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242
583화 천하에 적이 너무 많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황제가 차갑게 말했다.
“짐이 오늘 어사를 감찰원에 파견하게 한 이유를 너도 나중에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네 마음이 진실하다는 걸 짐도 알고 있지만 조정의 일은 사람의 마음만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범한은 둘밖에 없는 상황이라 억지를 부리며 저항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에 조용히 침묵했다.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짐은 네 심정을 알고 있고, 어젯밤에 일도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물론 네가 그만큼의 힘이 있다는 건 의외였지만.”
범한은 목구멍이 깔깔하고 메말라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경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큰 강의 제방이 아직 터지지 않았으니 먼저 물을 끌어와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게 해주려 합니다.”
황제가 아무 말 없이 범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전부 말끔히 빼낸 뒤에 나중에 다시 채우면 나중에 그 물로 제방이 다시 넘칠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이냐? 그래서 짐은 산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제방이 무너지는 그 날에야 비로소 강물은 아래로 순순히 흘러가든······ 아니면 파렴치하게 짐의 제방과 충돌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네 놈은 겉으로는 포악하게 행동하면서 마음은 항상 유약하구나.”
황제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계속 말했다.
“짐이 살면서 의도한 일은 두 가지뿐이다. 바로 천하와 계승이지. 짐이 그들의 마음을 분명히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하를 칠 수 있겠느냐? 너도 이제 더는 움직이지 말고 짐과 함께 보도록 해라.”
놀란 범한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황제가 가장 먼저 한 말은 경고의 의미가 충분했다. 담박공으로, 영원히 공야로 남아 더는 2 황자와 황태자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평안한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또한 자신이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자 더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연소을은 괴롭히지 말 거라.”
황제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연소을은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이자 용맹한 장수인 만큼 짐은 그가 이 일로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범한은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속으로 자신과 연 대도독은 절대 풀 수 없는 철천지원수인데 어떻게 이대로 지낼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 게다가 연소을이 나라에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장 공주와 너무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황제는 이러한 사실도 걱정되지 않는 것일까? 그제야 범한은 어젯밤에 늙은 홍 내관을 보내 방해한 사람이 황태후가 아니라 황제임을 깨닫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의에서 대도독이 저에게 도전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범한이 황제를 바라보며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무예를 숭상하는 나라인 경국에서는 올해 무의는 열릴 예정이었다. 만약 연소을이 범한에게 도전을 한다면 황제가 문무백관들 앞에서 범한을 황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연소을은 무의가 열리는 걸 기다리지 않고 떠날 거다.”
황제가 말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도독은 자기 아들의 죽인 게 저라 의심하고······.”
황제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죽인 것이냐?”
범한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이 일은 소신과 관련 없습니다. 소신이 어찌 대신의 아들을 암살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암살을 할 수 없다면 어젯밤에 한 일은······ 무엇이냐?”
범한이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라 말했다.
“어젯밤에 죽은 사람들은 모두 일반 사람들이니 조정과는 무관합니다.”
황제가 잠시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원대 진영에 침입한 사람은 동이성 사람이다. 그래서 짐은 그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도 알고 싶고, 연소을이 총명한 사람인지 보고 싶구나.”
범한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십삼랑아, 십삼랑아 너는 황제 폐하까지도 속였구나.’
황제 폐하는 이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게 분명했지만 범한은 어떤 상황이 초래되든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네가 연소을 문제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군대는 시끄러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황제의 눈빛이 그윽하게 변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서쪽 오랑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쪽 오랑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범한은 너무 놀라 고개를 번쩍 들고는 근심 가득한 황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너무 놀란 나머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20년 전에 황제가 병사를 이끌고 서쪽 정벌이 나서 오랑캐들을 몰살했었고, 이어서 몇 년 전에는 1 황자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가 뭉쳐 있던 오랑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다시 오랑캐가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설사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경국의 군사력이 막강하고 뛰어난 장수들이 많으므로 황제가 이 일로 군대의 사기가 불안해질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경국에서 성장한 범한은 경국이 건국 초기에 서쪽 오랑캐 서호에게 한동안 괴롭힘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경국의 큰 걱정거리였던 오랑캐 문제는 경국 황제가 지난 20년 동안 강력하게 진압 덕분에 비로소 안정화될 수 있었고, 이제 더는 사람들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황제가 범한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경국은 여러 해 계속 가뭄과 홍수, 눈 피해에 시달려 온 반면 서호 쪽은 2년 동안 날씨가 무척 좋아 풀이 자라고 말이 살이 쪘다······. 물론 별 볼 일 없는 오랑캐를 짐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너도 경국이 눈 피해를 보기 전에 북제 북쪽에 있는 오랑캐 설만이 수십 년 만에 가장 큰 냉해를 입은 사실을 알고 있겠지?”
