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243
584화 조상과 가문을 빛낼 일
남쪽 성문을 향하던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가 마차 창문 발을 걷어 하품하며 남쪽으로 뻗은 관도를 바라봤다.
이미 오후라서 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성문을 책임지는 성문사와 방어를 책임지는 경도 수비의 병사들도 따분함을 애써 이겨내며 매일 반복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검은색 마차가 십여 명의 감찰원 관리들의 경호를 받으며 성문에 이르자 모두 화들짝 놀랐다.
하품하며 마차에서 내리는 젊은 관리를 본 사람들은 단박에 그의 신분을 파악했다. 소식을 들은 천남 성문사의 성문령 참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범한에게 앉을 걸상과 뜨거운 차를 내왔다.
범한이 사양하지 않고 꿀떡꿀떡 소리를 내며 찻잔에 담긴 차를 단숨에 마셨다.
오래지 않아 관도 끝에서 마차 행렬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지평선을 따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던 마차 행렬이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얼마 뒤 성문 앞까지 왔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마차를 바라보던 범한이 나가 맞이했다.
마차 행렬이 멈추고 중간 마차에서 고달을 비롯한 호위 일곱 명과 6처 검수가 내려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부드럽게 격려한 뒤 곧장 중간에 있는 마차에 올랐다.
발을 걷어내자 파란색 보자기를 앉고 자고 있는 임완아가 보였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과 가지런하게 늘어뜨린 앞머리가 피곤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범한이 조용히 옆에 앉아 품에 안고 있는 파란색 보자기를 빼내면서 맞은편을 바라봤다.
맞은편에 앉은 사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하신 탓에 피곤해하시다가 잠드셨어요.”
범한이 웃으며 조용히 눈짓으로 성으로 들어가자는 표시를 했다. 모두들 잠든 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마차를 몰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경도 큰길과 작은 골목을 지난 마차는 성 남쪽 조용한 거리에 있는 범씨 저택 정문에서 멈췄다.
마차가 멈추자 임완아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우람하지는 않은데도 상당한 힘이 느껴지는 팔에 안겨 있던 그녀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한 감촉에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품 안으로 파고들던 그녀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번뜩 떴다.
놀란 임완이가 벌떡 일어나자 옆에서 잠들어 있는 범한을 보았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그리운 얼굴을 보자 그녀가 천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혀를 빼꼼 내밀었다.
펑 펑 펑.
연달아 터지는 시끄러운 폭죽 소리에 범한이 잠에서 깨어났다. 욕을 중얼거리며 깨어난 범한은 안고 자고 있던 사람이 없다는 걸 발견하고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의자 끝에 다소곳하게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먼저 잠에서 깨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던 임완아는 맞은편에서 사사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고, 또 폭죽 소리에 범한도 잠에서 깨어나자 어색하고 쑥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범한이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는 한 손으로는 파란색 보자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은 뒤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느 집에서 혼인이라도 하는 건가?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임완아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범씨 집안 대문을 가리켰다.
“저도 그게 이상해요.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우리 집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때 작은 보자기를 안고 마차에서 내리던 사사의 눈에 범씨 집안 정문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붉은 등이 걸린 범씨 집안 대문 앞은 연달아 폭죽이 터지는 게 시끌벅적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사사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치며 말했다.
“도련님과 아씨 마님이 강남에서 돌아온 걸 환영하는 게 아닐까요?”
마차가 행렬이 늘어선 범씨 저택 앞은 무척이나 떠들썩한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범한이 마침 저택 문을 나가는 정탁을 발견하고는 잡아 세웠다.
“정 선생,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정택이 ‘하하’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도련님께서 오늘 담박공으로 봉해졌으니······ 무척이나 기쁜 일이 아닙니까. 각 관아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분이 축하해주러 오셔서는 대인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상과 가문을 빛낼 일이 생겼으니 당연히 축하해야지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범한의 머릿속에 자신이 소공야가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고개를 들어 범씨 집안 편액에 걸린 붉은 천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눈을 굴리며 대화를 엿듣던 임완아가 놀라 물었다.
“상공이 소공야로 봉해진 거예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임완아의 눈에 기쁨이 넘실거렸고, 옆에 있던 사사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쨌든 이 세계에서 범한처럼 젊은 나이에 담박공에 봉해졌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저택에 들어간 범한이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관리들의 축하 인사에 정신없이 답례하는 가운데 등 대가의 부인이 재빨리 나와 임완아와 사사, 그리고 함께 온 여종들을 안채로 데리고 갔다. 범씨 집안 종들이 설렘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축하드립니다.”
엎드려 축하하는 종들에게 포상금을 주면서 범한은 아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떠들썩하게 기뻐할 일인지 의문스러웠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임완아와 사사가 기뻐했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만약 누이가 집에 있었다면 분명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황을 정리하고 축하하러 온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범씨 집안사람들이 정원 안 응접실에 모였다. 유씨가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범건 옆에 단정히 앉자 사사가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원래 유씨가 담담했던 이 임무가 사사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범씨 집안이 사사의 지위를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범건도 이미 담주에서 집안 어른인 노부인이 허락한 일인 만큼 아들, 며느리와 함께 간단하게 사사의 일에 대해 의논한 것 말고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식사 준비가 끝나자 줄곧 집 안에 숨어 있던 범사철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달려와 형수에게 인사하고는 범한의 옆에 앉아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아부를 시작했다.
