 잘 다루고 잔재주까지 부렸으니 범한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하도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자의 생김새는 범한과 달랐습니다.”
그러자 랑도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변장했을 수도 있지.”
랑도는 신분이 특별했던지라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에 섣불리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멀쩡하게 살아서 사신단 거처에 있었다. 만약 절벽에서 뛰어내린 게 범한이라면 어떻게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아무리 봐도 신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 같았다.
심중도 랑도의 판단에 의구심을 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티는 전혀 안 내고 여전히 부자 어르신의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가능성이 가장 큰 쪽은 범한입니다. 상삼호가 결탁한 게 남쪽 사람이니까요. 이번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건 경국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동이성의 고수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도인이 반대의 의미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심중은 웃었다.
“물론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요.”
“범한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랑도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원래 특무 기관 책임자들과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은 일만 아니었으면 금의위를 돕기 위해 출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심중이 랑도를 잠깐 쳐다보고는 활짝 웃었다.
“랑도 대인, 경국에도 고수는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재주와 관련한 부분에서는 대인께서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진평평 곁에 ‘그림자’라고 부르는 자객이 있다는 걸요. 그를 본 사람도, 그의 수단과 행동 방식을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범한이 감찰원 제사 신분이니 그의 재주가 그림자와 무슨 관련이 있을 수도……. 이리 말하고 보니 절벽에 있던 자는 범한이 아닌 그림자일 수도 있겠군요.”
그림자는 진평평 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살피는 호위 무사였다.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심중은 특무 기관의 책임자였으므로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하도인이 몸에서 탁한 기운을 몰아내고는 계속 말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소은의 생사 확인입니다.”
“소은은 죽었네.”
랑도가 담담하게 말했다. 잠행복을 입은 범한이 소은을 구할 때 그는 몸을 돌려 소은의 가슴과 배 사이에 곡도를 찔러 넣었었다. 이에 랑도는 자기 칼끝에 담겨 있던 정기로 소은의 생기를 끊어 놓았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자 심중이 미소 지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국사와 황태후께서 분명 만족하실 것입니다. 이 심중, 두 분 대인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 * *
천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러했듯이 태양이 상경성 서쪽 성벽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살짝 더운 바람이 생기 잃은 나뭇잎을 감싸더니 이어 상경성에 있는 저택으로 밀고 들어가 사람들의 몸을 휘감은 후 침묵 중인 나뭇가지들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이 되자 바람이 점점 차가워졌다.
범한은 후원에 있는 나무 옆에 서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가장 먼저 떠오른 별을 바라보았다. 이날 밤은 싸늘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범한은 너무 고단했던 탓에 밤공기가 쌀쌀하게 느껴져 옷을 한 겹 더 겹쳐 입어야만 했다.
범한은 조심스레 들고 있던 서한을 접었다. 그리고 이전처럼 손바닥 안에 올려놓고 가루로 만들지는 않았다. 감찰원에서 보낸 밀서가 아닌 집에서 보내온 평범한 서한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완아가 보낸 서한이었다. 집안 소식이 꾸준히 북쪽까지 전달되기는 했지만 아내가 서한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완아는 집에서 그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 외에도 서한에는 장인어른께서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보는 사남 백작가에서 맡아 주고 있으며, 약약은 혼인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언제나처럼 담담하고, 아버지 사남 백작은 조정 일을 돌보느라 바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서한 말미에는 보고 싶다거나 얼른 돌아오라거나 하는 말 따위는 없었다. 대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여름밤 바람마저 멎으니 꿈에서도 아파 몸을 뒤척입니다. 님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검은 머리만 더 자랐네요. 소싯적 이별 그 언제인지 사흘 내내 님만 그리워합니다. 어찌 그리 꾸물거리시는지요. 고개를 파묻고 서한을 써봅니다.”
어제, 오늘, 내일, 사흘 내내 낭군님만 그린다니.
범한은 서한에 은근하게 담긴 염려와 걱정에 살며시 웃음 지었다. 그리고 아내의 타고난 명랑한 성격 덕분에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요 며칠 음모를 꾸미느라 집안 여인들은 거의 잊고 지냈는데 서한 때문에 그녀들 생각이 나자 범한은 은근히 양심의 가책이 일었다.
나중에 만나기로 약속해 놓은 해당타타와의 만남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은 은근히 기대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이는 절대 남녀 간의 감정 때문이 아닌 그냥 순수함 기대감이었다. 누군가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은과의 대화 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디에도 말할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이런 이상하고 기묘한 감정이 줄곧 범한의 마음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경국 경도에서 비가 내리던 날 밤, 그 상자가 열린 후 범한은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세상 곳곳에 남아 있는 그녀의 숨결과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 순간 범한은 절박할 정도로 쓸쓸했다. 이곳에서는 그 여인의 흔적을 조금도 느낄 수 없어서였다.
“소은의 말이 맞아. 나는 정말로 무정한 사람이었어.”
범한은 자신에게는 친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곁채로 걸어갔다.
* * *
곁채에서는 범한, 언빙운, 왕계년,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 상경에서의 감찰원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다. 언빙운이 차분히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 대인, 비밀은 알아내셨습니까?”
일찌감치 예상했던 상황이다. 범한은 감찰원과 신양 쪽 역량을 모두 이용했기에 절묘하게 소은을 사지로 몰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경국의 관리인 두 사람이 소은이 간직하고 있던 비밀을 알고 싶은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발 늦는 바람에 소은이 죽었습니다.”
언빙운의 눈동자에서 순간 이상한 기색이 번뜩였다가 곧장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내젓고 탄식했다.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건만 결국 실패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범한이 살짝 비꼬듯 웃었다.
“늙은 절름발이도 스무 해 동안 알아내지 못했는데 내가 신선이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까?”
범한은 언빙운과 대화할 때면 진평평 원장을 일부러 늙은 절름발이라 불렀다. 경솔하고 졸렬하게 으름장을 놓는 행위였지만 언빙운이라는 차갑고 똘똘한 사람에게는 써먹기 꽤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자 언빙운이 고개를 돌려 왕계년에게 말했다.
“돌아갈 준비나 합시다.”
왕계년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대답했다.
“네.”
그런데 왕계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인, 어젯밤에 방 안에 남겨 뒀던 가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범한은 왕계년의 뜻을 알아차렸다. 죽여 입막음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데려가야지요.”
언빙운이 반대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북제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발각되는 게 뭐 어때서요?”
범한은 언빙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조소하듯 말했다.
“저들이 발견한다 한들 또 어쩌겠습니까? 언빙운 대인은 갇혀 있는 1년 동안 담력이 많이 줄었군요.”
언빙운과 왕계년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범한의 심리 상태가 이상해서였다. 이에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이 두 사람을 슬쩍 보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해당이 알아채지 못했을 것 같습니까? 그냥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뿐이라고요!”
왕계년이 귀국과 관련된 일정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잠시 아무 말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북제 황태후의 생신 연회가 끝난 후 곧장 귀국길에 오릅시다. 난 말이죠, 가족들이 그립거든요.”
211화
왕계년이 명에 따라 귀국 준비를 하기 위해 그리고 임정과 임문 두 사람과도 상의할 게 있어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쨌든 이번 귀국길에는 존귀하신 북제의 공주마마를 모시고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왕계년이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범한이 하는 말이 들려왔다.
“오는 길에 준비해 뒀던 말들 있잖아요, 그것부터 깨끗하게 처리해요. 그리고 농부한테 데려가서 귀찮은 일 생기지 않도록 하고요.”
맨 처음에 계획을 세울 때 참석하지 못했던 언빙운은 범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왕계년이 범한을 잠시 쳐다보았다. 한데 범한이 손을 흔들자 왕계년은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 상황을 본 언빙운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세 사람, 세 가지의 동작. 그러니 그 속에는 분명 무슨 뜻이 숨겨져 있으리라.
범한이 살짝 웃더니 말했다.
“내 앞에서까지 그리 고생스럽게 참을 필요 있나요?”
언빙운은 웃지 않았다. 대신 앞에 놓인 찻잔을 느긋하게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부하의 예를 갖춰 대답했다.
“제사 대인께서 저에게 알려 주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 아무리 궁금해도 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범한은 잠시 고민도 하지도 않고 툭 까놓고 말해 줬다.
“맨 처음 계획입니다. 이미 버린 계획이라 쓸모없어졌지만 그래도 뒤는 깨끗하게 닦아 놔야 하니까요.”
그런 후 범한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막 봄에 접어들었을 무렵 범한은 경도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젊은 관원을 발견했고 그 후로 그를 줄곧 규방 깊은 곳에서 길렀다는 이야기였다.
맨 처음 계획대로라면 귀국할 때 범한 대신 가짜 범한이 사신단을 이끌고 남하해야 했다. 그리고 대역이 사신단을 이끄는 사이 범한은 상경에 남아 처리해야 할 일을 완수하려 했었다.
“처음에는 혼자 상경에 머물 생각이셨다고요?”
언빙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처리해야 할 일이란 게 대체 무엇입니까?”
범한이 언빙운을 쓱 쳐다보고는 말했다.
“진평평 원장께서는 소은이 죽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상경에 남아 그를 제거하려 했어요. 그런 후 서둘러 돌아가 국경 근처에서 사신단과 합류할 생각이었습니다. 소은이 죽은 후 북제 사람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우리 사신단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언빙운이 물었다.
“방금 왕계년 대인에게 말했던 말(馬)이란 게 그걸 말하신 건가요?”
그러자 범한이 잠시 웃고는 설명해 주었다.
“사신단이 경도에서 출발할 때 감찰원과 황실 금고에 있는 누군가에게 부탁해 남하하는 길목에 좋은 말 몇 필을 가져다 놔달라고 부탁해 뒀습니다. 물론 그 말들은 몰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중이고요. 그것 때문에 북제 관아가 놀라 움직이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상경에서 소은을 죽인 후 말을 갈아타며 전속력으로 국경까지 갈 생각이셨던 겁니까?”
언빙운의 입가에서 비웃음 같은 게 흘러나왔다.
“천 리를 말 한 마리로 달리면 뭔가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자 언빙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처음 계획대로 했어도 소은을 죽이셨다면 북제는 분명 상경성 문부터 닫아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 주에 주둔시켜 놓은 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막았겠지요. 그런데도 혼자서 말을 타고 남쪽으로 가실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범한이 웃었다.
“진평평 원장께서도 옛날에 그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라고 못 하란 법 있겠습니까?”
“용감하다고는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계책에는 조금 바보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언빙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계속 말했다.
“대인께서는 감찰원 제사이니 당연히 목숨부터 아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처럼 귀국하는 사신단에 대해 북제가 경계를 소홀히 한다 해도 상경성에는 은둔 고수들이 많으니 대인께서는 소은을 죽이지 못하셨을 겁니다.”
범한은 이 얼음남에게 저격과 관련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죽 아저씨는 상자와 함께 실종되었고, 장 공주와 상삼호는 결탁했고, 꼬마 범한이 어부지리를 얻는 바람에 결국에는 계획이 이 지경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 * *
내일이 가고 또 내일이 가 글피가 되었다. 물론 쓸데없는 말 좀 해봤다.
상경성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옥천하강 강가에 녹음이 짙게 깔리고 북쪽으로 돌아온 백로가 날고 있었다. 이곳은 상류 쪽으로 황궁과 가까워 경비가 삼엄한 곳이었다. 그러니 여기 바닥석이 깔린 길에는 백성은 발조차 내디딜 수 없었다.
범한은 바로 이곳에서 해당타타와 함께 있었다.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화제로 한담을 나누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답답했던 가슴이 시워해졌다. 촌부와 동행한 덕분인지 몰라도 요 며칠 음울했던 기분이 많이 가셨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이상하기는 하지만 해당타타는 예쁘기는커녕 자태도 맵시 있다거나 단아하지도 않고, 촌부 기질이 다분해서 범한은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쩐지 편안했다.
한담을 마치고 두 사람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해당타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황태후께서는 단 한 번도 고집을 꺾으신 적이 없으세요. 그런데도 제대로 된 방법을 내놓을 수 있어요?”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네 황제께서 아내를 맞이하시는 일인데 왜 하필이면 나보고 도우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말을 마친 범한은 해당타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차분한 눈매에 불쾌함을 섞은 채 말을 이어 갔다.
“해당 낭자는 사리리의 친구이니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내게 도움을 청하면 그녀가 불편해할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요?”
해당타타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두 발을 질질 끌며 강가에 깔린 바닥석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앞쪽에 늘어져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리리가 원하는 거라면 범한 대인은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리리는 상경에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원래 무정한 사람이라면서 왜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는 척하는 거죠? 그녀가 입궁하는 건 대인도 원하는 일이잖아요. 게다가 대인에게는 저 먼 남쪽으로 돌아간 후에도 북제 황궁과 연락할 사람이 하나 생기는 거고요.”
해당타타가 변명할 여지도 주지 않고 모든 걸 까놓고 말하자 범한은 당황했다. 마치 걸치고 있던 옷이 순식간에 모두 벗겨져 그 안에 숨겨 두었던 자신의 이기심과 무정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기분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 후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신하에 불과해요. 그러니 상황을 바꿀 만한 충분한 힘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둔 거군요.”
압박하는 말투는 전혀 아니었지만 해당타타의 당당함과 거리낌 없는 언사는 오히려 범한을 절로 주눅 들게 만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에 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궁에서의 삶은 사람을 백발로 만들 정도로 근심이 많다 했어요. 해당 낭자와 사리리는 자매 같은 사이인데 왜 그렇게 그녀를 입궁시키려 하는 겁니까?
“폐하께서는 꽤 괜찮은 남자니까요.”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게다가 사리리는 경국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그녀가 상경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바람막이가 어디 있겠어요.”
말을 마친 해당타타가 느닷없이 몸을 돌려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의 눈에 호수보다 맑게 빛나는 해당타타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지금까지 본 사람 중 눈빛이 가장 예쁜 이는 섭령아였는데 그녀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섭령아의 눈빛에는 사악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진난만함이 있다면 해당타타의 눈빛에는 세상사를 통달한 듯한 명석함과 담담함이 있었다.
“범한 대인, 일일이 계산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살면 피곤하지 않아요?”
* * *
범한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잠시 후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뒷짐을 지더니 상체는 움직이지 않은 채 하체만 조금 움직이며 해당타타처럼 푸른색 바닥석이 깔린 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고는 조금 생뚱맞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해당 낭자처럼 마음껏 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목적을 갖고 살고 있답니다. 낭자는 밭에 채소나 심으며 살 요량이겠지만 나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말을 마친 범한은 품에서 서한 하나를 꺼내 해당타타에게 건넸다.
“내가 대단한 지혜를 갖고 있거나 한 건 아니에요. 기껏해야 잔머리를 굴리는 정도지요. 이 방법이 먹힐지 살펴봐요.”
해당타타는 햇살을 맞으며 서한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맑은 눈동자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범한에게 말했다.
“황태후께서 믿으실까요?”
“황태후께서 이 일 때문에 폐하와 반목하길 원치 않으신다면 그분께 필요한 것은 체면 세워 드리기입니다. 황태후마마께서 믿으시든 안 믿으시든 이 두 가지 일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거예요.”
범한이 내놓은 계획은 간단했다. 그것은 줄곧 기억하고 있던 전생 세계의 이야기, 즉 한무제가 구익부인과 만나게 된 일화였다.
한무제가 황하로 순시를 갔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술사가 갑자기 이곳에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으니 분명 기이한 여인이 있을 거라 말했다. 이에 한무제가 구름이 떠 있는 곳을 찾아가 보니 술사의 말대로 정말로 그곳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한데 아름답기는 해도 어려서부터 병을 앓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더군다나 손이 오그라들고 굳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펴주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든 한무제는 그녀의 양손을 펴주러 직접 나섰고 기적이 일어났다. 소녀의 두 손이 펴지면서 건강한 사람의 것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더 기이했던 건 그녀의 오른손에서 자그마한 옥 갈고리가 나왔다는 점이다.
한무제는 그 어느 때보다 기뻐했고 그녀를 궁으로 데려가 주먹을 쥐고 있는 부인이란 뜻으로 ‘권 부인’이란 봉호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이 권 부인은 훗날 구익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 * *
“당신이 말한 황제는 누구예요?”
해당타타가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꾸며 낸 이야기예요.”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당연히 가짜지요. 한무제란 사람이 바보가 아니니 그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꾸며 냈다고 이야기해 준 겁니다.”
해당타타는 남녀 일에 대해서는 무지한 면이 있어 망설이다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범한은 언짢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지적했다.
“당신이 누구였죠?”
해당타타는 무의식적으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범한은 천인의 도를 중시하는 이 어린 여인이 또 철학적인 문제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덜컥 들어 겁을 집어먹었다. 이에 서둘러 헛기침을 살짝 하고는 말했다.
“낭자는 고하의 제자예요. 고하 선생은 국사이시고요. 고하 국사께서 상경 서쪽에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고 구름 아래에 기이한 여인이 있다고 말하신다면 설득력이 더 강해지겠지요.”
해당타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께서 어찌 나와 함께 그런 소란에 동참하시겠습니까?”
범한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스승이란 작자는 인육까지 먹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총애하는 어린 제자와 함께 소란을 좀 떤다 한들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타타는 다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점을 말했다.
“그런데…… 상경 귀족들은 모두 리리의 신분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해도 속일 수 없어요.”
그러자 범한이 웃더니 말했다.
“우선 사리리 낭자에게 북제 사당에서 몇 달 살도록 해요. 출가하면 더 좋고요.”
“출가가 뭐지요?”
“사당에서 일심(一心)으로 신을 모시고 혼인할 생각을 않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는요?”
“주변이 잠잠해지면 남몰래 일을 진행시켜요. 그런 후 궁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못 주워 담는 엎질러진 물이 되는 거예요.”
“그걸로 된 건가요?”
“서한에 일부 세부 사항이 있으니 유념하고요. 국사님을 설득해 사리리 낭자를 제자로 받아들이면 더욱 좋고요.”
“범한 대인의 제안이 황당하고 웃겨 보여요. 그런데 세세히 살펴보니 가능성이 엿보이기는 하네요.”
해당타타는 범한을 향해 고맙다는 의미로 가볍게 인사했다.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전생의 측천무후와 양귀비라는 두 미인의 황궁 입궁 이야기를 오늘 성공적으로 써먹게 되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었다. 왜 황제는 왜 사리리를 황궁으로 들이려는 걸까? 왜 황태후는 사리리를 황궁으로 들이려 하지 않는 걸까?
해당타타는 분명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외국 사신에게는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범한의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궁에서 몇 번 만난 젊은 황제의 표정과 태도였다. 그러자 범한의 마음속에서 대담하면서도 황당한 생각이 떠오르고 말았다.
212화
물론 범한은 자신의 추측을 옆에 있는 낭자에게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들이마신 찬 바람 때문에 치통이 온 것처럼 머리가 아팠을 뿐이었다.
해당타타는 범한을 슬쩍 바라보았다. 한데 별일 아닌 걸 알자 다시 옥천하강을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정원이 나타났다. 대나무 울타리가 문이었고 정원 옆에는 우물도 있었다. 돌로 된 탁자가 서쪽 그늘에 놓여 있었고 여러 색이 섞인 병아리가 조용히 모이를 쪼아 먹고 있었다.
이곳은 해당타타가 채소를 심고 가꾸는 곳이었다.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비교 대상이 안 되는 법. 그래도 솔직히 말할게요. 낭자는 언제나 자연스러운 기풍을 보여 주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의 맑고 우아한 면을 시골의 악취 나는 돼지우리와 비교해 보니 이제 알 것 같군요. 채소를 재배하고 닭을 기르려면 경계를 나눠 놓고 해야 한다는 걸 말이죠.”
칭찬 같은 폄훼의 말이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웃어넘겼다.
“내가 상경성에 있고 싶어 있는 줄 아나 보죠? 사부님의 명도 있고 황궁에서도 자주 부르니 하는 수 없이 이 부근에 조용한 정원 하나 마련한 거예요.”
범한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심중이 낭자에게 채소나 심으라고 이 정원을 내줄 때 어느 부자 양민을 괴롭히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지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대꾸했다.”
“그것 관련해서는 아는 바 없어요. 그리고 알 필요도 없는 일이고요.”
해당타타의 대답은 담담했다. 범한 역시 담담하게 들었다. 이는 그가 해당타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북제에서 초월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음에도 선녀같이 꾸미지도 않고 무심하고 그렇다고 무미건조하지도 않고 일부러 담담한 척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연스러운 그녀의 모습이 범한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황태후의 생신 연회 전에 생긴 이 귀중한 휴식기 동안 범한은 한동안 우울했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매를 걷고 바짓단을 말아 올리고 돌절구 뒤에서 농기구를 들고 와 해당타타와 함께 땅을 파기 시작했다. 두 고랑 정도 황토를 갈아엎은 후 범한은 그릇에 곡물을 한가득 퍼 담았다. 그러고는 인색한 사람처럼 곡물을 땅 위에 찔끔찔끔 뿌려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병아리들이 울며 그의 발걸음을 쫓아 작은 정원 곳곳을 따라다녔다.
해당타타는 무릎을 꿇고 앉아 넝쿨을 정리하면서 웃음꽃이 핀 얼굴로 병아리와 장난치며 놀고 있는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범한의 왼쪽 다리 위로 꽂혔다.
범한은 지치고 갈증이 밀려왔다. 이에 우물에서 물을 한 바가지 길어 올려 소라도 된 듯 머리를 박고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곁눈질로 해당타타를 살폈다. 채소밭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걸 보니 분명 한두 해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범한은 담주에 있을 때도 농사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괭이를 잡았을 때도 비수를 집어 들었을 때처럼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없었다. 또한 작물에 물을 뿌려 줄 때도 독 가루를 뿌리는 것처럼 시원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렇듯 손놀림, 발놀림이 어수룩하다 보니 농사일을 제대로 돕는 건 고사하고 결국에는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제법 힘들었는지 범한의 얼굴에 비지땀이 흘렀고 정수리에서는 수증기가 솟아올랐다.
해가 점점 중천으로 향하자 해당타타는 긴 의자 두 개를 차양이 있는 곳에 옮겨다 놓았다. 그늘을 만들기 위해 어떤 넝쿨 식물을 심어 놓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넓고 번들거리는 시퍼런 잎은 햇빛을 제대로 차단해 주고 있었다.
범한은 뜨거운 입김을 내뱉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해당타타가 건네는 차가운 차를 받아 들고는 두어 모금 마시고는 의자 눌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뒤로 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눈을 감고 마치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오후 휴식을 취했다.
해당타타가 범한을 슬쩍 보고는 웃었다. 그런 후 머리에 묶어 두었던 두건을 끌러 관자놀이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고는 자신도 의자에 누웠다.
차양 아래 놓인 두 개의 대나무 의자에서 두 사람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가롭게 휴식을 취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해당타타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당신은 조금 이상한 사람이에요.”
“당신도 이상한 사람이에요.”
범한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당신에 대해 간파한 게 아니니까요.”
어느새 범한 대인이니 하는 존칭을 쓰지 않게 되자 해당타타는 더 편안해진 기분에 미소를 지었다.
“왜 누군가를 간파해야 하는 거죠? 게다가 간파한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데에는 늘 목적이 있어요.”
범한이 입가에 살며시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낭자의 목적이 뭔지 대체 모르겠단 말이죠.”
“내 목적이요?”
해당타타가 손수건을 부채처럼 흔들었다.
“살아가는 데 꼭 목적이란 게 있어야 하나요?”
범한이 눈을 감은 채 검지를 치켜들고 아니라는 듯 양옆으로 흔들며 말했다.
“살아가는 데 꼭 목적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모든 일, 달성하려는 목표, 이런 것들은 모두 살기 위해 있는 거예요.”
해당타타가 말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삶에는 익숙하지 않아요.”
“그냥 헛소리 좀 해봤어요.”
범한이 허리를 쭉 폈다.
“낭자와 이런 헛소리를 하는 게 좋아요. 이런 느낌이 내게 제대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거든요. 목적에 의해 삶이 조정당한다는 느낌 말고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을 툭 내뱉었다.
“또 헛소리를 하는군요.”
“이게 다 좋아서, 그러니까 낭자의 행동이 좋아서 그런 거예요.”
말을 마친 범한은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나 나처럼 친구가 없는 사람은 말할 상대를 찾기 마련이거든요.”
“대인은 재주가 많고 명성도 하늘을 찌를 듯한데 어떻게 친구가 없을 수 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해당타타는 다시 대인이란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후 다시 입을 뗐다.
“나는 정말로 친구가 없어요. 낭자는 북제 소녀이고 나와는 서로 적대적인 진영에 있지만 그래도 낭자는 친구로 여기고 있어요. 어찌 되었든 내가 북제에 있는 동안에는 낭자가 나를 죽이기 위해 공격할 일은 없으니까요.”
해당타타가 범한을 잠깐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경국의 관원이 예쁘장하게 생긴, 제대로 된 진상이란 사실을 발견했다.
“대인은 권문세족 출신이라 경도로 들어간 후로는 자연스레 명성을 얻었어요. 그리고 평생 막힘없는 탄탄대로를 걷게 되어 있고요. 두 나라의 군주께서도 모두 대인을 중히 여기고 있지요. 그런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불만스러운 게 있다고요?”
“외롭고 적막하거든요.”
범한은 이 단어들 자체에 투정을 부리는 기색이 들어 있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살짝 비웃었다.
“대인은 언빙운처럼 대단한 인물을 수하로 두었어요. 또 경국 감찰원에서도 진평평 원장 대인 다음으로 권력을 쥐고 있고요. 집에는 아름다운 아내에, 누이동생은 알아주는 재녀(才女)에, 부친은 고위 관료에, 교류하는 사람들은 모두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이잖아요. 그런데도 적막하고 외롭다고요?”
“아버님은 아버님이고, 처는 처고, 누이동생은 누이동생이고, 언빙운은 부하고, 교류하는 이들은 모두 각자의 이익 때문에 나와 만나는 거예요.”
범한은 이상하게도 해당타타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계속 말했다.
“내가 고독한 척한다고 말해도 좋고 절망을 모방하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어찌 되었든 지금 하고 있는 벼슬살이는 맘이 편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런 아들…… 노릇하는 것도 즐겁지 않고요.”
해당타타가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리고 햇살보다 눈을 더 반짝이며 말했다.
“대인, 설마 나랑 친구 하자는 건가요?”
“친구니 뭐니 하는 말은 잠시 접어 두죠.”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적어도 낭자와 함께 있으면 비교적 마음이 편해요. 그것만으로도 나는 꽤나 얻기 힘든 걸 누리는 거랍니다.”
“내가 대인에게 다른 의도를 가졌을 수도 있는데요?”
“해당 낭자는 그럴 사람이 못 돼요.”
범한의 말에는 강한 믿음이 실려 있었다.
“대인은 지금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군요. 우리 사이에는 아직도 풀지 못한 원한이 있어요.”
“상관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낭자가 분명 나서서 나를 도와줄 테니까요.”
뼛골 깊이 숨어 있던 범한의 무례함이 드디어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 *
“범한 대인, 줄곧 궁금했던 게 있어요. 대인은 왜 북제로 오는 일을 받아들인 거죠?”
해당타타가 빙그레 웃으며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경국 정부에서 일어난 일들은 북제에게는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그러니 해당타타도 어떤 일들과 황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이 잠시 웃고는 말했다.
“말 안 해줄래요.”
해당타타는 기가 막혔다. 그런데도 범한은 그녀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눕더니 허리를 쭉 펴고 말했다.
“배가 고프네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대답했다.
“집 안에 쌀이 있고 우물 안에는 물이 있고 뜰에는 채소가 있어요. 그러니 직접 해 먹어요!”
그러자 범한은 탄식했다.
“남자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배고프다고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배 속에 있는 술고래 녀석이 배가 고프다는 뜻입니다!”
* * *
상경성에서 가장 호화롭고 가장 조용하고 가장 격조 있는 기루, 백세송거에 오늘 귀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귀한 손님이. 이에 백세송거 주인은 공손하게 모든 손님을 내보내고 넓은 세 개 층의 건물에 고요함만 남긴 채 문밖까지 나가 손님을 기다렸다.
기루 관리자는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영문을 몰라 의아해했다. 하지만 주인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이 주인은 조정에 소식통까지 갖고 있는 고위급 인사였다. 그래서 오늘 방문할 남자는 경국의 시선이고 여자는 황제의 작은 사고(小師姑: ‘사고’는 사부의 사제나 사매를 이르는 호칭으로 사문에서 고모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란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이 함께 산책할 때 황궁에서 그들이 다니는 길에 다른 사람이 출입하지 못 하도록 막아 주기까지 했다니 기루를 비워 주는 것 정도는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길가가 보이는 귀빈실에서 범한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입 안으로 술을 들이부었다. 한데 석 잔을 연거푸 마셔 놓고는 외려 눈살을 찌푸리며 주인장에게 술을 바꿔 달라고 소리쳤다.
범한의 표정이 좋지 않자 주인은 시선에게 시 한 수 받아 두려던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범한이 마시던 술을 북제에서 가장 유명한 청미자라는 술로 바꾸어 주었다.
범한이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해당타타가 물었다.
“앞서 나왔던 술은 오량액이에요. 독주 중에서는 천하에서 가장 좋은 술이고요. 그런데도 범한 대인에게는 별로였어요?”
“독한 술을 좋아하는 건 맞아요.”
범한이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를 쓱 쳐다보고는 이상한 낯빛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량액이 마시고 싶지 않군요. 왜냐하면 그 술에는 조금 다른 맛이 나 편히 마실 수 없어 그래요.”
오량액은 경여당의 맛이고 섭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맛이었으니 결국 범한 자신과 관련된 맛이었다. 범한은 오늘따라 그 맛이 싫었다.
해당타타는 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범한이 술을 들이붓고 있는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아주 재밌는 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 * *
한껏 취기가 오른 범한이 아까보다 살짝 흐리멍덩해진 눈과 훨씬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나의 이런 삶이 행복해 보이지요? 한데 술에 기대 시름을 잊는 꼴이라니 조금 우스워 보이지 않나요? 소년은 슬픔의 맛을 알지 못하고…….”
범한이 젓가락을 들고 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구절은 환생한 후 처음으로 베낀 시로 범한은 그때 행동이 기억나 심경이 더욱 복잡해지고 말았다.
범한이 작은 소리로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상님의 은덕이네. 우연히 은인을 만난 건 조상의 은덕이네. 이는 모두 어머님 덕분이네. 은공을 쌓으신 어머님 덕분이네. 그분이 살아생전 곤경과 빈곤에서 사람을 구하신 덕분이네. 모진 삼촌과 간사한 형처럼 돈만 좇으며 골육의 정을 잊지 않아서일세! 착한 일, 나쁜 일 모두 응당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으니 시시비비를 모두 하늘께서 가려 주신 것이네.”
이는 《홍루몽》에서 가교저의 ‘조상님의 은덕’라는 부분이었다.
213화
그 광경을 본 해당타타의 눈은 더욱 반짝였다.
이어 범한은 길게 탄식하더니 술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켜고는 말했다.
“해당 낭자, 그냥 이대로 취할 수 있게 상대하지 말고 무시해 줘요.”
왜 취하려 하는 걸까. 남자들이 취하려 하는 이유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마음이 답답할 때와 압박감이 클 때다. 범한은 이번 북제행에서 신묘의 비밀을 알아냈고 양국 간 우의를 다졌으며 북제 첩보망도 성공적으로 정비했다. 아무리 봐도 모든 게 순조로워 보이는데 무엇 때문에 침울해하는 거며 압박감을 받는 거지?
그런데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답답해하는 건 마음을 기댈 곳이 없어서였다. 동굴에서 소은과 대화를 나눌 때 그는 자신이 세상의 여행자며 시종일관 여행자의 마음으로 이 세계를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일곱 해를 지냈는데도 그에게는 여전히 이 세계가 서먹서먹했던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완아가, 누이동생이 그리고 오죽이 없었다면 범한은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자기 마음대로 살았을 것이다.
압박감은 동굴에서의 그 대화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범한은 앞서 진평평 원장에게 눈을 조금 더 높이라고, 심지어 천하를 굽어볼 수 있는 데까지 높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리고 그 후 신묘의 소재지를 알게 된 범한은 진평평 원장의 말뜻을 이해했고 홀로 압박감을 견뎌 내는 중이었다.
한데 이 천하를 좌지우지할 비밀은 소은을 수십 년 동안 쥐어짜 왔다. 그러니 범한이라고 해서 이 기한도 없는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신묘에 간다면 당연히 죽을 고비를 수백 번 넘어야 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그사이 자신이 지켜 주려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신묘에 가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때의 일을 알지 못하게 될 텐데.
신묘의 위치를 알기 전에는 소은의 머리를 파내서라도 알고 싶었건만 막상 알게 되니 차라리 영원히 모르는 게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범한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반면 안전해지는 쪽을 택한다면 범한은 반드시 경도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관리로서 일하고 계속 장사를 하며 몇 년 재미를 보면 신묘에 관한 일은 자연스레 마음속에 묻힐 것이다. 하지만 그리한다면 마음 한구석이 늘 답답할 게 뻔했다.
이에 범한은 자신이 섭경미를, 이 육신을 낳은 친어미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리고 순간 오량액을 마시고 싶지 않아 쥐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내던져 깨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그러니 《홍루몽》에 등장하는 가교저의 ‘조상님의 은덕’이라는 내용이 자신을 위한 구절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다행히 다시 태어났고 다행히 은인을 만났고 다행히 생모가 은공을 쌓았다. 그 덕분에 자신은 마음 편히 그리고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커다란 재화와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 점들이 모두 똑같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에 범한은 ‘조상에게 입은 은덕을 남은 생 동안 나누어야 할 텐데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 * *
해당타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입을 뗐다.
“남은 생은 힘들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며 살도록 해요.”
범한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에 술에서 깼다. 그는 원래 인사불성으로 취해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자신의 비밀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당타타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사실 해당타타는 우연히 꺼낸 말이었다. 범한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자 경국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시의 신선이 세상에 나타나 인간의 굴레를 벗고 미친 듯이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 것뿐이었다. 그녀는 범한은 이미 삶의 방향을 정했고 무궁히 번창할 순탄한 길만 걸어 왔으니 그것 때문에 오히려 그가 염세적인 생각, 의기소침한 마음을 갖게 된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문인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으니 해당타타는 자신의 진심을 속삭여 준 것뿐이었다. 세상의 백성을 위해 일하라고 말이다. 한데 이는 그녀가 범한을 뼛골까지 문인이라 생각했기에 한 말이었다.
“천하가 빈번히 왕래하며 번화한 이유는 모두 이익 때문이에요.”
범한은 계속해서 조롱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해당 낭자는 천인의 도를 닦고 자연을 가까이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 백성이란 자들이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있군요. 본관에게 영토를 넓히려는 야심 따위는 없지만 천하 백성이 조금 더 편안히 지냈으며 하는 바람은 있어요. 하지만 그러기 전에 나부터 편안해져야 하는데 백성을 편히 살게 만들려면 내 손에 권력을 쥐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이 세상에 높은 관직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 중에 편히 지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범한의 말에 살벌한 의미가 담겨 있자 해당타타는 살짝 놀라 말했다.
“범한 대인, 권력을 쥐었을 때는 도의(道義)라는 두 글자를 절대 잊어서는 안 돼요.”
“너무 뻔한 말입니다. 뻔한 말이에요.”
범한의 젓가락이 도자기 그릇 위를 내리쳤다. 하늘을 울릴 듯 커다란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그릇이 깨질 정도는 아니었다.
* * *
“사람은 아주 조금의 차이로 동물과 달라요.”
해당타타가 찌푸리고 있던 이맛살을 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인간은 의를 중시하거든요. 범한 대인과 나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천하 백성은 경국, 제국을 떠나 모두 하나뿐인 각각의 생명이에요. 그러니 대인이 도의라는 두 글자에 아직도 경외심을 품고 있다면 귀국한 후 천하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주세요.”
천하의 전쟁을 막는 건 해당타타에게는 목표였고 범한에게는 풀어 나가는 중인 목표였다. 이 정도로 거창한 목표를 옆에서 누군가가 말해 줬다면 역겨운 생각을 했을 게 뻔했다. 하지만 같은 말인데도 해당타타가 하니 자연스럽고 훨씬 믿음이 갔다.
그런데도 범한은 살짝 비웃었다.
“그렇다면 소은은 생명이 아닌가 보죠?”
그러자 해당타타가 대답했다.
“소은 한 사람을 죽여 세상 만인을 구한 겁니다. 그러니 안 될 게 뭐죠?”
해당타타의 대답은 일정 부분 일리가 있었다. 소은이 탈옥해 상삼호 부자와 연합하고 이로써 황제의 권력이 강대해져 소은이 황제에게 신묘의 비밀을 털어놓으면, 북제 젊은 황제의 야심 때문에 수년 후 세상은 다시 전쟁의 수렁으로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범한에게는 정치가로서 그리고 도덕가로서의 각성은 없었다. 이에 범한은 해당타타의 말을 냉소적으로 받아쳤다.
“만약 백 명의 사람이 죽어야 한다고 해보죠. 마흔아홉 명의 사람을 죽이고 쉰한 명이 살아 있어요. 그렇다면 낭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죽일 겁니까, 안 죽일 겁니까?”
해당타타는 잠자코 있으면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낭자를 모두 무정한 사람이라 말하는 거예요.”
범한은 문득 이런 무료한 화제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 억지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사람은 아주 조금의 차이로 동물과 다르다고요? 그 둘은 다르지 않아요.”
해당타타가 살짝 놀라 멍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범한이 계속 말을 해나갔다.
“나의 무공 실력은 낭자만 못해요. 하지만 정말로 생사를 두고 겨룬다면 낭자는 나를 쉽게 죽이지는 못할 거예요.”
해당타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은 술 한 사발을 마시고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나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하는 데 능하기 때문이지요.”
“무공 수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의 수양이에요. 아무리 외부 물건의 힘을 빌려도 결국 계속 기댈 수는 없게 되니까요.”
해당타타가 차분하게 맞받아쳤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의를 중요시한다고 해서 의를 발휘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이익을 도모한다고 해서 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요. 의라는 것은 커다란 이익이에요. 목적이 정확한데 무엇 하러 수단에 신경 쓰는 거죠?”
말을 마친 범한은 오히려 자기가 뱉은 말 때문에 놀라고 말았다. 그냥 잡담을 한 것뿐이고 화제를 돌리려 엉뚱한 말을 꺼낸 것뿐인데 그것이 도리어 자신의 속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마음속에 빛 한줄기가 켜져 순간 자신의 진심을 알게 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무정한 사람이라고? 범한에게 어쩌면 자신이 다정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한은 이번 생은 빙빙 에둘러 가며 살아야 한다고 말해 왔었다. 하지만 어떻게 에둘러 가며 살아야 할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드디어 명확해진 것이다.
이 순간 범한은 눈가의 취기는 더 짙어졌을지언정 머리만은 깨 있었다. 이에 해당타타를 주시하고 느긋하게 내뱉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해당타타는 오늘 대화에서 전반적으로 열세였다. 그래도 그런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한데 범한이 건넨 “대단히 감사합니다.”란 말을 듣고는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범한의 잔뜩 취한 눈에서 오히려 의연함이 보이자 돌연 불안했다. 이에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잠시 후 더 초롱초롱해진 눈을 하고는 말했다.
“대인의 재주를 펼치기에 경국은 좋은 무대예요. 대인은 전쟁을 할 생각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친구입니다. 그러니 대인, 높은 자리에 오르면 사소한 행동 하나도 부디 조심하고 만민을 위해 더 생각하고 절대 자만하지 않기를 바랄게요. 그것이야말로 정도를 걷는 거니까요.”
범한이 탁자 위에 술잔을 살며시 놓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제 막 길을 나선걸요.”
* * *
고하를 제외하면 북제의 최고 고수는 해당타타였다. 이리도 멋진 사람이 옆에서 보호해 주고 있고 마음속 모든 망설임까지 해소시켜 주자 범한은 기분 좋게 마음껏 술을 마셨다. 오량액은 치기를 부리느라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청미자를 잔뜩 들이켠 탓에 결국 목구멍은 깔깔해지고 속은 더부룩하고 머리는 어지러워져 결국에는 흐느적거리며 기분 좋게 탁자 위로 쓰러졌다.
그 상자를 열고 난 이후로 처음으로 인사불성으로 취한 것이었다. 그것도 적국의 상경 기루에서, 적인지 친구인지 아직 분간할 수 없는 해당타타 앞에서 말이다. 실로 촌스러운 바보짓이었다.
“당신은 정말로 알 수 없는 사람이군요.”
해당타타는 탁자 위에 엎어져 아이처럼 쌔근쌔근 잠든 범한을 보며 미소 지었다.
“조설근 선생이나 만나 보려 했던 건데.”
범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데 어느샌가 따뜻한 손길이 다가와 태양혈을 가볍게 주물러 주고 있었다. 범한은 살짝 놀랐지만 그래도 눈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여기는 어디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자 양쪽에서 태양혈을 누르고 있던 손 중 하나가 사라지더니 잠시 후 작은 잔이 입가에 조심스레 놓였다. 맛을 보니 술 깨는 데는 최고라는 적당한 농도의 꿀물이어서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범한은 해당타타가 자신에게 독을 쓰지 않았을 거라 믿고 있었다. 득이 될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이런 생각을 할 때 주위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겨 왔다. 지극히 청아하지만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향으로 아랫도리 쪽에서 열기가 솟구치고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런데 그 향이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범한의 뒷머리에 푹신한 것이 기댔다. 아름다운 신체가 맞닿자 범한은 마음속 불길이 치솟아 올라 정말로 참기 힘들었다.
* * *
범한은 눈을 부릅떴다. 차분한 눈동자에 떨쳐 버리지 못한 욕정 한 점을 박은 채로 백옥처럼 새하얀 팔을, 옅은 푸른색 옷소매를 바라보았다.
“리리?”
사리리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몸에 힘이 빠진 사람처럼 범한의 품으로 엎어지더니 온화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는 기대와 원망이 교차하고 있었다.
북제까지 오는 동안 두 사람은 사이에 놓인 얇은 종이 장벽 하나를 깨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익숙한 여인의 체취가 나자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가 아득해졌다. 상경에 온 후로 이 여인과는 사당에서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이고 이 여인과는 남녀 사이로 얽히는 일은 없게 하겠노라 일찌감치 다짐했던 터.
그랬건만 따스한 백옥이 품으로 파고들어 익숙하고 부드러운 감촉으로 자신의 상복부를 계속해서 문지르자…….
‘조금 전까지 해당 낭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리리와 다정한 상황이라니.’
범한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세상이 변해도 너무 빨리 변한 거였다.
214화
초여름의 상경성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매우 무더웠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사방에서 먼지가 일어 그야말로 고역스러웠다. 한데 다행히도 날도 저물고 밤바람도 살짝 스치고 지나가 준 덕분에 자그마한 사당은 찌는 듯한 열기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처마에는 듬성듬성 솟은 나뭇가지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휘영청 걸려 있었다.
범한은 허리끈을 단단히 여미고 색마가 도망이라도 치듯 사당 안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말간 얼굴에는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사당 문 앞에 왔을 때 범한은 고개를 휙 돌려 사당 지붕 끝에 걸린 달에 들어가 앉아 있는 여인을 호되게 꾸짖었다.
“당신도 당신 사부와 똑같은 사람이었어. 전부 미쳤어!”
범한은 위장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살짝 수줍은 사람인 듯, 달콤한 사람인 듯, 천진난만한 사람인 듯 자신을 위장해 왔다. 그리고 믿지 못하겠지만 여전히 선량하고 순결한 사람인데……. 그런데 오늘 이런 황당한 일을 겪게 되자 놀라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결국에는 거친 말을 쏟아 내고 말았다.
해당타타는 지붕 꼭대기에서 연애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보모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하필 평소 머리에 묶어 놓는 손수건을 목에 메고 있어 딱 봤을 때 범한에게는 어떤 세계의 지휘관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해당타타는 범한이 이렇게나 빨리 깨어날 줄 예상 못 했다는 듯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는 옅은 부끄러움과 장난기를 잠깐 번뜩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지?”
범한은 화가 많이 난 상태였지만 해당타타의 반응이 어처구니가 없어 ‘이 여자 대체 뭐지?’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해당타타는 곧 이유를 알아챘는지 자책하듯 자기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비개의 제자인 걸 잊고 있었네. 좀 더 일찍 생각났으면 아까 약을 탈 때 용량을 늘렸을 텐데.”
달빛이 살며시 떨렸다. 나뭇가지도 살며시 떨렸다. 그리고 해당타타는 몸을 날려 지붕 아래로 내려왔다. 아주 살짝 먼지를 일으키며 범한 옆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려 활짝 웃으며 내실을 잠깐 쳐다보더니 이어 사당 문을 열고는 범한에게 함께 나가자는 행동을 취했다.
사당 밖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저 멀리 우물에서 우렁찬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와 농가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한편 범한의 마음에서는 원망이 한껏 무르익어 그는 이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추궁하듯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내게 무슨 약을 쓴 거죠?”
“춘약이요.”
해당타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게 부연 설명까지 했다.
“궁에서 최상품으로 가져왔어요.”
“당신이……!”
범한이 삿대질하듯 해당타타의 코를 향해 손가락을 들이댔다. 남들보다 곧게 뻗은 그녀의 콧대를 욱하는 마음에 박살 내 버리고 싶었다.
“나는 경국의 사신이에요. 그리고 사리리는 곧 당신 황제 폐하의 여인이 될 사람이고. 정말로 간덩이가 부었군요!”
해당타타가 순간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도하강에서 내게 춘약을 썼을 때는 왜 자신의 간덩이가 작은 줄 몰랐던 거죠?”
“그때는 적이었고 오늘은 친구 사이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 이런……!”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말하는 내내 범한은 살짝 뒤가 켕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에 해당타타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궁에서 대인이 한 말 기억해요?”
* * *
한참 전 황궁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난번에 주신 해독제는 진피가 많이 들어갔는지 굉장히 쓰더군요.”
햇살에 취해 있는 해당타타가 말했다.
범한은 그날 자신이 쓴 속임수를 상대방이 알아챘다는 걸 알고는 웃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는 감찰원 제사이지 하늘의 도를 따르는 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낭자께서도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정 그렇게 못마땅하시다면 낭자도 제게 그 약을…… 사용하시든지요.”
조금 경솔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해당타타는 다른 여자들처럼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거나 하지 않고 도리어 담담하게 받아쳤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고 싶군요.”
* * *
‘기회가 된다면 그러고 싶군요, 라니!’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인 범한은 이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어처구니없다는 듯 ‘칫! 칫!’ 거렸다. 하지만 화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약을 쓰라고 말했고 상대방이 요구대로 약을 썼으니 범한은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잠시 달만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워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나도 수도하는 도인이 아니라 그저 원수를 갚고 싶은 어린 여인일 뿐이거든요.”
해당타타는 말하는 내내 만족스러운 사람처럼 방글방글 웃었다.
“그래도 사리리를 이용하면 안 되죠. 사리리는 낭자에게 자매와 같은 사람 아닙니까.”
범한이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잖아요!”
“리리는 당신을 좋아해요.”
해당타타가 미소 띤 얼굴로 계속 말했다.
“당신도 리리에게 반감이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 자매 생각으로는 가능한 일이에요.”
사실 해당타타는 범한이 《석두기》의 작가, 조설근 선생이란 걸 안 후부터 그에게 춘약을 쓰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진 터였다.
범한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러다 무엇을 떠올렸는지는 몰라도 한참 후 갑자기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사실 낭자께서 내게 춘약을 썼으니 비록 당신이 미인 축에 드는 건 아니래도 나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내 미색을 대가로 치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리리 낭자를 우리 둘 사이에 끌어들이다니요!”
해당타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도 별수 없는 젊은 여인인지라 범한의 말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맑은 눈이 한밤에 초원에 사냥 나온 이리처럼 범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범한은 노기를 살짝 죽이고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는 말했다.
“그냥 궁둥이를 털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 낭자가 사부님께 꾸중을 들을까 염려되는군요.”
해당타타가 심호흡하고 감정을 억누른 후 차분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오늘 제가 꾸민 계략에 대해 대인의 양해를 바랍니다.”
그러자 범한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런 계획이라면 얼마든지 짜세요.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찰 남자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낭자께서는 그냥 관두시죠.”
그러자 해당타타는 분노 대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황궁 연회에서 무도 대회가 열립니다. 대인은 준비해 둬야 할 겁니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귀국길에 올라야 합니다.”
이어 범한은 해당타타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노려보며 이상한 말을 했다.
“집안에 급한 일이 있어 상경에 남아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 나와 사리리 낭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자리나 한번 잡아 줘요.”
해당타타는 가볍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는 침묵으로 답했다. 그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범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논두렁을 지나던 범한은 살짝 비틀거리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어쩌면 마음이 불안정해서 그랬을 수도. 그런데 양손을 긴 옷소매에 넣고 무언가 찾는 걸 보니 조금 전 넘어질 뻔했던 건 허리끈을 제대로 묶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시대를 풍미하는 시선이, 그것도 훗날 한 세대 동안 권력을 쥘 관리가 상경성에서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사당 밖에서 이번 생의 가장 낭패스러운 꼴을 내보인 것이었다.
해당타타는 웃기 시작했고 반짝이는 두 눈에는 희열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이렇게나 기쁘게 하는 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 * *
범한은 사신단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눈빛은 차분함 그 자체였다. 조금 전 낭패스러워하던 감정이나 앞서 표출했던 노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계략에 빠질 수 있다. 정말로 주도면밀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벽히 꿰뚫어 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러니 범한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해당타타에게 그런 이상한 면이 있었고 그녀가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은 말이다. 게다가 과감한 결단력과 도박성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니.
“겨우 넷이라고?”
범한은 목욕을 마친 상태에서 의자에 몸을 반쯤 누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몸에 아직도 옅게 향이 남아 자기도 모르게 그 낭자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어떤 생각들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러자 냉혈한인 범한도 결국에는 그 일이 그 여자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따져 볼 수밖에 없었다.
해당타타의 말은 어쩌면 진짜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언빙운이 눈살을 찌푸리며 범한을 슬쩍 바라보았다. 범한은 자신의 상사이며 사신단의 어엿한 수장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곧 귀국길에 올라야 하는데 소리 소문 없이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다 이제야 나타나다니. 처리할 일은 산적해 있는데 말이다.
오후에 사람들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해당타타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그 이후에는 또 어디로 사라졌던 건지. 그리고 오늘따라 낯빛은 왜 저렇게 이상한 거고. 언빙운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그렇습니다. 네 해 동안 총 네 명의 비가 입궁했습니다.”
대답을 마친 언빙운이 설명을 덧붙였다.
“북제 황제는 어려서부터 천인의 도를 연마했습니다. 그의 나라를 다스리는 풍격을 보면 영민한 군주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릇 가슴에 큰 뜻을 품으면 남녀 간의 일에는 자연스레 흥미를 잃게 되지요.”
“그렇다면 북제 황제에게는 아직 아들이 없겠군요?”
범한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황제가 춘추 미령하니 황궁에서 서두르지 않은 것뿐입니다.”
“서두르지 않는다고요? 됐습니다. 물러가서 왕계년에게 모레 입궁 계획이나 세우라고 말해 둬요. 그리고 귀국하는 일도 함께요.”
범한은 속으로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고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언빙운에게 물러가라는 의사 표시를 했다.
언빙운은 제사 대인이 많은 비밀을 간직만 한 채 자신에게 털어놓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조금 답답한 표정으로 범한을 잠시 바라봤다. 정말로 그랬다. 범한은 감찰원 제사이기는 하지만 많은 정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저녁 일만 해도 예를 들어 북제 황제가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범한은 비밀로 하고 있었다. 문득 범한은 손가락 사이가 아직까지 차갑다는 걸 느꼈다. 이제 보니 해당타타는 자기보다 훨씬 대담한 사람이었다.
* * *
북제 황성의 정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러자 청산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황궁이 폭포수 아래 멋지게 서서 날아갈 듯한 검은 처마를 자랑하며 다시 한번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범한은 낯선 관리들의 싸늘한 시선과 노기를 꾹 참고 황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위화와 이미 안면을 튼 홍려사 관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태감들의 공손한 안내를 받으며 대전으로 들어갔다.
대전 내부는 무척 평온해 보였고 길게 뻗은 어도(御道) 옆에는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헤엄치는 맑은 수면이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다.
황태후와 황제는 높이 솟은 단상 위에 앉아 있었다. 황제 아래쪽으로는 수십 개의 잔칫상이 늘어서 있었다. 잔칫상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귀족과 고위 관료들이었다. 신분이 높지 않은 일반 관원들을 위해서는 편전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에 경국의 정사인 범한은 황제의 왼편, 첫 번째 잔칫상 앞에 앉게 되었으며 그의 뒤로 장도를 들지 않은 고달이 서 있었다. 그리고 전체 사신단 인사 중 임정과 임문 정도만 범한 옆에 앉을 자격이 주어졌다.
사신단 맞은편에는 북제 조정의 태부와 재상이 있었다. 범한은 태부를 잠시 쳐다보았다. 범한은 그가 장묵한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데 이렇게나 나이가 지긋한 사람인 건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일련의 예식이 끝나고 황태후의 생신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황태후는 아직 젊은 사람이었다. 비록 눈가에 주름이 몇 가닥 생기기는 했어도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하지만 이 귀부인은, 소은의 일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은 매우 악랄한 사람이었다. 소은을 생각하니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상삼호에게 시선이 향했다. 상삼호는 범한과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범한은 대전으로 들어올 때 북제 제일 명장의 풍채를 직접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태후가 술잔을 들고는 나긋하고 맑은 목소리로 몇 마디 했다. 범한은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주변 신하들의 행동에 따라 절하고 축하 인사말을 건넸다.
황태후의 생신이고 남다른 청첩장도 받았으니, 북제 군신들은 천하에서 가장 진귀한 물건들을 황궁으로 옮기느라 바빴다. 그 진귀한 것들이란 동산(東山)의 청룡 옥석, 동이성에서 배로 옮겨 온 기이하고 커다란 종, 북방의 눈 덮인 지역에서 나오는 천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는 꼬리 두 개 달린 설표범 등등이었다.
215화
황태후는 각종 선물을 보며 만족한 듯 살며시 턱을 치켜들었다.
경국 사신단의 선물은 일찌감치 경도로부터 옮겨 온 상태였다. 한데 유명하고 귀중한 것이기는 해도 절대 기이한 것은 아니었다. 범한은 황태후를 위해 하늘의 선녀가 인간 세상에 내려 준 것 같은 시를 짓지 않았다. 그가 시를 지었다면 북제 황태후의 체면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고 변변치 못한 서예 솜씨도 공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범한이 개인적으로 준비한 선물은 작은 병이었다. 병 안에는 호박색의 맑은 액체가 들어 있어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다. 한데 황태후가 뚜껑을 열고 잠시 냄새를 맡아 보더니 범한을 다시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것의 이름이 ‘사랑스러워’였기 때문이다.
예측한 그대로다. 별다를 것 없는 향수였고, 황실 금고에서 생산하지 않은 지 열다섯 해가 된 물건이었으며, 범한이 경여당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해당타타에게 주려고 준비한 물건이었다.
단지 해당타타가 향수를 좋아하지 않았고 상상했던 것보다 미녀가 아니어서 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경도에서 이청조의 시와 프랑스식 향수를 준비할 때는 남녀 간의 접근법으로는 해당타타를 설득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녀에게 한 방 먹을 줄 생각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범한은 황태후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인사를 올린 후 눈을 들어 황제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런데 청년 천자 역시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일찌감치 선입견이 생겨서인지 지금 이 순간 황제가 자신의 보며 좋아하는 눈빛을 또 보게 되자 범한은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범한은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솟는 기분이었지만 공손한 표정으로 눈을 아래로 내린 채 젊은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도 쑥스러워 다시 황제 옆에 있는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그런 후 맞은편에 앉은 태부와 재상의 늙은 얼굴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이들은 건너뛰고, 다시 태부 옆에 놓인 의자로 시선을 보냈다.
비어 있는 의자라 누구 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이리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다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물가 옆으로 난 복도 뒤편에서 누군가가 대전으로 걸어 나와 황태후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는 자연스럽게 그 빈 의자에 가 앉았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 앉자 궁녀가 다가가 술을 따라 주었다.
길고 호리호리한 체형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그는 한눈에 봐도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눈매는 말라붙은 우물처럼 침착했으며 깊이감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그의 허리에 쇠사슬이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두 개의 곡도를 지니고 대전으로 들다니 이런 겁 없는 사람을 봤나!’
범한이 싸늘하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기울여 임정에게 물었다.
“누구입니까? 태부 바로 아랫자리에 앉고 칼까지 들고 입궁할 정도면 대단한 인물일 것 같은데요.”
그러자 임정이 작은 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저분은 고하 국사의 수제자, 랑도 대인입니다. 황궁 호위병 대통령 직위에 있습니다. 한데 요 몇 년 동안은 북제 황제 폐하의 무공 수련만 돕고 있고 대통령 일은 안 한다고 합니다.”
범한이 “아.” 하고 한마디 내뱉고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보니 해당 낭자의 대사형이셨군요. 역시 대단한 지위에 계신 분이었군요.”
그 순간 랑도의 차분하고 깊은 눈은 범한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러자 범한은 웃어 보이며 랑도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살짝 움직여 한마디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랑도의 미간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랑도도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보이며 멀찌감치 떨어진 범한에게 술을 권하며 한 번에 들이켰다.
범한 옆에 있는 임정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인, 이번에 꼭 저분과 친분을 쌓아야 합니다. 오늘이 첫 만남이기는 해도 안타깝게도 대인께서는 며칠 후 귀국길에 올라야 하니 말입니다.”
범한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랑도가 자신을 알아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범한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저만치 멀리 앉아 있는 랑도는 그대로 의심하는 중이었다. 한데 맞은편에 있는 젊은 경국 관리의 안색이 자연스럽고 또 모르는 척하는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이자, 심중의 추측이 일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절벽 위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은 진평평의 그림자 기사였으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범한 제사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이다.
범한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전에 놓인 잔칫상을 쓱 훑어보고는 물었다.
“왜 심중 대인은 보이지 않는 겁니까?”
임정이 대답했다.
“심중은 진무사 지휘사이기는 하지만 그의 품계로는 대전에 들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황태후마마의 생신 연회니 그분은 분명 상경성 방위 업무를 보고 있을 겁니다.”
범한은 고개만 끄덕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연회를 위한 풍악이 울려 퍼졌다. 관악기와 현악기가 일제히 웅장하게 소리를 내자 무희들이 대전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궁 꼭대기에서부터 빛이 환하게 밝아 오자 황태후의 생신 연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황제가 황태후를 향해 잔을 들고 축하를 했다. 그러자 아랫자리에 앉은 신하들도 차례대로 무릎을 꿇고 절하며 황태후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범한은 타국의 신하이고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옆에서 소곤거리며 알려 주는 임정의 지시를 따라 행동한 덕분에 무사히 첫 번째 관문을 넘길 수 있었다.
아름다운 궁녀들이 술과 과일 등의 연회 음식을 들고 와 잔칫상 위에 살며히 내려놓았다. 그런 후 상 하나에 궁녀 한 사람이 붙어 시중을 들었다. 범한은 궁녀가 시중을 들 때마다 살짝 몸을 기울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범한의 이런 행동은 북제 신하들이 보기에 작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름난 젊은 인재는 과연 다르다며 범한의 행동을 좋게 보았다.
그런데 범한은 버들잎처럼 고운 눈썹과 나긋나긋 행동하는 궁녀를 보니 도리어 마음이 더 불안해졌다. 날마다 이리 아름다운 낭자들에 둘러싸여 사는, 젊은 황제가 음란한 청년으로 전락하지 않았다니. 이거야말로 문제 있는 것 아닐까.
* * *
황태후의 생신 연회는 일반 노마님들의 생일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많이 다른 건 아니었다. 그저 초대된 손님들의 계급이 높고 내놓은 음식들이 조금 더 고급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식후 여흥을 위한 단계에서는 조금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는 철령 대청산 이도하촌 서쪽에 사는 이씨 아주머니의 50세 생신연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의식이었다.
범한은 태양혈을 문지르고 있었다. 얼굴에는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 욕을 내뱉고 있는 중이었다.
얌전한 낭자들이 요즘 들어 대놓고 자신을 ‘이 몸께서’라며 시원시원하게 부르는 걸 좋아하고,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살짝 수줍게 웃으며 닭살 돋는 행동을 하는 걸 좋아하고, 돼지 잡는 백정은 옆집 채소 먹는 걸 좋아하고, 머리에 꽃을 꽂고 시집가지 못한 여인들은 사방을 다니며 중매쟁이 노릇을 하는 걸 좋아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재주 없는 것과 가장 친해지기 마련이고, 자신이 가장 못하는 일을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심리학에서도 사람은 결핍된 것에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끌린다고 했다.
그래서 줄곧 무공으로 명성을 떨치던 경국은 현 폐하의 인도로 문치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에 경도에서는 유명한 무장과 무공 고수들이 이른바 ‘시 모임’이란 것을 앞다투어 열게 되었고, 황궁의 숙 귀비도 문학을 좋아하여 황제에게 총애를 받게 되었다. 2 황자의 경우도 정치와 경전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 민심을 두루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시선 범한이 혜성처럼 나타나자 그는 모든 문인의 관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줄곧 천하 문예의 중심지를 자처했던 북제에서는 자력갱생의 열기가 일어 시를 짓는 기풍이 사라지고 결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즉 도리를 따질 때 입씨름하던 것이 이제는 주먹질로 바뀐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경국 사신단 거처 입구에 각종 칼과 검이 잔뜩 던져져 있었고, 범한과 무예를 겨루기 위해 찾아온 북제 고수의 수가 사신단 거처 문 앞에서부터 연산 골짜기까지 늘어설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문을 걸어 닫고 문밖출입을 삼가다 해당타타를 만날 때만 밖에 나간 것이었다. 이렇게 겨우겨우 대결 신청을 피해 왔건만 하필 귀국하기 바로 전에, 그것도 황궁 대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건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
“범한 대인, 이번 제의가 어떤가요?”
황태후가 웃으며 범한이 앉아 있는 잔칫상 쪽을 바라보았다. 질문이기는 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놀라 멍하니 있는 범한에게 북제의 무장 하나가 대결을 신청했다. 말로는 각자의 무공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라 했지만 이건 누가 봐도 자명했다. 북제 군신들이 문학적으로 유명한 시선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유는 모르겠으나 범한이 보기에 황태후도 자신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위쪽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입을 활짝 벌리고 빙그레 웃었다.
“황태후마마, 소신은 닭 잡을 힘도 없는 사람이니 그냥 넘어가겠나이다.”
그러자 대전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범한의 말을 믿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범한은 이미 정거수를 이기고 검은 주먹으로 섭령을 때린 사람으로 천하에 알려져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니 군신들로서는 경국의 정사가 이리도 담이 작을 줄 몰랐다며 웃음이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황태후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은 너무 겸손하군요.”
그녀는 이 한마디 말로 범한의 거절 의사를 거부해 버렸다.
범한의 눈꺼풀이 팔딱팔딱 뛰었다. 그는 전생에 읽은 시공을 넘나드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왜 전부 권세를 쥔 후에는 황태후를 ‘늙은 년’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이는 곧 조정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경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절름발이를 볼 면목이 없을 테고 신양 쪽에서도 이걸 빌미로 어떤 음흉한 짓을 꾸밀지 모를 일이었다.
이에 범한은 웃으며 반 발짝 뒤로 물러서서 양손을 가슴팍까지 올리고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자 황태후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한편 황태후 옆에 앉아 있던 황제는 약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며 배려의 말을 건넸다.
“범 경, 만약 몸이 불편하다면 관두게.”
범한은 북제 황제와 겨우 몇 번 대화를 나누어 봤을 뿐이고 황제에게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진심인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구오지존이란 생각이 들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범한은 고개를 치켜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사신인 제가 대전에 피를 뿌리게 되어도 이는 생신이신 황태후마마를 위해 바치는 피의 꽃이라 여겨 주시오소서.”
예의에 어긋나는 적절치 못한 언사로 대전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황태후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그런데 황제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한데 이 범한이란 작자는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여도 실제로는 절대 손해 보지 않는 괴팍한 성질의 소유자 아니던가. 이에 범한은 곧바로 절레절레 손을 흔들었다.
“제 언사가 지나쳤습니다. 겨루기라고 하셨으니 딱 그 정도만 하겠사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싸늘한 눈으로 군신들을 바라보았다.
“힘 조절이 안 되는 자는 나와서 추한 꼴을 보이지 말라.”
황제의 엄명이 내려졌으니 장난으로 상대를 다치게 하려는 사람은 나설 수 없게 되었다.
군신들은 깜짝 놀랐다. 황제가 몇 년 사이 놀랄 만큼 성장해 이제는 자신들도 대들지 못할 만큼 천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신하들이 보기에도 무언가 이상한 건 있었는지 이들은 속으로 불만을 쏟아 냈다.
‘제기랄, 황제 폐하가 범한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냐고!’
‘대체 어느 나라 황제야!’
216화
일찌감치 편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장이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태후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소신 성박죽, 경국에서 온 범한 대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옵니다.”
황태후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황제는 성박죽이란 자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그는 랑도의 사질(師侄: 사문에서 조카뻘이 되는 제자)로 천일파(天一派)에 속한 사람 중 하나다. 지금은 황궁 호위병 소속이며 윗사람으로부터 명령받아 겨루기를 하러 온 것이었다.
황제는 해당타타를 통해 범한이 9등급 초반의 고수란 걸 알고 있었다. 성박죽은 겨우 7등급 수준인데 대체 왜…….
황제는 랑도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무공 스승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성박죽은 범한 일행에게도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리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 대인이 문무를 겸비한 사실은 온 천하가 압니다. 이에 성박죽, 범한 대인께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범한은 잠시 웃으며 랑도를 쳐다보았다. 오늘 대전에서 열리는 겨루기는 승자를 가르기 위한 게 아니었다. 경국 사신단이 귀국길에 오르기 전, 랑도가 자신의 공격 방식을 알아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북제로 온 후 범한은 단 한 번도 여러 사람 앞에서 무공을 사용한 적 없었다. 그러니 랑도는 분명 절벽에서 있던 일과 관련해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범한이 두 손을 가슴팍까지 올리고 성박죽을 향해 인사했다.
“성박죽 대인?”
성박죽이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범한이 말했다.
“대인은 제 적수가 못 됩니다.”
범한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 앉아 버렸다.
* * *
신하들이 술렁였다. 그들은 범한이란 자가 너무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순간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성박죽 대인,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범한 뒤에 있던 호위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분노에 휩싸여 있는 성박죽 앞에 섰다. 이 순간 햇빛이 대전 지붕의 유리를 통해 아래로 쏟아지며 반짝였다. 그러자 대전을 밝게 비추는 빛 때문에 순박하게 생긴 호위의 얼굴에 드리워진 살기등등한 기운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겨우 한 발짝이었다. 고작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을 뿐인데 고달은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범한의 뒤에 숨어 있어 시선조차 가지 않던 호위건만, 한 발짝 앞으로 나온 그에게서는 은연중에 종사와 맞먹는 풍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전에는 바람이 불고 있지 않았지만 고달의 몸에서 발산된 정기 때문에 옷이 살며시 휘날리고 있었다.
범한은 잔칫상에 기댄 채 다리를 편히 벌리고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로 작은 술잔을 쥐고 두 눈은 가늘게 뜨고는 곁눈질로 맞은편에 있는 랑도의 표정을 살폈다.
랑도는 현 상황이 흥미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어 상 위에 놓인 음식을 집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의 눈에는 그의 아래턱이 살짝 끄덕이는 게 보였다. 이는 곧 이번 대결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성박죽이 심호흡하고는 자기 앞에 선 고달을 바라보았다. 상경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사신단 호위를 맡고 있는 고수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 초식 내에 상삼호 대장의 수하, 담무 장군을 제압했으니 고달은 고수가 맞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뒤로 물러설 수 없었던 성박죽은 기세 좋게 한마디 했다.
“폐하, 칼을 쓸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청년 천자는 범한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북제의 황제란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고 또한 무장 성박죽의 용기와 기세가 마음에 들었다. 이에 장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윤허하노라. 하나 성 장군, 신경 쓰도록 하게. 이번 대결은 순전히 무예 교류를 위한 것이니 조정의 체면은 일단 접어 두게. 짐은 승패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상을 내릴 생각이네.”
생신 연회의 주인공인 황태후가 반대 의사가 가득 담긴 얼굴로 아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젊은 황제는 어머니의 시선은 보지 못했다는 듯 활짝 웃기만 했다.
임문과 임정은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귀국길에 올라야 하는데 왜 북제 황궁에서 이런 소란이 벌어진 거지?’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들이 이긴다면 북제는 체면을 구기게 되는 것이니 이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북제가 이긴다면 이는 또 경국이 체면을 구기게 되는 것이니 더더욱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 경국 관원들에게는 이미 십수 년 동안 쌓아 온 북제를 향한 미움이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도발해 오자 문신일지라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고달에게 말했다.
“고달 대인, 살살해요. 너무 압도적으로 이기지는 말고요.”
아직 붙기도 전인데 승리를 확신해 버리다니. 범한은 옆에 있는 두 부사를 슬쩍 쳐다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 두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더 날뛴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제 부하의 칼을 대전에 들일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황제가 미소 지으며 범한을 바라보고는 손을 휘휘 흔들었다.
대전 밖에서도 안에서 겨루기가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은 황태후의 생신 연회라 황궁 규율을 조금 느슨하게 적용하기도 했고 황제도 허락했으니, 편전에서 잔치 음식을 먹고 있던 신하들도 대전 문 앞까지 몰려와 잔뜩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린 태감들이 고달의 장도를 가져와 대전 앞 태감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장도를 든 태감이 그것을 대전 안까지 가지고 들어왔다. 그사이 범한은 대전 문 앞에 서서 슬쩍슬쩍 안쪽을 들여다보는 왕계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걱정이 일었다.
‘손이 근질거리는 건가? 옛날 손버릇이 도져서 황궁에서 무슨 물건이라도 훔치려는 거 아니야?’
다시 돌아와 고달을 살펴보니 그는 양손에 칼자루를 쥔 후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앞서 위풍당당했던 위세는 온데간데없었지만 그렇다고 압박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고달은 그냥 칼 한 자루, 그 자체 같았다. 사람 하나, 칼 한 자루가 있을 뿐인데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고달이 있는 자리에는 그냥 칼 한 자루만 있는 것 같았다.
랑도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달의 손에 들린 독특한 양식의 장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 * *
성박죽은 고달과 마주 보고 서서 차분히 상대를 바라보았다. 성박죽은 머릿속의 온갖 잡념을 버리고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칼집에 들어 있던 곡도를 빼 들었다. 그러자 순간 피를 들끓게 하는 금속의 마찰음 소리가 났다.
고달은 여전히 가만히 있었고 두 손으로 장도를 쥔 채 우측으로 몸만 살짝 틀 뿐이었다.
성박죽이 천천히 정기를 운기해 손목으로 보냈다. 그리고 팔뚝이 곡도와 합체된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칼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는 랑도의 사질이었으니 고하 문파의 사람이었다. 비록 실력은 7등급밖에 되지 않지만 고하 문파이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은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 해도 성박죽은 그럴 수 없었다.
칼이 빛을 내며 눈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상대와 한 장 넘게 떨어져 있던 성박죽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잠시 후 고달 바로 앞에 나타났다. 얼굴과 몸을 서로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말이다.
눈꽃처럼 펼쳐졌던 곡도도 성박죽의 손에서 다시 나타났다. 성박죽은 곡도를 기이한 자세로 거꾸로 들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칼을 높이 들어 고달의 왼쪽 어깨에 내리꽂았다.
성박죽이 칼을 거꾸로 들고 예측하기 힘든 음험한 공격을 펼친 건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달이 장도를 쥐고 있기는 했어도 별수 없었고 그에게는 칼집에서 칼을 뽑을 기회조차 없었다. 다시 말해 이렇게 서로 밀착한 상태에서는 검을 빼는 것조차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성박죽은 문파의 명성을 훼손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상대방 무기의 움직임을 보고 적을 제압하는 방법을 결정할 정도의 실력을 보여 준 것이었다.
대전에 모여 있던 신하들은 곧 고달의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건 아닐까 싶어 깜짝 놀랐다.
범한도 고달이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성박죽이 빠른 공격을 보일 줄 몰랐다는 듯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 * *
턱!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이어 깨지는 소리가 울렸고 또다시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대전의 황태후와 황제, 대전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신하들이 놀란 얼굴로 사람 하나가 슈욱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성박죽이 바닥에 엎어져 얼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고달이 정기로 성박죽을 날려 버렸다고 생각해 순간 깜짝 놀랐다. 정기만으로 7등급 고수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건 4대 종사를 빼면 겨우 9등급 상에 달하는 최강자 몇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달이, 그것도 고작 경국 사신단의 일개 호위 수장이 그 대단한 걸 해내다니.
조금 전 벌어진 일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건 오직 무공 고수들뿐이었다. 성박죽의 곡도가 하강할 때 고달은 검을 뽑는 대신 두 손으로 장도를 쥔 채 칼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성박죽의 곡도 칼끝을 장도의 칼자루 끝으로 막아 냈다. 장도 칼자루는 지름이 겨우 일 촌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고달은 작은 면적으로 곡도와 대적한 셈이었다.
고달이 쥐고 있던 장도의 길이는 사람 키 정도는 족히 되었다. 그런 장검을 고달은 수직으로 세운 후 칼집을 안정적으로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자 곡도 칼끝이 장도 칼자루를 찔렀을 때 성박죽의 전신에 있던 정기가 고달이 들고 있던 장도라는 다리를 타고 바닥석까지 내려갔다. 이때 고달은 작용 범위 밖에 있었고 성박죽은 작용 범위 안에서 정기를 한껏 실어 공격하는 바람에 그는 대지의 힘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한데 넓고 깊은 대지의 힘과 충돌했으니 설령 성박죽이 종사라 가정해도 이건 이미 끝난 거였다.
* * *
그 순간 성박죽은 어마어마한 힘이 칼끝으로 되돌아오는 걸 감지했지만 그와 동시에 질식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이때 고달은 칼을 버리고 주먹을 쥐었다. 양어깨를 원을 그리듯 한껏 웅크려 몸을 왼쪽으로 돌린 후 오른손으로 성박죽의 아래턱에 강철 주먹을 날렸다. 그런데 이 일격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순식간에 성박죽의 입술이 터지고 치아가 부러지면서 피가 여기저기로 튀었다.
고달이 봐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성박죽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니 성박죽이 당한 건 고달의 주먹이라기보다는 대지가 휘두른 손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었다.
* * *
성박죽은 일찌감치 태감들이 부축해 의원에게 데려다 놓았다.
고달은 차분하게 황제와 황태후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장도를 바닥에서 빼낸 후 천천히 범한 곁으로 돌아갔다. 그때 쩌걱, 하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 겨루기를 할 때 잘게 쪼개졌던 바닥석이 이제야 소리를 낸 것이다.
대전에 있던 군신들은 그제야 성박죽이 곡도로 찌를 때 검집에 있던 장도를 대전 바닥석을 뚫고 들어가게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박죽의 공격은 이리도 강했었는데 대체 왜?
고달이 교묘하게 수를 쓴 걸 알아차린 신하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로서는 무언가를 더 말하는 게 껄끄러웠다.
범한이 북제 군신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살짝 오만하게 웃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범한의 그런 웃음을 역겨워했다. 범한이 들고 있던 술잔을 뒤로 넘겼다.
고달이 살짝 얼떨떨한 표정으로 술잔을 받아 들더니 단번에 술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대인, 술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앞서 범한이 그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범한이 웃었다.
“나보다는 황태후마마께 감사해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범한은 대전이 조용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는 대전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신하들과 태감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냐하면 랑도가 말하기 시작해서였다.
랑도가 미소 지으며 범한을 바라보고는 입을 뗐다.
“범한 대인의 잔재주는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대인의 호위도 그런 방법을 쓸 줄은 몰랐습니다.”
말을 마친 랑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조심스레 벗어 뒤쪽에 있는 궁녀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두 자루의 곡도가 드러났다.
대전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랑도 대인이 직접 나서다니! 랑도는 국사의 수제자이고 폐하의 무공 스승이었다. 상경에 있는 중신들도 벌써 몇 해 전부터 그가 직접 나서는 걸 보지 못한 터였다. 그런데 오늘 경국 사람을 위해 예외를 두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랑도는 신분이 특수한 사람이었다. 이에 군신들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랑도를 주시하기만 할 뿐 감히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지 않았다.
217화
범한은 랑도가 앞으로 나서기도 전에 하하하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저는 적수가 못 됩니다.”
아까는 성박죽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더니 이제 와서는 당당하게 랑도의 적수가 못 된다며 바로 꼬리를 내려 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랑도가 웃으며 응수했다.
“내 상대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우선 겨뤄 봐야 아는 것이지요.”
범한은 깜짝 놀랐다. 정말로 이 고수와 대결하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우선 숨겨 놓은 쇠뇌의 화살, 독침, 춘약, 독약을 동원하지 않는 이상 자신은 그와 세 합도 겨루기 전에 질 게 뻔했다. 다음으로 상대방이 절벽에서 맞붙었던 사람이 자신임을 확인한다면 고하가 신묘에 대해 계속 숨기는 걸로 보아 자신은 쫓기는 신세로 전락할 게 분명했다.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랑도가 직접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경국 사람들의 체면은 이미 충분히 세워 준 터. 그러니 다시 고달을 내보낼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전을 받아들여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범한 귓가에 들렸다.
“사형, 제가 하겠습니다.”
범한은 기뻤다. 너무나도 기뻤다.
북제 사람들도 기뻐했다. 원래 구경하는 사람이 더 기뻐하는 법이다.
* * *
해당타타가 황태후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랑도를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사형, 제가 하겠습니다.”
랑도가 따스한 얼굴로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그러려무나. 사매가 나선다면 당연히……. 한데 범한 대인의…… 잔재주를 조심하렴.”
해당타타는 황태후와 황제를 향해 예를 차려 인사했다. 그리고 별말 없이 범한 앞으로 나가 미소 지었다.
“할래요?”
“할게요! 왜 안 하겠어요!”
두 사람은 자신들의 대화가 놀이를 시작하려는 어린아이들 같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대전에서 세 겹으로 빙 둘러 서 있는 북제 사람들도, 경국 사신단에 속한 관원들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는 못하고 있었다. 모두 두 사람의 대결에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게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승부니 양국의 체면이니 하는 것과 상관없이 순전히 잠시 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관한 생각들이었다.
왜냐하면 이번 대결에 나선 한 사람은 문무를 겸비한 경국의 시선이자 또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어린 나이에 감찰원 제사가 된 범한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북제의 천녀(天女)이자 고하의 제자 중 가장 어린 9등급 고수이며, 전설 속 하늘의 자손이고 다섯 번째 종사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해당타타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유명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는 이 둘이 일찌감치 상경성을 함께 거닐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그러니 대전에 모인 사람들이 봤을 때 이 둘이 함께 어울린 건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 격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남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걸 실제로 증명한 셈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문 앞에 지켜 서 있던 왕계년이 하품을 했다. 그리고 대전 안에서 맞붙은 젊은 남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걸 보고 누가 속겠어.”
그러자 곁에 있던 태감이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대전에서 열리는 무술 대결에서 가짜로 싸우다니! 해당 낭자, 재밌는 구경 좀 하나 했더니 왜 우리를 실망시키시는 거예요!”
그러자 왕계년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구경꾼들한테 판돈 걷은 것도 아니니 연기를 하더라도 진지하게 안 하겠지요. 그리고 가짜로 싸우는 게 뭐 어때서 그럽니까? 두 사람 정도면 황제 폐하께서도 말리기 곤란하실 겁니다.”
싸우는 장면을 보니 범한의 동작은 어수룩하기 그지없었다. 손바닥을 세로로 세워 식칼로 채소를 썰 듯 여기저기 휘둘러 대는 통에 민첩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손바닥을 휘두를 때마다 제법 그럴싸해 보이게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바람을 일으킨 덕분에 제법 살상력을 지닌 손놀림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범한은 손을 휘둘러 열심히 해당타타 옆에 있는 공기만 갈라 그녀의 옷자락만 펄럭이게 할 뿐 그녀의 몸에는 손을 댈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것은 또 무슨 수법? 이는 가수가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를 때 앞쪽에 선풍기를 틀어 놓은 것과 같은 특수 효과를 내주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영화배우 저우싱츠가 공기 펌프 앞에서 종잇조각을 흩뿌려 주연 배우의 잠옷 단추를 풀어 버리는 수법이기도 했다.
이에 해당타타의 구름 같은 의상은 범한의 장풍에 선녀의 날개옷처럼 나풀거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해당타타는 이 구름옷을 타고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해당타타에게서 순간 손가락이 뻗어 나와 동쪽, 서쪽을 찌르더니 이내 감 잡을 수 없는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는 동쪽을 가리키고는 서쪽을 치는 초식이 아니었다. 어린 낭자가 졸병을 잡고 나중에 장군까지 잡으려고 내놓은 수였다.
두 사람은 이런 식으로 서로 여러 합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둘 사이의 대결에서는 상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왕 피를 보지 않기로 한 거 공격도 담백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절에서 먹는 식으로 마늘, 생강 등은 넣지 않은 나물 반찬을 만들었는데 기름을 한 방울도 넣지 않아 입에 넣는 즉시 뱉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담백하게 말이다.
* * *
대전에 모인 같은 물에 발 담그고 있던 눈치 빠른 여우들, 그러니까 늙은 여우, 어린 여우, 수컷 여우, 어미 여우, 그리고 일부 대신들은 더 일찌감치 알아차린 상태였다. 한데 이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해당 낭자와 범한이 조정의 체면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이리도 낯 두껍게 행동할 줄은 말이다.
황태후는 단상 위를 바라보다가 밝은 빛에 휩싸여 있는 사람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어 버렸다. 예의 없는 추태로 비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가에 온통 가는 주름이 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분노하고 있었다. 반면 황제는 단상 위에서 범한과 작은 사고가 이리저리 나풀거리며 다니는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랑도는 평온한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범한의 저 어눌한 손짓은 사실은 ‘관을 쪼개 버린다’는 의미를 지닌 매우 위력적인 무공, 대벽관이었다. 한데 경국 섭씨 가문의 가전(家傳) 무공을 어떻게 범가 녀석이 알고 있는 거지? 그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대전 안팎에서 잔뜩 기대하고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결국 실망했다. 어떤 이들은 지루함을 참다못해 하품까지 해댔다. 아까 이야기를 꺼냈던 태감은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러려는 건지. 승부를 가르는 건 이미 그른 거 같은데.”
왕계년 역시 애석해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곧 누군가가 관두라고 소리칠 것 같군요.”
왕계년의 말에 어린 태감이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전 안에 계신 대인들은 모두 세상 물정에 빠삭한 분들이십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나서려 하겠습니까.”
왕계년과 어린 태감은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에는 저 긴 단상 위에서 춤추고 있는 두 사람이 언제 멈출지를 두고 내기했다. 그러자 옆에서 두 사람이 입씨름하는 걸 보고 있던 몇몇이 합세해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섬게 한 수레, 오이 두 근 등 저마다 특이한 것들을 판돈으로 내걸었다.
* * *
“무례하오!”
황태후의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지자 보고 있던 대신 하나가 참지 못하고 탁자를 치며 훈계하기 시작했다.
“황태후마마의 생신연이오. 그런데 이 무슨 장난질이란 말이오. 이런 식으로 군주를 기만하려 하는 것이오?!”
대놓고 황제를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어린애 취급한 무례한 언사였다. 추태이기는 하지만 모두 누가 먼저 나서서 해주기를 바라던 말이기도 했다. 모두 이런 말을 꺼냈다가 밉상으로 찍히고 싶지 않았던 터다. 그래서 범한과 해당타타가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걸 분명 알면서도 아무도 말리지 않은 것이었다.
황태후의 경우, 참고 이 상황을 계속 지켜봤던 건 어찌 되었든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고, 어린 여자가 춤추는 걸 보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대신은 지금 군주를 기만하고 황태후의 분노를 자극하는 행동을 한 것이었다. 이에 황태후가 폭풍처럼 화를 낼 준비를 하며 말을 꺼낸 대신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사이 그녀의 마음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태후는 그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다.
수면 위 단상에 있는 두 사람은 관중들의 야유를 아예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진지하게 연기를 했다. 해당타타는 계속 나풀거렸고 범한은 호랑이 보법으로 용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낭자의 자태는 단아하고 아름다웠고 범한은 준수하고 멋져 보기에는 꽤 괜찮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겨루기를 하며 자리를 단상 위쪽에서 단상 뒤쪽에 위치한 대전 앞쪽으로 옮겼다. 이는 용좌로부터 겨우 수 장 정도 떨어진 곳으로 아까 말을 꺼낸 대신의 잔칫상이 놓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범한의 손바닥이 식칼이 되어 허공에 놓인 도마를 매섭게 내리쳤다. 그러고는 실수했다는 듯 “아이고!”란 소리를 내뱉었다.
해당타타는 공중 공격이 소용없자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검처럼 뻗어 슉, 하는 소리를 내며 범한의 가슴 쪽을 찌르려 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방향 전환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풍과 손가락 찌르기는 상대방의 몸을 맞히지 못했다. 대신 공기 가르는 소리는 뒤쪽으로 흘렀다.
뒤쪽에는 겨루기를 멈추라고 말했던 대신의 자리가 있었다.
이에 대신은 깜짝 놀랐다. 해당타타와 범한의 동시 공격은 고하 국사에게 직접 공격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그로서는 잠시 공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 * *
키 낮은 잔칫상이 순식간에 조각나고 상 위에 놓여 있던 호리병이 깨졌다. 음식이 담긴 접시는 바닥에 뒹굴었다. 술과 고기 안주는 공중으로 솟구쳐 하늘을 얼룩덜룩 물들인 후 다시 대신의 얼굴로 쏟아졌다. 이마에는 유채꽃이, 입에는 무꽃이, 귀에는 버섯이 걸렸는데 여기에 다시 술이 뿌려지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그러자 대전 안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두 사람이 어느 시점부터는 일부러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아챈 대신들은 조금 전처럼 체면 깎이는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아 아예 입을 꾹 닫아 버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밝은 빛이 약간 사그라지자 범한과 해당타타는 동시에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알 듯 말 듯 웃었다.
해당타타가 황태후를 바라보며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는 말했다.
“범한 대인의 대벽관이란 무공은 대단합니다. 소녀, 대응에 서툴러 대인도 영향을 받았으니 황태후마마께서는 부디 죄를 용서하소서. 실수는…….”
그러자 범한도 자책하는 표정으로 오른손을 휘휘 내저으며 불쑥 끼어들었다.
“말도 내내 잘 뛰다가 헛발질할 때가 있는 법이옵니다.”
황태후는 해당타타를 아끼는 터라 그녀를 질책할 리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니 이 정도 소란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경국에서 온 사람을 덜 고생시킨 건 조금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범한이 자조 섞인 말로 재미있게 응대하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 살며시 미소 짓고 말았다.
황태후뿐만 아니라 황제도 기이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신들도 웃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무언가 난처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그런데 진정한 무공 고수는 앞서 장난처럼 보였던 대결에 젊은 두 강자의 마음이 담겨 있었음을 알아챈 상태였다. 그리고 그가 본 대벽관은 어수룩해 보이지만 실은 살기등등한 공격이었으며, 해당타타의 손가락 검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실은 엄격함을 담은 동작이었다. 또한 기다란 단상에서 춤을 춘 것은 사실 무공을 겨룬 것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맨 마지막에는 긴가민가하지만 범한이 패배한 것에 가까웠다.
가짜 대결이 끝났음에도 천장에서 쏟아지는 밝은 빛은 여전히 넓은 대전 안을 감싸고 있었다. 범한과 해당타타는 그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웃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온화했다. 이 시각 대전 꼭대기에 늘어뜨려 놓은 반달 모양 등은 어느새 수면을 비추고 있었다.
이번 무공 대결은 그야말로 고개를 들었다가 내렸다가 한바탕 웃어넘기고, 수면 위 달빛도 부끄럽게 만든 그런 것이었다.
218화
밤의 어둠이 점점 황궁을 감싸 안았다. 반달도 황궁 뒤쪽에 있는 청산을 서서히 기어올라 은은하고 담담한 달빛으로 북제 황궁 비춰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고 긴 처마, 회색과 백색으로 이루어진 황궁 담벼락도 밤과 함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대전 밖에서 구경하던 신하들이 황궁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궁성 주변에 호위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태감들도 길을 따라가며 신하들을 인도했다. 신하들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황궁도 금세 고요해졌다. 넓디넓은 광장에서는 궁궐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고요해지기까지는 향 하나를 사르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연회가 끝나자 황태후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침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범한은 황제에게 붙잡혀 화영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한 궁 안에서는 맑고 옅은 향 내음이 감돌고 있었다. 범한은 눈을 내리깔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북제 황제는 지금 황태후의 침전에서 어머니의 잠자리를 봐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남아 있으라 한 것인지 범한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궁녀가 범한에게 차와 과일을 내왔다. 범한은 그때마다 웃으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런데 궁녀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특히나 눈가에 드러난 그녀의 수줍은 표정에 범한은 마음이 요동쳤다.
하지만 이 야심한 시각에 젊은 황제가 자신을 남게 했고 더군다나 그가 어떤 부분에서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조금 전까지 요동치던 마음은 금세 위축되어 사라져 버렸다.
“폐하께서 범한 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눈을 내리깔고 정좌해 있는 낭자가 옆에서 범한의 두려움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평온한 얼굴로 말해 주었다. 물론 이 말을 해준 사람은 해당타타였다. 범한 혼자 황궁에 손님으로 남게 되니 해당타타가 절반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해당타타는 조금 전 대전에서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라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왜 범한과 함께 있을 때면 평소보다 훨씬 제멋대로 굴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범한도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살며시 웃고 있었다.
태감이 궁 밖에서 소리쳤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화영궁 쪽으로 다가왔다. 이게 그렇게 서두를 일인가. 젊은 황제가 내게 도움을 청할 게 뭐가 있다고? 구오지존께서 천하통일 말고 못 할 일이 또 뭐가 있길래?
범한이 궁금증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젊은 황제가 벌써 화영궁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고는 손을 휘둘러 범한과 해당타타에게 안부 인사는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어 오른손으로 자신의 외투를 벗어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어린 태감에게 던졌다.
한 벌로 된 얇은 황색 옷을 입고 있는 황제는 활기차 보였다. 이내 황제는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러자 태감이 조심스레 그가 신고 있던 가죽신을 벗겨 얇은 양말을 신고 있는 그의 발이 드러나게 했다.
해당타타는 황제의 이런 사적인 모습에 익숙한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반면 범한은 북제 황제가 자기 앞에서 사적인 모습을 보이자 그의 조금도 꾸미지 않은 행동에 살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에 범한의 시선은 절로 의자로, 황제의 가슴으로 그리고 황제의 양쪽 발로 향했다.
크지 않고 작지 않았다. 황제의 가슴은 크지 않았고 발은 작지 않았다.
“모후께서는 고요한 걸 좋아하세요.”
젊은 황제가 의자에 기대 태감이 가져온 제비집 미음으로 입을 헹구었다. 그러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어 궁녀와 태감들에게 모두 나가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화영궁에 순식간에 고요가 찾아왔다.
범한이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폐하, 분부하실 것이 무엇이옵니까.”
경국 사신이 조심스레 행동하자 황제의 눈에 살짝 장난기가 발동했다.
“범 경, 모레 귀국길에 오르게 되어 있지 않은가. 가는 길에 큰 공주를 잘 보살펴 주게나.”
범한은 살짝 놀라고 말았다. 줄곧 잊고 있던 중차대한 일이 지금에서야 생각나서였다. 바로 북제 공주를 모시고 귀국해 혼사를 치르게 하는 일 말이다. 돌아가는 내내 조금의 실수도 허용치 않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요 며칠 범한은 언빙운을 통해 북제 큰 공주와 관련해 몇 가지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큰 공주는 궁에서만 자랐다. 현 황제와는 이복 남매지간이다. 친모는 일찌감치 빙궁(氷宮)으로 내쳐져 죽었고, 황태후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탓에 정치적인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사람이다.
황제가 왜 갑자기 큰 공주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상황을 놓고 본다면 황제와 누나인 큰 공주 사이에는 정이 깊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황제의 말끔한 이마에 옅게 우수가 깔리자 범한은 자신의 추측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큰 공주는 이제껏 궁을 떠난 적이 없다네. 이번에 혼인 때문에 경국으로 가면 천자인 짐도 이제 다시는 돌봐 줄 수 없지 않은가.”
그러자 범한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폐하, 염려 놓으십시오. 우리 1 황자께서는 한 세대를 빛낸 영웅으로 만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십니다. 그러니 큰 공주님과 1 황자님은 분명 금실 좋게 백년해로를 할 것입니다. 또한 조정의 모든 대신이 공주님을 예로 대하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소리를 내며 싸늘하게 웃더니 대꾸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황제가 갑자기 범한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범 경, 짐은 자네를 친구로 생각하니…… 자네가 경국에서 큰 공주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항시 도와주기 바라네.”
범한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북제 황제와 기껏해야 네 번 만났을 뿐인데 감히 천자의 친구라 불리는 건 가당치 않아서였다.
그러자 범한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 황제가 웃었다.
“범 경, 처음 만났을 때 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짐이 그대의 시문을 좋아해 자주 읊어 본다고 말이네. 그 시들은 자네가 말하는 것과 같으니 짐과 자네는 이미 1년 동안 대화를 나눈 셈이야. 그러니 짐이 자네를 친구로 여겨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란 말일세.”
범한은 북제 황제의 총애에 몸 둘 바를 몰랐고 송구스러운 마음에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황제를 향해 절을 올리려는 찰나, 황제의 맑고 담담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런데 이번 목소리에는 노기와 원망도 다소 섞여 있었다.
“하나 그런데도 범 경은 짐에게 좀 소원했던 것 같군. 요 며칠 입궁해 짐과 대화도 나눠 주지 않고…….”
황제는 말하는 도중 갑자기 범한의 두 눈을 응시했다.
“이런저런 일을 가지고 짐을 속이려고나 하고 말이야.”
난감해진 범한이 해명하기 시작했다.
“일이 많았습니다. 홍려사와 태상사 양쪽 일로 바빠 감히 폐하의 휴식을 방해할 수 없었사옵니다.”
황제가 내내 침묵하고 있는 해당타타를 쓱 바라보고는 갑자기 웃었다.
“그러한가? 나는 요 며칠 자네가 가장 많이 한 일은 작은 사고와 함께 산책하고 술을 마신 거라 생각하고 있었네만.”
그러자 해당타타가 황제의 말에 좌불안석하며 불안한 기색으로 답했다.
“타타가 범한 대인에게 천인의 도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또 많은 걸 배웠고요.”
그런데도 황제는 범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면 범 경은 그 일을 준비하고 있으면서 언제까지 짐을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범한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려움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관자놀이까지 흘러내리지는 않고, 대신 검고 긴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중이었다.
범한의 첫 번째 생각은 ‘설마 사리리 관련 계획이 폭로된 건가?’였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북제 황제는 여인을 좋아하지 않고, 또 천자의 권력 독점욕 때문에 자신이 북제에서 살아서 떠날 수 없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범한은 슬쩍 곁눈질로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두려움이나 불안 따위는 전혀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이에 살짝 마음의 안정을 찾은 범한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공손하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무엇을 두고 그리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해당타타가 소은과 관련해 무언가를 추측해 낼 가능성은 있었지만 소은의 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사리리와 관련된 일 빼고는 범한은 북제 황제에게 두려움이나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예상을 깨고 황제가 다시 질문을 던지자 범한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그리고 오늘 밤 황궁에서의 대화는 범한을 여러 번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 * *
“짐이 묻겠네. 임 누이는 대체 어떻게 되는가?”
황제가 범한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황궁 안에서 벼락이 내리친 것만 같았다. 천둥 번개가 치는 빗속에 서 있는 여인이 되어 ‘하늘이시여!’라고 외치는 기분이었다. 범한은 순간 얼이 빠져 나무토막처럼 몸이 굳어 버린 탓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북제 황제가 어떻게 임완아가 자신의 사촌 누이인 걸 아는 거지? 북제 황제가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다는 건가?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은 다섯 명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다섯 사람은 이 놀라운 비밀을 외부로 유출할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북제 황제가 수많은 능력자를 거느리고 있는 타국의 천자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어떤 흔적이나 황실에서 나온 노란 종이 무더기 같은 데서 그 비밀을 알아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왜 갑자기 범한 자신의 처에 대해, 그러니까 자신의 사촌 누이 완아에 대해 질문을 한 거냔 말이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범한을 북제 황제는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의자 팔걸이 부분을 거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말하거라!”
‘제기랄, 뭘 말하라는 거야?!’
한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은 꾸며 낸 것이었다. 범한은 실제로는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왼쪽 새끼손가락을 살짝 까딱이던 범한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절벽에 나타난 사람과 자신과의 관계를 해당타타가 알아챌까 봐 요 며칠 왼쪽 다리에 검은색 비수를 넣고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싸울까? 그런데 자신은 해당타타를 이길 수 없다. 도망갈까? 북제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면 황태자, 1 황자, 2 황자가 곧바로 굶주린 호랑이로 변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궁에 있는 마마님들도…….
범한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다시 웃는 얼굴을 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는 이유는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범한은 못 알아들은 척하면서 상대방이 어떤 조건을 내걸지나 먼저 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폐하,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옵니까?”
* * *
북제 황제가 벌떡 일어나 아까 태감이 벗겨 준 신발에 발을 올리더니 제대로 신지도 않은 채 범한을 향해 직진했다. 범한에게 오는 동안 그의 표정은 점점 다채롭게 변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살짝 분노에 차 있던 얼굴에 점차 담담하게 장난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얼굴에는 흥분과 기대감 같은 게 숨어 있었다.
황제의 표정에 범한은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이로써 그가 변태임을 확신했다.
황제는 범한의 양어깨를 움켜쥐더니 살짝 추태를 부리듯 어깨를 흔들었다. 그런 후 희색이 만면해 낭랑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범 경, 범 경, 짐을 속이느라 고생이 참 많구려. 세상 사람들을 속이느라 참 힘들었을 것이오.”
“네?”
범한은 순간 황제의 엉뚱한 짓을 저지할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코앞에 다가와 있는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황제가 꽤 잘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황제는 매일 씻고 휴식도 적절히 취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열광적인 표정과 범한의 멍한 표정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해당타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 공!”
북제 황제는 다시 있는 힘껏 범한의 어깨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 때문에 범한은 살짝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 공! 어서 짐에게 말하게나. 임 누이가 마지막에 보옥과 이어지느냔 말일세!”
219화
범한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그리고 북제 황제가 조설근이 자신인 걸 어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현 상황이 적응이 안 돼 그는 의자 위에서 뻗어 버렸다. 그러고는 별다른 말은 않고 우선 옆에 있는 찻잔을 들어 차부터 벌컥벌컥 마셨다.
황제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석두기》 내용을 끝까지 말해 주지 않으면 절대 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네.”
범한이 탄식하며 말했다.
“폐하, 제가 《석두기》를 썼다는 사실을 어찌 아셨사옵니까?”
황제가 해당타타를 쓱 쳐다보자 해당타타가 살며시 웃었다.
“《석두기》는 담박서국에서만 나오고 조설근 선생이란 분은 은거 중이니, 담박서국 사람만 조설근 선생이 누구인지 알 것 아니에요. 《석두기》가 천하를 휩쓸고 있으니 많은 이들이 조설근 선생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겠죠. 며칠 전에 함께 술을 마실 때 범한 대인이 말을 좀 많이 하는 바람에 내가 살짝 알아채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오늘 폐하께서 떠보셨는데 대인이 인정까지 했으니 내 예측이 맞았던 거죠.”
범한은 대체 어찌 말해야 할지 몰라 쓴웃음만 지었다. 우선 지금 범한에게는 《석두기》 작가라는 명성은 그리 절실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까 북제 황제가 마치 《석두기》 속 인물인 곽희가 된 듯 “조 공, 조 공.” 하며 다정하게 외치는 걸 보고 그가 《석두기》의 열혈 애독자임을 알아챈 것 때문이었다.
범한이 《석두기》의 작가임을 확인한 황제는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계속 말을 쏟아 냈다.
“경, 얼른 알려 주오. 보옥이 나중에 몇 명이나 아내로 맞이하는지 말이오.”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제 보니 북제 황제는 아내를 여럿 거느리는 남자 주인공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내였다. 하지만 범한은 계속 손을 내저으며 애원했다.
“폐하, 소신 대충 예순여 장의 글을 썼을 뿐이옵니다. 그래서 아직 다음 이야기는 생각해 두지 않았나이다.”
범한은 이 말을 할 때 옛날 담주에서 약약이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던 일, 여분의 원고, 이야기 수정, 환관으로 전락시키느냐 마느냐 등등 정말 골치 아팠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범한의 대답에 이맛살을 찌푸린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옆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해당타타를 잠깐 쳐다보더니 갑자기 범한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37장에서 해당의 시 모임이…… 작은 사고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가?”
범한이 곁눈질로 해당타타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살짝 부드러워지는 걸 보니 분명 훔쳐 듣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범한은 살며시 웃으며 과감하게 대답했다.
“폐하, 글 쓰는 자는 직접 설명해서는 안 되는 법이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말씀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그러자 황제가 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범 경, 얼른 귀국길에 오르시오. 다음 편을 쓰는 즉시 짐에게 얼른 부치는 거 잊지 말고 말이오.”
하늘에 달이 떠 있는 가운데 나무 아래로 푸른 바닥석이 깔린 황궁 길을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여름밤 이건만 범한은 등을 축축이 적신 식은땀 때문에 밤공기가 싸늘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기분이 오싹해 가슴을 토닥이며 옆에 있는 해당타타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석두기》 작가가 나라는 걸 눈치챘으면서 왜 나에게는 한마디도 언급해 주지 않은 거예요? 조금 전에 하마터면 황제 폐하 때문에 놀라 죽을 뻔했어요.”
해당타타는 잠시 웃고는 대답했다.
“누가 그리 오랫동안 세상 사람을 속이라고 했나요?”
말을 마친 해당타타는 눈알을 도르르 굴리고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죠? 폐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조설근 공과 관련된 거 말고 다른 무언가가 더 있었나요?”
그러자 범한이 생각이란 걸 해보지도 않고는 곧바로 온화하게 웃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낭자가 말해 줄래요?”
해당타타는 입꼬리만 아주 살짝 올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범한은 고개를 갸우뚱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은빛으로 물든 해당타타의 기다란 눈썹이 눈에 들어오자 순간 그녀가 청순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이에 범한은 시선을 해당타타의 얼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로 옮겼다. 그녀의 눈동자는 밤과 어우러져 유난히 더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이는 모두 은색의 달빛이 부린 마술 덕분이었다. 아무리 평범하게 생긴 여인도 은색의 달빛에 몽롱하게 물들면 요정으로 변해 버리는 마술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범한은 해당타타에게 어떤 감정 같은 걸 느낀 건 아니어서 그냥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발을 끌며 걷기만 했다. 그러다 해당타타에게 말했다.
“이번에 나를 골탕 먹였군요. 복수는 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그 이유가 뭔지는 낭자도 알고 있을 거예요.”
“내가 범한 대인을 한 차례 도와주기로 해서지요.”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방과 관계있을 거란 생각은 했어요. 그러니 나 같은 외부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일 테고요.”
“그렇습니다. 낭자와 나는…… 사실 둘 다 어느 정도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니까요.”
범한이 자조하는 듯한 괴상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우리의 대화가 좀 단도직입적일 수 있는 거겠지요. 낭자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일어날 수도, 안 일어날 수도 있어요. 어찌 되었든 그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 낭자에게 알리리다.”
해당타타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더니 불쑥 다른 얘기를 꺼냈다.
“재상의 사생아 딸을 매우 사랑해서 담주에 계신 할머님께서 여종을 보냈는데도 줄곧 품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내 집안일에 대해 슬쩍 알아보려는 질문은 하지 말아 줘요.”
범한이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요.”
해당타타가 웃으며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냥 궁금했어요. 대체 어떤 사람이 여자를 마음대로 다루려고 하고, 남자를 보면 불편해하며 싫어하고, 결혼 전에는 여자를 진주처럼 떠받들다가 결혼하고 나서 부인이 되면 그 진주를 썩은 생선 눈알 취급하고, 여자는 물로 보고, 남자는 진흙탕으로 여기고, 여자는 귀하게 여기면서 남자는 천하게 여기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말을 멈춘 해당타타는 범한의 차분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무나도 궁금하거든요. 세상은 남자를 더 존중하는데 범한 공자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말이죠.”
범한은 잠시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갑자기 절을 하며 정색하고 말했다.
“규방 여인들을 위한 전기를 써주시고 여인들의 고충을 품어 주신 범한 공자께 이 타타가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범한은 잠시 잠자코 있다가 대뜸 답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과 근본적으로 달라서 그래요.”
두 사람이 궁 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돌아가지 않고 아직도 궁 밖에 있는 태부 대인이 해당타타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황제 폐하의 스승을 보고도 범한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자 해당타타는 두 사람이 이미 만나기로 선약이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당타타가 태부 대인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범한에게 말했다.
“나중에 대인을 배웅하러 갈게요.”
범한은 그녀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태부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세 대가 상경성에 내린 밤의 어둠 속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해당타타의 맑고 반짝이던 시선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경국의 준수한 젊은 관원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천하 사람들 눈에 범한은 남들과 다른 사람이었다. 한데 그 자신조차 인정하는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란 게 대체 무엇인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 * *
마차가 고요한 뜰 밖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사신단 안전을 책임진 황궁 호위병들은 이번 방문이 경국의 재인 범한이 북제에서 갖는 마지막 방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범한이 이 대가를 방문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한데 금의위들은 천하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버린 그날 밤 연회의 시 대결이 생각나 불안한 기분에 휩싸여 대체 범한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는 본디 책 향이 가득한 곳이라 모두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맨 앞 마차에 있던 호위들이 내리더니 눈을 부릅뜨고 주요 입구를 지켜 서기 시작했다.
이어 범한과 북제 태부가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친밀한 사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의가 있어 보이지도 않자 사람들은 살짝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언제나 정의에 편에 서서 권력에 아첨하지 않는 강직한 태부 대인과 범한이 작은 소리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범한이 호위들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태부가 실내로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 서서 안쪽을 향해 몸을 깊숙이 숙여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범한 공자, 스승님께서 최근 들어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오. 그러니 가급적 장시간 대화는 삼가 주시오.”
이 문인을 향해 범한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옷을 단정히 고쳐 입은 후 나무문을 살며시 열었다. 안을 바라보니 어느 노인이 작은 붓을 쥔 채 종이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범한이 바라보고 있는 노인은 이 세계에서 최고의 학자로 불리는 분이었다. 천하 곳곳에 문하생이 있고 북제 태부와 경국 서무 대학사도 모두 그가 아끼는 제자였다. 범한이 세상에 재능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학문에 관해서라면 그와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범한이 연회에서 그를 인정사정없이 깔아뭉갰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범한이 시 말고 다른 영역에서는 아직도 그의 경지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노인의 성은 ‘장’, 이름은 ‘묵한’이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하인도, 서동(書童)도 없이 길고 품이 넓은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계속 그리다가 가끔씩 이맛살을 찌푸리며 종이를 주시했다. 그러다가 다시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옆에 놓아 둔 책을 뒤적였다. 장묵한의 정신 상태는 1년 전 경국에 있을 때보다 많이 나빠진 듯했다. 새하얀 은발은 여전히 단단히 묶여 있지만 훨씬 진해진 이마의 검버섯은 불길한 징조를 예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범한은 발소리를 죽인 채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책상을 바라보니 그 위에 펼쳐져 있는 건 담박서국에서 출판한 《반한재 시집》이었다. 더군다나 시집 여백에 주석이 빼곡히 달려 있었다. 범한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당대 세계 최고의 문학 대가께서 내가 ‘외운’ 시에 전부 주석을 단 거야?’
장묵한의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은 시집 속 어느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전생에 원진이란 시인이 쓴 에 나오는 구절로, ‘거대한 바다를 보고 나니 강물은 물도 아니오, 무산의 구름을 보고 나니 다른 곳의 구름은 구름도 아니어라.’에서 두 번째 구절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다가 입을 살며시 벌려 고통스러운 듯 말했다.
“맞지 않아! 맞지 않아! 시란 서로 대구를 이루며 짝이 맞아야 하거늘 다음 구절은 맞지 않아!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야! 여보게, 이게 무슨 뜻인지 말 좀 해주게!”
* *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범한의 부드러운 음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산은 남극에 있는 신산(神山)입니다. 1년 내내 운무에 싸여 있는 곳으로 새벽에는 구름에 싸여 있고 저녁에는 비가 내립니다. 하온데 범인이 이곳의 구름을 본다면 아무리 높이 올라가 새하얀 구름을 본다 해도 다시는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무산’이라는 두 글자는 다음 두 구절과 연계되는 것이고 순수한 충성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랬었군.”
장묵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널따란 책상 한쪽 귀퉁이에 놓인 두툼한 책 한 권을 가리켰다.
“이 늙은이도 그런 뜻일 거라 생각했네. 하지만 무산에 관한 전고를 찾을 수 없었어. 산해총람을 아무리 뒤져도 구름이 많은 무산이란 곳은 나오지 않더군. 남극의 신산에 있는 곳이라 내가 몰랐던 거였군.”
범한은 아무렇게나 말을 지어 설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장묵한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걸 보고 이 노인이 포용적인 온건한 인물이란 생각에 살며시 웃었다. 이에 앞으로 나아가 장묵한을 위해 먹을 갈며 자신이 말해 준 내용을 그가 책의 여백에 정자인 해서체로 작고 빽빽하게 적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220화
장묵한의 해서체는 반듯하고 잘 쓴 글씨여서 단정하기로는 천하제일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명필가가 글씨 쓰는 장면을 직접 보고 있는데도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어서였다.
“진왕이 옛날에 평락에서 연회를 열고 한 말에 만 냥이나 하는 술을 마음껏 즐겼다네. 이 시에는 어떤 전고가 있는가?”
장묵한은 이번에도 고개는 돌리지 않고 묻기만 했다.
범한은 난처했다. 《반한재 시집》을 낼 때 범한은 이백의 란 시를 제외했었다. 그런데 이 늙은 동지께서는 하필이면 왜 이 시에 대해 묻는 것인지.
장묵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늙은이는 어려서부터 한번 본 거와 한번 들은 거는 잊어버리지 않는다네. 그건 나의 자랑거리기도 하지. 한데 그날 자네가 바다만큼 많은 시를 쏟아 내는 바람에 이 늙은이에게도 문제가 생겨…….”
노인이 잠시 주저하다가 자조하듯 말을 이어 갔다.
“그 능력에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겨우겨우 많은 시를 외워 뒀다네. 나중에 《반한재 시집》이 나와서 살펴보니 어린애인 자네의 생각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시가 빠져 있더군.”
장묵한이 자신을 어린애라고 부르자 범한은 기분이 이상했다. 이에 두어 번 헛기침을 한 후 설명해 주었다.
“진왕은 성이 조씨인 황자입니다. 옛날 평락관이란 곳에서 주연을 얼었던…….”
“조씨 성의 황자라고?”
장묵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혼탁한 눈에는 불신이 담겨 있었다.
“한데…… 천 년 동안 조씨 성의 왕조는 없었는데.”
범한이 깊이 탄식하며 설득하듯 말했다.
“이 후배가 지어낸 것들이니 어르신께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서는 안 될 노릇이네!”
장묵한은 어떤 면에서는 무척 고집스러웠다. 이에 자신이 옮겨 놓은 전체 시문이 담긴 책자를 넘기더니 그중 한 수를 가리켰다.
“‘또한 언제나 소사 풍의 아름다움이 흐른다.’라는 구절에서 소사는 또 누구인가?”
범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잠시 후 대답했다.
“소사는 소설을 쓰는 대단한 문인 중 하나입니다. 그의 글은 조잡해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는 저잣거리에서는 어느 정도 유명세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렇다면…….”
* * *
얼마나 지났을까, 범한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무료해하고 있을 때였다. 장묵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눈가를 누르며 드디어 붓을 벼루 위에 내려놓더니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름이 떨어지니 등잔불의 불씨도 마르는군. 옛날 공부하던 때만 못하네그려.”
범한이 집 안으로 들어온 후 두 사람은 서로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이 황당한 작업에만 몰두해 있던 터였다. 이에 범한이 말아 올렸던 소매를 아래로 내리고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부터 올렸다.
“장묵한 대가께 인사 올립니다. 노선생께서는 이 후배를 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까?”
집 안이 순간 고요해졌다. 그리고 한참 후 갑자기 장묵한이 늙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허리를 깊이 숙여 범한에게 절을 했다.
범한은 너무 놀라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부축해 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지체 높은 노인이 대체 왜? 북제 황제의 스승인 태부의 스승 아니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나에게 절하는 거지?’
범한이 놀라 멍하니 있는 사이 장묵한은 어느새 몸을 바로 세우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작년 경국에서 만난 후로 벌써 1년이 지났군. 이 늙은이는 평생 덕을 행하는 걸 중히 여기는지라 작년에 경국에서 범한 대인을 모함한 일이 늘 마음에 걸렸다네. 그래서 오늘 대인을 이 자리로 부른 건 모두 사죄하기 위해서라네.”
* * *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장묵한이 수십 년 동안 지켜 온 체면을 버리고 장 공주의 부탁을 받아들여 남쪽까지 찾아가 소인배 짓을 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협상에 따라 소은을 석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은 현재 그에게 가장 결핍된 것, 즉 형제지간의 정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소은 선생은 돌아가셨습니다.”
범한은 1년 새 부쩍 늙고 마른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얇은 입술을 살짝 열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자 장묵한은 웃으며 범한을 잠깐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도 웃었다. 자신이 조금 쓸데없는 말을 했음을 알아서였다. 장묵한은 수십 년 동안 천하를 휩쓴 유명이다. 더군다나 그가 북제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찌 되었든 소은의 죽음 같은 큰일을 모르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되지.”
장묵한은 혼잣말하듯 그리고 범한에게 들으라는 듯 말을 계속 이어서 했다.
“그러니 살려면 제대로 살아야지. 내 형제처럼 살면 삶이 정말 별 볼 일 없어지는 거고. 죽인 사람이 워낙에 많으니 결국 그런 죽음을 맞이한 것일 테고…….”
한데 범한은 장묵한의 말이 꼭 옳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이치는 반대입니다. 살인 방화를 한 자가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황금 허리끈을 차고, 도로 건설과 다리 보수에 동원된 무고한 사람은 일하다가 파묻혀 시신 보존도 못 하는 게 세상의 이치지요.”
그러자 장묵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게나.”
그런 사람은 ‘될 수 없네’가 아니라 ‘되지 말게나’라고 말하다니. 만약 제삼자가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고 들었다면, 즉 장묵한과 범한이 나눈 대화를 듣고 이 둘의 자연스럽고 가식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았다면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다른 궤적에서 살던 두 사람이 그리고 음모 때문에 이제껏 단 한 번 만난 사람들이 가장 직설적인 화법으로 자신들의 태도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리될 수 있었던 건 ‘책의 힘’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범한이 미간에 싸늘함을 담은 채 말했다.
“자신하기 때문일세.”
대답을 마친 장묵한은 느닷없이 웃기 시작했다. 한데 그의 웃음에는 깊은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내 형보다 훨씬 유쾌하게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네.”
범한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도 소은 선생이 없었다면 영원히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없었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장묵한도 범한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한데 자네는 아직 모르는 게 있다네. 죽음이 점점 다가오니 알겠더군. 왜 권력, 지위, 재화가 한낱 연기에 불과한지 말일세.”
그러자 범한이 차분하게 그리고 고집스레 대답했다.
“아닙니다. 정말로 죽음에 임박한다면 어쩌면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보지 못했고 누리지 못했는지 말이죠. 선생께서는 평범한 사람은 영원히 누릴 수 없는 걸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과거의 화려한 인생이 늙어 사라지게 되자 감상에 젖으신 것뿐입니다.”
장묵한은 그의 말이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는 아직 젊으니 몸에 죽음의 기운이 짙어져 가는 걸 느껴 본 적 없을 거네. 그러니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를 걸세.”
“알고 있습니다.”
범한이 기계적으로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제 말을 믿어 주세요. 죽음이 임박했을 때의 기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묵한은 조금 피곤해졌는지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석두기》같이 경서와 도에 반하는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자기 글에 나오는 인물과 똑같은 속물이라니.”
그러자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
“소문이란 놈이 이리도 새보다도 빨리 날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한데 장묵한이 갑자기 배려하는 마음을 담은 눈빛으로 말했다.
“범한 대인, 귀국 후 조심해야 하네. 《석두기》에는…… 금기시된 것이 많이 담겨 있으니 말이네.”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자신도 알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석두기》는 어렸을 때 경망스러운 치기가 발동해 쓰게 된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소개될 기회를 잃게 할 수 없어서 그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벼슬길에 오르고 난 후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쉽게 트집 잡힐 거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범한이 느끼기에도 자신의 삶이 《석두기》에 나오는 상황과 놀랄 만큼 잘 맞아떨어져 그도 무의식적으로 조심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열렬한 애독자인 북제 황제에게 들켜 하는 수 없이 털어놓게 되었지만 말이다.
한데 장묵한은 감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범한 자신에게 이와 같은 관심을 보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범한은 이 점이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장묵한이 범한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오늘 범한 대인을 이리 오게 한 건 내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사죄하는 것 말고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네.”
“고맙다고요?”
범한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이 순간 그는 소은의 생명을 자신이 하루 연장시켜 준 걸 장묵한이 알 리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천하 문인을 대신해 자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네.”
장묵한이 미소 띤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 대인이 감찰원에 들어간 초기에 경국 춘시의 부정행위가 밝혀졌고 이 소식이 천하에 퍼져 폐하께서도 과거 제도를 손볼 생각을 하셨다네. 범한 대인의 그와 같은 행동 덕분에 누추한 가문의 문인들이 정말로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이는 천추에 기록될 공일세. 대인은 이 늙은이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감정적으로 그리고 도의적으로 내가 천하 문인을 대신해 범한 대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네.”
그러자 범한이 자조적인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는 말했다.
“부정행위를 밝힌 거요? 모두 같은 문인들을 위해 한 일인데 뭐 그리 고마워하실 게 있겠습니까.”
범한의 대답에 장묵한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혼탁하고 생기가 조금 없어 보였다. 소은의 귀국과 관련해 장묵한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자기 때문에 조정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아서였다. 더군다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은 문인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정객도 있고, 음모를 꾸미는 자도 있고, 무력을 쓰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일 처리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방법이 더 직접적일 수도 있고 더 야만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장묵한은 범한을 잠시 쳐다보았다. 원래는 무슨 말을 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북제 내정과 관련된 것이란 사실이 떠오르자 굳이 범한에게 말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 * *
그로부터 한참 후, 범한은 장묵한의 집에서 떠났다. 그 후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 * *
더위가 극성을 부렸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1년 중 가장 더운 시기는 벌써 지나갔지만 북제는 대륙의 동북쪽에 위치해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유난히 더웠다. 게다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 자주 내렸던 가랑비도 지금은 종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머리 위를 내리쬐고 있는 태양만 지독하고 경망스럽게 사람들의 옷을 최대한으로 벗기는 중이었다.
상경성 남문 밖에서 밝은 노란색의 수레가 성문으로 들어가자 청회색의 오래된 성 담벼락은 다시금 성 밖 사람들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존재가 되었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안한 마음으로 마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북제의 황제가 경국 사신단을 배웅하러 왔다 갔기 때문이다. 이는 전혀 예법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북제 대신들이 열심히 황제를 설득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결국 고관대작들을 비롯해 태부까지 함께 황제를 따라 성 밖으로 몰려와 경국 사신단을 배웅하고 그들의 체면을 살려 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황제는 범한의 손을 잡고 한담을, 그러니까 자나 깨나 《석두기》 생각 중이란 등의 이야기를 해서 대신들의 이목을 잔뜩 집중시켰었다. 그런 황제를 겨우겨우 돌려보내고 나니 이제 성 밖에는 북제 관리들과 의장용 깃발만 남게 되었다. 범한은 북제 관리들을 훑어보았다. 한데 위화는 나왔는데 장영후와 심중이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그제야 자신의 등이 흠뻑 젖어 있음을 알아챘다. 그런데 그게 북제 황제 때문에 놀라서인지, 아니면 태양 빛이 강해서인지는 알지 못했다.
사신단은 아직 길시(吉時)가 되지 않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범한이 대열 맨 앞에 서 있는 가장 화려한 마차를 잠시 바라보았다. 북제 큰 공주가 타고 있는 마차였다. 먼발치에서만 봤을 뿐이지만 범한은 큰 공주가 청순하게 생긴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 그녀의 성격까지 파악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범한은 큰 공주를 데리고 귀국길에 오른 일 때문에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해당타타를 겪고 나니 여자와 함께 있는 일에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221화
맑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범한의 마음도 덩달아 가뿐해졌다. 범한은 단단히 여며 두었던 옷깃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폭염에 단비 같은 바람이 분다고?’라고 생각했다. 이에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왕계년이 범한에게 잘 보이려고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아쉬움과 슬픔이 잔뜩 어린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푸흡, 하고 웃으며 왕계년을 질책했다.
“겨우 1년인데 왜 그리 울상입니까! 집에 있는 부인과 딸은 자연히 내가 잘 돌볼 것이니 걱정 말아요.”
사신단이 떠나는 것이니 언빙운도 당연히 그들과 함께 귀국해야만 했다. 이는 곧 북제에 심어 둔 첩보망에 우두머리 자리가 공백 상태가 된다는 걸 의미했다. 이에 감찰원에서 왕계년에게 ‘경국 홍려사 상주 북제 거중랑’이라는 신분을 내려 주고 상경에 머물며 임시로 북쪽 사무를 관할하도록 했다. 그리고 반년 후 감찰원에서 비밀리에 관원을 파견하면 그에게 업무를 넘겨 주도록 했다.
더군다나 범한은 감찰원에서도 특수 신분인 제사라는 직위에 있었으므로 왕계년이 북제에 남아 있는 일은 경도 관아의 수속을 거칠 필요도 없이 간단히 처리되었다. 다만 문제는 왕계년이 이번에 사신단과 함께 귀국할 수 없음을 알고 조금 실망해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왕계년은 이번 일이 나중에 더 높은 관직으로 올라가게 만들어 줄 절호의 기회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어느 정도는 달갑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대인, 하루라도 대인께서 하시는 말씀을 안 들으면 온몸이 쑤실 것입니다.”
왕계년이 미련을 잔뜩 담은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잠시 웃고는 말했다.
“북제와 충돌하지 말고 명철보신해요. 그러면 1년 후 내가 경도에서 환영회를 열어 줄게요.”
사실 범한은 옆에서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측근의 존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왕계년을 남겨 두기로 결정한 건 그가 감찰원 안에서 자신의 유일한 심복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쉽기는 해도 장 공주의 자금 통로를 막기 위해 그를 북제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 * *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성문 쪽에서 느닷없이 준마 한 필이 달려 나왔다. 한데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은 관리가 아닌 어느 집 하인처럼 보였다. 이에 관리들은 자연스레 말의 움직임에 주목하며 상경성에 있는 관청에서 어찌 백성 하나만 딸랑 이곳에 보냈을까, 하고 생각했다.
눈이 예리했던 범한은 배웅 대열 맨 앞쪽에 위치한 태부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눈이 슬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말은 곧장 북제 관리들이 있는 곳 맨 앞까지 달려왔다. 이어 하인이 서둘러 말에서 내리더니 울먹이며 태부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런 후 하인은 태부에게 천에 둘둘 말린 것을 건네고는 성문이 있는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태부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성문에서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달려오는 걸 바라보며 슬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는데 그는 살짝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태부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범한에게 다가왔다. 영문을 모르는 범한은 불안한 마음에 얼른 마차에서 내려 태부 대인이 건네주는 것부터 받아 들었다. 긴장하며 천을 풀어 보니 시집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장에는 살짝 구불구불한, 노쇠한 필체로 써진 글자 몇 개가 적혀 있었다.
-《반한재 시집: 노인 장묵한 주(注)》
태부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잠시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선생께서 대인에게 남긴 것이오.”
말을 마친 태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깊고 무거운 슬픔을 싣고 말았다.
“장묵한 선생께서…… 돌아가셨다오.”
범한은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시집만 꽉 움켜쥐고 있었다. 지난밤 장묵한과의 만남이 마지막일 줄이야. 그날 밤 장묵한은 정신력이 작년만 못하게 많이 노쇠해졌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때는 문단을 이끌어 온 큰 인물이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장묵한의 유언은 그의 마지막 작업이자 성과인 이 책을 범한에게 건네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의 유언에는 복잡다단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즈음 되자 상경성에서 사신단을 배웅하러 나온 관원들도 이 놀라운 소식을 하나둘 알게 되었고, 관원들 사이에 슬픔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도 많은 북제 관원들이 범한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에는 범한을 향한 경계심, 분노, 의심이 담겨 있었다.
북제 사람들의 생각을 범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장묵한의 일생에서 유일한 오점이 바로 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막상 장묵한이 세상을 떠나자 암담한 기분이 든 범한은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저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빛들을 무의식적으로 몽땅 차단해 버렸다.
모두 장묵한을 기리고 있을 때였다. 성문에서부터 버겁게 달려오던 마차가 관원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드디어 사신단 대열 맨 뒤쪽에 도착했다. 마차는 상자 칸을 이루는 나무 부분이 살짝 변형되어 있었다. 그리고 덜컥거리며 거슬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마차 칸 안에 중요한 물건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앞서 장묵한 대가의 유품을 들고 왔던 하인이 어느새 범한을 이끌고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 대인, 어르신의 유언입니다. 부디 이 마차를 남쪽까지 무사히 가지고 가 잘 보관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장묵한의 임종 소식으로 인한 슬픔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슬픈 감정과는 별개로 장묵한이 죽기 전까지 잊지 않고 있다가 범한에게 전해 주려던 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태양이 따가워지자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 칸을 덮고 있던 두꺼운 장막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범한의 눈은 순간 휘둥그레졌다.
책에는 아름다워지는 방법,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방법, 부자 관원이 되도록 해주는 방법이 있다.
그러니 마차에 담긴 게 미인과 보석은 아닐지라도 범한은 놀라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책은 마차 한가득 있었다. 장묵한이 평생에 걸쳐 모은 것일 테니 그의 지위와 신분을 고려해 굳이 일일이 꺼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분명 모두 귀중한 희귀본, 구하기 힘든 원본일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장묵한의 하인이 옆에서 공손히 책 한 권을 건네며 말했다.
“범한 대인, 어르신께서 직접 정리하신 서적 목록입니다. 뒤쪽에는 서적과 관련한 주의 사항이 적혀 있습니다.”
범한이 탄식하며 손에 쥐고 있던 장막을 놓았다. 그리고 하인이 건네주는 책을 들고 진지하게 책장을 넘겨 보았다. 아무리 인쇄술이 장족을 발전을 거두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는 책을 인쇄하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러니 마차에 가득한 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장묵한 어르신이 자신에게 책을 물려주셨다니. 범한은 절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이 순간 슬픔에 잠긴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께서 물려주신 서적들을 부디 잘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인의 의견임을 범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손을 가슴팍까지 올려 예를 갖춰 진지하게 인사하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걱정 말게나. 이 범한이 죽은 후에도 이 서적들은 대대손손 전해질 것이네.”
북제 관원들은 어느새 범한 주위를 에워싸고 마차에 가득 쌓여 있는 서적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모두 과거를 치르고 관직에 오른 이들이었으니 저 서적들이 진귀한 희귀본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이에 장묵한 자신이 평생 연구한 귀한 서적들을 경국 관리에게 남겼다는 사실이 놀라기도 하고 은근슬쩍 질투심도 일었다.
태부는 자신의 은사이신 아버님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자기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내며 탄식했다.
책을 물려준 것은 본보기를 보인 것이었다. 더욱이 장묵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 준 것이므로 책을 물려줬다는 것은 단순한 ‘기증’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의 ‘전승’이었다. 그러니 북제 문신들이 제아무리 잘났어도 이제는 범한의 존재를 얕봐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준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천하 문인들에게 범한이 차지하는 지위를 책을 물려주는 의식을 통해 인정받도록 한 것이었다.
* * *
범한이 고개를 돌려 태부를 잠시 바라보고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감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상경성으로 돌아가 제를 올려야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부의 눈동자는 더 이상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얼른 성안으로 돌아가 하늘나라로 간 넋에게 절을 올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범한이 제를 올리겠다고 하자 그는 범한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리하라 했다. 한데 홍려사 소경 위화가 어느새 두 사람 곁에서 인사를 하더니 낮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온 세상이 슬퍼할 것입니다. 하오나 태부 대인, 범한 대인, 사신단의 귀국은 정해진 일입니다. 사신단이 깃발까지 높이 든 이상 이제는 상경성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범한은 눈을 들어 상경성의 청회색 성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치 장묵한이 있는 하늘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아른거리는 연자색의 빛을 바라보았다. 범한은 옷을 단정히 고쳐 입었다. 그런 후 성문 안쪽을 향해 최대한으로 깊숙이 허리를 굽혀 외문(外門) 제자의 예를 올렸다.
태부는 범한의 행동이 살짝 의외였다. 하지만 그가 제자의 예를 올린 덕분에 지난해 봄 파문에도 불구하고 장묵한에게 존중과 숭배의 의미를 담아 비를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내심 안심이 되었다. 이에 태부는 옆에 있는 범한에게 답례의 인사를 했다.
* * *
예포가 울렸다. 그것이 사신단을 배웅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돌아가신 넋을 불러오려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잇조각이 하늘 가득 날리고 살짝 코를 찔렀던 연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인간사의 무상함을 절로 느끼게 해주었다.
사신단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며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북제의 관리들은 행렬 뒤에서 경국의 마차가 떠나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다 책이 가득 담긴 무거운 마차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하자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은 이내 의관을 바로 하고 슬픈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 상복으로 갈아입고는 장묵한 대가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황태후와 폐하께서 이미 상갓집에 도착해 있을 거란 생각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서둘렀다. 하지만 태부 대인과 장묵한의 제자인 몇몇 대학사들은 슬픔이 너무나 커 울다 지쳐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어 있었다.
* * *
마차 행렬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상경성의 웅장한 성벽이 점점 푸르고 빽빽한 산에 가려져 사라질 즈음, 이들은 상경성 밖에 위치한 첫 번째 역참에 도착했다. 규율에 따라 귀국하는 사신단과 혼인을 위해 길을 나선 큰 공주의 마차 행렬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길을 떠나야 했다. 범한이 느릿느릿 마차에서 내려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 서책이 실린 마차에 다다르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렇지만 범한은 금칠 위에 붉은색을 덧발라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까지 걸어가 허리를 굽히고 예절 바르게 인사했다. 그리고 공손하게 말했다.
“역참에 도착했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쉬시옵소서.”
얼마 후 마차 안에서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인 편한 대로 하시오. 본궁은 잠시 혼자 있고 싶소.”
범한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북제 큰 공주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그런데 살짝 갈라지는 소리가 나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마차 장막이 열리며 눈이 시뻘게진 궁녀 하나가 내리더니 범한 곁으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주마마께서 조금 불편하신 상태이십니다. 그러니 범한 대인, 조금 기다리시지요.”
그러자 범한이 신경 써주는 말을 했다.
“공주마마께서는 천금의 귀한 몸이시니 이런 긴 여정은 힘드실 거네. 그러니 어서 쉬셔야 하네.”
궁녀는 범한의 수려한 용모를 보니 절로 신뢰감이 생겨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주마마께서는 장묵한 대가의 제자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그분의 임종 소식 때문에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제야 이유를 안 범한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공주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게 사람됨이 오만해서가 아니라 은사를 기리는 마음 때문이었다니. 장묵한은 상경성 안에서 임종했고 공주는 성 밖으로 나와 있으니 오늘만큼은 황실 사람인 게 슬펐을 것이리라.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자신의 처지가 생각나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범한은 궁녀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하고는 호위와 사신단의 주요 인물들을 불러 그들에게 할 일을 배정해 주고 홀로 역참 안으로 들어갔다.
222화
역참에서는 사신단과 공주 일행이 이곳을 지나칠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역참 내부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각종 도구도 황궁 예법에 따라 준비되어 있었다. 범한은 잠시 점검해 본 후 본실로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나갔다. 그런 후 역참 뒤쪽에 있는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수수밭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참 안으로 들어왔다. 한데 예부에서 임시로 파견한 관리가 바삐 움직이는 바람에 아무도 범한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역참 밖, 아직까지 두 대의 마차에서 사람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한 대에는 북제 큰 공주가 타고 있었다. 모두 공주마마가 상심이 큰 상태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서둘러 내리라고 재촉할 수 없었다. 나머지 한 대에는 준수한 외모를 지녔지만 북제 관리 입장에서 봤을 때 악마 같은 사람이 타고 있어 아무도 그 마차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마차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범한이 경계를 서라며 배치시켜 놓은 호위와 감찰원 관원뿐이었다.
뒤쪽에 있는 마차에서 입구를 가리고 있던 장막 모퉁이가 살짝 열렸다. 그러더니 희고 차가워 보이는 손이 불쑥 튀어나와 손짓했다. 마차 옆에 있던 감찰원 관원이 얼른 다가가 장막 귀퉁이에 바짝 붙어 물었다.
“언빙운 대인, 무슨 분부십니까?”
그러자 모퉁이에서 준수하지만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언빙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인은 어디 가셨는가?”
그가 사신단 안에서 대인이란 존칭을 붙이는 사람은 범한뿐이었다. 이에 감찰원 관원은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저는 모릅니다.”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작게 말했다.
“오는 길에 옅은 청색 옷을 입은 여인이 마차를 따라오지 않았는가? 붉은색의 커다란 말을 타고 왔을 수 있네.”
감찰원 관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언빙운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살짝 열었던 장막을 닫아 버렸다. 심중 대인의 딸이 자신을 보러 오지 않은 걸 확인한 언빙운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후련함 뒤로 살짝 암울한 기분 같은 게 따라왔다.
* * *
수수밭 바깥쪽에 정자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정자 옆에는 사람이 오가지 않는 오래된 길이 나 있었고 길 위에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정자에는 낭자 둘이 서 있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며 수수밭이 살짝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범한이 걸어 나와 느긋하게 정자로 다가갔다. 범한이 풍만하고 아름다운 낭자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상경에 도착한 후로는 서로 말도 제대로 못 해보고 헤어졌군요.”
사리리가 범한을 바라보며 살며시 인사하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범한은 다른 말은 않고 옆에 서 있는 해당타타를 잠시 바라봤다. 해당타타가 잠시 웃더니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갈라진 바닥 위에 발끝을 놓더니 몸을 날려 멀리 사라지고 정자에 이 이상한 남녀 둘만 남겨 두었다.
해당타타가 정자에서 사라지자 범한은 자신이 언제 온화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곧바로 정색하며 사리리를 바라보았다.
“입궁하면 모든 걸 조심해요. 황태후는 쉬운 사람이 아니니 그분을 속이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사리리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따스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 사리리가 따스하게 말했다.
“겨우 조심하란 말뿐인가요? 달리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범한은 잠시 웃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품에 안아 주지도 않은 채 말했다.
“북제에 남아 있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는 거죠? 설마 사리리도 여자라고 나 같은 속물의 마음을 가지고 놀 생각인가요?”
사리리가 담담하게 웃었다. 그런데 해당타타 앞에서 보여 주었던 연약한 느낌은 아니었다. 사리리가 말했다.
“대인은 원래 그런 분 아니신가요? 소녀, 북제에 남기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런데도 대인께서 먼저 그런 말을 꺼내시는 걸 보니 제가 경도로 데려가 달라 떼라도 쓸까 걱정되시는 거군요?”
그러자 범한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반짝였다.
“당신은 훗날 북제 후궁의 주인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 하러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리려 하는 겁니까.”
사리리도 웃으며 말했다.
“황궁 안에 기거할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잘된 일인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내젓다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리리, 당신은 세상의 다른 여인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에요.”
사리리가 아, 하고 소리를 내더니 이내 담담하게 답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으니 어쩌면 종일 집 안에서 수놓고 시 읊는 여인들보다는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을 거예요.”
그러자 범한은 그냥 가만히 듣기만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리리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였다. 보통의 여인들은 집에서 가만히 지내기 때문에 사리리처럼 경험을 쌓는다든가, 해당타타와 같은 자유분방함이 없으니 말이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하지만 그래도 경고는 해야겠군요. 늙고 썩고 어리석은 사람을 절대 얕잡아 보지 말아요.”
정자 안 분위기가 잠시 답답해졌다. 그러길 한참 후, 사리리가 몸을 깊이 숙여 범한에게 인사했다. 이어 고개를 숙인 채 머릿결을 바람에 흩날리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대인께서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대인과 이야기를 나누니 참 좋습니다. 마치 그때의 마차 안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습니다.”
범한은 사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인의 말 중에 대체 얼마만큼이 진담이고 얼마만큼이 농담인지 범한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리리가 살며시 웃었다. 원래 아름다운 외모가 더 아름다워졌다. 그런 그녀가 범한에게 말했다.
“대인, 오는 도중 해독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은…… 진심입니다.”
“나는 진평평이 아닙니다.”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 하는 행동이라도 비교적 부드러운 방식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거든요. 더군다나 북제 황제가 당신 때문에 독에 중독되기를 원치 않고요. 물론 지금 보니 진평평의 계획은 처음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군요.”
사리리의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남자가 이미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범한이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낭자는 나중에 황궁에서 지낼 테니 지체 높은 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찰원의 손발이 아무리 길어도 당신을 통제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당신과 나 사이의 협의가 유효한지는 우리 두 사람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자 사리리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대인은 염려 놓으셔요.”
한데 이리도 아름다운 여인을 계속 보고 있다 보니 범한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에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북쪽에서 소식을 기다려요. 안전하게 지내고요. 그리고 조만간 누군가가 당신의 원수를 갚아 줄 것입니다.”
사리리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은 그녀의 눈에 담긴 기쁨을 모른 척하며 옷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이 사람을 통해 나와 연락하면 돼요. 그리고 읽은 후 꼭 없애 버려야 합니다.”
범한이 돌연 미소 지었다.
“우리 사이의 협의를 깨도 좋아요. 하지만 날 팔아넘기는 건 안 됩니다. 이 사람은 나와 직통으로 연결된 사람이니 북제에게 넘겨도 아무 소용 없을 겁니다. 그러니 모험을 하지 않는 편이 가장 현명한 거겠지요.”
말을 마친 젊은 대인이 괴상하리만큼 달콤하게 웃자 사리리는 살짝 놀랐다. 그리고 두려운 기분이 들어 사리리는 얼른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리고 만약…….”
범한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만약 언제든 북제 황궁을 떠나고 싶으면 내게 알려 줘요. 그 일은 내가 처리해 주리다.”
“고맙습니다, 대인.”
사리리가 나긋나긋한 자태로 고개를 숙이며 범한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번만큼은 진심과 미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얼마 후 자신이 곧 떠날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리리는 살짝 어두운 기색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리리는 간장이 끊어질 것 같습니다.”
범한은 ‘간장이 끊어질 것 같다’는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찾느라 한껏 인상을 썼다. 하지만 사리리는 이 말을 끝으로 한창 생각 중인 범한을 뒤로한 채 곧장 정자를 떠났다.
* * *
범한은 버려진 길을 따라 사라져 가는 마차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후에는 퍽, 하고 소리가 나도록 정자 기둥을 주먹으로 한 대 쳤다. 정자는 오랫동안 수리가 안 됐던 터라 범한과 사리리가 이별하고 있는 순간에도 무너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주먹으로 한 대 치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웅웅 울어 댔다.
사람 하나가 정자 위에서 내려왔다. 당연히 해당타타였다. 그녀는 범한 옆에 사뿐히 착지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타타는 아무것도 훔쳐 듣지 않았어요.”
“낭자가 훔쳐 듣고 있었다면…….”
범한이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어 갔다.
“내 곧장 입을 다물었겠죠.”
해당타타가 미소 지었다.
“범한 대인이 제국을 떠나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요?”
그러자 범한은 경도에 있는 누이동생이 생각나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낭자의 그 유명하신 스승님께서는 어디 가셨나요?”
범한이 느닷없이 화제를 돌렸다.
“북제에 와놓고 대종사님께 인사 한 번 못 드렸군요. 그 점은 참으로 유감이네요.”
해당타타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솔직히 말해 주겠다 결심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경국 사신단이 상경으로 들어오기 사흘 전 스승님께서 나무 조각 하나를 받으셨어요. 그길로 곧장 상경성을 떠나셨는데 어디로 가셨는지는 몰라요. 황태후마마와 내게도 비밀로 하셨거든요.”
“상경에 있는 동안 내가 남들의 이목을 속이는 데 낭자가 많이 도와줬군요.”
범한의 눈이 오래된 길 끝, 황무지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점은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북쪽으로 보내는 화물 문제는 지금 내가 장영후, 심중과 논의 중이기는 해요. 그런데 만약 북제 폐하께서 내게 은전을 빌리셔야 한다면 심중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자는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독한 인물이었어요.”
해당타타는 곧장 반응하지 않고 잠시 후 입을 뗐다.
“이건 나와 대인 두 사람만의 비밀이군요.”
범한이 그녀의 맑게 빛나는 눈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말했다.
“세상에서 내 손위 처남 말고는 바보처럼 순수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우리 둘 사이의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요? 타타, 이번 북제행에서 당신은 알게 모르게 나를 많이 도와줬어요. 그러니 당신의 사형들이 알아채지 못했을 거란 생각은 접어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범한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낭자와 황제 폐하께서 황태후마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이 단순히 황궁 내 투쟁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외부 사람에게서 조달한 자금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요. 북제는 지금 대국입니다. 그러니 국정 대권을 전반적으로 장악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거고요.”
해당타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범한 대인이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요.”
“그래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면 괜한 걱정을 한 건가요?”
해당타타가 엉뚱한 대답을 하듯 말했다.
“나는 스승님을 존경하고 도리를 지키는 착한 제자랍니다.”
이에 범한이 불쑥 이상한 말을 꺼냈다.
“장묵한 대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묵한은 천하 각지에서 문하생을 배출한, 세인의 지극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작년에 발생한 사건을 빼고는 그에게는 도덕적으로도, 문장으로도 그 어떤 오점도 없었다. 해당타타도 그 노인을 매우 존경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하필 오늘 상경 외곽에서 사신단을 기다리느라 장묵한의 임종 소식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그녀는 순간 놀라움과 슬픔에 빠진 얼굴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정자에는 일순간 슬픔이 번졌다.
223화
가을로 들어선 경국 경도의 북방 평원.
지나가는 구름 때문에 평원 위를 비추는 햇살이 비추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늘이 구름과 태양을 가지고 멋들어지게 빛과 그림자 놀이를 하고 있는데도 평원에서 일하는 백성들은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지도 않았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비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황금빛으로 물든 작물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올해는 비교적 비가 많이 그리고 자주 내리는 편이었다. 그리고 듣자 하니 남쪽에서는 강물도 심하게 범람했을 정도라고 하던데.
하지만 강 제방이 튼튼하든, 물이 넘든 북쪽 변방 부근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걱정거리는 오로지 갑자기 퍼붓는 빌어먹을 비 때문에 1년 수확을 망치지 않는 것뿐이었다.
가끔씩 통통하게 살이 오른 커다란 들쥐들이 겁도 없이 농민들 발 사이를 뛰어다니며 나락을 훔쳐 가기도 했다. 그런데 농민들의 손에 들린 낫은 그런 쥐들을 쫓거나 잡기는커녕 작물 수확에만 여념이 없었다.
길 양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에서 쓱싹쓱싹 벼가 베어져 나갔다. 벼 베는 소리는 한곳을 향해 가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만족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사불란한 하나의 소리가 되어 갔다.
농민들은 웃통을 벗고 누런 땅만 바라본 채 앙상한 등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벼를 벨 때마다 갈라지며 솟아 나오기를 반복하는 등 근육을 무심한 하늘에게 내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논 가운데로 난 도로로 끝도 보이지 않는 마차 대열이 서서히 들어오고 있는데도 농민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봄에 북제로 갔던 경국 사절단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었다. 가을에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9월 중에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다.
사절단에게 생긴 변화라면 떠날 때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점이다. 북제에서 성의 표시로 선물을 보낸 게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혼례를 올리기 위해 온 북제 공주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 온 관원과 의장대가 적지 않았으니까. 이 점만 봐도 북제 조정이 공주의 혼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양국의 첫 번째 혼인 아니던가. 한데 이처럼 여인을 이용한 외교가 20년간 평화를 유지했던 이 대륙에 어떤 전환기를 가져올지는 아직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제 공주의 화려한 마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 기다란 마차 대열 속에서 눈길을 끄는 마차가 하나 더 있었다. 혼례 준비를 위해 오고 있는 화려한 마차와도, 경국 사절단의 검은색 일색인 마차와도 대비되는 매우 초라한 행색의 마차였다. 준마가 끌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 머리를 흔들며 끌고 있어 무기력함마저 더해져 있었다.
사절단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마차 자체가 너무 무거워서였다. 마차 안에는 북제의 대가 장묵한이 임종 전 범한에게 증여한 서적들이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들은 북제 공주가 들고 온 패물보다도 훨씬 귀중한 것들이었다.
사절단의 여러 관원은 이 마차를 볼 때마다 자신들도 모르게 무언가 존경심 같은 게 일었다. 일단 마차가 범한 대인의 체면을 세워 주었고 아울러 절로 감탄이 나오는 범한 대인의 학문 하는 자세를 직접 볼 수 있도록 해주어서였다.
모두 알고 있었다. 마차가 북쪽 몇 개 소국을 지나 창주 외곽을 통해 경국 국경으로 들어오는 동안 범한이 줄곧 이 마차 안에서 지냈다는 것을. 그가 이 안에서 밤이고 낮이고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않고 책을 읽었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지내겠어.”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들고 있던 이전 시대 시집을 뒤쪽에 있는 상자에 도로 넣었다. 바람이 차창 가림막을 닫아 버린 탓에 마차 안은 어두컴컴했다. 하여 범한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음성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범 대인은 들어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당대 문학 대가인 척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절대 진심에서 우러나서 한 행동이 아님을 말이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매우 순탄했다. 북제 공주도 장묵한의 서거로 인한 슬픔에서 벗어난 후로는 고귀한 신분에 어울리게 위엄 있고 무게 있게 행동했다. 그러니 그녀도 범한을 귀찮게 한 건 없었다. 역참에 머무는 동안 이 청초하게 아름다운 북제 공주가 가끔씩 범한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는 했다. 그때마다 두 사람은 비교적 평범한 일들을 주제로 짧게 한담을 나누며 여행으로 인한 적적함을 풀었다. 물론 그때마다 신하 된 처지였던 범한은 감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인을 상대하는 것이다 보니 무뚝뚝한 검객 고달이나 얼음 같은 언빙운을 대하는 것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공주와 범한의 대화는 창주를 벗어나자마자 끝나 버렸다. 경국 영토로 들어왔으니 예법상 1 황자의 장래 처가 될 여인과 말을 섞으면 안 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사람 하나가 늘어나서였다. 그것도 매우 특수한 신분과 이상한 내력을 지닌, 그리고 사절단에 있는 모 형씨와 어정쩡한 관계에 있는 사람 때문에 말이다.
그 사람은 내내 북제 큰 공주와 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날마다 눈물로 세수를 하는 통에 범한은 그자의 끔찍한 몰골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에 마차에 콕 들어박힌 채 이 난제 풀이를 언빙운 공자님에게 맡겨 버렸다.
그사이 범한은 감찰원에서 일부 정보를 받아 보기도 했다. 경국에서 보낸 정보 중에는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현재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살인 사건을 빼면 말이다. 반면 북제 쪽에서는 정말 놀라운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심중의 사망 소식이었다. 비 내리는 밤, 서른 명이나 되는 금의위 고수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 중이던 심중이 상삼호의 긴 창에 찔려 가마 안에서 죽었다고 한다.
당당한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가, 그것도 소은 이후 북제 밀정의 최고 우두머리가 이리도 무능하게 죽다니! 믿기 힘든 황당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미 진실로 판명된 정보였다. 범한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잠시 소리를 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왕계년이 적어 보낸 당시 상황이 생각나 순간 가슴이 떨려 왔다.
왕계년의 정보에 따르면, 비 오는 날 밤 상삼호는 온몸에 검은 갑옷을 두르고 긴 창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길게 뻗은 길 위에서 갑자기 말을 달리더니 단번에 심중의 머리에 창을 꽂아 버렸다고.
그런 후 상삼호가 다시 한번 창을 휘둘렀을 때는 주위에 있던 호위병의 몸이 산 채로 찢겼다고 했다. 상삼호가 창을 거둬들이고 말을 몰아 집으로 돌아가자, 그제야 멎어 버렸던 비도 감히 다시 내릴 수 있었다고.
대체 그 기세가 얼마나 끔찍했으면 비마저도 멎었던 걸까. 이는 9등급의 절대 강자가 용맹하게 혼자 힘으로 모든 음모와 계략들을 갈가리 찢어 버린 것이었다. 순전히 무력으로 조정의 모든 권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무모한 짓을 벌인 게 아닌 그의 잔혹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상삼호가 이렇게나 난폭한 인물이었다니. 그리고 하필이면 상삼호가 전쟁터에서 연마해 온 철혈(鐵血)과도 같은 성품을 그동안 저평가해 왔다니. 범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관자놀이를 아무리 문질러도 두통은 가실 기미가 없었다.
소은이 감옥에 있을 때 범한 자신이 악역이었다는 건 많은 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담무가 얼굴을 훼손하며 자살하기 직전 “저를 죽인 자는 범한입니다.”라고 고래고래 소리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소은의 죽음과 구출 작전 때 경국 사람들이 배신한 것, 이 두 개의 빚을 상삼호가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범한은 경국과 북제가 대대손손 우호를 이어 나가며 전쟁을 벌이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니 상삼호와 자신이 전쟁터에서 만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물론 심중의 죽음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어찌 되었든 심중은 금의위의 모든 권력을 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상삼호가 아무리 난폭하게 행동해도, 군(軍) 측이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를 거리에서 비명횡사하도록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북제 황궁의 반응은 심중의 죽음을 미심쩍게 보는 시각에 타당성을 더해 주고 있었다. 심중 사망 후, 북제 황궁에서는 밤새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상삼호의 가택을 포위해 그를 감금하고 작위를 몰수했을 뿐이다.
그런 후 정말 놀라운 내용이 담긴 성지가 발표되었다. 그 안에는 심중이 최근 몇 년 동안 저지른 범죄와 위법 사실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죄목들은 죽은 심중을 다시는 신원이 회복될 수 없게 오물 속으로 처박아 버렸다.
심중의 가택이 몰수되고 금의위도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청소에 들어갔으며, 군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한편 아직 어린 황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분명 좋아했을 것이다. 이번 일로 황실을 향했던 상삼호의 분노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을 게 뻔하니 말이다.
하지만 사나운 호랑이 같은 상삼호는 절대 쉬이 부릴 수 있는 자는 아니었다. 그가 계속 상경에 붙잡혀 있는 것만 봐도 북제 황제와 황실이 그의 거취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여 버리지. 그래도 안 될 일이었다. 그 누구도 군의 반발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놓아주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사나운 호랑이가 산으로 돌아가면 결국에는 후환이 남기 마련이니 말이다.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해당타타에게 심중에 대해 조언해 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나 빨리, 그것도 그렇게나 인정사정없이 손을 쓰다니.
범한은 비 내리는 밤에 상삼호가 심중을 제거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자기 신변의 안전부터 걱정해야 하건만 정작 범한은 저도 모르게 쾌감 섞인 감상에 젖어 들었다.
인정사정없는 복수의 현장. 그리고 말에 타고 있던 상삼호가 서서히 검고 긴 창을 들어 올리며 심중의 생명을 거둬들이려 하는 순간. 상삼호의 눈에는 하늘과 땅에 대한 경외심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길게 늘어선 거리 위로 쏟아지던 비도 그 순간만큼은 감히 요란스레 내리지 못했으리라.
범한이 마차 가림막을 열어젖히더니 마부에게 멈추라는 명령도 없이 곧장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런 후 얼굴로 불어오는 황토 섞인 바람을 손부채질로 막으며 길가에 서서 논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살짝 떨려 왔다. 북제에서 일어난 일들은 벌써 머리 뒤편으로 날려 보낸 터이니 그 일 때문인 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 일은 범한이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니 그로서는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오늘 내로 룡천(龍泉) 역참에 당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북제 공주가 먼 곳으로 시집을 온 것이니 범한은 지금보다 훨씬 더 느리게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남모를 근심이 있었던 범한은 사절단 내에서 누구도 감히 자기 의견에 토를 달 수 없다는 걸 이용해 마차 속도를 높여 예정보다 빨리 경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눈앞에 경도가 보이는 지금, 범한은 그제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멈출 수 있었다. 내일이면 완아를 만날 수 있으니까. 완아는 그동안 몸이 많이 좋아졌을까? 그리고 누이 약약은 괜찮을까? 오죽 아저씨가 경도에 있었다면 그동안 별일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범한이 뒤편에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자는 척하는 언빙운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은 직접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곧 경도로 들어가는데 저 여인을 계속 공주마마와 함께 있도록 할 건가요? 북제 쪽에서 알게 된다면 우리는 중대 범죄자를 은닉한 게 돼요. 그때 가서 조정에는 어떻게 해명할 생각입니까?”
언빙운이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는 상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창밖 황금빛 벌판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눈빛에 잠시 발버둥 치는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심중이 죽었습니다. 북제 황제가 권력을 되찾아 가는 첫 번째 단계를 실행에 옮긴 것뿐이죠. 그러니 저들은 그녀의 생사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것입니다.”
언빙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범한이 돌연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저 여인이 살든 죽든 관심이 없다면 내게 처리를 맡겨줘요.”
언빙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잠시 성난 눈빛을 번뜩였다.
“죽여 버리세요. 우리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껏 언 대인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지금 보니 자기 자신도 속이며 살고 있었군요.”
언빙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풍성한 수확이 한창인 창밖 농부들만 바라보았다.
224화
마차 대열 앞쪽에 위치한 화려한 마차에서 북제 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는, 어릴 때부터 알아 온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북제 상경성에서 운 좋게 도망 나온 심중 대인의 딸. 그녀는 지금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언빙운이 보는 것과 같은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도련님의 매정함을 생각하는 중인지, 집안을 망하게 한 참극을 생각하는 중인지 아니면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오게 되어 슬퍼하고 있는 중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절단 내 지체 높은 분들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차는 어느새 경도 외곽에 위치한 마지막 역참에 도착해 있었다. 범한이 죽 늘어선 의장대와 대열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 낭자 문제를 경도로 돌아간 후 처리하게 되어서였다.
범한은 그녀를 계속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 낭자와 큰 공주가 교분이 있다는 점, 또한 언빙운 공자가 그녀에게 은근히 유감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신경 쓰여 자기 생각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부와 홍려사, 태상사의 관원들은 마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역참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사절단 마차가 천천히 들어오자 관원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예를 갖추어 북제 공주를 맞이했다.
그사이 범한은 눈을 굴려 눈짓으로 고달을 불렀다. 그러고는 두 명의 호위(虎衛)를 시켜 북제 공주의 마차를 확실히 지키도록 했다. 공주의 마차에 있는 다른 여자가 경국 관원들에게 발각되면 안 되어서였다. 그런데 범한의 현재 권력과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굳이 이렇게까지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범한 대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범한 대인, 이번 북제행에서 나라의 위엄을 크게 떨치셨더군요. 이 점, 폐하께서 매우 기뻐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경도로 돌아가시자마자 곧장 다른 일에 중용되시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범한 대인께서는 지금······.”
여기저기에서 아첨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범한은 아부를 떠는 관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역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하필 그때 북제 공주는 이미 내실로 들어가 쉬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 누가 봐도 정사가 더 성대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범한의 신분을 모르는 이가 이 상황을 보았다면 고작 젊은 중간 관리일 뿐인데 경국의 대신들이 왜 저렇게나 존경심을 표하는 걸까, 하며 분명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범한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주변 관원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잡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지겹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짝 조급증이 나 주변을 쓱 둘러보기는 했다. 대부분 자신이 아는 이들이 와 있었다. 주로 태상사에 있을 때의 동료들, 홍려사와 북제 협상장에 갔을 때 부하로 부렸던 이들이었다. 이 밖에 일부 예부에서 온 관원들은 행동은 공손했지만 은근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범한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곽유지를 거꾸러뜨린 게 어찌 보면 범한이었기 때문이다.
범한이 궁둥이를 의자에 붙이고 차부터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황궁에서는 다른 명을 내리셨나요? 사절단은 언제 경도로 들어갈 수 있답니까?”
그런데 범한은 대답은 들을 생각도 않고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본관은 정사입니다. 그런데도 향후 일정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군요.”
예부 관원들에게는 어렵사리 마련된 범한과 가까워질 기회였다. 그러니 이 소중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터. 한 관원이 서둘러 대답했다.
“대인, 염려 놓으십시오. 관련 의전은 예부에서 모두 짜놓았습니다. 앞서 황궁에서 모든 걸 계획해 놓으셨으니 일찌감치 준비가 끝났을 것입니다.”
홍려사에 있을 때 부하로 있던 이가 말을 이어 갔다.
“사절단 관원들이 집 떠난 지 오래되어 가족들을 그리워한다는 걸 황제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특별히 교지를 내리진 않으셨으나 구두로는 사절단에게 경도로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대인께서는 경도로 들어가는 즉시 황궁으로 가셔야······.”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4품 관원의 관복을 입은 누군가가 순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안쪽에 모여 있던 관원들이 서둘러 그를 맞아 주었다. 범한도 그를 주시하고 있다가 껄껄 웃으며 맞아 주었다. 그러고는 바로 4품 관원의 어깨를 한 대 툭 쳤다.
“임 대인, 어찌 여기에 오신 것입니까?”
관원의 정체는 태상사 소경 임소안이었다. 범한 장인의 문하에 있는 이였다. 범한의 무사한 모습에 마음이 놓였는지 임소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북제 공주께서 혼례를 올리러 오셨으니 큰일 아닙니까. 나 같은 태상사 막노동꾼이 여기에 안 오면 도찰원에서 탄핵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사직은 해야 하기에 왔습니다.”
범한이 잠시 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오늘 사절단이 올 걸 뻔히 알고서도 임소안 소경 대인이 왜 이렇게 늦게 왔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범한이 안에 있던 관원들에게 가볍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임소안을 이끌고 문밖으로 나와 물었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임소안은 이 형씨가 나이가 어리기는 해도 외유내강의 성미를 지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경도에 온 지 고작 1년 만에 많은 일을 벌였고, 또 많은 관원을 갈아치우게 만든 인물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대답을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재상 임약보는 낙향한 지 오래고, 경도에서 임씨 가문과 연관된 사람이라고는 범한밖에 없으니 임소안은 이 두 가지 상황을 가지고 잠시 이리저리재보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저 머뭇거리고 말았다.
“범한 대인, 무엇이 말이오?”
범한이 그의 눈을 주시하며 다시 물었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사절단이 경도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요. 우리가 상경을 떠나올 때 북제 조정에서 정한 규칙들을 당연히 경국 조정에서도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북제 공주마마께서 사절단과 함께 계신데 어찌하여 낮은 직급의 관리들만 마중을 나왔느냔 말입니다! 신기물 대인은 대체 어디로 가신 겁니까? 그리고 예부의 시랑들은 또 왜 안 온 거죠? 북제 공주께서 혼례를 위해 예까지 오셨는데, 어찌 황궁에서는 경험 많은 궁녀를 안 보냈느냔 말입니다! 그리고 임소안 대인은 태상사 소속이잖아요. 이러한 황실 관련 일들을 처리하는! 그러니 제가 대인께 묻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임소안이 소리 내어 잠시 쓴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오늘은······ 참으로 공교롭게 됐군. 신기물은 그쪽으로 갔네. 예부에 있는 그 어르신들도 그쪽으로 가셨고. 범한, 이 형을 탓하지 말아 주시게. 내 서둘러 여기에 온 것만으로도 그쪽에는 죄를 지은 거니 말일세.”
“그쪽이라 함은 어딜 말하는 겁니까?”
범한이 살짝 놀라워하며 물었다.
* * *
임소안이 계속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1 황자께서도 오늘 경도로 돌아오셨다네. 지금 자네와 3리도 안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계시지. 참으로 공교로운 일 아닌가! 예부, 추밀원, 병부 사람들 모두 그곳에서 시중을 들고 있다네. 그러니 사절단 쪽은 자연히 한산해질 수밖에.”
임소안은 이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범한, 자네와 교분이 있어 그러니 내 좀 거리낌 없이 물어봄세. 자네처럼 총명한 사람이 겨우 겉으로 보이는 의전 따위에 신경 쓸 리는 없을 텐데?”
전후 사정을 알게 되자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냥 서둘러 경도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공주님은 또 공주님다운 대우를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정에서 한 치의 소홀함이라도 내보인다면 천하 사람들의 비난을 사게 될 텐데 그러면 누가 봐도 흉한 일이지요.”
사절단을 마중 나온 인원이 이리도 적었던 이유를 범한으로서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저쪽은 병권을 쥐고 있는 1 황자. 그러니 조정 대신들은 자연스레 저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아부를 떨려면 이왕이면 더 높은 쪽에게 하는 게 좋으니까 말이다.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해명하려는 임소안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러고는 이상하다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연초에 내려진 성지에는 가을이 깊어질 무렵 1 황자마마께서 군을 끌고 경도로 돌아오시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한데 지금은 겨우 초가을 아닙니까. 왜 벌써 돌아오신 겁니까?”
“황태후마마께서 큰손자가 보고 싶다 하셨다네.”
임소안이 잠시 소리를 내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앞당겨 경도로 오신 거라네. 지금 서로(西路)군은 정주 쪽에 주둔해 있지. 그리고 이번에 돌아오실 때 2백에 이르는 근위병들을 데리고 돌아오셨다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질책했다.
“예부에 있는 관원들은 곽가에게 멍청한 짓만 배웠답니까? 사절단도 경도로 들어가야 하고 황자께서도 회궁하시는 마당인데, 그 많은 예부 사람이 어찌 안배해야 하는지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됩니까? 도중에 서한이라도 보냈다면 어느 쪽이든 하루 이틀은 지연했을 것을. 그것도 안 해 경도성 밖에서 옴짝달싹못하게 만들어 놓다니 참으로 잘했네요. 이제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예부와 홍려사 모두 자네에게 서한을 보냈네. 사절단에게 조금 더 천천히 오라고 말일세. 한데 사절단이 조금 지체하기는커녕 오히려 길을 서두르는 바람에 경도 앞에서 모두 멈춰 서버리게 된 거 아닌가.”
범한은 웃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절단이 서둘러 천 리를 달려오게 된 건 모두 자신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용서해 주겠네. 그러니 일단 순서가 정해지면 사절단은 그때 경도로 들어가는 걸로 함세. 어떤가?”
임소안이 범한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자가 감찰원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아무에게나 버럭 화내는 오만한 진평평의 성미를 이어받았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가 다시 조심스레 말을 이어 갔다.
“신임 예부 상서가 사절단 쪽으로는 오기가 뭐했나 보네. 하여 내게 이 말을 전해달라 한 걸세.”
“제기랄, 이 몸은 집에 있는 마누라 생각이 간절하단 말입니다!”
임소안과는 서로 잘 아는 사이다 보니 범한은 격 없이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았다. 더군다나 웃으며 임소안을 꾸짖기까지 했다.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하다니. 임소안 대인, 나중에 우리 집에 왔을 때 걱정 좀 해야 할 겁니다. 그 사람이 벌을 내릴 테니까요.”
임소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범한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병들어 골골하는 몸이기는 해도 간과할 수 없는 엄청난 배경을 지닌 사람이니 말이다.
범한은 일면식도 없는 1 황자와 먼저 입성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고 싶지 않았다. 물론 범한에게는 다툴 자격조차 없었다. 이에 웃으며 임소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염려 말아요.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잠시 심사숙고하다 이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공주마마께 먼저 알려야겠습니다. 두 분께서 만나게 해서는 안 되잖아요. 일이 살짝 틀어졌으니 신하 된 도리로 해명을 해드려야겠지요.”
말을 마친 범한이 공주가 쉬고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임소안은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저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만 할 뿐이었다.
‘대체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거지?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한 이틀 늦추는 게 뭐 그리 문제라라고! 북제 공주가 양보하지 않으면 자네의 해명은 오히려 싸움을 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단 말일세!’
그런데 임소안도 모르는 게 있었다. 범한은 원래 심보가 고약한 놈이고 지금은 오로지 서둘러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란 점이었다. 그러니 1 황자와 북제 공주가 서로 싸우든 말든 범한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225화
땀을 닦으며 기다리고 있던 임소안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역참 밖에서 연신 땀을 닦으며 달려오고 있는 4품 관원이었다. 이 관원의 등줄기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건조하고 무더운 초가을에 양쪽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관원의 신분은 바로 홍려사 소경 신기물이었다. 신기물이 임소안을 발견하고는 두 손을 모아 인사부터 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일찍 오셨구려.”
임소안은 상대방이 황태자의 측근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둘 사이는 가까워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재상이 물러난 후 임소안은 조정에서 범한 쪽 사람으로 분류되어 버렸고 또한 딱히 따르고 있는 황자가 없다 보니 최근 들어 신기물과 많이 친해지게 되었다. 이에 임소안이 웃으며 스스럼없이 꾸짖었다.
“범한 대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야 안 오면 아가씨께 야단맞게 되어 왔다지만 신기물 소경은 범한 대인과 친하면서 왜 이제야 온 것입니까? 잠시 후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
순간 어리둥절해 하던 신기물이 금세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범한 대인은 지금 도착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오늘 일이 너무나 황당했는지 신소경이 자조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1 황자마마와 사절단이 동시에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예부에서 어느 쪽을 먼저 들여보낼지 결정 못 하고 있는데 내 보기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도대체 어느 쪽부터 맞이해야 하는가를 놓고 3원 6부 4사의 신하들이 몽땅 다 우왕좌왕하고 있어요.”
그런데 신소경이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지금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해서였다. 한참 후 두 사람 모두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방금 자신들이 대화할 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차려서였다. 황자님과 사절단을 똑같이 중요한 위치에 놓고 판단하다니. 설마······ 범한이 감찰원을 장악하고 또 일대 문인으로 등극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알게 모르게 범한을 황자마마와 같은 지위에 놓고 생각했던 거야, 하고 말이다.
신기물이 고개를 내저으며 이 황당한 생각을 머리 뒤편으로 날려 버렸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다. 관리들이 이리도 난처해하는 이유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범한을 높은 지위에 놓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도 그럴 것이 경도에 나타난 지 불과 1년여 만에 범한 대인이란 자가 해놓은 걸 보면 놀라우리만큼 많지 않은가. 그러니 오늘 사절단 쪽으로 온 관리들은 명분상으로는 이국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 목적은 범씨 가문과 감찰원에 아첨하고 잘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범한 대인이······ 아까 내가 안 보여서 뭐라 하지는 않았겠지요?”
신기물이 소심하게 묻자 임소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짝 안심한 신기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정리로 보나 도리로 보나 1 황자마마께서 먼저 도착하셨으니 황태자마마를 대신해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게 맞겠지요. 범한 대인도 어차피 일개 신하이니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 *
“나는 분수 같은 거 모릅니다.”
범한이 걸어오면서 신기물에게 인사했다.
“둘이서 기분 좋게 술도 마시고 호형호제하며 서로 친해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몇 달 출국했다 돌아왔더니 마중도 안 나오시다니요. 화났습니다. 정말 화났다고요. 하하하.”
범한이 말로만 화났다고 하면서 웃어넘기자 신기물도 어처구니가 없게 웃어 버렸다. 그리고 무언가 할 말이 있었는데 말할 기회를 범한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에 신기물은 범한의 온화하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리로 보나 도리로 보나 대인은 홍려사 소경이니 외교적 사무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절단이 아니라 1 황자님을 맞으러 그쪽으로 달려가시다니요. 설마 정말로 추밀원에 있는 참찬 자리를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까?”
말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불쾌함이 담겨 있었다.
신기물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범한은 1 황자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해서는 안 되는 위치였고, 더욱이 이렇게나 어리석은 방식으로 대놓고 불만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였다.
조정 내 힘 있는 파벌에 속한 두 청년 관원을 향해 범한이 두 손을 모아 가슴까지 끌어 올린 후 허리를 굽혀 절했다. 그러고는 몸을 곧게 펴더니 입을 뗐다.
“사절단은 오늘 경도로 들어가야겠습니다. 두 분 대신께서 처리해 주시지요. 예부에서는 처리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다 하니 두 분께서 방법을 찾아봐 주세요.”
순간 두 소경의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렸다. 둘 다 머리가 터질 듯한 기분이었다. 범한이 1 황자보다 먼저 경도로 들어가려 고집을 피우는데 대체 뭘 믿고 저리 당당한 건지 원! 이 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황궁에서는 이 일을 잊어버렸는지 아무런 지시도 내려보내지 않고 있고. 한데 또 사절단이 먼저 경도로 들어간다 해도 규율상으로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 않던가.
문제는······ 저쪽이 1 황자란 것뿐!
임소안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범한에게 눈치를 준 것이었다. 신기물이 아무리 태자의 사람이기는 해도 그 앞에서 1 황자마마를 향한 불경한 태도를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한데 범한은 그의 ‘추파’를 보고서도 미소 지은 얼굴로 계속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절단이 먼저 경도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는 북제 공주마마의 뜻입니다. 그러니 먼저 들어가도록 손 좀 써주시고, 1 황자마마께는······ 우선 기다려 달라고 전해 드리고요.”
말을 마친 범한은 소맷자락을 펄럭이고는 역참을 나섰다. 그리고 사절단 부하들에게 입성 준비를 하라고 분부했다.
반면 역참 안에 버려진 두 소경 대인은 입을 떡 벌린 채 ‘범한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지?’라며 어처구니없어했다. 감히 1 황자마마보다 먼저 경도로 들어가겠다니! 생각과 기분에 따라 계속 표정이 바뀌던 신기물이 어느 순간 이를 악물고 입을 뗐다.
“황궁에서는 아직 아무런 답도 없으니 나는 이 일에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임소안이 매우 이상하다는 듯 받아쳤다.
“참견하지 않겠다면 어느 쪽으로 갈 생각입니까? 홍려사 소경이 사절단의 경도 입성 의식을 책임지지 않겠다니 그러다가는 누군가에게 탄핵당할 것입니다.”
신기물이 잠시 웃다가 답했다.
“1 황자마마 쪽은 내 알 바 아니란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게 내 일이니까요. 그러니 1 황자마마께서 기분 나빠하셔도 내게는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사절단과 함께 갈 것이고 임소안 소경은, 그러니까 태상사는 황실 종친을 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쪽은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신 1 황자마마이시고 다른 한쪽은 황제 폐하의 장래 며느님이신데, 임 소경은 어느 쪽으로 갈 생각입니까?”
신기물이 말하는 내내 임소안은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과 친분이 두터움에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둘러 1 황자에게 향했다. 예부에게는 입성 준비를 시켜 놓고 동시에 1 황자의 마음을 돌려 봐야겠다고 마음먹어서였다. 잠시 후 성문 밖으로 난 유일한 길 위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 * *
범한이 마차에 올라타 언빙운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후 외부에 얼굴을 노출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경도로 들어가면 아버님이신 언 대인께서 사람을 보내실 겁니다. 그리고 업무 보고 전까지는 절대 그 누구도 대인의 소식을 알게 해서는 안 되니 이 점 명심해 주기 바라고요.”
그러자 언빙운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연 질문을 쏟아 냈다.
“그런데 대체 왜 싸우신다는 거죠? 어찌 되었든 그분은 1 황자이십니다.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시라고요. 그런데도 대인이 그분과 싸울 자격이 있다고 보십니까? 아둔한 사람도 아닌 분이 왜 그리 바보 같은 행동을 하려 하십니까?”
“황자님이요?”
범한이 언빙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다가 웃으며 답했다.
“이런 장난이 흔히 있는 줄 압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분과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 어느 귀인께서 그분과 싸우려 하시는 거라고요.”
언빙운이 어리둥절해 하자 범한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직 만난 적도 없는 두 분이 일찌감치 발언권 쟁탈전에 나선 거랍니다. 공주마마는 유순하고 담담한 성격을 가진 분 같았습니다. 한데 1 황자께서 먼저 경도로 들어가시려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예쁜 눈썹을 바로 치켜세우시더군요. 하동(河東: 원래 하동사[河東狮]를 줄여서 말한 것으로 보이고, 사나운 아내란 뜻을 가지고 있음) 편에 서서 말을 하다니······ 이런 부류의 여인은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거든요.”
“하동이요? 대체 왜 갑자기 강 타령이십니까?”
언빙운이 범한을 호되게 질책했다.
“대인께서 중간에 이간질한 게 아니어도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경도로 돌아가시기도 전에 대체 왜 1 황자마마와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는 행동을 하시는 거랍니까? 대체 어떤 생각이신 거냐고요!”
“아주 좋아요. 이제야 이 상사를 위해 언빙운 대인이 전반적인 문제 분석이란 걸 시작해 준 거 같아서.”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공주님을 도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에요. 저 조용조용한 공주마마께서 동풍(東風: 진보와 혁명의 힘)을 신봉하셔서 서풍(西風: 부패와 몰락을 의미하기도 함)을 압도해 버리려는 생각을 지니고 계실 줄 내 어찌 알았겠습니까?”
방금 한 말은 《석두기》 82회에 나오는 구절이다. 물론 아직 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데 이 말을 인용해 미리 이렇게 써본 것만으로도 범한은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냥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몸이 닳아 있어서였다.
“내가 왜 1 황자님께 불경한 짓을 하느냐고요?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오늘 같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죠. 바로 1 황자마마가 너무너무 싫다는 걸 드러낼 기회 말이죠.”
“왜 굳이 이러시는 것입니까?”
“언 대인이 북쪽에 오래 있기는 했어도 그동안 사절단에서 함께 생활했으니 이제는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범한이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언빙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태자마마와의 관계가 어떤 것 같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다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태자마마께서는 대인을 중요하게 여기고 계신 것 같습니다. 춘시 사건 때에도 대인을 돌봐 주셨고 사절단과 관련해서도 대인을 많이 보살펴 주셨지요. 그러니 대인을 매우 좋게 생각하고 계시다고 봐야겠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태자마마께 보답해야 할 게 많이 있어요.”
이는 춘시 부정 사건과 관련한 마음을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상세 설명은 생략한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나는 정왕 세자님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지요. 한데 정왕 세자님은 2 황자마마 편에 계시고······ 그래서 나와 2 황자님과의 관계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죠.”
언빙운은 그제야 범한이 왜 1 황자에게 이런 불경한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태자마마, 2 황자마마 두 분과 모두 관계가 좋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훗날 1 황자마마와의 관계마저 좋아져 버리면······.”
범한의 얼굴에 살짝 자조 섞인 미소가 드리워졌다.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모두 거머쥔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세 명의 황자님들과 모두 관계가 좋지요. 그렇다면 이런 젊은이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어 할까요? 그리고 황궁에 계신 마마님들께서 그런 나를 고까운 눈으로 보실까요?”
* * *
오늘 경도성 밖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그런데도 이 난리 통의 유일한 해결자인 황궁에 계신 분께서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의견도 보내지 않고 계셨다. 그 때문에 성문 앞에 서 있는 관리들은 잔뜩 움츠러든 채 등줄기에 식은땀만 흘려야 했다. 그리고 길 저 멀리에서부터 두 개의 행렬이 다가오는 걸 바라보며 속으로 황궁 쪽과 범한을 향해 계속해서 욕을 퍼부어 댔다.
1 황자의 근위병은 모두 서쪽 사막에서 있다 온 용맹한 병사들이었다. 이에 감히 황자보다 길을 먼저 쓰려는 사절단 놈들에게 일찌감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1 황자가 군 기율을 엄격히 시행하고 있기에 이들은 사절단 마차가 자신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걸 꾹 참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러다 기마병 소속의 어느 지위 낮은 장수가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대체 어찌 돼먹은 신하기에 이리도 규율을 모르는 것이냐! 죽고 싶은가!”
그러자 양쪽 행렬이 동시에 이동을 멈추고 순간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범한이 마차에서 내려와 가식적인 모습으로 의관을 정제하고는 저 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1 황자의 마차를 향해 예를 갖춰 절하며 말했다.
“소신 범한, 1 황자마마께 인사 올리옵니다.”
* * *
“범한이라고? 자네가 범한인가?”
범한이 인사한 곳에서 웅장하고 힘찬 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러고는 이내 살짝 멸시가 담긴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아가 배필로 맞이한 자였다니. 그런 자네가 감히 황자인 나와 길을 두고 다투는 것인가? 그 담력은 봐줄 만하다만 그래도 어리석군.”
범한이 미소 지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신, 어찌 감히 황자마마와 길을 두고 다투겠습니까. 다만······.”
범한이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뒤쪽에 있는 화려한 마차 안에서 북제 공주의 담담하고 자신감 넘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궁은 연약한 여인입니다. 이런 몸으로 줄곧 남쪽까지 왔는데도 황자마마께서는 저를 성 밖에 며칠 더 두실 요량입니까?”
1 황자의 근위병들이 순간 얼어붙어 버렸다. 마치 사절단 안에 귀한 분이 한 분 계셨다는 걸 그리고 그분이 며칠 후면 1 황자비이자 자신들의 주인마님이 되리란 걸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226화
1 황자는 출정하여 오랫동안 변방에서 지낸 사람이었다. 비록 서쪽 오랑캐가 옛날처럼 난폭하게 날뛰지는 않는다지만 그는 오랑캐를 상대로 몇 년 동안 사막에서 가혹한 시련을 거치며 칼에 수없이 피를 묻혀 왔다. 이러한 이유로 1 황자는 다른 황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겉치레라 할 수 있는 행동은 잘하지 않은는 반면, 군에서 볼 수 있는 난폭한 기질은 좀 많이 지닌 편이었다.
이번에 경도로 돌아올 때 1 황자는 자신의 군사 지휘권을 이용해 적게는 2백, 많게는 5백 명까지 근위병을 이끌고 올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최종적으로 2백 명만 데리고 돌아왔다. 경도에 있는 관리들과 황실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추측을 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들은 하나같이 매우 용맹한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사절단과 길을 두고 다투게 되자 살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일찌감치 폭발하기 일보 직전까지 와버렸다. 말에 올라타 있는 사막에서 온 2백 명의 근위병들은 오만하게 얕보는 기색으로 문관들을 꼴사납다는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수백 개의 눈이 순식간에 어느 마차로 쏠리더니 그들은 이내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알아차리고는 감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은 장래의 황자비였다. 그러니 저들은 아무리 서군(西軍) 소속의 흉포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여주인 될 사람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었다. 즉 그냥 멍하니 있을지언정 길을 두고 다투는 멍청한 짓은 할 수 없었다.
이 시각, 예부 상서는 성 밖 십 리까지 나와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마중 나온 관리들 중에서는 가장 경험이 많고 지위가 높았다. 모두 당황스러워하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예부 상서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일을 수습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잠시 무어라 몇 마디 꺼냈다. 그런데 그 순간, 말들이 한꺼번에 울어 대서 관원들 중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이는 몇 안 되었다.
갑자기 말들 우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말을 타고 있는 서군 근위병이 마치 강물이 갈라지듯 대열을 이루어 양쪽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십 필의 준마가 한 몸처럼 똑같이 움직이니 넓지 않은 길 위에 어느새 커다란 공터가 생겨났다. 이어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전투용 갑옷을 온몸에 두른 대장이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왔다.
북제 큰 공주가 탄 마차 옆에 서 있던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들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1 황자의 근위병들이 말을 돌려 길을 비키는 척하면서 곧장 자신을 향해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들 군인은 줄곧 변방에 있던 자들이니 범한이 누구인지 알아볼 리 없었다. 그저 앞쪽에 있는 예쁘장한 공자가 무어라 말을 내뱉자 그냥 화가 잔뜩 치밀었을 뿐이고, 그에게 바닥에 고꾸라지도록 만드는 굴욕만을 선사하고픈 생각뿐이었다. 이에 앞쪽에 있던 키가 큰 말들은 움직일 때마다 누가 봐도 매우 위험해 보일 정도로 일부러 범한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범한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을 탄 대장을 향해 살짝 몸을 굽혀 절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준마가 울며 발을 구르고 도발하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신 범한, 1 황자마마를 뵈옵니다.”
말고삐를 늦추며 달려온 이는 당연히 경국의 1 황자였다. 번뜩이고 활기차 보이는 눈에는 타고난 살기가 담겨 있었다. 곧게 뻗은 눈썹과 쭉 뻗어 코, 광대는 살짝 솟아 있었지만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민하고 용맹한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온몸에 두른 투구와 갑옷이 빛을 발하고 있는 상태에서 말까지 타고 있으니 마치 천신이 땅에 내려온 것 같아 감히 똑바로 쳐다보면 안 될 존재 같았다.
이에 범한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얄밉고 가증스러워 보이는 부끄러운 미소를 흘리며 살며시 고개를 숙여 절한 것이었다.
1 황자는 조심스럽고 비굴한 모습으로 자기 말 앞에 서 있는 이 문신이 지금 경도에서 가장 유명인인 범한이란 걸 알게 되자,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이렇게나 잘생겼다고? 한데 웃는 모습이 어찌 이리도 계집 같을꼬?”
1 황자는 원래 이 말을 내뱉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순간 실수로, 그것도 옆에 있는 근위병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말로 하고 말았다. 그는 원래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에 근위병들은 주인님이 길을 두고 다투는 이 문신을 일부러 모욕하려고 한 말이라 생각해, 다들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경도성 밖 하늘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도록 말이다. 부하들의 웃음소리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경멸감이 담겨 있자, 1 황자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딱히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자신의 입가에도 살며시 조롱기를 담아 버렸다.
당당한 체구의 말들은 어느새 콧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범한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말 여러 마리의 커다란 머리가 범한을 직접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즉 1 황자의 근위병들이 말을 몰아 사절단을 길에서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1 황자가 자기 장래 아내의 체면을 이렇게나 세워 주지 않을 줄이야.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제 보니 사촌 누이 남편의 체면은 더더욱 생각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범한을 향해 다가가는 준마의 눈에는 점점 흥분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 모든 걸 똑똑히 본 범한은 전쟁에 투입되는 말들이니 통제하기 쉽지 않고 피를 갈구하는 성미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잠시 뒤로 물러설 준비를 했다.
어찌 되었든 1 황자에게 밉보이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상대방과 진짜로 척을 지는 상황까지 치달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현재 범한의 가장 큰 약점은 군 측과 전혀 관계를 맺어 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추밀원의 늙은 장군들이 자신이 일부러 서로군의 체면을 떨어뜨리기 위해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훗날 조정 내에서 범한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한데 이건 범한만의 생각이었고 그의 부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범한은 깜빡하고 있었다. 제사 대인이 위험에 처하자 사절단에 숨어 있던 감찰원 하급 관원이자 칼잡이인 검사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연기가 스르륵 지나가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마차 위, 길옆 등 공격하기 유리한 위치에 서서 속속 쇠뇌를 꺼내 들고는 범한에게 바짝 다가간 말들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멈추시오!”
예부 상서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경도 외곽에서 무력을 동원하다니 이 소식이 천하로 펴져 나간다면 조정의 체면은 말도 못 하게 떨어질 게 뻔하다. 그러면 예부 상서직을 유지 못 하는 것뿐만 아니라 1 황자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터. 감찰원이 범한의 뒷배라고 해서 황제 폐하까지 볼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
마중 나와 있던 신하들은 찬바람이 쌩쌩 이는 감찰원 관원들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예부 상서가 소리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범한의 두려운 신분을 떠올리고 너도나도 다급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모두 멈추시오! 그게 무슨 짓이오!”
1 황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한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범한이라는 감찰원 개를 볼 때는 눈매가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감히 자신과 맞짱을 뜨려 하는 걸 보니 꽤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한편 범한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북제에서 돌아오는 내내 감찰원 부하들을 잘 교육해 놓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제사의 안위가 위협당하자 저들은 조정의 체면은 생각도 않고 감히 화살을 서로군에게 겨누었다. 나라를 위해 변방에서 오랫동안 싸워 온 군인들을 이런 식으로 홀대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늙은 절름발이가 꽤나 난처할 텐데 말이다.
한데 1 황자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마치 범한의 걱정을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그가 이번 일을 어찌 처리할지 두고 보려는 것 같았다.
1 황자의 근위병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들이 나타나자 그동안 쌓아 왔던 살기를 단번에 폭발시켰다.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하늘에 울려 퍼지더니 그들은 이내 창과 활로 무장하고는 앞쪽에 있는 사절단을 에워쌌다. 그리고 동시에······ 말들도 범한을 꽁꽁 에워쌌다.
그러자 범한이 주먹을 들어 중지와 약지를 세웠다. 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와중인데도 명확하게 수신호를 보냈다.
범한의 수신호를 본 감찰원 검수들은 화살을 거둬들이고 말에서 내려 원 대열로 돌아갔다. 그것도 전혀 주저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매우 일사불란하게 말이다.
* * *
1 황자는 여전히 말 위에 있었다. 투구에 반쯤 가려져 있는 얼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매우 놀란 상태였다. 나약해 보이는 문관이 이리도 엄격하고 냉철하게 통제를 할 줄 알다니. 더군다나 이러한 상황에서 손동작 하나로 모든 사람의 행동을 중지시키다니. 이 정도의 기강은 자신이 맡고 있는 서로군 내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1 황자는 지금 경도 외곽에 있으니 진짜로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성문에서 태자와 둘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에 그는 가볍게 말고삐를 쥐고 손을 내저어 병사들에게 물러나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근위병들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창이며 활을 거둬들이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조금 전 명령을 따랐던 감찰원 관원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자 1 황자도 결국에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때 범한을 에워싸고 있던 말들도 서로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한데 말들끼리 너무 가까이 붙어 있던 데다 길 위에 깔아 둔 누런 흙이 많이 말라 있던 탓에 흙먼지가 풀썩이며 말의 콧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 한 마리가 발을 구르고 긴 목을 이리저리 비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여러 말들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말 두 마리가 동시에 범한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순전히 우발적인 사고였다. 열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던 1 황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황의 눈에 든 자가 말에 부딪혀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서쪽 변방에서 세운 공은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 터. 그런데 순간 범한의 능력에 대해 전해 들은 게 퍼뜩 떠올라 1 황자는 저도 모르게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감찰원 제사씩이나 되는데 겨우 말 몇 마리에게 받혀 죽지는 않겠지, 하고 말이다.
이히힝! 말은 곧장 앞으로 내달리고 범한은 순간 흙먼지 안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그때, 고수만 보고 들을 수 있는 두 개의 빛 줄기와 소리가 먼지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 * *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두 번 나고 흙먼지가 점점 잦아들었다. 범한은 여전히 그 밉살스러운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어정쩡한 자세로 먼지가 일던 곳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놀라 범한에게 달려들었던 말 두 마리가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땅바닥에 픽 고꾸라졌다. 위에 타고 있던 병사는 이미 혼절한 것 같았다. 그런데 말들은 기수들처럼 운이 좋지는 않았다. 말 머리는 이미 선혈을 흩뿌리며 하늘 저 멀리 날아가는 중이었고 말들의 사체는 쓰러지면서 길 위의 황토에 잘게 균열을 만들었다.
범한의 뒤쪽으로 갈색 옷을 입은 검객 둘이 양손에 사람 키만큼 긴 장도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냉담한 표정과 차가운 눈빛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1 황자의 근위병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이 두 개의 칼을 아래로 내리쳐 말 두 마리의 머리를 산 채로 잘라 버린 것이었다. 참으로 빠른 칼이었다. 그리고 대단히 빠른 대처였다.
1 황자의 동공이 수축된 채 범한 뒤에 있는 검객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에게는 저 둘의 손놀림이 어쩐지 익숙했다. 1 황자가 자신의 대퇴부 쪽 갑옷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치기 시작했다. 탕탕, 하며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가 범한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범 대인은 과연 대단하군. 본 왕은 수년간 출정해 있다가 경도로 돌아온 것인데, 오자마자 그대에게 말 두 마리가 참수되어 버리다니! 조정에서는 이런 식으로 병사들에게 환영식을 해주는 건가 보군.”
범한이 한숨을 쉬며 손을 뻗어 코부터 막았다. 말이 뿜어 내는 피 냄새가 너무 자극적이라 싫은 사람처럼 행동하며 1 황자의 말에 해명하기 시작했다.
“1 황자마마, 소신에게 간덩이를 천 개 주신다 한들 소신은 감히 마마의 말은 베지 못하옵니다.”
범한은 이 1 황자가 성격은 거칠고 호방할지라도 우둔한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 황자가 자신을 본 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과거 성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1 황자가 서쪽에서 돌아올 때 폐하께서 이미 그를 왕으로 봉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황자들 중 처음으로 왕에 봉해진 이였다.
오늘 상대방에게 너무 많은 죄를 짓고 말았다는 생각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1 황자의 낯빛이 점점 싸늘해져 갈 때쯤 황자의 곁에 있던 근위병이 걸어 나와 그에게 몇 마디 건넸다. 그러자 1 황자의 눈빛이 순간 범한 뒤에 있는 검객에게 꽂히더니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보니 호위(虎衛)였군.”
227화
범한 뒤에 서 있던 고달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1 황자마마 곁에 있는 저분은 호위입니다.”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요?”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알 수 있습니다.”
고달이 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이 순간 장도에서는 말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범한이 물었다.
“당신도 호위인데 왜 1 황자마마께 이리도 무례하게 행동하는 겁니까?”
그러자 고달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도련님, 폐하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소신은 도련님의 안위만 책임질 뿐입니다. 그러니 상대가 누구든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중 범한의 얼굴에 살짝 묘한 기색이 돌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 범한이 갑자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1 황자의 말을 향해 몸을 곧게 숙여 절했다.
범한이 그러는 사이 근위병들은 혼절한 두 명의 병사들을 일찌감치 수습한 상태였다. 그리고 1 황자마마에게서 당장 사절단에게 달려들어 손보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한데 1 황자는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돌연 말을 움직여 범한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몸을 살짝 숙이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의 성미가 마음에 드는구나. 하나 말을 죽인 건 불길한 짓이니 경도로 돌아간 후 본 왕이 좀 귀찮게 만들어 줄 것이다.”
범한이 주변 근위병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소신과는 정말로 무관한 일이오니 부디 살펴 주십시오.”
1 황자가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황자였으므로 당연히 호위의 역할과 권한을 알고 있었다. 부황께서 사절단의 안위를 위해 호위 무사를 붙여 준 것이므로 범한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속에서는 계속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본궁의 뜻입니다. 마마께서 기분 나쁘셨다 해도 범 대인을 난처하게 말아 주시지요.”
마차 안에서 줄곧 가만히 있던 공주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임소안은 범한의 손을 잡아끌었고 신기물은 1 황자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황궁 문지기들은 1 황자의 말고삐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예부 상서는 화가 나 씩씩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상대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는 황자의 근위병들을 꾸짖어 제자리로 돌려 버냈다. 이밖에도 추밀원의 늙은 대신이 뒤늦게 중재에 나섰다. 이 자리에 나온 경국의 모든 관리가 1 황자와 범한을 에워싸고는 일촉즉발의 대립 상황을 최대한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이리 많은 관리가 둘러싸고 말리자 사절단과 서로군의 충돌은 자연스레 흐지부지되었다. 그렇지 않고 서로 충돌했다면, 그리고 나이 든 사람 중 누구 하나 다치게 했다면 그들로서는 조정의 체면을 깎는 짓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정이란 게 대체 무엇이길래 그런 걸까? 단순히 3원 6부 4사만을 이르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바로 체면, 즉 모든 신하의 체면을 대표하는 게 조정이기 때문이었다.
* * *
관리들이 1 황자와 범한을 말리기 시작하자 성문 쪽에서도 저 멀리서 무언가 일이 난 걸 감지하고 드디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성문 쪽에 있던 이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말을 몰고 다가왔다.
그리고 한참을 묻고 답한 후에야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 일찍 도착한 사절단이 길을 먼저 지나가기 위해 1 황자와 다투고 있었다니. 하지만 이들은 하급 관원이라 자신들로서는 처리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서둘러 상부에 보고부터 올렸다.
양측은 다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데 범한이 아무리 물러나고 싶다 해도 마차에 있는 북제 큰 공주가, 사절단의 문관들이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1 황자보다 먼저 입성하려 했다.
1 황자는 오늘 쓸데없이 말만 두 마리 죽이고 체면을 잔뜩 구긴 상태였다. 더군다나 아무리 신하일지라도 자신도 명령을 내릴 수 없는 부황의 측근, 즉 호위가 없었다면 진즉에 창과 칼을 들어 길을 열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터였다. 이에 1 황자도 드디어 슬슬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까짓 공주고 뭐고 절대 사절단부터 입성하게 할 수는 없지! 나중에는 결국 본 왕의 발이나 닦아 주는 계집이 될 것이거늘!’
1 황자와 사절단, 관원들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관원 중 일부는 황자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고 또 일부는 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쯤 되면 힘으로 밀어붙이며 싸울 수는 없는 상황. 결국에는 서로 간에 이러쿵저러쿵 입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서로군 병사들은 힘으로 싸울 때나 치명적일 뿐 말싸움에서는 젬병이었다. 특히나 궤변술에 통달한 사절단 외교관들에게는 적수가 될 리 만무했다. 결국 사절단에서 조정의 규율이니, 양국 간의 우의니, 황제 폐하의 성심이니, 관리들의 체면이니 하는 것들을 들먹이기 시작하자 1 황자 쪽은 점점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1 황자 쪽은 계속해서 길을 막아선 채 사절단이 먼저 지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는 와중이었다. 개국 이래 조정 대신들이 가장 시끄럽게 싸우고 있는 이 도떼기시장 같은 곳으로 밝은 노란색을 띤 천자의 마차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누군가가 마차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이 순간 범한은 뒤로 물러나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언빙운의 마차 옆으로 가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언빙운이 주의를 받고 나서야 그제야 마차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맞이하러 나섰다. 범한이 의관을 정제하고 주변 관원들과 함께 절을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태자는 황제의 성지를 들고 1 황자를 맞이하기 위해 성문 앞에 와 있는 중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이런 큰 소란이 일자 어쩔 수 없이 체면을 잃을 것을 무릅쓰고 직접 화해를 조정하러 온 것이었다.
태자가 나타나자 1 황자도 감히 꾸짖고 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서둘러 말에서 내려 갑옷을 입은 상태 그대로 태자가 탄 마차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절했다. 그러자 이미 마차에서 내려와 있던 태자는 서둘러 1 황자의 행동을 저지하며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황형(皇兄), 지금 갑옷을 입고 계시니 이리 예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제 황형 아니십니까. 그러니 어찌 제가 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황자는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태자가 절을 하지 말라고 하자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투구부터 벗었다. 그러자 이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던 태상사와 예부 관원들이 속으로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제간의 일이고 황제 폐하께서도 이 정도 일 가지고는 신경도 쓰지 않으실 테니, 신하 된 입장인 이들은 그냥 가만히 있기로 결심했다.
태자가 형의 얼굴을 보며 살짝 감성적으로 말했다.
“황형, 오랫동안 열사의 변방에서 거친 바람을 맞으며 전투를 치르시느라 많이 마르셨군요.”
1 황자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뭐 별거라고요! 변방에서 말을 내달리고 있는 게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고 좋습니다. 태자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이 형이 저택 안에서 가만히 있는 걸 제일 싫어하고 좀이 쑤셔 죽으려 하는 걸 말입니다. 이번에 할마마마께서 제 귀환을 원치 않으셨다면 그곳에서 며칠 더 있다가 왔을 것입니다.”
그러자 태자가 꾸짖었다.
“할마마마뿐만이 아닙니다. 부황, 황후마마, 영비마마 그리고 우리 형제들까지 모두 황형께서 일찌감치 돌아오시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1 황자가 범한을 게슴츠레 흘겨보며 말했다.
“한데 누군가는 내가 조금 일찍 돌아가는 걸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태자가 불편한 낯빛으로 1 황자를 바라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물었다. 그러더니 이상하게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정도였다. 대신들은 태자의 뜬금없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태자가 다시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범한을 자기 앞으로 불러들이더니 문책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황형과 길을 두고 다투었는가? 그건 중죄이니라.”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해명했다.
“소신이 어찌 그리 담이 크겠습니까? 사실 북제 공주마마가 먼 길을 오는 도중 고뿔에 걸리셨사옵니다. 그리하여 성 밖에서 더는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태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1 황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차 옆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안부 인사부터 건넸다. 그런 후 몸을 돌리더니 웃는 얼굴로 1 황자에게 말했다.
“황형께서도 신하들과 일일이 논쟁하지 마십시오. 경도에 안 계신 두 해 동안 무슨 일들이 있는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범한이란 자도 모르실 것입니다. 이리 오십시오. 본궁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범한은 사실 태자와 제대로 만나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온화한 인상의 태자를 보며 그가 여러 관리 앞에서 자신과 친밀한 관계임을 드러내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에 범한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앞으로 나아가 1 황자에게 절을 올렸다.
“소신, 태학 봉정 범한이옵니다. 1 황자마마를 뵈옵니다.”
“자네는 4품 거중랑일세.”
태자가 책망하며 말을 이어 갔다.
“어찌하여 자신의 관직마저 잊고 있는 것인가?”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동안 제가 바보가 되었나 봅니다. 부디 태자 전하께서는 용서해 주시옵소서.”
태자가 작은 소리로 1 황자에게 말했다.
“범한은 지금 원장 대인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바입니다. 감찰원 제사라니 참으로 대단한 위세를 지녔군요.”
1 황자가 냉소적으로 한마디 했다. 그러자 태자가 웃으며 중재에 나섰다.
“됐습니다, 됐어요. 제 체면은 그렇다 쳐도 신아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저이를 타박하시면 안 되죠. 어릴 때만 해도 황형과 신아 관계가 무척이나 좋았으니까. 이리 말하니 범한도 우리의 매제가 되는군요. 모두 한 가족인데 왜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1 황자가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조금 어색해하는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녀석에게 화를 내는 것이지요. 신아가 황궁에 있을 때는 그야말로 모두의 금지옥엽이었습니다. 그런 신아가 이런 계집처럼 생긴 놈에게 시집을 갔다니 보고만 있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군요. 혼인한 지 반년도 안 되었건만 아직 신혼 중인 아내는 집에 놔둔 채 감히 자청해 사절단으로 나가지를 않나. 이런 권세와 돈만 밝히는 녀석이 어째서 우리 신아의 배필이 되었단 말입니까!”
범한은 씁쓸하게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자신이 엉뚱한 데서 삽질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서였다. 이제 보니 길을 두고 다투게 된 건 집안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1 황자와 장래 황자비 간의 집안일이 아닌, 1 황자와 매제인 자신 사이의 집안일 때문이었다.
이 시끄러운 상황이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어찌 되었든 범한은 계속 웃고 있었다. 조금도 오만방자하지 않은 매우 성실한 모습만 보여 주면서 매제로서, 신하로서 본분을 지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길을 두고 다툰 잘못된 행동이 범한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왔음을 주변 관원들이 생각해 내지 못하도록 했다.
범한에게는 타고난 장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그가 음험하고 잔인한 성격을 지녔다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속으로는 남을 속이고 업신여기는 일일수록 더 하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겉으로는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인 척했다. 그야말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가식 덩어리 그 자체였다.
228화
장 공주가 범한에게 몇 차례 당했을 때도 모두 그런 식으로 당한 것이었다. 특히 글 종이가 황궁 밖에서 터진 일만 봐도 그녀는 지금까지도 막후 인물이 사위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사위가 울분에 차도 참아 내고, 북제에서 자기 말에 따라 계획을 잘 이행해 주고 하여 감히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범한의 신조는 하나였다.
‘화려하게 날뛰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래도 몸을 낮춘 화려함이어야 하고, 그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이득을 취해야 한다.’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이용하고, 자신이 움직이지 못할 사람은 때려죽여도 이용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한데 1 황자는 현재의 범한으로서는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범한이 평소 자신의 취향을 크게 거슬러 1 황자와 길을 두고 다툰 건, 모두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인 황제에게만 보여 주기 위한 일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직선적인 성격의 1 황자가 범한 자신의 연극을 위한 상대역으로는 적격이었던 것이다. 범한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어쩌면 진평평 그 늙은 여우 정도만 조금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어찌 되었든 양측은 태자의 화해 조정으로 최종 타협안을 마련했다. 사절단의 앞쪽 대열과 황태자의 근위병이 함께 입성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한데 너무 규율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 예부 상서는 매우 불쾌해했고, 태상사의 임소안 소경 역시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런데 이번 의전 문제는 해결 방향을 어떻게 잡든 결국에는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태자는 옆에서 답답해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언가 모를 통쾌함 같은 걸 느꼈다. 이에 짐짓 꾸짖듯 말했다.
“자네도 소란을 벌인 것이네. 분명 사절단이 나중에 돌아오기로 결정된 사항이거늘, 어찌하여 앞당겨 도착하고 또 조정의 조정도 거치지 않고 이런 사달을 만든 것인가?”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소신,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태자 전하,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어쩌면 내일 어사 중 누군가가 저를 탄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범한은 내심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하는 사이 태자의 기색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서였다. 예전에 보았던 살짝 비굴하고 음울한 면은 사라지고 얼굴에 환하게 광택이 돌고 있었다. 대체 그사이 무슨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당연히 범한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태자는 황후와 장 공주라는 거대한 두 개의 산에 짓눌려 지냈었다. 그런 그에게 장 공주가 황궁을 떠나 신양으로 돌아간 사건은 그를 억누르던 산 하나가 사라진 것과 같았다. 그러니 잠시라도 마음이 편할 수밖에. 더군다나 올해 들어 황제 폐하께서도 위안이 되는 말을 많이 해주고 있으니, 태자는 예전보다 훨씬 좋은 시절을 지내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신하들이 봤을 때 태자가 좋은 시절을 보내는 중이라면 분명 2 황자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여야 했다. 하지만 성문 앞 막사 안에서 1 황자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2 황자의 고상하고 우아한 얼굴에서는 불편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순간 신하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건 오히려 그 옆에 있는 어린 녀석이었다.
이 어린 녀석은 황제 폐하의 가장 어린 아들이었다. 천자는 총 네 명의 아들을 낳았고 황자들에게 순서를 붙일 때 태자는 제외하고 매기게 되니, 이 아이는 황실이 외부에 전혀 공개하지 않은 3 황자인 것이었다. 그는 올해 겨우 아홉 살이었다. 1 황자가 변방에서 돌아오게 되자 황제는 모든 황자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차원에서 그를 배웅하러 나가라 명했다. 이는 대신들에게 단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어린 황자에게 공식 석상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준 것이기도 했다.
2 황자가 어린 황자의 손을 이끌고 1 황자에게 절을 했다. 1 황자는 2 황자와 관계가 좋았는지 앞으로 나아가 아우를 끌어안았다. 그런 후 어린 녀석의 머리를 만져 주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새 많이도 자랐구나!”
어린 녀석이 웃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중에 키가 황형만큼 자라면 저도 나가서 오랑캐들을 때려잡을 것입니다.”
이 어린 황자의 생모는 사남 백작가 유씨 부인의 자매였다. 그러니 이리저리 관계를 따져 보면 범한에게도 친척이 되는 셈이었다. 범한은 이 앳된 황자가 천진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천진난만한 웃음 속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긍지 같은 게 엿보여서였다. 범한의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살짝 웃는 얼굴을 한 채 범한은 생각했다.
‘이 몸께서는 어릴 때부터 극한의 천진난만한 가짜 미소로 사람을 홀려 왔느니라. 그런 내 앞에서 감히 이런 장난질을 하다니! 이 범한에게는 먹히지도 않는 웃음을 팔고 있는 꼴이구나!’
2 황자도 앞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범한에게 말했다.
“이보게, 매제. 언제쯤이면 사고를 덜 칠 셈인가? 자네 때문에 경도의 온 관원들이 심장을 졸였을 걸세.”
그러자 범한이 매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해명에 나섰다.
“정말로 북제 공주마마의 뜻이었습니다. 고작 안위나 탐하는 소신이 어찌 그리 대담한 짓을 하겠습니까.”
태자가 보일 듯 말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2 황자와 범한 간에 나누는 말투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둘째 황형, 아직 의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관직명으로 부르시지요.”
이 말은 억지에 가까웠다. 앞서 태자도 범한을 매제라 부르며 친근감을 드러내 놓고는 이제 와서 2 황자에게는 안 된다고 하다니. 2 황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한 채 껄껄 웃어넘겼다. 그러고는 범한 곁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춘시 전에 나에 대한 호칭을 어찌해야 할지 신아에게 물어보라 했었는데 물어보았는가?”
그제야 그때의 일이 생각난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웃었.
“마마께서도 춘시에서의 일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일 때문에 잊고 있었습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꼭 물어보겠습니다.”
그러자 2 황자는 웃으며 그와 관련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3 황자의 손을 잡고서 앞서 성문을 향해 가고 있는 태자와 1 황자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매우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모든 내용은 1 황자의 귀에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그동안 변방에서 있었던 1 황자는 이런저런 의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범한의 명성이 높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경도에 없었던 탓에 그가 대체 어떤 힘을 쥐고 있는지는 몰랐다.
한데 방금 두 사람의 대화에서 그는 무언가를 눈치채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2 황자든 태자든 그들은 모두 말을 할 때 범한을 회유하는 듯한 말투를 썼다는 점, 그리고 자신과 범한의 관계가 친밀하다는 걸 주변 관원들에게 들킬까 염려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개 신하 따위가 황자 둘의 눈에 들었다니. 그것도 황자들이 체통도 생각 않고 회유하러 나설 정도로. 1 황자의 이맛살이 절로 일그러졌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지금 이 순간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어두컴컴한 동굴과도 같은 성문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밝은 노란색과 연한 노란색의 각기 다른 의복을 입은 황자 넷의 모습에 범한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만 것이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저 네 명의 황자 가운데에 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 * *
경도의 가을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아름다웠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하며 민가 주변에 흐드러지게 늘어진 이제 막 노란색이 들기 시작한 나뭇잎까지. 길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은 급하지 않게 졸졸졸 흘러 가을의 적적한 정취까지 더해 주고 있었다. 길게 뻗은 거리, 그 끄트머리로 황궁의 처마 한 끝자락이 불쑥 솟아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걸려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위엄 그 자체였다.
1 황자의 근위병들은 노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사절단의 마차는 일부러 속도를 늦춘 채 홍려사와 태상사 관원을 따라 느긋하게 황궁으로 향했다. 범한 입장에서는 이왕 경도로 들어온 이상 더는 서두를 필요가 없어서였다. 어찌 되었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먼저 황궁 문 앞으로 가 도착 사실과 그간의 경위를 아뢰어야 했으니 말이다.
이에 범한은 여유를 갖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경도에서 지낸 기간은 모두 합쳐 봐야 1년 정도에 불과하니 그에게 경도는 아직 담주보다 많이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경도성 안으로 들어서서 주변 민가를 둘러보는 순간, 이곳에서만 나는 특유의 냄새 때문에 범한은 기분이 상쾌해졌다.
“대인이 급히 돌아온 걸 보니 필시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가 보오.”
준마 옆에 있는 마차에서 북제 공주마마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전해져 왔다.
범한은 살며시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중요한 신하였던 자신과 북제 공주가 일부러 친분을 더 쌓아 두려는 게 빤히 보여서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경국으로 오는 내내 이미 충분히 교류를 한 상태 아니던가. 그러니 경국 도읍으로 입성한 이상 주변 이목도 있고 하니 범한은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도 있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까닭도 있었다.
범씨 가문은 현재 경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집안으로 가내 평안한 상태였다.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들은 범한이 왜 이리 조급증을 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범한이 박차를 가해 수 장(丈) 앞에 있는 언빙운의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꼭 그녀를 데려가야 합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마차에 있는 언빙운 공자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꽉 붙들려서 눈만 드러내고 있는 누군가의 익숙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누군가는 바로 심 낭자로, 독기를 가득 품은 그녀의 눈동자는 언빙운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한편 언빙운은 범한 대인이 대체 언제부터 중매쟁이 노릇을 하는 데 취미를 들인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빙운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화제를 돌렸다.
“대인, 오늘 길을 두고 다툰 일은 정말 현명치 못한 행동이셨습니다. 감찰원은 황자들 간의 다툼에 시종일관 중립을 유지해 왔습니다. 대인께 들은 내용과 앞서 들은 내용을 모두 살펴보니 태자 전하와 2 황자마마 모두 대인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왕 그렇다면, 그리고 균형을 유지하실 목적이라면 1 황자마마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야 감찰원의 취지와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범한은 그냥 잠자코 있었다. 상대방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였다. 경국의 신하로서, 특히 감찰원 제사로서 이들 황자들과 평생 교류하지 않거나 또는 교류하려면 늘 공정함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감찰원이 어느 황자의 편도 들지 않는다고 황궁 쪽에 확신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게 안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분이 단순한 신하 그 이상이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특정 황자에게 편향되게 행동하면 황제는 기껏해야 자신이 부귀와 권력을 탐하고 진평평만큼 순수하게 충정을 바칠 인물이 아니란 정도의 의심만 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정말로 공정하게 행동한다면 범한에게는 감찰원과 황실 금고가 있으니 황제가 자신을 다른 식으로 의심할 수 있었다. 바로 신하 하려는 생각이 없다고 말이다.
이는 범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였다.
마차 행렬이 흥도방(興道坊) 구역에 도달하자 이제 더 이상 질서 유지를 위한 경도부의 도움은 필요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비교적 정갈하고 안전한 관아들과 관원들 저택이 밀집된 지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리에 서서 행렬 구경을 하는 백성도 없었다. 그 순간 마차 한 대가 대열에서 벗어나 아무도 모르게 옆쪽 샛길로 빠져나갔다. 그 골목 안쪽에는 이 마차를 몰래 맞이하러 온 누군가가 있었다.
물론 마차가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관리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한데 사절단은 워낙 복잡한 곳 아니던가. 이에 관리들은 아마도 감찰원 사무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앞쪽에 있는 제사 대인의 표정이 자못 엄숙하기도 해서 감히 끼어들어 말을 걸며 알리지 못했다.
범한의 표정은 당연히 엄숙할 수밖에 없었다. 주홍색의 황궁 담벼락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제 곧 황성에 당도할 일만 남았으니 말이다.
229화
사절단들이 황궁 문 앞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의 권위가 지엄하니 누구도 의례상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천 리를 쉬지 않고 달려와 피곤할지라도 말이다. 한참이 지났건만 아무런 지시가 내려오지 않자 신하들은 슬슬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번 북제행에서 사신단은 대륙과 바다에 우리의 땅이 어딘지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범한 정사도 북제 조정에서 큰 활약을 하지 않았던가. 비록 마차 안의 오래된 서적들은 값도 안 나가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어찌 보면 황제 폐하의 체면을 크게 살려 주는 것임에는 분명한데. 그런데도 우리를 이렇게 문밖에 세워 두고만 있다니!’
황궁 밖에서 사신단과 함께 있던 예부 관원들도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임소안이 범한 곁으로 다가와 작게 이야기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1 황자마마를 알현하고 계실 거네. 그러니 신하된 도리로 더 기다려야 하지 않겠나.”
범한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북제 공주의 마차가 이미 황궁 문지기 태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으니 중요한 일은 거의 다 처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범한 스스로도 사절단이 왜 황성 밖에서 찬 바람을 맞고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성의 금군들이 무표정하고 싸늘한 눈빛으로 궁궐 밖에서 초조하고 황당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관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황궁 문을 지키는 태감들은 사절단을 제대로 한번 봐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남들과 신분이 다르지 않던가. 아직은 군주 신분인, 더군다나 황궁 안에서 매우 총애를 받고 자란 이의 남편이고 또한 감찰원의 고위 관리이며, 이번에는 북제에 사절단으로 다녀온 인물이니 말이다. 그리고 생각을 해보니 나중에는 작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이에 태감이 일찌감치 범한에게는 둥근 걸상을 내다 주며 거기에 앉아 기다리도록 해주었다.
그러자 범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리해도 예법에 맞는 것인가?”
그러자마자 그들 중 우두머리 태감이 한껏 아첨하는 얼굴로 걸어 나와 범한을 부축해 걸상 위에 앉히며 말했다.
“범한 도련님, 소인, 황제 폐하께서 대인을 아끼신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 리 길을 다녀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걸상에 앉아 계셔야지요.”
“이런, 후 내관이 어찌 여기까지······.”
범한이 일부러 놀란 척했다. 새어머니인 유씨 부인과 범약약을 따라 처음 입궁했을 때 만났던 이였다. 범한은 후 내관과 사남 백작가가 매우 친밀한 관계인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일부러 자신을 범한 도련님이라고 부른 것도 있고 해서 그를 향해 다정한 표정을 지어 주었다. 그러자 둘 사이의 친밀감이 제대로 드러난 것 같았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외국에서 이제 막 돌아왔네요. 그래서 오늘은 빈궁한 처지라 딱히 뭐 드릴 것이 없군요.”
그러자 후 내관이 날카로운 소리로 웃고는 소리를 낮췄다.
“범한 도련님은 돌도 황금으로 만드시는 분이란 거 다들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황금 광산을 허리에 두르실 분 아닙니까!”
늙은 태감이 아첨 몇 마디를 더 하려는 찰나, 황궁 문이 소리를 내며 살짝 열렸다. 이어 한 태감이 뛰어나와 폐하의 명을 전했다. 범한은 서둘러 걸상을 치우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황궁 문 앞에 꿇어앉았다.
범한의 생각대로 황제는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내용은 다름 아닌 재능을 믿고 남을 깔본다는 둥, 안하무인이라는 둥,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는 둥 등이었다. 이 밖에 오늘은 피곤하니 범한에게 내일 다시 입궁해 보고를 하라는 내용과 사남 백작에게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고 엄히 벌을 내리란 명도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는 사절단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나 일단 돌아가 푹 쉬고 다음 날 다시 칭찬과 격려를 해주겠다는 내용이 나왔다.
사절단 신하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도로 돌아온 첫날 이런 대접을 받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관리들은 심장이 방망이질 쳐대는 가운데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말로는 엄히 꾸짖으셨지만 결국에는 사남 백작에게 아들 교육 잘 시키라는 훈계 말고는 아무런 벌도 내리시지 않았으니 이제 보니 황제 폐하의 범한 대인을 향한 총애는 정말로 남달랐던 것이다.
범한이 고개를 조아리며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은근슬쩍 기뻐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범한이 궁둥이를 털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작금의 궁중 금군 대통령인 궁전이었다.
궁전은 범한을 보자 기쁜 기색으로 다가가 몇 마디 건네려 했다. 하지만 범한은 지금은 부득이하게 시간이 안 된다는 듯 두 손을 모아 인사하고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는 훌쩍 말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양발로 박차를 가하고 채찍까지 휘둘렀다. 그러자 범한이 타고 있던 말은 황궁의 드넓은 광장을 나는 듯이 달려 어느새 먼지만 남기고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궁전은 깜짝 놀라 수하인 호위병들과 함께 저 멀리 피어나고 있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속으로는 황궁 안에서는 허락 없이 말을 몰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처럼 재빨리 사라진 대신은 그도 이번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 * *
가을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범한의 마음은 터질 듯이 무르익어 있었다. 감찰원의 일도 이미 다 안배를 해둔 터였고 고달을 포함한 호위 일곱 명은 알아서 관련자들을 만나러 갈 터였다. 그러니 범한은 길게 뻗은 거리에서 말을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리고 얼마나 달렸을지 모를 무렵, 드디어 성 남쪽으로 들어선 말발굽 소리가 사남 백작가 문 앞 사자 석상이 있는 길 위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밤이 되고 거리 위로 늘어선 왕족, 대신들의 저택 앞에 등불이 내걸리기 시작했다. 흐릿한 등불만이 수없이 밝혀진 가운데 오직 사남 백작가 문 앞의 등불만 훤하니 밝혀져 있었다. 정문은 열려 있었고 종자, 호위병, 식객 모두 문밖에 서서 고개를 치켜들고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는 유씨 부인이 직접 나서서 여종들과 어멈에게 차와 탕을 끓이도록 분부하고는 사남 백작가 가문의 제일 큰 도령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절단이 경국 외곽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일찌감치 성안에도 전해진 터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의례적인 일정도 있고 해서 약 이틀 후에나 사절단이 입성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뒤채에 있는 젊은 아씨 마님은 오히려 싸늘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오늘 반드시 돌아올 거네!”
모두 범한의 부인이 보통내기가 아닌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상은 오늘 필시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모두 이런저런 준비를 하며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집에서는 1 황자와 길을 두고 다툰 일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알았다면 이곳 사람들 모두 깊이 걱정만 하고 있었을 터.
“오셨습니다, 오셨어요!”
눈이 좋은 종이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말을 발견하고 말했다. 그러자 종들이 속속 돌계단 아래로 내려가 양쪽으로 서서 범한을 맞을 준비를 했다.
말발굽 소리가 울리고 범한이 도착했다. 범한이 말에서 내려오다가 등자(鐙子: 말을 타고 내릴 때 발 디딤 용으로 쓰는 것) 노릇을 하려던 등자경의 궁둥이를 가볍게 발로 차고 말았다. 이에 웃으며 한마디 해주었다.
“다리도 성치 않은 사람이 그런 일은 배우는 거 아니네.”
“도련님, 돌아오셨습니까!”
양쪽으로 늘어서 있던 종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범한은 아무런 말 없이 웃기만 하고는 돌계단을 두 걸음 걸어 올라갔다. 그러자 여종이 따뜻한 물수건을 건넸고 그는 그것으로 대충 얼굴을 닦았다. 이어 적당히 따뜻한 차를 받아 들고 입을 헹궜다. 필수적으로 거치는 과정이었으므로 범한은 이런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 집으로 돌아와 눈에 익은 종들을 보게 되자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심지어는 문 뒤에서 웃는 얼굴로 있는 새어머니 유씨를 발견했을 때는 그녀의 웃음이 과거처럼 계산적인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버님은 서재에 계신단다.”
유씨가 범한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 들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연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
범한은 순간 작은어머니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삼키고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
“먼저 누이와 완아부터 보고 오겠습니다. 아버지는 곧 가서 뵐게요.”
유씨는 이 집 큰아들을 ‘효(孝)’라는 명분을 가지고 구속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범한이 저택으로 들어선 순간 갑자기 검고 뚱뚱한 무언가가 뛰어나왔다. 범한은 화들짝 놀랐다. 그런 후 속으로 ‘몇 달 못 본 새 회계 신동이 어찌하여 검고 작은 철탑으로 변했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까지 물어볼 여유는 없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몇 가지만 일러두었다.
“이따가 결산 보고 받을 거야. 내가 할 일이 있거든.”
깜짝 놀란 범사철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범한을 나무랐다.
“이 도련님께서 오늘은 기분이 좋다고요. 그런데도 상대하지 않으시겠다면 형님은 읽지도 못하는 장부에 대해 저 역시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겁니다!”
범한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성문 밖에서 본 황자 네 사람이 떠올라 품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범사철에게 건넸다. 그리고 웃으며 꾸짖었다.
“장부는 무슨! 아무리 봐도 엉터리인데. 일단 너 혼자서 놀고 있어. 그리고 일단 우리 주인장 형제끼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정을 나눈다는 둥 하는 건 생략하자.”
그러자 범사철도 ‘이 도련님께서도 당신과 형제 간의 정을 나눌 생각 따위는 없어!’라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범사철은 이런 생각을 하며 뒤채로 들어가는 범한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한데 왜 이렇게 매우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 * *
혼례를 치른 범한은 백작가 뒤편에 자신의 저택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는 본래 사남 백작가에서 앞뒤로 통하는 두 채 가운데 뒤채를 쓰는 것이었다. 범한과 범약약과 매우 사이가 좋았고 임완아도 범약약과 서로 의기투합한 터라 범약약은 대부분 시간을 바로 이 뒤채에서 보내는 중이었다.
자신이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께서 서재에 계신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내 임완아와 누이 범약약이 마중을 나오지 않은 건 그에게는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은 더 속도를 내며 걸었다. 그러자 옆에서 따르던 어린 여종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아가씨는 안에 계십니다. 아씨 마님께서도 아직 안에 계십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종의 말이 너무 불길하게 다가와서이기도 하거니와 누가 그렇게 말하도록 시킨 건지 알 수 없어서였다.
침소 앞에 도착한 범한이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았다. 한데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이에 순간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 그냥 안쪽을 향해서 몇 차례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이상하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 문을 몇 차례 두드려 보았다. 만약 이 순간 그에게 아내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곧장 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잠시 후 안쪽에서 여종 사사가 불안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아씨 마님께서는 잠드셨습니다. 그러니 그만 두드리셔요.”
범한이 이맛살을 더 강하게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천 리 길을 마다않고 서둘러 왔건만 완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다니.
범한은 실내를 어두컴컴하게 밝힌 등불을 잠시 바라보고는 별다른 말 없이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드리지 않고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방 안에 있는 여인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방에 들어온 이가 범한인 걸 확인하자 여인은 미간에 담았던 쌀쌀함과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서는 잠시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 스치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가 이내 무릎을 굽히고 나지막한 소리로 인사말을 건넸다.
“오라버니, 돌아오셨군요.”
범약약을 보는 순간 범한은 앞서 일었던 불쾌감이 모두 사라졌다. 이에 온화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니? 내가 돌아온 걸 보고서도 왜 기뻐하지 않는 거야?”
범약약이 살짝 웃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오라비의 소맷자락을 잡아끌며 자리에 앉히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단히 오랜만에 본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소리를 질러 대며 소란을 피우면 그제야 만족하실 겁니까?”
범한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넌 말이다, 어쩜 이렇게 항상 담담하니. 이 오라비 앞에서만이라도 고치면 안 되겠니?”
그러자 범약약이 웃으며 대답했다.
“고치면 약약이가 아니겠죠?”
말을 하면서 범약약은 차를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오라비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230화
범한은 찻잔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바로 차를 마시기보다는 그다지 예쁘지는 않지만 단정하게 생긴 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방 안은 순간 괴이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런데도 남매는 둘 다 인내심이 강했던 터라 서로가 먼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결국에는 누이를 아끼는 범한이 탄식과 함께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괴롭겠구나. 무슨 일이든 내가 돌아온 후 결정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범약약의 얼굴에 침울함이 스쳤다. 오라버니가 벌써 자신의 생각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에 범약약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미뤄 뒀고요.”
범약약이 몸을 일으켜 곧장 침대로 걸어가 그 아래에서 보따리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런 후 침대 뒤쪽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장에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내고는 다시 그것의 뚜껑을 열어 탁자 위에 놓았다. 안에는 은표 몇 장이 들어 있었다.
범약약이 말했다.
“집을 떠날 것입니다. 한데 이 몇 가지만 가지고는······ 많이 부족하네요.”
범약약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소맷자락에서 호신용 비수를 꺼냈다.
* * *
범한은 화나고 기쁘고 가슴이 아파 누이를 바라보았다.
“너는 대갓집 규수야. 그러니 이 세상이 얼마나 험난하고 위험한지 아는 게 없어. 시집가기 싫어서 이렇게 집을 떠나려는 거라면 아버님께서 걱정하실 거란 걸 생각은 해본 적 없니? 그리고 내 걱정은 해본 거니? 왜 이 오라비의 마음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이런 결정을 내린 거니?”
범약약은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소매 끝자락을 단단히 쥔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저를 중히 여기셨던 때가 있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오라버니도······ 설마 잊으신 건가요? 어려서부터 제게 자기 운명을 움켜쥐는 법을 배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특히 혼인과 관련해서는 집안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지 말라고요.”
범한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벼슬아치들의 딸 중에 실천으로 옮기는 건 고사하고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아가씨가 또 어디에 있을까? 범한의 누이가 이리 용감하고 심지어는 무모하게 도망갈 준비를 한 건, 범한이 어려서부터 해주었던 이야기들 때문이 아닌 서한을 통해 가르쳐 주었던 도리들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너무 많은 걸 알려 준 터라 정말로 각성하려 하는 것일까?
범한은 무언가 불안한 사람처럼 탁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옛날에 자신이 한 행동들이 누이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정말로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어찌 되었든 이 세계와 전생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상 아니던가. 그러니 남들과 다른 생각을 지니면 그것이 비수가 되어 당사자에게 도로 날아와 꽂힐 수 있었다. 이에 범한이 느닷없이 고개를 치켜들고는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어. 너는 이홍성 세자님과 함께 있어 본 적이 없지 않니. 그러니 훗날 불행한 혼인 생활을 하리란 건 아직 확정된 게 아니야!”
범약약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하지만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세자님과는 어려서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잘 알게 되었죠. 제가 그분을 싫어한다는 걸 말이죠.”
만약 이 말을 외부인이 들었다면 어쩌면 놀라 까무러쳤을지도 모른다. 사남 백작가의 당당한 아가씨께서 이렇게 대놓고 싫다고 말하다니. 범한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언가 해명을 하려 노력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단다. 나와 네 형수를 봐. 황제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사인데도 지금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범약약이 고개를 확 치켜들고는 결연하고 고집스럽게 말했다.
“오라버니,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오라버니와 새언니에게 일어난 것 같은 행운이 따르지는 않아요.”
누이가 자신의 말에 찬성하지 않다니. 범한은 처음 있는 일이라 순간 깜짝 놀랐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범약약은 자신을 볼 때마다 숭배하듯 좋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런 범약약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에 직접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하자 범한은 저도 모르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이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거지?’
한동안 침묵을 거치면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범한의 표정도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범한은 낭랑한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 속에 담긴 시원함에는 한 치도 거짓이 없었다. 정말로 마음이 놓였다. ‘과거 그 꼬맹이가 이렇게나 자랐다니! 드디어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방법을 배웠다니!’라며 안도감이 들었다.
“약약아, 날 믿니?”
범한이 응원의 미소를 범약약에게 보이며 물었다.
범약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예전처럼 평온하게 웃는 얼굴을 내보이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범한이 탁자 위의 물건들을 잠깐 보고는 웃는 얼굴로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날 믿겠다면 이런 장난은 그만하자. 내가 제대로 해결을 해줄게.”
황궁에서 혼처를 지정해 준 후 범약약은 줄곧 침묵 속에서 살았다. 그녀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대역무도한 것인지, 황명에 항명하면 어떤 재앙이 닥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오라버니의 서한을 통해 교육받은 것 때문에 범약약은 이미 변한 상태였다.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일찌감치 자유의 씨앗이 미약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누구에게도 이러한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내면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오라버니가 자신의 결정을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승낙하자, 그녀가 지난 한 달여 동안 품고 있던 불안은 가을날의 미풍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한 달 가까이 강하게 다잡고 신경 써왔던 것들을 한순간에 놓아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셨잖아. 그러니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해 주실 거야.’
* * *
남매가 수개월 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그만큼 할 말도 많을 터. 하지만 범약약은 오라버니의 얼굴빛이 조금 이상한 걸 보고는 문득 그가 왜 자기 처소에 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아버지와 대화하기 위해 서재에 있거나, 아니면 새언니와 함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번뜩 무언가가 생각난 범약약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살며시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오라버니, 조금 전 제게 그러셨잖아요. 새언니와는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사임에도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다고요.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우울해하시는 거죠?”
범한은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누이는 아내와 사이가 좋으니 임완아가 왜 문을 걸어 닫고 있는지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에 서둘러 누이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그러자 범약약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장난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 일은 이 누이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직접 새언니께 가서 매달려 보세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처신을 똑바르게 했는데 완아에게 매달려야 할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여종이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도련님, 아씨 마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범한이 여러 차례 머리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무리 봐도 아내가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그런데 본디 임완아는 완곡하고 함축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모범적인 여인이 아니었던가. 어째서 세간의 뒷방 여인네들처럼 이리도 앞뒤 안 가리는 행동을 하는 거지? 자신이 힘들게 집에 돌아온 걸 알 텐데. 마중 나오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문전박대라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침소로 걸어가고 있던 범한의 마음은 점점 분노로 차올랐다. 하지만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시 낭송 소리를 듣는 순간, 분노는 사그라지고 얼굴에는 다채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참으로 맑고 달콤한 목소리다. 임완아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누구의 것일까. 그리고 그 시 역시 무척 귀에 익은 것이었다.
“모르는가. 모르는가. 푸른 잎만 짙어지고 붉은 꽃은 시들었을 거란 걸.”
범한이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해당타타가 자신에게 속은 걸 알리기 위해 읊은 이청조의 문장이었다. 한데 분명 북제 해당타타와 자신 두 사람만 아는 구절이거늘 어찌하여 경국의 경도까지 전해진 걸까?
범한은 주먹 쥔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두어 번 헛기침부터 했다. 그리고 발을 앞으로 내디뎌 손으로 문을 밀었다. 방문이 아주 부드럽게 미는 즉시 열렸다. 범한은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제대로 한판 붙을 예정이었다. 그러니 대결장의 문을 닫아걸고 상대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법. 조금 전 범한이 헛기침을 한 것도 방 안에 있는 아내를 향한 사전 경고였다. ‘내가 왔소. 할 말 있으면방에서 합시다’라는.
이 시대의 사회에서는 남자를 더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임완아는 아무리 출신이 범한보다 존귀해도 범씨 가문으로 시집온 이상 이치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한데 이들 부부에게 적용되는 예법은 일반 벼슬아치 집안과는 다른 건 있었다. 그리고 범한은 비록 골수부터 남성 호르몬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존재이기는 했어도 정신적으로는 여성을 지극히 존중하고 있던 터였다.
더군다나 이렇게 저렇게 말해도 이번 일은 모두 범한 스스로가 자처한 일 아니던가. 누이는 집에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고 마누라는 질투를 하고 있고. 하지만 만약 이 모든 게 범한 자신 때문에 비롯된 일이 아니었다면, 또 만약에 다른 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벌써 대판 소란이 일었을지도 모른다.
* * *
“도련님.”
여종 사사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방으로 들어오는 범한을 맞았다. 그녀가 범한의 외투를 벗기고 수건을 건네자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이미 닦았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여종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범한은 속으로 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누이와 완아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군. 범한에게 있어 사사라는 여종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고 자신이 신분에 귀천을 두지 않고 예뻐하던 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 막장극이 상연되자 여유롭게 구경하고 용감하게 자신을 비웃기까지 하다니!
그 순간 임완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얇은 이불을 가슴팍까지 덮고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에 흐트러뜨려 놓고 있었다. 딱 봐도 이제 막 잠에서 깬 사람 같았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돌아온 상공을 신기하면서도 달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의 노기를 받아 줄 준비는 전혀 없었는지 작고 앙증맞은 코끝으로 살며시 잉잉 소리를 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상공, 마중 안 나갔다고 너무 나무라지 말아 줘용.”
범한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드러난 도자기 같이 반들거리는 치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냉큼 침대로 가서 앉더니 아무런 해명도, 변명도 않고 대뜸 이불 속으로 손부터 쑥 집어넣었다. 범한은 그녀의 살짝 차가운 손을 덥석 쥐고는 주물럭거렸다. 요 몇 달 동안 뼈가 없는 것처럼 말랑거리는 완아의 손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사사는 아직 방 안에 있었다. 이에 임완아가 부끄러워하며 다급하게 사사 쪽으로 슬쩍 눈짓을 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보니 사사가 탁자 위 약상자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눈은 자기네 쪽을 향한 채 보고 있었다. 웃음이 터진 범한이 사사를 나무랐다.
“이런, 나쁜 버릇이 들었군. 보지 말아야 할 걸 함부로 보다니. 얼른 나가요!”
그러자 사사가 키득키득 웃고는 도련님과 아씨 마님께 인사를 올리고 문을 열고 나갔다. 사사가 손을 뒤로 한 채로 문을 닫을 때였다. 때마침 앞채에서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오던 사기와 마주쳤고 사사는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서둘러 막았다.
231화
사기는 완아가 시집올 때 따라온 몸종이었다. 그리고 사사와 지위가 같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죽이 잘 맞았다. 그런 사사가 붙잡고 못 들어가게 하자 사기는 안에서 주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차리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들고 온 음식을 바라보면서 볼멘소리로 말했다.
“도련님께서 막 돌아오셨잖아. 그러니 뭐 좀 드시게 해야 하는데.”
그러자 사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요기만 하는 간식이잖아. 앞채 저택에서 지금 제대로 된 밥상을 준비하고 있지 않아?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 도련님께서는······ 우선 뭐든 먹기만 하면 되는 거지.”
사기가 듣기에는 조금 거북스러울 정도로 경망스러운 말이었다. 특히나 자신들 같은 아랫사람이 아가씨를 음식 취급하며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사기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사사를 노려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쟁반을 들고 곁채로 들어갔다.
사사 입장에서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다 이내 조금 전 자기 언사가 매우 불경했다는 게 생각나 혀를 내밀고는 얼른 사기를 따라 자리를 피했다. 잠시 후 곁방에서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다가 이따금 작게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종 둘이 이미 예전처럼 재미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 * *
침소에 놓여 있는 커다란 침대 위.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이불 아래에서 범한의 오른손이 밖으로 불쑥 솟더니 빗 모양의 비녀를 집어 들었다. 집 안에 있는 동안에는 머리를 땋고 시원하게 있는 걸 좋아해서였다. 갈증이 난 범한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탁자에서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런 후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찻잔을 완아의 입가로 가져가 반 잔 정도를 마시도록 했다.
두 뺨이 살짝 발그레해진 채 부드러운 눈길로 범한을 보고 있던 임완아가 따뜻한 차를 받아 마셨다. 그러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수줍게 화내며 범한의 왼쪽 팔뚝을 깨물며 말했다.
“상공처럼 안달이 나 있는 이도 없을 거예요! 더군다나 밤이 되자마자 이러면 종들도 몽땅 알아챘을 거 아니에요! 이제 무슨 낯으로 집 안 사람들을 대하란 겁니까!”
그러자 범한이 히죽히죽 웃으며 모로 누워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매끄러운 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범한이 매우 만족감을 느끼며 말했다.
“잠시 떨어졌다 다시 만나면 신혼 때보다 더 친밀해진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 꽤 오래 떨어져 있었어요. 그러니 애정 표현 좀 했기로서니 누가 감히 이러쿵저러쿵할 수 있겠어요?”
그런 후 눈동자를 살짝 굴리며 임완아를 놀리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조금 전에 이렇게 조바심 내지 않았으면 내가 밖에서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다녔다고 의심했을 거 아니냐고요!”
임완아는 그제야 오늘 상공을 시험해 보려 했던 게 생각났다. 상공이 방으로 들어온 후 겨우 차 한 잔 마시는 정도의 시간 동안 상공에게 정신없이 굴욕을 당했기로서니 준비했던 말들을 몽땅 잊을 뻔하다니. 설마 상공은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무슨 술수라도 부리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임완아는 살짝 부끄럽고 굴욕적인 생각이 들어 범한을 가볍게 때리며 준비한 말을 꺼냈다.
“상공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잊을 뻔했네요. 아까 당신 들으라고 시를 읊었는데 뭐 느끼는 거 없어요?”
범한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준수한 얼굴에 이러한 행동을 더하니 외설적이라기보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못된 남자처럼 보였다. 부부 관계에서 범한은 줄곧 행동파였다. 임완아의 생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짜고짜 침대에 눕혀 놓고 사랑부터 나눈 후 다시 이야기하자는 식이었다. 한데 자고로 여자란 이러한 친밀한 접촉을 한 후에는 정을 준 낭군을 더없이 좋아하게 되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불평도 누그러지는 법. 그렇다 할지라도 이 일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말을 꺼내야 했기에 범한은 이번 기회에 과감히 내질러 버렸다.
“이런, 감히 날 안 들여보내 주다니 볼기짝을 쳐줘야겠군!”
그러자 임완아가 범한의 품으로 엎어지며 그윽한 음성으로 말했다.
“쳐보려면 치시지요! 그래 봤자 날 무시하는 그것밖에 할 줄 모르잖아요!”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설마 북제에서 닭 날개를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화내는 건 아니겠죠?”
임완아가 몸을 일으켜 한쪽 무릎만 꿇고 앉았다. 그러자 잠옷이 스르륵 흘러내려 한쪽 어깨가 살짝 드러났다. 임완아가 범한의 눈을 주시만 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뗐다.
“아까는 기분이 나빴어요.”
이 세상 여자들도 질투는 하겠지만 임완아처럼 이렇게 대놓고 하지 않을 터. 범한은 순간 당황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몇 마디 건넸다.
“대체 어디서 온 식초를 먹었을까?(중국에서 ‘식초를 먹다’는 ‘질투’를 의미한다.) 그 시는 내가 쓴 게 맞긴 하나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갑자기 식초를 먹다니, 무슨 뜻이죠?”
임완아는 선뜻 범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범한도 이제야 생각이 났다. 이 세상에는 ‘방 부인이 식초를 먹고 자살하려 해 자신의 뜻을 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은 웃으며 관련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옛사람의 기록에서 봤다는 가짜 근거를 대며 말이다.
임완아는 이야기를 듣고는 방 현령 부인의 기개에 감탄했다. 하지만 분명 상공이 꾸며 낸 이야기고 어쩌면 자기 들으라고 일부러 꾸며 낸 것일 거란 생각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나는 그 여자처럼 당신을 독점할 생각에 속 좁게 굴 사람이 아니에요. 사사와 사기도 언젠가는 첩으로 들여야 하잖아요. 그러니 일부러 그런 이야기까지 들먹이며 나에 대해 재단할 필요는 없어요.”
범한은 처가 뜻을 오해하자 껄껄 웃었다.
“날 ‘독점’하고 싶어 하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안 될 일인데.”
임완아는 어려서부터 황궁에서만 자란 여인이었다. 그러니 상공의 말 속에 숨은 독점욕이란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에 그냥 이어지는 범한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질투가 아니었다면 아까는 왜 방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한 거지요?”
임완아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한쪽 무릎만 꿇은 채로 있었다. 그리고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두 뺨을 볼록하게 부풀리고 한참 있다가 입을 뗐다.
“이제는 이 시가 천하에 다 퍼졌다는 걸 알았겠네요. 경도 사람이라면 시선 범한이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한 걸 모두 알고 있어요. 한데 북제에 사신으로 가서 어떤 한 여인을 위해 그 맹세를 깨다니요!”
“그냥 짧은 시일 뿐입니다. 당신도 듣고 싶다면 매일 당신을 위해 시를 지어 줄 수 있습니다.”
범한이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으며 말하자 임완아가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짧은 시라고요? 듣자 하니 상공이 북제 상경성에서 지낼 때 날마다 그 해당타타인가 하는 여인과 나돌아다녔다더군요. 같이 술도 마시고 비 내리는 거리도 함께 걷고. 이미 미담이 되어 있더라고요.”
범한은 화도 나고 씁쓸했다. 북제 황제가 일부러 퍼트린 소문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니 임완아의 처지가 난처했을 건 자명했다. 이에 범한이 해명을 하려는데 아내가 질문을 하기에 잠자코 듣기만 했다.
“상공, 말해 봐요. 그······ 해당타타라는 여인은 대체 어떻게 생겼어요?”
범한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선 해당타타를 한껏 치켜세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내에게 사실을 왜곡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해당타타를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모든 남자가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다른 여자를 깎아내리는 염치없는 짓을 당연하게 하기는 해도 말이다. 이에 범한은 잠시 생각을 좀 해본 후 말하기 시작했다.
“해당타타는 북제 국사 고하의 마지막 제자이자 가장 총애를 받는 제자예요. 북제 황궁에서도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지요. 이번에 내가 북제에 사신으로 간 건 우리 경국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해당타타 같은 중요한 인물과는 당연히 더 많이 친해져야 했답니다.”
그러자 임완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당타타란 낭자는 여기 남쪽에서는 명성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 다 알게 되었잖아요. 그녀의 북쪽에서의 지위가. 상공에게 딱 하나만 더 물을게요. 해당타타 같은 신분의 여인도 첩으로 둘 수 있어요?”
대체 어떻게 이런 기상천외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범한이 깜짝 놀라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임완아가 탄식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정도 여자라면 눈이 무척 높겠군요. 상공 정도가 아니면 그녀 눈에 차지 않을 거 같아요. 다만 그녀 신분으로는 여기에서 알맞은 자리를 찾기란 힘들겠죠. 그래서 내가 오늘 화가 났던 거예요. 분명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는데도 상공은 그런 거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일을 벌여서요.”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 해당타타란 여인을 취할 계획이 없는데 무슨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겠습니까? 완아, 방금 그 말은 좀 웃겼어요.”
임완아가 대경실색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 해당타타란 여인을 향해 동정심이 일어서였다. 이에 임완아가 범한을 꾸짖었다.
“상공, 설마 그녀를 이용만 하고 버릴 생각인 건가요?”
범한이 연신 손을 내저으며 꾹 참고 웃었다.
“이용하지도 않았는데 버리긴 뭘 버리겠습니까.”
* * *
잠시 후 임완아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요? 그렇다면 상공은 왜 시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 한 거죠?”
“마음을 얻는다고요?”
범한은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한참을 생각해 보다가 경도를 떠나기 전 자신의 계획과 상경성에서의 여러 일에 대해 아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고는 어느덧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흔들어 대며 말했다.
“해당타타는 무공이 대단히 높답니다. 4대 종사를 제외하면 그녀도 몇 안 되는 최강자 중 한 명이에요. 그녀와 왕래하게 된 이상은 나도 이기(利器: 예리한 무기)를 준비해야 했어요.”
임와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바로 상공이 말했던 마음 공략법인 건가요?”
“그렇지요.”
범한이 헤헤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양국이 교전하려면 심리적으로 상대방의 의지를 떨어뜨리는 게 우선이니까요.”
한참 후 임완아가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했다.
“상공, 그 계획은······ 조금 파렴치해 보이네요.”
* * *
집안 내 풍파는 이렇게 일기도 전에 평정되었다.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오늘 1 황자와 길을 먼저 쓰는 문제를 두고 다투었던 걸 처에게 말해 주었다. 완아는 황궁 안에서 자라 조정 일과 관련해서는 범한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이에 혼인한 후부터 범한은 계획을 세울 때는 아내와 상의하는 게 점점 습관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임완아가 범한의 말을 들으며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언빙운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그가 1 황자에게 밉보이는 짓을 할 필요가 없었거니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말이다. 범한은 비밀로 하고 있는 걱정거리까지 처에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이에 따스하게 웃으며 말했다.
“완아, 당분간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말아 줘요. 대신 그 일로 황실에서 나와 1 황자마마 사이가 훗날 적이 되었다고 믿으실지 아닐지에 대해서만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임완아가 우습다는 듯 범한을 잠깐 쳐다보며 말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범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왜요?”
임완아가 한숨을 푹 내쉰 후 답을 해주었다.
“사실 상공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어요. 네, 그래요.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감찰원은 모두 음험하고 무서운 관청이에요. 6부 관원들 전부 뒤에서 감찰원을 검둥개라고 부르며 욕하고 있죠. 하지만 모두가 감찰원은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군 측, 추밀원, 서로군 같은 곳은 원래 감찰원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범한은 금방 이해를 했다. 군대가 전쟁에 나서려면 가장 먼저 정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감찰원이 천하에 깔아 둔 밀정의 첩보망은 군 측에게는 매우 튼튼한 지원군 같은 것이었다. 병사들의 피를 덜 희생하게 만들어 주는. 그러니 군 측은 감찰원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232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일단 한 가지 이유는 나왔네요. 그런데 1 황자마마께서 경도로 돌아오신 이상은 쥐고 계신 병권을 반납하셔야 하잖아요. 그리고 군 측이 어떤 의견을 내놓든 그분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것도 아니고요.”
왜 황궁에서는 범한이 황자 셋과 동시에 결연을 맺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임완아는 이런 범한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어쩌면 상공이 잊고 있었나 봐요. 세분 황자 오라버니 중 저와 가장 가까운 분이 바로······ 1 황자 오라버니세요.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그분이 당신을 원수로 간주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범한이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아는 한 임완아는 황궁에서 자랐고 대부분의 시간을 영 재인의 궁에서 지냈다. 그러니 임완아가 1 황자와 가장 친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자신이 계산을 할 때 무심코 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고의로 간과해 버린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어쩌면 내면 깊은 곳에서 처와 그 황자들을 한데 묶어 생각하는 걸 거부해서일지도 모른다.
임완아는 사실 범한의 걱정거리를 알고 있었다. 이에 부드럽고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내 보기엔 상공이 걱정이 조금 많은 것 같아요.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건강하세요. 그러니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한참 후에야 일어날 거예요.”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임완아를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먼 앞날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면 가까운 시일 내에 일이 터지게 마련이에요. 이번에 경도로 돌아와 분위기를 보니 알겠더라고요. 내년에 내가 정말로 황실 금고를 물려받게 되면 당신의 태자 오라버니, 1 황자 오라버니, 2 황자 오라버니께서 날 놓아주려 하지 않으실 것 같더군요.”
“작년에 창산에서 내가 상공에게 했던 제안 어때요?”
임완아는 이 순간만큼은 열예닐곱 살 먹은 아가씨가 아닌 나이 많은 책사 같았다. 어찌 되었든 장 공주의 친딸이니 이 방면에는 많든 적든 유전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범한도 줄곧 그녀의 의견을 신뢰했던 것이고. 하지만 창산에서의 제안은 아직까지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범한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느릿하고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스스로 권한을 축소한 건 도리상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나 같은 젊은 신하가 손에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쥐고 있다는 건 너무나 과중한 성은을 입은 것이고, 너무 큰 권력을 쥔 것입니다. 이는 원래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완아, 황실 금고는 절대 포기 못 해요.”
임완아는 왜 부군이 황실 금고만큼은 포기 못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내 된 입장에서 묵묵히 지지를 해주어야 했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범한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황실 금고를 포기 못 한다 했는데 감찰원은 더욱 포기 못 하겠어요.”
황실 금고가 황금 광산이라면 감찰원은 그 황금 광산을 지키는 군대였다. 그러니 황실 금고만 갖고 있다면 범한은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하는 벌거벗은 미인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곧 황실 사람들에게 멋대로 능욕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임완아가 탄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상공, 많이 힘드실 거예요.”
임완아가 갑자기 범한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자신 있어요?”
범한이 엷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감히 장담은 못 하겠네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잘난 척과 자기 연민이 좀 심한 편이잖아요.”
임완아가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돌연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내게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해요.”
범한이 흥미를 보였다.
“무슨 방법이죠?”
임완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에서 그런 건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해당타타 낭자를 이 집으로 들이는 거예요!”
범한이 대경실색했다. 처가 내놓은 계획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임완아가 흥분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당타타 낭자는 9품상의 강자잖아요. 상공도 그녀가 언젠가는 대종사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고요. 우리 집안에 대종사가 있다고 생각해 봐요. 게다가 그녀에게는 고하 문파라는 뒷배가 있어요. 그러면 아무리 경국의 황자 오라버니들이라고 해도 감히 상공을 어쩌지 못할 거예요. 황제 폐하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을 구슬리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셔야 하겠지요. 섭중 가문을 봐요. 섭류운 한 분 나왔을 뿐인데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십여 년 동안 최고 가문으로 쳐주고······.”
범한도 임완아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누구든 해당타타를 처로 들인다면 그것은 곧 집안에 단서철권(丹書鐵券: 대대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문서)과 면사금패(免死金牌: 죽을죄에도 면죄부를 주는 패)를 들인 것과 같았다. 하지만 범한은 이것이 자신의 처가 던진 마지막 시험이란 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밉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생긴 게 그냥 그래요.”
임완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범한을 호되게 꾸짖었다.
“이 색마 같으니!”
범한은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 순간 속으로는 처가 언급한 섭씨 가문에 대해 생각했다. 섭중은 경도 수비이고 섭령아는 곧 2 황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있었다. 대체 황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대종사? 만약 일이 정말로 그런 식으로 발전한다면 범한이 봤을 때 황궁에 있는 그들은 섭류운이란 대종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경도에 없는 동안 섭중 대인이 경도 수비에서 사직하지 않았나요?”
임완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다시 물었다.
“어머니께서 편지는 보내셨어요?”
그가 어머니라고 한 이는 당연히 신양에 있는 장 공주였다. 비록 임완아와 그 절세 미녀 사이에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건 범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처 앞에서만큼은 존경심을 표했다.
임완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간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범한은 가엾다는 생각에 그녀의 미간을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요즘 몸은 어떠십니까? 지금까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느라 가장 중요한 일을 묻지 않고 있었다니 소인, 맞아야겠습니다!”
임완아가 웃었다.
“비개 대인이 자주 와줬어요. 그 환약을 계속 먹었더니 많이 좋아진 게 느껴질 정도예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창산에서 요양을 잘했나 보네요. 올해도 겨울이 되면 온 가족이 창산으로 갑시다. 작년에는 온천에 몸을 담그지 못해서 조금 애석했거든요.”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사랑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가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여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련님, 아씨 마님. 식사하세요. 어르신께서 이미 여러 번 재촉하셨습니다.”
범한이 괴성을 지르며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원래는 뒤채에서 잠깐 있다가 곧장 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갈 생각이었다. 잠시 육체적인 놀이로 평안을 좀 얻고 가려 했을 뿐인데 도리어 이 보드라운 바닷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버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도 몽땅 잊은 채로 말이다.
범한은 아버지의 엄숙한 얼굴이 떠오르자 그분이 속으로 얼마나 화를 내고 계실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천 리 길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께 인사는커녕 자기 아내에게 쪼르르 달려가 놀기부터 하다니. 이는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예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완아도 범한을 원망하며 서둘러 옷을 입고 머리를 빗고 단장을 했다. 사사와 사기는 일찌감치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들어와 전속력으로 두 주인의 의복과 머리 매무시를 정리해 주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아무것도 안 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등잔을 든 여종을 따라 앞채로 향했다.
대청에 들어서니 여종들이 한쪽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호부 상서 사남 백작 범건은 중앙에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유씨는 이미 정실부인이었지만 예전에 하던 게 습관으로 굳어서인지 지금도 백작 옆에 서서 잔이며 젓가락 따위를 챙기고 있었다. 범약약은 백작의 왼쪽에 앉아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범사철은 말석에 앉아 식탁 아래에 손을 숨기고 범한이 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범한과 임완아가 들어오는 게 보이자 범약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사철도 서둘러 물건을 소맷자락 속으로 숨기고 누나를 따라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정중앙에 앉아 있던 범건은 범한은 쳐다보지도 않고 며느리에게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며늘아기의 신분이 특수하다 보니 냉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명문가에서 식사할 때는 지켜야 할 규율이 많았다. 그동안은 범건이 공무가 바빠 가족들과 함께 정식으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범한이 먼 길에서 돌아온 날이지 않은가. 그러니 자연스레 예전보다 훨씬 더 규율을 지키는 식사 자리가 마련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식탁 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함께 식사하는 시간은 그렇게 겨우겨우 끝을 맺었다. 그러자 그제야 범건이 아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게 작위가 내려질 것이다.”
1등급 남작, 정2품.
범한은 이 작위의 경중을 따져 보고는 이 일로 야기될 비난이 걱정되었다. 그런데 사실 범한은 지나치게 소심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북제 사절단으로 다녀온 일은 겉으로 봤을 때 그리 험난한 일은 아니지만 고된 임무인 건 맞았다. 초봄 조정 조회 석상에서 황제 폐하께서 임약보 재상과 범건 시랑의 체면을 깎아내린 후 범한을 경도 밖으로 억지로 내몬 거니까. 물론 그 일이 있은 후 범건이 호부 상서가 되고, 이번에 다시 범한에게 남작이란 작위가 내려지긴 했어도 세인의 눈에는 그다지 기인한 일로 비치지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이 봤을 때는 사남 백작가 가문에 단순히 두 번째 보상이 내려진 것뿐이니까 말이다.
더욱이 경도로 돌아온 후 세상 사람들은 왜 사남 백작가 아들에게 천자께서 큰 상을 내리시려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은 그의 문학적 재능 때문이었다. 문치를 장려하는 황제 폐하의 정책과 맞아떨어져서였다. 또한 범한이 이번 북제행에서 서적이 가득 든 마차까지 끌고 귀국했으니 황제 폐하께서 그에게 상을 하사하는 건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가 범한에게 내린 직책이 고작 남작에 불과했어도 작위를 하사했다는 건 그만큼 그를 귀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는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어찌 되었든 이득을 볼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범한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성지는 언제쯤 도착할까요?”
이 시각 부자는 서재에서 이미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뒤였다. 범한은 이번 북제행에서 숨길 필요가 없는 부분만 골라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러다 감찰원 사무와 겹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면 범건은 범한이 난색을 표하기도 전에 먼저 손을 흔들며 그 부분은 건너뛰고 말하도록 했다.
사실 범한은 아버지와 함께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려서는 담주에서 자랐기 때문이고 경도로 들어온 후에는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둘의 대화는 대개가 이 단출하고 특별한 서재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니 서로 부자의 정을 나눈다든가 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겠지만, 범한은 아버지의 귀 쪽으로 희끗희끗하게 난 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자 북제의 풍류 가인들이 겪은 모진 풍상이 떠오르며 암담한 기분과 함께 양심의 가책이 밀려들었다.
진평평 원장 대인의 말이 맞았다. 사남 백작은 범한에게 빚진 게 없었다. 오히려 범한이 그에게 많은 빚을 졌지.
“내일 입궁하면 아마도 성지가 내려질 게다.”
호부 상서 범건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유씨가 밤마다 가져다주는 과즙을 맛있게 음미하며 말했다.
“이번에 북제에서 일을 잘했더구나. 진평평 원장이 네게 상이 내려지도록 주청을 올렸단다. 폐하께서도 아주 흡족해하시고.”
233화
범한은 이번 북제행에서 주로 자신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처리했지, 조정을 위해 한 일은 사실 없었다. 언빙운의 귀국도 원래 순조롭게 끝날 일이었으므로 결코 힘들일 일도 아니었다. 이에 범한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북제에 가 있는 동안 저는 한 게 없었습니다.”
“가끔은 아무 일도 안 한 게 잘한 것일 때가 있느니라.”
범건 상서가 서서히 눈을 떴다.
범한은 살짝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제 경도성 밖에서 1 황자와 길을 두고 다투었던 일을 두고 부친이 훈계할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건은 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예전에 네게 감찰원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했거늘, 내 말은 듣지 않고 오히려 진평평 그 늙은 개의 꼬임에 빠져 감찰원과 한통속이 되다니·········.”
범건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분이 좀 상한 사람처럼 이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편안하게 황실 금고나 지킬 것이지. 누가 봐도 얻기 힘든 기회이거늘!”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오나 소자 생각으로는, 물론 아버님께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계시겠지만 신양 쪽에서는 이런 식으로 손을 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먼저 도발한 쪽은 장 공주마마이십니다. 그런데도 제가 감찰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분과 어찌 맞설 수 있겠습니까.”
범건 상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이번 일에 대해 너무 엉성하게 따져 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장 공주마마의 반응이 이리도 강렬할 줄이야. 이에 범건이 손을 내저었다.
“그분은 황제 폐하의 친누이니라. 황태후마마께서 가장 아끼는 딸이고 완아의 생모시지. 그러니 과거는 그냥 과거로 묻어 두어라.”
범한은 아버지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란 사람은 단순히 재수 없다고 치부하며 그냥 넘어갈 부류는 아닌 것 같았지만 황실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허락된 범위 내에서 이 가문을 위해 크고 작은 이익을 챙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줄곧 범한 에게 감찰원을 멀리하라고 강력히 요구했었다. 경도의 이 이상하고 복잡하며 음침한 정치판 투쟁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는다며 말이다.
하지만 황실 금고의 돈과 조정에서의 정치, 이 둘은 늘 한 쌍과도 같은 사이였다. 그러니 범한이 보기에 아마도 아버지는 처음부터 이 중요한 원칙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아버지가 마음을 써준 것만큼은 그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 염려 마세요. 소자, 언제나 조심하고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범건이 만족스러워했다.
“진정한 강자만이 약해 보일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약자는 애당초 무능한 사람이니 약해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지. 그러니 이 이치를 잘 생각해 보거라.”
아버지의 뜻을 명확히 이해한 범한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돌연 어떤 일이 생각나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 경도에 돌아온 후에도 고달을 포함한 일곱 호위들이 계속 저와 함께 다녀도 되나요?”
범건 상서가 아들을 쓱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줄곧 엄숙함을 유지하고 있던 눈동자에 따스한 웃음을 띠었다.
“너도 알지 않느냐. 이 아비가 황실을 대신해 호위를 훈련하고 관리하고 있어도 그들을 배정할 권한은 황실에서 쥐고 있다는 걸 말이다. 네가 그들을 데리고 있고 싶다면 내 황궁에 들어가 물어봐 주마. 하나 황제 폐하께서는 윤허하지 않으실 게다.”
범한이 잠시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고달을 포함한 일곱 호위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나 과묵한 고수들이 호위 무사로 있어 준다면 자신의 안전을 최대한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무도하강 근처 습지대에서 일곱 호위와 연합해 공격하자 해당타타도 쩔쩔매지 않았던가.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감찰원 6처에 있는 검수(劍手: 칼잡이, 검의 고수)들보다 실력이 더 높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앞서 왕계년을 통해 조직한 계년조(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물론 계년조는 가장 믿을 만하고 충성스러운 이들이었다. 또한 왕계년의 지도 아래 정보 수집이며 다른 일까지 두루두루 실력을 쌓아 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무공이 약한 게 흠이었다.
하지만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호위는 원래 황자들을 호위하려고 둔 이들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서로군 근위병 내에도 몇 명 배치되어 1 황자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가끔씩 호위를 대신들에게 붙여 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건 전부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였다. 예를 들어 범한의 장인 임약보 재상이 사직하고 낙향할 때 황제가 그에게 네 명의 호위를 붙여 준 경우처럼 말이다. 이는 재상이 평생 국가에 공헌한 것을 치하하고 여정의 안전을 도모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임무를 완수한 호위는 곧장 경도로 돌아와 눈에 띄지 않는 민가로 사라져 버리도록 되어 있었다.
범한이 이리 많이 알고 있는 건 범건이 황제 폐하를 대신해 호위를 관리하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사절단이 경도로 돌아왔는데도 호위가 자신을 따라다니면, 그리고 그 사실을 황실에서 알게 되면 골치 아파질 것이 분명했다.
아들의 얼굴에 애석한 기색이 역력하자 범건 상서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 아이가 제 어미를 많이 닮아 세인을 능가하는 능력을 지녔지만 아직 평범한 젊은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에 범건이 범한에게 무언가를 일깨워 주었다.
“네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사천립이란 수재가 자주 문안 인사를 왔단다. 몇 번 만나봤는데 그야말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인재더구나.”
범한은 놀라 잠시 머리가 멍했지만 이내 그 뜻을 이해했다. 자신이 감찰원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고 또 스스로를 위해 조정에서의 앞날까지 도모하고 있다는 걸 아버지께서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그들 문하생을 잊지 말라는 일깨움을 주신 것이었다.
범한은 현재 천하 문인의 마음속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전 재상인 장인어른이 남겨 둔 문하생들을 통해 조정에서 조력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자기 사람들이 향후 조정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아버님의 속뜻을 이해한 범한은 절로 감탄했다. 하지만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제대로 된 감정 표현법을 배우지 못한 탓에 그냥 아버지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절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범건 상서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범한에게 거처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 순간 범한은 잠시 어떤 일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누이의 혼사와 관련해서는 너무 일찍 거론하면 안 되고 차근차근히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에 범한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서재에서 나섰다.
범건 상서는 서재를 나서는 범한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뒤쪽으로 제법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 있자 그의 눈에서 만족감과 안도감이 흘러나왔다. 이런 아들을 두었는데 아비로서 뭘 더 바랄까. 범건이 그릇에 남아 있던 과즙을 마저 마셨다. 그는 이 아이가 무엇을 눈치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의 심성을 놓고 보자면 상대방이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당연히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니 범씨 일족의 앞날은 이 아이에게 달린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건은 어느새 이미 경국의 권력 중심에서 떠난 임약보 전 재상을 떠올리며 탄복하고 있었다. 그 늙은 여우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자신은 그리 많은 대가를 치르며 십여 년 동안 고생을 했는데 그는 고작 딸 하나 낳아 놓고 그리 좋은 운을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 * *
9월은 번뇌할 것조차 없는 평범하고 무료하고 평탄한 한 달이었다.
범한은 마차에 앉아 차창의 나무살을 가볍게 때리며 기이한 절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박자에 맞추어 옆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입궁은 절대 다수의 신하들에게는 매우 엄숙한 일인데 범한은 온통 무료하다는 생각뿐이었다.
9월 초하루 경도로 돌아왔을 때 아내, 아버지와 함께 결심한 게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동안 조정과 경도 안팎에서는 자신을 번뇌하게 만드는 일이 전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면 황궁에서 작위를 받고 고개를 조아릴 것이고, 그런 후 다시 감찰원에 가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긁어 오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 기분은 다시 창산으로 돌아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창살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갑자기 멈추었다. 문득 누이의 혼사에 이어 이홍성 이놈이 저녁에 유정강에서 술판을 벌여 자신의 환영회를 해주겠다는 약속이 생각나서였다. 범한의 얼굴에 잠시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 평범하고 무료한 9월이 이제 보니 그냥 개 같은 인생 그 자체였던 것이다.
* * *
오늘은 아침 일찍 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에 아침 댓바람부터 많은 대신이 황궁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듣자 하니 여러 해 전에는 일부 나이 든 대신들이 근면함과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한밤중에 관복으로 갈아입고 여명이 뜨기도 전에 황궁 문 앞으로 나와 기다렸다고 한다. 황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그래서 그 늙은 신하들이 고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밤중이면 유달리 귀에 거슬렸던 소리가 꽤 오랫동안 안 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황제는 명예를 탐하는 자를 가장 혐오했다. 이에 대신들은 황궁 문 앞에 너무 일찍이도, 그렇다고 너무 늦게도 도착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자 누가 낸 묘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몇몇 대인들은 새로 난 길에 위치한 찻집에 자리를 하나 예약해 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동이 터올 때쯤 저택을 나와 찻집, 예약해 둔 자리로 가 기다렸다. 그사이 그들은 종자들을 궁문 앞으로 보내 동정을 살피도록 했고 종자들이 정보를 보내오면 적절한 때에 가서 줄을 서는 방법을 활용했다.
감찰원 제사는 품계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잊힌 신비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범한이 바로 이 제사였다. 그것도 경국이 개국한 이래 첫 번째 제사. 그러니 지금 범한의 품계는 태학 4품 관원에 불과했다. 황제 폐하가 사절단에게 경과 보고를 듣지 않는다면 범한은 조회에 참석할 자격조차 없는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관복을 차려입는 데 반나절씩이나 소모할 필요가 없었고 동이 트자 느긋하게 백작가에서 출발해 황궁으로 향했다. 그 결과 그는 황궁 문이 열리기 전에 도착했는데도 대다수 대신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상태였다.
한데 사람은 잘나갈수록 타인에게 질시를 받는 법. 더군다나 경도로 들어온 지 불과 1년 반밖에 안 되는, 잘나가도 너무 잘나가는 젊은 후배라면 더더욱 그렇게 되는 법. 그리고 그 후배란 자가 대부분 대신들의 체면을 손상시켰고, 상서 하나는 죽게 만들었으며, 다른 상서 하나는 쫓아낸 놈이라면 더더욱 질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터. 이른바 큰 자라가 울면 일반 자라도 따라 울고,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에 잘생긴 감찰원 제사가 하품을 하며 말에서 내리자 대신들은 그를 경계심과 혐오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범한이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대신들은 각 부의 상서들과 각 사(寺)의 정경(正卿)들이었다. 2품 이상이 되는 관리들은 모두 황제로부터 봉호를 받은 아내가 있었고, 황제로부터 받은 하사품을 집에 몇 개씩은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이도 어린 범한이 이들 대신보다 늦게 오다니······. 만약 범한 뒤에 범건 상서가 없었다면, 특히 그 절름발이가 없었다면 이들 경국의 진짜 고위 관리들은 일찌감치 범한에게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이렇듯 상황이 여의치 않자 대신들은 범한을 고깝지 않은 싸늘한 눈으로 잠시 흘겨보고는 거만하게 고개를 돌렸다. 군신들 중에는 과거에 임약보가 발탁한 인물 몇몇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몇 마디 해주려 서 있던 줄에서 벗어나 범한에게 가려 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멸시의 눈빛을 따갑게 쏟아 내고 있는 걸 알고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려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대신 따스한 눈길로 범한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대신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자 범한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얼굴에 평온한 미소를 띠고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자세로 두 손을 모아 대신들을 향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이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범건 상서가 오늘따라 늦게 온 것이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온 게 아니었다. 이에 범한은 서둘러 아버지를 맞이하러 갔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는 아버지를 조심스레 부축했다.
범건 상서가 범한을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아비가 그 정도로 늙지는 않았단다.”
234화
범한이 배시시 웃었다. 자기 연기가 좀 과했다는 걸 알아서였다. 범건 상서는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관원들은 알 수 있었다. ‘늙은 돈 바구니’가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다는 것을. 그게 아니라면 아들의 손을 계속 붙잡고 걸어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범건 상서가 직접 아들을 이끌고 오자 대신들도 더 이상 거만하게 굴지 못하고 속속 범한과 인사를 나누었다. 짧은 시간 동안 범건 상서는 범한의 손을 이끌고 실권을 쥔 대신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인사를 시켰다. 그때마다 범한은 숙부님, 백부님, 대인 등의 호칭을 써가며 응대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젊은이와 다시 마주하게 된 대신들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애당초 임약보의 사람이었던 이들은 매우 다정하게 반응했다. 심지어 범한 대인은 젊은 나이에 능력도 출중하다는 등등의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싸늘하게 바라보는 대신들도 있었다. 인사는 나누었어도 그들 얼굴에서는 여전히 찬바람이 쌩쌩 일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젊은 대인이 무엇으로 유명한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범한을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 뒤에 음험함을 숨긴 자라고 생각했다.
세 명의 황제를 섬긴 원로대신 이부 상서가 범씨 부자를 바라보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개국 이래로 그리고 이전 위나라 때까지 합쳐 사남 백작가처럼 부자가 함께 조정에 나온 경우는 극히 드문 일입니다. 과연 봄바람을 만난 듯 득의양양하군요.”
그러자 범건이 껄껄 웃었다.
“모두가 하해와 같은 성은 덕분이지요.”
그는 상대방의 비아냥거림을 못 알아들은 양 모든 영광을 황제 폐하에게 넘겼다. 한편 범한은 살짝 웃고 말았다. 이와 같은 장소에서 자신에게는 끼어들어 말할 여지가 없음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에 범한은 아예 입을 꾹 닫고 가만히 있었다.
* * *
바로 이때 세 명의 태감이 천천히 궁문을 나섰다. 그리고 중간에 선 지위가 가장 높은 태감이 불진(拂塵)을 휘두르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드시지요.”
그러자 대신들이 인사를 멈추고 과하다 싶게 의관을 정제하고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습관 때문일 테지만 그들은 궁문 앞에서 창을 들고 빽빽하게 서 있는 금군과 문 안쪽에서 칼을 들고 있는 호위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잠시 후 대신들은 어느새 세 명의 태감을 앞질러 가고 있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가슴을 쭉 편 그들에게는 나라의 주인다운 기개가 있었다.
범한은 조정 조회에 온 건 처음이어서 아버지와 같은 줄에서 걸어가는 게 불편했다. 이에 약간 불쌍한 사람처럼 슬금슬금 대열의 맨 마지막 자리로 가 태감 셋과 함께 걸었다. 이들 중 우두머리 태감은 범한도 잘 아는 후 내관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 범한은 그에게 단 한마디도 건넬 수 없었다. 더욱이 당당하게 은표를 건넬 수도 없었다. 이에 범한은 후 내관을 향해 살짝 웃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지금으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후삼아는 왜 자신이 처음부터 범한 대인을 믿을 만한 뒷배라고 여겼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범한 대인이 자신을 볼 때마다 진실한 웃음을 지어 보여 주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웃는 모습이 다른 대신들과는 달라서라고 말이다. 다른 대신들은 필요할 때만 잠시 자신에게 따스하게 대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외의 경우에는 아무리 다정하게 웃어 준다 해도 그들 웃음 속에는 항상 애매모호하니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멸의 느낌이 담겨 있었다.
* * *
범한은 조회에 처음 참석하는 거라 긴장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문관들이 서 있는 대열의 맨 끝, 그러니까 용좌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에 패도의 기와 뛰어난 청력이 없었다면 황제의 말 중 제대로 들은 건 하나도 없을 뻔했다. 범한은 용좌에 앉아 있는 저 중년 남자가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범한은 마음을 살짝 느긋하게 먹고 태극궁의 내부 장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입궁은 여러 차례 해봤지만 그때마다 범한은 후궁 처소에서 마마님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완아와 산책하는 게 거의 전부였다. 황궁의 정전(正殿)이자 지금 조회가 열리는 태극궁은 멀리서 몇 번 본 게 전부였을 뿐 이곳까지 들어와 볼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들어와서 보니 태극궁도 거기서 거기였다. 대들보 위에 용과 봉황 조각과 화공이 그린 정묘한 그림이 있어 붉은 기둥은 위엄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넓은 궁전 안에는 맑은 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는 가운데 황동을 주조해 만든 선학과 기이한 동물들이 옆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하늘과 물이 어우러진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북제 황궁과 비교하면 훨씬 별로였다.
그래도 이 대전 안에는 무언가 다른 기운이 있었다. 권력의 기운 같은 것이 말이다. 그 기운은 용좌에서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고 대신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한데 그것은 용좌는 아니었다. 그러니 거기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가 바로 그 기운의 출발점이었다. 그의 궁전은 북제만큼 넓고 아름답지도 않았고 동이성의 것보다 실용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천하 사람들은 그가 세계 최고의 권력자라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조회의 주요 의제 중에는 자연스레 1 황자와 사절단에 관한 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성 밖에서 길을 두고 다툰 것에 관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도찰원 어사가 그 일과 관련해 상소를 쓴다 해도 오늘 그 상주문을 들고나올 수는 없었다. 이는 절대 어사들이 하룻밤 사이에 상소를 쓸 능력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성급하게 탄핵했다가 실수를 저질러 황제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오늘 조회에서 의제로 삼은 건 서로군의 향후 안배 및 병사들의 논공행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1 황자가 이미 왕으로 봉해졌으니 그 휘하의 10만 병사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해주어야만 했다. 이에 관련 내용을 추밀원이 내놓았고 대신들 모두 이견이 없었다. 비록 지금 황제 폐하가 문치를 증시하고 있기는 해도 경국은 어찌 되었든 무력으로 나라를 세웠고 용맹함이 기풍을 지닌 나라였다. 그러니 그 누구도 이 일과 관련해 군 측을 불쾌하게 만들 리 없었다.
이어 사절단도 그간 경과 내용을 보고했다. 홍려사는 북제 송례단(送禮團)을 대신해 국서를 전달하고 새로 확정된 천하도와 해도를 바쳤다. 황제는 가만히 앉아서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경국의 영토가 훨씬 더 확장된 걸 확인하자 그의 눈은 어느 순간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신하들이 자연스럽게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황제에게 대놓고 아첨한 것이었다. 한편 추밀원의 나이 많은 대신들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 땅은 모두 젊은 병사들이 칼과 창을 들고 피와 살을 맞바꾸어 가져온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협상 과정에서 대부분의 역할을 한 건 사실은 신기물과 범한을 포함한 홍려사 관원들 및 감찰원 4처였다. 한데 대부분의 신하는 이 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의식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일부러 무시하고 모른 척할 가능성이 더 컸다.
조정 대신들이 진심으로 기뻐하자 어느새 범한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도 이 큰일에 조금은 기여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범한은 문득 장 공주가 언빙운을 북제에 팔아넘기지 않았더라면 경국이 더 큰 이익을 얻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장 공주마마가 소은을 북제로 되돌려 보낸 건 정말로 대단한 수이기는 했다. 북제 조정 내부에 혼란의 씨앗을 심고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질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언빙운을 북제에 넘긴 것과 소은을 돌려준 것을 비교해 보면, 이 둘 사이에는 단순히 단기적 이익을 볼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 이익을 볼 것인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 * *
천하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이 중년 남자는 마음속 기쁨을 강하게 억눌렀다. 강한 통제력으로 곧장 평정심을 되찾고는 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신하들이 황제를 칭송하는 소리를 들으며 담담하게 맨 뒤쪽에 있는 신하를 훑어보았다. 그 녀석의 미소 지은 얼굴을 보니 그는 더 흐뭇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손을 휘휘 내젓자 단 아래에서 붓을 쥐고 있는 태감과 중서령이 조서(詔書)를 공손히 들었다. 그리고 이내 살짝 날카로운 음성이 이미 준비해 둔 조서를 읽기 시작했다.
우선 서로군 병사에게 상을 하사하는 일과 관련한 내용이 나왔다. 한데 대상이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1 황자와 군 측의나이 든 대신들에게도 의견을 구해야 하므로 며칠 더 늦추어 결정하기로 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이 조서의 내용은 자연스레 사절단에게 상을 내리는 게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대전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사절단은 귀국하면 일반적으로 상을 하사받으니 대신들은 그 내용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태감의 날카로운 음성 속에서 오로지 범한이란 이름이 나오는지만 확인하고 있었다.
“······1등급 남작, 정2품에 봉한다.”
신하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황제 폐하께서도 분별력은 있으셨다. 사남 백작 가문과 관계가 어떻든 대신들은 범한이란 젊은이가 높은 작위를 하사받지 않기를 바랐다. 모두 계산이 다르고 입장 달랐지만 결론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된 의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물, 범한 등은 성은에 감사하는 의미로 곧장 대전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른 신하들이 ‘더 아뢸 것이 있으면 말하고 없으면 이만 퇴청하라.’라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용좌에 앉아 있는 황제가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그대들은 남아 있거라.”
말을 마친 황제의 눈빛이 용좌로부터 가장 가까운 고관들에게 향했다. 임약보가 재상직에서 사직한 후 조정은 아직 적합한 후임자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내각이 처리해야 할 일은 몇 명의 대학사와 상서들이 나누어 하고 있었다. 요 며칠 조회 후 황제는 자주 그들에게 남아 있도록 한 터였다. 그리고 오늘은 태자와 1 황자도 대전에 들어 있었으니 자연스레 함께 논의할 사항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나머지 대신들은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문안 인사를 마치고 대전을 나서기 위해 속속 뒤로 물러났다.
한데 갑자기 퇴청하는 대신들에게 질투심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들려왔다.
“범한, 너도 남아 있거라.”
대신들이 조금 이상한 표정으로 범한 옆을 지나며 태극전을 나섰다. 범한은 불편했다. 잠시 후 어전 대화에서 어떤 국면이 펼쳐질지 알고 있어서였다. 자신이 아무리 감찰원 제사이기는 해도 경력도 적고 나이도 어리니 대신들 사이에 껴 있기엔 너무 생뚱맞은 일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담담하게 응해야 하지 않는가. 이에 범한은 조심스레 노대신들 뒤로 가 태감의 인도에 따라 대전 뒤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세 번 방향을 바꾸고 두 번을 돌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편전에 도착했다. 천장 쪽이 덮여 있어 그런지 공간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다. 왼쪽으로 사람 키 높이의 빗금무늬 나무 선반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서적이 채워져 있었다. 범한은 서가의 배치 상태를 속으로 따져 보고는 이곳이 소문으로만 듣던 어서방일 거라 생각했다. 범한은 순간 웃음기를 싹 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생에 자주 보던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가 얼핏 떠올라서였다.
황제는 태감들의 도움으로 벌써 용포를 벗고는 남색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허리에 옥대(玉帶)를 차고 있었다. 매우 편안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긴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누이고 있던 황제가 손을 뻗어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대충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태감들이 서둘러 앉는 부분이 비단으로 마감된 둥근 모양의 의자를 일곱 개 들고 들어왔다. 그러자 나이 든 일곱 대신이 몸을 굽혀 감사 인사를 하고는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235화
태자와 1 황자는 예절 바른 자세로 황제가 앉아 있는 긴 의자 옆쪽에 서 있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앉을 자리가 모자라기는 했어도 두 황자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만으로도 이곳 규칙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원래 이곳에서 준비해 두던 의자 수는 항상 일곱 개였다. 그런 곳에 젊은 관원 하나가 더 들어와 있자 어서방의 태감은 난처해졌다. 왜냐하면 이제껏 범한을 본 적이 없어서였다. 단순히 잠시 말을 전하러 온 하급 관원인지 아니면 존귀한 신분인지 종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들은 모두 앉아 있는데 혼자 서 있다 보니 범한 혼자 튀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버지인 범건 시랑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범한에게는 눈길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으며 눈에 잘 띄지 않을 자리를 찾을 때까지 계속 뒷걸음질 쳤다.
범한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 모습을 태자가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살그머니 웃어 주었다. 하지만 범한은 감히 눈빛으로만 응답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실수로 1 황자가 황제 폐하 옆에서 슬그머니 하품하는 걸 보고 말았다. 이에 범한은 1 황자가 어제 경도로 돌아온 후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으면 저렇게나 피곤해할까, 라고 생각했다.
유정강 강가 찻집에서 처음 만난 후 황제와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 건 범한에게는 처음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이에 범한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살며시 들어 보았다. 그리고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재빨리 황제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전생 청나라 때 아버지인 황제의 용안을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모천안(慕天颜: 용안을 보고 싶어 하다는 뜻도 있다)이란 관원이 있다는 기록은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마주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미녀 보듯 방자하게 감상할 수는 없는 게 황제의 용안 아니던가.
아주 빠르게 슬쩍 본 것이었지만 범한은 상대방의 용모를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하마터면 주변을 둘러보는 황제의 눈빛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황제가 범한을 잠깐 바라보았다. 하지만 범한이 자신을 본 것을 가지고 탓하지는 않았다. 범한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느끼거나 한 건 아니었다. 잠시 후 태감이 흥경궁에서 어린 황자를 데리고 공부하던 2 황자를 데려왔다. 2 황자는 막내 황자의 손을 잡아 이끌며 어서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형제간의 화목한 모습에 황제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만족감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태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 욕을 퍼붓는 중일 수도 있었다.
* * *
“범한에게 앉을 것을 가져다주어라.”
네 명의 황자가 긴 의자 주위에 나란히 서자 황제는 그제야 범한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 분부를 내렸다.
범한이 살짝 놀라 답했다.
“소신, 어찌 감히 앉아 있을 수 있겠나이까.”
범한의 품계로 어서방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거늘. 더군다나 황자 넷도 아직 서 있는데 어찌 그가 감히 앉을 수 있단 말인가. 나이 든 대신 여섯은 황제가 젊은 놈에게 의자를 하사하자 순간 궁둥이가 근질거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헛기침을 해댔다. 그들로서는 분명히 불만스러웠던 거다. 자신들은 조정에서 스무 해 동안 입도 제대로 뻥끗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이제 겨우 황제 앞에 앉을 자리가 생겼는데, 이 범한이란 놈은 어서방에 들어온 첫날 제 자리를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태자가 대신들을 쓱 훑어보고는 황제에게 공손히 말했다.
“아바마마, 범한은 아직 젊고 몸도 대신들보다는 튼튼하옵니다. 본인도 저리 황망해하니 그냥 서 있도록 하시옵소서.”
이곳에 평화를 가져오는 지극히 올바른 언사였다. 이에 대신들뿐만 아니라 범한도 모두 마음속으로 고마워했다.
여기에 1 황자가 몇 마디 더 보탰다.
“부황께서는 저희 형제들에게 이리 말씀하셨사옵니다. 여러 대신과 국사를 논하는 걸 들을 때는 반드시 서서 들으라고 말이옵니다. 왜냐하면 소자 훗날 태자 전하를 보필해 치국평천하를 이루어야 하니 이는 수업을 듣는 자리이며, 수업을 듣는 학생은 그에 합당한 자세를 취해야 하고······.”
그가 말을 모두 마치기 전이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이미 자명했다. 네놈 범한은 아직 젊고 초보 관원이고 정치적인 경험도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 황자들이 너를 스승으로 여겨야 하느냐는 이야기였다.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평범해 보이는 의자에는 대단히 많은 의미가 숨어 있어서였다. 그러니 오늘 어서방에서 범한에게 앉을 자리가 생긴다면 3각(1각은 15분, 3각은 45분)도 안 되어 경도 전체에 퍼지게 될 큰 사건이 될 것이라 대신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범한은 물 들어온 김에 노 저을 생각으로 황제에게 조금 전 황명을 물려 달라는 청을 올리려 했다. 한데 자신을 향한 황제의 태연한 눈빛에 살짝 움찔해 순간 말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 * *
황제가 중신들을 쓱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어 직선적이고 시원시원해서 성적이 조금 조급한 1 황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입을 뗐다.
“범한에게는 그 자리가 과분하기는 하군. 하나 오늘만큼은 앉도록 해야겠다. 힘들게 서 있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상을 주기 위함이니라.”
모두 황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가 입을 연 이상은 어서방에서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올 여지가 없었다. 황제가 자신의 아들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희들 중 누구든 장묵한의 서적을 마차 한가득 가져올 수 있다면 짐이 자리를 내줄 것이다!”
그러자 모두 잠자코 있었다. 그 마차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황제 폐하가 문치를 이룬 황제가 되려고 집착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차와 관련해서는 어찌 반박해 볼 수가 없었다.
황제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던 터라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게 문인들만의 일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그렇다면 문인이란 무엇이오? 이곳에 있는 대신들 모두 문인이군. 문치(文治)와 무공에 있어 짐은 무공에는 부족함이 없지. 부족한 쪽은 문치와 관련된 것이고······ 천하 강토를 통일하기란 쉬운 일이지. 하나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통일하는 일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라오. 그러니 문치에 힘쓰지 않고 급하다고 칼이나 들이대면 안 될 일이지.”
1 황자의 얼굴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부황의 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은 터라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제는 느릿느릿하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천하는 금세 차지할 수 있어도 그 천하를 금세 통치할 수는 없는 노릇. 문학의 도는 뜬구름 같아 보이지만 천하 선비들의 마음과 연계되어 있다네. 과거 짐이 세 차례나 북벌을 진행하면서 위씨들을 산산조각 내버렸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소? 전씨들이 그 틈을 타 일어난 것 말이오. 하나 수년간의 노력과 수많은 인재를 모았기에 오늘날의 북제 조정도 있는 것! 천명을 받든다고? 이 말 또한 문인들이 만들어 낸 것 아니었소? 그리고 서무! 안행서! 그대들은 경국의 대신이지만 과거 북위의 과거에도 참가했었지. 그렇다면 그대들은 대체 왜 그런 것이오?”
서무 대학사와 안행서 상서가 몸 둘 바를 몰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이게 천하 선비들의 모습이란 말이지. 여전히 이렇게나 케케묵은 행동을 한단 말이야. 짐이 그대들을 탓하는 건 아닐세. 그러니 그대들도 괘념치 마시오. 그냥 짐은 그대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라오. 천하를 다시 세우고 선비들의 마음을 얻는 게 장점이 많다는 걸 말이오. 즉 각 군에서 어진 인재와 현명한 벼슬아치를 두면 여론도 더 좋아질 것이란 뜻이오.”
황제가 1 황자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짐도 네 생각을 다 아느니라. 하지만 출병했을 때 적이 덜 저항하면 네가 이끄는 병졸들이 덜 죽을 것 아니냐. 그런데도 싫다 하겠느냐?”
1 황자는 할 말이 없어 그냥 잠자코 있었다.
황제가 다시 차갑게 말을 이어 갔다.
“마차 한가득 실린 낡은 서적은 짐에게 더 많은 천하 인재들을 모을 수 있게 해주고, 짐에서 무수히 많은 병사의 목숨을 살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니라. 그러니 짐이 범한을 의자에 앉도록 상을 내리는 게 무엇이 안 될 일이란 것이냐.”
사람들에게는 황제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황제가 일부러 천하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왜 범건 상서는 아들에게 내려진 의자를 직접 나서서 사양하지 않는 걸까? 물론 경국이 아직 전란 중이고 그런 까닭에 백성들은 천하 통일이라는 열정과 사명감에 압도되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이번 사절단 행에서 가져온 서적을 황제가 천하 통일이라는 커다란 대의와 연계시켜 말한 이상은 그 누구도 감히 말참견을 할 수 없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 폐하, 영명하시옵니다.”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 * *
마차와 천하가 대체 왜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거지? 어찌 되었든 범한은 의자를 내준 황제 폐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평온한 얼굴로 거만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진중히 앉아 있으면서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황제 아버지께서 대체 왜 자신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 구워 버리려 하는 건지, 원!
* * *
붉은색 융이 활짝 펴졌다. 그러자 안쪽에 있던 넓은 지도가 나타났다. 새로운 지도가 제작된 것이었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경국의 영토가 계속해서 동북쪽을 향해 확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황무지 말고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보였다. 경국의 영토 확장세는 너무나 맹렬했다. 동북쪽에 있는 북제가 아직까지는 거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다지만 경국이라는 야수 앞에서는 그저 자그마한 혹에 불과했다. 북제는 신흥 국가였지만 과거 위나라의 대부분 영토를 계승한 상태였다. 한데 그것뿐만 아니라 위나라의 부패한 관료와 정부 기관 그리고 풍습까지도 계승하고 있었다.
범한도 지도를 바라보며 토론 내용을 듣고 있었다. 그에게는 난생처음으로 경국의 권력 중심에서 이 나라의 강인한 품격과 거친 야망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에 범한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제 조정에게는 아직 싸울 여력이 있고 해당타타와 북제 황제의 생각을 봤을 때 천하에 다시 한번 전란이 일어날 수 있어서였다. 그러면 천하 백성들은 다시 재난에 희생될 것이고 세상이 언제 다시 회복될지는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범한이 인간에게 연민을 가진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냥 전쟁에 대해서는 정말로 흥미가 없을 뿐이었다.
황제는 또 대신들과 주요 국사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중간 큰 강의 제방과 관련된 일, 작은 제후국들의 세공(歲貢: 해마다 제후국에서 받아들이는 공물) 문제 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범한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설령 어떤 의견이 있어도 ‘바늘방석’에 앉아 있었기에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범한이 어서방 한구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에 한가로워진 범한은 새로 만들어진 지도나 보며 계속 멍하니 있다가 침묵의 탄식이나 해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떤 단어가 그의 귀에 내리꽂혔다. 황실 금고! 범한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고 주의력을 점점 강화해 나갔다. 황제가 자신을 이 자리로 데려온 건 역시나 의자나 내주면서 체면이나 세워 주기 위한 건 아니었다.
236화
“경들도 모두 알 것이오. 황실 금고가 이름만 황실 금고지 여러 중요 사항과 맞물려 있음을 말이오.”
황제가 회한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요 몇 년간 황실의 금고는 참으로 힘들었소. 신력 3년 때 남쪽에 물길을 만들고 북쪽에서는 추위를 막아 내야 했지. 이에 짐이 황실 금고에서 국고로 은자를 넣어 두라 했는데, 한데······ 광혜고(廣惠庫)가 은자도 꺼내 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더군!”
광혜고는 황실 금고 열 개 중 전표(錢票: 수표처럼 지폐로 된 돈)와 동전만을 보관하는 곳이고 금과 은은 승운고(承運庫)에서 보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화를 내긴 했지만 화낼 대상을 잘못 짚은 것이었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승운고와 광혜고는 모두 장 공주와 호부에서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이에 호부 상서 범건은 호부가 10년 동안 광혜고와 승운고에 대해 전혀 관여할 수 없었는데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죄했다.
한데 황제는 범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결국 신정은 흐지부지 끝났지 않았소. 그러니 짐은 황실 금고만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10년 전 재정이 풍부했던 때로 돌아가는 건 바라지도 않아. 단 적어도 조정에 다시 은전은 대줄 수 있을 정도는 되도록 만들어야겠소.”
황제는 그다지 크지 않은 음성과 격정적이지 않은 어조로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위세에 눌려 대신들은 감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누이가 신양으로 돌아갔으니 그 일을 관리할 만한 신하가 있어야겠지. 그러니 경들, 짐에게 적임자를 추천해 보시오.”
어서방의 몇몇 대신들과 황자들은 이게 막간극 같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뒤쪽에 가만히 앉아 있는 범한이 폐하가 점찍어 둔 적임자란 건 경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앞서 황제 폐하가 연극을 해가며 범한을 치켜세운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즉 신하들에게 잠시 후 황실 금고를 관리할 사람을 선발할 때 엇나가는 행동을 하지 말라며 미리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황실 금고의 상황이 황제 폐하가 말한 것처럼 그리 엉망이 아니란 것 정도는 이들도 알고 있었다. 매년 강남 지역에서 북쪽으로 오는 화물을 보면, 조정으로 들어오는 금액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은전으로 몇백만 냥 정도. 만약 황실 금고가 매우 은밀한 사업을 통해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면 경국에게는 사방으로 영토를 넓힐 재정적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한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대신들은 순간 사남 백작가를 향해 은근히 시기심이 발동되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가 이렇게나 불만을 표출하는 걸 보니,훗날 황실 금고를 누가 맡든 매년 상납하는 은전 양 때문에 골치깨나 썩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대신들의 시기심은 순간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 누구도 범한을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건 체면 문제이자 경제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황실 금고가 아무리 관리하기 어렵다고는 해도 책임자가 매년 받게 되는 이익은 적지 않을 터. 그리고 이들 대신은 매년 신양 쪽으로부터 적지 않은 보상을 받아야 했으니 이미 계산은 다 끝난 것이었다.
중신들은 입을 꾹 닫고 있고 범건은 관계 때문에 자기 아들의 이름을 말할 수 없고. 어서방에는 난처한 침묵만 흘렀다. 황제도 별말 없이 찻잔만 들고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데 표정 변화가 없어서인지 그의 눈에 담긴 싸늘함을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소자가 추천하고자 하는······.”
“소자가 추천하고자 하는······.”
어서방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동시에 두 사람이 침묵을 깼는데 하필 그 두 사람이 태자와 2 황자였던 것이다. 상황이 흥미롭게 급반전되는 순간이었다.
황제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거라.”
2 황자가 태자를 슬쩍 바라보고는 조금 미안한 듯 웃었다.
“태자께서 추천인이 있다 하시니 소신은 경청하겠습니다.”
황제는 2 황자에게 잠시 눈길만 주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2 황자가 양보를 해주자 태자는 동궁의 주인이고 장래 경국의 황제가 될 자신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부황을 향해 예를 올렸다.
“부황, 소자는 범한을 추천하옵니다.”
어서방 사람들은 태자가 범한을 끌어들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중인 걸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 정도의 인심은 충분히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황제는 태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2 황자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를 추천하려 하였느냐?”
그러자 2 황자가 수줍게 웃었다.
“소자가 추천할 이도······ 범한, 범 대인이옵니다.”
어서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런데 황제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범한을 쓱 훑어보았다. 범한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 대답을 하려 했다. 그런데 황제는 범한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황자들이 범한을 추천했으니 그로 하지. 가을이 지난 후 결정을 내릴 것이오. 그러니 각 지역에 이 내용을 전달할 필요는 없겠지.”
황제의 말이 떨어지고 모든 게 정해졌다. 원래 이 일은 범한과 임완아의 혼사를 결정할 때 이미 황실에서 정해 놓은 사항이었다. 하지만 오늘 어서방에서 제의되어 통과되고 또 기록으로까지 남게 되었으니 이제는 절대 바뀔 수 없는 일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아비인 범건이 국고를 장악했는데 아들인 범한마저 황실 금고를 장악하게 된 것이니, 어서방에 있는 이들은 찜찜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그들이 봤을 때 이 정도로 성은과 총애를 받는 가문은 경도에서 더는 없었다. 그리고 태자와 2 황자 모두 서로 나서서 범한을 추천했으니, 향후 몇 년 동안 사남 백작가는 지위가 상승하면 상승했지 떨어질 일은 없어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불난 데 제대로 기름 붓는 격 아닐까.
범건과 범한 부자가 서둘러 일어나 황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연달아 “황공하옵나이다.”라고 외쳤다.
황제는 그들의 행동에 별 관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왕 정해진 거 짐이 너희들에게 묻겠다. 왜 두 사람 모두 동시에 범한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냐?”
그러자 태자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웃으며 답했다.
“소자, 그저 대략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뿐이옵니다. 범건 상서 대인이 국가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고 성과도 탁월하지 않습니까. 범한은 그러한 집안의 공자이니 그쪽으로 재능이 있을 거라 생각했사옵니다.”
2 황자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소자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사옵니다. 황실 금고는 금과 은 같은 것을 취급하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청렴하고 자부심을 지닌 대신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나이다. 소자, 망언을 좀 하자면 요즘 조정에서는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고 있사옵니다. 지역마다 유명한 청백리가 있기는 하오나 대부분은 지방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옵니다. 범한 대인이 재주가 비상하고 학식이 높으며 청렴한 문인인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그런 그가 황실 금고를 맡기에는 적격자라 생각하였사옵니다.”
“그래?”
황제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이치상으로는 겨우겨우 맞는 것 같구나. 한데 다른 이유는 없었느냐?”
태자와 2 황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 이번 기회에 자신들을 시험해 보려 하시는 건가? 둘 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활시위는 당겨진 상태니 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태자가 체면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
“둘째 황형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옵니다. 황실 금고를 감찰하는 일은 줄곧 감찰원에서 하고 있사옵니다. 이에 범한 대인이 감찰원 제사이니 일을 처리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으로 생각하였나이다.”
2 황자와 함께 들어온 3 황자는 서 있는데 이미 한계가 와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허옇게 수염이 난 대신들과 부황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터라 머리가 멍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에 조금 이상하게 웃으며 아이답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태자 형님, 형님 말씀대로라면 범한이 자신을 감찰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언사가 조금 방자하기는 해도 사람들은 그냥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로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무심코 툭 던진 말이 의외로 태자가 한 말의 허점을 정확히 짚어 내고 있었다. 대신들은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태자의 얼굴에는 살짝 화가 드리워졌다.
운 좋게도 2 황자는 고뇌하는 듯 말하며 넘어갔다.
“부황, 소신은 더 이상은 도무지 모르겠사옵니다.”
황제는 태자가 한 말에 대해 책망은 하지 않고 담담하게 몇 마디 더 던졌다.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아까는 무엇을 믿고 범한을 추천한 것이냐?”
어서방에 있는 대신들은 황제가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범한을 의중에 두고 있으면서 왜 아들들을 못살게 구는 건지. 이에 황제 폐하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대신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입을 뻥끗했다가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 같아서였다.
당사자인 범한은 지금 이 자리가 바늘방석을 넘어 불구덩이 같았다. 그리고 2 황자는 살짝 불안한 기세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사옵니다. 바로······ 소신이······ 범한 대인과 친한 사이라 그리했사옵니다.”
* * *
황제는 차분히 아들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갑자기 시원스레 웃기 시작했다.
“천 가지, 만 가지 이유는 필요 없느니라. 딱 하나면 되는 것을······. 황실 금고는 무엇이더냐? 바로 황실의 것이다. 범한이 황실 금고를 관리한다면 황실과 충분히 가까이 지내야 할 터. 범한은 태상사에서도 있었으니 황실과 친분 문제는 이미 충분히 해결된 것이었다.”
당연히 충분했다. 범한을 두고 어쩌고저쩌고해도 그는 부마 아니던가. 어찌 되었든 태자와 2 황자에게 그는 매제인 것이고. 옆에서 듣고 있던 태자는 어느새 속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부황이 원하는 답을 찾아낸 둘째 황형은 역시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기는 왜 한발 늦었을까 하고 말이다.
* * *
대군(大軍)도 돌아왔고 국경도 처음으로 확정되어서 오늘 회의는 평소보다 훨씬 오래 진행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로 오찬 먹을 때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황제가 시각을 확인하더니 태감들에게 대신들과 황자들이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식사를 준비시켰다. 범한은 오늘 처음으로 어선방에서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채소와 생선, 닭고기로 차려진 식탁이어서 그런지 조금도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와의 식사는 상상했던 것처럼 괴롭지 않았고, 식사 전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할 필요가 없어서 범한은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었다.
아까 태자와 2 황자가 말할 때 범한은 그 말들을 전부 다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를 다시 보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경계심이 일었다. 이에 범한은 황제가 자신을 총애하는 건 어떤 황당한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왕에게는 가족 간의 정 같은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이런 생각을 한 건 그가 통제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범한도 무릎을 꿇어야 할 때는 꿇고, 참아야 할 때는 참고, 들어야 할 때는 들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리면 미소 짓는 얼굴로 자기 왼쪽 종아리를 만지며 꿇지도, 참지도, 듣지도 않고 상대에게 엿을 먹여 버리는 게 범한의 진짜 모습이었다.
태자와 황자들은 황제가 첫술을 뜰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다가 옆방으로 가 식사를 했다. 식사를 시작한 황제는 대신들과 함께 한담을 나누기도 했다. 밥 먹는 자리다 보니 자연스레 국사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네 집 우물물로 차를 끓여야 가장 맛있는지, 어느 지역의 수박이 거대한 바위만큼 크다든지 등등이 주제로 등장했다. 그렇게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장묵한의 별세까지 언급되자 모두 목소리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무 대학사와 안행서를 제외한 경국의 고위 관료들은, 심지어 황제 폐하까지 경국의 계몽 시기에 장묵한의 정책을 외운 적이 있어서였다.
어찌 되었든 이번 식사는 사남 백작가의 가족 식사 때보다는 한결 편안했다. 범한은 배가 많이 고팠다. 그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황제와 대신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젓가락을 들고 콩 싹을 넣어 맑게 끓여 낸 탕에서 기다란 콩 싹을 집어 입에 넣었을 때다. 갑자기 황제 폐하가 자신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237화
“범한, 이리 오너라.”
깜짝 놀란 범한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미련이 남는 듯 향긋한 탕을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명랑하게 웃으며 황제가 앉아 있는 의자 곁으로 잽싸게 걸어갔다. 그런 후 영웅의 기개가 듬뿍 담긴 황제의 마른 얼굴을 감격과 침울함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아 들고 절을 했다.
늙은 신하들은 황제 폐하가 왜 범한을 가까이 오게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에 귀를 쫑긋 세우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황제가 웃으며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유정 강가 찻집에서 만났던 걸 기억하느냐? 그때 짐이 네게 무엇을 허락하였더냐?”
범한은 고관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황제가 자신과 우연히 만난 일을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웃으며 답했다.
“소신, 그때 황제 폐하를 알아보지 못하여 황궁 통령과 겨루기까지 하였나이다. 황제 폐하께 무례한 짓을 하였으니 소신, 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하옵나이다.”
이부 상서가 자신이 3조를 모신 원로대신이라는 체면만 믿고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황제 폐하께서 범한 대인을 궁 밖에서 만나신 적이 있으셨군요.”
경국의 황제는 국사를 논할 때면 성은 내지 않아도 위엄만큼은 한껏 세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황제가 편안하게 껄껄껄 웃으며 그때 있었던 일을 대신들에게 말해 주기 시작했다. 범건은 속으로 ‘이런 황당한 일이!’라고 외쳤다. 다시 한번 황제 폐하에게 ‘이 개 같은 놈이 죄를 지었나이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빌어야 할 판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나머지 조정 대신들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기연이 있었기에 범한이 황제 폐하게 총애받았던 거구나. 이 녀석은 운이 너무 좋군. 황제 폐하께서 범가네 아들놈에게 대체 또 뭘 해주셨는지 궁금하군, 하고 말이다.
“짐이 그때 네 누이의 혼처를 정해 주기로 말하지 않았더냐.”
범한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은 따스했다. 그리고 천자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허세까지 보였다.
“범 낭자는 정왕 세자와 맺어 주기로 했다. 네가 보기에 이 혼사가 어떠한 것 같으냐?”
범한의 속은 그야말로 쓰디썼다. 하지만 얼굴에 역력히 감동한 표정을 짓더니 아버지과 함께 절하며 연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늙은 신하들은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아첨을 떨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강가에서 우연히 신하를 만난 일이 아름다운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둥, 정말로 천고의 미담이라는 둥 하면서 말이다.
이들의 대화하는 소리는 조금 큰 편이었다. 이에 옆방에서 식사 중인 황자들의 귀에까지 그 내용이 들리고 있었다. 1 황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반면 태자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자신을 위해 범씨 가문을 끌어들인 건 똘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하고는 무의식적으로 2 황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2 황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요 몇 년간 그러했듯이 태연자약 그 자체였다. 한데 이상하리만치 느릿느릿하게 음식을 씹고 있기에 태자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이놈은 모든 게 다 거짓이로군!’이라며 욕을 퍼부었다.
어서방에서는 황제를 덕을 칭송하며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범한의 고통과 고뇌는 알지 못했다.
* * *
범한은 노을이 질 무렵 황궁 문을 나섰다. 새로 난 길 입구에 말에 타고 있는 세자가 보이자 그의 고뇌는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정왕 세자 이홍성이 매우 기쁜 얼굴로 자신을 맞아 주자 범한도 오랜만에 상대를 만난 반가움을 얼굴에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진짜 속마음은 속에 꼭꼭 숨겨 버렸다.
석양은 점점 더 서쪽으로 저물어 가고 이제 곧 어둠이 몰려올 시각이었다.
황궁 밖 광장 한구석, 새로 난 길 입구에서 쭉 뻗은 거리를 따라 저 먼 하늘을 바라보니 초승달이 수줍게 걸려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는 가운데 이홍성이 말에서 내려 대충 두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여인처럼 아름다운 친구를 살펴보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얼굴에서 층층이 붉은빛이 돌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화사함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오늘 좋은 일이 꽤 많았나 보군.”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맞받아쳤다.
“몇 달 만에 만난 건데 그런 식으로 저를 놀리시다니요. 당당한 정왕 세자이시자 경도에서 다섯 번째로 높으신 공자께서 어찌 저처럼 박복한 놈을 놀리시는 겁니까.”
네 명의 황자를 제외하면 이홍성은 젊은이들 중에서는 가장 신분이 높았다. 만약 평범한 사이밖에 안 되는데 범한이 그의 신분 순위를 말한 거라면 이는 경박한 짓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이와 같은 이야기는 오히려 친근감을 배가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홍성이 순간 움찔했다. 요 녀석은 원래 자신을 도발하기는커녕 오히려 따스한 미소로 깊은 고독감과 싸늘함을 숨기는 게 일이거늘. 그런데 오늘은 왜 갑자기 성향을 바꾼 거지? 이홍성에게 어떤 일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것으로 이유를 알 것 같자 소리 내어 웃었다.
“자네가 박복하다고? 황제 폐하께서 그리 총애하시거늘. 조회 후에는 자네만 콕 집어 남게 하셨다면서. 그런 식의 박복한 사정이라면 경도에 있는 관원들은 모두 이를 악물고 기꺼이 버텨 내려 할 걸세.”
그러자 범한은 손을 내저으며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는 등자경도 있었다. 등자경은 줄곧 황궁 밖에서 범한을 기다리고 있다가 어느새 그를 맞이하러 와 있는 중이었다. 다만 세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끼어들지 못하고 있을 뿐. 그런데 범한이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손을 내젓는 걸 보고는 때는 이때다 싶어 말을 건넸다.
“도련님, 어르신께서 제게 도련님을 따라다니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홍성이 웃었다.
“뭐라 했나? 범 대인께서 내가 이 사람을 취하게 할까 봐 걱정하신다는 건가?”
범한이 옆에 서서 말했다.
“그렇다면 따라오게나.”
그사이 사남 백작가의 마차가 당도했다. 이홍성은 왕부 종자에게 말을 끌고 오도록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 하는 건가, 지금 이 상황에 마차를 타고 가겠다는 건가? 말이 아니고?”
그러자 범한이 답했다.
“급할 것도 없는데 무엇 하러 말을 탄답니까?”
이홍성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경도에서 자네는 문무를 겸비한 걸로 알려져 있네. 한데 자네 행동을 보면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서생이라고 무시당하기 딱 좋네그려.”
경국은 무(武)를 숭상하는 나라로 젊은이들은 말을 잘 타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범한은 그 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마차가 있으면 절대 말을 타려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괴벽은 최근 1년 사이 경도 곳곳에 소문이 나 있었다.
범한이 웃으며 무어라 질책하고는 마차에 타며 한마디 했다.
“말에 올라타면 엉덩이가 실룩거리지 않습니까!”
정왕부의 종자와 호위병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백작가의 호위 병사와 종도 가세했다. 그러자 십여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부대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키 큰 말 한 마리와 눈길도 안 가게 생긴 검은 마차를 호위하며 성 동쪽을 향해 느긋하게 나아갔다.
경도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없었다. 그러니 해 질 무렵 저녁에, 그것도 사람이 아직 꽤 많이 오가는 때에 거리를 지나가는 호위병 대열은 금세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 호위병 대열을 보고 있다 보면 자연스레 영민하고 잘생긴 청년과 마차 위에 그려진 둥그런 네모 표식에도 눈이 가 이 둘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경도 백성들은 사절단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왕 세자와 함께 거닐고 있으니 마차 안 인물은 분명 전기적인 인물인 사남 백작가의 서자, 그러니까 작은 범 대인일 거라 생각했다. 이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속속 발걸음을 멈추고 이들 행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부 광적인 이들은 마차를 향해 “범 시선, 범 시선!”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작년 황궁의 밤 연회 일화는 경도에서는 이미 백성들 입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북제의 장묵한 대가가 서적을 증정해 준 일화도 감찰원 8처를 통해 거리 곳곳까지 널리 알려져 범한의 명예가 한층 높아져 있었다.
또한 얼마 후에는 ‘모르는가? 모르는가?’라는 재강림한 시선의 작품도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범한 대인이 뜻밖에도 북제 상경에서, 그것도 벌건 대낮에 무수한 북제 젊은 귀족들 앞에서 고하 대종사의 마지막 여제자를 유혹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도 백성들은 이 일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졌고, 어느새 이 일은 장묵한이 증정해 준 책보다 더 멋진 일화가 되어 있었다. ‘봤냐, 너희들이 성녀처럼 떠받드는 해당타타가 우리 범한 대인 손아귀에서는 한낱 꺾어 버려야 할 꽃이란 말이다!’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이는 곧 범한이 경국 백성들의 체면을 세워 준 것이었다. 이에 경도 백성들도 범한의 체면을 세워 주려 했다. 이에 가는 내내 길가에서는 범한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인사를 하는 이들 중 대다수는 공부하는 문인이었지만 가끔씩 수줍은 기색으로 살며시 인사 건네는 아가씨들도 있었다.
민심을 후하게 얻은 건 범한이다 보니 정왕 세자는 자연스레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아무리 그가 경도에서 가장 고귀한 분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정왕 세자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게 웃고 있었다. 마치 범한이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게 자신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였다.
마차 밖에서 나는 토론하는 소리, 문안 인사 하는 소리를 범한은 모두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범한은 어딘가의 우두머리라도 되는 듯 창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손이라도 흔들어 감사 인사를 해주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만족감에 찬 웃는 모습 정도는 보여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마차 안에 콕 박혀서 아무도 모르게 입가에 자포자기한 듯한 쓴웃음만 띠고 있었다.
* * *
세자가 귀국 환영회 장소로 잡은 곳은 일석거였다. 범한이 경도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웅건하고 힘 있는 풍격이 있다고 평한 그 주점이었다. 이곳은 경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럽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조용한 곳도 아니었고 대단히 훌륭한 요릿집은 더더욱 아니어서 범한은 왜 이홍성이 이런 곳을 골랐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싫은 건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려서 보니 오늘따라 일석거는 유난히 조용했다. 건물 앞으로 난 길에도 행인이 많지 않았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던 주점 안쪽도 오늘따라 너무나도 조용했다. 한데 다행히도 내부에 불빛만은 밝게 켜져 있었다. 불빛이 꺼져 있었다면 자신이 사절단으로 나갔다 온 수개월 안에 이 황금 알을 낳던 굴지의 주점이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은 줄로만 여겼을 것이다.
범한이 의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자 이홍성은 일부러 장난 따위는 치지 않고 바로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오늘 내가 세를 내었다네.”
그러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위세 당당한 세자이시라 해도 이건 너무 과합니다. 매일 일석거를 드나드는 고관대작들이 많은데 고작 저와 밥 한 끼 드시자고 주변의 뒷말을 감당하시다니요.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곳을 원하셨다면 성 서쪽에도 갈 곳이 많습니다. 이곳 음식을 좋아하셔서 이리하신 거라면 그냥 한 개 층만 세를 내시면 될 것을요. 주점 전체가 우리 둘만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니 너무 과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정왕께서는 그냥 넘어가신다 해도 이 일이 황궁에 전해진다면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진지하게 말하자 이홍성은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러다 살짝 감동받아 웃으며 말했다.
“뭐가 무섭단 말인가? 천하 사람 모두 부왕께서는 꽃을 기르는 걸 좋아하시고 나는 꽃을 따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네. 지금껏 맹랑하게 행동해 ‘방탕 세자’라는 별명은 절대 못 벗을 것 같은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 정도는 세자의 신분으로 충분히 부릴 수 있는 허세였다. 그래도 범한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런, 이제 곧 혼인하실 분 아닙니까. 자중 좀 하시지요.”
혼인이란 말에 이홍성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옅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쑥스러워했다.
“자네야말로 너무 소심하게 이러지 말게. 자네가 쥔 권력이 작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자네 아내의 신분은······ 내 툭 까놓고 이야기함세. 황궁과 저택에 있을 때는 우리 같은 젊은 사람은 어떻게든 분수를 지킬 수밖에 없다네. 한데 일단 황궁과 저택 밖으로 나오면 우리는 진정한 어르신으로 거듭난다네. 그러니 옆에서 뭐라 하든 그냥 내버려 두게!”
너무나 맹랑하고 과장되고 오만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홍성이 말하니 이상하게도 반감이 일지 않았다.
범한은 황궁에 있을 때부터 화를 꾹 참고 억누르고 있던 중이라 이번에도 그냥 웃어넘겼다.
세자 이홍성을 따라 주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래쪽으로 갔을 때 그곳 편액에 반령 대인의 친필로 써진 황금색의 ‘일석거’란 세 글자가 보였다. 이홍성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와 자네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기억하는가?”
그러자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바로 이곳이지요.”
“그렇다네. 고작 1년이 흘렀을 뿐이라니. 그때의 자네는 당찬 불굴의 기개로 이른바 인재라고 불리던 이들을 냉혹하게 평하며 얕보던 놈이었지. 한데 이제는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인재가 되어 있다니.”
238화
이홍성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시대를 풍미한 대가 장묵한께서 자네를 계승자로 삼지 않았나. 만약 그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래도 그 인재들을 욕했을 텐가?”
범한은 1년간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무언가 새로운 감회가 있었는지 탄식했다.
“연초에는 연말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자께서 절 조롱하신다 해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때의 저는 이제 막 경도로 온, 아는 것 없고 견문도 없는 서자였을 뿐입니다. 배때기 속에 불평이 커다란 광주리로 몇 개나 있었답니다.”
이홍성이 미소를 지은 채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젊은 친구에게 1년 동안 매우 큰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변화는 황제로부터의 총애, 범건 상서의 은밀한 보호, 혼인이란 세 요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리 젊은 나이에 감찰원 제사가 되고, 어서방에서 의자까지 하사받을 수 있으려면 진짜 실력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반한재 시집》도 수차례 재인쇄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범한은 천하 사람들에게도 그 자질을 충분히 증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범한이 감찰원에서 일하는 것과 관련해 경도 내 권력을 쥔 고위층들은 사실 진평평과 범한을 직접 연계시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폐하의 뜻이며 충견 진평평은 황명을 따르는 중이라고 여겼다.
“항상 저를 데리고 유정강으로 오시는데, 그래도 저는 재주와 기개로 불쌍한 여자들을 농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이홍성이 살짝 놀라 멍하니 있자 범한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니 그런 개똥 같은 인재들이 욕을 먹어도 싸다면 저는 계속 욕을 할 거란 말이지요.”
범한은 과거, 시로 해당타타를 농락했었다. 그건 범한에게 해당타타는 불쌍한 여자가 아니어서였다.
두 사람은 잠시 ‘일석거’라는 글자 앞에 서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회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고 두 사람 다 매우 감개무량했다.
주점 관리인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주인 어르신이 대체 어떻게 했기에 세자께서 여기에서 환영회를 열게 된 건지. 그것도 범한 대인이 경도로 돌아와 집 밖에서 먹는 첫 번째 식사 자리를 말이다. 이는 곧 일석거가 주점으로서의 명성이 한층 더 높아지고, 강남의 돈 많은 서생들이 일부러 찾아와 식사를 하고 가는 곳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그들이 이곳에 헛돈을 쓰러 오는 건 아닐 터. 일석거는 이미 충분히 유명했지만 유명세, 권력, 돈,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게 된다는데 과연 누가 마다할까!
범한과 이홍성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은 이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점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사이 뒤쪽에서 길을 막고 있던 왕부 호위병들은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주점 입구를 지키기 시작했고 또 일석거 일꾼은 함께 온 백작가 마차와 종자들은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소리와 함께 일석거가 문을 닫아걸었다. 경도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3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이홍성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날카로운 안목으로 평상복 차림을 한 밀정 몇 명을 찾아냈다. 밀정들은 주점 곳곳 주요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홍성은 그들이 범한을 근접 보호하는 중인 감찰원 사람들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감찰원 몇 처 소속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세자가 속으로 탄식하며 범한에게 말했다.
“자네가 내게 오만하다 했는데 밥 먹을 때는 감찰원이 지켜 주고, 사절단에 있었을 때는 호위가 옆에서 지켜 주고, 오만함을 놓고 따지자면 자네가 나보다 더하군.”
두 사람은 이미 계단을 올라 3층에 당도한 상태였다. 그곳은 두 폭짜리 병풍으로 막혀 있었고 그리 크지 않은 원탁 위에 보기 좋게 차가운 전채 요리가 놓여 있었다. 범한은 사양 않고 의자에 앉고는 바로 이홍성의 말에 해명하기 시작했다.
“호위는 사절단에게 지원해 준 거였습니다. 경도에 오자마자 바로 해산하지 않았습니까. 하오나 감찰원은······.”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외양간 길 사건 같은 게 발생했는데 세자께서 보시기에 감찰원에서 저 혼자 경도를 돌아다니게 놔둘 것 같습니까?”
그러자 이홍성이 분노한 척 범한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자네, 이렇게나 시시한 사람이었나? 입 꾹 닫고 그냥 감찰원 제사나 하는? 어쩐지 외양간 길 사건 후 감찰원이 긴장한다 했더니······ 이제 보니 그때부터 자네는 이미 그랬던 거군. 만약 형부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면 나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걸세.”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니 외양간 길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범한이 시선 강림으로 황제 폐하를 놀라게 해드리기 전이었다. 세자 또한 그를 넌지시 떠보는 단계였고, 2 황자 역시 부황이 왜 그렇게 범한을 신임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나 범한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따뜻한 수건으로 손을 닦고 술부터 마셨다.
“외국에 오래 나가 있었더니 경도의 술맛을 잊고 있었네요.”
이홍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범한이 더 이상 무언가를 알려 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잠시 후 첫 음식들이 나왔다. 분위기상 세자와 범 대인이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관리인과 접대하는 일꾼들은 별말 없이 음식만 놓고 물러났다. 범한이 젓가락을 들어 생선 뱃살을 갈라 입에 넣고 몇 번 씹고는 바로 술 한 모금으로 입을 헹구며 흡족해했다.
범한을 관찰하고 있던 이홍성이 놀렸다.
“일품 곰 발바닥 요리가 있는데도 먹지 않고 고작 생선만 바숴 대고 있다니 아직도 입 짧은 건 못 고쳤군.”
그러자 범한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곰 발바닥도 먹고 싶은 거고 생선 역시 제가 먹고 싶었던 겁니다. 한데 둘 모두 얻을 수 없다면 곰 발바닥을 버리고 생선을 먹는 수밖에요.”
범한이 재밌는 말을 하자 이홍성이 웃으며 물었다.
“왜인가?”
범한이 머리를 한 대 툭 치고는 웃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순전히 옛날에 책을 너무 많이 읽어 그런가 봅니다.”
* * *
환영회란 건 원래 이렇게 썰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젯밤 범한은 정왕 세자에게 사람을 보내 여독도 있고 하니 사람들을 잔뜩 배석시키는 건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정왕 세자는 그 시(詩) 문제로 사남 백작가 뒤채에 있는 누군가가 화를 냈다는 걸 알고 있던 터라 노래 부르는 기녀도 배석시키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둘은 원래 친한 사이였으니 범한이 북제에서 보고 들은 것을 주제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술과 음식을 곁들였다. 이렇듯 편안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범한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7할 정도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껏 음식을 먹어 댔다.
술 몇 잔을 연달아 들이켠 세자가 술기운을 이기지 못했는지 범한을 가리키며 질책했다.
“듣자 하니 북제에서 술을 마실 때는 마시자마자 바로 취했다던데, 어찌 내 앞에서는 주선(酒仙)이 되었는고?”
범한은 약물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또 체내에는 패도의 정기가 흘렀다. 그러니 물 같은 술을 겨우 몇 잔 마셨다고 쓰러질 리는 없었다. 지난번 북제에서 해당타타와 술을 마시다 취한 일은 모두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다년간 품어 왔던 우울함을 토해 내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이홍성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와 한마디 했다.
“지체 높은 어르신 앞에서 취해 있으면 제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이홍성이 갑자기 동경의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해당타타란 낭자 말일세. 정말 선녀처럼 아름다운가?”
범한은 입에 머금고 있던 술을 뿜어 버렸다. 다행히 속히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술은 모두 땅으로 쏟아졌다. 범한이 웃으며 질책했다.
“설마 오늘 저를 식사에 초대를 하신 이유가 그걸 물어보시기 위함입니까?”
두 사람 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석 잔의 술을 더 마셨다. 범한은 술이 들어갈수록 눈이 더 초롱초롱해졌지만 이홍성은 취기가 더 올랐다. 그런 이홍성이 범한의 말간 얼굴을 가리켰다.
“범한, 이번 사절단 행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 자네 얼굴을 보니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이홍성이 머리를 긁적이느라 술을 바닥에 잔뜩 흘렸다.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생각하는 것처럼 한참을 있다가 그가 크게 웃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자네가 지금처럼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다고 해봄세. 그런 자네를 보면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도 무언가 벽 같은 게 느껴졌어.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같은 거. 하나 지금 자네의 웃는 얼굴에서는 일부러 순진한 척하는 게 안 보이네. 보고 있으면 그냥 편안한 기분이 들어. 눈동자도 맑고 투명하고. 그리고 말이 되었든 기질이 되었든 마치 갈아 놓은 옥 같아졌다고 할까. 아주 매끈하게 잘다듬은.”
그러자 범한이 지금 상황에 어울리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산속 동굴에서 보낸 하룻밤이 가져다준 변화 같았다. 그곳에서 드디어 어떤 일들에 대해 알게 되자 드디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이 세계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후 자신이 정말로 해야 하는 것에 대해 계획을 짜기 시작해서였다. 즉 내적인 변화가 일자 자연스레 외적인 변화도 따라온 것이었다.
* * *
이홍성은 점점 더 취해 가는데 범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았다.
“나도 다 아네. 오늘 황궁에서 자네에게 황실 금고를 맡겼다지.”
이홍성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는 상태인데도 계속 말을 했다.
“나중에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으면 나에게도 좀 주게나.”
비록 농지거리처럼 들리긴 했지만 세자 신분으로 한 말이니 이는 범한의 체면을 충분히 세워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순간 생뚱맞다는 생각에 그를 재차 잠시 바라보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왕가 분께서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설마 황제 폐하께서 정왕부가 빚을 지도록 하신 것입니까?
그러자 이홍성이 조롱하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밀었다.
“내 씀씀이가 큰 건 알고 있지 않은가. 경여당의 대행수들이 왕부의 재산을 불려 주고 있기는 하나 일부는 장부에 기입되니 어찌 충분히······.”
이홍성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집 그분께서 황제 폐하의 친형제이신데도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려 하셨다네. 입궁해서 할마마마를 뵙는 것도 한 달에 겨우 한 차례. 거기다 고집불통이시고. 이처럼 왕야께서 놀고 계시니 자연히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주는 사람도 적겠지. 그리고 나는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군수나 지주와 교류할 때 허세를 안 부릴 수도 없고. 그렇다 보니 자연히 주머니 사정이 안 좋을 때가 있다네.”
범한에게는 세자의 말이 조금 의외로 다가왔다. 이에 어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그런 말씀을 공공연히 하시다니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홍성이 잔뜩 취한 사람처럼 손을 휘휘 내젓다 냉소를 지었다.
“빈껍데기 같은 신분이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네는 미안해할 필요 없네. 황실 금고는 결국에는 조정 거니 자네가 손에 넣어야 되는 때가 되면 절대 사양 말게나. 요 몇 년 고모님께서 황실 금고를 관리하시는 동안 태자께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봤는지 모를 걸세. 자네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한 곽씨 가문에서만 무려 은자로 30만 냥이나 나왔다네. 황실 금고가 비어 있다고? 오주에 갈 일 있으면 태자 저하의 행궁에 좀 가보게나. 그러면백성들의 고혈이 전부 어디로 갔는지 금세 알게 될 걸세.”
범한의 가슴이 살며시 두근거렸다. 지금 이건 세자가 자기 들으라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 * *
취해 식탁 위에 엎어져 있는 정왕 세자를 보며 범한이 잠시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이제 보니 오죽 아저씨의 말이 맞았다. 이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북제행에서 많은 걸 느꼈고 그로써 우정을 지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밤 이홍성이 귀국 환영회를 열어 준 게 자신과 2 황자가 친밀하다는 걸 경도 전체에 알릴 목적으로 꾸민 일임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세자는 자기 앞에서 이렇게나 대놓고 거짓말이나 하다니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정왕 세자 이홍성의 심복 중에는 유정강 근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매춘을 관리하는 이가 있었다. 떳떳한 사업도 아니고 세자란 신분과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이홍성에게는 암암리에 엄청난 양의 은전이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이 일과 관련해 세자 이홍성은 매우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작년 여름에 범한이 사람을 시켜 원몽이라는 기녀를 조사해 보지 않았더라면 감찰원 2처도 그와 같은 사실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이홍성이 범한 앞에서 대놓고 울상을 지으며 돈이 없는 척한 건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니었다.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2 황자가 황실 금고 속 은전에 눈독을 들인다고 볼 수 없음을 말이다. 장 공주가 황실 금고를 관리하는 동안 태자가 황실 금고에 이런저런 일들을 해놓았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2 황자가 자신을 많이 신뢰하는 건 어쩌면 단순히 태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단으로 삼으려는 가능성이 더 컸다.
한데 세자의 거짓말 속에는 진실도 숨어 있었다. 일단 황실 소속인 일부 왕공 귀족들께서는 정말로 사는 게 여의치 않았다. 이건 범한 자신의 사정만 돌아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자신이 담박서국을 열지 않았다면, 아버지께서 국고를 관리하지 않으셨다면 어쩌면 자신도 여기저기에 손을 벌리고 다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홍성이 다른 이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서 조정에서 주는 녹봉만 가지고 살고 있다고?
연회는 끝나고 술도 소진되자 범한이 이홍성을 깨우기 위해 툭툭 두어 번 쳤다. 한데 아무런 반응도 없자 범한은 이홍성이 정말로 취했든 말든 상관 않고 일부러 취한 척 몸을 비틀거리며 상을 짚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밖에는 관리인이 불러다 놓은 범한 일행이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39화
일석거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문을 통해 들어오는 초가을 바람을 맞으며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진심으로 벗을 대하려 했건만 그 친구는 오히려 실망감만 안겨 주다니.
그런데 이 순간 소박한 옷을 입은 중년의 누군가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불안한 기색으로 범한에게 황급히 예를 올려 인사했다. 범한이 살짝 몸을 비키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홍성이 이 주점 전체를 세를 놓았다고 했고 문밖에는 호위병들이 깔렸는데 이자는 대체 어떻게 들왔단 말인지!
이 낯선 이는 범한 대인이 의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자 서둘러 자신을 한껏 낮추며 답했다.
“소인 최청천이옵니다. 일석거의 주인이지요. 범한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일석거의 주인장이라고 하는 걸 보니 이 참에 아첨을 하러 온 것 같았다. 이에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웃으려는 찰나 순간 성씨가 마음에 걸려 인상을 팍 썼다.
“최씨라고?”
최청천이 환심을 사기 위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사옵니다. 대인께서 북쪽에서 저희 2 공자를 교육해 주신 은혜에 인사하고자 집안 대인들이 이곳에 직접 오려 했습니다. 하오나 시재(詩才)가 뛰어나기로 유명하신 범한 대인께서 꺼리실 것 같아 대인을 잘 대접해 드리라는 집안 어르신들의 명을 받아 이렇게 소인이 대신 왔사옵니다.”
범한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씨 일족은 경도에서도 기반이 꽤 튼튼하고 북에서도 장사를 하는 명문대가다. 북제 상경에서 비 내리는 밤, 사절단 숙소에서 목숨을 구걸하던 최 공자도 바로 이 집안사람이고. 이제 보니 최씨 가문에서 아들이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든 원만히 매듭짓고자 이렇게 범한을 찾아온 것이었다.
최청천은 눈치가 빨라 범한에게 더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작은 산삼입니다. 몸을 보하는 데 큰 효험은 없으나 술 깨는 데는 최고입니다. 이미 깨끗이 씻어 놓았으니 생으로 씹어 드시면 됩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등자경이 옆으로 다가왔다.
길고 긴 거리를 내달리는 마차 안에서 범한이 상자를 열어 보았다. 한데 산삼은 없었다. 오히려 두툼하게 접어 놓은 은표(수표 같은 것으로 은전으로 환전할 수 있게 한 것)가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살펴보니 그 액수가 무려 2만 냥 가까이 되었다.
앞에 앉아 있던 등자경이 입을 떡 벌리며 한마디 했다.
“최씨 가문은 정말 통이 크군요!”
한데 범한에게서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물론 속으로는 살짝 놀란 상태기는 했다. 담박서국 몇 달 치 수익과 맞먹는 돈을 이리도 쉽게 내놓았으니 말이다. 범한은 최씨 가문이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실 금고의 북쪽 사업을 최씨 가문에서 계속하고 싶다면 일단 자신에게 잘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황궁에서 있었던 일과 선물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보던 범한이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범한은 전생의 기억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의지가 굳세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 이렇게 권력의 위력을 몸소 실감해 보니 은근 망연자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최씨 가문은 헛돈을 보낸 것이었다. 범한에게는 이미 계획이 서 있었고 최씨들은 나중에 장 공주와 함께 제거될 예정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세자에게 일었던 혐오감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살아가려면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리고 범한은 단순히 이홍성이 자신을 바보 취급한 게 기분 나빴을 뿐이고. 그러니 범한은 이홍성과 계속 친구로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등자경은 도련님의 낯빛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다 범한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래도 될까요?”
범한이 등자경을 바라보며 잠시 웃었다.
“세자께서 아까 내게 이런 말을 했다네. 황궁과 저택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가 진정한 어르신이 된다고 말일세. 그러니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 * *
마차가 으슥하고 외진 골목에 와 있을 때였다. 달은 이미 중천에 떠 은은히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범한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정왕부 사람들을 먼저 돌려 버냈다. 그런데도 등자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감찰원 관원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그림자 진 곳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감찰원 밀정 하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다가와 있었다. 계년조에 첫 번째로 합류한 사람으로 범한의 심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범한이 말했다.
“등자월, 내일 감찰원에 다음의 밀령을 전해 줘요. 이부 상서, 흠천감 감정, 좌부 도어사가 최씨 가문이 이끌고 있는 사업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조사해 달라고요.”
등자월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 크고 부리부리한 눈을 번쩍였다.
“제사 대인, 황실은 성지 없이는 조사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감찰원 내에서도 품계가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세 대신의 배후에 모두 2 황자가 있음을 은연중에 다 알고 있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대신 몇 명을 암암리에 조사하는 것뿐인데 뭘 그리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등자월은 자신의 대답이 제사 대인의 심기를 건드렸음을 알아차리고 즉각 입장을 바꿔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러자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몇 마디 덧붙였다.
“왕계년은 물어야 할 것과 묻지 말아야 할 걸 가릴 줄 알았습니다. 그의 임무를 이어받았으니 이 점만은 명심해 둬요.”
등자월이 겁에 질려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런 후 자기 눈앞에 불쑥 나타난 상자를 잠시 바라보기만 하다가 감히 열어 보지는 못하고 품에 품고는 뒷짐을 지며 걸어가는 범한 대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겨우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대인, 감찰원과 연락을 취할 때 소인은 이제 어떤 식으로 해야 합니까?”
