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9
019화 체면의 문제
왠지 오늘따라 기고만장한 주 집사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련님, 집안일은 큰마님께서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주 집사는 도련님이란 단어를 일부러 길게 늘이며 불손한 태도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범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 집사를 마주 보았다. 자신이 서자라는 사실에 원망을 품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리한 여종이 몰래 빠져나와 노부인에게 갔다. 그리고 다른 여종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사실 모두 범한의 신분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담주항 별저는 경도에 있는 두 번째 부인이 쫓아낸 사람들만 오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심복인 주 집사가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백작가 사람들은 모두 사남 백작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귀여운 열두 살짜리 소년이 아니라 경도에 있는 도련님이라 생각했다.
비록 아랫사람들이 범한을 공경하고 사랑스러워했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 두 번째 부인의 눈 밖에 날 위험을 무릅쓰고 편에 설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사가 범한의 손을 꽉 잡았다. 범한도 종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원망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계속 고분고분하게 굴던 주 집사가 왜 갑자기 이 집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경도 사남 백작 저택에서 일하던 주 집사가 외진 담주항으로 쫓겨난 이유는 경도에서 저지른 작은 실수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 집사는 언젠가는 번화한 경도로 다시 돌아갈 거라고 확신했기에 좌절하지 않았다.
사남 백작의 첫 번째 부인이 이미 오래전에 죽은 데다가 7년 전에 아들을 낳은 두 번째 부인은 집안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두 번째 부인이 좋은 배경을 등에 업고 집안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으려 하는 이때, 심복인 주 집사가 담주에 내려온 것은 범한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주 집사는 임무를 해내기 위해서 사남 백작의 별저를 신경 써서 관리하고 노부인에게도 공손하게 행동했다. 더구나 종들에게도 항상 상냥하게 대하며 다른 사람의 일에 좀처럼 참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이 외진 곳까지 오게 만든 원흉인 범한을 볼 때는 속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 집사는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을 두려워했다.
자신이 어디에 가든 범한의 미소 지은 얼굴과 맑고 투명한 두 눈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주 집사는 아름다운 범한의 얼굴을 발견할 때마다 꺼림칙했다.
주 집사가 종들에게 친절하게 지시할 때도 범한의 아름다운 얼굴은 꽃밭 사이에 숨어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 집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장부를 살펴볼 때도 범한의 얼굴은 사무실 창문에서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주 집사가 공손하게 보고할 때도 범한은 큰마님 옆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흐르자 주 집사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마치 안개 속을 둥둥 떠다니는 귀신의 얼굴처럼 눈을 감든 뜨든 범한의 앳된 얼굴이 보였다. 만약 귀신의 얼굴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으며, 어떻게 항상 자신을 지켜볼 수 있을까.
이미 정신적으로 버틸 수 없게 된 주 집사는 범한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린놈이 나한테 맞서려고 하는 것인가. 하지만 서자인 데다 어린애에 불과한데 어떻게 어른처럼 모함과 계략을 알 수 있겠어.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거지? 무엇 때문에? 심지어 나에게 모욕당한 상황인데 어떻게 미소를 보일 수 있지?’
주 집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담주에서의 일이 곧 끝날 테니 굳이 서자 놈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어.’
범한은 집안일에 신경 쓰는 자신의 행동이 주 집사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주리라는 걸 몰랐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저 경도에 있는 두 번째 부인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하지만 주 집사가 아랫사람을 훈계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리자 그런 범한도 기분이 울적해졌다. 더군다나 모호한 태도로 도련님이라고 제대로 부르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얼굴에 있던 미소도 천천히 사라졌다.
“몇 년 전에 도련님께서 여종을 쫓아낸 일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웠다고 들었습니다.”
주 집사는 범한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거리낌 없이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시니 오늘 이후로는 집안일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나에게 주제에 맞게 행동하라고 경고하는 건가?”
주 집사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해서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감히 제가 그럴 수 있나요. 마님께서 저를 담주에 보내시며 어린 도련님을 잘 보살피라 당부하셨는걸요.”
“내가 너를 야단칠 수 있다는 게 두렵지도 않나 보지?”
범한이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주 집사는 큰 소리로 웃더니 턱에 듬성듬성 나 있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비록······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어 예의범절을 배울 기회가 없었겠지만, 어려서부터 책을 두루 읽으셨으니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알고 계실 텐데요.”
주 집사는 앞에 있는 십 대 소년을 바라보며 속으로 주제에 맞지 않게 주인 행사를 하려 한다고 생각하며 비웃었다.
“허! 그렇지.”
그러자 범한은 마치 자신이 서자 신분이라는 걸 이제야 상기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돌려 떠났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여종들도 상황이 끝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범한의 손을 잡고 있던 사사의 눈이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불쌍하면서도 그가 화를 낼까 두려운 마음에 곁눈질로 슬쩍 안색을 살피던 사사는 의외로 범한의 얼굴이 평온한 것을 보고는 마음을 놓았다.
사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온 범한은 걸상 두 개를 문 앞으로 들고 오더니 하나에 사사를 앉힌 뒤 다른 하나를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주 집사는 조금 전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고, 다른 여종들도 아직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범한이 가져온 걸상을 주 집사의 앞에 놓았다. 주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주 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뭐라 말하려 할 때 범한이 걸상 위로 올라갔다. 비록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걸상에 오르니 주 집사와 키가 같아졌다.
모두가 걸상에 올라선 범한을 지켜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태연한 표정으로 오른손 손바닥에 입김을 두어 번 불고는 높이 들어 올렸다.
“지금 뭘 하시려는 겁니까?”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 집사의 입에서 침이 사방으로 분출되었다. 범한이 작은 손을 높이 들어 힘껏 휘두른 것이다!
짝! 소리와 함께 뺨을 맞은 주 집사가 땅에 쓰러졌다.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나 있고 입술은 터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은 아이에게 이렇게 큰 힘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정말 자신을 때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범한은 걸상에서 내려와 손목을 주무르고는 옆에 있던 여종이 건네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그러고는 땅에 주저앉아 얼굴을 붙잡고 신음하고 있는 주 집사를 바라봤다.
“책을 많이 읽어도 사람을 때릴 수 있어. 내가 아랫사람을 막 대하지는 않지만 네놈에게 귀족 자제의 위엄을 알려 줘야 한다면 기꺼이 때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