미간을 찌푸리는 범한이 머릿속에 순간 반년 전 항주 호숫가에서 해당타타가 근심에 잠겨 이 일을 언급했던 게 생각났다. 북쪽 오랑캐 설만이 눈 피해를 당하여 소, 양, 말 등 가축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얼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북쪽 오랑캐 북만이 서쪽 오랑캐 서호나 경국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황제가 말했다.
“북제 황실은 상삼호가 상경성에 머물고 있어 북만이 남쪽에 내려올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이건 하늘이 그들을 도운 거라 할 수 있지······. 북만은 얼어 죽일 지경이면서도 상삼호가 두려워 함부로 내려오지 못하고 기련산 부근을 빙빙 돌려 활로를 찾으려 했다······. 그러던 중 북만이 반년에 거친 대이동 끝에 풀을 따라 이동하는 서호와 만났다고 하더군. 비록 20만 명 중에서 4만여 명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했지만, 눈바람을 뚫고 험한 경로를 거쳐 살아남은······ 정예병이야.”
순간 범한의 눈앞에 북만이 천막을 짊어진 말과 뼈밖에 남지 않은 양들을 몰며 눈발을 해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구름 위로 높이 솟은 기련 산맥을 헤매며 목숨을 걸고 서쪽으로 갈 길을 찾는 여정 곳곳에는 시체가 쓰러져 있고, 독수리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건 장엄하면서 참혹한 광경이자 위대한 여정이라 할 수 있었다.
“서호가 북쪽 부족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범한이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가 웃었다. 웃음소리에서는 무궁한 자신감과 거만함이 담겨 있었다.
“우리에게 이미 처참하게 당한 서호가 북쪽에서 온 오랑캐를 쉽게 받아들였을 리는 없지······ 비록 숫자로는 서호가 더 우세했지만 몇 차례 큰 싸움을 치른 끝에 결국 양측은 연맹을 결성했단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오랑캐들이 정말 연맹을 맺었다면 서호와 가장 가까이에 인접해 있는 경국이 가장 큰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군대 쪽 일을 조심히 다루려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걱정하는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던 황제가 담담히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소신의 생각은 이 정보가 극비에 속한다는 것과······ 만일 큰 전쟁이 벌어진다면 소신이······ 선봉장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환심을 사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말을 타고 신나게 초원을 달리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다만······ 조정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실현되기는 어려울 거였다.
황제가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너도 무예 고수이니 군대를 이끌고 싸워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 하지만 전쟁은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곳인 만큼 섭류운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니면 모두 난도질당할 목숨이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오랑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짐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들을 신경 써 본 적이 없다······. 다만 북만이 이동해서 북제의 걱정거리가 잠시라도 줄어들었느니 그쪽에 시선을 고정해야겠지.”
범한은 황제의 시선은 자신보다 훨씬 민감하고 빠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계에서 경국의 진정한 적은 북제 밖에 없었다. 더욱이 북만이 이동해 북제는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어린 황제가 다른 마음을 품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가 마지막으로 천천히 말을 했다.
“연소을은 며칠 안에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다······. 북쪽 어린 황제가 황태후를 설득시켜 상삼호를 다시 기용한다면 연경에서 충돌할 수도 있을 테니.”
범한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잽싸게 숨겼다.
* * *
황궁 밖. 검은 마차에 탄 범한이 자신의 미간을 누르며 몰려드는 피곤함과 오늘 황궁 안에서 들은 나쁜 소식들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황제의 말에 따르면 서호는 몇 년 동안 인구를 늘리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경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북제에서······ 상삼호가 다시 움직이는 건 달랐다.
상삼호. 범한은 이 이름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파 왔다. 그는 비록 비가 내리는 밤거리에서 벌어진 살인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천하에 명장이라 불리는 상삼호의 위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소을이 북쪽으로 간다면 과연 상삼호를 막을 수 있을까? 하물며 아들을 잃은 일로 연소을이 조정에 마음이 떠난다면 황제는 연소을이 이성을 잃고 적에게 투항할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은 걸까.
범한이 이처럼 상삼호가 다시 움직이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상경성에서 상삼호 부하들을 참혹하게 죽였기 때문이었다. 깊은 밤 담무가 ‘자신을 죽인 사람은 범한이다’라고 말한 소리가 지금까지도 북제 상경성 안에 맴돌고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상삼호가 양아버지 소은 대인을 잡고 죽음으로 내몬 것도 자신이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범한은 상삼호의 가장 큰 원수가 되었다. 상삼호는 그저 작은 역할만 맡았을 뿐인 심중을 비가 오는 밤거리에서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러니 나중에 전쟁터에서 범한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마차 안에서 비통함에 휩싸인 범한이 속으로 천하에 적이 너무 많다고 한탄했다.
황궁 안에서 황제에게 연소을을 이용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범한은 당장이라도 연소을에게 심정이 어떠하냐고 묻고 싶었다. 그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지금까지 범한은 황제에게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경국의 존망과 황제의 생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경국의 미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쏟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