그는 이게 물어도 될 말인지 아닌지조차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웃었다.
“공식 경로로 가면 안 되지요. 그러면 기록으로 남으니까요. 곧장 1처의 목철이란 자를 찾아가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범한은 성큼성큼 걸으며 오랜만에 밤이 무르익은 경도를 만끽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몇 마디만 더 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그 상자는 등자월 한 사람이 아닌 여러분에게 준 것입니다.”
경도의 밤은 북제의 밤보다 조금은 덜 북적북적했다. 경국 사람들은 이른바 태평성대란 것을 즐기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되면 대개 집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물론 유정강의 꽃놀이 배나 성 서쪽의 유곽이나 기생집은 이와는 완전히 딴판이기는 했다.
범한은 뒷짐을 지고 밤이 깊은 거리를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등자월도 상자를 품에 안고는 몇 발자국 뒤에서 범한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범한이 멈춰 서더니 여기저기 으슥한 곳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범한의 안전을 위해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감찰원 하급 관원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경도 사람이라면 내 곁에 그대들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굳이 어두운 곳으로만 다니는 거죠?”
범한이 웃으며 말하자 등자월이 씁쓸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감찰원 밀정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조정 관리들이 좋아하지 않아서입니다. 백성에게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러다 대인께 나쁜 영향이라도 끼치면 안 되어서입니다.”
그의 말뜻을 이해한 범한이 웃었다.
“그렇다면 항상 민가 지붕 위로 다니던데 자는 사람 방해하는 건 신경이 안 쓰였나요?”
그러자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모두 제사 대인이 시키는 대로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원래 감찰원에서 인정받던 관원은 아니었다. 그런데 범한의 명령으로 왕계년이 ‘계년조’를 꾸릴 때 다방면으로 활용하기 좋은 이들로 신경 써서 찾아 모은 게 바로 이들이었다. 그렇게 계년조에 편입된 이들은 모두 범한 제사를 따르게 되었고 그 후로 감찰원 내에서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인생을 살게 되었다. 감찰원 여덟 부처와 공무를 수행할 때면 그들로부터 매우 공손한 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매월 녹봉 외에도 거액의 수당을 받았다. 이와 같은 변화가 있자 이들은 범한 제사 대인을 따르게 된 것 자체를 행운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밤중이 가까워 오자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 그러자 등자월이 서둘러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 얇은 검은색 바람막이 옷을 범한에게 걸쳐 주고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일고여덟에 달하는 사람은 모두 감찰원에서 특별 제작한 단벌로 된 검정 옷을 입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무릎 아래쪽은 빛을 반사하는 재질의 옷감으로 되어 있다 보니 얼핏 보면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은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일행은 아주 재밌는 방식으로 서로 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걷고 있었다. 모두 침묵한 채로 범한을 가운데 두고 같은 보폭과 박자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은빛 달빛은 눈처럼 뽀얗게 내려앉건만 검은 옷은 그냥 새카맣게 검을 뿐이었다.
* * *
다음 날, 범한은 천하대도 옆에 위치한 건물, 즉 감찰원으로 갔다. 감찰원에 도착한 범한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곳마다 감찰원 관원들이 무표정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제사 대인, 나오셨습니까.”
“범 제사 대인, 나오셨군요.”
범한은 일일이 웃는 얼굴로 응대하며 감찰원의 그 방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 있는 감찰원 여덟 부처의 일곱 수장이 눈에 들어왔다.
범한이 살짝 허리를 굽히고 양손을 가슴팍까지 모으며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자 감히 거만하게 있을 수 없는 일곱 수장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를 했다. 특히 4처 언약해는 살짝 상기된 기쁜 낯으로 범한을 맞아 주었다. 부자가 상봉해 한 이틀간 잘 지낸 터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한편 진평평은 긴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웃는 것도 안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이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진평평의 오른쪽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스승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진평평이 양손으로 무릎을 문지르며 살짝 날카로운 소리로 자그마하게 말했다.
“지금 강남에 가서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 그냥 놔두거라.”
범한이 잠시 웃다가 앞을 응시한 채 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대인께서는 언제 놀러 가실 것입니까?”
그러자 진평평이 범한을 잠시 쓱 보았다.
“그거야 네가 언제 이 자리를 물려받을 만한 능력을 갖추느냐에 달렸지.”
* * *
감찰원에서 이런 회의는 자주 열리는 게 아니었다. 한데 하필이면 범한이 올 때마다 회의라니. 물론 그 두 차례의 회의에서 범한은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오늘은 범한이 북제행과 관련해 보고하는 자리였다. 범한의 보고를 들은 이들은 모두 마음을 놓았다. 북제에 깔아 둔 밀정 첩보망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왕계년에게 잠시 북방 일을 맡겼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모두 이견을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 제사인 범한에게는 그럴 만한 권한이 있었다. 둘째, 왕계년은 감찰원에서 충분히 경력을 많이 쌓은 인물이었다. 왕계년은 옛날에 무기력하게 지내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수장 중 한 명이 됐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그러니 운이 좋게 범한 제사를 만나고 또 범한이 자기 사람인 그를 한 계급 승진시킨 일은 파격적인 인사 축에도 못 들었다. 셋째, 북제에서 노점을 활용한 활동은 정말 위험한 거래다. 이는 4처 언약해의 아들이 당한 일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어 진행된 감찰원 인사 발표에서 여러 사람의 예상을 뒤집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1처 수장 자리는 주격이 자살한 후 계속 공석이었다. 그리고 진평평 원장 대인이 곧장 인사를 하지 않아 관찰원 관원들은 언빙운이 귀국하면 그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번 진평평 원장 대인이 발표한 임명안에 따르면 언빙운은 4처 수장이었다. 언빙운이 4처 수장이 되었다면 1처는 누가 관할하게 되는 거지? 언약해 대인인가?
진평평이 맥없이 눈을 떴다.
“언약해가 그동안 감찰원에 너무 오래 있어서 질렸다고 하더군. 그래서 감찰원 4처 수장 자리에서 사임을 했다네. 내일 문서가 작성되는 대로 이부(吏部)로 보낼 걸세. 경도에서 제일 한직인 곳에서 늙은 몸이나 쉬며 지내라고.”
240화
진평평 원장의 행동을 보니 언약해의 사직이 그리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언약해는 최근 1년 동안 아들의 생사를 걱정하느라 맘고생을 심하게 해 감찰원에서의 삶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감찰원 8대 처는 언씨 가문에서 동시에 두 명의 수장이 나오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란 걸 그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아들 언빙운의 승진을 위해서라도 먼저 사직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감찰원 8대 처의 수장들은 품계상으로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손에 쥔 권력은 각부의 시랑과 맞먹었으므로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범한이 언약해를 잠시 쳐다보았다. 역시나 그의 눈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드디어 벗어났다는 기쁨이 역력했다.
진평평 원장과 언약해 대인이 4처 후임자를 정했으니 다른 수장들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한데 이때 2처 수장이 물었다.
“1처는 수장 자리가 너무 오랫동안 공석 상태에 있었습니다. 어쨌든 누군가를 정해야 하실 겁니다. 목철······.”
그가 중간에 말을 끊고 고개를 가로젓다가 잠시 후 말을 이어 갔다.
“충성도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지요. 한데 목철 대인은 아첨에만 능하고 다른 능력이 좀 약하군요. 1처는 감찰원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서이고 경도 관원들에 대한 감찰을 관장하는 자리이니 유능한 인물이 가야 합니다.”
그러자 나머지 수장들도 머리를 끄덕이며 그의 말이 옳다고 동의했다. 1처는 여덟 부처 가운데 가장 빛나는 자리니 모두 언약해처럼 과감히 용퇴할 생각은 없어도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진평평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입을 뗐다.
“오늘부터 1처에는 수장을 두지 않을 것이네. 대신 모든 권한을 범한 제사에게 넘길 것이야.”
가볍게 툭 던지듯 나온 말이었지만 다른 수장들의 마음에는 철퇴가 내려진 것과 같았다. 싸워야 하는 상대가 범한 제사인데 어찌 감히 싸울 수 있을까. 범한은 원래 자신들의 상사이고 또 언젠가는 분명 진평평 원장 대인의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 1처를 맡긴다 한들 감히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모두 두려웠다. 제사는 거의 제한이 없는 권력을 쥐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도 범한 대인이 1처까지 관장하게 되면 1처 사무는 더 이상 감찰원의 관할 사항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다른 처가 1처 업무에 보조를 맞춰 주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렇다면 이는 곧 1처의 지위가 지금보다 반 등급은 더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달리 말하면, 범한 제사는 1처의 군주이니 그가 하는 말이라면 나머지 처에서는 모두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범한은 놀라 얼떨떨했다. 왜 진평평이 자신에게 1처를 맡긴 건지 궁금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원장 대인, 저는 제사란 직분도 겨우겨우 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구체적인 업무를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처를 맡기시다니요. 감찰원 업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진평평 원장이 짧은 몇 마디 말로 쐐기를 박아 버렸다.
“구체적인 업무를 해본 적이 없으니 1처를 준 것이다. 경험 좀 쌓으라고 말이다.”
* * *
회의가 끝나자 범한의 부하 격인 타처 수장들이 범한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감찰원은 조정의 다른 부서에 비하면 기풍이 건전한 편이었다. 그래서 범한에게 귀에 거슬리는 아첨을 하는 이는 없었다.
수장들이 모두 회의실을 나갔을 무렵, 홀로 끝까지 자리를 지키던 언약해가 범한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범한은 너무 부끄러운 마음에 서둘러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제가 아드님과 첫 대면을 했을 때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감찰원 업무와 관련해 저는 정말 한 게 없습니다. 그러니 언 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이 후배, 부끄럽습니다.”
범한이 겸손한 모습을 보이자 언약해는 이 젊은 귀인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에 살며시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며칠 뒤 범한 대인을 제 집으로 모시는 초청장을 보내겠습니다.”
“반드시 가겠습니다. 꼭 보내 주십시오.”
범한은 초대를 거절할 수 없었다. 물론 심 낭자가 지금 언빙운의 집에서 어찌 지내는지도 궁금했다.
* * *
회의를 하는 방 안에는 이제 진평평 원장과 범한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사고를 쳤구나.”
진평평 원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범한을 바라보았다.
“언빙운은 원래 침착한 성격이라 그 여인을 경도까지 데려올 리 절대 없지. 그래서 생각해 보니 그런 생각을 내놓을 사람은 너밖에 없더구나.”
세상 사람은 모두 진평평 원장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런 그 앞에서 오히려 후배인 척 연기하며 억울하다는 말을 마구 해대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원장 대인, 그 일은 하관과는 관계없습니다. 그 심 낭자는 사절단에 합류한 후 시종일관 북제 공주님 마차에서 지냈거든요. 그러니 저로서는 강제로 끌어내 죽여 버릴 수 없었습니다.”
진평평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경도로 돌아오는 동안 줄곧 흑기를 시켜 사절단 뒤를 따르도록 했다. 네가 그런 의사를 표한 게 아니라면 그 여인이 어찌 홀로 말을 몰아 사절단까지 난입할 수 있었겠느냐?”
범한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어찌 해명을 해야 할까? 잠시 후 범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악연일 뿐입니다.”
진평평은 세상에서 이 젊은이를 가장 아끼는 터라 더 책망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그러다 돌연 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한데 계년조에게는 왜 모습을 드러내게 한 거냐!”
이 일은 어떻게든 속일 수 없을 것 같아 일찌감치 대응법을 생각해 둔 터였다. 이에 범한이 미소 지었다.
“감찰원이 더 광명정대해지기를 바랐습니다. 항상 어둠 속에 숨어 다니니 많은 사람이 우리를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러니 굳이 그럴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광명정대라고?”
진평평이 인상을 팍 쓰며 말을 이어 갔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럼 됐다.”
범한이 진평평의 무릎을 덮고 있는 담요를 끌어 올려 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천천히 하십시오. 너무 서두르시지 마시고요.”
“오늘내일하는 판에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진평평 원장의 수척한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더군다나 수염도 없이 매끈한 턱 때문에 얼굴 위 주름을 더욱 골이 져서 훨씬 늙은 것처럼 보였다.
“기억하고 있거라. 내가 소은보다 나이가 조금밖에 안 어리단 걸 말이다.”
범한은 잠자코 있었다. 앞에 있는 이 절름발이의 몸에서 콕 집어 무어라 말하기 힘든, 회색의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지만 범한은 이내 마음을 강하게 다잡고 북제행에서 발생한 은밀한 일들을 보고했다. 물론 산속 동굴에서 소은과 밤새 긴 대화를 나눈 사실은 숨겼다. 자신은 이미 신묘의 구체적인 위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리리는 언제 입궁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진평평 원장은 천 리 먼 곳에서 그 여인을 통제할 자신이 있는 것만 같았다.
범한이 보일 듯 말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이 언제쯤 사리리의 남동생과 접촉할 수 있을지부터 따져 보았다. 그런 후 대충 둘러대기 시작했다.
“지금 몇몇과 함께 그 일을 추진 중입니다. 북제 조정에서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으니 분명 쉬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진평평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너도 잘 알다시피 1처 수장 자리는 원래 언빙운에게 주려던 거였다. 언약해가 아직 젊은 나이에 편히 지내고 싶어 할 줄은 생각 못 했던 부분이구나. 언빙운이 줄곧 제 아비의 부하로 일을 해왔으니 4처 업무는 잘 알고 있지. 그러니 4처에 남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구나. 한데 문제는 너에게 1처를 던져 놓은 거란다. 그러니 신경을 좀 더 쓰려무나.”
범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진평평이 괴이하게 웃으며 범한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곳저곳에 아주 많지. 사실 황제 폐하께서는 줄곧 네가 1처를 다시 수습하기를 바라셨거든. 경도에는 대부분 주요 부서들이 모여 있다. 그런 그들을 밀착 감시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황자들 간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버린단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일이 터져 버리는 거고.”
범한은 두려워졌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황궁 안 그분을 욕하고 저주하기 시작했다.
‘대체 당신 아들들이 싸질러 놓은 것들을 왜 제가 치워야 하는 겁니까!’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 팔걸이를 바짝 마른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그의 손가락 마디는 대나무 마디처럼 유난히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범한이 몸을 기울이고 팔걸이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다. 들어 보니 팔걸이도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었다. 순간 범한은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가지를 연결시켜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경국에서 가장 엄하고 무서운 이 노인에게 거센 바람에도 버텨 내는 대나무와 같은 절개가 있는 거였어?’
“이번에 북쪽에서 일을 괜찮게 했더구나.”
진평평 원장이 말을 이어 갔다.
“왕계년을 그곳에 남겨 둔 건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알고 있다. 하나 황제 폐하께서 하루 동안 아무 말씀 안 하시면 너는 그 하루 동안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 거란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 공주 쪽은 그 노선을 이용해 적지 않은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제가 내년부터 황실 금고를 맡게 된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황실 금고를 맡기 전에 그 노선부터 깨끗이 쓸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수습이 어려운 상태에서 물려받으면 제대로 된 성과를 못 낼 텐데, 그러면 제가 어떻게 세상에 얼굴을 내놓고 살 수 있겠습니까?”
진평평 원장이 범한을 잠깐 바라보았다.
“최씨 가문이 장 공주를 대신해 북쪽에 물건을 팔아 왔다. 만약 그 노선을 모조리 없애 버릴 생각이라면 그걸 이어받아서 할 사람은 생각해 둔 것이더냐?”
범한은 진평평 원장이 적임자를 소개해 주는 거란 생각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진평평 원장이 손을 내저었다.
“그 일은 황제 폐하께 보고할 거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동안 장 공주마마가 너무 깊게 손을 뻗치고 있다고 여기시거든. 하나 모두 한 가족 아니겠니. 그러니 그분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너도 손을 대면 안 될 터. 이 점만은 알아 두어라. 감찰원도 네가 황실 금고를 확실히 쥐고 있기를 바란다는 걸. 왜냐하면 첫째는 네가 제사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감찰원이 3원 6부 가운데 지금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황실 금고와 떼려야 뗄 수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란다.”
범한이 물었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진평평 원장이 범한을 쓱 쳐다보고는 음침한 음성으로 느릿느릿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감찰원은 모든 관리가 쥐고 있는 권력을 감찰한다. 그러니 나머지 2원 6부와는 그 어떤 관계도 맺어서는 안 되지. 그렇기에 나랏일과 감찰원 일은 줄곧 확실히 구분되어 있었단다. 감찰원에서 1년에 소모하는 경비는 실로 어마어마하지. 그렇지만 여러 해가 흘렀어도 감찰원은 국고에서는 단 한 푼도 받아 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부든 다른 부든 감찰원에게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는 것이야.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감찰원의 독립성이니라.”
범한은 명확히 이해했다.
“감찰원의 경비며 녹봉은 모두 황실 금고의 이윤에서 직접 떼 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진평평 원장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것은 네 어머니께서 세우신 규칙이기도 하다. 감찰원과 천하 관리들을 분리하기 위한 조치니라. 그래서 네가 훗날 이 감찰원을 장악하려면 몇천이 되는 감찰원 관원들과 국외에서 돕고 있는 이들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니 황실 금고가 건강할수록 감찰원의 경제적 기반도 견실해지는 거다. 아울러 독립적인 지위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거고.”
진평평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30년 전 그 유혈 사태가 있고 난 후,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여러 차례 신정을 실시하셨는지 모른다. 옛 군부를 군사원으로 바꾸시고 그것을 또 지금의 추밀원으로 바꾸셨지. 그런데도 또 병부를 다시 만드셨단다. 이건 그냥 단적인 예일 뿐이야. 이런 명목상의 일들이 만들어지고 고쳐지길 반복되었어. 근본적으로 바꾸지도 못한 것 같았고.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부(部)들은 그냥 두루뭉술한 한 뭉텅이가 되고 말았단다. 그럼에도 감찰원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지. 그건 바로 이 독립성을 갖고 있어서였단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아직 황제 폐하께서 무어라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네가 싸워야 하느니라!”
241화
진평평 원장이 범한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을 이어 갔다.
“훗날 언젠가는 황궁에서 감찰원을 부숴 버리려 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싸워야 한다. 만약 감찰원이 대리사처럼 쓸모없는 장난감으로 변해 버린다면 우리 대경국 조정은······ 어쩌면 과거 위나라처럼 서서히 낡아 빠진 장난감으로 타락할 것이니라!”
범한은 늙은 절름발이의 걱정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은 진평평보다 한 생애를 더 살았고 또 그로 말미암아 식견도 더 넓었으므로 이른바 감찰원의 독립성에 대해서는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황실 금고와 감찰원은 원래 한 몸과 같은 사이인 거지.”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진평평 원장이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네 아버지의 생각은 정말 너무 유치하단다. 황실 금고를 장악하려면 어떻게든 네가 권력을 쥐고 이 감찰원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하거늘. 한데 감찰원을 통제하고 싶다면 네가 이 감찰원에 제대로 피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해. 즉 돈을 너무 우습게 보지 말란 뜻이다. 그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게 천하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이 조직을 궤멸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진평평 원장이 아버지까지 들먹이자 범한은 자식 된 도리로 잠자코 듣기만 했다.
* * *
범한은 곧장 1처로 갔다. 1처 관아는 네모반듯하고 외벽이 시커멓게 칠해져 있는 이 감찰원 건물 안에는 없었다. 성 동쪽의 대리사 옆에 있는 어느 정원 안에 있었다. 그곳의 대문은 그런대로 장엄하고 경건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문 앞에 걸린 현판 때문에 범한은 하마터면 마부로 온 등자경의 얼굴에 물을 뿜을 뻔했다.
범한이 마차 벽에 손을 짚고 솟구쳐 오르는 웃음을 강하게 억누르며 이도 저도 아닌 현판을 바라보았다.
‘칙명, 대경(大慶: 대경국) 감찰원 제1 지점’
순간 시공간이 뒤바뀐 것 같은 황당한 느낌이 일었다. 범한은 자신이 갑자기 다른 시공간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것도 전생에 중국에서 유전(油田)으로 유명했던 ‘대경’이란 도시의 검찰청 문 앞에 말이다.
범한은 부임 행사를 간소하게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사전에 목철에게 연락을 해두지도, 감찰원 공문을 발송하지도 않았다. 감찰원 1처의 관원들은 오늘 새로운 책임자가 부임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문간방에 있는 사람도 관아 입구에 마차가 서 있고 누군가가 한동안 중얼거리는 걸 보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밖에 서 있는 젊은이가 바보처럼 배를 잡고 웃고 있구먼. 저 예쁘장한 얼굴이 아깝네그려. 그런데 계속 서 있기만 하고 안 들어오는데 대체 뭐 하는 짓이람?’
그런데 범한은 어느새 등자월과 몇몇 심복을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등자경은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감찰원이란 곳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문간방에 있는 근 반백인 늙은이가 서둘러 나와 길을 막았다.
“여러 대인께서는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요?”
범한이 순간 움찔했다.
‘처음 감찰원에 무작정 들어갔을 때 나를 막아 세우는 사람이 없었던 건 감찰원에 그냥 가보려는 한가한 사람은 없어서였을 테지.’
이에 범한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자신을 막은 문간방 사람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1처에는 평소에도 다른 관원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건가?’
범한은 오늘 관복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등자월 등 몇몇은 감찰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에 문간방 사람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신분이 애매해 비교적 부드러운 말투로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그를 무시하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 그사이 등자월이 손으로 그 늙은이를 막아 세웠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곧장 감찰원 1처 관아 안으로 들어갔다.
범한이 관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1처는 과연 다른 곳과 달랐다. 아무도 자신을 맞아 주며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이 방 저 방을 둘러보았다. 한데 방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지금은 근무 시간. 그런데 한 사람도 없다?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 이에 편청(偏廳)으로 가 직접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다. 그런데 관아 뒤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왔다.
계년조 중에는 1처에 소속되어 있던 하급 관원이 여럿 있었다. 때마침 그중 한 사람이 오늘 제사 대인을 따라온 터였다. 성은 소, 이름은 문무였다. 대인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돌자 소문무가 서둘러 서류 작업하는 방으로 달려가 당직 관원을 찾았다. 한데 한 사람도 없었다. 소문무는 무언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1처를 떠난 지 불과 1년인데 관아 전체 분위기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변한 거지?’
다행히 소문무는 1처 소속이었던지라 사람은 없어도 차와 뜨거운 물이 있는 곳은 알고 있었다. 이에 차를 내려 범한 앞에 아주 공손하게 대령했다.
범한도 서두르지 않았다.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마셨다. 그것도 조정의 나이 든 대신들처럼 침착해 보이려 허세를 부리면서.
등자월이 소문무를 향해 잠시 눈을 부라렸다. ‘왜 지금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가?’라는 의미였다. 소문무는 범한 곁에 서서 몸을 반쯤 굽히고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감히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였다. 당당했던 감찰원 1처가, 그것도 진평평 원장의 위엄 아래에 있는 이곳이 어째서 인적이 드문 일반 관아처럼 변한 건지 그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문간방 사람이 문밖에서 잠시 머리를 디밀고 몰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몇몇 대인들이 차를 마시고 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해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 이에 이들은 계속 이렇게 어색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슬슬 지치기 시작했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계속 앉아 있으라고 해놓고는 자기 혼자 편청 한쪽에 놓인 진열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서류들을 뒤적여 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런 행동까지 하는데도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1처의 기율이 무너져도 너무 심하게 무너졌군.’
그때 갑자기 몇몇이 웃으며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감찰원 관원이었다. 손에는 커다란 광주리가 들려 있었고 광주리 안에는 얼음으로 눌러 놓은 신선한 물고기가 보였다. 이들은 범한 일행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 한 관원이 곁눈으로 소문무를 발견하고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소 씨!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를 다 왔어요?”
소문무가 잔뜩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 보이다 구석에 있는 범한이 보내는 수신호를 보고 하는 수 없이 웃었다.
“오늘 제사께서 감찰원에 업무 보고를 하시는 날이네. 그래서 할 일이 없어 형제들을 데리고 좀 놀러 왔지.”
북제에 다녀오는 동안 계년조는 범한의 수신호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니 이 위기 상황에서도 그는 지금 일어난 일을 알려 줄 만한 건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그 관원이 손뼉을 치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광주리를 들고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부러운 기색으로 소문무에게 말했다.
“소 씨, 진짜 출세하기는 했네요. 그런데 그 도련님을 따라다니면 이제는 제멋대로 행동은 못 하겠네요?”
소문무는 적당한 말을 찾으려 애쓰며 소심하게 답했다.
“제사 대인께서는 엄격하시다네. 그러니 감히 그분 명성을 가지고 밖에서 허튼짓을 하고 다녀서는 안 되지.”
그러자 관원이 하하하 웃었다.
“그런 말은 필요 없고. 뭐 그런 좋은 일들은 우리 1처까지 오지도 않을 테니까요. 같이 가시죠, 가······.”
관원이 등자월과 함께 온 동료들에게까지 몇 마디 건넸다.
“이왕 온 거 너무 일찍 가지 말아요. 윗분들 회의는 오랫동안 하잖아요. 그 정도 사정은 우리도 다 아니, 그냥 저리로 가 우리랑 잠시 먹고 마시죠.”
등자월이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며 얼굴을 돌렸다. 관원은 등자월이 자기를 무시하자 분한 마음에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 봤자 범 제사 바짓가랑이나 잡고 늘어지는 것밖에 더 하겠어? 뭘 그렇게 우쭐대는 거야? 이들은 이제 그만 상대하면 되지 뭐. 소문무랑 몇 마디 더 한 후에 슬슬 내보내자.’
바로 이때 범한이 걸어왔다. 그것도 얼굴 가득 온화함을 담고.
범한이 물었다.
“형님, 아까 보니까 광주리에 물고기가 가득하던데 점심에 그거 드시려고요?”
관아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그러니 범한의 모습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고 관원은 그냥 웬 젊은이가 말하는 거라 생각해 껄껄껄 웃었다.
“먹기 너무 아까워서 이따가 집에 가져가라고 나눠 줄 거네.”
“그런가요? 꽤 비싼 물고기인가 봐요. 얼음을 채워 놓은 걸 보니.”
범한이 말했다.
“그렇지!”
관원이 등자월을 잠시 흘겨보고는 오만한 표정을 드러냈다.
“8백 리 먼 남쪽에서 서둘러 가져온 운몽어네. 대호에서 건져 올린 걸로 무지 싱싱하지. 얼음을 채워 넣지 않았으면 일찌감치 상했을 거야. 경도성에서 아무리 높은 대신도 쉬이 못 먹는 물고기라고. 군부나 먹을 수 있을 정도고. 여기가 위세 높은 감찰원 1처니 가능한 일이지 아니면 입이 호사하는 복은 못 누렸을 거네.”
“이제 보니 군부에서 보내준 거군요.”
범한이 살며시 웃었다. 경도 각부는 감찰원 1처에 잘 보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정도인 줄 몰랐을 뿐이다.
관원이 손을 모아 가슴팍까지 끌어 올리고 인사하며 말했다.
“그만 말하지. 그러면 여러분, 제사 대인께서 회의를 끝내실 때를 기다리는 거니 잠시 앉아 쉬시구려. 나는 내 가져갈 물고기나 챙겨 놓은 후 다시 나와 이야기를 나눠 드리겠소이다.”
범한이 말했다.
“천천히 하시죠. 우리는 일이 있어 목철 대인께 인사드리러 온 겁니다. 아직 그분을 찾지 못해 그런데 형님이 좀 찾아 주셨으면 합니다.”
관원이 범한을 잠시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일인데 내 해주지. 가서 알릴 터이니 기다리시게.”
* * *
관원이 웃으며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범한 일행의 시선 밖으로 벗어나자 표정을 확 바꾸고 종종걸음으로 관아 뒤쪽에 있는 방으로 가 문을 발로 걷어찼다.
방 안에서는 몇몇 사람이 의자에 앉아 시끌벅적하게 마작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깜짝 놀라 큰소리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상석에 앉아 있던 목철이 곱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바로 맑고 푸르스름한 마작 패를 암기처럼 날렸다. 그러고는 거친 말을 쏟아 냈다.
“뭘 그리 허둥대냐! 꼴랑 물고기 몇 마리 가지고 그 꼴을 보이다니!”
그러자 그 관원이 부들부들 떨었다.
“목철 대인, 우리 처에 젊은이가 왔습니다.”
목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누군데? 아는 놈이면 곧장 데려올 것이지. 지금 좋은 패를 쥐고 있어서 내가 갈 수 없거든.”
“모르는 자입니다.”
그 관원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하오나 소문무가 따라온 걸 보면 제 짐작으로는······ 아마도······ 그 도련님 아닐까요?”
목철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래서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나서는 그의 코를 향해 삿대질하며 꾸짖었다.
“너······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던 목철이 제자리를 몇 차례 뱅뱅 돌고는 황급히 물었다.
“정말로 제사 대인이었냐?”
“짐작건대 그러합니다.”
그 관원이 잔뜩 위축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얼굴을 마주했을 때 알아본 척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모르는 척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달려와 대인께 알리는 겁니다. 만약 정말로 범한 제사이시면 대인께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목철이 잔뜩 놀란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서둘러 마작 판을 치우고 이곳을 사무를 보는 곳처럼 꾸미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관원을 데리고 서둘러 편청으로 갔다.
그가 뛰어가며 말했다.
“풍아야, 네 공을 기억해 두마. 돌아가면 네 숙모에게 좋은 혼처 자리 구해 주라고 하······ 제기랄, 제사 대인이 온다고 하더니만 진짜로 왔네! 네가 대처를 잘해 다행이다만······ 역시 감찰원 1처다웠어! 이 정보 위장 작업을 버리지 않길 잘했어. 정말 잘했어!”
풍아라 불린 밀정이 손에 묻어 있는 얼음물을 궁둥이 쪽에 문지르며 말했다.
“목철 대인께서는 역시 훌륭한 지도자이십니다. 훌륭하세요!”
242화
목철이 침울한 얼굴로 느릿느릿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편청에 앉아 있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어느 대인께서 이 목 아무개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으스대는 걸 보니 1처 사무가 바쁘다는 걸 모르는 분인가 보오.”
소문무가 과거 동료를 보고는 조심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목철은 사실 누가 와 있는지 알고 있는 듯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이에 목철이 소문무의 눈치에 반응하는 척하며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휙 돌렸다. 뒤쪽에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쪽은?”
목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 발짝 더 다가가더니 놀라 까무러쳤다. 그리고 탁탁, 하는 두 번의 소리와 함께 즉시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하관 목철, 제사 대인을 뵈옵니다!”
범한이 아무 표정 없이 목철을 바라보았다. 그의 연기에 장단을 맞춰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목철은 여전히 놀라워하는 얼굴로 기뻐했다.
“대인, 말씀도 안 하시고 어찌 1처에 오신 겁니까? 대인을 밖에서 한참 기다리시게 했으니 하관,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범한은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목철은 범한의 웃는 얼굴에 순간 마음이 얼어붙어 버렸다. 범한 대인이 가장 달콤한 웃음을 날릴 때는 바로 그의 속에서 열불이 나고 있을 때란 건 모두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목철의 목소리가 절로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게······ 대인, 저기······ 하관.”
범한은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묵묵히 목철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커먼 목철의 얼굴에 어느새 두려움과 후회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리고 더 이상 말대꾸를 할 수 없기에 이번에는 두 무릎을 모두 바닥에 대고 꿇어 버렸다.
* * *
범한도 더 이상은 목철의 추한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목철은 1처의 주부(主簿)이고 이곳 사무는 기본적으로 그가 맡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편청이 너무 더럽군요. 손님을 맞기에 적합하지도 않고요.”
목철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속으로는 순간 기뻤다. 이에 옆에 있는 풍아에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얼른들 나와서 청소하라고 해!”
“사건 관련 문서를 이렇게 편청에 두다니 이것도 규칙에 어긋나는 거예요.”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목철이 팔짝 뛰며 뒤쪽에 있는 1처 관원들에게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문서를 뒤쪽 암실로 옮겨 놓았다. 그사이 나머지 관원들은 귀찮아하며 무력하게 터벅터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목철 대인이 한 젊은이 곁에 온순하게 서 있는 광경이었다. 1처의 나머지 관원들은 범한을 몰랐지만 모두 정보 수집과 정탐 업무를 수행했던 터라 머리 회전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 젊은이에 대한 신분 예측이 얼추 끝나자 모두 후다닥 튀어가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청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다. 사건 관련 문서도 가지런하게 정리를 마쳤다. 감찰원 1처가 지녀야 필수 능력 중 하나가 재빠른 반응 속도인데 이제 보니 이 능력은 아직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 * *
“반 시진(한 시간이며 한 시진이 두 시간) 주겠습니다. 오늘 각 부(部), 각 사(司), 각 부(府)에 가 있는 인원과 신분 노출을 하면 안 되는 사람만 빼고 나머지 1처 소속 관원들은 모두 만나 봐야겠어요.”
범한이 장삼을 뒤로 젖히며 의자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목철이 아부를 하듯 찻잔을 그의 손 앞까지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살짝 풀이 죽어 말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목철은 이 젊은 도련님은 속이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기 앞길은 모두 그의 손에 달려 있지 않은가. 그러니 시킨 일은 진지하게 하는 수밖에.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혐오감을 조금이나마 줄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별것 아닌 일로 직접 가지는 말아요.”
범한이 차를 마시는데 차가 식어 저도 모르게 불만스러운 듯 입을 벌렸다. 그러자 목철이 서둘러 따뜻한 차로 바꿔 주려 했다. 한데 범한은 그런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찻잔을 자기 옆에 있는 깨끗한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나와 함께 들어갑시다. 할 말이 있습니다.”
목철이 서둘러 부하에게 밖에서 놀고 있는 1처 직원들을 모조리 불러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얼른 범한 제사를 따라 후원으로 갔다. 그런데 조금 전 자신이 나왔던 방으로 범한이 들어가자 또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문지방 아래 있는 비취옥 마작 패를 보았다.
“역시 감찰원은 최고의 권력을 지닌 관아였군요. 마작 패조차 비취옥으로 만든 걸 쓰다니.”
목철이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해명했다.
“가짜 비취옥입니다. 그건 감히 대인을 속일 수 없지요. 재작년에 황실 금고에서 만든 물건입니다. 비취옥처럼 보이지만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지요. 예전에 8대 처에서 1처에게 나눠 준 것입니다. 1처에서는 저걸 줄곧 관아 안에 두었고요. 그 누구도 사적으로 취해 집으로 가져가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다 평소에······ 감찰원에 일이 없으면 가끔 한 번씩······. 소인, 부끄럽습니다. 부디 대인, 중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일은 잠시 후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냥 실망했습니다. 당당한 감찰원 1처가 흔적 지우기 기술도 이리 형편없다니요. 아까 여기에서 마작하고 있었지요? 몽땅 치웠을 텐데 왜 문지방에 하나가 남아 있는 겁니까?”
목철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 냈다. 아까 조카를 혼내려고 던진 마작 패였다. 눈썰미 없는 녀석들이 방 안을 치울 때 놓친 게 분명했다.
범한이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관직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 겁니까? 감찰원 업무를 날림으로 한 건 그렇다 치죠. 일이 없어 마작을 한 것도 대죄는 아니고······.”
목철의 가슴이 살짝 두근두근했다. 전부 큰 죄가 아니었다니. 이렇게 마음을 놓으려 하는데 느닷없이 팍! 큰 소리가 났다. 순간 크게 움찔한 목철은 몸을 웅크리고 범한 제사를 바라보았다.
범한이 탁자를 세게 내리친 것이었다. 지금 그가 지닌 패도의 공력이면 이 탁자를 단 한 번만 내리쳐 산산조각 내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커다랗게 소리만 내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이어 범한이 노기 섞인 싸늘한 목소리로 목철을 혼냈다.
“아까 광주리에 담긴 물고기를 봤을 때부터 당신들이 다른 부에서 이득을 편취하고 다닌다는 걸 알았습니다. 죽고 싶은 것입니까! 감찰원에서 알았다면 당신부터 능지처참했을 것입니다!”
목철이 얼른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깟 별것도 아닌 광주리 속 물고기로 왜 이러느냐고 생각했다.
범한이 싸늘하게 질책했다.
“그깟 광주리 속 물고기가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했습니까? 감찰원의 불변의 규율은 지켜야 할 거 아닙니까! 특히 경도 백관을 감찰하는 1처가 저들 조정 대신들과 형님, 아우 하며 친하게 지내면 나중에 감찰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범한은 언제나 부드러운 사람의 모습만 보여 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화를 내니 싸늘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실린 압박감이 실로 대단해 목철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 * *
범한은 자기 앞에 꿇어앉은 관원을 보고 있었다. 범한으로서는 실망하고 뜻밖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제 막 맡게 된 1처뿐만 아니라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이 사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일어나요!”
범한의 말이 떨어지자 목철이 그제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원래 감찰원 내부 조례에 따르면 상하 간에는 이렇게나 엄격하게 예를 따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이 상황은 목철이 자기 필요에 의해 범한의 말을 따른 것뿐이었다. 즉 그로서는 지금만큼은 조금 더 바르게 처신해야 했고 범한에게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얇은 철판 같은 입술과 시커먼 얼굴. 범한은 이 인상 깊게 생긴 얼굴을 향해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경도에서 내 진짜 신분을 처음으로 안 사람이 당신이니······.”
목철은 마음이 암담했다. 작년 외양간 길 사건을 조사할 때 주제넘게 백작가로 찾아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사남 백작가는 지금처럼 잘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자기 앞에 있는 젊은 대인이 신분을 밝혔고 그래서 그가 감찰원에서 전설로만 존재하는 제사임을 알게 되었다.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여서 이제는 조금 덜 치열하게 살아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재미를 본 건 왕계년이란 반늙은이였다.
“당신도 1년 동안 내 일을 도운 사람입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어 갔다.
“이치대로라면 당신도 내 연줄을 이용했어야 해요. 하나 그러지 않더군요. 그래서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기뻤습니다. 한데 1년 동안 이렇게나 많이 변하다니요. 처음에는 상사에게 아첨하는 것도 어색해하던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수시로 낯을 바꿔 가며 유들유들하게 처세나 하며 막 사는 관리가 되어 있다니······ 정말 실망입니다.”
정말 실망했다는 한마디에 목철은 자기 자신에게 더 실망하고 말았다. 목철은 자신이 왕계년처럼 제사 대인과 가까운 것도 아니고 해서 혼자서 큰일을 책임지게 되리란 희망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도 1년이란 시간 동안 7품 첨사에서 5품 주부로 승진할 수 있었던 건, 머리 대신 궁둥짝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 여기 있는 제사 대인의 체면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목철이 깊이 숨을 내쉬고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몇 마디만 했다.
“대인, 하관이 이후 어찌해야 하는지 부디 알려 주십시오.”
범한은 목철이 아까는 자신을 ‘소인’이라고 칭하던 것을 ‘하관’이라고 바꾼 게 인상적이었다. 이에 허리를 곧게 펴고 눈에 은근히 칭찬해 주는 것 같은 기미를 띠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누구나 다 만담꾼 보조가 될 천부적 소질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왕계년이 거들먹거리는 건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예전처럼 사건 조사에 몰두하는 자신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면 본관도 당신의 앞길이 잘못되도록 하지 않을 거예요.”
* * *
비바람이 몰아치고 나면 다시 맑은 날이 오기 마련이고, 또 맑은 날이 있은 후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목철은 앞에 있는 제사 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 어르신의 속마음이 이제 막 여름이 지나간 경도의 날씨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범한의 낮게 깔린 음성을 듣고 있었다.
“이제 좀 들어 볼까요? 1처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된 겁니까? 감찰원의 다른 몇몇 처를 가봤는데 여기와는 비교도 안 되었어요. 다른 처의 관원들은 모두 신중하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작 같은 건 말할 거리도 안 되죠. 심지어 변소에 다녀올 때도 서두르고 길을 걸을 때도 바람이 일지 않도록 신중하던데······. 그런데 여기를 좀 봐요! 여기가 무슨 도떼기시장입니까!”
목철은 일찌감치 모든 걸 다 내려놨다.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범한 대인의 다리라도 꽉 잡고 늘어져야만 했기에 모든 걸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제사 대인, 1처가 이리 변한 데에는 하관도 잘못이 있습니다. 한데 최근 1년 동안 수장께서 부임하지 않으셔서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자 제 아랫사람들도 하관의 말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기강이 해이해진 것입니다.”
범한은 왜 그런지 잘 알고 있었다. 원래 1처 수장이었던 주격이 신양 쪽에 빌붙어 언빙운 관련 정보를 유출했고 이는 언빙운이 북제에 붙잡히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훗날 감찰원 자체 조사로 주격은 실패했고,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감찰원 연석회의에서 자살했다. 이는 감찰원이 건립된 이래 가장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날로 1처는 수장을 잃게 되었다.
그러자 진평평 원장은 언빙운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계속 후임자 선발을 미뤘다. 감찰원 1처 수장은 매우 민감한 자리이다. 경도 백관을 은밀히 감찰하는 권한을 쥐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이 권력을 남용하면 많은 이득을 챙길 수도 있을 터. 한데 당시 감찰원에서는 적당한 후임자를 찾지 못해 수장 자리는 계속 공석으로 있었다.
243화
“책임자 대인이 관리하지 않았어도 조례와 각처의 세부 규정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일을 하지 않은 거죠? 설마 감찰원 위쪽에서도 이곳 관원들에게 주의도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범한이 무언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한데 목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어서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대인께서 말씀하신 조례는 있사오나 1처가 하는 일은 감찰원 윗선에서 문서를 발행해 주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수장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다면 우리 같은 일반 관원은 명목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각 시랑, 학사, 부에 가더라고 무릎을 꿇고 청하는 처지밖에 되지 않습니다.”
범한이 깜짝 놀라 화를 냈다.
“그렇다면 2처에서 최근 1년 동안 아무런 정보도 보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보내 주긴 했습니다.”
목철이 범한을 슬쩍 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하오나 경국 법률에 따르면 3품 이상의 관원에 대해 저희는 자체 조사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려면 칙명을 내려 주십사 주청해야 하고요. 적어도 원장 대인께서 직접 비준을 하셔야 합니다.”
범한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말했다.
“3품 이상의 관원에 대해서는 조사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3품이 안 되는 관원에 대해서는 조사를 한 건가요?”
목철이 대답했다.
“대인, 사실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1처는 감찰원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부서입니다만 실제로는 가장 무능한 부서이기도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2처와 3처는 모두 정보, 독약, 무기, 이런 묵직한 것들만 다루고 있습니다. 5처와 6처는 안보를 맡고 있고, 7처는 범인 처리만 하고 있고, 8처는 서적에 관해서만 일을 하고 있습니다. 8대 처 가운데 사람을 다루는 곳은 1처와 4처뿐이지요. 그런데 4처는 주로 국외 및 각 군과 로(郡路) 지역만 맡고 있습니다. 그 지역 관원들은 하급에 속하니 감히 4처와 힘겨루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나 갖다 붙여 그곳 현령을 내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누가 감히 4처에게 대들 수 있겠습니까.”
이쯤 되자 목철의 얼굴에 어느새 자조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우리 1처는 경도에 있어 보기에는 대단해 보입니다. 하오나 우리가 다루는 대상이 조정 대신들 그리고 경도 지역에서 대대로 관리하는 이들이다 보니, 실제 신분상으로는 저희가 많이 낮습니다. 그러니 지위는 더더욱 따질 것이 없겠지요. 그렇다 할지라도 경도 관리들이 대경국의 칙명을 받드는 감찰원 1처의 이름을 봐서 우리의 비위를 맞춰 주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6부에게도 그게 이득이니까 우리를 홀대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말로 힘겨루기에 들어가면······ 저들이 우리를 무서워할 리는 없습니다.”
범한은 ‘이건 아니잖아!’라고 생각했다. 전생에는 무능한 금의위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 없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3품 이하 관원이라면 당신에게는 입안(立案)할 권한도, 독립적으로 조사할 권한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당신에게 잘해 준 건 두려워해서죠. 그런 그들이 어떻게 감히 힘겨루기를 하려 했겠습니까!”
그러자 목철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대인, 그건 3품이 안 되니까 가능한 일이고요. 하지만 그들의 스승은요? 스승이 되는 관원들은 경도 곳곳에 거대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안건은 우리가 증거까지 찾아냈는데도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왜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1처의 형제들은 모두 경도에서 생활해야 하니까요.”
목철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다른 조정 관원에 비해 녹봉이 조금 많기는 하지만 집안의 다른 식구들도 생계는 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각부 관아에서 심부름꾼을 찾을 때 그때 관리들을 상대로 일할 생각이 아니라면 거리에 나가서 채소라도 팔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도부의 서기를 조사했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경도 부윤이 거리에 채소 파는 매대도 못 세우게 합니다. 당하는 쪽에서는 반박도 못 하게 경국 법률을 세세하게 들어 대면서요. 더군다나 황실과 연관 있는 분들은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등시구 지역에 있는 검소사(檢蔬司: 소설 속 채소를 검사하는 관청명) 대진은 누구나 다 아는 탐관입니다만 우리로서는 손도 댈 수 없었는데······ 왜인 줄 아십니까? 황궁에 있는 대(戴) 내관이 그의 친숙부이기 때문입니다!
“주격 대인이 자살······ 형벌이 두려워 자진하신 후부터 1처는 수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희 같은 하위 관원들은 경도에 있는 관리에게 죄를 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 중 높은 분들과 혈연관계가 없는 이가 있는 줄 아십니까? 모두 관직에서 서로 만날 여지는 다 남겨 두었더란 말입니다.”
주철이 자괴감에 말했다.
“그러니 저는 대인의 분노는 무섭지 않습니다. 하관, 1년 동안 명철보신하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감찰원에서 제게 큰 사건을 맡기신 게 아니라면 아무런 조사 업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인, 하관이 호랑이 같은 담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경도살이는 너무 힘듭니다. 평소에 잘 보여야 하는 관리들이 너무나도 많거든요.”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오늘 했던 것처럼 나와 계속 대화를 나눕시다. 그리고 기풍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바로잡을 기풍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상사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목철은 ‘기풍을 바로잡다’라는 새로운 용어를 듣고는 이유 모를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에 서둘러 대인에게 설명을 청했다. 그러자 범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설명해 주었다. 목철은 범한을 숭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경청했다. 그리고 자칫하면 잊어버릴세라 먹을 갈아 종이 위에 써두기까지 했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무렵, 등자월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더니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모두 모였습니다.”
* * *
감찰원 1처. 경도 외곽의 각 로(路)에 남아 있는 인원을 빼면 모두 310명의 관원이 와야 했다. 하지만 오늘 조사를 나간 사람과 각 대신의 저택에 숨어든 ‘첩자’를 제외하고 올 사람은 기본적으로 모두 온 터였다. 이에 1처 후원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모두 의관을 정제하고 엄숙하게 서서 제사 대인의 훈화를 기다렸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않고 맨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1처 관원들을 바라보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1년 동안 축적된 기강 해이를 한순간에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이들은 제법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또한 감찰원 밀정들이 지녀야 할 음울한 느낌도 풍기고 있어 범한은 이 점만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목철이 몸을 굽혀 범한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1처는 비교적 특수합니다. 밀정인데도 비밀스럽지 않게 행동하지요.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신분을 드러내 놓고 활동하는 자들입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여전히 신분을 숨기고 있는데, 그들 ‘첩자’의 명단은 감찰원에서 보관하며 열람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인께서 조사해 보고 싶으시다면 1처의 보고서와 진평평 원장께서 친히 내리신 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범한의 신분이 생각난 목철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대인은 제사이시니 원장 대인의 명까지 기다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1처의 보고서는 있어야 하니 잠시 후 제가 써드리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오늘부터 내가 1처의 관할자입니다. 만약 보고할 일이 있으면 누구에게든 쓰도록 하면 되겠지요.”
* * *
목철의 몸이 순간 굳어 버렸다. 범한 제사가 단순히 시찰을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1처 수장직을 겸하게 되었다니! 목철은 범한 대인과 함께 일하면 더 쉽게 친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에 그의 얼굴에 살짝 기뻐하는 기색이 돌았다.
* * *
후원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범한은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수백 명의 1처 관원들 역시 창처럼 꼿꼿이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군인들이 정렬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검은색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마치 비 오는 날의 스코틀랜드야드(영국 런던 경찰국의 다른 이름)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범한이고 여러분을 지휘할 1처 수장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신분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범한 대인이 1처의 수장으로 왔다는 소식에 모두 살짝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더 컸다. 주격이 죽은 후 1처는 경도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게 녹록지 않았다. 심지어 감사원의 관원들에게도 무시를 당했다. 그런데 이제 범한 대인이 수장으로 왔으니 감찰원의 나머지 일곱 처도 감히 어물쩍 넘기며 일을 그르치게 하는 일은 없을 터. 경도의 각 관아로부터 암암리에 재미도 더 많이 볼 테고 말이다.
하지만 범한이 이어 꺼낸 말에 1처 관원들은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본관은 최근 1년 동안 그대들이 어찌 지냈는지 안다.”
범한이 눈이 가늘어지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이후로 절대 그렇게 지내지 말라.”
범한은 아주 간단하게 결론을 내려 버리고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아 목철을 잠시 바라보았다.
목철이 몸을 일으켜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매우 위엄 있는 시선으로 관원들을 보았다.
“오늘 모두 이 자리에 집합시킨 건 제사 대인의 부임 첫날이시기 때문이다. 이에 본관이 제사 대인께 위임받은 권한으로 몇 마디 하겠다. 관련 취지는 모두 제사 대인께서 결정하신 것이다. 그러니 동료들은 모두 진지하게 들어 주기 바란다.”
감찰원 1처 관원들이 엄숙한 자세로 경청했다.
“오늘 나는 우리 1처의 기강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목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금 자신이 직면한 고충을 드러냈다.
“감찰원은 대체 왜 있어야 하는가? 왜 우리 1처가 있어야 하는가? 조정에 황제 폐하를 기만하고, 백성을 억압하고, 경국 법률을 저해하는 탐관오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서 관리들을 투명하게 살펴보고 다스리시도록 하기 위해, 백성들이 편히 살도록 하기 위해, 경국 법률의 존엄성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 1처가 필요한 거다.”
모두 경악했다.
‘목철 대인은 원래 일 처리와 사무나 잘 하는 사람이었는데 대체 언제 저렇게 관리다운 말솜씨까지 닦은 거지?’
그러나 폐하, 백성, 경국 법률이라는 거대한 세 개의 산에 압도되어 그 누구도 감히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우리는 1처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눈과 귀다. 만약 우리가 눈과 귀를 맑게 유지할 수 있다면 황제 폐하의 근심을 나누어 질 수 있다. 한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발걸음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정예 병사처럼 산처럼 나아가자!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경도 백관을 감찰하는 일은 단순히 모래 위에 쌓아 둔 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1처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이란 말인가? 황제 폐하의 지시는 당연히 영명하고 정확하시다. 1처의 업무 역시 성과를 내고 있다. 이 점은 제사 대인께서 앞서 크게 칭찬해 주신 바다.”
목철이 갑자기 화제를 돌려 지금껏 본 적 없는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하나 최근 1년 동안 1처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그동안 나는 1처 수장님을 대신해 왔다. 그러니 나의 책임은 당연히 내가 질 것이며 당장 내일 스스로 처분을 청할 것이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모두 감찰원 조례를 위반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도록!”
“개인 또는 1처의 명의로 조정의 다른 부와 사(司)로부터 선물 및 은전으로 환산 가능한 모든 것을 받는 행위를 금하겠다.”
“그 어떤 이유로도 보고 및 고발 접수를 거부하는 행위를 금하겠다.”
“그 어떤 명의로도 다른 부와 사의 관련 관원과 일상적인 접촉을 하는 것을 금하겠다. 그러므로 안건 처리를 위해 손님을 모셔야 하는 경우, 반드시 사전 신고하고 무조건 셋 이상이 만나야 할 것이다!”
“사무화 업무의 논리성을 강화하고 또한······.”
“감찰원 조례 및 관련 세칙 집행을 엄격히 관철해야 한다. 작년 1년 동안 우리 1처 동료들 가운데 타당하지 못한 일을 한 이가 있다면 열흘 이내에 본관에게 설명하도록. 그러면 과거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도록 하겠다.”
244화
목철이 계속해서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어 가자 1처의 관원들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모든 게 이른바 ‘기풍 바로잡기’ 운동이란 걸 몰랐다. 그들에게 들리는 건 범한 제사가 마음을 정말로 독하게 먹었으니 자신들이 1년 동안 재미를 봐온 걸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만 들렸다. 그리고 또 경도 관리들에게 밉보이는, 위험하지만 영광스러운 일에 다시 몸을 바쳐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이에 1처 관원들의 얼굴에는난처함과 분개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들은 단 한마디의 구시렁거림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6부 관원들이 지닌 관료풍의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표정 변화는 있을지언정 아주 강한 통제력으로 제자리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진평평 원장이 직접 훈육해 만들어 낸 감찰원, 이곳의 기질과 본질은 언제나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밀정의 부대이기 때문이었다.
목철이 발언을 마쳤다. 그러자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지금 나서서 이야기하라.”
하지만 침묵뿐이었다. 감찰원의 일반 밀정과 일반 조사 인원 그리고 범한이라는 행운아 사이에는 거대한 신분 격차가 있었다. 그러니 감히 앞으로 나서서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유인책을 썼다.
“지혜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아야 하는 법! 원장 대인께서 내게 1처를 맡기신 건 여기 동료들을 신임했기 때문이네. 본관은 바빠서 일반 관청에서 와달라 청해도 잘 안 간다는 걸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범한이 이 말을 마치자 후원에 모여 있던 관원들이 살짝 긴장감을 풀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제사 대인은 웃음 속에 칼을 숨겨 뒀다던데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방은 고귀한 신분에 천하에 이름이 난 큰 인재 아니던가. 어떻게 감찰원이 하는 그런 음습하고 추악한 일에 정통할 수 있으랴. 이에 이들은 잠시 호응만 해주고 나중 일은 나중에 처리하자는 심정으로 속속 허리를 굽혀 절하기 시작했다.
“제사 대인의 명령을 삼가 따르겠나이다.”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해서였다.
가까이 있던 목철은 범한의 눈에 서린 냉기를 보았다. 이에 범한이 부하들이 그다지 충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며 불만에 차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급해진 목철이 다급하게 바로 앞줄에 서 있는 풍아에게 눈짓을 했다. 풍아는 그와 같은 성을 가진 먼 친척 조카였다.
풍아는 숙부님의 눈짓을 앞에 나서서 반대 의견을 말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높디높은 제사 대인을 향해 대놓고 반대 의사를 말할 수 있을까. 풍아는 두려움에 두 다리를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숙부님이 지금껏 베풀어 주신 은혜가 생각나자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고는 대열 앞으로 나가 인사를 올렸다.
“제사 대인, 비록 1처의 업무가 경도 백관을 감찰하는 직을 수행하고 있기는 하나, 인정에 의한 왕래는 어쩔 수 없다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친척은 있기 마련입니다. 소인, 손위 처남이 지금 행마 감작사로 있사옵니다. 만약 저와 처남이 평소 왕래를 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오나 이로 말미암아 처남은 집안에서 사나운 처와 계속 싸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웃기려고 한 말처럼 들렸지만 감히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따라 풍아가 왜 저렇게 간덩이가 부은 짓을 하는지 그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범한은 기뻤지만 낯빛만큼은 여전히 음침하게 유지하며 싸늘하게 꾸짖었다.
“너는 감찰원 조례를 개똥으로 아느냐! 어디서 모욕을 하는 게냐! 세칙만 봐도 나와 있느니라. 3대 이내 친척은 신고 등기 후 예외로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한 건 무언가 찜찜한 게 있어서냐? 목철, 당장 네 먼 친척 조카를 끌어내 규율에 따라 처리하라!”
목철이 한숨을 내쉬고는 조카를 끌고 가 애통한 얼굴로 곤장을 쳤다.
범한이 싸늘한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더 할 말 없느냐?”
모두 범한이 직위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중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밀정 중 어느 고집이 센 이가 앞으로 나와 예를 올리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사 대인, 사건 조사는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높으신 분께서 위협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황궁의 태감들이 하는 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장은 침묵 그 자체였다. 1처가 사건을 처리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황궁과 관련 있는 관원과 부딪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감찰원이 아무리 강해도 여전히 황궁에서 부리는 졸개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 * *
범한이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의 이름을 대거라.”
세 음절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든 그대들을 협박하고 괴롭히면 그게 대신이든 권문귀족이든 범한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대라니! 지금의 경도에서 범한에게는 그런 말을 해도 될 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다. 물론 황궁에 있는 그들이 겉으로는 거만하게 굴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실제 상황이 닥친다면 아무리 3품 이상의 관원과 권문세족일지라도 범한이라는 위험한 인물과 부딪치는 걸 피하기 위해 그의 감찰원 부하들을 무시하지 못할 터였다.
왼손에는 감찰원의 권력을 쥐고 오른손에는 천하의 돈을 쥐고 있는데 대체 감히 누가 범한에게 밉보이려 하겠나.
* * *
범한은 조금 전 나선 관원이 살짝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일부러 목철을 압박했는데도 용감하게 나서서 말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이 속도를 늦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다른 생각도 있느냐? 죄는 묻지 않을 테니 모두 말해 보아라.”
그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지만 염치 불고하고 더 말했다.
“하관, 개인은 돈과 선물을 받지 않는 건 당연지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1처 명의로 받는 것은 무방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6부와 각 사의 관계가 조금 더 좋아질 수 있고 나중에 조사할 때도 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1처 명의로 받은 돈과 물건을 나누면 그것 역시 보조금이 될 수 있어서입니다.”
범한은 관원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은전을 향한 애착이 너무나도 강해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봉록만 놓고 보면 너희들은 같은 품계의 조정 관료들보다 세 배나 많다. 비록 다른 관원들처럼 외부 수익원을 가질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는 감찰원 건립 초기에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녹봉을 높게 책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건 불만거리로 삼을 게 못 된다!”
줄곧 그 뒤에 서 있던 소문무가 범한 제사와 조금 더 아는 사이란 걸 이용해 과감하게 나섰다.
“감찰원은 지금껏 다른 관원들의 배반과 백성들에게 무시를 당해 왔습니다. 1처의 처지는 비교적 특수한 편이라 조정에서도 더 많은 도움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후원에 있는 감찰원 밀정들과 하급 관원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장내에 질식할 것 같은 적막이 흐르자 범한은 그제야 단어마다 힘을 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조정이 그대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대신 그대들이 조정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기를 바란다.”
소문무는 범한의 말에 깜짝 놀라 하려던 말을 먹어 버렸다. 그리고 깊은 뜻이 담긴 말에 부끄러움과 존경심이 동시에 밀려 올라왔다. 그렇다. 1처 관원들은 자기 속궁리만 하고 있으면서 조정이 왜 감찰원을 건립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 전 앞으로 나와 말했던 관원도 순간 놀라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오랫동안 감찰원의 교육과 진평평 원장 대인의 훈계를 받아 왔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처음 감찰원에 발을 들였던 때의 정신 상태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가슴이 뜨거워진 그가 왼손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모든 건 경국을 위해서다!”
“모든 건 경국을 위해서다!”
이는 후원에 있는 모든 이가 감찰원에 첫발을 들인 그날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말이었다.
범한에게서 안도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가볍게 오른 주먹을 쥐고 홀로 속으로 외쳐 보았다.
‘모든 건 삶을 위해서다!’
* * *
우중충한 하늘, 경도 전체가 음침하고 스산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높고 깨끗한 하늘과 산뜻한 공기는 온데간데없고 네댓새 차가운 비만 뿌려 댔다. 빗물은 민가의 기와와 처마에 쌓여 있던 먼지들을 쉴 새 없이 씻어 내 주었고 바닥 석판 역시 어느덧 빗물에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경력 5년 가을의 첫 싸늘한 기운이 이곳을 덮쳤다.
범한은 손바닥을 비비며 신풍관 2층에 앉아 있었다. 시선은 창밖에서 촘촘히 내리고 있는 빗물을 향한 채 길 맞은편에 있는 1처 관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옮겨 다른 쪽을, 그러니까 대리사라는 관아를 바라보았다. 범한은 1처 관아와 대리사 관아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1처는 너무나도 조용해 보였다. 하지만 드나드는 감찰원 관원들의 낯빛이 침착한 걸 보니 처음에 보았던 모습과는 달라져 있는 것 같았다.
기풍 바로잡기가 시행된 지 이미 며칠이 지난 시점. 물론 범한은 몇 마디 구호 제창만으로는, 감찰원 조례를 다시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감찰원 관원들의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에 아무도 모르게 관원들이 자기 성찰과 자기 개선을 하고 있는지 계속 살펴보았고, 일부 관원들은 가차 없이 잘라 버렸다. 또한 일부 관원들은 7처로 보내 심문을 받게 했다. 그러자 1처 전체의 기풍이 드디어 효과적인 반전을 이루었다. 마치 정밀한 기계처럼 1처 관아가 유효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범한은 1처 내에 있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에 목철이 방 하나를 비우고 통째로 내주겠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대신 1처 대문을 나서서 경도에서도 유명한 신풍관 2층으로 갔고 그곳에서 거리가 보이는 방을 하나 빌렸다. 그리고 매일 그곳으로 올라가 간식이나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범한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1처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곧장 처리할 수 있어서였다.
탁자에 찜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대략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찜기 안에는 왕만두가 딱 하나 들어 있었다. 이 왕만두에는 소가 잔뜩 들어 있었고 만두피를 여민 곳에는 모두 열여덟 개의 주름이 만들어져 있었다. 작지 않은 크기에다가 새하얀 피 안에 맛있는 즙까지 풍성하게 담겨 있어 보기만 해도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범한이 왕만두 위로 가볍게 입바람을 불었다. 그런 후 만두피에서 주름이 한데 모인 곳, 그러니까 만두를 여며 놓은 용안(龍顔)이라 불리는 한가운데에 젓가락을 대고 피를 벌리자 안에서 신선한 육즙이 흘러나왔다.
범한이 밀짚 대롱을 들고 고개를 갸우뚱한 채 물었다.
“대롱으로 마셔야 하나?”
“델 수 있습니다.”
[원문은 “탕(湯)부터 마셔야 하나요?”/“뜨겁습니다(燙: 데울, 뜨거울 탕)!”로 말장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범한이 다음에 웃는 이유에 대해서 이해를 돕고자 설명을 덧붙입니다.]일꾼이 대롱을 줘놓고 질문을 잘못 알아듣고 덴다고 하자 범한은 순간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젓가락으로 용안 부분을 인정사정없이 벌렸다. 안쪽에는 조금 전 흘러넘쳤던 즙과 더불어 맛난 고기소가 담겨 있었다. 범한이 작은 접시로 받치며 고기소를 꺼낸 후 다시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 그런 후 아첨하듯 말했다.
“대보는 제일 착한 사람이니 고기가 너무 뜨거우면 안 돼요. 그러니까 먹을 때 여러 번 입바람을 불어서 식혀야 해요.”
대보는 말을 참 잘 들었다. 양 볼을 볼록하게 부풀리더니 그릇에 놓인 고기에 열심히 입바람을 불었다.
“후! 후! 후!”
장인 임약보가 사직해 낙향하자 그가 살던 저택은 한산하고 쓸쓸해졌다. 이에 범한이 북제에 있는 동안 대보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남 백작가에서 보냈다. 그런데 범한은 집으로 돌아와 며칠이 지나도록 대보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이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임완아에게 물어보니 그가 귀국했을 때를 생각해 임대보를 원래 살던 저택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했다.
범한은 기분이 조금 나빴다.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 사람들이 임대보를 괴롭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임약보 전 재상의 저택이자 임씨 가문 저택인 곳에 있는 종들은 교활하게 나쁜 짓 하는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곳에서 임완아의 먼 친척 형제들이 임대보를 돌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범한으로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245화
1처 수장 자리를 맡은 후 범한은 여러 날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그러다 보니 임대보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 오늘 비도 오고 또 경도에 아무 일도 없고 해서 그는 등자월에게 임대보를 임씨 가문 저택에서 데려오도록 했다. 임대보는 신풍관에서 범한과 한 의자에 앉아 이 식당에서 가장 유명한 접당(接堂) 왕만두를 먹고 잠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제 그만 불고 먹어요.”
범한이 웃으며 형님 임대보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적 수준이 어린아이 정도인 임대보는 범한을 유난히도 잘 따랐다. 이에 임대보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한입에 고기소를 먹어 치웠다. 그것도 만두 맛을 제대로 맛보았는지 어쩐지 알 수 없이 매우 다급하게 먹어 치웠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범한은 순간 저팔계가 인삼과를 먹는 모습이 연상되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다.
다른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등자월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범한을 따라다니는 계년조의 인원수는 서른 몇 명. 이들은 총 네 개 반으로 나뉘어서 범한을 근접 호위하고 있었다. 등자월의 경우는 왕계년의 직위를 이어받은 후 범한에게 거의 꼭 붙어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 요 며칠간 범한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누구보다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본 범한은 1처의 기풍을 바로잡은 후로는 한동안 구체적 지시도 내리지 않고, 날마다 이 신풍관에서 머물며 맛난 거나 먹고 노랫가락이나 들으며 지내는 중이었다. 그런 범한이, 제사씩이나 되는 신분으로 지능이 낮은 처의 오라비를 살뜰히 챙기는 걸 보니 그로서는 조금 의외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감동 같은 게 일었다.
아래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등자월은 즉시 쓸데없는 생각에서 벗어나 허리춤에 있는 장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독수리의 눈처럼 계단이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건 목철이었다. 요 며칠 동안 그는 조사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수상한 부하들을 조사하는 한편 1처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했다. 또한 범한이 남몰래 맡긴 임무도 처리해야 했다. 이에 한가롭게 신풍관에 올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움푹 파이고 원래 검었던 얼굴에는 건강 이상을 알리는 기색이 나타날 정도였다.
목철이 쓰고 있던 비 모자와 비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것을 방문 앞 한쪽 구석에 대충 던져 놓고는 품에서 조심스레 원형의 통 하나를 꺼냈다.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통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수가 되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가 품에서 꺼낸 둘둘 말린 종이가 전혀 젖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한이 종이를 받아 들고 내용을 한 줄 한 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사이 그의 눈썹은 점점 일그러지고 낯빛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경도로 돌아온 초기, 그는 2 황자와 연관된 대신(大臣) 몇몇이 최씨 가문과 어떤 관계인지 등자월에게 알아보도록 했었다. 그 후 자신이 1처 수장이 된 후에는 목철에게 같은 임무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이것을 목철을 시험해 보는 계기로 삼았다.
내용만 보면 유력한 증거는 없어 보였다. 한데 이것도 예상한 바였다. 상대방의 수족이 분명 일을 매우 깨끗하게 처리했을 터이니 말이다. 다만 깨끗해도 너무 깨끗했다. 설마 최씨 가문 같은 큰 일족이 요 몇 년간 이부 상서, 흠천감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이리 이상한 걸 보면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장난질을 치고 있을 터. 범한이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이게 다인가요?”
목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다시 물었다.
“2처에는 물어봤나요?”
목철이 범한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2처에서는 매우 협조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감찰원 윗선 명령으로만 알고 있고 제사 대인의 뜻인 건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했으니 대인, 염려 마십시오.”
“2처 쪽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나요?”
범한은 순간 자기가 아직도 젓가락을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 일에 대해서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젓가락을 찜기 옆에 내려놓았다. 범한에게 가장 큰 적은 저 멀리 신양에 있는 장 공주였다. 한데 그 누구도 장 공주가 언제 경도로 돌아올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범한은 꼭 확인을 해야만 했다. 태자와 장 공주의 관계가 소원해진 후 대체 어느 황자가 장 공주와 한 패거리가 되었는지 말이다.
목철이 여전히 공손하지만 살짝 자신감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경도 감찰과 관련해 2처가 정보 업무를 맡고 있기는 합니다. 하나 정보의 출처는 우리 1처와 같습니다. 그러니 대인, 염려 놓으십시오.”
범한이 그에게 이제 그만 나가 봐도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철이 나간 후 범한은 종이 위에 빼곡히 쓰인 작은 글씨들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거기에는 최씨 가문이 최근 몇 년 동안 뇌물을 준 이들의 명단, 시간, 이유가 적혀 있었다. 조정의 경도 관리 대부분이 연루되어 있는데도 2 황자와 관련된 흔적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범한은 머리가 아팠다. 자신의 직감은 분명 2 황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정보로도 정작 필요한 걸 찾을 수 없다니.
범한은 자기가 암살, 권력 장악, 세력 형성 면에 재주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온화해 보이는 겉모습 아래로 자객의 심장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황자처럼 사람을 잘 다루고 사람의 마음을 잘 주무르는 건 아니었다. 또한 모사처럼 정보 분석에 능해 판단력을 바탕으로 방책을 내놓는 데 능한 것도 아니었다. 즉 범한은 자기 단점은 숨기고 장점은 활용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으며 이에 자신을 위와 같이 분석하고 있었다.
북제 상경성에서 펼쳤던 치밀한 계획을 생각하며 범한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익살맞으면서도 생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왕계년이 슬슬 그리워지기 시작해서였다. 물론 그 계획을 전반적으로 조정한 사람은 언빙운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경도로 돌아가면 언빙운을 자기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한데 감찰원에서 그를 4처 수장으로 임명해 버리더니 자신에게는 1처를 맡겨 버렸다. 그러니 언빙운 공자에게 조정과 관련한 지략을 짜내도록 만들려던 계획은 그대로 어그러지고 만 것이었다.
범한이 임대보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가 작장면(중국식 짜장면)에게 최후의 맹공을 펼치는 중이어서 범한은 그 광경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다. 범한은 찜기 안에 남은 만두피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보의 그릇 안에 남아 있던 잔여 고기소를 깔끔하게 닦아 낸 후 후딱 입 안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임대보가 깜짝 놀랐다. 손 하나가 갑자기 자기 그릇 안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걸 보아서였다. 하지만 임대보는 한참 후에야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는 만족한 표정의 범한만 볼 수 있었다. 이에 임대보는 무언가 원망스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작장면을 먹었다.
* * *
신풍관 밖에서는 아직도 비가 후드득후드득 내리고 있었다. 세찬 빗발이 땅에 떨어지면서 만들어 낸 작은 물방울이 물안개까지 만들어 점점 시야를 흐릿해졌다. 주변에 들어선 건축물도 몽롱하게 물안개에 젖어 들어 갔다. 한기(寒氣)도 빗방울을 따라 경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신풍관 문 앞에 있는 어느 일행의 몸 위로 떨어져 내리며 그들의 옷깃을 파고들어 온기를 얻으려 했다.
범한이 바람막이 옷을 임대보에게 입혀 주었다. 그리고 세심하게 목 쪽에 있는 단추를 채워 주고는 재차 바람이 옷깃으로 새어 들어가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런 후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임대보의 어깨를 톡톡 토닥여 주었다.
“범한은 일하러 가봐야 해요. 대보 형님은 먼저 집에 가서 완아와 놀고 계실래요?”
임대보가 사과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물우물 답했다.
“누이는 너무 무서운데······ 나······ 범······ 꼬마 뚱땡이랑 놀래.”
범한은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웃기 시작했다. 만약 이 세상의 관리, 신하, 장사꾼, 기녀, 시인이 모두 임대보처럼 단순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어쩌면 자기 삶이 훨씬 단출하고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한이 등자경에게 조심스레 몇 마디 건네자 사남 백작가 마차가 대보 형님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등자월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인,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언씨 가문 저택으로 갈 것이네.”
등자월은 조금 의외였다.
‘비가 이리도 많이 오는데 차라리 부하가 일을 처리하고 오기를 기다리시지. 그냥 신풍관에서 맛난 거나 드시며 계시거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화로 앞에서 차나 마시며 쉬실 것이지 왜 하필이면 폭우를 뚫고 언씨 가문 저택으로 가시려는 건지.’
등자월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대인이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서 마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등자월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범한에게 대답하고는 맞은편에 위치한 1처로 향하려 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비옷에 달린 모자를 머리에 훅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비가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는 거리로 걸어 들어갔다. 범한이 걸친 회흑색 옷 위를 빗물이 거칠게 내리쳤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감찰원이 입는 관복은 평범하지만 특이한 형태로 되어 있었다. 특히나 비가 오는 날 조사를 하러 나갈 때 이 옷을 입으면 좋았다. 넓지만 길지 않은 옷소매에 옷 전체가 방수가 되는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등 뒤쪽으로 몸체와 연결된 모자가 있었다. 그래서 이 특이한 모양 때문에 바람막이 옷이 되기도 하고 온몸을 푹 덮어 가리는 용도로도 쓸 수도 있었으며, 비를 맞아도 빗물이 옷 속으로 침투되지 않고 그냥 흘러내려 비옷이 되었다.
옛날 서무 학사가 경도에서 감찰원의 관복을 처음 보았을 때 매우 흥미롭게 여기며 ‘연의(蓮衣)’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빗물이 연잎에 떨어지면 물이 진주알처럼 뭉쳐 흩어지는데 이 옷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한데 특이한 모양 때문에 경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미적 감각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었다. 이에 연의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음에도 민간에까지 널리 펴져 나가지 못하고 감찰원 관원과 밀정들만 입는 정도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경도에서 비 오는 날 회흑색의 연의를 입은 사람과 마주치면 사람들은 감찰원 관원이 일하러 나온 것임을 알아차리고 모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피했다.
범한이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계년조의 몇몇도 감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날 달밤에 했던 것처럼 모두 각각의 방위로 흩어져 적당한 거리에서 범한을 지켰다. 사람이 거의 없는 비 오는 적막한 거리, 쭉 뻗은 거리 위에서 이들은 앞을 향해 나아갔다. 빗물이 옷 위로 쉼 없이 떨어지는 가운데 장화 신은 발을 빗물 속에서 담가 가며 타다다닥! 소리를 내며 말이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빗물 속에서 몇몇이 침묵의 살수 같은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몸을 굽혀 손님을 배웅하던 신풍관 주인장이 고개를 살며시 치켜들고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범한 제사란 이는 참으로 묘한 사람이구나. 부하 몇 명까지 대동하고 나서니 몸에 걸친 저 이상한 옷도 다 멋지게 보이고 말이야. 옷이 사는군.’
246화
언씨 가문 저택은 1처 관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선 빗속을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런 후 다시 그 골목에서 나와 오른쪽을 보면 언씨 가문 저택의 그리 크지 않은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저택에 사는 부자(父子)가 조정의 대외적인 모든 간첩 활동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범한도 더 진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약해는 감찰원 4처를 10년 동안 관리한 노신(老臣)이라 황제 폐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있었고 진평평 원장으로부터도 깊이 신뢰받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조정 6부 대신들이라 해도 그 앞에서는 감히 허세를 부릴 수 없었다.
감찰원 관원들의 벼슬 품계는 감찰원 설립 초기부터 매우 낮게 설정되어 있었다. 이에 공무 집행의 편의성을 위해 황제가 억지로 이들의 정치적 지위를 높여 놓았고 그 방법으로 이용된 게 바로 작위 수여였다.
이에 언약해만 봐도 몇 년 전에 이미 2등급 자작(子爵)으로 봉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작년에 장 공주 때문에 언빙운이 북제에서 잡히자 황제는 감찰원에 충성을 바친 이를 위로하기 위해 언약해의 작위를 3등급 백작으로 올려 주었다. 범한의 부친인 범건의 현재 지위가 호부 상서인데도 아직까지 1등급 백작인 걸 감안하면 황제가 감찰원 관원들을 얼마나 후하게 대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언씨 가문 저택은 아직도 문 앞에 있는 편액을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아래쪽에 쓰여 있는 글자는 여전히 ‘정징자부(静澄子府)’이지 ‘정징백부(静澄伯府)’가 아니었다. 글자색 역시 황금색이 아닌 검은색이다 보니 존재감이 매우 낮아 보였다.
한데 대대로 공(公)으로 봉해지는 대신들을 제외하고 고관의 저택을 나타내는 ‘부(府)’라는 글자 앞에 작위를 넣을 수 있는 건, 황제 폐하의 칙명으로 저택을 하사받은 경우뿐이란 걸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부(子府)’란 글자만 봐도 언약해의 저택은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것이었으므로 아무리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범한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문 앞에 범한 일행이 서 있자 집사가 일찌감치 그들을 발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이들이 비옷을 입고 있어 금세 감찰원 관원임을 눈치챈 상태였다. 하지만 큰 어르신의 동료인지 아니면 도련님의 친구인지는 알 수 없어, 속히 계단 아래로 내려와 손으로 비를 가린 채 범한 일행을 맞았다.
범한이 쓰고 있던 비 모자를 벗고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드러내며 물었다.
“언빙운 공자는 있는가?”
집사는 이제 막 큰 어르신은 안 계신다고 대답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상대방이 먼저 물어 오자 도련님을 만나러 왔다는 걸 알고는 그제야 이 청초한 용모의 주인공이 뉘신지 금세 알아차렸다. 이에 집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도련님은 안에 계십니다. 하온데 대인께서는 제사 대인이신지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그러자 집사가 재빨리 비옷을 받아 들고 왼손으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대인, 안으로 드시지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네 집 도련님이 북제에서 돌아왔으며 이 범한 제사라는 사람과 잘 아는 관계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기가 다 안다는 듯 먼저 들어가 통보부터 한 게 아니라 직접 범한을 맞이해서 저택으로 모시고 들어가는 방법을 취했다. 범한은 이런 생각이 들자 웃으며 집사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범한의 벼슬 등급이 언씨 부자보다 높기도 했거니와 이런 상황에서는 굳이 사양하며 따라 들어갈 필요는 없었으므로 범한은 그냥 냉큼 안으로 향했다.
범한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저택 내부가 어찌 생겼는지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사가 우산을 씌워 준 상태에서 걷다 보니 가는 내내 특별한 것은 보지 못했다. 이에 빗물로 흠뻑 적셔진 정원 내 기이하게 들어선 가짜 산이나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가짜 산 위에 자란 이끼는 빗물에 청춘이라도 되찾은 듯 파릇파릇했다.
가짜 산을 끼고 돌자 바로 저택의 안마당이 나왔고 저 멀리 처마 밑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범한은 그들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음을 짓고는 손을 흔들어 다른 일행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범한은 바닥 석판에 고인 빗물을 천천히 밟으며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길게 늘어선 처마 아래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빗속에 잠긴 경치 감상용 다리, 빗물에 축축이 젖은 기둥 근처 돌계단 그리고 여전히 꿈쩍할 생각도 없는 처마 밑 두 사람. 이들은 긴 의자에 앉아 가을날 비 내리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둘 중 한 사람은 당연히 얼마 전 경도로 돌아온 언빙운 공자였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이 의외였다. 바로 천 리 길을 도망 온 심 낭자였다. 두 사람은 함께 의자에 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빗물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끝도 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엮어 낸 주렴(珠簾: 구슬을 꿰어 만든 발)에 자신의 눈빛이 반사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되기만을 바라는 사람들 같았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언빙운 저 인간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싸늘했지만 눈동자만큼은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심 낭자는 집안이 망한 처참한 고통에서는 이미 벗어난 듯 살며시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실의에 찬 기색이 엿보였다.
서로를 원망하는 한 쌍의 남녀가 대화를 하지도,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으면서 서로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는, 참으로 괴이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심 낭자의 행색 때문에 범한은 더 괴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행색을 보니 여종의 복장에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족쇄의 한끝은 방 안에 들어가 있고 그녀는 이 긴 사슬을 끌고 밖에 나와 있는 중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언빙운이 채운 게 분명했다.
* * *
범한은 다시 차분히 그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빙운의 지금 심정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편안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차려서였다. 그게 아니라면 범한이 뒤쪽에 그리 오래 서 있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이에 범한이 두어 번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언빙운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밉살맞을 정도로 온화하게 웃는 얼굴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노기가 번뜩였다. 방해를 받아 분노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가둬 둔 여성 포로 때문에 범한에게 심려를 끼쳤다는 생각을 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심 낭자는 범한을 발견하고는 어떤 마음 자세로 그를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어두운 낯빛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인사를 하고는 곧장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처마 밑에서 빗소리와 함께 쇠스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언빙운은 범한의 방문이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듯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그에게 안기를 권했다. 범한은 이 저택이 이상하리만치 적적하고 썰렁한 곳이라 생각하고 있다가 심 낭자가 방금 일어난 의자에 앉으니 궁둥이에 따스함이 느껴져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이에 이러는 건 시의적절치 않은 태도이고 신분을 생각해서 이러지 말자고 자신을 강하게 억누르며 입을 뗐다.
“천신만고 끝에 경도로 돌아왔으니 저택이 축하를 해주러 온 관원들로 붐빌 거라 생각했어요. 한데 이리 비가 내리는 날 대인과 심 낭자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자 언빙운이 제법 진지하게 해명에 나셨다.
“첫째, 저는 저 여인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저를 경멸하고 있을 테니까요. 둘째, 울고 있던 건 하늘이지 제가 아닙니다.”
그러자 범한은 어깨를 으쓱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언빙운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아버님께서는 조정 관원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경도에서 저는 제사 대인처럼 유명인도 아닙니다. 그러니 댁에 비하면 저희 저택은 썰렁할 수밖에요.”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박했다.
“나도 다 알고 있답니다. 북제에 가기 전에 대인은 경도에서 꽤나 유명한 공자님이셨다죠. 귀국한 후에는 관직이 오를 게 뻔한데 이참에 언빙운 대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어찌 안 찾아오겠습니까? 감찰원 내 수장이라 조정 관리들과 계통이 다르기는 해도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버릴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언빙운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개를 세 마리 기르고 계십니다. 모두 문 앞을 지키고 있지요. 그러니 그 누구도 감히 저택으로 못 들어온답니다.”
범한이 깜짝 놀라 축축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해다.
“들어올 때 그런 건 보지 못했는데요!”
그러자 언빙운이 말했다.
“오늘은 비가 손님 방문을 막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덩치 큰 흑구들을 요 며칠 쉬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 * *
“대인,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기에 방문해 주신 것입니까?”
일부러 거리 두기를 하려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쩌면 집안 교육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범한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곧장 품에서 원통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언빙운의 품을 향해 툭 던졌다.
언빙운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대충 훑어보았다. 낯빛이 살짝 불편해진 그가 말했다.
“대인께서는 수하를 너무 믿으시는군요. 이건 1처에서 할 일입니다. 제게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규정을 위반하신 것입니다.”
범한이 미소 지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곧 부친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는다고 나를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고. 그리고 매번 나를 대인께서라고 높여 부르는 이상 답은 간단한 겁니다. 내가 아무리 1처에, 대인이 4처에 있어도 어찌어찌해도 나는 제사인 거죠. 그러니 내가 정말로 급해지면 명령을 내려 언빙운 대인을 곧장 1처로 데려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직위를 낮추어서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을 테니 그런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 정보들이 제대로 된 건지나 좀 봐줘요.”
그러자 언빙운이 불쑥 화를 냈다.
“대인의 말도 안 되는 이치를 가지고 저를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대인께서 직위를 이용해 저를 찍어 누르려 하신다면 직접 원장 대인께 찾아가 말씀드릴 것입니다!”
범한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처마 밖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조소하듯 말했다.
“그리 말했으니 결국에는 1처 주부로 오게 될 거예요.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아요.”
언빙운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억지로 참으며 종이에 적힌 정보를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했다.
“무엇이 알고 싶으신 겁니까?”
“큰 거 딱 하나요.”
범한이 자그마하게 말을 뱉어 놓고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언빙운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언빙운의 날렵하고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단어 하나하나를 똑똑히 말했다.
“조사 좀 해줘야겠어요. 2 황자마마와 최씨 가문 사이에 대체 관계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말이죠.”
처마 아래 공기가 순간 침묵과 함께 가라앉았다.
언빙운은 놀라거나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이 종이를 가리켰다.
“북제 상경에 있을 때부터 대인이 최씨 가문을 어찌하실 거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점만큼은 저를 속이지 못하셨지요. 하오나 2 황자마마라니요? 그분과 신양 쪽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언빙운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범한이 최씨 가문을 손봐 주려는 이유는 장 공주 때문임을. 그리고 범한이 최씨 가문과 2 황자와의 관계를 조사하려는 것 역시 장 공주를 겨냥해서라는 걸. 그래서 2 황자가 연루되자 그로서는 살짝 생뚱맞다는 기분이 들었다.
“직감이에요.”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신양 쪽과 맞서는 일은 언빙운 대인에게는 처음부터 숨기는 게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 일과 관련해서 당신과 나는 자연스레 동맹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2 황자마마께 의심이 생긴 건 내가 북제에 반년 있는 동안 그분이 너무 조용히 계셨기 때문이에요. 더군다나 요즘 1처에 있으면서 조금씩 알아 가고 있는데 이무런 내색도 안 하는 2 황자마마께서 뜻밖에도 조정에서 매우 큰 세력을 형성하고 계시더군요. 대단히 많은 관원이 그분과 열심히 왕래하고 있어요.”
조용히 지내는 2 황자를 범한이 심상치 않게 여긴 이유는 전생에 키워 둔 안목 때문이었다. 황권 경쟁에서 선천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태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리고 최근 1년 동안 보이지 않던 장 공주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태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2 황자는 달라야 했다. 만약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생각이라면 분명 무언가를 했어야 한다. 아무리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지만 조용히 지내는 황자는 절대 대권을 손에 쥘 수 없기 때문이다.
언빙운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대인께서 황자마마님들의 싸움에 개입하기로 결심하셨나 보군요.”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였다.
“아니에요. 준비를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분들 싸움에 살 집조차 사라질까 두려워서랄까.”
247화
언빙운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일 뒤에 숨어 있는 문제점들을 따져 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한데 신하라면 누구나 조정의 향후 국정 방향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특히나 범한과 언빙운처럼 젊은 대신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대인······은 태자마마 쪽 사람입니까?”
언빙운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범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약간은 바보스럽고,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으로, 또 별다른 의도 없이 물었다. 범한은 살짝 놀랐지만 이내 서서히 장난기 어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닌데요.”
언빙운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내 웃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대인은······ 폐하의 사람이었군요.”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을 도와주리란 건 확신했다. 언빙운은 반년 넘게 갇혀 있었으니 이미 좀이 쑤실 대로 쑤실 지경일 것이다. 그런데도 경도로 돌아온 후로는 요양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범한 자신이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을 해달라고 하는 이상은 그 미끼를 물지 않을 리 없었다.
* * *
언빙운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정보가 적힌 종이를 세세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1처의 경도 정찰 능력이 예년만 못하군요. 하지만 그런대로 아직은 괜찮습니다. 다만 이런 대략적인 윤곽을 잡는 일은 경도에 있는 정보만 가지고 착수해서는 안 됩니다. 정보는 상호 참조를 통해 얻는 것이니까요. 이 자료들은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라 가치가 없습니다. 목철이란 사람은 개별 안건에 관해서는 그만의 조사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거국적인 국면을 보는 데에서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만약대인께서 저를 신뢰하신다면 몽땅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신뢰라고?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언빙운을, 그리고 자기보다 겨우 몇 살 많을 뿐인데도 희끗희끗하게 난 그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한데 신뢰라는 건 원래 단순히 심리적인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언빙운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담담하지만 전혀 머뭇거림 없이 자신감에 차 말했다.
“다음 달에 4처로 갑니다. 이번 달 말까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줄 건 없나요?”
언빙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커질 수 있습니다. 그때 희생양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염려 말아요. 나는 양이란 동물을 제일 좋아하니까요.”
범힌이 웃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나 기뻐하는 건 단순히 북제 상경에 있을 때처럼 서로가 묵시적 합의의 상태로 돌아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시에 몇 가지 일을 시작하게 된 까닭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뻤던 건 언빙운 공자가 정말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면 향후 벼슬을 하는 내내 범한 대인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2 황자와 신양 장 공주와의 관계는 반드시 조사를 거쳐야만 했다. 그런데 이는 범한이 언빙운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맞다.”
언빙운이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보니······ 대인께서 병력 지원 좀 해주십시오.”
범한이 호기심에 물었다.
“지금까지 쉬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설마 아무도 몰래 무슨 조사 같은 걸 하고 있었어요? 병력 지원이라면 언빙운 대인이 맡게 될 4처에도 정예병과 맹장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지원 요청을 하는 건가요?”
순간 처마 밖 빗소리가 더 거세지고 빗물이 바닥 석판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석판 위에 무수히 많은 곰보 자국을 새겨 놓으려는 심산인 듯했다. 한편 이미 물을 흠뻑 마신 정원의 나무들은 잎을 축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포악하리만큼 거센 비가 무서워서였다. 언빙운의 미간에서 아주 잠깐 우울함과 걱정의 기색이 스쳤다.
“남쪽에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몇 개 주와 부에 걸쳐 일어났고 형부 13관아에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죽었는데도 진짜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에 황제 폐하께서 감찰원에게 그 사건을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은 이미 이런저런 정보를 받아 보고 있었는데, 언빙운과 함께 북제 상경에 있을 때 관련 내용을 감찰원의 비밀 보고를 통해 접한 적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때는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던 정보였다.
언빙운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는 4처 관할 사건입니다. 하온데 4처에서 접수한 후 무려 열세 명의 밀정이 잇따라 죽었습니다.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고 하는데 범인은 흔적조차 찾지 못했지요. 보고서를 보니 범인은 매우 강한 무공 수련자인 것 같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몇 등급의 고수인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조사에 나선 관원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정도면 아마도 9등급 상에 달하는 실력자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범한은 이 사건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천하가 태평한 이 시점에도 9등급 이상의 무공 실력자는 어느 나라에서든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조정에서 그들을 영입하는 데 적극적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 측에서도 일련의 이유 때문에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이들 고수를 과감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천하에 9등급 이상의 고수는 정말 몇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동이성의 경우 부유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고검이 살고 있어서 천하에서 9등급 고수를 가장 많이 보유한 지역이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9등급 이상의 고수라면, 섭씨 집안처럼 경국을 보호하는 군사력의 한 축이 될 수도 있고, 북제의 하도인처럼 조정을 위해 일하는 외부에서 영입한 자객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모두 자신의 선호와 자유로운 선택에 달렸다. 물론 가장 쓸모없는 선택이기는 하지만, 동이성으로 가 가끔씩 동이성 상단을 돕는 막후 강자가 되거나, 사고검과 그의 제자들을 찾아가 함께 무공을 연구하는 것도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9등급 이상의 고수라면 부귀영화, 강호에서의 지위 중 자신이 원하는 걸 선택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쇄 살인이라고? 아녀자를 겁탈하려다 그런 걸까 아니면 강도질을 하려다 그런 걸까? 무려 9등급의 고수라면 당연히 이런 짓은 할 필요 없겠지.
“어쩌면 변태 살수일 수도 있겠네요.”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냥 살인할 때의 쾌감을 즐기기 위해.”
언빙운의 이맛살이 한껏 일그러졌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변태’라는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다.
“4처가 너무 많은 손실을 봤습니다. 그러니 조정 입장에서는 무공이 강한 자를 남쪽으로 내려보내 조사를 해야 합니다. 하오나 대인도 아시다시피 9등급 이상 고수는 몇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경도에 계신 몇 분도 제 아버님보다 벼슬 품계가 높으셔서 4처에서는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황제 폐하께서도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대인께 병사를 빌려 달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범한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1처에도 그만한 고수가 없는데. 사가(私家)에서 데리고 있는 호위 무사도 기껏해야 7등급 고수 두 명. 그러니 이마저도 안 되겠군요.”
언빙운이 입꼬리가 위로 한껏 올라가도록 웃었다.
“제가 빌리고 싶은 이는······ 고달입니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다니는 나머지 여섯 명의 칼잡이들까지요!”
언빙운이 수를 쓰자 범한이 정말 아쉽다는 듯, 한 손으로 허공을 내리치는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싸늘하게 조소했다.
“이런,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했네요. 나도 고달을 내 곁에 두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곧장 아버님께 달라 했더니 어찌 된 줄 압니까?”
범한이 양손을 앞으로 쭉 펼쳤다.
“대인과 같았답니다. 모두 바보 같은 망상이었어요. 황궁에 계신 분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을 그렇게 쉽게 빌려주지 않으신답니다.”
“그 문제는 제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언빙운이 눈이 가늘게 될 정도로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찌 되었든 훗날 고달을 대인의 수하로 두게 된다면 그때 대인께서 4처에 며칠 빌려주시면 그만입니다.”
범한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언빙운이 거의 보여 주지 않는 웃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심장이 울리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다.
‘언씨 가문이 경도에서 다른 연줄이 있다던데 설마 그 연줄에게서 뭔가를 들은 게 아닐까?’
한데 고달을 포함한 일곱 칼잡이를 정말로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는 상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절로 기분이 좋아져 범한은 그냥 승낙을 해버렸다.
“그 부탁 받아들일게요.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필요할 때마다 빌려주도록 하죠.”
진지한 이야기를 마친 범한이 조용하기만 한 방 안쪽을 노려보았다. 그런 후 갑자기 언빙운을 놀리기 시작했다.
“요즘 심 낭자와 어찌 지낸답니까?”
그러자 언빙운이 순간 얼음처럼 싸늘하게 말했다.
“대인, 부디 자중하시지요.”
“자중은 개나 줘버려요!”
범한이 계속 꾸짖기 시작했다.
“심 낭자를 쇠사슬로 묶여 놓다니 저 여인에게 억지로 자중하도록 한 것이겠죠. 하나 언빙운 대인은 아까 말했던 남쪽 살인범처럼······ 변태라구요!”
* * *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가운데 분위기는 화목한 편은 아니었다. 같은 처마 아래 있었지만 범한은 득의양양하게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세우고 있었고, 언빙운은 화가 나 말문이 막혀 있었다. 언빙운은 변태가 결코 좋은 뜻은 아닐 거란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를 악물고 의자를 쳤다.
“애당초 대인이 저 여인을 사절단에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저도 이러지 않았겠죠!”
“심 낭자에게 여종 옷을 입힌 건 장기적 계획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러니 쇠사슬까지 채울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 언빙운 대인이 이 저택에 있는 이상 심 낭자는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범한이 웃는 얼굴로 계속해서 언빙운을 자극했다.
“그렇다면 대인께는 무슨 방법이랄 게 있습니까?”
언빙운이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북제 공주마마께서도 굉장하시더군요. 경도에 계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세상에, 1 황자마마께서 제 집까지 왕림하시도록 해 심 낭자에게 잘해 주라 압력을 넣으셨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심중의 여식이고 북제에서 수배 중인 중범이라 해도 이제는 죽이지도, 풀어 주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그러자 방 안에서 들릴 듯 말 듯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범한이 방문 쪽을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1 황자께서 이번 일에 대해 알고 계셨다니.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정색했다.
“그렇게나 불편하면 내가 심 낭자를 우리 집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언빙운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범한은 사나운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 후, 언빙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범한 일행이 언씨 가문 저택에서 나왔다. 밖에는 어느새 사남 백작가의 마차가 한 대 와 있었다. 범한에게는 빗속을 산책하는 우아한 흥취 따위는 없었다. 범한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 앉아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하며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잔뜩 겁에 질려 불안해하고 있는 심 낭자였다. 범한이 미소 지으며 그녀를 진정시켜 주기 위해 말을 건넸다.
“심 낭자, 염려 말아요. 며칠 지나고 이번 일이 가물가물해지게 되면, 내가 그대를 다시 언씨 가문 저택으로 돌려보내 드리리다.”
범한이 2 황자에 관해 조사하는 데에는 자신과 장 공주 사이의 원한이라는 공명정대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또한 자신이 영원히 외부로는 발설할 수 없는 숨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너무 큰 사안이다 보니 언빙운을 온전히 신뢰하려면 범한으로서는 그의 무언가를 쥐고 있어야 했다. 신뢰라는 것은 직감과 심리적 판단에 의거한 것이므로 신뢰가 충분하지 않으면 이익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범한의 마음을 놓이게 해줄 수 있는 방책이 바로 심 낭자를 자기 저택에 데려다 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언빙운이 자주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함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것이라 믿은 것이었다.
언빙운은 감찰원의 기풍 속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범한이 심 낭자를 데려간 일로 마음이 조금 우울하고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딘가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 심 낭자는 그에게 있어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비록 아직까지는 터지지 않았지만 이미 그들 부자를 날마다 싸우도록 만드는 원인이었다. 그러니 언빙운의 입장에서는 범한이 그녀를 데려간 건, 한편으로는 양측이 서로 신뢰와 관련한 균형 상태를 이룬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잠시 평온을 되찾은 것이었다.
범한이 창을 통해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1년 전 비 내리는 밤에 그 검은 상자를 열었던 일, 미친 사람처럼 굴었던 일, 그리고 다시 지금의 음울하고 무미건조한 자신이 연달아 생각나서였다. 그런데 범한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아직 이 세상을 변화시킬 시간이 남아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이 세계가 이미 자신을 속속들이 바꾸어 놓았음을 말이다.
마차가 등시구에 왔을 무렵이다. 비가 잦아들기 시작하고 사람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마차도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앞쪽이 사람들로 붐비는지 마차는 잠시 이동할 수 없었다. 이때 마차 세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넓이의 거리에 마차 한 대가 나타나 범한이 타고 있는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사남 백작가 마차 옆에 나란히 섰다. 노란색 옷소매 속 통통한 팔이 마차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범한의 마차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사람이 깜짝 놀라도록 소리쳤다.
“스승님!”
248화
범한은 일찌감치 알아채고 수신호로 옆에서 이미 칼을 빼 들고 있는 등자월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놀라 의아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반년이나 보지 못했는데 여전히 자신을 스승으로 기억해 주고 있어서였다.
옆 마차에 타고 있는 섭령아는 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마차에 타고 있는 범한과 심 낭자를 놀란 모습으로 바라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역시 이 섭령아의 스승님답습니다. 또 어느 댁의 아가씨를 속인 것입니까?”
범한이 언짢은 기색으로 꾸짖었다.
“스승인 걸 알면서 어째 말투에는 존경이 하나도 안 담겨 있는 겁니까. 이제 곧 2 황자마마의 비가 될 분께서 이렇게나 비가 쏟아지는 날에 아직까지 밖을 쏘다니시다니요!”
최근 범한은 외양간 길 사건에서 2 황자가 맡았던 진짜 역할이 무엇일까 의심하기 시작한 터였다. 그날 연회에 자신을 초대한 건 2 황자였으니 말이다. 물론 사후 조사에서는 사리리가 내놓은 정보에 따라 장 공주와 재상 밑에 있던 모사가 임완아의 둘째 오라버니와 몰래 모의해 벌인 일로 밝혀졌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2 황자를 향한 경계심은 늦추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호숫가에서 피서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태자와 우연히 만난 일도 2 황자가 꾸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듯 습관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떠보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광명정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모두 장 공주가 동궁을 지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범한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처음에는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세세히 따져 보니 장 공주의 그와 같은 변태적 권력 욕구가 정품 태자를 지지한다고 한들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란 의구심이 들었다.
범한은 세자 이홍성과 일석거에서 식사할 때 의외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바로 일석거의 막후 주인은 최씨 가문이었다는 점. 한데 최씨 가문의 뒷배는 신양이니 이 몇 개의 구슬을 엮어 보면 아직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심지어는 설명할 수도 없지만 범한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있었다. 바로 2 황자가 조용히 있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며 그는 황궁 내에 강력한 지지 세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만약 2 황자가 정말로 장 공주에게 끈을 대고 있다면 범한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죄송합니다.”
* * *
비록 2 황자를 벌써 조사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낭자가 내년 봄에 2 황자비가 될 사람이기는 했지만 범한은 그녀가 대단히 거슬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대할 때 자신의 진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도 정말 잘 관리하는 중이었다.
섭령아와의 첫 만남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중에는 자신의 잔재주와 그녀의 대벽관을 가지고 한판 겨루기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범한이 혼인한 후로 섭령아가 자주 범한의 집으로 찾아와 임완아와 놀고, 그렇게 몇 번을 더 마주치다 보니 범한은 이 옥처럼 맑고 깨끗한 여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일반 대갓집 규수들과는 달리 섭령아에게는 소탈한 기질이 있어서였다.
다만 섭령아가 항상 아내 앞에서 자신을 꼬박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임완아를 언니라고 부르는 건 거슬리기는 했다. 자신이 나이가 한참 더 많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였다.
마차 안의 섭령아가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스승님, 돌아오셨으면서 왜 저한테 놀러 오지 않으셨어요?”
“스승님,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스승님······.”
범한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계속 쏟아져 나오는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러다 쓴웃음을 지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오공아, 네가 또 까부는구나.”
범한이 호숫가에서 섭령아에게 잔재주를 가르쳐 준 건 실은 섭씨 가문의 대벽관을 훔쳐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 일로 섭령아는 자신을 꼬박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중이었다. 이에 범한은 웃기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한 상태에서 물었다.
“어디 가는 것입니까?”
섭령아가 대답했다.
“완아 언니 보러 댁으로 가는 중이에요.”
말을 마친 섭령아가 범한 옆에 있는 심 낭자를 쳐다보며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범한은 제멋대로 드러내는 오만한 기질 그리고 순전히 자기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섭령아의 행동이 거슬러 더 이상 그녀에게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데 섭령아는 범한이 스승임을 내세우면 그걸 잘 받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친하게 어울리면서 범한이 세세한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터라 섭령아가 웃으며 말했다.
“화내지 마세요. 지금 감찰원에서 제일 잘나가시는 분이니 미인은 집에 감춰 두고 이런 사람들이 많은 곳까지는 데려오지 않으시겠죠.”
그러자 범한은 잠시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섭령아의 말이 끝났을 무렵 막혀 있던 앞쪽이 서서히 뚫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섭씨 가문의 마차가 앞서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운행을 멈추었다. 섭령아가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했다.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마차를 앞쪽으로 몰고 가라고 지시했다. 섭령아의 마차 옆에 도착하자 범한은 비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등자월을 포함한 계년조 소속 사람들이 서둘러 범한의 뒤를 쫓았다.
마차에 앉아 있는 섭령아에게 회흑색 비옷을 입고 빗속을 걸어가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이제 보니 범한은 등시구 지역을 지나가던 중이 아니라 이곳에 일이 있어서 들른 것이었다.
* * *
등시구에 있는 검소사 대진은 매일 부하들이 성 밖에서 채소며 과일을 운반해 오면 그것의 등급을 정하고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황궁 및 각 왕과 공의 저택에 매일 필요한 채소를 보내는 일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경국 귀족들의 주방에서 필요로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해 주고 있었다. 한데 그 자질구레한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의 단위가 조금 컸다. 예를 들어 미나리 한 포기나 닭 한 마리는 돈이 되지 않았지만, 미나리 백 포기에 닭 백 마리를 팔면 일석거에서 제법 좋은 자리 하나는 살 수 있을 정도의 액수는 되는 식이었다.
검소사는 관아 축에는 들지 못했다. 품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물품 공급처가 매우 많은데도 이곳을 직속으로 관리하는 관아 자체가 아예 없었다. 어쩌면 관원들이 경도성으로 채소를 보내 봤자 이득이 남지도 않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한데 사실 범한은 이와 같은 현상이 최근 몇 년 안에 생겨난 것임을, 신정을 중도 폐기한 것과 관련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갈피를 못 잡고 계시니 아래 있는 기관들도 자연스레 어수선한 짓들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진은 검소사의 책임자이다. 그는 몇 년 동안 닭, 달걀, 채소로 돈을 안정적으로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들에서 적지 않은 이득을 챙기는 방법을 자기만 안다는 생각에 밤마다 이불 속에서 남몰래 웃는 중이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첩이 숙부님께 찾아가 제대로 된 관직을 얻으라고 날마다 부추겼지만, 그는 그때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딴생각을 했다.
‘멋지군! 채소도 나처럼 파는 이는 천 년을 통틀어 나 혼자뿐일걸!’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늘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웃지도 못했다. 가을비 속에서 감찰원 1처 관원이 그의 자그마하고 불쌍한 관아를 직접 봉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통방에 있는 천막도 막아 버렸다. 대통방에는 채소를 파는 행상들이 있었고 이곳에서는 경도의 3분의 1에 달하는 채소가 공급되었다.
대진이 새파랗게 질려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악귀들을 보고는 우선 자기 얼굴을 두 대 쳐서 웃고 있는 얼굴을 더 온화해 보이게 만들었다.
“이제 보니 1처 대인들께서 오셨군요. 가을이 깊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대통방에 희귀한 과일이 좀 많이 들어왔습죠. 언제 가져다드릴까 생각 중이었는데······.”
1처에서 오늘 조사의 대장으로 나선 이는 목풍아였다. 그는 지금 이것이 범한 제사님이 경도에서 첫 번째로 시행하는 시범 활동이란 걸 잘 알고 있는 터라 조금도 소홀히 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대진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대진 대인, 우리와 함께 가시죠.”
1처 관원들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문이며 길을 모두 봉쇄하고 명부에 있는 인명을 보며 대통방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내 밖에 세워 둔 마차 안에 가두었다.
가을비는 아직도 내리는 중이었다. 대진은 갈수록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했다.
“제가 어찌 대인이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목 대인, 무언가 오해가 있으셨나 봅니다.”
그가 평소 하던 대로 목풍아의 소맷자락을 잡더니 은표 몇 장을 그 안에 찔러 넣었다.
목풍아가 대진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범한 제사께서 1처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아직 못 들어 본 건가? 그러자 줄곧 옆에서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던 감찰원 관원 둘이 다가와 대진의 무릎을 걷어차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그런 후 비밀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포승줄을 꺼내 대진의 양손을 단단히 묶었다. 능숙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걸 보니 과거에 여러 번 해본 솜씨였다.
대진은 땅바닥으로 엎어졌다. 가슴은 미친 듯이 뛰고 손목에는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수치스럽고 화가 나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목풍아가 품에 있는 것을 만져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그냥 포기하고 말했다.
“명령에 따라 사건 처리 중입니다. 그러니 대진 대인, 협조해 주십시오.”
대진은 너무나도 황당했다. 그가 눈을 굴려 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사람 살려! 감찰원이 돈이 탐나 사람을 죽인다!”
감찰원 1처 소대(小隊)가 폭우를 뚫고 검소사로 밀고 들어갈 때였다. 구경하기 좋아하는 경국 사람들이 이미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구경꾼들도 검은 기운이 짙은 감찰원이 무서웠는지 현장에 바짝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평소 우쭐거리기 좋아하는 대진 대인이 무기력하게 체포당하는 모습을 겁에 질린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편 대진이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데리고 있던 부하들이 어느새 몰려왔다. 이들은 사람들로 붐비는 상황을 이용해 감찰원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대진은 손이 결박당하자 속히 생각을 바꿨다. 감찰원이 나섰으니 중간에 관두지는 않을 터. 필사적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감찰원이 돈 욕심에 사람 잡네!”
사실 그는 공황 상태에 빠져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생각해 낸 게 “돈 욕심에 사람 잡네!”라는 말뿐이라 그 말만 외쳐 댔다. 그리고 황궁에 계신 숙부님께 얼른 이 말이 들어가기만을 바랐다. 무섭다는 감찰원 감옥에 갇히기 전에 숙부님께서 어떻게든 자신을 구해 주기만을 바라며 말이다.
목풍아는 대진의 선동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에 품에서 문서를 꺼내 읽으며 사람들에게 대진의 죄상을 낱낱이 알렸다.
경도 백성 중 하층민 노동자들은 관아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더군다나 대진은 깨끗한 놈이 아니니 이들이 믿고 있는 쪽은 실은 감찰원이었다. 하지만 일단 에워싼 이상은 뒤로 물러나기 쉽지 않은 법. 그러니 오늘따라 적은 인원수만 온 1처 관원들이 명부와 증인들을 데리고 현장을 떠나기란 조금 힘에 부쳐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목풍아는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런데 몰려 있는 구경꾼 너머로 마차 두 대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빗속에서 낯이 익지 않은 감찰원 동료들이 비옷을 입은 채 제사 대인을 호위하며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순간 당황한 목풍아가 소리쳤다.
“가자!”
이미 두 손을 결박당한 대진은 감찰원 감옥이야말로 관원으로서는 절대 갈 만한 곳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에 계단을 내려가지 않으려 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도록 고래고래 소리치며 버텼다.
그러자 대진의 심복들도 시끌시끌하게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히 감찰원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지만 목풍아가 대진을 데려가려 하는 건 막을 수 있었다.
249화
호우가 내리는 가운데 범한은 돌계단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목풍아에 대해 심한 비평을 쏟아 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뒤쪽에서 호기심 어린 섭령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감찰원에서 일하는 걸 보니 조금 황당합니다. 벌건 대낮에 저리도 별 볼 일 없는 직급의 관원과 줄다리기라니요. 저리 체통 없는 행동을 백성들에게 보이면 조정의 체면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범한의 비 모자 가장자리로 빗물이 내리치고 있었다. 이에 모자 가장자리는 아래로 꺾여 범한의 얼굴을 반쯤 가린 상태였다.
“관리 스스로가 체면을 차리지 않으면 조정도 저들의 체면을 세워 줄 필요가 없습니다.”
범한이 평온히 말을 이어 갔다.
“령아 아가씨, 저자를 하급 관원 정도로 취급하면 안 돼요. 1년에 황궁에서 지출하는 비용 중 5천 냥이 넘는 은자를 빼낸 자입니다. 그동안 대통방에서 많은 이득을 봐왔지요. 그것도 액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요.”
섭령아는 마차 창가에 몸을 반쯤 기대고 있던 터라 이마 부분의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오늘 범한의 저택으로 가서 놀 생각이었는데 길 위에서 범한과 마주치고 거기에다가 이런 구경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별거 아닌 것 같은 하급 관원이 그리도 많은 은전을 챙겼다는 걸 알게 되다니.
이때 목풍아 일행이 겨우겨우 검소사에서 빠져나와 범한 앞까지 와 있었다. 그사이 대진은 빗물이 고인 바닥에 드러누운 채 목풍아 일행에 의해 억지로 질질 끌려 나왔다. 참으로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자 대진의 심복들이 다시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두 대의 마차가 지닌 힘과 권세를 알아차렸는지 감히 경솔한 행동까지는 저지르지 못했다. 한편 경도 백성들은 범한과 등자월의 차림새를 보고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비옷을 입은 이들이 뿜어내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는지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진은 매우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관복이 물에 흠뻑 젖고 산발이 되어 머리카락이 얼굴에 감겨 버린 꼴이 말이 아닌 상태인데도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러 댔다.
“야, 이 감찰원 놈들아! 이 몸 돈을 그리 처먹고도 아직도 모자라느냐! 본관을 꼭 형부로 끌고 가서 은전을 탈탈 떨어내야 성이 차냔 말이다!”
주변에 몰려 있던 속사정을 모르는 백성들은 그의 말만 듣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줄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범한은 눈을 반쯤 뜨고 빗속에 엎어져 두 다리를 굴러 대며 도살되기 직전 돼지처럼 막판 몸부림을 치는 관리를 바라만 볼 뿐 급히 그자의 입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감찰원은 천하 백성들에게 어두침침한 존재다. 대진이 자신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다 한들 더 나빠질 평판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고작 작은 고양이 한 마리 잡으러 온 것뿐이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이번에 부하들의 일 처리 능력이나 확인하면 되는 것이었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섞여 있는 목풍아의 얼굴을 보며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왜 한밤중에 저자의 집으로 가서 잡아 오지 않은 건가? 오늘 비가 내리기는 해도 대통방에는 사람이 많으니 쉬이 소란이 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목풍아는 순간 깜짝 놀라 얼른 새로 만들어진 규칙부터 세세히 곱씹어 보았다. 분명 범한 대인이 다음부터 사건 처리를 할 때는 가급적 광명정대하게 할 것을 주문했고 그래서 검소사로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 멋지게 처리해 이름도 좀 날릴 생각이었다. 만약 과거 방법대로 했다면 자신도 한밤중에 급습해 체포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자신이 잘못한 거라고?
범한이 목풍아에게 변명할 여지도 주지 않고 할 말을 이어서 했다.
“대낮에 와도 물론 천막을 폐쇄하고 사람을 데려갈 수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대진을 감찰원까지 조용히 데려갈 수 있을 것 같은가? 게다가 공문에 적힌 죄목까지 읽다니 자신을 무슨 대리사 관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가르쳐 줘야 하는 것인가?”
범한이 날카롭게 쏘아 대자 목풍아는 그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통스럽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일단 대진은 튼튼한 뒷배를 가진 자니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후환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사 대인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니 그들이 하는 행동이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범한이 날카롭게 지적하자 목풍아는 이제야 무언가 알 것 같았다. 제사 대인은 시선이라 불리고는 있었어도 감찰원의 은밀한 수단들에 대해서까지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보다 훨씬 더 그런 방법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이때 대진은 빗물 속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흙탕물이 묻은 눈으로 목풍아가 누군가에게 보고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감찰원에서 대인이 나타났다는 걸 알고는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물론 대진은 범한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대신 그 뒤에 있는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알아보았다. 경도 수비 섭중의 무남독녀 외동딸 섭령아. 섭령아는 어려서부터 워낙 경도 거리에서 말을 달리는 걸 좋아해 경도 사람이라면 거의 다 그녀를 알아볼 정도였다.
대진이 즉시 마차에 있는 여인을 향해 울고 불며 애원했다.
“섭씨 가문의 아가씨, 하관의 억울함을 풀어 주소서!”
그러자 너무나도 평온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범한을 섭령아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히 무슨 말을 꺼내기가 뭐해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대진은 오늘 자신이 끝장나는 날이란 생각에 하는 수 없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큰소리로 욕을 하며 대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 숙부님께서 어떤 분인지 아느냐! 감히 나를 잡아가려 하다니! 내 숙부님께서는 바로······ 웁!”
범한의 눈치를 보고 있던 등자월이 대인께서 대(戴) 내관이란 이름이 거론되는 걸 원치 않으심을 눈치채고는 대진의 입 위에 칼을 들이댔다.
목풍아는 이제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이에 살짝 뻘쭘하게 품에서 줄로 연결된 치도곤을 꺼냈다. 그러고는 매우 우악스럽게 그의 입 앞에 들이댔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그냥 한 대 쳐버렸다. 치도곤은 매우 단단한 재질로 되어 있던지라 대진은 입술이 터져 양쪽 입가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는 자연스레 말도 못 하게 되었다.
주변에 있던 백성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범한은 그 반응들을 못 본 척하며 목풍아에게 말했다.
“저자의 숙부가 누구인지는 내 알 바 아니다. 하나 네 숙부가 누군지는 상관있다. 조금 더 힘써 일하고 목철의 체면은 깎아 먹지 말거라.”
목풍아는 부끄럽게 그러겠노라 답하고는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대진을 마차 위로 집어 던지듯 밀어 넣었다. 그런 후 부하들과 함께 구경꾼들 사이에 숨어 있는 대진의 심복들을 잡으러 나섰다. 목철 일행은 이들에게 반항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감찰원 관원이 지니고 다니는, 겉을 감싼 쇠몽둥이로 이들을 바닥에 때려눕혀 버렸다.
폭력이 행사되기 시작되자 구경꾼들은 두려움에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길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잡고는 신기한 듯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폭우 사이로 보이는 건 비옷을 입은 감찰원들이 몽둥이를 휘둘러 대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흉측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장정들을 계속해서 구타했다. 그런데도 장정들은 감히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최근 몇 년 동안 감찰원이 쌓아 온 위엄에 기가 죽어서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장면이었다.
* * *
범한이 저 멀리서 구경하고 있는 백성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비 모자를 휙 벗더니 자기 마차가 아닌 섭령아의 마차에 올라탔다.
섭령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속으로 ‘다 큰 남자가 무엇 하러 갑자기 내 마차로 뛰어든 거지?’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 위해 섭령아의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깜짝 놀라는 척했다. 그리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섭령아가 손수건을 받아 들고는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러고는 손수건에서 나는 담담한 향을 맡으며 임완아가 쓰던 것이라 생각하고 잠시 웃었다. 이어 그녀는 조금 전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 묻기 시작했다.
범한이 소리 내어 잠시 씁쓸히 웃고는 대진이 한 짓을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섭령아가 호기심에 물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왜 직접 와서 살펴보신 거죠?”
그러자 범한이 또 소리 내어 잠시 싸늘하게 웃고는 말했다.
“경도는 수심이 깊은 곳이에요. 그러니 저 대진이란 자를 단순히 채소나 파는 관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자가 적잖이 탐욕을 부린 건 대담하기 때문이지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자의 친숙부가 황궁의 대 내관입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부하들이 일을 너무 늦게 처리하게 되면 대 내관에게 이 소식이 전해질 수 있어서였습니다. 만약 황궁에 있는 사람이 직접 나서면 1처 관원들도 어쩌지를 못하니 내가 직접 나선 것이지요.”
섭령아가 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 황궁이라 그러셨어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에게도 최대한 황궁과는 얽히지 말라 하셨죠. 그런 걸 보면 스승님은 정말 담력이 크시네요.”
“상대가 단순히 태감이니까요.”
범한이 잠시 웃었다. 태감은 원래 인권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자 섭령아가 반대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궁에 있는 태감들을 얕잡아 보시면 안 돼요. 저들에게는 주인이 다 있거든요. 만약 스승님이 저들의 체면을 깎는 일을 한다면 이는 곧 황궁에 계신 마마님들의 체면을 깎는 일이거든요.”
범한은 아차 싶었다. 이제야 그 문제가 생각난 거 같았다. 그러다 잠시 후 다시 햇살처럼 찬란한 웃음을 지었다.
“뭐 그런 걸로 겁먹겠습니까! 완아가 황궁에서 중재인 노릇 하는 거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마마님들께서 문제를 삼으신다면 나 같은 가짜 부마는 황궁으로 불려가 규율에 따라 그냥 곤장이나 맞으면 그만입니다.”
그러자 섭령아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생각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마차가 사남 백작가 대문 앞에 도착하고 두 사람 모두 마차에서 내렸다. 등자경은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범한은 그에게 분부를 내렸다. 모두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내에게 심 낭자를 뒷길 쪽에 있는 집에 데려다줄 것을 부탁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섭령아를 뒤채로 안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범한은 직접 섭령아에게 손수건을 돌려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대 내관은 숙 귀비가 아끼는 태감이었다. 그리고 섭령아는 곧 2 황자비가 될 사람이었으니 숙 귀비는 섭령아의 장래 시어머니였다. 섭령아 역시 절반 정도는 대 내관의 주인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범한은 앞서 섭령아와 한담을 나눌 때 이와 같은 말을 언급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관계가 얽혀 있으므로 손수건은 줄 수 없으니 돌려 달라고 말했었다. 물론 그때는 쓸 곳이 있었으므로 손수건은 일단 다 쓰고 돌려 달라고 했다.
* * *
이날 경도에는 비가 종일 내리다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조금 잦아들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대 내관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 황궁을 서둘러 나섰다.
그는 황궁 내에서도 매우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숙 귀비는 글을 쓰는 재주가 상당했는데 황제 앞에서 글을 쓸 때마다 항상 이 대 내관을 곁에 두고 시중을 들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황친과 대신들의 저택에 성지를 전할 때에도 주로 그가 갔기 때문이다. 범한이 생애 첫 성지를 받고 태상사 협률랑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바로 이 대 내관이 성지를 전하러 왔었다. 황친과 대신들의 저택에 성지를 전달하러 가는 건 정말 많은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가 규율을 어기고 출궁했음에도 감히 무어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 내관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검소사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내부를 바라보며 그곳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뱉어 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른 그가 조카의 수하들에게 삿대질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 말하지 않았더냐! 경도에 있는 다른 관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감찰원만큼은 비위를 잘 맞추라고 말이다!”
그러자 누군가가 잔뜩 부은 한쪽 얼굴을 감싸 쥐고 울먹였다.
“어르신, 평소에도 홀대하지 않았습니다요. 오늘은 주인님이 은표까지 건넸고 1처 관원도 그 돈을 받았습니다요. 하온데 그들이 꿈쩍도 안 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250화
대 내관이 화가 너무 많이 나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날카로운 소리로 질책했다.
“대체 체면을 안 세워 준 놈이 누구냐! 어느 개잡놈이 무리를 이끌고 왔느냔 말이다! 내 당장 목철이란 시커먼 놈을 찾아가야겠구나. 감히 우리 대씨 가문의 자손을 건드리다니!”
그는 황궁 태감이었으니 감찰원에서도 어쩌지 못했다. 그러니 이리 말할 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다. 체면이 깎여 화가 잔뜩 난 대 내관이 가마에 올라타 1처로 향했다. 비록 대진이란 조카 놈이 좀 모자라기는 하지만 요 몇 년 동안 적지 않은 은전을 보내왔다. 그러니 그가 감찰원에서 형별을 받다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일단 감찰원에 들어가게 되면 살아 나오더라도 적어도 몇 군데는 성치 않은 몸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 정도는 경도 관리 사회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
가마가 1처 관아 문 앞에 당도했다. 대 내관은 의심이 발동해 여러모로 더 조심했다. 이에 우선 자신을 따라온 수행원들에게 안으로 들어가 탐문해 보도록 했다.
잠시 후 수행원이 밖으로 나와 그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닥였고 대 내관의 얼굴빛이 금세 변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대 내관이 이를 악물었다.
“회궁한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대진의 수하는 어르신의 마차가 회궁하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이에 자신이 지금 1처 문 앞에 있다는 사실은 생각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소리쳤다.
“어르신, 저희의 억울함은 풀어 주셔야죠!”
대 내관은 과연 강절(江浙) 여조(余佻) 사람이 맞았다. 그리고 성지를 낭독한 경력 때문인지 말하는 것만큼은 최고의 공력을 쌓은 상태였다. 그가 가래침을 뱉자 그것이 조금 전 말한 사람 얼굴에 정확히 맞았다. 대 내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꾸짖었다.
“나는 내관이니라! 판관이 아니고!”
말을 마친 대 내관이 극도로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가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앞서 수행원들이 제대로 알아 온 것이라면 오늘 직접 부하들을 데리고 간 이는 바로 범한 대인이었다. 대 내관은 그제야 황제 폐하께서 감찰원 1처를 범한 제사에게 맡겼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런데 범한 대인이 왜 내 조카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거지? 조정에 있는 경도 토박이 관리들과 비교하면 그 아이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개미 새끼에 불과한데!’
범한은 단지 부하들을 훈련시키고 1처 업무를 개시한 것뿐이었는데 대 내관이 그걸 알 리 없었다. 이에 그는 자신에게 미칠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사남 백작 가문이 지닌 권세가 생각나 등골이 오싹해지며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대진이 고용한 수하들은 먼지를 날리며 달아나는 가마를 멍하니 바라보며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빌어먹을 고름이나 닦아 냈다. 그리고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대 내관이 대체 뭐가 무서워서 저러시나?’라고 생각했다.
* * *
며칠 후 대 내관이 기회를 살피다가 숙 귀비에게 이 일을 언급해 보았다. 모두 조카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헛된 마음과 관련 정보라도 듣게 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한데 숙 귀비는 대체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조카인 대진이 한 행동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매우 분노하며 대 내관을 매섭게 질책하기까지 했다.
대 내관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 범한이란 대인이 일찌감치 자기 뒷구멍을 막아 버렸다는 것을. 화도 나고 두렵기도 했지만 그는 체면을 잃을 것을 무릅쓰고 비굴하게 의 귀빈의 궁으로 쪼르르 달려가 그녀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의 귀빈과 사남 백작가의 유씨 부인과의 관계를 이용해 아무도 모르게 사남 백작가에 은표라는 얄팍한 놈을 전달했다.
한편 이번 사건의 심리를 맡은 목풍아는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속에서 열불이 나는 상태에서 아직 감찰원 중범죄자 감옥으로 이송하지 않은 대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악랄한 놈이 자신을 범한 제사 앞에서 크게 엿을 먹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범한 제사는 이 별 볼 일 없는 놈에게 고문하라는 명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대체 왜지? 목풍아가 허리춤을 긁적이다가 두툼하게 접혀 있는 은표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투덜대기 시작했다.
범한이 1처 부하들에게 대진을 잡아 오도록 한 건 바로 그의 뒤에 대 내관이라는 태감이 있어서였다.
경도에 있는 관리들은 대 내관이 깔끔하게 복종하는 것을 보고는 감찰원 1처의 결심과 범한 제사의 수단에 경악해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 한편 1처는 경도에서 암암리에 자신의 업무를 일사불란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밤중에 문을 부수고 들어가 쥐도 새도 모르게 관리들을 감찰원에 모셔 왔다.
언제부터인가 느닷없이 청소가 시작되자 경도에는 기분 나쁜 쌀쌀한 바람만 몰아쳤다. 모든 경도 관리들은 이 대단한 인재가 봄에 일으킨 사건처럼 경도에 또다시 풍파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점차 알게 되었다. 이번 풍파에서 조사 대상이 된 건 비교적 낮은 품계의 관리들뿐이었으며 각 파벌의 주요 인물은 포함되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조사를 받게 된 관리들은 걸리는 게 많은 커다란 안건에 연루된 것도 아니었다.
조정의 나이가 많고 지체가 높은 대신과 각 황자에게 복종하던 신하들은 범한의 체면을 보아, 아울러 대 내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격렬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번 풍파가 조정 관리들에게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범한이 작고 자질구레한 것들을 가지고 조사하고 있어 관리들은 마음을 살짝 졸이기는 했지만 이내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이제 막 새로 부임한 범한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의욕에 차서 일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불길이 크고 거세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는 걱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요 며칠간 유씨 부인은 사남 백작가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었다. 과거 아무도 모르게 은표를 건네는 걸 좋아하던 그녀의 손은 어느새 매우 안타까워하며 은표를 받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은표는 자연히 전부 범한에게 돌아갔다. 그러면 범한은 다시 그것을 나눠 주는 것으로 처리를 해버렸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으면 언빙운에게 보냈다.
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전생인 범신의 세계에서도, 현생인 범한의 세계에서도 돈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마음속의 가장 예리한 무기를 무디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에 감찰원 1처 관원들은 예전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일을 했다. 그리고 호부 상서 부인의 친밀한 손길과 성공적으로 접촉한 각 파벌의 관원들 역시 적지 않게 마음을 놓았다. 돈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모두 심적인 위안을 받았던 것이다.
* * *
업무가 정상 궤도로 올라서자 범한은 더 이상 신풍관에 가지 않았다. 대신 집 서재에서 사건 기록을 살펴보았다. 사건 기록은 목철이 해놓은 것이었다. 글씨체가 정갈한 편은 아니었지만 내용은 조리 있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대 내관의 조카는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물은 후 운 좋게 감찰원에서 사지 멀쩡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경국 법률의 허점을 이용해 형부나 대리사로 이송되지 않았지만 이제 검소사의 그 자그마한 관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범한은 이 밖에 몇 가지 안건들도 비교적 부드럽게 처리하고 넘어갔다.
원칙대로라면 감찰원이 검소사 사건을 맡은 이상 대진은 관복을 벗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머리도 보존 못 했어야 한다. 그런데 범한은 대 내관이 분별력 있게 행동해 나중에 발생할 몇 가지 번거로운 일들을 알아서 해결해 준 게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섭령아가 조용히 입궁해 범한을 도와 숙 귀비에게 부탁을 한 것도 있었다. 바로 이 정도 선심은 당연히 써줄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사천립이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 있는 젊은 스승을 바라보며 좌불안석했다. 춘시 후 그의 친한 세 친구 후계상, 양만리, 성가림은 이미 지방 관리가 되었다. 서한에 따르면 모두 각 군(郡)과 로(路)에서 일을 잘하고 있다고 했다. 이는 임약보가 재상직에 오래 있으면서 각 군, 로, 주(州)에는 골고루 인맥이 형성된 덕분이었다. 범한을 주시하고 있던 임약보의 인맥들이 그의 ‘애제자’ 셋을 잘 보살펴 주기 때문이었다.
네 사람 중 유일하게 낙방한 사천립은 벼슬길에 올라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북제로 가기 전 그에게 서한 하나를 건넸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란 내용이었다. 그런데 범한이 귀국한 후 곧바로 감찰원 1처 사무를 맡게 되자 사천립은 자신이 스승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하고 있을 일을 생각하며 서재에 앉아 사건 기록을 베껴 쓰는 것만 하고 있으니, 아무리 성격이 명랑한 그일지라도 암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사천립을 잠시 바라보고는 웃어 주었다.
“조금 답답한가?”
그러자 사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께서는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리신데도 이 번거로운 공문서를 참으로 침착하게 보시는군요. 이 제자, 아무래도 성품을 더 도야해야겠습니다.”
범한이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 후계상과 양만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을 해보았다. 후계상이라면 분명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한마디 했을 것이다. 양만리라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왜 범한 마음대로 중범죄자를 풀어 주었느냐고 묻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천립 정도 되니 그나마 느긋하면서도 무미건조하지 않게 물어 온 것이었다. 이제 보니 애초에 그에게 자기 곁에 남으라고 한 게 잘못된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스승님이라고 그만 부르게.”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그냥 대인 정도로만 불러 주게나. 그편이 벼슬아치 같다는 느낌도 없고. 그리고 스승님이란 호칭은 정말로 너무 황당하게 느껴지거든.”
사천립은 순간 깜짝 놀랐다. 사실 과거에서 심사관이 수험생인 선비보다 젊은 건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니 사천립이 봤을 때는 그다지 이상한 게 없는 일이었다.
범한이 책상에 놓인 사건 기록을 건네며 물었다.
“그대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군.”
사천립은 대인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줄 알지 못했다. 다만 요 이틀 동안 이들 공문서를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기에 고개를 내저으며 진정성을 담아 말했다.
“이 제자, 정말로 스승님······ 대인께서 왜 이러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만약 정말로 호랑이를 때려잡을 생각이시라면 이렇게 쥐들만 노려보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냥 1처 고양이들에게 할 일을 주었을 뿐인데. 연습을 하라고 말이지. 나중에 정말로 큰일을 하게 되었을 때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세.”
사천립은 ‘큰일’이란 단어를 못 들은 척하며 진심을 담아 가르침을 구했다.
“대인, 조정 벼슬아치라 함은 모두 황제 폐하의 근심을 분담하기 위해 조정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래 대인의 행적을 보면 작은 빌미를 가지고 크게 확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사게 되실 것입니다.”
“미움을 사는 건 감찰원이 꼭 지녀야 할 특수한 자질이라네.”
범한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알다시피 감찰원은 황제 폐하의 사적인 기관이지 내관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딱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있어. 그러니 황궁 쪽에서 보든 아니면 감찰원에서 보든 우리는 미움을 사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네. 그런데도 1처는 경도에 위치한 탓에 이곳의 번화함과 얽히고설켜 황제 폐하께서 세운 당초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상실하게 되었지. 충분히 용맹하지도 음험하지도 않은 상태가 된 것이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내게 1처 관리를 맡기신 건 최초 의도대로 1처가 미움받을 짓을 하는 곳으로 되돌려 놓기 위함이라 봐야 하지.”
스승이 모든 걸 탁 까놓고 말해 주자 사천립도 더 이상 모를 척할 수만은 없었다. 이에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대인을······ 고립된 신하로 만들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당파를 만들지 않는다라. 황제 폐하께서 나를 제2의 진평평 원장 대인으로 만드시려는 거라니. 한데······.”
범한은 갑자기 화제를 돌려 살짝 비웃는 듯 말했다.
“감찰원 원장 대인 댁에 가서 인사를 드린 적 있는데 호화롭고 사치스럽기가 황족분들의 저택보다 더하더군. 그처럼 뼛속까지 교활한 건 정말이지 별로였는데.”
사천립은 범한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고 근심 어린 얼굴로 답했다.
“하오나 대인, 황제 폐하께오서는 안목이 예사롭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만약에라도 거짓으로 사람을 대하신다면 모두 들키고 말 것입니다. 그러다 대인의 앞날이 불리해질까 저어되옵니다.”
범한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는 ‘황제 저 노친네가 평소에는 호랑이보다 더 흉악한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251화
사천립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아 화제를 돌려 버렸다.
“1처에서 사건 조사를 할 때 과거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한밤중에 사람을 체포해 온다고요. 하오나 대인께서는 그와 같은 소식이 퍼져 나가는 건 전혀 막지 않으시더군요. 누군가가 물어보면 사실대로 다 말해 주시기도 하고. 저는 그리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범한이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왜인가?”
사천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감찰원은 황제 폐하의 특무 기관입니다. 백관들을 위협할 수 있는 건 경국 법률이 정한 특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큰 이유는 신비감과 음험, 어두운 느낌 때문입니다. 세인은 무지하니 이해하기 어려울수록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인께서는 일부러 1처가 하는 일을 외부에 공개하고 계시니 그와 같은 느낌이 많이 줄어들면 조정과 백성이 감찰원을 가볍게 볼 수도 있습니다.”
범한이 보기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찰원 1처의 새 조례 중 어느 조항에 반대하는지 나도 알고 있다네. 예를 들어 정보 발표 같은 것들이겠지. 감찰원이 계속 어둠 속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악마처럼 행동하면 일을 처리하는 데 훨씬 더 유리하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일세.”
범한이 자신의 의견에 찬성하자 사천립은 살짝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설마 세상 사람들 눈에 괴물로 비치기 싫어서 그러는 건가? 세인들의 평판을 뒤집기 위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진 범한의 말은 조금 전 그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알려 주었다.
“나도 세상 사람이 감찰원을 어찌 보는지는 관심 없지만 그대가 알아 둘 게 있다네. 내가 맡고 있는 건 전체 감찰원이 아닌 1처 하나뿐이라네. 1처는 경도에 있으니 황족들에 대한 밀정 활동을 제외하면 실은 그 어떤 일도 은폐하기란 어렵단 말이지. 그리고 경도 관원들이 앞잡이처럼 이야기를 퍼뜨리면 민간 백성들이 그것에 이런저런 살을 붙여 나가고. 어찌 되었든 1처의 신비감은 유지가 안 되는 거니 차라리 공명정대해지는 편을 택한 거지. 그 대신 감찰원 1처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더 강화되는 거고.”
범한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나는 조사 결과만 발표하는 방법을 쓰고 있네. 그러니 과정까지 공명정대할 필요는 없는 거지. 조사 과정에서는 어떤 어둠의 수단을 쓰든 나는 다 허용하고 있고. 그러니 그대에게 하려는 말은 나는 무슨 성인 같은 게 되고 싶은 건 아니란 말이지.”
사천립이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 스승님은 관리 사회의 폐단을 과감히 벗겨 내기 위해 잠시 보류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범한은 사천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부터 1처에서 조사한 모든 안건 중 마무리 지은 것은 대리사나 형부로 보낼 것이네. 그러니 그때마다 그대는 문서를 작성해야 할 것이네. 매 안건 그 원인에 대해 상세히 써주게나. 그러면 그걸 공고문용으로 쓸 걸세. 공고문을 붙일 곳은 내 이미 알아 놨지. 바로 1처와 대리사 사이에 있는 벽이라네.”
사천립은 황당해 입이 떡 벌어져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그게······ 규정에 맞는 일입니까? 형부에서 발행한 범죄자 수배 벽보도 아니고 조정에서 붙이는 방도 아닙니다. 그런데 감찰원이······ 공고문을 벽에 붙여 내건다고요?”
범한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감찰원이 아니고 1처에서 하는 거네! 아까 내가 조금 더 광명정대하게 한다 말하지 않았는가? 설마 내게 소설이나 써서 4처에 팔아먹을 준비나 하라는 것인가?”
그러자 사천립이 즉시 기쁜 기색으로 답했다.
“그것참 최고로 좋은 방법이네요. 백성들의 궁금증도 풀어 줄 수 있고 생경하고 범접하기 힘든 1처의 분위기도 은근하게 유지할 수 있고요. 게다가 대인께서는 책방을 가지고 계시니 하시기에 가장 편한 방법이기도 하군요.”
범한이 화가 나 기분 나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사천립이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뒤따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 그렇다면 이 제자, 감찰원에서 일하게 된 것입니까?”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의 문인 중 음험하고 후안무치한 특무 기관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자는 없었다. 이에 범한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대는 나의 개인적인 비서일 뿐일세. 내 아버님께 말씀드려 잠시 호부에 꽂아 줄 터이니 다음에 다시 이야기함세. 염려 말게나. 세상 누구도 자네에게 감찰원의 못된 개새끼라 손가락질하며 욕하지는 않게 해줄 터이니.”
* * *
사남 백작가 뒤채에는 누가 봐도 놀랄 만큼 넓은 화원이 있었다. 범한이 이곳에서 산책을 하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둠의 수단으로 광명정대한 결과를 얻는다고?”
범한은 자신은 비굴한 성인(聖人)은 아님을 스스로 인정했다. 물론 경국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 관료 사회에 만연한 부패 풍조를 조금 억제하려 한 것은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남쪽의 그 큰 강들의 강둑이 미처 손쓰기도 전에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 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1처의 기풍 바로잡기는 자신의 사심에서 비롯된 측면이 더 많았다.
범한은 시선(詩仙)이라는 칭호와 함께 최근 들어 새로운 문인의 태두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감찰원이 20년 동안 쌓아 온 더럽고 추악한 악명 때문에 범한의 명성은 어떻게든 손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1처를 조금이라도 더 광명정대하게 바꾸려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명성은 훗날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어둠과 공명이란 단어를 생각하다 보니 범한은 저도 모르게 북제에 있을 때 해당타타와 나누던 말이 생각났다.
―어둠은 저에게 검은 눈을 주었지만······ 저는 그 눈을 통해 빛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범한은 별안간 북제 쪽 상황이 걱정되었다. 해당타타가 과연 자신이 짜준 일을 제대로 했을는지. 한데 오죽 아저씨는 아직까지 실종 놀이 중이고 고하 역시 상경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없었다.
화원 안, 범한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인 몇몇이 담소를 즐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오늘은 맑게 갠 날이었다. 가을날 메뚜기가 아직 푸른 풀잎 사이에서 목숨을 걸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무 위의 매미도 이게 마지막 햇살인 걸 알았는지 목청이 터지게 노래를 불러 대는 통에 여인들의 말소리는 그 속에 묻혀 버렸다. 임대보는 화원 한쪽에서 개미를 잡고 있었고 범사철은 가문 학당에서도 집에서도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범한이 실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섭령아가 와 있었다. 그는 속으로 남몰래 앓는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저 여자가 자신을 한 번 제대로 도와줬다고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놀러 온다고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섭령아 옆에서 수줍어하고 있는 유가 군주를 봤을 때는 진짜 고역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열두 살짜리 꼬마 아가씨가 열세 살이 되더니······ 아직도 꼬마 아가씨이기는 하지만 제발 자신을 흠모하는 눈길로 바라봐 주지않았으면 했다.
최근 며칠 동안 범한은 이홍성의 초대를 몇 번이나 거절한 상태였다. 언빙운의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이홍성을 피해 숨어 지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저 어린 아가씨, 즉 유가 군주를 피해 숨어다녀야 한다. 범한이 체내의 정기를 운기해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오죽의 몽둥이 아래에서 연마한 경공을 이용해 누렇게 시들어 가는 풀들 위로 몸을 날려 아무도 모르게 저택 담벼락을 넘어갔다.
* * *
경도 심정도에 왕계년이 은전 120냥을 들여 사둔 저택이 있었다. 범한은 그 집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앉아 편안하게 허리를 폈다. 이곳이야말로 범한에게는 가장 은밀한 은신처였다. 계년조와 진평평 원장 말고는 집안사람들도 그가 자주 이곳에 와서 공무와 사무를 처리하는 걸 알지 못했다.
등자월이 정중하게 두 개의 죽통을 책상 위에 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이 왕계년처럼 제사 대인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알아서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죽통 색상이 둘 다 비슷한 걸로 보아 상경 근처 연산 산자락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였다. 입구를 밀랍으로 봉해 놓은 것도 비슷했고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사이 한 번도 뜯어 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다만 대나무 마디에 새겨져 있는 은밀한 기호는 정보를 전달하는 밀정들만 알 수 있도록 해놓은 표식이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극비 서한은 각각 북쪽 계통의 두 개의 독립된 노선에서 온 것이었다.
범한이 죽통을 들고 우선 진지하게 밀봉 상태부터 살폈다. 밀랍 위에는 왕계년이 반령신운이라는 서체로 쓴 것이라 위조가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드디어 마음이 놓인 범한이 죽통을 열어 안에 있던 두 개의 서한을 꺼냈다.
하나는 사리리가, 나머지 하나는 해당타타가 보낸 것이었다. 범한은 해당타타와 편히 연락하기 위해 그녀만을 위한 단일 연락 노선을 만들어 놓은 터였다.
사리리의 서한에는 중요한 정보 같은 건 없었다. 그녀는 범한과 해당타타의 계획대로 천일도에 귀의는 한 상태였지만 입궁하려는 노력은 아직 성과를 보지 못한 중이라고 했다. 북제 상경성에서 심중이 죽고 그의 가문이 망했지만, 이는 황태후 세력에게 큰 타격을 준 것 말고는 그리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건 아니라고도 했다. 상삼호는 계속 집에 감금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서한 말미에 북제 국사 고하가 이미 상경성으로 돌아와 줄곧 폐관(閉關) 중이라고 했다. 그의 행동을 두고 감히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사리리는 그 절대 강자가 분명 다친 거라고 깊게 믿고 있었다.
범한이 잠시 웃었다. 이 세상에 인육을 먹는 괴물과 싸울 만한 사람은 나머지 세 명의 종사 말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당타타의 서한에서는 그 대종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물론 범한과 해당타타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었으니 그녀가 무언가를 말해 주기를 바란 건 없었다. 다만 그 상서로운 일을 제대로 처리했는지만 궁금했을 뿐이었다.
범한은 생각을 좀 해보다가 붓을 들어 해당타타에게 그때의 약조를 지킬 것을 재촉하는 내용으로 답장을 썼다. 해당타타에게는 매우 쉬운 일이었고 범한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리리에게 쓴 답장에는 다른 내용은 전혀 쓰지 않고 오로지 이청조의 시만 한 수 적어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전했다.
사실 1처 일을 처리하는 요 며칠 동안 범한이 가장 많이 생각한 건 범약약과 이홍성의 혼사 문제였다. 그런데 세자의 인품이나 쌍방의 정치적 입장 충돌 여부는 범한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최대 관건은 딱 하나, 바로 ‘누이가 이홍성을 좋아할까?’였다.
범약약은 이미 자신의 태도를 밝혔다. 싫어한다고. 범한에게도 다른 오라비들처럼 청춘기 여성의 종잡을 수 없는 분노를 향해 ‘설마 네가 정말로 시집을 안 가겠어?’라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보다는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보호 본능이 더 크게 작용했다. 이에 누이가 싫다고 했으니 간단하게 생각해 아예 이 혼사를 깨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범한에게는 경도로 온 후 가장 번거로운 일에 직면한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지정한 혼사이니, 서로 어울리는 집안의 자녀들이 맺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혼사를 가지고 무어라 트집을 잡을 여지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범한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2 황자 쪽을 주시하면서 시시각각 상대를 무너뜨릴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고 거기에 이홍성을 연루시켜 그것을 빌미로 혼인을 무른다. 둘째, 동생 범약약의 계획에 따르되, 황제에게 이득이 될 만한 것 중 무시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하고 범약약은 잠시 경도에서 떠나 있도록 한다.
전자의 방법은 얼마나 많은 소란이 일지 모를 일이었고, 후자의 방법은 너무 뜬구름 잡는 방법이라 범한도 제대로 할 자신이 없었다.
“한 장군이 공을 세우는 데 만 명의 병졸이 죽어야 한다 했는데 내가 혼사 한 건 깨자고 수많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걸까?”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정말로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가서는 오죽 아저씨께 누이 범약약을 데리고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여행이나 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겨우 이까짓 일로 황제 폐하께서는 사남 백작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범씨 일족을 참수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252화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섭령아와 유가 군주는 모두 돌아간 후였다. 범한이 방으로 돌아가 사기에게 차를 내오라 소리쳤다. 일단 사기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이 가을에 사기는 사사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봄 내내 집을 비웠다고 원망을 해대는 중이었다. 방 안에 잠시 자신과 처만 남게 되자 범한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최근에 황궁에서 무슨 소문이 돌고 있나요?”
임완아는 창가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수를 놓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범한의 질문에 살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해 질 녘이었다. 햇살이 창을 넘어 들어와 실내를 비추었지만 투명하고 맑은 빛은 아니었다. 범한이 임완아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강하게 찡그렸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임완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매끄러운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런 햇살은 몸에 안 좋아요. 무엇 하러 여기서 수를 놓습니까?”
임완아의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어쩌면 어젯밤에 잘 쉬지 못해서일 거란 생각에 고개를 숙이고 키득키득 웃고는 들고 있던 수틀을 뒤로 숨겼다.
“수는 다 놓으면 보여 줄래요.”
범한은 아내의 유약한 모습과 긴 속눈썹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봄부터 경도를 떠나 있느라 작년보다 아내를 덜 챙겨 주었던 터였다. 조강지처가 싫증 나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당당한 범한 대인은 아직까지도 첩을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저 너무나 많은 일이 그의 마음을 구속하고 있어 집안일을 많이 돌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임완아는 앞서 범한의 질문이 생각나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다시 입을 뗐다.
“최근에 황궁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특별한 건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런 건 왜 묻는 거죠?”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의 무정한 외삼촌께서 내게 감찰원 1처를 맡기셨어요. 대체 얼마나 많은 관원에게 죄를 짓게 될는지, 원. 한데 그들이 섬기는 진짜 주인들은 모두 황궁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로서는 관심을 더 가질 수밖에요.”
임완아의 신분은 특수했다. 황태후께도 총애를 받고 있고 황제 폐하도 그녀를 볼 때면 따사로운 눈빛으로 바라봐 주시고. 그러니 황궁에서 임완아의 지위는 범한이 애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높았다. 현재 황제 폐하께 딸이 없어 경국에 진짜 공주가 없다 보니 임완아의 지위는 공주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임완아가 생각을 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염려 놓으셔요. 황제 폐하께서 상공을 총애하시는 거 모두가 알고 있어요. 그러니 마마님들께서도 좋은 이야기밖에 안 하세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뵌 건 겨우 몇 번뿐입니다. 그러니 그 총애니 뭐니 하는 말이 어떻게 나온 건지 당최 모르겠어요.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총애하신다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에 대해서는······ 그냥 당신을 예뻐하시니까 덩달아 나도 예뻐해 주시는 것뿐이라니까요.
임완아의 눈동자에 잠시 범한을 향한 사랑이 잠시 스치더니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상공은 늘 그런다니까요.”
임완아가 말을 이어 갔다.
“숙 귀비마마께서 요즘 상공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세요. 의 귀빈께서는 알잖아요, 이 집안과 친척 관계이신 거. 그러니 항상 당신 편을 들고 계시죠. 다만 황후마마께서는 여전히 평소처럼 담담하게 반응하고 계시고. 그 밖에 비로 계신 다른 마마들께서는 황궁 내에서 말을 할 자격도 없으시니 나도 그분들 말은 그냥 흘려 버리는걸요.”
범한은 아내의 판단을 믿었다. 그가 훗날 감찰원을 모두 거머쥔다 해도, 황궁이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삼엄한 곳일지라도 임완아는 자신을 위해 가장 믿을 만한 눈과 밀정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리고 숙 귀비가 자신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한 건 다름 아닌 범한이 그녀에게 인정을 팔았기 때문이었다. 은전 따위는 사용할 필요도 없는 말 몇 마디로 말이다.
“영 재인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셨나요?”
범한이 자기 질문에 설명을 덧붙였다.
“나와 1 황자께서 길을 두고 다툰 일이 진즉에 황궁으로 전해졌을 거 아닙니까.”
그러자 임완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영 재인마마께서는 상공은 거들떠도 안 보실걸요. 어려서부터 나를 가장 아껴 주셨으니까요. 그래도 상공과 1 황자마마를 놓고 토끼 두 마리가 소란을 피웠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한쪽에게 곤장 50대를 치실 거란 말은 하셨답니다.”
그러자 범한이 깜짝 놀란 척하며 말했다.
“부인, 황궁에서 맞는 곤장은 정말 견딜 수 없게 아프답니다! 부디 이 남편을 위해 말 좀 잘해 주구려.”
임완아는 범한의 장난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마디 꾸짖고는 말을 이어 갔다.
“남들에게 미움 살 행동은 자기가 다 해놓고는 그 뒤처리는 나한테 해달라니!”
범한이 아내의 자그마한 손을 잡으려 하다가 답답하고 괴로워하며 말했다.
“대체 뭐가 그리 급한 일인데 그럴까?”
범한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한데 문득 자신이 아까부터 잊고 있었던 큰 인물이 생각나 살짝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후마마는 알현했었나요?”
임완아가 손을 머뭇거리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눈빛에 이해가 안 된다는 기색과 암담함을 담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현했습니다. 할마마마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줄곧 황궁에만 있는 황태후는 그야말로 황실 내 진짜 권력자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범한은 몇 차례 입궁했었지만 공교롭게도 단 한 번도 황태후를 알현할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부부가 함께 두 번이나 입궁을 했는데도 황태후마마께서는 병환을 이유로 만나 주지 않았다. 임완아 혼자 입궁을 하면 그 황태후란 노인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임완아를 품에 안고는 “우리 보배!” 하고 불러 대면서 말이다. 그래서 황태후가 눈에 띄게 범한만 소원하게 대하자 임완아는 무언가 모르게 불안하고 답답했다.
범한이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그 노인에 대해 드디어 무언가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다 해도 범한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임완아가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령아가 입궁한 일에 대해 오늘 말해 줬어요. 상공, 당신이 요즘 공무를 보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한데 당신은 사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어요. 그녀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기억해 두기 위한 구실로 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어젯밤에 내게 말해 준 거 사실은 너무 무서웠어요. 2 황자 오라버니······께서는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독하게 뒤틀린성격을 지니셨거든요. 어쩔 수 없이 그분을 조사하는 거겠지만 지금처럼 망설임이 너무 많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범한은 걱정 어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당신이 어렸을 때 2 황자마마께 ‘돌머리’라는 이상한 별명을 지어 줬을 줄은 몰랐어요.”
“2 황자 오라버니는 상냥해 보이셔도 자신이 확신해 버린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세요.”
임완아가 다시 걱정스럽게 말했다.
범한은 부부 사이에서는 항상 신의와 성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사는 인생,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사람에게조차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런 삶은 어찌 되었든 처량한 거라 생각했다. 이에 범한은 자신이 2 황자를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임완아가 걱정하기 시작하자 그녀를 안심시켰다.
“실은 이건 다 2 황자마마를 위해서 하는 일이예요. 지금 상황을 보니 조정의 일부 신하들에게 그분이 현혹되셔서 현 상황을 제대로 못 보고 계신 것 같아요.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의 태자 전하께 보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셨는데 말이죠. 그러니 지금 누구라도 2 황자마마를 위해 나서야 합니다. 그분이 정말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시게 된다면 그때는 스스로 내려오려 해도 못 내려오시니까요.”
그러자 임완아가 달콤하리만치 사랑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가요?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를 냈을 텐데 말이죠.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가면서요.”
참으로 총명한 사람이야. 범한은 하마터면 이 말을 내뱉을 뻔했다. 그는 자신이 연기파 배우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유치한 수준의 정치력을 오로지 냉혈함, 무정한 마음 그리고 겉으로만 따스한 사람인 척하는 것으로 보완하고 있는 중이었다. 범한이 두 손을 가슴팍까지 모으더니 아내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절했다.
“임완아 대(大)책사님을 제 어찌 따라가겠나이까. 지상 최대의 암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자라셨으나 그곳에서 도망 나온 선녀셨군요.”
임완아가 화를 내며 범한을 꾸짖었다.
“왜 황궁을 그런 식으로만 보는 거죠?”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이 세상은 기루 아니면 황궁이라 했습니다. 온통 어둠에 잠긴, 그야말로 사람 살 곳이 아닌 곳이라고 말이지요.”
임완아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기분도 조금 나쁘고 해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제야 범한은 황궁에서 자란 자기 아내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임완아가 속으로 무언가를 꼼꼼히 따져 보기 시작해서였다. 잠시 후 그녀는 감동 같은 걸 받은 상태였다. 비록 자신의 생모가 장 공주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출가한 여자 중에서 남편에게 이리 존중받는 여자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군다나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터였다.
임완아가 따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황궁은 상공의 생각과 같은 그런 곳이 아니에요. 외삼촌인 황제 폐하께서도 여색을 탐하지 않는 명군이시랍니다. 황궁에 계신 황족들은 체면을 깎는 꺼림칙한 일은 하지 않으세요. 그러니 예전에 상공이 언급했던 소설 속 수단 같은 건 감히 쓰지 않으셔요. 또 할마마마의 눈이 항상 지켜보고 계시니까 누구든 천자의 혈통을 해치려 한다면 그분께서 절대 용서치 않으실 거예요.”
범한은 그녀의 말에 마음의 동요가 일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편해졌다.
임완아가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매우 엄한 분이세요. 그런데 마마님들께서 총애를 더 받으려 다투신다고요? 편애하지 않으시는데 어찌 싸움이 나겠습니까? 황후마마께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시니 다른 마마님들은 그저 마작에나 열중하시는 수밖에요. 서로 지지 않으려 하시고요. 그러니 실은 일반 황족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요.”
범한은 깜짝 놀랐다. 황궁 안에서 이런 화목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니. 자신이 전생에 보았던 황궁 내 여인들의 원망 서린 글들은 이제는 전혀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이에 범한이 살짝 자조적인 느낌으로 고개를 내젓고는 웃었다.
“그러니 완아, 당신의 마작 실력이 그렇게나 좋은 거였군요. 그래서 사철이, 저 괴물 녀석이 당신과 겨루면 겨우겨우 비기는 거였고요.”
마작 이야기가 나오자 임완아의 얼굴에 잠시 이채가 흐르더니 범한이 깜짝 놀랄 정도로 펄쩍 뛰었다. 범한이 앞으로 나아가 그 이채를 세세하게 살펴보니 은은하고 매끄러운 빛이 속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 영롱한 옥과 같았다. 이름하여 ‘소박하고 진실한 고수의 빛’이었다.
* * *
임완아가 촉촉한 눈동자를 쓱 굴려 불경한 상공을 째려보았다.
“그냥 손이 근지러웠을 뿐입니다. 상공에게 시집을 왔는데 상공은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매일 바쁘기만 하니. 하나 운이 좋아 도련님과 같은 마작의 천재를 만나게 된 거지요.”
임완아가 이를 악물고 빠드득 갈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후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매만지며 말했다.
“사철이 고 녀석은 요즘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거랍니까! 마작판에는 나타나지도 않고! 감히 제 어머니를 내게 붙여서 사람 벌받는 기분이나 느끼게 하고 말이야! 어머니께서 나를 너무 공손히 대하시는 바람에 꼭 내가 시어머니가 된 기분이라니까요!”
범한이 그녀의 작고 오뚝한 코를 비틀며 한마디 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새어머니인 유씨께서는 당연히 당신 시어머니가 아니지요. 당신이 너무 앞서 나가서 생각한 거예요.”
그러자 임완아가 잔뜩 원망 섞인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날 왜 그런 사람 취급해요!”
그러고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말을 이어 갔다.
“며칠 뒤에 국화를 감상하러 갈 거예요. 예년처럼 규칙에 따라 황궁에 계신 마마님들께서 서산에 가실 거예요. 하나 올해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실지는 나도 아직 몰라요. 가는 건 확실한데 어찌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거죠. 아마도 며칠 뒤 황궁에서 내관이 나와 말을 전해 줄 거예요. 그러니 잊지 말고 기억해 줘요.”
“국화 감상요?”
253화
범한이 눈썹을 움찔했다. 하늘이 높고 공기가 상쾌해지는 가을이면 경도 사람들은 국화를 감상했다. 한데 황족에게도 그런 취미가 있었다니. 이씨 일족의 대대적인 모임이니 당연히 자신도 가야만 했다. 그런데 자신이 최근에 경도에서 벌인 일들을 생각하다 보니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저 늙은 여우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국화 감상하듯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임완아는 갑자기 조용해진 상공을 의식하지 못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요즘에는 마작을 못 했고 국화는 아직 피지도 않았고. 정말 무료해요. 혼인 전에 상공이 내게 약속한 책 말인데요, 그거 언제 써줄 건가요?”
범한이 기분이 언짢아 인상을 팍 썼다. 《홍루몽》이나 베끼고 있을 정신이 없는데 말이다.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에둘러 답했다.
“이런, 이 소인을 용서하시옵소서!”
임완아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원고를 재촉하자 범한도 더 이상은 방에서 아내와 노닥거릴 수만은 없었다. 이에 엉덩이에 불난 사람처럼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 피해 버렸다.
* * *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샛길로 도망치던 범한이 저택의 넓은 정원을 지나다가 얼굴을 가리고 웃고 있는 여종 몇몇과 마주쳤다. 그제야 범한은 지금 이러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이어 유명 인사로서, 유명한 관료로서의 풍모를 드러내려 했다. 하지만 몸을 꼿꼿이 편 채로 있은 지 1각(15분)도 안 되어 다시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이를 악물며 어려서부터 멋지게 살기로 마음먹어 놓고 무엇 하러 저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에 끄응, 소리를 내었다가 이내 짧은 곡조를 읊조리더니 냅다 뛰어 곧장 자신의 서재로 꺾어 들어갔다.
처와 나눈 평범한 대화였지만 범한은 그 속에서 몇 가지 유용한 정보를 알아냈다. 그런데 범사철의 최근 행보는 조금 기이해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리고 《석두기》 문제에 관해서는 북제 황제가 비밀을 지켜 주기로 한 사실이 생각났다. 이에 그에게 은혜를 입은 것도 있고 하니 한 회 정도는 써서 보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북제 황제에게는 자신이 《석두기》 작가란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으니 범한은 감찰원이 이용하는 비밀 서한 교환 통로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방 밖이 아직 어둠으로 완전히 휩싸이기 전 약속대로 언빙운이 나타났다. 범한은 그가 건네준 자료를 읽으며 자기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가 오늘 한 일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목철이 보낸 사건 기록 파일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사철립과 어떻게 할지 기조를 정한 후 집으로 돌아왔고 이어 마누라와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언빙운 공자와의 대화가 남아 있었다. 하루 동안 이리도 많은 일을 해야 하다니. 이리 보니 ‘권신(權臣: 권세를 쥔 신하) 양성’ 과정은 정말이지 고생스러운 길인 것만 같다.
“체포하라던 이는 모두 잡아다 놨어요. 일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범한이 자료 내용은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앞서 진행되었던 ‘쥐 잡기’는 경도 관료 사회는 건드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군더더기 사건으로 연막을 쳐가며 조심스럽게 2 황자의 숨은 세력들에게 접근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번한은 탐색 차원에서 두 명의 관원을 구류하기도 했다. 이 두 관원은 품계가 낮은 이들이었다. 언빙운이 2 황자와 장 공주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 할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겨서였다.
언빙운이 의자에 앉으며 냉정한 표정으로 범한 앞에 놓인 자료를 가리켰다.
“다 끝냈습니다.”
범한이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벌써요?”
한데 이번에도 자료는 보지도 않고 곧장 되물었다.
“결론은요?”
언빙운이 냉랭하게 말했다.
“신양 쪽은 매년 북제와 동이성에 매우 큰 액수에 달하는 밀무역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손해이고 이는 동궁 태자마마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장 큰 금액은 모두 명가를 경유해 2 황자마마께 가고 있습니다. 그 돈으로 조정 관원을 매수하고 각 로(路)에 있는 대리(大吏: 지방 수석 장관)와 교분을 맺고 있더군요. 그러니 대인의 판단이 맞으셨습니다. 2 황자마마 배후에 장 공주마마가 계셨습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명가라니요? 최씨와 인척 관계에 있는 명가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 큰 금액이 어떻게 황실 금고에서 2 황자 손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범한이 가르침을 구했다.
“당연히 경도를 통해서는 안 되겠지요. 강남 쪽으로 돌아서 들어간다고 합니다. 중간에 몇 개의 황실 상단을 경유해 돈을 아래쪽으로 분산시키고 그 아래쪽에 있는 돈을 다시 위쪽으로 보내면, 그 모든 돈이 2 황자 전하께 가는 것입니다.”
언빙운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관련 내용은 자료에 모두 적혀 있고요. 하온데 대인, 불분명한 것이 있으니 직접 보시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말로 하기에는 복잡하거든요.”
언빙운의 말 속에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느낌이 숨어 있었지만 범한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생각에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는 멋졌다고 한마디 내뱉었다.
범한이 반문했다.
“장 공주와 2 황자마마께서 은밀히 행동하고 계신데도 우리 쪽에서는 쉽게 알아냈습니다. 그런데도 황궁 쪽에서 이 사실을 모르고 계실 것 같다고 보나요? 그리고 진평평 원장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실까요?”
“황궁 쪽에서는 경계는 할지언정 분명 실질적인 증거는 쥐고 있지 않습니다.”
언빙운이 서서히 눈을 감으며 말을 이어 갔다.
“대인, 죽은 1처 수장 주격은 줄곧 장 공주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대인께서 1처를 장악하신 게 아니고 나머지 부서가 적극 협조하지 않았다면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것으로······.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대인께서 정말로 이 안건을 공개하신다면 경도에는 필시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언빙운은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 말 뒤에 숨은 냉혹함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정보를 이렇게나 빨리 찾은 건 감찰원이 확보한 무시무시한 자원 덕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언빙운이라는 인물의 탁월한 능력이 더 많이 발휘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언빙운은 자신이 조사한 사건 때문에 평화로워 보이는 경국 조정에 일대 혼란이 일어나는 걸 전혀 원치 않고 있었다.
그러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빙운은 범한에게 충성하는 게 아닌 황제에게, 경국에게, 감찰원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것이었다.
범한이 언빙운을 잠시 보고는 말했다.
“이 일을 그냥 덮는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러자 언빙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아는 건 이 일이 공개되었을 때 가장 난처해지실 분이 대인의 부인이란 점입니다.”
사실 상류층에 있는 절대 다수는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범한의 아내가 장 공주의 여식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이 일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다고 작정한다면, 어찌 되었든 분명한 건 황제 폐하께서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사납게 반응하실 것이고, 임완아의 처지도 난처해질 것이란 점이었다.
범한이 경도로 돌아온 후 한 행동들은 글 종이 사건으로 장 공주를 내몬 상황을 더 견고히 보완하고, 황궁 내 모순된 실책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범한이 원했던 결과는 어쩌면 다른 속셈이 있을 황제 폐하를 압박해 단시간 안에 장 공주가 쥔 권력을 박탈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 아내를 존중합니다.”
범한이 싸늘하게 언빙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아내가 곤란해진다고 해서 내 행보를 늦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빙운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의혹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관은 바로 그 점이 이해가 안 됩니다. 대인, 대체 무엇이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창가로 걸어가 서서히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정원 한쪽 귀퉁이에 있는 한 아녀자가 키 작은 나무의 가지며 잎을 관리하고 있었다.
“첫째는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이에요. 지금 조정에 은전이 모자랍니다. 남쪽의 큰 강이 오랫동안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답니다. 올해 제방이 무너져서 몇십만 명이 수몰되어 죽었지요. 비록 직접 목도한 것은 아니나 생각만으로도······ 너무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재난 구호에 쓸 은자를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내 아버님께서 요 며칠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계시답니다. 현 조정의 재정 상황은 역대 조정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장기간 군사를 동원하느라 대량의 금전과 식량을 소모한 상태지요. 재정의 원천지가 괴이한 건 말할 필요 없다 쳐도 국고로 들어오는 1년 수입 중 상당히 많은 액수는 황실 금고에서 충당되어야 하더군요. 황실 금고는 황제 폐하의 곳간이나 대인과 나도 알다시피 실제로는 섭가 여주인의 유산이지요. 한데 그 황실 금고가 벌인 사업이 끊임없이 은전을 벌어들여야 경국도 지탱될 수 있답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더니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한데 장 공주마마는 권력을 이용해 장난질 치는 걸 좋아하십니다. 그동안 황실 금고의 은자가 차츰 관원들 손으로 들어갔지요. 은전은 장 공주마마와 관리들 사이에서 충성과 권력을 맞바꾸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참 역겹지 않습니까. 폐하의 은전을 쓰는 것이고 그분의 신하를 빼앗아 가는 것이니까요. 은전이 황실 내부에서 그리고 관원들에게 소모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은전이 필요한 곳이 있을 때 대체 어디에서 그 은전을 구해야 할까요?”
“은전은 은전일 뿐이지만 어찌 쓰느냐는 큰 문제이지요. 그리고 관리들이 집 안에 쟁여 놓고 곰팡이나 슬도록 하게 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내놓도록 해 강의 제방을 보수하는 데 쓰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 최씨 가문과 2 황자마마에 대한 조사를 급히 진행한 거예요. 우리의 장 공주마마와 독서에만 열중 중인 척하는 2 황자마마가 우리 경국의 은전을 맘껏 다 써버리시는 걸 막기 위해서 말입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흡사 개탄에 빠진 사람처럼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이 사실이 폭로되어도 황제 폐하께서는 자신의 친누이를 엄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 지난번 황궁에서 쫓아내신 것처럼 물의가 이는 건 신경을 쓰시는 분이니, 황실 금고에 대해 제대로 조사를 하시고 또 2 황자마마에게도 따끔하게 훈계를 하시겠지요. 하나 나는······ 그분이 내시는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싫어하실 것이고 이내 감찰원에서 내쫓아 어디 먼 데로 보내시겠지요.”
범한이 기지개를 켜더니 얼굴에 순진무구한 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랍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나를 담주로 돌려보내 주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언빙운이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갸우뚱했다. 자기 앞에 있는 제사 대인을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그런 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오나 대인, 내년에 황실 금고를 맡게 되시지 않습니까. 그때 다시 조사하시면 명분도 얻고 일도 더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요?”
범한이 잠시 웃고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이 대답했다.
“우리 경국에 남아 있는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황실 금고에서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은전을 막아야 해요. 그래야 재난을 당한 남쪽 백성에게 죽이라도 몇 그릇 더 먹일 수 있지요. 일이란 건 그냥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하나 밥은 한 끼라도 먹지 못하면 허기가 밀려오기 마련이지요.”
언빙운이 범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기 앞에 있는 이분이 대체 원래 알던 음험한 권신인지, 아니면 대자대비하여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이 기꺼이 자기희생하는 큰 성인인지 똑똑히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254화
“나를 무슨 성인 보듯 하지는 말아 줘요.”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어 갔다.
“어찌 되었든 본관도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거든요. 아까 내가 내년에 황실 금고를 맡게 된다고 했죠? 그렇게 되면 신양 쪽은 자금줄이 끊어질 텐데 장 공주마마께서는 무엇으로 황자마마를 지원할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도록 그냥 놔둘까요? 황실 금고의 회계 상태는 당연히 정리가 잘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 암암리에 손해를 입은 건 어떻게 하죠? 설마 본관이 그걸 맡은 후 머리가 세도록 걱정만 해야 하는 건가요?”
“장 공주마마께서 먹다 남긴 성대한 잔칫상에서 깨진 식기나 받쳐 들고 있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단 말이죠!”
“황실 금고는 금광입니다. 하지만 오염된 물구덩이기도 하죠. 장 공주마마께서는 황태후마마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한데 나는요? 한낱 신하로서 황실 금고를 맡은 것 자체가 그냥 죄짓는 거예요.”
범한이 고뇌하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나를 장 공주마마 대신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하시는 건 아닐까 하고요. 훗날 황실 금고가 비어 있는 일과 관련해서 나는 입이 8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테니까요. 맞아요, 나도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먼저 장모님께서 발 닦으신 물을 그분에게 뒤집어씌워 드리려고요.”
만약 진평평 원장과 범건이 지금 범한이 한 말과 표정을 듣고 보았다면, 분명 엄지를 치켜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녀석, 아직 나이는 어려도 연기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한낱 신하라고? 그것도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경천동지할 비밀을 언빙운이 어찌 알까. 그는 그저 범한의 자칭 진짜 속내라는 듣고는 오히려 마음속 깊이 범한에게 감탄할 뿐이었다. 그동안 시답지 않게 보였던 범한 대인이 생각과 달리······ 강직한 신하였다니! 언빙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건의했다.
“그렇다면 왜 대인께서는 황궁의 제의를 완강히 거절하지 않으신 겁니까? 황실 금고는 확실히······ 너무나 다루기 힘든 곳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내가 말해 줘도 안 믿을 겁니다. 하나······ 천하 백성을 위해 무언가는 꼭 하고 싶습니다.”
언빙운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하지만 마음의 온도는 조금은 상승했는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그런 후 차분한 음성으로 부하 된 입장에서 건의했다.
“지금 황실 금고를 건드리는 건 적절치 않은 일입니다.”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범한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언빙운은 느끼지 못했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이 일이 들쑤셔져서 외부로 알려진다면······ 대인의 최근 계획을 보면 분명 그 어마어마한 담력으로 사천립에게 공문 하나를 쓰도록 하셨을 테고, 대리사 옆 벽에 거창하게 내걸어 천하 사람들에게 알리셨겠지요. 장 공주와 경도 관원들이 황실 금고를 가지고 많은 이득을 챙겼다는 내용의······.”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정말로 그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 담 크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였다. 그 든든한 뒷배는 황제가 아닌 바로 그 아저씨를 말하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행동이십니다.”
언빙운이 정색하며 말했다.
“적어도 올해 발생한 이재민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황실 금고에서 흘러나간 은전을 고작 한 달여 내에 회수할 수는 없으니까요. 황제 폐하의 결심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관리들에게 미움을 사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벼슬자리에서 내쳐져 귀양 가는 관원들이 많아지면 조정 운영에도 차질이 생기지요. 하오나 재난 구제는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닙니까.”
범한이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언빙운 대인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 안건은 잠시 덮어 두시지요. 호부 상서 대인께서 오랫동안 국고를 관리해 오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방법이 있으실 테고, 남쪽 재난 지역을 그냥 저대로 두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왕계년을 상경에 두는 시간이 너무 짧아 걱정입니다. 북쪽에 있는 이들을 완전히 장악하기 힘드니 최씨 가문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없으니까요.”
언빙운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시원하게 답을 주었다.
“하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범한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자기 기분을 전혀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 변화 없이 언빙운을 바라보았다.
“대인은 북제에서 유명인 아닙니까. 한데 어떻게 다시 북제로 가겠단 말입니까?”
언빙운이 대답했다.
“제가 수하로 둔 이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일일이 지켜보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더 많은 권력을 쥐기 위해 더 많은 실험을 할 거예요. 그런 후 그 권력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거고요. 그러니 그사이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범한이 언빙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북제 상경에 있었을 때처럼 언빙운 대인이 나와 함께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이번뿐만 아니라 내년 봄에도 한 번 더요.”
언빙운은 범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에 너무 오래 침묵하지 않고 잠시 후 고개를 숙여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올려 인사하고는 서재에서 나섰다.
감찰원의 잘생긴 청년 언빙운은 시원시원하고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범한 대인이 충분한 신뢰를 보여 주었는데도 그로서는 무언가 의혹이 남았는지 서재 문을 나서려는 찰나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제사 대인, 대인께서는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며 자라셨는데 왜 세간의 고통받는 백성들을 그리도 중히 여기시는 건가요?”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긁적이며 답해 주었다.
“어쩌면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착한 사람이 되고 좋은 일을 하려고 습관을 들여 놔서겠지요.”
* * *
“언빙운 공자는 참는 데 일가견이 있어 그런가, 어째 심 낭자가 지금 어찌 지내는지 묻지 않는군.”
범한은 석양이 내려앉은 창밖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반 정도 가지치기된 관목이 있었고 그는 속으로 한숨을 짓고 있었다. 관리 사회란 역시 갈수록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남 백작가 저택에도 심후한 실력의 밀정이 숨어 있으니 말이다.
과거 1처에서는 사남 백작가 저택에 밀정을 심어 두었었다. 그런데 범한이 형부에서 자신이 감찰원 제사임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그 밀정은 눈치껏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뒤로 물러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찰원이 가만히 있을 곳은 아니다. 만약 오죽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범한은 꽃을 심는 아낙이 또 다른 밀정이란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냈을 것이다.
아까 자신의 말처럼 범한은 성인이 아니었다. 또한 순수한 의미의 호인(好人)도 아니었으며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장 공주에게 대적하기 위해 정작 진짜 실력을 알 수 없는 2 황자마마와도 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장 공주와 자신이 원수지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를 이렇게 만든 근본 원인은 바로 황실 금고였다. 황실 금고는 범한에게는 환생 후 어떻게 해서든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는 섭가의 것이었으므로 범한은 그것에 담긴 의미를 수호해야만 했다. 그러니 누구든 그 앞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인정사정없이 걷어차 치워 버릴 작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빙운에게 한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자신이 누이에게 말해 준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었다.
즉 ‘사람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다면 범한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는 자신, 아내, 가족, 세상 사람을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했다. 이는 무슨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사랑 같은 것이 아닌 순수하게 내면의 본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런데 멍청하지만 부귀영화를 누리고, 돈 있다고 남을 무시하고, 남의 여자를 탐하고, 이것도 인생이다. 성실하지만 비굴하게 살아야 하고, 아침저녁으로 상황이 급변하는 일상을 사는 것, 이 역시 인생이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고, 수없이 사람을 죽여 천하를 통일하는 것도 역시 인생인 것이다.
범한 역시 부귀, 권력, 미녀를 탐하는 평범한 수컷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전생의 기억이 있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에 그가 생각하는 찬란한 인생이란 자연스럽고 대범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독하기도, 부드럽기도 하고 미인들에게 더 다정히 대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또 이 아름다운 세계의 경관을 더 많이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가장 우선적으로 생명과 물질적인 삶을 보장받는다는 전제하에서 범한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 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려면 먼저 함께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마음껏 웃을 수 있어야 했다. 이에 범한이라는 이 ‘가련한 권신’은 시작과 동시에 지쳐 가고 있었다.
만약 담주에 있었을 때처럼 여전히 맑고 깨끗한 소년의 마음씨를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범한은 훨씬 더 행복하고 자유로웠을 것이다. 황실 금고니 천하 백성이니 하는 것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단순히 곁가지였을 텐데. 하지만 경력(慶歷) 4년, 쓸데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버린 게 문제였다. 정혼자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사랑의 늪에, 가정에 빠져 허우적대게 되었고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만 갔다.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자유롭게 떠돌 방도가 없게 되었다. 이 사실만 봐도 남자가 일찍 결혼하는 건 정말 바보짓을 하는 거다.
* * *
이날 오후, 감찰원 제사 범한은 감찰원 4처 수장 후보 언빙운과 함께했다. 이 둘은 사남 백작가에서 황실 금고, 2 황자, 민생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은 경국 내 가장 은밀한 통로로 각각 황궁의 어서방과 진평평 원장 대인의 책상 위로 보내졌다.
진평평의 반응은 단순했다. 감찰원 전체를 통괄하는 자신의 권한을 잠시 범한에게 모두 위임한다는 내용으로 명령을 내렸다. 다시 말해 진평평 원장이 이 명을 거두어들이기 전까지 범한은 이 무섭고도 방대한 감찰원의 역량을 모두 다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서방에서는 경국의 지존인 황제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보고서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범한이 요 며칠간 벌인 일들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다. 천하 백성과 벼슬아치들이 감찰원을 자신의 개라고 부르고 있는 이상 그 개는 사람을 물어 버릴 용기와 살벌함을 지녀야 했다. 물론 아무 사람이나 덥석 물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범한에게 이 개들을 맡긴 장본인으로서 그의 능력이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9개월 전, 진평평 원장과의 대화 후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범한이 감찰원을 이어받는 일에 대해서는 묵인했다. 언젠가는 그 아이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려 주어야 하는데. 천자의 혈통이지만 출신 때문에 영원히 용상의 자리에 앉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한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 아이는 지금 자신이 짜놓은 판에서도 만족할 것만 같았다.
오늘 오후 범한과 언빙운의 만남에서 황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대목은 바로 대화 내용이었다. 대화 중 자연스레 흘러나온 정감이 과거의 그 여인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수척하게 마른 황제의 얼굴 위로 안도의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비록 그 어린놈의 자신을 향한 언사가 조금 불경하기는 했어도 말 속에 숨어 있는 자신을 향한 충성심을 어림짐작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서였다.
황제가 뒤에 있던 태감을 잠시 쳐다보며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홍사양, 네가 보기에 범한은 어떠하더냐?”
홍사양 태감이 살짝 몸을 굽혔다. 그러고는 늙은 얼굴 위로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내보이지 않고 답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옵나이다.”
그러자 황제는 말없이 이맛살만 찌푸렸다. 그리고 속으로 범한이 자신에게 거짓으로 연기를 하는 중인지 생각해 보았다. 하나 듣기로는 오죽은 줄곧 남쪽에만 있다 했다. 그렇다면 경도에서 자신이 계획한 일을 알아차릴 사람은 없을 텐데.
“황제 폐하,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시옵니까?”
홍사양 태감이 물었다. 당연히 2 황자와 장 공주를 두고 한 말이었다.
황제가 싸늘하게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직 본극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리 빨리 끝낼 수 있겠느냐?”
경국 황제는 국고 부족 문제로 계속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신양 쪽을 향해 의심을 품고 있기는 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자신은 늘 충효를 강조해 왔으니 이번 일이 황태후의 건강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면에 있는 모든 걸 잔인하게 공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운예는 경국에게 과보다는 공이 더 컸고 2 황자는 자신의 친아들이니까 말이다.
황제는 이제야 진평평이 했던 말을 진정으로 믿게 되었다. 어떤 일들은 젊은 사람이 맡았을 때 무모해 보일 수는 있어도 박력 있게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지적 말이다. 범한뿐만이 아니었다. 황제는 이제야 언빙운이라는 젊은 관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너무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255화
궁녀들이 촛불을 밝히고 밖으로 나가자 어서방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황제는 범한이 올린 상주문을 말없이 보기만 했다. 그리고 만약에 범한이 정말로 자신의 심중을 알아차렸다면, 게다가 자신이 판을 짜놓은 대로 기꺼이 고립된 신하가 되기로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늦어도 오늘 밤 안에는 조사한 정보를 자기 책상 위로 보낼 것이리라.
그런데 만약 범한이 언빙운의 뜻에 따른다면 이 일을 덮을 텐데······. 문득 황제의 이맛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범한이 조정의 안정을 고려했다 해도 천자를 기만하는 행위는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삐그덕, 소리와 함께 어서방 문이 열렸다. 태감 하나가 상주문이 담긴 함 두 개를 들고 와 황제에게 열람할 것을 권했다. 상주문을 읽는다면 한밤중까지 계속 일하게 될 터. 이는 황궁 내 규칙이 된 지 오래였다.
황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로 상주문을 받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던지라 가장 아래쪽에 있는 비밀 상주문 상자가 눈에 들어오자 황제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황제는 감찰원 비밀 통로로 들어온 상자부터 열어 보았다. 그리고 범한이 벼슬아치가 된 이래 처음 쓰는 상주문, 그러니까 비밀 상주문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한참 후 황제는 이 비밀 상주문을 촛불에 태워 버렸다. 그런 후 가볍게 두어 번 기침하더니 붉은 먹을 적신 붓을 들어 새하얀 종이 위에 몇 글자 적고는 비밀 함에 넣어 밀봉했다.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버릴 상주문이었건만 황제는 별것 아니라는 태도였다. 권력의 정점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황제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일을 간파해 왔다. 이에 범한을 포함한 수많은 세력이 암암리에 예측했던 것과 달리 황제는 아들과 누이가 어떤 소란을 피우게 될지에 대해서도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의 야심과 자신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황제는 범한의 행동만큼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분명 황태자의 입장에서 2 황자를 공격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안도감에 젖어 있던 황제는 뒤쪽에 놓인 상주문을 읽고는 수척한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노기와 경멸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도찰원 어사들이 집단으로 낸 탄핵문이었다. 감찰원 제사 겸 1처 수장인 범한을 탄핵하는 상주문. 그것도 범한이 사익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고 사사로이 뇌물을 받았으며 법을 왜곡해 횡포를 부렸다니.
그 순간, 모든 상주문이 도발하는 눈빛으로 황제의 음침한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도찰원이 이 시대의 최고 명사인 범한을 집단 탄핵했다. 그리고 경도에서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범한이었다. 황제가 탄핵 상주문을 읽기도 전에 범한은 자신이 이미 도마 위에 올랐음을 알고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 예의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목철이 말했다.
“어젯밤 도찰원 좌도어사 뢰명성이 앞장서서 한 일이지만,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해서 오늘에서야 1처로 도착했습니다.”
감찰원 1처는 백관들의 동향을 몰래 감시하는 책무를 지녔다. 그러므로 어사들이 연명 상소라는 이리도 커다란 움직임을 보였는데도 1처 관원들이 즉각 감지해 내지 못했다면 범한은 화를 내며 제2차 기풍 바로잡기에 들어가야만 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던 종이를 펄럭이며 호기심에 물었다.
“죄명이 이것뿐인가요?”
목철은 제사 대인이 별로 신경 쓰지 않자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인, 과소평가하시면 안 됩니다. 어찌 되었든······.”
목철은 말을 끝마치지도 않고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그를 잠시 보더니 장난기가 담긴 눈동자로 말했다.
“설마 본관이 이 죄명들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요?”
어사 언관의 상주문에는 다음과 같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범한은 1처를 맡게 된 지 겨우 한 달 만에 몇 명으로부터 얼마의 은전을 받았고, 동시에 몇 명의 혐의자를 사사로이 풀어 주었다. 또한 부하들을 종용해 거리에서 폭력을 행사하게 했으며 이 일은 조정의 체면을 손상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확실히 죄를 지은 것이며, 유씨 부인을 통해 범한에게 건네진 은표들과 관련해서는 조사 가능한 증거가 남아 있다. 바로 일전에 감찰원 1처로 붙잡혀 갔다가 풀려난 관원들이 증인이니 범한은 천하 사람들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죄목만 봐도 관복을 벗고 물러나기에 충분했다.
범한이 일그러진 미간을 문질렀다. 오늘은 종일 바빴다. 한데 그 결과가 이런 엄청난 일이라니. 범한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리 경국의 도찰원 어사 언관께서 주둥아리 두 쪽만 살아서는. 겁쟁이에 기둥서방 같은 놈들인 주제에 대체 언제부터 권력자를 우습게 본 거지? 그게 아니라면 본관의 권력이 아직 별 볼 일 없다는 뜻인가? 신분도 아직은 그저 그렇고?”
목철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범한의 말처럼 감찰원은 줄곧 도찰원을 무시해 왔기 때문이었다. 목철은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제사 대인이 말한 마지막 두 구절을 놓고 ‘잘 아시면서 왜 그런 질문을 던질까?’라고 생각했다. 범한 대인이 큰 권력을 쥐고 있고 신분이 높다는 건 지금 경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점은 범한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도찰원 어사들은 왜 겁도 없이 갑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요 며칠 동안 자신은 비교적 온건한 방법을 사용해 왔는데. 생각해 보니 저들의 체면과는 관련이 없었고 게다가 그동안 천자의 총애도 날로 커져만 가고 있는데. 설마 저들이 황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도 불사하겠다는 건가?
범한의 얼굴을 보니 목철은 그가 무슨 생각 중인지 알 것 같았다.
“대인, 이번 일은 도찰원에서 관례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저들은 언제나 감찰원을 겨누고 있지요. 경국 법률이 준 권한이니까요. 황제 폐하께서도 감찰원이 암암리에 수단을 쓰는 걸 억누르고 계신 것이죠. 하여 가끔씩 저 잘난 척만 하는 수재들이 우리 감찰원의 흠을 들춰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오나······.”
목철이 이맛살을 강하게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저들이 감히 이리도 애먼 죄목으로 대인을 직접 겨눌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범한이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식은 차를 찍어 미간에 바르고 문질렀다. 차가운 찻물 덕분에 조금 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도찰원은 특수한 기관이었다. 이전 왕조에서 도찰원은 조정의 최고 감찰, 탄핵 및 건의 기구였다. 도찰원 장관으로 좌도어사, 우도어사가 있었고 그 아래에 부도어사, 금도어사가 있었다. 또한 지방 관할지에도 각각 감찰어사를 두어 주현(州縣)을 순시하며 살폈고, 주로 관리에 대한 현지 조사와 탄핵하는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장묵한 대가가 수정 정리한 《직관주(職官注)》를 보면, 예전 북위의 도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었다.
‘도어사는 백관을 탄핵하고, 억울한 사안을 밝히고, 각 도를 살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자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한 기관이다. 이에 대신이 간사한 행동으로 소인이 당파를 이루어 권세를 가지고 정치를 어지럽히면 탄핵하였다. 벼슬아치 중에서 기율을 어긴 옹졸하고 천박한 탐관을 탄핵하였다. 학술에 있어 부정을 저지르고 상서와 진언을 문란하게 하여 이 상황이 고착화되도록 한 자를 탄핵하였다. 조사를 통해 이부사와 함께 벼슬아치의 어진 정도를 따져 봄으로써 관리의 승진과 파면을 결정하였다. 대감옥에 있는 중범죄인을 심문해 조정 밖으로 내보내고 형부와 함께 죄인을 문초하였다. 내지(內地)로 봉해져도 외지(外地)를 돌며 칙령에 따라 일을 하였다. 13도 감찰어사는 주로 내외 모든 기관의 부정을 살피고 그 내용을 모아 서면으로 탄핵하거나 비밀 상주문으로 탄핵하고······ 이와 같은 내용을 도찰원 총헌강(總憲綱)으로 삼았다.’
경국 도찰원에서는 북위 조정과 같은 위세는 없었다. 우선 감찰어사가 각 군현을 순시하도록 하는 권한을 없앴다. 사건 심사 권한을 형부와 대리사로 이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군을 감찰하는 것과 벼슬아치를 암암리에 감찰하는 유의 대부분 권력은 진평평이 건립한 감찰원이 가져가서였다. 이에 현재 도찰원의 기능은 풍기와 규율과 관련해 천자의 눈과 귀 역할을 하되 실질적 권력 없이 입만 놀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관리는 누가 하는가? 남자가 한다. 그렇다면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미인을 빼면 권력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도찰원 어사는 자신의 대부분 권력을 감찰원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 기형적이고 방대한 거물에게는 항상 부러워하는 마음과 적대시하는 마음이 공존하했다. 한데 이는 어쩌면 이들 문인이 아주 오래전 역사 속 도찰원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는 특권에 기대어 언제든지 감찰원 관원을 탄핵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늙은 절름발이가 항상 독기 어린 눈으로 주시하고 있어 어사들은 오랫동안 본분만 지키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사들인데 왜 갑자기 반란을 일으킨 걸까? 범한은 조심스럽게 접근해 생각해 보았다.
감찰원이 감찰 기구 중에서도 독보적인 곳이라 해도 도찰원의 조정에 대한 잃어버린 영향력까지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론은 금속도 녹일 수 있다고 하고 세 사람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하지 않던가. 범한이 날린 몇천 장의 글 종이 때문에 무려 장 공주가 황궁에서 떠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시 말해 말만 가지고도 관리 하나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도찰원 어사는 대부분은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들이었으며 또한 선비들에게는 추앙받는 대상이었다. 과거에는 어사가 상소를 올리면 천하 문인들이 호응을 해주었고, 그들이 말로 공격을 시작하면 조정에서도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조사 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더라도 온통 오물을 뒤집어쓴 관원은 더 이상 조정에서 당당하게 지낼 수 없었다.
범한이 소리 내어 싸늘하게 웃었다. 생각을 전환해 보니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감찰원이 신양 쪽과 2 황자 사이를 조사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간 것 같았다. 범한은 형부에서 장 공주의 명령에 따라 자기 양다리를 잘라 버리려던 전임 좌도어사를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 공주가 데리고 있던 기생오라비는,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 아무도 모르게 조사하고 있는 소위 대단한 인재 하종위는 아직도 도찰원에 있었다.
잠시 후 황궁으로 보냈던 비밀 상주문과 관련해 회답이 왔다. 범한이 황금색 비단 아래에 놓여 있는 함을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이내 함을 열어 보았다. 하얀 백지에는 딱 두 글자만 있었다.
‘안지(安之: 편안히 지내라는 뜻).’
* * *
‘범’은 성씨, ‘한’은 이름이었고, 안지(安之)는 범한의 자(字)였다.
이것으로 범한은 옛날에 자신의 ‘자’를 황제 폐하께서 직접 지어 주셨음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뜻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편히(安) 살 수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도리질하고는 목철에게 말했다.
“자칭 청렴하다고 하는 어사들을 조사해 봅시다. 내가 법을 어기고 재물을 탐했다 하니 당연히 그에 따른······ 답례를 해줘야겠어요.”
목철이 무언가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진평평 원장 대인께서 일찍이 분부하신 게 있습니다. 도찰원 상주문에 대해서는 개 짖는 소리로나 여기라고 말이지요.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게······. 왜냐하면 황궁 측에서도 감찰원이 도찰원을 조사하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보기 안 좋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두기 위해 황제 폐하께서도 감찰원에게 언관을 체포할 권한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혀를 찼다.
“단순히 떠들어 대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이를 드러내고 날 물어뜯을 준비 중이거든요. 조정의 체면 따위 상관없이 말이죠. 목 주부에게 조사를 맡긴 건, 내가 직접 조사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니 내 문제를 대리사나 형부가 맡을 것입니다.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도 덮으라 하셔도 안 받아들일 테고. 그나저나 1처 밖에 있는 저 담벼락이 무슨 용도라고 했었지요?”
목철은 겉으로 표는 안 냈지만 너무나 기뻤다. 감찰원 소속으로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평소보다 백배는 활기찬 모습으로 명령을 받들고 사남 백작가를 나섰다. 그리고 밀정들을 파견해 도찰원의 어사들이 저지른 불법 행위를 비밀리에 조사하기 시작했다.
256화
둘째 날, 범한은 집에서 내기 돈 없이 마작을 하고 하루 종일 내리는 비나 감상하며 어사들이 자신을 탄핵한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범한의 입을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임완아와 범약약이 더 걱정을 했다. 언관들이 내는 목소리의 중요성을 이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사가 범한을 탄핵했다는 소식이 경도 전체에 퍼져 나갔을 즈음, 중서(中書)에서도 탄핵 상주문을 베껴 그것을 사남 백작가로 보냈다. 그러자 범한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가짜로 경악하고 화를 내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밤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숙면을 취했다.
셋째 날, 범한은 이른 아침부터 저택을 나섰다. 규율에 따르면 어사에게 탄핵을 당한 관원은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을 변론하는 상소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 규율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신풍관으로 가, 식구들과 함께 그 맛있다는 접당 왕만두 공략에 나섰다.
이 일은 경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유명 인사가 어떤 반격을 펼칠지 그 누구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어사들이 단체로 탄핵 상주문을 올렸다는 건 누가 봐도 당사자를 갈가리 물어뜯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을 벌였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어사들은 이미 이번 달에 1처에 드나든 관원들에 대해 모조리 조사도 마친 상태였고 말이다.
그런데 범한 제사는 너무나도 뜬금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사대를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왕만두 공략에 나서다니.
넷째 날, 며칠 동안 쉼 없이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범한은 식구들을 데리고 교외로 국화 꽃놀이를 갔다. 그리고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린 작은 국화 한 송이를 손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 * *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중서에서는 황제 폐하의 뜻을 보내야 했다. 조사를 할 건지, 물어볼 건지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요 1년 동안 너무 잘나간 범한 대인을 일깨워 주든 아니면 쓸데없는 짓을 한 도찰원 어사들을 꾸짖든 황제는 어느 쪽이든 태도를 취해야 했다.
조회 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이부 상서 안행서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한데 황제는 콧방귀만 뀌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이렇듯 난처한 교착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러자 엄숙했던 도찰원 어사들의 얼굴에서도 점점 난처한 기색이 떠오르더니 그들은 다시 한번 연명 상소를 올릴 계획을 짰다. 아울러 조정 문관 중에서 같은 해 급제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태학 학생들까지 동원할 준비를 했다.
사실 경국의 황제는 범한의 자기 변론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의 변론서를 가지고 대충 아무렇게나 얼버무려 일을 흐지부지 처리할 생각이었다. 태평성대를 구가한 모든 제왕이 자유자재로 썼던 ‘두루 뭉실한 일 처리’ 능력을 발휘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범한은 줄곧 모르쇠로 일관하며 자신은 떳떳하다는 듯 사방으로 놀러나 다녔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책을 황제에게 떠넘겨 버린 채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직접 물어뜯으시려던 거 아니었나요? 황제씩이나 되시니 어쨌든 알아서 장애물을 제거하고 나를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겨우 이까짓 일로 체면까지 잃을 각오를 하셨다면 나중에 신양 쪽에서 움직였을 때도 장 공주를 처리해 주시고요. 그리고 그때 가서 저를 황태후 마마께 던져 놓고 찜 쪄 드시게 하면 안 됩니다!’
만약 황제의 총애를 받는 평범한 신하나 문신이었다면 범한처럼 사악한 생각을 하거나 삐딱선을 타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의 마음은 측정하기 어렵고 천자의 위엄은 수시로 변하니 말이다. 황제의 총애만 믿고 오만방자하게 우쭐대다가는 아주 사소한 실수가 훗날 문제가 되어 변명할 기회도 없이 참수당하는 일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이 평범한 신하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편 황제는 그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어서 상황이 좀 재미있어진 터였다. 이에 범한은 황제 폐하가 자신을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 * *
어사들이 집단 상주문을 올린 지 7일째 되는 날, 범한이 마차를 타고 황궁 문 앞에 나타났다. 범한이 마차에서 내리자 계년조 소속 관원들이 범한을 에워쌌다. 흑회색 관복, 싸늘한 표정, 곧게 편 상체, 이것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궁 문 앞에 몰려 있던 관원들도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딱 봐도 최근에 자신들이 식후 차를 마시면서 간식거리로 자주 언급했던 그 인물이었다. 다른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밀정들에게 사람들에게 노출된 곳에서 자신을 보호하도록 한 것만 봐도 범한은 감찰원의 일인자였다.
오늘은 조회가 있는 날로, 황제가 범한에게 입궁해 옆에서 회의 내용을 듣고 있으라는 특명을 내렸다. 관원들은 모두 오늘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알고 있던 터라 흥분한 상태였다. 일부 사남 백작가와 교분이 있던 문관들은 범한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는 날이 추워졌다며 황궁의 문 옆쪽으로 몸을 피했다.
광장 어도(御道)를 중심으로 양측에는 대여섯의 진홍색 관복의 관원들과 회흑색 관복을 입은 감찰원 관원들이 서로 대치하며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상대 진영을 뚫고 나가 저 멀리 성곽만 향할 뿐이어서 서로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진홍색 관복을 입은 관원들은 범한 탄핵 상소를 낸 도찰원 어사들이었다. 범한이 그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어째 하나같이 돼지처럼 생겼을꼬. 그런데도 청렴한 관리라고?”
등자월이 옆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1처에서 며칠 동안 조사를 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대인, 저들 도찰원 어사들은 대부분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이라 명성을 중시합니다. 기댈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 거죠. 그래서 집 문지기가 떡 선물을 받는 것조차 조심해 무언가를 찾아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관리는 탐욕스럽지 않다는데 천하는 어렵다니!”
등자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사 대인의 ‘묘한 말’이 조금 황당하게 들려서였다.
도찰원 어사들은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싸늘한 눈빛으로 범한을 보고 있었다. 범한도 저들이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관원들이 모두 탐욕스럽지 않다면 나 같은 감찰원 제사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범한은 문득 수하 몇을 보내 저들을 암살해 버리고 이번 일을 끝맺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저들은 언관이라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정말로 그렇게 했다가는 아무리 아버지인 황제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담주로 내려보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청렴한 관리는 세상에서 가장 찾아내기 힘든 인재였다. 범한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1처의 조사 능력도 믿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보기에도 여기에 있는 어사들은 진정으로 청렴한 관리들이었다. 그런데 그 청렴한 관리들이 적이 되어 떼로 몰려오다니. 이는 범한이 보기에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어느새 젊고 아름다운 장모님께 탄복하고 있었다.
‘부패하지 않은 깨끗한 관리들까지 동원하시다니 진정한 능력자군.’
범한이 남몰래 감탄하는 동안 저들 도찰원 어사들도 제사 대인을 보며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는 중이었다.
한 달여 동안 범한이 보여 준 행동은 시선이라는 얼굴 뒤에 숨겨 둔 그의 진면목이었다. 바로 탐관의 모습을, 그것도 온갖 수완을 동원해 이익을 도모하는 권신의 싹을 말이다. 이와 관련해 어사들은 충분히 증거를 확보했다고 생각했지만 황제 폐하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어사들은 황제 폐하께서 범한을 편애하느라 자신들에게 더 심한 중벌을 내릴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는 영명한 군주였고 또한 탄핵은 어사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사란 모름지기 도와 의를 굳건히 짊어지고 황제에게 간언해야 하는 법. 그러니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저 백골이 되어도 한 점 오점이 없기만을 바랄 뿐.
그런데 도찰원은 요 며칠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우선, 조정 관료들과 함께 연명 상주문을 올리려던 게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어느 부에 가든 관원들은 그들의 의견을 예절 바르게 경청해 주기는 했지만 연명 상소에는 어떻게든 참여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민간의 문인들과 여론을 선동하는 데 실패했다. 왕년에 저잣거리에서 조정을 비판하던 인재들도 그들이 범한을 탄핵하려 한다고 하자 고개를 내저으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언관들은 태학에도 찾아갔었다. 한데 태학에 있는 젊은이들의 태도 때문에 그들은 울화가 치밀고 말았다. 태학으로 찾아가 학생들을 선동하던 어사들은 오히려 쫓겨나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범한은 시선, 장묵한 대가가 지목한 후계자, 호부 상서 가문의 공자, 젊은 문인들의 마음속 우상, 무수한 규방 소녀들의 꿈에 그리는 낭군이었다. 그런데 겨우 그깟 푼돈이나 탐했다고? 태학 학생들은 어사의 말을 아예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데 13,400냥이 고작 푼돈이라고?”
어쩌면 도찰원 어사들이 가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도 태학 학생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었을 수도 있다.
갑자기 새벽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황궁 문밖에 있던 관리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구름이 새벽 햇빛을 내몰며 몰려오자 모두 동굴처럼 생긴 황궁 문 입구 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금군 호위병들과 소황문(小黃門)이라 불리는 하위 태감들은 나이 많은 고관 대인들에게 비를 맞도록 할 수 없어 입구 쪽으로 몰려드는 그들을 막지 않았다.
가을 경도는 낯빛을 수시로 바꾸었다. 바람이 불더니 이내 비가 오고, 가을비가 소슬히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황궁 바닥에 깔아 둔 푸른 바닥 돌이 빗물에 흠뻑 젖어 짙은 검은색이 되었다.
그런데도 범한과 도찰원 어사 일행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빗물이 몸 위로 쏟아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편을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 무어라 했다.
“뢰 어사, 그만 비를 피하시지요.”
범한이 부른 이는 도찰원 좌도어사로 정3품 고관인 뢰명성이었다. 뢰명성 어사가 범한에게 잠시 싸늘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
“범 대인, 이리 비를 맞고 있다고 자기 몸에 있던 죄악이 모두 씻겨 내려갈 것 같습니까?”
뢰명성 어사가 두 손을 모아 가슴팍까지 올리고 인사하며 말했다.
“오늘 황제 폐하를 뵙게 된 이상 본관은 범한 대인을 끝까지 탄핵할 생각입니다.”
범한의 눈썹이 살짝 씰룩였다. 음험한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히다니. 범한이 웃으며 똑같이 두 손을 모아 가슴팍까지 올리고 인사하며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만약 황족 측근과 관련한 법률이 있다면 과연 뢰 대인이 지금처럼 장렬한 기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좌도어사는 화가 나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로 소맷자락을 한번 털어 내고는 황궁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있던 나머지 어사들은 여전히 빗속에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다리와 몸을 꼿꼿이 편 자세로 있을 뿐이었다.
“황궁 문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연기를 하다니.”
범한은 저들이 가련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 한숨을 내쉬었다.
“살면서 겨우 이름자나 세상에 알리고자 저러다니······ 조정에서 왜 그대들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빗속에 꿇어앉아 있던 어사들이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범한을 노려보았다. 범한은 못 본 척하고 등 쪽에 달린 비 모자를 머리에 쓰고는 엷게 웃었다.
“본관은 원래 검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씻어도 그냥 검을 뿐이죠. 여러 대인께서는 좀 전까지만 해도 붉은색이었는데 어째 비를 맞고 나더니만 몽땅 검어졌군요.”
빗물이 범한이 걸친 감찰원 관복 위로 떨어졌다. 빗물은 매끄러운 연의 속으로 침투하지 못했고 검은색은 아까와 똑같은 음울한 검은색이었다.
한편 어사들의 관복은 빗물에 젖자 점점 그 색이 짙어져 거의 검은색에 가깝게 변해 버렸다.
어사들이 고개를 숙여 자신들의 관복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빗물이 자신들의 얼굴을 때리도록 내버려 둘 뿐 고집스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257화
조정에서의 대사 논의가 끝났다. 황제 폐하가 좌도어사 뢰명성과 감찰원 제사 범한 두 사람을 이제야 봤다는 듯 미간에 분노를 담아 찡그렸다. 그리고 태감을 시켜 두 사람을 앞으로 나오도록 한 후 싸늘하게 말했다.
“조정 대신들 앞에서 말해 보거라!”
좌도어사가 의관을 정제하고는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신이 할 이야기는 모두 상주문에 적어 놓았사옵니다. 황제 폐하, 부디 본 안건을 조사하시어 조정을 정화하시고 백성들의 원망을 잠재우소서!”
황제가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았다.
“왜 그대는 아직까지도 변론하는 상소를 보내지 않은 것이냐?”
그러자 범한이 공손하게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굽혀 절하고는 말했다.
“소신, 변론서를 쓰지 않았나이다.”
황제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어찌 그리도 오만방자한 것이냐! 도찰원 어사가 여러 관료를 탄핵했지만 너처럼 오만불손한 경우는 처음이구나! 대대손손 충신 집안에 최근 1년 동안 공도 세우고 세간에 이름도 날렸다고 해서 짐이 그대를 봐줄 줄 알았더냐?!”
범한은 자신이 그동안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아 황제가 화를 낸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는 모두 자신이 문제 해결을 황제에게 미뤄 발생한 일이기에 죄를 청하며 말했다.
“소신, 변론서를 올려야 하는 줄 모르고 있었나이다. 이제야 소신의 죄를 알겠나이다.”
그러자 황제가 살짝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가 막 관료가 되었을 때 범건은 공무가 바쁘고, 진평평 그 늙은이도 제대로 교육을 해주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했구나. 오늘 짐이 그대를 입궁시킨 건 그대가 조정 대신들에게 어찌 변론하는지 들어 보기 위함이다.”
범한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 한참 후 천천히 입을 뗐다.
“소신······ 실로 어찌 변론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나이다.”
그러자 황제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지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똑똑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스스로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냐?”
범한이 얼른 고개를 들더니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 소신, 잘못이 없사옵니다! 소신이 스스로를 변론하지 않는 건 도찰원의 탄핵 이유가 너무나도 황당해서이옵니다. 저는 그 연유를 모르옵니다. 더욱이 법을 어기고 누군가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하는데 소신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그러니 애당초 변론을 할 필요도 없었나이다.”
대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범한이 자기 변론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티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부 상서 안행서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무언가를 말하려고 눈을 들었다. 그런데 자기 앞쪽에 있는 몇몇 제일 높은 품계의 대신들이 아무 소리도 못 하는 걸 보고는 분명 간단히 넘어갈 일은 아닌 듯했다.
대전 내로 바람이 불어 들어와 추밀원 정사인 진(秦) 장군의 새하얀 수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지만 흡사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행서가 시선을 옆쪽 아래 방향으로 돌려 보았다. 진로 장군의 아들이자 추밀원 참사관 진항도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초봄에 범한에게 북제로 가라 제안했던 용기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군 측에서 침묵하는 건 분명 의리 때문이었다. 이는 모두 감찰원과 군 측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이기도 했으며 또한 군 측이 무엇이든 말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경도 관료 사회에 끼어드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삼가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문관의 수장인 서무 대학사도 공손한 표정을 유지한 채 앞에서 무슨 말들이 오가는지 못 들은 척하고 있다니. 더군다나 상서들도 돌부처라도 된 듯 그냥 가만히 있고.
안행서가 곰곰이 이리저리 따져 보니 신양에 있는 장 공주마마를 위해 굳이 범한이라는 말썽꾼에게 밉보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에 그 역시 입을 꾹 닫아 버리고 말았다.
* * *
범한을 훈계하는 대신은 없었다. 황제 폐하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다 눈동자에 싸늘함이 스치더니 범한을 주시했다.
“그대가 자기 변론을 하지 않겠다 하니 뢰 경의 말이나 들어 보도록 하지!”
좌도어사 뢰명성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상소문에 적은 범한이 저지른 불법 사항을 모조리 읽어 내려갔다. 범한은 속으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좌도어사 이놈아, 성이 뢰(賴: 생떼 쓰다)씨라고 성씨대로 행동하는 거냐. 왜 하필 나한테 떠넘기며 생떼를 쓰는 거냐고. 1처에 있는 놈들이 지난달에 받아먹은 뇌물이 왜 나와 관련이 있는 거냐고!’
조회에 참석한 대신들은 어느새 논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은 뢰명성과 범한의 눈빛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도찰원이 탄핵한 사항 중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건 검소사에 있는 대진이란 조카 때문에 대 내관이 감찰원 제사에게 은전을 준 내용이었다. 여러 대신은 어찌하여 황궁까지 끌어들인 것이냐며 뢰명성을 질책했다. 또 다른 의견은 범한을 우습게 봤다는 것이었다. 아주 좋은 구실거리 같은데 대 내관에게서 겨우 은자 천 냥만 받은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였다. 조회에 참석한 선배 대신들은 푼돈밖에 안 되는 그깟 은자 천 냥을 범한이 무엇 하러 받겠느냐는 입장이었다.
황궁이 연루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황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황궁 호위병에게 숙 귀비의 궁에서 대 내관을 데려오라고 했다. 대질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대신들은 이런 조사 방법은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도 황제 폐하가 옛 폐습에 얽매여 있는 인물이 아님을 잘 아는 터. 그리고 이 사건이 어떻게 결말날지 궁금했기에 모두 답답해도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대 내관이 대전에 나타났다. 그는 오늘 조회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고 있었다. 이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부들부들 떨며 답답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은표를 건넨 사람은 의 귀빈인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본 의 귀빈은 성격이 쾌활하기는 해도 입은 매우 무서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범한과는 한 다리 건너 한 집안사람이라 할 수 있으니 어찌 되었든 자신에 대해 말할 리 없었다. 그런데 이 일이 어떻게 도찰원에게까지 전해진 건지······.
대 내관은 대전에 들자마자 먼저 “황제 폐하 만세!”를, 다음으로 “억울합니다!”를 외쳤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쏟으며 황제를 향해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항변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늘 소인들에게 조정 대신과 내통하는 걸 엄히 금하셨나이다. 소인, 겁이 많아 그 말씀을 감히 어길 수조차 없나이다. 범한 대인의 경우, 이름만 들어 보았사옵니다. 왜냐하면······.”
대 내관이 불쌍한 표정으로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를 바라보며 애원했다.
“천하 사람들 모두 범 시선의 이름자를 알기 때문이옵니다. 소인, 비록 불구이오나 경국을 위해 불구가 된 자이옵니다. 범한 대인이 북제 사절단으로 갔을 때 황제 폐하의 체면을 세운 일로 소인도 기뻐하였나이다. 하여 평소 대화를 나누다가 범 대인의 이름을 자주 거명하였지요. 하오나 소인, 지금껏 범한 대인을 본 적은 없나이다. 그러니 어찌 뇌물을 건넬 수 있었겠나이까?!”
그러자 좌도어사 뢰명성이 싸늘하게 물었다.
“대 내관, 정말로 범한 제사를 본 적 없으시오?”
대 내관은 꿇고 있던 무릎이 시큰거려 속으로 참견쟁이 어사를 향해 수도 없이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질문이 들어오자 갑자기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다.
“생각났습니다. 작년에 사남 백작가에 가서 성지를 전달했사옵니다. 그때 범한 대인을 한 번 보았습니다. 들어갔다가 바로 나오기는 했지만, 그 역시 본 것으로 친다면······ 그때 한 번 보았나이다.”
대 내관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하늘에 대고 맹세했다.
“황제 폐하! 소인, 범한 대인은 딱 한 번 보았을 뿐이옵니다. 만약 그 외에도 만난 적이 있다면 저는 창자가 찢기고 배가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다음 생에도 내시가 될 것이옵니다!”
황제는 그가 너무 잔인한 표현을 써가며 맹세하자 꾸짖었다.
“그 무슨 헛소리냐!”
그러자 뢰 어사가 살짝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뗐다.
“뇌물이란 것은 꼭 쌍방이 만나야만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대 내관, 본관이 묻겠습니다. 먼 조카 중에 대진이란 자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가 등시구 검소사에서 직책이 낮은 관리로 일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대 내관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뢰명성 어사가 정색하며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 폐하, 대진이란 자는 탐······.”
그는 감찰원 1처가 조사한 내용을 모두 말했다. 그런 후 범한을 주시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범한 제사, 대진이란 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겠습니까?”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대답했다.
“이미 끝난 안건입니다. 대진이란 하급 관원은 뇌물로 받은 돈을 토해 낸 후 이미 면직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본관은 모릅니다.”
뢰명성 어사가 냉랭하게 말했다.
“모른다니, 좋은 구실이군요. 분명 대 내관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사로이 법과 권한을 이용해 놓고 말이지요. 대진은 검소사에서 6년 동안 일했습니다. 그가 황실의 은전을 얼마나 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사 대인의 모르겠다는 한마디와 더불어 면직이라. 그리고 은전 몇 푼에 그를 풀어 주었다니, 대체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오묘한 수가 담겨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범한이 침착하고 조리 있게 대응했다.
“감찰원 조사 내용에 따르면 대진은 6년 동안 모두 은전 472냥을 부정하게 벌어들였습니다. 경국 법률 제3칙 규정에는 액수가 500냥 이하일 경우, 면직하고 은전을 회수하며 벌금을 물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형부로 이송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대진을 파면하고 그에게 벌금 천 냥을 물렸습니다. 본관의 처결 중 뢰 어사가 타당치 않다 여기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오면 다른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대진 사건은 감찰원이 조사를 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부정한 돈을 얼마나 벌어들였는지는 아직까지는 범한이 직접 한 말은 아니었다.
뢰명성 어사는 조급해졌지만 도리어 웃으며 반박했다.
“472냥이라고요? 범한 제사가 보기에 조정 백관들에게는 눈이 없는 것 같습니까?”
상황을 심각하게 몰아가는 말이었으나 범한은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
“물론 대진은 과일과 채소류에도 손을 대기는 했습니다. 그 모든 걸 은으로 환산해 액수를 매겼어야 하지요. 이리 말하고 나니 감찰원 일 처리가 꼼꼼치 못했습니다. 뢰명성 어사의 지적이 일리가 있습니다. 본관, 그 점을 지적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범한이 억지로 말을 꾸며 대자 뢰명성 어사가 크게 화를 내며 그를 꾸짖었다.
“어찌 그럴 수 있소! 대진이란 자는 적게 잡아도 6년 동안 4천 냥에 달하는 은전을 갈취했소이다! 백성들의 원망이 들끓는데 범한 제사는 그자를 감싸고만 돌다니,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거요!”
정적이 흐르는 대전 안, 노기에 찬 좌도어사의 추궁만 울려 퍼졌다.
범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좌도어사를 잠시 보더니 조심스럽게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범한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드리워진 싸늘함에 순간 움찔한 뢰명성 어사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범한이 뢰명성의 눈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요? 백성들의 원망이 들끓는다고요?”
범한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시고는 비꼬기 시작했다.
“뢰명성 어사, 부디 가르쳐 주시지요. 도찰원 어사이시니 소문에 따라 일을 처리한 점은 책임을 지셔야겠지요. 조금 전 말할 때마다 대진이 그리 많은 은전을 탐했고 민심이 들끓는다고 했는데······ 그 6년 동안 도찰원은 왜 상주문에 그 일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까? 설마 대인이야말로 그의 죄를 은닉해 주려던 관원 아니었습니까? 백성들의 원망이 들끓는다 했는데 왜 경도 부윤께 청하여 이 안건을 조사하라 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뢰명성은 순간 불쑥 화를 내고 말았고 이에 대청에 있던 중신들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범한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본관이 1처를 맡은 지 불과 한 달여. 그리고 그사이 대진의 부정을 조사한 것입니다. 한데 뢰명성 어사는 6년 동안 대진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겁니까! 감찰원이 조사를 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도찰원 어사 대인들은 무려 6년 동안이나 입을 꾹 닫고 있었잖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와서 감찰원이 법을 어기고 뇌물을 받았다고 말하다니요!”
범한이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그런 후 몸을 돌려 노기를 잔뜩 담아 뢰명성 어사에게 힐문했다.
“하나 나는 대인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군요.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 것입니까?”
258화
몰아치며 질문이 쏟아지자 좌도어사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앞서 잘못 말한 몇 가지가 도리어 범한에게 약점으로 잡혀 버리다니. 대진의 뇌물 사건을 도찰원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인정한다면 범한이 강변한 은전 4백여 냥이란 액수를 가지고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없게 된다.
앞서 화난 상태에서 대진이 아주 많은 은전을 부정하게 취득했고 백성들의 원망이 들끓는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범한에게 되치기할 빌미를 제공해 주고 만 셈이었다. 도찰원 어사로서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왜 6년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거냐고 말이다.
이미 감찰원 조사가 이루어졌는데도 기어코 조사한 당사자를 탄핵했다가 도리어 당사자인 범한에게 역으로 지적당한 것이다. 이로써 도찰원이 감찰원을 눈에 핏발을 세우고 보고 있던 것이 되었고 결국 거짓 죄명을 뒤집어씌워 무고하려 한다는 유력한 증거만 만들어 준 꼴이었다.
조회에 참석한 대신들이 뢰명성 어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범한은 탄복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늙은 여우들은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범한이 함정을 파고 뢰명성이 그 함정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범한의 실력과 정확성에 늙은 여우들도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
‘이게 어찌 벼슬길에 오른 지 1년밖에 안 되는 젊은이의 실력이란 말인가!’
모두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 범한이란 인물은 시도 잘 짓고 싸움도 잘하던데, 거기에다가 벼슬아치 노릇까지도 잘하다니! 범건, 그 돈방석에 앉아 있는 인간은 어쩜 이리도 운이 좋아 이다지도 잘난 서자를 낳은 건지!’
좌도어사 뢰명성이 분해 입술을 떨었다. 그러다 양 소맷자락을 털고 황제를 향해 꿇어앉아 격앙된 감정과 갈라진 목소리로 고했다.
“소신, 직무 수행에 부족함이 있었나이다. 황제 폐하, 부디 엄벌에 처해 주시옵소서. 하오나 범한 제사가 법을 어긴 일에 대해 가벼이 여기시어 풀어 주시면 절대 아니 되옵니다. 대리사에게 상세히 조사하도록 하시면 분명 무언가가 나올 것이옵니다!”
황제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은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범한이 능력 발휘를 하자 눈동자에 언뜻 기쁨이 스치기도 했지만 이내 귀찮다는 듯 말해 버렸다.
“이제 되었으니 그만하게. 그대는 당당한 좌도어사니라. 그러니 고작 채소나 다루는 하급 관원이 저지른 부정을 모르는 건 정상이지. 하나 이후 조정에서 다시는 과장해서 말하지 말거라. 백성들의 원망 같은 것 말이다. 짐은 북위나 북제의 황제가 아니니라. 경국 역시 그러한 나라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청렴하다는 명성을 얻고자 한 일이라면 다시는 그러지 말도록 하라.”
청렴하다는 명성을 얻고자 그랬다고? 뢰명성은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그런 말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이를 악물고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머리를 내리찧는 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머지않아 좌도어사 뢰명성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황제가 약간 혐오스럽다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손을 내저어 호위병에게 뢰명성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범한을 잠시 훑어본 후 말했다.
“범한 제사, 그대는 감찰원에 있으니 법률이 정한 특권을 많이 지니고 있네. 그러니 향후 일을 할 때는 더욱 조심하고 절대 짐의 체면을 깎지 말도록 하라.”
일을 두루뭉술하게 마무리 지을 기회가 어렵사리 찾아왔으니 영명한 황제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이에 범한이 무언가를 주청하려는 행동을 취하자 황제는 손을 내저어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러자 황제의 뜻을 알아챈 태감이 바로 큰 소리로 조회 해산을 알렸다.
범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과 관련해 황제 폐하께서 너무 제 편만 들어 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어서였다.
범한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대신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황제 폐하가 사남 백작가 녀석을 두둔하고 계신다는 걸 제대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그들은 태극궁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에 속속 범한에게 찾아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모두 도찰원이 적이라도 된 양 어사들을 인정사정없이 깎아내렸다.
그때마다 범한은 쓴웃음으로 응대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노인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광장 쪽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얼핏 보았다. 순간 마음이 짠해진 범한은 서둘러 뒤쫓아 가 아버지를 부축해 드렸다. 뒤쪽에서 그런 부자의 모습을 보고 있던 대신들은 연달아 감탄사를 내뱉었다. 부자가 함께 벼슬을 하고 황궁 안에서 자애로운 아버지와 효도하는 아들이 빚어낸 광경이 펼쳐지니 그야말로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상서 범건은 갑자기 팔이 조여 와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아들이 자신을 부축하고 있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지야, 안지야. 너는 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려 들지 않는 것이냐?”
범한으로서는 억울한 말이었다. 신양 쪽에서 계속 몰래 주시하고 있는 줄은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다.
황궁 문 앞에 이르렀을 무렵, 어린 태감 하나가 뛰어와 슬그머니 황제 폐하의 말을 전했다. 그러고는 범한을 이끌고 서둘러 뒤쪽에 있는 궁으로 향했다.
동료 하나가 뒤쪽에서 나타나자 범건 상서는 곧장 눈빛을 무미건조하게 바꾸고는 엷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신하들과 함께 황궁을 나섰다.
오늘 내리던 비는 일찌감치 멈춘 상태였다. 하지만 황궁 앞 공터에는 여전히 빗물이 흥건했다. 그런데도 도찰원 어사들은 빗물에 흠뻑 젖은 채로 여태 축축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있었다. 조회를 마친 좌도어사가 분노한 표정으로 나오더니 그들 앞으로 가 똑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관모를 벗어 왼쪽 가슴 쪽에 가져다 댔다.
이 모습을 본 대신들은 도찰원이 아직 관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서무 대학사가 다가가 몇 마디 건네며 달래 보았지만 소용이 없자 그도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여러 대인들이 귀가하기 위해 서둘러 마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일이 더 커질 걸 감지하고 가급적이면 저들을 피해 안전을 도모하려 한 것이었다.
도찰원 어사들 곁에서 그나마 잠시라도 더 있어 준 이는 범건 상서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위 무사들에게 우산을 가져오도록 시킨 후 옆에서 어사들을 지켜 주라고 했다. 왜냐하면 잠시 후 다시 비가 내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 *
범한은 종종걸음으로 어린 태감을 따라 황궁 담벼락 몇 개를 지났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서방 바깥쪽이었다. 어린 태감은 어느새 지쳤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진기를 살짝만 운기해 얼굴이 약간 상기되도록 만들었다. 그러고는 살짝 불안한 마음으로 황제의 어서방에 들어가 어린 태감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고, 이에 조심스레 황제가 앉는 긴 의자 옆에 가서 섰다.
잠시 후, 천으로 만든 가림막이 살며시 떨리더니 미복으로 갈아입은 황제가 걸어 들어왔다. 침착한 표정이지만 황제는 눈동자에서 살짝 동요의 기미가 스치는 범한을 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과도한 예는 생략하라는 뜻이었다.
이에 범한은 몽둥이처럼 빳빳하게 서 있기만 할 뿐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았다. 그런 후 어린 태감이 가져온 북 모양의 둥그런 도자기 의자에 단정한 자세로 앉았다.
오늘 어서방은 그날보다는 많이 고요했다. 황제와 범한 두 사람만 남아 있다 보니 무언가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다. 범한은 표정은 평온했지만 마음만은 살짝 불안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추측은 추측일 뿐이니까. 비록 진평평 원장의 말과 이번 생에서 겪은 수많은 일을 통해 그 추측이 옳다는 게 증명되기는 했어도 말이다. 그런데 황제가 잠시 후 그 추측에 대해 밝혀 준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범한은 생각했다.
범한에게 황제가 인자한 아버지의 가면을 쓸 거란 느낌이 점점 강해져 가던 터였다. 한데 이어지는 몇 마디 말은 범한의 예상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범한아,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돈을 탐하는 것이냐?”
황제 폐하가 싸늘하게 바라보며 직선적으로 물었다.
식은땀 한 방울이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앞서 범한도 자신이 자초한 부분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더욱이 새어머니를 통해 은표를 받은 일은 황제 폐하를 절대 속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하게 답했다.
“황제 폐하. 소신, 감찰원 1처를 장악하기 위해 그 은표가 필요했나이다.”
“뭐라?”
황제는 범한이 이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관원들을 제대로 감찰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관료 사회에 녹아들어야 했사옵니다. 과거 감찰원 1처가 물, 쇠붙이, 기름, 소금을 사용하는 방식을 답습하면, 방대한 밀정 체계에 기댄 채 굴러갈 수는 있사옵니다. 하오나 경도 관원을 제대로 감찰하는 데 있어서는 늘 수박 겉핥기 정도의 역량밖에 발휘할 수 없나이다. 그러니 경도 관료 체계에서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거래를 파악하는 데에서는 항상 정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잠깐 소심하게 해명하듯 말했다.
“즉 관원을 감찰하기 위해 저 자신이 진짜 관원이 되어야 했사옵니다.”
이어 범한은 쓴웃음을 짓고는 계속 말을 해나갔다.
“황제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소신, 오랫동안 담주에 살았나이다.”
이 말을 할 때 범한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황제가 미세한 반응을 보인 건 알 수 있었다.
“경도로 들어온 후 너무나도 많은 변화가 있었사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문학 시종 대신이던 제가 이제는 감찰원이라는 무거운 권력을 이어받게 되니 마음이 불안하였지요. 이에 저 자신과 다른 관원들 사이에 막이 하나 있는 걸 너무 의식하다 보니 조정 대신들 사이에 녹아들기 매우 어려웠나이다.”
범한은 더 말하려 했지만 황제는 이미 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는 듯 손을 내저어 말을 끊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진정으로 새하얀 학이라면 먹칠을 해놓는다 해도 검정 학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수단은 실로 유치한 것이니라. 나라를 위해 충심을 바친다면 누가 너를 못살게 굴겠느냐? 주격의 전철을 잊지 말거라. 그놈은 원래 경도 관료 사회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경도 관리가 되자 제 몸조차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것이야.”
범한은 황제가 자신에게 거듭 고립된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자 살짝 반감이 일었다. 그래도 별다른 이상한 기색 없이 그냥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 오늘 조회에서 신을 못살게 군 사람이······.”
옆에 서 있던 태감은 순간 당황했다. 범한 대인의 신분으로 꺼낼 말도 아니거니와 황제의 총애에 오만방자해진 사람처럼 비칠 수 있어서였다. 황제 폐하가 아무리 이 젊은 신하를 좋아한다 해도 듣고서 화를 내실 수도 있었다. 태자마마도 황제 폐하 앞에서는 살짝 두려움 섞인 공경을 표한다. 그러니 누구도 감히 범한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태감의 예상을 깨고 황제는 미소 지은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짐은 너를 위해 나서 주고 싶었느니라. 한데 이 일은 너와 네 집안 어른과 관련된 일이지 않더냐. 그러니 짐도 더 관여하지 않기로 한 것이란다.”
순간 범한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황제 폐하께서 도찰원이 올린 상소가 신양 쪽과 관련 있음을 다 알고 계셨다니. 그런데 왜 계속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못 하도록 막고 계시는 걸까. 이렇게 씁쓸한 생각을 하며 더 이상 황제 앞에서 가짜 눈물을 짜내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황제가 느닷없이 자신의 미간을 문지르며 그윽하게 말했다.
“너에게 보여 줄 그림이 있단다.”
범한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진평평에게 들은 어머니의 초상화가 황궁에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순간 어서방 문이 열리고 범한이 잘 아는 후 내관이 잔뜩 초조한 얼굴로 다가와 황제에게 작게 몇 마디 건넸다. 청력이 남들보다 뛰어난 범한은 모든 걸 똑똑히 듣고는 저도 모르게 경악하고 말았다. 도찰원 어사들이 이번에는 너무 큰 것을 건 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범한을 잠깐 바라보며 손을 내젓고 말했다.
“황궁 앞에 꿇어앉아 관모를 벗었다고? 짐의 어리석음을 간하다니! 그렇다면 짐의 어리석음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보여 주어야겠구나. 짐의 말을 전하거라. 도찰원 어사는 조정 신하로서 기강을 어지럽히고, 감찰원을 모함했으며, 정사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하나 후회는커녕 명성을 좇아 망령된 행동을 하였으니 곤장 30대에 처한다!”
생전 처음 본 천자의 화난 모습에 범한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곤장 30대라니 죽지 않으면 반신불수가 될 터인데.
사실 이 상황은 단순히 어사들의 운이 나쁜 거였다. 경국의 황제 폐하가 준비해 놓은 거사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찰나, 저들이 그 감정선을 탁 끊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용서받을 수 있을까.
259화
신화문 밖, 옥수강 강가에 있던 가마가 들어 올려지기 직전이었다. 어사들은 강제로 관복이 벗겨지고 바닥에 엎어져 곤장을 맞았다. 곤장이 묵직하게 떨어졌다가 천천히 올라오기를 반복하고, 그때마다 핏물이 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따라 올라갔다. 그러다 그 핏물이 빗물과 만나니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문관들 일부가 헐레벌떡 와보았다. 처참한 현장을 본 이들은 급히 입궁해 황제에게 간언했다. 그리고 황궁 문밖으로 나와 형 집행 장면을 지켜보도록 명받은 범한을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일은 도찰원 어사가 먼저 일으킨 일이기는 하나, 황제 폐하께서 수년간 쓰지 않으셨던 곤장 형을 범한 때문에 동원하시다니. 그러니 그들에게는 황제 폐하에게 범한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범한은 후 내관 옆에 서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들 좌도어사에게는 동정심이 조금도 일지 않았지만 끔찍해서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관, 수하들에게 조금 살살 하라 소리쳐 주시오.”
후 내관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했다.
“범 대인께서는 마음씨가 착하시군요. 대인께서 미리 말씀하셨는데 소인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나이까. 이미 잘 말해 놓았으니 저리 처참하게 때리기는 해도 근골은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범한이 아래쪽을 훑어보았다. 후 내관의 양 발끝이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었다. 이는 ‘살살 때려라’라는 의미의 암호였다. 이에 범한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는 관여하지 않았다.
두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좌도어사가 있었다. 황제가 체면만은 살려 준 그였지만 새파랗게 질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곤장을 맞지 않았지만 부하들에게 떨어지는 곤장 한 대 한 대가 자기 몸 위에 내다 꽂히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뺨이라도 얻어맞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범건 상서가 남겨 놓은, 우산을 받쳐 주고 있던 호위 무사들은 일찌감치 정신이 나가 버린 좌도어사 대인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범한이 좌도어사에게 다가가 집안 호위 무사들을 물러나도록 했다. 그러고는 조금 연민의 눈빛으로 뢰명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쩌다가 이 일에 연루된 것입니까?”
범한이 속사정을 얼마나 아는지 알지 못했던 뢰명성 어사는 그냥 제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후 내관에게 잠시 곤장 집행을 멈추어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고는 황제에게 인정을 구하기 위해 홀로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봐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도발한 어사들을 풀어 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단순히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조정 백관들을 보고 있자니 필히 그리해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범한은 황궁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원망 섞인 생각을 하며 분개하고 있었다.
‘황제 아버지! 곤장 형을 가지고 나를 저 관원들에게서 완전히 떨어뜨려 놓을 생각인가 본데, 절대 그럴 수 없지! 좋은 평판을 쌓으려고 2년간 고생고생했다고. 그런데 그게 곤장 몇 대로 사라지면 내가 너무 큰 손해를 보는 거겠지?!’
어둠뿐인 마차 안, 젊은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는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내보인 인위적인 행동이었고, 남자라면 짓지 않을 살짝 수줍음을 띤 미소였다. 옅게 흩어진 속눈썹은 경묘의 벽화 속 인물처럼 자연스럽게 고풍스럽고 존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야.”
젊은이가 살짝 고뇌가 실린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많은 일들이 생각해 봐도 모르겠단 말이지. 예를 들어 그가 왜 나를 조사하려 했는지 말이야. 나는 그자가 마음에 드는데 설마 그는 몰랐던 걸까?”
그가 허리춤에 달린 향낭을 가볍게 만지며 점점 퍼져 오는 정향꽃(라일락) 향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마감해 놓은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대고 두 눈을 반쯤 감으며 말했다.
“내가 그자를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지만, 부친께서는 말 위의 생활에 익숙하신 분인데 왜 그렇게 그의 글재주를 중시하시는 걸까?”
누구도 그의 말을 이어받아 답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젊은 귀족은 그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느낌에 계속 함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지?”
“왜일까?”
그가 수줍은 미소를 서서히 거두면서 향낭에서도 손을 떼어 코끝을 두어 번 문질렀다. 손끝에 남아 있던 잔향을 모조리 코에 담아 두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이런, 안 되겠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젊은이가 한탄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옆에 놓여 있던 청포도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쭉 뻗어 포도 가지를 집어 올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포도를 집어 던졌다.
“아버님께서 그놈을 너무 좋아하셔!”
“나보다 더 좋아하시다니!”
신경질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던 그가 황궁의 태자와 신양의 고모 생각이 나자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옆에서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명을 기다리는 어사에게 말했다.
“화해하거라.”
어사 하종위는 이번 행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터라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2 황자의 눈에서 진절머리가 난다는 기색이 잠시 번뜩이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후 2 황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도찰원 어사들은 곤장을 맞아 살점이 찢기고 피를 철철 흘렸다. 그러니 이 일은 자연스레 경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소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새로 출간한 신문에서도 당시 상황을 담담하고 간단하게 묘사해 놓았다. 관 내부에서 작성한 관보에는 모든 게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었다.
이 일은 모두에게 황제 폐하가 감찰원의 권위를 다시 한번 확인해 준 게 되었다. 그리고 범한이라는 젊은이를 황제 폐하가 옹호하고 있음을 재차 강하게 천명한 것이기도 했다.
어서방에서 앉을 자리가 생겼고, 감찰원에도 직위가 있고, 어사에게 탄핵을 당하자 황제 폐하께서 곤장 형을 내려 체면까지 살려 주고. 범한, 이 휘황찬란한 황금색으로 써진 이름에 다시 짙고 두툼한 검은 테두리가 둘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범한은 대다수 관원들조차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어사들이 곤장을 맞던 날, 이 젊은 제사 대인이 어서방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도 밖으로 새어 나갔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그가 악감정을 모두 잊고 어사들을 살리기 위해 인정에 호소하며 황제 폐하에게 곤장 형을 멈추어 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도 소문으로 퍼져 나갔다. 또한 당시 형 집행을 담당했던 후 내관은 어사들을 살리기 위해 범한 제사 대인이 몰래 부탁한 것 때문에 석 대씩 덜 때렸다는 사실을 외부에 말하고 다녔다.
한편 범한은 자신이 도찰원에게 인정을 베풀었다며 자랑하고 다니기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범한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그가 이 불쌍한 어사들의 목숨을 살려 준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암암리에 범한 편에 섰던 경도 사림과 태학 학생들 역시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며 범한에 대해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경국 백성들은 감찰원이 폐하의 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리고 어쩌면 범한 시선의 휘황찬란한 명성 때문에도 줄곧 어둠 속에만 있던 이 기관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감찰원에 대해, 적어도 1처에 대한 인상이 점차 개선되어 나간 것이었다. 흑과 백 사이에는 과도기 상태란 것이 있을 수도 있구나. 그리고 정의와 사악이라는 두 진영 속에서도 각각의 매력이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회색의 침묵, 이것이 바로 감찰원이라고.
* * *
황궁에서 국화 감상을 하러 놀러 가기까지는 아직 여러 날이 남아 있었다. 범한이 고개를 반쯤 갸웃한 상태에서 자기 집 정원에 앉아 무언가를 추리해 보고 있었다. 하나는 임완아가 무엇을 수놓고 있는 것인가였고 다른 하나는 범사철, 요 망할 놈이 최근 무슨 짓을 하고 싸돌아다니는가였다. 그러다 가끔씩 자신과 매우 비슷한 2 황자가 지금도 입가에 살며시 부끄러워하는 미소를 머금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한데 2 황자 생각을 하니 기분이 상당히 불쾌했다. ‘살며시 부끄러워한다고? 천진난만하다고? 이건 내 거라고!’라고 범한은 생각했다. 한데 문득 자기보다 훨씬 존귀한 신분인 2 황자가 같은 기질을 지녔다는 게 생각나자 속에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도련님.”
등자경이 공손하게 보고했다.
“도련님의 뜻에 따라 심 낭자를 정원 쪽으로 이사시켰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최근 들어 심 낭자에게서 이상한 행동은 없었는가?”
그러자 등자경이 답했다.
“정신적으로 조금 슬프고 침울해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나 대신 말 좀 전해 줘요. 언씨 가문 댁에 가서 언 대인 부자를 식사에 초대한다고 말이죠.”
“어르신께도 알려 드려야 할까요?”
등자경이 범한을 슬쩍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당연하죠. 언약해 대인께서 함께 식사하게 된 걸 부친께서 아시면 많이 기뻐하실 겁니다.”
등자경은 그러겠노라 대답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알리고 말았다.
“그 하종위라는 어사대부가 또 왔습니다. 도련님, 오늘도 안 만나실 건가요?”
범한이 눈을 떴다.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범한은 하종위를 알고 있었다. 경도로 온 초기 일석거에서 그와 만났었다. 그 당시 경도에서도 유명한 인재였던 그는 예부 상서 곽유지의 외아들 곽보곤에게 빌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과 교류할 기회를 포기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보니 권력에 심취한 문인이라 그런 것이었다.
하종위가 왜 어사대부가 된 것인지에 대해 범한은 그 숨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요 며칠 매일 찾아오는 이유도 모두 그 귀한 주인님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홍성도 피하고 만나 주지 않자 2 황자마마는 살짝 조급증이 난 게 분명했다.
“만나 봅시다.”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찰원에서 준비 중인 일도 거의 다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상대방을 만나 자신의 태도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적어도 선전 포고는 하고 싸우는 게 되는 것이었다.
* * *
범한은 한참을 걸었는데도 아직도 정원을 벗어나지 못하자 짜증이 밀려 올라왔다. 그러다 드디어 앞채에 도달했고 문득 자신이 북제에서 돌아온 날 밤이 떠올랐다.
‘그때는 대체 얼마나 빨리 뛰었던 거지? 누이가 정말로 집을 나갈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나? 아니면 마누라가 바람이라도 났을까 봐 걱정되어서 그랬었나?’
이런 웃긴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가을로 접어든 나무 사이로 난 길이 조금은 짧아진 것만 같았다. 앞채 서재로 가보니 어사대부 하종위가 벌써 서재에 들어앉아 있었다.
범한을 발견한 하종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가슴팍까지 모으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범한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범한이 손을 내저었다.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닌데 인사가 너무 과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 봄 그날 이후로 하종위는 종종 사남 백작가를 방문했었다. 어쩌면 범씨 가문의 일원이 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눈동자에 담겨 있는 범약약을 향한 마음을 일찌감치 범한이 읽어 버렸다는 것, 그리고 비밀이 많은 그의 성격을 범한이 너무 싫어해 이상하리만치 간단히 선을 그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몇 번 방문했지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자 하종위는 곤란해하며 알아서 물러났었다. 그러니 경도에서 유명한 인재 하종위가 사남 백작가 사람들에게 낯선 사람일 리는 없었다.
하종위가 서재에 단 두 사람밖에 없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하관, 앞서 있었던 일 때문에 왔습니다.”
“앞서 있었던 일?”
범한은 한마디만 말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눈썹을 살짝 씰룩이며 흥미롭다는 듯 하종위 어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휘휘 내젓고는 상대방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하종위는 얼굴이 거무스름한 게 딱 보기에도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사람 같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경도에서 생활하고, 관료로서 반년 가까이 고생하다 보니 어느덧 진중한 분위기가 많이 풍기고, 저 잘난 줄 아는 오만한 느낌은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특히 유난히 맑은 눈동자와 딱 봐도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른 생활 사나이 같은 얼굴은 누가 봐도 친밀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범한은 그런 그의 얼굴을 경멸했다.
260화
“앞서 있었던 무슨 일요?”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한마디 더 보탰다.
“본관은 도무지 모르겠군요.”
하종위는 과연 2 황자의 유세객이었다. 그가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거무스름한 그의 얼굴에 누가 봐도 충직하고 진실한 웃음이 떠올랐다.
“앞서 있던 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소관이 말실수를 한 것입니다. 단지 2 황자마마님을 대신해 운무산에서 나온 좋은 차를 한 상자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범한은 자기 앞에 놓인 평범해 보이는 상자를 보며 깊은 침묵에 빠졌다. 자신이 이 선물을 받으면 며칠 전 그 어사들과 비기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2 황자마마가 봤을 때는 어쩌면 범한에게는 아무런 손해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황궁 앞에서 벌어진 곤장 사건과 더불어 더 크게 체면을 세우게 되는 것이니, 이번에 범한은 분쟁을 관두고 서로 편케 지내는 편을 선택해야 했다.
“하종위 대인이 말실수를 했다 하니 도리어 한 가지 사건이 생각나는군요.”
범한이 미소 지으며 하종위를 바라보았다.
하종위는 가슴이 떨렸다. 젊고 잘생긴 범한 대인, 경도에 나타나자마자 자신이 누리던 경도 최고 인재라는 영광을 순식간에 송두리째 빼앗아 간 청년. 그런데 왜 2 황자마마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는 건지.
“대인, 어떤 일인가요?”
하종위는 조금 불안했다.
범한이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며 대답해 주었다.
“본관, 봄에 경도를 떠나 북제로 갔었지요. 한데 그 몇 달 만에 돌아온 경도는 정말 많은 게 변해 있었습니다. 제 장인어른께서도 지금 강제로 퇴직하시고 여생을 보내고 계시고요.”
하종위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게 드디어 나오고 말았다.
범한이 조용조용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종위 대인은 오백안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요?”
하종위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답했다.
“이전 재상님 댁에 있던 모사이지요.”
범한이 눈썹을 잠깐 치켜올렸다 내렸다.
“하종위 대인은 과연 옛정을 잊지 않는 사람이더군요. 올봄, 대인이 과부가 된 오백안의 처와 경도로 들어왔다지요. 한데 그 미망인이 지금 어디에서 지내는지는 모르겠더군요.”
하종위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허리를 굽히며 용서를 구했다.
“범한 대인, 소생은 그때 고인이 된 곽 씨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에 과감히 오 씨를 데리고 경도로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상 어르신께서 관두신 건 소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오나 그 일은 경도 국법과 관련된 일인지라 소생은 감히 속일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종위는 범한이 자신을 봐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 자신에게는 2 황자마마와 교분이란 게 있으니 그걸 믿고 강하게 나가 보았다.
“대인! 소생, 하 아무개만 나무라시고 2 황자마마의 진심만은 부디 사양 말고 받아 주시지요.”
범한이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본관은 조정 관료이니 아무도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 이 범 아무개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개인적 원한은 항상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하종위가 후회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오늘 화해를 청하러 온 일은 이미 허사가 됐다.
‘재상 어르신이 자리에서 내려온 게 나와 관련이 있기는 해도, 경국 신하로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쓴 것뿐인데 뭐를 잘못했단 거지? 설마 당신네 장인과 사위는 그런 수단을 쓰지 않을 것 같은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종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는 이곳에서 떠나려 했다.
범한이 혐오스럽다는 듯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 신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해버렸다. 하종위에게 걸어가 그의 허리 중 잘록하게 들어간 곳을 한 대 차버렸다.
하종위는 영문도 모른 채 윽,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한데 하종위도 경도에서 유명 인물이다. 지금은 도찰원의 어사대부이고. 결국 그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 기듯이 몸을 일으키더니 범한에게 삿대질하며 한 소리 했다.
“네······ 네놈이······ 감히 날 친 거냐!”
그러자 범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가 걷어찬 것이지. 직접 여기까지 맞으러 오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의 소원을 들어준 것뿐이니라!”
그러고는 주먹으로 몇 대 더 갈겨 버렸다. 비록 하종위를 때려죽일 수는 없었지만 죽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하종위도 더 이상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순간 범한 대인이 검은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게 생각나, 아파 죽겠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쥔 채 구르고 기면서 서둘러 밖으로 도망쳤다. 한데 방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범한의 발이 공중을 가르고 그에게 날아왔다. 그리고 찻잎이 담긴 상자가 표창이 되어 그에게 날아들었다.
* * *
범한은 이제야 기분이 좀 풀렸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사람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침을 탁 뱉고는 욕을 퍼부어 주었다.
“내 장인어른을 모함해 쫓아내 놓고 감히 여기까지 와서 화해 신청을 해? 이 개 같은 놈아, 그러고도 매 맞으러 온 게 아니라고?!”
등자경이 갑자기 옆쪽에서 쓱 나타나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도련님, 이 일이 새어 나가면 어르신께서 화내실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개가 짖어서 패준 것뿐이지 않은가. 저놈 주인께 보이려고 한 짓도 아니고 말일세.”
때는 수개월 전이었다. 범한이 북제 사절단으로 가 있을 때 감찰원으로부터 재상과 관련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바로 범한의 장인어른이 재상직에서 내려오게 된 상세 과정이 적힌 정보였다. 그 당시 범한은 이미 죽은 소은의 도움 덕분에 이 사건을 더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오백안은 장 공주가 재상가에 심어 둔 모사였다. 그는 작년 여름, 임씨 가문 둘째 아들에게 북제와 손잡도록 부추겼고, 외양간 거리에서 범한을 죽이려 했다. 한데 뜻밖에도 포도나무 넝쿨 아래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 사건 때문에 산동에 있던 오백안의 아들이 재상의 문하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었다. 한데 범한은 지금까지도 그 일이 진평평 원장이 가장 은밀하게 심어 둔 첩자 원굉도가 한 짓인 건 모르고 있었다.
이후 오백안의 처는 신양 쪽의 도움으로 경도로 들어오게 되고, 교묘하게 하종위의 손을 거쳐 도찰원 어느 늙은 어사의 오래된 저택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제에게 자신의 사정을 고하기 위해 일련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어처구니없이 살인을 기도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일은 임약보 재상이 물러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도 거리에서 오백안의 처가 살수에게 살해 위협을 받은 것이었다. 재상의 수하가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한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녀는 2 황자와 정왕 세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황궁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임약보 재상은 하는 수 없이 뒷거래로 들어온 제안을 받아들이고 슬픔에 젖어 경도를 떠났다.
범한은 길에서 감찰원 보고서를 받은 순간부터 2 황자와 정왕 세자가 맡은 역할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2 황자와 신양 장 공주 사이의 진짜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범한은 매번 임대보를 볼 때마다 낙향한 장인어른이 떠올랐다. 그러니 그에게 이 일은 공무나 나랏일 같은 게 아니라 자신과 2 황자 사이의 사적 원한에 불과했다. 비록 배후에 범한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게 있겠지만 적어도 범한은 사위로서 이 사건과 관련해 복수를 해야만 했다.
* * *
범한이 주먹을 문지르며 몸 근육을 풀었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기분이 좋았다. 범한은 뒤로 돌아 뒤채로 향했다. 가는 동안 등자경에게 맑게 트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말게나. 하종위도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것 같지 않으니까.”
뒤채에 도착하자 임완아가 진지하게 수를 놓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범한은 자신의 처를 주시하며 슬그머니 다가갔다.
* * *
하종위는 구타당한 일을 여기저기 알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2 황자는 이미 알고 있었고 범한이 대체 무엇을 믿고 이리 날뛰는지 궁금해했다. 2 황자는 조정에 아무런 세력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장 공주의 도움으로 이미 적지 않은 신하들이 그를 따르는 중이었으므로 사실 그에게 범한은 별거 아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쯤 되니 범한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이 범한이란 녀석은······ 문장력이 뛰어난 큰 인재인데 왜 갑자기 이리 막무가내로 날뛰는 거친 신하로 변한 걸까? 설마 감찰원이 사람을 저 정도로 변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는 범한이 기껏해야 감정이 격해져 싸운 것 정도로만 치부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쯤 되었는데도 자존심을 굽히고 범한을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이에 범한이 하종위를 패버렸으니 분명 기분이 풀렸을 거라 생각하고 신양 쪽에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내용의 서한만 보내고 말았다.
* * *
신양의 아름다운 이궁, 기이한 형태의 아름다운 노목이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가지를 떨어뜨리고, 누렇게 뜬 나뭇잎들은 새하얀 얇은 사로 된 휘장 안에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보드라운 손 하나가 공중으로 올라오더니 그 나뭇잎들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손 위의 푸른 핏대는 백옥 같은 피부 속에서 은은히 색을 발하며, 마치 옥 속에 깃든 정신인 양 아름다운 자태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경도를 떠나온 지 1년이 된 장 공주 이운예가 소녀처럼 귀엽게 하품을 하더니 들고 있던 낙엽을 바닥에 버렸다. 그러고는 턱을 살포시 괴고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원 선생이 보기에는 어떻지?”
임약보 재상을 배신하고 신양 쪽에 투신한 모사 원굉도가 무표정하지만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당황스러운 눈빛을 내보이며 대답했다.
“2 황자는 아직 천진한 면이 있어 적을 조금 얕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장 공주가 키득키득 웃었다.
“범한은 아직 젊은이야. 그런데 적이라니. 오히려 원 선생이 지나치게 신중한 것 같군.”
원굉도가 씁쓸하게 웃었다.
“공주마마의 사위분은 절대 평범한 이가 아닙니다. 북제에서 전력을 기울이지 않아 공주마마께서 내놓으신 묘수를 완전히 실현시키지 않기는 했습니다. 하오나 교묘하게 중간에 서서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북제 황제를 뒤에서 조종해 상삼호를 시켜 심중을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인물을 어찌 단순히 망나니로 치부해 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사위분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선입니다. 문장력이 좋은 인물이니 속마음은 분명 평범한 이들보다 훨씬 더 복잡할 것입니다.”
장 공주가 한숨을 내쉬고는 비단을 씌운 긴 의자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화려한 의복 사이로 새하얀 등과 목이 드러났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한 마리 백조, 그 자체였다.
“고 녀석, 소은을 구출해 오지 않은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심중을 음해해 결국 죽여 버리는 통에 최 씨 녀석이 매일 찾아와서 징징대고 있어. 북제 쪽 진무사 지휘사 자리는 공석이 되어 버려 부하인 금의위들은 감히 알아서 나설 수도 없어. 물건을 내보내는 길이 순식간에 다 막혀 버렸지 뭔가.”
줄곧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장 공주의 심복 황의가 공손히 입을 뗐다.
“지금 북제 황태후와 상의 중입니다. 하온데 북제의 젊은 황제가 최근 고집을 부리고 있다 합니다. 황태후가 장영후를 진무사 지휘사로 임명하려 하는데 억지로 막고 있지요.”
장공주가 소리 내어 잠시 싸늘하게 웃고는 말했다.
“북제의 그 할머니도 정말 바보군. 그냥 별 볼 일 없는 심복이나 데려다 꽂아 놓을 것이지, 왜 꼭 자기 혈육을 데려다가 특무 기관 대장으로 만들려는 건지, 원. 자기 아들을 너무 바보 취급하는 거 같은데.”
그러자 원굉도가 화제를 돌렸다.
“북제 일은 잠시 논외로 하시지요. 경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 우리로서는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261화
황의는 원굉도가 싫었다. 신양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장 공주의 깊은 신임을 얻다니. 그가 속에서 은근히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억누르며 말했다.
“경도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분명 안정을 되찾을 것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직접 선발하신 감찰원 후계자가 아드님과 풀 수 없는 갈등 관계에 놓이는 건 원치 않으시겠지요.”
그러자 원굉도가 싸늘하게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오나 범한 대인은 절대 자기가 손해 보는 사람은 아니더군요. 이번 도찰원 어사가 집단으로 그분을 탄핵한 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게 있음을 일깨워 주고자 벌인 일이었습니다.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그리도 총애하시는데도 범한은 오히려 그분 체면에 금이 가도록 했으니, 폐하께서도 이제는 자연스레 체면을 되찾으실 방법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황의가 그의 표정은 살피지도 않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설마 범한이 일을 더 크게 만들 거란 말인가요?”
그러자 장 공주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원 선생 말이 일리가 있군. 이번에 도찰원과 그 녀석이 섣불리 부딪치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 녀석, 성미가 불손하거든.”
장 공주가 느닷없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황의, 그리 말하지 말거라. 우리 사위는 말이다, 진짜 말썽꾼이거든. 그러니 범건 그 늙은이가 제 아들에게 안지란 자를 지어 준 건 참으로 선견지명 있는 행동이었어. 사위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녀가 입을 가리고 웃자 이궁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생기 가득한 눈동자와 예쁘고 사랑스러운 미간은 처연한 가을날 모든 공간을 적시는 빗방울이 되었다. 이에 황의는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서 있었고 심지어 원굉도도 잠시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다.
“내 보기엔 우리 사위는 분명 둘째를 두 번 더 물어 버릴 거야.”
장 공주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편지를 쓰게. 둘째에게 범한과 화해를 하라고 해. 아무리 많이 다쳐도 꼭 화해를 해야 한다고 말이지.”
경국 최고의 미녀는 나긋나긋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위세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수 없었다. 황의는 말을 하려다 멈추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장 공주자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마마마께서 서한을 보내셨는데 설에 황궁에서 함께 지내자고 하시더군. 기다려 볼까나. 이제 경도로 가게 되었어. 이제 곧 본궁이 사위와 놀아 줄 거야.”
* * *
한편 경도에서는 감찰원 1처 밀정들이 가을밤의 품 안에서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흠천감 감정, 이는 본래 별 볼 일 없는 직위이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일이 발생한 경우에는, 가령 유성이 떨어지거나 달이 개에게 먹히는 일이 발생하면 황제에게 그에 대한 풀이를 해주던 터라 어떤 때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흠천감 감정은 2 황자의 사람이나 제 역할을 할 때를 맞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경국에서 가장 유명한 검정 개들에게 사냥당해 그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길게 뻗은 길 위로 여러 차례 휙휙, 소리가 났다. 곧이어 밤의 악마처럼 검은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사람이 곧장 흠천감 감정의 관저로 들어갔다. 호위병들이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들의 어르신은 검은 옷의 사람들에게 꽁꽁 묶여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이들 강적은 곧장 관저를 떠나지 않고 정원에서 등불을 밝혔다. 정원을 밝힌 등불 아래에서 검은색 의상의 정체를 확인한 호위병들은 감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현장에는 흠천감 감정의 가족을 포함해 여러 사람이 있었다. 온통 검정 일색으로 위장한 목철이 그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감찰원이 황명을 받들어 사건을 처리하러 왔다.”
목철이 말을 마치자 감찰원 1처 관원들은 흠천감 감정을 관저에서 끌고 나와 마차에 밀어 넣고는 이내 칠흑같이 어두운 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관저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등불은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 * *
경력 5년 가을, 어린 태감 홍죽이 문서 더미를 품에 잔뜩 안고 구부정한 자세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서쪽 쪽문에 있는 방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자그마한 발끝을 종종거리며 젖은 바닥을 계속해서 밟아 나갔다. 그의 하늘색 도포 밑단은 위로 끌어 올려져 있었다. 옷자락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홍죽은 오른손을 문서 위에 가로로 얹은 후 넓은 소맷자락으로 다시 한번 문서를 감싸서 들고 있었다. 마치 납처럼 무겁게 내리깔린 비구름에서 비라도 떨어져 문서가 젖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 같았다.
문턱을 넘어서자 인수인계 절차가 시작되었다. 방 안쪽에 있는 태감들이 서로 명부를 훑어보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홍죽은 명부 위에 조심스레 표시를 한 후 품에 있던 문서를 건넸다.
중서(中書)는 경국 조정 일을 처리하는 중추이다. 과거에는 요즘처럼 중요한 지위를 지닌 곳이 아니었다. 6부를 총괄하는 재상이 상주문을 일일이 살펴본 후 황제께 전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임 재상 임약보가 낙향하고 없는 터라 중서성의 지위가 갑자기 도드라지게 되었다. 이에 황제는 몇몇 나이 많은 대신들을 뽑아 중서에서 함께 공무를 논하도록 하였고, 또한 서로 편하게 연락하기 위해 공무를 논하는 장소도 황궁 서쪽 쪽문에 있는 방으로 옮겨 버렸다.
그러니 현재 중서에서 조정 대사를 책임지고 있는 이는 서무 대학사와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이었다.
살짝 쌀쌀한 가을바람이 황궁 광장에 불어왔다. 홍죽이 입김을 불어 손을 비비며 조용히 문 앞에 서서 나이 든 대인들의 답변을 기다렸다. 사실 다른 곳에 가서 기다려도 되지만 홍죽은 문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내부 동정을 살폈다.
가끔 관원들이 나타나 홍죽의 곁을 스쳐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관원들은 그를 향해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홍죽은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서둘러 얼굴에 미소를 띠고 답례를 했다. 그런데 중서 임시 회의실 밖에 태감 홍죽이 서 있는데도 이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그의 직책을 알고 있어서였다.
가끔 나이 든 대인을 시중드는 어린 태감들이 파견 나왔다가 홍죽과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홍죽에게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하라고 청했다. 그럴 때면 홍죽은 그들을 향해 거만하게 고개만 끄덕여 주고는 계속 문밖을 지켰다.
홍죽은 올해 겨우 열여섯이었다. 그런데도 이렇듯 황궁에서 작은 지위라도 누릴 수 있게 된 건 날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의 성이 홍씨이기 때문이었다. 즉 홍죽이 나이 많은 홍 내관의 친척일 수도 있어서였다.
홍죽은 아랫입술 왼쪽에 난 작은 종기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살짝 화끈거렸다. 요 며칠 감찰원에서 사람들을 심하게 잡아들이는 것 때문에 문관들의 상소가 늘고, 중서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시끄럽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홍죽은 하루에도 몇 번씩 황궁 안팎을 오가는 중이었고, 얼마나 바쁜지 똥오줌을 바지에 지릴 정도였다. 이에 홍죽은 체내에 너무 많이 쌓인 화기가 드디어 몸 밖으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궁으로돌아가면 주방에 가서 차가운 차나 한 사발 들이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문 안쪽에서 나는 소리는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소리는 고스란히 홍죽의 귀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 * *
“그것은 감찰원의 업무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이 상주문을 돌려보내셨는데 무슨 뜻으로 그러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어지는 목소리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최근 제사가 한 일들에 대해 도가 좀 지나치다 생각하신 건 아닐까요?”
어느 나이 많은 신하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도가 지나친 정도가 아니지요! 범한은 공공연히 공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정적들을 쳐내고 있는 거예요! 겨우 열흘 동안 벌써 대신 다섯 사람이 잡혀갔습니다. 한밤중에 감찰원에서 들이닥쳐 사람을 잡아갔다고요! 이게 어찌 조정 소속 감찰원이란 말입니까! 그냥 범한이 쥐고 흔드는 도적 떼지요!”
그러자 반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범한 제사는 광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다섯 대신이 붙잡혀 간 다음 날 대리사 담벼락에 죄명이 상세하게 담긴 방이 붙었습니다. 경도 백성들도 다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니 안 대인의 이번 언사는 과하신 것 같습니다. 감찰원 1처가 한 일은 감찰 업무입니다. 대체 정적 제거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씀입니까? 제가 보기엔 그 다섯 대신이 부정을 저질러 그런 화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자 안씨 성의 나이 든 대신이 화를 냈다.
“정적 제거가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왜 지난번 도찰원의 제사 탄핵이 있은 후 감찰원의 움직임이 급증한 것일까요?!”
그러자 아까 그 대신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만약 보복하는 중이라면 범한 대인은 왜 도찰원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야 황제 폐하께서 영명하시어 감찰원이 도찰원 사무에 관여치 못하도록 엄히 금하셨기 때문이지요!”
되받는 말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안 상서께서 좀 가르쳐 주시지요. 흠천감과 도찰원 어사가 대체 무슨 상관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범한 대인이 만약에 보복하는 중이라면 왜 흠천감 감정을 잡아들였냔 말입니다!”
이부 상서 안행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다시 쌀쌀맞게 입을 뗐다.
“어찌 되었든 감찰원이 일을 더 크게 벌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잡아들이다가는 조정 신하들을 몽땅 잡아들일 것입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비웃듯 말했다.
“상서 대인, 염려 푹 놓으십시오. 3품 이상 대신은 감찰원에서도 손을 댈 권한이 없으니까요.”
은근히 이부 상서를 비꼬는 말이었다. 그 자신이 부정하기 때문에 감찰원 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화를 낸다고 말이다. 그리고 감찰원의 권력 행사도 한계가 있어 3품 이상의 고관은 건드리지 못하니 그는 안심해도 된다고 말이다.
안행서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문밖에 서 있는 태감 홍죽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참으로 황당하군요! 감찰원의 세력이 이렇게 커지는데 여러분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겁니까!”
그러자 가장 먼저 입을 뗐던 대신이 중재인으로 나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상서 대인, 이리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소진(小秦)도 그만하면 됐습니다. 감찰원은 사건 조사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도 안 되고 사건 판결도 못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잡혀간 그 대신들이······.”
그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유죄인지 무죄인지 밝히려면 대리사에서 다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 폐하의 뜻이 분명하시니 우리도 무엇이든 의견을 내기는 해야 합니다.”
그러자 소진이라 불린 대신이 제일 먼저 의견을 냈다.
“감찰원 업무는 폐하께서 친히 돌보고 계십니다. 하오니 이 진(秦) 아무개는 신하로서 더 이상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에 안행서 상서가 크게 화를 냈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 이번 일은 오래 지속되면 안 됩니다. 범한이 제멋대로 굴도록 내버려 둔다는 건 여러 동료 대신께서 우리 경국에······ 또 다른 진평평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262화
홍죽은 문밖에서 깨금발을 하고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띠었다.
‘황제 폐하와 진평평 원장 대인의 관계가 어찌 당신들 같은 문신들과 비교할 수 있겠소이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 추밀원 참찬 진항이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얼굴로 문을 밀고 나왔다. 홍죽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춰 주며 말했다.
“진 대인, 소인이 서둘러 회궁해야 합니다. 언제쯤 받아 볼 수 있을까요?”
진항은 30대로, 추밀원 정사 진 장군의 친아들이다. 작년에 북제와의 전투에서 그는 경국 통령으로 참전했었다. 그러므로 경력만 보면 중서성 회의에 참석할 자격은 안 되었다. 하지만 지난번 어사들이 곤장을 맞은 사건 이후, 아버지 진 장군이 줄곧 병환을 이유로 조정에 나오지 않자, 황제가 진항에게 중서 회의에 참석하도록 특별히 명을 내렸다. 이는 황제가 진씨 가문을 향한 두터운 총애를 보여 준 것이었으며 또한 경국이 군사적 공훈을 세운 자를 여전히 중시함을 보여 주는 처사였다.
아버지인 추밀원 정사 진 장군은 병환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조정 대신들은 감찰원 제사 범한이 지금 조정에서 너무 잘나가 제멋대로 구는 걸 진씨 가문에서 못마땅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홍죽은 오늘 진항이 의외로 말끝마다 범한을 옹호해 저도 모르게 버릇없이 몇 마디 말을 걸고 만 것이었다.
진항이 태감을 쓱 보고는 웃었다.
“그냥 떠드시도록 내버려 두어라. 결국 단 한 분도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을 테니. 한데 이제 그만 엿듣지 그러냐.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다 한들 결국 가슴에 담아 두기만 하고 말도 못 할 것을 무엇 하러 그리 답답한 행동을 하는 것이냐!”
그러자 홍죽이 고개를 숙이고 웃기만 했다. 이어 그는 조정에서 가장 잘나가는 군 측 중견 인사가 변소로 들어가는 걸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서 회의가 또는 말싸움이 서무 대학사의 조정으로 드디어 막을 내렸다. 대신들은 문서에 자신들의 의견을 완곡하게 적어 내려갔다. 황제 폐하께서 부디 이번 일에 조금 더 신중을 기해 달라고 말이다. 이번에 끌려간 다섯 대신의 품계는 그리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 경도 출신의 노인들인지라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이들 문신들로서는 감찰원이 이리도 간단히 그들을 끌어내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홍죽이 문서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러더니 이내 하늘색 관복 밑단을 들어 올려 허리춤을 꽂고는 소맷자락으로 문서를 감싸더니 엉덩이를 치켜들고 깨금발로 종종거리며 뛰어갔다.
중서의 임시 회의실에서 황궁 내 어서방까지 가는 동안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내리깔려 있었다. 하지만 경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들은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으며 그리고 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며 옮겨지고 있기에 누군가에게 위협을 받을 수 없었다. 이에 홍죽은 의기양양하게 뛰어갔다. 가는 동안 궁녀들이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눈길로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또한 어린 태감들이 잘 보이려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 역시 못 본 체했다.
어서방 밖에 도착한 홍죽은 일단 호흡부터 골랐다. 그런 후 시선을 내리깔고 어서방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문서들을 책상 아래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남쪽에서 온 상주문을 읽고 있던 황제가 홍죽이 들고 온 문서 중 하나를 집어 들고 보았다. 미간이 갈수록 강하게 일그러지더니 얇은 입술을 열고 싸늘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평범한 인사들 같으니! 서무는 웃을 줄만 알고 안행서는 그래도 좀 담대하고······. 그래, 진가네 녀석이 오히려 쓸 만하군.”
홍죽은 천자가 하는 말을 감히 들을 용기가 없어 옆에서 찍소리도 안 내고 바짝 긴장한 상태로 서 있었다.
황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홍죽은 이제야 살았다는 듯 어서방에서 물러났다. 그로서는 오늘 일과가 다 끝난 셈이었다. 그가 푸른 바닥 돌이 깔린 길을 따라 몇 번이고 돌아 걷다가 태극궁 옆까지 왔다. 그곳에 곁채처럼 있는 방에서는 태감 몇몇이 씨앗을 까먹으며 놀고 있었다. 들어가자 그들은 서둘러 홍죽을 자리에 앉히고는 히죽히죽 웃으며 물었다.
“오늘은 어떤 희귀한 일이 있었습니까?”
홍죽이 귀찮다는 말투로 말했다.
“날마다 대인들 싸우는 소리만 듣는데 뭐 새로울 게 있겠는가!”
그러자 태감들이 이내 아첨을 떨기 시작했다.
“작은 홍 내관, 날마다 어서방과 중서 사이를 오가시고, 우리 경국 조정의 중요한 일은 몽땅 내관의 눈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당연히 신선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으시겠죠.”
다른 태감이 끼어들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만약 우리 경국 조정에 급소가 있다면 바로 작은 홍 내관의 품속일 것입니다.”
홍죽은 거만하게 굴기는 했어도 이런 부분만은 경계했다. 이에 서둘러 자신은 모르는 척 정색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들인가! 나는 그냥 폐하의 종일뿐일세!”
그러자 태감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우리 경국 관원은 몽땅 종입니다요! 작은 홍 내관, 모르시나 본데 요즘 내관께서 유명하십니다. 이놈이 황궁 밖에 천을 사러 갔을 때였습니다. 제가 내관과 친하다 하니 그쪽에서 다른 눈으로 보더라고요. 다들 그러더군요. 상서 댁 범한 공자 빼고 경도에서 제일 유명한 이는 작은 홍 내관이시라고 말이죠.”
홍죽이 손을 뻗어 이마 앞쪽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범한 대인과 비교해 자신의 명성은 한참 보잘것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첨이란 건 원래 듣기 좋은 법. 특히 자신을 그리도 유명한 이와 함께 언급해 주니 홍죽은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이었다.
바로 이 순간, 누군가가 편전 문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어린 태감들은 서둘러 입을 봉했다. 홍죽 역시 심장이 떨려 왔다. 등장인물이 바로 숙 귀비 궁의 대 내관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비록 문서 전달 일을 하고 있기는 해도 품계만 놓고 보면 대 내관은 그보다 훨씬 윗전이었다.
대 내관이 멀리 사라지자 태감 하나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조금 전 침묵했던 게 조금 창피했는지 분하다는 듯 말했다.
“대 내관은 일찌감치 글러 먹었습니다. 하여 제가 조금 전에 정신이 없었던 거죠. 저렇게 얼빠진 사람하고 무엇 하러 어울리겠습니까!”
홍죽이 순간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대 내관께서 왜?”
그 태감이 득의양양해하며 말했다.
“며칠 전 어사가 범한 대인을 탄핵했을 때 대 내관이 불려갔었지요. 결론은 폐하께서 어사들에게 곤장 형을 내리시고 대 내관도 처벌을 받았답니다. 한데 최근에 들리는 말로는 황제 폐하께서 대 내관에게 성지 전달하는 직무를 내려놓게 하셨답니다. 그리고 귀비마마께서도 대 내관을 궁 밖으로 내치시려 한다네요.”
옆에 있던 다른 태감이 홍죽에게 알랑거리며 말했다.
“대 내관이 잘나갈 때 우리 아랫것들을 때리고 욕하고 그랬으니 권세를 잃은 지금 누가 상대해 주겠습니까! 그냥 진흙 속에 떨어진 가을 낙엽 신세가 된 거죠. 어디 우리 작은 홍 내관님 같은 신선하고 파릇파릇한 가지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홍죽은 이들의 아첨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저속해져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에 대충 몇 마디만 더 말하고는 서둘러 편전을 나섰다.
그는 편전 아래 굵은 대들보들을 따라 서둘러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후궁이 드나드는 석문(石門) 앞에서 낙심해 있는 대 내관의 뒷모습을 보았다. 홍죽이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인사했다.
“대 내관, 멀리서 누구인가 했더니 대 내관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서둘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대 내관이 의외라는 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최근 며칠 동안 황궁에 있는 우라질 놈 중에서는 이리 예의를 차려 주는 이는 없었다. 대 내관도 홍죽이 최근 어서방에서 일하느라 갈수록 유명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그의 행동이 희한하게 다가왔다.
홍죽도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이야기를 해나갔고 헤어질 때는 대 내관도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대 내관이 궁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젊은 홍죽의 입가에 그제야 득의양양한 미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모두 대 내관이 권세를 잃었다 하지만 홍죽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 내관은 황궁 밖 범한 대인과 관계를 맺고 있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재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도 대 내관은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이리 행동한 건 범한 제사를 무한히 신뢰한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그는 매일 어서방과 중서성 회의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 대인이 요즘 얼마나 잘나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찰원 1처에서 열흘 동안 무려 대신 다섯을 잡아들였다. 그런데도 폐하는 줄곧 윤허의 뜻을 유지하셨고. 중서가 아무리 강하게 말해도, 아무리 강하게 반발해도 홍죽이 보기에는 그들은 범한 제사를 절대 건드릴 수 없었다.
열흘 동안 다섯 대신이라니. 비록 모두 3품이 안 되는 관원이기는 했지만, 깊은 황궁 안에서 일하는 태감으로서 홍죽은 속속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범한 제사가 이렇게 큰 소란을 일으키려면 어떤 패기를 지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뒤에 어떤 든든한 뒷배가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런데 그는 항상 어서방에 있었으므로 누구보다 똑똑히 알고 있었다. 범한의 든든한 뒷배는 바로······ 경국의 황제 폐하란 것을!
홍죽이 입가에 돋은 곪을 대로 곪은 여드름을 만지며 황궁 밖 세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범한 대인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내내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인데 어떻게 이리 급이 다르게 살 수 있는지 궁금했다. 만약 대 내관과의 관계를 통해 그의 곁에 착 붙어 있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일 거라 생각했다.
* * *
흠천감, 이부(吏部), 연이은 경도 관리 다섯의 낙마. 감찰원의 어둠이 경도 전체를 다시 휘감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도 백성들에게는 별일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재수 없는 일을 당하는 건 관료들이잖아. 나랑 무슨 상관이래?’라고 생각했다.
관료 사회에서 감찰원 1처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아주는 심리가 작용한 걸 빼면 제일 큰 이유는 감찰원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었다. 그 어떤 관원도 젊은 범한 제사가 왜 저리도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관원들에게까지 손을 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극소수의 사람만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낙마한 관원들이 모두 2 황자가 비밀스럽게 짜놓은 판 속의 중요 장기짝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범한이 복수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어사들의 집단 탄핵에 화가 많이 나서라고. 하지만 범한이 황제 폐하의 엄한 반대에 부딪혀 도찰원에게 손을 댈 수 없게 되자, 열받은 망나니처럼 무지막지하게 큰 칼을 길거리로 들고나와 포효하며 눈에 띄는 대로 베어 버리는 중이라고. 특히나 자기 몸을 지킬 힘이 없는 아이에게 분풀이하는 중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범한 제사는, 경도로 온 후 근 2년간의 행적을 보면 충동적이고 뇌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 * *
범한이 신풍관에 앉아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고기 양념이 올라가 있어 보기만 해도 군침 도는 국수를 오른손에 쥔 젓가락으로 비비면서, 목철이 들고 온 사건 기록을 왼손에 들고 읽고 있었다. 안건 심문은 제법 빨리 끝난 상태였다. 범한으로서도 충분히 준비를 해 두었고 1처가 확보한 증거도 매우 유효해 보였다. 그러니 대리사나 형부로 보내 심판하게 해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도 범한은 언제나처럼 아버지와 절름발이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하지만 두 늙은 여우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이에 범한은 그들의 태도를 알게 되었다.
즉 이번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범한은 반드시 2 황자에게 타격을 주어야 했다. 그가 나중에 다시 신양 쪽의 말을 들으려 할 때 더욱 신중해지도록, 동시에 범한 자신을 위해 덜 번거롭게 되도록 말이다.
하지만 2 황자는 범한의 의도와 살짝 다르게 행동했다. 하종위가 범한에게 쫓겨난 후 다시 화해를 청하러 보낸 사람은 없었다. 황자의 존귀함에서 나오는 자긍심 때문에 이 정도에서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반격을 하지 않는 것도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다.
263화
“망월루는 어떤 곳이지요?”
범한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목철이 살짝 음란한 표정을 내보이자 범한은 웃으며 꾸짖었다.
“그 나이에 집에 돌아가 손주나 돌봐요! 그런 생각은 그만하고!”
그러자 목철이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망월루는 기생집입니다. 경도에 생긴 지 1년도 안 된 곳이지요. 1처에서 몰래 조사해 보았는데 배후에 대단한 인물이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최근 그곳에서 누군가가 몰래 계획을 꾸미는 듯한 커다란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범한은 기생집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유정강 쪽은 정왕 세자 이홍성의 세력권이었고. 비록 지금 2 황자와 암암리에 맞붙고 있기는 해도 이렇게 빨리 이홍성과 절교하고 싶지는 않았다. 친구로 지내다 보면 또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목철의 말은 흥미롭게 다가왔다.
“대단한 인물요? 얼마나요?”
목철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그 기생집에는 좀 사악한 기운이 있습니다. 간덩이가 부었더라고요.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있고요. 겨우 몇 달 만에 여자들도 꽤 많이 죽어 나갔는데 경도 부윤이 찍소리도 못 내는 걸 보면 배후 인물이······ 분명 황자 중 한 분입니다.”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망월루의 배후가 태자인지 아니면 2 황자인지 알지 못해서였다. 한편 1 황자는 군에서 날마다 사람들과 무예 겨루는 거나 좋아할 뿐이었고, 황제 폐하께 상도 두둑하게 하사받았으니 한동안 돈이 궁할 일은 없어 보였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범한은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살 수는 없었다. 이에 2 황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범한이 목철에게 말했다.
“시간 내서 조사해 봐요. 정말로 말한 대로라면 그 고급 기생집은 황자와 경도 관리의 접선 장소일 거예요. 거기로 몇 명 투입해 봐요.”
목철이 고개를 내저었다.
“관리가 엄격한 곳입니다. 또 새로 생긴 곳이고요. 그러니 단번에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감찰원은 관리들만 감찰해야 하니 민간 상인을 상대로는 불가능합니다.”
범한이 살짝 분노한 사람처럼 목철을 쓱 바라보았다.
“감찰원에서는 기녀들을 관리 감독할 수는 없지요. 하나 기녀가 속한 관아는 관리 감독할 수 있어요. 그러니 요는, 더 밀착해서 감시하란 말입니다.”
범한은 목철에게 모든 걸 다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범한이 보기에 2 황자는 너무 겸허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에 범한은 그가 중요한 패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 황자가 언젠가 그 패를 꺼낼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공무를 마친 후 범한은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조금 골치 아픈 듯 마차에 올라타더니 곧장 정왕부로 향했다.
오늘 범한의 가족들은 모두 정왕부에 가 있었다. 오늘은 정왕의 생일이었고, 유일하게 범건 상서 일가만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범한은 이홍성을 어떻게든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왕부 쪽에서 보여 준 정과 관심 때문이라도 이번에는 그곳에 가야만 했다.
왕부로 들어서는 순간 범한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1년 반 전에 이곳 호숫가에서 두보의 시를 읊은 게 떠올랐다. 그런 후 황궁 밤 연회에 갔고, 장묵한에게 객혈을 하게 만들었고, 북제에서 책을 받아 오게 되었다. 순간 그 모든 일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조용하고 고귀한 느낌이 가득한 이 왕부에서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다시 문득 그 마차에 있던 진귀한 서적들이 생각났다. 그 책들을 태학에 증정해 놓고 지금껏 가볼 여유도 없었다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홍성이 어느새 자신을 맞으러 나와 있었다. 그것도 서서 꽈리 물을 한 사발을 들고 왕부 밖에 서 있었다.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사발을 받아 들고 마시고는 웃으며 말했다.
“왕부로 들어서기 전에 이것부터 마시게 될 줄 알았습니다.”
범한이 처음 정왕부에 왔을 때였다. 가마 멀미 때문에 토할 것 같은 걸 이 꽈리 물을 마시고 회복되었다.
세자 이홍성이 범한의 두 눈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요즘 감찰원 대권을 쥐고 잡아들이고 싶은 이는 몽땅 잡아들인다던데. 어째 정왕부 밖에서 꽈리 물 파는 장사꾼은 자네 집으로 잡아가지 않는 것인가?”
세자의 말에는 가시가 숨어 있었다. 이에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이 난관에 부딪히게 될 줄 이미 예상했습니다. 하여 물을 건네주시는데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저를 주먹으로 때려눕히실 줄 알았거든요.”
이홍성이 콧방귀를 뀌고는 범한과 나란히 왕부로 들어서며 말했다.
“내 마음이 시원치 않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겠지?”
이홍성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둘째께서도 모르겠다 하시네. 태자마마 사람도 아니면서 하필이면 왜 그런 일들에 신경 쓰는가?”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웃었다.
“제가 온갖 사람에게 미움 살 짓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분께서 압박하는 게 아니고요?”
말을 마친 범한은 가을 하늘에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을 가리켰다. 한데 쭉 뻗은 손가락에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내가 바보인가?”
정왕 세자가 진지하게 범한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번거롭겠지만 말해 주게나. 내가 정말로 바보인 거 같아 그러니.”
범한이 그의 요청에 따라 진지하게 답해 주었다.
“제가 보기엔, 어떤 면에서는 정말 바보이십니다.”
이홍성은 범한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 이유를 두고 물은 것이었다. 한편 범한은 상대방이 굳이 황자들 권력 쟁탈전에 참여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정왕부의 식물들은 가을임에도 처연한 느낌 없이 여전히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오히려 약간 누런 빛깔을 띤 융단을 길 양쪽 바닥에 깔아 놓은 것 같았다. 원예를 좋아하는 정왕이 수고롭게 가꾼 결과임을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이 풀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를 보십시오. 저런 게 인생이지요.”
이홍성이 멸시와 조소가 섞인 말투로 받아쳤다.
“매일 집에서 정원이나 돌볼 생각이라면 둘째께 부탁해 강남의 땅을 자네에게 주도록 하겠네.”
범한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최근 있었던 일들은 제 생각이 아니라고요. 믿지 않으시는군요.”
이홍성은 항상 따스하고 햇살같이 말간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흘린 정보에 결국에는 이맛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최근 조정 동향이 범한 때문이 아니라면 황제 폐하의 뜻이라니. 생각해 보니 그 일들은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황제 폐하의 2 황자에 대한 총애가 예전만 못하다는 말인가.
범한이 이홍성을 쓱 보고는 말했다.
“물론 제 사심이 발동한 것도 있습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제가 둘째분께 호감이 없다는 걸 말입니다.”
이홍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경도에 온 초기에 나와 둘째분은 모두 예의를 차려 준 편이었네. 물론 성심성의껏 대해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네. 하나 적어도 동궁 쪽보다는 우리와 더 친해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자 범한은 소리 내어 잠시 싸늘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저택 안으로 들어왔지만 정왕의 생신 연회가 아직 시작되지 않아 곧장 후원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세자의 비밀 서재로 갔다. 범한은 탁자 한쪽에 걸터앉더니 눈가에 싸한 느낌을 풍기며 이홍성을 주시했다.
차를 가져온 종이 물러나고 서재에 두 사람만 남았다.
“예의를 차려 주셨다고요? 도찰원이 저를 건든 것도 예의를 차려 주신 것입니까?”
이홍이 잠시 흠칫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도찰원이라······ 그건 고모님의 뜻인데 사실 자네도 그 이유는 알지 않는가. 누가 자네에게 경도로 돌아오자마자 고모님과 둘째분 사이의 그런 일들을 조사하라 했나?”
범한은 외양간 길 사건과 관련한 걸 폭로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내저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사심도 있었다고요. 장 공주마마와 둘째분 사이의 일을 조사한 건, 세자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황실 금고의 돈을 그 두 분이 가져가서입니다. 제가 내년에 빈껍데기를 물려받기를 바라시는 것입니까?”
이홍성이 말했다.
“어찌 말해야 할까? 자네는 장 공주마마의 사위가 아닌가. 그분께 자식이라고는 완아 하나뿐이고. 그런 고모님께서 설마 자네를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실까? 한발 물러서게나. 모두 평안히 살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물론 한발 물러설 수 있습니다.”
범한이 이홍성을 바라보며 정말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세자님이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그 둘째분 옆에 선 건 분명 그분께서 황제가 되셨을 때 동궁마마보다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셔서겠지요. 성품이 온화하고 상냥해 보이니 그분이 황위를 이으시고 나면 정왕가도 더 편해질 거란 생각이실 테고요. 하오나 지금 이렇게 계속 둘째, 둘째, 부르시는데 그분이 나중에 정말 황제라도 되신다면 이렇게 불렸던 걸 없던 일로 하실까요?”
이홍성이 웃었다.
“그 말이 자네 입에서 나와 다행이군. 그렇지 않고 다른 이가 했다면 분명 졸렬하게 도발한 거라 여겼을 게야.”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진지하게 말씀드린 건데. 제가 허튼소리를 했다 여기셨겠지만······ 봄에 유정 강가에서 이런 일들에는 연루되시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 후 이홍성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동안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알고 있거든요. 하나 정왕이라는 신분에 얽매여 있으시니 손에 연지분은 수없이 묻히고 계셔도 병졸은 하나도 없으시지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오나 지금 쥐고 있는 힘이 저보다 못하시면서 어찌 황자님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이홍성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자아도취에 빠진 감이 있기는 하지요. 어쩌면 세자께서는 속으로 저를 비웃으실 수도요.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마음을 움직이셨으니 둘째분께서는 이제 좋은 날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세자께서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세요.”
범한이 이홍성의 어깨를 토닥이며 간절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다름이 아니라 모두 약약이 때문이지요.”
이홍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무표정하게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느끼는 게 있었다. 이에 잠시 후 조용조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둘째분을 모르네. 그분에게도 실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지. 다시 말해 나와 그분은 의리로 맺어져 있어서 어찌 되었든 헤어질 수 없는 사이네.”
그러자 범한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정왕의 생신 연회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둥근 식탁 위에 다양하고도 유명한 음식들이 올랐다. 정왕이 상석에 앉아 긴 수염을 휘날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부유한 상인처럼 입은 터라 평소 보던 꽃이나 기르던 농부 모습의 왕야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돈 많고 할 일 없는 황가 상단의 소금 상인처럼 보였다.
정왕은 자신의 아들과 범한이 함께 걸어 들어오자 웃으며 손을 휘저어 범한을 불렀다.
“내 옆자리에 앉거라.”
범한은 정왕이 해대는 이상한 말들을 정말 싫어하는 터라 죽을상을 하고 옆에 앉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처 임완아가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편 누이 범약약은 완아 옆에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범한은 조금 전 파렴치하게도 누이의 이름을 팔아 이홍성의 마음을 잠시 누그러뜨렸던 일이 생각나, 순간 자신이 뼛골까지 경멸스러운 인간처럼 느껴졌다.
범한은 바로 술잔을 들고 정왕에게 한 잔 올렸다. 그런 후 다시 맞은편에 계신 아버지, 새어머니 유씨 부인에게 한 잔씩 올렸다. 이는 지각한 것에 대한 사죄였다.
생신 연회에는 정왕가와 범가 딱 두 집안의 사람들만 참석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른들과 겸상을 하는 자리였던 터라 세자와 범한 모두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했고, 이에 음식이 풍성히 차려졌음에도 도무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
264화
술잔이 세 번이나 돌았지만 정왕은 흥이 나지 않았다. 이에 술병을 받쳐 들고 범건에게 말했다.
“집에서 자식들 교육을 어떻게 한 건가? 여기에 자네가 있어서 그런가, 범한을 포함해서 모두 입도 뻥끗할 생각을 하지 않는구먼.”
그러자 범건이 사슴 꼬리를 집어 들고 씹으며 여유 있게 말했다.
“왕야보다는 잘하고 있을걸요. 적어도 본관은 아이들 앞에서는 욕설이나 음담패설은 안 하니까요.”
“이런 어미도 모르는 놈아!”
정왕이 턱에 묻은 술을 닦아 내며 욕을 했다.
“내 여식 앞에서 나를 욕하지 말거라!”
정왕의 비는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물론 측실을 몇 두기는 했지만 그녀들에게는 이런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아랫자리에는 유가 군주와 세자 이홍성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욕설을 하자 유가 군주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범한을 몰래 쳐다봤다. 아버지 때문에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범한의 눈치를 본 것이었다.
그러자 범건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다시 받아쳤다.
“자기 뺨이나 때리시지요!”
임완아가 시집온 후 처음으로 두 집안이 함께 모인 자리였다. 한데 양 집안 어르신들이 적절치 않은 행동을 보이자 서둘러 범한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황친인 군왕(郡王)에게 자기 뺨이나 때리라 일갈하자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이 멎어 버렸다.
범한은 두 분의 이런 행동이 익숙했던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몸가짐이 바른 아버지께서는 이상하게도 정왕과 함께 계실 때면 옛날에 기생집에서 창기들이나 후리던 풍류가객의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범건의 말에 정왕은 욕설을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기가 했던 말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이런!” 하고 감탄사를 내뱉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오른손으로 자기 뺨을 소리가 날 정도로 가볍게 때렸다.
하지만 범건은 용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젓가락을 들어 정왕의 코를 가리키며 욕했다.
“아드님이 곧 혼인을 하니 그 입으로 덕담만 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뭡니까!”
정왕이 얼굴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실언했네, 실언하였소이다.”
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부라리며 어린 사람들을 쓱 훑어보고는 흉악하게 한마디 했다.
“방금 내가 한 말, 아무도 못 들은 게다!”
그런 후 난처하다는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옆에 있는 범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범한아, 날 키워 준 어머니는 담주에서 어찌 지내시느냐?”
임완아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해 고개를 숙이고 꾹 참았다. 조금 전 범건 상서가 어떻게 감히 왕야에게 자신의 뺨을 때리도록 만들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어미라고 하셨지? 상공의 할머니 때문이었다. 왕야를 키워 주신 분이 담주에 계신 할머니라서 그런 거였다.
범한이 얼굴을 찡그리며 속으로만 불만을 드러냈다.
‘두 분께서 싸우시는 데 왜 저까지 끌어들이신 겁니까!’
하지만 이내 할머니의 근황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드렸다. 주로 건강히 잘 지내신다는 말이었다. 그러다 범한이 눈을 또르르 굴렸다.
“왕야, 술이나 드시지요. 맞다, 경도에서 별로 할 일도 없지 않으십니까. 홍성 세자도 경도에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으니 내년에 시간을 내서 저와 함께 담주에 놀러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곳에는 정말 좋은 차나무도 있답니다.”
정왕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기에 정왕은 범한이 더 좋아졌다. 이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구나. 내일 입궁해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야겠구나. 한데 너는 안 된다. 너는 내년에 강남에 가야 하거든.”
아랫자리에서 줄곧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이홍성이 깜짝 놀랐다. 자기가 봤을 때 조금 전 범한이 참으로 절묘한 수를 썼기 때문이다.
범한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제가 왜 강남에 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정왕이 질책했다.
“이 녀석, 평소에는 엄청 똑똑하던데. 둘째 녀석까지 말도 못 하고 쩔쩔매게 만들어 놓고는 왜 갑자기 아둔해진 거지? 내년에 황실 금고를 물려받지 않더냐. 강남에 가지 않으면 어찌 물려받으려 그러느냐?”
범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어 물었다.
“황실 금고를 맡게 되는데 왜 강남에 가야 하는 것입니까?”
정왕이 범건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보게, 범건. 자네 아들이 바보인 척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바보인 건가?”
범건이 범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요 녀석이 큰 지혜는 없어도 잔머리는 좀 굴리는 줄 알았더니 오늘에서야 알겠구나. 이제 보니 잔머리도 없었던 거야.”
임완아가 불만이라는 듯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상공은 어찌 황실 금고 삼대방이 전부 강남에 있는 것도 모르고······. 외삼촌, 술이나 드시어요. 그런 재미없는 일을 가지고 왜 계속 말씀하세요.”
정왕은 하마터면 사레들 뻔했다. 이에 웃으며 임완아를 꾸짖었다.
“여자는 시집가면 남편 편이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네 친외삼촌이니라. 그런데 어찌 시집가자마자 범씨 가문 편만 드누?”
임완아가 웃으며 대꾸했다.
“제 보기엔 외삼촌께서도 우리 상공을 아끼시는 것 같은데요.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아랫자리에 앉아 있던 이홍성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아버지 곁에 앉은 범한 그리고 범한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부왕의 눈빛을 번갈아 보다 보니 질투심이 일어서였다. 2 황자마마와 마찬가지로 그는 불쾌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왜 부왕도 이렇게나 범한을 좋아하는 거지? 대체 누구의 아버지인 거야?’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 * *
술자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자식들 세대가 모두 함께 생신 축하주를 올리고 나자 정왕은 흥이 제대로 올라 갈수록 황당한 말을 해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들을 혼인시킨 후 서둘러 애부터 낳아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다 또 유가가 두 살 더 먹으면 다른 놈에게 좋은 일 시키느니 차라리 그냥 범한에게 시집 보내 버리겠다는 이야기까지 해버렸다.
범약약은 긴장해 옷깃을 꽉 움켜쥐고만 있을 뿐 감히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홍성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연모의 마음을 담은 눈동자로 정혼자를 몇 차례 훑어보았다.
한데 그들 중 가장 긴장한 이는 범한이었다. 이에 범한이 서둘러 말했다.
“유가 군주님의 신분을 생각하셔야죠. 어찌 제게 첩으로 주려 하십니까. 왕야,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직 어린 유가 낭자가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범한을 잠시 흘겨보았다.
술기운이 잔뜩 오른 정왕은 계속 욕을 해댔다.
“이 경도 바닥에 이상한 놈 천지인데 다른 놈에게 시집보내면 내 어찌 마음을 놓겠느냐. 신분? 내 여식인데 너와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인 것이냐?”
정왕이 고개를 돌려 임완아에게도 한마디 했다.
“신아야, 너도 할 말이 있는 게냐?”
그러자 임완아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저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외삼촌께서 할마마마를 설득하시면 그걸로 끝이니까요.”
정왕은 할마마마란 말에 술이 반쯤 깼다. 모후께서 범한에게 자신의 손녀를 둘씩이나 줄 리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에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해가며 말했다.
“이 일은 생각을 좀 해봐야지, 원. 유가 저 아이는 품성이 너무 유약해서······. 이런 염병할, 그냥 범한에게 시집보내지 말아 버릴까? 그러면 그 자리를 북쪽 그 여자애한테 그냥 넘겨주는 거잖아! 그건 손해 보는 건데, 손해 보는 거고말고. 이리도 예쁘장한 범한이를 북쪽 출신인 그 암컷 호랑이한테 공으로 넘겨주면 그건 너무 손해라니까.”
정왕이 잔뜩 취한 눈으로 범건을 바라보았다.
“북쪽 그 여자애 이름이 뭐라 했었지?”
범건도 술을 많이 마신 터라 트림을 하고는 살짝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해당타타. 북쪽 성녀 같은 거라던데. 고하 국사의 마지막 제자. 어쩌다 저리도 모자란 우리 아들한테 홀딱 넘어간 건지 모르겠군요.”
모자란 우리 아들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범건은 속으로 흐뭇해하고 있었다.
범건이 말을 마치자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다.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던 유씨도 어느새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범사철과 이홍성 두 사람은 과장되게 웃었다. 범한은 지금 상황이 너무 의외여서 정말 난처했다.
‘아버지께서 술에 취하시더니 이리도 방종하게 변하실 줄이야. 더군다나 해당타타의 이름까지 마음에 새겨두고 계셨다니.’
어깨가 살짝 결렸지만 범한은 표정 변화 없이 임완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잔을 들고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 술들 드시지요.”
그러자 또 한바탕 웃음이 흘러나왔다. 줄곧 이유 없이 불안해하던 범약약도 이번에는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 * *
“그 해당타타란 여자는······.”
정왕이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고하의 마지막 제자가 아닐 수도 있을걸?”
범한은 해당타타란 두 글자에 순간 긴장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을 듣고는 전에 자신이 계획해 놓았던 일들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가 이미 경도에서 소문으로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범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그 해당타타란 낭자 말이야.”
범건이 아들을 잠깐 보더니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듣기로는 하늘이 낳은 인재라던데. 유사 이래로 가장 젊은 9등급 상 고수이고. 북제 사람들은 또 하늘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런 제자가 있는데 고하는 대체 뭐가 불만이라 다시 산을 열고 제자를 거두기 시작한 건지······.”
세자 이홍성도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지라 인상을 쓰며 말했다.
“북제의 음모가 아닐까요?”
그러자 정왕이 또 욕을 했다.
“음모는 무슨 염병할! 제자를 거두는 게 음모면 고하가 밥 먹는 것도 음모더냐? 어째 매일 그런 거나 생각하는 게냐. 그런 거에 열중하느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게다! 다 큰 녀석이 이리도 모자라서야, 원.”
이홍성은 그냥 아무 소리도 않고 꾹 참기만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범사철이 그 슬픔을 깊이 공감한다는 듯 잔을 부딪쳐 주었다.
범건은 정왕이 자식을 타박하는 걸 그만 보고 싶었다.
“음모일 리는 없겠지만 이상하기는 하단 말이지. 고하가 수개월 동안 폐관했다가 갑자기 하늘의 뜻을 읽었다며 여제자 둘을 더 거둔다고. 뭐라더라, 하늘에서 상서로운 뭐라던데······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정왕이 천천히 술 한 잔을 비우고는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4대 종사, 인간 중 최정점에 있는 인물들. 우리가 알고 있는 세 사람 중 우선 섭류운은 제자를 거두지 않는 대범한 사람이고, 사고검은 제자를 적게 거두기는 했지만 검의 오두막이라는 뜻을 지닌 검려(劍廬)란 것을 크게 열어 동이성에서 9품 고수를 여럿 길러 냈어. 또 고하 국사는 과거에 네 명의 제자를 거뒀는데 모두 다 놀라운 재주를 지닌 걸로 유명하고.”
범한은 순간 영혼을 잡아먹을 듯 움직이던 랑도의 곡도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왕이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이들 세 종사는 여러 해 동안 제자를 받지 않았는데 고하는 왜 갑자기 이제 와서 제자를 거두는 건지······. 그야말로 천하의 일대 사건이로군. 우리 같은 사람과는 상관없지만 천하 무공 수련자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최고의 기회란 말이야. 만약 고하의 문하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무공 실력이 느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천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니······.”
정왕이 잠시 탄식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제자로 받아들여질 수만 있다면야 고하 일파와 가까운 관계가 되는 것이고. 내 보기엔 천하 군주들이 무척이나 반길 일인 것 같군.”
범한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고하는 북제의 국사입니다. 그러니 제자도 북제 사람 중에서 뽑았겠지요. 그런데 왜 우리 경국과 관계가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범건이 아들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번에 고하 국사가 문을 활짝 열었다고 했으니 그건 모두에게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가 비록 북제의 국사이기는 하나 대종사는 초월적 지위 아니겠니. 그러니 우리 경국 사람 중에서 누구든 그의 제자가 된다면 우리 황제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게다.”
범한이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대체 해당타타는 그 대종사님을 어떻게 설득한 거지? 이제 보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여인 같아!’
265화
연회가 파하고 유씨는 정왕의 첩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뒤채로 갔다. 젊은이들은 술에서 깨기 위해 호숫가로 가 바람을 쐬었다. 범사철은 어느샌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왕은 직접 가꾼 농원에서 범건 상서와 함께 대나무 의자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풀들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최근에······ 너무 거칠어졌군. 자네가 좀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
정왕의 두 눈은 말똥말똥했다. 범건 상서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연회 자리에서 보여 주었던 술주정뱅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범건이 가볍게 “네.”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뗐다.
“아이가 경도로 왔을 때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요.”
정왕이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가 통제를 안 할 거라면 설마 그 절름발이한테 맡길 셈인가? 그 절름발이는 배 속 가득 썩은 물뿐이라 대체 무슨 짓거릴 하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단 말이지.”
그러자 범건이 웃으며 말했다.
“절름발이는 원래 이 댁 출신 아닙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그리 신임하지 않으셨겠지요.”
정왕이 싸늘하게 웃었다.
“자네들 때문에 괴롭구먼. 어찌 되었든 그 일 이후로 나는 담담해졌다네.”
정왕이 눈을 감으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 저 아이 말일세, 마음씨가 참 괜찮아. 황제 폐하께서 저 아이를 너무 심하게 쥐어짜시다가 나중에 수습이 안 될 것 같아 걱정이라네.”
그러자 범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일과 관련해 저에게는 발언권이 없다는 걸 말입니다.”
정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했다.
“그냥 저 아이들끼리 놀도록 내버려 두세! 우리 형님께서 이런 연극을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말일세.”
저 멀리 호숫가에서 마작을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두 늙은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범한이 정확히 봤다네. 둘째에게는 기회가 없는데 조정의 대다수 사람들은 왜 그걸 못 알아채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정왕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 아들놈은 나랑 달라 좀 걱정이야. 나처럼 그냥 콕 틀어박혀 있으려 하지를 않아.”
범건이 정왕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했다.
“홍성 세자와 2 황자마마는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게 맞는 것 같군요.”
정왕이 싸늘하게 웃더니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했다.
“둘째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한 게 문제 같아. 호래자식 같으니. 정신 나간 완아 어미와 같이 이런저런 일들을 했으니 어찌 사달이 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 아들놈도 바보고······. 저 호래자식!”
그러자 범건이 희미하게 웃었다.
“둘째분의 어머니를 폄훼하시다니요. 숙 귀비께서는 폐하의 여인이십니다. 그리고 세자의 어머님은······ 왕야의 여인이시니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자 정왕이 크게 웃으며 또 욕을 퍼부었다.
“홍성이 어미가 죽은 지 언제인데 그러나. 지금은 지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나저나 요 늙은 놈 보소. 이제야 입이 트여서 음란한 말을 좀 하는군그래. 옛날에는 기방에서 매일 기녀나 끼고 살아 놓고는 왜 그러는지. 이제는 그거 떼버리고 여자 된 줄 알았다지.”
정왕이 의자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익숙한 주변 경관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이 저택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옛날에는 성왕부(誠王府)였지. 어렸을 때 우리 셋이 이 저택에서 함께 자라던 때가 생각나는군. 유모가 형님을 키운 후 또 나를 키우느라 정작 친아들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 그때 자네 정말 꼬질꼬질했는데.”
범건은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렸다. 그 당시 성왕은 바로 현 황제 폐하의 친부이셨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의 정왕보다도 못한 처지였고 권력도 야심도 없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왕야일 뿐이었다. 범건이 아무리 명문가인 범씨 일족의 일개 방계였다 하더라도 어머니께서 왕가로 들어와 아이들을 돌보신 건, 지금 봐도 여전히 신분에 맞지 않는 일을 하신 거였다. 그러니 집안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냉대를 받고 모진 말을 들으셨을까.
“나중에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범건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보기엔 어머니께서 담주에 계시기는 해도 자긍심을 가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리 대단한 분들을 키우셨으니 말이죠.”
“우리 셋이 싸우면 나랑 자네가 항상 편먹고 형님에게 맞서 싸웠었지. 그런데도 우리는 형님을 이기지 못했어.”
정왕이 갑자기 싸늘한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아이였는데도 형님은 정말 인정사정없으셨어. 그건 자네도 잘 알 거야.”
범건은 이에 대해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정왕은 자기 형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잘못된 점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범건에게는 황제 폐하였으므로 절대 험담을 해서는 안 되었다. 이에 범건이 웃으며 말을 돌렸다.
“누가 그때 진평평에게 폐하를 도우라고 한 걸까요? 폐하께서는 왕야보다 춘추가 많으시고 진평평은 저보다 힘이 셌지요. 그러니 아무리 우리 둘이 같이 덤벼도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그래서 나는 싸우고 싶지 않네. 그냥 편안히 지내면 그만. 내 자식과 손자도 편안히 지내면 그만일세. 이번에 둘째 조사 사건 말이네, 실은 범한이도 잘 알고 있을 걸세. 황제 폐하께서 없는 돈까지 쓰시며 아이들끼리 서로 끝까지 싸우도록 만든 거라고. 너무 모진 분이시네.”
범건은 호부 시랑직에 있어서 지금 국고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씁쓸히 웃었다.
“황제 폐하를 너무 탓하지 마시지요. 지금 돈이 정말로 궁한데도 온갖 데 은전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리고 황태후마마께서 건재하시니 황제 폐하께서도 장 공주마마를 너무 몰아붙이실 수 없는 것입니다. 범한이 그분의 칼이 되기를 원했으니 분명 무언가 알고는 있겠지요. 진평평도 성격이 갈수록 괴팍해지고 있기는 하나 범한이 손해 입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상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정왕이 범건을 잠시 바라보더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네 말이야, 여전하구먼! 뭐든 속에만 담아 두고 나한테도 털어놓지 않고 말이야!”
그러자 범건은 웃기만 할 뿐 역시나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 * *
연회가 끝나자 사남 백작가 사람들은 마차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범한은 아내와 함께 누이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한데 속에서 열불이 나 결국 몇 마디 하고 말았다.
“이 녀석 또 어디로 간 거야! 형수와 누나가 되어서 애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다니!”
임완아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범사철과 마작 연구를 하라면 했지 그 아이를 돌보라고? 자신도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판인데 말이다. 그런데 범한의 말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아무도 모르게 아랫배를 살며시 문지르며 딴생각을 했다.
‘대체 왜 소식이 없지?’
범약약은 임완아보다 두 달 어렸지만 용모나 기질 면에서는 훨씬 어른스럽고 차분했다. 그리고 범사철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건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몇 달 전 황궁에서 혼처를 정해 준 후 화살에 쫓기는 사슴처럼 정신없고 긴장되는 날을 지내는 중이었고, 더군다나 집까지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이런 와중에 오라버니가 짜증 내며 한 소리 하자 그것을 자신에게 한 말로 알아듣고 저도 모르게 억울한 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범한은 순간 자신이 이유 없이 화를 낸 걸 알아차렸다. 이제 겨우 열여섯인 어린 아가씨에게 보모 노릇이나 하라고 말하다니. 범한은 서둘러 봉합에 나섰다.
“화내지 마. 그냥 그렇다는 거야.”
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자 어린 여종들이 서둘러 차부터 내왔다. 범한이 작고 하얀 도자기 잔을 들어 차를 마시고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사사와 사기는 어디 갔지?”
그러자 임완아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하고 같이 정왕부에 갔었잖아요. 그래서 먼저 쉬라고 했어요.”
범한이 웃으며 답했다.
“우리 집 다 큰 여종들은 어째 평범한 집안 낭자들보다 더 호강하는 것 같군요.”
임완아가 범한의 말을 듣고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석두기》에서 대보 여종 중에 그 습인 말인데요. 사사죠?”
범한은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어내고는 손을 흔들며 답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은 얘기랍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범약약이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말했다.
“《석두기》에서 사사의 성격과 비슷한 건 청문이지요. 시원시원하면서도 귀염받게 행동하니까요.”
* * *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속으로만 아직 《홍루몽》 77회를 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청문이란 인물이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사와 사기 때문에 범한은 입장이 곤란한 상태였다. 이치대로라면 사사는 벌써 침소로 들였어야 했다. 그와 사사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단순히 주인과 여종이라 하기엔 감정이 깊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사를 거두게 되면 임완아가 데려온 다 큰 여종, 사기도 함께 거두어야만 했다. 아내 임완아가 강력히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매번 이 문제를 생각할 때면 범한은 이 행복감과 황당함을 동시에 느끼며 고민해야만 했다.
사사와는 감정적인 기반을 다진 게 있다지만 사기와는······ 제기랄! 한밤중에 정혼자를 만나기 위해 별궁으로 숨어들 때 밤마다 미향을 피워 재워 놓은 정은 있다만, 함께 침대에 눕는 거는 도무지 상상조차 안 된단 말이지.
사사의 경우는 올해 나이가 찰 대로 차서 더 이상 결정을 늦추었다가는 영영 시집을 못 가게 될 수 있었다.
범한이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임완아를 바라보며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조몰락거렸다. 기분 좋은 말랑말랑한 감촉. 범한은 일단 그 문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아내에게 눈짓을 보냈다. 임완아는 남매지간에 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시중을 들던 종들도 방에서 내보냈다.
* * *
“내가 너의 어떤 점을 제일 좋아하는지 아니?”
범한이 누이에게 직접 차를 따라 주고는 웃으며 말했다.
범약약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백옥 같은 손으로 머리에서 비녀를 살며시 빼냈다. 머리에 얹어 두었던 머리카락을 편안히 늘어뜨리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자 어깨 위 새하얀 의복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녀가 찻잔 속에 남아 있던 차를 손가락에 묻혀 이마에 문지르며 고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저 요즘 우울해 죽겠어요. 그러니 그만 놀리세요.”
찻물을 이마에 묻힌 건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는 범한이 습관적으로 하는 동작이었다. 한데 범약약도 그게 습관으로 굳어져 있었다. 범한은 식은 차를, 범약약은 살짝 미지근해진 차를 사용하지만 남매라 그런지 비슷한 습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너를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야.”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약약아, 너 정말로 침착하더라. 오늘 정왕부에서 어른들께서 혼사 이야기를 하실 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 그런데 당사자인 너는 낯빛 하나 안 변하더라. 심지어 심박수도 그대로였고. 정말 대단했어.”
범약약은 원래 담담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에 관한 일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녀가 아주 엷게 웃는 얼굴로 오라버니를 보았다.
“오라버니가 집에 안 계실 때는 그냥 막막했거든요. 한데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시고 나니 그런 느낌이 없네요. 모두 오라버니가 계셨기에 가능한 거였어요.”
범약약이 부른 세 번의 오라버니라는 호칭이 거대한 산이 되어 범한의 몸을 짓눌렀다. 순간 범한은 모든 걸 다 관두고 상관하지 않고 싶어졌다. 이에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정하신 혼사란다. 왕야께서도 기꺼이 원하시고 아버지도 기뻐하셔. 세자께서는 풍류 가인으로 유명하시지만 경도에서는 가장 우수한 젊은이시지. 그러니 이번 혼사는 물리기엔 너무 어렵구나. 약약아, 네가 나를 믿어 주는 게 조금 부담감으로 다가온단다.”
범약약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말했다.
“어찌 되었든······ 저는 오라버니 말을 들을 거예요.”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사리리에 대해 기억하고 있니?”
볌약약이 오라버니의 표정을 보며 조금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를 죽이려던 여자였죠.”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맞아. 나는 그녀가 이 세상 여자들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어. 그녀의 행동이 옳고 그른 걸 떠나 그녀는 적어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 원했던 것을 했지. 북제 상경으로 가던 길에 그녀에게 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물어봤어. 사리리가 그러더라. 어쩌면 어릴 때 집안이 망해 부득이하게 도망 다니며 천하를 떠돌게 되어서일 거라고. 이 세상의 평범한 여자들보다 자신은 더 많은 곳을 다녀봤고 조금 더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범약약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만 리의 길을 가려면 만 권의 책을 읽으라고 말씀하셨어요. 인생에 매우 유익한 일이라면서요.”
“그래, 맞아. 그게 바로 내가 북제로 가기를 원했던 이유이기도 해. 하지만 독서는 언제든 할 수 있는 거잖아.”
범한이 누이를 따스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풍경과 인생을 보는 건, 실은 매우 어려운 일이야. 특히나 너처럼 경도 내 관리 집안에서 자란 아가씨들에게는 말이야.”
범약약이 살짝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렸을 때 담주에서 1년 살았던 것 빼고 제 평생 가장 멀리 가본 건 창산이었어요.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신 무도하강이니, 북제 사람, 초원의 풍광 같은 것들은 당연히 볼 기회가 없었지요.”
“보고 싶니?”
범약약은 머뭇거렸다. 그러다 한참 후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266화
범약약의 성장 과정에는 항상 범한의 꾸준한 ‘망쳐 놓기식’ 교육이 있었다. 그 결과 범약약은 일반 벼슬아치 집안 아가씨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말해 준 세상 풍경과 인간 삶의 백태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꿈틀거렸던 터다. 경국 여인들은 출가하기 전에는 경도 여기저기를 다니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출가한 후에는 저택 안에서만 지내야 했고, 여행을 가게 되더라도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다닐 수 없었다. 갇혀 사는 삶이라······. 이에 범약약은 자신이 무지몽매한 일생을 살게 될 거란 생각이 들 때마다 그것은 오라버니가 원치 않을 것이고 탐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범한은 깊숙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서부터 누이가 마음의 창을 열고 바깥세상 구경을 하도록 만든 건 자신이니 이제는 누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자님과 혼례를 올리기 전에 내 어떻게든 네게 떠날 수 있도록 해주마.”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어 갔다.
“다 계획에 있는 일이었어. 오늘 왕야와 아버지의 반응을 보니 내 계획이 실행 가능하다는 걸 알았거든.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말이다.”
범약약은 경도에서 알아주는 재녀였다. 그러니 얼음처럼 냉철한 총명함으로 오라버니의 뜻을 이내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라 말했다.
“설마······ 오라버니, 설마 제게 고하 대사의 문하생으로 가란 말씀이세요?!”
범한이 범약약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리고 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정신 좀 차렸느냐?”
범약약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이에 한동안 웅얼거리더니 가까스로 제대로 된 말 한마디를 뱉어 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데요?”
“왜 불가능한데?”
범한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고하가 제자를 모집한다잖니.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 고하가 하늘에서 상서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수를 쓰기는 했는데, 특정 나라 사람만 받는다고 한정하지 않았단다. 우리 누이는 재능 많기로 유명한 여인이니 네가 제자가 되어 주면 고하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게 돼. 그러니 고하로서도 안 받아 줄 리 없겠지?”
범약약은 그 말을 장난으로 알아듣고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저는······ 무공을 못 해요.”
“세상 만물의 도는 다 하나로 통한단다.”
범한이 범약약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너는 재녀(才女)이지 않니! 시를 잘 지으니 싸움박질하는 것도 빨리 배울 거야. 고하는 천일도의 대종사니까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일 거다.”
범약약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웃는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때 가서 또 하늘에서 상서로운 계시가 내리면 어떻게 하죠?”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일은 내게 맡겨 둬. 세상에 상서로운 계시 같은 게 어디 있겠니? 며칠 뒤에 집 안 주방에 물고기 한 마리 잡아다 넣고 거기에 종이나 좀 넣어 놓으면 되는 거지 뭐.”
범약약은 여전히 얼굴에 담담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추궁하듯 물었다.
“그 일 말이에요. 오라버니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셨던 거죠?”
범한은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잠시 후 씁쓸하게 웃었다.
“너는 못 속이겠다. 북제에 있을 때 준비해 놓은 일이었어. 한데 네가 이홍성 세자께 시집을 가기로 결정하면 계속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지. 한데 네가 혼인은 싫다 하니 계획해 놓은 대로 할 수밖에.”
“북제?”
범약약이 미소를 띤 채 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이제 보니 해당타타 낭자와 오라버니의 관계가······ 역시 괜찮았던 거군요.”
이건 범한이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해당타타가 1대 종사에게 산을 열어 새로이 제자를 맞도록 만든 일은, 범한과의 관계가 별것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범한이 이 일을 꾸미기 위해 다른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제왕만큼 존귀한 대종사님을 어떻게 자기 연극에 끌어들일 수 있었을까?
“북제에 가서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하고 싶은 생각 없니? 다른 나라로 가서 유학하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범한이 직접적으로 누이에게 물었다.
범약약이 고개를 숙이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을 해보았다. 무슨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범야약이 고개를 들고 울적해하며 힘겹게 말했다.
“한데 아버지는 어쩌지요?”
그러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모시고 있잖니. 그러니 한 2년은 마음 푹 놓고 다녀오렴.”
“한데······ 그렇게 한다고 혼사를 무를 수 있을까요?”
범야약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고하의 체면이 있잖아, 북제의 그 이상한 황제보다 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 경국의 황제 폐하께서도 고하 정도는 체면을 세워 주셔야 할 거야. 다시 말해 네가 고하 문하로 들어가면 명목상 네 혼례는 2년은 연기되는 거란다. 정왕부에 핑계를 대기도 훨씬 수월해지는 거고.”
범야약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범한이 얇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세자에 관해, 특히 조정에서의 다툼에 대해 누이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만약 말해 준다면 범약약은 분명 오라버니가 자신의 ‘파혼’을 위해 이리 번거로운 일들을 벌인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싸늘해 보여도 마음씨 따뜻한 누이는 어쩌면 이를 악물고 차라리 혼인하는 편을 택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네가 이제 겨우 열여섯이란 거야!”
범한이 정의롭고 늠름하게 말했다.
“열여섯은 말이지, 아직 발육도 끝나지 않은 상태야. 그러데 혼인을 하겠다고? 이건 엄연한 박해야!”
범약약의 뽀얀 얼굴이 어느새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너무나도 부끄러워 주먹으로 범한을 한 대 툭 치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되어서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범약약은 따지듯 한마디 더 하려 했다. 그러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용기를 내 그 말을 꺼냈다.
“새언니가 시집올 때 만 열여섯도 안 된 나이였잖아요!”
범한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 * *
“오라버니, 사실······ 진짜 경도를 떠나 천하를 둘러볼 수만 있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범약약의 눈에는 자유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다.
“다만······ 오라버니 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당황스럽고 두려워요.”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바보. 사람은 누구나 자립하기 전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야. 어려서 첫걸음을 뗄 때처럼 말이지.”
범약약이 입술을 가리고 웃었다.
“그런가요? 한데 담주에 있던 사람에게 듣기로는, 오라버니는 어릴 때 다른 사람보다 빨리 걸었대요. 그리고 걷기 시작하자 바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던데요. 두려움 따위는 전혀 없으셨다고요.”
그러자 범한은 속으로 ‘나는 이상하게 태어났으니 그렇지. 그러니 평범한 사람은 절대 그렇게 못 해!’라고 생각했다.
“됐고, 그냥 네 의견을 물어본 것뿐이란다. 어찌 되었든 네가 원한다니 그 일은 내게 맡겨 줘!”
범한이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 오라버니가 제대로 해줄게. 너는 내 하나뿐인 누이니 너를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람으로 만들어 줄게!”
범약약은 감동해서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고하 대종사가 제자를 받는다는 일을 생각하다가 문득 해당타타 낭자를 떠올렸다.
‘오라버니와 그 낭자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다 범약약은 저도 모르게 몰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언니가 오라버니께 드릴 물건이 있으시대요. 이제 들어오시라고 할게요.”
범한은 놀라 누이가 문밖으로 사라지는 걸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범약약이 고요하고 휑한 후원을 걸어 나가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짙게 깔린 구름이 바람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잿빛 하늘과 구름 사이에서 보푸라기가 인 것처럼 새어 나오는 햇살에 가슴이 답답했다.
범약약은 가지런하게 정렬된 감탕나무 윗부분을 손으로 훑으며 걸었다. 그리고 내년에 이국 타향에서 지낼 생각을 했다. 그러면 이 숨쉬기 힘든 경국 공기에서 벗어나는 거였고, 신분 높은 아가씨들의 무료한 시모임에서 벗어나는 거였으며, 상상조차 하기 싫은 혼례에서도 벗어나는 거였다. 순간 기쁨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이내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쥔 범약약. 연약한 여인의 손이다 보니 금세 나뭇잎에 찔리고 피부가 벗겨져 아파 왔다. 그녀는 순간 자신에게 두 손을 아끼라고 한 스승님의 말이 생각나 전광석화처럼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쪽으로 가야 할까, 아니면 스승님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한번 조언을 구해야 할까?’
* * *
“약약이와 무슨 이야기 나눴나요?”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시누이를 바라보며 사뿐사뿐 방 안으로 들어서는 임완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하는 말을 했다.
“비밀이에요.”
임완아는 삐져 화장대 앞에 앉아 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가 빗을 받아 들고 아내의 머리를 빗겨 주기 시작했다. 빗살은 걸리는 것 없이 머릿결을 따라 매끄럽게 흘러내려 갔다.
범한이 딴소리를 했다.
“당신과 누이는 둘 다 머릿결이 정말로 좋아요.”
임완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모두 상공이 담주 계실 때 만든 물건들 덕분이죠. 머리 감기에 편하니 관리도 편한걸요.”
범한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가가 냄새를 맡아 보았다. 머리에서 이상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은은하게 맑은 향이 났다. 그러자 임완아가 화가 나 때리는 척하며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평소에 나랑 붙어 있었으면서 실은 전혀 관심도 없던 거였어요.”
임완아의 등 쪽에 서 있던 범한은 시선을 아내의 목 근처 옷깃을 여미는 곳에 두고 훑고 있었다. 살짝 들뜬 옷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피부를 보고 심장이 방망이질 쳐대는 통에 농담처럼 말했다.
“붙어 있는다고 해서 꼭 마음을 쓰는 건 아니잖습니까. 하나 눈으로는 가능하지요.”
상공의 말뜻을 알아들은 임완아가 부끄러워 얼른 옷깃을 여몄다. 그녀는 집 안에서도 옷을 대충 입고 있는 법이 없었다. 문제는 색마인 상공이 똑똑하게도 최고의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범한이 아내를 품에 끌어안으며 그녀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코를 묻고 다시 몇 차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근심스럽게 말했다.
“최근 들어 무언가 강한 갈망 같은 게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임완아는 상공이 부끄러운 일들에 대해 말하는 거라 생각했다. 이에 토라진 소리를 내고는 범한을 품에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강철 같은 팔은 어떻게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심술 그만 부려요. 누이와 나눈 말은 한동안 말해 줄 수는 없어요. 그래도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될 거예요.”
임완아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나 신중한 거예요?”
범한이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일이 될 수도 있거든요.”
순간 범한은 누이가 해준 말이 떠올라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약약이가 당신이 내게 줄 게 있다고 그러던데 뭡니까?”
임완아가 화가 나,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런 배신자! 상공이 하는 거 보고 주려고 했는데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러자 범한이 껄껄 웃었다.
“어차피 줄 거 아닙니까. 그러니 부디 군주 마나님, 그만 이 소인에게 하사하여 주시옵소서!”
임완아가 입술을 뽀로통하게 하고는 말했다.
“안 줄래요!”
그러자 범한이 음흉한 표정으로 아내의 허리춤을 더듬기 시작했다. 범한의 손이 이리저리 비비고 꼬집어 대자 임완아가 당황한 비명 소리를 질러 댔다. 결국 패배한 임완아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범한의 얼굴에 던졌다.
“여기요. 그러니 나 좀 놓아줘요!”
향기가 얼굴을 덮치는 순간 손수건 하나가 얼굴로 날아왔다.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풀고 손수건을 집어 들고는 멍하니 있었다.
수가 놓인 손수건이었다. 원앙 한 쌍이 푸른 물결 위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참으로 좋은 천으로 황궁에 들어오는 공물로 강남에서 만든 최상품이었다. 실도 좋은 실이었다. 황금색,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모두 소주부에서 정선해 올린 물건들로 보였다.
수에 담긴 의미도 훌륭했다. 원앙 한 쌍과 푸른 물결, 물 위에 복숭아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세 개의 나뭇가지 위에 꽃까지 활짝 피어 있었으니 말이다.
267화
다만······.
수를 놓은 실력이 정말로······ 이게 뭐야!
수실이 성글게 채워져 있었다. 실 옆에 콕콕 나 있는 수많은 작은 구멍은 수놓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망설였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수실이 삐뚤빼뚤해서 상징물들이 뜻하는 바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자태를 뽐내야 할 원앙은 물속에 사는 웃긴 괴물이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복숭아꽃을 추가하는 바람에 급기야는 해체주의식 작품으로 변하고 말았다.
범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수건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파란 물결은 몇 개의 물결무늬로 이루어진 선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이건 수를 꽤 잘 놓은 편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노란색 실을 쓴 거지? 설마 황하가 물새로 변하는 과정을 수로 표현한 건가?’
꾹 참아 가며 이리저리 살펴보던 범한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웃음소리가 저택 안에 울려 퍼졌다. 진즉에 그 이유를 알고 있던 임완아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새 시누이의 방으로 도망가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수치스럽게도 자신을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화가 단단히 나 영웅 같은 기개로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허리에 얹어 두었던 한 손을 엄지와 검지만 접고 쭉 뻗어 딱밤이라도 때릴 기세로 범한의 코에 손을 들이대며 한마디 했다.
“웃지 마요!”
임완아는 화가 잔뜩 나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한데 그 모습이 더 웃겼던 범한은 어느새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배를 움켜쥔 채 의자에 앉은 채로 오뚝이처럼 몸을 앞뒤로 굴리기 시작했다.
임완아는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순간 자기도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이에 바로 앞으로 튀어 나가 범한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았다. 하지만 범한은 빼앗기지 않고 꽉 움켜쥐며 손수건을 자기 품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겨우겨우 웃음을 멈추고 정색하며 말했다.
“완아, 좋소이다. 당신이 내게 처음 수를 놓아 준 것이고, 이왕 이렇게 준 거 도로 가져가지 말아요.”
임완아는 고귀한 신분으로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랐다. 항상 보모와 궁녀들이 시중을 들어 주었으니 바느질 같은 여자들이 하는 노동을 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아내가 실력이 형편없음에도 자신을 위해 손수건에 수를 놓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깊은 사랑이 느껴져 매우 감동하고 있던 터였다.
이에 사랑스럽다는 듯 아내의 두 손을 잡고 발갛게 된 손가락 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이 아픈 듯 대파의 흰 대처럼 새하얀 손가락에 후후 바람을 불어 주었다.
“다음부터는 수 같은 거 놓지 마요. 내가 대신 놓아 주리다. 담주에서 할 일 없을 때 며칠 배운 적 있거든요.”
범한의 다정한 표정에 임완아는 마음이 따스해져 왔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범한의 몇 마디 말 때문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상공은 생긴 것도 나보다 예쁜데 어떻게 또 여인들이 하는 일까지 할 줄 아는 겁니까. 게다가 이렇게나 세심하고······.”
임완아의 입이 오그라들면서 곧 울 것만 같았다.
“범한, 당신 때문에 나 못 살겠어!”
“이런 바보.”
범한이 사랑스럽다는 임완아의 부드러운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만약 그런 일로 못 살겠다고 하면 경도의 지체 높은 가문 아가씨들은 몽땅 자살하란 말입니까? 대체 누구랑 비교를 하는 겁니까? 나 같은 천재하고 비교하는 건가요? 그런데 어쩌죠? 이 상공은 무공 실력도 장군보다 뛰어나고, 시도 잘 쓰고, 형장에서 소란도 피웠고, 우아하게 앉아 수도 놓을 줄 알고······. 내가 누구라서? 바로 불세출의 천재라서!”
범한이 자화자찬을 늘어놓자 임완아가 울음을 뚝 그치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범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며 말했다.
“너무 기고만장하군요!”
범한이 말 못 할 모욕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신을 아내로 맞았으니 당연히 있는 힘껏 기고만장해야지요.”
임완아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얼른 손을 뻗어 범한의 품 안을 더듬었다. 그러자 범한이 황급히 자신의 몸을 정탐하는 임완아의 손을 막으며 말했다.
“이미 줘놓고 빼앗아 가려고요?”
순간 임완아의 눈에 자신감이 스쳤다.
“내 걸 뺏으려는 게 아니라 당신 걸 빼앗으려는 거지요.”
범한은 순간 깜짝 놀랐다. 임완아가 자신의 품에서 꽃무늬 두건을 꺼내고 있었다. 그건 범한이 상경을 떠날 때 해당타타의 머리에서 훔쳐 온 것이었다. 임완아가 범한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상공이 내 걸 가져갔으니 이거는 내가 보관할게요!”
범한의 머릿속에서 웅! 하는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아내가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참아 가며 몰래 이 손수건을 만든 이유를 이제야 알아차려서였다. 바로······ 질투심 때문이었다. 자신과 해당타타 사이에 남녀 간의 일은 없었지만 물증이 여기에 떡하니 있었으니. 범한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대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 더듬거리며 몇 마디 겨우 내뱉을 뿐이었다.
“완아, 오해했어요. 전에 해당타타는 별로 특색 있게 생기지 않았다고 말했었잖아요. 당신 상공인 내가 어떻게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었겠어요!”
그러자 임완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은 취향이 남달랐어요. 애초에 나를 만날 때마다 예쁘다고 칭찬하는 게 너무 이상하기는 했어. 그런데 그때는 아첨 잘하고 남 칭찬하는 거 좋아한다고만 여겼었죠. 그런데 나중에 약약이를 통해서 알게 됐죠. 당신은 정말로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더라고요. 바로 그거예요. 상공의 안목은 남들과 달라요. 그러니 어떻게 당신 말을 믿겠어요!”
범한이 화를 냈다.
“대체 어떤 놈이 내 아내에게 못생겼다 한 거요!”
범한이 평소 하던 모습 그대로 임완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요!”
범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내 안목이 정말로 문제가 있는 거예요?”
임완아가 입을 가리고 웃다가 갑자기 정색했다.
“말 끊지 말아요.”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해당타타의 두건을 흔들며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이건 이제 내 거예요. 괜찮겠죠?”
범한이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임완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 문 입구 쪽에서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해당타타 낭자를 이 집으로 들이든가, 그 마음을 접든가! 사내대장부가 매일 이 머릿수건이나 끌어안고 그리워하기나 하고 말이야! 당신 행동이 너무 박력 없고 소심해서 아내인 나조차도 부끄럽다고요!”
범한이 손을 입술에 댔다가 임완아를 향해 날리며 비웃었다.
“그 말뜻은 내가 당신보다 훨씬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거네요.”
임완아가 혀를 차더니 화를 냈다. 그 순간 범한은 중요한 일 하나가 생각나 긴장하며 물었다.
“완아, 당신 생일이 얼마 전에 지났잖아요. 우리가 혼인했을 때 당신 나이가 만 열여섯도 안 됐었지요?”
임완아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범한이 가슴팍을 툭툭 토닥이며 말했다.
“그러면 됐어요. 된 거예요.”
* * *
다음 날 사남 백작가 밖 마차 안.
“대인,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사천립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자기 스승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냐하면 스승이 오늘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어서였다. 지금 대체 뭘 계산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매우 음험한 미소였다. 경도 상황이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스승께서는 설마 아직도 관둘 생각이 없으신 건가?
범한은 수가 놓인 손수건을 보고 있었다. 손수건 위 이상한 모양의 물새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속은 좀 쓰린 상태였다. 해당타타가 머리에 두르고 있던 두건을, 그것도 9등급 상의 강자가 하고 있던 것인데. 그걸 직접 훔쳐 오는 건 범한에게도 정말로 큰 모험이었다. 한데 처에게 몰수당하는 게 최종 결과라니!
범한이 고개를 들어 사천립과 등자월의 궁금증에 찬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이를 한번 악물고는 사납게 말했다.
“가보세! 포월루에 가 보세. 본관이 가정사가 순탄치 않아 기분을 좀 풀어야겠네. 그리고 간 김에 포월루 낭자들과 함께 수를 놓는 것에 대해 이야기도 좀 나눠 봐야겠네.”
포월루 여인들은 자수를 놓지 않았다. 대신 그녀들이 취급하는 건 자수 바늘이었다. ‘공력이 심후하면 쇠 절굿공이도 바늘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가 그녀들의 장사 비법이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의 공력과 능력은 꽤나 괜찮을 것 같았는데······.
오늘 변장은 일찌감치 끝냈기 때문에 범한 일행은 1처에 들러 일반 마차로 갈아타기만 했다. 덜그럭거리던 마차는 성 서쪽 외진 곳에 위치한 3층 건축물 앞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일찌감치 나와 있던 일꾼이 재빠르고 능숙하게 말고삐를 넘겨받았다. 이어 말끔한 차림새의 안내인이 범한 일행을 맞았다.
범한은 오늘 눈썹 쪽을 살짝 변형했다. 그리고 범사철을 흉내 내 왼쪽 뺨에 작은 마맛자국을 만들었다. 그러자 아주 작은 변화임에도 범한의 얼굴은 훨씬 어두침침해 보였다. 이곳은 정보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였다. 그러니 범한은 자신이 아무리 경도에서 유명한 범한 제사일지라도 이곳 사람 중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 여겼다.
포월루는 평범한 목조 건축물을 3층 이상으로 개조해 놓은 곳이었다. 그리고 층간 간격을 좁히는 방법을 통해 건물의 안전성을 높였다. 이 포월루 건물은 높이가 높고 폭은 좁은 형태였다. 그래서 건물 앞에 서면 건물 뒤쪽에 있는 하늘이 보일 정도였다.
범한은 한눈에 이 건물에 쓰인 목재가 북쪽에서 가져온 상급의 나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건물로 발을 내디뎠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문 앞에 세워져 있는 기둥을 손으로 만지며 자신의 판단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1층 대청에는 벌써 적지 않은 손님들이 와 있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한쪽에 한 장 정도 높이의 낮은 대가 있었고 그 위에 소박하게 꾸민 여인들이 금을 타고 있었다. 맑은 금 소리는 기분 전환을 해주기에 충분했다.
보면 볼수록 이 기생집이 범상치 않다는 생각에 범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세 사람이 안내인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뒤쪽에 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범한이 먼저 난간 쪽에 자리를 잡고는 등자월과 사천립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범한은 난간에 기대앉아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난간 아래쪽으로 푸른색과 금칠을 활용해 그린 선계 궁전 그림이 있었다. 새로 문을 연 기생집에서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화려하게 치장을 해놓았다니. 범한은 주인이 참으로 돈이 많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분명 황자 중 한 사람과 관련 있을 수도 있다는 목철의 판단이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포월루는 분명 기이한 게 있었다. 그리고 그 기이함은 바로 고상함과 특이함에서 나왔다.
이때 특이함이란 기생집 하면 떠올리게 되는 그런 게 없다는 뜻이었다.
포주가 호객을 하지도 않았고, 기생 어미가 짙게 분을 바르고 맞으러 나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얇은 사만 뒤집어쓰고 가슴을 드러낸 농염한 여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담담하고 신선한 게 전혀 기생집 같지 않았다. 범한이 경도로 온 지 1년 반, 그동안 가무와 여색을 파는 곳을 몇 차례 가보기는 했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난간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가슴이 살며시 떨려 왔다.
이 기생집 건물인 기루는 길을 끼고 서 있었지만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또 건물 뒤쪽에는 길고 좁은 형태의 호수가 있었다. 바로 경도에서도 유명한 수호(瘦湖: 마른 호수라는 뜻)였다.
난간 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살짝 차가운 것이 상쾌하면서도 마음을 편안히 해주었다. 범한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하겠는지 난간을 두드리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밖을 살펴보았다.