북제에 있는 줄 알았던 시동생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임완아가 화들짝 놀랐다.
범한이 그런 아우를 보며 꾸짖었다.
“그깟 작위 하나에 이렇게 아부를 떠는 거야?”
그러자 범사철이 목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작위는 아니지······ 천하를 통틀어 공야에 봉해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나한테 포상금이라도 달라는 거냐? 너도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잖아? 앞으로 2년 뒤면 나와 아버지가 너한테 돈을 달라고 요구해야 할걸.”
범사철이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돈으로 형님의 명성을 살 수는 없잖아. 나중에 왕야가 되면 이 아우에게 작위를 줄 방법 좀 찾아봐.”
순간 범한은 작년 가을 포월루 사건으로 형부가 범사철에게 체포 공문을 발표하면서 어렸을 때 받았던 용기위 작위도 빼앗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왕야라는 두 글자를 듣자 범한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본 그는 서로가 같은 판단을 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범한의 배경을 생각하면 1등 공을 넘어 왕야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범사철은 자신의 말에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고는 입술을 합죽이고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완아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범사철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왔으니까 돌아다니지 말고······ 식사를 마친 뒤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마작 놀이를 해요.”
범사철은 마작이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1여 년 동안 북제에서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나지 못했던 그는 마작이라면 천하에서 두 번째 고수라 할 수 있는 형수와 겨뤄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신이 났다.
* * *
이후 며칠 동안은 별다른 일 없이 조용했다. 2 황자 측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잔뜩 움츠러들었고, 장 공주는 황궁 안에 틀어박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범한은 가끔 황태자가 포월루에서 보인 기묘한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의문이 생겼다. 황태자는 경국 용상에 오를 명분을 가진 계승자인 만큼 가장 유리한 입장에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가 왜 이렇게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는지 의문이었다.
범한이나 범건 모두 황태자가 무덤덤하게 상황을 방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건 황태자가 강력한 조력을 얻었거나 아니면 원래 조력자였던 장 공주의 손을 다시 잡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범한이 장 공주와 2 황자의 관계를 폭로한 상황에서 황태자가 과연 장 공주의 말을 믿을 수 있었을까?
어차피 내년이면 다시 강남으로 돌아가야 하는 범한으로서는 굳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설 명절 뒤에 그는 진원, 정왕가, 1 황자가 등 인사하러 가야 할 곳들이 많아서 설을 쇠기 전에 며칠 동안 감찰원에 가거나 입궁하지 않았다. 그저 범씨 저택에 머무르면서 1년 동안 보지 못한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북쪽에서 오래 머물 아우를 가르치는 데 시간을 쏟았다.
범약약과 담주에 계시는 할머니가 없다는 걸 제외하면 집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좋았다. 이에 범한이 아버지에게 할머니가 범사철을 보지 못하고 계시니 언제 시간을 봐서 범사철을 담주로 보내자고 제안했다.
범건을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범한에게 계획을 세워보라고 명했다.
이처럼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중 음력 섣달 스물여덟 날에 범씨 집안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불청객은 바로 북제 주경국 사절로 특수한 신분이라 홍려사에게 보고를 한 뒤에 범씨 집안을 찾아온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에 범씨 집안사람들은 그를 안으로 들이지 않고 대문 앞에서 맞았다. 사절이 범한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북제 조정을 대신해 범한에게 위로를 표시했다. 그리고는 산골짜기 습격 사건에서 작은 범 대인이 입은 불공평한 처사에 대해 북제 백성들도 잘 알고 있고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말도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상당한 양의 예물을 내려놓고는 저택을 떠났고, 범건과 범한이 대문 앞에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날 밤에 경국 홍려사와 궁정 내관이 동시에 범씨 집안을 찾아와 범한에게 북제 사절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알고 보니······ 범한이 자객을 만난 소식이 북제에 전해졌고, 이에 북제 어린 황제가 직접 서신을 써서 경국 황제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이 범한이 자객을 만난 일에 대해 북제가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경국 조정이 범한의 안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걸 은연중에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내관과 홍려사 소경을 통해 이 말을 들은 범한이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뒤 욕을 퍼부었다.
“뭔 쓸데없는 참견질인지, 자기가 뭐라고······ 이런 개소리를 들어 놓는 거야!”
홍려사 소경과 내관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조심히 말했다.
“북제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저희도 알고 있으니 작은 범 대인께서도 너무 화내실 것 없습니다. 이런 더러운 수법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내관이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이 보낸 예물은 그냥 받으십시오.”
두 사람이 저택을 떠나자 범한이 급히 서재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북제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할 생각인 겁니까? 이 일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뭘까요?”
범건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한테 말한다는 게 잊고 말하지 않은 게 있다. 폐하께서도 아마 잊어버리고 계셨을 거야. 애초에 네가 북제 사신으로 갔을 때 상경성 황궁에서 황제가······ 시간이 나면 태학에서 강연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지 않았냐?”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했다.
‘내가 그런 요청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하겠다고 대답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