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50
491화 치기 부리기 (1)
소주와 항주는 가까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소주 백성들이 역신을 쫓아내기 위해 터뜨린 폭죽 소리까지 범한이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밀정들을 통해 이 보고가 들어왔지만 범한은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일행은 항주 서호 옆에 있는 팽씨 장원에서 묶었다. 처음 강남에 왔던 때로 돌아온 것이었다. 범한이 궁둥이를 의자에 붙일 새도 없이 물었다.
“우리 부인은 어디까지 왔는가?”
부하가 보고했다.
“조금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직 사주에 계십니다.”
범한은 불안한 마음에 순간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별말을 하지 않고 호위 일곱과 함께 말을 타고 사주로 갔다.
사주에는 황혼이 들고 있었다. 임완아 걱정에 범한은 평소 타던 마차 대신 직접 말을 몰고 사주까지 왔다. 그래서 사주에 들어섰을 때는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뒤를 따르던 부하들과 호위들은 범한보다 얼굴이 더 창백해져 있었다. 전력 질주로 달려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너무 힘들어서 말에서 떨어질 뻔하기도 할 정도였다.
밤으로 들어선 사주의 고요함을 깨뜨리며 10여 필의 준마가 곧장 모 장원 앞으로 왔다. 이곳은 강남 수채의 사주 분타로 현재는 감찰원이 점령하고 쓰는 중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수리를 거친 후에는 범한의 명의상 사저가 되어 있었다.
범한이 몸을 틀어 말에서 내리고는 문 앞을 지키던 부하들에게 안부 인사도 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 돌계단으로 올라서기 전이었다. 범한의 눈에 낯익은 이가 들어왔다. 바로 등 대가의 아내였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도련님이십니까?”
등 대가 아내의 눈에서 기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찌 오셨습니까? 아씨 마님께서는 무탈하십니다. 집 안에서 쉬고 계시는 것뿐입니다.”
범한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일정대로라면 임완아는 오늘 항주에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도 도착 시각이 늦추어졌다는 건 그녀의 신상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에 범한은 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람처럼 침대로 다가가며 동시에 손을 돌려 장풍으로 문을 꼭 닫았다.
범한이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말갛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이에 범한은 가슴이 아파 한마디 하고 말았다.
“몸이 아프면 좀 더 천천히 올 것이지.”
임완아가 방글방글 웃으며 범한을 바라보았다.
“내가 천천히 와야······ 당신이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어서 그런 거죠?”
범한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그런 경박한 말은 어디서 들은 겁니까?”
말하는 동안 범한의 손은 벌써 옥처럼 뽀얀 아내의 손목 위로 올라가 진맥을 하고 있었다.
임완아는 과거에 수년간 폐병을 앓은 터라 범한은 아내의 몸 상태가 가장 걱정이 되었다. 최근 2년 동안 범한이 세심하게 돌봐주고 또 스승 비개가 조제해 준 약을 먹기는 했어도 임완아는 몸이 약했다. 이에 범한은 아내가 오는 길에 감기라도 걸리지 않은 건지 걱정하던 터였다.
임완아의 팔목에 손가락을 가볍게 대고 있던 범한의 낯빛이 점점 무거워졌다. 특히 손이 닿는 곳에 느껴지는 감각 때문에 범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완아가 왜 이렇게 마른 거지?’
“약을 끊었어요?”
맥이 이상했다. 범한이 감전이라도 된 듯 손가락을 거둬들이며 깜짝 놀란 모습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임완아를 향한 염려와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임완아가 천천히 손을 거둬들이며 가볍게 두어 번 기침을 했다. 그리고 범한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한데 그녀의 음성에는 결연함과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요. 약을 끊었는데······. 약약 아가씨가 떠나기 전에 고하 대사가 잠시 들렀다 갔어요. 고하 대사 말로는 비 선생의 약이 너무 강하대요. 그래서 아이를 낳고 싶다면 약을 끊어야 한다고 했어요.”
임완아의 말에 범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아내가 몸이 많이 좋지 않다는 게 생각나 얼른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 비 선생은 내 스승님이에요. 어려서부터 날 지켜봐 주신 분이고, 그 약은 우리가 혼례를 올린 날 스승님께서 동이성에서 힘겹게 구해다 주신 거라고요. 그러니 강하다 한들 상호 보완 같은 걸 간과하셨을 리 없겠죠? 그리고 1년 동안 약을 먹으면서 몸이 눈에 띄게 좋아졌잖아요. 그러니 약을 끊으면 안 되는데······ 으이고, 이 바보.”
임완아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피로 섞인 미소였다. 그런 임완아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비 선생의 약이니 당연히 효과가 좋지요. 한데······ 고하 대사 말로는······.”
처가 말을 마칠 때를 기다리지 않고 범한이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고하 대사는 싸우는 데 있어서는 세계 최정상에 있는 인물이에요. 한데 약이며 병에 관해서는 나와 스승님에 비하면 손톱만큼도 모른다고요. 그런 그의 말을 듣는다고요? 차라리 돼지가 꿀꿀대는 소리나 들어줄래요.”
범한이 많이 억제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임완아는 그의 말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이에 살그머니 범한의 손을 당기며 그를 안심시키기 시작했다.
“화내지 마요. 약을 끊기는 했지만, 그래도 태의가 와서 봐줬어요. 옛날에 앓던 병은 벌써 다 나았데요. 단지 최근 들어 몸 안의 기운이 너무 세져서 몸이 약해진 거래요.”
범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침대에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그리고 임완아를 품으로 끌어당기고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당신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그러니 다른 사람 말은 듣지 말아요.”