기루 뒤쪽, 호수 양쪽으로 가을에 접어든 나무 사이로 여러 개의 작은 정원들이 숨어 있었다. 가끔씩 회백색의 담벼락도 보였는데 이 역시 단아함의 극치였다. 시력이 좋은 범한의 눈에 작은 정원들 뒤쪽으로 오수 하수구가 보였다.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 수많은 낭자들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앞쪽에 놓인 포월루 건물은 단순히 손님을 맞아 장사하는 주루이던데 아무래도 진짜 즐거움이 있는 곳은 바로 저 자그마한 정원 내부인 듯 보였다.
누군가가 찾아오는 명산이 되려면 산 앞에 안개라도 짙게 깔려 줘야 절경을 찾아온 여행객들의 마음이 최대한으로 고양되는 법.
포월루의 3층 목제 건물이 명산 앞 운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건물 뒤쪽에 작은 정원들을 배치해 꽃을 찾는 기루 유객들의 들뜬 마음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자극하기 위해서 말이다.
268화
범한이 보기에 이 기생집 경영자는 대단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이에 그 사람을 회유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황실 금고를 맡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그가 기녀의 목숨을 취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범한은 기생집 장사를 그 본질에만 입각해 보고 있었다. 창기를 사는 손님은 손님이고 창기는 창기라고. 다시 말해 한쪽은 돈을 내고 다른 한쪽은 몸을 내놓는 거래라고. 그러니 아무리 비계 낀 살덩어리를 시 3백 편을 둘러 포장한다 하더라도 그 본질까지 없앨 수는 없는 거라고 말이다.
범한은 호숫가 정원을 슬쩍 몇 번 보고는 어느새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사람이 슬그머니 죽어 나가는 산장에서 하루에 대체 얼마나 돈을 버는 건지. 그렇지만 머릿속을 줄곧 점하고 있던 생각 때문에 그런지 범한은 이내 이곳이 질려 버렸다. 바로 이 맑고 우아해 보이는 정원의 진흙 아래에 연약한 여인의 뼈가 묻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슬슬 진이 빠져 가고 있을 무렵, 사천립은 벌써 음식 주문을 마친 상태였다. 포월루는 접대 수준이 매우 높았다. 이에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스물서넛은 되어 보이는 젊은 일꾼 둘이 어느새 쟁반을 받쳐 들고 올라왔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도자기 접시들을 정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하게 식탁 위에 놓았다. 참으로 훈련이 잘된 이들이었다.
접시 위에 올려진 음식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산차(山茶)와 새우로 만든 담백한 요리, 투명한 기름 막이 살짝 떠 있는 닭 가슴살 탕, 가정식으로 많이 해 먹는 음식이지만 파채를 넓게 얹은 기름진 소고기 육편, 그리고 모양이 예쁘게 만들어진 안주용 음식 몇 가지였다.
말끔한 이목구비의 잘생긴 일꾼들이 세 사람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러자 사천립이 손을 흔들어 그들을 물러가도록 했다. 스승 앞에서도 과감히 자기 주관대로 행동하는 사천립. 범한은 자기 문하생의 이런 소탈한 모습을 가장 좋아하는 터였다. 이에 미소 지은 얼굴로 사천립을 잠시 바라보았다.
작고 조잡한 나무 국자로 닭 가슴살 탕을 살살 휘저었다. 그러자 줄곧 숨어 있던 음식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범한에게는 참기 힘든 맛 좋은 냄새였다. 사천립이 건넨 탕 그릇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범한은 이내 한마디 해버렸다.
“좋다!”
* * *
범한의 오늘 위장명은 진 공자였다. 진평평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주안상을 앞에 두고 세 사람이 친구처럼 풍경 감상을 하며 음식과 술을 나누었다. 그리고 대화의 주제는 경도에서 일어난 재미난 일들이었다. 등자월은 계년조 책임자로 항상 제사의 안전을 걱정해야 했다. 이에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없는 포월루에서는 전혀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조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술도 들어가고 범한이 엄한 눈빛으로 압박하니 결국에는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고 말았다.
총 세 번의 술잔이 돌았다. 그러자 사천립이 참기 힘들었는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진 공자님, 그런데 우리가 오늘 여기에 왜 온 것입니까?”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경도에서 제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걸 누리러 왔······.”
주변에서 훔쳐 듣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범한이 그제야 작은 소리로 사정 설명을 해주었다.
“목철이 알려 준 곳이네. 그에게도 당연히 생각이 있겠지만 감히 설명을 못 하기에 무언가 숨은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 그리고 우연히 이곳에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온 걸세.”
사천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이 기생집 여인들이 가엾습니다. 하오나 웃음을 파는 이는 천하에 널린지라. 또한 경국 율법에서도 허용한 일이고요. 하온데 무엇 하러 이런 위험한 곳까지 대인께서 친히 오신 것입니까?”
범한은 젓가락으로 얇고 투명한 소고기를 콕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씹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 포월루에서 한 달에 무려 네 명의 여성이 죽었다더군. 어찌나 악랄하게 죽였는지 본 공자에 비할 바가 안 되어 좀 배우러 왔네.”
사천립이 인상을 썼다.
“형사 사안은 모두 경도 부윤이 처리합니다. 감찰원은 관원을 감찰하는 책무만 있고요. 그러니 이 살인 사건에 끼어들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분명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요.”
술이 조금 더 들어가고 나자 담력이 더 커진 등자월이 말했다.
“정작 조사해야 할 건 경도 부윤의 독직죄지요. 게다가······.”
등자월이 말을 멈추고 잠시 범한을 보고는 허가를 얻은 후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 포월루의 진짜 주인을 감찰원에서 찾아내지 못했다더군요. 그래서 조금 이상하게 여겨지는 거랍니다.”
사천립은 속으로 많이 놀랐다. 그가 아는 감찰원의 밀정은 경도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각 왕가와 대신들의 집에도 숨어들어 수많은 걸 보고 듣고 있으며 놀라운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겨우 한 달 만에 2 황자와 신양 쪽의 관계도 알아냈으니. 그런데 단순히 기루처럼 보이는 포월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진짜 주인을 찾아내지 못했다니.
사천립은 계속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리고 딱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 기루의 숨은 주인과······.
사천립이 자기 뜻을 알아차렸음을 알고 범한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주인이 8대 처에게 껄끄러운 존재인 걸 보니 누군가의 비호를 받고 있는 것 같으이.”
감찰원의 최고의 장점은 내부에서 큰 문제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전문성과 반복성을 통해 구성된 체계가 조직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1처 주격 사건이 터지고 말았고 감찰원 내부자들은 경악했다. 그런데도 주격이 죽은 지 채 이틀도 되지 않아 감찰원 내에서 황자들을 위해 나서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는 범한이 가장 걱정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감찰원 제사였다. 그러니 자신의 영역 안에서 그 누구도 행패를 부리도록 놔둘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오늘 직접 이 포월루에 와보기로 한 것이었다. 누가 자기 밥그릇 안에 몰래 젓가락을 들이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겸사겸사 불쌍한 부하들의 무료한 삶을 위로도 해줄 겸 온 것이었다.
* * *
“그렇다면 이 제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천립은 차분하고 신중한 성품의 소유자로 일개 서생이었다. 그러니 이 아슬아슬하고 자극적인 일 앞에서 역력히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범한이 말했다.
“닭 잡을 손아귀 힘도 없지 않은가. 이왕 온 거 그냥 여기저기 구경이나 하게나.”
범한이 사천립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어 갔다.
“내 공금으로 자네에게 한턱내는 거네.”
사립천은 잠시 놀라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이내 대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미혼이란 사실이 생각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범한은 오히려 의외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자네와 후계상 모두 경도에서 수학했다던데 설마 기생집에 가본 적 없었던 건가? 만나 본 아가씨도 하나 없었고?”
사천립이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이 제자가 무능하여 그렇습니다.”
범한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데서는 그리 쉽게 무능하다 말하는 게 아닐세.”
* * *
얼마 후 하늘의 색상은 저녁을 향해 가고 석양이 호수에 기다란 그림자를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한데 날씨는 좋지 않았던 탓에 수면 위에 찍힌 황금 인장(印章)은 조금 어두침침했다. 포월루에도 속속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마법을 시전한 것처럼 무수히 많은 등불이 순식간에 켜지며 건물 전체에 불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등불은 다시 호숫가에 비쳤다. 그러자 호수에 별이라도 빠진 듯 석양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경관이 만들어졌다.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포월루에서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이 시작되었다. 많은 마차들이 건물 앞에 서고 그 마차에서 평상복을 입은 이들이 내리는 게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했다. 한데 그들의 걸음걸이에서 벼슬아치 같은 거만함이 풍기는 걸 보아 모두 포월루에 자주 드나드는 경도 관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부유한 상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감찰원이 공무 중 사용하는 은전은 사천립에게 기생을 사주는 데 써도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6부 관원들은 부호들의 돈을 받아먹는 데 그냥 익숙해 있는 것이었다. 그편이 체면도 서고 안전해서였다.
난간 주변도 점차 어두컴컴해지며 범한 일행도 어둠에 휩싸였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뛰어난 시력으로 상황을 살폈다. 전에 연회에서 보았던 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몇몇 고관들은 곧장 예약해 둔 방으로 들어가 범한은 그들이 누구를 대동하고 왔는지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방이 모두 차자 2층에도 사람이 붐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악기 연주 소리,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는 소리가 잡다하게 섞이며 주변이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가슴 가리개만 입고 나온 아름다운 여인들이 건물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서 그녀들을 불러 대기 시작했다.
범한이 식탁 위에 남아 있는 음식과 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 주인이 내 신분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다른 문제가 생길지 모르겠군.
“즐기고들 있게나.”
범한이 분부를 내리자 긴장한 사립천이 물었다.
“대인, 어디 가시려는 것입니까?”
범한이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쉬러 온 거네. 그러니 좀 즐겨야 하지 않겠나.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면 호랑이 새끼라도 잡아야 하는 걸세.”
범한이 온화하고 순수하게 말했으니 두 사람 모두 그 말을 믿어 줬어야 하는데 무언가 뒤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기생집에 왔으면 기생과 놀아야 한다, 뭐 그 정도 이야기로 알아들었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잠시 후 풍류를 즐길 때 이것만 기억하고 있게. 주인장에 대해 묻지 말고 여기 여인들의 일상에 대해서만 물을 것. 대신 자세할수록 좋다네. 물론 여의치 않다면 묻지 말고. 제일 중요한 건 남들이 보았을 때 우리에게 특별한 용무가 있어 보여서는 안 되는 거네.”
등자월이 제사 대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야 대인이 황명을 핑계 삼아 기생과 놀러 온 것이 아닌 암행 조사를 나왔음을 확신하게 되어서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상대를 떠보며 알아내는 조사는 자기 품계의 관원도 하지 않는 일이어서 당당한 제사 대인께서 굳이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이때 건물 아래 호숫가의 작은 정원에서도 금귤처럼 생긴 작은 등잔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등자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꾼을 불러 말했다.
“우리 도련님 좀 모시고 가주게.”
일꾼이 손을 뻗자 손가락 마디 크기의 금이 쥐어졌다. 그는 순간 소름이 돋고 말았다. 이들이 돈 많은 손님인 걸 이제야 알아채서였다. 이에 일꾼은 당장에 이 사실을 알리고 말재주가 좋은 안내인을 불러오도록 했다.
안내인이 서둘러 올라오더니 부드럽고 완곡하게 일찌감치 알아뵙지 못해 송구하다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고는 세 사람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갔다. 그는 조심스레 범한 일행을 부축해 주며 타고난 입담으로 말을 걸었다. 마치 이 귀한 손님들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알아내려 하는 것 같았다.
범한은 당연히 그를 상대하지도 않고 뒷짐을 진 채 걸어가기만 했다.
사천립은 뒤쪽에서 안내인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들이 강남에서 온 수재들로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 온 거라 여기에 어떤 재밌는 것들이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내인이 웃으며 말했다.
“세 분 어르신, 저희 포월루에는 여러분께서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저희 같은 것들은 절대 못 하는 것들이 있습죠. 그러니 원하시는 건 몽땅 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는 중간중간 범한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그로서는 이 세 사람 중 진 공자란 인물이 제일 중요 인물인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기백을 보아하니 평범한 이는 아닌 것 같았다. 한데 자기소개를 듣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아 강남의 어느 대단한 관료 가문의 공자님인지 열심히 추측을 해보았다.
269화
포월루는 아주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주루 아래쪽을 돌아 나가면 곧장 호수가 나왔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전해져 오는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정원은 돌을 깔아 만든 풀 사이로 난 몇 가닥의 길과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방해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도록 분리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안내인의 인도를 따라 어느 정원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건물 쪽과는 달랐다.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여러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들을 맞았다. 여인들은 세 사람에게 바짝 붙은 채로 얇은 사를 들고 하늘하늘 춤추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의 행동은 마치 귀가해 들어오는 상공을 맞는 듯 매우 자연스러웠다.
실내는 따뜻했다. 한쪽 구석에 놓인 난로 상자가 이 초가을에 봄과 같은 따스함을 억지로 불어 넣고 있었다. 한 귀퉁이에 있는 나무 상 위에는 조화가 놓여 있었다. 꽃잎을 모두 수를 놓아 만들었는데 정교하고 특이하니 매우 아름다웠다.
향내가 코를 확 덮쳐 오자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사천립을 바라보았다. 사천립은 풍만한 여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범한이 말했다.
“마음 편히 먹게나. 호랑이 같은 아내도 없지 않은가.”
범한이 외투로 입은 도포를 벗자 옆에 있는 기생들이 냉큼 받아 들고는 나긋하게 말했다.
“어르신, 이미 음주를 하셨군요. 그렇다면 곡이나 연주해 드릴까요? 아니면······ 술을 더 올릴까요?”
범한이 부드럽고 긴 의자에 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의자나 좀 더 놓거라. 노래와 곡도 듣고 싶구나. 그리고 이리 와서 좀 주물러 다오.”
범한을 시중드는 여인이 기쁜 기색으로 감격하며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정말 배려심이 많으시군요.”
그녀는 서둘러 옷부터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어린 여종이 차를 따라 조심스레 세 사람 앞에 놓았다. 이어 경도에서 보기 힘든 신선한 과일을 한 접시 내왔다. 그사이 기생은 의자 위에 한쪽 다리만 올려 무릎을 꿇고는 범한의 양어깨를 딱 알맞은 강도로 부드럽게 주물렀다.
범한은 돈을 더 쓸수록 자신을 시중드는 여인들도 더 잘해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어깨에 전해지는 힘을 느끼며 이곳 포월루의 접대 수준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옆에 있는 사립천은 머뭇거리며 불안해하고 있었고, 등자월은 엄숙한 표정으로 아직도 기풍 바로잡기 운동을 실천 중이었다. 범한은 이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못난 놈들!’이라며 속으로 흉을 보았다. 누가 봐도 이 두 병아리는 지금 감찰원과 자신의 체면을 구기고 있었다.
뒤에서 어깨를 주무르던 여인이 갈수록 몸을 굽히더니 어느새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범한의 등에 바짝 붙었다. 범한은 순간 이 여인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게 그리고 용모조차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어찌 된 일인지 몰라도 범한은 그 순간 자신의 무정하고 냉정함에 놀라고 말았다. 이에 잠시 가만히 있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연아이옵니다.”
여인은 정말로 머리가 잘 돌아갔다. 향기 나는 양 소매를 범한의 가슴팍에 얹으며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범한의 등에 대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대답을 할 때는 범한의 귓가에 매우 부드러운 음성이 울리도록 살짝 따스한 바람을 귓구멍에 불어 넣으며 말했다.
범한은 저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확 깨지게 귓구멍을 긁었다.
“간지럽구나!”
범한은 그녀가 당연히 가명을 사용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궁금했던 건 따로 있었다. 조금 전 슬쩍 보았을 때 짙은 화장을 하고 있기는 했어도 미인형인 건 확실해 보였다. 그러니 이 정도 미색이면 포월루에서 평범한 외모 축에 속하는 건지, 그리고 자신 같은 ‘무명소졸’이 와도 아무렇게나 불러내 어울릴 수 있는 등급의 여인인지 범한은 궁금할 따름이었다.
실내의 봄기운이 조금 지겨워질 무렵 노래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기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범한은 그 낭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저 여인도 포월루에 납치되어 온 거야?’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러 들어온 여인은 상문이었다. 경도에서 유명한 소리꾼이었다. 예전에 범한이 자신의 권세와 지위를 이용해 만나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범한이 그녀를 알고 있는 이유는 1년여 전에 경도 서쪽에 위치한 피서 산장으로 임완아, 범약약과 함께 피서를 갔을 때였다. 이 상문이란 낭자는 임완아의 요청으로 산장에서 잠시 짧은 곡조를 부른 적이 있었다.
맑고 시원한 바람이 호숫가에서 불어올 때였다. 범한 옆에는 임완아, 범약약, 섭령아, 이 세 아가씨가 함께 앉아 있었고 그에게는 환생한 후 가장 미묘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이 상문 낭자가 ‘흰 비단 소매와 명주 치마가 서로 만나네’라는 구절을 읊을 때 문득 경묘에서 임완아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래서 범한에게 상문 낭자는 유달리 인상이 깊게 남아 있었다.
상문은 방으로 들어서자 살며시 인사를 한 후 무표정하게 방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비파와 비슷하게 생긴 악기를 받쳐 들고는 청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들, 듣고 싶은 곡조가 있으신가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시를 써준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작년 여름, 범한은 피서 산장에서 전생의 명나라 때 극작가 탕현조의 글을 베껴서 준 적이 있었다. 상문은 그 글을 노래로 만들어 경도에서 이름을 더 드날리게 되었다. 하지만 범한의 신신당부로 그녀는 진짜 작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을 불러 보거라.”
범한은 연아의 부드러운 가슴에 몸을 반쯤 묻고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리고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곡조 중 하나를 대충 말했다. 한편 속으로는 상문 정도의 유명 소리꾼이 어찌 포월루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저 정도 되는 이를 그냥 내보낼 수 있는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연아라는 기생에게서도 저속한 느낌이 없는 걸 보아, 설마 포월주 주인한테 자기 신분이 들통 난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딩당, 시원한 소리가 두 번 울리자 범한은 잔뜩 의심에 차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냥 있어도 괜찮지.’라고 생각했다. 포월루에서 자신의 신분을 알아채고 몰래 잘 보이려 하는 거라면 자신도 굳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마음을 편히 먹었다. 제사가 한밤중에 소리꾼의 노래를 들으러 왔으니 도찰원 어사들에게 또 탄핵밖에 더 당하겠느냐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상문은 눈썹이 가늘고 완만한 곡을 이루고 있었지만 연약한 느낌은 아니었다. 입술연지도 바르지 않아 담백한 느낌이었다. 예쁜 이목구비를 지니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양 볼이 조금 넓어 얼굴이 커 보였다. 입술 또한 일반적 미인 기준보다 조금 크고 두꺼웠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고 입술을 사뿐히 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왜 이리 넓은 치마를 둘렀을까! 그건 옥 같은 피부가 줄어들고 향내 나는 허리가 가늘어졌기 때문이라오. 밥을 봐도 한술 뜨기 싫고, 잠자리에서도 전 뒤집듯 몸을 뒤척여 대고, 호흡도 가느다란 아지랑이처럼 쉬어 대지 않았겠소.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이 한목숨 걸겠건만 이내 마음은 죽어도 말로 전하기가 참으로 어렵더이다! 이리 오랫동안 홀로 애만 태우다니. 애당초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행복한 삶을 누렸어야 하건만 결국에는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뿐이라니.(작가 주석:원나라,교길(喬吉)의 중 .)
노랫소리는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특히나 ‘아지랑이처럼 쉬어 댄다’는 구절에서는 범한 뒤에 있던 연아의 호흡마저 무거워질 정도로 상문의 노랫가락은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범한이 눈을 반쯤 감고 듣고 있는데 그의 입가에 어느새 술잔이 와 있었다. 연아가 술을 먹여 주려 하기에 범한은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받아 마셨다. 그러자 몸 주위가 따스해지고 사랑스럽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의식이 흐리멍덩한 가운데 이리 편안히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포월루의 주인이 누구든 나중에 다시 조사해도 늦지 않다고 말이다.
노랫가락이 몇 구절 흐르지 않았을 때였다. 방 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범한이 천천히 눈을 뜨고 아무 감정도 없어 보이는 상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상문은 자신을 알아본 게 아니라 그냥 냉담하게 있는 중이었다. 어쩌면 포월루라는 공간 자체가 그녀에게는 어색해서일 수도 있었다.
이 이란 곡조는 후반부에서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일상적인 쉬운 용어로 되어 있어 어느 아낙의 마음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바로 먼 길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고 증오하면서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 말이다.
그러니 간결한 가사와 음률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속에 담긴 뜻이 매우 훌륭해 상문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한데 여기는 사람들이 기생들을 데리고 노는 곳. 그런 곳에서 그녀가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건 분위기를 깨는 행동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연아는 원인 모를 두려움이 들어 서둘러 술부터 따랐다. 그리고 그 술잔을 범한의 입가에 대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술을 권했다.
“진 공자님, 상문 언니는 경도에서 아주 유명한 소리꾼이랍니다. 평범한 공자님은 볼 수도 없는 유명한 사람이지요. 저기, 언니에게 분위기를 띄우는 것으로 몇 곡조 더 부르라고 할까요?”
포월루에서 제일 잘나가는 아가씨가 자신을 감싸 주자 상문의 애처로운 눈동자에 의외라는 듯한 감격이 어리었다. 그녀도 조금 전 자신의 노래가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연아가 난처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저······ 진 공자님, 모두 상문의 잘못입니다.”
그러자 범한은 콧방귀만 뀌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범한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사천립과 등자월은 대인이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한데 범한이 돌연 미소를 지었다.
“경도에는 인물이 많다더니 역시 강남과는 다르군.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니 이런 짧은 노랫가락에서조차도 좋은 일을 하라 권한단 말이지.”
범한의 농담에 여인들은 한숨 돌렸다. 이어 연아가 서둘러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공자님께서 좋은 일을 하러 가시면 이 소녀, 어찌 먹고살아야 하나이까?”
범한이 웃으며 연아의 다리를 토닥이다가 그녀의 길고 탄력 있는 허벅지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렇게 재미를 본 범한이 연아에게 어깨는 그만 주무르고 옆에 앉아 함께 술이나 마시자고 했다.
상문도 정신을 차리고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다시 중 한 소절을 불렀다.
―나부산 꿈에서 진짜 선녀를 만났네. 양쪽으로 틀어 올린 머리에 사방으로 빛을 내는 머리 장식을 하였더라. 맑은 날 나부끼는 가는 버드나무, 봄날 가녀리게 뻗은 파, 가을날 동그스름한 연근 뿌리를 닮았구나. 술을 걸쳐 발그레한 얼굴에 부끄러움을 살짝 얹은 것이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달과 같아라. 존귀한 선녀에게 물었더니 달이 서쪽으로 간다던데, 오늘은 어느 해냐 묻더군.(작가 주석: 원나라,교길의 중 )
노래가 끝나자 범한은 누구보다 먼저 진심을 담아 반응을 보였다.
“참으로 듣기 좋구나!”
이어 고개를 살짝 기울여 품속 아름다운 연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웃었다.
“이 은 연아를 위한 것이로구나. 봄날 가녀리게 뻗은 파 같고, 가을 연근처럼 동그란 얼굴하며······.”
범한의 손이 점잖지 못하게 연아의 손가락을 타고 곧장 소매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팔을 조몰락거렸다. 이어 다른 손으로는 연아의 턱을 들고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참으로 미인이로다. 한데 살짝 취하기는 했으나 부끄러움에 찬 붉은 기는 안 보이는구나.”
범한이 고개를 돌려 아래쪽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기생을 품은 그의 눈에서는 정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천립을 향해 범한이 농담을 던졌다.
“그 구절은 자네 이야기인가 봄세.”
범한이 농을 하자 방 안에 있던 여인들이 모두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연아는 술 두 잔을 들고 달콤하게 웃으며 범한에게 술을 권했다. 범한과 건배하고 한 잔 들이켜니 연아에게는 황홀지경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나 사람 마음을 잘 가지고 노는 공자님이 있었다니, 설마 원 언니가 말했던······ 바로 그 관원인가?’
270화
밤이 깊었다. 일찌감치 욕구로 일렁이던 등자월과 사천립은 범한에 의해 옆쪽에 위치한 방으로 쫓겨난 후였다. 이곳은 방음이 정말 잘되어 있어서 한동안 저들 남녀가 나누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범한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등자월은 어쩌면 위패를 모시기라도 하는 듯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3처 출신이 아니었으니 기생에게서 무언가 정보를 얻어 내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한편 서생 사천립은 일찌감치 그 기생에게 잡아먹혀 버렸을 것 같았다. 아까 술을 마실 때 술 속에 약간의 최음제가 섞여 있음을 범한은 알아차린 상태였다. 하지만 기생집에서 자주 쓰는 수법이었으므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방 안에서는 상문이 경계심을 품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진 공자를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연회가 끝나 노래도 다 불렀는데 왜 그가 자신을 남으라고 했는지 영문을 몰랐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연아가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조금 의외라는 듯 진 공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 포월루에서 오늘 밤 노리고 있는 인물이란 생각을 하며 일석이조를 노리려다 보니 그녀로서는 무언가 거북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포월루의 기생이었다. 한데 이 젊은 공자가 자기 하나로 만족을 못 하고 상문을 억지로 방에 남겨 두다니. 이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포월루에서 상문을 데려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그리고 어느 한 곳을 없애 버린 사실까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문은 기예만 팔 뿐 몸은 팔지 않았으며, 경도에서는 어느 정도 명성도 있었다. 그러므로 설득한다고 해서 손님과 함께 밤을 지새울 사람이 아니었다.
이에 연아는 웃는 얼굴로 잠시 상문에 대해 알려 주려 했다. 한데 오늘 밤 만난 이 젊은 손님이 자신을 휙 끌어당기자, 연아는 저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르고 힘이 풀리며 그의 품속으로 엎어져 버렸다.
올려다보니 남자는 담백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 왔다. 심지어 이 젊은 남자가 웃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 위 마맛자국도 이제는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연아는 범한의 따스하고 친절한 행동에 말로는 표현 못 할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 내 어깨를 주물러 주느라 고생했다. 이제는 내가 주물러 줘야겠구나.”
범한이 따스하게 말하며 한 손으로 연아의 허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연아의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며 그녀가 거절 의사를 표하지 못하도록 했다.
연아는 순간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범한의 안정적인 손놀림이 주는 편안함을 당해 내지 못했다. 의식은 점점 흐릿해지고 긴 눈썹은 아래로 내리깔리면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연아 낭자가 남자의 무릎 위에 머리를 묻은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깜짝 놀란 상문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문은 잔뜩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서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마음 편히 먹거라. 잠들었을 뿐이니까.”
범한이 온화하게 말하며 오늘 저녁 자신을 시중든 여인을 조심스레 긴 의자 위로 옮겼다. 그런 후 세심하게 베개까지 가져다가 머리를 받쳐 주었다.
그러자 연아가 편안한지 신음을 흘리며 두 눈을 더 꼭 감았다. 꿈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로써 연아가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상문은 조심스레 방문 쪽으로 물러났다. 이 젊은 공자가 단 두 번 문지른 것으로 연아를 잠들게 한 것 때문에 상문은 기분이 매우 이상한 상태였다.
범한은 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웃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상문을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는 손동작을 취했다.
상문은 잠깐 눈앞이 가물가물한 느낌이었는데 젊은 공자는 어느새 자기 곁으로 와 있었다. 놀라고 부끄러운 마음에 상문이 고개를 획 돌리고 이 호랑이 굴에서 도망치려 했다. 한데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구절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는 어느 하늘에 있고, 즐거운 마음은 어느 집 정원에 있을까. 그대는 매우 박정한 사람이군. 날 기억 못 하다니.”
상문은 오늘 밤 너무 긴장하고 있던 터라 경악한 표정으로 ‘진 공자’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 상대방의 눈동자에서 줄곧 잊지 못하고 있던 청정함과 편안함을 발견하자 그녀는 눈앞에 있는 이 얼굴과 작년 여름에 보았던 얼굴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상문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눈동자에는 기쁨과 괴로움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었고 범한에게 할 말이 무수히 많은 듯했다.
상문의 표정에 범한은 자신이 정말 운이 좋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가 아무 말도 못 하도록 막았다. 그런 후 침대 뒤쪽에 있는 붉은 칠이 된 변기통 쪽으로 가 무릎을 꿇고는 체내의 정기를 운기했다. 그런 후 손가락을 칼처럼 만들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침대보를 찢어 뭉쳐 한 무더기를 만든 후 공중에 걸린 황동 팔걸이의 뒤쪽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예상대로 포월루는 단순한 기생집이 아니었다. 도청기가 은밀하게 설치되어 있는 걸 보니 포월루를 뒤에서 조종하는 진짜 사장은 매음 장사로 돈을 긁어모으길 좋아할 뿐만 아니라 침대 위 음란한 소리 사이로 들리는 경도 고관 귀족들의 비밀에도 관심이 있어 보였다. 워낙 정교하게 감춰져 있어 범한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변기통 옆에 있는 손잡이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상문은 상황을 깨닫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용서를 빌기 위해 범한을 향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범한은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미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자신의 말을 엿들을 사람은 없었다. 그는 무릎 꿇은 상문을 본체만체하며 의자에 앉더니 의식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연아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게.”
범한의 말을 들은 상문은 무언가 눈치챈 듯한 표정을 짓더니 기대하는 눈빛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범한의 앞에 선 그녀가 신경 쓰이는지 누워 있는 연아를 계속 힐끔힐끔 바라봤다. 그 모습에 범한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상황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안심하고 솔직하게 털어놓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한동안은 깨어나지 못할 거야. 대화를 엿듣지는 못할 거니까 안심해도 되네.”
그제야 안심이 된 상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은 상문이 원래 머물러 있던 천상간이 도산한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방법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계약 증서를 포월루가 가지고 있는 건가?”
자신을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거란 생각에 상문이 기뻐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네, 그들이 강제로······.”
그녀의 말을 끊고 범한이 계속 물었다.
“오늘 나를 시중들러 오기 전에 이곳 사람에게 지시를 받은 게 있나?”
범한이 오늘 사칭한 진 공자는 상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순간 상문은 범한을 전적으로 믿기로 했다. 범한은 현재 경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찰원 제사인 만큼 자신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곳에서 벗어나 천상간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가 엿들은 바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대인이 며칠 전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온 형부 13 관아의 고수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요. 그래서 가장 인기 있는 연아를 보낸 거지요.”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 치밀하게 신분을 위장했다고 생각했는데 포월루에서 무슨 수로 냄새를 맡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가 방향을 잘못 짚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범한의 표정을 살펴보던 상문이 추가로 설명했다.
“대인과 함께 온 수행원이 관리 분위기를 너무 풍겨서 이쪽에서 알아차린 걸 겁니다.”
여기서 상문이 말한 수행원이란 등자월을 말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화제를 바꿨다.
“이곳 포월루의 진짜 사장이 누구라 생각하는가?”
범한은 감찰원 내부에서 파악하지 못하는 포월루의 진짜 사장을 상문이 알 수는 없겠지만 항상 이곳에 있는 만큼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상문은 감찰원 제사가 포월루의 진짜 사장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곰곰이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본 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서 거리 쪽과 관련이 있겠지요. 포월루 사장은 매번 아주 비밀리에 방문하는데 마차는 잘 바뀌지 않습니다. 물론 가문 문장은 그려져 있지 않지만 최근 한두 달 동안 마차 지붕에 대수괴 나뭇잎이 떨어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원래 북제에서 자라는 이 나무는 경도 전체를 통틀어 상서 거리 양측에만 심겨 있으니 포월루 사장의 마차가 상서 거리를 지나왔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범한이 고개를 들어 상문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알아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상서 거리에서 오래 살아 그곳에 대수괴가 심겨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물었다.
“이곳을 책임지는 기생의 성은 뭔가?”
“원씨입니다.”
상문이 빠르면서도 분명하게 대답하자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낭자는 성격이 용의주도하니 감찰원 일을 해도 괜찮겠군.”
상서 거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개국 초기 국공으로 봉해진 자들이었다. 존귀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폐하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경계하는 탓에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범한이 무언가 알아챈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포월루를 관리하는 원씨 성을 가진 기생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정왕 세자 이홍성의 부하인 원몽 낭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용한 정보를 얻은 범한은 오늘 밤 성과에 만족스러웠다. 상문과 몇 마디 대화를 통해서 포월루의 배후에 엄청난 권력이 있다는 확신도 들었다. 초여름에 개업한 포월루는 여러 기생집과 경쟁을 벌이면서 뒤에서 무지막지한 수단도 서슴지 않는 게 분명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상문도 억지로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틀 뒤에 내가 낭자를 빼내 줄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범한은 여색을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가 항상 거래는 평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리꾼인 상문이 이런 음침한 기생집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상문은 완아가 좋아하는 가인(歌人)인 만큼 며칠 뒤에 감찰원 사람을 보내 상문을 꺼내 줄 생각이었다. 아마 그렇게 한다면 포월루 사장도 범한의 체면을 봐서 상문을 내보내 줄 터.
범한의 말을 들은 상문이 기대감에 활짝 웃었다. 사실 상문은 다른 곳에서 잡혀 온 기생들이 포월루 졸개들에게 맞아 죽는 걸 본 뒤로 항상 불안에 떨며 도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신분의 격차 때문에 과거 범한에게 글을 받은 적이 있음에도 그를 찾아가 도움을 청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오늘 우연히 범한을 만나 꺼내 주겠다는 말을 듣게 되자 그녀는 뛸 듯이 기뻤다. 조정에서 범 제사가 가진 지위를 생각해 보면 이 일은 이미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순간 만감이 교차한 상문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절을 했다.
이미 그녀에게 절을 받은 범한은 두 번 받고 싶지 않았기에 손을 뻗어 부축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밖에서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
“죽여 버리겠어!”
눈을 희번덕거리는 중년 남자가 방문을 산산조각 내며 엄청난 기세로 들어오더니 범한의 가슴을 향해 손을 내리쳤다.
“안 돼!”
놀란 상문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중년 남자가 무섭게 덤벼드는데도 범한은 비스듬히 서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귀찮다는 듯 소매 안에서 오른손을 꺼냈다. 범한의 동작이 너무나도 침착해서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가 손바닥을 평평하게 폈을 때 중년 남자는 이미 무시무시한 손바닥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때 범한이 곱고 우아한 손바닥으로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을 가볍게 때렸다.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천둥이 친 것처럼 엄청난 소리가 울렸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중년 남자가 순식간에 뒤편으로 날아갔다. 범한의 손짓 한 번에 투석기로 쏘아 올린 돌처럼 날아가 버린 것이다.
자신이 부순 방문 부딪친 뒤 한참을 더 뒤로 날아간 중년 남자는 포월루 입구 나무문을 부수고는 정원 호수에 빠졌다. 그러면서 사방에 엄청난 물보라가 튀었다.
반면 뒷짐을 지고 선 범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모두 본 상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낮게 비명을 질렀다. 범한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세상에! 온화한 범 대인에게 어떻게 이렇게 난폭한 정기가 있을 수 있지?!’
놀란 상문은 범한의 일격을 곱씹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가 눈물 자국도 닦지 않은 채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호수로 달려갔다. 범한의 공격에 날아간 남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271화
뒷짐 진 손에 풀과 진흙이 묻어 있자 범한은 상대가 건물 밖 잔디에 오랫동안 매복해 있었을 거라 짐작하며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도왕(刀王) 같은 족속이라 그런지 거칠기 그지없군.”
상문은 경도에서 비교적 유명한 가인이었기 때문에 좋아서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편이었고, 그중 일부는 포월루와 대적할 능력이 없음에도 상문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호하려 했다. 방금 범한에게 달려든 사람도 곡이 끝난 뒤에도 상문이 나오지 않자 조급한 마음에 창틈으로 안을 보다가 범한이 부축하려는 걸 희롱하는 거라 오해해 방으로 뛰쳐 들어온 거였다.
상황을 파악한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왔다. 소란을 피우는 소리에 등자월이 잽싸게 다가와 인상을 쓰며 그의 주변을 보호했고, 사천립은 여전히 술이 깨지 않은 듯 보였다. 범한이 몸을 옆으로 돌려 자신이 직접 뽑은 계년조의 두 번째 조장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등자월의 반응 속도도 만족스러웠지만 자신이 방금 한 일격이 더 만족스러웠다.
가벼운 일격을 통해 그는 비로소 자신이 담주, 경도, 창산에서 꾸준히 수련하고 북제 사신으로 건너가 여러 일을 조우하면서 상당히 성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신으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견뎌야 했던 압박감과 소은과의 결투, 연산 암석 절벽에서 치른 목숨을 건 사투 그리고 아무 뜻 없는 듯했지만 사실은 의도을 가지고 만났던 해당타타와의 만남 덕분에 그동안 수행해 왔던 이름 없는 공결이 마침내 경맥과 융합되었고 이로써 무술 실력이 상당히 향상된 것이다.
만일 예전 같았다면 일격에 상대방의 오른쪽 어깨를 산산조각 낼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멀리 날려 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순간 감격스러워진 범한은 해당타타와 이미 고인이 된 소은이 고마워졌다. 물론 가장 고마운 사람은 자신에게 이런 좋은 기회를 준 절름발이 노인이었다.
한편 자기 사람이라서 그런지 오죽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호수 표면은 계속 일렁였지만 밤이 어두워 호숫가에 불빛을 비춰 본들 피가 뿜어 나오는지 알 수 없었고 남자의 생사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때 호숫가 주변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지더니 포월루 졸개들이 우르르 호숫가로 달려가 남자를 그물로 건져 냈다. 그리고 동시에 아름다운 미모의 중년 부인이 치맛자락을 흔들며 달려왔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부인이 헐레벌떡 범한 앞으로 달려오더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주변을 통솔하지 못해 진 공자를 놀라게 했으니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놀란 표정에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하면서도 부인의 눈빛은 서늘할 정도로 차갑고 매서웠다.
부인의 눈에 드러난 차가운 눈빛을 본 범한은 포월루 사람들이 일부러 소란에도 늦게 나오고, 중년 사내가 방에 쳐들어가는 것도 막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이건 분명 범한의 신분을 의심하던 중에 도청 구멍까지 막아 버리자 정체를 알기 위해 벌인 짓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범한을 13 관아의 사람일 거라 짐작할 뿐 진짜 신분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만일 알았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그를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절한 중년 남자를 질질 끌고 가자 그가 지난 자리 풀들이 젖어 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인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 공자가 농담을 좋아하시는 건 알았지만 놀라운 무술 실력을 가지고 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노골적인 말투에 범한이 그녀를 힐끗 보고는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안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다. 대문과 방문이 모두 부서진 터라 포월루 안을 감싸고 있던 따뜻한 공기가 모두 빠져 안이 또렷하게 보였다.
부인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범한의 행동을 바라봤다. 범한 일행을 형부 13 관아에서 살인 사건을 조사하러 나온 고수들이라고만 생각한 그녀는 포월루에서 가장 인기 좋은 연아를 보내 정보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고수가 방에 있는 도청 장치를 간파해 내고 상문도 방에서 나오지 않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걱정에 중년 남자가 방에 쳐들어가 공격하는 걸 내버려 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호리호리하게 생긴 ‘진 공자’는 일격에 남자를 날려 버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왔다. 상문과 어떤 말을 했는지, 무슨 흥정이 오갔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범한이 자신을 본체만체하며 들어가자 부인은 애가 달아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고민하던 부인이 얼굴 가득 미소 지었다.
“포월루에서 경호를 제대로 하지 못해 손님을 놀라게 해드렸으니 오늘 밤 비용은 저희 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고, 이만 나가 보게.”
범한의 냉담한 말에 조급해진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공자께서는 어찌 저희의 성의를 거절하려 하십니까?”
범한 일행을 13 관아 사람이라고 확신한 부인의 목소리가 점차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범한은 상대가 자신과 협상할 자격이 없기에 자신의 신분을 오해해 뭐라 말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뒤로 젖히며 주변을 흘겨보던 그가 넌지시 말했다.
“주인장께서는 여자와 놀기만 할 뿐 손님을 대접하지는 않나 보군.”
부인은 그 말에 약간 서늘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진 공자가 누구인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문이 부서졌으니 손님께서는 더 여기 있지 마시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지요.”
범한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부인을 힐끗 보고는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등자월이 차가운 말투로 설명했다.
“공자께서는 이동하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 병풍을 가져와 치도록 하게.”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음란한 짓을 하겠다는 건가? 이건 또 무슨 악취미이지?’
등자월은 겉으로는 냉담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포월루 기생들이 감찰원 제사에게 노출증이 있다고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난처해하고 있었다.
이때 상황을 감지한 사천립이 놀라 외투를 입고는 걸어 나왔고, 옷이 약간 헝클어진 젊은 기생들은 방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부인과 범한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한편 방 안을 한번 훑어보던 부인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연아를 보고는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화난 척 이를 갈며 연아를 향해 소리쳤다.
“죽일 년! 이 중요한 때에 손님을 내팽개치고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다니!”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밖을 향해 외쳤다.
“이리 와 저년을 끌고 가서 흠칫 패줘라!”
범한이 미간을 구기자 부인은 더욱 맹렬하게 소리쳤다.
“이런 년은 때려 죽여서 본때를 보여야 해!”
부인은 한바탕 소리치고는 범한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데도 물러서지 않는다고?’
범한이 미간을 다시 찌푸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사람을 때려 죽이겠다고 하니 마음이 좋지 않군.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부인의 사람인 만큼 때려 죽이는 것도 부인의 일이겠지. 다만 때려 죽이기 전에 용모가 빼어난 낭자를 새로 골라 보내 주길 바라네. 참고로 나는 풍만한 체형을 좋아해.”
담담한 말에는 사람을 찌를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저렇게 선량한 얼굴을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과 몸을 나눴던 여자의 생사에 저리도 무심할 수가 있지?’
놀란 부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을 떠돌면서 사람을 보는 안목을 길러 온 부인은 자신이 여기서 연아를 때려 죽여도 저 냉혹한 공자는 미간 한번 찌푸리고 말리라는 걸 깨달았다.
‘13 관아에 저런 인물도 있었나?’
부인이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 범한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자 등자월이 차갑게 외쳤다.
“모두 나가시오!”
자신의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서로 본모습을 드러내며 체면을 구길 수도 없는 데다가 경도에서 계속 장사를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가려 했다.
부인과 포월루 졸개들이 방을 나가려 하자 범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남자는 두고 가게.”
범한의 말투에서 관원의 위엄이 풍겨나자 부인이 고개를 돌려 쏘아붙였다.
“이 남자의 죄는 경도부에서 처벌할 사항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경도부에서 하는 일을 형부 관아에서는 할 수 없다는 겐가?”
드디어 상대가 정체를 드러냈다고 생각한 부인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하인에게 명령하는 듯한 범한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상문을 원하네.”
포월루는 경도에서 영업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막강한 세력을 뒤에 업고 있었다. 더구나 부인은 자신이 모시는 사장이 감찰원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형부 관아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이에 범한이 무례한 요구를 하자 자신도 모르게 비꼬는 말투로 냉담하게 말했다.
“상 낭자는 몸값이 워낙 비싸서 공자께서, 아니 대인께서 계시는 13 관아가 돈이 없는 곳은 아니지만 형부에서 그만한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상서나 시랑 정도일 겁니다. 실례지만 대인의 직위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범한이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나는 상문이 부르는 노래만 좋아하네. 그러기 위해서라면 몇백 냥이든 지불할 의향이 있네.”
상문은 오늘 반드시 이곳에서 나와야 했다. 범한과 상문이 방에서 대화를 나눴다는 걸 상대측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상문을 여기에 놓고 간다면 내일 호수 아래서 시체로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범한의 말에 부인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냉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공자께서는 관원의 권한을 이용해 이곳을 압박하려 하실 뿐 경도 호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시는 것 같군요.”
“허튼소리 하지 말게.”
자신이 나서야 할 순간이라는 걸 안 사천립이 입을 열었다.
“상문은 기생이지 군영에 배치된 기생이 아니라서 경도 법률에 따라 누구든지 돈을 내고 기적에서 빼내 줄 수 있네. 그런데도 포월루에서는 어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가? 우리가 은전 몇백 냥도 못 낼 사람으로 보여 무시하는 건가?”
‘겨우 은전 몇백 냥에 상문을 데려가겠다는 건가?’
부인은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정말로 상문을 데려가려 한다면 최소한 은전 2천 냥은 내야 했다. 그런데 겨우 몇백 냥을 내고 데리고 가겠다니 어이없는 금액에 기가 막힌 그녀가 냉정함을 잃고 소리쳤다.
“만약 손님께서 은전 1만 냥을 내신다면 당장 상문을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저 남자도 덤으로 드리지요!”
은전 1만 냥은 저택 십여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으로 일반 백성이라면 몇 대가 먹고살 수 있었고, 천하에 내로라하는 부자들도 눈이 튀어나올 만한 액수였다.
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범한 일행을 바라봤다. 노래는 잘 부르지만 외모가 평범한 상문을 1만 냥이나 주고 데려갈 사람은 없었다.
반면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범한은 말을 바꿀 틈을 주지 않고 잽싸게 상황을 정리했다.
“금액이 정해졌으니 얼른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지.”
그 말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지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남자 옆을 지키고 있던 상문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부인도 너무 놀라 나무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짝! 바로 그때 갑자기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나타난 미인이 부인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고는 범한 일행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절했다.
“진 공자가 농담을 잘하신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낯선 미녀를 바라봤다. 버드나무 잎처럼 긴 속눈썹에 붉은 입술 그리고 교태가 가득한 눈동자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까지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인은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면서도 은은하게 거만한 분위기를 풍기며 범한 일행을 깔보고 있었다. 이렇게 도도한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면 원몽의 심복이 틀림없었다.
“농담한 게 아니네.”
범한이 미소를 거두고 정색했다.
“설마 1만 냥에 팔겠다는 말을 번복하려는 겐가?”
미녀가 한동안 차갑게 범한을 쏘아 보다가 말했다.
“보상하는 의미로 포월루에서 은전 천 냥을 드릴 테니 없던 일로 하시지요.”
은전 천 냥을 주겠다고 말하면서도 양미간에서 드러나는 거만함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재미있는 밤을 보냈는데 보상할 게 뭐가 있겠는가? 내가 상문과 저 사내를 데려가고 싶다는데 팔 생각이 없는 겐가?”
범한이 채신머리없이 노골적으로 말하자 미녀가 조롱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정말 1만 냥을 낼 수 있으십니까?”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상황은 어느덧 자존심 싸움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상문을 팔지 말지, 포월루의 사건을 조사할지 말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고, 은전 1만 냥을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 사실 포월루는 상문을 절대 놓아줘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지만 미녀는 은전 1만 냥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하여 범한을 떠본 것이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정수리를 긁자 옆에 있던 사천립이 웃었다.
“그건 낭자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네.”
세 사람을 바라보던 미녀가 그 말에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저희 포월루의 체면을 깎으시려는 것 같은데…… 대인 세 분께 알려드리자면 오늘 상문을 사 가셔도 내일이면 다시 돌려보내셔야 할 겁니다.”
위협하려는 의도가 농후한 말이었지만 범한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가 웃으며 가벼운 목소리로 응수했다.
“자네야말로 오늘 밤에 받은 은전 1만 냥을 내일 순순히 돌려줘야 할 거네.”
272화
지금까지 포월루는 위협한 적은 있었어도 위협받은 적은 없었다.
범한과 힘겨루기를 하는 미녀의 성은 석(石), 이름은 청아(淸兒)로 원몽이 키운 심복이었다. 사실 그녀는 오늘 밤 사건을 조사하러 온 젊은 관차 중 진 공자란 사람의 기개가 예사롭지 않고 무술 실력도 탁월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보고를 받고 잘 타협하러 온 것이었다. 타협하려는 이유는 9월부터 사장이 계속해서 포월루에 소란이 생기지 않게 하라고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상대방은 타협하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적나라하게 위협해 왔다.
순간 발끈한 석청아가 범한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 밤 일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범한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날 위협할 생각은 하지 말고 얼른 계약서가 가지고 오게. 기분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야겠으니.”
범한의 미소를 본 사천립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스승이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항상 엄청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속으로 며칠 뒤면 포월루도 문을 닫게 될 거라 생각했다. 다만 범한이 누구인지 모르는 석청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하에게 일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얼마 뒤 얇은 종이 한 장이 탁자에 놓였다.
“지금 은전 1만 냥을 주시면 사람을 드리겠습니다.”
석청아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국 법률에 몸값을 받고 기생을 양민이 되게 하는 속량(贖良) 조항이 있지만…… 사겠다는 말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지금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있습니다.”
범한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한 채 속으로는 상대방을 비웃었다.
“은전 1만 냥을 주고 사 갈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내가 지금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사 갔다고 핑계를 대고 주지 않으려는 거겠지.”
사천립이 붓을 들고 계약서를 쓴 뒤 상문의 인신 문서를 옆에 함께 놓고는 범한이 돈을 꺼내길 기다렸다. 사실 범한의 재정 능력이라면 1만 냥은 문제가 아니었다.
석청아도 범한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까지 강남의 소금 상인부터 황실 상인까지 수도 없이 많은 부자를 만나 봤다. 하지만 고관에게 줄 선물을 준비할 때와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평상시에 은전 1만 냥에 해당하는 은표를 소매에 넣고 다니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젊은 공자에게 1만 냥의 은표가 없을 거라 확신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듯한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범한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사천립이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자 석청아의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번졌다.
범한이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을 까딱이며 줄곧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등자월을 불렀다.
등자월이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진 공자,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범한이 낮게 욕을 하며 말했다.
“바보인 척하는 겐가? 나한테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빨리 빌려주게.”
등자월이 정색하며 범한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은표 수 만 냥이 있다는 걸 제사 대인이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재빨리 품 안에 손을 넣더니 한참 뒤에 속옷 안에서 꽉 묶인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무언가로 안이 가득 차 있는 소박한 주머니였다.
방 안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등자월이 주머니 안에서 은표 한 묶음을 꺼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등자월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탁자에 은표를 놓고 세고 또 세더니 마지못해 열 장을 석청아에게 건네줬다.
멍하니 손에 들린 은표 1만 냥을 바라보던 석청아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쩍 벌렸다.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귀족이나 부잣집 자제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같이 온 수행원이 은전 1만 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손에 들린 은표를 한 번 보고 범한의 평온한 얼굴을 한 번 보던 석청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서 온 신선이길래 돈이 이렇게나 많은 거지?’
한편 범한은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뒤에 잠들어 있는 연아 낭자를 만져 보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경부를 몇 차례 쓸어내렸다. 희롱하는 듯한 범한의 손짓에 연아 낭자가 깨어나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상당히 잘 잔 듯 보였다.
“가지.”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제일 먼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등자월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습격자를 업고 따라나서자 사천립도 너무 놀라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문 낭자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
머지않아 정체불명의 일행이 호숫가에 밝혀진 등불을 따라 사라졌다.
은표가 구겨질 정도로 손을 꽉 쥐던 석청아는 거액의 은전을 잃을 수는 없기에 조심히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내가 지켜볼 거야!”
포월루에는 신비한 사장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에서 작은 사장 쪽에 있는 석청아는 무서운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인상을 구기며 일어나던 연아는 어지러움에 휘청이더니 방 안의 상황을 보고는 속으로 자신이 단순히 잠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다정하게 웃던 진 공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석청아가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갈기려 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음에도 연아는 재빨리 몸을 피하고는 석청아를 향해 물었다.
“왜 저를 때리려는 거예요?”
석청아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 쓸모없는 계집아! 정보를 알아내라고 보냈더니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연아가 냉소를 지었다.
“언니도 다를 것 없잖아요. 어떻게 상문 언니를 데리고 가게 둘 수 있어요? 이 일을 원몽 언니가 알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흥!”
석청아가 연아의 농염한 얼굴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큰 사장의 총애를 믿고 네가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거지? 포월루가 영업을 계속하려면 손님과 충돌하는 상황이 일어나서는 안 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 방법이 생기게 되니까.”
두 사람은 포월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만큼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부하들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움에 급히 뒤로 물러났다.
잠시 뒤 연아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잊지 마세요. 큰 사장께서 요 몇 개월 동안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법을 가르쳐 준 덕분에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횟수가 줄었잖아요.”
“잔악무도한 짓?”
석청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웃었다.
“경도에서는 우리가 곧 법이야.”
연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일부러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응? 오늘 온 사람들은 13 관아에서도 대단한 사람들 같던데.”
“13 관아는 무슨!”
콧방귀를 뀌는 석청아의 눈은 살기가 가득했다.
“경도 전체를 통틀어서 1만 냥의 은표를 지니고 다닐 인물은 몇 사람 없어. 형부 바닥에 깔린 청석부터 부지깽이들까지 모두 긁어모아도 절대 낼 수 없는 돈이야.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어느 왕후 집안의 세자가 아닌가 싶어.”
진 공자의 신분이 그렇게까지 높을 거라 예상하지 못한 연아가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공자의 ‘손짓’을 떠올렸다.
연아의 미간에 드러난 교태를 본 석청아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야, 이 계집애야! 아무 데서나 교태 부리지 마. 큰 사장께서 싫어하시니까.”
석청아의 경고에도 무섭지 않은지 연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큰 사장께서 오늘 언니가 손님을 모시라고 나를 보낸 사실을 알면 화를 낼 거란 생각은 안 드나 봐요?”
석청아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네가 모셨던 그 진 공자란 사람이 시체로 발견되면 상관없지 않겠어?”
그 말에 놀란 연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또 사람을 죽이려는 거예요?”
“포월루에 망신을 준 놈을 편히 살게 둘 수는 없잖아.”
석청아가 냉혹하면서도 거만한 눈빛으로 연아를 바라보았다.
“다만 그의 신분을 고려해서 당분간은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둘 거야. 하지만 상문이란 기생 년은 반드시 죽여야 해. 그러고 보면 놈들도 운이 나빠. 오늘 마침 작은 사장님 패거리들이 여기서 놀고 있었거든.”
그 말을 들은 연아는 ‘진 공자’ 일행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다. 비록 작은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지만 작은 사장 패거리들이 경도에서 가장 난폭하고 거칠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물론 왕후 집안사람인 진 공자는 오늘 밤에 건들지는 않겠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연아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가 조정에서 조사라도 시작하면 우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석청아는 연아가 소심하게 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힐끔 째려보았다.
“가장 잘나가는 대인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황궁에서 말이 나온들 누가 포월루를 건들 수 있겠어?”
* * *
포월루에서 나온 상문이 눈물을 흘리며 범한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러자 범한이 쑥스러운지 따뜻한 말 몇 마디를 건네고는 재빨리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포월루 앞 큰 대로를 따라 나아갔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얼마 뒤 마차가 긴 거리 위에서 멈춰 섰다. 범한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마차 커튼을 걷어 횃불을 들고 서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거리를 막은 무리는 대략 열네다섯 살 정도로 보였는데 그중에는 간간이 어린 소년도 끼어 있었다. 모두 안색이 창백한 것이 건강하지 못한 생활 습관을 가진 듯했고 몸집이 크고 위풍당당한 것이 신분이 높은 것 같았다. 그들 멀리에는 주인을 따라온 종들을 보였는데 자기 주인들이 경도 거리에서 폭행을 일삼는 데 이골이 났는지 거리를 막고 있는데도 덤덤한 모습이었다.
“마차에 있는 사람은 얼른 내려 무릎을 꿇어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소년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마치 사람을 해치는 게 재미난 놀이라도 되는 듯 눈을 반짝이는 것이 당장이라도 살인을 할 듯한 분위기였다.
“포월루의 반응이 참 노골적이군.”
마차 안에 있는 범한이 감탄하며 말하고는 몸을 돌려 물었다.
“자월, 어디서 온 놈들인지 알고 있나?”
등자월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다 대답했다.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유협 소년단입니다.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놈들이지만 국공의 후손이라 감히 건들지 못합니다.”
“포월루는 이홍성과 관련이 있을뿐더러 국공 후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군.”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거리 양측에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봤다. 암흑 속에 잠복해 있던 계년조 조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안 그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경국은 무력으로 천하를 얻은 나라인 만큼 태조를 따라 나라를 건립하는 데 일조했던 장군 중에서 국공 작위를 받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후 용상에 오른 황제는 그들이 세운 공을 봐서 국공 집안을 잘 대우해 주면서도 원로대신인 그들이 조정에 영향력을 뻗지 못하도록 경계했고, 그들의 자제들이 과거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도록 암암리에 손을 썼다.
그래서 국공 가문의 3, 4대 자제 중에서 능력을 가진 인재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쓸모없는 망나니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열 몇 살 정도 되는 젊은 자제들은 집안이 부유하고 조정에서도 특별대우를 해주니 자연스레 향락에 빠지기 일쑤였다.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넘치는 혈기를 어쩌지 못해 남자를 기만하고 여자를 능욕하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포악한 짓을 일삼았고, 조금이라도 심사가 뒤틀리면 칼을 뽑아 들고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뒷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의협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 스스로 ‘유협 소년단’이라 부르며 경도 불량배들과 싸우고 다녔다. 하지만 범한의 눈에 그들은 그저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쓸모없는 귀족 자제들일 뿐이었다.
비록 범한은 저들과 나이가 별로 차이 나지 않았지만 훨씬 성숙했다. 거리 상황을 힐끗 본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하더니 커튼을 내렸다. 부하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국공들은 직접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복잡한 인척 관계로 얽혀 있었다. 백작가도 유씨 국공 집안과 인척 관계인 만큼 범한이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 * *
“마차를 부숴 버리자!”
우두머리 소년이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가자 뒤에 있던 무리도 소리를 지르며 범한이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돌격했다. 경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도(直刀)를 사방으로 휘두르며 달려드는 게 피 냄새를 맡은 새끼 상어들 같았다.
그 광경을 본 상문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한껏 웅크리고는 치마를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범한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차 커튼을 살짝 걷은 뒤 말을 타고 마차로 돌진하는 소년들을 바라보며 경도 치안이 갈수록 안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경도 부윤은 2 황자 사람인 데다가 소년들이 민감한 신분인 만큼 관원들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잔뜩 흥분한 소년들의 눈동자를 보니 파리를 씹은 것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젊다 못해 앳된 그들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흥분 속에는 생명에 대한 경시와 천하거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경멸 그리고 피비린내를 좋아하는 변태적인 면모가 담겨 있었다.
이미 어릴 때 죽음이 뭔지 알게 된 범한은 타인의 생명을 뺏는 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담담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인하는 과정에 도취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생명을 아끼고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이 상한 가장 큰 이유는 감찰원 제사인 자신이 공금을 가지고 기생집에서 놀려 하다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불량배들과 싸움을 벌이게 된 사실이 너무나도 민망스럽기 때문이었다.
273화
호루라기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소리가 나자 거리 양쪽 민가 지붕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 내려와 돌진하며 순식간에 귀족 자제들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계년조 조직원들은 오랜 시간 밀정 활동을 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적당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이에 귀족 자제들은 건들지 않고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을 공격했다. 순식간에 귀족 소년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등부터 떨어질 거란 범한 일행의 예측과는 달리 소년들은 갑작스럽게 떨어지면서도 다리부터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이들은 대대로 전해지는 왕공가의 무술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저놈들 뭐야, 가만두지 않겠어!”
열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우두머리 소년이 우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갑작스럽게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나타났는데도 전혀 겁먹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들은 경도에서 오랫동안 제멋대로 지내서 사실 누가 나타나도 무섭지 않았다. 우두머리 소년이 손에 들린 검을 몸에 바짝 붙이고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향해 엄청난 기세로 돌진했다.
범한의 부하는 여기 있는 소년들이 존귀한 신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가슴을 활짝 펴고 달려오는 상대방을 보면서도 단검을 던지지 못했다. 더구나 아직 어린 소년들에게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건 옳지 않았다. 이에 몸을 살짝 돌려 피하자 왼쪽 어깨에 바람에 들어오면서 살짝 피가 맺혔다.
상대방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소년이 오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놈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나 본데. 형제들, 마음껏 죽입시다!”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소년들이 코끼리를 휘감는 개미들처럼 계년조를 둘러쌌다. 상대방의 신분을 알고 있어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계년조와 달리 횡포한 짓을 일삼는 소년들은 꺼릴 게 없었다. 그들은 조정이 할아버지의 체면 때문에 자신들에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소년들이 죽기 살기로 덤비자 계년조는 순간 허물어지면서 수세에 몰렸다.
잠시 뒤 몇몇 소년들이 계년조 조직원들에게 맞아 기절하면서 양측의 세력이 균등해졌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에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주인들을 대신해 횃불을 들고 있던 종들이 가까이 다가와 밀집 대형을 취했는데 심드렁한 표정을 한 것이 모시는 주인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모습은 아니었다.
마차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범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자신을 호위하는 계년조는 고달이 이끄는 호위만큼 실력이 있지는 않지만 저기 귀족 소년들보다는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감찰원 관원으로 오랜 시간 나라를 위해 복무하다 보니 ‘유협 소년단’ 같은 망나니들에게도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터였다.
물론 범한도 부하들이 이 일 때문에 자신이 난처한 상황에 처할까 봐 걱정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상황이 급하다면 계년조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신을 지킬 것이다. 그런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오만방자한 소년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는 걸 보니 범한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전 세상에서 밀라노가 리버풀에게 역전당했을 때처럼 분하고 원통한 기분이었다.
“쓸모없는 놈들!”
범한이 마차에서 내리면서 난폭한 정기를 내뿜으며 말하자 싸움이 벌어지는 길거리 곳곳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싸우던 소년들이 일순간 동작을 멈추자 계년조가 재빨리 마차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맨 처음 무리와 맞섰던 두 명은 이미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계년조가 과감하게 대처하지 못한 데다가 소년들이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부하들을 보던 범한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북제 사람과 싸울 때는 이렇게 무능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부하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가슴이 들썩거리는 것이 범한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보였다.
‘저 꼬마들이 우리가 대적해야 할 적은 아니잖아. 젠장, 상대는 국공 집안 자제들인데 상대가 죽기 살기로 덤빈다고 똑같이 맞서면 결국 우리만 손해를 보게 될 것 아냐.’
계년조 조직원들이 속으로 이렇게 투덜대고 있을 때 등자월이 마차에서 내렸다. 화가 나 안색이 검푸르게 변한 그가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소년들을 바라봤다. 소년들은 두려움이 뭔지 모르는 철없는 병아리처럼 거만한 표정으로 시시덕거리며 피가 묻은 칼을 들고 마차 옆에 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인, 상대방 신분이 좀…….”
범한의 안색이 점점 검붉게 변하는 걸 본 등자월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신분이 어떻다고? 내 눈에는 길을 막고 있는 좀도둑만 보이는데. 저런 놈들에게 맞아서 다쳤다는 게 알려지면 얼마나 창피할지는 생각해 봤나!”
“이봐, 애송이. 너, 뭐라고 했냐?”
우두머리 소년이 사악한 기운을 풍기며 말을 타고 마차로 다가왔다.
“거기, 마차 안에 있는 기생을 데리고 와. 그러지 않으면 너의 쓸모없는 부하들의 팔을 잘라 버릴 거야. 너는 작은 사장께서 건들지 말라고 했으니 봐주도록 하지.”
그 말에 범한은 소년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발끈한 소년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이 오입쟁이 새끼, 내 말 안 들려? 당장 기생 년을 내놓으라고! 포월루에서 난동을 부렸으니 어떻게 죽을지는 생각해 뒀겠지? 우리가 최근에 곤봉형을 새로 발명했는데 한번 경험해 볼래?”
음란하면서도 모욕적인 말에 소년들이 다 함께 박장대소했다.
범한은 소년의 말에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부하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았다.
“밖에 있는 적이든 안에 있는 적이든 적을 대할 때는 인정사정없이 다뤄야 한다는 걸 모르는가? 아니면 늙은 절름발이 영감에게 돌아가고 싶은 건가?”
마차 앞에 서 있는 젊은 공자가 자신의 말은 무시한 채 부하들하고만 이야기하자 우두머리 소년은 자존심이 상해 포월루에서 지시받았던 내용을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범한을 건들지 말라는 주의를 잊은 그가 저속한 말을 퍼부으며 범한의 목을 향해 말채찍을 휘둘렀다.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어 말채찍으로 범한의 목을 감기는 무리였지만 그래도 충분히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범한이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말채찍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왼손을 치켜들었다.
“억!” 하는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우두머리 소년이 들고 있던 말채찍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자신의 손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검은색 쇠뇌의 화살이 귀신처럼 날아와 소년의 손바닥을 관통한 것이다. 우두머리 소년의 손바닥이 움직이는 자리마다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자 주위 소년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지금 쇠뇌의 화살을 쏜 거야? 우리의 신분을 모르는 건가.’
소년들은 매일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다 보니 생명에 대한 경각심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편이 치명적인 무기에 공격당하자 순간 머리가 쭈뼛 서면서 겁이 났다.
이때 모두의 시선이 괴이한 눈빛을 뿜어내는 범한에게로 향했다.
“대인!”
순간 제사 대인이 화를 못 참고 소년들을 모두 죽어 버릴까 봐 겁이 난 등자월이 소리쳤다. 만약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면 폐하는 경국 조정과 군대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제사 대인을 더는 총애할 수 없을 것이다.
범한이 천천히 왼손을 내리더니 방아쇠를 잡고 있던 손가락을 풀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주위 소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소년들은 정말이지 앳된 얼굴이었고 가장 어린아이는 고작 열 살 정도로 보였다. 앳된 얼굴에 흉악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인 건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소년들을 대면하니 계년조 조직원들이 소극적으로 반응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범한은 깊이 숨을 들이켜며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는 소년들을 향해 말했다.
“길을 막는 자는 죽는다. 마차에 깔려 죽고 싶지 않으면 모두 비켜라.”
무시무시한 검은색 쇠뇌의 화살에 놀라 겁먹은 소년들은 상황이 다시 잠잠해지자 흉포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쇠뇌의 화살을 맞은 우두머리 소년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울부짖었다.
“뭘 기다리는 거야? 저놈을 당장 죽어! 전부 죽여서 창산에 파묻어 버릴 거야!”
“너, 사람 죽여 본 적 있어?”
그 말에 범한이 고개를 돌려 우두머리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너 같은 잡놈은 매일 한 명씩 죽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벌이는 사이에 소년들은 이미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부하들이 칼을 빼고 맞서려 하자 범한이 손을 저지한 뒤 앞으로 나갔다.
범한이 순식간에 오른손을 뻗어 칼을 들고 마주 오는 소년의 손목을 움켜잡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범한은 멈추지 않고 몸을 옆으로 돌려 뒷걸음질 치며 다른 소년의 가슴팍에 파고들더니 교묘하게 상대방의 팔을 잡고는 자신의 어깨를 지렛대 삼아 손가락을 내리눌렀다. 그러자 서걱,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소년의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름다운 자세로 돌려차기를 하는 범한의 얼굴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발은 정확하게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오는 소년의 허리에 꽂혔다. 피를 뿜으며 날아가는 소년의 모습을 보니 최소한 몇 달은 집에서 누워 지내야 할 것 같았다.
이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왼손으로 달려드는 소년의 목덜미를 내리치자 상대방은 찍소리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범한의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면서도 야수처럼 위협적이었다. 포악무도한 소년들 사이를 종횡무진 움직이며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사람이 한 명씩 쓰러졌고, 거리에는 뼈가 부러지고 살 찢기는 소리와 앓는 소리만 들렸다.
소년들의 후안무치한 호통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거리에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엄습했다. 쓰러지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자 가장 외곽에 있던 소년들은 슬그머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자월을 포함한 계년조 조직원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닥에 드러누운 소년들을 바라보더니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우러러봤다. 비록 이들도 소년들을 격퇴할 수는 있었지만 범한만큼 깔끔하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범한은 단 일격에 생명에는 지장 없으면서도 일어나지는 못할 만큼의 중상을 입힌 것이다.
마차 안에 있는 사천립은 상황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눈을 가리고 연신 고개만 저었다. 반면 아랫입술을 깨물고 초조한 마음으로 범한을 지켜보던 상문은 속으로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그녀는 소년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경도 백성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잠깐의 시간 동안 도망치던 소년들도 범한의 손에 뼈가 부러져 땅에 쓰러졌다. 사방팔방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범한은 자신의 발아래 있는 잘린 팔을 들어 방금까지 움직였던 손목을 만져 보더니 어렸을 때 비개에게 인체 구조를 배웠던 게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몸을 돌려 등자월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이런 상황이 생기거든 내가 나서게 하지 말게. 정말 민망스러우니까.”
그러고는 우두머리 소년 앞으로 걸어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집안 자제인가?”
우두머리 소년은 쇠뇌의 화살에 맞고 범한의 무서운 실력을 봤으면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소리쳤다.
“용기가 있으면 나를 죽여라! 그러지 않으면 네 집이 멸문지화를 당할 테니!”
범한이 웃으며 손가락을 펴서 흔들었다.
“첫째,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둘째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말은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야. 그런 말은 폐하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만약 다음에 또 그런 말을 지껄인다면 너희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도록 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소년을 보자 묻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 범한은 손을 흔들어 마부에게 마차를 몰라고 지시했다.
이때 횃불을 들고 구경꾼처럼 지켜보고 있던 종들이 휘청거리며 걸어오더니 허둥지둥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자 종들이 서슬 퍼런 눈으로 아무런 표식도 없는 마차를 바라봤다.
범한 일행은 이미 마차에 올라 있었고 상처를 입은 두 명의 부하들도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앉자 마차 안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은 감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범한이 갑자기 두 눈을 뜨더니 말했다.
“좀 이상하군, 기녀 한 명을 되찾아 오자고 국공 자제들을 동원하다니.”
등자월이 물었다.
“국공 자제들을 다치게 했으니 대인의 신분이 발각될 걸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일이 대인과 관련 있다는 걸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범한이 그를 힐끗 보았다.
“그것보다 배후에 누가 있느냐가 더 중요하네.”
등자월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 포월루에 가서 은전 1만 냥을 되찾아 오게.”
274화
마차가 경도 대로를 따라 돌 때마다 길옆 민가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등자월이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지켜보다 범한에게 보고했다.
“뒤를 미행하던 종들을 모두 기절시켰으니 이제 조용히 갈 수 있을 겁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니 좀 이상한데 왕계년이 직접 뽑은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미행, 추적, 잠행과 같은 것에 탁월한 능력이 있군. 그런데 감찰원에 걸맞은 위풍은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등자월이 부끄러워하며 설명했다.
“대인, 저희 조직 구성원들은 대부분 1처와 2처 사람들입니다. 왕 대인께서 가장 잘하시는 게 추적과 미행이다 보니 저희를 뽑을 때도 이 방면에 중점을 두셨습니다.”
잠깐 말을 멈춘 그가 뭔가를 생각하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대인께서 오늘 일에 직접 나서신 걸 저희도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호위와 자객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6처 사람 중 적당한 사람을 골라 옆에 두심이 어떠합니까? 대인께서도 북제에 가셨을 때 그들의 실력을 봐서 아시겠지만 무공 실력은 그들이 저희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그림자’를 만나는 걸 약간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끔 진평평을 만나러 갈 때마다 감찰원 6처 책임자인 그림자를 만났는데, 서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자신이 오죽에게 배웠다는 이유로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림자는 분명 오죽의 제자인 자신과 겨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범한은 되도록 6처와 마주치는 일이 없길 바랐다. 게다가 무공 실력만 보면 부친이 암암리에 키운 호위병의 검술 실력이 6처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언빙운의 예측대로라면 호위병이 곧 있으면 자신에게 올 것인데 굳이 조급하게 6처에 접근할 필요는 없었다.
“포월루가 불법적인 짓을 저지른 게 있는지 샅샅이 조사하도록 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나지막이 명령했다.
등자월이 화들짝 놀랐다.
“그럼 배후 사장은 조사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감찰원 내부에서 비호를 해줘 찾기가 쉽지 않으니 외각에서부터 치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네. 포월루를 꼼짝하지 못하게 수렁으로 몰아넣으면 조급해져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겠지.”
사실 그는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포월루가 세자 이홍성과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짐작한 이유는 상문이 포월루 책임자가 원몽이라고 말한 점과 국공가 자제들이 동원된 점이었다. 게다가 정왕 세자와 범약약의 혼사가 모두에게 알려졌으니 2 황자 측이 감찰원 제사라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감찰원을 압박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대방이 이런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범한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어차피 혼사를 깰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자신과 누이의 명의를 이용하는 건 허락할 수 없었다.
더구나 놀 생각에 공금으로 기생집에 갔다가 결국에는 사건을 조사하고 싸움에 휘말리게 된 것도 기분 나빴다. 그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상문 낭자를 힐끗 바라봤다.
“사람을 시켜 성 밖으로 몸을 피할 수 있게 해줄 테니 사건이 해결되면 돌아오도록 하게. 하지만 가기 전에 먼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일을 조목별로 상세하게 써야 할 거야.”
범한은 상문의 성격이 치밀하고 조리 있기 때문에 포월루 일을 조사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이 포월루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모르는 등자월은 오늘 밤 일로 불쾌해진 제사 대인이 감찰원 내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려 하는 것이라고만 짐작했다.
반면 고민하던 사천립은 스승의 눈치를 살피다가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대인, 왜 1처 임시 책임자인 목철 대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대인이 경도에 없는 동안 포월루가 성장한 경위를 물어본다면 내막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눈을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목철 대인이 일부는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전체를 파악하고 있지는 못할 거네. 이 일은 분명 나 아니면 내 집안과 연관이 있는 만큼 그를 이 일과 연관시킬 필요는 없네. 게다가…… 이런 작은 일도 내 힘으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관료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마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조금 전 귀신처럼 신묘한 무술 실력을 보인 사람과 지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범한의 무술 실력은 외양간 거리 사건을 계기로 점차 세상에 알려지긴 했지만 직접 그 실력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범한과 겨루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죽은 걸 보면 오늘과 같은 상황은 굉장히 보기 드문 경우였다.
범한이 목철에게 왕계년의 나대는 버릇을 닮지 말라고 말했을 때 등자월도 옆에서 듣고 있었지만 제사 대인이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니 왕계년처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조심히 침묵을 깼다.
“대인, 아까 포월루에서…… 제가 거금을 가지고 있을 거라 확신하신 이유가 뭡니까?”
범한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지난번에 최씨 효경, 그러니까 최청천에게 2만 냥을 받았을 때 부하들이 돈을 너무 헤프게 쓸까 봐 걱정하며 한 사람당 백 냥밖에 안 나눠 줬지 않은가. 그러니 부하들에게는 총 3천 2백 냥을 나눠 준 것이지. 그리고 왕계년 가족에게 5천 냥을 보냈으니 1만 1천 8백 냥이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그러고는 눈을 감더니 등자월의 주머니 사정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구두쇠라서 먹고 입는 것도 감찰원에서 제공해 주는 거로 해결하지 않나. 심지어 3처 팽 선생 아들 결혼식에 은전 다섯 냥을 축의금으로 낸 뒤 아까워서는 내 앞에서 여러 번 나쁜 풍습이니 없애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런 걸 보면 자네는 한 달에 기껏해야 은전 두 냥 정도밖에 쓰지 않을 거네. 게다가 자네는 왕계년과 다르게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으니 1만 냥이나 되는 거금은 어디에다 둘 수 있겠나? 자네처럼 신중한 사람이 비어 있는 집 안에 두지는 못할 테니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겠지.”
범한이 웃으면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등자월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지나치게 절약하면 젊은 과부도 얻기 힘든 법이네. 게다가 부녀자들 사이에 짠돌이라고 소문이 나면 감찰원 체면도 말이 아니고 말이야.”
마차 안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등자월이 정색했다.
“그 은전은 대인에게 보고한 뒤 나눠 주려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백 냥은 절대 적은 돈이 아닙니다.”
범한이 씁쓸히 웃었다.
“이렇게 짠돌이면서 어떻게 왕계년 가족들에게는 그렇게 큰돈을 보낼 생각을 했는가? 상사라고 생각해 준 건가?”
등자월이 슬며시 웃었다.
“왕 대인이 북제에 계시니…… 변고가 생겨 급히 은전이 필요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내 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감동한 범한이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만약 평범한 경국 사절이나 학생이라면 북제에 있는 게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북제 국민과 거의 대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계년처럼 밀정 책임자로 있는 것이라면 언제 어디서 변고가 터질지 몰랐다.
그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사천립이 불쑥 물었다.
“내일 정말 포월루에서 은전을 찾아오실 생각입니까?”
멀리 이국땅에 있는 왕계년과 그가 최근에 보내온 사리리가 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떠올리며 착잡해 하던 범한은 사천립의 질문을 듣자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찰원은 조정을 위해 밖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는데 조정에 있는 황자들은 서로 알력 다툼이나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더러운 일에 감찰원까지 연루되어 있었다. 범한이 분노에 치를 떨며 대답했다.
“당연히 찾으러 가야지.”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등자월을 바라보았다.
“자네 신분을 당당히 밝히도록 하게! 아까 대화할 때 그 낭자가 나보고 상문을 데리고 가더라도 내일이면 다시 돌려보내야 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건 사람을 보내 억지로 뺏겠다는 말이네! 이런 놈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도 똑같이 대해 줘야겠지. 만 냥을 내일 되돌려 받겠다고 말했으니 자네가 반드시 되찾아 오도록 하게.”
범한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 * *
내일 성문이 열릴 때를 틈타 상문을 성 밖 농가로 데리고 가라는 명령을 받은 등자경이 이 일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집으로 돌아온 범한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비단 이불 아래 있던 완아가 수심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그녀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 않은 채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물론 공금으로 기생집에 간 일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둘러댔다.
그 말을 들은 완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상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황궁에서 자라 상서 거리에 있는 국공 집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완아가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일 기회를 봐서 사철이 모친께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유씨는 상서 거리에서 자랐고 국공 집안 출신이니 들은 게 있을지도 몰라요.”
범한은 순간 완아의 말대로 유씨에게 물어볼까 고민하다 마음을 접었다. 유씨처럼 신중하고 좀처럼 속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 힘을 잃었을 때 발목을 잡고 넘어뜨리려 할 게 뻔했다. 유씨의 거의 모든 부분을 파악한 범한은 그녀가 항상 백작가, 특히 아버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완아가 생각에 잠긴 범한을 보다가 걱정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도 포월루에 가실 건가요? 오늘 만난 국공가 아이들은 경도에서 악명이 자자해요. 상공께서는 무섭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 일은 경계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어린 시절 담주에 있을 때부터 거리에서 남을 못살게 하는 귀족가 자제들을 흠칫 두들겨 패주고 싶었거든요. 그동안 하지 못하다가 오늘 밤 마침내 뜻을 이루니 속이 시원하네요.”
완아가 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담주에서는 상공이 가장 큰 귀족가 자제였을 텐데 거기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고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범한이 완아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인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귀족가 자제들이 아무 이유 없이 단순히 살인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건…… 그건…… 살인이 주는 짜릿한 자극에 중독된 거예요. 갓난아이들도 젖을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살인하는 경우가 있죠. 하지만 살고자 하는 기본적인 본능에 따른 거니까 사람을 죽여도 죄책감도 없고 자신이 뭘 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요. 마찬가지로 경도 그귀족 소년들도 어려서 조정과 세상에 대한 경외심이 없을 테니 잔혹한 짓을 할수록 더욱 기고만장해지는 거죠. 일단 그 경계가 허물어지면 올해 강남 제방처럼 막을 수 없게 돼요.”
그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부하들을 모질게 공격하던 소년들을 떠올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근심이 아름다운 눈동자에 서서히 떠올랐다.
* * *
그날 밤 긴 거리에서 벌어진 싸움 소식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경도 치안을 책임지는 경도부는 가장 마음을 졸여야 했다. 자기 가문의 권위와 조정의 특별 대우를 믿고 악랄한 짓을 일삼던 국공가 자제들이 거리 한복판을 막고 싸움을 벌이다가 참혹하게 당했다니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을 책임진 경도부 관차는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잘린 소년들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벌인 ‘진 공자’에 대해 의구심이 생겼다. 국공가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런 짓을 벌인 사람이 있다니.
곧이어 등자월의 걱정처럼 몇몇 사람들이 범한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날 밤 상황을 자세히 전달받은 경도부는 진 공자가 누구인지 조사하지 않았다. 몇몇 영리한 사람들은 거리 민가 지붕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 내려왔다는 증언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바로 감찰원의 젊은 제사 대인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계년조’였다.
“원몽에게 오라고 하게. 범한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좋은 날은 다 갔다고 할 수 있겠군.”
경국 2 황자가 온화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창가로 걸어간 정왕 세자 이홍성은 자신의 사촌 형제의 성격이 누구보다 치밀하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서늘해졌다.
“누구도 범한이 기생집에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 괴팍한 성미에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군요.”
2 황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작은 접시에 담긴 말린 과일을 집었다. 그러고는 과일 껍질을 벗긴 뒤 천천히 씹으며 말했다.
“범한이 자세히 조사할수록 포월루가 그동안 해온 일들도 드러나겠지.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이홍성이 고개를 돌려 2 황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런 상황도 염두에 두셨지 않습니까. 다만 궁금한 것이…… 왜 범한에게 나설 기회를 주셨습니까?”
2 황자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야 범한과 화해하고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지. 포월루는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네. 만약 범한이 손을 내민다면 나도 그 손을 잡을 의향이 있네. 그래서 한 번은 그에게 손을 내밀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거야.”
275화
2 황자에게 경고를 받은 경도부는 포월루의 사장과 경도에서 유명한 불량소년들이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반면 감찰원은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지는 않았지만 경도 민사 사건을 조사할 권한이 없었다. 이에 경도부에서 저지른 과오를 조사한다는 핑계로 각 방면에서 여러 정보를 찾아다녔다.
책상에 앉은 범한은 앞에 놓인 사건 보고서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포월루는 모두 두 명의 사장이 있는데 너무도 비밀스러워서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예상대로 포월루의 경영 방법이 대담하고 거칠기 짝이 없었다. 올봄에 개업한 포월루는 단 몇 개월 만에 무력과 자금을 이용해 주변 기생집들을 잠식하고는 유명한 기생들을 빼앗아 경도에서 최고로 유명한 기생집으로 성장했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본 범한은 포월루 사장이 분명 경영 고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상인들을 사용하는 방식으로는 포월루가 뒤에서 암암리에 저지르는 일들을 감추지는 못했다. 목철의 말대로 한 달 동안에만 말을 듣지 않는 기녀 네 명이 실종되었는데 아마도 일찌감치 죽은 걸로 보였다. 이건 포월루에서 남몰래 어린 기생을 비롯해서 각종 변태스러운 장사를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범한은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지면서 마음이 갈수록 서늘해졌다. 이전 세계나 지금 세계나 더러운 일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다른 점이라면 경국 경도에서는 이런 더러운 일을 당연하게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자신이 가진 지위와 권력을 사용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포월루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경도 관료들의 입장에서 특별할 게 없었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그건 고관과 부자들이 재물을 긁어모으는 방법일 뿐이었다.
이전 세계에서 범한은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 불공평한 일 앞에서 방관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 세계에서도 그는 추악한 일들을 무관심하게 바라보거나 불공평하고 부패한 일들을 보면서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역시 귀족 가문 자제로서 특혜와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추악한 일들을 보면서도 침묵하고 용인하기로 했다.
하지만 침묵하고 용인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미 더러운 세상에 발을 담근 지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포월루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면서도 그는 침묵과 용인을 선택한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상문을 돈으로 빼내 주고 포월관을 압박하는 등 자신의 힘이 닿는 범위 안에서만 선행을 하려 했지, 계층 간에 발생하는 불공평한 일들에 대해 천둥같이 맹렬한 반응을 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천둥같이 맹렬한 반응’이란 포월관에서 저지르는 모든 더러운 일들을 부정하고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내미는 걸 의미한다. 이처럼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이미 그의 모친인 섭경미가 시도했고 결국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포월루는 단순한 기생집이 아니었다. 범한은 그 속에 숨겨진 불안을 감지할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길한 생각과 좀처럼 참기 힘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그는 직접 포월루에 가서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 * *
화창한 가을 오후, 계년조의 책임자인 등자월이 다시 포월루를 찾았다.
그가 침울한 얼굴로 나타나자 당장이라도 패줄 듯이 포월루 졸개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그의 차림새를 보고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의 옷에서 범접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나오는 듯 겁먹은 모습이었다.
등자월은 오늘 감찰원 관복을 입고 나타났다. 감찰원을 뒤에 업고 있는 포월루로서는 자신의 편도 몰라보는 무례를 저지를 수 없기에 즉시 태도를 바꿔 공손히 그를 3층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는 발이 내려져 있었고 발 뒤에 뭐가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밖에는 청주석으로 만든 원형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대단히 값비싸 보였다.
등자월이 나타나자 석청아가 미소 지으며 탁자 옆 의자로 안내했다.
“감찰원 분이셨군요. 어젯밤에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진작 신분을 알았다면 은표를 받지 않고 그냥 상문을 내어 드렸을 텐데요.”
석청아는 말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발 안쪽을 힐끔힐끔 바라볼 뿐 은표를 꺼내려 하지는 않았다.
등자월은 발 뒤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고 짐작했다. 다만 그 사람이 신비에 가려진 포월루 사장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감찰원에서 8년 동안 있으면서 한 번도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 상인을 압박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범한이 찾아오라고 말한 이상 오늘 반드시 1만 냥을 되찾아 돌아가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석 낭자께서 친절하게 대접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사실 어제 이곳을 나가면서 강아지 몇 마리와 마주쳤습니다. 혹시 이곳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입니까?”
등자월의 질문에 석청아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속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어젯밤 13 관아 사람일 거라고 예측했던 것과 달리 상대는 감찰원 사람이었다. 더구나 경도에서 패악질을 일삼던 작은 사장의 무리가 상대방에게 처참히 당하리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오늘 다시 찾아와 노골적으로 물어보자 석청아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등골에 땀이 흘렀다. 더구나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흘러가 상대방이 심어 놓은 첩자가 누구인지 조사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어느 방면의 이유로 포월루에서는 진 공자가 범 제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석청아는 베일에 싸인 진 공자의 정체에 별로 신경 쓰고 있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가 1만 냥의 은표를 토해 내지 않는 것은 발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이 준 확신 때문이었다.
석청아가 등자월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참, 말을 재미있게 하십니다. 감찰원이 언제부터 기생집 장사에 관여했다고 그러십니까? 이건 엄연히 경도부에서 담당하는 일이 아닙니까? 개한테 물리셨다면 병이 나지 않도록 얼른 집으로 돌아가 쉬셔야지 뭐 하러 기생집에 오셔서 저희 장사에 신경을 쓰십니까?”
그러고는 교태 어린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대인도 참 정력이 좋으시군요.”
저속한 말에 등자월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십시오! 어젯밤 받은 걸 되돌려 주지 않으면 이곳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등자월은 어색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명령에 따라 강하게 상대를 밀어붙였다. 오래 감찰원에서 근무해서 그런지 마음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음험하고 위압감이 가득했다.
그때 발 안에서 누군가가 기침을 두 번 했다. 그러자 석청아가 정색하며 청주석 탁자를 세게 치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행패십니까! 감히 포월루에 와서 돈을 착취하려는 겁니까! 어제 작성한 계약서가 명명백백하게 있는데 상문을 강제로 데리고 간 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 겁니까? 만약 순순히 나가지 않으신다면 발가벗겨서 경도 사람들에게 대인의 추잡한 모습을 보게 할 겁니다.”
등자월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석청아를 노려보면서 귀로는 발 뒤에 있는 사람의 동정을 들었다.
“포월루는 감찰원과 척을 질 생각인가 봅니다.”
작은 기생집이 어떻게 거대한 감찰원의 적이 될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석청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감찰원의 압박이 6부 3사에는 먹힐지 몰라도 포월루에는 먹히지 않습니다!”
석청아의 일갈에 등자월이 크게 웃었다.
“대단하군요.”
그러고는 일어나 차가운 눈빛으로 발을 한번 바라보고는 소매를 털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깐!”
두 번의 기침 소리만 들리던 발 뒤에서 마침내 목소리가 들렸다. 앳되면서도 권위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등자월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청색 발이 서서히 걷히더니 줄곧 베일에 싸여 있던 포월루의 사장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등자월은 너무 놀라 고개를 휙 돌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상대방이 어떤 신분일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고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담황색 옷을 입은 소년을 본 그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매일 밤 음란한 소리가 끊이지 않는 경도에서 가장 크고 인기 있는 기생집의 사장이……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남자아이일 줄이야!
멍한 표정으로 담황색 옷을 입은 남자아이를 바라보던 등자월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비범한 신분을 가진 남자아이가 포월루의 주인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으며 말했다.
“감찰원 직속 주부 등자월, 3 황자님을 뵈옵니다!”
폐하의 막내아들이 바로 포월루의 사장이었다.
줄곧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감찰원 관리가 작은 사장 앞에서 무릎을 꿇자 석청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소하다는 듯이 웃었다.
‘감찰원이 아무리 무시무시한들 황제 폐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개일 뿐이지. 포월루가 보기에는 평범해도 황제 폐하의 막내아들을 등에 업고 있다고!’
“저기…… 등 대인, 더 할 말이 있으신가요?”
석청아가 경시하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등자월은 열 살도 채 안 된 3 황자가 일어나라고 말하기도 전에 일어나서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관은 명령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낭자가 저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으시니 본관은 있는 그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감찰원 대인이 책임지실 겁니다.”
3 황자는 경국 황제의 막내아들이었고 생모는 궁중에서 가장 큰 총애를 받는 의 귀빈이었다. 그런 3 황자가 기생집을 운영하다니! 너무 놀라서 등자월은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예를 갖췄다.
“하관, 물러가겠습니다.”
돌아서는 등자월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3 황자가 찻잔을 집어 던졌다. 3 황자는 나이는 어려도 마음속으로 그럴듯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원하는 만큼 공경을 받지 못하면 화를 내는 어린아이였다.
3 황자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등자월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가겠다고? 왜 조사를 하지 않고 가겠다는 거야? 은전 1만 냥을 돌려 달라며!”
등자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감찰원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황자에게 돈을 뺏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또 폐하에게만 충성하는 감찰원의 특성상 황자의 눈치를 그다지 보는 편도 아니었다. 다만 등자월은 감찰원 제사의 측근이기에 황자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어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저희 상사께 설명하겠습니다. 다만 3 황자께서도 이런 음란한 곳에는 되도록 발을 들여놓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청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감찰원은 듣던 대로 횡포하기가 그지없군. 황자 앞에서도 저렇게 당당하다니!’
3 황자는 여덟아홉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제왕의 집안에서 태어난 만큼 자연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생각도 단순하지 않았다. 이에 그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감찰원이 언제부터 거지가 된 거지? 내 앞에서도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군. 내 사촌 형이 누군지는 알고 있나?”
그 말과 함께 절반밖에 올라가지 않았던 발이 전부 올라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이들을 바라보던 등자월은 정색하며 상대방의 실력이 일반적인 불량배와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무리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소년은 오른손에 붕대를 감은 채 악의 가득한 눈빛으로 등자월을 쏘아보고 있었다. 분명 어젯밤 범한에게 손 쇠뇌의 화살을 맞은 그 우두머리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놀랐던 것은 우두머리 소년 옆에 있는 사내였다. 놀란 등자월의 눈꺼풀이 두어 번 떨렸다. 오늘 일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까 포월루 사장이 3 황자를 걸 알았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약간은 뚱뚱한 소년의 왼쪽 뺨에 난 사마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백작가 작은 도련님도 포월루 사장이십니까?”
약간 통통한 소년은 바로 범한의 남동생 범사철이었다.
‘제사 대인께서 조사하는 포월루에 친아우가 개입되어 있다니!’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3 황자나 등자월을 혼쭐내고 싶어 하는 국공가 무리와는 달리 범사철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빛이 가끔 불안하게 떨리는 것이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그가 3 황자를 바라보며 버럭 화를 냈다.
“이 멍청아,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는 거야?”
3 황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 사촌 형이면 내 편을 들어야지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지?’
그러고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감히 나를 꾸짖는 거야?!”
범사철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젯밤 일을 들은 그는 오늘 자신의 돈줄을 끊으려는 관리가 누군지 직접 보고 싶어 온 것이었다. 그런데 13 관아 관차일 줄 알았던 상대가 감찰원 관리였다니!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깊이 심호흡을 두 번 하더니 3 황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큰돈 벌 수 있는 좋은 일이라며!”
그는 3 황자가 자신을 속이고 이 일에 끌어들였다고 생각했다.
3 황자는 범사철과 친척 관계였기에 올해 초 그를 꼬드겨 포월루를 열었고 지금껏 잘 운영해 왔다. 그래서 3 황자는 장사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는 사촌 형이 오늘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찰원이 아무리 무서운 기관이라 한들 자신은 황자이고 사촌 형의 친형은 감찰원 제사인데 말이다.
불안에 떠는 범사철을 보며 3 황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범사철은 울상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일말의 기대를 품은 얼굴로 등자월에게 물었다.
“저…… 어젯밤 진 공자란 분은 혹시…… 아니지?”
평온한 표정으로 범사철을 바라보던 등자월은 순간 마음속으로 범 제사가 이 사실을 알면 슬퍼할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등자월의 대답에 범사철은 입을 쩍 벌리고 그대로 굳어 버리더니 머릿속으로 재빨리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저 감찰원 관리 놈의 입을 막아 버린 뒤 포월루에서 몸을 빼면 되지 않을까? 만약 형님이 이 사실을 알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276화
범사철은 어떤 사람일까?
사실 그도 경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족가 자제들처럼 좋은 집안을 믿고 악명을 떨치는 불량 소년이었다. 범한이 처음 경도에 왔을 때 열두 살 소년이었던 범사철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그를 바라보았지만, 바보는 아니었기에 자신이 백작 작위의 계승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항상 마작 테이블에서 승부욕을 드러내는 소년이자 장부 읽는 걸 좋아하는 장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소년이었다.
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얼굴이 있듯이 열네 살 귀족 집안 자제인 범사철에게도 여러 얼굴이 있었다. 천진함, 거만함, 악랄함 모두 그가 가진 얼굴이었다.
그의 부친은 조정에서 가장 잘나가는 호부 상서 사남 백작 범건이었고, 그의 할머니는 지금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의 유모였으며, 그의 친모는 궁중의 귀빈과 친척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누이이자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재원인 범약약은 곧 정왕 세자 이홍성과 혼인할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형은 처음에는 은연중에 서로를 적대시했지만 알고 보면 상당히 유쾌한 사람이었다. 일대 시선으로 명성을 떨치며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젊은 신하이자 상당한 권한을 가진 감찰원 제사로, 천하 서생들에게 마음의 우상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게다가 군주와 혼인하여 황실 금고를 물려받을 계승자가 되었으며 어사방에서 폐하에게 의자를 하사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누구도 함부로 보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후광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다. 그의 형이 바로 작은 범 대인이라 불리는 범한이었다.
이와 같은 세도가는 경국이 개국한 이래로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 이처럼 권세가 대단한 집안에서 성장하는 소년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범한이 경도에 오기 전 범사철은 이미 경도에서 악명 높은 소년이었다. 다만 그때는 나이가 어렸고 인생의 방향을 찾지 못해 할 일 없이 놀며 거리에서 패악질을 일삼았었다. 물론 범약약이 집안의 법도로 꾸짖으며 감시한 터라 그동안 큰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겁 없이 함부로 날뛰는 기질이 숨어 있었다.
범한은 경도에 온 뒤 누이와 협력해 범사철을 온순하게 만드는 한편, 공부에 매진해 벼슬길에 올라야 한다는 부모의 압박을 줄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 이로써 범사철은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과거 섭가의 여주인처럼 어마어마한 거상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천부적인 장사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범사철이 이렇게 함부로 날뛰게 된 것은 거상이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와 천부적인 장사 소질 그리고 귀족가 자제의 거만함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렇다면 장사 중에서 가장 수입이 좋은 걸 뭘까? 바로 식욕과 성욕을 대상으로 한 장사였다. 비록 담박서국이 경여당 일곱째 섭 대행수의 관리하에 계속 규모가 확장되고 있었지만 책 장사는 수익이 많지 않았고, 거기에는 많든 적든 범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물론 범사철은 이 점을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어떤 사업이든 스스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황궁에서 매일 태부와 공부만 하는 게 싫증이 난 3 황자가 동년배들보다 성숙한 머리를 이용해 범사철에게 함께 경도에서 장사해 보자고 제안했다. 이로써 열네 살과 여덟 살 소년이 서로 힘을 합쳐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집인 포월루를 운영하게 되었다.
특별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년들의 유치한 연합은 예상치 못한 파장을 일으키며 관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범사철은 세자 이홍성이 유정강 기생집 영업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이홍성에게서 몸값이 비싼 기생인 원몽을 빌려 왔다.
범사철의 장사 안목, 원몽의 수완, 3 황자의 권세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들의 패악 무도한 짓까지 결합되자 포월루는 두세 달 만에 경도에서 가장 큰 기생집으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경도 기생집들이 사라지고 여러 사람이 죽고 양갓집 여자들이 순결을 잃었지만 그건 그의 고려 범위에 있지 않았다.
범사철은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상당한 권위를 가진 귀족가 자제였다. 그러니 자신의 일로 누가 죽든 신경 쓰지 않았고 이후 벌어질 일들도 걱정하지 않았다. 바로 어젯밤 범한이 완아와 대화하면서 가장 근심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범사철이 두려워하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범한이 황제의 명을 받아 북제 사신으로 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포월루가 경도에서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하면서 마음속 두려움도 점점 옅어졌고 나중에는 자신이 기생집을 운영하는 걸 형님이 안다고 하더라도 되돌리기에는 늦었으니 어쩌지 못할 거라 단정 지었다.
그는 훗날 상황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봄에는 백작가와 정왕가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기에 조정 대신들도 백작가가 2 황자 편에 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범사철은 매형이 될 이홍성과 관계가 나빠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2 황자나 3 황자와 사귀는 게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범한은 경도로 돌아온 뒤 2 황자와 대립하려 했다.
귀족가 자제인 범사철은 자신이 경도에서 저지른 악행 때문에 범한이 화를 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그쪽과 가깝다는 걸 안다면 분명 무슨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9월부터 포월루 부하들에게 행동을 조심하라고 분부한 뒤 자신은 재빨리 발을 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애가 달아 죽을 지경인 범사철과 달리 3 황자는 누구의 말을 들은 것인지 황실 안에 콕 박혀서는 오늘까지 일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 * *
범사철이 초점 없는 눈으로 등자월을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감찰원 관리가 범한의 측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순간 죽여서 입을 막아 버릴까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포월루 사장인 자신이 측근까지 죽인 걸 알게 된다면 형은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가 봐. 이 일은 내가 직접 이야기할 테니까.”
두려운 마음에 범사철의 통통한 볼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들어 따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았다. 형이 두려운 마음이 무엇보다도 컸기에 더 이상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등자월이 그를 힐끗 보고는 예의를 갖춰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3 황자가 볼멘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냥 놓아주면 내 체면은 뭐가 되겠어? 신하 주제에 감히 내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고!”
범사철이 조용히 한숨을 쉬고는 얼빠진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청주석 탁자의 반질반질한 표면을 쓰다듬으며 석청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연아는 지금 어디 있지?”
한편 석청아는 범사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큰 주인이 왜 감찰원 관리를 무서워하는 거지?’
복잡한 내막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연아는 후원에서 쉬고 있겠지요. 지금 만나시려고요?”
열네 살 범사철이 나이 많은 어른들이나 지을 수 있는 모진 눈빛을 짓더니 결심이 선 듯 침울하게 말했다.
“아니. 내버려 둬.”
범사철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주판을 굴려 봤다.
‘아버지가 이 일을 아시면 나는 맞아 죽을 목숨이고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시겠지. 황궁에 있는 의 귀빈이 직접 형님에게 봐달라고 사정을 한들…… 아, 장 공주의 체면도 봐주지 않는 형님인데 의 귀빈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
고민하던 범사철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씨익 웃었다.
‘형수랑 누이가 말해 준다면 듣지 않을까? 두 사람이 사정한다면 형님도 나를 처벌하지는 못할 거야.’
“나는 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
범사철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3 황자를 바라봤다. 이번 일은 왠지 모르게 수상한 느낌이 드는 만큼 더는 사사로운 이익에 얽매여 있을 수 없었다.
“이제는 여기에 오지도, 수익에 관여하지도 않을 거야. 내 지분을 3개월 안에 정리해 줘.”
3 황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더니 대답했다.
“둘째 형님께서 지원해 주고 있는데 뭐가 무섭다고 그래?”
범사철이 3 황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석청아를 노려보았다.
“네 그 보잘것없는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1만 냥은 당장 돌려주도록 해!”
그제야 어젯밤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은 석청아가 몸을 움츠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포월루 호숫가에 인접한 3층 방에 앉은 범한은 호수 위를 한가롭게 노니는 배와 새,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며 침착하게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 이미 모든 정황이 정리된 상태라 고민할 것도 없었다.
경도부에서 이 기생집을 조사하지 않은 이유는 사장이 범사철과 3 황자였기 때문이고, 감찰원에서 개입하지 않은 이유는 범한의 체면 때문이었다. 아마도 1처 사람들은 이 기생집의 진정한 주인이 범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것이다. 담이 큰 목철이 범한에게 몇 마디 언질을 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범사철의 최근 행적이 다소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형인 자신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범약약과 완아에게 왜 몰랐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남존여비 세상에서 범사철이 집 밖에서 나쁜 일을 하는 걸 안들 누이와 형수가 간섭할 수는 없었다.
범한은 2 황자 측에서 무슨 계획으로 이런 일을 시작했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봄에는 2 황자와 범한의 관계는 좋았으므로 2 황자는 단순하게 3 황자와 범사철을 통해 돈줄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에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다. 2 황자로서는 돈도 벌고 양측의 관계도 더욱 긴밀하게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일을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호의에서 시작한 일이므로 알리지 않아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전 세계에서 성을 파는 것에 불과했던 매춘이 어떻게 우애를 다지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만약 정말로 양측의 이익 관계가 긴밀하게 얽히게 된다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관계가 될 터였다.
범한이 경도에 돌아온 뒤 둘 사이에 변화가 발생한 것은 2 황자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원래 양측의 우애를 다지기 위해 만든 포월루 사이를 틀어지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범한이 계속 2 황자를 건들려면 포월루의 존재도 고려해야 했다. 범사철이 이곳에서 떳떳하지 못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감찰원이 지금까지 조사한 증거만으로도 포월루는 폐업하고 범사철은 중죄를 받기 충분했다. 백작가의 힘을 이용한다면 처벌은 피할 수 있겠지만 적들이 이 일을 빌미로 공격한다면 백작가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물론 범한은 가문의 힘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도 조정에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신비한 경력과 2년 동안 쌓아 올린 명성만으로 그는 조정에서 중요한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백작가와 3 황자 측이 함께 기생집을 열었다는 것은 서로의 얼굴에 똥물을 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한마디로 모두 다 같이 성공하거나 모두 다 같이 망하는 상황이었다.
줄곧 청렴한 시선으로 명성을 떨쳤던 범한은 정말 고민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 더럽혀지는 건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범사철의 운명과 부친의 입지는 신경 쓰였다. 진평평은 이전에 여러 번 자신이 부친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말했었다. 게다가 이 일은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약간의 선의를 베풀어 포월루 일을 완전히 덮어 버린 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범사철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면 된다. 그저 상대방이 내민 손을 잡는 게 가장 간단하면서도 서로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2 황자가 내민 검은 마수를 잡을 생각이 없었다. 2 황자는 충분한 성의를 보이며 신중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 손을 잡을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압박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용납할 수 없는 건 자신의 아우를 이용해 협박하는 것이었다. 2 황자는 상당한 지략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중요한 점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2 황자는 습관적으로 이익의 관점에서 일을 판단하고 신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범한의 행동을 예측하는 바람에 이익과 손해의 범주를 벗어난 일들이 많다는 걸 잊고 있었다. 게다가 범한은…… 보통의 신하들보다 훨씬 큰 담력을 가지고 있었다.
등자월은 이미 안전하게 마차에 올라 포월루를 떠났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우는 어쨌든 구제 불능이 될 정도로 악해진 건 아니었다. 그가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문을 밀고 나갔다. 얼마쯤 걸어간 그가 짝문 앞에 멈춰 서더니 문을 가볍게 밀어젖혔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쭉 훑어본 뒤 마지막으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범사철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277화
방 밖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들은 기절해 쓰러져 있었고 범한만 홀로 방문 앞에서 서 있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철없는 열네 살 아우를 바라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과 소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여전히 범한의 진짜 정체를 몰랐지만 어젯밤 자신들 우두머리의 손바닥에 쇠뇌의 화살을 날린 진 공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우렁찬 괴함과 함께 몇몇 사람들이 달려들려 했다.
조급해진 범사철이 아무 생각 없이 뒤돌아 쥐고 있던 찻주전자를 휘둘렀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찻주전자는 옆에 있던 졸개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혔다. 신음 소리와 함께 졸개가 쓰러지자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범사철의 손에 있던 찻주전자도 부서졌다. 안에 담겨 있던 찻물이 어찌나 뜨거운지 그의 손을 타고 흘러 땅 위로 떨어진 후에도 폴폴 김을 내뿜었다. 그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문 앞을 바라봤다. 깨진 찻주전자를 들고 있는 오른손은 계속 부들부들 떨렸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형님, 여긴 어떻게…… 왔어?”
범한은 아우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방 안 사람들을 지켜봤다. 한편 방 안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범사철을 바라보았다.
‘큰 사장께서 왜 자기 부하를 때린 거지?’
이에 반해 나이 어린 3 황자만 의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그때 머리 회전이 약간 빠른 한 명이 범사철이 상대방을 ‘형님’이라고 부른 것을 기억해 내고는 범한의 정체를 깨달았다.
‘포월루에서 난동을 피우는 저놈이 큰 사장님의 형인 감찰원 범 제사라고? 문 앞에 서 있는 젊은 남자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작은 범 대인이라고?’
범한은 여기 사람들이 자신을 뒷배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눈꺼풀을 내려뜨리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돌아갈 거야, 말 거야?”
범사철은 도무지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양 볼을 떨더니 잠시 뒤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아가야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범한에게 걸어가는 모습이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 같았다.
범한이 2년 동안 키가 훌쩍 자란 동생의 귓불을 잡아당겼다.
“첫째, 네가 한 일은 잘못된 일이야. 둘째, 너도 이제 아이가 아니니까 내 앞에서 가여운 척하지 마.”
“알았어.”
범사철이 울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범한은 울먹이는 범사철은 무시한 채 차가운 눈빛으로 방 안에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무리 중 어젯밤 마차를 막아 세운 국공가 소년들의 모습도 보였다. 멀쩡한 모습으로 여길 온 걸 보니 자신이 혼내 주기 전에 뒤꽁무니를 뺀 게 분명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범한만큼 기억력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자 모두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사촌 형님을 뵙니다.”
“큰 숙부, 안녕하십니까.”
“범 어르신.”
포월루 대지주와 소액 지주들이 우거지상을 한 채 앞으로 걸어 나와 자신을 소개하자 범한은 울화가 치밀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만일 이 사건을 계속 조사한다면 마지막 배후로 나올 사람은 분명 자신이었다. 마차가 상서 거리에서 오는 것 같다는 상문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작가나 유씨 국공가와 친척 관계인 사람들이었다. 범사철과 3 황자가 혈연으로 맺어진 조직 안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며 기생집을 운영하고 있던 만큼 이들과 관계는 정리될 수는 없었다.
범한이 치솟는 분노에 고개를 저으며 씩씩거렸다. 그의 마음속에 난데없이 나타난 친척들을 전부 포월루 밖 호수에 던져 넣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솟구쳤다.
잠시 뒤 화를 삭인 범한이 닭을 잡는 것처럼 한 손으로 범사철의 목덜미를 잡고는 포월루 밀실에서 나왔다. 두 형제가 방 밖을 나서려 할 때 3 황자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작은 범 대인…… 아니, 큰 사촌 형님!”
범한이 고개를 돌려 막내 황자를 바라보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3 황자 저하, 앞으로는 절대 제 앞에서 어른스러운 척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는 옹졸한 어린아이가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쩍 벌렸다. 감히 공개적인 장소에서 황자에게 옹졸한 어린아이라고 말하다니…… 경국이 개국한 이래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범한이 처음이었다.
모두 범한의 대담함에 놀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고 해도 황자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3 황자가 작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노려보자 범한이 웃었다.
“작은 입술이 떨리는 걸 보니 노래 솜씨가 좋으시겠습니다.”
3 황자는 화가 치밀어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을 때는 기분이 안 좋은 것이니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모친의 분부가 떠올라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후라 포월루에 손님이 많지 않은 터라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금방 1층까지 퍼져 나갔다.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어젯밤에 포월루에서 난동을 피운 진 공자가 작은 범 대인이라는 알고는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상황만 지켜봤다.
한편 상황을 모르는 졸개들과 여자들은 서로 엿들은 정보를 나누며 소곤거렸다.
“닭처럼 목덜미를 잡힌 채 시무룩해 있는 뚱보가 우리가 일하는 포월루의 베일에 싸인 큰 사장이라고? 소문으로 들었던 무시무시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데? 그럼 큰 사장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은 누구지?”
무표정한 얼굴로 포월루의 ‘큰 사장’을 붙잡고 있던 범한이 구석에서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연아 낭자를 바라봤다. 그가 무슨 자극을 받은 건지 미간을 찌푸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경도 사람들에게 진상을 감출 수는 없게 되었다. 사실 그는 다른 계획이 있었기에 이 일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포월루 앞, 긴 거리 양쪽에는 마차가 한 대씩 세워져 있었다. 범한이 타고 온 마차는 포월루에서 서쪽에 세워진 마차였다. 아무런 표식도 없는 동쪽에 세워진 마차 창문 커튼이 슬쩍 걷히더니 정왕 세자 이홍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밝았던 이전 얼굴과 달리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범한에게 인사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떨어져 앙상해진 가지 사이로 햇볕이 비추자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등자경이 몸을 굽혀 인사했다.
“상황을 아신 어르신께서 작은 도련님과 대화할 일이 있으시답니다. 괜찮으시면 작은 도련님을 먼저 돌려 내겠습니다.”
범한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호위병들에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 서라고 지시해.”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창백하게 질린 범사철을 노려보았다.
“빠져나가는 놈은 내가 직접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
담담한 말투에 범사철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등자경은 큰 도련님이 상당히 화나 있다는 걸 알기에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공손히 대답했다.
“어르신께서도 이 일은 큰 도련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일이니 저택 문을 걸어 잠그고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자 이홍성이 타고 있는 마차로 걸어갔다. 범사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불렀으나 범한이 뒤돌아보지 않자 고분고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옆에 선 두 사람은 무슨 협상이나 담판을 하는 게 아니라 사소한 집안일을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범한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몽 낭자를 이렇게나 빨리 유정강으로 돌려보내는 겁니까?”
이홍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네가 원몽의 일까지 알아챌 줄은 몰랐네.”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면서도 저를 속일 생각을 하셨군요.”
이홍성이 슬쩍 몸을 비켜서며 그에게 마차에 올라타라는 표시를 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넓은 마차 안을 바라봤다. 풍만한 몸에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원몽 낭자 말고도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다. 온화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한 범한은 양손을 공손히 모으며 인사했다.
“2 황자 저하를 뵈옵니다.”
“봄에는 자네와 내가 이렇게 서먹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는 2 황자의 눈에 안타까움이 배어났다.
“어쩌다가 이런 사이가 된 것인가?”
범한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범씨 성을 가진 누군가가 호의를 몰라서겠지요.”
2 황자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여기서는 편히 이야기할 수 없으니 마차에 타서 대화를 나눠 보지 않겠나?”
범한이 미소를 거두고는 고개를 저었다.
“급히 집으로 돌아가 보잘것없는 동생을 혼내 주어야 해서 시간이 없습니다.”
“이동하면서 이야기하자는 것이네.”
2 황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모두가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포월루 사건을 조사하든 하지 않든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만약 범한이 조사한다면 백작만 체면이 깎이고 손해를 보게 되겠지만 조사하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바로 포월루의 이익을 다 함께 나누고 조정에서 자신의 ‘총애’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황실 금고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2 황자로서는 포월루에서 오는 은전이 상당히 중요했지만 만일 범한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은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범한이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사건을 조사하다 자기 집안까지 들추게 되었으니 2 황자 저하께 우스운 꼴을 보였군요.”
2 황자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웃음이 나겠는가? 포월루 일은 상당히 복잡하네. 나는 비록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네만 내 아우 녀석과 범사철이 관여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네. 포월루 지분 중 최소 7할은 범사철의 것이라 하더군. 자네들은 친형제 아닌가.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는 관여하지 말고 손을 떼도록 하게.”
두 사람 모두 직설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나서 큰 사장까지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홍의공 집안의 두 자손이…… 적지 않은 돈을 댄 것 같더군.”
2 황자가 넌지시 알려 주었다.
홍의공이라면 유씨 집안을 뜻했다. 범한은 거짓으로 놀란 척하고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건은 정말 조사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그 말을 들은 2 황자는 속으로 기뻐했다. 사건을 조사하지 않겠다는 건 범한이 잠시 화해를 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가 미소 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신분이 다르긴 하지만 경도에서 살아가기 위해 발악하는 가여운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집안에서 중요한 인물인 자네가 조카들이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잘 이끌어 줘야 하지 않겠나.”
“저하께서 속이려 하지만 않으신다면 저도 고지식하게 법률만 따르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범한이 2 황자의 눈을 직시했다.
“하물며 저하께서 세밀한 부분까지 명확하게 계산하고 계신데 제가 어찌 양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순간 2 황자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범한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바닥을 한 번 치자 곧이어 마차 뒤 포월루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나뒹구는 소리와 의자와 탁자가 쓰러지는 소리 그리고 공포에 질린 기생들의 비명이 한데 뒤섞인 소리였다.
범한이 감찰원 1처 사람들을 포월루에 배치해 둔 걸 몰랐던 정왕 세자 이홍성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안지, 아무리 명확한 증거를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네. 어찌 힘든 길을 가려는 겐가?”
이홍성의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말에 범한의 눈동자에 순간 자조하는 기색이 보였다. 범한이 완강하게 손을 뿌리쳤음에도 2 황자는 마음을 진정한 뒤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설득했다.
“아이들이 저지른 일이지 않나. 사철이와 동생이 심심한 나머지 장난삼아 기생집을 운영했을 뿐이니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것 없네.”
범한도 포월루 사건을 이 잡듯이 조사해 봤자 3 황자도 건들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겉으로는 포월루와 조금의 관련도 없는 2 황자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몽을 끝까지 물고 들어가도 기껏해야 정왕 세자 정도만 연루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범한은 고개를 저으며 이 사건은 조사하면 할수록 자신의 손에 상처만 입힐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철이는 제 아우이니 어떻게 가르칠지도 제가 고민할 문제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2 황자를 바라보았다.
“저하께서는 본인의 아우를 어떻게 가르칠지나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278화
결국 참지 못한 이홍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지, 이 사건을 오해해서는 안 되네. 포월루는 사철과 3 황자께서 저지른 일이네. 원몽이 와서 돕는 걸 나도 알고 있긴 했지만 나와 2 황자 저하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네.”
“어쩌다 한 번 관여하지 않았겠지. 이 사건만 봐도 아주 교묘한 계획 아래서 진행되었다는 걸 알 수 있네.”
그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이홍성을 바라봤다.
“게다가 나는 내 아우에게 자네와 원몽의 관계를 알아낼 만한 능력이 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네.”
포월루에서는 여전히 도망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2 황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인정사정없이 사건을 조사하려는 건가?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친아우와 가족들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
그의 생각을 읽은 범한이 자조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주도면밀하신 분인 만큼 제가 친아우인 사철을 경도부에 압송하지는 못할 테니 포월관도 조사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셨겠지요.”
양측이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포월루에 연루된 백작가나 유씨 집안사람들도 경도부의 조사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범한은 마음 한편으로는 2 황자가 제시하는 방법이 시원스럽고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범한은 멀리 포월루에 있는 목풍아에게 비밀스러운 신호를 보냈다. 그는 애당초 포월루 장부를 압수해 뭘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미 범사철의 약점은 2 황자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는 악덕 상인이 되는 법은 알면서도 악덕 상인의 꽁무니를 항상 관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2 황자는 마침내 범한이 뭘 원하는지 깨닫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포월루가 범사철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만큼 이 일을 깨끗하게 처리할 수가 없겠지. 백작가와 유씨 집안이 이 일과 연루된 만큼 시끄러워지길 원치도 않을 거고. 결국 나와 평화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거야.’
“포월루는 계속 영업을 할 겁니다.”
범한이 침착한 표정으로 2 황자를 바라봤다.
“2 황자 저하께서는 제 뜻을 이해하셨겠지요.”
2 황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강렬한 불안감이 솟구쳤다. 범한처럼 통제하기 힘든 사람은 기생집만으로는 손발을 묶어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상대가 어떤 방법을 들고 반격할지 알 수가 없었다.
2 황자와 대화를 끝낸 범한이 정색하며 이홍성을 바라봤다.
“이 일은 세자께서 잘못하신 겁니다. 세자가 기생집을 쏘다니는 걸 알면서도 저는 그동안의 우정을 생각해서 차마 약약이에게 말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혼인한 뒤에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었지요. 그런데 세자께서는 어떻게 사철이가 이런 장사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저에게 말해 주지 않을 수 있으십니까. 제가 북제 사신으로 가는 바람에 경도에 없긴 했지만 약약이에게는 알려 줄 수 있지 않았습니까? 세자는 이제 곧 사철이의 매형이 되실 사람이지 않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는 이홍성을 바라보며 범한은 차갑게 말했다.
“정말…… 실망했습니다.”
2 황자는 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총명한 그도 범한의 말에 숨겨진 살벌한 뜻을 알아챌 수는 없었다. 이홍성도 부끄러워할 뿐 범한이 이 일을 이용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목적을 이루려 한다는 건 몰랐다.
한편 포월루에서는 수색이 계속되고 있었다. 잠자코 있던 2 황자는 순간 범한이 화해하기로 약속했는데도 수색이 계속 진행되는 게 의문스러워졌다. 더구나 감찰원 사람들이 이홍성과 포월루의 관계를 알아낼까 걱정되기도 했다.
“범 대인, 이만 멈추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경도부에서 다뤄야 할 일을 감찰원에서 관여하는 건 폐하께서 엄격하게 금지하신 일이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2 황자 저하, 저는 그저 친척들의 요청을 받아 기생 놀이에 빠진 친척들을 잡아가려는 것뿐입니다. 물론 1처 사람들을 동원한 건 공적인 힘을 사적으로 이용한 셈이긴 하지만 다른 조정 관리들도 부하들을 동원해 집안일을 처리하지 않습니까. 그저 부하들을 동원해 집안 친척들을 잡는 것뿐이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2 황자는 턱 말문이 막혔다. 범한이 친척을 핑계로 삼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마차 뒤 포월루 안에서 들리던 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변장한 감찰원 1처 관리들이 일고여덟 명의 사람을 끌고 나왔다. 모두 포월루 일에 깊이 개입된 백작가, 유씨 집안의 친척들이었다. 가장 마지막에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소년이 나왔는데 아마도 격렬하게 반항하며 도망치려다가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보니 어젯밤 범한을 죽이려 한 우두머리 소년이었다.
놀라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척들을 바라보고는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저택으로 돌려보내라.”
그러고는 몸을 돌려 2 황자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들은 경국 법률이 아니라 가법에 따라 처리할 생각이니 2 황자 저하는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범한의 말을 들은 2 황자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떤 가법을 동원한들 백작가가 포월루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못할 거야. 그저 화풀이하려는 것이겠지. 그나저나 범한은 무슨 가법을 사용해 저놈들 혼내려는 건가.’
범한이 그의 눈을 보다가 대뜸 입을 열었다.
“어젯밤 매복해 있다가 저를 공격한 사람에게 이 말을 전해 주십시오. 이후 경도 거리에서 제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입니다.”
* * *
감찰원 1처는 적당한 선에서 포월루 수색을 마무리한 뒤 백작가와 유씨 집안과 관련된 사람들만 잡아서 나왔다. 포악무도한 국공가 자제들은 범한에게 맞아 집에 누워 있는 데다 깊이 관여하지 않아 체포하지 않았다.
체포를 완료한 목철과 목풍아가 마차 옆에 서 있는 범 제사에게 묻지 않고 소년들을 백작가로 압송했다. 감찰원 관리들은 범한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안에 있는 사람이 나오지도 않는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범한보다 존귀한 인물이 안에 타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범한은 황제의 외척이었으니 이보다 존귀한 인물이란 황제의 친척을 뜻했다.
수색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자 범한은 범사철과 포월루가 관여되어 있는 장부만이라도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이것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2 황자와 잠시 평화를 유지하며 포월루에서 벌어진 어리석은 일들을 다시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감찰원 관리들이 철수하자 경도부 관리들이 와서 치안을 유지하기 시작했고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은 것으로 보였다. 백작가와 유씨 집안은 포월루에 7할에 달하는 지분이 있는 만큼 계속해서 추문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생집에 붙잡혀 있어야 해야 했다. 그럼 경도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 없이 태평해 보일 것이다.
마차 위에 있는 2 황자가 범한의 평온한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속으로는 감탄과 찬사를 금치 못했다.
‘포월루 일로 화를 낼 만도 한데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는다니. 게다가 내가 내민 화해의 손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잡았어.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과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니야.’
2 황자는 범한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를 보자 불안하면서도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범한은 분명 자신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순간 그는 범한이 신하임에도 깊이 사귀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홍성, 자네 먼저 가보게. 범 대인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
거리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지 2 황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상대방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자신이 집으로 얼른 돌아가야 해서 깊이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말했음에도 2 황자는 독단으로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하지만 황자가 마차에서 내리겠다는데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범한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듣고 싶었다.
이홍성이 고개를 숙여 범한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고는 시끄러운 포월루를 뒤로하고 떠났다.
오래 마차에 앉아 있었던 2 황자가 찌뿌둥한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멀리서 자신을 보며 소곤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한 채 범한을 데리고 찻집으로 들어갔다.
범한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놀란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세우고 2 황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2 황자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입맛은 알고 있네. 매번 정왕가에 찾아갈 때마다 꽈리 열매로 만든 음료를 마시지 않나. 포월루의 일로 분명 나를 미워하고 있겠지.”
범한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저도 성인은 아닌지라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2 황자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는 3 황자가 자네 아우와 장사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몰래 도와주기도 했네.”
그가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때는 조정과 경도에서 백작가와 내가 사이가 좋다고 알고 있던 때라서 도와준 것이지 이 일로 자네를 위협할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네. 그저 양측이 함께 이익을 공유하면서 사이가 더욱 친밀해지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네. 포월루를 이처럼 비열한 방법에 이용하는 건 원래 내 뜻과는 맞지 않아.”
범한은 이미 상대방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봄에 포월루를 열었을지 파악하고 있었기에 의외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에게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인정한 것은 의외였다.
“2 황자 저하께서는…… 소신에게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2 황자가 기다렸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계속 자네를 주시하고 있었네. 그래서 자네가 경도로 돌아온 뒤 나를 배척하려 한 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아.”
범한이 웃었다.
“그 말은 타당치 않습니다. 소신이 어찌 저하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소신에게 좋은 점이 뭐가 있겠습니까?”
2 황자가 그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자네가 태자 편에 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있네. 그래서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거야.”
2 황자가 이 정도로 솔직하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범한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평정심을 되찾고는 밝은 미소를 띠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모르십니까?”
2 황자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마디로 나무 탁자를 두드렸다.
“외양간 거리.”
2 황자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내가 한 일이 아니네.”
그러고는 일어나서 범한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황자의 친아들이 신하에게 허리 숙여 사과하다니. 하지만 범한은 2 황자가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저하가 저하이신 것과 소신이 신하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명과 관련된 일이 큰일이라는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하께서는 직접 사과하시면 신하인 제가 감격해 눈물 흘리며 지난 일을 묻어 버릴 거라 예상하셨겠지요?”
2 황자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오랫동안 느껴 본 적 없던 분노를 억눌렀다.
“범 대인, 어떻게 해야 우리 둘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겠소?”
범한이 돌연 활짝 웃더니 가볍게 일갈했다.
“사실 지난 사건을 조사해 보았는데…… 저하께서는 누군가가 장 공주가 저를 눈엣가시로 여기게 만들어 자객과 도찰원으로 저를 위협하게 했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만일 제가 내년에 황실 금고를 물려받는다면 신양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하께서 저의 이런 상황을 이해하신다면 저는 조금도 편향적이지 않을 겁니다. 최소한 이후 경도에서 감찰원은 중립적이고 공명정대한 자세를 유지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2 황자는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방금까지 솟구치던 화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려졌다. 최근 몇 달 동안 흠천감 감정을 비롯한 자신의 편에 선 조정 대신들이 감찰원의 감시를 받으며 고초를 겪는 바람에 2 황자 측은 상당히 골머리를 썩였다. 그런데 지금 범한의 입에서 감찰원이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오른 손바닥을 펼치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사 대인이 말해 보시게.”
어느새 호칭은 범한의 관직명인 제사 대인으로 변해 있었다.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만일 2 황자 저하가 장 공주와 거리를 유지하신다면 한평생 평안한 삶을 사시도록 해드릴 수 있습니다.”
범한이 이처럼 황당한 의견을 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2 황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279화
‘한평생 편안한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오만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군!’
결국 마음속에 가득 차오른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그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범 제사는 나를 농락하려는 것인가?”
생김새는 별로 닮지 않았지만 성격과 취향이 비슷한 두 젊은이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불꽃 튀는 의견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범한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저하께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듯이 저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자리가 그렇게 좋은 자리인 것입니까? 평안한 삶이야말로 가장 얻기 힘든 복 아닙니까? 저하는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이고 숙 귀비는 눈처럼 맑고 고우신 분이면서 어찌 그 속에 담긴 핵심을 보지 못하십니까?”
찻집에는 아무도 없어 대화를 누가 엿들을 염려는 없었지만 범한이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생각을 말하자 2 황자는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세상에는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이 자신에게 황위를 찬탈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여전히 태자를 지극히 공경하고 있는데 어찌 이런 말을 가볍게 내뱉을 수 있을까.
비로소 2 황자는 범한의 담력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뭘 믿길래 이렇게 담이 클까.
범한의 말이 오랜 시간 품고 있던 아픔을 건드린 것이지 2 황자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가 서서히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범한을 똑바로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언제 그 자리가 좋은 자리라고 했는가! 하지만 나는 천자의 아들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가져야만 하네. 가지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가져야 한단 말이네! 만약 내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이런 일에는 끼어들지 않고 매일 태학에서 공부하며 살고 싶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범한의 말에 자극을 받은 2 황자가 냉소를 지었다.
“이유야 많지. 열두 살 되던 해부터 나는 내 자질과 상관없이 친왕이 될 운명이었네. 그래서 열세 살 때 왕에 봉해졌고 열네 살 때는 황궁 밖 저택을 수리해 그곳에서 살았지. 겉으로는 황궁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내가 자유롭게 군신들과 만날 수 있게 기회를 준 것이었어. 열다섯 살 때는 나보고 어서방에 들어가 조정의 일을 들으라 했는데…… 그게 뭔 줄 아는가? 그런 기회는 태자만이 가질 수 있는 거네!”
2 황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도 싸우고 싶지 않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이 계속 나를 부추기니 내가 어쩔 수 있겠는가. 내가 가만히 있다고 동궁에서 나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가? 태자는 당시에 어린 나이였음에도 독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네. 그 애는 채 열세 살도 안 되었을 때 이미 친형인 나를 죽이려 했어! 설사 내가 태자를 설득한다고 하더라도 황후가 안심할 것 같은가? 황후가 나를 내버려 둘 것 같은가?”
범한은 아무 말 없이 2 황자가 흥분해 속마음을 털어놓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사람이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거야.”
보는 사람이 추워질 정도로 2 황자의 눈은 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
“나는 어머니를 보호하고 내 목숨도 지켜야 하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 사람이 나보고 싸우라 하니 나는 싸울 수밖에 없네!”
범한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2 황자를 황위 다툼의 길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은 황제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2 황자 저하는 태자의 성장을 부추기기 위한 숫돌의 역할만 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네.”
2 황자가 소매를 털며 말했다.
“동시에 행운아이기도 하지. 곧 버려질 숫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 나는 싸우려는 거네. 만일 싸워 이겨서…… 나를 여기까지 밀어 넣은 사람이 후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나로서는 용상에 앉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일 거야.”
범한이 웃었다.
“굳이 이런 일에 원망을 분출할 필요가 있습니까? 1 황자께서는 이미 친왕에 봉해지셨지만 2 황자 저하보다는 입장이 분명해 보이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억지로 강물에 들어가 수영 시합을 하라고 등을 떠민다면 들어가지 말아야지요. 강물에 들어가 싸우기 싫은 상대와 경쟁하는 것보다는 등을 떠미는 그 사람과 싸우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그제야 냉정함을 되찾은 2 황자가 화들짝 놀라 범한을 바라봤다.
“자네 그 말은…… 모반에 가깝네.”
그러자 범한이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하께서 말씀하신 말에 비하면…… 소신의 말은 모반에 가깝다 할 수도 없습니다.”
2 황자가 빠른 속도로 두어 번 눈썹을 실룩이며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 나를 도와주게.”
범한이 침착하다 못해 냉정해 보일 정도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2 황자가 범한을 찬찬히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가 뭔가? 언젠가는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네.”
아무 말 없이 2 황자를 바라보는 범한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혈연관계로 보자면 앞에 앉은 이 사람이 내 형이 되는 건가?’
범한은 일반 신하들과는 달랐기에 선택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경국 황제의 피도 눈물도 없는 교육 방식이 놀랍고 두려울 뿐이었다.
2 황자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던 범한이 결국 입을 열었다.
“신양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십시오. 그분은 상당한 능력을 갖춘 미치광이라 저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2 황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범한은 속으로 긴 탄식을 내뱉었다. 상대방은 자신이 가진 힘에 마음이 움직이면서도 여전히 신양 장 공주의 실력을 더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최소한 나중에 2 황자를 대적해야 할 때 마음을 모질게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여전히 자네와 적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네.”
2 황자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 말에 범한은 잠시 조용히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포월루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저도 저하를…….”
범한의 자만심이 선을 넘었다고 느꼈는지 2 황자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범한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담담히 계속 말을 했다.
“이건 아마도 저하……와 홍성이 살아갈 유일한 방법일 겁니다.”
2 황자가 상대방의 말투에 담긴 연민과 경멸을 알아채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이 그런 2 황자를 올려다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하, 자신이 모든 걸 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포월루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찻집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찻집 밖에는 복장이 모두 똑같고 나이도 불분명한 여덟 명의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몸속 깊이 살기를 품고 있었다. 칼이나 검을 감추고 있는 사람도 있고 산을 쪼갤 정도로 큰 도끼를 감추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덟 명의 사람들이 용감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범한은 2 황자가 시내 한복판에서 자신을 죽이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찻집에 들어온 여덟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甘)씨, 유(柳)씨, 사(謝)씨, 범(范)씨 4대 장군과 하(何)씨, 장(張)씨, 서(徐)씨, 조(曹)씨 4대 군자군요. 소문으로만 듣던 2 황자 저하의 여덟 가문의 장수들이 이런 모습이었군요.”
2 황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범한, 나는 자네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네.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말게.”
범한이 일어나더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부리는 계년조가 저하를 따르는 여덟 가문의 장수들을 이기지는 못할 테니 굳이 불러 창피를 당하게 할 필요는 없겠군요.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저하, 저 죽음을 각오한 장수들은 대세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만일 저들이 대세를 바꿀 만큼 능력을 갖췄다면 진평평 대인이 벌써 황제께 알렸겠지요.”
범한은 마지막으로 반역 무도한 말을 내뱉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찻집을 나갔다. 그러면서 그는 우연히 2 황자의 가장 유능한 가문의 장수들을 만났다는 듯 감씨와 사씨 장군 앞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서씨와 조씨 군자 앞에서 비키라고 손을 내저으며 옅은 숨을 내뱉었다. 숨은 여덟 명의 체내에 있던 살기와 부딪친 뒤 순식간에 찻집 나무 기둥을 따라 밖으로 나가더니 가을 오후 햇볕과 하나로 뭉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범한이 떠나고 잠시 뒤, 무언가를 생각하며 턱을 괴고 앉아 있던 2 황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침착함을 잃고 범한 앞에서 깊은 곳에 감춰 뒀던 일을 털어놓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의 수려한 얼굴에 근심이 비쳤다.
“정말 그를 죽여야 하는 날이 온다면 몇 명이나 필요하겠는가?”
사필안이 느릿느릿 칼집 안에 있는 검을 꺼내며 말했다.
“저 하나면 충분합니다.”
범무구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희 여덟 명이 모두 나서도 작은 범 대인을 상대하긴 힘들 겁니다.”
2 황자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범한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월루의 일이 있으니 짧은 시간 안에 자신에게 대적할 수 없을 터. 2 황자가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있는 잡념들을 떨쳐 냈다.
* * *
마차에 오른 범한은 깨끗한 물로 조심히 손가락 사이에 남아 있는 향을 씻어 냈다. 그는 2 황자가 솔직하게 마음속 말을 털어놓게 하는 데는 성공했음에도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게 실망스러웠다. 2 황자가 학자의 면모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만 알게 되었을 뿐 그가 장 공주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마차가 백작가에 도착하자 그는 조용히 쪽문으로 들어간 뒤 빠른 속도로 후원을 내질렀다. 범 씨와 유씨 집안사람들을 보고도 못 본 척하며 곧장 서재로 향하더니 양손으로 문을 활짝 열고는 난데없이 발을 날렸다.
곧이어 서재에서 참혹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놀란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범사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날라온 발에 등받이 의자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현재 두 저택으로 나누어진 백작가에는 호화스러운 정원과 거대한 저택 그리고 서재가 세 개 있었다. 비명 소리가 울린 서재는 서쪽에 있는 곳으로 정원과 맞닿아 있어 가장 방비가 느슨했고 종들도 가장 친근하게 생각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갑자기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자 집 안 사람들 모두 화들짝 놀랐다.
범사철의 비명이 들리고 곧이어 서재 안에서 두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오라버니가 홧김에 범사철을 발로 짓이겨 죽여 버릴까, 겁이 난 범약약과 임완아가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범한의 팔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에게 범한은 항상 온화하고 성숙한 젊은 남자였다. 가끔 침울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난폭한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두 사람은 오늘 범한의 살기등등한 얼굴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범사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범한이 앞으로 가지 못하게 팔을 잡고 죽을힘을 다해 매달렸다.
범건의 명령을 받은 등자경의 손에 이끌려 백작가로 잡혀 온 범사철은 뜨거운 가마 속에 있는 개미처럼 마음이 조급했지만 가까스로 살 구멍을 찾아냈다. 바로 서재를 지나가는 누이를 시켜 몰래 형수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 채 서재로 온 범약약과 임완아는 다짜고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범사철에게 몇 마디 놀려 주고 있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범한이 한 번만 맞아도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무시무시한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그제야 엄청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두 여자는 하얗게 겁에 질린 얼굴로 범한의 노기등등한 얼굴을 바라봤다.
“놔!”
범한이 엄동설한 밤에 부는 차가운 바람처럼 매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버지도 이미 이 일에 대해 알고 계시니 아무도 막지 마. 나도 저놈을 때려 죽이지는 않고…….”
죽은 척 바닥에 엎드려 곁눈질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범사철은 형이 침착한 표정으로 죽이지 않을 거라 말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이어 범한의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렸다.
“……불구로 만들어 버릴 거야!”
그 말에 팔을 부여잡고 있던 두 여자의 손이 느슨해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범한은 알맞은 가법이 뭔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책상에 놓인 찻잔을 집어 던졌다. 쨍! 하는 소리와 찻잔이 정확하게 범사철의 머리 옆에 떨어져 깨졌다.
도자기 파편과 함께 김이 나는 찻물이 사방으로 튀자 범사철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죽은 척할 수 없어 범사철이 찻물에 데이고 파편에 긁혀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울먹이며 임완아의 등 뒤로 숨었다.
“형수…… 형님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살려 주세요!”
화들짝 놀란 임완아가 얼굴에 피를 흘리는 시동생을 재빨리 뒤로 숨긴 뒤 노기등등한 얼굴을 한 범한을 막아섰다.
“왜 이러는 거예요? 무슨 일인데요? 말로 하세요.”
불쌍한 표정으로 울먹이며 임완아의 등 뒤에 숨은 범사철을 보아도 범한은 조금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우가 지금까지 한 더러운 일들에 더욱 화가 날 뿐이었다. 그가 범사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당신이 저놈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직접 물어봐요!”
해명하려 입을 열던 범사철은 순간 목구멍에 단내가 나면서 피를 토해 냈다. 방금 범한의 발차기에 맞아 속을 다친 게 분명했다. 순간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없던 용기가 솟구친 그가 펄쩍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가게 하나 운영한 것뿐이잖아! 그게 이렇게 죽일 일이야? 형수, 저는 이제 살기는 그른 것 같아요…… 아!”
범사철은 일말의 비명을 지른 뒤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에 놀란 임완아와 범약약이 쪼그리고 앉아 그의 명치를 쓰다듬고 인중을 꼬집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면서 화가 약간은 풀린 범한은 죽은 척 쓰러지는 모습이 기가 막혀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가 서재 문을 열고 멀리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종들을 바라본 뒤 다시 문을 닫았다.
“발차기 한 번에 죽지 않으니까 얼른 일어나.”
하지만 겁에 질린 범사철은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아 형수와 누이 뒤에 숨어서 어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280화
책상에 앉은 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무언가를 고민하자 범약약은 조심히 찻잔을 건네주며 물었다.
“무슨 가게를 운영했는데?”
범한이 눈을 감고 오룡차를 홀짝이며 마시다가 짧게 대답했다.
“기생집.”
범한의 말에 임완아와 범약약이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정말이지 오늘 두 사람은 놀랄 일이 끊이질 않아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하지만 범한이 무지막지한 발차기를 날린 것과 비교하면 범사철이 기생집을 운영한 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좀 황당하기는 하지만 경도 귀족가 자제 중에서 암암리에 기생집을 운영하는 경우는 많았다. 물론 매춘 장사가 드러낼 만한 일은 아니거니와 범사철이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이렇게나 화를 낼 일인 걸까?
두 사람이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범한이 냉소를 짓더니 품 안에서 감찰원 1처가 하루 반나절 동안 조사해 작성한 포월루 사건 보고서를 꺼내 누이에게 건네줬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범약약이 보고서를 바라봤다. 두껍지 않은 보고서에는 포월루가 그동안 저지른 악행들이 명명백백하게 나와 있었는데 증거도 명확하고 정황도 명료해서 잠깐만 읽어도 정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좀 전에 있었던 난리로 머리가 풀어져 얼굴을 가리고 있어 범약약이 보고서를 읽으며 어떤 눈빛과 표정과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가빠지는 호흡에서 슬픔과 분노가 느껴지는 데다가 아랫입술이 입 안으로 들어간 게 이빨로 깨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임완아는 보고서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궁금했지만 범약약 옆으로 가서 함께 봤다가는 범한이 틈을 노려 범사철을 때려 죽일까 봐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범약약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침착했지만 미간이 더욱 굳어지고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녀가 새언니 뒤에서 죽은 척하고 있는 범사철을 바라보고는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이거 정말 네가 한 일이야?”
침착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심상치 않은 기운에 서재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긴장했다. 어려서부터 범약약에게 교육을 받은 범사철은 연약해 보이는 누이를 무서워하면서도 친근하게 생각했기에 쭈뼛대며 일어나 앉아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
범약약은 슬픔과 실망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아우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됐지?’라고 생각했다. 순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녀가 이를 악물며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범사철의 얼굴에 던졌다.
“네가 직접 봐!”
범사철이 자신은 모른다는 표정으로 형과 형수를 번갈아 쳐다본 뒤 보고서를 들춰 봤다. 보고서를 읽어 내려갈수록 그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포월루에서 한 일을 형님이 다 알고 있다니!’
바로 그때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범사철이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더니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이 일들은 내가 한 게 아니야! 때리지 마!”
범한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아우를 바라봤다.
“살인, 방화, 양갓집 여인들에게 억지로 몸을 팔게 한 일들을 네가 직접 했다면 난 조금 전 발차기로 널 죽였을 거야! 하지만 네가 누구니? 너는 포월루 큰 사장이야. 이런 일들에 네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국공가 자제들이 멋대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니?”
범사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들은 모두 3 황자가 한 거야. 나는 아무 관련 없다고.”
범한이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더니 버럭 소리쳤다.
“사철아! 범사철!! 약약이가 네가 생각하는 게 돼지처럼 멍청하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맞았어. 너는 이런 일들에서 네가 깨끗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인제 보니 내가 너를 과소평가했구나. 경도 불량배들의 우두머리가 될 정도로 능력을 갖춘 분을 내가 너무 몰라봤어!”
범사철은 범한의 말에 마음이 쓰라렸다. 어린 나이에도 민첩하게 생각할 줄 아는 그는 형이 자신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점점 억울하고 분통해진 그가 엉엉 울면서 큰 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정말 관련 없다고!”
바로 그때 그의 앞에서 간담이 서늘한 장면이 펼쳐졌다. 바로 범약약이 침착한 얼굴로 책상으로 걸어가더니 길지 않은 몽둥이를 찾아 범한에게 건네준 것이다.
범한이 처음 경도에 왔을 때 범약약은 회초리로 범사철의 손바닥을 때려 버릇을 고쳤었다. 회초리는 범씨 집안에 전해져 오는 작은 가법이었다. 그렇다면 큰 가법으로는 뭐가 있을까?
바로 몽둥이였다. 거친 삼으로 싸여 있어 한번 맞으면 피부가 찢기고 살점이 터지는 무시무시한 몽둥이였다.
범씨 가문에서 큰 가법이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바로 사남 백작이 가장 총애했던 측근이 백작가의 세력과 범건의 총애를 믿고 호부에서 부정한 일을 저질렀을 때였다. 범건의 몽둥이에 맞은 그는 성 밖 농가에서 다리가 부러진 채 비참한 모습으로 목숨만 부지하며 살고 있었다.
범사철은 어렸을 때 그 사람의 참혹한 모습을 봤기에 범한이 ‘큰 가법’을 실행하려 하자 너무 놀라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아내와 약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여기 두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어.”
완아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범약약 옆에 섰다. 범사철은 몽둥이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펄쩍 뛰며 소리쳤다.
“형수! 누이! 저 사람 말 들을 것 없어. 형님…… 안 돼! 범한, 너도 이제 성인군자처럼 행동하는 것 좀 그만해. 내가 기생집을 운영한 게 어때서? 여자들을 좀 더럽힌 게 어때서? 경도 가문 중에 이런 짓 하지 않는 곳이 어디 있어? 무슨 근거로 나를 때리려는 거야?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2 황자와 사이가 틀어진 상황에서 내가 거기 연루되어 있어 협박을 받아 그런 거잖아. 그래, 체면 좀 잃은 게 어때서? 그게 나한테 화낼 일이야? 때려 죽일 일이냐고!”
벼랑 끝에 몰리자 없던 용기가 생긴 건지 범사철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나를 때려 죽이고도 형이라고 할 수 있냐! 내가 장사를 시작하면서 너와 2 황자 사이가 틀어질 줄 어떻게 알았겠어? 이게 내 책임이라고 할 수 있어? 너도 나한테 알려 주지 않았잖아! 이럴 거면 3 황자도 때려잡아야지. 아무 힘 없는 사람 괴롭히는 게…… 무슨 능력이야! 너는 감찰원 제사잖아! 가서 경도 부윤도 잡고 황궁에 있는 3 황자도 때려잡아! 가라고, 가!”
짝! 뺨을 맞은 범사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범한을 바라봤다. 범사철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은 범한은 겉으로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관자놀이에 핏줄이 점점 불거지기 시작했다. 다시 태어나고 근 20여 년을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화가 난 적은 없었다. 진심으로 형제라 생각했던 범사철이 패악 무도한 짓을 저지르고도 조금의 뉘우침도 없이 핑계만 대자 그는 정말로 화가 났다.
“입 다물어!”
결국 참지 못한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그걸로 나를 협박할 수 있었겠니? 그리고 그 협박에 내가 넘어갔을 것 같아? 오늘 내가 너를 혼내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네가 맞을 만하기 때문이야! 이 일은 황궁에 있는 둘째와 셋째가 아니라 범사철, 바로 네 일이라고!”
범한을 정말이지 슬프고 화가 났다.
“어린 나이에 이런 무서운 짓을 저질렀으니 만약 지금 혼을 내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아버지까지 난처하게 만들 만한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겠지! 너에게 기대를 품고 있는 만큼 난 네가 삐뚤어진 길을 계속 걸어가게 두지는 않을 거야. 2 황자와 3 황자는 상관없어. 내가 화난 건 너라고. 그들은 내 형제가 아니지만 넌 내 형제니까!”
그가 눈을 부릅뜨고 아우를 바라보았다.
“내가 조사해 보니 다행히도 너는 그런 일들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더군.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하지만 삐뚤어진 길에 들어선 만큼 내가 몽둥이로 바로 고쳐 줄 생각이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휙! 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휘둘려졌다. 큰 가법에 따라 휘둘려진 몽둥이에 범사철의 허벅지 부분이 찢어지면 새빨간 피가 났다. 그리고 이어서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비명 소리가 백작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종들은 두려움에 어깨를 떨었고 등자경과 등자월을 비롯한 부하들도 마음이 서늘해졌다. 정원에 붙잡혀 있던 범씨와 유씨 자제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고 일부 사람들은 참기 힘든 비명에 인상을 찌푸렸다.
백작가 작은 도련님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저택과 정원에 울려 퍼졌다. 처음 있는 힘껏 반항하던 목소리는 울며 용서를 비는 소리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로 변했다. 이후 듣기 힘들 정도로 애처로운 비명 소리가 이어지더니 마지막에는 그 소리마저도 점점 작아졌다. 그저 힘없이 엄마를 찾는 열네 살 소년의 가여운 울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정말 사철이가 맞아 죽도록 내버려 두실 겁니까!”
눈물범벅이 된 유씨가 사남 백작의 두 다리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가서 범한에게 멈추라고 말해 주세요. 이만큼 혼냈으면 됐잖아요. 정말 맞아 죽으면 어떡합니까?”
아름다운 외모의 유씨는 항상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의 모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창백한 얼굴에 초췌한 모습으로 남편의 두 다리를 부여잡고 울며 애원했다.
“당신도 말했잖아요, 사철이가 나이가 어리니 심하게 때리지는 못하게 하겠다고.”
범 상서는 자신의 앞에서 우는 유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씨는 본처가 죽은 뒤 들어온 사람이었다. 당시 범건은 사남 백작에 봉해지기는 했지만 황제가 남몰래 총애해 이목을 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 범씨 일족의 곁가지에 불과한 자신에게 국공의 손녀가 시집오는 것은 경국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렇게 백작가로 들어온 유씨는 그를 옆에서 보살피고 배려해 주면서 유정강을 자기 집처럼 쏘다니는 그의 버릇까지 고치게 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유씨에게 아끼는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서재에서 맞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친아들이었다. 나이가 적지 않은 범 상서로서도 자신의 친아들의 비명 소리는 마음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어떠하든 평온한 표정으로 단호히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아무리 좋은 원석이라도 다듬지 않으면 쓸모없게 되는 법이오. 아비인 나도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어미인 당신도 아들에게 지기만 하니…….”
바로 그때 멀리 서재에서 다시 비명 소리가 들려오면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범사철이 고통에 겨워하며 엄마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불안해진 듯 범건의 양미간이 떨리기 시작하면서 나오는 대로 조리 없이 하던 말도 더는 하지 못했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는 범건을 본 유씨는 무언가 결심한 듯 눈물을 훔치고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흐트러진 치마를 정리한 뒤 몸을 돌려 서재에서 나갔다.
“돌아오게!”
범건이 낮은 목소리로 강하게 말했다.
“형인 범한이 사철이를 훈계하는 것은 당연하네. 이때 자네가 그곳에 찾아가면 그 애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 애가 어떻게 생각하겠냐고요?”
유씨가 힘없이 몸을 돌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말했다.
“당신은 범한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쓰면서 제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쓰지 않으시는군요. 소중한 아이를 때려 죽이는 걸 냉정하게 보고만 계실 겁니까?”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날카로운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래요, 그때는 제가 잘못했지요. 하지만 그 애가 담주에서 온 뒤로는 모든 일을 양보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그 애가 잘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경도에 있는 황실 인척들에게 뇌물을 주며 그 애 앞길이 막히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습니다. 저도 그 애가 경도에서 이만큼의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고요. 물론 어미인 입장에서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을 해준 것이지요. 하지만…… 하지만 오늘 일은 너무 지나칩니다. 어떻게 이렇게 모진 방법을 사용한단 말입니까? 그 애가 예전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이러는 거 아닙니까. 차라리 내 목숨을 주는 게 낫지 내 아들은 안 된다고요! 아, 아들은…….”
범건이 흐느껴 우는 유씨를 보다가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범한이 어떤 아이인지 몰라서 그러는 겐가? 그 애는 이미 진작에 마음속에서 그때 일을 털어 버렸어. 그만큼 마음이 넓고 기개가 강한 아이네. 그리고 이번 일은 사철이가 잘못했네. 만약 지금 혼을 내서 바로잡지 않는다면 모두 연루돼서 집안 전체가 장례를 치를지도 모르네. 자네는 그걸 원하는 건가?”
281화
유씨는 평범한 부인들과는 달랐기에 오늘 포월루가 수색당한 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범한과 2 황자 사이의 힘겨루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별로 큰일도 아닌 걸 가지고 범한이 2 황자에게 약점을 잡혀 화가 나 저러는 것 아닙니까.”
유씨 역시 범사철과 마찬가지로 범한이 화가 난 이유가 2 황자에게 약점을 잡혀서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범건이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큰일이 아니라고? 방금 뒤채 서재에서 보내온 걸 보지 못했소? 나이도 어린 게…… 그런 짓을 벌였는데 큰일이 아니라니?! 사철이가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손으로 한 것과 다를 게 뭔가? 아들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여야지만 큰일이라 할 텐가?”
그러자 유씨가 자기 아들을 위해 변명하기 시작했다.
“경도에서 이런 일이 작은 일이 아니면 뭡니까? 어느 집에나 있는 일인데…….”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범건이 말을 가로채며 차갑게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는 가타부타 말하지 말게.”
범건의 말에 유씨가 입을 다물었다. 흐르는 눈물은 닦아도 끊임없이 계속 흘렀다. 멀리 서재에서 들리던 마음 아픈 비명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음에도 그녀의 마음속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철아가 기절을 한 거면 어떡하지?’
그런 유씨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던 범건은 침울한 마음으로 어젯밤 범한과 상의했던 일을 떠올렸다.
몇 달 동안 범사철이 경도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아무런 소문도 듣지 못했고, 어린아이가 해봤자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친아버지임에도 범사철의 능력과 수완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범한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게.”
범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하듯 말했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애가 이렇게 매섭게 행동하는 건 사철이를 자신의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네. 범한이란 아이는 적을 만나면 미소를 지을 뿐 오늘처럼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아. 사철이를 아끼기에 매섭게 혼을 내는 게야. 만약 아끼지 않았다면 단칼에 베어 죽였겠지 뭐 하러 이렇게 화를 내겠나? 이 점을 생각해서 안심하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집안이 훗날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유씨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백작가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엄청난 권세를 누리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범건의 나이가 많은 만큼 언제든지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고 그렇게 된다면 그녀와 사철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백작가가 편안하게 권세를 누릴 수 있을지는 범한에게 달려 있었다.
그래도 유씨는 지금 범한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범건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과 함께 뒤채 정원 옆에 있는 서재에 가보자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유씨가 기뻐하면서 급히 뒤를 따라나섰다. 어찌나 마음이 급한지 뜨거운 수건을 들고 뒤를 따르는 여종들에게 지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물러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범건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종들은 뒤채에서 들리던 ‘돼지 멱따는 소리’를 떠올리고는 화들짝 놀랐다.
‘큰 도련님이 둘째 도련님을 때리는 것 때문에 가시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집 안이 시끄러워지는 것 아냐?’
백작가는 요 몇 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순탄하게 지내 왔고 가풍도 엄격했기에 종들도 상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집 안에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는 건 원치 않았다.
마음이 급한 유씨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정원에 들어가면서도 날아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하지만 사남 백작의 평상시와 같은 넓고 침착한 등을 보니 감히 앞장서서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앞집과 뒷집을 이어 주는 정원 문에 이르자 처참한 울부짖음과 함께 나무판이 살을 때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유씨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이런 소리를 듣자 자기 아들의 비명 소리인지 아닌지 구분할 여력도 없었다. 놀란 그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다행히 물러가라는 유씨의 말을 듣지 않고 규정대로 뒤를 따르던 여종들이 뒤로 넘어가는 그녀를 부축했다.
* * *
집 안 서재 세 곳 중 가장 조용한 곳은 가짜 산 옆 으슥한 곳에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종들의 접근도 막고 이곳을 감찰원 일을 처리하는 곳으로 썼다. 이때 서재에는 범한 말고도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범한과 마주 보고 앉은 사람은 방금 4처에 부임한 작은 언 대인인 언빙운과 범한의 제자 사천립, 1처 주부 목철이었다.
이 밖에도 서재 밖 정원에는 형을 감독하는 등자경과 등자월도 있었다. 언빙운을 제외하면 모두가 범한의 측근이었다. 자연스레 특별한 위치에 있는 언빙운은 범한과 상사와 부하 사이면서도 약간의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정원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경도부에서 처리할 일을 왜 집 안에서 가법으로 처리하려 하십니까? 이건 경국 법률에 맞지 않습니다.”
세 사람 중 언빙운만이 범한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사천립이 범한의 표정을 힐끗 살피고는 웃으며 작은 언 대인에게 설명했다.
“이 일은 잠시 묻어 둬야 합니다. 정말 경도부에 맡기려면 둘째 도련님과 황궁에 계시는 그분을 조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제사 대인께서 2 황자와 완전히 갈라서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사한들 백작가 작은 도련님에게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고, 경도부에서 수집하는 증거로 2 황자를 건들 수도 없지 않습니까.”
목철이 아무 말 없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포월루 일을 범 제사가 알게 된 것은 자신이 한 말 때문이었다. 그러니 백작가 작은 도련님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 부닥치게 된 데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물론 범 제사는 만족스러운 듯 보였지만 백작가 사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빙운이 다시 고개를 저으며 범한이 가법을 사용해 국법을 대신한 것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도 현재는 이 방법 말고는 없다는 걸 알기에 답답한 마음에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우리 제사 대인께서는…… 정말 수정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법으로 호되게 야단을 쳤으니 나중에 포월루 사건이 드러난들 폐하에게 변명할 구실은 생긴 셈 아닙니까. 최소한 2 황자가 엄청난 죄목을 들먹이며 백작가를 궁지에 몰지는 못하겠군요.”
그 말에 사천립의 표정이 굳었다. 오늘 범한이 때리는 소리를 집 안 사람이 다 듣게 하는 것은 사전에 언관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범사철이 관련된 형사 사건이 덮어지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사천립의 생각을 읽은 언빙운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쪽 스승께서 이미 계획을 해 두셨으니까요.”
사천립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4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 일에 범한이 언빙운을 불렀다는 것은 다른 계획이 있다는 것이지만 분위기상 계속 물어볼 수가 없었다.
목철이 창가로 걸어가더니 가짜 산 너머 정원에서 나무판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피부가 터지고 피가 튀는 장면과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를 들으니 감찰원 관리인 그 역시도 범한이 두려워졌다. 범씨와 유씨 집안 자제들은 고통에 자신의 엉덩이를 계속 만지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한편 사천립은 책상에서 당장 요긴하게 쓰일 문서를 정신없이 쓰기 시작했다.
* * *
잠깐 졸도했다가 깨어난 유씨는 당장 범한을 찾아가 결단을 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정원에 들어가 보니 맞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집안 친척들이었다. 비록 피가 튈 만큼 무서운 매질에 애처로운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친아들이 괴로워하는 건 아니었기에 상관없었다. 다시 백작가 부인의 고귀하고 단아한 모습을 되찾은 유씨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아이인 범사철이 경도에서 패악 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은 어떤 사악한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범사철이 삐뚤어진 것은 지금 맞고 있는 조카들과 범 씨의 집안 자제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녀는 구해 달라고 사정하는 소리를 무시한 채 등자경을 향해 소리쳤다.
“범한이 너희들에게 처벌을 맡겼으니 반드시 저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도록 해라. 그러지 않으면 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러고는 범건과 함께 서재로 들어간 그녀는 서재 구석, 긴 걸상 아래에서 바지를 벗은 채 엎드려 있는 범사철을 발견했다. 놀란 그녀가 재빨리 기어가서는 낮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피멍이 든 아들의 엉덩이를 조심히 어루만졌다.
“내 아들이…….”
그때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줬다. 그녀가 놀라 돌아보니 범한이 서 있었다. 그녀는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기 아들을 이렇게 만든 범한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한차례 매질을 한 뒤 이성을 되찾은 범한이 위로하며 말했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제가 아우에게 약을 발라 줄 테니 좀 물러나 주시지요.”
유씨가 아무 말 없이 물러나 범한이 범사철의 몸에 약을 발라 주는 모습을 지켜봤다. 범사철은 비명을 지르며 울다가 졸도한 상태였다.
한편 옆에 있던 범건은 서재 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며느리와 딸을 바라봤다. 완아의 얼굴에 놀란 흔적이 역력한 걸 보니 범한의 매질이 상당히 모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약약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은 아파하는 동생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철없는 동생이 안타까워서인 듯했다. 범건이 마른기침으로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킨 다음 온화한 목소리로 범한에게 물었다.
“계획은 어떻게 됐니?”
“아버지의 뜻대로 사철이는 오늘 밤 떠날 겁니다.”
범한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두 부자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마주 보고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세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저렇게 심하게 맞은 거로도 부족해 경도 밖으로 내쫓는다고?’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유씨가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범건을 바라봤다. 한편 반 혼수상태가 되어 걸상 아래 엎드려 있던 범사철이 그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났다. 심한 매질을 당한 사람치고는 민첩한 반응이었다. 사실 경도에서 권력을 누리며 살던 귀족가 자제에게 경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보내질 거란 말은 공포 그 자체였다.
범사철이 궁둥이를 치켜들고 자기 어머니의 다리를 꽉 끌어안더니 두 눈을 감고 닭똥 같은 눈물을 몇 방울 떨궜다. 그러고는 뭐라 말하려 입을 크게 열었지만 맞으면서 울고불고 소리를 질러서 그런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놀란 범사철이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엉덩이는 피멍이 들어서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모습이 정말이지 가여웠다.
“어르신!”
유씨가 참지 못하고 원망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쏘아본 뒤 범건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사정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어요! 철아가 잘못을 했어도 당신 아들이잖아요. 애가 집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그냥 보실 생각입니까? 어미도 아비도 없는 낯선 이국땅에서 헤매게 두시려고요?”
그러고는 재빨리 옆에 서 있는 범약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약약아, 빨리 네 아버지께 철아를 내쫓지 말아 달라고 말해 주렴.”
유씨는 포월루의 일로 범사철이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분명 어젯밤에 부자가 대화를 나눌 때 범한이 몰래 무슨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약약을 재빨리 상황에 끌어들인 것이다. 약약은 자신이 낳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십여 년을 같이 살면서 사철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듯이 범한은 그런 누이를 가장 아꼈다.
범약약도 아우가 이처럼 무거운 처벌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유씨의 요구대로 순순히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아버지, 아우도 이제 잘못을 알았을 테니 더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할 겁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계속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완아도 함께 무릎을 꿇었다.
줄곧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범건은 특별한 신분인 며느리가 무릎을 꿇자 급히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유씨에게 말했다.
“사철이는 반드시 오늘 떠나야 하네. 그리고 이 일은 내 의견이니 범한을 탓하지 말게.”
282화
유씨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범건을 바라보며 속으로 ‘왜 이런 결정을 한 거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범건이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사실은 단칼에 사람을 베어 버릴 수 있는 장군과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한눈에 반해 시집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범건이 한번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다시는 바꿀 수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머리가 민첩하고 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유씨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민하다 몸을 돌려 범한에게 느릿느릿 절하며 호소했다.
“집안의 큰아들인 네가 아버지께 부탁을 해주렴.”
지금 범사철을 유배 보내겠다는 범건의 뜻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범한뿐이었다.
범한이 유씨의 절을 급히 피하며 난처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범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신 말했다.
“그 애가 저지른 일을 언관이 조정에 상소한다면 3천 리 유배형을 받을 것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정에서 움직이기 전에 경도에서 쫓아내는 게 나아.”
하지만 유씨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천자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리고 있는 백작가 자제가 기생집을 운영하며 기녀 몇 명을 죽였다고 유배를 가야 하다니, 모반을 꾀한 것도 아니고 철이 없어 멋대로 행동한 것뿐이니 범건과 범한이 나선다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 그녀가 울며 애원했다.
“정말 이렇게 모질게 하실 겁니까? 사철이는…… 그 애는 이제 겨우 열네 살이라고요!”
“모진 게 아니야. 그 애가 지금까지 한 짓이 이런 결과를 불러온 거네.”
잠시 생각하던 범건이 냉소를 짓더니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열네 살이라고? 잊지 말게. 범한은 열두 살 때 살기 위해 살인을 해야 했어!”
범건의 말에 서재가 순간 조용해졌다. 그 사실을 몰랐던 임완아와 범약약이 놀란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이 일을 줄곧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유씨는 화들짝 놀라더니 절망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난처해진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조심히 상처투성이인 범사철을 안고 서재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아내와 여동생에게 아우를 내실로 데리고 가서 쉬게 하라고 분부했다.
“범한, 좀 있다가 건너오거라.”
범건이 유씨를 힐끗 바라본 뒤 서재에서 나가며 말했다.
서재에는 유씨와 범한만 남게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유씨가 초점 잃은 눈동자로 말했다.
“정말 경도에서 쫓아낼 거니?”
범한이 한숨을 쉬며 그녀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사철이가 경도에서 나쁜 일에 휘말리지 않고 외부에 나가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씨가 다시 물었다.
“얼마나 멀리?”
“아주 멀리요.”
범한이 생기 없는 유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항상 고귀함을 잃지 않던 유씨가 자신의 모습이 흐트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범사철이 부러우면서 누군가가 그리워졌다.
“도대체 얼마나 멀리 간다는 거니?”
애가 달은 유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날카롭게 반응하는 유씨의 모습에도 범한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젯밤에 제가 사철이를 담주에 피신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해 봤지만, 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서 신경 쓰시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시면서…… 북제로 보내기로 하셨어요.”
“북제?”
유씨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북제도 먼 곳이긴 하지만 조정 유배지인 서만이나 서호보다는 번화하고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국의 사이도 평화 협상을 한 뒤 이전과는 다르게 좋았다.
범한은 유씨가 자신에게 부탁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북제에 친구가 많으니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해 둘게요.”
* * *
앙상한 가을 나뭇가지 끝에 걸린 달이 등불보다는 희미하지만 은은하게 백작가 전체를 비췄다. 정원에서 매질을 당하던 범씨와 유씨 집안 자제들은 상서 거리와 근처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범씨 친척들은 자기 아들이 상처 입은 것을 보고 백작가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범건과 범한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재에서 범한이 공손히 부친의 옆에 서서 과일즙을 준비했다. 유씨는 범사철의 침대 옆을 지키고 앉아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기에 매일 밤 과일즙을 마셔야 하는 아버지를 위해 범한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세 명은 이미 경도부로 보냈습니다.”
범건이 말한 세 명은 포월루에서 살인 사건을 저지른 놈들이었다. 그가 아버지를 힐끗 본 뒤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경도부는 둘째 쪽이므로 저희가 정말로 그들을 경도부로 보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도 세 사람은 사철이와 연관된 살인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인 만큼 밤에 둘째 측 사람이 데려갈 것 같습니다.”
범건이 웃으며 말했다.
“나를 속일 생각 하지 말아라. 네가 그렇게 조심성 없이 행동할 아이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후환이 없도록 제가 깨끗하게 처리할 생각입니다.”
범한도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번에 마침내 진평평이 자신에게 부여한 모든 힘을 사용했다. 바로 6처 자객을 파견한 것이다.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긴 하나…… 이 일은 가문에서 반감을 품을 수 있는 일인 만큼 아버지가 직접 나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범건도 아들이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경도 명문 가문 중에서 지금껏 자신의 가문 자제에게 손을 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뭘 나서란 말이냐? 우리는 경도부로 보냈을 뿐인데 우리가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
범한이 그 말을 듣고는 감탄하며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사철이가…… 오늘 밤 움직이면 저는 언빙운에게 이 일을 아무 흔적도 없이 처리하라고 명령할 것입니다.”
범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북제 사람과는 아무런 연줄이 없다. 게다가 예전에 그들을 너무 잔인하게 죽였어. 네가 보기에는 어떨 것 같으냐?”
사철의 안전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본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왕계년이 지금 상경에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해당타타나 북제 황제와 관계가 좋으니 사철이는 상경에서 아무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을 겁니다.”
한숨 쉬는 범건의 희끗희끗해진 수염이 오늘따라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네가 이전에 사철이가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공부해 벼슬길에 오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라고 말했지. 네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사철이가 이런 짓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열네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내가 열네 살 때 뭘 하고 있었는지 아니? 정왕가에서 당시 세자셨던 폐하와 함께 공부하면서 온종일 뭘 하고 놀까 고민했단다.”
범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의 귀빈이 키운 3 황자가 정말 무서운 분이지요. 여덟 살에 기생집 사장이 되다니 만약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경사 같은 역사책에 실려 오래도록 전해질 겁니다.”
“의 귀빈에게는…… 내가 가서 말하마.”
범건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사철이가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너무 철이 없어. 이렇게 위험한 짓을 벌이면서도 장기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니. 사실 그 애를 멀리 보내는 건 벌을 주려는 것보다 이번 기회에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길러 더 나은 재목으로 성장하길 바라서야.”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저의 책임도 있습니다.”
“자책하지 말거라.”
범건이 손을 뻗어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일이 생겼을 때 너는 경도에 없었지 않니. 다만 내가 사철이를 북제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을 때 네가 안심하는 표정을 지은 이유가 궁금하구나. 북제는 경국 사람들이 있기에 좋지 않은 곳인데.”
범한은 그와 해당타타 그리고 젊은 황제가 암묵적으로 맺은 협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자기 생각을 설명했다.
“신양은 최씨 가문을 통해 북제에서 밀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심중이 죽은 상황에서 그들의 노선도 문제가 생겼을 것입니다. 저는 사철이가 북제에서 성장하는 몇 년 동안에 최씨 가문의 사업을 가져올 기회가 올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래서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장사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철이에게 관리하게 할 생각입니다.”
범건이 아들을 바라보며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범한은 진평평보다는 덜 잔인했지만 모든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 최씨 가문을 건들 생각이냐?”
범건이 자신의 계획에 쉽게 동의하자 범한이 마음을 놓으며 말했다.
“황실 금고를 받은 뒤 시작할 생각이니 대략 내년 3, 4월쯤일 겁니다.”
범건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걱정되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에게 어떠한 반격의 기회도 줘서는 안 된다.”
항상 온화하던 범건이 처음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자 범한이 놀라 작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범건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네 결정이 옳았다. 잠시 뒤로 물러선다면 반격할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 거야. 사철이가 떠난 뒤에는 뭘 하든 내 의견을 묻지 말고 진행해라. 다만 그 사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지 범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원몽……이었던 것 같은데?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사람인 만큼 사건이 조용해지면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버지가 범사철의 일에 대한 화풀이가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사람을 죽이라 말하자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범건은 그런 아들의 표정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휴머니즘 정신과 오래도록 숨겨 온 박애 정신을 드러내며 냉정하게 말했다.
“아비가 과거 유정강에서 많은 기생을 품으면서 느낀 건 악랄한 방법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가장 사악하다는 거다. 더구나 원몽은 원래 기생이었다면서? 같은 일을 하는 연약한 여자들에게 서슴없이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절대 살려 둬서는 안 된다.”
그 말은 들은 범한의 머릿속에 정왕이 농담 삼아 아버지가 기생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살았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더구나 그 당시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경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기생들이 처참하게 죽은 사건이 아버지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면 원몽을 죽여야 한다는 말도 이해가 됐다.
기회를 포착한 범한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원몽은 홍성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이런 홍성과 누이가 혼인하는 게 맞는 일인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건이 고개를 저었다.
“홍성의 품성이 나쁘지 않으니 두고 보도록 하자. 폐하께서 정하신 혼처인 만큼 신중해야 해.”
범한은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부친이 약약의 행복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분노가 일었다.
‘아버지는 약약이를 기생집 여자들만큼도 생각하지 않으시는 건가?’
그는 마음속으로 이 일은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아버지의 서재를 나선 뒤 자신의 서재로 들어왔다. 서재에 있는 세 사람이 일어나 인사했다. 사천립이 먹물이 이미 마른 문서를 건네주며 말했다.
“포월루의 7할 지분에 대한 양도 계약서입니다. 대인이 보시고 문제가 없으면 작은 도련님의 지장을 받으면 됩니다.”
목철이 이어서 말했다.
“경도부도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곳 정보원이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경도부는 저희가 보낸 살인 사건 범인들을 보고는 상당히 난처해했다고 합니다. 이후 2 황자 측에서 보낸 사람이 경도 부윤의 저택에 갔는데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네. 어차피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지 않은가.”
목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상대방이 우리가 물귀신 작전을 쓴다고 잘못 판단해 경도부에게 작은 도련님을 체포하라는 공문을 보내라 하면 어떡합니까?”
목철의 말에 범한이 고개를 젓고는 언빙운을 바라봤다.
“4처 책임자가 여기 있는데 북쪽으로 간 사철이를 누가 찾을 수 있겠는가?”
283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범한이 침실에 들어와 보니 유씨가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유씨를 깨운 뒤 옆방에서 조용히 뭐라 이야기하자 유씨가 퉁퉁 부은 눈으로 결연한 눈빛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그녀에게 무슨 허락을 받았고 어떤 말로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진 가을 정원에는 새와 벌레도 보이지 않았다. 약약이 유씨를 데리고 가자 범한이 잠들어 있는 아우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이를 가는 얼굴과 뺨에 난 사마귀 자국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책상에 놓인 인주를 집어 범사철의 손가락에 묻힌 뒤 품속에서 사천립이 쓴 문서를 꺼내 펼치고는 손가락을 눌러 지장을 찍었다.
범한이 하얀 문서 위에 찍힌 붉은색 지장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범사철이 가지고 있던 포월루 지분 7할은 정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범사철은 온갖 더러운 일이 자행되는 포월루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완아는 범한의 기분을 풀어 주려 재미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쓸모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범한도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은 당신과 아무 관련이 없어요. 철부지는 자고로 밖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심 낭자를 데려왔나요?”
“서정에 있어요.”
완아가 설명했다.
“언 공자는 이미 갔고요.”
“그래요.”
범한이 범사철 침대 옆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한 뒤 다시 일어나서는 작은 주방 사람을 불러 휴대하기 좋은 말린 음식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주방 옆에서 뜨거운 죽을 호호 불어서 천천히 마셨다. 언 공자와 심 낭자가 옛정을 다시 떠올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유씨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더 중요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등자월이 종을 데리고 오더니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범한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기에 직접 침실로 들어가 범사철을 끌어안고는 후원 쪽문 밖 마차에 태웠다. 유씨가 따라와 입술을 깨물며 잠에 취해 있는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고 약약도 안타까운 마음에 아우의 통통한 귓불을 쓰다듬었다. 완아의 눈도 촉촉한 것이 이대로 떠나는 게 안타까운 것 같았다.
유일하게 사남 백작 범건만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어린 아들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낯선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자네들 먼저 가게. 수고해 주시게. 성을 나갈 때는 특히 조심하고.”
범한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언빙운을 향해 말했다. 밤이 되면 일찍 문을 닫는 경도성을 아무 소리 없이 나갈 수 있는 건 감찰원 관리뿐이었다. 언빙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같아 안 가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송림포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가 눈동자를 돌려 마차 안에서 눈물을 머금고 있는 아우를 바라봤다. 분명 깨어 있는데도 유씨 앞에서 자는 척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입술을 계속 삐쭉거리는 게 자신과 부친을 원망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 계년조뿐만 아니라 6처 검수들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정도 세력이라면 2 황자 측에서 섭씨 집안의 경도 수비를 동원하지 않는 이상 정면으로 대적할 방법은 없을 터였다.
범한이 마차 아래서 잠시 고개를 숙인 뒤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마차가 천천히 경도 밖을 향해 움직였고 백작가 뒤채 쪽문 옆에 서 있던 세 명의 여인들이 슬픈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특히 유씨는 누구보다도 애통해했다.
* * *
표식이 없는 마차 몇 대가 조용하고 어두운 경도 거리를 나아갔다. 언빙운이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 마차는 순조롭게 성을 나가 성 밖 관도로 진입했다. 이대로 북서쪽으로 반 시진 정도 가면 달빛을 받는 작고 낮은 숲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송림포였다.
마차는 이곳에 멈춰서 범한을 기다렸다. 이때 마차 안에서 범사철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여전히 오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도중에 멈춰 서는 건 뭐야? 내가 도망갈 걱정은 하지 않나 보죠?”
마차 안에는 그와 언빙운밖에 없었다. 언빙운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
“총명한 사람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텐데. 범한이 이번 일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수단을 동원한 것은 자네를 무사히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네.”
범사철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기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서겠죠.”
언빙운이 비웃으며 말했다.
“만약 범한이 자기 명성만 보호하려 했다면 자네를 직접 경도부로 보냈을 거네. 그렇지 않은가?”
범사철도 마음속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야 아버지가 허락해 주지 않으셨으니까 그러겠죠!”
“상서 대인이?”
언빙운의 차가운 눈빛에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서 대인의 생각을 자네나 나처럼 젊은 사람들이 어찌 마음대로 단정 지을 수 있겠나.”
범사철이 무기력한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언 형님, 형님은…… 나를 어디로 유배 보내는지 알아요?”
“북제.”
언빙운이 대답했다.
“뭐요?”
범사철이 절망하는 표정으로 긴 한숨을 쉬더니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엉덩이와 등에 생긴 상처가 닿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언빙운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범한이 바른 약이…… 효과는 있지만 통증이 심해서 한동안 고생해야 할 거야.”
그도 북제 상경에 있었을 때 범한이 발라 준 약 때문에 고생했어야 했다.
“내가 뼈는 다치지 않게 적당히 때렸는데 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어.”
범한이 마차에 올라타며 차갑게 말했다. 그의 차가운 표정을 본 범사철은 아까 큰 가법에 따라 매질당했던 걸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뭘 하다 오신 겁니까?”
언빙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어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범한이 등에 업고 온 사람을 범사철 옆에 내려놓자 마차 안에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범사철이 놀란 표정으로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을 바라보더니 대경실색하며 범한을 향해 소리쳤다.
“어쩌려고!”
범한이 납치해 온 사람은 포월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생인 연아였다.
범한이 범사철을 힐끗 보고는 조롱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여자가 불쌍하냐? 성격은 난폭한 놈이 여자를 아끼는 아버지의 유전자는 또 물려받았나 보네. 그럼 기생집을 운영할 때는 왜 여자를 아낄 줄 몰랐던 거야?”
범사철과 언빙운은 유전자라는 단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보다 범한이 연아를 납치해 온 이유가 더 궁금했다. 물론 오늘은 포월루가 흉흉해서 손님도 없었을 것이고 또 범한이 미약을 사용하는 솜씨가 훌륭하니 아무도 모르게 기생 하나 납치해 오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 낭자가 너의 첫 번째 여인이냐?”
범한이 아우의 두 눈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물었다. 범사철이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자를 놓아 달라고 애걸하는 눈빛을 지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네가 나보다 낫다. 열네 살에 첫 경…….”
그가 말하다 말고 큰 소리로 웃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네가 이 낭자를 대하는 태도가 남다른 걸 보고 마음이 있다는 걸 눈치챘지.”
범한이 입꼬리를 자꾸 올리며 말했다.
“포월루는 앞으로 조용하지 못할 테니 연아 낭자를 남겨 두고 떠난다면 너도 마음이 편할 수 없겠지. 그렇다고 내가 집 안에 둘 수도 없어. 아버지께서 허락하신다고 하더라도 새어머니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테니까.”
범한이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네가 성장하기 위해서 북으로 가는 거긴 하지만 너무 외로운 것도 마음을 수양하는 데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그러니 이 낭자를 데려가도록 해.”
범사철과 언빙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다른 나라로 유배 가는데 가장 인기 좋은 기생과 함께 가라고? 이게 도대체 유배야, 휴가야?
“형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범사철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큰일을 저질러 유배 가는 자신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다니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는 범한의 평온한 표정이 두려워 고통도 잊을 정도였다.
언빙운도 범한을 바라보며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범사철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일세.”
그러고는 형제가 이별할 수 있게 마차에서 내렸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사철을 바라보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아까 깨어 있었으면서 새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니?”
그러고는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다시 물었다.
“내가 화를 낸 이유와 나와 아버지가 너를 북제로 보내려 하는 이유를 알고 있니?”
범사철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를 보내는 이유는…… 첫 번째는 내가 없으면 경도부에서 포월루 사건을 건드려도 신경 쓰지 않고 둘째 측과도 맞설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범한은 아우가 자신에게 혼난 뒤 황자들을 둘째와 셋째와 같은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자 훈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둘째는…… 나를 벌주기 위해서.”
범사철이 고개를 들고는 엉덩이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 정말 가기 싫어. 형님, 무서운 북제 사람들을 상대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범한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뭘 하느냐니, 당연히 네가 가장 잘하는 장사를 해야지.”
범사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포월루 큰 사장의 풍모를 드러내며 물었다.
“장사하라고?”
“그래. 아버지께서도 나에게 계획해 보라고 하셨어.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너에게 본전으로 은전 천 냥을 줄게. 상경에 가면 사람을 시켜 보내 줄 거야. 하지만…… 그 외에 도움은 주지 않을 거야. 만약 네가 5개월 안에 은전 천 냥으로 만 냥 이상으로 만들면 네 능력을 인정할게.”
“열 배로 불리라고?”
범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사철이 놀라 버럭 소리쳤다.
“나는 그렇게는 못 해!”
“이게 바로 네가 가진 문제야.”
범사철이 범한의 말은 무시한 채 벌게진 얼굴로 화를 냈다.
“은전 천 냥 가지고는 못 해! 너무 적다고!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어!!”
“무슨 개소리야. 우리가 담박서국을 열었을 때 얼마 든 줄 알아?”
“흥! 그럼 형님이 《석두기》 완성본을 팔게 해주면 내가 천 냥을 만 냥으로 불려 줄게.”
“꿈도 꾸지 마! 원고를 하도 재촉당해서 미쳐 버릴 지경인데…… 완성본이 어디 있겠어?”
서로 투덕거리며 입씨름을 벌인 터라 분위기는 한층 가벼워졌다. 범한이 범사철의 오동통한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께서 밖이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너를 돌보려 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모든 일에 조심해야 한다.”
범사철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말했다.
“형님이 말했잖아, 나는 거상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경도를 떠나는 일 때문에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범사철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우의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걸 안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 방금 네가 유배 보내는 이유를 말했을 때 맞는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야.”
범사철이 고개를 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경도에 있다고 해서 두려울 게 뭐가 있겠니? 내가 너 하나 보호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잖아. 이 일이 조용해질 때까지 어디에 숨겨 둘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해도 2 황자가 어쩌지는 못할 거야. 설사 경도부에서 포월루 사건을 조사한다고 해도 백작가까지 연루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범한이 침착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너를 벌하려 보내는 거라는 두 번째 이유도 일부만 맞아.”
범한이 고개를 돌려 정신을 잃은 채 잠들어 있는 포월루 기생 연아를 바라보고는 차분히 말했다.
“북제에 가면 고생은 하겠지만 네가 지금까지 한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일을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담주에 간다면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더 난폭해지겠지.”
범사철이 두려움을 느꼈는지 목을 움츠러뜨리고는 엉덩이에서 전해 오는 고통에도 비명을 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형이 자신을 북제로 보내려 하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범한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눈꺼풀을 내려뜨리며 말했다.
“나는 네가 이렇게 대담하고 무서운 수단을 부릴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네가 계속 경도에 남는다면 주변 사람들은 나와 아버지에게 환심을 사려고 너를 달콤한 말로 꼬드길 거고 그럼 너는 나쁜 길로 더 빠지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차라리 바깥에서 고생하는 게 네가 성장하는 데는 더 좋겠다고 생각해.”
그가 갑자기 범사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장사를 하려면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지만 적당한 선은 지킬 줄 알아야 해. 지나치게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면 항상 반격을 당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사람을 사귈 때는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최대한 밝은 쪽에 서려고 하는 게 좋아.”
284화
사실 범사철은 아직도 포월루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에게 포월루는 자신이 성공했다는 상징이기에 뒤에서 이뤄진 불법적이고 더러운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끙끙 소리를 내며 마차 의자에 엎드렸다.
“형이 지금 한 말은…… 정의감이 넘쳐흐르는 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감찰원과 아무 관련이 없이 태학에서 책만 읽는 서생이 한 말인 줄 알겠어.”
비꼬는 의미가 다분한 말에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감찰원 제사인 그와 그가 부리는 밀정들은 전문적으로 어두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작은 기생집이 아무리 악랄한 짓을 벌인다고 한들 감찰원에서 하는 일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서 범한의 꾸짖음이 범사철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범한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나도 못 하는 일을 너에게 강요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냐?”
범한의 온화한 미소에 겁을 먹은 범사철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눈알만 굴렸다.
“나는 성인도 아니고 좋은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어. 오히려 사람의 목숨을 서슴없이 빼앗는 살인자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정말로 자신의 가족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나와 똑같은 방법을 생각했을 거야. 우리가 비록 온몸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일을 하긴 하지만 자기 형제만큼은 항상 청렴하고 깨끗하길 바랄 테니까. 아마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것들을 보다 보니 너희들이 이런 것들에서 멀리 떨어지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르지.”
범사철은 형이 끊임없이 말하는 ‘우리’가 뭘 뜻하는지 궁금했다.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 소은과 장묵한의 이야기를 꺼냈다.
“소은은 평생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악행을 일삼으며 살면서도 자신의 형제만큼은 청렴한 군자로 살기를 바랐지. 그리고 그 바람은 이루어졌어. 장묵한은 죽기 전날 밤까지도 소은을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군자로서 기품을 잃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 점이 지금도 감탄스러워. 나는 비록 재주는 없지만 소은이 이룬 일을 이루고 싶어.”
그가 이어서 아우를 설득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위안을 받고 싶어서인지 모를 말을 했다.
“네가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는 셈이니까.”
처음으로 범한의 속마음을 들은 범사철은 입을 쩍 벌리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정신을 가다듬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장묵한 대가가 주를 단 《경사자집》만 봐도 머리가 아파지는걸. 형님, 나를 일대 대가로 키우려는 건 지나친 욕심이야.”
범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머리에 공부는 당연히 안 되지.”
상황 파악이 안 된 범사철이 범한이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럼 이 이야기는 왜 꺼낸 거야?.”
“장사를 잘해서 역사에 길이 남을 거상이 되라고.”
범한이 격려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상인이 꼭……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두운 길로만 가야 하는 건 아니야. 밝고 큰길을 통해 성공하는 상인들도 있으니까.”
범사철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인은 돈을 버는 사람인데 어떻게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거야? 밝고 큰길은 또 뭐고? 그건 관아 입만 불려 주는 일이 될걸.”
“나와 아버지가 있는데 착실하게 장사하는 너를 누가 건들겠니?”
범한이 침착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아우를 바라봤다.
“섭가를 잊지 않았지? 창산에 있을 때 네가 말했잖아. 장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섭가의 이야기를 들어서라고. 만약 여주인이 죽지 않았다면 관아는커녕 천하 대국도 섭가를 건들 수 없었을 거야.”
범사철의 눈빛이 잠깐 밝아지더니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하지만 기생집 장사가 어느 것보다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는걸.”
그는 장사란 모름지기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게 첫 번째고 체면이니 밝은 길이니 하는 건 그다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경여당 섭 대행수에게 당시 섭가가 무슨 장사를 했냐고 물어보니 부정한 건 하지 않았다고 했어. 그 이유로 첫 번째는 아마 섭가 여주인이 그런 일을 싫어했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섭 대행수가 설명해 준 건데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면 이윤을 많이 남길 수는 있지만 옳은 길을 갈 수는 없다는 거야. 큰 강 옆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끊임없이 흘러가도 결국에는 큰 강처럼 거대해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그러니 네가 장사로 최고가 되고 싶다면 작은 물줄기에 발을 담가서는 안 돼.”
말하던 범한은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울컥하면서 무언가가 치솟았다. 아마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약한 부분이 건드려진 것 같았다.
“세상은 살기 어렵기 때문에 뭘 하든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해. 상인이 되려면 악랄한 짓을 일삼는 간상이 되는 데 만족해서도 안 되고, 관아를 상대하는 관상이나 황실을 상대하는 황상에 머무르려 해서도 안 돼. 엄청난 부를 쌓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천고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천하의 상인이 되어야 해.”
그의 장황한 설명에 머리가 아파진 범사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범한을 힐끗 바라봤다.
“섭가는 당시 무기를 팔아서 경국이 북위를 무찌르는 데 도움을 줬잖아. 그러니 북쪽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장사 방법도 포월루에서…… 내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고 원 대가가 기생 몇 명을 죽이긴 했지만 섭가 여주인이 죽인 원혼도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해. 형님의 말은…….”
순간 말문이 막힌 범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범사철의 말을 막았다.
“약자를 억압한 일은 무슨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어.”
범사철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나 정말 경도를 떠나고 싶지 않아.”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했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모두 경도에 계시니까 형이 대신해서 효도를 해줘.”
범사철은 자신이 경도를 떠나야만 포월루 일이 수습될 수 있고, 2 황자가 백작가를 향해 겨눈 무기도 효력이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사철은 줄곧 이 점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걸 보면 자신이 집안에 우환을 불러온 건 확실했다.
게다가 범한의 말이 열네 살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섭가 여주인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가. 평생을 바쳐 이룰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다음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몇 마디 말을 건네고는 마지막으로 상경성에서 믿을 만한 사람 몇 명을 일러 줬다.
범한의 진짜 의도를 들은 범사철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황실 금고가…… 북쪽에서 밀수를 하는데…… 최씨 가문이…… 이렇게 큰 금액을…… 나보고 감당하라고? 나한테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작년에 내가 곽보곤을 때렸을 때 경도부에서 나를 불러 심문했던 거 기억해?”
“응, 기억나.”
“올해 춘시 부정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형부에서 나를 불러 심문했던 것도 기억나?”
“그럼, 기억하지.”
범사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경국 법률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 주려고 그러는 건가?’
하지만 이 두 사건은 마지막에 흐지부지 처리되면서 경국 법률의 엄격함을 증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권세가 법률을 능가한다는 걸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범한이 웃으며 아우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두 사건 때마다 너는 집으로 찾아온 관차를 때렸잖아. 물론 네 성미가 난폭해서 그런 거긴 하지만 같이 산 지 2년 정도밖에 안 된 형을 위해 그러는 걸 보고 내 안목이 틀리지 않음을 직감했어.”
엉덩이가 상처투성이인 범사철이 고통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그럼 왜 그렇게 매섭게 때린 거야!”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첫째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그랬고, 둘째는 때리는 시늉만 하면 경도 사람들이 백작가 가풍이 엄격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 아니야.”
범사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형님, 북쪽에 그 중요한 일…… 정말 나한테 맡길 거야?”
“네가 먼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면 생각해 볼게.”
범사철이 눈을 부릅뜨고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래! 내가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어.”
범한이 고개를 끄덕인 뒤 아우 옆에서 잠들어 있는 포월루 기생을 쳐다보았다.
“어제 포월루를 수색할 때 이 여자가 너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어. 나는 네 형인 만큼 네가 성격은 거칠어도 온화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 좀 더 부드럽게 대하면 삶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아직 나이가 어려 남녀 일에 낯선 범사철이 얼굴을 붉히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더는 할 말이 남지 않은 형제는 조용한 마차 안에서 이별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만 나중에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 날이 올 거야. 하지만 아버지를 원망해서는 안 돼. 이 세상에서 부모와 형제 말고 진심으로 너를 대해 주는 사람은 없으니까. 네가 어린 나이에 경도를 떠나게 되어 새어머니도 마음 아파하시고 아버지도 네가 잘 지내지 못할까 걱정하고 계셔. 그 마음을 헤아려서 원망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범사철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차에서 내리는 범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순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지면서 눈물이 앞을 가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형님, 얼른 나 데리러 와야 해.”
마차에서 내리던 범한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전부 계획해 뒀으니까.”
* * *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보던 범한은 자신도 좋은 사람이 아니면서 어째서 사철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미묘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정치가이자 친일파였던 왕징웨이(汪精衛)는 자신의 아들이 매국노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았을 것이고, 히틀러는 아마 자신의 아들이 화가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소은과 장묵한 형제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은은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장묵한을 위해 남몰래 많은 일을 하며 끝까지 청렴한 명성을 지켜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장묵한은 나이가 들어 자신의 명성이 최고에 다다랐을 때 형제를 구하기 위해 평생 지켜 온 신념을 버리고 경국까지 와서 범한을 모함에 빠뜨렸다. 겉으로 단순해 보이는 일이지만 사실 장묵한에게는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버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참 기묘하게도 범한은 두 풍운아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범한이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아우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먼 미래에 자신이 소은처럼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을 때 아우는 장묵한처럼 모든 걸 다 걸고 자신을 구해 주려 할까?
밤바람이 경도 밖 구릉에 불어왔다. 마차가 떠난 자리를 지켜보던 범한은 고개를 저었다.
‘재물을 좋아하는 아우의 성격상 은전 몇만 냥 손해 보는 건 감당하겠지만…… 만약 그보다 큰 손실을 봐야 할 경우에는 주저하며 망설이겠지.’
그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언빙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인은 정말 가식적인 사람입니다.”
범한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주변 모든 사람을 이용하시면서 상대방을 위하는 척 행동하시지 않습니까.”
언빙운이 입꼬리를 올리고 바라보자 범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형제가 없으니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죠. 정말 아우를 위해 한 일입니다. 물론 강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결과가 꼭 좋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제 능력이 이 정도이니 어쩔 수 없지요. 최소한 나중에 스스로에게 형으로서 사철이의 성장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다음으로 말하려 했던 점입니다.”
언빙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제사 대인은 정말이지 모진 사람입니다. 북쪽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면서 나이 어린 아우를 보내다니……. 아우를 경도 밖으로 쫓아내 행방불명이 되게 해서 다른 사람이 대인을 협박할 빌미를 끊어 버리려는 것 아닙니까. 2 황자도 대인이 이런 모진 방법을 사용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범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약약, 사철, 완아에 이어 범한은 네 번째로 오스트롭스키의 질문을 다시 했다.
언빙운이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제 생각은 단순합니다. 경국 감찰원 관리로서 폐하께 충성하고 경국에 충성하며 부국강병과 천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285화
“천하 통일?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범한이 비꼬는 말투로 묻자 언빙운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경국의 젊은 세대인 언빙운은 국가의 힘이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에 태어났기에 천하를 통일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천하 통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라서 그는 단 한 번도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본 적도 없었고 이런 질문을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범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 말해야 할지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천하가 세 갈래로 갈라지고 소국들이 즐비한 상황에서는 전쟁을 피할 수 없으니 백성들도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천하 통일을 이뤄 전쟁에 따른 재난을 영원히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언빙운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말하자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오랫동안 갈라져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갈라진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 말만큼 터무니없는 말이 없지요. 천하를 통일하는 데 수백 년이 걸리듯이 갈라지는 데도 수백 년이면 족할 겁니다. 만약 갈라진 나라 중 어느 나라도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전쟁이 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완전한 통일은……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전쟁에 뛰어들게 하는 유혹에 불과합니다.”
언빙운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비꼬았다.
“굉장히 유치한 생각을 품고 있군요.”
“저도 압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저는 살아 있는 동안 전쟁이 일어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1년 동안 저희 감찰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람의 수가 대략 4백여 명 됩니다. 8월 제방이 무너졌을 때 사망한 사람의 수는 수만 명이지요. 만약 전쟁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수개월 만에 십수만 명이 죽을 겁니다.”
“잠시 전쟁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언제든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겁니다.”
언빙운이 코웃음을 치며 이어서 말했다.
“설사 대인이 4대 종사를 모아 황실의 야심을 억누른다고 해도 대인이 사망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죽은 뒤요? 죽으면 아마 홍수가 넘쳐 하늘까지 닿겠지요.”
자만한 발언에 언빙운이 정색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둠 속에 숨은 어진 사람인 줄 알았더니만 이 말을 들으니 제가 방금 지나친 말을 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대인은 모진 사람이면서도 아주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방을 놀리듯 말했다.
“오해는 무슨, 지난번에 저는 성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보니…… 거의 성인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군요.”
“지금 본인이 감찰원을 장악한 성인이란 겁니까?”
언빙운이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대인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계획해 두셨습니까?”
“저는 계획해 두었습니다.”
대답한 범한이 상대방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사철이가 북쪽으로 갔으니 대인과 대인 아버지께서 고생 좀 하시겠습니다.”
범한은 각 지역 관리들의 동향을 관찰하고 외국 첩보망을 구축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감찰원 4처에게 범사철을 경국에서 빼내 상경으로 보내는 일을 맡긴 것이다.
“제 상사이지 않으십니까.”
언빙운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그의 생각을 이해한 범한이 말했다.
“이 일은 원장께 제가 보고하도록 하죠. 그런데 아십니까? 제가 지난번 사신단으로 경도를 떠난 첫날 밤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송림포에서 야영을 했습니다.”
그가 코를 비비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당시 사절단 안에도 가장 인기 있었던 사리리 낭자가 있었지요. 오늘 사철이는 쫓겨나는 신세니 당시 나보다 더 처량한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제가 가장 인기 있는 기생을 옆에 붙여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 형제 모두 떠나는 길이 외롭지는 않은 셈이지요.”
언빙운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친밀한 부하나 친구 앞에서만 드러내는 범한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스러움이 정말 적응되지 않았다.
“이제 걱정할 것도 사라졌으니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범한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상대방은 황자이니 우리가 함부로 죽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언빙운이 차갑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대인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요.”
범한이 찔린 표정으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인은 저를 잘 아시는 군요. 하지만 급할 건 없습니다. 먼저 홍성의 명성에 금이 가게 만든 뒤 둘째 측 부하들을 좀 괴롭히고 최씨 가문도 혼쭐을 내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이제 더는 포월루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니 대인이 사천립을 도와 처리해 주십시오. 이후 무슨 일이든 대인께 전권을 부여하겠습니다. 사실 음모를 꾸미는 일은 대인이 저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포월루는 계속 영업을 이어 갔다.
소식에 빠른 극소수 사람들은 경도에서 제일 유명한 기생집 때문에 범한과 2 황자 사이에 시끄러운 일이 있었고 이후 백작가에서 매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격렬한 반응은 없었고 감찰원에서도 포월루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소문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관리들에게는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범한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황자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은 백작가 작은아들이 포월루를 경영하는 게 백작가 명성에 약간의 손상은 주겠지만 거기서 들어오는 은전이 상당할 것이므로 모두가 협력해서 이 일이 드러나는 걸 막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이건 양측 모두 이익을 보는 결과이기도 했다.
반면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감찰원이 기생집을 수색하는 모습을 보거나 빗소리처럼 백작가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매질 소리를 들으며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폐하의 특수 기관이 기생집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백작가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매일 경도 거리에서 난폭한 짓을 일삼던 불량배 무리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다만 이 일을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경도 권력자들이 충돌하면 늘 그렇듯이 이 일도 결국에는 촘촘하게 얽혀 있는 관계망에 의해 모두가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조용히 마무리될 거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포월루의 대행수와 점원, 접대부, 기생들은 외부 사람들처럼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찰원이 수색한 뒤로 큰 사장이 포월루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실종된 것처럼 완전히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큰 사장이 감금되었다는 소문이 들리기는 했지만 모두 뜬소문이었기에 모두가 불안해했다. 게다가 작은 사장은 신분이 특수한지라 매일 포월루에 나와서 일을 감독할 수도 없었다. 이에 포월루는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안의 그림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불안하기는 2 황자 측도 마찬가지였다. 백작가는 왜 포월루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경도부에 보낸 것일까?
매집례가 이직한 뒤로 핵심 관아인 경도부는 줄곧 2 황자가 장악하고 있었고 상대방도 경도부가 2 황자 세력 범위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백작가가 관계를 정리할 생각에 그리한 것이라면 범사철을 경도부로 보내 처벌을 받게 하면 됐다. 하지만 범사철은 감금되었다는 소문이 들렸고 감찰원이나 백작가나 조금의 이상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을 신경 쓰느라 머리가 아픈 2 황자는 백작가가 범사철을 이미 경도 밖으로 쫓아내 소리 소문 없이 다른 나라에 보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과연 감찰원의 일 처리는 물샐틈없이 완벽했다.
하지만 2 황자 측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상대방이 포월루와 자신이 조금의 관련도 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랄 거라 생각했다. 다만 범한의 복수를 막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의 주변 사람들부터 건든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방비할 수 있을까. 범한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언빙운의 집행력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 * *
이날은 산들바람에 화려한 가을 단풍이 흩날려 경도 밖으로 나가 국화꽃을 감상하기 좋은 날이었다.
황궁에서 국화 감상을 하러 놀러 가기까지는 아직 6일이 남아 있어 경도 관리와 백성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교외로 나가기 바쁜 데다가 낮이라 포월루는 조용했다. 더구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데다가 큰 사장까지 실종되면서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항상 의욕이 넘치던 안내인들은 무기력하게 기둥에 기대어 있었고 기생들은 호수 옆에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낮에 희롱하길 좋아하는 늙은 변태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곤충들은 돌계단을 있는 힘껏 뛰어오르며 기진맥진한 울음소리를 내는 게 자신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포월루 점원들은 심란한 마음에 행주를 들고 대충 탁자를 닦았다. 범사철이 있을 때는 탁자는 반드시 하얀 비단으로만 닦게 하고 먼지 한 점도 없어야 통과시켜 줬으므로 지금처럼 대충 닦는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그때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붓으로 그린 것처럼 눈썹이 엄청나게 짙어 기억하기 쉬운 얼굴이었다. 어느 날 밤 그를 접대한 적 있던 안내인은 단박에 그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포월루 대문 옆에 멍하니 서 있을 뿐 접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보던 점원이 들고 있는 회색 행주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손님이 왔어…….”
말끝을 흐렸지만 목소리가 맑아 또렷하게 들렸다.
손님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거북스러운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포월루의 엄청나게 큰 대청을 잠시 둘러보다 고개를 저었다.
“석청아 낭자에게 내가 만나러 왔다는 말을 전해 주게.”
그 말에 점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석 낭자를 직접 만나러 온 것도 모자라 본명을 그대로 부른단 말이야? 경도의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포월루에서는 석 낭자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데 저 손님은 누구길래 저렇게 당당한 거지?’
손님을 아는 안내인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공손히 말했다.
“대인, 제가 당장 전하겠습니다.”
그런 뒤 점원에게 손님을 포월루에서 3층 가장 좋은 방으로 모시고 극진히 대접하라고 지시했다.
올라가는 손님을 보면서 1층에 있는 점원과 안내인들이 둘러서서 수군거렸다. 포월루에 안 좋은 일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체 모를 사람이 나타나자 모두가 불안했다.
마침내 누군가가 유달리 짙은 눈썹이 이전에 왔던 서생과 똑같다는 걸 기억해 냈다. 바로 그날 ‘진 공자’와 함께 왔던 사람이다. 진 공자가 누구인가? 포월루 큰 사장의 큰형! 조정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은 범 대인이었다. 그러니 오늘 온 손님은 범 대인의 심복인 만큼 감찰원 고위 관리일지도 몰랐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날 발생한 일 때문에 포월루는 범 대인에게 미움을 샀고 큰 사장은 사라져 버렸잖아. 그런데 오늘 측근이 왔으니 또 감찰원이 수색하는 거 아냐? 포월루는 계속 영업을 할 수 있나?’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봤을 때는…… 포월루에서 거금을 바쳐야지만 이 일이 해결될 것 같아. 그러고 보니 큰 사장이 없는 게 안타깝네. 성격은 거칠어도 경영은 참 잘했는데……. 관리들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 줘야 아무 일 없이 영업할 수 있을 거야.”
“무슨 개소리야!”
그러자 어느 사람이 그가 경묘 대제사인 것처럼 허풍을 떠는 게 꼴 보기 싫다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바보야, 포월루 큰 사장이 작은 범 대인 친동생이잖아. 그런데 감찰원이 은전을 받고 물러설 것 같아? 게다가 이 형제 위에는 상서 대인이 계시는데 돈으로 해결될 문제겠어?”
반박당한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그럼 저 사람은 뭘 하러 온 거지?”
* * *
포월루를 방문한 사람은 바로 사천립이었다. 스승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용모단정한 선비 차림으로 포월루에 오긴 했지만 기생집에 온 것이 거북하고 불쾌했다.
석청아가 심상치 않은 눈빛을 짓더니 공손하게 차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사천립이 관원은 아니지만 범 제사의 측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큰 사장님은 종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에서 상대측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뭐지?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야?’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물었다.
“사 선생께서는 오늘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사천립이 잠시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석청아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작은 사장인 3 황자가 뽑은 사람이라 백작가와 관계가 깊지 않아 상대방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오해한 것이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모두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설마 사 선생께서 수……색……을 진행하러 오신 건 아니겠지요?”
말할 때 혀가 꼬이는 바람에 이상하게 들렸다.
석청아가 오해하자 사천립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품 안에서 문서를 꺼냈다.
“오늘은 수색하러 온 게 아니라…… 인수를 하러 온 거네.”
인수라니! 놀란 석청아가 탁자에 놓인 얇은 문서를 들고 재빨리 읽더니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맨 아래 선명하게 찍힌 지장을 바라봤다. 한동안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겨우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질문했다.
“큰 사장께서 가지고 계시던 포월루 지분 전체를…… 선생께 드렸다고요?”
석청아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포월루 지분 7할을 어떻게 순순히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을까?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286화
“사 선생님, 이런 중차대한 일은 함부로 허락해 드릴 수 없습니다.”
사천립이 씁쓸히 웃었다.
“낭자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소. 오늘 이후로 내가 포월루의 큰 사장이란 걸 모두에게 알리시오.”
석청아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사천립을 바라보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사 선생께서는 큰 사장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이렇게 큰일은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사실 사천립은 지난밤 문서를 쓸 때만 하더라도 이 문서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가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범한의 강요에 마지못해 포월루에 오게 된 그는 자신의 작성한 문서로 이렇게 됐으니 자업자득이라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석청아의 의심 가득한 말을 듣자 순간 서글퍼지면서 화가 치솟았다.
“이 문서가 가짜라는 건가? 헛소리 지껄이면서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장부 검사하는 사람이나 데리고 오게.”
석청아는 백작가가 포월루에서 발을 빼려고 껍데기에 불과한 서생을 이용하는 거라 추측했다. 하지만 자신은 내막을 파악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고 원 대가도 갑자기 사라진 상태라서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사 선생 밑에서 입에 풀칠하며 살아야 하는 제가 어찌 선생과 언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냉정함을 찾은 그녀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사천립의 표정을 살폈다.
“다만 포월루 지분 3할은…… 작은 사장님에게 있다는 걸 사 선생도 분명히 아시겠지요?”
3 황자가 포월루 지분 3할을 가지고 있으니 백작가는 함부로 건들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상황이 이렇게 됐음에도 그녀는 범한이 포월루를 정리할 생각이 없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말에 사천립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는 씨익 웃더니 짙은 눈썹을 실룩이며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청아 낭자가…… 그 작은 사장이란 분에게 3할의 지분도 내가 인수한다고 전해 주시오.”
‘3할의 지분을 인수한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석청아가 버럭 화를 냈다.
‘백작가 지분을 양도하는 거야 간단하겠지만 어떻게 3 황자님의 지분을 인수하겠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지!’
한편 조금씩 기생집 사장의 역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천립은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3할의 지분을 인수하는 여러 방법을 가지고 있소. 지금 말하는 방법은 작은 사장의 체면을 생각한 방법이라는 걸 청아 낭자도 분명히 알아주길 바라오.”
석청아가 비꼬는 말투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요? 제가 사 선생에게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겠군요. 그런데…… 얼마에 인수하실 생각입니까?”
사천립이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십만 냥이요?”
석청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만한 가격이라면 공평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포월루가 앞으로 계속 영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분 3할을 십만 냥에 파는 거라면 괜찮은 조건이었다.
사천립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만 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석청아가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천 냥이네.”
사천립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서생 신분이라…… 가진 돈이 별로 없다네.”
“말도 안 되는!”
석청아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무리 백작가라도 세상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3할의 지분이 누구 손에 있는지 잊지 마십시오!”
사천립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분 7할을 가진 사람은 나, 사천립이오. 백작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그리고 나는 지분 3할이 누구 손에 있는지 관심 없소.”
석청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분 3할을 내놓지 않으면 어쩌실 겁니까?”
“첫째, 포월루에서 외국과 내통한 내용이 있는 편지가 압수될 수 있다고 하오. 무슨 죄와 관련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럴 수 있다 하오. 둘째, 경도에 당장 포일루가 새로 생길 것이오. 내게 지분 7할이 있으니 포월루에서 일하는 모든 점원, 안내인, 기생들을 내쫓은 뒤 포일루에서 다시 고용할 것이오. 청아 낭자가 보기에 포일루가 포월루를 무너뜨리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석청아가 단호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첫째가 가능할 거라 생각되지 않는군요. 게다가 그런 일로 백작, 아니 서 선생께서 포월루를 무너뜨리신다고요? 지분 7할도 함께 사라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둘째는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포월루 부지는 큰 사장께서 신중을 거듭해서 선정하셨고 인기 좋은 기생들은 포월루와 불변의 계약을 맺은 상태인데 떠나라 한들 떠나겠습니까?”
사천립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청아 낭자는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소. 지금 포월루 큰 사장은 나요. 무슨 계약이든 내가 끝났다고 말하면 끝난 거요.”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석청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천립이 천천히 일어나 창문을 열고 풍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포일루의 부지는 굳이 멀리 갈 것 없이 포월루 옆, 여기 호수 옆에 할 생각이오. 내가 오늘에서야 포월루를 인수하러 온 이유는 지난 이틀 동안 저기 부지를 계약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오.”
석청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악덕 상인 역할에 완전히 빠져든 사천립이 창밖으로 손을 뻗어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계속 말했다.
“그쪽이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면 다 함께 망하는 수밖에……. 포월루 지분 7할이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나는 잃어도 상관없다오.”
이 말을 내뱉으며 사천립이 자조 섞인 미소를 띠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서생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권력에 기대어 남을 협박하는 삶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 그의 말은 석청아에게 노골적인 위협이었고 현실적인 상황에서 석청아나 3 황자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포월루 옆에는 이미 감찰원 관리들이 파견되어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 온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천립은 인수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 공자는 능력이 출중한 만큼 3 황자가 지분 3할을 내놓지 않는다면 열흘 안에 포월루를 도산시킬 것이었다.
“낭자는 이 일의 배경을 잘 모르지 않소. 그러니 헛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사실 석청아가 3 황자에게 이 일을 전할 필요도 없었다. 범한이 포월루를 인수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은 일찌감치 백작가의 자체적인 경로로 황궁에 있는 의 귀빈의 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매일 의 귀빈 앞에서 벌로 책을 베끼고 있는 3 황자로서는 자신의 돈을 지키고 싶어도 당장 상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사천립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석청아를 향해 서생의 온화한 성품을 드러내며 말했다.
“나는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오. 앞으로 이곳에 남아 전심전력으로 일해 준다면 나도 섭섭지 않게 대우해 주겠소.”
하지만 석청아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작은 사장이 손실을 보지 않도록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비록 작은 사장은 어린아이였지만 그 아이가 가진 신분을 생각하면 이 일은 가당치도 않았다. 경도에서 재산을 강제로 뺏기는 일은 흔했지만 감히 누가 황자의 재산을 강제로 뺏을 수 있단 말인가.
“먼저 작은 사장님께 말씀드린 뒤 결정하겠습니다.”
그녀가 이를 갈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장부에 돈의 흐름은 항상 명확하게 계산해서 문제가 없도록 하죠.”
사천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포월루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던 석청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모두 평상복을 입은 감찰원 밀정들이었다. 밀정이 포월루를 인수하러 온 상황에서 누가 막을 수 있을까.
한편 무리에 섞여 들어온 턱수염이 긴 남자가 포월루 주변 상황과 경영 방법을 보더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너무 놀란 석청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을 헐떡이며 속으로 자신이 온 힘을 다해도 범 제사가 3 황자의 돈을 집어삼키는 걸 막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순간 화가 치솟은 그녀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경여당 셋째 섭 사장이 직접 와서 장부를 계산하는 이상 포월루는 결국 전부 사씨 성을 가진, 아니 그 죽일 범씨 성을 가진 놈에게 넘어가게 되겠어. 흥! 욕심내며 한입에 삼키려고 하다가는 목구멍이 막혀서 물도 마시지 못할 거다.’
경여당 대행수들은 황실 금고를 위해 조언하고 각 왕부의 자금을 불려 주고 있었지만 정작 수년간 정면에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편 석청아란 여인은 일개 기생에서 천신만고 끝에 맨 꼭대기 위치인 기생 어미라는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이는 모두 그녀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 항상 열심히 배우고 경영에 관해 깊이 연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도 경여당의 나이 많은 대행수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녀 역시 섭가 노인들을 깊이 존경하고 흠모했다. 이는 천하 선비들의 장묵한을 향한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석청아는 금전 출납부를 가지고 잔머리를 굴리려던 생각을 멈추었다. 그리고 완패를 선언하기 위해 나긋나긋한 자태로 앞으로 나와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셋째 섭 대행수는 턱에 국수 가락 같은 새하얀 수염이 나 있어 나이가 쉰은 된 것 같았다. 그런 그가 흐뭇한 얼굴로 석청아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옆에서 이 광경을 보게 된 사천립은 섭 대행수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대체 스승님께서는 이 호색한 노인네를 데려다가 무얼 하시려는 거지?’
셋째 섭 대행수가 찬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낭자는…… 분명 이 기루의 일을 맡아 보는 사람이겠군요? 건물의 입지 조건하며 채도, 내부 꾸밈까지 살펴보았는데 정말이지 모든 게 천재적이오. 정말 감탄했소이다. 낭자가 계속 이곳에 머물고자 한다면 내, 범 제사께 알리리다. 이 정도면 나 같은 늙은이는 필요 없어 보이는군.”
그러자 석청아가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건물 안에 있는 건 모두 큰 사장님께서 손수 챙기신 것이라 이 아낙은 한 것이 없습니다.”
셋째 대행수가 안타까운 기색으로 탄식했다.
“큰 사장이란 분께서는 참으로 경영에 귀재이시군요. 한데 어쩌다가…… 범…… 그분께 잘못을 저…….”
다행히 그는 나이가 많아도 정신만은 또렷했다. 하마터면 도를 넘은 말을 내뱉을 뻔한 순간, 사천립의 눈빛에 담긴 ‘멈추시오!’라는 신호를 얼른 알아채고는 이내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여기까지 와서 진짜 고수를 만나 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낸 채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경영의 도는 모름지기 세세한 부분에서 그 진가가 나타나는 법. 스무 해 동안 경여당의 음지에서 경영을 해온 늙은 대행수에게도 포월루는 떳떳하지 못한 장사였다. 그렇지만 환한 건물 내부와 뒤에 위치한 호수, 호숫가의 별채들, 점원과 안내인의 들고남, 예의범절, 지나치게 요염하지도 않고 추태도 부리지 않는 기생들……. 그야말로 손님들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걸 주도한 분은 장사의 비결을 심도 있게 깨우친 이였다.
늙은 대행수가 감탄을 연발하자 사천립도 어느새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사남 백작가의 둘째 도련님은 권력과 돈 있는 집안의 그저 그런 자제가 아니었어. 참으로 절묘하군. 백작가의 형제가 모두 세인을 능가하는 재주를 지녔다니 말이야.’
황궁에서는 줄곧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니 석청아로서는 3 황자의 돈을 제멋대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건물을 매입하러 나선 이들은 도착한 상태니 이제 장부를 대조해 보겠다며 내달라고 할 차례인데.
경국의 상단 대다수가 보여 주기 용 장부와 비밀 장부를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셋째 섭 대행수 앞이라 석청아는 감히 장난질을 칠 수 없었다. 하지만 포월루의 은전 거래 내역은 향이 몇 개 타는 만큼의 시간을 들여 이미 정확히 계산해 놓은 터였다. 그리고 은전 1천 냥당 3할을 지분으로 환산한 양도 잠시 떼놓았다. 그러니 이제 3 황자로부터 소식이 당도하면 이 포월루는 완벽하게…… 사천립의 것이 될 터
석청아는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포월루의 총관리인은 경여당의 셋째 대행수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녀의 생각과 달리 셋째 대행수는 그냥 마차를 타고 떠나 버려 이는 석청아에게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를 더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문이 열리고 포월루의 새 주인이 등장했는데 그녀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상문이라고?”
석청아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 말을 잃었지만 이내 정신을 수습했다. 상문은 범한 제사가 강제로 데려간 후 줄곧 소식이 없던 터였는데 이제 보니 반격할 준비를 했던 거였다.
사천립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렇다. 오늘부터 상문 낭자가 포월루의 총관리인이다.”
287화
석청아가 억지로 상문을 향해 살짝 인사를 올렸다. 상문은 포월루에 있는 동안 자신의 이전 명성 때문에 뻣뻣하고 도도하게 굴었고, 석청아는 그런 그녀를 제법 괴롭혔던 터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포월루의 총관리인이 되어 나타나자 석청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 건지 알아 버렸다. 이에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방으로 가 짐이나 싸려 했다.
한데 불안하기는 상문도 마찬가지였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준 범한 대인이 포월루를 자신에게 맡긴 이상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었지만 3 황자의 세력만 생각하면 은근히 두려웠다. 그런데 석청아가 물러날 의사를 보이다니. 그녀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사천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청아 낭자, 자네는 떠나면 안 되네.”
석청아가 싸늘하게 웃었다.
“내가 포월루와 계약 문서를 쓴 것도 아닌데 왜 떠나면 안 된다는 거죠?”
사천립이 골치 아프다는 듯 목 쪽에 있는 단추 하나를 끌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뗐다.
“나는 기방 장사를 해본 적이 없어. 상문 낭자도 노래나 부르는 소리꾼이었으니 청아 낭자 자네가 떠난다면 포월루는 돈을 벌 수 없고……. 아무튼 내가 정말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그러네.”
이제야 저들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석청아는 저도 모르게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아직 ‘만약’이란 단어밖에 내뱉지 않았는데 사천립은 바로 그녀의 말을 끊고 자기가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범한 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분이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자네는 이 포월루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하셨어.”
석청아는 화도 나고 씁쓸했다. 자신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말려 죽일 심산이란 걸 알게 되어서였다. 아무리 3 황자와 관계가 있다 해도 아녀자의 몸이니 그녀로서는 감히 감찰원 제사 대인의 명령에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고작 기생 하나 때문에 관리가 감찰원과 충돌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한 터였다. 그리고 아무리 황자라 할지라도 득보다 손해가 더 큰 일에는 나서지 않을 게 뻔했다. 게다가 범한 제사 정도면 자신을 파멸시키는 건 개미 한 마리 밟아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 터.
“저는 왜 남겨 두시려는 거죠?”
석청아가 살짝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물었다.
사천립이 대답을 해주었다.
“범한 대인께서는…… 아니, 나는 포월루에 조금 변화를 줘볼까 생각 중인데 그중 청아 낭자가 해줄 것이 있어서야. 어쩌면 경국의 모든 청루들이…… 똑같이 따라 할 수도 있는 일이지.”
석청아는 깜짝 놀랐다. 포월루는 장사가 정말로 잘되어 큰 사장은 이미 이곳에서 본전을 뽑고 다른 주에 분점까지 낸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경국 전체 청루에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몫은 아직까지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변화란 것이…… 옛날부터 청루 장사는 이런 식으로 해왔는데 큰 사장님이 바뀌는 게 아니라면, 설마 범한 제사가 여기에다가 시선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생각이란 건가? 그리고 천하 기생들에게 더 이상 몸을 팔지 못하도록 하려는 건가?
그런데 문제는…… 몸 파는 기생이 몸을 팔지 않고, 포주가 호객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청루라 할 수 있을까?
사천립은 그녀에게 어떤 의문이 일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에 스승의 분부에 따라 하나둘 자신이 해야 할 이야기를 풀어 놓을 뿐이었다.
“첫째, 기루 아가씨들에게 오늘부터 계약 내용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한다. 즉 5년마다 한 차례 기한이 되면 직접 다시 계약하도록 한다. 둘째, 포월루에는 의원이 항시 대기하며 아가씨들은 몸이 아프지 않을 때만 손님 접대에 나선다. 셋째…….”
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석청아는 궁금한 게 생겨 물었다.
“계약 내용을 변경하게 하라고요? 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사천립이 설명해 주었다.
“대인…… 쿨럭, 또 틀렸구먼. 내 생각에는 그래야 옳기 때문이라네. 5년이 되면 반드시 당사자에게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줘야 해. 이렇게 생각해 보지, 평생 남에게 속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외모까지 평범해서 잘나가지 않는다고 말이네. 그렇다면 그 아가씨 입장에서는 기분이 안 좋을 거 아닌가. 그러면 자연스레 손님 접대에 소홀해지겠지.”
그러자 석청아가 비웃었다.
“5년이 계약 만기라니 우리 같은 불쌍한 여인네들이 몸을 팔지 않고 배길 거 같습니까? 그러면 누가 기적에서 빼주기라도 한답니까?”
경국에서 기예만을 파는 기녀와 몸을 파는 기생은 처지가 달랐다. 몸을 파는 기생은 일단 기적에 오른 이상은 평생 그곳에서 이름을 뺄 수 없다. 누군가가 몸값을 내주고 기적에서 빼주거나 조정의 유명한 분께 총애를 받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앞서 사천립이 말한 방법에 따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해도 포월루 기생은 5년 후에도 여전히 기적에 올라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이 일로 먹고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사천립은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승인 범한이 나중에 알아서 해결해 주겠노라 해서였다.
석청아가 비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의원을 여기에 둔다니 그건 더 웃기군요. 포월루의 여인들은 신분이 미천합니다. 그러니 그녀들을 위해 이곳까지 왕진 올 의원은 없습니다. 평소에도 의원에게 진료 한 번 받으려면 첩첩산중인데 세상에 어떤 의원이 포월루에 상주하면서까지……. 그들도 사내인데 체면 깎이는 짓을 하려 할까요?”
그러자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던 상문이 미소 지었다.
“제사 대인께서 이리 말씀하셨어. 감찰원 3처에 사질(師侄)이 많으니 그들에게 이곳 의원이 되어 달라 청하면 문제없을 거라고 말이네.”
그러자 석청아는 소리까지 내서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감찰원 3처라면 모두 벌벌 떨게 만드는 독약이나 다루는 관아 아냐? 설마 그들이 의원으로 갈아타려는 건가?’
석청아는 범한 제사가 헛생각만 하는 이상한 부류라 생각하며 비웃었다.
“의원이 있은들 무엇 합니까? 아가씨들 몸이 깨끗한데. 그러니 손님들도 성병 따위에 걸릴 걱정은 없답니다!”
사천립은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 일은…… 나도 별다른 생각을 안 해봤군.”
이게 어찌 사천립이 생각을 안 해봐서 생긴 문제겠는가. 산업화된 양산형 매춘 사업을 하려는 범한의 구상이 시대적인 문제에, 즉 남성 피임 기구의 미보급이라는 일대 난제에 부딪힌 것이었다.
“일단 마저 들어 보게.”
사천립이 두어 번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오늘부터 강제로 매춘하도록 시키는 행위도 금지이다. 만약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있을 시에는…… 모두 자네에게 책임을 물을 거야.”
사립천은 석청아가 알아서 고개를 숙일 때까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린아이를 기생으로 삼아도 안 되네.”
“중간에 중개료를 뗄 때도 규율을 지켜야 해. 이는 아가씨들의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둘 거고.”
“아가씨들에게 한 달에 사흘은 휴가를 주고 자유로이 지내게 해주게.”
* * *
‘사 큰 사장님’께서 쉼 없이 말을 쏟아 내는 통에 석청아는 어느새 질려 버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는 상문도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가 온 석청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바꾸면…… 포월루가 청루입니까, 아니면 자선을 베푸는 곳입니까?”
사천립이 그녀를 쓱 쳐다보고는 말했다.
“대인께 들었다. 자네는 원 대가가 직접 키워 낸 사람이라지. 그러니 원칙대로라면 자네부터 내보내야 했어. 하지만 자네의 미천한 신분을 봐서 속죄할 기회를 주는 거니 포월루가 청루든 자선을 베푸는 곳이든 자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그저 상문 낭자 밑에서 분수에 맞게 장사나 하면 그만. 만일 이 일이 제대로 실시되고 또 이것이 점차 천하에 보급된다면, 천하 수십만에 이르는 청루 여인들은 자네에게 은혜를 입게 되는 거야. 그러면 이것으로 자네는 요 몇 달 동안 진 빚을 갚게 되는 거고, 그때는 대인께서도 자네를 살려 주시겠지.”
이즈음 되자 사천립도 드디어 범한의 이름자를 거론했다.
석청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얼굴만 보면 당황해 어쩔 줄몰라 하고 있었다.
사실 사천립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포월루는 감찰원 1처 소속인 상문 낭자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된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 앞날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 대인의 문하생이자 떳떳한 수재인 내가, 이제 다시는 벼슬길에 오를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청루에 남아서 위아래 층을 오가며 아가씨들에게 손님 맞으라고 소리나 질러 대는 기방 주인으로 남게 됐단 말이다!’
사천립이 상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소리꾼 출신의 이 연약한 여인은 아무런 걱정 없는 사람처럼 의외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 * *
며칠 뒤 다시 처량한 가을비가 내렸다. 맑고 상쾌했던 가을날은 어느덧 춥고 비 내리는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포월루는 범한이 완전히 접수한 상태였다. 그래서 2 황자 쪽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미 어떤 일들에 착수했는데도 범한은 그저 태연하기만 했다. 요 며칠 동안 범한은 1처에 가보지도 않았거니와 신풍관으로 접당 왕만두를 먹으러 가지도 않았다. 대신 태학에 가서 젊은 교수들과 함께 자신이 북제에서 가져온 서적 정리를 했다.
빗방울들이 먹구름 위에서 다시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때다. 어느 순간 가을바람이 불어와 빗방울들을 다시 떨어지게 만들었다. 성글게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며 참으로 얄밉게도 내렸다.
이곳 넓은 대지 위에는 태학과 동문각만 들어서 있었다. 경력 원년 신정 때 몇몇 관아가 들어섰지만 그것들은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었다.
범한은 검은 우산을 들고 태학을 오가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가다가 가끔씩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한 학생들에게 답례를 해준 것이었다. 범한의 신분과 지위는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황제가 그에게 5품 봉정이라는 직무를 계속 맡도록 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태학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라 명해서였다.
스승 노릇을 하는 게 싫어 수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관직을 이용해 태학에 들러 책을 보며 비바람을 피하는 건 자발적으로 하는 중이었다.
범한이 태학에 나타난 첫째 날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범한은 근 1년 동안 태학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거니와 젊은 대인이 감찰원에서 맡고 있는 직책이 학생들에게 두려움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학생들은 1년 전보다 범한에게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한이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 주자 학생들은 그를 다시 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태학에서 범한에게 마련해 준 서재 밖. 범한은 우산을 접고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아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에서는 몇몇 태학 교수들이 장묵한이 증정해 준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차에 있던 서적은 경국에게는 미묘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황제는 이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에 태학에서도 이 책들을 감히 소홀하게 다룰 수 없어 필사와 보존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는 중이었다.
범한 대인이 들어오자 교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범한도 웃으며 답례를 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뜻을 펼치지 못한 보잘것없는 인물들이었다. 범한은 혼자서 장묵한의 책들을 유지, 보수할 수 없기에 태학정에게서 이들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데려와 요 며칠 재밌게 지내는 중이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검은 우산에서 빗물이 흘러 바닥을 적시는 가운데, 서재 내부에는 화로 두 개가 피워져 있었다. 실내에 금세 습기가 차 눅눅해지자 찝찝해진 범한은 옷깃을 느슨히 풀며 말했다.
“이렇게 습한 것도 좋지 않아요. 지금 날이 많이 추운 것도 아니니 여러 대인분들, 잠시 참고 일단 화롯불을 꺼놓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자 교수 하나가 말했다.
“서적을 보관할 때는 온도가 일정해야 합니다. 너무 추워도 안 좋지요.”
범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 않습니까. 책들은 실내에 있으니 온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습한 건 문제가 되겠네요.”
그러자 모두 범한의 말에 따라 조치를 취한 후 바로 다시 머리를 박고 하던 일에 몰두했다. 이 모든 상황은 헛된 논쟁은 지양하고 실사구시를 따르는 태국 조정의 풍격을 태학이 일관되게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북제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범한이 자기 의자로 돌아와 앉았을 때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그를 만나기를 바란다며 데리러 왔다.
288화
“대학사께서 어찌 태학까지 오셨는지요?”
범한이 조금 의외라는 듯 의자에 앉아 있는 서무 대학사를 바라보며 존경심을 담아 인사를 올렸다.
범한의 장인이 재상 자리에서 내려오고 예부 상서도 사형을 당했으니 현재 조정 문관 체계는 그야말로 난맥상이었다. 일부는 몰래 범한을 지켜보는 중이었고 일부는 동궁을 따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문관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건 그동안 쥐 죽은 듯 지내고 있던 2 황자였다. 다년간 문재(文才)를 떨쳐 명성을 얻으며 일을 꾸며 온 때문이었다.
지금 범한 앞에 있는 서무 대학사는 장묵한의 제자로 명성이 드높은 인물이다. 그러니 경력과 자질만으로도 그는 조정에서 이인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북위에서의 경력은 그가 경국에서 관료로 커나가는 데 여러 차례 발목을 잡았다. 그러던 중 경력 5년에 일어난 커다란 소란으로 서무 대학사는 음으로 양으로 가장 덕을 많이 본 사람이 되었다. 비록 태학정이란 자리는 빼앗겼지만 동문각 대학사가 춘시에 연루되어 파직되는 바람에 서무 대학사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동문각 대학사 서무는 청렴하고 고귀한 인물이었다. 그런 데다가 재상이 파면된 후 재상 자리가 공석인 상태에서 중서에 들어가 국정을 논의하게 되었으니 조정의 실질적인 핵심이 되어 재상직에 맞먹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아무리 위세가 좋다 해도 그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일개 관원에 불과했다.
물론 서무 대학사는 범한을 평범한 관원으로 취급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오늘 이렇게 범한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
“범한 제사도 차분히 태학으로 돌아왔는데 나라고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서무가 자기 아들뻘인 젊은 범한에게 농담하듯 말을 이어 갔다.
“밖에 비바람이 차게 부는데 자네같이 젊은 사람이 자기 복을 즐길 줄도 알고. 태학까지 숨어들어온 건…… 왜인가? 감찰원에서 일하고 있으면 비에 맞을 거 같아 싫어서인가?”
밖에 비바람이 차게 분다고? 서무 대학사께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범한은 이해가 안 되어 웃기만 할 뿐 어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천립이 포월루를 거두자 언빙운도 행동에 나섰다. 우선 감찰원을 통해 형부를 압박했다. 이에 형부에서는 경도부를 무시하고 곧장 도망간 죄수를 수배 및 체포하는 문서를 발행했다. 몇 가지 죄명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서 원 대가로 불리는 원몽을 쫓기 시작했다.
원몽 낭자는 숨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정왕 세자 이홍성의 비호 아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범한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수배문은 뿌려 놓았고 뒤에 꾸며 놓은 일도 있고 하니 원몽이 늦게 잡힐수록 그에게는 오히려 유리했다. 언빙운이 세운 규칙에 따라 일들을 하나씩 완수해 최종적으로 자신이 세웠던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었다.
이틀 전부터 경도에서 어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얼마 전 형부 13관아에서 잡은 청루 주인 원몽이 사실은…… 정왕 세자 이홍성의 정부(情婦)라는 내용이었다.
소문이란 놈은 원래 쉽게 퍼지기 마련. 더욱이 원몽과 이홍성은 원래부터 밀접한 관계였으니 이 뜨끈뜨끈한 소식은 그야말로 삽시간에 온 경도로 퍼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홍성의 명성은 한창 더운 날 썩은 내를 풍기는 돼지비계처럼 날이 갈수록 악취로 점철되었다.
이홍성과 2 황자의 교분이 좋다는 건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에 다른 소문도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지금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포월루의 실제 막후 주인은 2 황자이며 형부 관아에서 조사 중인 기녀 실종 사건이 황족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이다.
이들 소문은 제법 상세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원몽은 과거 유정강 유역에서 가장 잘나가던 기생이라 세자를 제외한 다른 손님을 받지 않았다. 어느 해 몇 월 며칠, 2 황자마마께서 포월루 밖에서 감찰원 제사와 길게 대화를 나누셨다. 그때 무슨 내용의 이야기를 나눈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남 백작가에서 바로 다음 날 포월루의 지분을 신비한 사씨 성의 상인에게 팔아 버렸다.’
물론 이 소문은 감찰원 8처의 작품이었다. 춘시 사건으로 주목받은 범한을 더 띄워 천하 선비들의 마음속 우상으로 자리 잡도록 만드는 중이었다. 대(大)경국의 문서를 총괄하는 곳에서 띄워 주기 작업을 진행해 나갈 때마다 오물이 수도 없이 뿌려졌다. 하지만 결과물은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다.
물론 소문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경도 백성들은 포월루의 큰 사장이 사남 백작가의 둘째 도련님인 걸 알게 되었다. 이에 사남 백작가의 명성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뜻밖에도 사남 백작가의 명성에 영향을 준 소문의 시작점이자 퍼뜨린 쪽은 사남 백작가였다. 즉 범한 제사가 몽둥이찜질로 동생을 교육했으며 상서 어르신께서 집안 예법을 엄히 적용해 가정 내 기풍을 대대적으로 바로잡았다. 그래서 둘째 도련님은 다리가 분질러져 집 안에서는 처참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백작가는 금전적 손해를 보는 것도 불사하고 청루에서 손을 뗐다는 등등의 내용이었다.
이는 한바탕 술렁여야 했던 경도 백성들을 그냥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렸고, 사람들에게 사남 백작가는 포월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했다. 더군다나 소문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들었다.
여론을 통제하는 일을 범한은 너무 잘했다. 전에 오죽 아저씨와 함께 몇천 장에 달하는 종이 전단지를 뿌려 장 공주를 황궁에서 내쫓은 전력도 있고 말이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아직 미숙한 2 황자 하나만 대적하면 되었으니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결국 경도 백성들은 실제로는 지분이 하나도 없는 2 황자와 세자 이홍성을 포월루의 막후 주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반면 범한 제사는 깨끗한 사람으로, 사남 백작가는 말 못 할 고충이 있어 그리했을 거라 생각했다.
언빙운의 다음 목표는 2 황자와 최씨 가문 간의 은전 거래였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방법은 범한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언빙운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에 끼어들거나 관여하지 않았다.
* * *
서무 대학사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제 경도부에서 포월루 안건을 접수한 사실을 자네도 알 것이네. 자네 동생의 죄가 가볍지가 않아! 악행을 저질러 놓고도 입막음하느라 사람을 죽였고 양민 처자에게 몸을 팔도록 강요했으니 오늘 심문을 시작할 걸세.”
그러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불효막심한 놈이 나온 건, 가문의 불행입니다.”
서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도부에서는 아직 사람을 색출하러 가지 않았던데 아무래도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으이. 범한 대인, 이번 소송의 쟁점은 사람이 죽은 거네. 형사 안건이니 이론의 여지가 없어. 만약 경도부에서 정말로 심문하러 나선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놀라신 일이니 결과가 좋지 않을 걸세.”
이 정도 대화만으로도 범한은 문관 우두머리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조정 문관들을 대표해 사남 백작 가문이 2 황자와 화해하고 서로 체면 깎는 일은 이제 그만하라고 말한 것이었다. 앞서 조정의 체면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들 노(老)대신들은 이번 일은 호랑이 간 싸움이니 필시 한쪽은 다치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과 2 황자는 모두 경국의 젊은 실력자들이니 이번에 세를 잃는 게 누구든 결국 손실을 입는 건 경국 조정이라고 보았다.
물론 절대 다수는 범한이 아무리 감찰원 제사씩이나 된다 할지라도 황자들과 힘겨루기를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범한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므로 대학사의 화해 권유는 사실 자신을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기에 범한은 감동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인,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께서는 2 황자마마도 이미 만나 보셨겠군요.”
서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은 북제에서 돌아온 후 계속 2 황자 파와 반목하는 중이었고 감찰원에서는 그의 신하들을 제법 많이 잡아들인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무 대학사가 화해를 권유한 건 분명 2 황자의 의견을 먼저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2 황자가 서무 대학사를 통해 공손히 각자 한 발씩 뒤로 물러서자며 의견을 전한 건 정말이지 범한으로서는 의외였다.
* * *
서무 대학사의 말에 범한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2 황자는 어릴 때 ‘돌머리’로 불렸다더니 정말 상종할 인간은 아닌 듯했다. 둘은 이미 절교한 사이에다 자신은 동생마저 이국 타향으로 보내 놓은 상태다. 게다가 장인어른은 장 공주와 2 황자의 음모 때문에 재상직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렇다면 2 황자는 적어도 무슨 해명부터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범한은 생각했다.
더군다나 감찰원 1처 첩자가 보내온 내용에 따르면 2 황자 쪽은 범사철을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2 황자 쪽에서 포월루의 비밀을 아는 흉악범 셋을 경도부 재판장에 세우기 위해 벌써 경도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러니 2 황자가 서무를 통해 말을 전한 건 단순히 범한을 잠시 진정시키기 위한 처방일 뿐이었다. 범한은 그 정도에 속아 넘어갈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공손하게 서무 대학사에게 차를 올리며 말했다.
“이번 일은 감찰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와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요. 요즘 태학에만 있었던 것도 모두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까 걱정되어서였습니다.”
서무 대학사가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주름 가득한 얼굴로 안타까워했다.
“무엇 하러 그분과 싸우는 건가? 이번에는 그냥 이겼다고 치면 그만 아닌가? 자네가 아무리 천 번 만 번을 이긴다 한들 황제 폐하께서 기뻐하시는 것만 하겠는가.”
범한은 순간 가슴이 살짝 설렜다.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기에 이 나이 많은 학사에게 조금 더 감격해서였다. 이에 범한은 다른 생각이 있었지만 온화하게 응대했다.
“대학사 대인께서 하신 말씀이니 이 후배가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경도부에서 우리 가문의 체면을 챙겨 줄 생각이라면 형부에서도 그 안건을 너무 깊이 추궁하지는 않겠군요.”
서무라는 노대신이 보기에 범한의 이번 말은 조금 성급한 면이 있었다. 관료 사회에서는 체면을 중시하는 법인데 어찌하여 일국 조정의 책임자 앞에서 대놓고 불법적인 걸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서무 대학사도 범한의 인성이 원래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환하게 미소만 지어 보이고 아무런 말 없이 창밖으로 내리는 빗물만 바라보았다.
* * *
경도부 관아로부터 3리 떨어진 어산도(御山道)라는 길에 가을비가 거칠게 쏟아지고 있었다.
포월루 기녀 실종 사건은 벌써 조사에 들어갔다. 아직 시체를 찾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경도부는 이번 사건에 연루된 범인 셋을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기녀를 죽인 세 명의 당사자가 체포되어 심판에 부쳐졌으니 이제 남은 건 자백을 받아 내는 것뿐. 그러면 사남 백작가 둘째 도령의 막후 주모자를 물어뜯을 수 있을 터였다. 이는 사남 백작가에게 심한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2 황자를 둘러싸고 있던 오물을 깨끗이 떨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포월루의 세 범인은 정말로 중요한 증인이었다. 한데 2 황자 파는 지금까지도 사남 백작가에서 집안 규율을 집행한 후 왜 이 세 사람을 직접 경도부로 데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백작가 쪽에서 대놓고 자신들의 약점을 드러낸 행동인데 말이다.
그러다 사남 백작가에서 포월루를 팔고, 원몽을 추격하기 시작하고, 검 끝을 이홍성에게 겨누자 2 황자는 모든 게 명확해졌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범한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살인자인 졸개 셋을 보냈고 정말로 화해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말이다. 이에 2 황자는 계획을 며칠 늦추기로 했다. 그리고 이 범인들을 자신이 쥐고 있는 한, 백작가 뚱보는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랬던 2 황자가 지금은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범한 이놈! 정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어 대는구나! 감히 나를 공격해? 경도에서 도는 소문이 몽땅 네놈이 퍼뜨린 줄 내 모를 줄 아느냐!’
한편 세자 이홍성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사남 백작가로 달려가 범한에게 따질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정왕이 먼저 알고 화를 내며 그에게 매질까지 하고는 정왕부 안에 가두어 버려서였다. 그런데 이는 지금 경도에 부는 비바람을 피하게 해주는 방도이기도 했다.
289화
“철저히 감시하고 그 누구도 만나게 하지 말거라. 절대 저들에게 진술을 번복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2 황자부에서 여덟 장군 중 여덟째인 범무구가 경도부에서 범인 압송을 위해 온 아속(관아 하인)들을 향해 한껏 음침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압송 과정에서 문제라도 생겼다가는 네놈들 목숨부터 바쳐야 할 것이다!”
경도부 아속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압송 임무 때문이 아니라 2 황자의 수하인 여덟째 장군 때문에 긴장한 것이었다. 어산도는 경도부로부터 겨우 3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니 의심을 받을 일이 없다면 범무구는 이들이 경도부 대감옥에 도착할 때까지 동행할 것이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을비가 음산하게 내리는 가운데 범무구는 멀리 사라져 가는 마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차는 빗속을 뚫고 가고 있었고 거리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행인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등장한 행인도 우산을 받쳐 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길을 가던 행인들이 갑자기 우산을 접더니 우산대에서 검정색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꺼내 들고 냉정하게 마차를 향해 돌진했다.
깜짝 놀란 범무구는 마차를 향해 내달렸다. 마차와 살수들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들의 행동 속도를 계산해 봤을 때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이 저들을 구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행인들이 들고 있던 예리한 쇠꼬챙이가 두부 찌르듯 순식간에 마차를 뚫고 들어가 안에 있는 세 사람을 단번에 죽여 버렸다.
쇠꼬챙이를 빼 들고 찌를 때까지 행인들의 표정이나 동작에서는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일을 마친 후에는 곧바로 우산을 받쳐 들고 대로변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 비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 * *
마차에 선혈이 흘러내리는 가운데 범무구는 서둘러 다가가 마차 가림막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얼어붙어 있던 그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상처의 흔적만 봐도 전문가의 짓이었다. 가볍게 찌르고 간 것 같은데 살릴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범무구는 저도 모르게 숨을 한차례 들이켜고는 2 황자부터 걱정하기 시작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세 사람을 이렇게 깔끔하게 죽이는 것만 해도 난이도가 대단히 높은 일인데 증인들의 호송 시기와 지점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니. 이는 곧 감찰원에서 2 황자 주변에 수많은 첩자를 심어 두었다는 뜻이다.
이번 암살은 정말 완벽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우면서도 간단하게 마무리되었다. 만약 이 장면을 일반인이 봤다면 순간 뭐가 지나갔나 보다, 하고 무시하고 넘어갈 정도로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하지만 고수인 범무구에게는 달랐다. 담담하게 이루어진 살인이었지만 그에게는 아찔함 그 자체였다.
그는 살수들의 정체를 알았다. 그러니 범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골몰할 필요도 없었다. 감찰원 6처 소속의 어둠 속에 숨어 지내는 자객들. 그들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인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범무구의 얼굴이 갈수록 하얗게 질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
‘조금 전 행인들이 죽이려던 게 나였다면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2 황자 쪽 사람들은 그동안 범한의 힘을 얕보고 있었던 걸까? 그도 그럴 것이 경국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파벌이었으니 이들은 감찰원이 어떤 식으로 무서운 기관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긴장한 범무구가 소매 속에 숨겨 둔 비수를 찾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2 황자 곁을 떠나 자기부터 살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장기를 못 둡니다. 실력이 형편없어서 대체 장기짝을 어디에 놔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범한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범인 세 사람이 살해당하는 순간, 범한은 태학에서 서무 대학사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서무 대학사는 오늘따라 조회도 일찍 끝나고 남쪽 이재민 구제와 관련된 업무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터라 때마침 여유가 생겨 범한과 장기나 두게 된 것이었다.
한데 이 나이 지긋한 선생께서는 겨우 두 판 만에 범한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고는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혜, 총명함, 민첩함이 남다른 범한이란 인재가 장기에서만큼은 그냥 풋내기라니. 이러면 이긴다고 해도 흥이 날 리 없을 터.
서무가 탄식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무얼 하든 딱 부러지게 잘하던데 어찌 장기만큼은 이리도 형편없는가?”
이어 두 사람은 요즘 조정에서의 일을 두고 몇 마디 나누었다. 범건 상서는 집에서는 정사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었다. 범한도 자신이 조회에서 다투었던 일을 감찰원에게 조사하도록 할 수 없었던 터라 그에게는 서무 대학사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듣다 보니 그의 품계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조정의 몇몇 대사에서 이상한 낌새를 발견해 내기도 했다. 대도독으로 임명되어 북방으로 간 연소을이 은전을 보내 달라며 계속해서 손을 내미는 중이었고, 남쪽에서도 소형 전투들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중이라 하니 경국은 현재 정말로 은전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범한은 순간 마음이 놓였다. 황제 폐하께서 은전을 필요로 하시는 이상, 내년에 황실 금고는 확실히 자기 수중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장 공주는 교활하게 음모를 꾸미는 데 일가견이 있으니 사업을 벌여 돈을 버는 것과 관련해 범한은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범한은 이 나이 많은 대신과 겸상할 자격이 되지 않아 공손히 배웅만 하고 곧장 몸을 돌려 책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후 장묵한 대가가 자신에게 증여해 준 장서들을 살펴보았다. 교수들이 돌아간 후에도 범한은 홀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책 한 권을 들고 무언가에 골몰한 채.
오늘 경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 세 증인이야 원래 죽을 사람들이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죽은 기생의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경도부에 사남 백작가 가문을 범인으로 지목한 고발장을 제출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범한 입장에서는 또 살인으로 누군가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단 포월루의 세 졸개는 2 황자가 지금껏 꼭꼭 숨겨 온 터였다. 그러니 그들을 죽여 제거한다 해도 2 황자는 그 사실을 황제께 고할 수 없었으므로 범한에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러므로 본디 착한 사람도 아닌 범한이 피해자 가족들을 죽이지 않는 건 그만큼 잔악한 심성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방증일 터.
사실 범한은 현재의 국면을 잘 알고 있었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봤을 때 감찰원 제사로서 자신이 지닌 자원과 권력은 2 황자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러니 이번 투쟁에서는 만약 다른 일이 터지지만 않는다면 당연히 범한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이 점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만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건 황궁에 계신 황제 폐하의 태도뿐이었다. 만약 이 개자식들끼리 장난질 치는 걸 별것 아니라고 여기신다면 범한은 이 장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범한은 사실 황제의 마음을 정확히 예측했다. 그가 봤을 때 2 황자는…… 단순히 숫돌이었다. 무딘 태자를 예리하게 갈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래 감찰원 원장이 될 작은 범 대인의 자질을 시험해 보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장래 원장인 범한의 수단과 지혜를 놓고 따져 봤을 때 2 황자는 꽤 잘 고른 대상이었다.
물론 황제 폐하는 범한이 너무 심하게 나온다 싶으면 황명만으로도 바로 멈추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번 사건 때문에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독하게 나올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대신 모두 개자식 같은 놈들이니 이런 녀석을 낳은 황제 입장에서 누군가를 더 감싸고 예뻐하기는 힘들 거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경도에 내리던 비가 그치자 범한은 아무도 모르게 태학에서 빠져나갔다. 그런 후 어느 옷가게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속에 입고 있던 ‘작업복’을 드러냈다. 그러자 비굴한 표정의 옷가게 주인이 평범해 보이는 옷을 범한에게 건넸다. 범한은 그 옷을 입은 후 비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을 가리고는 곧장 경도 거리로 사라져 버렸다.
* * *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다. 하늘에 묵직하게 떠 있던 먹구름도 햇빛에 녹아내리는 중인지 점점 얇고 평평한 모양으로 변하더니 이내 작은 덩어리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둥근 호를 그리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처럼 하늘을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어느덧 탁 트인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가을 하늘은 먹구름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한 후라 그런지 유난히 맑고 선명했다.
햇살이 경도부 관아 밖을 비추기 시작했다. 일부는 관아 안까지 파고들어 재판장 위에 걸린 편액 위의 ‘광명정대’라는 글자를 비추었다.
경도부 밖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모두 최근 들어 가장 화제였던 포월루 사건을 부윤 대인이 재판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번에 재판대에 오른 안건은 뒷배가 있는, 무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생이 등장하는, 유명한 장소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었다. 경도 백성들의 기호를 만족시키는 소재이다 보니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식후 또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때 그 사건에 대해 모르면 대화에 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마차를 모는 마부도 이 사건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하면 손님을 태우지 못할 정도였다.
범한은 행인으로 위장해 군중 속으로 파고들어 관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경도부 같은 중요한 관아에서 최근 한두 해 동안 일어난 인사이동은 모두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이에 어쩌면 이번 일을 끝으로 이번 경도 부윤도 죄를 선고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될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전 경도 부윤으로 있던 매집례는 백작가 유씨 부인 부친의 사람이라 항상 사남 백작가 편을 들어 주었다. 곽보곤 관련 검은 주먹 사건 때도 그는 많은 부분에서 범한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이후 외양간 거리에서 범한이 자객에게 공격을 받은 사건 때문에 매집례는 경도 부윤으로서 1년 감봉 처분과 함께 유임이라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다음 해 춘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여러 차례 곤란을 겪다가 결국에는 경도 부윤 자리에서 내려와 외지로 쫓겨나야 했다.
나이가 많았던 매집례는 경도를 떠난 후에도 가끔씩 사남 백작가와 서신으로 왕래를 했다. 이에 범한은 그가 과거에 경도 부윤이었으며 온갖 악행이 이루어지는 경도부라는 관아에서 기꺼이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재판장 안에서는 가난해 보이는 사람 여럿이 재판대 앞 바닥에 꿇어앉아 목이 메도록 울고 있었다. 이들은 포월루에서 죽은 기생들의 가족으로 울고불고하며 범씨 가문을 비난하고, 말끝마다 “공명정대하신 어르신, 부디 이 억울함을 풀어주소서!”라고 읍소했다.
현임 경도 부윤 전정목은 짐짓 정의의 사자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고 입술이 살며시 떨리고 있어, 피해자 가족들의 울부짖음에 마음이 동요된 듯 보였다.
그런 그가 아속들에게 속히 포월루로 가 혐의자를 잡아 오고 현장 조사를 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사남 백작가로 가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골라 하는 둘째 도령을 데려오라고 엄숙히 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원몽 등의 이름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범한은 군중 속에서 이 모든 상황을 싸늘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전정목 부윤의 눈에서 살짝 허둥대는 기색이 있음을 알아챘다. 기생 살인 사건의 범인들이 벌써 살해당한 걸 아는 눈치였다.
재판장에 있던 피해자들 가족이 욕하고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지만 범한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포월루에서 죽은 그 기생들 때문에 자신과 아우가 욕을 더 먹는다 한들 달라질 게 없어서였다. 단지 이들 가족이 진심에서 우러나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2 황자 쪽의 사주를 받아 이러는 것인지에 대해서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감찰원의 조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아직은 자신이 나설 차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도부 재판은 무미건조하게 진행되었다. 단순히 구경만 하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했겠지만 이런 연극은 이미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것이라 범한은 일찌감치 관심을 끄고 다른 데에 신경을 썼다. 범한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곧 어떤 일이 일어날 거란 추측 때문이었다.
290화
범한의 장인어른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간사한 재상 임약보. 그가 압박을 받아 조용히 자리에서 내려온 건 근본적으로는 범한이란 인물이 불쑥 나타나 황제 폐하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도화선은 포도 넝쿨 아래에서 죽은 오백안이었다. 그의 죽음 후 산동로의 팽정생이 오씨 가문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겠다며 오백안의 아들을 괴롭혀 죽였고, 그 일로 오백안 미망인은 경도로 와 고소장을 낼 준비를 한다. 그런데 도중에 재상가 사람에게 살해당할 뻔한 걸 우연히 2 황자와 이홍성이 구해 주었다. 그러니 범한으로서는 오늘 2 황자가 이곳에 나타날지 궁금하던 터였다.
장인어른이 재상 자리에서 내려온 것과 관련해 사실 범한은 원한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2 황자가 어떤 수를 썼는지만 기억해 두었을 뿐이다. 자유자재로 음모를 꾸미는 고수라면 대개 자신이 예전에 쓴 방법을 절대 반복하지 않는다. 하지만 범한은 2 황자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상대방이 의자에 웅크려 앉아 심계가 깊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도 범한은 요 며칠 동안 2 황자 주변을 파헤치며 결국에는 그가 젊은이다운 치기와 한껏 뒤틀린 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도록 만들어 버렸다.
감찰원이 지닌 무서운 실력을 제외했을 때 범한이 2 황자보다 우위를 점하는 건 바로 이런 점이었다. 이번 생에서 연령만 놓고 따졌을 때 그는 2 황자보다 어렸지만 실질적인 경험과 경력 면에서는 2 황자보다 훨씬 많고 다양했던 것이다.
* * *
얼마 후 경도부 일부 아속들이 포월루의 현재 명목상 운영 책임자인 석청아를 데려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포월루에 남아 호수 근처에서 살인의 흔적을 찾아내려 했다. 한데 살인 사건의 직접적인 증인을 확보하지 못한 탓에 그들은 시체가 묻힌 곳이 어딘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범한은 푸른색 바닥 돌 위에 꿇어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그녀가 어떻게 대응할지 예측해 보았다. 범한이 압박을 넣어 놓은 게 있어 제 본분을 지키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는 마지못해 억지로 따르는 측면이 조금 있었다.
포월루에 묻혀 있던 시신은 감찰원이 사천립과 공조해 몰래 거두어 경도 외곽의 양지바른 곳에 안장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번 사건이 모두 해결되면 그녀들의 진짜 가족에게 알려 줄 예정이었다.
재판장에서 석청아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위쪽에 앉은 어르신이 질문을 하나 하면 한참 머뭇거리다가 하나씩 대답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번 사건에 대해 거울처럼 훤히 알고 있는 기분이었다. 경도부에 오기 전 사천립 선생이 해도 되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미리 일러 주어서였다.
다행히 지금의 포월루 주인은 그녀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못된 짓에 끌어들이지도 않았거니와 백작가 둘째 도련님에 대해 숨기라고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실대로만 말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경도 부윤도 고문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포월루의 원래 사장의 이름과 신분에 대해 거짓 없이 대답해 주어서였다.
그러다 기생 살인 사건과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석청아는 누구의 짓인지 곧바로 고해 버렸다. 바로 형부에서 수배 중인 원 대가, 즉 원몽이 시켜서 한 짓이며 사장은 이 일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살인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답했다.
경도 부윤은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여인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 조금 이상했다. 사남 백작가 둘째 도령이 점점 무고한 것처럼 상황이 변해 가는 게 아닌가. 게다가 2 황자가 일찌감치 언질해 준 바에 따르면 이번 사건에는 절대 원 대가가 연루되어선 안 되었다.
이에 그가 흙빛이 된 얼굴로 막대를 앞으로 내던지며 석청아를 매섭게 꾸짖었다.
“네 이년, 참으로 교활하구나. 저년에게 형을 가하라!”
그러자 경도부의 아속들이 부지깽이를 들고 와 석청아에게 고문을 가했다. 석청아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냈다. 백작가에서 온 누군가가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또한 그녀로서는 3 황자라는 비빌 언덕이 이미 사라졌으니 경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제 사남 백작가에 기대야 했고 지금부터는 한 길만 파야 했다.
말없이 고통을 참아 내기는 했지만 비명까지 지르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고통에 겨운 원망이 경도부 관아에 떠돌았다. 구경 중인 경도 백성들이 듣기에도 너무나도 끔찍한 소리였다.
밖에서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범한은 독하게 참아 내는 모습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문이 한차례 행해졌지만 석청아는 앞서 한 말을 고수했다. 이에 경도 부윤이 다시 고문을 가하려던 찰나, 범사철을 데리러 사남 백작가로 갔던 관차들이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패색 짙은 얼굴로 보고하러 돌아왔다.
관차들은 사남 백작가에서 범사철을 데려오기 위해 처음부터 경도부의 패를 들이밀고 강제 수색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 범사철은 이미 창주 경계까지 가 있을 터. 어쩌면 연아를 품에 안고 있으면서 고국을 떠나는 안타까움에 탄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어디 수색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었을까. 이에 몇 가지 물어보려던 찰나, 관차들은 유씨 부인이 대동하고 나온 집안 장정들에게 빗자루로 얻어맞고 밖으로 내쫓기기나 했다.
부하들이 수모를 당하고 왔는데도 경도 부윤은 화를 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속으로는 오히려 기뻐하고 있어서였다. 그래도 결국에는 여봐란듯이 소리 높여 외쳤다.
“권문세가라고 이리도 방자하게 굴다니! 감히 죄인을 숨기기나 하고······.”
그 순간 경도 부윤에게 어떤 묘안이 떠올랐다. 내일 이 일과 관련해 상소문을 올려 사남 백작가가 어찌 나오는지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범한은 이 모든 걸 냉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새어머니가 집에서 저들을 몰아냈으므로 조바심을 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는 새어머니가 어떤 수를 쓸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경박하게 처신했으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언빙운 공자가 짜놓은 음모를 신뢰하고 있었다. 과거 언빙운은 북제 조정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그마한 경도부 정도에서 처리하는 형사 사건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도부 밖에 있던 구경꾼들 중 일부가 무리를 이루더니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무리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범한이 처음 경도부에 갈 때 함께 들어간 사람이었다. 바로 사남 백작가의 식객인 정 선생으로 경도부에서는 꽤 이름난 문필가였다.
정 선생이란 자는 유명했으므로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었다. 이에 재판대에 있는 부윤 어르신을 향해 잠시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인, 참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 사남 백작가가 집안을 엄히 다스리는 건 경도 백성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어찌 죄인을 은닉하겠습니까. 또한 둘째 도련님이 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대인께서는 이리도 세세히 심문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사남 백작가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두둔하는 곳이 아닙니다.”
부윤 전정목도 이자가 경도에서도 유명한 문장가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소송대리인인 송세인은 다루기 까다로운 소송 거간꾼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사남 백작가에서 이런 사람을 보내 대응하는 걸 보면 분명 정면 돌파할 생각으로 왔을 터. 이에 부윤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꾸짖었다.
“사람을 두둔하지 않는다 해놓고 어찌하여 범인은 속히 데려오지 않는 것이냐!”
추운 가을날인데도 송세인은 부채를 내저으며 조소를 날렸다.
“범인 체포는 본디 경도부가 해야 하는 일이거늘, 대체 언제부터 다른 이들이 해주었단 말입니까?”
그러자 전정목이 싸늘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대들 집안의 둘째 도령이 저지른 일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을 내놓아야 할 것 아니냐. 내놓지 않겠다는 건 설마 죄인을 숨겨 주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 경국 법률에 상세히 쓰여 있는 일이니 송세인은 그 입 다물라!”
하나 송세인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경국 법률에 따른다면 반드시 범인의 가문에서 먼저 사람을 넘겨야 하지요. 하오나 대인, 사남 백작가의 둘째 도련님은 여드레 전에 실종되었습니다. 대체 어디로 가서 찾으면 좋을까요?”
전정목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웃으며 맞받아쳤다.
“하하하하, 참으로 황당한 핑계로군!”
송세인이 근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
“부윤 대인의 가르침, 감사합니다. 하오나 핑계가 아닙니다. 수일 전, 사남 백작가에서 이미 경도부에 제보를 했습니다. 둘째 도련님이 은밀하게 저지른 모든 불법적인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오나 대인께서는 관심도 갖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당시 둘째 도련님이 자신이 저지른 죄가 두려워 도피했으니 경도부에서 서둘러 사람을 보내 잡아들여 안건을 종결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그가 다시 부채질을 하며 침통하게 말했다.
“범건 상서와 범한 대인은 대의를 위해 자식과 형제를 봐주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범죄자를 은닉했다 하겠습니까?”
전정목이 화를 참지 못하고 경당목(법정에서 심리 중 경고할 목적으로 탁자를 칠 때 쓰는 나무토막)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꾸짖었다.
“대체 언제 사남 백작가에서 제보를 했다는 것이냐! 그리고 대체 언제 범사철이 실종되었다 알렸다는 것이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본 부윤이 몰랐겠느냐? 분탕질해서 벗어날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말거라!”
“있는지 없는지는······ 번거로우시겠지만 대인, 당일 사건 기록을 살펴보시면 금세 아실 것입니다.”
송세인이 웃는 척만 하며 두 손을 가슴까지 모으고 인사를 했다.
전정목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노련하게 관차를 시켜 그날 사건 기록을 찾아보게 하고는 핑계를 대 잠시 퇴청했다. 그런 후 사부와 함께 서재로 가 최근 며칠간의 사건 기록을 상세히 살펴보며 사남 백작가가 보내온 제보가 있는지 찾았다. 그러다 백작가의 둘째 도령이 벌을 받게 된 게 두려워 도망갔다는 내용의 기록이 나오자 너무 화가 나 하마터면 뒷덜미를 잡을 뻔했다.
있을 리 없는데 대체 어디에서 툭 튀어나왔단 말인가!
경도부 관아는 매우 삼엄했다. 그래서 감찰원이 손을 쓴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대체······ 저들······ 사남 백작가에서는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어떻게 귀신같이 아무도 모르게 이런 일을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소윤 짓인지 주부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경도부 안에 범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진정목의 낯빛이 흙빛이 되어 버렸다.
전정목이 재판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처음에 보였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사건 관련 기록은 정말로 있었다. 더군다나 그것을 조사할 때 경도부 소윤과 주부도 모두 곁에 있었으니 사남 백작가에서 보내온 제보를 직접 없애 버리고 싶어도 그 둘까지 속이고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범사철의 죄명이 정해진다면 공은 제일 먼저 제보한 사남 백작가에 돌아가게 될 터. 또한 둘째 도령이 죄를 받을까 두려워 도피한 일을 가지고 사남 백작가에게 일부러 숨겼다고 죄를 물을 수도 없고 말이다. 이는 곧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백작가를 구정물 속에 빠뜨리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최종 결정을 내리는 황제 폐하께서도 엄중히 벌을 묻지 않으실 거고, 기껏해야 작위 해제와 감봉 처분 정도만 내리실 테지. 하지만 그 정도는 2 황자마마께서 원하신 결과가 아니었다.
경도 부윤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에 백작가에서 온 어마어마한 소송대리인들과 하기 싫은 힘겨루기를 하며 맡은 악역을 계속 수행해 나갔다.
291화
경도부에서 잠시 휴정을 했다. 범한이 봤을 때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건 대충 다 나온 상태였고 지금부터 범사철은 도망자 신세였다. 그러니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대권을 장악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생의 죄를 벗겨 줄 방법을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사남 백작가는 그 죄목에서 가볍게 몸을 빼고 자유를 되찾게 될 것이었다.
지금 포월루의 명의상 주인은 사천립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건 발생 후 포월루를 인수했으므로 경도부에서는 막무가내로 그를 불러다가 죄를 물을 수 없었다.
범한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구경꾼과 함께 이번 안건을 대해 몇 마디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들의 가족이 아속들의 인도를 받아 관아 뒤쪽으로 가자 범한의 시선도 그들에게 향했다. 범한은 입꼬리를 쓱 올리더니 이야기를 나누던 이와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거리 한쪽 구석, 빗방울이 떨어지는 처마 밑에 있는 서생처럼 보이는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죽은 기생들의 가족은 슬프고 괴로운 표정으로 거리 한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이 구경꾼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할 때쯤, 누군가가 갑자기 품에서 흉기를 빼 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복면을 하고 나타난 네다섯의 사내들은 단도를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칼춤을 추며 피해자들 가족을 베어 나갔다.
거리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구경꾼들도 놀라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범한은 홰나무 아래에 서서 실눈을 뜨고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다.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2 황자의 실력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같은 수를 쓰다니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번에 재상에게 성공적으로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었던 건 우연히 황제 폐하의 뜻과 일치해서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황제 폐하께서는 살육은 원치 않으셨다. 그런데도 오늘도 거리에서 급습해 살인하는 똑같은 수단을 쓰다니, 황제 폐하께서 비웃으실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나 보다.
한데 범한은 피해자들 가족의 목숨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짐작대로 길목에서,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한 무리의 행인들이 불쑥 나타나 자객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들은 신속하게 피해자 가족들에게 다가가 자신들의 몸으로 그들을 보호하며 자객에게 맞섰다.
그런데 또 행인이라니. 이들은 범한이 매우 좋아하는 그 행인들이었다.
행인들은 칼이 아닌 감찰원에서 특별히 준비한 꼬챙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세 번 막아 내는 것으로 자객들이 휘두르는 칼 공격을 무력화했다. 자객들에게 바짝 붙어 꼬챙이로 압박해 나가는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간결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그래서 어떨 때는 오죽 대인의 몸놀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범한이 눈썹을 씰룩였다. 6처의 진짜 책임자인 그림자가 오죽의 추종자란 게 너무나도 확연해서였다.
2 황자가 보낸 자객들도 실력은 좋았다. 그런데도 굳이 비교하자면 6처에서 온 이들의 실력이 조금 더 뛰어났다. 그래서 잠시 싸웠을 뿐인데도 금세 궤멸 직전까지 갈 수 있었다. 자객들은 무의식적으로 도주하려 했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행인들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계속 공격하는 통에 도무지 도망갈 수 없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몇 차례 울렸다.
그러다 느닷없이 시작된 공격과 반격이 순간 멈추었다. 복면을 쓰고 있던 자객들은 몸에 끔찍한 자상을 입어 피를 흘리며 처참한 몰골로 길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범한이 몰래 그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언 공자의 계획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자객 중 생존자가 있든 없든 범한으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빤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저들이 도주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자객들 몸에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만한 감찰원의 비밀스러운 표식이 남아 있어서였다.
이번 자객들과의 일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범한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황자들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무인들이 자객으로 나선 거였지만, 그래도 6처 전문가들이 직접 나섰으니 처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거리 한 귀퉁이에 있는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서생이 갑자기 날아와 이 상황에 개입했다. 그가 검을 한차례 휘두르자 빛이 번쩍하더니 포악하게 정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거리를 적시고 있던 빗물이 일순간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이내 화살이 되어 그 자리에 있던 어느 피해자 가족의 몸으로 직행했다.
문약해 보이는 서생의 손에서 강하고 사나운 검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자 행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6처 검수들은 순간 그것을 막아 내지 못했다. 강한 기운이 칼날이 된 빗물과 함께 날아오자 검수들은 몸만 살짝 틀어 꼬챙이를 날렸다. 고수가 다시 검을 휘두르는 속도만이라도 늦추기 위해서였다.
척척, 하는 소리가 수도 없이 울리며 꼬챙이가 서생의 도포를 뚫고 나갔다. 한데 도포만 너덜너덜하게 찢겼을 뿐 검의 위력은 저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소리와 함께 평범하게 생긴 장검이 어느 피해자 가족의 몸을 꿰뚫었다.
* * *
사필안. 2 황자가 데리고 있는 여덟 가문의 장수 중 가장 오만한 자였다. 일찍이 일격으로 범한을 찍어 누를 수 있다고 말했던, 소위 ‘출검필안(出劒必安. 검을 꺼내면 이긴다)’이라 불리는 사필안이었다.
범한은 처마 밑 서생이 사필안이란 걸 첫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신분과 실력을 갖춘 자가 체면 불고하고 죽은 기생들의 가족에게까지 손을 쓰는 건 생각하지도 못한 전개였다. 사필안이 나선 이상 대세는 결정된 거였고, 그가 피해자들의 가족을 죽여 버린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범한은 사필안이 명령을 받아 현장을 살펴보러 온 줄로만 알았다. 저 오만한 성미를 지닌 자가 직접 나서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터라 범한도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필안은 사실 검을 꺼내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6처에서 검수들이 직접 나왔으니 범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던 계획은 이미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나서기는 했지만 항상 암흑을 달고 다니는 6처 검수들을 벌건 대낮에 경도 거리에서 몰살시킬 자신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검을 빼 들고 휘둘렀다. 자신의 마음이 현 상황을 용납하지 않아서였다. 수하들은 행인들에게 찔려 고꾸라져 나가고, 죽이려던 이들은 공포에 질려 있기는 해도 멀쩡히 살아 있고. 완전히 실패한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분노가 일었다. 그러자 결국에는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검을 빼 들었다.
피해자들 가족 중 하나만이라도 죽여야 했다. 그래야 범한과 싸우는 중인 2 황자마마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지켜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은 기생들의 가족 중 하나만 죽어도 범한이 해명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 할 테니.
검자루를 가볍게 쥐고 있던 사필안의 오른손에서 익숙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검 끝이 어느 낯선 자의 몸에 꽂혀 무고한 영혼을 앗아 간 것이었다. 그는 살짝 만족스러운 듯한, 심지어는 거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검을 거두어들이며 죽은 자의 가슴팍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이내 경직되어 버렸다.
사필안은 검을 뽑은 이상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자였다. 검은 피해자들 가족 중 한 사람의 몸에 제대로 꽂혔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검 끝이 파고든 지점이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한 치가량 옆으로 쏠려 있었다. 겨우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의 오차로 그가 쥐고 있던 검이 상대방을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이에 두 번째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마저도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앞에 있던 살해 대상이 초췌한 모습으로 옆으로 쓰러지는가 싶더니 무슨 연(鳶)이라도 된 듯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버렸다.
대체 어떤 힘인지 모르겠지만 물리 법칙에 반해 허공으로 사람을 끌어당긴 것만 같았다.
* * *
사필안은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거두어들여 장검으로 가슴팍을 보호했다. 그리고 순간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날아드는 범한의 발길질을 막아 냈다.
“범한!”
뛰어난 고수인 그가 단박에 상대의 기운을 감지해 낸 것이었다. 이에 사필안은 순간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온몸의 힘을 검에 모았다. 그리고 범한이 저지할 수 없도록 검을 똑바로 겨누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행인으로 위장한 6처 소속 검수들도 범한 제사가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혼비백산한 피해자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
범한은 조금 전 발길질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는 했어도 공격이 순식간에 들어오자 비수까지 꺼내 들 겨를은 없었다. 이에 자신에게 날아드는 살벌한 빛을 난폭하게 뿜어내는 기운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속눈썹이 잘려 나간 것만 같았다.
범한이 손을 들었다. 용수철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세 번 울리더니 맹독인 견혈봉후(見血封喉. 유파스 나무) 나무의 독액이 발린 쇠뇌의 화살이 칼바람을 가르고 사필안의 얼굴로 향했다.
사필안의 검 끝과 범한의 암기용 쇠뇌의 화살은 모두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두 사람에게는 얼굴 가죽 두께를 가지고 겨루는 취미 따위는 없었다. 이에 범한은 소리 없이, 심지어는 냉담해 보이는 표정으로 몸을 비틀었다. 자신의 강한 신체 통제 능력을 이용해 싸늘하게 파고드는 검이 자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도록 했다. 그런 후 사필안의 명치를 향해 매섭게 주먹을 날렸다.
패도의 정기를 가득 담은 주먹이 번개처럼 공중을 갈랐다. 제대로 맞았다면 분명 사필안의 오장육부는 파열되었을 것이다.
한편 사필안은 필사적으로 왼쪽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그러자 도포 자락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가느다란 두 개의 쇠뇌의 화살을 막았다. 그 순간 사필안은 검을 휘둘러 범한의 목숨까지 빼앗아 버리려 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범한은 가공할 만한 주먹을 사필안에게 날리고 있었다.
사필안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팔을 가로로 휘두르며 활짝 편 왼손바닥으로 범한의 주먹을 받아쳤다.
뻐걱!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사필안의 손목뼈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범한!”
분노에 찬 사필안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범한이 내뿜은 정기에 겁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주먹과 손이 서로 교차할 때 아주 연한 황색의 연기가 손 사이에서 피어올라서였다. 범한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독 연기를 피우는 수법까지 동원한 것이었다.
독 연기는 순간 사필안의 체내로 들어가 그의 검과 주먹을 무력화했다. 이상한 패도의 정기가 담긴 주먹을 성급하게 맞받아치려던 사필안은 결국 허점이 노출되어 쇠뇌의 화살 세 발 중 한 발을 어깨를 맞고 말았다.
그리고 독에 중독되기까지 했다.
* * *
“범한!”
사필안이 세 번째로 범한의 이름을 외쳤다. 분노에 미쳐 날뛰며 저주하는 듯했다. 그동안 상대의 실력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사필안은 체내 정기를 강제로 운기해 검을 들어 범한의 목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직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민가 지붕 위로 착지하려 했다. 음험하기 짝이 없는 강한 고수에게서 일단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이 어디 그냥 도망가게 놔둘 사람이던가.
회색의 그림자가 휘릭, 지나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공중에 있는 사필안에게 바짝 다가간 범한이 오른손을 뻗어 상대방의 복사뼈 부위를 바로 내리찍어 버렸다. 이번 손날 공격은 대벽관을 그의 잔재주로 전환해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적이 가장 방심하고 있는 곳을 공격해 극심한 손상을 준 것이었다.
사필안이 신음했다. 복사뼈 부위가 으스러진 것 같았고, 참을 수 없는 통증이 하반신 전체로 퍼져 도망가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사필안의 속도가 느려지자 범한은 말없이 그를 향해 손을 뻗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수없이 많은 공격을 퍼부었다. 두 사람이 다시 빗물이 자작한 길 위로 내려왔을 때는 모호한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하나는 회색, 다른 하나는 검은색으로 한데 뒤엉켜 있었다.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사필안이 범한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발길질과 주먹질을 당하는 소리였다. 사필안은 범한의 공격이 너무 빨라 자신의 정기를 제대로 발산하지 못했다. 이에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기본기만으로 버텼다. 검 끝이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자 절망감이 찾아왔다.
몸놀림이 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 있지?!
사필안이 날카롭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재빨리 팔목을 털어 무수히 많은 빗방울처럼 검을 움직여 자신의 온몸을 방어했다. 그러자 결국 범한도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사필안이 검으로 땅을 짚었다. 떨리는 손으로 물이 고인 곳에 칼끝을 꽂아 넣었기 때문인지 수면 위로 이상한 물결이 계속해서 일고 있었다.
292화
사필안은 멀지 않은 곳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있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몸이 너무나도 아팠다. 경맥에 무수히 많은 작은 칼날이 들어와 제 몸을 베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범한의 공격 때문에 내부 장기들이 완전히 손상된 것이었다. 그리고 독 역시 점점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오른쪽 다리도 버틸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사필안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적을 보고 있다는 건 이미 투지를 잃어버렸단 의미였다.
“구······.”
자신은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범한의 적수가 될 정도도 아니었다. 이렇듯 범한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사필안의 눈에 망연자실함이 살짝 스치더니 이내 두려움이 차올랐다. 방금 ‘구’ 자, 한 자만 말한 건 내상이 재발해 각혈하느라 뒤의 두 글자를 먹어 버린 탓이었다.
범한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다시 망연자실함이 스쳤다. 포월루 밖 찻집에서 혼자서도 범한을 상대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었는데.
범한보다 실력이 위라고 말했던 이유는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범한이 작년에 외양간 거리에서 정거수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사필안은 믿지 않았다. 귀한 집안의 자제가 무공 훈련에 집중했거나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살인 기술을 연마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이 부잣집 공자는 벌써 9등급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다.
“······9등급!”
사필안은 계속 기침을 해대면서도 가까스로 이 세 글자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오른손 엄지를 살며시 움직여 검 자루 위를 눌렀다.
* * *
범한이 발끝으로 살짝 땅을 찍었다. 그러자 몸이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더니 어느새 사필안 앞에 가 있었다. 검은색의 차가운 빛이 스쳤다. 자신이 가장 잘 쓰는 비수로 사필안이 자살용으로 쓰려던 장도를 잘라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필안의 관자놀이 부분을 무정하고 매섭게 한 대 내리쳤다. 그러고는 연기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전혀 손을 쓰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사필안은 지저분해진 빗길 위에서 처참하게 기절해 버렸다. 물방울을 튀기며 바닥으로 엎어진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범한이 패배자에게 기분을 토로하게 한다거나 최후의 포즈를 취할 기회를 줄 리 없었다.
* * *
경도부의 아속들이 겁을 먹고 잔뜩 움츠러든 채 서둘러 다가왔다. 경도 부윤도 소식을 듣고는 놀란 모습으로 서둘러 달려왔다. 2 황자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다니 그는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짜 감정은 감추고 겉으로는 미소 지은 얼굴로 범한 제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살인으로 입막음하려 했습니다. 경도부에서 아우 관련 사건을 다룬다기에 왔다가······ 우연히 마주쳤지요.”
범한은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오른손을 계속해서 살며시 떨고 있었다.
“다행히 솜씨 좋은 부하를 대동하고 나온 덕분에 그들의 음모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제멋대로 공격에 가담한 사필안은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한편 이로써 범한은 여덟 가문 장군 중 한 사람을 얻게 된 것이었기에 의외의 수확을 거둬들인 셈이었다. 2 황자가 데리고 있는 여덟 가문 장군들은 경도에서 비밀스러운 존재는 아니었다. 하물며 오늘 많은 사람이 사필안이 살인하려던 걸 똑똑히 보았으니 8처로서는 소문 공작을 제대로 할 여건이 마련된 셈이었다.
이에 범한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필안에게 정말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경도부 아속들이 경계에 들어갔으니 이제 범한은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사필안의 신분을 굳이 범한이 알려 줄 필요도 없었다. 이에 아랫사람들이 대신 일을 맡아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대인께 넘겨 드리겠습니다.”
범한이 웃는 듯 아닌 듯 한 얼굴로 경도 부윤을 바라보았다.
“대단히 음험하고 독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대인, 지킬 때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범한은 사필안을 감찰원으로 잡아 갈 생각은 없었다. 그가 이번 살인 기도 사건을 2 황자가 계획했다고 털어놓는다고 해도 그 말을 감찰원에서 한다면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범한이 이번에 기절한 사필안을 경도부로 넘겨준 건 다른 음흉한 의도가 있을 터. 산 사람을 넘겨주었는데 나중에 그가 죽기라도 한다면 일이 더 재밌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경도 부윤은 3품이나 되는 높은 벼슬아치였다. 그러니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감찰원은 그를 마음대로 조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렵사리 상대방을 사지로 몰아붙일 기회가 찾아온 것이니 범한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여인네처럼 연약한 생각을 가지고 일을 처리한다며 언 공자에게 욕을 얻어먹을 게 뻔했다.
* * *
경도에는 다시 갠 날이 찾아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경도부 밖에서 일어난 일은 어김없이 식탁 위에서 반찬처럼 곁들여지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2 황자와 범한의 싸움을 두고 사정을 아는 권문귀족들은 벌써 후자가 이겼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만약 황제 폐하께서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고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신다면 말이다.
행인으로 변장했던 부하들이 범한을 호위하며 백작가로 향했다. 그중 한 사람은 범한의 오른손이 살며시 떨린다는 걸 발견했지만 아까 싸우다가 다친 거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갔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네, 그냥 흥분했을 뿐. 몇 달 만에 이런 일을 즐기게 되어서랄까.”
이건 진심이었다. 사필안과 목숨을 건 일격을 벌이는 동안 범한은 정신적으로 흥분해 있었다. 이런 유의 공격을 태생적으로 즐기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때는 언빙운이 감찰원 주인으로 있고, 자신은 언빙운 대인을 위해 일하는 게 비교적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른손의 떨림은 단순한 흥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범한은 계속해서 팔을 가볍게 주물렀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햇살 같았던 마음은 희뿌연 안개로 뒤덮여 버렸다.
그동안 감찰원은 범한 제사의 영명한 지도와 언빙운 공자의 구체적인 지휘 아래, 심지어 치아까지 완벽 무장을 하고는 2 황자 파를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어 버렸다. 관리 개개인에서부터 그들의 경제적인 이익에 이르기까지 사나운 기세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해 갔다. 감찰원은 포월루 사건과 경도부 밖에서 일어난 자객 사건을 구실 삼아 온 조정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상업계 안팎도 대대적으로 수색해, 상대방의 영혼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그들의 음모와 계획을 조금씩 들추며 한 걸음씩 압박해 나갔다.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예상한 대로 여덟 가문 장군 중 하나인 사필안이 경도부 대감옥에서 급사한 것이었다. 이는 감찰원에게는 좋은 구실이었다. 감찰원에서는 연석회의를 통해 황궁에 세 통의 상주문을 올렸고, 이에 경도 부윤 전정목은 정직 처분이 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2 황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놓은 어리석은 수 때문에 감찰원이 쳐놓은 계획에 하나씩 걸려들었다. 그리고 이로써 그가 경도에서 가장 의지했던 것들이 곧바로 제거되어 갔다.
한편 언빙운은 다른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신양이 경도에 지원해 주던 몇 곳을 성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최씨 가문을 압박해 그들을 조바심 내게 했다.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으나 은전 손실을 입은 최씨 가문은 강남 본가에서 억지로 자금까지 끌어왔다. 그리고 그 돈으로 심중의 사망으로 끊어진 거래 노선을 억지로 열었다. 물론 2 황자에게 들어가던 은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론은 2 황자 파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2 황자 왕부에 전략을 짜는 고수가 있었지만 감찰원의 행동력과 전문성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8처 소속의 선전대 대원들과 비교해, 왕부에서 규모가 큰 찻집과 술집에 심어 놓은 일꾼들은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데 역량이 떨어졌다. 그렇기에 감찰원이 모질게 손을 쓰는 데도 경도 백성들은 은근히 사남 백작가 편을 들었다.
이홍성과 관련해서는······ 이 불쌍한 정왕 세자의 명성은 정말 역겨울 정도로 구릿해져 있었다. 세상에 원몽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경도 사람들이라면 내년 봄에 이홍성이 사남 백작가 큰 아가씨와 혼인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열넷밖에 되지 않은 어린 범사철을 꼬드겨 기생집을 열게 하더니 기생을 살해했다는 똥물까지 뒤집어씌우다니!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어린 처남을 이용해 먹는 매부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2 황자 파는 순식간에 관료 사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감찰원에게 격퇴되어 기세가 꺾이고 반격할 여력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에 그들이 유일하게 반격할 수 있는 도구는 장 공주가 통제하고 있는 도찰원뿐이었다. 그런데 어사들도 헛심만 쓰고 말았다. 감찰원이 무슨 행동을 하든 경국 법률에 따라 처리하는 바람에 그 어떤 트집거리도 찾을 수 없어서였다.
비 오는 날 밤에 일어난 포월루 증인 살해 사건 역시 기이한 사건으로 남았다. 감찰원의 짓이라고 추측만 할 뿐, 관련 증거가 전혀 없어서였다.
이 암살 사건과 관련해 감찰원이 취한 태도는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했다.
“그 세 사람은 범한 제사 가족이 직접 경도부 관아로 보낸 것인데 어떻게 경도부 밖에서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2 황자와 교분이 있는 경도 부윤 전정목에게 가장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의 성과에 범한은 대단히 만족했다. 어찌 되었든 황궁에서 정한 최저선인, 2 황자를 경도에서 쫓아내지 않을 정도에서 끝내 버렸다. 그리고 둘째의 힘은 더 이상 자신을 위협할 수 없을 지경까지만 약화시켜 놓았다.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심어 주되, 사남 백작가를 향해 원망의 말만 뱉을 수 있는 지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감찰원이 동원할 수 있는 가공할 위력 중 아주 일부만 보여 준 것이었다.
이번 행동이 이렇게나 순조로울 수 있었던 건 진평평 원장 대인이 자신의 모든 권한을 범한에게 위임해 주어서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범한의 행동이었다.
범한은 북제 상경에 있을 때부터 계획하기 시작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부터 이미 언빙운과 함께 오랫동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당시 범한은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문에 2 황자와 장 공주의 관계를 언급해 놓았었다. 한데 황제는 그것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포월루 일로 황제가 노하자 범한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계획을 앞당겨 실행했다.
그리고 이왕 시작한 거 대충 얼버무릴 수는 없는 법. 감찰원을 가지고도 이기지 못했다면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도 화가 나 펄쩍 뛰며 어린놈이 자기 얼굴에 먹칠을 했다고 욕했을 게 뻔했다.
* * *
황궁 쪽은 줄곧 은밀하게 고요함을 유지했다. 2 황자의 생모인 숙 귀비, 동궁인 태자, 황후를 포함한 모든 귀인이 눈과 귀가 먼 것처럼 조심하며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이게 황제 폐하의 뜻임을 모두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황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황궁에서 흘러나온 소식에 따르면 황제는 강남에서 전통극 배우들을 데려다가 황궁 안에서 그들의 노래와 연기를 감상했다 한다. 가을로 접어든 후 경도에는 줄곧 비바람이 몰아쳤건만 경국 황제 폐하는 여유롭게 황태후 마마와 함께 하루 종일 연극 감상을 하셨다고. 그리고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으나 몇 광주리나 되는 동전을 상으로 하사하셨고, 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 편히 즐겁게 즐기셨다고 한다.
그러자 모두 현 국면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다.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는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괘념치 않으신다. 그리고 한 젊은이가 경도에서 벌인 이런저런 일들은 강남의 유명 배우들이 연기한 연극만도 못해 굽어살필 생각도 없으시다.
모든 게 명확해지자 줄곧 중립을 유지했던 조정 관원들도 그 똑똑한 머리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황제 폐하의 범한을 향한 총애가 그 정도였다니! 범한이 대적한 이가 누구던가? 바로 황제 폐하의 친아드님이신 2 황자마마 아닌가! 그런데도 황제 폐하께서 이 정도로 중립을 유지하고 계신다는 건······ 이건, 이거야말로 정말로 어마어마한 총애를 받고 있다는 뜻 아닌가?’
그래도 2 황자에게 밉보여서는 안 되기에 그들은 더 열심히 가만히 있었다. 벽에 딱 붙어 발은 진흙 속에 박아 둔 채 고집스레 잡초 정신을 발휘했다. 좌우로 흔들릴지언정 특별히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2 황자는 계속 찬 바람이나 들이켜야만 했다. 몇 년 동안 찍소리도 내지 않고 세력을 불려왔건만 애당초 부황께서는 전부 다 보고 계셨던 거다. 이에 2 황자는 문득 의심이 들었다.
‘설마······ 범한이 경도로 돌아오자마자 날 겨눈 게, 전부 다 황궁으로부터 몰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인 건가?’
한데 2 황자도 음험하고 악랄한 사람이었다. 현 국면에서 자신이 더 물러나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황자로서의 체면을 내려놓고 다시금 범한과 손을 잡기를 희망한다 해도 상대방이 그에 응해 주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부황의 애매한 태도 때문에도 그는 자신이 범한을 꺾지 못한다면 도리어 범한에게 자신이 가루가 될 거란 걸 알게 되었다. 바로 찻집에서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강력한 압박 때문에 2 황자는 다시금 억지로 공격에 나섰다. 도찰원 어사들이 다시 범한을 탄핵했다. 이번에는 정말 실질적인 죄명에 증거도 확실한 것으로 골라잡았다. 이 증거들은 범사철이 저지른 일들과 어떻게든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어사들은 호부 상서 범건도 함께 탄핵해 버렸다.
상소문이 문하성으로 전달되어 흡사 눈송이가 내려앉은 듯 소복하게 쌓였다. 그런 후 형부와 대리사를 건너뛰고 직접 범씨 부자에게 전달되어 그들에게 관직에서 내려와 죄를 청하라고 압박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진을 쳐버린 것이었다.
293화
이날 하루만도 수십 명의 간관(간언을 하는 관원, 어사를 이름)들이 나섰다. 지난번 범한을 탄핵했던 것보다 훨씬 큰 공격진이 펼쳐졌다. 황궁 문 앞에서 수십 명의 간관이 무릎을 바닥에 댄 채 몸을 꼿꼿이 세우고 버텼다.
이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황궁 앞 진한 잿빛의 광장에 수십 개의 적갈색 관복이 가을바람에 펄럭였고, 이는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황궁 문 앞을 지나던 조정의 늙은 대신들은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도망치듯 측문으로 들어가 그들 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경국 법률에 따르면 탄핵을 당한 관원은 반드시 자기 변론서를 올려야 했다. 그리고 지난번 탄핵 때처럼 범씨 부자는 직접 입궁해 황제 폐하께 죄를 청하고, 그런 후 조회에서 명확히 해명해야 했다. 한데 조회에 참석한 2 황자 파는 여전히 위세가 굉장했다. 그러니 범씨 부자가 황제 폐하 앞에서 변론하는 일은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도찰원의 어사들은 자신감에 가득 차 범건과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국의 최대 ‘탐관’들을 제대로 무너뜨려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랐다. 2 황자의 도움으로 제대로 된 증거도 확보했으니 이번에는 사남 백작가와 국공인 유씨 가문, 포월루라고 하는 더러운 기루까지 몽땅 한꺼번에 엮어 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살짝 들뜬 기분으로 범한을 기다렸다.
‘사남 백작가에서 범사철을 도망시키고, 포월루에서도 손을 떼고, 법을 어기고도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을지라도 이번에는 증거가 명확하니, 너희 범씨 가문 놈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시건방진 감찰원 제사가 자신들 강직한 어사들 앞에서 잘못을 시인하고, 죄를 청하고, 고개를 숙일 때만을 기다렸다.
도찰원 어사들뿐만 아니라 사실 많은 이들이 이번 일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남 백작가와 감찰원이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이때, 거세게 밀려든 탄핵에 어찌 대응할지 궁금했다. 관리에게는 모름지기 체면을 지키는 게 중요한 법. 그러므로 감찰원이 이렇게 물려 죽으면 너무나도 창피한 일일 터.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범한은 명성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 아니던가. 이에 심지어는 서무 대학사까지 포함한 모든 관원은 흥미진진해하며 악취미, 복수심 내지는 비웃는 마음으로 범한이 낭패를 당하는 꼴을 보기만을 기대했다.
* * *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황제 폐하께서 불렀는데도 범한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만 안 온 게 아니라 범건 상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부자가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염치없게 똑같은 수를 썼다. 바로 병환이란 핑계를 대고 말이다.
이 소식을 들은 2 황자는 처음에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얼어 버렸다.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굶주린 이리처럼 달려들어 정신없이 물어뜯는 게 사남 백작가인데, 체면과 관련된 문제가 생기니 뜻밖에도 이렇게 냉정하게 나오다니. 자신에게 체면을 되찾을 기회도 안 주고 바로 손절이라니. 그것도 두 사람 다 말이다.
나이를 생각해 줄곧 쪽문 밖 회의실에서 차나 마시며 숨어 있던 서무 대학사는 소식을 듣자마자 입에 물고 있던 차를 뿜어 버렸다. 그는 태학에서 범함과 장기 두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녀석은 대답은 꼬박꼬박 잘했었다. 그래 놓고 결국에는 안면몰수하고 경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때 범한은 대학사의 장기짝을 잡아먹을 수 없다며 공손하게 굴었다. 한데 서무 대학사는 구정물로 가득 찬 범한의 가식적인 모습이 역겨워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 그래서 오늘 조회 석상에서 범한이 굴복하는 모습을 보게 되길 내심 기대했다. 한데 이놈이 와병을 핑계로 안 왔다니. 대학사는 범한의 연극에 화가 나고 기분이 몹시 찜찜했다.
범씨 부자가 병이 났다는 소식은 대전까지 전해졌다. 이제 막 각 지역에서 올라온 상소문을 읽고 있던 황제도 황당하기는 피차일반이었다. 하지만 이맛살만 찌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궁 내 마마님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범가네 녀석이 사고뭉치이네, 황제 폐하의 심기를 덜어 드리는 방법을 모르네, 어쩌다 의신이가 그런 상공을 만났을꼬, 시를 잘 지어 속에 지혜가 가득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불평투성이에다 무뢰한이네, 하며 범한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실망한 이들은 황궁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도찰원 어사들이었다. 대결 상대가 병환을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으니 아무리 살기등등한 진을 치고 있더라도 그들로서는 구심점을 잃고 헛심을 쓴 것이었다. 이에 허망하고 괴로워하며 의기소침해져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자리를 떠났다. 몸에 무기력하게 착 붙어 버린 적갈색 관복도 가을바람이 집적거리는데도 귀찮아서 상대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모두 곡식을 먹고 자랐으니 금강석처럼 단단하지 않아 언젠가는 부서지기 마련이고 언제고 병이 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범씨 부자처럼 이리 공교로운 시기에 동시에 갑자기 병이 드는 건, 그것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가 되는 건······ 어찌 되었든 이상한 일이었다. 특히나 범한은 감찰원 비개가 직접 가르친 제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정식 의원은 아니어도 황궁 어의들도 범한의 실력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몸져누웠단 말인지······.
조정 백관들만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백성들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사실 황궁의 마마님들도, 용상에 앉아 계신 황제 폐하까지도 모두 믿지 않았다. 이에 조회가 끝난 후 어의가 황궁 호위병의 엄호를 받으며, 그리고 거의 출궁하지 않는 홍 태감까지 길잡이로 삼아 위풍당당한 기세로 사남 백작가로 향했다. 황제 폐하의 위로도 전할 겸 범씨 부자가 대체 어떤 병을 얻은 건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2 황자의 눈이 되어 줄 사람 여럿도 이들 대열에 끼어 있었다. 모두 범씨 부자가 꾀병을 부리고 있으며, 두 사람이 조정에 나오지 않는 추태를 부림으로써 황제 폐하께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겨우 군주 기만죄에 불과했지만 정말로 어리석고 오만방자한 짓임은 틀림없었다.
2 황자도 이번 일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황자의 몸으로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라 홍 태감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꾀병이라면 그 비실비실한 늙은 내관을 절대 속이 수 없을 터.
* * *
범한은 정말로 병이 나 있었다.
이 정보는 홍 태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후속 처벌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소문까지 경도 곳곳으로 퍼져 나가자 그 누구도 범한이 꾀병을 부렸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범건 대인은 우연히 감기에 걸린 것이었고, 작은 범 대인은 정말로 쇠약해진 몸으로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감찰원에서 2 황자와 싸우고 있는 이 중요한 시점에 정말 공교롭게도 범한은 병이 나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을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다. 범한의 병환 때문에 경도 국면에 어떤 변화가 이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역사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북위 황제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씨 가문을 제거하려던 계획이 아슬아슬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당시 명장인 전청풍 총독이 갑자기 사흘 동안 설사를 한 덕분이었다. 황당해 보이지만 상당히 진실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 * *
“걱정하지 말아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침대 앞에 불안한 기색으로 있는 목철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모든 건 언빙운 공자의 말을 따르면 됩니다.”
경도부에서 돌아온 후 범한은 몸져누웠다. 심한 건 아니었지만 사필안과의 일전 후 체내의 정기를 통제할 수 없어서였다. 정기가 그의 몸 곳곳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범한은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명상을 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 탓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맥박이 괴이해져서 오히려 심오한 실력자인 홍 태감을 성공적으로 속일 수 있었다.
* * *
가을밤, 달이 기울고 아직 먼동이 터오기 전 오로지 시커먼 하늘만 남아 있을 때였다. 사남 백작가 뒤채에서 극심하게 쿨럭이는 기침 소리가 한동안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종들은 비몽사몽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후원에서는 우왕좌왕하며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범건 상서뿐만 아니라 종들 몇몇도 감기에 걸린 걸 보면 날씨가 문제였던 것 같다. 감기에 걸려 콧물을 흘리기 시작한 종들은 경도 밖에 있는 장원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백작가에 남은 종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 날마다 큰 도련님이 써준 약방에 따라 약을 달여 먹었다. 그 약방문은 참으로 효험이 좋아 이후로는 감기에 전염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침 때문에 사남 백작가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움직인 건 모두 그 소리가 큰 도련님 방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큰 도련님은 이틀 동안 괴질 때문에 심하게 기침했다. 그런데도 황궁 어의들이 약 처방을 해준대도 한사코 거절하며 자신의 비법만 고수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기침 소리가 잦아들 기미가 없자 종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랫것인 자신들에게도 잘해 주는 큰 도련님께 뜻밖의 변고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을 먹기도 했다.
여종 사사가 이마에 붉은색 천을 두르더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정리했다. 그러고는 조금 화가 난 사람처럼 주방에 서서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진한 약 냄새를 맡으며 막일하는 여종들에게 조금 더 빨리 움직이라고 소리치며 닦달을 해댔다.
그녀는 담주에 계신 노마님이 경도로 보낸 사람이었으니 향후 신분은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이에 사남 백작가 본가에서 그녀의 말이라면 종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권위가 있었다. 잠이 덜 깬 어린 여종들은 큰 도련님의 병환이 차도가 없는 걸 알고 있던 터라 사사가 자신들에게 화를 내도 아랫입술을 꽉 깨물기만 할 뿐 감히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한참을 지켜보고 있던 사사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작은 걸상을 들고 왔다. 그러고는 약탕기를 올려놓은 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심스레 부채질을 시작했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 않고 화로만 지켜보았다.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는데도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약을 달일 때 가장 중요한 건 불 조절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끓고 있는 약은 큰 도련님께서 복용하실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조금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침소에는 임완아가 있었다. 수 놓인 면으로 된 기다란 실내용 옷을 입은 임완아는 가슴 졸이며 범한의 가슴을 쓸어내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어의가 처방한 약을 좀 써보는 게 어떨까요?”
범한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기침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 그가 손을 내젓더니 억지로 웃었다.
“그건 교만입니다. 다시 말해 내 몸 상태는 내가 알고 있어요. 안 죽습니다. 내가 지은 약을 먹으면 된다니까요.”
임완아도 상공의 의술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이 15년 동안 앓던 폐병을 치료해 주었을 정도니 말이다. 단지 요 며칠 그의 기침 소리가 너무 심해 걱정이 되어 그리 말한 것뿐이었다. 임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홍 태감도 이 병이 뭔지 모르는데······ 상공은 안다고 말하니, 그러면······.”
임완아가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 갔다.
“비 선생에게 서한이라도 써서 물어볼까요?”
범한이 다시 두 번 기침을 했다. 그런 후 처가 심히 걱정 중이란 걸 알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스승님이 어떤 사람인지 당신은 잘 모르잖아요. 1년 중 절반은 세상 온갖 데를 쏘다니는 분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와달라고 해도 대체 언제 나타날지 모를 일이에요.”
그러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서너 달은 걸릴 거예요. 그때 되면 나는 죽고 없을걸요. 그러면 당신은······.”
범한이 임완아의 곧게 뻗은 코끝을 톡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경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과부가 되겠지요.”
임완아는 땅바닥을 향해 침을 뱉는 모양새를 취하고는 화를 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헛소리가 나와요?”
범한이 잠시 웃었다. 그는 집안사람들처럼 자신의 현 상황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사사가 달이고 있는 약은 그저 마음을 안정시키고, 머리를 맑게 해주고, 숨 쉬기 편하게 해주고, 경락을 살짝 안정시켜 주는 역할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의 근원을 다스리는 일은 여전히 범한 자신의 몫이었다.
범한은 임완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몇 마디 더 한 후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가끔씩 떨리는 오른손이 또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경도부 밖에서 일전을 치른 후 지금까지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다.
294화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사가 탕약을 들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앞쪽에 있는 방에서 그녀와 한방을 쓰는 사기도 일찌감치 일어나 탁자 위 등잔불을 밝혔다. 그렇게 몇 개의 탁자를 거치며 등불을 밝히다가 도련님과 아씨 마님의 침대 앞까지 와 있던 사기는 약탕기를 받아 들었다. 그런 후 숟가락으로 약을 살살 저어 식히고는 범한에게 한 모금 먹였다.
약이 조금 썼는지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혀로 입을 핥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새 사사가 사탕 하나를 쏙 넣어 주며 입 안의 쓴맛을 중화시켜 주었다. 범한이 피식 웃었다.
“다 큰 어른인 내가 이런 정도의 시중을 받아야 하다니!”
그러자 사사가 웃으며 받아쳤다.
“도련님, 어려서부터 쓴 건 정말로 싫어하셨잖아요.”
이에 범한은 이 세계의 턍약은 시럽이 든 게 아니기에 마시고 나면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사기가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 범한의 입가에 묻은 탕약을 닦아 주며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는 지금 환자이십니다. 그러니 강한 척 그만하세요.”
임완아는 두 여종의 행동을 도무지 봐줄 수 없었는지 한 소리 했다.
“둘 다 너무 애지중지하며 다루듯 행동하지 말거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임완아도 작은 손으로 범한의 등을 계속해서 쓸어내리고 있었다. 조금 더 편안해지라고 말이다.
범한은 큰 도련님 대우를 실컷 받는 중이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리 편히 지내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못 참겠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을 뻗어 약을 받아 들고는 호탕하게 쭉 들이켰다. 그런 후 소매로 입가를 쓱 닦고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의원을 겸하고 있기는 해도 아이는 아닙니다!”
그러자 침대 아래쪽에 있던 여종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범한은 자신의 기침 때문에 여종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만들어 살짝 양심의 가책 같은 걸 느끼고 있던 터라 다음과 같이 분부했다.
“약도 다 마셨으니 이제 기침은 가라앉을 거야. 두 사람 다 돌아가 자도록. 불침번을 서는 여종들에게도 자라고 하고. 이 추운 새벽에 감기 걸리면 안 되니 말이야.”
“곧 날이 밝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잘 필요 없습니다.”
“많이 자둘수록 좋은 것이야.”
범한이 정색했다.
사사와 사기는 범한이 늘 아랫사람의 입장을 헤아려 주고 온화한 모습으로 대하면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말대꾸하지 않고 두 사람 다 그러겠노라 대답만 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이런저런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
범한이 침대 밖으로 나와 잔에 차를 따라 입을 헹구었다. 임완아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못하고 한 소리 했다.
“아픈 사람이 왜 식은 차를 마십니까. 몸에 안 좋아요.”
범한이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병은 평범한 병이 아니에요.”
부부는 이어 대화를 나누었지만 이내 다시 시작된 기침 때문에 대화가 끊어졌다. 잠시 평온을 되찾았던 임완아는 그런 범한을 보며 다시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범한이 더 자려 하지 않기에 자신도 자지 않고 억지로 버텼다.
그런 아내를 더 이상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던 범한은 손을 뻗어 임완아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다 머리 쪽에 있는 안정을 취하게 해주는 혈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러 주었다. 임완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요 며칠 남편 걱정을 하느라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한 임완아는 이내 깊이 곯아떨어져 버렸다. 범한은 그런 아내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신의 병은 아버지처럼 몸조리를 잘한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범건 상서의 감기는 범한이 내놓은 묘수 덕분에 벌써 호전된 상태였다. 그리고 약 이틀 정도 더 지나면 완전히 나을 수 있었다. 다만 어느 정도 나이가 있다 보니 젊은이보다 신체 기능이 떨어져 회복이 조금 더딜 뿐이었다.
범한이 가볍게 손을 휘둘러 5척 정도 떨어진 탁자 위 등불을 껐다. 침소는 일순간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범한은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요 며칠 너무 가만히만 있던 탓에 잠이 오지 않아서였다.
범한은 치아 사이에 낀 약 찌꺼기를 혀로 핥으며 자신이 직접 처방한 약재를 품평해 보았다. 약재 속에 있던 유효 성분이 이미 폐엽으로 들어갔는지 불편하던 폐 쪽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범한은 살짝 자신만만해진 모습으로 손을 뻗어 이불을 끌어다가 아내에게 제대로 덮어 주었다. 이어 베개 아래에 있는 비밀 공간에서 약이 든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환약이 몇 알 들어 있었다. 범한은 손을 넣어 투박한 질감의 커다란 환약 하나를 꺼냈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범한은 그것이 붉은색 환약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익힌 이름 모를 무공비급 때문에 스승 비개가 어려서부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라 신신당부한 약이었다. 패도의 정기가 흉포하게 날뛰며 경맥과 충돌할 때 이것만이 그의 목숨을 구해 줄 최후의 영약(靈藥)이라고도 했었다.
범한이 담주에서 살던 어린 시절, 비개는 이 중요한 문제를 일찌감치 발견해 냈었다. 오죽인지 돌아가신 어머니인지 모르겠지만 둘 중 한 사람이 물려준 무명의 무공비급을 수행하면서 범한은 패도로 충만한 정기를 몸에 지니게 되었다. 한데 문제는 이렇게 연마한 정기가 너무 흉포하다는 점이었다. 일반인이 연마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체내의 정기가 원활히 흐르지 못하고 억지로 흐르면서 몸의 이곳저곳을 공격해 결국에는 경맥이 끊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연스레 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범한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기이한 면이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도 되는 양 그의 경맥은 남들보다 훨씬 넓었다. 이에 범한은 이름도 없는 패도의 무공비급을 연마할 수 있었고, 네 살 때는 정기를 몸에 가득 채우게 되었는데도 몸 안에서 폭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비개는 일찌감치 경고했었다. 체내에 정기가 쌓일수록, 더 웅장해질수록 언젠가는 지금 있는 경락과 기의 통로만으로는 패도의 기를 견뎌 내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가 되면 범한은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범한은 그런 위험한 기분을 느껴 본 적 없었다. 체내 정기가 사납기는 했지만 자신의 통제하에 있었다. 특히 열두 살이 넘어 이름 없는 패도의 무공비급 제1 권을 마쳤을 때는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체내 정기가 갑자기 평온하고 온순해졌다. 그리고 그 후로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점점 경계심을 늦추었고 심지어는 패도의 정기에 잠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지냈다. 환약 역시 더 이상 휴대하지 않고 그냥 집 안에 두고 다녔을 정도였다. 지난번 사신단으로 북제에 갈 때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한 알을 지니고 가기는 했었다. 물론 그때에도 그걸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골치 아픈 상황은 언제나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오기 마련이다.
평안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험난했던 북제로의 여정 후, 체내 정기와 연마한 기술이 합쳐져 범한의 무공 실력은 9등급의 관문을 넘어서 있었다. 무공이 정점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체내 패도의 정기도 드디어 큰 발전을 이루어 고하의 수제자인 랑도와 맞붙었는데도 강하게 맞설 정도였다.
그런데 하필 경도부 밖에서 여덟 가문 장군 중 하나인 사필안을 멋지게 무너뜨린 후 체내 정기가 균형을 잃기 시작하다니.
정기가 허리 뒤쪽의 설산에서 시작해 경락을 따라 위로 올라갈 때 모두 두 개의 통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 두 개의 통로는 두 개의 원을 그리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통로에서 정기가 올라가면 다른 통로에서는 정기가 내려오는 식으로 작동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신체 주인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정기가 다시 광폭하게 날뛰며 얌전하게 경맥 속으로 들어가 있으려 하지 않았다. 사방팔방으로 쉼 없이 뻗어 나가며 범한을 떠보고 몸 안 곳곳을 찔러 댔다.
범한의 양손은 정기를 가장 완벽하게 통제해 사용하는 부위였다. 그런데 하필 그곳이 체내에 있던 정기가 제멋대로 밖으로 흘러나가려 하는 관문이 되어버린 탓에 범한의 오른손은 시도 때도 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는 체내의 근육과 경락이 서로 소통 단절이 일어나 각기 따로 정기를 통제하려 하기에 일어난 결과였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범한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이에 범한은 며칠 동안 정좌한 상태에서 명상을 통해 정신력으로 체내에서 날뛰는 패도의 정기를 억눌렀다. 그러다가 두 개의 기가 역으로 흐르면서 충돌해 폐엽이 상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계속해서 기침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어 더 심해진다면 언젠가는 몸 안에서 난폭하게 날뛰는 정기를 통제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범한은 이름 없는 무공비급의 다음 권을 이미 절반 정도 익힌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가끔 심하게 기침이 나올 때면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오죽 아저씨가 미치도록 미울 뿐이었다.
‘내게 기를 흡수하게 만드는 흡성대법을 익히게 했으면 해결책도 같이 알려 주셨어야죠!’
범한이 인상을 쓰며 손에 있던 약 주머니를 살며시 움켜쥐었다. 범한은 예전에 스승님께서 남겨 준 환약의 성분을 분석해 본 적 있었다. 이 약은 호랑이를 가지고 사자에 맞서는 원리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승 비개가 범한 체내에 있는 패도의 정기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건 대단히 강력하고 사나운 약이었다. 이에 당사자인 범한도 약을 먹고 난 후 결과가 좋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 안에는 대량의 은방울꽃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약재는······ 공력을 없애는 데 쓰는 특효약이었다.
십여 년 동안 힘들게 연마해 온 정기를 하룻밤 사이에 없애 버리라니. 이 약을 복용하고 난 후 공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쳐도 체내 정기 중 절반은 사라지게 될 터.
그렇다고 복용하지 않으면······ 정기 때문에 몇 달 후 또는 몇 년 후에 피를 쏟으며 폭발하게 되지 않을까. 이처럼 무서운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른손을 계속 떨고 있게 될 터이니 보기 흉할 것이다. 한데 아직 한창인 나이인데 파킨슨병에 걸린 범한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아, 약을 복용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태양이 잠에서 깨어나 검은 밤을 몰아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자신이 침대 가장자리에 반 시진이나 앉아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범한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었다. 죽는 걸 제일 두려워하는 자신이, 그것도 사느냐 무공을 잃느냐를 두고 기로에 서서 이처럼 나약한 모습으로 주저하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어쩌면 이것 역시 계시겠지!’
범한은 이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여울지지 않는 연못 형태가 아직 파멸되고 훼손되지 않았을 때, 하늘의 샘을 끌어다 내 몸에 주입하고······.”
범한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로 무공비급의 구절을 천천히 암송하며 명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체내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정기를 조심스레 경락 속으로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정기를 다시 허리 뒤쪽 설산으로 보내 다시금 큰 빛이 되어 설산을 비추도록 했다.
그러던 중 범한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대충 옷을 걸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장 정원 내 가장 구석진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자신이 처음으로 독침을 시험해 보던 작은 연무장이었다. 굳이 찾으려 할 필요도 없었다. 그곳에 있던 가짜 산에 얼굴에 검은 천을 두르고 있는 이상한 아저씨가 떡하니 있었으니까.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하더니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저씨도 돌아오기는 하는군요.”
295화
하늘은 이미 청백색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아직도 꽤 어두운 편이었다. 정원에는 새벽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가짜 산 옆에 거친 옷을 입고 있는 이의 허리춤에는 대충 꽂아 놓은 뾰족한 꼬챙이가, 얼굴에는 검은 천이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주변 경관이며 건축물과 혼연일체가 되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존재감조차 너무나도 흐릿해 누군가가 그의 곁을 지나간다 하더라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범한은 자신과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냈던 16년 지기를 마주 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기보다는 제대로 한 대 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때릴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니 그냥 이대로 품으에 안겨 한바탕 울어 대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한데 오죽 아저씨는 그런 걸로 감동받을 사람은 아니었다.
이에 범한은 그냥 고개만 내젓고는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제야 오죽 아저씨가 손에 작은 칼을 들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조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나뭇조각을 깎고 있었다.
“다행히 여인상을 조각하시는 중은 아니고······. 만약 그랬다면 맹인계의 탐화(探花. 제3 인자란 뜻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이 다 있다)라도 되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 미워할 수 없는 이심환(고룡 소설에서 소이비도라고 불리는 암기를 잘 날리는 인물로 무기 사용 고수 중 제3 인자)처럼 말이지요.”
정원 안은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이에 범한이 웃음을 꾹 참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저는 토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오죽이 예상과 달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심환이란 그 인물은 정말 수치심도 없는 놈입니다.”
범한은 놀라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이심환을 아신다고요?”
오죽이 나뭇조각과 작은 칼을 소맷자락에 집어넣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 이야기를 해주신 적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그 남자 주인공을 제일 싫어하셨지요.”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저는 어머니를 닮은 거였군요.”
* * *
잠시 후 두 사람은 사남 백작가에 있는 세 곳의 서재 중 가장 은밀한 곳으로 들어가 있었다. 주변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범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심지어는 범건 상서도 이 규율을 묵인해 주었다.
“얘기 좀 해보시죠. 반년 동안 어디서 무얼 하셨는지 말입니다.”
범한이 실종되었다 나타난 오죽에게 흥미를 보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그 작은 나뭇조각을 통해 자신의 추측을 이미 확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경천동지할 흥미진진한 소식은 어찌 되었든 당사자의 입으로 들어야 제대로 자극적인 법.
이 순간 범한은 쥐새끼처럼 자기 몸 안 곳곳을 갉아먹으며 돌아다니고 있는 정기를 잊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아저씨, 그동안 어떻게 목숨 보전하셨어요?”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냥 오죽 아저씨의 눈만 뚫어지게 보았다.
범한은 찻잔에 어젯밤 마시다 남은 차를 따랐다. 물론 오죽에게는 따라 주지 않았다. 그는 차를 마시지 않아서였다.
“북쪽에 갔었습니다.”
오죽이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이 어디에 갔었는지 확인하는 듯 대답을 했다.
“그런 후 남쪽에 갔었습니다.”
일반인과는 다른 사유 방식을 지닌 아저씨에게 범한은 이미 익숙해져 있던 터였다. 그래서 이 무료한 대답에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인내심을 가지고 물었다.
“북쪽에는 왜 가셨던 거예요? 남쪽에는 또 왜 가셨던 거고요?”
“북쪽에서는 고하를 찾아갔습니다.”
오죽이 차분하게 말했다. 한데 그는 일을 언급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놀라 자빠질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바탕 싸우고 그런 후 남쪽으로 가서 어떤 사람을 찾았습니다.”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일대 종사 고하가 다쳤다더니 당연히 이 앞에 계신 눈먼 아저씨께서 멋진 수를 썼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가 생각나 이맛살을 찌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저씨는 괜찮으신 거죠?”
오죽이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쪽 어깨를 바라보았다.
“여기를 다쳤는데 다 나았습니다.”
오죽은 여전히 간결하게 할 말만 했다. 하지만 범한은 말 안에 숨겨진 위태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해당타타와 겨룰 때 그는 해당타타의 대머리 사부, 즉 천하 최고수라는 4대 종사 중 한 사람의 실력이 대체 얼마나 무서운 수준인지 제대로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오죽 아저씨가 아무리 한껏 거만하게 굴었다 할지라도 상대에게 상처를 입은 순간, 그도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제는 다 나았다니 그거면 된 거였지만 말이다.
“왜 거기까지 가셔서 싸우신 건데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죽이 대답을 했다.
“첫째, 그가 북제에 있으면 분명 도련님께서 불편하실 것 같아서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사신단으로 가 있을 때 고하가 상경성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면 자기 힘으로는 북제 조정의 무공 고수들을 가지고 놀 수 없었다. 그리고 소은을 죽이기 전에 여러 유용한 정보도 얻지 못했다.
오죽이 대답을 이어 갔다.
“둘째, 예전에 고하와 알았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고하에게 물어보러 간 것입니다.”
범한이 느닷없이 고개를 치켜들고는 깜짝 놀란 모습으로 오죽을 바라보았다.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게 있어서였다. 소은이 죽기 전 말해 준, 끝없는 밤에 휩싸여 있다던 사당이 떠올라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면······ 아저씨께서는 정말로 고하를 알지도 몰라요. 적어도 옛날에는 말이지요.”
이어 그는 동굴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모두 오죽에게 해주었다. 오죽 아저씨가 그때 있었던 일련의 중요한 일들을 기억해 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오죽 아저씨와 신묘와의 관계 같은 것 말이다. 범한이 어렸을 때 오죽 아저씨는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도망 나왔다고 말해 준 적 있었다. 그렇다면 그 집이······ 설마 신묘였나?
오죽이 한참 동안 침묵했다.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아 고통스럽게 머리털을 쥐어뜯는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죽은 그저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기억 안 납니다.”
* * *
이에 머리털을 쥐어뜯는 건 범한이 할 일이 되어 버렸다. 범한은 나지막하게 구시렁댔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범한이 머리를 내저으며 실망감을 떨쳐 내고는 다시 물었다.
“상처를 입으셨는데 왜 곧장 경도로 돌아오지 않으신 겁니까? 다친 상태에서 왜 남쪽까지 가서 누군가를 찾으신 건지······. 어, 혹시 섭류운이 남쪽에 있었나요?”
그러자 오죽이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쪽에 문제가 좀 있어서······ 고하가 저를 알아보는 걸 확인한 후 남쪽으로 갔습니다. 그쪽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찾으려 했는데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습니다.”
범한은 아까보다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자신이 반년 동안 남으로 북으로 다니는 동안 아저씨도 가만히 계신 게 아니었다. 북제 국사와 싸우며 동시에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지 무언극을 했고, 그러고는 또다시 남쪽으로 친구를 찾으러 가고. 한데 고하가 오죽 아저씨를 알아봤다고 하니······. 그렇군. 소은이 그랬었다. 고하가 오늘날 무공 고수가 될 수 있었던 건 옛날에 신묘에서 있었던 일과 관계가 있다고. 그때 그는 어머니와 만났지만그 당시 어머니는 오죽 아저씨와 함께 있지 않았다고 했다.
남쪽에서 무슨 말썽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나? 그건 또 누굴까? 범한은 재빨리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그러다 상경에 있을 때 접했던 사건 하나가 생각났다. 경국 남쪽에 냉혈한인 연쇄살인범 출현. 언빙운은 이 사건을 대단히 엄중하게 보고 있었고 나중에 황제 폐하의 친위 무사인 호위병을 통해 범인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죽 아저씨가 그 사람을 찾지 못했다면 언빙운 동지에게 남는 건 실망뿐일 텐데.
범한이 깊이 숨을 들이쉬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일은 잠시 제쳐 두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자신이 반년 동안 어떤 일을 했으며, 오로지 자신과 해당타타만 아는 비밀 협약에 대해 말해 주었다. 한데 오죽은 그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범한은 오죽 아저씨가 자신을 칭찬해 줄 리 없음을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만스러웠다.
‘정말 많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소은까지 처리하고 2 황자도 이리 처참하게 뭉개 버리고. 이 정도 했으면 뭔가 반응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범한이 살짝 시무룩해하는 걸 발견했는지 오죽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해명하듯 한마디 했다.
“전부 별거 아닌 일이군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자신과 2 황자 간의 싸움은 오죽과 황제 폐하 정도 되는 사람이 봤을 때는 아이들 간의 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비밀 협약에 대해서도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나 살짝 흥미를 가지실 일이지 오죽 아저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범한은 이유가 명확해지자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어넘기더니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내밀어 보여 주며 말했다.
“최근 들어 손이 계속 떨리고 있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범한의 체내에서 정기가 폭주하는 징후가 보이는데도 오죽은 여전히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냉정한 태도로 말했다.
“기를 연마해 본 적이 없어서 어찌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생과 사의 일이 눈앞에 닥치자 범한은 드디어 극도로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몹시 불안해하며 소리를 억누른 상태에서 소리쳤다.
“전혀 안전하지 않은 걸······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익히게 하다니······ 연마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왜 그런 거예요?”
“아가씨께서 그게 최선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죽이 냉정하게 대답을 이어 갔다.
“그리고 예전에 누군가는 연마에 성공했습니다.”
“당연히 연마한 사람이 있었겠지요.”
범한이 허점을 콕 집어 공격했다.
그러자 오죽이 진실을 털어놓았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기껏해야 정기가 모두 흩어지는 정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도련님이 우둔해 마지막 관문에서 그 정기란 걸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범한은 순간 기가 막혔다. 속으로 오죽 아저씨는 괴물이니 일반 무공 수련자에게 정기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르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체내의 패도 정기를 잃게 되면 해당타타를 압도하지도 못할뿐더러 세상에 있는 원수들이 언제든 달려들어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려 할 거라 생각했다.
“이제 어쩌죠?”
범한이 시위라도 하듯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여 주며 화를 냈다.
“설마 손이 이렇게 계속 떨리도록 놔두실 겁니까? 저보고 오맹달(중국의 영화배우, 주성치 영화의 단골 배우로 몸을 덜덜 떠는 연기를 많이 했다)이 연기한 바보처럼 살란 거예요? 지금은 손만 떨릴 뿐이지만 체내 정기가 더 늘어나면 그때는 엉덩이까지 흔들고 다니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죽이 고개를 들었다. 오죽의 눈을 덮고 있는 검은 천은 앞에 있는 범한을 싸늘하게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마하지 않으시면 정기는 더 늘어나지 않습니다만.”
* * *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다니!’
범한은 일찌감치 날마다 두 차례 명상과 무공 수련을 하는 게 습관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수련을 멈춘다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야 깨달았다. 해결 방법을 찾기 전까지 자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이름 모를 비급의 패도 정기 수련을 멈추는 것이었다. 비록 싸울 때는 몸 안의 정기가 자연스레 커지고 확장되겠지만 날마다 기운의 크기를 키우는 것보다는 천천히 늘어나게 되겠지.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그 방법밖에 없겠네요. 정기가 폭발할 시기를 늦춰야겠어요.”
오죽이 불쑥 한마디 했다.
“비개가 약을 주었잖습니까.”
오죽이 자기 어렸을 때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자 범한은 잠시 놀라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해주었다.
“그 약도 사나운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약을 먹고 나면 공력이 흩어질 거 같아 걱정이에요.”
오죽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다.
“분명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 치료하겠지만요.”
범한은 아저씨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이 이름도 없는 치명적인 무공비급은 오죽 아저씨가 자기 머리맡에 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에 쓴웃음을 지었다.
296화
“그 일은 나중에 다시 말하지요. 우선 아저씨 일부터 얘기를······. 그러니 아저씨, 다음부터 실종 놀이를 하시려거든 제게 먼저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죽이 자못 진지하게 물었다.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북제로 가는 동안 아저씨가 제 곁에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 상자도 제 곁에 있고 해서 겁도 없이 해당타타에게 치욕을 선사하려 했지요. 한데 아저씨가 안 계셨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오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참 후 입을 뗐다.
“아, 알겠습니다.”
범한은 속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서부터 오죽이 자신의 지근거리에 있는 게 익숙해서였다. 마차에서, 잡화점에서, 해변가 절벽 위에서 항상 오죽이 곁에 있어 주었다. 물론 경도로 들어온 후 오죽 아저씨가 곁에 함께 있어 주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의 무공 실력이 몸 하나는 지킬 정도로 성장하기는 했어도 범한은 오죽이 필요했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커갈수록 더 큰 도전에 직면해야 했으므로, 아저씨가 곁에서 지켜 주면 어디에 가 있든 그만큼 더 안정감이 들어서였다.
“이사를 할 예정입니다.”
범한이 작게 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뒤채에서 지내는 건 조금 불편하더군요. 사람도 너무 많고요. 그래서 아저씨께서도 우리와 함께 사실 수 없는 거겠죠.”
오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신과 같이 사는 문제 때문에 이사를 해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완아는 아직 아저씨와 만난 적 없군요.”
범한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저씨는 제게 가장 가까운 분입니다. 그러니 제 아내를 만나 봐 주세요.”
그러자 오죽이 천천히 말했다.
“이미 뵈었습니다.”
“완아는 아저씨와 만난 적 없습니다.”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늘 혼자서 저택 밖을 떠돌아다니시잖아요. 아저씨께서 어디서 묶고 계시고 평소에 뭘 하시는지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이런 기분······ 그러니까 제게는 불편해요.”
오죽이 다시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그제야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웃지는 않고 천천히 말을 해나갔다.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도련님 곁에 있다는 사실은 아내분 외에 다른 사람은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범한이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났는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약약이도 알면 안 될까요? 늘 그 애에게 아저씨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안 됩니다.”
오죽이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렇게 하시지요. 도련님은 도련님의 일을 하시는 겁니다. 제가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범한이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다. 서재 밖에서 벌써부터 기상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와서였다. 이에 범한은 하는 수 없이 팔을 비비며 서재 밖으로 나섰다.
서재 안에는 오죽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영원히 무표정할 것만 같은 그의 얼굴에는 드디어 5백 년 만에 처음 피어나는 꽃처럼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 웃음에는 장난기가 살짝 드리워져 있었다. 범한이 무언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
* * *
가을이 한창인 정원. 새하얀 서리를 뒤집어쓴 풀들 위로 태양이 점점 따스하고 부드럽게 비추기 시작했다. 범한은 정원에 놓인 길고 부드러운 의자에서 반 정도 누워 얇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가끔 기침을 하기는 했지만 지난밤보다는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정원 한쪽 구석에 놓인 그네에는 몇몇 담력이 큰 어린 여종들이 타고 있었다. 엷은 색 치마가 긴 그넷줄에 달린 작은 나무 발판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사사와 사기가 가끔씩 부러워하는 기색을 흘리며 한껏 즐거워하며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도 있고 체면을 생각해 직접 그네 위에 올라타 실력 발휘를 하지는 않았다.
범한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네 위 어린 여종들의 치마가 흩날리는 걸 보며, 그것이 꽃 같기도 하고 또 전생에 본 낙하산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치마 아래 언뜻언뜻 비치는 하얀 속바지를 보다가 문득 전생에 본 영화 중 자전거에 낙하산을 달고 나오는 장면이 인상적인 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옆에서 손 하나가 다가와 범한에게 얇게 저민 고욤을 먹여 주었다. 과육만 섬세하게 잘라 낸 터라 입맛에 딱 맞았다. 범한이 두세 번 씹더니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왜 아버지 곁에 있지 않고 내 곁에 와 있는 거니?”
임완아와 범약약이 양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환자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범약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속 방에만 있자니 저도 따분해서요. 오라버니께서 아프기도 하시고 정원에 나와 여종들이 그네 타는 걸 보는 것도 재밌고 해서 나왔어요.”
그러자 임완아가 야유를 보냈다.
“상공은 그네 타는 걸 보러 온 게 아니고 그네 위에 있는 사람을 보러 온 거예요.”
그러자 범한도 변명하지 않고 웃었다.
“풍경 감상하는 거랍니다. 경치란 건 사람도 함께 보는 거예요.”
그러고는 크게 소리쳤다.
“사사, 그만 아줌마처럼 굴고! 타고 싶은 만큼 실컷 타!”
범한은 순간 방금 전 한 말이 음탕한 상황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 자기가 말을 해놓고도 누구보다 깜짝 놀라 뻘쭘해졌다. 다행히 옆에 있는 여인들은 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해 범한은 혼자 난처하게 웃고는 기침하는 척했다. 그러다 어떤 일이 생각나 옆에 있는 임완아에게 물었다.
“가을이 되니 갈수록 추워지네요. 저것 봐요, 저택 정원에 있는 국화도 살짝 얼었잖아요. 지난번에 경도 외곽에서 황실 국화 감상 모임을 연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는 거예요? 첫눈이 내리면 국화 감상은 끝인데 황궁에 계신 분들께서는 흥취가 깨질 걱정은 안 하시나 보죠?”
그러자 임완아가 눈을 홉뜨고는 웃었다.
“예년보다 늦어질 거예요. 그런데 전해 받은 소식으로는 현공(懸空) 사당에 있는 금선(金線) 국화를 보러 갈 거 같아요. 송이가 작은 국화인데 추위에 강해서 얼진 않을 거예요.”
범한은 어느새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국화 감상 모임이 미뤄지는 것과 최근 경도를 떠들썩하게 한 일이 관련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데 최근 이틀 동안 경도의 대세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범한이 병환 중일지라도 강하게 버텨 내야 2 황자를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범한은 정반대였다. 감찰원이 하는 일이니 자신은 너무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언빙운 공자가 아주 자잘한 것까지 모두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분명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보았다.
범한은 아주 조금이지만 그래도 나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많이 아픈 척하며 탄핵과 관련해 조회에 출석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1처 관아와 감찰원에 가 있지도 않았다. 그저 저택 내 정원에 콕 박혀 경도의 환자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굴었다. 초조해하는 둘째의 모습을 무슨 연극 보듯 하면서 말이다.
“높이! 더 높이!”
범한이 지금 숨어 있는 곳은 길고 푹신한 의자 위였다. 이곳에서 아내와 누이의 시중을 받으며 용감하게 발을 구르며 그네를 높이 높이 띄우는 사사의 모습을 감상했다. 사사는 발을 구를수록 정원 담장을 뛰어넘을 듯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경도 풍경을 구경하며 마음껏 웃고 소리를 질러 댔다.
발을 굴러 그네를 하늘 높이 띄우던 사사가 높은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발을 구르지 않기 시작했다. 사사는 그네가 완전히 서자 급히 뛰어내려서는 바닥에 벗어 놓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곧장 범한에게 뛰어왔다.
옆에서 부축하며 그네에서 내려오는 걸 도와주던 어린 여종은 사사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고, 몇 마디 골려 주려 기다리던 사기도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바로 입을 닫아 버렸다. 심지어 주인 세 사람도 사사가 왜 저렇게 부리나케 뛰어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남 백작가 정도의 권세라면 황궁에서 태감이 가산을 몰수하러 금군이라도 끌고 오면 모를까. 대체 경도에서 무서워할 게 무어기에 저리도 허둥대는 건지.
“문 앞에······ 정왕야의 마차가 와 있습니다!”
사사가 숨을 헐떡이며 의자에 누워 있는 범한에게 달려와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난 범한은 펄쩍 뛰듯 의자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얼른 철수!”
범한은 냅다 정원 뒤쪽으로 뛰었다. 그러다 잊지 않고 고개를 돌려 사사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사사는 역시 영리하다니까!”
조회에도 못 나갈 만큼 아픈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의자 옆에 있던 임완아와 범약약이 의심의 눈초리로 잠시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러다 금세 상황을 파악했는지 살짝 변한 낯빛으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종들을 불러 저택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도록 시키고는 등자경에게 서둘러 마차를 준비하라고 소리쳤다.
웃음꽃이 피었던 사남 백작가 후원이 순식간에 전쟁을 준비하는 기지로 변해 버렸다. 모두 범한이 누워 있던 긴 의자며 기타 등등의 것들을 서둘러 치웠다. 그중에서도 주인어른을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히는 게 제일 급선무였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게 말끔히 처리되자 사람들은 범한을 뒤채 후문 밖으로 내보냈다. 때마침 등자경도 마차를 끌고 오는 중이었다.
“아직 아픈 상태니 어디든 숨어 계셔야 합니다.”
임완아가 두툼한 바람막이 옷을 범한에게 걸쳐 주며 원망하듯 말했다.
“작은 외삼촌께서도 너무하시네요. 이미 말씀을 드렸으니 굳이 와보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던 범한은 유격대원처럼 민첩하게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임완아가 비웃듯이 웃었다. 그런 후 뒤를 돌아보니 범약약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작은 향로를 품에 안은 채 범한을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임완아가 너무나도 의외라는 듯 한마디 했다.
“아가씨는 왜 또 따라 들어가요?”
임완아는 아내였으니 사사가 정왕가의 마차를 보자마자 범한에게 급히 뛰어온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최근 범한과 2 황자 파가 서로 싸우자 세자 이홍성은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그 때문에 세자는 최근 며칠 동안 정왕야의 명으로 왕부에 갇혀 지내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왕이 친히 왕림했다는 건 이유가 명확했다.
첫째, 범건 상서에게 대체 어찌 된 연유인지 묻기 위해서였다. 둘째, 범한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이유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딱 하나 남았다. 일단 세자 대신 몇 마디 전하고 두 사람이 화해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황제의 친아우가 직접 찾아왔다. 그것도 그동안 사남 백작가 자녀들이 웃어른처럼 존경하고 모시는, 친하게 지내는 어르신께서 말이다. 그런 분께서 친히 왕림해 화해를 권한다면 범한이 마냥 무시하고 버틸 수 있을까.
한데 범한은 2 황자 파와의 싸움을 겨우 정왕 때문에 멈출 수는 없었다. 몇 마디 더 보태 설명하자면, 이 교활하고 머리를 잘 굴리는 꽃 농부가 범한이 이홍성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중이란 걸 예측 못 할 리 없었다.
물론 범한은 그 어르신의 거친 말투도 너무 무서웠다. 그런 분이 신분을 앞세워 자신을 압박한다면 자신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일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하고 봐야 했다. 즉 삼십육계 줄행랑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책이었다.
