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7
017화 전수된 식칼
편지에 적힌 글자와 글자 행간에 범약약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근심이 엿보였다. 경도 저택에서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뒤로 아들을 낳은 두 번째 부인의 횡포가 갈수록 거세졌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버지인 사남 백작이 공사로 바빠서 어린 여자아이 혼자 경도에 남겨진 탓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범한은 붓을 골라 쥐고 먹물을 묻힌 뒤 잠시 고민하다 솔직하게 답신을 적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누이에게 사남 백작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적었다. 아버지가 연민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스러운 애교와 함께 어려움을 살짝 밝히되, 절대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새어머니와 교만한 동생 앞에서 엄격한 모습을 보이라고 충고했다. 순진하게만 행동하면 다른 사람에게 당하니 최소한 자신에게 반항할 힘이 있다는 걸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로 집안사람들, 특히 사남 백작의 참모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순수한 눈빛으로 친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라고 충고했다.
범한은 마지막으로 사소하지만 새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리는 잘못을 저질러 꾸중을 들으라고 말했다. 그 사실이 사남 백작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첫 번째 부인이 유일하게 남긴 딸인 범약약을 신경 쓰게 될 테니. 남자라면 누구나 보호 본능을 가지고 있는 법이고, 더구나 자신의 딸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수완을 부리려면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범한은 범약약이 영리한 아이라면 자신이 말한 뜻을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 다만 이 방법이 이전 세계에서 읽었던 연애 소설에서 차용한 방법이라는 것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편지를 보낸 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누이의 편지를 기다렸다. 괜히 나서서 누이의 상황을 곤란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두 달이 지난 뒤 범약약에게서 답신이 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도 저택에서 새어머니의 횡포가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누이의 생활이 이전보다 훨씬 밝고 편해진 모양이었다.
다만 범약약은 편지에서 왜 집안 종들과 잘 지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물었다. 범한은 그제야 엄격한 계급 사회의 귀족들은 자신처럼 종들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누이에게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걸 알려 주었다.
범한은 기억을 떠올려 《데카메론》의 이야기 몇 개를 베껴서 편지에 넣어 보내려 했다. 이전 세계의 교과서에서 권위 있는 평론가가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 속 연애 이야기가 사회 평등과 남녀 평등을 보여 준다고 칭찬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외설적인 내용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만두었다.
누이의 편지는 범한의 삶에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음을 의탁할 곳을 찾게 해 주었다. 경도에 사는 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행복의 지표가 된 것이다.
한편 멀리 떨어진 경도에서 생활하는 범약약도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편지를 통해 담주에서 지내는 오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오빠가 일반 소년과는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범한과 이런 편지를 주고받으려면 정신 연령이 상당히 높아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범약약도 영향을 받아 한층 어른스러워졌다. 편지에 적는 문장도 평범한 여자아이와는 달리 상당히 성숙해졌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편지가 왕래하는 사이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갔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요새 범한은 범약약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며 힘겨워했다. 그의 팔은 최근 몇 년 동안 상태가 나빠졌다. 부어 있는 오른팔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아프기도 했다. 가끔 오른손을 움직이기 힘들 때는 하는 수 없이 왼손으로 편지를 썼다. 그러면 사정을 알지 못하는 범약약은 오빠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필적을 바꾼 것이라 생각하고는 그 신중함에 감탄하곤 했다.
팔의 통증은 6년 전 어느 날 밤에 생긴 사건 때문이었다.
비개가 떠난 뒤 적적함을 못 이긴 범한은 어느 날 밤 몰래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평상시 영업을 하지 않는 기괴하고 수상한 잡화점으로 갔다. 익숙하게 뒷문을 찾은 범한은 돌계단에 핀 무성한 수풀을 뒤져 열쇠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범한이 뒷문으로 들어오자 칠흑같이 어두운 잡화점에 미세한 등불이 켜졌다. 코를 한번 쓱 닦은 범한은 오죽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황주를 발견하고는 미소 지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황주를 사발에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오죽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범한은 그러려니 했다. 평상시에 밥을 먹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 오죽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게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시던 범한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여섯 살밖에 안 된 남자아이가 세상을 떠도는 자객처럼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평범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죽은 범한이 마음대로 술을 마시도록 내버려 두었다. 심지어 술과 함께 먹을 안주로 냉채를 준비하기까지 했다.
비록 도수가 낮은 술이지만 많이 마시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범한이 작고 귀여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무표정하게 있는 오죽을 바라봤다.
“왜 아저씨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얼굴이 그대로예요? 조금도 늙지 않는 것 같아요.”
범한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절대 고수는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나 보네. 하지만 아저씨는 내공을 단련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저씨, 이 세상에 강한 사람은 몇 명이나 있어요? 순위는 어떻게 나누지?”
“아저씨는 순위가 몇이에요?”
“순위가 없나?”
“동이성에서 사고검법을 단련한다는 백치는 순위가 어떻게 돼요?”
“그 사람도 순위가 없나?”
“경도에 사는 누구누구의 동문이라는 섭류운은 순위가 어떻게 돼요?”
“그 역시 순위가 없나?”
취한 범한은 그렇게 자문자답을 하더니 히히 웃으며 말했다.
“말도 안 돼. 그럼 나도 단련하면 절대 고수가 될 수 있겠네.”
오죽은 범한의 자문자답을 들으며 안정된 자세로 무채를 썰고 있었다. 맹인임에도 칼질이 굉장히 빨랐고, 도마 위 무채의 굵기도 일정했다. 얇게 썰려 가지런히 놓인 무채들은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그러다 범한의 마지막 말에 오죽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범한의 옆으로 걸어가더니 들고 있던 식칼을 범한의 손에 쥐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