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99
540화 흰 눈, 붉은 숲, 검은 머리카락 (1)
마차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예측을 한 대로 며칠 동안 하늘에서 계속 눈이 내렸다. 눈은 많이 내리기도 적게 내리기도 하면서 점점 사람의 눈을 매혹시키고 마음을 사로잡았다.
범한 일행이 드디어 위하강의 상류인 위주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곳은 남쪽에서 경도로 들어가기 전에 만날 수 있는 최후의 주(州)였고, 성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 한데 조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고, 범한이 책임지고 있던 은전 상자는 아직 큰 강의 일부인 위하강에서 사주 수군의 보호 아래 천천히 경도로 이동하고 있던 터라 범한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에 다음 날 범한은 곧장 위주를 떠났다. 한데 범한은 이번만큼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위주에 주군 100명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위주에서는 이 거물에게 큰일이라도 날세라 당장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인원수가 늘어난 범한 일행은 북쪽으로 꼬박 하루를 더 이동한 후에야 위주를 벗어나 경도가 통치하는 영역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범한이 마차 위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의 야트막한 구릉에서 은색의 가면을 쓴 형과가 범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과가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자 5백에 이르는 흑기가 구릉의 고요함을 깨뜨리고 예리한 칼날처럼 순식간에 밀고 내려와 40리 밖에 있는 흑기 영지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이는 경국 조정에서 정해놓은 고정불변의 규칙이었다. 흑기는 황제 폐하께서 진평평에게 내려준 무적의 친위대였다. 하지만 감찰원의 초월적인 지위와 균형을 지키기 위해 흑기는 경도 관할권 내로 들어오는 게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래서 흑기는 경도 관할권 내에 ‘단 한 걸음이라도 발을 들이면 절대 용서 받지 못한다’는 철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자주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흑기 철칙만 봐도 알 수 있어. 황제 아버지는 자아도취적인 자신감 때문에 누가 반역을 하든 다 장난 취급을 하시겠지. 하지만 그래도······ 경도의 권문세족이 반역을 저지른다면 그분이 제일 걱정하고 있는 존재는 절름발이인 거야.’
물론 황제는 절름발이가 반역을 하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대비책을 마련해 둘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경도 관할권 안으로 들어오자 도로 폭이 점점 넓어지고, 산림은 덜 보이고, 행인도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보라도 갈수록 잦아들어 녹아내린 눈 때문에 도로는 진흙탕이 되었고 마차 진행에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감찰원 사람들은 이미 마음의 긴장이 풀어져 있었다. 경도에 거의 다 왔으니 감히 벌건 대낮에 암살을 시도할 자는 없기 때문이었다.
원래 소심하고 조심스러웠던 범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 측이 아무리 야심만만하다고 하더라도 경도가 개국한 이래로 그들이 경도 부근에서 감히 소란을 피우지는 못해서였다.
작은 산골짜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눈으로 덮인 상록수림에서는 눈 무게 때문에 나뭇가지에서 투둑,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은 물론 곳곳에 고드름이 맺혀 있었다.
범한이 두툼한 마차 가림막을 열고 산골짜기를 바라보았다. 산은 바위산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 멀리로 거대한 성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동물 같아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
범한이 활짝 웃었다. 경도라니. 드디어 돌아온 것이었다. 작은 활잡이 형의 정말 말도 안 되는 공격 때문에 그 여러 날을 긴장하며 왔는데. 그동안 마음 수양이 되어 확실히 담력이 강해져 있었다.
* * *
별안간 범한의 귓불이 떨리며 전방 숲에서 칼날이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가 공격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어 쇠뇌를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범한이 휘파람을 불며 손을 뻗어 앞쪽에 있는 마부를 붙잡았다. 그러자 대열 안에 있던 모든 마차가 범한의 휘파람 소리에 맞추어 제자리에 섰다.
키 작은 산에서 거대한 쇠뇌의 화살이 폭풍처럼 ‘휘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범한이 타고 있던 마차에 꽂혔다.
마차 앞에 있던 마부가 미친 듯이 소리치고는 범한의 손에서 벗어나 범한 앞으로 툭 떨어졌다.