임완아의 말에 줄곧 조용히 있던 범약약은 유감이라는 듯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난처해했다.
“새언니, 지금 그분을 뵙기에는 너무 난처해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임완아는 놀라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금세 이유를 알아차렸다. 백작가에서 한동안 이홍성을 무시해 왔고 또 정왕가의 명성이 상공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추락한 터였다. 그러니 이런 시기에 범약약이 예비 시아버지를 만나는 건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297화
그러자 임완아도 상공과 아가씨가 모두 몸을 숨기는 마당에 혼자 집에 남아 있어 무엇 하느냐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들이닥친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외삼촌이니······ 임완아는 작은 외삼촌의 입담이 떠오르자 순간 몸서리가 쳐졌다. 이에 사기가 들고 있는 자신의 외투를 집어 들고는 바로 고개를 숙이고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자 마차에 있던 남매가 깜짝 놀라 물었다.
“왜 들어와요?”
임완아가 두 사람을 향해 눈을 홉떴다.
“작은외삼촌께서 직접 단죄하러 오셨잖아요. 설마 나 혼자서 그걸 다 감당하란 건가요? 내가 그 정도로 우둔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마차 주위에 모여 있던 백작가 종들은 정왕야의 성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인 셋이 모두 질겁하고 몸을 숨기자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등자경이 채찍을 휘둘렀다. 사남 백작가 마차임을 알리는 기다란 동그란 원이 찍혀 있는 마차가 조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젊은 사람들의 불평 소리가 희미하게 마차 밖으로 새어 나왔다.
등자경은 정왕가의 종들에게 들킬세라 조심해서 마차를 몰았다. 이에 큰길로 나가지 않고 길을 빙 둘러 나가는 방식으로 성 남쪽을 벗어났다. 배웅하기 위해 문밖에 서 있던 종들도 마차가 거리 끝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거대한 종소리가 후원까지 울려 퍼졌다.
“이런 염병할 놈들!”
잔뜩 불안해하는 종 앞에 정왕야갸 양손을 허리에 짚고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넓고 적적한 후원을 바라보며 구시렁댔다.
“이놈의 새끼들, 이 몸께서 나타나니 꽁무니 빠지게 숨었구먼. 내가 그렇게나 무서운 사람이었나.”
정왕과 동행한 이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건 범한의 명목상 어머니인 유씨였다. 왕야가 거칠게 뇌까리자 순간 불안감에 휩싸인 유씨가 작은 소리로 대꾸를 했다.
“왕야,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아이들은 오늘 성 서쪽에 있는 의원에게 갔습니다.”
정왕이 아직까지 살짝 흔들리는 그네를 보며 침을 탁 뱉고는 욕했다.
“범건의 병은 전부 범한이 치료해 줬다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고놈한테 염병할 의원 따위가 필요한 건가?”
* * *
이 시각 양쪽에서는 사뭇 다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백작가에 와 있던 정왕야는 후원 허공을 향해 한껏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한편 마차를 타고 도망친 세 젊은이는 이미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경도의 맑고 상쾌한 가을 공기를 만끽했다.
범한은 북제에서 돌아온 후 연이어 여러 가지 일들을 벌였다. 그래서 가족들과 창산으로 휴가를 가거나, 경도 외곽 장원에 가서 잠시 쉬고 오거나, 경도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걸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하루 종일 저택 안에서 음모를 짜거나, 아니면 계략을 실행하느라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나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요 며칠 대세가 자기 쪽으로 기울어 조금 한가로워지기는 했지만, 병을 핑계로 조회에도 나가지 않고 있던 터라 황제 폐하의 체면을 생각해 대놓고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이에 저택에 콕 박힌 채 아내, 누이와 입이 마르도록 수다나 떨어 댔다.
그러던 중 정왕야가 들이닥친 건 범한에게는 좋은 구실거리가 되어 주었다. 바깥에 나돌아다녀도 아버지께 꾸중 듣지 않을 좋은 핑곗거리니 말이다. 이렇듯 정왕야의 기습 방문은 세 사람이 저택에서 몰래 빠져나와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줄 좋은 기회가 되었다.
범한이 마차 가림막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동승한 두 여인과 함께 거리 풍경과 사람을 구경했다. 주전부리를 파는 가판대에서 계속 소리치며 호객하는 사람들, 골목에서 진기한 물건을 파는 사람들, 모든 게 평온했다.
임완아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오긴 했는데 마차에서 내리기도 뭐하네요. 계속 이렇게 마차 안에만 있어야 하는 걸까요?”
그러자 범약약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라버니께서 바깥에 얼굴을 드러내기도 뭐하시잖아요.”
그렇게 얼버무린 범약약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오라버니, 변장할 줄 아시잖아요!”
범한이 소리 내어 잠시 웃고는 말했다.
“백성들이 나는 못 알아본다 쳐도 설마 경도에서 제일 예쁜 우리 집 꽃 두 송이까지 못 알아볼까?”
두 사람은 범한이 뻔한 거짓말 중이란 걸 알았다. 그래도 은근히 기쁜 마음에 계속 재잘대기 시작했다.
“일석거로 가서 식사나 하고 와요!”
임완아가 마차에 계속 앉아 있기 힘든지 의견을 내놓았다.
“3층에 있는 조용한 방으로 잡아 달라고 하면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거기에서는 경치 감상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마차는 때마침 일석거 앞에 와 있었다. 차창을 통해 밖을 보고 있던 범한에게 경도로 와 처음 거리 구경에 나섰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누이, 아우와 함께 일석거에서 식사를 했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잊어버려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기개니 풍격 같은 걸 얘기한 거 같기는 한데. 검은 주먹으로 곽보곤을 때려눕힌 건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건물 아래서는 어느 친절한 중년 아낙이 해적판 《석두기》를 팔고 있었고 말이다.
곽씨 가문은 이미 자기 때문에 망한 상태였다. 예부 상서 곽유지가 춘시 부정 사건으로 감옥에서 목매달아 죽었다. 한데 그 사건은 연좌 죄가 아니어서 공자 곽보곤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범한으로서는 알지 못했다.
범한은 아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유감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일석거라······ 아래층에 책 파는 판매대가 있었는데 왜 안 보이는 거지?”
범약약이 범한을 쓱 쳐다보고는 작은 소리로 일러 주었다.
“오라버니, 담박서국을 연 후 사철이가 그 사람들을 찾아내 관아에 엄히 조사를 받도록 해서 경도 거리에 책을 파는 판매대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범한이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불현듯 아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애초에 정품 도서와 해적판 도서가 함께 나오면 해적판을 파는 장사꾼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금쯤이면 아우가 북제에 있을 거란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했다.
“사철이가 다음 달 초면 상경에 도착하겠구나.”
마차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임완아는 범약약과 잠시 마주 보더니 한참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북쪽은 춥다던데 옷이나 제대로 챙겨 갔을지 걱정이네요.”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엷게 웃었다.
“그 일은 그만 신경 써요. 그 애도 이제 열네 살이에요. 그러니 자기 몸 하나는 알아서 잘 돌볼 거예요.”
말은 이렇게 했어도 범한은 마음이 편치 않았고 2 황자를 향한 악감정이 오히려 더 강해져 버렸다. 이에 다시 일석거를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최씨 집안이 장사하는 곳이에요. 둘째에게 은전을 대는 곳이죠. 그러니 저곳 장사에 보탬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임완아는 더 이상 말하기가 거북스러웠다. 그래도 2 황자는 그녀와 어려서부터 근 십 년 동안 황궁에서 함께 자란 사이였으니 말이다. 이에 상공과 사촌 오라버니가 싸우게 되자 임완아는 조용히 속으로만 상공을 지지하던 터였다. 이에 사촌 오라버니에 대해 악담을 하기도 뭐하고 순간 분위기도 갑갑해지고 하자 임완아는 헤헤헤 웃었다.
“저들 장사에 보탬이 되고 싶지 않다면 우리 집안 장사에는 보탬이 되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임완아가 눈을 또르르 굴리고는 농담처럼 말했다.
“우리 포월루에 가요!”
* * *
아내와 누이를 데리고 포월루에? 아내의 제안에 범한은 하마터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이에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정색했다.
“포월루는 내가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천립 거지요.”
그러자 임완아가 눈을 홉떴다.
“눈속임인 거 다 알고 있어요. 더군다나 상공이 기생집을 연다 했을 때 내가 반대하지도 않았잖아요.”
옆에 있는 범약약은 고개를 돌리고 숙인 채 애써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범한이 눈썹을 씰룩이고는 웃었다.
“그게 어찌 내가 연 기생집이랍니까? 내가 아우 녀석이 싼 똥을 치우는 중인 거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임완아가 고집을 부렸다.
“어찌 되었든 우리 집안에서 하는 장사이고 상공도 그곳 음식이 경도 최고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아가씨를 끼고 놀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식사나 하고 오자는 건데 뭘 그리 벌벌 떠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우리 집안에서 장사하는 곳에 가면 상공이 꾀병을 부리더니 거리를 쏘다녔다는 소문도 나지 않을 거고요.”
그러자 범한이 단호히 거절했다.
“그곳 음식이 드시고 싶은 거면 내, 기루 주방장에게 음식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오라고 하리다. 어찌 아낙네가 기생집에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게 가당키나 하답니까?”
임완아가 장난스럽게 혀를 쏙 내밀었다.
“거기에서 저택까지 음식을 가져오면 식어서 맛이 없습니다.”
범한이 불편한 기색으로 받아쳤다.
“그러면 주방장을 집으로 불러올게요. 이러면 됐지요?”
상공이 고집을 부리자 임완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포월루에 가보고 싶었는데. 도련님이 얼마나 잘 꾸며 놨는지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러고는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말을 이어 갔다.
“사실은 말이죠, 그런 데는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범약약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왕 나온 김에 가보는 게······.”
이에 범한이 무어라 대답을 하려 하자 범약약은 말할 기회를 가로채 버렸다.
“아낙네가 기생집에 앉아 있는 게 이상한 거라면 설마 오라버니 같은 어르신들이 가서 앉아 있는 건 말이 된다는 건가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창틀에 턱을 기대며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상문 낭자에게 포월루 장사를 맡겼잖아요. 그녀의 노랫가락을 못 들은 지 정말 오래되었어요. 오라버니 말씀에 따라 포월루에 가지 않으면 그녀의 노래는 영영 못 듣게 되는 거겠죠?”
아가씨가 자기 말에 힘을 보태 주자 한껏 기가 산 임완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범한에게 다시 부탁했다.
“내가 상문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거 다 알잖아요. 오랫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고 몹쓸 도련님이 포월루로 빼앗아 가서 그런 거였군요. 이렇게 된 거 포월루에 데려가 줘요!”
범약약이 옆에서 거들었다.
“사내들이 가는 데라고 해서 우리라고 못 갈 게 뭐 있겠습니까?”
범한은 순간 말문이 막혀 어디 두고 보자는 표정으로 누이를 몇 번 쳐다보았다. 이 아이가 갈수록 대담해지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제는 생각하는 방식이 이 세상 여자들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니. 앞서 한 말들만 봐도 누이의 말은 임완아보다 훨씬 당당하고, 조리 있고, 여권 의식 면에서도 많이 신장되어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다 자신이 어릴 때 해놓은 교육 때문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누이가 비범한 기질을 드러내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가봐도 괜찮긴 하겠네. 두 사람 다 알다시피 나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걸 좋아하는 놈이니 말이니까요. 한데······ 최근 경도가 좀 시끄러워서 언관들에게 더 많은 꼬투리를 제공해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거든요.”
범한이 진지하게 나오자 그간 사정을 다 알고 있던 임완아와 범약약은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상에 이럴 수가! 앞쪽 멀지 않은 곳에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맑고 수려하기까지 한 포월루가 눈에 들어왔다. 범한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고는 마차를 몰고 있는 등자경을 혼냈다.
“아니, 여기로 오면 어떻게 하는가! 여주인들만 챙기고 어째 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해주는 거냔 말일세! 동해군으로 가서 벼슬아치 될 생각은 없었나 보군! 집에서 내게 몇 번이나 청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인가?”
그러자 등자경은 별말 없이 충직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러자 임완아와 범약약도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사남 백작가의 마차가 포월루에 당도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범한인 걸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포월루의 똑똑한 안내인들은 공손히 행동했다. 경도부에서 고문을 받아 3층에서 쉬고 있던 석청아도 절뚝거리며 내려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차 안에서 중병을 앓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범한 제사가 나오자 순간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마차에 있던 두 규수는 말로만 듣던 유명한 젊은 기생 어미를 보자 왠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상문이 다른 댁으로 노래를 부르러 가 있어서 지금 포월루에 없다는 걸 알고는 이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핑곗거리가 사라져 범한이 자신들을 포월루에 들여보내 줄 리 만무했으니 두 사람은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문은 자유의 몸이 아닌가. 게다가 감찰원에도 들어갔으니 경도에 있는 다른 왕공 귀족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런데 무엇 하러 직접 찾아가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거지? 대체 어느 댁이기에 상문이 직접 나서서 체면까지 세워 줘야 한단 말인가.
마차가 포월루를 떠났다. 시무룩해져 있는 두 여인을 향해 범한이 웃는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왕 놀러 나온 거 즐겁게 보내자고요. 포월루가 경도에서 제일 호화로운 곳은 아니에요. 여기 주방에서 만든 음식이 천하에서 제일 맛있는 것도 아니고요.”
범한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임완아가 끼어들었다.
“속일 생각 말아요. 요즘 포월루의 명성은 정말로 대단하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아니라고 한다면······ 상공이 말한 그곳은 황궁일 거예요.”
임완아가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마마님들 뵈러 황궁에 가는 것도 괜찮은 생각 같아요. 어찌 되었든 한동안 못 뵈었잖아요. 한데 상공은 황궁에 들어가면 꾀병인 걸 황제 폐하께 들킬 텐데. 황제 폐하께서 진노하시겠지요?”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임완아의 코를 비틀었다.
“나를 저주하시는구려. 내가 어딘가로 데려갈 건데 거기가 황궁보다 훨씬 편할 거예요. 음식도 어선방에서 만든 것만큼 맛있답니다.”
두 낭자는 순간 천하에서 황궁보다 더 호화로운 곳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며 놀라워했다. 황궁 상단 소속인 소금 장수들이라면 모를까. 이들 외 다른 누구도 황궁보다 더 호화롭게 해놓고 살 용기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298화
마차는 경도 남문 쪽으로 오더니 곧장 외곽으로 나갔다. 인적이 드문 곳이다 보니 그동안 음지에서 범한을 호위하던 계년조 밀정들과 사남 백작가 호위 무사들은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뻘쭘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차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장이 불편한 기색이기는 해도 뒤를 따르자 이들도 곧장 그 뒤를 따라갔다. 마차는 경도 외곽의 어느 조용하고 자그마한 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산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산길은 전혀 좁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여전히 경국의 1급 공식 도로가 깔려 있었다. 길옆으로 펼쳐진 깊고 그윽한 숲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랗게 변한 풀들 사이로 여기저기 아직도 들꽃이 남아 있었다. 초지 위에 서 있는 흰 나무껍질이 인상적인 나무에는 여전히 파릇파릇한 나뭇잎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들 뒤로는 무수한 층을 이룬 색상들이 풍부한 색채감을 뽐내고 있었다. 화공이 그려 놓은 듯 산림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어 참으로 아름다웠다.
임완아와 범약약에게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나 풍경이 멋진 곳이 있었다니. 그런데 왜 이제까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거지? 과거 교외로 소풍을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곳에는 처음이었다. 이치대로라면 이렇게나 풍광이 멋진 곳에는 일찌감치 황궁이나 고위 관료의 별장이 들어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곳의 땅 주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거지? 하지만 산길의 폭만 봐도 어느 정도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잠시 후면 누군가의 별장으로 가게 될 거란 걸. 그것도 분명 대단한 인물이 사는 별장에 말이다.
그런데도 범한이 여전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자 두 여인은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이에 입을 닫아걸고 범한에게 한마디 걸지 않은 채 주변 경관을 감상했다.
산길이 끝나 갈 무렵, 마차가 말 머리를 돌려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무척 넓은 장원이 펼쳐졌다. 도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갑자기 운무가 사라지며 신선이 사는 곳이 범인들의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장원 건물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배치가 좋았고 정원에 있는 관목, 푸른 바닥 석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처마 끝에 달린 빗장까지 섬세하게 신경 써 수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황궁과 비교해 어떤가요?”
범한이 웃으며 물었다.
임완아가 놀라 떡 벌어졌던 입을 다물며 조소하듯 말했다.
“······이 역시 괜찮군요. 한데 우리 집안 장원도 아닌데 뭘 그리 득의양양해하는 것입니까?”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곳 주인이 나중에 이곳을 내게 물려준다 하였습니다. 한데 나는 여기가 평범해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에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범약약이 깜짝 놀라 물었다.
“여기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여인들이 너무 많거든.”
범한이 정색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장원에 절세미인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있거든.”
* * *
두 여인이 놀란 건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가 범한의 지시에 멈추어 섰다. 범한은 여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 후 갑자기 허리에서 제사 패를 꺼내 들어 옆에 있는 풀 더미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무슨 변장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풀더미 속에서 사람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그 사람은 산골에서 흔히 보는 나무꾼 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나무꾼이 제사 패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다시 범한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무척 미안한 기색을 내보였다.
“대인, 반드시 걸쳐야 하는 절차였습니다. 그러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괜찮네.”
범한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마차 안에 내 처와 누이도 있네.”
그러자 나무꾼 복장의 사람은 다른 말 없이 공손히 뒤로 물러나 눈에 띄지 않는 새로운 잠복 지점을 찾아 들어갔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 장원으로 들어가는 내내 정말 고요했다. 마차에 있는 여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곳이 황궁만큼 경계가 삼엄하고 걸음걸음마다 암기가 숨어 있음을 말이다. 이곳은 군대라 할지라도 작은 규모 정도는 쳐들어와도 무참히 패하고 돌아갈 정도로 방비가 잘되어 있었다.
물론 냉철한 지혜를 지닌 총명한 두 여인은 이 순간 산장 주인이 누구인지 유추해 낸 상태였다.
황궁 내 최고위급만큼 누릴 수 있는 자, 이런 멋진 장원에서 살 수 있는 자 그리고 이리 삼엄한 방비를 할 수 있는 자. 감찰원 주인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뒤쪽에서 마차를 호위하던 사람들은 이미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춘 상태였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각자 편한 방식대로 휴식을 취했다. 이곳까지 온 이상 자신들이 호위 무사 노릇을 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오늘 계년조의 대장을 맡은 이는 소문무였다. 그가 사남 백작가의 호위 무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호위 무사 대장이 어색하게 답례를 했다.
“분수를 지켜야겠죠!”
소문무가 길 맞은편 사람을 향해 말을 이어 갔다.
“우리 같은 사람이 원장 대인의 정원에 이렇게나 가까이 와보게 된 것도, 이게 다 범한 제사 대인을 따른 복 아니겠소이까.”
“그렇고말고요.”
시위대 대장이 부러운 눈길로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장원을 잠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런 후 풀숲 양쪽으로 늘어서서 앉아 풀을 씹거나, 멍하니 있거나, 무료하게 그냥 있거나, 하늘을 보거나, 하품을 하거나 했다.
* * *
이 아름다운 장원에 사는 이는 진평평이었다. 경국에서 황제 폐하를 빼고 최대 권력을 누리는 늙은 절름발이 말이다. 일반 문무백관들과 달리 진평평은 경국 조정에서 대단히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병을 핑계로 조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에 꽤 여러 해 동안 성 밖에 있는 장원에서 생활하며 경도성 내에 있는 저택에서는 거의 생활하지 않았다.
오늘, 꾀병 중인 범한이 오랫동안 꾀병을 앓고 있는 진평평을 만나러 왔다. 그는 이전에 몇 차례 방문한 적 있어 헤매지 않고 곧장 정원 문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정원 문 앞 편액에는 진평평의 정원이란 뜻으로 ‘진원(陳園)’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데 이는 선대 황제의 친필이어서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문밖에 서 있는 마차가 눈에 들어오자 범한은 그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늘 이곳에 손님이 와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때문이었다. 진평평의 고독을 즐기는 성정과 감찰원을 이끌며 생긴 극악무도한 명성을 고려하면, 일반 조정 대신이 이곳까지 와 차를 마실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이곳까지 찾아온 손님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임완아가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른 마차를 보는 순간 그곳에 있는 표식을 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황가에서 왔군요.”
범한이 놀라서 살짝 긴장했다.
진원 입구에 있던 나이 든 가솔이 서둘러 계단에서 내려와 범한 일행을 맞았다. 그는 여기 있는 이 젊은 대인이 일반 관원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진평평 원장 대인께서 가장 아기는 후배이자 그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감히 거들먹거리지 못하고 아주 공손하게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화친왕과 추밀원 소진 대인이 와 계십니다.”
범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1 황자와 소진이라고? 그는 소진 대인이 지금 중서성에서 국정을 논의하고 있으며 이미 추밀원의 중요 대신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소진 위에 노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노진은 나이 든 진씨란 뜻으로 바로 전 군사원 원장이자 현재 추밀원 정사인 진 장군을 뜻했다. 그는 현재 경국군 측의 가장 핵심 세력이었다. 1 황자는 서역에서 몇 년 동안 전투를 벌였으니 진씨 가문과는 깊이 관계를 맺고 있을 터.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진평평의 장원까지 대체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
범한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일단 돌계단 아래쪽에 서서 상대방의 이번 방문이 자신과 관련이 있을지부터 생각해 보았다. 군 측과 감찰원 관계가 줄곧 좋았다고는 해도 이번 방문은 조금 이상했다.
범한이 웃었다. 자신이 성 외곽으로 나온 일이, 게다가 아내와 누이까지 대동하고 진평평 원장 대인의 진원에 왔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는 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대신 1 황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까지 왔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이 흐르는 곳에 지어진 호화롭고 아름다운 정자를 지나 드디어 진평평 원장 대인의 손님맞이용 대청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인장에게 통보하는 절차도 거치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원래는 아무것도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한쪽 구석에서 한껏 불안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상문 낭자를 보며 범한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경도에서 감히 상문을 데려와 노래 부르게 할 수 있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겠습니까!”
포월루에 없던 상문이 진원에 와 있었다.
상문은 포월루의 관리인이었고 감찰원에서 새로 들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진평평이 불러다가 노래를 부르게 한 건 말 한마디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웃음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상석에 앉아 있던 진평평이 웃는지 아닌지 모를 표정으로 눈을 들어 갑자기 들이닥친 청춘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언제나 싸늘하기만 한 그의 눈동자에 따스함이 어리었다. 그가 늘 다리를 덮고 있던 회색 양털 담요에 비쩍 말라붙은 양손을 가볍게 비비며 웃는 얼굴로 꾸짖었다.
“여기에 여인이 많다고 싫어하지 않았더냐! 한데 오늘은 어찌 이렇게 온 것이냐! 그리고 오려면 그냥 올 것이지 어째서 마누라며 누이까지 줄줄이 달고 온 게야? 설마 내가 여자들이라도 불러다 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손님 석에 앉아 있던 두 젊은이가 흠칫 놀라고는 고개를 돌려 대청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일순간 멍하니 있었다. 어느덧 상문도 노래를 멈추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과 두 여인에게 예절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잠시 후 평복 차림이지만 여전히 군인 특유의 기질이 남아 있는 젊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우선 예의를 차려 범한 뒤쪽에 있는 임완아에게 인사를 하더니 이어 범약약에게도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후 얼굴에 미소를 활짝 머금었다.
“작은 범 대인 아니오.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범한은 진항과 만난 적 있었다. 잘나가는 가문 출신에 황제 폐하의 총애도 받고 있어 경국 조정에 신예로 떠오른, 꽤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다. 범한이 그에게 두 손을 모아 가슴까지 올리고 예절 바르게 인사를 했다.
“소진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현재 진항의 품계는 범한보다 위였지만 양측은 서로가 지닌 권세와 지위의 크기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형식적인 인사로 장난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진항이 따스하게 웃었다.
“오늘 원장 대인을 뵈러 왔는데 제사 대인까지 만나게 될 줄이야. 이 진 아무개 운이 참으로 좋군요.”
자신을 맞아 주는 진항의 미소가 가식적이지 않아 범한은 마음 편히 대답했다.
“나중에 서로 가식적으로 대하느니,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이참에 같이 제대로 몇 잔 하시지요.”
그러자 진항이 크게 웃었다.
“제사 대인은 과연 묘한 사람이군요. 남들은 생각도 못 한 행동을 다 하고 말입니다. 한데 즐겁게 술을 마시려면 재미 삼아 몇 마디 하는 것도 못 하겠네요그려.”
범한이 상석에 앉아 있는 진평평을 슬쩍 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랫사람인 우리 입장에서 술자리 분위기는 주인장께서 좋은 술을 내어 주시느냐 마느냐에 달렸겠지요.”
그러자 진평평이 범한을 꾸짖었다.
“네 녀석이 이 늙은이보다 부자이지 않더냐!”
299화
진항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 놀라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범한이 감찰원에서 잘나가는 건 황제 폐하께서 총애하시고 끌어 주셔서라고 대신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두려워하는 진평평 원장 대인과 대화를 나누는 범한을 보면 놀랍게도 ‘어쩜 이리도 위아래도 없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진평평 원장 대인은 자연스럽게 받아 주어 진항으로서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보니 원장 대인과 범한 제사의 관계는······ 역시나 예사 관계가 아니었다.
황제 폐하의 총애가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감찰원을 장악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진평평 원장의 태도였다. 그렇기에 바로 이 순간, 진항은 범한이란 젊은이가 언젠가는 감찰원을 거머쥐게 될 거란 걸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군 측은······ 이자와 더 빨리 친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서(@성) 회의에서 범한 대인을 거들기 위해 좋은 말을 하는 정도에서 그칠 게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라도 재차 사남 백작가에 호의를 보여야 했다.
불과 몇 마디 대화였지만 서로 간에 쓸모 있는 정보들이 제법 많이 오갔다. 범한도 지금 이 대화로 진평평 원장 대인의 태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군 측에게 자신의 가장 진실한 태도를 보여 주고 주변 여건들을 더 강화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계절과 관련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었다. 그러다 범한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그제야 1 황자를 향해 예를 갖추어 인사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도리를 따진다면 범한은 정말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1 황자와 처음 만났을 때 소란을 피운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항은 1 황자와 친한 사이여서 범한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 진평평 원장은 황궁 내 예절 따위는 개나 줘버릴 것으로 여겼으므로 지금 이 상황은 아예 신경도 안 썼다.
범한은 1 황자가 자신에게 화를 내리라 생각하며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하마터면 화를 내는 건 자신이 될 뻔했다. 부인 임완아가 눈웃음을 활짝 지은 채 사근사근한 태도로 1 황자 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였다.
이런, 부인! 임완아는 어려서부터 영 재인의 궁에서 지냈고 1 황자는 그녀가 자라는 걸 보아 왔으니, 범한도 알다시피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남매와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범한은 불쑥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더욱 불쾌했던 건 아랫자리에 앉은 누이 약약마저도 1 황자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다는 점이었다.
범한이 귀를 쫑긋 세우고 두어 마디 엿들었다. 1 황자가 서역 정벌을 나섰을 때 오랑캐들과 싸웠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국 사람들은 무를 숭상했다. 1 황자는 여러 해 동안 서쪽에서 전투를 치러 왔으므로 민간에서 그는 영웅이자 우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임완아와 범약약의 생각도 일반 백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범한은 지금 이 상황이 마뜩지가 않아 입이 써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 몸께서는······ 이 몸께서는······ 이 몸께서는 평화주의자란 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당장 누구랑 몇 판 붙어 두 사람에게 내 진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 줬을 거라고!’
범한은 씁쓸했지만 그런 기분을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자연스럽게 1 황자에게 예를 차려 인사를 올렸다.
“하관 범한, 1 황자마마를······ 이런, 화친왕을 뵈옵니다.”
1 황자가 범한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좀 답답했는데 범한의 말투 때문에 결국에는 몇 마디 늘어놓고 말았다.
“이보게, 범한. 본왕이 대체 자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가? 이렇게 만났는데 본왕에게 몇 마디 쏘아붙이지 못해 기분이 나쁜 건 아닌가 모르겠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임완아에게 말했다.
“신아야, 네 상공은······ 진짜 별로구나.”
임완아는 1 황자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터라 자신의 남편이 그의 눈에 찰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탁자 위에 있던 과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겨우 한 번 만나 보시고는 어찌 매제에 대해 다 안다 하십니까?”
범한은 매제란 단어가 너무 마음에 들어 웃었다. 그런 후 범약약보다 아랫자리로 가서 앉았다. 진원의 종들은 이미 뜨거운 손수건이며 차 등을 범한에게 가져다준 상태였다.
1 황자와 진항이 늙은 절름발이를 찾아온 건 중요한 일이 있어서일 터. 물론 범한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바로 대청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저들에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임완아도 사절단과 1 황자의 군인들이 경도성 밖에서 길을 두고 다툰 일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범한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보기에 그 일은 사실 범한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2 황자의 목표물이 된 상태이니 1 황자에게까지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 더군다나 임완아는 자신과 가장 친한 1 황자가 상공과 충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이에 무의식적으로 사이에 끼어들어 둘의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하려 애썼다.
임완아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본래 배알이 뒤틀리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에 1 황자는 시선을 돌린 채 범한을 상대하지 않았다. 한편 범한은 배시시 웃는 얼굴로 진항하고만 대화를 나누었다. 연로한 진 장군께서 몸은 좀 어떠신지 묻기도 하고 언제 시간 내서 뵈러 가야겠다는 등의 말을 건네며 말이다.
진평평은 바퀴 의자에 반쯤 몸을 기대앉아 어찌 보면 잠든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이렇게 호화로운 곳에 살면서 푹신하고 긴 의자에 편히 있는 게 아니라 계속 바퀴 달린 의자에만 앉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임완아도 어쩔 수 없었는지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옆에 있던 범약약이 웃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활약한 1 황자 그리고 조정에서 가장 잘나가는 젊은 대신이 어린 사내아이들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그녀에게는 익살스럽게 와닿았다.
드디어 진항도 범한과 더 이상 말할 거리가 없어질 무렵, 1 황자가 갑자기 싸늘하게 말했다.
“듣기로는 범한 제사가 최근 와병 중이라 조회에도 못 나온다던데. 도찰원이 탄핵을 했는데도 자기 변론을 하지 않았다지? 한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예까지 놀러 온 건지······.”
그러자 범한이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내일 조회에 나갈 것입니다. 내일, 바로 내일 말입니다!”
진항이 깜짝 놀라 생각했다.
‘설마 이제 아픈 척은 그만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내일 조회에서 한바탕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겠군. 그런데······ 1 황자마마께 예까지 끌려와 말하려던 건, 범한 자네의 체면을 봐서라도 말하기 쉽지 않군.’
그는 원래 하고자 하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1 황자는 광명정대한 사람인지라 회피하지 않고 진평평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숙부, 둘째 일은 숙부께서 말 좀 해주세요.”
그가 고개를 갸우뚱한 채 범한을 잠시 쓱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조정에서의 일은 나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하지만 경도에서 떠도는 소문들이 너무 황당하네요. 게다가 둘째 밑에 있는 관원 중 몇몇은 정말 재능이 출중한 자들이에요. 그러니 이렇게 두었다가는 조정 입장에서는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항은 속으로 ‘황자마마께서는 악당이셨군요! 범한 제사를 앞에 두고 대놓고 그의 체면을 깎으시다니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바로 안면몰수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원장 대인, 황제 폐하께서도 줄곧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나서지 않으셔서 일이 더 커지면 조정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너무나도 광명정대한 행동에 범한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1 황자와 진항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명확히 드러낸 것이었다. 2 황자 파가 감찰원에 의해 궁지에 몰려 직접 나서기 힘드니 자신의 큰형님에게 대신 나서 달라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고 1 황자는 진평평에게 찾아올 때 추밀원을 맡고 있는 진씨 가문까지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야말로 자기 결점은 감추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진평평이 범한에게 멈추라고 지시한다면 범한도 따를 수밖에 없을 터이니.
그런데 범한으로서는 이미 취해야 할 이득은 모두 취한 상태였다. 경도 부윤을 제거했고, 6부에 있는 2 황자 파 관원들은 정도가 크든 작든 전부 손해를 입었다. 그리고 범한에게 그런 사실들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1 황자가 앞서 꺼냈던 호칭만 마음에 담아 두고 신경 쓰는 중이었다.
진평평의 실력이 아무리 헤아릴 수 없다 해도 또한 그가 아무리 황제 폐하와 친근한 사이라 해도 당당한 1 황자가 그를 숙부라 부르는 건 예법상 맞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이 단어를 듣게 된다면 놀라 까무러치며 물을 게 뻔했다. ‘황자님 숙부가 누구시라고요? 정왕이시지, 일개 대신이면 안 되죠!’라고 말이다.
범한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진평평이 생기 없는 두 눈을 뜨고 작게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했다.
“둘째 일은 이따가 다시 말하지요. 그러니 제 말은······.”
그가 임완아와 범약약을 가리키며 기침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콜록콜록, 두 사람은 내 장원에 처음 발을 들여 놓고 어찌하여 주인에게는 인사도 건네지 않는 건가요?”
사실 진평평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떠도는 수많은 소문을 통해 진평평은 행실이 불량한 한밤의 마귀 같은 인물로 거듭나 있었다. 그러니 임완아와 범약약은 제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해도 경국의 어둠을 이끄는 수장 앞에서는 두려움이 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1 황자 곁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다 지금 와서 노인네가 말을 꺼내자 임완아와 범약약은 난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평평 앞으로 나아가 후배로서의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진평평이 잠시 웃었다.
“뭐 무서울 게 있다고! 그대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보다 더 나을 것도 없거늘.”
당연히 장 공주와 늙고 교활한 간신 범건 상서를 이르는 말이었다. 진평평 원장이 1 황자에게 말했다.
“황자께서 말씀하신 일은 당사자가 이 자리에 있으니 직접 말씀해 보시지요. 그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군주 마마, 범 낭자, 이 노인을 대신해 의자 좀 밀어 주구려. 이 늙은이가 진원에 있는 진귀한 것들을 보여 주고 싶어 그러오.”
두 여인과 상문이 늙은 절름발이의 바퀴 의자를 밀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대청에 남은 범한, 1 황자, 진항 세 사람은 서로를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진평평을 향한 원망을 늘어놓았다.
‘저 늙은이가 정말 너무하는군. 자기 집을 우리들의 전투장으로 내어 놓고는 자기만 예쁜 여자 셋이랑 정원 구경이나 하러 내빼고 말이야!’
진항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아버지가 군 측에서 신망받는 높은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서른 정도의 나이에 중서성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똑똑한 진항이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1 황자와 범한을 향해 두 손을 가슴팍까지 올리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급한 일이 있어 그러니 두 분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지요.”
그러고는 두 사람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태연한 걸음걸이로 대청 한쪽 구석까지 바람처럼 이동했다. 그런 후 종들의 길 안내를 받아 곧장 측간으로 가버렸다.
300화
범한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 자신이 형부 관아에서 소란을 피우던 때가 생각나서였다. 군 측을 대표해 자신을 괴롭히러 나왔던 대리사 소경이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자 소피가 마렵다는 핑계를 대고는 현장에서 도망쳤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이 수법의 최고 고수가 진씨 가문이었다니.
진항이 사라지자 대청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아 버렸다. 그러자 1 황자가 이 침묵을 깨고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진항과 나는 싸우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네. 우리 둘 다 군인이고 성격이 직선적이니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말하지. 나는 병사들이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싫다네. 경도에 있는 권문귀족들이 서로 헐뜯으면서 나라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싫고. 당쟁 같은 게 일어나면 최종적으로 누가 이기고 지든 조정 내 인재들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범한이 옷소매를 정리하고는 제자리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처럼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 후 찬바람이 쌩쌩 도는 말투로 천천히 말했다.
“화친왕께서 하신 말씀을 하관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번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왕야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사료됩니다. 군인들은 변방에서 조정을 위해 칼을 맞고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있지요. 하온데 설마······ 감찰원 관원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요? 감찰원의 밀정들은 이국 타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관이 보기에 감찰원 밀정들은 서역에서 전투 중인 장병들보다 못할 게 없지요. 우리 감찰원의 관원들이 성격 면에서 직선적이고 솔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수나 쓰도록 타고난 사람도 아닙니다. 제게 조정을 위해 북쪽에서 일하라 하신다면 저도 그것이 좋습니다만······ 만약 누군가가 저를 건드린다면 그 누군가가 조정 소속이라 할지라도 저는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1 황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자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오나 일부 이익 다툼일 뿐이니 그런 제 행동은 나라의 안녕을 저해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감찰원 제사입니다. 그런 제가 자신의 이익조차 보호할 수 없다면 어찌 조정과 황제 폐하의 이익을 보호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냉소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1 황자마마께서는 그런 말씀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이 기세등등하게 공격하고 저는 무기력하게 얻어터지는 상황이라고 해보죠. 설마 그때 가서 마마께서 저를 위해 중재자가 되어 주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1 황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가뜩이나 까무잡잡한 얼굴이 더 어두워 보였다.
“범한, 자네 본분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 주지. 자네는 일개 신하일세. 그러니 일을 할 때는
······ 분수를 지켜야 하겠지.”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다. 황자 입장에서 봤을 때 범한의 행동은 과한 면이 있었다. 신하인데도 지나치게 과감하게 행동했다. 그러니 1 황자는 범한에게 비위를 맞추는 게 좋다고 일깨워 준 것이었다. 물론 범한의 입장까지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범한에게는 자신이 처한 위치 때문에 항상 이런 말을 듣고 있던 터라 귀에 몹시 거슬렸는데 말이다.
“저는 신하입니다.”
범한이 1 황자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하온데 제가 생각하는 소위 군신 사이란, 군(君)은 황제 폐하이고 태자 마마는 장래의 황제 폐하이시니 이 두 분을 제외하면, 그러니까 1 황자마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하입니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 것이지요.”
1 황자는 살짝 당황한 모습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생각지도 못한 사람 같았다. 이에 눈을 가늘게 떠 순간 싸늘한 기운을 발사했다.
“신아를 봐서라도 자네에게 일깨워 줘야겠군. 천자의 집안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고 있어. 그건 장래에 범씨 가문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세.”
그러자 범한이 잠시 웃고는 맞받아쳤다.
“천자에게는 집안일 같은 건 없습니다. 1 황자마마께서는 설마 그 이치를 모르고 계셨습니까?”
‘천자에게 집안일 같은 건 없다’는 표현에 1 황자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내 의자 팔걸이를 내리쳐 버렸다.
그러자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원장 대인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골동품입니다. 그러니 1 황자마마, 부디 조심해서 다뤄 주시지요.”
1 황자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어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한, 어쩌면 내가 자네를 너무 얕보고 있었나 보군.”
범한이 살짝 놀라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어디부터 말입니까?”
“내 포부는 말 위에 있다네. 그러니 천하라는 무대 위에서 군대가 사방으로 멋지게 출격하려면 우리에게는 뒤에서 안정적으로 받쳐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지.”
1 황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조정이 평온하기를 바란다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서쪽 변방에서 지냈어. 하지만 조정이 조금 불안정하기는 했어도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단 말이야. 그것도 자네가 경도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일세.”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맞받아쳐야 할지 몰라서였다.
“자네는 너무 갑자기 나타났어. 그리고 너무 급격하게 컸단 말이지.”
1 황자가 범한을 바라보았다.
“조정 내 대다수 사람이 미처 준비도 하기 전에 자네 혼자서 이 균형을 깨버릴 능력을 지니게 되어 버린 거야.”
이어 1 황자가 오늘 하려던 가장 중요한 말을 꺼냈다.
“많은 사람이······ 자네가 경도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기를 바란다네. 광풍처럼 이 모든 걸 쓸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일세.”
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자신뿐만 아니라 군 측 절대다수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어서였다.
범한은 그간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담주에서 경도로 온 지 2년이 채 안 된 기간 동안 감찰원을 통제하고 시대를 풍미하는 유명 문인이 되었다. 내년에 황실 금고를 맡게 되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관료 사회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능력을 지니게 됐다. 그리고 이번 2 황자 파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보여 준 셈이었다. 이렇듯 젊은 대신이 황자까지 공격할 만한 능력을 지녔으, 관료 사회의다른 세력들은 그를 두려워할 게 뻔했다.
그러니 군 측이 하려는 말은 2 황자를 그만 봐주라는 것이었다. 이는 위협도, 천자 가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닌 일종의 탐문이었다. 훗날 감찰원을 장악하게 될 사람이 충분히 이성적인지, 경국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충분히 성의를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지금껏 군 측과 감찰원은 줄곧 격 없이 잘 지내 왔다. 심지어 경국의 군인들이 전선에서 희생을 덜 치르게 되는 것도 감찰원 지도자의 지혜와 기개가 직접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가 왜 이런 싸움을 벌이게 되었는지 황자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범한은 일부러 상대방에게 존칭을 붙여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일침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위와 같이 물었다.
1 황자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는데. 한데 이번에 범한이 물으니 이제야 그동안 감찰원은 황자 간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그리고 이런저런 가능성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는 무언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범한은 살짝 의외였다. 1 황자가 관료 사이에서 횡행하는 계략에 대해 이리도 모르다니. 그래도 범한은 여전히 빙그레 웃는 얼굴로 다시 입을 뗐다.
“그냥 화를 내본 것뿐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살짝 일깨워 주기도 할 겸 하여 한 행동입니다.”
긴 침묵 후, 1 황자가 갑자기 눈썹을 씰룩였다. 무언가 알아챈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고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둘째는 사실은 총명하다네. 이번에 자네 때문에 큰 손해를 입었지만 그에게는 경계가 되었을 것이네. 그러니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군.”
총명하기는 피차일반. 범한은 방금 한 말속에서 숨은 뜻을 알아채고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후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하관과 1 황자마마의 의도가 조금 맞아떨어진 것일 수도요. 다만 2 황자마마께서 어떤 득을 보실지는 1 황자마마께서 어찌 권고하시는가에 달린 거겠지요.”
그러자 1 황자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수긍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의심이 도져 몇 마디 했다.
“본왕은 자네가 왜 이번 일에 이리도 마음을 졸이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러자 범한이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형제인데 힘들게 환생해 황자들 간에 벌어질 황위 쟁탈전을 볼 준비를 해야 하는 거야?’
하지만 이 말만은 대놓고 할 수는 없기에 범한은 그냥 웃어넘겼다. 게다가 1 황자를 향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비록 조정에서는 1 황자가 가장 배포가 크고 무(武)에만 정신이 팔려 황위를 노리는 마음이 없다고는 해도 말이다. 그런데 저 사람도 그 빌어먹을 황제의 아들 아니던가. 그러니 속에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거겠지.
“지금 시점에는 관용을 베푸는 게 좋을 걸세.”
1 황자가 의미심장하게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2 황자를 위해 아량을 베풀라는 말을 하다니,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범한이 미소 지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2 황자를 죽여 버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1 황자의 인정에 호소한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범한의 이러한 결정은 1 황자 및 군 측의 태도를 고려한 게 아니었다. 순전히 황궁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시기에 그런 것이었다.
* * *
1 황자 입장에서는 범한이 군 측의 체면을 충분히 살려 주었으니 무어라 더 말을 할 게 없었다. 그는 둘째가 능력이나 수완이 없지는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사남 백작가가 막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범한 측에서는 이렇듯 아무런 이익이 없다면 결국에는 손을 뗄 거라 생각했다.
다만 문제는 하려던 말을 마쳤다는 것이다. 서로 데면데면한 사람들끼리 진원의 대청에 앉아 있자니 딱히 할 말도 없고 해서 순간 어색하고 썰렁한 기운만 감돌았다.
변소에 간 지 오래인데 진항은 아직도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차만 맛없어 보이게 홀짝였다. 그러다 범한이 말을 꺼냈다.
“북제 큰 공주께서는 어찌 지내십니까? 하관이 공무가 바빠 인사드리러 갈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1 황자마마, 부디 저를 대신해 인사말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료 사회에서 무엇으로 대화의 운을 떼느냐는 매우 기술적인 문제였다. 그러니 범한이 이와 같은 말을 한 건 자연히 무슨 계산이 있어서였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1 황자는 정색을 하며 범한의 말에 답을 했다.
“범한 대인이 남쪽까지 오는 동안 계속 호위를 했으니 본왕은 그 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범한은 바로 이런 점에서 대단히 뛰어났다. 적당한 화제를 골라 서로 간의 거리를 효과적으로 좁히는 것. 그리고 동시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까지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에서 말이다.
범한이 씨익 웃더니 자신을 낮추고 몇 마디 더 건넸다. 그러고는 곧장 1 황자와 함께 북제의 풍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 황자와 북제 큰 공주의 혼사는 내년 봄에 치러질 예정이었다. 지금 북제 공주는 황궁에서 기거 중이었고 1 황자와도 몇 차례 만남을 가졌다. 경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정략 관계로 맺어진 이 남녀는 서로에게 비교적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범한이 지난번에 사신단 정사로 있었으니 경국의 전통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그는 1 황자에게는 중매자였던 셈이다.
한차례 가볍게 담소를 나눈 후 범한은 1 황자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황자의 신분으로 이처럼 명쾌하고 직선적인 성정을 지녔다니 참으로 보기 드문 경우였다. 어쩌면 생모의 출신이 그다지 높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단순히 동이성 출신의 여자 포로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1 황자에게는 다른 황자나 태자처럼 뼛속 깊이 스며 있는 권위로 가득 찬 귀족의 기개보다는 꾸밈없고 정직한 면이 더 많았다.
‘완아가 1 황자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범한은 이런 생각을 하며 몸까지 1 황자 쪽으로 돌리고 그가 해주는 군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그러던 도중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301화
자신에게는 군사와 관련해서는 재능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수년간 군을 이끈 실력자 앞에서 그는 가만히 ‘침묵은 금’이란 진리를 실천으로 옮겼다.
“범한 대인은 상삼호를 만나 보았는가?”
1 황자의 얼굴에 잠시 동경하는 기색 떠올랐다. 그러고는 살짝 존경심이 담긴 흠모하는 표정을 지었다.
범한에게는 살짝 놀라웠다.
“상경성 황궁에 갔을 때 멀찍이서 한 번 뵈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인상이 남진 않았습니다.”
1 황자가 다리를 한 대 툭 치고는 범한을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경이 사람을 몰라보았군, 사람을 몰라보았어.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건만 그리 날려 버리다니.”
“네?”
범한이 눈썹을 들었다 내리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1 황자마마께서는 상삼호를 왜 그리 중히 여기시는 겁니까?”
“시대의 영웅 아닌가.”
1 황자가 시원시원하게 일갈했다. 그런 후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차갑게 말했다.
“북제 북면에 3천 리에 이르는 방어선을 혼자 힘으로 구축하신 분이네. 그로써 오랑캐들이 남하하는 걸 십여 년 동안 막았지. 또한 눈 덮인 땅에서 차례대로 기습 공격을 펼쳐 천 리를 나아가 북쪽 오랑캐의 수급 수천을 벴고. 범 대인은 몰랐나 보군. 호인과 만인이라 부르는 오랑캐는 모두 흉악하기로 유명해. 하지만 서쪽의 호인은 북쪽 만인에 비하면 아주 약한 이들이네. 본왕이 몇 년 동안 서역에서 호인이라 불리는 오랑캐들과 교전을 펼치는 동안 절실히 깨달았다네. 북제 조정이 저리도 불안정한데도 상삼호가 그리 오랫동안 버텨 준 건 실로······ 실로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란 걸 말이네.”
“안타깝군요. 상삼호는 이미 상경성으로 불려갔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1 황자마마와 사막에서 맞붙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1 황자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빛이 반짝이더니 느긋하게 말을 해나갔다.
“그런 뛰어난 장군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다니 전혀 쓸모가 없을 터인데······. 하나 훗날 정말로 국경선 부근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본왕이 아무리 그의 병법이며 영웅다운 기개를 흠모한다 할지라도, 내 배운 걸 총동원해 제대로 상대해 줄 생각이네.”
호방하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온몸에서 호방함을 발산하고 있는 1 황자를 보며 범한은 망연자실했다. 자신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방향을 잘못 잡기도 했고 또 전생의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해서 이번 생에서는 군과 전장에서 연마한 이런 호방한 기질을 가질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름의 자신감이 있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비록 상삼호의 병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그가 빗속에서 심중을 죽인 걸 보면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 결단력 하나만으로도 과연 고수는 고수였습니다.”
1 황자가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조금 이상하게 범한을 바라보았다.
“북제 진무사 지휘사 심중 말인가? 그 일에 범한 제사도 관련되어 있지 않나?”
심중의 죽음은 범한과 해당타타가 함께 모의한 계획의 첫 단계였다. 사실 경국이 어느 정도 개입했을 거라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막상 1 황자가 그 점을 콕 집어 말하니 범한은 속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어수룩한 미소를 지었다.
“마마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감찰원 사람은 은밀한 일만 처리합니다. 황자마마나 상삼호 장군처럼 무공이 뛰어나지 않아도 언제든 조정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1 황자가 한동안 범한의 두 눈을 응시하고 있다가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본왕이 자네를 얕봤다 말한 걸세. 상삼호 같은 안하무인이 범한 제사의 묘수에 걸려들어 꼭두각시 역할이나 하다니, 범한 대인의 일 처리는······ 과연······ 예측 불허일 정도로 심후하군.”
상삼호가 비 오는 거리에서 심중을 살해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항은 북제 황제와 해당타타가 정교하게 계획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범한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오해했다. 이는 범한이 더 무서운 인상을 갖게 되고 주변인으로부터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이에 범한은 뻔뻔하게도 자랑스럽게 웃으며 바로 그렇다고 맞받아쳤다.
“듣기로는······ 범한 대인이 9등급 강자라던데?”
말을 하며 1 황자가 범한을 쓱 쳐다보는데 그 눈빛에는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고는 슬며시 웃고는 대답했다.
“마마, 저는 마마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누가 이기든 모두 조정에 손실을 입히는 것이니까요.”
이는 1 황자가 앞서 중재하기 위해 꺼낸 말을 가지고 범한이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하는 동시에 질문 당사자의 입을 막아 버린 행동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범한의 교활한 대응에 1 황자는 속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무예를 좋아하는 성미 때문인지 몰라도 무력을 거의 쓰지 않는 범한과 한판 겨뤄 보고 싶었다.
“제게 훈계를 두려는 분은 많답니다.”
그러고는 이따가 변태 같은 그림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냥 어지간하면 황자마마께서는 하품이나 한번 하시고 저를 놓아주시지요.”
1 황자는 이번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원래 명랑하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황자 신분이고 또 수년 동안 군에서 지내며 호전적인 성격이 길러져서 그런지 자신에게 감히 자유롭게 대화를 걸어오는 신하는 몇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앞에 있는 범한은 성도성 밖에서 이미 만나 그런지 자신에게 공손히 행동하지 않았다. 오늘 진원에서 만나기는 했어도 범한이 이렇게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건 실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데 한술 더 떠 기분에 따라 시시덕거리고 화까지 내고. 아무리 봐도 범한은 자신을 황자로 여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1 황자가 심호흡을 했다. 세상이 그새 조금 바뀐 건지 그가 보기에 적어도 범한이란 젊은이의 주변은 이미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범한 대인은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자네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좋군.”
1 황자가 드디어 돌아온 진항을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자네가 내 체면을 생각해 주었으니 경도성 밖에서 길을 두고 다툰 일은 없던 일로 해주겠네. 다만 나중에 내가 자네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때, 병이 났다거나 소피가 마렵다는 핑계로 도망가지나 말게.”
범한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찌 그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1 황자마마께서 말씀하시니 다른 분들이 하시는 것보다 뜻깊게 다가옵니다.”
다른 분들이라 함은 당연히 황제 폐하가 낳은 다른 황자들을 이르는 것이었다.
* * *
1 황자는 진평평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성격이 괴팍한 원장 대인은 그와 같은 허례허식을 신경 쓰지 않아서였다. 그는 진항과 함께 진원을 떠났다.
진원을 떠나기 전, 진항은 범한을 진씨 가문 저택으로 초대할 날짜와 시각을 정하기 위해 잠시 범한과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경계가 삼엄한 진원 밖 산길을 지나고 또다시 풀숲에서 산적들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남 백작가의 호위 무사와 감찰원 계년조 사람들을 지나자, 1 황자는 그제야 마차 차창의 푸른 가림막을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범한이라, 과연 비범하더군.”
진항이 웃으며 말했다.
“제 부친의 뜻에 따르면 범한이 강해질수록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능력도 없는 이가 감찰원을 맡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추밀원의 나이 든 분들이 화가 나 죽으려 하겠지요. 우리 군에 있는 형제들도 좋은 날은 다 지나간 게 되는 것이고요.”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던 1 황자가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 해 만에 경도에 돌아오니 정말 적응이 안 되는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고 말이야.”
그의 근위병들은 대부분 해산해 귀환한 상태였고 서정군(西征軍)에 편제되었던 이들도 이미 해산하고 없었다. 병부에서 다른 군인들을 모아 서쪽 변방으로 보냈지만 그는 지금 경도에 남아 있었다. 북제에 있는 그 용맹한 장수와 비슷한 처지였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황자였으니 상삼호 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기는 했다.
“범 제사와 이야기를 나누신 건 어떠셨습니까?”
“괜찮았네.”
1 황자가 말을 이어 갔다.
“자네 부친은 마음을 놓아도 될 듯하네. 진평평 원장이 노진 장군에게 한 말대로 범한의 능력이면 감찰원은 지금처럼 효율적으로 운영될 것이고 군 측이 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걸세.”
진항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점은 저도 믿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보기에 범한 대인은 어쩌면 너무 과한 면이 있는 것 같아······.”
“범한 대인이란 자는 용의주도한 사람입니다. 타국 사람과도 교류할 정도이고 무공 실력도 9등급이라는 초강자의 경지에 들어섰고요. 감찰원 업무도 확실히 장악하고 있고······ 아, 시선이란 신분도 있었군요. 장묵한 대가로부터 서책을 증여받아 문인의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그리고 장래에 감찰원 원장이 될 것이고······ 그리고 이게 다 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진항이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런 사람은 이제껏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진평평 원장보다 더 멀리 갈 것 같습니다.”
그러자 1 황자가 탄식했다.
“내년에 그가 황실의 금고를 쥐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한데 이렇게까지 첨예하게 대립하면 천하 사람들의 주목과 공격을 한 몸에 받게 될 터인데. 대체 부황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황제 폐하가 언급되자 진항으로서는 불편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1 황자가 웃으며 그를 쓱 바라보더니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범한은 아직 젊지 않은가. 더군다나 원장 대인과 비교하면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네. 어쩌면 그이도 잘 알고 있을지 모르지. 그래서 이번에 둘째 일을 가지고 위세를 부리며 세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거라네. 자신의 약점을 누구보다 먼저 보호하기 위해서 말일세.”
“무슨 약점 말입니까?”
진항이 궁금해했다.
“그의 생각 방식은 무언가에 얽매여 있더군.”
1 황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엄숙하게 말을 이어 갔다.
“숙부님과는 달랐어. 숙부님은 자식이 없어. 부모님도 일찌감치 돌아가셨고 친척도 하나 없지. 진정한 친구라 할 만한 이도 없고. 진원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기는 해도 그중에서 진짜 마음을 준 여인도 없지. 그야말로 그냥 고독한 나무 그 자체랄까, 적들이 숙부님을 무너뜨릴 수 없는 이유는 숙부님의 약점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어서지. 하지만 범한은 달라. 아내도 있고, 누이도 있고, 가족과 친구도 있고······. 이 모든 게 그에게는약점인 거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했다. 경국 사람 중에 진평평이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론 황제 폐하 한 사람 빼고 다른 누가 있는지 그 점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혈육도, 친구도, 사랑하는 이도 없는 삶이라니······ 사는 게 분명 고역일 것입니다.”
진항은 인생을 아직 많이 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런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암담했다.
“원장은 참으로 대단해.”
1 황자가 얼굴에 존경심을 띠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이 그러한 경지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 * *
진원에서는 노랫소리와 악기 소리가 무기력한 구름처럼 나른하게 흘러나와 공중으로 흩어져 나가고 있었다. 십여 명의 화려하게 차려입은 미인들이 호수 위에 마련된 누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바퀴 의자에 앉아 있던 진평평은 임완아와 범약약과 함께 만족한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상문은 금을 품에 안고 춤을 추는 여인들을 위해 곡을 연주했다.
이처럼 왕과 제후처럼 마음 편하게 자유롭게 사는 중인데 마차를 타고 떠나는 경국군 측의 두 젊은이는 진평평의 이런 삶을 동정하고 있다니.
범한이 걸어오자 진평평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가무가 멈추고 한 여인이 조심스레 임완아, 범약약, 상문을 데리고 뒤쪽으로 가려 했다. 범한이 진평평과 나눌 이야기가 있음을 아는 임완아는 일단 자리를 떠나기 전, 잠시 범한을 바라보며 1 황자 오라버니와 이야기를 나눈 건 어떠했는지 물으려 했다.
범한이 아내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후 진평평의 등 쪽으로 가 자연스럽게 두 손을 바퀴 의자 위에 놓고는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진평평이 말라비틀어진 손을 들어 정원 동쪽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302화
범한이 조용히 바퀴 의자를 밀고 갔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지만 가을 햇살은 싸늘했다. 숲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이 바퀴 의자와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의자의 둥근 바퀴가 소리를 내며 그림자를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대인을 숙부님이라고 부르더군요.”
범한이 바퀴 의자를 밀고 나무들이 성글게 서 있는 숲으로 갔다. 잎이 얼마 남지 않은 숲에 들어서자 발걸음을 늦추고 웃으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도찰원에게 탄핵당할까 무섭지 않으십니까? 그건 큰 죄입니다.”
“너는 도찰원에게 탄핵당할까 무섭지 않은 것이냐? 내게 이득이 되는 일도 아닌데 뭘 그러느냐. 그깟 일로 나를 탄핵한 상주문이 남아 있다면 아마 황제 폐하의 어서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니라.”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이란 말입니까?”
범한이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진평평이 고개를 돌려 범한을 잠시 노려보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영 재인께서는 과거에 동이족 여자 포로셨다. 당시 북벌 때 황제 폐하께서 하마터면 북방 산하에서 돌아가실 뻔하셨지. 한데 영 재인께서 성심성의껏 돌본 덕에 살아나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로 1 황자께서 태어나셨고.”
범한은 이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당시 황제 폐하께서 궁지에 몰렸을 때였다. 지금 여기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비쩍 마른 노인이 흑기를 이끌고 나타나 황제 폐하를 북쪽에서 구했다고. 일련의 일들을 생각해 보니 범한은 이제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대인과 영 재인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으셨군요?”
“구사일생으로 겨우 돌아오는 길이었다. 처참한 상황이었다 할 수 있었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인상은 훨씬 심각했지만 말이다. 나중에는 자연스레 조금 친해질 수밖에 없었어.”
진평평이 계속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때 포로까지 데리고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 재인께서 머리가 잘려 나가게 될 뻔했을 때 내가 한마디 했지. 어쩌면 그 일을 기억하고 계셔서 그분이 지금까지 나를 존중해 주시는 것 같구나.”
범한이 신이 나서 말했다.
“이제 보니 대인은 영 재인마마의 생명의 은인이었군요.”
진평평이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느릿느릿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그때 다치셨는데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셨단다. 그때 몸을 문질러 주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은······ 어찌 되었든 섬세한 여인이 해야만 했어.”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영 재인께서 입궁하셨을 때 풍파가 일었지. 그때 황제 폐하께서는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시기 전이었거든. 그런 상황에서 동이족 포로인 여인이 입궁하자 황태후마마께서 기분이 상하셨던 게다.”
범한이 물었다.
“그러면 그때 대인이 영 재인마마를 도와드린 건가요?”
진평평이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얼굴에 여러 개의 주름이 질 정도로.
“그때 내가 한 말은 지금처럼 힘을 쓰지는 못했단다. 그때 아가씨께서 말씀을 해주신 덕분에 영 재인께서 입궁하실 수 있었어.”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였군요. 제 어머니는 참견하는 걸 좋아하셨군요.”
“참견하는 거 참 좋아하셨지.”
진평평이 갑자기 머뭇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건 참견이라 할 수 없었어. 아무래도 그분이 나서 주셔야 황제 폐하께서 혼인할 결심을 하도록 만들 수 있었거든!”
범한이 옆에서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나이 든 분들의 사랑 이야기라니 그냥 안 들으렵니다.”
“똑똑히 들어 두어라.”
진평평이 음침하게 웃었다.
“적어도 황궁에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 정도 있다는 건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 재인께서요?”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주 옛날에 은혜를 입은 일인데 지금까지 효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진평평이 말했다.
“동이족 여자이니라. 결단력 있는 성정에 원수와 은혜는 확실히 구분하는. 더군다나 13년 전에 아가씨를 위해 복수할 때도 그분께서 큰 힘이 되어 주셨다. 그래서 그 일로 황태후마마께 밉보여서 재인으로 품계가 내려가셨어. 그리고 지금까지도 예전 품계로 돌아가지 못하시는 거고.”
“1 황자마마께서 황위를 두고 다툴 마음이 없는 거 확신하십니까?”
그러자 진평평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총명하신 분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도망가는 편을 택한 거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영 재인께서 1 황자마마를 교육하셨기에 둘째나 태자마마보다는 성격이 훨씬 시원시원한 거란다.”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후 입을 뗐다.
“영 재인께서도 저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아직 모르신다.”
진평평이 훈계하듯 말했다.
“네 손에 쥐고 있는 패들을 한꺼번에 드러내서는 안 되느니라. 몇 개의 패는 항상 소맷자락에 숨기고 있거라.”
“황제 폐하께서는······ 제가 아는 걸 알고 계시나요?”
“모르신다.”
“그러면 군주를 기만하는 게 아닌가요?”
“아니다. 황제 폐하께서 묻지 않으셨잖니. 우리는 신하 된 입장이니 무언가를 말하는 게 쉽지 않고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웃기 시작했다. 마치 두 마리 영악한 여우처럼.
“둘째에 관한 일은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냐? 네 목표는 달성한 거고?”
“모두 열일곱 명의 관원을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둘째의 힘이 많이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부 상서 같은 높은 품계는 저로서는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범한이 손을 꼽으며 말했다.
“최씨 가문이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북쪽에서 온 소식에 따르면 그들이 손발을 더 넓게 벌렸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그들의 손을 잘라 버리면 일이 더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너의 다음 목표가 최씨 가문인 걸 다른 이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진평평이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일 조회에서 황제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실 거다. 그러면 둘째가 빠져나가기 어렵게 되겠지.”
“집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요?”
“그 남작이란 작위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냐?”
“신경이 쓰입니다.”
“그건 괜찮을 것이니 염려 말거라. 네 아비는 그 누구보다 교활한 자이니 네가 손해 보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진평평이 음험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경도에 없을 때 너를 담주에서 불러들였잖니. 그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었지.”
“그거야 제 아버지이니까요.”
범한이 살짝 골치 아파하며 원장 대인을 일깨워 주었다.
진평평이 의자 팔걸이를 치며 조소하듯 말했다.
“그건 내가 인정하지. 그자가 아비 노릇을 정말 잘하고 있어.”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라 범한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진평평은 이 아이가 범건을 이리도 존경하고 있는 줄 몰랐다는 듯 안심한 것처럼 기쁘게 웃다가 물었다.
“그런데 오늘 왜 온 것이냐?”
“마누라, 누이와 함께 밥이나 얻어먹으러 왔습니다.”
범한이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겸사겸사 좋은 구경도 좀 시켜 주고 안목을 넓혀 주려고 말입니다. 혼자 사는 노인네께서 저택 가득 쟁여 두고 있는 미녀들 구경을 할까 해서죠.”
그런데 이 노인과의 농담 따 먹기가 돌연 지루해진 범한이 갑자기 우울한 어조로 물었다.
“줄곧 여쭙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말해 보거라.”
“대인께서는······ 충신이십니까?”
아이처럼 유치한 구석이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진평평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한참 후에야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황제 폐하와 경국에 충성을 한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모두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걸 이제는 너도 잘 알 것이다. 그분께서 허락한 일만 너는 할 수 있는 게지. 그러니, 황제 폐하께 충성한다는 건 사실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것이란다. 이 점을 잘 기억해 두고 영원히 황제 폐하께 충성하도록 하려무나.”
그렇다면 대체 누구에게 충성을 하라는 거지? 황제 폐하? 아니면 자기 자신? 범한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데 이번에 너는 손을 너무 일찍 썼더구나. 황제 폐하께서 계획하신 것보다 조금 앞당겨졌어.”
진평평이 두 눈을 감은 채로 힘없이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네 일 처리 방법이 너무 철저했어. 황제 폐하께서는 네가 자신의 신분을 알아차렸다는 걸 모르고 계신단다. 그러니 어찌 되었든 너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시겠지.”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지적받은 것이 이번 일로 생겨난 가장 귀찮은 일이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걱정 말거라. 내 처리하마.”
진평평이 자그마한 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이에 범한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바퀴 의자를 밀며 아름답고도 처량한 숲에서 나왔다. 노인과 젊은이는 서쪽을 향해 가며 뒤쪽에 있는 그림자와 점점 멀어져 갔다. 지금까지 이 바퀴 의자에서 그림자가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 * *
다음 날, 조회가 정시에 개회됐다. 와병을 핑계로 수일 동안 출석하지 않았던 범씨 부자도 드디어 폭풍우 같은 탄핵과 조정 관료들의 질책을 받을 준비를 하고 조정에 나왔다. 도찰원의 상주문이 도착한 지는 이미 오래. 호부 상서 범건은 가정 내 교육이 엄격하지 않아 범사철과 같은 불초자가 나왔다고 스스로 인정을 한 상태였다. 범한 역시 죄를 청하는 상소문을 써서 포월루 살인 사건과 관련해 관리 감독이 소홀한 점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범씨 부자는 다른 죄명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경도 부윤만 탓했다. 경도부 앞에서 일어난 빗속 암살 시도 사건과 관련해 상대편에서 증거를 전혀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언관들의 입을 막아 버릴 수 있도록 모든 게 깔끔하게 처리되어서였다.
한편 2 황자를 향한 범씨 가문의 죄상 고발과 관련해, 2 황자 측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경도부 살인 사건 현장에 여덟 가문 장군 중 하나인 사필안이 있었고, 결국에는 그가 감옥에서 급사해 모든 죄상이 2 황자를 가리키고 있어서였다.
조회 석상에서 2 황자 측은 맹렬히 공격을 퍼붓지 않았을뿐더러 반격도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할 뿐이었다. 이에 대신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한참 후 양측에서 모종의 합의를 이룬 것 같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2 황자가 패배를 인정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황제는 줄곧 용좌에 앉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범한이 자리에서 나와 죄를 청할 때만 눈동자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을 잠시 반짝일 뿐이었다.
이윽고 중서 회의를 거치고 황제가 직접 심의한 후 이번 탄핵안에 대한 결론이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호부 상서 범건은 자식 교육을 똑바로 하지 않아 아들이 악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다년간 조정에서 일한 노고와 이러한 잘못을 미리 알린 것을 참작해 가벼운 처벌만 내린다. 녹봉 3년 치를 감봉하고 작위를 2등급 내리며 집에서 조용히 반성하라.”
“감찰원 제사 겸 태학 봉정 범한은 품행을 단정히 하지 않았고 감찰원 병력을 사사로이 이용하였다. 비록 아우를 대신해 죄를 반성하고 있으나 용서하기 어려운 죄이므로 작위를 박탈하고 감봉 처분을 한다. 장묵한이 증정한 책을 3년 동안 수정하는 일을 맡을 것이며 이 일에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주 중인 범씨 가문 둘째 아들 범사철에 대해서는 형부가 지명 수배 전단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경도 부윤은 일찌감치 하옥되고 관직이 박탈되었으며 훗날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모 황자는······.
* * *
마지막으로 2 황자에 대한 처결 내용이 발표되었다.
“품행이 단정치 않으니 작위를 강등하고 6개월간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말 것이며 덕을 수양하여라.”
결과가 나왔다. 그러자 백성들이 문구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따져 보았다. 범씨 부자가 작위가 강등되고 박탈당한 건 조금 과한 처분 같아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손해를 입은 건 없었다. 한편 2 황자 파의 수많은 관원은 정말 많은 손실을 보았고, 황자 본인도 6개월간 가택 구금이라는 중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이번 싸움의 승자는 명백히 범씨 가문이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가 직접 정한 내용을 유심히 들은 사람이라면 정말 재밌는 우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범한과 2 황자에게 똑같이 품행이 단정치 않다는 모호한 죄명을 단 점이었다. 감찰원 제사가 품행이 단정치 않은 건 별것 아니었지만 황자에게 품행이 단정치 않다는 건 정말 불리한 판결이었다.
이로써 조정의 풍향계가 바뀌었다. 황제 폐하의 2 황자를 향한 총애가 예전만 못하다는 걸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조회가 끝난 후에도 황제 폐하께서 범한에게 따로 남으라는 명을 내리지 않자 대신들은 또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다 보니 모두 다 상처를 입게 되었나 보군. 범한은 누구보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도 결국 여기까지인 건가?’
하지만 범한은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종일 빙그레 웃는 얼굴로 태학에서 멍하니 있으면서 교수들과 서적을 정리하고 가끔씩 감찰원에 들러 보았다. 그러다 이틀 시간을 내어 추밀원 진 장군 댁에 인사를 가고, 이어 아내와 누이를 옆에 끼고 마마님들께 인사드리러 황궁에도 갔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북제 큰 공주가 잠시 기거하는 수방궁에서 1 황자와 마주쳤다. 물론 이번 입궁에서도 황제 폐하는 만나 뵙지 못했다.
범한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여전히 언빙운 공자와 함께 많은 일을 상의했다. 황실 금고의 북쪽 밀무역과 관련된 포석은 본격화되고 있었고 최씨 가문의 손을 일격에 잘라 버릴 날만 기다렸다. 이는 곧 신양 쪽과 2 황자에게 들어가는 가장 큰 돈줄이 끊어지는 걸 의미했다.
체내 정기와 관련해 범한은 신경 써서 관리하는 동시에 도대체 그 약을 먹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두고 스승 비개의 답장을 기다렸다.
이렇게 이틀이 채 지나지도 않은 늦은 가을날, 그것도 찬 바람이 부는 어느 날, 계속 지연되었던 황실 국화 감상 모임 날이 드디어 정해졌다. 하지만 범한은 잔뜩 움츠린 채 살짝 겁에 질린 표정으로 창밖에서 무기력하게 나풀거리는 마른 나뭇잎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날이 이렇게나 춥고 이상한데 결국에는 목숨 걸고 국화 감상을 하겠다는 건가?’
303화
출중한 자태, 맑고 높은 절개, 우아함과 굳은 지조. 이는 모두가 사랑하는 국화를 이르는 수식어이다. 국화는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그리고 범한이 어린 시절을 보낸 담주에서는 국화를 재배해 ‘담국화차’라는 경도에서도 유명한 꽃 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도에 있는 범건의 집에서는 여러 해 동안 담주 별저에 계시는 노부인을 통해 이 담국화차를 조달해 온 터였다.
그렇기에 범한에게 국화는 낯설지 않은 꽃이었으며 그는 담주 해변과 해안 절벽 옆에 움츠러든 채 핀 작은 국화꽃을 종종 떠올리기도 했었다.
범한은 국화가 추위에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생의 시인인 원진은 시에서 다른 꽃은 피지도 못하는 추위 속에서 홀로 피어난다고 표현했다. 어찌 되었든 국화도 한겨울에 노란 꽃을 피우는 납매(蠟梅)가 될 수는 없으므로 범한이 보기에 이렇게 추운 늦은 가을날에 국화가 핀다면 꽃잎이 얼어 뭉그러질 게 뻔했다.
마차가 산 아래에 마련된 여러 개의 삼엄한 관문을 지났다. 그런 후 범씨 가문의 젊은이들이 호위병인 대내 시위 및 금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계곡 옆으로 난 가을이 내려앉은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그러다가 봄여름과 비교해 쇠약하게 떨어지는 폭포 앞에서 길을 꺾어 들어갔다. 그러자 정면에 도끼로 잘라 놓은 듯한 암벽이 보이고 경묘 양식의 사당 건축물이 곧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현공 사당은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나무 기둥에 의지해 공중에 떠 있었다.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한 장(丈)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누군가가 그림이 그려진 얇은 종이를 수직으로 가파른 절벽 위에 대충 붙여 놓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하자 종잇장 같은 사당이 순식간에 벽에서 떨어져 나오지는 않을까, 절로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현공 사당은 경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당이었다. 신묘를 신봉하는 고행자들이 벽돌 하나, 돌 하나, 나무 기둥 하나씩 얹어 가며 쌓아 올려 만든 것이었다. 완공되는 데만도 수백 년이 걸렸으며, 신묘의 광명을 세상에 알리고 사람들에게 선한 마음을 갖도록 권하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신묘는 세상일에 간섭하지 않고 존재하는 신비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천 년 동안 이 대륙 위에서 일어나는 급변하는 정세에 영향을 미쳐 온 것만 같았다. 잃어버린 역사의 한 조각이 담긴 전설 속에 신묘의 발자취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행자들은 본디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올바른 삶을 사는 이들이어서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에 신묘는 평민들의 마음속에서 숭고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통치자인 황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영향은 미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신비한 영향력을 지닌 신묘를 향해 상당한 정도의 경의는 표하고 있었다. 한데 이는 일종의 보여 주기 식 행위였다. 바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행동이자 그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행위 말이다.
이에 경국 황족들은 3년에 한 차례 황실 국화 감상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올해는 바로 이곳 현공 사당에서 그 정기적 행사가 치러졌다. 국화 감상 모임은 황족 간 이익 충돌에 있어 완충재 역할과 상호 간의 이해를 높이는 기능을 함으로써 이들 간 피 터지는 싸움이 발생하는 걸 막아 주었다. 이에 적어도 몇십 년 동안은 이전 대에서처럼 친왕 둘이 동시에 암살당하거나 순간 황위 계승자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 경국 황실에 소속된 인원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에 국화 감상 모임에는 몇몇 인척과 황실과 가장 가까운 가문들이 초대되었다.
우선 최근 몇 년간은 관례에 따라 군을 지탱하고 있는 진씨와 섭씨 가문이 초대되었다. 진씨 가문은 군에서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섭씨 가문의 경우는 오랫동안 경도의 수비를 도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국에서 유일하게 외부에 알려진 대종사를 배출해 낸 가문인 터라 초월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 밖에 경국 개국 때 국공으로 봉해진 몇몇 가문 그리고 최근에 황실에 합류한 몇몇 가문도 초대되었다. 이를테면 군주와 혼례를 올린 임씨 가문이 그러했다.
그런데 범씨 가문이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던 건 범한이 임완아와 혼례를 올려 황실과 인척 관계가 되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범씨 가문이 권세를 누리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신하가 아무리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황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실은 별거 아니었다.
범씨 가문이 국화 감상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던 건 범건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녀가 황제 폐하와 정왕을 직접 길렀으므로 범씨 가문과 황실과의 친밀감은 외부인이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단순히 개인적인 관계만 놓고 봤을 때 범씨 가문이야말로 황실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범한이 숨을 헐떡이며 허리에 손을 얹고는 현공 사당 아래에 섰다. 그러고는 곳곳에 둘이나 셋씩 모여 있는 경국의 높은 분들을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구시렁댔다.
“국화 감상, 국화 감상, 해서 왔더니 국화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나이 든 사람에게는 특권이 주어져 범건 상서는 이미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되어 가 있었다.
마차는 산 아래에 서 있었고 범한의 호위 무사들은 금군이 구축한 방어선 밖에 있었으니, 범씨 가문 사람 중 남은 이는 이제 남자 하나와 여자 둘뿐이었다. 그중 한 사람인 임완아가 키득거리며 산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예요.”
범한이 깜짝 놀라며 절벽 가까이로 한 발짝 다가섰다. 강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강타해 저도 모르게 눈은 가늘게 떴지만 이내 숨을 들이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요!”
현공 사당은 절벽에서 살짝 움푹 들어가 U자 형태처럼 생긴 곳에 지어져 있어서 산허리에 붙어 난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야만 도착할 수 있었다. 올라가는 동안 범한은 산길 옆에 있는 언덕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데 정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드넓은 벌판 위에 국화가 흐드러지게 핀 게 한눈에 들어왔다. 국화의 색상은 일반 품종에 비해 훨씬 진했고 황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꽃잎도 일반 국화와 달리 살짝 좁고 긴 모양이었다.
“황금색의 국화라······ 과연 황가의 기백과 어울리는 꽃이군요.”
범한이 절벽에 서서 언덕 가득 박힌 황금색 별 같은 꽃송이를 바라보며 다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리 추운 날씨에 이리도 세차게 피어오르다니 참으로 기이합니다!”
그러자 임완아가 설명을 해주었다.
“금선 국화잖아요. 옛날에 현공 사당에서 수행을 마친 북위 천일도 대사 근진께서 직접 이곳에 가져다 심으셨다 합니다. 그때부터 이곳이 경도 내 별천지가 된 것이지요.”
“근진이요?”
범한이 감탄하며 물었다.
“그분이 설마 고하 대종사의 태사조입니까?”
“맞아요.”
범한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산 아래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차례 살펴보다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국화는 밀집해 피어 있는 게 아니었다. 산허리 쪽은 흙이 척박해서 그런지 상당히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단지 산 아래쪽 언덕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감상하니, 착시 현상 때문에 황금색 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데도 마치 전체 산야를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늦은 가을에 산을 장식하고 있어서 유난히 더 화려해 보였고, 연약한 자그마한 꽃송이임에도 넓게 분포돼 웅장한 멋을 뽐내고 있는 것이었다.
범한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온 사람도 있었다. 한데 황제 폐하가 끝끝내 범한에게 좀 냉담하게 대하기도 했고 임완아의 신분 문제도 있고 해서, 범한에게는 젊은 공자들과 젊은이들이 늘 이야기하는 주제를 가지고 긴 대화를 나누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잠시 몇 마디 말만 나누고는 바로 헤어졌다.
범한은 온화하게 웃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직업적인 습관이 도져 주변 환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현공 사당이 위치한 뒤쪽은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었다. 이곳까지 올라오는 길은 단 하나뿐이며 오늘 경국 황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도 바로 이 길 위였다.
산 아래에는 이미 겹겹이 방어선을 구축한 금군들로 쫙 깔려 있었다. 방어선 중 제일 안쪽은 궁전이 이끄는 호위병인 대내 시위가 조심스레 행동하며 지키는 중이었다.
내관들은 시선을 내리깔고 있어 이들 중에 홍 태감의 사람이 있는지는 범한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호위(虎衛)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다니. 범한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아래쪽에 호위병이 물샐 틈 없이 깔려 있으니 검수는 물론이거니와 모기 한 마리도 뚫고 들어오는 날에는 끝장이 날 거라 생각했다.
범한이 웃는 얼굴로 임소안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내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임소안의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범한이 속으로 웃기 시작했다. 장인어른께서 재상직에서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제 슬슬 인맥의 연결 고리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범한은 눈을 들어 위쪽을 보았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나무로 만든 사당 내부에 경국 내 최대 권력자 몇몇이 모여 있어서였다. 먼 거리였지만 범한은 맨 위층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연한 노란색 도포를 입은 사람이 난간을 잡고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바로 황제 폐하였다.
고개를 들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범한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다 정말 이상한 상상까지 하고 말았다.
‘이 순간 북제나 동이성에서 고수가 나타나 이 현공 사당을 불태워 버린다면 천하는 어떻게 변할까?’
오늘 이곳에는 병력이 삼엄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검수의 습격 따위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물론 범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방자하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내가 사당 꼭대기까지 가야 한다면 어느 지점으로 발을 내디뎌야 하지? 어떤 길로 가야 최단시간에 꼭대기까지 갈 수 있을까?’
순전히 직업적인 버릇이었다.
내관 하나가 사당에서 급히 걸어 나왔다. 그러자 사당 앞 공터에 있던 젊은 귀족들이 서둘러 길을 터주었다. 내관이 범씨 가문에서 온 삼인방 앞에 서서 공손하게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
“황제 폐하께서 완아 아씨를 뵙고자 하십니다.”
임완아가 살짝 놀란 눈으로 범한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대 공공, 나 혼자만 말인가?”
대 공공은 범한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범한이 불려가지 않는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돌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무언가 걸리는 눈빛으로 범한을 잠시 보고는 신중하게 말했다.
“다른 지시 사항은 없으셨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임완아에게 말했다.
“가봐요.”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이 외삼촌께서 가장 사랑하는 생질녀란 건 나도 다 알고 있어요.”
임완아가 현공 사당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두운 동굴 문으로 들어가는 동안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누이를 데리고 반대편 쪽으로 가 그쪽에 있는 풍경을 보려 하는데 쉬는 시간을 방해하는 살짝 불안한 음성이 들려왔다.
“스승님!”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섭령아 고 녀석이었다. 그녀의 불안한 낯빛을 보는 순간 범한은 단번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년에 섭령아는 2 황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데 자신과 2 황자가 서로 피를 말리는 보이지 않는 폭력적인 싸움을 벌인 때문이었다. 그리고 섭중의 여식인 그녀가 그간의 사실들과 원인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범한이 섭령아를 바라보며 따스하게 웃어 주었다.
“무슨 생각 중입니까? 설마 내가 예비 상공 되시는 분을 너무 무시했다 여기는 것입니까?”
섭령아는 차분한 표정의 범한을 보자 예전의 명랑한 그녀로 돌아왔다. 그리고 웃으며 침 뱉는 시늉을 했다.
“스승님이 다시는 저와 말도 안 할까 봐 걱정했어요.”
옆에 있던 범약약이 웃으며 받아쳤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섭령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둘째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작판에서 둘째가 사라지니 허전해요.”
최근 2년간 범씨 가문 저택의 후원에서는 자주 마작판이 열렸다. 그리고 그 판에서 범약약과 범사철이 한편을, 규중 친구 사이인 임완아와 섭령아가 한편을 먹고 실력을 겨루었었다.
“그동안 낭자와 약약이는 사철이와 완아에게 계속 돈을 잃지 않았습니까?”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 판이 깨져 버렸으니 이제는 덜 지게 되었군요. 이제야 재미 좀 볼 때가 된 거 같은데.”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진항이 걸어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숨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304화
어찌나 소리가 쩌렁쩌렁한지 모임에 와 있던 사람들에게 다 들으란 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이에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마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잔뜩 흥이 오른 진항이 범한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정말로 잘하는 건데!”
진항이 주변을 쓱 둘러보며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국화 감상 모임은······ 원래 황제 폐하께서 마련해 주신 대귀족 자제들끼리 가까워질 기회입니다. 그런데 대인 주변은 왜 이렇게 한산한 걸까요?”
범한의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보면 저들이 아무리 신분상 열등감을 느낀다 해도 아첨 몇 마디 정도는 떨고 가야 맞는 건데. 이렇게나 한산한 게 이상했다.
그러자 범한은 평온한 얼굴로 대답을 해주었다.
“오늘에서야 안 사실인데 금선 국화는 멀리서 봐야지 가까이서 보면 안 되더라고요. 제 성미를 잘 아시겠지만 원래 참을성을 발휘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성미는 못 되어 놔서······ 가까워지기가 힘든 거겠죠.”
범한이 웃기 시작하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 그런 쪽으로는 흥미가 전혀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범한이 보기에 이 국화 감상 모임은 전생에 있었던 파티나 다과 모임처럼 교제를 위한 장이었다. 함께 어울림으로써 황실과 친분이 있음을 뽐내고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범한에게는 지엄한 황권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픈 마음이 전혀 없는 터라 지금 이 자리가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진항은 올해 서른으로 일찌감치 혼례를 올리고 첩도 두고 있었다. 진씨 가문에서는 3년에 한 번 꼬박꼬박 국화 감상 모임에 참석한 터라 진항 입장에서는 지겹도록 국화를 본 셈이었다. 이에 범한의 말을 듣고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2 황자와 정왕 세자는 일시적으로 가택 연금이 풀리지 않아 올해는 현공 사당에 올 수 없었다.
“스승님, 여기 경치가 정말 좋은데 시 한 수 지어 보세요!”
섭령아가 맑고 예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섭령아의 눈을 볼 때마다 범한은 눈이 부셨다. 이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대답했다.
“이 스승이 다시는 시를 짓지 않겠노라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섭령아가 범한을 스승님으로 부르는 건 소녀의 장난기 같은 것이었지만 이 재밌는 사실은 이미 경도 바닥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범한이 대놓고 자신을 스승이라 칭하자 무언가 익살스러운 느낌이 있어 진항과 범약약은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항이 야유하듯 말했다.
“범한 대인이 북제에서 짧은 시를 지었다죠. 그 시는 이미 천하에 다 퍼졌고요. 설마 그런데도 우리를 속일 셈입니까?”
범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내저으며 상황에 맞게 대충 둘러댔다.
“다른 데 소문내지 마십시오. 요즘은 시를 쓰는 게 제일 싫습니다.”
그사이 범약약은 고개를 숙이고 ‘꽃 중 국화만 편애하는 건 아니나, 다른 꽃은 피지 못할 때 국화는 만개하니’라는 구절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한데 돌연 오라버니의 말이 들리자 이유가 궁금해 질문을 던졌다.
“왜입니까?”
“왜냐하면 누군가 다급하게 압박하며 시를 쓰라고 하는 건 내게는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일이거든.”
범한은 여러 차례 쉬어 가며 말을 이어 가다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는 세 사람의 눈빛에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것도 대단히 흥겹게, 매우 시적이고 비밀스럽게,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웃어 버렸다.
현공 사당 앞에 모여 차를 음미하고 시를 읊으며 한담을 나누던 권문귀족들은 어디선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경악한 눈빛으로 소리 나는 방향을 쏘아보았다. 절벽가에 네 명의 젊은 남녀가 모여 있었다. 네 사람의 신분은 그들의 마음을 살짝 요동치게 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작은 범 대인이 2 황자를 거꾸러뜨린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진씨와 섭씨 가문의 젊은이들과 함께 있다니. 그들로서는 ‘이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어디선가 불에 그을린 냄새가 나 코를 살짝 벌름거렸다. 그리고 ‘오늘 식사에 훈연한 고기가 나오나?’ 하고 생각하며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공 사당 한쪽 구석에서 보일 듯 말 듯 하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장에서 감각이 가장 예민한 이는 범한이었다. 이에 다른 사람은 이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방에서 경호를 서고 있는 호위병인 대내 시위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현공 사당 아래쪽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절벽가에서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네 명의 젊은이들만 주시하며 자기들의 처지를 개탄하고 부러워하고만 있었다.
* * *
가을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출렁하더니 갑자기 크게 성을 내며 불꽃을 드러냈다. 범한은 어느새 바람 같은 속도로 현공 사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진항! 거기 두 사람을 부탁해요!”
말이 끝났을 무렵 범한은 이미 사당 앞에서 맹렬히 열을 토하는 불과 마주하고 있었다. 열기가 얼굴로 훅 치고 들어오는 가운데 칼을 빼 들고 자신을 공격하는 호위병들을 손바닥으로 쳐내며 화를 냈다.
“다들 눈이 멀었느냐?”
화염이 하늘로 솟구쳤다. 현공 사당은 목조 건조물이어서 불길이 정말 빠르게 번져 나갔다. 그러자 국화 감상 모임에 참석한 젊은 권문귀족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비록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건조한 날이기는 했어도 이번 화재는 너무 이상했다. 금군 대통령 궁전은 이 순간 최고층 위에 있을 테니 아래쪽에 있는 호위병 대내 시위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호위병들과 내관들을 향해 소리쳤다.
“준비해 둔 모래와 자갈은 어디에 있는가?”
범한의 말에 사람들은 조금씩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범한의 신분을 알기에 그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사당 1층에 있는 나이 많은 대신들을 아래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런 후 황제 폐하를 엄호하고 화재 소식을 전하기 위해 호위병을 올려 보내고, 십여 명의 고수들에게 사방에 조심스레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했다.
모두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이 움직였다. 권문귀족들이 불안해하며 허둥대는 사이 호위병들과 내관들은 용감하게 불을 끄는 데만 열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쪽에 있는 불씨가 잡혔다. 범건 상서를 포함한 대신들은 이때를 틈타 1층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현공 사당은 계단이 너무 협소한 탓에 소식을 알리러 간 사람은 더 빨리 위로 올라가지도 못했고, 꼭대기 층에 있는 사람도 금방 내려올 수 없었다.
범한은 아버님이 무사한 걸 보고 일단은 안도했다. 하지만 앞서 자신의 불길한 상상이 막상 현실이 되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만약 이 불이 정말로 번져 나갔다면 꼭대기 층에 계신 황제 폐하는······ 정말 돌아가셨을 수도 있을 터다.
누군가가 불을 놓은 게 분명했다. 상대방이 대체 어떤 신분으로 위장했기에 이렇게나 경비가 삼엄한 사당 앞까지 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방화에 쓰인 도구는 너무 허술해서 범한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엉망진창이 된 사당 앞에서 범한은 어떻게든 냉정을 유지하고 사건을 분석하려 애썼다. 하지만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완아가 아직 꼭대기 층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평정심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흐트러지고 불길한 생각만 떠올랐다. 하지만 누군가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위층으로는 올라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범한, 위로 올라가서 황제 폐하를 엄호하거라!”
범건 상서가 곁으로 다가와 냉정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범한도 그러고 싶던 터였다. 이에 아버지의 눈에 담긴 애매모호한 기색에 대해서는 더는 생각하지 않고 곧장 호위병 중 고수 둘을 데리고 현공 사당 꼭대기로 향했다. 범한은 계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땅바닥에서 뛰어오르더니 좁디좁은 사당의 처마를 밟고는 귀신처럼 시커먼 잔상만 남기며 재빠르게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
범한의 손가락이 사당 처마 사이의 틈을 움켜쥐자 그의 몸이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발끝이 손가락 마디 정도 튀어나온 바깥쪽 나무 난간을 밟자 몸이 빠르게 위로 솟아올랐다. 잔재주와 결합된 절묘한 신체 움직임이 몇 번 반복되더니 범한은 눈 깜짝할 사이에 현공 사당의 최고층에 도달해 있었다.
아래쪽은 상황이 안정되는 중이었다. 불은 진화되었고 권문세족들은 숱하게 전쟁 속에서 지독한 역할을 맡아 온 이들이라 그런지 잠시 소란스러웠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은 사당의 안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앞장서서 호위병들을 동원해 방어선을 한 겹 더 구축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사람들이 초조하게 황제 폐하가 있는 위쪽을 바라보았다. 한데 때마침 범한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고 있어 처음 보는 뛰어난 실력에 사람들은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범한이 오른손으로 꼭대기 바로 아래층 처마를 움켜쥔 상태에서 왼쪽 다리를 살짝 구부렸다. 그러고는 왼쪽 신발 안에 숨겨 둔 검은 비수 위로 왼손을 가져다 댔다. 그사이 범한의 몸은 산바람을 맞아 살며시 흔들리고 있었다. 꼭대기 층은 조용했다. 하지만 범한으로서는 감히 무례하게 침입할 수 없어 일단 위를 향해 큰 소리로 아뢰었다.
“소신 범한입니다.”
꼭대기 층에서 누군가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기는 했다. 이에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창문 틈을 통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싸늘한 빛이 점점 한곳으로 수렴되더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안에서 누군가가 한마디 했다.
“들어오너라.”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창문이 열렸다.
범한은 말이 떨어진 즉시 복부의 근육을 오므렸다 팽팽하게 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산바람의 도움을 받아 사뿐하게 사당 꼭대기 층으로 들어갔다. 범한은 황제 폐하께서 놀라실까 봐 조심스레 행동했다.
이에 양발이 지면에 닫자 먼저 곁눈질로 주변부터 살폈다. 그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 자세를 취했던 호위병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만약 앞서 통보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들어왔다면 자신을 맞아 주는 건 무수히 많은 칼날이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범한은 일단 내부부터 쓱 훑어보았다. 한데 예상했던 검수의 활동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일단 한시름 놓았다. 그런 후 복도가 꺾어지는 곳을 보니 황태후마마의 그림자가 살짝 보였다 사라졌다. 가정 걱정되는 사람인 아내 임완아는 황태후를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심후한 실력의 소유자인 홍 태감은 두 손을 소매에 넣고 구부정한 자세로 맨 뒤쪽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불이 나자 황태후와 황궁 여인들이 먼저 피신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왜 온 것이냐?”
위엄이 깃든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범한은 놀라 멈칫했다가 얼른 몸을 돌려 왼쪽 난간에 있는 중년의 누군가에게 예를 올리고는 차분히 설명했다.
“아래쪽에서 불이 났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저지른 것으로 소신, 황제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이리 왔습니다.”
경국의 황제 폐하는 오늘은 밝은 황색의, 평소보다 가벼운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난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대가 높은 곳이다 보니 밖을 내다봤을 때 무수히 많은 산과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온 산에 핀 황색 국화가 주는 가을의 소슬한 느낌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안위는 전혀 걱정 않는 사람처럼 평온하게 강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라간 모습에서는 사당 아래에서 삼엄히 경비하고 있는 관료들을 향한 조소가 옅게 드러나 있었다.
305화
사당 꼭대기에 있던 황태후마마와 다른 마마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들은 3층에서 올라온 호위병들과 함께 조심스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현공 사당 꼭대기 층에는 평온한 황제 폐하 말고도 태자, 1 황자, 3 황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는 칼을 찬 호위병 십여 명 그리고 시중을 드는 너덧 명 정도의 내관들이 있었다.
범한이 그들을 훑어보며 사당 내부의 방어력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그의 미간에서는 걱정이 사라질 줄 몰랐다. 아래층에서 난 불은 분명 수상쩍었다. 자신이 서둘러 진화하는 바람에 검수들 입장에서는 혼란을 틈타 작전을 수행하려던 계획이 틀어진 것뿐이었다. 그러니 검수는 아직 사당 안에 숨어 있었다. 한데 경국의 실력이 강대한데 어떻게 여기까지 잠입해 들어올 수 있는 거지? 범한은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감찰원 제사였으므로 경국의 방어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검수가 잠복해 있다 하더라도 검으로 천하를 혼란에 빠뜨릴 만한 절정의 고수는 셋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한데 궁전은 이 자리에 없었다. 범한은 순간 긴장했다. 그런데 홍 태감도 황태후마마를 모시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던가. 홍 태감의 부재에 범한은 골치가 아팠다. 그렇다면 검수가 방화를 한 건 설마 여기 와 있는 최고의 고수들을 아래층으로 내려보내기 위해 쓴 수법이란 말인가.
지금 이 꼭대기 층에서 일단 칼을 찬 호위병을 제외하고 진짜 고수를 찾아본다면······ 아무래도 범한 혼자뿐인 것 같았다. 범한은 조금 우쭐거리며 현 상황을 판단했다. 1 황자는 말 위에서나 무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 뿐이라 실력이 뛰어난 검수가 급습을 해오면 상대가 안 될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해 버린 것이었다.
황제 폐하의 표정을 보니 이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군주로서 드러내야 할 침착함과 당당함일 수도 있었다. 범한은 이 중년의 남성이 어쩌다 다치기라도 해 경국에서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망자가 나오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황제 폐하 뒤쪽에서 침착하게 있는 태자에게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짓을 했다.
태자는 살짝 당황했지만 범한의 뜻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허리를 굽혀 황제에게 예를 표하고는 말을 꺼냈다.
“부황, 화재의 원인이 불분명합니다. 그러니 잠시 이곳에서 물러나 계시지요.”
한데 황제는 동궁인 태자의 청을 무시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랐지만 활력 있는 얼굴에 은근히 자조적인 기색을 띠고 범한을 바라보았다.
“불은 껐느냐?”
범한이 당황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진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올라왔느냐?”
황제가 왼손으로 살며시 난간을 짚고는 작은 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짐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물러선 적이 거의 없었느니라.”
범한은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런 염병할!’ 등의 욕을 하며 다른 생각을 했다.
‘쿨한 척하면서 자극적인 걸 즐기시는 거군요. 하지만 저는 그런 취미가 없는데 말입죠.’
범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상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하오나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경호하기 어려워 그러니 황제 폐하, 천하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즉시 회궁해 주십시오.”
천하를 들먹이며 황제에게 간하는 건 전생에 본 사극에서 자주 등장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경국 황제에게는 너무 명확할 정도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황제는 오히려 몸을 돌리더니 싸늘하게 받아칠 뿐이었다.
“범한아, 너는 감찰원 제사이니라. 만약 누군가의 습격으로 짐이 죽는다면 그건 네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너의 태만함 때문에 짐이 국화 감상도 하지 못하는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
범한은 화도 나고 괴로워 속으로 구시렁댔다.
‘저는 그저 감찰원 제사일 뿐입니다. 6처에서 일부 업무를 담당하고 있기는 해도 오늘 국화 감상 모임과 관련해서는 감찰원에게는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사전에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 감찰원은 천하에 밀정 첩보망을 깔아 두고 있으나 최근 들어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기는 했다. 천하에서 감히 경국 황실에 손을 쓸 수 있는 이들은 둘셋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그들은 조용히 지내는 중이었다. 가장 파악하기 힘들다는 동이성에서도 별다른 동정이 없었다. 감찰원의 중요 관찰 대상인 사고검은 아직도 동이성에 머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차분한 황제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범한은 또 혼자 속으로 구시렁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번 화재가······ 검수 습격의 전조 증상이 아니라면? 설마 내가 너무 긴장한 거였어?’
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범한을 도와줄 자격이 있는 황자 셋은 그가 부황에게 훈계를 듣는 중인 것 같아 슬쩍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중 태자가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범한을 거들어 줄 준비를 했다. 한데 문득 최근에 범한이 둘째를 처참하게 뭉개 버리고 자신에게 ‘크나큰 안도감’을 준 게 떠올라 버렸다. 범한의 실력은 이미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에 무시무시한 실력자가 된 신하를 부황께서 압박하시는 건 분명 깊은 뜻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에 태자는 생각을 접고 범한에게 위로의 눈빛만 보냈다.
한편 1 황자는 이런저런 계산 없이 바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부황, 범한 제사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감히 부황을 습격할 자는 없겠으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래에 있는 노대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내려가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황제는 1 황자의 꾸미지 않는 태도가 마음에 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여전히 쌀쌀맞은 얼굴로 말할 뿐이었다.
“범한아, 감찰원 제사로서 이만한 일에 호들갑을 떨다니 짐의 기대를 너무 많이 저버렸구나.”
범한은 또 속으로 ‘이런 염병할!’ 하며 욕을 했다. 하지만 표정만은 공손하고 겸손하게 유지하며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지당하신 지적이십니다.”
황제가 따져 물을 기세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범한은 순간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이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이유를 밝혔다.
“소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천하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니 폐하의 안위와 관련해 사소한 일이란 없습니다. 더 진중하게 대처해야 하고, 제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입니다. 국화 감상은 매년 할 수 있으나 경국의 황제 폐하는 단 한 분뿐이지요. 놀라 허둥대고 담이 콩알만 하다 놀림을 받을지라도 소신, 황제 폐하께 회궁하실 것을 건의드리는 바입니다.”
그러자 사당 안에는 난처한 침묵만 흘렀다. 생각지도 못하게 범한이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황제 폐하께 강경히 맞서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더군다나 황제 폐하의 생사까지 언급하고 또 앞서 황제 폐하께서 훈계하신 내용에 반박까지 하고 말이다.
* * *
“담력이 참으로 크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그 말을 내뱉은 후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네 담이 콩알만 한 거라면 그렇게 큰 콩알을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 짐은 몰랐을 것이니라.”
웃자고 한 말이었다. 한데 황제를 제외한 꼭대기 층에 있던 다른 이들은 긴장하고 있던 터라 감히 황제가 울린 변죽에 맞추어 웃을 수 없었다. 반면 담이 하늘만 했던 범한은 잠시 웃기는 했다. 그것도 무척 언짢은 기분을 담아서 말이다.
갑자기 황제의 웃음소리가 다소 잦아들더니 그가 두 눈을 서서히 감았다. 그사이 난간 밖에서 산바람이 불어와 주름이 선명한 중년 남성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짐은 그동안 검수들의 공격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받아 왔다. 너희 어린 세대들이 그때 천하가 어땠는지, 대체 어떤 격변들이 일어났는지 어찌 알겠느냐!”
황제가 멸시가 담긴 웃음을 지었다.
“이런 실수투성이인 허술한 공격으로, 또 제대로 타오르지도 않은 불로 짐을 압박해 떠나게 할 생각이라면 그리 쉽게는 안 될 것이야!”
범한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국의 군주가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어서였다.
범한은 황제의 이야기를 듣는 한편 주변 환경도 계속 살폈다. 궁전과 홍 태감도 없고 심지어 호위(虎衛)도 없고. 무력을 가진 자라고는 호위병과 황자 세 명······ 아니, 네 명인가? 지근거리에서 황제 폐하의 시중을 드는 내관들은 충성심이 깊을 것이고, 전전 대부터 이어진 황실 친족들은 조정의 통제를 받고 있으니 이들 역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만 가지고 황제 폐하를 보호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특히 홍 태감이황태후마마를 따라가 버리지만 않았어도. 홍 태감의 부재가 범한에게 크게 다가왔다.
그러던 중 범한은 순간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이상한 게 떠올라서였다.
‘지금 검수가 들이닥치면 감찰원 제사인 내 책임이 제일 큰 거 아니야? 그런데 아까 아래에서 아버지께서는 왜 이런 건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내게 다짜고짜 올라가라 하신 거지?’
대 공공이 큰 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평생 마흔세 차례나 검수의 공격을 받으셨으나 그때마다 단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범한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문득 북제에 남겨 두고 온 왕계년 생각이 나 속으로 또 욕을 내질렀다. 성공한 사내 뒤에는 하나 또는 여럿의 우수한 만담꾼 보조가 있기 마련이란 생각을 했다.
황제가 서서히 눈을 떴다. 편안해 보이지만 한편 강한 자신감이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북제, 동이, 서호, 남만 그리고 짐에 의해 망하게 된 나라의 불쌍한 벌레들까지 모두 짐을 죽이고 싶어 한다. 하나 스무 해 동안 성공한 이가 있는 줄 아느냐?”
그가 작은 소리로 웃었다.
“검수의 공격을 받는 건 이미 그러려니 하고 있단다. 범한아, 짐이 왜 신경 쓰지 않는지 너라면 거의 다 이해했을 것 같구나.”
‘그거야 황제 폐하께서는 이런 상황에 숙달된 분이니 그렇죠!’
범한은 오늘따라 속으로 불평 및 욕설을 많이 늘어놓는 중이었다. 그래도 감찰원의 제사로 황제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천하에서 제일 크고 제일 억울한 누명만은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이에 그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황제에게 환궁할 것을 과감히 권했다.
범한의 간청이 지겨워진 황제는 드디어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범건은 네 녀석을 어쩌면 이리도 쓸모없게 키워 놓은 게냐! 진평평도 왜 너 따위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범한은 계속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황제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할 수 있으면 직접 해보시든지요! 원래는 황제 폐하께서 해야 할 일이었잖아요!’
검수 습격과 관련한 상황은 거의 다 정리가 된 상태였다. 이제는 아무리 실력 좋은 검수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상황을 봐서 도망가야지, 그러지 않으면 금군 수색대에게 잡혀 끔찍한 꼴을 당할 게 뻔했다.
이에 꼭대기 층에 있던 이들은 한시름 놓고 황제와 범한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이랬다저랬다 하며 범한을 꾸짖고 있어 상황이 조금 웃겼다. 그런데도 태자는 여전히 온화한 눈빛으로 범한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다. 1 황자는 도무지 못 봐주겠는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편 3 황자는 활짝 웃는 얼굴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범한이 혼나고 있자 분풀이가 되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걸까? 범한 제사를 계속 꾸짖고 모습이 왜 자꾸 아들을 꾸짖는 모습처럼 보이는 거지? 범한은 유명 인사고 조정의 중신이며 또 요즘 경국은 문치를 중시하는 분위기 아니던가. 황제 폐하가 이렇게 대놓고 신하의 체면을 깎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범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듣고 있었다. 그러다 말 속에 숨은 다른 의미를 잡아 냈다. 황제 폐하가 자신과 똑같은 의심을 하고 계신 것만 같았고 그래서 유난히 더 분노하신 것 같았다.
만약 이 모든 게 늙은 절름발이나 아버지께서 몰래 짜놓은 일이라면 범한은 그들의 대담함, 악랄함, 후안무치, 낮은 지능 지수에 한탄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황제 폐하 구출 작전이라는 계획을 짰으면 적어도 당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할 것 아닌가.
황제 폐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능 지수만 봐도 범한 자신보다 높은 거 같은데 모를 리 없지. 다만 황제 폐하는 범한이 까맣게 모르고 속고만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범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꾸민 소란이었으니 정말로 검수가 나타날 일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진평평이 유치원 졸업반 학생도, 범건이 등교 첫날부터 깜짝 놀라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우는 어린 여학생도 아니란 점이었다. 더욱이 황제 폐하는 범한이 총애받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두 측근이 이런 황당한 일을 벌였다고 믿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황제가 화가 난 이유는 사실은 범한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306화
드디어 말을 멈춘 황제가 몸을 돌려세우고는 있는 힘껏 난간을 내리쳤다.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었지만 범한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 도가 튼 터라 옆에 있는 대 공공을 향해 입을 오물거렸다. 천자께서 대차게 화를 내시느라 목이 마르시다고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알려 드린 것이다.
대 공공은 태극전에 있다가 늦게 도착해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범한 제사가 황제 폐하께서 갈증을 느낀다는 걸 알려 주자 신이 나서 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옆에서 대기했다.
“술로 다오.”
황제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그런데도 범한 저 녀석이 뒤에서 뭔 짓을 하고 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난간 밖 경치와 하늘 위 구름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싸늘한 가을빛에 시 천 수를 읊고, 찬 향기가 담긴 술 한 잔을 땅에 붓는다. 높은 누대에 올라 국화를 감상하는데 어찌 술이 빠질 수 있겠느냐!”
3년에 한 번 열리는 국화 감상 모임에서는 언제나 국화주가 곁들여졌다. 그러니 술은 옆에 준비되어 있었고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던 의문의 화제는 이내 모두 잊힌 일이 되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명령에 담당자인 수려한 외모의 어린 내관은 서둘러 술상을 준비해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어찌나 조심하는지 발끝으로 걸으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범한은 황제가 시를 읊기 시작하자 순간 속으로 뜨끔했다. 그 시는 《석두기》 38회에 등장하는 것으로 가보옥의 국화 시였다. 황제 폐하는 자신이 범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은근슬쩍 알려 준 것이었다. 한편 범한은 언제까지나 세인을 속일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던 터였다.
“《석두기》에는 오로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만 나와 수준이 낮은 글이기는 해. 한데 문장은 그런대로 괜찮단 말이지. 한데 또 아까처럼 시는 수준이 조금 떨어지고.”
황자들과 수행원들은 황제 폐하께서 뜬금없이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시자 살짝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굽힌 상태에서 말했다.
“소신, 재미로 한 것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보실 줄은 생각도 못 하였는데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래? 짐은······ 네가 원작자인 걸 밝히지 않기를 바라는 줄 알았구나. 하여 시가 나오는 부분에서 일부러 실력 발휘를 안 하는 유치한 짓을 했다 생각했지.”
그러자 범한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숨만 내쉬었다.
한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민간과 황궁에서 유행하는 《석두기》가 작은 범 대인의 손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너무나도 놀라 각자 반응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담박서국에서만 출간되고 있는 그 책은 대중적인 작품이기는 했지만 문체가 수려했다. 이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새 명문장으로 천하를 놀라게 한 작은 범 대인의 작품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진짜 작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황제가 술잔을 들고 술에서 감도는 국화 향을 맡았다. 그런 후 살짝 맛을 보고는 담담하게 웃으며 난감해하는 범한과 깜짝 놀란 황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술상에는 술잔이 두 개 있었다. 황제 본인과 황태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한데 그중 한 잔은 자신이 마셨고 한 잔이 남았으나 어마마마께서는 아래로 내려가셨다. 하여 황제는 순간 이 술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황제는 먼저 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1 황자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펴는데 그의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범한을 가리키려 했다.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린 황제가 얼른 손가락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손가락은 한쪽 구석에 숨어 놀란 얼굴로 웃고 있는 3 황자를 가리켰다.
아직 나이가 어린 3 황자가 얼굴을 구겼다.
“부황, 소자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 황명에 거역한 죄를 물을 수 없었다.
황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술보다 더 독한 것도 해놓고 이깟 술 한 잔 가지고 뭘 그러는 게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3 황자는 부황의 싸늘한 기운에 눌려 하마터면 울 뻔했다. 하지만 서둘러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난간으로 가 자그마한 손을 뻗어 잔을 받아 들고는 술을 마셨다.
* * *
턱, 하는 소리와 함께 3 황자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멀리 굴러갔다. 그 순간 3 황자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이 벌어진 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싸늘한 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냥 술 한 잔 마신 것뿐인데 왜 호위병이 내 목을 치려는 거지?’
황자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복잡하면서도 위험한 상황에서 자라 온 그였다. 그래서인지 몸이 곧장 반응했다.
‘검수이다!’
3 황자 뒤쪽에는 황제가 있었다. 그러니 그가 머리를 감싸 쥐고 쥐새끼처럼 내뺀다면 저 서릿발 같은 칼날은 곧장 황제를 찌를 게 뻔했다. 물론 3 황자에게는 고하 대종사처럼 눈밭을 발자국도 안 남기고 걸어가는 심후한 무공 따위는 없었다. 섭류운처럼 강한 손날 격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부황을 위해 아무리 용맹하게 막아선다 해도 이 경천동지할 칼날은 그를 두 동강 낸 후 황제의 머리를 취할 게 뻔했다.
피하든 그냥 칼을 맞든 결과는 피차일반이었다. 이에 3 황자는 가장 올바른 선택을 했다.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칼날을 통해 보이는 검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리를 떨며 아랫도리가 몽땅 젖은 채로 냅다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비명이 꼭대기 층에서 울려 퍼졌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검수가 출현했음을 즉각 알아차렸다. 한데 이제껏 경국 황궁에서 호위를 맡고 있는 대내 시위 가운데 검수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에 칼날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난간 쪽에서 술잔을 쥐고 있는 황제를 베려 하는데도 누구 하나 달려들어 막지를 못했고 결국 칼날은 호위병들의 방어선마저 뚫어 버렸다.
하지만 범한은 달랐다. 순간 거친 숨소리와 함께 어깨를 한 바퀴 돌려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 검수는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던 터라 급습이 가능했고 칼을 휘두르는 기세 또한 강력했다. 이에 범한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대응했다. 그러자 허리 쪽 설산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정기가 거대한 강물이 되어 범한의 오른팔을 타고 쏟아져 나가 그의 주먹으로 모였다. 그런 후 몇 걸음 떨어진 허공에서 검수의 칼날을 부수어 버렸다.
참으로 대단한 일격이었다. 주먹이 일으킨 바람이 공기를 가르며 나가는데 천둥이 낮게 흐느끼는 것처럼 소리까지 났다. 그리고 정기의 바람과 검이 부딪치자 새하얀 서릿발 같았던 검은 어느새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범한은 가슴이 답답해져 너무나도 놀랐다. 칼을 휘두른 자가 9등급에 달하는 고수였던 것이다. 한데 이게 맞는 거였다. 천하의 최고 권력자인 군주를 죽이려 하는데 9등급 고수가 아니라면 어찌 공격할 깜냥이라도 되겠는가. 주먹에서 정기가 소리를 내며 나간 순간 범한은 어느새 3 황자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범한은 왼손으로 다리 쪽에 숨겨 두었던 검은 비수를 꺼내 들고는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것을 검수의 하복부를 향해 찔렀다.
검수가 쥐고 있던 칼은 절반이 날아가고 없었다. 이에 칼의 기세는 형편없어졌지만 반면 속도는 오히려 더 빨라져 버렸다. 검수도 범한의 공격을 사력을 다해 막는 것 같았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호위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범한 주변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9등급 강자인 검수에게 맞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현공 사당 앞쪽 하늘에서 구름이 열리며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것도 작열하는 태양이 말이다.
햇살이 비추자 사당 내부에 초췌한 흰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새하얀 옷을 입고 흰색의 고검(古劍)을 든 검수가 등장했다. 한데 그 누구도 이 검수가 어떻게 꼭대기 층에 나타났는지 그리고 그가 햇빛의 엄호를 받으며 황제 바로 앞까지 접근했는데도 알지 못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두 번 났다. 그사이 황제 곁에 있던 호위병 둘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고 황제를 뒤쪽으로 끌어 피신시켰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바람을 가르는 검 소리와 후두부 파열이었다. 파열된 후두부에서는 선혈이 솟구쳤고 칼날이 채 뽑히기도 전에 그들의 몸은 바닥으로 거꾸러져 버렸다.
하얀 옷을 입은 이는 어느새 옛 사연이 담긴 듯한 고검을 들고 곧장 황제에게 향했다.
* * *
황제는 앞서 지금껏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선 적 없다 했었다. 한데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듯 나타난 검수가 공격을 해오자 목숨 바쳐 호위를 한 시위들에게 이끌려 뒤로 몇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간 검의 끝은 그 순간 황제로부터 한 척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에 모두 곧 검이 황제 폐하의 목을 관통하리라 생각했다.
경국 황제가 무공을 못 한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에 호위병 여럿이 미친 듯이 황제 앞으로 달려와 막아섰다. 너무나도 급작스레 일이 터지자 황제의 안위를 걱정한 이들이 가장 즉각적으로 효과가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즉 자신들의 몸을 던져 검에 대신 찔린 것이었다.
무수한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런데도 황제의 두 눈은 차분함 그 자체였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검과 하나가 되어 직선으로 공격해 들어오고 있는 흰옷의 검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 * *
호위병들도 실력이 충분히 고강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에게는 검수를 막을 시간이 모자랐다. 현공 사당 아래에는 홍 태감도 있고 섭씨와 진씨 가문의 유일한 9등급 강자 두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목숨을 보호하려면 바로 이 순간 흰옷의 검수를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누가 막는단 말인가. 호위병들은 이미 그들의 본분을 다한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 중에서 검수가 나왔기에 자신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에 집에 있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던졌다. 그리고 이제 황제 폐하를 대신해 칼을 맞아 줄 사람은 여기에 있는 아들들뿐인데······.
앞서 일어난 상황은 모두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펼쳐진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3 황자가 놀라 손에서 떨어뜨린 술잔은 아직도 바닥을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의 1 황자는 살기충천한 고검(孤劍)을 막으러 부황 곁으로 달려가기 위해 이제 막 두 발짝 내디디고, 아직 마지막으로 내디딘 발은 땅에 닿기도 전이었다.
그 순간 범한은 검수와 몇 치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가느다란 검은 비수를 들고 호위병으로 위장한 검수의 하복부를 찌르려 할 때였다. 그리고 동시에 순간 뒤쪽에서 나타난 놀라운 검의 위력을 감지한 후였다.
허공으로 튄 피들이 산에 활짝 핀 꽃처럼 허공에 피어 있었다. 죽어 눈도 감지 못한 호위병들의 수급도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분명 확실히 조사를 마쳤는데. 흰옷의 검수가 어떻게 현공 사당 위쪽에 숨어 있을 수 있었는지 호위병들은 죽으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범한의 눈앞에서 이 모든 장면이 느린 화면처럼 너무나도 선명하고 살 떨릴 정도로 끔찍하게 펼쳐졌다.
범한은 곁눈질로 이 모든 장면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래서 처절한 표정으로 황제 폐하에게 달려가고 있는 태자의 충성스러운 모습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태자 전하는 동생이 바닥에 떨어뜨린 술잔을 밟아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엎어져 버렸다.
이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황제 폐하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던 범한이 가장 빨리 반응해 가장 충성스러운 효자로 등극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목덜미의 털이 갑자기 쭈뼛쭈뼛 서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나타난 검의 살기가 앞쪽에 있는 9등급 검수의 것보다 훨씬 순수하고 더욱 광포하게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찰나, 범한 내면 깊은 곳에 있던 난폭한 기운을 흥분시켰다. 그 순간 범한은 황제 폐하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3 황자도구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에 뒤쪽에서 나타난 흰옷의 검수에게 자신이 중상을 입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범한은 싸우기로 결심했다. 이리 좋은 기회를 인색한 범한이 놓칠 리 없었다. 이리도 강한 적을 승부욕이 강한 범한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307화
하지만 순간 최후의 공격을 펼친 검수 때문에 범한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이번에 상대편은 경국 황궁에서 십 년이나 매복해 있던 첩자를 이용하고 있었다. 얼마나 대가를 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흰옷의 검수도 움직이게 만들었다. 경국에서 십여 년 동안 자기희생을 불사하며 힘들게 작업을 해놓고, 홍 태감까지 자리를 비우도록 만든 후 모든 조건이 완비된 시점에 움직여 지금과 같은 완벽한 형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이 9등급 검수는 최종 공격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저 스산한 흰옷의 검수도 최종 공격자가 아니었다.
최종 공격을 펼칠 검수는 경국 황제 뒤쪽에 있었다.
앞서 국화주 술상을 내온 수려한 이목구비의 어린 내관이었다. 황제가 흰옷의 검수 때문에 뒤로 몇 걸음 물러나게 됐는데 그게 하필이면 검수 앞으로 다가간 것이었다. 어린 내관이 술상을 뒤엎고 손을 뻗어 복도 기둥 안을 더듬었다. 그러자 무슨 도술이라도 부린 듯 갑자기 나타난 회색의 비수를 들고는 황제의 등에 인정사정없이 내리꽂았다.
비수는 현공 사당의 나무 기둥 안에 숨겨져 있었다. 나무 기둥과 똑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이 흉기를 찾아내지 못했다. 물론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렇게나 오랫동안 경국 황제의 암살 계획을 준비해 온 줄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인내심을 발휘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건 상대방이 얼마나 강하게 필승의 의지를 다져 왔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어찌 되었든 일국의 군주를 죽이려면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라기보다는 결심과 용기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경국 황제 앞쪽으로는 경천동지할 기세의 예스러운 장검이, 뒤쪽으로는 고물 느낌이 물씬 나는 음산하고 매끈한 비수가 있었다. 황제에게는 그 어느 쪽으로도 도망갈 틈이 없었다.
범한에게는 환생 후 가장 위험한 시험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습지대에서 해당타타와 싸울 때보다 훨씬 더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한탄할 여유조차 부려서는 안 되기에 그의 무의식은 스스로가 가장 정확하다고 여길 만한 선택을 했다. 검은 비수가 범한의 손을 떠나 어느새 상대방의 두 눈을 향했다.
범한은 자신이 신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죽 아저씨나 4대 종사가 나타나 주지 않는 이상 앞에 있는 검수들을 물리쳐 3 황자를 구하고, 흰옷의 검수와 싸운 후 다시 충분한 시간을 확보 해 황제 폐하 뒤쪽에 있는 어린 내관까지 무찌르는 건 불가능했다.
어린 내관은 무공을 익힌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오래된 단검 비수는 사람의 목숨을 취하기에는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에 범한은 먼저 3 황자를 구하고 다시 황제 폐하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이 선택 때문에 나중에 대역 죄인으로 몰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는 모두 앞에 있는 3 황자가 그에게는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아서였다.
사람을 구하려면 당연히 아이가 먼저니까.
* * *
검은 비수는 시커먼 뱀처럼 처음 나타난 검수의 미간으로 향했다.
상대방은 이번 계획을 정말 세밀하게 짠 것이었다. 물론 범한이 쓰는 방법 중 가장 무서운 게 바로 이 가늘고 검은 비수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들은 바로는 늙은 괴물인 비개가 직접 준 불경한 물건이어서 9등급 고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이에 반 토막이 난 칼이 번쩍하더니 범한의 비수가 아래층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그 순간 9등급 검수는 세인에게 문무를 겸비했다 칭송받는 범한 제사가 무기를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칼에 대항할지 상상했다.
한데 비수가 난간을 벗어나려 할 때 범한은 몸을 재빨리 돌려 자신의 등을 검수에게 보였다. 그리고 몸을 돌릴 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머리카락을 살짝 집어 올리고는 동시에 뒤쪽을 향해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가느다란 자수용 바늘이 정확히 검수의 새끼손가락 가장자리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겨우 한 개만 들어간 터라 피도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검수는 순간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갑자기 기혈이 원활치 않자 칼을 휘둘러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냈다.
그런 후 고개를 들어 보니 범한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유령 같은 범한은 어느새 안하무인 격인 흰옷의 검수 앞에 와 있었다. 검수와 황제 사이에 선 것이었다. 지금 범한이 지니고 있는 무기는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애매한 검은색 쇠뇌의 화살과 연막을 내는 것들뿐이었다. 그래도 이 둘을 함께 섞어 쓰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오장육부가 썩고 파괴되도록 하는 독 연막을 만들 수 있었다.
순간 노랗고 파랗고 하얀 연기가 현공 사당 꼭대기 층을 채워 나갔다. 참으로 말로는 형용하지 못할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지만 경도에서 가끔씩 마주치게 되는 평범한 꽃불의 연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범한의 음흉한 수단에 통달하고 있던 흰옷의 검수는 어느새 쇠뇌의 화살 세 발을 피했다. 그리고 호흡을 멈추고 검을 쭉 뻗어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 같은 기세로 연기를 뚫고 범한에게 향했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범한은 황제 폐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니 이제 검이 누군가를 찌른다면 범한 자신부터 찌르리라. 크나큰 의리를 발휘해 황제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겨우 여기까지 뿐. 황제 폐하 뒤쪽에서 비수를 들고 있는 어린 내관은······ 그래, 부디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검이 얼굴 바로 앞까지 왔다.
순간 패도의 정기가 몸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광폭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범한이 정기를 지휘하는지 아니면 정기가 정신을 통제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범한의 날카로운 울부짖음과 함께 두 손바닥이 재빨리 앞으로 나갔다. 체내 정기가 암석처럼 단단하게 뭉쳐져 팔을 타고 뻗어 나가 빙설처럼 차가운 검을 맞았다.
흰옷의 검수가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계속 이대로 나아가 범한의 가슴을 검으로 찔러 버린다면 가공할 두 주먹에 자신의 흉골도 산산조각 날 게 뻔했다.
촤악, 소리와 함께 신선이 인간계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 듯 고검이 살며시 파동을 일으키며 범한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바로 그 순간, 흰옷의 검수는 검을 버리고 범한의 손바닥 공격에 맞섰다.
펑! 하는 거대한 소리가 울리더니 기운이 사방으로 진동하며 퍼져 나가고 먼지가 일며 독 연기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 한데 흰옷의 검수는 아무리 천재적이라 할지라도 범한을 따라오지 못했다. 범한이 영유아기 때 쌓은 정기의 기본기가 검수의 약한 왼팔로 파고들더니 그의 팔을 부러뜨려 버렸다.
그런데도 흰옷의 검수는 밀려 퇴각하면서도 범한의 어깨에 꽂아 넣은 고검을 손쉽게 뽑아 가 버렸다. 빠른 속도와 신묘한 손놀림. 순간 범한은 섬뜩했다.
헛맞은 일격과 즉각적인 퇴각. 그야말로 일류 검수다웠다. 흰옷의 검수는 발끝으로 난간 한쪽을 밟더니 범한을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하얀 도포 자락이 나풀거리는 모습은 흡사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학이 훨훨 나는 것만 같았다.
* * *
흰옷의 검수와 범한이 손을 맞부딪친 순간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범한에게 당한 9등급 검수가 얼굴과 산산조각이 나버린 양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으로는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생각과 절망감을 토로하며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왈칵 검은 피를 쏟으며 바닥으로 엎어진 9등급 검수. 바닥에 몸이 떨어졌을 때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검수 뒤쪽에는 어느새 홍 태감이 와 있었다.
구부정한 몸의 홍 태감은 그 자리에 평온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은 아무 공격도 하지 않은 것처럼 소맷자락에 들어가 있었다.
그 순간 범한은 결정적 한 방을 노리고 있는 검수가 생각나 절망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수년이 지나도 생각날 정도로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비수를 들고 찌르려던 어린 내관이 이미 바닥에 혼절해 있었다. 게다가 그의 머리 근처에는 나무 부스러기 같은 게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어린 내관의 공격 목표였던 경국 황제 폐하의 손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잔이 놓여 있던 쟁반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 혼란한 상황에서 그가 집어 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던 것이다. 황제가 발아래에 있는 어린 내관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짐이 섭류운은 아니나 겨우 너 정도에게 살해당할 수는 없지!”
이 장면만 봐도 경국 황제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천하 통일을 하러 나섰던 용자였고 싸우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으니 이쪽으로는 잔뼈가 굵었던 것이다.
범한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조각난 나무 쟁반을 들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전생에 인기 있었던 액션 영화 가 떠오르는 걸까. 정말 멋진 쟁반 공격이었다.
* * *
현공 사당 아래쪽에서 미친 듯이 소리치는 소리와 욕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흰옷의 검수가 도망가고 있어서 소란이 인 게 분명했다. 이제 보니 경국 권문귀족들은 용감하고 성격도 화끈했다. 흰옷을 입은 이가 황제 폐하를 노린 검수란 걸 알고는 속속 그자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걸 보니 말이다.
이내 놀란 소리와 끄응, 하는 소리가 지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당 꼭대기 층까지 들려왔다.
아직 논공행상할 만큼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터라 범한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고 살펴보았다. 경도 수비 섭중이 입을 가리고 서 있었다. 범한의 눈에는 그가 피를 토한 게 똑똑히 보였다. 분명 조금 전 흰옷의 검수와 겨룰 때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섭중은 경국 경도에 있는 몇 안 되는 9등급 고수였다. 한데 그가 기습 공격을 받아 피를 토할 정도라면 흰옷의 검수는 더 많이 다쳤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국화가 가득 피어 있는 곳에서 흰옷의 검수는 한껏 느려진 속도로 도주 중이었다.
“떠도는 이야기로는 사고검에게 아우가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떨어져 살아 아무도 그가 어디에서 지내는지 모른다고 했지.”
황제 폐하가 범한 뒤에 서서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범한아, 짐에게 저자를 잡아 오너라. 저들 형제가 똑같이 바보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봐야겠구나.”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던 경국 황제가 연달아 일어난 공격에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범한이 무언가를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홍 태감도 이미 올라와 있으니 이제 황제 폐하의 안전은 그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비록 어깨 부위에서 피가 흐르고 있지만 범한은 난간을 뛰어넘어 새카만 새처럼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사당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은 범한이 뛰어내리자 이번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경났습니까!”
범한이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사라지고 나서 잠시 후, 검수에게 당했던 경도 수비 섭중도 기운을 회복하자 이내 사나운 얼굴을 하고는 흰옷의 검수가 도망간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궁전의 사형이었다. 만약 저 검수를 잡지 못하면 섭씨 가문은 강물에 뛰어들어도 씻어 내지 못할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그러니 목숨을 거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직접 검수를 잡아 와야만 했다. 그것도 산 채로.
이내 호위병 중 경공의 고수들도 화살처럼 공중을 가르며 언덕으로 날아갔다.
산 아래에서는 금군이 층층이 포위하고 있었고 산에서는 범한과 섭중이라는 두 명의 9등급 고수, 그리고 눈이 시뻘게진 한 무리의 호위병들이 추격에 나선 상태였다. 이런데도 과연 흰옷의 검수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을까.
308화
현공 사당에 있는 황제는 조금 전 화난 표정은 모두 걷어 낸 평온한 얼굴이었다. 발아래 널브러져 있던 나무 파편들, 선혈, 호위병과 검수의 시신, 다치고 혼절한 사람들, 주변 공기 속에 섞여 있던 살짝 달큼한 냄새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수년 동안 암살을 준비한 검수의 공격도 받지 않은 것처럼 황제는 3년에 한 번 돌아오는 국화 감상 모임을 계속 이어 갔다.
사당 꼭대기에서 사람들이 잔해를 치우기 시작할 무렵 무너져 내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황궁 내 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황제 폐하의 안전을 책임지는 대내 시위 호위병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 공공을 포함한 내관들은 모두 떨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검수에게 공격을 받으셨으니 자신들이 어떤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될지, 아니면 곧장 삶을 여정을 끝내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되어서였다.
기듯이 바닥에서 일어난 태자가 얼굴 가득 눈물범벅이 되어 1 황자와 함께 부황 앞에 꿇어앉아 사죄를 했다.
“소자, 무능하여 부황께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1 황자는 마음이 더 무거웠다. 서역에서 무수히 많은 적을 죽였건만 검수가 습격한 상황에서 자신은 그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평소 얕봤던 범한은······ 생각지도 못한 반응 속도를 지닌 굉장한 실력자였다.
“9등급이었으니 평범한 실력이 아니었다. 그러니 너희가 아무리 짐의 자식이기는 해도 이렇듯 죽자고 달려드는 자 앞에서 아무런 대응도 못 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란다.”
황제는 아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대신 홍 태감 손에 죽어 한쪽 구석에 있는 9등급 검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태자가 밟아 깬 술잔을 보며 이맛살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품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3 황자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리고 사당 아래로 펼쳐진 언덕과 평야에 가득 핀 국화를 바라보았다. 산비탈 쪽에서는 가끔씩 나뭇가지가 부서지며 공중에 날리는 게 보였다.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제 뒤에 서 있던 홍 태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곳에서는 검수의 공격이 지나갔으니 더 이상 황제 폐하 곁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작은 범 대인이 최근에 병이 나 몸이 안 좋습니다. 이에 소인, 걱정이 되어 그러나이다.”
범한이 떠나기 전 바닥에 던져 놓고 간 약 주머니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독 연기가 퍼졌으니 분명 누군가는 그 연기를 마셨을 터. 그러니 범한은 떠나기 전 해독약부터 챙긴 것이었다. 바닥에 놓인 약 주머니에서 그 아이의 세심함이 보이자 황제의 눈에 양심의 가책이 잠시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제야 범한이 최근에 병이 났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더군다나 홍 태감이 지난번 범한의 집에 갔을 때 확인한 거였으니 황제가 보기에도 자신은 분명 범한에게 부담을 준 것이었다.
황제가 현공 사당 난간에서 손가락을 몇 번 두드렸다. 그렇게 똑똑, 소리가 나자 아래쪽에서 권문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 뒤쪽에 있던 범건은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위쪽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냥 있거라.”
황제가 홍 태감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이니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아래쪽에 있는 평지에서 몇 차례 수상한 소리가 나더니 수 명의 사람이 매복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에 장도를 멘 이들은 험준한 계곡과 암석 사이를 누비더니 이내 국화꽃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앞서 출발했던 대내 시위 호위병들을 따라잡고 선두에서 달려가고 있는 삼인방의 흔적을 뒤쫓았다.
호위(虎衛)가 움직인 것이었다.
* * *
산에 사당이 있다면 그 앞에는 자연스레 계곡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곳의 계곡은 험준했다.
범한은 험준한 계곡과 들판이 맞붙은 곳에서 가끔씩 손을 뻗어 앞쪽에서 길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를 쳐내며 질주를 하고 있었다. 지나갈 때마다 잘려 나간 금선국이 진한 향을 내뿜어서인지 금선국 향을 계속 맡게 되자 아편이라도 한 듯 체내 정기가 두 개의 길을 따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모되어 버린 정신력과 힘이 빠르게 보충되었고 두 발에는 눈이라도 달린 듯 정확하게 위아래로 놓인 바위들을 밟아 나갔다. 마치 검은 용 한 마리가 놀라운 속도로 산 아래를 빠르게 훑으며 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기술은 오죽 아저씨를 빼면 범한이 최고였다. 더군다나 오늘 흰옷의 검수와 일전을 치른 후 체내에서 일어난 거대한 진동 때문에 몸 상태는 훨씬 좋아져 있었다. 정기의 양이며 정신 상태까지 모두 최고조에 달해 오른쪽 어깨의 상처는 지금으로서는 별거 아니었다.
범한으로부터 수십 장 떨어진 앞쪽에서 흰옷의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검수의 몸놀림은 정교했다.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아름답게 포물선을 그리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지축의 인력을 빌려 가속하는 범한의 기술이 한 수 위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뒤쪽에 있던 호위병들은 산 아래에서 길을 찾아가며 따라가던 터라 한참 뒤처져 있었다. 그리고 명성이 자자했던 섭중 대인은 이름이 무거울 ‘중(重)’ 자여서 그런지 이름에 걸맞게 무게 때문에 산 아래로 주르륵 밀려 내려가고 말았다.
새로 따라 놓은 차가 아직 식지도 않은 사이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 아래까지 와 있었다. 저 멀리 금군 병마의 기치가 보일 듯 말 듯 하자 범한은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흰옷의 검수가 갑자기 몸을 기울이더니 방향을 틀어 산 아래 나무가 듬성듬성한 가장자리 쪽을 따라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평지로 온 이상 범한의 속도로는 흰옷의 검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섭중의 일격을 받아 큰 손상을 입은 탓인지 검수는 더는 속도를 올리지 못했고, 이내 범한도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상대방이 선택한 방향 때문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산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연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 검수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내려보냈을지라도 산 아래에 있는 금군들은 바로 대응할 수 없었다. 더욱이 흰옷의 검수가 선택한 방향은 금군이 신경 쓰기 가장 어려운 곳이었다. 바로 원시 밀림이었다. 밀림의 면적은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검수가 숨기에는 충분했다.
범한은 조용히 쫓아가기만 했다. 궁전이 일을 헐렁하게 처리해 금군이 저곳에 대한 방비가 소홀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다행히도 밀림 밖은 제대로 방비가 되어 이었다. 그런데 흰옷의 검수가 빠르게 질주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살짝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범한은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따라갔다.
그러자 흰옷의 검수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이에 범한도 방향을 틀고 따라갔다.
흰옷의 검수는 정말 멋지게 도망가고 있었다. 여러 차례 급작스레 방향을 바꾸면서도 저 멀리 있는 금군과 거리를 유지했다. 반면 범한은 금군을 향해 도와 달라 소리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슝, 하는 소리와 함께 흰옷의 검수가 갑자기 속도를 냈다. 그러더니 앞쪽에 있는 호수를 가로질러 버렸다.
* * *
범한도 이를 악물고 쫓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검수를 따라 벌써 산 아래에 있던 금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온 것이었다.
앞쪽에 시야가 탁 트여 넓게 펼쳐진 곳은 금군이 방비하지 않는 곳이었다. 범한은 너무 놀라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금군의 감시망을 흰옷의 검수가 대체 어떻게 뚫은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일단 제외하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석은 딱 하나뿐이었다. 검수가 금군의 배치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것. 이는 곧 경국 조정의 긴급 대응 방법을 무서울 정도로 명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늘 하루 궁전이 현공 사당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떠올랐다. 범한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렇지만 지금은 음모 따위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섭중은 무거워 몸이 둔하고 호위병은 너무 느리고. 지금 자기 주변에는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검수가 사라져 버린다면? 이는 곧 범한이 비리고 고린내 나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에 범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날고 쫓고 또 쫓기만 했다.
* * *
범한은 자신이 추적을 꽤나 잘한다고 믿고 있었다. 특히 북해 부근에서 한밤에 호위 몇몇과 함께 천하를 종횡무진 누빈 소진을 끈질기게 추적해 잡아 낸 후에는 4대 종사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추적을 따돌릴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 범한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흰옷의 검수는 금군의 봉쇄를 뚫는 것도 모자라 곧바로 강력한 탈출 능력까지 발휘했다. 산자락에서 호숫가로, 다시 호수를 가로지르고 이어 논밭을 지나고. 그러는 동안 범한의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여러 번. 만약 범한의 시력이 일반인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운이 남들보다 좋지 않았다면 범한은 일찌감치 그를 놓쳤을 것이다.
더군다나 흰옷의 검수는 도망가는 내내 차분했다. 심지어는 그게 본능인 듯 너무나도 자유자재로 피해 다녀 범한도 그의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어려서부터 감찰원의 기술을 접하며 자랐기 때문에 이 정도 실력이면 얼마나 오래 수련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상대방의 노련하면서도 동시에 음험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흔적 지우기 수법에서 범한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잘 아는 그 어둠의 존재와 닮아 있어 아무리 봐도 이 검수에게 새하얀 옷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흰옷의 검수는 냉정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음험하고 악랄하기가 세상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이 검수의 진면목인 게 분명했다.
현공 사당에서 검수의 검술을 접했을 때는 번쩍번쩍하니 대단히 장렬했다. 그런데 지금 저자가 내뿜고 있는 검은 기운을 보니 아까 보았던 검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보니 검수의 진짜 실력은 예전에 범한 자신이 잡아 온 소은보다 뛰어났고 자신의 진짜 실력보다도 위였다.
범한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상대방의 검술 실력을 현공 사당에서는 피가 들끓어 너무 충동적으로 대처하는 바람에 제대로 파악을 못 했었다. 그러다 냉정함을 찾은 지금 다시 평가를 해보고는 범한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 섭중이 저자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유일한 행동은 당장 멈추어 서서 멀어져 가는 상대를 보며 안심하는 것뿐이었다.
* * *
두 사람 앞에 경도성이 나타났다. 경도성은 사람을 압도할 만한 크기로 우뚝 솟아 있었다.
흰옷의 검수가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입고 있던 순백의 도포를 한 손으로 찢어 버렸다. 그러자 안에 입고 있던 평범하고 소박한 옷이 드러났다. 경도의 일반 백성과 같은 차림새였다.
하얀 도포는 진흙 위로 떨어졌다. 잠시 후 그가 한쪽 발끝을 옷 위에 살며시 대는가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렸다.
범한은 저 멀리 보이는 일반 백성으로 변장한 검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대방을 향한 탄복도 이미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는 일반 검수들처럼 교외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물망 안으로 들어오는 편을 택했다. 수많은 사람이 있는 경도로 들어와 그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분명 자신을 엄폐해 줄 믿을 만한 신분이 있어서일 거다. 감찰원의 전 대원을 움직여도 찾기 힘든 신분 말이다.
오늘 황실 사람들은 모두 현공 사당에 가 있으니 경도의 수비는 자연스레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문 밖에 있는 병사들도 잠시 눈이 어리어리해지기에 비비기만 할 뿐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가 경도 사람들 속으로 몰래 들어가 놀랍게도 거리낌 없이 성문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성문을 들어갈 때 범한도 저지를 당하지 않았다. 이에 그도 가까스로 검수를 쫓아갈 수 있었다. 북새통이고 복잡하기까지 한 경도 내부는 검수의 진짜 능력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에 범한은 상대방의 수를 파악하는 데 촉각을 동원했다. 다행히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맑고 몸놀림도 속도가 줄어들지 않아 범한은 검수를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범한은 조용히 추격과 은폐를 반복하며 민가와 골목 사이를 누볐다. 북해 근처보다 위험 지역은 많지 않았지만 범한은 그때보다 훨씬 더 긴장하고 있었다.
건물 귀퉁이 부근에서 사람 그림자가 훅 지나갔다. 그 그림자는 이어 대나무 아래에 천으로 된 신발을 사뿐하게 내딛더니 이내 사람들로 북적이는 옛 시가지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을 지나다가 산사나무 열매 탕후루 꼬치를 파는 작은 노점에 부딪쳐 넘어졌다. 범한은 넘어지는 그를 보며 확신했다. 다친 검수가 이미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어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다.
309화
이곳에서 느닷없이 사뿐한 발걸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범한이 그자를 막다른 골목까지 모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몸과 마음을 집중해 먼 길을 이동해서 그런지 범한의 얼굴은 인위적으로 색을 칠해 놓은 것처럼 창백하고, 두 뺨은 흥분해 발그레하고, 두 눈은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체내 정기가 극한까지 치달은 것이었다.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검수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흰 도포 아래에 있던 옷에서 피가 배어나는 게 보였다.
검수가 몸을 돌렸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고 그 역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평소 햇볕을 쬐지 않는 사람 같아 보였지만 분장으로 바꾼 얼굴일 수도 있었다. 그가 겨우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범한을 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범 대인, 당신은 지치지도 않는 거요?”
범한은 어이가 없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본관도 당신이 이리 멀리 도망쳐 올 줄은 몰랐지.”
검수가 살며시 웃더니 옷 속에 손을 넣어 가을 물처럼 찬 기운의 고검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검 하나를 더 들었을 뿐인데 그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도망 중인 암흑의 검수에서 어느새 자신감과 오만함이 잔뜩 밴 거만한 검수로 변해 있었다.
“당신은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범한은 잠자코 있었다. 다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골목 끝에서 고검이 내뿜는 싸늘한 기운을 느낀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암기로 쓰는 쇠뇌의 화살, 신발에 숨겨 둔 검은색 비수, 손에 감춰 둔 독 연막을 내는 물건을 꺼내 쓸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런데 비수는 제자리에 없고, 독 연막은 다 썼고, 쇠뇌의 화살도 하나도 없었다.
“이제 몸만 남았군.”
이름도 모르는 검수가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쇠뇌의 화살은 겨우 세 발, 비수는 한 자루, 독 연막을 내는 환은 열네 알. 그리고 지금은······ 몽땅 써버렸으니 몸만 남았구려.”
범한이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장비도 챙기지 않고 경도까지 오다니. 그것도 줄곧 자신을 지켜 주던 3대 보물을. 해당타타와 정면 대결을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3대 보물 덕분이었는데. 그것도 없이 모든 면에서 해당타타에 뒤지지 않는 절정의 고수와 싸워야 한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범한이 해야 하는 건 상대방의 상처가 더 빨리 발작하기만, 오죽 아저씨가 더 빨리 나타나 주기만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현재 최절정에 달한 정기가 온몸에 가득 차 있는 상태여서 자신감이 넘쳤다 경맥 안을 빠르게 운행하고 있는 정기가 말 안 듣는 아이처럼 그에게 칭얼거렸다. 얼른 자기를 가지고 상대방과 제대로 한판 붙으라고 말이다.
한데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범한은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전의를 억눌렀다. 그리고 아무 감정도 없는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확인 가능한 당신의 신분을 말해 주면······ 그만 보내 주겠네.”
큰 위험을 무릅쓰고 건넨 제안이었다. 지금껏 이 절정의 고수를 따라 경도까지 와놓고 겨우 거래나 하려 하다니. 현공 사당의 검수 습격은 너무나도 기괴했다. 궁전은 이상하게도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검수가 차례대로 나타나며 습격을 하도록 짠 것도 그렇고. 흰옷을 입은 검수의 출현과 도주. 더군다나 경국 내부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것까지. 이 모든 건 너무나도 무서운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 검수 습격 사건은 어느 한쪽 세력만 참여한 게 아니란 점. 그리고 분명 경국 조정 사람 중 하나가 참여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해야 할 일은 이번 일이 일어난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용자처럼 황제 폐하께서 당한 치욕을 씻어 드리는 게 아니고 말이다. 범한은 단순한 충신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에게 더 신경이 쓰였던 부분은 이번 검수 사건과 자신, 아버지 그리고 감찰원 간의 관계였다.
“기개 따위는 말하지 말게.”
범한이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 줄곧 당신을 뒤쫓아 왔으니 승낙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그래도 필요한 정보만 말해 주면 바로 풀어 주겠네.”
검수는 침묵했다. 범한의 말에 수긍하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상대방이 이 공평해 보이는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여겼다. 그리고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이익인 거래가 이루어지려는 찰나 상대방이 입을 뗐다.
“지금 이 문제는 내가 대인을 죽이면 해결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하면 내가 그냥 떠날 수 있는 거 아닌가?”
세상에 이런 일이! 2 황자가 내놓은 공생의 제안을 범한은 강하게 거절했었다. 누가 봐도 완만하게 매듭지을 수 있는 멋진 제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또 누군가가 범한의 제안을 똑같은 식으로 거절하고 있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지? 당연히 실력이었다.
* * *
검이 번쩍이며 골목을 비추었다. 검이 일으킨 바람에 가을이 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잎들이 공중으로 떠올라 두 사람 사이에서 어지럽게 날렸다. 그리고 어느새 옛 사연이 가득 담긴 고검이 범한의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범한의 정기도 현공 사당 꼭대기에서처럼 순식간에 양 손바닥까지 흘러나와 어느새 천지를 갈라 버릴 기세의 웅장한 장풍이 되어 있었다. 범한은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장검은 쳐다보지도 않고 장풍이 담긴 손으로 상대방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살을 에는 듯한 어마어마한 장풍의 위력에 검수의 머리카락이 뒤쪽으로 흩어지며 강철 침으로 변하기라도 한 듯 삐죽삐죽 솟구쳤다.
범한은 무공 실력이 상대방보다 떨어졌기에 사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절정의 고수 검수와의 승산 없는 싸움을 할 때, 살기 위해 몸을 사리고 오만하게 행동할수록 목숨을 지킬 수 없기에 범한은 최선을 다했다.
상대방은 범한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다. 검을 가로로 휘둘러 범한의 손바닥 위를 내리쳤다. 그 순간 범한은 재빨리 손을 거둬들인 후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듯 상대방의 태양혈을 향해 직격타를 날렸다. 깔끔하게 두 주먹을 이용해 주먹질을 날린 것이었지만 대단히 사나운 일격이었다.
그리고 이때 범한과 일전을 벌이던 검수는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를 해버렸다.
검수는 더 이상 화공이 붓을 놀리듯 멋들어지고 섬세하게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대신······ 검을 버렸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장검은 화살처럼 범한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한편 검수는 몸을 정말로 이상하게 움츠려 맹렬하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범한의 주먹질을 피하는 한편, 자신의 왼쪽 다리에 있는 신발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곳에서 시커먼 비수가 나왔다.
* * *
범한은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을 거두었다가 다시 두 손을 교차시켜 한 방 날렸다. 패도의 정기로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검을 날려 버렸다. 그러자 고검이 직선으로 날아가 골목길 벽에 꽂히더니 부르르 떨며 웅웅 소리를 냈다.
그런데 범한을 너무나도 깜짝 놀라게 한 건 검수가 신발 속에서 비수를 꺼내 들어 자신을 찌르려 한 것이었다. 범한에게 익숙한 수법을 쓴 것이었다.
고검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 검수는 광명정대하고 정정당당한 검의 절대 고수였다. 이에 범한도 패도의 정기로 맞대응했다. 그런데 검을 버리는 순간, 검수는 순식간에 광채를 잃고 가을바람 속에서 유영하는 유령이 되어 손에 든 날카로운 비수로 범한을 찌르려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공격 방법 전환으로 하마터면 범한에게 큰일이 날 뻔했다. 비수가 훑고 지나간 왼쪽 어깨에 가느다란 상처가 생겼으니 말이다.
순식간에 두 개의 흑회색의 그림자가 골목에서 서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 가까이 붙어서 치고받는데 정말 기이한 방법으로 소리도 없이 날카롭게 서로를 공격했다. 팔꿈치를 구부리고, 무릎을 들고, 배를 공격하고, 발을 밟는 둥 두 사람의 몸놀림은 갈수록 빨라졌다. 담벼락 한 모퉁이에 있다가 담벼락 위에도 갔다가 다시 바닥에 엎어지기도 했다가. 몸을 치는 소리가 소름 돋을 정도로 연달아 울렸다.
어려서부터 오죽에게 수련을 받지 않았다면, 만약 감찰원의 음침한 풍격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런 상태였다면 범한은 일찌감치 검수의 비수에 찔려 몸에 수없이 많은 구멍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재빨리 피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신들린 듯한 비수 공격에 당해 무수히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상대방은 감찰원 관복의 특징을 꿰뚫고 있는지 비수로 방어력이 약한 부분만 골라 공격했다.
그런데 범한은 다른 이유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상대는 범한에 대해 철저히 연구를 한 상태였다. 이에 범한이 주로 손을 뻗는 곳, 평소 의지했던 잔재주 등등을 정확히 알고 있어 그가 어떤 공격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먼저 알고 피해 버렸다. 결국 새끼손가락 비틀기, 눈 찌르기, 음낭 쥐어짜기뿐만 아니라 팔꿈치 돌려 가격하기 등등 온갖 저질적이고 비열한 수법까지 모조리 먹히지 않았다.
범한의 눈을 향해 옅은 회색의 빛이 반짝했다. 비수 끝이 직선으로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오죽 아저씨의 몽둥이질을 떠올리게 하는 공격이었다. 그 순간 범한은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직접적이고, 악랄하고, 정확하게!
숨이 넘어가기 직전, 과거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러자 자신에게는 아직 대벽관이 남아 있고 신발 끝에 칼 조각이 숨겨져 있다는 게 생각났다.
범한은 검수의 손을 뿌리치고 체내 흉포한 정기를 한꺼번에 내뿜었다. 그러자 팔에 둘려 있던 감찰원 관복이 진동에 의해 갈가리 찢어졌다. 오른손은 정기의 자극을 받아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렴풋이 담주 해안 절벽에서 섭류운이 손에서 내뿜었던 기운과 비슷하게 파박! 하며 치는 소리가 났다.
범한의 왼쪽 팔에 유령처럼 붙어 있다시피 한 검수도 순간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강력한 정기를 느꼈다. 그가 본 상대방은 손가락을 활짝 펴고 말라빠진 나뭇가지처럼 떨고 있었다.
검수는 가슴이 답답하고 동시에 진동이 느껴지며 몸이 뒤로 밀리자 발끝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하지만 그 순간 범한이 날린 신발 끝 칼날 공격에 정면으로 맞아 공중으로 붕 떠 세 척 정도 먼 곳에 떨어졌다.
범한이 끄응, 소리를 내며 칼날에 찢어진 왼쪽 어깨를 감싸 쥐고는 앞쪽에 있는 무서운 적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가 피를 토해 입을 가리고 있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죽 아저씨는 아직이라니!
* * *
검수가 팔을 가로로 뻗었다. 그러더니 회색의 비수를 가로로 들어 눈앞에 놓고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네게서 배운 거다.”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범한은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런 몸 상태 때문에 얼굴마저 어둠침침해졌는데도 오히려 싸늘하게 받아쳐 버렸다.
“그럼 사양하지 않으마.”
범한에게는 상처를 수습하고 기운을 재정비할 시간이 없었다. 검수는 상처를 입은 상태라도 범한보다 버티는 힘이 훨씬 강했다. 이에 범한은 더 이상 다른 말 없이 발끝으로 담벼락을 밟았다. 담벼락에 있던 회색 벽돌 몇 개가 떨어져 나가더니 범한은 호랑이 같은 기세로 용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검수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런 후 비수를 쥔 손의 방향을 바꿔 범한의 태양혈을 찌르려 했다.
범한은 순간 동작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난폭한 공격의 기세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비수를 타고 작은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 두 손가락 사이에서 차가운 빛이 잠시 반짝이더니 범한의 목 뒤쪽에서 귀신처럼 무언가가 나왔다. 찰나의 순간, 범한이 독침을 집어 들어 적이 비수를 움켜쥐고 있는 손아귀에 찔러 넣은 것이었다.
한데 검수가 쥐고 있는 칼은 허상이었다. 침 끝을 찔러 넣으려 할 때 상대방은 벌써 침착하게 비수 끝을 세 치 정도 위로 들어 올린 후였다. 그것도 독침이 비수의 가로 면을 찌르게 되도록 말이다. 침이 짧아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이었다.
이어 검수는 한쪽 무릎으로 범한의 엉덩이 보조개 쪽을 눌렀다. 그러자 극심한 통증이 몸을 타고 흘렀고 범한은 가공할 비수가 자기 가슴 바로 앞에 와 있는 걸 봐야만 했다.
비수를 바라보며 범한은 절망했다. 너무나도 철저히 준비를 하고 나온 상대방과 달리 자신은 머리카락에 숨겨 둔 목숨을 지켜 줄 최후의 침 세 개까지 들켜 버리다니!
그런데도······ 오죽은 왜 안 나타나는 걸까.
* * *
허리 쪽이 묵직한 것에 찍어 눌리자 범한은 끙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 소리는 이내 커다란 포효와 같은 함성으로 변했다.
“으악!”
생사의 경계에서 드디어 체내에 있던 잠재적인 힘이 최대치로 폭발했다. 강한 살상력이 모두 설산으로 흡수되더니 패도의 정기가 범한의 두 팔로 재빨리 옮겨 가 비수를 감싸 버렸다.
양손바닥 안에 비수가 끼어 있는데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오른 인두로 거친 발바닥을 천천히 지지는 소리 같았다.
범한에게 검수의 눈 속에 담긴 미소가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재수 없는 일은 언제나 함께 일어난다더니 바로 지금 범한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그의 체내에 있던 가장 큰 골칫덩이가 드디어 폭발해 버렸다. 그것도 사나운 포효와 함께.
폭주하는 정기는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또 길들이기 힘든 야수처럼 그의 경맥 안에서 불안정하게 날뛰었다. 전투에서 체력과 정신이 소모되어 버리자 설산에 축적된 정기가 드디어 극한을 넘어 버렸다.
즉 폭발해 버린 것이다.
310화
찰나에 가까운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범한은 이제껏 맛보지 못한 고통을 생생하게 느꼈다. 몸에 있는 신경 하나하나가 모두 찢어지는 것 같은 극강의 고통이 찾아왔고, 체내 정기는 미친 듯이 경락을 뚫고 나가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장기 속으로 숨어 버리더니 더 이상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기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양 손바닥에도 힘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척, 소리와 함께 그동안 범한의 가슴을 뚫을 수 없었던 회색의 비수가 너무나도 쉽게, 정말 터무니없이 쉽게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범한은 양손을 툭 떨어뜨리고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자기 가슴 위로 삐죽 솟아 있는 비수를 바라보았다.
대결 상대였던 절정의 고수도 깜짝 놀라 제자리에 서서 범한의 가슴에 꽂힌 비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명한 통증이 범한은 머리로 전달되자 그제야 범한은 자신의 몸속에 비수가 깊이 박혔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이계의 모 골목에서 잃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싫다고!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아직 자식도 안 낳았고 《홍루몽》 78회도 아직 다 옮겨 쓰지 못했단 말이다. 그리고 황실 금고에 있는 섭경미의 유물도 보지 못했고, 신묘도 못 가봤고 또 황궁 대전에 서서 천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진짜 신분도 말하지 못했단 말이다.
제일 싫은 건······ 눈먼 아저씨는, 당신은 왜 아직도 나타나는 않는 거냐고!
* * *
“의외군.”
더욱 의외였던 건 죽음을 앞두고 홍콩 배우 주성치를 떠올린 범한뿐만 아니라 검수도 같은 말을 내뱉었단 점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범한은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말이었고, 상대방은 자신이 무고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었다.
검수는 비수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범한도 두 다리의 힘이 풀려 땅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경국 황제의 정예 무사인 호위가 천신만고 끝에 골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결투가 끝난 상태였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일반 백성처럼 보이는 이가 범한 대인의 가슴에서 비수를 뽑아 들더니 검은 그림자처럼 골목을 막고 있던 담벼락을 넘어가는 장면뿐이었다.
그리고 범한 대인은, 호위들 사이에서 최강의 인물로 회자되던 이는 만취한 술꾼처럼 경직된 몸으로 골목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얼른 쫓아!”
호위 하나가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둘로 나누어 움직이고 우선 대인부터 구한다!”
이번에 출동한 호위의 대장, 고달이 살기등등하고 음울한 얼굴로 범한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땅바닥에 있는, 자신과 함께 북제에 다녀온 젊은 관원을 초조하게 걱정하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골목 안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안 죽어.”
고달의 품 안에서 범한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검붉게 변한 가슴팍을 보고 있다가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심각하게 찔리지는 않았······. 한데 얼른 어의를······ 집에서 누이에게 해독약을······ 폐하께 비개 스승님을 불러 달라고······. 살고 봐야지.”
이 말을 끝으로 범한은 눈을 감고 혼절해 버렸다. 범한은 혼절하기 직전 검수가 도망간 담벼락을 모호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중상을 입고 난 후 범한은 그 무서운 검수의 신분을 어렴풋하게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무섭게 다가왔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혼절한 후 깨어나고 싶지도, 이 일에 대해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차 가림막이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펄럭이는 가림막 사이로 마차 밖 푸른 산과 다급히 뒤로 물러서는 기다란 석판 길이 수없이 많은 화폭이 되어 쉼 없이 거꾸로 따라오고 있었다.
한편 화면 한쪽 구석에서 나풀거리는 검은 천 조각들은 검은빛이 되어 점점 화면을 잠식해 나갔다.
이어 알록달록한 눈부시게 반짝이는 화면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것이 다시 눈에 익은 작은 꽃송이로 변했다. 담주 벼랑에 피어 있던 꽃이었다. 누군가가 조금 거칠지만 유난히 따스한 손을 뻗어 그 꽃을 꺾었다.
꽃은 민가 지붕에 있는 건조대로 올라가 햇빛과 해풍을 쐬며 마른 후 찻잎과 함께 잔으로 들어갔다. 끓는 물을 잔에 따르자 찻잎과 말린 꽃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광택이 도는 황금색 호박빛이 잔 위로 떠올랐다. 그러자 또 손이 등장해 조심스레 잔을 받쳐 들고 오더니 그것을 얼굴 앞에 놓았다.
“도련님, 사사가 타 온 새 차를 마셔 보십시오. 오늘은 사사가 시집온 첫날입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동아 누나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담주에서 두부를 파는 사람이 오늘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온 건지······.
범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차를 받아 들고는 다른 쪽에다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기 옆에서 계속 닭 다리를 뜯고 있는 임완아를 바라보며 한 소리 했다.
“그 기름진 걸 어찌 그리 잘 먹습니까. 차로 입가심 좀 해요.”
임완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범한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범약약을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 미간에 옅게 드리워져 있던 근심이 모두 사라지자 범한도 기분이 좋았다.
“가셔야 합니다.”
얼굴에 검은 천을 두른 오죽이 싸늘하게 말했다.
“어디에 간단 말입니까?”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를 뵈러요.”
“그러죠.”
범한은 별다른 의문 없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으로 가 짐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그 검은 상자도.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상자가 너무 무거워 아무리 노력해도 들 수 없었다. 결국 범한의 얼굴은 어느새 땀범벅이 되었다.
* * *
땀 한 방울이 범한의 이마를 타고 흘러 침대 위로 떨어졌다. 혼미한 상태의 범한이 눈꺼풀을 아주 살짝만 들어 올려 그림이 그려져 있는 위쪽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은 낯선 방에 와 있었다. 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어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설마······ 또 다른 세상으로 온 건가?’
죽을 때마다 다른 세상으로 오는 거라면 범한은 어쩌면 지난번에 이왕 죽는 거 더 제대로 죽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 많은 사람과 일을 겪고 많은 일을 했는데도 왜 또 다른 세상으로 와야 하는 거지? 떠나기 싫은데도 떠나게 되다니. 그것도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말이다.
분산되어 있던 시력이 드디어 방 안 불빛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어린아이처럼 집중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고 그런 후에야 자기 옆에 있는 아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임완아의 두 눈은 복숭아처럼 붉게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이불보 한쪽 끝을 꽉 움켜쥐고 입술을 깨문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우는 중이었다. 이제 보니 아직 살아서 경국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에 누워 있는 건지는 감이 잡히지않았다.
고개를 숙여 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가슴에 통증이 밀려오는 게 상처가 다 낫지 않아서였다. 방 안에 내시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은 다급한 모습으로 사방을 쏘다니며 슬프고 분주한 척하고 있었다. 문 입구에는 어의의 의관을 한 노인들이 몹시 슬퍼하며 어느 중년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제 폐하, 신들에게는 방도가 없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대로했다.
“구하지 못한다면 너희들도 모두 함께 묻어 버릴 것이다!”
반쯤 혼수상태에서 이 장면을 본 범한은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웃었다. 단지 그의 입가는 대뇌의 입꼬리를 올리라는 명령을 듣지 못했을 뿐이다.
범한에게는 정말 너무나도 많이 들어 본 뻔한 말이었다. 자신이 죽을 때가 되니 황제도 이제야 화를 내는구나, 하며 황제의 인간 됨됨이가 후덕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은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 다른 걸 원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 어의에게 소리치고 있는 사람이 부친인 범건 상서 대인이면 좋으련만.
손을 뻗어 임완아의 손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몸은 어디 한 군데 안 아픈 곳이 없었고 공허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억지로 몸과 마음을 움직여 보려다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혼절해 버렸다.
* * *
범한 제사가 황제에게는 불만을 품고 아내는 위로해 주려고 할 무렵, 경도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일었다.
황제 폐하가 검수에게 당하셨다니!
이는 천하 사람들에게 퍼져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황혼이 질 무렵 많은 이들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행히도 황제 폐하께서 무사하시다는 소식이어서 백성들은 안심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고 그게 문제였다.
바로 감찰원 제사인 작은 범 대인이 충성스럽게도 군주를 지키기 위해 그 무시무시한 화근 덩어리를 제거하러 용감히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몸으로 현공 사당에서 경도성까지 검수를 추격하다가 결국에는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살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오리무중이라고.
경국 백성들에게 범한은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에 소식을 전해 들은 경도 백성들은 식탁 앞에서 밥그릇을 받쳐 들고는 범한의 무사안일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리고 밤이 되자 그의 회복을 비는 등불을 들고 나선 이들로 경묘 앞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성 남쪽에 위치한 범씨 가문 저택에서는 종들이 등잔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초조해하게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호위들은 다친 범한을 곧장 황궁으로 데려갔으며, 황제 폐하는 환궁 후 중상을 입은 범한을 황궁에 두도록 하는 동시에 어의들에게 그의 곁을 떠나지 말 것을 명했다. 황제 폐하의 조치를 범씨 가문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한 처사라 여겼다. 그런데 아씨 마님과 아가씨까지 모두 입궁하셨는데 왜 아무런 소식도 전해 오지 않는 걸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도련님이 검수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심해 태의(太醫. 황제를 치료하는 의관)도 딱히 손을 못 쓰고 있다고 했다.
의외인 건 호부 상서 범건이 입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침울한 얼굴로 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큰일이 벌어졌으니 진평평도 교외에 있는 진원에 머물며 미녀들의 가무만 즐기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바퀴 의자에 앉은 채로 감찰원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검수 습격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현공 사당에서 붙잡힌 어린 내관과 9등급 고수의 시신을 건네받아 확보했다.
정왕은 이미 황궁으로 들었고 유가 군주는 규방에서 울고 있었다.
유가 군주 말고도 경도성 내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마음 아파했는지 모른다.
* * *
2 황자는 왕부 대문을 굳게 걸어 닫고 부하 중 그 누구도 소식을 알아보거나 반응을 보이는 걸 엄히 금했다. 그는 현재 자신이 매우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가을에 일어난 모든 적절치 않았던 행동들이 자신을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1 황자는 범한을 치료하고 있는 광신궁 밖에서 계속 서성이고 있었다.
의 귀빈 역시 3 황자를 데리고 광신궁 밖에 서 있었다. 오늘 3 황자의 목숨은 범한이 구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선 의 귀빈과 범한이 친척 관계인 건 차치하고서라도 황실 여인으로서 폐하의 진노 뒤에 어떤 일이 숨어 있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이에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황태후는 오지 않았다. 동궁 태자는 광신궁에서 관심 있는 척 몇 마디 건네며 임완아와 범약약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 후 황제 폐하께는 옥체를 돌보시라는 걱정의 말을 건네고는 바로 동궁으로 돌아갔다.
다른 소식에 따르면, 황태후가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홍 태감을 보내기도 했지만 함광전 뒤쪽에서 향을 피워 놓고 기도도 올렸다고 한다.
범한이 중상으로 죽기 직전이란 소식이 전해지자 경국 내 모든 세력은 가장 진실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는 소식이 너무 어처구니없어 깜찍할 지경이었다.
* * *
과거 광신궁은 장 공주의 거처였다. 그리고 범한이 처음 황궁에 잠입했을 때 찾았던 곳이다. 하지만 침궁 내부까지 들어와 본 적은 없어 범한은 깨어났을 때 자신이 어느 궁에 누워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리 범한이 황제 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해도 신하 된 입장에서 황궁에서 치료를 받는 건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에게는 장 공주의 사위라는 신분이 하나 더 있었다.
소리와 함께 광신궁 문이 열리고 황제가 침울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범약약을 보며 미간에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요 태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 가서 쉬십시오. 범한 대인은 어의들이 치료 중이니 분명 무사할 것입니다.”
황제의 눈동자에서 싸늘한 한기가 번뜩였다.
“쓸모없는 놈들······.”
“황제 폐하, 저도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범약약이 마음을 다잡고 황제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하오나······ 태의정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311화
“뭐라?”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냐?”
황제는 범약약 발 옆에 놓인 평범한 손잡이가 달린 함을 주시했다.
범약약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라버니가 깨어나지 않아서입니다. 호위 말로는 오라버니가 제게 평소 사용하는 해독 환약을 들고 오라고 했답니다. 분명 혼절하기 전에 무슨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데 태의가······ 제 말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황제는 묵묵히 계단에 서 있었다. 어의는 분명 자신의 방법에 따라 치료를 하고 있을 터. 그러니 범약약의 청을 거절하는 건 정상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과거로부터 그 수많은 날이 있었는데도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평소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낳은 여러 아들 중에 지금 이 안에 있는 녀석이 가장 잘난 녀석이란 생각 말이다. 그리고 저 안에 있는 아이만 자기 자리에 연연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현공 사당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범한이 목숨을 걸고 황제를 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의심이 습관으로 밴 황제는 범한이 자기 욕심 때문에 꼭대기 층까지 올라와 환궁 요청을 했으며, 이는 권력을 쥔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심을 내보이기 위해 한 행동으로만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황제란 직업을 가진 이에게는 범한의 행동이 충성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범한이 3 황자부터 구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깊이 파고든다면 도찰원에서 이 사실을 물고 늘어지며 범한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다고 탄핵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세세한 부분들을 통해 범한의 내면이 따스하고 선량하다는 걸, 그 여인과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범한은 그 순간 그와 같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는 황제가 그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어찌 되었든 황제는 기쁘면서도 위안이 되었다.
범한이 중상을 입어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자, 지금껏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황제의 마음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범한을 너무 몰아붙인 건 아닌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범건을 향한 이유 없는 질투와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이리 뛰어난 젊은이가 대체 왜······ 너의 아들로만 남아야 되는 것이냐!’
그렇다면 황제에게 다른 아들들은 어떠했을까? 첫째는 너무 직선적이고 둘째는 너무 가식적이고 셋째는······ 너무 어리고. 그렇다면 태자는? 황제는 속으로 싸늘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근본도 없는 놈 같으니 네가 일부러 술잔을 밟았다는 걸 짐이 모를 줄 알았더냐!’
그러니 황제가 범한을 황궁에 남겨 둔 건 한편으로는 속히 범한을 구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중년 남성이 뼛속 깊이 박혀 있던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려서 한 짓이었다. 어려서부터 황제와 함께 자란 범건은 아마도 그의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가장 잘 이해한 것 같다. 그러니 아들이 중상을 입었는데도 입궁하지 않고 집안 서재에서 묵묵히 있었던 것이다.
* * *
황제 폐하의 전갈을 받은 태의정이 쉬고 있는 어의 하나를 데리고 광신궁 밖으로 나오면서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 지혈에는 성공하였나이다. 하오나 칼에 찔릴 때 범한 대인의 내장도 함께 상했습니다.”
황제가 살며시 턱을 치켜들어 범약약의 존재를 그에게 알렸다.
“범씨 낭자는 왜 들여보내지 않은 것이냐?”
태의정은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직업 정신을 잊지 않았다. 이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 환약들은 성분을 알 수 없기에······. 검수의 칼날에 독이 있다 하더라도 독소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하여 막무가내로 복용했다가는······.”
“꼴값하는군!”
그 순간 줄곧 계단 아래 의자에 앉아 있던 정왕야가 불쑥 끼어들었다. 찰싹, 소리와 함께 태의정의 따귀를 때리며 욕을 했다.
“이 몸께서 너에게 두 시진 주겠다! 살리겠다고 했으면 적어도 지금쯤이면 범한이 깨어났어야 하지 않느냐! 저 아이가 깨어나면 어련히 제 의술 실력으로 알아서 고칠 것을! 네 그 늙어 빠진 머리통보다는 훨씬 믿을 만할 것이니라!”
따귀를 얻어맞은 태의정은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고 분노가 치밀어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황제는 순간 정왕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 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현재 비개가 경도에 없는 상황에서 독을 가장 잘 치료하는 이는 범한이었다. 이에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 되었든 어떻게든 범한부터 깨어나도록 만들라!”
말을 마친 황제는 그제야 범한이 다재다능한 완벽한 인재란 걸 깨달았다. 더군다나 범한이 자신과 황자가 독에 중독되었을 걸 염려해 약 주머니를 던져 놓고 가지 않았다면 자신은 검수의 검에 있던 독에 당해 지금 여기에 없을 터였다. 이에 다시 한번 범한의 장점을 발견한 황제는 속으로 탄식을 하며 생각했다.
‘이 아이의 어미가······ 그녀가 아니면 좋았으련만.’
황제가 고개를 내젓고는 내관들의 인도를 받으며 어서방으로 돌아갔다.
황제 폐하의 성지를 받은 정왕은 어의들의 간언은 무시하고 범약약과 궁문 입구를 지키는 호위병을 데리고 범한이 누워 있는 곳으로 밀고 들어갔다.
임완아는 퉁퉁 부은 두 눈을 하고서 조용히 있었다. 범한의 싸늘한 손을 꼭 쥐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창백한 범한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느라 자기 뒤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몰랐다.
이 광경을 본 범약약은 마음이 아파 왔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대단한 오라버니가 이렇게 간단히 죽을 리 없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깨워라.”
오늘 정왕은 더 이상 꽃이나 키우는 농부가 아니었다. 그가 살벌한 결단력을 지닌 대장군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약을 먹였는데도 소용이 없다면 내가 저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릴 것이니라.”
범약약은 이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함 안에서 크기가 각기 다른 몇 개의 나무 상자를 꺼냈다.
정왕야가 말했다.
“어떤 걸 먹어야 하는지······ 아는 것이냐?”
정왕야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어의들이 몽땅 바보는 아닐 터. 그러니 저들 말도 일리는 있었다. 약을 잘못 먹이기라도 한다면 무언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고, 더군다나 겨우 숨만 붙어 있는 범한은 그 자리에서 숨이 멎게 될 것이었다.
범약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중하게 상자를 열어 연한 노란색의 환약을 꺼냈다. 환약에서는 매운 내가 났다.
범약약이 환약을 형수의 손에 건네주었다. 두 여인은 모두 냉정하고 총명한 사람이었다. 임완아가 손을 잠시 떨더니 묻지도 않고 환약을 입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그런 후 내관으로부터 따뜻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셔 입 안에 있는 약을 묽게 만들었다.
옆에 둘러서서 긴장한 채 신기하게 지켜보고 있던 어의들은 이 두 대담한 여인들이 약을 주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에 어의 하나가 서둘러 앞으로 나와 이럴 때 쓰는 나무 도구로 범한의 치아를 벌렸다. 막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돕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임완아가 고개를 숙이고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줄곧 말이 없던 정왕이 갑자기 손바닥으로 범한의 가슴을 한 대 친 후 손바닥을 아래쪽으로 쓸어내렸다.
그런 후 모두 긴장한 상태로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범한의 긴 속눈썹이 살며시 떨리더니 그가 무기력하게 눈을 떴다.
* * *
“범한 대인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일찌감치 관심을 갖고 있던 내관이 소리치며 광신궁에서 나가 황제 폐하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황궁 내부가 잠시 술렁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범한은 가장 먼저 ‘분명 많은 사람이 실망할 거야!’라는 생각부터 했다.
그런 후 옆에서 긴장하고 흥분하고 아직 슬픔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베개요.”
임완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다. 너무 긴장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임완아는 상공이 자기 가슴에 난 상처를 보려 한다는 걸 알았다. 이에 베개로 목을 괴어 줄 때 하나를 더 넣어 범한이 고개를 높이 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범약약은 어느새 불빛이 밝은 촛대를 들고 와 공격을 당해 처참하게 상처가 난 가슴팍을 비추어 주었다.
범한은 두 눈을 감고 매운맛이 나는 환약의 약효가 몸에 퍼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말라 버린 기운이 조금 회복되자 천천히 두 눈을 뜨고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상처는 깊지 않았고 살짝 아래쪽으로 나 있었다. 가슴 쪽을 보고 있었지만 실제 상처가 난 위치는 위장의 상단이었다. 외부 상처는 어의들이 치료를 잘해 놓은 상태였다. 범한이 봤을 때 트집을 잡을 게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위장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정기가 완전히 흩어져 버렸으니 정기로 자가 치료를 할 수도 없고······ 만약 체내에서 피가 계속 흐르도록 둔다면 범한이 보기에도 자신은 오늘 밤을 넘길 수 없었다. 이 세계의 의학 수준으로는 내장 손상을 치료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니 어의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닦아 줘.”
지금 범한의 체력으로는 간단한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범약약은 갑자기 떨어진 명령에 끓는 물로 소독한 거친 천을 가져다가 오라버니의 가슴에 있는 가루약을 모두 닦아 냈다. 그걸 본 어의들은 모두 경악했다.
역시나 가슴에 있는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침.”
범한이 힘없이 한 단어를 내뱉고는 겨우겨우 손을 움직여 온몸을 떨고 있는 아내의 차가운 손을 잡아 주었다.
범약약이 장침 몇 개를 꺼냈다. 범한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이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왕야를 바라보았다.
“천돌, 기문, 유부, 관원에 침을 2할 깊이로 꽂아 주세요.”
시침을 할 때 정기로 보완을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걸 할 수 있는 이는 옆에 있는 정왕야뿐이었다.
범한은 깨어난 후에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앞서 약을 복용한 후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쳤을 때 얼마나 오래 연마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심후한 정기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왔었다는 것을 말이다.
정왕야는 자신이 의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긴장은 했어도 범한이 말한 순서에 따라 가느다란 장침을 혈도에 꽂아 넣었다.
침이 피부 속으로 파고들자 피가 멈추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어의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 * *
“3처입니다.”
범한이 무력한 목소리로 정왕야에게 말을 했다.
정왕은 그 뜻을 알아차렸다. 감찰원 3처가 독약 제조에 전문이었다. 자신과 황제 폐하가 관심을 가지면 소란스러워지기 때문에 3처를 불러들여 해독 작업을 시키는 걸 잊고 있었다. 이에 정왕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 사람을 시켜 감찰원 3처 책임자와 관련 관원에게 입궁해 사람을 치료하게 하라는 말을 전했다.
한데 3처 관련자는 이미 황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3처 수장은 이미 여러 차례 범한을 구하기 위해 입궁하겠노라 황제에게 알린 터였다. 하지만 오늘 밤 황궁 안이 너무 혼란스러웠던 탓에 금군 관계자 몇몇이 감찰원의 청을 듣고도 감히 황제 페하께 알리지 못했다. 이에 그 누구도 3처 관원들을 감히 황궁으로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왕이 황제 폐하를 대신해 명령을 내리자 감찰원 사람은 그제야 한숨 돌리고 입궁해 곧장 광신궁으로 향했다. 3처 사람은 물건을 잔뜩 들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금속으로 만든 것이었다. 침대 누워 있는 범한에게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고 외쳐야 할 것 같은 감동적인 소리였다.
3처 수장은 비개 사형의 제자였다. 그러므로 3처 수장은 범한에게는 사형이었고 감찰원에서 범한과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 처참한 몰골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제를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그런 그가 범한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팔목에 대고 진맥을 했다.
그러자 어의를 포함한 모든 이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잠시 후 3처 수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범한을 바라보았다.
“사제가 먹은 약이 정말 약효가 좋군. 한데 이 독은 동이성 쪽에서 온 것이야. 감찰원에서 가지고 있는 걸로 일단 해독해 봄세.”
범한은 가슴이 살짝 떨려 왔다. 위약 효과 때문인지 진짜 약효 때문인지 몰라도 정신이 조금 더 좋아진 것만 같았다.
312화
천하에서 3대 독 종사를 꼽으라면 그중 1대 독 종사는 비개였다. 2대 독 종사는 소은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동이성에 있는 괴짜였다. 이 세 사람 중 비개가 가장 많은 걸 섭렵하고 있었고 능력도 최강이었다.
독 종사마다 독을 만들 때 재료 선정, 제조 방법, 독의 강도가 모두 달랐다. 소은은 동물 유지와 내분비 물질을 주로 사용했다. 비개는 식물에서 추출한 것을 주로 사용했고 범한은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검수의 비수에 묻어 있던 독은 동이성 쪽의 초석광독파의 것이었다. 각기 선호하는 독이 달랐으므로 해독을 하려면 당연히 번거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감찰원에서도 상비용 해독약이 있을 수 없었다.
이에 범한도 분명 누군가가 자신을 해독시키기 위해 사형 명의로 해독약을 들여보낸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평생 독약 연구에만 매진하느라 융통성이 없었던 사형은 그 점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독소가 점점 사라지고 남은 건 손상된 장기뿐이었다. 감찰원의 해독 능력에 어의들도 감탄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범한 제사와 3처가 어떻게 장기 내 상처를 치료할지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사제, 예전에 자네가 준비해 두라던 도구를 가져왔는데 어찌 쓰는 건가?”
3처 수장은 그 도구의 쓰임새를 아직 모르는 듯했다.
범한이 자기 가슴 아래쪽 상처를 바라보며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담력이 정말로 큰 사람이 필요해요······ 손놀림이 유달리 차분한 사람도요.”
3처 수장은 항상 독과 시체를 끼고 사는 이였다. 그러니 흉부를 갈라 여는 건 여러 번 보아 담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손놀림이 유달리 차분한 사람이라면? 3처에 있는 관원들은 모두 적격자였다.
그런데 순간 범약약이 침대 앞으로 나와 서서 고집을 부렸다.
“제가 할게요.”
초췌한 얼굴로 누워 있는 범한은 곧장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내보였다. 우선 범한은 자신이 지닌 봉합 관련 기술에 확신이 없었다. 다음으로 깔끔하고 유약한 누이가 피로 얼룩진 흉부 안쪽을 들여다보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니 그녀에게 직접 내장 기관을 만지게 하는 건······.
“완아, 당신도 나가 있어요.”
범한이 메마른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누이도 데리고 가요.”
임완아는 아무런 말 없이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범약약도 고집을 부렸다.
“제일 침착하게 손을 놀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저예요.”
범씨 가문 낭자의 자신감에 찬 말에 3처 수장을 포함한 모든 이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범한이 누이를 바라보니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그녀의 눈에서 점점 자신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범한은 누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가슴이 살짝 떨려 왔다. 이에 창백한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띠었다.
“이따가 무지 역겨운 걸 보게 될 거야. 또 우린 가족 간이니 네가 이 일을 맡게 할 수 없어. 그래도 계속 있겠다면, 그러렴.”
길게 말하고 나니 범한은 또 정신적으로 피로가 밀려들었다. 옆에 있던 임완아는 범한이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벌써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촛불에 얼굴 명암이 흔들리는 가운데 범한은 억지로라도 웃었다.
“뭘 더 기다리나요? 그냥 간단한 수술이라고요.”
3처가 들고 온 몇 개의 상자 안에는 범한의 제안으로 만든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한데 그것들을 먼저 고안해 낸 사람은 비개였다. 그런데 비개는 어디서 그런 것들을 배운 걸까.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범한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수술을 총감독할 사람도 범한뿐이었다. 광신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새 범한의 말에 따라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은 호화로운 곳이니 당연히 초와 촛대도 충분히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궁리 끝에 평상 위에 촛불을 집중적으로 올려 범한의 흉부가 잘 보이도록 했다.
내관들은 서둘러 물을 끓여 집기들을 소독하고 광신궁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손을 깨끗이 씻도록 했다. 그리고 범약약은 몸을 숙여 범한이 해주는 말을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들었다. 범한은 그녀에게 잠시 후 주의해야 할 사항과 수술 방법들을 알려 주었다. 3처 수장은 의심할 나위 없이 현존 최고의 마취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내관들은 능숙하게 보조해 줄 간호사가 되었다.
한편 영문도 모른 채 멍하니 서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어의들은 범한의 전생 세계에서 수술실 참관을 온 의예과 3학년 학생이 된 것만 같았다.
‘산부인과 진료도 아닌데 뭐.’
범한은 이런 생각을 하며 의원들을 내쫓으려던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리고 살균이니 소독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됐다! 황궁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겼다.
날카롭게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광신궁 안에 울려 퍼졌다. 범약약이 살짝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오라버니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임완아가 고개를 돌려 걱정스럽게 아가씨를 잠시 바라보고는 눈처럼 새하얀 면 수건으로 범한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범한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부인, 의원들 이마에 흐르는 땀이나 닦아 줘요.”
3처 수장이 막무가내로 범한에게 약을 먹이려 했다. 한데 범한은 약 냄새를 맡고는 눈을 꼭 감으며 먹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마전자는 너무 독해서 먹으면 바로 혼절할 겁니다.”
3처 수장은 범한의 태도가 이해가 안 돼 답답했다.
“정신이 말짱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러다 통증 때문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범한은 관우처럼 뼈를 깎는 수술을 받을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수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이었으므로 혼절한 채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누이에게만 맡겨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범한이 힘겹게 입을 뗐다.
“가라방을 조금만 써줘요.”
3처 수장은 그제야 가라방 생각이 났다. 이 약은 봄에 자신이 범한에게 추천해 준 것으로 범한은 북제에서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에만 사용했었다. 3처 수장도 감찰원 내에서는 아주 가끔 사용하는 약이었다. 그가 방 한쪽 구석으로 가 한참을 뒤지더니 갈색 병을 찾아 들고 기뻐하며 제자리로 돌아와 범한의 코에 가져다 대었다.
살짝 달콤한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약효가 돌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한 건 아니었지만 범한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두 개의 화면을 동시에 보는 기분이었다. 그중 한 화면은 누이가 뾰족한 집게 같은 기구를 들고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머지 한 화면은 아주······ 아주 오래전 자신이 병원이라고 부르던 곳에서 자주 보았던 예쁜 간호사와 자신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범한은 일반 사람보다 정신력이 강했다. 이에 자신이 잠깐씩 환각을 겪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진짜 화면과 환각의 화면이 교차되는 걸 보니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보였다.
“시작, 서둘러요.”
범한이 실눈을 뜨고는 말을 이어 갔다.
“약약아, 네가 견디지 못할 것 같으면 사형이 바로 이어서 할 거야.”
범한은 담이 대단히 컸다. 마치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범약약의 자신감을 지켜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지 가라방 약효 때문에 정신이 황궁의 수술실을 떠돌며 자신이 수술을 받는 중이란 걸 잊는 게 문제였다.
범한은 가라방을 소은, 언빙운, 2 황자에게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오늘 그 벌을 받는 중이었다.
범한은 고개를 돌려 임완아의 눈처럼 새하얀 두 뺨과 살짝 부어 유난히 처연해 보이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자신의 흉부 쪽에서 조심스럽지만 서둘러 수술 중인 누이도 바라보았다. 그러다 바보처럼 웃으며 나중에 집에서 아내와 누이에게 분홍색 간호사 복장을 입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양쪽을 잠깐 번갈아 본 것이었지만 분명 묘하게 아름다운 장면이 될 거라 생각했다.
약에 취해 본성이 드러나는 중이었다.
* * *
광신궁 밖에 있는 사람들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범한이 이미 깨어났음을 그리고 그의 주도로 심각한 상처를 치료 중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범한은 늘 놀라운 일을 저질렀으므로 경국 사람들은 그런 범한에게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시 3백 수를 읊고, 해당타타를 희롱하고, 춘시 사건을 일으키고, 1처 수장이 되고, 부드러운 두부까지······. 하지만 사람들은 범한이 직접 중상 입은 자신을 치료한다고 해서 생사의 기로에 있는 그가 살아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는 확신하지 않았다.
어서방에서 잠시 쉬고 있던 황제는 이 젊은이 때문에 너무 긴장이 되어 가마를 타고 광신궁 앞으로 오고야 말았다. 광신궁 앞에 있는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고, 안쪽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에 황제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여러 해 전 일을 떠올렸다. 북방 전장에서 고전을 치르고 있을 때 비슷한 광경이 있었던 것 같다.
“어찌 되었느냐?”
정왕이 황제를 향해 절을 올리고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의는 범한을 도울 수 없어 3처 관원들이······. 해독은 별 탈 없이 진행하겠지만 칼에 맞은 상처가······ 너무 깊었습니다.”
황제가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남긴 아이니 큰 문제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정왕은 깜짝 놀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 뒤에 서서 바닥을 보고 있는 그의 눈에 분노와 슬픔이 스쳐 가더니 이내 메마른 눈동자만 남아 있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광신궁 문이 드디어 열렸다. 자신의 신분은 잊고 3 황자를 데리고 직접 살펴보러 와 있던 의 귀빈이 초조하게 물었다.
“어찌 되었는가?”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은 무례하게도 구토 소리였다.
“웩!”
밖으로 나온 이는 내관이었다. 광신궁 안에서 수술 집기를 건네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광신궁 밖으로 나왔으니 그에게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는 의 귀빈의 질문을 받자마자 바로 대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창백해진 얼굴로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대들보를 손으로 짚은 채 계속 구토만 해댔다.
요 태감이 그에게 욕을 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 토······.”
욕을 마치지 않았는데 안에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젊은 어의가 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이 어린 내관과 마찬가지로 주저앉아 토하기 시작했다.
태평성대를 사는 중이라지만 내관은 어려서부터 궁에서 자란 터라 고문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음산한 장면은 그에게도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체 그 시퍼렇고 허옇고 한 건 뭐지? 설마 사람 배 속에 그런 식으로 끔찍하게 피가 엉겨 붙은 살덩어리들이 있다는 거야? 범씨 아가씨는 진짜 대단했어. 손으로 만지기까지 하고 말이야!’
젊은 어의는 여러 해 동안 의술을 익혀 왔지만 지금껏 그가 해온 건 환자의 병세를 보고, 환자에게 듣고 묻고 환자의 맥을 짚어 보는 게 다였다. 제일 역겹다고 생각한 것도 혀에 낀 설태와 성병에 걸렸던 태자의 상태가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 밤 사람이 직접 바늘로 피부를 꿰매고 칼로 피부를 자르고······ 그건 분명 사람의 살점인데 말이다.
잠시 후 오늘 밤 의예과 학생 역을 맡았던 의원들이 정말 봐주기 힘든 얼굴로 조용히 광신궁에서 나왔다. 모두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작지 않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황제는 그들 낯빛에서 범한이 무사하다는 걸 알아챘지만 그래도 의연하게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정왕에게 따귀를 맞은 태의정은 호기심 때문에 몰래 들어가 본 터였다. 한데 황제 폐하가 질문을 던지자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놀란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 그야말로 신의 기술이었습니다.”
태의정의 말에 정왕이 또 참지 못하고 꾸짖었다.
“범한에 대해 물었지, 언제 여기서 감탄이나 하라고 했더냐!”
그런데도 태의정은 몸을 곧게 세운 채 계속 감탄사를 내뱉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황제 폐하 그리고 왕야. 소신, 수십 년 동안 의술에 몸담아 와 이런 신묘한 침과 칼을 쓰는 법을 들어 보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부디 황제 폐하, 염려 놓으십시오. 작은 범 대인의 내장은 이미 봉합되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하오나 피를 너무 많이 흘린지라 한동안 깨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감히 입에 담지 못한 사실도 있었다. 작은 범 대인이 수술이 끝난 후 가라방 약효를 이기지 못해 수술대에 누운 채로 지껄여 댄 황실에 관련한 황당무계한 헛소리였다. 이 일은 황제 폐하께는 절대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다행히 수술대 옆에 있던 첫 번째 참관 학생인 자신을 빼면 범한 대인과 가장 친한 여인 둘만 들었을 뿐이니 분명 그는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313화
광신궁 밖에 있던 이들은 범한이 살아나기만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태의정이 보장을 하자 모두 한시름 놓았다.
1 황자는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리고는 광신궁을 떠나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이 범한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오해, 황제 폐하의 뜻에 따라 이곳에서 기다렸다는 오해 그리고 범한이 살아나기를 순수한 마음으로 바란 게 아니란 오해 말이다.
황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의 귀빈에게 피곤해하는 3 황자를 데리고 그녀의 궁으로 먼저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그런 후 광신궁으로 들어가려 발걸음을 떼고 정왕도 당연하다는 듯 뒤를 따르려 하던 터였다.
태의정이 두 사람 앞을 막아서며 쓴웃음을 지었다.
“작은 범 대인이 혼미해지기 전 말을 남겼습니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말입니다. 그게······.”
태의정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드디어 새로 들은 단어를 내뱉었다.
“······감염이 되면 안 된다 하였습니다.”
범한이 이 단어를 말한 이유는 조용한 곳에서 안정을 취하고 싶어서였다. 황제와 정왕은 놀라 머뭇거리다가 범한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태의정이 열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소신이 보기에 작은 범 대인의 의술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니 태의원에 들이시고 관직을 하사하심이······. 첫째로 황궁 내 각 귀인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기술을 전수하여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면 이는 경국 백성의 복이고 또한 천세에 길이 남을······.”
대의를 생각한 사심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너무 긴장된 상황이다 보니 황제는 참지 못하고 정왕보다 먼저 화를 내며 꾸짖기 시작했다.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뭘 그리 서두르는 게냐! 그리고 어찌 범한 같은 인재에게 고작 그런 일이나 맡아 하라는 것이냐!”
그런데 정왕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잠시 중얼거렸다.
“의원이 되는 게 환자보다는 낫겠군.”
3처의 관원들도 드디어 밖으로 나와 황제 폐하를 향해 공손히 절을 했다. 이들은 황제의 격려를 들은 후 초췌한 모습으로 황궁을 떠났다. 이제 광신궁에는 시중을 드는 몇몇 내관들과 궁녀들을 빼면 범한, 임완아, 범약약 이렇게 세 사람만 남아 있었다.
임완아가 안쓰러워하며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새하얗게 질려 있는 아가씨를 안쓰러운 눈으로 잠시 바라본 후 이마에 흐르는 땀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범한이 앞서 말한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껏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임완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의 지휘 아래 자신이 대단한 일을 마쳤음이 드디어 실감이 나서였다. 오라버니의 목숨을 살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순간 긴장이 풀리고 두 다리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바닥으로 넘어질 뻔했다.
임완아가 그녀를 부축하고는 말없이 살짝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닭 다리 아낙이 보기에······ 범한을 도와야 할 때 정작 자신은 영원히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방관자밖에 될 수 없다는 자기 비하였다.
“형수님.”
이제야 임완아가 조용하다는 걸 알아챈 범약약이 관심을 보였다.
“몸은 괜찮으신 거죠?”
범약약이 그녀를 거의 하루 종일 돌보다시피 했으니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이에 바로 웃는 얼굴을 내보였다.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은 들릴 듯 말 듯 했다. 범약약이 자세히 살펴보니 형수의 입가에 핏자국이 보여 깜짝 놀라 어의를 부르려 했다.
임완아가 서둘러 범약약의 입을 막았다. 가라방에 취해 있는 범한을 깨울까 염려해서였다. 이에 혀짤배기소리로 이유를 설명했다.
“벼 거······아녜요. 아까 혀르 깨무어써요.”
범약약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어찌 된 일인지 이해했다. 그러자 마음이 따스해지고 이 어린 형수를 조금 더 존경하게 되었다. 아까 범한에게 약을 먹이려고 급하게 약을 씹다가 자기 혀까지 깨문 것이었다. 하지만 상공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것이다.
광신궁 안에 쳐졌던 새하얀 장막은 제거되고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저녁 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이 인간 세상에 맑은 빛을 뿌리기 시작하자 새하얀 장막이 다시 드리워진 것만 같았다.
광신궁 밖에도 사람들이 하나둘 물러나고 호위병 몇몇과 소식을 전할 내관만 남았다. 광신궁의 궁녀와 내관들은 의자에 머리를 대고 잠깐 쉬면서 언제든 작은 범 대인의 상태 변화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침번을 서는 궁녀들은 필요 없는 촛불을 조용히 다른 곳으로 치워 두었다.
형수와 아가씨 두 사람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편안히 자고 있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들의 눈에서 동시에 안도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층층이 둘러싸인 황궁성 밖, 거친 옷으로 몸을 두른 오죽이 싸늘하게 황궁 내 어느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의 안전을 확인하자 쥐도 새도 모르게 어둠 속에 있는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 * *
수일이 지난 후 여전히 황궁 안. 고즈넉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매화 정원(梅園)에 방어진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리고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환자는 길고 푹신한 의자에 누워 감개무량해하고 있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가려나.”
범한은 얇은 이불을 덮고 의자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매화 정원에서 시기를 앞당겨 피어나 자신을 돌봐 주고 있는 작고 귀여운 첫 매화를 조금 성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궁에는 물자가 풍부하다 보니 태의원에서는 범한을 치료하려고 각종 귀한 약재로 만든 약을 계속해서 그의 배 속에 들이붓고 있었다. 그러니 회복하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 없었다. 황궁의 내관과 궁녀들의 시중을 드는 능력도 범씨 집안의 종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매화 정원의 경치도 범씨 가문의 후원보다 훨씬 멋졌다. 더군다나 아내와 누이도 황제의 특명을 받고 날마다 옆에서 간호를 해주고 있었다. 면 이불을 덮고 가을 햇볕을 쬐며 미인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중이니 집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네가 없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런데도 범한은 범씨 가문의 저택이 더 그리웠다. 경도에서 자신의 진짜 집은 그곳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경국 황궁에서 첫 번째 수술을 받은 후 근 20년 가까이 힘들게 다져온 체력 덕분에 범한은 빠르게 회복해 나갔다. 가슴의 상처는 아직 다 아물지 않았지만 반듯이 누워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단지 체내에서 흩어진 정기는 전혀 회복될 기미가 없어 범한은 두렵고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 * *
범약약이 그릇에 있는 말간 죽을 후후 불어 범한에게 한 입 먹였다. 다른 한쪽에서는 임완아가 그의 품 안으로 손을 넣어 조심스레 두 겹으로 감아 놓은 천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녀는 범한의 요청에 따라 길고 좁은 천으로 상처 부위를 동여맨 후 그 위를 다시 넓은 천으로 압박해 놓았다. 상처 부위가 더 잘 아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범한이 힘들게 죽을 받아먹으며 투정을 부렸다.
“매일 희멀건 죽만 먹었더니 물리는구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포월루 음식은 바라지도 않아. 그냥 새어머니께서 만드신 과즙이 먹고 싶구나. 이거보다 훨씬 맛있을 텐데.”
그러자 임완아가 화를 냈다.
“깨어난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말이 왜 이렇게 많아요! 황제 폐하께서 황궁에서 상처를 치료하도록 성은을 베푸셨어요. 그런데도 무슨 불평이 이리도 많은 건지······. 그런데 물린다는 게 무슨 뜻이죠?”
그러자 범약약도 이해를 못 해 물었다.
“뭘 물어요?”
그러자 범한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불평하는 게 아니라······ 집이 그리워서 그런 겁니다.”
범한은 지금 황궁에 있어서 계년조와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황제 폐하가 그에게 마음을 쓰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바람에 임완아와 범약약도 출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내관과 궁녀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범한은 현공 사당에서 검수 사건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늙은 절름발이를 찾아가 검수와 관련된 일을 물어볼 수도 없어 찜찜하고 불안한 상태였다.
* * *
매화 정원은 광신궁 뒤편에 자리 잡은 경관이 수려하고 조용한 곳이다. 그리고 천심대(天心臺)를 지나 음풍각(吟風閣)으로 가면 범한 대인이 요양하는 곳이 나왔다.
범한은 황제 폐하의 명으로 황궁에 남아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고 황궁 내 모든 사람도 이번에 범한 대인이 황실에 많은 공을 세웠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내인 신하가 황궁에 장기간 머무는 건 무언가 타당치 못한 감이 있었다. 범한 역시 이그 점을 잘 알고 있어서 그냥 매화 정원에만 틀어박혀서 지냈다. 그러다 다른 궁에서 그를 만나러 오는 이가 있으면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청을 거절했다.
그런데도 어느 명랑하면서도 눈치가 없는 귀부인은 여기까지 오는 길을 잘 알고 있어 아예 음풍각까지 직접 찾아와 버렸다. 아이와 뒤에는 궁녀 몇 명가지 대동하고 말이다.
범한은 깜짝 놀랐지만 의 귀빈이란 걸 알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범한이 깨어난 후 의 귀빈은 매일 3 황자를 데리고 이곳에 와 앉아 있다가 갔다. 왜냐하면 첫째로 인척 지간이기도 했고, 둘째는 자기 아들인 3 황자를 구해 주어서였다. 큰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찾아왔기에 범한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마마가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지 범한은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모님, 안 오셔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오늘은 물건까지 가지고 오셨는지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예법에 따라 범한은 그녀를 ‘마마’라고 불러야 했다. 하지만 작년 초 입궁했을 때 범한이 그녀에게 이모님이라고 부르자 친밀감을 주는 칭호라 그런지 그녀가 좋아했다. 이에 범한은 지금까지 그녀를 이모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늘 의 귀빈을 따라온 궁녀들은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식이 담긴 찬합 몇 개를 들고 있었다.
“동충하초를 우려낸 탕이네.”
의 귀빈이 범한 옆에 있는 여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다가 옆에 앉았다.
“황궁 어선방에서 만든 게 아니야. 너희 집에서 만들어서 보낸 거란다.”
범한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옆에 탕을 담고 있는 궁녀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눈에 익은 이가 있었다.
“성아도 왔구나.”
성아는 범한이 처음 입궁했을 때 범한을 마마님들에게 인사시키기 위해 길 안내를 해주었던 어린 궁녀이다. 그녀는 범한 대인이 자신을 기억해 주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발그레해져 모기 같은 소리로 짧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의 귀빈도 한마디 했다.
“다친 사람이 어찌 그런 건 기억도 잘하······.”
문득 더 말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의 귀빈은 그냥 활짝 웃는 것으로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나이가 많지 않았고 천성적으로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어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사람이었다. 의 귀빈이 고개를 돌려 임완아에게 몇 마디 건네더니 다시 범약약과 집안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집에는 아무 일도 없다 전해 주며 그녀들이 황궁 안에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녀 옆에 앉아 있는 3 황자는 오늘따라 전보다 많이 진중해 보였다. 예전에 포월루에서 보았던 포악한 태도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채 한마디도 않고 있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어 의자에 누워 있는 환자를 몰래 쳐다보았다.
포월루에서 범한에게 가졌던 분노는 현공 사당의 일로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었다. 현장에서 이 ‘사촌 형’이 없었다면 아무도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을 터. 친형들이 한 공간에 있었지만 모두 부황만 구하려 했으니······. 그때 범한이 없었다면 보잘것없는 자기 목숨은 이미 9등급 검수의 손에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3 황자가 아무리 조숙하다 할지라도 여덟 살이면 아직까지는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하는 생각만으로 친하게 지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나이이다. 3 황자는 범한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현공 사당에서 그가 자기 앞을 막아서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때 범한이 보여 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용감한 모습에 이루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경심이 들었다. 임완아가 3 황자를 잠시 바라보며 의이하다는 듯 물었다.
“셋째야, 오늘따라 너무 조용한데?”
그러자 3 황자가 웃었다.
“신아 누나, 별거 아니에요.”
임완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사람이 변한 거 같단 말이지.”
그러자 의 귀빈이 아들이 사랑스럽다는 듯 잠시 바라보았다.
“범한이 아니었다면 요 녀석은 목숨도 부지 못 했을 게야. 그리 놀랐는데도 이리 차분한 걸 보니 다행이야.”
314화
범한은 누워 있던 터라 고개를 돌리기 힘들었다. 이에 곁눈질로 여인들과 아이가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며 성아의 도움으로 천천히 동충하초 탕을 마셨다. 성아가 그릇을 가져가면서 범한의 손바닥을 꼬집듯이 빠르게 만졌다. 순간 범한도 날카로우면서도 매끈한 그녀의 손가락 끝을 느꼈다.
범한은 약간 당황했지만 성아가 자신을 희롱하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님을 금세 알아차렸다. 의 귀빈이 자신과 단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다는 뜻이어서 범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완아, 3 황자마마와 함께 정원 산책 좀 다녀와요. 약약아, 너도 함께 가거라.”
아가씨와 형수가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봤지만 그들도 이내 의 귀빈이 할 말이 있어서 그럴 것이란 걸 알아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기 싫어하는 3 황자와 시중을 들고 있던 내관과 궁녀까지 모두 데리고 정원 먼 곳까지 갔다.
이렇게 되면 음풍각에는 범한과 의 귀빈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한데 청춘기의 신하와 젊은 마마가 단둘이 있는 건 불편한 일인지라 성아가 알아서 자리를 지켰다.
범한이 힘겹게 고개를 돌려 성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의 귀빈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집에서 데려온 아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모님.”
범한이 힘겹게 웃었다.
“무슨 일이시기에 이리 조심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조카, 상처가 심해 깨어난 지 이틀이 채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의 귀빈이 손수건을 내저으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으면 네가 찾아와 줄 것도 아니잖니!”
절대로 이상한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 범한이 지금쯤이면 궁 밖 소식에 목말라 있을 거란 걸 알아차려서 한 말이었다.
현공 사당의 검수 사건은 정말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황궁 내 높은 분들도 걱정하고 조정 신하들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경도 백성들도 너무 이상하다 생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었다. 이들은 식사 중에, 술을 마시는 와중에 큰 소리로는 검수를 욕하고, 소리를 낮추고는 검수가 어디에서 왔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이렇게 추측만으로도 몇백 개의 답안이 나와 있는 상태였다.
의 귀빈은 황제 폐하께서 범한이 아무 생각 없이 치료에만 매진하기를 바라셔서 그에게 들어가는 모든 정보를 차단한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로서는 범한을 돕고 득을 볼 기회가 온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마마를 질책하실 텐데 걱정 안 되십니까?”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때가 되었잖니.”
의 귀빈의 말은 간단명료했다. 그리고 잠시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너 말고는 내게는 희망을 걸 곳이 없구나.”
범한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황궁에 있는 네 명의 마마에게는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황후는 말할 것도 없고 영 재인과 숙 귀비의 황자들은 모두 성인이라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여기 있는 의 귀빈은 훌륭한 집안 여식이고 더군다나 황궁 밖에는 범씨 가문이라는 아군이 있었음에도 3 황자는 아직 어려도 너무 어렸다.
범한이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현공 사당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했다.
이미 아들의 입을 통해 한차례 들은 내용이었지만 의 귀빈은 그때 벌어진 일을 무서워했다. 양손으로 손수건을 쥐어짜고 있는 모습은 호위병들 사이에 숨어 있던 검수의 칼에 아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의 귀빈이 이야기를 다 듣고는 증오감을 드러냈다.
“어떻게 검수를 호위병인 시위 안에 숨겨 놓을 수 있었지? 황궁 내 시위 3대 관련자가 정말 샅샅이 조사를 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그게 셋······.”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셋째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가 형이니 마음대로 하렴.”
“셋째를 노린 것은······.”
범한이 소리를 낮추고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 검수는 일단 아무나 죽이려 한 거였는데 그게 우연히 셋째였던 겁니다. 그자가 노린 건 황제 폐하였으니까요. 그러니 이모님, 이제 염려 그만 놓으세요. 태자마마께서는 황실 내 자기 위치 때문에 걱정 중이시고 또 둘째는 저와 관계가 좋지는 않지요. 그렇다고 해서 검수가 아직 어린 셋째를 가장 먼저 인질로 삼으려 정한 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말을 황궁 안에서 하다니 담이 큰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음풍각 주변에 엿듣는 이가 없기는 했지만 의 귀빈의 낯빛이 살짝 이상해지더니 그녀가 이내 부자연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궁 내부에서 누군가 자기 아들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가장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범한이 분석해 주자 일단 마음이 놓였다. 그러자 그녀는 범씨 가문내 상황과 궁 밖에서의 조사 상황에 대해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범한은 조사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몰랐다. 그런데 의 귀빈의 경우 친정의 배경 덕분에 수많은 감시자를 두고 있는 터라 그녀가 가져온 내용은 실제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궁전이 이미 잡혔다는구나.”
범한은 정말로 많이 놀랐다. 하지만 “그렇군요.”라고 대답만 할 뿐 겉으로는 놀란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의 귀빈이 ‘잡혔다’라는 단어를 썼다는 건 조정에서 이미 이번 사건과 관련한 성질을 규정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금군 대통령이자 시위의 총책임자가 정작 현공 사당에서 검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폐하 곁에 없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는 금군 대통령직을 땅바닥에 던져 버린 것도 모자라 발로 짓밟은 것이었다. 즉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런데 범한이 더 궁금했던 건 대체 이 멍청하기 그지없는 금군 대통령이 그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냐는 점이었다.
* * *
“그는 경도에서 40리 떨어진 낙주에 있었다는데 그자의 말로는 황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러 간 거라고 했었다는구나.”
이 말을 하는 의 귀빈은 의혹에 찬 눈을 하고 있었다. 그자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한 말일지라도 ‘황명’이란 단어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되었다. 이 말이 황제 폐하께 들어간다면 그는 즉시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감찰원이 이틀 동안 심문을 하면서 거기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한 건지 알아내려 했는데 알아낸 게 없다고 했어.”
범한이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쉬더니 탄식했다.
“궁전은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군요.”
“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황제 폐하께서 그에게 낙주로 가라 한 게 아니라도······ 그건 분명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검수 사건이 발생했어도 굳이 그분을 언급하면서까지 자신의 결백을 밝혀야 했을까요? 궁전이 그리 말해도 황제 폐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실 테니 그건 자기 목숨을 재촉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 것이지요.”
범한의 대담하고 직설적인 말투에 의 귀빈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신경 끄자꾸나.”
“그렇군요. 제게는 관여할 자격이 없었군요.”
범한이 탄식하며 말을 이어 갔다.
“섭씨 가문이 이번 일로 정말 큰 고초를 당할 텐데 검수의 신분은 밝혀졌습니까?”
“처음 공격한 검수가 9등급 고수였대.”
의 귀빈의 눈에서 두려움이 살짝 스쳤다.
“듣자 하니 서쪽 오랑캐인 서호 좌현 왕부의 검수라고 했어. 경국에 잠입한 지 14년이나 되었고.”
“어떻게 또 서호와 관련이 있을 수 있는 거죠?”
범한이 이상히 여기며 더 질문을 했다.
“오랑캐들이 어떻게 그리 오래 황궁에 숨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말입니다.”
“그 서호 사람의 내력이 정말 대단했어.”
의 귀빈이 어찌 말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고는 설명을 해나갔다.
그제야 범한은 홍 태감의 손에 죽은 서호 검수가 옛날에 경국이 개국할 때, 그러니까 서호와 경국이 화친을 맺을 때 보내온 ‘가짜 공주’의 후손인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경국인 같아 보였던 것이다.
그때 당시 서호와의 화친은 정말 유명한 사건이었다. 서호가 경국에게 가장 처참하게 깨지고 있을 때였다. 서호에서는 자발적으로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고 그때 화친 파들이 후손들을 경도로 보냈다. 하지만 경국 사람들이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그들의 귀순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그때 화친 파들은 비참하게 서호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고수 하나가 돌아가지 않고 경도에 남아 있다가 이런 사달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황궁까지 숨어들어 시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까? 대체 그때 일 처리를 한 자는 누구입니까?”
“그 일을 처리한 자는 이미 죽었단다.”
의 귀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 일이 이렇게 커진 거겠지.”
범한이 속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번 일에 대해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린 내관이 아직 살아 있으니 감찰원이라면 알아냈을 텐데요?”
범한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의 귀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사야 다 끝냈지. 어린 내관은 15년 전에 경도에서······ 그때 풍파 때 죽은 왕공의 후손이었어. 그때 경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거든. 한데 왕공부에서 종 하나가 아이를 안고 도망친 거야.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부에 빠져 있었던 거고······ 아이를 안고 나온 종은 자살했다나 봐. 아이는 경도 외곽의 어느 농부의 손에서 자라 나중에 입궁을 하게 된 거였어.”
“그렇다면 비수는 어떻게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까?”
범한이 보기에 그게 진짜 큰 문제였다. 어린 내관으로서는 내놓을 수 없는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의 귀빈이 이어서 말해 준 내용에 범한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3년 전, 그 어린 내관이 국화 감상 모임이 있기 전에 현공 사당 꼭대기 층을 청소했대. 그때 비수를 숨겨 둔 거였고. 감찰원이 비수를 만든 자를 찾아서 시간을 확인했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내관은 15년 전 경도에서 피바람이 불던 날 밤 살아남은 아이였다. 범한은 피로 물든 그날 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황제, 진평평, 아버지가 어머니 복수를 하기 위해 직접 계획한 일이었다. 그때 경국에서 최대 열 곳에 달하는 왕공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대체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 심지어는 황후의 가족도 모조리 참수형에 처해져 지금은 그녀 혼자만 살아남았다. 어찌 되었든 그 어린 내관에게 대체 어떤 게 더 숨어 있는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서호, 왕공······ 이들은 황제에게 검수를 보낼 만한 동기와 용기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한데 모일 수 있었을까.
“섭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까?”
범한이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반응을 보이겠니?”
의 귀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섭중이 벌써 여덟 차례나 죄를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단다. 그리고 정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지금 저택에만 박혀 있대. 경도를 수비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가문 내부에 있는 근위병에게 맡도록 한 상태고 말이다. 황제 폐하의 처분만 기다리며 말도 못 할 정도로 조심해서 행동하고 있어.”
“황제 폐하 말씀입니까?”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섭류운이 경도로 돌아올지 말지 봐야겠네요!”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매화 정원 한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화제를 바꾸어 말하기 시작했다.
범한은 가장 먼저 포월루 일부터 물었다. 그런 후 의공(毅公) 가문 사람이 다친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의 귀빈은 국공 가문을 대표하고 있던 터라 친분을 떠나 범한이 용감하게 자기 아이를 일깨워 준 점 그리고 장래 국공 가문이 예기치 못한 추락을 할 수도 있는 걸 막아 준 데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둘은 이렇게 환담을 하고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315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의 귀빈이 3 황자를 데리고 화원을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임완아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의 귀빈께서는 늘 편한 모습인데 어째 오늘따라 긴장한 모습이신데요?”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아이가 컸으니 어머니로서 예전 같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나중에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면 저분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임완아가 난처한 낯빛으로 자기 배에서 아무런 신호가 없다는 걸 다시 떠올렸다. 하지만 상공이 다친 마당이니 그 말을 하기 곤란해 억지로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밖에서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대요? 천지개벽할 정도로 소란이 인 건 아니겠죠?”
그러자 범한이 나지막한 소리로 의 귀빈으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고는 멀찌감치 있는 내관과 궁녀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바람이 조금 차군요. 안으로 들어가야겠어요.”
황궁의 아랫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기 불편한 게 있음을 안 임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관을 불러 긴 의자를 들도록 했다.
* * *
방 안으로 돌아온 범한은 침대에 누워 침대 꼭대기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후 입을 뗐다.
“당신이 보기에 섭씨 가문은 이번에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방 안에는 단둘뿐인 터라 범한은 거리낌 없이 말을 이어 갔다.
“궁전은 분명 황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낙주로 간 걸 테지요. 게다가 분명 그것은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궁전은 황제 폐하께서도 감싸 주실 수 없는 사실을 말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았을 테지요.”
범한은 순간 한기가 들어 몸이 떨렸다.
“황당한 방법이긴 하나 그래도 먹혀들었어요. 황태후마마께서 궁전을 낙주로 보내셨으니 그는 금군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였어요. 하지만 그 때문에 현공 사당에 검수가 출현했죠. 만약 심문 때 궁전이 황태후마마의 밀지로 경도를 떠났다고 강변한다면, 이는 곧 천하에 황태후마마께서 황제 폐하를 죽이려 했다고 알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만약 궁전이 9족을 멸하는 멸문지화를 당할 생각이 아니라면,그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자기 혼자 짊어지고 갔어야 하는 비밀이었어요.”
임완아와 범약약은 총명했기에 황태후께서 현공 사당 사건을 주도했다고 믿지 않았다. 이에 임완아가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에는 궁전이 낙주로 간 건 외할머니와 황제 폐하께서 함께 계획한 일이란 건가요?”
범한이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범약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신 걸까요?”
그러자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궁전은 금군 대통령이면서 섭중의 사제야. 이번에 그가 잘못을 뒤집어쓰면 섭씨 가문도 자연스럽게 죄를 뒤집어쓰게 되어서야.”
임완아가 친구 섭령아 걱정을 하며 탄식했다.
“섭씨 가문은 그동안 충성을 바쳐 왔어요. 그런데 왜 황제 폐하께서는······.”
범약약이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모두 그녀가 말하려는 뜻을 알아차렸다. 이에 범한은 한숨을 내쉬며 중간에 말을 가로챘다.
“황제 폐하께서 섭씨 가문의 충성을 의심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선택은 당연히 하지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의심이 든 이상은 섭씨 가문을 근신하도록 하는 선택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적어도 경도란 주요 지역을 섭씨 가문의 두 형제에게 지키도록 해서는 안 되는 거였죠. 제일 중요한 문제는 섭씨 가문에 경국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대종사가 있다는 거예요. 섭류운만으로도 섭씨 가문은 하룻밤 사이에 죽지는 않으니까요. 이 정도의 잘 알려진 이유만으로도 섭씨 가문은 건드릴 수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니 황실의 체면을 크게 깎을 수 있는 그런 수를 쓸 수 있었던 거예요.”
범한이 탄식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신하들이 냉담하게 돌아설 건 걱정하지 않으셨던 걸까요?”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왜 섭씨 가문을 의심하신 거죠?”
“그거야 간단해.”
범한이 설명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2 황자와 섭령아를 혼인시킨다고 하셨잖아. 만약 섭중이 정확히 판단했다면 그때 혼사를 거절했어야 해. 설령 혼사를 받아들인다 해도 가장 먼저 경도 수비 자리를 내려놓았어야 했어. 아니면 변방으로 옮겨 가거나. 그렇게 해서 황제 폐하께서 안심하시도록 만들었어야 했지.”
“그런데 그분은 이 둘 중에서 단 하나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임완아와 범약약이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범약약이 못 참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사정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 있었군요.”
“북제에 있을 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한데 황제 폐하께서 이런 옹색한 방법을 쓰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한동안 조용히 듣고만 있던 임완아가 끼어들었다.
“이제 보니 현공 사당의 검수는 황제 폐하의 의중을 파악해서 일을 벌인 거였군요?”
범한이 임완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다 계획적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중 하나는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만드셨단 거예요.”
임완아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위험을 무릅쓰는 걸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러니······ 불을 낸 정도만 하셨을 거예요.”
부부가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처럼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현공 사당의 불을 만약 황제 폐하께서 직접 놓으신 거라면 그 후에 연속적으로 일어난 일은 대체 누가 한 짓인 걸까.
범한이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검수가 정말 우연히도 때를 잘 맞춘 거군요. 나조차도 한 곳 아니면 여러 곳에서 내놓은 단일 계획이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때를 잘 맞췄어요.”
“그냥 우연이었을 뿐이에요.”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단지 황궁 안 여러 곳에 숨어 있던 검수가 현공 사당에서 어떤 일이 터지니까 때는 이때다 싶어 봇물 터지듯 공격을 해온 걸 거예요. 그러니 이번 검수 공격은 어떤 모의 없이 그냥 갑자기 일어난 것뿐이에요.”
범한이 마지막 혼잣말을 했다.
“분명해. 이건 정말 신선국(神仙局)이야. 그러니까 우연의 일치일 뿐이란 거지.”
* * *
황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우중충한 건물 내부,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은 한마디도 않고 있었다. 일곱 수장도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검수의 공격을 받은 건 금군이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했지만 금군을 빼면 감찰원이 가장 큰 책임을 질 수밖에 없어서였다.
만약 황궁 안에 누워 있는 범한 제사가 나서지 않았다면 어쩌면 감찰원 역시 섭씨 가문처럼 황궁에서 내려오는 처분만 기다리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4처 수장으로 등극한 언빙운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밀실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서호가 호위병 속에 잠입시킨 검수, 15년 전 경도 피의 밤에 도망친 어린 내관, 소문만 무성한 사고검의 아우, 이들이 서로 계획을 모의한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불은 대체 누가 놓은 것인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각 처에서 올라온 정보를 보면 북제 금의위는 혼란 중에 있다고 하니 그런 일을 벌일 틈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동의성이 이번 일을 모의했다는 정황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6처의 수장 임무 대행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사고검에게 아우가 있다는 건 소문만 무성할 뿐······ 그자의 존재에 대해 아는 이는 없습니다.”
정보 수집과 분석을 맡고 있는 2처 수장이 죽을죄를 진 사람처럼 수치스러워했다.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소인이 업무를 소홀히 한 것이겠으나 이러한 살인 사건을 계획하려면 오가는 정보가 분명 있어야 합니다. 하오나 저희는 그와 관련해 아무런 실마리도 잡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 생각으로는 암살을 모의한 사람들 간에 서로 접촉한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더 과감히 추측해 보건대 그 검수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진평평이 서서히 눈을 뜨더니 혼탁한 눈빛으로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불은 황제 폐하께서 놓으라 하신 거니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한데 서호 검수하고 그 용감한 어린 내관하고 신출귀몰했던 자가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어찌 알겠는가. 황제 폐하와 이 몸이 신선도 아니고 말이야.’
“이건 우연히 맞아떨어진 신선국일 뿐이네.”
노인이 하품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냥 모든 게 우연 아닌가. 그런데도 뭘 그리들 많이 생각하는 것인가.”
경국 감찰원 조례의 보충 설명 부분은 일단 무시하고 감찰원 내부의 참고 자료 제5권 마지막 쪽을 살펴보겠다.
제5권은 감찰원이 다년간 기록해 온 사건 모음집이다. 몇십 년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대표적인 안건들에 대한 최종 분석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각종 안건의 계획부터 심화 단계에 이르기까지 발생한 변수, 영향력 및 최종 결과가 모두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제5권에는 사건 관련 기록이 많이 담겨 있으며 그중에서도 감찰원 정보 체계 및 사건을 조사하면서 찾은 증거와 관련한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음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인류의 상상력은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일정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의 안건에서 사람의 힘으로 찾아낼 수 있는 원인은 기껏해야 하나 또는 두 개 정도이며 모든 상황을 다 아우르는 원인을 찾아낼 수는 없다. 이에 제5권의 맨 마지막 쪽에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으며 그 세 글자는 범한과 진평평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신선국(神仙局).
* * *
이른바 신선국이라 함은 사건에서 상식만 가지고는 알아낼 수 없는 변수를 이르는 것으로 신선도 예단할 수 없는 국면을 불러왔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를테면 과거 진평평이 흑기를 몰고 천 리를 이동해 북위 국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아들 혼례에 참석하기 위해 몰래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소은을 잡을 때 바로 이 신선국이 펼쳐졌었다.
당시 감찰원은 사전에 모든 세세한 부분을 계산해 둔 상태였으며 심지어 더 심각한 대가를 치를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은은 혼례를 위해 비개가 정성스레 준비한 맛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북위 밀정 두목은 냉정함을 넘어선 냉혹한 수준에서 음식을 비롯한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경국 사람들이 음모가 계획처럼 흘러가지 않을 거라 여겼을 무렵, 정말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다. 소은이 신방에서 흘러나오는 다투는 소리에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술을 찾았다. 소은은 자신이 마시는 술은 가죽 주머니에 담아 두었다. 그런데 때마침 주머니에 술을 채워 두는 일을 하던 근위병 대장이 술이 너무 당겨 그 안에 있는 술을 모두 마셔 버린 후였다. 이에 자기 책무를 저버린 친위대 대장은 소은이 술을 찾자 너무 당황해 혼례를 위해 준비된 술을 주머니에 넣고 말았다.
결국 소은은 독에 중독이 되고 진평평과 비개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후 진평평 쪽에서는 그 당시 소은이 왜 답답해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그의 아들이······ 남자 구실을 못 해서였다.
이와 같은 변수는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국면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건 분명했다.
그리고 또 20년 전에 남쪽의 어느 소금 상인이 생일잔치를 연 후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도 신선국이라 할 수 있었다. 형부에서 사건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해 감찰원 4처로 이관해 조사를 하다 보니 그날 밤 현장에 있던 혐의자 수만 해도 무려 열네 명이었다. 소금 상인의 첩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그 갑부가 빨리 죽어 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누구였을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어느 가난한 늙은이가 구운 떡을 훔치다가 관아에 잡혀가는 일이 일어났다. 그자는 살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3년 전 소금 갑부를 죽인 게 자신라고 털어놓았다. 이 소식을 들은 감찰원 4처는 전문가인 자신들이 진짜 혐의자를 놓쳤다는 이유 때문에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에 서둘러 남쪽으로 내려가 심문을 해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노인과 소금 상인은 어려서부터 이웃 간으로 함께 자란 사이였다. 훗날 노인은 오주로 이주해 살았고,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소금 장수가 생일잔치를 하는 걸 보고는 왜 그런 나쁜 맘을 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원으로 숨어 들어가 돌을 집어 들고 술에 취해 있는 소금 상인을 내리쳐 죽여 버렸다고 했다.
당시 감찰원은 담벼락에 쓸린 흔적이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한데 귀향한 노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정원으로 기어 들어가, 그것도 호위 무사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나쁜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당시 4처를 책임지고 있던 언약해는 궁금해서 노인에게 물어보았었다.
“나중에 사건 기록을 보니 당신에게도 물었더군. 그런데 그때는 왜 전혀 긴장하지 않았던 거지?”
그러자 노인이 답했다.
“긴장할 게 뭐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언약해는 그렇게나 흉악한 사람은 태어나 처음 봤다. 그래도 여전히 궁금한 게 있어 더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자를 왜 죽인 것인가?”
그러자 노인은 너무나도 떳떳하게 답했다.
“어릴 때 그놈이 내 따귀를 한 대 때렸거든요.”
316화
현공 사당의 검수 사건은 신선국인 것만 같았다.
황제 폐하는 갈수록 섭씨 가문을 의심했고 그 집안의 대종사마저 꺼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이 후안무치한 수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고 생각했다. 즉 한편으로는 황태후의 명으로 궁전을 다른 지역으로 보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공 사당 아래에 불을 놓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불에 대해서는 범건과 진평평이 아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서호 검수는 불이 난 후 꼭대기 층에서 소란이 일자 드디어 손을 쓴 것이었다. 황궁에서 십여 년을 기다렸던 터라 정말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힘들고 고된 나날이 3년이 지나고 또 3년, 그러다 대체 언제 공격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질 무렵이었다. 홍 태감이 황태후마마를 모시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리고, 황제는 자신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고. 그리고 강력한 실력을 지닌 범한에 대해 오판까지 해 결연히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호위병이 공격을 하기 시작하자 이는 흰옷의 검수에게도 기회를 준 셈이 되었다.
흰옷의 검수가 나서자 또 황궁에서 오랫동안 숨어 지내던 어린 내관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황제가 자기 바로 앞에서 등을 보이자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숨겨 둔 비수 생각이 났을 테고 어린 내관은 그 상황을 분명 하늘이 준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강력한 유혹에 복수심이 폭발했을 것이다. 거세까지 하고 황궁에 들어왔으니 이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말이다.
* * *
황제가 있는 곳에서 황당한 방화가 일자 일순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검수들은 용사였다. 그러니 서로 연락하거나 하지 않았어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신들이 나설 기회를 찾아 들어간 것이었다. 즉 상대를 돕는 게 자신이 소원하던 바를 이루는 것이고 경국 황제를 죽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사력을 다한 것이었다.
사전 모의도 없이 각기 다른 곳에서 온 것이었지만 모두 하나의 목표로 모인 이들이었다. 그러니 결연하면서도 동시에 호흡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 * *
한밤의 광신궁. 침대에 누워 있는 범한은 침상 끝에 달린 얇고 투명한 장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친 후 황궁에서 치료를 받으며 낮에 너무 많이 잔 탓에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촛불이 궁 안을 흐릿하게 비추고 있는 가운데 그의 두 눈은 얇은 사로 된 장막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슬램 덩크》에 등장하는 강백호처럼 장막을 열어젖히고 그 뒤에 있는 진상을 보려는 사람 같았다.
임완아는 잠이 들어 있었다. 커다란 침대에서 함께 자고 있었지만 몸을 뒤척이다가 침대의 탄력 때문에 범한의 복부 상처를 건드릴까 염려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는 중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안쓰러운 눈빛으로 임완아를 바라보며 베개 밖으로 흘러나온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눈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황궁 안은 고요했다. 내관들도 모두 잠들고 불침번을 서는 궁녀들도 사각형의 그루터기처럼 생긴 것 위에 엎드려 잠시 쉬고 있었다. 범한은 시선을 공중으로 옮겨 뚫어지게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냥 입술만 살짝 움직이며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차근차근 사건의 맥락을 짚어 나갔다.
“서호의 검수에 숨어 있던 어린 내관이라. 생사를 떠나 전부 증거들이잖아. 그러니 감찰원이 판단을 잘못할 리 없겠지.”
얼핏 보면 정말 괴상할 정도로 어둠 속에서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림자는?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이 본 적 없는 흰옷의 검수이라. 그렇다면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지내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 6처 수장이야말로 경국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그림자 검수이잖아.”
범한의 눈썹이 보기 좋게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선국? 내 보기에 그 신선은 분명 절름발이야.”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러다 아무도 없는 침대 한쪽 끝을 바라보며 멸시하는 표정으로 웃으었다.
“황제 폐하께서 분명 하나 정도는 계획하셨어. 섭씨 가문의 세력을 경도에서 제거하시려고. 앞서 장 공주를 잘라 낼 때 쓰셨던 수단으로 말이지. 분명 황제 폐하께서는 내가 둘째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다고 생각하신 거야. 그리고 내년에 신양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까지 분명 다 알고 계셔.”
여기까지 생각을 한 범한은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런데 상처 때문에 통증이 일어 그런지, 아니면 황제가 쓴 비열한 수단에 놀라서 그런지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너무 비열하고 파렴치해!’
“그렇다면 당신이 하려던 건 뭡니까?”
범한은 진평평의 진짜 속마음을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대놓고 물어보면 어쩌면 그 바퀴 의자에 앉아서 이도 저도 아니게 한마디 하겠지. 진원에서 내가 너에게 말했잖니. 천자의 총애 같은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고 말이다, 라고 말이야.”
“천자의 총애라고?”
“갑자기 일이 터진 후에야 한가롭게 그림자 검수를 보냈겠다. 나보고 영웅이 되라고 말이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나?”
그림자는 경국 제일의 검수로 홍 태감의 귀를 속일 수 있는 자였다. 이러한 추론을 내놓기까지 범한은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림자가 직접 나선 건 단순히 어떤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범한이 황제 폐하의 목숨을 구해 천자의 총애를 확고부동하게 얻게 될 여건 말이다. 그런데 일은 크게 저질러 놓은 반면 결과는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꼼꼼하게 따지는 진평평의 성격과도 전혀 맞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진평평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림자가 직접 나서면 내가 알 거란 걸 당신은 전혀 걱정하지도 않았어.”
범한이 눈썹을 씰룩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고 당신이 정말 황제 폐하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도 말이 안 돼. 충견이 갑자기 불충해진 건 일단 무시하고 봐도 단순히 당신 힘으로 검수 암살을 모의한 거라면 분명 더 완벽하게 모든 여건이 조성됐어야 하잖아. 그렇다면 황제 폐하 대신 황자들의 마음을 염탐하려던 거였나? 그렇다면 늙은 개 당신은 지나치게 오지랖 넓은 짓을 한 건데. 더군다나 황제 폐하께서는 그 정도 가지고는 놀라지도 않으실 거란 말이지.”
범한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검수 사건이 있던 당시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계속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만 해 결국 한숨만 내쉬고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비록 꿈속에서였지만 범한이 가장 믿고 있는 어머니의 옛 전우는 그의 마음속 어두운 생각을 아무도 훔쳐보지 못하도록 깊숙이 숨겨 주고 있었다.
* * *
“이 세상에는 신선국이란 건 없네.”
진평평이 바퀴 의자에 앉아 정원 나무 사이에 있는, 눈을 가린 사람과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제5권에 적혀 있는 소금 상인의 죽음을 말일세. 구운 떡을 훔치려던 늙은이가 쉽게 소금 상인을 죽일 수 있었던 건 그 집에 있던 호위 무사들이 일찌감치 그 집 첩들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이야. 그러니 누군가가 자기들 대신 그 일을 처리해 버리니 기꺼이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지.”
“한데 그 늙은이가 소금 상인을 죽인 이유는 오래전에 따귀를 맞았다는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네.”
“정확한 원인은 소금 상인이 그 늙은이의 아내를 빼앗아서였어.”
“아내를 죽인 원수이니 원한이 클 수밖에.”
“그리고 언약해가 그 일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생각 말게나. 사실 자네와 나는 그때 다 알고 있었어. 소금 상인의 첩실들이 5만 냥에 달하는 은표를 누군가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말일세.”
“그러니 말하는 거네.”
늙은 절름발이가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 신선국이란 없다고 말이야. 일이란 건 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거야. 그러니 그 과정에서 우연히 변수가 나타난다 해도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수준인 거야. 만약 그걸 알아낼 수 없었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벌써 돌아가셨겠지.”
오죽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완전히 알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서호 검수와 어린 내관의 존재 때문에 하마터면 내 계획이 전부 어그러질 뻔했다는 거 나도 인정하는데······ 그래도 다행인 건 황제 폐하의 안위까지는 근본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았다는 거네.”
“당신 하는 말을 들어 보니 황제를 향한 충성심이 충분해 보이지 않는군.”
진평평이 웃기 시작했다.
“나는 황제 폐하께 충성을 한다네. 그리고 내가 신경을 쓰는 건 황제 폐하께서 얻게 되실 진짜 이익과 관련한 거지 그분께서 놀라시게 될 부분은 아니야.”
“진짜 이익이란 건 뭐지? 충분히 제대로 된 후계자를 말하는 건가?”
오죽이 이리도 말이 많은 건 진평평이라는 인물을 예전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계획이네.”
진평평이 정색했다.
“정치란 계획의 과정이야. 황제 폐하께서 섭씨 가문을 몰아내시려면 고작 불을 낸 것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거든.”
“나중에 황제가 진상을 알게 되면 당신 말을 믿어 줄 것 같은가?”
오죽이 싸늘하게 받아쳤다.
진평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 폐하께 이득만 된다면 그분께서 어찌 믿으실지는 중요하지 않아.”
진평평과 비개가 둘 다 똑같이 그러고도 남을 늙은 변태들임을 오죽은 알고 있었다. 이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그 황제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진평평은 오죽의 대역무도한 호칭 사용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도 오죽은 똑같이 행동했으니까. 그러니 오죽에게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분을 황제 폐하라고 부른다든가, 경외심을 갖는다든가 하는 것은 영원히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돌아가시지 않을 거야.”
늙은이의 말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거는 내 장담하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지니신 비장의 카드가 사람들에게 드러날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이 점 잊지 말게나.”
“그가 죽어 버리든 말든 나는 관심이 없다.”
오죽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건 하마터면 그가 죽을 뻔했다는 거야.”
똑같이 ‘그’라고 지칭하고 있었지만 오죽은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진평평이 소리를 내며 잠시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범한이 생각지도 못한 중상을 입었으니 오죽이 얼마나 무서운 살인 무기로 변할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오죽 못지않게 간교하고 음험한 진평평도 오죽을 대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싸늘한 한기가 치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진평평이 해명이란 걸 하러 나섰다.
“범한은 자신이 너무 빨리 커 나온 것 때문에 황제 폐하께 의심받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어. 그래서 이 일을 꾸민 거야. 단 한 방에 모든 걸 다 불식해 버리기 위해. 물론 일의 시작점은 내가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결말까지 내다보지는 못했던 것뿐이고.”
진평평이 옅게 웃었다. 옛날에 아가씨께서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자신을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그게 그림자와 관련 있는 거긴 하네. 그는 항상 자네와 한번 붙어 보고 싶어 했거든. 그런데도 자네는 단 한 번도 기회를 준 적 없지 않은가. 그러던 와중에 자네가 직접 키운 제자와 겨룰 기회가 찾아온 거고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게지. 물론 범한이 쫓아가지도 않고 그리 심한 부상까지 당하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크게 의미가 없었어.”
그러자 오죽이 불쑥 제안을 했다.
“그림자를 불러와. 나와 겨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오죽의 싸늘한 농담에 진평평은 하마터먼 숨이 멎을 뻔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기침을 하고는 양손을 앞으로 펼쳐 들었다.
“그냥 의도치 않게 일어난 일 아닌가.”
그러자 오죽이 대놓고 반박했다.
“만약 단순히 의도치 않게 일어난 일이라면 왜 내가 나타나기도 전에 내뺀 거냐?”
진평평이 얼굴에 잔뜩 주름을 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기침을 하다가 잦아들자 다시 입을 뗐다.
“그건······ 내 계획이었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자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되었거든. 또 내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자네가 알게 되고······. 그런데 자네가 그림자를 죽여 버리면 이 늙은 몸이 어찌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갈 수 있겠나?”
오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천만이 그의 불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내가 죽으면 그림자는 그에게 충성할 걸세.”
진평평이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317화
오죽이 고개를 살며시 갸우뚱했다. 범한이 그와 같은 보상을 받아들일지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오죽은 범한 같은 호색한에 권력 지향적인 사람은 9등급 상의 초강력 검수에 관심을 가질 거라 판단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오죽이 입을 뗐다.
“남쪽까지 나를 찾으러 와서 경도에 재밌는 걸 보여 준다고 하더니만······ 설마 이런 장난을 치기 위해서였나?”
“범한은 늘 자네가 남쪽으로 놀러 갔다고 말했지. 난 그 말이 거짓말인 줄로만 알았지 뭔가.”
진평평이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자네가 정말로 남쪽에 있을 줄이야. 참으로 대단한 우연의 일치였어.”
진평평이 갑자기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자네에게 그걸 보여 주려던 참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범한의 실력을 너무 낮게 봤네. 그리고 범건도 생각보다 더 염치없었지. 그 늙은 놈이 황제 폐하께서 불을 놓으신 걸 알더라고. 그래서 서둘러 범한에게 황제 폐하를 엄호하러 올라가라 하는 바람에······.”
노인이 날카로운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자네한테 보여 주려던 건 그게 아니거든. 참으로 안타깝구먼.”
오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태후를 죽이려 한 건가?”
진평평이 고개를 내저었다.
“황태후마마는 범한의 친할머니 아닌가. 그래도 아가씨와 관련한 일에서는 그냥 방관하셨지. 태평 별장에도 지원군을 보내 주지 않으셨고 말이지. 그렇다고는 해도 그분께서는 그 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셨으니······ 지금까지 내가 조사한 것만 보면 그 부분에 대해 명확히 연관을 지을 수도 없고 말일세.”
오죽이 고개를 내저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만약 나중에 당신이나 나 둘 중 한 사람이 무언가를 알아낸다면 범한 도련님의 결정과 상관없이······ 내가 할 거다.”
진평평은 ‘내가 할 거다’라는 말에서 그의 결심과 실력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평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봐, 오 씨. 아무리 자네가 천하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고 해도 한 나라 그리고 황실의 진짜 실력을 무시해서는 안 되네. 더군다나 이 몸께서 감찰원 원장으로 있는 한 경국이 천하에서 안정을 도모하는 방법을 계속 생각할 걸세.”
“잊지 말게나. 그 점은 아가씨의 유지이기도 해.”
진평평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그런 비교적 재미없는 일은 그냥 내게 맡겨 둬!”
“그러면 내게 보여 주려던 건 뭐지?”
진평평이 돌연 한숨을 푹 내쉬고는 조금 적막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더 언급할 필요 없지 않겠나.”
오죽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이에 꼬치꼬치 캐물을 흥미조차 없는 사람처럼 곧장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네가 도련님을 안고 담주로 사라져 버린 후로는 도통 못 만나지 않았나.”
진평평이 갑자기 그의 뒤쪽에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17년 동안 못 봤는데 이리도 빨리 떠날 셈인가?”
오죽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잘 지내라.”
그러고는 정말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죽의 실력과 성격을 감안했을 때 그가 잘 지내라는 말을 꺼낸 건 정말 기묘한 일이었다. 적어도 진평평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진원의 늙은 종이 다가와 바퀴 의자를 밀고 방으로 갔다. 진평평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만족스러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말해 보게나. 그 인내력만큼은 끝내주는 호위병과 어린 내관을 나서도록 만들었는데······ 난 참 대단한 사람 같지 않은가? 하나 서호 검수에게는 고마워해야겠어. 범한이 올라왔다고 계속 숨어 있었다면 일이 정말로 재미없었을 테니까.”
그러자 늙은 종이 쓴웃음을 지었다.
“원장 대인께서 내놓으신 계획이니 빈틈이 있을 리 없겠죠.”
진평평이 탄식했다.
“쉴 새 없이 일해야 하는 운명이라니 시도 때도 없이 황제 폐하를 대신해 못을 뽑아 드려야 하지. 그런데도 나는 황제 폐하만 못하다니!”
* * *
황궁에서 묶는 동안 서리는 어느새 더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다 하늘에게서 눈이 내릴 것 같던 어느 날, 범한의 강력한 요구로 황제는 그가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윤허해 주었다.
현공 사당에서 황제를 구한 일로 범한이 황궁 안에서 요양하고 황제 폐하께서 사소해 보이는 일로 크게 진노하시고.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제 폐하의 범한을 향한 총애는 예전으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더 강해졌음을 말이다. 목숨을 걸고 검수의 검을 막은 건 아무리 아첨이라고 간주해도 목숨을 걸고 쟁취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 일을 가지고 눈이 시뻘게져서 범한을 질투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범한이 출궁하는 날 마마님들이 선물을 보내 주었다. 황후도 예외가 아니었다. 2 황자의 생모인 숙 귀비는 특히나 더 귀한 선물을 준비했다. 모두 평판에 신경을 썼다. 영 재인은 성격이 시원시원했고, 의 귀빈은 범한과 친분이 두터워 그런 데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다른 마마님들은 범한이 출궁하는 데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
황태후도 자신이 십여 년 동안 지니고 있던 지사주(衼邪珠)를 범한에게 상으로 하사했다. 그러니 다른 마마님들도 범한에게 줄 선물을 대충 고를 수 없었다.
범한은 마차에서 몸을 반쯤 누이고 있었다. 가슴의 상처가 다 아문 건 아니지만 몸을 조금씩 뒤척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범한이 마차 창문의 가림막 한끝을 열었다. 그리고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손에 들고 있는 완벽히 동그란 모양의 유명한 구슬을 햇살에 비쳐 보며 생각했다.
‘설마 진짜 할머니께서 이제야 내 존재를 인정해 주신 건가?’
집으로 가는 길에 가장 신이 난 사람은 임완아와 범약약이었다. 그동안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많이 답답하던 차였다. 그리고 범한의 상처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자 걱정을 많이 덜었다.
마차가 범씨 가문 저택 정문에 도착해 두 개의 돌사자 가운데에 섰다. 계단에는 일찌감치 나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택 대문이 열리고는 무슨 성지라도 맞이하는 듯 조심스레 마차를 대문 안으로 들였다.
일반적으로 마차는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큰 도련님이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치셨으니 이 정도의 예외를 두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마차가 뒤채 근처까지 가자 등자경과 몇몇 사람들은 마차에서 범한을 조심스레 들어서 내렸다. 그사이 사사는 범한을 돌보았다. 입궁할 자격이 없는 사사는 그동안 속이 바짝 타들었다.
범한이 살짝 발그레해진 사사의 두 뺨을 보며 농담조로 몇 마디 건넨 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계셨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담담히 품어 주는 아버지의 눈빛에 범한은 가슴이 따스해졌다. 이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 돌아왔습니다.”
상황은 역시나 범한이 예상한 방향대로 흘러갔다. 외로운 기러기처럼 천하를 주유하던 경국의 대종사는 경도로 돌아올 기미가 없었고, 섭씨 가문은 얌전히 모든 걸 받아들이고 경도 방위 체계에서 물러났다. 물론 중하 단계에서 그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 실력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 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니 향후 조정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역량은 이미 잃은 것이었다.
만약 사건 발생 후 섭류운이 정말로 경도로 돌아왔다면 황궁에서 엄숙하지만 다정한 면모를 유지 중인 황제는 분명 자신의 지독한 면모를 드러냈을 것이고, 경국의 국력이 손상될지언정 섭씨 가문을 바로 제거해 버렸을 것이다. 섭씨라는 세도가 가문이 경도라는 중요 지역을 관리하고 곧 황자와도 혼사를 맺을 수 있게 된 건 모두 대종사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였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반항의 기미를 보인다면 반드시 강하게 찍어 누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섭류운은 결국에는 경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곧 섭씨 가문이 어쩔 수 없이 현 국면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황제 폐하도 섭류운의 체면과 지금까지 섭씨 가문에서 일관되게 충성심을 보여 준 것을 참작해 그들을 지나치게 못살게 굴 수는 없었다. 이에 섭중은 작위와 군에서의 공이 그대로 인정되는 상태에서 창주에 주둔하게 되었고 오히려 과거보다 더 큰 상을 하사받게 되었다.
그리고 고지식하고 어리석지만 조금 귀여운 궁전의 경우, 너무나 큰 죄를 진 것이었지만 황제는 그를 엄벌에 처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군에서의 공로와 직무를 빼앗고 곤장 서른 대를 친 후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섭씨 가문은 억울했지만 경국의 안정적인 장래를 위해 희생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걸 틈타 경도라는 시시비비가 일고 있는 지역을 떠나게 되었으니 꼭 나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실제로 진짜로 실망해야 하는 쪽은 저 멀리 신양에 있는 장 공주와 지금 가택 연금 중인 2 황자였다.
* * *
“참으로 황당하군!”
범한이 목철이 보내온 감찰원 보고서를 보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섭씨 가문이 잠시 물러섰으니 경도 방위를 누가 맡게 될지에 대해 조정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경도 수비 직은 전혀 이상할 것 없이 진항의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직책이자 지금까지 줄곧 한 사람이 맡아 왔던 금군 대통령 겸 어전 시위 대신의 자리는 황제가 둘로 나누어 버렸다.
일단 어전 시위 대신의 자리는 잠시 공석이 되었다. 황궁에서 전해 온 소식에 따르면 홍 태감이 잠시 맡게 될 게 뻔했다.
그리고 금군 대통령 자리는······ 뜻밖에도 1 황자에게 떨어졌다.
그러니 앞서 범한이 황당하다고 말을 내뱉은 이유는 황제의 금군 대통령 자리에 대한 인선 때문이었다. 현 시공간의 역사에서 지금껏 황자가 이러한 직책을 맡은 선례는 극히 드물었다. 대체 왜 그런 걸까. 담력이 큰 황자들이 자신에게 들어온 병력으로 반역을 꾀할 걸 우려해서 아닐까. 그런데도 황제는 금군 대통령 자리를 1 황자에게 맡겼다. 동궁인 태자가 있는데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1 황자의 생모 영 재인은 동이족 사람이었다. 그러니 원칙대로라면 1 황자는 금군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목철은 범한의 말에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대신 1처의 최근 업무를 보고하고 제사 대인의 얼굴에 피곤함이 비치자 서둘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스승님, 쉬셔야 합니다.”
사천립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여전히 범한을 ‘대인’이 아닌 ‘스승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가 얼굴이 해쓱한 범한을 보며 걱정했다.
“황제 폐하께서 3개월 동안은 감찰원 업무를 하지 말라 명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치료에만 열중하라 하셨는데 어찌 안 들으시는 건지요.”
제자는 스승이 남다른 성은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범한이 고개를 잠시 가로젓더니 웃으며 한 소리 했다.
“포월루에 있어야 할 사람이 매일 내 서재로 쪼르르 달려오기나 하고 대체 왜 그러는 건가?”
그러자 사천립이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었다.
“그곳은······ 계속 있다 보니 왠지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범한이 웃어넘기며 사천립을 방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 등자월을 불러 달라 했다.
등자월이 서재로 들자 범한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감찰원에서 흰옷 검수에 대한 결론을 내렸나요?”
범한은 지금 상황으로는 진평평의 속내를 파헤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늙은 절름발이일 것으로 보이는 자료를 가지고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추측을 해야 한다는 건 좀 아쉬웠다.
등자월이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현공 사당에서 상대방의 신분을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하오나······.”
등자월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대인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무공을 익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분 말씀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고검이 과거에 아우가 있던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이미 실종이 된 지 오래입니다. 천하 사람들은 사고검에게 동이성을 빼앗아 올 때 죽은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찰원에서도 줄곧 반대 의견을 드러내는 데 신중을 기하고 있지요.”
범한은 조금 놀라웠다. 진평평이 꼬리가 되는 단서를 지우도록 감찰원을 유도하지 않았다는 게 의외였다. 그렇다면 진평평은 그림자의 진짜 모습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아예 흔적을 지우려고도 시도하지 않은 거고.
“하오나······.”
등자월은 벌써 두 번째로 하오나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고는 매우 난처해했다.
318화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사고검의 제자라고 말씀하셨으니 신하 된 입장에서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특히나 황제 폐하께서는 그냥 하신 말씀일지라도 향후 몇 년간 조정의 동향을 결정할 수도 있는 내용이니까요.”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경국이 무를 숭상하는 건 천하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작년에 자신이 외양간 거리에서 검수를 만난 일은 황제 폐하께 북쪽으로 출병할 좋은 구실거리가 되었고, 그로써 경국은 넓은 영토를 점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황제 폐하께서 죄를 뒤집어씌우고 핑곗거리로 삼는 취미에 인이 박인 신하들은 그 누구도 감히 나 잘났소, 하는 식으로 나서서 않았다.
현공 사당에서의 일을 원칙대로 처리한다면 범한이 직접 감찰원에 나가 어린 내관을 심문하고 검수의 시체를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범한은 현 상황에서 불분명한 게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던 터라 자신이 더 깊게 파고들어도 되는지 일단 따져 보기만 했다.
그리고 범한은 몸이 안 좋기도 해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직접 감찰원에 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 대인을 포함해 모든 가족이 그의 출타를 막고 있었다.
범한은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도 감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는 목숨 아끼기를 황금같이 하는 사람인데 지금은 체내에 있던 정기가 모두 흩어져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너무나도 낙담한 나머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 유난히 더 조심하는 중이었다.
물론 범한은 자신이 공력을 모두 잃은 상태란 걸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소리를 내며 누군가 서재 문을 여는데도 문밖에 있는 호위 무사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범한이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를 살짝 틀어 보니 역시나 아내와 누이였다.
등자월은 제사 부인과 아가씨 얼굴에 살짝 노기가 서린 걸 알아차렸다. 이에 자신이 그만 나가 봐야 할 때인 걸 눈치채고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물러갔다. 범한은 그에게 언빙운을 불러 달라는 말을 전하려 했지만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얌전히 치료에만 신경 쓰라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그쪽 일에 신경을 쓰다니요.”
두 사람이 손발을 맞춰 가며 열심히 연습한 것처럼 범한에게 약을 새로 발라 주고 약을 먹이면서 한 소리 해댔다.
범한이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 이름은 잘못 지어진 것 같아요. 도통 한가로울 새가 없다니까요.”
왜 한가로울 수 없는 걸까. 범한이 출궁해 집으로 돌아오자 그 순간부터 범씨 가문 저택이 경도에서 가장 떠들썩한 곳이 되어 버렸다. 3원 3사 6부의 관원들이 하루 종일 줄기차게 병문안을 왔고, 수많은 권문귀족들은 너도나도 문지방을 밟아 댔으며, 대신들은 자신들의 파벌도 신경 쓰지 않고 범한에게 잘 보이려 했다. 이에 범씨 가문 저택 대문이 있는 성 남쪽 거리는 검은색의 마차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와 있었고 선물 상자도 용이 휩쓸고 지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범씨 가문 저택에 오는 사람들은 귀한 약재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범한 혼자서는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이에 범한은 진짜로 유명한 약재를 뺀 나머지를 모두 포월루로 가져가 처리했다.
현공 사당의 검수 사건으로 범한은 경국에서 대단한 권세를 쥔 대신이 되었다. 이전에 갑자기 성장해 감찰원 제사가 되었을 때와 비교한다면 이번에는 황제의 목숨을 구한 공이 기반이 되어 주었다. 이에 그의 권세는 예전보다 더욱 견실했고 경국 관원들에게는 두려움이 일도록 만들었다.
관원들에게도 보고 듣는 귀가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다친 후 황궁에서 여러 날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궁에서 흘러나온 소식에 따르면 범한이 치료를 받던 날 밤 황제 폐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와 같은 성은을 입다니, 이는 범한이 진평평이란 홀아비와 견줄 수 있을 만큼 총애를 받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많은 이들이 조심스레 범씨 가문에 아부하는데 그것이 과연 범한에게 진정으로 승복해서 한 행동이었을까. 특히나 용맹한 젊은이들의 경우도 그랬을까. 그들은 ‘황제 폐하께서 검수의 습격을 받을 때 자신은 왜 그분 곁에 있지 못했을까.’라고 아쉬워하며 범한이 운이 너무 좋았다며 질투했다.
“이번에 집에 은전이 많이 들어왔군.”
농담이 아닌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전생에 어느 작은 행정 구역의 수장이 병이 나자 몇백만 원을 벌어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 높은 대신이 되어 보니 경국도 대놓고 뇌물을 주는 사회였다.
“우리 나리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시네요.”
임완아가 담담하게 웃더니 아이를 달래듯 그에게 약을 먹였다. 임완아는 높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저들 신하들이 아첨하는 것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치료 중인 범한은 병문안을 핑계로 아부하러 온 관원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있었던지라 애꿎은 범건 상서만 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에 범건은 조정에서 국사를 돌보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의 모든 시간을 손님 접대에 쓰고 있었다.
범약약이 방문자들을 향해 원망을 쏟아 냈다.
“그냥 한 번만 오고 말 것이지 왜 계속 오는지 모르겠어요. 이쪽에서 귀찮아하는 건 생각도 안 하나 봐요.”
“각부 대신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에요.”
임완아가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감탄하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웃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은 태의정이더라고요. 정말 인내심 하나는 대단해요. 앞서 네 번 왔는데도 상공이 만나 주지 않았잖아요. 결국 황제 폐하께서도 그에게 한 말씀 하셨대요. 상공은 태의원으로 갈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렸어요. 아까 등 대가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태의정이 오늘도 왔대요. 그리고 저 서재에 들어앉아서 나갈 생각을 않는다는군요. 아버님께서 차 대신 냉수를 내주면서까지 눈치를 주셨는데 모른 척하고 있대요.”
임완아가 혀를 끌끌 차며 감탄했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범한은 소리가 나게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도 낯짝 두껍기로는 경국 제일인 태의정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탄복하는 중이었다.
그날 밤, 황궁에서 태의정은 범한의 의술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쫓겨나지 않고 광신궁에 남아 몰래 훔쳐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데 그 일로 범한의 의술이 기묘하다는 걸 알고는 어떻게든 범한을 태의원으로 들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범한에게 ‘이상한 의술’을 전수하도록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 마음이 얼마나 견고한지 계속 찾아오더니 이제는 막무가내로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경국 의원 입장에서는 외과 수술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범한이 살아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명줄이 길어서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외과 수술을 보급하려면 몇 가지 중대한 난제들부터 해결해야 했으므로 실제로는 보급이 거의 불가능했다.
범한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여 상처 부위의 붕대를 정리해 주고 있는 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돌연 어떤 가능성이 생각났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서재에서 세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문소리에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님이 왔습니다.”
문밖에서 하인이 공손하게 아뢰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임완아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 * *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에 온 손님은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는 얼굴로 불청객 1 황자를 맞았다.
“황궁에 있을 때 오셨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1 황자마마께서는 매화 정원으로 납시지 않고 오늘 이곳으로 행차하신 것입니까?”
임완아 역시 입을 삐죽 내밀며 타박했다.
“큰 오라버니, 저택에 손님들도 많은데 어찌하여 이런 북새통에 오신 것입니까?”
1 황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누이가 시집간 지 이제 겨우 1년여 남짓. 그런데 어찌하여 온통 시댁 편만 드는 건지.
“왜 그리 말이 많은 게냐.”
오라비와 여동생이 서로 몇 마디 승강이를 벌이다가 1 황자가 그냥 져주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큰 공주도 나와 함께 왔느니라. 지금 범 부인과 대화 중이니 신아 너도 가보거라.”
그가 말한 큰 공주는 당연히 북제에서 혼인을 하기 위해 경국까지 천 리 길을 온 여인이었다. 범한은 놀라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이 두 남녀가 혼인 전에 이렇게나 감정을 키워 갈 줄은, 더군다나 황실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궁에서 외출하도록 놔둘 거라 생각 못 해서였다. 그리고 범한은 귀국길에 큰 공주와 몇 차례 대화를 나누어 봤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임완아와 범약약은 말로만 듣던 이국의 공주에게 크나큰 호기심이 있던 터였다. 그래서 1 황자가 범한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두 사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서재에 고요함이 흘렀다. 범한이 살짝 오른손을 들어 상대에게 차를 권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1 황자마마, 축하드립니다.”
금군 대통령이 된 걸 축하해 준 것이었다. 한데 1 황자는 순간 미간이 경직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이내 미간에 들어간 힘을 풀고 담담하게 말했다.
“무엇이 축하할 일이란 말인가? 본왕은 서쪽 정벌을 하는 대장군인 것을.”
범한이 웃으며 받아쳤다.
“2등급이 강등되기는 하셨지만 그리도 금군의 핵심 아닙니까. 그러니 변방의 음산(陰山)과 같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범한의 말 속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건가 싶어 1 황자는 그를 쓱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다시 입을 뗐다.
“본왕은······ 금군 대통령을 맡고 싶지 않아. 북쪽으로 보낸 연소을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고 보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연소을을 저 멀리 보내시고 섭씨 가문을 배제하신 건 신양에 있는 미친 장모를 방어하시기 위해서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북쪽으로 간다면 연소을은 기뻐할망정 황제 폐하께서는 대단히 씁쓸해하실 겁니다!’
“1 황자마마께서 이 환자를 보러 오신 게 직장에서의 고충을 토로하기 위해서란 말씀은 마십시오.”
범한이 웃으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듣는 것만큼은 잘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들어 주는 것만으로는 안 되네.”
1 황자가 범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비록 ‘직장’이란 게 무슨 뜻인지 이해는 못 했지만.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 있어.”
‘내가’라고 했다. ‘본왕’이 아니고.
범한은 황자가 별안간 호칭을 바꾸어 사용해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이제 보니 동이성 혈통의 1 황자는 진지하게······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었다.
이런!
범한은 지금 이 상황이 못마땅해 속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후 1 황자를 보았다.
“금군 대통령은 중요한 위치 아닙니까. 황제 폐하께서 마마의 충성을 신임하시니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 범한, 신하로서 어찌 헛된 의견을 내겠습니까!”
그러자 1 황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한, 솔직하게 말하지. 경도로 돌아온 초기에는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네. 서쪽에 있을 때 경도에 시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어. 한데 무장인 나는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다네. 천하 백성들과 조정 문무백관들에게 어찌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도······.”
그가 화제를 돌렸다.
“한데 경도로 돌아와 몇 달 동안 자네를 지켜보니 행동은 매서운데 따스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았더군. 그리고 일을 할 때는 재능까지 발휘하고 말일세. 둘째를 제대로 혼내 준 건 일단 차치하더라도 현공 사당에서의 일로 자네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어.”
“그리고 황궁에서는 자네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상처까지 치료하지 않았는가!”
까만 얼굴의 황자가 엄숙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이 세상에 과연 자네가 해결 못 할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 그러니 자네가 꼭 내 일을 도와줬으면 하네.”
대놓고 칭찬하는 통에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평평은 1 황자가 어려서부터 일부러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지내 남들과 다르니, 함께 있게 되면 가급적 멀리 피해 앉으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칼을 쓰지 않고도 살인이 가능한 황제 폐하가 1 황자를 혼탁한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었으니 황자가 분노하며 반항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 황자의 세력은 대부분 군 측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조정 내부에서 계략을 짜는 것과 관련해 도움을 줄 만한 측근이 없었다. 단지 지금 문제는 1 황자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점이었고 이는 범한으로서는 정말로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
범한은 이렇게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형제’가 생겨 기뻤다. 그리고 지금 1 황자가 처한 처지를 동정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결연하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이와 같은 생각을 떨쳐 버렸다.
319화
“마마, 감히 못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범한은 신하일 뿐입니다. 또한 감찰원도 감히 조정에 대고 망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1 황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곳까지 온 건 그에게는 어리석은 모험이었다. 경도를 통틀어 범한 말고 이런 말을 꺼낼 만한 다른 이가 없어서였다. 그렇다면 설마 다시 진원으로나 가봐야 하는 걸까.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마음을 정하셨으니 그 누구도 그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마께서도 다시 진원에 가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오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왕림하신 건······ 어떤 결단을 내리셨기에 그런 것입니까? 마마의 눈에 제가 선의로 남을 돕는 어진 신하로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범한은 그의 의중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1 황자가 잔 속에 담긴 향 차를 느긋하게 마셨다.
“범한, 자네는 다른 사람은 속였을지 몰라도 나는 속이지 못했어. 잊지 않고 있다네. 그때 현공 사당에서······ 자네가 아우부터 구한 후 부황을 구하러 나선 사실을 말일세. 그때 자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알았다네.”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만의 세계에서 형성된 가치관 때문에 황제와 1 황자가 동시에 자신에게 미묘한 신뢰감을 갖게 된 건 범한으로서도 의외였다.
1 황자가 오늘 이곳까지 온 건 감찰원 쪽에 자신의 태도를 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또한 겸사겸사 범한에게서 무언가 유익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범한은 침묵만 유지하고 있으니 그로서도 더 이상 과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임완아가 가운데에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어서 나중에 경도에서 변고가 일었을 때 감찰원이 자신을 돕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범한이 유용한 정보를 알려 준다면 그는 그걸로 족했다.
“태의정이 집에 여러 번 찾아왔다던데?”
1 황자가 뜬금없이 화제를 돌렸다. 여러 해 동안 말 위에서 생활한 그로서는 관료 사회의 이런저런 꼬인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범한이 속으로만 웃고는 관련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제가 태의원에서 일하기를 바라거든요. 황제 폐하께서 반대를 하셨는데도 제가 태의원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냥 한담일 뿐인데 1 황자는 외려 진지하게 나왔다.
“범한, 나도 자네가 태의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날 밤 광신궁 밖에서 어의들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자네 의술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걸 나도 알게 되었어.”
1 황자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사실, 경도의 많은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네. 자네가 어떻게 범 낭자를 시켜 자신의 배를 가르고 치료를 했는지 말일세. 그래서인지 어의들은 자네를 신선으로 보고 있더군.”
범한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들 말은 믿지 마십시오. 모두 비개가 제 스승인 걸 알고 있으면서······. 만약 저들도 네 살 때부터 매일 무덤에 가서 시체를 보고 물에 부은 시체의 배를 가르고 살았다면 저와 같은 능력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랬었군. 이제 보니 모든 걸 ‘천재’라는 두 글자로 해석할 수는 없는 거였군.”
1 황자가 감탄을 하더니 다시 범한에게 권했다.
“태의원이 감찰원보다 강한 권력 기관은 아니네만 평안함을 가져다줄 수는 있네. 그러니까 태의정은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자네가 지닌 의술을 전수한다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될 거란 생각 말일세.”
그가 진지하게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 죽이는 것보다 좋은 일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나는 군에 있었으니 다친 군졸들에게 좋은 의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고 있거든.”
“왜 의술을 전수해야 하는 것입니까?”
“천하 사람들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지.”
“태의정도 똑같은 생각일까요?”
“그럴 걸세.”
“마마께서는 오늘 태의정을 돕기 위해 오신 거였군요. 어쩐지 앞서 하신 말씀이 너무 이상하다 했습니다.”
범한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범한이 득의양양하게 웃자 1 황자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설마 내가 한 말을 모두 헛소리로 들은 건가?”
사실 헛소리에 가깝기는 했다. 범한에게 당당한 감찰원 제사 직을 내려놓고 의술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되라니. 그리고 누구도 권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직선적인 태의정과 1 황자는 동시에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범한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가슴 위 상처 부위가 살짝 욱신거려서였다. 이어 1 황자의 말에 깜짝 놀란 범한이 말했다.
“놀리는 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태의정에 대해서는 저도 어느 정도는 존경심을 갖고 있답니다.”
외과 수술을 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산적해 있었다. 첫째로는 마취, 둘째로는 소독, 셋째로는 기구였다. 지금 이 세계의 수준으로는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범한이 마취용으로 사용하는 건 가라방이었고 소독용으로 사용하는 건 경항이었다. 이는 모두 자신의 신체 기능이 강했기에 사용 가능했다. 만약 다른 백성들에게 사용한다면 약에 중독되어 죽기보다는 오히려 부작용으로 죽을 수 있었다.
기구와 관련한 문제는 더 난이도가 높았다. 범한과 비개가 다년간 방법을 생각해 보고 3처가 그동안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혈 문제도 아직 해결이 안 됐는데 어떻게 개복을 한단 말인가?
범한은 위의 문제점들을 1 황자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단어들을 써가며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1 황자도 드디어 범한이 쓴 의술은 강력하고 위험한 방법이어서 환자의 몸과 칼, 미약이 서로 안 맞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이해했다. 그리고 범한도 어려서부터 수행하지 않았다면 견뎌 내지 못했을 거란 사실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래도 서역 정벌군 중 화살에 맞아 치료받지 못한 군졸이 떠올라 1 황자는 유감스러운 마음에 다리를 한 대 툭 치며 탄식했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단 말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 범한은 누이의 유난히 차분했던 손놀림이 떠올랐다. 범한이 1 황자를 안심시켰다.
“기본이 되는 물건들은 며칠 후 약약이를 태의원으로 보내 의원들에게 참고시키도록 하겠습니다.”
1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먼저 자네는 백성에게 복을 준다는 말에는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군.”
이는 1 황자가 범한에 대해 갖고 있는 궁금증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범한은 이익을 중시하는 권력을 쥔 신하였다. 하지만 몇 차례 마주하면서 범한의 포부는 겨우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 것 같았다.
범한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백성에게 복을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꼭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지요.”
1 황자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마마께서 서역에서 수년간 서호와 교전을 벌이며 무수히 많은 적을 죽인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서호가 침입하는 걸 막은 것이니 이 역시 백성에게 복을 준 셈 아닙니까?”
범한의 아첨에도 1 황자는 침착하게 꾹 참고 있었다.
“다시 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감찰원은 음험하고 무서운 밀정 기관이라고만 여기고 있지요. 하오나 제가 감찰원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하고 최대한 올바른 길로만 가도록 한다면, 우리 경국 조정의 천하는 견고할 것이며 이로써 천하 백성들도 편안히 살 수 있을 테니······ 이것이야말로 백성에게 복을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적은 어쩌면 같을 것입니다. 하오나 방법만큼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범한의 말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리고 전생의 초등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처럼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소설가 루쉰이 이란 수필에서 밝힌 의과 대학을 관두게 된 일화를 말해 주었다. 물론 이 내용은 장묵한이 지니고 있던 고서에서 우연히 발견한 천 년 전 이야기라고 둘러댔다.
1 황자는 조금 경악했다.
“국민의 몸을 구하는 것보다 국민의 정신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1 황자가 다리를 툭 치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우리 경국은 이야기 속 나라처럼 연약하고 무능하지 않다네. 그러니 문치로 교화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1 황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경국 국민은 소박한 풍속과 맑고 깨끗한 자기 발전의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전생의 루쉰이 질식할 것만 같다고 말한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 중국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이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의원이 되고 싶지 않은데 이런 저에게 문인까지 그만두라고 한다면 저란 사람은 뭐가 되겠습니까? 의술을 버리고 정치를 해야 할까요? 문인의 길을 포기하고 군대에 가야 할까요?”
1 황자는 여전히 범한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네는 정말 천재적인 인물이야. 그런데 왜 가슴속에 있는 학문을 모두 풀어 놓지 않는 것인가? 만약 이 세계가 더 좋게 변한다면······.”
범한이 살짝 힘겹게 손을 내저었다.
“대부분 사람은 이 세계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는 정말로 드물죠. *저는 일단 자기 자신부터 바꾼 후 이야기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 전 이 세계를 바꾸려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말로는 죽음이었다. 범한은 그녀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이는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비교적 이기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는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실려 있었다.
1 황자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 웃었다.
“자네에게 상을 내리는 성지가 왔나 보군. 이제야 오다니.”
그런데 범한은 자조적으로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숨어 있는 건 자기 몸 상태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러니 앞장서서 천하 걱정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 * *
범씨 가문으로 황명을 받들고 온 요 태감이 세 번 포성을 울렸다. 저택 내부에서는 서둘러 향을 올릴 상을 준비하고 길을 청소한 후 모든 사람이 대청으로 가 대기했다.
한편 그사이 1 황자와 북제 공주는 계속 남아 있기 뭐해 돌아갔고 태의정은 꿋꿋하게 서재에 앉아 있었다.
성지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건 중대사였으므로 범한도 어쩔 수 없이 침실에서 들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황제는 범한이 치료 중인 걸 감안해 침대에 누운 채로 성지를 받을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요 태감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범한은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적지 않은 물건을 내려 주셨음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고 있는데도 끝날 줄 몰랐다. 범한은 포상 내역에 신경 쓰지 않았기에 진지하게 듣지도 않았다. 요 태감의 목소리는 오히려 최면제 같았다. 따스하고 푹신한 긴 의자에 누운 채 눈만 살며시 뜨고 있었더니 곧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범건 상서가 가볍게 기침을 한차례 하며 눈빛으로 범한에게 주의를 주었다. 임완아도 살짝 놀라 범한의 손바닥을 살며시 꼬집어 주었다. 그 바람에 범한은 억지로라도 두 눈을 뜨고 버티고 있다가 마지막 내용은 들을 수 있었다. 비단 5백 필, 몇 무의 밭, 금괴 약간······. 한데 신선하고 재밌는 건 없었다.
범씨 가문에는 은전 빼고 있는 게 없었다. 이는 경국 사람들도 다 아는 일이라 황제 폐하는 은전을 상으로 내리지는 않았다. 대신 범한에게 작위를 돌려주고 범건의 작위도 1등급 상향 조정하여 부자에게 영예를 안겨 주었다.
성지를 모두 읽자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조용히 흩어졌다. 그러자 요 태감은 작은 소리로 황제의 밀지를 읽어 내려갔다.
한데 말만 밀지였고 단순히 황제 폐하의 좋은 뜻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면 그다지 좋지 않았을 뿐이었다.
범한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자신에게 일곱 호위를 내려준다는 내용을 들어서였다. 범한은 그제야 황제 폐하께서 인색한 분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성지에 나온 황제 폐하의 다른 뜻은 무의식적으로 흘려들어 버렸다
지금 범한이 가장 걱정하는 건 자신의 신변 안전이었다. 내년에 강남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정기가 원상회복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죽 아저씨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목숨을 갈수록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 범한으로서는 오로지 스스로 방법을 찾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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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석 : 이 문장은 QQ라는 SNS에서 우연히 본 걸 가져온 것입니다. 읽었을 때 꽤 의미 있는 글이다 싶었고, 이내 수많은 청대, 명대, 당대, 이공간계와 관련한 내용이 떠올랐지요.
범한은 이 세계를 바꾸는 길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작가인 제가 게을러서 그도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의 엄마가 너무 부지런한 거였어요. 셋째, 제가 어떤 부분에서는 지적 수준이 허접해 전문적인 건 쓸 수 없어서입니다. 예를 들어 외과 수술 같은 건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거든요. 그러니 황당하고 웃긴 부분이 있어도 모두 그냥 웃어넘기고 용서해 주세요.
320화
화원 밖에 서 있는 일곱 명의 익숙한 호위가 범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들 무리를 이끌고 있는 자는 고달이었다. 호위들은 수개월 전에 범한과 북제에 함께 다녀온 사이였다. 그리고 이들은 황제 폐하께서 자신들에게 범한 제사 보호를 맡겨 말도 못 하게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범한 곁에 있는 게 숨어서 황제 폐하를 호위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더군다나 범한 대인은 무공 실력까지 출중했으니 그들로서는 그다지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는 편한 대상이었다.
등에 장도를 멘 호위들이 고달의 인솔하에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한목소리로 범한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인들, 제사 대인을 뵈옵니다.”
범한이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웃었다.
“일어나요. 모두 잘 아는 사이 아닙니까. 오늘부터 본관의 보잘것없는 목숨을 모두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호위들은 범한 대인이 농담한다고 생각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썰렁하게 두 번 소리 내어 웃었다. 범한의 말이 진심이란 걸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한편 범한은 이제 일곱 호위가 옆에 있으니 해당타타가 갑자기 미쳐 날뛰며 자신을 죽이려 들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아버님께 인사부터 올리고 와요.”
범한이 고달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평일이라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하나 본관을 따르게 된 이상은 이런저런 금기 사항 같은 거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고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범한 제사의 시원스러운 결정이 고마웠다. 이에 살짝 들뜬 기분으로 자신의 옛 상사께 인사를 올리기 위해 서둘러 앞채로 향했다.
* * *
“수놓은 베개? 좋은 술? 옷? 그리고 악기까지?”
범한은 자기 방에서 진지하게 하사품 품목을 듣고 있다가 아내를 잠시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내 비록 협률랑을 지내기는 했지만 악기는 다룰 줄 모르는데요.”
“황궁의 규칙일 뿐이에요.”
임완아가 설명을 해주었다. 한데 범한이 지친 모습을 보이자 하사품 안에 끼어 있던 변기 같은 항목은 읽는 걸 생략했다.
지금 이 순간 뒤채 정원은 어수선할 정도로 바빴다. 등자경이 사람들을 시켜서 저택 밖에서 황궁에서 온 하사품들을 받아 오고 있어서였다. 한편 등 대가는 창고에서 물건을 분류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중요한 물건이 있으면 방에 있는 아씨 마님에게 찾아와 보여 주었다.
등 대가의 아내가 이 추운 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뛰어다니는 걸 보며 범한은 참다못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상이야, 벌이야?”
그러자 등 대가의 아내가 싱글벙글 웃었다.
“바늘 하나, 실 한 가닥도 대충 보시면 안 됩니다. 몽땅 황궁에서 하사품으로 주신 복덩이들 아닙니까. 그리고 경도에서 이리 많은 상을 하사받은 가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련님께서는 이번에 체면이 크게 서신 것입니다.”
“그 하사품들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범한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목숨을 건 대가로 받은 것들인데······ 체면 따위 차라리 필요 없네.”
임완아가 범한과 거의 동시에 똑같은 말을 했다. 부부는 하사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임완아는 황제 외삼촌의 저의가 불량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상공이 나중에도 몇 번이고 대신 칼을 맞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삼촌이 하사품이며 상을 내려준 거라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 쩨쩨하시네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사받은 금은의 수량을 읽을 때 자세히 들어 봤는데 정말 처참할 정도로 적은 양이더군요.”
범한의 말에 임완아가 웃었다.
“아직도 신경 쓰는 것입니까? 한데 재밌지 않아요? 하사품의 종류가 복잡해질수록 황제 폐하의 상공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뜻이니까요.”
“어찌 관심이 없으실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눈썹을 씰룩였다.
“우리 집은 지금 담박서국으로 유지되고 있어요. 매번 돈이 필요할 때마다 앞채의 아버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고 말입니다. 저 어르신께서 손에 쥔 은전이 정말 많으시다지만 나는 캥거루족으로 남아 있을 생각이 없거든요.”
캥거루족이란 단어에 임완아가 그 뜻을 은연중에 알아차리고는 웃었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을 하고 있기에 작은 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상공에게는 청루도 있지 않아요? 듣기로는 거기에서 한 달에 은자 몇만 냥을 벌어들인다던데요.”
범한이 실소했다.
“그건 사천립 거라니까요. 그러니 날 엮지 말아 줘요.”
임완아가 삐진 척을 하며 중얼거렸다.
“자기편 앞에서도 거짓말이라니 아닌 척하는 거 피곤하지도 않나 봐.”
“언제 어디서든 그래야 합니다. 제일 좋은 건 나 자신도 속여야 하는 거고요.”
“아까 오라버니께서는 왜 찾아오신 건가요?”
임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말했다.
“금군 대통령을 하지 않으시겠다며······ 내게 방법을 물으러 오셨어요.”
임완아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큰 오라버니 성품에 경도에는 안 계시려 할 거예요.”
그러자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렇게 경도에만 있는 걸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냥 폐하께서는 전투도 정복 활동도 잘하는 아들인데도 항상 외지에서 군을 이끌고 있는 게 걱정되어 그러신 게지요.”
“당신 앞이니 조금 솔직히 말하리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 갔다.
“사실 1 황자마마를 돕고 싶습니다. 하나 나는 신하 된 입장이니 그 일과 관련해서는 발언권이 조금도 없어요. 1 황자마마께서 대체 어떤 결심을 하셨기에 그리도 대담하게 내게 모두 털어놓으셨는지 정말로 이해가 안 됩니다.”
“어쩌면 큰 오라버니 생각은······ 내 체면을 생각해서 상공이 자신은 해치지 못한다고 여기셨을 거예요.”
임완아가 씁쓸하게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일을 단순하게만 보신다니까요.”
“경도는 물이 깊은 곳입니다. 그래서 한참을 수영해 봤는데도 탐사를 마치지 못한 곳 같아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봄에 강남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나와 같이 가요. 그곳에서 며칠 묶으면서 제대로 쉬는 거예요.”
“아직은 몰라요. 조정에서 상공을 흠차대신 신분으로 황실 금고를 조사하도록 할지 아니면 바로 유명무실한 직위에 임명할지 말이에요.”
임완아가 이어 진지하게 분석해 나갔다.
“만약 흠차대신 신분이라면 가족을 데려갈 수 없어요. 한데 명목상 강남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면 내가 따라가도 무방하기는 해요.”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분께서 어찌 결정하시든 나는 어떻게든 당신을 데려갈 거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임완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음속으로는 달달하니 기분이 좋아서였다. 임완아는 범한과 자신의 신분이면 규율을 깨도 지적할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황궁의 마마님들께서 자신이 저 먼 강남까지 가는 걸 동의해 주실지가 걱정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가장 멀리 가본 곳이라고 해봤자 작년 겨울에 다녀온 창산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오늘 범한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소문으로만 듣던 그림처럼 아름다운 강남에 직접 가볼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너무 격에 맞지 않는 일이에요.”
돌연 어떤 일이 생각난 임완아가 범한을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호위에게 상공을 보호하라는 밀지를 내리셨지만 결국에는 경도 사람들도 알게 될걸요. 물론 상공이 중상을 입은 터라 호위들이 와 있을 이유는 충분하지요. 그렇다 해도······ 호위의 신분은 좀 특별하잖아요. 상공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눈에 거슬릴 거예요.”
범한이 윗입술 위로 살짝 따끔거리게 난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염려 말아요. 황제 폐하께서는 총명하신 분입니다. 호위를 이곳에 보내신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신 거예요. 그러니 여기 계신 군주마마께서도 자연스레 보호받게 될 것입니다.”
* * *
방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범한은 살짝 화가 나 고개를 내저었다. 누군가가 귀찮게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정기가 소실된 후 주변 환경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과거처럼 민감하게 알아챌 수 없어서였다. 적어도 예전처럼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
범약약이 태의정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태의정은 임완아가 방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중히 예를 갖추어 황급히 인사하고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얼른 얼굴을 돌렸다.
경국은 북제와 달리 남녀 간의 규율 같은 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임완아에게는 할아버지뻘 나이의 태의정이 옛날 사람처럼 행동을 하자 방 안에서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오라버니가 정신은 말짱해도 태의정 대인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범약약이 웃으며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범한은 순간 심장이 서늘해졌다. 아버지처럼 염치없는 분이 태의정의 무작정 찾아와 뻗대는 기술에 넘어가 이 불쌍한 아들의 처분을 맡기시다니.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태의원과 관련된 요구에 그는 일찌감치 결단을 내린 터라 활짝 웃으며 태의정을 바라보았다.
“대인, 무슨 일로 오셨는지 본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태의정이 말하려 하자 범한은 서둘러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나 본관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니 집 밖에서 수업을 할 처지는 아니고······.”
범한은 나이 많은 선생의 분노에 찬 표정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저택에서 몇 가지를 말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걸 책으로 엮어 태의원으로 가져가시면 되겠지요.”
태의정이 수염을 한번 어루만졌다. 이것도 나름 괜찮은 성과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말했다.
“본디 의술의 도는 직접 손 기술을 가르치는 걸 으뜸으로 치지요. 책만으로 보고 배우는 건 그리 타당한 방법은 아닙니다.”
범한이 숨을 두 번 고르고는 말했다.
“책이 나온 후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다면 내 약약이를 통해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지요.”
태의정이 매우 황송해했다.
“어찌 아가씨께서 직접 나서시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황궁에서 수술할 때 그는 옆에서 모든 걸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범씨 가문 아가씨가 직접 침을 이용하는 것도 본 터라, 그녀의 솜씨를 의심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약약이도 아는 게 없어서 내가 집에서 교육을 해야겠지만요.”
범한이 탄식했다.
“1 황자마마께서 앞서 내 의견을 전달해 주셨을 것입니다. 이 일은 심도 있게 진행될 수 없습니다. 하나 일부 유익한 주의 사항이 있으니 어의분들은 그것을 참고해도 좋을 것입니다.”
범한이 눈이 가늘게 되도록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곧 제 스승님께서 경도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분께서 태의원에서 교육을 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실력이 약약이보다 훨씬 뛰어나시거든요.”
태의정은 매우 기뻤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게 있었다.
“비 선생께서는······ 과거 제가 여러 차례 모시려 해봤지만 응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모실 방도가 없었습니다.”
“황제 폐하께 성지를 내려 달라 청할 것이니 걱정 마세요.”
범한은 어린아이 달래듯 앞에 있는 노인을 안심시키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못마땅하다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태의정이 만족감을 안고 떠나자 범약약은 그제야 놀란 마음을 토로했다.
“오라버니, 저는 실제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날 밤에도 오라버니의 지시만 따랐을 뿐이라고요.”
“어쩔 수 없지 않니.”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우선 고온 소독과 감염 격리 방법에 대해 써놓을 거야. 그 이후의 일은 스승님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그리고 이참에 너도 좀 배워 두고.”
범약약은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얼굴에서 환한 빛이 돌더니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 부부는 임완아가 생각지도 못하게 시원하게 승낙을 해버리자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라버니께서 한평생 사는 거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계속해 나가라고 늘 말씀하셨잖아요.”
범약약은 고개를 숙이고 수줍게 말을 이어 갔다.
“그날 밤 제가 한 건 별로 없지만 오라버니께서 살아나셔서 알았어요.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일인지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오라버니께서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제가 직접 나서서 가르쳐 달라고 하려던 참이었어요.”
순간 범한은 입이 떡 벌어져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설마 내가 한 이상한 짓 때문에 경국에 여자 의사가 탄생하게 되는 건가?’
하지만 비개가 여자 제자를 거두어 저 아이를 전생의 3대 명의인 화타, 편작, 풍화 중 어떤 인물이 되도록 키워 줄지는 더 두고 봐야 했다.
‘안 돼! 여자인데 절대 화타와 편작 같은 괴물로 만들 수는 없어! 이왕 하는 거 당연히 아름다운 서왕모 같은 풍화가 되어야 해!’
범한이 상기되어 생기가 넘치는 누이의 말간 얼굴을 보며 이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하다못해 경국 판 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321화
밤이 되었다.
사사가 이불을 깔고 난로의 바람구멍을 적절하게 조절해 놓은 후 물을 가지고 들어온 사기와 함께 방을 나섰다. 부부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촛불만 바라보았다.
“자요?”
“아, 하루 종일 너무 많이 자서······. 당신은요? 어째 오늘따라 잠들지 못하는 거죠? 창산에 있을 때는 꼭 새끼 고양이처럼 잘만 자더니만.”
“고양이 이야기가 나와 그런데······ 흰둥이, 누렁이, 검둥이는 어떻게 지낼까요?”
“등 대가가 장원으로 데려갔잖아요. 당신이 줘놓고 왜 지금 와서 보고 싶은 거죠?”
범한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웃었다.
임완아가 작은 소리로 구시렁댔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고양이를 기르면 아이를 갖는 데 안 좋다고 했으면서.”
범한은 순간 깜짝 놀라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이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큰 고양이든 새끼 고양이든 저들의 게으르고 교활한 모습을 보면 속에서 화가 치솟는다고 했으면서.’
하지만 범한은 이런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상공······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요?”
임완아가 모로 누우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숨결이 범한의 얼굴에 간지럽게 와 닿았다.
“아이고, 간지러워라. 좀 긁어 줘요.”
범한은 아내에게 얼굴을 긁어 달라고 하고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건 묻는 거예요?”
임완아가 범한의 귀 아래쪽을 살살 긁어 주며 어둠 속에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장기로 당신을 도왔어요. 도련님은 장사를 할 줄 알고 아가씨는 의술을 배우려 하고. 또 아가씨는 경도에서도 재능이 뛰어나기로 알아주는 사람이잖아요. 언빙운 공자도 당신을 도와 감찰원 업무를 하고 있고, 북쪽에서는 해당타타 낭자도······.”
범한이 갑자기 기침을 두 번 했다. 그러다 하마터면 가슴 쪽 아물지 않은 상처가 터질 뻔했다.
임완아가 가볍게 그의 상처 부위를 문질러 주었다.
“그녀도 정말 뛰어난 능력자잖아요. 국가를 굳건히 지키려는 큰 포부까지 지닌.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황궁에서 귀여움만 받고 자라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글 실력도 없어, 그렇다고 무예를 익힌 것도 아니야.”
범한은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다. 이에 일단은 침묵했다가 잠시 후 입을 뗐다.
“완아, 사실 지금까지 당신한테 하지 않은 말이 있어요.”
“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유용해야 좋은 사람이고 쓸모없으면 나쁜 사람인 건 아니에요.”
범한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그건 사실 우리 같은 사람이 원하는 역할은 아니에요. 나는 원래 부자에 한가롭게 사는 삶을 꿈꿨어요. 그리고 언빙운이라고 해서 평생 밀정 두목으로 살고 싶었을까요? 그와 심 낭자의 상황을 당신도 봤잖아요.”
“나에게 완아 당신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에요.”
범한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눈빛은 베개 옆에 있는 아내에게 향하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자랐어요. 그렇게 오염되고 위험한 곳에서 자랐는데도 당신 성정은 전혀 나쁜 물이 들지 않았어요. 한 떨기 연꽃처럼 자유롭게 자라난 당신을 운 좋은 내가 갖게 되었으니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라고요.”
임완아는 범한의 사랑의 속삭임에 기분이 달달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힘들어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범한이 말을 가로챘다.
“더군다나 완아, 당신은 정말 능력자예요. 마작을 할 때 사철이 녀석이 당신을 상대할 때는 완전히 이기지를 못하잖아요.”
이 말에 부부는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진짜 장점이 뭔지 잘 알고 있어요.”
범한은 잠시 침묵하더니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조정 내 판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판단하는 데는 당신이 나보다 경험이 풍부해요. 더군다나 안목도 정확해서 놀라울 정도예요. 춘시 사건 후 당신이 황궁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내가 책략을 짤 때 당신이 도와주는데 그 능력이 결코 언빙운 공자보다 뒤처지지 않아요. 다만, 다만······.”
임완아가 동그랗게 떴지만 유난히 평온한 눈빛으로 물었다.
“다만 뭐요?”
“다만 내가 싫어요. 당신을 이런 일들에 끌어들이는 게 나는 싫거든요.”
범한이 단호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너무 음침하고 나쁜 일들이라 당신은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내 아내이고 나에게는 당신이 행복하고 마음 편히 살게 해줄 책임이 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종일 그런 일들에 신경 쓰도록 하지 않고 싶어요.”
“나는 남성 우월주의자거든요.”
범한이 미소 지으며 결론을 맺었다.
“적어도 그런 일들과 관련해서는 말이지요.”
* * *
한참 후 임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속에는 만족감과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황실의 일원이에요. 나중에 어떤 일들이 생기면 말을 안 해주겠군요. 상공이 나를 신뢰하는 거 알고는 있어요. 그 일들이 음침하고 나쁜 일이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부부간에는 피할 수 없는 일 아닐까요? 그러니 나중에 내 걱정하느라 말해 주지 않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임완아와 범한의 혼인은 원래는 황제께서 정한 것이라 그 안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다만 하늘이 조화를 부리사, 이 어린 남녀에게 닭 다리라는 중매쟁이를 내려 주시고, 한밤에 창문을 열고 들어가 사랑을 나누게 만들었으니 일반적인 정치적 정략결혼에 비해 이 둘 사이는 훨씬 더 견고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면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 사이일지라도 비극은 벌어지게 마련이고, 그런 예는 역사에서도 비일비재했다. 더군다나 임완아의 생모는 장 공주이다. 그러니 임완아가 한 말은 투정을 부리거나 하는 게 전혀 아니었으며 한발 물러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려는 포석도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실질적으로 범한을 위한 생각이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범한이 평온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이어 갔다.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도 믿을 수 없다고 해봐요. 그런 불쌍한 날들을 지속해 나갈 필요가 있을까요?”
범한이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였다. 인생을 다시 살 기회가 주어졌는데 시도 때도 없이 머리맡에 있는 사람을 방어하며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다시 주어진 삶을 안 사는 편이 낫다는 뜻이었다.
* * *
경도에 첫 번째 눈이 내렸다. 작은 싸라기눈 알갱이는 땅에 떨어지는 즉시 녹아 없어졌다. 민가에는 눅눅한 한기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때는 경국이 가장 강성하여 물자가 풍부할 시기. 그러니 백성들 가정에서도 갑작스레 난방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저 멀리 보이는 평민 취락지에서는 검은 처마 밑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평범한 마차 한 대가 경도에서 몇 번을 돌고 돌아 어느 외진 곳에 있는 민가 작은 뜰 앞에 당도했다. 오늘은 날이 추워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없고 사위이 고요했다. 그러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등자월이 조심스레 범한을 안아 바퀴 의자 위에 앉히고는 그 작은 뜰로 들어갔다.
범한이 오늘 입은 외투는 목 부위가 얼굴까지 올라와 있어 정말 따뜻했다. 하지만 범한은 손을 입가에 대고 호호 불었다. 그리고 곁눈질로 정원 한쪽에서 서문무의 지휘 아래 장작을 패고 있는 젊은이를 바라보다 조금 놀랐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젊은이 같았다. 그 젊은이는 한겨울에 상반신을 탈의하고 있는데도 조금도 추운 기색 없이 쉼 없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저자가 사리리의 동생인가?”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젊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북제에 있는 여인의 그림자라도 찾으려는 것처럼.
등자월이 작은 소리로 응답했다.
“대인의 건의로 원장 대인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데려왔습니다. 사 낭자가 북제 황궁으로 들어갔으니 저자의 신분도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어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지난번에 웃전에 여쭤본 후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작은 집은 범한의 유일한 개인 사유지였다. 자신과 왕계년 조를 제외하면 진평평만 아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범한이 오늘 상처가 다 낫지 않았음에도 이곳에 온 이유는 황제 폐하께서 자신에게 호위를 배정해 주어서였다. 호위가 있어 범한은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분명 황제 폐하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보도록 심어 놓은 첩자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이에 나중에는 이렇게 마음 편히 올 수 없다는 생각에 범한은 오늘 눈이 오는데도 나와 보았다.
“저 사 공자란 자는 거칠고 경솔하고······ 누나를 위해 북제에서부터 경국까지 온 자예요. 그러니 며칠 후 이곳에서 도망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범한이 주먹을 입가에 대고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했다.
“조금 더 신경 써서 감시해요. 만약 이상한 행동을 보이거든 즉시 죽이고요.”
등자월이 무표정하게 대답을 하고는 의자를 밀었다. 그러자 의자 바퀴가 눈이 뒤섞여 질척이는 흙 위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 있던 감찰원 관원들이 나와 범한을 맞았다. 그들은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제사 대인의 모습에 절로 오싹했다. 경국에 무서운 진평평이 하나 더 나타난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였다.
경도 심정 도로 옆에 있는 근거지에는 사람이 많이 머무는 법이 없었다. 이곳의 주요 임무는 범한의 명령을 전달하고 북제 상경에서 왕계년이 보내는 소식을 받는 거였다. 더구나 사리리의 남동생과 다른 사람들은 곁채에서 생활했기에 범한이 일을 보는 방은 평소에 거의 불을 피우지 않았다.
오늘 제사 대인이 온다는 소식에 일찌감치 난로를 피워 따뜻하게 하려 했지만 방 안에 가득 있는 한기를 모두 없앨 수는 없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범한이 손에 입김을 불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난로 피우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돈이 없나?”
벼루를 난로에 녹이면서 부하들에게 얼어붙은 붓에 뜨거운 물을 부으라고 지시하던 등자월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대인께서 요새 일이 많으신 데다가 상처도 입으셨기에 안 오실 거라 예상하고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범한이 손으로 머리를 괸 채 등자월이 데운 벼루에 먹을 갈려고 애쓰는 모습을 지켜봤다. 등자월은 따뜻한 물을 조금씩 부어 가며 기를 쓰고 갈았지만 얼어 있는 먹은 좀처럼 갈리지 않았다.
새로운 심복이 한참 애를 써서 간 먹물을 범한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윤기 나는 붓을 들어 먹물을 묻힌 뒤 눈처럼 하얀 종이에 몇 글자 써 내려가는데 세상에, 먹물이 또 얼어 버렸다!
“거지 같은 날씨!”
범한이 버럭 화를 내며 나무처럼 굳어 버린 붓을 탁자에 내던졌다.
“집 안에 한기가 가시지 않는 이유가 뭔가?”
등자월은 사방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조심히 대답했다.
“이 집을 처음 살 때 난방을 고려했어야 하는데 미처 그러지 못한 데다가 침대 아궁이 열기만으로는 따뜻해질 수가 없어 그렇습니다.”
범한이 투덜댔다.
“내가 여기서 잘 것도 아닌데 아궁이는 무슨, 왕계년이 너무 인색해서 그래. 내가 은전 1천 냥을 줬는데 고작 120냥에 이 집을 샀어. 내가 얼어 죽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한 걸까?”
등자월은 멀리 북제에 있는 전임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대신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마도 주변이 조용해서 그랬을 겁니다.”
범한이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조용하다 못해 얼어 죽을 지경이야! 북제 대신들이 보면 감찰원에 돈이 없다고 생각할 거네.”
범한이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써야 할 중요한 편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붓으로 편지를 쓰려고 몇 번이고 애를 쓰던 그는 결국에는 포기하고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자네 연필을 주게!”
한참을 꼬물거리다가 마지못해 옷 안에서 연필을 꺼낸 등자월은 범한의 손에 연필을 쥐여 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값이 비싼 데다가 황실 금고에 재고가 많이 없으니 부디 살살 써주시면······.”
범한이 연필 낚아챈 뒤 등자월을 째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연필을 왜 비싸게 파는 거야? 나중에 강남 흑연석을 가져다가 황실 금고 연필 사업을 부흥시키면 내가 연필을 두 바구니 안겨 주지. 하나는 죽을 때까지 쓰라고 하고 나머지 하나는 길거리를 다니면서 연필을 뿌리라고 할 거야!’
322화
흰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이 내려가는 연필의 모습은 미녀가 발끝으로 잔잔한 물 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등자월은 몇 발자국 떨어져서 제사 대인이 밀서를 쓰는 모습을 지켜봤다. 얼음장처럼 추운 서재 안에서 연필로 편지를 쓰는 범한의 모습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종이 위를 스치는 모습이 기괴해 보였다.
사실 더 기괴한 건 편지 안의 내용이었다. 감찰원 밀서인 만큼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더구나 연필은 필적을 닦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비교적 모호한 말을 사용해 편지를 쓰면서 특히 일과 관련된 단어를 쓸 때는 암호를 사용했다.
이 편지는 왕계년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편지 안에는 최씨 가문과 관련된 일이 적혀 있었다. 경도에서 박해를 받은 최씨 가문은 2 황자와 신양을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량의 밀수품을 북제에 가지고 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쪽 통로가 여전히 막혀 있는 탓에 갈수록 재고만 쌓이고 있었다.
현재 최씨 가문이 신양을 통해 빼돌려 쌓은 물건을 계산해 보면 황실 금고 연 생산량의 6분의 1이나 되는 분량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장 공주는 황실 금고를 오랫동안 관리하면서 간이 굉장히 커져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지금 상황은 범한과 언빙운이 몇 개월 동안 2 황자를 공격하고 최씨 가문을 압박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는 오래도록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상대방을 뼈도 뱉지 않고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순간을 말이다.
편지를 쓰던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편지의 가장 마지막 줄에 “밥상을 차리게.”라고 썼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범한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이고는 붕대로 감싼 상처가 가려운지 가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편지를 한 통 다 쓴 뒤 얼어 경직된 손을 풀던 그는 순간 담주에 있었을 때가 생각났다. 사사는 매일 자신을 도와 책을 베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글을 쓸 때는 손을 품 안에 넣어 녹여 주고는 했는데 그 감촉이 정말 좋았다.
마음이 약간 난잡해진 그가 다시 연필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두 번째 편지는 해당타타에게 보내는 거였다. 옛 생각에 마음이 난잡해져서인지 편지의 말투도 약간은 거칠어졌다.
북제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해당타타와 편지를 계속 주고받고 있었기에 꽤 친숙해진 상태였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양국을 대표하는 젊은 실력자였기에 서로 연락할 수 있는 통로를 유지하는 게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되는 건 분명했다.
편지에는 경국 경도에서 최근 발생한 일들이 적혀 있었는데 물론 현공 사당 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경국 황제가 검수을 만난 건 천하가 놀랄 만한 대사건이었으므로 북제 상경에도 이미 소식이 전해졌겠지만 당사자가 직접 전하는 것이 소문으로 듣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용 안에는 은밀하게 다른 의미도 숨겨져 있었다. 바로 자신이 최씨 가문을 손대려 하니 해당타타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어린 황제도 함께 움직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편지 맨 마지막에는 자신의 재능이 이전처럼 뛰어남을 증명하는 시를 적었다.
‘은혜에 보답하는 걸 소임으로 삼을 뿐 사사로운 이익과 명예에 얽매이지 않네. 옛사람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었고 쓸쓸히 변방에 묻히는 걸 두려워했지. 조정의 옛사람들이 어찌 나를 생각해 줄까. 무거운 옷과 두꺼운 신발을 신으니 화려한 술만 나부끼네. 북쪽 추위가 극심하다 들었는데 백성들이 어찌 살아가는지 모르겠구나.’
이 시는 북송 시대 정치가 사마광이 쓴 에서 마지막 몇 구절을 베낀 것이었다. 범한이 만족한 얼굴로 편지를 한번 읽어 보고는 차가운 양손을 비비며 상황과 완벽히 어울리는 시를 적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백성의 고통을 걱정하는 뜻이 담긴 구절에서 해당타타는 분명 오래도록 의미를 생각하고 음미할 것이었다. 그는 해당타타가 자신의 편지에 속아 감동할 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즐거웠다.
빠뜨린 내용이 없는지 확인한 뒤 편지를 봉투에 넣고 봉랍하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움찔하면서 편지에 쓰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시골 아낙네처럼 몸을 흔드는 친구가 자신의 고리타분한 편지를 읽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잠시 고민하다가 새로 편지지를 하나 펼치고 쓰기 시작했다.
‘타타, 잘 지냈소? 이전 편지는 공적인 일을 적은 것이고 이 편지는 일상을 편히 이야기하려고 쓰는 것이오. 오늘 경도에 경력 5년 첫눈이 내렸소. 이전보다는 훨씬 이른 시기에 내린 것이오. 상경은 이곳보다 눈도 더 많이 오고 날씨도 추울 텐데 괜찮은지 모르겠소. 이제 좀 지나면 낭자의 작은 정원 울타리에 뻗은 납매 가지에서 하얀 눈을 뚫고 빨간 꽃이 피어오르겠구려.’
‘맞다, 낭자가 키우는 오리는 잘 크고 있소? 얼어 죽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나는 여기서 아주 잘 지내고 있소. 누렁이, 검둥이, 흰둥이도 경도 밖 농가에서 지내고 있답니다. 거기 사람들이 통통한 고양이 세 마리를 조상 모시듯 정성껏 기르고 있으니 잘 지내지 못할 수가 없지요.’
‘나는 모든 게 좋습니다. 먹고 자면서 집 안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소. 다만 최근 이틀 동안은 태의원에 가느라 바쁜 누이의 얼굴도 보기 힘들었고 완아도 처가에 가 있어 좀 적적하오. 귀여우신 큰 처남께서 최근 외로움에 우울해한다고 하니 내가 어찌 가지 말라 할 수 있겠소.’
범한은 생각나는 대로 써서 내용이 산만해지자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이 사씨인 제자는 최근 기생집을 운영하기 시작했소. 장사도 잘되고 음식도 아주 맛있으니 언제 한번 경국에 오면 내가 대접해 드리지요. 갑자기 생각난 건데 이름은 까먹었지만 상경에 있는 술집의 술도 달았던 게 기억나는구려. 그날 낭자와 허튼소리를 많이 했는데 기억할지 모르겠소.’
‘낭자가 이전에 보낸 편지들은 읽어 봤는데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소. 성녀라 불리는 분이 명문가 규수의 교양은 배우려 하지 않고 편지에 볼품없는 시나 글귀를 끼워 넣는 걸 좋아해서 되겠소? 내가 비록 거짓으로 시선이란 명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작문을 고쳐 주는 데는 흥미가 없소.’
‘지난번 편지에 사리리 낭자가 잘 지낸다고 했는데······ 앞으로 이런 내용은 전하지 말아 줬으면 하오. 지난번 일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남아 있는 데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낭자의 입에서 사리리 낭자의 소식을 들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오.’
‘타타, 언제 한번 경국에 놀러 오시오. 아내가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오. 그리고 기회가 돼서 물어보는 건데 천일도 공법을 외부인에게 전해 줄 수 있소? 최근 낭자 쪽 수련 방법에 흥미가 생겨서 그러오.’
자연스럽게 한 질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범한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뻔뻔스럽고 능글맞은 모습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문장이었다.
‘창밖에 눈이 거세질 것 같으면 집 밖에서 그 젊은이가 장작을 패오. 젊어서 그런지 힘이 넘치나 보오. 반면 나는 젊은데도 마음속에 늙은이가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이든 귀찮고 재미없소. 밖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게 나보고 그만 쓰라고 재촉하는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소. 방에 난로가 허술해서 온도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아 춥소. 말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구려. 마지막으로 나를 도와 그를 잘 보살펴 줘서 고맙소. 잘 지내시오.’
평범한 일상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에는 유용한 정보가 상당히 많이 담겨 있었다. 편지 내용을 한번 읽어 본 뒤 그가 밑에 추가로 적었다.
‘왕계년, 또 훔쳐보면 내가 목철 조카보고 자네 딸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라고 할거네!’
* * *
“이전보다 한 통을 더 쓰셨군요?”
등자월이 손에 들린 편지를 세어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범한을 바라봤다.
“해당타타 낭자에게 두 통을 보내시는 겁니까?”
“뭔 질문이 그렇게 많아? 기존 방법대로 상경에 보내게.”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잘 봉인된 편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계년조 조직원에게 전해졌다. 편지를 세어 보던 조직원이 질문했다.
“왜······ 같은 사람에게 두 통을 보냅니까?”
등자월이 조직원을 노려보며 입술을 두어 번 씰룩거렸다.
“뭔 질문이 그렇게 많아?”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보안이 철저한 감찰원의 우편망이······ 사랑 편지를 보내는 데 사용되다니.’
* * *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심정 대로 근거지에서 나와 마차에 올라탄 범한은 완아와 대보를 맞이하기 위해 처가로 향했다.
“태학사업이란 직책이······ 좀 이상한 것 같지 않나? 게다가 나는 태상사에 가지도 않는데 왜 태상사 소경이 될 수 있었던 거지?”
범한의 말을 듣던 등자월이 설명했다.
“소경은 두 가지가 있는데 임 소경이 주소경을 맡고 있고, 대인은 부소경이십니다······ 부소경은 유명무실한 직위이니 매일 태상사에 가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태학사업은 총 일곱 부분을 이끄는 직책으로 태상사 소경과 태학사업 모두 정 4품 직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말을 쉬며 범한의 안색을 살피고는 넌지시 말했다.
“대인께서는 감찰원 제사 자리를 받으셨으니 원래는 조정 관리직에 임명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 관례를 깨고 대인에게 두 직책을 맡긴 것은 폐하께서 대인을 총애한다는 걸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지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 부분은 황제 성지에서 맨 마지막 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수상했다. 생각이 깊은 황제가 단순히 총애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이런 직책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이 두 직책에서······ 무슨······ 특별한 점은 없겠지?”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등자월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상사가 종묘의 자질구레한 일을 주관하는 곳이니 비교적 자유롭게 입궁을 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소경이란 직위는 흔한 것이라 특별할 건 없습니다. 그리고 태상사업은 최근 몇 년 동안 임명된 적도 없었고 새 정책이 계속 실행되면서 관직이 약간은 복잡해져서······.”
말꼬리를 늘이며 고민하던 등자월이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이전에 태상사업은 태부의 조수로 입궁해서 황자들에게 강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범한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황제가 자신에게 이런 직책을 내린 의도가 뭔지 알 것 같았다.
‘태상사 소경 말고도 태학사업이란 직책을 준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황자들의 스승이 되라고? 나보고 지금 버르장머리 없는 3 황자를 책임지고 가르치라는 거야?’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매일 입궁할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럼 강남은 언제 내려가라고?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나한테 맡길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때 마차가 삐걱 소리를 내고 멈춰 섰다. 창문 가림막을 살짝 걷어 보니 날리는 눈발 속에서 태감이 대내 시위 몇 명을 이끌고 마차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태감이 추운 듯 마차에 탄 범한을 바라보며 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그가 말을 하려 입을 열자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차 안에까지 들렸다.
“소인이 대인을 찾으려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릅니다. 얼른 저와 함께 가시지요. 폐하께서 입궁하라 하셨습니다.”
323화
황제의 명을 받고 요 태감이 처음 간 곳은 범한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범한은 없었다. 그는 몸이 좋지 않은 제사 대인이 어디를 갔을지 짐작할 수 없었고 상서 대인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범한의 특수한 신분상 집에 없다면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폐하가 황궁에서 범한을 데려오길 기다리고 있는 만큼 요 태감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다가 제사 대인의 부인이 처가에 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이에 시위를 이끌고 그쪽으로 가던 길에 범한의 마차와 마주친 것이었다. 만일 눈썰미가 좋은 시위가 범한의 측근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아마 계속 눈발을 맞으며 고생했을 터다.
숨을 헐떡거리는 요 태감을 본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처가에 가야 하네. 왜 입궁하라 하는 것인가?”
폐하의 뜻을 전했는데도 범한이 심드렁하게 반응하자 요 태감은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살면서 이처럼 폐하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신하는 본 적이 없었다. 범씨 집안과 친분이 있는 그가 초조해하며 재촉했다.
“폐하께서 분부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작은 범 대인께서 지체하실수록 폐하의 기분은 나빠지실 겁니다.”
범한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가야지.”
그는 눈 위에서 떨고 있는 태감을 일단 마차에 태운 뒤 일행에게 처가에 가서 완아에게 사실을 전하라고 분부하고는 황궁으로 향했다.
“요 태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범한이 몸을 반쯤 기댄 채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는 집안에서 태감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는 걸 알았기에 요 태감에게 은표를 건네주고 싶지 않았다.
요 태감도 범한에게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기에 멋쩍게 웃었다.
“소신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대인께서 가보면 아실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짐짓 화난 척 말했다.
“하는 일이 형편없구먼.”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싶은 일이 있네.”
요 태감이 귀를 쫑긋거리고는 마차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인께서 알고 싶은 일이 뭡니까?”
“지난번 현공 사당에 있었던 태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요 태감은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범한은 담담하기만 했다. 사실 이건 필연적인 결과였다. 태감들 속에서 검수이 나온 이상 그날 현장이 있던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태감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보다 황실에서 일을 깨끗하게 처리했을지가 더 걱정되었다.
“대 내관은 어떻게 됐나?”
“대 내관은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요 태감이 한숨을 쉬었다.
“폐하의 신임이 두텁긴 하나 연루된 이상 태극전에 머무를 수는 없지요. 더구나 두 달 전 못난 조카가 저지른 일로 도찰원에 조사를 받게 되면서 궁에서 쫓겨날 처지가 된 것을 폐하께서 숙 귀비의 체면을 봐서 다시 쓰게 했으니까요.”
요 태감은 말하면서 범한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대 내관에 대해 물어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대 내관이 범한과 은표를 주고받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으니······ 대 내관도 참 운이 없지요. 하던 일도 다 뺏기고 창고 관리직으로 가서 노년에 추위에 떨며 힘을 쓰고 있으니······.”
요 태감과 대 내관은 같은 해에 입궁한 사이였다. 비록 평상시에는 서로 배척하며 견제했지만 같은 일을 하는 만큼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요 태감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얼마 동안은 고생해야겠지만 그래도 폐하의 화가 누그러진 뒤 다시 말해 보면 들어주실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오늘 태극전 당직은 누가 서고 있는가?”
“홍죽이 서고 있습니다.”
요 태감이 그건 왜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범한을 보다가 목소리를 낮추며 이어 말했다.
“어린놈이 올해부터 태극전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일 처리가 깔끔해 폐하께서 좋아하십니다.”
“폐하의 명을 전하는 일도 그······ 홍죽이 하는 건가?”
범한이 묻자 요 태감이 고개를 저었다.
“그놈에게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 * *
마차가 새로 난 길 입구를 지나자마자 요 태감이 소리쳐 마차를 멈춰 세웠다. 등자월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황궁 앞 드넓은 광장을 바라보았다. 오늘같이 눈발이 휘날리는 날에 상처 입은 제사 대인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이곳을 지나다가는 황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저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요 태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를 살폈다.
“지난번 일이 있고 난 후로 금군 내부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는데 그 뒤로 병사들이 늑대처럼 눈을 부라리며 궁에 입궁하는 사람들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입니다.”
범한이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 태감이 난처해할 건 없소. 이제 내리지.”
등자월이 약간 화난 표정으로 황궁 문을 바라보고는 범한을 안아 마차에서 내린 뒤 바퀴 달린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재빨리 검은 천으로 만든 큰 우산을 펼쳐 제사 대인의 머리 위를 가린 다음 감찰원 관리에게 밀고 가라고 지시했다. 눈이 검은 우산 위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 태감은 손으로 머리 위를 막은 뒤 따라온 시위들과 함께 황궁 문으로 달려갔다.
외투로 몸을 감싸고 얼굴을 절반을 가린 범한은 겨울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오늘따라 흐린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발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황궁 문밖에서 요 태감의 말을 듣던 금군이 놀란 눈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오고 있는 일행을 바라봤다. 눈발 속에서 평상복을 입은 관리들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오고 있었으나 검은색 우산을 씌워 놔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감찰원 원장이 입궁한다는 말은 없었지 않습니까?”
금군 대장이 묻자 요 태감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범 제사입니다.”
화들짝 놀란 금군 대장이 급히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가서는 바퀴 달린 의자에 탄 범한이 눈바람을 맞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그러고는 황궁 문 앞에서 잠시 검사를 한 뒤 재빨리 안으로 들여보냈다.
* * *
차가운 북쪽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를 맞으며 등자월은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정전 옆에 길게 난 길을 걸어갔다. 황궁 담장 모퉁이를 따라 깊이 들어간 일행은 오른쪽에 있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일찌감치 흰색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태감이 범한의 머리 위를 가려 준 뒤 상처 입은 그를 조심히 후궁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등자월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후궁 문밖에 서서 태감들에게 둘러싸여 점점 멀어지는 제사 대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멀어지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등자월이 바람에 날린 눈발에 두 눈을 끔뻑였다.
“어서방으로 가는 게 아닌가?”
얼굴을 덮치는 차가운 바람에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요 태감에게 물었다.
황제는 오래도록 범 제사가 오지 않자 이미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진 태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깊은 궁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바퀴 달린 의자는 연신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하얀 우산을 든 태감은 곧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황궁의 지세가 평탄하지 않았다면 충격에 범한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요 태감이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침······ 침전에 계십니다.”
영문을 모르는 범한이 의아함에 인상을 찌푸리자 요 태감은 순간 그가 최근에 다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폐하가 더는 기다리시지 않도록 빨리 가는 것도 중요했지만 서두르다가 제사 대인의 상처에 탈이라도 난다면 그것만큼 난처한 경우도 없었다. 이에 그가 주변 태감들에게 천천히 가라고 소리친 뒤 범한의 안색을 살폈다.
“작은 범 대인, 괜찮으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잠시 뒤 황궁 정원에 들어간 일행은 황후의 침전이 아닌 의 귀빈의 침전으로 향했다. 요 태감이 몇 걸음 앞장서서 걸어가 안에 통보하자 누군가가 안에서 나와 범한을 데리고 들어갔다.
황제는 평상복을 입고 따뜻한 침대에 앉아 의 귀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3 황자는 옆에 앉아 무언가를 베끼고 있었다. 태감들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들어오자 황제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상처를 입었으면 저택에서 몸이나 추스를 것이지 어디를 돌아다니는 건가?”
황제가 젊은 신하를 꾸짖으며 관심을 보인다면 신하는 마땅히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야 옳았다. 하지만 범한은 남몰래 냉소를 지었다.
‘정말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17년 동안 아무런 표현도 안 하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정말로 내 상처가 걱정된다면 오늘 이렇게 급히 입궁시키지도 않았을 거고.’
그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상황에 맞게 감동한 척을 했다.
“많이 좋아져서 바깥바람을 좀 쐴 겸 처가에 가서 완아를 데리고 오려고 했습니다.”
“완아가······ 임약보의 집으로 갔는가? 거기에는 바보 말고는······ 다른 사람은 없을 텐데.”
황제는 자신의 조카가 임약보 집안과 왕래하는 것이 못마땅한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의 안색을 슬쩍 살핀 의 귀빈이 호호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범한, 상처도 낫지 않았는데 그렇게 쏘다니다가는 범 상서 대인에게 몽둥이로 맞을지도 몰라요.”
그러자 황제가 약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말했다.
“범건이······ 어찌 그럴 수 있겠소.”
비록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안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의미를 눈치챈 범한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옆에서 책을 베끼고 있는 3 황자를 슬쩍 보고는 범한에게 말했다.
“얼마 전에 자네가 태학에서 정리한 경책 몇 권을······ 짐이 승평이에게 공부해 보라 했네. 태부는 어렵다고 하는데 자네가 보기에 어떠한가? 승평아, 제사 대인에게 보여 드리거라.”
3 황자의 성은 이씨였고 이름은 승평이었다. 경국 법규상 황자들은 대신들을 존경해야 했으므로 황제가 3 황자에게 이런 분부를 내리는 건 특이할 게 없었다. 3 황자가 급히 붓을 멈추고 공손하게 바퀴 달린 의자 앞으로 걸어와 범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어찌 이러십니까?”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어 피할 수 없는 범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는 태학사업이 아닌가. 그러니 이리하는 게 당연하지.”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황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가 범한을 3 황자의 스승으로 삼으려는 걸 알게 된 의 귀빈은 좋은 감정을 감추질 못하고 헤벌쭉 웃었다. 무예와 문예에 모두 뛰어난 데다가 조정에서 영향력까지 갖춘 범한을 스승으로 둔다면 3 황자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은가?”
황제는 의 귀빈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라서 아끼고 좋아했다. 황제의 말을 들은 의 귀빈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평아에게 좋은 스승을 찾아 주셨군요.”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범한은 씁쓸한 마음에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에 대한 나의 의견도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고는 그가 3 황자가 건네 보인 책을 힐끗 보았다.
“장 대가의 경책으로 공부하는 건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수준이 어렵다는 태부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이 책들은 입문용이므로 3 황자께서 공부하셔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이후 황제와 신하 사이에 응당 오고 갈 말들을 주고받던 범한은 속으로 황제가 분명 다른 할 말이 있어 자신을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뜨거운 탕을 마시던 황제가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밖에 눈이 그친 것 같네. 첫눈을 그냥 보내기 아쉬우니 짐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지.”
“네, 폐하.”
황제가 일어나자 의 귀빈이 웃으며 너구리 털이 박힌 진홍색 비단 도포를 걸쳐 줬다.
의 귀빈의 거처인 수방궁을 나서자 눈은 이미 그친 상태였다. 황궁 바닥은 촉촉하게 젖어만 있어 눈이 왔다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회색빛 하늘에 붉은 담장과 금색 처마 그리고 눈이 쌓인 겨울 가지들이 어우러지면서 매력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더구나 공기도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맑았다.
황제가 외투를 걸친 채 앞으로 걸어가자 어린 내관이 범한의 뒤로 와서 바퀴 달린 의자를 밀었다. 그 모습을 본 면 저고리를 입은 태감과 궁녀들은 멀리서부터 비켜선 채 고개를 숙였다.
“눈이 내린 날은 짐에게 무릎을 꿇을 필요 없네.”
범한의 생각을 읽은 듯 황제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짐이 즉위한 뒤 정한 규정이지. 매일 무릎을 꿇으니 저들도 피곤하고······ 황실 금고 은전으로 산 옷도 더러워지지 않는가.”
눈과 함께 바람도 그치면서 더워진 범한은 옷깃 단추를 살며시 풀었다. 황제의 입에서 황실 금고란 단어가 나오자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범한이 무례를 무릎 쓰고 아무 말 하지 않자 황제가 차갑게 물었다.
“자네 아우는 지금 어디 있나?”
이때는 이미 황궁에서 가장 외지고 조용한 정원에 다다라 있었다. 앞에 보이는 작은 호수 중앙에는 다리로 연결된 정자가 있었는데, 눈이 살짝 덮여 있음에도 정자의 검은 돌에서는 뿜어져 나오는 스산한 기운을 감추지 못했다.
324화
눈이 내린 뒤 황궁 안은 한기가 가득했지만 범한은 추위를 막아 주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바퀴 달린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따뜻하다 못해 더울 지경이었다. 범한은 이미 황제가 범사철에 대한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해 둔 상태였다. 범사철이 몰래 경도를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감출 수는 없었다.
“며칠 전에 서신을 받았는데 이미 상경에 잘 도착했다고 합니다.”
범한이 무심코 뒤에 있는 어린 내관을 바라봤다. 이때 황제는 산책에 집중하느라 뒤에서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어린 내관은 바로 홍죽이었다. 범 제사의 빙그레 웃는 얼굴을 본 그는 왠지 모르게 순간 마음이 오싹해지면서 덜컥 겁이 났다.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었다. 최근에 폐하를 근거리에서 보필하면서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된 그는 급히 고개를 숙여 범한의 눈빛을 피했다.
그러면서 홍죽은 마음속으로 범한의 기세가 이처럼 대단한데 자신이 어떻게 범씨 가문에 불리한 일을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거 말고는 할 말이 없는가?”
황제가 호수 쪽으로 걸어가면서 가벼운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대부분의 일은 천하 모든 사람이 알 만큼 투명하고 명확하게 처리되지만 몇몇 일들은 그렇지 못하네.”
범한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목을 돌리자 옷깃에 있는 털이 뺨에 스쳤다.
“폐하의 물음에 제가 어찌 거짓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어린 내관이 범한의 바퀴 달린 의자를 급히 멈춰 세웠다. 의자가 흔들리자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짐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서슴없이 거짓을 말할 수 있는가?”
황제가 고개를 돌려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눈가에는 몇 가닥 주름이 잡힌 게 분명 웃는 모습이었지만 눈동자는 차가웠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예의 없이 황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백성은 본디 어리석습니다. 그리고 소신은 폐하에게만 충성할 뿐 백성에게는 충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말을 한 사람도 있네.”
황제의 눈빛이 순간 이상하게 빛났다.
“백성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으로 국가이며 군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었지.”
“허튼소리입니다. 누가 그런 오만방자한 소릴 지껄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오만방자한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원작자는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사상가 맹자였고 그걸 이 세상에서 퍼뜨린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였다.
“형부에서는 아직도 자네 아우를 수배하고 있네.”
황제는 재미있는지 두어 번 호탕하게 웃고는 몸을 돌려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짐이 자네를 벌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는가?”
황제가 걸어가자 홍죽이 천천히 바퀴 발린 의자를 밀기 시작했다. 범한은 의자에서 나는 소리에 머리가 아파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현명하시니 소신의 고충을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고충? 둘째가 자신의 고충을 하소연하다 그리되었다는 걸 모르는가?”
“아······ 소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범한은 사극에서 황제와 가까운 신하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도 놀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2 황자의 일에서 그는 황제의 뜻에 따라 움직인 꼭두각시일 뿐이었고 더구나 황제에게 그는 평범한 신하와 같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의 두려움이나 긴장감도 없는 범한은 황제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약간 과장해서 죄를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면 그만이었다. 다만 말을 노골적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 같지 않았다.
황제도 그걸 느꼈는지 낮은 목소리로 질타했다.
“지금 거짓으로 뉘우치는 척하는 건가? 진심으로 하는 말 같지 않군!”
범한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소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말을 반복하는 사이에 호수 다리에 이르자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경도 날씨가 추워지고 첫눈까지 내렸지만 호수는 아직 얼지 않아 푸른색 물이 찰랑대며 흐르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다리는 수리해서 견고한 편이었지만 바퀴 달린 의자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다소 버거워 보였다. 범한은 불안한 마음에 의자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다리의 갈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뒤에 있는 어린 내관이 검수라면 자신의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앞에 정자를 미리 청소하고 준비해 둔 태감과 궁녀들이 멀찌감치에서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황제가 방석이 깔린 돌의자에 앉은 뒤 범한에게 차를 마시라는 눈짓을 해 보이고는 손가락으로 잣을 천천히 까기 시작했다. 어린 내관 홍죽은 눈치 있게 정자 밖으로 물러나 상황을 살피면서 지시를 기다렸다.
“어떠한가?”
황제가 물었다. 범한은 잔에 담긴 찻물이 뜨거운지 미간을 찌푸리다가 질문에 즉시 대답했다.
“폐하, 소신의 상처를 말씀하시는 건지 아니면······.”
“후자이네.”
뜻을 알아챈 범한이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감찰원 내부를 거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에 시선을 많이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범한은 계속 설명했다.
“현재 경내의 물건은 모두 차단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북제 사람이 소문을 듣고 안에서 이윤을 보려 한다면 최씨 집안이 북제에 쌓아 둔 물건이 적지 않은지라······.”
이 말에는 황제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그가 북제 황제와 함께 이익을 나눠 갖기로 계획했다는 사실 말이다.
“북방에 노선은 총 세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은 4처에서 통제만 하고 있을 뿐 황실 금고에 파견된 감찰원 관리가 그곳에서 너무 오래 머무른 사람인지라 안심할 수 없어 잠시 사용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언빙운이 세운 계획을 되도록 자세히 설명하자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짐은······ 세세한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알고 싶네.”
범한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늦어도 1년 안에는 황실 금고 수입의 대부분을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황제가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실 금고가 이전에처럼 번성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자네도 그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범한이 고개를 숙이자 황제가 이어서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 자네가 2 황자와 장 공주에게 손대는 걸 짐이 지지해 줄 거라 확신했던 건가?”
“그건······ 조정에 은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황제가 흠, 하고 콧소리를 냈다.
“조정에서 일을 진행해 영토를 넓히려면······ 은전이 필요하지. 짐은 운예가 황실 금고에서 돈을 꺼내 착복하는 걸 더는 지켜볼 수가 없네. 그래서 자네가 황실 금고를 넘겨받아 상황을 정리해 주었으면 하네. 먼저 황실 금고를 인계받은 뒤 상대방의 신분은 두려워하지 말고 매섭게 상황을 정리하도록 하게···. 짐이 자네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 부디 실망시키지 말게나.”
“폐하의 총애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범한은 황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장 공주는 자신의 장모인 만큼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잣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향을 음미했다. 바람이 멈추면서 눈이 녹기 시작한 정자 밖은 조용하면서 약간은 한기가 느껴졌다.
“섭중이 창주로 돌아가서 짐이 친왕에게 금군 대통령을 하라 한 걸 가지고 말들이 있는 것 같더군. 자네는 들은 바가 없는가?”
황제가 마치 아무 의미 없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묻자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선례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다 보니 여러 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범한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왜 내 의견을 묻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성상께서 깊이 헤아려 결정하신 일에 어찌 소신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뭐라 말하든 탓하지 않은 테니 말해 보게.”
황제는 계속 범한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은 채 정원의 나무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황제와 대화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녹정기(鹿鼎記)》라는 무협 소설 주인공인 위소보(韋小寶)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다가 결국에는 강희(康熙)에게 약점을 잡히고 만다. 범한 역시 황제 몰래 여러 일을 벌였다. 몰래 황궁에 잠입하기도 했고 북제와 은밀한 협상을 했으며 소은과 비밀스러운 대화도 나눴다. 만약 이런 사실들이 발각된다면 어떤 처지로 전락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황제는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만약 범한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황제와 놀아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여기서 범한이 가진 우위란 바로 그와 황제의 진짜 관계였다. 그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황제는 그가 알고 있다는 걸 몰랐다. 이에 범한이 충성스러운 신하인 척 연기할수록 황제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 상황은 자연스럽게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1 황자 저하께서는 경도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범한이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또 친왕에게 품격에 맞지 않는 일을 시키시는 것 또한 규율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황궁은 경국의 심장인 만큼 부주의하게 다뤄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범한의 말은 직설적이다 못해 지나쳤음에도 황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원치 않는다고? 세상일은 대부분 마음대로 되지 않네. 경도에 있기 싫다고 아들이 되어서 아비 혼자 외롭게 경도를 지키게 하겠는가? 범한, 자네는 웅변가로서는 자질이 없는 것 같군.”
범한은 순간 오싹해졌다. 1 황자가 자신 집을 방문했던 걸 황제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둘째도 이제는 분수에 맞게 처신할 것이니 더는 싸우지 말게.”
황제가 두 눈을 감으며 얼마 전 경도에서 있었던 일을 매듭지었다.
“알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그로서는 계속 싸울 필요가 없었다.
“현공 사당에서는 자네 공이 컸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황제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자네는 감찰원 제사이지 않나. 검수에 경도에 들어와 있음에도 2처는 사전에 미리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네. 이건 자네의 불찰인 만큼 직위를 빼앗아도 마땅하나 공이 커서 빼앗지 않은 거야. 다만 짐은 자네가 세운 공에 대해 아무런 상도 주지 않을 것이니 원망하지 말게나.”
“소신이 감히 어찌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제사 자리를 빼앗겨도 할 말이 없습니다. 흰옷의 검수에게 당한 것도 소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갑자기 흥미를 가지며 물었다.
“그 검수······ 아직도 정체를 밝히지 못했네. 싸우면서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는가?”
정자 밖에서 갑자기 불어온 차가운 겨울바람에 범한은 등이 얼얼하면서도 목덜미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황제가 질문한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신중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흰옷의 검수는 그림자였다. 진평평이 무슨 이유에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자신이 먼저 알기 전까지는 황제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황제가 이 일의 진상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면 그는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걸까. 만약 자신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가 어렵게 얻은 황제의 마음도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이에 범한은 순간 깜짝 놀란 척하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흰옷의 검수가 사고검의 아우라 의심하시는 겁니까?”
황제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동이성에 큰 혼란이 닥쳤을 때 사고검의 가족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죽었고 그 속에서 아우가 도망을 쳤다고 들었네. 짐이 생각하기에 그날 현공 사당에서 보았던 검광은 사고검법일세. 짐의 눈이 멀지 않았다면 사고검법의 검의가 확실해.”
자신의 추측대로 말이 이어지자 범한은 약간 안심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일 실제 증거를 포착할 수만 있다면······ 이 일을 명분으로 삼아 동이성에 군대를 보낼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소신이 입은 부상도 가치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325화
그야말로 황제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말이었다.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이와 같은 후안무치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었기에 웃으며 말했다.
“사고검이 비개에게 치료를 받은 뒤 백치가 되는 건 면했다고 하지만 상황을 계산하는 머리는 없는 것 같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아직도 아우가 살아 있다는 걸 인정하고 국서를 보내 검수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머리가 제대로 돌아간다면 검수의 극악무도한 짓을 질타해야겠지.”
자기 생각을 말하던 황제는 호응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는 고개를 돌렸다. 범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고 정자 밖 어린 내관은 몸을 굽힌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가 마음속 깊이 한숨을 쉬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이 세상에 그녀처럼 지위 고하를 신경 쓰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자신과 대화해 줄 사람은······ 없었다.
살짝 슬퍼진 황제가 천천히 물었다.
“범한······ 그날 누각에서 평아를 먼저 구한 이유가 무엇이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범한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한참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당시 상황에서 만약 제가 폐하의 옆에 있었다면 앞으로 오는 검은 막을 수 있었겠지만, 뒤에서 오는 검은 막지 못해 3 황자 저하께서 위험해지셨을 겁니다.”
“응?”
황제가 자조 섞인 미소를 띠었다.
“짐의 목숨이 평아의 목숨보다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범한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용서를 빌었다.
“소신은 죽어 마땅합니다. 당시 상황이 매우 급하여 제대로 대처하지를 못했습니다.”
“자네가 짐의 앞으로 돌진하였을 때는······ 이미 기선을 제압한 상황이었는데 죽을까 두렵지는 않았는가?”
범한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거듭 고민하더니 황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실로 무도한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쏟아 냈다.
“당시에는 소신의 보잘것없는 목숨을 바쳐 검을 막을 수 있으면 다행이고 만일 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폐하와 함께 다른 세상에서 가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니 영광이라 생각했습니다.”
황제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커서 정자 밖 멀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좀처럼 들을 수 없는 황제의 웃음소리에 황궁 정원 구석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태감과 궁녀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범 제사가 무슨 재미있는 말을 했길래 폐하가 저렇게 웃을까 생각했다.
웃음을 멈춘 황제는 범한의 얼굴에서 그리운 얼굴을 본 느낌이었다.
“강남에 가서는 모쪼록 조심하고 어떤 일이 발생하건 앞으로 나서지 말게. 북제에 갔을 때 상당히 소란을 피웠다고 들었네. 기백이 출중한 대신이니 몸을 사리려 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자중하도록 하게.”
범한은 약간 난처한 기분을 느끼면서 황제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국가 대신 중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서려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 이건 어디까지나 홀로 움직이길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남으로 떠나려면 아직 몇 개월은 남은 상황에서 황제가 이렇게 빨리 이별을 당부하는 건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때 중요한 일이 생각난 범한이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폐하, 조금 전 의 귀빈 거처에서 하셨던 말씀은······ 농담으로 하신 것입니까?”
황제가 두 눈을 부릅뜨며 차갑게 응수했다.
“군주는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않는 법이네.”
범한이 황송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소신처럼 나이도 젊고 덕망도 높지 않은 사람이 어찌 황자의 스승이 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미소 지으며 범한을 바라보았다.
“북제 어린 황제가······ 자네를 엄청나게 공경했다고 들었네. 심지어 자네는 장묵한의 인정까지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덕망이 없다고 할 수 있겠나. 장묵한의 제자가 북제 태부이니 자네도 경국 황자의 스승이 되기에 충분하네. 만약 자네의 나이가 너무 적어서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면 짐이 직접 입궁해 강연하라고 교지를 내리면 될 게 아닌가. 그럼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하지만······.”
범한은 허영심을 채우고자 명성을 쌓은 게 약간은 후회스러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소신은 내년 봄에 강남을 가야 해서 3 황자 저하의 학업에 지장을 줄까 우려되옵니다.”
황제가 한 손을 저었다.
“평아를 데리고 가면 되지 않는가. 내가 이미 황태후께 말씀드렸네.”
범한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입을 쩍 벌리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잘하게.”
황제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강남 일이 끝나고 2년 정도 지나면 짐이 자네를 중서로 보내 주겠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범한을 바라보며 황제가 다정하게 덧붙였다.
“짐이 자네를 높이 평가하고 있네.”
아무 말 없이 황제를 바라보던 범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화도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오늘이 동지라 황궁에서 연회가 열리니 자네도 참석하게나. 짐이 이미 자네 집에서 완아를 데리고 오라 명해두었네.”
예상치 못한 제안에 놀란 범한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눈치만 살피자 황제가 두어 번 기침하며 계속 말했다.
“황태후께서도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시네. 완아의 남편이 어떤 사람이지 보고 싶으신 게지.”
* * *
황제가 어가를 타고 떠난 뒤 조용한 정자에는 범한과 오늘 바퀴 달린 의자 끄는 일을 맡은 어린 내관만이 남게 되었다.
황제가 떠난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범한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오늘 갑작스럽게 황제의 부름을 받아 입궁하게 된 범한은 속으로 황제가 자신에게 초상화를 보여 주거나 무언가 말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었다.
