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53
494화 별이 빛나는 똑같은 밤하늘 (2)
범한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고 임완아를 가볍게 품 안으로 끌어들이며 따스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생각이 너무 심후해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더라고요. 당신 어머니의 생각도 매우 거대할 거예요.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건 그분과 황제 폐하 간의 전쟁이고, 나는 그냥 변죽만 울릴 뿐이니······. 다른 건 보장할 수 없어요. 하지만 완아에게 만큼은 내가 그분을 직접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요.”
그런데 믿어도 되는 약속일까?
“황제 외삼촌께서는 줄곧 나를 예뻐해 주셨는데······.”
임완아가 속상한 고양이처럼 범한 품으로 엎어지며 유약하고 무기력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어려 있었다. 만약 장 공주에게 정말로 그런 일을 할 담력이 있다고 해도, 그리고 사후에 범한의 힘과 신분에 기댄다 할지라도 임완아는 그 어떤 것에도 연루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황족 내부에서 그녀의 신분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임완아의 한탄이 사실이란 걸 알고 있던 범한은 그냥 조용히 있었다. 혼례 후 황궁을 오가면서 임완아가 황제 아버지께 실제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범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임완아의 황궁 내 지위는 일반 군주들보다 훨씬 높았는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황제께서 가장 아끼는 외질녀를 사생아인 자신에게 시집보낸 건, 어쩌면 자신에게 주는 보상 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괜찮아요. 모두 어른들 일이에요.”
범한이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그분들끼리 알아서 하도록 둡시다.”
가볍게 한 말이었지만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1년 안에 위대한 경국의 용좌 주인이 바뀌는 게 아니라면, 황족들 중 일부는 피로 목욕을 하게 될 터. 그러면 범한과 임완와라는 이 젊은 남녀에게 또 어떤 일이 닥칠는지. 전자라면, 범한은 온 가족이 황제 폐하를 위해 순장 당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후자라면······ 임완아와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바로 이 순간, 범한은 상대방을 압박해 그들이 먼저 손을 쓰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미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자신과 자신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늙은 절름발이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에게 좋은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범한이 임완아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창밖으로 보이는 고요한 호수, 푸른 산, 작은 배, 버드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범한의 생각은 저 먼 경도로 날아가 있었다.
* * *
경도의 냉랭한 황궁 안. 궁녀와 내관들은 가급적 소리를 내지 않고 걷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젊은 궁녀가 웃는 소리를 내자 늙은 궁녀가 즉각 엄하게 꾸짖었다. 늦봄이 지나고 초여름이 되어 황궁 안 나무도 무성해지는 이때, 어찌하여 황궁 사람들은 아직도 여유 있게 지낼 자유조차 누리지 못하는 것인지.
광신궁은 과거 장 공주의 침궁이었다. 그런데 경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은 북제와 암암리에 소통하며 감찰원 고위 관원을 팔아넘긴 일로 경도의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 싸늘한 이궁(離宮)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 일을 알리는 글 종이를 오죽 아저씨가 온 성에 뿌려 알렸기 때문이었다.
장 공주는 신양 이궁에서 지내면서도 황궁 내 국면에 은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경도에서 직접 하는 것만 못하자 그녀는 황태후마마를 설득해 경력 6년에 경도로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다. 물론 과거의 떠들썩했던 글 종이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던 터였다.
그런데 장 공주는 경도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홧김에 강남에서의 군산회 실력을 황제 오라버니에게 드러내는 바람에 황제의 명으로 다시 황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명목은 단란하게 지내자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황제가 근거리에서 그녀를 감시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장 공주는 황궁에서 오랫동안 지냈고,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딸이고, 황후와 관계도 밀접하다보니 황궁에 있으면서도 바깥출입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몰래 해놓은 밑 작업 덕분에 그녀는 여러 사람을 성공적으로 속일 수 있었다.
물론 황제 오라버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장 공주는 출궁을 너무 자주 한다거나 대신들과 너무 긴밀히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주된 활동은 황궁에서 황태후마마와 함께 한담을 나누고, 황후마마와 함께 꽃, 새, 벌레, 물 등을 어떻게 해야 더 예쁘게 수놓을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녀가 수를 놓는 건 천 위가 아닐 수도 있었다.
* * *
강남의 정세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장 공주 이운예가 굴복할지 말지, 받아들일지 말지, 힘들어할지 말지를 떠나 어찌되었든 그녀가 십년 동안 일궈놓은 강남은······ 이미 ‘쓸모 있는 그릇’이 된 사위가 모두 접수한 상태였다.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과 삼석 대사는 죽었다. 명씨 가문은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강남 관료 사회는 범한과 설청이 힘을 합쳐 압박하고 있던 터라 큰 반발이 없었다. 장 공주가 황실 금고, 전운사, 3대 작업장에 심어 놓은 측근들은 범한에게 색출이 된 상태였다. 이에 그 관원들은 공손하게 편지를 보내는 것 말고는 범한의 대단한 위세에 눌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일으켜 놓은 백성의 분노도 이유도 없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리 먼 길에서 올라온 백성들의 혈서며 나이든 문인들의 어전을 향한 소송은 근거 없는 일이 되어 버려 조정에 조금도 위협이 되지 못했다.
“녹봉 삭감이요?”
장 공주 이운예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기다란 형태의 아름다운 눈에 조롱기를 담고 말을 이어 갔다.
“마마 말씀은, 범씨 가문에 이제 은전이 떨어진단 건가요?”
