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17
457화 큰 눈덩이를 옮기는 일 (1)
호부는 상당한 액수를 강남에 보내기는 했지만 실제로 사용된 돈은 아주 적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돈은 강남을 한 바퀴 돈 뒤 호부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러니 범건은 황태자와 이부상서가 조사를 통해 강남과 관련된 실마리를 찾아낼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범건은 그들이 더 넓고, 더 깊이 조사하기를 바랐다. 그는 강 정비 사업을 담당하는 관아와 관련된 내용을 일부러 누설해 두었다.
황제는 내쫓을 정도로 큰 잘못을 하지 않은 관리를 물러나게 하고 싶으면 항상 소문과 여론을 이용했고, 그럼 해당 관리는 압박을 이기지 못해 물러났다.
간사한 재상이라 불린 임약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범건은 폐하의 계획을 따르고 싶지도 않았고, 이렇게 일찍 담주로 돌아가 퇴직 생활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호부가 조사를 받는 걸 내버려 두었다. 그는 호부를 들쑤시고 조사하면 할수록 자신의 청렴함이 더욱 두드러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정탁의 입을 통해서 용상에 앉아 있는 남자를 자극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범건이 충성스러우면서도 어리석고 멍청하지만 지금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믿어주기만 한다면 범건은······ 계속 썩은 내 풍기는 부패한 경도에서 자애로운 눈빛으로 아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모두 통제한 것인가?”
범건이 편지를 찬찬히 읽어 본 뒤 물었다. 멀리 강남에 있는 아들이 보낸 편지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의 앞에 서서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공손히 대답했다.
“정탁은 원굉도처럼 자식도 여자도 없으니 아마 감찰원 사람일 겁니다.”
범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원굉도가 정말 감찰원 사람이 맞는 건가? 재상 집안이 쉽게 무너진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감찰원의 힘이었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하지만 원굉도와 달리 정탁은 조카가 있습니다. 부하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조카가 그의 친아들이지만 황궁에서 아들을 볼모로 위협할까 봐 조카로 키운 거라 합니다.”
놀란 범건이 눈썹이 치켜세우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좋네,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약점을 알아냈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옷 입은 남자는 양손을 편하게 늘어뜨린 채로 서 있었는데,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길게 굳은살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만약 범한이 이 장면을 봤다면 고달을 비롯한 호위들이 오랜 시간 장검을 연마하면서 생긴 굳은살과 무척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범건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를 따라 일을 하면 능력을 뽐낼 기회가 없을 거네. 그래도 나를 원망하지는 말게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11년 전 경계를 허술하게 하는 바람에 황태후를 모시던 궁녀가 미치광이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대인께서 옛정을 생각해 몰래 구해주셨지요. 대인의 은혜가 없었다면 저는 이미 땅속에 묻혀 구더기 밥이 되었을 겁니다.”
범건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그 호위답지 않은 방정맞은 성격 때문에 폐하가 자네를 제일 싫어했던 거야.”
웃음을 거둔 범건이 냉정하게 지시했다.
“정탁을 계속 감시하고 필요하면 그가 조카로 키웠다는 아들의 오른손을 잘라 침실에 넣어주게.”
* * *
호부 조사가 대대적인 진전을 얻자 3사 관리들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더욱 깊이 조사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며 점차 자신만만해진 황태자는 가끔 호 대학사와 대화를 하던 중에도 무의식적으로 몇 번이고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호부에 숙청의 바람을 불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감개무량한 것인지 아니면 갈수록 짙어지는 봄날에 감개무량한 것인지 모를 뿐이었다.
호부의 조사는 눈덩이가 굴러가면서 갈수록 커지는 것처럼 계속 커졌다. 북쪽 창주에 주둔하고 있는 수만 명의 장군과 군사들이 입는 겨울 솜옷 제작 비용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을 시작으로 오래된 장부들에서 여러 문제가 발견되었고, 그 모든 것들은 경도 호부 관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부를 조사할수록 호부의 문제는 갈수록 커졌다. 호부 관리들이 주도면밀하게 숨겨왔던 경국의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모든 관리가 볼 수 있게 드러났다.
이에 조사를 맡은 관리들이 입궁해 상황을 보고했고, 조사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호 대학사마저도 호부에 칼바람에 부는 걸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범건이 당장 사직하지 않는다면 조정의 시선은 범한에게까지 향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범건이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호 대학사를 비롯한 문신들은 갈수록 드러나는 호부의 문제에 놀라기는 했지만, 조정에 큰 풍파가 생기는 건 원치 않았다. 더욱이 그들이 가장 원치 않는 건 힘의 균형이 무너져 한쪽 세력이 우위를 차지하는 거였다. 그래서 이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범씨 집안에 자신들의 호의를 전달했다.
그들이 보인 호의는 바로 범 상서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만 한다면 호 대학사와 서 대학사가 책임지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대신들의 일방적인 바람을 담은 호의에 대해서 근 30년간 황제를 보필해왔던 범건이 보인 대답은 고집스럽기 그지없었다. 범씨 집안은 암암리에 전달된 호의에 대해서 감사를 표시할 뿐 범건 개인의 대답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입궁해 폐하 앞에서 통곡하거나 상서를 올려 사직을 청하기는커녕 여전히 병을 핑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범건이 병을 핑계로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관리들은 범 상서가 꾀병에 걸렸다는 걸 눈치챘다. 황제도 굳이 황궁 어의나 늙은 홍 내관을 범씨 집안에 보내지 않았다. 황제는 이 일로 범건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범건이 병을 핑계로 서운함을 드러내는 걸 묵묵히 용인해주고 있었다.