그런데 결국 인자한 군주와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습으로 대화가 끝나자 실망감이 밀려왔다. 황궁이 원래 무정한 곳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도 중년의 남자를 자신의 아버지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실망한 것은 섭경미란 이름의 여자였다.
황제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는 무정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그것마저도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황제에게 그는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가장 가까이 두는 신하일 뿐이었다.
만약 자신의 신분이 드러났다면 그는 황제를 지킨 ‘충신’이 될 수 없었다. 범한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도 감찰원 제사로서 자신이 어려서부터 길러 온 특기를 발휘하는 데에는 흥미가 있었지만, 황제가 되는 거에는 조금의 흥미도 없었다. 하지만 마땅히 서야 할 서열에도 서지 못하게 하는 건 인격의 문제였다. 그가 불만스러운 마음에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나도 더는 할 말 없다고!’
* * *
속으로 황제에게 욕을 퍼붓던 범한은 한숨을 쉬며 자신이 주제넘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 재인이 동이성 포로였다는 이유로 1 황자는 이미 사람들에게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는 자신이 어찌 황자들과 나란히 설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유도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게 아닌 이상 황제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터였다.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 뒤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범한은 오늘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의문이었다.
툭, 툭, 눈이 녹아 생긴 물이 정자 처마에서 흘러 돌계단 위로 떨어졌다. 소리에 정신을 차린 범한은 정자 밖 초겨울 풍경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황궁의 중압감이 필요 없는 일을 떠올리게 한 것 같았다.
“제사 대인······ 저녁 식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폐하께서 편하게 돌아다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내관 홍죽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발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궁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매화 정원에서 상처를 치료하던 때와는 다르니 금기시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정자에서 풍경을 감상하는 거로도 족하네.”
그러고는 실눈을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한, 쇠꼬챙이처럼 생긴 태감의 몸을 훑어봤다. 범한의 시선에 어린 내관이 살짝 긴장했다.
“추운가?”
“그렇습니다.”
“땀을 흘렸는가?”
“······네.”
범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무서워할 것 없네. 폐하께서 자네를 여기에 두고 말을 듣게 했다는 것은 신임하고 계신다는 뜻이니까.”
오늘 정자에서 황제와 범한이 나눈 대화는 언뜻 보기에는 일상적인 대화 같아 보였지만 안에는 ‘상당히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홍죽은 오늘 처음 감찰원과 2 황자가 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황실 금고의 일에 황제의 묵인이 있었으며, 총명한 범 제사가 황제가 원하는 점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아마도 범 제사는 앞으로 어떤 큰일을 벌이려는 것 같았다.
만일 이러한 정보들이 황궁 안에 전해진다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홍죽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범한이 어린 내관의 울퉁불퉁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호기심에 물었다.
“태감도 여드름이 생기는가?”
“여드름이요?”
홍죽이 멍한 표정을 짓고 되묻다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약간 짜증 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방이 호수로 둘러싸인 정자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궁녀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차가운 바람이 호수 위를 비스듬히 스치며 정자 안으로 들어오자 조급했던 마음도 식어 차분해졌다.
범한이 어린 내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이름이 홍죽이라고?”
제사 대인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자 홍죽은 영광스럽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사 대인께서는 저같이 보잘것없는 노비의 이름까지 기억해 주시는군요.”
“폐하를 옆에서 모시니 알 수밖에. 감찰원 제사인 이상 모든 면에서 방비해야 하네. 더구나 어린 내관이 있는 태극전에 검수라도 나타나면······.”
놀란 홍죽이 입을 열 엄두도 내지 못하자 범한은 온화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폐하가 자네를 신뢰하는 이상 나도 자네를 신뢰할 것이네. 맞다, 그러고 보니 대 내관이 요새 힘들다고 하던데?”
홍죽이 그의 기색을 살피면서 슬쩍 떠보았다.
“맞습니다. 무척 힘들어하십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도 대 내관을 만나 봤었는데 괜찮은 사람이었네. 자네가 황궁 안에 있으니 조금씩 챙겨 주도록 하게.”
홍죽은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사실 그는 지난달부터 대 내관을 통해 범한과 연줄을 맺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먼저 이렇게 말해 희망이 보이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대인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수고스럽겠지만 앞으로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 주게.”
범한의 직설적인 말에 홍죽도 듣자마자 의 귀빈을 통해서 연락하라는 뜻인 걸 알아챘다.
* * *
의 귀빈의 거처인 수방궁으로 돌아갈 때 우연하게도 9월 이후로 만날 기회가 없었던 북제 큰 공주와 마주치고 있었다. 나온 방향을 볼 때 황태후 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같았다. 황실은 큰 공주가 혼인을 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무르게 했다. 그녀가 우연히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범한과 마주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 알맞은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살짝 인사를 한 뒤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의 귀빈이 범한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물었다.
“함께 북제에서 온 사이인데 왜 이렇게 어색한 거지?”
범한은 동맹국이 심어 놓은 밀정에 대해 항상 잊지 않고 있었기에 이런 중요한 역할을 맡은 큰 공주를 가만히 놓아 둘 생각은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낯선 척 연기를 할 뿐이었다.
“신분이 다르고 남녀가 유별하니 그런 것이지요.”
그의 말에 의 귀빈이 웃으며 놀렸다.
“미녀보다도 잘생긴 녀석이······ 다른 사람에게 화를 입히는 건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건드리는 건 싫어하는구나.”
그 말에 깜짝 놀란 범한이 서둘러 대답했다.
“이모님께서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그때 고개를 돌려 보니 3 황자가 착한 아이인 척 책을 베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화가 치솟은 범한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이 일을 황태후께서 정말 허락하셨습니까?”
범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의 귀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오늘 폐하를 통해 허락하셨다는 소리를 들었어. 좋은 일인데 반대하실 이유가 없잖아?”
326화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제가 강남에 3 황자 저하를 데리고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강남은 물 좋고 사람 좋고 풍경 좋기로 유명한데 안 보낼 이유가 없지.”
그러고는 의 귀빈이 갑자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범한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가까이 다가갔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제야 의 귀빈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궁에서 멀리 데려갈수록 좋네. 시간을 끌 수 있다면 몇 년 끌면서 데리고 있으면 더 좋고.”
의 귀빈의 생각을 눈치챈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무턱대고 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닙니다. 게다가 황실 금고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고요. 그냥 한번 보고 오는 것이라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습니다.”
의 귀빈도 범한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알기에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폐하께서 자네가 경도가 아닌 곳에 오래 있는 걸 허락하실 리도 없으니.”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위로했다.
“3 황자 저하께서는 나이도 어리시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더구나 황태후께서 손자들을 아끼시는데 누가 감히 건들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희는 다른 집안과는 다릅니다. 국공가도 아직 힘을 가지고 있고 저희 부친께서도 당분간은 자리에서 물러나시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저도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의 귀빈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지금 상황대로라면 조정에서 범한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이었다. 조정과 황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위치에 있으므로 조정에 힘이 될 사람이 있다면 의 귀빈과 3 황자는 궁중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런 말까지 오갈 수 있다는 건 서로가 서로에 대한 계산이 끝난다는 의미였다. 명랑하고 솔직한 의 귀빈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범씨 가문을 가까이하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3 황자 저하를 강남에 함께 데리고 가려면 먼저······ 의 귀빈께 허락을 받을 일이 있습니다.”
범한은 3 황자가 듣고 있는지 슬쩍 확인하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범한의 진지한 목소리에 그녀가 긴장하며 물었다.
“제가 3 황자 저하를 지방의 주와 군에서 일하고 있는 저의 제자들처럼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귀빈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들은 오랜 세월 공부에 매진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의 귀빈의 안색을 슬며시 살피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3 황자 저하를 동생처럼 가르치고 싶은데······ 그러다 보면 불경하게 보이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동생처럼 가르치고 싶다’는 말이 마음에 든 의 귀빈은 범사철이 참혹한 매질을 당한 뒤 북제로 쫓겨났다는 사실은 떠올리지 못하고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싱글벙글 웃는 의 귀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범한은 속으로 ‘의 귀빈이 왜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기뻐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가 의 귀빈의 마음을 확인해 보기 위해 넌지시 떠보았다.
“어쩌면······ 잘못했을 때······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매질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때리든 말든 마음대로 해! 어떻게 매질하지 않고 제대로 가르칠 수가 있겠어.”
그녀가 연신 한숨을 쉬며 솔직하게 털어놨다.
“최근 며칠 동안 내가 그 기생집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를 거야. 평상시 둘째 황자와 잘 어울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때려죽일 놈이 평아를 꼬드겨서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어. 어린 평아가 뭘 알겠어?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한 거지. 그나마 자네가 더 커지기 전에 일을 해결해 줬으니 다행이지. 폐하께서 이 일로 화가 나신 게 아니면 좋겠는데······.”
범한이 속으로 웃으며 3 황자는 의 귀빈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속으로 3 황자가 여덟 살 아이답지 않게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의 귀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애를 잘 가르쳐 주게. 한평생 무탈하게 살 수만 있다면······ 지금 정왕처럼 무기력하게 살아도 난 괜찮아.”
이 말을 들은 범한은 코끝이 찡해 왔다. 자식에게 가장 좋은 건 어머니이며 어머니가 없는 아이는 잡초와 같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이 바로 이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황태후 궁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범한은 수방궁에 머물면서 의 귀빈과 함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생기 없이 차가운 황궁 안에서 의 귀빈만큼은 진짜 사람처럼 느껴졌다.
“신 군주를 뵈옵니다.”
밖에 궁녀들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임완아가 작은 손을 비비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래는 비취색 치마를 입고 위에는 소매에 복슬복슬한 여우 털이 달린 붉은색 외투를 입은 게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범한이 양손을 펼치자 완아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범한이 아내의 찬 손을 어루만져 주며 물었다.
“어떻게 온 거예요?”
생동감 있는 빨간색 외투와 귀티 나는 비취색 치마가 서로 어우러져 보기 좋았다. 황궁에서 식사하는 만큼 화려한 색의 옷을 입는 건 당연했다.
범한의 물음에 임완아가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집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더니······ 소문무가 해준 얘기를 듣고 입궁하셨다는 걸 알았지요. 그래서 대보 오라버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태감이 집 앞을 지키고 서 있지 뭐예요. 입궁한 뒤에는 먼저 황태후와 황후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다행히 모두 황태후 궁에 계셨어요. 황궁 안을 쏘다니며 인사할 필요가 없으니 그나마 편하게 끝난 셈이죠. 그곳에서 인사하고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상공을 보러 온 거예요. 갑작스럽게 불려 오는 바람에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니까요.”
“잘했어요. 그런데 대보는 어떻게 했어요?”
범한의 가장 큰 관심은 손위 처남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약약이가 집에서 봐주고 있어요.”
임완아는 궁녀가 가져다준 뜨거운 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고는 의 귀빈 옆에 앉아서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의 귀빈은 먼저 궁녀에게 몇 마디 지시를 한 뒤 뜨거운 수건으로 완아의 얼굴을 닦아 주며 폐하가 범한에게 말한 내용을 알려 줬다.
완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정해진 거예요?”
범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강남에 놀러 다녀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이 났다.
그때 함광전에서 식사를 하라는 태감의 목소리가 들리자 의 귀빈은 재빨리 3 황자를 뒤채로 데리고 가 몸단장을 시키고는 자신도 몸단장을 했다.
범한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은근슬쩍 물었다.
“황태후마마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어요?”
완아가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도 안 보이자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파혼시키고 싶으면 저와 진작 상의했었어야죠.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하면 할마마마가 허락을 해주시겠어요? 게다가 저는 이런 일에 나설 자격도 없다고요.”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약약이가 싫어하는데 오라버니인 제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하긴 내가 너무 늦게 알려 주긴 했죠. 포월루 사건으로 홍성이 황실에서 미움받는 틈을 타서 이 일을 처리하려고 한 건데 쉽지가 않네요.”
“폐하께서 정하신 혼사를 무산시키는 건 쉽지 않아요.”
완아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상공이 약약이를 너무 예뻐하는 것 같아요.”
범한이 키득키득 웃었다.
“누이를 예뻐하는 건 당연한 거죠.”
“제가 봤을 때는 아버님께서 직접 나서야 해요.”
뒤채를 바라보던 완아는 엿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실히 확인하자 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로는 부족해요. 이 일은 아버님께서 직접 폐하께 말씀하셔야만 성사될 수 있어요.”
범한이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두 집안 사이가 시끄러운데도 아버지께서는 홍성을 마음에 들어 하세요. 홍성이 매일 기생집을 쏘다니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신다니까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면서 친밀한 관계를 이어 왔으니 2 황자 저하만 아니면 두 집안이 갈라설 일은 없을 거란 말만 하시고 있죠.”
완아가 피식 웃었다.
“아버님께서도 왕년에 유정강에서 이름을 떨치신 분이니 당연히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시겠죠.”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과거를 가지고 웃는 건 규범에 어긋나기에 완아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한편 누이의 혼사 때문에 마음이 조급한 범한은 완아의 말이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그는 약약이 태의원에서 명성을 쌓고 있으니 해당타타 쪽에서 하루빨리 일을 처리해 혼사를 막을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외삼촌께서 왜 입궁하라 하신 거예요?”
완아가 정말 궁금한 점을 물었다.
“셋째 일 때문에 그런 건 아니죠?”
범한은 아내를 가만히 쳐다보며 윤기 나는 턱을 쓰다듬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외삼촌이 사랑하는 상공에게 온 힘을 기울여 친모를······ 가난뱅이로 만들라고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때마침 의 귀빈이 단장을 마치고 나왔다. 장막이 걷히면서 빛이 들어오자 범한은 몸을 돌려 의 귀빈과 북제 큰 공주가 손을 맞잡고 나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옷에서부터 장신구, 화장까지 모두 세심하게 꾸민 두 여인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예상치 못한 미모에 범한이 감탄하며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큰 공주가 그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짓고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완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
‘작은 설’이라 불리는 동지에는 경국 전체가 쉬었다. 조정도 하는 일을 멈췄고 군대도 경계를 늦췄으며 국경도 이날만큼을 문을 걸어 잠그고 휴식을 만끽했다. 항상 장사하는 상인들도 동짓날에는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이는 북쪽에 있는 북제도 마찬가지였다. 동지에는 천하 사람들 모두가 가족들과 둘러앉아 편안하면서 소박한 행복을 누렸다.
경국은 동짓날에 양고기를 먹는 풍습이 있어 이날이 되면 경도 민가 거리에서는 불을 때는 연기가 자욱하게 깔렸다. 주방 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솥 위를 배회하다가 창문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거리마다 자욱하게 깔린 뜨거운 안개에서는 마른 고추 냄새, 양고기 누린내, 각종 약재가 가진 특유의 냄새, 무의 달콤한 냄새가 모두 뒤섞인 미묘한 냄새가 났고, 거리에서 이 냄새를 맡는 사람들은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군침을 삼켰다.
함광전 식탁 가장 끝자리에 앉은 범한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귀 모양의 양고기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하얀 국 위에 둥둥 떠 있는 버섯과 진귀한 채소들을 바라보고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황궁에서 먹는 양고기는 민가에서 먹는 것과 달랐다. 분명 정교함은 더 대단했지만 향불의 따뜻함이 없었다.
‘두부와 무가 없는데 양고기를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게다가 뜨뜻미지근한 양고기를 먹는데 왜 입술이 덴 것처럼 저린 거지?’
억지로 탕을 한 그릇 마신 그는 간장에 밥을 비빈 다음 밥알을 한 톨 한 톨 음미하며 재미없는 ‘집안 잔치’ 시간을 견뎠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눈을 최대한 내리깔고 소리 없이 식사하며 황족들의 대화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 외롭게 놓여 있는 바퀴 달린 의자처럼 외롭게 있을 뿐이었다.
황태후의 거처인 함광전은 후궁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물론 북제 상경에 있는 휘황찬란한 황궁에 비교한다면 소박했지만 그래도 웅장하고 화려했다. 특히 겨울날 촛불을 밝혀 놓으니 궁전 안에 있는 장식물들이 반짝반짝 빛이 나서 더욱 화려해 보였다.
오늘 함광전에 온 황족 자제들은 묵묵히 식사할 뿐 가장 상석에 앉은 노부인과 그 옆에 앉은 황제와 황후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늘이 동짓날인 만큼 황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으며 거기에는 정왕가 가족들과 연금되어 있던 2 황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범한이 함광전에 들어오는 모습을 본 2 황자와 홍성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 살기를 드러내며 달려들지는 않았다.
327화
범한은 상석에 앉은 노부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오늘 처음 황태후를 보게 된 그는 그녀의 미간 주름에서 그 당시 부렸던 매정한 마음을 읽어 내려 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대단한 황태후의 위세에 눌린 것인지 항상 거칠게 행동하던 정왕도 오늘만큼은 고분고분했다.
사람들은 낯설었지만 함광전만큼은 친숙했다. 이전에 이곳에 잠입한 그는 노부인의 침상 아래 비밀 공간에서 열쇠를 찾았었다. 그때 일이 떠오른 그가 눈길을 거둬들이고는 간장에 비빈 밥을 조용히 먹었다.
상석에서 들려오는 노인들의 잔기침 소리를 들으며 범한은 아무 말 없이 힐끔힐끔 황태후의 얼굴을 훔쳐봤다. 입가가 이미 처지기 시작한 걸 볼 때 그녀는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듯했다.
“신아야, 내 옆으로 오렴.”
황태후가 멀리 끝자리에 앉아 있는 외손녀와 그림자 속에 얼굴을 숨기고 있는 범한을 보며 말했다.
완아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빙그레 웃으며 황태후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황태후 귓가에 대고 몇 마디 말하더니 우거지상을 하고 간장에 비빈 밥을 먹고 있는 범한을 힐끔 바라봤다. 그러자 황태후가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집에서 밥을 배불리 먹여 황궁 밥을 먹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듣기에는 충분했기에 모두가 범한을 바라봤다.
긴장한 범한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완아가 황궁 안에서 가장 귀염을 받고 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황태후와 황제에게 예쁨을 받는다면 자연히 황궁에서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오늘 처음 황태후를 본 그는 그녀가 가끔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오싹해졌다. 게다가 외손자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이라 하기에는······ 그 눈빛이 상당히 복잡했다. 그 눈빛에는 위안과 자부심과 함께 의심과 경계심, 냉혹함마저 담겨 있었다.
황태후가 말을 하자 모두가 식사를 멈추고 동짓날 연회에서 무슨 말을 할지 귀 기울였다.
“올해에는 모두가 모였군. 작년에는 내가 몸이 좋지 못해 모두가 모이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부마의 얼굴도 보니 무척 기쁘네.”
기쁘다고 말하는 황태후의 얼굴에서는 말과 다르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황제를 향해 말했다.
“황상, 누이가 신양에서 쓸쓸히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딸과 사위도 모두 경도에 있는데 혼자 그곳에 있는 게 마음이 편치 않군요.”
황태후의 의도를 알아챈 범한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부마인 자신도 황족 연회에 참석하는데 장 공주가 왜 오지 못하냐는 것이었다.
황제가 깊은 두 눈을 순간 번뜩이고는 대답했다.
“지금은 날씨가 추워 길을 나서기에 좋지 않습니다. 봄이 되면 운예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황태후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맞은편에 앉은 2 황자의 왼손 소매가 부자연스럽게 떨리는 걸 보고는 궁지에 몰린 그가 지원군이 곧 경도에 올 거라는 생각에 기뻐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다만······ 황태자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나는 이유가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 *
황족들의 가족 연회는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기에 범한은 이후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가끔 황태후가 자신을 언급하면서 일부러 냉대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자조 섞인 미소가 지어졌다.
이전에 상처를 입었을 때 황태후가 자신의 복을 빌어 줬다는 말을 듣고, 황태후가 하사한 구슬을 받았을 때 그는 그녀의 모진 마음도 부드러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 직접 만나 보니 그건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다.
‘황족이 다른 사람들보다 모진 것은 선천적으로 마음이 차가워서일 거야. 그러니까 자식들도 괴팍해서 마음이 부드럽지 못한 거지. 차갑게 식은 탕 안에 들어 있는 양고기가 딱딱한 것과 같은 이치야.’
어차피 군주와 신하, 아비와 자식, 할머니와 손자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근거 없는 혈연관계를 피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비록 작품을 베껴 ‘시인’이 되었음에도 범한은 학자들에게서 보이는 고고한 품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함광전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몸을 곧게 세우고 은은한 미소를 띠며 황태후의 비위에 맞는 대답을 하거나 즐거운 척하지 않았다. 이에 일순간 함광전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황태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범한과 친분이 있었기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걸 즐기고 계략을 꾸미는 걸 잘하는 범한이 오늘 기회를 틈타 황태후에게 아부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황제는 범한이 장모가 경도로 돌아오는 일 때문에 기분이 나빠 시무룩해하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황태후는 달랐다. 그녀는 젊은 범한이 시건방지게 마음속에 있는 불만을 그대로 노출한 거라 생각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자 황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한편 영 재인은 약간 노기 서린 황태후의 눈빛을 주시하며 호탕하게 술을 들이켰고, 숙 귀비는 작은 입을 오므리고 눈치를 살폈으며, 의 귀빈은 바보처럼 웃으며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 중에 1 황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2 황자는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3 황자는 감탄하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그리고 황태자는 무언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반면 유일하게 범한의 마음을 이해한 정왕만이 몰래 고개를 저으며 ‘책을 벗으로 삼는 문인들은 왜 저렇게 괴팍한 성미를 드러내길 좋아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황태후 옆에서 있던 완아는 걱정하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겨울밤 눈송이가 다시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황궁 쪽문에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범한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아무 생각 없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완아는 그런 모습을 근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 물었다.
“상공, 아무 일 없는 거죠?”
범한이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없어요. 그냥 적비경(狄飛驚)인 척한 거예요.”
호위와 계년조가 오자 두 사람은 마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임완아가 물었다.
“적비경이 누군데요?”
“평생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사람이에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그만 말하고 얼른 집에 돌아가서 양고기 먹어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경국 경도에서 동북 방향으로 4천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상경성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거위 깃털 같은 하얀 눈이 쉴 새 없이 떨어지자 상경 대로와 작은 골목에는 순백색 양탄자가 깔린 것처럼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난로가 있는 집 지붕에는 눈이 쌓여도 금방 녹아 없어졌기에 검은색 처마와 하얀 눈이 대조를 이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멀리 성문에서도 보이는 황궁의 처마는 민가보다 훨씬 검었다. 쌓인 눈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겨울나무와 졸졸 물 흐르는 계곡이 있는 겨울 산의 모습이 황궁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엄청난 풍광을 만들어 냈다.
여름이 지난 뒤 북제에도 여러 일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놀란 일은 당연히 진무사 지휘사 심중이 거리에서 상삼호에게 죽임을 당한 일이었다. 이 일로 상삼호는 가택에 연금되었지만 심중이 죽은 뒤 온갖 죄를 끌어들여 심씨 집안을 몰락시킨 걸 보면 조정과 황실의 태도는 명확했다. 다만 이런 난리 속에서 심 낭자는 어디로 간 것인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심중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금의위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원래부터 약간 세력이 위축되어 있던 북제 특수 기관은 젊은 황제가 암암리에 실행한 계획에 의해 지도자를 잃은 뒤 더욱 약해졌고 심지어 황태후의 목소리도 힘을 잃은 상태였다.
겁을 먹은 금의위 관리들은 아무도 이 관아를 책임지려 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몇 달째 비어 있는 자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며칠 전에 조정에서 장영후 집안 공자인 홍려사 소경 위화가 심중의 자리를 이어받는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이에 상경에서는 황태후가 장영후에게 지휘사 자리를 주고 싶어 했지만 젊은 황제가 결단코 반대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장영후의 아들이 자리를 받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다만 매일 싸우기만 하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묵약과 타협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다시 활력을 되찾은 금의위는 과거의 사납고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내며 새로운 임무를 실행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갈색 관복을 입은 백여 명의 금의위들이 쏟아지는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수 거리를 포위했다.
하지만 수수 거리는 함부로 건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상점들은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서 일곱 점포는 경국 황실에서 운영하는 상점이었다. 더구나 지금 양국이 우호 관계에 있는 이상 금의위도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게 옳았다.
하지만 상황은 모든 사람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수수 거리 상점 상인들이 거리에 나와 손바닥을 비비며 술 가게 주인 성씨 사장이 잡혀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성은 성이고 이름은 회인인 이 사람은 상경에 있는 경국 황실 금고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유리 가게 여씨 상인이 오래된 문짝에 기대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잡아가는 거지?”
그러자 옆에 있던 종이 조용히 말했다.
“경남에서 엄청난 양의 물건을 발견했는데 검열 문서도 없었고 세금도 내지 않은 거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금의위가 조사해 봤는데 물건들은 모두 상경으로 갈 거였고 거기에 성 사장이 관련 있다고 하더라고요.”
사방에서 내리는 눈들은 여씨 사장 뒤에 있는 유리병보다도 투명하고 맑아 보였다. 그가 점점 사라져 가는 금의위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황실 금고가 북쪽에서 밀수 사업을 하고 있다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장 공주가 밀수하는 걸 알면서도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들여올 수 있다는 장점에 그동안 묵인하고 있었던 것인데······ 북제에서 왜 갑자기 이 일을 건드는 것이지?’
* * *
상경에 있는 아름다운 황궁에서 사는 젊은 황제는 지금 따뜻한 이불 속에서 과자를 먹으며 독서에 빠져 있었다.
새로 진무사 지휘사에 임명된 위화는 한참 동안 황제의 표정만 살피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몇 명을 잡아들이긴 했습니다만······ 그동안 조정에서 최씨 집안과 신양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지라 이에 황태후께서 몇몇 사람은 마지막에 풀어 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젊은 황제가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입술을 삐쭉거렸다.
“한낱······ 여인의 보잘것없는 생각인 게지.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옛정을 생각해서 무엇 하겠는가?”
황태후를 깔아 내리는 말에 위화가 난처해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황제가 여전히 시선을 책에 둔 채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체포하든 말든 상관없네. 그······ 물건은 얼마나 된다고 했지?”
“아주 많습니다.”
위화가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정확한 소식에 따르면 저희가 관례를 깰 거라 예측하지 못한 남쪽 오랑캐들이 허둥대는 바람에 상당한 손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설명하던 그가 순간 무슨 일이 떠오른 듯 의심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 일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장 공주에게서 황실 금고를 가져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범한이 저희에게 이렇게 큰 이익을 안겨 주는 게 이상합니다. 범한 정도의 힘이라면 북제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황제가 여전히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을 도와주려 그러는 것이지.”
“하지만 경국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범한이 먼저 손을 써둔 바람에 남쪽 사람들은 범한이 폐하와 손을 잡고 이익을 나눴다고 의심하기보다는 폐하가 혼란을 틈타 물건을 가로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황제가 갑자기 책을 내려놓더니 경고하는 뜻이 다분한 눈빛으로 위화를 노려봤다.
“이 일은 조정에서 다섯 명만 알고 있네. 자네 때문에 이 일이 누설되는 건 원치 않네만.”
화들짝 놀란 위화가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장영후의 아들이었지만 황제의 측근이었다. 그는 이번에 자신이 금의위를 장악하게 된 것은 황제가 자신에게 능력을 보일 기회를 준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경국 사절이 아직도 항의하고 있는가?”
갑자기 궁금해진 황제가 묻자 위화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28화
“임 대인이 최씨 집안을 대신해서 매일 홍려사에서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최씨 집안의 물건과 재물을 압수한다면 양국의 우호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버럭 화를 냈다.
“최씨 일가는 경국에서 가장 큰 밀수꾼이잖아! 내가 남쪽 오랑캐들을 대신해 잘못을 바로잡았으면 와서 감사 인사를 할 망정이지 원망을 쏟아 놓고 있다니······ 남쪽 오랑캐들은 정말이지 예의라는 걸 모르는 족속이군.”
위화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 안에 들어온 물건과 은전을 토해 내기 싫어서가 아닙니까.’
경국 사절로 북제 상경에 머무르고 있는 임문은 최씨 집안에 일이 터지자 그 속에 담긴 내막은 모른 채 자국 백성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싸우고 있었다.
“사실 임 대인보다는 참사관 왕계년이 더 골치가 아픕니다.”
위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임 대인은 홍려사 안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지만 왕 대인은 매일 태상사에 달려가고 있습니다. 최씨 집안은 경국의 유명한 거상이고 관리인 만큼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태상사가 직접 폐하를 찾아가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황제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범한도 재미있는 사람이지만 심복도 참 제멋대로이군. 범한이 최씨 일가를 물어 죽이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소란을 피우는 건 아마도 범한이 깔끔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위화는 여전히 남쪽 동업자에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폐하, 만약······ 이번 일의 진상이 남쪽에 전해져서 경국 황제가 범한이 한 짓을 알게 된다면 격노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럼 황제가 다시 군대를 일으키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여름에 협상을 진행하면서 그는 범한이 온화한 문인처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뼛속까지 차갑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금의위 지휘사로 부임하는 즉시 범한을 자신의 최대의 적으로 보고 항상 그를 쓰러뜨릴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는 마침내 범한에게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악랄한 계책을 생각해 내었다. 이에 기쁨에 상기된 얼굴로 황제에게 찾아가 계획을 이야기했지만······ 실망스럽게도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하네.”
황제가 조소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국경에 있던 최씨 집안 물건을 짐이 갈취한들 무엇 하겠는가? 설마 짐이 그깟 상인의 돈을 탐낸다는 건가? 조정이 과거 계속 장 공주와 교분을 이어 가면서 양쪽 모두 적지 않은 이익을 누린 건 사실이네만······. 이번에 범한과 함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자네는 정말 모르는가?”
황제가 탁자에 놓인 책을 집으면서 계속 말했다.
“경국의 황실 금고는 곧 있으면 범한에게 넘어가네. 자네에게 범한의 숨통을 끊어 놓을 만한 계책이 있는 게 아니라면 예의 바르게 대하도록 하게. 그래야 범 제사가 짐이 다스리는 국가의 백성들을 위해······ 매년 편의품들을 보내 줄 게 아닌가.”
위화가 물러가자 황제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조금 전 차갑던 표정과 달리 평온한 얼굴로 나른한 허리를 쭉 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이때 출중한 미모에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가 장막을 걷고 나오더니 지휘사 대인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셨나요? 들어 보니까 범한과 관련된 것 같던데요.”
“리리, 범한이란 말에 이렇게 긴장하다니 짐이 질투할 거란 생각은 안 하나 보지?”
젊은 황제가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당겨 안은 뒤 귓가에 대고 말했다.
“범한이 남쪽 신양을 겨누기 시작했어. 짐은······ 살짝 협력해 주는 중이고.”
사실 살짝만 협력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최씨 집안이 일궈 놓은 북제 노선은 완전히 망가졌고 가지고 있던 물건과 은전도 금의위에게 모두 뺏겼으니 말이다. 이로써 장사로 천하를 호령하던 최씨 가문의 한쪽 손은 망가져 버렸다. 그리고 경국 내부에 걸치고 있던 한쪽 손도 일찌감치 음산하고 무서운 감찰원에 의해 잘린 상태였고.
사리리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긴장되지요. 범 제사는 저희 중매를 서주신 분 아닙니까.”
젊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의 ‘괴상한 계획’을 따른 덕분에 고하가 사리리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황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사리리 신분을 고려할 때 황궁에 입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뭘 보고 계십니까?”
사리리가 궁금해하며 황제의 손에 든 책을 뺏자 황제가 급히 도로 빼앗으며 말했다.
“범한이 짐만 보라고 《석두기》 최근 장을 보내 줬네. 천하를 통틀어 단 하나만 있는 거니 함부로 만지지 말게.”
사리리가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포근히 안겼다.
“범한은 어떻게······ 자기 장모의 사람을 건들 수 있죠?”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짐보다 담이 훨씬 큰 것 같아. 게다가 남쪽 황궁은 우리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하니 그 속에 담긴 내막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 * *
북제에서 가장 존귀한 강은 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와 황궁을 거쳐 상경성으로 내려가는 옥천하강이었다. 이 강은 상류로 갈수록 황궁과 가까워져서 조용했다.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려서 강변에 얼음 조각들이 얼어 있었고 날씨도 무척이나 추웠다. 황궁의 검은색 처마가 보이고 겨울나무들이 쭈뼛쭈뼛 서 있는 이곳에는 누가 사는지 모를 작은 정원이 있었다.
대략 열세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작은 정원 안에서 힘을 쓰고 있었다. 볼이 오동통한 소년이 이를 악물고 큰 맷돌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어찌나 힘을 썼는지 한겨울이었음에도 등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이지 가여운 모습이었다.
한참을 기를 쓰던 소년은 손잡이를 놓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콩이 없다고! 왜 비어 있는 맷돌을 갈라는 거야! 당나귀 살 돈도 없어? 당나귀 사서 갈아!”
그러나 정작 그를 화가 나게 한 사람은 한가롭게 두꺼운 이불을 깐 의자에 누워 멍한 표정으로 눈이 내리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밖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하품하며 일어났다.
“오늘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콩을 어디서 사라는 거야? 게다가 네가 있는데······ 당나귀가 왜 필요하지? 당나귀는 며칠 전에 팔았고 작은 정원에는 닭이랑 오리밖에 없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려면 돈이 필요하단 말이야.”
서로 맞지 않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북제로 쫓겨난 범사철이었고 다른 한 명은 북제 젊은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해당타타 낭자였다.
해당타타는 꽃무늬가 그려진 솜저고리를 입고 양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미소를 지으며 범사철을 바라봤다.
“네 형이 며칠 전 편지에서 너를 잘 교육하라고 써서 보내왔어.”
그 말을 들은 범사철은 정말이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상경에 도착하고 며칠 동안 그가 한 일이라고는 저 촌스러운 시골 처녀가 시키는 대로 막일을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아도 그녀가 어디론가 보내 버렸다.
범사철은 몇 번이고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을 했지만 명성도 높고 무공도 강하고 생각도 민첩한 그녀를 상대로 도망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상경에서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분노와 좌절에 휩싸인 범사철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데? 뭘 가르친다는 거야?”
해당타타가 아무 말 없이 씩 웃기만 하고는 다시 누워서 두 눈을 감았다. 눈 내리는 소리를 반주 삼아 잠을 잘 모양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범사철은 말을 듣지 않으면 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걸 알기에 다시 맷돌 손잡이를 잡으며 욕했다.
“생긴 건 시골 촌구석 아낙네 같아서는 형님에게 시집갈 생각을 하는 거야? 나중에 나한테 형수 소리 들을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작은 정원에 놓인 맷돌을 쉰 번 돌린 범사철이 숨을 헐떡이며 맷돌에 기대 쉬었다. 허리는 시큰하고 등은 욱신거리는 게 몸을 곧게 펼 수조차 없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서 오른 열기가 차가운 공기와 만나면서 김이 나는 게 온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땀 닦은 뒤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 동상 걸리지 말고.”
해당타타가 가지런하게 접힌 옷을 건네주며 말했다.
범사철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물었다.
“씻을 곳이 없잖아. 몸에서 땀 냄새가 나면 어떡하지?”
해당타타가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네 형이 만든 물건은 아직 상경에 도착 안 했어.”
범사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괴롭힘당하라고 형님이 나를 북제에 보낸 건 아니라고.”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는 법이지.”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예전에 황궁에서 대화할 때 범한이 했던 말이 있는데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무슨 말을 했는데?”
범사철이 호기심에 물었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힘들게 하며,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리게 하고 하는 일마다 안 되게 하는데, 그 이유가 참을성을 기르게 하고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거야.”
사실 범한이 맹자의 이 구절을 말한 이유는 북해 갈대밭에서 춘약 때문에 고생하는 해당타타를 놀려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범사철과 해당타타는 그가 그런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땀에 젖은 머리에 차가운 바람이 불자 범사철이 덜덜 떨며 말했다.
“저녁밥······ 먹을 수 있는 거지?”
해당타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오늘 저녁은 여기서 먹지 않을 거야.”
그때 작은 정원 밖에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도련님,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범사철이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왕계년이 서 있었다.
낯선 타향에 와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범사철은 아는 사람을 만나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격한 그가 환호를 지르며 울타리 밖으로 달려나가려 하자 해당타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사 끝나면 다시 돌아와야 해.”
해당타타의 목소리가 겨울바람을 타고 범사철의 귓가를 울리자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좌절한 표정을 지었다. 터벅터벅 울타리로 걸어간 그가 몸을 돌려 힘껏 소리쳤다.
“내가 상경에 온 건 막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야!”
이미 의자로 돌아가 누워 있던 해당타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은전 천 냥을 만 냥으로 불리기가 어디 쉬운가? 범한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거야. 그리고 잊지 마. 네 은전이 지금 나한테 있다는 걸.”
울타리 밖에서 왕계년이 범사철에게 해당타타 낭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범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해당타타에게 대들어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 눈짓을 읽은 범사철이 씩씩대며 울타리 문을 밀고 나오자 왕계년이 처마 아래 누워 있는 해당타타를 향해 인사했다.
“낭자,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해당타타가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왕 대인, 최씨 집안일을 이렇게 서둘러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까?”
범 제사의 계획을 해당타타가 알고 있는 줄은 몰랐던 왕계년이 흠칫 놀라며 두 사람이 어디까지 계획을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했다.
“낭자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인지?”
범사철의 계획을 자세히 알고 있는 해당타타가 웃으며 넌지시 당부했다.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 급하게 진행할 것 없지요.”
왕계년은 부하를 시켜 눈을 막을 갓모자와 비옷을 범사철에게 입히게 한 뒤 해당타타에게 인사를 하고 황궁 옆 작은 정원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뒤에서 다시 해당타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온 편지를 왕 대인도 보셨습니까?”
해당타타가 의자에 기댄 채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놀라 몸을 움츠리는 왕계년을 바라봤다. 고개를 돌린 그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임을 물으시는 거라면 사죄드릴 테니 소신을 대신해 제사 대인에게 제 여식을 희롱하지 말라는 편지를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당타타가 호탕하게 웃으며 왕계년 대인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329화
작은 정원이 조용해지자 해당타타는 의자에 누워 눈을 감았다. 오늘처럼 눈보라가 매섭게 일면서 추위가 엄습하는 날에 달콤한 잠을 자는 걸 좋아하는 그녀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하 사람 모두가 놀랄 만한 무공을 쌓은 그녀는 뼛속까지 엄습하는 추위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게 봄날에는 온화해지고 겨울에는 냉혹하게 추워지는 자연환경을 있는 그대로 쉽게 받아들였다.
눈이 어지러이 내리는 날에 처마 아래에서 꽃무늬 솜저고리를 입고 잠을 청하는 게 그녀는 정말이지 편안하고 좋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당타타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처마 밖에 떨어지는 눈송이와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비칠 정도로 맑은 그녀의 두 눈동자에 기쁨과 반가움이 어렸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눈이 두껍게 쌓인 옥천하강 옆 돌길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눈을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자 갑자기 눈발도 약해진 것인지 주위에는 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만 들렸다.
다가오는 사람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눈 위에 서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견고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작은 정원 앞으로 걸어온 남자는 울타리 문을 열고는 들어오더니 기뻐하고 있는 해당타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를 보러 왔다.”
그 사람은 4대 종사 중 한 명이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는 고하 국사였다.
만약 범한이 이 모습을 봤다면 너무나도 평범한 얼굴에 오죽보다도 못생겼고, 파도를 타고 유랑하는 섭류운보다도 풍채가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머리에 쓰고 있는 삿갓 모자 사이로 비치는 눈빛에서는 세속을 벗어난 초탈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의 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다만 순백색의 얇은 옷만 입은 채 맨발로 있는 모습은 그가 고행자의 신분임을 드러냈다. 과거 신묘에서 돌아온 뒤로 그는 더 이상 고행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해당타타는 스승에게 예를 다해 공손히 인사한 뒤에 안으로 안내했다. 이후 차를 준비해 내온 그녀가 어린 소녀처럼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의 옆에 앉았다. 대종사 고하 앞에서는 천하의 해당타타도 고분고분해졌다.
고하의 얼굴은 비교적 말끔했고 입술은 아주 얇았다. 특히 두 눈이 푹 들어가 있었고 눈빛은 깊고 심오했다. 그가 애정 어린 눈으로 자신의 진정한 마지막 제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서산(西山)에 다녀왔다.”
해당타타가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소은 대인의 시신을 찾으셨습니까?”
고하가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고는 웃음기 가득한 눈빛을 지었다.
“절벽 사이에 동굴이 있더구나. 거기서 오랜 친구의 시신을 발견했어.”
해당타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산 절벽에서요?”
고하는 남쪽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이에 북제 사람들은 대종사 고하가 다쳐서 그런 거라 추측했지만 어디서 누구와 싸웠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고검과 싸웠을 거라 예상했고, 누군가가 섭류운이라 짐작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경국 황실에 깊이 숨어 있는 대종사와 싸웠을 거라 추측했다. 오죽과 그가 서로 피 튀기는 결전을 치렀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상처가 회복된 뒤 고하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소은이 북제로 돌아오고 나서의 행적을 자세히 수소문하는 것이었다. 대종사 고하는 황제와 황태후의 알력 다툼에 환멸을 느껴 정사에 대해서는 최소한만 간섭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은의 생사는 세상과 담쌓고 지내는 대종사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서산의 절벽을 여러 번 수색했음에도 산 위나 아래에서 소은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북제 조정으로서는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만약 소은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저택에 연금되어 있는 상삼호가 다시 날뛸 수 있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랑도 사형이 곡도로 소은을 찔렀다고 단언했으니 이미 죽었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고하 대종사 역시 수제자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다. 북제 사람들의 고민은 단 하나였다. 바로 소은의 시신이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상당한 인력을 동원해 서산을 여러 번 뒤졌지만 소은과 그 베일에 싸인 인물이 떨어진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북제 사람들은 거울처럼 매끈한 서산 절벽에 도마뱀처럼 붙어서 기어오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소은을 찾으려 애를 쓰던 북제 사람들은 고하 국사의 말에 잔뜩 골이 난 채 수색을 중단했다. 그러자 대종사 신분인 고하가 직접 수색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시간을 들인 끝에 그는 마침내 눈보라 속에서 절벽 동굴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소은의 시체를 찾아냈다.
놀란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고 있던 해당타타는 그제야 스승의 발에 작은 상처들이 있는 걸 발견했다.
“절벽에는 어떻게 내려가신 거죠?”
그녀에게 소은의 문제는 그리 급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의 몸 상태가 더 중요했다. 더구나 고하는 나이도 많은 데다가 상처를 회복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고하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내려가는 건 쉽지 않았단다. 뿌리를 엮어 끈을 만들어서 내려가야 했어. 그런데 랑도를 피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는 그 사람은······ 쉽게 그곳을 나간 것 같더구나.”
해당타타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생각하다 말했다.
“아마 갈고리 같은 걸 가지고 있었겠지요.”
“갈고리를 걸 수 있는 곳이 없지 않니.”
고하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제자를 바라봤다.
“너도 아까 서산 절벽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라서 놀랐던 게 아니냐.”
해당타타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일이 있고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소은 대인의 유해가 산새들에게 먹히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고하가 눈처럼 하얀 눈썹을 약간 떨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벽 동굴이 깊지 않았으니 산새들이 소 선생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긴 했지. 내가 줄을 잡고 내려가 보니 소은의 시체 옆에 새들 몇 마리가 죽어 있더구나. 이상해서 보니 새들은 이미 백골이 되어 있었는데 소은의 시체는 약간 메말랐을 뿐 부패하진 않았었어.”
해당타타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무언가 이해한 듯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한 독이군요.”
고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바꿨다.
“그 범한이란 젊은이가 소은에게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다.”
해당타타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이 상경에 있을 때 했던 일들은 모두 말했다.
“소은이 탈출한 날 범한은 사신단에 줄곧 머물러 있었다고 했지만 직접 그를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가 다음 날 찾아갔을 때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요. 하지만 사형이 처음부터 소은과 함께 벼랑에서 떨어진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범한일 거라고 말했고 그가 독에 능통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묘에 가본 사람은 소은과 고하밖에 없었다. 지금 소은이 죽었으니 이제 고하만 남은 셈이었다. 고하는 황제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소은은 북제로 데려오려 하는 순간 그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니 신묘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 하는 고하가 소은의 임종을 본 마지막 사람이 범한이라는 걸 안다면······. 해당타타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한 말이 범한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될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못했다. 하지만 온화해 보이는 스승은 총명함을 타고난 사람이기에 거짓말할 자신이 없었다.
해당타타의 걱정과는 다르게 고하는 이 문제에 대해 오래 대화하지 않았다. 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제자를 바라보며 웃더니 오룡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 우리는 솜씨가 갈수록 좋아지는구나.”
“감사합니다, 스승님.”
해당타타가 고개를 숙이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범한이 누구인지 알 거 같구나.”
고하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에 해당타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스승을 바라봤다.
천천히 일어난 고하의 얼굴에서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젊은이가 북제에 오기 전에 어딘가로 떠난 나는 상처를 입고 돌아왔단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하지 않니?”
국사 고하는 북제의 정신과 기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에 그가 상처를 입는 일은 줄곧 비밀에 부쳐졌다. 그래서 해당타타도 알고는 있었지만 스승에게 직접 그 일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호기심 어린 맑은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맹인이었어.”
고하가 몸을 돌려 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오래전에 한 번 만난 뒤로 단 한 번도 그 맹인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해당타타가 화들짝 놀랐다.
‘스승님에게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인데 그 사람이 대종사도 아닌······ 맹인이라고?’
고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이상한 점은 실로 두려울 만한 실력을 갖춘 맹인이······ 이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렸더구나.”
해당타타가 숨을 죽이고 스승의 말에 귀 기울였다.
“오랫동안 사라졌던 맹인이······.”
고하의 얼굴에서 은은한 미소가 피었다.
“갑자기 세상에 다시 나타나서는 맨 처음 찾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사리사욕과 같은 잡다한 마음을 모두 버렸지만 거만함은 버리지 못한 나를 말이다.”
해당타타는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맹인은 과거 백치인 사고검을 가르쳤고 검을 버렸던 섭류운을 1대 종사로 만든 사람이지.”
고하가 긴 탄식을 내뱉으며 이어 말했다.
“그런 그가 나를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단다. 더구나 그는 이전의 신비했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어.”
해당타타가 불쑥 물었다.
“그럼 그 맹인이 베일에 싸여 있는 신비한 대종사인가요?”
고하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두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 맹인에게는 그런 허울뿐인 이름 같은 건 필요하지 않지. 대종사라 불리는 우리 네 명 중에서 가장 신비하다고 일컬어지는 그 사람은······ 경국 황궁에 있단다.”
해당타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비한 대종사를 본 사람이 없는데 어째서 그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며 또 그가 경국 황궁에 있다고 단정 짓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단다.”
제자의 생각을 읽은 듯 고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에 사고검이 세 차례나 경국 황궁에 잠입해 황제를 죽이려 했어.”
놀란 해당타타는 낮게 비명을 질렀다. 동이성 사고검은 정말이지 엄청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종사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나서지 않는다면 천하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경국 황제를 누가 저지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제자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 고하가 가벼운 목소리로 이어 설명했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너와 같은 생각을 했겠지. 사고검이 치밀한 계산을 했을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달 동안 네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단다.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어.”
해당타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맹인이······ 당시 경국 황궁에 없었나요?”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스승에게 상처를 입힌 맹인이 신비한 대종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고하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시 맹인은 섭가 여사장과 함께 경국 강남에서 황실 금고를 짓고 있었단다.”
“섭가 여사장이요?”
해당타타가 너무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해당타타는 스승님이 말하는 당시의 비밀에는 세상을 바꾼 인물들과 사건들이 많이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하가 몸을 돌려 온화한 얼굴로 해당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했니?”
해당타타가 맑게 빛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범한이 누군지 아신다고 하셨죠?”
고하가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의 여제자를 바라봤다.
“범한은 섭경미의 아들이다. 섭가 여사장의 아들이지.”
화들짝 놀란 해당타타는 여전히 스승의 말을 전부 이해한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큰 눈을 굴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범한은······ 경국 호부 상서의 서자인데 어떻게 섭가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 섭가? 당시 장사로 천하를 호령했던 섭가를 말하는 거지? 감찰원을 설립하고 황실 금고를 지어 지금까지도 그 위력이 남아 있는 섭가 말이야.’
330화
고하가 양손을 비비며 앉더니 탄식했다.
“소은은 이후 줄곧 진평평에게 잡혀 있었으니 섭가 여사장의 신분을 알지 못했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맹인은 섭가 여사장의 종이었어. 그가 나를 상경에서 떠나게 한 것도 아마 범한이 일을 편하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을 거야. 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범한은 섭가 여사장의 친아들이란다.”
해당타타가 고개를 저으며 용감히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스승님이 하신 추리가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 맹인이······ 갑자기 등장해 스승님과 대결한 것과 범한이 북쪽에서 한 일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섭가는 완전히 망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고하가 웃으며 해당타타의 말을 끊고 설명했다.
“이번 일이 여러 의문을 다 설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범한이 지금 경국의 관리가 된 점과 그가 담주에서 나온 뒤 경국 조정에 이상한 변화가 생긴 점을 종합해 보면 일의 진상을 이해할 수 있단다. 섭가가 완전히 망하긴 했지만 당시 섭가에서 일하던 대행수들은 여전히 살아 있어. 경국 조정에 어느 뜻있는 사람이 섭가 여사장을 위해 그녀의 핏줄을 보호했다고 충분히 짐작해 볼 수도 있지.”
마음이 혼란스러워진 해당타타가 자신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스승님의 말이 맞았다. 범한은 범 상서의 서자이고 시선으로 명성을 떨칠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을 고려해 보면 지금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감찰원과 황실 금고는 절대 한 사람의 손에 쥐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감찰원과 황실 금고 모두 과거 섭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산이었다.
‘나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 범한이 이처럼 복잡하고 가련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범한이 주점에서 불렀던 노래를 네가 말해 주지 않았니······.”
고하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여제자를 바라봤다.
“네가 범한이 《석두기》 작가라는 걸 알아낸 그 노래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범한이 분노, 불만과 같은 감정을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올여름, 상경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주점인 백세송거에서 해당타타와 술을 마시던 범한은 취기가 달아올랐을 때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조상님의 은덕이네. 우연히 은인을 만난 건 조상님의 은덕이네. 이는 모두 어머님 덕분이네. 은공을 쌓으신 어머님 덕분이네. 그분이 살아생전 곤경과 빈곤에서 사람을 구하신 덕분이네. 모진 삼촌과 간사한 형처럼 돈만 좇으며 골육의 정을 잊지 않아서일세! 착한 일, 나쁜 일 모두 응당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으니 시시비비를 모두 하늘께서 가려 주신 것이네.
겨울 작은 정원 안에서 생각하던 해당타타는 스승의 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들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때 범한은 노래 하나로 자신의 모든 게 단정 지어지는 것도 모른 채 경국 창산에서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만약 알았다면 온천에서 뛰쳐나와 발가벗은 상태로 상경까지 달려가 고하에게 욕을 퍼부어 준 뒤 조 선생의 글과 자신의 배경이 비슷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평정심을 되찾은 해당타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복잡한 일이군요.”
범한의 배경을 알게 된 해당타타는 자연스럽게 그와 경국 황실 사이에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점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세밀한 고민 후에 정할 문제였다.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란 걸······ 천하에 알릴 생각이다.”
고하 대종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맹인은요?”
예상치 못한 말에 해당타타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범한의 이익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생각했다.
고하가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 맹인이······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내 앞에 일부러 나타나 이런 실마리를 남긴 걸 보면 아마도······ 내 입을 빌려서 이 재미난 소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길 바라는 것 같다.”
잠시 생각하던 대종사 고하가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 맹인은 더는 기다릴 생각이 없는 게야. 그래서 범한에게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거지.”
작은 정원에 눈이 내린 뒤 조용한 집 안 공기에 차향이 은은하게 났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해당타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자, 이해했습니다.”
고하가 그녀의 얼굴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범한이 편지에서 천일도 심법을 물어봤다면 알려 주거라.”
‘천일도 심법을 알려 주라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 고하를 바라보는 해당타타의 표정은 스승이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미친 건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천일도 심법을 외부인에게 알려 주시겠다는 건가? 전수되지 않던 비결을 경도에서 어마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관리에게 알려 주겠다고?’
고하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건 그 애의 어머니가 나에게 준 것이야. 그러니 마땅히 그 애에게 돌려주어야지. 게다가 범한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경국 황실은 골치를 썩일 테니 북제로서는 좋은 일 아니냐.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고 국가 이익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있겠니?”
당황한 해당타타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승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챈 그녀의 마음이 서늘해졌다.
두 사람은 범한과 섭가의 관계만 알 뿐 범한이 가진 또 다른 배경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단순하게 범한의 신분을 폭로하면 경국 내부에 파란이 불면서 섭가를 무너뜨린 경국 황실에 큰 책임이 따를 거라고만 생각했다. 두 사람은 범한이란 호랑이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경국이 시끄러워질 것이 북제는 안정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스승님, 범한이 이에 따른 파장을 감당해 내지 못하면 어떡합니까?”
섭가의 재산은 전부 경국 황실에서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섭가 여사장의 핏줄이라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경국 황실은 최대한 단시간 내에 그를 죽이려 할 게 뻔했다.
하지만 고하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섭가를 무너뜨린 왕공들은 십몇 년전에 발생했던 경도 피의 달 때 모두 죽은 거로 알려졌지만 어쩌면 섭가의 원수가 여전히 경국 황궁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맹인은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는 걸지도 몰라.”
북제 국사인 고하는 북제의 이익을 가장 먼저 고려했다. 출생의 비밀이 드러났을 때 경국 황실이 보일 태도나 범한이 입게 될 타격은 그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범한이 이 일에 따른 파장을 감당해 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맹인이 범한 뒤를 지킬 게 분명하다. 그러니 범한이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그를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야.”
다만 천일도 심법을 강력한 적에게 알려 주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었다. 하물며 스승의 말에는 아주 무서운 사실이 담겨 있었다. 바로 천일도 심법이 범한의 어머니가 알려 준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섭가 여사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해당타타의 물음에 고하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맨 처음에 봤을 때 나는 그녀가 속세의 때가 묻지 않는 꼬마 선녀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사실은······.”
“하늘의 자손이라고요?”
“하늘의 자손은 아니었다.”
고하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섭가 여사장은 일반 천재들을 훨씬 능가하는 아주 신비한 여자였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떠나려 하는 고하 국사를 해당타타가 밖으로 안내했다. 고개를 숙이고 안내하던 그녀가 눈 위를 걷는 스승의 맨발을 바라보며 물었다.
“스승님, 소은 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 위에 드리워진 고하의 그림자가 멈추더니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 대가와 함께 있지. 두 사람은 비록 살아생전에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죽어서는 함께이니 다행이지 않냐.”
해당타타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오늘에서야 그녀는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건 이전 세대의 일이다. 너희 젊은이들에게는 너희들의 세상이 있지 않으냐. 그리고 심법은······ 직접 범한에게 전해 주려무나.”
이 말을 마친 고하는 머리에 삿갓을 쓰고 성큼성큼 눈 속으로 걸어갔다.
* * *
하얀 눈이 끝없이 펼쳐진 경국 창산 산자락에는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수십 마리의 아름다운 두루미들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춤을 추며 날아다녔다. 얼마 뒤 땅에 내려온 두루미가 소심하게 긴 다리를 뻗어 눈 덮인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온천으로 향해 걸어갔다.
온천의 수온은 이따금 뜨거워지는 걸 빼면 적당했다.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김 나는 온천에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의 몸은 대부분 온천에 담겨 있었고 약간 빨갛게 달아오른 양팔은 굵지는 않지만 힘이 있어 보였다.
마른 손가락이 천천히 그의 오른 손목을 잡았다. 두 눈을 감은 비개의 미간이 움찔거렸고 항상 제멋대로 펼쳐져 있던 머리는 온천물에 젖어 단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식을 듣고 경도에 돌아온 뒤 비개는 범한이 가족들을 데리고 창산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고 급히 이리 온 것이었다. 스승과 제자가 눈 덮인 소나무에 둘러싸인 온천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은 호화스러워 보였다.
감고 있던 눈을 뜬 비개가 맥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말했다. 흐린 갈색 눈동자는 더욱 깊어진 모습이었다.
“평상시에는 옷을 입고 있어 몰랐는데 몸은 오히려 더 좋아졌구나.”
범한이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웃었다.
“3처 사형 사제들도 제 몸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더군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다 물었다.
“스승님, 방법이 없는 겁니까?”
비개는 목 뒤에 놓아 두었던 흰 수건을 집어 뜨거운 온천물에 적신 뒤 얼굴을 벅벅 닦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이 스승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크게 폭발한 뒤 사라진 정기를 다시 되돌릴 좋은 방법이 없는 게 분명했다.
“준 약을 먹지 않아서 그렇지.”
비개가 근심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기 싫어할 필요가 있었니? 만약 먹었다면 정기가 크게 손상되기는 했겠지만 폭발하지는 않았을 거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정기가 크게 손상되는 것과 완전히 없어지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아주 큰 차이가 있지. 최소한 네가 스스로를 지킬 힘은 가질 수 있지.”
범한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목숨을 지키는 방법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도 제가 무예에만 기대 살아온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전에 잔기술에 의지해 해당타타와도 싸워 봤습니다. 그러니 정기가 모두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을 지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개가 아무 말 없이 제자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참 이상한 녀석이야. 무공을 수련하는 자에게 정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않니? 호위가 옆에서 지켜 주고 6처에서 주시하고는 있지만 무릇 무공을 수련하는 자라면 정기를 잃었다는 사실에 절망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당당하구나.”
“절망이나 실망 같은 건 쓸모없는 감정입니다.”
범한의 머릿속에 오죽 아저씨가 어린 시절 가르쳐 줬던 교훈이 떠올랐다.
―만약 치료할 수 없다면 현실을 받아들여야지요. 절망하며 한숨 쉬는 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창산에서 온천을 즐기고 있는 범한은 멀리 북방에서 고하와 해당타타가 말도 안 되는 억측으로 자신의 신분을 단정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 두 사람이 이 사실을 폭로해 경국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과 경국 황실이 대립하게 만들려 한다는 건 더더욱 알지 못했다.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가는 법이지만 해당타타가 이 일을 즉시 실행하더라도 양국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최소한 현재는 경국에 전달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모르는 범한에게 섭가의 후손이란 신분은 가장 골치 아픈 위협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체내의 정기를 회복해 만신창이가 된 경맥을 치유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일단은 몸을 잘 추슬러야 한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비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약을 처방해 줄 테니 지어 먹도록 하고 어렸을 때 준 약은 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으렴. 쓸모가 있을 테니까.”
범한이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생각했다.
‘정기가 이미 사라졌는데 산공약이 무슨 쓸모가 있는 거지?’
사실 비개도 이 약이 무슨 쓸모가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이 훗날 범한이 저지르는 어떤 일의 계기가 될 거라는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331화
“창산에 보름 정도 있었더니 경도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따뜻한 온천 수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경도에 있다 오셨으니 말씀해 주시지요.”
비개가 투덜대며 말했다.
“매일 수십 통의 보고를 받으면서 나에게 물을 게 뭐가 있다고 그러냐?”
범한이 씨익 웃자 비개가 쌀쌀맞게 말했다.
“상처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창산에 틀어박혀서는 감찰원을 통해 최씨 집안을 건들고 있으니······. 경도는 이미 난장판이 따로 없고, 북쪽에서는 수백 명을 잡아들이더니 수백만 냥에 달하는 물건을 한입에 먹으려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네가 최씨 집안에 죄를 씌웠으니 몰락하는 건 시간문제겠지. 대가문을 이렇게 쓰러뜨리다니 너무 무지막지한 방법인 것 같다.”
범한이 웃으며 해명했다.
“모두 조정에 필요한 일입니다.”
신양을 향한 감찰원의 선전 포고는 갑작스럽고 돌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방법도 상당히 거칠었다. 천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밀정을 이용해 이미 최씨 집안이 사용하던 북쪽 밀수 통로를 막은 뒤 신양이 대응하기도 전에 언빙운을 수장으로 한 4처 돈줄을 대부분 통제해 버렸다.
중상을 입은 범한이 창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던 경도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인정사정없는 방법을 사용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이 계획은 여름부터 준비해 온 것으로 폐하의 암묵적인 허락이 내려진 뒤 조용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신양 쪽은 각 군과 로에 세력을 포진하고 있었음에도 상당한 손실을 보게 되었다.
이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범한이 자신의 의중을 깊이 숨겨 장 공주 이운예가 사위를 얕잡아 보게 만든 때문이었다.
“이번 일로 장 공주가 너를 엄청 미워할 게다.”
비개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쉬었다.
“최씨 집안을 무너뜨린 건 장 공주의 팔 하나를 자른 것과 다르지 않아. 이런 짓을 하고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스승의 뜻을 이해한 범한이 말을 잘랐다.
“처음에는 저도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2 황자 저하와 싸우고 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폐하께서 암묵적으로 허락을 하셨고 또 감찰원이 이처럼 힘을 가지고 있는데······ 누가 저와 맞설 수 있겠습니까?”
비개는 범한이 자만심에 도취되어 본분을 잊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묵묵히 하는 말을 들었다.
“저는 아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한이 탄식하며 이어 말했다.
“황궁 황자들도, 조정의 대신들도 제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이전에 원장 대인이 제게 시선을 높은 곳에 두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그 말은 더 넓은 미래를 내다보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자신감을 기르고······ 감찰원 제사로서의 거만함을 가지라는 의미였습니다.”
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지금 조정에서 저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조정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기관입니다. 군대를 제외하고 어느 관아가 감찰원과 나란히 논의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군대는 폐하께서 실권을 쥐고 계시니 문제 될 게 없지요. 이번에 섭씨 집안이 경도에서 쫓겨난 게 바로 그 증거입니다. 군대 안에 장 공주의 세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폐하께서 봄에 연소을을 경도 밖으로 보낸 상태인데 신양 쪽에게 저와 싸울 힘이 있겠습니까?”
범한이 담주에서 경도로 오고 2년 동안 세상에 변화가 생겼다. 진평평과 범건······ 과거 섭경미의 전우였던 두 사람의 노력과 경국 황제의 묵인하에 범한은 단시간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하지만 범한은 줄곧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게 됐는지 모르고 있었다. 경도에서 2 황자에게 쉽게 승리한 뒤에야 그는 그간 제가 가진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제의 총애가 줄어들지 않는다면, 황궁 안 노부인이 그가 황실 가족이란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진평평이 지금처럼 진원에서 노후을 보내며 감찰원의 모든 권력을 그에게 넘겨준다면······ 범한은 쉽게 경국 조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질 수 있을 것이었다.
제자의 말을 곱씹어 보던 비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북쪽에 있는 연소을은 이번 일에 나서지 않은 건가?”
“정북 진영이 창주 밖에서 많은 용맹한 장수와 십만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최씨 집안사람 몇 명이 진영으로 달아났는데 창주를 지키고 있던 4처가 완전히 죽이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비개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스승의 칭찬에 범한이 겸손하게 말했다.
“저는 그저 결정만 했을 뿐입니다. 일이 군더더기 없이 진행된 건 모두 언빙운의 노력 덕분입니다.”
비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반년 만에 언약해의 아들을 네 편으로 만들어 계획에 맞게 움직이도록 만들지 않았니. 정말 대단하구나.”
순간 범한은 창산 별장에서 완아와 함께 마작을 두고 있을 심 낭자가 생각났다.
‘최씨 집안 일이 마무리되면 언 공자에게 창산에서 같이 겨울을 보내자고 말해야겠지?’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은 온천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별장에 떠올리고는 비개에게 간청했다.
“스승님, 어제 제가 말씀드린 걸 잘 고려해 보십시오.”
비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마른기침을 했다.
“그 아름다운 낭자에게 내 의술을 가르쳐 주는 건······ 너무 가여운 일이 아니냐? 내가 허락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서 대인께서 허락을 안 하실 거야.”
“아버지는 제가 설득할 겁니다.”
범한이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누이는 의술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러니 스승님, 귀찮겠지만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비개가 버럭 화를 냈다.
“나는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스승님이 화를 낸다는 건 수락할 마음이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한참이 시간이 지난 뒤에 비개가 수심이 드리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장과 내 나이가 많으니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니?”
범한이 한동안 말없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제 생각에 원장 대인께서는 자신의 인생을 예측해 스승님께 알려 줬을 것 같은데요.”
비개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폐하께서······ 네게 충분히 잘해 주고 계시지 않니.”
범한은 이 점을 인정할 수 없었다. 황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자인 그의 양손에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쥐여 주었다. 이건 황자들도 가지기 힘든 권력이었으므로 일반 사람이라면 부담스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기에 원하는 게 단순한 만큼 문제를 보는 시각도 단순했다. 그는 거대한 두 기구는 원래 자신의 어머니의 것이지 경국 황실의 것이 아니므로 자신에게 돌려주는 건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돌려주지 않는 게 파렴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개는 이런 범한의 생각을 알지 못했기에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 담주에서 네가 의사나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실 기쁘면서 한편으로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아가씨께서 일군 가업을 네가 이어받길 바랐거든. 하지만 네가 이렇게 가업을 모두 물려받는 걸 보니 두려워지면서 네가 나중에 지금을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범한은 스승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세력이 너무 강해져서 황태자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비개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몇 년 안에 폐하께서 저의 충심을 믿게 되실 겁니다.”
범한이 명치에 난 흉터가 가려워 손으로 쓰다듬었다. 온천에 몸을 담갔더니 흉터가 빨갛게 부어 약간은 흉해 보였다.
“그녀는 황태후의 유일한 딸이라는 걸 잊지 말거라.”
비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경고했다.
“전면전에서는 네 적수가 되지 못할지라도 과거 외양간 거리 사건처럼 언제든지 생각지도 못한 미친 수단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야.”
범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별장에는 완아가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경도에서는······ 미친 수단을 부리고 싶어도 폐하가 두려워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장모님이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제가 상처 입었을 때 폐하의 시선을 피해 저를 죽이려 했겠지요.”
비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잘 알고 있으니 됐다.”
범한이 씨익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지금의 저는 죽이기 쉬운 사람이 아닙니다.”
* * *
서동이 작은 칼로 얇은 선지를 찢는 것처럼 찍, 하는 소리가 났다. 창산 온천 뒤 소나무 숲에 있는 순백색 설원에 빨간 액체가 후드득 떨어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을 물들였다.
검수 한 명이 자신의 목을 움켜잡고 컥컥거리다 설원 위에 쓰려졌다.
감찰원 6처 검수가 검을 검집에 넣은 뒤 고달을 향해 인사하고는 설원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곱 명이군.”
등에 장검을 멘 고달이 어두운 얼굴로 부하에게 말했다.
“시신은 뒷산으로 가져가 태우게.”
“네, 알겠습니다.”
고달은 검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최근 며칠 동안 범 제사를 암살하려 창산에 들어오는 검수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이 검수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미쳐 날뛰기 시작한 신양이 최씨 집안 몰락에 따른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복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측은 범 제사의 호위 수준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호위 일곱 명이 폐하의 지시에 따라 범한을 가까이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무시무시한 것은 호위가 아니라 감찰원 6처 검수들이었다. 이들은 원래 경국 정부에서 양성한 검수이었다. 그들은 3일 동안 창산을 물샐틈없이 지키며 신양에서 보낸 검수들을 일곱 명이나 죽이고도 본인들은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얀 눈에 찍힌 빨간 피를 바라보며 고달이 한숨을 쉬었다. 황궁에서 황제를 근거리에서 경호한 그는 오늘에야 비로소 호위와 6처의 차이점을 실감했다. 호위들은 정면에서 오는 공격을 막는 데는 강하지만 암살이나 경호에서는 감찰원 6처를 따라갈 수 없었다.
호위 수장인 고달은 6처 검수가 정면으로 자신과 맞서려 한다면 한 번에 이길 자신이 있었다. 다만 검수는······ 정면 승부를 하는 법이 없었다.
만일 6처 검수 수장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면 자신은 살아날 수 없을 것이었다.
범한은 상처를 입은 뒤 경호 등급을 몇 단계 상향시켰다. 더욱이 범 제사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진평평이 불같이 화를 냈고,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감찰원 6처에서 검수 열두 명 보내 범한을 경호하고 있었다. 이 정도 경호 수준은 과거 황제가 궁을 나설 때와 같은 정도였다. 지금은 폐하가 호위를 자주 이용하고 있어 진원에 갈 때만 이처럼 엄격한 경호 수준을 유지했다.
범한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계년조 인원 절반 정도를 철수시키고 1처 사람도 창산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뒤 연락을 책임질 등자월과 소문무 두 사람만 남겨 두었다. 범한은 진평평이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떠올리며 남몰래 미소 지었다. 절름발이 노인은 분명 범한을 찌른 사람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제대로 경호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고달이 속으로 감찰원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다른 사람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양의 명령으로 창산에 오게 된 검수 수장은 하얀 옷을 입고 눈 속에 숨어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장 공주에게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무사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흘 동안 신양 검수들은 범한을 암살하기는커녕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 소리 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검수 수장으로서 처음으로 잠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폐하가 보낸 호위가 범한을 경호하고 있어도 암살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자신하고 있었고, 신양 측에서도 범한의 상처가 심상치 않으니 금방 회복하지 못할 거라 예측했다. 하지만 문제는 감찰원 6처에서 보낸 검수들이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이상한 기운을 직감하고 잠복해 있는 위험 요소들을 모두 찾아냈다. 만일 6처 검수들의 경호를 뚫고 범한을 죽이려 한다면 신양에서 군대를 보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검수 수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그리고 그동안의 실패 과정을 자세히 적은 편지를 신양에 보냈다. 자신의 무술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는 그는 감찰원 6처 검수들의 배치 구역을 자세히 알기만 한다면 범한을 암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그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눈송이가 목에 들어오면서 약간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순간 몸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눈으로 덮인 검은색 쇠막대기가 정확하게 그의 목을 꿰뚫었다.
332화
이 세상에는 만인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귀신들도 얻으려면 고생해서 쟁취해야만 하는 더없이 기괴한 물건이 있다.
범씨 가문 마차에는 항상 한쪽은 네모지고 한쪽은 둥근 범씨 가문의 표식을 볼 수 있었다. 국고를 관리하는 호부 상서 범 대인에 이어 작은 범 대인 역시 강남 황실 금고를 물려받아 함께 경국의 모든 돈줄을 관리할 거라 그런지 범씨 가문의 표식에서도 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하면서도 몹시도 증오하는 돈은 우리를 천당에 보낼 수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사람을 벼랑 끝에서 바보처럼 웃게 만들거나 불바다 속에서 춤추게 하는 게 바로 돈이었다.
백성들이 돈을 좋아하듯이 조정도 돈을 좋아했기에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거둬들였다. 경국 조정은 개국 초기부터 토지에서 나는 생산물과 부역을 제외한 소금, 철, 차에 세금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조정의 가장 큰 수입원은 갑자기 나타나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다가 몰락한 섭가가 남긴 황실 금고였다. 그래서 조정은 황실 금고에서 생산하는 유리 제품, 독한 술, 장난감, 선박 등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고 감찰원을 통해 엄격하게 관리시켰다.
이런 점에 있어서 감찰원이 밝혀낸 최씨 집안 밀수 사건은 무척이나 놀라웠다. 그제야 경국 사람들은 황실 금고 관리에 문제가 있어 조정이 세금에서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도찰원은 침묵을 유지했고 신양에게 매수된 관리들도 침묵했다. 하지만 다른 편에 서 있거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관리들은 연이어 조정에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며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장 공주의 이름을 직접 거론한 상소는 없었지만 이들의 창끝은 분명 신양을 향하고 있었다.
한편 북제 젊은 황제는 이 일로 상당한 이득을 보게 되었다. 감찰원 범 제사가 요양을 핑계로 창산에 들어간 것은 사람들에게 넌지시 정보를 던진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범 제사가 내년에 황실 금고 인수를 수월하게 하려고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태학에 있는 학생 중 성격이 급한 몇몇 이들은 황실 금고 관할권을 범 제사에게 당장 넘겨줘야 한다는 상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범한은 장 공주보다 명성이 좋은 데다가 공을 세운 이력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 며칠 경도 찻집에서 흥미진진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신양에 있는 그분이 분노에 이성을 잃고는 작은 범 대인을 암살하려 검수을 보냈다는 소문이었다.
감찰원 8처 역시 업무 능력이 탁월했다.
* * *
다만 모든 사람이 범한과 장 공주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일부 고결한 문인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답답함에 한숨을 지었다. 사천립과 같은 사람들이 왜 돈에 이처럼 열중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포월루 큰 사장이 되어 경도 유흥업소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그는 가난한 서생에서 부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장 공주가 황실 금고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사위를 죽이려 할 만큼 황실 금고가 가치 있는 것일까? 최씨 집안과 명씨 집안을 이용해 북방과 동이를 넘어 해외에까지 물건을 밀수하면서까지 황실 금고의 돈을 착복한 이유는 뭘까? 그렇게 십여 년 동안 빼돌린 돈은 도대체 어디에 사용했을까?
“군대를 양성했겠지.”
범한이 옆에 있는 제자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군대는 모두 폐하와 조정이 관할하고 있네. 대도독인 연소을도 움직이려면 폐하의 조서가 있어야 하지. 모두가 알다시피 군대에서 폐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위엄을 가지고 계시네. 이런 위엄에 대항하려 한다면 효과가 있을 만한 물건은 하나밖에 없지.”
말을 잠시 멈춘 범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말했다.
“바로 돈이네. 연소을이 자신의 병력을 손에 쥐려면 군관들에게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돈을 쥐여 줘야 하네.”
사천립이 글을 쓰던 오른손을 멈추고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가 범한을 찾아 창산에 들어온 이유는 태학의 부탁을 받아 경국을 대표하는 문신인 범한의 뜻을 알기 위해서였다. 《반한재 시집》을 발행해 경국 시단에서 견고한 지위를 확립한 범한은 북제에서 장묵한의 서적을 마차 한가득 가져오면서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범한이 거중랑이자 학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태학은 그를 널리 알리는 서적을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이 책을 담박서국에서 간행해 북제와 동이성에 인재들이 본다면 경국에 춘시를 보러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처 입은 범한은 창산에 들어가 한동안 태학에 오지 않았고 서무 대학사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경로를 통해서 경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범 대인의 제자인 사천립을 찾아와 부탁한 것이었다.
사천립은 태학에서 직접 찾아와 부탁한 데다가 포월루에서 기생을 관리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란 생각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다행히 그는 설원에 있는 시체들을 보거나 검수들을 만나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손발이 닳도록 간청해 스승을 서재에 앉히기는 했다. 그런데 스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인생 철학이나 문인으로서의 뜻은 이야기하지는 않고 감찰원이 2 황자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나 장 공주가 황실 금고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 이유와 같은 조정의 비밀들만 털어놓고 있었다.
이런 내용은 종이 위에 기록할 수도 없었고 설사 자신이 그대로 쓴다고 한들 태학에서 인쇄해 간행할 수도 없었다.
그가 스승의 눈치를 살피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스승님, 이런 일들은······ 세상에 알릴 수 없지 않습니까.”
자신의 전기를 쓴다는 게 범한으로서는 너무 황당무계했다.
‘나는 아직 젊은데 태학 서생들이 내 전기를 쓴다는 게 말이 돼? 그런 건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거잖아?’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천립을 보며 웃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하게!”
상스러운 욕을 한차례 퍼부은 그가 한숨을 쉬었다.
“태학은 그렇게나 할 일이 없는 건가? 장 대가가 남긴 서적은 언제 정리한다고 그러는 거지? 담박서국에서 인쇄를 기다리고 있고 폐하께서도 재촉하시는 상황이지 않은가. 폐하께서 3년 안에 정리하라고 하신 걸 자네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도 밥만 축내는 것들이 쓸데없는 짓이나 벌이면서 정작 중요한 건 안 하는군.”
사천립이 우물쭈물하다가 태학을 대신해 해명했다.
“장 대가의 서적은 이미 인쇄가 시작되었습니다.”
범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 전기를 쓴다는 게 너무나도 황당해서 그러네. 내가 시 몇 편 쓰고 노래 몇 번 부르고 장 대가와 두 차례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내가 정말 잘하는 건······ 사실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 아닌가.”
범한의 말에는 진실하다 못해 루소의 자기비판처럼 참회하는 듯한 느낌까지 풍겼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건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거지 글로 세상을 노래하는 게 아니네. 이런 사실을 자네는 쓸 수 있겠나?”
범한이 사천립의 두 눈을 직시하며 계속 말했다.
“나에 대한 전기는 내가 죽은 뒤나 아니면 이 시대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에 써도 늦지 않을 걸세.”
사천립이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뱉었다. 스승이 자신의 전기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더는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방금 범한이 말한 조정의 비밀에 대해서는 흥미가 있었다.
“제가 보기에 북방에 있는 연소을 대장은 돈을 이용해 충성심을 사려 할 겁니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별 이득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반년 동안 범한의 밑에 있으면서 사천립은 담주에서 온 사사처럼 담이 커져서 말도 직설적으로 하게 되었다.
“폐하께서 수를 쓸 수 없게 군대를 꽉 잡고 계시긴 하지만 장 공주에게는 연소을과 같은 심복이 있으니 은전으로 충심을 사려 하겠지.”
범한이 눈썹을 움찔거리며 제자의 말을 생각했다.
“군대를 양성하는 건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황실 금고에서 10년 동안 빼돌린 돈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충분하고도 남을 거네.”
범한이 정말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처럼 담담히 설명했다.
“2 황자가 경도 관리들을 매수하는 데도 황실 금고 돈이 들어갔고 여론을 장악하는 데도 황실 금고 돈이 들어갔네. 심지어 신양 지방 관리나 제후들과 친분을 쌓은 데도 황실 금고 돈이 사용되었지. 경국 관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면 배부르다고 할 때까지 입 안 가득 넣어 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 그러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사천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도 반역에 해당하는 것 아닙니까.”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나. 지금 황위를 노리고 있는 2 황자가 만약 정말 성공해서 황권을 손에 쥔다면 자신과 장 공주가 사용한 돈을 다시 돌려받으려 할 거네. 아주 단순한 이치지.”
범한은 순간 《녹정기》에서 위소보가 오삼계를 농락하던 장면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황제가 되면 돈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지. 천하가 자신의 것일 텐데 그깟 돈이 아깝겠는가.”
사천립이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스승님께서 이미 최씨 집안을 무너뜨리셨고 곧 있으면 황실 금고도 받을 테니 상대측 돈줄이 끊이는 것 아닙니까? 그럼 2 황자 저하의 계획에도 상당한 차질이 생길 텐데요. 그래서 신양에서 지난번에 경도에서 파문이 일어났을 때보다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군요.”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반응을 보인다고? 장모님은 이미 5, 6년 전에 반응을 보이셨네.”
그는 5, 6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담주에 있었을 때 지금은 시커멓게 타버린 집에서 첫 살인을 했었다. 경도에 온 뒤 감찰원을 이용해 그 사건을 조사해 본 그는 유씨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것이 황궁에 있는 두 여자의 계획이었다는 걸 알아냈다.
그해는 폐하가 처음으로 범씨 집안과 임씨 집안의 혼인을 언급해 황실 금고 관할권 이전 문제가 불거진 때였다. 진평평의 강력한 반대로 혼사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위기감을 느낀 장 공주는 엄청난 부를 놓지 않기 위해 범한을 죽일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4년 뒤 진평평이 고향에 내려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범건이 다시 혼사를 제안해 황제의 허락을 받아 내었다. 이에 범건은 등자경을 담주로 보내 범한을 서둘려 경도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범한은 아무것도 모르던 열두 살 때부터 이미 지금의 혼란을 감당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던 셈이다. 그는 이미 상당한 권력을 손에 쥐었음에도 당시 일을 떠올리면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후 외양간 거리 사건도 자신이 2 황자의 연회에 참석하는 걸 알고는 장 공주가 재상의 둘째 아들을 부추겨 자신을 살해하도록 한 것이었다.
장모는 실패했을 뿐이지 이미 여러 번 자신을 죽이려 했다. 이런 생각에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살면서 겪은 위험은 대부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미모를 지닌 장 공주의 음모 때문이었다. 게다가 장 공주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일을 진행해 왔다. 이처럼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걸 진저리치게 싫어하던 그녀가 신양 사람을 동원해 자신을 암살하려 한 걸 보면 상당히 당황하고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범한이 자신감에 찬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화를 낼수록 좋지. 예전처럼 침착하게 대응한다면 생각을 읽을 수가 없잖아.’
그는 신양에 있는 장 공주가 지략이 출중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외양간 거리 사건을 북제 영토를 빼앗는 계기로 전환한 것이나 언빙운을 팔아 경국 조정의 어지러운 국면을 타개한 것만 봐도 장 공주의 음모 능력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점이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찰원이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음모를 꾸미는 일이었고 여기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언 공자는 장 공주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두렵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감찰원이 가진 힘 때문이었다. 이건 신양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힘은 음모자에게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333화
“장 공주는 정말 대단한 여인이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대단해.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모두 그녀가 동궁을 돕고 있다고 생각할 뿐 2 황자 저하와 손을 잡았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 그래서 관직에서 물러나신 장인어른과 같이 장 공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2 황자의 편에 서서 동궁과 척을 졌었어. 만약 이런 상황을 7, 8년 정도 유지하고 폐하께서 연로해지셨다면 2 황자가 동궁을 완전히 누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스승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런 상황을 간파해 내시지 않았습니까.”
제자의 아첨에 범한이 겸손을 떨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네. 자네는 폐하와 진 원장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가?”
사천립이 놀란 표정을 짓자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장 공주가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분들의 상대가 되지는 못하네. 나는 그분들의 장기짝에 지나지 않아. 아마 폐하께서는······ 황태후마마가 화를 내시는 게 싫어 그리하셨겠지.”
그가 머리를 살짝 돌려 유리창 너머 온통 하얀 설산을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지금은 경도에 안 계신 장인어른이네.”
줄곧 스승님이 상서 대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생각해 온 사천립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장인어른은 간사한 재상이라 불렸지만 보기 드물게 여러 방면에서 유능했던 사람이네. 경국이 지난 몇 년 동안 약간의 소란을 제외하면 대체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인어른의 능력 덕분이었네. 내가 장인어른을 존경하는 이유는 참을 때는 끝까지 참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누구보다도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줄 알기 때문이야. 장 공주로 인해서 둘째 아들이 사고검의 손이 죽었을 때도 장인어른은 망설임 없이 나와 완아의 혼사를 허락해 감찰원과 부친의 편에 서셨네. 지난 몇 년 동안 조정 안에서 끊임없이 진 원장이나 아버지와 다투셨던 분이 이런 결정을 내리기 어디 쉬우셨겠나. 중요한 상황에서 개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긴 탄식을 내뱉었다.
“게다가 장인어른은 재상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주변 상황이 달라지자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셨네. 본인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조금의 미련도 없이 손에 있던 권력을 포기하신 거지.”
범한의 장인인 재상 임약보는 사직을 청한 뒤 오주에서 풍족한 노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경도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최근에는 경도에 있을 때보다 건강도 더 좋아져서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사람을 알기는 쉽지만 자신을 알기는 어려운 법이네.”
범한이 감탄하며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과 자신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시기와 세력의 변화까지 냉정하게 판단한 장인어른의 능력은 배울 만하네.”
사천립은 아직 재상직이 비어 있어 문하중서들이 협력해 정사를 돕고 있는 걸 떠올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재상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범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질타했다.
“은근슬쩍 떠보지 말게나. 나는 그런 자리에는 관심도 없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생선 굽는 일처럼 간단한 줄 아는가. 앞으로 폐하의 뜻대로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잘 관리하는 것 말고 다른 건 할 생각이 없네.”
사천립이 웃으며 말했다.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관리하는 것도 일반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자네도 장인어른이 사직하신 뒤에 폐하께서 재상을 비워 두신 걸 알고 있겠지.”
범한은 일어나서 목발을 짚으며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문을 열고 설원에서 불어오는 맑은 공기를 마셨다.
“그런데 노령으로 퇴직한 문서각 호 선생이 폐하의 부름을 받고 경도로 돌아왔다고 하더군.”
사천립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어느 호 선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호 선생이 여러 명이던가?”
범한은 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서서 말했다.
“자네와 내가 개구쟁이이던 시절에 문학 개선에 힘을 쓰셨던 호 선생 말이네. 폐하께서 경도로 불러 대학사에 임명하신 뒤 나중에 문하중서가 되었다고 하더군. 이부 상서 안행서의 자리는 공석이고 진항도 경도 수비를 하러 갔으니 문하중서가······ 대학사 몇 명을 이끌고 재상직을 차지할 수도 있겠지.”
놀란 얼굴로 잠자코 있던 사천립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전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조정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된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조정 일은 외부인은 절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군요.”
그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들은 내용은 외부에 전할 수 없는 것들이라서 태학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늘 스승이 알려 준 이야기를 잘 기억한 뒤 수십 년이 지나서 역사책에 쓰거나 《반한재 주인의 산거필기》를 쓴다면 자신은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스승님은 역사의 승리자로 남을 것이었다.
사천립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주시하고 있는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는 진 원장의 나이가 폐하보다 적다는 걸 아는가?”
그 말에 사천립은 화들짝 놀랐다. 그가 멀리서 봤던 진평평의 모습은 당장 무덤에 들어가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노쇠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한창 장년인 폐하보다도 젊다고?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진 원장이 폐하보다 한 달 늦게 태어났네. 조정 일이 복잡해서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그래서 나도 나중에 그렇게 늙지 않을까 걱정이네.”
창밖에는 설원이 펼쳐져 있고 복도 기둥 끝에서는 마작 두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북제에 있는 범사철을 제외하고 유가 군주와 정주에 있던 섭령아까지 와서 창산 별장은 작년처럼 시끌벅적했다.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바라보는 범한의 모습은 집 안에 풍기는 즐거운 분위기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도 개똥 같은 조정 안에서 진평평처럼 황제를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해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사람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 손에 어떤 패가 들려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다른 사람이 가진 비장의 카드가 뭔지 모르는 이상 자신이 가진 비장의 카드를 절대 꺼내지 않았다.
사박사박 소리가 들리더니 검을 비옷을 입은 등자경이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 할 때였다. 열린 창문에서 범 제사의 손이 불쑥 나오더니 이리 오라는 표시를 했다. 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창가로 다가가 작게 말했다.
“퇴각한 신양 사람을 진 원장이 종추를 보내 뒤쫓고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추는 왕계년만큼 추격에 뛰어났기에 범한은 그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등자월이 들고 있는 종이 가방을 보고는 손을 뻗었다.
종이 가방 안에는 3처에서 작성한 정보 분석 자료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러자 등자월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북제에서 보낸 편지도 있습니다.”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범한이 뜻을 이해하고는 웃으며 타박했다.
“사내대장부가 아녀자들처럼 수다스러워서 되겠는가.”
등자월이 종이 가방을 건네주고는 입을 가리고 떠나자 범한은 웃으며 익살맞은 모습으로 떠나는 부하를 바라봤다.
범한은 경도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사천립을 내쫓은 뒤 종이 가방의 봉랍을 뜯었다.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편지들 사이에서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가 보였다. 조금 전 등자월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감찰원 봉랍은 송진에 진사를 섞어 사용하기 때문에 등불에 그을릴 필요가 없어 안정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편지 봉투를 틈 없이 메워서 누가 몰래 열어 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범한은 먼저 경도 계년조의 소식을 훑어본 뒤 3처가 작성한 각처의 정보를 살펴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 처의 일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언빙운이 최씨 집안이 대처할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강남에까지 퍼지면서 최씨 집안의 사돈인 명가는 재산을 이전하기 시작했다.
감찰원 보고서를 모두 검토한 그는 마지막으로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를 꺼냈다.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적인 일은 나중에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 그는 항상 이와 같은 순서로 일을 진행했다. 하지만 평상시와 다름없이 해당타타의 편지를 읽은 뒤 그는 늦게 본 걸 후회했다.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그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편지에는 경악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범한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얇은 편지지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는 내용은 간단했고 문장은 고리타분하지 않은 금문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안지, 잘 지냈습니까? 지난번에 보낸 편지는 잘 받았어요. 경국의 우편망은 정말 빠르고 편리하군요. 한 달 걸릴 게 열흘이면 도착하니 말이에요. 이전 편지에서 경도가 초겨울이라고 했을 때 상경은 이미 눈이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려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어요.’
‘제가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지 옆에 사람이 있거나 봄과 가을에는 잠에 쉽게 들고 또 겨울에는 잠자는 걸 좋아해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눈이 펄펄 내려 청록색이던 세상이 무미건조한 하얀색으로 뒤덮이면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푸른 잎사귀나 가까이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꽃이 없잖아요. 더구나 작은 정원에 매화꽃 몇 송이가 피어 있기는 하지만 올해는 작년보다 추워서 그런지 얼어 버려서 감상할 마음이 나지 않아요.’
‘이전에 보았던 당나귀는 팔았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맷돌은 뚱보가 갈고 있으니까요. 콩이 얼마 없어도 매일 쉰 번씩 돌리고 있어요. 당나귀를 판 돈으로 대나무 숯을 사서 집 안에 두었어요. 그리고 대인이 통풍이 잘되지 않아 독에 중독되기 쉽다고 해서 보내 준 도면대로 굴뚝을 만들었더니 집 안 공기가 훨씬 좋아졌어요.’
‘참, 지난 편지에서 물어본 오리들은 이미 다 자라긴 했지만 얼어 죽을 수 있어 집 안에서 키우고 있어요. 악취가 좀 나기는 하지만 대인도 알다시피 제게는 부릴 하인이 있잖아요? 매일 깨끗하게 청소시켜서 그럭저럭 참을 만해요.’
‘왕 대인이 몇 번 이곳에 와서 저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요청했지만 왕 대인이 술을 마실 수 없다는 말에 거절했어요. 대인도 아시다시피 저는 사람이 술 마시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고 술에 취한 모습을 보는 건 더 좋아하거든요.’
‘반년 전에 백세송거에서 대인이 술에 취해 《홍루몽》에 나오는 ‘조상님의 은덕’을 불렀을 때 정말 듣기 좋았어요. 그래서 제가 며칠 전에 스승님 앞에서 불렀는데 스승님도 무척 좋아하시면서 가교저의 불쌍한 신세에서 이상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하셨어요. 밖에 눈이 많아 와서 집 안까지 한기가 들이치던 날 스승님과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참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몇 개월 전에 대인과 함께 상경에서 놀던 날이 생각나더군요. 대인이 밝은 달을 보며 즐거워했던 모습과 작은 사당과 논두렁 말이에요. 대인은 논두렁 안에서 난처해하며 헐레벌떡 논두렁 밖으로 뛰어나오셨죠.’
‘맞다,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요. 소은 대인의 시신은 서산 절벽 사이에서 발견되었어요. 이미 장례를 치르긴 했지만 대인은 소은 대인을 압송한 사람인 만큼 안심할 수 있게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범한은 해당타타의 말에 많은 암시가 들어 있다는 생각에 기괴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우가 압박과 착취를 당하며 불쌍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실소가 터졌지만 그건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어서는 자신에게 천일도 심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해당타타가 진짜 전하려 하는 이야기를 추측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을 곰곰이 음미해 보던 그는 소은의 시신을 찾았다는 내용과 고하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글귀에서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특히 ‘가교저의 불쌍한 신세에서 이상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하셨어요.’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밝은 달, 작은 사당, 논두렁이 적힌 부분을 여러 번 읽어 봤다. 편지 내용과 맞지 않는 내용인 데다가 앞뒤 문장이 약간 억지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해당타타가 말하는 이때는 범한으로서는 일생에서 가장 낭패스러운 상황이었다. 당시 춘약에 중독되었던 그가 바지를 움켜쥐고 도망치듯 사당에서 뛰쳐나왔을 때 이따금 우렁찬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고 밭 진흙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것이······ 바로 해당타타가 자신에게 알려 주려는 정보였다.
“논두렁 안에서 논두렁 밖으로 뛰어나왔다고?”
미간을 찌푸리고 곰곰이 생각하던 범한의 머릿속에 번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밝은 달이나 사당 같이 쓸모없는 글자들을 제거한 뒤 남은 마지막 문장. 범한에게 이런 수수께끼는 실로 간단한 거였다.
‘논두렁 안이면 밭이잖아. 밭 안에서 밖으로 뛰어나왔다면 ‘古’ 자를 말하는 건가? 아냐, 땅을 뜻하는 자를 말하는 걸 수 있어! 땅을 뜻하는 자가 ‘地’ 그리고 ‘葉’이 있었지. 땅 지는 아니고. 엽 자라면······ 연잎 할 때 쓰는 잎 엽 자인데······. 책 접 그리고 땅 이름 섭, 그러고 보니 섭은 성씨로 쓰기도 했지. ‘葉’를 성으로 쓰면 섭씨. 그래, 이건 섭씨인 내 어머니 섭경미를 지칭하는 거야.’
편지지를 쥐고 있던 범한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문득 편지에 적힌 《홍루몽》 가교저의 신세를 언급하며 이상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내용이 생각나면서 그는 마침내 해당타타가 자신에게 뭘 말하려는지 이해했다.
고하는 자신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334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범한은 손으로 굳은 양 볼을 문지르며 갑작스럽게 날아든 소식에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고하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으며 공개할 예정이니 얼른 대비책을 세우라는 거였다.
그는 고하가 어떻게 자신과 섭가의 관계를 알아냈는지 추측할 겨를이 없었다. 그보다 더욱 시급한 문제는 앞으로 닥칠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것이었다.
아마도 며칠이면 북제에 자신과 섭가의 관계가 소문날 것이고 늦어도 열흘 이내에 경도 거리와 골목에도 이 소식이 전해질 터였다.
이렇게 소문이 퍼져도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고 북제에서도 유언비어라고 딱 잡아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말은 사람을 죽일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소문이 퍼진다면 사람들은 경도에 온 뒤 자신의 수상한 행적들을 파기 시작할 것이고 점점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게 될 터였다.
더구나 이건 원래 사실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기묘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범한이 섭가와 관계가 있을 거라 의심하지 않았지만 일단 소문이 퍼진다면 의심의 씨앗이 모두의 마음속에 심어질 것이다. 그 씨앗은 점점 자라나 사람들의 마음을 점거할 테고 어느덧 소문은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로 받아들여질 게 뻔했다.
당시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 황궁 사람들, 자신과 이익이 충돌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섭가의 후손이란 소문에 화들짝 놀라겠지만 누구보다도 사실이라 믿을 게 분명했다.
다만 이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지 모를 뿐이었다.
갈증을 느낀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책상에 놓인 찻주전자를 들어 곧장 입에다 부었다. 사천립이 계속 보충해 데운 뜨거운 찻물이 입으로 들어오자 그는 찻주전자를 바닥에 던지고는 욕을 퍼부었다.
쨍! 소리와 함께 도자기 찻주전자가 부서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실 그는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비밀을 누군가가 들출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하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내가 섭경미의 아들이라고 외칠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밝혀지는 건 곤란했다.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준비되기 전에 이 사실이 경도에 알려진다면 자신은 예측할 수 없는 강한 위협과 충격을 받을 게 분명했고 어떤 파장이 불어닥칠지 알 수 없었다. 범한은 이처럼 자신이 주도할 수 없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했고 상황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했다.
이게 바로 지금 그가 분노하는 이유였다.
도자기 파편을 밟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열려 있는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삭막한 설원을 바라보며 여러 번 차가운 공기를 들이쉰 그는 마침내 대비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깨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여종들은 범한의 화난 표정이 무서워 감히 안으로 들어가 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범한이 고개를 저어 여종들을 물러가게 한 뒤 이전처럼 손으로 편지들을 갈가리 찢으려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편지지는 구겨지기만 할 뿐 찢을 수는 없었다.
당황한 범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해당타타의 편지에 적힌 놀라운 사실이 자신의 몸에 정기가 사라졌다는 상황까지 잊게 했던 것이다.
복도를 돌아 별장에서 가장 조용한 방 앞에 도달한 범한은 노크도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서 환약을 만들고 있던 비개가 피곤함에 전 얼굴로 제자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범한이 스승을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스승님, 큰일 났습니다.”
비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는 제자가 저렇게 당황한 거지?’라고 생각했다. 이후 해당타타가 전해 준 소식을 들은 비개는 범한보다도 더 당황해서는 약 가루가 잔뜩 묻은 두 손으로 산발이 된 머리를 줴뜯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광경을 보던 범한은 남몰래 한숨을 쉬며 아무리 급해도 스승님을 찾아온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비개는 독살에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지만 상황을 판단하고 음모를 꾸미는 데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당장 산에서 내려가야겠다.”
“당장 산에서 내려가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말을 하고는 곧장 서로의 생각을 알아챘다. 가늘게 뜬 비개의 갈색 눈동자에는 살의가 드러났다.
“나는 진원으로 갈 테니 너는 상서 대인을 찾아가거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두 사람 모두 경도에 있는 두 명의 늙은 여우를 생각해 낸 것이다. 범한이 머리 아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하들에게 마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떠나려 할 때 비개가 갑자기 말했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비개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음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 두려워할 필요 없단 말이다. 십여 년 전 일이 다시 재현되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독으로 수만 명은 죽일 수 있는데 누가 우리를 건들 수 있겠니?”
두 사람이 사람들을 독살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범한은 진저리를 쳤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생각만 해도 섬뜩한 장면이었다.
별장 안에 있는 여인들의 배웅을 받을 겨를이 없었기에 수를 놓고 있던 사사의 배웅만 받은 채 범한과 비개는 두 대의 마차에 각각 올라탔다. 마차들은 바닥에 깔린 얼음을 부수고 얼어붙은 길을 미끄러지듯 힘겹게 눈 덮인 산에서 내려왔다. 6처 검수들은 두 사람을 따라 내려왔고 고달을 비롯한 호위들은 산에 머무르면서 남은 사람들을 경호했다.
저녁 무렵 비개가 탄 마차가 엄격한 호위를 받으며 경도 교외에 있는 황실 행궁보다 화려한 장원에 도착했다.
“비개 대인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비개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리자 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생각에 물었다.
잠시 뒤 장원 안에 등불이 켜지고 비개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이 굳은 표정으로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입궁한다.”
부하에게 명령한 진평평이 갑자기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별일도 아닌 일로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비개가 차가운 손을 비비며 반박했다.
“이게 큰일이 아니면 뭐가 큰일입니까?”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의 손잡이를 만지며 놀리듯 말했다.
“자네야 매일 약을 제조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으니 이해하지 못한다고 치지만 범한까지 호들갑을 떠는 건 좀 실망스럽군. 조금만 생각해 봐도 별일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하긴 이 일로 심리적 압박을 오래 받아 왔으니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할 수도 있겠지.”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내달린 마차는 얼마 뒤 경도성 성문에 진입했다. 지금은 성문이 닫힌 시간이었지만 경도 수비를 책임진 진씨 집안도 감찰원 원장 대인이 경도에 들어가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마차가 황궁에 도착하자 진평평이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건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네.”
비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감찰원에 가서 8처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있겠습니다.”
황궁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진평평은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언제든지 입궁해 보고할 권한이 있었다. 귀에 익은 소리를 듣던 진평평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소식이 경도에 전해진 뒤 이틀은 퍼지는 걸 막아야 하네. 그래야 감찰원에서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 않겠나. 그래도 범한의 배경을 드러내기에······ 이번이 가장 좋은 기회이네.”
서재 안에서 경국 호부 상서 범건이 꽈리 열매로 만든 음료를 마시며 범한을 바라보다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구나. 좀처럼 당황하는 법이 없기에 나는 네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이 소식이 경도에 전해지면 어찌합니까?”
잠시 아무 말 없이 부친의 두 눈을 바라보던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동안 이 사실을 숨긴 이유는 제 정체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범건이 맑은 두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너는 여기 있지 않으냐. 그것도 아주 어여쁜 모습으로 말이다. 너와 섭가의 관계를 영원히 감출 수는 없어. 그리고 만약 밝혀야 한다면 내가 보기에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인 것 같다.”
“가장 좋은 시기라고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범한은 아버지의 침착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를 본 뒤 줄곧 이어졌던 초조함이 사라지자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띠며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목발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상처를 조심해야지.”
그 모습을 본 범건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범한은 미소 지으며 가슴에 난 상처를 문질렀다. 아직은 약간 통증이 느껴졌지만 최근 비개가 옆에서 뛰어난 의술 솜씨로 돌봐준 덕분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네가 무서워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 봐라.”
범건이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항상 근엄한 상서 대인의 모습이던 그는 이미 모든 계산이 끝난 듯 초연했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범한은 양미간을 찌푸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비로소 자신이 평소와는 다르게 허둥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도대체 뭐가 무섭기에 이성까지 잃었던 걸까?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이 사실이 퍼져 나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시작할 것이고 황궁에서도 제 정체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를 어떻게 처리한다는 거냐?”
범건이 냉소를 머금었다.
“설마 황궁에서 네 정체를 지금까지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범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황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황태후 쪽도······ 지난번 동짓날 양고기 연회에서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 사실을 모르는 건 평범한 일반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천하 사람들을 속이고 싶어 합니다. 만약 더는 숨기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상황에 변화가 오겠지요.”
범한이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게다가 황후가 제가 섭가의 후손이라는 걸 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녀와 섭가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원한 관계가 아닙니까.”
범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후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유사 이래 가장 세력이 약한 황후니까. 네가 고려해야 할 것은 동궁 황태자가 황후의 말에 따라 너와 대적할 경우다.”
황후의 가족 세력은 십몇 년 전 경도 피의 달 때 경국 황제의 손에 모조리 제거되었다. 줄곧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범건은 당시 가장 큰 역할을 했었기에 황후가 어떤 힘도 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
범건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황태자는 총명한 사람이다. 네가 지금의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한 황태자는 너와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할 테니 예전 일을 들먹이며 너는 건들지는 않을 거다.”
범한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고민하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장 공주는 어쩔 것 같습니까?”
섭가의 재산이 경국 황실의 호주머니에 들어가 지금의 황실 금고가 되었다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당시 정부는 천하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섭가를 강제로 인수하기 위해 모반과 같은 명분을 사용했었다. 그런데 지금 섭가의 후손이 나타난다면 당시의 여죄를 받게 될 수도 있었다.
설사 조사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황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섭가의 후손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할 터.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이었다.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란 소식이 알려진다면 장 공주는 분명 이 사실을 이용해 황실에 상응하는 대응을 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었다. 섭가의 재산을 수탈한 일은 황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으므로 범한이 이 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벼락출세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물론 범한은 자신이 가진 또 다른 출생의 비밀 때문에 황궁에 있는 모자는 자신을 죽일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실을 안다면 그들은 자신을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터. 다만 화가 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거였다.
만약 황궁에서 오랜 시간 사람들을 속이려 한다면 범한을 단순하게 섭가의 후손으로만 대우한 뒤 여론으로 압박해 범한이 황실 금고와······ 감찰원을 내려놓게 만들 수 있었다. 이미 무수히 많은 원수에게 둘러싸여 있는 범한으로서는 손에 쥔 권력을 잃는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335화
“장 공주가 어쩔 것 같으냐고?”
범건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만약 영리하다면 나서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겠지.”
“왜 그럴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폐하의 생각 때문이란다.”
곰곰이 생각하던 범한은 잠시 뒤 범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황제는 자신이 가진 출생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황제가 어떤 계획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지금 자신이 가진 계획을 드러낼 생각은 없을 터. 그러니 이 사실을 들은 황제는 범한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놀라고 나중에는 분노와 초조함을 느낄 게 분명했다.
황제는 범한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을 손에 쥐고 흔들기를 좋아했기에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일이 발생하는 걸 싫어했다. 그리고 분노한 황제가 맨 처음 지시할 일은 비밀을 누설한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 공주가 요란법석을 떨며 범한을 공격하려 한다면 황제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범한을 보호할 것이고 장 공주에 대한 미움도 더욱 커질 게 분명했다.
범건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아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는 감찰원 제사이고 또 최근 반년 동안 충분한 권력을 손에 넣지 않았니. 담주에 있던 네가 경도로 온 뒤 나와 진 원장은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 네가 설 바닥을 견고하게 다져 주었다. 이미 상당한 기반을 쌓았는데도 이런 사소한 풍파를 두려워하다니. 이런 풍파는 네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범한은 마음속에 또 다른 걱정이 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세상은 상당히 시끄러워지겠지만 황실은 두려워할 것 없다. 이 일을 알게 된 뒤 황태후와 폐하께서 백성들을 의식해 이틀 정도 너에게 냉담하게 대할 수는 있겠지.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결국 폐하의 태도에 달렸어.”
어떤 일이든 치밀한 계략을 세우는 호부 상서 범건이 마지막으로 덧붙여 설명했다.
“현공 사당 검수 사건을 계기로 폐하께서 너를 신뢰하게 되었으니 네 편에 서주실 거야. 네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고 폐하께서 항상 너의 공로를 염두에 두고 계시니 황족의 이익, 황후와 황태자, 심지어 장 공주와 황태후의 압력보다도 너를 먼저 생각해 주실 거다. 즉 네가 폐하에게 날아오는 검을 막았듯이 폐하도 너를 대신에 풍파를 잠재워 주실 거란 말이다.”
범건이 냉소를 지으며 아들을 바라봤다.
“그러니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인 거다. 만약 몇 년이 지난 뒤 이런 일이 터졌다면 그때는 이미 폐하의 고마운 마음이 식었을 테니 도움을 받기도 힘들겠지. 그러니 이왕 밝혀질 거면 며칠 안에 밝혀지는 게 나아. 일러서도 안 되고 늦어서도······ 안 된다.”
가장 좋은 시기.
이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보던 범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 일로 인해서 집안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될 뿐입니다.”
범씨 집안이 섭가의 후손을 받아들인 건 황제의 계획이었지만 황제는 분명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모든 책임은 범씨 집안이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범건이 천천히 두 눈을 감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보 같은 놈. 네게 타격을 주지 못할 일로 이 아비가 타격을 입을 것 같으냐? 조정에서 나를 공격하려면 먼저 네가 섭가의 후손이라는 걸 밝혀야 하지 않겠니?”
그 말을 들은 범한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버지 말씀은 밖에서 뭐라 떠들든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이 사실을 누가 증명할 수 있겠니?”
범건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하자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저는 이 기회를 빌려서······.”
“이 기회를 빌려서 섭가 사건을 바로잡겠다고?”
범건이 큰 소리로 웃었다.
“아까 초조해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걸 다시 밝혀서 뭘 하려고 그러니? 그건 십여 년 전에 폐하께서 이미 정리하신 일이야.”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제가 섭가의 후손이란 게 밝혀지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범한이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장 공주와 남다른 포부를 가진 사람들이 이 사실을 통해 자신이 황가의 혈통이라는 걸 알아낼까 봐서였다. 이 말을 하려던 그는 앞에 앉아 있는 범건을 보고는 애써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자신과 황제의 관계에 대해 범한은 범건과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두 부자는 서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현재의 화목한 상태를 유지해 왔다.
범건 역시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진 끝에 범건이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네 마음속에 깊이 숨겨 두도록 해라. 다른 사람이 알아채는 게 무슨 상관이 있겠니? 이 아······ 아비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진 원장은 이런 일이 생기기를 줄곧 바라 왔을 거다. 그러니 그는 아마 경도에 소문이 퍼지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퍼지는 걸 단속하는 방식으로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드러내 세상 사람들이 네 정체를 궁금해하게 만들 거야.”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속으로 아버지의 추측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절름발이 노인이라면 분명 그런 방법을 동원하겠지. 섭가 후손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걸 단속해 경국 백성들이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게 만든다니 실로 교묘한 방법이 아닐 수 없어. 다만 내가 황제의 사생아라는 사실은······.’
“진평평 대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이런저런 고민에 피곤해진 범한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너도 알다시피 나와 진 원장은 생각이 늘 달라서 네 문제를 가지고도 오랜 시간 의견이 충돌했었어. 그래서 나는 진 원장을 믿지 않고 진 원장도 나를 믿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두 사람 모두 너는 신뢰하고 있단다.”
그가 아들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너를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끌어들인 걸 보면 결국에는 그가 이긴 것 같구나. 그래서 나는 이 일도 그가 꾸민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으면 북제에서 어떻게 네가 섭가의 후손인 걸 알았겠니. 물론 그렇다고 해도 네가 걱정할 건 없어. 지금쯤이면 진 원장이 입궁해 너를 대신해 계획을 세우고 있을 테니까.”
이후 두 부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던 중 범한이 뜬금없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무런 맥락도 없는 사죄이자 이유도 알 수 없는 사죄였다. 범건이 바라던 평안한 삶을 버리고 감찰원을 손에 넣고 권력 쟁탈의 길에 들어선 게 죄송하다는 거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가진 출생의 비밀 때문에 범씨 집안을 알 수 없는 위험에 빠뜨려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에게 보이는 죄스러움이었을까.
어쩌면······ 죄송하다는 것은 자신은 진정한 아들이 되고 싶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은 게 죄송하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 * *
범 상서는 진평평이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걸 폭로할 가장 좋은 시기를 만들려고 일부러 범한이 황제를 구하다가 중상을 입도록 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한편 이때 진평평은 깊은 황궁 안에서 갑자기 이 일을 들춰내려는 사람이 누군지 추측하고 있었다.
정치가라면 모름지기 허울뿐인 명분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범한이 행복할 수 있도록 손에 권력을 쥐여 주는 일에만 열중할 뿐 범한이 섭가의 후손으로 정정당당하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저와 범건, 범건의 어머니, 폐하, 비개만 아는 사실입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의 메마른 목소리가 어서방에 울려 퍼졌다.
“폐하께서 황태후가 춘시 이후 이 일을 알아챘다고 말씀하셨으니 총 여섯 명이 아는 것이군요. 소신이 보기에 이 여섯 명 중에서 사실을 누설할 사람은 없습니다.”
황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평상시 맑고 고요하던 눈동자가 오늘은 분노로 가득 차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매서워 보였다.
“아무도 누설하지 않았다면 그 북제 사람은 어떻게 알았다는 것이냐!”
춘시 사건으로 인해서 범한은 감찰원 제사 신분이 드러나면서 경국 젊은 관리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실 금고를 장악하게 된다면 그의 권위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에까지 오르게 될 게 분명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어떠한 사실도 추측해 내지 못하겠지만 깊은 황궁 안에 있는 황태후는 달랐다. 그녀는 오랜 시간 황궁에서 나랏일을 보고 음모를 접하면서 정치적 촉감이 누구보다도 예리했다. 그런 그녀가 춘시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강력하게 추궁하자 황제도 어쩔 수 없이 범한이 자신의 서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황태후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놀랐지만 결국에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과거 그 ‘요사스러운 여자’를 무척이나 싫어했던 건 사실이지만 황가의 핏줄에게는 항상 포용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북제 사람이 스스로 추측해 낸 것 같습니다.”
진평평은 자신이 사실에 가장 근접한 추측을 해냈다는 걸 모른 채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고하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건가? 북제 국사가 자신의 머리를 이용해 이런 추측을 해낼 수 있다고?”
황제의 반박에 진평평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사실 장 공주마마가 가장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범한이 지금 이 말을 엿들었다면 일거양득이라며 감탄했을 거다.
황태후는 범한이 섭가의 후손인 걸 알았고 장 공주는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딸이었다. 과거 장 공주는 손바닥 뒤집듯 언빙운을 북제에 팔아 버렸고, 몰래 북제 대가 장묵한과 내통해 거래했으며, 북제 황태후와 긴밀히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황실 금고 상품을 밀수해 북제 백성들에게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그녀는 황실 금고의 권한을 넘겨주기 싫다는 이유로 범한을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있었고 검수을 이용해 죽이려 했지만 실패한 적도 있었다.
이는 황제 역시 아는 사실이었다. 이런 부분들을 종합해 봤을 때 장 공주는 이 일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고 북제는 그녀가 남몰래 폭로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녀는 누구보다도 큰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진평평은 심사숙고한 뒤 조심스럽게 이 말을 꺼냈다. 만약 구체적인 정황이 없었다면 그는 황실에 북제와 결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해 황제가 신양에 있는 여동생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근거 없이 장 공주의 이름을 들먹인다면 황제가 그의 의도를 의심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이처럼 직접 장 공주의 이름을 말한 것은 첫 번째로 그녀에게 가장 큰 동기나 혐의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신이 순수한 충성심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의도를 의심받을 걸 알면서도 폐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황제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민했다.
“운예는 안지가 섭가의 후손이라는 건 알아도······ 내 혈육이란 건 모르는 것 같소. 알았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겠지.”
황태후가 이 사실을 장 공주에게 알려 줬다고 하더라도 장 공주는 범한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그건 범한이 아니라 황제를 겨냥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말을 들은 진평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장 공주라고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잠시 뒤 황제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운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고 보도록 하지.”
만약 장 공주의 계획이라면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퍼진 뒤 상서를 올려 황제에게 조심하라고 간언하거나 심지어는 범한을 죽이고 범씨 가문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할 터였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으시겠습니까?”
진평평이 마른기침을 했다. 입궁을 서두르는 바람에 머리도 제대로 정돈하지 못해 헝클어진 모습이 더욱 늙어 보였다.
황제가 그를 힐끗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탄식했다.
“짐도 영광스러운 삶을 산 것 같은데 장년의 나이에 이렇게 고독한 삶을 살게 될 줄은 몰랐소. 자네와 범건을 제외하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구려.”
336화
진평평이 황송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황제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자네도 당시 황태후께서 무슨 명목으로 섭가의 재산을 몰수했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모반입니다.”
“그렇지. 맞아, 모반이었네.”
당시를 떠올리는 황제의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우리 두 사람도 그 결정에 동의했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섭가의 산업을 계속 유지하고 보호할 만한 능력이 있는 건 황실뿐이었으니까.”
“맞습니다.”
진평평이 담담히 대답했다.
“당시에는 관련된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어떤 죄명을 씌우든 상관없으리라 생각했지요. 그게 17년이 지난 뒤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황제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상관없네. 짐이 섭가에 씌워진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면 되지 않은가? 그럼 누구도 가타부타 말을 할 수 없을 거네.”
“불가능합니다.”
진평평이 단칼에 황제의 생각을 반대했다.
“폐하께서 그 아이를 불쌍히 생각하시는 건 알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집안의 어르신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진평평이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넌지시 말하자 황제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평평이 말하는 대상은 바로 황태후였다.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런 일을 대비해서 세워 둔 계획은 있는가?”
진평평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터졌고 또 폐하께서 이전에 보이신 뜻이 있는지라 계획을 세워 두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범한이 가진 출생의 비밀을 계속 감춰 두고 싶어 했기에 감찰원에서도 이런 일을 대비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거였다.
진평평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신양에서 상소를 보내면 폐하께서는 엄히 질책하시고 황제들에게도 몇 마디 훈계하시면 됩니다. 범한 쪽에서 결단코 사실을 부인한다면 백관들이 의심은 하겠지만 근거 없는 소문만 믿고 상소를 올리지는 못할 겁니다.”
“그럼 조정에서 안지가 난처해지지 않겠는가?”
“범한은 황실 금고 일 때문에 내년에 강남에 가야 하니 조정의 수군거림에서 도망칠 수 있습니다.”
진평평이 미소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폐하, 비록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이왕 폭로될 거라면 지금이 좋습니다. 범한이 황실 금고 일을 핑계로 2년 정도 경도를 떠나 타지에 나가 있으면 소문도 점점 잠잠해질 것입니다.”
“자네는 소문이 잠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사리리가 유정강에서 기생으로 있을 때 그녀가 어느 친왕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큰일은 없었습니다. 범한에 대한 소문도······.”
진평평이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근거 없이 떠돌 뿐 큰일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문에도 이 일을 눈에 띄게 실어야 합니다.”
황제가 허탈하게 웃었다.
“다만 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비해야 하네.”
진평평이 약간은 슬픔이 배어 있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황후께는 제가 가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 쉬었다.
“명분을 줘서는 안 되네. 짐은 이미 그 아이에게 미안한 게 많아.”
* * *
6개월 뒤 경도 거리 곳곳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조정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자 감찰원 제사인 작은 범 대인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소문이었다.
섭가는 이미 20여 년 전에 모반을 꾸몄다는 죄목으로 재산이 몰수되었기에 후손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인물이 경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은 범 대인이라니. 소문을 처음 들은 경도 백성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이내 호기심을 느끼며 사방팔방 소문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이틀도 되지 않아 소문은 경도 전체에 쫙 퍼져 나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범씨 집안은 반역에 연루된 죄인을 숨겨 준 꼴이 되니 화를 피할 수 없을 터. 그리고 조정에서 범한을 미워하던 문무백관들에게는 공격할 빌미가 주어진 셈이었다. 물론 황실에서 어떤 말도 없고 소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관리가 경솔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경도 백성들과 관리들은 시로 명성을 떨친 범한이 고결한 문인으로서의 명성을 버리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감찰원과 돈 냄새가 진동하는 황실 금고를 손에 쥐게 된 걸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번 소문이 어느 정도는 사실일 거라 생각했다.
황궁은 이런 소문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이 평온한 모습이었고 감찰원만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8처에서 찻집과 술집에서 소문을 퍼트리는 백성들을 체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후 일석거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약간의 지위를 가진 그들이 이처럼 겁에 질린 토끼 눈을 하고 있는 건 조금 전 침을 사방으로 튀기며 이야기를 하던 두 명의 서생을 감찰원 8처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체포해 갔기 때문이다.
감찰원의 이런 반응에 사람들은 범 제사가······ 섭가와 관련이 있다고 더욱 믿게 되었다.
감찰원 안, 무릎에 양털 담요를 덮은 진평평이 검은색 커튼을 살며시 걷었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문 채 주변을 경계하며 걸어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다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감찰원 8처 관리들이 서생 두 명을 체포해 가자 일석거 안은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술기운에 두려운 게 없었던 문인들은 잠시 뒤 감찰원이 범 제사 신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두고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신비한 섭가 여사장이 모반을 꾸몄다는 이유로 이 세상을 떠난 뒤 모든 가산은 황실 금고로 들어갔어.”
수심에 잠긴 표정을 지은 남자가 자신의 의견을 털어놨다.
“작은 범 대인이 정말 그 여사장의 자식이라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거야.”
“모반이라고?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경여당 대행수들은 왜 아직까지 잘 살고 있는 건가? 말이 안 되지 않나?”
눈썹이 짙은 서생이 비꼬는 말투로 반박했다.
“내 생각에는 여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주인 없는 틈을 타서 조정이 섭가의 재산을 갈취하려 그런 거네. 그런데 갑자기 섭가의 후계자가 나타났으니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지.”
“당황할 게 뭐가 있겠는가?”
“폐하는 범 제사가 황실 금고를 관리했으면 좋겠다고 하시지 않았나. 그런데 황실 금고 재산은 원래 범 제사의 것이었으니 관리하고 말고 할 게 없는 거지.”
“황실 금고를 범 제사가 관리한다고?”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냉소를 지었다.
“이 일로 범 제사도 화를 면치 못하겠구먼.”
그때 주인장이 식은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손님들 목소리를 낮춰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감찰원 관리들 귀에 들어가면 저희는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평소 손님을 거의 상대하지 않는 일석거 주인장은 오늘 오랜만에 가게에 나와 서로 잘 아는 손님들과 인사하는 중이었다. 사실 그는 주변을 살펴보며 남몰래 술을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 서생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석거는 몰락할 위기에 처한 최씨 집안이 운영하는 곳인 만큼 범한의 소문에 관심이 많았다. 최씨 집안 사람들은 철천지원수인 범 제사의 출생과 관련된 소문이 들리자 남몰래 기뻐하며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방금 조정이 섭가 자산을 강제로 몰수했다고 말한 젊은 청년이 술에 취해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듯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주인장은 두려울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시오? 감찰원이 천하 사람들의 입을 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설사 감찰원이 그러려 해도 폐하께서 용인하지 않으실 거요. 어제 감찰원에 잡혀갔던 사람들도 오늘 보니 멀쩡하게 돌아왔더구려. 잡담을 나누는 게 경국 법률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니 잡아가도 멀쩡하게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거지.”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낭패를 본 사람은 범 제사네. 만약 자신이 정말 섭가의 후손이라면 벼슬길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실 자신의 생각을 모두 털어놓은 대화는 아니었다. 백주에 술집에서 자신의 머릿속 생각을 모두 털어놓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조정이 범한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일단 관직을 모두 빼앗은 다음 목숨을 빼앗을 거라고 생각했다.
“범씨 집안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한숨을 쉬었다.
“범 상서는 몇 년 동안 호부를 관리해 왔고 유능한 관리라 명성이 자자하니 예전 일 때문에 집안이 몰락하지는 않겠지?”
소문이 경도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 경도 사람들은 범한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호부 상서 범건이 어떻게 신비한 섭가 여사장과 관계를 맺어 자식까지 낳았는지도 궁금했다. 범 상서가 과거 유정강에서 이름을 떨쳤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일이었지만 당시 천하에서 가장 부유했던 섭가 여사장까지 꾀어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반면 소문이 퍼지는 과정에서 명문가 규수와 가난한 집 여식들은 범 상서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소문대로라면 당시 낮은 관직에만 머물러 있던 범건은 섭가가 모반이라는 대죄로 몰락하자 자신과 여사장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지키려 모험을 강행한 셈이었다.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황실의 눈을 피해 자식을 몰래 키워 온 범건의 이야기는 연애 소설의 인기 있는 소재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범건이 범한을 16년 동안 담주에서 키운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감찰원 8처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 소문의 정확성이 아주 높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범한이 감찰원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라 있었지만 진평평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람들의 입을 강제로 닫게 하지 못했고 한담하길 좋아하는 경도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둘 줄도 몰랐다. 그냥 아연실색한 얼굴로 소문이 갈수록 커지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어제 체포된 사람이 오늘 무사히 돌아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은 범 제사가 억지로 소문을 막으려 한 일을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미래는커녕 죽을지 살지조차 알 수 없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지난 2년 동안 범한은 경국에서 좋은 명성을 쌓은 데다가 나라 안팎에서 나라의 체면을 세워 주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가 당시 모반을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섭가? 섭가가 뭡니까?”
이때 술집에서 젊은 청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참 동안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음에도 그는 작은 범 대인이 섭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니 경국 사람 중 당시 찬란한 명성을 떨치던 섭가를 잊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섭가를 모른단 말인가?”
나이 먹은 사람들은 무시하는 눈빛으로 젊은이를 바라보며 수염도 아직 자라지 않은 나이라면 섭가를 모를 수도 있으니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섭가는 과거 장사로 천하를 주름잡았던 곳이네.”
중년 사내가 지난날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유리를 만들어서 은을 받고 팔던 곳이 섭가야.”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연해 설명했다.
“그게 아니라 비누, 향수를 파는 곳이 섭가네. 참, 향수는 생산이 중단되었으니 자네는 뭔지 잘 모르겠구먼.”
“유일하게 섭가만이 독한 술을 만들어 낼 줄 알았지.”
또 다른 사람이 보충해서 설명했다.
“당시 섭가는 조정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무기를 제공했네.”
“황실의 금고가 아니고요? 경국 조정에서 매년 대량의 돈을 주고 그곳에서 무기를 가져온단 말입니까?”
중년 남자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북제, 동이성, 심지어 더 멀리 있는 해외에서까지 돈을 벌어 오는 황실의 금고가 원래 섭가였단 말이네!”
질문한 젊은 청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나, 정말 대단하군요.”
337화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조정이 섭가의 재산을 강탈했다고 말했던 서생이 고개를 저으며 냉소했다.
“섭가가 단순히 장사하는 곳이었다면 그렇게 규모를 키울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섭가 여사장이 평범한 상인이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겠는가?”
그 말을 들은 중년 남자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자네는 뭐 들은 게 있어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섭가는······.”
서생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탄식했다.
“감찰원과 아주 밀접한 관계였다고 하더군. 감찰원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 섭가에서 운영 비용을 모두 지원했다는 거야. 물론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오.”
그 말을 중년 남자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른 표정을 지었다.
“자네들, 감찰원 문 앞에 세워진 비석을 본 적 있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은 뭔가가 떠오른 듯 일제히 소리쳤다.
“설마 거기에 적힌······ 그 섭경미가 섭가의 여사장이란 말인가!”
놀라 안색이 변한 서생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어쩐지, 어쩐지······ 작은 범 대인이 고결한 문인으로서의 명성을 버리고 자신을 더럽히면서까지 굳이 감찰원에 들어간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군.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어······.”
말을 하던 그가 화들짝 놀랐다.
“잠깐, 작은 범 대인은 아무도 모르게 감찰원 제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설마 진 원장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년 남자가 황급히 술잔으로 젊은 청년의 입을 막았다. 난데없이 입이 막힌 청년은 무슨 짓이냐는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겁에 질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순수하고 명랑한 경국 백성들은 문무백관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작은 범 대인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술집에서 자유롭게 그에 대한 한담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노인만큼은 모두 두려워했기에 절대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술집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고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구석에서 기쁨에 찬 환호가 들렸다.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섭가의 빛나는 역사를 모르던 청년이 잔뜩 흥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휘저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섭가가 생각났어요. 섭가가 생각났어. 섭가에서 쌍발 폭죽을 만들었잖아!”
그 말을 들은 모두가 하하 웃고는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경국 백성들에게 섭가는 이미 오래된 종이에나 등장하는 이름이 되어 있어 여사장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일석거에서 당당하게 한담을 나눈 사람들도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섭가가 경국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다줬는지 잊고 있었다. 범 제사가 섭가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경도에 퍼지고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깨어나면서 사람들은 점차 섭가가 출현한 뒤 경국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향수 냄새를 그리워하는 여인, 목욕하다가 비누의 위대함을 깨달은 성문을 지키는 졸병, 쇠뇌의 화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군인, 북제 상경에서 비단 천으로 유리를 꼼꼼히 닦던 상인, 독한 술을 들이켜며 즐거워하는 시인, 감찰원에서 검은 천을 살며시 걷고 세상의 모든 걸 지켜보는 노인,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폭죽을 떠올린 청년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두 범한의 출생과 관련된 소문을 듣고 섭가를 기억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 * *
문을 나서던 범한은 겨울에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따뜻한 햇볕에 기지개를 켜며 상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일로 인해서 다시 창산에 가기 힘들어진 그는 아버지의 의견대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말들과 행동을 주시했다.
등자월이 다가와 오늘 감찰원 보고서 및 계년조가 남몰래 모은 정보를 건네줬다. 범한이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소문에 대해 경도 백관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등자월이 슬쩍 평온한 얼굴을 한 제사 대인의 안색을 살핀 뒤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처럼 큰일이 터졌는데도 흔들리지 않으시다니 제사 대인은 황궁에서 자기를 잡아갈 수도 있다는 걸 모르시는 걸까? 어떻게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지?’
창산에서 범한이 당황해 허둥지둥하던 모습을 보지 못한 그가 경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맨 처음 소문이 퍼졌을 때 등자월을 비롯한 감찰원의 모든 관리는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놀라 당황했다. 하지만 이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정황을 살펴보던 그들은 소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지만 범 제사가 경도에 온 뒤의 행적을 볼 때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섭가의 후손이 아니라면 원장 대인이 제사 대인을 특별히 아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섭가의 후손이 아니라면 범 상서가 자기 아들에게 황실 금고를 넘겨주려고 그렇게 애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별다른 반응은 없습니다.”
정원을 비추는 눈 부신 햇살에 집중력이 분산되어 있던 등자월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행동이 부주의했다는 생각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여 설명했다.
“각 관아의 반응은 아주 명확합니다. 도찰원에서 몰래 연락한 것 같지만 지난번 일로 상당한 손실을 본지라 이번에는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것 같습니다. 다만 몇몇 부에서 관리들이 움직이려는 조짐을 보이지만 소문만 있지 뒷받침할 증거가 없어 상소를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범한이 물었다.
“동궁의 반응은 어떠한가?”
등자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궁과 가까운 관리들은 사태의 추이를 살피려 하는 반면, 어제 몇몇 대신들의 부인은 입궁해 황후를 만났다고 합니다. 부인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해당 대신들이 몰래 만났다고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황후라고?”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서려 하지도 않는데 황후 쪽에서 알아서 나서려는 건가? 황후에 펄쩍펄쩍 뛰겠지만 황태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오늘에 이르러서야 범한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힘 중에서 확실한 건 오죽과 최후에 쓸 비장의 패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 사건은 자신에 대한 폐하의 신임과 진평평과 아버지의 계획에 기대 넘길 수 있었지만 이후에도 그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면 안심할 수 없었다.
* * *
황궁 함광전 안에서 운 흔적이 역력한 황후가 황태후 침대 옆에 앉아 손을 잡으며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그 아이를 어떻게 할지 말해 주세요.”
황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뭘 어떻게 한단 말이냐?”
황후가 분노에 찬 얼굴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번에 범한을 만났을 때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요사스러운 년의 아들이라서 그랬던 겁니다! 황상······ 황상께서도 참 모지시지. 지금까지 저를 속이고 그 요사스러운 년의 아들을 남겨 두시다니!”
황태후가 황후의 헝클어진 머리를 어루만져 주며 위로했다.
“이미 오래전 일이라서 생각이 안 나는 것이냐? 황상은 그 아이에게 어떤 명분도 주실 수 없는데 뭣 때문에 싸우려 하는 거니?”
지금 함광전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꾸벅꾸벅 졸며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홍 태감을 제외한 모든 태감과 궁녀들은 함광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황후가 눈물을 떨어뜨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고모께서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잊으신 겁니까? 비록 황상께서 인정하려 하시지 않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당시 그 요사스러운 여자를 죽인 일 때문에 줄곧 원망을 품고 있는 것 아닙니까?”
황후의 말에 황태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뒤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입 다물어라! 황궁 안에서는 나를 고모가 아니라 황태후마마라고 불러야 하는 거다! 뻔뻔스럽게 그때의 일을 들먹이다니. 질투심에 사로잡혀 네 아버지에게 사람을 죽여 달라 부추기는 바람에 집안도 말아먹은 것이······. 황상이 몇 달 전에 알려 줘서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범건 집안사람이 조금이라도 대처가 늦었다면 수십 명의 목숨이 날아갔겠지. 너는 그 여자를 죽인 것도 모자라······ 범한까지도 죽이려 했을 테니까!”
황태후가 황후에게 바짝 다가가서는 귓가에 대고 차갑게 말했다.
“절대 잊지 말거라. 범한이 그녀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 애의 몸속에 황상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그 애가 어느 위치에 있든 그 애는 우리 황실의 혈육이야. 네가 그 애를 죽이려 한다면 내가 너를 어떻게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야.”
잔뜩 겁에 질린 황후는 몸을 떨며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황태후의 당당한 얼굴을 바라봤다.
‘태평 별궁에 쳐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묵인하셨잖아요. 왜 이제 와서 인정하려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마치 황후의 생각을 읽은 듯 황태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 절대 입 밖에 내지 말고 무덤 속까지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황후가 예의 없이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황태후를 노려보았다.
“이제 보니······ 항상 당당하던 황태후께서 자기 아들을 무서워하고 계셨군요.”
황태후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차가운 눈빛을 지으며 황후를 노려보고는 말했다.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아끼는 거야. 나는 황상이 그때처럼 슬픔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고 경도 피의 달 사건이 다시 재현되는 것도 원치 않아. 황실 혈통의 자손이 가뜩이나 부족하고 왕공 귀족들도 많이 절손된 상황에서 더는 황실 혈통이 죽는 걸 용인할 수 없다.”
잠시 생각하던 황후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용인할 수 없다고요? 가여운 제 아버지와 형제들은 왜 모두 죽어야 했습니까? 범한이 섭씨 요녀의 아들이라는 게 밝혀진 상황에서······ 조정에 아무런 뜻도 내비치지 않으실 겁니까? 조정과 외부에서 제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실 생각입니까? 섭가가 어떤 곳이었습니까? 섭가는 모반을 꾸민 곳입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황가가 체면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그러자 황태후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피곤하니 그만 가도록 해라. 누가······ 범한이 섭씨 여인의 아들이라고 그랬다는 것이냐? 나는 우매한 백성들이 꾸며낸 이야기는 믿지 않아.”
절망한 황후가 소매 안에서 쥐고 있던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억지로 일어나 황태후에게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황태후의 한기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몇몇 대신들의 부인을 만났다지? 곧 있으면 설 명절이니 황궁에서 준비해야 할 일이 많네. 그러니 후궁들이나 잘 이끌고 황궁 밖 일은 신경 쓰지 말게나. 그럼 가보게.”
황후가 몸을 돌리고 다시 인사를 한 뒤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뒤 황태후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하얗게 센 머리를 매만지며 홍 태감에게 지시했다.
“가서 지켜보도록 하게. 요 몇 년 사이에 성미가 갈수록 고약해지는 것 같아. 이 일로 황상의 마음이 어지럽혀져서는 안 되네.”
홍 태감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귀신처럼 조용히 함광전을 빠져나갔다. 이후 끼익 소리가 들리더니 지시를 받은 태감과 궁녀들이 황태후의 시중을 들기 위해 재빨리 들어왔다.
궁녀가 빗을 들고 은백색 머리를 조심이 빗어 내렸다. 황태후가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탁자를 손으로 치자 엉킨 머리를 빗고 있던 궁녀는 화들짝 놀랐다. 궁녀가 뽑혀 버린 머리를 보고는 혼비백산해서는 무릎을 꿇고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일어나거라.”
황태후가 눈을 반쯤 감은 채 궁녀를 바라봤다.
“나는 실수도 용서하지 못할 만큼 아량이 없는 사람이 아니야.”
그녀는 마음속에 치솟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황제가 자신에게 황후를 통제해 달라 요청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경도 피의 달 이후 관련된 사람이 거의 죽은 상태였지만, 범한이 섭가 여사장과 황제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된 황후가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황자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섭가를 떠올리자 황태후는 태양혈이 움찔움찔 떨리면서 두통이 몰려왔다. 황태후는 당시 섭가 여사장이 경국 황실에 저주를 불러올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녀가 황상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과거 섭가에 닥친 일은 황태후에게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직접 진실을 듣게 된 이후 그녀는 범한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친모가 섭가 여사장이라는 게 떠올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범한이 입궁할 때마다 일부러 피하며 만나 주지 않은 이유도 황태후로서 마땅히 보여 줘야 할 인자한 모습을 그에게는 보여 줄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범한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녀는 황후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황후에게 범한은 섭가의 후손으로 철천지원수의 자식이었지만 황태후에게는 달랐다. 그녀에게 섭가 여주인은 백번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요녀이자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리려 한 오만방자한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은 어쨌거나 황실의 혈통이었고 자신의 친손자였다.
깊은 밤 홍 태감이 함광전 밖에 있는 작은 집에 돌아간 걸 확인한 황후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옆에 있던 궁녀에게 눈짓하자 그동안 조용히 있던 황태자가 앞으로 다가와 예를 갖춰 문안을 올렸다.
아무도 엿듣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던 황후의 말이 흥분해 점차 빨라졌고 황태자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후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 끝에 황태자가 위로했다.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그냥 상인의 후손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냥 상인이라고요?”
황후가 냉소를 지었다.
“섭가 여사장이 평범한 상인이었다고 알고 있는 겁니까? 그 여자는 불길한 요물이었습니다!”
황후가 황태자를 노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범한은 황상의 아들입니다.”
338화
깊은 밤 황궁 안에 불길한 침묵이 감돌았다.
황후의 말에 너무 놀란 황태자는 다리의 힘이 풀려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황후마마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황후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가 놀란 듯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범한은 황상과 섭씨 요녀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입니다.”
동궁 황태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개를 너무 흔들어 어지러워지자 힘없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
순간 자신의 아우가 어려서부터 민가에서 자랐다는 생각에 황태자는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경도에서 언제든지 자주 볼 수 있는 그 아우는 황태자인 자신보다 명성도 높았고 손위 쥔 권력도······ 자신에게 뒤지지 않았다.
순간 위압감을 느낀 황태자는 마음속에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소자에게 아우가 하나 더 있었군요.”
황후가 멍한 표정으로 제 아들을 바라봤다.
그때 황태자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범한은 소자와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고 출신이 좋지 못해 위협이 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전하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요?”
황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웃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범한의 친모의 죽음은 저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범한이 전하가 황위에 앉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그리고 범한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용상에 오른 다음 범한을 내버려 둘 수 있으십니까? 결국 범한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하가 용상에 오르지 못하게 할 겁니다.”
황후의 목소리는 황궁의 몰락을 재촉하는 저주같이 들렸다.
“그러니 준비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물론 이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황궁에 있는 황자들이 범한의 정체를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와 둘째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황후의 뜻을 이해한 황태자의 안색이 변했다.
“밖에서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라 계속 떠드는데도 부황께서 어떤 조치도 취하시지 않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하지만 부황께 총애를 받는 데다가 범씨 집안과 진 원장이 그를 지지해 주고 있는데 소자가 어찌 건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황후가 차가운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봤다.
“지금이야 건들 수 없지요. 저희가 가진 힘이 너무 약해서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은 순종하는 척하면서 민가에 사는 아우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절대 잊지 마십시오. 참고 견디셔야 합니다. 오늘부터는 참고 견디면서 무슨 일도 하지 마세요. 춘시 사건을 보니 전하의 말이 맞았습니다. 황상의 뜻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황상께서 전하를 신임하시니 범한도 함부로 전하를 건들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미래를 생각하며 견디고 버텨야 합니다. 분명 언젠가는 길이 보일 겁니다.”
황태자는 황후의 생각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동이 틀 무렵.
죽집 안에서도 사람들은 범씨 집안과 섭가의 관계에 대한 소문에 대해 떠들었다. 백관들의 동향을 감시하는 감찰원 1처는 잔뜩 경계한 채 이러한 상황을 주시했고, 범씨 집안은 겁에 질린 것처럼 침묵을 이어 갔다.
황제도 황태후도 이 일로 골치가 아팠지만 범 상서만은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관아에 도착한 그는 담소를 나누며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진평평은 진원에 돌아가지 않고 감찰원에 머무르며 흐릿한 두 눈으로 경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감시했다.
거리에서는 빗자루로 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비개가 내려준 처방대로 약을 복용한 범한은 손에 들린 이름도 없는 무공 비결을 바라봤다. 상권은 이미 수련을 완료했고 하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정기가 모두 사라지고 경맥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하권에 나와 있는 대로 정기를 운행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도 침착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퍼져 나간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고 또 이 일로 자신이 책임질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어머니에 대한 황실의 두려움이 강렬해서 자신이 건륭(乾隆) 황제의 서자라는 소문이 났던 복강안(福康安)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해도 자신이 신경 쓸 게 뭐가 있겠는가. 기껏해야 서로 싸우고 죽일 수밖에. 만약 체내에 정기가 없는 상황에서 황제의 명령으로 감찰원, 계년조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면 자신은 아주 위험한 상황에까지 몰릴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아마 어머니의 뜻을 배반하고 스승의 뜻에 따라 독약을 사용해 사람들을 죽이거나 저격 총으로 종사들을 죽여야 할 수 있었다.
섭류운이 경도에 없고 군대는 소수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으니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쉽사리 붙잡히지 않을 터였다. 이때 범한은 오히려 마음이 더욱 차분해지면서 점차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섭경미란 이름의 여자아이는 눈먼 맹인과 상자를 가지고 세상에 대적하려 등장했었다.
세상과 적이 된 기분은 분명 약간은 긴장되고 약간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물론 가장 좋은 결과를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자신은 범씨 집안의 이익과 아버지와 누이, 아내의 안전을 신경 써야 했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생사도 고려해야 했다. 그렇기에 지금 범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고 그가 하려는 일들은 반드시 현재 권력과 지위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찾아온 사람이 없었다. 평소 범씨 집안과 관계가 긴밀한 사람들도 모두의 이목이 쏠린 범씨 집안에 찾아와 안부를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이상했던 점은 정왕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계년조가 보고한 소식에 따르면 평소 정원을 가꾸는 걸 좋아하는 정왕은 호미와 거름통도 내팽개쳐 둔 채 집 난간에 기대 술을 마시며 울고만 있단다.
한편 평소 범한과 친분이 두터운 신기물, 임소안 등과 같은 관리들도 조심히 동태를 살피며 이 소문에 대한 조정의 반응을 기다렸다. 즉 아무도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황궁 안.
몸에 딱 맞는 홑옷을 입은 영 재인은 따뜻한 겨울 햇볕 아래서 말라 버린 큰 거목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건 그녀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었다. 과거 동이성 포로였던 그녀는 황실 사람이 되었음에도 몸을 쉬게 할 줄 몰랐다.
옆에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1 황자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한숨 쉬었다.
“어머니, 무슨 일입니까?”
황궁 밖에 자신의 저택을 가지고 있는 1 황자는 서쪽을 정벌한 공으로 황자 중에서 처음으로 친왕에 봉해졌기에 황궁 안에서 머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황실의 복잡한 규정 때문에 입궁해 어머니를 만나려면 상당히 귀찮은 절차를 거처야 했다. 그런데 오늘 영 재인은 그런 복잡한 규정들을 모두 무시하고 자신의 친아들을 황궁에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부른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멍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나무 주위만 돌고 있었다.
1 황자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급히 당부할 일이 있기에 규정 따위는 무시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받으면서까지 불러들인 것이라 생각했다.
‘설마 경도를 시끄럽게 만든 소문과 관련된 건가?’
“범한과 관련된 소문을 들어 봤습니까?”
마침내 걸음을 멈춘 영 재인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물었다.
영 재인의 진지한 표정을 본 1 황자는 속으로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을 하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소자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터무니없고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도 없습니다. 부황과 황태후마마께서 몇몇 소인들이 지껄이는 헛소문이라 생각하시니 소자도 믿지 않습니다.”
영 재인이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제가 봤을 때는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믿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잔뜩 화가 난 그녀가 씩씩대며 손바닥으로 돌 탁자를 쳤다.
“진 원장이 소문이 퍼지는 걸 굳이 막으려 한 이유를 모르겠습니까? 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이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일로 범한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정신없이 소리치던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리며 중얼거렸다.
“범한? 그 여자의······ 아들이 범한이었던 거야.”
1 황자는 어머니가 말하는 여자가 누굴 지칭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바로 당시 경국이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마지막에는 처량하게 죽임을 당한 섭가 여사장이었다. 어머니의 뜻을 추측하던 그가 물었다.
“무슨 말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영 재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동이 사람들은 은혜와 원한을 분명히 하는 걸 중요시 생각합니다. 폐하께서는 섭가의 공로를 생각해 넘어가 주실지 몰라도 동궁은······ 분명 범한을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1 황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싸움을 잘하는 장군이자 용맹한 사내대장부였지만 영 재인 앞에서는 더없이 순종적인 고양이 같았다. 그가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대답했다.
“어머니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일이 안 좋게 흘러간다면······.”
영 재인의 눈빛에서 단호함과 용맹함이 엿보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한의 목숨을 보호해야 합니다.”
1 황자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의견을 거역해 본 적이 없었기에 즉시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속 의문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는 경도 피의 달 사건 때 자신의 어머니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가 범한을 이처럼 보호하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이 안 좋게 흘러가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까지 생긴다면······ 그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진 원장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북쪽 산속에서 폐하와 저는 살아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 재인이 담담하게 당시 일을 털어놓았다.
“그때 일은 황자도 알고 계시지요. 그렇게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지만 포로였기에 황궁에서 목을 매고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만약 섭가 여주인이 말하지 않았다면 황자나 저나 이미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었을 겁니다.”
영 재인이 깊이 숨을 들이켰다.
“범한의 생모는 우리 모자를 구해 준 은인입니다. 당시 그녀에게 일이 생겼을 때는 황자가 너무 어려 아무런 힘도 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해 반드시 범한을 보호하십시오.”
정원 안은 조용했다. 겨울날 부드러운 햇살이 영 재인을 비췄다. 은혜를 받았으니 갚아 줘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하다 못해 순진무구해 보일 정도였다.
“만약 부황께서 범한을 살려 두려 하지 않으시면 어떡합니까?”
1 황자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소자가 금군을 장악하고 있긴 하지만 큰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혼인을 앞둔 황자에게 어찌 어미가 모험을 무릅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 재인이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폐하의 입장은 신경 쓰지 말고 동궁의 동태만 신경 쓰십시오.”
곰곰이 생각하던 1 황자는 뭔가 알아차린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직설적이고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단순히 섭가의 후손이라면 부황께서 범한을 내버려 두실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가만히 계시는 걸 보면······ 한 가지 이유밖에는 없습니다!”
영 재인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눈치채셨군요.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범한에게 당시 모반에 대해 죄를 묻지 않는 것이나 황태후께서 침묵을 유지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지요. 범한이 섭가 여사장의 아들이자······ 그분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황자인 것이지요.”
그 말을 들은 1 황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 마음을 추스른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범한이 정말 부황의 아들이라면 왜 범 상서가 키운 것입니까? 이게 만약 진실이라면 부황은 왜 범한을 담주로 보낸 것입니까?”
영 재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황궁에서 가장 힘이 있는 두 여인이 범한의 생모를 뼈에 사무칠 정도로 미워했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런 말이 제 어머니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1 황자가 눈을 끔벅이며 바라봤다.
“어머니께서 범한의 신분을 밝혀내신 걸 보면 황궁 밖에 이미 소문이 퍼져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추측은 추측일 뿐이지요.”
영 재인이 옷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며 대답했다.
“이 일이 원장 대인의 뜻에 따라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처리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황상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해결해 주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니 황상께서는 자기 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339화
황제는 범한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까. 이건 최근 며칠 동안 경도 관리들과 백성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들려오는 소문이 진실이라면 범한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힐 것이었고, 거짓이라면 황궁에서 하사품을 내리거나 위로를 하는 등의 방법을 이용해 소문을 잠재울 것이었다.
소문이 퍼질수록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감찰원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범씨 가문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모습을 볼 때 범한은 섭가 여사장의 자식이 맞는 것 같았지만 황궁에서 그를 체포하러 올 기미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일이 상당히 재미있게 변해 가고 있었다.
황제는 침묵했고 황실도 침묵을 유지하자 사람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눈치껏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도찰원 어사들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주문을 올려 경도에 퍼진 소문에 대해 말했지만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런 추측들은 결국 용맹하지만 머리는 나쁜 어느 관리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에 조정에 큰 풍파를 불러왔다.
이 용맹하지만 머리는 나쁜 관원의 성은 모(毛), 이름은 열량(閱良)이었다. 육과급사중인 그는 상주문을 심사해 부당한 말에 반박하고 교정하는 일을 했다. 성격이 직설적이고 거칠어서 조정의 체면이 손상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 어리석은 관리는 안타깝게도 눈치가 없었다. 범한의 정체에 대한 소문이 경도에 퍼지는 걸 동료들이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이유를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폐하 앞에서 사실이 아닌 헛소문이 퍼지는 걸 엄히 질책하고 범 제사의 고결한 명성을 지켜 줘야 한다고 소리쳤다.
이에 황제가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깨끗한 자는 깨끗함이 드러나는 법이고 더러운 자는 더러움이 드러나는 법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는 말에 끼어들어 체면을 잃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모열량은 물러나지 않고 범 제사의 명성이 손상됐으니 제대로 밝혀야 한다고 우겼다. 소문이 거짓이라면 조정이 공문을 반포해 질책하고, 진실이라면 경국 법률대로 조정을 속인 범 제사와 이에 결탁한 범씨 가문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이다.
여기에서 끝났으면 아무 일 없었겠지만 그는 기어코 해서는 안 될 말을 입 밖에 내뱉었다.
“소문이 너무나도 황당해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폐하께서는 조정의 체면을 고려해 범씨 부자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아울러 작은 범 대인은 감찰원 제사와 황실 금고 관리를 담당하기에는 부적합해 보이므로······.”
그의 어리석은 주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같이 화가 난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위에게 모열량에게 곤장 스무 대를 때리라고 명령했다. 만약 마지막에 황태후가 나서서 용서해 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멍청한 육과급사중은 황제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가 분노한 이유와 황태후가 나서서 보호해 준 이유가 그가 신양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모친과 누이가 자신의 아들들과 힘을 합쳐 연합하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려는 수사자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며 고집스럽게 범한의 관직과 작위를 지켜 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황궁 안 사정을 모르는 관리들은 곤장을 치라고 소리치는 황제의 모습에 경악하며 황제가 황자들보다도 범한을 더 총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황제가 이 일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부족했던 사람들의 상상력은 이 일로 자극을 받아 풍부해지기 시작했고, 이미 통제 범위를 벗어난 범한에 대한 소문은 누군가가 가장 싫어할 만한 방향으로 점차 흘러갔다. 이러한 상상력의 배후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노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한차례 폭풍과도 같은 소문이 불어닥쳤던 경도에는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소문이 곳곳에 퍼져 나갔다. 백성들과 관리들이 소곤거리는 이 소문은 더 신비하고 조심스럽고 흥분되는 것이었다.
“혹시 작은 범 대인이 우리 경국 황제의······ 서자라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그대로 찍어 놓은 것처럼 닮았다고 하던데.”
“폐하의 용안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야······ 예상하는 거죠. 하지만 작은 범 대인은 지혜도 깊고 문예와 무예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시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총명하신 황제 폐하의 자식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다만······ 범 상서를 생각하면 좀······.”
“그렇죠. 범 상서가 불쌍하죠. 범 상서 명성에 좋을 게 없는 일이니까.”
* * *
신양 이궁.
장 공주의 그려 놓은 듯 아름다운 눈과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일에 빈틈이 없다고 자부하는 이 기묘한 여자는 연이어 터진 소문에 자신이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 오라버니는 분명 내 뜻을 의심하고 계실 거고 그 범한이란 녀석은······.’
“내가 원 선생의 의견을 무시하는 게 아니었어.”
장 공주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작은 범 대인이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인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첫 번째 소문이 천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면 두 번째 소문은 아무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내용입니다.”
황의와 함께 신양에서 수석 모사를 맡은 원굉도가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제가 공주께 잠시 자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라는 소문에 수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으로 이와 같은 추측이 난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터진 데다가 상황도 시시각각 변했으니 저희가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당연한 흐름입니다.”
장 공주는 최씨 집안을 잃어 되돌릴 수 없는 손해를 입은 상태였다. 사위의 진짜 능력을 실감한 그녀는 화가 치솟아서 평상시와 같은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범한과 관련된 소문이 들려오자 그녀는 고민하지도 않고, 심지어 원굉도의 강력한 반대도 무시한 채 이 일을 이용해 범한을 끌어내리려 했다.
다만 신양과 경도 사이의 연락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터라 그녀는 황태후와 아둔한 척하는 육과급사중의 입을 빌려 황제에게 범한의 직위를 박탈하라고 종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두 번째 소문이 바로 터졌다.
범한이 황제의 서자라니?
누군가가 마음대로 추측해 낸 소문이었지만 듣자마자 진실이라 확신한 장 공주는 자신의 아둔함에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그녀는 자신이 가진 힘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황제 폐하의 심기를 건드려 범한이 쉽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주고 말았다.
밀려오는 후회가 경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독사처럼 괴롭혔다.
“섭경미······.”
두통에 그녀가 신음하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내 평생 그녀를 이겨 본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그녀의 아들까지 이렇게 쉽게 나를 짓밟는구나.”
* * *
경도 깊은 밤.
오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오죽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범씨 가문 저택 뒤쪽 작은 골목에 나타났다. 골목 끝에 있는 국수 가게에 켜진 등잔이 겨울바람에 움츠러들었고 평상복을 입은 사내는 가게 밖 걸상에 앉아 있었다.
걸상에 앉은 사내 앞에는 국수 그릇이 놓여 있지 않았다. 얇은 옷을 입고 있음에도 전혀 추워하지 않는 사내는 무표정했다. 그의 얼굴은 원래부터 표정이 없는 듯 기괴스러울 만큼 평온했고 차갑고 무정한 두 눈은 세상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오죽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차가운 바람에 얼굴을 덮은 검은 천이 흔들렸다. 그가 오른손을 천천히 움직여 허리춤에 끼워 둔 쇠막대기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국수 가게를 향해 걸어갔다.
국수 가게 사장은 심상치 않은 상황은 느끼지 못한 듯 국수 뽑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장의 얼굴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고 등은 고된 일에 굽어 있었다. 한편 국수 가게에 앉아 있는 사내는 무명으로 만든 얇은 황갈색 반소매 옷을 입고 있었는데, 경도 남쪽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복장이었다. 오죽의 발걸음을 들은 그는 눈만 깜빡일 뿐 차가운 눈동자나 무표정한 얼굴에 조금의 동요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걸상에서 일어났다.
무명옷을 입은 남자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검날이 곧게 뻗은 직도였다. 그가 팔을 빠르게 휘두르자 검 끝에서 바람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국수 가게 사장의 목덜미에서 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에서 나온 시뻘건 피가 국수 삶는 솥으로 쏟아졌다.
이어서 가을에 나뭇가지에 열린 과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국수 가게 사장의 머리가 솥 안으로 떨어졌다. 펄펄 끓는 솥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아무런 징조도 경도도 없이 순식간에 국수 가게 사장이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제 국수 가게에는 머리 없는 사장의 시신과 시뻘건 핏물을 펄펄 끓고 있는 솥만 남아 있었다. 겨울밤 꺼질 듯 말 듯 한 등잔에 비친 모습치고는 무시무시하고 기괴스러운 장면이었다.
이때 오죽은 무명옷을 입은 남자와 석 장 정도 거리만 남겨 둔 상태였다. 검은 천 밖으로 드러난 얼굴은 무고한 사장의 죽음에도 별일 아니라는 듯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남쪽에서 왔군.”
오죽이 고저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명옷을 입은 남자가 직도를 천천히 거둬들이며 차가운 두 눈으로 오죽을 주시했다. 그의 눈과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지만 극도로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규정대로 순찰하다가.”
무명옷을 입은 남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네를 찾으러 왔네.”
“범한을 죽이러 온 거겠지.”
“자네가 고의로 소문을 퍼뜨렸으니.”
“남쪽에서 자네를 찾을 수 없었네. 그러니 자네가 직접 나타나도록 할 수밖에.”
오죽이 죽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차갑게 그를 노려봤다.
“범한이 그분의 아들이라는 걸 안다면 죽이러 달려올 줄 알았거든.”
무명옷을 입은 남자가 눈썹을 씰룩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 코 입은 움직이지 않은 채 벌레가 꿈틀대는 것처럼 눈썹만 움직이는 모습이 이질적이고 기괴했다.
“자네가 나를 불러들인 거군.”
무명옷은 입은 사내는 어째서 범한이 섭경미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듣고 단박에 그를 죽이러 경도에 온 걸까? 오죽과 무명옷을 입은 사내는 서로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오죽은 상대가 범한의 정체를 알면 경도로 들어와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를 걸 알았기에 일부러 범씨 집안 저택 밖에서 기다렸다. 최근 경도를 시끌벅적하게 만든 소문은 오죽이 일부러 누설한 거였다. 그는 고하에게 넌지시 진실을 알려 줌으로써 멀리 북쪽에서부터 소문이 나게 만들어 자신의 흔적을 완벽히 지워 버렸다.
오죽이 이처럼 완벽한 계획을 세운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지금 앞에 서 있는 무명옷을 입은 남자를 경도로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럼 무명옷을 입은 남자는 누구일까?
* * *
수개월 전 경국 남쪽 해안선에 나타난 이름 없는 남자는 사방팔방 맹인을 찾아다니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그렇게 그는 지금까지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을 본 모든 사람을 죽였다.
그는 바로 범한과 언빙운이 항상 걱정했던 남쪽에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다.
형부에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자 감찰원이 기이하고 수상한 살인 사건 조사에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을 뒤쫓는 과정에서 감찰원 관리들이 연이어 죽어 나간 것이다. 현재까지도 범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언빙운이 지난번 범한에게 고달을 비롯한 호위들을 빌려 남쪽으로 보내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처음 출현했을 때 그는 세상의 행동 방식과 규칙을 몰랐기에 필요치 않게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이후 조금씩 여러 가지 것들을 이해하게 된 그는 산발이었던 머리를 빗어 상투를 튼 뒤 어느 집이든 다 있는 짚신을 신고 경국 무인들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직도를 차고 다녔다. 무명옷을 입은 것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340화
오죽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뎌 국수 가게에 가까이 다가갔다.
“자네를 찾아 남쪽으로 갔는데 찾을 수 없었네.”
그러자 무명옷을 입은 남자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나도 남쪽에서 자네를 찾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네.”
오죽은 맨발이었고 무명옷을 입은 남자는 짚신을 신고 있었다. 오죽은 머리를 뒤로 꽉 묶고 있었고 무명옷을 입은 남자는 상투를 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입고 있는 옷이나 얼굴은 달랐지만 분위기는 상당히 비슷했다. 아마도 누군가가 지금 두 사람을 보았다면 무정한 살인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둠 속에 숨어서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두 사람은 상대가 먼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서로를 찾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먼저 찾으려 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사냥꾼과 호랑이 사이의 대결에서는 누가 먼저 발견하느냐에 따라 누가 이 세상에 남을지가 결정되는 법이었다.
“내가 남쪽에 있다는 걸 누가 알려 줬군.”
무명옷을 입은 남자는 오죽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다른 말을 했다.
“흔적을 남겨서는 안 돼.”
“그분은 이미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겼어. 신묘로 돌아가게. 나는 자네를 죽일 생각이 없어.”
무명옷을 입은 남자는 오죽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줄곧 신봉해 오던 도리와 충돌하는 듯 그의 차가운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일반 사람이라면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그럼 자네도 나와 같이 돌아가지.”
“나는 잊어버린 일들이 있어 떠오르길 기다리는 중이네.”
억양의 변화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한 무명옷을 입은 남자와 달린 오죽의 목소리는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말투는 상당히 이상했다. 조금만 주의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다면 이들이 의문문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거나 자신의 논리적 판단 능력에 확신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뛰어난 사고력을 지닌 것인지 두 사람은 일반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두 사람은 최후의 담판을 진행하는 듯 입술은 움직이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담판이 결렬되자 오죽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뎠다.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무명옷을 입은 남자가 물러서지 않고 무표정하게 쇠막대기를 쥐고 있는 오죽의 손을 바라봤다. 그 창백한 손에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때 가게 안에서 치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국수 가게 사장의 머리가 떨어진 솥에서 시뻘건 거품이 치솟더니 아궁이 아래로 흘러넘친 것이다. 흘러내린 물이 불붙은 숱에 닿으면서 소리를 내었고 순식간에 코를 찌르는 연기가 자욱하게 일었다.
오죽이 마침내 움직였다. 그가 눈을 덮은 검은색 천이 실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더니 손에 든 쇠막대기를 날카롭게 부러진 겨울 대나무처럼 무명옷 입은 남자의 가슴을 찔렀다.
이상하게도 오죽은 평상시와 다르게 목이 아닌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직도를 들고 있는 무명옷을 입은 남자의 손도 움직였다. 두 사람이 거의 같은 힘과 속도로 충돌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오죽과 무명옷을 입은 남자가 맹렬한 기세로 부딪쳤다.
두 사람의 속도는 너무나도 빨라서 사람의 눈으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눈 깜빡할 사이에 한차례 겨룬 뒤 대치하고 서 있었다.
두 사람에게만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빠른 공격은 상처 입기 전 범한이나 6처 그림자 검수, 심지어 해당타타까지도 반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죽었을 것이다. 이런 경지는 4대 종사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실력이었다.
이렇게 빛처럼 빠른 공격이 이뤄짐에도 불꽃이 번쩍이기는커녕 오히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오죽의 옆구리에 박힌 칼날을 타고 무언가가 땅에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쇠막대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무명옷을 입은 남자의 가슴을 관통했다.
오죽은 먼저 움직인 터라 속도가 상대보다 아주 약간이지만 빨랐기에 두 사람이 충돌할 때 왼쪽 무릎을 굽힐 여유가 있었다. 아주 간발의 차였지만 치명적인 차이였다.
그는 간발의 차이로 한쪽 무릎 꿇은 뒤 손에 든 쇠막대기를 치켜들어 상대방의 가슴에 꽂았다.
그때 골목 뒤편 정원에서 인기척이 작게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오죽과 무명옷을 입은 남자에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두 사람은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것처럼 무심하게 상대방의 몸에 꽂혀 있는 무기를 거둬들였다. 이때 무명옷을 입은 남자의 가슴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어딘가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중상을 입었음에도 무명옷을 입은 남자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지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멍하니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자신이 오죽보다 느렸던 이유를 생각했다.
일격에 적을 제압하면서 중상을 입게 된 오죽도 마찬가지로 무표정했지만 입가에 희미하게 감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상대방이 이 세계에서 더는 생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상대보다 빠를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계획해 둔 덕분이었다. 범한의 신분을 폭로해 상대방이 오늘 이곳에 오도록 유인한 그는 신발도 신지 않고 상투도 틀지 않는 등 모든 걸 철저하게 준비해 두고 있었다.
―속세에 물들지 마라.
신묘 안에 있는 이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 * *
밤이 되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몇 개의 그림자가 담을 넘어 골목에 조용히 착지했다. 등에 장검을 차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공격할 수 있도록 대형을 갖추고 주변을 경계했다.
갑자기 골목에 나타난 사람은 범한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호위였다.
안전을 확인한 고달은 검을 거둬들이고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국수 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피로 물든 솥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람의 머리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어서 그는 머리가 잘려 나간 시신을 살펴보고는 저도 모르게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상처를 봤을 때 머리는 아주 빠른 일격에 잘려 나간 게 틀림없었다.
눈이 옷을 뚫고 목에 들어온 것인지 순간 고달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면서 소름이 돋았다. 그는 만일 자신이 이런 상대를 만났다면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죽었을 거란 걸 알았다. 주변에 남은 흔적을 보면 두 명이 싸웠고, 그것은 이와 같은 신묘한 경지에 있는 사람이 두 명이란 소리였다.
눈발이 점차 거세지면서 솥에 있는 핏물의 온도도 내려갔고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차가워졌다. 골목에 있는 작은 국수 가게의 광경은 너무도 처참했다. 죽은 사장의 시신은 널브러져 있었고 식어 버린 솥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눈 내리는 밤 작은 골목에서 종사는 아니지만 종사급 실력을 갖춘 두 명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니. 이건 천하에 다시는 없을 기묘한 사건이었다.
야간 근무를 서는 감찰원 관리가 꾸벅꾸벅 쪽잠을 자고 있었다. 추운 겨울밤에 보는 감찰원 건물은 더욱 음산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놀라 일어난 관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리며 잠을 쫓았다.
감찰원에는 당직을 서는 관리들이 많았다. 더구나 요 며칠 범 제사 일 때문에 진 원장도 진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감찰원에 머무르며 모든 것을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 진 원장이 자신이 잠든 모습을 본다면 좋을 게 없었다.
한편 진 원장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사실 그는 최근 몇 년간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방 안 난로에 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음에도 연신 무릎에 덮은 양털 담요를 가슴까지 끌어 올렸다.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기척에 깬 진평평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남자를 바라봤다.
“여긴 어쩐 일인가?”
오죽이 옆구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걸 보고는 그가 흰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나 슬픔이 아닌 경악과 공포가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인가?”
‘오죽이 상처를 입다니 대종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데.’
그러면서 진평평은 속으로 지금처럼 골치 아픈 상황에서 적이 대종사의 도움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감당할 수 없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가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오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림자를 다시 부르게. 내가 상처 입힌 존재는 내가 남쪽에 있다고 알고 있었네. 범한이 죽으면 경국도 망할 거네.”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 세 가지 말만 남긴 그는 앞에 있는 절름발이 노인이 자신의 뜻을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 입은 상처 때문에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어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신속하게 감찰원에서 빠져나갔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은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다. 난로의 붉은 불이 도깨비처럼 타오르면서 창백하고 핼쑥한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오죽이 남긴 세 가지 말에는 아주 중요한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먼저 그림자를 다시 부르라고 한 것은 자신이 심각한 부상을 입어 더 이상 범한을 보호할 수 없으니 진평평에게 약속대로 그림자를 시켜 범한의 안전을 보호해 달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오죽에게 상처를 입힌 그 사람도 이미 죽은 거로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오죽의 성격상 자신의 상처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범한을 지키기 위해 경도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오죽에게 상처를 입힌 것일까? 만약 대종사 중에서 이런 짓을 했다면 오죽이 굳이 상대방의 정체를 숨기려 하지 않았을 테니 대종사들은 아니었다. 진평평은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지금 하는 추측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이지만 지금까지 증거를 찾지 못한 것이었다.
오죽이 범한을 엎고 경도를 떠나던 그날 밤 오죽과 진평평은 어떻게 하면 범한을 이름 없는 위협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다만······ 신묘는 왜 오죽이 남쪽에 있다고 알고 있었던 거지?’
진평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모든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범한이 경도에 오고 2년 동안 진평평은 여러 번 오죽의 행방을 물어봤었고 그때마다 범한은 오죽이 남쪽에서 섭류운을 찾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진평평 말고 이 거짓말을 아는 사람은 그가 예전에 보고했던 경국 황제뿐이었다.
오죽의 두 번째 말은 진평평에게 이 점을 상기시킨 것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 말은 엄연한 위협이자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었다.
“폐하.”
진평평이 입가 주름을 실룩거리며 한탄했다.
“항상 소신의 예상에서 벗어나 주시니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잠깐의 시간 동안 진평평은 황제의 진짜 의도를 추측하고 따져 보았다. 황제가 행방이 묘연한 신묘와 어떻게 연락을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는 오죽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일대 제왕인 그는 자신의 서자가 대종사급 실력을 가진 사람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상당히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만일 대종사 중 한 명이라도 날뛰게 된다면 조정의 통치 능력이 흔들리게 될 거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대종사 한 명으로는 황궁에 진입해 황족을 죽일 수 없었지만 지역 곳곳을 누비며 군대의 포위를 피해 각 지역의 관리들을 죽일 수는 있었다.
만일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황제는 겁을 먹고 영원히 황궁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고 성지도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었다. 연이어 죽어 나가는 관리들을 대신하려는 사람이 없고 황제의 뜻도 전달되지 못한다면 조정이 붕괴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과거 고하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북제 왕공 귀족들과 관리들을 혼자만의 힘으로 막아 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사고검은 검 하나만 가지고 수년간 동이성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검이 가진 위력으로 두 대국 사이에 낀 작은 제후국들이 존립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었다.
또 제멋대로인 듯 보이지만 가장 총명한 섭류운은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세상을 계속 여행하고 다니고 있었다. 이는 경국에서 섭씨 집안을 후하게 대접해 주며 황제가 경도 방위를 교체하고 싶다는 핑계로 그에게 더러운 술수를 선동해 달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실을 잘 아는 섭류운은 여러 해 동안 경도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천하를 정벌하려 한다면 경국 황제는 섭씨 집안을 볼모로 삼아 섭류운에게 나서라고 강요할 거였고, 북제는 만백성들의 생명을 볼모로 고하에게 지켜 달라 부탁할 것이었으며, 동이성은 사고검을 이용할 것이었다. 이에 3국은 어느 정도 균형 있는 협상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오죽은 세 명의 대종사와는 달랐다. 그는 황족의 명을 받들지 않았고 백성들을 보호할 필요도 없었다. 범한 한 사람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그는 황제의 위협이나 서로의 이익을 신경 쓰지 않았고 협상할 여지도 없었다.
341화
만약 범한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면 오죽이 미쳐 날뛸 것이고 천하는 그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었다. 그러니 오죽이 있는 한 황제는 범한을 아끼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자식에게 죄책감을 가진 아버지이자 인자한 황제인 척해 왔던 것이다.
어쩌면 황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범한을 아끼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황제인 만큼 범한이 충성심에 불타는 대종사급 종을 둔 걸 용인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신묘 사람을 이용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황제는 오죽을 제거할 방법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진평평은 이런 이유 말고도 황제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같은 다른 이유도 있을 거라 추측했다.
신묘는 지금까지 세상일에 관여한 적이 없었기에 누구도 신묘의 사람을 만난 적 없었고 신묘의 사람도 몇백 년 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만약 오죽이 신묘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면 범한과 섭가의 관계는 영원히 묻힐 거고 당시 모든 일도 잊힐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황제가 가장 바라던 결과였다.
다만 황제는 범한이 섭가의 후손이란 사실이 이렇게 빨리 알려져서 자신의 아들이 신묘의 첫 번째 표적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신묘를 이용해 오죽을 죽이려 했던 그의 계획과는 다르게 오죽은 범한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신묘의 사람을 유인해 죽였고 범한의 생명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진평평은 오죽이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약간은 슬픈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는 신묘 사람이 세상에 나왔다는 걸 알고 계시면서도 범한의 신분이 폭로된 뒤 나나 범한에게 알려 주지 않으신 건가. 폐하께서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연민하거나 동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진평평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바퀴 달리 의자를 굴려 벽난로 앞으로 가서 손을 뻗었다. 따뜻함에 하품을 하던 그가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즐기려고 벽난로를 만들었지. 무엇이든 잘하면서 왜 이번 일은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했을꼬? 아가씨 집마다······.”
* * *
동틀 무렵 경도 ‘외삼리’라 불리는 외지고 조용한 곳은 아직 어두웠지만 은은하게 둥근 건축물은 볼 수 있었다. 전부 검은 목재로 지어진 사원은 분분히 흩날리는 눈발 아래에서 더욱 세상과 동떨어져 보였다.
검은 목재로 지어진 사원은 경묘였다. 경국에서 유일하게 비밀에 싸여 있는 신묘와 소통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자 황가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원이었다.
사당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지만 경묘 대제사는 나오지 않았다. 북제 사원의 고하와 비교하면 이름 없이 묵묵히 수행하는 고행자에 불과한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휘청거리며 눈 덮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안아 들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시체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 * *
범씨 집안은 현재 앞채와 뒤채로 나뉘어 성 남쪽 방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두 저택 사이에 놓여 있는 정원에는 가짜 산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라서 나무에 피었던 꽃도 다 떨어지고 대나무와 매화 가지만 곧게 뻗어 고즈넉한 분이기를 자아냈다.
이른 새벽녘 조용한 정원 어디에선가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훅욱, 후욱, 후······욱.”
범한이 얇은 옷만 걸친 채 정원 담장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자마자 단련을 시작한 그는 호흡이 가쁘고 힘겨워 보였다. 당직인 호위 두 명과 6처 검수 몇 명이 재빨리 정원 모퉁이에 서서 아침 일찍 단련을 시작한 범 제사의 안전을 책임졌다.
멀리 서재 밖에서는 등자월과 고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범한의 모습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범한이 매일 아침 달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범한도 두 사람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매일 두 번의 수련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해온 습관이었다. 그러니 그는 부상을 입은 뒤 정기를 단련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몸을 단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힘들어도 부지런히 자신을 단련하는 것은 범한이 가진 가장 좋은 인품 중 하나였다.
뒤채에서 지내는 종들은 정원 담장을 따라 달리는 범한의 모습이 익숙한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행랑 돌계단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이를 닦고 거품을 뱉으며 수다를 떨었다. 뒤채에서는 황실 금고 최상품인 이것을 종들에게도 사용하게 했는데 범한의 결벽증 때문이었다.
열 바퀴를 돈 뒤 범한은 서재 밖 처마에 서서 양손을 허리에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저으며 놋대야를 들고 있는 여종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집안 여자들은 모두 아직 창산에 있었기 때문에 앞채에서 보낸 여종들이 범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여종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땀범벅이 된 범한을 바라보았다.
‘도련님은 왜 굳이 자기 몸을 힘들게 하시는 거지?’
여종이 놋대야를 걸상에 올려놓고는 범한에게 외투를 걸쳐 준 뒤 손가락으로 물의 온도를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아주 뜨거운 물을 준비해 오긴 했지만 날씨가 추워서 금세 식을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야에 있는 수건을 집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이고 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다음 벅벅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건에서 흘러나온 물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세수를 마친 그의 얼굴은 뜨거운 열기에 벌겋게 익어 있었지만 눈은 더 맑고 분명해져 있었다. 그가 수건을 다시 대야에 던져 넣은 뒤 옆에 있던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오늘 입궁할 거네. 자월은 1처로 가서 요 며칠 동안 감찰원에 무슨 일이 없었는지 알아보게.”
등자월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떠나자 범한은 고달을 바라봤다.
“잠깐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할 일을 전해 주겠네.”
경도에 소문이 퍼진 뒤 황실에서 자신을 해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기에 범한은 호위 네 명을 창산에서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하며 온 고달은 범한의 말을 듣고는 약간 안심하며 서재 밖에서 대기했다.
조용한 서재에 들어간 범한은 암담한 눈빛으로 의자에 앉았다. 오늘 자신의 몸 상태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체내에서 정기가 폭발한 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경맥은 여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내장 사이에 흩어져 있는 정기는 잠시 온순해져 있어 내장의 기능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기를 억지로 불러일으킬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경락이 저절로 회복되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창산에서 저택으로 돌아온 뒤 과묵해진 범한은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론하는 데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진평평과 범건, 비개 세 사람은 범한이 연달아 일어난 사건에 놀란 데다가 아직 정치적 투쟁을 감당한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범한이 며칠 동안 모든 일을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이 처리하게 내버려 둔 채 나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몸 상태 때문이었다. 오죽은 과거 그에게 이 세상에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만 믿어 온 범한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자신을 신경 써주고 아껴 줘도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해 왔다.
자신을 지켜 주는 호위, 감찰원, 계년조가 중요한 순간에 의견이 갈린다면 그가 최후에 믿고 의지할 것은 자신이 가진 무공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체내의 정기가 모두 흩어져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등딱지 안에 숨어 들어간 거북이처럼 입을 다물고 나서지 않았다. 모양은 좀 빠지는 짓이었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했다.
서재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낮게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등 대가의 부인이 탕약과 환약이 든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순간 방 안에 진한 약초 냄새가 풍겼다.
중요한 일을 맡길 만큼 신뢰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범한이 복용하는 약은 등 대가의 부인이 전담해서 준비했다. 쟁반을 책상에 내려놓은 등 대가 부인은 범한이 약을 먹으면서 급히 물을 찾지 않도록 따뜻한 차 몇 잔을 준비해 가지런히 책상에 놓았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한 손으로 탕약을 들고 한 손으로 환약을 쥔 채 설탕물에 알사탕을 먹는 것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단숨에 먹었다. 약이 워낙에 많다 보니 쉬지 않고 빠르게 털어 넣었음에도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쟁반 위에 있던 약을 말끔히 비울 수 있었다.
“많이 쓰실 텐데요.”
그 모습에 놀란 등 대가 부인은 자신이 약을 먹은 듯 연신 입을 쩝쩝거렸다. 부인은 범한이 안타까우면서도 매일 이렇게 많은 약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먹어 내는 게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감찰원 비 대인은 칼 상처도 다 나았는데 왜 이렇게 많은 약을 처방해 주시는 거지?’
범한이 그런 등 대가 부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침 식사 비용을 절약했군.”
두 사람이 함께 웃으며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등 대가 부인은 쟁반을 들고 서재에서 나갔다. 범한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스승님의 처방대로 매일 상당량의 약을 복용하면서 몸은 많이 좋아졌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해당타타가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고하가 정말 천일도 공법을 나에게 전수해 줄까?’
그가 미소 지으며 고하가 자신을 맹호로 키우고 싶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장 공주나 자신과 같은 경국 사람도 북쪽 상삼호처럼 계속해서 용맹함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 경국 조정으로서는 긴장과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셈이었다.
천일도 공법을 외부로 전수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므로 고하는 분명 신중하게 진행하려 할 것이었다. 천일도를 전수한 제자 중에서 해당타타만이 자신과 관계가 좋았으니 범한은 나중에 남쪽으로 내려간 뒤 해당타타에게 공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기대 가득한 눈빛을 지었다.
그러던 중 눈길이 앞에 줄지어 놓여 있는 찻잔에 멈춘 순간 맑은 황색 찻물이 외눈박이 괴물처럼 보였다. 자신의 이상한 상상력에 웃음이 난 그는 순간 목구멍에 쓰디쓴 위액이 치솟으면서 토하고 싶어졌다. 너무 많은 약을 순식간에 들이켠 탓이었다. 그가 재빨리 차를 마신 뒤 가슴을 쓸어내려 속을 진정시켰다. 등 대가 부인 앞에서 호탕하게 약을 들이켜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이렇게 자신을 괴롭혀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원한, 위협, 황궁, 강남과 같은 고민거리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무수히 많은 환약과 같았다. 아무리 쓰더라도 속이 괴롭더라도 전부 삼켜야만 했다.
* * *
고달은 서슬 퍼런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한 손으로는 칼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언제든지 무슨 일이 생기면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위풍당당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뭘 본 것인지 장검 손잡이를 쥔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범한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쿵 내려앉은 것이다.
‘제사 대인이 오늘 왜 저렇게 즐거워하시는 거지? 요 며칠간 발생한 일을 보면 즐거울 게 하나도 없는데.’
342화
범한이 서재에서 나오자 고달은 오늘 자신을 아침 일찍 부른 이유가 같이 대련을 하기 위해서라는 걸 깨달았다.
고달은 자신은 범한의 상대가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범한은 최근 중상을 입었기에 계속 수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의 집요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정기는 사용하지 않고 겨루기로 했다. 이건 범한이 원한 조건이었다. 체내의 정기가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고 겨뤄 보자고 한 것이다.
호위와 황궁 시위들이 현공 사당 앞 금선 국화밭에서 회수해 온 검은 비수가 맞붙었다. 두 ‘고수’가 저택 정원에서 진검 대결을 벌이자 종들이 둘러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 중 몇몇 대담한 종들은 “도련님, 힘내세요!”라고 목청껏 응원하기도 했다.
정기를 사용하지 않는 대결은 몸을 얼마나 잘 통제하고 빠르게 반응하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에 고달은 순식간에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범한의 반응 속도는 고달의 기술을 모두 무력하게 만들 만큼 빠른 데다가 정기를 사용하지 않으니 힘도 범한이 더 강했다. 고달은 범한이 자신보다 반응 속도가 빠른 건 이해하지만 힘이 강하다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힘들게 무술을 연마해 온 자신이 제사 대인보다 힘이 약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범한이 가진 어마어마한 배경까지 생각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전력을 다하는 걸 주저하게 되었다. 이 때문인지 몇 번 칼날을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장검을 쥔 그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범한이 손가락을 펴자 가는 비수가 그의 손 위에서 검은빛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았다. 상당히 기이해 보이는 장면이었지만 사실은 이전 세계 학교 교실에서 연필 돌리기를 연습했던 걸 비수에 응용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고달의 눈에는 엄청나게 대단한 기술처럼 보였다.
범한이 고달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상처도 이제 다 나았으니 봐줄 것 없네.”
그러고는 발끝으로 얼어붙은 미끄러운 바닥을 내디디며 전속력으로 앞으로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본 고달의 눈빛이 변하다니 양손으로 장검을 쥐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곧이어 펑! 하는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장검이 뒤채 새벽 공기를 갈랐다.
검의 속도도 빨랐지만 범한의 움직임은 더 빨랐다. 고달이 장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을 때 그는 이미 상대방 앞까지 진격해 있었다. 그가 양발로 바닥을 차고 뛰어오른 뒤 모이를 먹는 새처럼 비수를 아래로 내리꽂았다.
챙! 하는 낭랑한 소리가 울려 퍼진 뒤 두 사람은 두 발자국 떨어져 멈춰 서 있었다. 범한의 기세에 고달의 장검은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검의 위력에서는 고달이 앞서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의 대결은 무승부로 끝났다.
범한이 싱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겨뤄 보지. 매일 겨뤄 본다면······ 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말을 마친 범한이 소매로 입을 가리고 마른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소매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봤다. 아마도 마지막 공격을 할 때 정기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경혈에 충격이 가면서 정기의 보호를 받지 못한 심맥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고달은 이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 상처를 입은 뒤에는 정기를 사용하지 않는 게 가장 좋긴 합니다. 하지만 대련에서 정기를 사용하지 않는 건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적을 만나 싸울 때는 반드시 정기를 사용해야 하니 신체만 단련하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호위의 수장인 고달은 범한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그가 몸의 근육을 단련하는 새로운 수련 방법을 하기 시작했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부하로서 ‘잘못된 수련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진지하게 지적한 것이다.
그 말에 범한이 피식 웃었다.
“그냥 몸을 움직이려는 것뿐이네. 나도 뭐가 중요한지는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는 이 세계에 오죽처럼 정기가 없이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어젯밤 저택 뒤쪽 골목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고달이 보고했을 때 그는 오죽이 신양에서 보낸 검수을 처리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죽이 무를 썰고 자신은 술을 마시며 담주에서 행복하게 지내던 때를 그리워했다.
해가 떠올라 새벽의 한기가 약간은 움츠러들 무렵 여종이 찾아오자 범한이 집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여종의 안내를 받아 앞채로 가던 그는 막 떠오른 태양과 싱그러운 정원 풍경을 바라보며 일상의 여유를 만끽했다. 가장 믿는 오죽이 상처를 치료하러 멀리 떠났으며 자신이 경험했던 위험들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 * *
아침 식사 분위기는 무척이나 어색했다. 최근 범한의 시중을 들게 된 앞채 여종들은 호시탐탐 그의 ‘아름다운’ 외모를 훔쳐보곤 했다. 물론 범한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게 익숙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여종들이 평상시와 다르게 고개를 푹 숙인 채 뒤에서 시중만 들 뿐 감히 엿보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눈에는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천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황제의 권력은 하늘과 같이 지엄하다는 생각이 깊게 박여 있었다. 그래서 범한이 황제와 섭가 여주인 사이에 생긴 서자라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다른 시선으로 범한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전에 범한은 공경스러우면서도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도련님이거나 문예와 무예를 모두 겸비한 권신이었다면 지금은 천자의 아들이었다.
이 소문 때문에 집안의 어르신이자 호부 상서 범건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어색해졌다. 그래서 종들은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하면서도 감히 식사 자리에서는 내색하지 못했다. 그저 깊은 밤 방 안에서 따뜻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기들끼리 몰래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범한도 이런 분위기를 눈치챘지만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내색하지 않았다. 곧장 식탁으로 걸어간 그가 한없이 공손하게 아버지를 향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범건이 아들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고 옆에서 억지 미소를 짓는 유씨의 표정은 어색하다 못해 약간은 기괴해 보였다.
사실 집안의 배경으로 소문이 진실인지 가짜인지 충분히 알아낸 유씨는 요 며칠 동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힘들었다. 더욱이 자신이 이전에 독살하려 했던 사람이 소문의 주인공이란 사실이 마음을 더욱 두렵게 했다. 범한의 진정한 신분을 생각하던 그녀는 자신이 앉아서 인사를 받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피하면 범건이 화를 낼까 두려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유씨의 마음을 알아챈 범건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으며 아들을 바라봤다.
“오늘 입궁하면 행동거지에 주의하거라.”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처음 가는 것도 아니고 주의해야 할 것도 없으니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겁니다.”
이전과는 같지 않을 거라는 말은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뜻을 담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유씨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두 부자가 마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한 사람은 위로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이후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원 동쪽 정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범건이 식사를 멈추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범한이 손수건을 건네자 유씨가 받아서 범건의 수염에 묻은 죽을 닦아 줬다. 범건은 유정강 생활을 청산한 뒤 줄곧 엄숙하고 단정한 생활을 중시해 왔다. 이 사실을 아는 범한은 아버지가 화를 내다 죽을 수염에 묻힌 걸 보고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닐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 식사하십시오.”
급히 문 앞으로 달려간 여종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와 뭐라 말을 하자 범한은 화들짝 놀랐다. 아버지가 편히 식사하도록 신경 쓰던 그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문을 바라봤다. 멍한 표정으로 있는 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아내인 임완아와 누이인 범약약이 사사와 사기를 비롯한 여종들을 이끌고 창산에서 내려와 저택 문 앞에 와 있었다. 범한이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버지, 저희가 창산 쪽에 사실을 숨기지 않았나요?”
새벽에 경도에 도착했다는 건 어젯밤에 창산에서 떠났다는 의미다. 밤길을 뚫고 급히 산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창산에 남아 있던 호위와 감찰원 관리들이 자신의 편지를 전해 줄 겨를이 없었다는 의미고. 그 말인즉슨 두 사람이 경도에 퍼진 소문을 듣고 큰일이 났다는 걸 알고는 범한이 걱정돼서 한걸음에 돌아온 것이었다.
며느리와 딸이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된 범건은 돌연 침착한 표정으로 유씨의 손에 있던 손수건을 건네받아 수염을 닦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죽을 마저 마신 뒤 아무 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섭령아와 유가 군주가 같이 창산에 있었는데 숨긴들 며칠이나 숨겨졌겠니?”
그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너희들끼리 할 말이 있을 테니 뒤채에 가보도록 해라. 주방에는 요리를 다시 해서 보내라고 하마. 추운 산 위에 있었으니 따뜻한 걸 먹어 몸을 녹여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범한이 인사를 하고는 그녀들을 맞이하러 떠났다.
* * *
조용한 뒤채 서재에 범한과 완아, 약약이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 누가 먼저 입을 열어야 할지 눈치를 보며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누구든 입을 열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소문의 당사자인 범한이 설명을 하려 했다가는 말이 너무 길어질 수 있었고, 정황을 알지 못하는 완아나 약약이 입을 열었다가는 두서없는 질문에 범한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었다.
잠시 뒤 괴로운 얼굴로 아랫입술을 씹던 완아가 물었다.
“경도에 도는 소문은 좀 잠잠해질 기미가 있나요?”
“아뇨.”
아내의 질문에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진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문이란 게 금방 잠잠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뭔 큰일이 났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어요? 밤중에 급히 산에서 내려오다가 마차가 넘어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내와 누이를 꾸짖는 그는 자신도 초상집 개처럼 허둥지둥 산에서 내려와 범건과 진평평에게 비웃음을 샀던 걸 잊고 있었다.
“나는 좀 있다가 입궁해야 해요.”
범한은 뭔가 말하려다 망설이는 누이와 안절부절못하는 아내를 바라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러니 저녁에 다시 이야기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는 범한이고 언제까지나 범한일 거라는 거예요.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요.”
범한이 서재에서 나와 입궁할 준비를 하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사사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려서부터 범한과 함께 자란 사사는 그에게 누구보다도 편하게 대할 수 있었고 또 범한에게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신분의 귀천 같은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완아와 약약이 묻고 싶어도 묻지 못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물어볼 용기가 있었다. 그녀가 슬쩍 주변을 살피고는 범한의 소매 잡고 정원 외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도련님의 친어머니가······ 섭가 여주인이란 소문이 정말이에요?”
범한이 크게 웃으며 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사가 가장 화통하구나.”
그러고는 그가 몸을 굽혀 사사의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맞아.”
사사가 놀라 입을 쩍 벌리더니 멍청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범한보다 나이가 두 살 위인 사사는 부드러우면서도 대담한 성격에 걸맞게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물었다.
“그······ 그럼 정말······ 폐하의 아들이신 거예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범한은 사사의 부자연스러운 얼굴을 보고는 순간 정색했다.
“그건 내 어머니에게 물어봐!”
343화
마차 한 대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새로 난 길 입구에 깔린 청색 돌 위를 지나갔다. 추운 겨울이라 길 표면이 얼어 있어 사륜마차도 함부로 빨리 내달릴 수 없었기에 마차를 모는 소문무는 조심히 채찍을 휘둘렀다. 장화를 신은 감찰원 6처 검수가 마차를 따라가면서 주변을 경계했고 계년조는 평범한 백성처럼 솜저고리를 입고 거리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마차에는 원형과 사각이 서로 교차하는 문양에 흑금으로 테두리가 꾸며진 범씨 집안의 표식이 있었다. 마차 안에는 범한과 고달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두 명의 호위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범한이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호가 너무 거창해서 오히려 눈에 띌 것 같군.”
고달이 창문에 단 두꺼운 가림막을 걷고 거리를 살펴본 뒤 대답했다.
“창산에서도 검수이 나타났던 만큼 경도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저번 일로 크게 진노하신 폐하께서 저희에게 대인의 안전을 반드시 책임지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거리를 한번 훑어봤다. 거리에 행인이 많지는 않았지만 민가와 가게 안에 있는 사람을 비롯해 주변의 모든 사람은 마차 안에 범씨 집안의 사람이 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을지 추측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마차 안을 훔쳐봤다. 며칠 동안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면서 천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범한이 폐하의 서자라는 소문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차가 향하는 방향을 가늠하던 경도 백성들은 작은 범 대인이 입궁하러 간다는 걸 알아채고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오늘 경도에 모두를 경악하게 할 만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황궁은 항상 멀게 느껴졌지만 실은 매우 가까웠다.
마차가 황궁 광장 외곽에 멈춰 섰다. 현공 사당 사건 이후 금의위의 경비가 한층 더 삼엄해져 있었다. 범한은 마차에서 내려 소문무가 전해 준 외투를 걸치고 목발을 겨드랑이에 꼈다. 범한의 상처가 좋아져서 굳이 목발을 짚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 고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고달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범한이 일행을 이끌고 음습하고 웅장한 황궁을 향해 걸어갔다.
성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지키고 있던 금군 호위들이 재빨리 주위를 에워싸 바람을 막아 주었다. 이런 대우는 노쇠해 몸이 좋지 않은 원로대신들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황자들도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그는 1 황자가 부하들에게 암암리에 지시를 내렸다는 건 몰랐다. 1 황자는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드러내는 태도를 통해서 모든 금군 장군에게 자신의 뜻을 명확히 전달했다. 바로 범한의 지위는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범 제사와 1 황자 사이의 관계도 이미 회복되었다는 것이었다.
오늘 성문에서 안내하는 사람은 범한이 처음 입궁했을 때 만난 후 내관이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였기에 후 내관은 얼굴 가득 아첨하는 표정을 지었다.
“범······ 도련님,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오늘 일찍 일어나길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타박을 하다가 물었다.
“지난달에 계관국으로 가서 지난번에 입궁했을 때는 요 태감이 맞이했는데 오늘은 어찌 후 내관이 나와 맞이하는가?”
후 내관은 해관국령으로 진급되어 황궁에서 약과 질병을 책임지고 있었다. 황궁 안에서 신임받는 사람만 갈 수 있는 요직에 발령된 그가 오늘은 성문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게 이상했다.
후 내관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요 태감이 일 때문에 출궁해 폐하께서 저에게 오늘 대신 맡으라 하셨습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후 내관을 따라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대평 궁전 정원을 걸으며 중요하지 않은 한담을 늘어놓던 범한이 한숨을 쉬며 넌지시 말했다.
“요 며칠 동안 본관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네. 그런데 후 내관은 이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나를 대해 주는군.”
예상치 못한 말을 듣자 후 내관은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범 도련님께서 앞으로 더욱 대성하시도록 제가 옆에서 보좌할 것입니다.”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웃어넘겼다. 자신과 황실의 숨겨진 관계를 알고 나서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과 달리 황궁 안 태감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경국 황궁에 사는 태감들은 모든 황자를 똑같이 대우할 뿐 절대 편을 만들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편에 섰다가 만일 다른 쪽이 용상을 차지하게 된다면 자신들에게 남은 건 죽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감들은 황태자 이외 세 명의 황자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공손하게 행동하면서도 멀리했다.
태감들이 범한에게 아첨하는 이유는 그가 관리이기 때문이지 황제의 아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익숙한 궁을 몇 채 지난 뒤 어서방 앞에 도착하자 후 내관이 문 앞에서 안에 말을 전달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눈짓하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문이 열리자 범한은 목발을 짚고 안으로 들어가 높은 책장 앞에 섰다. 그러고는 일부러 서투르게 목발을 옆에 내려놓은 뒤 의자에 앉아 상주문을 보고 있는 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황제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인사를 받았다.
“알아서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게. 다 보고 나면 다시 이야기하세.”
‘어서방 안에서 자리를 찾아 앉으라고?’
먼지떨이를 쥐고 있던 홍죽이 황제의 말을 듣고는 잽싸게 뒤편으로 걸어가더니 걸상 하나를 가져와 범한 옆에 두었다. 범한이 미소 지으며 어린 내관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한 뒤 앉았다.
‘저 어린 내관은 여드름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은데.’
상주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보지 않던 황제의 눈가에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어서방은 조용했다. 문 안과 밖에 대기해 있는 태감들도 숨죽인 채 침묵을 유지했다. 황제와 단둘이 있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소문이 퍼진 뒤에 만나서 그런지 긴장되면서 목구멍이 가려워졌다. 그가 참지 못하고 살짝 기침하자 소리가 어서방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범한은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고개를 들어 그를 한번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상주문을 계속 검토했다.
범한이 재빨리 정자세로 앉은 뒤 황제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황제가 일하는 모습을 볼 기회는 소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약간은 주의력이 흐트러진 범한이 자신도 모르게 황제의 얼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약간 고개를 숙인 황제의 얼굴 속에서 자신과 닮은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혈연관계라면 얼굴에 비슷한 점이 있기 마련이었다.
오랜 시간 검토했음에도 아직도 책상에는 상주서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황제는 새로 하나 읽을 때마다 기뻐하기도 했고 격양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영토가 광활한 경국은 총 7로 26군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주와 현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매일 관아에서 보내오는 수많은 상주문을 읽고 넓은 영토를 다스린다는 건 실로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황제는 세상이 알아서 돌아가게 내버려 두거나 내각에 권한을 맡기고 놀러 다니는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권력을 조금도 놓으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재상 임약보를 조정에서 내쫓은 뒤에는 문하중서들이 협력해 정사를 돕도록 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학대하는 일이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범한이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황좌는 재미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왕처럼 정원을 가꾸며 사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서 겨울 구름 사이로 따뜻한 햇볕이 비췄다. 마지막 상소문을 읽은 황제는 피곤한 두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켰다.
태감들이 순서대로 수건, 청심차, 간식, 정신을 맑게 하는 향을 들고 들어왔다. 그때 범한이 겨울에도 찬 수건을 사용하는 걸 보고 물었다.
“폐하, 겨울에 찬 수건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황제가 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닦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차가운 수건으로 뼛속까지 시리게 해야 정신이 바짝 들지 않으냐.”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했다.
“폐하, 뜨거운 수건을 사용하시는 게 건강에는 더 좋습니다.”
황제가 싱긋 웃었다.
“뜨거운 수건은 몸을 나른하게 해서 졸릴까 봐 쓰지 않는다.”
범한도 따라 웃었다.
“수건은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습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목이 막힌 듯 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물론 너무 뜨거워 손이 데면 안 되겠지요.”
황제가 의미 장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의 두 눈을 바라봤다.
“그래, 일리가 있군.”
그러고는 범한 뒤에 놓인 목발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저놈도 어미를 닮아서 고집이 세군. 아니면 일부러 내 눈에 들고 싶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황제는 예전 어느 사람이 떠오를수록 범한이 분수에 맞지 않는 헛된 욕심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맑고 고결한 태도를 지닌, 좋은 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일어나 어서방을 나서면서 범한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범한이 급히 목발을 짚고 따라가려 하자 황제는 웃으며 돌아봤다.
“자네 몸이 좋아진 걸 알고 있네. 짐 앞에서 불쌍한 척하려는 것인가?”
황제가 화를 내지 않자 범한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자신을 질책할 거라 생각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헤헤 웃으며 목발을 옆에 내려놓고는 황제를 따라갔다.
범한과 ‘부황’의 첫 번째 심리 싸움은 범한의 승리였다.
* * *
긴 황궁 처마를 따라서 서북쪽으로 걸어갔다. 함광전, 태극전과 같은 웅장한 건축물들은 모두 지나면서 더는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 만난 궁녀와 태감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길을 비켜줬고 황제와 범한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홍죽뿐이었다. 점점 걸어갈수록 궁녀와 태감들도 보이지 않았다. 겨울 정원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적막했고 잔설이 남은 가짜 산에는 새나 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디를 가는지 눈치챈 범한은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라갔고 황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궁전은 보이지 않고 낙후한 전당이 나타나자 황제는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고 안에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이 있었다. 건물은 오래도록 수리를 하지 않아 몹시 낡아 있었다.
황제를 따라 계단을 오르던 범한은 긴장돼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건물 밖은 낡았지만 안은 누군가 청소를 하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2층에 오르자 황제가 한숨을 쉬며 난간으로 걸어가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깥 풍경만 바라보았다. 이 건물이 있는 곳은 황궁에서 가장 외진 곳으로 정원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야생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매서운 겨울바람과 눈을 맞아 쓰러진 풀이 무수히 많은 시체처럼 보여 음산했다.
그리고 아주 멀리 희미하게 화양문의 각루도 보였다.
범한은 가만히 황제 옆에 서서 안을 살펴봤지만 자신이 생각한 초상화는 보이지 않았다.
어린 내관 홍죽이 차를 우려낸 뒤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까 어서방에서 가만히 앉아 있게 한 것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황제가 두 손으로 난간을 꽉 잡았지만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군주에게는 군주의 도가 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였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듣기만 하자 황제가 이어 말했다.
“한 나라의 군주인 짐은······ 반드시 사직과 천하의 백성들을 생각해야 하네.”
황제가 차분히 말하면서 아주 먼 곳을 바라봤다.
“황제는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자네 어머니가 말했었지. 그래서 황제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든 때로는 놔버려야 할 때가 있어. 자네를 담주에 16년 동안 버려 뒀다고 짐을 원망하지 말게나.”
범한은 이날이 오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착실히 준비를 해왔지만 막상 그 말을 듣게 되니 목덜미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차오른 두려움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른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신······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범한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황제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344화
황제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먼 풍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한껏 온화해져 있었다.
“자네의 형제들을 포함해서 천하 사람 중에는 짐을 원망하더라도 그걸 밖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없네. 그런 걸 보면 안지, 자네는 정말 모친을 많이 닮았군.”
범한이 목을 쭉 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황제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짐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랬나? 자네가 짐의······ 친아들이라고 말한 거네.”
범한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기막힘과 분노, 슬픔이 담긴 웃음이었다. 한참 뒤 마음을 추스른 그가 약간 얼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자신도 입궁하면서 세웠던 계획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서자 역할에 너무 몰입되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황제에게 예를 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의 연기에 속은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경도에 파다한 소문을 짐이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도 짐이 인정을 하는 것은 안지, 자네가······ 짐의 혈육이기 때문이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황제는 아름다운 얼굴에서 고집과 강인함을 보고는 연민의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황제가 이어 말했다.
“다음 달이면 열여덟 살이 되지.”
범한이 고개를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신, 태어난 날을 모릅니다.”
이 말이 황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항상 냉정한 황제도 이 말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했다.
“정월 18일이네.”
범한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태어난 날을 알게 되는군요.”
보면 볼수록 범한이 마음에 든 황제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황량한 시골에서 자네를 이렇게 잘 길러 준 걸 보면 담주에서 유모가 상당히 고생을 했겠군. 짐이 언제 시간을 내서 담주에 가봐야겠다. 안지야, 유모는 요즘 잘 계시느냐?”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할머니께서는 건강하십니다. 소······ 항상 편지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래.”
범한이 더는 ‘소신’이라 자신을 칭하지 않자 황제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범한은 새로운 ‘군신 관계’에 적응한 듯 천하지존인 황제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모두 아래 민요를 소리 내어 읽어 보자.
범한은 황제의 아들이다. 이전에는 범한이 알고 있다는 걸 몰랐던 황제가 이제야 범한이 안다는 걸 아는구나. 황제에게 자신이 안다는 걸 숨긴 범한은 이제는 방금 안 것처럼 황제를 속이려 드는구나. 황제는 범한을 모르고 범한은 황제를 안다네. 황제는 범한에게 자신의 아들이라 하고 범한은 자신은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구나.
이건 생각의 문제였고 심리 문제였다. 황궁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범한은 이 점을 이용했다.
잠시 뒤 각자 꿍꿍이를 가진 ‘부자’가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범한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안색은 온화해져 있었고 황제와의 대화도 군신 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을 담주에서의 생활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황제는 이러한 분위기에 취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범한이 원했던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일국의 군주가 바쁜 나랏일을 팽개치고 황궁 외진 곳에서 오래 머무르는 건 좋지 않았다. 태극전 나이 든 태감이 황급히 건물 아래로 달려오더니 애타는 목소리로 여러 차례 부른 끝에 마침내 황제가 내려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 뒤에 범 제사가 서 있는 걸 본 태감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황궁 안을 아무리 뒤져도 안 보이시더니······ 눈물겨운 부자 상봉을 하고 계셨던 거군. 내가 그걸 방해해 천자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곤장을 맞을지도 몰라.’
그의 생각대로 황제의 안색은 한눈에 봐도 안 좋았다. 사실 황제는 아들 중에서 짧은 시간 안에 경국에서 가장 많은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학식과 교양도 출중하고 일 처리 능력도 뛰어난 범한을 가장 좋아했다.
게다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현공 사당에서 3 황자를 구한 일과 경도 소문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황제는 이런 범한의 충직한 모습과 악랄한 수단을 부리면서도 중립을 지킬 줄 아는 모습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이 중년의 천자는 그동안 범건에게 근거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한 나라의 황제였지만 어쨌거나 그도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오늘에야 드디어 범한에게 사실을 말해 주고 서로를 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자 그는 무척이나 기뻤다. 범한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도취된 황제에게는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 즐거운 시간에 갑자기 나타난 태감이 찬물을 끼얹으니 황제는 기분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건물 안팎에 구경꾼들이 많았기에 황제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몸을 돌렸다. 범한의 수려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는 얼굴을 보자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제의 표정이 점점 온화하게 변했다.
“이전에도 말했고 자네도 봤듯이 일국의 군주는 일이 많네. 자네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니 이 일로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는 말았으면 좋겠네.”
자신의 친아들 앞이라도 존엄한 황제는 말을 낮출 수는 없었다. 비록 미안한 마음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뜻은 충분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양손을 공손히 모아 올려 화답했다.
그러자 순간 신양에 있는 누이가 생각난 황제가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경도에 너무 시끄러워 공개 석상에서 다루지 못한 일들이 많네. 진평평은 자네가 조정에 있기가 난처할 테니 일정을 앞당겨 강남에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하던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황제 앞에서 감히 자기 의견을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기에 범한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소신,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러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덧붙여 말했다.
“다만 강남에 가본 적이 없는지라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짐이 원하는 것은 모든 일이 말끔하게 처리되어 매년 황실 금고가 조정을 위해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네가 잘 알고 있겠지. 짐은 자네가 최근 두 달 동안 한 일을 높이 평가하고 있네.”
황제가 말한 일은 감찰원이 최씨 집안을 수사해 황실 금고 밀수 사건을 드러낸 것이었다. 황제가 이어서 말했다.
“다만······ 이 일 때문에 안지, 자네가 조정에서 적을 만들게 되어, 짐은 그게 좀 걸리지만······. 흠, 아무튼 일은 잘 처리했네.”
황제는 범한이 조정을 위해서 황제가 직접 나서서 처리하기 곤란한 일을 대신 처리해 주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신양과 2 황자를 공격했다고 생각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소신은 폐하에게만 충성하는 고립된 신하로 남을 것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흡족해하자 범한이 틈을 이용해 청했다.
“강남은 길이 멀고 험한 데다가 소신이 감찰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장사를 잘 모르는 게 사실입니다. 이에 모든 사무를 혼자 처리하다가는 제대로 조사를 하지 못할 것 같아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신······.”
그가 황제의 안색을 힐끗 살핀 뒤 눈을 꼭 감고 말했다.
“경여당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황제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경여당 대행수들이야 황실 금고 일에 관해 잘 알 테지만 조정의 규정상 그들은 경도에서 나갈 수 없네.”
황제는 범한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염치없다고 생각되는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했다.
“안지, 이렇게 짐 앞에서 직접 청하다가 짐이 자네의 마음을 의심할 거란 걱정은 안 하는가?”
범한이 숨김없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천하의 모든 땅이 폐하의 것입니다. 소신, 폐하를 대면한 자리에서 청해야 폐하께서 소신의 깊은 충심을 믿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황제가 그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과거 섭가는 국체를 흔들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그러니 일국의 황제인 그로서는 당시의 일이 재현되는 걸 원치 않았다. 더구나 눈앞에 있는 범한은 그녀의 친아들인 만큼 섭가가 사라진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터였다.
하지만 범한이 힘들게 말을 꺼낸 걸 보면 거짓은 없어 보였다.
“자네의 지위도 높아졌으니 금이니 은이니 하는 것은 별다른 쓸모가 없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리고 짐은 이미 6년 전에 자네가 장성하면 황실의 금고를 맡기겠다 결정했네. 이게 본래 짐의 뜻인데 의심할 게 뭐가 있겠는가?”
범한이 감동한 기색을 보이자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하지만 자네도 짐을 속이려 해서는 안 되네. 황실 금고의 일이 아무리 복잡하다고 해도 경여당 대행수들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짐에게 이런 요청을 하는 걸 보면 경도에 갇혀 있는 그들을 꺼내 주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범한이 탄식을 내뱉으며 솔직하게 털어놨다.
“어찌 폐하를 속일 수 있겠습니까. 소신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 출생의 배경을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작년에 경여당에 갔을 때 대행수들이 경도에 발이 묶여 있어 힘들어하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대행수들의 나이가 아직 정정한 만큼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게 해주신다면 조정에도 큰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작년에 경여당에 갔을 때 그는 이 일은 언젠가는 해결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오늘 기회가 되자 황제 앞에서 공개적으로 요청을 한 것이었다.
그의 솔직한 말에 황제는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자 황제는 실소를 지었다.
“왕공 집안 중에서 경여당에 사업을 맡긴 곳이 많으니 모두 데려가지는 말게. 자네가 모두 데려가 버리면 정왕부터 자네를 용서하려 하지 않을 것이야.”
범한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자 황제가 이어 말했다.
“그들 중에 짐 앞에서 꼿꼿이 서서 친왕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거친 사람이 있었는데 가만 보니 자네가 더 한 것 같군.”
황제가 잠깐 말을 멈추고 고민했다.
“건물 구석진 방에 그림이 있네. 이따가 가서 보게.”
초상화가 황궁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범한은 주저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그림이옵니까?”
“자네 어머니가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긴 초상화네.”
그녀를 떠올리자 황제의 눈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따가 보러 가게. 덧붙여 말하자면 자네는 어머니와 그렇게 많이 닮지 않았어.”
범한이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미모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성격은 괴팍하고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어. 그러니 이렇게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게지. 그녀는 시나 문학과 같은 것들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실무만을 중시했네.”
눈앞에 서 있는 아들이 시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게 생각나자 황제가 큰 소리로 웃으며 손가락으로 범한을 가리켰다.
“그녀가 지은 시나 문장은 세상을 집어삼킬 만한 기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성정에 기인한 것이었지. 그런 걸 보면 이 부분에서는 자네와는 차이가 크네. 아주 큰 차이가 있어.”
홍죽은 건물 밖에서 태감이 애 달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폐하가 작은 범 대인과 즐겁게 대화 나눈 걸 차마 방해하지 못했다.
범한이 웃으며 호기심에 물었다.
“어머니께서······ 지은 시나 글을 폐하께서도 들어 보셨습니까?”
“한 수 들어 봤지.”
황제가 아득한 먼 날을 떠올리며 읊었다.
“북쪽 나라의 풍광은 얼음이 천 리까지 덮였고 눈발이 만 리에까지 날리는구나. 황성궁 안과 밖을 둘러보니 아득해 끝이 없구나. 큰 강도 얼어붙어 세차게 흐르던 물줄기도 사라졌네. 산은 은색 뱀들이 춤을 추는 듯하고 땅은 코끼리처럼 뛰며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시험하는 것 같네. 날이 맑으니 요염하게 붉은색으로 치장한 것 같네. 강산은 이리도 아름다운데 무수히 많던 영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위나라 황제와 한나라 무제는 문학적 재능이 없었고, 당나라 태종과 송나라 태조도 문학에는 자질이 없었네. 천하를 호령한 서쪽 오랑캐 서만의 다한도 활로 독수리를 쏠 줄밖에 몰랐지. 모두 지난 일일 뿐 풍류를 아는 인물은 꼽으려면 지금을 바라봐야겠지.”
‘위나라 황제와 한나라 무제? 당나라 태종과 송나라 태조라고?’
범한은 놀라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자 황제가 꾸짖었다.
“설마 이 시가 별로라는 게냐?”
범한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기세는 대단하나 소신이 한나라 무제, 당나라 태종, 송나라 태조가 누구인지 몰라 그럽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마오쩌둥의 을 살짝 고친 거잖아. 어머니께서는 고치시려면 철저하게 고쳐서 쓰셔야지. 서쪽 오랑캐 서만의 다한이라니······. 원래 시대로 칭기즈칸이라 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으로 바꿀 것이지 칭기즈칸의 존칭인 다한(大汗)을 사용할 건 뭐야. 정말 나보다 더한 분이야.’
황제가 설명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뛰어난 군주라 하더군.”
345화
말문이 막힌 범한은 자신과 어머니의 수법이 무척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북제 상경에서 장묵한과 대화를 나눴을 때 그도 설명하기 힘들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우연히 역사책에서 봤다고 말했고 역사책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면 변소에서 똥 닦을 때 썼다고 둘러댔다.
태감이 여러 차례 재촉하자 황제는 결국 몸을 돌렸다. 떠나는 그의 앙상한 뒷모습에는 슬픔이 배어났다.
작은 건물에는 홍죽과 범한만 남았다. 황제의 뒷모습이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지자 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배를 움켜잡고 건물이 떠나가라 웃는 모습이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옆에서 놀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범 제사께서 오늘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실성한 게 아닐까.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해야 하나.’
한참 후에야 마음을 가라앉힌 범한은 너무 웃어 아픈 배를 어루만지며 숨을 헐떡였다.
“나 혼자 올라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건물에 올라가는 과정에서도 범한은 여전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섭경미란 사람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수많은 좋은 시를 놔두고 굳이 이 시를 인용해 범건과 황제를 비롯한 사람들을 다그치는 데 사용했으니 말이다. 마오쩌둥의 시와 그녀의 마음이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었던 걸까.
건물로 올라왔을 때 범한은 웃음기를 완전히 거두고 평상시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봉건 왕조에 살면서 그 시를 베낀 걸 보면 어머니가 마지막에 황실과 충돌한 것도 이해가 됐다.
냉정함을 회복한 그는 아까 황제가 보였던 진심을 잊은 채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차갑게 식은 차를 들고 구석진 방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침착한 모습으로 초상화 앞에 섰다.
그림 속에는 황색 옷을 입은 여인과 유유히 흐르는 큰 강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여인은 강가의 푸른 돌 위에 서서 큰 강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치맛자락이 강바람에 살짝 날리는 모습도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앞쪽에 하늘 높이 치솟는 파도와 모래들도 자세히 그려져 있었고 멀리 맞은편 기슭에 개미처럼 작은 사람들도 그려져 있었다. 흙이나 돌을 나르는 걸 볼 때 아마도 강둑을 수리하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이 그림을 그린 화공의 솜씨는 정말이지 대단했다. 사소한 부분의 세밀함과 풍경의 웅장함을 그대로 녹여 냈을 뿐만 아니라 맞은편 기슭의 심각한 상황과 가까이 산과 돌이 어우러지는 풍경까지 모두 적절하게 묘사하였다. 더욱이 두 산 사이로 흐르는 큰 강의 거센 파도와 물보라는 실감 나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당시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강물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풍경들이 그림의 중심은 아니었다. 운 좋게 이 그림을 본 사람은 누구나 강가에 서 있는 황색 옷을 입은 여인에게 시선이 간 뒤 나중에 풍경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황색 옷을 입은 여인은 옆모습만 보였는데 옥처럼 영롱한 귓불 주변에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입술을 살짝 다물고 있는 게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그녀의 눈썹이었다. 검처럼 아름다운 눈썹은 부드러운 여인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남자처럼 호방한 기색도 없었다. 그저 맑고 깨끗해서 저도 모르게 호감이 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때 범한의 시선은 옆모습을 한 여인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온해 보이는 눈동자였지만 안에는 아주 많은 감정이 감춰져 있는 듯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북제 상경성 밖 서산 절벽 동굴에서 소은이 어머니를 묘사했던 말이 떠올랐다.
―맞아, 바로 그 눈빛이야. 유연함, 슬픔, 실망 그리고 생명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고 고난을 동정하면서 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눈빛 말이야.
범한이 탄식하며 천천히 자리에 앉더니 벽에 걸린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을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기려는 것 같았다. 건물 구석방에서 그는 차갑게 식은 차를 손에 들고 오래된 그림 앞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건물 밖에 햇볕이 사라지더니 바람과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에 든 차가운 차를 마시지 않은 채 오래도록 우두커니 앉아 있다 보니 입술이 말라 왔다. 그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그림 속 황색 옷을 입은 여인을 향해 말했다.
“대단한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은 제대로 돌보지는 못하셨네요.”
그가 긴장한 듯 잠시 멈칫하더니 머릿속으로 말을 좀 더 조리 있게 다듬었다.
“저는 어머니만큼 훌륭한 일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반드시 저 자신을 잘 돌볼 거예요.”
그가 일어나 그림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잠시만 여기 계세요. 제가 그림을 가져가게 허락하지는 않으실 테니.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자주 보러 오게 될 거예요.”
며칠이 걸릴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를 일이었다. 범한이 그림 가까이 다가가 활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모두 지난 일일 뿐······ 풍류를 아는 인물을 꼽는다면 나를 제일로 꼽겠지.”
이 말을 끝낸 뒤 그가 방을 나갔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뒤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다시 돌아온 범한은 방에 서서 그림 속 여자를 자세히 바라보다가 대뜸 질문했다.
“이과? 박사셨나?”
그림 속 여자는 자신의 아들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꺼내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마음이 시큰해지자 괜히 웃으며 눈가에 어린 눈물을 감췄다. 그가 정성을 다해 절을 올렸다.
“감사해요.”
그가 정말로 떠났다. 그림 속 황색 옷을 입은 여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세차게 흐르는 강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에 다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가 등지고 있는 방문은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를 일이었다.
문을 나온 뒤 범한이 손에 들고 있던 식은 찻물이 담긴 찻잔을 던졌다. 소리를 내며 찻잔은 정확하게 다른 찻잔 위에 떨어졌다. 두 찻잔이 딱 맞물리면서 아래 찻잔에 있던 찻물이 넘쳐흘렀다. 손에 있던 찻잔을 다른 찻잔 위에 던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는 사소한 동작에 불과했다.
내려간 범한이 홍죽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두 사람이 건물을 떠나 한기가 가득한 황궁 돌길을 향해 걸어갔다.
범한을 황궁 밖까지 배웅한 홍죽은 태극전을 돌아 석문을 거친 뒤 어서방으로 갔다. 그는 길을 가면서 만난 궁녀들과 농담도 하고 어린 내관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게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이에 태감과 궁녀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홍 태감을 바라봤다. 왜냐하면 홍 태감은 폐하를 옆에서 모시게 되면서 지위가 올라가자 사람이 신중해지고 음흉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리도 기뻐하는 걸까.
눈앞에 어서방이 보이자 홍죽은 자신의 태도가 점잖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걸음을 재촉하며 길옆 돌 위에 쌓인 눈을 두 손 가득 쥐고 얼굴에 비볐다. 상기된 얼굴 피부와 근육을 차갑게 식힌 그가 비로소 안심하며 마른기침을 두 번 했다. 그러고는 황궁 태감 어르신인 늙은 홍 내관에게서 배운 대로 침착한 표정으로 어서방 문을 열었다.
황제는 이때 서무 대학사와 목소리를 높이며 어떤 내용을 가지고 쟁론을 벌이고 있었다. 대담한 서무 대학사는 황제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당당하게 주장했다. 홍죽의 귀에 희미하게 무슨 강에 대한 말과 돈을 융통하는 내용이 들렸고 간간이 호부라는 단어도 나왔다.
홍죽은 귀를 쫑긋 세운 채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옆에서 대기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도대체 어떤 일이기에 서무 대학사가 저렇게 폐하와 각을 세울까 생각했다.
겨울은 강을 정비하기 좋은 기간이었다. 이에 문하중서는 두 달 전부터 계획을 세워 두고 호부가 자금을 마련하기를 기다리며 각 지역의 주와 현에서 사람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부에서 끝내 자금을 내주지 않으면서 강 정비 사업이 지체되고 있었다. 이로써 모든 사람에게 질타를 받게 된 범 상서는 만약 폐하가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했다.
태평성세를 이룩한 경국 국고에 돈이 없다니. 문하중서가 호부에 이유를 물어봤지만 호부는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며 황실에 자금을 융통하는 게 먼저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실의 자금은 원래 황실 금고에서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황실 금고가 이와 같은 상황을 초래할 정도로 돈이 말랐다는 것인가. 황실 금고의 일은 장 공주와 관련이 있는 만큼 황제의 체면과도 연관된 일이었다. 더구나 최근 감찰원이 최씨 집안을 조사하며 황실 금고를 직접 건들고 있는 만큼 조정 대신들이 황제에게 이 일을 물어보는 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무 대학사는 입궁해 황제를 찾아간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군신 사이의 대화는 화목해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마른기침을 하며 슬며시 범한, 강남 등 알쏭달쏭한 말을 하자 서무 대학사의 안색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범한이 강남에 가면 경국 재정 문제가 말끔히 해소될 거라 믿는 듯했다.
서무 대학사가 목소리를 낮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기간을 맞추지 못해 내년에도 큰 홍수가 나면 어떡합니까? 범 제사의 능력이 출중하긴 하지만 강남 일이 복잡해 처리하려면 족히 1년은 걸릴 것입니다. 설사 내년은 하늘의 덕으로 무사히 넘긴다 해도 그다음 해는 어찌합니까?”
황제가 웃으며 서무를 위로했다.
“범한이 며칠 뒤에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 기간을 맞출 수 있을 걸세.”
서무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하고는 어서방을 나갔다. 경험이 풍부한 두 사람은 정말로 범한이란 젊은 청년이 강남에 간다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걸까.
사실 서무 대학사가 오늘 폐하를 찾아온 것은 이런 표면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현재 조정 문관의 우두머리인 그는 폐하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황실 금고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도에 두 소문이 불어닥친 뒤 조정이나 황실에서 범한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신비주의를 유지하는 황실은 많은 일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조정으로서는 항상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황제가 범한이 경도를 떠나는 기간을 설명해 준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첫째는 황실 금고를 반드시 정리할 것이며 강력한 수단도 불사할 것이란 거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서무를 통해서 조정 관리들에게 범한의 신분에 대한 추측을 그만두라고 말한 거였다. 범한은 어차피 경도를 떠날 것이니 모반을 저지른 섭가의 잔여 세력이니 황제의 사생이니 하는 추측은 그만두고 소문이 사라질 수 있게 하라는 거였다.
“홍죽.”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문득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더냐?”
홍죽이 재빨리 대답했다.
“범 제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물에서 큰 웃음소리가 났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홍죽이 어린 나이에 황제를 근거리에서 모시게 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눈치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누구라 지칭하지 않았음에도 방금 출궁한 작은 범 대인을 말한다는 걸 알았다.
황제가 순간 어두워진 안색을 숨기고 미소 지었다.
“그럼 됐다. 얽매이는 게 없어야 조정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게지.”
아무 말 없이 은은한 미소를 짓던 홍죽에게 황제가 소스라치게 놀랄 말을 내뱉었다.
“다음 달부터는 황후 옆에서 시중을 들도록 해라.”
황제가 손바닥 가운데를 누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자 날벼락을 맞은 듯 홍죽은 화들짝 놀라서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우는 소리를 냈다.
“폐하, 이 노비가······ 이 노비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차라리 때리시고 내쫓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쪽 궁중의 수령 태감이 되란 말이다. 짐이 특별히 발탁해 줬건만 저리 놀라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든 홍죽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는 감동한 표정으로 울었다.
“이 노비가 무슨 수령 태감을 하겠사옵니까. 저는 그저 폐하 곁에 머물고 싶을 따름입니다.”
346화
황제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어린 내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흥, 짐 옆에 있으면 뭐가 좋은 점이 있다고 그러는가?”
좋은 점을 잘 대답하면 가벼운 농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홍죽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니 눈물 젖은 얼굴에 얼룩덜룩 먼지가 묻어 있었다.
“황상을 옆에서 모시면······ 노비의······ 체면이 섭니다.”
“체면이 선다고?”
홍죽이 마늘 찧는 것처럼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울먹였다.
“죽여 주시옵소서. 부려서는 아니 되는 욕심을 부렸사옵니다.”
태감이 뇌물을 받는 건 황실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얼마나 받았는가?”
황제가 얼굴이 눈물과 먼지로 범벅이 된 어린 내관을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웃음소리에 안심한 홍죽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노비, 어서방에 있는 두 달 동안 총 은전 4백 냥을 받았습니다.”
황제가 순간 정색하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뭐라? 교주 땅 8백 묘를 누가 네가 사줬느냐? 네 형의 벼슬길은 또 누가 열어 주었느냐? 짐 옆에서 채 백일도 있지 않은 녀석이 대담하게 돈을 긁어모아!”
얼굴이 사색이 된 홍죽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이 노비의 죄를 알겠사옵니다.”
그는 감히 황제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 청하지도 못하고 울먹였다.
“누구냐?”
황제가 몸을 돌려 신발을 벗은 뒤 용상에 앉아 상주문을 고치며 물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홍죽은 감히 숨길 엄두를 내지 못하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범······ 제사이옵니다.”
담담한 얼굴을 한 황제가 의외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홍죽이 갑자기 네발로 황제 발밑으로 기어가서는 고개를 치켜들고 울며 사정했다.
“폐하, 이 노비를 죽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이 노비, 폐하께만 충성하며 범 제사 대인과는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았사옵니다. 제사 대인은 좋은 분입니다. 노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이리된 것이오니 부디 제사 대인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황제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응? 어째서 그를 대신해 간청하는 것이냐?”
그러고는 즉시 큰 소리로 웃었다.
“녀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붙임성이 좋은 모양이군.”
황제가 어린 내관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얼른 내 앞에서 사라져라. 이 일은 범한이 진작 짐에게 말했던 것이다. 만약 짐이 네 영민함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 애는 진작 너를 없애 버렸을 것이야. 그런데도 너는 그 애의 편을 들고 있구나.”
“네?”
놀란 홍죽이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뒤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른 안 꺼지고 뭐 하느냐?”
“네, 폐하.”
홍죽은 우는 얼굴로 말했지만 속마음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는 일어나지 않고 기어서 어서방을 나갔다. 황후궁으로 쫓겨나든 다른 곳으로 가든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서방을 나가 옆방으로 달려간 홍죽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그제야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수건을 건네받은 그가 눈물과 먼지로 꾀죄죄한 얼굴을 대충 아무렇게나 닦았다. 뒤숭숭한 마음에 부하들을 모두 내쫓고 자리에 앉으니 불현듯 무서움이 밀려왔다.
“작은 범 대인의 말이 맞았어. 이 세상에 폐하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어린 내관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폐하께서 탐을 내도 좋다 허락하셨으니 차라리 일을 공개적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는 범한의 주도면밀함이 감탄스러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폐하가 주변 어린 내관들이 돈을 탐내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이 점을 가장 중요한 일을 숨기는 데 사용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폐하는 나중에 작은 범 대인이 자신에게 접근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하던 홍죽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격해졌다.
‘이제 어서방을 떠나게 되었으니 작은 범 대인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군.’
* * *
황궁을 떠나는 마차 안에서 범한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달과 두 명의 호위는 밖에 있었기에 안에 탄 사람을 소문무뿐이었다. 그는 계년조 안에 황실에서 심어 놓은 밀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왕계년이 감찰원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관리들을 추려서 뽑은 만큼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일을 추진하려면 또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영주 일은 실마리를 찾았는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차 위에서 조심히 주변 동정을 살피던 소문무가 가볍게 대답했다.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 지주는 감옥에서 병들어 죽은 것입니다. 검사관도 대인의 약이 사용됐다는 건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주의 가족들이 이대로 얌전히 있어 이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제사 대인이 자신에게 비밀을 유지하라는 당부를 한다는 걸 아는 소문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은밀한 일을 제사 대인이 맡겼다는 것은 자신이 마침내 심복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심복으로서 생각해 봤을 때 이번 일은 여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정4품 관리인 지주를 암살한다는 것은 감찰원이 건립된 이후에 거의 없었던 일이다. 앞으로 아무 일 없으면 다행이었지만 만약에 변고가 생긴다면 감찰원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지주는 아무런 파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천자의 제자였다.
소문무의 생각을 읽은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 지주를 죽인 것은 향민들의 가산을 강제로 점거했을 뿐만 아니라 도적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네. 그러니 그놈 목숨을 빼앗은 거로 끝났으면 그놈한테도 싸게 먹힌 셈이야.”
소문무가 간청하듯 말했다.
“대인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뒷받침할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체포한 도적들도 입을 꾹 다물고 그 지주가 자신들과 결탁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말이네. 만약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면 내가 이런 방법을 썼겠는가.”
소문무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너무 위험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다못해 대인께서 상주문을 올렸거나 문하중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폐하를 만나 이야기하셨더라면 증거가 없더라도 폐하께서 대인의 체면을 봐서 그 지주를 체포했을 겁니다.”
범한은 웃으며 고개만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지주의 일은 절대 폐하가 알게 해서는 안 됐다. 그가 두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자 머리 회전은 오히려 빨라졌다. 그가 경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주 일에 관여하게 된 것은 어린 내관 홍죽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늘처럼 큰 은혜를 입게 된 홍죽은 앞으로 이 점을 끊임없이 되새길 터였다.
지금 어서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어린 내관 홍죽은 영주 사람으로 원래 성이 진(陳)씨였다. 과거 범한이 죽인 지주가 지현(知縣)이던 시절 그는 어느 곳 임산물 때문에 홍죽의 진씨 집안의 가업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러자 진씨 집안의 두 인재가 산을 넘고 고개를 지나 경도에 가서 소송을 걸겠다고 주장했다.
일이 발각될까 겁을 먹은 지현은 악랄한 방법을 사용해 일을 잠재우기로 했다. 바로 한밤중에 산 도적들을 이끌고 진씨 집안에 쳐들어간 것이다.
그날 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확실치 않았다. 다만 어린 소년이었던 홍죽과 그의 형은 산에서 노느라 집에 돌아가는 걸 잊어버려 다행히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총명한 두 형제는 밤에 산을 넘어 구걸하며 동산로까지 갔지만 관아에 가서 고자질하지 못했다. 이후 온갖 고생을 하며 사람들 틈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두 형제는 결국 버틸 수 없게 되자 어린 아우인 홍죽이 신공을 연마하고 바짓가랑이에 피를 묻혀 궁에 들어온 것이었다.
겁에 질려 황궁에 들어온 홍죽은 선배 태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나이 든 궁녀들에게 엉덩이를 꼬집히는 모욕을 당하면서 더욱 겁이 많아져 자신의 성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어느 날 물을 길어 함광전 옆길을 지나가던 홍죽은 밖에서 졸고 있는 늙은 홍 태감과 마주쳤다. 늙은 태감은 궁복이 아닌 낡을 옷을 입고 있어 상대방의 신분을 알아채지 못한 홍죽은 늙은 태감이 얼굴 주변을 날아다니는 파리도 쫓아내지 않고 부서진 대나무 의자에 기대 졸고 있자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순간 자신과 같은 처지란 생각에 주변 나뭇잎을 꺾어 흔들며 파리를 쫓아내 줬다.
물론 잠에서 깨어난 늙은 홍 태감은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흐름처럼 홍죽을 제자로 받아들여 황궁에서 호의호식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저 성씨가 없는 어린 내관에서 자신의 성을 줬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대나무 의자에 기대 있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대나무 ‘죽(竹)’ 자를 이름으로 지어 줬다. 이것이 바로 홍죽이란 이름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그날 이후로 늙은 홍 태감은 홍죽의 생사에 관여하지 않았고 심지어 말도 섞지 않았다. 홍죽은 어서방에 오게 된 뒤 늙은 홍 태감에게 아부하려고 애썼지만 늙은 홍 태감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어린 내관은 홍죽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홍씨 성을 가진다는 것은 황궁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늙은 홍 태감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자 순식간에 황궁 안에는 홍 태감이 홍죽을 거둬들였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아무도 홍죽을 괴롭히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에게 수월한 일을 맡기면서 잘 봐달라 아첨했다.
홍죽은 머리가 영민한 데다가 어린 시절 참상을 겪으면서 신중함도 배웠다. 덕분에 홍죽은 여러 좋은 기회를 얻고 또 대 내관이 세력을 잃게 되면서 운 좋게 어서방에 들어와 폐하 옆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회와 인연이 맞아떨어져 얻어진 결과였다.
어서방에서 여러 일을 경험하게 된 후 지주가 큰 관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마음속에 복수의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별로 없는 그로서는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폐하 앞에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 간청할 용기도 없었다.
바로 이때 하늘에서 그의 앞에 한 사람을 보내 주었다.
* * *
마차가 덜컹거리자 눈을 뜬 범한이 피곤한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홍죽을 대신해 복수할 방법을 궁리한 그는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알리지 않고 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일이 성공한 오늘에서야 그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다.
범한은 홍죽이 황궁에서 빠르게 입지를 굳히고 있고 황제도 그를 신임하는 만큼 3년 안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만약 그때가 된다면 그의 말 한마디에 조정 6부에서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복수를 해줄 게 뻔했다. 그래서 범한은 반드시 3년 먼저 깔끔하고 후환 없이 원한을 갚아 주고 홍죽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높은 수준의 전략이었다.
사망한 지주는 영주 지주였고 홍죽은 교주 사람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관련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사건은 너무나도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범한은 누군가가 홍죽과 이 일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신중하게 처리했다.
훗날 폐하가 영주 지주의 죽음이 비정상적이라는 걸 안다고 하더라도 감찰원을 동원해 조사할 것이므로 피해 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더구나 황제가 파벌도 없고 황실과 연관도 없는 보잘것없는 지주의 목숨을 자신의 아들보다 더 귀하게 생각할 리는 없었다.
범한이 마차 창문을 살짝 열어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황궁 각루를 바라보며 속으로 어린 내관이 얼른 출세하기를 기원했다.
347화
마차가 감찰원 입구에서 멈추자 범한은 안으로 걸어가며 만나는 관리들에게 은은한 미소로 인사했다. ‘소문 사건’ 후로 처음 감찰원에 찾아오는 터라 관리들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사실 하부 관리 중 대부분은 섭경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한동안 돈 냄새가 물씬 나는 천하 남자들을 업신여긴 여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족처럼 익숙함이나 친밀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진평평은 고의인 듯 아닌 듯 8처 수장들과 종추 같은 나이 든 관리들이 부하들에게 섭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당시 섭가가 어떤 상가였는지 그리고 섭가가 감찰원을 위해 무얼 했는지 자세히 말해 줬다. 이런 말은 갈수록 발전을 거듭해서 마지막에는 섭가가 없었다면 감찰원도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반을 저질렀다는 죄명으로 사라진 섭가를 상사들이 대놓고 찬양하는 모습에 감찰원 관리들은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조정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자 점차 범 제사의 출생의 비밀에 흥미가 생겼다. 이에 모두 당시의 이야기에 궁금해하며 알아 가기 시작했다.
여러 번 세뇌된 감찰원 관리들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섭가가 친밀감을 넘어 가족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던 중 감찰원 입구에 서 있는 비석 주인공의 친아들인 범 제사를 오늘 보게 되자 모두 이전에 가졌던 존경심 이외에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경외심과 친숙함을 느꼈다. 진 원장이 모든 힘을 동원해 서생같이 생긴 공자에게 감찰원을 넘기려 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로써 경국 사람들은 관리건 백성이건 할 것 없이 범한이 감찰원을 넘겨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범한이 지금까지 감찰원에서 조금씩 자신의 실력과 지혜를 드러내 보인 데다가 당당히 드러낼 수는 없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섭가의 후손이란 신분 때문이다. 이러한 신분은 최소한 내부의 의구심을 해결했다는 점에서 그가 감찰원의 전권을 손에 쥐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범한은 오늘 이런 좋은 기회를 이용해 감찰원 관리들을 굴복시킬 시간이 없었기에 재빨리 정방형 건물을 돌아 정원으로 갔다. 눈이 듬성듬성 남아 있는 정원은 봄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나무들을 발가벗은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고 거울처럼 투명하게 얼어붙은 연못 안에는 이미 얼어 죽은 건지 물고기들이 보이지 않았다.
진평평은 두꺼운 털가죽을 두르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서 구슬프면서도 강약이 느껴지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두 눈을 살짝 감고 오른손으로 가볍게 바퀴 달린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게 상당히 편해 보였다.
그 모습은 범한에게 어느 세계를 연상시켰다. 어느 나이 든 남자도 오래된 등나무 의자에 앉아 골목에 비치는 오후 햇살을 즐기며 낡은 축음기에서 들리는 올드 상하이 음반을 듣기를 좋아했었다.
‘야오리(姚莉)나 바이홍(白虹)의 늘어지면서도 탄력 있는 노랫소리도 이렇게 햇살과 뒤엉켰었지.’
하지만 문제는 진평평이 중국 유명 작곡가인 리진광(黎錦光)이 아니며, 그가 듣고 있는 건 축음기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아니었으며, 신분도 일반인보다는 훨씬 높다는 데 있었다.
범한은 진평평처럼 봉건 시대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동정 어린 눈빛으로 겨울날에 고목 아래 서서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상문 낭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얼굴은 약간 발갛게 얼어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노래를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정말 놀라운 노래 솜씨였다.
“자칫하다가는 목이 상하겠군.”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노래를 멈추게 하고는 웃으며 진평평을 바라봤다.
“제가 상문 낭자를 감찰원에 들인 것은 이 뛰어난 재능에 도움을 받고 싶어서지 원장 대인 앞에서 노래나 부르게 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두 눈을 뜬 진평평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공과 사는 엄연히 구분해야 하지만 상문 낭자가 내 마음도 즐겁게 해줘 2년 정도 더 살게 해준다면 네 곁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다.”
진평평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범한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예상대로 진평평도 자신의 몸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는 당장 가야 합니다.”
그가 진평평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건조한 손등을 살짝 쳤다.
“상문 낭자는 저와 함께 갈 겁니다. 강남에도 포월루를 열 생각이니까요.”
진평평이 한숨을 쉬었다.
“봄에 다시 데리고 가는 것도 좋겠군. 3 황자 저하와 함께 가면 서로 죽이 잘 맞을 테니까.”
순간 3 황자가 저지른 일이 떠오르면서 범한은 화가 치솟았다.
상문이 공손히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절을 한 뒤 감찰원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두 사람이 대화할 수 있도록 소문무와 함께 자리를 비켜 줬다.
멀리서는 진평평과 범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진평평과 눈을 맞춘 범한의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진평평은 줄곧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가 웃으며 그런 범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가자.”
범한이 소문무에게 말하고는 옆에 있는 상문을 바라봤다. 상문은 그가 포월루에서 구해 준 뒤 직접 감찰원에 넣은 사람이므로 믿을 만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상문은 매일 진평평 앞에서 노래를 불러 주고 있었다.
“상문 낭자는 그동안 잘 지냈는가?”
그 질문이 기쁜지 상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매일 아무 일 없이 원장 대인께 노래를 불러 드리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랬군.”
범한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원장 대인의 뜻에 따라 나와 함께 강남에 가서······.”
그가 말꼬리를 늘이며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했다.
“자네는 그냥 남아서 원장 대인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시게.”
* * *
감찰원 입구에 서 있는 마차가 28리 언덕 방향으로 갈 준비를 했다. 황제가 범한에게 경도를 떠나라고 정해 준 기간이 다가왔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 범한을 조급하게 했다. 경도를 떠나기 전해 처리해 둬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기에 오늘 그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바빴다.
범한이 자신을 가까이에서 경호하는 이들을 믿지 못하는 탓에 고달 등 호위 세 명은 여전히 마차 밖에 있었다. 범한이 약간 기다리는 틈을 타서 소문무가 발갛게 언 손을 비비며 작은 목소리로 살며시 말했다.
“3처에서 궁문 문서를 조사하는데 요 내관이 경도 외곽으로 나가는 바람에 이 일은 비밀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황실에서도 감찰원 기록을 삭제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요 태감은 뭣 때문에 그곳에 간 것인가?”
범한이 호기심에 물었다. 그러자 소문무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표시를 하며 설명했다.
“지난번 현공 사당 검수 사건에 연루된 어린 내관이 경도 외각에 위치한 마을에 양부모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 태감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시위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침묵하다 한숨을 쉬었다.
“암살에 대한 뒷일을 어린 내관은 고려하지도 않았겠지. 자신이 목적을 달성하든 말든 마을에 사는 친척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거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문무가 제사 대인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상을 암살하려는 것은 모반에 해당하는 대죄인 만큼 궁중에서는 이미 연루 범위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니 연루되지 않은 어린 내관의 9촌은 관대한 조치를 받은 셈이었다.
“대인은 인자하신 분이니 이런 일에 마음을 쓰시는 거겠지만 몇십 명 죽는 것뿐입니다.”
범한은 마음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불편해하는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그저 그 어린 내관이 복수를 위해서 양부모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괘씸한 거네.”
소문무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대역무도한 말을 하자면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법이지요. 그러니 그 어린 내관은 찢어 죽이는 게 마땅하지만 그가 한 선택은 이해가 됩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경국 황제는 효를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있었고 경국 법률은 친척끼리 잘못을 감춰 주는 일에 대해 무죄를 판결할 수 있었다. 그의 양미간에서 순간 진절머리 난다는 기색이 보였다. 주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로서는 어린 내관이 친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양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지로 내몰았다는 점과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너무나도 거지 같은 논리라고 생각했다.
* * *
28리 언덕에 도착하자 마차는 긴 거리로 들어섰다. 길가에 광칠을 한 상점 문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 마치 범한이 온 걸 환영하는 것 같았다. 마차가 경여당 앞에 도착하고 소문무가 아직 방문 명함을 꺼내기도 전에 끼익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오랫동안 열린 적 없던 거대한 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늘 경여당 열일곱 명의 대행수들은 자신의 집에 있거나 왕공가에서 장부를 계산하지 않고 모두 나란히 문 앞에 서 있었다. 범 제사가 마차에서 내리자 대행수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범한이 급히 대행수들에게 일어나라고 청하고는 낯이 익은 일곱째 섭 대행수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앞은 대화를 나누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지만 그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은 대행수들은 범 제사가 대낮에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 조용히 안으로 안내한 뒤 부하에게 따라온 일행들을 대접해 주라고 지시했다. 다만 고달을 비롯한 세 명의 호위들을 연신 고개를 저으며 폐하의 엄명에 따라 범한의 곁에서 절대 떨어질 수 없다고 버텼다.
눈짓으로 대행수들에게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 거실로 들어간 범한이 호위에게 문밖을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외부인 없는 거실에서 열일곱 명의 대행수들은 두려움과 감동이 교차하면서 약간은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소문대로라면 내 눈앞에 있는 젊은 관리가 바로 섭가의 후손인 거잖아. 아가씨의 친아들인 거야! 세상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범 제사가 오늘 아주 중요한 일로 찾아온 게 분명해.’
다만 지금 상석에 앉아 있는 범한이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이상 대행수들이 먼저 그의 다리를 끌어안고 울부짖을 수는 없었다.
모두 범한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범한도 오래 침묵하지 않고 잠깐 뜸을 들이다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오늘 찾아온 것은 1년 반 전에 이야기했던 일을 위해서입니다.”
범한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나오자 대행수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범한이 그런 대행수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때 제가 아우인 사철이를 제사로 받아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대행수들께서 일이 바빠 허락해 주시기를 기다리다가 아우가 결국 일을 치르게 되었지요. 지금 제 보잘것없는 아우가 어디를 떠돌아다니는지 모르니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전에 제가 말했던 다른 일에 대해서도 아무 의견도 내지 않으실 거면 그냥 잊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잊으란 거지?’
그날 범한은 은연중에 자신이 훗날 황실 금고를 운영하게 되면 경여당의 도움이 필요하니 경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었다. 범한의 제안은 경여당 대행수들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경도를 떠나 아가씨가 남긴 사업을 다시 하는 건 대행수들이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다만 황제의 위엄이 무서운 데다가 범한에게 황실을 설득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아 주저했다. 더구나 가장 중요한 범한의 목표가 무엇이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에 그들은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상황이 이렇게 기묘하게 변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범한은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급속도로 성장해 경국에서 가장 유망한 젊은 권신이 되어 있었고 그가 황실 금고를 받는 일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소문에 따르면 그는 아가씨의 아들이었다.
마른기침을 하는 섭 대행수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대인, 저희도 정말 그렇게 하고 싶지만······ 황실에서 허락해 주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더는 범한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능력은 여전히 의심하고 있었다.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48화
거실에서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신중한 열일곱 명의 대행수들의 얼굴에 놀람과 무한한 기쁨이 솟구쳤다. 섭가가 몰락한 뒤 계속 경도에 갇혀 있던 그들은 오늘 이런 소식을 들으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차를 마시던 범한은 중년인 대행수들이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자 함께 웃었다. 어머니와 함께 일하는 데 청춘을 바친 대가로 경도에 갇혀 살던 이들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정말로 기뻤다.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모두 다 갈 수는 없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범한이 사실대로 털어놨다.
“그리고 가족들은 경도에 남아야 합니다.”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하던 대행수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범한이 하는 말을 들었다.
“강남에 갔다가 휴가 가는 셈 치고 교대로 경도에 오는 건 어떻습니까?”
모두 작은 범 대인이 농담한다는 걸 알고는 움찔움찔하다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범한은 이어서 몇 마디 당부를 남긴 뒤 모두 황제의 은혜를 생각해 조정을 위해 힘써 달라는 식의 진부한 격려를 늘어놨다. 이 진부한 말은 자연히 문밖에 있는 호위들도 들어야 했다.
“일곱째 섭 대행수는 이번에 나와 함께 가시고 남은 분들은 상의해서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연세가 많으신 분이 경도에 남았으면 해요.”
그러자 일곱째 섭 대행수가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뭐라 물었다.
“아, 포월루는 돌볼 사람이 없으니까 여러분들이 저를 대신해서 신경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혼이 쏙 빠지는 곳이니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으신 분이 책임져 주시면 좋겠네요.”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짓자 대행수들이 씁쓸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거실 안의 분위기가 다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대행수들은 범한의 말을 대강대강 들으며 그의 얼굴에서 익숙한 부분을 찾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범한 스스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진행되는 상황을 통해 대행수들은 이미 그가 섭가의 후손이라는 걸 믿고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섭 대행수를 선두로 남아 있는 대행수들이 나란히 두 줄로 서더니 정중앙에 있는 범한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조상의 은덕을 받고 긴 봄날을 누리길 바라는 1년에 한 번뿐인 설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새로운 뜻은 보이지 않았다.
올겨울 범한은 창산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게다가 여러 일로 인해서 완아와 약약이 경도로 서둘러 돌아오면서 범사철이 없었음에도 집 안은 화기애애하고 시끌벅적했다.
저택 문 앞에는 폭죽을 터뜨려 생긴 붉은색 종잇조각들이 양탄자처럼 두껍게 쌓여 있었고 공기에서는 살짝 달큼하면서 코를 자극하는 불꽃 냄새가 가득했다. 큰 주방과 작은 주방 옆에는 고기와 생선이 쌓여 있어 주인이나 종들 모두 속으로 큰 도련님의 소화 약이 쓸모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섣달그믐 밤 황실에서 몇 가지 음식과 작은 장식품을 하사했다. 범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내와 누이가 놀람과 의혹에 휩싸여 있었기에 그는 주방에서 함께 들어가 설명해 준 뒤 앞채로 향했다.
섣달그믐 밤에 함께 식사를 한 식구들은 모두 둘러앉아 마작을 했다. 범한은 완아의 어깨에 기대 팔을 끌어안고는 잔꾀를 부리면서 집안 어른 두 분에게 은전을 뺐고 또 이전 생애에서 들은 우스갯소리를 해서 탁자 위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다.
두 번째 날인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밤을 지새운 젊은이들이 잠을 쫓으려 발악하며 세의(歲儀)를 하기 위해 거실에 모였다. 범한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성스럽게 양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그러고는 주변의 어색한 시선을 받으며 아버지를 향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정성스럽게 절을 세 번 올렸다.
범건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은은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안 여자들은 떡국을 만들러 나가 설날 아침 앞채에는 잔꾀 부리길 좋아하는 두 남자만 남아 있었다. 범한이 슬쩍 아버지 앞으로 걸어가 어깨를 주물렀다. 소문이 온 사방에 퍼진 뒤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장벽이 깨진 범한은 아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자간의 정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두 부자 사이도 이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졌다.
호부 상서 범건이 두 눈을 감고 아들이 해주는 안마를 즐기며 물었다.
“사철이가 있는 그곳 상황은 어떠니?”
범한이 공손히 대답했다.
“왕계년이 워낙 꾀가 있는 사람인지라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범건이 피식 웃었다.
“네가 북제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러고는 그가 갑자기 고개를 저으며 약간은 뜻이 모호한 말을 내뱉었다.
“안지야, 북제 사람들과 사이가 좋다고 해서 경국과 북제 사이에 해소될 수 없는 원한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언제든지 북제 사람을 이용하는 건 괜찮지만 너무 신뢰하거나 마지막 희망을 그들에게 기대해서는 안 돼.”
범한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께서 무슨 기미를 눈치채신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고는 멋쩍게 웃으며 짧게 해명했다.
“비개 선생이 치료해 준 상처는 어떠니?”
범한은 아버지가 걱정하는 게 싫었기에 정기가 사라진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고 대충 둘러댔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두 달 정도 더 요양할 생각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두 달을 더 요양해야 한다고?”
범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남은 외진 곳이라 경도와는 다르게 관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야. 지금 몸 상태가 예전만 못하다면 모든 일에 조심해야 한다.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모든 일에 나서며 상대방을 사지에까지 몰아넣어서는 안 돼.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잠시 용서할 줄도 알며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인 거다.”
범한은 아버지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훈계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경도에서의 범한은 지독한 싸움꾼으로 유명했다. 그는 장 공주나 2 황자와 부딪쳐도 물러서지 않고 대담하고 모질게 맞섰다. 강남의 지방 고관들이나 세도가들이 범한의 권력과 지위에 휘둘리지는 않겠지만 범건과 진평평이 뒤에 산처럼 버티고 있다면 원만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두 부자는 설 명절 이후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나눈 뒤 장 공주가 경도에 오면 조정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를 자세히 분석했다. 그러면서 범건은 범한에게 설 명절 이후 입각하는 후 학사를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범한은 아버지가 일부러 문학 대가인 그를 언급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 사람의 이름만큼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범건이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젊은 아들의 손을 토닥거리며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 정말 감찰원을 네게 주려고 하시는 모양이다. 조정에서 너와 비슷한 명성과 지위를 가진 문관을 찾은 건 장래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지.”
후 학사는 20대 초반 나이에 문풍의 변화를 몰고 온 사람으로 지금은 대략 40대가 되어 있었다. 범한이 두각을 드러내기 전에 그는 남쪽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며 독보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 관운이 좋지 못해서 도처를 떠돌아다니는 고달픈 관직 생활을 하는 바람에 지위는 높지만 실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조정에서 이번에 그런 그를 경도로 불러들여 문하중서를 담당하게 했으니 중용을 받은 셈이었다.
범한은 미소 띤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은 조정 일에 자주 관여할 생각이 없으니 후 학사가 자신을 건들지 않는다면 서로 부닥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담을 몇 마디 나누던 중 범한이 오늘 제사가 있는 걸 떠올리고는 은근슬쩍 물어보자 범건은 아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들이 힘들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황궁에 있는 누군가의 체면을 깎게 될까 봐 두려워 아들을 집안 족보에 올릴 수 없었다.
한번 슬쩍 떠본 범한은 아버지가 직접 불가능하다는 표시를 해 보이자 자신이 헛된 꿈을 꿨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 * *
오후의 태양이 정원을 따뜻하게 감쌀 무렵 범 상서, 유씨, 약약 등 집안사람 대부분은 촌가에 있는 범씨 집안 사당에 가 있었다. 심지어 소수만 남겨 두고 집사와 유모, 어린 여종들까지 모두 가서 앞채에는 고요한 적막만 감돌았다.
“상공이 가고 싶어 하는 거 알아요.”
완아가 그의 옆에 앉아 위로했다.
범한은 담박서국에서 출판한 《장씨 평론집》을 보고 있었다. 제목도 범한이 정했고 글씨도 범한이 쓴 이 책은 일곱째 섭 대행수의 말에 따르면 지금 가장 잘 팔리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미 들인 비용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회수됐고 북제 조정에서도 1만 권을 주문해 범한의 호주머니는 다시 두둑해지게 되었다.
아내의 말을 들은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들고는 책을 옆에 내려놨다.
“왜요? 내가 꽁해 있는 것 같아요?”
완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꽁해 있는 거 아니었어요?”
범한이 양팔을 펼쳐서 완아를 끌어안고는 그녀의 차가운 볼을 비비며 물었다.
“요즘 몸 상태는 어때요?”
그의 말뜻을 오해한 완아의 얼굴에 순간 근심이 어렸다.
“아무런 소식도 없어요.”
범한이 크게 웃으며 아내를 바라봤다.
“누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딸을 걱정한다고 했어요? 당신 몸 상태가 어떠냐고요. 스승님이 내 몸을 치료하는 걸 보니 요즘 그분 수준이 의심스러워져서 묻는 거예요.”
“몸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요.”
완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왜 딸이에요?”
“딸이 좋죠. 조정에서 매일 싸우며 살 필요가 없잖아요.”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었다.
완아가 범한을 밀쳐 내고는 자신의 명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가야 해서······ 여기가 괴로운 여자도 좋을 거 없어요.”
범한이 엉큼한 표정으로 아내의 가슴을 더듬으며 말했다.
“내가 심각한지 아닌지 봐줄게요.”
한바탕 웃어도 지금 상황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기에 완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공이······ 내 사촌 오라버니일 거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
“싫어요?”
범한이 슬쩍 묻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누이, 오라버니의 말을 잘 듣도록 해.”
완아가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퉤! 상공은 보옥이 아니잖아요.”
범한이 속으로 가보옥이나 자신이나 사촌과 사랑에 빠진 건 맞지만 외모는 자신이 훨씬 출중하니 아내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예쁜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아무 말 없이 방에서 나갔다. 완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뭘 하려고 저러나 생각하려던 찰나 그가 방으로 돌아왔다. 종들도 입지 않을 누더기를 걸친 채 말이다.
거지꼴로 나타난 남편을 본 완아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자 범한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렸
“사촌 누이, 에헤헤······ 에헤헤, 드디어 당신을 만났군!”
완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상공이 갑자기 미친 건가? 우리가 외종사촌인 게 좋은 일은 아니잖아?’
“사촌 누이라고요?”
범한이 바보처럼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네 외종사촌이야.”
완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멀거니 헛소리를 하는 상공을 바라봤다. 그런 아내의 반응에 마음이 식은 범한이 패잔병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가려 했다.
“상공, 조금 전에······ 뭘 하려고 한 거예요?”
“를 모방한 쇼를 해보려고 한 거예요.”
범한이 씁쓸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쇼가 뭐예요?”
“쇼는······ 남쪽 사람들은 사투리로 ‘사오’라고 말해요. 됐어요. 그만 물어봐요.”
사실 범한이 했던 쇼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그는 어린아이인 척, 시선인 척, 사랑꾼인 척 연기하면서 실력이 상당이 높아져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황궁이나 작은 건물에서 의심 많은 황제 폐하를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
349화
한편 약약의 경우 오라버니가 갑자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얼굴로 오라버니를 봐야 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계속 범한을 피하고 다녔다. 심지어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약약은 비개 수업에서도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태의원에서도 병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약약이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래요.”
완아가 안심하라는 표정으로 말하자 범한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오라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아요? 바뀐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잠깐 정신을 가다듬은 뒤 이어 말했다.
“내가 강남으로 내려간 뒤 그곳 상황이 안정되면 약약이와 함께 오라고 부를게요. 아마 곧 경도를 떠날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임완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강남은 물이 좋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림처럼 생겼다고 들었어요. 한 번도 외지에 나가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즐겁게 놀아 보겠네요.”
범한이 피식 웃었다.
“설마 지금 잘생긴 남자들 볼 생각에 들뜬 거예요?”
기쁜 마음에 싱글싱글 웃던 임완아의 통통하고 부드러운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짓궂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째려보며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자 범한이 하하 웃으며 그녀의 작은 주먹을 막더니 순간 정색했다.
“장모님이 경도에 돌아오시면 뵈러 가요.”
만감이 교차한 임완아가 이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서로 호응할 수 없는 상황일 때는 각각의 상황에 알맞게 처신하는 방법도 배워야 해요.”
이 일은 위로하거나 회유해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범한도 알고 있었기에 되도록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완아는 그가 황실 금고 일에 고민하는 걸 알기에 씩씩하게 말했다.
“저는 상공이 경여당 대행수들을 모두 데려가서도 빨리 황실 금고를 장악하지 못할까 봐 걱정될 뿐이에요. 강남 고관들은 오랜 시간 운영해 오신 어머니의 체면을 생각해서 쉽사리 움직이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진지하게 말했다.
“게다가 상공이 섭가 사람들을 강남에 데리고 가는 것에 대해서 민가와 조정에서 말이 나올 거예요.”
범한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동안 왕공가들을 위해 장사를 해온 대행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를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황실 금고 일은 그들 없이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조정에서 그동안 그들을 감시해 왔던 것도 황실 금고 상품 제조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건 조정에 매우 중요한 정보인 만큼 그들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북제나 동이성에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있었던 거죠. 다만 황실 금고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이 제대로 만들어지려면 기술 지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해요.”
임완아가 가만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행수들이 경도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아니에요. 그동안 계속 옆에서 미행하며 감시한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들은 비밀을 누설하려는 조짐만 보인다면 미행하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두 죽여 입을 막으려 할 거예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도무지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감찰원에도 외곽 경계만 책임지는 사람은 있어도 비밀 보장을 위해 죽이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없었어요.”
“그건 황궁 사람이 맡고 있어요.”
임완아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아마 그들은 상공이 강남에 갈 때도 따라갈 거예요.”
“내관들의 부하가 이 일을 맡았다고요?”
범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경도에 온 뒤로 그는 황궁 내관들과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누가 어느 궁에서 일하고 어디로 파견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 일은 걱정할 것 없이요.”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황실 금고 일은 아직 실행되지 않았을 뿐이지 대세는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니 그 돌대가리 오라버니도 어쩔 기회는 없을 거예요. 황자들의 싸움이 최소한 몇 년 동안은 다시 수면에 드러나지 않는 게 폐하가 가장 좋아하실 부분인 것 같아요. 물론 폐하는 직접 마음을 밝히지 않으시겠지만.”
완아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남편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아요. 폐하께서 황자들이 시끄럽게 싸우는 걸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누가 알겠어요? 그리고 2 황자 오라버니가 지금은 집에 연금된 상태지만 상황이 바뀌면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잖아요.”
범한이 흠칫하며 아내의 말을 곰곰이 분석했다.
“황상은 특별하신 분이에요.”
완아의 크게 뜬 두 눈에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지혜와 교활함이 엿보였다.
“갖은 고생을 한 끝에 군주가 되셨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자신의 지위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황자들이 용상을 두고 싸우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죠. 황상이 황자들이 싸우는 걸 싫어하시는 건 아버지로서 자신의 혈육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걸 원치 않으셔서 그런 것뿐이에요. 제가 봤을 때 황상께서는 황태자 오라버니를 걱정하고 계시지도 않아요. 훗날 누구에게 용상을 물려줄지, 몇 년 뒤 황자들 중 누가 두각을 드러낼지에 관한 일들도 황상은 신경 쓰지 않으세요.”
임완아가 잠시 쉬다가 계속 설명했다.
“외삼촌은 건강하시고 나이도 많지 않으시기 때문에 자신이 앞으로 오래 더 살 거라 생각하세요. 그러니 황위를 물려주는 일을 신경 쓰지 않으시는 거죠. 사실 외삼촌 마음속에는 천하에 대한 웅장한 포부만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폐하께서 전쟁을 준비하고 계세요?”
“정확하지 않아요.”
전쟁과 같은 일을 좋아하지 않는 임완아가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실 십여 년 동안 조용한 게 이상해요. 서쪽 오랑캐인 서호도 동쪽으로 침범하지 않고 남쪽 오랑캐 남월도 조용하잖아요. 만약 황실 금고 일이 수습되어 강남 민생이 안정되고 국고가 풍족해진다면 폐하께서 다시 군대를 일으킬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전쟁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에 달렸죠. 만약 작년과 같이 작은 충돌로 끝난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임완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은 황상과 추밀원이 걱정할 일이죠. 저는 강남에 나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설사 감찰원에서 전쟁에 참여한다고 해도 3처에서 할 거잖아요.”
범한은 웃었다. 경국 황제가 정말로 제2 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고 있다면 자신도 모략을 짜는 일은 아니더라도 힘을 쓰는 일에는 불려가게 될 거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이 대역무도한 일이라는 걸 모르는 임완아는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생각을 털어놨다.
“황태자 오라버니가 황위를 이어받을 사람이긴 하지만 상공도 알다시피 폐하께서 황후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러니 이 일은 변수가 있어요. 1 황자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여덟 살밖에 안 된 3 황자까지 모두에게 기회가 있는 셈이죠. 조정이나 민가 모두 상공이 이번에 강남에 가는 게 유배나 다름없다고 알고 있지만 폐하께서 3 황자를 데리고 가게 하시는 게······ 좀 이상해요. 상공은 그런 생각 안 들어요?”
범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자신이 곧 경도를 떠나서 완아의 마음이 심란하다는 걸 알기에 마음껏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황태후께서는 황태자와 2 황자 오라버니를 아무 차별 없이 좋아하시고 가장 싫어하는 건 1 황자 오라버니, 3 황자는 그다음으로 싫어하시죠.”
임완아가 밖에는 알려지지 않은 황궁 안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황후께서는 실권은 없지만 어머니와는 관계가 좋으세요.”
범한이 진지하게 경국 후궁의 정치를 듣다가 끼어들어 물었다.
“3 황자는 왜 싫어하시는 거예요?”
임완아가 창밖을 힐끗 보고는 잠시 주저하다 대답했다.
“그거야 아버지와 관계 때문이겠죠. 황태후께서도 의 귀빈이 범씨 집안과 사이가 가깝다는 걸 아시니까요.”
“완아, 당신은 내가 이번에 강남에 가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범한이 진지하게 묻자 완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정말 스승처럼 3 황자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거리를 유지하세요. 그래야 황태후께서 상공이 3 황자에게 해서는 안 될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고 의심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건 조사도 미루지 말고 빨리 추진하시고요. 시간이 늦춰질수록······ 어머니가 2 황자 오라버니와 도찰원을 통해 무슨 짓을 할 확률도 높아지잖아요.”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른 임완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마 모든 사람이 어머니가 동궁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게 2 황자 오라버니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상공은 반드시 이에 대해 대비해야 해요. 어쨌든 황태자 오라버니는 언젠가는 어머니 쪽으로 기울 테니까요.”
범한은 한동안 말없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어쩌다가 이런 가련한 상황에 놓이게 됐을까 생각했다. 그는 과거 원한 때문에라도 동궁이 자신의 성장을 두고 볼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장 공주가 황태자와 2 황자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을 정도로 술수를 잘 부리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꾀 많은 장모를 떠올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 * *
초하룻날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보냈다.
초이튿날에는 경도 관리들이 찾아와 새해 인사를 하며 보냈다.
초사흗날에는 집안사람 모두 정왕가 연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범한은 세자 이홍성과 어색한 만남을 가져야 했다.
초나흗날에는 임소안과 신기물이 합동으로 연회를 열어 범한과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초닷샛날에는 언씨 부자가 범씨 저택에 찾아왔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바둑에 취미를 두게 된 언약해는 어두워질 때까지 상서 대인과 실력을 겨루었고, 범한과 언빙운은 작은 서재에 안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밀담을 나누었다.
초엿샛날에는 진원을 방문했다.
초이렛날에 범한은 아내, 누이, 유가 군주, 섭령아 이렇게 네 명의 여자들과 함께 경도를 쏘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초여드렛날에는 정오에 국공가의 초대와 저녁 무렵 범씨 대호족의 모임에서 범한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 * *
정월 대보름날을 보낸 범한은 일행들과 함께 경도 남쪽 부두에 도착했다. 이 강의 이름은 위하강이었다. 중간에 유정강과 만나는 위하강은 남쪽으로 수백 리 흘러 큰 강과 합류했다. 그리고 그 강을 따라 내려가면 경도보다 더 번화한 강남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폐하와 상의한 대로 범한은 대외적으로는 담주로 돌아가 할머니를 만나 뵌다는 핑계를 댄 뒤 강남으로 향했다. 그가 최소한 3개월이 되어야 소주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일찍 도착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범한은 가족을 제외한 친분이 있는 감찰원 관리나 조정 관리들을 포함한 누구의 배웅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경도를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이 소식을 들은 태학 학생들이 부두까지 달려왔다.
범한이 태학에서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예전부터 친밀한 관계였다. 작년 춘시 때 대량의 은전을 동원해 가난한 학생들을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춘시 부정 사건도 밝혀 실력 있는 인재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주고 장묵한 대가에게 증서를 받은 일까지 더해져 범한은 서생들의 마음속에 지고지상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또 범한은 감찰원 제사가 된 뒤에는 뇌물 사건을 처리해 1처의 기풍을 바로잡음으로써 자신은 감찰원의 비리에 물들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
이후 알려진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소문도 상당히 기이한 부분이 있었다. 원래 서생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품이 고결하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집안이 얼마나 좋은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걸출한 인재라 인정한 작은 범 대인이 휘황찬란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자 서생들은 위화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영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작은 범 대인이 감찰원 관리면 어떠하고 상인이면 어떠한가. 우리 서생들이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황자이신데.’
부두에서 교사와 태학 학생들이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부두에서 종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범한이 술 석 잔을 마셔 마중 나온 사람들과 정을 나누었다. 그 광경이 복잡스럽고 시끌벅적해서 아마도 얼마 후면 조정에도 알려질 게 분명했다.
가까스로 사람들을 돌려보낸 범한이 완아의 두 손을 가볍게 잡고는 자세하게 여러 당부를 남겼다. 마지막으로 그가 날이 따뜻해지는 봄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하자 비로소 완아는 눈물을 그쳤다.
350화
완아가 멀어진 서생들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상공이 알린 거예요?”
범한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들의 아름다운 소망을 이뤄 주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그가 고개를 돌려 여종들 뒤에 숨어서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고 있는 누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움츠러든 모습을 보니 순간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솟아 범한은 배웅하는 여종들을 밀치며 약약의 앞으로 걸어가 소리쳤다.
“울긴 왜 울어!”
오라버니가 직접 자신의 앞에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범약약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더듬더듬 말했다.
“무슨······ 내가······ 언제 울었어?”
둘러대던 범약약이 순간 생각했다.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화낸 적 없던 오라버니가 오늘은 어째서 화를 내는 거지? 친오라버니가 아니라고 이전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는 건가.’
원래 국화처럼 여린 마음을 가진 범약약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자 서글픔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자꾸만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범한은 그런 누이의 모습을 보니 너무 화가 나서 실소가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머리끝까지 화난 그가 이를 갈며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종들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물러났다. 종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범한과 범약약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때 다행히 완아가 다가와 약약을 끌어안고는 뭐라 속삭였다. 이어서 경도를 떠나는 범한이 마음이 좋지 않아 화를 낸 거라고 타이르자 범약약도 비로소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범한이 오늘 버럭 화를 낸 것은 지난 십여 일 동안 누이가 계속 상심에 겨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려 하지 않자 결국 화가 터진 것이었다. 약간은 무서워하는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누이의 모습에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한테 화를 내는 건 당연한 거야. 나는 네 오라버니고 너는 내 누이이지 않니. 그러니 오히려 내가 화를 내지 않는 걸 슬퍼해야지.”
총명함을 타고난 범약약은 한 번에 범한의 말을 알아들었다. 만약 범한이 자신을 친누이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화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범한의 진심을 안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 그럼······ 멀리 떠나는 오라버니를 보고 누이가 슬퍼하는 것도 당연한 건데 왜 화를 내고 그래?”
“하하하하.”
마음이 풀린 누이가 말문을 열자 범한은 안심되는 마음에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 시간이 없어요!”
부둣가에 세워진 배 위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던 사사가 조급함에 소리쳤다. 범한은 강남으로 가면서 가장 가까운 종들을 데리고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사사는 담주에서부터 함께 살았으므로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담주에 있었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밝고 활기차 보였다.
소리치는 사사를 본 완아가 피식 웃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상공이 너무 잘해 주니까 버릇이 없잖아요.”
범한이 웃으며 누이의 귓가에 대고 곧 경도에 중요한 일이 생길 거라 당부한 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완아를 꽉 끌어안고 진한 입맞춤을 나눴다. 그러고는 마침내 소매를 휘두르며 정박한 배에 올랐다.
그는 소매를 휘두르며 모든 은전을 가지고 갔다.
* * *
오늘 작은 범 대인이 경도를 떠난 일은 이미 경도 사람들의 대화 소재가 되어 있었다. 술집이나 찻집뿐만 아니라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저택에서까지 이 일을 가지고 의견을 나눴다.
저택에 연금된 2 황자는 모사의 보고를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이 결국 갔군.”
모사가 이를 갈며 분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떠나지 않았다면 그놈의 낯짝을 벗겨 저하의 원한을 씻어 드렸을 텐데 말입니다.”
의자에 앉은 2 황자가 국을 떠먹다가 그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자조 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나와 범 제사가 닮았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내가 그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건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가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나더니 바깥 자유로운 하늘을 바라보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놈이 마침내 갔다고 하니 기분이 좋군. 마치 누가 내 등 뒤에 있던 독사를 치워 준 것처럼 홀가분해.”
경도에서 3백 리 떨어진 곳에서 휘황찬란한 대열이 길게 늘어서서는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바로 신양 이궁에서 생활하다가 경도로 돌아가는 여자의 행렬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위가 경도를 떠나는 바람에 자신이 호의를 표시하고 협상을 나눌 대상이 사라졌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한편 외삼리에 위치한 장엄한 경묘에는 장작을 높이 쌓고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불길이 워낙에 거세서 안에서 화르르화르르 타오르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황제가 뒷짐을 지고 차가운 눈으로 불길을 안에서 점차 검은 연기로 변하는 육체를 바라봤다. 그의 뒤에서 고행자의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경국 대제사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불길을 바라봤다.
경묘 밖에서 어린 내관 홍죽은 시위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내일 황후궁 수령 태감으로 발령되는 만큼 오늘이 폐하를 모시는 마지막 날이었다.
며칠 뒤 위하강에서 범한이 서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납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도 그가 입은 귀한 가죽옷을 뚫지는 못했다.
경도를 벗어났음에도 그는 끊임없이 계속 보고를 받고 있었다. 장 공주는 수많은 전초를 경도로 보낸 데 이어 임완아에게 준다는 핑계로 신양의 특산품들을 사남가에 보냈다. 아무래도 장모는 금전적 손실을 보고 암살까지 실패하자 결국 범한의 힘을 인정하고 모녀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런 건 진평평이 말한 천하를 바라보는 시선 안에 들 수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다. 범한이 정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건 여러 해 만에 귀국한 경국 대제사가 남쪽에서 고행하느라 정력을 소진해 몸이 쇠약해져 사망했다는 소식과 홍죽이 황후궁 수령 태감으로 발령 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이 소식이 약간은 실망스러우면서 또 약간은 기쁘기도 했다.
그의 제자 사천립이 손으로 매서운 강바람을 가리며 옆으로 다가왔다.
“스승님, 배의 상교가 말하기를 지금과 같은 속도면 내일 영주를 지날 수 있고 거기서 며칠 더 가면 강남 경계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 합니다.”
강남으로 함께 가는 일행은 경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감찰원의 비밀 함선으로 갈아탔었다. 그들이 지금 타고 있는 배는 사실 민간 선박처럼 위장한 수군 함선이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그림처럼 펼쳐진 산과 호수 풍경을 바라보던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사천립, 지금 강남 미녀들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으니 조급해할 필요 없네.”
순간 사천립이 정색했다. 포월루 장사가 강남에까지 전해져서 이번에 같이 가게 된 상문은 석 달 뒤로 떠나는 날짜가 미뤄졌지만 범한의 제자인 사천립은 미룰 수 없었다. 그는 과거 동복객잔에 있었던 친구들과 동기들은 지금 강남 관리가 되었는데 자신은 유명한 기생집 사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강물을 얼릴 정도로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니 순간 화가 나면서 그는 운 좋게 진 원장 옆에 머무르게 된 상문이 부러워졌다.
한편 여기 운이 없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엄명에 봄꽃이 피지도 않은 추운 겨울에 황궁을 나와야 했다. 3 황자가 두꺼운 장막을 걷고 범한을 바라보았다.
“사업 대인, 밥 드세요.”
범한이 황자를 교육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태학사업인 만큼 3 황자는 그를 사업 대인이라 불러야 했다.
고개를 돌린 범한이 여덟아홉 살 된 남자아이를 향해 무서운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저하, 숙제는 다 하셨습니까?”
영주는 큰 강 북쪽에 자리 잡은 곳으로 수많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물자가 풍부한 강남으로, 서북쪽으로 향하면 경국의 중추인 경도로 갈 수 있었다. 즉 경국에서 가장 번화한 두 지역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 지역은 위하강과 큰 강이 만나는 지역이기도 했다. 비록 높고 험준한 산에 휩싸여 있어 교통이 불편했지만, 다행히 운하가 연결되어 있어 교통의 중추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지리적 배경만 놓고 따져 본다면 영주는 상단이 운집해 번화하고 민생이 안정된 곳이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의 영주는 몰락한 지역이었다. 이는 풍물이 쇠락하고 가옥이 낡아 쓰러질 듯 보여서라기보다는 거리에서 풍기는 느낌이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행인들의 표정이 시무룩하고 생기가 없었다. 거리에서 과일, 구운 떡 등을 파는 노점상에서도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찬 바람만 쌩쌩 불고 있었다.
성 밖에 위치한 나루터도 그다지 활기차지 않았다. 경국 뱃길을 따라 오가는 선박 대부분이 이곳이 아닌 아래쪽 나루에서 정박해서였다. 그러니 겨우 배 몇 척이 드문드문 있는 가운데 새로 건조한 것 같은 대형 선박이 떡하니 정박하자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영주 지역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첫째 날씨 때문이었다. 작년에 큰 강에서 홍수가 나 상류에 있는 제방이 무너져 물이 벌판까지 덮쳐 버렸다. 이 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가옥이 침수되고 파손되었다. 다행히 수재가 있고 난 후 바로 날이 서늘해져 역병까지 돌지는 않았지만 영주는 전체적으로 치명상을 입은 탓에 침체의 늪에 빠져 버렸다.
둘째는 관리 때문이었다. 영주의 지주는 과거 천자의 제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자로부터 총애를 받는다거나 하는 복을 누리지는 못했다. 이에 그는 영주성에 있는 동안 권력을 남용하고 웃전에 아첨하고 상인과 백성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데에만 몰두했다. 수로 보수와 정비, 일반적인 치안 유지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세금만 과하고 잡다하게 징수할 뿐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영주 지주가 강과 마주한 산악 지대의 산적과 한통속이란 소문도 꾸준히 떠돌았다. 이런 자가 지역의 관리로 있었으니 민생은 자연히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상인과 여행객들도 마음 편히 돌아다니지를 못했고, 규모가 큰 제대로 된 상단은 산적의 공격을 받으면 제때 피할 수가 없어 그 누구도 굳이 지역에서 머물려 하지 않았다.
셋째는 도적 때문이었다. 영주 백성들은 용맹하고 사나운 기풍을 지녀 예로부터 괭이를 들고 관에 맞서는 걸 영광스러운 전통으로 여겼다. 그러니 탐관오리 때문에 빈곤해진 백성들이 산이며 강으로 들어가 도적 떼에 합류하는 게 자연스레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올해 들어 영주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 우선 지주(知州)가 이곳에 주둔한 감찰원 4처 순찰사에게 차 대접을 받으러 간 일이었다. 백성들은 ‘드디어 지주가 무너지는구나!’ 하며 은근히 기뻐했다. 하지만 감찰원은 지주를 곱게 그것도 공손하게 돌려보냈다. 영주 지역민은 ‘영주가 이렇게 무너져내리는구나!’라고 실망했다. 한데 그때 지주가 급작스레 사망해 버렸다.
경도에서는 직접 사람을 내려보내 오랫동안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지주는 음모 때문이 아닌 병사로 확인되었다.
지주가 죽은 날, 영주성 백성들은 침묵 속에서 환희의 폭죽을 수없이 터뜨렸다. 그 누구도 악귀가 죽어 경축하는 거라 감히 말할 수는 없었다. 이에 지역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날 영주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집을 비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다음으로는 강 맞은편 산에 있는 산적들이 많이 온순해진 일이었다. 누군가가 제일 큰 산채에 쳐들어가 하룻밤 사이에 산적들을 학살하고 사분오열시켜 놓은 것만 같았다. 소문에 의하면 강남 쪽에서 온 강호의 유명 인물이 산적들을 굴복시켜 나가는 중이라 했다.
그런데 영주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기쁨을 더 즐기지 않고 일찌감치 거두어 버렸다.
악덕했던 지주는 죽었지만 내년에 조정에서는 다른 지주를 내려보낼 것이고, 현 산적 세력이 무너졌다 할지라도 다른 거대한 세력의 산적 떼가 도로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나아진 게 전혀 없었다.
351화
나루터 옆에 있는 창고에서 십여 명의 일꾼들이 빙 둘러서서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나루터가 아무리 한산해도 대낮에 한담을 나누는 건 제대로 된 나루터 일꾼에게서는 볼 수 없는 태도였다. 더군다나 사납고 악랄한 표정이라니.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가운데에는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 미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얼굴에서 강인한 면모가 보였다. 그런 그녀가 입을 열자 주변 장정들이 고분고분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두목인가 보다.
“제대로 조사했습니다. 차(茶)를 가지러 온 상인이고 경도에서 왔다고 합니다.”
“관 누님, 저들 배에는 호위 무사도 있었어요.”
한 일꾼이 일러 주었다.
관 누님으로 불리는 이는 영주 부근에서 유명한 산적 두목이었다. 영주에 나타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벌써 힘 있는 도적 두목들을 규합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소문에 의하면 그녀에게는 어마어마한 뒷배가 있다고 했다.
관 누님이란 자가 싸늘하게 웃었다.
“고작 상인들 아니냐. 뭘 그리 겁먹고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도 같이 가자고 했잖아. 그런데도 그 밀실에 있는 상자가 얼마나 무거운지 내가 일일이 말해 줘야 하는 거야?”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상자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일꾼들의 눈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산적은 마차 바퀴가 만들어 내는 먼지양으로 화물의 중량을 판단하고 가치를 따졌다. 마찬가지로 주로 수로에서 도적질하는 영주 부근의 산적들은 선박이 물에 얼마나 잠겨 있는지를 가지고 안에 있는 물건의 가치를 따졌다.
그런 이들에게 어제 갑자기 정박한 커다란 선박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해 보이는 데다 겉으로 보기에는 8할 정도는 새로 건조된 것처럼 보였다. 나루터에서 사람들은 목재로 된 선박 몸통에 낀 이끼를 가지고 배가 물에 얼마나 들어가 있었는지를 판단했다. 이에 산적들은 그 선박이 아주 오랫동안 물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요즘 영주에서는 이런 대형 선박을 거의 볼 수 없다 보니 산적들에게는 그야말로 통통하게 살찐 커다란 양 한 마리가 통째로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이에 선박에서 사람이 먹을거리와 물을 구하러 내려왔을 때 이들은 이미 배 내부 상황을 꼬치꼬치 캐물어 둔 상태였다.
산적들이 차를 가지러 왔다는 상인의 선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물에 잠겨 있는 선박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고작 차나 가지러 온 상인의 배라는데 선미 쪽에 왜 무거운 물건이 실려 있는 것인지. 의문에 대한 답은 밥을 지어 주러 선박 안으로 들여보낸 염탐꾼 식모를 통해 해결되었다.
염탐꾼이 알려온 정보에 따르면 선미 쪽에 경비가 삼엄한 밀실이 있었다. 갑판이 힘을 받아 휘어져 있는 상태이며, 자물쇠 위의 살짝 긁힌 흔적을 통해 그녀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바로 은자였다. 그것도 상자 가득 말이다.
“강남에 차를 가지러 왔다면서 은자를 그리 많이 가지고 다니는 자는 세상에 없지.”
사실 관 누님은 아직 확신이 선 상태는 아니었다. 한데 대두목께서 영주 부근 산적을 굴복시키려면 몇 개의 큰 거래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이들 땀내 나는 도적들에게 여기저기서 냄새를 맡고 다니도록 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공자께서 봄부터 하려는 일은 정말로 은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니 자신도 이렇게 사방팔방 바삐 다니며 선박을 강탈할 수밖에 없었다.
산적 하나도 무언가 수상쩍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배 바닥이 물에 많이 잠겼는데 안에 물건이 많이 없다면······ 배 밑바닥 선실에 돌을 넣었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 형수가 정확히 확인 못 한 것일 수도 있어요.”
관 누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선(海船)도 아니잖아. 그러니 밑바닥 선실에 돌을 넣어 배를 눌러 놓을 필요는 없어!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저 큰 배에 있는 상인이······ 왜 은전을, 그것도 현물로 많이 가지고 다니느냐 하는 거라고.”
“은전이 현물이면 좋지요!”
다른 산적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은표는 많아 봤자 뺏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의 말에 동료들도 동의했는지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대단히 만족감에 찬 웃음소리였다.
관 누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문제는······ 요즘 대체 어떤 상인이 은전을 현물로 가지고 다니느냐는 거지! 설마 누군가 훔치거나 뺐을 거라는 걱정은 안 하는 건가?”
산적들이 관 누님을 바라보았다.
‘이 두목은 악랄한 데다가 일 처리도 지독하게 해. 목표물을 고르는 안목도 정확하고. 지주가 없는 상황을 틈타 형제들을 데리고 가서 큰 건 몇 개를 해치우고 왔잖아. 그런데도······ 어떤 때는 너무 소심하단 말이지. 도둑을 걱정해야 하는 건 저 멍청한 차 상인이라고. 무엇 하러 형제들에게 묻는 거야?’
관 누님이 손을 흔들어 소리를 치며 염탐을 나갔던 셋째 형수를 불렀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비쩍 마른 셋째 형수가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염려 마세요! 호위 무사들은 십여 명 있던데 위쪽에 있어요. 바깥쪽에 어린 여종하고 어린아이가 하나씩 더 있었고요. 주인이란 작자는 바람만 불어도 픽 쓰러질 것처럼 생긴 젊은 놈이더라고요. 아주 곱상하게 생긴 게 은폐 같은 건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딱 보니까 경도에 사는 덜떨어진 부잣집 도련님 같더라니까요. 사람 만들라고 집안 어르신들이 강남으로 보냈나 봐요.”
여종을 데리고 있다니. 젊은 상인은 밤마다 찾아오는 적적함을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관 누님이 소리를 내며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걱정했던 걸 내려놓았다. 저 차 상인이 정말로 생각이란 게 있는 자라면 여자를 데리고 큰 강을 지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정말로 모자란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종이로 된 은표보다는 반짝이는 은전을 가지고 다니는 걸 더 선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십여 명의 호위 무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수하로 둔 십여 명의 형제들은 모두 사람 몇 정도는 죽여 본 적 있는 무시무시한 비적이다. 그러니 형제들과 함께 선박에 오르면 저들 호위 무사들은 죽거나 강으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 사항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 곁에 있던 산적들이 서로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관 누님, 밤에 일을 다 치르고 나면······ 그 어린 계집종은 우리한테 상으로 넘기시죠!”
그러자 관 누님이 두 눈을 감았다 뜨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단 일부터 잘 끝내고 볼 것이지! 은자만 손에 넣으면 다른 건 어련히 알아서 따라올 것 아니냐.”
말을 마친 관 누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정말로 서늘하고 사악한 웃음소리였다.
“깔끔하게 처리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죽인다. 일이 끝나면 배는 이호 모래사장으로 가져가서 태워 버리고.”
* * *
밤이 찾아오자 영주성 밖은 고요했다. 강 맞은편으로 우뚝 솟은 산꼭대기에 걸린 달빛은 세차게 흘러가는 강을 싸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포효하던 강물도 잠잠해진 것만 같았다. 나루터에는 배 몇 척이 쓸쓸하게 정박해 있었다. 이미 자시(子時: 밤 11시에서 새벽 1시)를 넘긴 시각. 사람들이 단잠에 빠져드는 때로 배를 밝히고 있던 등불도 일찌감치 꺼지고 상인들도 이미 잠들었을 무렵이었다.
달빛이 땅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가운데, 십여 명의 검은 그림자가 강기슭을 더듬고 내려와 강물로 입수했다. 그들은 제일 큰 선박 뒤쪽으로 헤엄쳐 가더니 몸을 더듬어 물건 하나를 꺼냈다. 일부는 배에서 늘어뜨려져 있는 줄을 맨손으로 타고 올라갔다. 흡사 물에 홀딱 젖은 원숭이가 날렵하게 줄을 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잠깐 사이, 야간 습격에 나선 산적들은 어느새 배에 올라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관 누님은 한도(寒刀)를 입에 물고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선박 내부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엄호 속에서 선채를 더듬으며 뒤쪽으로 향했다. 나루터 창고에서 이미 충분히 정보를 교류한지라 그녀는 선박 내부를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고 은전이 가득 든 상자가 선미 어느 선창에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관 누님 뒤쪽 어둠 속에서 들릴 듯 말 듯 푸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누군가가 갑판에서 넘어지는 소리가 나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놈의 부하 새끼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거야! 호위 무사가 놀라 깨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두렵다기보다는 조금 전 일어난 상황이 성가셔서 한 말이었다.
밀실 밖에 도착했는데 이상하게도 호위 무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선박 안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그런데 부하들이 선박 안으로 침투 중인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 안심이 되었다. 관 누님이 문을 손가락으로 잡은 후 그 틈에 칼끝을 넣어 힘을 주자 밀실 문은 가볍게 열렸다. 어둠 속을 더듬던 그녀가 잠시 후 상자 하나를 찾아냈다.
관 누님은 선창을 통해 어슴푸레 들어오는 빛으로 상자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셋째 형수는 상자의 크기와 중량을 말하면서 수천 냥의 은전은 있을 것 같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관 누님은 상자를 더듬으며 크기를 가늠해 보다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세상에나! 여기에 은전이 대체 얼마나 들었기에 이렇게나 큰 상자에 담은 거지?’
갑자기 뒷북치듯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은전을 이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다면 부유층 자제 중에서도 경도 제일 부자일 터. 그러니 은전을 도둑맞은 사실이 새어 나간다면 경도 쪽에서도 화를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 뒷배로 계신 공자님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 배에 있는 부잣집 도령은 죽이지 말아야겠군!’
관 누님은 퍼뜩 이 생각부터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생각이 들자 어느새 또 머뭇거렸다. 더군다나 이 정도로 많은 은전이라면 정말이지 너무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녀는 지니고 있던 공구를 조심스레 찾아 꺼냈다. 한참을 조몰락거리자 상자가 열렸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 밀실 선창 내부에 은빛이 일렁였다.
* * *
관 누님은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앞에 놓인 상자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동안 칼날이 오가는 삶을 살아 그런지 항상 핏빛으로 물든 은전만 보아 온 터였다. 그러다가 오늘 밤 상자 안에 가지런하게 담겨 빛을 뿜고 있는 중간 크기의 은전을 보자 그녀는 그것들에게 마음을 사로잡혀 버렸다. 싸늘하기만 했던 두 눈에서는 어느새 탐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관 누님은 즉각 그런 자신을 경계했다.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은전이 아무리 반짝여도 이렇게나 유혹하는 빛을 낼 리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다 고개를 홱 돌렸을 때다. 순간 우중충한 얼굴을 한 중년의 누군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중년의 사람은 한 손에는 백광등을, 다른 한 손에는 특이하게 생긴 장검을 들고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위 고달이었다. 고달은 일찌감치 범한의 분부를 받은 터였다. 그는 일단 관 누님에게 은전을 구경할 시간을 충분히 준 후 천천히 칼을 휘둘렀다.
관 누님도 칼을 들어 맞섰다.
고달 입장에서는 굼뜬 동작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막을 수 없는 홍수와도 같았다. 큰 강에서 활동하는 여도적은 순식간에 심리적, 물리적 방어막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 끔찍하게도 자신의 왼손이 잘려 나가는 걸 똑똑히 지켜봐야만 했다. 손이 잘려 나간 자리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그녀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 * *
배의 중간 선창에 불이 밝았다. 밀실 밖으로 끌려 나온 관 누님은 산발이 된 머리만큼 마음도 심란한 상태였다.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며 선박 위로 올라온 산적들은 일찌감치 기절해 무장이 해제된 상태였다. 그리고 온몸이 꽁꽁 묶인 채 가지런하게 갑판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숙직을 서고 있던 6처 검수 몇몇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사방에서 각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관 누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팔걸이 나무 의자에 권태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급하고 고민에 찬 듯 보이는 젊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 몸서리가 쳐졌다.
‘배에 대체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 거지?’
이 정도 실력의 고수들을 호위 무사로 두다니. 그것도 도법(刀法)의 대가를 말이지.
그녀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것이었다. 셋째 형수가 말한 부잣집 도련님은 평범한 차 상인이 아니었다.
“관무미?”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사람이 그녀의 손이 잘려 나간 부위를 쓱 쳐다보았다. 여도적은 아직 살기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는 하품을 하며 매우 흥미롭다는 투로 물어 왔다.
이 젊은 청년은 당연히 범한이었다. 그가 영주에 정박한 이유는 홍죽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좀도둑이 든 것이었다. 한데 범한은 그 여인을 보는 순간 감찰원 사건 중 수배범으로 기록되어 있는 여도적의 초상화를 단번에 기억해 내고는 저도 모르게 흥미가 일었다.
‘강남에서의 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아직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게 제 발로 찾아와 줬군!’
352화
상대방이 너무나도 편하게 자기 이름을 부르자 여도적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도 잘려 나간 손 부위를 다른 손으로 꽉 움켜쥐고 도끼눈을 뜨고 범한을 찍어 버릴 기세로 노려보며 매섭게 말했다.
“오늘 손이 잘려 나갔는데 귀하의 존함이나 알아야겠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범한은 상대방의 독기 품은 눈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이곳 주인이고 너는 도적이니라.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내 내력을 묻는 것이냐?”
관무미는 왼손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전해져 오자 손이 잘려 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로 오늘 벽창호 같은 이를 만났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저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범한이 가소롭다는 듯이 관무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황당해서였다. 자신과 일행들은 오늘 일이 있어 영주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선박이 도대체 어떤 냄새를 풍겼는지 모르겠지만 하루도 안 되어 도적 떼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잡아 놓은 여도적은 자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어떻게 할 건지나 묻고 있었다.
“어찌하다니?”
범한이 손을 내밀더니 손가락에 차가운 찻물을 묻혔다. 그런 후 미간에 꼼꼼히 바르며 눈썹을 한차례 들썩였다.
“저승, 이승, 사람 사는 세상, 귀신 사는 세상, 이 중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
그때 뒤쪽에 있는 선창 가림막이 살며시 움직였다. 그리고 두툼한 솜저고리를 걸친 사사가 떨떠름하게 미간을 문지르며 나와 얼떨떨해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련님, 왜 올라오셨습니까?”
넓은 선창을 밝히고 있는 등불이 눈 부셨는지 사사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내부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잘려 나간 관무미의 손을 발견한 사사는 피범벅이 되어 있는 끔찍한 현장 모습에 놀라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사사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 범한은 서둘러 손으로 그녀의 입을 가로막으며 놀리듯 말했다.
“영주성 사람들을 모두 깨울 셈인가?”
담주와 경도에서 지내는 동안 사사도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본 적 있었다. 바로 범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 범사철이 가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을 때다. 하지만 손목이 잘려 나가고 다리가 부러진 장면은 처음 보는지라 너무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안정을 되찾았다. 범한이 그녀의 허리를 꼬집으며 엄포를 놓았다.
“이만 돌아가 자게. 나는 지금 일하는 중이니까.”
사사는 다시 한번 관무미를 쳐다보고는 “네.” 하고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그 애는 아직 자고 있지?”
“자고 있습니다.”
사사가 말을 이어 갔다.
“사 선생은 안 깬 것 같습니다.”
“사 군은 돼지처럼 잘도 자는군. 그때 도련님이던 내가 사건에 휘말렸을 때도 기생을 품에 끌어안고 잘도 자더니만.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잤었지.”
* * *
관무미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입가에는 경련이 일고 낯빛은 창백해져 있었다. 하지만 젊은 대인과 여종과의 대화만큼은 똑똑하게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내용이 들을수록 이상해 이 배에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밤에 산적에게 습격을 받았는데 이렇게나 침착하고 태연하고 더군다나 잡담을 나눌 여유까지 있다니. 강한 자신감에 차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조금 덜떨어진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지금 관무미는 전자의 경우로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다만 상대방이 자신과 자기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사가 떠난 선창 안. 범한은 미소를 잠시 거두고 나지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관무미. 강북로 악주 출생. 아비는 관하산, 어미는 하씨. 집안 사정이 궁핍해 어릴 때 기루에 팔려 갔고 나중에 악주 일주부의 첩실이 되었지. 본처의 괴롭힘 때문에 홧김에 그녀를 죽여 하옥되었고. 그 후 기적처럼 탈옥해 이후 모 산채의 산적 두목이 되었고. 그런 후 산채가 무너지자 또다시······ 영주 일대로 와 있었군.”
관무미는 너무 놀라 오들오들 떨었다. 손에서 전해져 오던 고통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저 청년은 어떻게 내 과거를 샅샅이 알고 있는 거지? 설마 저자가 나를 잡기 위해 쳐둔 덫에 내가 걸려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관무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악을 썼다.
“넌 대체 누구냐? 어떻게 나에 대해 그리도 상세히 알고 있는 거지?!”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기억력이 좋아 그러니라. 하나 이 자료도 명확한 건 아니더구나. 왜냐하면 너는 중요한 인물 축에도 못 들거든.”
관무미는 굴곡지고 기이한 인생을 살아 온 터라 큰 강 일대에서는 거칠기로 유명한 도적이었다. 한데 오늘 제대로 저항도 못 해보고 잡힌 데다가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자신이란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너무나도 굴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이의 말투와 그자에게서 풍기는 기질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존재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이 몸 뒤에 어느 분이 계시는지도 알아챘을 텐데······. 우리를 몽땅 죽여 버린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자선을 베풀 생각은 애당초 말아야 할 거야.”
그런데 잔혹한 현실이 그녀의 환상을 산산이 부서뜨려 버렸다.
범한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내가 하려던 걸 네가 직접 말해 주었구나.”
경악한 관무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예리한 칼로 목을 끊어 놓는 소리가 무수히 울렸다. 일석거 뒤쪽에 있는 큰 주방에서 닭을 수없이 잡는 소리 같아 정말로 들어 주기 힘들 지경이었다.
범한을 근접 호위하는 무사들이 관무미를 따라 선박 위로 올라온 산적 십여 명의 목을 단번에 찔러 죽이는 소리였다. 그들은 도적들의 숨통을 제대로 끊어 놨는지 확인하고는 시체를 곧장 강에 집어 던졌다. 어찌나 깔끔하고 전문적으로 해치워 버렸는지 갑판 위에는 혈흔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강물 튀는 소리가 한바탕 나더니 한참 후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죽은 도적들의 시신과 피를 흘러가는 강물이 너그럽게 받아들여 준 것이었다.
십여 명의 사람을 연달아 죽이는 데 눈 한번 깜빡 않다니. 정말로 매섭고 잔인했다.
관무미의 눈빛에 드디어 공포가 깃들었다. 상대방이 손을 쓰는 걸 직접 보고 나니 이런 일은 예사로 하는 사람들이란 걸 알게 되어서였다. 관무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젊은 남자가 아까 내렸던 명령을 수신호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에 관무미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이를 부딪치며 떨고 있자 관무미는 억지로 침을 삼켜 자신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저들과 함께 죽이지 않은 건 자신에게 살 기회를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부디 우리 대두목님의 체면도 생각해 주십시오.”
공포에 질린 관무미가 털썩 무릎을 꿇고 범한에게 인정을 베풀어 달라며 호소했다.
“너희 대두목이라고?”
대두목의 실력이 생각난 관무미는 한 줄기 희망을 잡은 것 같았다.
“공자님의 행동을 보아하니 무(武)를 연마하신 분 같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저희와 같은 길을 걷는 분이실 터. 우리 대두목님은 강남 수채(水寨: 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산적, 도적 떼, 비적의 본거지)의 주인으로, 그분은 보유한 배만 백 척이며 인재도 수없이 많이 거느리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강남에서 큰일을 도모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우리 대두목님과 만나시는 즉시 의기투합하시게 될 것입니다.”
범한은 여도적의 불경한 말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의 애걸하는 소리가 소위 강남 수채의 주인이란 자를 들먹이며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아서였다. 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번 강남행은 정말 재밌겠어.’라고 생각했다.
* * *
“대두목이라고 했느냐?”
범한이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말하는 이가 명칠 어르신으로 불리는 자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라는데 그 가문 문턱도 넘어 본 적 없다는 명칠 공자 말이다. 듣자 하니 공자의 생모는 여러 해 전에 죽었다더군. 그리고 명씨 가문의 어르신이 돌아가시자 가업을 물려받은 큰아들이 가문의 수치인 서자를 찾아내겠다며 사방팔방으로 사람을 풀었고 말이지. 한데 진짜 이유는 명씨 어르신이 유언으로 7 공자에게 너무 많은 걸 남기셔서라고 하더군. 숨을 곳이 없었던 명칠공자는 아예 암흑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했고, 이에 성과 이름까지 바꾸고 꼭꼭 숨어 조용히 살며 암암리에 사람을 죽이며 살았지. 그렇게 5, 6년을 지냈더니 드디어 유명세를 타게 된 거고 말이야. 당당한 강남 수채 대두목 하서비. 과거 불쌍했던 서자 명칠 공자. 어찌하다 그 꼴이 되었을꼬?”
범한이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그리고 강남에서 지위가 좀 있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과 너무 괴리가 크다는 듯 말했다.
“자기 수하들에게 여기저기에서 은전이나 빼앗고 다니게 하다니. 설마 최근 들어 필요한 은전이 모자라서 그런 건가?”
강남은 원래 부유한 지역이었는데 황실 금고가 세워진 후로 더 많은 부자가 생겨났다. 그런데 소금을 파는 염상과 해외에 물건을 파는 해상을 제외했을 때 가장 유명한 양대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최씨와 명씨 가문이었다. 두 집안은 혼인을 통해 대대손손 세력을 키워 왔다. 그리고 장 공주에게도 붙어 황실 금고에 기대어 셀 수도 없이 많은 부를 쌓았다. 최씨 가문은 황실 금고의 북쪽 밀무역 노선을 책임지고 있었다. 한편 명씨 가문은, 감찰원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분명히 황실 금고와 동이성과의 밀무역 및 해외로의 일부 수출을 맡고 있어야 했다.
범한이 강남 황실 금고를 이미 접수했고 최씨 가문도 이미 무너졌으니 가장 먼저 충격을 받게 될 곳은 명씨 가문이었다. 이에 범한은 경도에서 떠나기 전에 충분히 조사를 했고 언빙운 공자와 밤샘 논의를 하며 방비책도 이미 세워 놓은 상태였다.
범한이 천천히 말을 해나가는 동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얌전히 듣고 있던 관무미는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자신이 모시는 공자님은 명씨 가문에서 쫓겨난 후 몇 년 동안 가문의 사업을 빼앗아 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의 진짜 신분은 가장 은밀한 정보였다. 강남 수채의 다른 두목들도 자기 주인의 정확한 신분은 모르고 있었으며 단순히 명문 호족의 후예라고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이에 명씨 가문에 속한 대부호 상인들은 하서비에게 깜빡 속아 넘어간 것도 모자라 강남 수채와 떳떳하지 못한 거래까지 하고 있었다.
관무미는 명칠 공자의 친척이었지만 명칠 공자 주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명칠 공자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관무미는 강남 수채의 대두목인 하서비의 진짜 정체를 다른 사람이 알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공자가 하서비의 진짜 신분을 줄줄 읊다니.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범한이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기분 좋게 웃기 시작했다.
“이제야 알겠군. 명씨 가문은 최씨 가문이 몰락해 가슴이 아프긴 하겠지. 그래도 최씨 가문의 지분을 넘겨받게 되어 실제로는 기분이 좋을 거야. 명칠 공자는 지금이 명씨 가문에 맞설 절호의 기회이니 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거고. 3월에 황실 금고에서 새롭게 입찰 참여 문서를 발행할 테니 강남 수채는 이참에 양지로 나오려 하겠지. 명칠 공자가 복수를 하려면 황실 금고의 거래 문서를 자신이 가져와야 하고 말이지. 그런데 이때 필요한 게 돈이야. 어쩐지 그자가 허둥지둥한다 했더니만.”
관무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저 유약해 보이는 젊은이는 대체 어디서 떨어진 신선이지? 어떻게 저렇게나 많은 걸 알고 있을 수 있어? 황실 금고 일은 조정 기밀 사항이잖아. 그리고 잠깐 사이에 공자님의 진짜 생각까지 모두 간파해 버리고 말이야.’
그 순간 범한의 입가에 온화한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녀는 몸이 꽁꽁 얼어붙어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명칠 공자의 계획은 너무 꼴불견이군. 은전 몇백 냥이 적은 돈도 아니고 말이야.”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강남으로 오기 전 감찰원에서 명칠 공자에 대해 조사를 한 터라 범한은 그에게 어느 정도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신분과 처지가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뛰어난 수법을 구사할 줄 아는 고수가 아니란 걸 알게 되자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353화
범한은 바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관무미가 눈에 들어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웃었다.
“내가 가끔 혼잣말하는 걸 좋아하니 내 말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 지혈을 해주마.”
관무미가 물었다.
“왜 저는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답을 해주었다.
“살인을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지. 더군다나 네 공자란 사람과 함께 장사 이야기도 나눠야 하니까. 그자의 사촌 누이를 죽여 버리면 살기등등하기만 하고 지혜는 모자란 자가 거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어서랄까.”
관무미는 오늘 밤 이미 놀랄 대로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공자의 진짜 신분을 조사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과의 관계도 알아낼 수 있을 터. 그런데······ 지금 거래라고 말한 건가? 다시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기자 관무미가 힘겹게 입을 뗐다.
“공자님, 우리 대두목은 지금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관무미는 범한이 경도의 어느 거대한 세력가의 대리인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강한 고수 여럿을 호위 무사로 둘 수 있고 지밀한 비밀까지 알 수 있는 거라고.
관무미가 이를 악물었다.
“오늘 밤에는 저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사죄의 선물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앞서 범한의 말 때문에 관무미는 자신이 풀려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젊은 공자는 답은커녕 깊은 생각에 잠겨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무미는 저도 모르게 절망감에 휩싸여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공자님, 다 똑같이 강호를 떠도는 처지 아닙니까. 공자님께서는 이미 우리 쪽 부하 십여 명을 죽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화가 덜 풀리신 건가요?”
“강호라고 했나? 이 세상에 정말로 강호란 게 있을까?”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살인이란 건 화를 풀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일을 처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거지. 너를 이 배에서 풀어 줄 생각은 없다. 적어도 내가 너를 풀어 줘야겠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네가 순간 입을 잘못 놀려 내 신분을 누설하기라도 하면 그 강호라는 곳에 불필요한 일이 생길 수 있거든.”
관무미는 범한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상대방의 말에 강한 자신감이 담겨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에 절망감에 빠져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강호의 일이니 강호라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을 하려 이러시는지요?”
선창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다 한참 후 범한이 가볍게 웃었다.
“네가 오해했구나. 나는 강호 사람이 아니야.”
범한이 턱을 괴고 흥미롭다는 듯 관무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강호라는 이 시끄러운 곳에서 내가 그리 한가롭게 있을 사람이 아니거든.”
관무미에게 범한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댁······ 댁······은 대체 뉘신가요?”
“나 말이냐?”
범한은 진지하게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놀고먹으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쓸모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니라. 물론 경국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도련님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순간 관무미는 선박에 오르기 전 일행들이 내놓았던 추측들이 생각나 하마터면 피를 뿜을 뻔했다.
“당신은 도적이군요!”
범한이 관무미의 두 눈을 응시하며 똑똑히 말해 주었다.
“한데 큰 도적이니라. 그런 나의 배에 네가 올라왔으니 주인에게 제대로 인사부터 해야 했느니라. 물론 너의 그 명칠 공자도 내 도적 배에 곧 올라와야겠지. 그리고 그자는 평생 내 배에서 내려갈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단 말이지.”
관무미는 그제야 상대방이 명칠 공자와 거래 같은 걸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뿐. 이에 그녀가 사납게 저주하고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헛된 꿈 따위는 꾸지 말거라! 네까짓 게 뭔데······. 너 같은 놈은 우리 공자님의······ 쿨럭쿨럭, 공자님의 신발닦이밖에 되지 못한다!”
범한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껄껄껄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금침을 꺼내 그녀의 팔꿈치 몇 군데를 찔렀다. 범한은 지혈부터 해주고 몇 마디 더 말해 줄 생각이었지만 돌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너의 7 공자가 오히려 며칠 뒤면 내 신발을 성심성의껏 닦아야 할 것이다. 그때 가서 너무 놀라지나 말거라.’
* * *
모든 처리를 마치자 조금 전까지 아래층에 있던 갑판원들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큰 통으로 강물을 퍼 올려 선박 내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냈다. 피는 관무미의 것밖에 없었지만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갑판원들은 한참을 닦아 내야만 했다.
갑판원들이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 내고 나자 다시 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하품을 하며 자러 들어가고 선박 내부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앞서 전주곡 같았던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도 않은 일 같았다.
“가서들 자요. 나머지 시간에는 다음 당직자가 불침번을 설 거예요.”
범한이 고달을 잠시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경국 관리와 관련한 규칙 중에는 근접 호위 무사는 두 개 조로 나누어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범한은 세 개 조로 나누어 운영했다. 물론 이 때문에 당직을 서는 사람 수가 줄어들긴 했다. 그래도 그는 전생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3교대 근무라는 착취를 하기는 했어도 그 나름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분명 효율이 더 높아지니까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두툼한 가림막을 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양쪽으로 늘어선 선창 사이의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사천립의 방을 잠시 바라보았다. 서생 사천립은 그야말로 꿀잠을 자는 중이었다. 일찌감치 깬 소문무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한데 야심한 시각이라 범한은 소문무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자신의 방 앞까지 온 범한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호위 무사에게 몇 마디 건넨 후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침대 옆으로 가 앉아 이불 속에 있는 소년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 황자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것이 어린 나이임에도 외모가 제법 수려했다. 하지만 범한은 이 꼬맹이가 제 나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놈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선박이 살짝 흔들렸다. 범한은 이불을 끌어 올려 3 황자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강바람이 아직 차니 찬기라도 들까 염려되어서였다.
범한은 소리 없기 웃기 시작했다. 이 아이가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음에도 자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제 여덟아홉밖에 안 된 어린애가 사천립보다 잠귀가 밝다니 마음속 부담감이 큰 건 아닌가 몰라.’
생각이 미치자 범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왕가에 있으니까 권모술수같이 더럽고 불결한 환경에 물들어서 이런 놈이 나온 거야. 요 녀석이 가끔은 정말 밉살스럽다니까. 그러니 불쌍하게 여길 필요까지는 없겠지.’
범한은 요 녀석의 얕은수를 알아내는 게 귀찮았다. 그러다 우연히 방심한 사이 임완아의 경고가 생각나 버렸다. 범한은 임완아의 경고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 이는 단순히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여당의 대행수들은 강남행 선박에 타고 있지 않았다. 범한이 몰래 강남으로 가는 중이어서 담주로 할머님을 뵈러 가는 대열은 진지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범한이 위하강의 중간 지점까지 갔을 때 가짜 범한도 마차 행렬을 이끌고 동쪽으로 출발했다. 흑기의 보호를 받으며 경여당 대행수들까지 대동하고 말이다. 그러니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범한이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범한이 위하강과 큰 강이 만나는 지점에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수로를 통해 이동하는 중이라 가장 빠르고 안전한 흑기의 지원은 받을 수 없었지만 범한은 자신에게 위험이 닥친다 해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선박에 호위 무사 일곱과 6처의 검수 여섯이 함께 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리 많은 고수 및 자객들과 함께하다 보니 범한은 종사급이 오지 않는 이상은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범한이 따스한 손바닥으로 이불 속에 있는 3 황자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런데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어 범한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현재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존귀한 인물은 사실은 3 황자였다. 이에 범한은 그가 호신용 부적 같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자신이 특권을 이용해 부군(府軍) 주갑(州甲)을 동원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3 황자가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만 같아서였다.
그런데 범한이 3 황자의 등을 토닥여 주는 건 사실 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한데 범한은 원래 담력이 큰 사람이라 황실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동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는 3 황자를 제자 겸 동생으로 하는 수 없이 데리고 있는 것이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황제 폐하와 의 귀빈의 체면은 충분히 세워 준 셈이었다.
범한은 모든 게 평소와 다를 게 없음을 확인하고 손이 잘린 관무미를 아래층에 있는 간이 감옥에 가두고 나서야 온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살짝 부은 관자놀이 부분을 문지르며 자기 침실이 있는 선창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대고 졸음과 싸우고 있는 사사가 눈에 들어왔다. 범한은 그런 사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사사의 몸은 배의 흔들림에 따라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흔들리기만 하고 절대 바닥으로 고꾸라지지는 않자 범한은 그런 사사의 모습이 자못 재밌었다.
범한은 잠시 웃었다. 사사는 범한이 먼저 휴식을 취해야 제대로 잠자리에 들 게 뻔했다. 범한은 이 점을 잘 아는 터라 크게 소리가 나지 않게 발소리를 죽이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어 한 손은 사사의 겨드랑이에, 다른 한 손은 무릎 아래쪽으로 찔러 넣은 후 사사를 안아 올렸다. 그러자 사사가 입고 있던 낡고 커다란 짙은 청색의 솜저고리가 둥글게 뭉쳐지는 바람에 범한이 무슨 커다란 곰 한 마리를 안은 것 같은 광경이 연출되었다.
범한은 사사가 깰세라 조심스레 침대로 옮겼다. 그런데 사사는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 사사는 잠시 멍한 눈을 하고 있다가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웃었다.
“도련님 이불은 제가 깔아 드릴게요.”
범한이 작은 소리로 한소리 했다.
“조금 전까지 자고 있던 사람이 무슨 이불을 깔아 주겠다고 그래? 많이 피곤한 거 같으니 이제 그만 자.”
그러자 사사가 입을 막고 웃었다.
“이불 속이 차지 않습니까. 도련님께서 어렸을 때 제일 싫어하신 게 찬 이불로 들어가는 거였잖아요. 그래서 저보고 먼저 들어가서 덥혀 놓으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사의 말에 범한은 살짝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여인을 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예전에 담주 별저에서 함께 지낸 날들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2년이 지나갔다니. 권력 쟁탈전을 벌이고 혼인을 하고 사절단으로 나갔다 오느라 너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사사와는 조금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사사는 여전히 살갑게 대해 주고 있어 범한은 어느새 가슴이 훈훈해져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오늘은 날 위해 이불 속을 덥혀 주려고 온 거다, 이건가?”
조금 경박한 말이었다. 하지만 경도와 담주에서는 사사가 언젠가는 범한이 침실로 들일 여종이란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사사도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는 하던 터였다. 그런데 범한이 갑자기 이상하게 말하자 사사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며 예전에 하던 것처럼 단호하게 받아치지 못했다. 대신 입고 있던 솜저고리를 벗고 냉큼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도련님의 새하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간 사사가 검은 머리카락만 내놓고 있는 모습은 유혹적이었다.
범한은 살짝 당황했지만 잠시 후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사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함께 한 사이라 한 침대에서 잔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마지막 관문만 넘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한 이불 속에서 서로 뒤엉켜 놀며 할 만한 건 이미 다 해본 사이였다.
등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범한이 뒤에서 자신의 여종을 껴안았다. 그리고 다소곳하게 앞으로 모으고 있는 사사의 차가운 양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앞에서 숨소리가 들려오자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제가 스무 살이 되었어요, 도련님.”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말하는 사사의 말속에는 억울함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사사의 머리에서 풍겨 오는 은은한 향을 맡으며 품 안에 있는 탄력 있고 매끄러운 몸을 느꼈다. 그의 정신은 이미 옛날 담주에서 함께했던 때로 되돌아가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편안했다.
354화
한밤중임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선창 밖에서 강바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눈을 번쩍 뜨더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여종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스무 살이 되어서 뭐? 마음이 급해졌다 이건가?”
범한의 말에 사사가 다급히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화가 난 입술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문 채 단 한마디도 내뱉으려 하지 않았다.
범한은 당황해 얼른 사사의 몸을 끌어당겨 도로 눕혔다.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이었다. 경국 여자는 대략 열다섯에서 열여섯이 되면 시집을 갔다. 사사처럼 스물이 되도록 처녀로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범한 기준에는 만 스무 살이야말로 가장 성숙하고 아름다운 때였지만 일반 사람들 눈에 비친 사사는 이미 노처녀였다.
범씨 가문에서는 담주의 노부인과 범한의 체면을 생각해 모두 사사를 공손히 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앞에서든 뒤에서든 여러 말이 있는데도 범한이 사사를 취하지 않으니 오히려 이런저런 말들만 더 무성해지는 중이었다.
범한은 사사를 취하는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채 줄곧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만 생각해 왔다. 한데 이는 사사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여인이 스무 살이 되었다는 건 이 세계에서는 서른이 넘은 노처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는 사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부정하고 싶은 비극적인 현실일 것이다.
마음이 상한 사사는 범한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몸을 웅크리고는 잠을 청하려 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 한 이불에서 안 잔 지 2년이나 되었군.”
사사는 범한보다 두 살 많았다. 담주에 있을 때 사사는 범한과 다른 침대에서 잤지만 범한은 자기 이부자리에서 나와 사사의 침대로 기어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와 뒹굴며 일찌감치 부잣집 도령의 나쁜 습성을 길렀다.
“도련님께서도 다 크셨으니 이제는 아랫것과는 함께 어울리실 수는 없겠지요.”
사사가 고개를 이불 속에 묻은 채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함께 있는 것도 오랜만이군.”
범한은 사사를 어르고 달래는 대신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갈 뿐이었다.
“나 같은 못생긴 밀가루 반죽을 받아 준 건 사사뿐인데 말입니다.”
그러자 사사가 피식 웃었다.
“도련님께서 못생긴 밀가루 반죽이시라면 이 세상 여인들은 어찌 살란 말씀입니까?”
주인과 종은 순간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둘 다 방금 그 말이 《석두기》에 나오는 황희봉의 자기 비하 대목인 걸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담주에 있을 때 밤마다 범한이 책을 베껴 쓰고 사사가 옆에서 시중을 들던 광경을 떠올렸다.
범한이 수려한 해서체로 《석두기》를 옮기고 있으면 사사는 옆에서 먹을 갈고 등불을 밝혀 주고 향을 피워 주고 밤참을 준비해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완벽할 정도로 여인의 붉은 소매, 향 내음 그리고 한밤에 글을 쓰는 장면을 연출했었다. 그리고 그때의 사사는 범한의 첫 번째 독자였다.
* * *
범한이 여인의 몸을 돌려 거칠게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왕 웃었으니 다시는 울지 마. 그리고 이 도련님이 해주는 금수만도 못한 웃긴 이야기나 들어 주고.”
사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범한이 말해 줄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유명한 웃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품에 폭 파묻혀 웃으며 이내 범한을 놀리기 시작했다.
“도련님께서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금수만도 못하다고 하셨던 게 다 그런 이유 때문이군요!”
“최근에서야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게 생각났다구.”
범한이 고분고분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사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지만 말이야. 물론 내가 봐도 그건 좀 염치없고 위선적이기는 했지.”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사사가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데 범한은 속으로만 한숨을 내쉴 뿐 그녀가 원하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사사는 갑자기 도련님의 뜻을 이해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감동받았다. 도련님이 자신의 생각을 알고 싶어 했다는 게 너무 뜻밖이고 황당하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슴이 따뜻했다.
“도련님, 어렸을 적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주 집사를 때리셨을 때 말이죠.”
“당연히 기억하지.”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놈이 감히 사사에게 불쾌한 표정을 지어서 내가 그자 얼굴에 복숭아꽃이 피도록 패줬으니까.”
사사가 용기를 내어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런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은 여종일 뿐이라 사랑한다느니 연모한다느니 하는 말을 할 수 없어서였다. 실은 범한이 주 집사의 얼굴에 복숭아꽃이 피도록 해준 날, 사사의 마음속에서도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났었다.
그때 범한은 겨우 열두 살이었고 사사는 불과 열네 살이었다.
그러니 범한은 당연히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상황을 음미하다가 저도 모르게 어떤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때 정말 세게 손찌검을 했었는데.”
사사가 범한의 품 안에서 웅크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도련님은 손힘이 세세요.”
“손힘이 세다고?”
범한이 웃었다. 범한의 왼손은 어느새 이불 속으로 들어가 사사의 둥근 어깨 위에 둘러져 있었다. 사사는 잠을 자기 위해 옷을 한 겹만 입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얇은 옷으로 말이다. 그래서 범한의 손바닥이 어깨에 닿을 때 착, 하며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추억이란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다. 그러니 희롱도 유쾌할 수밖에. 주인과 여종 두 사람은 서로 한동안 말없이 끌어안고 있었다. 다만 밤이 깊어 가면서 사람도 조용해지고 이불은 따뜻해지고 공기가 애매해지면서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범한도 드디어 짐승이 되어 갔다. 두 손은 일찌감치 조신하지 못하게 먼 길을 떠나 위아래에서 열심히 길을 찾고 있었다.
* * *
“등불이, 등불이 아직 켜져 있습니다.”
사사가 부끄러워하며 다급하게 일러주었다.
범한은 이미 금수로 변한 상태라 마음이 급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사사가 불을 꺼달라고 하자 왼팔을 뒤쪽으로 쭉 뻗어 대벽관을 날렸다. 섭령아에게 배운 대벽관을 날리면 바람이 일어 탁자 위의 등불이 꺼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장풍을 날렸는데도 등잔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범한은 그제야 자기 몸에 있던 정기가 모두 흩어지고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러니 대벽관이 허공을 가르고 나가 촛불이 끌 리 없었다. 범한은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기가 사라지니 이런 게 제일 불편하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에 구시렁대며 베개 아래에 넣어 둔 옷깃에 달아 쓰는 쇠뇌를 꺼냈다. 그리고 허둥지둥 뒤를 돌아보며 쇠뇌의 손잡이를 당겨 활을 쏘았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쇠뇌의 화살이 등불을 스치고 지나 선창 벽에 꽂혔다. 그러자 등불이 꺼지고 선창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 * *
범한은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아직 재미도 보지 못했는데 바람 소리와 함께 몇 명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수들이 선창 밖으로 모여들었다. 이어 장도를 꺼내 드는 소리와 쇠뇌를 장정하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조금 전 범한이 쇠뇌로 등불을 끌 때 화살이 선창 벽에 박히면서 난 소리가 문제였다. 비록 아주 자그마했지만 전문가인 호위 무사들의 귀에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큰 소리였다. 특히 배에는 황자와 제사 대인이 타고 있으니 야경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호위 무사들 입장에서는 경각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선창 밖에서 무사 하나가 경계심이 담긴 소리로 말했다.
“대인, 일이 터졌습니다.”
범한이 벌컥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다행히도 충성심 깊은 수하들이 방 안으로 불쑥 들어오지는 않자 범한은 여종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데 여종이 이불 속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침통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범한은 밤새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다음 날, 범한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원래는 사사가 범한의 머리를 빗겨 주고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어야 했지만 오늘 아침에는 범한 혼자서 했다. 그녀가 자신을 도와주기에는 불편한 상태인 것 같아 이불 속에서 계속 쉬도록 한 것이었다.
범한은 일단 남자로서 해야 할 일부터 했다. 죽, 옥수수 떡 몇 덩이, 소금에 절인 채소를 들고 선창으로 돌아가 안쓰럽게도 몸이 불편한 여인이 아침 식사를 하는 것부터 도와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곧장 선창 밖으로 나와 뱃머리로 향했다.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찬 겨울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상쾌하고 편안했다.
새벽안개가 물러나자 선박은 곧장 영주를 떠났다. 그 시각 배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자는 중이었다. 범한은 계속 나루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루터가 어느새 겹겹이 둘러싸인 산자락에 모습을 숨기고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였다.
“대인, 기침하셨습니까.”
소문무가 옆에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의 눈빛은 범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들은 웃긴 이야기가 벌써 배 안에 쫙 퍼졌던 것이다. 대놓고 놀리지만 못할 뿐 모두 속으로는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었다.
부하의 불량한 눈빛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범한이 대충 몇 마디 건넸다. 그런 후 눈을 한쪽으로 돌리자 3 황자와 등자월이 선창이 있는 쪽에서 문을 나서는 게 보였다.
“마마께 인사드립니다.”
범한이 3 황자에게 공손히 아침 인사를 올렸다. 범한의 행동은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경도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제멋대로 군다거나 허술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앳된 모습의 3 황자가 뻣뻣한 자세로 조금 뻘쭘하게 범한의 인사를 받았다.
인사를 마친 범한은 곧장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조용히 3 황자 앞으로 다가가서 섰다.
그러자 3 황자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억울한 사람처럼 한 손으로 다른 주먹 쥔 손을 감싸 쥐고는 범한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제자, 사업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예쁘장하게 생긴 두 사람은 모두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사람은 이렇게 괴이한 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선박에서의 하루를 시작했다. 배 위에는 범한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부하들 말고도 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바로 황궁의 훈육 상궁과 내시 두 명으로 이들은 3 황자만을 보필하기 위해 나온 이들이었다. 한데 마음 씀씀이가 모질고 담이 큰 범한은 이들을 아래층에서만 지내도록 하고 위층으로는 올라오지 못하도록 했다.
범한 쪽인 감찰원 8대 처에서는 일단 암살과 안전상의 문제를 책임지기 위한 6처 검수 외에도 2처와 4처 소속의 관원 둘을 더 딸려 보냈다. 2처 관원은 원활한 정보 전달을 위해서, 4처 관원은 범한 곁에 머물면서 강남 물길 근처에 있는 각 지역의 감찰원 순찰사 관원과 연락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3처 비개의 문하생이면서 지금 1처의 수장을 맡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여기에는 감찰원 조직의 거의 절반이 참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인원수는 많지 않았지만 업무 분담과 소통은 원활히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박에서의 생활은 너무나도 무료했다. 경도에서 출발한 후 사람들은 초반에는 강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즐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슬슬 질렸다. 게다가 살을 에는 듯한 강바람이 불어와 요 며칠 동안은 임무 수행 중이 아니면 모두 각자의 선창 안에 틀어박혀 휴식을 취했다.
범한과 3 황자는 뱃머리에 서서 협곡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이 작은 소리로 말하면 3 황자는 그저 “네, 네.”라고만 답했고 범한은 만면에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소문무는 뒤쪽에 서서 범한 제사 대인과 3 황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현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은전을 한가득 담은 큰 상자를 배에 싣고 가야 하는 거지?’
보고를 마친 범한은 3 황자가 뱃머리에 서 있도록 내버려 두고는 제 볼일을 보러 갔다.
355화
소문무가 뱃머리에 있는 사내아이를 잠시 보고는 씁쓸하게 물었다.
“대인, 황자마마께서 감기에라도 걸리신다면 대인이 난처해지십니다.”
“마음과 의지를 단련하도록 하는 중이네.”
범한은 강남행에 오른 내내 3 황자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동승한 사람들이 봤을 때도 의외였으니 당사자인 3 황자도 어쩌면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었다.
“대인, 상자에 든 은전은······.”
소문무가 슬쩍 운을 떼보았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잘 지켜보고만 있게. 저 여인이 이미 보지 않았는가. 그러니 더는 보는 사람이 없게 하게.”
소문무는 그러겠노라 답하고는 다시는 은전에 관해 묻지 않았다.
범한이 허리를 쭉 폈다. 그러다 문득 큰 선박과 은전이 가득한 상자, 거기에 여인까지 거느리고 강남으로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정말로 부잣집 도련님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때마침 계절이 맞지 않아 아쉽다고 생각했다. 날이 따뜻해 얼음을 띄운 차가운 과일즙을 옆에 두고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면 훨씬 더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을 텐데.
“관무미는 우리에게 잡혀 있습니다.”
소문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강남 수채에 있는 하 큰 두목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후에 배가 양주에 도착하는데 그곳 감찰원 관원에게 알려 소문을 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그들이 한동안은 내 신분을 몰랐으면 좋겠네. 강남에서 날뛰는 흉악한 자들일지라도 상대방의 내력을 모르는 이상은 조심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나는 그자가 이 일을 위해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지 봐야겠네.”
“그렇다면······.”
“4처 담당자에게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지 말게나.”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젯밤 자네 사람들이 셋째 형수란 자를 영주에 남겨 두지 않았는가? 그 아낙이 어떻게 해서든 하서비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네.”
* * *
이날 경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황당한 일을 당한 사람은 바로 범한이 말한 셋째 형수였다.
영주 나루에 있던 민간 선박들은 모두 떠나고 없을 때였다. 셋째 형수는 바보처럼 멍하니 나루터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아직 훈연이 덜 된 육포가 들려 있어 가끔씩 가격을 물어 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녀는 대답조차 해주지 못할 정도로 얼이 빠져 있었다. 그녀는 산적들이 영주에 심어 놓은 염탐꾼으로 평소에는 여기저기를 다니며 정보를 캐냈다. 어제 그 선박 위에 있던 은전 상자 정보를 가장 먼저 알아낸 사람 역시 그녀였다.
선박이 사라진 건 큰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관 누님이 이끄는 산적은 살인을 하고 물건을 강탈한 후 밤사이 하류 모래사장까지 배를 몰고 가 태워 버리고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일을 해서였다.
이에 셋째 형수는 아침에 배가 사라지고 없어 관 누님 일당이 성공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나루터에서 반나절을 기다렸는데도 이상하게도 관 누님 쪽 사람들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관 누님도, 둘째 오라버니도 그리고 단 한 사람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형수 입장에서는 사라져 버린 배처럼 모든 산적이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이었다. 이에 그녀는 일단 해 질 녘까지 나루터에서 기다려 보았다. 하지만 모두 죽어 버리기라도 한 듯 나루터는 고요하기만 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셋째 형수는 일이 났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이를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배 위에 있는 호위 무사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어젯밤에 싸우는 소리가 들렸을 테니 관아에서도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런데 관아에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 이 또한 이상했다.
‘설마 어젯밤 그 배가 유령선이었어? 그게 아니라면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나 쉽게 거둬 가는 게 가능해?’
셋째 형수는 밤새도록 여장을 꾸렸다. 그런 후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집에 있는 귀중품들은 잘 숨겨 놓고는 큰돈을 들여 마차 한 대를 대절해 밤새도록 험한 산길을 달려 하류 쪽으로 갔다. 양주를 지나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동쪽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강남로에 있는 큰 고을을 눈앞에 둔 때였다. 그녀는 꼬박 이틀을 쉬지 않고 내달렸다. 그동안 물을 조금 마신 것 말고는 끼니도 걸렀다.
셋째 형수는 계급이 낮은 사람으로 원래는 관 누님 같은 두목과는 접촉할 수 없었다. 그런데 피로에 전 채 푹 꺼진 그녀의 눈 때문인지 몰라도 접견 책임자는 그녀의 말을 믿어 주었다. 그러고는 한껏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이 지역의 가장 삼엄한 후원에는 강남 수채의 대두목이 있었다. 대두목은 아직 나이가 서른이 되지 않았으며 강호에서는 이름깨나 떨치고 있는 하서비란 인물이었다. 두 눈을 감고 셋째 형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하서비가 서서히 눈을 뜨자 주변을 압도하는 싸늘함이 뿜어져 나왔다.
“그 배가 아직 물에 떠 있다면 어떻게든 막아야겠지.”
그런데 배라는 건 당연히 물 위에 떠서 움직일 터. 하서비는 강남 일대 물길에서 활약하는 이들을 부하로 부리고 배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 전 한 말은 강한 자신감과 함께 은근히 분노를 드러낸 것이었다.
겨울이 되어 유수량이 줄어든 터라 양쪽 강기슭에는 제방을 보수하러 나온 백성들로 붐볐다. 백성들은 개미처럼 힘겹게 돌과 토사를 옮기는 중이었다. 그런데 위쪽에서 은전이 단 한 번도 제대로 풀린 적이 없다는 소문을 들어서인지 하청을 받아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마지못해 제방 보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온종일 힘들게 일해도 동전 한 닢 챙기지 못하는데 누가 열심히 일하랴. 이에 백성들은 게으름이나 피우며 높은 자리에 있는 선비와 관리님들이 하는 것처럼 가끔씩 세월아 네월아 하며 이미 지겹도록 본 강물이나 바라보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강물을 보고 있던 사람들 눈에 순간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강남으로 들어서는 큰 강 위쪽에 갑자기 여러 척의 배들이 나타나서였다. 배들은 강을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주변을 순시하고 있었다. 여기는 겨울이 되면 다른 계절보다 배들이 덜 오가는 곳이다. 이에 누가 봐도 저 많은 배들은 하룻밤 사이에 누군가의 조화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배들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그러니 속도도 제각각이었다. 심지어는 배들 사이에는 개조하기는 했지만 돛이 세 개 달린 소형 삼익선도 있었다. 삼익선은 원래 조정 소속인 강남 수군의 관용 선박으로 속도가 빠른 게 특징이었으며 민간인은 절대 사용할 수 없었다. 배에 탄 남자들의 허리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어쩌면 허리춤에 칼을 숨기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그들의 시커먼 얼굴에는 눈에 띄게 물때가 묻었다는 것 말고도 과묵한 살기와 경계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강남으로 들어가는 수로에 이틀 만에 이리도 많은 선박을 불러 모은 데다 관아의 저지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유명한 강남 수채밖에 없었다. 큰 강의 통제 능력만 놓고 본다면 강남 지역의 몇몇 유명한 큰 가문들은 강남 수채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강남 수채의 정식 이름은 ‘강남 및 관련 수역 12 연환오’였으며 강남 지역에 그물망처럼 퍼진 수로를 중심으로 먹고살았다. 운수, 객운, 관련 사업 종사자들까지 모두 강남 수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특히 소금, 차, 밀을 밀거래함으로써 강력한 세력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명씨 가문의 후손으로 하서비라고 불리는 인물은 수채의 대두목이 된 후 관아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힘썼다. 이에 하 어르신께서 사호(沙湖) 지역의 수군 제독 대인과 호형호제한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불량배가 관아와 결속을 했으니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최근 몇 년 동안 강남 수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검은 거래를 줄인 상태였다. 그리고 강호를 벗어나 광명정대하게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자 이들의 명성은 전보다 훨씬 높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강력한 세를 구축한 터라 강남 산채는 큰 강에서 거리낌 없이, 군중의 비난도 연연해 하지 않고 배로 수로를 샅샅이 훑고 다닐 수 있었다.
명령을 내린 자는 강남 수채의 대두목인 하서비였다. 그는 원래 수하들의 생사까지 신경 쓸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실종된 관무미는 그에게는 외가 친척이었다. 더군다나 그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놈인지 모르겠지만 자기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단번에 잡아가고 자신에게 말 못 할 손해를 끼쳤기 때문이었다.
황실 금고는 3월에 다시 문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최씨와 명씨 가문 둘이서만 나눠 먹던 밥그릇이 아니었다. 최씨 가문의 몰락으로 올해는 황실 금고의 관할권이 장 공주에서 감찰원의 범 제사의 손에 넘어갔다는 걸 천하가 알고 있었다. 이에 하서비는 황실 금고에 도전하기 위해 자신이 들어갈 때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광명정대하게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빼앗아 올 생각이었다.
한데 황실 금고는 사업 범위가 어마어마했다. 은전의 수량만 해도 기본적으로 십만 개부터 시작했다. 3월에 재신문(財神門)의 문턱을 넘어서서 그곳에 앉아 차만 마시는데도 놀라 까무러칠 정도로 많은 은전을 지급해야만 했다.
몰락한 최씨 가문과 여전히 잘나가는 명씨 가문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하서비는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그의 부하들이 수로에서 가장 센 도적 떼라고 해도 그가 쥐고 있는 은전의 양은 명씨 가문에 비하면 거지 수준이었다. 그래서 하서비는 여기저기서 허둥지둥 은전을 갈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관무미에게도 다시 수로에서 도적질을 하도록 몰래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하서비는 은전 한 개도 아쉬운 판국이라 그야말로 다급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돈 한 푼에 거꾸러지는 영웅은 없다고 하지만, 강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영웅들에게는 장사하는 법을 배우려 해도 가장 먼저 직면하게 되는 난제가 바로 돈이었다.
