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96
537화 눈 오는 날 밤에 만난 푸른 깃발 (2)
해당타타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랑도가 북제 사절단을 데리고 소주성에 도착했을 때 범한은 해당타타가 대사형을 따라 북제로 돌아갈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이는 북제 황태후의 명령이기도 했지만······ 해당타타가 경국에 남아 있을 만한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내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그녀는 북제의 성녀이지 남쪽 경국의 공주가 아니었다. 그러니 범씨가 마련해 준 화원에서 어찌 더 머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해당타타는 자국 황제를 대신해서 경국에 와 있는 중이었다. 즉 그녀가 맡은 제일 중요한 임무는 범한이 북제 황제와 맺은 비밀 협의를 잘 이행하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와 범한의 관계에 북제 황제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북제 황제도 황태후의 뜻에 따라 작은 사고(師姑)를 귀국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범한은 해당타타의 귀국 장면을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꽃무늬 옷을 입은 촌부가 바구니를 들고 몸을 흔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원하게 소주를 떠나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해당타타가 떠났어도 범한은 북제와의 협의를 안정적으로 시행해 나갔다. 북쪽으로 가는 밀무역은 범사철과 하서비가 남과 북에서 협력한 덕에 벌써 안정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 양쪽의 통로가 뚫렸으니 황실 금고에서 생산한 물건은 계속해서 북제 국경으로 보내졌고, 물건 가격은 자연스레 시장가격보다 훨씬 싸게 형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경국 조정은 범한의 술수 때문에 암암리에 수많은 은전 손실을 입었지만······ 그래도 항주회로 들어온 은전은 적잖이 늘었다.
한데 모두 백성의 은전이니, 무엇하러 누가 갖고 누가 쓰는지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명씨 가문은 범한의 공격으로 이제는 정말로 교착 국면에 빠져 있었다. 물론 그들 수중에는 여전히 은전 몇천만 냥에 달하는 자산이 있었지만,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은 아니었다. 명씨 가문은 전답이며 사업들을 팔아 현금화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외부에서 돈을 꾸는 방식으로 변통을 해나갔다.
문제는 명청달이 큰 노마님을 목 졸라 살해한 후 군산회에서 지위를 제때 승계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에 동이성의 태평 전장에서 명씨 가문을 계속 지원해주기는 했어도 눈에 띄게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명청달은 명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초상 전장으로 달려가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범한이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명청달이 돈을 많이 빌릴수록 좋은 거야. 황제 폐하의 뜻에 따라 무력도 동원하지 않고 피도 안 보고 명씨 가문의 모든 걸 빼앗다 보니 이렇게 시간을 늘어지게 된 건데 뭐.’
범한이 고개를 들어 앞에 잔뜩 내리고 있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만족감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오랫동안 자긍심을 갖고 산데다가 강남까지 평정했으니 스스로에게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때 범한의 동공이 갑자기 수축했다.
폭설 속에서 검은 선이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검은 번개 같은 것이 하늘을 휘감은 거친 눈발 소리에 숨어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어느새 범한 앞에 나타나 있었다.
화살이었다. 그것도 검은색으로 된 화살이었다.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체내에서 있던 패도의 정기를 순식간에 왼손으로 보내 허리춤에 있던 장검을 들어 올려, 검으로 허공을 내리쳐버렸다.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날카로운 일격으로 허공을 내리친 것이었다.
그런데 검이 화살에 닿기도 전에 범한의 눈앞에 갑자기 푸른색 깃발이 나타났다. 깃발을 든 자는 머리카락을 푸른색 끈으로 묶고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깃발 아래에 가만히 서서 화살이 날아오는 걸 보고만 있었다. 영혼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던 화살은 이윽고 그 푸른 깃발의 대 정중앙에 꽂혀 궁깃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깃발 위에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철상(鐵相).’
감찰원 밀정들은 일찌감치 대응에 나선 터였다. 이미 검수 여섯이 쇠뇌를 들고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고, 또 다른 검수 몇몇은 내리는 눈을 뚫고 화살이 발사된 위치를 찾으러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푸른 옷을 입은 자를 바라보는 범한의 눈은 생각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했다.
범한이 갑자기 한마디 툭 던졌다.
“돌아가지.”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러자 숨어 있다가 쇠뇌를 쏜 자를 쫓아가려고 나온 6처의 모든 검수가 조용히 눈 쌓인 학당 앞마당으로 가 푸른 옷을 입은 자를 에워쌌다.
범한이 고개를 들고 푸른색 깃발을 바라보고는 대뜸 물었다.
“점쟁이군. 누군가가 본관을 죽이려 한 걸 예견한 건가?”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가 웃으며 말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고작 화살 한 대일 뿐인데, 어찌 작은 범 대인을 다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서 왜 큰 활잡이가 움직이지 않고 작은 활잡이가 움직인 건지 본관은 이해가 안 되는군.”
푸른 옷을 입은 자가 따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작은 활잡이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성격마저 사나워서 충동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푸른 옷을 입은 이가 계속 말했다.
“본인은 점쟁이가 아니옵고······.”
그가 손가락 두 개를 비스듬히 들어 들고 있던 푸른 깃발 위의 글자 두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본인은 성이 철(鐵), 이름이 상(相)입니다.”