한편 조사가 며칠이나 계속되는 동안 황태자는 호부에 앉아 관리들이 조사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봤고, 호 대학사도 직접 모든 걸 지시했다. 조사하는 사람이나 조사를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힘든 과정이었다.
그러던 중 호부 조사에서 예상치 못한 진전이 있게 되었다. 장부에 기재된 금액과 금고에 있는 은전의 액수가 맞지 않았는데 액수도 상당했다. 사라진 은전은 네 가지 방향과 네 명의 볼품없는 관리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구체적으로 관련된 사람과 일이 드러나자 황태자가 눈을 반짝였다. 그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연루된 관리들의 상사를 하나하나 조사하다 보면 마침내 범건을 쓰러뜨릴 수 있겠지? 그리고 강남 쪽을 더 파본다면 공개 입찰로 2천만 냥을 벌어 큰 공을 세웠다고 으스대는 범한에게도 상응하는 죄를 물릴 수 있을 거야!’
반면 호 대학사는 네 명의 관리 중에 특히 마지막 관리의 이름을 듣자 순간 눈을 번뜩였다. 그 역시 겉으로는 침착한 모습이었지만 속으로는 범 상서의 정교함에 혀를 내두르며 그동안 자신과 서 대학사의 걱정이 쓸모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젊은 황태자는 호 대학사처럼 성격이 용의주도하지 못했고 더욱이 호 대학사만큼 기억력이 좋지도 못했기에 눈앞에 있는 함정을 보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적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그는 자기 쪽 관리들에게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조사하라고 지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암암리에 장 공주와 2 황자 편에 서 있었던 이부상서 안행서도 선두에서 지휘하는 황태자를 도우며 관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호 대학사는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남몰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윽고 조사는 어떤 중요한 지점에 이르렀고 호부 관아 안에는 황태자의 득의양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태자가 손에 든 관리들의 진술서를 흔들며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호부 관리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말해라! 이 장부에 적힌 은전 40만 냥은 어디로 간 것이냐?”
봄이 절정에 이르러 날씨가 더워져서인지 대신들 앞에 가련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호부 6품 주사는 온몸이 땀에 절어 관복의 색깔도 짙게 변해 있었다. 황태자의 호통에 그가 울먹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범 상서 대인이 은전을 어디에 보냈는지 일개 관리인 내가 어떻게 알겠어!’
황태자는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는 관리를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설득했다.
“이 은전이 이동하려면 네 서명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조정의 은전이 절차도 거치지 않고 엉터리로 다른 곳에 새어나갈 리는 있겠느냐?”
압박에 못 이긴 관리가 더듬더듬 설명했다.
“강좌청리사(江左清吏司) 원외랑(員外郞)이······ 맡아 진행한 일입니다.”
호부 아래에 있는 7사는 각각 각각 5품 관리인 낭중(郞中)과 거외랑(居外郎)을 책임지고 관리했다. 그리고 강좌청리사 원외랑의 성은 방(方) 이름은 려(勵)로 호부에서 비교적 품계가 높은 관리였다.
이 관리는 다른 세 명의 호부 낭중과 같이 이미 조사를 통해 연관자로 파악한 관리였다. 그러므로 법정에서 재판한다면 호부 관리들이 더는 발뺌하지 못할 결정적인 증거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6품 주사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은 황태자가 무정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물러가서 지시를 기다리거라.”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전혀 모르는 주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울먹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방려라는 사람에게 들어오라고 하게.”
의기양양해진 황태자는 자신이 규정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명령을 내리기 전에 명실상부 총책임자인 호 대학사에게 의견을 묻지 않은 것이다.
얼마 뒤 방려라는 이름의 호부 원외랑이 들어와 주변 관리들에게 인사했다. 조금도 기죽지 않은 모습이 상황이 어떤지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방려의 얼굴을 본 황태자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방려라는 이름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명령에 따라 사람이 불러온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더구나 간사한 호 대학사와 안행서는 상황을 황태자에게 모두 맡긴 채 방관자처럼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황태자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고 있는 호 대학사와 안행서를 바라보며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앞으로 천하가 모두 내 것이 될 것인데 호부 관리들 몇 명 심문한다고 무슨 문제가 생기겠어? 지금 모양이 좀 빠지거나 동궁 체면이 상하더라도 이번에 발견한 문제를 강남과 연관시켜 범건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이런 생각을 한 그가 탁자를 ‘쿵’하고 치며 소리쳤다.
“이름과 관명을 말해라.”
황태자의 위협에 놀란 호부 강좌청리사 원외랑 방려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놀란 표정으로 황태자를 바라봤다. 황태자가 자신을 엄하게 대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아 인사하며 대답했다.
“하관은 호부 강좌청리사 원외랑 방려라 하옵니다.”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감찰원 관리가 며칠 동안 조사한 보고서와 관리의 서명이 적힌 진술서를 보고는 물었다.
“은전 40만 냥이 어디로 간 것이냐?”
방려가 벼락을 맞은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황태자를 바라봤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하, 하관은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황태자가 미관을 찌푸리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알아도 말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안색이 창백해진 방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황태자가 ‘아마도’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그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황태자가 자신을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은전 40만 냥까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