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91
532화 오늘 담주에 두부가 없는 이유
범한이 사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의 뜻을 알아차린 사사가 급히 두부 점포 앞으로 갔다. 그리고 장정들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얼마나 더 필요한가?”
갑자기 등장한 여인 때문에 장정들은 순간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사사는 오늘 외출하면서 일부러 치장을 하고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부잣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그녀의 의상이며 장신구는 값비싸고 귀한 것 일색이었다. 이에 안목이 날카로웠던 장정들은 내력이 심상치 않은 여인임을 직감하고 바로 헛기침을 하고 공손하게 나왔다.
“은전 열 냥입니다.”
말하는 동안 장정들의 눈동자는 두부 점포 주변을 훑고 있었다.
한편 동아는 사사가 두부 점포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놀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유감스럽다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장으로 보이는 장정이 두부 점포 옆에서 공자 하나를 발견했다. 딱 보기에도 눈에 띄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두부 점포 동아의 내력과 앞에 나타난 꽃처럼 아름다운 낭자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니, 그는 공자의 신분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이에 장정이 서둘러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열 냥이 맞습니다. 이자는······ 감히 받을 수 없지요. 오늘 낭자께서 직접 나서주셨으니, 이자는 모두 제하겠습니다요.”
사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동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언니, 액수가 맞아요?”
그러자 놀라 얼이 나가 있던 동아가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사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범한의 심중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장정들을 향해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봐도 여러분은 우리 언니를 감싸주려는 것 같네요. 우리 공자님을 대신해 내가 대신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겠네요.”
사사는 말하는 동안 소맷자락에서 자그마한 은표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장정들에게 건네며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중에 이 가게 좀 잘 보살펴 주세요.”
은표를 받아든 장정이 은표의 액수를 쓱 살폈다. 20냥이란 액수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얼른 물러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두부 점포 뒤쪽에 있는 웃는 것도 화난 것도 아닌 젊은 공자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고 이렇게나 많이 주시다니. 당연히 돌봐드려야죠. 당연히 그러겠습니다요.”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뒤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일행을 데리고 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범한 곁을 지나칠 때는 허리를 깊이 굽혀 살살 기듯이 지나갔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두부 점포로 다가갔다. 그리고 여전히 못 믿겠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동아를 향해 원망하듯 말했다.
“돈이 있는데도 안 쓰다니. 대체 얼마나 고리로 돈을 빌려 쓴 거지?”
그러자 동아가 억지로 웃으며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자그마하게 말했다.
“도련님, 어찌 예까지 행차하셨는지요?”
범한이 화를 냈다.
“몇 년 전에도 그 말만 하더니, 지금도 똑같은 말인가? 자네는 내 사람이네. 그런데도 내가 찾아와보면 안 된다는 건가?”
옆에 있던 사사가 입을 막고 웃으며 거들었다.
“조금 전까지 저기에 서 있기만 하고 안 온 게 누구시더라?”
말을 마친 사사가 동아 곁으로 다가가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당황한 동아는 옷 앞자락에 황급히 손부터 닦은 후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범한은 동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녀의 눈가에 생긴 주름을 자세히 살폈다. 세월이 무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젊은 아낙의 얼굴에는 아직 세월의 흔적이 깊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단지 평소 집안일과 장사를 하면서 생긴 피로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높은 지위를 누리며 부유하게 지낸 사사가 옆에 있어 비교되다 보니 그녀로서는 무언가 불편한 것 같았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두운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딸아이는?”
“집에서 제 아비와 있습니다. 아비가······ 몸이 많이 안 좋아서요.”
동아가 잠시 범한의 표정을 살피고는 따뜻하고 친근하게 웃어 보였다. 동아는 범한을 아기 때부터 안아 키운 사람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범한의 기분을 잘 알았다. 이에 범한이 지금 무엇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건지 알아차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도련님께서 보내주신 돈은 함부로 쓸 수 없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잘······.”
동아가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범한이 화를 내며 손을 휘릭 휘두르며 말을 가로챘다.
“너희 집에 가서 얘기하자꾸나!”
그러자 동아가 자신의 두부 점포를 잠시 쳐다보고는 어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했다.
범한이 크게 화를 냈다.
“이딴 낡아빠진 가게에 신경을 쓰긴 뭘 써! 옛날에 나와 틀어져 놓고 어떻게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겠어! 계속 나를 따랐다면 이런 더러운 일은 안 당했을 거 아니야!”
범한이 화를 내자 동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에 사사가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이끌며 시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범한이 두 사람 뒤를 따라 두부 점포에서 나왔다. 한데 시장 사람들이 쳐다보자 싸늘한 눈으로 주변을 노려보다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두부 두 모를 손에 받쳐 들고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범한이 사라지자 시장 전체가 끓는 솥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장사하던 사람들 모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놀라움과 흥분에 빠져든 것이었다.
흠차 대인이 시장에 오시다니.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과거의 여종과 만나다니. 그것도 두부 파는 미인이라고 알려진 사람을 말이다.
“봤는가? 내 말하지 않았나······ 작은 범 대인은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분이라고 말일세. 담주로 돌아오셨으니 당연히 동아 누나를 만나러 오셔야겠지.”
그러자 누가 혀를 끌끌 차며 탄식했다.
“흠차 대인일세. 얼마나 높은 자린지 아는가! 그런 분이 옛 여인을 그리워한다고?”
그러자 또 누군가가 험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사 누님까지 온 거 못 봤어요? 헛소리 좀 작작하시죠. 안 그러면 백작부에서 그쪽들을 호인들에게 던져 버릴걸요!”
