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94
535화 담주를 떠나기 전날
담주 해변 옆으로 늘어선 높은 절벽 위. 범한과 임완아는 손을 잡고 그 위에 서 있었다. 몇 발자국만 앞으로 나아가면 천 길 낭떠러지였고, 그 아래에서는 바닷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일렁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머리 꼭대기에 있던 태양은 지면에서 봤을 때보다 더 먼 곳에 있었다. 태양은 둥근 빛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전혀 작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임완아는 숨결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얼굴은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에는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범한에게 업혀 절벽까지 오는 동안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자극적인 경험의 순간이었다. 더군다나 임완아는 이 험준하고 미끄럽기까지 한 이곳을 자신이 어찌 올라온 건지 알지 못했다. 이에 절벽 위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공포가 마비되어 두렵다는 느낌조차도 나지 않았다.
임완아가 살짝 위축된 모습으로 저 멀리 있는 담주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력으로는 담주성에 있는 민가의 형태가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임완아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차분하게 있는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자그마하게 말했다.
“······ 옛날에······ 날마다 올라왔다고요?”
“그렇다니까요.”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부터였을 걸요?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리고 여기는 나와 아저씨 빼고 당신이 세 번째로 올라온 거예요.”
임완아가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 상공 마음속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인데 자신을 데리고 올라와 줬다는 건······. 그녀의 마음속에서 달달한 기분이 솟구쳤다. 하지만 이내 씁쓸한 기분도 따라 올라와 천천히 범한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황궁에서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 상공이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았군요.”
어린 나이에 억지로 산에 올라야 했던 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당연히 누군가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겠지. 그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니. 어린 남자아이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임완아는 옆에 서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할 것 같은 남자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고생할 것까지야. 죽고 싶지 않으면 당연히 노력해야 하는 것을. 사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나는 꿀단지에서 꿀만 빠는 달콤한 인생을 살았어요. 그러니 그렇게 쉽게 고생이란 말은 꺼내지 말아요. 적어도 우리는 배를 곯는다거나 입을 옷이 없는 걱정은 안 했잖아요. 그리고 부모에게 청루에 팔려가서 기녀가 되거나 뚜쟁이가 될 필요도 없었고요.”
임완아는 옆에서 차분하게 듣고만 있었다.
“내가 겉으로 보기에 시원시원하게 굴었던 건······ 전부 그런 척을 한 거예요.”
범한이 바다 위에 드리워진 찬란한 금빛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살고, 제일 고생했고, 제일 근면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완아도 잘 알 거예요.”
그러자 임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은 혼례를 치른 후 창산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잊지 않고 두 차례씩 수행을 했다. 사실 범한 정도의 경지와 권력이면 그리 힘들게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작은 범 대인의 휘황찬란한 면만 보고 그가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며 노력했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았어요.”
범한이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스스로를 가혹하게 다루는지 아는 사람은 없고요.”
임완아는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냥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범한이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담주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 맞으며 말했다.
“사실, 이유는 간단해요······. 살아남기 위해서예요.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어렸을 때 취해 봐야 정이 깊어졌다는 걸 알 수 있고 죽어 봐야 목숨이 중요한 줄 안다는 말을 자주 했었어요. 죽어 보지 않은 사람은 죽는 게 얼마나 두려운 건지 절대 알 수 없어요. 이 세상에서 계속 살기 위해 나는 마음도 모질게 먹고, 행동도 악랄하게 해야 했고, 나 자신을 강대하게 키워나갔어야 했어요. 완아는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거에 익숙해진 상황을 알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하나 움직이려 괴로워할 때······ 갑자기 하늘이 몸을 움직일 기회를 줬다고 해봐요. 그러면 완아도 하늘에게 무한히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몸을 움직이는 데 도취 될 거예요.”
범한은 두 세계의 기억 속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임완아는 범한의 말을 알아들지 못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범한의 말간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범한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성숙하고 노력한 느낌이 얼굴에 드러날 때마다 임완아는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면서 몹시 슬펐다. 딱히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범한의 기분 변화에 따라 그녀도 슬퍼진 것이다.
눈가가 촉촉해진 임완아가 조금 힘겹게 까치발을 하고는 자기 옷소매로 범한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 * *
담주성에서의 일정은 이걸로 끝을 맺었다. 다만 담주를 떠나기 전, 범한은 할머님의 서재에서 그녀와 한동안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눈 건 있었다. 경도에서 온 소식 때문에 그 누구보다 온화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냉철했던 두 사람이 엄숙하게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서재에서 나올 때 범한의 얼굴은 살짝 무거웠다.
방으로 돌아오자 임완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난 거예요?”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조정에서 어사가 상주문을 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그리고 강남로 흠차인 내가 담주로 와서 놀았으니 많은 사람들 눈에 거슬렸을 테고요. 한데 관건은 내게 불편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는 거예요.”
“무슨 소식인데요?”
임완아는 범한이 초조해 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범한이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냥 웃음이 터져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상공을 이토록 힘들게 하는 거죠?”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연말연시에 연소을이 경도로 돌아와 주요 보고를 할 거래요. 대충 따져보니 나와 거의 동시에 경도로 들어가게 되더군요.”