범한의 품에서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임완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데······ 아이는 정말로 낳고 싶어요.”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한테 화내지 않을래요. 한데 이것만은 알아줘요. 그 문제는 상의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어요. 완아 몸만 좋아진다면, 아이가 있든 없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이 세상에서 후사를 낳지 않는 건 큰 죄였다. 그래서 임완아는 범한과 혼인을 올리고 1년 반이나 지났는데도 뱃속에 아무런 징조가 없어 항상 그 일을 신경 쓰느라 괴로운 지경이었다. 그런데 범한이 툭 던지듯 그런 말을 내뱉자 그녀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임완아는 마음은 복잡했다. 범한의 말에 기뻐해야 했지만 그래도 은근히 슬픔이 밀려오고 부채감 같은 게 파고들었다.
범한은 품안에서 괴로운 표정으로 있는 아내 때문에 그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이에 손으로 그녀의 미간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세상에는 바보가 많다더니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걸 여자 문제로 여기는데, 내가 사실을 말해줄게요. 아이를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부부 두 사람의 문제에요. 내가 보기엔 나에게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커요. 그러니 당신 문제가 아니겠죠?”
임완아를 위로하기 위해한 농담이었다. 한데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던 임완아는 상공이 정말 후안무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증상이란 건 입에는 담을 수는 있겠는데 도대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범한이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기 위해 한 말이란 것만 알아들었을 뿐이었다. 이에 임완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범한에게 눈총을 주었다.
“무슨 말이에요?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남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예요?”
범한이 큰 소리로 웃었다.
“누가 아무 관계가 없다고 그래요? 그러면 황궁에 있는 요 태감이나 대 태감에게 아이들을 만들라고 해봐요!”
임완아는 이번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범한이 계속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심후한 실력의 홍 태감에게도 아이를 만들라고 하면 못 한다고요!······ 그러니 아이를 낳는 일은 남녀 쌍방의 문제에요.”
임완아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발그레해진 두 뺨을 하고는 버럭 외쳤다.
“어째 갈수록 이상한 말뿐입니까!”
그러자 범한이 웃음을 멈추고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면 진지한 말을 할게요. 약을 계속 먹도록 해요.”
임완아는 범한의 말에 ‘응’,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눈은 오히려 반짝하고 빛났다. 범한이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임완아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려서였다. 임완아는 겉보기에는 항상 천진난만한데 속은 눈처럼 냉정하고 총명했다. 그래서 본인 및 범한과 관련한 큰일에는 유난히 집착하는 면도 있었다.
범한이 말한 과학적 근거는 자립심 강한 해당타타도 믿어주지 못할 말이었다. 그러니 임완아는 오죽할까.
“왜 그렇게 아이를 원하는 거예요?”
불쌍하다는 듯 처를 끌어안고 있던 범한이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이 어렸을 때 황궁에서 어찌 지냈는지 생각해 봐요. 내가 어렸을 때 담주까지 쫓겨 내려간 걸 생각해 보자고요. 아이는 길러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대로 기르지 못할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게 나아요.”
임완아가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오므리고는 침착하고 자신감 있게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그분들과는 달라요. 그러니 우리는 아이를 잘 키울 거예요.”
범한은 살짝 지친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나 때문에 아이가 안 생기는 거라면, 그냥 안 낳으면 되죠. 당신 몸이 건강한 게 훨씬 중요해요.”
임완아는 마음이 따스해지는 걸 느꼈지만 그래도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이를 낳을 거예요.”
범한이 골치 아파하며 말했다.
“이 고집쟁이!”
임완아가 고개를 들어 범한을 바라보며 긴 눈썹을 가볍게 깜빡였다.
“나는 당신 아이를 낳을 거고······. 올 1년 동안 상공이 계셨던 곳은 북제가 아니라 강남이에요. 그래서 너무 외롭기도 하고······.”
범한은 자신이 제공한 원인은 일부였지만, 그래도 듣고 있자니 진한 죄책감이 밀려들어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은 조용히 끌어 앉고 있었다. 그런데 체온 때문인지 몰라도 다시 기침이 올라와 임완아는 범한이 걱정할 걸 염려해 기침을 최대한 억눌렀다. 그러자 작은 얼굴이 너무 불쌍해 보일 정도로 붉게 부풀어 올랐다. 마음이 시큰해진 범한이 임완아의 등을 가볍게 문질러 주며 그녀를 다독였다.
“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마요. 항주에 도착하면 내가 잘 돌봐줄게요. 비개 스승님의 약은 내가 다시 자세히 분석해 보리다. 그러니까 약은 계속 먹도록 해요.”
임완아가 고개를 들어 불쌍한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범한이 침울한 얼굴 위로 흉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더 이상 의논할 여지가 없는 일이에요!”
그러자 임완아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는 범한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그의 품에 머리를 대고 문질러댔다.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임완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마를 해주었다. 범한의 손이 거치는 곳마다 천일도의 순한 기운이 파고들자 임완아는 몸이 따스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오랜 여정으로 인한 피로감은 오히려 더 명확해져 범한의 품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 버렸다.
* * *
침실에서 나온 범한은 허리를 쭉 펴 뻣뻣하게 굳은 사지를 풀어 주었다.
밖에는 범한을 맞이하러 등 대가의 아내가 나와 있었다. 그녀는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범한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내내 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도를 떠난 후 아버지 대인께서 챙기지 않자 완아가 약을 끊기 시작한 것이었다. 용감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경솔한 처사였다.
하지만 범한은 조금도 분노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완아가 자기 몸부터 챙기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 때문에 그런 것이기에 더 이상 완아를 힘들게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