시장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와전되어 가는지는 차치하겠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만 봐도 범씨 가문의 위엄과 범한의 명성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니 두서없는 소문 따위는 더 이상 퍼지지 않았다. 다만 두부 점포에 갑자기 등장한 범한 때문에 장사를 잠시 쉬게 되었는데도 본래 시끌벅적한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오늘만큼은 담주성에서 그 누구도 두부를 먹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동아는 담주 한쪽 구석에 위치한 자그마한 집에 살고 있었다. 좁은 골목 끝에 자리를 잡은 곳이었고, 담주성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였지만 가격이 싼 집은 아니었다. 과거 범한은 반령서체로 된 신문을 필사해 내다 팔았는데 그 돈으로 동아가 시집을 갈 때 이 집을 사주었다. 당시 범한은 단호했고 동아도 11살인 도련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지금까지 이 집에서 살고 있었다.
동아의 집안 가구며 집기들은 모두 낡고 오래된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일단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한데 제법 깔끔하고 정갈하게 관리가 되어 있어 범한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두부 두 모를 돌절구에 내려놓고는 뒷짐을 지고 대청으로 들어갔다.
동아가 서둘러 차를 따라놓고 간식거리를 내왔다. 그러자 범한이 동아를 막아 세워 놓고 웃으며 말했다.
“내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그런 건 안 좋아하네.”
그러자 동아가 따스하게 웃었다.
“그때 집안사람들 모두 도련님께서 기이한 아이라 했지요. 어린아이가 간식은 마다하고 뼈나 발라 먹었으니까요.”
“그랬지. 나는 기이한 아이였지.”
범한이 탄식을 내뱉고는 말을 이어 갔다.
“두 사람만 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
사사는 긴 의자를 대충 두어 번 쓸어냈다. 그리고 범한이 그런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걸 알기에 범한에게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한데 범한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청 왼쪽에 있는 가림막을 열어젖히고는 마치 제집 드나들 듯이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약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단정한 것이 충직한 사람처럼 보였다. 한데 낯빛이 창백해 딱 보기에도 몸이 부실해 보였다.
범한이 안으로 들어가자 동아가 황급히 따라 들어왔다.
“도련님. 병자가 머무는 곳입니다. 무엇하러 예까지 들어오십니까?”
침대에 있는 남자는 동아의 남편이었다. 성은 맥씨로, 그는 방문자의 신분을 진작부터 알아챈 상태였다.
범씨 가문 도련님이 담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그는 동아와 함께 범한 도련님이 이곳을 방문하시실지에 대해 상의를 한 터였다. 하지만 신분 격차가 컸던 탓에 부부는 범한이 방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고, 이에 안심하고는 아무런 준비도 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도련님, 들어오지 마십시오.”
제법 깜짝 놀란 남자가 황급히 말을 건넸다.
하지만 범한은 웃어 보이고는 곧장 남자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후 맥을 짚기 위해 그의 팔뚝에 손을 올리며 눈빛으로 안심하라고 말했다.
문 앞에 서 있던 동아는 도련님이 남편의 병을 봐주려 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도련님이 옛날에 아무리 의서를 보셨다지만, 담주에 있는 의원이 남편은 불치병이라고 했는데 어찌 도련님이······.
동아의 남편은 너무 긴장해 안절부절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맥을 직접 짚어주고 있는 범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항간에 소문에는 흠차 대인께서 용종(龍種: 용의 씨앗이란 의미로 황제의 자식이란 뜻이다)이시라던데······ 어찌 이런 분께서 내 병을 봐주시는 거지?!’
감격에 겨운 그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실내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사사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아 뒤에 서서 조심스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 후, 범한이 손가락을 떼고 눈을 뜨고는 미소를 지었다.
“공교롭군. 폐에 문제가 있는데, 치료하기 쉬울 것 같네.”
동아 부부는 대단히 기뻐했지만 그래도 조금 못 믿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사사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둘 다 걱정 마요. 우리 아씨 마님께서도 황궁 어의도 못 고치는 폐병을 앓으셨는데, 전부 도련님께서 고치셨어요.”
사사의 말에 동아와 그녀의 남편은 기쁨을 금할 길 없었고 일 년 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아가 서둘러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았다.
범한은 동아에게 붓과 먹물을 준비시킨 후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처방전을 써 내려 가기 시작했다. 다 쓴 처방전을 두 번 상세히 살펴본 범한은 아무 문제가 없자 후후 불어 먹물을 말린 후 동아에게 건넸다. 그리고 약을 제시간에 복용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에 준 은전을 아끼지 말고 쓰라고 당부했다.
동아는 살며시 웃으며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당부를 듣지 않을 거란 게 동아의 표정에 드러나 있자 범한은 참지 못하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또 사서 고생하려는 생각이군!”
동아는 감격한 웃음만 지을 뿐, 범한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런데 오늘 하필 날씨도 덥고, 옷도 홑옷만 입었고, 또 담주에 와 걱정거리가 전혀 없어 약 상자를 안 가지고 나와 사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녁때 돌아가지. 그리고 환약 몇 알 골라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고 알려주고.”
범한이 고개를 돌려 동아의 상공에게 따스하게 말했다.
“맥신아, 이 약은 자주 먹어야 하네. 하나 담주에서는 약재를 모두 구하라 수 없으니 며칠 후 내가 경도로 갈 때 자네 가족은 나를 따라서 가야 할 걸세. 자네는 한 집안의 가장이니 먼저 자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야. 담주에서 더 신경을 쓸 것이 있는가?”
그러자 맥신아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도련님의 말뜻을 알아들어서였다. 일가족이 도련님을 따라 경도로 가면 더 이상 고생할 필요 없다는 뜻인데, 다만······. 그가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동아에게 의견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