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90
531화 부부는 담주로 온 후 한동안 바쁘게 지냈다. 범한은 과거에 잘 알던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 때문에도 나가 놀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큰 강 위에 떠 있던 배에서 범한과 선을 넘은 여종 사사가 할머니의 주재로, 그리고 전혀 의외랄 것도 없이 정식으로 범씨 가문에 들게 되었다. 그런데 사사는 늘 범한을 시중드는 게 몸에 밴 터라 한동안은 자신의 역할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한편 사람들은 이번 일에 대해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사는 어려서부터 범한과 함께 자라 서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곳 종들은 범한이 12살 때 사사를 위해 경도에서 온 집사를 얼굴이 시뻘겋게 되도록 패준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범한에게 맞은 집사는 백작부에서 나간 후로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더군다나 범한이 경도에서 혼인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담주에 있는 노부인은 곧장 사사를 경도로 올려보냈다. 그러니 할머니의 의중이 무엇인지 누군들 몰랐을까? 그러니 경도와 담주에 있는 범씨 가문 사람들은 주인이건 종이건 할 것 없이 사사가 언젠가는 범한의 침소로 들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한데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자 백작가 여종들은 사사를 축하해주기도 했지만, 그런 사사를 끝도 없이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노부인이 사사에게 붉은색의 큰 봉투를 건네고 온화하게 웃었다. 그러자 사사는 훌쩍이며 우느라 눈이 붉게 퉁퉁 부어올라 버렸다. 그리고 임완아도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저택 대문이 자그마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범한이 사사의 손을 이끌며 몰래 문을 나선 것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복숭아처럼 퉁퉁 눈이 부어 있는 여종을 바라보며 웃긴다는 듯 말했다.
“내가 사사를 괴롭혀서 그런 건가? 아니면 다른 일 때문에?”
목이 멨던 사사는 범한을 잠시 노려보았다.
이 저택 안에서 범한에게 제일 위아래도 없이 구는 건 역시 사사였다. 사사가 새벽안개가 깔린 담주의 조용한 길을 바라보며 궁금해했다.
“도련님, 어디에 가시려는 겁니까?”
‘이것 봐라! 아직도 호칭을 못 고치다니!’
범한이 사사의 손을 잡았다. 확실히 무언가 좀 자극적인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바람을 피우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내일부터는 떳떳하게 침소로 들이게 되었으니······.
범한의 얼굴에 순간 따스한 웃음이 스쳤다.
“같이 두부 사 먹으러 가자.”
* * *
아직 새벽인 담주성은 조용하고 평안했다. 특히나 백작가 저택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데 담주는 큰 고을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 안에 있는데도 성 밖에서 들려오는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건 당연했다. 더욱이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면 어느 집에서 말구유를 비우는 소리, 물을 끓이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먼 곳에 위치한 시장은 남들보다 훨씬 일찍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선한 채소와 고기로 각 집안의 일찍 기상한 요리사와 아낙들을 유혹하기 위해서였다.
여름날 새벽이라 그런지 공기가 상쾌했다. 범한과 사사 두 사람은 조용한 성 안 거리를 따라 익숙한 채소 시장 근처까지 왔다. 범한이 갈수록 짙어지는 공기 중 냄새를 맡으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최근 2년 동안 이런 곳은 거의 와 보질 못했군.”
옆에 있던 사사가 범한을 슬쩍 쳐다보며 생각했다.
‘흠차 대인께서 어찌 채소 사러 올 시간이 나셨겠습니까.’
범한이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우리가 담주에 있을 때 시장에 자주 왔었던 거 기억해?”
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도련님께서는 언니들과 성 안을 많이 돌아다니셨지요. 언니들 대신 물건도 골라주셔서, 처음에는 많은 사람을 까무러치게 하셨다고요. 백작가로 들어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도련님께서 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지 뭡니까.”
“지금 봐도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범한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먼저 시장으로 들어가 2층으로 된 작은 건물 앞을 지나다가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주변을 두어 번 살폈다.
사사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물었다.
“왜 그러시죠?”