“철상이라고?”
범한의 시선이 푸른색 깃발로 옮겨갔다. 그런 후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양쪽 소매를 툭 털고 학당 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밖에 그대로 세워둔 채였다.
그러자 감찰원 6처 검수들도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잠시 쳐다보고는 학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검수들은 쇠뇌를 쏜 자를 잡으러 쫓아가려 했는데 제사 대인께서 왜 저지했는지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감찰원 내부에서는 명령이 추상같은 것이라 그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푸른 깃발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대경실색한 사람 같아 보였다. 암흑 속에서 펑펑 내리고 있는 눈은 그의 어깨 위에 소복이 쌓여갔다.
참으로 이상한 광경 아닌가. 갑자기 자객을 만났는데 범한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차분하기만 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가공할만한 화살을 대신 막아낸 푸른 옷을 입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듯 상대도 않고, 그에게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꼭 닫힌 문을 바라고 있던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고개를 내저으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범 대인은 소문대로 과연 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옷을 고쳐 입었다. 그리고 매우 진중한 모습으로 학당 문 앞으로 걸어와 예절 바르게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잠시 후, 문 안에서 범한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푸른 깃발을 학당 나무문 앞에 내려놓았다. 그곳은 눈 때문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입가에 드리워진 웃음은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범한에게 인사도 않고 곧바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인께서는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거친 분이군요.”
범한은 두 손을 불에 쬐기만 할 뿐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온화하게 말했다.
“대인께서는 원래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십니까?”
그러자 범한이 따뜻해진 양손을 비비며 옆에 있는 부하에게서 술잔을 받아 두어 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찬바람이 불고 땅은 얼어붙었는데 그대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나. 본관이 그대를 안으로 들여 눈을 피하게 해준 건, 백성을 아끼기에 한 행동일 뿐. 그대를 손님으로 여겨서가 아니란 말이지.”
“본인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대인께서는 만나주지 않으셨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계속 질문을 던졌다.
“설마 대인께서는 제게 묻고 싶은 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까?”
그러자 범한이 그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싸늘하게 대충 쓱 쳐다보고는 물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내가 그대를 만나줘야 한다고 말하는 거지? 그리고 본관이 그대에게 물어볼 게 대체 뭐가 있다고 그러는가?”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지펴 놓은 불 때문에 학당의 대당(大堂) 내부가 갑자기 밝아졌다.
그는 칼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부드럽고 영롱한 눈과 살짝 위로 올라간 입술을 가지고 있어 사나워 보이기보다 도리어 친근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또 유난히 말간 얼굴을 지지고 있어서 나이가 무척 어려 보였다.
이에 범한은 살짝 넋을 놓고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 녀석 제법 잘생겼는데. 나랑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외모야.’
한편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범한의 싸늘한 태도가 의외였다는 듯 씁쓸해하며 말했다.
“대인께서는 어찌하여 이리도 단호하게 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범한이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설마 그대가 나를 위해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건가?”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대답을 했다.
“제가 오늘 밤에 이곳이 없었더라도 그 화살은 당연히 대인에게 상처 하나 못 입혔겠지요.”
이미 앞서 한 말이었다.
범한이 술 주머니를 옆에 놓고는 그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런 도움도 못 된다면 내가 그 일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면 안 되는 거라네. 이 점만은 명확히 기억하고 있게나.”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이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지요.”
범한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본관은 그대에게 빚을 진 게 없으이. 그러니 눈을 피하려거든 계속 피하고, 할 말이 있거든 하고······. 비밀스럽다거나 심도한 척은 하지 말게. 나는 그런 거는 딱 질색이라서.”
푸른색 옷을 입은 이가 어리둥절해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대인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데······.”
범한이 느닷없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대를 거둬주기를 바라는 건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또 역사적 사실이 소설로 만들어지기까지, 이런 황량한 시골에서의 만남에는 역사적으로 늘 영명한 군주와 훌륭한 신하의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무한한 이상주의의 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군주는 겸손한 태도로 어진 이를 대하고, 신하는 충심으로 의탁을 청한다는 과장된 요소가 늘 따라다녔다. 그런데 범한의 말처럼 직접적이고······ 심지어는 대놓고 제 이익만 생각하는 경우는 어쩌면 지금껏 전혀 볼 수 없었던 일일 것이다.
범한이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평등한 관계가 있을 거란 망상은 말게. 그러니 내 부하가 되려면 내 아랫자리에 서서 행동에 주의해야 할 것이야. 말이며,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태도와 생각까지 모조리 본관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지.”
범한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자네를 거둬주기 바란다면, 비현실적인 환상이나 자존감 따위는 버리게. 지금 이 세계는 누구 하나 없다고 해서 돌아가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본관은 성미가 괴팍해서 문객을 널리 거둬주는 취미 따위는 없어.”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범한이 내뱉는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에 답답한 기분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 한참 후에 씁쓸하게 웃으며 겨우 입을 뗐다.
“대인께서는 과연 기세등등하시군요.”
범한이 차분하게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본관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거든.”
푸른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할 새를 주지 않고 범한이 계속 말했다.
“만약 할 말이 있거든 하게. 그게 아니라면 구석에 가서 불이나 쬐고 있다가 눈이 멎으면 떠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