범한이 매우 빠르게 반응하기는 했지만, 사람 팔 길이의 화살이 인정사정없이 마부의 가슴을 꿰뚫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가 솟구치고 내장이 삐져나와 마차 외벽을 더럽혔다.
화살이 마부의 몸을 뚫고 나와 그의 시체를 범한 옆에 못 박은 듯 고정시켜 버렸다. 범한이 참담한 얼굴로 벽을 쳤다. 그러자 ‘끽’ 소리와 함께 마차 가림막 쪽에서 나무판 하나가 떨어지면서 마차 칸을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수많은 쇠뇌의 화살 나는 소리가 오싹하고 질식할 것만 같이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탁탁탁탁!
마차 주변에서 촘촘하게 ‘탁’ 하고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쇠뇌의 화살이 마차 벽에 꽂히는 소리로, 목숨을 앗아 가려고 왔으니 얼른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노랫가락이었다.
순간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이 날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이 타고 있던 마차에 쇠뇌의 화살이 꽂혔다. 그중에는 강노(强弩)라고 불리는 강력한 위력을 지닌 거대 쇠뇌로 쏜 화살도 있었다. 강노 화살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아예 마차를 뚫고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펑!’,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검은색 마차가 무기력하게 튕겨나듯 움직였다. 위력적인 강노 화살 공격으로 바퀴가 산산조각나 마차가 돌바닥 위에서 통통 튀듯 움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차가 산산조각이 난 건 아니었다.
범한은 마차 바닥에 바짝 엎드려 체내 정기를 억지로 운기 해 거대한 충격을 상쇄시켰다. 하지만 옆에 있는 마부 시체 아래로 생긴 거대한 구멍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노 화살의 위력이 정말로 엄청나서였다. 자신이 타고 있던 마차 바닥을 뚫어 땅바닥의 눈 섞인 돌들이 훤히 보이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감찰원에서 특별히 제작한 마차가 얼마나 견고한지 범한은 잘 알고 있었다. 마차에는 안팎으로 나무판을 두 개나 대어 그사이에 철선으로 만든 천과 얇지만 매우 튼튼한 강철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니 황실 금고의 병 작업장과 감찰원 3처가 지혜를 총동원해 만든 마차가 아니었다면, 범한은 촘촘히 내린 우박 같은 화살 공격 속에서 일찌감치 죽었을 것이다.
범한은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화살 소리에 집중했다. 적의 최우선 목표는 범한 자신이었다. 이에 범한은 매복해 있던 적이 어떻게 감찰원이 갈아탄 마차를 알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살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짧은 시간 안에 산골짜기 안으로 쏟아진 화살의 속도를 가지고 범한의 귀가 내린 판단에 따르면, 전쟁터에서 경국 군대가 타국에서 공성전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군력이 동원된 것으로 보여서였다.
즉 성 하나를 공략할 정도의 병력을 동원해 범한 한 사람을 죽이러 온 것이었다.
강력한 쇠뇌 공격을 이리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다니. 범한은 순간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숲에 있는 적들도 산골짜기에 있는 마차가 강노의 위력적인 공격을 견뎌내 의외였을 것이다.
빗발치는 화살에 산골짜기에서는 처참한 비명소리와 말 울부짖는 소리만 가득했다. 초반 습격 때 범한이 분 휘파람 소리는 이미 감찰원 부하들 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에 감찰원 6처 검수들과 밀정들도 재빨리 기회를 틈타 마차 안으로 숨어들었다. 한데 바깥에 있던 마부와 위주에서 데려온 주군은 검수들만큼 운이 좋지는 못했다.
쇠뇌의 화살은 주군(州軍)의 몸통과 머리에 인정사정없이 꽂히는 것은 물론 말들의 가슴과 복부, 눈으로도 파고들어가 멀쩡했던 그들의 살점을 찢으며 생명을 앗아갔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100여 명의 주군은 비처럼 쏟아지는 첫 번째 화살 공격에 절반 이상이 사망하고 말았다. 말들도 처참하게 울어대며 눈 위로 쓰러졌다.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던 눈은 너무 끔찍해서 봐줄 수 없을 정도로 피에 물들어 버렸다.