범한이 건물을 가리키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는 채소 보내주던 노합의 집 아니던가? 건물이 다 불타버렸다고 들었는데? 지금 누가 살고 있나?”
범한의 말에 사사도 그 일이 떠올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해 보고는 죄송한 사람처럼 말했다.
“저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어서요.”
범한은 새로 지어진 2층 건물에 관심이 갔다. 여기는 채소를 배달하던 노합과 감찰원 동산로 자객이 죽은 곳이었다. 사건 발생 후 할머니가 사람을 시켜 건물과 시체를 모두 불태워 없애 담주 백성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한 채 평범한 화재인 줄만 알고 넘어간 터였다.
범한의 낯빛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그 일은 범한이 이 세계로 온 지 12년이 되었을 때로 그에게는 이 세계에서 저지른 첫 번째 살인이었다.
* * *
시장은 시끌벅적했다.
배 위에서 어부가 작은 수레를 끌고 어판장으로 왔다. 수레 위 광주리에 담긴 신선한 은빛 물고기들은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쉼 없이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사이 어판장에 있는 사람들은 수신호로 물고기 가격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쉼 없이 수레가 오가는 통에 소상인들은 계속해서 길을 비키라고 소리를 쳐댔다. 두 번째 줄에는 수분을 가득 머금은 신선한 채소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닭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닭들은 꼬꼬댁 울어대며 악취가 올라올 때마다 푸드덕거리기를 반복했다. 서쪽 한 귀퉁이에서는 거대하고 하얀 돼지가 마지막으로 소리를 높이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채소며 먹을거리를 사러 나온 담주 백성들은 신선한 식재료를 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히 움직인 이들이었다. 담주는 풍속이 소박할 뿐만 아니라 경국 황제로부터 매년 세금 감면이라는 혜택을 받고 있었다. 이에 백성들의 삶은 꽤 괜찮은 편이었고 적어도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생활수준은 영위하고 있었다.
시장 풍경에 범한에게 경국이 제법 괜찮은 나라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무렵, 범한은 시장에서 가장 조용한 구석에 와 있었다. 그자리에서 저 먼 곳을 보니 두부 가판대를 오가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익숙한 신체의 곡선, 발갛게 홍조가 도는 얼굴, 살짝 풍만한 몸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안아 키워 준 사람인데, 왜 지금 봐도 싫지 않은 걸까?’라고 생각했다.
사사도 그 아낙을 보는 순간 기쁜 마음에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다. 한데 그런 그녀의 손을 범한이 잡아 저지시켰다. 사사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굳이 만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멀리서 봤으니 된 거야. 동아 누나의 표정을 보니 지금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니 일부러 찾아가서 귀찮게 하지 않을래.”
사사는 알 수 없었다. 몰래 집에서 나왔는데 정말로 만나지 않고 돌아가겠다고? 그냥 이렇게 멀리서 잠깐 보고 간다고?
“집에서 매월 돈을 보내주고 있어. 내 뜻으로 말이지.”
범한이 자신을 위로하듯 계속 말했다.
“그 돈이면 사는 데 문제없을 거야.”
두부를 파는 아낙의 이름은 동아였다. 과거 담주 백작가 별저에 있던 큰 여종으로 열 살 때부터 십 년 동안 범한을 품에 안고 키워준 사람이었다. 이에 그녀를 향한 범한의 감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열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다 큰 처녀가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범한은 향후 자신이 굴곡진 인생을 살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실을 찾아내 그녀를 백작부 별저에서 내보낸 후 계속해서 몰래 도와주고 있었다.
범한은 동아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가 평범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해주고 싶었다.
* * *
하지만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인생은 그렇게 쉽게 오지는 않았다. 범한과 사사가 잠시 지켜보는 사이 장정 네다섯이 동아의 두부 점포를 둘러싸더니 표정이며 감정이 격해진 상태로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러자 그의 말간 얼굴에 갑자기 싸늘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장정들은 감정이 격해져 있긴 했지만 그녀를 압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 너무 과격한 행동 같은 건 보이지 않자 범한은 폭주해 달려나가기 보다는 일단 지켜보았다.