그러니 이 제일 중요한 관문 앞에서 하서비는 훨씬 더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성까지 잃은 건 아니었다. 그는 영주 강가에서 벌어진 일이 자신을 겨누고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 계속 따져 보는 중이었다.
일이 터지자 하서비는 현재 머물고 있는 사주성에 강남 수군의 수비로 있는 허수산을 초대해 함께 술을 마셨다. 강호에서 떠도는 말이 조금 과장된 건 있었지만 그가 수군의 최고위급 장수와 접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일급비밀이었다. 허 대인이란 자는 이번에 발생한 일을 듣고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하서비가 그 선박을 찾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수채에 있는 한 사람에게는 경고는 날려 두었다.
―어떤 일이든 3월 전에 매듭을 지어라. 일이 마무리된 후에는 흔적을 전혀 남기지 말고 몸에 있는 피비린내까지 닦아 버릴 것!
왜냐하면 범한 제사 대인이 3월에 담주에서 강남으로 온다고 해서였다.
* * *
강남 수채의 배 수십 척이 강 위에서 수색을 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커다란 선박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수하의 보고를 받은 하서비가 찬바람이 쌩쌩 돌 만큼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자들이 아직 여기까지는 안 온 것 같군. 그 정도의 상자면 배에서 쉽게 내릴 수 없을 테니 분명히 아직 양주 부근에 있을 것이다. 양주 부근은 찾아보았느냐?”
강바람 때문에 머리에 흰 천을 휘감고 있던 사내가 당황하며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소인들은 시간을 따져 보고 훑어보았습니다. 이틀이 지났으니 선박이 사주 부근까지 왔을 것 같아······ 그들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하서비가 발로 사내를 걷어찼다. 발이 사내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가자 하서비는 욕을 내뱉었다.
“이 멍청한 돼지 새끼야!”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소리쳤다.
“위쪽도 찾아! 살아 있으면 산 사람을 데려오고 죽었으면 시체라도 가져와!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어떻게든 그 배를 내 앞에 끌어다 놓으란 말이야!”
한데 사내는 하서비의 명령을 이행하러 속히 자리를 뜨느라 산채 주인이 한 말을 제대로 살피는 것까지는 하지 못했다. 하서비는 어느새 현 상황과 관련해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하서비는 화가 나 퉁퉁 부은 채로 탁자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최근 반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니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도 자신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오랫동안 계획해 왔던 복수를 처음부터 다시 짜야 했으니.
하서비가 사발에 담긴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화가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 열불이 치솟았다. 하서비는 눈을 사납게 치켜뜬 채 정원으로 나가 형제들이 가져올 소식을 기다렸다. 그가 가슴 앞섶을 풀어 헤쳤다. 그러자 험상궂은 상처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지런하게 똑바로 줄을 맞추고 서 있는 정말 이상하게 생긴 상처들이었다. 강호에서 칼부림을 하다가 생긴 칼자국이나 도끼 자국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묶인 채로 누군가에게 인정사정없이 채찍질을 당한 흔적에 가까웠다.
356화
정오가 되었을 무렵, 거대한 선박 한 척이 양주의 번잡한 나루터를 떠나 아래쪽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수십 척의 강남 수채의 배가 기세등등하게 강을 역류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밤중에 배를 몰면 위험한데도 그 모든 걸 감수하고 밤새도록 적의 흔적을 찾았다.
하늘이 숨바꼭질할 시간을 일부러 정해 준 건 아니었지만 태양이 아직 산 아래로 떨어지기 전 양측은 큰 강 어느 한 지점, 그것도 가장 물살이 완만하게 흐르는 경박만이란 일대에서 마주쳤다.
수십 척의 배들이 재빨리 위쪽으로 움직였다. 비적들의 타고난 노 젓기 실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겨우 몇 차례 대형을 바꾸었을 뿐인데 작은 배들은 어느새 강 한복판에서 큰 선박 주위를 빙 둘러싸 버렸다.
강남 수채의 작은 배들이 경도에서 온 선박을 조심스레 가운데로 몰아 갔다. 삼익선이 앞장서서 큰 선박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자 저항하는 걸 포기했는지 큰 선박이 멈추어 섰다.
삼익선에 타고 있던 수채 두목 하나가 큰 선박을 향해 소리쳤다.
“배에 있는 자들은 들어라.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즉각 무기를 버리고 조사를 받으라.”
그러자 배 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수채 두목이 살짝 얼어붙은 표정으로 수신호를 했다. 그러자 배 여섯 척이 동시에 큰 선박 쪽으로 다가갔다. 기다란 대나무 막대기를 뻗어 큰 선박 뱃전에 있는 판에 힘겹게 고정시켰다. 그런 후 몸에서 단도를 꺼내 들고는 곧장 선박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큰 선박이 갑자기 움직였다.
그리고 전력으로 속도를 냈다. 선박은 비적이 놀라 나자빠질 만큼 빠른 속력으로 포위선을 뚫고 나갔다. 뱃전에 걸렸던 대나무 고리들은 거대한 선박이 속력을 내면서 생긴 힘 때문에 모두 부서져 버렸다. 뱃전을 향해 올라가고 있던 십여 명의 비적이 처참하게 물속으로 추락하자 물보라가 어지럽게 일면서 강물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한편 정면에서 막고 있던 수채의 제일 큰 배는 경도에서 온 선박과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형편없이 뱃머리가 도는가 싶더니 허리 부분이 잘려 두 동강 난 배가 물살 위로 미끄러지듯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배가 희한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갑판까지 부서져 버리자 놀란 갑판원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 * *
경도에서 온 선박은 꼬리 부분에 새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빠르게 아래쪽으로 운항해 나갔다. 이 거울처럼 매끈한 강물 위에 무수히 많은 배의 잔해들과 물 위에 동동 뜬 비적들만 남겨 놓고 말이다.
두목이 되는 자가 서둘러 배의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물결이 크게 일어 몸을 지탱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내 놀라 입이 떡 벌어진 채 큰 선박의 꼬리 부분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는 처음 당해 본 일에 감탄을 쏟아 내고 있었다.
‘저 배는······ 정말 너무 견고하군! 더군다나 저렇게나 빠른 속도인데도 안정적으로 배를 몰다니 저 배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저런 걸 할 수 있는 거지? 어째 우리보다 수준이 한참 뛰어나 보이는군.’
경도 선박의 갑판원들은 모두 천주(泉州)에서 철수한 수군 교관 출신이었다. 매년 물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 기술을 연구하고 연마하는 자들이었으니 강남 수채에서 그냥 개미처럼 열심히 노 젓기만 할 줄만 아는 선원들보다 배를 통제하는 능력이 훨씬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강에서 배를 움직일 때는 강바닥에 암초들이 많아 섣불리 나아가서는 안 되었다. 이에 경도 선박은 돛을 달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일반적으로 수군이 쓰는 삼익선과 비교해 속도 면에서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경도 선박은 적의 방어선을 뚫고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곧장 십여 척의 삼익선에게 따라잡혔다.
강은 어느새 석양에 물들어 찬란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경도 선박이 앞쪽에서 나아가고 강남 수채의 배들이 뒤를 쫓고 있었다. 하류를 향해 빠르게 질주하는 배들 때문에 수면에는 담황색 상처들이 수도 없이 많이 생겨났다. 배가 할퀴고 지나가면서 남긴 누렇고 불안해 보이는 강물은 빠르게 지나가는 배들과 어우러져 미묘한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갈고리를 던져라!”
경도 선박은 거칠고 기세등등했다. 그리고 선체가 무엇으로 만들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견고했다. 강남 수채 두목이 크게 소리 지르며 동시에 수신호 몇 개를 내보냈다. 강한 강바람이 두목의 명령을 저 멀리까지 밀어내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선박을 둘러싸고 있던 배 위의 도적들은 두목의 수신호를 보고는 일제히 기다란 줄을 이용해 큰 선박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십여 개의 밧줄이 공중을 가르더니 아름답게 곡선을 그리며 선박 갑판 위로 떨어졌다. 숙련된 자들이라 그런지 비적들의 솜씨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멋졌다. 갈고리가 갑판에 떨어지자마자 비적들은 밧줄을 움켜쥐고 당기며 갈고리를 뱃머리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번에는 대나무가 아닌 밧줄을 사용했으니 비적들은 더 이상 아까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비적들이 잽싸게 밧줄을 잡고 선박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 * *
비적들이 밧줄을 절반 정도 올라갔을 때였다. 선박 뱃전 위쪽에서 칸막이같이 생긴 창문 십여 개가 열렸다. 그러고는 긴 창과 도끼로 인정사정없이 밧줄을 잘라 버렸다. 도끼와 창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처참하게 이어졌다. 강바람에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고 사지가 떨어져 나간 몸뚱이가 일렁이는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른 곳보다 먼저 얼굴 쪽에 공격을 받았던 탓에 비적들은 그야말로 처참한 몰골로 죽어 나갔다.
일부는 운 좋게도 곧장 강물로 떨어졌다. 하지만 갈고리와 이어져 있던 밧줄이 잘려 나가자 경도 선박 창문에서 십여 개의 활이 나타나 사방에 있는 배들을 향해 팽팽하게 활시위를 겨누었다. 아직 시위를 당긴 건 아니었지만 위협감은 실로 대단했다. 마치 ‘누구든 올라오는 자는 바로 죽여 버리겠다!’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것만 같았다.
후방에 있는 수채 두목은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뜬 채 이상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벌벌 떨고 있었다. 오랫동안 강에서 살아온 그는 비적 토벌대와 수도 없이 많이 마주쳤었다. 이에 큰 활과 창, 도끼 등이 조정 수군들이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무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음모가 깔려 있는 거 아니야?”
* * *
배들이 돛을 내렸다.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속도로 경박만을 빠져나가 모래톱이 있는 곳까지 갔다.
도적 떼 두목은 아직 자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큰 선박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상대는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준비를 했고 또 실력도 강대했다. 하지만 코끼리도 개미를 두려워할 때가 있기 마련. 계속해서 강에서 일전을 벌인다면 강에서 살아온 자신들이 저 선박을 언젠가는 강바닥 아래로 침몰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저들이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화답이라도 하듯 앞쪽에서 갑자기 네 대의 큰 선박이 나타나 옆으로 죽 늘어서며 하류로 내려가는 물길을 막았다. 이 네 대의 큰 선박은 모두 세 개 층으로 이루어진 정말로 높이 솟은 배였다. 이에 수면 위에 그림자까지 길게 드리우며 용맹한 기세를 뽐냈다.
수채 두목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새로 등장한 배들을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자신들과 몰래 협력해 왔던 수군의 누선(樓船)이라는 병선이었다. 이에 두목은 저도 모르게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형제들이 도와주러 왔다! 모두 마음 놓거라!”
그런데도 경도 선박은 묵묵히 굳건하게 아래쪽을 향해 운항해 나갔다. 마치 앞쪽에 있는 사호 지역 수군의 병선들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또한 목숨을 버리려는 비장한 장수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 * *
석양 아래로 펼쳐진 광경에 강남 수채 두목은 순간 머리가 하얘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경도 선박이 앞뒤로 겹겹이 둘러싸여 고사 직전에 간 거라고 여겨졌을 때다. 하류 쪽에 있던 사호 수군의 병선들이 무슨 상의라도 한 듯 뱃머리를 돌려 경도 선박에게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경도 선박은 유유히 물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수채 두목은 지금 자신이 본 걸 믿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은 오랫동안 추격해 온 저 선박이······ 사호 수군이 몰고 온 네 척의 거대 병선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거였다.
그가 무언가를 더 생각해 보기도 전에 병선 네 척은 어느새 거대한 짐승처럼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며 강남 수채 배들을 막아섰다.
수군의 병선 뱃머리에 서 있는 관원은 이 두목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하 채주로 불리는 대두목 하서비와 절친한 친구 사이로 사호 수군의 수비 허수산 대인이었다.
허수산은 냉랭하게 뱃머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급히 관복을 챙겨 입었는지 관대를 제대로 채우지 못한 상태여서 조금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다. 그는 아래쪽에 있는 ‘낯익은 이’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눈빛으로는 수채 두목에게 얼른 투항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상관도 하지 않고 관료다운 느낌을 잔뜩 담아 한마디 했다.
“배 위에 있는 자들은 들어라. 너희들은 이미 포위되었다. 그러니 손에 든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조사를 받으라!”
* * *
사주 주성(州城)은 사호에서 강으로 들어가는 쪽에 위치해 있었다. 물살이 세고 수량이 풍부해 옥토가 쌓인 곳이 많았다. 그리고 백성들이 열심히 일궈 놓은 덕분에 큰 강 주변에서 유명한 곡창 지대 중 한 곳이 되었다. 십여 년 전 천주 수군이 해체되고 사호 수군이 이 일대를 맡은 후부터는 경국에서 가장 큰 수군 기지가 되었다. 이에 수만에 이르는 수군 소속 관병들은 강남 입구에 있는 주성에 기대어 생활하게 되었다.
온몸에서 비릿한 땀 냄새를 풍기는 수군 관병들은 사주 주민들에게는 골칫덩어리였고, 사주 아가씨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존재였으며, 사주 관원들에게는 치안 문제를 무수히 일으키는 주범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주성에게 수많은 은전을 벌어들이고 왕성한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주는 이들이었다. 홀아비 신세인 수군 관병들이 조정에서 받는 녹봉의 9할 정도가 사주의 기루, 도박장, 술집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사주에서는 유흥업이, 정확히 말해 제3의 산업이 상당히 발달한 편이었다. 각종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서쪽에서는 기생집의 여인들이 붉은 소맷자락을 흔들며 관병들을 유혹했다. 동쪽에는 새벽부터 황혼까지 도박용 주사위가 끊임없이 굴러가 사주는 그야말로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이날 사주의 가장 유명한 객잔에서 몇몇이 걸어 나왔다. 이들 일행은 정말 이상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청년 공자 하나, 낭자 하나, 서생 하나, 아이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 뒤로 엄숙한 표정의 호위 무사 몇몇이 따르고 있었다. 일행은 대절한 마차 두 대에 올라타고는 곧장 성 남쪽으로 향했다.
이들은 당연히 범한, 사사, 3 황자, 사천립과 평범한 무사로 변장한 호위들이었다. 이들은 양주에서 1박을 하고 다음 여정에 대해 상의했다. 현지의 4처 사람이 대체 어떤 방법을 동원했기에 사호 수군이 파견된 건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군 측 입장에서는 감찰원 대인을 잘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일로 범한이 더 이상 신분을 감추려 하지 않는 것 같자 아직 배에 남아 있던 소문무는 그런 범한이 이해가 되지않았다.
선박에게 큰 강 비적을 상대하도록 해놓고 앞서 양주에서 한밤중에 배에서 내린 범한은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마차를 타고 편안한 도로를 이용해 사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런 범한의 행동은 은밀해서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357화
사주 남쪽 성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지내기는 했어도 모두 이곳의 맹주가 누군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바로 강남 수채의 하 채주였다. 사람들은 하 채주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정까지는 몰랐다. 한편 그 작은 정원을 부지런히 드나드는 두목들은 대두목이 조금 번거로운 일을 하고 있는 중임을 알고 있었다.
그 작은 정원은 눈에 별로 띄는 곳이 아니었지만 모두 알다시피 그곳은 강남 수채 72련오의 사주 지역 분타(分舵: 분점 같은 곳)였다.
그래서 범한이 마차를 타고 분타로부터 수십 장 떨어진 곳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특히 수채에서 거리에 심어 둔 염탐꾼들은 범한 일행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듯 열심히 주시했다. 하지만 어두컴컴해질 무렵 평범해 보이는 6처 검수들이 이미 거리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 몇 군데를 선점해 둔 상태란 건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차가 강남 수채 분타에 가까워질수록 이런저런 사람들이 범한 일행에게 다가와 무심코 하는 행동처럼 마차를 주시해 분위기는 은근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차에 있는 사람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분타 바로 앞에 마차를 세웠다. 마차에서 가림막을 열고 나온 서생이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문 앞에 서서 진중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고는 공손하게 몇 마디 건넸다.
잠시 후 분타에서 팔자 눈썹과 노란 눈동자를 지닌 고문으로 보이는 사람이 걸어 나왔다. 경계하는 낯빛의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생을 향해 물었다.
“무엇 하는 사람인가? 대체 누구기에 하 어르신을 만나 뵈려 하는 건가?”
서생은 사립이었다. 그는 지금껏 강호에 발을 담가 본 적 없던 터라 음침하고 표독한 표정의 고문과 마주하게 되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졸개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분명 흉기를 들고 있었다. 사천립은 서생이다 보니 속으로 적지 않게 당황했다. 이에 저도 모르게 스승 대인께서 자신에게 이런 도리에 어긋나는 험한 일을 시켰다며 욕을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긴장감을 억누르고 입을 뗐다.
“우리는 경도에서 왔소이다. 협상할 일이 있어 수채의 하 채주를 만나러 왔지요.”
분타 고문은 사천립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두어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차를 삐딱하게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니면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 만약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 주인님을 뵈려 하는 거라면 왜 문 앞까지 와놓고 내리지 않는 거지? 손님으로 와놓고 어찌하여 이리도 예에 어긋나게 수상쩍게 행동하는 거냐고!”
* * *
마차에 있는 세 사람에게는 밖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들리지 않았다. 범한이 사천립을 내보낸 건 서생 동무의 정신력을 단련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에 범한은 셋째와의 대화에만 신경 썼고 그가 온화하게 말했다.
“마마, 양주에서 사주까지 오는 동안 민생을 살펴보셨지요? 경도와는 많이 다르니 마마는 그 모습들을 잘 새겨 두셔야 합니다.”
밤새 길을 달려오는 동안 범한은 3 황자에게 길에서 마주치는 일반 백성들의 모습을 일부러라도 보도록 했다. 그에게 제대로 된 민초들의 삶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이에 길가에서 땔감을 짊어지고 가는 노인이 보일 때도, 점포에서 냉차를 파는 여인이 보일 때도 범한은 마차를 멈추고 백성들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이른바 ‘황자 훈육’이란 걸 범한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별다른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가자는 생각으로 이와 같은 방법을 시도해 본 것이었다.
범한의 교육 방식에서 무언가를 알아챈 사천립은 스승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3 황자는 조용히 그 교육을 받아들였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함으로 침묵을 유지하며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해대지 않았다.
“백성들은 참으로 힘들게 사는군요.”
3 황자가 공손하게 대답하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 경국의 세금이 과중한 것은 아니나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힘드네요. 하나 이곳 백성들의 얼굴에는 편안함과 행복함이 깃들어 있으니 이것만 봐도 백성들이 실제로 바라는 건 그다지 눈높이가 높은 게 아닐 겁니다. 그러니 조정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백성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부터 해결을 해주는 것이겠군요.”
범한은 맹인이 코끼리 만지듯이 교육하는 중이었다. 범한은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알지 못해 3 황자의 대답에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백성들은 쉬이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 황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과 조정 백관들의 녹봉은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지요. 마마께서 훗날 태자 전하를 도와 천하를 다스리시려면 백성들에게서 취할 때 어찌해야 하는지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한계선을 넘지만 않으신다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3 황자가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스승님, 양주 백성들의 풍습이 사주보다는 사납군요. 그곳 사람들의 얼굴에는 원망과 사나움만 있었으니 아무래도 그들에게서 조정이 너무 많은 걸 가져가고 있나 봅니다.”
배 위에 있을 때 이 어린 3 황자는 범한을 사업 대인이 아닌 스승님이라 부르겠다며 친근하게 요구했었다. 범한과의 거리감을 더 좁히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몇 차례 거부했지만 효과가 없어 그냥 3 황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3 황자의 말을 듣고 나니 문득 자신이 몰래 죽인 양주 지주가 생각나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싶어졌다.
“저······ 강남 수채에 대해 마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스승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협객은 무(武)로 금령(禁令)을 어긴다고 말입니다. 수채라면 단순히 물가에서 궐기한 검은 무리 아닙니까. 배에서 생활하는 건달에 재물을 위해 남의 목숨을 해치고요. 단순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는 것이니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협객의 기품은 없는 것이지요.”
3 황자의 맑고 어린 얼굴에 잠시 증오의 빛이 스쳤다.
“제자인 제 생각으로는 대군을 동원해 저들을 일망타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두머리는 참수해야 하고요. 그리고 나쁜 짓을 하는 데 동참했던 이들은 북쪽 변방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범한은 깜짝 놀랐다.
“앞서 백성들의 기풍이 지리적인 기세와 환경 그리고 생존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꺼번에 말끔히 제거하는 방법은 들풀을 순식간에 없애기 위해 들불을 놓아 버리는 것과 같지요. 백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와 같은 해결책을 내놓는다면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결국 비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들풀은 봄바람이 불면 다시 솟아나기 마련이지요. 이렇듯 같은 일이 반복되기만 할 텐데 언제쯤 문제를 해결해 상황을 끝내게 될까요?”
그러자 3 황자는 생각을 좀 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의 방금 말씀은 틀리셨습니다. 질서를 해치는 백성들에 대해 조정은 마땅히 엄격하게 법률을 적용해야 합니다. 스승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강남 수채는 사호 수군과 손을 잡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텨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질서를 어기는 백성들이 암암리에 조정의 기강까지 해치도록 내버려 둔다면 훗날 어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3 황자가 싸늘하고 날카롭게 말을 이어 갔다.
“백성을 보듬고 그들이 잘 살도록 해주는 건 천하무적인 사람이라면 필히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다만 감히 앞장서서 도적질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하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죽여야 할 놈은 어떻게든 죽여야 합니다!”
범한이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3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 아이가 자신보다 훨씬 명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가림 기술은 범한 자신보다 훨씬 떨어지는 게 보였다. 자기 앞에서 용감하게 반대 의견을 내놓다니 어찌 보면 기탄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듯하다.
강남 수채를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한 건 범한 앞에서 꾸미지 않은 결단력을 보여 주려 했던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진심을 알아 달라는 심정으로 말이다. 범한은 강남행에서 어떻게든 셋째를 바꾸어 보려 생각 중인데 셋째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어린 녀석이 아직 능숙하지는 않아도 이 정도의 심계를 꾸밀 줄 알다니 정말 대단했다.
“그렇다면 마마께서는 소신이 오늘 강남 수채 분타에 오는 걸······ 왜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스승께 묘수가 있으신 것 같기에 이 제자 함부로 예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3 황자가 평정심을 되찾고는 웃어 보였다.
범한이 눈썹을 씰룩였다. 3 황자가 세부 사항까지 아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대략적인 방향은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이에 범한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좀 위선적인 놈인 것 같아.’
그 순간 마차 밖에서는 대화가 절반 정도 진행된 터였다. 사천립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문이란 자가 당황한 낯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를 에워싸고 있던 졸개들은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마차 가림막이 열리더니 범한이 머리를 내밀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후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압박해 오고 있는 비적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후 몸을 돌려 3 황자와 사사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3 황자가 범한 곁에 섰다. 키가 이제 겨우 범한의 겨드랑이 정도밖에 안 되는 황자는 제법 흥이 올라 주변에 있는 수채 졸개들을 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스승님, 저들이 소위 강남 인사란 사람들입니까?”
범한이 대답했다.
“그런 셈이겠지요.”
3 황자는 두려움 따위는 없는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황자의 신분이어서 강호의 험악함을 알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범한 제사가 자기 곁에 있으니 자신의 신변 안전 같은 문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현공 사당에서 자객 사건을 겪은 후 셋째는 범한 제사만 곁에 있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이제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범한의 신분을 알게 되었니······. 천자의 집안사람들은 본래 무정하기 짝이 없다지만 3 황자는 범한만은 예외로 보였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틀어 3 황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궁금하다는 듯 작은 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어찌하여 전혀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3 황자가 웃었다.
“스승님께서 곁에 계신 데 무엇 하러 걱정을 한답니까?”
모두 범한을 북제 해당타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공의 천재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진짜 상태를 아는 이는 없었다. 단지 범한이 왜 자신의 안전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모하게 호랑이 굴로 들어가려 하는지만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강호 수채 사람들의 귀에도 들렸다. 이는 상대방의 신분을 말해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강남 수채 사람들은 어린아이는 대략 어느 대귀족의 공자일 것이고 저 예쁘장하게 생긴 서생은 입주 교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도 입주 교사의 나이가 너무 젊기는 했다.
“도련님, 우리도 들어가 볼까요?”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과 경계에 찬 눈빛을 무시한 채 범한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한 손으로는 아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여인을 붙잡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고문의 낯빛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인적 구성을 보고 그들이 채주가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는 적(敵)임을 알아차려서였다. 그런데······ 저들은 무엇 하러 직접 찾아온 거지? 대체 배에서는 언제 내린 거고.
지금 이 순간, 강호 수채 소속의 무수히 많은 형제들은 강에서 힘겹게 범한 일행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박과 목숨을 건 일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찾고 있던 적이 거들먹거리며 사주 분타 앞에 나타나 자기들 멋대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건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저들을 잡아라!”
고문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이렇게나 오만하게 구는 적은 지금껏 본 적 없었는지 속으로는 제법 당황한 상태였다. 그런데 허풍을 강하게 친다는 건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 그렇다면 지금 하 어르신이 분타 안에 계시니 이건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게 대응한다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고문의 고함 소리에 졸개들은 단도를 꺼내 들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범한을 죽이러 달려들었다.
358화
범한은 오른손 쪽에서 살짝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에 고개를 돌려 보니 3 황자는 여전히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손만큼은 무의식적으로 범한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실은 조금 무서웠던 것이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런 상황에서도 범한은 설명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여러 사람 사이에 있을 때는 필히 모든 걸 압도할 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탕탕탕탕, 하는 소리가 황당하게도 음악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순간 강남 수채 분타 형제들은 믿기 힘든 광경을 보게 되었다. 분타 입구에 무수히 많은 단도가 비가 내리듯 날기 시작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단도들이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후 곧바로 들린 것은 수많은 “꺼억!”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범한의 앞길을 막아선 졸개들의 몸이 하나같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 * *
갑자기 불어닥친 강력한 바람처럼 고달이 다른 여섯 호위 무사를 이끌고 범한을 포함한 네 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등에 지고 있던 장도를 꺼내 졸개들을 날려 버렸다. 하늘을 뚫을 듯한 무사들의 기세에 길을 막아섰던 졸개들은 질겁하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사이 범한은 변함없이 평온한 얼굴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안으로 향했다. 옆에서 장도가 번쩍할 때마다 “끄억”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범한은 편안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천만이 달려온들 날 막을 수 있을쏘냐.”
범한이 옆에 있는 3 황자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조정은 강호 사람과 교섭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저들에게 일을 하도록 시키는 것뿐. 그러니 초면에 뭔가를 더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요.”
3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놈들을 이리저리 노려보며 생각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3 황자가 흥분했는지 어느새 자그마한 손바닥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어 있었다.
“왜 저들······ 강호 사람들의 실력으로는 일격도 당해 내지 못하는 거죠?”
3 황자는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남 수채 졸개 중 일부는 바닥에 나뒹굴며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자리에서 일어난 자들은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범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말없이 장도를 쥐고 있는 손에 눈이 갈 때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문은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칼자루를 안정적으로 쥐고 있는 손을 노려보며 속으로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강호에 왜 갑자기 7, 8등급이나 되는 고수가 나타난 거야? 더군다나 저런 실력자가 왜 호위를 하고 있는 거냐고!’
* * *
범한 일행은 이미 본관 대청의 돌계단 아래에 와 있었다.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3 황자를 향해 웃었다.
“무공은 왜 배울까요? 글공부와 마찬가지로 권력, 이익, 명예를 위해서랍니다. 강호는 무공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주지만 조정에서는 줄 수 있는 게 더 많이 있지요. 그래서 정말로 이름이 난 문인은 모두 조정 관료로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정말 대단한 고수는 조정을 위해 힘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서는 그런 말에 속으셔서는 안 됩니다. 강호는 궁핍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보호비라는 돈을 거둬들이는 전망도 없는 일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 진짜 고수들을 끌어들일 리 없는 것이고요.”
본관 대청 앞으로 가자 강남 수채의 주인 하서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일행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나고 더 이상 추태를 보이지 말거라. 경도에서 오신 저 손님분들을 만나 뵐 것이니라.”
하서비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너무 놀라 덜덜 떨고 있었다. 상대방이 경도 선박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일찌감치 알아차린 터였다. 하지만 자신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서비는 손을 뻗어 손님들을 맞이하는 모양새를 취할 필요도 없었다. 범한 일행이 마치 집에 온 듯 자연스레 중당(中堂)으로 들어가 버려서였다.
범한은 3 황자를 주인석에 앉히더니 호탕하게 황자 옆에 앉았다. 사사와 사천립은 범한 뒤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일곱 명의 호위 무사는 칼자루를 쥔 채 중당 안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자신의 구역에서 상대방이 거드름을 피우자 하서비는 하마터면 벌컥 화를 낼 뻔했다. 하지만 노기를 최대한 억누르고 범한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하서비가 대인을 뵈옵니다. 한데 강호 초야에도 호걸은 있사오니 대인의 조금 전 말씀은 조금 과한 면이 있었습니다.”
이쯤 됐는데도 범한이 경도에서 온 힘 있는 인물임을 하서비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는 정말로 바보 천치였다. 하지만 바보는 아닌 관계로 어떻게든 분노를 억눌러야만 했다. 경국에서 조정은 절대로 깰 수 없는 견고한 존재, 가공할 만한 존재니까. 그리고 관(官)에게 대항하려는 헛된 망상을 지닌 세력은 결국에는 한낱 연기처럼 사라지는 비극적 결말만 맛보게 되니 말이다.
“하서비인가?”
범한이 자기 앞에 있는 음험하고 사나워 보이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하자 이내 온화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관이 여기에 손님으로 왔다는 건 사람들이 한동안은 몰랐으면 하는데. 앞서 많은 사람이 본 일은 자네가 알아서 처리를 해주게나. 조금 힘들겠나? 그렇다면 본관이 하 두목에게 내린 첫 번째 시험으로 여기게.”
젊은 관원의 말에 하서비는 머리가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쌓여 왔던 모든 굴욕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는 강남 수채의 주인으로 암흑가에서는 나름 명성이 자자한 인물로 지내며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하서비는 똘똘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판단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상대방의 신분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예측은 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옳다면 이 젊은 관원은 그야말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 옆에 있는 어린아이는······.
‘참자! 어떻게든 참아야 한다!’
하서비는 계속 자신을 다독였다. 상대방의 권세 정도면 새끼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자신이 몇 년 동안 쌓아 온 모든 걸 몽땅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어서였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준비해 왔던 복수라는 대업도 무용지물이 된다. 게다가 몇천에 달하는 졸개들은 건사할 가정이 있는 형제들인데 그런 그들이 단번에 머리통이 잘려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지금껏 경국 백성이 황실에 보여 왔던 무한한 경외심으로 자신의 정신을 꽁꽁 동여매 반역을 저지르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도 갖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참는 수밖에. 강호를 떠도는 사내에게도 혈기는 있고 건달도 3할 정도는 결연함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형제인 졸개들의 목숨을 살리고 자신의 평생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서비는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리고 공손함 속에 비굴함까지 담아 말했다.
“오늘 대인께서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범한이 하서비를 쓱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번거롭겠지만 하 어르신은 본관이 앞서 분부한 것부터 처리를 해주게나.”
하 어르신이란 호칭을 쓰기는 했지만 건성건성 말하는 것으로 보아 강호에서 통용되는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는 전혀 없었다.
하서비는 상대방이 대체 무슨 계산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에 한껏 침울한 낯빛으로 몸을 돌려 중당 밖으로 나가 두려움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고문에게 몇 마디 건넸다.
중당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범한은 꽤 느긋해 보였다.
대화가 재개되었다.
“본관이 오늘 이렇게 온 건 하 어르신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네.”
범한은 찻잔을 내려놓고 하서비를 온화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며칠 전 밤에 영주 나루터에서 본관이 타고 있던 배에 손님들이 왔었지. 그리고 본관은 그들을 배에 남아 있도록 했고. 하 어르신은 이 일과 관련해 어떻게 거래를 할 생각인가?”
하서비는 낯빛만 어두워질 뿐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다 외려 되물었다.
“대인, 이 하 아무개가 부인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래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강호인으로서 수하인 형제들에 관한 일이니 모른 척 지나갈 수 없어서입니다. 맞습니다. 그날 밤 대인의 배에 실수로 올라간 이들은 모두 하 아무개의 형제들입니다. 대인께서 미복으로 남쪽에 오시는 바람에 순간 눈뜬장님이었던 제가 대인께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시지요. 모든 죄목은 이 하 아무개가 짊어지겠으니 부디 부하들은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3 황자가 듣기 거북스러웠는지 찻잔을 탁자 위에 무겁게 내려놓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어린아이가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듯싶으냐?”
3 황자는 말을 할 때 일부러 길게 늘여서 말했다. 하지만 아직 젊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라 그런지 음침하고 괴이하다기보다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싸늘한 느낌이었다.
하서비는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죄명을 말하자면 바로 황자 살해 기도였기 때문이다. 몇천 명을 구덩이에 묻는다 해도 씻을 수 없는 죄였다. 하지만 하서비는 어려서부터 명씨 일족에게 추격당하면서도 암흑가에서 상위에 오르는 데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강남 무림에서도 중요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는 굳은 마음과 주도면밀한 사고력을 지닌 이였다.
하서비가 자기 앞에 있는 귀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들을 소탕하기 위해 관병을 보낸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분타로 왔다는 건 그들 뒤에 더 큰 뜻이 숨어 있어서라고 말이다.
이에 하서비는 범한이 정말로 두렵지는 않았다. 단지 경도에서 온 귀인들이 대체 무엇을 원하기에 이리하는지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서비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강호 사람이 가장 중시하는 기개를 버리고 범한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민초인 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크나큰 죄이옵니다. 하오나 대인들께서 하해와 같은 덕을 베풀어 주셨고 또한 아무런 손해도 없으셨으니 부디 대인께서는 이 민초의 몸뚱이를 수천수만 조각으로 저미는 형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민초의 무지하고 경솔했던 형제들은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배짱을 부리며 눈 가리고 아웅 해본 것이었다. 상대방의 그런 점을 못 알아챘는지 아니면 그의 임기응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범한은 긍정적인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 당주는 과연 수하를 아끼는 진정한 호걸이군.”
서로가 서로를 추켜세워 주고 있었다. 하서비의 경우는 자신에 대한 호칭을 ‘나’에서 ‘하 아무개’로, 다시 ‘민초’로 바꾸며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었다. 범한의 경우는 처음에는 그를 ‘하서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가 ‘하 어르신’으로, 다시 또 ‘하 당주’로 바꾸어 부르며 그의 체면을 점점 더 세워 주었다. 상대방이 자신과 대화를 할 만한 신분임을 인정해 준 것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딱 그만큼만 말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옆에 있던 3 황자는 순간 썰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승님이 자기가 끼어드는 게 싫어 본인이 먼저 나서서 악역을 자처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자의 신분이었던 그는 이른바 강호가 앙심을 품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이에 맑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하 당주의 말이 늦은 감이 있군. 그날 밤 도적들은 이미 호위 무사들이 죽여 강물로 던져 버렸다.”
“네?”
하서비가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경도에서 온 관원들이 비적보다 훨씬 더 악랄할 거란 건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그것도 단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고 말이다.
순간 머릿속에 관무미와 나머지 형제들의 시체며 머리가 강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게 그려지자 하서비는 가슴이 아프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얼굴에는 비통함만 드러낼 뿐 앙심까지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실력파 연기자였다.
359화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관에서 하는 일은 자네들의 규칙과는 다르네. 그들이 배 위에서 칼을 휘둘렀으니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던 거지. 만약 그때 본관이 마음이 약해져 그들을 풀어 주었다면 훗날 그 소식이 경도까지 흘러 들어가 조정의 진노를 샀을 것이네. 그렇다면 그들은 더 처참한 결말을 맞았을 테지. 물론 그자들의 가족도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야.”
하서비가 침묵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후 처음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오늘 대인께서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상대방이 모든 걸 명확히 설명해 주었다. 배에 은전을 훔치러 올라온 일은 십여 명 형제들의 선혈로 깨끗이 씻어 냈으니 이 일은 일단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자연히 다른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어 부하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3 황자도 의자에서 뛰어내려 자리를 피해 주려 했지만 범한은 황자에게 남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달라 했다.
* * *
집안에는 세 사람만 남아 있었다. 하서비가 속으로는 어떤 갈등을 빚고 있고 혼잣말을 해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 같은 암흑가 인물이 한꺼번에 두 분의 ‘황자’를 뵐 수 있게 된 건 의외로 굴러들어 온 ‘복’이었다.
“나는 범한이네.”
범한이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다.
하서비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은연중에 알아차리기는 했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신분을 드러내자 심장이 벌렁대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금 여기에 있는 젊은이는 경국 민간에서 이미 전설처럼 회자되는 인물이었다. 만 스물이 되지 않은 나이로 감찰원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을 쥔 제사 대인이 되었고, 황궁에서 시를 지었고, 거리에서 사람을 죽였고, 춘시 사건의 폐단을 바로잡았고, 북제에서는 해당타타와 겨루었고, 북제에서 책을 가져왔고, 귀국 후에는 황자에게 모욕감을 준 인물이었다. 그리고 고작 2년이 만에 호적에도 오르지 않았던 시랑의 서자에서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등극했다. 또한 문과 무를 모두 겸비하고 있으며 양쪽 분야에서 모두 최정점의 수준에 도달해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일단 범한 이야기가 등장하면 젊은 남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향한 부러움과 흠모의 마음을 드러낼 정도였다. 이 점에서는 하서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비슷한 처지인 터라 하서비는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제사 대인에게 더욱 큰 찬사를 보내던 중이었다. 한데 문제는 자신이 제사 대인에게 죄를 저질렀다는 점이다. 범한 대인에게 죄를 지었으니 자신에게 결국 어떤 일이 있을지는 하서비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살펴봐도 범한의 손에 잘려 나간 인물로는 전임 예부 상서 곽유지, 형부 상서 한지유, 도찰원 좌도 어사 곽정이 있었다. 이 젊은이 때문에 도찰원의 어사가 곤장을 두 차례나 맞았고 2 황자도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장 공주는 황실 금고에서 쫓겨나게 될 판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범한의 신분은 갈수록 예사롭지 않게 변해 갔다. 그런데 재상의 사위가 되더니 이제는 황제 폐하의 핏줄이라고? 경도의 중추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일에 대해 경도 백성들은 신비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에게는 이름에도 금테까지 둘러져 있었으므로 하서비로서는 감히 다가갈 수도 없는 존재였다.
하서비가 지금 어떤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매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이내 옷매무시를 가다듬고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 범한에게 절을 올렸다.
“민초 하서비, 제사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 * *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도 범한은 그에게 일어나란 말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흥미롭다는 듯 하서비를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명칠소, 본관은 자네가 조금 더 진실하고 간절하기를 바랐다. 적어도 예를 올릴 때 네 본명을 사용하기를 바랐지.”
동공이 수축된 하서비가 순간 고개를 치켜들어 온화한 듯해도 실은 사람을 압박하고 있는 범한의 두 눈을 직시했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아래로 향해 있었고 언제든 천둥 같은 일격을 날리려 했다.
명칠소라니!
그동안 들어 보지 못한 세 글자가 그의 귀에 파고들어 독사처럼 그의 대뇌를 물고 늘어졌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속으로는 폭발하고 말았다.
‘어떻게 내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거지? 이 소식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강남에 백 년 동안 뿌리내리고 산 가문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두려 하지 않을 텐데! 내가 아무리 강남 수채를 갖고 있어도 이래서는 내가 이길 가능성이 없잖아!’
“신발에 숨겨 둔 비수를 꺼낼 필요는 없네.”
범한은 상대방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동작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 당주는 당연히 잘 알고 있겠지. 본관의 특기가 바로 그런 거란 걸 말일세.”
그런 후 범한은 손을 드는 척했다. 그러자 하서비도 그 틈을 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완전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으면서 귀로는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예의주시했다. 한데 아까 지시해 놓은 일을 고문이 준비해 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위험한 국면에 처한 하서비는 범한 제사가 자신에게 어떤 위협을 가할지 예측하고는 있었다. 그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너 죽고 나 죽자였다.
아직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는지 3 황자는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 어미가 과거에 지금 명씨 가문의 할머니에게 맞아 죽었다지.”
범한이 감찰원에서 수집한 정보를 말했다.
하서비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언제든 범한을 제거해 버릴 준비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수채 대두목으로서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북제의 해당타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9등급 실력자. 그러니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 한들 지금 당장 죽여 버릴 수는 없었다.
“자네는 어려서부터 큰형에게 학대받고 자랐고.”
범한이 하서비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 당주는 너무 괘념치 말게나. 본관에게는 자네의 아픈 과거사를 들춰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다만 자네와 거래를 할 생각이란 건 알려 주고 싶군. 그리고 그 사업이 명씨 가문을 향한 자네의 복수심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네. 자네가 명씨 가문을 충분히 증오하지 않는다면 나도 자네를 찾아올 일은 없었거든.”
하서비는 금세 화가 풀렸다. 이에 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대인께서는 소인과 무슨 장사를 하시려는 것입니까?”
“자네가 하려는 일을 본관이 도울 수 있지.”
거래와 관련된 게 거론되자 범한은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하 당주가 최근에 은전이 부족하다던데. 반면 내게는 은전이 있고 말일세.”
범한에게 은전이 있는 건 당연했다. 일단 범한은 담박서국과 포월루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6부 관아와 대 태감 같은 사람들이 준 돈, 정풍 운동으로 거둬들인 황금과 은전까지 있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정말 놀랄 만큼 많은 액수였다.
물론 강남이라는 부유한 지역에 있는 명문가 젊은이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별 볼 일 없었다. 하지만 범한 제사에게는 재물신급의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란 사람이 국고와 황실 금고를 모두 관리한다는 건 세상 사람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집안에 돈이 없다고 한다면 셋째 형수 같은 신분 낮은 사람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하서비는 범한이 자신을 위협하는 중이라고 생각만 할 뿐 도우러 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얼빠진 사람처럼 물었다.
“대인······ 3월에 황실 금고를 여는 일과 관련해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자네와 나 모두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니 바로 말하지.”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3월에 황실 금고가 문을 열고 입찰에 들어갈 걸세. 황실 금고가 왕년에는 최씨와 명씨 가문이 주무르던 것이라지만 최씨 가문은 이미 몰락했어. 그러니 올해는 자연스레 커다란 변동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하 당주가 끼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이네. 그리고 공교롭게도 본관이 그 일을 맡게 되었으니 내가 자네에게 입찰에 참여할 자격을 주려 하네. 그러니 은전을 충분히 들고 가 관련된 몫을 배당받으란 말이네.”
사실 범한이 수중에 은전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는 순전히 하서비가 범한의 말을 믿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었다.
하서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잠시 후 대답했다.
“제사 대인께서는 무척 친절하시군요.”
하서비는 곧장 범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찰원은 가공할 기관이란 걸, 또한 감찰원과 엮인 사람은 결국에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걸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범한이 그의 속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렸다면 그에게 비교적 적절한 설명을 곁들여 제안했을 것이다. 바로 악마와의 거래 말이다.
“본관에게 자네가 왜 필요한지 설명을 해주지.”
범한은 상대방이 움찔하는 건 개의치 않은 채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놓고 가격을 제시했다.
“강남 수채는 자네 것이지. 나중에 성공한다면 명씨 가문 역시 자네 것이 되겠지. 그러면 나라고 할지라도 관련 수익을 직접 받아 낼 수는 없게 될 거야.”
하서비의 이맛살에 더 강한 긴장이 실렸다. 세상에 이렇게나 선량한 감찰원 관원은 없을 터.
아니나 다를까, 범한은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자연스레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자네 것은 모두 내 것이 되어야 하네. 하지만 그 전에 자네는······ 반드시 감찰원 사람부터 되어야 하고.”
범한은 말을 마친 후 품에서 간단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요패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흑단목으로 만든 검고 윤기 나는 탁자 위에 가볍게 내려놓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감찰원 4처의 주강남로 순찰사 감사 자리네. 품계는 높지 않으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섭섭하다니? 강남 비적 두목에게 갑자기 조정의 관직 자리를 주었는데. 그것도 관리의 공무 집행을 감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감사 자리를 쥐여 줬는데 섭섭하다니! 바보나 섭섭하게 생각할 일이었다.
범한이 제시한 가격에 놀란 하서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감찰원으로 들어간 후 나중에 명씨 가문이든 강남 수채든 그가 쥐고 있는 곳은 감찰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중에 황실 금고와 관련한 방대한 수익을 두고 나눌 때도 여전히 감찰원이······ 아니지, 어쩌면 범한 제사가 개인적으로 한 말일 수도 있었다.
거액의 자금이 생기고 아무도 모르게 관리가 되고 황실 금고가 주관하는 입찰 경쟁에 범한 제사의 도움으로 참여하게 되자, 하서비는 처음으로 저 돈 많은 가문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인생에서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주저했다. 왜냐하면 첫째, 자유를 잃어서였다. 범한의 부하로 들어가 충견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강호를 구르며 살아온 그에게는 딱히 달가운 제안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범한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둘째, 감찰원이 너무 악명을 떨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관직을 받았다는 정보가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훗날 더 큰 권력을 쥐게 된다 하더라도 그날로 명성을 잃게 될 게 뻔해서였다.
이에 하서비는 최후의 몸부림을 쳐보았다. 어쩌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가 버르장머리 없게 범한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인, 이 민초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 거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뭐라고?”
범한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하 당주는 명씨 가문을 다시 손에 넣고 싶은 게 아니었나? 그곳은 원래 자네 가족이 있는 곳 아닌가. 본관이 알기로는 명씨 가문의 옛 어르신이 첫 번째로 생각해 둔 이름이 명청성이라 하던데.”
명청성은 하서비의 본명이었다. 하서비가 놀라 살짝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
360화
“이 민초, 세상 물정을 몰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복수의 방법이 많이 있어서입니다. 민초는 지금 강남 수채의 대두목입니다. 그러니 명씨 가문과 맞서려면 제게도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황실 금고와 관련해서는 어쩌면 민초에게는 주제넘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명씨 가문은 자금력이 어마어마한데 제가 어찌 공개적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웃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한밤중에 사람이 죽이지 않았는가? 명칠소 자네는 그럴 만한 능력과 결단력이 있다 믿네. 한데 요 몇 년 동안의 일들로 증명된 건 자네가 강남 수채를 전멸시킬 위험을 무릅쓰고 명씨 가문을 불태워 버릴 미치광이가 아니란 것 정도니······ 일단 자네가 그런 능력이 있는지는 말하지 않겠네. 그런데 자네가 그리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설득해야겠지? 그런데 수채 형제들은 조정에 쫓기고 과부와 고아가 된 그들의 처와 자식은 세상을 떠돌게 될 텐데. 설마 자네가 바라는 결말이 이런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어야 은혜는 은혜로 원수는 원수로 갚는 게 되어, 자네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살려 주고 또 위로 올려 준 옛 산채 주인을 다시 만나러 갈 면목이 생겨서 그런 것인가?”
범한은 조리 있게 말하며 상대를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부드럽게 말하면서 하서비의 마음 약한 부분만 건드렸다. 분석에서 나온 강한 설득력이 마음을 파고들자 하서비의 낯빛은 암담해지기 시작했다.
범한은 하서비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 당주가 가장 바라는 건 복수보다는 명씨 가문을 되찾아 오는 것 아닌가. 그런 후 반백 살 먹은 자네 큰형 앞에 당당하게 서서 기를 펴고 지내려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살인만이 해결 방법이라면 자네는 이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겠지. 더군다나 무력을 동원해 강남 수채를 전멸시켜 가면서 명씨 가문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면 그 명씨 가문이란 건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게 되는 걸까? 자네가 돌려받으려 했던 게 그때도 남아 있을까?”
범한이 담담하게 하서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내 입장을 밝히자면 그러한 선택은 하지 말게. 명씨 가문을 되찾기 위해 다년간 힘겹게 싸워 오지 않았나. 그것이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면 분명 씁쓸한 기분일 거야. 더군다나 명씨 가문을 온전히 남겨 두는 게 분명 명씨 어르신의 유지일 테지. 명씨 가문에서 아무리 자네에게 험악하게 굴었어도 부친만큼은 자네 모자에게 아무런 빚도 지지 않으셨을 테니 말이네.”
하서비는 말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직까지 범한의 말을 소화시키는 중인 것처럼 보였다. 늘 격렬한 싸움에만 길들어 있던 사내에게 갑자기 어떤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앞에 있는 젊은 대인이 자신과 매우 유사한 처지에 있다는 점이었다.
‘설마 저자도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되찾으려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황실의 금고 같은 것 말이야. 그건 원래 섭씨 가문의 사업이었잖아. 그걸 온전히 빼앗아 오려는 셈인 거야?’
하서비가 완곡하게 거절한 것 때문에 범한이 화를 내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것이었다. 범한은 자신이 한 말이 먹힐 거라 자신했다. 중요한 점은 범한에게 명칠 공자에게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이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터라 범한이 그의 진짜 생각을 정확하게 잡아 낼 수 있어서였다.
“하 당주, 자네가 원하는 건 명씨 가문의 사업이지 몇백 명의 목숨은 아니지 않은가.”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하서비가 최후의 질문을 던졌다.
“제사 대인, 이 민초가 이해 못 한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대인이 이리하심은 모두 황실 금고를 인수받기 위한 준비겠지요. 최씨와 명씨 가문이 외부 공급 노선을 독점한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그쪽과도 너무 깊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인께서는 그들과 맞서시려는 생각이겠군요.”
하서비는 장 공주라는 세 글자를 억지로 삼키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온데 대인께서는 어찌하여 저 같은 민초가 마음에 드신 것입니까? 대인의 권세와 지위면 최씨 가문 따위는 손쉽게 무너뜨리고 명씨 가문을 제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대인 혼자만의 힘으로도 거뜬히 해내실 수 있으니 굳이 이 민초까지 나설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
“최씨 가문은 말일세.”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을 이어 갔다.
“명씨 가문과는 상황이 다르네. 내가 나서지 않는 이유는 직접 나서는 게 편치 않아서네.”
편치 않아서란 말은 관리 입장에서는 참말이었다. 그는 감찰원 제사인 데다가 이제는 황실 금고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니 조정의 냉혹한 규율에 따라 황실 금고의 모든 산물을 책임져야 했고 수출을 하려면 반드시 민간 상인들의 투서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므로 감찰원 업무를 하는 와중에는 사적인 업무 때문에 공개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러므로 범한에게는 신임할 수 있고 편하게 일을 시킬 수 있는 대변인이 필요했다.
범한에게 있어 최씨와 명씨 가문의 상황은 달랐다. 최씨 가문을 축출하기 위해 범한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충실하게 준비를 했다.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며 겉으로는 아닌 척했다. 그리고 언빙운이 중심이 되어 강력한 일격을 가함으로써 순조롭게 일을 마무리했다.
그러니 명씨 가문은 최씨 가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물건의 입출과 장부 내용을 가지고 잘못을 잡아내는 건 이미 어려운 일이 되었다.
물론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범한이 최씨 가문을 무너뜨리려던 이유는 그들 뒤에 강력한 뒷배가 있어서였다. 그 사람에게는 경국 황실 말고도 다른 강한 세력이 있었다. 바로 북제의 젊은 황제였다.
한편 명씨 가문과 관련된 인물은 동이성과 해외에 집중되어 있었다. 범한은 일찍이 사고검의 제자와 손제자를 죽였다. 범한을 포함해 경국 조정에서는 동이성에게 무수히 많은 억울한 누명을 씌운 터라 동이성과 경국은 원한이 깊었다. 그런데 지금 동이성과 손잡고 있는 명씨 가문을 무너뜨리려면 범한이 보기에도 자신에게는 아직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놓아둔 요패를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요패는 일단 여기에 두겠네. 오늘 밤이 되기 전에 답을 주게. 물론 일단 결정을 내린다면 어떤 걸 준비해야 할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야.”
하서비가 공손하게 몸을 틀어 한쪽으로 비켜서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범한의 말에 대한 즉답은 아니었다.
“대인께서 오늘 와주신 일은 마치 천신의 강림과도 같았습니다. 대인께서는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는 게 싫으셨겠지만 이미 유명하신 분이라 숨기시는 건 어쩌면 힘들 것 같습니다.”
하서비가 아부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급히 다른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하 당주는······ 여전히 어쩌다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구는군. 그렇다면 우선 지금 하는 연기나 잘하게나. 그리고 본관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무엇 하러 덮어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큰 강에 있는 배는 하 당주의 부하들에게 호송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군. 본관이 은전을 한 상자 가져왔는데 도적이 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러네.”
하서비가 죽을죄를 진 사람처럼 고개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인,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범한이 몸을 돌려 셋째를 의자에서 내려 주었다. 그 순간 하서비는 대화를 나누느라 자신이 어린 귀인을 소홀히 대했다는 사실이 생각나 마음이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하지만 순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어 주저하며 입을 뗐다.
“대인, 만약 3월에 하관과 명씨 가문이 겨루게 된다면 상대편에서 의심을 할 터이니 그때······.”
“자네가 본관 쪽에 서면 본관도 알아서 자네 편을 들어 줄 것이네.”
범한이 미소 띤 얼굴로 하서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3 황자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걸어 나가며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하 당주, 빠른 결정을 내려 주니 본관도 기분이 좋군.”
* * *
강남 수채 사주 분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수채 주인이 엄격하게 함구령을 내려서였다.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명령이었지만 형제들은 큰일이 났음을 알고 있었다. 이에 감히 예측만 할 뿐 함부로 자신의 생각을 다른 데 말하지 않았다.
하서비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의자에 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낯빛이 어둡고 불안정했다.
고문이 걸어 들어와 하서비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수군 쪽에서는 이미 병영을 봉했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서비가 낯빛을 흐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괜찮아. 이번 일만 원만하게 협상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니까.”
말주변이 없는 고문이 더듬거렸다.
“우리 배들이 많이 나포되었습니다. 채주님의 명령에 따라 충돌은 일으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한데 앞서 경도에서 오신 분들께서 떠나신 후 우리 쪽 배도 풀려났습니다.”
하서비가 고개를 숙였다.
“그쪽에서 실력을 보여 주신 거다.”
그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들 눈에 우리는 한낱 개미에 불과한 게야.”
“채주님, 이미 준비를 끝냈습니다. 공봉이 지금 뒷방에서 검을 씻고 있습니다. 채주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지요.”
하서비는 명령을 내릴 기미가 없었다. 대신 이맛살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잠시 후 그가 느릿느릿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전 고문, 자네가 보기에 이번 일은 해도 괜찮을 것 같은가?”
그의 손은 감찰원 요패를 살살 문지르고 있었다. 하도 많이 문질러서 그런지 요패는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고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채주님의 분부에만 따르겠습니다. 소인, 어찌 감히 말참견을 하겠습니까.”
하서비가 눈을 감았다.
“경도에서 오신 대인은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게 습관이신 것 같았어. 그리고 내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셨고 말이지. 아무리 7, 8등급이나 되는 고수들을 호위 무사로 두고 있어도 우리가 모두 덤빈다면 실제로는 기회가 있을 수도······.”
고문은 속으로 두어 번 욕을 뇌까리고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불가능한 거 알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거냐? 제 손으로 오명은 뒤집어쓰고 싶지 않으니 나에게 설득해 달라고 하는 말이군!’
고문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입을 뗐다.
“호위 무사 중 대장은 실력이 정점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 자가 강호 무림에 나온다면 자신만의 문파를 형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채주께서는 심사숙고하시지요.”
“제일 중요한 건 그 대인이구나.”
하서비가 두 눈을 부릅떴다. 사실 범한이 그에게 내건 조건은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다만 하나의 파를 형성한 당당한 주인인 자신이 별안간 그의 부하가 되어야 하는 데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앞서 범한과 이야기를 할 때는 비굴하게 굴어 놓고 이제 와서는 고문에게 최후 일격을 할 준비를 시킨 것이었다. 이는 모두 수채 내 최고수 공봉 선생이 때마침 사주 분타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강남 수채는 반격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하서비는 잘 알고 있었다. 이른바 ‘최후의 일격’은 단순히 자기 위로 차원에서 하는 것임을 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못난 놈이 아니란 걸 보여 주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하서비가 탄식했다. 무언가 이유 모를 슬픔이 밀려들었다. 강남 수채가 이제 곧 자신 때문에 조정의 개가 되어야 한다니 그에게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하서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울상을 짓고 있는 고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현명하지 않은 선택을 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고문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였다. 위로를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하서비는 손이 닿는 곳마다 싸늘한 기운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경도 사람들에게 놀란 고문이 한겨울임에도 식은땀을 흠뻑 흘린 걸 알게 되자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하서비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황권과 감찰원이 주는 위압감은 자기 같은 민간 패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린 그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배치를 풀어라. 공식적으로는 그 선박을 감시하는 것으로 하되, 뒤에서는 배가 안전히 운항할 수 있도록 보호해라. 경도에서 온 배가 안전하게 소주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육지에 오르란 말씀이십니까? 대인 곁에 있으라고요?”
“대인 곁에는 고수들이 즐비해. 그러니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고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하오나 공봉 노(老)대인 쪽은······ 이미 손쓸 준비를 마쳤는걸요.”
361화
하서비가 침묵했다. 그에게는 이번 일이 조금 복잡했다. 아무도 모르게 감찰원 일을 하게 된 사실이 너무 일찍 강호에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그러면 자신이 수채를 다스리는 게 불가능해지게 될 테고 외부적인 압력도 늘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공봉 노대인은······ 그건 골칫거리 중 골칫거리였다. 공봉은 강남 수채에서는 가장 신비한 고수였다. 항렬을 따지자면 노(老)채주의 사숙이었으니 자신에게는 사숙조(師叔祖)가 되었다. 직접 나서는경우가 거의 없어 강남 수채에게는 숨겨 둔 보물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공봉이 하서비가 관에 제대로 빌붙으려 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서비가 느닷없이 진저리를 쳤다. 이리도 복잡한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음을 깨달아서였다. 한동안 아무 말 없던 하서비가 갑자기 사나운 기색을 흘렸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내당의 호위 무사를 데려오게.”
고문은 순간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채주가 그 일을 하기 위해 공봉 대인을 제거할 준비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정말로 해낼 수 있을까.
반 시진 후 강남 채주의 주인 하서비가 닭으로 만든 탕을 받쳐 들고 후원으로 갔다. 그리고 수채에서 가장 특수한 지위를 지닌 공봉 대인에게 인사 올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최측근인 살수들이 숨어 있었다. 단숨에 끝내 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한참 동안 문밖에 서 있는데도 문을 열어 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정원은 사람들이 모두 죽기라도 한 듯 조용했다.
* * *
하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평온한 얼굴로 입을 뗐다.
“사숙조님?”
아무런 대답이 없자 하서비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해 손이 풀려 탕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바닥은 여기저기 닭 국물이 튀어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그가 본 건 침대맡에 놓인 부들방석 위에 앉아 있는 은발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상투로 틀어 단단하게 묶고 검을 차고 있었다. 장검은 허리 옆쪽에 매달려 있었고 온몸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공봉 대인은 언제든지 살인이 가능하도록 자신의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려 놓은 것이었다.
한데 이미 살인을 할 수 없게 되어서인지 공봉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불쾌감과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찌나 살벌하던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가느다란 상처가 그의 목 쪽에 나 있었다. 목을 관통해 버린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는 늙은 공봉의 등을 타고 흘러내려 수채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공봉은 이미 죽어 있었다.
* * *
공봉을 죽인 자객은 정말 놀라운 검 솜씨를 지닌 자였다. 이에 공봉의 시체 앞쪽으로는 핏자국이 전혀 없었고 피는 모두 검이 지나간 방향을 따라 몸 뒤쪽에서만 흐르고 있었다.
하서비가 몸을 떨며 공봉에게 다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사숙조를 죽이려던 게 현실화되어 있자 현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숙조를 죽이기 위해 자신은 몇십 명을 동원하려 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나 조용하고 깔끔하게 죽이다니.
순간 어디선가 종이 한 장이 날아왔다.
하서비는 깜짝 놀란 눈으로 종이를 훑었다. 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네가 그런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음에도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자가 살인을 행하려 마음을 먹었기에 내가 죽여 버렸다.’
강남 수채 주인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이제야 감찰원의 진짜 실력을 확실히 체감한 것이었다. 감찰원은 강호의 그 어떤 파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공봉을 죽인 건 자신이 투항하는 데 최후의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걸 제거하도록 도와준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서비 자신을 향한 최후의 요청이자 경고였다.
그날 밤 사주성은 고요한 가운데 긴장감이 감돌았다. 평소에는 떠들썩했던 밤거리도 오늘만큼은 유난히 조용했다. 모두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게 있었으니······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였다.
도박장 동쪽으로 뻗은 길 위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깔끔하고 쾌적한 객잔들이 들어서 있었다. 평소에도 남쪽에서 북으로 가는 대부호들이 자주 묵는 곳이다.
오늘 사주에 도착한 범한은 대놓고 부잣집 도령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부잣집 도령들에게서 볼 수 있는 습성 같은 건 없었다. 평소 소박하게 산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단순하게 생활하다 보니 객잔에서는 가장 조용한 맨 위층을 통으로 빌려 여장을 풀었다.
방 한쪽 구석에 있는 하서비가 침착하게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요패를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문서에 서명하고 손바닥 인장을 찍은 후 소가죽 봉투 안에 문서를 공손히 집어넣었다.
범한이 문서를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기 시작했다.
“하 대인, 이제 우리는 한 식구군.”
하서비는 속이 쓰라렸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지금 이 앞에 있는 젊은 관원과 한 식구가 되기는 했지만 식구란 본디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일 터. 다시 말해 상대방은 도련님인 데 반해 자신은 팔려 온 노비가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마음에 품어 온 독기와 원망을 배출해 낼 기회와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강호의 야심 찬 영웅으로서 하나를 얻었으니 다른 하나는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이 길을 선택한 이상은 제대로 해야만 했다. 이에 하서비가 앞으로 성큼 다가가 대범하게 절을 올렸다.
“하관 하서······ 명청성이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하서비는 말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제대로 절을 할 수 없었다. 두 개의 손이 어느새 자신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주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하서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대인이 본관을 어찌 보는지는 상관없네. 감찰원에 들어온 이상 우리 둘 다 조정 관원이니 상하 구분은 있어야겠지.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서로 흉금을 털어놓는 형제가 되었으면 하네. 내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한 사람이 아니야.”
하서비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범한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 대인도 분명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감찰원에 대해 이런저런 편견이 있겠지. 한데 그런 건 우리 내부 사정을 잘 모르기에 나온 편견들이네.”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기 시작했다.
“이리 말하니 좀 그렇군. 우리는 조정에서 기르는 늑대라네. 겉으로 보기에는 사자나 호랑이 같아 보이긴 하지만 말이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조정을 위해 일하고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니 사람들의 상스럽고 저속한 평가 따위는 신경 쓰지 말게. 그리고 중요한 건 우리 내부의 단결일세. 늑대에게는 두목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내부에서 절대 알력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거라네.”
하서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하관, 알겠습니다.”
“자네는 아직 몰라.”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이런 말들이 재미없고 빈껍데기처럼 느껴질 거야. 그러니 천천히 하게나. 그런 느낌은 언젠가는 감찰원 업무를 하면서 느끼게 될 테니까. 그렇군. 내가 이해한 바로는 자네에게는 영웅의 기개가 있더군. 앞서 분타에서 내가 압박했을 때 분명 속으로는 불쾌했을 텐데 말일세.”
하서비는 뜨끔했다. 하지만 범한은 온화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그때 자네는 백성이고 나는 관리였네. 그러니 자연스레 분별을 둬야 했던 거고. 한데 이제는 자네 신분이 달라졌군.”
하서비는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움츠러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성은 몹시 어리석다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자네는 백성을 이용할 수도 돌볼 수도 있을 거야. 하나······ 백성들을 믿어서는 안 되네. 그들에게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해 자네에게 기어오르게 해서도 안 되고. 그러니 감찰원 관원은 황제 폐하와 백성의 입장에서 관리들을 감독하기는 해도 믿어야 할 사람은 오로지 황제 폐하뿐이네. 백성은······ 감찰원이 충분한 권위를 유지한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압박만 하면 그만인 거고.”
“물론 이는 전부 내 개인적인 생각이네.”
범한이 자신의 소맷자락을 가볍게 말아 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절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어.”
범한에게 건망증이 있는 걸까.
비 오던 그날 날 밤부터 범한은 마음이 한구석이 서늘했다. 경도에서 지내는 동안 마음의 한기는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오죽 아저씨의 ‘세상에는 도련님이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일찌감치 처세의 도로 삼아 버린 터였다. 이에 범한이 믿지 않는 대상에는 개인들뿐만 아니라 경국에서 순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백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황제 폐하도 그중 하나였다. 범한은 단지 언제 어디서고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겉으로 내뱉지만 않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각 방 안에는 범한과 하서비 두 사람 외에도 계년조의 소문무가 함께 있었다.
범한이 소문무를 가리켰다.
“소 대인이네. 내가 1처에서 데려와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이지. 자네는 내 곁에 있을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그래도 나중에 경도로 오게 된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하서비는 강남 지역에서 토호로 지내는 편이 경도에 있는 것보다 훨씬 행복할 거라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모두 대인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은 하지 말게. 그래도 감찰원은 정말 많은 걸 도와줄 수 있어. 그래 봤자 서로 이용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소 대인이 오늘 자네 감찰원 입단의 증인이 되어 줄 걸세. 나중에 연락할 일이 있으면 소 대인과 연락하면 되네. 잠시 후 함께 이야기도 좀 나눠 보게나.”
범한이 다시 소문무에게 말했다.
“소 대인, 하 대인에게 편람과 조례를 보여 주도록 하게.”
소문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범한이 소개를 끝내자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방에서 물러났다.
두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가자 자그마한 3 황자가 유령처럼 내실에서 쪼르륵 나와 범한 곁에 서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스승님, 감찰원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들입니까?”
“그는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뽑은 특사입니다.”
범한이 공손하게 3 황자를 자리에 앉혔다.
“마마께서 앞서 들으신 건 감찰원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감찰원에서 사람을 들일 때는 먼저 오랫동안 심사를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각 주의 군(軍)에서 사람을 뽑아 옵니다. 이는 과거 황제 폐하께서 첫 북벌에 나서시기 전 감찰원을 꾸릴 때 행해진 방법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춘시에서 떨어진 수재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감찰원은 관리들을 감찰하는 일을 하니까요. 하오나 감찰원에서는 개인적으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사람, 또는 뒷배가 있는 사람은 기피하고 있습니다.”
3 황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데 저 하서비란 자는 강남 수채의 채주 아닙니까.”
“그러니 특사라 말한 것입니다.”
범한이 인내심을 발휘해 설명을 이어 갔다.
“일반적으로 하서비 같은 사람은 기껏해야 감찰원 외부 활동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그를 감사로 임명한 건 정말로 드문 일이기는 합니다.”
“왜 특사인 것입니까?”
3 황자는 이 일에 유난히 흥미를 보이며 배우려는 열의를 보였다.
이는 황자라는 존엄을 잊고 너무 세세하게 질문을 던진 것이었지만 범한은 꾸짖기보다는 온화하게 설명해 주었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께서 소신에게 강남으로 가 황실 금고를 청소하라 명하셨기 때문이지요. 강남에서 유명한 부유한 상인들을 대하려면 감찰원도 강남 현지 출신을 하나쯤은 둬야 합니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통제 가능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왜입니까?”
3 황자가 되물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마음이 모질고 독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그였다. 그리고 황자의 신분이다 보니 포월루 일로 범한에게 호되게 당한 것 말고는 인생에 좌절이란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강남에서 정무를 보는 게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지 전혀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362화
범한이 3 황자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눈빛의 아이를 보고 있자니 범한으로서는 조금 웃기기는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황궁에 있는 의 귀빈에게 탄복했다.
‘천진무구하고 귀여운 마마께서 어떻게 이런 강단 있고 배우기 좋아하고 거기에다가 기꺼이 굽힐 줄 아는 요런 대단한 꼬마 황자를 길러 내셨을까? 어쩌면 보기보다 만만한 분은 아니실 수도 있겠군.’
“강남은 신양 쪽에서 오랫동안 경영해 온 곳입니다.”
범한은 장 공주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지 않았다.
“십여 년 동안 이곳은 이미 철옹성으로 변했지요. 최씨와 명씨를 적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모두 이렇게 저렇게 이익 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이에 그 누구도 현 국면에 큰 변화가 오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변화가 가져오는 건 손실이고 또 그들은 손실을 원치 않으니까요.”
“저 먼 경도에서 온 우리는 그들 입장에서는 큰 변수입니다. 외부의 힘에 습격당하면 철옹성 내부에 있던 균열도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 잠시 동안은 견고하게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철옹성 안에 있는 모래알이 필요합니다. 그 모래알을 키우고 키워 철옹성에 다시 균열을 일으키고 깨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3 황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래알 하나가 그런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가 저자를 돕는 것과 우리가 직접 나서는 게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까?”
“제일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직접 나설 수 없어서입니다.”
범한이 머리가 아픈 듯 탄식했다.
“마마께서는 경국에 지역감정이란 게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제가 사천립을 시켜 강남에 포월루 분점을, 소주에 담박서국을 내도록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강남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한다면 그들에게 집단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집단이라고요? 대체 어떤 사람들 말입니까?”
“강남에서 제일 거부인 명씨 가문이지요. 저 때문에 그 집 장정 몇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원한이 깊은 소금 상인들, 일찌감치 장 공주마마께서 키워 놓은 각급 관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강남로 정2품의 능 제독부터 소주성에서 성문을 지키는 병졸까지 다양합니다.”
범한이 무슨 놀이라도 하는 듯 웃으며 손가락을 꼽았다.
“황실 금고에 있는 각급 대행수, 거리에서 웃음을 파는 아낙네, 사당 앞에서 기예를 파는 노인. 모두 강남 사람으로 우리가 자신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싫어하지요.”
3 황자가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표독하게 말했다.
“공격을 하려면 하라지. 설마 내······ 스승님이 두려워하실까?”
“두렵지는 않지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행동은 법을 들이대어 추궁하거나 처단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정말로 강남에 소란을 불러일으킬 생각이라면 장사꾼들은 백성들의 원망을 확대하고 그들의 삶을 피폐해지게 만드는 방법을 찾을 테지요.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경도 조정에서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제 편을 들어 주기 위해 몇만 명에 이르는 강남 사람들의 목을 칠까요, 아니면 강남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제게 관직을 내려놓게 할까요?”
3 황자는 당황스러웠다. 부황의 성정을 생각하면 범한을 고생시키지 않는 방법을 취하겠지만 그래도 범한을 경도로 다시 데려갈 것이었다. 그런데 엄연히······ 3 황자인 자신의 스승님인데 그런 굴욕을 당해야 하다니 3 황자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해졌다.
범한은 황자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차렸다는 듯 하하하 웃었다.
“물론 그런 거창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마께서도 감찰원이 때로는 살인을 하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시종일관 부드럽게 대해 주시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저는 그냥 상황을 심각하게 가정해 봤을 뿐입니다.”
범한이 점점 장난기를 거두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정말로 위엄을 세우기 위해 살인을 해야 한다면 그 정도 악명은 감수할 생각입니다.”
3 황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로 많이 죽으면 어찌 되었든 수습하기 힘들잖아. 경도에 있는 도찰원도 난리를 칠 거고. 설마 부황께서 어사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죽이지는 않으시겠지? 부황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는 명군으로 남고 싶어 하시니까.’
이제 막 굴복시킨 하서비에게 죽이도록 하는 게 낫겠지.
3 황자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제 생각을 스승에게 말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겉으로만 온화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독하고 모진 스승은 3 황자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3 황자가 두 번 기침을 하고는 입을 뗐다
“그렇다면 수군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군 수비가 도적 떼 두목과 결탁했는데······ 이 일은 감찰원에서 어떻게 조사를 할 수 있답니까?”
범한이 고개를 숙여 소가죽 봉투를 바라보고는 건성건성 말했다.
“그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반응이 나오자 3 황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어찌 조사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까? 군대가 나라의 중요한 무기이듯 사호 지역 수군도 우리 조정의 중요한 병력이에요. 더군다나 명색이 강남 수군이란 곳에서 문제가 생겼는데도 조사하지 않으면 조정에서 어찌 처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경국은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불리는데 어찌 안정을 말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범한이 의외라는 듯 3 황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유치하고 명확하지도 않은 말이지만 이 아이가 이번 일에 진짜로 관심이 있다는 것만은 잘 드러나 있었다. 처음에는 황자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범한은 이내 이유를 알아챘다. 이제 보니 요 어린 도련님에게도 영웅의 기개가 있었던 것이다. 웃음이 터진 범한은 들고 있던 소가죽 봉투를 3 황자에게 건넸다.
“수군 문제는 그리 심각한 건은 아닙니다. 물론 도적 떼와 결탁한 수비는 당연히 재수 없는 일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그 일이 있은 후 수군의 제독 대인은 제게 해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범한이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큰 강에서의 일은 일종의 정찰이었습니다. 한데 수군의 군기는 나름 괜찮은 편이더군요.”
3 황자는 범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소가죽 봉투 안에 있던 것만 이리저리 넘겨 보았다. 한데 보면 볼수록 가슴이 벌렁거렸다. 전부 강남 수채가 요 몇 년 동안 각지 관원과 암암리에 접촉한 내용이었다. 장부도 있었다. 거래 증명서 위에 관원의 이름이 쓰여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정식으로 조사를 한다면 몇몇 정도는 밝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범한이 말했다.
“그건······ 투항장이라고 부릅니다. 하서비가 그 물건을 제게 넘겼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 관원들과 자신의 머리를 제게 넘긴 것이지요. 서로가 밑바닥을 드러냈으니 이제 안심할 일만 남은 거고요.”
3 황자가 고개를 홱 들며 못 믿겠다는 듯 말했다.
“하서비가 암춘(暗椿: 숨은 감시자) 일을 하게 되는 건가요?”
“마마께서는 매우 빨리 이해하시는군요. 역시 영명하십니다.”
범한이 상찬의 말을 해주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은 우리들이 잡아들여야 할 관원이고 지금은 때를 보는 중입니다.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고 조정과 반대편에 서려 한다면 당연히 그들을 잡아들여야겠지요. 한데 하서비 입장에서는 여전히 강남 수채의 주인으로 남아 있고 여전히 수군이며 각지 관원들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니 좋지 않습니까.”
조정과 반대편에 선다는 건 범한 입장에서는 곧 신양 쪽에 붙는 걸 의미했다.
3 황자가 범한을 바라보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정말 좋은 계획입니다.”
범한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개뼈다귀 같은 게 무슨 좋은 계획이라고요. 누구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답니다. 다만 감찰원처럼 많은 자원을 동원할 사람이 없을 뿐입니다. 하서비의 속사정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그자를 통제하지 못했을 테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도 손을 쓸 수 없었을 거고요.”
범한이 어쩌다 저속한 말까지 섞어 가며 말하자 3 황자는 흥이 올랐다.
“스승님은 이 시대를 풍미하는 시선이신데도 그런 저속한 말을 쓸 줄 아시는군요.”
범한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무슨 개뼈다귀 같은 시선이랍니까. 시선은 뒷간에 안 간답니까. 장묵한 대가께서도 첩을 둘씩이나 두셨지요. 이 세상에 겉과 속이 모두 수정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있답니까? 있다면 주변 사람을 얼려 죽이기나 하겠지요.”
3 황자가 키득키득 웃다가 돌연 장난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부황께서도 그런 저속한 말을 쓰십니까?”
범한은 순간 당황했다. 이 아이를 계속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기에게 거짓말을 해보라고 강요하는 상황이라 대판 욕을 날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농담처럼 받아치는 선에서 끝냈다.
“돌아가시면 귀빈 마마께 여쭤보시지요.”
한바탕 웃고 나니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갑자기 앞서 하서비가 했던 말이 떠오른 3 황자가 한껏 흥이 올라 말했다.
“스승님, 그 도적 떼 두목의 말로는 며칠 뒤에 서호 근처에서 무슨 대회가 열린다던데요. 강호 호걸의 등급을 매기는 대회로 쉬이 볼 수 없는 일이라던데 우리······ 가서 볼까요?”
“저속한 행동이십니다. 정말 저속한 행동입니다.”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고작 속인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입니다. 마마께서는 당당한 황자 신분이신데 어찌 그런 구경을 하려고 하십니까?”
“강호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3 황자가 이맛살을 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이 제자, 정말로 궁금합니다.”
3 황자가 눈을 반짝였다.
“스승님은 천하에 몇 없다는 9등급 고수 아닙니까. 변장하고 참가해 맹주 자리를 차지하시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요? 나중에 연극으로도 만들어져서 천하에 활약상도 널리 퍼질 테고······.”
“갈수록 더 저속한 말씀이시군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로 그리한다면 경도 쪽에는 어찌 말씀을 올려야 할까요. 제가 탄핵을 당할 소재가 차고 넘치게 되겠지요. 결국에는 황제 폐하께 어린 녀석이라 경솔한 짓을 하였다며 한 소리 듣겠지요. 다시 말해 마마를 가르치고 있는 입장에서 어찌 험지에 갈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마지막 말을 전했다.
“물론 감찰원에서 사람을 파견하기는 할 것입니다. 이미 4처에서 사람이 서호 주변에 가 있을 것이고요. 저는 소문무에게 가보라고 할 참입니다.”
범한에게 이미 계획이 서 있자 3 황자는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3 황자가 아무리 인내심이 강하고 교활한 성정을 지녔다 해도 어찌 되었든 아직은 아이였다. 그러니 말로만 듣던 무림 대회를 구경하러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매우 실망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마마께서는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3 황자를 배웅했다.
문을 나가기 직전 3 황자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문은 열지도 않고 뒤로 돌아서서 고개를 갸우뚱한 채 범한의 몸을 위아래로 흥미진진하게 훑었다.
“스승님, 왜 부황께서 저에게 스승님을 따라 함께 강남으로 가도록 한지 아십니까?”
범한은 놀라 금세 답을 하지 못했지만 잠시 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마마께서 어찌 생각하시든 황제 폐하께서는 각별한 마음으로 그리하신 것이겠지요.”
무섭고도 험악한 뜻이 담긴 불순한 말이었다.
3 황자의 앳된 얼굴이 순간 엄숙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께 감히 여쭙겠습니다. 둘째 형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러 날 안 보이던데 이 제자, 정말로 둘째 형이 보고 싶습니다.”
범사철에 대해 묻고 있음을 범한도 알고 있었다. 셋째 황자의 얼굴을 보니 기생집 작은 사장이 큰 사장을 그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에 범한은 진심으로 웃는 척하며 대답해 주었다.
“형부에서 이미 전국에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3 황자는 황제가 아니었으므로 범한으로서는 이러쿵저러쿵 많은 걸 말해 줄 필요가 없었다.
3 황자가 살짝 화가 나 범한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던지려 했다.
“줄곧 스승님께 여쭙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마마, 말씀해 보시지요.”
“그게······ 현공 사당에서 왜 나를 구해 주신 것입니까?”
363화
3 황자가 듣고 싶은 게 어떤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대감에 부푼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웃으며 곧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때 마마께서 위험해서지요. 그래서 제가 구했습니다.”
3 황자가 원한 건 이런 부실한 답변이 아니었다. 이에 조금 더 캐물었다.
“그때······ 부황께서 더 위험하셨는데요?”
그러자 범한이 더 묘한 답변을 해주었다.
“그때 마마께서 제게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
3 황자는 화가 났다. 화를 내며 나무문을 밀고 곧장 밖으로 나가며 생각했다.
‘저 허여멀건 밀가루 반죽 같은 놈이 하는 짓은 목석이라니까. 아주 대단한 척 이리저리 말이나 둘러대고 단번에 제대로 말해 주는 법이 없어요!’
천자의 가문에서 성장한 이승평은 어려서부터 모친의 가르침에 따라 늘 조심하며 살아왔다. 2 황자와도 사이좋게 지내면서 동궁과도 자주 어울리는, 형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동생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실제 담력과 성숙한 정도는 나이를 훨씬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부득이한 일을 겪고 난 후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현묘 사당에서 모두가 황제의 안위만 걱정하고 3 황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때 태자는 더욱 봐줄 수 없는 짓을 해서였다. 이 일로 3 황자는 천자 가문 사람은 무정하다는 말이 전혀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일 후 3 황자는 실망감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범한이 영웅처럼 자기 앞에 나타나 준 장면을 수시로 떠올렸다. 이 두 상황이 너무나도 비교가 되다 보니 3 황자는 명목상 ‘외사촌 형님’이자 실질적인 관계로서 ‘형님’인 범한을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범한은 문 앞에 서서 호위 무사를 따라 자기 침실로 들어가는 3 황자를 지켜보았다. 그런 후 문안으로 들어와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범한과 3 황자의 관계는 확실히 무언가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상대는 황자이고 자신은 신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와 스승 관계이기도 했으니.
또한 모두 다 알다시피 두 사람 다 한 아버지의 소생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총명해 누구 하나 먼저 그 사실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서로 간에 미묘한 탐색전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사사처럼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 * *
“도련님, 주무셔야지요.”
멍하니 정신이 나가 있던 범한은 언제든 쉽게 말을 걸어오는 여종 때문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 보니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온 사사가 진지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가만히 있으라고 했거늘.”
범한은 말하면서 두 발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 범한이 편안한 신음 소리를 냈다. 며칠 내내 이동하면서 일도 하고 또 정신적으로 조금 피곤해져서 그런지 이런 뜨거운 물로 하는 족욕이 간절하던 터였다.
범한 앞에 놓인 걸상에 사사가 큰 수건을 들고 앉아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
사사의 행동에 살짝 소름 돋은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왜 그러지?”
사사가 고개를 돌려 문을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황실 금고 조사고 뭐고 다 좋은데 이제 그 일은 그만 신경 쓰세요.”
사사는 범한에게 인정받은 몇 사람 중 하나라 그런지 범한의 신분을 믿고 있었다. 사사는 말을 직선적으로 하기는 했지만 머리는 정말로 잘 돌아갔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범한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타고나게 민감했다. 그래서 요 며칠 범한과 3 황자의 관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범한이 장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자 집안의 일이라 일개 여인으로서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한을 황실 사람이라고 보고 있지 않아서 더욱 걱정하고 있었다.
범한은 따뜻한 물에 담근 두 발을 휘휘 젓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사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후 그녀를 안심시켰다.
“염려 마요, 내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저 녀석을 사철이처럼 고생하지 않도록 할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강남행이 저 아이의 안목을 트여 줄 거란 기대는 있거든. 장래니 하는 건 일단 제쳐 두고 황자로서 나중에 태자를 보좌하며 나라를 통치하려면 배포를 더 키울 필요는 있어. 그래야 천하가 더 좋아질 테니까.”
사사가 피식 웃었다.
“우리 도련님은······ 아직까지도 천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군요.”
범한이 웃으며 사사를 꾸짖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설마 내가 못 할 것 같아서인가?”
“정말 그런 분 같아 보였어요.”
사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래서 오히려 조금 거짓 같아 보였어요. 도련님께서 아까 하 대인을 어찌 훈계하셨는지는 또 잊으셨나 봐요.”
“완전히 다른 일인데.”
범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남에게 잘한다고 해서 뭐든 부탁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또 백성은 자기 이익을 지키는 방법을 모르니 그런 일을 우리가 해주는 거지요.”
“그렇다면 왜 하셔야 하는데요?”
사사가 궁금해져서 질문을 던졌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녀는 도련님 입에서 인(仁)과 의(義)에 관한 말이 나오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왜냐면 원래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여인의 마음이니.
“뭘 그리 일일이 신경을 쓰지? 내일 강남로로 들어가니 얼른 잠이나 자둬. 물은 내가 알아서 버릴게.”
범한이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사가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는 여전히 범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사는 범한과 단둘이 있을 때면 종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대범하게 행동하는 편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이불 속에서 손을 넣어 무뢰한처럼 허벅다리를 두드리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왜 해야 하냐고? 당연히 백성을 긍휼히 여겨서는 아니고······ 나는 우리 어머님과 같은 포부는 없지만 천하가 태평성대를 이루고, 변경에서는 전쟁이 사라지고, 경국 내에서도 기근과 동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거든. 그리고 내가 부귀한 한량이 되려면 내 주변이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어야 해. 그래야 이 도련님이 서른 살에 퇴직해서 한가하게 복이나 누리며 살 수 있을 테고. 솔직히 말해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만년에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환경을 있는 힘껏 만드는 중이랄까.”
“도련님, 퇴직이 무슨 뜻입니까?”
“물러나는 거라고 해야 하나? 서른 살에 물러난다라. 재상도 못 해보고 끝내는 거기는 하지만 적어도 국공 정도는 되어야 담주로 돌아가 지낼 만하겠지?”
사사가 대경실색했다.
“이미 감찰원 제사이십니다. 나중에 진 대인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실 텐데······. 그러면 다시는 다른 자리로는 못 가십니다. 군대도 직접 지휘하실 수 없고요. 서른 살이 되셨을 때는 기껏해야 2등급 후작이신걸요.”
사사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서른에 담주로 내려가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게 뜻대로 될까요?”
우연히 털어놓은 진심에 여종이 더 펄쩍 뛰자 그녀의 반응이 의외였던 범한은 웃으며 대꾸했다.
“꼭 담주로 돌아가란 보장은 없지. 북제, 동이, 남월, 서만 그리고 바다 저쪽에 있는 나라들도 있고. 전부 다 가봐야겠군. 그래야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거니까 말이지. 초원에서 말 달리고 바다에서 배 타고 느긋하게 걸으며 찬찬히 살아 봅시다.”
“서쪽 오랑캐들은 사람을 먹는다고 하던데요.”
사사가 겁에 질려 말했다.
서만 이야기가 나오자 범한은 최근에 들어온 감찰원 정보가 생각났다. 하지만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집중했다. 범한은 앞서 자신이 한 말이 실현 가능성이 낮은 아름다운 이상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범한에게는 지금의 삶도 만족스러웠다. 그 일만 빼고 말이다.
사사가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했다.
“아직 12년이 남았네요. 도련님께서는 어떤 준비를 하고 계세요?”
“뭘 하고 있냐고?”
범한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물론 권력을 쥔 신하이니 위로는 황제 폐하와 조정에 충성하고 있고 아래로는 관리들을 감찰하고 있지.”
사사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한참 후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은······ 청렴한 관리가 아니시잖습니까.”
범한과 가장 가깝고도 친한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절대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사사 정도 되니 비교적 완곡하게 말해 줬을 터. 도련님에게 다른 사람이나 괴롭히는 큰 탐관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자 범한이 자신은 무고하다는 듯 반응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리 집 어르신과 내 장인어른을 두고 경국의 2대 최고 탐관이라고 하니까. 집안에서 보고 배운 가락이 있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러자 사사가 진지하게 반박했다.
“그렇다 해도 도련님께서는 분명 탐관은 아니십니다.”
범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두 손에 힘을 주어 경직된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어떤 때는 너무 오랫동안 연기를 해서 그런지 어떤 게 진짜 나인지 모르겠다니까. 음, 이렇게 말하니 꼭 소자산가 같긴 하군. 이 도련님께 소자산가가 뭔지 묻지 말고 그냥 이대로 잠이나 자자!”
* * *
객잔의 등불이 모두 꺼지고 이불은 계속 들썩이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사사를 재워 놓고 범한은 침대에서 기어 나와 여유롭게 상의를 걸쳤다. 그리고 잔에 있는 식은 차를 배 속으로 들이붓고는 화기를 가라앉혔다. 등불도 켜지 않은 채 자신의 좋은 시력에만 의지해 어둠 속에서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여니 하늘을 가득 메운 달빛이 찬 바람과 함께 선창으로 들어왔다. 선창 맞은편은 사호였다. 바람이 가볍게 살랑대는 가운데 호숫가의 말라붙은 긴 풀들이 기이하게 하늘거리고 있었다. 호수 가운데에는 환영인 듯 아닌 듯 둥그런 달이 떠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객잔 아래쪽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범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혀 놀란 기색 없이 객잔 밖에 있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의 두 발은 공중에 떠 있었다. 그것은 공중에 걸린 가로대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자로, 이것만으로도 무공의 경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자가 떨어져 죽을 가능성은 세숫대야에 코를 박고 죽을 만큼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방에 여인이 있는 걸 아시면 좀 피해 주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도 의외의 사고일 뿐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의외의 사고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단조롭게 한마디 하더니 자기가 하려던 말을 이어 갔다.
“운지란이 항주에 온다고 해서 대인께 알리러 왔습니다.”
범한은 조금 놀랐지만 계속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집중하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전에도 그 늙은 분 곁에 항상 붙어 있었는데······ 잠을 안 주무시는 것입니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았다.
“그 흰 도포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게 당신의 진짜 모습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정말 멋졌거든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리 범한의 부하라 하더라도 조금 전의 무료하고 유치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지위와 실력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내 가장 큰 궁금증은 이겁니다. 늘 신비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행동해 황제 폐하께서도 당신의 존재를 모르시는데······ 어떻게 6처를 이끄시는 겁니까? 당신이 6처의 진짜 수장이라면 그 사람은 그냥 대리인이란 거잖아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공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경국에서 가장 뛰어난 자객이자 경국 검수들의 대장인 그림자 동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을 조금 더 많이 해주실 수 없습니까? 내 곁에 있는 그분을 숭배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당신과 그분은 다릅니다. 그러니 조정 관료로서 자신의 신분부터 명확히 하시지요. 경도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게 딱 세 번 대꾸하셨거든요. 기분 나쁩니다. 계속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대답을 들을 기회도 안 주시니까요.”
그림자 앞에 있으니 범한은 갈수록 수다쟁이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림자가 머뭇거리다가 잠시 후 입을 뗐다.
“대인, 질문하시지요.”
범한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묻고 싶었던 게 말입니다, 나를 칼로 찌르셨잖아요. 어떻게 갚으실 생각입니까?”
364화
그림자가 범한에게 무엇을 허락했는지 모르겠지만 범한은 그 ‘의외’의 사건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고는 다음 날 한껏 기분이 들뜬 채로 사주성에서 떠났다.
그날따라 갑자기 겨울비가 내려 쌀쌀하고 처량한 느낌이 가득했다. 그런데 강남에서 잠행 중인 범한 제사 일행은 사주성 밖에 위치한 크지도 높지도 않은 구릉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누군가가 조화라도 부린 것처럼 말이다.
그날 밤, 비옷을 입은 관원들이 어둠을 틈타 사호로 들어갔다. 사호에 있는 강남 수군의 나루에는 경도에서 온 큰 선박이 정박해 있었고 선박은 경계가 삼엄했다. 그래서 수군에서 접대 업무를 책임지는 고위 장군들도 비옷을 입은 관원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선박에 남아 모든 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소문무가 비에 젖어 배에 오른 동료들을 바라보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왔는가? 대인은 어찌하고 계시는가? 계년조에서는 몇 명 남겨 둬야겠지?”
그러자 한 관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인께서 이왕 연기하는 거 제대로 하라 하셨습니다. 계년조는 모두 선박 위에 남아 있으라 하셔서 저희 모두 얼굴을 가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수군 쪽 사람들은 대인께서 선박에 계신 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몇 명은 속일 수 있겠지요.”
소문무가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대인께서 장난을 치시는 건가? 벌써 사주에서 종적을 드러내셨는데 왜 숨기시려 하는지······.”
소문무가 저속한 말을 내뱉으려다가 삼켰다. 대신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러지. 내일 곧장 떠나 서둘러 강남로로 들어가세.”
“3월 초사흘입니다.”
조금 전 말을 꺼냈던 계년조 일원이 엄숙하게 말을 이어 갔다.
“3월 초사흘에 배가 소주에 도착해야 합니다. 대인께서 날짜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소문무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대체 어떤 배로 가야 그리 늦게 도착할 수 있는 건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휘 내젓고는 화를 냈다.
“어떻게 운행할지는 관여하지 않겠네만 사호에서는 더 이상 못 있네. 내일 어떻게든 떠날 것이야.”
그러자 아까 말했던 관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인, 왜 그러십니까?”
소문무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강남 수군의 병영으로 들어왔는데······ 제사 대인과 3 황자마마께서 배에서 내리지 않고 계시는 거네. 수군에 있는 장군들이 미심쩍어하지 않겠는가? 이틀 동안 수비며 통령이며 여럿이 찾아왔었네. 모두 핑계를 대고 배 위로 올라오려 하더군. 두 귀인께 아첨하러 왔다는 게 빤히 보였네. 한데 대인께서는 배에 안 계시니 내 어찌 그들을 배 위로 올라오게 할 수 있겠는가?”
소문무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틀 동안 배에 올라오려는 사람들을 막느라 울화통이 터지려던 차였다.
“저 정도 등급의 관원은 내 선에서 막을 수 있어. 한데 수군의 제독 대인께서 내일 오후에 오신다는 말을 들었네. 그분은 1품의 최고위급 관원이야. 제사 대인께서 계신다면 얌전히 예를 다해 맞이해야 하는 분이란 말일세. 3 황자마마께서도 거들먹거리기 힘든 상대인데 내 힘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소문무와 대화를 하던 관원도 깜짝 놀랐다. 수군 제독이란 신분은 저들 조무래기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 대인께서 여기로 왕림하시면 지금 하고 있는 거짓말도 들통날 게 뻔했다. 제독 대인이 범한 제사와 3 황자마마 때문에 기분이 상한다면 비밀 상주문을 올려 황제 폐하께 자신이 농락당해 화났다고 알리는 선에서 끝날 일이었다. 한데 문제는 그사이 자신들이 화풀이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가시지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나세요!”
배에 남아 있던 계년조는 즉각적으로 공감대를 이루었다. 이에 곧장 아래에 있는 수군 교관들에게 배가 떠날 수 있도록 채비해 달라 요청하는 동시에 배에 남아 있는 호위들과 6처 검수들에게도 관련 사실을 알렸다.
“대인께서 말씀하시길 항주의 그것은 다른 사람을 보낸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소문무 대장께서는 가실 필요 없습니다.”
말을 마친 관원이 소문무를 바라보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요 이틀 동안······ 수군에서 적지 않은 선물이 온 것 같은데요.”
소문무가 뒤쪽을 향해 입을 삐죽댔다.
“모두 뒤쪽에 놔두었네. 장병들을 지휘하는 이들이 돈이 참 많더군. 역시 도적 떼의 뒤를 봐주는 능력자들다워.”
순간 관원의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까 3월 초사흘까지 어떻게 시간을 끌 수 있겠냐며 걱정하셨죠? 제게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그러더니 소문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은 생각이군! 제사 대인께서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실 걸세. 우리는 조정 관리의 은전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그 어르신을 대신해 은전을 거두면 문제 될 게 없지.”
기뻐하던 소문무는 돌연 그 일이 생각나 부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맞아. 뒷방에 있는 그 은전 상자를 잘 지켜보게. 제사 대인께서 이후로는 그 누구도 그 상자를 건들지 못하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네.”
관원은 그러겠노라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구시렁거렸다.
‘상자 안에 몇만 냥에 달하는 거액의 은전이 있다고는 해도 제사 대인 댁에는 넘쳐나게 있는 게 돈 아닌가. 그런데도 저걸 가보 지키듯 지킬 필요가 있는 거야?’
다음 날 이른 아침. 사호의 안개가 걷히자 8할은 새것인 경도 대형 선박이 수군 고위 장군들의 떠나보내기 아쉽다는 눈빛의 배웅을 받으며 서서히 나루터에서 떠났다. 선박은 수도를 따라 사호를 빠져나가서는 느긋하고 경쾌하게 큰 강 수역으로 진입했다.
호위를 맡은 수군 선박 세 척이 그 뒤를 따랐다. 강기슭에서 배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던 강남 수군 장수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껄끄럽고 마주치기도 싫은 호환 마마 같은 어르신이 드디어 떠나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요 며칠 올려 보낸 선물이 생각나 헛돈을 쓴 것 같아 속이 쓰라렸다.
황자와 제사가 타고 있는 큰 선박이 수군 방위 구역에서 도적을 만났으니 이 일과 관련해서는 속죄양이 필요했다. 이에 고위 장군들은 일제히 심 수비에게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직접 나서서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후에 제독 대인이 병영으로 돌아온 후에나 언급할 생각이었다.
사실 소문무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강남 수군의 고위 장군들도 다음 날까지 제독 대인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강남 수군 제독인 시 대인은 강남에서 군사력을 쥐고 있는 자들 가운데 굴지의 권력자였다. 그러니 그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마음이 급하긴 했으나 너무 빨리 나타나지 않으려 했다.
시 제독은 1품의 관료였다. 뿐만 아니라 경도 추밀원 진씨 가문의 문하생으로 옛날부터 그들과 교류하던 사이였다. 이에 범씨 가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 악질 고참병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이 당장 병영으로 달려가 범한과 만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뻔했다. 분명 3 황자와 건달 같은 놈을 향해 몸을 굽신거리며 무언가 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시 제독 입장에서는 아직 제대로 수염도 나지 않은 녀석과 아직 솜털도 벗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아첨을 떤 것이니 늙은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시 제독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공무를 본 후 바로 말을 달려 3 황자께 인사를 올리러 가는 중이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래 놓고 실제로는 제일 아끼는 기생을 품에 안고 마차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수군 병영으로 향했다. 수군 병영이 왜 이다지도 가까운 곳에 있는지 한탄하며 말이다.
늦게 도착하려는 시 제독의 노력은 결국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가 도착했을 때 3 황자가 타고 있던 배는 이미 멀리 가 있는 상태였다.
한편 소문무는 의기양양하게 선박을 몰며 뱃길을 따라 강남 쪽으로 향했다. 그는 범한 제사의 지시를 지킨 것은 물론이고 수하 관원의 건의도 받아들여 이행했다. 길목에 고을과 나루터가 나오면 곧장 정박했다. 아무리 허름한 나루터라 할지라도, 그 고을이 거주민 수가 몇천밖에 안 되는 작은 현일지라도 무조건 배를 정박하고 쉬었다. 그는 이렇게 매일 1박씩 해가며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이는 매우 이상한 운행 방식이었다. 이에 강남로에 위치한 관아 일대에서는 혼란이 일었다.
그 결과, 감찰원 범한 제사와 3 황자가 그 선박에 있을 수 있다는 소식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선박이 정박하는 지역의 관원들은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야만 했다. 정성껏 주연도 준비해야 했다. 물론 선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그 누구도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위쪽 고을에서 비취옥을 준비했다고 하니 아래쪽 고을에서는 비교되는 선물을 준비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묘안석(猫眼石) 정도는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사정이 궁핍한 고을에서는 산삼 몇 뿌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돈이 없는 고을에서는 솔잎과 편백나무로 훈제한 고기 몇 덩어리를 내놓았다. 선박에 계신 두 귀인께서 산해진미에만 입맛이 길들어 있을 수 있으니 분명 자신들이 준비한 지역 특산물을 좋아할 거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지역 특산물이 없다면? 관아에서는 서둘러 공인을 파견해 대인들을 위해 대신 배를 끌어다 놓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 달여 동안 강 연안에 있는 관원들은 저 높은 곳에 계신 두 분을 뵙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선박은 계속 남쪽으로 향하다 고을을 만나면 쉬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작은 고을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강남 관원들은 선물을 올릴 귀한 기회가 찾아왔다며 겉으로는 매우 기뻐하는 한편 속으로는 욕을 해댔다. 범한 제사와 3 황자가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는다고,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고을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고 말이다.
“모르겠나? 모기가 아무리 작아도 고깃덩어리 아닌가.”
소주성 내 모 가문의 고문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이란 대인을 보니 상서 대인의 풍격을 빼다 박았군. 계산이 너무 정확해!”
다른 고문이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관리는 명성을 중시해야 해! 명성 말이지! 요즘 젊은 귀인들은 체면 생각도 않는다니까!”
“닥치시오! 이 일이 감히 의론을 할 여지가 있는 것인가? 감찰원에게 능지처참당하기 전에 본관이 자네 목을 비틀어 줄 것이야!”
정중앙에 앉아 있는 엄숙한 표정의 높은 관원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런 후 마음을 가다듬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뒷말 같은 건 하지들 말게. 은전을 받아 주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강남 지역은 없는 것 천진데 은전은 넘쳐나니 말일세.”
관원이 눈을 감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우려하는 기색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 제사 대인이 연막을 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그분이 배에 계신지 아닌지 어찌 알겠느냔 말이네. 남쪽으로 내려가는 그 선생 말로는 범한 대인의 마차 행렬이 담주로 향하고 있다더군. 게다가 가는 길목에서 은전도 적지 않게 받고 있다고 했어.”
지금 전국의 도로란 도로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이끌고 이동 중인 행렬은 바로 ‘가짜 범한’ 일행이었다. 종, 호위 무사, 거기에 경여당 대행수들까지 데리고 담주로 가는 중이었다.
큰 강에서 소문무는 즐겁게 금칠을 하며 여행하는 중이었다. 훗날 범한에게 피떡이 되도록 제대로 얻어터질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완전히 다른 소식들이 날아들자 강남 관원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체 어느 쪽에 있는 게 진짜 범한 제사인 건지. 일부 똘똘한 사람은 범한이 다른 길로 가고 있을 거란 추측을 내놓기는 했지만 그들로서도 확인할 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모두 감찰원 2처 사람들이 범한 일행의 행적을 엄호하고 있어서였다.
365화
2월 초의 날씨는 봄이 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겨울이 물러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강한 한기가 큰 강 양쪽 강기슭의 들과 밭을 모두 점령하고 봄이 오는 걸 막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강남 일대는 바다와 인접해 다른 지역보다 조금 따뜻한 편이어서 그런지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도로 위로 울퉁불퉁하게 들떠 있는 진흙은 겨울바람을 맞아 수개월째 딱딱하게 굳은 터라 그 위를 굴러가는 마차는 위아래로 덜컹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말도 못 하게 고생하고 있었다.
범한은 참지 못하겠는지 창문 가림막을 열고 마차 행렬에게 정지 명령을 내렸다. 마차에서 내려 말에 올라탄 후에야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허리를 쭉 펴며 코를 덮쳐 오는 살짝 싸늘한 바람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도로 양측에 있는 도랑을 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관개를 위한 도랑인데 물도 없이 말라 있었다. 겨울이라 물이 마른 거면 오히려 괜찮았다. 문제는 도랑에 사람 키만큼 자란 말라 있는 풀이었다. 도랑을 막고 무성하게 자라 황폐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몇 년 동안 관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며 답답해했다. 발에 힘을 주고 몸을 세워 높은 곳에서 바라보자 찬 기운이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도로 주변에 있는 도랑은 전부 그러했다. 도랑에서 자란 키 큰 풀들은 이미 얼어 죽어 있었지만 여전히 하늘을 찌를 기세로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런 도랑에서 어떻게 관개를 할 수 있는 거지? 봄이 되어 씨를 뿌릴 때가 되면 또 어떡하고.
북제에서 돌아오는 길에 본 경국의 관개 시설은 그래도 완벽하게 정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강남 지역은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데 어찌하여 도랑을 수리할 돈도 없는 걸까? 설마 저 땅을 농사도 짓지 않고 그냥 놀리는 건 아니겠지?
경도에서부터 범한을 따라온 감찰원 4처 관원이 범한 제사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말을 몰고 다가와 설명을 해주었다.
“이곳은 황폐한 곳이고 소주와 항주 쪽은 이렇지 않습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강남에서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여기 땅이 메마른 건 황실 금고가 너무 많은 노동력을 가져가서네.”
범한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두어 번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짓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모두 아무 말 없이 풀이 빡빡하게 난 도랑을 따라 걸었다. 사주에서 벗어난 지 여러 날. 천천히 덜컹거리며 오기는 했어도 항주가 어느새 코앞이었다. 일행은 모두 피로에 지친 상태였고 범한도 미복으로 감찰을 하고 다닐 생각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뒤쪽에 있는 마차들, 더 바짝 따라와!”
4처 관원의 이름은 오명맥이었다. 소문무가 배에 남자 그가 범한 일행의 마차 전열을 가다듬고 후방 지원을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제사 대인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이자 오명맥은 더 말하기가 뻘쭘해 뒤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바짝 쫓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마차들에는 고수 여럿이 타고 있었다. 문제는 6처 검수와 호위 무사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 개개인은 노련한 암살자여서 도랑 풀숲으로 들어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항주까지 따라오라고 했다면 별문제 없이 따라오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그런 그들에게 공짜 여행이나 하라고 하자 모두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주성 밖 70여 리 떨어진 곳에서는 원래 얼마 안 되던 범한 일행의 수가 늘어나는 일이 있었다. 산자락 아래에서 종으로 거둬 달라는 소녀 다섯을 사들인 것이었다. 이에 이동 속도가 느려진 이들의 모습은 흡사 여행을 다니는 부잣집 마차 행렬처럼 보였다.
여종을 사들인 일은 범한으로서는 너무나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경국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반면에 강남 지역에서는 기아에 허덕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자녀들을 팔고 있어서였다. 이 불쌍한 이들은 강북에서 흘러든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범한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한편 범한 일행은 아무도 모르게 항주로 잠입해야 했다. 이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뭐한 것도 있고 범한이 원래 냉혈한인 이유도 있어 그냥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참다못한 3 황자가 한마디 해 사사가 기꺼운 마음으로 은전 십여 냥을 지불하고 여자아이 다섯을 사들였다. 그러자 아이들의 부모들은 울먹이며 천 번 만 번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고 그곳에서 떠났다. 결과적으로는 범한이 아이들을 사들이는 걸 눈감아 준 것이었다.
한편 범한은 자신을 다독였다.
‘우리 일행은 누가 봐도 너무 튀어. 잘생긴 귀공자, 가난뱅이 서생, 딱 봐도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 한껏 기가 살아 있는 부잣집 여종, 십여 명의 호위 무사들까지. 내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누군지 금세 알아차리겠지. 이런 와중에 소녀들이 합세했으니 이 정도면 위장한 효과가 나는 거잖아.’
그 후로 또 수일이 지났다. 그러자 거울 면처럼 평평한 도로가 나타났다. 아직 겨울이라 도로 양쪽으로 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가 유난히 곧게 뻗어 있었고,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번화한 풍경이 갑자기 범한 일행 앞에 나타났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화려한 색상의 의상을 입은 행인들, 저 멀리 어슴푸레 푸른 성벽이 보이자 범한 일행은 그제야 자신들이 항주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말을 타고 있던 범한이 채찍을 휘두르며 기세 좋게 말했다.
“입성한다. 그리고 송씨 아주머니를 찾아간다!”
송씨 아주머니? 모두 ‘제사 대인이 어떻게 항주성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놀라워했다. 물론 감찰원 관원들은 남녀 문제에 있어 범한은 경도에서도 보기 드물게 깨끗한 관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극히 적은 것으로 명성이 나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자신들이 무언가 오해를 했겠거니 했다.
물론 그들이 오해한 게 맞았다. 범한은 이곳 항주성이 전생의 항주성과 같을까 하는 생각에 이곳에도 그 유명한 ‘송씨 아주머니의 생선탕(宋嫂魚羹)’을 팔고 있을지 궁금했던 것뿐이다. 이곳 서호(西湖)에는 소제백제(蘇堤白堤)라고 불리는 유명한 제방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미인 서시를 배출한 고을 항주와 이름이 같은 곳이니 여기에서 나긋나긋한 강남 미인을 보지 말란 법도 없었다.
세상을 주유하다 드디어 문인들이 흠모하는 강남에 도착하자 범한은 살짝 흥분했다. 이에 두 발을 굴러 재빨리 말을 몰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항주 입성은 간단했다. 범한 일행은 일찌감치 관련 통행증과 문서를 준비해 둔 터였다. 신분은 오주 사람으로 항주를 거처 남쪽으로 가는 대가족의 선발대로 되어 있었다. 통행증 문서 위에 찍힌 인장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사람은 없었다. 감찰원이 업무 편의상 사용 중인 고도의 위조 기술은 각지 관아 관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정도로 정교했기 때문이다.
성문 아래로 쭉 뻗은 길을 따라 범한 일행은 유쾌하게 성안으로 들어갔다. 마차에 타고 있던 범한이 창문 가림막을 살짝 열어 항주성 내부 경치를 살폈다. 항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거리에는 양쪽으로 점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성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술집도 있었다. 다만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손님을 유혹하는 향기를 풍기고 있지는 않았다. 항주 백성들의 차림새와 거리 모습만 봐도 강남 지역이 부유한 곳이란 이야기는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다.
한참을 더 가자 마차 행렬 앞에 길게 늘어선 버드나무가 나왔다. 막바지 겨울이고 아직 추울 때여서 버드나무 가지는 파란 잎으로 단장하기보다는 채찍처럼 무기력하게 축 늘어진 채로 손님을 맞아 주었다. 하지만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어서인지 범한 일행에게는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범한은 눈이 예리한 터라 겹겹이 늘어진 버드나무 주렴 사이로 가려져 있던 수면을 발견했다.
맑고 온유한 수면에는 잔물결도 찾아볼 수 없어 겨울 끝자락인데도 맑고 고결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손님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는 냉기보다는 따스함만 풍기는 드넓은 호수였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산은 안개 속에 숨어 수려한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흑회색의 목조 건축물이 호숫가를 따라 드문드문 들어서 있어 부귀하면서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멋이 있었다.
이 호수가 바로 서호였다. 그리고 오늘따라 서호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 * *
‘호숫가에서 말을 몰고,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푸른 매실 나무에게 선물로 주련다.’
이는 범한이 전생에 초등학교 때 쓴 시였다. 당시 그는 항주를 향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그래서 서호는 왜 그리 아름다운 것이며 서호와 관련해 유명인이 왜 그리 많은지 늘 궁금했다.
가입했던 동아리에 항주에서 이사 온 친구가 있어 언젠가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적 있었다. 그러자 친구는 서호가 실은 그저 그렇다고 대답했었다. 당시 범신으로 불렸던 범한은 친구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항주에 가 서호를 볼 기회는 결국 갖지 못했다. 그 후 병을 앓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때 항주의 집값이 너무 비싸서였다.
서호 근처에는 ‘건물 위 건물’이란 뜻의 ‘루상루(樓上樓)’라는 항주성에서 가장 비싼 식당이 있었다. 건물 밖에서는 푸른 깃발이 바람이 나부끼고 곳곳에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푸른색으로 넓게 펼쳐진 곳은 글재주를 겨루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식당 내부에는 청목(靑木)으로 만든 탁자, 푸른 옷을 입은 일꾼들, 노래를 하는 젊고 파릇파릇한 예기(藝妓: 기예만 파는 기녀) 등등으로 꾸며져 있어 통일감이 훌륭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범한 일행이 도착한 때는 아직 겨울이었다. 이에 푸른 깃발은 얼어서 빳빳했고 청목은 누렇게 떠 있었으며 푸른색으로 넓게 펼쳐진 곳에서는 속인들이 싸우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젊은 예기가 노래를 부르고 있기는 했지만 속이 비치는 얇은 사를 입고 있어 이곳이 원래 추구하는 분위기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범한은 난간 근처에 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후 난간 밖에 바람막이용으로 드리워진 대나무 발 사이로 서호를 바라보고 있다가 살짝 실망하고 말았다. 송씨 아주머니 물고기탕은 당연히 없겠거니 했지만 동파육처럼 삼겹살을 쪄서 만든 요리도 없고, 규화계(叫化鷄) 같은 통닭 튀김도 없고, 전생의 서호에서 유명한 순채탕(蒓菜湯) 같은 요리도 없어서였다. 다행히 용정하인(龍井蝦仁) 같은 새우 살 요리는 있었다. 만약 이것마저 없었다면 범한은 답답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당장 이곳에서 나갔을 것이다.
전생에 유명했던 뇌봉탑도, 단교도 없는 곳이지만 범한에게 서호는······ 여전히 범신의 마음속에 있던 서호이기 때문일까. 그는 손가락 세 개 굵기의 작은 술잔을 들어 호록 소리를 내어 단번에 들이켜는 것으로 무언의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한 건 범한이었다. 경도 음식과 달리 항주의 향토 음식은 담백하면서도 깔끔해 경국에서도 알아주는 맛이었다.
칸막이가 쳐져 만들어진 방에는 탁자가 모두 세 개 있었다. 문을 지키는 호위 무사 두 명을 빼고는 주인이고 종이고 할 것 없이 귀천을 따지지 않고 범한의 명령에 따라 자리에 앉아 모두 군말 없이 음식을 먹었다.
톡톡, 소리가 났다. 침을 흘려서인지 아니면 국물을 탁자 위에 떨어뜨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만으로도 이곳의 음식 솜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장거리를 여행하느라 허기진 이유도 있겠지만 이 식당의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한 무리의 사람이 말도 하지 않고 사나운 기세로 음식을 흡입하고 있다 보니 조금 살벌해 보이기도 했다. 한편 문 앞에 있는 호위 무사 둘은 침만 삼키는 가운데 범한은 홀로 한가로이 술잔을 들고 난간에 기대어 경치를 감상했다.
난간 밖에 드리워진 대나무 발을 살짝 들자 안으로 밝은 햇살이 들어왔다. 겨울 호숫가의 물 빛이 눈에 반사되는 가운데 바람까지 실내로 따라 들어와 내부에 떠다니는 음식 향을 흩뜨려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식당 밖 호숫가에 위치한 넓게 깔린 청석판(靑石板: 푸른색 돌을 자재로 깔아서 만든 바닥) 위에서 하늘이 울릴 정도의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366화
박수 소리도 바람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건물 내부에서 난간에 기대서 있던 손님들도 모두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해 식당 안은 순식간에 사람들 소리로 웅성댔다.
하지만 범한이 있는 칸막이 방만은 유난히 조용했다. 범한은 난간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며 다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그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범한의 부하들은 무수히 쏟아지는 갈채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건물 아래에서 진행 중인 무공 대결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아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간으로 몰려가 구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식탁 위 맛난 음식들을 상대했다.
범한이 부하들을 쓱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강호의 협객들이 자신들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고 여기겠지. 그 정도 자긍심은 갖고 있을 거야. 그래도 다 똑같이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이잖아. 한두 초식 정도는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건가?’
사실 범한은 이해가 안 되었다. 강남 무림 대회가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는데도 호위들과 6처 검수들에게는 식탁에 차려진 맛난 음식에 집중했다. 각대 문파에도 고수는 있었지만 살인과 연계시켰을 때 그다지 볼만한 게 아니어서 그런 걸까. 어찌 되었든 호위 무사와 검수는 살인에 특화된 사람이니까 말이다.
사사와 얼마 전 들인 여종들은 밖에서 벌어지는 살기 가득한 치고받는 장면이 무서워 가만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 황자는 이번에 항주에서 열리는 무림 대회를 보기 위해 뒤에서 무척 애썼던 터다. 그러니 수없이 많은 방법을 동원한 끝에 범한에게 허락을 얻어 낸 것이니 지금 이 순간을 절대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드렁허리라는 생선으로 만든 요리 한 접시를 들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입에 밀어 넣으며 밖에서 두 사람이 대결 중인 장면을 무척 재밌게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이 3 황자를 잠시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마, 그리도 맛있습니까?”
구경에 방해가 되는지 3 황자가 짜증을 내며 범한에게 눈을 흘겼다.
“황궁에서는 허락이 안 되는 거거든요.”
범한은 순간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해 당황했지만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다. 우선 황궁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규율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드렁허리는 북방에서는 보기 힘든 물고기라 사시사철 공급되지 않는 데다 생긴 것마저 너무 못생겨서 어선방에서는 요리 재료로 잘 취급하지 않았다.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3 황자의 눈빛이 머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위해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검을 뻗은 저자는 강남 용호산 문파의 계승자입니다. 저자의 움직임을 보니 적어도 7등급 고수는 되는군요. 한데 안타깝게도 완력이 조금 부족합니다. 듣자 하니 저자의 사부는 과거 서생이었다더군요. 그래서 기본기를 제대로 닦지 못해 그게 제자들에게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함께 겨루고 있는 사람은 비교적 유명한 자입니다. 성은 려, 이름은 사사이죠. 절 보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여인입니다. 그녀는 동이성 운지란의 제자이니 사고검에게는 손제자입니다. 명문 문파 출신이니 당연히 뛰어날 수밖에요. 제가 보기에 용호산 문파 검객은 잠시 후 몇 군데 찔릴 것입니다.”
“스승님이······ 운지란이라고요?”
3 황자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려다 말고 물었다. 들어 본 이름이었다. 운지란은 동이성 사고검의 수제자로 이미 9등급의 실력자였다. 세상에는 일대(一大) 검법 대사로 알려져 있다. 작년 동이성 사절단이 경국을 방문했을 때 수장 역을 맡았었다.
“소문으로는 운지란도 강남 출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제자를 보낸 건 격려하려는 것 말고도 다른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말을 이어 갔다.
“아마도 명씨 가문과 관련이 있겠군요.”
동이성과 장 공주는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범한과의 관계는 줄곧 좋지 않았다. 양자 간에 직접적인 접촉은 그다지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맞붙은 건 여러 차례. 하지만 단 한 차례의 교전으로 범한과 동이성 측은 거의 해결이 불가능한 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다.
범한이 외양간 거리에서 운지란의 여제자를 죽인 것 때문이었다.
비개가 체면 불고하고 직접 동이성까지 찾아가 과거 사고검의 병을 치료해 준 것을 이유로 사고검 문파에서 범한을 찾아와 공격하지 않기로 약조를 맺었기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원한은 갚고야 마는 동이성 사람들의 충동적 성격에라도 범한은 2년 동안 편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사고검이란 괴물은 경국 황제 정도는 암살해 버릴 미친놈인데 말이다.
넓게 펼쳐진 청석판 위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호수를 마주한 곳에 커다랗게 대죽붕(大竹棚, 竹棚: 대나무로 지은 건조물)이 지어져 있었다. 그 안쪽에는 연배 높은 명망 있는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중간에는 강남로의 관원이 앉아 있었다. 강남 수채의 하서비는 맨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이가 젊어 강남 무림계에서는 아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오늘 상석인 주석 자리에 앉은 이는 감찰원 4처의 이름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관원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가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강남 무림 대회가 열린 지 반나절이 지났을 때다. 청석판 위에서 이미 여러 쌍이 주먹과 검으로 무공을 겨룬 터라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다행히 공격이 오가는 와중에 죽은 사람은 나오지는 않았으며, 조정 관원이 살펴보는 가운데 진행된 터라 강호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무림 대회는 성공적인 단결의 장이었다. 모든 강호 사람들에게는 명예로운 자리였고,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 얼굴을 알릴 기회였으며 또 어떤 이에게는 제대로 된 무공 대결을 펼칠 수 있는 경험의 장이었다.
범한은 차분하게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가 전생에 읽었던 소설 속 한 구절이 생각났다.
‘강호가 강산의 한구석이라고 했던가? 저기 넓게 펼쳐져 있는 청석판 위가 강호라면 아무래도 강산의 한구석은 아닌 것 같아. 오히려 강산의 화려한 가장자리라면 모를까.’
하지만 범한의 얼굴에는 어느새 옅게 우려가 드리워져 있었다. 반나절을 지켜보는 동안 강호 고수들은 비장의 수단을 드러내지도, 목숨을 걸고 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진정한 강자는 있었다. 마지막에 나온 와룡산 문파 검객은 동이성 문파를 맞아 싸웠는데도 전혀 열세에 몰리지 않았다. 그러니 마지막에는 아무래도 사고검의 명성을 생각해 반 발짝 물러서 준 것만 같았다.
강남 무림 대회에서 진짜 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참가한 사람들에게서는 속된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들 뒤에 하나같이 명문 귀족이나 관아 인사들이 있어서였다. 만약 누군가가 이들의 역량을 한데 모은다면 범한도 골치가 아플 것이다. 어쩐지 조정에서 이 대회를 상당히 엄격하게 관리한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민간의 무력을 일관되게 억누르되 동시에 그들을 조정에 흡수시켜야 할 필요성을 이미 알고 계셨던 거다.
그제야 범한은 자신이 부주의했음을 깨달았다. 하서비 말이 맞았다. 재야에도 진짜 호걸은 있었다. 다만 경국 황제가 20년 동안 무력으로 강하게 억누른 터라 저들에게 능력을 펼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운지란은 어디 있습니까?”
3 황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운지란을 찾고 있었다.
범한은 정신을 놓고 있느라 바로 대답을 해주지 못했는데 3 황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신분이 다릅니다. 물론 죽붕 안쪽에서 저 늙은이들이며 조정 관원과 함께 앉아 있는 게 성가셨겠지요. 그러니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과거 황궁에서 운지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범한을 몇 차례 찌른 적 있었다. 한데 범한은 낯짝이 두껍고 뱃속이 검은지라 상대방이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 운지란이 그러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범한의 눈빛이 사방팔방으로 운지란을 찾고 있었다. 한데 검술 대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범한은 은근슬쩍 걱정되었다. 자신의 안위 때문이 아니라 그림자 자객이 범한의 허락 없이 자의적으로 손을 쓸까 봐 우려되어서였다.
그림자와 사고검 간의 은원에 대해 진평평이 말해 줬었다. 그림자에게는 뼛속 깊이 새겨진 원한이라 공무 수행을 이유로 억누르려 해도 억제되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운지란은 변장하고 강남으로 올 때 공식적인 도로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림자에게는 그를 죽이기 위한 최적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오늘 서호에는 고수들과 나이 든 관원들이 모여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9등급 고수 간 싸움이 인다면 구경꾼들은 눈 호강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난간 옆에서 이것저것 따져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운지란이 항주까지 온 이유는 이 별것도 아닌 대회 때문이 아닌 범한 자신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신양 쪽이 동이성으로 물건을 팔고 있으니 사고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명씨 가문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범한은 명씨 가문을 움직여 몸을 숨기고 있는 검술의 대가부터 먼저 찾아내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 건물 아래 울타리에 있던 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석판 위로 걸어가 두 손을 모아 인사하더니 온화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 호걸분들의 무공을 보게 되어 본관,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우리 위대한 경국에는 과연 훌륭한 인재가 많군요. 민간의 여러 영웅호걸이여, 이후에도 열심히 무공을 갈고닦아 훗날 험지에서 우리 경국의 영토를 넓히는 데 일조하여 불세출의 공명을 쌓고 가문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관원이 껄껄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여러 영웅분들이 비웃겠지만 본관은 닭 한 마리 잡을 힘없는 서생이외다. 이런 내가 이 자리에서 무공 대결을 보게 되니 절로 부럽군요. 여러분께 몇 초식 배우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모두 훗날 달리는 말에 올라타 적을 베어 황제 폐하를 위해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대결장에 있던 강호 사람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다. 관원이 겸손하면서도 꽤 재미있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무림 대회는 원래 강호의 일인데 조정의 개가 생뚱맞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강호인들은 분개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다 관원의 말을 듣고는 그런 이유 때문에 와 있던 것이구나 하고 이해했다. 무공을 익혔으니 언젠가는 제왕을 위해 힘쓰고······.
강호의 삶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삶이 쉬이 곤궁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군에 들어가 명예와 이익을 모두 취하는 것만 못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늘 무공을 중시해 오셨고, 그동안 태평성대를 구가하기는 했어도 전쟁은 언제든 터지기 마련이니 그들에게는 군에서 공을 세울 기회가 있을 터.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이는 아직 소수에 불과했다. 대결장 밖에 서 있는 대다수의 고결하고 청렴하며 자유롭게 사는 이들은 조정 관원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어떤 이는 괴상야릇한 말을 하기도 했다.
“민간에 바삐 사는 영웅이 많기는 하지요. 하나 모두 우리 위대한 경국 조정의 영웅호걸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조금 전 몇 분은 동이성 검객 아니었나요? 설마 대인께서는 그녀들에게도 경국 장군이 되어 동이성을 되찾아 오는 데 일조해야 한다 설득하실 겁니까?”
범한은 위층에서 모든 걸 듣고 있었다. 그는 강남로 관원이 영리하게 말을 잘해 기분 좋게 듣던 터였다. 한데 순간 반박하는 말이 들려오자 웃음이 터져 자그마하게 한소리 했다.
“참으로 예리한 지적이군.”
3 황자가 옆에서 분개했다.
“모두 간악한 자들이군요. 스승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정말 재미없습니다. 보러 오지 말았어야 해요.”
한데 청석판 위에 있던 관원이 침착하게 받아쳤다.
367화
“문무(文武)의 도는 국경이 없습니다. 우리 조정의 선비들은 과거 북제에서도 과거를 보았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조정에서 재상으로 중용되지 않았습니까. 동이성 사고검 선생은 일대 종사이시니 그 제자들도 당연히 범상치 않겠지요. 그런 분들이 이번 무림 대회에 참여해 주었으니 우리 경국으로서는 경사지요. 만약 동이성의 여러분들이 우리 위대한 경국 조정을 위해 힘을 써준다면 조정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잠시 자조적으로 웃고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우리 조정과 동이성은 대대손손 관계가 좋았으니 앞서 말한 선생의 말은 일어날 리 없겠지요.”
그러자 아까 말한 강호인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천하에 제후국이며 소국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 정말로 싸우게 된다면 모두 우리 적으로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북제와 동이는, 대인께서 동이성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라 하셨는데 설마 그렇다면 북제와 싸우실 생각인 건가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나이 든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그 사람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관료와 싸우지 않는 게 처세의 도이거늘 무엇 하러 한사코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관원의 말에 반박했던 자를 바라보며 그의 얼굴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신분을 숨기고 강호 무림에 뛰어든 유명 인사는 아닌 듯했다.
위층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범한도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했다. 그런데 대체 어디가 이상한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대결장에 있던 강남로 관원이 잠시 화를 삭이는 소리를 내고는 돌연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뗐다.
“선생의 말도 일리가 있군요. 하나 번화한 우리 중원 이외의 지역은 아직도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서만은 최근 들어 다시 움직일 기미가 보인다는데 모두 들어 보았는지요?”
관원이 증명되지 않은 소문을 툭 던져 자리에 있는 영웅들이 입을 다물도록 했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경국 조정과 북제는 작년에서야 국서를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국혼도 이미 성사되었으니 나라 간 우의는 더욱 공고해질 겁니다. 그러니 어찌 선생의 말처럼 북제를 향해 군사를 일으키겠습니까?”
그러자 관리를 몰아붙이던 강호 사람이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잠시 후 다시 말했다.
“경국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됐소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인, 그만 의심을 푸시지요.”
그는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뒤쪽에 몰려 있던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 것이었다. 자신이 북제 사람임을 말이다.
장내가 잠시 술렁였다. 무림 대회는 원래 참가 자격에 제약을 두지 않는 터라 동이성 사람도 참가한 것이었다. 이에 북제 사람이라고 참가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그의 행동을 두고 그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위층에 있던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이 잠깐 반짝이더니 건물 아래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훑기 시작했다. 하지만 범한이 보고 있는 건 사람들에 둘러싸여 몰래 자신의 뜻을 말한 북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범한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범한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비교적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에 살짝 가려져 있는 데다가 대나무 발까지 쳐져 있었다. 그래서 건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봤을 때 범한의 행동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저 단순히 바깥 상황을 구경하는 손님으로만 여겨졌다.
대결장 바위 위에 있던 관원의 낯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앞서 말한 사람이 북제 사람일 줄 생각도 못 한 모양이다. 그가 잠시 후 쌀쌀맞고 무시하는 어투로 입을 뗐다.
“삼국이 잘 지내는 건 거짓이 아니오. 하나 저 먼 북에서 온 선생······ 아까 하던 말을 끝맺지 않았는데 본관, 이제야 알겠군요. 북제 친구들은 경문(經文: 경서와 문예)의 도를 좋아하다 보니 이쪽으로는 믿음이 부족했었나 봅니다.”
관원의 마지막 말에 자리에 있던 경국과 동이성 사람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경국과 마찬가지로 북제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북위를 이어서 그런지 진부한 문예적 기운이 농후했고 사람들은 유순하기만 했다. 한편 문을 숭상하는 것에 비하면 무를 숭상하는 풍토는 비교적 약해, 천하 사람들은 북제는 허약하다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북제에 대종사 고하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천일도 수행에만 전념할 뿐 속세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상삼호라는 뛰어난 장군도 있었지만 북제 조정은 그를 극한의 한지로 내몰았다가 경도로 불러들인 후에는 다시 집 안에 가둬 두고 중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강호 사람들은 북제를 깔보고 있었다.
동이성은 천하에서 9등급 고수가 가장 많은 곳이었으니 동이성을 가지고 무도를 논한다면 자연스레 믿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경국은 무를 숭상하는 터라 명장들이 많았다. 진씨와 섭씨 두 가문이 배출한 장군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무공 고수만 놓고 봐도 경국에는 대종사가 둘이나 있었다. 9등급 강자도 적지 않았으니, 화살로 하늘의 구름을 가르는 연소을 대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최근 주목을 받은 범한 대인까지 있었다. 그중 범한 대인은 천하에서 무공 천재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니······.
최근 2년 새에 북쪽에 해당타타라는 낭자가 나타났으나 어쨌든······ 여인 아닌가. 남자를 여자보다 더 높이 쳐주려는 심리는 강호 사람들이 일반 백성들보다 강했다. 이에 해당타타라는 여자 고수의 등장은 북제 사람들을 더 우습게 보는 계기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관원의 말에 경국 무림인과 동이성의 검객이 소리 높여 웃은 것이었다.
그러자 북제 사람은 흙빛이 된 얼굴에 분노를 드러냈다.
위층에 있던 범한은 누가 봐도 이상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강남로 관원이 분노를 억누르지 않는 게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러다 갑자기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건물 아래쪽을 주시했다. 드디어 원하던 걸 찾은 모양이다.
범한은 가볍게 난간을 한 번 두드리고는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평안했던 마음에 격동이 일기 시작한 것 같았다.
3 황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런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의 눈은 넓고 평평하게 펼쳐진 청석판 너머 길가에 있는 큰 나무를 보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서 평범해 보이는 여인이 꽃바구니를 들고 꽃을 팔고 있었다. 한겨울인데 바구니 속 꽃은 대체 어디에서 훔쳐 온 건지.
줄곧 범한을 등지고 있었던 여인은 머리에 꽃무늬가 들어간 두건을 두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관원이 북제 사람을 모욕하는 말을 하자 몸을 돌려 담담하게 관원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돌릴 때 그녀의 얼굴이 범한의 눈에 들어왔다. 저 여인이 해당타타가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인지.
* * *
해당타타가 이미 강남에 와 있자 범한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 낭자는 자신이 경국 황제의 사생아란 사실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왜 서한에서 말한 것처럼 강남까지 내려와 자신을 찾는 걸까? 설마 이런 상황에서 천일도 심법을 자신에게 건네주어 북제의 호랑이 키우기 계획을 성공시키려는 걸까?
한데 그 순간, 전광석화처럼 결단을 내려 버려야 하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자 범한은 깊이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 후 다시 아래쪽 어딘가에 숨어 있을 운지란을 찾았다.
이는 갑자기 찾아온 기회였으며 극한의 결단력을 동원해야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결정이었다. 이에 범한은 본디 차분한 성격임에도 긴장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림자가 이 기회를 제대로 잡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순간 그림자가 몹시 뒤틀린 성정의 소유자라는 게 안타까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6처 검수들과 협력해 오늘 임시로 세운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 가능성이 더 커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큰 나무 아래에서 꽃을 파는 여인이 넓게 깔린 청석판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왔다. 그녀에게서 은은하고 맑은 품격이 흘러나오자 대결장에 있던 강호 고수들도 이내 이상한 낌새를 감지해 냈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꽃 파는 여인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 감히 그녀를 막아설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평범한 얼굴의 꽃 파는 여인이 지나가고 난 후에야 자신들이 왜 그녀에게 길을 터주었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사이 해당타타는 차분한 표정으로 청석판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경국 관원 앞에 서서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대인, 소녀는 북제 사람이나 경문을 모르는 거친 사람이지요. 하지만 싸우는 일만큼은 자신이 좀 있답니다.”
강남로 관원이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앞에 선 평범하게 생긴 여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압도되어 겁을 먹었는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호에서 갑자기 찬 바람이 불어왔다. 해당타타가 입고 있는 두툼한 외투는 펄럭이지 않았지만 귓가에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얼굴 앞쪽을 어지럽게 가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웠다. 오늘 항주성에는 선자(仙子: 선인, 미녀를 의미)가 하늘을 가르며 등장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동향 사람이 굴욕을 당하자 앞으로 나선 촌부는 있었다.
줄곧 분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북제 사람은 그녀가 등장하자 일부러 머뭇거리는 기색을 내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기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인파를 헤치고 나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해당타타 낭자! 어인 행차십니까?”
건물 안이고 밖이고 할 것 없이 강호 사람들은 순간 술렁였다. 이에 평범해 보이는 여인에게 다시 향한 그들의 눈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해당타타라고? 북제의 그 해당타타 말이야?
고하 종사의 마지막 제자이자 검으로는 북쪽에서 적수가 없다는 9등급 강자. 전설 속 하늘의 자손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갑자기 대종사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지금 서호에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 *
해당타타가 자세를 취하고 기선을 제압하고 있을 때 범한은 그녀를 바라볼 정신이 없었다. 애당초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건물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의 동정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호숫가 제방 아래에 있는 작은 배에서 낚싯대를 들고 있는 삿갓을 쓴 어부였다.
범한은 어느새 양손으로 푸른색 난간을 어루만지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어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해당타타가 나섰을 때 어부의 손에 있던 낚싯대가 살며시 아래로 내려가는 걸 발견했다.
낚싯줄에는 물고기가 없었다. 어부가 해당타타의 경지를 신경 썼는지 자신의 위장술을 더 교묘히 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작은 동작 변화가 눈에 들어오자 범한은 손을 뻗어 3 황자가 손에 들고 있던 청화 도자기 쟁반을 가져왔다.
3 황자는 깜짝 놀랐다.
“아직······.”
3 황자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범한은 청화 도자기 쟁반을 있는 힘껏 건물 아래로 내던졌다.
* * *
도자기 쟁반이 산산조각 나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한동안 울려 퍼졌다. 해당타타의 등장으로 고요했던 터라 쟁반 깨지는 소리는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일부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바라보며, 세상 구경 생판 처음 하는 놈이 북제 성녀의 이름을 듣고 너무 놀라서 접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나무와 대나무 발에 가려져 있어서 범한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일부 사람들은 대결장 내 상황에만 집중했다. 해당타타가 다음에 할 행동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순간 호수 위에 있던 어부와 건물 위 범한 사이에는 가림막 같은 건 없었다. 어부는 쟁반 깨지는 소리를 듣자 실수로 떨어뜨린 게 아닌 일부러 깨서 낸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에 조금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단번에 한곳을 응시하며 눈을 떼지 않았다. 범한의 눈빛이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고 있어서였다.
어부로 위장하고 있던 운지란은 위층에 있는 차분한 표정의 젊은 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속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범한, 네 녀석이 여기에 있었구나!’
운지란은 천천히 낚싯대를 거둬들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빛만큼은 눈부신 명검처럼 건물 위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수십 장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건물 위층과 배 위에 있는 두 사람은 그들 사이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잊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해당타타가 이제 막 실력을 발휘하려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서로를 주시할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한참이 지나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눈빛에 담긴 건 서로를 탐색하는 기색이 아닌 적나라할 정도로 얼음장 같은 싸늘함이었다. 두 사람은 과거의 원한 그리고 강남 명씨 가문과 관련한 일 때문에라도 서로 실력을 인정해 주는 훈훈한 사이는 절대 될 수 없었다.
368화
운지란이 낚싯대를 절반 정도 거두었을 때였다.
기괴하게도 광택이 없는 날카로운 비수가 배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 낚싯줄 옆에 나타났다. 비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운지란이 낚싯줄을 거두는 속도에 맞춰 위로 따라 올라왔다. 목숨을 앗아 갈 비수는 그렇게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순간 운지란은 건물 위에 있는 범한에게 집중력의 절반을 쓰고 있다시피 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으로는 대결장에 있는 해당타타를 신경 썼다. 그는 사고검의 수제자였지만 해당타타와 범한이 모두 젊은 세대 중 가장 심후한 실력의 소유자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세상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은 사이도 좋다고 했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 갑자기 동시에 항주성에, 그것도 바로 이 작은 배 옆에 나타나자 운지란은 이들에게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순간 결사의 의지가 담긴 검은 빛이 기괴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배 위에 있던 어부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끔찍하게도 피 묻은 화살을 꽂은 채 그대로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작은 배에 있던 검은 거적이 동시에 딸려 올라가 순식간에 어떤 힘에 의해 조각조각 나더니 쏜살같이 옆으로 뻗어 나갔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서호를 가르고 나오더니 곧바로 허공을 밟으며 도망가고 있는 운지란을 따라갔다.
그렇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두 차례 나더니 두 사람은 어느새 호숫가에서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남은 건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는 수많은 거적 파편들뿐이었다. 그리고 강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삿갓이 범한에게 항의라도 하는 듯 제멋대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서호는 넓은 호수가 아니어서 제방의 길이도 수 리(里)에 불과했지만 호수의 기세만큼은 장대했다.
루상루 식당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대나무 발 사이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수 오른쪽 제방이 있는 곳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다가 가끔씩 수면을 스칠 때마다 잠깐씩 큰 물보라가 일었다. 그러다 다시 제방 옆에 있는 뱃머리를 지나는 속도는 실로 엄청났다. 번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우연히 호수 위에서 서로 맞붙게 됐을 때는 검의 기운이 좌우로 뻗어 나가고 두 사람이 동시에 거대한 새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한데 그 모습이 어찌나 우아하고 아름답던지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절로 온몸이 떨릴 정도였다.
순간 피가 튀고 두 사람이 분리되더니 다시 천상의 새처럼 앞쪽으로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한데 어찌나 아름답고 묘한지 절로 두려움이 밀려들 지경이었다.
* * *
범한은 높은 곳에 서서 멀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수 둘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호수 옆에 위치한 잎이 다 떨어진 버드나무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방향을 보니 검은색의 고풍스러운 정원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중상을 입었는데도 오랫동안 버티는 운지란을 보니 동이성의 일대 검술 대가라는 명성은 과연 헛소문이 아닌 듯했다.
호수 위에서 다시 잠시 매가 공격하는 듯한 광경이 벌어졌다. 그림자는 자신이 가장 자주 쓰는 기술을 버리고 동이성의 사고검결이라는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두 고수의 검세는 매우 유사했다. 호수 위에서는 깨진 잔상 같은 화면만 전광석화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하지만 검의 기세는 눈을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위용이 넘쳤다.
예상했던 대로 그림자는 찰거머리처럼 운지란을 뒤쫓았다. 한편 다친 운지란은 궁지에 몰린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왜 호수와 마주 보고 있는 기슭으로 향한 거지? 설마 그곳에 동이성에서 온 조력자가 있는 건가? 범한은 서호 맞은편에 있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목조 건축물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촤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막이용 대나무 발이 아래로 떨어졌다. 범한은 난간에서 물러나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3 황자를 잠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뭘 보십니까? 드시던 것이나 마저 드시지요.”
말을 마친 범한은 탁자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남은 음식 속에서 새우 살을 찾기 시작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악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3 황자도 밖에 무슨 일이 생겼고 얼추 살인이 일어나려 한다고 예상했다. 청석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호숫가로 몰려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걸 보면 분명 큰일이 나기는 한 것이었다.
사천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인, 무슨 일이 난 것입니까?”
범한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곧장 대답을 해주었다.
“누구인지 모르겠는 이가 호숫가에 있던 어부를 찔렀다네. 그리고 지금은 호수 저쪽까지 쫓아갔고.”
방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대체 어부 피습 장면이 어떠했기에 경험 많은 강호 호걸들을 놀라게 한 건지. 사람들은 범한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박을 하지도 않았다.
* * *
해당타타와 관원은 여전히 서호 옆 청석판 위에 있었다. 해당타타는 관원 옆에 서서 호수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린 절대 고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강남 무림 사람들은 이미 호숫가에 몰려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잔물결이 남아 있는 호수를 바라보며 연신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경이로움에 찬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그들은 대결의 시작 부분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작은 배가 파괴되고 고수 둘이 거대한 새처럼 호수 위로 날아오르는 장면은 똑똑히 보았다. 순간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어 보게 된 것이었지만 모두 그 두 사람이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고수란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소리만 들어 봐도 9등급이라는 현묘한 경지였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사람들은 그제야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려 했다. 한동안 의견을 나누어 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일부 고명한 인사들은 호수 위에서 본 검세에서 사고검의 품격을 느꼈지만 이 점을 밝히지 않고 혼자서만 내심 뿌듯해했다.
‘동이성아, 지금껏 고수가 많다고 허풍을 떨지 않았더냐! 그런데 자기편끼리 싸우다니!’
하지만 호숫가에 있던 동이성 출신 여제자들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들은 경국의 번화한 지역인 항주에서 감히, 그것도 자기 사부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터였다. 려사사가 이끄는 여검객들은 주최 측에게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조용히 대결장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호수 제방을 따라 초조하게 뛰어갔다.
강남 무림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하루 종일 별 볼 일 없다가 막판에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가 나타나 주고 또한 호숫가에서 갑자기 절세 검객 둘이 나타나 서로 맞붙어서였다. 사람들이 봤을 때 이 정도면 참가비는 뽑은 셈이었다.
경국의 강호인들은 방금 암살 사건을 핑계로 해당타타가 대결장에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잊어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도 저 낭자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만약 경국 사람으로서 체면이 깎이고 싶지 않다면 이때를 틈타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강호 호걸들은 근처 루상루로 들어가 식사를 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자 아까 보았던 놀라운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평소 만나기 힘들었던 각 문파의 대표들은 ‘공정’한 관(官)의 공증 아래 이익 배분에 대해 논의했다.
강남로 관원은 덕망 높은 선배 인사들과 함께 해당타타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앞서 있었던 일을 거론하는 대신 해당타타가 쉴 수 있도록 정중하고 깍듯하게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루상루로 들어갈 때였다. 말갛고 반듯한 외모에 따스한 눈빛을 지닌 귀공자가 마중을 나와 해당타타를 향해 두 손을 들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싼 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해당타타 낭자, 친히 왕림해 주시다니요. 이리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공자께서는?”
해당타타는 원래 얼음장처럼 차가운 선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앞서 사라져 버린 두 고수 생각뿐이었지만 대충이기는 해도 예의 바르게 받아쳐 주었다.
“저는 명씨 가문 사람으로, 이 루상루의 주인으로 있는 자입니다.”
이 일행의 맨 뒤쪽에는 강남 수채의 하서비가 있었다. 하서비가 고개를 들어 명 공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겉으로 드러난 표정은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냉소를 짓고 있었다. 북제 사람에게 비위도 맞출 줄 알다니 여러 해 동안 못 본 사이 조카가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루상루도 명가가 꾸리고 있는 사업이다. 원래는 대행수를 통해 운영하지만 오늘은 루상루 옆에서 중요한 대회가 열려 특별히 가주 명청달의 아들인 명란석이 직접 나와 있었다.
강남에서 거부(巨富)를 이룬 가문이니 이들은 관아와의 관계를 잘 조율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타국의 중요 인물에게 알아서 아첨하는 건 그들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건물 밖까지 나와 해당타타를 맞이하는 동시에 그녀와 함께 있던 강남로 관원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패가망신할 유형은 아니었다.
식당 안에 있던 손님들의 이목이 모두 입구 쪽으로 쏠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해당타타 낭자가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해서였다.
해당타타는 유명 인사였다. 경국 사람들 모두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해당타타 낭자와 젊은 범 대인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 때문에 경국 사람들은 범한 대인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사람들에게 범한은 조정을 통틀어 제일 잘난 인물이었다. 그러니 지금 해당타타를 바라보는 그네들의 눈빛은 마치 며느릿감이라도 고르는 듯 여느 때보다도 깐깐했다.
그리고 해당타타를 살펴본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낭자는······ 생긴 게 그저 그래, 아무리 봐도 범한 대인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 * *
식당 밖이 조용해지고 있는 반면 내부는 점점 시끌벅적해졌다. 범한은 재야의 호걸들이 식당으로 들어왔음을 알아채고는 호위 무사 한 사람에게 칸막이 쪽에 서 있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눈치 없는 강호 인사가 소설 속 악질 토호처럼 자리를 빼앗기 위해 들어와 난동을 부릴 수도 있어서였다. 그리고 범한에게는 그런 데에 쓸 시간이 없었다.
고달이 범한을 바라보자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달이 손을 휘휘 흔들어 앞서 나간 호위 무사에게 돌아오라고 한 후 자신이 직접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참에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한 호위 무사 둘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다른 이들에게 보초를 서도록 했다.
범한 일행은 이미 먹을 만큼 먹은 후였다. 이에 3 황자를 포함한 모두가 지시를 바라는 궁금증 어린 눈빛으로 범한을 주시했다. 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에도 호기심이 가득 어려 있었다.
“왜들 그렇게 보는 거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호수에서 일어난 일과 나는 정말 관계가 없어.”
사천립이 스승님은 총명하지만 어떤 때는 반응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모두 궁금한 게 있어도 범한에게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범한의 성미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3 황자는 웃으며 입을 뗐다.
“그것 때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대체 뭡니까?”
밖에서 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보아하니 아래층에 있던 강호 인사들이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 위층으로 올라온 것 같았다. 3 황자가 문밖을 향해 턱짓을 했다.
“해당타타 낭자가 왔는데 스승님께서는 그녀에게 이리로 들어와 앉도록 청하지 않으실 건가요?”
방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간절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범한은 낯빛이 어두워지며 꾸짖었다.
“대체 머리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항주까지 데려와 구경시켜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거늘. 내가 자네들 앞에서 연기하는 모습까지 보여야겠는가?”
그러자 사천립이 곁눈질을 했다.
“스승님, 해당타타 낭자가 남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같이 밥 한 끼 먹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가 여기로 들어온다면 우리 정체가 들통날 것 아닌가!”
그러자 3 황자가 또랑또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왜 미복 차림으로 다녀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당당하게 신분을 밝히고 물놀이, 산놀이나 가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곳 강남 사람들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텐데 말이에요.”
369화
범한은 골치가 아파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무서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경도를 떠나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다니게 됐는데 수염이 허연 관원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어야겠습니까? 마마께서도 그리 지내는 건 싫으시지 않습니까?”
이제야 범한 제사가 미복으로 다니는 이유를 알게 된 3 황자는 순간 정신이 멍했다. 몰래 명씨 가문의 죄를 파헤치려던 게 아니라 순전히 마음 편히 여행 다니고 싶어서였다니. 3 황자는 순간 그동안 자신이 범한의 직무 수행 의지를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속으로 저 인간은 역시 짓궂다고 욕을 하고는 멸시와 조소가 담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들이 안다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가 먼저 관아로 찾아간 것도 아니니 감히 우리를 쫓아올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러 숨기는 건 사서 고생하는 거 아닐까요?”
범한은 3 황자의 말은 귓등으로 들으면서 관리들이 아첨하는 장면이나 떠올리며 생각했다.
‘너 같은 어린 애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느냐.’
어느새 형제는 잔뜩 멸시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칸막이 방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더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범한이 있는 방을 노리는 것 같았다.
범한이 눈썹을 들썩이더니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안 되느니라! 결국 올 것이 왔단 말이냐!”
* * *
고달은 흙빛이 된 얼굴로 방 밖을 지키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나 있는 강호 인사들의 얼굴을 주시하며 그들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저속한 말을 가만히 듣는 그의 손에는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칼을 뽑은 건 아니었다.
해당타타가 꽤 흥미롭다는 듯 고달을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물론 고달 앞에는 이미 세 명의 ‘강호 사나이’들이 누워 있었다. 사나이들은 배를 끌어안고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내며 억울한 척하는 중이었다.
범한의 생각대로 거만한 강호 사람들은 위층으로 올라오자마자 범한이 자리 잡은 방에 눈독을 들였다. 루상루에는 위치 좋은 방이 두 개로 범한 일행이 차지한 곳이 그중 하나였다. 나머지 한 곳은 작은 주인인 명 공자가 무림 대회의 주최 측 인사들을 위해 미리 빼놓은 상태였다. 강호 사람들은 관아나 해당타타 낭자와는 자리를 두고 싸우고 싶지 않았던 터라 범한 일행의 방을 보자마자 군침을 흘렸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냉큼 자리를 비우라며 소란을 피웠다.
명씨 가문의 작은 주인은 아직 위층에는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대행수와 일꾼들은 칼을 찬 강호 사람들이 무서워 한쪽에서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고달이 누구던가. 황제 폐하를 따라다니는 호위의 우두머리 아닌가. 강호에 머물렀다면 이미 문파 하나를 세우고도 남을 인재였다. 그런 고달에게 무리하게 억지를 썼으니 제사 대인은 콧방귀나 뀔 뿐이었다. 결국 고달은 강호 사람들이 먼저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저들이 먼저 공격해 오자 뽑지도 않은 장검으로 그냥 툭 치기만 했을 뿐이었다.
이에 몇몇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 대며 바닥에서 나뒹굴기 시작했다.
* * *
오늘 루상루에는 무림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강호는 원래 난폭한 곳이다. 이에 자신들보다 더 난폭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자 모두 원수라도 만난 듯 몰려와 에워싸고는 곱지 않은 눈빛으로 고달을 주시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범한 탓이었다. 반년 가까이 범한과 ‘밤낮’으로 붙어 있다 보니 고달은 죽이는 기술 말고도 범한의 음험한 기풍에 너무 많이 물들어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 일은 민간에서 일어난 일이라 고달은 치명적인 공격은 하고 싶지 않아 범한의 잔재주를 써보았다. 물론 그 덕분에 다툼은 금방 해결되었지만 그가 사용한 음험한 기술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용호산 검객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이보시오, 선생. 아무리 이 친구들이 먼저 무례하게 나왔고 또 요구가 좀 과했기로서니 어찌 그리 음험한 수단을 쓰는 것입니까? 너무한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고달은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용호산 검객은 고달의 공격을 보는 순간 지금 폐관 수련 중인 자신의 스승보다 고강하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이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선생으로 부르기는 했어도 고달을 호위 무사로 여기지 않았다. 물론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고달의 얼굴을 보고 방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에 대해 경각심과 두려움을 갖기는 했지만 분노가 가시기는커녕 계속 치솟았다.
* * *
바로 그때 해당타타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꼭대기 층으로 올라왔다. 사람들과 대치 중인 고달을 본 그녀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고달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러자 건물 안에 있던 이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여 고달의 신분을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강호에서 저런 장도를 쓰는 고수를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어 모두 궁금증만 더해 갈 뿐이었다. 한편 해당타타는 북제 상경성에서 고달을 여러 차례 만났기에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명씨 가문의 작은 주인은 사람들이 한데 엉켜 있자 서둘러 올라와 상황을 원만히 해결했다. 서둘러 다른 방을 비우고 일꾼들에게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들’을 모시고 들어가 쉬게 하도록 했다.
명씨 가문은 강남에서 어마어마한 재력과 세를 지닌 곳이었다. 그러니 사내들은 작은 주인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달의 무공 수준 또한 놀라울 정도라 칸막이 방에 있는 사람은 자신들이 건드릴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점점 흩어지며 혼잣말처럼 구시렁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상황이 모두 정리되자 명씨 가문의 작은 주인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고달과 몇 마디 나누었다. 그런 후 온화하고 예절 바르게 해당타타와 강남로 관원 및 기타 사람들을 미리 마련해 둔 귀빈실로 안내했다.
한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해당타타는 꽃바구니를 든 채 웃는 듯 마는 듯 한 눈으로 고달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기는커녕 작은 소리로 무어라 말했다.
“명 공자님의 호의, 감사드립니다. 하나 저는 오늘 옛 친구를 만나 좀 귀찮게 해줘야겠습니다.”
모두 깜짝 놀라 고달을 바라보았다. 고달의 눈빛에 조금 미묘한 구석이 있자 모두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 * *
모두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강남로 관원은 두 번 기침을 하고는 해당타타에게 두 차례 말을 건네더니 속히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농담은 아니겠지? 만일 저 방에 있는 옛 친구라는 사람이 바로 그 도련님이라면 그가 지금 강남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강남로 관원은 자신이 아부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지부 정도의 높은 관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경솔하게 이 사실을 폭로해 버리면 나중에 관직을 수행하는 데 좋은 날은 다 가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달에게 잘 보이려는 듯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이고는 바람처럼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명씨 가문의 작은 주인만은 경악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 * *
방문이 삐거덕하고 열렸다. 해당타타가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오자 햇살이 그녀를 위해 반짝여 주었다.
술잔을 들고 있던 범한은 불청객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후 딱 한 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왔어요?”
해당타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기한 듯 놀라 입이 떡 벌어져 있는 방 안 사람들을 향해 미소로 인사를 해주었다. 그런 후 자연스럽게 범한 옆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아 대답했다.
“왔어요.”
범한이 술잔을 내려놓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당신이 들어올까 봐 일부러 고달에게 나가 있도록 한 건데. 오히려 본관의 행적이 새어 나가도록 했으니······. 고달이 눈치 줬을 텐데 설마 못 본 척한 건 아니겠죠?”
고달은 문 앞에 서서 자신은 잘못 없다는 듯 식당 밖으로 펼쳐진 호수와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두건을 벗고 언짢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8등급 고수가 문을 지키고 있잖아요. 안에 누가 있는지 바보도 알 수 있을걸요.”
범한이 경박하게 소리까지 내며 비웃었다.
“강남의 와호장룡(은둔 고수 및 인재)일지라도 고달을 아는 이가 없거늘. 우리가 타고 온 배는 아직 강 위를 떠다닌단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항주에 와 있다고 알아챈 사람은 없을걸요?”
해당타타가 범한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잠시 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참 형편없는 믿음이네요. 저들이 당신이 누구인지 정말로 모를 것 같아요? 설마 이런 게 예전에 말했던 정신 승리법인가요?”
범한이 반박했다.
“당신이 여기로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저들은 막연히 추측만 했을 거예요. 내가 누군지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해당타타가 살짝 귀찮다는 듯 받아쳤다.
“당신의 그 수상쩍은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광명정대하게 해도 되는 일을 왜 이리 꼬고 저리 꼬고 검댕까지 발라 가면서 하는 건지 원. 그렇게 안 하면 자신이 음모가라는 걸 증명할 수 없어서 그런가?”
그러자 범한이 버럭 화를 냈다.
“나는 본래 음모가예요! 당신이 나보다 음모를 더 잘 짤 거 같아요? 그리고 아까 식당 아래에 있던 북제 사람은 당신이 꽂아 놓은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냥 기회나 보고 있다가 강남에 있는 군웅 중 하나 찍어서 겨룬 후에 위엄도 세우고 사람들 이목도 끌 셈 아니었어요? 오늘 당신이 소원을 풀지 못했기에 다행이지, 만일 그랬다가는 우리 경국의 체면이 당신 때문에 땅에 떨어졌겠죠!”
그러자 해당타타가 범한을 비웃었다.
“그렇게 기분 나빴으면 아까 뛰어 내려와서 나와 붙었어야죠!”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에요! 고달에게 문 앞을 지키게 한 건 여기 작은 주인이 바보가 아니라 그런 겁니다. 그자가 사람을 시켜 이 방에 누가 있는지 알아보려 했을 테니까. 내가 목을 걸고 도박을 한 건 말썽을 피운 강호 사내들이 모두 작은 주인이 보낸 사람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고달을 내보낸 거예요. 그들을 위협해서 명씨 가문에서 우리 쪽을 덜 살펴보게 하려고 말이에요. 그런데 아주 잘 했습니다. 등장하자마자 모든 걸엉망으로 만들어 줬으니까요. 내가 때를 봐서 본때를 보여 주려 했는데 덕분에 다 어그러졌네요.”
범한이 불쑥 불같이 화를 냈다.
“여기는 경국이에요! 그러니 내 말을 들어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천장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내가 언제 당신 계획을 따른 적 있던가요?”
해당타타가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첨예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일을 흐리멍덩하게 처리한 건 분명 범한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름 할 말이 많았다. 해당타타는 분명 범한의 밑바닥을 들추어내고 있으면서도 그런 그의 행동이 낯설다고만 말했다. 두 사람의 말소리는 점점 빨라져 갔지만 소리 크기만큼은 갈수록 작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 거의 소리가 나지 않게 입만 나불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입은 꾹 다문 채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광경을 보며 ‘강호에서 떠도는 소문이 과연 가짜는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총명함이 극에 달하고, 입담도 좋고, 권력에 실력까지 지닌 범한 제사를 상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세로 범한 제사를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은 북제에서 온 낭자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한다면 지나가는 개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3 황자는 입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자그마한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다가 해당타타를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테니스 경기를 보는 관중처럼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3 황자는 다채로운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정말 다시는 못 볼 장면이야. 전부 기억해 뒀다가 경도로 돌아가서 신아 누나와 부황께 모두 말해 드려야지.’
결국에는 사립천이 스승을 아끼는 마음이 발동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대인, 해당타타 낭자, 이제 어떻게 이곳을 떠날지 생각해 보시는 게······. 잠시 후 항주 지주, 항주 장군, 강남 직조 대인들이 마중을 나올 것 아닙니까. 이 제자, 이미 여럿이 식당 밖으로 나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다리를 툭 치고는 해당타타를 두 차례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얼른 가요! 여기서 휴가라도 보낼 셈이에요?”
해당타타는 가만히 앉아, 하고 싶었던 말이나 툭 던졌다.
“배고파요.”
그러자 3 황자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얼른 일꾼을 불러서 새로 음식을 내오도록 하게.”
범한이 3 황자를 향해 잠시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깔깔깔 웃었다.
“3 황자마마, 감사합니다.”
370화
정오가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서호와 마주 보고 있는 어느 장원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장원 내부에서만 그런 것이라 외부에서 보면 여전히 조용한 것 같았다. 장원은 화려하면서도 질리지 않게 꾸며져 있었고 산과 호수를 낀 절묘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장원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가 은전으로 십몇만 냥에 달했다.
장원의 주인은 팽씨로 그 누구도 그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옛날에는 여름에만 사람들이 찾아왔다. 피서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오늘 장원에 나타난 이들은 범한 일행이었다. 이곳은 전임 재상인 임약보가 자기 문하생인 팽 대인의 어느 먼 친척 명의로 사들인 곳이었다. 그러니 항주로 온 범한이 장인의 집에 묵는 건 당연했다.
장원의 관리인은 일찌감치 소식을 듣고 모든 걸 준비해 둔 터였다. 범한은 어느새 다리를 꼬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용정차를 음미하면서 항주 대부호의 삶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3 황자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해당타타를 삐딱하게 흘겨보며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중이었다.
범한 일행은 당연히 루상루에서 계속 머무르지 않았다. 해당타타도 음식을 시키지 않았다. 서둘러 루상루로 향하고 있는 관리들을 피하기 위해 범한이 일행을 이끌고 도망치다시피 나왔기 때문이다.
마차 대열이 가짜로 성에 들어가는 걸 연출하기 위해 감찰원 4처의 항주 순찰사 관원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6처가 살수를 위해 준비한 포목점 두 곳까지 이용했다. 그리하여 범한 일행은 다시 항주성에서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게 되었다. 그 후 범한 일행은 아무도 모르게 길을 돌아 서호 근처에 있는 장원으로 들어갔다.
범한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감찰원 부하들이 사랑스러웠다.
해당타타가 범한을 슬쩍 보고는 답답해하며 물었다.
“대체 누구를 피하느라 이러고 있는 거예요?”
범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번거로운 걸 피하는 중입니다.”
사실 오늘 일은 범한이 어리석게 굴어 벌어졌다. 행적이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았다면 루상루에 가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방을 뺏으려 할 때 화를 꾹 참고 굽혔어야 했다. 하지만 범한은 성미가 유난스럽고 굽힐 줄 몰랐다. 그러니 강호를 다니는 동안 자신의 진짜 신분을 계속 숨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참 후, 3 황자는 정원으로 가 새로 합류한 어린 여종들에게 장난을 걸었다. 장원의 나이 든 여종들이 따뜻한 떡을 내오자 해당타타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보니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정말로 배가 고프긴 고팠던 것 같았다.
범한이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좀 여인네답게 먹을 것이지.”
해당타타가 푸흡, 하고 웃으며 생각했다.
‘이 녀석이랑 반년 동안 못 봤는데 왜 보자마자 싸웠을까? 그래도 정말 재미있었어.’
해당타타가 떡을 다 먹자 범한은 그녀에게 함께 후원으로 가자는 눈짓을 했다. 팽씨 장원에 와본 적은 없었지만 건축 양식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다 보니 범한은 손쉽게 조용한 서재를 찾을 수 있었다.
서재로 들어온 두 사람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범한이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정색했다.
“해당타타······ 지금쯤이면 그 소문을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일단 그 이야기는 접어 두죠. 오늘 서호에 있었던 두 사람은 누구예요? 내가 아는 사람인가요?”
“그 어부는 본 적 있어요.”
범한은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분명 운지란일 거예요. 작년에······ 아니, 분명 재작년에 황궁에서 한 번 본 적 있어요. 그때 동이성 사절단 대표였거든요.”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침묵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질문을 던졌다.
“운지란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그 살수는 대체 누구죠?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어 본 적 없었어요!”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매복하고 있다 공격하면 어린아이도 대종사를 죽일 수 있을걸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이성의 검술을 연구해 본 적 없군요. 그 살수가 쓴 검법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사고검 검법이에요.”
범한이 관자놀이 쪽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대충 둘러댔다.
“동이성에는 고수가 많아요. 그들끼리 서로 죽인다면 우리 계획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잖아요.”
해당타타는 여전히 호수에서 갑자기 나타난 살수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검은 옷의 사람이 쓴 건 순수한 사고검 검법인 것 같았다. 딱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한 게 있었고 그 사람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해당타타가 그런 인상을 받은 건 범한이 자신과 습지대에서 겨룰 때 사용한 초식 때문이었다. 그때의 공격 방식들은 그림자 자객과 똑같았고 감찰원의 후안무치한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런데 해당타타는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녀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범한을 응시했다. 그러자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타타도 다 봤을 거 아닙니까. 살수는 당신과 수준이 비슷해요. 9등급 이상의 절세의 강자라고요. 그런 사람을 내가 어찌 부릴 수 있답니까?”
범한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해당타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자객에게 공격을 받지 않았군요. 내가 보기에는 그게 정말 의외예요. 지금 상황이라면 신양 쪽에서 분명······.”
범한이 손을 들어 해당타타가 하려던 질문을 막고는 차분하게 받아쳤다.
“태평성세이니 그런 일은 너무 큰 파문을 일으킬 거예요. 게다가 신양 쪽은 날 죽일 능력이 안 돼요.”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친 건 다 나았어요?”
* * *
범한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찌감치 나았어요.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강남까지 왔겠어요. 내가 죽는 걸 제일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요.”
해당타타는 마음이 놓였는지 살며시 웃었다.
“서한에서 말했던 건 지금 할까요, 아니면 저녁때 다시 할까요?”
범한은 뼛속까지 음탕한 자라 잠시 해당타타의 말이 선정적으로 들렸다. 이에 서둘러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답했다.
“저녁때 다시 이야기하죠. 국사님과 관련한 것이니 정중히 다뤄야겠지요. 향은 피우지 않더라도 목욕 정도는 하게 해줄래요? 그런데 내가 궁금했던 건······.”
범한이 궁금했던 건 다음과 같았다.
자신이 경국 황제의 감춰졌던 아들인 걸 분명 알고 있을 텐데 고하 대종사는 왜 천일도 심법을 자신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일까.
범한이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해당타타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가로챘다.
“저녁에 다시 말하지요. 가서 서호 경치나 구경할래요. 책에서 서호에 대해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몰라요. 그런데 오늘 자세히 못 봤거든요.”
해당타타가 탁자 위에 있는 꽃바구니를 대충 들어 올리자 그 모습을 본 범한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타타, 이 겨울에 어디에서 꽃을 가져온 거예요?”
“오주에서 산 비단 꽃이에요. 가짜지요. 전부 가짜예요.”
* * *
범한은 홀로 서재에 남아 조용히 앉아 있다가 한참 후에 몸을 돌려 두툼한 창문 가림막을 바라보며 친절하게 물었다.
“안 다치셨지요?”
그림자가 정말로 그림자처럼 홀연히 창문 가림막에서 나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운지란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범한은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생각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운지란이 다짜고짜 옆에 있는 어느 정원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분명 명가가 관리하는 곳인데 그때는 혼자가 아니라 제자 몇도 데려왔습니다. 모두 정원에 있기에 저는 그냥 물러났고요.”
그림자의 말투에는 감정적 동요란 게 전혀 없었다. 이에 범한이 다시 물었다.
“명씨 가문? 동이성? 그쪽 사람들 실력이 어떻던가요?”
“9등급이 두 명, 8등급이 셋입니다.”
그림자가 대답하고는 설명을 이어 갔다.
“한데 운지란은 반년 동안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범한의 두 눈에 잠시 노기가 번쩍이더니 느릿느릿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9등급 하나, 8등급이 셋이라. 이제 보니 동이성이 나를 너무 대단하게 봐서 배팅 한번 크게 했군. 이런, 대체 어디서 그렇게 고수들이 튀어나온 거지? 떼로 덤비겠다는 건가?”
그림자는 범한이 쓴 단어들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그곳을 떠났습니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강남 황실 금고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면 그는 분명 명씨 가문을 뒤집어엎고 신양과 동이성 사이에 돈이 오가는 경로를 끊어 버릴 게 뻔했다. 무력 면에서 허약한 명씨 가문처럼 신양 쪽도 원래 무력이 약한 터였다. 이에 명씨 가문은 동이성의 고수 여럿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조정의 고위 관료를 죽이는 일은, 특히나 범한 같은 이를 죽이는 일은 얼핏 들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명씨 가문에서도 9족이 멸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범한을 죽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됐을 때 미친 장 공주의 성미를 생각한다면 아무 일도 없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동이성의 8, 9등급의 고수들이 계속해서 암살을 시도할 거란 생각을 하니 강한 권력과 담력을 지닌 범한도 순간 오싹했다. 이에 범한은 그림자가 먼저 손을 쓸 수 있게 허락했다. 먼저 우두머리인 운지란을 움직이게 한 후 다시 6처 검수들을 데리고 강남을 누비며 동이성에서 온 이들을 제거하도록 한 것이다.
관아에 앉아 동이성 자객이 제 발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말이 있듯이 범한에게는 감찰원 검수들의 가공할 위력을 사용해 동이성 자객의 무서운 위력에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방법이었다.
사고검이라는 그 늙은 괴물과 관련해 범한은 자신은 그에게 위협감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순간 등골이 오싹해 운지란을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란이 형, 부디 몇 달 더 살아 주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우리 맹인 아저씨께서 나으시면 그때 다시 말하자고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저격 총은 사람을 죽일 수만 있고 살리는 건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 * *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범한이 다시 입을 뗐다.
“6처 검수들을 모두 데려가세요. 2처 사람과도 협력하시고요.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손을 써야 합니다. 가급적 죽이지는 말되, 그들이 겁을 먹어 우왕좌왕할 정도로만 만들어 주세요. 우리를 칠 생각을 못 하게 만드는 거죠.”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대인 곁에 있는 낭자는 정말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그러니 자주 뵈러 오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이군요. 오늘부터 내 안전은 그녀가 책임져 줄 테니 문제없을 거예요. 그러니 늘 조심하시고 복수 때문에 서두르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아직 그 대종사의 적수가 못 되거든요.”
그림자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축축이 젖은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림자가 사방팔방으로 동이성 검객들을 처리하고 다니게 되면 범한에게는 신변 안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범한은 해당타타가 나타나자 행동 개시에 들어갈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의 행적이 노출될까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
범한이 이렇게 한 건 첫째, 해당타타의 위세에 기대면 자신이 호기롭게 그림자에게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어서였다.
둘째, 그림자가 떠났어도 해당타타가 왔으니 범한 곁에는 여전히 9등급의 강자가 있는 셈이었다. 그녀와 호위 무사들이 함께 움직이면 신변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해당타타가 옆에 있으면 누구든 자신을 건드리려 할 때 북제라는 강대국과 대머리 고하 대종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해당타타는 그림자보다 훨씬 귀엽지 않은가. 같이 수다도 떨고 입씨름도 하고, 저녁에는 친구처럼 이것저것을 써서 보여 주며 같이 공부도 할 수 있고.
범한은 어느새 염치없게 대놓고 웃기 시작했다.
371화
한밤의 팽씨 장원은 고요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호는 물살이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고 정원의 등불은 깜빡이고 있었다. 팽씨 장원은 높은 담벼락으로 막혀 있는 데다가 뒷산 역시 이곳 소유여서 여기에서는 누군가에게 발각될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다.
강남까지 천 리 길을 온 사람들은 피로했다. 그런데 여기 항주성에서 제대로 포식까지 하자 식곤증이 밀려와 더 빨리 잠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등불도 하나둘 꺼지면서 어둠이 깊어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콤한 꿈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이 순간 불빛을 반짝이고 있는 건 후원에 있는 방 두 칸뿐이었다. 하나는 침소였고 다른 하나는 서재였다.
침소에서 사사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어떻게든 사주에서 찢긴 범한의 소맷단을 꿰매며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재에서는 범한이 책상 앞에 앉아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책 위에 작은 수첩을 같은 걸 얹고 읽는 중이었다. 해당타타는 범한과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었으며 역시 엄숙한 표정으로 작은 책자를 들고 보고 있었다. 책자 위의 글자가 새로 쓴 것인 걸 보니 분명 누군가가 방금 전 써놓은 내용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 한동안 씁쓸한 미소를 교환했다.
결국에는 범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해탕타타, 무언가 조금 상충되는 것 같아요.”
해당타타 낭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 두 비급은 완전히 상반되어서 연마 자체를 할 수 없어요.”
지금 두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책자는 이 세계에서 정말로 희귀한 것이었다. 범한이 보고 있는 건 북제 천일도의 무상심법(無上心法)이었고 해당타타가 보고 있는 건 범한이 기억하고 있던 걸 적은 이름 없는 무공 비급이었다.
천일도 심법은 고하가 신묘 앞 푸른 돌계단에서 수개월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얻은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비록 범한은 동굴에서 소은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소문이 황당한 거짓말이란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심법은 천하의 무공 수련자들이라면 기꺼이 배우고 싶어 하는 무공 비급이었다. 범한의 이름 없는 무공 비급은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내공 고수인 스승 없이도 한 젊은이를 지금의 9등급 고수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공의 기세가 사납기로는 세상 으뜸으로 해당타타도 그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공유하는 데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해당타타도 허심탄회하게 천일도 심법을 보여 주었으니 범한도 자신의 보물을 기꺼이 보여 준 것이었다.
젊은 사람 둘이 한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한참을 연구하다 보니 드디어 다른 사람도 군침을 흘릴 만한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두 무공 비급은 서로 극과 극으로 풍격이 완전히 달랐고 은근히 상충했다.
범한의 패도의 무공 비급은 직설적이고 난폭한 편으로 내공을 단련해 경맥이라는 기본기를 튼튼히 하는 것이었다. 가장 어려운 건 입문을 위한 첫 관문이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생긴 강대한 정기가 허리 뒤쪽 설산에서 갑자기 일어나 수련자의 경맥에 강한 진동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틀 잡기’라고 불렀다.
해당타타는 천일도 심법을 십여 년 연마해 온 터라 경맥이 일찌감치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어찌 되었든 기존 공력을 흩어 버리고 다시 수련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해당타타는 범한과 같을 수 없었다. 다시 아기 때로 돌아가 체내에 아직 남아 있는 선천적 기운에 기대 억지로 버티는 일도 겪지 않았고, 전생에 겪었던 중증 근무력증이라는 소중한 정신적 경험도 없었다. 그러니 해당타타는 이름 없는 무공 비결을 연마하려 해도 첫 번째 관문조차 넘을 수 없었다.
범한 입장에서도 천일도 심법은 그림의 떡이었다. 천일도 심법은 구결(口訣)은 법칙이 있으면서 자연스러웠다. 체내와 체외의 정기가 서로 순응하도록 되어 있어 확실히 현묘했다. 특히 체내에서 정기가 흐르는 길과 그 방식이 차츰 심후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라 대단히 유순했다.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도록 하다 보니 윤택한 기운으로 정신을 수련하도록 되어 있었다.
범한이 어쩌다 익히게 된 패도의 비급은 요 십여 년 동안 범한의 내부 경맥을 평범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지경까지 확대해 놓았다. 이에 범한도 정신을 집중해 물방울을 만들어 낼 수는 있었지만 이는 이슬처럼 경맥에 달라붙어 있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 이슬을 졸졸 흐르는 물로 만들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많이 봐둬요. 이것저것 많이 봐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테니까요.”
해당타타가 작은 소리로 한 말이었다. 그녀는 범한과 동년배로 젊은이 중에서는 최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미 9등급 상의 경계에 들어섰음에도 무공에서 최정점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한 상태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도 그녀는 그 문턱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해당타타는 범한의 도움을 받으면 무언가 득이 되는 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범한이 익힌 무공 비급이 의외로 변태적이라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대꾸했다.
“내가 익힌 무공은 봐둬도 해당타타에게는 쓸모없을 거예요. 다시 경맥을 뚫어야 하니까요. 고통스러운 건 차치하고서라도 너무 위험해요. 그러니 절대 익히지 말아요.”
해당타타가 눈썹을 씰룩이고는 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무턱대고 용감하기만 한 경솔한 여자는 아니에요.”
그리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안지가 익힌 비급은 정말 이상해요. 세상에 자신의 몸을 다치게 하는 이상한 무공 심법이라뇨! 당신 같은 괴물이니까 연마할 수 있는 거겠죠.”
과거 오죽 아저씨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난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거야 모르는 겁니다. 내가 알기로는 예전에 연마에 성공한 사람이 있어요.”
“이 이상한 심법을 누가 준 거예요?”
해당타타가 범한을 떠보듯이 물었다. 물론 범한이 순순히 대답해 줄 거란 희망은 전혀 없었다.
한데 범한은 의외로 솔직히 말해 주었다.
“어머니께서 남겨 주신 거예요.”
“섭가 여주인께서요?”
“그래요.”
해당타타가 어색하게 웃었다.
“세상 사람들은 진귀한 건 숨겨 놓고 밖으로 내보이지 않아요. 당신과 나같이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진리가 담긴 비급 두 권이 이 자리에 나란히 있는 것도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고요. 한데 안타깝게도······ 결말이 나는 게 없군요.”
범한의 얼굴도 살짝 암담해져 있었다. 예부터 지금까지 사문의 이익은 제쳐 두고 각자가 지닌 가장 귀한 걸 용감하게 내보일 수 있는 이는 자신과 해당타타라는 이 괴상한 청춘 남녀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 일은 이 세계에서 지식 공유라는 역사에 남을 아름다운 장면이었는데. 한데······.
범한이 책장 하나를 넘기더니 돌연 눈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리 한탄하지 말자고요. 여기에 ‘쌍수(雙修)’라고 두 가지 무공을 함께 연마하는 방법이 쓰여 있어요!”
* * *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성명쌍수(性命雙手). 성명이란 무엇일까? 본래 타고난 것을 명(命)이라 부르고 자신을 거느리고 이끄는 것을 성(性)이라 한다. 정신을 성이라 하고 마음을 명이라고 한다. 정신이 내적으로 굳건하지 않으면 성은 마음에 의해 흔들린다. 마음이 내적으로 굳건하지 않으면 명은 주변의 말들과 현상들에 현혹된다. 무정하지 않고, 교화되지 않고, 떠나지만 돌아오는 것을 일러 반(反)이라 하며······. 여기 위에 다 쓰여 있네요. 그런데 어떻게 익힐 셈이에요? 하루 종일 관아를 돌아볼 텐데 말들과 현상에 현혹되지 않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먼 곳에 두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면 돼요.”
범한이 도연명 시에 있는 구절을 인용해 답했다.
해당타타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이내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가장 큰 문제 하나가 남았어요. 당신 경맥을 다시 구축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이미 체내에 있는 정기와 새로 만들어진 정기가 공존할 수 없어요. 설마 기존에 있던 강력한 진기를 경맥 안에서 산산조각 낸 후 처음부터 다시 연마할 생각인 건 아니겠죠?”
범한은 방금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일도 심법 중 몇 가지 난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해당타타는 숨김없이 하나씩 답을 해주었다. 해당타타는 자신이 이 패도의 무공을 익힐 수는 없지만 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천일도 후배에게 전수해 주겠노라 생각했다. 이는 자국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으므로 그녀는 열심히 읽어 두었다. 그러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물어보았다. 범한도 해당타타와 마찬가지로 숨김없이 모두 알려 주었다.
서재에 붉은 초가 타오르고 하늘에 별빛이 가득한 가운데, 두 친구의 즐거움은 더해져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무공 비급들 안에 담긴 현묘한 경지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으로 내용을 음미하느라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서로의 등에 기대어 책자 안에 담긴 내용을 빠르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등을 기대고 있던 범한이 갑자기 느릿느릿하게 입을 뗐다.
“사실······ 현공 사당에서 자객을 만난 후 정기가 경맥 안에서 폭발해 버렸어요. 그리고 체내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해당타타는 아직 범한의 등에 기대어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어깨가 살며시 떨리더니 잠시 후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이제야 털어놓는군요.”
세상일은 항상 오묘하게 돌아간다. 원칙대로라면 범한은 경맥을 훼손하면서까지 천일도 심법을 다시 배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경맥은 정기가 줄줄 새어 나가는 지경이 되어 있어 재건이 필요한 상태였다. 한편 해당타타는 범한의 비급을 가지고 득을 볼 게 전혀 없었다. 그러니 크게 이득을 본 건 범한밖에 없었다. 범한은 원래는 계속 해당타타를 속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녀와 등을 맞대고 있다 보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고, 이에 몇 차례 고민을 한 끝에 자연스레 털어놓아 버렸다.
범한이 몸을 돌리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이어 갔다.
“해당타타를 계속 속일 수는 없었을걸요. 더군다나 내 신분이 북제에까지 알려졌을 때 해당타타는 이 무공 심법을 가지고 남하하고 있었을 텐데······ 고하 국사를 속인 거겠죠?”
해당타타가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범한은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경계심이 들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죠?”
해당타타가 입고 있는 솜저고리의 꽃무늬가 은근한 노란 불빛 아래에서 그림 속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간단해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감이 왔거든요. 별일 없었다면 당신이 아무리 무뢰한이라도 내게 심법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지 않았겠죠. 바보라도 알아챘을걸요. 그런데 그건 일국의 비밀이라 당신에게 줄 수는 없어요. 안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연해 내가 도와줘야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 협약을 이행할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잖아요.”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진 범한이 물었다.
“그래서 지금 와서 어쩌라고요? 나는 원래 당신이 준 심법을 익힐 수 없었어요. 그냥 때마침 경맥을 다쳐서 천일도 심법으로 복원할 수 있게 된 거라고요. 내가 준 건······ 해당타타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을걸요.”
해당타타가 차분하게 맞받아쳤다.
“내게는 소용없겠죠. 그래도 후세에게는 쓸모가 있어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 줘도 군말 없을 거라 믿어요.”
“당신의 후세라면······ 어떻게든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게 되지 않을까요?”
맺혔던 응어리가 가셨는지 범한이 큰 소리로 웃었다. 말싸움에서 해당타타 낭자를 이겨서였다.
해당타타는 방금 상스러운 농담을 못 들은 척하며 싸늘하게 받아쳤다.
“내게 충분히 성의를 보였으니 꼬치꼬치 따지지는 않을래요.”
범한이 웃으며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손에 든 책자를 휘휘 흔들며 파렴치하게 말했다.
“물건이 이미 내 손에 들어왔으니 지금 와서 후회해도 늦었을걸요?”
해당타타는 때마침 몸을 돌리던 중이라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 곁으로 다가갔다. 범한은 해당타타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나 책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372화
해당타타는 조금 심란한 마음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에 큰 권력도 쥐고 문무도 겸비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왜 나하고 있을 때만 이렇게 시정잡배 같은 무뢰한이 되는 거야?’
이에 해당타타가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몇 군데 고쳐 줄게요. 스승님께서 손을 써두셨어요. 그대로 익히고 바보가 되면 나는 책임 안 질 거예요.”
범한은 깜짝 놀라 서책을 꺼내 주고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아까 심법을 읽을 때 막히는 구절을 발견 못 해서인지 고하의 경계에 절로 탄복했다. 가짜도 이리 완벽하게 만들어 내다니. 하지만 이내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그 까까머리가 독하긴 독하다고 속으로 욕했다. 그리고 아까 ‘진정성 보이기’라는 최고의 묘수를 동원해 고하 여제자의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이유도 모르고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 처음부터 나를 바보로 만들 작정이었던 거예요?”
범한이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격노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여전히 차분했다.
“안지와 내가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황당한 거예요. 외부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천하가 놀랄 텐데 당연히 신중해야지요! 관건은 당신과 내가 서로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거지만요. 조금이라도 속이는 게 있다면 나도 섣불리 당신을 믿어서는 안 되잖아요.”
“조금 전에 정기를 전부 잃어버렸다고 털어놓지 않았다면 바보가 되더라도 그건 자초한 게 되는 거죠.”
범한은 경악했지만 착하게 행동했더니 좋은 보답을 받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해당타타가 중요 구절의 몇 글자를 고치자 범한은 그것을 다시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아주 미묘하게 아름다웠던 그림이 단청 장인이 중요한 몇 군데에 덧칠을 하자 아까보다 훨씬 더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며 온갖 생명체들이 생기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천일도 무상심법의 진면목을 보게 된 범한은 가슴이 떨려 왔다. 이대로 수행을 해나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천인합일의 도를 행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구멍이 숭숭 뚫린 체내 경맥도 자연스레 낫게 될 것이었다. 자신에게서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던 경지가 드디어 돌아올 수 있게 되자 범한은 감개무량했다. 그리고 순간 마음이 움직여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따가 그림 한 장 그려 줄게요.”
범한이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오지랖 넓게도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낭자에게 패도 비급을 주었지만 그림에 나오는 정기의 길을 따라가며 연마해야 해요. 대충 감으로 연마하다가는 십여 군데가 넘는 곳에서 피를 쏟을 거예요.”
해당타타가 멍하니 범한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 천천히 입을 뗐다.
“언제쯤 이 세상 인재들이 서로 속이는 짓을 덜할까요? 최소한 당신과 나 사이만큼은 말이지요.”
범한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열심히 배우리다. 물론 낭자도 같이 배워야 해요.”
* * *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난처한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일 수도. 해당타타가 먼저 나지막하게 말했다.
“얼마나 다쳤는지 봐줄게요.”
범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다. 수술은 섬세하게 잘 마쳤지만 가끔은 제삼자가 봐줬을 때 더 정확히 진단되기 때문이다. 특히 해당타타처럼 상급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더 쉽게 문제점을 발견하고 또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줄 수 있다.
해당타타가 범한 곁으로 다가갔다. 한데 자세를 잡고 기를 끌어 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범한의 등에 있는 유문혈에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가져다 댄 게 다였다.
서재 안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고 책상 위에 있던 촛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공기 중에 갑자기 부드러운 힘의 파동이 나타났다.
해당타타는 두 눈을 감고 자기 체내에 있는 정기를 조심스레 범한의 몸 안으로 주입해 그의 상처를 살폈다.
그 순간 주변 환경이 갑자기 안정을 되찾았다. 바람도 한 점 불지 않았고 촛불도 꼿꼿이 서 있었다. 공기가 응고되어 버린 것만 같았지만 그렇다고 진득한 느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청량했다.
9등급 상인 강자의 몸에서 정기가 밖으로 흘러나오자 주변 환경이 순식간에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가 되었다. 천일도 문파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기운은 과연 신묘함 그 자체였다.
한참 후 눈을 감고 있던 해당타타의 이맛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한 상황과 맞닥뜨린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범한은 이상한 건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넘쳐 편안하다는 느낌뿐. 맑은 기운이 자신의 허리 뒤쪽에서 흩어지더니 빠른 속도로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따뜻한 물이 담긴 목통 안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랄까. 하와이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온몸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 곧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뒤에 있던 낭자가 작게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범한은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은 상태에서 하품을 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들면 안 돼요.”
“알았어요. 천일도는 과연 대단하네요. 병 치료를 하면서 대화까지 가능하다니 말이죠.”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치료해 주는 거라면 그냥 매일 다칠까 봐요. 마사지받는 것보다 훨씬 편하네요.”
“입 좀 다물어 줄래요?”
해당타타가 평온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갑자기 힘이 들어갈 수 있어요.”
해당타타가 위협하는데도 범한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무례하게 한마디 던졌다.
“설마 자기 남편을 죽일 셈이에요?”
* * *
끄응, 하는 소리가 동시에 두 사람 입에서 흘러나왔다. 서재 공기가 갑자기 폭발하는 것 같더니 무수한 정기가 소용돌이가 되어 체내에서 흘러나와 잠시 후 사라졌다. 그런데 전임 재상 임약보의 소장용 서적 사이로 정기가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책이며 종이가 허공에 날렸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범한과 해당타타는 모두 안전했다. 하지만 깜짝 놀라 바닥에 흩어진 종이 더미 위에 털썩 주저앉은 범한은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낭자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죽이려고 했던 거예요?”
해당타타는 범한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화를 억누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내 마음을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고요.”
범한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욕을 퍼부었다.
‘진작 제대로 말해 줬어야죠! 나는 당신이 치료하는 동안 재밌게 대화하면 좋아할 줄 알았다고요!’
해당타타가 살짝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범한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정기가 장기로 흩어지기는 했지만 당신 설산에 쌓여 있는 정기는······ 여전히 웅장했어요. 더군다나 전에 나와 겨뤘을 때보다 더 사나워졌고요. 지금 정기를 순환시킬 경맥이 없어서 계속 쌓이기만 하는 중이에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제때 와서 다행이네요. 반년 정도 늦게 왔다면 설산과 명문이 폭발해서 정말로 끝장났을 테니까요.”
지금껏 범한에게는 스승이 둘 있었다. 하나는 오죽 아저씨고 다른 하나는 비개였다. 한 사람은 무채 써는 법을 가르쳤고 다른 한 사람은 독약을 만드는 걸 가르쳤다. 정기 수행은 줄곧 독학으로 해왔다. 그러니 정기 연마와 관련한 세부적인 지식은 정파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모자랐다. 이에 범한은 정작 자기에게 닥친 최대 위험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해당타타의 말을 듣고는 자신이 줄곧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두려움이 일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현공 사당 사건이 있은 후 수련을 멈췄어요. 그런데 왜 설산에 정기가 쌓이는 거죠?”
해당타타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대답해 주었다.
“아마도 혼자 수행을 해오느라 자연스레 습관으로 굳어져 그럴 거예요. 그래서 잠잘 때도······.”
범한이 오른쪽 팔을 들어 해당타타의 말을 끊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서였군.”
범한에게 명상과 수면은 어려서부터 몸에 익은 여가 생활이었다. 다른 수행자였다면 분명 그런 그를 흠모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그게 오히려 이런 험악한 지경을 초래한 원흉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범한이 음울한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도 비개 스승님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데 홍 태감은 알아챘단 건가?”
“네?”
범한이 어떤 높은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해당타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고생했어요.”
서재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 종이가 날리고 있었다. 범한은 종들을 불러 치우라고 하기가 뭐해 해당타타와 함께 잠시 정리에 들어갔다. 진귀한 심법이 적힌 책자가 각자의 품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종이들은 그냥 무시했다.
“내일부터 연마할 거예요.”
범한이 간절함을 담아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일에서는 내가 득을 많이 봤어요. 번거롭겠지만 해당타타가 이번 달 동안은 나를 좀 보호해 줬으면 좋겠어요.”
해당타타는 잠시 호위 무사가 되어 달라는 범한의 요청이 크게 거슬리지 않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안지, 사실대로 말해 줘요. 내 사형께서 상경 서산 절벽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치셨는데, 당신 맞죠?”
범한이 잠시 침묵했다. 해당타타가 드디어 자기 체내에 있는 포악한 정기와 랑도가 경험한 정기가 매우 유사하다는 걸 알아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은 소은과 신묘와 관련되어 있어서 너무나도 큰 사안이었다. 이에 한참 후 범한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날 아침에 당신이 나를 사절단 숙소로 찾아왔었잖아요. 그때 뭔가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영원히 인정 못 하는 게 있다는 것도 알 거예요.”
“스승님께서 무언가 눈치채신 것 같아요.”
해당타타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과거 당신 어머니께서 그분께 은혜를 베푸셨다고 하셨어요.”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가짜 심법을 줘놓고도 은혜를 갚는 거랍니까?”
“아까 줬던 심법이 가짜이기는 해도 나쁠 건 없었어요. 더군다나 스승님께는 당신이 경국 황제······ 아들인 걸 아신 후 부득이하게 내리신 결단이거든요.”
해당타타가 정색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심법은 우리 문파 내부에서도 최고의 비급이에요. 그러니 범한 대인, 부디 조심해서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이따가 그거 그냥 들고 가요. 없애 버리든 말든 나는 상관없어요. 이미 전부 다 외워 뒀거든요.”
상대방의 변태 같은 기억력에 놀란 해당타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괴물 놈, 대체 어렸을 때 누구한테 교육을 받은 거야?’
이렇게 딴생각을 하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해당타타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스승님께 들었는데 당신 곁에 눈먼 대사님이 계시다던데요. 제가 한번 만나 뵙고 인사라도 드릴 수 있을까요?”
해당타타는 무공에 천재적 재능을 지닌 자였다. 그러니 스승인 고하 종사를 다치게 한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맹인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였다. 그러니 방금 요청은 순수하게 후배로서 오죽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르침을 구하고 싶어 꺼낸 것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보니 고하 국사 앞에서는 정말로 비밀이란 게 있을 수 없군요. 한데 어쩌죠? 한동안은 아저씨를 만나 뵐 수 없어요. 요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섭류운 흉내를 내고 다니시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혼자서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다니시는 중이에요.”
해당타타는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말해 주었다.
“안지, 스승님께서 내게 확실히 말씀해 주신 건 아니지만 그분 말 속에 정보가 있었어요. 당신 어머니께서는 신묘와 관련된 분이실 거예요.”
고하가 해당타타와 대화를 나눌 때 이 일에 대해 명확히 언급한 건 없었다. 하지만 소은에 대해 언급하면서 실마리가 될 만한 것 몇 가지를 노출했었다. 그리고 총명한 해당타타는 그 안에서 일부 내용을 예측해 낸 것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딱 잘라 말했다.
“신묘는 너무 멀어요. 그러니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부터 먼저 논의합시다.”
해당타타는 살짝 화가 났다. 유난히 꼴불견인 범한의 품성이 맘에 들지 않아 싸늘하게 받아쳤다.
“세상의 어떤 일이요?”
범한이 껄껄껄 웃었다.
“예를 들어······ 타타, 올해 몇 살이에요? 우리가 안 지 꽤 됐는데. 서한도 여러 번 교환하고요. 그런데 이런 중요한 정보도 모르고 있었지 뭐예요.”
373화
경력 6년에는 연초부터 북제와 남제 두 나라에서 신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일단 날씨가 추운 탓에 논에 있는 곡식은 싹이 트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알곡이 두 배로 열리는 벼, 흰 물고기, 기린 같은 상서로운 징조를 암시하는 것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주에서 산을 깎을 때 동으로 만들어진 벽이 발견되었다. 사주에서는 하천 제방을 수리하던 백성들이 구름무늬를 가진 거대한 검은 거북이를 발견했고, 강남 논에서는 매와 붉은 기러기가 하늘 가득 나는 일이 일어났다.
동으로 된 벽이든, 구름무늬 거북이든, 매든 모두 상서로운 것임은 분명했다. 이에 각지 관원들은 속속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아첨을 해댔다. 하지만 경도에 있는 황제는 콧방귀가 뀌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상서롭다고 하는 후안무치한 풍조는 작년에 북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산에서 첫눈이 내린 후 어느 나무꾼이 흰 사슴, 흰 늑대, 흰 여우를 보았다며 나라에 길조가 들었다고 북제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린 것이 발단이었다.
4대 종사 중 하나인 고하는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 준 징조라고 했다. 각국의 군주가 나라를 잘 다스렸음을 하늘이 인정해 준 것으로 인간과 하늘의 마음이 합일된 현상이라고 했다. 이에 그는 다시 산을 열고 상경성 밖에 있는 한 사당에서 여자 제자 하나를 거두어들였다. 그 여자 제자는 바로 훗날 황궁으로 들어가게 될 사리리였다.
시간이 지나 이 풍조는 남쪽으로 내려왔고 경국 각지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경국 황제는 귀신 따위는 숭배하지 않는 강건한 인물인지라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다 흠천감 감정이 하늘을 관측할 때 ‘경성경운(景星慶雲)’을 보았다며 매우 신이 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경국 황제는 그제야 그 사건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상서로운 징조는 길조라고도 부르며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었다. 경문(經文)에는 하늘이 인간계 통치자에게 만족했을 때 보여 주는 작은 조화라고 주가 달려 있었다. 백성들은 길조가 하늘의 뜻이 전달된 것이라 믿고 있었다. 상서로운 징조는 그 종류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예를 들어 비와 바람이 순한 것, 알곡이 배로 생기는 벼가 나타난 것, 감천(甘泉)이라는 물이 솟는 것 등등이 있었다.
상서로운 징조는 모두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기린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모두 가서(嘉瑞)에 속했다. 이를 뺀 나머지의 등급을 매기면 각각 대서(大瑞), 상서(上瑞), 중서(中瑞), 하서(下瑞)였다.
흰 늑대, 흰 여우는 상서에 속했고 매, 붉은 기러기는 하서에 속했다. 흠천감은 이를 두고 크게 기뻐하며 ‘경성경운’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하늘에 신기한 구름이 나타났다는 의미였다. 이는 확실히 대서에 속하는 상서로운 징조였다. 더군다나 ‘경운’이라는 말에는 경국의 ‘경’ 자가 들어가 있으니 경국 황제는 조심하고 의심하려 했어도 점점 득의양양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황제도 사람인지라 이러한 아첨은 좋았던 것이다.
그러니 올해는 분명 비바람이 순한 한 해가 될 것이리라.
그렇다면 좋은 한 해가 되려면 당연히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될 터.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북제와 경국은 더욱 긴밀히 교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양국은 곧 국혼을 치를 예정이었다. 1 황자와 북제 큰 공주의 화촉동방이 임박해 오자 북제에서는 큰 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이번 북제 사절단 때문에 경국 사람들은 놀라움과 영광스러운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왜냐하면 이번 혼인의 증인으로 북제 국사 고하가 사절단과 함께 왔기 때문이었다.
고하 대종사가 천하에서 초월적인 지위를 지닐 수 있었던 건, 우선 무공의 최정상에 있는 4대 종사 중 한 사람이어서였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천일도가 천하 각지 사원과 세상을 주유하는 고행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였다. 신묘는 세상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암암리에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며, 고하는 무공 강자로서의 지위보다 신묘와 관련되었기에 더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번 일로 경국 사람들은 자랑스러워했지만 접대 관련 절차를 다시 짜야만 했다. 섭류운이 종적을 감춘지라 고하를 맞이해야 할 사람으로는 경국 황제 한 사람뿐이었다. 황제께 직접 나서 달라고 요청해야 했지만 경국의 홍려사 관원들에게는 그만한 담력이 없었다.
관원들이 우왕좌왕하자 결국에는 보다 못한 황태후가 직접 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녀는 과거 장묵한 대가에게 적용했던 규율을 적용했다. 즉 고하 대사를 황궁으로 초청해 황태후가 직접 맞이하기로 한 것이다.
한데 고하 국사는 경도에 도착한 후 황태후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경묘로 갔다. 자신의 신분에 맞게 처신을 한 것이었다.
고하는 어찌 되었든 대종사였다. 그러니 아무리 타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국 사람들은 그에게 그에 맞는 존경심을 표했다. 그런데 존경심을 넘어서서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이에 사람들은 ‘양국이 국혼을 치르는 게 대사이기는 하나 저 노인이 여기까지 올 일은 아니지 않은가?’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북제 사절단이 경도로 들어온 지 수일이 지났을 때 고하 국사는 직접 경국으로 온 진짜 이유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제 황제가 친히 국서를 보내서였다. 국서에서 북제 황제는 경국과 친선을 도모하길 바란다며 작년에 초안으로 정한 협정의 기한을 만년으로 연장했다. 그리고 양국이 상하를 따지지 말고 서로 형제로 부르며 우의를 다지고 대대손손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
중요한 협상 자리니만큼 고하가 직접 나서야 했다. 경국 황제는 북제 동업자가 보낸 서한을 손에 쥔 채 수일간 망설이다가 드디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쩌면 고하의 체면을 3할 정도 봐주었을지 모른다.
소식이 알려지자 천하가 기뻐했다. 경국 사람들은 무를 숭상했지만 평화롭고 태평한 날을 더 좋아했다. 다만 군 측에서는 은근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지금의 경국 조정은 천하 통일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맞았을 정도로 강성한데 종이 몇 장으로 자신들을 묶어 놓았다며 기분 나빠했다. 비록 불만의 정도는 심하지 않지만 씩씩거리기는 했다.
한데 진씨 가문의 군 측 우두머리만은 세상 돌아가는 판도를 분명히 보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최측근 몇몇에게 가끔씩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지금 북제의 회복세가 우리의 예측을 뛰어넘고 있네. 몇 년 지나면 군대로 그들을 이기기 쉽지 않을 걸세. 이 협정은 종이 몇 장에 불과한 것이니 때가 되면 찢어 버리게 될 거야. 우리 황제 폐하께서 과거에 그러신 적이 또 있지 않은가!”
한편 고하가 경도까지 온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이 일로 경도 관원과 백성들을 깜짝 놀랐다. 그가 상서의 외동딸, 즉 범씨 가문의 아가씨를 제자로 거두러 왔기 때문이었다.
고하 국사가 제시한 이유는 충분했다.
음양이 교합하는 날로부터 앞뒤 몇 달 동안 하늘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내려왔으니 이는 하늘의 어짊을 베풀어 주신 것이었다. 천일도는 천인합일의 도를 따르므로 하늘의 뜻에 따라 인간사의 일을 행해야 했다. 이에 인간 중에서 진기한 꽃인 자를 선택해 정성껏 길러 만백성에게 복을 주어야 했고 이것이야말로 정도(正道)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행동이었으므로 국경의 제한을 두지 않았다. 북제에서 상서로운 일이 있어 제자를 거두었으니, 남쪽 경도에서도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는 건 곧 이곳에서도 제자를 하나 더 거두어야 하는 뜻이었다.
그래서 고하는 자신이 친히 경도까지 온 것이라고 했다.
천일도 종사 고하가 다시 산을 열고 제자를 받은 일은 이미 작년부터 천하에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을 자국과는 관련 없는 것으로 여겼던 경국 사람들은 ‘천일도의 마지막 여자 제자가 경도에서 나올 줄 어찌 알았겠어?’ 하며 신기해했다.
그러고는 이내 ‘왜 범씨 가문의 아가씨일까?’라며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저 멀리 강남에 내려가 있는 범한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범한이 아무리 잘나간다 해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고하 국사를 사주할 능력까지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다.
고하는 제자 선택의 기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중을 들던 일부 내관들이 사람들에게 흘린 이야기는 있었다. 고하 국사가 경도로 여행을 왔다가 태의원 문 앞에서 머문 적이 있단다. 그때 그가 반나절 정도 가만히 있다가 얼굴에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는 “태의원의 어느 아낙의 심성이 선하고 온화하고 지혜가 남다르니 참으로 좋은 인재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날 범약약은 태의원에서 ‘실습’ 중이었다. 몇 달 동안 배운 간호 지식과 의료의 도를 바탕으로 태의원에 있는 위중한 환자를 세심히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환자를 돌보느라 입술은 말라 있었고 땀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해 고생이 말도 아니었다.
이 세계에는 ‘문무는 국경이 없다.’는 말이 있었다. 북제 장묵한 대가의 제자가 경국에서 높은 관리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북제 국사 고하가 경국까지 제자를 데리러 오자 경국 사람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큰 동요가 일기보다는 오히려 낙관적으로 보는 측면이 더 강했다.
그런데 고하가 제자를 거두는 건 원래 큰일이었다. 더군다나 높은 관료 집안의 아가씨를 데려가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녀의 집안 어르신께도 의견을 물어야 했다. 한데 이번 일은 감히 범건 선에서는 결정해서는 안 되는, 입궁해 황제 폐하의 명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
깊고 깊은 황궁 안에서 경국의 황제는 용상에 앉아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한마디 물었다.
“안지가 홍성이를 그리도 싫어하더냐?”
범건은 모골이 송연해져 어찌 답해야 할지 몰랐다.
황제의 눈에서 웃음기가 언뜻 비쳤다 사라졌지만 그는 범한이 손을 뻗고 있는 범위와 능력에 놀란 상태였다. 또한 고하가 해당타타라는 여인을 무척 아끼니 별로 걱정할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한을 강남으로 쫓아 버린 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터라 손을 내저어 허락을 해주었다.
1 황자가 혼례를 올리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무렵, 고하는 사절단은 내버려 둔 채 범약약만 데리고 경도에서 떠났다.
이렇게 되자 범씨 가문과 정왕가의 혼사는 무기한 연기되어 이제 파혼하는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정왕 세자 이홍성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갑자기 흠모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에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왕은 입궁해 한바탕 난리를 쳤고 황태후가 직접 나서서 달랜 후에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정왕은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에 왕부에서 부리는 일꾼과 병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평소 친하게 지낸 범건 상서의 집으로 쳐들어가 앞채 뒤채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때려 부수었다. 집 안을 온통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버린 건 물론이거니와 범건이 수년간 애지중지 보관해 온 골동품들까지 무수히 망가지자 여종들은 놀라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대미를 장식한 건 서둘러 돌아온 범건 상서의 눈을 향해 정왕야가 던진 사나운 주먹 한 방이었다. 범건 상서의 눈가에 시퍼렇게 멍이 들자 그제야 가슴속 독기가 조금 가셨는지 정왕은 일꾼과 병사들을 이끌고 거만하게 왕부로 돌아갔다.
* * *
강남 서호 주변에 봄이 찾아오고 실 같은 가랑비가 내렸다.
범한 일행이 항주성에서 머문 지도 근 한 달이 다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휴가를 보내고 있었지만 봄기운이 찾아온 강남에서 이렇게 죽치고 있는 건 다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그동안 감찰원의 주강남 지부는 전면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모든 일을 경도를 거쳐 처리하지 않고 서호 근처에 있는 장원으로 직접 전달했다.
이에 장원은 경도의 감찰원 본부 다음가는 감찰원 제2의 권력 중심이 되었다.
374화
강남로 관원의 상황, 명씨 가문 및 소금 상인들 간의 관계, 황실 금고의 최근 몇 개월에 걸친 동향, 이 모든 게 장원에 있는 4처 관원들의 취합을 거쳐 범한에게 보고되었다. 지리적 접근성이 높아지자 강남에 대한 감찰원 상층부의 통제력도 더 강력해졌다. 한데 명씨 가문은 작년 겨울부터 일찌감치 일 처리에 들어가 있었다. 더군다나 명씨 가문은 그 자체가 현지의 거대 토호인지라 집안사람들을 고용해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에 감찰원은 다양하게 첩자를 꽂아 놓지 못해 명씨 가문에서는 유용한 정보는 빼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한편 사주에 있는 강남 수채는 봄이 되자 범한이 생각지도 못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주도면밀하고 원대한 포부를 지녔던 하서비는 명씨 가문을 되찾기 위해 몇 년 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온 터였다. 이에 명씨 가문이 물건을 내보내는 통로에 대해 감찰원보다 훨씬 상세한 정보를 쥐고 있었다.
명씨 가문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소주성에서 한 차례 모임을 가졌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분명 항주에 있는 범한에게 대응하기 위해 만났을 텐데 너무나도 은밀한 모임이라 감찰원에서도 캐낸 정보가 없었다.
그래도 범한의 신분과 지위, 아울러 3 황자의 스승이란 사실을 더하면 명씨 가문뿐만 아니라 강남 관원들도 먼저 범한을 찾아와 건드릴 수는 없었다. 동이성의 운지란 일행의 경우, 원래는 명씨 가문의 후원자 역할 정도만 하고 있던 터라 범한이 인정사정없이 자신들을 쫓을지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당하는 중이었다.
신선일지라도 인간 세상에 혼자 기거한다면 오랫동안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무리의 신선들이 내려와 인간 세상에 섞여 지낸다면 자신들의 행적을 완전히 지우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과거 아무도 살지 않던 팽씨 장원에 갑자기 여러 사람이 나타나자 양식, 과일, 채소뿐만 아니라 높은 사람이 쓰는 일용품까지 모두 장원 안으로 사들여야 했다. 그러니 항주성에서 이들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금이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십여 일 후, 범한 제사가 항주에 있다는 소식이 전체 강남로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범한은 장원에 숨어 지내는 동안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 항주 지부가 한 차례 찾아왔지만 문 앞에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범한 제사가 아직 휴가 중이라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한이 이리도 오랫동안 조용히 있는 걸 보니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라고 추측했다. 한데 범한이 조용히 지내니 관료들과 강호 인사들도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수로를 따라 이동하는 선박으로 선물을 보내는 이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명씨 가문 사람들은 범한 제사 대인의 휴식을 방해할세라 서호 위쪽에 있는 다른 저택들로 이사를 했다.
서호 근처에 있는 장원은 고즈넉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 * *
호수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떠내려왔다. 서생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 둘이 뱃머리와 배 꼬리 부분에 앉아 있었고 가운데에는 낮은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 강남 지역의 술이 놓여 있어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두 사람은 바로 변장을 한 범한과 해당타타였다. 얼굴에 분칠까지 한 건 아니었고 범한이 손재주를 발휘해 눈썹 끝부분만 살짝 민 후 눈썹을 올려 그리기만 했다. 눈썹 모양만 바꾸었을 뿐인데 두 사람의 외모는 거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소 잘 알던 사람과 마주쳤는데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배는 서호의 어느 외진 곳으로 느릿느릿 향하고 있었다. 비가 그친 후라 호수 위 공기는 유난히 상쾌했다.
요 며칠 동안 범한은 해당타타와 호수로 배를 타러 나왔다. 왜냐하면 첫째, 이곳의 풍광이 마음에 들었다. 둘째, 범한이 천일도 심법을 배우기 위해 해당타타의 말을 따르는 중이었다. 해당타타는 항상 자연을 가까이해야 천지의 원기로 엉망이 된 체내 경맥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했다.
현묘한 말일 수 있겠지만 범한이 천일도 심법을 수련한 후부터는 더 이상 설산에 정기가 쌓이지 않았다. 대신 단전에 방울방울 맺힌 정기가 맑은 기운으로 그의 경맥 벽을 서서히 적셔, 마르고 파손된 경맥을 윤택하게 해주었다. 서호에 있다 보니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지척에 있었다. 살짝 차가운 호수 위에는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이 들어가 있었고, 옆쪽에 자리 잡은 산자락 숲에서는 파릇한 잎망울이 터지고 있었다. 그러니 범한의 천일도 심법수행은 꽤 빠른 진전을 보이는 중이었다.
범한은 해당타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에게는 정기 순환의 길이 일반 무공 수련자들보다 하나가 더 있었다. 공력을 몸속에서 순환시키고 왕복시키는 건 과거 많이 연습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고작 암벽을 탈 때만 사용한 방법이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범한 자신의 정신력과 천지와의 감응 정도가 꽤 좋았던 것이다.
범한은 눈을 감고 뱃머리에 누워 있었다. 오른손은 편안하게 뱃전에 올려 둔 상태라 손끝이 살짝 일렁이는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담담한 정기가 그의 손끝에서 서서히 흘러나와 호수와 접촉하더니 다시 얌전하게 손끝으로 흘러 들어갔다. 진기가 범한의 체내로 다시 들어가는 순간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던 호수에 잘게 물결이 일었다.
해당타타는 가볍게 노를 저으면서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로는 범한의 손끝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자기 앞에 있는 이 젊은이의 깨달음과 운은 참으로 보기 드문 경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만 보면 정기는 범한의 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고, 그때마다 자연의 숨결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 현상만 보면 분명 천일도 심법의 제3 단계에 들어선 것이었다. 제아무리 천재라 불려도 이 정도의 경지를 터득하기까지 해당타타는 무려 5년이나 걸렸다. 그런데 범한은······ 고작 십여 일 만에 가능했다.
물론 범한의 현 경지는 해당타타가 처음 입문했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터득하는 속도도 빠를 수밖에. 그래도 이렇게나 빨리 터득하자 지금 상황을 아직 이해할 수 없었던 해당타타는 범한이 두려워져 살짝 경계심이 생겼다. 범한이 남과 북의 양대 절대 무공 비급을 익힌 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어마어마한 권력을 쥐고 있고 천하 백성들에게 명망 높은 인물이 만일 장래에······ 나쁜 생각을 먹는다면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사실 범한이 무공을 터득하는 능력은 해당타타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런데도 천일도 심법을 이리도 순조롭게 연마할 수 있는 건 첫째, 해당타타가 곁에 있으면서 숨김없이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둘째, 범한이 어려서부터 정기를 충실히 쌓아 왔기 때문이다. 셋째, 앞서 언급했지만 범한은 정기를 몸 밖으로 내보냈다가 거둬들이는 데 숙련되어 있었다. 그의 인색한 성품이 천일도 수행 방식과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해당타타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범한이 명상에서 깨어났다. 서서히 두 눈을 뜨고는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걱정 말아요. 내가 정말로 약속을 깰 생각이었다면 타타가 강남에 올 때 데려온 북제 사람이 그 많은 것들과 접촉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예요.”
범한과 해당타타의 협의는, 더 정확히 말하면 범한과 북제 황실과의 협의에는 장 공주를 무너뜨린 후에도 황실 금고가 북쪽으로 밀수출하는 화물의 양을 줄이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품질과 등급은 오히려 더 높이기로 되어 있었다. 심지어 국경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되는 물건에 대해서도 범한은 북제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주었다.
묘하게도 해당타타가 경국 강남까지 데려온 사람은 북제 조정의 관원이었다. 호부의 주사로에 있으면서 공부(工部)의 사우(司虞)라는 관직도 겸하고 있었다. 과거 병부에 있는 동안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장부도 볼 줄 알았고 병기의 구조도 잘 알고 있었으며 화물 검사에 정통해 있었다. 해당타타가 그를 데려온 건 경국의 황실 금고와의 거래를 맡기기 위해서였으며 그야말로 적임자를 고른 것이었다.
“나는 약속을 대단히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범한이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상경성에서 당신들에게 한 약속은 꼭 지킬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해당타타가 미소 짓고는 쥐고 있던 노를 놓았다. 그리고 작은 배가 마음껏 호수를 떠다니도록 내버려 둔 채 말을 이어 갔다.
“벌써 소식을 들었겠군요. 스승님께서 범 낭자를 데리고 경도에서 떠나셨어요.”
그러고는 범한이 대답하기를 기다려 주지 않고 바로 자기가 하려던 말을 이어서 했다.
“범사철은 최씨 가문이 우리 조정에 남겨 두었던 사업을 접수하기 시작했어요. 이미 당신도 알다시피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그것들은 전부 국고로 회수되었을 거예요. 그러면 안지 당신의 개인적인 재산이 될 수 없었겠죠.”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씨 가문 사람은 본래 경국 백성이에요. 그들이 잘못을 저질러 체포되기는 했어도 우리 경국에서 데리고 있는 게 맞아요.”
해당타타는 범한이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더군다나 나는 윗분의 말씀을 따라 당신에게 이 심법을 전해 줬어요. 협의의 첫 내용은 내가 봤을 때는 양쪽에게 까다로울 건 없어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에게 이로운 거래이기 때문이었다. 단지 범한이 왜 이렇게 북제 사람을 신뢰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해당타타는 무언가가 정말 이해가 안 되었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지, 누이와 아우를 모두 상경으로 보냈는데 우연히 그렇게 된 거란 말은 하지 말아 줘요. 대체 왜 그런 거예요?”
상대방이 드디어 무언가를 알아차리자 범한은 잠시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타국 사람에게는 자신이 걱정하고 있는 걸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범한은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대대적으로 판을 다시 짜시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자신의 후임자들의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범한이 손을 내저었다.
“왜 그러긴요. 어찌 되었든 우리들의 협의가 계속 이행되기만 하면 해당타타뿐만 아니라 그분도······ 그러니까 북제 황제 폐하께서도 우리 가족을 돌봐 주실 거라 믿어서죠.”
해당타타가 눈썹을 씰룩였다.
“만약 실패해서 그 일이 탄로 난다면 무슨 낯으로 경국 사람들을 대하려고 그래요?”
“무슨 낯으로 대하냐고요? 체면 같은 거 생각 안 했는데.”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 비록 스스로를 매국노라고 여기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은 나를 경국에서 제일 큰 변절자로 생각하겠죠.”
해당타타는 범한의 성정이 솔직한 건달 같다고 느꼈지만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자 범한도 따라 웃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나는 그냥 국제주의자가 되겠다는 겁니다.”
* * *
“경국 각지에서 나타난 상서로운 일들은 안지, 당신이 손을 써둔 거지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범한은 부인하지 않았다. 오주, 사주 등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감찰원에서 한 것이었다. 흠천감의 관측과 경성경운과 관련해서는······. 2 황자 사람이었던 전임 흠천감은 달빛도 없이 바람만 세차게 불던 날 밤에 감찰원이 함께 차나 마시자며 데려간 뒤로 아직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흠천감은 범한과 가까운 이가 맡고 있었다.
범한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북제 황제가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을 추진하려면 3백 냥은 거뜬히 들 테고 경국 설산에는 야생 동물이 적었다. 그러니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다고 하면 해당타타의 스승이 넘어올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또 북제 황제가 보내온 밀서에서는 자신의 계획에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는 느낌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다.
“경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해당타타가 잠시 심사숙고하고는 신중을 기하며 말했다.
“그동안 외부에 자신을 거의 드러내시지는 않았지만 세인들은 그분께서 타고난 인재인 걸 다 알고 있어요. 특히 이번에 스승님이 당신의 누이를 마지막 제자로 거둔 일 때문에 뭔가를 눈치채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어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들을 가지고 황제 폐하를 속일 수는 없어요. 나는 신하라 더더욱 그럴 수 없고요. 하여 관련 사항은 일찌감치 비밀 상주문을 올려 아뢰었어요.”
해당타타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생각보다 솔직하게 일을 처리하는군요. 그러면 말해 주지 않는 건 대체 어떤 거예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를테면 황실 금고의 은전을 내 집으로 옮기는 것 같은 일이요. 이런 건 황제 폐하께도 아뢰기 난처한 일이랍니다.”
작은 배 위가 다시 고요 속에 빠져들자 호수도 고요해졌다. 범한은 살짝 수심에 잠겨 있는 해당타타를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후 그녀의 마음에 작은 변화가 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처음 조정과 관련해 일을 하다 보니 심경에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375화
사실 범한은 해당타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은근히 불안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진정성 보이기’라는 원칙을 지키고 있던 터라 해당타타와 있을 때는 최대한 흉금을 털어놓고 진심으로 대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게 말하기도 했다. 범한이 이렇게 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해당타타라는 친구를 정말 소중히 여겨서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여인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어 자신의 강력한 조력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서였다. 어찌 되었든 처음에는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이기에 범한은 해당타타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호숫가에 다급하게 말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보니 준마 한 필이 호숫가에 깔린 석판 길을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여러 날 동안 감히 관원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팽씨 장원 입구에 당당하게 서버렸다. 낯익은 사람인 것 같은 관원은 말에서 내리더니 몹시 화를 내며 문을 두드려 댔다.
배에서 내려 호수 기슭으로 올라온 범한은 궁금한 마음을 안고 장원을 향해 걸어갔다. 해당타타는 범한 뒤를 따르다가 호숫가에서 낚시 중인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범한은 인사를 나눌 마음이 없어 저 멀리 보이는 준마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을 타고 온 관원은 이미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타고 온 말을 끈으로 묶어 두지도 않고 밖에 내버려 둔 걸 보니 급하긴 급했나 보다.
말은 돌계단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콧김을 뿜으며 바닥에 난 파릇한 풀들의 향을 맡고 있었다. 풀을 먹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인데 안타깝게도 입에 채운 마구를 벗겨 주지 않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대인.”
문 앞에 있던 호위 무사가 범한에게 인사를 했다. 수하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잠시 상황 설명을 하려 하자 범한은 손을 내저어 저지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자신을 찾아온 관원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1년 동안 못 봤는데 성정은 그대로인 걸 보니 살짝 짜증이 밀려들었다.
장원 깊은 곳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전해져 왔다. 가림벽을 돌자 소리가 갑자기 더 크게 들려왔다. 온통 질책하는 말들로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실망감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를 향해 자조적으로 웃어 보였다.
“별일 아니에요. 내 체면을 봐서 들어오지 말아 줘요.”
해당타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쪽으로 난 정원과 이어진 작은 길로 들어갔다.
범한은 옷을 고쳐 입고는 한동안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인내심을 발휘해 들어 보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두 번 기침을 한 후, 스승의 위엄을 한껏 담아 뒷짐을 진 자세로 높은 문턱을 넘어 대청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청에는 두 사람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마치 닭 두 마리가 꼿꼿하게 서서 대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은 사천립이었고 다른 한쪽은 오랜만에 보는 양만리였다.
작년 춘시에서 양만리는 3갑(三甲: 3등) 안에 들었다. 모두 그를 범한의 직계 일파로 여기는 터라 이부(吏部) 주사가 그를 강남 지역의 모 부유한 현의 지현(知縣)이라는, 수입을 짭짤하게 올릴 수 있는 자리에 바로 임명해 버렸다. 이렇게 된 건 이부 상서 안행서의 훼방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양만리는 범씨 가문의 위엄에 기대어 곧장 주동(州同)이나 운판(運判) 자리에 갈 수도 있었다.
양만리는 스승 범한을 위해서라도 분발했다. 열심히 정사를 펼쳐 백성을 돌보고 꾸준히 학문을 닦았다. 그리하여 겨우 1년 만에 그가 통치하는 지역은 질서정연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백성들은 길가에 떨어진 물건은 줍지도 않았고, 한밤중에는 문을 닫지 않아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고을이 되었다. 가을에는 이부로부터 청렴하고 공평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리사로부터는 ‘상하(上下)’라는 심사 등급을 받았다. 비록 연한이 차지 않아 진급은 할 수 없었지만 그는 현재 당당한 6품 관원이었다.
한편 범한 문하생 4인방 중 후계상과 성가림은 현재 각각 교동로와 남방에서 관리로 지내고 있으며 들리는 바에 따르면 매우 괜찮은 관리였다.
범한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서로 다투고 있는 사천립과 양만리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양만리의 기세가 사천립을 압도하고 있었다. 잠시 들어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아 범한은 소리 내어 싸늘하게 웃었다.
양만리가 고개를 돌렸다. 범한이 보이자 잠시 멍하니 주춤거리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범한의 예상과 달리 바로 몸을 돌리고는 계속 사천립을 공격했다.
“천립 형님, 벼슬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스승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이 모자란 게 있으면 채워 주고 힘써 일하는 것도 만백성들을 위한 일이니까요. 하나 지금 스승님께서는 분명 잘못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곁에 있으면서도 일깨워 드리지 않는 겁니까? 제자 된 도리로 우리가 간언과 직언을 하는 게 정도입니다. 그런데 강남 일대를 돌면서 왜 이리 심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입니까? 모두 범한 제사 대인이 능력 있는 관리라고 칭송하는데 어찌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아직 모르실 수가 있냐고요. 은전을 그리 독하고 광명정대하게 걷어 들이고 계시는데 말이죠!”
양만리는 분명 반어법으로 말하는 중이었다. 그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큰 강이요? 제가 보기에는 은전 깔린 강이니 은강이라 불러야겠더군요. 뱃길을 지나면서 은전을 싹싹 쓸어 담고 있는데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뭍을 밟지도 않고 말입니다!”
양만리는 갈수록 더 심하게 화를 냈다. 급기야는 소맷자락을 내젓기까지 했다.
“관리로 임명되었으면 그 지역민을 위해 일해야죠. 작년에 스승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서한에 좋은 관리가 되고 좋은 사람이 되라 하셨거늘······ 한데······ 한데 그 좋은 관리란 게 그런 식으로 하는 거요? 나는······ 이제 사람 볼 낯도 없다고요! 사천립! 당신은 날 너무 실망시켰어! 이런 부패한 벌레! 앞잡이 같으니!”
부패한 벌레와 앞잡이라는 말에 사천립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요 어린놈은 청렴한 관리가 돼 행복에 겨운 상태니 경도에서 기생집 주인 노릇을 하느라 이 몸께서 얼마나 힘든지 알 턱이 없겠지. 앞잡이라고? 지금 스승님께서 백성들의 골수나 빼먹는 호랑이라고 욕했다 이거지! 나 원 참, 양만리 이놈 관리 된 지도 얼마 안 됐으면서 간덩이가 부었군!’
순간 피가 솟구친 사천립이 반격에 나섰다.
“너는 백성의 고통도 모르는 궁상맞은 책벌레 아니더냐! 스승님께서 경도에 계시지 않았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듯싶으냐? 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아!”
양만리가 얼굴을 치켜들고는 도도하면서도 침통하게 말했다.
“내 비록 일개 현이나 다스리지만 1년 만에 내 고을 산적들을 모두 없애 민생을 안정시켰소. 작은 범 대인께서 처음에 기대하셨던 걸 이루었단 말이오.”
사실 사천립도 양만리가 왜 분노했고 직접적으로 공격한 건지 잘 알고 있었다.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다. 그들은 작은 범 대인을 따라 경국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하고자 하는, 진정으로 충성스러운 선비였다. 범한은 지금 감찰원에서 대권을 장악한 상태인 데다 하고 있는 일들도 누가 봐도 권력을 장악한 신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명예를 추구하는 신하의 모습과는 점점 멀어지는 중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천립은 범한 곁에 있으면서 스승이 얼마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도 더 깊어진 터라 저도 모르게 냉소를 머금으며 양만리에게 반박했다.
“산적이 모두 사라졌다고? 만약 주의 병영을 자네의 부춘현 쪽으로 12리나 더 가깝게 옮기지 않았다면 그때도 자네는 성인과도 같은 말에 산적들이 놀라 도망갔을 것 같은가? 12리가 별 것 아닌 것 같지? 한데 자네 같은 보잘것없는 지현이 배겨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양만리가 놀라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니?”
사천립이 고개를 돌려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감찰원 호위 무사들이 왜 이 자를 막지 않아서 외부인에게 자신과 양만리의 언쟁을 고스란히 듣게 만들었는지 불만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 * *
이 순간 가장 무고한 이는 두말할 것 없이 범한이었다. 제자들이 싸우는 데 정신이 팔려 진짜 주인공을 한동안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해서였다. 범한은 사천립이 자신을 보고 말한 틈을 타 웃으며 끼어들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네. 아버님께서 자네들을 아끼시기에 주(州)를 지휘하고 있는 지인분께 서한을 써주셨을 뿐이네.”
두 사람은 그제야 범한의 음성을 듣고 동시에 놀라 펄쩍 뛰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의아해하며 물었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범한이 태양혈 주변에 손을 대고 두어 차례 문질러 눈썹꼬리에 붙여 놓은 고무를 떼자 원래의 말갛고 잘생긴 얼굴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변장한 걸 지우지 않아 흥분해 싸우는 두 사람이 범한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범한이 소리 내어 쓴웃음을 지었다.
“싸우려면 문이라도 닫고 싸울 것이지. 내가 들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어쩔 뻔했나? 우리 범씨 가문에 무슨 스승과 조상을 욕되게 할 만한 큰 사건이 터진 줄 알았을 거네.”
* * *
장원 대청은 순간 안정을 되찾았다. 자신들이 언쟁을 하면서 한 말이 몽땅 범한의 귀에 들어갔으니 사천립이든 양만리든 모두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범한에게 착석할 것을 청하고는 옆으로 가서 섰다. 두 사람 다 범한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지만 스승과 학생이라는 이 황당한 조합의 사람들은 어찌 되었든 다시 제 역할로 돌아갔다.
양만리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문질렀다. 그러다 갑자기 범한이 한 말 중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스승과 조상을 욕되게 한다 하셨지?’
양만리가 느닷없이 고개를 들어 크게 소리쳤다.
“대인,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범한이 웃긴다는 듯 양만리를 바라보았다. 양만리는 민(閩) 지역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탐관오리를 가장 싫어하는 데다 성격까지 직선적이고 화끈해 무턱대고 쳐들어온 것이었다. 물론 이는 범한도 잘 알고 있던 터라 다음과 같이 물었다.
“부춘현은 항주에서 2백 리 떨어진 곳이야. 문관인 자네가 하인도 안 달고 이리 급히 와 본관에게 대놓고 탐욕스럽고 잔혹한 호환(虎患) 같은 놈이라고 욕하지 않았나. 그게 스승을 기만한 게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나?”
범한은 농담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농담의 무게는 양만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하지만 양만리는 본디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라 이를 악물고 범한 앞으로 가 양팔을 들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싸 쥐고 허리를 깊이 굽히는 예를 올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대인 뒤에서 시시비비를 논하는 망언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범한은 이자가 왜 이렇게 빨리 태세 전환을 하는지 의아했다.
한데 양만리는 바로 태도를 바꾸어 다시 뻣뻣하게 말했다.
“하오나 이제는 스승님께서 돌아오셔서 제 앞에 계시니 이 제자,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스승님께서도 제가 윗사람에게 기탄없이 직언한다는 걸 아실 테지요.”
“말해 보게.”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몇 마디 더했다.
“이런 괴팍한 인사 같으니.”
그러나 양만리는 자신의 성격에 대한 범한의 품평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대인, 이번에 강남까지 내려오신 건 조정의 재정을 관리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제자, 대인께서 하시지 말아야 할 게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
범한은 깜짝 놀랐다. 소문무 그 찢어 죽일 놈이 은전을 거두고 다니는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할 줄 알았는데 무려 세 가지나 있다니.
376화
양만리는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항주로 달려와 ‘간언’할 결심을 내린 터였다. 이에 침통하게 말을 이어 갔다.
“첫째, 수하들이 수로를 따라 이동할 때 주변 백성의 재산과 노역을 착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경도에서 온 선박이 남하하자 수로 주변의 주와 현의 관원들이 일부러 마중을 나오고 선물은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을 동원해 배를 끌게 하고 있습니다. 강남 일대의 물은 흐름이 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큰 선박이 고의로 운항을 늦춘 게 아니라면 왜 인부가 필요할까요? 이 일은 강남 일대에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로 주변 주와 현의 관원들이 보내는 선물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요? 가혹하게 잡세를 거둬들인 게 아니라면 백성들의 소득을 갈취한 것이겠지요. 대인, 감찰원 제사의 신분으로 국법을 무시하고 뇌물을 거둬들이고 백성들을 무시하여 그들을 노역에 동원하시면 안 됩니다!”
범한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사람처럼 손을 내저어 사천립에게 차를 따르도록 하더니 차를 홀짝였다.
양만리는 범한이 거드름 피우는 표정을 짓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스승님이 정말로 화나신 건 아닐까, 하며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범한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오히려 더 화가 나 곧장 이어서 하려던 말을 했다.
“둘째, 강남 수군 병선이 호위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대인께서 흠차 대신의 신분이기는 하나 처음부터 잠행하신 거라면 한밤에 움직이셨어야지요. 대인께서는 이미 제도를 위반하신 겁니다. 그리고 잠행을 하는 중에 관병에게 호송을 맡기신 건 제도 위반을 넘어서서 예법을 어기고, 소란을 피우고, 군사적 방비에 공백을 만드신 것이니 그야말로 큰 과오를 저지르신 겁니다.”
범한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고는 양만리를 질책했다.
“나를 쳐 죽일 놈으로 만들어야 맘이 편하겠나?”
범한은 손을 내저어 양만리가 이어서 말하려는 걸 저지했다.
“일단 두 개에서 끝내지!”
그런 후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수로를 따라 선물을 거둬들이고 다닌다는 건 나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확실하더군. 경도에서 온 서한에서도 이 일이 경도 관료 사회 내에서 황당한 농담거리가 되어 있다 했지. 모두 이 몸이 강남에 내려가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고 한다나 뭐라나.”
범한의 말에 양만리는 기뻤다. 이에 몇 마디 더 진언을 올렸다.
“그렇습니다. 제도니 법이니 예법이니 하는 문제는 둘째 치고 부정적인 영향만 말해도 대인의 관리로서의 명성에 지대한······.”
“관리로서 자네의 명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그런 건 아니고?”
범한이 조소를 날리고는 말을 이어 갔다.
“앞서 자네가 사람들을 볼 낯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만리, 자네는 줄곧 청사에 이름을 남길 청렴한 관리가 되고 싶어 했어. 그런데 하필이면 거액의 은전이나 뺏고 다니는 탐관오리 스승을 만났으니 기분이 언짢았겠지. 나도 이해하네. 하나······.”
범한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강남 관원이 어찌 보는지, 백성이 어찌 보는지 또 경도 내 6부가 어찌 말하는지, 주변에서 나를 상대 안 하든지······ 나는 상관 안 하네. 문제는 내 문하생인 자네일세. 어찌하여 본관을 은전이나 탐하는 자로 여기는 건가?”
양만리는 순간 당황했다.
“스승님의 배가 이룬 위대한 공적은 사실에 증거까지 확실합니다! 더군다나 범한 제사님이 강남에 몰래 내려가 놓고 북쪽, 남쪽, 중간 이렇게 세 개 노선으로 움직이는 건 이참에 뇌물을 받아먹겠단 심산으로 그랬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쫘악 퍼졌단 말입니다! 설마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거라고요?”
“나는 가진 게 은전뿐이라네. 그런 내가 무엇 하러 은전을 탐하겠나! 자네는 대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범한이 양만리를 바라보더니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자네와 계상, 가림 세 사람은 지금 외지에서 관리로 있으니 경도에 계신 아버님께서 자네들에게 매달 꼬박꼬박 은전을 보내 주고 계시지. 왜 그런지 아는가? 자네들이 돈 때문에 주변 동료들의 꾐에 빠질까 봐 그런 거야. 내가 자네들에게 하는 게 이러할진대 나 자신에게는 어떻겠나?”
춘시 후 외지로 발령이 난 양만리 포함 3인은 매월 경도에서 보내 주는 은표를 받고 있었다. 은표의 액수는 녹봉보다 많았다. 한데 이는 사실 범한과는 무관했다. 범한은 그 정도로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범건 상서가 아들을 위해 세심하게 돌봐 준 것이었다.
돈이 넉넉하게 생기자 세 사람은 일단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은전을 가지고 어떤 일들을 하고 있었다. 양만리는 범한의 세심한 관심에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좀처럼 화내지 않는 범한이 크게 노한 표정을 보이기에 서둘러 감사의 인사부터 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범한이 웃으며 꾸짖었다.
“돈을 주어 감사하다고 하는군. 한데 그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생각해 봤는가? 물론 남의 것을 탐한 건 아니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장사를 몇 개 하고 있지 않은가. 자네들을 먹여 살릴 정도는 되네.”
양만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오나······ 수로에 있는 선박은요?”
“그 선박과 내가 무슨 관련 있다고 이러는가?”
범한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가 탐관에게 욕하고 싶은가 본데 직접 배에 찾아가서 그들에게 욕하게나. 항주로 달려와 대놓고 내게 욕을 하다니······ 양만리, 자네 말이네. 간덩이가 조금 부었구먼.”
양만리가 괴로워했다.
“스승님, 그들은 스승님의 부하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네. 부하들이 은전을 받은 걸 내가 관심을 안 가졌다고 해서 그게 다 내 생각에 따라 벌어진 일이 되는 건가? 그냥 생뚱맞게 일어난 일일 뿐인데 뭘 그리 심각하게 구는가?”
사천립이 옆에서 중재에 나섰다.
“대인께 깊은 뜻이 있으실 거야. 자네가 오늘 이렇게 쳐들어온 것 때문에 사람들이 뒤에서 비웃을까 겁나는군!”
양만리가 생각을 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 범한 대인께서 남의 재물을 탐했다면 이처럼 거창하게 티를 내지도, 이처럼 저열한 게 굴지도 않았을 터.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잘못 생각했단 말인가?’
“그렇게 깊은 뜻 같은 건 없네.”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하나 3월 초사흘에 소주에서 연극을 할 셈이야. 엄청나게 오글거리는 일이라 생각만으로도 닭살이 돋는군. 그때가 되면 자네도 자연히 알게 될 거네.”
양만리는 범한의 말을 믿기에 다시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스승님의 국고 정비 대계가 잘못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자신이 너무 큰 실례를 저지른 거 같아 후회했다.
“두 번째로 지적했던 거에 대해 말해 보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만리, 자네는 너무 순진하군. 지금이 정말 태평성대라고 생각하는가?”
양만리는 깜짝 놀랐다. 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고 날씨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범한이 싸늘하게 웃으며 놀랄 만한 말을 해주었다.
“수군에게 호위를 받지 않는다면 그 선박은 언제든 물귀신들 때문에 강바닥으로 끌려 들어갈 걸세. 못 믿겠지?”
양만리에게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보이자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실 금고 일은 내 탁 까놓고 말해 줌세. 내 상대는 황실 금고에 있는 좀벌레만 있는 게 아니야. 강남의 호족들, 심지어는 강남의 전체 관원과 귀족들도 있지. 명씨 가문이 어떻게 가문을 일으켰을까? 그리고 그 가업을 어떻게 그렇게나 크게 불렸을까?”
범한의 질문에 양만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천립 역시 최근 감찰원과 강남 수채 하서비로부터 온 비밀 보고를 접했던 터라 속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해적질!”
범한의 눈에 섬뜩함이 번뜩였다.
“명씨 가문은 황실 금고에서 물건을 받은 후 천주를 통해 바다로 나가네. 그런 후 북쪽으로 올라가 동이성으로 가지. 또한 남쪽으로 내려가 서쪽의 양귀(洋鬼)들이 사는 곳으로도 간다네. 그런데 요 몇 년 동안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해적을 만났다네. 배 세 척을 몰고 나가면 한 척은 잃게 되었고······.”
양만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과거 명씨 가문 사람들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온화하고 선량한 느낌을 주는 부자들이었다. 그리고 바다로 나갔다가 해적을 만난 건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범한 대인의 말 속에 다른 의미가 있다는 뜻인데.
범한이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실제로는 말일세, 그 해적들이 모두 명씨 가문 사람들이더란 말이야!”
양만리는 대경실색했다.
“황실 금고에서 내보낸 물건을 해적을 만나 잃어버렸다면 명가는 황실 금고에 돈을 물어 줘야 하니 딱 보면 손해 본 것 같지. 하지만 실제로는 훔친 화물을 몰래 해외로 반출해 팔아 놓고도 조정에 줘야 하는 이익금의 6할은 줄 필요가 없어진 거네. 더군다나 황실 금고에는 원금만 갚으면 되고 말일세. 어찌 되었든 훔친 배 한 척으로 번 돈이 나머지 두 대보다 많은 거야. 요 몇 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만 바다에서 애꿎게 죽은 거지.”
양만리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게 명씨 가문에서도 얼마 벌지 못했을 텐데 무엇 하러 사람까지 죽여 가며 위험하게 일을 벌인 겁니까?”
방금 범한이 한 말은 모두 최근에 감찰원과 하서비가 조사해서 알아낸 정보였다. 한데 안타깝게도 산 사람의 증언은 확보하지 못했다. 명씨 가문은 요 몇 년 동안 악독한 수단을 동원했다. 대체 얼마나 벌어들였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정말 악랄했다.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는 한편 귀인들의 엄호까지 받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갈 때마다 해적을 만나고 풍랑에 좌초되는 게 명씨 가문에서 화물을 훔치기 위해 벌인 짓이란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만리의 두 눈을 응시했다.
“일단 적당한 이윤이 생기기만 한다면 상인은 담이 커지기 마련이지. 5할의 이윤이 생기면 그들은 위험을 무릅쓴다네. 10할의 이윤이라면 경국의 모든 법률을 짓밟아 버리지. 세 배의 이윤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죄도 저지르게 되네. 심지어 교수형에 처해진다 해도 그들은 조정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네.”
마르크스의 말에 놀란 양만리와 사천립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그 뜻을 음미했다.
“더군다나······ 조정에는 늘 그들의 협조자가 있었어.”
범한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정식으로 물건을 팔면 수익은 장부에 기입해야 하지. 한데 장부에 기입되지 않은 돈만큼 쓰기 편하고 안전한 돈이 또 어디 있겠나?”
이는 신양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이런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장 공주는 장기간 감찰원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니 황실 금고에서 은전을 빼돌리는 데 훨씬 고생했을 것이다.
“동전 한 닢 한 닢에 핏빛이 서려 있는 게지.”
범한이 양만리를 훈육하듯 말을 이어 갔다.
“자네나 내가 무언가를 하려면 어떻게든 자신의 안전부터 확보해야 하네. 명씨 가문은 살인도 쉽게 하고 그쪽 방면으로는 도가 텄어. 때가 무르익으면 거리낌 없이 본관을 죽이려 들 것이네! 이렇듯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데 무슨 예법 따위를 따지는가. 관리로 오래오래 있다가 나중에 썩은 나무토막이나 되지 말게나!”
양만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십 년 동안 힘들게 공부해 관리가 된 그는 범한이란 큰 나무가 음으로 양으로 보호해 준 덕분에 살면서 험악한 일을 제대로 당해 본 적 없었다. 그리고 이는 범한에게 한 소리 듣고 나서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입을 뗐다.
“됐네. 그만 말하지. 자네가 오늘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는데 이곳에는 손님이 온 적이 없었다네. 1년 만에 만났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하게. 그리고 이따가 주안상이 나오면 한껏 취해 보세나.”
양만리는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후회되었지만 스승님이 변함없이 가까운 사람으로 대해 주자 한시름 놓았다.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가 생각나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말하려던 세 번째는······.”
범한이 웃으며 한 소리 했다.
“내 죄를 낱낱이 알리지 않으면 이따가 밥도 못 넘기겠군. 말해 보게.”
양만리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은 스승님이 잘못한 것 같아 당당하게 말했다.
“최근에 각지에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관원들과 백성들이 술을 마시면 늘 그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제자, 이제껏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스승님 앞이니 감히 말하겠습니다. 분위기를 보아 가며 환심을 사는 건 결국에는 오래 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아첨도 조정 관원이 지녀야 할 기풍이 아니니까요. 스승님께서 하신 그 일들은 정말로 덕이 없는 행동이셨습니다.”
377화
범한이 깜짝 놀랐다. 양만리는 고집불통에 강직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대단히 총명했다. 역시 사방에서 나타난 상서로운 징조를 자신이 꾸민 일이란 걸 알아챈 거였다. 그런데 이놈이 이번에도······ 감히 대놓고 자신에게 황제 폐하께 아부했다고 욕할 줄이야.
“꺼져! 꺼지라고! 꺼져 버려!”
범한은 드디어 진심으로 폭발해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예서 밥도 먹을 필요 없느니라! 네놈의 부춘현인가로 돌아가 죽이나 처먹거라!”
양만리는 아직까지 혼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서서 스승의 침으로 세수까지 하고도 여전히 늠름하게 할 말을 했다.
“이 제자, 오늘은 팽씨 장원에서 죽을 먹겠습니다.”
범한이 잔뜩 화가 나 뾰로통해진 모습으로 양 소매를 툭 털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사천립과 양만리도 줄레줄레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이 순간 아직 만 스무 살이 안 된 젊은이는 드디어 제 나이에 맞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더 이상 단정히 앉아서 말과 행동에 조심을 기하며 노련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는 스승 대인이 아니었다.
* * *
3월 초사흘, 용이 고개를 든다는 음력으로 2월 2일이 되는 날이었다.
담주성으로 향했던 마차 행렬, 은전이 깔린 강을 따라 내려온 경도의 선박이 모두 소주성 밖 나루에 도착했다. 그리고 첫째 날 밤, 항주에서 온 대열이 아무도 모르게 배에 올라탔다. 경도에서 출발해 나중에 세 갈래로 갈라졌던 대열이 드디어 강남에서 합류한 것이었다.
나루터에서는 북소리와 징 소리가 하늘이 떠나갈 듯 울리는 것은 물론 폭죽 소리도 들렸다. 강남로의 각급 관원들은 관복을 정제하고 차례대로 서서 목을 쭉 빼고 한 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관원은 태학 사업, 태상사 소경, 황실 금고 운사사 정사, 감찰원 제사, 순무 강남로 흠차 대신을 두루 겸하고 있는 인물로······ 바로 범한 대인이었다.
* * *
경력 3월 초사흘, 용이 머리를 든다는 음력 2월 2일이었다.
커다란 선박이 강남 수군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나루에 정박했다. 배에서 닻줄이 내려오자 교관들이 능숙하게 밧줄과 닻을 고정시켰다. 이어 계단 모양의 발판이 나루터와 갑판 사이에 놓여다. 그러자 강기슭에 있던 관리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판에 서둘러 두툼한 천을 깔았다.
하늘 저 멀리에서는 흠차 대인의 도착을 환영이라도 해주듯이 봄날의 우레가 쾅쾅 울렸다. 같은 시각, 나루터에서는 폭죽이 일제히 터지고 북과 장구 소리가 하늘을 울릴 듯 연주되기 시작했다. 강기슭에서는 쏠 준비를 끝낸 축포에 불이 붙었다. 그러자 하늘의 위엄까지 덮어 버릴 정도로 대포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루터에 있던 관원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귀를 막았다. 하지만 시선만은 나루터와 갑판에 깔아 놓은 발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어느 젊은 관원이 갑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호위 무사들을 데리고 조용히 아래로 내려와 두 줄로 섰다.
그리고 이어서 자주색 관복을 입은 젊고 잘생긴 관원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나왔다. 그런데 관복 위에 도포를 입고 있어 새하얀 얼굴과 자주색 관복이 이루어 낸 강렬한 시각적 자극은 조금 희석되어 있었다. 나루터에 있던 사람들은 온화하고 친절하고 말끔하게 생긴 얼굴에 매료되어 버렸다.
자주색 관복은 3품 이상의 관원에게만 입을 자격이 주어졌다. 나루터에 있던 관원들은 자신들이 그리도 ‘줄기차게 외쳐 대던’ 흠차 대인 범한 제사가 눈앞에 나타나자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두 발짝 나아가 팔을 들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싸 쥐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려 했다.
범한은 사람들이 예를 차려 인사를 하는 걸 서둘러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손을 옆으로 뻗어 허공으로 쭉 뻗어 나온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어린 사내아이를 이끌고 갑판 위에 나란히 서더니 이내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사내아이는 옅은 노란색의 평상복 형태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옷깃 부분에는 털옷에 달린 털이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털옷에는 귀엽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령한 짐승이 수놓아져 있었고 아이의 단정한 얼굴은 반짝이는 두 눈과 잘 어우러져 귀여움을 배가시켜 주었다.
관원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가 황제 폐하께서 범한 제사에게 딸려 보낸 3 황자란 걸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방향을 틀어 줄을 맞추어 서서 3 황자에게 예를 표했다.
“강남로 관원들이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3 황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이 추운데 여러 대인은 고생하였소. 나는 배우기 위해 스승님을 따라온 것뿐이니 이제 그만들 일어나시오.”
스승님이란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든 관원들은 서둘러 범한에게도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리고 “대인,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등등의 말도 건넸다.
몇십 명의 관원들은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배 위에서 내려온 두 남자를 훔쳐보았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적지 않았지만 외모가 매우 닮아 있었다. 강기슭에 서서 강바람을 맞아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둘에게서는 맑고 귀한 기품과 함께 화목하면서도 속되지 않은 느낌이 풍겼다.
그러자 사람들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범한 제사의 출생과 관련한 소문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불안감이 엄습했다. 3 황자에게 먼저 예를 올렸으니 혹시라도 범한이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을는지. 어찌 되었든 범한이 가장 주요 인물인 데다 흠차 대신의 신분이었으니 조정의 규칙에 따르면 아직 미성년인 황자보다 범한이 훨씬 높은 존재였다.
한데 범한이 이렇게나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나루터에 있는 낯선 관원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응대하고 그들의 관직과 관명을 열심히 외우며, 정치 신성(新星)으로서 지녀야 할 예절과 자부심을 열심히 보여 주였다.
범한 제사가 황제를 데리고 강남까지 온 건 중대 사안이었다. 이에 오늘 나루터에 매우 많은 관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문관으로는 강남로 총독부와 순무의 직속 관원, 소주와 항주의 지주와 지주들이 각각 대동하고 온 인재가 있었다. 비교적 먼 주에 위치한 지주들은 두 사람을 영접하기 위해 관할지를 무단으로 이탈해서는 안 되었지만 주(州)의 통판과 리동 등급의 관원들은 적지 않게 참여한 터였다. 이밖에 강남의 염로 전운사(鹽路 轉運司) 관원들도 와 있었다. 무관은 당연히 강남 수군 중 수비 참장으로 있는 이들이 가장 많이 왔다. 물론 현재 범한의 직속 부하가 되는 황실 금고 전운사 관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나와 있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근 백 명 가까이 되었다. 강남로의 높은 관원들 절반 이상이 나루터로 몰려온 것이었다. 만약 동이성이 감찰원 3처의 화약을 훔쳐다가 여기에서 터뜨렸다면 경국에서 가장 부유한 강남로 지역은 하루아침에 일대 마비를 일으켰을 것이다.
나루터에서 범한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관원들에게 인사했다.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있고 관복도 여러 색이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아직 추운 날씨임에도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자신을 향해 아첨하는 표정의 낯선 이들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고 있는데 어찌 진지하게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있으리오.
하지만 관원들은 속도 모르고 작은 범 대인이 계속 웃고 있자 자신이 보낸 선물이 효과를 본 것이라며 확신했다. 이에 더 과감하게 3 황자 곁으로 몰려들어 보낸 은전이 아깝지 않게 어떻게든 친근하게 안부 인사를 하려 했다.
큰 강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주와 현의 관원들에게는 선물을 보낼 기회가 없었다. 이에 이들은 불편한 마음에 부러움과 질투가 담긴 표정으로 동료들이 황자와 범한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루터는 순식간에 알랑방귀 구린내로 진동했다. 범한은 수염을 깨끗하게 깎아 낸 아래턱을 수없이 힘껏 문질러 댔다. 열기가 들끓자 관원들은 점점 더 들어 주기 힘든 말을 해댔다. 특히 소주부 지주의 관원은 태학 계열 사람이라 범한이 태학 사업이라는 직을 겸하고 있는 걸 이유로 들어 매번 ‘범 스승님!’이라고 외쳤다.
범한은 짜증이 강하게 치밀었지만 열심히 억눌렀다. 하지만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건 정말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렇지. 만으로 스물도 안 된 자신이 지부의 스승이 되다니 이 사실이 경도로 전해진다면 그 황제 노친네께서 웃겨 죽으려 하실 게 뻔했다.
범한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3 황자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뻔뻔한 말들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다. 작은 범 대인은 자신의 스승이거늘 이 늙은이가 감히 자기 스승을 빼앗아 가려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더 이상 참아 줄 수가 없어 차가운 얼굴로 기침을 두 번 했다.
황자가 기침을 하자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항주 지주는 찾아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 노련하고 교활한 사람이었다. 소주부 지주가 곤경에 빠지자 속으로는 기쁜데도 정색하며 말했다.
“오늘 날이 춥습니다. 여러 대인, 흠차 대인과 황자마마께서 속히 쉬시도록 해드립시다!”
범한과 3 황자는 그의 말에 마음이 놓여 바로 항주 지주를 향해 칭찬하는 눈빛을 쏘아 주었다. 그 눈빛을 읽은 그는 순간 인삼 한 뿌리라도 먹은 듯 온몸이 훈훈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 * *
그런데 쉬라고? 그렇게 쉬울 리가. 관원들이 몇몇 물러가기는 했지만 남아 있는 의례를 모두 마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범한과 황자는 관원들에게 빙 둘러싸인 채 강기슭 옆 언덕에 올랐다. 언덕에는 대나무로 만든 죽붕이 있었다. 새것인 걸 보니 만든 지 며칠 되지 않은 듯했다. 이는 오로지 강남으로 올 범한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죽붕 밖에는 자주색 관복을 입은 고위 관원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엄숙하게 대기하고 있는 그들을 발견한 범한은 3 황자의 손을 이끌고 서둘러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에게 존경심을 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두 관원은 평범한 이들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강남로 총독 설청인 설 대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순무 대사성인 대 대인이었다.
경국 관료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1궁(一宮), 2성(二省), 3원(三院), 7로(七路). 궁은 당연히 황궁을, 성은 정무를 처리하는 중서성을, 3원은 감찰원, 추밀원, 교육원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교육원은 경력 원년의 신정 때 폐지되고 대신 태학, 동문각, 예부라는 3처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7로는 경국의 현 지방을 나누고 있는 일곱 개의 대로(大路)를 의미했다. 각 ‘로’는 총독이 천자를 대신해 지역을 순시하며 다스렸다. 이에 현재 경국의 로와 주(州) 사이에 있는 군(郡)의 1급 관리는 직능이 많이 약화되었다. 각 로의 총독은 군과 관련한 업무 외에도 관할 주현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고 이에 큰 권력을 지닌, 그야말로 실질적인 지방의 수석 관리가 되었다.
그러니 황제는 당연히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측근을 이 중요한 자리에 배치했을 것이고,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니 능력 또한 매우 출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대단한 권력을 쥔 총독과 비교해 순무는 문관의 업무에 치우친 일을 하고 있어 중량감이 조금 떨어졌다.
품계 질서만 놓고 논한다면 총독은 정2품, 순무는 종2품이어서 지위가 크게 차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국 황제는 이들 7로의 총독들이 정무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6부의 견제를 줄여 주었다. 지금까지는 7로의 총독이 협판 대학사, 감찰원 우도어사 또는 병부 상서 직을 겸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들 관직은 모두 종1품에 속하는 높은 자리지만 조정의 재상, 중서와 대면했을 때는 의견을 낼 수 있을 정도의 위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강남은 경국에게 중요한 지역이다. 이에 현 강남로 총독 설청은 황제 폐하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어 직접적으로 전각 대학사를 겸하고 있었고, 이 자리는 제대로 된 정1품의 최고위급 자리였다.
이렇듯 설청은 범한과 3 황자도 감히 얕봐서는 안 되는 지위와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범한은 발걸음을 재촉했던 것이다.
하지만 죽붕 밖으로 온 범한은 온화한 시선으로 설청을 잠시 바라보기만 할 뿐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이는 규범이었다. 설청과 대사성은 상대가 흠차 대신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아무리 큰 권력을 쥔 고위급 관원일지라도 먼저 상대에게 예를 올려야 했다. 이는 범한을 높이기 위해서도, 그렇다고 3 황자를 높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모두 황제 폐하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일환이었다.
378화
향을 피울 탁자가 놓이고 성지를 청했다. 검이 번쩍하자 죽붕 안에서 관원들이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모든 의식이 끝나자 범한은 서둘러 강남로 총독 설총을, 다음으로 순무 대인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런 후 3 황자와 함께 공손하게 설청에게 인사를 했다.
설청은 팔을 들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싸고 허리를 깊숙이 굽혀 하는 인사를 3 황자에게 받을 수 있는 정도의 신분은 되었다. 그런데 강남로 총독은 말로만 듣던 범한 제사가 의외의 인물이어서 잠시 기쁨의 눈빛을 반짝이던 중이었다. 범한은 권력을 쥔 신하이나 다른 문인들처럼 고상한 척도 하지 않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일도 기꺼이 해서였다.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순무가 서둘러 몸을 굽혀 답례를 했다. 그러자 설청도 앞에 있는 ‘친구’가 답례를 마칠 때까지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서둘러 두 사람을 부축하며 말했다.
“범 대인, 부디 허물없이 대해 주게나.”
범한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는 옆에 있는 셋째가 설청 대인과 마주한 상태에서 난처해하고 있어 범한은 순간 곤란했다.
그러자 설청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본관은 강남으로 오기 전 서각에서 학사로 있었습니다. 한데 형편없는 품계는 아니었지요. 3 황자마마께서 지금보다 더 어리셨을 때 그때 본관에게 자주 장난을 치셨지요. 한데 이미 몇 년 지난 일이라 마마께서 기억을 하고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3 황자가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고는 설청에게 다시 제자의 예로 인사를 올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인께서 매년 경도로 돌아와 보고를 하면 부황께서 제자인 나에게 댁으로 가 인사를 하도록 하셨지요. 그러니 어찌 잊었겠습니까?”
범한은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어 속으로 찬찬히 따져 보았다. 경도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설청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나와 범 대인도 연결된 게 있었군.”
범한이 이 높은 관리 앞에서 다 아는 체할 수 없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대인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후배는 대인이 초면입니다.”
설청은 상대방의 시원시원한 점이 마음에 들어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본관이 향시에 급제했을 때 시험관이 임 재상이셨네. 그러니 항렬을 따진다면 자네는 나를 형이라 불러야 할 걸세.”
범한은 이제야 이해를 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이미 총독이란 높은 직위에 있었으니 과거의 인연은 그냥 해본 말일 것이다. 더군다나 범한이 아무리 철면피에 속이 검고 대담하다고는 해도 여기에 맞장구를 치기엔 쑥스러웠다. 총독과 호형호제라니. 아무리 충분히 그럴 만한 권력을 쥐고 있다고는 해도 나이와 경력 면에서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났다.
일행은 죽붕 안에서쉬고 있었다. 범한과 설청은 길을 따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설청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황제 폐하께서는 건강하신지 물었다. 결국에는 다 형식적인 쓸데없는 말뿐이었지만 둘 사이가 조금은 가까워지고 친해졌다. 범한은 1품의 고위 관료를 바라보고 있다가 상대방의 수척한 얼굴에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수심을 발견했다. 이에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금세 이유를 알았다.
그가 총독으로 있는 강남에 갑자기 상주 흠차 대신이 나타나서였다. 이 일은 어느 총독일지라도 견디기 힘들 터. 하물며 이번 흠차 대신은 황실 금고까지 이어받지 않았나. 어쩌면 경도 귀인들과 큰 마찰이 일 텐데, 아무리 총독이 고위직이고 황제 폐하께 신임받고 있어도 결국에는 중간에 낀 입장이니 총독 본인으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설청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무심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은 범 대인, 2년 동안 강남에 있어야 하니 고생이 많을 거네. 비록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는 건 매한가지라도 강남보다는 경도에 있는 게 좋지. 강남이 번화한 곳이기는 하나 오래 머물 곳도 아니고. 2년 후 나도 황제 폐하께 퇴직을 신청하고 경도로 돌아가 낚시나 할까 한다네. 황제 폐하 근처에 있는 게 강남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거든.”
범한은 상대방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듣고는 웃으며 대꾸했다.
“황제 폐하를 대신해 이곳을 책임지며 대인께서 고생도 많이 하시고 공도 많이 세우셨지요.”
설청이 미소를 지었다.
“작은 범 대인, 어디 머물 곳은 정했는가? 소주성에는 염상이 많은데 누구든 기꺼이 저택을 내줄 걸세. 그중에서 한 군데 고르게나.”
염상이 부유한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화려한 저택을 공손히 바칠지는 범한도 금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거절했다.
“그건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 일이 경도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이 후배, 늘 마음이 불안할 것 같습니다.”
범한이 소탈하게 말하자 설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시인은 이런 게 안 좋다니까. 뭘 하든 다 가리려고 하니 말이야. 그런데 뱃길에서 은전을 거둬들인 건 왜 대놓고 했을꼬?’
범한이 간절하게 부탁했다.
“대인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과거에 황실 금고 전운사 정사는······ 어떻게 묵을 곳을 정했습니까?”
설청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 대인, 자네 신분은 과거 황실 금고 전운사 정사와 비교할 수 없네. 어떻게 정했느냐고 묻는다면 일단 황실 금고가 정해 놓은 관저는 저 멀리 민(閩) 지역에 있다는 것부터 말해야겠군. 한데 요 십여 년 동안 정사 대인 중 그 누구도 그곳에서 머물지 않았다네. 자네 전임인 황 대인도 오랫동안 신양에 머물렀거든.”
신양이란 두 글자를 내뱉을 때 강남 총독은 무심코 범한을 잠시 쳐다보았다.
범한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조정에서 정한 관저에서 머물지 않아도 된다고요?”
질문같이 들리지만 실은 염탐해 보는 것이었다.
설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대인께 이실직고하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항주에 있었습니다. 소주에 계신 대인을 찾아뵙지 않은 건 제 불찰입니다. 하온데 그 저택이 꽤 괜찮거든요. 만약 머물 곳을 제가 고를 수 있다면 저는 항주에 있고 싶습니다.”
설청은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상대방이 항주에 머문다고 말할 줄 생각도 못 하고 있던 터다. 그는 침묵하고 있는 범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 제일 잘나가는 권신(權臣)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강남 총독의 관저인 강남 총독부는 소주에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는 범한이 소주에 머무는 걸 꺼렸다. 정무에 간섭받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높은 서열의 관리 둘이 한 지역에 있으면 강남로 관원들은 골치 아파할 것이고, 자신도 사무를 처리하는 데 여러모로 방해가 될 테니.
범한의 간절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설청이 눈에 이채를 띠더니 미소 지었다.
“당연히 무방하지. 범 대인이 묶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묶으면 되는 걸세.”
범한이 웃었다.
“물론 항주에서 지내더라도 자주 소주에 와야 하니 대인께 몇 끼 얻어먹게 될 것입니다. 대인 관저에 북제의 유명 요리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도 사람들이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저도 한번 맛보고 싶습니다.”
설 총독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본관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데 범 대인도 같은 취향일 줄이야. 무엇 하러 다음을 기약하는가. 오늘 저녁에는 일단 여러 동료들이 대인과 황자마마를 위해 환영회를 준비해 뒀다네. 그러니 내일 대인을 우리 집으로 초대함세.”
범한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은근히 약속하자 강남 총독도 홀가분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웃음소리는 죽붕이 있는 곳까지 퍼져 나갔다. 강남로 관원들이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총독 대인과 제사 대인이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순간 한시름을 놓고는 속으로 작은 범 대인은 과연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감탄했다. 은근히 걱정했던 힘겨루기 국면에 접어들지도 않았을뿐더러, 대체 범 대인이 어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총독 대인을 저리도 기분 좋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범한 대인이 설청 총독 대인의 귓가에 작게 몇 마디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설청이 살짝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잠시 엄숙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조금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싸늘하게 말했다.
“범 대인, 너무 걱정 말고 본관의 체면도 따지지 말게. 내 평소 황제 폐하의 인(仁)과 화(和)의 도리를 항시 유념하고 있으니 내 잠시 용인함세. 범 대인의 생각이 지극히 옳아.”
범한은 상대방이 동의해 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소주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인심을 베풀어 설청도 그에 상응하는 화답을 한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진심을 담아 고마운 마음을 전한 후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 * *
범한이 몸을 일으키자 죽붕 내부가 잠시 조용해졌다. 강물에 반사된 햇살이 안으로 들어와 아름답게 반짝이고 살짝 차가운 강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모두 범한을 주시하며 흠차 대인께서 부임 선언을 어떻게 할지 궁금해했다.
“본관은 남들과는 다릅니다.”
범한이 주변에 있는 관원들을 둘러보고는 웃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비록 대인 여러분들과 함께 일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나에 대해 알려진 바가 있어 모두 그 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내 성격의 장점이라면 참신한 게 있고, 단점이라면 소란을 좀 잘 피우고 경중을 모르는 젊은 놈이랄까요.”
그러자 관리들이 껄껄껄 웃으며 흠차 대인은 소탈하니 말을 참 재밌게 잘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범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혀 겸손하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이따위 체면 챙기는 빈말은 그만하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옥체 강녕하시니 여러분은 그분의 안부를 물을 필요 없습니다. 황태후마마께서도 강녕하시어 경도에 그 온화함을 비춰 주고 계시니 이 점에 대해서도 더 첨언할 필요 없습니다. 대인들은 조정에서 강남이란 중요 지역을 다스리란 중임을 부여받은 분들입니다. 요 몇 년간 세수가 모두 이곳에서 나왔지요. 오는 길에 본 민생과 시장 풍경은 진짜였습니다. 모두 힘들게 살고 있으니 내가 더 말할 필요는 없겠고······.”
강남 관원들은 범한이 줄곧 잠행했음을 아는 터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가 몇 마디 더 해주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 올리는 비밀 상주문에 그 말도 함께 언급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범한이 또 태도를 바꾸었다.
“대인 여러분의 장점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잘못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범한은 미소를 지었지만 죽붕 안에는 순간 싸늘한 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인정 없는 행동이기는 하나 왜 그런지 말은 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대인 여러분이 본관의 신분을 잊은 것 같아서입니다.”
범한의 신분이 뭔데 이럴까? 시선, 거중랑, 태상사 이런 게 아니라······ 시커멓고 음산한 감찰원을 뜻하는 거였다. 한데 관원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몰라 깜짝 놀랐다.
‘우리가 보내 드린 은전은 제대로 간 거 같은데 대체 뭘 더 하시려 그럽니까?’
‘감찰원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죠!’
“육로로 오는 동안 사주와 항주를 거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배는 큰 강을 따라왔지요.”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을 이어 갔다.
“듣자 하니 큰 강을 은강(銀江)이라고 불렀더군요. 여러 대인이 그 배로 적지 않은 선물과 은전을 보냈다지요. 또한 적지 않은 백성들을 동원해 줄을 끌도록 했다던데······ 대인 여러분들의 두터운 마음, 본관은 고맙습니다. 한데 그렇게 대놓고 뇌물을 주시기에 본관은 정말 탄복했습니다. 여러분의 담력이 정말로 어마어마해서요!”
관원들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범한은 몸을 돌려 강남 총독 설청을 향해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감싸 쥐고 예를 표하고는 미소 지어 보였다.
“오늘 총독 대인께서 본관과 계실 때 격노하시며 본관의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본관은 영문을 알지 못해 두려웠을 뿐이죠. 다행히 총독 대인께서 본관이 그간 사정을 모른다는 걸 아시고 사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여러분이 본관 몰래······ 그런 대담한 일을 벌였더군요.”
범한이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며 싸늘하게 웃었다.
“감찰원은 조정 관료들을 감찰하고 탐관오리를 잡아들입니다. 모두 담이 크게도 본관에게 뇌물을 보냈으니······ 내가 경도를 떠났다고 해서 이 손에 쥔 칼로······ 아무도 못 죽일 줄 아셨던 것입니까?”
379화
깜짝 놀란 관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범한의 말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총독 대인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한데 총독 대인은 수염을 매만지며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 몰라라 하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했다. 범한이 앞서 한 말은 뱃길에서 관리들이 선물을 보낸 건 범한 몰래 한 것이었으니 범한 입장에서는 떳떳하므로 대놓고 말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 후 총독 대인께서 진노하셨다는 걸 핑계로 총독 대인도 깨끗하다는 걸 알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총독 대인의 권위를 세워 주고 동시에 그분이 인격적으로 청렴한 분이라고 치켜세워 준 것이었다.
‘배가 지나갈 때 선물을 준 거? 그때 당신 수하들은 거절하지도 않았다고! 감찰원은 정보가 빠르잖아! 아무리 항주에 있다 해도 모를 리 없잖아!’
한데 범한이 딱 잡아떼니 강남로 관원들은 강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냥 크게 손해를 입고 속앓이나 할 수밖에. 어느새 그들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범한에게 무언의 말을 하고 있었다.
‘범한 제사는 과연 소문대로군. 온화하고 위화감 없고 말끔하게 웃는 얼굴인데, 그 아래에는 후안무치한 악독한 저질이 숨어 있다더니만!’
관원들은 범한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에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범한은 손뼉을 한 번 치고 말았다. 손뼉 소리가 밖까지 새어 나가자 감찰원 관원 하나가 두툼한 선물 목록을 한 움큼 들고 선박에서 걸어 내려왔다. 목록을 적어 놓은 것만도 저리 두툼하니 선박에 들어차 있는 선물은 보나 마나 작은 산을 이루고 있을 터.
범한이 몸을 돌려 설청 총독에게 몇 마디 물었다. 미소 띤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설청이 손을 휘 내저어 관아 아속들에게 감찰원 관원을 따라 올라가도록 했다. 얼마 후 커다란 상자 몇 개를 아속들이 힘겹게 끌어다가 죽붕 안에 가져다 놓았다.
상자를 열어 보니 그야말로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에 금은보화와 귀중품이 부지기수로 들어 있었다. 모두 관원들에게서 받은 선물들이었다.
실내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화로를 피웠다. 범한은 부하들이 가져온 선물 목록을 대충 몇 장 넘겨 보며 눈썹을 살짝 씰룩이고는 웃어 보였다.
“제법 많군!”
관원들은 수치심과 분노가 교차하는 가운데 속으로 불만을 쏟아 냈다.
‘흠차 대인, 너무 인정이 없어. 죄를 가져다 붙이다니 정말 역겹군! 설마 이 많은 관원에게 죄를 물을 셈인가? 강남 관료들을 몽땅 요절내려고 온 게 아니라면 총독 대인께서도 가만히 계시지만은 않을걸! 규율을 어기고 강남 관원들에게 죄를 물었으니 나중에 어떤 꼴을 당할지 두고 보겠다!’
한데 범한이 보여 준 의외의 행동에 관원들은 하마터면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범한이 손을 뻗어 두툼한 선물 목록을 화로 속에 던져 버려서였다.
불길이 치솟았다. 관리들이 뇌물을 뿌린 사실이 적혀 있는 증거가 순식간에 재로 변해 갔다.
범한은 화로 옆에서 말없이 있다가 잠시 후 입을 뗐다.
“본관이 유치한 수단으로 사람 마음을 사려 한다 생각하지 말아요. 여러분이 우둔하지 않듯이 나 또한 단순히 친절을 베푼 건 아니니까요. 이것들을 태워 버린 건 여러분에게 아직 살길이 하나 남았음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범한이 뒷짐을 지자 수려하고 말간 얼굴에 의연함이 스쳤다.
“본관은 감찰원 제사이니 여러분에게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강남에서 하려는 일은 대인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부디 정신 차리고 나중에라도 같은 잘못을 저질러 내가 인정사정없이 잡아들인다고 해도 원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감찰원은 3품이 안 되는 관원들만 조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범한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그만한 기백이 있어서였다. 체면과 관련해서는 범한은 특수 신분이었다. 조정의 어느 관원보다도 특수하다 보니 굳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업무 관련 도움을 받는 것과 관련해서는······ 강남로 관원들에게는 체면이란 게 아예 없었다. 그래서 당당한 제사 대인과 맞설 용기조차 없었다.
“이따가 환영회 후, 저 상자 안에 든 귀중품 안에서 자기 것을 모두 찾아가기 바랍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돌려줄 건 다 돌려줬으니 노역에 동원된 백성 모두에게 임금을 환산해서 주도록 해요. 고을이 가난해 바로 임금을 줄 수 없다면 내게로 문서를 작성해 보내고요. 본관이 가지고 있는 은전을 내어 주리다.”
관원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이때 소주 나루터에 도르래와 줄의 설치도 마무리되었다. 20여 년 전에 나온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는 물건으로 무거운 물건을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선박 위로 도르래와 줄이 설치되자 거대한 상자 하나가 아래로 천천히 내려왔다. 대체 무슨 물건을 넣어 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어찌나 무거운지 도르래와 연결된 쇠줄이 살며시 흔들거렸다.
범한은 이미 사전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소주 나루는 황실 금고 물건을 내보내는 제일 큰 나루라 도르래와 쇠줄로 물건을 매달아 선적하고 하역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무거운 상자를 옮기는 건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놀라운 일을 겪었던 관원들은 나루터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거대한 상자가 강기슭으로 내려오자 십여 명의 사람이 그것을 힘겹게 언덕 위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죽붕 안까지 밀고 갔다. 그러자 감찰원 관원이 공손하게 아뢰었다.
“제사 대인, 상자가 당도했습니다.”
범한이 “그래.” 하고 대답하고는 상자 옆으로 걸어갔다. 상자 밖은 버드나무 가지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 듯하고 안쪽은 쇠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관원들은 ‘이 대인이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답답해했다. 이때 총독 설청과 순무 대사성도 상자 안에 대체 무슨 보물이 든 건지 궁금해 다가왔다.
범한이 품에서 열쇠를 꺼내 상자 뚜껑을 열었다.
* * *
관무미가 처음 이 상자 안에 있던 물건을 봤을 때처럼 내부는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전이었다. 안에 있는 건 모두의 눈을 사로잡는 반짝이는 은전이었다. 그것도 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사실 아까 상자 안에 있던 선물들도 이 큰 상자에 든 은전과 비교해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천 년 넘게 습관적으로 은전을 사용해서 그런지 갑자기 수많은 양의 은전이 눈앞에 나타나자 시각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은 것뿐이었다.
한참 후에야 사람들은 아쉽다는 듯 시선을 상자에서 거둬들였다. 그리고 범한을 바라보며 그가 이제 어떤 연기를 하려는 건지 볼 준비를 했다.
“이 상자는 본관이 경도에서부터 가져온 것입니다. 훗날 어디로 부임하든 이 상자를 가지고 다닐 겁니다.”
범한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왜냐고요? 각 로의 관원들에게 본인이 가진 건 은전뿐이란 걸 알려 주기 위해서지요. 여러분이 비웃어도 상관 않습니다. 나, 범안지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인물이니까요. 누구든 은전이란 이기(利器)로 나를 매수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꿈 깨야 할 겁니다.”
범한이 이제는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번에 강남에서 본관은 여러분들의 은전 사용처를 조사할 것입니다. 정무에 사용한 것은 괜찮지만, 누구든 뇌물을 주고받고 백성들을 속이는 데 은전을 사용했다면 내가 독하게 나가도 원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옛 선현 중 어느 분은 관리의 공무 집행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검을 넣는 관을 몇백 개나 짜놓고 소리쳤지요. 탐관을 모조리 죽여야 이 잘못된 기풍을 고칠 수 있다고 말이지요.”
범한이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본관은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관이 아니라 은전을 들고 왔답니다.”
관원들은 등골이 오싹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상자 안에 든 은전은 모두 13만 8,880냥입니다. 이 자리에서 관원 여러분과 마중 나와 주신 어르신들에게 말하겠습니다. 강남은 부유한 지역입니다. 그러니 본관이 민생을 위해 이 은전을 얼마나 사용할지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하나 본관이 강남에서 떠날 때 이 상자 안에 든 은전이······ 절대 단 한 냥도 늘어나 있지 않으리란 건 보장합니다.”
범한이 여러 관원의 눈을 훑어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대인 여러분, 이런 내 약속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연기가 마무리되고 나루터의 환영회도 일단락이 되었다. 범한이 의자로 돌아가 앉고 보니 소매 밑으로 드러난 양팔에서 닭살이 돋고 있었다. 이에 아까 말할 때 함께 곤경을 헤쳐 나가자는 둥, 가시밭을 걷는 심정으로라는 둥 거창한 수식어를 내뱉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소주에서의 오후, 고요한 총독 관저 서재.
1품의 고위 관료이자 강남 총독인 설청이 팔걸이 의자에 앉아 미소 짓고 있었다. 곁에는 그와 여러 해를 함께한 고문 둘이 각각 앉아 있었다. 그중 한 고문이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이번 흠차 대인이······ 소란의 핵심일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한 고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혀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작은 범 대인이 강남 관원들의 체면을 일거에 구겨 버렸습니다. 비록 범 대인의 신분으로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겠지만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준 겁니다.”
그러자 설청이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이 보기에 범한이 일부러 으스댄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까?”
두 고문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 총독이 탄식했다.
“젊은이 아닙니까. 그러니 표현하려는 욕구가 있는 것이겠지요.”
고문이 조심스레 물었다.
“대인께서 보시기에 작은 범 대인은 어떤 사람 같습니까?”
설청이 살짝 어리둥절해 한동안 깊이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총명한 사람입니다. 지극히 총명한 사람이지요. 교제할 만한 사람이고요. 그것도 깊이요.”
질문을 한 고문은 조금 의아했다.
‘왜 앞서 결론을 내린 것과 다르게 말씀하시지?’
설청이 잠시 자조적으로 웃었다.
“으스댄다 한들 그게 뭐 어떻겠습니까? 천하 백성이 그때 상황을 봤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경도 책상물림 대신들이 이번 달에 진짜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겠습니까?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요. 진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말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는 법이니까요. 작은 범 대인은 민간에서 칭송이 자자합니다. 백성들은 이번 일을 열심히 퍼뜨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범 대인을 향한 애정이 있으니 이번 일 중 그에게 불리한 점이 있다면 저절로 깎여 나갈 것입니다. 반면 관료들의 적폐며 관료들을 대놓고 꾸짖은 모습은 더 멋지게 부풀려질 테고······.”
총독 대인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상자에 십만 냥을 싣고 배로 옮겨 소주까지 왔어요.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경국에는 미담이 하나 더 늘게 될 것입니다. 감찰원에서 온 이라 그런지 아주 영특합니다.”
그런데 한 고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그렇게나 총명한 사람이라면 오늘 일은 분명 더 원만하게 풀 방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데 작은 범 대인은 이리도 격렬하면서도 황당한 방법을 선택해야만 했을까요?”
설청 총독이 웃는 듯 아닌 듯 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몰라도 됩니다.”
설청 총독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바로 입을 닫아 버렸다. 아무리 자신과 친밀한 고문들이라 할지라도 어떤 일들은 말해서는 안 되어서였다.
범한은 오늘 직접 칼을 빼 들고 모든 관원들에게 미움을 샀다. 총독인 자신에게 성의를 보인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범한이 먼저 항주에서 지내겠다고 의사를 밝힌 건 그가 관료 사회에서 지켜야 할 점을 제대로 알고 있음을 의미했다. 더군다나 관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으니 흠차 대신이 강남에 있을지라도 관원들은 그의 곁을 맴돌지 않을 것이고 이는 곧 총독인 자신이 계속 강남 제일인자로 남아 있을 거란 의미였다.
돌연 다른 일이 생각난 설청이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범한에 대한 평가가 한층 더 높아져서였다. 젊은 권신이 오늘 이리 으스댄 건 단순히 자신에게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만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춘시 사건부터 강남에서의 일까지 이제 보니 범한은 천하의 모든 관리에게 밉보였다. 근 2년 사이 조정의 고관들이 본 범한은 자기 장인 일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이건······ 고립된 신하가 되려는 과정인가.
설청은 황제의 측근이어서 조정에는 그의 눈과 귀가 많았다. 이에 범한의 신분과 관련한 소문이 확실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범한의 신분이 떠오르자 왜 그가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고립된 신하가 되려는지 명확히 이해가 되었다.
자신에게 금기인 것을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설청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은가. 강남은 이제 젊은 제사와 함께 나아가야겠군.’
380화
오후가 되어 따뜻한 햇살이 초봄의 한기를 약간 흩어 버리자 소주성 사람들은 찻집으로 나와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었다. 소주 사람들은 부귀했다. 너무 부유해서 한가한 시간이 많아 찻집에서 시간을 죽이며 지내는 걸 좋아했다. 특히 오늘 성안에서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니 찻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침이며 찻물을 열심히 튀어 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이제 막 부임한 흠차 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천하에서 유명한 범한 제사 말이다.
“들었는가? 관원들이 너무 놀라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버렸다던데.”
한 중년의 상인이 히죽히죽 웃었다. 관리들에게 당한 적 있는 민간의 인사들은 그 장면을 즐겁게 감상한 터였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안타깝구먼. 큰일인데 흐지부지됐어. 흐지부지됐다고! 흠차 대인께서 정말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면 그 탐관오리 놈들을 몽땅 감옥에 처넣으셨어야 해!”
“멍청한 소리!”
앞서 먼저 말했던 중년 상인이 무시하는 듯 조소를 날렸다.
“관리들이 몽땅 감옥으로 가보게. 누가 사건을 심판하겠는가? 또 누가 일을 처리해야 하지? 작은 범 대인은 하늘이 내린 인재에 심계도 깊어. 어찌 우리 같은 백성처럼 경중도 모르시겠는가? 그건 걸 일러 산을 두드려 호랑이를 놀라게 한다고 하는 거네. 두고 보게나, 나중에 좋은 구경을 하게 될 터이니. 내 보기엔 강남로 관원은 이참에 감찰원이 얼마나 대단한지 제대로 맛보게 될 걸세.”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군. 영명하신 황제 폐하께서 범한 제사를 강남으로 파견해 주셔서 다행이야.”
그러자 상인이 소리를 죽이고 웃으며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영명하셨으니 범한 제사를 낳은 것이야.”
찻상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상인이 말했다.
“전에 우리 집 일꾼이 나루터에서 봤는데······ 제사 대인의 수하들이 정말 무섭다더군. 큰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온 수하들이 채찍 서른 대를 맞았데.”
앞에 있던 사람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받아쳤다.
“그래야 옳지. 부하들이 작은 범 대인 몰래 은전을 받지 않았나. 죄를 지은 증거도 떡하니 있었고. 한데 은전은 몽땅 돌려줬지, 뇌물 목록도 불태워 버렸지. 그러니 죄를 묻기는 쉽지 않을 거네. 한데 부하들을 더 엄하게 단속해 놔야 강남로 관원들도 믿을 거 아닌가! 전에 나도 가서 봤다네. 쯧쯧, 정말로 인정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더군. 채찍으로 때릴 때마다 살점이 몇 개씩 떨어져 나와서 피가 이리저리 튀는데 정말 끔찍하더라고.”
* * *
한편 흠차 대인은 1처 염상 장원에 잠시 기거 중이었다. 그리고 1처 곁채에는 참담한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범한이 순서대로 서 있는 측근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들의 등에 생긴 채찍 자국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든 상처용 약을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웃으며 꾸짖었다.
“안 발라 줄 테야. 이 도련님께서도 부하들 처지는 이해하지만 왜 여기에서 울부짖고 있는 건지······. 채찍 맞을 때나 더 처참하게 소리를 내지를 것이지!”
소문무가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인의 체면을 생각하니 채찍을 맞을 때는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되겠기에······. 하오나 대인, 저희에게 주신 상처에 바르는 약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까? 어째 바를수록 아픈 것 같습니다.”
범한이 씨익 웃어 보였다.
“채찍을 살살 때렸으니 이제는 제대로 된 고통을 맛볼 때가 왔느니라!”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곁채에서 나갔다. 그리고 걸어가는 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양만리 말이 어떤 때는 정확하다니까. 내가 좋은 관리가 아니니 부하들에게도 청백리가 되라고 강요하기가 힘드네. 윗물이 안 맑으니 아랫물이 맑을 턱이 있나. 힘들구나.’
그날 오후 범한은 잠시 머무는 숙소 안에서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를 접견했다. 범한에게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강남로 다른 관리들과는 달리 황실 금고에 소속된 관리들은 모두 그의 직속 부하인 만큼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기에 눈 딱 감고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범한은 나루터에서 보여 줬던 무서운 모습과 다르게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몇 마디 말을 하고는 출발 날짜를 정했다. 그러고는 환한 얼굴로 관리들을 배웅하니 황실 금고에 소속된 관리들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녁, 강남거에서 준비한 환영 연회에서 강가 주와 현의 관리들은 범한이 무서워 예의상 잠시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더구나 그들이 소주성에서 오래 머무는 걸 허락하지 않는 조정 규정은 감찰원 범 제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은 그들에게는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한편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소주성 관리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상석을 바라봤다.
상석에서 범한과 강남 총독, 순무 대인이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함께 술잔을 부딪쳤고 옆에 있는 소주 지주는 똥 씹을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면 흠차 대인이 앞으로 항주에 머무른다는 걸 아는 항주 지주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소주 관리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아부를 떨었다. 세상 물정에 훤한 항주 지주는 냉정하게 대하는 범한의 모습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상사에게 잘 보인다면 나쁠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연회가 끝난 뒤 먼저 총독 대인이 가마를 타고 떠나자 남은 두 사람은 서로 감사 인사를 나눴다. 이 모든 게 끝난 뒤에야 범한은 비로소 건물에 있는 관리들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체질상 가마보다는 마차를 이용하는 걸 훨씬 좋아했다.
그가 창문 발을 걷자 소주성의 바람을 타고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강남은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해서 거상들이 훌륭한 기녀들을 많이 양성했고 특히 소주와 항주는 좋은 기생집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다.
범한은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차가운 밤바람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체내의 정기는 상당 부분 회복되었지만 주량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상태라서 오늘 관리들과 술을 마시자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항주성 장소는 정해졌고 소주성은 어떻게 되었는가?”
범한이 눈을 살짝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앉은 사천립이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상문 낭자가 중순쯤 도착한다고 해서······ 그래서······ 저는······.”
범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뜨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을 하게 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겠지만 1, 2년만 참게. 자네도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알지 않나.”
범한과 사천립이 하는 이야기는 바로 포월루를 남쪽에 진출시키는 계획이었다. 기생집은 금전 흐름 속도가 가장 빠른 장사이고 가끔은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경도에 있을 때부터 포월루를 강남에 진출시켜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적지 않은 장애에 부딪히겠지만 자신의 권세를 이용한다면 1년 안에 문제없이 계획을 달성할 수 있었다.
사천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대인, 이 일을 잠시 늦출 수는 없는 겁니까? 모레 대인은 황실 금고로 출발하실 거고 소주성에는 믿을 만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여건에서 저 혼자 장소를 정하고 건물과 기생들을 사는 걸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내가 없어도 3 황자마마가 계시지 않은가······.”
범한이 약간은 음흉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내일 3 황자마마를 가르칠 선생 몇 명을 뽑을 것이네. 나중에는 나를 따라 항주로 오시겠지만 며칠간은 소주에 머무르셔야 할 테니······. 잊지 말게나, 3 황자마마께서 경도에서 무슨 장사를 하셨는지. 나이는 어리지만 무서운 수단을 부릴 줄 아는 분이네. 3 황자마마가 계시면 총독 대인도 함부로 뭐라 말하지는 못할 테니 돈만 있다면 좋은 장소나 기생을 마음껏 살 수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인가? 3 황자마마께서 계시는 만큼 강남기생집 사장들도 감히 자네를 해치려 하지 못할 테니 자네는 은전으로 찍어 누르기만 하면 되네. 설마 나한테 충분한 은전이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겐가?”
사천립이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각했다.
‘폐하께서 3 황자를 함께 보낸 것은 동행하며 가르치라고 하신 건데 스승님께서는······ 애초부터 강남 기생집을 여는 데 3 황자를 이용할 생각이었던 거야. 어떻게 이런 대역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할 수가 있지!’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천립은 다른 의문이 들었다.
‘대인이 돈을 많이 가지고 오셨던가?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13만 8,880냥에 해당하는 은괴는 사용하지 못할 텐데. 하지만 대인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분명 상당한 은전을 가지고 계신 것이 분명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사천립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방법을 쓴다면 강남 건물이나 기생들 몸값이 오를 것이고······ 은전이 물 새듯이 빠져나갈 테니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겁니다.”
이때 소주성 청색 돌길을 달리던 마차는 문을 거쳐 번화한 상업 구역에 도착했다.
밤인데도 거리는 상점 간판들로 밝게 밝혀져 있었다. 황실 금고 생산품을 밖으로 운송하는 가장 큰 항구가 있는 소주는 동이성 다음으로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더구나 이곳에서 판매하는 유리는 북제보다 5분의 4 정도 저렴했다. 하지만 범한은 유리의 원가를 알기에 소주 상인들이 몇십 년 동안 상당한 돈을 벌어들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갖가지 상점 간판 외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정한 간격으로 튀어나와 있는 검은 천이었다. 검은 천이 눈에 띄는 이유는 밤에도 잘 보이는 형광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천이 나부끼는 곳에 술집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검은 천에 그려진 문양이 범씨 집안 휘장과 비슷해서였다.
모두 전장들이었다.
마차를 타고 천천히 대로를 지나던 범한이 새로 검은 천이 걸린 전장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저 전장에는 가지 말게.”
범한이 가리킨 곳을 슬쩍 본 사천립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초상전장?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군요. 태평전장 말고 다른 곳과 거래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범한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현금 거래가 불편해지자 상인들은 은표를 자주 이용하게 되었고 전포나 전장과 같은 기구들의 역할이 점차 커졌다. 하지만 전장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이 신용과 자본인 만큼 이 세계에서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십 년 동안 큰 물고기 몇 마리들이 시장을 장악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물고기를 뽑자면 경국, 북제, 동이성이라 할 수 있었다.
경국과 북제에서 발행하는 은표는 관표인 만큼 신용이 가장 좋았지만 조정 관리들은 그 중요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관표는 현금으로 바꾸기가 아주 불편했고 유연성도 끔찍할 정도로 안 좋았기 때문에 상인들은 보통 동이성에서 설립한 태평전장을 이용했다.
태평전장은 동이성의 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북제와 경국 왕공 귀족들도 투자를 했기 때문에 세 나라가 죽기 살기로 싸워도 태평전장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에 신용도 좋고 자본도 풍부한 데다가 이용하기도 편리한 태평전장은 20∼30년 동안 각국 상류층의 지원을 받아 천하에서 가장 큰 전장으로 성장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태평전장은 천하에서 가장 큰 전장이었다.
이 거리에도 태평전장이 세 개나 있었다. 범한이 마차 밖에 나부끼는 검은 천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돈은 태평전장에서 찾도록 하게.”
사천립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그가 이어 말했다.
“원하는 만큼 찾아 쓰도록 하게. 내가 가기 전에 자네에게 인감과 금액을 알려 줄 테니 구두쇠처럼 굴지 말고 아끼지 말고 써야 하네.”
‘원하는 만큼 찾아 쓰라고?’
이 세계에서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이 있을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천립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굳이 거래할 필요는 없지.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건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인데 굳이 그들과 거래할 필요는 없네.”
381화
사천립은 심복인 만큼 범한이 북제 쪽을 말한다는 걸 알아듣고는 긴장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곰곰이 북제 쪽을 생각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곧 있을 황실 금고 공개 입찰 일이 떠올랐다. 만약 범한이 명씨 집안과 하서비가 낙찰 경쟁을 하는 데 금전적으로 도와주려 한다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금이 있어야만 했다.
“대인, 황실 금고 일로 들어갈 돈이 많으니 기생집 개업하는 일은 늦추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에게 필요한 돈과 황실 금고 낙찰에 필요한 돈은 자릿수부터가 다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네. 그리고 개업을 빨리 서두르려는 이유는 첫째로 그 일에 흥미가 있으신 3 황자마마가 소주에 계실 때 하면 일을 편리할 수 있고, 둘째로······.”
그는 경도에 남아 있는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웃음을 참으며 계속 말했다.
“둘째로 강남 기생들이 우리 범씨 집안에서 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하루라도 일찍 할 수 있으면 일찍 해야 하네.”
이 말을 거짓이 아니었다. 경도 포월루는 규칙을 정하고 석청아가 관리하면서 여건이 상당히 좋아졌다. 기생들이 몸을 파는 장사를 하는 건 바뀌지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기생들은 내야 할 공제금도 줄었고 정기적으로 의원에게 진찰도 받았으며 듣도 보도 못한 ‘노동 계약’도 맺었다. 이에 포월루 기생들은 범한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었고 이 일이 밖에 알려지면서 경도 기생집들에 진취적이고 건전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니 포월루가 만약 강남에 분점을 연다면 강남 기생들도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었다.
* * *
범한은 소금 상인이 내어 준 장원에 돌아와서 사사가 건네준 뜨거운 국을 마시니 술도 깨고 몸도 따뜻해졌다. 그는 먼저 책상에 놓인 보고서를 읽고 별일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 사사에게 먼저 방에 들어가 자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나가 다른 방문을 두드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호위 무사와 6처 검수들이 급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해당타타가 자다 깬 듯한 얼굴을 내밀자 범한은 놀라 물었다.
“이렇게 일찍 자는 겁니까?”
해당타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표시를 한 뒤 연기가 나지 않는 등잔을 밝혔다.
“이 상인 집의 물건들은 전부 아주 고급스러운 것들뿐입니다. 이 침대도 어찌나 편한지. 대인이 오늘 밤에 환영 연회에 갔으니 분명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올 거라 생각해 먼저 잠들었습니다.”
해당타타의 모습을 눈여겨 바라보던 범한은 그녀가 얇은 옷만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많이 껴입어야 합니다. 낭자의 경지가 높은 건 알지만 찬바람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됩니다.”
해당타타가 대꾸하기 귀찮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온 이유나 빨리 말해요.”
자신이 뭘 말하러 왔는지 잊어버린 범한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그가 배에 오른 뒤 해당타타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가 오후에 신출귀몰하게 정원에 나타났었다. 그는 자신이 해당타타가 방에 있는지 확인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북제 성녀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려고 온 것인지 생각했다.
“나는 취하도록 마시는 게 쉽지 않아요.”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난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낭자도 내가 죽는 걸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 앞이 아니면 취하지 않아요.”
“그럼 대인은 집 안에서만 취하게 마십니까?”
해당타타가 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에 묻자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취했을 때 지켜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 앞에서만 취할 수 있지요.”
범한의 의도를 알아채고 미소를 짓던 해당타타는 순간 그가 불쌍해졌다.
“굳이 거짓말할 것 없어요. 지난번 상경성에 있는 술집에서······ 취한 적이 있잖아요.”
그때 북제 상경성에서 해당타타와 술을 마시던 범한은 인사불성이 되어 춘약에 중독되는 바람에 다시 태어난 이래로 가장 큰 일을 치를 뻔했었다.
그때 일이 떠오른 범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건 낭자를 믿고 그런 건데······.”
말을 하던 그는 해당타타가 맘 편히 취할 수도 없어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위풍당당하게 큰소리를 쳤다.
“어렸을 때는 항상 취했었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요.”
해당타타가 웃으며 물었다.
“그때는 그럼 그······ 장님 대사가 항상 옆에 있어 줬던 건가요?”
범한이 대답하지 않자 해당타타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대인은 고주망태가 되면 시흥이 폭발한다고 하던데. 경국 황궁에서 취했을 때 시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지었잖아요. 설마 그것도 거짓으로 취한 척했던 건가요?”
범한이 이런 재미없는 대화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은전은 어떻게 됐습니까?”
해당타타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일어나더니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8월부터 준비를 시작하셨으니 걱정할 것 없어요.”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이 일 때문에 아버지께서 국고 은전을 꺼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해당타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인은 십여만 냥의 은전이 있으면서 너무 어리석게 행동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는 대인이 강가 환영회에서 위엄을 보이려고 그랬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그 말에 범한은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부득이하게 그렇게 한 건데 그 자세한 내막을 어떻게 자세히 말해 줄 수가 있겠어?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해 줄 수 없다고.’
“하지만 쓸모없는 은전을 가지고 있어서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요?”
“대인은 출세한 지 2년도 안 됐는데 이렇게나 많은 은전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해당타타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대인과 대인 아버지의 봉록을 꼬박 백여 년은 모아야 모을 수 있는 돈인데 관리들에게는 어떻게 해명하려 하십니까?”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범씨는 명문가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집안 사업이지요.”
“뭐요? 집안 사업으로 이렇게 많은 은전을 쉽게 얻을 수 있다니······ 설마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겁니까? 도찰원 어사가 대인을 주시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설사 집안에 이렇게 많은 돈이 없다고 해도 2년 동안 내가 장사를 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기생집 하나에 서점이 십여 개면······ 수입이 어느 정도 되는 거죠?”
범한이 운영하는 상점을 세어 보다가 해당타타가 호기심에 물었다.
“제 아우의 재물을 긁어모으는 능력을 우습게 보시면 안 됩니다. 물론 제가 2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요. 모두 그 상자 안에 담아 놨습니다. 경도에서 떠나면서 은괴를 마련할 때 아버지께서 도움을 주지 않으셨다면 저도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범한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설명했다.
“일이 끝난 뒤 뇌물 받은 은전을 깨끗한 은전과 함께 섞는다면 조정에서도 제가 뭐라 하지 못할 겁니다. 은전을 충분히 모으기 위해서 제 명의로 된 상점에서 은전을 모두 긁어모아서 지금 경도 금고가 텅텅 비어 있거든요.”
범한의 계획을 알게 된 해당타타가 경멸하는 눈빛을 지었다.
“대인과 같은 지위에 있는 분이 어떻게 뇌물을 세탁할 생각을 하십니까?”
“사람마다······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 것이지요.”
“은전을 상자에 넣는다고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는 상태라서 사용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그 돈을 어쩔 생각입니까?”
범한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낭자가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귀여운 황자마마도 계시고요. 이번에 마마께서 태평전장에서 상당한 금액의 돈을 융통하셨는데 제가 필요할 때 꺼내 써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해당타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지금에야 비로소 책략과 같은 방면에서는 자신이 범한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실감했다. 교활한 수단을 활용해 돈을 긁어모으는 방면에서 그녀는······ 범씨 집안사람들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주시할 수는 있었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인물이라 알려진 범한과 해당타타가 깊은 밤에 방 안에 앉아 은전, 은표, 전장, 돈세탁과 같은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황당하면서도 웃기는 장면이었다.
한편 촛불이 높이 걸린 저택 정당에는 앞으로 강남에서 범한이 펼칠 정무 을 보여주는 상자가 보란 듯 놓여 있었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마다 이 상자에 저절로 시선이 갔지만 어둠 속에서 지키고 있을 호위와 6처 검수들이 두려워 십여만 냥의 은전을 건드는 사람은 없었다. 천하에 악명 높은 도둑이나 돈 욕심 많은 좀도둑도 정당에 놓인 상자를 건드느니 차라리 관아 창고에 든 은전을 훔치는 게 더 안전하다는 걸 알았다.
활짝 열려 있는 상자는 조금의 숨김도 없이 모두에게 솔직한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 가득 담긴 눈처럼 하얀 은괴는 사람을 혼을 빼앗을 만큼 밝은 빛과 함께 무시무시한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 * *
며칠 뒤 강남로 전체를 시끌벅적하게 만든 흠차 대인 범한이 마침내 소주에서 떠났다. 부하들을 이끌고 관도를 따라 남서쪽 황실 금고 전운사 소재지로 길을 나선 것이다. 3 황자는 소주성에 남았지만 관리들로서는 범한보다는 어린아이 하나 상대하는 게 더 쉬웠기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3 황자는 관리들이 자신을 어린아이로 얕잡아 보고 있다는 걸 몰랐다. 만일 그 사실을 알았다면 거친 성격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관리들의 혼을 쏙 빼놓았을 것이다.
사실 3 황자는 범한이 자신을 황실 금고로 데리고 가지 않아 약간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과거 섭가의 것이었던 황실 금고는 경국의 안정과 발전을 간접적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니 경국은 황실 금고에 기대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실 금고는 조정에서 가장 엄격하게 관리하는 곳이었고 심지어 황궁보다도 경비가 삼엄했다. 이에 백성들은 벼락이 바깥을 지키고 천신이 안을 지키고 있다고 알려진 황실 금고를 한 번 보는 걸 평생의 바람으로 여길 정도였다.
3 황자는 비록 황자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황실 금고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제가 특별히 허락하지 않는 이상 황자들도 황실 금고를 볼 자격이 없었다. 이에 3 황자는 이번에 범한을 따라 강남에 내려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황실 금고를 볼 수 있다고 들떠 있었는데 범한이 자신을 소주에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
퍽! 소리와 함께 학식이 풍부한 중년의 서생이 울며 기어 나왔다. 그 뒤를 따라 나온 3 황자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부황께서 내 스승으로 지정한 범한이 도망을 쳤으니 너라도 맞아!”
집안 종들은 숨을 죽인 채 속으로 생각했다.
‘흠차 대인이 떠났으니 누가 3 황자를 벌할 수 있겠어? 심지어 총독부에서 초청한 교사 선생도 발길질을 당하고 있는데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분풀이를 하던 3 황자는 사람들이 복도 밖으로 도망치자 화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그의 눈에 범한의 제자인 사천립이 보였다. 3 황자가 아무리 성격이 더럽다고 한들 범한이 아끼는 제자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사 선생은 왜 자리에 남아 있는 겐가?”
사천립이 짐짓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마마를 뵈러 왔습니다. 소신과 함께 나가 바람 좀 쐬시지요.”
3 황자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소주성에는 놀 만한 곳이 없는 거로 아는데.”
사천립이 송구스러워하며 대답했다.
“마마, 스승님이 요 며칠 동안 해야 할 공부를 모두 계획해 두시고 반드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마께서 다 하지 않으시면 어찌 되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마마를 데리고 놀러 갔다는 걸 스승님께서 아신다면 불같이 화를 내실 것입니다.”
3 황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그거야 하면 되는 거지.”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사천립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런데 사 선생은 왜 스승님을 따라 황실 금고에 가지 않고 소주에 남은 것인가? 여기서 뭘 하려고?”
사천립이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우물쭈물하더니 잠시 뒤 씁쓸한 미소를 띠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께서도 스승님께서 제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3 황자가 두 눈을 반짝이며 슬며시 떠보았다.
“그렇다면······ 포월루를 소주에서 열겠다는 건가?”
사천립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3 황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사천립이 소주에서 기생집을 여는 걸 도와주는 게 이 집에서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경도 포월루 지분을 뺏긴 데다가 범한도 겉으로만 도덕군자인 척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3 황자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382화
하늘과 땅이 아무리 커도 군자만큼 크지 않으니 군자가 없으면 스승이 크고 스승이 멀리 떠나면 군자가 가장 크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란 소인의 반대말이 아니라 진짜 군주의 아들을 말하는 것으로 어린 3 황자는 지금 소주성 안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3 황자의 모습에 사천립은 거짓으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마지못해 따라 나가겠다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신이 난 3 황자는 유모와 태감들을 모두 집 안에 내팽개쳐 둔 채 거드름을 피우며 사천립과 호위병 몇 명을 데리고 장원을 나갔다. 어린 주인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태감과 유모들은 이제 곧 큰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전전긍긍하면서 제사 대인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이 모든 게 3 황자의 신분을 이용하려는 범한의 계획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어렵사리 놀 기회를 얻은 3 황자는 절대로 조급해하지 않았다. 신분을 숨기고 여행 온 부잣집 공자로 위장한 그는 사천립에게 맏형 역할을 맡게 하고 자신은 아우 역을 맡았다. 마차를 타고 소주성을 한 바퀴 돌며 아름다운 풍경과 호수에 떠다니는 놀잇배를 바라보던 3 황자가 지루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기생들이 옷을 너무 두껍게 입었군. 이래서는 놀 분위기가 생기지 않을 텐데.”
귀티가 흐르는 부잣집 공자로 변신한 3 황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말했다.
“먼저 장소를 잘 골라야 하네. 모름지기 스승인 범 대인께서 하시는 장사이니 나도 신경을 써야겠네. 그러지 않으면 자네가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쏘다니기만 했다고 혼날 게 아닌가.”
아무 말 없이 있던 사천립이 속으로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부지를 선정하기 위해서 이들은 먼저 소주성에서 시끌벅적한 장소 중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를 골라 처음부터 끝까지 쭉 돌아다녀 보았다. 주변 기생집들을 살펴보고 장사 상황과 대체적인 위치도 파악해 두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가장 밝고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곳은 기생집이 아니라 호화롭게 치장한 3층짜리 술집이었다. 웅장한 건물에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대지 면적도 꽤 커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3 황자가 작은 손으로 그 건물을 가리켰다.
“더는 둘러볼 필요가 없겠군. 이 위치가 가장 좋아 보이네.”
그 말을 들은 사천립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경도 포월루에서 장사를 해봤지만 이처럼 지점을 고르는 일이 빠르게 진행된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속으로 돈과 세력뿐만 아니라 3 황자까지 옆에 있으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거라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술집 문 앞에서 안을 살펴보던 사천립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소가 너무 좋은 곳은 항상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습니다.”
3 황자가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천하에 나보다 더 힘이 센 세력이 있는가?”
사천립이 입을 쩍 벌리며 감탄하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만일에······ 총독부의 지분이나 순무가 지분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마마야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관리들의 체면을 신경 써야 합니다.”
3 황자는 나이가 어렸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총독 설청은 자신이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경도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에 나와 있는 상태에서 강남 관리들의 체면을 깎아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술집의 위치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고 욕심이 났다.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이렇게 좋은 자리를 그냥 지나치면 범 대인도 아까워할 테고 나도 배가 아파 한참 고생할 것 같으니까.”
게다가 이들은 한참 동안 술집 밖에서 머무른 터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하고 있었다. 소주성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술집 문 앞에서 음식 냄새만 맡으며 수군대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이었다. 이에 주변 사람들은 귀티가 흐르는 차림새에 위풍당당한 호위병까지 이끌고 나타난 외지인들을 보며 곧 있으면 시끄러운 일이 생기겠다고 짐작했다.
그때 건물 안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술집 지배인이 나와 직업으로 단련된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셔서 저희 가게 요리를 맛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 죽원관은 강남거와 함께 소주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인 만큼 음식 맛이 아주 좋습니다.”
지배인은 가게 문 앞에 있는 외지인들이 보통 신분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조심스럽게 응대했다. 죽원관도 뒤를 봐주는 세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찾아온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하는 법이었다. 이에 그의 말에는 자신의 가게 앞을 막고 있는 걸 탓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천립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합니다. 고의로 가게 앞을 막은 건 아니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지배인이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3 황자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일행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던 그가 지배인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조용한 방으로 주시게. 의논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러자 지배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형은 가만히 있고 어린 아우가 왜 지시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사천립이 마른기침을 하며 아무 말 없이 술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일행이 방에 앉기도 전에 지배인이 들어와 인사하자 성격 급한 3 황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배인, 이 건물 팔 생각이 있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란 지배인은 속으로 어린 공자의 태도가 버르장머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일들은 겪어 온지라 내색하지 않고 공손하게 웃었다.
“보시다시피 장사가 잘되고 있어 아마도 사장님께는 파실 마음이 없으실 겁니다.”
“여기 사장의 성을 알려 주실 수 있읍니까?”
사천립은 속으로 3 황자의 급한 성미를 욕하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배인이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장님은 전(錢) 씨입니다.”
* * *
지배인이 나가자 사천립은 미간을 찌푸리며 3 황자에게 말했다.
“소주는 처음 와서 사정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천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때 3 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더니 무언가 신기한 거라도 본 것인지 화들짝 놀라며 감탄했다.
3 황자가 서 있는 창가에 다가간 사천립도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죽원관 후원과 연결되어 있어 창밖에는 잔잔한 호수가 있었다. 호수는 크지 않았지만 양쪽에 담장이 쳐져 있어 시끄러운 도시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아직 초봄이라 정원에는 잔디가 돋아나지는 않았지만 화창한 봄날이 되면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낼 게 분명했다.
“정말 닮았네.”
두 사람이 동시에 감탄을 내뱉었다. 여기서 닮았다는 말은 죽원관이 경도 포월루와 상당히 닮았다는 의미였다. 만약 이곳을 수리할 수만 있다면 경도 포월루와 똑같이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포월루의 전임 사장인 3 황자와 현재 사장인 사천립은 죽원관 후원을 보자마자 같은 생각을 했다.
“반드시 인수해야 해!”
3 황자와 사천립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구동성으로 소리치고는 객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일은 돌아가서 죽원관 뒤에 있는 세력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배경이 그리 크지 않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에 고위층 관리가 연루되어 있다면 일은 복잡해진다.
3 황자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범사철 형님이 있었다면 술집 사장에게 소송을 걸어 상대방이 포월루를 베껴 가게를 차렸다고 따졌을 거네.”
사천립은 백작가 둘째 도련님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는가?”
3 황자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둘째 사촌 형님은 첫째 사촌 형님보다 악랄······. 하긴 두 사람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 하나는 일이 잘못되니까 흔적도 없이 도망을 치고 다른 하나는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얕잡아 보고 지분을 빼앗았으니까. 자네도 그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있네!”
3 황자가 갑자기 발끈하자 겁을 먹은 사천립이 눈치를 살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나온 음식은 지배인의 말대로 맛이 훌륭했다. 식사를 마친 뒤 떠나려 할 때 지배인이 급히 들어와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수 일에 대해 마음이 바뀌지 않으셨으면 다시 의논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3 황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술집은 한눈에 봐도 장사가 잘되는 듯했다. 그런데 아까 물었을 때는 분명 안 될 거라더니 갑자기 이렇게 태도를 바꾼단 말인가.
사천립이 넌지시 떠보았다.
“무슨 의미입니까?”
지배인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방금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최근에 장사가 이전만큼 좋지는 않다고 하시면서 손님들이 부르는 값으로 팔겠다고 하셨습니다. 가격이 적당하고 또······ 인수한 뒤에도 이곳을 잘 관리해 주신다면 팔 마음이 있으시다네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제안에 사천립이 다시 뭐라고 질문을 하려 하자 3 황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우리도 장사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잘 관리할 거네. 다만 적당한 가격이라 하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지배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나보고 가격을 부르라는 건가? 하지만 사장님께 들은 바가 없는데 어떡하지? 상대방은 사장님은 아무 가격에나 팔려 하는 걸 모르고 있으니······ 나라도 손해 보지 않는 가격을 불러야 하는 건가?’
초봄이 아니라 한여름이 된 것처럼 지배인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렸다. 한참을 주저하며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손가락 네 개를 폈다.
사천립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던 호위병까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4만 냥이라고? 아무리 자리가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다니!’
눈치를 살피던 지배인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잽싸게 손가락 세 개를 접고 집게손가락 하나만 폈다.
사천립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가격 한번 이상하게 매기는군. 아무 말도 안 했는데 4만 냥이 순식간에 1만 냥으로 변하다니.’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나쁜 가격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1만 냥이면 나쁜 가격은 아닌데······. 하지만······.”
사천립의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지배인이 휘청거리며 울먹였다.
“대인, 계산이 틀렸습니다. 그게 아니라······.”
사천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틀렸다는 겁니까?”
“그게······ 제가 말한 가격은 1만 냥이 아닙니다.”
지배인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1천 냥을 말한 것입니다.”
사천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 사천립을 대신해 3 황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계약하지.”
전혀 놀라지 않은 모습을 보니 3 황자는 이미 마음속에 모든 계획이 되어 있는 듯 보였다.
지배인은 이미 가게를 팔려고 모든 준비를 마친 듯 관부 인가를 받은 중개인에게 들어오라고 하더니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매매 금액을 쓸 차례가 되자 3 황자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금액은 1만 6천 냥으로 적게. 그 정도 가격이면 너무 싸게 파는 건 아니지.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금액의 2할을 먼저 주겠네. 팔 마음도 없었던 술집을 파니 자네 사장의 속이 얼마나 쓰라리겠는가. 2할의 은전으로 쓰린 속을 달래 줄 약을 사서 먹도록 하게.”
평민 복장을 한 3 황자에게서 존귀한 자태가 드러나자 놀란 지배인은 감히 뭐라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계약서에 양측이 지장을 찍고 내일 남은 대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383화
3 황자 일행을 술집 밖까지 배웅한 지배인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마음을 진정시킨 뒤 3층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계약서를 젊은 청년에게 건넸다.
그곳에는 깔끔한 용모에 온화하면서도 생기가 가득한 두 눈을 가진 청년이 있었는데 바로 항주 서호 루상루에 나타났던 명씨 가문 공자 명란석이었다.
계약서를 훑어보던 그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보이더니 순식간에 손을 들어 휘둘렀다. 짝!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고 지배인이 뺨을 부여잡은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린 주인을 바라봤다.
“쓸모없는 것!”
명란석은 화가 났음에도 얼굴은 여전히 온화해 보였다. 그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냥 주라니까 왜 그걸 못 해!”
사실 오늘은 그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가족회의를 마친 뒤 계속 소주에 머무르고 있던 명란석은 오늘 지배인에게서 누군가가 죽원관을 사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상대방의 생김새를 듣고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 그는 몰래 대화를 엿듣던 중 범사철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상대방의 신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냥 죽원관을 넘기려 했던 것인데······.
예상과 달리 상대방에게 헐값에 죽원관을 넘기지 못한 것이다. 1만 6천 냥은 전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세보다 높은 금액에 가게를 팔았으니 그가 이득을 얻은 셈이었다. 그렇다면 명란석은 왜 손해를 보면서까지 싸게 넘기려 한 것일까.
이유는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만약 상대방이 자신의 이러한 호의를 무시한다면······ 계약서를 경도로 보내 장 공주에게 범한과 3 황자가 권력을 이용해 억지로 가게를 싼값에 팔게 했다고 공격할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어린 3 황자가 걸려들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탐욕에 눈이 먼 황자라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던 건가?’
그는 자신의 집안이 확실히 예측하기 힘든 인물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두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가벼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범 대인의 의도는 아주 간단해. 기생집을 열겠다는 것이지. 어느 곳이든 그들에게 절대 기생을 팔지 말라고 지시하게. 아무리 높은 가격을 불러도 절대 팔면 안 되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일단 알겠다고 대답한 지배인은 눈치를 보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저희 가게들이야 기생들을 팔지 않겠지만······ 소주성에 있는 다른 기생집 사장들은 아마 범 대인에게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기생을 팔 겁니다.”
“그들에게 좋은 기생이 있던가?”
명란석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좋은 기생들은 모두 우리 원 대가의 손에 있네. 다른 기생집에서 판다고 해봤자 손님 끌기도 힘든 볼품없는 기생들뿐이겠지.”
* * *
마차가 죽원관을 떠났다. 주변 상인들은 위풍당당한 명가가 소주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인 죽원관을 손해를 보면서까지 팔았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일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사천립이 이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방이 마마의 신분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앳된 모습을 아직 벗지 못한 3 황자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곳 사장이 영리한 사람인가 보네.”
사천립이 잠시 고민하다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마, 지배인이 1천 냥을 불었는데 왜······.”
“왜 값을 올렸냐는 것인가?”
3 황자가 입꼬리를 올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 이유 없이 아첨하는 사람은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거나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는 거네. 내 신분을 눈치채고 술집을 그냥 내주려 하는 걸 덥석 받는다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는가? 훗날 이 일을 핑계로 부탁해 온다면 모른 척 무시할 수도 없을 게 아닌가. 그러니 아예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좋지. 천하에서 내 연줄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가?”
이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천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에 있는 사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상황을 살피는 능력이 대단하군요.”
“그게 누구든 싸게 넘기려 한 걸 보면 내 신분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 한 사람이네. 자네도 이번 일을 잘 새겨 뒀다가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기거든 조심하도록 하게. 나중에 범 대인에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야.”
사천립은 어린 황자의, 상황을 바라보는 능력에 진심으로 탄복을 금치 못했다.
“마마의 말씀은 간단명료하면서도 그 뜻이 심오합니다.”
3 황자가 아직 앳된 목소리로 버럭 화를 냈다.
“아부하지 말게. 힘들게 평민으로 위장했는데 금방 들켜 버려서 기분이 좋지 않아.”
그 말에 사천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어린 건 생각하지도 않고 지배인에게 반말로 명령하고, 술집을 사겠다고 당당히 말했으면서 신분을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야?’
한편 3 황자가 1만 냥 이상의 이득을 볼 수 있었음에도 그 유혹을 거절한 걸 보면 포월루에서 악랄한 짓을 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달라진 3 황자의 모습에 사천립이 의심 어린 눈빛을 짓고 있는 가운데 3 황자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범 대인의 말대로 내 신분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 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조정을 상대로 이득을 보려 하는 사람이네. 잠깐의 이익에 눈이 멀어······ 조정이 이용당할 빌미를 제공하는 건 향후 내 것이 될 이익을 내어 주는 것이니 바보나 하는 짓이지.”
잠자코 듣고 있던 사천립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태자가 버젓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황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게 타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정의 이익이······ 향후 자신의 이익이 될 거라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이지? 앞으로 자신의 이익이 될 거라는 건가? 황태자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사천립이 기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한 3 황자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께서 군자는 재물을 좋아해도 도에 맞게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네. 사실 군자의 재물은 천하 도처에 널려 있으니 구태여 구하려 할 필요도 없지.”
헛기침하면서 마차 창밖으로 펄럭이는 검은 천을 바라보던 사천립은 두려운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스스로 자신은 이 말을 못 들은 거라 세뇌했다.
“그러니 장사하는 건 단순한 취미 활동이라 할 수 있지.”
3 황자가 웃으며 계속 말했다.
“사 대인은 내 사촌 형님들보다 담이 작으니 장사를 할 재목은 아닌 것 같네.”
사천립은 몸을 살짝 움직여 땀에 젖어 등에 달라붙은 옷을 살짝 떼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마께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3 황자가 마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전장에 도착했으니 자네가 알아서 하게. 나는 먼저 돌아가 보겠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3 황자의 앳된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어렸다.
멀어지는 마차를 보면서 사천립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두 호위병에게 따라오라고 명령한 뒤 옷을 정돈하고는 태평전장 분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뒤 멀지 않은 곳에는 개업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초상전장이 있었다. 비록 들락거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천은 사천립의 고지식함과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
* * *
사천립이 전장에서 또 어떤 놀라운 일을 만났는지는 잠시 미뤄 두고, 소주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황실 금고 전운사 관할 지역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을 태운 거대한 마차 행렬이 초봄 차가운 비를 뚫고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황실 금고 전운사는 소금을 다루는 염사나 차를 다루는 다사와는 달랐다. 먼저 업무가 더 많은 만큼 이윤도 더 많았으며 세 곳 중 유일하게 실제 부지를 점유하고 있었다. 황실 금고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이나 공방은 거대한 대지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오래전에 조정이 민북 토지를 생산지로 할당한 뒤로 이곳은 점차 특별한 곳으로 변해 갔다. 작은 주(州)보다도 면적이 큰 이곳은 아주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황실 금고의 제조 기술이 밖으로 유출되는 걸 걱정한 경국 조정은 보안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국은 황실 금고 관할 지역 전체를 봉쇄하기로 했고 총 5단계의 보안선을 설치했다. 가장 외곽 보안선은 강남 현지 주군과 수군이 맡았고 안의 4단계의 보안선은 경국 군대와 감찰원에서 각각 두 개씩 맡아 관리했다. 한마디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구조였다.
또한 밖에서 상품을 운송하는 운송로는 공개적으로도 엄격한 관리 감독을 받았지만 암암리에도 상당한 감시를 받았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눈이 최씨 집안과 명씨 집안 그리고 다른 대리 거상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경국은 이렇게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다른 나라에서 보내는 탐욕의 시선을 막지 못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황실 금고에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고 경국은 심각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군대를 주둔시키고 황실 금고 보안을 유지하는 데에만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경국의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정보를 유출하려는 쪽과 지키려는 쪽의 싸움이 계속되면서 참혹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특히 감찰원은 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에서 가장 많은 대가를 치르는 기관이었다. 바로 이러한 희생 덕분에 황실 금고의 기술은 지금까지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었다.
지금 경도 수비를 맡은 진항의 형 진산은 과거 언약해와 함께 황실 금고 보안 업무를 책임졌었다. 이에 두 사람은 항상 황실 금고의 보안은 대종사도 뚫을 수 없고 모기도 향수 냄새를 묻히고는 밖으로 날아갈 수 없다고 허풍을 떨었었다.
마차가 마지막 보안 검사를 받고 있을 때 범한은 창문 발을 걷고 멀지 않은 강에 설치된 수력 기구를 바라봤다. 비록 초보적이고 조잡한 방식이었지만 동력을 얻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그가 가늘게 뜬 눈에서 살기를 드러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낭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제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각 작업장에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만약 낭자가 이곳에 들어온 걸 누군가 알게 된다면 일이 심각해지니까. 낭자가 9등급 절대 강자라 하더라도 이곳에서 도망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만일 정말 낭자가 이곳 기술을 빼돌리려 한다면 상처가 다 낫진 않았지만 제가 직접 나설 겁니다.”
여종으로 변장한 해당타타가 살며시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는 사사를 바라봤다.
거리에 심어진 나무 너머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흐르는 강물을 따라 움직이던 범한의 시선이 큰 공방에서 멈췄다. 그곳에서는 농가에서 피어나는 하얀 연기와는 다르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설마 용광로인 건가?’
조정에 의해 징집돼 황실 금고에서 일하는 이곳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변 비옥한 평야에는 잡초와 어린 벼가 뒤섞여 함께 자라고 있었다.
범한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신선한 걸 보니 이곳의 환경 오염은 상상했던 것만큼 심하지 않아 보였다. 물론 더 멀리 있는 동 광산은 여기보다 훨씬 심하게 오염되어 있을 것이었다.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니 그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기분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왠지 모르게 허전한 것 같았다. 작년 9월부터 그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뭔지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384화
범한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해당타타는 노인처럼 양손을 소매 안에 넣고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그녀는 주변 풍경에 정신이 팔린 범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곳에 오니 심정이 어떻습니까?”
범한의 마음이 심란한 걸 눈치챈 해당타타가 살며시 웃으며 묻자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말은 제가 낭자에게 물어야 할 말 같은데요.”
해당타타가 웃으며 고개를 돌려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보기 드문 광경이기는 하군요. 지금까지 경국 황실 금고가 대단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전에 봤던, 그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물건들을 이곳에서 생산했다고 하니 놀랍네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일러 줬다.
“이곳에서 보이는 것들은 그냥 잊어버려요. 어차피 돌아가서 그대로 만들 수는 없을 테니까.”
해당타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황실 금고에 대해 그 정도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해당타타의 질문에 당황한 범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자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것들은 원래 이 세계에 출현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에요. 낭자가 겉모습만 보고 만들려 한다면······ 낭패를 보게 될 겁니다.”
해당타타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황실 금고 사람들은 신양 측 사람들인데 어떻게 장악할 생각이에요?”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누가 관리하든 지금 총독은 내 사람이에요.”
해당타타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정말······ 그들과 죽기 살기로 싸울 생각인 거예요?”
범한이 가만히 해당타타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좀 늦은 것 같네요.”
해당타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대인의 장모가 아둔한 사람은 아닌 만큼 지금의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인이나 장 공주 모두 협상할 필요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 때문에 서로 감정이 틀어져 나서지 않는 것 아닌가요?”
“저는 장모님과 감정이 틀어진 적이 없어요. 아마도 낭자와 북제 황제 폐하는 그걸 원하는 것 같지만.”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장모와 손을 잡고 북쪽에 있는 과부와 고아를 무시하는 짓은 저지르지 않을 거니까.”
그는 해당타타가 자신의 말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 알 수 없었지만 북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황실 금고가 있는 이상 북제는 자신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해당타타의 말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치를 우습게 여기며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야 눈앞의 큰 이익을 위해 지난 원한은 모두 털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더구나 범한과 장 공주 사이에는 임완아라는 중재자가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장 공주가 한발 물러서기만 하면 범한도 화해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지금 장 공주는 이미 한발 물러선 상태였다. 암살 계획이 실패한 후 경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부인인 장 공주는 범한의 힘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하고는 몇 번이나 편지를 보내 화해하려 했었다. 다만 범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뿐이었다.
범한이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담담히 말했다.
“사실 제가 황실 금고를 장악하는 걸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장 공주가 화해를 요청해 왔지만······ 제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양에서 요청한 화해를 거절한 이유를 모르는 해당타타가 화들짝 놀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그러자 범한이 담담히 설명했다.
“장 공주는 지분 3할을 주면 제가 황실 금고를 쉽게 장악할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했습니다. 뭐, 생각해 보면 나쁜 조건도 아니지요.”
해당타타가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나쁜 조건이 아닌 건 물론이고 최대한 성의를 보인 것 같은데요. 물론······ 북제의 경우 범 대인과 장 공주의 사이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좋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친구의 입장에서 충고하자면 범 대인의 권력은 경국 황실에서 부여받은 것이고, 장 공주는 범 대인의 장모이자 황실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런 좋은 조건이 온 이상 승낙해야 할 것 같은데요.”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요? 하지만 전 다릅니다. 저는 누구와도 황실의 금고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왜 그렇죠?”
“그야 제 어머니가 남기신 사업이니까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해당타타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자 범한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어머니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부잣집 자제일 뿐이지만······ 황실의 금고가 망가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차에 긴 침묵이 흘렀다. 한참을 생각하던 해당타타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황실 금고는 지금 경국 조정의 것입니다.”
“조정은 실체가 없습니다. 조정의 실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황제? 관리? 황태후? 아니면 백성?”
이 말을 하는 범한의 표정은 단호해 보였다.
“핵심은 황실 금고가 제 손 위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또 그곳에서 나오는 은전이 어떤 경로로 사용되느냐입니다. 만일······ 조정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제가 대신 사용해 실체가 없는 기관에 백성이라는 두 글자가 드리워지게 할 수도 있겠지요.”
해당타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이제는 아주 습관적으로 성인인 척하시는군요.”
범한도 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언빙운 공자에게도 한 말인데 가끔 성인 노릇을 하는 것도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더군요.”
장 공주와 암암리에 진행했던 협상을 밝혀 해당타타의 입을 다물게 한 범한은 다시 아무 말 없이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강변에 설치된 물레방아에서 나는 소리와 멀리 굴뚝에서 연신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욕망을 부채질했다.
* * *
“대인, 도착했습니다.”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의 겸손한 목소리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을 깨웠다. 아직 완전히 정신이 들지 않은 그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마차에 앉아 있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황실 금고 전운사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은 그는 급히 옷을 정돈한 뒤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촐싹대며 뛰어내리는 모습이 항상 점잖고 의젓하게 행동해야 하는 관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실 이건 범한이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마침 제 어머니가 과거 집안을 일으켰던 장소에 도착했으니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양발이 단단한 땅에 닿자 범한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길가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관아 말고 다른 건 보이지 않자 설렘 가득했던 표정에 실망감이 스쳤다. 이곳은 그가 항상 상상해 왔던 활기 넘치는 발전의 현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거리를 조용했고 공방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운 건축들만 있었다.
소주에서부터 그를 안내했던 전운사 관리는 이런 모습을 보는 게 한두 번이 아닌 듯 정중하게 설명했다.
“3대 작업장은 이곳 관아에서 더 가야 있습니다. 오늘은 일단 쉬시고 내일 보러 가시지요.”
오늘 유리도 불어 만들어 보고 비단도 짜보면서 노동자들을 격려하려 했던 범한은 하루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관아 문이 열리자 황실 금고 전운사와 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군대와 감찰원 측 관리들이 양쪽으로 나란히 서서 흠차 대인 범한을 맞이했다.
범한이 먼저 들어가자 고달이 호위 무사 몇 명을 이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이후 자신과 같이 온 백여 명의 사람들이 지낼 곳을 순식간에 안내하는 걸 보면서 그는 이곳 일 처리가 듣던 대로 빠르다고 생각했다. 해당타타와 사사를 비롯해 여정 중에 새로 사들인 여종은 모두 뒤채로 보내졌다. 이들이 들어오자 적막하기만 했던 전운사 정사부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열기로 왁자지껄해졌다.
차례로 범한에게 인사를 한 관리들이 자리에 앉아 그가 훈사를 하길 기다렸다.
범한은 황실 금고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데다가 자신이 첫 번째로 보는 정무였기에 기분이 이상해 눈짓으로 소문무에게 자신을 대신해 몇 마디 하라는 표시를 보냈다. 이후 내일 정식으로 정무를 보기로 한 뒤 모두를 돌려보냈다.
뒤채로 돌아온 그는 관저에 익숙해질 틈도 없이 곧장 황실 금고에 상주하고 있는 감찰원 관리를 불렀다. 보안 업무의 정신적 소모가 심한 것인지 40대 정도밖에 되지 않은 관리의 머리는 이미 희끗희끗해져 있었다.
그가 관리에게 앉으라고 한 뒤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상황을 이야기해 보게.”
4처 소속인 이 감찰원 관리는 작년 가을부터 언씨 부자에게 밀서를 받고 있었기에 이미 모든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범한이 묻기가 무섭게 곧장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빠짐없이 보고했다.
그는 황실 금고에 처음 오는 범 제사에게 믿을 만한 측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빨리 상황을 파악하려 한다면 황실 금고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찾을 것이었고 그것은 곧 감찰원 관리인 자신에게 기회가 온다는 의미였다. 이에 그는 천금과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그의 설명을 듣던 범한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감찰원 관리는 말을 조리 있게 할 뿐만 아니라 3대 작업장에서 맡은 업무와 금고 관리인들의 파벌까지 황실 금고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했다.
“최근 몇 년 동안 황실 금고의 적자가 컸던 원인이 뭔가?”
선천적으로 담력이 큰 범한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질문하자 감찰원 관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쭈물했다.
지금 범한 앞에서 설명하는 감찰원 관리의 성은 단(單), 이름은 달(達)이었다. 그는 범한만큼 담이 크지도 않았고 말단 관리라서 몇 마디 말로 황실 금고 일을 모두 다 설명할 수도 없었기에 눈치껏 대답했다.
“사실 적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 몇 년 동안 경도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몇 할 적어진 건 사실입니다.”
범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황금알을 낳는 닭이 1년 동안 벌어들이는 수입이 줄었으면 적자를 본 게 아닌가? 전임자가 관리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는가?”
황실 금고의 전임 전운사 정사는 신양 이궁에 있는 장 공주의 수석 책사인 황의의 사촌 형 황완수였다. 범한이 황실 금고를 인수하게 되었음에도 직접 나타나 인수 절차를 밟지 않는 걸 보면 시세에 밝은 사람인 게 분명했다.
단달은 장 공주를 직접 험담할 수는 없었기에 범한의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에둘러 설명했다.
“수입이 해마다 줄어드는 원인은 작업장 담당자를 포함한 금고 관리인들이 자기 몫을 너무 많이 챙기는 바람에 3대 작업장에 들어가는 비용이 갈수록 많아져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최근 몇 년 동안 판매 경로에 문제가 생겨서입니다. 최근에 바다 해적이 날뛰고 있어 열에 한두 번은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북제로 상품을 공급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장부가 너무 난잡하게 작성되어 최씨 집안에 얼마나 많은 상품을 밀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이 일을 누구도 조사해 보려 하지 않아서······. 다만 제사 대인께서 작년에 최씨 집안 밀수 사건을 조사하신 덕분에 조정이 입을 손해를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범한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해적은 무슨 해적이야. 명씨 집안에서 상품을 가로채려고 속임수를 쓰는 거지.’
385화
한참 설명하던 단달이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그가 물었다.
“아직 말하지 않은 다른 원인도 있는 것인가?”
단달이 그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 더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감찰원의 운영 비용이 급속하게 증가한 것도 원인입니다. 제사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감찰원의 운영 비용은 직접 황실 금고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황실의 수입이 최근 몇 년간 늘지 않은 상황에서 감찰원 비용이 늘어난 데다가 앞에서 말한 여러 요인이 겹치다 보니 수입이 감소한 겁니다. 게다가 사실 황실 금고가 조정을 대신해 돈을 벌어들인다고는 하지만 이전처럼 수입을 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범한이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황실 금고의 피를 빨아먹는 요인 중 하나가 감찰원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터였다. 생각해 보면 3처에서 매일 대규모 살상 무기를 연구, 제작하는 것이나 2처 관리들이 위장해 사방에서 소식을 수집하려면 상당히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게다가 5처와 6처의 경우 전혀 수입을 내지 못하는 고질적인 적자 부서였다. 진원에서 절름발이 노인이 절세 미녀들을 끼고 제왕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하는 데에도 분명 황실의 금고 돈이 들어가고 있을 터였다.
그가 어쩔 방법이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감찰원 일이 알려지면 창피만 당할 테니 언급하지 말고 다른 원인만 조사하게.”
단달과 범한 뒤에 있는 소문무는 범한의 솔직한 말에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판매 경로나 해적 문제는 내가 해결하도록 하겠네.”
범한이 단달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문제는 내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그러는데 3대 작업장 담당자를 포함한 금고 관리인들과 수입 문제에 대해 의논해 볼 수는 없는 건가? 이들은 근무지를 떠날 수 없어 항상 강남에만 발이 묶여 있는 처지이니 차라리 조정에 이 점을 고려해 봉록을 후하게 주면 되지 않겠는가?”
단달은 자신의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범한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말했다.
“3대 작업장은 황실 금고의 모든 생산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황실 금고 상품은 전부 그들 손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
“그렇다 보니?”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설마 그들이 이 건으로 협박이라도 일삼고 있단 말인가?”
“감히 어떻게 협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단달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다만 조정이 황실 금고 관리를 엄격하게 해서 공정이나 배합 비율 등은 상·중·하 3급 금고 관리인들만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 머릿속에 있는 것이 곧 조정의 돈줄인 셈이니 약간 잔꾀를 부려 황실 금고 생산량을 줄일 수는 있겠지요. 지금까지 황실 금고에서 그들의 지위는 특별했고 조정도 그들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라 좀······ 거만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렇군.”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과거 섭가에서 품팔이 일꾼으로 일하던 자들이 지금 횡포한 기술 관료가 되어 있다는 거야?’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기가 막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협박이 아니면 뭔가? 장 공주는 이들을 어떻게 대우했지?”