그녀 옆에는 단정하면서 화려하게 꾸민 황후가 앉아 있었다. 장 공주의 말에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범씨 가문 사람들을 아끼세요. 얼마 전에 호부 조사 때도 대충 마무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장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긴 눈썹을 청초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범건 상서는 나라에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우리 아녀자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장 공주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말해, 사실 저에게는 아들이 없잖아요. 딸을 낳기는 했어도 친하지도 않고. 그러니 아이들 일에 신경 써서 뭐하겠습니까? 그래서 가을이 되면 모후께 말씀드려 신양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황후의 심장이 ‘두근’, 하고 울렸다. 속으로는 이 여우가 또 약한 척 하며 나아가기 위해 물러나는 수를 쓴다고 욕했다. 한데 지금 상황에서 이운예가 손을 떼버리면 자신과 태자가 어찌 범한과 3 황자의 기세를 당해낼 수 있을 까란 생각도 들었다. 물론 황후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장 공주가 지금 쥐고 있는 권세를 내려놓고 떠나지는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장 공주가 이렇게 말한 건 다름 아닌 현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행동일 뿐이었다.
황후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신중한 속마음까지 꺼내놓고 말았다.
“동생은 무슨 말을 그리 하는 겁니까? 내가 국사에는 무지한 아낙이기는 해도 동생이 나라의 동량이란 건 알고 있어요. 우리 경국 조정을 위해 좋은 일을 셀 수도 없이 많이 했고······. 그런 동생이 신양으로 가다니요. 황제 폐께서 제일 먼저 반대하실 것입니다.”
지금 두 아낙은 그 의자를 둘러싸고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다만 제대로 시작하기 전이라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말할 용기를 못 냈던 것뿐이었다.
장 공주가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모후께서 연세가 더 드시니 사람들에게 쉽게 속으시는 거 같아요.”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느긋하게 생각해요.”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들고 호로록 차를 마셨다. 그러다 황후가 갑자기 장 공주를 떠보았다.
“범한이 강남에서 잘 하고 있네요.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고수가 나타나 소주성에 있는 건물의 반을 날려버렸다죠?”
검 때문에 건물이 무너진 사건은 오랫동안 은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벌써 경도뿐만 아니라 황궁에 까지 그 소식이 전해진 터였다.
장 공주는 황후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에 오만한 웃음을 내보이며 말했다.
“강호의 일인데 제가 어찌 자세히 알겠습니까.”
장 공주 뒤에 대종사가 버티고 있다면, 두 사람 간의 협력에서 황후는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야 하는지 더 명확히 알게 될 것이었다. 물론 이는 황후와 태자의 결심을 더 강화할 게 뻔했다.
그런데 장 공주가 명확히 말해주려 하지 않자 황후는 속으로 두어 번 욕을 날린 후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국모의 적막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 장공주의 눈에 순간 연민과 경멸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나눠 먹을 생각을 하다니, 대체 뭘 믿고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신양에서 장 공주의 수석 책사로 있던 황의와 원굉도는 둘 다 입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장 공주 곁에 있는 측근은 내관이었다. 한 쪽에 서 있던 내관이 장공주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자그마한 소리로 대신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설마······ 모르시고······ ?”
“호랑이에게 고기를 달라는 격이지.”
장 공주는 측근 내관이 차마 제 입으로 내뱉지 못하는 속담을 말해 놓고는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본궁이 호랑이인 게고. 황후는 내 옆에 설 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셋째가 황위에 올라 버리면 범한이 섭경미 복수를 할 텐데······. 그러면 누가 황후를 도와주겠어!”
장 공주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승건인지, 아니면 둘째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 나나 황후는 잠시 보류 중이야. 왜냐하면 황후는 이번 일이 성사되면 나를 이기지 못할뿐더러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길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
“강남?”
“더 이상 신경 쓸 거 없지 뭐.”
장 공주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내 사위가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강남으로 내려갔잖아. 그러니 강남 사람들이 적수가 될 리 없지.”
장 공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느릿느릿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크게 잘못한 거였어. 외양간 길 사건이 없었다면, 나와 범한 사이가 이 모양까지는 안 됐을 텐데······. 범한이 내 곁에 섰다면 천하에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장 공주는 내관이 대꾸할 여유도 주지 않고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 희한한 일이야. 나와 범한 사이에 그런 깊은 원한이 없는데도 우리 황제 오라버니께서 그 아이를 중용했을까?”
옆에서 듣고 있던 내관은 장 공주의 질문에 감히 대답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애초에 잘못했어.”
장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에 싸늘함과 결연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범한이 아무리 대단해도 황궁에 그 아이 사지에 실을 매달아 조정하는 이가 있을 거야. 그러니 내가 상대해야 하는 건 범한이란 꼭두각시가 아니야. 꼭두각시에 연결된 실을 잡고 있는 사람인 거지.”
* * *
광신궁에서 멀지 않은 함광전 안, 황태후가 몰려오는 졸음 때문에 눈을 반만 뜨고 있었다. 나이가 많아져서 그런지 그녀는 정신 상태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전투력과 결단력도 과거만 못했다.
“그만, 그만 하거라.”
노부인이 혐오스럽다는 듯 책을 읽어주고 있는 궁녀의 행동을 멈추도록 했다. 그리고 궁녀 손에 들린 책을 잠시 바라보고는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온통 허황된 말 뿐입니다. 그런데 민간에서 어찌 하여 그리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옆에 있던 늙은 궁녀가 비위를 맞추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황태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잠시 후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직 어린 애 아닌가······ 조금 반항하는 건 정상이야.”
그러자 늙은 궁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황태후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황후가 《석두기》를 보도록 한 이유를 그녀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녀는 범한이 지닌 원망에 매우 분노해 있었지만 황후의 행동에 훨씬 더 분노한 상태였다.
범한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황족의 자손 아니던가. 그러니 황태후에게는 그 점이 가장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