범한이 사사에게 두부 점포 쪽으로 더 가까이 가자는 의사 표시를 했다. 저들이 나누는 말을 더 정확히 듣고, 또 동아 누나의 눈가에 드리워진 주름을 똑똑히 보게 되자 범한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암담해졌다.
“동아 이모, 우리는 지금 협박하러 온 게 아니요. 한데 돈을 안 주고 미룬 지 벌써 일 년이나 됐잖소. 그러니 이제 좀 갚읍시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주변에 물어 보쇼. 이 집에 빌려준 돈에 이자가 제일 낮을 거야. 그보다 더 낮게 쳐준 데는 없을걸.”
동아가 당황해 양손을 주물럭거렸다. 그녀의 양손은 매일 두부를 만드느라 거칠고 붉게 변해 있었다. 동아가 고개를 숙이고 난처해 했다.
“날짜를 조금 더 뒤로 미뤄주세요. 조금 더 미뤄주십시오. 우리 남편이 1년 내내 몸이 안 좋았다는 거 다 아시잖아요. 병구완을 하느라 돈이 많이 들어서 그래요.”
그러자 조금 전 장정이 동아를 두어 번 쳐다보고는 갑자기 무어라 했다.
“동아 이모, 어째 이리도 막무가내요?”
동아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헤헤헤 웃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일단 시장 관리자가 당신한테서 돈을 제일 적게 가져가는 거 내가 다 알고 있수다. 그리고 우리 형님께서도 당신한테는 이자를 과하게 물리지도 않았고······. 시장 사람들이 당신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데 왜 그런지 알아요? 옛날에 백작가에서 일했으니까! 겉으로는 쫓겨난 거였지만, 우리 담주의 나이든 분들이 모르는 줄 알았소? 범씨 가문의 도련님께서 당신을 제일 예뻐해 그런 거 아니요! 어렸을 때 매일 두부 가판대에서 같이 놀아줘서!”
장정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범씨 가문 도련님 체면을 봐서 모두 당신을 무시하지 않은 거라고······ 한데······.”
그가 벌컥 화를 냈다.
“갚아야 하는 은전 양이 많은 것도 아닌데, 그냥 백작가로 가서 노마님께 몇 마디 하구려! 설마 그 어르신께서 안 도와줄 거 같아 그러오?”
동아는 입술을 지긋하게 깨물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내심에 한계가 온 사내가 소리쳤다.
“당신이 노마님께 감히 말도 못 꺼낸다고 해도, 여기 사람들은 담주부에서 있던 그 일을 전부 안다고! 그리고 범씨 가문 도련님께서 어엿한 흠차 대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셨으니,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 올 거 아니야! 그러면 당신네 가족은 그날로 신세 고치는 거라고! 그러면 그깟 은전 따위 별거 아니지 않아?!”
동아가 불쑥 고개를 들고 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일이니 그 댁까지 찾아가서 소란 피우지 마세요. 당신에게 빌린 돈은 천천히 어떻게든 갚을 테니······. 호 대형께서 2년 동안 돌봐주신 점은 저도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는 말이었다. 장정은 감히 동아를 위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말을 빌미로 돈은 벌어야겠기에 벌컥 화를 냈다.
“당신이 백작가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했으니, 나도 그냥 있을 수만은 없지. 내가 받아가야 할 은전을 오늘 안으로 당장 가져와!”
범한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즈음 되면 모든 게 명확해져서였다. 동아의 남편은 병환 중인 거 같았다. 그런데······ 범한이 별저에 부탁해 놓은 돈이면 충분했을 텐데. 동아 누나의 표정을 보니 2년 동안 보내준 돈을 쓰지 않고 직접 두부를 판 돈으로만 힘겹게 버텨오고 있는 것일 수 있었다.
이제 굳이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범한에게는 사태가 심각해진 후 등장해 어르신다운 풍모를 보여주는 이상한 취미도 없었다. 물론 지금 담주에서 자신이 제일 큰 어르신이 되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