단달이 잠시 생각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장 공주께서는 생산량이 떨어지지 않기만 바라시며 금고 관리인들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셨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지위가 너무 높아서······. 물론 6년 전에 그들이 정말 주제를 모르고 날뛰자 장 공주께서 문제를 일으킨 금고 관리인들을 죽이신 적은 있었습니다. 그 뒤로 금고 관리인들도 겉으로는 고분고분 행동하면서 뒤로 몰래 돈을 빼돌렸지요. 이들은 같은 급의 관리들은 무시하지만, 조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냉소를 지었다.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건 지위가 너무 높아서 그러는 것이겠지······. 일단은 제일 먼저 그들이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겠구먼.”
이렇게 태연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는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장모인 장 공주는 뛰어난 관리인이 아니었다. 대형 기업을 이런 식으로 관리했으니 황제 폐하가 매일 앓는 소리를 내고 아버지가 텅 빈 국고를 보며 괴로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말을 들은 단달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혈기왕성한 제사 대인이 모든 걸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금고 관리인들의 죄를 공론화한다면 판매 경로는 둘째 치고 생산량과 상품의 질도 보증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가 공손히 두 손을 맞잡고 간곡히 말했다.
“대인, 신중하게 접근하셔야 합니다. 일단은 회유한 다음 천천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으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이미 결심이 선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생각할 수 없네. 열흘 뒤에 소주로 돌아가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을 주관해야 해서 시간이 없어. 열흘 안에 그들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이후 자네들이 일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일 이곳을 뛰어다니면서 관리하고 싶은 마음은 없네.”
단달이 답답하다는 듯이 궁둥이를 들썩이며 설명했다.
“이 일은 단박에 해결하기 힘듭니다. 설사 금고 관리인들이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면서 작업장 안에서 암암리에 다른 짓을 꾸미거나 아니면 해서는 안 될 짓을 해서 황실 금고 생산량을 낮춘다면 저희는······ 원인을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만일 황실 금고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대인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범한은 단달이 자신의 앞에서 솔직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감찰원 관리는 확실히 강남로 관리들보다 주관이 뚜렷했다. 그가 손을 흔들어 상대방의 충고를 중단시키고는 웃으며 설명했다.
“걱정하지 말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지 않겠는가?”
단달과 소문무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제사 대인이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금고 관리인들이 담당하는 일에 대해서 감찰원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때 소문무의 머릿속에서 번뜩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황실 금고는 원래 섭가의 사업이었잖아. 설마······ 후손인 제사 대인도 방법을 알고 계신 건가?’
의혹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범한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에게 내일 정식으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지시만 내리고는 뒤채로 갔다. 그곳에서 맛없는 죽을 두 그릇 비운 그는 해당타타에게 저녁에 자신과 함께 3대 작업장에 가보자고 요청했다.
이미 부하들이 통행증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기에 저녁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가볼 수 있었다. 그가 해당타타에게 같이 가자고 한 것은 선의를 베풀고 싶었다기보다는 황실 금고의 훌륭함을 북제에까지 알리고 싶은 욕심과 훌륭한 경호원을 옆에 두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 * *
닭이 울고 날이 밝았다.
황실 금고 전운사 정사부의 뒤쪽 담에서 사람 그림자가 지나가더니 범한과 해당타타는 밤새 탐험을 마치고 서재로 돌아갔다.
범한이 어두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밤마다 풍악을 울리며 놀고 관리는 엉망으로 하다니······.”
범한을 따라 3대 작업장을 보고 온 해당타타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군수 시설과 같은 작업장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비단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사람이 아니라 방직 기계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수력을 사용해서 말이다. 그녀는 강물의 힘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오늘 보고 들은 것들을 떠올려 보던 그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섭가 여주인의 위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그녀가 마음이 일렁이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뜨거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은 이 황실 금고를 만든 섭가 여주인의 친아들이었다.
범한은 해당타타만큼 놀라거나 신기함은 없었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남긴 유산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경국 황실 금고는 자신이 이전 세계 기업들과 비교하면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만약 경국 황제가 영리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모든 산업이 지금까지 유지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놀란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금고 관리인들이 엄청나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마음이 가려워지면서 만약 저들의 입에 들어가는 은전을 자신이 가지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장 공주가 걱정했던 일은 그에게는 전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금고 관리인들이 아는 기술은 그에게 협박의 무기가 될 수 없었다. 사실 지금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그들을 대신할 사람으로 누구를 세울 것이냐였다.
지식은 힘이고 잠재력이며 돈이었다. 이것이 황실 금고에 처음 온 날 범한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 * *
경국의 황실 금고 전운사는 국내에서 가장 독립적인 곳이었다. 그야말로 하나의 왕국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근무하는 관리들도 모두 조정에서 발령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강남은 경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황실 금고 내부에서 받는 유혹이 너무나도 컸다. 그래서 어느 관리든 결국에는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감찰원 관리는 그나마 중립을 지켰지만 전운사 내부 관리들은 일찌감치 독립된 왕국의 한 일원이 되어 버렸기에 이들은 황실 금고에 조금의 변화도 발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장 공주의 측근으로 있어 온 황실 금고 관리들은 황제의 명에 의해 이곳의 권한이 장 공주에게서 범한에게로 옮겨 간 것에 대해서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면 작은 범 대인도 황실 금고의 근간을 흔들지는 않을 테니 지금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황실 금고의 근간이란 무엇일까? 그건 금광이나 은광도 아니었고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들이나 외부 상인들도 아니었다. 바로 3대 작업장에서 일하는 고급 장인들과 금고 관리인들이었다.
황실 금고의 3대 작업장은 강남 여러 주 사이에 분포되어 있었다. 갑(甲) 작업장은 유리 제품, 고도의 정밀함을 요구하는 공예품, 도자기,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향수, 독주를 생산해 냈을 뿐만 아니라 이 밖에도······ 유리 제품과 같은 유형의 상품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게 생산해 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곳은 사치품 생산 공장이었다.
을(乙) 작업장은 면이나 비단의 대량 생산, 볍씨 연구, 강철 제조 등 규모가 큰 생산 작업을 진행하는 곳으로 1차 산업과 2차 산업이 결합된 생활품을 생산했다.
마지막으로 병(丙) 작업장은 3대 작업장 중 보안이 가장 엄격한 곳으로 선박 제조와 군에 필요한 발전된 무기 생산을 책임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흑기들에게 보급된 가벼운 연발 화살도 병 작업장에서 생산한 것이었다. 게다가 더 멀리에는 감찰원 3처와 황실 금고 연구 부서가 끊임없이 화약 연구 제조를 하고 있었다. 다만 섭가에서 작업장을 열었던 초기 화약의 연구 제조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던 것인지 지금까지 감찰원에서도 초보적인 수준에만 머물 뿐 총과 같은 수준의 무기는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경국 백성들의 총명함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섭가 여사장이 무언가를 알리지 않은 게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3대 작업장은 조잡하지만 하늘에 박힌 별처럼 민북 지역 곳곳에 배치되어 끊임없이 상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상품들은 각각 나누어져 민간 상인들에 의해서 북제, 동이성, 작은 제후국, 바다 밖 낙후한 왕국까지 가서 팔렸다. 한마디로 황실 금고는 만족할 줄 모르는 아귀처럼 끊임없이 전 세계 돈을 긁어모으는 동시에 전 세계에 더 나은 생활을 알리고 사치를 전파하고 있었다.
386화
물론 기존에 섭가가 황실 금고가 된 뒤 여러 산업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는 지켜지고 있었다. 게다가 금고 관리인들이 적지 않은 지혜를 발휘해 섭가의 산업을 발전시킨 끝에 17년 전에 섭가의 수입이 최고점을 찍은 이후 경국 재정 수입의 4할은 항상 황실 금고에서 책임져 오고 있었다. 다만 최근 몇 년 동안 수입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국 재정 수입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황실 금고는 명실상부 경국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수준 미달인 관리인들이 황실 금고 생산을 책임지는 데다가 음모의 귀재인 장 공주가 안타깝게도 경영에는 재능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맞물리면서 지난 시간 동안 금고 관리인들은 경국에서 가장 특수한 계층이 되었다.
황실 금고에서 가장 말단 노동자들은 얼마의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조정에서 발령받은 관리들도 함부로 날뛰지 못했다. 반면 금고 관리인들만은 많은 봉록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각종 이유로 보조금과 상여금도 받고 있었다. 황실 금고의 비밀을 안다는 이유로 장 공주가 상당히 후하게 대우한 덕분에 이들은 눈에 뵈는 게 없는 늑대로 자라 있었고 이는 조정이 최근 몇 년 동안 경영에 혼란을 겪은 이유가 되었다.
황실 금고 전운사에 소속되어 있는 금고 관리인들은 지방 군벌과도 같았다. 비록 이들은 대놓고 포악한 짓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몰래 이윤을 가로채고 노동을 착취했다. 이들은 그렇게 얻은 돈을 외부 전장에서 세탁해 주변 큰 주의 적지 않은 토지를 사들였다. 이러한 재산을 축적하는 데 그들이 얼마나 많은 불법적인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금고 관리인들이 황실 금고에서 하층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일도 번번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급 금고 관리인은 그래도 체면상 점잖게 행동했지만 서른 정도밖에 되지 않은 중급 금고 관리인은 부끄러운 짓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범한이 밤중에 봤던 금고 관리인의 경우에는 첩을 무려 열두 명이나 두고 있었다. 나이가 스물도 안 된 어린 여자가 어떻게 그 집에 첩으로 오게 된 것인지······ 그 사정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물론 착취에 시달린 노동자들이 반항하고 소송을 거는 일이 해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발생했지만 황실 금고 노동자들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대부분 묻어 버렸다. 어쩌다가 운 좋게 소주성까지 가서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조정에서 대충대충 처리할 뿐이었다.
죄를 지은 백성보다도 죄를 지은 금고 관리인이 더 많다는 건 강남로 관리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금고 관리인들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하층 노동자나 백성들이 새로 부임한 전운사 정사가 민북 관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오지 않도록 서슬 퍼런 눈으로 관아 대문을 감시했다. 황실 금고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길 바라는 그들은 범한의 명성을 들은 노동자나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러 찾아오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 * *
불빛이 번쩍이면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붉은 종이 쪼가리들이 하늘에서 춤을 추며 떨어졌다. 민북 황실 금고 전운사 관아 정문이 천천히 열리자 관복을 입은 수십 명의 관리들이 은은한 향냄새가 풍기는 건물 안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두 줄로 선 관리들은 정중앙에 있는 젊은 관리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황제의 명에 의해 흠차 신분으로 이곳에 오게 된 범한이 업무 규정을 명확하게 말한 뒤 관리들을 바라보았다.
“앉으시게.”
“감사합니다.”
황실 금고 관리들이 의복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관아에 의자가 부족했으므로 하급 관리들은 뒤편에서 서 있어야 했다. 대중을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작은 범 대인은 경도에서 무섭기로 유명한 감찰원 제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에 경계하고 있던 사람들도 마음이 서서히 편해졌다.
그런 관리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범한은 오늘의 공격 대상이 될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무리 중에서 유독 피부가 검고 평상복을 입고 있는 세 명의 사람이 눈에 띈 것이다. 이들은 허리띠를 꽉 졸라맨 채 공손한 모습으로 한쪽에 앉아 있었다. 관직도 없는 이들이 관리들 사이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작업장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범한이 매서운 눈길로 바라보는데도 이들은 공손히 앉아 있을 뿐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우리가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데 네가 뭘 어쩔 수 있냐는 배짱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오랜 시간 장 공주에게서 길러진 사람들인 만큼 범한이 황실 금고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 반드시 부딪쳐야 했다.
범한은 일단은 세 명을 어떻게 할지는 뒤로 미뤄 두고 관리들에게 조정의 뜻을 전한 뒤 오른쪽에 앉아 있는 군대 측 대표와 대화를 나누었다. 범한과 대화를 나누는 군 측 장군은 섭씨 집안의 먼 친척이었다. 비록 섭씨 집안이 지금 2 황자 쪽에 기운 것으로 보였지만 섭령아라는 기묘한 인물의 존재 때문에 범한과 섭씨 집안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다. 더구나 섭씨 집안 출신임에도 장군이 범한에게 깍듯이 공경하는 걸 보면 경도 섭씨 집안에서 분부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공무가 어느 정도 끝나자 범한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경국은 차를 대접해 손님을 배웅하는 규범이 없었으므로 관리들은 범 대인이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 거라 짐작하고는 숨을 죽였다. 이미 모두가 소주 나루터에 위치한 죽붕 안에서 작은 범 대인이 한 취임 연설이 강남로 관리들 경악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숨을 죽이고 범한이 오늘 무슨 말을 할지 귀를 기울였다.
“황실 금고는 정말 신비로운 곳입니다.”
범한이 미소 지으며 말을 시작하자 관리들도 함께 미소를 지었고 전운사 부사가 맞장구를 쳤다.
“황량한 땅 위에서 매일 힘들게 일을 하니 괴롭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훌륭한 곳도 없지요.”
그 말을 들은 범한이 씨익 웃었다.
“본관이 신비롭다고 한 까닭은······ 이번에 폐하의 명을 받아 강남에 내려와 관아를 열고 신분을 밝혔음에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관아를 연 지도 벌써 반나절이 지났는데 이렇게 드넓은 지역에 사는 백성 중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관리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아무도 모르게 남쪽으로 내려와 놓고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범한의 이 말은 본론을 말하기 위한 서두에 불과했다.
“본관은 여러분들이 힘써 준 덕분에 황실 금고가 조금의 불법적인 일 없이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관리들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치자 범한이 밝은 얼굴로 이어 말했다.
“황실 금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몇몇 관리들의 권한이 너무 커서 백성들이 억울함이 있어도 본관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이 말은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을 만큼 적나라하게 관리들을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어느 파벌이든 황실 금고에 소속된 모든 관리들은 흠칫 놀라면서 두려움과 반항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결국 칼을 쥐고 휘둘러 보겠단 건가? 그런 터무니없는 방법이 통할 거라 생각하나 보지?’
전운사 부사를 비롯한 관리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제히 목청껏 소리쳤다.
“대인, 결단코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결단코 없사옵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여 손가락으로 사사가 꿰매 준 소맷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 없다는 겁니까? 본관이 듣기로 몇 년 전부터 3대 작업장에서 일하는 하층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 하던데? 심지어 작년에는 그 일 때문에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데 지금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하는 겁니까?”
관리들이 화들짝 놀라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작년에 금고 관리인들이 착취를 너무 심하게 하는 바람에 3대 작업장 노동자들이 소란을 일으켜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전운사에서 은폐한 일이 경도에까지 알려졌다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을 텐데······. 하지만 범 대인이 직접 이 일을 언급하는 걸 보면 이미 확실한 정보를 파악해 뒀다는 게 아닌가? 그럼 더는 숨기는 건 불가능할 텐데······.’
관리들이 이런 생각을 하며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자 전운사 부사가 급히 앞으로 나와 차분히 설명했다.
“작년에 자금 흐름이 살짝 좋지 않아 임금 지급이 사흘 늦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간악한 무리가 이를 빌미로 소란을 피운 것뿐입니다. 3대 작업장이 하루만 작업을 멈춰도 조정에 상당한 손실을 끼치기에 전운사에서 상의 끝에 섭 참장에게 진압을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많이 발생하지 않았고 수월하게 정리되어 대인께 굳이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일은 단순히 임금 지급이 늦어져서 생긴 게 아니었다. 오히려 금고 관리인들이 임금을 너무 많이 깎아서 노동자들의 쌓여 있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맞았다. 전운사 관리들은 금고 관리인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들과 부딪치고 싶지도 않고 공금으로 부족한 임금을 보충해 주기도 싫었기에 그동안 고의로 모르는 척해 왔다. 그러다 결국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자 병력을 불러 강제로 진압한 것이다.
범한은 뒤돌아서서 섭 참장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섭 참장이 소곤소곤 대답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 난처한 것 같았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옆의 탁자를 두드렸다.
“황실 금고는 엄연히 말해서 하나의 사업체입니다. 폐하의 사업체이지요. 저는 경국의 사업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노동자들의 처우가 나빠진다면 누가 이 일을 하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일을 한다고 해도 집중해서 최선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결국 손실을 보는 건 조정이 아닙니까?”
그의 말에 관리들은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부터는 황실 금고에서 정해진 규정을 엄격하게 지켜 임금 지급이 늦어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관리들의 머릿속에 나중은 없었다. 금고 관리인들과 작은 범 대인 사이에서 어떤 충돌이 생기든 관리들은 눈앞에 있는 상황만 어영부영 잘 넘어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고분고분한 관리들과 다르게 까무잡잡한 얼굴에 관복을 입지 않은 세 명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굳어져 갔다.
범한은 이들의 안색이 변하는 걸 모르는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임금 지급이 지체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이미 체불된 건 어쩔 것입니까?”
그의 말에 관아 정당이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관리들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실 금고에서 일하는 노동자만 수만에 달하는 데다가 음식이나 옷과 같은 물자를 제공하는 인원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게다가 조정이 3대 작업장 노동자들에게 정한 임금 수준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착취한 돈은 황실 금고 관리들의 최대 수입원 중 하나였다.
사실 체불한 임금을 뱉어 내라고 해도 전운사 관리들은 무서울 게 없었다. 그들은 경국 법률과 감찰원 감사 때문에 대놓고 착취하지는 못했고 금고 관리인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만 받아먹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범 대인의 말이 겨냥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금고 관리들이었다.
관리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세 명의 사람에게로 쏠렸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범한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조정이 백성들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요 몇 년 동안 끼친 손해를 차근차근 보상해 줘야 합니다. 물론 복잡한 일이니 서두를 수는 없겠지요.”
그 말에 관리들이 한숨을 돌리고 있는 찰나 범한의 입에서 경악할 만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사흘입니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세 개를 펴고 관리들을 바라봤다.
“사흘의 시간을 드릴 테니 모든 장부를 제게 가지고 오시고 밀린 임금을 노동자들에게 지급하십시오. 그리고 늦게 지급한 만큼 태평전장의 이자를 기준으로 해서 보상도 해주어야 합니다.”
“만약 사흘 뒤에 노동자 중 한 명이라도 본관에게 달려와 임금을 못 받았다고 말하거나······ 본관의 감찰원 부하들이 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사실을 찾아낸다면······ 여러분에게는 죄송하지만 강제적인 수단을 쓸 수도 있습니다.”
범한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관리들은 그에게서 풍기는 무서운 기운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387화
줄곧 가만히 앉아 있던 세 명 중 한 명이 정중한 자세로 일어났다.
“대인, 하관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범한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급되지 않은 임금이 있어도 액수가 크지는 않고 가끔은 장부에 명확히 기록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소리를 내며 웃다가 다시 말했다.
“대인께서는 멀리 경도에서 오셔서 이곳 지방 사람들의 성미가 얼마나 포악한지 모르실 겁니다. 가족들까지 줄줄이 데리고 와서는 작업장에서 일은 한 명만 하면서 세 명의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고, 임금을 체불하지도 않았는데 조정의 돈을 갈취하려 난동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노동자들이 농간을 부렸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범한이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듯 반색하며 계속 말했다.
“대인, 여기 노동자들은 백성을 아끼는 조정의 마음을 이용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간악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일을 게을리하거나 어떤 놈들은 작업 순서를 망치기도 합니다. 요 몇 년간 이런 일들 때문에 조정에서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 아마 대인은 상상도 못 하실 것입니다.”
그는 노동자에 대한 험담을 한껏 늘어놓으면서 범 제사의 청렴한 명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범한도 관리인 이상 천한 노동자 편에 서지는 않을 거라 짐작했다.
범한이 속으로 냉소를 지으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노동자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음, 폐하가 이처럼 어질고 총명하신데 노동자들이 만족을 모르고 설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그 사람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임금이 체불된 일은 하관이 돌아가서 자세히 조사를 해보겠지만 소란을 벌인 노동자들을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심에 눈이 먼 간악한 자들이니 대인께서는 절대 그들의 말에 속으셔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대인은 누구시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전운사 부사가 재빨리 나서서 소개했다.
“저 사람은 갑 작업장을 책임지고 있는 주사, 소 대인입니다.”
“소 대인?”
범한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 작업장 주사란 말인가?”
성이 소(蕭)씨인 갑 작업장 주사가 급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하관, 그렇습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는 보잘것없는 금고를 관리하는 주사일 뿐이고 조정에서 품직을 내리지도 않아 관직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계속 자신을······ 하관이라 칭하는 것인가?”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온화했던 범한의 목소리가 점차 싸늘하게 변했다.
“입을 열 때마다 하관이라 하는데 다른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본 관아가 오늘 처음 문을 열었으니 보잘것없는 주사인 자네는 관아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거늘 감히 이곳에 들어와 거드름을 피우고 조정 관리들 사이에 앉아 있다니······ 정말이지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군! 이건 또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정당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래고래 화를 내는 범 대인을 바라보는 관리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금고가 황실 소유가 된 뒤로 지금껏 3대 작업장 주사 앞에서 화를 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장 공주도 황실 금고를 관리하게 되고 맨 처음 민북 관아에 왔을 때 3대 작업장 주사들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대했을진대 범 대인은 뭘 믿고 저리 질책을 한단 말인가.
갑 작업장 주사 소 대인 역시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범 대인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진 않더라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감히 뭐라 반박할 수는 없었기에 화를 삭이며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뒤에서 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주사의 자리를 치워라.”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온화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본관이 있을 때는 자네 자리는 없을 거네.”
“범 대인!”
궁둥이를 붙일 의자까지 빼앗기자 다시 일어선 주사가 목구멍까지 치솟는 화를 애써 삼켰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범한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섭 참장과 전운사 부사와 대화를 나눴다.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그의 옆에 있던 감찰원 관리가 소 대인을 한쪽 구석으로 밀쳐 낸 뒤 의자를 치웠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아래 관원들까지 연이어 중재하려 나섰고 옆에 있던 섭 참장도 범한을 타일렀다.
“범 대인, 저들의 체면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무슨 체면을 생각해 주란 말입니까?”
범한이 당당한 표정으로 웃었다.
“오늘 반드시 저들의 체면을 깎아 버릴 것입니다.”
그의 말에 말문이 막힌 섭 참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황실 금고가 열린 이후 전운사에는 항상 3대 작업장 주사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특별한 지위를 가진 그들을 지금껏 이렇게 모욕한 사람은 없었다. 이에 다른 두 명의 주사도 일어나서 소 대인의 옆에 서서는 상석에 앉아 있는 범한을 향해 말했다.
“대인께서 관아에 저희의 자리가 없다고 하시니 그럼 모두 치우시기 바랍니다. 3대 작업장 주사들은 별 볼 일 없는 비루한 사람들이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것은 도발이 아니라 3대 작업장을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위협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주사를 보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함께 치워야지. 자네들 자리는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가? 본관은 3대 작업장 주사들이 비루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만 자네들이 그렇게 말하니 본관도 그런 줄 알겠네.”
“대인!”
본래 3대 작업장 주사들은 처음 황실 금고에 온 범한이 권위를 세우려 일부러 자신들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자신들에게 면박을 주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들을 정말 몰아낼 작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뭘 믿고 이러는 것일까. 정말로 3대 작업장의 생산을 멈추려는 것일까.
“3대 작업장 주사들이 대인께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주사가 한기가 느껴질 만큼 무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임금을 착취하고 백성들을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 조정을 협박하고 본관을 공경하지 않았다. 물론······.”
주사의 질문에 범한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잘못을 쉼 없이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네들은 본관에게 잘못한 게 아니라 3대 작업장 노동자들과 조정 그리고 천하의 만백성들에게 잘못을 저질렀네.”
“저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러십니까?”
주사가 버럭 화를 내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경국 규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범한이 씨익 웃으며 생각했다.
‘규정이라고? 내가 바로 규정이다.’
사실 이 말은 범사철이 경도에서 포악무도한 짓을 저질렀을 때 가장 좋아했던 말이다. 관리나 불량배나 상황이 모호하고 혼란스러울 때는 거친 방법을 사용하는 게 가장 편리했다.
“이봐라, 3대 작업장 주사들이 관아 정당에서 소란을 피우니 곤장 열 대를 때려라.”
범한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관용을 베풀어 달라 요청하는 관리들의 말을 무시했다. 그의 입가에 은은하게 걸린 미소는 더는 누구도 딴소리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해 보였다.
퍽! 퍽! 퍽! 퍽!
이곳 곤장 소리는 경도 황궁에서 도찰원 어사들이 맞을 때 들렸던 묵직한 곤장 소리와는 달리 리듬감이 강해서 누구든 박자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곤장 열 대를 맞게 된 주사들은 다행히 범사철처럼 맞기도 전에 졸도해 버리지는 않았다.
그 장면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범한은 주사들의 예상치 못한 기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곤장 열 대를 맞으면서 그들은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명령을 받은 그의 부하들이 있는 힘을 다해 때렸을 텐데도 말이다.
상의를 위로 걷고 바지는 벗은 채 곤장대에 엎어져 있는 세 명의 주사들의 엉덩이와 등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상처는 심하지 않았지만 분명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범한에게 용서해 달라 빌지 않았다. 의연하게 곤장대에 누운 그들은 매질이 시작되자 통증도 통증이지만 엉덩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굴욕감이 몰려왔다. 어느덧 그들의 눈가에 원한이 담긴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정말이지 불쌍하고 처량한 모습이었다.
곤장 열 대를 다 맞자 범한이 손을 흔들어 명령했다.
“데리고 나가게.”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일제히 대답하고는 세 명의 주사들을 부축해 관아 밖으로 데리고 갔다. 주사들이 고통과 굴욕감에 힘겨워하며 나가자 범한이 뒤에서 소리쳤다.
“사흘이네, 사흘. 잊지 말게나!”
관아가 순간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고 범한을 바라보는 관리들의 눈빛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천하 사람들은 범한의 명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경도 사람들과는 달리 그 청렴한 명성 뒤에 숨겨진 무서운 모습을 모르고 있었다. 하기야 전운사 관리들은 2 황자 측 관리들이 겪은 고통을 직접 체험해 볼 기회가 없었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오늘에야 범한의 무서운 면을 보게 된 관리들은 무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소롭게 생각했다. 무섭게 호통을 치고 매질을 하는 범한의 모습이 관리들의 눈에는 황실 금고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범한이 아무리 박식해도 3대 작업장 주사들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앞으로 상황을 관리하기는 힘들 거라 생각했다.
반면 범한은 자신의 부하인 관리들이 사흘 뒤 펼쳐질 상황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사흘 안에 체불된 임금을 모두 처리하고 어떤 불법적인 일이든 조사하라고 지시한 뒤 관리들을 물렸다.
그러고는 섭씨 가문 출신인 참장과 자신을 가까이서 도와준 전운사 부사를 남게 했다. 사흘 뒤 벌어질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이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후원에서 그가 이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범한의 말을 듣던 두 명의 관리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뒤 범한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인.”
소문무가 감찰원에서 보낸 정보 보고서를 건네자 범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받았다. 생각해 보니 4처 관리는 쓸모가 있어 보였다. 그동안 장 공주와 금고 관리 사이에 끼어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공문서에 파묻힌 그를 바라보던 소문무가 방금 일을 떠올리고는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3대 작업장 주사들은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죽여야지. 하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네.”
“아까는 대인이 너무 온화하게 처리하신 것 같습니다.”
감찰원 1처 소속인 소문무는 잘못을 저지른 관리들을 매섭게 다루는 걸 자주 봐왔기에 조금 전 범한의 행동이 지나치게 인자해 보였다. 더구나 어차피 죽일 사람들이라면 굳이 반나절 동안 혼을 내고 곤장은 때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범한의 안색을 살피던 소문무가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곤장 열 대는 너무 가벼운 처벌입니다. 이 정도로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범한이 손에 들고 있던 감찰원 보고서를 흔들었다.
“알고 있네. 수중에 증거가 있으니 언제든 주사를 참수해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걸세.”
소문무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증거가 있는데도 국법을 어긴 세 명의 주사를 풀어 준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범한이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주사들을 참수했다면······ 관리들과 금고 관리인들은 속으로 나를 원망하면서도 칼날이 두려워 사흘은커녕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체불된 임금을 모두 지급했을 거네.”
“그게 바로······ 대인께서 원하시는 결과가 아닙니까?”
소문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범한이 손을 내저었다.
388화
“그건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네. 3대 작업장 주사들을 죽이는 강경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순간의 효과는 좋겠지만 황실 금고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곡식을 훔쳐 먹는 원숭이를 쫓기 위해 우두머리를 죽인다면 순간 원숭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라질 것이네. 하지만 내가 황실 금고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나중에 내가 떠나면 원숭이들은 다시 산에서 내려와 곡식을 훔쳐 먹으려 할 거야.”
소문무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사 대인이 말한 원숭이는 바로 3대 작업장에 포진되어 있는 창고 관리들이었다. 만약 오늘 3대 작업장 주사들을 참수했다면 금고 관리들은 고분고분 은전을 토해 내고 체불된 임금을 돌려줬을 테니 제사 대인이 칼날을 휘두를 기회는 줄어드는 셈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시간이 흘러 제사 대인이 이곳을 떠나 항주로 돌아간다면 금고 관리인들은 다시 본색을 드러낼 것이고 3대 작업장 노동자들은 더 심한 보복에 시달릴 터였다.
“이건 여드름을 짜는 것과 같네. 여드름을 짜려면 먼저 따뜻한 수건으로 모공을 연 다음 짜내야 제대로 짜낼 수 있지.”
소문무는 미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범한의 뜻은 충분히 이해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놈들의 죄가 드러나게 유인하려는 것 아닙니까?”
반질반질한 머리를 매만지던 범한은 자신의 예시가 알맞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쨌든 사흘이네. 3대 작업장 주사들이 곤장을 맞았으니 오만방자한 창고 관리인들도 더는 참지 못할 거야.”
“만약······ 진짜로 은전을 순순히 토해 내면 어떡합니까?”
소문무는 제사 대인의 무서운 명성을 듣고 원숭이들이 놀라 그대로 도망칠까 걱정되었다.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달라진다면 나쁠 게 없지.”
범한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경국 법률을 위반하지 않았고 갈취한 돈도 순순히 내놓는다면 다시 기회를 줄 의향이 있네. 나는 황실 금고를 관리하기 위해서 온 거지 망가뜨리기 위해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우리는 저들을 분열시켜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끌어들여야 하네. 이제 사흘 뒤면 내 호의를 거절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지. 금고 관리인들뿐만 아니라 장 공주 심복 전운사 관리들도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걸세. 내가 만약 금고 관리인들과 사이가 틀어져 황실 금고가 마비 상태에 놓인다면 그들도 본색을 드러내게 되겠지. 자네는 이틀 자세히 감시한 뒤 최종 명단을 작성하도록 하게.”
마침내 제사 대인이 모든 일을 면밀하게 계획해 두었다는 걸 깨달은 소문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대인, 전운사 부사 대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참장은 섭씨 가문 사람이라 믿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범한도 그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경도에서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1 황자와 북제 큰 공주의 혼인이 이뤄지고 며칠 뒤 섭령아도 2 황자와 혼인을 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틈타 2 황자는 황태후에게 찾아갔고 마침내 자택 연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에게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걱정할 것 없네. 그 섭 참장에게 상품이 출고되는 경로를 감시해 달라고 말했을 뿐이야. 나도 몇 마디 말로 섭씨 집안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그가 참장에게 이런 일을 시킨 것은 금고 관리인들이 숨겨 놓은 돈을 다른 곳으로 몰래 빼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대부분의 돈을 토지를 구입하는 데 썼겠지만 토지 매매 계약서는······ 그들의 기질상 분명 자신의 집에 두고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섭씨 집안과 2 황자, 장 공주가 함께 손을 잡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네.”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이어 말했다.
“섭씨 집안과 진씨 집안이 나란히 거론되는 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네. 만약 한쪽이 어느 황자에게든 기울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지. 약간 기운다고 하더라도 사태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섭 참장은 내 체면을 먼저 세워 주려 할 거네.”
자신의 예상보다 복잡한 상황에 놀란 소문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지시를 따르기 위해 떠났다.
한참을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던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섭령아와 혼인한 2 황자는 앞으로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까. 그는 인자하고 선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포월루 근처 찻집에서 2 황자에게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섭령아와의 관계를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의식적으로 경국 황제의 피도 눈물도 없는 교육 방식에 2 황자가 휘둘리게 된다면 곧이어 자신도 휘둘리게 될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개월 동안 황제에게 괴롭힘을 당한 섭씨 가문은 어쩔 수 없이 2 황자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생각하던 범한은 마음이 암담해지면서 황제 폐하가 주도면밀하고 원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인 것은 진짜지만 쓸데없이 의심이 많은 것도 사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자신만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의 한계성은 의심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그래서 황제는 방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혼인을 성사시키더니 섭씨 집안을 황태자와 대립하게 몰아붙였다.
황태자를 떠올린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황태자? 3 황자가 나와 같이 경도를 떠나게 된 이유가 뭘까?’
황제는······ 정말이지 간파해 내기 힘든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아파진 범한은 어린 3 황자가 뭘 하려 하는지도 간파해 내지 못한 자신이 노련한 황제의 의도를 간파해 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범한이 장모와 화해하지 않은 이유는 그동안 겪은 일로 불만이 쌓여 그런 것도 아니었고 해당타타의 말처럼 ‘집안 사업에 눈이 멀어서’도 아니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약 범한과 장 공주가 손을 잡는다면 양쪽 모두 경국의 근간을 충분히 흔들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경국 황제는 절대 이런 상황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천하의 권력을 손에 쥐지 못한 범한으로서는 자신의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한마디로 목숨이 위협받지 않는 이상 황제가 허락하지 않은 일은 할 생각이 없었다.
* * *
이틀 동안 황실 금고에 방문한 흠차 대인 범한은 자신이 아끼는 여종 일곱 명을 데리고 작업장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점차 황실 금고의 흐름을 파악한 그는 과거 섭가의 위상을 한층 더 자세히 체감하기도 했고 강가에 건설된 수차를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에 한숨을 쉬기도 했다. 또 가끔은 작업장 노동자들과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유리를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손재주가 너무 없는 탓에 제대로 된 상품은 만들지 못했다.
이에 관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업장에서는 새로 부임한 대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명성이 자자한 범 대인의 잘생긴 얼굴을 대놓고 보지는 못하고 몰래 훔쳐보았다. 범 대인은 손재주는 없지만 붙임성이 좋은 친절한 사람이었고 옆에 있는 여종들도 시골 아낙네처럼 걷는 한 명을 빼면 모두 꽃처럼 아름다웠다.
한편으로 군대와 감찰원이 감시하는 4단계의 보안선 순찰이 강화되었다. 천하에서 가장 엄격하기로 유명한 황실 금고의 순찰이 더욱 엄격해져서 황실 금고의 기밀 기술뿐만 아니라 묵직한 물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묵직한 물건이란 바로 토지 계약서였다.
범한의 예상대로 3대 작업장 주사를 비롯한 금고 관리인과 전운사 관리들이 사흘령이 내려지고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자신이 가진 가장 비싼 물건을 외지에 있는 친척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색이 엄격해지자 전운사 관리들과 금고 관리인들은 새로 부임한 흠차 대인이 자신들이 재산을 빼돌리는 걸 허락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절망했다. 그들은 재산을 빼돌리지 못한다면, 사흘 동안 체불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재산이 몰수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더구나 그들 중에 청렴결백한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모두 흠차 대인이 자신의 죄를 밝혀 처벌하려 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단달과 섭 참장의 업무가 아주 효과적이라서 이틀째 되는 날부터는 재산을 빼돌리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리고 살벌한 소문이 황실 금고 각 관저와 3대 작업장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밤사이 비가 쏟아져 강물이 불어났다. 제방이 있어 문제는 없었지만 음산한 바람이 불고 검은 물결이 일렁이자 사람들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금고 관리인들이 강렬한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상중하를 모두 합쳐서 2백여 명 정도 되는 금고 관리인들은 ‘사흘령’이 내려지자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기도 했고, 아직 양심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착취한 돈을 돌려줄 준비도 했다. 몇몇은 범한의 권세가 두려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몰래 동료들이 저지른 불법적인 일을 고발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3대 작업장 주사 저택에 모여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몰래 의논했다.
곤장을 맞은 뒤 줄곧 침대에 누워 있던 주사들의 마음속에는 범한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그들은 범한에게 고개를 숙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나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러서 고개를 숙인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금고 관리인들의 연합은 아직 남아 있던 신양 측 심복들을 중심으로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멀리 경도에 있는 공주가 금고 관리인들에게 조정은 황실 금고에서 나오는 생산품과 이익에만 관심이 있지 관리인들의 사소한 수익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확실히 보장한 것이다.
젓가락 하나는 쉽게 부러뜨릴 수 있지만, 젓가락 열 개가 모이면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이에 금고 관리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흠차 대인을 물리치겠다는 의욕을 다졌다.
사흘령 마지막 날 범한은 이틀 전과 마찬가지로 오전과 오후 시간에 관아에서 공무를 논의했다. 이틀 동안 금고 관리인 중 자발적으로 착복한 재물을 내놓고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전운사 관리 중에는 착복한 재물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진심으로 뉘우쳤느냐 아니냐는 두고 볼 문제였지만 일단은 범한의 기세에 한발 물러선 셈이다.
또 금고 관리인 중에서도 몇 명은 자발적으로 죄를 인정하고 감찰원을 통해 그동안 저지른 일들을 고했다. 범한은 이들을 웃으며 반겨 주면서 금고 관리인들 모두가 구제 불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날 그는 차를 마시면서 정당 밖에 내리는 이슬비를 바라봤다.
‘어젯밤에 비가 많이 쏟아지던데 올해 또 홍수가 나는 건 아니겠지? 더 서둘러야 해.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 쪽에서 부탁한 돈을 제때 마련하지 못해 큰 강의 제방이 또 붕괴될 수 있어.’
“대인!”
다급한 목소리가 번개처럼 크게 울리자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은 번쩍 정신을 차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어리둥절해하는 범한의 눈에 관리들이 관복이 홀딱 젓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각 작업장에 오늘이 사흘령의 마지막 날이라고 통보하러 간 관리들이 급히 돌아오고 있었다. 맨 앞에서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사람은 황실 금고 이인자인 전운사 부사 마해였다. 귀신이라도 본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신발이 흙탕물에 젖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다급하게 뛰어왔다.
“마 대인, 무슨 일입니까?”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 큰일 났습니다.”
마해는 사흘령 기간 안에 금고 관리인들이 반격하리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이런 일이 터지니 급히 너무 놀라 보고하기 위해 급히 뛰어온 것이었다.
“3대 작업장에서 지금······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389화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돌계단 위에 우두커니 섰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흠차 대인이 놀랐다고 생각한 마해는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 내며 씁쓸한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차라리 잘됐지 않습니까.”
3대 작업장에서 파업을 시작했다니······ 이건 경국이 황실 금고를 운영하기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사실 범한의 방법은 처음부터 칼을 휘두른 장 공주와 비교하면 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파업이라는 강경 수단을 사용한 것일까. 문제는 그가 사흘이라는 시간을 줬다는 것과 장 공주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감찰원의 힘을 이용해 금고 관리인들이 재산을 빼돌릴 기회를 막았다는 점이다. 이에 그동안 착취한 은전을 모두 뱉어 내게 된 금고 관리인들이 최후의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은전이란 무엇일까? 은전은 사람의 목숨이었다. 금고 관리들은 자신의 목숨과 같은 은전을 지키기 위해 파업이라는 경천동지할 만한 수단으로 범한에게 맞섰다.
마해의 말에 잠시 놀란 범한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가 놀란 이유는 금고 관리들이 파업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에도 노동 투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인, 이제 어찌합니까? 사흘령을 철회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처음부터 범한이 내린 사흘령에 찬성하지 않았던 마해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금고 관리들이 파업을 시작해 황실 금고 3대 작업장이 모두 멈춘다면 조정의 손실은 어마어마할 텐데 그 책임을 누가 진담? 범씨 집안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이 일은 폐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마해를 비롯한 관리들의 예상과 다르게 범한은 흥분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과연 본관을 실망시키지 않는군. 반항이 크면 클수록 좋지. 본관이 가서 모두 깨끗이 죽이면 그만인 것을!”
“네?”
이슬비 속에서 관리들이 멍하니 서 있는 가운데, 멀리 관문 밖에 제비 한 쌍이 춤을 추며 날아갔다.
* * *
부슬부슬 내리는 빗물을 뚫고 검은색 감찰원 복장을 한 범한이 이십여 명의 전운사 관리들을 이끌고는 처음 파업을 선언한 갑 작업장의 어느 큰 공방으로 갔다. 평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소리가 들리고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던 모습과 다르게 공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가 범한을 바라보며 이렇게 조용한 반항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다렸다.
이들은 범한을 따라 강남으로 내려온 계년조와 6처 검수들이 큰 공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리고 좀 더 떨어진 곳에서는 섭 참장이 긴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소문무와 잡담을 나누면서도 그의 마음은 온통 오늘 파업을 시작한 큰 공방에 가 있었다. 두 사람 뒤에는 무기를 손에 쥔 관병들이 정자세로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갑 작업장 파업에 동참한 사람들은 모두 이 큰 공방에 모여 있었다. 이곳은 원래 유리를 제작하는 곳으로 아직도 어젯밤 작업 열기가 남아 있었다.
침착하게 공방 안으로 들어간 범한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방수가 잘되어 있군.”
노동자들은 맨 뒤편에 삼삼오오 모여 겁에 질린 얼굴로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하층 노동자인 그들은 오늘 갑자기 작업을 멈춘 이유도, 흠차 대인이 직접 이곳에 온 이유도 알지 못했다.
공방 맨 앞에 서 있는 청색 옷을 입은 십여 명의 금고 관리들이 마지못해 범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왜 작업을 하지 않는 거요?”
“대인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직 몸이 낫지 않은 갑 작업장 소 주사가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어젯밤 너무 많은 비가 내린 탓에 아궁이가 식어 버렸고 모형도 망가져서 작업할 수 없습니다.”
주사와 금고 관리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대놓고 파업을 했다가는 화가 난 범한이 자신들을 모두 죽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핑계를 대며 파업함으로써 상대를 위협할 생각이었다.
이것이 협상의 예술이라 한다면 범한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예술을 파괴하는 데 전문가라 할 수 있었다. 주위 분위기를 살핀 그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형이 망가졌고 아궁이에 습기가 찼다는 건가? 그럼 을 작업장은 어떠한가? 설마 사람도 녹일 정도로 뜨거운 쇳물도 빗물에 식었다는 겐가? 방적기 그것도 녹슬었나?”
소 주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쳤다.
“금고 관리인이란 자들이 이렇게 아둔하다니!”
범한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관리인들을 교체하기로 결정한 그는 오히려 빌미를 제공할 만한 소란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이번 파업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봐라, 소 주사의 머리를 쳐서 그의 피로 용광로를 데워라.”
범한이 한쪽 손을 휘두르며 담담히 말했다.
흠차 대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소 주사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범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비를 입은 감찰원 관리들이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이 의자를 들고 와 범한을 앉게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소 주사를 널브러뜨리고는 약 댓 장 정도 떨어져 있는 용광로로 끌고 갔다.
범한이 얼른 하라는 듯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의 뒤에서 우왕좌왕하는 전운사 관리들을 뚫고 마해가 나와 급히 나서 소리쳤다.
“대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멍한 표정으로 있던 소 주사는 아궁이 앞까지 끌려간 뒤에야 비로소 흠차 대인이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있는 힘껏 발을 바둥거리며 울부짖었다.
“잘못했습니다. 대인, 용서해 주십시오!”
상황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용서를 비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소 대인과 평소 교분이 있던 창고 관리들은 울먹이며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쳐나가 소 주사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황해 발을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눈에 서슬 퍼런 칼날이 보였기 때문이다.
곧이어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머리가 땅에 떨어지더니 데구루루 굴러 아궁이 안으로 들어갔고 붉은 피가 아궁이 벽에 튀었다.
순간 큰 공방 안이 놀란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금고 관리인들은 선홍색 피로 물든 아궁이를 보자마자 살고자 하는 본능이 솟구치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아궁이 앞 시체를 힐끗 보고는 공방 맨 뒤에 모여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본관이 사람을 죽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네.”
비가 천장을 때리면서 나는 소리가 조용한 공방 안에 울려 퍼졌다.
겁에 질려 맨 뒤쪽에 몰려 있던 공방 노동자들이 놀라 무의식적으로 주변에 있는 삽이나 나무판자를 들었다.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한편 맨 앞에서 파업을 주도하던 금고 관리인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흠차 대인을 바라봤다. 그들은 아궁이 앞에 널브러져 있는 머리 잘린 시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못한 채 겁에 질린 눈으로 범한의 얼굴만 바라봤다. 이윽고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한 사람, 열 사람,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일제히 뒷걸음질을 치자 벌레가 사막을 기어가듯이 슥슥 소리가 났다. 공방의 규모가 크긴 했지만 뒤에는 얇은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바글바글했으니 청색 옷을 입은 금고 관리인들이 숨을 곳은 없었다.
범한은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본관은 아무에게나 칼을 휘두르는 잔악무도한 사람이 아니네. 조사를 통해 금고 관리인들의 횡령에 노동자들은 관련이 없다는 걸 알고 있네.”
그 말을 들은 노동자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거란 말에 조금은 안심되었지만 젊은 관리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기에 쥐고 있던 삽이나 나무판자를 놓지는 못했다.
“조······ 조정의 명을 받은 관리가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죽여도 되는 건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금고 관리인 한 명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전운사 부사 마해는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범한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범한이 아무 말 없이 다짜고짜 갑 작업장 주사의 목을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이와 같은 큰일을 앞으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지만 너무나도 당혹스럽고 두려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흠차 대인, 왜······ 왜 이러신 겁니까? 잘 상의해서 처리해야 할 일을······ 이렇게 처리하시다니요. 이제 어찌합니까. 이렇게 해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해가 생각했을 때 황실 금고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바로 자신의 앞에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금고 관리인들이었다. 이들이 있어야만 황실 금고가 유지될 수 있었다. 범한이 오늘 사람들의 목을 쳐서 금고 관리인들을 강제로 굴복시킨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원한을 품은 금고 관리인들이 황실 금고를 어떻게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마해가 떨리는 눈으로 주변 상황을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다른 곳에서 파업 중인 주사들이 갑 작업장 소 주사가 죽은 사실을 안다면 파업이 장기화될지도 몰라. 흠차 대인이 정말 다 죽일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 그럼 황실 금고 운영은 누가 하라고? 설마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저 노동자들이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고 계신 건가?’
범한은 전전긍긍하고 있는 부사는 본체만체하고는 소문무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고는 작업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
“모두 잘 들으시오!”
모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소문무가 옷 안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조사에 따르면 황실 금고 전운사 3대 작업장 중 갑 작업장 주사인 소경은 이전부터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해 온 것으로 드러났소.”
소문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힐끗 겁에 질린 금고 관리인들을 바라보고는 계속 읽어 나갔다.
“경력 2년 3월 소경은 동광에서 일어난 사고를 은폐한 뒤 무려 5년 동안 사망한 사람들의 임금을 가로채 총 1만 3,700냥을 착복했다. 경력 4년 7월 9일 소경은 소주 주부에게 뇌물을 주고 비옥한 토지 7백 묘를 헐값에 사들였다. 경력 6년 정월 소경을 필두로 한 3대 작업장 주사와 금고 관리인들이 노동자들의 임금 지급을 미뤄 체불된 임금이 만 냥을 넘었으며 이에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열네 명이 사망했고 쉰여 명이 다쳤으며······.”
열거된 죄상이 어찌나 많은지 읽어 내려가던 소문무의 입이 마를 지경이었다. 쉼 없이 읽어 내려가던 그가 마침내 마지막 줄을 읽었다.
“용서하기 힘든 죄를 저질렀으니 경국 법률에 따라 참형에 처한다.”
그런 뒤 그가 품속에서 토지 매매 계약서와 뇌물을 받은 소주 주부의 진술서 및 관련 증거를 꺼냈다.
“이 정도면 증거가 충분하지.”
범한이 만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인적 증거도 있고 물적 증거도 적지 않소. 본관이 황실 금고를 관리하는 이상 소경과 같은 악랄한 놈은 절대 남겨 두지 않을 거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던 노동자들은 소경이 지은 죄상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그가 평소 자신들에게 저질렀던 포악한 짓들이 떠오르면서 죽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금고 관리인들의 원망하는 눈빛은 갈수록 더 짙어져 갔다. 그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죄를 다스리려면 법정에서 사건을 심사해야지······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니까 함부로 죽이다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소!”
범한 뒤에 서 있는 부사 마해도 소문무가 읽은 죄상들은 모두 이들을 죽일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소경이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어도 경국 법률로 처벌해야지······ 이렇게 멋대로 죽이다니!’
마해는 사촌 동생 임소안과의 관계 때문에라도 범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범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도 의문을 가지지 않고 단호하게 실행했다.
하지만 전운사 안에 남아 있는 장 공주의 심복들은 이처럼 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대인,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리 뇌물을 받고 법을 어겼다 하더라도 법정 재판을 통해 스스로 죄를 뉘우치게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죄를 지은 놈들에게 진정으로 본때를 보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금고 관리인들에게 사흘의 시간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직 사흘이 다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하시면······.”
전운사 관리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자 금고 관리인들은 벌벌 떨면서도 여전히 의지를 꺾지 않고 한층 용기를 냈다.
반면 범한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희미하게 냉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본관은 감찰원 제사이자 전운사 정사를 맡고 있소. 감찰원은 조사할 책임이 있고 전운사는 경국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 특수한 기관이오. 그러니 정사인 내가 직접 사건을 판단해 참수하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아요? 게다가······ 본관은 그가 이런 죄를 지었다고 참수한 것이 아니오.”
그가 말을 잠시 멈추고는 오금을 저릴 만큼 무서운 미소를 지었다.
“노동자들을 동원해 파업함으로써 폐하의 뜻에 저항했지 않소. 이런 상황에서 본관이 이런 오만방자한 자를 참수하지 않는 게 더 문제가 아니오?”
390화
세세하게 나열된 경국 법률에서 살인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암살한 경우 같은 살인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범한과 같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살인할 경우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만약 그가 소경이 그동안의 불법적인 일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정당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전운사 관리들이나 창고 관리인들에게 아주 좋은 반격의 기회를 줄 수 있었다. 합법적인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느 관아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한은 소경의 죄명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낸 뒤 황제의 뜻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그를 참수하였다. 물론 황제의 뜻이란 항상 아리송했기에 해석의 여지는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해석한 권한도 흠차인 범한에게 있었다.
물론 감찰원 조사로 소경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는 일도 반드시 필요했다. 비옥한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고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혀 죽였다는 죄상을 확실히 밝혀 둬야 나중에 경도 조정에서 이 문제가 불거져도 의문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먼저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운 뒤 증거를 수집해 세상 사람들의 의문을 잠재우는 것은 먼 미래를 고려한 계획이었다.
* * *
갑 작업장의 큰 공방에서 파업을 주도하던 소경이 참수당하자 노동자들은 흠차 대인에게 약간의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한편 위풍당당하던 금고 관리인들은 담이 쥐만큼 작아졌고, 전운사 관리들은 마음속에 켕기는 것이 있었지만 대놓고 범한을 지적할 수 없기에 조용히 상황을 지켜봤다.
한편 같이 파업 중인 을과 병 작업장은 섭 참장과 단달이 처리했기에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었다. 두 사람은 범한만큼 대담하지 않았기에 관련자들을 체포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두 작업장에 있던 금고 관리인들이 군사들에게 잡혀 큰 공방에 끌려 왔고 노동자들은 각 작업장에 감금되었다. 2백여 명이나 되는 청색 옷을 입은 금고 관리인들이 들어오자 큰 공방은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하지만 군대의 창과 감찰원 관리들의 쇠뇌의 화살이 두려워 이들은 감히 자리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광경을 본 전운사 관리들은 비로소 흠차 대인이 사흘령을 내린 뒤 상황을 일찌감치 계획해 두었으며 금고 관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이미 예상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 범한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내두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신양 측 심복인 전운사 관리들은 실망한 눈빛으로 이 상황을 지켜봤다. 그들은 사실 오늘 범한이 잔학무도한 방법을 사용하기를 기대했다. 그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범한이 금고 관리인들을 모두 죽여서 황실 금고 생산량이 줄어들고 품질도 하락해 폐하의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공방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 범한이 일어나자 비옷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땅에 떨어졌다. 그가 한곳에 모여 있는 금고 관리인들을 바라보았다. 몇몇 금고 관리인들 눈에서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였다. 특히 을과 병 작업장에서 잡혀 온 이들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교만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두 모였군.”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젯밤에 비가 많이 내려 여기 공방 아궁이가 식어 버렸는데 다른 곳은 어떠한가? 삼사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공방 금고 관리인들도 오늘 모두 관문 부근에 모여 있던데? 비 때문에 공방 작업이 멈췄더라도 자신이 책임지는 공방에서 상황을 살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아직 시간이 이른데 설마 벌써 갔다가 돌아온 것인가?”
범한이 자문자답을 하는 사이 다른 곳에서 온 금고 관리인들은 동료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듣고는 얼굴이 점차 창백하게 변해 갔다.
범한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이 파업한 건 엄연한 사실이니 본관도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네.”
소 주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금고 관리인들은 마침내 흠차 대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냉혈한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범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금고 관리인들은 모두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용서를 빌며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퍼붓는 사람, 흰자를 드러내고 기절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중에는 개구멍을 찾아 도망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살겠다고 발악했지만 밖은 군대와 감찰원이 막고 있어 도망칠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금고 관리인들 사이에서 두 사내가 튀어나왔다. 이번 파업을 주도한 을과 병 작업장 주사들이었다.
두 주사는 의기양양하게 가장 큰 공방에 금고 관리인들과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는 청산유수 같은 말들을 쏟아 내며 파업을 주도했었다. 물론 노동자들이야 무기력하게 두 사람의 지시를 따를 뿐이었지만 수백 명의 금고 관리인들은 진심으로 그들의 말을 믿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지혜를 짜내 생각한 끝에 그들은 조정에서 자신들을 엄벌하지 못할 거라 믿었다. 그러니 두 주사의 주장처럼 흠차 대인에게 공손하게 행동하면 파업을 해도 조정에서 자신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반란이라고 치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들은 파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수히 많은 병사와 감찰원 관리들이 들이닥쳐 무기를 겨눌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무기 앞에서 힘을 잃은 두 주사는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붙잡혀 왔지만 여전히 저항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분수에 맞게 행동했으니 흠차 대인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흠차 대인은 분수를 지키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무리에 섞여 상황을 전해 듣던 두 주사는 비로소 함께 파업을 도모했던 소 주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두 주사는 마침내 아궁이 앞에 널브러져 있는 소경의 시체를 발견했다. 피로 물든 머리 없는 시신을 본 두 사람은 비통함에 소리쳤다.
“소 대인······ 소 대인!”
무기를 들고 서 있는 군대와 감찰원 관리들이 무서워 아궁이 옆으로 가지는 못한 채 울부짖던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독기가 가득 서린 눈으로 범한을 노려보는 그들은 이미 오늘 자신들이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때 범한은 고개를 돌려 고달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병 작업장은 아무 문제가 없으며 혼란 없이 감찰원 3처 기술자들이 이미 모든 걸 인수하였다는 내용을 듣자 그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때 관저를 지키고 있던 호위 무사가 관리들을 뚫고 다가와서는 귓가에 보고했다.
“관저에 계시는 그분이 나가고 싶어 합니다.”
병 작업장이 중요한 이유는 무기나 선박과 같은 중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곳의 기밀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나중에 전쟁에서 경국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 나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범한은 저 때문에 그럼 참사가 벌어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기에 단달의 보고를 듣고는 안심했다. 하지만 이어서 말을 듣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여종으로 분장해 자신을 따라온 해당타타는 전운사 관리를 비롯해 여러 사람을 속이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매의 눈을 가진 고달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이에 범한은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았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나마 계년조가 은밀히 감시하고 있었고 호위 무사들도 밖으로 소식을 흘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에 다행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호위 무사가 말하는 그분은······ 당연히 해당타타였다. 아무래도 시골 아가씨는 오늘 소란을 틈타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내보내서는 안 되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관저에 머무르게 해야 해.”
호위 무사들은 작년에 습지대에서 해당타타와 대치해 본 적이 있었기에 범한은 걱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단 무력으로 대응한다면 해당타타도 자신의 결심을 알고 조용히 물러날 것이었다.
지시를 마친 범한의 시선이 앞에 서 있는 주사들에게 향했다.
“소란을 일으켜 조정에 대항한 두 사람을 체포해라.”
병사들이 앞으로 나와 두 주사를 포박하자 금고 관리인들은 두려움과 원한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도 따라나서려 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정부 기구에 대항할 힘이 없거니와 그동안 착취한 돈이 너무 많아서 잃을 것도 많았기에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범한도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용기도 적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 대인!”
을 작업장 주사는 자신의 두 손을 결박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범한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죽이려면 죽여 보십시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조정에서 이 일을 묵인하지 않을 테니!”
“지금 본관을 겁박하는 겐가?”
범한이 빙그레 웃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는 법. 금고 관리인이 줄어든다고 본관이 황실 금고를 관리하지 못할 것 같은가?”
을 작업장 주사가 비웃으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저희가 흠차 대인의 의지를 얕보았듯이 대인도 작업장에서 하는 일을 얕보고 계시는군요!”
그가 절망해 내뱉는 최후의 말에는 귀신이 되어서라도 범한이 황실 금고를 망가뜨리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비장함이 느껴졌다.
범한이 소문무에게 눈짓하자 그가 옷 안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장삼, 이사, 왕팔, 용구······.”
금고 관리인 중 이름이 불린 십여 명의 사람들의 안색이 순간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이들은 자신들도 갑 작업장 소 주사처럼 머리가 잘려 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졌다.
소문무가 무서운 얼굴로 그들을 힐끗 보았다. 제사 대인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그가 마른 침을 꼴깍 삼킨 뒤 마지못해 말했다.
“이름을 불린 자들은 앞으로 나오게. 자네들은 무죄이니 흠차 대인께서 내일 조정에 상소를 올려 죄가 없음을 보증해 주실 것이네.”
‘무죄라고? 조정에 상소를 올린다니?’
이름이 불린 금고 관리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지옥에 있다가 천국에 온 것만 같았다.
의문과 질투가 뒤섞인 금고 관리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범한의 앞에 선 그들은 엎드려 감사의 절을 올리면서도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자신들도 알지 못했다.
범한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금고 관리들에게 일어나라는 표시를 했다.
“주사 세 명의 죄상을 파악하고 황실 금고에서 자행되었던 여러 불법적인 일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여러분이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대의를 따르지 않았다면 본관은 황실 금고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 파업이 일어날 거란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만큼 본관도 섭섭지 않게 대해 드릴 것입니다.”
범한의 말에 공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름이 불린 십여 명의 금고 관리들은 사실 밀고자들이었다. 범한 뒤에 있던 전운사 관리들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실 금고에 온 지 사흘도 되지 않은 흠차 대인이 어떻게 자신의 편을 포섭할 수 있었단 말인가. 감찰원 밀정이 뛰어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이름을 불린 동료들이 몰래 자신을 팔아먹은 밀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금고 관리인들은 당장이라도 그들을 흠칫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상 그럴 수는 없었기에 이를 갈며 나지막이 욕을 퍼부었고 이 말은 앞에 나온 밀고자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범한에게 감사해하던 밀고자들은 순간 그가 원망스러워졌다. 몰래 재산을 반납하고 알고 있는 정보를 밀고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파업이 일어날 거란 사실은 자신들이 말한 게 아니었다. 자신들도 어젯밤에야 그 사실을 알았는데 무슨 수로 알릴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들은 상사인 주사들의 눈 밖에 날 용기는 없었으므로 애초에 갈대처럼 양쪽에 붙어 상황에 따라 처신한 생각이었다.
동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된 밀고자들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흠차 대인이 밀고 사실을 말했으니 이제 동료들을 어떻게 본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장삼이 이삼을 바라봤고 왕팔은 옆에 있는 용구를 바라봤다.
“자네도 밀고했나?”
“응, 나도 밀고했네.”
그들이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범한은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말을 내뱉었다.
“이 열세 명의 금고 관리인들은 용감히 폐단을 폭로해 공을 세웠으므로 본관은 이들을 3대 작업장 부주사로 임명하기로 했네.”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부사에게 물었다.
“마 대인은 다른 의견이 있소?”
391화
상황을 지켜보던 전운사 부사 마해는 황실 금고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을까 봐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범한의 말을 듣자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좋은 방법이라고 감탄했다. 열세 명의 금고 관리인들이 밀고자라는 사실을 밝혔으니 그들은 범한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다른 금고 관리인들과 사이가 벌어진 만큼 오늘 일만 잘 수습한다면 나중에 금고 관리인들이 결탁해 나쁜 짓을 벌이더라도 전운사 관리들과 함께 대항할 것이었다.
마해가 고개를 끄덕이며 범한의 계략에 감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을 작업장 주부에게로 향했다. 그가 비웃음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으로 소리쳤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비겁한 것들······. 범 대인, 설마 저들이 황실 금고를 이전처럼 운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조정을 협박하려는 마음은 없지만 저희 머릿속에 든 정보가 없다면 황실 금고는······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그 말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 부사 마해는 범한에게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전운사 관리 중 장 공주의 심복인 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정을 위한 고려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은근슬쩍 주사들의 편을 들어줬다. 이들은 황실 금고가 계속 운영되는 게 중요한 만큼 주사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야 하며 이미 소 주사의 죽음으로 그들도 깨달은 바가 많을 거라 설득했다.
범한은 귓가에 들리는 말들은 무시한 채 뚫어 버릴 듯한 눈빛으로 을 작업장 주사를 노려봤다. 그의 강렬한 눈빛에 을 작업장 주사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때 범한이 벼락같이 화를 냈다.
“사지에 몰렸으면서도 조정을 협박한단······ 말인가? 이렇게 어리석다니······. 자네 목에 달린 건 머리인가, 엉덩이인가! 차라리 속옷을 벗어서 머리에 쓰게!”
흠차 대인의 고함에 전운사 관리들은이 일제히 겁을 먹고 입을 다물었다.
범한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금고 관리인들을 쑥 훑어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자네들 덕분에 황실 금고가 수익을 내는 거라 생각하나? 황실 금고가 아직도 이전의 섭가라고 생각하는 겐가? 자기 능력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원망의 말들만 늘어놓고 있군. 돈을 탐내고, 재료는 훔쳐 몰래 팔고, 힘들게 고생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가로채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내는 거 말고 자네들이 하는 게 뭐가 있는가? 부끄러움도 모른다고 했는가? 비겁한 자들이라 했는가? 자네들이야말로 부끄러움을 알았다면 오늘의 사태를 만들지 않았겠지!”
그가 몸을 돌려 을 작업장 주사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정말 당당한 사람이군. 자네가 없으면 황실 금고가 무너질 거라 생각하고 있는가? 그럼 자네가 한번 말해 보게. 요 몇 년 동안 유리가 갈수록 탁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술이 갈수록 도수가 약해지는 이유는 또 뭔가. 향수는 이미 10년 동안 생산이 중단되었는데 자네는 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인가!”
감정이 격해진 범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네도 과거 섭가의 일꾼으로 오래 근무해 온 사람 아닌가.”
범한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을 작업장 주사에게 화를 퍼부었다.
“제기랄,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는가. 정말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야!”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최근에 온 천하를 시끌벅적하게 했던 소문이 떠올랐다.
‘흠차 대인이 정말 섭가의 후손인 건가? 그래서 저리 화를 내는 것인가.’
결박된 채 땅에 무릎을 꿇은 을 작업장 주사는 섭가라는 단어를 듣자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의 진짜 신분이 기억났다. 이어서 오랜 세월 떠올려 본 적 없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 새록새록 기억나면서 부끄러움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솟구쳤다. 과거 길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던 그가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섭가 덕분이었다. 그가 부끄러워진 이유는 과거 섭가 여주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시절이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분노한 이유는 강제로 발가벗겨진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듯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는 흠차 대인이 정말로 섭가의 후손이라면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분명 알고 있을 테니 이것으로 위협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즉 그는 자신이 목이 잘려 나간 소 주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거란 사실에 분노했다.
“조정이 자네들을 섭섭지 않게 대우해 주지 않았나.”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며 말했다.
“세 명의 주사뿐만 아니라 평범한 금고 관리인들에게도 매년 경도 3품 관리보다 더 많은 봉록을 내렸는데도 자네들을 어찌 만족할 줄 모르는가!”
그가 매서운 눈빛을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설마 황실 금고 상품이 자네들 머릿속에 담긴 정보에 의해 나온다고 해서 매년 은전 2천만 냥을 받는 게 성에 차지 않는 것인가? 그럼 도대체 얼마나 받아야 만족한단 말인가!”
이 말이 금고 관리인들의 마음에 울렸다. 경국은 매년 황실 금고에서 생산하는 상품을 천하 각국에 팔아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런 수익과 비교하면 자신들이 받는 임금이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조정에게 상당한 수익을 안겨 주는 만큼 자신들도 이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은 매번 뇌물이나 착취를 통해 돈을 챙겼다.
흠차 대인의 말에 금고 관리인들은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불만 가득한 눈빛은 숨기지 않았다.
금고 관리인들의 솔직한 반응에 범한이 차가운 조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자네들 머릿속에 든 것이 정말 자네들 것이라 믿는 건가?”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관리들을 비롯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범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잊지 말게. 섭가가 나타나기 전에 자네들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말이네. 자네들 머릿속에 있는 기술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신묘에서 가져온 것인가? 모두 섭가가 가르쳐 준 것들이 아닌가! 섭가 여주인이 없었다면 자네들은 지금도 거리를 떠돌며 구걸하고 있을 걸세! 과거 섭가가 작업장을 지은 이유가 뭐였는지 자네들은 이미 잊어버린 것 같군. 그러니 섭가가 가르쳐 준 기술을 빌미로 본관을 협박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도 부끄럽지도 않은가? 수치스럽지 않으냔 말이네!”
그의 뒤에 있는 전운사 관리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비록 조정에서 사실인지 아닌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작은 범 대인의 출생의 비밀을 천하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섭가란 이름을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는 건······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화도 나고 이 기회를 빌려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마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하려면 명분과 이치가 있어야 하는 법. 오늘 범한이 금고 관리들에게 화를 내고 사람을 참수한 이유는 이익이 아닌 도의적 측면 때문이었다. 섭가의 기술을 이용해 섭가의 후손을 협박하는 것만큼 배은망덕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을 작업장 주사가 결국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대인,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그때 배웠던 기술을 이용해 조정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주사가 울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범한의 예리한 눈은 그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 더구나 저도 모르게 살며시 냉소를 짓는 것이 자신의 머릿속에 든 기술 때문에 범한이 죽이지 못할 거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범한이 가볍게 손뼉을 치자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네 명의 남자가 감찰원의 경호를 받으며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담주를 경유해서 이곳에 도착한 경여당 대행수들이었다.
감찰원 관리들이 의자를 놓자 범한은 일어나 무심하면서도 공손하게 네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전운사 관리와 금고 관리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난데없이 나타난 저들은 누구지? 흠차 대인과 나란히 앉을 만한 자격을 갖춘 자들로는 보이지 않는데.’
흠차 대인 뒤에 서 있던 마해는 평민이 자리에 앉자 불만스러웠지만 잠자코 상황을 지켜봤다.
범한이 손가락으로 비옷에 흐르는 빗물을 찍어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이들이 누군지 아는가?”
섭가가 몰락한 지 이미 20여 년이 흐른지라 공방에는 당시 일했던 노동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혹여나 같은 시기에 일했다고 한들 당시 지위가 높았던 섭가 스물세 명의 대행수들과 만나기란 쉽지 않았기에 금고 관리인 중 대부분은 네 명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을 작업장 주사가 긴가민가한 눈빛으로 네 명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머리를 푹 숙이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뭔가 떠오른 듯 화들짝 놀라더니 흙탕물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20여 년 전 어린 노동자였던 그는 한참 머리를 쥐어짠 끝에 마침내 의자에 앉아 있는 네 명의 중년 남자가 섭 대행수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을 작업장 주사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범한이 겁 없이 금고 관리인들을 몰아붙이고 자신이 기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동요하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그건 경도에 감금되어 있던 섭 대행수들과 함께 황실 금고에 왔기 때문이었다.
섭 대행수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섭가 여주인이 키운 첫 번째 제자들로 섭가의 모든 기술자의 스승이자 현재 금고 관리인들의 스승이었다. 이런 섭 대행수들을 데리고 있으니 흠차 대인은 기술이 사라지는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었고, 황실 금고 생산이나 질이 떨어질까 걱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의 황실 금고를 있게 한 섭 대행수들이 있으니 범한이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이 사실을 깨달은 을 작업장 주사는 절망하면서도 여전히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버둥대며 앞으로 기어가더니 울먹이며 사정했다.
“스승님, 이 제자 좀 살려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범한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 앞으로 기어 와 목숨을 구걸할 거란 범한의 예상과 다르게 을 작업장 주사는 일곱째 섭 대행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일곱째 섭 대행수의 제자입니까?”
범한의 질문에 일곱째 섭 대행수가 그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마지못해 말했다.
“며칠 제 옆에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일곱째 섭 대행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섭가가 무너진 뒤 조정이 스물세 명의 섭 대행수들을 체포해 경도에 가두자 죽음을 불사하고 저항하는 제자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자신의 살길만 찾았다. 물론 한 치 앞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서 한 선택을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높은 자리까지 오른 을 작업장 주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서 스승이라는 두 글자가 튀어나오자 줄곧 조용히 있던 병 작업장 주사가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범한의 옆에 앉아 있는 네 명을 바라봤다.
과거 섭가에서 일했던 금고 관리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희미하게나마 옛 기억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놀람과 기쁨,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나와 섭 대행수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넷째 대행수님이시군요.”
“열두째 대행수님, 저 주자입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대행수님과 함께 저주 분점에서 일했던 놈입니다.”
금고 관리인 대부분은 섭 대행수들을 몰랐음에도 공방은 어느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이 어두운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인사는 나중에 하도록 하게.”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안심하고 있었다. 밀고해 부주사가 된 열세 명과 섭 대행수들만 있다면 황실 금고 개선 계획이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20여 년 만의 만남에 기쁨으로 가득 찼던 공방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자 아쉬워하는 감정이 솟구치면서 기존의 긴장감이 옅어졌다. 전운사 관리들은 이런 분위기에 당황하는 반면 신양 측 심복들은 암암리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만약 지금 상황이 경도에 알려진다면 폐하가 못마땅해할 게 분명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땅에 엎드려 있던 을 작업장 주사는 비빌 언덕이 생겼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지금 상황을 보니 흠차 대인이 섭 대행수의 체면을 봐서라도 자신의 목숨은 살려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아궁이 앞에 있는 소 주부의 시신을 바라보고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그는 소 주부가 섭 대행수들과 아무런 인연이 없어서 흠차 대인이 망설이지 않고 참수한 거라 생각했다.
392화
금고 관리인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 범한은 보일 듯 말 듯 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을 끌고 가서 참수하게.”
“네, 대인.”
을 주사가 고개를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봤다.
‘누구를 참수하라는 거지? 또 참수할 사람이 남아 있나?’
그는 감찰원 관리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뒤에야 비로소 흠차 대인이 말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입을 열자 진흙 한 덩어리가 입을 막았다.
그가 오줌을 질질 흘리며 감찰원 관리에게 끌려 공방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흠차 대인을 바라봤다. 범한은 무수히 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걸 모르는지 태연하기만 했다.
얼마 뒤 공방 밖에서 살과 뼈를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공방 안에 짧은 탄식이 들리더니 곧이어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을 작업장 주사는 이렇게도 간단히 죽임을 당한 것이다.
무거운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손이 결박된 병 작업장 주사가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는 절망과 비참함이 그대로 드러났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가 천천히 범한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자신에게 행운이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흠차 대인이 파업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재판이나 증거도 없이 주사 세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고, 섭 대행수 네 명에게 황실 금고 기술을 통제하려 하는데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3대 작업장 주사 중 이미 두 명이 죽었으니 자신도 곧 죽을 목숨이었다.
실성한 듯 웃는 그를 본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병 작업장 주사가 범한을 바라보더니 순간 웃음을 멈추고 이를 갈며 말했다.
“내 끝은 내가 선택할 겁니다. 이 구렁텅이에서 저를 꺼내 주셨으니 대인을 원망하지는 않지만 죽기 전에 한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말하게.”
병 작업장 주사는 고개를 돌려 범한 옆에 있는 열두째 섭 대행수를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두째 대행수님, 스승님······ 경도에서 잘 지내셨습니까? 제자가 돼서 지금껏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한 적이 없군요.”
“자네는?”
열두째 섭 대행수가 흐린 눈을 깜빡거리며 병 작업장 주사를 바라봤다. 옆에 있던 일곱째 섭 대행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 열세 번째 제자가 아닌가. 과거 자네와 관계가 돈독했으니 안부를 묻는 거겠지.”
열두째 섭 대행수가 화들짝 놀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호금림인가? 자네 아직도 살아 있었어? 나는 그때 자네가 죽은 줄 알았네.”
순간 옆에 있는 범한이 생각난 열두째 섭 대행수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호금림도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열두째 섭 대행수가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께서 항상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지. 그래서 우리도 남은 목숨 부지해 가며 살았는데 내가 어찌 자네를 탓할 수 있겠나. 다만 열세 번째 제자야······.”
그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처음 경도에 스물세 명이 있었는데 이제는 열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구나.”
그 말을 들은 호금림은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도 잊고 비통함에 눈물을 흘렸다. 한편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범한은 묵직한 슬픔에 숨을 골랐다. 자신이 경도에 오고 난 뒤 채 2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섭 대행수들 중 스물셋째 섭 대행수와 열일곱째 섭 대행수가 세상을 떠났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공방에 쌓여 있는 재료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시간은 물처럼 빠르게 흘러가는데 나는 언제 섭가란 이름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죽어야 할 사람이 죽고 살았어야 할 사람이 경국 사람들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날이 언제 올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젖어 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는 앞에 있는 병 작업장 주사를 바라봤다.
“자네가 연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옛정이 떠올라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본관을 자네를 죽일 생각이 없네. 그건 자네에게 계속 살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본관의 마음이 약해서야.”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던 호금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주사가 죽는 모습을 보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버린 그는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듣자 너무 놀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범한이 무정한 눈빛으로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설명했다.
“죄가 큰 자는 참수하고 작은 자는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네.”
범한이 병 작업장 주사 호금림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병 작업장은 줄곧 황실 금고와 감찰원 3처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며 군사 무기와 선박 연구를 전문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감찰원 3처를 통해서 호금림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금림이란 사람은 과거 섭가 여주인이 남긴 설계도를 연구하는 데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소박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상당한 은전을 착복하기는 했지만 땅을 강제로 사들이거나 여자를 겁박하는 등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점만 봐도 갑과 을 작업장 주사들과 비교해 그를 죽이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범한도 완벽하게 청렴한 사람은 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병 작업장 주사가 호송되고 공방 안에 금고 관리인들만 남게 되자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이들은 파업을 시작할 때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창고 관리인들이 똘똘 뭉쳐서 조정 전운사 관리들에게 맞선 게 처음도 아니었고, 그들이 터무니없는 요구만 하지 않으면 대부분 평화롭게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착복한 은전이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흠차 대인이 칼날을 휘둘러 주사들을 참수하고 황실 금고의 본질을 밝혀 자신들의 행동 정당성을 반박하며 더구나 네 명의 섭 대행수들을 등장시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금고 관리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비장의 카드가 지금 앞에 있는 젊은 관리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다.
금고 관리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들 중 누가 죽게 될지 가늠했다.
얼마 뒤 소문무가 이름과 죄명을 이야기하자 세 명의 금고 관리가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평상시 온갖 악행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소주 관리와 결탁해 서슴없이 경국 법률을 위반한 자들이었다.
소문무가 건네준 서류를 받아 든 범한은 겁에 질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금고 관리인들을 바라봤다. 바지가 흥건하게 젖은 걸 보니 오줌을 지린 모양이었다.
“자네는 첩을 열두 명이나 얻었군?”
범한이 세 명 중 한 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떠는 금고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는지 가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범한이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첩을 열둘이나 얻었다는 건 돈이 많고 밤일에 엄청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짓이지. 게다가 첩 열두 명 중에 아홉 명은 강제로 빼앗은 거로군. 설마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죽인 것인가? 정말 대단하구먼. 경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귀족가 자제들보다 더 제멋대로야.”
나머지 두 명은 이것보다는 죄가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살려 둘 정도는 아니었다. 범한이 손을 휘두르자 감찰원 관리들이 세 명을 끌고 갔다. 얼마 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묵직하면서도 참혹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명이 참수를 당한 것이다.
감찰원 관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었고 공방에 있는 병사들도 내키지는 않아도 감당할 수는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처럼 참혹한 광경을 거의 볼 일 없었던 그들은 너무 놀라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공방 안팎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참지 못해 구역질하기도 했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부사 마해가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범한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대인, 며칠 뒤 공개 입찰을 앞둔 상황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자신이 계속 사람을 죽일까 봐 걱정하는 마해를 향해 범한이 씨익 웃어 보였다.
“마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6년 전 제 장모······ 장 공주마마께서 처음 황실 금고에 왔을 때도 몇 명이 죽었습니다.”
마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손가락 여섯 개를 펴 보였다.
“여섯 명이지요. 장 공주마마보다 아랫사람인 제가 이보다 더 많이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미 다섯 명을 죽였으니 더는 죽이지 않을 겁니다.”
뒤에 있던 관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금고 관리인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참수당한 머리를 볼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면 소문무만이 범한의 말에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겼다.
부사 마해가 미간을 찌푸리며 흠차 대인이 방금 한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장 공주마마께서 여섯 명을 죽였으니 자신은 다섯 명만 죽이겠다는 건······ 나중에 이 문제를 두고 어사들이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다고 공격할 걸 대비한 것이겠지. 이제 보니 흠차 대인은 나이는 많지 않지만 생각은 굉장히 치밀한 사람이야. 이종사촌 임소안이 연줄을 만들려 노력한 이유를 알 것 같군.’
이런 생각을 하던 마해는 범한이 앞으로 임명할 사람과 해야 할 조치들을 지시하자 조금의 싫은 내색 없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 말을 듣던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 중 몇몇은 내키지 않았지만 정사와 부사가 정한 일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범한은 공석이 된 3대 작업장 주사의 자리를 섭 대행수들에게 임시로 맡게 했다. 그리고 감찰원에 동료들의 죄를 밀고한 금고 관리인들을 부주사로 임명해 20여 년 동안 떠나 있어 황실 금고가 낯설 섭 대행수들을 보좌하도록 했다.
동료를 밀고한 금고 관리들을 부주사로 임명한 건 이후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동료를 밀고했다는 부담이 있는 부주사들은 이후 보복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엄격히 관리하고 조심히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고 관리인들은 부주사들이 엄격하게 굴수록 반감이 커질 것이므로 양측은 결국 충돌할 게 분명했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범한이 원치 않는 일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흘령이 끝나기까지 아직 반나절 정도 시간이 있으니 죽지 않은 자들은 은전을 뱉어 내고 장부를 내놓은 뒤 자신이 저지른 잘못도 상세히 적도록 하게. 반성하라는 의미에서 하는 거니 나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네. 왜 멍하니 서 있는 겐가? 집이 여기 공방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은전을 챙겨 다시 공방으로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할 텐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고 관리들은 화들짝 놀라 헐레벌떡 큰 공방에서 빠져나갔다.
섭 참장이 이끌고 온 병사가 천천히 길을 비켜 줬고 감찰원 관리들도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4처가 공방에 심어 놓은 밀정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전운사 관리들은 소리 내 말할 엄두는 내지 못한 채 남몰래 눈빛만 주고받았다. 한편 맨 뒤에 서 있던 노동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예전과 달리 고분고분해진 금고 관리들을 바라보았다.
밖에 내리던 빗줄기는 거의 멈춘 상태였다. 시끌벅적했던 황실 금고 파업 사태는 범한의 무서운 칼날과 섭 대행수들의 등장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
393화
금고 관리인과 전운사 관리들이 착복한 은전을 내놓자 범한은 사건을 심사한 뒤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재산도 지나치게 착취한 경우가 아니라면 체면을 봐서 모두 몰수하지는 않고 약간은 남겨 주었다. 비록 재산을 전부 몰수해도 겉으로는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아 앞으로 일을 나태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루 만에 거둬들인 은전은 부유한 범한도 놀라 눈이 튀어나올 만한 금액이었다. 장부에 적힌 금액을 보던 범한은 일을 시끄럽게 처리한 게 약간은 후회가 되었다. 경도를 비롯해 온 세상에 소문이 날 만큼 시끌벅적하게 일을 처리한 터라 노동자들에게 체불된 임금을 주고 나면 남은 돈은 모두 황실 금고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미리 금고 관리인들이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탐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범한은 이렇게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을 거다. 오히려 감찰원 6처 검수들을 시켜 토지 계약서와 같은 것들은 빼고 은전은 개인적으로 빼돌렸을 거였다.
지금처럼 돈이 부족한 시기에 이 돈을 가질 수 있다면 북쪽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고 그 과정에서 나올 새로운 문제도 피할 수 있었다. 더욱이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황실 금고 공개 입찰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다.
이후 저택으로 돌아온 범한은 해당타타를 붙들고 자신의 상황을 하소연한 뒤 지금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경국 황제가 이미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아는 상황에서 만약 그녀가 공방을 몰래 구경한다면 자신은 황실 금고 자리를 지킬 수 없을 것이고 북제도 상당한 피를 입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당황한 해당타타는 아무 말 없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저 심심해서 바깥바람을 쐬려던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크게 잘못한 일이란 말이야?’
약간 의심이 많은 범한은 겉으로는 이 일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파업에서 범한이 보인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모습과 섭 대행수들의 등장은 그의 계획대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그럼에도 황실 금고의 모든 일이 정상 궤도를 회복하는 데에는 며칠이 필요했다.
노동자들이 다시 제대로 된 임금을 받기 시작하고 붙잡혔던 여자들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자 황실 금고 전체에 기쁨의 활기가 용솟음쳤다.
하지만 이 기쁨 속에는 드문드문 어울리지 않는 음표들이 섞여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챈 범한은 권력을 이용해 비참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했지만 경국 백성들의 자질구레한 집안일까지 모두 통솔할 수는 없었다. 다시 돌아온 부인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남편들이 기어코 부인들이 다시 금고 관리인들을 따르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생긴 부작용이었다.
사실 금고 관리인들 모두가 여색을 지나치게 밝히는 자들은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의 아내를 강제로 뺏어 첩으로 삼는 일은 많지 않았다. 비록 많지는 않다고 해도 남녀 사이를 깨뜨린 일은 민간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범한은 머리를 쥐어짜며 방법을 강구했지만 복잡한 집안일까지 간섭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포기하고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큰 국면에서 새로 황실 금고에 부임한 전운사 정사이자 흠차 대인인 범한의 권위는 이미 확실하게 세워졌다. 그리고 황실 금고의 수만 명의 하층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강직하고 청렴한 이미지가 심어졌다.
황실 금고는 그렇게 점차 안정되어 갔다.
파업이 끝난 뒤 범한의 계획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의 확실한 조치로 지금 양두사의 머리 한쪽은 이미 죽은 상태였고 다른 머리도 상처를 입어 꿈틀대기 시작했다.
“등자월이 보낸 새로운 소식이 있는가?”
의자에 앉은 범한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감찰원 보고서를 읽다가 묻자 소문무가 대답했다.
“그렇게 빨리 진행될 수는 없습니다. 신양 측 관리들이 소식을 받아 의견을 주고받는 데 최소 몇 달은 걸릴 겁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조정 어사들의 일 처리 속도가 상당히 느리군.”
소문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세상에서 도찰원이 자신을 공격하길 기다리는 사람은 제사 대인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제사 대인이 태연하게 도찰원 공격을 기다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더 큰 세력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네. 내일 그 사람들을 체포하도록 하게.”
잠시 고민하던 범한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지시했다.
범한이 체포하라고 한 사람들은 바로 황실 금고에 남아 있는 신양 측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사흘령이 내려지자 금고 관리들을 선동해 범한에 대항하게 했다. 그리고 범한이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한 그날 밤 그들은 깔깔 웃으며 상주문을 올릴 계획을 세우고 경도에 있는 장 공주 측 관리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범한이 금고 관리인들에게 사흘의 시간을 줘서 파업을 조장하게 한 이유는 황실 금고의 고름을 밖으로 드러내게 해서 원흉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에 감찰원 밀정들은 전운사 안의 관리들을 감시했고 누구도 범한이 짜놓은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움직이게 해야 하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모두 떠난 뒤 그들이 여기서 다시 활약하게 해서는 안 되네.”
소문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인, 소문이 나지 않게 막지 않으실 겁니까? 파업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이 경도 조정에 알려지면 신양 측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는 셈인데······ 대인에게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범한이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가볍게 두들기며 고민했다. 소문무의 질문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의문이었다.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심복에게 자세한 계획을 알려 줘야겠다고 결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황실 금고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네. 공방이 뿌리와 몸통이라면 외부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은 가지라 할 수 있지. 그러니 가지를 절단하려면 먼저 뿌리와 몸통을 튼튼하게 해야 하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일을 진행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네. 그래서 금고 관리인들이 강력한 반항을 하게끔 만든 것이지. 그래야 내가 과격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고 핑계를 만들어 신양 측 관리들을 내쫓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소문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제사 대인이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알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황실 금고에 포진해 있는 적들이 움직이도록 자극해야 하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설명했다.
“장 공주는 아마 내가 자극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네. 섭 대행수들이 나를 따라 강남에 내려왔다는 사실을 황궁에 있는 장 공주가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녀가 이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황실 금고 관리들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분명 관리들이 이 사실을 알면······ 과감히 일어나 대항하지 않을 테니 그게 싫었던 거겠지. 섭 대행수들이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누가 감히 파업하려 했겠나.”
“맞습니다. 파업할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요.”
소문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여당 대행수들이 대인과 함께 있다는 건 금고 관리인들이 가진 비장의 패가 소용없다는 의미니까 대항할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장 공주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 정보를 숨겨 황실 금고 관리인들이 암암리에 연합하도록 했을까요? 이건 대인이 위엄을 세울 좋은 기회를 제공한 셈이지 않습니까? 만일 장 공주께서 사전에 정보를 알렸다면 금고 관리인들도 얌전히 행동했을 것이고 신양 측 관리들도 가만히 있었을 테니 저희가 기회를 잡을 수는 없었겠지요.”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장 공주는 일반인들은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에서 계시지 않나. 물론 이번 일이 장 공주가 나에게 위엄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심지어는 황실 금고 관리들이 나를 두려워하게 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 하지만 이번 일을 처리하면서 나는 부득이하게 과거 섭가의 사람과 힘을 빌려야 했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으며 강경한 수단을 사용해야 했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 황실 금고에 온 내가 금고 관리인 다섯 명을 죽였다는 사실이 경도에 알려진다면 조정에서 분명 좋은 말이 나오지 않겠지. 게다가 섭 대행수들을 이용해 황실 금고를 관리한다는 소식까지 알려진다면 황궁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심기를 건들 거네. 그러니 장 공주는 아마도 이 일이 시끄러워질 때 나에게 일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소문무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인 말대로라면 파업을 처리한 방식이 잘못되었던 것 아닙니까?”
범한이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 하지 않자 소문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파업, 살인, 섭 대행수와 같은 일들이 경도에 알려진다면 조정에서 대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질 겁니다. 경솔하게 제멋대로 일을 처리한다거나 쓸모없······.”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눈치를 보자 범한이 웃으며 대신 말했다.
“쓸모없는 놈이라 욕할 거라는 말이지? 아마 내가 과거 섭가를 그리워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거라는 말도 나올 거네.”
소문무는 그제야 범 제사가 가장 꺼리고 있는 게 뭔지 알아채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는 비로소 장 공주의 생각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범한이 몰래 섭 대행수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숨긴 것은 범한을 가장 위험한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섭 대행수들을 등장시키는 건 신중하게 해야 했던 것 아닙니까.”
그가 용기를 내어 지적하자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 공주는 내가 과격한 방법으로 최대한 빨리 황실 금고를 장악하려 하리란 걸 정확하게 예측했네. 더구나 이 일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내가 어찌 면밀하게 예측할 수 있겠나. 지금 상황에서는 장 공주가 이 일을 주시하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처리해야만 했네.”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황실 금고에 있는 심복들을 내가 걸러 내리라는 걸······ 장 공주도 분명 알고 있네. 그러니 이들은 앞으로 수년간은 쓸모없는 데다가 오히려 그녀에게 장애가 될 수가 있지. 이미 쓸모가 없어진 사람의 생사를 무엇 하러 걱정해 주겠는가? 어차피 버릴 패니 죽기 전에 나를 귀찮게 하는 데 이용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겠지. 내가 황실의 금고를 장악하는 걸 막을 방법이 없는 장 공주로서는 이 과정에서 앞으로 나에게 문제가 될 만한 일이 발생하기만 바라고 있을 거네.”
여기서 말한 문제는 황궁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황실 금고에 미묘한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황실 금고를 장악하면서 보여 준 잔혹한 면모가 황태후의 예민한 부분을 건들 수도 있었고 황후나 동궁 황태자에게 섭가를 연상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자극은 독사와 같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이러한 일에 충분하게 대응하지 못해 황태후, 장 공주, 황후가 단결하거나 황태자와 2 황자가 범한에게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면 황제는 범한을 의심하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장 공주가 무척이나 바라는 상황이자 범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결과였다. 황실 금고에 섭 대행수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장 공주는 분명 알고 있을 테니 이를 이용해 어떤 방면에서든 이익을 얻으려 할 것이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질문에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덤덤하게 말했다.
“별거 없네. 원장 대인의 말에 따르면 장 공주의 시야가 제한되어 있어 도찰원을 동원해 나를 건들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군.”
그가 고개를 들어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소문무를 보고는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
394화
“폐하께서 내가 섭 대행수들을 데리고 갈 수 있게 허락하셨다는 것은 당분간은 나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으실 거란 의미이네. 내가 황실 금고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장 공주의 체면을 깎아도 만약 장 공주가 조용히 있다면 다행인 거고 경도 관리들을 동원해 공격한다면······ 폐하께서도 섭가 문제에 대해 약간은 의심을 하실 수 있겠지만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네. 나는 최대한 빨리 황실 금고를 복구시키고 싶은 생각뿐이네. 장 공주는 내가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 공격 빌미가 생기는 걸 바라고 있고 나는······ 그녀가 이런 이유로 암암리에 나를 도와주는 걸 이용할 생각이야.”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내가 황실 금고를 장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상당히 과격하고 의심을 부를 위험이 있지만 일부러 은폐하려 하지 않는다면 폐하께서도 내 진심을 믿어 주실 거네. 그렇다면 장 공주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고 한들 나를 공격할 수는 없겠지. 어떤 권모술수든 마지막 단계에서는 폐하의 뜻과 심정을 고려해야 하는 법이네. 그러니 나는 폐하께 항상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려 하네.”
이 말은 소문무를 설득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 싸움에서 사위이자 아들인 자신이 반드시 승리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황제는 황태자에게 2 황자를 적으로 세운 뒤 오늘 다시 범한을 가장 강력한 숫돌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
장 공주는 범한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이 두 황자와 황태후와 황후에게 압력을 준다는 것만 알 뿐 이 압력이 본래 경국 황제가 계획한 것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범한이 조금 전에 진평평의 입을 빌려 말했듯이 장 공주의 시야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것은 역사의 제한성이 아니라 궁둥이의 제한성이었다. 그녀는 용상에 앉아 있지 않았기에 시선이 군왕에게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3월 중순이 되자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온 천하가 봄기운으로 물들었다. 북제 상경이든 경국 경도건 들판에 새싹이 돋고 사방에 꽃이 피어나 활력이 가득했다. 한편 강남에서는 산에 푸른 물결이 넘실거렸고 강가에 심어진 버드나무에서는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강남로 서남쪽에 있는 황실 금고 역시 이러한 대자연이 만들어 낸 활력을 느끼고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연녹색 새싹들과 분홍빛 꽃들이 피어나자 그동안의 일들로 분위기가 삭막했던 관아와 공방의 분위기도 부드러워졌다.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관리들이 관아 문 앞에 서서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아 서로 인사했다. 피비린내 나는 무서운 날들은 이제 끝났다. 내일이면 흠차 대인은 봄에 새롭게 시작되는 황실 금고 입찰 진행을 위해 소주로 돌아갈 것이었다. 이에 오늘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홀가분했다.
관아가 열리자 중앙에 앉은 범한이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사실 이들 중 범한의 심복이라 할 만한 사람은 없었기에 대부분 공방의 안배 문제와 같은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전운사 관리들에게 경국 법률을 비롯해 조정이 황실 금고를 위해 특별히 제정한 규정들을 어기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임금과 봉록은 반드시 제때 지급하고 치안과 보안 업무에 특별히 주의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관리들은 흠차 대인이 말할 때마다 착실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구동성으로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이들은 높이 걸려 있는 다섯 구의 머리가 무서워서라도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범한은 소문무를 이곳에 남겨 두기로 결정했다. 소문무는 전운사 관리가 아니었으므로 임시적으로 감찰원 4처에 전입시켜 단달과 함께 황실 금고 전체를 통솔하는 감찰원 관리 밀정 임무를 맡게 되었다.
관리들은 범한이 소주에서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을 처리한 뒤 항주로 이동해 그곳에서 생활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운사 정사가 황실 금고에서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규정이었다. 그러니 흠차 대인을 대신해 황실 금고에 남게 된 소문무는 결코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전운사 관리들이 모두 일어나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마해에게 넌지시 말했다.
“어젯밤에 말했던 일을 실행해야겠습니다.”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사실을 통보하는 범한을 향해 마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한편 범한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섭 참장은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흠차 대인이 자신에게 말하지도 않고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하던 그의 귓가에 소문무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소문무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정당으로 걸어 나오더니 관리들을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인사했다.
“조사를 통해서 황실 금고 전운사에서 몇몇 관리들이 규정에 어긋나는 일을 벌이고, 금고 관리인들을 선동해 황실 금고의 근간을 흔드는 일을 벌였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이는 모두 불법이며 간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관아 구석에서 일고여덟 명의 감찰원 관리들이 나오더니 꼿꼿하게 앉아 있던 관리 몇 명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러자 관리들이 그들을 밀치며 버럭 화를 냈다.
“감히 어디에다 손을 대!”
한편 다른 전운사 관리들은 자신은 피해 갔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감찰원이 그동안 관리들에게 해온 방식을 잘 알고 있는 경국 문관들은 감찰원에 함께 대항해야 한다는 일종의 동맹 의식 같은 게 있었다. 이에 전운사 관리들은 재빨리 일어나 범한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대인,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실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이 감찰원을 동원해 체포하려는 이들은 모두 신양 장 공주가 황실 금고에 심어 놓은 심복들이었다. 그러니 흠차 대인은 장 공주가 심어 놓은 뿌리까지 말끔히 제거한 뒤 자신의 묘목을 새로 심으려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체포당하는 관리들이 이렇게 거칠게 반항하는 이유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체면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범한이 전운사 관리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관의 뜻을 의심할 필요도 인정에 호소할 필요도 없네. 저 관리들은 반드시 체포될 것이니.”
그 말에 오른쪽에 앉아 있던 섭 참장이 어두운 안색으로 부사 마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사 마해가 그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서 속으로 어젯밤에 범한에게 미리 말을 들었을 거라 짐작했다. 자신만 소외되었다는 생각에 울컥한 섭 참장이 간곡하게 호소했다.
“대인, 저 관리들은 오랜 시간 전운사에 근무하며 황실 금고를 위해 헌신한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거칠 게 체포해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황실 금고를 위해 헌신한 자들이란 말입니까? 참 가당치도 않은 말이군요.”
섭 참장이 물러서지 않고 계속 설득했다.
“저들이 부당한 짓을 저질렀을지는 모르지만 사흘령이 내려졌을 때 대인의 지시를 모두 따랐습니다. 그러니 대인께도 지시를 따른 자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저들의 죄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그도 섭 참장을 비롯한 관리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건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지난번 금고 관리인들이 일으킨 파업을 진압할 때 섭 참장이 말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실 금고가 하루 멈추면 조정에 상당한 손실을 입히는 만큼 파업은 반드시 진압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전운사 관리들을 체포하는 건 달랐다. 이것은 관리들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는 것이었고, 이에 섭 참장은 자신이 감찰원 제사이자 흠차 대인인 범한과 공모해서 전운사 전체를 뒤집으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반대하는 것이었다.
섭 참장의 집안은 황제에게 미움을 받는 데다가 섭령아와 2 황자가 혼인을 하면서 그쪽에 기대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정주 섭씨 집안은 그에게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에 대한 어떤 밀서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장 공주가 황실 금고에 심어 놓은 심복을 모두 제거하려는 범한의 행동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범한이 황실 금고에서 세력을 확장하면 할수록 자신이 앞으로 처신하기가 힘들어질 거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범한은 품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받은 서류를 읽어 보던 섭 창장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서류에는 체포된 관리들이 암암리에 저지른 불법적인 일들이 적혀 있었다. 게다가 재물을 탐했던 일들뿐만 아니라 이번 파업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모든 증거가 명확하게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금고 관리인들의 증언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어느 관리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시각과 장소, 인물까지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는 것이 감찰원에서 조사를 진행한 게 분명했다.
증거까지 명확하게 나와 있는 서류 뭉치를 읽어 보던 섭 참장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황실 금고에 온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흠차 대인이 어떻게 전운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이처럼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거지? 게다가 감찰원은 어떻게 신양의 심복들이 금고 관리인들과 비밀리에 나눈 대화의 내용까지 알아낼 수 있었던 걸까. 설마 금고 관리인 안에 감찰원 밀정이 숨어 있는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섭 참장은 말로만 듣던 감찰원의 공포스러운 면모가 무엇인지 실감했다. 독사처럼 어디든 틈만 있으면 잠복해 염탐하는 감찰원 밀정들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황실 금고 보안을 관리할 권한이 있는 참장인 그는 감찰원이 소스라칠 정도로 두렵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3품 관리인 그를 황제의 지시 없이 감찰원이 멋대로 조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자신이 군대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파벌과 상관없이 감찰원은 군대의 체면 때문에라도 자신을 함부로 건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 발생한 파업에서 스스로 괜찮은 능력을 발휘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장 공주의 체면을 손상할 뿐만 아니라 경도 황자들에게도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후환이 두려워진 그가 마음속에 치솟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범한에게 간곡히 말했다.
“대인, 이 일은······.”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제게 저들을 용서하라 말하지 마십시오.”
섭 참장은 정주 쪽에서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아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범한이 먼저 과감한 결단을 내리자 없던 용기까지 모두 짜내어 말했다.
“하지만 대인, 저들은 전운사 관리들입니다. 대인은 저들을 전운사 정사로서 체포하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감찰원 제사로서 체포하시려는 겁니까?”
고개를 돌려 주위 분위기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인께서 흠차의 신분이고 증거도 명확할지라도 사람을 체포하려면 며칠 동안 재판을 열어 사건을 심사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대인께서는······ 곧 있을 황실 금고 공개 입찰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그가 과감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힐 거라 생각하지 못한 범한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실 섭 참장은 범한이 어떤 위치에서 행동하냐에 따라 관리들을 체포하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걸 지적한 것이었다. 만약 범한이 감찰원 제사의 신분으로 사건을 조사해 체포한 것이라면 경도에 보고해 조의를 열어야 했다. 하지만 만일 그런다면 조정 대신들이 장 공주를 공격하기 위해 그가 일부러 일을 꾸몄다고 공격할 수 있었다. 반면 전운사 정사나 흠차의 신분으로 사건을 조사한 것이라면 직접 사건을 심사해야 해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범한이 누구인가? 그는 경도 여론 같은 건 발톱의 때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씩 웃으며 섭 참장을 바라봤다.
395화
“섭 참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본관은 경국 법률을 누구보다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시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오늘 체포한 저 관리들은 본관이 직접 심사하지 않을 것이며, 공평 타당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섭 참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흠차 대인이 직접 심사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경도 눈치를 보며 제대로 심사하려 하지 않을 텐데. 설마 경도에 사건을 넘긴다는 명목으로······ 저 관리들을 계속 황실 금고에 가둬 두려는 속셈인가.’
“저들은 제가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황실 금고도 조정에 소속된 기관입니다. 비록 황실 금고가 그동안 다른 조정 관리들과 교류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규정상 강남로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가 불안한 눈빛으로 분위기를 살피는 전운사 관리들을 바라보며 안심시켰다.
“본관도 자네들이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네. 게다가 본관은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사람도 아니네. 여기 섭 참장에게 말했다시피 이들이 공정한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본관이 직접 심사하지 않고······ 소주 총독에게 심사를 넘기겠네.”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설 대인이 심사하면 자네들도 의문을 품지는 않을 게 아닌가.”
그러고는 아직도 장 공주 심복들과 대치하고 있는 감찰원 관리들을 향해 그가 버럭 화를 냈다.
“언제부터 체포를 이렇게 어영부영했단 말인가!”
수치심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소문무가 부하들을 노려보자 감찰원 관리들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황실 금고 관리들을 땅에 넘어뜨린 뒤 거칠게 결박했다.
그 장면에 관리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흠차 대인에게 관리들의 체면을 생각해 달라고 호소하려 했지만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범한이 온화한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무섭게 변하는 모습을 본 그들로서는 겁이 나서 도저히 호소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상사는 잔혹한 상사보다 감정 기복이 심해 언제 어디서 칼날을 휘두를지 모르는 상사였다.
황실 금고의 마지막 업무를 끝낸 범한이 부사 마해를 보고 자리에 남으라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화창한 봄기운이 가득한 뒤채 정원에서 무시무시한 일들을 논의했다.
“본관이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범한이 마른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먼저 저를 공격하려 움직였기에 그들을 체포한 것이니 저를 탓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공식적으로 범한과 그는 전운사 정사와 부사 사이였지만 품계로 보면 차이가 크게 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젊은 청년의 손에 들린 권력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며 심지어 황자들까지도 두려워할 정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젯밤에 범한이 장 공주가 황실 금고에 심어 둔 측근들을 제거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약간 걱정이 되면서도 반대를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더구나 마해는 범한이 자신과 둘만 남은 자리에서 솔직하게 입장을 밝히는 걸 보고는 속으로 범한이 자신을 심복으로 삼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이것은 사실 마해 입장에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청년은 분명 상당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수년 뒤 벌어질 권력 다툼에서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었다.
조정 관리들은 특히나 용상과 관련된 일에 극도로 예민했다. 물론 용상을 물려받을 황태자가 일찌감치 정해진 상태였지만 최근 2년 동안 폐하의 모습을 보면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황태자가 이대로 용상에 오를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어쩌면 범한과 사이가 좋지 않은 2 황자가 즉위할 수도 있었다. 만일 2 황자가 황위를 물려받게 된다면 범한의 심복이 되어서 좋을 게 없었다.
이것이 바로 마해가 줄곧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어느 쪽에 설지 정할 때 다양한 쪽과 접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회주의자처럼 처신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범한이 황실 금고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에 독대할 자리를 마련한 만큼 자신도 태도를 확실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어젯밤 범한을 만난 뒤 고민한 끝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해 둔 상태였다.
“하관은 이 일에 관한 두 통의 문서를 작성해 한 통은 문하중서에 보내고 다른 한 통은 빠른 말을 이용해 소주 총독부에 보낼 생각입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범한은 곧바로 마해가 자신의 편에 서려 한다는 걸 알았다. 문서 두 부를 작성한다는 것은 범한이 받게 될 언론의 공격을 나누어 받고, 관료 사회에 자신이 범한의 편에 섰다는 걸 공개적으로 알리겠다는 의미였다. 그가 온화한 눈빛으로 마해를 바라보았다.
“마 대인께서는 참 세심하시군요.”
마해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관은 황실 금고의 부사인 만큼 아래 관리들을 통솔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관리들이 잘못을 저지른 데에는 하관의 책임도 있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마 대인께서는 오늘 본관이 한 일이 적절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해가 잠시 고민하다가 공손히 대답했다.
“주도면밀한 계책이라 생각합니다. 전운사 관리들은 금고 관리인들처럼 함부로 죽이거나 고문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만약 전운사에서 사건을 심사했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사람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내일 그들을 소주로 데리고 가 총독 대인에게 심문을 받게 하시는 건 아주 탁월한 선택입니다. 총독 설 대인은 국가의 기둥으로 관리들에게 선망을 받는 분이시니 조정을 대신해 이 사건을 심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할 수 있지요.”
곰곰이 듣고 있던 범한이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사 마해는 과연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파업을 조종했다는 가장 좋은 핑계가 있는 만큼 범한은 원한다면 장 공주 심복들을 깔끔하게 제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움직여 장 공주와 황자들을 비롯한 황실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총독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유는 첫째로 강남로 총독은 이 일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둘째로 설청이 속으로 자신을 욕하기는 하겠지만 지방 고관인 만큼 멀리 경도에 있는 장 공주보다는 강남에 머물 자신의 눈치를 살필 가능성이 더 컸다. 게다가 설청은 그가 뭘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전에 임소안 대인이 나에게 자신에게 세상을 구할 재주를 지닌 사촌 형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며칠 함께 일을 해보니 임소안 대인의 말이 과연 사실이군요.”
범한이 웃으며 화제를 바꿔 다시 임소안을 거론해 두 사람의 거리를 좁히려 하자 마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소안이에게 2년 전 제사 대인께서 처음 경도에 오셨을 때 만나자마자 마음이 맞아 가까워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편지에서도 항상 대인이 가지신 천부적인 자질을 칭찬하며 장래 나라의 발전을 책임질 재목이라 하였지요.”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추켜세운 뒤 앞으로 황실 금고에 실행할 규정을 상의해 정하고는 작별 인사를 했다.
장원 문 앞에서 마해가 허리를 살짝 숙여 자신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은 속으로 조정에 뛰어난 인물이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뛰어난 인물들이 그동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이유는 세상에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일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곰곰이 오늘 일을 되새겨 보던 그는 앞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구나 마해의 도움을 받는다면 매년 전운사에 자신의 측근을 심는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될 터였다.
다만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마해가 명분과 실익을 모두 챙길 수 있는 황자가 아닌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였다. 이것은 분명 태상사 소경 임소안과 자신의 친분을 고려해 선택한 건 아니었다.
사실 마해가 범한의 사람이 되기로 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건 바로 3 황자와 범한의 관계에 자신의 앞으로의 벼슬길과 가문의 흥망성쇠를 모두 건 것이었다.
부사 마해를 배웅한 뒤 범한은 일곱째 섭 대행수를 불렀다. 정말이지 황실 금고를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곱째 섭 대행수는 이번에 범한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온 네 명의 대행수들의 수장이었다. 더구나 그는 경여당에 있을 때부터 범씨 집안의 재물을 불려 주는 일을 해와서 범사철과도 관계가 좋았고 범한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범한도 다른 섭 대행수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작은 목소리를 앞으로 황실 금고 관리와 생산 문제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범한은 자신이 화학과 물리에는 문외한이었으므로 생산 관리에 대한 권한을 모두 일곱째 섭 대행수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그는 사람을 잘 믿지는 않았지만 경도에서 4처 언 공자의 음모와 계획을 세우는 능력을 믿고 모든 일을 맡겼듯이 황실 금고에서도 섭 대행수들의 전문 지식을 믿고 맡길 생각이었다.
모든 사항을 확인한 뒤 한숨을 돌렸다. 과거 섭가의 발전을 이끌었던 대행수들이 있으니 최근 황실 금고의 운영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었다. 범한은 먼저 생산품의 질과 수량을 개선해 황제의 첫 번째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체불되는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상품의 질을 향상하는 문제도 신경 써주시고요.”
일곱째 섭 대행수는 그를 바라보며 제사 대인이 왜 이렇게 노동자들 임금에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봄빛이 만연한 정원에서 범한의 조각 같은 얼굴을 바라보던 섭 대행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보기에 제사 대인은 아가씨와 외모 면에서 닮은 점은 별로 없었지만 똑같이 세상의 관행에 물들지 않는 사람인 건 확실했다.
비록 황제를 대신해 관리하는 것이긴 했지만 아가씨의 혈육인 제사 대인이 섭가의 산업을 다시 일으키려 하자 섭 대행수들은 마음이 벅찰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절대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유는 20년 가까이 경도에서 갇혀 생활하면서 진심을 드러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는 데다 자신들 때문에 제사 대인이 곤란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일곱째 섭 대행수께 북제에 가서 아우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범한은 일곱째 섭 대행수의 마음은 알아채지 못한 채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관들이 계속 따라올 줄은······. 황실 감시가 엄격해 대인을 황실 금고로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곱째 섭 대행수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관들이 대인의 체면을 살피느라 저희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도련님께서는 상인의 자질을 타고나신 분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대인께서도 제가······ 황실 금고로 다시 돌아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범한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일곱째 섭 대행수를 바라봤다.
“소문무가 계속 머무를 거니 만약 불편한 점이 있거나 반항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에게 말하십시오. 제가 대인들을 경도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속상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일곱째 섭 대행수는 감동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때 거센 바람이 정원에 불자 어린나무의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더니 그만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탄식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리고는 한동안 부러진 나무를 바라봤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담담히 물었다.
“기술을······ 기록할 수 있습니까?”
일곱째 섭 대행수가 몸을 살짝 굽히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규정이 엄격해서 문자로 적을 수는 없고 말로만 전수하고 있습니다.”
“설계도는 입으로 전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보고 외웠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범한이 살며시 웃었다.
“몇 개월 뒤에 항주에 와서 알려 주십시오. 제가 기억력이 무척 좋습니다.”
396화
사륜마차가 푸른 나무가 심어진 도로를 나아가자 바퀴가 돌길과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었다. 이 소리가 마차의 삐걱대는 소리와 어우러지면서 마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황실 금고를 떠나는 길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작은 새들은 멀리 논 옆 나무 위를 빠르게 날고 있었고 푸른 볏모는 부끄러운지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논 옆에는 잡초들이 그런 볏모들을 무시하는 듯 쭉쭉 자라 있었다. 도로에는 마차 행렬이 끊이질 않았고 강에도 화물선들이 계속 오갔다. 황실 금고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을 천하 각지에 팔기 위해 바쁜 모습이었다.
마차는 관병들이 길을 터주면서 가장 안쪽에 있는 보안 관문을 쉽게 통과하였다. 도로를 오가던 화물 마차들이 알아서 멈춰 서서 마차가 기다리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범한이 오늘 출하량이 많으니 화물 마차들이 먼저 갈 수 있게 마차를 풀밭에 세우라고 명령했다.
나란히 풀밭에 선 마차 두 대 중 한 대에는 어제 체포된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들이 타고 있었다. 장 공주의 심복들인 그들은 범 제사가 부임한 만큼 자신들의 앞날이 순탄치 않겠다고 짐작은 했었지만, 장 공주의 체면도 무시하고 자신들을 막무가내로 체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들이 체포된 이유가······ 파업을 조장했다는 이유라는 걸 알게 되자 범한의 계략에 걸려들었음을 직감하고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범한은 당장 사건을 심사하지 않고 그들을 가둬 두기만 했다. 이에 어젯밤 감옥에서 동료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소주로 가서 강남 총독 설청에게 심문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들은 약간 안도했다. 최소한 감찰원이 자신들에게 주리를 틀거나 고춧물을 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감찰원에서 배신한 금고 관리인들의 진술을 확보해 놓고 있다 하더라도 소주 재판에서 죄를 부인하기만 한다면 설청 대인은 장 공주의 체면을 봐서 심사를 지연시킬 것이었다. 게다가 만약 경도에서 압박이 전해진다면 범한도 어쩔 수는 없을 테니 살아날 구멍은 있는 셈이었다.
“설청 대인에게 심사를 맡기는 이유가 뭡니까?”
의자에 기대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해당타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범한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했다.
“이 일은 제가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해당타타가 가볍게 신음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파업 사건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난달 가지고 있었던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살짝 깨지면서 관계가 멀어진 것이다. 나중에 곰곰이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본 해당타타는 자신이 바깥바람을 쐬려던 것이 범한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해했지만 사과나 변명을 하지는 않았다. 북제 성녀인 그녀는 범한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지금 어색한 관계를 이어 오는 중이었다.
“확인할 게 있는데, 은전은 도착했습니까?”
범한이 노심초사해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해당타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소주에서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나를 믿지 못하는 겁니까?”
순간 마차 안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범한은 사사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천하에서 명성이 자자한 아가씨가 어쩌다가 도련님의 화를 돋우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사는 범한과 해당타타는 정을 통하는 남녀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친구 같은 사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요 며칠 왠지 모르게 두 사람의 사이가 이상했다.
해당타타는 사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아가씨도 저를 보는데 저는 아가씨를 보면 안 되나요?”
해당타타가 웃으며 습관적으로 손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늘 입던 꽃무늬 저고리와는 다르게 지금 입고 있는 여종 옷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그녀가 사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범한이 좋아하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그 말은 진실이었다. 해당타타는 자신의 친구이자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 자부할 수 있는 사리리 앞에서 범한이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거리를 지킬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더구나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범한은 사리리에 대해 어떤 마음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강남에 내려온 지 열흘이 지나도록 범한은 사리리가 최근 어떻게 지내지는지 안부도 묻지 않았다.
아무리 정이 없는 사람이라도 하룻밤을 같이 보낸 절세 미녀에게 이처럼 냉담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이에 해당타타는 범한에게 북제 황제처럼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더욱이 최근 사사란 여종이 범한과 동침하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사도 아름다운 얼굴이기는 했지만 사리리의 매력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기 때문이다.
해당타타가 ‘범한이 좋아하는 여자’라고 말하자 사사는 얼굴을 붉히면서 모기 날갯짓만큼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도련님이······ 어찌 저 같은 걸 좋아하시겠어요.”
해당타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를 좋아하지 않으면 방에 들였겠어? 범한처럼 무정한 사람에게 이런 정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러자 사사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건 아가씨가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이 세상에 도련님만큼 정이 많으신 분도 없어요.”
“정이 많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꼬던 해당타타는 사사가 어린 시절부터 범한과 함께했다는 걸 떠올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범한처럼 잔인한 계략을 꾸미기 좋아하는 권신에게도 정이 있단 말이야?’
그녀가 한숨을 쉬며 허전한 손을 주머니 대신 소매에 넣으며 물었다.
“아까 왜 나를 쳐다봤던 거야?”
사실 사사는 그동안 바늘과 실처럼 해당타타가 범한과 함께 다니는 게 눈에 거슬렸다. 해당타타는 그녀가 모셔야 할 사람도 아닌 데다가 경국 사람들이 적대시하는 북제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사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항상 부드럽게 말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면서 성격은 시원시원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당타타는 고귀한 신분임에도 모두에게 평등하게 대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뼛속까지 존중과 평등이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해당타타의 질문에 사사가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아가씨처럼 도련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서 쳐다본 거예요.”
마차가 조용해졌다. 해당타타의 크고 밝은 두 눈동자가 귀여운 동물을 보는 것처럼 사사를 바라봤다. 잠시 뒤 그녀가 소매에 넣었던 손을 빼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랑캐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랑캐 서호와 북만이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양민을 죽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사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불가능하죠.”
해당타타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미소 지었다.
“같은 이치야.”
* * *
지금이 봄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듯 포근한 산들바람이 범한의 얼굴을 스쳤다. 그가 두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어 바람 속에 가득 담긴 생명의 활력을 마셨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논 옆 나무에서 들려오는 솨솨, 하는 소리를 듣던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른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건 분명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려 나는 소리도 아니었고 거리를 쓸어서 나는 소리도 아니었으며, 주사위를 굴리거나 연필로 글을 쓰거나 봄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어서 나는 소리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 시골 처녀가 발을 질질 끌며 걸을 때 나는 소리였다.
범한이 눈을 뜨지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
“왜 불가능하다는 겁니까?”
“응?”
해당타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되물었다. 말투가 담백하고 간결한 게 오래전 장님이 진평평에게 의문을 표시했을 때와 상당히 비슷했다.
범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왜 제가 낭자를 좋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하는 겁니까? 북제 황태후가 낭자의 혼사를 서두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해당타타는 양손을 소매 안에 넣고는 그의 옆에 서서 논에 있는 소를 바라봤다. 자신과 사사가 마차 안에서 나눈 대화를 범한이 전부 엿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정기 회복이 상당히 잘되었나 보군요.”
범한이 눈을 뜨고 논에서 일하는 소 등에 있는 작은 새를 바라봤다.
“왜······ 제가 낭자를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해당타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범한이 장난기 없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항상 그렇게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걸 좋아하면 어떤 이익도 가질 수 없습니다.”
순간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일곱째 섭 사장과 대화를 나눴던 게 생각났다. 그가 다시 태어난 뒤 겪은 여러 일은 할 수만 있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해당타타는 자신에게······ 하지는 못하면서 말만 앞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저는 그냥 낭자가 이처럼 확신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한 것뿐입니다.”
해당타타도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상경성에서 제가 사내들을 비롯한 수컷들은 모두 아랫도리를 사용해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는 대인의 마음을 끌 외모도 아니고 신분도 평범하지 않으니 대인이 꺼릴 거라 생각했던 거지요. 어떤 이익도 얻을 수 없는데 무엇 하러 저를 좋아하겠습니까?”
해당타타는 북제 성녀였고 범한은 경국 권신이었다. 두 사람이 친구로 서로를 알고 지내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만약 정말로 마음을 주고받게 된다면 북제 황태후와 경국 황제가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계획에도 손해를 불러올 것이었지만 범한은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은 이익과 무관한 겁니다. 좋아하는 감정도 이익으로 계산하다니 채 반년도 안 된 사이에 낭자의 마음씨도 이전보다 훨씬 고약해졌군요.”
이 말을 하면서 범한은 항주에 있을 때도 해당타타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하던 해당타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일도는 사람과 하늘이 서로 감응하는 겁니다. 위로는 천하를 우러러보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굽어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 반년 동안 천일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러 계획에 얽매이다 보니 혼란스럽습니다.”
범한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략 같은 일은 저와 어울리는 일이지요. 낭자는 시골 처녀처럼 지내는 게 더 어울리고요.”
그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참 고약한 사람입니다. 제가 상경에 있을 때 낭자를 계획에 끌어들이지만 않았다면 낭자는 지금 정원에서 닭을 키우고 당나귀를 끌며 여유롭게 살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제가 낭자를 그릇된 길에 끌어들인 건 아닌지요?”
“그릇된 길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해당타타가 되묻고는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바로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지요. 욕심을 부리면 잃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무언가는 잃게 되는 것이 바로 자연의 길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낭자는 계속할 생각입니까?”
“당연하지요. 저는 범 대인이 한 말에 깊이 공감했으니까요.”
“무슨 말에 공감했다는 겁니까?”
“이 세상에 전쟁이 좋았던 적도 없고 평화가 나빴던 적도 없다고 했던 말 말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 저는 대인을 돕고 싶습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눈앞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진흙 바른 소 위를 한참 날아다니던 새가 지렁이 같은 먹이를 찾지 못하자 날아가 버렸다.
397화
“낭자도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범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저는 항상 낭자의 얼굴이 단정하고 위엄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말문이 막힌 해당타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를 칭찬하시는 겁니까, 놀리시는 겁니까?”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낭자가 제가 낭자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이유를 말하면서 외모를 언급했기에 하는 말입니다.”
해당타타가 꼴사납다는 표정으로 그를 흘겨봤다. 그런데도 범한은 눈썹을 긁으며 뻔뻔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와 비교하시면 안 됩니다. 이 세상 여자 중에서 저와 비교해서 미인이라 말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러고는 괴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이건 저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제 아버지의 문제이지요.”
소박하게 생활하는 해당타타도 어쨌거나 10대 아가씨였고, 장님이 아닌 10대 아가씨라면 모름지기 외모에 신경이 쓰이는 법이었다. 이에 그녀는 범한이 위로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놀리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녀가 입술을 삐쭉거리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고관이 채신머리없이 헛소리를 지껄여서 되겠습니까?”
해당타타가 화난 사실을 모르는지 범한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아닙니다. 낭자가 조금 전에 제가 낭자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본인의 외모가 예쁘지 않아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보기에 낭자의 외모가 못나지 않으니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해당타타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범한은 속사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선례로 제 아내를 말하자면 경도 사람들은 그녀의 외모가 소박하다고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절세미인처럼 보입니다.”
그가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아무래도 제가 가진 미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달라서겠지요.”
마지막 말이 결국 해당타타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녀가 끙 소리를 내며 소매를 세차게 털고는 가버렸다. 소매를 어찌나 세게 털었는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풀들이 흔들릴 정도였다. 아무래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소매를 털 때 정기가 실린 것 같았다.
놀란 범한이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풀밭 위에서 쓰러지지 않으려 몸을 앞뒤로 흔들며 균형을 잡았다. 곧이어 기쁨에 겨운 그의 웃음소리가 풀밭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해당타타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런 식으로 놀리면 내가 화를 풀 줄 알았습니까?”
범한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쉬었다.
“해당타타, 아직도 화가 나 있었습니까?”
해당타타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마차로 걸어갔다. 이때 6처 검수들은 이미 마차에서 내려 경호를 서고 있었고, 고달을 수장으로 한 호위 무사들도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해당타타를 주시하고 있었다. 범한을 지켜야 하는 이들은 방금 심상치 않은 바람을 느끼고는 혹시나 해당타타가 공격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나온 것이었다.
범한이 능청맞게 웃으며 해당타타를 향해 소리쳤다.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으니까 마차에 오르지 말아요.”
그가 고달에게 괜찮으니 물러가라는 손짓을 한 뒤 해당타타를 데리고 관도 옆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 멀리 떨어진 숲으로 들어갔다.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봄 햇살이 새어 들어오며 두 사람의 옷에 각양각색의 무늬를 만들어 냈다.
“저는 신임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범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건 아마도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서이겠지요. 그래서 지난번 낭자가 관저에서 나가겠다고 했을 때 약간은 실망했습니다.”
해당타타가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이 없자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해당타타 낭자도 신입을 중시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나라를 섬기고 있는 만큼 서로를 신임하지 않으면 같이 일을 해나갈 수 없습니다.”
범한의 의도는 비교적 단순했다. 그는 이제 와 다시 해당타타에게 공방을 정말 몰래 염탐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오해했던 것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두 사람 사이의 신임을 다시 회복하고 싶었을 뿐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주머니가 없어 두 손을 소매 안에 넣고 있던 해당타타가 범한이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 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을 느낀 범한이 설명했다.
“사사가 감찰원 관복에 주머니를 달아 줬습니다.”
해당타타가 살며시 웃으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관도 옆 숲에서 솨솨,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남녀 간에 정은 없고 서로를 향한 신임만 있는 두 사람은 북제 상경성 황궁에서 옥천 강변길을 따라 걸었을 때처럼 발뒤꿈치를 질질 끌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머리 위에는 이제 막 자란 어린잎들이 귀여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명씨 집안을 어떻게 다룰 생각입니까?”
해당타타의 물음에 범한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과거 최씨와 명씨 집안은 황실 금고가 공개 입찰하는 열여섯 개 항목 중 열네 개 항목을 가져갔습니다. 최씨 집안이 무너지면서 주인이 없어진 여섯 개 항목을 인수할 사람은 제가 이미 정해 두었습니다. 올해 안에 북제에 있는 사철이가 최씨 집안의 사업을 인수할 때까지 기다린 뒤에 북쪽과 남쪽을 이어 주던 길을 다시 뚫을 생각입니다. 위 지휘사가 제멋대로 굴지만 않는다면 황실 금고가 북으로 운송하던 운송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다만 그곳으로 얼마나 많은 밀수품을 옮길 수 있을지는 제가 황실 금고를 얼마만큼 장악할지와 아버지 쪽에서 보낸 사람이 얼마만큼의 역할을 하는지에 달려 있겠지요.”
이것이 그가 북제 황제와 맺은 협상이었다. 그러니 해당타타가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도 당연히 이 일과 엄청난 양의 은전과 관련이 있었다.
해당타타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짧은 시간 안에 황실 금고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해도 북제에 보내는 상품의 양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협의에 따라 장 공주가 이전에 보냈던 밀수품보다 더 많은 양을 북제에 보냈다가 경국 조정에서 요구하는 수량은 맞추지 못하면 어찌합니까? 저는 대인이 협상을 지키기 위해 경국 황제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봐 걱정됩니다. 폐하께서도 올해 안에 북제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서두르지 말고 대인의 자리가 안정될 때까지 2년 정도 기다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쨌든 이건 장기적인 계획이니까요.”
북제 황제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범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상황을 보면 올해 황실 금고의 생산량은 지난 몇 년보다 훨씬 많을 거니 경국 조정의 요구를 맞출 수 있습니다.”
해당타타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맞출 수 있다는 말입니까?”
범한이 해당타타에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했다.
“첫째, 일단 황실 금고 생산량이 증가하고 운송로가 열린다면 장부를 어떻게 작성하고 상품을 어떻게 운반할지는 섭 대행수들과 소문무 그리고 아버지께서 보낸 호부 관리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낭자도 알다시피 황실 금고의 감찰 권한은 저에게 있는 만큼 흔적을 지우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닙니다. 둘째, 제가 명씨 집안을 건드려 거기서 얻은 재물을 바친다면 폐하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그의 말을 곰곰이 듣던 해당타타는 짧은 시간 안에 명씨 집안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에 놀라 물었다.
“명씨 집안을 저대로 둘 생각입니까?”
“최소한 올해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범한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최씨 집안은 기반이 약해서 감찰원이 일격에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명씨 집안은 백 년 넘게 명맥을 이어 온 대호족입니다. 황실 금고가 생기기 이전부터 강남에서 명성을 떨친 명문가인 만큼 뿌리도 깊고 구성원도 수백 명에 달하지요. 조정에서 관직에 올라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강력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강남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말을 잠시 멈춘 그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명씨 집안은 최근 몇 년간 황실 금고에서 상당히 많은 이익을 취했습니다. 한 가문이 이처럼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 뒤에 황족의 그림자가 있다는 겁니다. 장 공주, 황태자, 2 황자가 분명 뒤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고, 낭자는 아마 믿지 않겠지만 범씨 집안 역시 관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해마다 경도에 성대한 예물을 보내는데 그래서인지 각 부뿐만 아니라 심지어 추밀원도 명씨 집안에 대해서는 우호적입니다. 낭자도 만나 봤던 명씨 공자의 경우 명망을 극히 중요시 생각하는 사람이라 민가에서도 안 좋은 평판이 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건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해당타타도 그 일이 절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범한이 근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 게 이상했다.
“대인이 가지고 있는 패는 무엇입니까?”
“제가 쥐고 있는 패는 황상입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범한의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명씨 집안은 황실 금고의 은전을 탈취해 그중 일부를 공주, 황자, 대신들에게 보냈습니다. 이에 천하 사람들 모두가 명씨 집안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단 한 사람, 폐하께서는 좋아하실 수가 없지요. 그들이 탈취한 은전은 폐하의 것이니까요.”
범한의 분석을 들은 해당타타는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경국 황제의 용인하에서 범한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실행한다면 명씨 집안은 곧 무너지리라 짐작했다. 아무리 막대한 권력과 견고한 뿌리를 둔 지방 호족이라도 강력한 국가 권력 기구와 맞서는 건 달걀로 바위를 내려치는 격이었다.
“올해의 목표는 명씨 집안의 은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범한이 말했다.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 참여하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낙찰된 뒤에는 입찰의 최저 기준 가격의 4할을 미리 남겨 두어야 하지요. 이번에 신춘 공개 입찰에서 저는 명씨 집안과 입찰 경쟁을 벌여 아주 많은 은전을 토해 내게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최씨 집안이 몰락하면서 비게 된 자리를 두고 저와 경쟁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은전을 빠르게 조달해 텅 빈 국고를 채울 수 있습니다.”
“가격을 얼마나 높일 생각입니까?”
해당타타의 질문에 범한이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높일 수 있는 만큼 높여야지요. 낭자도 아시다시피 제가 욕심이 많지 않습니까.”
398화
해당타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명씨 집안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고 공개 입찰을 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한다고 하지만 도박장에서 주사위를 굴리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가격을 올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가격을 올려 직접 명씨 집안 은전을 빼앗아 오려면······ 황실 금고 3대 작업장의 열여섯 개 항목의 4할을 현금으로 남겨 둬야 한다고 했으니······ 도대체 얼마나 필요한 겁니까? 그렇게 많은 돈을 조달할 계획은 있습니까?”
“명찰입니다.”
범한이 설명했다.
“관리와 상인들이 암암리에 결탁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황실 금고는 항상 신춘 공개 입찰을 할 때 명찰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기회인 셈이지요.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일이니······.”
말을 멈춘 범한은 잠기 고민하다가 계속 숨길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하서비를 통해 합당한 가격을 보임으로써 명씨 집안이 알게 할 겁니다.”
“하서비요?”
해당타타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강남 수채의 대두목으로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대인과 함께 명씨 집안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그는 강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알고 있는데요.”
범한은 하서비의 신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냥 그가 이미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고 알린 뒤 은전 문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낭자도 지적했듯이 우리가 가진 은전을 모두 동원해도 황실 금고 열여섯 개 항목을 모두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명씨 집안에 넘겨줄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을 안심시킬 수 있고 또 많은 은전을 이용해 명씨 집안이 강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황실 금고 열여섯 개 항목을 모두 가져올 수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해당타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인은 명씨 집안이 작은 것을 희생해 큰 것을 보존할 거라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몇 년 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게다가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인이 이번에 강남에 내려온 이유가 명씨 집안과 대적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인이 하서비를 시켜 아무도 생각지 못한 높은 가격을 부르게 했다가 명씨 집안에서 두 손 들고 입찰을 포기한다면······ 대인이 손해를 보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계약금을 내지 못한다면 하서비도 경국 조정에 미움을 받게 될 겁니다.”
모든 계산을 마친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명씨 집안은 많은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황실 금고 입찰 경쟁에 나설 겁니다. 끝없이 펼쳐진 옥토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황실 금고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은전을 토해 내는 황실 금고는 그런 땅들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지요. 더구나 거기에는 명씨 집안과 결탁한 경도 황족과 대신들의 이익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명씨 집안은 장 공주의 체면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입찰 경쟁에 나설 것입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멀리 숲 끝에 피어난 검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상인은 허수아비일 뿐입니다. 명씨 집안은 해적질을 가장해 황실 금고의 재화를 약탈해 가서 조정 대신들과 황족들의 주머니를 채워 줬습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명씨 집안이 손을 떼버린다면 경도에 있는 이들의 수입이 끊기는 셈이지요. 그럼 분노는 자연스럽게 명씨 집안에게 향할 것이고 제가 나서기도 전에 명씨 집안은 무너져 버릴 겁니다.”
경도 사람들의 수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명씨 집안은 올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황실 금고 상품의 판매권 대부분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들은 1, 2년 정도 조용히 경도에서 펼쳐지는 권력 싸움을 보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가늠할 것이다.
“그 돈을 하서비에게 줄 준비는 되었습니까?”
이것이 해당타타가 가장 관심 가지는 문제였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를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준비해 주시기는 했지만 황실 금고 공개 입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의 이목이 저와 호부 창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장 공주는 이미 저의 돈줄을 알아챘을 것이니 만약 제가 정말 호부의 돈을 사용해 명씨 집안과 맞선다면······ 조금만 실수해도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국고의 돈을 사사로이 이용하는 것은 집안 전체가 몰락할 만한 대죄입니다. 저에게 그만큼의 담력은 없습니다.”
그 말에 해당타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태평전장에서 은전을 조달하면······ 동이성을 배후로 두고 있는 태평전장에서 뭔가 알아채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해당타타를 힐끗 본 뒤 조용히 말했다.
“이건 북제 황제 폐하의 계획입니다. 아마 낭자는 모르는 것 같지만 북제 황실 금고의 돈이 재작년 외양간 거리 사건 이후 몇십 개의 경로를 거쳐 아무도 모르게 태평전장으로 흘러갔다고 합니다. 중간에 얼마나 많은 지점을 거쳤는지는 몰라도 이 돈은 분명 강남으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해당타타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자 범한은 계속 설명했다.
“제가 감찰원과 호부의 도움을 받아 알아봤으나 그 은전의 흐름을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게다가 상당히 큰 액수이긴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큰 전장인 태평전장에 있다 보니 동이성에서도 주의를 기울이지는 못할 겁니다.”
해당타타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대인의 말은······ 2년 전에 폐하께서 은전을 강남으로 옮기기 시작하셨다는 겁니까? 이게 가능하긴 합니까? 저도 작년 9월에야 이 일을 알았고, 상경성에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2년 전부터 준비를 했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믿기 힘든 일이죠.”
범한의 두 눈동자가 기쁨과 놀라움으로 반짝였다.
“저도 다시 자금의 출처를 조사해 봤는데 아무것도 명확하게 나온 게 없었습니다. 다만 그 은전이 태평전장에 들어간 시기가 2년 전이라는 것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년 전이라고요?”
해당타타가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면 대인이 경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닙니까. 설마 그때부터 폐하께서는 2년 뒤 대인이 황실 금고를 장악할 거라는 것과 자신과 손을 잡고 황실 금고 판매권을 쥐려 한다는 걸 예측하셨을 거란 겁니까?”
범한이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저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백작가 사생아였을 뿐인데 어떻게 그런 걸 모두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다만 북제 황제도 외양간 거리 사건을 통해서 장 공주가 저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겠지요. 그리고 아마 각 방면의 정보를 취합해 제가 경국 황실 금고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파악했을 겁니다. 이후의 일은 아마도 황제가 직접 분석했겠지요. 저와 장 공주는 함께 힘을 합칠 사이가 아니라는 점을 통해 제가 최씨 집안이나 명씨 집안과 같은 장 공주 수족들을 제거하려 하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 최씨 집안을 손쉽게 무너뜨린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군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북제 황제가 어떻게······ 제가 이런 방법을 사용해 명씨 집안과 맞서려 한다는 것까지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만약 당시에 정말 이 모든 걸 계산해 냈던 거라면 저는 한 가지밖에는 떠오르지 않는군요.”
해당타타 역시 너무 놀라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며 항상 자신을 작은 사고라고 불렀던 어린 황제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건 2년 전에 범한의 앞날을 내다보고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변수까지 계산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범한의 말을 듣던 그녀가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무슨 말 말입니까?”
“북제 황제가 요괴에 버금갈 만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2년 전부터 계획했음에도 북제 황제가 예상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상황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니 설사 경국 폐하께서 황실 금고를 저에게 맡기지 않았거나 북제 황제가 저와 손을 잡지 않았더라도······ 북제 황제는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든 그 은전을 가지고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 참여했을 겁니다.”
오늘에서야 범한은 자신이 지금까지 북제 젊은 황제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금알을 낳는 닭인 황실 금고를 경국은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고, 다른 나라들은 십수 년이 흐르도록 기술을 빼내지 못했다. 이에 북제 황제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북제 황제 입장에서는 좀도둑이 되어 보물을 훔칠 수도 없고, 강도가 되어 보안을 뚫고 잠입해 비밀을 알아낼 수도 없다면 돈을 두둑이 가진 이름 없는 상인이 되어 보물이 팔리는 과정에 참여해 수입이라도 얻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 중 범한이라는 아주 반가운 변수를 발견한 북제 황제는 한층 더 과감하고 은밀하게 자신의 계획을 발전시켜 나갔다.
범한은 한숨을 쉬었다. 이 세상에는 영리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노련하고 계획이 주도면밀한 사람과 비교하면 자신은 국제주의자이거나 지나친 이상주의자처럼 느껴졌다.
“화났습니까?”
해당타타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묻자 범한이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북제 황제가 저를 속이고 이런 일을 진행했다면 화가 났겠지요. 하지만 지금 함께 협력하고 있으니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돈을 인질로 삼아 저에게 손을 내밀라 협박했다면······ 북제 황제에 대한 제 믿음이 사라졌겠지요.”
해당타타가 한숨을 쉬었다.
“대인은 쉽게 사람을 믿지 않지 않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음은 서로 호응해야 이뤄지는 겁니다. 다만 저는 북제 황제가 저를 이렇게까지 신뢰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훗날 양국의 관계가 악화하거나 제가 다른 마음을 품고 북제 황제의 돈을 가로채거나 운송로 끊어 버려 배신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가 고개를 들어 해당타타의 호수처럼 맑고 큰 눈을 바라봤다.
“저는 북제 황제가 저를 이렇게 신뢰하는 게 이상합니다.”
해당타타가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제가 편지에서 이 돈을 언급했을 때가······ 마치 대인의 출생 비밀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와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해당타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폐하께서는 대인이 섭가의 후손인 이상 경국의 권신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니 대인의 시선이 경국 안에만 머무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경국이 대인에게 드릴 수 있는 모든 걸 북제도 전부 대인께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약간 다른 뜻이······.”
해당타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뜻을 이해한 범한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북제 황제의 호의에 감사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질타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고 함부로 머리를 숙이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추다 슬그머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물며 북제 황제도 제가 경국 황제의 아들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황자는 많지만 섭가의 후손은······ 대인뿐입니다.”
해당타타가 타이르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북제 쪽의 의견을 분명하게 일러 줬다. 범한은 웃을 뿐 더는 이 화제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경국 후궁에 있는 몇몇 부인들과 두 명의 황자 때문에 골치가 약간은 아팠지만 양심상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경국 황제가 자신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인 척 행동하는 것도 좋았고 북제의 제안을 받아들일 만큼의 매력적인 부분도 찾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해 보죠.”
범한이 화제를 돌려 말했다.
“낭자는 왜 저를 좋아할 수 없는 겁니까? 그리고 저는 왜 낭자를 좋아할 수 없는 겁니까?”
399화
해당타타는 당혹스러우면서 화도 났다. 그녀가 속으로 ‘왜 갑자기 이 일을 또 거론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저는 지금껏 남녀 사이의 일을 신경 쓴 적이 없습니다. 물론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 생각은 없지만 이 문제를 고민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범한은 항상 천하 만백성을 생각하느라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할 겨를이 없는 해당타타를 향해 피식 웃었다.
“만백성만을 생각하는 삶은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해당타타.”
“네?”
해당타타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범한의 두 눈이 빛나고 있는 걸 보고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럽니까?”
“오랑캐들도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범한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해당타타는 아까 마차 안에서 사사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한 말을 범한이 반박한다는 걸 알고는 살짝 화가 났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북제와 경국 백성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랑캐들도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은 살인자로 대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당황한 해당타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하자 범한이 차분히 설명했다.
“같은 이치로 저도 낭자를 좋아할 수 있고 낭자도 저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해당타타가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가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려고요?”
“아뇨.”
범한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해당타타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가 죽고 우리 둘만 남아서 강바람이라도 쐬자는 겁니까?”
범한이 고개를 들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재미가 없을 것 같긴 하군요.”
그런 뒤 그가 호주머니에서 두 손을 꺼내 해당타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해당타타가 놀라 이게 무슨 짓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냥 추운 날씨에 여종 옷을 입고 있어 손이 시릴 것 같아 만져 주는 것뿐입니다.”
두 손이 맞닿으면서 서로의 온기가 전해졌다. 바로 그때 뒤에 있던 마차 바퀴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해당타타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을 뿐 두 손을 빼지 않은 채 범한에게 물었다.
“일부러 이런 모습을 보여 준 겁니까?”
범한이 두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국 황제에게 제가 강남에서 낭자를 데리고 있는 이유를 이해시키고, 북제 황제와 저의 신뢰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면 우리 둘의 사이가 좀 더 친밀해 보여야 합니다.”
해당타타가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범한이 진지하게 덧붙여 말했다.
“낭자는 매일 농사일을 하는데도 굳은살이 없군요. 이렇게 부드러운 낭자의 손을 잡으니······ 마음이 평온해지긴 하네요.”
* * *
소주성의 번화한 모습과 사방에 펼쳐진 연한 초록빛은 경국 다른 지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상점과 바쁘게 돌아가는 부두,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파는 소주성만이 가진 특징이었다. 소주성의 남성에는 거대한 관아가 있었고, 서성에는 부유하기가 이를 데 없는 소금 상인과 황상들의 호화로운 저택이 있었으며, 동성 거리에는 아름답게 꾸민 여자들과 버드나무 가지처럼 쉽게 꺾일 것 같은 야리야리한 공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북성에는 음험하고 교활한 모습의 사내들이 용맹함을 드러내며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들이 모두 뭉쳐 소주성은 모험, 격정, 풍족, 욕망과 같은 세상 여느 곳과도 같지 않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곳은 학문을 별로 숭상하지도 않았고 오랜 왕조의 압력을 많이 받지도 않았지만 관부의 위엄에 감히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동 인구가 많고 항구로 들어오고 나가는 상품과 은전의 양이 많아서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시민들은 굉장히 의욕적으로 일을 했다. 게다가 관부와 깊이 결탁해 있는 상인을 비롯해 길거리에서 먹고사는 청년들까지 모두 경도 태학생들처럼 청색 장삼을 입고 다니며 더는 무턱대고 사람을 때려죽이지 않았다.
소주 부두에 인접해 있는 하류 쪽 드넓은 지역은 모두 명씨 집안의 재산이었다. 지금 그곳에서 장삼을 입은 사내가 어느 공자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장삼을 입은 사내는 한눈에 봐도 평생 무예를 익히며 산 사람 같았으나 단정하게 차려입은 온화한 얼굴의 공자에게 전혀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온화한 인상의 공자는 명씨 집안 어르신의 친아들인 명란석이었다. 이곳 부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명씨 집안에 기대 먹고살고 있었고 또 그중 절반이 명씨 집안 종이었다.
명란석이 떠나자 사내가 장삼 옷깃으로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는 떠나는 명씨 집안 공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명씨 집안 공자가 직접 나 같은 사람한테 찾아와 당분간 소주성에서 얌전히 행동하라고 주의를 주는 거지? 천하에 명씨 집안이 약점을 잡힐까 봐 두려워하는 상대도 있나? 총독 대인 정도라면야 명씨 집안을 건들 수 있을 테지만 그동안 명씨 집안에서 배불리 먹여 줘서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대수롭지 않게 장삼으로 땀을 닦는 걸 보면 분명 정식 경도 학생이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중 몇몇 총명한 사람들은 이 일이 좀 있을 황실 금고의 신춘 공개 입찰과 관련이 있을 거라 추측하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수군거렸다.
“자네 당당했던 최씨 집안 소식을 듣지 못했는가? 최씨 집안은 명씨 집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호족으로 이름을 떨치지 않았는가. 조정에서 새해를 앞두고 그 최씨 집안의 재산을 몰수해 버렸다고 하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일이 감찰원에 있는 그 젊은 제사 대인이 한 일이라는 거야. 그리고 그 제사 대인이 바로······ 이번에 강남에 오게 된 흠차 대인이라는 거지!”
명씨 집안 공자가 관부에 어떤 구실도 주지 않으려 신중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일을 단호하게 처리하는 작은 범 대인 때문이었다.
“그가 무서운 건 아니야.”
마차에 앉아 있던 명란석은 외부인과 부하들 앞에서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작은 범 대인은 조정에 있는 다른 관리들과는 분명 다른 면이 있어.”
만일 범한이 지금 명 공자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를 봤다면 분명 너무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명 공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항주 서호가에서 무림 대회를 주관했던 강남로 관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이 관리와 대화를 나눴던 범한은 상대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그는 이 관리가 명씨 집안과 관계가 이처럼 깊을 거라고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명란석이 전혀 거리낌 없이 편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 관리는 명씨 집안에 상당한 신뢰를 받는 인물이 분명했다. 만일 당시에 범한이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 관리와 명씨 집안의 관계를 알아챘을 것이고 그랬다면 무림 대회에 대해서도 더욱 경계심을 가졌을 터였다.
명란석이 허심탄회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는 관리의 성은 추(鄒)였고 이름은 뢰(磊)였다. 도찰원 강남로 어사인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촌 형님, 흠차 대인이 조정의 다른 대신들과 어떤 면에서 다르다는 겁니까?”
명란석이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젊은 나이에 큰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작은 범 대인을 다른 관리들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감찰원은 네가 소속되어 있는 도찰원과는 차원이 달라. 게다가 지금 흠차라는 신분까지 가지고 있으니 뭐든 할 수 있게 된 셈이 아니냐. 총독 대인도 분명 작은 범 대인의 체면을 세워 주려 할 거야. 너도 소식 들었을 거 아냐. 황실 금고에 가자마자 작은 범 대인이 소란을 일으킨 사람 다섯을 참수했는데 그중 두 명은 큰 공방 주사야!게다가 장 공주가 심복으로 전운사에 심어 놓은 관리들도 모두 체포한 상태고! 조정 관리 중에서 이처럼 과감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배짱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추뢰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통하던 사람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남몰래 하던 일도 하기 힘들겠네요.”
명란석이 조소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타박했다.
“관리가 되더니 사리 분별 하는 능력이 형편없어졌구나.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거야? 아직도 암암리에 벌이던 일들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지금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흠차 대인이 우리는 건들지 않도록 하는 거야.”
명란석은 서호 루상루에서 관리들에게 공손하게 행동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상대방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이었고 추뢰도 명란석의 이런 태도가 이미 익숙한 듯 보였다. 이 모습만으로도 명씨 집안의 힘이 조정에 얼마나 깊숙이 뻗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추뢰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흠차 대인이 이번에 강남으로 내려온 건 분명 명씨 집안을 건들기 위해서일 거예요. 무슨 계획을 세워 둔 게 있나요?”
명란석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까도 말했듯이 작은 범 대인은 다른 관리들과는 달라서 일반적인 방법은 통하지 않아. 강남으로 내려온 게 만약 다른 고관이었다면 우리 명씨 집안에서도 대처할 방법이 있었겠지. 하지만 작은 범 대인에게는 일반적인 방법이 전혀 먹히지 않을 거야.”
추뢰가 설마 그러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 세상에 재물을 좋아하지 않는 관리가 어디 있겠어요.”
명란석은 자신의 마음을 오싹하게 만든 어떤 일이 떠오른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생각하다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가장 진부한 방법이 가장 효과가 좋은 법이지.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신 아버지도 과감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 그래서 시도해 봤지.”
그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다가 계속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결과는 전혀 먹히지 않더군. 얼음장처럼 차갑게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어.”
“얼마나 보냈는데요?”
추뢰는 이 세상에 은전을 좋아하지 않는 관리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설사 황제의 사생아라 하더라도 은전은 늘 필요한 법이었다.
명란석이 그를 바라보며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 그 모습을 본 추뢰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4만 냥이나 보냈다고요?”
명란석이 한심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4만 냥이라니? 작은 범 대인이 관아에 놓아 둔 상자에 은전 13만 냥이 들어 있는 거 몰라? 그런데 고작 4만 냥으로 마음을 흔들 수 있겠어? 아버지께서 경도로 보내는 돈까지 줄여 가면서 40만 냥을 마련해 보냈다고!”
“40만 냥!”
너무 놀란 추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40만 냥이면 작은 제후국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잖아. 그렇게 큰돈으로도 흠차 대인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는 거야?’
명란석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를 갈며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 무상주도 2할 보냈지.”
추뢰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무상주 2할은 40만 냥보다 더 가치 있는 제안이었다. 그는 집안에서 이렇게 큰 이익을 내놓았는데도 범한의 마음을 살 수 없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장 공주에게 항상 재물을 보냈지만 이렇게 큰돈을 보낸 적은 없었다. 이 정도라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이익을 나누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살점을 떼어 바쳤다고 봐야 옳았다.
명란석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살짝 떨리고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것이 기분이 상당히 불쾌해 보였다. 놀란 추뢰도 뭐라 할 말이 없었기에 마차는 일순간이 조용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금 아버지를 대신해 명씨 집안 산업 대부분을 관리하고 있는 명란석이 눈을 떴다.
400화
“우리가 작은 범 대인의 그릇을 너무 작게 봤어. 호부 상서의 아들인 걸 망각했던 거지. 40만 냥으로 황자의 마음은 살 수 있겠지만 작은 범 대인의 마음은 살 수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까 이런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거고.”
“장 공주 쪽은 어떻습니까?”
추뢰가 약간 원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명씨 집안이 장 공주를 위해서 이만큼 많은 공을 쏟았으면 그쪽에서도 신경을 써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명란석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매수되지 않는 관리는 원래 경도 조정에서 모함해서 끌어내려야 하는 건데 이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어째서요?”
놀란 추뢰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명란석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작은 범 대인이 어떤 사람이니? 그의 뒤에는 진 원장과 범 상서 대인이 버티고 있어. 임약보 대인도 관직에서 물러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세력을 가지고 있고. 폐하께서 아무런 의향도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관리가 우리를 위해서 작은 범 대인을 건들려 하겠니? 너희 도찰원에서 두 차례 작은 범 대인을 공격했다가 오히려 폐하의 미움을 받았잖아.”
그때의 일이 떠올라 추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작은 범 대인이 멀리 강남에 있어 자신을 변호할 수 없고 또 감찰원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지난날처럼 민첩하게 대응하지도 못할 겁니다. 작은 범 대인과 폐하의 관계가 각별하다고 하지만 황자도 강남에서 소란을 피우면 경도로 불려가는데 작은 범 대인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일을 시끄럽게 만든다면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을 경도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명란석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반박했다.
“이래서 너희 같은 관리들이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거야. 너 같은 관리들은 항상 관직의 등급이나 신분만 보려 하지. 너는 명씨 집안이 황자가 와도 기를 죽여 돌려보낼 방법을 가지고 있는 만큼 폐하의 사생아인 범한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우리 집안에서 문제를 보는 시각은 너희 관리들과는 달라. 우리가 봤을 때 작은 범 대인은 권력, 병력, 돈, 명예까지 모두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감한 방법도 서슴없이사용하는 사람이야. 설사 작은 범 대인에게 오점을 남겨 조정이 모함하게 해도 감찰원에서 전부 말끔하게 처리할 거야. 그러니 그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작은 범 대인은 황자들보다도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야.”
잠시 말을 멈춘 명란석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만약 네 의견대로 강남 백성들을 선동해 소란을 일으킨다면······.”
말꼬리를 늘이던 명란석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작은 범 대인이 흑기들을 이끌고 소주로 와서 우리 명씨 집안을 멸족시킬 수도 있어!”
추뢰가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뒤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있을까요? 작은 범 대인이라 해도······ 조정의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경국 법률은 그냥 장난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놈은 미친놈이니까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명란석이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양 있는 척 행동하는 미친놈이라고. 그러니까 되도록 건드려서는 안 돼. 정말로 깔끔하게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건드려야 해.”
그러자 추뢰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살며시 물었다.
“무림 대회를 이용하면 어떻습니까?”
명씨 집안은 은밀히 강남 무림을 통제하고 있었다. 물론 셀 수도 없이 많은 강호 고수들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추뢰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흉악범들을 이용한다면 굳이 흠차 대인의 마음을 얻으려 애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명란석이 모자란 백치를 볼 때처럼 가엽다는 눈으로 추뢰를 바라봤다.
“작은 범 대인이 9품 강자라는 걸 잊은 거냐? 설마 폐하께서 가장 뛰어난 호위 무사들을 골라 작은 범 대인과 같이 내려보냈다는 걸 모르는 거야? 감찰원에서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6처 검수들이 항상 작은 범 대인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북제 해당타타 낭자가 항주에서부터 작은 범 대인과 같이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거냐고!”
명란석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그는 평소 총명해 보였던 친척 관리가 오늘따라 정말 바보 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그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무림 대회? 아버지의 부탁으로 동이성에서 온 운 대가라는 사람은······ 서호에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정체 모를 자객에게 당했어! 그리고 동이성에서 온 그 거지 같은 고수들은 상갓집 개처럼 괴상한 자객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는 상황이야. 운지란! 동이성! 사고검의 제자들까지 범한을 처리할 여력이 없다고. 설마 강남에 있는 무인들이 작은 범 대인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추뢰는 비로소 범한이란 권신을 처리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천하에서 범한은 분명 다루기 가장 힘든 사람이었다. 세상에 범한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범한처럼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범한보다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범한만큼 무공이 높지 못했다. 또 범한보다 무공이 높은 사람은 범한만큼 뻔뻔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범한보다 더 뻔뻔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범한만큼 강한 뒷배경을 가지지 못했다. 범한보다 더 큰 뒷배경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돈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고 모함으로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누가 자신을 암살할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도 겁내 하지 않았다. 그저 직접 칼을 휘둘러 눈에 거슬리는 자들의 머리를 베어 버릴 뿐이었다.
이것은 십여 년 전에 만들어진 기형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숨겨진 황자인 그는 그런 기형적인 조건 덕분에 황자도 가질 수 없는 감찰원과 호부를 동시에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십여 년 동안 조정에 암암리에 영향을 끼치고 있던 장 공주와도 대적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명씨 집안이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추뢰가 명란석을 위로했다.
“지금 소주에 계신 곽 대인의 의견을 듣고 경도에 있는 장 공주마마가 힘을 쓰실 겁니다. 형님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범한이 지금 저렇게 오만하게 굴고 있으니 황태자와 2 황자께서도 마음이 편치 않으실 테니, 작은 범 대인을 경도로 돌려보내지는 못해도 황실에서 말이 나온다면 그의 기세를 누를 수는 있겠지요.”
명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가까스로 상황을 유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가 ‘곽’ 자를 듣자마자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네 상사를 이 일에 끼어들게 해서는 안 돼! 예전에 형부 관아에서 범한에게 매질을 했다가 강남으로 쫓겨났으면서······ 아직도 보복을 생각하고 건가? 흠차 대인이 뒤끝이 긴 사람이라는 걸 잊은 거야? 곽쟁이 이 일에 끼어들었다가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우리도 덩달아 미움을 받게 될 거라고!”
천하 사람 중에서 감찰원 원장 진평평 대인이 거주하는 진원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이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사람들은 민간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건축물로 신양의 이궁, 동이성의 검려, 강남 명씨 집안의 명원을 손꼽았다. 물론 북제 상경성에 있는 검은색과 푸른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신선이 사는 궁정과 같은 매력을 지닌 황궁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궁 안에는 황족이 살고 있었고, 검려 안에는 대종사 중 한 명인 사고검이 살고 있었기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다만 강남 소주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명원은 천하 백성들도 가까이서 즐길 수 있었다.
명씨 집안은 자신들의 세력을 믿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명문 귀족 집안의 신비감을 유지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남의 지식인이나 멀리서 여행을 온 여행객들은 소주성을 구경한 뒤 숲 사이로 나 있는 넓은 대로를 따라 성 밖을 둘러보다가 멀리 아름다운 명원을 구경할 수 있었다. 들어가서 놀아볼 수는 없었지만 워낙 아름다웠기에 멀리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지은 지 거의 40년이 된 명원은 항상 겸손하고 거리감 없이 행동하는 명씨 집안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다. 안에 있는 계단과 정자, 벽돌 하나, 기와 한 장, 심지어 심어진 풀과 나무들까지 어느 것 하나 눈을 자극하는 화려함은 없었다. 오히려 은은하게 친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산을 따라 둘린 담은 높지 않아서 여행객들이 도로에 서서 안에 처마를 볼 수 있었고, 담 가까이 다가가면 졸졸 물 흐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명원은 친근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았고, 검소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곳이었다. 만일 전문가가 보았다면 이 거대한 장원은 세밀한 부분까지도 흠잡을 데가 없으며 최상의 목재와 가장 정교한 설계로 지어졌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군인이 이곳을 봤다면 겉보기에는 방어 능력이 없어 보이지만 간단한 개조를 거친다면 반년 넘게 함락되지 않을 성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낼 것이었다.
오늘 날씨는 그리 좋지 않았다. 꽃샘추위에 바람이 매서운 데다가 안개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명씨 집안 공자가 탄 마차는 외롭게 집으로 가는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항상 보이던 여행객이나 나들이 온 여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문으로 가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명란석이 마차 창문 발을 걷어 음침함이 가득 피어난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집 대문 쪽을 바라봤다. 관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마차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명란석이 발을 내려 창문을 다시 가린 뒤 고개를 돌려 추뢰를 노려봤다.
“곽쟁이 왔어. 곽쟁이 여기까지 왔다고. 네 상사는 정말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사람이야?”
추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에 경도에서 도찰원 좌도 어사로 부임한 곽쟁은 그의 직속 상사로 춘시 사건 이후 곽쟁은 형부 3사를 이끌고 범한을 심문했었다. 당시 장 공주의 지원을 받고 있던 그는 범한에게 매질을 해 자백을 받아 낼 생각이었지만 범한은 예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범한을 무너뜨리지 못한 건 물론이고 임 재상과 범씨 집안, 감찰원의 미움을 받게 된 그는 찍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경도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와 함께 범한을 공격한 형부 상서 한지유는 관직에서 강등당했고 곽쟁은 강남으로 쫓겨났다.
어사 대부 곽쟁은 자신의 인생이 꼬인 건 모두 범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속 깊이 범한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그는 범한이 이번에 강남에 내려온 걸 기회로 명씨 집안을 이용해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게 바로 명란석이 똥 씹은 얼굴로 추뢰를 노려보고 있는 이유였다. 곽쟁이 오늘 이곳까지 온 것은 분명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자신의 집안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 * *
“아버지, 모두 만나 보았습니다.”
명란석이 공손히 명원 한쪽에 위치한 작은 건물 돌계단에 서서 안에 대고 말했다. 방 안에서 명씨 집안의 주인인 명청달의 피곤함과 안도감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떻게 해서든 이번 한 해는 견뎌야 하니 가족들에게도 관부에 약점이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거라. 그리고······ 란석이 너야 항상 침착하게 행동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명란석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방 안에서 느릿느릿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명청달이 피곤한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오면서 곽쟁을 만났느냐?”
명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네, 아버지. 저렇게 당당하게 찾아오니 혹여나 흠차 대인의 눈에 띌까 걱정됩니다.”
명청달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401화
“됐다. 우리에게 찍힌 낙인이 너무 짙어서 그쪽과 관계를 끊으려 한들 가능한 일도 아니고, 사람들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문제는 더는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그럼 곽쟁 대인은······ 개인적으로 온 것입니까? 아니면 경도 쪽을 대신해서 온 것입니까?”
명란석이 궁금해하며 묻자 명청달의 눈가에 파인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관리가 이곳을 개인적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더냐?”
말뜻을 알아들은 명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오늘 곽쟁이 온 것은 장 공주마마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걱정할 것 없고 경도 쪽 의견을 신경 쓸 것도 없다. 마마께서는 우리가 흠차 대인을 음해하길 바라시지만······.”
명청달이 천하의 갑부다운 차디찬 미소를 지었다.
“그건 곧 우리보고 칼잡이 노릇을 하라는 게지. 내가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따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지 않으냐. 물론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또 장차 용상의 주인이 될 사람이 누구일지 겉으로는 따르는 척해야겠지.”
명란석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생각했다.
“명령은 이미 내려 두었습니다. 다만 흠차 대인이 강남에 있는 동안 숨죽이며 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자가 보기에 이렇게 숨을 죽이고 지내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야.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가장 좋은 방법이야.”
명청달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아들을 바라봤다.
“범 제사는 주변 여론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탐욕만 채우려 하는 마귀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약점을 보이지 않는다면 강남의 관리와 세도가들의 반항이 두려워서라도 우리를 단숨에 무너뜨리지는 못할 게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범 제사의 체면을 세워 준다면 그도 우리의 체면을 신경 써줄 거야.”
“하지만 작은 범 대인은······ 2 황자마마의 체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명란석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명청달도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상인은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없는 신분이지. 하지만 내가 봤을 때 범 대인은 좀 다른 것 같더구나. 과거 섭가 여사장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관리는 공격해도 백성은 해치지 않고 상인에게도 어떤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아. 더구나 2 황자마마가 반격을 한들 뭘 할 수 있겠느냐? 기껏해야 관리들을 이용해서 모함하는 것뿐이지. 반면 우리는······ 민간의 힘을 동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 말한 명청달은 잠시 생각하다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절대 그를 건들지 않을 거야.”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던 명란석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최근 며칠 동안 아버지는 범한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셀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이번 일에 아버지가 이처럼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마음속에서 울화가 솟구쳤다.
“아버지, 이번에는 어차피 힘들 것 같으니 차라리 손을 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현재 강남의 최고 부자인 명청달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반백 년을 산 그가 단호한 눈빛으로 제 아들을 바라봤다.
“손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말하는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우리가 손을 놓으면 우리 가문과 얽혀 있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절대 잊지 말 거라. 경도에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 무상주를 가졌는지. 우리가 손을 놓는다고 해서 그분들이 우리에게 은전을 요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느냐? 장 공주, 황태자, 2 황자, 경도 고위 관리들은 이미 우리에게 돈을 받아먹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말 손을 놓아 버린다면 그분들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니? 황족과 관리들의탐욕을 절대 얕보아서는 안 된다.”
명란석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강남 최고의 갑부에게 이런 사정이 있다는 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명청달도 아들의 생각을 아는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명씨 집안은 겉보기에는 휘황찬란한 권세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분들 눈에는 알을 낳는 닭과 다르지 않단다. 만약 닭이 알을 낳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니? 그러면 흠차 대인이 뭘 하려 하기도 전에 원래 우리를 지켜 줬던 사람들이 먼저 우리를 잡아먹으려 할 게다.”
불만 가득했던 표정을 거둔 명란석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경도에 있는 그분들이 매년 은전을 가져가지 않는다면 저희 집안도 정정당당하게 황실 금고 상품 대리 판매만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황실 금고를 흠차 대인이 끊는다고 해도 저희 집안은 강남 곳곳에 있는 산업으로 집안을 유지해 갈 수도 있고요.”
명청달이 손을 내저으며 이 일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를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명씨 집안이 떳떳하지 못한 장사를 해온 건 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어. 이번에 작은 범 대인이 강남에 내려온 건 어쩌면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일 수도 있단다. 이번 기회에 그런 일들을 정리하고 올해를 시작으로 점차 경도로 보내는 액수를 줄인다면 장 공주 쪽도 뭐라 하지는 못할 게야. 이번 공개 입찰에서는 최소한 작년의 6할 정도를 낙찰받는 걸 목표로 해야 한다. 최씨 집안처럼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정정당당하게 장사를 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니?”
명란석이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사실 그는 말만 그렇게 할 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장부에는 기록되지 않는 동의성으로 보낸 밀수품들과 해외 해적들이 거둬들인 수입은 상당한 액수였다. 경도 쪽에 계속 돈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수입마저 포기한다면 손해를 볼 게 분명했고, 분명 그 손해는 집안의 재산으로 채워야 할 터였다. 만일 흠차 대인이 계속 강남에 머물러 집안의 재산으로 손해를 보충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아무리 부유한 명씨 집안이라도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명청달은 제 아들이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설명하거나 괜찮다고 안심시키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들의 걱정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명씨 집안이 과거의 일들과 결별하고 자력으로 살아남으려 한다면 앞으로 2년 동안은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거였다.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명란석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자, 요 이틀 동안 대가들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가들이란 황실 금고 입찰 공고에 참여할 수 있는 강남 일대 거상들을 말하는 거였다. 그가 아버지를 힐끗 쳐다본 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잘 알고 지내던 몇몇 집안을 찾아가 본 결과 영남 웅(熊)씨 집안과 천주 손(孫)씨 집안에서도 현재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집안 모두 황실 금고 판매권을 탐내는 눈치였으나 최씨 집안이 남긴 몫에만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저희와 가격 경쟁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청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입이 좋으니 어느 집안에서든 가지고 싶어 하겠지. 하지만 강남에서 계속 장사를 할 생각이라면 우리와 대놓고 경쟁하지는 못할 게다.”
이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서 비로소 강남 최고의 부자에 걸맞은 자신감과 거만함이 보였다.
“중요한 건 소금 밀수 상인들입니다.”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소금 밀수 상인들은 이득 앞에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다 보니 상당한 여윳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공개 입찰에 참여해 기존의 관행을 어지럽힌다면······.”
강남에서 가장 부유한 건 뭐니 뭐니 해도 황상과 염상들이었다. 그동안은 양쪽 모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최씨 집안이 무너지면서 소금 상인들이 황실 금고 영역에 눈독을 들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일 정말로 자금이 많고 조정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소금 상인들이 입찰에 참여한다면 명씨 집안으로서는 상당한 골칫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소주성에 있는 몇몇 소금 상인들을 제가 만나 봤습니다.”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이틀 동안 겪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난 소금 상인들 모두 올해는 황실 금고 쪽 일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 이들이 왜 포기한 것인지 소자도 잘 모르겠습니다.”
의외의 소식에 놀란 명청달이 잠시 생각하다가 무언가 이해한 듯 착잡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작은 범 대인이 상품 출하 경로를 손보려 한다는 소식을 모두가 들은 모양이구나. 그러니 이익을 눈앞에 두고도 싸우려 하지 않는 거겠지. 소금 상인들은 올해 우리 명씨 집안과 흠차 대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내년 입찰에 나설 생각일 거다.”
명란석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하지만 소금 상인들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신중하게 움직일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뒤에서 받쳐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
명청달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강남로를 담당하는 설청 대인이시다. 설청 대인은 범 대인의 생각을 빤히 알고 있으니 최소한 올해 한 해 동안은 소금 상인들이 황실 금고 일에 참여해 범 대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막으시겠지. 이로써 설 대인은 작은 범 대인과 경도에 있는 범 상서와 진 원장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게야.”
놀란 명란석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명청달이 잠시 생각하다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흠차의 위세가 대단하니 아무도 판세에 끼지 않으려는 게지. 우리도 어떻게든 입찰 문서를 손에 쥐고 올해 한 해를 순탄하게 보내야 한다.”
“흠차 대인이······ 우리를 어떻게 하려 할까요?”
아들이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묻자 명청달이 대답했다.
“모든 일이 분명한데 흠차 대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느냐? 장사 일에서만큼은 우리가 흠차 대인보다 한 수 위야.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의 경우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가져가는 거니 문제 될 게 없지. 황궁에서도 사람이 오고 강남로에도 보는 눈이 많은 데다가 황실 금고 전운사가 조작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그러니 우리 명씨 집안이 당당하게 은전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면 작은 범 대인도 어쩌지는 못할 게다.”
“소자의 말은 흠차 대인이 몰래 다른 집안을 동원해 공개 입찰에서 일부러 가격을 올리지 않겠냐는 겁니다. 이거야말로 흠차 대인은 손해를 보지 않고 저희만 손해를 보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아닙니까.”
명청달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강남로에서 작은 범 대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사람이 없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흠차 대인을 제외하고 우리 명씨 집안의 미움을 살 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도 없어. 네가 이틀 동안 알아본 대로 주변 상인들은 올해는 방관자로 상황만 지켜보려 할 게다.”
아들을 안심시키던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허수아비를 세워 가격을 올린다면 입찰 경쟁할 만한 돈이 있어야 하는데 흠차 대인에게 그만큼의 돈이 있겠니?”
명청달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상자에 들어 있는 13만 은전을 만약 우리 집안을 공격하는 데 쓰려 한다면 관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야.”
돈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은 사실 명씨 집안이 가장 잘하는 거였고 이번에도 은전 40만 냥으로 범한을 쓰러뜨리려 시도했었다. 물론 이번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면 돈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제 편으로 이끌 수 있었다.
“흠차 대인의 아버지는······ 경국 국고를 담당하는 호부 상서입니다.”
명란석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상기시켰다.
“돈으로 말한다면 저희 집안보다야 호부 상서가 가진 은전이 더 많겠지요.”
“범 상서 말이냐?”
명청달이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호부는 움직일 수 없다. 만약 흠차 대인이 우리 명씨 집안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호부 상서의 힘을 사용한다면······ 이 일은 끝난 거나 다름없지. 장 공주마마께서 계속 조용히 계시는 건 분명 그 순간을 기다리기 때문일 거야.”
402화
진원에 순간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명란석이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이제 보니 아버지는 뒤로 물러나는 척하면서 경도 쪽 사람들과 흠차 대인에게 맞설 방법을 의논해 둔 상태였다.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을 두고 얼마나 많은 음모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건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더는 황실 금고 일이나 호부 상서에 관해 이야기할 엄두가 나지 않는 터라 명란석이 화제를 바꿨다.
“예전처럼 태평전장 돈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분부대로 입찰 때 허둥대지 않도록 이번에는 평상시보다 3할 정도 돈을 더 마련했습니다.”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는 출처가 명확한 돈만 사용해야 했다. 더구나 입찰에 성공한 뒤에는 4할에 달하는 금액을 계약금으로 내야 했기에 미리 돈을 준비해야 했다. 진짜 금이나 은 또는 조정에서 허가한 전장의 은표를 반드시 그날 정해진 장소로 보내야만 했다.
그러니 공개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처럼 많은 현금은 강남에서 가장 큰 부자인 명씨 집안도 당장 마련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나머지 6할의 금액도 낙찰된 뒤에 당장 마련을 해야 했기에 땅이나 집을 팔아서 조달할 수도 없었다. 이에 최씨 집안과 명씨 집안과 같은 대부호들은 매년 입찰 때마다 필요한 현금을 출하될 상품을 담보로 태평전장에서 마련해 왔다.
올해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을 이용해 범한이 자신들에게 타격을 입히려 할 게 분명했기에 명씨 집안은 태평전장에서 이전보다 2할 많은 돈을 빌렸다. 2할이라는 숫자가 적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다른 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명씨 집안도 이만큼의 돈을 융통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걸 담보로 걸어야 했다.
“태평전장과는 오래도록 신용을 지켜 왔지.”
명청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오래된 관계라 할 수 있지. 게다가 태평전장은 우리가 상품을 공급하는 동의성의 산업이 아니냐.”
“네, 맞습니다.”
명란석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저희가 이번에 이만큼 많은 돈을 조달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도 있습니다. 지금 강남 일대에는 호시탐탐 저희 명씨 집안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만약 저희가 낙찰을 받는다면 그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수 있고, 흠차 대인에게도 황실 금고 대리 판매와 같은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집안은 우리 명씨 집안뿐이라는 걸 알려 줄 수 있을 테니까요.”
명청달이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맞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 공개 입찰에서 낙찰을 받아 내야 한다. 조정의 제도가 이처럼 큰돈으로 전운사를 압박하는 이유는 원래 실력 없는 상인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우리 명씨 집안의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서이지. 이렇게 많은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집안 중 한 곳은 이미 무너졌으니 이제 누가 남았겠니? 흠차 대인은 내년에 황실 금고 상품을 넘겨받는 사람을 제거하고 싶겠지만······ 그러지는 못할 게다.일단은 금액을 너무 터무니없이 올리지 못할 테고, 항목을 묶는 문제에서도 경도의 압력이 있을 테니 전운사에서는 작년과 같이 진행하려 할 게다. 그러니 우리는 이전처럼······ 여덟 개 항목만 가져오면 된다.”
열여섯 개 항목 중 절반에 해당하는 여덟 개 항목을 가져오겠다고 말하면서도 명씨 집안 주인의 말투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명란석이 존경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조정 제도를 분석한 아버지의 말을 들어 보니 긴박해 보였던 상황이 쉽게 변한 것 같았다. 조정의 황당한 제도의 규정에 따른다면 공개 입찰에서 낙찰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집안은 자신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바다 일은 이미 정리됐다.”
명씨 집안의 주인이 자신의 아들을 두 눈을 바라보며 당부했다.
“그러니 집 안에 있는 그 사람의 입도 막아야 할 거야.”
바다 일이 정리되었다는 말을 듣자 명란석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리면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바다 일은 명씨 집안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러니 그 일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야지만 명씨 집안은 앞으로 계속해서 강남로에서 안정적으로 장사를 할 수 있고, 범한에게 공격당한 빌미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아버지가 한 말에 명란석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는 아버지가 무슨 방법으로 그 일을 정리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섬을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해적들을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리려면 분명 군대의 도움이 필요했할 터였다. 아버지의 단호한 시선을 느끼면서 명란석은 속으로 어느 쪽 군대가 동원되었을까 추측했다.
바다 일은 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해결했으니 집안일은 그가 직접 해결해야 했다. 그의 얼굴에 순간 매서운 독기가 스쳤다.
* * *
깊은 밤.
명씨 집안 공자는 소주성 외진 곳에 위치한 화려한 집 안 침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품 안에는 발가벗은 여자가 새끼 고양이처럼 품에 안겨 가녀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명란석의 세 번째 첩으로 특수한 신분 때문에 계속 명원 밖에서 지내고 있었다.
“란석.”
여자가 화가 치미는 듯 약간 헐떡이며 말했다.
“원해요.”
일을 치른 남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내뱉자 명란석이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뭘 원한다는 거야? 만족할 줄도 모르는 건가?”
그러자 여자가 정색하며 따졌다.
“무슨 의미예요? 흠차 대인이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 배를 내보낼 수도 없잖아요. 우리 남매가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명란석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야. 요 몇 년간 네가 우리 명씨 집안에 얼마나 많은 은전을 벌어다 줬는데 쓸모가 없을 리 있겠어?”
그가 손으로 여자의 하얀 엉덩이를 주무르자 그녀는 아양을 떨며 화를 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명란석이 얼굴 가득 은은한 미소를 띠며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여자가 가녀린 소리를 내며 기절하자 그는 무정하게도 자신이 이전에 수도 없이 물고 빨았던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손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새벽 소주성 밖 부두에 있던 돌과 포대의 개수가 줄었고 누군가는 무거운 물체가 강물에 던져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어서 명씨 집안 공자의 세 번째 첩이 부모를 만나러 고향 천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언제 돌아온다는 말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가운데 멀리 천주성 밖 바다에 있는 외딴섬에는 기괴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동이 트지 않은 어둠을 틈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갈매기가 이곳에 날아들었다. 어찌나 많은지 섬 전체를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굶주린 갈매기들은 땅에 머리를 처박고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쪼아 먹으며 서로 먹이 경쟁을 펼쳤다. 어두운 섬 전체가 갈매기 깃털과 핏자국으로 난자되어 있었다.
지금 갈매기들이 경쟁하듯 먹고 있는 건 항상 잡아먹던 작은 새나 거북이 알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사람의 시체였다.
시체가 섬 전체에 널려 있었고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아직 쌀쌀한 초봄이라 썩은 내는 나지 않았지만 시체들의 피 냄새에 반경 수백 리에 있는 갈매기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갈매기들에게는 성대한 연회나 다름없었다.
섬 한쪽에 어렴풋하게 부두처럼 생긴 건물이 보였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엎어져 있는 시체는 흰자를 드러낸 터라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흰자에는 죽은 뒤 생기는 점막이 덮여 있었고 얼굴은 누군가가 섬에 들이닥쳐 자신들을 죽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끼룩 소리를 내며 갈매기 하나가 그 시체의 눈을 쪼아 먹으려 다가왔다. 피가 엉겨 붙은 눈동자를 문 갈매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누군가가 자신의 음식을 탐낼까 걱정되는 듯 양 날개를 퍼드득거리며 이동했다. 암석 뒤로 이동한 갈매기가 물고 온 눈동자를 단숨에 삼키려 하다가 목구멍이 걸렸는지 칵칵 소리를 내었다.
섬에 가득했던 시체들은 어느새 백골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오장육부는 쪼여 갈가리 찢겼다. 피와 죽음이 만연한 섬에서 갈매기들이 날개 춤을 추며 서로 먹겠다고 다투었고, 바다에는 죽음의 공포가 자욱하게 깔렸다.
그때 손 하나가 살며시 나오더니 힘겹게 위에 있는 시체를 살짝 밀고는 주변에 있는 갈매기들을 쫓았다. 틈으로 주변을 살펴보던 그는 관병들이 이미 섬을 떠났다는 걸 확인했다. 죽음이 드리운 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동료들의 시체를 헤치며 기어 나왔다.
그는 한쪽 어깨에 상처를 입고 온몸이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는 특수한 신분 덕분에 관병들이 살기를 숨기고 있다는 걸 재빨리 감지해 낼 수 있었고, 이에 동료의 시체 뒤에 숨어 죽은 척 위기를 모면했다. 만일 순간의 판단으로 민첩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도 죽었을 것이다.
관병들이 평소 동료처럼 지내던 해적들에게 갑자기 살기를 드러내며 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여 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죽어 있는 해적 두목을 바라보던 그는 명씨 집안이 입막음하기 위해 모두 죽인 것이라 짐작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는 얼굴이 까무잡잡한 것이 한눈에 봐도 사시사철 바다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외모는 평범했지만 강인한 의지가 돋보였고 눈은 살짝 작은 편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그는 당황하거나 허둥대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의 시체 위에 앉아서 숨을 고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 동료의 옷을 벗겨 자신의 상처를 단단히 싸맸다. 이후 일어나 마실 수 있는 물을 찾으러 갔다.
그는 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 확신한 관병들이 떠날 때 물과 음식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살아남을 기회가 있는 셈이었다.
그는 힘없이 걸어가며 날이 밝아질 무렵에는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다 위에 해가 천천히 떠오를 무렵 그 남자는 부두에 앉아 날개를 퍼드득거리며 움직이는 새 떼와 자신의 동료들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봤다. 순간 입술이 창백해지면서 화를 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는 병에 담긴 물로 마른입을 적셨다.
저기 시체는 모두 그의 동료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장례를 치러 줄 생각이 없었다. 혼자 장례를 치러 주기에는 시체의 숫자가 너무 많았고, 해적이 바다에 묻힐 수 없다면 새들의 도움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나쁜 결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겁탈하는 등 나쁜 짓을 저지른 해적이 이렇게 죽임을 당해 새의 먹기가 되는 건 인과응보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동료들의 장례를 치러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이름은 청와로 청주 본토 사람이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원래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선원이었다. 작년 어느 날 그가 탄 배가 해적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무슨 방법으로 살아남았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해적의 내부로 들어가게 된 그는 해적들을 동료로 여기며 천주 밖 망망한 바다 위에서 나쁜 일을 하며 살아갔다.
이 섬에 해적은 바다에서 가장 규모가 컸지만 이상하게도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두목은 자신들의 행적을 숨기는 데 엄청나게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섬에 머문 지 반년쯤 되었을 때 청와는 비로소 원래 섬에서 주로 하는 일이 명씨 집안이 서쪽 바다로 보내는 상품을 약탈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매번 배를 약탈할 때마다 포로를 남겨 두지 않고 모두 죽였으며 배에서 압송을 책임진 자는 조정의 관리였다.
반년 정도 되었을 때 청와는 냉혹한 성격에 두목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해적들 사이에서 소두목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많은 일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중요한 일에 접촉할 기회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로 그 무렵 수군들이 어두운 밤에 작은 섬에 들이닥쳐 모든 사람을 죽였다.
햇살이 얼굴을 비췄지만 산뜻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주변에 온통 시체가 널려 있는데 어떻게 산뜻한 기분이 들 수 있겠는가. 청와의 목구멍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새들에게 허벅지 살을 쪼이고 있는 그 시체는 자신과 함께 산굴에서 생활하던 재자였다.
청와가 무기력하게 두 눈을 깜빡이며 힘겹게 일어나 재자의 시체 옆으로 걸어가더니 들고 있던 나무 막대기로 갈매기를 쫓았다. 그가 물끄러미 재자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살아서 돌아가게 된다면 네 부모님은 보살필게.”
말을 마친 그는 단호하게 동료의 시신을 버려 두고 부두 옆에 숨겨진 오솔길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섬에 있는 배는 이미 모두 가라앉아 버렸고 해적 두목이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둔 나무배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403화
청와의 발걸음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단호했다. 그는 최대한 빨리 육지로 돌아가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돌아가야 하기도 했지만 정보를 보고하지 않으면 제사 대인이 조급해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걸어가던 그는 자꾸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뒤에 시체가 되어 있는 해적들은 모두 죽어도 마땅한 이들이었지만 반년 동안 동고동락한 동료이기도 했다. 강철처럼 단단한 그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청와의 마음속에 분노라는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명씨 집안이 해적과 결탁한 증거야. 더욱이 어젯밤에 들이닥친 군대는 엄청나게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어. 섬에 있는 해적을 모두 죽이려면 강력한 수군을 동원해야만 했을 텐데······ 설마 섭씨 집안에서 움직인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자신에게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최대한 빨리 이 정보를 들고 소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청와란 사람은 바로 천주에 주둔한 감찰원 4처 순찰사 외곽 조직의 다섯 까마귀 중 하나로, 범한에게 명씨 집안과 해적의 관계를 보고하는 밀정이었다.
* * *
섬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강남 소주성 밖에 위치한 명원의 청아한 아름다움에는 세속적인 분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명씨 집안의 주인인 명청달이 공손하게 의자에 앉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노부인이었다. 장 공주 앞에서도 이처럼 공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명청달이지만 이 노부인 앞에서만큼은 고개를 숙이고 한없이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이 노부인은 명씨 집안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과거 노부인이 마음을 굳게 먹고 가장 큰 총애를 받았던 첩을 독살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일곱째를 집에서 내쫓지 않았다면 명씨 집안의 어마어마한 재산은 아마 명청달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졌을 것이다.
명청달은 자신의 연로하신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이가 많을수록 지혜로워진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집에서 쫓겨난 일곱째가 생각났다.
‘이미 죽었겠지······. 일곱째의 시신은 어딘가에 백골이 되어 있을 거야.’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계속 살아 계시면 자신이 명씨 집안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낙심했다.
“너무 늦게 움직였어.”
노부인이 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냉혹한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깨끗하게 씻어 내고 싶었으면 2년 전에는 움직였어야지.”
명청달은 총명하기로 유명했기에 명씨 집안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한없이 고분고분 행동했다.
“2년 전에 움직였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야 2년 전에 황궁에서 범한과 임완아의 혼사가 결정되었으니까!”
노부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아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명청달은 마치 자신이 잘못했다는 양 공손한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설사 그때 범한이 강남에 내려와 황실 금고를 장악하리라는 걸 알았다고 한들 그가 황상의 사생아이고 섭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 아닌가. 또 그가 훗날 감찰원을 이끌 거라고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어? 어머니는 정말이지 어리석으시다니까.’
노부인이 다시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이번에 내가 늙은 몸을 이끌고 군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감찰원에서 그 섬을 조사했을 거다. 그럼 범한의 성격상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 상상이 가느냐?”
명청달은 속으로 냉소를 지으며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가 잠시 뒤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소자의 잘못입니다.”
“란석이는 지금 어떠니?”
명씨 집안 노부인이 아들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손자에 대해 묻자 명청달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그 아이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압니다. 그리고 요 몇 년간 그녀에게 잘 대해 주기도 했고요.”
“사내란······.”
그의 어머니가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어쩜 이리도 한결같은지.”
노부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란석이한테 원 대가와 교제를 줄이라고 해라. 며칠 전에 성안에서 기생집을 열려고 하는 흠차 대인 제자에게 죽원관을 팔고 난 뒤 원 대가와 함께 흠차 대인의 장사를 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더구나. 한마디로 우리가 세운 방법과 반대로 가려 하는 것이지.”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원 대가는 정왕 세자의 여인이니 란석이에게 넘볼 생각은 하지 말라고 당부해라.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범씨 집안은 원몽을 뼛속 깊숙이 미워하고 있다. 만일 범한이 원몽이 소주성 안에 있다는 걸 안다면 당상 찾아내 죽이려 할 거야. 이런 상황에서 란석이가 그녀와 교제한다면 위험하지 않겠니.”
알았다고 대답한 뒤 방을 나서려 하던 명청석의 귓가에 노부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계획을 세워 두긴 했지만 작은 범 대인이 무지막지한 방법을 사용해 황실 금고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구나.”
명청달이 잠시 생각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흠차 대인이라도 천하의 명망 있는 저희 집안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건들지는 못할 겁니다.”
머리와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세고 주름이 가득한 노부인의 얼굴에서 냉혹함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아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응수했다.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은전 40만 냥도 받지 않는 걸 보면 흠차 대인은 더 많은 걸 원하고 있는 거야. 이 세상에서 우리 명씨 집안 말고 그에게 그만한 은전을 안겨 줄 수 있는 곳이 있을 것 같으냐?”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은전 40만 냥을 마련해 범한에게 보낼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범한이 받지는 않았지만 역대 최대 뇌물 액수로 역사책이 남을 만한 일이었다. 범한이 은전 40만 냥은 마다했다는 것은 분명 더 많은 걸 원한다는 뜻이었다.
“소자가 보기에······.”
명청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차 대인이 은전을 받지 않은 게 꼭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년 9월에 일석거에서 최씨 집안이 은전 2만 냥을 건넸을 때 작은 범 대인은 웃으며 받고는 최씨 집안을 무너뜨렸지요. 그러니 은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의향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뇌물의 성격과 효과가 변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범한이 최씨 집안에게 은전 2만 냥을 받고 단숨에 무너뜨린 것은 굉장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뇌물은 항상 통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깨뜨린 범한의 행동은 이후 강남 상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아들의 말에 노부인이 힘없이 축 처진 볼을 끌어 올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최씨 집안은 너무 옹졸하게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사태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북제 상경에서 최씨 집안 공자가 범한의 심기를 건드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일이 있지 않았니. 그런데 은전 2만 냥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게 어리석은 게지. 작은 범 대인이 은전을 받은 것은 최씨 집안을 건들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경에서의 일을 더는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표시였을 뿐이야. 이후의 일까지 보장한 건 아니었단 말이다.”
여기까지 말한 노부인이 숨을 고르다 물었다.
“혜아는 요즘 어떠니?”
명청달이 대답했다.
“기분은 좀 나아진 것 같습니다.”
최씨 집안과 명씨 집안은 장 공주의 계획에 따라 혼인을 맺었다. 이에 지금 말하는 혜아는 바로 명란석의 정실부인 최지혜를 말하는 거였다. 범한이 최씨 집안을 공격했을 때 핵심 인물들은 연소을에게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지만 집안은 무너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에 명씨 집안에 시집온 그녀는 매일 암담한 심경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집안일을 물어보던 노부인이 다시 본래 문제로 돌아와 물었다.
“태평전장 대행수가 그저께 와서는 우리 집안이 요구한 은전이 거의 준비되었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며칠 전에 또 그가 와서는 초상전장 이야기를 하던데······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어떻게 나는 그동안 들은 소식이 없는 거지?”
“소자가 태평전장에 약간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 알아본 것입니다.”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이전에 말했던 사천립이란 자가 전장에서 상당한 액수의 은전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만약 조정이나 흠차 대인이 누군가를 심어 두었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초상전장은 작년 처음 동이성에서 개업을 시작한 곳입니다.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지금 전장은 대부분 동이성에서 나왔습니다. 지분과 배경을 제가 조사해 본 결과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 흠차 대인이 가격을 올릴 게 분명해 보이므로 앞으로 매상을 담보로 잡아 태평전장 말고 다른 곳에서 돈줄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부인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냉소를 머금었다.
“배경이 어떻기에 문제가 없으리라 확신하는 게냐?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 필요한 돈을 그깟 작은 전장에서 조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범한이 강남에 내려온 것에 겁을 먹고 쓸데없는 짓까지 하는구나.”
명청달은 마음속으로는 반감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며 설명했다.
“믿을 만한 배경을 가진 곳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초상전장의 배경이 누구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아는 거나 빨리 말해라.”
노부인이 눈을 부릅뜨며 제 아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명청달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조사해 본 결과 초상전장의 지분 대부분은 심씨 집안의 것이었습니다. 북제 조정의 추적이 너무 심해 심씨 집안의 돈을 관리하던 사람이 동이성으로 도망쳐 초상전장을 연 것입니다.”
“심씨 집안이라고?”
노부인이 마침내 흥미가 생기는지 두 눈을 반짝였다.
“북제 진무사 지휘사였던 심중을 말하는 거냐?”
“맞습니다.”
노부인이 한참 말없이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 집 여식이 홀로 도망쳤다는 말은 들었는데······. 하물며 북제 조정에서 심씨 집안의 자산을 몰수할 때 일부 재산을 찾아내지 못했다지? 심중은 최씨 집안과 함께 황실 금고 상품을 북제로 밀수하는 일을 했으니 상당히 많은 돈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말이 맞는다면 초상전장이라는 데도 재력을 가지고 있겠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초상전장의 진정한 배후가 동이성에서 굉장한 세력을 가진 가문이라는 겁니다.”
명청달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재빨리 말했다.
“심중은 북제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고 이 일에는 작은 범 대인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초상전장은 절대 작은 범 대인이나 북제와는 거래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명씨 집안은 논밭과 장원 안에 숨겨 둔 방대한 은전을 제외하고 장사로 벌어들인 은전은 대부분 태평전장에 보관했다. 그리고 태평전장에서 돈을 찾을 수 있는 인장은 항상 명청달의 어머니가 쥐고 있었다. 그러니 명씨 집안의 주인이라 불리지만 사실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명청달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초상전장을 추천하는 데에는 또 다른 속셈이 숨겨져 있을 수 있었다.
노부인은 제 아들이 다른 속셈을 품고 있다는 걸 아는지 미소를 거두고 차갑게 물었다.
“사천립이란 자가 태평전장에서 돈을 얼마나 찾았는지는 알아보지 않은 거냐?”
허를 찌르는 질문에 명청달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 애써 차분히 대답했다.
“태평전장에 물어보니 그곳 대행수가 규정을 어기고 액수를 알려 줬습니다. 사천립이 찾은 돈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분명 범씨 집안의 돈일 거라 하면서 액수는 대략 5만 냥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말 없이 제 아들을 바라봤고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 명청달은 갈수록 긴장되었다.
404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노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은 초상전장과 거래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단은 공개 입찰에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사천립이 찾은 돈의 액수가 크지는 않고, 둘째로 태평전장의 배후에는 사고검이 있어. 전장은 무엇보다도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 그들이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금액을 알려 준 이유는 사고검이 우리 명씨 집안이 동이성에 계속 상품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갑자기 초상전장과 거래를 하면 그들의 마음이 편하겠니? 마지막으로 초상전장이 심씨 집안의 돈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동이성의 귀족 가문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이성은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다. 만일 그 가문이 사고검의 눈엣가시라면 우리도 덩달아 사고검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 아니냐.”
명청달은 자신이 어머니가 온화한 목소리로 자신과 대화를 나눌 줄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노부인이 차분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초상전장과는 적게 왕래하도록 해라.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의 보안을 유지하려면 태평전장을 이용해야만 해.”
명철달은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머니의 온화한 말 뒤에 피도 보이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 말에 굴복하지 않았다.
‘사업을 하려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법인데 태평전장만 믿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두 모자 사이에 벌어진 작은 의견 차이는 앞으로 아주 골치 아픈 일을 초래할 것이었다.
“만약 흠차 대인이 우리 집안을 몇 년 동안 가만히 둔다면 네 말대로 하겠지만, 만약 그가······ 우리 명씨 집안을 사지로 몰아넣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명청달이 허리를 굽히고 공손히 대답했다.
“군산회가 다음 달에 열리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노부인이 냉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살인은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명씨 집안이 강남 무림을 양성하며 조정의 시선에서 오랜 시간 보호해 줬으니 군산회도 그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니?”
노부인이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살인은 바로 범한을 죽이는 일이었다. 군산회는 추뢰가 이전에 범한을 대항할 방법으로 말했던 무림 대회와는 다른 곳이었다. 경국에는 소위 강호라는 것이 있었지만 진정한 강호는 절대 서호 옆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닥석 위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초야에 강남 수채 공봉 대인과 같은 고수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군산회는 강남에서 소위 고수라 불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모이는 곳이었다. 군산회는 지금껏 알려진 적이 없었기에 이곳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진 곳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만약 범한이 단호하게 명씨 집안을 몰락시키려 한다면 백여 년간 명맥을 유지해 온 명씨 집안 역시 반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 6처 그림자와 전문 자객들이 강남에서 동이성 검수들을 쫓고 있는 상황이라서 범한의 경호가 보이는 것만큼 치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일을 줄곧 반대해 온 명청달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동이성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군산회에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잊으셨는지 모르지만 흠차 대인은 상당한 고수인 데다 곁에는 폐하께서 보내신 호위 무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더구나 가장 거슬리는 것은······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가 계속 그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부인이 미련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살인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지 성공 확률을 따지며 하는 게 아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나를 죽이려 하는 상대를 죽일 수 있을지 계산만 하다가는 죽일 기회를 얻을 수 없어.”
명청달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반박했다.
“설사 범한을 죽인들 저희가 얻는 게 무엇입니까? 폐하의 미움과 천하의 질타 속에서 명씨 집안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물샐틈없이 치밀하게 일을 처리하고 천하가 모두 믿을 수 있는 답을 던져 주면 되지 않느냐?”
노부인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범한이 죽는다면 그건 당연히 동이성 사고검이 한 짓이 될 텐데 우리 명씨 집안이 미움을 받을 일이 뭐가 있겠니? 사고검은 요 몇 년간 누명을 여러 차례 썼으니 이번에 한 번 더 쓴다 해도 신경을 쓰지 않을 거다.”
명청달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천하 사람들은 물론이고 폐하와 감찰원도 속일 수 없습니다.”
“만약 범한을 죽일 수 있다면······.”
노부인이 확신에 찬 무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평화를 유지하는 게 가장 좋기는 하다만 만약 정말로 범한을 죽인다면 우리 경국의 지혜로운 폐하께서는 사생아 하나 죽었다는 이유로 강남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자신의 통치 기반을 흔드는 짓은 하지 않으실 게다. 오히려 일의 파장을 최소화하실 거야.”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설명했다.
“범한이 살아 있는 게 명씨 집안이 유지되는 것보다 열 배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범한이 죽는 게 명씨 집안이 무너지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폐하가 우리 명씨 집안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수도 없으시지. 그래서 폐하께서는 범한이 우리 집안을 완전히 빼앗아 조정의 손에 쥐여 주기를 바라시는 거야. 만약 네가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도 안심하고 권한을 네가 넘겨줄 거다.”
노부인이 한기 서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내 목숨으로 메울 일이 생길 테니.”
만감이 교차한 명청달이 울먹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왜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몰래 냉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상황 판단이 흐려지셨어. 어머니께서는 정말로 범한을 죽이면 폐하께서 우리 가문이 살아날 길을 열어 주실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 그리고 자신의 목숨으로 메우겠다니? 늙은 목숨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 리가 없잖아.’
* * *
죽원관에서 나온 사천림이 깊은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그의 뒤에 있는 죽원관은 한창 수리가 진행 중이었다. 아직 개업까지는 시간이 있는 만큼 포월루를 강남에 진출시키는 계획은 수월하게 시작된 셈이었다. 다만 최근 이틀 동안 기생들을 사들이는 일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 3 황자의 위세를 등에 업고 주변 기생집에서 기생들을 빼내기는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인기 있는 기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사천립은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아름다운 여자가 많기로 유명한 강남에서 왜 인기 있는 기생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설마 누군가가 어디엔가 숨겨 둔 것일까. 방법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중개업자를 찾기로 했다. 하지만 중개업자가 성심껏 소개해 준 기생들은 대부분 강북에서 도망쳐 온 가여운 아이들이거나 부모가 팔아넘긴 아이들이었다. 만일 그런 아이들을 사들였다가는 범한이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제자들 중에서 사천립은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었지만 범한의 생각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께 황실 금고에서 돌아온 범한은 소금 상인이 내준 장원 안에 종일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있을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을 위해 어떤 준비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천립은 오늘 솜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상인이 되었음에도 십여 년 동안 힘들게 공부하면서 생긴 서생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손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마차를 쓰다듬었다.
마차 옆을 지키고 있던 시위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차에 오르지 않고 우두커니 밖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소주성 대로를 오가는 마차와 사람들을 본 사천립이 문득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 즐거운 얼굴을 한 강남 백성들을 바라봤다. 미간을 찌푸리며 1년간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선택이 새삼 놀랍고 두려워졌다.
항주에서 양만리와 대화를 나눈 뒤부터 사천립은 줄곧 마음이 심란했다. 제자 네 명 모두 범한을 믿고 전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천립은 세 명과는 달랐다. 그는 이미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벼슬길에 대한 희망이 옅어진 상태였다. 범한을 위해 은밀한 일들을 처리하고 남들은 모르는 비밀스러운 정보를 접하게 된 그는 갈수록 범한이 추측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승인 범한이 자신처럼 천하를 돕고 백성을 위해 헌신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포월루를 강남에 진출시키는 이유는 범한이 감찰원 밖에서도 쉽게 천하의 정보를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돈세탁을 위해서였다. 범한이 하는 모든 일은 좋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이를테면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거나 서생이 평생 지켜 온 정도가 무너지거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양심이 더럽혀지는 등의 일 말이다.
지금까지 범한을 근거리에서 봐온 사천립은 그가 자신이 바란 명신이 아닌 권신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신하는 것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 명신이 되려면 반드시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청렴함을 바라는 건 바보 같은 기대였다.
사천립은 지금 이 양립할 수 없는 철학적 문제에 빠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자신의 스승을 믿고 묵묵히 마차에 오를 뿐이었다. 그가 오르자 마차는 곧바로 태평전장으로 향했다. 최근 사천립은 그곳에서 조달한 은전을 곳곳에 사용했다. 은전 5만 냥이란 액수는 그에게는 가슴 떨릴 정도로 무서운 액수였지만 작은 범 대인에게는 많다고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속으로 앞으로 충분한 권력과 자원을 모아 자신이 원하는 천하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네.”
범한이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양만리를 바라봤다. 황실 금고에서 소주로 돌아온 이후 그는 양만리를 불렀다. 규범을 따른다면 양만리는 함부로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었지만 흠차 대인이 부춘현 관리를 부르는 만큼 다른 관리들도 양만리를 질책하지는 못했다.
양만리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제자가 걱정되어 그럽니다. 이 관료 사회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고 권력과 재물의 유혹도 상당하다 보니······.”
범한은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제자가 뭘 말하려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사실 범한은 네 명의 제자 중에서 양만리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양만리는 말하는 게 직설적인 데다가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항상 머릿속에 간직해 두고 청렴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은 청렴한 관리가 아님에도 범한은 양만리 같은 청렴한 관리들이 좋았다. 물론 사천립도 항상 청렴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일을 할 때만큼은 그런 마음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두 제자 중에서 성가림은 타협할 건타협하고 거부할 건 거부하며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며, 후계상 역시 과거 경도에서 하종위와 함께 인재로 명성을 떨친 사람답게 생각이 냉철하고 일 처리도 과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먼 곳에 근무하고 있어 범한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범한이 지나친 걱정을 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어 양만리의 말을 중단시켰다.
“내 뜻이 이렇게 단호한데 자네는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하는 건가? 내가 어두운 길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밝은 길을 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인가?”
양만리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걱정이 정말 지나친 건지 생각했다.
“금전은 도구일 뿐이네.”
제자의 이런 마음을 읽은 것인지 범한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항상 은전을 이용해 어떤 생리나 심리적 즐거움을 얻으려 하지. 하지만 은전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 은전을 탐하는 것은······ 은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네.”
양만리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욕망은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절대 채워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은전이 충분히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은전을 탐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405화
양만리는 가끔 알 수 없는 단어를 사용해 말하는 범한의 대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대략적으로만 알아들어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태감이 아니네.”
범한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은전과 같은 것들을 모으는 데 취미 따위는 없어.”
양만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은전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사천립의 명의로 기생집을 경영하는 거지? 더욱이 명씨 집안과 황실 금고에서 착복한 은전을 조정에 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가던 돈줄을 끊었지만, 과연 얼마나 조정에 돌려줄지는 알 수가 없는 거지.’
제자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범한이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번에 자네를 부른 것은 맡길 일이 있어서이네.”
양만리는 범한의 몇몇 행동이나 일 처리 방식이 자신의 신념에 저촉되었기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범한이 맡기는 일이 법률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처리했다.
“대인, 분부해 주십시오.”
한껏 진지해진 범한의 표정을 본 양만리는 맡길 일이 정무와 관련 있는 일이라 짐작하고는 호칭을 ‘대인’으로 바꾸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범한의 지시를 기다렸다.
공손하게 명령을 기다리는 그를 바라보던 범한이 넌지시 말했다.
“곧 경도에서 자네를 공부(工部)로 전근시킨다는 조서가 내려올 거네. 놀라 허둥대지 말라고 미리 말해 주는 거네.”
놀란 양만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관례대로 자신이 부춘현에서 문제없이 근무를 마친다면 내년에는 주로 들어가 근무를 할 수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순탄한 벼슬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무난하고 합리적인 과정이었다. 양만리는 고지식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료 사회의 복잡한 내막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범한이 자신을 비롯한 세 명의 제자들을 경도가 아닌 지방 주와 군에 발령한 이유가 뭔지 알고 있었다.
이미 경도에 세력을 두텁게 다진 범씨 집안으로서는 지방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양만리가 부춘현에 발령된 이유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공부로 전근 가게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품계가 낮아도 경도 밖에서는 스승이 하는 일을 도울 수 있었지만 경도로 돌아간다면 낮은 관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스승에게 무언가 깊은 뜻이 있으리라 짐작하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자 범한이 설명했다.
“지방 관리가 공부로 전근 가는 것은 살짝 승진하는 정도이니 내가 일부러 뭘 했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그리고 자신이 공부로 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양만리가 여전히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범한이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공부에는 네 개의 사(司)가 있네. 그중에서 수부사(水部司)는 경국 원년 신정 때 수청리사(水淸吏司)로 개편되었지. 이번에 자네가 가게 될 곳은 바로 수청리사네.”
범한의 의도를 알아챈 양만리는 입을 살짝 벌렸다. 하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대인, 치수 공사를 하는 데 은전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이 은전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범한이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었다.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항주성에서 그렇게 혼이 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야?”
양만리는 그동안 스승이 명씨 가문과 황실 금고를 공격하면서까지 은전을 긁어모으려 했던 이유가 강 정비 사업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인 양만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의 우악스러운 성격도 고칠 필요가 있네. 내 앞에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건 괜찮지만 공부에서 간사한 관리들에게 그렇게 행동한다면 내가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양만리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스승님 말씀대로 앞으로는 신중하게 하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양만리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수청리사는······ 강 정비 사업에 들어가는 돈을 심사하여 결정하는 자리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강 정비 사업을 진행하려면 은전이 많이 필요하지. 게다가 작년 큰 강의 제방이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이 수몰되어 죽었네. 그러니 올해 다시 그런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폐하께서는 국고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즉시 정비 사업에 돈을 투입하실 걸게. 내가 자네를 수청리사로 보내려는 이유는······ 자네가 그 돈을 감시하길 바라서야.”
양만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강 정비 사업? 제방? 홍수? 나보고 그 돈을 관리하라고?’
강 정비 사업은 명실상부 국가에서 돈이 가장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더욱이 경국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매년 강 정비 작업을 했지만 매년 둑은 무너졌고 은전은 홍수와 함께 사라졌다. 한마디로 매년 인명 피해가 계속되는 홍수는 자연재해이자 인재였다. 경도의 공부와 하운 총독부의 관리들이 강 정비 사업에 쓰일 은전을 착복했고 이는 자연재해보다 더 큰 참사를 낳았다.
경국 황제도 그런 문제를 알고 있었기에 4년 전 큰 강 제방이 무너졌을 때 감찰원에게 조사를 맡겼고 조정은 하운 총독을 사형에 처했다. 소문에 따르면 국가 돈을 착복한 하운 총독의 배후에는 황태후가 있었다고 한다. 경국 황제가 사형이라는 엄벌을 내렸음에도 강 정비 사업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부패는 근절시키지 못했고 하운 총독의 자리는 4년째 비어 있었다.
게다가 근 몇 년 동안 황실 금고 수입이 예전만 못한 데다가 두 번의 전쟁으로 국고가 비게 되면서 큰 강의 제방을 수리하는 일은 장기간 방치되어 왔고 결국 작년 홍수로 제방이 무너지면서 상당한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황제 폐하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일을······ 나보고 하라고?’
양만리가 초점 없는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아는 그는 자신에게 군이나 주를 다스릴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천하 백성들의 생사가 걸린 강 정비 사업과 같은 일을 맡을 능력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가 범한에게 절을 하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하고 싶지 않다고 사정을 하자 범한은 한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타일렀다.
“무서울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가? 내가 자네에게 제방을 수리하라고 그랬는가? 그냥 은전이 제대로 쓰이는지 지켜보라는 거네.”
“차라리 직접 흙으로 강둑을 메우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양만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제게 맡기신 일은 이번 강 정비 사업과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어 홍수로 백성들이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면 저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범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청사에 이름을 남길 청렴한 관리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나? 그래서 내가 경국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관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청렴함을 드러내라 하는 건데 못 하겠다는 겐가?”
양만리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범한도 더는 말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용기를 낸 양만리가 고개를 들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대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하운 관아 문 앞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스승이 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를 준 만큼 몸을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범한은 비장한 결심을 한 그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까지 한 걸 보니······ 잘하면 총독도 끌어내리겠구먼.”
범한이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하물며 지금까지 하운 총독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범씨 집안과 감찰원에서 자네를 보내려 하는 것이네. 하운 관아가 위험한 곳이긴 하지만 그곳 탐관들이 자네를 몰래 해치려 한다면······ 내 보복을 감당해야 할 거야.”
양만리가 무언가 깨달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내 뒤에는 스승님이 계시는데 하운 관리들이 뭘 할 수 있겠어?’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놓이면서 의욕이 불타올랐다. 당장이라도 경도에 보고한 뒤 큰 강 연안으로 달려가 조정의 은전이 제대로 쓰이는지 감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범한이 양만리의 의욕에 불타는 눈빛을 바라보다가 애써 웃음을 참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머릿속에 주의 깊게 새겨 두어야 할 게 있네.”
“네,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은전만 관리하는 거니 강 정비 사업에는 관여할 수 없네.”
범한이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당부했지만 양만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 정비 사업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중요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내가 관여하면 안 된다는 거지?’
제자의 마음을 아는 범한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강 정비 사업은 전문 기술을 가진 공부사 관리들이 해야 하는 일인 만큼 자네는 은전이 제대로 쓰이는지만 감시하고 강 정비 사업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전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끼어드는 거네. 설마 자네는 강 정비 사업이 그냥 제방을 높이 쌓으면 끝나는 일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양만리가 자신도 그 정도는 안다는 표정을 짓자 범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네를 공부로 보내는 이유는 주류에 휩쓸리지 않고 청렴함을 지킬 줄 알며 불의를 보고 참지 않기 때문이네. 나는 자네가 해본 적도 없는 강 정비 사업에서 뭔가를 해낼 거라는 기대는 눈곱만큼도 하고 있지 않아.”
범한은 자신이 여러 번 말하는데도 양만리가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흘려들어서는 안 되네. 양만리, 내 말 듣고 있는가!”
정신을 차린 양만리가 벌떡 일어나자 범한은 그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만일 자네가 내 명성을 등에 업고 강 정비 사업의 구체적인 일에 함부로 관여한다는 말이 들린다면 사람을 보내 자네를 갈기갈기 토막 내버릴 거네.”
범한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에 겁을 먹은 양만리가 덜덜 떨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이후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과 하운 총독부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처럼 세밀한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던 범한은 자신이 이전에 양만리를 아둔한 사람으로 봤던 게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지시한 일을 비교적 원만하게 해결할 거란 확신이 들자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일러 주기 시작했다.
“내가 자네에게 수청리사에 가라고 하는 이유는 사실 자네가 강 정비 사업의 해묵은 부패를 해결하길 바라서가 아니네.”
범한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천천히 사실을 털어놨다.
“사실 감찰원에서도 많은 밀정을 보냈지만 관리들이 너무 많고 조정과 깊이 결탁하고 있어 제대로 처리해 오지 못했네.”
양만리는 솔직히 약간 놀랐지만 질문하지 않고 조용히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큰 강 정비 사업에 쓰일 은전이······ 항상 부족했던 거지.”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자네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은 없지만 강 정비 사업에 쓰이는 은전은 늘 부족했네. 설사 폐하께서 은전 2백만 냥을 보내도 공부에서는 부족하다고 외칠 거야.”
말을 멈춘 범한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천천히 해결한다면 이런 상황을 고칠 수 없는 것도 아니네. 하지만 시간이 없네. 작년 큰 강의 제방이 무너지면서 댐과 둑이 손상되었어. 작년 겨울이 오랜 시간 방치된 둑과 제방을 수리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였지만 국고에 돈이 없어서 할 수가 없었지. 만약 이대로 간다면 올해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나? 이대로라면 올해 홍수가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수밖에는 없어.”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냉소를 띠었다.
“만일 올해 큰 홍수가 일어난다면 작년처럼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걸세. 그러니 강 정비 사업에 전문성을 가진 관리들을 감찰원에서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거야.”
406화
이 말을 들은 양만리는 스승이 몸은 소주에 머물러 있어도 마음은 천하 백성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감을 느낀 그가 스승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국고에 은전이 부족해 미루다가 벌써 봄이 되었습니다. 봄에 하천이 범람하는 건 막는다고 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강 정비 사업에 필요한 은전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자네를 공부에 보내는 진짜 목적이네.”
범한이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내가 마련한 거금은 대부분 호부를 거쳐 국고로 들어간 뒤 하운 관아로 이동할 거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워낙 탐관들이 많은 곳이라 실제 강 정비 사업에 얼마나 쓰일지는 알 수 없네. 더구나 내가 가장 걱정되는 것은 제때 은전이 도착하지 않는 경우네. 그래서 일부 돈을 다른 경로를 통해 하운 관아에 보낼 생각이니 자네가 받아 관리하도록 하게.”
양만리가 대경실색했다. 범한의 입에서 거금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분명 어마어마한 액수의 은전일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그 은전은 분명 황실 금고에서 마련될 것이니 규정대로 한다면 황실 금고에 귀속된 뒤 폐하의 의도에 따라 국고로 이송되는 게 맞았다. 범한이 따로 은전을 조달해 보내겠다고 한 말은······ 작게 보면 국가의 재산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이었고 크게 보면 반란을 꾸민 거라고 해석될 수도 있었다.
“시간이 없네.”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전 방식을 통한다면 은전이 필요한 곳에 이동하는 데만 반년이 걸릴 거네. 만일 그 속도대로 한다면······ 큰 강 제방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없을 거야. 한마디로 관료주의 때문에 백성들이 죽게 되는 셈이지.”
양만리도 범한이 자신에게 아무 이익도 되지 않는 위험한 계획을 세운 이유가 강 정비 사업을 최대한 빨리 마쳐 인명 피해가 없게 하려는 데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한편으로는 감동하면서도 이 일로 스승이 큰 고초를 치를 수 있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대인, 이 일은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제자의 간곡한 만류에도 범한은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려울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건가? 설마 폐하께서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그 말에 양만리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국가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동원하더라도 강 정비 사업에만 쓰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는다면 황제 폐하가 제 아들인 그를 핍박할 이유는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양만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은전은 어디서 마련하실 생각입니까?”
그는 은전이 정당한 방법으로 마련되지 않을 게 분명한 이상 정확하게 묻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부잣집에 사기를 쳐서 가져올 거네. 내가 부유한 사람들 등쳐 먹는 일을 좋아하지 않나.”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곧 있으면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이 시작되네. 그러니 자네는 은전 걱정은 하지 말게. 그리고 공부 안에도 자네를 대신해 일을 감춰 줄 사람이 있으니 뒷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네.”
양만리가 이해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액수의 은전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강 정비 사업에 들어가려면 조정 고위층이 알면서도 모른 척 눈을 감아 줘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는 전체적인 계획을 알지 못함에도 스승의 아버지인 호부 상서 대인의 암묵적인 도움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내가 가진 은전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해가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지. 그래서 지금은 은전을 어떻게 벌어들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써야 좋을지가 고민이네.”
생각해 보면 오만한 말이었다. 아직 명씨 집안의 은전을 가져오지 못했는데도 그는 은전을 어떻게 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운 총독 자리가 4년 동안 비어 있었네.”
그가 자신의 제자 중 가장 고집스러운 양만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서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자네가 하운 총독이 되어 역사에······ 처음으로 탐욕을 부리지 않는 하운 총독으로 기록되기를 바라네.”
그 말을 들은 양만리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이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일렁이면서 의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소주에서 은전을 마련해 강 정비 사업에 투입하려는 이유는 가을철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만신창이가 된 제방을 최소한이라도 수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아는 양만리는 마음이 조급해져서는 재빨리 범한에게 인사를 하고 부춘현으로 돌아가려 했다. 공부로 전근을 가려면 일단 경도에 올라갔다가 다시 하운 관아로 내려와야 했기에 한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정말이지 그의 이름처럼 만리를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상황이었다.
양만리가 떠난 뒤 범한은 편하게 의자에 앉아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 해당타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신선처럼 앉아 있는 범한을 보고는 물었다.
“문제는 어디서 은전을 마련할지 아닙니까?”
“내일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이 열립니다.”
범한이 걱정할 것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서비가 바보가 아니라면 분명 가격을 합당한 정도까지 올릴 겁니다. 4할의 계약금은 결코 적지 않죠. 명씨 집안이 공손히 전운사에 내놓은 은전을 제가 제대로 써야 명씨 집안의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해당타타가 고개를 저었다.
“경도에 이미 감찰어사가 왔고 강남 총독부에도 사람을 보낸 상황이니 그 은전을 동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하서비가 최씨 집안의 판매권을 가져간다 해도 상품이 현금이 되는 데는 최소 일곱 달이 필요합니다.”
범한이 웃으며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어쨌든 그렇게 되면 낭자의 황제께서 북제에 운송될 상품의 값을 지불해야 할 테니 전운사에는 충분한 은전이 들어오는 건 정해진 사실이 아닙니까. 저는 결과가 정해지는 대로 태평전장에 가서 미리 돈을 융통할 생각입니다. 설마 북제 측에서 다른 의견이 있지는 않겠지요?”
해당타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면 일곱 달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대인의 계획을 모르고 계십니다. 게다가 북제 궁정에서 여러 해 동안 힘겹게 모은 돈을······ 경국 강 정비 사업에 쓰인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사리에 맞지 않을 뿐이겠는가. 만일 총명한 북제 황제가 범한의 이런 계획을 알고 있다면 피를 토할 정도로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범한이 양손을 맞잡고 항상 천하 백성들을 가여워하는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낭자도 이전에 천하의 만백성은 모두 하늘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낭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강의 제방이 무너져 죽게 될 경국 백성들은 천하의 만백성이 아닙니까? 낭자는 그런 참사가 발생하는 걸 그냥 지켜볼 수 있습니까? 북제 궁정의 은전이든 명씨 집안의 은전이든 조정의 은전이든······ 모두 천하 만백성의 은전이 아닙니까? 제가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천하 만백성을 위해 하는 일이 어찌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에 말문이 막힌 해당타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 만백성의 은전은 천하 만백성을 위해 쓰는 게 맞지요. 그런 의미에서 훗날 북제에 흉년이 발생한다면 범 대인께서는 아끼지 않고 도와주시겠군요.”
범한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범한이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할 줄 몰랐던 해당타타가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범한이 정말 그럴 뜻이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대답한 것인지 고민했다. 이 세상에 제 나라와 남의 나라를 구분 짓지 않고 대의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당타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은전 문제는 제쳐 두고 오늘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은전을 긁어모으는 권신들은 많이 봤어도 대인처럼 공익을 목적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권신은 처음 봤습니다.”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아까 양만리에게 말했다시피 은전은 도구에 불과하지요. 생리나 심리적 즐거움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은전을 벌기도 어렵지만 은전을 쓰는 건 더욱 어렵습니다. 어떻게 사용해야 쾌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말을 사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아름다운 여인을 사는 걸 좋아하며, 누군가는 땅을 사서 지주가 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관직을 사는 걸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단순하지요.”
범한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저는 은전을 사용해서 즐거움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은전을 많이 쓸수록 즐거움도 커지는 것이지요. 혼자 즐기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즐겁습니까?”
범한이 맹자의 구절을 인용해 설명하자 해당타타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대인께서는 더욱 즐겁게 살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이전에 편지에 쓴 대로 더욱 아름다워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범한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권력과 부귀를 모두 손에 넣은들 나라가 멸망한다면 그게 진정한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미인을 옆에 끼고 노래를 부르며 천하를 쏘다니는 신선과 같은 삶을 산다고 해도 한순간의 사고로 가진 걸 모두 잃고 굶어 죽어 새들의 먹이가 된다면 그게 진정한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키우던 개를 굶겨 사람을 물게 만들고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못돼 먹은 귀족 자제들의 생활에서 저는 즐거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한 명만 즐겁고 만 명은 즐겁지 않은 건 진정한 즐거움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모두 다 즐거워야 진정한 즐거움이라 할 수 있지요.”
해당타타가 그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대인의 말 중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대인은 어떤 사람인 것입니까?”
범한이 잠깐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
해당타타가 고개를 숙여 호수처럼 맑은 두 눈동자를 숨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좋은 사람이라······. 내일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 보일 모습이 좋은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해당타타의 반박에 범한은 물러서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저는 가끔 좋은 사람은커녕 오히려 악인으로 보일 정도로 잔혹한 일을 할 때도 있지만 이 두 가지는 절대 충돌하지 않습니다.”
더는 그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해당타타는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요 이틀 동안 새벽에 다시 수련을 시작했던데 정기의 상태가 좋아진 겁니까?”
407화
사실 항주성 서호에 온 이후로 범한은 이전처럼 매일 새벽과 저녁에 명상을 하기 시작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해당타타에게 숨겨 왔다. 그런데 해당타타가 묻자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해당타타가 옅게 웃으며 물었다.
“대인이 방금 은전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한 말은 정말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많이 있고, 가난에 허덕이며 힘겨운 삶을 사는 백성들도 정말 많은데 어째서 강 정비 사업에 돈을 쓰려 하십니까?”
“각 지역에 자선 단체가 점차 열릴 겁니다. 그리고 강북 일대의 유랑민들이 정착할 방법을 조정에서 마련하기로 폐하와 이야기를 한 상태입니다.”
범한이 침착하게 말했다.
“황실 금고의 은전 일부는 제가 합당한 일에 쓸 생각입니다.”
“혹시 어느 분이 생전에 바라신 일입니까?”
해당타타가 호기심에 묻자 범한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인께서는 아직 첫 번째로 강 정비 사업을 선택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해당타타가 질문을 상기시켰지만 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머릿속으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황색 옷을 입은 여인이 강가 청색 돌 위에 서서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맹렬한 기세로 흐르는 강물과 힘겹게 제방을 쌓고 있는 인부들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일단은 쉬어야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일 열릴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 한바탕 전쟁이 벌어질 테니까요.”
경력 6년 3월 22일은 대길이었다. 그리고 흠차 대인이자 황실 전운사 정사인 범한이 강남에 내려온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알록달록 아름다운 봄 경치에 따뜻한 산들바람이 불자 소주성에 있던 귀족가 자제들과 여인들은 봄 경치를 즐기러 성 밖으로 나갔다. 넓은 도로 위에 핀 풀들이 마차 바퀴에 눌려 눕고 꾀꼬리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파에 놀랐는지 허둥대며 울어 댔다. 성 밖 청산의 곳곳이 푸른색으로 물들었고, 남녀가 함께 모여 정을 나누는 곳마다 맑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처럼 화창한 봄날에 소주성 안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강남 총독부에서 남쪽으로 일흔네 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운사 관아였다. 강남로에 있는 관아든 소주부에 있는 관아든 관료 냄새가 가득한 이곳은 평상시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 오늘도 손에 긴 창을 쥔 군사들이 양쪽 길 끝을 오가며 경계를 서고 있었고 관아에서 일하는 아속들도 춘곤증을 가까스로 몰아내며 이상한 낌새가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상당히 큰 구역이었지만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매년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이 열리는 날에는 많은 사람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왔다. 먼저 각 지역의 상인들은 엄청난 은전을 가지고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리고 공개 입찰 진행을 책임진 전운사 관리들과 강남로 총독도 현장에 나왔다. 뿐만 아니라 관리 감독을 위해 황궁에서 보낸 태감들과 도찰원에서 종일 할 일 없이 지내는 어사들까지 한 무리가 왔다. 한마디로 오늘 이곳에 수많은 은전과 중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안전 문제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날이었다.
다행히 소주는 큰 강 연안 깊숙이 위치해 있었고 경국의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에 어떤 세력도 함부로 이곳에 찾아와 탐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소주성 안에서 활동하는 좀도둑들도 봄놀이를 나간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러 성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전운사의 관례에 따라 큰 건물은 비어 있었다. 안의 넓은 공간에는 정당과 칸을 막은 작은 공간이 두 줄로 쭉 이어져 있었는데, 과거 왕조에서 이곳을 시험장으로 썼다고 했다. 과거 경국 황제가 황실 금고를 시찰하러 남쪽에 내려왔을 때 이곳을 발견하고는 공개 입찰을 진행하기에 알맞은 장소라 판단했고, 이후로 이곳에서 공개 입찰을 진행하는 게 관례가 되었다. 평상시에는 소주 총독부에서 이 건물을 관리했고 3월에만 전운사가 사용했다.
십여 일 전부터 청소와 수리를 시작한 터라 오늘 이곳은 먼지 한 점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했다.
건물 밖은 군대가 지키고 있었고 안은 평범하게 생긴 시위들이 지키고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살짝 어두운 정당에는 희미하게 큰 탁자 하나와 팔걸이 나무 의자 네 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신풍관 소주 분점의 접당 왕만두가 모두 팔리고 나자 비로소 건물 문이 열렸다. 각 주에서 온 거상들은 옆에서 자신들을 뚫어지게 감시하는 병사들의 눈빛을 못 본 척하며 질서 정연하게 계단을 올랐다. 십여 년간의 경험을 통해 이들은 오늘 벌어질 일들을 훤히 알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온 상인들은 집안을 대표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집안 뒤에는 관료 사회의 파벌이 버티고 있었다.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 참여할 만한 자격을 갖춘 상인들의 수가 많지 않은 만큼 부리는 종과 회계 담당자까지 데려왔는데도 인원은 많지 않았다. 모두 상자와 장부를 비롯해 공개 입찰에 필요한 물품들을 들고 들어왔다.
이러한 상인들 속에는 당연하게도 명씨 집안의 대표도 있었다. 작년부터 명씨 집안은 대부분의 일을 명란석에게 맡겼고 아버지인 명청달은 얼굴을 내미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많은 거상의 예상을 깨고 오늘은 명씨 집안의 주인인 명청달이 직접 이곳에 등장했다.
피곤한지 눈을 게슴츠레 뜬 명청달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손을 맞잡고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고는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강남 상인들은 재빨리 명청달에게 답인사를 한 뒤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서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오늘이 명씨 집안에게 중요한 날인 건 사실이었지만 명청달이 긴장한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에 사람들은 황실 금고 전운사 정사로 새로 부임한 흠차 대인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명씨 집안 공자가 암암리에 상인들을 찾아다니며 분위기를 살피던 것이 떠올랐다. 오늘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은 이전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도 않을 것이며 봄날처럼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끝나지도 않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처마 밑에 좌우로 나란히 있는 방 앞에는 각자의 이름이 붙어 있었고 상인들은 이름을 찾아 순서대로 들어갔다. 명씨 집안은 데리고 온 사람들만 열여섯 명이 되는 만큼 일행이 가장 많았기에 왼쪽 첫 번째 큰 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운사에서 일하는 아속들이 차와 정성껏 만든 간식 그리고 김이 나는 뜨거운 수건을 가지고 왔다.
관아에서 하는 공개 입찰이었지만 이들은 부유한 상인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전에 범한이 돼지를 잡으려면 먼저 잘 먹여서 살을 찌워야 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의자에 앉은 명청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문밖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들어오기 전에 상인들과 인사를 하며 눈을 맞춘 그는 모두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걸 확인했다. 이익 앞에서 서로 가격을 올리며 경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거니와 더욱이 이들 상인 중에서 자신의 눈 밖에 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마음이 약간은 안심이 된 명청달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더 걸릴 것 같느냐?”
공손하게 아버지 옆을 지키고 있던 명란석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곧 시작될 것입니다.”
그가 피 한번 묻혀 본 적 없는 것 같은 하얀 손을 뻗어 아버지 옆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명청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하에서 자신과 재력을 다툴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입술이 말랐다. 그러다 나이가 많아서인지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어머니는 이미 연로한 나이이신데도 어쩜 그렇게 정정하실 수 있지?’
명청달이 고개를 돌려 칸막이 방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그는 그 안에 어느 집안 상인이 들어가 있는지 훤히 다 알고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직접 상업계에 나타난 적이 거의 없었지만 평생을 교류해 온 만큼 서로를 잘 알았다. 오늘 온 사람들은 대부분 2세의 후손들이었다. 황실 금고의 열여섯 개 항목 중 최씨 집안이 원래 담당하던 부분은 가격 경쟁을 벌일 수 있었지만 명씨 집안이 줄곧 해온 여덟 개 항목은 건들 수 없다는 걸 잘알고 있었다.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맞은편 맨 끝에 있는 방이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것이었다. 어느 집안에서 입찰 문서를 냈는지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던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렸다.
“을(乙) 열여섯 번째 방은 어느 집안이냐? 곧 있으면 시작될 텐데 왜 아직 안 온 거지?”
명란석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든 걸 세밀하게 조사한 그도 저 방이 비어 있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명청달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범한은 은전 40만 냥을 돌려보낸 뒤 줄곧 조용히 있어 도무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아들을 노려봤다.
“물샐틈없이 철저하게 일을 준비했어야지. 입찰에 참여하는 사람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냐? 그러다가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쩌려고?”
명란석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대호족 가문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어느 집 소금 장수일 겁니다. 원래 소금 장수들 속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챙길 게 있는지 알아보려고 온 거겠지요.”
명청달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소금 상인은 절대 아니다. 일단 그들도 공개 입찰에 나서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고 설 대인도 그 점에 대해서는 보증을 했어.”
명씨 집안의 주인인 그가 비어 있는 방을 바라봤다. 굳게 닫힌 문과 은은하게 한기가 새어 나오는 유리창을 보니 불안감이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 * *
“정말 아깝습니다.”
강남 총독부 서재에서 한 고문이 한숨을 쉬었다.
“최씨 집안이 몰락하면서 여섯 개 항목의 주인이 사라졌는데도 우리가 나설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눈앞에서 이렇게 큰 수입을 명씨 집안과 강남 지주들이 나눠 가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정말 아깝습니다.”
강남로 총독으로 지방 고관이자 1품 고위 관리인 설청 대인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는 다른 고문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양계미가 며칠 전까지 몇 번이나 찾아와서는 혹시나 대인이 자신을 위해 작은 범 대인에게 말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더군요. 대대로 소금 장사나 하던 놈이 황실 금고 이익을 보니 눈이 멀어 허튼짓을 하는 게지요.”
양계미는 양회 일대 가장 큰 소금 상인이자 소금 밀수꾼으로 총독부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었다.
설청이 피식 웃었다.
“눈이 멀었다고? 누군 눈이 멀지 않았는가? 양계미 그놈은······ 내가 그 좋은 장원을 달라고 했는데도 한사코 내주려 하지 않더니 이번에 작은 범 대인이 거주할 곳으로 내주더군. 본관이 그놈의 속셈과 작은 범 대인의 생각을 모르겠는가?”
강남 총독인 그는 나라의 7분에 1에 해당하는 지역의 군마와 민생을 관리하는 만큼 실력도 대단했고 정보를 얻는 눈과 귀도 많았다. 오늘 공개 입찰을 떠올리며 그가 한숨을 쉬었다.
“작은 범 대인이 양계미의 체면을 세워 주기는 하겠지만 황실 금고 일에서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네.”
옆에 있던 고문이 물었다.
“흠차 대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주인이 없는 여섯 개 항목을 누구에게 줄지 물어보셨습니까?”
미소 짓고 있던 설청의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지. 폐하가 그를 강남에 보냈다는 건 여섯 개 항목을 그가 가질 거라는 뜻이니까.”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이어서 계속 말했다.
“아마도 명씨 집안에서 그동안 운영해 왔던 여덟 개 항목을 모두 가져가려 한다면 엄청나게 기를 써야 할 거네.”
고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작은 범 대인께서 이번에 선택한 집안이 어디인지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설청이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는 강남 전체를 다스리는 만큼 범한의 꿍꿍이를 알고 있었다.
“자네들은 상상도 못 할 사람이네. 흠차 대인도 정말이지 무서운 사람이야. 상인들 사이에서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일반인 중에서 선택하다니. 만일 평상시에 그런 사람이 당당하게 성안으로 들어오려 했다면 본관이 잡아서 감옥에 처넣었을 거네.”
408화
내막을 모르는 고문이 멋쩍은 웃음만 짓다가 호기심에 슬쩍 물었다.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 대해서 흠차 대인이······ 대인께 뭐라 한 말이 있습니까?”
관료 사회의 관례대로라면 황실 금고와 같은 이익이 큰 사업은 한 파벌에서 독식할 수 없었다. 더욱이 설청은 지위가 높고 강남에 뿌리가 깊은 만큼 범한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공개 입찰이 시작되기 전 총독부의 의견을 알아봤을 것이었다.
설청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작은 범 대인이 이 일에 대해 언급하긴 했었네. 나이가 많지 않은데도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더군. 그런 걸 보면 범 상서와 진 원장이 정말 잘 가르친 것 같네. 다만 이번에는 본관이 작은 범 대인의 호의를 거절했네.”
“네?”
놀란 고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의를 거절했다니? 작은 호의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십여만 냥은 되는 액수인데 그걸 거절했다는 말인가? 총독 대인이 이득을 거절한 이유가 뭐지? 설마 사이가 틀어진 것인가?’
설청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가까운 거리이기는 하지만 이만 출발하는 게 좋겠네. 작은 범 대인도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거고 곽쟁과 황궁 내관도 교지를 가지고 왔을 테니 늦어서는 안 되네.”
그는 아내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인 고문들에게도 자신이 범한의 호의를 거절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황실 금고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겉으로는 범한과 장 공수 사이의 이익 다툼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걸 설청은 알고 있었다. 이 일이 황자들의 권력 다툼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만큼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심히 행동해야 했다. 설청처럼 상당한 힘을 가진 사람이 너무 일찍 편을 선택하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황실 금고의 성대한 만찬을 함께 즐기자는 범한의 호의를 거절한 것이다.
시위들이 지키고 있는 강남 총독부 정문에 나온 설청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편액을 바라봤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편액을 바라보던 그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요 몇 년 동안 폐하의 행동은 갈수록······ 이상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경도를 주시하며 앞으로의 상황을 추측했다. 하지만 조정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지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그리고 경국 황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 * *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 참여할 상인들은 이미 각 방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을 주관할 범한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경도에서 온 내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실 금고는 황실의 재산인 만큼 규정대로 태상사와 내정이 함께 관리, 감독했다. 다만 범한이 태상사 소경이므로 태상사에서는 오늘 따로 인력을 소주에 보내지 않았기에 범한은 골칫거리를 하나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황궁을 대신해 온 태감은 그에게는 아주 큰 골칫거리였다.
“황 내관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범한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본관도 쓸데없이 참견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건 이전 규정대로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황궁에서 오늘과 같이 중요한 임무를 처리하기 위해 보낸 내관이니 분명 지위가 상당히 높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뒤룩뒤룩 살찐 황 내관이 범한의 말에 거짓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이 일을 맡으시니 저희는 마음이 놓입니다.”
깊은 황궁에서 생활하는 그는 일찌감치 범한의 명성을 알고 있었지만 황제의 명을 받은 이상 상대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소주에 있는 며칠 동안 범한이 그를 장원에 초대하지 않자 무시받은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사실 황 내관이 이곳에 온 이유는 공개 입찰을 감독하는 것도 있었지만 황태후의 말을 전해 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바로 이전의 규정대로 공개 입찰을 진행하고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범한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 말은 황태후가 범한에게 보내는 명령이자 경고였다.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이전의 규정을 따르라고?’
범한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보기에 황태후의 말은 명씨 집안을 건들지 말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장 공주가 경도로 돌아온 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황태후가 직접 나선 것 같았다.
이것은 황태후가 자신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였다. 지나치게 참견해서 황족 구성원들의 이익을 건들지 말라는.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일대 제왕이라 불리는 황제가 일을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해도 되는 건가? 가업을 맡은 아들에게 어머니와 누이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건가?’
황제는 비범한 인물임은 틀림없었지만 몇몇 일들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를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혼란이 따라야 한다는 것인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던 그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뭐라 하셨습니까?”
그의 옆에 있던 황 내관이 물었다.
“아니네.”
범한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말을 전하려 먼 길을 왔구먼. 고생했네.”
황 내관이 교만한 표정을 지으며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
“황태후께서 이 노비를 믿고 말씀을 전하라 하시니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제 체면을 세워 주신 작은 범 대인께도 감사드립니다.”
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돼지머리처럼 살찐 황 내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잠시 뒤 말했다.
“자네의 체면이라고?”
뜬금없는 말에 황 내관이 살며시 범한의 눈치를 살폈다.
“황 내관, 본관의 앞에서 쓸데없는 짓은 벌이지 않는 게 좋을 거네. 황 내관보다는 분수를 잘 알던······ 요 내관, 대 내관, 후 내관처럼 행동하게.”
황 내관은 모욕적인 말에 화가 치솟았지만 놀라기도 했다. 범한이 언급한 세 사람은 황궁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비록 대 내관이야 세력을 잃기는 했지만 최근 동궁의 수령 태감이 된 홍죽을 제외하면 요 내관과 후 내관은 황 내관보다 직위가 높았다. 그러니 범한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요 내관과 후 내관도 자신 앞에서는 공손하게 행동하니 황 내관도 오만하게 나서지 말라는 의미였다.
황 내관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여전히 범한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사방에 적을 만드는 젊은 권신의 앞날이 좋을 리 없거니와 자신은 황태후의 측근이므로 함부로 못 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황 내관, 소주성에서는 고분고분 행동하는 게 가장 좋을 거네.”
황 내관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흠차 대인께서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경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네.”
범한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본관이 가장 싫어하는 게 황태후마마를 이용해 나를 겁박하는 거네. 자네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본관은 아니야. 만일 황 내관이 경도로 돌아가 사방에 말을 퍼뜨리고 다닌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라네.”
범한의 협박을 들은 황 내관은 눈에 독기가 가득하고 이도 으드득 가는 것이 상당히 화가 나 보였다. 그가 벌겋게 화가 오른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일개 신하 주제에 황태후의 말을 무시하다니! 정말 네가 그 작은 목숨 하나도 부지하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범한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히 그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양 소매를 털고는 옆 복도를 따라 정당으로 걸어가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자네의 신분을 정확하게 알도록 하게. 자네는 홍씨가 아니지 않은가!”
늙은 홍 태감을 제외하고 음산한 황궁 안에서 범한에게 경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 * *
범한이 정당 앞 돌계단 앞에 서자 양쪽 방 안에 있던 상인들이 앞다투어 나와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앞 정문만 바라볼 뿐 자신과 가장 가까운 방인 갑(甲) 열 첫 번째 방 앞에 서 있는 명씨 집안 부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때 정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한 사람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은 상인처럼 부유해 보이지도, 관리처럼 근엄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민간에서 피를 묻히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양들 속에 갑자기 늑대가 나타난 것처럼 지금 안에 있는 상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바로 강남 수채 대두목 하서비였다. 오늘 하서비는 담청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몸에 배어 있는 쇠 냄새와 피 냄새를 숨기지는 못했고, 표정을 침착했지만 가는 눈동자에는 흥분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하서비가 두 손을 모아서 들어 올리며 범한에게 인사했다.
“정사 대인,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지 않았네.”
범한이 차가운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딱 맞게 왔어.”
강남의 거상들은 종종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장사를 할 때면 여러 지방의 민간 힘을 빌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강남 수채 대두목인 하서비는 비밀리에 오늘 공개 입찰에 참여한 상인들이나 심지어 명씨 집안과도 왕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하서비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었다. 오늘 그가 부하를 몇 명 이끌고 이곳에 등장하자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연이어 놀라 헉!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비적이 황실 금고 입찰에 참여한다고?!’
거상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서비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돌계단 위에 서 있는 범한을 바라봤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적이 장사를 한다고? 그럼 우리 상인들은 뭘 하라는 거지? 산에 들어가서 도둑질이라도 하라는 건가? 이게 무슨······. 작은 범 대인이 나타난 뒤로 모든 게 다 뒤죽박죽돼서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었지만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이야. 게다가 하서비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다고 한들 입찰에 참여할 만한 은전은 모으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지? 강남 수채 사람들이 여기 들어와 있다는 건 이미 보증금을 지급했다는 거야. 세상에, 약탈로 그 돈을 모았다는 것인가? 그럼 약탈이나 해서 돈을 벌면 되지 뭣 하러 힘들게 장사를 하려는 거야?’
돌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방문 앞에 서 있던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서비를 바라보다가 아들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냐?”
“하서비입니다.”
명란석이 아버지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강남 수채의 대두목입니다. 저도 이전에 몇 번 연락한 적이 있었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명청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사람이 흠차 대인이 준비해 패인 것 같구나.”
바로 그때 하서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명씨 집안의 주인인 그를 바라보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끝없는 적의와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재산까지 뺏긴 명씨 집안 일곱 번째 공자가 범한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정정당당하게 복수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409화
얼마 지나지 않아 강남 총독 설청도 서둘러 왔다. 줄곧 후원에서 꾸물거리던 어사 곽쟁도 드디어 바깥 대청으로 왔다. 이로써 황실 금고 개찰 일을 주재하고 감시하는 주요 고관 네 사람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였다. 곽쟁은 현재 경도에서 제법 잘 나가는 도찰원 좌도 어사는 아니었지만 각 로를 순찰하고 있어 어느 정도 권력은 쥐고 있었다. 그는 범한과 아직 원한 관계에 있던 지라 범한과 마주하게 되자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네 명의 고관들이 서로 인사를 올릴 때, 범한의 차분하고 냉정한 눈에서도 잠시 험악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네 명의 고관 중 경도에서 온 황 내관은 황궁을 대표했고, 강남 총독 설청은 조정 쪽을, 어사 대부 곽쟁은 언관을 대표하고 있었다. 한편 범한은······ 여러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황실 금고 전운사, 감찰원, 심지어는 태상사라는 황족을 관리하는 기관까지 대표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모두는 조정과 황제 폐하를 대표하고 있었다.
범한은 두 번째 의자에 앉아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설청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상황으로 보아 지켜보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누구든, 또 어느 세력이든 단번에 입찰을 끝내버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또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 황실 금고의 개찰 과정은 매우 효과적으로 공평함을 보장하고 있어서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공평했다. 돈 있는 상인이라면 황실 금고가 내놓은 16개 항목의 판매권을 쟁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는 범한의 생각이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의 생각도 그와 동일했다. 황 내관과 곽쟁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은근히 불안한 건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범한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무슨 짓거리를 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명씨 가문이 과거와 똑같은 지분을 차지하도록 보증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내관과 어사, 이들은 원래 역사적으로 물과 불처럼 서로 섞이기 힘든 층위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묵계라도 이룬 듯 이 둘은 같은 진영에 서 있었다. 한데 두 사람은 숨은 복잡한 사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고, 제일 마지막으로 황실 금고 문턱을 넘은 하서비라는 하 당주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설청은 달랐다. 강남 총독은 구경이나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무대 아래에 있는 거상과 그들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자상한 모습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경꾼 입장에서 거들먹거리고 있으면 연극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음 편히 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즉, 현 상황은 한쪽에서 하는 연기에 수많은 사람이 장단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 * *
황실 금고 대저택의 육중한 문이 서서히 닫히자 문 밖에 있는 병사와 감찰원 관리들이 물샐 틈 없는 보안에 들어갔다. 과거 황실 금고 입찰은 일반적으로 하루면 끝이 났다. 하지만 조정의 규칙에 따르면, 각각의 상단은 가격을 결정하기까지 최대 이틀이라는 시간을 쓸 수 있었다.
쾅!, 하며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범한이 웃는 얼굴로 귀를 막으며 저택 밖에서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봄날의 우레를 바라보았다.
우레는 천공을 가르며 솟구치더니 낮게 깔린 구름 아래에서 번쩍였다. 그리고 맑고 날카로운 소리를 멀리 떨어진 지면에까지 도달하도록 해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지난밤 밤새 힘들게 일하고 잠들어 있던 소주성 기생들은 우레 소리에 놀라 욕을 해대고는 이불 속에 머리를 깊숙이 묻고 다시 잠을 청했다. 거리에서 부모에게 동물이며 사람 모양을 한 비싼 엿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착한 아이가 아니어서 하늘이 벌을 내리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으아앙, 하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후원에서 뒷다리를 들고 나무에 오줌을 싸고 있던 검둥개는 우레 소리에 놀라 앞다리를 바닥에 바짝 대고 엎드리더니, 털이 보송보송한 다리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봄날의 우레는 일부 사람들의 귀에는 다른 의미로 들렸다. 소주성 북쪽 나루터에 모여 명을 기다리고 있는 각 가문의 고문과 대행수들, 그리고 이들뿐만 아니라 찻집에서 오늘 입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주성 거주민들은 모두들 성 남쪽 방향으로 고개를 향한 채 보이지도 않는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황실 금고의 공개입찰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던 것이었다.
경력 6년 봄, 황실 금고의 공개입찰은 사실 시작부터 유난히 순조롭지 못했다.
우선 황실 금고 전운사가 작년에 각 상호(商號)의 잉여 결손 상황을 총결산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레 격려사가 적지 않게 쏟아졌다. 그리고 연설을 맡은 전운사 부사 마해가 최씨 가문에 대한 조정의 조사 상황을 엄중하게 통보했다. 이는 계단 아래에 있는 상인들을 향해 조정이 너희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모두 과거의 규율을 따른 것이었으므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마해가 오늘 입찰과 관련한 구체적인 사항을 발표하자 저택 내부는 한바탕 왁자지껄해졌다. 상인들이 너도 나도 일어나 반대 의사를 표했고, 정당(正堂)에 있던 주요 고관 네 사람도 모두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전운사에서 원래 16개였던 항목을 34개로 더 세분화 하고 올해부터는 묶음 식의 입찰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갑작스럽게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큰 변화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아래쪽에 앉아 있는 상인들에게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매번 입찰하기 3개월 전에 강남의 거상들은 일찌감치 사적으로 연합을 했다. 그리고 이때 서로 간의 화목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서로가 지켜야 할 경계와 영역을 정했다. 예를 들어, 영남의 웅씨 가문은 올해 북쪽으로 가져 갈 주류 항목을 어떻게든 쟁취하려 했고, 천주의 손씨 가문은 해외로 가지고 나가 파는 도자기의 판매권을 원했다.
오늘 전운사의 뜻에 따라 16개 항목을 34개 소항목으로 세분화 하면 겉으로는 각자가 원하는 최저선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명씨 가문에게 돌아가기로 되어 있던 8개 항목은, 그러니까 묶음 식으로 두 차례 진행되기로 되어 있던 물품은, 세분화 하면 어느 누구든 다른 이의 몫을 빼앗아 가기 위해 눈이 벌게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묶음 식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그리 많지 않은 은전을 가지고도 이문이 가장 많이 남는 항목의 판매권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누군가가 명씨 가문의 몫에 눈독을 들인다면, 명씨 가문에서는 어떻게 나올까? 분명 그들도 다른 상단의 몫을 빼앗으려 들 것이다. 상인은 원래 천성적으로 이익을 쫓는 이들이니, 오늘 황실 금고 입찰은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이들 강남 상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건 바로 혼란이었다. 명씨 가문은 이미 최씨 가문이 지녔던 몫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놓은 터였다. 덕분에 다른 상인들 입장에서는 오늘 제대로 한몫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계획이 다른 누군가 때문에 어그러지는 걸 원치 않은 것이었다.
상인들이 봤을 때, 흠차 대인이 이와 같은 변화를 준 목적은 간단했다. 첫째, 모두가 더 많은 몫을 챙기기 위해 눈이 벌게지도록 만들어, 가격을 높여 놓기를 바라서였다. 둘째, 세분화해서 진행하면 모든 항목에 필요한 계약금을 떨어뜨릴 수 있으니······ 마지막으로 저택에 들어온 하서비에게도 한 몫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줄곧 침묵하고 있던 을열 여섯 번째 방에 흠차 대인의 대변인이 있다는 사실을 이들 간교한 상인들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흠차 대인이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불공정하고 타당해 보이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다니, 너무나도 악독한 방법 아니던가!
* * *
“범 대인, 이번 논의는 이곳에서 정하기에는 타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황 내관은 범한에게 체면이 깎인 후였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차분한 태도로 빙그레 웃는 표정까지 쥐어 짜내며 말을 이어 갔다.
“과거 규칙에 따라 16개 항목이면 16개 항목이지, 어찌하여 세분화 한단 말입니까? 그건 경도 쪽에 생각을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몇 마디 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설청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총독 대인, 항목을 세분화 하고, 묶음 식의 입찰을 하지 않는 건 실은 더 많은 사람에게 참여할 자격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은 조정에게도 이익이라 생각됩니다만.”
설청이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난처한 기색을 지어보였다.
“말이야 그렇다 해도, 대동소이한 것 아닌가. 내 보기에는 범한 대인이 먼저 조정에 상세히 뜻을 밝히고 황궁에서 의논을 거친 후 내년에 천천히 시행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군.”
설청도 반대를 하자 범한은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이에 아래쪽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는 상인들을 바라보다 잠시 저들이 안쓰럽고 밉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항목을 세분화한 건 상인들이 생각했던 이유 때문이 아니어서였다.
범한은 명씨 가문이 하나로 묶어 놓은 8개 항목 안에서 제일 돈이 될 만한 두 개 항목을 하서비에게 주기 위해 탐색전을 해본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이유는 다른 상인들을 생각해서였다.
이들 상인들은 최씨 가문에서 남긴 6개 항목은 자신들이 가져갈 것이니, 명씨 가문에서 그것에는 대들지 않을 것이란 생각뿐이었다. 한데 잠시 후 하서비는 최씨 가문이 가지고 있던 6개 항목을 모두 꿀꺽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정작 나머지 상인들에는 형편없는 두 개 항목만 남는 것이었다. 사전에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영남 웅씨 가문과 천주 손씨 가문은 이번에 거액의 은전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들은 최씨 가문이 쥐고 있던 노선을 접수하기 위해 칼을 갈아 왔다. 그러니 잠시 후 자심들이 헛수고했음을 알게 된다면, 이들은 분명 큰 손해를 입을 게 뻔했다.
최씨 가문이 무너진 일로 오늘 황실 금고 입찰에 참여한 상인은 세 배나 늘어 있었다. 그러니 범한의 본의는 이들 상인들도 차지할 게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항목을 세분화 한다는 제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의 생각과 달리 그런 그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이는 상인은 없었다.
이들 상인들은 잠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이리도 강경하게 반대를 한 것이리라. 하지만 범한은 선한 마음을 거절당하자 분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런 와중에 옆에 있던 황 내관과 곽쟁이 두어마디 말을 보태고 한바탕 설명을 해댔다. 상인들은 여전히 과거 관례대로 일처리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머지 고관 세 사람 역시 ‘규칙’이란 두 자를 들먹이며 옛 방식을 고집했다. 이에 범한도 결국에는 포기를 했다. 이른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후퇴라고, 가끔씩은 이렇게도 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부사 마해가 고개를 돌려 난처한 기색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범한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관두라는 뜻을 내보였다.
상인들은 매우 기뻐하며 범한을 향해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흠차 대인, 영명하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범한은 상인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생각했다.
‘이따가 울지나 마시오들.’
범한 옆에 앉아 있는 설청은 미소 지은 얼굴로 수염이나 매만지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정당에서 가까운 방과 가장 멀리 있는 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앞서 혼란이 일었을 때 그 두 방에서 가장 평온한 태도를 보여서였다. 설청은 하서비가 범한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범한이 어떻게 그 많은 은전을 준비했으며, 명씨 가문이 어떻게 대응할 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뿐이었다.
입찰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일부 상인들은 벌써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영남의 웅씨 가문의 당주는 하마터면 제일 먼저 울음을 터뜨리는 불쌍한 인간이 될 뻔했다.
높은 돌계단 위에 서 있던 황실 금고 전운사의 관원이 의례에 따라 말을 했다. 그러자 각 방에서는 입찰 가격을 내놓기 시작했다. 가격을 제시할 때는 당연히 기생집에서 아가씨를 고를 때처럼 ‘오십 냥!’, ‘백 냥!’이라고 소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정에서 진행하는 일이니 그에 합당한 규율을 따라야 했다. 이에 입찰에 참여하려면 상단은 의례를 진행하는 관원의 말이 떨어진 후 먼저 작년 이윤과 올해 예상 시세를 고려해 대동하고 온 나이 많은 대행수와 함께 꼼꼼하게 계산부터 해야 했다. 그런 후 종이 위에 정한 액수를 정확히 기입한 후 소가죽 문서 봉투에 넣고 봉했다. 그리고 그것을 전운사 관원에게 전달하면, 관원은 정당 왼편에 있는 응접실에 소가죽 봉투를 건넸다.
상인은 총 세 번에 걸쳐 값을 제시할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제시한 호가(呼價)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 호가 경쟁에서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면, 다음번에 더 높은 가격을 써낼 수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에 제시한 가격을 가지고 낙찰자를 결정했으며, 매우 간단하게 최고가를 쓴 사람이 낙찰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낙찰 받은 상인은 결과가 매우 흡족할 수도, 매우 못마땅할수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4할이나 되는 계약금을 응접실에 가져다 내야 했다.
410화
응접실에는 전운사 회계 담당자와 경도 호부에서 온 장부 내역을 계산하는 나이 많은 관원이 있었다. 이들 중 호부 관원은 상단이 낙찰 받은 항목 및 낙찰 받은 상단이 건넨 은표를 조사했다. 이는 바보처럼 은전으로 가득 채운 십여 개의 상자를 직접 들고 와 낙찰 금액으로 내는 이가 수 년 간 없었기 때문인데······.
* * *
이 점에서 보면, 황실 금고의 입찰은 사실 기생집에서 기생 경매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황실 금고에 있는 기생은 몸값이 비쌌을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이는 상단에게든, 관리들에게든 낯선 광경은 아니었다.
이 순간 저택에 있는 관원들은 사방을 바삐 오가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각 상단에게서 건네받은 문서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애당초 가능성은 극히 적었지만, 그래도 감찰원 관원들은 부정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이 모든 걸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오가고 있는 건 북쪽으로 보내는 주류 관련 입찰 문서였으며, 세 번째 가격 제시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오늘 영남 웅씨 가문에서 온 사람은 당주인 웅백령이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다른 이가 앞서 두 차례 낸 가격을 보고 있었다. 그의 안면부 근육이 살짝 수축되며 있는 것이 눈물은 나지 않지만 그래도 울고 싶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영남의 웅씨 가문은 경국 남쪽에서 상업을 해오던 곳이라 지리적으로, 기회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북쪽까지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넓힐 기회가 없어 사업 범위를 넓히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최씨 가문이 몰락해 다른 상인들에게도 북쪽 판매권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자 웅백령은 이번 입찰에서 필승의 의지를 다지고 있던 터였다. 이에 앞서 범한의 항목 세분화 제안에 가장 크게 반대한 것도 그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자기 혈족들에게 은전을 충분히 마련해두라고 일렀지만 앞서 두 차례 호가에서 그는 이미 압도된 상태였다.
화가 치밀었는지 웅백령의 양 눈에는 붉게 핏발이 서 있었다. 이번 입찰에서 판매권을 따가지 못한다면, 이는 단순히 올해 돈을 덜 벌게 되는 문제만 발생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가문이 명씨 가문이라는 거대한 산을 피해 북쪽으로 가겠다는 계획이 늦춰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약속을 깨고 감히 자신이 노리고 있던 판매권을 빼앗아간 사람이 뼈에 사무치게 미웠다. 하지만 미운 마음이 불타오르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두려운 마음에 경계를 했다. 왜냐하면 그자의 뒷배가 흠차 대인이어서였다. 한데 정작 문제는······ 그자가 대체 어디에서 그 많은 돈을 가져왔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을열 여섯 번째 방!”
그가 맨 뒤에 있는 조용한 방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하서비 일행은 줄곧 조용히 있었지만 사업권을 빼앗아가는 데 매우 악랄한 수단을 동원했다. 가장 큰 문제는 대체 누구의 도움을 받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류의 북쪽 판매권의 1년 이문이 얼마나 되는지 정말이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자기 가문이 제기할 수 있는 금액이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 앞서 두 차례 값을 써낼 때 매번 자신이 제시한 것보다 바로 위의 가격을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웅백령이 순간 좌절감에 휩싸여 생각했다.
‘대를 이어 장사를 해온 내가 강도 두목만도 못하다는 건가?’
옆에 있던 나이든 대행수들도 패색 짙은 얼굴로 그를 일깨워주었다.
“어르신, 그만 하시지요. 가격을 더 높였다가는······ 이문이 남지 않습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웅백령은 어느 순간부터는 잔뜩 성이 난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웅씨 가문이 이번 입찰을 통해 원했던 건 돈보다는 장사를 하는 길을 뚫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강도에게 맞서기로 결정했다.
“이 가격을 써 넣으시게.”
웅백령이 수신호를 보냈다.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결정을 내린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강도짓 하던 녀석이 훔쳐온 은전이라 아까운 게 없는 건지······ 그래도 밑지고서라도 내가 하려는 장사를 뺏을 필요는 없겠지.”
정원은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다. 세 번째 호가 경쟁이 끝나 이제는 그 누구도 이번 입찰에 참여할 수 없었다. 모두의 눈은 영남 웅씨 가문과 을열 여섯 번째 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황 내관과 곽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범한을 슬쩍 보기는 했다. 하지만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 입찰에 오른 건 작은 항목에 불과해서였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건, 범한이 부수입을 좀 챙기더라도 명씨 가문과 자신들의 이익만 해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관원 둘이 각각 두 개의 방에서 소가죽 문서 봉투를 받아다가 조용히 응접실로 가져갔다.
모두 긴장 속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이번 16개의 입찰 항목 가운데 가장 돈이 되는 항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택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을열 여섯 번째 방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건 알아채기 시작했다. 이에 사람들은 을열 여섯 번째 방이 사업권을 따내러 온 것인지, 아니면 흠차 대인을 대신해 낙찰 가격을 올리기 위해 온 것인지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 * *
“을열 여섯 번째 방, 하씨 가문, 37만 냥으로 낙찰······.”
돌계단 위에 서서 의례를 진행하는 전운사 관원이 무표정하게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음성만큼은 대단히 감상적이었다. 심지어는 마지막에 낙찰이란 단어를 말할 때는 사뿐하고 경쾌하게 내뱉어 그가 마치 연기를 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해주었다.
정원에 순식간에 쥐죽은 듯한 고요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란 마음을 수습한 사람들이 하늘이 무너질 듯한 소리를 내며 놀라워했다.
“37만 냥이라니! 북쪽에서 주류나 파는 건데······.”
예전 수익으로 계산을 해본다면, 이는 분명 손해였다. 영남의 웅씨 가문이 내놓은 금액은 30만 냥으로, 자신들이 가진 돈을 다 걸고 호가 경쟁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영남의 웅씨 가문은 을열 여섯 번째 방에게 지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일로 상인들은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이 알게 되었다. 을열 여섯 번째 방의 하서비는 흠차 대인의 부탁으로 가격을 올리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사업권을 따기 위해 자신들과 제대로 겨루러 온 것이라고 말이다.
순간 사람들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한편 그 순간 영남 웅씨 가문의 방에서는 끄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의자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진 것만 같았다.
그러자 모두들 겁에 질리고 놀란 마음에 소리가 들려온 방 쪽을 바라보았다.
웅씨 가문의 주인인 웅백령이 기듯이 바닥에서 일어나 찻잔에 든 식은 차를 입으로 들이붓고는 숨을 헐떡이며 입을 뗐다.
“강도 자식······ 염병할! 37만 냥이나 쓰다니. 강도는 역시 강도군. 장사하러 나서 놓고도 비적 티를 하나도 못 벗다니. 역시 악랄해!”
중당 한가운데에 놓인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던 범한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높은 가격이라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앞서 두 차례 가격을 써낼 때 하서비는 웅씨 가문을 찍어 누를 수 있는 아주 적당한 선에서 가격을 불렀었다. 그런데 막판에 무려 7만 냥이나 더 높여 부르다니.
범한에게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의 인내력을 벗어난 범위라 그런지, 범한은 속으로 탄식을 내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 가격을 부른 게 하서비의 결정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모두 을열 여섯 번째 방에 넣어 둔 나이 많고 교활한 호부 관원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경도 아버님 쪽에서 몰래 보내준 전문가들로, 이들이 영남의 웅씨 가문의 결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때문이었다.
* * *
머지않아 을열 여섯 번째 방에서 비단 함이 나왔다. 비단 함은 응접실로 건네져 심의와 검사를 거쳤다. 15만 냥에 달하는 은표가 확실했다. 태평 전장에서 발행한 것으로 인감도 위조된 것이 아니었다. 영감이 속이지 않은 것이었다.
이제 모두들 조용한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상인 노릇하는 강도가 앉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비적 같은 상인 녀석은 인정사정없이 황실 금고 판매권을 강탈해 가는 중이었다. 놈은 피비린내가 풀풀 나는 은전으로,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은전을 가지고 사람들을 때려 부수는 중이었다.
단지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강도가······ 대체 얼마나 많은 판매권을 강탈해 갈 속셈인지만 아직 정확히 모를 뿐이었다.
이어진 상황은 명씨 가문 이외의 모든 이들을 절망으로 몰아가 버렸다. 강남 수채 대두목 하서비가 강도의 풍격을 완벽하게 발휘한 것이었다. 하서비의 손에 쥐어진 은표는 칼이 되고, 절묘하게 책정된 가격은 주먹이 되어, 그에게 맞선 상인들을 피로 얼룩진 길 위에 일렬로 늘어놓아 버렸다. 돌계단 위에 서 있는 관원이 의례를 진행할 때마다 비단 함은 계속해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일순간 착각에 빠져들었다. 무수히 많은 은표가 공중에 아름답게 흩날리는 가운데 큰 칼을 뽑아 든 하서비가 ‘나 보다 돈 더 많은 놈 있어?’라고 음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두 시진이 지났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항목 하나를 제외하고 하서비가 나머지를 낙찰 받았다. 그중에는 최씨 가문이 북쪽에서 가지고 있던 노선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그는 웅백령을 좌절시킨 데서 그치지 않고 천주 손씨 가문을 새하얗게 질려버리게 만들었으며, 나머지 상단은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로써 하서비는 그들에게 오늘 입찰 경쟁에 참여한 게 아니라 살인강도를 만나러 온 기분을 맛보게 해주었다.
이쯤 되자 상인들은 그제야 범한이 처음 제안했던 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후반부에 아직 중요한 항목 열 개가 남아 있기는 했다. 그래서 만약 판매권을 더 잘게 세분화 했더라면, 아무리 명씨 가문이 그 열 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에게도 몇 개는 꿀꺽 삼킬 수 있는 기회는 있었을 텐데 라고 말이다.
차라리 명씨 가문과 체면불고하고 싸울지언정,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강도와 맞붙지 말걸. 강남 상인들은 이제야 절실하게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 사이 범한은 평온한 표정으로 팔걸이의자에 앉아 설청과 이런 저런 이야기나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도 속으로는 하서비가 질투가 나 죽겠는 판이었다.
‘은전으로 사람을 깨부수다니. 이런 깜찍하게 재밌는 게임에 내가 분장을 하고 직접 나설 수 없다니! 하서비는 기분 째지겠군!’
깜짝 놀라 한동안 멍하니 있던 황 내관과 곽쟁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똑같은 생각을 했다.
‘범한 이놈······ 대체 그 은전을 어디서 가져온 것이냐? 아무리 봐도 경도에 있는 호부 상서가 깨끗한 것 같지는 않구나!’
다섯 번째 입찰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번 것은 북쪽으로 보내는 유리 제품으로 원래 최씨 가문이 갖고 있던 판매권이었다.
을열 여섯 번째 방의 방문이 다시 열리며 소가죽으로 된 문서 봉투가 전달되었다.
강도 놈과 놀아줄 생각이 싹 달아난 상태였던 상인들은 강도가 어서 배불리 먹고 물러나기만을 그냥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줄곧 조용히 있던 갑열 방 첫 번째 방의 문이 열렸다. 명가가······ 영문을 모르겠지만, 계획보다 앞서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낙찰을 바라는 건 아니다. 하나 시간은 끌어야 한다. 적어도 오늘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해.”
명청달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옆에 있는 아들에게 말을 이어 갔다.
“상대방이 이미 기선을 잡았다. 그러니 우리로서도 조금 더 조심해야겠지. 저 자에게 대응할 방법을 마련하려면 하룻밤만이라도 벌어야 한다.”
명란석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을열 여섯 번째 방이 지닌 은전 양을 걱정 중인 아버지께서 하룻밤만이라도 은전을 더 조달할 시간을 확보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명청달은 계속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내가 왜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강도 때문에 이렇게나 불안해하는 걸까? 그리고 저 하서비라는 놈은 어째서 볼수록 눈에 익은 것 같지?’
411화
명씨 가문에서 값을 써냈다는 소식에 범한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대방이 이렇게나 빨리, 그것도 노련하게 대응에 나설 줄은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범한의 속마음은 실제로는 매우 평온했다. 모든 게 예상했던 범위 내에서 흘러가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본 명씨 가문은 도살장에 끌려 나온 돼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리 눈앞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노련하고 심계가 깊은 명청달에게는 괜찮은 대응법이 있을 게 뻔했다.
황 내관과 곽쟁은 명씨 가문이 나섰다는 소식에 사기가 진작되었다. 이에 한동안 가만히 내버려두었던 어깨를 앞으로 쭉 내밀고 잔뜩 기대한 사람처럼 정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한편 설청은 여전히 평온한 마음으로 찻잔에 담긴 차나 음미했다.
다섯 번째 입찰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이는 원래 명씨 가문이 노리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명씨 가문이 이번에 직접 값을 써낸 건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하서비 일행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꺾기 위해서였다. 즉,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자 명씨 가문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입찰 진행을 늦추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번 호가 경쟁은 앞서 하서비와 영남 웅씨 가문이 살벌하게 칼날을 맞부딪히며 첨예하게 맞섰던 것에 비하면 정말 무미건조하고 재미없었다. 심지어는 바로 앞서 진행되었던 호가 경쟁과 비교해도 별 볼 일이 없었다.
명씨 가문에서 매우 낮은 가격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대단히 성의 없게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명청달 본인은 정작 그러한 점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아들과 가문 대행수들을 바라보며 꾸물거리며 시간이나 끌 뿐이었다.
명씨 가문은 가격을 써낼 때마다 오랫동안 시간을 끄는 공력을 십분 발휘했다. 계산을 할 때에는 초보자처럼 서투른 행동을 내보였고, 가격을 적어 낼 때는 아가씨처럼 부끄러워했으며, 소가죽 봉투를 전달할 때는 나이가 많아 몸이 불편한 노인처럼 느리게 행동했다.
어찌 되었든 시간이나 끌고 보자는 전략이었다. 주인과 회계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어찌나 호흡이 척척 잘 맞던지. 그들이 결정을 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잔뜩 조바심이 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니었다. 돌계단 위에 서 있던 의례 진행자, 전운사 관원도 다섯 번째 입찰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느새 하품이나 하고 있었다.
하서비는 명씨 가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부른 상태였다. 하지만 세 번의 가격 제출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탓에 그 누구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강남 상인들도 무료했는지 차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들 늙은 여우들에게도 명씨 가문 어르신의 속셈이 무엇인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하루 동안에는 다섯 번째 입찰까지만 진행하고 마치도록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하늘의 해도 어느새 처마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명씨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뭉그적거리며 모든 일을 천천히 진행시켰다. 정원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품하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왜 이 정원 안에서는 모든 게 다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행동했다.
명씨 가문은 급할 게 없었다.
강남 상인들도 급할 게 없었다.
황 내관과 곽쟁도 급할 게 없었다.
강남 총독 설청은 더더욱 급할 게 없었다.
을열 여섯 번째 방의 강도가 이런 뜸들이기 작전에 초조하고 불안해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탐색전을 지켜보고 있던 범한의 미간에는 은근하게 초조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명씨 가문의 악독하고도 후안무치한 수단에 한껏 감탄하고 있었다.
해가 점점 서산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만큼 황실 금고 저택 내부의 그림자도 아가씨의 치마폭처럼 길게 드리워져갔다. 돌계단에서 풀 한포기도 찾지 못한 작은 새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고는 무언가 잔뜩 불만스러운 듯 꾸꾸, 하고 두어 번 울고는 날아가 버렸다.
‘댕-’,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황실 금고의 입찰이 성공리에 막을 내렸음을 알리는 폭죽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다섯 번째 항목의 입찰에서 세 번째 호가 경쟁이 이제 막 끝나서였다. 하서비가 다시 ‘힘겹게’ 명씨 가문을 이기고 북쪽으로 보내는 유리 제품의 판매권을 낙찰 받았다. 그리고 이로써 황실 금고 봄 입찰의 첫째 날이 겨우겨우 막을 내렸다.
정원에 있던 상인들이 “휴-”,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쭉 뻗었다. 그들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식은땀까지 닦아냈다. 다행히 오늘 마지막에 명씨 가문이 나서주어서 억지로라도 시간을 끌어주었길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초반부터 몰아치는 을열 여섯 번째 방의 기세에 눌려 기름기가 좌르르 도는 황실 금고의 16개 판매권 중 이문이 가장 적게 남는 몇 개만 빼고 나머지는 하서비에게 몽땅 빼앗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 내관과 곽쟁이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웃음을 내지었다. 하서비가 손을 쓴 건 그들로서는 확실히 의외였지만, 마지막에라도 상대방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린 건 확실히 다행이었다. 명씨 가문이 내일을 위해 밤새 단단히 준비하고 나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있던 범한이 고개를 들어 저택의 높은 담벼락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가에 남아 있는 붉은 빛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석양은 보이지 않았다.
저택 내부의 청소가 시작되고 봉인할 것은 봉인이 되었다. 상인들이 가져 온 은표와 모든 도구들은 굳이 밖으로 들고 나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로 편의를 위해서였고, 둘째는 안전을 위해서였다. 황실 금고 저택은 오늘 저녁부터 강남로, 감찰원, 전운사, 소주부, 이렇게 네 개 관아가 연합해 방범을 서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황실 금고 저택은 세상에서 가장 삼엄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가장 안전한 곳이 되는 것이었다.
사병들이 복도 옆으로 나 있는 방과 응접실 외부에 봉인 종이를 붙였다. 그 사이 상인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정원에서 삼삼오오 모여 한담을 나누었다. 그러다 명씨 가문의 주인과 작은 주인이 갑열 첫 번째 방에서 나오자 서둘러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모두들 작은 소리로 말을 나누었지만 주요 내용은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강도에 대해서였다.
하서비는 자기 수하들을 데리고 황실 금고 저택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담벼락 아래로 가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곳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상인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하서비가 있는 곳을, 또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들은 저 강도들이 쓴 수단은 생각하면 할수록 진절머리가 났다.
바로 이때 정당에서 고관 네 사람이 걸어 내려 왔다.
“황 내관께 인사 올립니다.”
“설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작은 범 대인, 이놈도 좀 먹고 살게 해주십시오!”
상인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고관 네 사람을 동시에 에워싸고는 인사를 올리고 앓는 소리를 해대는 통에 순간 분위기는 떠들썩하게 변해 버렸다. 그러자 범한도 순간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살짝 노기에 차 있는 영남 웅씨 가문의 웅백령을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곧바로 다시 비웃듯이 말을 이어 갔다.
“아직 항목이 11개나 남아 있는데, 뭘 그리 조바심을 낸답니까!”
그러자 각 집안의 대표들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남은 11개 항목 중 명씨 가문이 묶어서 가져가는 게 모두 8개나 되는데, 그것을 빼면 자기들이 먹을 게 있기는 하냐며 속으로 앓는 소리를 해댔다.
범한이 다시 탄식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항목을 너무 적게 나누어 놨어요. 그러니 누군가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 조정의 규칙이다 보니 나 역시 달리 방도가 없군요.”
이 말을 듣자마자 사람들은 범한의 처음 제안을 떠올렸다. 그리고 범한이 내뱉은 ‘규칙’이란 두 글자에 절로 두 눈이 반짝였다. 웅백령이 갑자기 헤헤헤 웃으며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그 규칙이란 게······ 결국은 사람이 정하는 거 아닙니까.”
상인들은 오늘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내일 입찰이 진행되는 항목에 갈증이 생길 수밖에.
사람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고 있던 명청달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흠차 대인이 명씨 가문이 다른 상인들과 몫을 나누어야 한다고 알게 모르게 부축이고 있어서였다. 이에 속으로는 싸늘하게 웃고 있던 그가 겉으로는 담담한 미소를 내보이며 황 내관 쪽을 은근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뜻을 이해한 황 내관이 미소를 지으며 중간이 껴들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황궁 대표로 온 내관이 항목을 세분화 하자는 건의에 동의하자 상인들은 이제 성사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기뻐했다. 한데 황 내관은 곧바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안타깝게도 조정의 규칙을 따라야 하니, 누가 함부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는지······ 그 일은 일단 경도로 돌아가서 황태후마마와 황제 폐하 앞에서 상세히 보고부터 해야 하는지라. 그러니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은, 내년이 올해 보다 나을 거란 말뿐이군요.”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들은 얼굴에 난처한 기색을 한껏 드러냈다. 그리고 속으로는 저놈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았다고 한껏 욕을 퍼부었다.
그동안 범한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명씨 가문 쪽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에 명씨 어르신이란 자가 오늘 갑작스런 변고에 직면했는데도 정신만큼은 멀쩡한 상태이고, 정서적으로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빠른 상황 판단력에 정확성까지 겸비하고 있다니. 범한은 무언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씨 가문을 궁지로 몰아넣어 정신을 못 차리게 할 생각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수를 더 동원해야 할 터.
* * *
황실 금고를 봉인하는 작업도 드디어 끝나고, 병력 배치도 어느새 마무리가 되었다. 황실 금고 저택의 대문이 오늘 두 번째로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거리의 맑은 공기가 저택 안으로 밀려 들어와 사람들에게 정신이 확 들도록 해주었다. 그러자 모두들 돌아가 내일 입찰과 관련한 상의를 해보고 내일 다시 도전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명씨 가문이든, 범씨 가문이든 상관 말고 판매권 몇 개는 획득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거상들은 범한의 말 몇 마디에 조정 내 어느 세력의 뜻을 알아챈 상태였다. 바로 명씨 가문에게서 이득이든, 세력이든 가져오란 뜻 말이다. 이에 정면충돌은 꿈도 꾸지 못했던 상인들은 명씨 가문의 몫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영남의 웅씨 가문, 천주의 손씨 가문을 필두로 몇몇 큰 상단의 우두머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괴이한 웃음을 내보이며 저녁에 강남거에서 함께 식사나 하자고 약속을 잡았다.
명씨 가문의 목표물을 빼앗아오기 위해 몰래 상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들은 명씨 가문 어르신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그들의 눈에 명씨 가문의 어르신이 흠차 대인과 대화 중인 게 들어왔다. 노인과 젊은이가 웃는 얼굴로 매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관리와 상인은 허위(虛僞)의 정점을 찍는 직업군 아니던가. 이런 그들에게 보여주기 신공은 너무나도 자연스레 펼칠 수 있는 것이라 그런지 모두들 이 장면을 기이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412화
상인들이 자리를 떠나려 할 때였다. 흠차 대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줄곧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하서비 일행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에 상인들은 문밖을 나서려다 멈춰 서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범한이 차분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하서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앞으로 나란히 모아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신호를 보내며 동시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 선생, 오늘 큰 활약을 했더군요.”
하서비가 웃으며 두 손을 모으고 주변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모두 여러분들께서 양보해주신 덕분이지요.”
상인들은 하서비가 미웠다. 하지만 하서비는 암흑가 사람이니 최대한 밉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자는 너무나 명확히도 흠차 대인의 심복 아니던가. 이에 상인들은 하서비 면전에서 “재야에 은둔 중이던 하 선생이 갑자기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하였군요.”, 등등 상찬의 말을 잠시 늘어놓았다.
명청달은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난 적을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바라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하 당주, 왜 갑자기 장사에 흥미를 갖게 된 것입니까?”
그러자 장내에 적막이 흘렀다.
하서비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 만에 서서히 고개를 들어 명씨 가문 주인을 바라보고는 웃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표정으로 입을 뗐다.
“하 아무개, 오랫동안 강호에 있기는 했으나 본래 대대손손 장사 하는 집안의 자손입니다. 이에 제 대에 와서 보탬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그래요?”
명청달의 눈초리에 잡힌 주름이 더 진해지더니 그가 피곤한 기색으로 물었다.
“하 당주도 상인 가문 출신이었군요. 한데 어디에서 장사를 했나요? 옛날에 춘부장님과 내가 만나 뵈었을 수도 있겠군요.”
이 광경을 지켜보던 상인들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하서비의 집안에서 대체 무슨 장사를 했을지 잔뜩 궁금해 했다.
하서비는 평소 악몽에서나 보던 명청달의 얼굴을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그의 입가가 살짝 실룩이더니 이내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만나 뵌 적 있겠지요. 제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니까요. 명씨 어르신, 설마 저를 못 알아보신 것입니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하서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웅백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해서 귀를 팠고, 명청달은 살짝 얼이 나간 채로 앞에 있는 하서비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서비는 왜 아까 전에 흠차 대인이 그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한 건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명씨 가문 사람 앞에 다시 서는 건 최근 몇 년 동안 그가 가장 강렬하게 바랐던 꿈이었다. 꿈을 이룬 지금, 하서비의 감정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격앙되어 있었다.
비록 소맷자락에 숨은 오른손이 살짝 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서비가 명청달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느릿느릿하게,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큰형님, 십여 년 동안 못 봤다고 설마 이 일곱째를 못 알아보시는 겁니까?”
하서비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였다니!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명씨 가문의 진짜 계승자, 그리고 결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던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라니!
모두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하서비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무슨 지옥에서 살아 돌아 온 무서운 귀신이라도 보는 것만 같았다. 또 어떤 이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괴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비록 그 누구도 왈가왈부하며 끼어들 수 없었지만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과 여기에 있는 명씨 어르신이 일곱째 공자를 죽였다는 건 누구든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아서 강남 수채의 대두목까지 된 거지?
명청달은 앞에 있는 하서비를 얼빠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얼마나 오랫동안 주시하고 있었는지 모를 무렵, 느닷없이 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하서비의 얼굴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한 때문이었다.
그 옛날, 풋풋하고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형제를 채찍으로 독하게 때렸었는데. 명청달이 하서비에게서 원한과 복수심으로 가득했던 동생의 얼굴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버지!”
명란석도 순간 놀라움과 두려움이 한가득 밀려왔다. 이에 그는 바보처럼 멍하니 하서비를, 소문으로만 듣던 숙부를 바라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몸을 휘청이며 쓰려지려 하자 그가 소리치며 서둘러 아버지를 부축했다.
명란석에게 오늘 황실 금고 저택은 무슨 묘지 같았고, 절대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 같았다. 이에 그는 갑자기 창백하게 늙어버린 아버지를 부축해 가문 일원들을 이끌고 밖으로 걸어갔다.
현장에 있던 상인들은 놀란 얼굴로 하서비를 주시한 채 저들끼리 작은 소리로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명씨 가문 사람들이 대문 앞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모두의 생각대로 명씨 가문의 주인 명청달이 아들의 부축을 풀고 억지로 몸을 세우고 뒤돌아섰다.
명씨 가문 주인의 낯빛은 창백하지만 강력한 자기 통제력으로 잠시 평정심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가 정원에 있는 하서비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 당주의 말이 웃기군요. 내 불쌍한 일곱째 동생은 불행히도 이미 십여 년 전에 병사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이 늙은이의 마음을 가지고 놀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요.”
상인들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명씨 가문 어르신이 방금 전 한 말은 다 의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놀라 빈틈을 보인다면, 그리고 이 소식이 명씨 가문 사람의 반박도 없이 사방으로 소문이 되어 퍼진다면, 일이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돌계단 위에 서 있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명씨 가문의 늙은 주인을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 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군. 그래도 대단하단 말이지!’
명청달이 오랫동안 숨기고 있던 사실을 가지고 갑자기 공격했는데도 동요하지 않자 범한은 살짝 안타까웠다. 하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 때문에 명청달에게 감탄했다.
하서비의 진짜 신분은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비밀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명씨 가문에서는 명칠 공자가 아직 살아 있는 걸 모르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하서비는 강남 수채의 노(老)채주에게 구조된 후 이곳의 대두목이 되어 명씨 가문과 거래를 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니 만약 명청달이 일찌감치 하서비의 신분을 알았더라면, 그는 벌써부터 명칠 공자에게 대적할 방법을 생각해 두었을 것이다.
오늘 명칠 공자가 유령처럼 나타났는데도 명씨 가문의 현 주인은 살짝 허둥대기만 할 뿐이었고, 겉으로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과연 경국 제일 부자다운 그리고 강남 거대 가문의 주인다운 심후한 내공이었다.
명씨 가문이 비록 경도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는 했어도 하서비에 관한 사실까지는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범한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던 건 작년 가을에 세운 올해 계획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명씨 가문을 겨냥한 연구에 착수해 강남이란 철옹성을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을 찾아낸 덕분이었다.
물론 이는 모두 감찰원 4처 수장인 언빙운의 공이었다. 즉, 언빙운 공자의 자료 속 정보를 분석하고, 치밀하게 탐색해 내는 능력 덕분이었다. 줄곧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감찰원 고위 관료가 하서비 신분과 관련한 가장 은밀한 정보를 성공적으로 찾아낸 것이었다.
만약 범한이 사전에 계획의 토대를 다질 때 언빙운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범한은 이번 강남 행에서 이렇게나 순조롭게, 또 계획한대로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명씨 가문 일행은 놀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조용히 황실 금고 저택 문을 나섰다. 그들이 병사들이 봉쇄한 길 입구를 나서자 마차는 이미 대기해 있었다. 명씨 가문 일행은 마차를 타고 성 밖에 있는 명원(明園)으로 돌아갔다. 한데 명칠 공자의 갑작스런 부활 소식에 오늘 밤 명원에서 어떤 소란이 일지, 명씨 가문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범한은 미소 지은 얼굴로 대저택 문 앞에 서서 황혼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명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한데 범한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관원들과 강남 상인들은 저도 모르게 오싹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흠차 대인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기는 했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싸늘한 냉혈한처럼 보여서였다.
이에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하서비에게 향했다. 그들은 강남 수채의 도적 두목과 여러 해 전에 죽었다던 명씨 가문의 일곱째 도령이 한 사람이란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있었다. 하서비의 뒤에는 흠차 대인이 있다. 그러니 명씨 가문의 어마어마한 유산과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과거 유언을 둘러싸고 언젠가는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명씨 가문에서는 관련 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절대 아니라고 맹세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일은 격화될 게 뻔했다.
그렇다면 이들 강남 사람들은 그 싸움에서 어떤 득을 보게 될까?
영남의 웅백령과 천주의 손길상이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저녁에 강남거에서 만날 때······ 한 사람을 더 불러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 하서비의 신분은 오늘 갑자기 밝혀진 터라 강남 상인들은 순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하서비에게 손을 내미는 건 너무 경솔한 행동처럼 생각되었다. 다시 말해, 하씨 성의 명칠 공자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들로서는 감을 잡지 못한 것이었다.
하서비가 무슨 생각 중인지는 범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언빙운이 자신에게 정해준 행동 수칙만 알 뿐이었다. 강남에서 범한은 반드시 좌와 우로 나누어 행동을 해야만 했다. 즉, 명씨 가문은 치고, 나머지 상인들에게는 유화책을 펴야 했다.
오늘 하서비가 이리 많이 낙찰을 받도록 한 건 강남 상인들이 연합해 내일 명씨 가문과 경쟁을 벌이도록 은연중에 압력을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하서비에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신분을 드러내도록 한 건 강남 상인들에게 이면에 숨은 음모와 기회를 포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본디 위험과 기회는 쌍둥이처럼 동시에 찾아오고, 상인들은 태생적으로 모험 정신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범한은 하서비에게 수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하서비가 활짝 웃는 얼굴로 웅백령과 손길상 앞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살짝 경악한 눈빛을 내보였지만 그래도 하서비는 그들에게 나지막하게 몇 마디를 건넸다. 상인들 모두 작은 소리로 웃는 걸 보니 매우 재밌는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친 이들은 각자 흩어져 황실 금고가 있는 거리를 떠났다.
범한이 몸을 돌려 설청과 황 내관에게 두어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런 후 다시 곽쟁을 잠시 바라보고는 호위들의 엄호를 받으며 황실 금고를 떠났다. 범한은 자리를 뜨면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하서비는 상인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잠시 후 강남거에서의 모임에 분명 하서비가 앉을 의자도 마련되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413화
명씨 가문이 손해를 보게 된 건 범한이 몰아치듯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씨 가문이 기대고 있는 황 내관과 곽쟁은 동요하지도, 심지어는 현 상황을 마음에 두지도 않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설청 총독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후 작은 소리로 몇 마디 건네었다.
그러자 설청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 후 설청은 뒷짐을 지고는 가마에 올라타고 황실 금고를 떠났다.
이제 저택 앞에 남아 있는 사람은 황 내관과 곽쟁 어사 두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강남 총독의 가마가 골목길을 돌아 사라지는 걸 보고 있었다. 한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그들의 낯빛에 잠시 어둠이 어렸다.
곽쟁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저 총독 대인은 일을 너무 소심하게 처리하는군요. 연명 상소를 올리는 게 뭐 그리 몸을 사릴 일이라고.”
그러자 황 내관이 껄껄 웃었다.
“곽 대인, 이 세상에 대인처럼 도의를 어깨에 짊어지고 굳건히 나아가는 자가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작년에 형부 대당에서 대인께서는 권력에게 굴하지 않고 범한을 엄히 심판하셨지요. 대인이 그리 하셔서 황궁에서도 상당히 좋아하셨답니다.”
곽쟁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일은 언급하지 말아주시지요.”
그러자 황 내관이 갑자기 소리를 낮추었다.
“설청 그 사람은 황제 폐하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습니다. 관리들 사이에서는 둥글둥글하게 행동하며 자기 생각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있고요······ 이번에 범한이 하서비를 몰래 움직여 판매권을 빼앗도록 한 것과 관련해 대인은 어사이시니 풍문도 상서로 올리실 수 있지요. 하나 실질적 증거를 댈 방도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설청 대인 입장에서는 연명 상소를 올리는 데에는 참여할 수 없는 겁니다. 앞서 물어본 것도 그냥 그의 태도를 탐문해 보기 위해서일 뿐이었고요. 아시다시피, 우리가 보고 있는 곳이 원래는 강남이 아니지 않습니까.”
곽쟁이 아주 옅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자연스레 그리될 수밖에요. 관원은 장사를 해서는 안 되고, 조정에서 오래 전부터 그와 같은 규정을 정해 운영해 왔지만, 대인들 중 지킨 사람이 있는 줄 아십니까? 하서비가 범한의 졸개라는 증거를 가지고 조정에 상소를 올려도······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는 웃어넘기시고 말 것입니다. 그동안 개입을 하지 않으셨을 뿐더러, 또 현재 범한에 대한 황제 폐하의 총애가 깊으시니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곽쟁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강남의 일은 어떻게든 경도에서 결판을 내야 합니다. 황 내관 대인, 범한이 그 많은 은전을 어디에서 조달했을까요? 은전이 어떻게 강남까지 왔는지 알아내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그 은전이 가득 들어차 있는 방은 찾아내야겠지만······. 어쩌면 지금쯤이면 범씨 가문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을지도 모르겠군요.”
황 내관이 흐흐흐, 하고 음험하게 웃었다.
“황궁에 계신 몇몇 주인님들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계십니다. 강남은 흠차 대인이 이리저리 헤집어 놓도록 내버려 둡시다······ 이틀 후면, 어쩌면 경도에서도 호부 조사에 나설 테니까요.”
* * *
범한은 화원(華園) 서재에 있는 중이었고, 지금 책상 위에서 아래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붓을 쥐고 있는 작은 손이 있었다. 범한은 그 작은 손이 써내려가고 있는 글자들을 보고 있었다.
이 나잇대 아이 중 3 황자는 글씨를 제법 잘 쓰는 축에 속했다. 3 황자의 글자체는 아름다웠고 유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골격이 살아 있는데도 획이 둥글고 매끄러웠다. 힘 있게 써내려간 글자체는 그 힘이 은근하게 드러나 있었다. 글자체로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에 범한은 3 황자가 과거 자신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에는 항상 부끄러운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는 실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저 나이가 어려 여러 일에서 사리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강남에서의 업무 외에 범한이 가장 중시하고 있는 일은 태학 사업이란 직책이었다. 바로 3 황자의 학업과 수양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3 황자의 교육과 관련해, 요 며칠 설청의 호의로 강남에서 유명한 훈장들이 3 황자에게 수업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3 황자는 그들을 모두 문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이 소식은 소주로 돌아온 범한에게도 전해졌다. 범한은 이를 듣고 벌컥 화를 내더니, 3 황자를 데리고 강남 서원으로 찾아가 그 훈장들에게 예를 갖추어 사과를 하도록 했다. 그런 후 좋은 말로 훈장들을 구슬려 그들에게 다시 화원으로 찾아와 3 황자를 가르치도록 했다. 거처로 돌아온 후 범한은 서재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3 황자의 손바닥을 매섭게 때려주었다.
매가 손바닥 위로 떨어질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특히나 3 황자의 손바닥 위로 떨어지고 있다 보니 자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의기양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설청이 서둘러 찾아왔지만, 범한이 이미 손바닥을 다 때리고 난 후였다. 3 황자는 눈가가 시뻘겋게 부은 채로 고분고분하게 있었다. 이 모습에 설청은 저도 모르게 마음의 동요가 크게 일었다. 범한이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정한 3 황자의 스승이라고는 하나, 이리도 인정사정없이 매질을 하다니······ 어린 범 대인의 담력이 커도 어지간히 큰 게 아니었다.
한데 이 일이 널리 알려지자 강남 문인들은 범한은 과연 문인의 빛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줄곧 고공행진 중이던 범한의 명성은 스승과 도를 중시하는 문인들에 의해 더 아름답게 빛나게 되었다.
한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범한이 3 황자를 엄하게 교육한 건 황제 폐하의 뜻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의 귀빈의 정중한 부탁을 저버리기 싫어서였다.
“마마, 그 정도면 됐습니다.”
범한이 책상 위에 고개를 숙이고 진지하게 글자를 써 내려 가고 있던 3 황자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스승님, 아직 두 장 더 써야 합니다.”
3 황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범한이 이렇게나 부드럽게 나올 줄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범한이 웃으며 답해주었다.
“아직 손바닥이 아프시지요? 내일 이어서 마저 쓰십시오. 오늘은 일단 쉬시고, 이제 그만 나가서 노시지요.”
범한이 3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는 과하게 친근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이치대로라면, 스승이라 함은 높이 솟은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 함부로 웃거나 말을 건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데 하필 3 황자의 신분으로 이런 일을 당해서 그런지, 아니면 황궁 안에서 자란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접촉 결핍증에 걸려서인지 몰라도, 요 어린 녀석은 빙그레 웃으며 범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물론 이리 잽싸게 뛰어 나간 건 화원에서 또 어떤 재미난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뛰어나가는 3 황자의 뒷모습에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범한은 마음이 허전했다. 그리고 이내 저 멀리 북제로 보낸 동생이 그리웠다. 왕계년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범사철은 최근에 감찰원의 도움을 받아 최씨 가문이 깔아 둔 북제 노선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한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일곱째 섭 대행수를 출국시킬 수 없다보니, 어린 나이에 혼자서 그 일을 하느라 고생 깨나 하고 있었다.
범한은 3 황자가 왜 이렇게 팔딱거리며 뛰어 나가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해당타타에게 그를 맡겼기 때문이었다. 존엄한 신분인 황자가 천일도 문파에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면 고하도 그다지 반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설령 천일도 문파의 제자가 되는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해도, 셋째가 해당타타에게서 무예를 익혀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게 되고, 이렇게라도 두 사람을 억지로라도 사제 관계를 맺도록 해두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서재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한창 이런 저런 생각 중이던 범한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사천립이었다. 고개를 돌려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천립이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범한이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
“들어오게. 뭐 볼게 있다고 그러고 있는 건가?”
사천립이 씁쓸하게 웃으며 문안으로 들어섰다.
“스승님, 3 황자마마께 해당타타 낭자에게 무예를 배우도록 한 건 스승님이니 가능한 일 같습니다만······ 해당타타 낭자는 북제 성녀인데······ 이 일이 경도에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적잖이 골치 아프실 수 있습니다.”
“골치 아플 게 뭐 있다고 그러나?”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내게 3 황자를 강남까지 데려가도록 맡기시지 않았나. 그러니 나로서는 당연히 있는 힘껏 가르쳐야지. 그리고 무예에 관해서는 해당타타가 나보다 더 적임자라 그러네.”
두 사람은 다시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사천립이 씁쓸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양계미가 또 왔습니다. 어떻게든 저에게 식사 대접을 하겠다면서요.”
양계미는 양회(兩淮) 일대에서 가장 큰 소금 상인이다. 범한이 지금 묵고 있는 화원도 그가 내준 곳이다. 양계미는 설청과 가까운 사람이었고, 범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사천립의 말을 듣는 순간 올해 아무 재미도 못 본 양계미가 내년에는 황실 금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범한이 웃으며 받아쳤다.
“이곳은 원래 양계미의 저택이네. 주인이 와서 보겠다는데 들어오지도 못하게 할 수는 없겠지······. 내게는 아첨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자네에게 아첨하려 하는 걸세. 같이 식사를 해주게. 나중에 강남에서 장사를 하려면 지역 건달들을 많이 알아두는 것도 좋을 걸세.”
“그런데 자네를 어디로 데려간다고 하던가?”
잠시 후 범한이 물었다.
“강남거입니다.”
소주성에서 가장 고급인 술집을 꼽으라면 강남거와 죽원관이 있었다. 범한이 처음 소주에 왔을 때 설청을 필두로 한 강남 관원들이 자신의 환영회를 해준 곳이 바로 강남거였다. 지금 명씨 가문의 죽원관은 반은 겁을 주다시피 해서 3 황자가 사들인 후 포월루 분점으로 개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양계미가 손님 접대를 하려면 선택지는 강남거 밖에 없었다. 이에 범한은 자신이 괜한 걸 물었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강남 상인들이 강남거에서 모임을 갖는데······ 명씨 가문은 오늘 하서비에 맞설 방법을 상의할 테니, 그곳에 따로 사람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네. 양계미가 오늘 자네에게 어떻게든 식사 대접을 하려는 건 이참에 황실과 거래하는 상인들 사이에 끼기 위해서일 거네. 이번 기회에······ 자네가 양계미를 그자리에 데려가 주게나.”
지금 소주성에 있는 사람들은 포월루 분점 주인이 사천립이고, 그가 사실은 범한의 심복이란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사천립이 이끌고 가는 것이니 황실 상인들은 분명 양계미를 기꺼이 받아줄 것이었다. 물론 범한이 이런 생각을 한 건 양계미와 설청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계획이 있어서였다.
“그자리에 가면 최대한 귀를 활짝 열고 있게.”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명씨 가문 사람은 그자리에 없을 테니, 황실 상인들은 자네를 피하지 않을 거네. 어쩌면 자네 귀를 통해 내일 계획을 내게 전달해 주려 할 것이네.”
사천립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하서비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까요?”
범한과 오랜 시간을 함께 있다 보니, 책과 성현의 도만 알던 도덕군자 사천립은 어느새 음모론적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서비에 대한 불신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자 범한이 웃음이 터져버렸다.
“염려 말게. 하서비는 똑똑한 사람이야. 그러니 지금은 날 배신할 리 없다네. 지금 날 배반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거든.”
사천립이 살짝 궁색하게 웃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인, 저를 통해 강남의 황실 상단 사람들에게 전달할 말이 있으신지요?”
“그게······.”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이 말을 전해주게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이네. 그리고 올해는 거의 모두가 빈손으로 가게 되었으니, 내년에는 본관이 보상을 해줄 거라고 말이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신신 당부를 했다.
“물론, 그 말을 할 때 꾸며서 말하게. 너무 대놓고 적나라하게 말하지 말고 말일세.”
사천립은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다 문득 양계미가 앞서 언급했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떠올라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입을 뗐다.
“아까 양계미에게 강남에 군산회라는 조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알 수 없는 신비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대인, 부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았지만 군산회라는 이름은 여전히 낯설었다. 감찰원의 안건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이맛살을 찌푸렸다.
“신비하다고 해서······ 강하다고 확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니, 알겠네.”
414화
사천립이 떠나자 범한의 이맛살이 강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조직이라니. 그게 무얼 뜻하는 걸까? 범한이 소리쳤다.
그러자 줄곧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고달이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최근 들어 범한은 무슨 일을 하든 고달을 덜 피하고 있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호위를 통해 경도 용좌에 계시는 그분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일부러라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라는 방법을 써보는 중이었다. 이 방법으로 실력이 고강한 호위들을 진정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범한은 고달에게 6처 검수 대장을 데려오도록 했다. 그런 후 부하들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소주성에 몇 명이 더 있지?”
6처 검수들의 인원수를 묻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가 보내준 호위는 몇 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들은 범한 곁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 이들 말고도 3 황자 곁에도 호위가 몇 명 있었는데, 그들 역시 다른 곳으로 인원 이동을 할 수 없었다. 한편 감찰원 6처 검수 대부분은 그림자와 함께 강남 지역을 누비며 동이성에서 내려온 고수들을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그러니 지금 범한이 동원할 수 있는 검수는 몇 명 되지 않았다.
“6처에는 지금 7명이 있고······ 4처 주소주 순찰사에는 적지 않은 인원이 있습니다.”
부하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답했다.
지금 계년조의 진짜 우두머리인 왕계년은 북제에 있었고, 등자월도 경도에 있었다. 그리고 소문성은 범한이 민북에 있는 황실 금고 3대 작업장에 남겨 둔 상태였다. 지금 이 순간 범한의 직속 부하 중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하필이면 6처 출신의 소문무였다. 계년조 일원 중 방위 업무에 가장 능통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4처 사람은 움직일 필요 없네.”
범한이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은 싸우거나 살인하는 데 능통하지 않으니까. 혹시라도 손실이 생기면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가져다 쓴 걸 언빙운이 알 거네. 언빙운의 성격을 보면, 어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경도로 돌아갔을 때 내게 한소리 하겠지.”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고달과 계년조 일원들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조금 전 답변을 한 부하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대인, 오늘 무슨 행동에 나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한 사람을 보호해야 하거든.”
범한이 목소리를 깔고 말을 이어 갔다.
“6처에 남아 있는 검수 일곱을 모두 데리고 얼른 강남거로 가게. 그곳에서 가서 하서비를 찾아. 그런 후 내가 호위 무사로 붙여주어서 왔다고 말하게. 또 황실 금고 입찰이 끝나는 즉시 자네들은 나에게 돌아갈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고도 전하고.”
의심하는 사람은 쓰지 않고, 사람을 쓸 때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범한이 하서비 곁에 정말로 첩자를 심어두었는지 여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호부에서 온 늙은 관원 몇몇을 보낸 걸 제외하면, 감찰원은 겉으로는 하서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쌍방이 함께 할 때 지켜야 하는 도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하서비 곁에 검수들을 보내면서 굳이 그 이유까지 설명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자 부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인, 남은 사람을 몽땅 그곳으로 보내시면 대인과 황자자마의 안위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범한이 고달을 쓱 쳐다보며 자신감에 찬 웃음을 내보였다.
“내 안전은 고달이 알아서 걱정할 걸세. 그러니 자네들의 임무는 황실 금고 입찰이 열리기 전까지 하서비가 안전하게 보호하는 걸세.”
범한의 말에 고달은 칼자루를 쥐고 범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6처 부하는 더 이상 질문을 않고 담담하게 범한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가 문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몇 마디 툭 던졌다.
“조심들 하게나.”
* * *
오늘따라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매일 먹던 몸보신용 비둘기 탕을 입도 대지 않고 주방으로 돌려보냈을 정도였다. 그리고 명씨 어르신과 도련님은 오늘 소주성에서 돌아온 후 곧장 후원으로 들어가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었다.
한편 각 방에 있는 형제와 친척들에게 명령이 떨어지자 이들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둘러 명원의 아름다운 복도와 호수 정자를 지나 큰 노마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린 여종들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평소 새장을 들고 산책하기 좋아하는 넷째 어르신, 첩과 놀기를 좋아하는 셋째 어르신, 무술 하는 사람들과 씨름 하는 거나 좋아하는 여섯째 어르신이 불편한 낯빛으로 급히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명씨 가문 모임에 좀처럼 참여하지 않는 남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지?’라고 의아할 수밖에.
명원이 순식간에 긴장과 불안감에 휩싸였다.
한편 소문이란 놈의 전파 속도는 경국이 자랑스러워하는 우편 전달 체계보다도 빨랐다. 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명원에 있는 종들도 놀랄만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오늘 소주성의 황실 금고 입찰에서 명씨 가문에 대적하는 적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적이 바로······ 이미 한참 전에 죽었다던 소문으로만 듣던 명칠 도련님이란 점이었다.
명씨 가문의 윗대 주인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명칠 공자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유언을 남길 때 거의 모든 재산을 불쌍한 명칠 공자에게 남겨 주었다.
한데 너무 오래 전에 지난 일이라 명씨 가문은 이미 장자의 소유물이 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으니, 어쩌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모두 진정하거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큰 노마님이 후원 한곳에 모여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사내들이 이런 별것도 아닌 일로 허둥대며 호들갑을 떠는 게 못마땅해서였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이 죽은 후 이 거대한 가업을 어찌 안심하고 저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 걱정이 밀려들어서였다.
“형님, 갑자기 그런 소문을 들었으니 아이들도 당황할 수밖에요.”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 곁에는 옛 명씨 어르신의 첩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정실인 큰 노마님에게 아첨을 잘해 오늘날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녀가 큰 노마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 하가란 놈이 정말로 일곱째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소문이란 걸 알면서도 뭘 그렇게 당황하는 게야!”
큰 노마님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날카롭게 내질렀다. 기묘하게 굴욕감 같은 게 어려 있는 제법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도자기를 칼끝으로 긁는 걸 연상시키는 끔찍한 소리이기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작은 노마님은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더니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가 앉고는 더 이상 말참견하지 않았다.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시기심이 강하고 마음이 모질었다. 그래서 과거 명씨 어르신은 모두 세 명의 첩을 두었지만, 그들 중 지금 남아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다행히 명씨 가문에 아들 복은 있어서 그런지, 지금 강남거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하서비를 제외해도 아들은 모두 여섯이었다. 명청달이 맏이에 장남이었고, 현재 명씨 가문의 주인이었다. 셋째와 넷째는 모두 작은 노마님의 소생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친모가 큰 노마님에게 한소리 듣자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큰 노마님의 위세에 눌려온 터라 그 누구도 감히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자인 명청달이 나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짧게 설명을 더했다. 한데 큰 노마님은 명씨 가문의 명의상 주인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싸늘한 얼굴을 내보이며 말했다.
“명심하거라! 명씨 가문의 일곱째는 십여 년 전에 이미 죽었느니라. 그러니 지금 소주성에 있는 그 하당주란 이는······ 십여 년 전 소문을 가지고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게다. 그러니 우리 명씨 가문에서는 그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
명청달은 체면이 깎였는데도 외려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고 온화하게 말했다.
“어머니, 황당한 소문이니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혹시라도 조정에서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하서비가 범한의 졸개란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범한이 내세운 조정 세력이 이번 기회에 무력도 동원하지 않고 명씨 가문의 방대한 가산과 실력을 거둬간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국면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큰 노마님이 혼탁한 두 눈을 깜빡이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 범씨라는 관원이 직접 한 말이냐? 설마 조정에서 억지를 쓰고 있는 것이냐?”
명청달은 순간 조정이 언제 억지를 쓰지 않은 적 있느냐고 생각했다. 단지 과거에는 조정이 자기편에 서주어서 세상에서 입김, 주먹, 권세가 센 곳이 바로 자신들의 명씨 가문이었던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만약 조정 내부에서 분열이 일었다면 자신의 권세는 일찌감치 잘려나갔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차마 이런 식으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었다.
명청달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머니 분부를 내려주시지요.”
오늘 입찰에서 하서비가 기세를 거세게 몰아붙인 걸 보니 지니고 있는 은전의 양이 상당한 것 같았다. 더군다나 흠차 대인의 지원까지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명씨 가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이제 큰 노마님의 지침을 따를 필요가 있었다.
큰 노마님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속으로도 떳떳하다거나 거친 사람은 아니었다. 이에 명청달의 질문에 곧바로 답을 하지는 않고 자신의 거처에 모인 명씨 가문 자손들을 주시하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싸늘하게 말했다.
“현 시국은 과거와는 다르다. 얼마 전 란석이를 통해 숙부인 너희들에게 제대로 하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거늘······ 이 늙은이가 다시 말하마. 이제부터 너희들은 명씨 가문에 그 어떤 폐를 끼쳐서도 안 된다. 새를 데리고 다니려면 집안에서만 하고, 같이 씨름하던 거친 사내들도 당장 이 집에서 내쫓거라!”
“그리고 이 일은 그 누구에게도 입도 뻥끗 말아라! 만약 그 누구 하나 허투루 입을 놀렸다가는 내가 그 혀를 뽑아버릴 것이니라!”
화를 내며 빠르게 말을 해서 그런지 큰 노마님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여종이 서둘러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옆에 있던 손자 명란석도 공손한 자세로 서둘러 차 한 잔을 올렸다.
후원에 모여 있던 명씨 가문 자제들은 감히 큰 노마님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허리를 굽혀 그렇게 하겠노라는 뜻을 내보였다.
명청달의 경우는 어머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큰 노마님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일을 할 때 결단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들 녀석 때문이었다. 고얀 놈! 항상 어미가 직접 나서서 해줘야 하다니. 그녀가 재빨리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일은 입찰 둘째 날이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흠차 대인이 우리 가문을 도발하고 있어. 내일 묶어서 입찰 받게 될 8개 항목 가격은 작년보다 훨씬 비싸질 게다. ”
그녀의 말에 후원에 있던 명씨 가문 남자들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멍하니 떴다. 새를 돌보는 일이나 무술 대련 같은 건 잠깐 참아 넘기고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몰래 챙겨 놓은 보잘 것 없는 양의 은전까지 꺼내 공금에 보태라니! 매년 황실 금고에서 입찰을 진행할 때마다 집안에서는 늘 충분한 양의 은전을 마련했었다. 만약 여덟 개 항목의 가격대가 너무 높으면, 낙찰 받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어찌하여 이다지도 사력을 다한단 말인지. 조정에서 낙찰 상한가를 정한 것도 아닌데,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은전이 들어갈지 알고 이러는 것인지.
이들 어르신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어도 계승자는 될 수 없기에 삶을 즐기는 데만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황실 금고 입찰이 명씨 가문에 지니는 의의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뒷사정을 보아하니, 조정 내부의 권력 투쟁이 연관 되어 있는 것 같아 그들은 큰 노마님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동의도 표하고 싶지 않아 했다.
415화
명씨 가문의 여섯째 어르신은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다. 평소에 씨름 하는 것을 좋아하고 담력도 큰 편이어서 그가 용기를 내보았다.
“어머니, 우리 형제들 중 몇몇은 가문 상단 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각자의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고요. 설령 딴 주머니를 차고 있다고 해도······ 그 별 볼 일 없는 양은 보태도······ 쓸모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코앞에서 찻잔이 산산조각 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여섯째 어르신은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상석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큰 노마님이 서릿발 날 날리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양이라고? 그동안 그 공금으로 너희들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봤는지 알기는 하는 거냐? 너희들의 처남들까지 소주성에서 알아주는 부자가 되어 있거늘······ 너희들도 모두 명씨 가문의 혈육이라 지금까지는 내가 모른 척해준 것이다. 조상들께서 세운 규칙 때문에 가문 상단을 맡을 수 없어, 불쌍해서 계속 은전을 주었더니만······ 한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모두 무릎을 꿇지 못할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청달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두 개의 팔걸이의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큰 노마님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에 모두들 벌벌 떨었다.
“이 약삭빠른 놈들아! 큰 나무가 무너지면, 너희들에게 좋은 일일 것 같으냐? 내 일찌감치 분명히 말하지 않았더냐. 내일 낙찰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우리 가문은 몇 년은 버티겠지만 결국에는 산산조각 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물러서지 말고 난관을 타개해 나가야지······ 그러니 이 중차대한 시점에 감추는 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작은 노마님이 후원에 있는 아들들을 가슴이 미어지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몸을 옆으로 숙여 큰 노마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형님, 화내지 마세요. 저 아이들도 어찌 해야 할지 알 거예요.”
그러자 후원에 있는 명씨 가문 남자들이 깜짝 놀라 바닥에 머리를 연신 내리치며 사죄했다.
“잘못을 알았으면 됐다.”
큰 노마님이 천천히 의자에 몸을 누이며 뜬 듯 감은 듯한 눈을 하고는 말했다.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 보거라. 그리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내일 아침이 밝기 전에 은전을 회계 방에 가져다 놓거라. 한 집 당 20만 냥, 여섯째는 15만 냥을 가져다 놓거라.”
큰 노마님의 말에 둘째, 넷째, 다섯째는 속이 무지하게 쓰렸지만 그래도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셋째는 달랐다. 그가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는 받아쳤다.
“어머님, 왜 여섯째만 15만 냥을 내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큰 노마님이 눈을 부릅떴다.
“여섯째는 가장 어린데도 최근 두 해 동안 수비 대인과 왕래도 하고, 씨름을 좋아 해 은전을 더 많이 써서 그렇단다. 형이 되가지고서 뭘 그런 걸로 따지는 게야!”
그러자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듯 셋째가 숨을 씩씩 내쉬었다.
“그렇다면 저는 평소에 은전을 안 쓰는 줄 아십니까?”
사실 모두들 큰 노마님이 자기 친아들은 끔찍이 아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든 이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셋째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셋째는 작은 노마님의 소생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작은 노마님이 셋째에게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셋째는 근래 들어 쓸 은전이 부족했던지라 고개를 치켜들고 억지로 버텼다.
그러자 큰 노마님이 버럭 화를 내며 꾸짖기 시작했다.
“기생집에서 돈을 쓴 것도 모자라 그 매춘부들을 집안으로까지 끌어들이지 않았느냐. 그게 제대로 은전을 쓴 것이더냐?!”
하서비 모자가 처참한 결말을 맞은 것만 봐도 큰 노부인이 남자에 대해 어떤 결벽증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남자들을 혐오했다.
“그렇다면 큰 형님은요?”
“나는 장자잖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명청달이 미소 지은 얼굴로 형제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당연히 최대한 정성을 보여야겠지. 내가 50만 냥을 내마.”
큰형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형제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로써 명원에서의 가족회의는 바로 끝을 맺었다. 형제들 중 몇몇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 가 은전을 준비했다. 모두들 제법 두툼하게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그 많은 액수를 준비한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셋째는 형제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우는 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모두들 자기 코가 석자였다. 더군다나 큰 노마님의 엄명이 있었으니 누구 하나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셋째에게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 * *
“시간이 너무 빠듯하네요.”
작은 노마님은 자기 거처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에 큰 노마님의 거처에는 장자네만 남게 되었다. 명청달이 보일 듯 말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흠차 대인이 너무 갑작스레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우리에게 대응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았습니다.”
큰 노마님이 아들을 잠시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황실 금고 저택에서 잘 대처했더구나. 적어도 하룻밤을 벌지 않았니.”
명청달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룻밤은 너무 짧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하······ 서비의 수를 보니, 아직 여력이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 벌일 일전은 어쩌면 위험할 것 같아요. 형제들이 은전을 가져온다 해도 겨우 백만 냥이 넘을 뿐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그 정도로는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명석란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지며 자신이 들은 게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대꾸했다.
“아버지, 과거에 묶음 식인 8개 항목 입찰에 참여했을 때도 4할의 보증금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 액수는 5백만 냥이었지요. 한데 올해는 작년보다 2할이나 더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숙부님들이 100만을 더 내놓을 거고요. 그런데도 부족한 것입니까?”
명청달이 씁쓸하게 웃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그 여덟 개 항목을 꼭 가져가려 한다는 걸 흠차 대인이 안다는 거란다. 그러니 하서비는 아무렇게나 금액을 부른 것이다. 더군다나 물건 생산과 판매는 모두 그들 내부에서 하는 일이니, 우리를 밑지게 만들 수도 있는 거지.”
명란석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니 명씨 가문이 왜 그 항목 반드시 가져와야 하는지에 대해 물을 리 없었다. 세력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동이성 쪽만 놓고 봐도 명씨 가문은 그 여덟 항목을 꼭 낙찰 받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동이성이 황실 금고 제품을 위해 1년 동안 지불하는 대가가 몇 백만 냥을 훌쩍 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태평 전장에서는 소식이 있느냐?”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큰 노마님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명청달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들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준비가 조금 부족했습니다. 하서비의 은전도 모두 태평 전장에서 나온지라 우리에게는 약속 어음만 발행해줄 수 있을 뿐, 일람 출급 어음은 내줄 수 없습니다. 한데 우리가 내일 당장 필요한 건 일람 출급 어음이니······ 어머니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들도 꺼리고 있는 것이지요. 앞서 전장 대행수가 찾아와 우리에게 내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30만 냥이라고 말했습니다.”
큰 노마님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 은표 차용증을 써주면 어찌 되었든 현금인 은전으로 교환이 되어야만 한다. 하서비가 먼저 어마어마한 액수의 은표를 발행해 갔으니, 다른 사람에게 차용증을 써줄 때는 그 액수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전장에서 하는 일은 현금인 은전으로 지불할 능력이 있음을 보증해주는 것이므로, 이는 곧 신용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어서다.
이런 긴장 된 국면만 아니라면, 동이성과 명씨 가문의 관계를 봐서라도 태평 전장은 허위로 은표를 발행해 줄 수도 있었다. 물론 이는 위험성이 매우 크고 또 거친 일처리 방식이었다. 그리고 일단 범한에게 제대로 찍히면, 황실 금고 전운사에서 입찰 개시 후 하서비의 은표와 명씨 가문이 건넨 은표를 가지고 가장 치졸한 방식으로 지불 청구를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엄청난 양의 은전을 조달해야 하는데······ 아무리 신선 같은 능력을 발휘해도 태평 전장으로서도 단시일 안에 그 많은 은전을 소주까지 가져오는 건 불가능했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태평 전장은 그냥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태평 전장은 각 나라들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따져본다면, 그 어느 나라 조정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악랄한 수단을 쓸 리 없었다. 하지만 이번 황실 금고 입찰 주관자는 범한이었다. 가장 예측하기 힘들고, 가장 모질고, 막나가는 범한 말이다. 그러니 태평 전장으로서는 맞아 죽는다 해도 위험을 무릅쓸 리 없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후원에 죽음과도 같은 고요가 흘렀다. 명씨 가문의 3대 인물이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설마 내일······ 그동안 명씨 가문이 해오던 사업을 일곱째가 모두 빼앗아 가는 걸 눈뜨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것인지. 황실 금고의 판매권을 잃으면,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토착 지주일 뿐인 명씨 가문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처지가 될 수 있었다.
이 무서운 사실에 큰 노마님의 이맛살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이름 하나가 생각난 그녀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최근 요 며칠, 그 초상(招商) 전장에서 사람이 다녀갔었느냐?”
그러자 명란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태평 전장의 큰 고객인 걸 알면서도 몇 차례 찾아와 물어보고 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꿈쩍도 않을 알았는지, 바로 물러났습니다.”
큰 노마님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구나.”
어머니가 줄곧 태평 전장을 관리를 해온 것 때문에 그동안 명청달은 초상 전장과 거래를 틀 것을 적극 주장해왔던 터였다. 이에 어머니의 말에 순간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았지만, 그래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신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정말로 무슨 문제가 있다면, 그리 나오지 않았겠지요.”
그러자 큰 노마님이 무슨 곤란한 문제를 생각하는 것처럼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한참 후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초상 전장에 사람을 보내 거라. 아니다. 보내지 말거라. 란석이 네가 직접 찾아 가서 오늘 밤에 일람 출급 어음을 얼마나 조달해 줄 수 있는지 알아 보거라.”
“알겠습니다. 어머님.”
명청달이 살며시 웃으며 대답을 하고는 여전히 궁금한 게 있었는지 질문을 던졌다.
“하서비 쪽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그러자 큰 노마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나도 너도 그 사람을 모른다. 우리 명씨 가문에서는 모르는 사람인데 무엇 하러 대응을 하느냐? 이 일에 대해 너는 끼어들지 말거라. 흠차 대인에게 휘둘리지 말란 말이다······ 지금 흠차 대인은 우리 명씨 가문이 크게 반응을 보이길 바라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느니라.”
명청달이 두 손을 맞잡아 쥐고 위아래로 흔들며 감탄했다.
“역시 어머님은 영명하십니다.”
명청달은 내일 입찰과 관련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회계를 보는 방으로 가 몇몇 형제들이 일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명란석은 성으로 들어가 그 신비하고, 소문만 무성한 동이성 배경의 초상 전장을 찾아야 했다. 이에 두 사람은 후원에 더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인사를 한 후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416화
줄곧 매서운 태도로 일관했던 큰 노마님은 아들과 손자가 후원에서 나가자 곧바로 피로가 밀려들었다. 그녀가 무력하게 새끼손가락을 치켜들더니 의자 팔걸이 부분을 두드렸다.
옆에 있던 여종이 노부인의 입가로 다가왔다.
그러자 큰 노마님이 두 눈을 감았다. 그런 후 그녀는 한동안 새끼손가락을 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중요한 일을 두고 저울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곱째라고?’
순간 굳게 닫고 있던 눈꺼풀에서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 속에서는 여우 같이 생긴 여자가 낯익은 남자의 몸 아래에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자신에게는 대놓고 오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고 그녀가 낳은 아이가 명원 이곳저곳을 자랑스럽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은방울 같은 아이의 웃는 소리가······ 나풀나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큰 노마님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두 눈에는 살얼음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격렬하게 떨리며 살짝 구부러졌다.
그녀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묵직한 곤장이 그 여자의 몸 위로 떨어질 때 붉은 핏방울이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자신이 그 여인을 우물 밑에 가둬 버린 날에는 하늘 가득 눈꽃송이가 하늘하늘 휘날렸었고. 그 여인의 시체는 일찌감치 해골이 되었을 텐데. 쥐들에게 몸뚱이를 갉아 먹히느라 듣기 괴로운 소리만 내질러 댔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은방울 같았던 맑은 웃음소리는 이제는 영원히 들을 필요가 없었는데.
그 몹쓸 여자가 죽고, 집에는 대충 둘러대어 마무리를 지었었다. 하지만 그 여자를 죽였다고 해서 그녀가 낳은 아이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이는 명의상으로는 명씨 가문의 혈육이었으니까. 다행히 청달이가 마음이 악랄해 날마다 채찍으로 때렸고, 굴욕과 고통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어느 날 새벽 명원에서 도망을 쳤었지.
‘어쩌면 그 아이도 영원히 모를 거야.’
그때 자신이 문 뒤에서 싸늘하게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아이는 영원히 모를 거야.’
자신이 일찌감치 살수를 대기시켜 그 아이가 명원 밖으로 나가는 순간 제 어미와 함께 있게 해주라며 오래된 우물 속에 처넣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어째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냐고!’
* * *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이 눈동자에 불현 듯 노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줄곧 살짝 구부려진 채 치켜 올라가 있던 새끼손가락이 드디어 차분하게 의자 등받이 위에 착지했다. 같은 시각, 살짝 마른 입술이 열리고 그녀가 입가에 붙어 있던 여종에게 속삭였다.
“주 선생을 모셔와.”
* * *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이 드디어 결정을 내렸을 때 그녀의 아들과 손자는 나란히 후원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명란석이 만면에 감탄하는 기색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머님께서 그 못된 놈에게 손을 쓸 거라 아버지가 말씀하셨었죠?”
“무슨 못된 놈 말이냐?”
명청달이 환하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자는 네 7 숙부이니라. 비록 지금은 우리의 적이지만, 어찌되었거나 네게는 작은 삼촌이란다.”
그러자 명란석이 자조적인 웃음을 내보이다가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일곱째 숙부를 죽여야 이번 일을 온전히 마무리 지을 텐데 말입니다······ 하오나 흠차 대인이 어찌 나올까요? 군산회가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반역까지 저지를 정도는 아닙니다.”
“네 할머니도 늙으셨구나.”
명청달이 탄식하며 말했다.
“네 할머니께서 애당초 잘못된 방법을 쓰셔서 그래.”
명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명청달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의 잘못이니, 명씨 가문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이번에 네 7 숙부가 재수가 없다면,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말이다.”
명씨 가문의 표면상 주인은 속으로 냉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절대 통제할 수 없는 군산회와 감찰원은 이참에 충돌이나 해버려라, 라는 마음이었다. 심계가 깊은 그에게는 이번 패배 국면을 수습할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자신도 아직은 무슨 수단을 동원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6 숙부께서 이번에도 잘 보이셨나 봐요.”
명란석이 갑자기 비웃었다.
그러자 명청달이 귀엽다는 듯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설명을 해주었다.
“할머니께서는 항상 막내아들을 아끼시잖니······ 물론, 그분이 직접 낳은 자식이기도 하고 말이다.”
* * *
명씨 가문이 한바탕 뒤죽박죽이 되자 쥐새끼들은 그런 명씨 가문을 물고 뜯어버릴 생각에 머리를 굴려대기 시작했다. 명씨 가문의 막내아들 명청성은 현재 강남 수채의 대두목 하서비였다. 그리고 암암리에 감찰원 4처 주강남로 순찰사 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소주성 강남거 맨 꼭대기 층에 서 있었다.
그는 건물 가장자리에 서서 나무 난간을 가볍게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듯 성 밖 모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과거 자신이 살던 집이었지만 이미 오랫동안 들러보지도 않은 곳, 명원이었다.
강남 상인들의 집회가 끝났다. 구체적인 절차가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영남의 웅씨 가문과 천주의 손씨 가문의 탐욕적인 눈빛에서 하서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제사 대인의 계책이 이미 먹히고 있음을 말이다. 내일 명씨 가문은 하서비 뿐만 아니라 웅씨와 손씨 가문처럼 연합해 공세를 펼치는 이들에게도 맹공을 퍼부을 것이다. 상인에게는 본래 뜯어 먹을 게 있어야 하지 않던가. 그런데 너무 오래 굶었으니, 저들은 분명 네 것 내 것 따지려들지 않을 것이다.
하서비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명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우뚝 솟은 강남거 맨 꼭대기 층에서 명원을 바라보니 새어나오는 등불조차 보이지 않아서였다.
오늘은 그가 운 좋게 살아남은 이래로 가장 속이 후련했던 하루였다. 드디어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 있게 자신의 이름이 명청성임을 밝혔으니까.
한편 은전을 가지고 사람을 짓밟는 쾌감이라든가, 강호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경국 조정의 무대에 선 것은 그에게는 별 것 아니었다.
하서비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힌 건 명씨 가문의 악독한 노부인의 귀싸대기를 후려갈긴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복수를 했다는 쾌감이 모든 기분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 범한이 검수 일곱을 자신에게 보낸 일로 하서비는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범한에게 무한히 감격하고 있었다.
하서비는 오늘 일어난 모든 일 때문에 도취감과 상실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맞은편 거리에 몇몇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지만, 강호의 영웅호걸이었던 그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강남거에서 나온 하서비는 바로 고개를 살짝 숙여 버렸다. 큰길로 나오기 전 밤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해서였지만,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형님.”
거리에서 십여 명의 장정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들은 경외심과 낯설음이 담긴 낯빛으로 하서비를 바라보며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강남 수채에서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황실 금고 입찰 일로 하서비를 따라 소주성으로 들어온 이들이었다. 그런데 소주성은 항상 경비가 삼엄했고, 이들 비적 중 몇몇은 초상화까지 그려진 체포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러니 이들은 평소 같았다면 소주성까지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데 도적질이나 일삼는 이들이 지금은 소주성을 당당하게 거닐고 있다니. 그리고 큰 형님이란 자는 강남에서 최고로 돈 많은 상단 가문들과 한 자리에 나란히 앉고 말이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들 상인들은 평소 형제들의 목숨을 노리고 돈까지 내건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 상인들이 하서비 큰 형님 앞에서 이렇게나 공손하게 굴다니. 그들에게 오늘은 생각지도 못한 하루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들 장정들 가슴에 허영심과 거만함이 치솟기 시작했다. 세상을 사는 이치가 과거와 달라져서였다.
한데 부하들이 놀라 허둥대면서도 기뻐하는 복잡한 표정을 내보이자 하서비는 너무 웃겨서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봐 형제들, 좀 많이 배워야겠어. 이번에 나이 많은 선생들을 뵙게 되었으니, 평소 한가할 때 그분들께 가르침을 좀 구해.”
하서비가 언급한 선생들이란 흠차 대신 범한이 이번 입찰을 위해 호부에서 데려온 나이 많은 관원들을 일렀다. 강남 수채가 상단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와중이니, 하서비는 자신의 심복들이 하루 속히 장사 기술을 익히기를 바랐고, 적어도 계산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한창 화기애애한데 하서비에게 문득 차가운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이에 고개를 들어보니 밝은 달이 둥근 천장 끝에 달려 있었다. 바야흐로 봄이 찾아온 맑은 날이었지만 한밤중이 되니 아직은 싸늘했다.
시선을 거둬들인 후 다시 길 맞은편을 보니, 이상한 사람 셋이 서 있었다.
이들이 이상해 보였던 이유는, 갑자기 나타나 하서비가 있는 길가 쪽을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밤이 되어 돌아가는 여행자도, 다른 놀 거리를 찾는 취객도 아니었다. 옷을 평범하게 입고 있었지만, 중간에 있는 사람은 삿갓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 한밤중에 입고 있는 복장치고는 너무나도 특이했다.
어려서부터 생과 사의 경계에서 싸우며 오랫동안 강호에서 구른 하서비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뼛속까지 느껴지는 한기와 위험하다는 직감 때문에 싸늘한 눈빛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발끝으로 바닥을 세 번 찍었다. 그러자 강남거 문 쪽에 있던 사람들이 스르륵 나타났다.
그가 발끝으로 바닥을 찍을 때였다. 길 맞은편에 있던 세 사람 중 가운데 사람이 손을 어깨 뒤로 넘겨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이내 눈발이 흩뿌려지듯 칼날의 빛이 흩뿌려졌다. 그는 물새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밀고 나오는 것처럼 다가와 하서비를 칼로 베어 버렸다.
“죽여!”
이에 강남 수채의 장정들도 대응에 나섰다. 그들은 뼛속 깊이 스며 있던 용맹함으로 큰 형님의 목숨을 앗아갈 듯 달려드는 칼날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 속도는 삿갓을 쓴 사람이 휘두르는 칼날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자 하서비와 가장 가까이 있던 측근이 미친 듯이 큰 소리를 내지르며 옷 속에 숨겨 두었던 직도(直刀)를 꺼내 상대의 칼날을 막아냈다.
칼날이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한데 강남 수채 장정의 손에 들려 있던 직도는 어느새 부드러운 연근처럼 적의 칼날에 두 동강이 나버렸다.
이어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광폭한 칼날이 장정의 몸을 잘라 버렸다. 장정의 몸은 끔찍하게도 두 토막의 고깃덩어리가 되어 사방으로 선혈을 내뿜었고, 내부 장기들을 바닥으로 후루룩 쏟아냈다. 그런데도 몸에서 분리되어버린 손은 여전히 칼자루와 칼날을 쥔 채 무력하고 처참하게 방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칼날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때는 고요한 밤, 강남거 앞에서는 살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자의 발끝이 땅바닥에 닿았을 때, 그는 이미 하서비 앞에 와 있었다.
직선으로 뻗는 칼의 기세는 사람이든 땅이든 모두 베어버렸다. 거리에 깔려 있던 청석판 바닥을 파괴한 것은 물론이고 그 아래에 있던 돌 파편까지 드러나도록 했다.
그리고 이내 펑,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강남거 앞에서 돌과 먼지가 어지럽게 날리기 시작했다. 먼지 속에서는 하서비의 고함 소리만 들려왔다. 하서비가 두 손바닥으로 앞을 막으며 자신에게 날아드는 거센 칼날에 맞선 것이었다.
칼날의 빛이 갑자기 사라지자 먼지도 점점 줄어들었다.
417화
강력한 진동 때문에 하서비는 양 콧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으로 몸 앞을 막고 있었으며, 한껏 겁에 질린 표정으로 삿갓을 쓴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넓은 길 건너편에 있던 광폭한 칼날이 하서비에게 다가왔다. 칼날은 그 와중에 한 사람의 몸을 베어버리고 하서비에게도 내상을 입혔다. 9등급 고수에게서나 볼 수 있는 가공할만한 경지였다. 그런데 강남에 이런 절정의 고수가 있었던가?
폭주한 칼날은 인정사정없이 밤하늘 찌르고 베었다. 그리고 잠시 고요가 찾아온 순간, 사람들은 그제야 삿갓을 쓴 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삿갓을 쓴 자는 키가 컸고, 칼자루를 쥔 채 온몸에서 엄격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칼날은 눈처럼 새하얗게 빛났고, 칼자루는 유난히도 길었다. 마치 연극이나 전장에서나 볼법한 기다란 칼이었다. 길이가 족히 8척은 되어 보여, 조금 전까지 그걸 어떻게 몸 뒤에 숨기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이 모든 건 찰나의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하서비는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사력을 다해 칼을 막은 것이었다.
한데 눈을 깜빡 한 사이 무서운 일이 하나 더 일어나 있었다. 삿갓을 쓴 자 옆에 있던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모두 하서비 자신을 죽이러 온 자들이었으니, 사라진 두 사람이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사실 삿갓을 쓴 사람이 몸 뒤쪽에서 장도를 뽑고 길 맞은편을 향해 용맹하게 뻗어 나올 때, 옆에 있던 나머지 두 고수도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들은 스르륵 움직여 거리에 있던 강남 수채의 장정 하나를 제쳤다. 그런 후 제비처럼 우아하고 매끈한 곡선을 그리며 어둠 속에서도 쏜살같이 하서비가 있는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들은 장도와 함께 날아올랐다.
만약 의외의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아직 경황이 없던 하서비는 벌써 죽었으리라. 하서비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그가 가까스로 칼날을 막았을 때 길게 뻗은 거리 위에서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 덕분이었다.
강남 수채 장정들이 하서비 옆으로 다가가 막아설 때였다. 이들 중 네 사람이 매우 괴이한 움직임으로 양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두 고수가 양쪽에서 제비처럼 빠른 속도로 스치고 지나갈 때, 사람 넷이 손바닥을 뒤집어 긴 도포 아래에 숨겨 두었던 쇠꼬챙이를 꺼내 들고는 내질렀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일격은 두 고수의 복부 음부 쪽을 정확히 파고들었고, 이에 고수들은 어쩔 수 없이 피해야만 했다. 이들 넷은 다름 아닌 범한이 오늘밤 급히 파견한 6처 검수들이었다.
6처 검수의 실력은, 어쩌면 오늘 밤 사람을 죽이러 온 고수들 보다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판세를 읽고, 상대가 살인을 위해 접근하는 경로를 판단하는 능력에 있어 검수들은 타고나게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연합 공격을 펼치려던 제비 두 마리를 막을 수 있었다.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순식간에 수도 없이 울렸다. 강남거 앞 큰길에서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다. 봄을 맞아 풍광이 수려해진 소주성에 갑자기 자잘한 우박이 쏟아진 것마냥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비처럼 날렵한 두 고수는 양손에 단도를 쥐고 있었다. 독이 발린 칼날은 달빛을 맞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6처 검수들은 손에 쇠꼬챙이를 쥐고 있었다. 쇠꼬챙이 위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고 어둠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수도 없이 끄응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찰나의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일이다 보니 그 모든 소리가 마치 동시에 새어 나온 것처럼 들려왔다.
하서비를 죽이기 위해 접근했던 두 고수는 비틀거리며 길가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의 옷은 쇠꼬챙이에 찔려 수십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깊게 찔린 곳은 피부도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물론 6처 살수들도 이번에는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한 사람은 왼손을 여러 차례 칼에 베어 뼈가 드러나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어깨에 칼을 맞아 피범벅이 되어 낯빛이 갈수록 괴이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피가 흥건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잠깐 마주했을 뿐인데도 서로에게 되돌릴 수 없는 손실을 입혀 놓았다. 자그마하게 소리가 몇 번 울렸을 뿐인데, 대체 그동안 어떤 험악한 일이 벌어졌던 건지.