곳곳에 시체, 화살, 선혈, 죽음이 있었다.
마차들은 감찰원 관원들의 최후 보루가 되어 빗발치는 화살 공격을 처참하리만큼 불쌍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마치 언제든 거대 파도에 먹혀버릴 수 있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외로운 배 같았다.
공격이 이루어진 찰나의 시간 동안 마차 안에 무수히 많은 검은색 화살이 뚫고 들어와 버렸다. 화살이 강철판마저 깊이 뚫고 들어와 있었지만 그래도 마차는 아직은 견고하게 잘 버텨내고 있었다. 한데 화살에 맞아 산골짜기에 서 있는 마차의 모습은 마치 순식간에 곰팡이가 피어난 관(棺)처럼 보였다.
* * *
숲속에서 다시 누군가가 이를 악물며 몇 차례 강노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낮게 깔린 힘쓰는 숨소리도 들려왔다.
‘슉’,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가공할만한 거대 쇠뇌에서 다시 화살이 발사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범한이 타고 있는 마차만 겨눈 게 아니었다. 총 세 발 중 한 발이 범한의 마차로 향했고, 나머지 두 발이 앞쪽에 있는 마차로 향했다.
강노의 화살이 검은색 마차를 사납게 파고들자 ‘펑’ 하며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그런 후 마차는 통통 튀며 처참하게 왼쪽으로 엎어졌다.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이기에 마차를 엎어 버린 건지.
마차에 숨어 있던 범한은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게 엎어지는 걸 느껴졌다. 강력한 진동 때문에 그는 마차 바닥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곁눈질로 사선 위쪽을 보니 날카로운 금속으로 된 쇠뇌의 화살이 마차 벽을 뚫고 무서운 속도로 파고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범한의 흉부로부터 겨우 반 척(尺)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말이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금속으로 만든 화살, 화살대에 묻어 있는 나무 조각과 쇳조각의 상태에 범한은 이 마차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직감했다.
마차는 원래 너무 무겁게 만들면 안 되는 거라 설계 당시 나무판 사이에 얇은 강철판만 넣은 것이었다. 그런데 적이 이번 습격에 수성(守城)용 쇠뇌인 강노를 쓸 줄이야. 이런 건 3처 괴물들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을 거다.
* * *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범한은 살짝 달짝지근한 공기를 두어 번 몰아서 들이쉬고는 마차가 전복되려는 찰나 아까 나 있던 바닥 구멍으로 빠져 나왔다.
골짜기에 있는 암살자의 반응은 잠시 느려져 있었다. 분명 생각지도 못한 출구로 범한이 빠져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차에서 빠져나온 순간, 범한은 발끝으로 바닥을 툭 찍은 후 몸을 억지로 계속 회전시켰다. 그리고 골짜기 빈 터에서 몇 개의 기이한 선을 그리며 움직인 후 지그재그로 걸어 골짜기 옆 숲으로 쏙 들어갔다.
슉슉슉, 십여 발의 가느다랗고 예리한 쇠뇌의 화살이 조금 전까지 범한이 있던 곳으로 날아왔다. 화살은 뒤집힌 마차 바닥판으로도 뚫고 들어가 산골짜기의 눈 진흙탕에도 파고들었다.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기 전인데 범한이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며 공중으로 몸을 띄우고는 한손으로 바닥에 놓인 바위를 쳤다. 두 번째로 빗발치는 쇠뇌의 화살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이었다.
바위가 산산조각이 났고, 사람은 사라졌고, 쇠뇌의 화살이 하늘에서 날아왔다.
* * *
범한이 숲으로 샤샤샥 들어갔다. 범한은 몸에 걸치고 있던 여우 가죽 갖옷을 손으로 끌어 당겨 벗은 후 자기 왼쪽 다리 위에 묶고 환약 하나를 꺼내 복용했다. 그리고 입고 있던 검은색 관복을 벗어 그것을 뒤집어 입었다.
그런 후 한 손에는 신발 속에서 꺼낸 검은색의 가느다란 비수를, 다른 한손에는 허리춤에 있던 칼자루를 쥐고 유령처럼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