연소을? 그는 경국의 정북 대도독으로 과거에는 금군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경국에서도 유명한 9등급의 강자인데······ 제일 중요한 건 이 자가 장 공주의 심복인 동시에 군에서 명망이 높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증거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그를 찍어 누를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인물이 경도로 돌아왔으니 범한은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범한은 예전에 황궁에 잠입했을 때 맞닥뜨렸던 화살 공격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 * *
임완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대전에서 무의(武議)를 다시 여시려는 거예요?”
깜짝 놀란 범한이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주며 생각했다.
‘아내가 뭔가 냄새를 맡았나 보군.’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추밀원의 뜻이래요. 군 측에서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무의를 다시 시작하자고 건의했다네요.”
“황제 폐하께서는 어찌 말씀하셨습니까?”
임완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녀도 알다시피 경국은 곧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정도의 강국이 될 터인데 이는 군의 공이 매우 컸다. 그리고 세 차례의 북벌 후 황제 폐하께서는 다음 전쟁을 위한 숨 고르기에 들어가셨고, 그사이 문치로 눈을 돌리셔서 매년 열리던 가장 중요 행사인 무의를 여러 해 전부터 열지 않고 계셨다.
“황제 폐하께서는 반대하실 리 없지요.”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원래는 잘된 일이에요. 조정에서 너무 편히 있다 보니 교주 수군도 변질된 거예요. 그러니 자연스레 군기를 다잡을 필요가 있는 거예요.”
한동안 묵묵히 있던 임완아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어쩌면······ 상공 때문일 수도 있어요.”
“나는 문관이잖아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유정강에서 범한과 2 황자는 서로 견해가 달랐다. 그때 2 황자는 황제 폐하께서 범한에게 교주 수군 처리를 맡길 거라 여겨 그에게 군사 업무와 관련한 정보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당시 범한은 극도로 강경한 ‘부황’의 생각은 오히려 그 반대일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상곤을 죽였고, 당효파를 음해했으니 군에서는 파벌을 불문하고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는 감찰원 제사를 보내 병권을 어루만지게 할 생각은 없어 보이시는데······.
임완아가 범한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공은 문관이기는 하나 그래도······ 천하가 다 아는 무공 고수잖아요.”
범한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내렸다.
“당신 뜻은, 연소을이 경도로 돌아왔으니 무의에서 내게 도전하려 한다는 건가요?”
경국 사람들은 무(武)를 숭상했다. 비록 근래 들어 그 기풍이 쇠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백성과 벼슬아치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강인함은 어떻게 해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섭령아가 황궁 별장 밖에서 작은 칼을 던져 범한에게 도전했던 것처럼 결투는 경국에서는 합법이었다. 더욱이 그 결투 장소가 대전 앞에 마련된 무의라는 장이라면 그 누구도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은 물러나고 싶었고, 이에 싸늘하게 웃었다.
“정말 유치하군. 연소을이 나와 결투를 벌이고 싶다고 하면 내가 꼭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범한에게 무공은 살인을 위한 것이지 결투를 위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살인을 하려면, 범한이 보기에 결투보다 더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결투라고? 아이들끼리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범한은 문득 경국 군 측에 치기가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임완아가 탄식하고는 따스하게 말했다.
“그 방법은 직접적인 효과가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바보 같네요······ 어머니는 연소을에게 황궁에서 당신에게 도전하라고 할 만큼의 바보는 아니실 거예요. 이기고 지는 걸 떠나 연소을도 감히 상공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을 테니까요. 황제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내 보기에는 우리가 너무 치우쳐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연소을은 정북 대도독이고, 2년 만에 경도로 돌아오는 것이니 정말로 업무 보고를 하러 온 것일 수도 있어요.”
범한은 순간 번뜩한 게 있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번에 연소을이 경도로 온 게 무의와 관련이 있다면, 이는 조정의 그 세력이 드디어 황실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러 나섰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 공주가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거지?
“만약 내가 그 결투를 피한다면 명성에 손상이 가겠네요.”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한데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체면 따위 신경 안 써요.”
거짓말이었다. 범한도 허영을 좋아했다. 만약 다른 군 측의 높은 장수가 무의에서 범한에게 도전한다면 범한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로 응할 것이다. 그리고 친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대 장수를 묵사발을 만들어 놓고 자기 이름에 금테 하나를 더 두를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연소을이었다.
범한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보았다. 자신이 상처가 다 낫고 해당타타의 천일도 무상심법의 도움도 받아 일찌감치 안정적으로 9등급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다 해도, 그 정도로 위력적인 화살을 쏘는 초특급 강자와 맞붙는 건 여전히 좋을 게 없었다.
범한 곁에는 연소을에 대적할만한 인물이 둘이나 있었다. 바로 해당타타와 그림자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두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결투에 나가줄 수는 없다는 거였다.
범한 곁에는 연소을을 가볍게 처리해줄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오죽 아저씨였다. 그런데 문제는······ 오죽 아저씨는 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범한은 돌연 이유 없이 흥분하기 시작했고, 코끝에 바다의 짠 내음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경도로 돌아간 후 정말로 연소을과 정면으로 맞붙어야 한다면, 잔재주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대체 어느 정도까지 해낼 수 있을까?
그러자 경도, 광풍과 우레, 강자, 무공 겨루기. 이런 단어들이 범한의 불안한 마음을 계속 흔들어댔다.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범한이 느닷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활짝 웃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싸우지 않을래요. 하나······ 궁금하긴 하네요. 그를 죽여 버리면 어찌 되는지 시도는 해보고 싶군요!”
그러자 임완아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