하지만 심하게 중상을 입고도 6처 검수들은 끄응 하는 소리를 두 차례만 냈을 뿐이었다. 과연 일반적인 강호 인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굳은 의지의 소유자들이었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세 사람은 3처가 처방해준 해독용 환약을 먹고 뒤로 물러나 방어선을 조밀하게 짰다. 어떻게든 하서비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 * *
맞은편으로 퇴각한 제비 두 마리는 자신들에게 상해를 입힐 정도의 실력을 지닌 전문적인 살수가 하서비 곁에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저들이 감찰원 사람인 걸 알아챘다는 의미였다. 감찰원의 독약은 가공할 위력을 지녔다는 걸 모두 알고 있던 터였다. 더군다나 비개 선생이 직접 만든 독약이니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이에 두 사람은 깔끔하게 자리를 떠버렸다. 발끝으로 담벼락을 밟아 어둠으로 물든 공중으로 뛰어오르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모두 강호 무림의 진정한 고수요, 살수였다. 오늘 하서비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아 이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소중한 목숨을 묻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저 멀리 밤이 내려앉은 작은 골목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한 차례 들려왔다.
* * *
길 맞은편에 서 있던 세 명의 고수 중 둘이 떠났다. 하지만 하서비는 자신의 상황이 호전됐다고 여길 수 없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큰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양쪽에서 당당당, 하며 전투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칼이, 연극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장도가 다시금 자신을 죽이기 위해 공격을 해와서였다.
그 칼날에 맞선 적은 일합도 버텨내지 못하고 사지육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죽어버렸다.
칼날은 눈발을 흩날리듯 움직였다. 그리고 존경스러우리만치 용맹하게 맞서는 수채 장정들의 사지와 머리를 자르고 분해해버렸다. 칼날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피가 솟구쳤고 잘려나간 몸뚱이는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이렇게 칼날은 점점 하서비를 향해 갔다.
거리에서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형제들이 하서비의 눈에 들어왔다. 영혼까지 얼어붙게 만들 칼날 휘두르는 소리와 비명 소리. 진하고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형제들의 피를 밟으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삿갓을 쓴 고수. 하서비는 고집스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자가 순간 마귀처럼 보였다.
하서비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어 버렸지만, 피만은 들끓고 있었다. 두 눈이 찢어져라 크게 부릅뜨고 있는 하서비. 앞으로 나서서 형제들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다. 저 삿갓을 쓴 고수와 거하게 한 판 싸울 수만 있다면, 저 칼에 죽어버려도 그만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슬프게도 그의 몸은 뒤로만 후퇴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강남거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매우 쓸모가 많지 않은가. 복수하려면, 적을 제대로 먹고 자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자신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설령 그게 굴욕적인 방법일 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삿갓을 쓴 사람은 하서비와 겨우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때 다친 6처 검수들도 드디어 하서비를 구하기 위해 제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다친 몸으로는 삿갓을 쓴 고수의 경천동지할 검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쇠꼬챙이는 여러 조각으로 잘려 나갔고, 세 사람은 그 충격에 날아가 버렸다.
강남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서비가 섬돌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러자 건물 입구에 있던 일꾼과 식객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허둥대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 튀기는 끔찍한 장면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서서 도망가지 못했다.
삿갓을 쓴 고수는 아직 돌계단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가 칼을 내리치자 검의 기운이 하서비의 등으로 돌진했다.
그러자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선 식객이 강남거의 아름다운 대들보에 몸을 기댄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몸을 떨던 식객이 쇠꼬챙이를 꺼내들고는 삿갓을 쓴 고수의 대퇴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다. 키가 큰 삿갓을 쓴 고수는 위세가 대단했다. 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6처 검수는 이번 공격으로 하서비를 구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그런데도 하서비 앞으로 다가온 검의 기운을 깨버리고 대퇴부를 공격한 건 그자의 급소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삿갓을 쓴 고수가 검수의 공격을 보지 못했는지 칼을 계속 아래쪽으로만 내리쳤던 것이었다.
이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쇠꼬챙이가 고수의 대퇴부에 박혔다. 그런데 사람 피부가 아닌 무슨 철판에 꼬챙이가 꽂히는 것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6처 검수는 순간 가슴이 서늘했다. ‘철포삼(鐵布衫)’이라는 미련한 무공을 연마한 자가 강호에 더는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철포삼을 연마해놓고도 검수의 쇠꼬챙이를 피하지 못하다니. 이건 그가 철포삼을 연마하기 위해 십 년이나 공을 들였어도, 전부 헛짓거리나 한 거란 의미였다. 이 무공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남녀 간의 환락과 욕구를 모두 끊었을 텐데 말이다.
6처 검수는 자기 실력으로는 고수의 칼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하서비를 살려야 한다는 제사 대인의 엄명을 떠올리며 삿갓을 쓴 고수 앞으로 몸을 날렸다. 용감하게 몸을 가로로 날린 검수가 허공에서 신발 사이에 숨겨 두었던 작은 비도를 꺼냈다. 그리고 삿갓으로 가려져 있는 적의 눈을 인정사정없이 찔렀다.
그 순간 삿갓 쓴 고수가 내리친 칼날은 하서비 등으로부터 한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쇠꼬챙이 두 개가 더 나타났다.
하서비를 보호하기 위해 범한이 파견한 검수는 모두 일곱이었다. 그중 다섯은 이미 등장했고, 뒤에서 있던 두 사람은 앞서 하서비를 구출하고 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숨어 있다가 행동에 나선 검수처럼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기이하고 변태적인 무공을 쓰는 탓에 그들은 계획했던 방법이 통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더군다나 칼날이 하서비 바로 앞까지 오자 무리를 해서라도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쇠꼬챙이는 잘려나가지 않았지만 강한 진동을 일으키며 검수들의 손에서 이탈했다.
하서비는 검수들이 방어하는 틈을 타 몸을 앞으로 움직여 개처럼 굴욕적인 몰골로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했다.
순간 칼의 빛이 땅으로 떨어졌다. 강남거 돌계단에 한 줄로 커다란 흔적 생겼다.
하서비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고수의 기세에 옴짝달싹 하지 못하던 하서비가 칼날이 내뿜는 기운에 정면으로 공격을 당해 누구보다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서비가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재빨리 오른손을 집어넣더니 소맷자락에 숨겨 두었던 쇠뇌의 방아쇠를 당겼다.
흠차 대인이 호신용으로 쓰라며 준 것이었다.
쇠뇌의 화살이 발사될 때 검수 여섯은 어느새 삿갓을 쓴 고수 앞에 와 있었다.
418화
순간 칼을 거둬들일 새가 없었던 삿갓 쓴 고수는 재빨리 왼손 주먹을 가로로 내질렀다. 그러자 검수 하나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삿갓을 쓴 고수 얼굴 쪽에 드디어 빈틈이 생겼다.
가느다란 쇠뇌의 화살이 삿갓 앞으로 발사되자 그자도 드디어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 것이다. 무시무시한 무술로 무장하고 있던 몸통과 달리 안면부는 약하기 때문이리라.
화살이 공중을 가로지르며 삿갓의 가장자리 부분을 깊숙이 뚫고 들어갔다.
한데 삿갓이 띠로 고정되어 있던 탓에 화살은 삿갓을 채가지는 못했다. 이에 내내 가려져 있어 정체가 궁금했던 얼굴도 결국에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순간 자그마한 소리가 울렸다. 무언가가 터지면서 내는 탁한 소리였다. 아이들이 폭죽놀이 할 때, 또는 젖은 장작이 타들어 가면서 타다닥, 하고 내는 소리와 비슷했다.
삿갓을 뚫고 들어간 쇠뇌의 화살이······ 폭발한 것이었다.
불빛이 번쩍하더니 삿갓을 쓴 고수의 머리 쪽에서 잠시 연기가 일며 정말 기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 폭죽은 3처에서 개조해 만든 것이었다. 불꽃이 맹렬하지 않아 화약이 지닌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기에는 모자랐지만, 그래도 삿갓 정도는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삿갓을 쓴 사람은 장도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강남거에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시커먼 얼굴에는 끔찍한 몰골로 수포가 일어나 있었다. 한데 두 눈을 꼭 감고 있어 대체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서는 살벌한 노기가 번뜩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는 아직 살아 있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는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고수가 살아남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이 정도 공격으로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건 모두 알고 있었다. 하서비와 감찰원 검수들을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몰고 간 이유는······ 삿갓을 쓰고 있던 고수가······ 원래 대머리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세상에서는 효도를 중시하고 있었다. 이른바 ‘신체발부 수지부모(피부와 몸에 난 털은 모두 부모에게서 온 것이다)’라는 말에 따라 함부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기풍이 있었다. 그러니 대머리라는 건 이상했다. 이 세상에서 대머리로 다니는 부류는 오로지······ 고행자뿐이었다. 신묘를 신봉하는 고행자들 말이다.
세인들은 고행자는 일반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며, 세속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오늘, 그것도 무공 실력이 정점에 달해 있는 고행자가 하서비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한데 이런 놀라운 문제를 두고 더 생각해 보고 말고 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 고행자가 다시 장도를 치켜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양손으로 칼을 쥐더니 섬돌 위에 있는 하서비에게 휘둘렀다.
미쳐 날뛰는 호랑이 같은 기세로, 천군(千軍)이 와도 막아내기 힘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천군도 막아내지 못할 기세는 한 떨기 꽃에게 막히고 말았다.
돌계단에서 절망에 빠져 있던 이들 앞에 홀연히 맑은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해당화 한 떨기가 그들 눈앞에서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강남거 앞 거리를 가득 메웠던 피비린내가 순간 말끔히 지워지고 해당화 향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갔다.
해당화는 양손으로 살포시 감싸 쥐고 있던 싸구려 비단 꽃바구니로 긴 칼 끝을 맞이하더니, 어느새 그것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칼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지만, 꽃바구니를 든 양손의 속도는 더 빨랐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음 동작이 펼쳐지는 순간 긴 칼은 어느새 꽃바구니에 찔러 넣어져 있었다.
검의 기세는 맹렬했고, 꽃바구니의 기세는 솜털 같았다. 하지만 칼끝에 꽃바구니가 쑥 하고 꽂혔을 때,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장도는 어느새 부들부들 떨리며 아래쪽으로 축 처져 버렸다. 꽃바구니가 너무나도 무거워 버티고 있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칼의 기세가 잠시 주춤하게 되자, 칼을 쥐고 버티고 있던 고행자가 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그러자 그의 정기가 폭발했다. 산을 가르고 하늘을 무너뜨릴 정도로 용맹하고 사나운 기세였다.
칼날의 움직임에 위로 솟구친 꽃바구니는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듯 허공에서 빠르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등나무로 만들어진 바구니는 가닥가닥 풀어지더니 어느새 무수히 많은 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이내 ‘탁탁탁’, 하며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구니 속에 있던 비단 꽃은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하늘 날아오르며 살인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거리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꽃잎이 비처럼 내리고, 고행자가 쥐고 있는 장도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꽃무늬 솜저고리를 입은 낭자가 바람처럼 부드럽고 가뿐하게 칼을 타고 들어가 고행자를 공격했다.
고행자가 손바닥을 뻗어 칼날 같은 장풍을 날렸지만, 상대방의 하늘거리는 몸놀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시 후, 부드러운 두 손이 칼자루를 가볍게 치더니, 다시 고행자의 거대한 손바닥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러자 순간 고행자에게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화상을 입은 얼굴에서 정기가 솟구치고 요동쳐 괴이한 붉은빛이 돌더니, 고행자는 온몸을 펄럭이며 뒤로 물러났다.
단 한 번의 대면으로 고행자가 뒤로 밀려난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아직 꽃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꽃비는 소주성을 비추고 있는 푸르스름한 달빛과 어우러져 유난히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꽃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평온한 얼굴의 해당타타 낭자가 그 꽃 더미 위에 섰다. 그녀는 고행자를 쫓아가 공격하는 대신 살짝 우수에 찬 표정으로 맞은편에 서 있는 고행자를 주시했다.
촌부에게도 가끔은 아름다운 순간이 있기 마련이니까.
* * *
“경묘의 2 제사. 당신이 왜 여기에 계시는 거죠?”
해당타타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행자는 해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챈 고행자가 성난 목소리를 날카롭게 내질렀다.
“해당타타!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해당이 아주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 범한과 함께 있습니다.”
고행자는 어이가 없었다. 천일도 계승자이자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가 이렇게도 순순히 대답을 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오늘 사람을 죽여야 하니 막지 말거라.”
고행자가 해당타타를 싸늘하게 주시하며 말했다.
해당타타가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강남거 돌계단 주변을 바라보았다. 거리 한가운데에 죽어 있는 사람들, 잘려나간 사지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해당타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늘 밤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을 죽이셨군요. 그만 살인을 멈춰요.”
청하는 것도 권유하는 것도 아닌 말투였다. 줄곧 하서비를 걱정하던 범한은 해당타타에게 잠깐만 보고 와 달라고 말만 꺼냈던 터였다. 범한이 해당타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일단 해당이 직접 행차해서 살인을 멈추라고 말했으니, 전설적인 불사의 몸 네 사람이 오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고 계속해서 살인을 할 수는 없었다.
비교적 심하게 화상을 입었지만, 그래도 고행자의 얼굴에서는 결연함이 엿보였다. 그런 그가 매우 이상한 눈빛으로 해당을 잠시 보더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자리를 떠난다고 해서 꼭 길로만 가라는 법이 있던가. 고행자는 길가에 있는 어느 집 정원 담벼락을 부숴버렸다. 펑, 소리와 함께 담벼락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자, 그는 그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하늘 가득 여전히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해당타타가 말없이 몸을 날려 구멍 뚫린 담벼락 뒤로 쪽으로 향했다.
정원으로 들어간 해당타타는 살쩍에 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고행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나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이었다.
큰길 옆에 사는 사람이면 부자 아니면 신분이 높은 사람일 텐데. 어찌되었든 집 주인은 누군가가 침입한 소리가 나자 일찌감치 깨 등불도 켜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몸을 피한 상태였다.
이 시각 길 건너편의 강남거 등불은 벽에 뚫린 커다란 구멍 사이로 스며들어 정원을, 그리고 상처를 입어 유난히 더 험악해진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고행자를 바라보며 살짝 근심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러시는 거죠?”
고행자는 평온하게 그녀를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해당타타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소주부 관차들이 쇠스랑을 쨍그랑거리며 오는 소리가 얼핏 들려오는데도 말이다.
천하에 고행자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리고 경묘 대제사를 수장으로 하는 고행자들은 모두 각지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문 속의 오묘한 뜻을 묵송(默誦)하고, 선행을 베풀기 때문에 무력이 고강한 세력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몇십 년 사이 경묘에 특이한 자가 나타났다. 바로 삼석 대사란 자였다. 신력(神力)을 타고났으며, 수련을 통해 내공과 외공을 최고 경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세간에서는 성정이 포악하고 악인을 원수처럼 증오하는 걸로 일찌감치 소문이 자자했다.
경묘와 북제 천일도는 신묘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원류가 같았다. 그래서 해당타타도 과거에 이 자와 만난 적이 있었다. 이에 그녀는 여기에 있는 고행자인 경묘 2제사를, 그러니까 전설 속 삼석 대사를 잘 알고 있었다. 신분만 놓고 보자면, 그는 대단히 존귀한 인물이었다. 한데 심성의 수련 정도를 놓고 말한다면, 지금도 피를 갈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해당타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왜······ 지금껏세상일에 간섭하지 않던 제사가, 오늘 이 자리에서 황실 금고 내지는 조정의 권력 투쟁에 끼어들었느냐는 것이었다.
“군산회는······ 대체 어떤 조직입니까?”
해당타타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마치 혼잣말하듯 물었다.
2 제사가 싸늘하게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그런 문제에 신경 쓸 것 없다. 맞아. 지금의 나는 군산회의 일원이다. 군산회는 원래 느슨한 연합체지. 어쩌면 구체적 목표조차 없는 조직일 수 있겠군. 하지만 목표가 생기면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함께 앞으로 나아가지.”
해당타타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제사님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서비를 죽이는 것.”
2 제사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살며시 웃었다.
“상인들 간의 다툼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제사님까지 끌어들여 손을 쓰게 한 것입니까?”
해당타타가 차분하게 다시 질문을 이어 갔다.
“하서비는 오늘 황실 금고에서 낙찰을 받았습니다. 큰길에서 사람을 죽이셨으니 경국 조정에서 진노하겠지요. 이 점은 걱정이 안 하시나요?”
그러자 2 제사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하서비를 죽이려는 건, 황실 금고 일을 우리가 바랐던 방향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야.”
해당타타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이에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제게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인데······ 제가 알고 있는 2 제사님과 대제사님은, 그러니까 2 제사님은 명리와 부귀를 탐하는 분이 아니신데요.”
그러자 2 제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해당이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명씨 가문도 2 제사님께 움직여 달라고 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고요.”
그러자 2 제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느슨한 협력일 뿐이다. 내 목표와 명씨 가문의 목표가 교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야.”
“범한과 맞서시려는 겁니까?”
해당타타가 눈썹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2 제사가 싸늘하게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해당타타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사건의 진상을 예측해 보았다. 상대방의 특수한 신분을 고려한다면,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나설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황실 금고의 입찰 과정에 손을 쓰려 했다는 건, 분명 경도와 관련한 문제였다. 2 제사의 목표가 범한이 아니니 조금만 더 캐묻는다면 이번 일의 원인을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419화
해당타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믿기 힘들군요. 경묘 제사께서 남몰래 경국 황제께 대항하는······.”
시커먼 얼굴에 수포가 잔뜩 생기고 핏발까지 서 있어서 그런지 2 제사는 그야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다. 그런 그가 흰자위가 더 많이 드러나도록 눈꺼풀에 걸쳐 있는 동공을 위로 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성녀는 총명하고 지혜롭군. 흠차 대인은 황제 폐하의 명으로 황실 금고를 손보러 왔지. 나는 황제 폐하의 명이란 걸 영원히 수행하지 못하도록 할 생각인데.”
해당타타는 잠자코 있었다. 경국 조정 내부에서도 이미 암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암류가 가리키는 방향은 당연히 용좌에 앉아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범한은 그 남자가 가장 총애하고 신뢰하는 권신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범한은 칼끝이 겨누는 곳에 서 있었으니, 결국에는 어마어마한 위험에 직면하게 될 터.
경묘 2제사가 해당타타 앞에서 이리 많은 비밀을 털어놓은 건 해당타타가 북제 사람이고, 또 경묘와 천일도의 사이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경묘 2제사는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해당타타와 범한이 더 가까워진다고 해도, 경국 내부에서 자국의 황제를 공격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 이상 북제 사람인 해당타타는 똘똘하게 침묵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해당타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대사님, 지금 하신 말씀은 호랑이에게 가죽을 달라고 하는 격입니다.”
느슨한 군산회가 끔찍한 이유 때문에 더욱 긴밀해졌다니. 이런 중요한 일에는 분명 우두머리가 있기 마련이다. 이에 해당은 분석을 해보았다. 우두머리란 자는 어쩌면 지금껏 대단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범한에게 소심하게 장 공주만을 방어하도록 했을 텐데······.
경묘 2제사가 냉담하게 말했다.
“꽃의 눈에는 벌레가 호랑이요, 대나무의 눈에는 불이 호랑이고, 강의 눈에는 해가 호랑이고······ 나의 눈에 황제 폐하가 호랑이지.”
해당타타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경묘 2제사가 이 혼잡하고 더러운 인간사에 결연히 뛰어들게 된 것일까? 세상 사람에게 자비롭고, 세인을 가련히 여기는 고행자가 어떻게 사람 머리를 베는 마귀가 된 것일까?
2 제사의 공포에 찬 두 눈동자에 암담함과 추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가 따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형께서 돌아가셨다.”
해당타타는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경묘 대제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몇 달 전에 이미 천하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시 경국 조정에서 발표한 발표 내용에 따르면, 대제사가 과거 남쪽으로 도를 전파하러 갔다가 오랫동안 학질을 앓게 되었고, 또한 오랫동안 과로한 때문에 병을 얻어 경도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사했다고······. 그런데 경묘 2제사의 말을 들어보니, 해당타타는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실은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고, 어쩌면 경묘 대제사의 죽음과 경국 황제가 큰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말이다.
해당이 두 손을 합장하고 예를 차려 인사를 올렸다. 방금 전 말과 관련해 더 이상 물을 수 없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상대방이 충분히 단서를 주었으니, 더 이상 말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까 제가 제사님의 신분을 밝히는데도 왜 막지 않으신 것입니까?”
해당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이번 큰길에서의 살인이, 이번 일을 크게 키울 거란 걱정은 안 하신 겁니까? 경국 황제에게 단서를 주게 될 텐데요?”
경국 2 제사가 무표정하게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였다.
“산에 세 개의 돌이 있지. 이를 삼석(三石)이라 부른다. 하나의 이름은 명(明), 다른 하나는 정(正), 다른 하나는 기(棄).”
“삼석은 어려서부터 범인(凡人)과 달랐어. 그래서 고을 사람들에게 황야로 쫓겨났지. 만약 사형과 연이 없었다면, 들개 뱃속이 내 무덤이 됐을 거다.”
경묘 2 사제는 수염을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종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를 내지 않았는데도 그에게는 위엄이 느껴졌다.
“그런 내 사형의 목숨을 세상 사람이 앗아 갔다. 그래서 나는 난세의 마음을 맞아 명(明)이란 기술로 죽이고, 정(正)이란 소리로 속이고, 기(棄)로서 나 자신을 버림받은 자식이 되도록 한 거다. 혼군(昏君)을 죽여 천하 만민을 평안케 하려고 말이다.”
해당은 명과 정이 등장하는 앞의 두 구절은 알아들었지만, 마지막에 구절은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기분이 교차하고 있었다. 경국 조정 내부에 분열의 기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국 황제는 7로 총독 및 군측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봤을 때 경국의 통치 자체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삼석 대사가 오늘 거리로 나와 살인을 한 건 다름이 아닌 명이란 기술과 정이란 소리로 세상 사람에게 알린 것이었다. 경묘의 제사는 더 이상 조정의 협력자가 아니란 걸 말이다. 비록 경묘 2제사가 전체 경국과 천하의 고행자를 대표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태도는 강력한 상징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을 차근차근 해나가다 보니, 해당타타는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버림받은 자식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삼석 대사에게는 군산회의 막후 주모자가 경국 황제보다 나을 게 없었던 것이다. 오늘 행동에 나선 건 한편으로는 하서비를 죽여 경국 황제의 큰 계획을 어그러뜨리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연하고 결연하게 자신을 버리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경묘 2제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대제사의 타이름과 예속이 사라져버렸으니, 그로서는 황제를 죽일 방법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경묘 제사에게는 본래 복수 때문에 천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도록 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삼석 대사 입장에서 강남 수채 사람들은 온몸을 피로 물들인 악당에 불과했다. 그러니 죽여 버려도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리 만무했다. 하지만 복수를 갈구하는 내면, 현 국면에 대한 판단, 천하 백성들에 대한 걱정은 결국에는 삼석 대사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와 같은 일들을 해당타타에게 말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에게······ 자신은 버림받은 아이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라고 털어놓은 것이었다.
“경도로 돌아가면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그러니 오늘 내게 들은 말은 고하 국사에게 전하거라.”
말을 마친 삼석 대사는 침묵했다. 그리고 건장한 체격과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담벼락에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정원을 떠났다.
해당타타는 제자리에 차분하게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경묘의 2 제사가 이리 쉽게 스스로를 버렸으니, 군산회에서 분명 후속 행동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노릴 대상이 먼 강남까지 와 있는 범한일지, 아니면 경도에서 평안히 있는 경국 황제일지는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국 황제가 편히 지내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 천하에 꽤 많이 있었다.
그렇다면 북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 * *
“삼석이요? 그리고 버림받은 자식이요?”
범한이 해당타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눈동자에서는 도깨비불이 팔딱이고 있었다.
“당신네들의 그 괴상야릇한 대화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내가 알 수 있는 건······ 정말로 그가 자신을 버릴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황성 정문으로 쳐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후 대전을 지키는 금군과 싸우고, 또 황궁의 홍 태감과 한 대판 겨뤄야 하죠. 아니면 당장 소주성으로 달려와 내 일을 망치든, 나를 죽이든 해야 한다고요!”
범한은 언성까지 높아져 매우 심각한 어투였다.
“버림받았다는 표현 말인데요.”
해당타타가 범한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군산회는 분명 이렇게나 일찍 경도 2 사제의 신분이 폭로되는 건 바라지 않았을 거예요. 오늘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비밀을 말할 일도 없었겠죠.”
해당타타의 말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문제가 터졌고 암살에 나선 경묘 2 사제가 실패했다고 생각한 적들이 버릴 건 버리려 할 것이란 의미였다. 다시 말해, 모든 문제가 해당타타 앞에서 폭로되어 버렸으니, 범한을 가지고 경국 황제의 주의력을 끌거나, 군산회의 나머지 존재를 숨기려 할 것이란 뜻이었다.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경묘 2제사는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한 감이 있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어쩌면 별것 아닌 사람일 수 있거든요. 어디서 나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자신감만큼은 그 누구보다 강하실 뿐이죠. 내가 타타라면, 그 대머리가 무사히 도망가게 놔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말 몇 마디로 타타가 더 이상 캐묻지 않도록 만들다니. 경묘 2제사에게는 유세객의 재능이 있었군요.”
평범한 말 같았지만 사실은 해당타타의 응큼한 속마음을 질책한 것이었다. 그리고 범한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해당타타가 경묘 2제사와 나눈 대화 중 일부를 털어놓지 않았다고 대놓고 말한 것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경국 내정에 관한 일이고, 해당타타는 북제 사람이었으니, 그녀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어떤 내용은 털어놓지 않았다고 본 것이었다.
한데 해당타타는 화를 내기는커녕 나지막한 목소리로 해명을 했다.
“군산회는 분명 명씨 가문을 보호하려 그런 거였어요.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도 안지의 충동질 계획에 걸려들어 다른 사람을 시켜 하서비를 죽이도록 한 거고······ 전부 예상했던 일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죠?”
범한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생각지도 못하게 해당타타가 인정사정없이 자신의 음험한 생각을 까발려 버려서였다. 이에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맞아요. 명씨 가문이 공격하도록 압박한 거예요. 하지만 명씨 가문에서 그 정도의 고수를 움직일 줄은 예상치 못했던 거고······. 내가 군산회란 곳을 너무 얕봤던 거죠.”
오늘 밤 강남거 앞에서는 사망자와 중상자가 나왔다. 우선 하서비가 소주성으로 데려온 강남 수채 장정 중 8, 9할이 살벌한 칼 아래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감찰원 관원도 하서비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6처의 일곱 검수 중 한 명이 사망했고, 네 명은 혼수상태에 빠져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범한이 감찰원을 맡은 후 발생한 가장 큰 손실이었다. 범한은 생각대로 되지 않자 자책하기 보다는 분노가 치밀었다. 모든 게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상대방의 실력을 저평가해 이런 결과를 맞아서였다.
그리고 범한을 가장 화나게 했던 건······. 범한은 일단 명씨 가문이 손을 쓰러 나타나면 그걸 빌미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계획이었다. 한데 이 모든 게 강남거 앞 큰길에서 모두 망가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해당타타의 말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경묘 2제사라니!
경묘 2제사는 기껏해야 황실하고만 왕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이번 일을 빌미로 명씨 가문을 조사하려 해도 이번에는 불가능했다. 죄를 뒤집어씌우기라는 감찰원의 가장 능숙하면서도 음침하고 더러운 수단을 동원해도, 이번 일을 가지고는 조정과 경도 관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다시 말해, 강남의 부유한 일족인 명씨 가문이 경묘 2 사제를 살수로 동원했다는 사실을 믿어줄 사람은 없었다.
420화
범한은 무언가 황당한 마음에 좌절감에 빠져 버렸다. 과거에는 상대가 저지르지 않은 일인데도 죄를 뒤집어 씌워 인정하도록 만들었는데. 한데 이번 건은 분명히 상대가 저지른 일이고, 자신이 광명정대하게 조사를 해도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니!
범한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타타, 이제 그만 가서 자요. 아까는 내가 기분이 나빠서 말을 너무 막한 거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요.”
해당타타가 의외라는 듯 범한을 슬쩍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벌써요?”
범한이 심호흡을 하며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불쾌감을 강하게 억눌렀다. 그리고 얼굴에 다시 온화한 미소를 띠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너무 늦었잖아요. 할 이야기가 있으면 내일 합시다.”
오늘 저녁을 위해 범한은 오랫동안 준비를 한 게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포기라니. 범한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해당타타는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서재를 나섰다.
범한은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러고는 붓을 들어 종이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 밤에 발생한 일을 경도 황제 폐하께 보고해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그의 마음은 경도 2 제사의 출현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신하된 도리로, 설령 자신이 호의를 가진 신하는 아닐지라도 적당한 때에 황제 폐하께 황송하고 초조해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관심을 받을 필요는 있어서였다.
밀서 작성을 마친 범한은 옆에 두었던 서한을 집어 들었다.
서한의 글씨체는 매우 바싹 말라 있고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바로 진평평이란 노인이 직접 작성한 서한이기 때문이었다.
진평평은 조정 국면에 대한 설명과 관료 사회에 대한 주문 같은 건 써놓지 않았다. 대신 짧은 이야기나 하나 해주었다. 까마귀가 물 마시는 이야기로 지금 자기 곁에 없는 범한에게 무슨 일이든 조급하게 처리하지 말라며 훈계를 하고 있었다. 조급해 할수록 어떤 때는 물을 마시는 게 더욱 힘들어진다고 말이다.
병에 돌 넣기라고?
그런데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먼저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는 걸 뜻하는데.
서한을 읽고 있던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오늘 황실 금고 저택에서 본 명청달은 꽤 인상 깊은 인물이었다. 명씨 가문의 노(老)선생이 혼란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한 건 범한에게는 배울만한 점이었다.
한데 자신의 계획에 마음이 동해 군산회를 동원해 암살에 나선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의 경우는 범한이 보기에도 스스로 대비를 덜 한 측면이 있었다.
한데 지금의 명씨 가문을 아직도 큰 노마님이 쥐고 있다는 사실에 범한은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공격에 나선 건 경묘 2제사였다. 그런데 이는 큰일인지라 그자가 오늘 밤 안에 다시 손을 쓰기는 힘들 것 같아 보였다. 이에 범한은 생각을 해보고는 더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하서비가 명줄이 길어 죽지 않았고, 내일 황실 금고 입찰은 계속되어야 하고, 삶도 지속되어야 하고, 날도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평온을 되찾고, 물병 목까지 돌이 채워졌을 때 범한은 그때 물을 마시기로 마음먹었다.
* * *
“나갔다 올게.”
범한이 사사에게서 외투를 받아들고는 말했다.
사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범한을 두어 번 쳐다보고는 생각했다.
‘이제 곧 자시인데, 대체 어디를 나갔다 오시려는 거지?’
하지만 갑자기 서둘러 나간다고 한 걸 보면, 도련님께는 분명 큰일일 거란 생각에 사사는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범한이 새의 깃털이 든 도포를 걸치며 급히 명원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길을 가면서 옆에 있는 부하에게 말을 해두었다.
“일이 커지면, 즉각 1급 원령을 발효시키게. 동남 1로에서 어떻게든 경묘 2제사의 행방을 찾아보게.”
그러자 부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대인, 경묘는 지금껏 황궁에서 관리해온 곳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비공식적인 개입이겠지요?”
범한이 살짝 화를 내며 꾸짖었다.
“우리를 죽이러 왔었네. 그런데도 내가 그자를 못 죽이는 건가?”
그러자 부하는 더는 말대꾸하지 않고 범한의 말대로 명령이나 내렸다.
사실 범한의 말에는 다른 뜻이 숨어 있었다. 해당타타가 앞서 말했듯이, 경묘 2제사의 행동을 보니 그는 경도로 가 황제를 살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감찰원에게 동남 1로에서 수색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림자가 소주에 없는 상태니 현 감찰원 인력으로는 삼석 대사를 붙잡아 둘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범한의 이번 조치는 일종의 척만 한 것이었다. 자신의 부하와 고수가 다시 맞붙어 더 큰 손해를 입게 될 걸 방지하고 경묘 2제사가 경도로 돌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경묘 2제사가 경도로 돌아가 황제 폐하를 죽이려 한다는 걸 범한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안배를 했으니,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문 밖으로 나오자 호위 고달이 마차 가림막을 열어주었다. 범한은 마차에 오르려다가 무언가 생각할 게 있었는지 한 발을 마차 위에 올려놓은 채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몸을 돌려 말했다.
“밖에 나간 사람들에게 오늘 밤에는 돌아와 있으라고 해줘요.”
범한 곁에 있던 감찰원 관원은 경악했다.
‘오늘 밤 계획을 취소하란 말씀이신가?’
그가 알고 있는 제사 대인은 부하가 손해를 입으면 어떻게든 바로 보복을 하는 사람이었다.
‘설마 제사 대인께서 갑자기 성격이 변하신 거야?’
경악한 부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범한은 마차로 들어갔다.
마차 바퀴가 소주성의 청석판이 깔린 도로 위를 달렸다. 밤이 깊은 시각인지라 거리에는 행인이 없었다. 오늘 밤에 발생한 일을 알고 있는 소주부 아속들만 잠이 덜 깬 얼굴로 여기저기를 살피고 다닐 뿐이었다. 그래도 이들은 강남거 앞거리에 있는 아속들보다 그나마 마음은 홀가분한 편이었다. 강남거 쪽으로 간 이들은 지금 시체며 잘려나간 사지를 옮기느라 구토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고 했으니까.
범한은 의자 등받이에 반쯤 몸을 기댄 채 조용한 소주 밤거리를 운행하고 있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미간을 계속해서 가볍게 주물렀다. 머릿속을 피곤하게 만드는 생각과 시시각각 뛰쳐나오려는 몽땅 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강제로 제거하는 중이었다.
마차 옆에는 호위 몇몇이 따르고 있었다. 오늘 하서비가 자객을 만났으니 외출한 범한의 안전에 더 각별히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얼마 후 마차는 강남 총독 관저의 측문 앞에 와 있었다. 그리고 이름첩을 제출할 시간이 없어 범한은 자기 얼굴을 통행증 삼아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관저 가사를 관리하는 종들이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둘러싸고 막아서는데도 범한은 총독관저 후원에 있는 비밀 손님 용 응접실로 곧장 향했다.
차가 나오고 아직 두 모금도 마시지 않았을 때였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던 강남 총독 설청이 서둘러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집사가 말해주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설청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그는 설청의 차림새에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웃기 시작했다. 총독 대인이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있어 자기 때문에 침상에서 서둘러 일어난 사람 같지 않아 보여서였다. 이제 보니, 오늘 저녁 소주성에서 제대로 잠을 청한 관원이 별로 없던 것이었다.
범한이 웃자 설청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을 휘휘 내저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런 후 차를 들이켜 목을 좀 축인 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흠차 대인이 한밤중에 오다니, 무슨 중차대한 일이라도 있는가?”
범한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솔직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누군가가 제 사람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를 죽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강남 총독은 살짝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 저녁 소주성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음험함을 감추고 있던 범한이 명씨 가문에게 손을 쓰려 하는 건 그로서는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다만······ 범한이 사전에 자신에게 통보하러 온 건 자신도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범한의 이와 같은 태도에 설청을 안도감을 느꼈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설청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흠차 대인의 심정은 본관도 이해가 가는군.”
이는 말을 안 해준 것과 진배없는 반응이었다. 당연히 지지한다는 뜻으로는 볼 수 없었다. 범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명씨 가문은 강남에서 명망 있는 집안이었다. 가문 자제 수만도 만 명이 넘었고 조정과 재야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명씨 가문의 손과 발은 이미 강남 백성의 생활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범한이 감찰원의 무력을 동원해 단순하고 거친 방법으로 명씨 가문을 압박하려 든다면, 분명 무수한 반발에 부딪힐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강남 정세도 일대 소용돌이가 일 것이었다.
강남 정세는 어지러워져서는 안 되었다. 일단 어지러워지면 강남 총독인 설청이 직격탄을 맞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설청 입장에서는 조정과 황제 폐하께 면목이 서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해한다 외에는 다른 말을 꺼낼 수 없던 것이었다.
한편 범한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흑기는 아직 강북에 있었다. 최후의 한 방을 아직 소주로 들이지 않은 것이다. 황제 폐하의 의심과 군신들의 소란까지 감수하고 흑기를 소주로 들이는 모험을 감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현재 범한이 쓸 수 있는 무력 수단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명씨 가문과 맞서는 역할을 맡으려면, 강남 총독 설청의 도움이 절실했다. 도움을 줄 게 아니라면, 최소한 묵인이라도 필요했다. 그래서 범한은 야밤에 총독관저까지 서둘러 온 것이었다.
설청의 걱정거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자 범한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총독 대인 염려 마십시오. 본관이 호방한 사람이기는 하나, 그래도 평소에 일 처리를 할 때는 규율을 지킨답니다.”
설청은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그는 장 공주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감찰원과 황자의 투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밤 명씨 가문이 뜻밖에도 강남거에 살수를 보내 입찰에 참여한 상인을 죽이려 한 건······ 아무리 그 상인이 모두 다 아는 강에서 활동하는 비적이었지만······ 아직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수석 관리에게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상인은 그에 맞는 본분과 경계를 지켜야 했다. 그런데 오늘 밤 명씨 가문은 그 선을 넘었다.
더욱이 살인이 이루어진 강남거는 총독 대인이 운영하는 곳이 아니던가.
“황실 금고의 16개 항목이 모두 낙찰되기 전까지 본관은 행동에 나설 수 없습니다.”
범한이 설청의 두 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모레 이후에 이 일과 관련해 명씨 가문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입니다.”
“그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선에서만 하게.”
설청이 세상 백성을 가련히 여기는 고행자처럼 탄식하며 말했다.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총독 대인은 여전히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고, 자신도 원래 큰 걸 바란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안에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큰 가문에 평지풍파가 일 것이라 생각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인, 염려 마십시오. 제게 다 생각이 있습니다.”
“증거가 있어야 하네. 관건은 증거야.”
설청이 자기 앞에 있는 젊은 흠차 대인을 바라보며 일깨워주었다. 이번 일은 단순히 관(官)과 상단 간의 다툼이라기보다는 조정 세력 간의 싸움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범한은 명씨 가문을 제거하고 싶어도 결국에는 경도에 있는 누군가에게 꼬투리나 제공해 주는 것일 수 있었다.
“살다 보면 항상 증거를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범한이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증거를 찾아내는 안목이 떨어져 문제지요. 한데 감찰원은 그 안목이 매우 뛰어납니다.”
강남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두 관원은 한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그러다 둘 모두 피로감이 밀려오자 범한이 먼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강남 정세는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었다. 여명이 오기 전 암흑이 깔린 것처럼, 눈을 들어 멀리 바라봐도 어둠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지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범한은 마차 의자에 기댄 채 깊이 잠들어 마차 밖이 밝아오고 있는데도 알지 못했다. 소주성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곳 봄날의 새벽은 이미 당도해 있었다.
421화
이날 밤, 많은 사람이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또 여럿은 바삐 움직였으며, 심지어 일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듯 소주성에서 큰일이 터졌지만, 황실 금고 봄 입찰의 둘째 날은 예정대로 찾아왔다.
규정이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예전부터 지켜오던 규정 말이다.
그래서 황 내관과 곽쟁이 소주성의 방어 문제와 하서비 자객 사건을 이유로 전운사에게 입찰 날짜를 며칠 뒤로 미루자고 요구했지만, 범한은 단호했다. 제 시간에, 그것도 일각도 늦어서는 안 된다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명씨 가문은 이미 하룻밤이란 시간을 벌지 않았나. 그러니 그들에게 더 대응할 시간을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범한은 줄지어 들어오는 상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피곤한 기색을 억지로 감추기 위해 지끈거리는 미간을 연신 문질러댔다. 강남 거상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그들 눈동자에 섞여 있는 기이한 감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하서비가 자객을 만난 일 때문에 저들도 큰 곤욕을 겪은 것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이러한 변화가 자신의 계획에 호재로 작용할지 아니면······ 악재로 작용할지 아직은 섣부르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명씨 가문의 부자는 끝에서 두 번째로 황실 금고 저택 정원으로 들어왔다. 뒤따라오던 명씨 가문 심부름꾼과 회계 담당자는 한껏 온화한 얼굴로 사방에 예절 바르게 인사부터 건넸다 그러자 관원과 상인들의 눈동자가 그들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범한 앞에서 명씨 가문에게 과하게 친한 척을 할 수 없었다.
명씨 가문의 부자가 정당 앞에서 인사를 올리자 황 내관과 곽쟁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화답을 해주었다. 그들에게 지지 의사를 분명히 표한 것이었다. 범한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며 어서 자리에 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눈빛만큼은 싸늘했다. 명청달의 눈빛이 매우 기괴했고 무척이나 차분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청달은 어젯밤에 일어난 하서비 자객 사건 때문에 보복 당할 걸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문이 닫히기 전, 강남 수채 사람들이 당도했다.
하서비 뒤에는 범한이 보내준 호부의 나이 많은 관원 외에도 호위 무사 셋이 더 있었다. 호위 무사가 셋 밖에 없었던 건 나머지 형제들이 어젯밤에 강남거 앞 큰길에서 목숨을 잃어서였다.
하서비는 안색이 창백했다. 중상을 입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오늘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걸려 있어 억지로라도 참석한 것이었다.
몸에 두른 붕대와 대조적으로 이마에 묶은 흰 띠는 눈에 거슬릴 정도로 새하얬다. 한데 그의 뒤에 있던 부하들도 머리에 흰 띠가 두르고 있어, 이들은 봄날에 눈발이 날리는 것 같은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누군가가 상복을 입고 황실 금고에 들어온 건, 몇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택에 내 모든 이의 이목이 상복을 입고 온몸에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을열 여섯 번째 방 도적들에게 쏠렸다. 영남의 웅씨 가문과 천주의 손씨 가문을 필두로 한 상인 몇몇이 방에서 나와 하서비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지막한 소리로 안부의 말을 전했다.
하서비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정당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첫 번째 방에 앉아 있는 명씨 가문 부자(父子)는 본체만체하고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하 아무개, 그래도 왔습니다.”
순간 홍 내관과 곽쟁의 낯빛이 조금 이상해졌다.
범한은 눈가가 실룩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오른손을 뻗어 차분하고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기만 한다면야, 여기에 자네 자리는 계속 있을 거네.”
모두들 범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황 내관과 곽쟁은 이 말을 가지고 범한에게 이래라저래라 말참견할 수 없었다. 오늘 강남 총독 설청은 와병으로 불참한 상태였다. 그러니 황실 금고 저택 내부에서 제일 고위급 관원은 범한이었다. 다시 말해, 설청이 범한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빠져준 것이었다.
하지만 명씨 가문의 뒷배들은 모든 국면이 범한에 의해 좌우되도록 놔둘 수만은 없었다. 이에 황 내관이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뗐다.
“하 선생, 소주성에서 강호인 살인 사건이 일어나 귀하의 부하들이 적잖이 해를 입었다고 들었네······ 허나, 그렇다고 상복을 입고 황실 금고에 온 건 예에 맞지 않는 행동이군.”
하서비는 신분 자체가 내세울 게 없는 이였다. 그래서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이 군산회 고수에게 그를 죽여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하서비가 살수의 손에 죽었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됐을 게 뻔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을 단순히 강호인들 끼리 서로 공격하고 싸운 걸로 몰아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황 내관이 말을 한 건 이와 같은 점을 명확히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범한은 상대방이 형식적인 걸 가지고 일일이 따지는 건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복을 입고 온 게 예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황 내관의 말에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지막하게 말하고 말았다.
“황 내관, 본관의 화를 그만 돋우시지요.”
자그마한 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마치 땅속 깊은 곳에 있던 음성이 빙산의 갈라진 틈을 타고 튀어나온 것 같아······ 너무나도 차갑고 음험해 듣는 이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어 버렸다.
‘본관의 화를 그만 돋우시지요.’
이 말은 황 내관의 귀를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이 늙은 내관이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며 얼른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다.
‘저 천벌 받을 우라질 놈이 애처럼 고집이나 피우지 않게 하려면 하서비부터 후딱 보내줘야겠군! 어찌되었든 명씨 가문은 밤새도록 방책을 세웠잖아. 이따가 내가 살펴보기만 한다면야 문제가 일어날 리는 없겠지. 이런 상황에서 범한이 트집이라도 잡아 갑자기 버럭 화라도 내버리면 저 놈을 진정시킬 사람도 없잖아!? 일단 대사를 그르치지 않는 게 우선이야!’
옆에 있다가 한마디 하려던 곽쟁도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어 내뱉으려던 말을 서둘러 삼켜 버렸다. 어젯밤에 이들은 크게 진노한 범한이 인정사정없이 손을 쓸 거란 생각에 상주문을 써서 나름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바로 범한의 약점을 잡을 준비였다.
한데 이들의 생각과 달리 범한은 줄곧 차분했다. 이에 황 내관과 곽쟁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언제 폭발할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은 마음속의 사악한 불길을 꾹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곽쟁은 순간 범한의 손에 거꾸러진 상서 대신들이 떠올라 일단은 뒤로 물러섰다. 장 공주께서 지키려는 건 명씨 가문의 몫이지 명씨 가문의 체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 *
또 폭죽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황실 금고 저택 밖에 종잇조각이 어지럽게 날리고 먼지가 자욱하게 깔렸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지금 이 광경이 무언가 익숙하게 느껴져서였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년에 북제 상경에서의 그날이 떠올랐다. 장묵한 대가의 서거 소식을 듣던 그 순간, 그리고 그날 말이다. 상경성 밖에서는 사절단을 배웅하는 예포가 터졌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장묵한 대가를 배웅하기 위한 것 같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울린 폭죽은 어젯밤에 죽은 이들을 배웅하기 위한 것일까?
하서비가 침묵 속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을열 여섯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머리에 둘렀던 흰 띠를 벗어 조심스레 탁상 위에 반듯하게 펼쳐 놓았다. 뒤에 있던 형제들 역시 큰형님을 따라 흰 띠를 벗은 후 절도 있게 그것을 한 줄 한 줄 탁자 위에 반듯하게 펼쳐 놓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범한의 눈가에 알 듯 말 듯 하게 살짝 주름이 잡혔다.
황실 금고의 의례 진행자 관원이 다시 돌계단 위로 올라가 둘째 날 입찰 개시를 정식으로 선포했다.
어제 모두 5개의 항목이 낙찰되었다. 황실 금고에서는 모두 16개 항목에 대해 입찰을 진행했다. 맨 마지막에 두 개로 묶어서 진행하는 8개 항목을 제외한 3개 항목이 먼저 입찰에 들어갔다.
이윽고 진행자가 이 3개 항목의 입찰 개시를 알렸다.
명씨 가문은 강남 상인들 간의 약속에 따라 가격을 부르지 않았다. 한편 하서비는 어제 저녁에 당한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듯 침착하게 가격을 내놓았고, 셋 중 하나를 낙찰 받았다. 나머지 두 개는 영남의 웅씨 가문과 항주의 진씨 가문에서 가져갔다. 모두 어젯밤에 강남거에서 상의한 대로 한 것이었다.
하서비가 낙찰 받은 건 어제와 마찬가지로 북제로 가는 항목이었다. 응접실에서 가격을 확인한 범한은 하서비가 낙찰 받을 걸 확인하고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하서비가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하지 않아 기뻐서였다.
세 개 항목의 호가 경합은 특이할 것 없이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낙찰가도 작년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결정 되었고, 누구 하나 놀라게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모든 상인과 관원들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 다 알다시피, 오늘 가장 중요한 항목은 뒤에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명씨 가문이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8개 항목 말이다.
* * *
“동쪽과 남쪽, 해로(海路)로 보내는 2 작업장에서 나온 물건으로 모두 네 개 항목이오. 가격을 제시하고, 최고가를 쓴 상단에게······ 낙찰······ 되오.”
황실 금고 전운사 관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계단에 서서 소리쳤다. 대체 몇 번을 외쳤는지 모르겠지만, 매년 이 말이 터져 나오면 가격을 써내는 건 명씨 가문뿐이었다. 아무도 명씨 가문 것을 빼앗아 올 생각을 안 해서 그런지, 관원의 말투는 무미건조하고 전혀 흥이 올라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시작을 알리는 말이 떨어진 후 가장 먼저 소가죽 봉투를 건넨 건 을열 여섯 번째 방이었다.
저택 내부에서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소문에 명씨 가문에서 버린 7 공자란 하서비가 드디어 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어서였다.
갑열 첫 번째 방에 있는 명청달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예견했다는 태도였다. 과거 몇 년 동안은 명씨 가문의 강력한 실력과 장 공주의 보살핌으로 강남로 상인들은 감히 그에게 맞서 가격을 써낼 수 없었다. 그래서 명씨 가문이 뒤쪽 8개 항목을 최씨 가문이 앞쪽 6개 항목을 나눠 가지며, 두 집안이 판을 휩쓴 것이었다.
계속 독무대를 하다보면 결국에는 물리기 마련 아닌가. 그래서 오늘 드디어 누군가가 명씨 가문과 한 판 붙으러 나서자 명청달은 경계하는 와중인데도 저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명청달이 웃는 얼굴로 옆에 있는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2할을 더 얹어서 찍어 눌러 버리자.”
명란석이 대경실색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첫 번째 호가에서 작년 낙찰 가격보다 2할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란 뜻인 거야? 하서비가 정말로 은전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서 2차 호가 경합에서도 우리를 계속 따라오면 어쩌지? 우리가 과연 그걸 당해낼 수 있을까?’
명청달이 옆에 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느긋하게 말했다.
“2할 더 얹은 건 하서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누르기 위해서란다.”
명란석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오늘 황실 금고 저택에서 하서비를 지원해주고 있는 흠차 대인 말고 대체 또 누가 우리 집안과 입찰 경쟁을 하려는 거지?’
이 명씨 가문 도련님은 아직도 굳건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서비의 저력은 범한이 호부에서 사적으로 조달해 온 은전에서 나오는 것임을. 그러니 다른 사람은 그럴만한 실력이 없다고 말이다.
한데 명청달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맑은 거울 같았다. 그래서 범한이 어제 하서비에게 이것저것 대량으로 판매권을 사들이게 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강남의 상인들을 굶주린 늑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굶주린 늑대는 누구든 물어뜯고 보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422화
두 개의 소가죽 봉투가 응접실로 전달되었다. 이번 입찰에 관심이 있던 관원들은 궁둥이가 어느새 의자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탁한 숨을 내뱉었다. 진짜 연극은 이제부터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연극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을열 첫 번째 방의 방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소가죽 문서 봉투가 관원의 손에 전달되어서였다.
“천주의 손씨 가문이잖아!”
순간 분위기가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천주의 손씨 가문이 이 뜨거운 감자를 빼앗으려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였다.
“손씨 가문이라니!”
명란석이 깜짝 놀라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손씨 가문이 대체 어디서 그 많은 은전을 가져온 걸까요?”
명청달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손씨 가문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된다. 여러 가문이 힘을 합쳐도 되는데, 설마 그걸 몰랐던 것이냐? 웅백령 저 늙은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차분한 걸 눈치채지 못한 게냐? 우리 쪽만 지켜보고 있던 가문들도 있었다. 한데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리 오랫동안 우리를 바라볼 리 없겠지! 이 애비 얼굴에 뭐 이상한 게 묻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당에서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던 관원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범한은 일찌감치 이리 될 줄 알고 있어서 전혀 놀라지 않았다. 황 내관과 곽쟁은 이를 악물고 이를 벅벅 갈며 생각했다.
‘천주의 손씨 가문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감히 지금 끼어들어서 소란을 피우다니!’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며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첫 번째 호가 결과가 나왔다. 응접실에서 범한은 호가 대조표를 들고 속으로 탄식했다. 그리고 명씨 가문이 강남에서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고 혼자서 속으로 읊조렸다.
범한 계획에서 어떻게든 사력을 다해 명씨 가문과 가격 전쟁을 벌여야 하는 건 후반부 네 개 항목이었다. 북제에서 운반해온 은전의 양이 어마어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걸 유통하기 까지는 너무 오래 걸려서였다. 더군다나 하서비가 앞서 낙찰 받은 다섯 개 항목의 계약금만도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가격을 무한대로 올릴 수 있다면, 하서비는 명씨 가문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을 높여도 되었다. 한데 문제는 범한이 명청달에 대해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명씨 가문의 명의상 주인은 단순히 이름만 올려놓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서 범한이 정말로 허위로 가격을 올려놓았을 때, 명청달이 장 공주의 엄명을 무시하고 손절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 범한으로서는 아직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 범한이 보유하고 있는 은전을 가지고 명씨 가문에게 손해를 입히기 위해 낙찰 가격을 높이려면, 두 번째 묶음 항목에서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만일 명씨 가문이 세 번째 호가 경쟁에서 독하게 나온다면, 이번의 묶음 네 개 항목에서는 대담하게 포기해야 했는데······. 하서비가 가격을 너무 높여 놓으면, 결과는 두 가지 중 하나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4할의 계약금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하서비가 성공적으로 첫 번째 묶음 항목을 낙찰 받게 되어 다음 입찰에 참여할 여력이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묶음 항목에서 명씨 가문이 주워가듯 빼앗아 가는 걸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나머지 하나는 범한이 원치 않는 결말이었다. 범한에게는 동이성으로 가는 화물 노선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반면 이 네 개 항목은 명씨 가문 입장에서는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었으니, 범한 입장에서는 계륵이었다. 범한은 하서비가 이번 항목을 낙찰 받을 거란 생각은 아예 않고 있었다. 하지만 뒤에 네 개 항목을 너무나도 쉽게 빼앗아 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게 된다면, 범한은······ 그 분노를 삼켜버릴 수 없을 것이었다.
첫 번째 결과 가능성과 관련해······ 만약 정말로 가격을 폭등시켜 놓는다면, 황실 금고가 그동안 공을 들여온 일을 단번에 망쳐버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황 내관과 곽쟁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면 하서비는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었다.
* * *
그러니 앞서 말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범한의 사전 계획에서 첫 번째 묶음 항목은 천주의 손씨 가문이 공격에 나서야만 했다. 그래야 하서비는 눈속임으로 가격을 써내는 척만 하며 사력을 다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응접실에서 가격표를 보니, 범한은 명씨 가문 어르신이 일찌감치 자신의 계획을 눈치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첫 번째 호가부터 생각지도 못한 가공할만한 액수가 나온 것이었다.
손씨 가문이 오늘 공격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어젯밤 범한이 사천립을 통해 전달해준 소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씨 가문의 무겁게 짓누르는 공세와 어젯밤에 명씨 가문이 하서비에게 살수까지 보냈다는 생각이 맞물리자······ 범한은 놀란 손씨 가문이 이번 호가 경쟁에서 더 이상 가격을 써내지 않을 거란 걱정이 일었다.
역시나 일은 범한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의례를 진행하는 관원은 명씨 가문에서 은전 380만 냥을 적어 냈다고 발표했고, 사람들은 웅성이기 시작했다.
을열 첫 번째 방의 문은 그때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손씨 가문이 놀라 위축되어버린 것이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갑열 첫 번째 방에 있는 명씨 가문 부자를 바라보았다. 감찰원 조사를 통해 얻은 정보처럼 정말로 저 두 사람이 어젯밤 살수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은 건지, 주모자는 순전히 큰 노마님뿐인지 따져보았다.
하서비 살해 시도는 경솔하고 우악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기에 기세등등한 호가 공격까지 더하니, 명씨 가문 입장에서는 혼란을 틈타 그들의 것을 훔쳐가려던 이들을 쫓아내는 효과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명청달이 현 국면과 자신의 모친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범한은 상대방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던 것이었다.
첫 번째 호가가 나오자 황 내관과 곽쟁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황 내관은 턱수염이 없는지라 그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명씨 가문의 공격과 사람들의 반응에 상당히 흡족해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을열 여섯 번째 방 안은 차분했다. 하지만 하서비는 창살을 통해 범한에게 의견을 구하는 눈빛을 잠시 지어 보였다.
범한이 유감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두 손바닥으로 관자놀이 쪽의 머리카락을 눌렀다. 이 행동의 뜻은 ‘여유롭게 임하라’였다. 그리고 손씨 가문이 물러섰어도 하서비는 계속해서 가격을 제시하되, 다만 이번에 가격을 써낼 때 제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하서비는 명씨 가문에게 손해를 입히되 너무 과하게 하지 말아야 했고, 상대방이 첫 번째 묶음 입찰 결과에 만족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또한 명씨 가문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포기해 이번 네 개 항목을 자신에게 넘기도록 해서도 안 되었다.
하서비에게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무리 호부 관원들이 뒤에서 도와주고 있어도 아무 실수도 없이 처리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국면이었다.
의례를 진행하는 관원이 다시 돌계단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명씨 가문의 첫째와 일곱째가 가족 간 고투를 벌이는 걸 기대했지만, 호가 경쟁이 두 번 더 진행되는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을열 여섯 번째 방의 강도가 어제의 맹렬함은 온데간데없이 매우 조심스럽게 가격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심한다고는 했어도, 하서비는 처음부터 묶음 항목의 입찰 가격을 서서히 올리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그것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가격대까지 올려놓고 말았다.
가격이 높아진 건 명씨 가문이 시작가를 작년 낙찰가보다 2할이나 높게 제시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른 한편으로는 을열 여섯 번째 방이 상대방에게 찰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괴롭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낙찰가는 성공적이었다. 과연 명씨 가문이었고, 결과는 과거와 같았다. 단지 가격 면에서 과거와 다른 큰 변화가 있었을 뿐이었다.
바로 512만 냥!
모두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낙찰 가격을 듣는 순간, 황실 금고에서 가격을 써낼 기회를 다섯 차례 주었다면, 하서비와 명청달이 낙찰가를 작년의 두 배로 올렸을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만큼 확실히 너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장 공주가 관리하는 동안 황실 금고의 판매권 가격이 턱없이 낮았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낙찰 받은 가격 때문에 명씨 가문은 더 손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할 테고, 어쩌면 더 크게 벌어들일 작정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 물론, 이는 명씨 가문이 계속 해적질을 하고, 범한의 코앞에서 여전히 동이성과 밀무역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웃었다. 이번 결과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올해는 명씨 가문이 낙찰을 받기 위해 돈을 쏟아붓게 되어 있어서였다.
“갑열 첫 번째 방, 명씨 가문, 512만 냥으로 낙찰!”
줄곧 멍하니 있던 황실 금고 전운사의 의례 진행 관원도 가격을 부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황실 금고에서 입찰을 시작한 지 십여 년. 지금껏 가장 높은 낙찰가였다. 이에 낙찰 결과를 알리는 그의 목소리는 낭랑하니 힘이 넘쳤고, 질질 끌지 않고 말해, 대단히 경쾌한 느낌이었다.
명씨 가문에게 각각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던 상인들도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낙찰가를 듣는 순간 그들도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갑열 첫 번째 방에 있는 명씨 부자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전혀 없었다. 특히 명청달의 미간에는 옅게 걱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명청달도 범한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떳떳하지 못한 수단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번 네 개 항목은······ 분명 손해를 봤을 것이라고 말이다.
명청달에게 제일 신경이 쓰였던 건 하서비가 고수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가격을 써낼 때 아주 적은 액수까지 잘 잡아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이번 항목에서 은전 512만 냥으로 낙찰 받은 명시 가문은 잠시 후 계약금만도 은전 2백여 만 냥을 내야 했다. 한데 그가 봤을 때 상대방이 사력을 다해 가격을 써내는 것은 맨 마지막일 터였다.
어젯밤 명원에서는 밤새도록 은전을 모았다. 여섯 형제에게서 더 거둬들인 은전이 기껏해야 60여만 냥.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이 정한 135만 냥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이다. 한데 이번 묶음 네 개 항목의 판매권 낙찰 가격만 해도 이미 명청달이 예상을 훨씬 넘어 버린 상태였다. 그러니 다음 입찰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지.
태평 전장에서 공급받은 은전은 아직 절반이 더 남아 있었지만 후반부 묶음 식 입찰 항목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명청달의 두 손이 옆에 놓아 둔 나무 함 위를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나름 무슨 생각이 있는 듯했다.
한껏 피곤해 보이는 아버지를 잠시 쳐다본 명란석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버지께서 어젯밤에 주무시지도 못하고 새벽까지 소주성에 있는 몇몇 큰 전장을 돌며 은전을 조달한 덕에 겨우 안심할만한 액수를 모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나무함에는 초상 전장이 서둘러 발행해 준 일람 출급 어음이 들어 있었다.
“네 상각에는 흠차 대인이 다음의 묶음 네 개 항목도 원할 것 같으냐?”
명청달이 피곤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명란석은 어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423화
정오가 되고, 황실 금고의 입찰도 잠시 일단락되었다. 소주부와 전운사 소속 아속들이 각 대인들과 상인들이 먹을 식사를 내왔다. 거부들에게 관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집에서 먹는 음식보다 못했다. 하지만 상인들은 식사를 맛있게 하고는 의기소침해져 있는 천주의 손씨 가문 사람 옆으로 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었다.
모두들 오후에 있을 최후의 결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에 이미 은전 5백만 냥이라는 가공할만한 금액이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오후에는 얼마나 더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어줄 일이 일어날지 모두들 기대하는 중이었다.
명청달이 아무 소리도 않고 정당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청달은 고관들이 식사하고 있는 편청으로 걸어 들어가 싫은 기색 없이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황 내관과 곽 어사를 뵈옵니다. 이 늙은이 흠차 대인께 드릴 말이 있어 그러니 두 분께서는 편의를 좀 봐주시지요.”
황 내관과 곽쟁은 순간 깜짝 놀랐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지? 설마 명씨 가문이 내 앞에서 범한 편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할리가······.’
명청달은 오랫동안 명씨 가문을 맡아 왔고, 조정의 높은 관리들과 왕래가 있는 편이라 스스로 위엄을 갖추려 노력했다. 황 내관과 곽쟁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웃는 얼굴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명청달을 굳게 믿고 있던 지라 범한과 단 둘이서 말할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 * *
편청에 있던 다른 이들이 물러나자 명청달이 힘겹게 앞섶을 젖히고는 범한 앞에 말없이 꿇어앉았다.
그런데 범한은 한 손에는 밥그릇을 다른 한 손에는 젓가락을 쥐고 차려진 음식 중에서 뭐가 맛있을지 고르기나 했다. 그리고 명청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몇 마디 해주었다.
“다음에 진행될 네 개 항목은······ 본관이 가져갈 생각입니다.”
범한의 젓가락이 쟁반 위를 이리저리 헤집더니 기름기가 좔좔 도는 쇠고기를 집어 밥 위에 올렸다. 범한은 그것을 천천히 입으로 넣더니 꼭꼭 씹어 맛이나 음미 할 뿐 자기 옆에 꿇어앉아 있는 명청달은 상대도 하지 않았다.
명청달은 비범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무릎을 꿇었다는 건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범한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을 마친 범한이 들고 있던 밥그릇과 젓가락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명씨 어르신, 당신은 저보다 한참 윗 연배십니다. 이러지 마시지요.”
범한이 슬쩍 부축하는 척을 하자 명청달도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관리와 상인 간 대화는 매우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범한이 명청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어르신께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오셨습니까?”
대체 어떤 말을 해야 범한 부하들의 목숨값을 치를 정도가 될까? 어떻게 말해야 범한이 명씨 가문을 놔줄까? 명청달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을뿐더러 알 필요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범한이 명씨 가문을 잠시 놔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가문과 경도 쪽을 위해 어떻게든 충돌을 완화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던 것이었다. 현 상황이 불투명하니 줏대 없는 사람이 되어서라도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올지 알아내야 했던 것이고······.
그러니 그는 행동을 취해 구걸을 하는 중이었다. 흠차 대인이 조금이나마 자신의 숨통을 트여주고, 자신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흠차 대인이 자신들 쪽으로 기울었으면 하는 강한 바람 때문이기도 했다.
범한은 심계가 깊은 명씨 어르신이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성의가 없으니, 항복을 해도 다 부질없는 행동입니다.”
명청달이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흠차 대인께서는 제가 못 미더우시겠지요.”
“못 미더워서 그런 게 아닙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스스로도 자신을 믿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 배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 내려오려면······ 어렵겠지요. 지금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 겁니다. 아직도 그 배에 타고 있을 생각이라면, 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언제든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려 하겠지요. 그런데도 본관의 배에 탄다면, 예전 배에 두고 온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범한이 언급한 물건이란 게 실물로 된 물건이 아님을 명청달은 알고 있었다. 이에 젊은 흠차 대인을 설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그는 피곤한 기색을 내보이며 자조적인 자세로 부탁했다.
“대인, 부디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범한은 탁자 위에 놓인 맛깔스러운 음식만 바라보며 생각을 해보다가 잠시 후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형제가 많던데, 최근에 듣자 하니······ 을열 여섯 번째 방의 하 당주와 형제라면서요?”
명청달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속이 쓰렸다. 명씨 가문은 범한의 적(敵)을 따른 지 너무 오래 되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명씨 가문이 정말로 범한을 따르려 한다는 걸 믿도록 만들려면, 그에게 가문의 통제권을 완전히 넘겨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하서비는 분명 범한이 명씨 가문을 통제하기 위해 쓰는 말이지 않던가. 그러니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면 범한은 이 협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조금 전 범한의 말은 분명 명청달 자신에게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 다만 그 조건이란 게 명청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명청달은 가문의 사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하서비의 얼음장 같은 눈빛과 옷에 가려져 있는 처참한 채찍 자국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했다.
현 상황에서 공격하는 쪽은 감찰원이고, 방어하는 쪽은 명씨 가문이었다. 더군다나 명씨 가문은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오늘 황실 금고의 입찰 가격이 크게 오른 건 향후 줄줄이 일어날 일의 서막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 곧 명씨 가문은 폭풍우를 맞아 흔들릴 것이다.
이 순간, 명청달은 깨달은 게 있었다. 이 젊은 흠차 대인이 원래는 뼛속 깊이 보수적이고, 신중하며, 가혹하고 음험한 자란 사실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제시한 거대한 유혹에 전혀 흔들림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제야 명청달은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것보다 범한이 훨씬 더 많은 걸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40만 냥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향후 명씨 가문이 강남에서 암암리에 협조해야 하는 것에서 그칠 일도 아니었다. 오만하게도 범한은 황실 금고의 사업과 생산에 관한 모든 걸 통제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대인 부디 살길을 내주십시오.”
명청달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달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살길을 내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후반부의 네 항목도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제 가문의 만여 명의 식솔과 고용된 무수한 종들이 내년에는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명씨 가문에서 은전이 부족할 리 없지요.”
자기 앞에 있는 명씨 가문의 주인을 보고 있던 범한은 상대가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협박하고 있기는 했지만,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한껏 낮추고 있어 귀에 거슬리지도 않을뿐더러 유순하게 들려서였다.
“이따가 진행될 네 개 항목은······ 명씨 가문이 몇 년 동안 꿀꺽한 은전을 토해 놓는 셈 치면 됩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패색 짙은 명청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명씨 가문 주인이 속으로 어떤 계산 중인지 쉼 없이 따져보았다.
“본관이 과거에 어떻게 했는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동안 당신이 물건을 팔아치우던 수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물론 본관은 무조건 억지를 부리는 비적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쪽에서 일처리를 타당하게 한다면 본관도 자연스레 그리 할 것입니다.”
타당한 일 처리란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지적한 것이었다.
범한이 젓가락 끝으로 도자기로 된 접시 가장자리를 내리쳤다.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범한이 마지막으로 말을 이었다.
“밥그릇을 잡을 때는 용이 토해낸 여의주를 잡듯이 하고, 젓가락질을 할 때는 봉황이 부리로 쪼듯이 해야 하며, 밥을 8할 먹었는데 배부르면 남은 건 싸가야 하지요······ 사람의 도리와 일을 하는 방식은 모두 밥 먹는 것과 같습니다. 자세가 멋져야 할뿐만 아니라 분수에도 맞게 행동해야 해요. 그게 제일 좋은 거랍니다.”
명청달은 여기에서 계속 흠차 대인과 이야기를 해봤자 무슨 진전이 있지는 않을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범한의 마지막 말에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진 건 있었다. 전부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범한이 명씨 가문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갈 생각은 아니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생겼다. 범한은 명씨 가문을 무너뜨리려 한다기보다는 오로지 통제할 생각뿐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거대한 명씨 가문을 통제하려면······ 하서비도, 어머니도 아닌 명청달 자신이어야 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묶음 네 개 항목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흠차 대인과 협의할 게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상인은 본디 협의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흥정이 특기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명청달은 범한에게 매우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명씨 가문의 현 주인은 살짝 몸을 굽힌 채 밖으로 나갔다. 그의 늙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범한이 젓가락을 탁자 위에 놓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명청달의 심계가 대체 얼마나 깊은지 아직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아까 명청달이 무릎을 꿇은 건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패배의 인정? 화친 요구? 항복? 어젯밤 일에 대한 보상? 만약 명씨 가문이 정말로 범한에게 기울 의향이라면 오늘 황실 금고라는 광명정대한 장소는 오히려 속마음을 가장 드러내기 가장 좋은 장소인데······.
문제는 저 어르신이 자진해서 항복했다는 사실을 범한은 아예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아직 패를 다 꺼내 보이지 않았고, 명씨 가문도 아직은 끝까지 온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건너편 기슭에 있는 거대한 나무를 뽑아다가 자신이 있는 쪽 기슭에 이식하려면, 반드시 고통스러운 대가가 따라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명씨 가문은 그런 건 원치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왜 이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인 걸까? 그의 위에는 아직 큰 노마님이 있었고, 명씨 가문의 선택은 만여 명에 이르는 가문 사람과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명청달은 분명 독단적으로 결정을 할 능력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무릎을 꿇은 건 은밀히 진행된 일이 아니었으므로 분명 누군가가 봤을 게 뻔하고, 또 바로 소문이 날 것이었다. 범한은 눈을 더 가느다랗게 떴다. 설마 동정표를 얻으려고 한 짓이었나? 동정표 구하기는 나름 해볼 만한 방법이었다. 일부러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범한 자신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대체 얼마나 불쌍해 보였을까?
만약 명청달이 다른 관원 앞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그 관원은 분명 속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생각이 달랐다. 명청달이 예상했던 것처럼 범한은 너무 많은 걸 원했다. 그것은 명씨 가문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일을 위해 무척 오랫동안 준비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범한은 명씨 가문을 통째로 먹어버리기를 원했지 명씨 가문의 투항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어찌되었든 범한은 언제든 명씨 가문을 먹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무엇 하러 명씨 가문과 이런 저런 흥정을 하면서 상대방의 투항을 받아줄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닌, 그냥 그럴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424화
맑은 바람이 문지방을 넘어 들어와 저택 내부에 남아 있던 음식물 냄새며 폭죽 냄새를 흩어버렸다. 하지만 육중한 분위기만큼은 흩어버리지 못했다. 황실 금고 정원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천년 빙하가 봄날 봄바람에 녹기 힘든 것처럼, 강바닥 거대 바위가 격랑에도 꿈쩍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의례를 진행하는 전운사 관원이 갈라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말을 너무 많을 해서도, 물을 너무 적게 마셔서도 아닌, 단순히 긴장해서였다.
갑열과 을열에 들어가 있던 각 거상들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들은 높이 솟은 문지방에 올라서서 투각이 된 창살을 통해 긴장된 모습으로 바깥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후에 진행된 묶음 네 개 항목의 입찰은 두 번째 호가가 발표될 때까지는 환호성을 내지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는 이도 없었다. 오전에 명씨 가문이 써낸 가격에 놀라 뒤로 물러났던 천주 손씨 가문의 경우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가격이나 듣고 있었다. 두 미친놈들에게 또 놀라버린 것이었다. 상인들도 너무 놀라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은전이야! 은전이라고! 대체 뭘 믿고 갑열 첫 번째 방에 있는 명씨 가문과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하서비는 그 은전을 마구 내던지는 거냐고! 설마 저들 눈에는 두툼한 은표가 폐지와 다름이 없다는 말이야?!
영남 웅씨 가문의 웅백령은 시뻘게진 눈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귀를 믿을 수가 없어 옆에 있는 회계 담당자에게 물어보았다.
“조금 전 의례 진행자가 뭔가 잘못 말한 건 아니겠지?”
웅씨 가문의 회계 담당자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응접실에서 확인한 숫자이니 어찌 잘못이 있겠습니까······. 세상에나! 하 당주가 어제 형제들이 살해를 당해 미친 듯이 독기를 발산해 그런가······ 명씨 가문도 같이 발광을 하는 건가 봅니다! 명씨 어르신은 강도가 아니니까요!”
웅백령은 너무 긴장한 탓에 침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에 걸려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했다. 이에 황급히 부하 손에 들린 찻잔을 빼앗아 찻물을 들이키고는 소리를 낮추어 비난을 해댔다.
“하서비는 명씨 가문의 일곱째가 맞아. 형제끼리 아주 제대로 붙었군······. 형제끼리 싸우니 아주 볼만하군. 명시 가문 사람들은 뼛속까지 미치광이였어.”
의례를 진행하는 관원의 목소리만 떨리는 게 아니었다. 강남의 거상들은 계속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정당에 있는 대인 셋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호가가 들려오자 황 내관과 곽쟁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실 금고의 마지막 묶음 식 입찰 항목의 호가 경쟁에서 범한과 명씨 가문이 가격을······ 어마어마한 지경까지 높여 놓아서였다.
명씨 가문은 이번 입찰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정도로 말이다. 황 내관과 곽쟁 입장에서 명씨 가문의 수입이 줄어들면 강남에서 경도로 몰래 보내는 은전도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많이 말이다. 생각에 여기까지 미치자 두 사람은 독기가 담긴 원망 섞인 눈으로 범한을 노려보았다.
범한은 강한 정신력으로 겉으로는 차분한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흠차 대인의 풀을 빳빳하게 먹인 자색 관복의 소맷자락이 살짝 떨리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려하게 생긴 얇은 입술을 살짝 긴장된 사람처럼 다물고 있고, 귓불에도 살짝 붉은 기가 도는 것 또한.
어찌 되었든 오늘 일어난 일은 정말 희귀한 광경이었다. 경국 황제는 천하 최고 갑부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호부 금고에 들어와 보지도 못한 돈을 가지고 감히 도박을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평생 구경도 못한 은표의 액수가 의례 진행 관원의 떨리고 갈라진 음성을 따라 하늘 높이 훨훨 날리도록 말이다.
“은전 1,150만 냥!”
경국이 개국하고 10년이 지났을 때 나라의 재정 수입은 다 합쳐봐야 1,000만 냥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성대한 발전을 이룩한 현재의 경국에서도 은전 1,150만 냥이란 숫자는 여전히 불가사의한 액수였다. 1,000만 냥이 넘는 은전을 강남에서 몸 바쳐 싸울 무사들을 사들이는 데 쓴다면, 동이성 주변에 있는 작은 제후국들을 손 한번 까딱할 사이에 멸망시켜버리고 북쪽의 패주(覇主)로 등극할 수도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액수의 은전으로 얼마나 많은 미인을 곁에 둘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무기를 만들 수 있을까? 만약 전액을 민생에 쏟아붓는다면, 얼마나 많은 제방을 만들 수 있을까? 죽은 또 얼마나 끓일 수 있으며, 학당은 얼마나 많이 세울 수 있을까?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은표를 몽땅 현물인 은괴로 바꾼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찍어 누를 수 있을까?
오전에 나온 은전 500만 냥만 해도 황실 금고가 세워진 이래 최고 낙찰가였다. 그런데 오후에 그 수치를 가뿐히 돌파해 버리다니. 특히 두 번째 호가에서 명씨 가문은 1,000만 냥이 넘는 가격을 외쳤다. 이는 기록을 깬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심리적인 저항선까지 깨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 건 당연히 명씨 가문이 현재 안팎으로 곤란한 상황과 범한이 북제 황제로부터 빌려온 대량의 금과 은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명씨 가문은 반드시 이번 항목을 낙찰 받아야 하고, 하서비가 위험을 완충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해 가공할만한 금액이 나온 것이다.
범한은 차를 두 모금 마셔 감정을 강하게 억누른 후 은밀하게 수신호를 보냈다.
됐네. 여기까지 하게. 이제 그만 쉬게나.
이즈음 되자 범한은 명청달, 황제 폐하, 또 여러 사람의 생각이 연쇄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명청달이 낙찰을 받았을 때 범한의 계획대로라면, 명청달은 한편으로는 신양 쪽으로 압박을 받아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각이 복잡해야 했다. 판을 좌우하는 게 은전이기 때문이다. 낮은 가격을 부르면, 명청달은 벌어들이는 돈의 일부를 신양으로 보내야 했다. 반면 높은 가격을 부르면, 명청달 입장에서는 그 은전을 황실 금고로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이는 곧 황제 폐하와 범한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게 되었다.
한데 명청달은 상황을 매우 정확하게 보았다. 그는 조정에서 자신의 은전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독하게 나온 것이었다. 독하게 마음먹고 가산의 절반을 내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야 낙찰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범한의 의중에도 부합시킬 수 있었다. 즉, 양쪽에 모두 죄를 짓지 않으면서 어느 한쪽에게도 잘못하지 않게 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정작 돈에게는 죄를 지었으니, 몇 년이 걸려야 이 많은 금이며 은을 다시 벌어들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이른바 돈을 써서 액막이를 한다고 하는데, 명씨 가문은 액막이 용 은전을 쓴다는 게 밑천을 갉아먹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한편 범한이 보기에 명씨 가문의 경제적 능력은 가공할만한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 그 말은 경국 황제가 이들이 커나가는 걸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란 의미였다. 다시 말해, 황제는 상대방의 힘을 꺾어 놓거나, 아예 무너뜨리려 할 게 뻔했다.
이게 황제 폐하가 범한을 강남으로 내려 보낸 진짜 의도였다.
그리고 명청달 역시 그런 의도를 명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그런데 과거에 심만삼은 죽었는데, 명씨 가문은······ 살아날 수 있을까? 이는 훗날의 일이라 범한도 온전히 결과를 알 방도는 없었다. 그런데 명씨 가문의 행동을 보니, 범한이 봤을 때에는 매우 쓸모 있어 보였다. 그래서 수신호를 보내 하서비에게 더 이상 가격을 써내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의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은 방해를 받아서도, 명청달에게 연민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범한은 명씨 어르신의 연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은전 1,150만 냥이면 이미 충분했다. 범한은 조정에서 너무 많은 말이 오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평가가 쏟아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 * *
을열 여섯 번째 방의 도적이 더 이상 가격을 써내지 않았다고 해서 관원들과 상인들이 연극을 끝까지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분노에 휩싸인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큰 부담을 내려놓았다는 듯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오후의 호가 경쟁은 공포 그 자체였다. 너무 민감한 액수다 보니, 상인들은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랐다. 관원들 역시 폭발해버릴 정도로 사태가 커지는 건 원치 않았다.
응접실에 있는 호부와 황실 금고의 심사관들이 긴장 속에서 심의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낙찰되었음을 확정하고는 붉은 먹이 묻은 붓으로 진지하고 긴장된 모습으로 문서를 작성해 밖으로 내보냈다.
의례를 진행하는 관원이 돌계단 위로 올라가 몇 차례 침을 꿀꺽 삼켜 갈라져 화끈거리는 목을 축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했다.
“동쪽과 남쪽, 해로(海路)로 가는 1 작업장의 물건, 묶음 네 개 항목, 갑열 첫 번째 방의 명씨 가문에게 1,150만 냥으로······ 낙찰!”
환호성을 지른다거나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얼른 황실 금고 저택에서 도망쳐 이 금액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바로 이때, 정당에서 가장 가까운 갑열 첫 번째 방 안에서 놀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깜짝 놀란 사람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난 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명씨 가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보시오! 이보시오!······ 얼른 누구 좀 와주시오!”
갑열 첫 번째 방에서 명란석 공자가 놀라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허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원들이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명씨 가문의 주인인 명청달이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바닥에 기절해 있었다.
관리와 상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있었다. 명씨 가문의 주인이 안팎으로 압박을 받아 네 개 항목에 대한 입찰 참여를 강행했으며, 이로써 높은 가격을 써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낙찰 가격으로 명씨 가문이 쇄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명씨 어르신이 불같이 화가 치밀어 혼절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들 대체 누구의 핍박 때문에 명씨 가문이 저런 처참한 꼴이 됐는지 알고 있었다. 이에 정원에 있던 모두의 눈길이 무의식적으로 돌계단 위에 서 있는 흠차 대인에게로 쏠렸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꾸짖었다.
“뭘 그리 허둥대느냐! 서둘러 금고를 봉해 은전을 보관하고, 모든 과정이 끝나는 즉시 명씨 어르신을 의원에게 데려가거라!”
황실 금고를 열고 닫을 때는 항상 의례에 따라야 했다. 저택 안에서 보관하고 있는 은표가 많았기 때문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큰 명씨 어르신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들려 나갈 수 있었다. 그런 후 범한의 특별 허가로 황실 금고 저택 문 앞에 세워져 있던 명씨 가문 마차를 타고 곧장 의원에게 향했다.
이번 황실 금고 공개입찰은 연신 새로운 기록을 내놓았음은 물론 무수히 많은 흉악한 일까지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도 결과까지 처참하다니. 이는 모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멀리 사라져가는 명씨 가문의 마차를 보고 있자니, 강남 상인들은 아직 생사를 알 수 없는 명씨 가문의 주인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계속 한숨만 내쉬었다. 동병상련의 기분이 들어서였다.
425화
명씨 가문 사람들이 먼저 물러나고 검사를 마친 상인들마저 황실 금고 저택에서 물러나자, 남은 건 관원들뿐이었다. 관원들은 황실 금고에서 해야 할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이왕 장사로 벌어먹는 거, 이들에게는 4할인 계약금 은표를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고관 세 사람은 응접실에 서서 호부와 전운사 관원이 기록을 기입하고 봉인 작업을 하는 걸 지켜보았다.
범한은 명씨 가문이 내놓은 마지막 400만 냥의 계약금 중 가장 아래에 끼워져 있는 두툼한 초상 전장의 은표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드디어 성공을 한 것이었다.
범한의 원래 계획은 마지막 묶음 네 개 항목에서 명씨 가문을 압박해 초상 전장이 써준 일람 출급 어음을 쓰도록 할 생각이었다. 한 차례 더 괴롭힐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초상의 신용이 천하 보다 떨어지지 않던가. 그러니 그때가 되면 황 내관과 곽쟁이 명씨 가문을 위해 무언가 말을 해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범한은 또 깔끔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명청달이 이렇게나 속이 시원하게 결정을 내려주다니.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범한 역시 별것도 아닌 일에 계속 무언가를 덧대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한데 맨 마지막에 명청달이 기절한 건······.
“연기라. 계속 연기하라지 뭐.”
범한은 속으로는 싸늘하게 웃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동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는 황 내관에게 탄식을 하며 말을 걸었다.
“명씨 가문이 어려운 가운데 낙찰을 받았군요. 명시 어르신이 연로해서 그런지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절한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이 있었는데, 장례나 치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황 내관은 긴장이 가시지 않은 채 은표를 바라보며 손을 비비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흠차 대인의 말이 들려오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손으로 ‘우드득’ 소리를 내며 욕을 할 뻔했다. 한데 차마 욕은 할 수 없어 속으로만 욕을 해댔다.
‘사람 가지고 놀아 놓고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건 네놈 말고는 또 없을 거다!’
황 내관은 잔뜩 화만 난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곽쟁이 오히려 거짓 웃음을 지으며 입을 뗐다.
“올해 황실 금고가 벌어들인 돈이 과거보다 8할이나 늘었어요. 이 일이 경도로 알려지면 황제 폐하께서 분명 작은 범 대인에게 상을 내리실 겁니다. 왕이나 제후로 봉해질 가능성도 있을 걸요!”
범한의 신분과 지금 그가 지닌 권력을 보면 왕이나 제후로 봉해지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범한은 곽쟁의 알랑방귀가 듣기 싫어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모두 대인들 덕분이고, 강남 상인들이 조정을 돌봐준 덕분이죠. 장사 밑천까지 손해 보면서 황실 금고를 도와준 것이니······ 본관은 이번 일에서 한 게 없습니다.”
곽쟁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명씨 가문이 바지까지 전당 잡히게 된 건 네가 핍박해서 그런 게 아니더냐! 그러고도 이번 일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말할 낯짝은 있는 것이냐?’
곽쟁은 소리 내어 싸늘하게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는 계속해서 범한을 비난했다.
‘어디 계속해보라지! 계속 아닌 척 해보라고!’
* * *
“1황자마마께서 호마(胡馬)를 죽일 때 쓰신 동자선(銅刺線: 구리선의 일종)이 어떻게 발명된 건지 알아요?”
“네? 철로 만든 거 아니었어요?”
“차이가 큰 건 아니지요. 아무튼 알아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북제에는 동자선 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북제의 군주와 신하들은 경국 황실 금고의 3 작업장에서 만든 군용 제품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오늘 한쪽이 알아서 이 이야기를 꺼내자 다른 한쪽인 낭자가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에 기뻐하며 성실하게 답을 했다.
“몰라요.”
“그랬군요. 동선(銅線)이라는 물건은 끌어당기기가 힘들어요.”
부드럽고 나긋한 음성으로 탄식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강남 상인들이 동판 한 덩이를 훔치려고 고집스레 끌어당기다가 만들어진 거랍니다.”
원래는 재밌는 이야기였지만, 그가 말을 하니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낭자도 잠깐 입가만 올렸다 내렸다.
그가 다시 물었다.
“사주에 있는 사호 제방에 강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뚫었는데, 어떻게 뚫었을까요?”
낭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흔들며 정답을 말해주었다.
“강남 상인들이 동판을 제방에 있던 쥐 동굴에 떨어뜨려서래요.”
해당타타가 웃긴 이야기랍시고 말하고 있는 범한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이야기 인지는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이야기를 한 거죠?”
범한이 목에서 머리카락이 난 부위를 긁어댔다. 사사는 요 이틀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래서 범한의 머리를 빗겨줄 때 너무 힘을 주고 있었다. 특히 뒤통수 쪽 머리카락을 너무 세게 당겨서 빗는 바람에 범한의 머리카락이 난 목 쪽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 있었다. 이에 범한이 목이 간지러워 긁적이며 말했다.
“상인에게는 인색함이 최고의 미덕이고, 이익은 영원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란 걸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지요.”
사실 이 이야기는 그가 전생에 들었던 유태인 이야기를 강남 상인으로 바꾸어 말한 것이었다. 한데 이야기는 강남 상인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한 게 없었다.
범한이 해당타타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자기 등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방금 전 긁적이던 곳으로, 간지러운 부위가 계속 확장돼 빌어먹게도 등 정중앙까지 가려운 지경이 되어서였다. 범한은 자신의 잔재주를 동원해 그곳까지 손은 가져다 대기는 했지만, 그래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던 터였다.
그래서 해당타타 쪽으로 몸을 돌려 자신의 등 가운데를 가리킨 것이었다.
해당타타는 범한을 잠시 노려보았지만 그녀의 손은 어느새 앞으로 나아가 옷 위쪽을 살며시 긁어주고 있었다.
범한에게 경묘 2제사를 가볍게 이긴 오묘한 손이 느껴졌다. 자신의 간지러운 곳을 천일도의 무상 심법으로 긁어주니 범한은 온몸이 노근노근해지는 것만 같았다.
“인색함은 상인들의 천성이에요. 그러니 명청달이 이렇게 살점을 잘라낸 건 의외의 행동이었어요. 더군다나 이익과 관련된 일이니, 내년에는 천주의 손씨 가문과 올해 떨어진 상인 가문을 위로해줘야겠지요. 그래서 당신 황제 폐하께 내년에도 기껏해야 올해 정도의 몫만 드릴 수 있고, 더 많이 드리는 건 정말로 힘들다고 말씀드려줘요. ”
해당타타는 긍정을 표하며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바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명씨 가문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죠? 보아하니 명청달의 태도가 마음에 든 것 같던데요.”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진지하게 답했다.
“그의 태도가 명씨 가문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 그날 밤 일은 아직 안 끝났고, 나도 이대로 관둘 수는 없어요. 명씨 가문은 오로지 경제적인 면에서만 피해를 입었어요. 이후 1년 동안은 황실 금고의 물건으로 그자를 압박해 계속 피를 흘리도록 할 수 있는데······. 그래도 명씨 가문은 아직 전체적으로는 건강한 편이에요. 내가 그들을 단번에 먹으려 해도 그럴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러니 강남에 있는 한 나는 그들의 살점을 도려낼 겁니다.”
잠식이란 단어가 있는데, 범한은 어쩌면 이런 의미로 말을 한 것이리라. 한데 해당타타만은 명청달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씨 어르신이란 자는 저자세를 취했는데도 범한이 추진하고 있는 강력한 계획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해명을 했다.
“명씨 가문은 가만히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문제는 이번에 언 공자가 정한 계획이 최씨 가문을 대적할 때와는 다르단 거예요. 감찰원이 동원하는 수단은 모두 떳떳하지 못한 것들이에요. 반면 이번에 진행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경국 법률을 따르고 있어요. 다시 말해, 음지에서 벌이는 음모가 아니라 양지에서 실행하는 계획인 거지요. 실력 차이가 있으니 명씨 가문이 정면으로 반격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명청달이 순순히 양보해가며 분쟁을 불식시키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는 타타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에요. 시간을 소모해가며 경도에서 판도가 뒤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이지요.”
범한이 조금 전보다 무겁게 말을 이어 갔다.
“명씨 가문 입장에서는 경도 판세는 변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조정에 먹히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편안하게 기다리도록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군요. 안지는 경도에서의 국면이 변하기 전에 그들의 실력을 최대한으로 약화시키려는 거고요.”
“맞아요.”
범한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모든 걸 규정에 따라 하고 있어요. 그래서 명씨 가문의 명성이 좋은 게 이해가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이게 내 유일한 걱정거리에요. 황실 금고 전운사의 회계 장부에서도 아무 문제를 찾을 수 없는 걸로 보아 그들이 흔적을 지우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인데······. 지금 그 섬에서 또 소식이 오지 않고 있어요.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도와 은폐해주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들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덕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큰 가문이에요.그러니 나나 감찰원이 너무 바짝 압박한다면, 명씨 가문은 과하게 불쌍한 척 할 테고, 그러면 어쩌면 강남 문인들과 백성들의 반발이 일겠죠.”
“안지는 다른 사람의 의견은 신경 안 쓰는 사람이잖아요.”
해당타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범한도 웃었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황제 폐하께서도 신경을 안 쓰시는 건 아니에요. 황제 폐하께서는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고, 또 군주의 권위를 공고히 하길 바라세요. 그런데 정말 번거로운 일이거든요. 그런 게 아니라면, 조정에서 명씨 가문을 직접적으로 제거해 버릴 방법이 널리고 널렸는데 지금껏 손을 쓰지 않을 리 없겠죠? 그러니 천하 사람들 마음에 천자가 박덕하고, 조정이 음흉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역사에 떳떳하지 않은 기록이 남는 게 걱정되어서 그러시는 거겠지요.”
“경국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분이셨어요?”
해당타타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날 믿어 봐요.”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는 명예를 추구하시는 분이세요. 그게 아니라면 전에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났을 때 북제의 황제께 공공연히 노기를 드러내실 필요는 없었겠죠······ 이번에 황제 폐하께서 나를 강남으로 보내 명씨 가문을 거둬들이도록 한 건 내가 일처리를 아주 깔끔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명씨 가문을 밟아 죽여 버리는 동시에 나쁜 평판을 만들지 않으니까요. 만약 그때 강남의, 더 나아가서는 천하 백성들이 명씨 가문 일 때문에 불평을 드러낸다면······ 경도에 있는 세력들이 다시 소란을 피우겠지요. 그러면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내가 앞잡이 검둥개가 되기를 바라신다 해도 그분도 어쩔 수 없이 나를 경도로 불러들이셔야 할 거예요.”
“그럴 생각이면, 황실 금고 공개입찰로부터 나흘이나 지났는데 당신은 왜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한 건데요?”
해당타타가 궁금해했다.
범한이 웃으며 답을 해주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포월루 일은 그래도 제법 마음을 쓰고 있다고요.”
갑자기 포월루가 툭 튀어나오자 해당타타는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426화
“내가 빌려준 돈을 강가 공사에 썼다면 그럭저럭 괜찮았을 텐데. 그런데 우리 북제의 은전을······ 기생집 여는 데 쓰다니. 이 소식이 상경으로 들어가면 황제 폐하께서 이 작은 사고(師姑) 때문에 웃겨 죽겠다고 하실 수도 있겠네요.”
자신이 기생집을 연 일에 대해 북제 성녀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건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범한이 정색을 하며 말을 했다.
“강가 공사는 선행을 하는 일이에요. 타타도 알다시피, 내가 곧 시작할 유민 정착 작업도 선행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생집을 여는 게······ 역시나 선행을 하는 거란 걸 타타는 모르고 있어요.”
해당타타는 범한의 말이 너무나 미심쩍었다.
‘기생집은 여인들에게 억지로 그런 불쌍한 일을 시키는 거잖아. 그런 일이 선행과 무슨 상관이람?’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직업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살수, 하나는 기생이에요.”
범한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더니 다시 등을 가리켰다. 해당타타에게 멈추지 말고 계속 등을 긁어달란 뜻이었다.
“그건 당신도 나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에요. 심지어는 내 어머니께서도 바꿀 수 없었고요······ 그 말뜻은 이 직업은 영원히 남아 있을 거란 거예요. 그렇다면, 아예 이 일을 영원히 내 손에 쥐고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것도 일련의 규정을 만들어서 그 불쌍한 여인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해주면서요.”
앞서 말한 건 전생의 무협 소설가 구롱(古龍: 고룡)이 한 말로 과거 사천립을 설득할 때 했던 말을 다시 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엄숙하게 결말을 내렸다.
“내가 기생집을 여는 건 그 기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예요. 머리에 도덕은 이고 살면서 이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는 듯 두 눈 꼭 감고 상관도 않는 거야말로 진정 어진 마음이 없는 거고, 그 기생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거라고요.”
범한은 포월루를 경영하기 위해 내놓은 ‘신정(新政)’ 내용들을 해당타타에게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예를 들어, 의원을 모시고, 매달 휴가를 주는 등에 관해서 말이다. 해당타타는 어느새 범한을 긁어주고 있던 손동작을 멈추고 살짝 놀란 사람처럼 범한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이 단순히 체면치레로 거짓말 한 게 아닌, 정말로 이런 일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범한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에는 해당타타의 얼굴에서 잠시 감탄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에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안지의 말이 일리가 있네요.”
“네?”
너무 의외의 반응이어서 범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해당타타에게서 진지하게 반응이 나오자 기분이 이상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어 갑자기 연상된 슬픈 장면을 머릿속에서 내몰았다. 그리고 두서 없이 말을 툭 던졌다.
“타타, 미안해요.”
그러자 이번에는 해당타타가 생각지도 못하게 “네.”, 라고 답했다.
범한이 말했다.
“며칠 전, 우리 둘이 조금 싸웠잖아요. 그 후에 생각을 좀 해봤는데, 주로 내 문제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당신 문제도 있더라고요. 그래도 결국에는 내 문제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해당타타로서는 범한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상하다 못해 말 중간에 생뚱맞게 등장하는 말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북제 상경성 밖, 옛 길에서 범한이 해준 햇살 같았던 말이 곧 떠올랐다. 세계는 당신 것이고 내 것이란 이야기 말이다.
이에 해당타타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옅은 웃음이 지워졌다.
범한이 박수를 치며 해당타타의의 두 눈을 주시했다.
“사치스런 감정이겠으나, 나는 친구 간에는 솔직 하려 해요. 하지만 사실 당신에게는 충분히 솔직하지 못했으니, 그건 내 문제였던 거죠. 당신은 북제를 떠나 강남으로 온 후로는 날마다 그 많은 은전을 지켜봐야 했고,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 걱정해야 했죠. 압박감이 컸을 테고, 마음이 편하지 않고, 기분이 예전만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 압박감을 제대로 사그라뜨릴 수 없었겠지요. 이게 당신 문제였어요. 한데 당신도 압박감을 느끼고 있듯이 나도 나도 그래요. 그런데 그 압박감은 결국에는 내가 만든 것이니, 그 문제는 내 문제였던 거지요.”
해당타타가 입을 가리고 반짝이는 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만 내놓고 웃기 시작했다.
살짝 어리둥절한 기분에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눈이 정말 예쁘네요.”
“네?”
두 사람 사이에서 세 번째로 “네.”라고 반응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껄껄껄 웃었다.
“타타에게도 어린 낭자 같은 구석이 있었군요······ 하지만 결국에는 오늘도 말해주지 않는군요. 대체 몇 살인지 말이죠.”
그러자 해당타타가 살짝 성이 난 기색으로 말은 않고 손만 휘휘 내저었다.
“화제를 돌리다니! 아까 내가 왜 요 이틀 동안 명씨 가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기생집 공사를 하느라 바쁘다고 답했고요.”
해당타타도 어색하기는 해도 농담을 할 줄 알았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어 보였다.
“그거야, 당연히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하서비가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에요.”
* * *
3월 26일 저녁, 소주 성 서쪽 일대에 황실 소금 상인 저택이 밀집한 지역에 홍등이 높이 내걸리고, 포죽 소리가 하늘 가득 울려 퍼져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동안 황실 금고 일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던 강남 수채의 대두목 하서비가 소주성 안에 정식으로 집을 마련하고 오늘 처음으로 손님을 맞는 것이었다.
사실 진정한 강남 거부는 소주성 밖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들은 물가 근처에 자신들만의 웅장한 저택을 가지고 있으면서 평소에는 그곳 장원에 머물다가 가끔씩 성 안에서 머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두 소주 성 서쪽 일대에 호화로운 거주지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고 집안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 서쪽의 땅값은 매우 비쌌고, 그 누구도 집을 팔려고 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이곳에 들어와 살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서비가 이곳에 자신의 저택을 마련할 수 있었던 건 황실 금고의 일을 맡게 되어 강남 지역에서 자격을 인정받아서였다.
물론 소주성으로 들어간 하서비는 과거의 모든 걸 깨끗이 털어내야만 했다. 얼굴에 암흑가의 흔적을 티끌만큼도 남겨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강남 수채 대두목 신분으로는 이곳에 입주할 수는 없었고, 이제 그의 신분은 하명기의 주인이었다.
하명기는 새로 연 상점이었다. 상점 이름에는 숨은 뜻이 있었는데, 축하 인사를 하러 온 상인들은 그 뜻을 다 알아보았다. 이에 그들에게 명씨 가문은 눈에 띄면서도 거슬리는 존재였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오늘 사람이 올지는 확실히 알고 있지 못했다. 명씨 가문의 주인 명청달 어르신이 그날 기절한 후 꼬박 이틀이 지나서야 깨어났고, 몸 상태가 엉망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차 한 대가 하서비 저택 앞에 멈추었다. 온통 시커먼 색으로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하지만 주변을 살벌하게 살피고 있는 호위 무사들과 거리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람들 때문에라도 사람들은 마차에 타고 있는 자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하서비 저택 문 앞에 둘러 서 있던 상인들은 서둘러 다가와 마차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껏 친절하게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맞을 준비를 했다.
마차 안에서 범한이 3 황자에게 온화하게 말했다.
“마마, 정말로 구경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금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3 황자가 귀엽게 활짝 웃었다.
“스승님께서 무얼 걱정하시는지 잘 알고 있어요. 하오나 스승님께서 하서비를 도와주러 오기로 하셨으니, 제자 한 사람이 더 추가된다 한들 별일 아니지 않습니까.”
범한은 잠시 웃고 말았다. 요 어린놈은 의 귀빈마마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고 있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과 함께하려 했다. 심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물리적 거리로도 말이다.
소주성의 두 귀인이 당당하게 마차에서 내리자 마차 밖에서 환호성과 인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범한은 방안에 서서 새로 만든 책상을 손으로 만지며 코끝으로 전해오는 은은한 나무 향을 맡으며 생각했다.
‘이 세계는 다른 건 별로인데 새로 꾸민 서재에서 화학품 냄새가 안 나는 건 정말 좋아.’
순간 범한은 깜짝 놀랐다. 벌써 오랫동안 전생 세계에서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 세계에 점점 적응하고 있는 것일 수도. 하지만 왜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갈망이 계속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하는 것인지. 그런데도 자신은 스스로가 뭘 갈망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다니.
대체 무엇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서비와 3 황자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 범한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어버렸다.
“명청성 자네는 아직 다친 몸이니 난 상관 말고 앉아 있게. 나는 자주 멍하니 있는 편이네.”
흠차 대인과 3 황자마마가 동시에 방문하자 먼저 축하인를 하러 와 있던 강남 상인들은 속으로 운 좋은 하서비를 부러워했다. 그리고 흠차 대인과 3 황자마마가 사람들의 이목을 꺼리지 않고 나타난 사실에 놀라워했다. 한데 두 사람이 나타난 것 때문에 상인들은 너무 시끌벅적하게 있을 수 없었다. 이에 앞뜰에서 흥겹게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원 서재에서의 대화를 방해할 정도로 떠들지는 않았다.
사실 범한의 등장은 하서비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를 따라 온 사람이 3 황자마마라니.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강남에서는 자네와 나 사이 관계를 모두 알고 있다네. 경도에서도 아마 알고 있을 걸. 이왕 이렇게 된 거 감춰서 무얼 하겠는가?”
하서비가 3 황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작업장에서 나온 말이 생각나 피하지 않고 바로 말을 해버렸다.
“제사 대인, 소인이 대인을 번거롭게 해드릴까 두렵습니다.”
“무슨 번거로운 일 말인가?”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자네는 조정을 위해 일하고 있네. 최근에 제법 멋져 보이기는 했어도, 실제로는 손해를 적지 않게 보지 않았는가.”
하서비는 그날 밤 죽은 형제들이 생각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친 건 좀 나았는가?”
범한이 물었다.
하서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
범한이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뗐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명씨 가문과 관련해 내 태도는 굳건하네. 어쩌면 진도가 좀 느려질 수는 있어. 하지만······ 본관이 누군가의 태도에 속았다고 생각하지는 말게나.”
명씨 가문의 주인인 명청달이 황실 금고 저택에서 무릎을 꿇은 일과 낙찰 후 기절했을 때를 말한 것이었다. 이 일들은 이미 소주성 안팎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범한이 쥐고 있던 칼인 하서비는 바로 그 칼을 쥐고 있는 손이 걱정스러웠던 차였다. 갑자기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까하고 말이다. 그런데 범한이 약속을 해주자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하서비는 저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났다. 복수, 명씨 가문을 되찾아 오는 일! 그에게 있어 이번 생의 가장 큰 염원이었다. 한데 범한의 도움이 없다면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일 아니던가.
범한이 하서비의 표정을 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자네가 조정을 위해 일을 하니, 조정이 자네 뒤를 봐주는 거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자네가 본관의 사람이니 본관이 떳떳하게 세상 사람에게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우리의 관계는 회피하거나 숨길 필요가 없어. 이제 자네는 강남에서 일을 하면서 북쪽으로 물건을 내다 팔 것이네. 그러니 이런 일이 있으면 모든 게 훨씬 수월해 질 거야.”
427화
하서비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리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제사 대인이 왜 이렇게 급히 밝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살짝 황송해 당황스러웠다. 사실 하서비는 지금까지 자신이 조정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한이 그를 쓴다고 해서 조정에서까지 그를 기용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하서비에게 과거 최씨 가문이 썼던 노선을 이용해 물건을 북쪽으로 보내도록 하는 것. 다시 그에게 북제에 있는 범사철과 만나도록 하는 것. 또 남쪽에 있는 범한이 북제 황제의 비호 아래에서 북제로 가는 밀수 노선을 다시 새롭게 뚫는 것. 이것이 범한의 목적이었다.
지금 남쪽에서는 감찰원이 암암리에 관리하고 있고, 북쪽에서는 진무사 지휘사 위화가 관리를 하고 있었다. 위화는 범한과 아는 사이였고, 북제의 나이 어린 황제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밀수 노선은 이미 천의무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필요한 건, 두어 번 더 단련이 필요한······ 시작점에 있는 하서비 본인이었다.
범한이 논란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세인의 말을 이용해 하서비를 자기 곁에 확고히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이제 모두들 하서비가 범한의 신복일 거라 믿게 될 것이다. 그러면 밀수가 시작된 후 하서비가 범한을 배신하려 해도 그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범한의 적도 하서비를 겨냥할 것이다. 이미 강남거 앞에서 제법 괜찮은 시작이 있었으니, 하서비는 어쩔 수 없이 범한을 더 꽉 끌어안을 수밖에······.
이 자리는 본래 외환(外患)으로 마음을 굳힌 하서비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배에 타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한데 3 황자가 억지를 부리며 자기도 같이 배에 오르겠다고 하다니. 하서비는 그 배에 오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 * *
“모레네.”
범한이 하서비의 저택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분부를 해두었다.
“필요한 수속은 모두 마쳐놨네. 그러니 때가 되면 바로 나가야 하네.”
하서비는 살짝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는 제사 대인이 자기를 이용해 명씨 가문의 주의력만 끌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자신은 어찌되었든 소주부에서 목소리 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에 하서비는 자신이 인생의 목표에서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범한이 탄식을 하며 하서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경국 법률에는 이런 사건과 관련한 선례가 없다네. 상대방은 종갓집 장자이니, 법률에 따르면, 이득을 얻는 쪽은 그자네. 감찰원에서 도와준다 해도 이상적인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거고······. 그래도 잃어버린 걸 다시 가져오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급히 서두르지도 말고, 너무 실망하지도 말게나.”
하서비는 가슴이 떨렸다. 앞에 있는 젊은 제사 대인이 명씨 가문의 일을 언급해서 뿐만 아니라 순간 두 사람 간에 있는 가산(家産)이란 공통점을 떠올리게 해 무언가 동질감이 느끼도록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하서비는 두 손을 맞잡고 감동한 사람처럼 말했다.
“이 하 아무개의 일로 대인께서 마음을 쓰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일이네.”
범한이 딱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았나. 본관 역시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네. 그러니 지나치게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범한이 이익을 강조하자 하서비는 상대를 더 진실 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연신 인사를 올리고는 범한과 3 황자를 배웅했다. 정확히 말하면, 범한과 3 황자는 저택에 잠시 서 있다가 떠난 것이었다.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도 안 되었지만, 그 사이에 겉으로 드러났던 태도와 결심들은 상인과 관원들의 입을 통해 소문으로 퍼져나가고, 또 명씨 가문의 주요 인사들의 귀에도 전달될 게 뻔했다.
마차는 하서비의 저택을 떠난 후 서둘러 화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 북쪽으로 향했다. 소주 성 북쪽에는 강호인이 많이 있었던 탓에 마차에서 호위하는 이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모레가 무슨 날입니까?”
3 황자가 순진무구한 두 눈을 깜빡이며 범한에게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대답을 해주었다.
“하서비가 소주부 관아로 가 명씨 가문이 자신의 가산을 빼앗아 갔다고 고발하는 날입니다.”
조용하고 길게 쭉 뻗은 소주 도로 위로 마차 바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소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소리를 덮어주고 있었다.
3 황자가 놀라 물었다.
“그게 가능한 소송입니까?”
“왜 안 됩니까?”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소송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이기고 나서 다시 말하시지요. 하지만 어떻게든 소송은 걸어야 합니다.”
3 황자는 어찌되었든 이제 겨우 아홉 살 난 어린아이였다. 그러니 범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내 흥미를 느꼈다.
“스승님, 우리 구경 가요! 듣기로는 하서비의 생모를······ 큰 노마님이란 사람이 때려서 죽였다고 했어요.”
범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 할 소송은 가산을 돌려받으려는 것입니다. 살인과 관련한 옛 사건이 아니고요. 그리고 문서화 된 경국 법률 조문이나 다룰 테니 재미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3 황자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스승님, 계획을 세워두지 않으셨습니까?”
“안 세워뒀습니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계획을 세워뒀다면······ 무엇하러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했겠습니까? 그냥 시간에 맡길 뿐이고, 오래 맡길수록 좋은 겁니다.”
그러자 3 화자가 시무룩해져서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뒤로 지나가고 있는 주변의 낯선 거리 풍경이나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화원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어딜 가시는 겁니까?”
범한이 3 황자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마마에게 저를 따라다니며 배우라 하셨지요. 마마께서도 줄곧 열심히 노력하셨고요. 오늘 마마께서 신을 따라 나오셨으니······ 길을 따라 가면서 장래에 꼭 배우셔야 하는 것들을 가르쳐드리려고요.”
3 황자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범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서였다.
마차는 성 서쪽에서 성 북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강호인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는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어느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더니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밤의 엄호를 받으며 뒤에서 따라오는 계년조의 경호를 받으며,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미행을 따돌리고 마차는 소주성에서 사라졌다.
* * *
마차는 어느 민가 밖에서 멈추었다. 이곳은 외지고 고요한 곳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는 곳이었다. 고달은 마부석에서 내려오자 등에 있는 장도 칼자루를 쥐고는 냉정하고 꼼꼼하게 주변부터 살폈다. 그런 후 그가 주먹을 쥐어 안전하다는 수신호를 보내자 범한은 그제야 3 황자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현재 범한 곁에 남아 있는 6처 검수는 모두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완쾌된 사람이 둘이 있었지만, 범한은 다시 그들에게 목숨을 걸도록 할 수 없었다. 이에 신병안전을 모두 호위와 계년조에게 맡겨 놓았더니 일을 하는 게 갈수록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굴처럼 생긴 조용한 문을 따라 안으로 걸어가는데 3 황자는 털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사방이 온통 새카만 가운데 코에 화약 냄새가 전해져 와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범한의 손바닥을 더 꽉 쥐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방으로 들어가자 침소가 나왔다. 방에는 모든 게 다 구비되어 있었다. 침대며 화장대에······ 심지어는 침대에서는 부부가 잠을 자고 있었다.
3 황자는 입을 떡 벌리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는 ‘이건 무슨 장난이지?’라고 생각했다. 범한도 살짝 놀라 고개를 돌려 길을 안내한 감찰원 관원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관원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곧장 침대로 걸어가 침대 틀에 있는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촤라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침대 위에 있던 장막이 서서히 열리고, 아래쪽으로 향하는 비스듬하게 난 길이 나타났다. 그러자 감찰원 관원이 ‘가시지요’라고 말하며 안내를 계속했다.
관원이 이 모든 걸 할 때, 침대에 있던 부부는 안쪽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그사이 부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귀머거리에 맹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침대 옆에 나타난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아 범한 일행은 순간 유령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범한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머리를 긁적였다. 전생에 읽은 어떤 소설 속 내용과 비슷한 장면이 뜬금없이 정말로 눈앞에 펼쳐져 있어서였다.
이 민가는 당연히 감찰원 4처가 소주성에 마련해 둔 비밀 가옥이었다.
* * *
이즈음 되자 3 황자도 오늘 자신이 어디에 온 것인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범한의 손을 잡고 통로를 따라 지하로 걸어 들어가는데 심장이 계속해서 방망이질을 해댔다. 3 황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스승님, 이 제자가 황자이기는 하나 그래도 조정의 규정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는 감찰원의 비밀 가옥에 들어올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주마다 세 개에서 다섯 개의 비밀 가옥이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생긴 것도 아니니, 규정에 따라 제가 옆에 있으면 아무도 무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감찰원 제사이고, 진평평의 친필 서한을 받은 후에는 감찰원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범한의 말에 3 황자는 살짝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어두컴컴하게 등불이 비치는 가운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사실 감찰원 4처가 소주성에 마련해 둔 비밀 거처는 크기가 제일 큰 건 아니었지만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밀실 앞에 당도했다.
실내 등불은 차분하게 타오르며 좁은 방을 어두컴컴하게 비추고 있었다. 방 안에는 숯불 화로가 피워져 있었고, 인두 두 개, 약물 몇 상자, 긴 걸상 몇 개, 길이와 모양이 제각기인 십여 개의 금속으로 된 뾰족한 물건들이 있었다.
바로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본적인 물품들이었다. 특히나 형틀에 묶여 있는 숨을 헐떡이고 피범벅이 되어 있는 사람에게 쓰는 건 분명해 보였다.
익숙하고 친근한 냄새가 나자 범한은 참지 못하고 코를 벌름거렸다. 그리고 3 황자가 자신의 손을 더 꽉 쥔 게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고 말았다. 황궁에서는 잘도 음험한 일을 해대는 아이인데. 그래도 아이는 아이이다 보니 고문실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은 제대로 본 적 없었을 것이다.
자백을 받아내고 있는 4처 관원들은 열이 나서 그런지 상의를 탈의한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상관(上官)과 상관의 상관이 갑자기 등장하자 깜짝 놀라 서둘러 옷부터 찾아 입었다.
그러자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그들에게 하던 걸 멈추도록 했다.
“하던 일이나 계속하게······ 자백은 좀 했는가?”
아직 팔 하나밖에 넣지 못한 관원이 낭패라는 듯 방구석에 있는 탁자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종이 몇 장을 들어 건넸다. 모두 고문으로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범한이 종이를 받아들고 보더니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범한은 줄곧 군산회를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시간을 내 심문 상황을 보러 온 것이었다. 한데 예상과 달리 이미 여러 날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큰 진전은 없는 상태였다.
428화
감찰원에 잡혔는데도 계속 수를 쓰고 있는 두 사람은······ 바로 3월 22일 밤 강남거 앞에서 하서비를 죽이려고 제비 같은 몸놀림을 보였던 자객들이었다.
그 날 두 자객은 6처 검수의 독에 당해 기회를 봐 재빨리 도망가려 했었다. 하지만 가는 도중에 해당타타를 만나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중에 범한은 사양 않고 그들을 데려다가 이 비밀 가옥에 숨겨 놓고는 군산회의 내부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군산회는 감찰원에서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미지의 존재라 범한은 저도 모르게 걱정이 일었다.
‘느슨한 조직이라고? 그런데도 경묘 2제사를 도구로 동원할 정도야?’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부하들이 지금껏 받아낸 자백 내용을 바라보았다. 두 자객은 강남 일대에서 유명한 살수이고 독한 자들이었다. 한데 군산회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아 명씨 가문으로부터 돈을 받아 일을 한 것 같았다.
“깨워라.”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관원 하나가 작은 병을 형틀에 묶여 있는 두 사람 코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게 했다. 두 사람은 무력하게 몸부림을 쳤다. 근육이 뒤틀리며 몸에 난 상처에서 다시 시뻘건 피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두 사람 깨어났다.
자객들의 흐릿한 두 눈은 공포가 가득했다. 처음 잡혔을 때 보여주었던 강단은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는 걸로 보아 요 며칠 감찰원 4처 고문관들에게 제법 험하게 당한 모양이었다.
범한과 3 황자가 지저분한 긴 걸상에 앉았다. 범한이 들고 있는 종이를 넘기며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너희 입으로 말한 주 선생은······ 군산회와 어떤 관계지?”
자객들은 감찰원의 수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열사가 될 작정을 한 게 아니라면 서둘러 답을 해야 했다. 자객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인, 주 선생은 군산회의 회계이옵니다.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소인도 알지 못합니다.”
범한이 살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주 선생이 명씨 가문의 집사장이 아니란 말이냐?”
자객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인 역시 단 한 차례 우연히 들었을 뿐입니다. 군산회에 관해서는 정말로 그것 밖에 모르옵니다.”
“며칠 고생을 했는데도 둘 다 정신 하나는 말짱하군. 고생을 덜 했어.”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객들의 눈에서 절망의 빛이 스쳤다.
감찰원 관원이 또 고문을 가했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고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자 처참하게 내지르는 외침이 고문실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면까지 뚫고 올라갈 리는 없었다.
범한은 3 황자의 눈을 가려주지 않았다.
고문 장면에 3 황자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만 3 황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 않고 억지로 버텼다. 한데 이 피비린내 나는 광경에 토악질이 나올 듯해 가슴이 답답했다.
범한이 품에 가지고 있던 작은 상자에서 연고를 꺼냈다. 그런 후 집게손가락에 약을 살짝 찍어 3 황자 코 아래에 꼼꼼하게 발라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군산회 일은 이미 황제 폐하께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한데 저들의 담력이 생각보다 크군요. 마마께도 저들의 담력이 잘 보일 겁니다. 지금의 적과 훗날의 적, 일부 수단들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하오나······ 절대 저런 것에 도취되면 안 됩니다.”
3 황자는 범한이 무엇을 교육하고 있는지 잘 알아들었다.
“고문과 고문관을 동원하는 걸······ 조정 통치를 위한 최고의 약방으로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단에 의존하셔도 안 되고요. 망을 넓게 펼쳐도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물고기는 있기 마련이지요. 엄하게 고문을 해 자백을 강요한다 해도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통치의 도는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동시에 사용하고, 한 번 내어준 믿음은 끝까지 관철하고, 함부로 의심하지 않아야 하며,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은 보조적 역할을 하는······ 잔재주일 뿐입니다.”
3 황자의 콧속으로 스며드는 청량한 냄새는 악취를 사라지게 해주었다. 그는 범한의 뜻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명청달과 하서비에게 극명히 대비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범한은 한 번 믿은 상대는 의심하지 않고, 함부로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며 명확히 설명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이곳까지 와서 고문하는 걸 보여준 건 강압적 수단이라고 해서 모두 효과가 있는 게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 * *
“명씨 가문에 대해 알아낸 것만으로도 괜찮은 편이구나.”
범한이 부하들을 위로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종이는 잘 처리하고, 나중에 쓸모 있을 수 있으니 두 사람의 상처는 잘 치료해주게.”
범한은 무거운 마음으로 감찰원 4처가 소주성에 마련해둔 비밀 가옥을 떠났다. 처음에는 군산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는데, 생각과 달리 자객들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그런데도 내친김에 3 황자 교육에 나선 건 자신의 무력감으로 인한 난처함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다.
화원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범한은 꼼꼼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감찰원은 황제 폐하의 특무 기관이었고, 많은 일들을 대놓고 떳떳하게 처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찰원이라는 기관에게는 선척적으로 제한되는 게 많았다. 이를 테면,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는 안 되었는데······ 강남의 주요 고을은 4처가 감찰해야 하는 중요 지역인데도, 이곳 4처는 인원 부족으로 항상 고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군산회라는 구름 위를 떠도는 신비한 조직에 대해 조사하고 싶어도 강남에 있는 감찰원의 역량만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 순간 범한은 언 공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언빙운은 4처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쉬이 경도를 떠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기 직속의 1처의 대부분 업무를 등자월이 처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그곳도 언빙운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왕계년이 있었다면, 일이 더 수월했을 텐데.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양계미는 흠차 대인인 범한에게 화원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바친 것도 모자라 이곳에 있던 종이며 요리하는 사람까지 전부 그대로 넘겨준 상태였다. 물론 범한은 감찰원에서 이들이 깨끗하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거절하지 않고 양계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사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하며 점점 작은 마님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게 불편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범한이 강남으로 오는 도중에 사들인 불쌍한 소녀들에게도 거친 일을 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대호족 집안의 큰 여종들처럼 양육되고 있었다.
특히 양계미가 남겨둔 음식 하는 사람은 황궁의 어선방 숙수들을 진땀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그래서 그가 매일 삼시 세끼를 화려하게 차려내는 통에 범한은 굳이 밖으로 나가 강남의 일품요리들을 맛보기보다는 저택에 남아 식사하는 편을 택했다.
그래서 사사는 음식 하는 사람을 제일 좋아했지만, 3 황자는 그 사람이 제일 미웠다.
범한, 해당타타, 3 황자가 이른 새벽부터 작은 탁자에 둘러앉아 옥수수, 훈제 돼지고기, 근채(샐러리 또는 미나리)를 섞어 끓인 죽을 먹었다. 색상은 그저 그랬지만, 각기 다른 맛이 한데 어우러져 매우 신선하고도 희한한 맛을 내 범한은 연달아 세 그릇이나 먹어 버렸다. 어찌나 빨리 먹어대는지 옆에서 죽을 담아주는 사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때, 저택 밖으로 사람 몇몇이 찾아와 호위가 이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들은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탁자에 둘러 앉아 있는 범한, 3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해당타타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훨씬 더 놀란 쪽은 문턱을 넘어 들어온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범한이었다. 화원까지 찾아온 사람은 바로 상문과 등자월이었다. 상문 낭자는 일찌감치 강남으로 내려와 자신을 돕기로 했으니 그렇다 쳐도, 등자월은 경도에서 1처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왜 강남까지 달려온 건지. 이윽고 범한의 눈에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 똑똑히 들어왔다. 이에 범한은 너무 놀라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대보 형님! 어떻게 왔어요?”
그렇다. 상문과 등자월 사이에서 멍하니 아무렇지도 않게 서서 살짝 위축된 상태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뚱뚱한 이가······ 임대보가 아니라면 또 누구겠는가?
범한이 깜짝 놀라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형님의 손을 한 손으로 덥석 잡으며 등자월에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이죠? 완아는요?”
등자월이 피곤한 기색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씨 마님께서는 최근 몸이 많이 안 좋아 지셔서 강남으로 오는 시기를 잠시 늦추었습니다. 대신······ 손위 처남께서 대인을 뵙고 싶다고 집에서 계속 소란을 피우시기에, 그래서 상서 대인께서 하관을 불러 강남까지 데려다주도록 하신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소리!”
범한이 탄식을 하고는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 물었다.
“완아가 몸이 좋지 않다고요?”
“네. 그런데 괜찮으십니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상문 낭자는 두 뺨이 포동포동한 것이 아직 정겨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답했다.
“군주께서 고뿔에 걸리셨는지 조금 피곤해 하십니다. 한 이틀 몸조리하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그러고는 품에서 서한 두 개를 꺼내 범한에게 건넸다.
“대인께 드릴 서한입니다.”
편지를 받아들고 보니 아버지와 완아에게서 온 것이었다. 범한은 우선 그것을 품 안에 넣어 놓고 화부터 냈다.
“아버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러신 겁니까? 지금 강남은 어지럽습니다. 그런데도 왜 대보 형님을 이리로 보내신 거란 말입니까?”
그러자 이때 임대보가 돌연 입을 쩍 벌리고 웃으며 범한의 귀를 끌어당겼다.
“꼬마 범한, 이번 술래잡기에서는 진짜 오래 숨어 있었네······ 대단해!”
죽 그릇을 들고 신기하다는 듯 문 앞을 주시하고 있던 3 황자는 지금껏 무섭기만 했던 범한이 저 바보 앞에서는······. 아무튼 3 황자는 참지 못하고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려 입에 있던 죽을 뿜고 말았다.
등자월도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서둘러 상문과 함께 3 황자께 예를 갖추어 인사부터 했다. 범한이 낭패에 빠진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어서였다. 분명 두 사람도 오는 내내 임대보 때문에 골치 꽤나 썩은 것 같았다.
임대보가 왔으니 그를 시중드는 사람도 분명 함께 왔을 터. 이에 사사가 재빨리 화원 밖으로 나가 그들에게 있을 곳을 정해 주었다. 범한도 대보를 진정시킨 후 일단은 후원에서 묵도록 했다. 그리고 매일 할 일 없이 지내던 여종들에게 대보와 함께 해바라기 씨며, 땅콩 같은 견과류를 까먹으며 놀아주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바깥 대청은 안정을 되찾았다.
해당타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대청에서 나갔다. 범한이 분명 등자월과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란 생각에 자리를 피해준 것이었다.
등자월은 대청으로 든 후 촌부 낭자를 못 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먼저 인사를 해주니 그 역시 서둘러 답례를 해주었다.
의자에 앉아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젯밤에 현재 내 곁에 사람이 너무 적은 거 같다고 생각을 했는데, 때마침 잘 왔어요. 한데 지금 경도는 어떤가요?”
“경도는 언 공자께서 봐주고 계십니다. 대인이 경도 감찰원으로 보낸 보고서를 원장 대인께서 보시고 제게 도와주라며 사람들을 딸려서 내려 보내신 겁니다.”
등자월이 계속 설명을 해나갔다.
“다시 말해 대인께서 준비하고 계신 일은 2처와 3처에서 서둘러 해도 몇 개월이나 걸립니다. 그래서 아예 제가 오는 길에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429화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사람이 이끌고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직접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그는 옆에서 죽을 마시며 엿듣고 있는 3 황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해 도련님께서는 나가 달라는 눈치를 주었다.
3 황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가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까 들어올 때 왜 그런 이상한 표정을 지은 거죠?”
등자월이 사방을 살펴보고는 쓴웃음을 내지었다.
“경도를 떠나올 때 경도에서 흉악한 소문이 돌았는데······ 모두들 대인께서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 낭자와 바깥출입 때는 동행하고, 앉을 때는 동석하고, 누울 때는······ 아무튼 조정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대인께서는 황실 금고를 쥐고 계시니 불화는 피하셔야 하는데, 조정 관원들은 이 일로 대인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데 화원에 들어서자마자 뜻밖에도 해당타타 낭자가 보여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직감해 걱정이 들었던 겁니다.”
“누울 때는 동침한다고요?”
범한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이 생각해 낸 거니 다행이네요. 그러니 그 일은 그만 이야기하고, 가져온 물건이나 보여줘요.”
그러자 등자월에 품에서 조심스레 납작한 함을 하나 꺼내 범한에게 건넸다.
범한이 함을 열어 가운데에 누워 있는 종이를 꼼꼼하고 진중하게 살펴보았다. 살짝 누렇게 뜨고 가장자리는 살짝 말려 있는 흰 종이로, 딱 봐도 오래 된 것이었다. 종이 위에 쓰여 있는 글자가 살짝 비뚤배뚤한 것이 글씨를 쓴 이가 생명이 거의 다했을 무렵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잘 만들었군.”
범한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유서가 무슨 역할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산을 둘러싼 소송을 연기시키려면 이게 있어야 하지.”
그러자 등자월이 보고를 했다.
“대인, 염려 마십시오. 2처와 3처에서 협력해서 만든 것입니다. 과거 명씨 가문 주인이 남긴 무수히 많은 글씨체를 참고했고, 종이도 요즘 찾기 힘든 그때 만들어진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오래 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처리까지 해서 세밀하게 들여다보아도 아무도 가짜란 걸 알아챌 수 없습니다.”
“명씨 가문에서는 가짜란 걸 알 겁니다. 진본은 일찌감치 없애버렸을 테니까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가짜로 진실을 숨기는 일과 관련해 우리 감찰원 내부에 전문 인사들이 제법 있었군요. 나중에 가짜 골동품으로 장사나 해야겠습니다. 어쩌면 돈을 제법 벌어들일 겁니다.”
“이따가 이걸 하서비에게 보내요. 내일 개정하고 사건을 심의할 테니, 이 유서를 거기에 던져 놓으면······ 어쩌면 소주부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겁니다.”
명씨 가문에 대한 조사는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 성과가 없었다. 명씨 가문의 흔적을 지우는 기술이 너무 심오하고, 강남 관료들과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어서였다. 소주부도 그중 하나였다. 범한은 직접적으로 소주부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밀리에 제작된 옛 유서’로 강남로 관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면,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바깥 대청에 혼자 남게 되자 범한은 가슴팍에 넣어 두었던 서한 두 통을 꺼냈다. 그는 서한을 우선 대충 훑어 본 후 다시 자세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임완아의 편지에는 경도에서 벌어진 잡다한 일이 주된 내용이었고 가끔씩 황궁 상황을 언급되어 있었다. 한데 내용이 비교적 이해하기 힘들게 어렵게 쓰여 있었다.
아내를 경도에 두고 오니 가장 좋은 건, 범한에게 황궁의 풍향계가 어디로 향하는지 곧바로 알려주는 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장 공주는 광신궁으로 돌아왔고, 2 황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태자의 동향이 가장 은밀했으며, 황태후는 범한이 강남에서 날뛰고 다니는 게 조금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가장 이상했던 건 황제는 아직도 차분하다는 점이었다. 한데 이······ 뒈질 황제는 천하를 이따위로 어지럽혀 놓으면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어 이러는 건지!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거야?!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으로 향이 배어 있는 서한을 가볍게 쓰다듬고 있는데 문득 임완아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수개월 동안 못 보았지만 그는 아내가 경도에서 자기 걱정을 하며 방법을 강구 중인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서한을 다 읽은 범한은 그제야 그분이 임대보를 강남으로 내려 보낸 목적을 알게 되었다.
범건 상서는 서한에서 신신당부를 해 놓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임대보를 오주로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전임 재상 임약보는 관직에서 내려와 오주로 가서 지내느라 오랫동안 자기 아들을 보지 못했다. 이에 범한이 임대보를 오주로 데려가면, 심계가 깊은 장인을 자연스레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황제 폐하께서도 반대하기 힘든 아주 좋은 구실거리였다.
* * *
오늘 소주부에서는 엄청 황당한 일이 일어날 예정이었다. 이에 소주부 관아 문 앞에는 일찌감치 소문을 듣고 몰려온 백성들로 북적였다. 구경하기 좋아하고 관을 무서워 않는 이들 소주 백성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 주제는 당연히 최근 소주성에서 무성하게 소문이 돌고 있는, 그리고 강남 전체가 주목하고 있는 명씨 가문의 가산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일찌감치 병사했다는 명칠 공자가 살아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강남 수채 대두목으로 암흑가에서 이름을 떨치던 이가 어느새 황실 금고와 관련한 일원이 되어, 그것도 북쪽 판매를 책임지는 황가 상단 중 하나가 되어 말이다. 그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떠한 신분적인 변화를 거쳤든 가장 이목을 끄는 건 그의 신분이 여전히 명씨 가문의 자손이란 점이었다. 이에 오늘 하서비는 소주부에 고소장을 제출하고 가산을 둘러싼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명원에 있는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명씨 가문의 가산은 일국의 재정과 맞먹는 규모인데, 대체 누구 손에 떨어지게 될까?
절대 다수의 사람은 명씨 가문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왜냐하면 첫째, 명씨 가문이 자신들의 어두운 면을 제대로 감추어 강남 재상가와 권력가, 백성들에게 매우 깨끗한 사람들로 각인되어 있어서였다. 둘째, 명청달이 명씨 가문의 장자여서였다. 하서비가 정말로 명씨 가문의 일곱째라고 해도 경국 법률과 천년 동안 이어져 온 관습에 따라 가산은 자연스레 적장자에게 계승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하서비가 명청달이란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은가.
소주부 관아 밖은 시끌벅적했지만, 관아 내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소주부 지주가 머리가 너무 아파 커다란 책상 위에 반쯤 엎어진 채로 옆에 있는 고문에게 맥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을 좀 해보게. 오늘 어찌하면 좋겠나?”
명씨 가문은 백년 역사를 지닌 큰 가문이었다. 그러니 강남 관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복잡하고도 많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한 명씨 가문에서 일이 터진다면, 강남 내 절반에 이르는 관원이 함께 손해를 볼 수 있었다. 한편 소주부라는 이 중요한 관아도 일찌감치 명씨 가문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하서비가 가산 관련 소송을 내자, 소주부 지주는 명청달과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 입장에 서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서비 뒤에는 흠차가 있었다. 지주 대인으로서는 감히 밉보여서는 안 되는 인물 말이다.
고문 역시 얼굴에 잔뜩 불안한 기색을 내보이며 초조하게 뱅글뱅글 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추어 서서 쥘부채를 접어 ‘팍!’, 하고 소리를 냈다.
“대인, 청렴한 관리가 되셔야 할 때입니다.”
고문이 미간에 보기 싫게 주름을 잔뜩 지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러자 소주부 지주가 당황해 크게 화를 냈다.
“무슨 쓸데없는 말인가! 설마 본관이 평소에 청렴한 관리라 아니란 뜻인가?”
말을 마친 지주 대인은 불현듯 어떤 일이 생각나 기가 죽어 말을 이어 갔다.
“이는 명씨 가문의 일이네. 본관 역시 모른 척할 수 없어. 과거에 큰 노마님에게 기댄 덕에 지금 이 자리까지 와 있는 거야.”
고문은 지주 어르신이 자신의 뜻을 오해했다는 걸 알고는 서둘러 다가가 소리를 죽여 짧게 해명을 했다.
“어르신, 명씨 가문에서 요 이틀 동안 뭔 말이라도 전하기 위해 누구든 보냈답니까?”
소주부 지주는 당황했다. 이에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이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군. 명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본관과 소통을 한 게 없었군.”
그러자 고문이 음산하게 웃었다.
“명씨 가문도 다 생각이 있었군요. 이번 소송이 어찌 진행 되든, 또 하서비가 무슨 증거를 쥐고 있든······ 명씨 가문의 거대한 자산은 어떻게든 명씨 어르신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군요······ 명씨 가문은 자신들이 이길 거라 믿고 있어 걱정하지 않는데, 무엇하러 어르신께서 대신 조바심을 내십니까?”
소주부 지주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 생각에는 본관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고문의 전공 분야는 법률이어서 그는 경국 법률에 빠삭한 인물이었다. 이에 촥, 소리와 함께 부채를 펼쳐 들고는 오만하게 말했다.
“하서비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줄 당시 사람을 찾아내 그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란 게 밝혀져도, 경국 법률에 따르면 그에게 돌아갈 가산은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양쪽에 밉보이셔서는 안 되지요. 한데 명씨 가문은 경국의 법률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얼 걱정하십니까? 오늘은 공적으로 일을 처리하실 때 법률에 따라 사건을 재판하시면······ 흠차 대인도 어르신께 잘못을 물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강남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니 셀 수 없이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에 소주 지부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고문이 말해준 법률에 따르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법률에 따라 사건을 심의하면, 범한에게 밉보일 일도 없고 명씨 가문의 성공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동시에 관리로서의 체면도 세울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방법 같아 보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드디어 마음이 홀가분해진 지주 대인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 함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로 무언가를 하는 거지.”
이때 관아 밖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저 하씨 성의 도적놈은 성미 한번 참으로 급하구나!”
말은 이리 했지만 한 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지부는 일단 의관부터 정제했다. 그리고 위엄과 자상함이 돋보이도록 얼굴에 웃음을 짓고는 서재를 나가 재판장으로 향했다.
* * *
재판장으로 들어서자 관아 밖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사람들의 기를 꺾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밖에서 떠드는 소주 백성들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지주 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아래쪽을 바라보니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하서비가 재판장에 홀로 나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걸 보니, 흠차 대인이 하서비를 돕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민초는 하서비입니다.”
“무슨 일로 소송을 제기했느냐?”
하서비가 잠시 침묵했다. 잠시 주의력이 분산되어 순간 대답하는 걸 잊은 것이었다. 새파란 면 도포를 입은 상태에서 턱수염도 깨끗이 밀어 푸르스름한 피부가 드러나 있다 보니, 오늘따라 그는 한껏 용맹하고 기운차 보였다. 한데 옷소매 밖으로 드러난 양손이 살짝 떨리는 걸 보니, 오늘 일이 명칠 공자에게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했나 보다.
지주 대인이 살짝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하서비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 자가 재판장 한가운데에 오만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비추어져서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하고, 뜻밖에도······ 무릎을 꿇지 않아서였다.
430화
지주 대인이 불같이 화를 내려 하는데 고문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문이 귓속말 일러주었다.
“범······ 범······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마십쇼.”
지주는 깜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런 자질구레한 걸 가지고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바로 이때, 하서비가 입을 뗐다. 그가 손을 맞잡고 예를 취한 상태에서 맑고 우렁차게 말하기 시작했다.
“민초 하서비, 본래 성씨는 명, 이름은 청성이옵니다. 소주 명씨 가문의 옛 명씨 어르신의 일곱째 아들입니다. 어렸을 때 사나운 어머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 지금까지 떠돌며 살았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셔서 오늘 이렇게 부득이하게 재판장으로 찾아와 소주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과 장자인 가주 명청달이 결탁하여 못된 짓을 하고, 사람을 죽이려 하였으며, 제 가산을 빼앗은 것을 고발하러 왔나이다······ 부디 청렴한 대인 어르신께서 이백성을 위해 정의를 되찾아 주십시오.”
그의 말에 재판장에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모두 오늘 하서비가 가산을 빼앗긴 일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다고만 알고 있었다. 한데 말을 들어보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있던 것이었다. 하서비는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과 명청달이 과거 자신을 죽이려 했다며, 그자들의 악행을 직접적으로 규탄했다. 더군다나 사나운 어머니, 못된 짓이란 단어를 연달아 사용함으로써 다른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고 있었다.
밖에 있던 백성들이 시끄럽게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자상한 노부인으로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선행을 하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거지?
사실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가 과거 실종되었을 때 그들도 큰 노마님 및 현 가주인 명청달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걸 속으로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한데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믿음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서비가 명청달의 죄상을 말하자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
소주부 지주 역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듣기 싫다는 듯이 받아쳤다.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니 언행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고발장은 어디에 있느냐?”
하서비가 품에서 고발장을 꺼내 두 손으로 재판대 아래쪽에 있는 고문에게 건네자 고문이 그것을 다시 지주 대인에게 건넸다. 그러자 두 사람 모두 잠시 같은 곳에 시선이 멈추더니 속으로 깜짝 놀라 버렸다.
고발장은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을 날카롭게 겨누고 있으면서도 그것과 관련한 경국 법률의 규정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명씨 어르신의 유서에만 초점을 맞추어 놓아서였다. 그리고 그동안 하서비 자신이 불쌍하게 떠돌이 생활을 한 사실을 필묵을 아끼지 않고 써 내려가 읽는 이의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지주 대인은 마음이 움직인 사람처럼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싸늘하게 웃어넘겨 버렸다. 그리고 이 정도 문장이면 연극용 소설로는 꽤 괜찮겠지만, 소송을 할 때는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경당목(驚堂木)을 내리치며 엄하게 꾸짖었다.
“하서비! 제시할 증거가 있느냐?”
하서비가 한껏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명씨 가문 사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인께서는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것입니까?”
하서비의 차분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 지주 대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설마 저자가 치명적인 무기라도 손에 쥐고 있는 것인가?’
지주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문과 두어 마디 상의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명씨 가문에게 소송에 응하러 재판장에 나오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경국 법전에 쓰여 있는 주석을 보면 이번 민사 소송 건은 피고가 나와서 응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큰 안건이고, 양측의 배후 세력도 너무 크고, 강남 일대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어 소주부 지주도 감히 부주의하게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지주는 명씨 가문이 모른 척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기에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속이 밖으로 나가는데 명씨 가문 사람이 관아 안으로 들어왔다. 명씨 가문에서도 소송에 응할 사람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이길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한데 찾아온 사람을 보며 소주 지부가 또 이맛살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러자 귀공자가 살며시 웃으며 몸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명란석이 대인께 인사드리옵니다.”
명씨 가문의 도령은 소주부 지주가 지금 연기하는 중이란 걸 다 알고 있었다. 백성들 앞에서 강직하고 권세에 아첨하지 않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느라 이리 냉담하게 말한 것이라고 말이다. 평소 소주부 지주는 명란석에게 매우 친절했다. 한데 요 며칠 명씨 가문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번 가산을 둘러싼 소송은 자신들이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었다. 이에 명란석은 소주부 지주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
소주부 지주가 말을 이어 갔다.
“명씨 어르신께서 최근 몸이 편찮으시니 장손인 그대가 이번 소송에 응하는 건 합당하다고 본다. 여봐라! 고소장을 명란석에게 보여주어라.”
고문이 고소장을 건네주는데도 명란석은 받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려 인사나 올렸다.
“대인, 우리 명씨 가문은 소송에 능할 정도로 악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쟁점에 대해 잘 모르옵니다. 그러니 소송대리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명란석은 말을 마친 후 옆을 잠시 바라보았다. 소위 ‘소송에 능한 악인’이란 당연히 옆에 서 있는 하서비를 이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서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큰 조카에게 잠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명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쪽에서 사람 하나가 재빨리 들어왔다. 그는 고문이 들고 있던 고소장을 양손으로 받아들고는 비위를 맞추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소주부 지주와 고문은 그자를 보는 순간 걱정을 놓아 버렸다. 이 소송대리인은 성은 진이고 이름은 백상으로 강남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자였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악명 높은 소송 거간꾼일 수도 있었고, 주부(州府)와는 가장 의기투합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자가 소송을 맡으면 검은색도 흰색으로 변하고, 죽은 것도 산 것이 되고, 남자도 여자가 되었다. 그만큼 말주변이 좋았고 경국 법률을 손바닥 안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어 지금껏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오늘 명씨 가문은 진백상을 내보낸 것도 모자라 경국 법률 중 적자 승계의 사문화된 법률의 보호까지 받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가산 관련 소송에서 명씨 가문은 패할 리 없었다.
진백상이 하서비의 고소장을 들고 세세히 읽어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입가에서는 경멸을 담은 냉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대방을, 심지어는 상대방 뒤에 있는 흠차 대인까지 싸잡아서 얕본 것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경박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늘도 땅도 감동할만한 이야기군요······. 한데······ 하 두목의 일과 명씨 가문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송대리인이 하서비를 하 두목이라고 부른 건 여론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였다. 옆에서 듣고 있는 백성들에게 하서비가 강과 호수에서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암흑가 두목이란 걸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하서비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명씨 가문에서 20년간 있었던 이야기인데, 왜 명씨 가문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오?”
그러자 진백상이 갑자기 싸늘하게 두어 번 소리 내며 비웃기 시작했다.
“하 선생은 정말 웃기군요. 당신이 명씨 가문에서의 일이라고 말하면, 그게 정말로 그렇게 되는 건가요? 자신이 명씨 가문의 일곱째 어르신이라고 우기면 그렇게 되는 건가요?”
그가 재판대의 소주부 지주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웃으며 말했다.
“대인, 이번 안건은 너무 황당합니다. 그러니 계속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소주부 지주는 거짓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하여 그런 맹랑한 말을 하느냐!”
그러자 진백상이 웃어보였다.
“실질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혼자서만 자신이 명씨 가문의 일곱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인, 만약 지금 또 다른 이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라고 나선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강남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께서는 과거에 아들 일곱과 딸 넷을 기르셨지요. 그중 일곱째는 첩의 소생이었고, 어려서부터 병치레를 많이 하고 몸이 허약해 십여 년 전 불행히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칠 공자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명씨 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소송을 하도록 놔둔다면, 명씨 가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과 명씨 어르신의 깨끗한 명성은 중상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늘의 도일까요?”
그가 하서비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물론 지금 모두들 하 두목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건 다 알고 있기는 한데······ 하온데 황실 금고의 공개입찰 후 하 두목이 이리 황당한 행동을 하니, 소인이 보기에는 너무 이상합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뒤에 말 못할 음흉한 생각이라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요?”
강호에서 제일 유명한 소송꾼은 오늘 소송은 전혀 도전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시작부터 아예 맹공을 퍼부어 버렸다. 그는 하서비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공격을 해댔다. 그리고 하서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소송을 걸면 안 되지요. 증인이 없으면,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고요······ 하 두목, 오늘 당신이 명씨 가문의 명성을 모욕했으니, 잠시 후 무고죄로 고발해주지.”
과거에 큰 노마님이 하서비의 생모를 때려죽이고 하서비를 쫓아낸 걸 아는 사람은 이미 십여 년 전에 입막음을 당한 상태였다. 그러니 하서비 손에는 물증이든 증인이든 있을 턱이 없었고, 이에 명씨 가문에서는 자신만만하게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소주부 관아 밖에서 듣는 순간 닭살 돋는 부드럽고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증거가 없으면 소송을 걸 수 없다고 누가 말했답니까? 또 증인이 없으면 살인이라 말할 수 없다고 누가 말한 건가요?”
“경력 원년, 정주 지역의 어느 첩이 남편을 죽인 사건이 있었지요. 증거가 없는데도 정실이 고발을 했습니다. 나중에 마구간에서 말을 탈 때 쓰는 칼이 나와 사건이 해결이 되었답니다. 형부에 기재된 사건으로 춘권(春卷) 137당(擋: 문서, 안건)에 나온 남월 송대왕 사건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3등급 민사 사건으로, 1만 관 이상의 금액이 연관된 사건이라 사문(死文)화된 법을 적용하지 않았고, 반좌(反坐: 거짓을 고해 남에게 벌을 받게 한 사람에게 같은 벌을 내리는 것)를 당하지 않았으며, 완벽한 증거가 필요 없었습니다. 하온데 명씨 가문의 가산 가치가 어찌 만 관만 되겠습니까? 두 가지 선례가 이미 있는데, 어찌하여 소송을 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증거란 건 고발한 후 관부가 현장을 조사하면서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송꾼은 뭘 그리 서두르는 건가요?”
관아 밖에서 나타난 사람은 유삼이라는 소매 폭이 좁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금선(金扇: 금색 부채)을 들고 있어 제법 잘난 척하는 오만한 사람 같아 보였다. 또한 말끝마다 형부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과거 사건을 언급해 억지 주장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기세등등한 태도로 명씨 가문을 성공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사람들의 이목까지 자신에게 집중시켜 버렸다.
431화
소주부 지주가 살짝 화가 나 수염을 쓰다듬었다.
“누구인가? 먼저 알리지도 않고 함부로 재판장에 들어오다니! 여봐라! 저 놈을 쳐라!”
유삼을 입고 있는 사람이 금선을 허리 뒤춤에 꽂았다. 그리고 재판대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잡고 인사를 올렸다.
“대인, 때리시기 전에 잠시 제 말 좀 들어 주십시오.”
말을 마친 그가 소맷자락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공중에 대고 흔들며 히죽거리며 말했다.
“저는 진백상 선생과 마찬가지로 소송대리인이옵니다. 하서비 선생이 청한 소송대리인이 지각을 했을 뿐이지요. 그러니 대인 용서하여 주시고, 제가 온전한 몸으로 재판장에 서서 명씨 가문과 이야기를 좀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직 사건 심리가 시작되지 않았는데 대인께서 한쪽의 소송대리인을 때려 기절시켜······ 그게 소문이라도 난다면, 대인의 청렴한 명성에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가 하서비의 소송대리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깜짝 놀라 멍하니 있었다.
한편 하서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흠차 대인께서 어찌하여 저리 말썽꾸러기 같아 보이는 자를 내 소송대리인으로 보내셨을까?’
소주부 지주는 소송대리인의 말에 숨이 턱 막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때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흠차 대인을 볼 면목이 없어지기에 순간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주부 지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백상은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금선을 허리에 꽂고 있는 소송대리인을 주시했다. 그는 드디어 말발이 좀 되는 적수를 만난 것은 기분이 들어 살짝 흥분했다. 이에 진백상도 부채를 허리춤에 꽂아 놓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귀하가 앞서 제시한 두 가지 예는 특례입니다. 특히 형부 춘당주(春擋注: 안건에 대한 일종의 주석)는 경도의 대리사와 형부만 참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지방에서 심의할 때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유삼을 입은 자가 머리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흥 4년, 당시 소주 평사로 계셨던 임약보 전임 재상께서는 관련 춘당주에 따라 어느 가문의 가산 관련 안건을 처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적용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다 한답니까?”
진백상은 순간 긴장했다. 상대방이 말한 그 안건은 자신은 모르고 있던 건이었다. 그러니 상대가 헛소리 하는 게 아니라면 경국 법률과 판례에 대한 그의 지식이······ 자신을 한참 뛰어넘는다는 것일 터였다.
이에 진백상은 유삼을 입은 자가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백 형님, 경국 법률은 판례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마시죠. 판례를 적용하고 하지 않고는 경국 법률에서 제한을 두어서가 아니라, 심판하는 관리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그가 소주부 지주 대인을 향해 손을 들어 예를 표했다. 하지만 소주부 지주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상대가 ‘마음에 달린 것’이란 표현으로 이번 가산 관련 안건을 받아들이도록 자신을 압박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이 소송대리인은 대체 누구지? 진백상과 명란석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후안무치한 소송 거간꾼은 대체 강남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거지?
소주부 지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선생의 성명은 대체 어떻게 되는가? 부디 알려주게나.”
하서비도 자신의 소송대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유삼을 입은 이가 두 손을 모으고 웃으며 대답했다.
“소생 송세인입니다. 분에 넘치게도 경도 소송대리인 조합의 이사로 있으면서 형부의 신상 기록 자료를 가져다 볼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도 받았습니다. 오늘 특별히 강남까지 온 건 유사 이래 가장 큰 규모의 가산 소송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송세인이라니!’
소주부 지주는 얼른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명란석 역시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한편 진백상은 송세인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송세인이 누구인가? 경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제일 알아주는 소송대리인 아닌가. 그는 어쩌면 경국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소송대리인이었다. 진백상의 명성은 강남에서나 통했지만, 송세인은 총명하고 교활하고 흔들어놓기 힘든 이로 천하에서 유명한 자였다. 소송대리인 일을 시작한 후로 그는 어려서부터 익힌 경국 법률을 가지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관리들의 체면을 짓밟아 버렸고, 피해자들에게는 고통의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었었다.
소주 백성들도 송세인의 명성과 악명은 들어봤던 터였다. 이에 그가 이름을 밝히자 관아 밖이 가마솥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오늘 정말 볼만한 구경을 하게 되어서였다.
명란석은 걱정스럽게 진백상을 잠시 바라보았다. 진백상은 당황과 혼란에서 벗어나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진백상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순간 속으로 강력한 전의를 불태우며 싸늘하게 웃었다.
“도련님 염려 마십시오. 저는 송사(訟事)에서 지금껏 패한 적이 없습니다. 하오나 송세인은 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백상은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송세인이 패한 유일한 송사는······ 지난번 경도부에서 사남백작의 서자 검은 주먹이 곽보곤을 때렸던 그 사건뿐이었다······ 송세인이 진 적이 있다는 그 사건은 바로 범한에게 딱 한 차례 진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소송을 진행하는 것이니,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건 하서비의 진짜 신분, 다시 말해, 그가 옛 명씨 어르신의 일곱째 아들인지 아닌지였다.
이 점에 대해 진백상의 입장은 매우 확고했다. 상대방이 이 일을 증명할 수 없으면, 나머지는 더 이상 변론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악명 높은 송세인에게 자신의 약점을 잡을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소주부 지주 역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하서비에게 신분을 확인할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조금 전과 달리 송세인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하서비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자신들이 준비한 첫 번째 증인을 청했다.
증인은 산파였다. 산파는 이미 나이가 많이 먹은지라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와서는 재판장 안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증언을 했다. 과거에 자신이 옛 명씨 어르신을 대신해 첩의 아이를 받았고, 그 아기는 허리 뒤쪽에 푸른색 반점이 있다고 말했다.
하서비가 앞으로 나아가 옷을 벗자 허리 쪽에는 정말로 푸른색 반점이 있었다.
진백상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이를 악물고 작은 소리로 명란석에게 말했다.
“왜 어제 저런 건 말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명란석이 이를 빠드득빠드득 갈며 잔뜩 분노에 차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저 산파는······ 가짜야! 옛날에 있던 그 산파는 2년 전에 병사했으니까!”
진백상이 슬프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산파가 가짜라고 해도 자기 쪽에서는 밝혀낼 방도가 없어서였다. 산파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같이 보였지만 앞서 문답에서 과거 명원의 위치, 옛 명씨 어르신의 용모, 첩의 외모, 건물 구조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 산파는 흠잡을 데 없는 진짜였다.
‘이런 제기랄! 감찰원의 증거 날조 수준은 정말 끝내주는군!’
당연히 명씨 가문은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산파 때문에 당황해서는 안 되었다. 진백상 역시 변론에는 일가견이 있던 터라, 이미 오래 전 일이고 산파의 나이가 많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며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냥 인정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서비가 신분을 밝히기 위해 내세운 가짜 증거는 결국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욱이 이와 같은 결과는 소주부 지주 대인과 강남로 관원들이 애당초 명씨 가문 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송세인이 벌컥 화를 내며 생각했다.
‘강남 사람들은 역시나 모두 간악한 자들이구나. 내가 천신만고 끝에 ‘설계’한 산파라는 증인을 부정해 버리다니!’
한데 재판대 앞에 있는 소주부 지주의 표정과 말만 가지고도 송세인은 명씨 가문 가산을 둘러싼 송사에서 자신들이 내세운 증거가 취약하고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송세인은 열정이 넘쳤다. 소주부에서 암암리에 편향된 태도를 보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변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걸 알게 되자, 송세인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신의 말재간을 발휘했다. 즉, 명씨 가문을 대놓고 저평가하고 은근슬쩍 소주부를 자극했으며, 말하는 사이에 야유와 조롱하는 말을 끼워 넣었다.
경도의 유명인사이니 강남 귀족들의 잔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작은 범 대인이 뒤에서 버텨주고 있으니 그는 자연스레 독하게 나온 것이다.
명란석, 진백상, 재판대의 소주부 지주 역시 서두르지 않았다. 이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천하에서 유명한 소송 거간꾼의 연기를 지켜보며 재판장 허공을 떠돌고 있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비록 속으로는 저놈이 미워죽을 지경이었지만.
“송 선생은 하서비가 옛 명씨 어르신의 일곱째 아들인 걸 증명한다 했는데, 다른 증거가 있는가?”
소주부 지주가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 말이었다.
“대인, 앞서 나온 산파가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왜 증거가 될 수 없습니까?”
송세인은 공격을 할지 수비를 할지 알 수 없는 자세로 재판장에 서 있었다.
“이런! 송 형, 그 말은 타당치가 않아요.”
진백상이 옆에서 한 손으로 주먹을 감싸 쥐고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저 늙은이는 거동이 불편하고, 양 볼은 무력하게 축 쳐져 있으니, 이미 죽을 때가 거의 다 된 사람입니다. 그 정도로 늙어 노망난 사람의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녀가 과거 명씨 가문과 관련한 걸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세세히 기억하고 있던 누가 그 노인에게 말해준 후······ 여기까지 와서 모함하라고 시킨 것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송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참으로 후안무치한 모함입니다, 그려.”
그의 말에 진백상은 살짝 화가 나 생각했다.
‘너희들은 뻔뻔한 짓을 대놓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나는 입도 뻥끗해서는 안 된다는 거냐?’
진백상을 상대하는 게 귀찮았던 송세인이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재판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대인, 설마 대인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재판장 밖에 있는 백성들은 이미 하서비의 신분을 거의 믿어주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산파의 연기 실력이 정교하고 뛰어났다. 소송을 구경하고 있던 백성 중 일부는 소주부 지주 어르신과 명씨 가문이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색을 보이자 시끄럽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명씨 가문의 편을 드느라 여전히 침묵하는 중이었다. 특히 하서비의 뒷배가 경도에서 온 세력이다 보니 이들 강남 백성들은 현 상황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소주부 지주의 늙은 얼굴이 약간 붉게 달아올랐다. 산파의 진술을 죽어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는 자신이 보기에도 확실히 타당치 않아서였다. 하지만 명란석의 눈빛에 그는 그대로 밀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지주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산파는 노망이 난 게 확실하다. 진술을 받아들이는 권한은 본관에게 있다. 그런데 앞서 송 선생은 형부 3등급 사건을 언급했지만, 이번 명씨 가문의 가산 관련 소송은 의심할 여지 없이 1등급 사건이다. 그러니 더 상세하고 믿을만한 증거가 없다면, 본관은 확실히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송세인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이에 송세인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고 실망한 모습을 보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그건 안 됩니다! 이미 오래된 일인데, 어디에서 다시 증거를 찾아오란 말씀이십니까? 제가 증인을 찾아왔는데도 대인께서는 안 된다 하시니, 대체 얼마나 상세한 증거가 필요하신 겁니까?”
소주부 지주는 살짝 흥이 올라 생각했다.
‘송세인 네가 아무리 오만하고 유명하다 해도 재판장에서는 우리 관리 어르신들이 주무르는 밀가루 반죽밖에 안 되느니라. 네가 증인을 데려오는 족족 내가 어떻게든 거부할 것이다.’
그러고는 송세인의 황당한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답을 해버렸다.
“증인과 물증을 모두 가져오면 판결을 내리겠다.”
432화
송세인은 소주부 지주가 이어서 더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매우 빠르게 말을 받아쳤다.
“대인? 판결은 누가 내립니까?”
“당연히 본관인데······.”
“대인께서 판결을 내리시니 묻겠습니다. 어떤 물증 말입니까?”
송세인은 기세등등하게 재빨리 말을 내뱉으며 소주부 지주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소주부 지주는 정신이 조금 멍해져, 우물쭈물하며 말을 제대로 못 했다.
그 순간 송세인이 한 손으로 다른 한 주먹을 감싸 쥐고 예를 갖추더니 상대방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본 상태에서 압박하듯 물었다.
“대체 어떤 물증 말입니까?”
소주부 지주는 송세인의 기세에 깜짝 놀랐다. 이에 순간 수년 전 율과 시험을 보던 때로 되돌아가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흔적, 흉기, 문서······.”
“문서요? 좋습니다!”
송세인이 두 눈이 빙그레 웃기 시작하더니, 그의 입에서 거창하게 칭찬하는 말이 나왔다.
“대인, 영명하십니다!”
소주부 지주는 다시 머리가 멍해져 버렸다. 대체 자신의 어디가 영명하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해 미심쩍어하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송 선생은······.”
그런데 송세인은 이번에도 그에게 말을 다 할 기회를 주지 않고 급히 재촉하듯 되물었다.
“대인, 만약 문서가 있다면 증거가 되는 것입니까?”
“당연히 되······.”
송세인이 다시 말허리를 툭 끊어버렸다.
“문서 증거가 있으면, 대인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 거군요!”
소주부 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본관도 경국 법률을 잘 아는 사람인데, 어찌 문서가 유력한 증거물이란 걸 모를 수 있겠느냐! 소송대리인으로서 말이 너무 무례하구나! 문서로 된 증거물을 가져온다면야 당연히 앞서 데려온 산파보다 더 신뢰할 수 있지 않겠느냐!”
소주부 지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득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만 같았고, 왜 자기가 갑자기 말을 많이 했는지 의아했다. 지주가 무의식적으로 재판장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명란석과 진백상이 경악하며 실망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송세인이란 소송대리인은 득의양양하게 얄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송세인은 연거푸 소주부 지주의 말을 끊었다. 지주가 생각해 둔 대응 방법을 완전히 차단한 후 갑자기 다시 말을 거는 방법을 되풀이해 지주가 그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주부 지주가 증거를 다시 거부하는 뻔뻔한 광경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먼저 사람들 앞에서 문서 증거의 중요성을 확인한 것이었다.
사실 이는 변론 이전에 아주 얕게 깔아 놓은 밑작업이었다. 개 앞에서 햄을 들고 계속 흔들기만 하며 단 한 입도 내어주지 말아 보자. 그렇게 계속 흔들다가 마지막에 개에게 바나나 하나를 툭 던져주면, 개는 얼씨구나 하면서 맛있게 먹어치운다. 하지만 그 순간 개는 자신이 먹고 싶었던 건 바나나가 아니라 햄이란 사실은 잊게 되는데, 송세인의 밑작업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진백상은 지주 어르신이 송세인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진백상은 송세인이 말할 때 끼어들어 말을 끊어놓을 기회를 잡지 못했다. 왜냐하면 송세인 저놈이 말을 마구 쏟아내면서 오만하고 무례한 말투로 상대방의 화를 돋게 만들어서였다.
진백상과 명란석이 서로를 잠시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상대방이 대체 무슨 문서 증거를 가지고 있기에······ 하서비의 진짜 신분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걸까?
소주부 지주는 자신이 송세인에게 농락당했음을 알아채고는 그의 밉살스러운 미소를 바라보며 저놈을 매우 치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지금만큼은 저자를 때릴 수 없기에 그로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묻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서 증거가 있으면서 왜 아까는 내놓지 않은 것이냐?”
그러자 송세인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올리겠습니다.”
지주 대인이 싸늘하게 웃었다.
“가져온 문서 증거가 아무 효력이 없다 해도 본관의 결정을 비난하지 말거라.”
그러자 송세인이 음산하게 웃었다.
“대인, 염려 놓으십시오. 이번 문서 물증은 오래된 것이기는 해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망이 날 리도 없고······ 아무튼 대인, 염려 놓으십시오!”
송세인이 하서비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몇 마디 건넸다. 그러자 하서비가 살며시 표정을 구겼다. 마치 이렇게나 빨리 그 물건을 내놓게 될 줄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자신의 진짜 신분을 증명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줄이야.
그가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 조심스레 고문에게 건넸다. 그는 벌건 대낮에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함을 들고 가는 고문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서비의 신중한 표정을 보며 진백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명란석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도련님, 무슨 물건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명란석도 잔뜩 궁금한 표정이었다.
‘소주는 경도만 못하니 출생증명서 같은 게 있을 리 없어. 그렇다면 저 종이는 대체 뭐지?’
그 순간 소주부 지주가 함을 열었다. 그리고 고문과 함께 대충 훑어보다가 갑자기 낯빛이 변해 버렸다.
그들의 반응에 명란석과 진백상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주부 지주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명란석을 잠시 훑어보았다.
그러자 송세인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차분하지만 높은 목소리로 맑고 우렁차게 말했다.
“저 문서 증거는 옛 명씨 어르신께서 친히 작성하신 유서입니다. 유서에는 명씨 가문의 가산을 모두 일곱째 명청달에게 남긴다고 되어 있고······ 이는 하 선생이 줄곧 지니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 선생이 명씨 가문의 일곱째 아들이란 걸 증명하기에는 충분합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송세인이 소주부 지주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투를 확 바꾸어 먼저 방어막을 친 것이었다.
“물론, 우매하고 완고하고 강직한 사람들은 하 선생이 우연히 주운 유서를 가지고 명씨 가문의 자손 행세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아까는 산파가, 지금은 유서가 나왔는데도 대놓고 모함을 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흥! 세상 사람들이 눈이 먼 것도, 생각이 짧은 것도 아니니, 우리 경국의 관리와 강남 백성들이 그런 모함을 믿을 리 있겠습니까!”
“옛 명씨 어르신의 유서라니!”
재판장 내부의 풍향이 확 바뀌고 말았다. 관아 밖에서 구경하던 백성들도 갑자기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재판장에 있는 명란석과 진백상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명란석은 너무 놀란 얼굴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할아버지께서 유서를 남기셨다고? 분명 가짜일 거야!”
옆에서 명란석 도령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송세인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유서라고는 아예 구경도 못했으면서 초장부터 가짜라고 하다니······ 명씨 가문 도련님은 신선이라도 되나 보죠?”
여전히 충격 속에 있던 명란석은 송세인의 말에 옷소매를 뿌리치며 벌컥 화를 냈다.
“그 유서는 분명 가짜요!”
명란석의 말에 송세인은 기분이 좋았다. 적시에 밑 작업을 해둔 덕에 가장 걱정했던 국면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걸 알게 되어서였다. 만약 상대방이 유서의 진위 대신 앞서 자신의 지적처럼 하서비가 유서를 어디서 주운 후 죽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를 사칭하고 다닌다고 물고 늘어졌다면, 이것이야말로 송세인에게는 가장 대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방이 그런 식으로 뻔뻔하게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송세인으로서도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명씨 가문의 도령은 유서의 진위에만 신경을 쓰느라 하서비가 진짜 행사를 한다는 건 지적도 않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송세인 자신이 유서가 진짜라는 것만 증명해 낸다면, 그렇다면······ 하서비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란 점은 확인을 받은 사실이 되는 것이었다.
송세인이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재판장의 소란은, 사실은 모두 송세인의 계획이었다. 송세인은 계획한 순서에 따라 말을 해나가며 모든 걸 정교하게 이끌어 나간 것이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지금의 이 곤란한 국면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송세인은 과연 명불허전인 경국 제일의 소송대리인이었다.
* * *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는 소주부 지주가 양측 소송대리인에게 재판대 앞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문서 증거가 나왔네. 아직 진위는 모르지만······.”
송세인은 오늘 소주부 지주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터였다. 이에 지주의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대인, 진짜든 가짜든 조사를 해보면 바로 알 터인데, 왜 모른다고만 말씀하십니까?”
진백상은 강남에서 유명한 소송대리인이라 그런지 이미 충격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송세인이 오늘 상대에게 일부러 겁을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대응했다.
“대인, 상대측에서 이미 이 문서가 옛 명씨 어르신의 유서라고 말했습니다만, 물론 조사를 해보셔야겠지요. 명씨 가문의 도련님이 현장에 있으니 직접 살펴보도록 하는 건 어떠할는지요?”
그가 송세인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송 선생도 이견은 없는 거겠죠?”
“명씨 가문 도련님이 발광해 유서를 먹어버리지 않는다면야, 직접 봐도 무방하겠지요?!”
송세인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음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진 형은 대단히 차분하군요.”
“피차일반이오.”
진백상이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소주부 지주는 두 악덕 소송대리인이 무얼 가지고 서로를 치켜세워주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송세인과 진백상만 알고 있어서였다. 이들에게는 소송이 시작된 이상 하서비의 신분을 증명하는 건 시작일 뿐이고 거대한 자산이 어느 쪽으로 돌아가느냐가 진짜 중요한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서비가 내놓은 유서가 진짜라고 해도 경국 법률에 의하면 명씨 가문은 여전히 불패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진백림은 전혀 허둥대지 않은 것이고, 송세인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 모두 아직 갈 길이 머니 어디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명란석은 이미 재판대로 다가와 잔뜩 불안한 얼굴로 그 위에 펼쳐져 있는 유서를 보고 있었다.
유서에는 할아버지인 옛 명씨 어르신의 필적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명씨 가문 자손으로 날마다 보다시피 한 그로서는 할아버지의 글씨체를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명란석은 유서 위의 말라빠진 글자체를 보고는 할아버지의 친필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유서의 용지 역시 할아버지께서 옛날에 가장 좋아하셨던 청주지였다.
명란석이 얼굴에 살짝 불안한 기색을 드리우더니 지주 대인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백상이 명청달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명란석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을 해주었다.
“어쩌면······ 진짜일 수도요······.”
한데 명씨 가문 도령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가문의 사업을 맡아서 해오던 터라 심지가 굳건하게 다져져 있었다. 그런데 순간 무언가 기이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 과거 아버지께서 토로했던 여러 비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났다. 이에 점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명란석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가짜입니다!”
진백상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네? 어찌 그리 판단하신 겁니까?”
명란석이 이를 악 물고 음침하게 대답했다.
“우리 집 큰 어르신이라면······ 과거에 손을 쓰셨을 테니, 유서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지요!”
진백상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상대방이 말한 이는 바로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으로, 생각해 보니 그녀는 정말로 그럴 사람이었다. 만약 큰 노마님이 가산을 빼앗고, 살인하고, 내쫓았다면, 가장 먼저 유서부터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치대로라면, 유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저 유서는······.”
진백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명란석이 살짝 암울하게 말했다.
“산파와 마찬가지입니다. 감찰원이 만든 가짜인 거죠.”
433화
일이 이쯤 되자 명씨 가문에서는 경악했다. 하서비 뒤에서 감찰원이 아주 오랫동안, 그것도 심도 있게 작업해왔기 때문이었다. 대체 얼마만큼 공을 들여야 저렇게 완벽한 유서를 위조해 낼 수 있는 건지. 고작 몇 달 가지고는 저렇게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종이 선택만 봐도 생산 시기며 재질까지 고려했는데, 이는 정말로 복잡한 일이다.
일단 청주지만 해도 이미 10년 전에 단종된 것이었다. 그런데 감찰원에서는 그걸 찾아다가 쓰다니.
감찰원의 수단은 정말로 대단했다. 소송을 위해 동원한 방법도 정말이지 뻔뻔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몽땅 가짜로만 포진해 놓다니······ 세상에 정도란 게 아직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슬픔에 잠겨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명란석에게 갑자기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젊고 말간 얼굴의 흠차 대인이었다. 어디에선가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살며시 벌리고 만찬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뒤에서 모든 걸 주도하고 있는 이는 당연히 작은 범 대인이었다.
유서가 나왔으니 당연히 진위를 조사해 보아야 했다. 소주부 지주는 필적을 대조하기 위해 명원으로 사람을 파견해 옛 명씨 어르신의 과거 필적이 담긴 자료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 동시에 송세인이 제기한 공평하고 타당해 보이는 의견에 따라 황실 금고 전운사로 사람을 보내 서명이 들어 있는 과거 입찰서 자료도 가져오게 했다. 또한 감찰원 4처 주소주 분리사 관원을 통해 유서의 연대와 종이를 조사해 보도록 했다.
감찰원이 이 일을 하는데 가장 적격인 건 세인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한데 감찰원은 가짜 물증을 만들어내는 데 능했으니, 거짓 진술을 하는 데에도 능할 터. 단지 본래 감찰원이 만든 가짜 물증을 감찰원이 검증하는 꼴이었으니, 이는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긴 셈이었다.
소주부 지주는 속으로 대차게 욕을 해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감히 감찰원의 잘못을 말할 수는 없어 송세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동시에 다른 수를 동원했다. 유서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도찰원 순로 어사와 강남 총독 관저에 있는 실력이 쟁쟁하기로 유명한 법률 고문을 모셔오도록 한 것이었다.
소주부의 사건 심의는 유서의 등장으로 잠시 일단락되었다. 유서 조사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에 구경 중이던 백성들은 당장 찻집으로 달려가 차와 구운 떡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마른 목을 축인 후 다시 서둘러 구경하러 돌아왔다.
그런데 좋은 자리는 이미 다 사라지고 없던 터였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참고 지켜서 있던 구경꾼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제 자리를 뺏긴 이들은 속으로 슬쩍 욕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명씨 가문에서는 일찌감치 찬합을 보낸 상태였다. 명란석은 맛도 모르고 음식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다 진백상이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이자 그제야 좀 정신을 차렸다.
범한이 머물고 있는 화원에서도 거리낌 없이 나와 있었다. 하서비에게 찬합을 보내준 것이었다. 하서비 쪽은 사람 수가 정말 적었고, 그와 송세인 딱 둘 뿐이었다. 송세인이 명씨 가문 사람이 있는 곳을 쓱 바라보며 하서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유서가 나왔으니, 하 어르신의 신분도 곧 밝혀질 것입니다.”
하서비의 눈에서 감동의 빛이 잠시 어렸다. 그러나 일순 그 기색이 사라지더니, 그가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송세인이 정색하며 말을 이어 갔다.
“하 어르신이 명씨 가문 후손인 게 밝혀져도 그게 어르신이 남겨주신 물건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서비도 그의 말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송세인이 한탄했다.
“경국의 법률은 엄격하고 법률에 의거해 처리해야 하지요. 경국 법률의 소의 호혼(疏義戶婚)의 내용을 보면 가산 계승권 규정은 정말로 융통성이 없습니다. 상대측은 장자이니 절대적 우위에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옛 명씨 어르신의 유서를 가지고 있다 해도, 관아에서 명씨 가문의 가산을 어르신께 돌려드리라고 판결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강남로의 관리들은······ 꼴을 보니, 명씨 가문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습니다.”
하서비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의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 아무개에게는 오늘 원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일입니다. 가산과 관련한 일은 모두 선생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대인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이번 일은 서두르면 안 됩니다. 유서가 인정만 된다면, 이 소송은 안 해도 그만입니다.”
송세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송은 어떻게든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질 거란 걸 알고 있더라도 계속 소송을 해나갈 것입니다. 명씨 가문을 낭패에 빠뜨리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망신당하도록 할 것입니다. 제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니까요.”
소송대리인은 시원시원하게 행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범한에게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작은 범 대인이 천 리 먼 강남까지 오라고 해서 왔더니, 자신에게 맡긴 게······ 필패의 소송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범한은 이번 소송은 최대한 오래 끌수록 좋다고 주문을 했다. 송세인은 재판장에서 딱 한 번 패했고, 그게 범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범한 덕분에 또 두 번째로 패하게 생겼다. 그 생각하면 울컥했지만 그래도 어쩌랴!
‘누가 나를 작은 범 대인께 던져 놓았단 말이냐! 누가 작은 범 대인에게 대범하게 나오도록 한 거냔 말이다!’
오후가 되자 감찰원 관원, 소주부 관원, 도찰원 관원, 강남 총독 관저의 법률 고문으로 이루어진 연합 조사 인원이 한자리에 모였고, 이들은 누렇게 뜬 종이를 한동안 살펴보았다.
우선, 필적과 서명을 보니 옛 명씨 어르신의 마르고 가는 필체는 모사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개인의 글씨 쓰는 습관, 이를 테면, 옆으로 뻗는 획의 끝을 아래쪽으로 끌어서 빼는 습관 같은 게······ 유서에 있는 글자체에서는 충분히 드러나 있었다.
더군다나 종이 역시 오래 전에 단종된 청주에서 생산된 종이였다. 법률 고문은 누렇게 변색된 정도와 습기가 차서 변한 정도를 살펴보았다. 유서가 써진 시기는 하서비가 말한 연도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유서에서 사용한 어조 역시 과거 명씨 어르신이 살아 계실 때와 완전히 맞아 떨어졌다.
가장 중요한 인감도 명원에서 가져온 옛 명씨 어르신의 인감과 대조해보니 딱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너무 딱 맞아떨어져서 강남 총독 관저의 경험이 풍부한 관원이 느끼기에는 오히려 조금 이상해 보였다. 십여 년 동안 방치되어 보관된 유서라 인감 색상이 확실히 오래되고 옅게 바래있었다. 하지만 아주 세밀하게 표현된 가는 선 부분이 뜻밖에도 요즘 찍어 놓은 인감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점이 너무 이상했다.
한데 이 나이 많은 관원은 지금 이게 매우 중요한 안건임을 잘 알고 있었고, 더군다나 이 점은 전혀 의심을 할 여지가 없기에 더 이상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편 소주부와 도찰원 관원들은 유서가 가짜란 사실을 밝힐 생각뿐이었다. 이들은 결국에는 황실 금고 특산품인 확대경까지 동원했고······ 그런데도 이상한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관원들이 상의를 하고 의견을 한데 모았다. 소주부 지주는 재판장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선고를 해야만 했다.
“이 유서는 진짜다. 그러므로 하서비는 일찌감치 죽었다는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 명청달이 맞다.”
* * *
“삶에서 항상 무언가가 빠져 있는 느낌이에요.”
강남에서의 3월 가장 마지막 날이었다. 봄비가 땅을 소리 없이 적시고, 화원 정자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자 아래에 있는 남녀는 각각 따로 의자에 편안히 누워 정인이라도 되는 양 부드러운 시선을 교환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범한을 잠시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원만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모자라서 그래요?”
범한이 이번 생의 과거를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의기양양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권력도 얻고, 필요한 사람도 얻었다. 사람이라면 누리고 싶어 하는 건 다 가지고 있었고,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유 없이 항상 불만족스러운 게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스스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한데 이렇게 지내다 보니 마음속의 이유 모를 갈망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과 무관한 인문학적인 환상적인 동시에 실질적이지 못한 것이어서 범한은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과거 어느 황제가 늙어 노망이 들었을 때 과거를 회상해 봤대요. 그리고 자신이 10대 무공을 익혀서 십전(十全)노인이라고 불렸다고 말했지요······ 물론 이 황제는 젊었을 때도 바보였어요. 황제 자리에 있었으니 나보다도 훨씬 더 오만했고요. 하지만 나는 바보는 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세상에 열이면 열 다 완벽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요.”
“황제가 되고 싶다는 건가요?”
해당타타가 범한 곁에 있는 모두에게 물었다. 이는 심복 중 심복이었던 왕계년 조차도 감히 꺼낼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해당타타는 범한이 정말 묘한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북제 사람인 자신이 이런 대역무도한 질문을 제기하는데도 범한은 그녀의 말을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금세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가식적인 행동을 외부인이 보기라도 했다면, 범한이 역모를 일으킬 마음이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황제가 되면 너무 피곤할 거예요.”
범한이 골치 아파하며 말을 이어 갔다.
“당신네 황제 폐하와 우리 황제 폐하는 편히 잘 지내시는 거 같아 보이죠. 하지만 정신과 힘 소모가 심하니, 실제로는 재미없게 살고 계실 거예요.”
해당이 살며시 미소 짓더니 정곡을 찔렀다.
“내 보기엔 흠차 대신 노릇을 하는 당신도 황제 폐하보다 마음 편한 구석은 없어 보이는데요.”
그러자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황제는 만인이 눈앞에서 죽어나가도 가슴을 졸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런 걸 못한단 말이지요.”
해당타타가 살짝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껏 내 앞에서는 자신이 마음이 모진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십여 명, 백여 명 정도는 나도 죽일 수 있어요.”
범한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막상 피바다에서 헤엄을 치라고 한다면, 정말로 그게 가능할 만큼 내가 독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이런 걸 일러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라고 하지요. 전에 말해준 적 있을 걸요.”
범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 무료한 화제를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범한은 의자에 누운 채 소리를 거의 내지 않으며 대지를 적시는 봄비 소리나 들었다.
정자 안은 점점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 *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의(蓮衣: 감찰원 관복)를 입은 감찰원 관리 하나가 조용히 화원 후원 입구에 나타났다. 온몸에 빗물을 맞아 음침한 한기를 머금고 등장한 이는 얼마 전 경도에서 온 등자월이었다.
해당타타가 웃었다.
“또 바쁘게 뭔가를 하고 있었군요. 사람을 덜 죽일 방법이나 계속 계획하시죠.”
해당타타 낭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자연스럽게 두 손을 큰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범한의 답변은 들을 생각도 않고 발을 질질 끌고 허리를 흔들거리며 촌부보법으로 정자를 떠났다.
범한이 미소 지은 얼굴로 떠나가는 해당타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욱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해당타타는 몸을 가볍게 흔들며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살쩍 부위의 머리카락은 비에 젖고 있었다. 그걸 보니, 해당타타는 천일도 정기를 활용하고 있지 않았다. 천일도에서 말하는 자연과 가까이하는 삶을 실천 중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천으로 된 신발에는 지면에 고인 물이 묻지 않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떠나자 등자월은 그제야 조용히 정자 안으로 들어와 입을 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재판장에서는 경국 법률 조문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송세인의 입담이 날카로워 재판장에서 열세에 몰리지는 않고 있지만 그래도 실질적으로는 진전이 없습니다. 소주부에서 경국 법률을 물고 늘어지는 한 하서비가 아무리 유서를 지니고 있어도 이번 소송에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이내 깊은 생각에 빠졌다.
434화
오늘은 3월의 마지막 날. 강남을 떠들썩하게 만든 명씨 가문의 가산을 둘러싼 소송이 시작된 지 네 번째가 되는 날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친 것 같던 첫째 날 이후로 소송은 줄곧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범한도 예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날마다 부하 관원들의 보고를 듣고만 있다 보니 그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날 재판에서 송세인은 교묘하게 유서를 활용해 하서비가 명씨 가문의 후손임을 확정지어 놓았다. 이 소식은 소주부에서 온 강남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들 명씨 가문의 일곱째 어르신이 다시 살아 돌아왔으며, 그가 명씨 가문의 장자와 가산을 둘러싸고 싸우는 중이란 걸 알게 되었다.
다만······ 경국의 법률이 경문(經文) 정신에 입각해 만들어진 게 문제였다. 이에 경국에서는 적장자가 승계권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은 물론, 법률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유서는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하서비의 바람을 이뤄주는 데 더 이상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하서비 입장에서는 명씨 가문의 방대한 가산을 빼앗고 싶어도, 규범을 잘 따르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수 천 수 백 년은 기다려야 가능할 일이었다. 너무나 강력한 규범이라 한 사람의 힘으로는 뒤집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규범을 꺼리는 사람이 아무리 범한이고, 경국 황제라 할지라도 적장자의 천부적 승계권을 빼앗으면 결국에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 것이니······.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정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명씨 가문의 가산 관련 소송이 계속 확대된다면? 그리고 이 소송이 일종의 사상 해방의 대변론의 장이 되고 더 나아가 이것 때문에 태자마마의 천부적 지위가 도전을 받게 된다면?
범한은 쓰읍, 하며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 계획은 언빙운이 세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진평평의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 심계가 깊은 늙은 절름발이가 이 사건이 가져올 파장을 생각 못했을 리 없다. 설마······ 늙은 절름발이가 황제 폐하로부터 몰래 지시를 받은 거라면? 그렇다면 태자의 천부적 승계권을 흔들 여론과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건가?
강남 명씨 가문의 일은 큰일이었다. 그런데 경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그 일은 훨씬 더 확대되어 범한이 상상도 못 했던 국면에 이를 수도 있었다. 어머니와의 관계 때문에라도 태자가 황위를 계승하고, 줄곧 자신을 죽이려 했던 황후가 황태후가 되는 것을 범한은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현 국면에서 직접적으로 태자를 흔들면, 태자가 장 공주 및 2 황자와 연합 하는 걸 부추길 수 있었다. 한데 범한은 한동안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건 원치 않았다.
범한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그가 송세인에게 부탁한 내용은 이번 소송을 최대한 질질 끌어서 시끄러워지고, 영향력이 더 커지도록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이번 사건 배후에는 늙은 절름발이가 있었다.
그는 진평평을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평평은 줄곧 범한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많은 것들을 그에게 비밀로 하며 알려주지 않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범한은, 사건의 국면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명씨 가문 일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오주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
범한이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오주로 가 장인어른을 만나 뵈라고 한 건 참으로 총명한 판단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조정의 상황 때문에 자신이 분명 어떤 의문점을 갖게 되리란 걸 일찌감치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경도를 떠나 있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얼굴을 맞대고 해결책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은 전 재상 어르신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등자월은 범한이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사 대인이 명씨 가문의 가산 관련 소송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이 생긴 것 같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에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시를 구했다.
“송세인에게 소송을 끝내라고 해야 할까요? 하서비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인 게 확인되었으니, 며칠 지나 감찰원이 나서서 그를 다시 명씨 집안으로 들이도록 한다면, 경국 법률에 따라 명씨 가문도 그에게 지분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 지분의 양은 미미하겠지만, 그래도 하서비를 명씨 가문 내부로 들여보내려는 대인의 바람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것입니다.”
범한은 등자월의 분석에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곁에 이 정도 실력의 심복이 있어 기분이 꽤 좋았지만 그래도 대답은 해주지 않고 오히려 자세히 물어보았다.
“4처에게 하서비를······ 이런, 이제는 명청성이라 불러야겠군. 명청성과 명씨 가문 넷째를 만나게 하라고 했는데, 그건 어떻게 돌아가고 있죠?”
하서비를 가시 삼아 명씨 가문의 목구멍을 찌르기로 계획한 이상 명씨 가문 안에서 겉돌고 있는 이와 결탁을 할 필요는 있었다. 범한은 부자인 명문가 사람들이 음성적으로 결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세히 아는 건 없었다. 하지만 전생의 홍콩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비슷한 내용을 수도 없이 많이 보기는 했다.
등자월이 보고를 했다.
“이미 접촉을 했습니다. 다음 달 초 하서비와 명씨 가문의 넷째가 만나기로 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앞서 던진 질문에 답하기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범한이 간질거리는 입술 안쪽을 가볍게 물고 씹으며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송세인에게 계속하라고 해요. 이번 소송을 계속 이어나가라고 말이죠! 더 떠들썩해지도록 말입니다······ 이기지 못한다 해도 져서는 안 된다고 전해요! 소주부에 압력을 넣어서 그들이 강제로 안건을 마무리 짓지 못하도록 해요. 천하 문인과 백성들이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니까요!”
깜짝 놀란 등자월이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대인, 무슨 문제를 말입니까?”
범한은 자신이 말실수 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웃어 넘겨 버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여기 있는 자기 측근에게는 숨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온 세상 사람에게 적장자만이 가산 승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는 겁니다.”
등자월은 현재 계년조의 업무를 책임지는 주사관이라 범한의 모든 걸 대단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제사 대인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이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대경실색했다. 그가 이내 한 손으로 다른 주먹을 감싸 쥔 자세를 취하며 공손히 범한을 설득하려 했다.
“대인······ 만약 조정과 황궁에 계신 분들께서 대인의 마음을 의심하신다면······ 좋지 않은 결과만 낳을 수 있습니다.”
범한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자월, 본관의 신분을 잊은 것 같군요. 본관의 성은 범씨이니 너무 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내 마음이 의심 받는 것에 관해서는······ 황궁 쪽 귀인들께서는 어쩌면 선생 노릇이나 하고 있는 내가 본분을 넘는 짓을 했다고 의심하실 겁니다.”
범한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언젠가는 조만간에 동궁과 맞서야 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는 일단 진평평의 뜻에 따라 상대방을 툭툭 찔러보는 중이었다······ 현재 범한이 지닌 권세와 지위에서는 모반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니까 말이다. 더욱이 그가 이와 같은 여론을 형성하는 게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라고 누군가가 생각한다 해도 말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은 범한이 3 황자를 위해 무언가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일은 원장 대인께 보고하지 말아요.”
범한이 재차 명령을 내렸다.
“그냥 별 것 아닌 일이니까요.”
하지만 등자월은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적장자의 자리를 빼앗는 선전(宣傳)식 공격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는데, 이게 별 것 아닌 일이라고요?’
범한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송세인은 소송 거간꾼일 뿐인데, 설마 그가 지구를 움직이는 축이라도 된다는 건가? 어쩌면 내가 이번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군. 경국 법률을 가지고 재판장에서 변론을 하는 게 천하의 낡은 규율과는 크게 관련 없는 일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
등자월은 지구라는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략적인 뜻은 이해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송세인은 진백상을 만나 백중지세로 싸우고 있습니다. 양측이 불꽃을 튀기며 싸우는 와중에 경국 법률만 인용하는 건 아니니······ 만약 재판장에서의 변론 내용이 밖으로 흘러나간다면, 그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범한이 흥이 잔뜩 올랐다.
“어? 그렇다면 한번 가서 봐야겠군요. 가서 3 황자마마와 대보 형님을 불러와요. 잠시 후 소주부로 구경을 가야겠어요.”
그러자 등자월은 쓴웃음을 지으며 명령을 받들겠다고 답했다.
* * *
가늘게 내리는 비의 엄호를 받으며 온통 새카만 마차 세 대가 화원을 떠나 느긋하게 소주부 관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로 향했다. 화원 사람들은 모두 점심 식사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소주부도 잠시 휴정을 하고 있던 터라 모두들 느긋하게 움직인 것이었다.
비록 소주부 관아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가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관아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모두들 신풍관 소주 분점 3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범한은 난간에 기대어 서서 빗물로 층층이 둘러싸인 소주부 방향을 바라보며 잔뜩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천리안도 아닌데! 이래서야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없잖아!”
등자월은 먼저 와 예약을 해 놓고 비밀 누설 방지 조치를 하던 도중이었다. 그러다 제사 대인의 책망 소리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어버렸다.
“제사 대인, 여기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온 가족과 함께 나와 구경하겠다고 하셨지만, 마차 세 대가 소주부까지 가는 건 좋지 않습니다. 관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백성들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만들면 되겠습니까.”
범한이 불평을 내뱉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집에서 양계미가 해주는 음식이나 먹을 걸. 무엇하러 비까지 맞으며 나왔을까!”
이렇게 신경질을 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진난만한 표정의 임대보가 보였다. 범한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물었다.
“대보 형님, 왜 그러세요?”
그러자 임대보가 입을 씨익 벌리고 웃었다.
“꼬마 범한······ 이······ 집에······ 접당 만두 있어.”
임대보가 통통한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찜기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뽀얗고 커다란 만두가 하나 들어 있었다. 뜨끈하게 새어나오는 김과 함께 육즙의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임대보 옆에 앉았다. 범한이 젓가락으로 만두를 벌리자 육즙이 흘러나왔다. 그런 후 숟가락으로 만두 안에 든 국물을 대보 앞 접시에 덜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도 신풍관이에요. 소주에 있는 분점이지요.”
줄곧 옆에서 조심스레 시중을 들고 있던 신풍관 관리자가 서둘러 조심스럽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습니다, 임 도련님. 본점과 멀리 떨어진 강남점이지만 맛은 경도와 차이가 없습니다. 드셔보시지요.”
임대보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잠시 중얼거리고는 이내 앞에 있는 만두 공략에 나섰다. 그는 신풍관 강남점 주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풍관 주인을 상대한 건 궁금증이 생긴 범한이었다.
“여보게 관리인, 어떻게 알고 이분을 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가?”
그러자 관리인이 소리 내어 두어 번 억지웃음을 짓더니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제사 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도에서는 자주 임 도련님을 모시고 신풍관 본점에서 식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이 별 볼 일 없는 가게로서는 엄청나게 체면이 서는 일이지요. 경도 관리인은 그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랑스러워하고 감격스러워한답니다. 그래서 소인이 비록 주로 소주에 있기는 해도 대인과 우리 신풍관의 연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신경 써서 시중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435화
범한이 경도에서 1처를 맡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1처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이 신풍관인지라 자주 임대보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 접당 만두를 먹었다. 한데 경국에서는 사회 풍조 상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식사 때마다 한껏 겉치레를 부리고 크게 연회를 여는 게 일이어서 범한처럼 접당 만두와 작장면을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신풍관은 맛집이었고 경국에서 가게를 3개나 연 유명한 가게였지만, 장사 자체는 보통 축에 속했다.
그 와중에 범한과 임대보가 자주 찾자, 경도 신풍관은 점점 격이 올라가게 되었고, 수많은 학생들과 선비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시선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작은 범 대인이 즐겨 먹는다는 만두를 맛보았다. 그러니 신풍관 본점의 관리인도 기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자랑을 했던 것이다.
이에 소주 분점의 관리인도 자연스레 범한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범한은 오매불망 기다리던 귀한 손님이었다. 그런 손님이 찾아주자 그는 아부를 쏟아냈던 것이고, 범한이 최대한 편안히 있을 수 있도록 유난히 신경을 써서 대접한 것이었다.
이는 소주부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볼 수 없어 답답해하는 범한의 마음을 순식간에 삭여 주었다.
범한은 면 요리를 먹었고 대보는 만두를 먹었다. 3 황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함으로 예절 바른 선비처럼 탕원(湯圓: 소가 든 새알심 요리)을 먹었다. 사사는 어린 여종들을 데리고 죽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죽을 다 먹은 사사는 처마 아래에 서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보고 있다가 처마 밖으로 손을 뻗어 빗물을 손에 받으며 웃고 떠들며 놀았다.
범한은 종들을 엄하게 관리한다거나 하지 않아 여종들은 매우 활달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여종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에 범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에 등자월에게 손을 흔들어 불러들이고는 몇 마디 건넸다.
“지금 즈음이면 소주부도 시작했겠군요. 가서 들어보고, 중요 내용을 간추려서 써오면 더 좋고요.”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들에게 일을 배정해 주었다.
범한이 또 손을 흔들었다. 고달을 포함한 몇몇 호위들에게 옆으로 와 밥을 먹으라는 신호였다. 범한은 다시 면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매우 자연스럽게 임대보의 접시에서 고기소를 빼앗아 먹었다. 먹던 걸 빼앗긴 임대보는 예전처럼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거대한 몸집으로 소심하게 불만을 드러냈다.
해당타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여기 신풍관에 있는 이는 전부 범한의 부하, 종, 가족뿐이었다. 범한은 즐거운 마음으로 비를 감상하며 걱정을 모두 내던져 버리고 뽀얀 면을 집어 들었다.
임대보가 만두를 다 먹자 범한은 온화하게 더 먹겠느냐고 물었다. 임대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범한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위처남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3 황자에게는 이러한 장면이 조금 의아했는지 그의 눈에서 잠시 이상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옆에 있던 호위들도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범한이 임대보를 세심히 돌보는 건 세인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현장을 직접 보니 세심한 범한과 음험한 감찰원 권신(權臣)을 선뜻 연계시키지 못했다. 과거 신풍관에서 식사를 할 때 등자월과 목철은 이와 같은 장면에 감동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 있는 호위와 3 황자도 범한에 대해 어쩌면 새로운 생각이 생겼을 수 있었다.
모자란 손위처남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건 절대 ‘마누라가 귀여우면 처갓집 쇠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범한이 자신의 아내를 대단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범한이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 이런 자질구레한 행동까지 신경 쓰는 거라고 말한다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항상 진심을 다해 행동하고 있는 거라면, 범한은 과연 사악한 사람인 것일까 아니면 성인(聖人)인 걸까.
그렇다면 범한은 어느 쪽일까?
* * *
물의 고장 강남에서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이 되면 봄비가 기름처럼 귀하다는 말은 내뱉을 필요도 없었다. 가느다랗기는 해도 안개처럼 희뿌연 해질 정도로 비가 대지를 넉넉히 적셔주었기 때문이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처마 밖에서 떨어지고 있는 빗물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었다. 감찰원 보고에서는 분명 올해 큰 강의 상류 쪽에 강수가 충분하지 않다고 되어 있었다. 비록 재난 지역의 토지를 복구하는 데 일부 영향은 미치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잠시 동안은 봄날의 하천 범람이라는 무서운 괴물을 만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강 주변을 복구하는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지금 즈음이면 양만리는 경도로 들어가 보고를 했을 텐데. 그래도 하운(河運) 총독 관아까지 들어가려면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강 주변을 복구하는데 필요한 은전은······ 이번에 황실 금고 입찰을 통해 과거보다 8할이나 늘어나 있었다. 공개된 액수는 이미 금고에 들어가 있었고, 일련의 복잡한 수속을 거쳐 경도로 운반되고 있었다. 은전은 가장 먼저 황실 금고로 들어갔고, 이어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라 일부가 국고로 들어갔으며, 다시 하운 총독 관아로 보내졌다.
그리고 암암리에 감찰원과 호부와의 협력으로, 또한 범한 아버지가 파견한 나이 많은 관원들의 정교한 회계 정리를 거친 후, 거액의 은전은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하운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직접 보내졌다. 돈을 써야 할 명목이 이미 다 정해져 있던 것이다. 이 많은 액수의 은전 중 일부는 황실 금고의 은전이었으며, 전운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을 쥐어짜듯이 하여 어렵사리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대다수의 은전은 범한이 해당타타를 통해 북제의 젊은 황제에게서 빌려온 것이었다.
그 은전들은 모두 태평 전장에 놓아둔 상태였고, 범한은 우선 그것들을 가져다가 사용했다. 반환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하서비와 북제에 있는 범사철이 연락 창구를 만든 후 황실 금고의 밀무역을 통해 천천히 갚을 계획이었다.
* * *
이 일과 관련해 범한은 충분히 은폐 작업을 하기는 했다. 또한 북제 황제와 관련한 부분은 더 확실히 은폐했다. 경국의 경도 조정으로 그 어떤 정보도 들어가서는 안 되어서였다. 그래도 범한은 하운 총독 관아로 은전을 보내는 일과 관련해서는 이미 황제에게 밀서로 알려 놓은 상태였다. 그는 관련 일을 모두 은밀하게 진행했지만, 사심은 전혀 없었던 지라 그 과정에서 은전은 단 한 푼도 챙기지 않았다. 애민이란 명목으로 생기는 이득을 경국 백성에게만 돌아가도록 했을 뿐, 자신은 전혀 챙기지 않은 것이었다. 이는 결국 황제 아버지에게 이득이 돌아가도록 한 것이어서 황제는 범한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윤허를 해 주었다.
그런데 북제 황제가 전주(錢主)란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기에 범한에게는 매우 그럴싸한 이유가 필요했다. 이에 그는 애초에 계획을 세울 때부터 제대로 된 변명거리를 준비 해둔 터였다. 일부분은 두 해 동안 벼슬을 하면서 얻은 뇌물이고, 또 일부분은 작년에 최씨 가문을 전복시키면서 얻은 것이며, 나머지는 황실 금고 전운사가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돈을 모은 것이라고 말이다.
훗날 황제가 장부를 맞춰봤을 때 금액이 맞지 않는 부분이 나올 수 있었으므로, 범한은 이것을 위한 최후 수단도 마련해 두었다. 그때는 오죽이 자신에게 남겨준 것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황제도 오죽을 찾아다가 대질을 시킬 수는 없으니 말이다.
운이 정말로 좋다면,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올해 풍족하게 들어온 황실 금고의 은전 중에서 일부를 범한에게 돌려줄 수도 있었다.
명씨 가문과 관련해서도 범한은 당연히 후속 조치를 마련해 둔 상태였다. 조사 및 처리 작업은 현재 천천히 진행 중이었고, 이는 사람들 이목이 현란한 소송에 집중되는 바람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범한에게 명씨 가문을 상대하는 건 장기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범한은 차근차근 잠식해 나가야만 했다. 공격을 너무 맹렬히 해도, 명씨 가문을 너무 심하게 압박해도 안 되었다. 강남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쩌면 강남 총독 설청이 먼저 나서서 반대할 수도 있었다.
왕조를 통치하는 데 있어 모든 걸 압도하는 제일 조건이 바로 안정이기 때문이었다.
명씨 가문의 존망은 현재 강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송보다는 황궁 내 권력 투쟁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었다. 명씨 가문의 주인이, 즉 장 공주와 황자들이 권력 투쟁에서 거꾸러진다면, 명씨 가문은 자연스레 자신의 몫도 지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범한이 진다면, 명씨 가문은 자연스레 기가 살아 활개를 칠 것이고, 하서비는 또 상갓집 개처럼 도망 다니게 될 것이었다.
만약 범한과 장 공주 사이에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백중세가 유지된다면, 명씨 가문은 범한의 압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만 유지해 나가게 될 것이었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일은 없이 쭉 고집스럽고 비굴하게 살아 나갈 것이고,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면서 때를 기다릴 것이다.
“대인.”
누군가가 가볍게 부르는 소리로 범한을 깊은 사색에서 끌고 나왔다. 범한은 아직 정신이 혼미해 머리를 흔들어 생각들부터 떨쳐버렸다. 그러자 밖이 아까보다 많이 어두워졌다는 게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가 더 세차게 내려서이기도 하지만, 시간도 많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그제야 생각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음을 알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했다. 해당타타의 말이 맞았다. 요즘 자신의 삶은 황제보다 마음이 더 편한 것도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놀다 지친 것 같아 보였다. 이에 범한은 난간에 엎드려 잠깐 쉬고 있는 사사에게 눈짓을 했다. 여자아이들에게 외투를 입히라는 의미였다. 그런 후 망설이며 불안한 모습으로 3 황자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는 임대보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제야 정신이 든 범한이 구경에 중독된 사람처럼 등자월에게 물었다.
“저쪽 상황은 어떤가요?”
그러자 등자월이 씨익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네며 범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재판장에서 나온 변론 내용을 기록한 것인데······ 대인, 8처에 이 내용을 책으로 엮어 간행해 천하에 배포하도록 해야 할까요?”
참으로 악랄하고 대담한 생각이었다. 등자월이 드디어 범한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적장자의 가산을 서자가 가져오는 일에 대해 감찰원도 더 이상 과거처럼 중립을 유지할 수 없을 거란 걸 등자월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꾸짖었다.
“그냥 소문만 퍼뜨리면 돼요. 이걸 책으로 엮으면 황궁에 계신 분들이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시지 않을까요?”
황궁에 계신 분들이란 말에 다른 식탁에 있던 3 황자가 범한 쪽을 잠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범한은 못 본 척하며 탄식을 했다.
“8처면······ 강남에는 인원수가 너무 적군요. 그러니 지금은 그렇게 해봤자 아무 효과가 없을 것 같아요.”
강남에서 하서비 이야기를 널리 알리기 위한 행동을 말한 것이다. 범한은 8처에서 착수하면 경도에서의 ‘소문 전쟁’에서 2 황자가 대꾸할 여력조차 없도록 만들 거라고 여겼었다. 하서비가 어머니를 잃고 집에서 쫓겨난 걸 대본으로 만들고, 소주부의 판결 내용을 증거로 삼으면 강남 일대에서 크게 소문을 낼 수 있을 것이고, 명씨 가문이 그동안 심어주었던 선한 사람들이란 생각도 깨지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씨 가문은 범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남에서 더 깊고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반면 강남 8처의 인원수는 적어도 너무 적었다. 한편 명씨 가문에서도 비슷한 대응에 나설 것이었고, 이야기꾼인 전기수(傳奇叟)를 훨씬 더 많이 동원해 떠들어대도록 할 것이었다. 그러면 저들은 가산을 둘러싼 소송, 암흑가에 몸담았던 하서비의 뒷이야기, 경도에서 온 대인의 음모를 한데 엮을 게 뻔했다.
436화
명성만 봐도 범한이 명씨 가문에게 한참 뒤지고 있었다. 아무리 강남 백성들이 하서비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 아들이란 걸 믿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그들은 하서비가 올해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던 건 범한으로 대표되는 경도의 관원이······ 강남 현지 양민을 압박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순간 너무 웃겼다. 병상에 누워 있는 척하는 명씨 가문의 주인 명청달은 과연 자신의 행동 방식을 세세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응 수단과 속도 역시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빨랐다. 과연, 범한에게 명청달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큰 권세를 쥐고 있었지만, 그게 강남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명청달과의 의견 충돌을 마음 편히 유희 정도로만 여길 수 있고, 명청달에게 크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아 오히려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등자월이 가져온 기록을 읽고 난 후에는 더더욱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강남에는 인재가 많았지만, 경도에서 온 송세인도 만만치 않았다. 소주부에서 진행되는 소송은 갈수록 경국 법률의 범주를 벗어나 진평평이 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양측은 경전을 인용했고, 말할 때마다 이전 왕조인 북위를 언급했으며, 두 손까지 공손히 모으고 장묵한 대가에 대해서도 말을 했다. 이게 어디 봐서 소송 장면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사람들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적장자 상속제 개념에 대해 말하기 위해 양측은무슨 황궁 대전에서의 경연(經筵)과도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던 것이었다.
범한이 웃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긴장감 넘치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게 진행되고 있는 심리 장면이 눈에 보이듯 훤히 펼쳐지고 있었다.
* * *
소주부 재판장에서는 이미 넷째 날이 되었는데도 변론은 계속되고 있었다. 양측을 대표하는 장수들은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대느라 조금 피로한 상태였다. 이에 소송 중간에 쉬는 시간은 첫째 날보다 훨씬 더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휴식 시간을 청했다.
소주부 지주도 하서비 측이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일찌감치 흠차 대인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언질을 받아서였다. 그래서 얼른 판결을 마치고 싶어도 얼렁뚱땅 마쳐버릴 수 없었으니······ 제멋대로 마칠 수 없다면 저들이 재판장에서 마음껏 변론하도록 놔두는 수밖에.
하지만······ 소송대리인이 하나는 송세인, 다른 하나는 진백상인 게 문제였다. 모두들 말 잘하기로 유명한 이들 아닌가. 그런 그들에게 마음껏 변론하도록 놔두었으니, 어쩌면 1년 동안 저러고 있을 수도.
소주부 지주도 계속 보다보니 별 감흥이 없어졌다. 이에 양측에서 휴식을 청해올 때면 웃으며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아속을 시켜 걸상을 가져다가 양측 모두 앉아서 쉴 수 있게 편의를 봐주고, 목을 축이게 차(茶) 등을 가져다주는 일도 빈번해졌다.
명란석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걸상에 앉아 있었다. 요 며칠 소송을 질질 끌다 보니 명씨 가문 도령도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집안 사업은 도무지 도울 수가 없었다. 숙부가 몇몇 있었지만 모두들 놀고먹는 쓸모없는 이들이었다. 한데 황실 금고 공개입찰이 열린 후 민북으로 물건을 보내는 일은 모두 가문의 중요 인물이 맡아서 해야 했다. 그래서 줄곧 와병 중이던 아버지 명청달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일들을 도맡아 하는 중이었다.
명씨 가문도 흠차 대인이 소송을 건 이유가 자기 가문의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가문의 황실 금고 사업과 관련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명씨 가문도 더 나은 대응 방법이 없었던지라 같이 시간을 질질 끌 수밖에 없었다. 현 국면을 보니, 소송은 한 일 년은 갈 것 같았다. 하지만 지지만 않으면 그만 아니던가.
명씨 가문에게 발언할 기회가 돌아왔다. 강남의 유명한 소송 거간꾼 진백상의 얼굴이 창백한 것으로 보아 요 며칠 정신 소모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옆에 있는 제자의 손에서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수건을 받아들고 얼굴을 닦았다. 그렇게 정신을 가다듬은 그가 재판장 가운데로 나가 정색을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옛 성인들이 말한 오륜(五倫)은 바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입니다. 대인, 하 선생이 명씨 가문의 일곱째로 밝혀졌다면, 부자 사이의 친근함은 명씨 가문의 장자분과 다를 바가 없으니······.”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저쪽에 있던 송세인이 말허리를 잘랐다.
“하 선생이 아닌, 명 선생입니다. 더 이상 말실수하지 마시지요. 그렇지 않다면 이번 안건이 끝난 후 일곱째 명청성 어르신께서 당신을 고발할 것입니다.”
송세인은 두 눈이 움푹 꺼져 있는 게 얼굴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가 이번에 강남에 홀로 온 건 자료 보는 걸 도와주는 하인과 제자를 데려올 시간이 없어서였다. 비록 감찰원 서리가 도와주고 있기는 했지만, 종이 더미 속에서 자료와 유리한 경문을 찾아주는 건 그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편 상대방은 현지 소송대리인이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나흘 동안 전쟁을 치렀으니, 제아무리 천하제일 소송대리인인 송세인이라 할지라도 정신력만 가지고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었다.
송세인의 말에 진백상이 느긋하게 빙그레 웃으며 하서비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오나 장유유서 이 네 글자의 뜻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명청달 어르신은 적장자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명씨 가문 가산의 처분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어 갔다.
“예기(禮記)의 상복사제(喪服使制)에 이르길 날에는 둘째 날이 없고, 땅에는 둘째 주인이 없고, 국가에는 둘째 군주가 없으며, 집안에는 둘째 가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진백상의 말에 계속 힘이 실리고 목소리는 갈수록 격앙되어 갔다.
“예로부터 이러할 진데 어찌하여 작은 변화라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경국의 법률은 일찌감치 정해져 있는데, 하······ 명 선생은 어찌하여 이런 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부디 대인, 일찌감치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송세인이 곤란하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하서비를 감싸는 눈빛으로 웃으며 재판대 앞으로 나아가 꿋꿋하게 말했다.
“이른바 가산이란, 지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분할 받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 선생이 말씀하신 점에 대해 본인도 이견은 없습니다. 하오나 지위를 이어받는 일, 재산을 분할 받는 일과 관련해, 옛 명씨 어르신의 과거 지위는 지금은 명청달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명청성 선생은 이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오나 지위를 물려받는 건 단순히 태어난 순서와 적자와 서자만 논하는 것이니, 재산을 분할 받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요.”
그러자 진백상이 살짝 노기를 드러냈다.
“지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나눠 갖는 일에서, 명확히 지위를 이어받았다면 재산 분할권을 이어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거늘!”
지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분할 받는 건, 계승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두 부분이었다. 송세인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산을 분할 받는 것과 지위를 계승하는 건, 선생도 말했다시피, 모두 경국 법률을 기준으로 따른 거지요. 그런데 나도 지금 경국 법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손에 쥔 금선을 탁 내리치고는 언성을 높였다.
“경국 법률 집주 제34 소조항에 분명히 명기되어 있습니다. 집안은 가장이 다스리되 가산은 공공물이라고 말입니다! 내게 소송 대리를 맡긴 분은 집안을 다스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하오나 가산은 공공물이니, 그것은 세밀하게 따져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나누는가는 옛 명씨 어르신의 유서에 나와 있으니, 당연히 옛 가장의 말을 따라야겠지요!”
진백상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위 계승과 재산 분할과 관련해 어찌 저런 생경한 내용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경국 법률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습니다. 동거 중인 가장이 재산을 불균등하게 나눠주면, 그 죄는 아이의 가산을 사사로이 사용한 죄로 논하며, 벌금 20관과 곤장 스무 대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송세인이 싸늘하게 명란석을 바라보고는 매 단어를 똑똑히 말해주었다.
“내게 소송을 맡긴 분은 어려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일부러 불균등한 분배를 해준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벌금 20관과 곤장 20을 기준으로 따져본다면······ 명씨 가문은 20만 관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리고 명씨 가문 사람의 엉덩이가 남아날 것 같습니까!”
명란석이 대노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송세인이 갑자기 몸의 방향을 틀어 재판대의 지주를 향해 살짝 웃으며 예를 갖추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이는 경국 법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형부의 아동 재산을 사사로이 이용하는 것과 관련한 조항에 들어 있습니다. 대인께서는 율과(律科) 출신이시니, 소인의 말이 틀림없음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송세인은 명씨 가문의 대응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법률 조항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으니, 하나 더 말하겠습니다. 경국 법률 소의 호혼 중 다음과 같이 규정이 있습니다. 동거한 자에게 반드시 나누어 주고 불균등하게 대하면 법률을 침해한 것을 간주하며, 남에게 죄를 씌운 것으로 간주해 3등급을 강등한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죄명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도적질을 한 것으로 중죄인 것이지요.”
진백상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경도에서 온 소송대리인에게 감탄했다. 분명 간단한 가산 관련 소송이거늘. 그것을 지위 계승과 재산 분할이란 두 가지 문제로 확대시키더니 그 둘 사이를 원숭이처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압박을 해 왔다. 자신이 주장한 경국 법률의 경문이 훨씬 더 견고한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상대방이 여러 해 전에 있었던 별 볼 일 없는 법률 조문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줄은 말이다.
방금 전 송세인이 말한 경국 법률은 수정을 거칠 때 잊혀 간과되었던 부분이었다. 일찌감치 서재 한쪽 구석에 처박혀 쥐도 들여다보지 않을 것들인데. 상대방이 꼼꼼하게 찾아낸 것도 모자라 재판장에서 떳떳하게 들이밀기까지 하다니.
‘저 소송꾼 놈은 정말이지 대단하단 말이지!’
송세인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두 눈에는 핏발이 일고 있었다. 소송을 이 정도까지 끌고 오다 보니, 그의 능력에도 한계가 온 것이었다. 지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분할 받는 것을 이번 소송에 엮는 건 참으로 복잡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신감이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유서가 최종적으로 효력을 발휘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모든 자녀의 평등 분할’이라는 말을 꺼내보기는 한 것이었다.
명씨 가산의 7분의 1이라니. 적지 않은 액수였다.
비록 범한의 야망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흠차 대인이 하서인을 이리도 중히 여기는 걸 보면 송세인은 이 소송을 멋지게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소송대리인으로서의 업적에도 가장 멋진 한 획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명씨 가문의 가산 관련 소송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건, 소송대리인 입장에서는 이미 가장 난이도 높은, 그리고 동시에 이전보다는 훨씬 큰일을 한 것이었다. 이를 테면······ 황자의 계승권을 어찌 소송대리인 정도가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조정이 두 패로 나뉘어 힘겨루기를 하지 않았다면, 명씨 가문의 가산 관련 소송은 재판장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송세인 역시 이번 소송에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송세인은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이상하게 극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만나기 힘든 기회를 잡았으니, 어떻게든 이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번 소송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의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고, 이로써 그들의 협력을 촉진했으며, 더 나아가 범한과 그들의 갈등으로 인한 대치 상황을 앞당겨지게 만들 거란 걸 알게 된다면······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게 해주겠다는 유혹이 있다 해도 그는 서둘러 이름도 성도 모두 바꾸고 도망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송세인은 그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른바 가산이란 건, 명씨 가문이든, 황제든 모두에게 민감한 문제니까 말이다.
437화
범한이 항상 말했던 것처럼 무슨 일이 발생하든 생활은 계속 이어져야 했다.
경력 6년의 네 번째 달에 들어선 지금 강남 일대는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모두의 이목을 끌었던 명씨 집안 재산에 대한 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지만 공개 입찰을 끝낸 황상들은 흔들림 없이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일들을 진행했다. 관리들은 여전히 몰래 뒷돈을 챙겼고, 소주성 시민들은 국가 일이나 집안일, 밤일에 대해 사방으로 침을 튀기며 의논했다.
하지만 작은 변화도 있었다.
먼저 명씨 집안 재산을 둘러싼 재판이 너무 오래 진행되면서 처음 시작되었을 때의 신선한 내용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매일 소주부 관아를 둘러싸고 소송을 관람하던 사람들의 숫자도 점차 줄어들었다. 소주 지주 대인과 양측의 소송 변호인들도 이런 마라톤식 재판이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일 열리던 재판은 3일에 한 번씩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6일째 열리지 않고 있었다.
송세인과 진백상은 각자 세력의 도움을 받아 먼지가 자욱이 쌓인 서류 더미와 곰팡내 나는 경국 법률서를 뒤적거리며 자신 쪽에 유리한 증거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다. 다만 소송이 장기전으로 치달으면서 명씨 집안과 하서비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범한의 의도대로 한동안 정신없이 재판에 매달려 있던 명씨 집안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올해 황실 금고 장사에 집중해 손해를 조금이라도 만회해 볼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서비는 장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강남에서 명씨 집안 다음으로 가장 큰 황상이 된 그는 하루아침에 바뀐 신분에 적응해야 했다. 최씨 집안이 운용하던 북쪽 판매 노선 대부분을 가지게 된 그는 각 군과 주의 관문 노선에 연락하고 북쪽 상인과도 교섭해야 했다. 범한이 뒤에서 도와주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복잡한 일이었다.
소주를 떠나기 전날 하서비는 명씨 집안 일곱 번째 공자라는 신분으로 소주성 안에 있는 강남 거상들을 초대했다. 그날 밤 고위 관리들이 구름처럼 운집했고 마차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부티가 좔좔 흐르는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소주성에 있는 부유한 기운이 하서비가 접대 장소로 고른 포월루 소주 분점에 다 모인 것 같았다.
* * *
포월루 소주 분점은 며칠을 연기한 끝에 오늘 밤 마침내 개업했다. 원래 명씨 집안이 운영하는 죽원관이었던 이곳은 소주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였다. 이곳을 인수한 사천립은 각급 관리들은 범한의 체면을 생각해 쉽게 허가를 내준 덕분에 은전 5만 냥으로 가게를 수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까지 개업이 연기된 것은 분명 다른 곳에 문제가 있을 것이었다.
그 문제는 바로 포월루 소주 분점을 대표할만한 인기 기생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든 홍보할 만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어야 하는 법이건만 사천립이 기생집을 운영하는 사장들을 모두 만나 봐도 대표할 만한 기생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표 기생이 없다면 개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 이에 강남에 도착한 상문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강남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기생 몇 명을 모집했고, 경도 포월루 본점에 있는 석청아도 유정강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기생을 사들여 소주로 보냈다. 또 1 황자도 서쪽 오랑캐 소호를 토벌하는 과정에 포로로 잡은 미녀를 보내주었다. 이로써 사천립은 석청아가 보낸 기생과 1 황자가 보낸 기생, 그리고 상문이 모집한 기생들을 필두로 정식 개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날 밤 하서비와 강남 부자들은 포월루 2층에서 연회를 즐겼다. 붉은 등이 높이 걸려 있고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게 포월루 개업은 한 눈으로 봐도 성공적이었다.
포월루 소주 분점은 개업 날 손님을 받지 않고 강남에서 가장 돈 있는 사람들을 전부 초청했다. 이들을 통해 홍보한다면 풍류를 즐긴다고 자부하는 공자들이나 관리들이 며칠 안에 물 만난 물고기처럼 포월루로 달려올 게 뻔했다.
경도 유정강에서 새롭게 인기를 얻기 시작해 석청아의 눈에 띄어 이곳에 보내진 기생의 성은 양(梁) 이름은 점점(點點)이었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나이어서 그런지 얼굴에는 약간 앳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풍류 기질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요염하면서도 살짝 차가운 기운마저 감도는 눈빛은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경도 풍류계의 이목을 사로잡은 그녀는 원 대가라 일컬어지는 원몽과 전설로 남아 있는 사리리의 뒤를 이을 만한 기생임이 틀림없었다.
이처럼 주목받던 양점점은 경도 풍류계에서 이름을 떨치기도 전에 포월루에 팔려 강제로 소주로 보내지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포월루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도 들어 알고 있었고, 기생들에게 강제로 몸을 팔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소주에 내려와 처음 상문을 만난 자리에서 듣도 보도 못한 계약서를 쓰게 되었을 적지 않게 놀랐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그녀가 보기에도 계약서가 자신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세상에 기생을 이렇게 잘 대해주는 포주도 있나?’
또 다른 기생인 서호에서 온 미녀는 확실히 경국 사람과는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양 눈이 살짝 들어가고 얼굴의 윤곽은 두드러지면서도 각져 보이지는 않았다. 피부색은 살짝 검으면서도 지저분해 보이지 않았고, 눈동자는 검은 진주처럼 반짝였다. 몸매도 풍만하고 굴곡이 져서 담백한 매력을 풍기는 경국 여자들과는 다른 매력을 풍겼다.
게다가 이 서호 미녀는 양점점보다 더 독특한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은 마(瑪)이고 이름은 색색(索索)인 이 미녀는 사실 서호 부족의 공주였다.
군대를 이끌고 서쪽 정벌에 나선 1 황자는 파죽지세로 몰고 가면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부족을 물리쳤다. 그중에서 두 번째로 큰 부족의 지도자가 투항의 의미로 자신의 딸을 바친 것이다. 전장을 누비며 살았던 1 황자는 적의 딸을 여종처럼 대했다. 이후 1 황자가 북제 큰 공주와 혼인을 하자 왕부에 데리고 있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서 방법을 고민하던 1 황자는 범한이 강남에서 기생집을 연다는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포월루를 통해서 소주로 보낸 것이었다.
두 여자가 경도에서 소주로 온 뒤 포월루가 개업을 시작할 때까지 동안 감찰원 8처는 범한은 도와 대대적인 홍보 공세를 펼쳤다. 그동안 명씨 집안을 공격할 때는 8처가 할 일이 많지 않았지만 두 기생을 절세 미녀로 소문내는 것은 8처가 가장 능숙하게 잘하는 일이었다. 두 기생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며칠 뒤 사천립은 두 사람을 마차에 태우고 소주성 밖으로 봄놀이를 떠났다······.
그 소식에 강남에서 호색한으로 이름을 떨치는 사람들이 멀리서라도 두 기생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자 따라왔다.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여린 풀들을 짓밟으며 포월루 마차의 뒤를 우르르 쫓아다니는 호색한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로써 포월루는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대표 기생들을 홍보해 강남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포월루 개업일인 오늘 두 기생은 나와서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다. 천주 손씨 집안과 영남 웅씨 집안을 비롯한 누구도 두 기생들을 잠깐이라도 데리고 있기는커녕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두 기생은 지금 어느 청년 옆에 다소곳이 앉아 술과 음식을 먹여주며 시중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 앞에서 두 기생은 고분고분 행동할 뿐 설사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조금도 드러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능력인 남자의 마음을 꿰어내는 기술도 쓸 용기를 내지 못했다.
두 기생은 지금까지 아름다운 외모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파악할 줄 아는 능력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태연자약하게 자신들 가운데 앉아 있는 청년의 마음은 읽을 수 없었다. 맑고 수려한 외모를 가진 청년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작은 범 대인은 이 세상에 모든 걸 읽을 수 있는 사람이자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읽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범한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옆에 있는 기생들에게 시중을 들지 말라는 표했다. 꽃처럼 아름다운 두 여자가 구슬처럼 맑은 두 눈을 굴리며 자신의 옆에 앉아 있으니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범한은 일부로 고고한 척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이런 데 정신을 팔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옆에 앉아 있는 양점점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무슨 삶을 살았기에 열여섯 살밖에 안 된 나이에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방법을 터득한 것일까? 양점점의 나이를 떠올리던 그는 순간 자신이 오랜 시간 풀지 못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해당타타는 올해 몇 살일 걸까?’
자신에게 요염한 추파를 날리는 양점점을 바라보며 범한은 그녀가 자신의 권세에 기대 출세하고 싶은 마음이 그러리라 짐작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1 황자가 보낸 서호 미녀를 바라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서호에서 부족 공주로 있었던 그녀는 어쩌다가 이런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 마색색은 아무래도 일찌감치 자신의 운명을 체념한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 여자는 남자가 언제든지 팔 수 있는 물건일 뿐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워하는 범한과 달리 마색색은 오히려 이곳에 오니 마음이 편안했다. 그녀는 비록 1 황자에 의해 아무 연고도 없는 강남에 보내졌지만 포월루가 무서운 곳인 것 같지도 않았고, 상문 관리인이나 사천립 사장이 포악한 사람 같지도 않아 안심이 되었다. 더구나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작은 범 대인도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왕부에서 고된 중노동에 시달리며 큰 왕비의 매서운 눈초리를 견디며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때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행복했다.
마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범한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문을 바라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1 황자 저하께서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지 않나?”
두서없는 말에 상문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벌리고 크게 웃었다.
“대인께서 서호인을 많이 보지 못해 낯설게 느끼시는 겁니다. 사실 색색 낭자 정도면 상당한 미인이지요. 1 황자 저하께서 대인을 무시한 게 아니니 불쾌해하지 마십시오.”
범한이 낮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전 세계에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서양 미녀들을 보았고, 프랑스 배우 이자벨 아자니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그러니 서호 미인인 마색색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녀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가 1 황자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한 말은 마색색의 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천하에 무서운 것 없던 1 황자가 마색색을 서둘러 소주로 보낸 걸 보면 아무래도 멀리 경도로 시집을 온 북제 큰 공주가 그동안 숨기도 있던 자신의 성미를 드러낸 게 틀림없었다. 북제 큰 공주가 질투심이 강한 무서운 부인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니 1 황자가 마색색을 소주로 보낸 것은 그녀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서였고, 그렇다는 것은 1 황자가 서호 미녀에게 애정은 없어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범한이 어떻게 마색색에게 손님을 받으라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손님을 받게 했다가 나중에 1 황자의 마음이 애정으로 바뀌어 마색색을 그리워하기라도 한다면 난처해지는 건 범한이 아니겠는가?
438화
“정말 손님을 받게 하지 않으실 겁니까?”
사천립이 들어와서는 물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동자는 살짝 풀린 채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것이 상인들을 접대하면서 술을 마신 양이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양점점을 바라봤다. 한참을 깊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자신이 계속 마색색을 돌보려면 양점점의 마음을 위로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홍보하는 자리니까 굳이 손님을 접대할 필요가 없네.”
그리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다만 찾으면 가볍게 노래를 부르고 춤만 추도록 하게.”
예상치 못한 말에 양점점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마색색과 함께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마색색은 아직 표준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기에 범한에게 눈빛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
“아내는 첩만 못하고, 첩은 훔친 여자만 못하며, 훔친 여자는 매일 보기만 하고 만질 수는 없는 여자만 못하다고 하지······. 강남 남자들도 며칠 지나면 멀리서만 감상하고 건들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될 걸세.”
그가 마지막으로 상문과 사천립을 향해 말했다.
“남자는 무척이나 단순한 동물이네. 자네들이 이 점을 이해해야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있네.”
범한의 말에 사천립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범한의 눈치를 살폈고, 상문은 애써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겼다.
“두 사람을 웅백령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상인들이 소문을 내야 이름이 더 알려질 테니.”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양점점이 마색색의 손을 잡고 일어나 범한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상문을 따라 나갔다.
세 사람이 나가자 범한이 사천립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 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네가 마색색을 지켜보다가 적당할 때에 그녀가 1 황자의 여자라는 걸 알게 하게.”
사천립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러다가 경도에까지 말이 들어가면 어찌합니까?”
“사람들에게 나와 1 황자 사이가 좋다는 걸 알리려는 걸세.”
그가 술을 한 모금 마셔 마른 입술을 적신 뒤 웃으며 계속 말했다.
“그래야 손에 쥐고 있는 패가 보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1 황자 뒤처리를 왜 내가 하느냔 말일세.”
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나야 북제에서 큰 공주와 함께 왔으니 그녀가 좋은 주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네. 게다가 1 황자도 정직하고 시원스러운 사람인 듯 보였는데, 인제 보니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네······. 큰 공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내 힘이 필요하다면 마땅한 대가도 지불해야 할 게 아닌가.”
범한은 정말이지 순수하게 기분이 불쾌했다. 자신은 강남에서 공무를 처리하느라 바빠 죽을 지경인데 형제란 황자들은 경도에서 한가롭게 집안일이나 신경 쓰고 있는 게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 * *
포월루 소주 분점을 돈을 세탁하거나 벌어들이는 범한의 개인 사업을 목적으로 한 곳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범한의 두 번째 정보망으로 활용될 곳이기도 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감찰원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봤을 때 앞으로 자신이 감찰원을 완전히 쥐게 될지 아닌지는 순전히 황제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포월루 소주 분점을 자신의 정보망으로 활용하기 위해 내부 공사를 하는 척하면서 경도 포월루처럼 도청에 사용할 황동관을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낸 정보 수집을 책임질 사람을 관리자로 위장해 기생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배치해 두었다.
술기운이 달아올라 점점 커지는 음악 소리가 건물 전체를 울렸지만 범한이 있는 방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침대 뒤에 있는 변기통에서 볼일을 본 뒤 평상시 입는 옷을 벗고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작업복’을 꺼냈다. 몸에 대어 보니 딱 맞는 게 반년 동안 편안한 생활을 누렸음에도 생각보다 살이 많이 찌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작업복을 입은 그는 자리에 앉아 반년 동안 잊고 살았던 이전의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준비를 마친 그가 방 창문을 열고는 손가락으로 검은색 외벽을 잡고 도마뱀처럼 미끄러지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체내의 정기가 폭발해 경맥이 크게 다친 뒤로 정기를 운행할 때 각별히 조심했다. 그리고 굳이 필요하지 않으면 정기를 손바닥 밖으로 뱉은 뒤 다시 거두 들이는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런 방법은 정신과 정기의 소모가 너무 컸다.
두 다리가 땅에 닿자 그는 복잡한 행랑 사이를 돌고 돌아 포월루 분점 후문으로 걸어갔다. 후문을 열고 나가자 골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차가 보였다.
마부 자리에 앉은 등자월은 삿갓으로 얼굴 전반을 가리고 있었고, 마차 안에 앉은 고달은 창문 발을 살짝 걷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밖을 살피고 있었다.
범한이 번개처럼 빠르게 마차에 올라탄 뒤 말했다.
“출발하게.”
* * *
“대인,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범한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이 무섭지 않은 듯 고달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범한을 안전하게 지키는 게 가장 큰 사명인 그로서는 믿을 만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범한이 위험한 모험을 하게 할 수 없었다.
범한이 입은 심각한 부상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말을 하면서도 대부분 이미 좋아졌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속사정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을 아는 사람 중에는 늙은 홍 내관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는 황제가 범한에게 너무 실망할까 봐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 그리고 고달의 경우 범한이 감쪽같이 숨기는 바람에 처음에는 사실을 모르다가 몇 개월 동안 가까이에서 범한을 경호하면서 점차 사실을 눈치챘다. 제사 대인의 정기 상태가 북제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게다가 해당에게 천일도 심법을 배운 뒤 범한의 상태가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본인 말고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해당조차도 말이다.
고달의 걱정 가득한 눈빛에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작게 대답했다.
“괜찮네.”
그리고는 이어서 재빨리 물었다.
“그녀의 위치는 확인했는가?”
마차 밖에서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경도에서 도망친 이후 줄곧 소주에 머무르고 있었던 거로 보입니다. 감찰원에서도 그녀가 그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강남 관리들이 암암리에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있어······ 며칠 전에야 겨우 소재지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범한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명씨 집안에서 보호해 주니 강남 관리들도 협조해준 거겠지······. 그러니 강남 관리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네.”
황제를 경호하는 호위 출신인 고달이 두 사람의 말을 듣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 차라리 현지 관부에서 체포하도록 정보를 알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건 형사사건인 만큼 감찰원에서 나서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범한은 고달이 고지식하기는 하지만, 오늘 밤 있었던 일을 비밀로 지킬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오늘 함께 동행한 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관부에 알리는 건 다시 도망갈 기회를 주는 것이네. 2 황자와 이홍성의 사람인 그녀에게 형부의 체포 공문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공개적으로 체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네.”
“그럼, 사람을 더 데려가야 합니다.”
고달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2 황자와 이홍성의 명을 받아 도망친 만큼 분명 옆을 지키는 고수가 있을 테니 생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생포하지 않을 거네. 죽일 거야.”
범한이 의자에 기대 두 눈을 감은 채 설명했다.
“그녀를 명씨 집안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할 필요는 없네. 그냥 명씨 집안을 압박할 용도로만 사용할 거야. 오늘은 포월루 분점 개업일이니 아무도 우리가 그녀의 위치를 찾아내 움직였을 거라 생각하지 않겠지. 더구나 누구도······ 내가 직접 움직였다고 의심하지 못할 거네.”
고달이 뭐라 말을 하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범한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의 목적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은근슬쩍 자신과 대립하면서까지 명씨 집안을 위해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있는 강남로 관리들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었다.
피와 죽음은 강남로 관리들에게 감찰원의 힘을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쥐죽은 듯 조용해진 마차 안에는 바퀴가 돌바닥에 닿으며 나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소주성의 조용한 골목을 달리던 마차는 이후 한참을 더 가서 멈춰 섰다.
범한이 장화 안에 있는 비수와 자신의 허리 부분에 꽂혀 있는 연검을 만져 확인했다. 이 검은 해당에게 빌린 것이었다. 장비에 문제가 없는지 세심하게 확인한 그가 조용히 지시했다.
“고달 자네는 외곽을 책임지도록 하게. 도망치는 놈이 있으면 놓아주지 말고 모두 죽이게.”
고달이 작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하자 범한이 등자월에게 물었다.
“자월, 총독부에서 보낸 사람은 준비가 다 되었는가?”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여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전에 주의하십시오.”
이 말을 듣자마자 범한이 검은색 미꾸라지처럼 순식간에 마차에서 내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높은 담 아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범한은 신분상 적은 인원만 데라고 움직이는 건 위험했지만 반드시 조용히 진행해야 하는 일인 만큼 오늘은 고달과 등자월만 데리고 움직였다. 사실 그가 이렇게 한 데에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계속 꿈틀대는 모험에 대한 갈망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오늘 밤을 기회로 삼아 무술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그동안 몰래 연습해온 연검 실력도 검증해 보고 싶었다.
시간을 세어보던 고달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장검의 손잡이의 삼밧줄을 다시 동여맨 뒤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마치 죽음을 알리는 저승사자처럼 천천히 저택 뒤쪽으로 걸어갔다.
고수가 몇 명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저택에 단둘이만 온다는 건 범한과 고달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택 뒷담 아래 선 고달이 돌벽에 몸을 완전히 붙이자 하나가 된 듯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가 체내의 정기를 천천히 움직여 담 안에 작은 소리까지 모두 엿들었다.
안에서 갑자기 가벼운 잡음이 들렸다. 제사 대인이 자주 사용하는 거위 깃털 붓으로 종이를 찢을 때 나는 소리와 같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고달은 범한이 이미 한 명을 처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화로에서 막 꺼낸 호떡에서 김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들은 고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사 대인이 손바닥으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부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범한은 유령처럼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가 지난 자리에는 몇 구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시신들은 상처가 눈에 띄지 않았고, 피도 많이 나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죽어 있었다.
그의 옆에 있는 방들도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은 일어날 새도 없이 침대 위에서 죽임을 당한 상태였다.
방에 있는 종과 여종들도 힘없이 침대 옆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취약에 취해 잠든 것뿐이었다. 이때까지도 저택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객이 집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진평평이 그에게 대종사급 자객을 막을 사람은 없다고 알려줬듯이 이미 9품 실력을 가진 강자에다 어려서부터 기술을 연마한 자객인 범한을 막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저택 뒤쪽으로 걸어가면서 양쪽 높은 담을 경계했다. 감찰원 보고서와 저택의 경호 인력은 아주 정확하게 일치했지만 언제 누군가가 그의 시선을 피해 어둠 속에 숨어 도망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이 잽싸가 나타나 소리 없이 칼을 휘둘렀다.
439화
범한은 침착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자신의 허리 위로 뻗었다. ‘슥’소리를 내며 연검을 뽑은 그가 오른손을 살짝 떨며 왼쪽 발을 뒤로 빼더니 오른쪽 다리 발꿈치를 조금 돌렸다. 몸의 중심이 왼쪽으로 살짝 기운 가운데 그의 손에 있던 검이 팔을 따라 활시위를 벗어난 활처럼 빠르게 내질렀다.
‘뿌직’하는 소리와 함께 범한을 공격한 사람의 목에서 소리 없이 분출된 피가 땅에 후두득 떨어졌다.
돌계단 위 끝방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범한을 발견하고는 놀라 큰소리를 지르며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범한이 가만히 서서 검을 자신의 가슴 앞에 대었다. 마치 모든 걸 체면하고 자살하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재빨리 세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칼날을 가로로 세워 공격할 빈틈을 주지 않더니 순식간에 무지막지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공격을 막은 범한이 모든 정력을 실어 휘두르는 검의 위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이처럼 강력한 공격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보이는 건 붉은 피와 땅에 떨어진 사람의 머리뿐이었다.
담담한 표정의 범한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두 발걸음 이동했다. 정기가 설산에서 일어나더니 어깻죽지에서 뿜어져 나와 용수철처럼 그의 오른쪽 팔에 튕겼다. 개구쟁이들이 소주성 밖 버드나무 가지를 당겼다 놓으면 나뭇가지가 튕기듯 올라가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름답게 튕긴 정기가 역사책을 저술하는 대가가 마지막 마침표를 찍듯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한 사람의 목에 찍힌 것이다. 그렇게 또 한 사람이 죽었다.
범한은 검을 세 번 휘둘러 세 명의 사람을 죽였다. 이건······ 도대체 무슨 검법인 걸까?
만약 고달이 저택 안에서 이 광경을 보았다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고, 만일 해당이 봤다면 그동안 범한이 수련하는 모습을 자신에게 숨긴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강남에서 그림자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운지란이 이 모습을 봤다면 멍한 표정으로 스승이 새로 제자를 들인 건가 하는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사고검.
사고검의 사고검.
목적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은 사고검.
자신에게 달려든 사람을 모두 죽인 범한이 흡족한 눈빛으로 가볍게 떨리는 검 끝을 바라봤다. 오늘 실전에서 사용해보니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림자는 자신의 공격에 죽을 뻔한 범한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었다.
이 세계에서 사고검의 진정한 정수를 배울 행운을 누린 사람은 범한 밖에 없을 것이다.
사고검의 핵심은 검의 기세나 검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보법에 있었다. 보법을 제대로 익혀야 만이 한 사람의 힘을 검에 온전히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보법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는 잔인함이었다.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온 힘을 쏟으며 귀신도 막을 수 없고 하늘도 저지할 수 없는 정도로 강한 살기를 뿜어야만 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공 사당에서 흰옷의 검객으로 변장한 그림자가 휘두른 일격은 태양의 빛마저 가려버릴 정도로 강했다. 만약 그를 상대한 게 범한이 아니었다면 그림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모든 살기를 검에 실었을 것이다.
* * *
죽은 사람도 다시 죽게 할 차가운 검 빛이 뜰 안에 번쩍이자 두 사람이 뒷담 쪽으로 도망쳤다. 범한은 그들을 쫓지 않고 검을 등에 찬 채 조용한 침실로 들어갔다.
뒷담에서 ‘촤악!’소리가 두 번 들렸다. 장검을 거둬들인 고달이 몸이 두 동강이 난 시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침실 문을 밀고 들어간 범한은 방금 침대에서 일어나 초를 밝힐 수는 있었지만 옷을 입을 겨를은 없었던 여자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원 대가, 오랜만이네.”
형부에서 지명수배를 내린 뒤로 소주에서 숨어 있던 원몽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문 앞에서 살기를 드러내며 서 있는 청년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울부짖었다.
“작은 범 대인······ 왜 저를 놓아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주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대답해 주겠네.”
범한이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가며 담담히 설명했다.
“낭자의 손에는 무고한 여자들의 피가 너무 많이 묻어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그런 낭자를 살려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니 자식으로서 응당 효도해야겠지요.”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이 힘없이 이마에 내려와 있는 원몽의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답던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초췌해 보였다. 그녀가 힘없이 웃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경도의 일은 명령을 받아서 했던 일입니다······. 형부에서 저를 지명수배했으니······ 대인의 아우와 지금 대인이 가르치고 있는 3 황자 저하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니 죽이려면 그냥 죽이십시오. 하지만 그딴 가당치도 않은 말로 저를 죽이는 걸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범한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낭자가 나쁜 짓을 한 이상 이런 결과는 정해져 있던 거네. 만약 내가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면 낭자에게 조금의 기회를 줬을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낭자도 알다시피 나는······ 나쁜 놈인지라 낭자에게 기회를 줄 마음이 없네.”
신경질적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던 원몽이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범한을 째려보며 소리쳤다.
“하하! 나를 잡아서 저하를 공격할 수단으로 쓰려고? 꿈도 꾸지 마라!”
이 말을 내뱉은 그녀가 자살하기 위해 치아 안에 숨겨두었던 독약을 삼켰고, 순간 온몸이 경직되더니 그대로 붉은 이불 위에 쓰러졌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나는 그냥 죽일 생각이었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검 끝을 그녀의 목구멍에 찔러 넣었다.
* * *
깊은 밤, 어디선가 불길한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구름 사이로 비춘 달빛이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산으로 가세.”
고달과 함께 마차에 오른 범한이 등자월에게 지시했다.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어.”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말고삐를 휘둘렀다. 풀을 뜯던 말이 천천히 마차를 끌고 저택 뒤쪽에 있는 산언덕으로 향했다. 주변이 어두운 데다가 나무에 가려져 있어 산 위에서 아래쪽을 관찰한다면 아무도 그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었다.
마차 안에서 범한이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피부처럼 보일 정도로 얇은 장갑이었다. 그가 장갑으로 피가 묻어 있는 연검을 닦은 뒤 검에서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허리에 찼다. 마지막으로 가루를 꺼내 장갑에 뿌린 뒤 불을 붙였다.
펑 소리와 함께 장갑에 불이 붙자 고달이 의자 아래 있는 철통을 떠내 앞에 놓아줬다. 범한이 타고 있는 장갑을 철통 안에 넣고는 불길이 작아지다가 이내 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얼마 뒤 마차는 산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래 저택은 여전히 조용했다. 안에 사람들은 모두 죽지 않으면 기절해 있었으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당연했고, 밖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았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범한은 뒷산에 올라 뭘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적당한 위치에 마차를 세운 등자월은 말을 목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범한이 마차 창문 발을 살짝 걷고는 오랫동안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상대측에서 오늘 일어난 일을 알아채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까 걱정되는군.”
등자월이 하늘을 올려다본 뒤 말했다.
“아직 한밤중이니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이렇게 일찍 찾아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 말에 범한은 자신이 조급해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고달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고달이 모포를 그에게 덮어줬다. 차갑던 몸이 따뜻해지면서 졸음이 몰려온 범한은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잔 것일까 범한이 눈을 뜨고 ‘끙’하고 소리를 냈다.
등자월이 마차 창문 발을 열고 아래를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왔습니다.”
범한이 모포를 걷고 창문가로 다가가서 아래를 바라봤다. 원몽의 은신처였던 그 저택 밖에서 사람 하나가 익숙한 듯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소리에 리듬이 있는 게 암호가 분명했고, 그렇다면 저 사람은 강남 세력과 원몽 사이의 연락책이 틀림없었다.
홑옷을 입은 그 사람은 평범한 외모였다.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가 잔뜩 긴장하더니 재빨리 마차를 몰고 사라졌다.
산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범한은 그 사람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걸 알고 있었기에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과연 그 사람은 멀리 가지 않았다. 잠시 뒤 서북쪽 담 위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은 그가 안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살펴보려 했다.
담 위에서 주변을 살피던 그가 과감하게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산 위에 있는 범한을 비롯한 세 명은 그가 안에서 뭘 보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애써 목소리를 낮추려 하는 비명 소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마침내 시체가 뒹굴고 피가 낭자한 참혹한 광경을 확인한 것이다.
저택의 문이 열리더니 어둠 속에서 머리를 숙이고 죽어라 내달리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이 분명 자신의 주인에게 사실을 알리려는 게 틀림없었다.
마차 안에서 나른한 허리를 펴고는 하품을 하던 범한이 동쪽에서 이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날이 곧 밝을 테니 그쪽에서 이 일을 숨기려면 서둘러야 할 거네.”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 관아에 사람을 보내 감시하고 있으니 내일이면 이 일과 연관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이 보기에 오늘 이 일을 처리할 올 사람이······ 누구일 것 같나?”
등자월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분명······ 소주부에서 보낸 사람일 겁니다. 대인, 여긴 제가 감시하고 있을 테니 일단 저택으로 들어가 쉬시지요.”
범한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원몽의 죽음은 그녀를 몰래 보호해 주던 강남 관리들에게는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한 소식일 것이다. 밤중에 죽은 원몽을 새벽에 발견했으니 짧은 시간 안에 소식을 듣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관리는······ 분명 이 일에서 신분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관리일 것이다.
다만 이 일로 인해서 강남로 안에 있는 장 공주 심복들이 누구인지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정보전에는 누구보다도 강한 범한이었지만 이곳에 심어진 장 공주 심복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강남에 파견된 감찰원 관리 수가 너무 부족해 모든 관아에 밀정을 심어 감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원몽의 사망 소식에 반응하는 사람을 감시해 심복들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 * *
소주부 지주는 최근 며칠 동안 매일 공당에서 송세인과 진백상의 변론을 듣느라 정신이 없는 나머지 정무도 등한시하고 있었다. 어찌나 정신적 소모가 컸는지 너무 피곤해서 가장 아끼는 첩과 관계를 갖는 일도 줄일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 새벽 자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이후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냉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끼얹은 것처럼 분노가 사라지면서 걱정이 몰려들었다.
‘원몽이 죽었다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그는 2 황자와 정왕 세자, 그리고······ 장 공주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가 허둥지둥 옷을 입으면서 사람을 시켜 책사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책사가 도착하자 이미 옷을 다 입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것인가? 원몽이 죽었어!”
책사는 관리를 보좌하며 옆에서 조언해주는 사람이었기에 서로 숨기는 일이 없었다. 이미 원몽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책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을 수밖에 없으니 죽은 겁니다. 흠차 대인이 소주에 와서 도망칠 수 없게 된 원 대가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습니다.”
소주부 지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자네 말은 감찰원이 움직였을 거라는 건가?”
“감찰원이 아니라면 강남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원몽을 죽일 수 있는 세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책사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분석한 상황을 설명했다.
“대인께서는 지금은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원몽이 죽은 이상 감찰원에서도 저희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는 못할 겁니다······. 지금 오히려 성급하게 움직인다면 감찰원에서 대인이 이 일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책사다운 신중하고 치밀한 분석이었다.
440화
소주부 지주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물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네. 만약 흠차 대인이 한 짓이라면 왜 원몽을 잡지 않고 죽였겠는가? 흠차 대인이라면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형부에서 반포한 체포 명령을 이용해 원몽을 생포하려 했을 거네.”
책사도 이 점이 이해되지 않았기에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원몽은 2 황자 저하와 정왕 세자의 사람입니다. 형부에서 체포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천하에서 어느 관리가 그분들에게 미움을 받을 짓을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제가 봤을 때 감찰원에서 원몽을 생포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원 대가가 감찰원 고문이 두려워 자결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 가서 확인해 봐야겠군.”
결심이 선 소주부 지주가 일어났다.
“최소한 상황은 자세히 알아야 할 게 아닌가.”
그러자 책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대인께서는 가서는 안 됩니다.”
“뭐라고?”
소주부 지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책사를 바라봤다.
“어째서 가지 말라는 건가? 본관도 신분이 드러날 위험을 무릅쓰고 가고 싶지는 않지만 곧 날이 밝을 테니 서둘러 상황을 수습해야 하네. 만일 이 일이 밖에 알려진다면······ 경도 형부와 감찰원에서 조사하려 할 게 뻔할 것이고, 폐하도 원몽이 여기 있는 이유를 물으실 게 분명하네. 그럼 소주부에서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만약 감찰원에서 이 일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을 지도 모르니 대인께서는 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곳을 감시하는 눈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차라리 제가 변장한 뒤 심복들을 데리고 가서 뒷수습하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소주부 지주가 결국 책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는 책사가 직접 나서서 상황을 정리한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아주 신중하게 행동했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책사가 새벽에 분장하고 나가는 모습을 지주 관아 밖 골목에 숨어 있던 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책사는 청기가 달린 작은 가마를 타고 원몽이 숨어 지내던 저택 밖을 살펴보다가 거리에 수상한 사람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놀란 그가 재빨리 발을 걷고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책사가 무명 홑옷을 입고 있는 남자 옆으로 가마를 붙인 뒤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셨습니까?”
무명옷을 입은 남자는 소주 천총으로 오늘 원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한걸음에 달려온 관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원래 성 밖에서 주둔해 있어야 했지만 관아가 성안에 있는 덕분에 제일 먼저 이곳에 올 수 있었다. 책사의 질문을 들은 천총 대인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하며 물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걸 왜 나한테 묻는 건가? 자네가 나한테 알려줘야지.”
책사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가마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평소에는 입지 않는 평민 복장을 한 서로를 보고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거리를 청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책사가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숨기며 물었다.
천총 대인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치웠네. 주변에서 본 사람은 없을 거네.”
책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총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 책사가 속이 뒤집히는 걸 참지 못하고 코를 막으며 물었다.
“원몽의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방 안에 있지 않겠는가?”
책사는 치솟는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방안을 흘끗 바라봤다. 눈을 뜬 채로 죽어 있는 원몽의 시신을 본 그가 살짝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은 경도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일단 깨끗하게 처리한 뒤에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지.”
천종이 볼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있으면 날이 밝을 거네. 만약 이곳이 사람들 눈에 띈다면 소주성 전체에 소문이 퍼질 텐데,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명씨 집안에서 사람이 왔습니까?”
“그 간상들은······ 흠차 대인이 몰래 지켜보고 있을까 무서워 집안에서 처박혀서는 나오지 않고 있네.”
* * *
저택을 나온 두 사람은 뒤이어 온 사람들과 함께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아무리 보도 이런 일을 할 곳은 감찰원밖에 없었지만 사건 현장이 감찰원이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시체의 상처들이 모두 문드러진 것이 검에 의해 죽은 게 분명하지만 검세의 풍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현장을 살펴본 결과 저택에 잠입한 사람은 한 명으로 보입니다. 한 명이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으니 분명 상당한 고수일 겁니다.”
범죄 현장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는 인물이 말했다.
“만일 감찰원에서 나선 거라면 굳이 숨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소주 지주를 대신해 온 책사가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을 정리한 듯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건은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 게 더 좋습니다.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이곳을 깔끔히 정리하고 감찰원에서도 나서지 않는다면 이 일은 이대로 묻힐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감찰원에서 밀정을 심어 상황을 지켜보다가 나중에······ 우리에게 왜 나섰냐고 묻는다면 사건을 접수해 확인한 것일 뿐이라고 둘러대면 연루시키지는 못하지 않겠습니까?”
책사의 말에 천종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체!’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본관은 무장이네. 무장이 사건을 접수해 확인하는 경우도 있는가!”
책사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천종을 힐끗 째려보고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대인이 꽁무니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헐레벌떡 달려올 줄 누가 알겠습니까?”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싸울 여유가 없었기에 곧이어 서로 역할을 분담해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소를 맡은 사람은 청소를 시작했고, 시체 매장을 맡은 사람들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돌아가서 문서 작성을 맡은 사람은 이 일을 먼저 보고해야 할지 아니면 흠차 대인 쪽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움직여야 할지 고민했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느라 아무도 멀리 있는 뒷산 위에서 검은색 마차가 유령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범한은 전날 밤 자신이 죽인 시체들을 강남로 관리들이 와서 매장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유리한 상황을 차지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시체에서 사고검의 흔적이 보인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상처를 두 번 처리해야 했다. 이 일과 관련 없는 동이성에 누명을 씌울 수도 없는 이상 사고검의 흔적을 드러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는 고달에게도 자신이 사고검의 검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걸 보여주지 않았다.
범한에게는 경도 황제가 자신이 사고검의 검법을 할 줄 안다는 걸 모르게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 일로 인해서 황제가 현공 사당 사건의 자객이라 의심하고 있는 사고검의 아우를 떠올린다면······ 감찰원은 돌이킬 수 없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천천히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원몽의 죽음에 놀라 달려온 강남로 관리들이 저렇게나 많단 말인가······ 설마 저들이 모두 장 공주가 키운 개들이란 말인가?”
등자월이 고달을 힐끔 쳐다봤다. 제사 대인은 고달의 귀를 빌려 황궁에 있는 황제에게 불만을 털어놓는 거라 생각한 그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장 공주는 강남에 오래 있었으니 심복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늘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몇몇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관아에서 나온 사람들이 분명하니 이제 밀정을 통해 조사해 보면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대답하던 등자월이 한숨을 쉬었다.
“다만 눈치 빠른 명씨 집안에서는 냄새를 맡고 사람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범한도 이 점이 아쉬웠다. 그는 원몽을 통해 명씨 집안을 공격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괴롭게는 해줄 계획이었다.
마차가 조용히 장원에 도착하자 피곤함이 몰려온 범한은 두 사람에게 쉬라고 말한 뒤 뒤채로 갔다.
탁자에 엎드린 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사가 재빨리 일어나 발을 담글 뜨거운 물을 가져왔다.
그녀는 오늘 밤 범한의 행적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여종들에게 음식을 데워오라고 지시하지 않고, 직접 음식을 따뜻하게 데웠다.
범한은 깔끔하게 죽을 한 그릇 비우고 족욕을 마친 뒤 침대에 들어가 깊이 잠이 들었다.
오후가 돼서야 깨어난 그는 원몽의 죽음이 하루 만에 소주성에 변화를 불러오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사사를 통해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받은 등자월이 피곤함에 절은 모습으로 들어와 서류를 건넸다.
오늘 새벽 수상한 동향이 감지된 소주성 관아 관리들이 모두 적힌 보고서였다. 보고서를 찬찬히 살펴보던 범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성안에 있던 관리들이······ 모두 적이었단 말인가? 이래서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원몽의 죽음으로 그들도 느낀바가 있었을 테니 앞으로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겠군.”
등자월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리들도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큰일 난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
범한이 아직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듯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명단 안에 이름이 적힌 관리들은 이제 고생길이 열린 셈이네. 이 명단을 경도로 보내서 2처에서 조사를 하라고 하게. 아주 사소한······ 십여 년 전에 받은 뇌물이라도 상관 없으니 아주 사소한 잘못까지도 모두 알아내야 하네.”
제사 대인이 명씨 집안을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리들까지 건들려 하자 긴장한 등자월이 작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본 범한의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가 씩씩대며 보고서를 탁자에 내던지고는 으르렁댔다.
“과연······ 과연 설청도 이 일을 알고 있었군. 그런데도 내 앞에서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인가!”
원몽의 죽음을 계기로 그동안 감춰져 있었던 강남로 관료 사회의 진짜 모습을 본 범한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장 공주와 명씨 집안이 오랫동안 강남에서 세력을 떨쳐 왔으니 강남 관료 사회 전체가 그들의 편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범한이 손에 쥔 권력과 권위에 비하면 이런 저항은 걱정할 거리가 아니었다. 그가 알고 싶은 건 강남 총독 설청이 이 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였다.
흠차의 신분인 범한이라도 지방 고관인 설청을 건들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총독은 군대와 민간을 모두 관리하기 때문에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그가 범한에게 대항하는 쪽에 선다면 명씨 집안은 저항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얻는 셈이었다.
그가 얼굴까지 붉히며 씩씩거리자 등자월이 조심히 위로했다.
“총독부도 원몽의 사망 소식을 받기는 했지만 어떤 의견이나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급 관리들이 원몽을 강남에 숨기려 했다면 총독부에게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더구나 총독부는 대인에게 미움을 받기 싫어하는 것처럼 경도에 있는 2 황자에게 미움을 받기도 싫었을 테니 사실을 알아도 눈을 감아줬겠지요. 그러니 이 일로 총독부가 대인에게 대항할 마음을 품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범한이 ‘끙’소리를 내며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최근 며칠 동안 정신적으로 긴장한 상태에 있다 보니 민감해진 것 같았다.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만나 볼 필요는 있겠어. 모레 설청 대인을 만나러 갈 것이니 준비하도록 하게.”
그러자 등자월이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꼼지락거리며 범한의 눈치를 살폈다.
441화
그 모습을 본 범한이 웃으며 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말하게. 입만 꼬물거리지 말고.”
지적을 받은 등자월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제가 봤을 때 대인께서는 당분간 설청 대인을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응?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범한이 묻자 등자월이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총독 대인은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인이 총독 대인에게 찾아가 빨리 입장을 정하라고 재촉하다가······ 만일 상대방이 대인과 맞설 생각을 품게 되면 어떡합니까? 제가 봤을 때 총독 대인은 지금의 태도를 유지하도록 내버려 두고 명씨 집안을 압박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총독 대인이 계속 중립을 지킨다면 대인과 맞서지 않는 것이니 우리가 일을 추진한 시간도 많아지는 셈입니다.”
그가 범한의 표정을 슬쩍 살핀 뒤 말을 마무리 지었다.
“대인께서는 총독 대인이 빨리 결심하기를 바라시지만 사실 총독 대인의 결심이 늦을수록 저희에게 유리합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야 명씨 집안을 살짝 압박하는 정도로만 건들고 있으니 설청 대인도 관조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더 강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설청 대인도 계속 중립을 지킬 수는 없을 테니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에······ 자꾸 마음이 불안해지네.”
등자월이 잠시 고민하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활짝 웃었다.
“최소한 오주에 갈 때까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이해한 범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강남로 총독 설청은······ 대보와 임완아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장인어른인 임약보자였다. 재상직에서 내려온 장인어른을 체면까지 설청이 신경을 쓸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장인어른이라면 설청의 생각을 확실히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 자네가 옳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 범한이 크게 웃었다.
“장인어른께서는 이미 한직에 물러나게 시지만 아직도 상당한 역할을 발휘하고 계시네.”
등자월이 피곤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범한이 물었다.
“오전에 눈 좀 붙이지 그랬나.”
등자월이 공손히 대답했다.
“정보를 확인하느라 잘 시간이 없었습니다.”
범한은 몸을 쉬어가면서 일하라고 말하려 하다가 자신도 그러지 않는 걸 떠올리고는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순간 다른 일이 떠오른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자월, 자네 계년조에 들어오기 전에······ 2처에서 근무하지 않았는가?”
제사 대인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모르는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계년이 늦여름쯤에 돌아올 거네.”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감찰원에서도 그에게 1처를 맡길 준비를 끝낸 상태네. 한마디로 말해서 북제 상경에서 그가 했던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자네는 2년 동안 나를 따라다니면서 여러 일을 보고 들었으니 적임자라 할 수 있네. 어떤가? 북쪽에 가볼 배짱이 있는가?”
제사 대인의 제안에 등자월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북제 밀정 총 책임자 자리는 위험한 자리이긴 했지만 감찰원의 대외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만큼 돌아오면 높은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과거 북제 밀정 총 책임자였던 언빙운 공자도 북제에서 돌아온 뒤 젊은 나이임에도 4처 수장이 되었다. 더구나 고령인 진 원장 대인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제사 대인이 감찰원 원장직에 오른다면 언빙운 공자는 더욱 중요한 자리에 임명될 게 뻔했다.
마찬가지로 등자월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상사인 왕계년도 감찰원에서 10년 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우연히 제사 대인의 눈에 띄어 심복이 된 뒤 북제로 가게 되었고, 이제 돌아오면 1처의 새로운 수장이 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북제로 가는 건 목숨을 담보로 한 도전이자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는 길이었다.
더구나 제사 대인이 그에게 북제에 갈 의향이 있는지 묻는 다는 것은 이미 그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순간 등자월의 머릿속에 최근에 2처 수장이 나이가 많아서 퇴직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과 범한이 방금 자신에게 2처 출신이냐고 물었던 말이 번갈아 떠올랐다.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앞날을 떠올리며 감격한 등자월이 범한 앞에 무릎을 꿇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의 계획을 따르겠습니다.”
범한이 등자월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 지었다.
강남에 내려와 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범한은 황제가 자신을 신임하고 있으면서도 군대 쪽과 관계를 맺는 건 막음으로써 그가 쥐고 있는 힘을 억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강남 총독 설청의 존재가 두렵지는 않았다.
용상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은 자기 아들마저도 믿지 못하는 사람인만큼 범한을 완전히 믿을 리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황제가 자신에게 큰 권력을 쥐여 주기는 했지만, 그 권력을 확장하는 건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을 공고히 해야 했다.
공고히 하는 방법은 예를 들어 감찰원의 경우 진평평과 오래 함께 일한 사람들을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사람들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등자월이 이어서 감찰원이 강남에서 하고 있는 일들의 상황을 보고했다. 대부분이 명씨 집안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감찰원이 아무리 감찰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구라고 해서 아무 이유 없이 민간 세력을 감시하거나 관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관아에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내면 권한이 넘는 일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감찰원이 강남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개입해도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해두라고 지시해둔 상태였고, 감찰원이 이에 따라 황실 금고뿐만 아니라 소주성 안에 일들과 바닷가를 드나드는 사소한 배들까지 명씨 집안과 관련된 모든 일에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범한이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들뿐이었다. 강남로 관리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명씨 집안의 구체적인 죄를 밝혀내거나 관아의 힘을 이용해 전 방위에서 압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감찰원을 이용해 명씨 집안의 장삿길을 방해하거나 황실 금고 전운사의 화물 공급을 이용해 명씨 집안의 수입을 줄이는 방식으로 압박했다. 상대방의 은전 수입을 줄어 자금을 부족하게 만들어야만 명씨 집안의 손발을 계속 묶어 둘 수가 있었다.
“섬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건가?”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명씨 집안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일에 대한 소식이 최근 동안 전혀 들리지 않았다.
범한의 걱정 가득한 물음에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천주 지점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섬에 몰래 잠입할 사람을 보내 두었습니다. 곧 있으면 소식이 올 겁니다.”
강남은 땅이 넓어 동해 섬에서 보낸 소식이 소주에 도착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범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잠시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등자월이 떠나고 혼자 남은 범한이 피곤함에 기지개를 켜고는 방에서 나와 장원을 산책했다.
이곳은 양계미가 소유한 장원임에도 소금 상인들에게서 보이는 특유의 부귀함이나 소금 밀수꾼들의 거만함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풍스러우면서도 고아한 운치가 풍기는 곳이었다. 다른 장원들처럼 마찬가지로 졸졸 흐르는 얕은 물에 가짜 산이 있고, 첩첩이 산봉우리들이 풍경으로 펼쳐져 있는 이곳은 설계자가 처음부터 심혈을 기울여 계획해 지은 것 같았다. 이곳은 다른 장원들과 달리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생명력이 넘쳐흘렀고, 강남의 청산이나 서호의 벽수처럼 온화하고 청담한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포근히 감쌌다.
이처럼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느껴지게 하는 장원에 가장 매료된 사람은 천일도의 직계 제자인 해당이었다. 소주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강남 사람들을 구경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장원에서 사색하며 보냈다.
그래서 산책하던 범한은 작은 호숫가에서 꽃무늬가 그려진 옷을 발견했을 때 놀라지 않았다.
“낚시는 그쪽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는 해당과 1척 정도 떨어진 거리의 호숫가에 앉았는데, 해당의 안정적인 어깨와 꽃무늬 두건을 쓴 머리를 볼 수 있는 각도였다. 그녀의 옆에는 평범한 갈색 삿갓이 놓여 있었다.
해당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어째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죠?”
해당이 낚싯대로 들고 있는 대나무 장대는 몸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끝만 살짝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들에게 인사하는 것 같았다.
범한이 웃으며 이끼 묻은 두 손을 옆에 아무 곳에나 문질러 닦으며 대답했다.
“낚시는 살생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밑밥을 넣지 않고 있다는 건 물고기들을 유혹할 생각조차 없는 거니 마음을 낚는 것일 뿐이지요.”
이것은 이전 세계에서 그가 읽은 기이한 소설에서 현묘한 인물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였다. 해당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자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정말 재미없는 짓이지요. 미끼를 쓰지 않는 건 물고기를 낚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마음을 낚는다는 것은······ 마음을 구한다는 것이니 낚고 못 낚고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범한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자신에게 고개도 돌려주지 않는 해당이 야속해 화가 나려 했다. 그때 해당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마음이 심란하신 것 같은데 같이 앉아서 낚시하시겠어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 이만한 게 없거든요.”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군자란 모름지기 부엌과 푸줏간을 멀리해야 하는 법인데 낚시질을 해서 되겠습니까?”
해당이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위선적인 인간.”
범한이 ‘허허’하고 크게 웃다가 그만 엉덩이가 미끄러졌다. 호수에 빠지려 하자 그가 ‘어어’소리를 내며 손발을 마구잡이로 버둥거렸다.
호숫가는 돌이 많아 나무나 풀이 별로 없었다. 버둥대던 범한이 자신도 모르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해당의 어깨를 쥐었다.
해당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게 그의 손에 전해졌다. 해당이 그의 손목을 잡고 제대로 앉을 수 있도록 해주면서 말했다.
“위선적일 뿐만 아니라 하는 행동도 가식적이군요. 천하에 제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하는 9품 고수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범한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알아주지 않고, 타타 낭자는 나를 믿어주지 않으니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할꼬?”
해당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흘겨보며 자신의 옆에 앉게 하고는 주인 없는 낚싯대를 손에 쥐여 줬다.
“낚시는 조급해하지 말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합니다.”
낚시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는 사실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여자를 꾀려면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범한도 해당이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강남의 상황을 두고 한 것이었다. 그가 웃으면서 옆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서 지렁이를 꺼내 낚싯바늘이 묶고는 물에 던졌다.
호숫가가 조용해졌다.
잠시 뒤 침묵을 깨는 범한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조급해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강남 상황이 통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조급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정해진 계획에 따라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면 되는 거지요. 문제는 강남이 아니라 경도에 있습니다. 경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든 제가 통제할 수가 없거든요. 그곳에서는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고, 아무도 대처하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게 큰 사건이 터질 수도 있습니다.”
“큰 사건이요?”
“네.”
범한이 약간의 걱정과 진심 어린 존경심을 드러내며 계속 말했다.
“낭자도 제가 경국 감찰원의 제사인 걸 알고 계시지요? 그럼 감찰원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도 아십니까?”
“북쪽에는 소은이 있고 남쪽에는 진평평이 있다.”
해당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442화
“북쪽 사람들에게 진 원장은 원수나 마찬가지인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범한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자신이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지요. 경국과 북제는 오랜 시간 적으로 지냈으니 지금 낭자가 저의 목을 베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다만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진 원장이 천하를 아울러서 제가 생각을 읽지 못하는 두 명 중 한 명이라는 걸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두 명이나 있다는 겁니까?”
해당이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
“그렇습니다.”
범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해당을 바라봤다.
“제가 모시는 황제나 낭자가 모시는 황제나 그들이 어떤 생각과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저는 예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분 모두 엉덩이를 용상을 걸치고 있는 이상 반드시 그것과 관련된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평평 대인은 다릅니다. 소위 세속에 대한 미련이 없으면 마음이 모든 걸 아우를 수 있고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진실하다고 하지요······. 진평평 대인이 꼭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사실 진평평 대인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황위 싸움에 개입할 필요가 없지요. 누가 황제가 되든 대인과 잘 지내려 할 테니까요······. 하지만 대인의 성격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자로 있는 건 어울리지 않습니다.”
진평평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략가이자 음모가였다. 이런 사람은 평상시에는 조용히 있다가도 한 번 움직이면 천하를 뒤엎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해당이 범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대인의 어머니와 진 원장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면 이 일에 대한 전혀 다른 생각을 했을 겁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진평평 대인이 대인을 아끼는 이유가 경국 황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저는 대인에게 그 일에 대해 들었을 때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해당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인이 3 황자를 옆에 두고 가르치며 기반을 다져주려 하듯이 진평평 대인도······ 대인의 기반을 다져주려 하는 게 아닐까요?”
“어려운 문제지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궁 사람들이 제 정체를 아는 이상 저는 황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과거에 있었던 일의 배후에 누가 숨어져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저도 이 일을 언젠가는 밝힐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지금 급하게 서두를 생각은 없습니다. 낭자가 말한 진 원장의 생각은······.”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사가 아닌 황제가 되는 건 무척 큰일입니다. 저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진 원장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해당타타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하다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복잡한 일이군요. 잠깐 머리를 식혀야겠어요.”
“강남에는 작은 물고기밖에 없고 경도에 가야 큰 물고기가 있지요.”
범한이 담담한 눈빛으로 호수에 드리운 두 낚싯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낚시질하면······ 항상 낚싯바늘을 문 물고기에게 끌려 물속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해당이 피식 웃었다.
“대인은 이미 강가에서 발을 적셨으니 물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도 맞군요. 다만 무언가 불확실한 기분이 듭니다. 저는 일이 제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무척 싫습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라 할지라도······ 모든 일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해당타타가 멀리 풍경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큰 흐름을 장악하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호숫가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해당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대인이 생각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두 명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 명은 진평평 대인이고, 다른 한 명은 누구입니까?”
범한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해당타타는 다른 한 명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항상 사람의 생각을 간파하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자부하고, 심지어는 경국 황제의 생각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고 자랑하는 범한이 생각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정말이지 궁금했다.
“저의 아버지입니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아버지도 진평평 대인과 같이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만 진평평 대인이 물 위와 아래를 오가는 물고기라면 아버지는 항상 물밑에서만 움직이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아들인 저도 그분의 진정한 생각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요.
범한은 진평평과 범건 두 사람을 항상 아버지처럼 대하며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과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두 사람은 경도 피의 달에 황후 가족들을 몰살해 복수하였고 이후 관심과 사랑을 쏟으며 그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범한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기묘하게도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두 사람의 생각을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대인의 근심은 강남이 아니라 경도에 있었군요.”
해당타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폐하가 형제들을 위해 놓아둔 숫돌에 불과합니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남의 일에서 장 공주와 황태자, 2 황자가······ 아버지와 진평평 대인이 저를 위해 놓아둔 숫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이 저에게 가진 기대가 너무 깊어서 기쁠 따름입니다.”
기쁘다고 말할 때 범한의 목소리에서 상당한 분노가 느껴졌다.
고요한 수면 위에 드리운 가는 낚싯줄에서는 조금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당타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제 보니 대인은 정말 낚시로 자신의 마음을 단련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범한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저의 굳건한 의지와 평화로운 마음은 바깥 것들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의 당당함은 자만한 허풍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명확하게 분석한 데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도대체 몇 살입니까?”
해당타타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젊은 사람이 큰 권력을 손에 쥐고 복잡한 일을 처리하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물었다.
“그러는 낭자는 몇 살입니까?”
해당이 입꼬리를 올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너무나도 밝게 반짝여서 호수의 푸른 물빛도 약해지는 것 같았다.
범한이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먼저 말했다.
“정월 18일에 만 열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해당이 고개를 저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대인의 평소 모습을 보면 여든 살이라 말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
노인들은 봄날의 따스한 바람과 천둥 번개를 동반한 여름날의 폭우, 쓸쓸한 가을날의 서리와 겨울날의 매서운 추위를 모두 겪으며 세상만사를 경험했기에 냉정한 눈으로 세상의 모든 걸 꿰뚫어 볼 수 있다.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로 복잡한 상황에서도 누구보다도 침착하게 가장 매서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음모가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조건은 바로 적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욕망을 줄이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부터 지금까지 음모에 뛰어나다고 이름을 떨친 사람들은 세월의 풍파를 모두 겪은 노인이 아니라 거세를 당한 내관이었다.
이에 반해 젊은 사람들은 경험도 부족하고 넘치는 혈기도 가지고 있어 종종 잘못된 선택을 하곤 했다. 예를 들어 2 황자나, 황태자 심지어 지략에 뛰어난 장 공주까지고 모두 넘치는 혈기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하곤 했다.
하지만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한 범한은 해당이 80세 노인 같다고 말할 정도로 냉철함과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특히 하서비를 이용해 명씨 집안과 재산 소유권 소송을 진행할 때 감찰원은 줄곧 조용한 상태였다. 감찰원은 재산 소유권 소송이 조용해질 무렵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4처 강남로 순찰사 관아에서 차를 마시자고 강남로의 관리들을 초대했다.
초대를 받고 온 관리들은 은은하게 감미로운 향기를 내뿜는 차를 바라보며 품질이 좋은 용정차라는 걸 알았지만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록 설청 총독 대인의 체면 덕분에 강남로 관리들 중에서 체포된 사람은 없었지만 차를 앞에 두고 들려오는 말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온 관리들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 한참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그들은 결국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명씨 집안을 더는 보호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감찰원은 이어서 체포하거나 재산을 압류하는 노골적인 방법이 아닌 간접적인 방법으로 명씨 집안 사업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바로 동이성 밀정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명씨 집안이 소유한 상점들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명씨 집안은 육로와 해상 화물 운송에 상당한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조사에도 감찰원은 밀수품을 적발하는 등의 사소한 죄목만 잡았을 뿐 명씨 집안의 목덜미를 움켜잡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명씨 집안 운송 속도를 늦추는 데는 성공 했다.
운송업을 주로 하는 명씨 집안과 같은 상인들이 수입을 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흐르는 큰 강처럼 계속 화물을 운송해 현금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감찰원은 지금 강에 흙과 자갈을 부어 물의 흐름을 느리게 만들고 결국에는 정체되도록 만들고 있었다.
이 일은 감찰원이 가장 적은 인력만 동원해도 가능했고, 여론에 휩싸이지도 않으면서 좋은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천하를 경악하게 한 공개 입찰 결과로 인해서 명씨 집안은 처음으로 재정 곤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화물 운송까지 어려움을 겪자 명씨 집안은 태평전장에서 돈을 급히 융통해야 했고, 근심에 빠진 명청달은 암암리에 초상전장 환어음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 * *
강남 일대에서 오랜 시간 성장해온 명씨 집안은 몇 대에 걸쳐 이뤄진 신중한 경영과 대담한 개척을 통해 천하에서 손꼽히는 대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더구나 장 공주와의 관계를 통해서 황실 금고 황상이 된 이들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은전을 사용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더 넓고 깊게 확장했다. 이렇게 소주와 항주 일대에서 수없이 많은 사업을 거느리게 된 명씨 집안은 대량의 선박, 마차, 점포를 직접 운영할 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을 통해서 강남 백성들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업을 간접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이처럼 기름, 곡식, 기생집 등 모든 분야를 명씨 집안에서 다 장악하고 있다 보니 강남에서 사업을 하고 싶으면 반드시 명씨 집안을 통해야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가문이 거대하고 가진 게 많을수록 내부 파벌도 복잡한 법인만큼 명씨 집안은 처음부터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속을 철저히 했다. 본가의 여섯 어르신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사소한 장사만 할 수 있게 했다.
가족 내부 분열이 초래하는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잘 아는 명씨 집안 큰 노마님은 집안의 권력을 장악한 뒤 가장 먼저 권력의 서열을 정리했다. 집안의 장남인 명청달을 제외한 다른 자식들에게는 지분만 주고 명씨 집안의 거대한 산업에 참여할 권한을 일절 주지 않은 것이다.
443화
큰 노마님이 내린 이러한 조치가 알맞았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이런 강력한 방법을 사용해 명씨 집안은 표면적으로 단결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득을 두고 갈라져서 싸우는 다른 가문들과 달리 명씨 집안은 항상 하나로 똘똘 뭉쳐 움직였다.
하지만 집안 사업에 참여할 수 없는 다섯 어르신은 매년 들어오는 엄청난 돈을 집구석에 그냥 쌓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그들은 사소한 곳에 투자해 강남에서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명씨 집안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더 넓혀갔다. 다섯 어르신이 각자 진행하는 사업은 명씨 집안 본가에 기대어 성장한 만큼 본가가 무너진다면 다섯 어르신 사업에도 엄청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본가가 무너지지 않도록 힘을 써야 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범한은 감찰원을 이용해 명씨 집안이 직접 관리하는 사업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명씨 집안과 관련 있는 사업을 빠짐없이 건드렸다.
이에 견디기 힘든 상황까지 몰린 이들은 집안일에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애꿎은 자신에게 화가 미친다는 생각에 갈수록 불만이 쌓여갔다.
“그 거지 같은 눈을 크게 뜨고 봐봐!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은 첩이 낳은 자식이라서 집안에서 지위가 높지 않았다. 그저 새장을 들고 산책하는 것만 낙으로 삼으며 살아온 덕분에 그는 큰 노마님과 장남 명청달의 미움을 피할 수 있었고, 매년 자신의 몫으로 오는 돈으로 과일과 채소 상점을 열었다. 상점은 암암리에 관리들에게 뇌물도 준 덕분에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최근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하루가 멀다고 조사를 받는 바람에 장사가 이전처럼 잘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경영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건 분명했다. 이전에는 자신과 스스럼없이 웃으며 안부를 묻던 관리들도 함께 차를 마시자고 하면 시치미를 뚝 떼고 피하기 일쑤였다.
그는 관리들이 감찰원의 위협에 겁을 먹고 자신을 피하는 거라 확신했다.
이처럼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남쪽 오랑캐가 자신을 무시한 짓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화가 치솟아 붉으락푸르락해진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의 얼굴이 험상궂게 구겨지더니 한 손을 들어 힘껏 휘둘렀다. 그의 앞에 있던 남쪽 오랑캐가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더니 끙끙대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얼굴에는 선명한 붉은 손자국이 나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소주성에서 가장 큰 규모의 채소와 과일 장사를 하는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은 남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황궁에 납품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다. 강남 채소, 과일 사업에서 그는 약 3할 정도를 독점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이곳에서 과일의 왕이라 불릴 만했다. 누구도 명씨 집안 세력을 등에 업은 그와 경쟁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는 오랫동안 강남 채소, 과일 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 영남에서 온 정체 모를 상인이 명씨 집안과 웅씨 집안이 맺은 협의를 무시하고 직접 소주에 과일을 팔기 시작했다.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가격을 매겨 과일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사시사철 기온이 높은 영남에서 재배되는 과일은 유난히 달고 맛있었기 때문에 장거리 운송에 따른 부패 문제만 해결된다면 시장가치가 많았다. 그렇기에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도 영남 상인이 관례대로 자신에게 먼저 찾아와 허락을 받았다면 흔쾌히 몫과 자리를 정해줬을 거였다. 하지만 영남 상인은 이곳 관례를 알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인지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을 찾지 않고 단독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엄청나게 많은 상품을 가져와 시중보다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여파로 10일 만에 소주뿐만 아니라 강남 전제 과일 가격이 2할이나 떨어졌고, 영남 상인은 급속도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픈 뺨을 감싸고 쓰러져 있는 영남 상인을 바라보았다.
“감히 누가 명씨 집안 머리 위를 기어오르려는 거야? 남쪽 오랑캐 주제에 뭘 믿고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사실 그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명씨 집안이 감찰원의 감시와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잠자코 있었던 상인들이 명씨 집안의 이익을 뺏으러 들고 일어날 것이었다.
하지만······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은 집안을 공격하는 흠차 대인에게 대항할 수는 없더라도 남쪽에서 온 오랑캐가 자신의 영역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건 도무지 가만히 나둘 수가 없었다.
“이런 놈은 몽둥이라 다스려야지.”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용서를 비는 영남 과일 상인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곧이어 몽둥이를 든 졸개들이 다가와 인정사정없이 패기 시작하자 영남 과일 상인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지나가던 행인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처절한 비명이 한동안 저택에 울려 퍼졌다. 이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 때 영남 상인의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이윽고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만 들렸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영남 상인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피를 흘리며 기절해 있었다.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회계 담당자가 몸을 떨며 말했다.
“대인, 저 상인······ 아마 웅씨 집안사람일 겁니다.”
“알고 있네.”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가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웅백령, 그놈이 저 과일 상인을 이용해 나를 떠본 것이네. 그러니 저렇게 혼내주지 않는다면 분명 우리 명씨 집안을 우습게 보고 뒤통수를 치려 할 거야.”
회계 담당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이니 집안에 안 좋은 소문이 날 만한 일을 만들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 말에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의 안색이 순간 흑색으로 변했다.
“큰어머니께서 이미 나를 의심하고 계신 상황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회계 담당자가 만감이 교차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의자에서 일어나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영남 상인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장사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을 거네. 하지만 장사를 하더라도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법이지. 더는 나를 무시하지 말게나.”
정신이 든 영남 상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은전 1만 냥을 내고 가격을 원래대로 돌려놓게. 경쟁을 하더라도 공평한 환경에서 해야 하지 않겠나.”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자네가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나도 자네를 무시하지 않을 걸세.”
그가 사람을 불러 영남 과일 상인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영남 상인이 흘린 피로 물든 바닥을 바라보던 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흥! 흠차 대인이 나를 무시한다고 웅씨 집안 놈들도 나를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지?”
집 안으로 들어온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손을 닦고 소매를 걷은 뒤 복도에 있는 새장을 들었다. 휘파람을 불며 새장 안에 든 새를 바라보는 눈빛이 약간은 흐리멍덩해 보였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그의 뒤를 따르던 회계 담당자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인······ 하서비를 만난 일을 모친에게 알리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의 몸이 굳더니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어리석은 조언 같은 건 하지 말게! 양쪽 모두에 다리를 걸치고 있으라던가 일곱째가 죽을 상황에서도 죽지 않았으니 앞으로 승승장구할 거라거나 흠차 대인이 지원을 받아 일곱째가 모든 사업을 가져갈 거라고 거나······. 내가 그 애를 만났다가 어떻게 된 줄 아는가! 다음날 큰어머니에게 꾸중을 한바탕 듣는 것도 모자라 하마터면 살아남지 못할 뻔했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가 씩씩대며 화를 가라앉힌 뒤 다시 말했다.
“감찰원에서 우리 집안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오늘 내가 단호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어머니와 형님이 나를 어떻게 봤겠는가?”
겁에 질린 회계 담당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하서비 쪽에서 대인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만나지 않는 것도 경우는 아니었지요. 대인······ 정말 하서비 쪽의 말을 듣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일곱째는 일곱째일 뿐이네······.”
그동안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이 멀쩡히 살아서 등장했다는 사실에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하서비 모친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우연히 들어서 알고 있었고, 그와 그의 친모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날 하서비가 전한 흠차 대인의 말이 떠오른 그가 순간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난 흠차 대인보다도 큰어머니가 더 무섭네······. 게다가 아직은 우리 명씨 집안사람들이 집안을 다스리고 있지 않은가. 만일 자네 말대로 하서비와 손을 잡는다면 흠차 대인이 뒤에서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조정 세력이 명씨 집안을 좌지우지하려 할 거네.”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형님이 아무리 잔혹하게 굴어도 우리가 오랜 시간 형제였다는 것과 내가 명씨라는 건 변하지 않네.”
더는 설득할 용기가 나지 않은 회계 담당자가 입을 다물었다.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범한이 하서비를 통해 전달한 호의를 정식으로 거절했고, 그에 대한 하서비 쪽의 반응은 소주 남성에 있는 그의 저택에까지 빠르게 전달되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온 소주부 아속은 명씨 집안 졸개들의 뜨거운 시선에 겁에 질려 몸서리를 쳤다. 그가 품속에서 꺼넨 문서를 건네면서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에게 소주부에서 재판을 받으라고 말했다.
“나보고 소주부에 나와 재판을 받으란 말인가?”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은 자신이 법정에 불려가 재판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누가 감히 나를 고발했는데? 무슨 죄목으로 나를 재판하겠다는 거야?”
아속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를 살폈다. 이전이라면 명씨 집안 문패를 단 그에게 와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자신이 바닥에 엎드려 그의 신발을 핥으며 용서를 빌어야 했을 것이었다. 아속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의 안색을 살피고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사정을 했다.
“영남에서 온 상인이 대인께서 시장을 마음대로 독점하기 위해 졸개들을 시켜 자신을 폭행했다고 고발했습니다.”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영남 상인이 자신을 고발할 거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고, 더욱이 소주부에서 그걸 받아들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랜 기간 강남에서 특수한 지위를 누려온 명씨 집안은 소주부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런 소주부에서 소송장을 받아 주다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감찰원에서 명씨 집안을 노리고 있다고 해도 감찰원은 지방 정무에는 간섭할 수 없는 만큼 직접 형사 소송에 관여해서는 안 됐다. 그는 이 사실을 알기에 영남 상인을 흠칫 두들겨 패면서도 뒷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소주부에서 재판을 받으라고 사람을 보낸 것이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속 넘어 보이는 몇 명의 관차들과 그 뒤에 서 있는 낯선 얼굴의 조정 관리를 향했다. 관리는 품계가 높지 않은 관복을 입고 있었다. 관리의 신분을 추측해보던 그는 영남 상인이 소주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감찰원이 주시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반응할 리 없었다.
444화
넷째 어르신은 자신이 상황을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에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감찰원은 비록 직접 자신을 심문할 수는 없지만 소주부에서 어떻게 하는지 감사할 수는 있었다. 그러니 소주부가 오늘 자신에 체포하려 하는 것은 만일 이 일을 조사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경우······ 감찰원에서 소주부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아속을 바라봤다.
“내가 따라가지 가지 않으면 어쩔 건가?”
화들짝 놀란 아속이 두 손을 모으고 애걸복걸 사정했다.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발 지주 대인의 체면을 생각해 따라 주시지요.”
상황을 살펴보던 명씨 집안 종들이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몽둥이를 들고 아속과 관차들을 둘러쌌다.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맨 뒤에 있는 감찰원 관리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감찰원 4처 관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누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모반이라도 일으키려 한다고 오해할까 걱정되는군요.”
관차들을 구타하는 것은 조정의 명령이 불복하는 것이었으니 모반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셈이었다.
감찰원 관리의 말에 흠칫 놀란 아속은 오늘 반드시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을 체포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공당에서 영남 상인이 맞아서 참혹한 몰골을 한 걸 확인한 데다가 장원에서 온 사람들이 공당 맞은편 찻집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처럼 흠차 대인의 눈이 공당을 향해 있는 상황에서 체포해 가지 않는다면 나중에 지주 대인이 감찰원에게 추궁을 당하게 될 게 분명했다.
아속이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용기를 내어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을 향해 소리쳤다.
“대인, 가시지요!”
말은 당당하게 내질렀지만 눈빛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상황이 이전과는 다르니 일단은 순순히 따라간 뒤 소주부에서 상황이 바뀌기를 기대해 보자는 뜻을 전했다.
아속의 뜻을 이해한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고개를 천천히 숙이더니 치솟는 화를 억눌렀다. 지금 상황에서는 순순히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속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한편 감찰원 4처에서 나온 젊은 관리는 뒤에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지켜봤다.
회계 담당자가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 옆에 다가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인, 어찌합니까?”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새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새장이 부서지면서 다친 새가 날개를 퍼득거리자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가야지 어쩌겠는가. 그동안 소주부에 가면 후원에서 차를 마셨을 뿐 소주부 감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보게 되었군.”
음흉스럽게 웃으며 말하던 그가 회계 담당자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당장 이 소식을 명원에 알려 큰형님께서 방도를 마련할 수 있게 하게······. 이 일을 계기로 큰어머니께서 나를 믿으실 테니 차라리 잘 됐어.”
모든 말을 마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관차의 손에 이끌려 소주부 감옥에 수감되었다.
* * *
“넷째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았나 봅니다.”
소식을 들은 명청달은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한 뒤 어머니가 머무는 작은 건물로 향했다.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제가 가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영남 상인을 때렸다는 이유로 감찰원에서 소주부를 압박해 체포하기는 했지만, 사건이 크지 않으니 작은 범 대인도 넷째를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큰 노마님은 두 눈을 감고 골몰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하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자 명청달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큰 노마님의 안색을 살폈다.
그때 큰 노마님이 약간은 생기가 없으면서도 한기가 느껴지는 두 눈을 떴다.
“넷째는 명씨 집안의 앞날이 불안한 상황에서 하서비를 몰래 만났으니 그것만으로도 다른 생각을 품은 셈이다. 게다가 경거망동하게 행동해서 집안에 근심을 끼쳐 불효를 저지르지 않았느냐. 이처럼 다른 생각을 품고 불효를 저지른 놈을 뭐 하러 보호하려고 하는 게냐?”
그 말을 들은 명청달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범한의 기세등등한 공격에 주눅이 든 명씨 집안은 미래를 위해 일 보 후퇴를 결정했다. 이에 그는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 몸을 상하면서까지 무리해서 범한이 원하는 대로 따랐지만······ 감찰원의 공격은 사그라질 줄 몰랐고, 명씨 집안은 경험해 본 적 없는 시련에 힘없이 휘청거릴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를 도와주지 말라고 한 어머니의 말은······ 집안의 상처를 더욱 깊이 후벼 파 분열시키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보기에 작은 범 대인은 아직 저희 집안을 흔들만한 약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큰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어쨌거나 넷째도 저희 집안의 핏줄이 아닙니까.”
큰 노마님이 무정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노려봤다.
“흠차 대인의 핍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집안사람 누구라도 희생해 강남 사람들의 동정을 얻는 방법 말고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 넷째가 감옥에 들어갔으니 잘된 게 아니냐.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흠차 대인이 돈에 눈이 멀어 명씨 집안을 핍박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해. 그럼 조정에서도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볼 테니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게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넷째를 희생시키는 것이 반드시 손해인 것만도 아니지.”
명청달이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머니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첩의 자식인 넷째는 큰 노마님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었다.
“요새 집안 상황은 어떠하냐? 최근에 초상 전장을 자주 들락거리는 것 같던데, 적자가 심한 것이냐?”
명청달이 몰래 차가운 냉소를 지으며 태평 전장 인감이 어머니 손에 있으니 자신이 명씨 집안을 장악하려면 다른 전장과 거래를 할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말로 둘러댔다.
아들의 설명을 들은 큰 노마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넷째만 가지고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얻기 힘들게다. 집안의 장남인 청달이 네가 핍박받는다면 천하 사람들도 우리 명씨 집안의 힘든 상황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어머니의 말뜻을 이해한 명청달이 속으로 경악하면서도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아들 명란석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니······ 할머니가 진짜 아끼는 자식은 막내 삼촌뿐이라고······.”
* * *
범한은 명씨 집안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에게 명씨 집안은 그저 언젠가는 깨부숴야 하지만 당장은 할 수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는 인내심이 깊었고, 조급할 게 없었다.
그는 요 며칠 동안 포월루 소주 분점에 갔다. 포월루 분점은 장사는 잘되어 건물 위아래에서 손님을 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도 남자 사장과 여자 관리인이 누군가를 공손히 맞이해 건물 꼭대기 층으로 안내하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꼭대기 방에 도착한 범한이 창문을 열자 사람들이 마른 호수 주변 땅을 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수를 넓히고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저 일에 들어갈 어마어마한 인력과 돈을 계산해보던 그가 한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꼭 필요한 일인가?”
사천립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대인의 지시대로 분점의 계획과 규격을 적어 북쪽에 편지를 보냈는데, 어제 답신이 왔습니다. 작은 도련님이 호수가 너무 작고 지세가 탁 트이지 않아 손님들이 답답하다고 느낄 수 있으니 호수 앞을 파내라고 말씀하셔서 따르는 것입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범사철은 멀리 북제에 있으면서도 포월루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사를 방해하지는 않겠는가?”
“푸른색 발을 둘러서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이 저곳을 보지 못하게 해두었습니다. 지금도 장사가 잘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호수 공사를 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늦봄부터 여름까지가 장사가 가장 잘 되는 시기이고 공사를 하기도 쉽지 않은 때입니다.”
아우의 천부적인 장사 기질을 믿는 범한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구나 그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포월루 분점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찰원이 수집한 정보를 듣기 위해서였다. 건네받은 보고서를 읽어보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명씨 집안 집사장은 어디로 도망을 간 것인가?”
명씨 집안 집사장은 범한이 어렸을 때 담주에서 때린 주 집사와 같은 주(周)씨로 오랜 시간 명씨 집안 큰 노마님의 심복으로 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베일에 싸여 있는 군산회의 장부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강남거 앞에서 하서비가 군산회에게 암살을 당할 뻔한 뒤 감찰원은 이 집사를 체포해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몰래 행방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주씨 성을 가진 집사는 하루아침 만에 사라졌고, 명씨 집안 사업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강남로 관리들이 숨겨주고 있는 것인지 감찰원의 능력으로도 조금의 행방도 찾아낼 수 없었다.
마침 범한에게 소주부가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전하러 들어온 등자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 집사의 행적을 찾는 임무를 맡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 진전이 없는 것이 부끄러웠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고개를 저으며 고민하다가 넌지시 말했다.
“명씨 집안에서 죽인 게 아니라면 아마도······.”
“명원 안에 숨어 있는 거겠지.”
범한이 이어 말했다. 군산회의 장부를 관리하던 주 집사가 명원 안에 숨어 있는 건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명원에 들어가 데리고 나올 수는 없는 건가?”
등자월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상대측도 백작 지위를 세습하고 있는 가문입니다. 명확한 증거 없이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일이 엄청 시끄러워질 것이고 총독 대인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일이 점점 재미없어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쳐들어갔는데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설청 대인에게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겠지만 찾아내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안에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네.”
“그렇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등자월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등자월이 범한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밀정과 작은 목소리로 뭐라 몇 마디 말을 나누던 등자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밀정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는 들어와 범한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섬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해적 쪽에서 소식이 들리지 않아 이걸 빌미로 명씨 집안을 공격하지 못할 거라 체념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소식이 왔다고 하자 그가 눈을 반짝이며 등자월을 바라봤다.
“빨리 말하게.”
등자월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탁!’하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범한이 내리친 주먹에 찻잔을 깨지지 않았지만, 그의 분노는 확실히 느껴졌다. 명씨 집안사람들의 잔혹함에 진저리를 치며 그가 물었다.
“우리쪽 사람 어떻게 되었는가?”
범한은 섬에 있던 감찰원 밀정의 생사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그는 살아 있어서 방금 돌아왔다고 합니다.”
범한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청와입니다.”
“지금 어디 있는가?”
“방금 소주에 도착해 비밀 가옥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세.”
445화
청와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 며칠 동안은 계속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관병들이 섬에 있던 해적들을 몰살하는 가운데에서도 홀로 살아남은 그는 섬 전체를 뒤엎은 시체와 갈매기 떼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해적 두목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마련해 둔 배를 찾아서 섬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철저한 명씨 집안은 섬에 모든 배를 망가뜨렸고, 해적 두목이 숨겨 놓은 쾌속선들도 모두 물에 잠긴 상태였다.
물에 잠긴 돛을 보고 청와는 절망했다. 그는 섬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천주에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예측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보내기는 했지만 도착하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물도 식량도 떨어진 섬에서 그는 어떻게 오랜 시간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감찰원 2처와 4처에서 밀정을 양성할 때 야외 생존 훈련과 정보 수집 훈련을 엄격하게 한 덕분이었다. 그 덕분에 청와는 혼자서도 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섬에는 물이 없었지만, 다행히 간간이 비가 내려 식수로 사용할 수 있었다.
섬에는 사냥할 야생 동물은 없었지만, 시체가 있었고······ 시체를 먹으려 몰려든 새들과 물고기와 조개가 있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천주에 있는 동료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섬에 사람을 보낸 덕분에 청와는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구출될 수 있었다.
마침내 육지에 도착하자 마음이 놓은 청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잠을 자면서도 그는 자신이 먹은 새들의 배속에 사람의 사체가 들어 있었다는 생각에······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천주에서부터 오랜 시간 잠에 빠져 있던 그는 소주에 도착한 뒤에야 깨어났다. 깨어난 그가 맨 처음 본 것은 경탄과 안타까움이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얼굴이었다. 웬만한 미녀들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을 한 청년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청와에게 옆에 있던 감찰원 관리가 설명해 줬다.
“제사 대인이시네.”
‘제사 대인이라고?’
화들짝 놀란 청와가 급히 일어나 인사를 하려 했다.
범한은 손을 들어 일어나려는 그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범한은 경국의 로빈슨 크루소인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치 싸움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기에 항상 하급 관리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범한은 일단 환약을 먹인 뒤 혈액 순환을 촉진 시키는 침을 놓았다. 이후 조심히 맥을 짚어보니 기력이 상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후유증 크게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청와의 기력이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린 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청와는 과연 유용한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범한은 그의 말을 통해 해적 두목이 명란석의 첩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같은 그동안 보고되지 못한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갑자기 고향에 내려갔다는 그 첩은 아마도 이미 강에 사는 물고기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네. 참······ 가엽군. 자월, 당장 그 첩의 고향 집에 사람을 보내 조사하도록 하게 명란석이 어떤 변명을 내놓을지 궁금하군.”
청와는 갖은 고생 속에서도 서신 한 통을 끝까지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실질적인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비록 명씨 집안에서는 부인하겠지만 이것을 통해 공격할 빌미를 만들 수 있었다.
“섬에 온 관병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범한이 청와의 두 눈을 보고 물었다. 청와는 섬에서 힘겹게 생존하고 육지에서 장거리를 급히 이동해 무척 허약해진 상태였다. 범한도 이 질문이 그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섬에 나타난 관병은 분명 명씨 집안의 조력을 받고 있을 것이었고, 그것은 장 공주 편이라는 의미였다. 범한은 군대에서 장 공주 편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를 황제 폐하가 무척이나 알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섬에 나타난 수군이 연소을이 이끄는 군대일 가능성도 없었다. 9품 강자이자 경국 무북신책군 대도독인 그의 군대는 감찰원의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었고, 연소을은 수군을 동원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천주 수군은 과거 가장 강력한 수군이었습니다.”
등자월이 범한의 안색을 힐끗 살핀 뒤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 섭가가 천주 수군에 미치는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서 조정에서 천주 수군을 폐지했고, 지금은 강남 수군을 지휘하는 관아는 사주(沙州)에 있습니다. 대인도 그곳 사주 관리를 만나 보셨겠지요. 만일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 사주 수군이 동원됐다면······ 이동 거리가 너무 멀고 큰 강을 건너야 하니 흔적이 많이 노출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조용히 해군들을 처리한 걸 보면 사주 수군은 아닐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섭가라는 말은 듣자 복잡한 감정이 솟구친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청와를 바라봤다.
침대에 누워 있던 청와의 입가에 하얀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날 밤에 섬을 들이닥친 관병들의 모습이 떠올라 괴로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의 중요성을 알기에 감찰원이 해적과 손을 잡은 세력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주고 싶었다.
한동안 눈을 질끈 감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날을 장면을 떠올려 보던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관선은 새벽이 되기도 전에 섬에 도착했습니다. 섬 주위에 암초가 많은 데도 어둠 속에서 배를 대려 했던 걸 보면 분명 배를 전문적으로 다룰 줄 아는 수군이 온 것이지 육지 관병들이 배를 빌려 온 건 아닙니다······. 제가 관병 중 한 명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얼굴 윤곽으로 보아 분명 북쪽 사람이었습니다.”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동이성의 수군일 가능성도 있다는 겐가?”
청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데 말투가 동이성은 아니었습니다.”
범한과 등자월이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경국에는 3대 수군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북쪽 산동로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교주 수군은 실력이 상당했다. 만일 교주 수군이 장 공주 쪽이라면 군대에서 장 공주가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범한 쪽에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막강한 것이었다.
범한은 황제가 자신이 병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면서 군대 방면에서는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며 경국 군대 대부분을 황제가 장악하고 있다고 믿었다. 범한이 그동안 자신의 계획을 과감히 추진해 나간 것도 바로 이런 믿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만일 장 공주와 황자들의 세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강하다면······ 그의 계획에서 차질이 생각 수밖에 없었다. 순간 위기감을 느낀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섭씨 가문은 이미 조금씩 2 황자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무북신책군 연소을은 이미 장 공주 편이지. 이런 상황에 교주 수군까지 더해진다면!’
“교주 수군을 이끄는 사람은 누구인가?”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등자월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군 제독은 정1품 무장이니 연소을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의향을 드러낸 적도 없고 진씨 집안 출신이지만 섭중 대인과 관계도 좋은 편입니다.”
범한이 가볍게 주먹을 쥐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피곤한 얼굴을 한 청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몸이 회복되면 내 일을 돕도록 하게.”
그는 해적으로 잠복해 있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감찰원 관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유능한 인재를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고 싶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이런 행운을 얻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한 청와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계년조를 데리고 방을 나가고 감찰원 4처 천주 순찰사 관리들이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한 뒤에야 정신이 든 그는 자신이 마침내······ 악몽에서 깨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생각보다 안 좋은 소식을 접한 범한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경도에 소식을 보내 진원 안에서 미녀를 품에 껴안고 놀고 있을 절름발이 노인의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대인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오늘 운이 나쁘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인상을 구기고 있는 범한에게 등자월이 공손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무슨 소식인가?”
범한이 심드렁하게 묻자 등자월이 기쁨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군산회를 관리하던 주 집사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어디 있는가?”
“대인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지금 명원에 있다고 합니다.”
범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탄식했다.
“마침내 할 일이 생겼군.”
* * *
4월 봄기운이 절정에 이르러 따뜻해진 강남에서는 사람들이 겹옷만 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주에서 천 리 떨어진 경도성 밖 창산은 여전히 하얀 눈이 산봉우리를 덮고 있었다.
삿갓을 쓴 거구의 사내는 창산 봉우리를 덮은 흰 눈을 바라보다가 남은 차를 한 모금에 전부 들이킨 뒤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막무가내로 입에 쓸어 넣는 것이 맛있어서 먹는다기보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는 모습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경도에서 30리 떨어진 있는 석비촌이었다.
그리고 맛없게 소면을 먹고 있는 거구의 사내는 강남에서 경도까지 갖은 고생을 하며 온 경묘 2제사 삼석 대사였다. 삼석 대사가 이곳에 온 것은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천자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강남에 있는 범한이 고의인 듯 아닌 듯 그를 놓아준 뒤 이후 감찰원은 치밀한 조사를 시작했고 서북로 군대도 경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석 대사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감찰원과 흑기들의 봉쇄를 피해 경도 근처에까지 왔다.
군산회는 응집력이 강하지 못한 조직이었지만 신비로움과 중요한 임무를 가지게 된 뒤 그 중요성이 두드러졌다. 이 신비한 조직에서 마침내 천하에 세력을 가진 중요한 인물들을 집합시키기 시작했다.
삼석 대사는 비록 경묘 2제사로 높은 신분임에도 군산회에서는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강남에서 군산회의 계획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범한의 계획을 방해하려 했던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삼석 대사는 자신만의 웅장한 포부를 품고 군산회에서 벗어나 이곳까지 왔다.
그는 경도로 가서 죽일 수 없는 그 사람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가 소면을 한 움큼 입에 밀어 넣었다. 그는 대사장이 항상 식사할 때마다 자신에게 일러주었듯이 입안에 있는 면을 오래오래 씹은 뒤 삼켰다.
순간 마음속에서 슬픔이 일렁이면서 그의 무미건조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두어 방울 면에 떨어졌다.
그는 경도로 가서 황제에게 이유가 무엇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면을 다 먹은 그가 얼굴을 가리도록 삿갓을 고쳐 쓰고는 탁자 옆에 놓인 한 사람의 키보다 높은 나무 지팡이를 쥐고 국수 가게를 나섰다. 석비촌 산자락 아래 작은 길을 따라 경도 방향으로 걸어갔다.
뒤에 순백의 산을 두고 고행자는 어두운 황성을 향해서 묵묵히 걸어갔다.
숲이 깊어질수록 길도 좁아졌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장작을 패러 오는 부지런한 나무꾼도 보이지 않았고, 황량한 야외라 지나는 행인도 없었다. 조용한 산길은 심지어 새와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아 기괴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삼석 대사는 상당히 높은 수행을 거친 고행자이긴 했지만, 정식으로 암살을 연마한 무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경계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정과 군산회가 자신이 강남을 벗어나 경도 근처까지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북제 성녀 해당타타 낭자뿐이고, 그녀는 경국에서 자신의 행적을 노출하면서까지 이 일을 발설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경로를 미리 예측해 매복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446화
삼석 대사는 빽빽한 숲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날카로운 화살이 자신의 눈앞까지 날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모양이 특이한 화살은 맨 처음에는 귀신처럼 아무 소리 없이 날아오다가 3척 앞까지 다가와서야 맹렬하고도 섬뜩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긴 화살이 마치 그에게 죽으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삼석 대사가 새 머리가 조각된 나무 지팡이 머리 부분을 잽싸게 들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지팡이 머리 부분에 박힌 화살에서 엄청난 힘이 전해져 왔고 삼석 대사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지팡이 머리 부분이 폭발했다.
눈을 가늘게 뜬 삼석 대사는 속으로 이렇게 빠르게 화살을 쏠 수 있는 사람은 무북신책군 대도독 연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소을은 현재 경도에서 수천 리 떨어진 창주성에 머물고 있었다.
경계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삼석 대사가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사람의 얼굴을 찾아냈다. 자신에게 화살을 쏜 사람이 분명해 보였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젊은 남자였다. 젊은 남자는 연소을의 활 기술을 사용한 만큼 그의 제자임이 분명했다.
삼석 대사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큰 새처럼 잽싸게 몸을 날려 어마어마한 기세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유도 몰랐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어찌 됐든 경도로 가서 이유를 황제에게 물어보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
머리에 삿갓을 쓴 채 거구의 몸을 날려 엄청난 힘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는 삼석 대사의 모습은 거대한 사나운 새를 보는 것 같았다.
솜씨 좋은 궁수와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건 상대방과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석 대사처럼 공중에 몸을 날린다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방법이 없어진다.
공중에 뛰어오른 삼석 대사는 상대방의 침착한 얼굴을 보고는 화살을 쏠 기회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등에 메고 있던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더니 장전하고 조준한 뒤 발사했다.
세 가지 동작이 간결하게 이어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빠르게 이어지는 게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이 정도의 수준을 가지려면 오랜 기간 엄청난 수련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궁술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야만 했다.
쉭!
두 번째 화살이 삼석 대사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이미 공중에 몸을 날린 그는 빠르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바로 삼석 대사가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는 정기를 가슴으로 끌어 모으더니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강력한 위력을 지닌 철포삼 공법으로 화살을 막으려 했다.
그의 목을 향해 날아온 화살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
삼석 대사의 눈에 이상한 빛이 번쩍하더니 순식간에 궁수의 앞에 나타난 그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겨우 3척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궁수가 어마어마한 위력의 지팡이를 피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궁수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지팡이를 바라보다가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선 뒤 활을 치켜들고 외쳤다.
“봉쇄하라!”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네 자루의 검이 섬광을 내뿜으며 삼석 대사의 지팡이를 막았다.
검과 지팡이가 맞붙으면서 굉음과 함께 숲에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먼지 속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 번째 화살이 삼석 대사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삼석 대사는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피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인 목을 연문 궁술의 위력을 시험할 대상이 되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가 신묘를 향해 기도할 때처럼 한쪽 손바닥을 곧게 폈다.
네 자루의 검에 지팡이를 움직일 수 없으니 손바닥으로 화살을 막을 생각이었다.
가늘면서도 무지막지한 위력을 지닌 화살이 삼석 대사의 굳은살이 박인 큰 손바닥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는 사람의 살점을 노리는 모기처럼 손바닥을 파고들려 하다가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손바닥이 살짝 찔렸을 뿐인데도 삼석 대사가 몸을 휘청거리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화살이 계속 그의 목을 노렸고, 삼석 대사는 날아오는 화살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한 번 막을 때마다 그가 휘청이면서 한 발자국씩 뒷걸음질을 쳤다.
자욱한 먼지를 뚫고 화살은 갈수록 빠르게 날아왔고 끝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먼지 뒤에 숨은 궁수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홉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아홉 발자국 뒤로 물러선 삼석 대사는 화살에 의해 강제로 산길 옆으로 내몰렸다. 그가 신음을 흘리며 양팔을 들어 지팡이를 휘두르려 할 때 마지막 화살이 날아왔다······. 피하려 움직이던 그는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자 아래를 내려다봤다. 눈에 살기를 가득 품고 있는 야수가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물고 있었다.
크기를 보니 호랑이가 분명했다.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진 삼석 대사가 눈에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철포삼을 단련한 몸이었지만 맹수의 날카로운 이빨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호랑이에게 물린 다리의 살점이 찢기면서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
삼석 대사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에서도 피가 뿜어져 나왔고 지팡이를 쥔 손에서도 피가 흘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고슴도치가 되고도 남을 정도로 신출귀몰하게 날아오는 화살은 삼석 대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못했지만, 함정에 빠지게 한 것이다.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숲에서 보았던 젊은 궁수와 검을 쥐고 있는 검객의 얼굴이 보였다.
삼석 대사가 상대방을 차갑게 노려봤다.
“자네들 손에 죽임을 당할 거라고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젊은 궁수가 활을 들었다. 그도 삼석 대사가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화를 나눌 정도로 상대에게 경외심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젊은 궁수가 오른손으로 독이 묻은 검은 화살을 장전한 뒤 더는 도망칠 수 없는 삼석 대사의 목을 조준했다.
“쏴라.”
젊은 궁수는 말만 할 뿐 자신의 손에 들린 활을 쏘지 않았다.
숲속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사방팔방에서 수많은 궁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십여 장 떨어진 거리에서 삼석 대사 주변을 빙 두른 궁수들이 쏘라는 명령에 맞춰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화살이 비처럼 삼석 대사를 향해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삼석 대사의 동공이 살짝 오그라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산속에 이렇게 많은 궁수를 배치한 걸 보니 군대가 움직인 게 분명했다. 삼석 대사도 강한 고수였지만 군대의 무정하고 냉혈한 연속 공격에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오른쪽 다리를 맹수에게 물린 상태였다.
삼석 대사는 섭류운이 아니었고, 고하도 아니었다. 삼석 대사가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휘둘러 사방에서 비처럼 내리는 화살을 막았다.
챙, 챙, 챙, 챙.
쇠가 부딪치면서 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팡이에 맞아 부서진 수백 발의 화살 파편들이 주변에 쌓이는 모습은 비장하고도 처절해 보였다.
몇몇 화살들은 그의 방어선을 뚫고 그의 몸을 찔렀지만, 이전 젊은 궁수만큼 강력하지는 못했기에 삼석 대사의 철포삼을 뚫지 못했다.
궁수들을 지휘하고 있는 젊은 궁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죽음을 눈 앞두고 발악하는 야수와 같은 삼석 대사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삼석 대사의 정기가 상당하므로 멀리서 쏴서 죽이려면 정기가 소모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기가 소모되어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화살을 쏴야 삼석 대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삼석 대사의 목을 조준한 채 그 순간을 기다렸다.
숲에서 수십 명의 궁수가 끊임없이 화살을 쐈다.
삼석 대사는 큰 소리로 포효하며 쉴 새 없이 지팡이를 휘둘러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을 막아 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삼석 대사의 호흡이 가팔라졌다. 그의 힘이 다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용맹하게 싸웠던 삼석 대사의 끝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치밀하게 조직된 강력한 군대 앞에서는 용맹한 무예 고수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인가?
맹수를 사냥하듯 군대가 무인 한 사람을 둘러싸고 공격하는 막무가내로 공격을 퍼붓는 모습이 잔인해 보였다.
* * *
화살은 비라도 내리붓는 것처럼 끊임없이 쏟아졌고 삼석 대사의 주변에 쌓이는 파편들은 갈수록 높아졌다. 어느덧 야수에게 물려 상처 입은 다리도 화살 파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쏟아지는 화살을 막는 삼석 대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주변에 쌓이는 화살대들을 장작으로 삼아 타 죽으려는 것처럼 비장하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지팡이를 휘두르는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정기는 이미 많이 소모된 상태였다.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우두머리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중지를 펴자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휭’하는 소리에 이어 ‘퍽’하는 소리가 났다.
순간 숲을 넘어 세상 전체가 침묵에 휩싸인 것처럼 조용해졌다.
삼석 대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목에 박힌 화살을 쥐었다. 그가 입을 벌려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입에서는 ‘꺽꺽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화살을 잡은 손을 따라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 광경에 놀란 궁수들이 화살을 쏘던 걸 멈추자 젊은 궁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명령했다.
“계속해라.”
순간 삼석 대사의 몸에 십여 발의 화살이 박히면서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삼석 대사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약한 척하며 적을 유인해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젊은 궁수는 연소을의 제자답게 냉절하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큰 소매를 흔들며 몸에 박힌 화살 깃을 털어냈다. 눈을 부릅뜨고 엄청난 괴성을 지르자 손에 있는 지팡이가 순수한 정기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무 조각이 떨어져 나가면서 서슬이 퍼런 검이 나타났다.
소주성에서 삼석 대사는 검으로 긴 거리를 절단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절단하려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검을 아래로 비스듬히 휘두르자 소리 없이 그의 오른쪽 다리가 잘려나갔다.
야수의 속박에서 벗어난 삼석 대사가 날개를 잘린 큰 새처럼 다시 힘차게 날아오르더니 사냥하는 매처럼 상대 진영으로 파고들었다. 검이 차가운 빛을 번쩍이자 순식간에 사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세 명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여러 명이 가슴을 베이면서 숲 안은 피범벅이 되었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삼석 대사를 피해 나무 위로 도망친 젊은 궁수가 화살을 쏘았다. 그는 상대방이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이고 다리를 잘라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과연 무시무시한 위력을 내뿜던 검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여러 명의 궁수를 해치우던 삼석 대사가 멈춰 섰다. 독에 중독된 데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피를 많이 흘린 그는 장검에 기대고 서서 마지막 숨을 토해냈다.
경묘 2제사가 세상을 떠났다.
* * *
궁수들이 둘러서서 삼석 대사의 죽음을 확인했다. 이들은 군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에도 여러 명이 포위해······ 경묘 2제사를 잔혹하게 죽였다는 사실에 괴로운 모습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마음이 동요하는 기색도 보였다. 이들은 계략에 걸려 사지에 몰린 삼석 대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다리를 자르면서까지 싸웠던 모습을 생각하면 두려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장을 깨끗하게 수습한 뒤 자네들 진영으로 돌아가게.”
젊은 궁수가 냉담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정한(丁寒) 자네가 책임지고 상황을 정리하게.”
군인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숲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들은 위장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뒤 진영으로 돌아갔다.
447화
한편 숲에서 나온 젊은 궁수는 일반 백성들의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대열을 따라 진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굽이굽이 산길을 빠져나온 그는 경도로 가는 관도를 찾아 마주친 마차를 얻어 탄 뒤 상인과 함께 이야기하며 경도로 들어갔다.
경도성에 들어온 이후에는 채소죽을 두 그릇 먹은 뒤 길에서 바람개비를 하나 서서 남성 대로를 지나 구석진 작은 골목에 들어섰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찻집 문 앞을 지나치던 그가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갔다. 한동안 차를 마시고 해바라기 씨앗을 까먹으며 이야기를 듣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변소로 갔다.
변소 뒤 담장으로 나온 그는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어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 저택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안에 구조를 훤히 알고 있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가 책상 앞에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책상 아래에 살며시 드러난 작은 발을 바라보며 그가 보고했다.
“마마, 제거했습니다.”
“고생했네.”
경국 장 공주마마 이운예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일반인들과는 다른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그녀의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젊은 궁수는 삼석 대사를 죽일 때 보였던 냉정하고 무정한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장 공주의 눈을 직접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조심히 장 공주 옆에 섰다.
“삼석 대사는······ 참 안타깝게 되었어.”
장 공주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다가는 폐하께서 우리를 의심하실 거야. 지금처럼 몸을 사려야 하는 상황에서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려 한다면 제거하는 수밖에는 없지 않겠어?”
젊은 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일들은 윗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고 자신은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장 공주가 그를 힐끗 보고는 웃으며 물었다.
“연 도독을 따라 북방으로 가지 못한 데 불만이 있는 건가?”
젊은 궁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계시는 북방에서는 매일 술 마시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데, 경도에 있는 것보다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장 공주가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짓더니 두어 마디 말을 더 나눈 뒤 그를 서재에서 내보냈다.
장 공주가 이 이름 없는 저택을 찾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이곳 서재에서 생각에 빠지는 걸 가장 좋아했는데 가끔은 너무 빠져서 멍하니 넋을 놓을 때도 있었다.
‘군산회라?’
그녀의 입가에 자조 섞인 미소가 보였다. 그녀가 어렸을 때 조직한 군산회의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경국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황제 오라버니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대신에 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면 눈엣가시인 관리를 죽이거나 세력을 지나치게 키운 집안의 가산을 몰수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었다.
비록 황제 오라버니는 군산회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군산회는 묵묵히 북제와 전쟁이나 동이성과 경쟁에서 암암리에 영향을 끼치며 경국을 도와왔다.
그러던 군산회가 언제부터 변하기 시작한 것일까? 군산회의 취지가 자신에 의해서 상당히 변한 건 사실이었다.
장 공주의 얼굴에 서글픈 기색이 비쳤다. 그녀의 머릿속에 멀리 강남에 있는 범한과 황실 금고, 감찰원, 그리고 황제가 2년 동안 보인 의심과 의중이 떠올랐다······. 자신의 헌신을 황제 오라버니는 과연 무엇으로 보답하려 할까?
마음이 심란해진 그녀가 눈을 잠시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군주가 자신을 용납하지 않더라도 자신은 항상 스스로를 아껴야 하며, 이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원 선생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 * *
같은 시간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숲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주변에 은은하게 감도는 옅은 피비린내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싸움이 있었다는 흔적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감찰원만큼이나 군대의 현장 처리 수준도 상당히 뛰어났다.
연소을의 아들이 현장 처리를 맡긴 정한이란 사람은 모든 사람이 철수한 뒤 마지막으로 숲을 떠났다.
이상한 점은 숲을 떠난 그가 얼마 뒤, 소리 없이 다시 숲에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가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자신이 고의로 흙 속에서 숨겨둔 부러진 화살을 찾아 조심이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손에 침을 뱉고는 힘들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땅을 판 그는 깊은 땅속에서 이미 타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를 꺼내 올렸다. 삼석 대사의 시체였다. 그가 장화에 꽂혀 있던 비수를 뽑아 시체의 목뼈 마디에 넣고는 삼석 대사의 머리를 조심히 잘랐다. 그리고는 다시 시체를 땅에 묻고 낙엽을 뿌리고 풀로 덮어 흔적을 지운 뒤 마지막으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 숲을 떠났다.
그는 경도로 가지 않았다. 그가 가려고 하는 곳은 경도가 아니었다.
* * *
진원 뒷산 뒷문에 있는 아치형으로 된 나무문 앞에 늙은 종이 서 있었다.
늙은 종이 정한에게서 작은 상자와 보따리를 건네받았다. 정한이 아무 소리 없이 인사를 한 뒤 진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섰다.
어둡고 음침한 방안에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검게 탄 머리를 바라보다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 시신이 이렇게 탔는데도······ 폐하가 삼석 대사인지 아닌지 분간해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늙은 종은 소리 내어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진평평이 즐거워하니까 덩달아 즐거워진 모습이었다.
진평평이 작은 상자 안에 있는 부러진 화살을 꺼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삼석 대사도 바보 같지만, 장 공주도 참 어리석지 않은가? 이런 일에 누구를 동원하든 적당하지 않겠지만 연소을 아들에게 시키다니. 이 일로 연소을은 더욱더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되었고······ 발각되기도 쉬워지지 않았나.”
감찰원 원장 진평평은 젊은이들의 계략을 꾸미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비쩍 마른 손으로 무릎에 덮고 있는 양털 담요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몇몇 일들은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 예를 들면 그 보잘것없는 군산회 같은 것 말이네.”
늙은 종이 살며시 물었다.
“입궁하시겠습니까?”
“그래.”
“제사 대인 쪽에서 약간의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늙은 종은 20년 동안 진평평의 옆에서 심복으로 지낸 집사였기에 진평평의 일을 대부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넌지시 일러준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진평평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범한의 움직임이 너무 이른 감이 있네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게. 그 애가 정확한 정보를 파악해 일을 하게 내버려 두고, 그 애가 하길 원치 않은 일은 내가 하면 그만이니까.”
진평평은 많은 일을 범한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범한의 마음이 자신처럼 단단하고 강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창가로 다가갔다. 멀리서 은은하게 그가 모은 미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장 공주 옆에 있는 원 모사를 떠올리고는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적들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네. 다만······.”
중얼거리듯 말하던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탄식했다.
“모든 일을 안다는 건 그리 행복한 일은 아니야.”
늙은 종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어 줬다. 그는 내일 진 원장 대인이 시신의 머리와 부러진 화살을 들고 입궁함으로써 폐하의 앞에 처음으로 군산회의 존재가 드러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폐하는 결심을 내리게 될 것이다.
진 원장은 폐하의 결심이 필요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진평평은 속으로 큰일을 일으키지 않고, 황궁 안에 있는 고귀한 분들을 죽이지 않고 자신이 어떻게 평온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폐하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황궁과 조정의 모든 사람이 최근 며칠 동안 황제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폐하가 매년 황태후를 모시고 보던 연극 공연이 잠시 중단했고, 조회를 제외하고는 관리들은 폐하를 만날 기회를 좀처럼 얻을 수 없었다. 이에 관리들은 황궁 밖에서 요 내관, 후 내관, 그리고 다시 중용된 대 내관을 둘러싸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었다.
다만 폐하가 측근 관리들을 황궁에 불러들이지 않는 걸 보면 나라에 골치 아픈 일이 터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조회에서 폐하가 각 주에서 올라온 상주문의 거의 다 반박해 돌려보내고는 대리사 정경을 엄하게 질책한 뒤 추밀원 늙은 진 대인도 한바탕 혼냈기 때문이다. 진씨 집안은 황제의 심복 중의 심복인 데다가 국방을 책임진 중신이었다. 그렇기에 평상시 문무백관들 앞에서 항상 진씨 집안의 체면을 살려주던 황제가 오늘 갑자기 모질게 대한 것이다······.
더욱 수상한 것은 폐하에게 질책을 당했는데도 경도 수비 진항과 진소 장군이 평온한 표정으로 문하중서를 출입한 것이었다. 살며시 미소까지 짓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폐하가 자신의 집안을 질책했다는 사실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관리들은 황제 폐하가 자신의 심복을 질책함으로써 경도 밖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라 짐작했다.
모호한 방법이라서 황제가 누구를 지적한 것인지 대부분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채기 마련이었다. 3일 뒤 멀리 정주에 있는 섭중이 상소를 올려 지금은 태평성세라서 정주에 많은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몇몇 병력을 폐지하겠다고 말했다.
섭씨 집안에서 자청해서 병력을 줄이겠다고 하자 황제는 담담히 허락하고는 조회나 추밀원에서 이 일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금했다. 새로 부임한 호 대학사와 서 대학사를 비롯한 조정 관리들은 이것이 작년 현공 사당에서 일어난 암살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라고만 생각할 뿐 다른 일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섭씨 집안에서 자청해서 병력을 줄인 뒤 기분이 나아진 폐하는 다시 매일 황태후에게 문안을 올리기 시작했고, 장 공주가 황궁에 들어오는 것도 허락했다. 이로써 장 공주는 다시 광신궁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가족이란······ 멀리 있을수록 위험하고 함께 있을수록 안전한 법이었다.
황제는 진원 안에 있는 늙은 절름발이의 생각도 자신과 같을 거라 생각했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절름발이 노인은 한숨을 쉬며 일이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은 이상 다른 일을 계획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씨앗은 이미 새싹을 틔워 사람의 마음속 검은 토양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독을 품은 넝쿨로 자라나 뚫고 나올 것이었다.
* * *
얼마 뒤 황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폐하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가시지 않는 걸 보고는 기분이 정말로 좋아진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천하의 군주이자 황실의 주인인 황제는 모두가 우러러봐야 할 대상이자 모두의 목숨과 미래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황실의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채 폐하가 감추고 있는 게 뭔지 알아내려 했다.
태극전과 어서방에서 시중을 드는 늙은 내관들은 황실의 수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각 궁에 물어 넌지시 알아봤지만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늙은 홍 내관의 경우 그가 가진 위엄 때문에 각 궁의 유모와 태감들도 감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편 시무룩한 모습으로 광신궁으로 들어온 장 공주는 금방 이전의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했다. 그녀는 황태후가 적적하지 않도록 매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한편 가끔은 동궁에 가서 황후와 황태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는 그녀도 황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동궁에 있는 수령 태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448화
줄곧 황제 옆에서 시중을 들어온 홍죽은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데다가 늙은 홍 내관과 친척 관계라는 소문도 있었다. 게다가 태극전과 어서방의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운 만큼 정보를 알아보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홍죽이 동궁에서 4품 수령 태감으로 부임한지도 이미 3개월이 되었다. 황후는 황제가 직접 보낸 사람이라는 것과 조심하면서도 눈치 빠른 그의 행동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당장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동안 충분한 대접을 해주며 경계하던 황후는 이번 일이 터지자 홍죽을 활용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황후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홍죽을 바라봤다. 그녀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을 줄 아는 잘생긴 내관이 약간은 마음에 들었다.
“나는 황후인 만큼 국사로 인한 황제 폐하의 근심을 나누고 싶네. 물론 국사에 관여할 수는 없네만 그래도 폐하의 마음을 위로할 탕이라도 만들어 올려 편하게 쉬게 해드릴 수는 있지 않겠는가?”
홍죽이 아첨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후 마마께서 모든 일을 세심히 챙기시는 모습이 감탄스럽습니다.”
“그러니 가서 알아보고 오게나.”
황후는 아첨하는 홍죽의 말은 무시하고 본론을 꺼내 놓았다.
“보필하기 위해 폐하의 마음을 알아보는 건 숨길 필요도 없는 응당 해야 하는 일인 만큼 자네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걸세.”
홍죽이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고 말하고 나갔다.
그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황궁을 돌아다니는 동안 끊임없이 온갖 아첨하는 말들을 들어야 했다. 황궁의 새로운 세력가로 떠오른 그에게 줄을 서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아직은 자신을 치켜세우는 말을 득의양양하게 듣고 있을 정도로 뻔뻔해지지 못한 홍죽은 난처한 미소를 재빨리 황후궁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그가 황후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했다.
황후가 귀티가 흐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근심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국고가 비어 있는 일 때문이었군. 큰 강 제방 수리가 작년 초겨울부터 지금까지 연기되어 온 것이 국고에 돈이 없어서라는 건 본궁도 알고 있었네······. 본궁이 은전을 내놓을 수만 있다면 폐하의 근심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는 게 한스럽군······.”
홍죽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황후 마마게서는 천하의 어머니이신데 이런 일에 근심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국고는 호부에서 있는 범 상서 대인이 관리해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호부라는 두 글자를 들은 황후가 눈을 순간 번쩍이더니 넌지시 물었다.
“범 상서 대인이 오랫동안 호부를 관리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해주었지······. 이번에 국고가 빈 것은 분명 수입 문제 때문일 것인데 무슨 방법을 세우는 것 같던가?”
홍죽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황후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쏘아 봤다.
“어린 것이 쓸데없이 생각이 많구나.”
황후의 질책에 화들짝 놀란 홍죽이 바닥에 바짝 엎드리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노비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어제 어서방에서······ 폐하께서 호부가 무능함을 크게 질타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말을 하던 그는 누가 들을까 겁이 나는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호부 관리가 몰래 나라의 돈을 가로채서라고 합니다. 그 액수가 상당해······ 사실을 안 폐하께서 진노하신 거라 했습니다.”
황후는 놀라 표정을 짓다가 재빨리 안색을 고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조정의 일은 본궁에게 알릴 필요는 없네. 폐하께서 요즘 기분은 어떠신 것 같던가? 황궁 안에서 자주 다니시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자신의 말이 황궁 안에서 금기시되는 거라는 걸 아는 홍죽이 사방을 살피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조심히 황후 옆으로 기어가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뭐라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황후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안색이 창백하진 황후가 입술을 떨며 중얼거렸다.
“또 그곳에 가신 것인가.”
홍죽이 겁을 먹은 표정으로 나가자 병풍 뒤에서 젊은 남자가 나왔다. 연노란색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의 얼굴 윤곽은 부드러웠고 두 눈은 맑고 또렷했다. 황궁 안에서 이런 복장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황태후, 황후, 그리고 황태자뿐이었다.
경국 황태자는 2년 전보다 훨씬 건강이 좋아져서 백지장 같았던 얼굴에 혈색도 많이 돌아와 있었다. 이건 그가 남녀 일로 정력을 너무 소모하지 않도록 황후가 엄격하게 관리한 덕분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도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이 마주한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 날이 갈수록 세력을 키워가는 형제들에게 압박감을 느끼면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과거 황태자는 2 황자를 최대의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2 황자가 범한에게 처참하게 당한 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조력자라 여겼던 범한이 부황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범한은 부황과 요녀라 불리는 섭가 여사장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동궁과 섭가는 풀 수 없는 원한 관계였으므로 황태자는 자연스럽게 멀리 강남에 있는 범한을 경계하게 되었다.
범한의 신분이 밝혀진 상황에서 황태자가 황위에 오른다면 범한의 끝이 좋을 리 없었다. 마찬가지로 만일 범한이 이보다 더 세력을 키운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지 못하게 할 게 분명했다.
“어마마마, 호부의 일은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병풍 뒤에서 황후와 홍죽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황태자가 말했다.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황후가 대답했다.
“홍죽이란 태감을 얼마나 믿어도 될까요?”
“7할 정도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후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홍죽은 원래 어서방에서 폐하를 모셨던 사람이니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지금 비록 동궁에 있지만 두 단계나 승진해 수령 태감이 되었으니 벌써 작년보다 힘이 강해진 셈이지요.”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일 범한이 홍죽에게 뇌물을 준 일을 부황께 말하지 않았다면······ 홍죽이 미움을 받고 쫓겨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황궁 사람들은 모두 홍죽이 감찰원 제사 범한에게 미움을 받는 바람에 어서방에서 쫓겨난 거라고 알고 있었다. 그 일을 떠올리던 황후가 한숨을 쉬었다.
“폐하의 태도를 보면 홍죽이란 태감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만 본궁은 이 일을 보이는 대로 믿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황태자도 같은 생각인지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했다.
“홍죽이 범한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이전에 황궁 태감과 궁녀들이 홍죽이 그 일로 분통해 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부황께서······ 홍죽을 이용해 저를 감시하고 계실 수도 있지만 지난 반년 동안 행동을 조심하며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괜찮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황후의 봉황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폐하가 화를 내신 이유가 정말 호부 때문이라면······ 호부를 조사해야겠지요. 그렇게 되면 범건도 더는 호부에 있을 수 없을 겁니다. 범한이 강남에서 황실 금고를 장악하고 범건이 경도에서 호부를 차지하고 있는 건 저하의 앞날에 좋을 게 없습니다.”
황태자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항상 부황의 훈계를 되새기며 부황께서 원하시는 일만 하려 하고 있습니다.”
황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좀 있다가 광신궁에 가서 저하의 고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장 공주가 언급되자 순간 수상한 눈빛을 짓던 황태자가 당장 표정을 바로 고쳤다.
“고모께 나서 달라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황후가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장 공주와 가깝게 어울릴 생각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이번에 장 공주를 황궁에 들어와 살라고 한 이유도 가까이에서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황궁에 있으니 조정 관리들과 연락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폐하의 일 처리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상당히 교묘하고 매섭습니다. 이 점은 저하도 배우셔야 합니다······. 장 공주는 최근에 움직이고 싶어도 자유롭지가 않은 상황임이 분명합니다.”
명의상 국모인 그녀가 고소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황실 안에서 장 공주의 역할이 너무 두드러져서 황후인 자신의 풍모가 가려지는 것에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물론 황제가 장 공주를 갈수록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장 공주에게 알릴 게 있어 가는 겁니다.”
황후가 한숨을 쉬며 황태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장 공주와 둘째의 관계는 잠시 잊어버리십시오. 더는 이전 일을 떠올리며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호부를 조사하는 일에 대해서는 제가 합당한 사람을 찾아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눈에 서늘한 독기가 드리웠다.
“제 집안은 비록 멸문지화를 당했지만, 조정에는 아직 몇몇 사람들이 숨어 있습니다. 범건은······ 국고의 돈을 강남에 보내면서 천하 사람들의 시선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설마 폐하의 눈을 가릴 수 있다 믿은 걸까요? 폐하께서 범한은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이런 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걸 허락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황태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국고의 은전을 강남에 보낼 정도로 범건의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단 말인가? 하지만 어머니가 자신감 있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어머니와 고모가 호부를 무너뜨릴 만한 정황을 포착한 건 분명해.’
황후가 생각에 빠진 황태자를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호부의 일이 끝난다면 범한도 더는 제멋대로 굴지 못할 테니 세상도 조용해질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폐하께서는 저하가 함부로 움직이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와도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이겠지요. 어쨌든 저하가 황태자라는 건 천하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
황태자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 자리는 가장 무능한 아들이 맡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황후가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역사를 보면 저하보다 자질이 부족했던 황태자 중에서도 즉위에 오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뭘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용상에 오를 때까지만 참으면 이후부터는 저하의 세상이 열릴 겁니다.”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매섭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저하에게 용상을 물려줄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황태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둘째가 세력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셋째가 강남에 내려가서 범한과 함께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 황궁 안에서 암암리에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 일이었다. 나이 어린 3 황자가 교육을 핑계로 흠차 대인을 따라 강남에 내려간 것에 대해 사람들은 그 교육이 혹시 제왕의 자질을 기르기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 이에 3 황자의 생모인 의 귀빈도 자연히 여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지만, 줄곧 아무 말 없이 조심히 행동할 뿐이었다.
황후가 부릅뜬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아직 젖내도 다 가시지 않은 아이까지 무서워하다니. 앞으로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황태자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저는······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부황께서 제게 황위를 물려주실 마음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하께 황위를 물려줄 마음이 없었다면 진작에 폐위시켰을 겁니다!”
황후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소리치자 황태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부황께서는 기회를 찾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황후가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뒤 평정심을 회복한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하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저하는 다른 황자에게는 없는 가장 큰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하께서는······ 아직도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