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25
025화 백옥처럼 아름다운 두부 상인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범한은 안정을 되찾았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입고 있는 옷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그는 자객의 어깨에 꽂힌 가느다랗고 긴 비수를 뽑았다. 칼끝이 살과 분리되면서 나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그는 멍하니 서서 자객의 시체 옆에 놓인 작고 위험한 석궁을 바라봤다.
칼날에는 빛의 반사를 막기 위해 검은색 염료가 칠해져 있었다. 범한은 비개가 직접 만든 검은색 염료에는 독약뿐만 아니라 공격받은 사람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약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조심히 비수를 가죽으로 만든 칼집에 넣은 뒤 침대에 누워 있는 자객의 시체와 침대 아래 떨어져 있는 노합의 두 발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자 구석에 서 있는 오죽이 보였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차가 지나가지 않았으면 어쩔 생각이셨습니까?”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침묵하던 범한은 첫 살인의 두려움을 쫓아내고는 고개를 들어 웃었다.
“그와 대치하며 아저씨가 오시기를 기다렸겠죠.”
그러고는 뒷담을 넘었다. 담주항을 나와 벼랑 위에서 수련해 온 것이 마침내 오늘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범한은 두 발로 당당하게 선 채 앞으로 나갔다. 오죽이 늘 곁을 지켜 주는 건 아니지만 범한은 자신이 위험할 때면 언제든지 그가 나타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채소 시장에 진입하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거리를 걸어가는 그의 오른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거운 발을 끌며 채소 시장을 지나던 범한은 한 노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부를 파는 노점에는 20대 부인이 서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녀는 얼굴이 백옥처럼 아름다웠고 두 손도 하얗고 보드라웠다.
“동아 누나.”
범한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가 몇 년 전에 내쫓은 여종, 동아였다. 범한은 어린 시절 항상 그녀의 품에서 잠들었기에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저택에서 쫓겨난 뒤 동아가 채소 시장에서 두부 장사를 시작하자 범한은 항상 이곳에서 두부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동아가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그를 안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무슨 일로 오셨나요?”
두 사람이 작은 걸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려던 차에 손님이 두부를 사러 방문했다. 동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범한이 고개를 끄덕여 장사에 전념하라고 전했다. 동아가 장사를 하는 틈을 타 범한은 고개를 돌려 노점 안을 둘러봤다. 안쪽에는 어린이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두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발그레한 얼굴로 웃으며 앞에 걸려 있는 방울에 손을 뻗고 있었다.
범한이 아이를 품에 안고 얼러 주었다. 몸을 돌리다 그 모습을 발견한 동아가 급히 달려와 아이를 받으며 말했다.
“옷 더럽혀서 돌아가시면 종들이 고생하잖아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만했을 때 누나가 항상 나 안아 줬잖아요.”
그러자 동아가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이 우리 같은 아랫사람과 같을 수 있나요.”
먼저 음식을 맛봤다는 이유로 백작가에서 매몰차게 쫓겨났음에도 동아의 말에는 어떠한 원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범한은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머리만 긁적였다. 동아는 범한의 기분을 알아채고는 자신의 딸에게 말했다.
“도련님이라고 해 봐. 도, 련, 님.”
“그냥 삼촌이라고 불러.”
범한이 고집을 부렸다. 범한은 한동안 노점에 앉아 동아가 두부를 자르고 포장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간간이 아이에게 자신이 삼촌이라고 이야기하며 놀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범한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어둡고 차가운 기분이 사라졌다. 범한이 일어나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자 동아가 약간 난처한 듯 말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대접해 드릴 만한 게 없네요.”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뭐 특별할 게 있다고 대접을 해요?”
“그건 그래요.”
동아가 쑥스러운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도와주신 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쫓은 일 때문에 나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동아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녀는 어린 범한을 깊이 신뢰했다. 비록 그날 범한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저택에서 쫓겨난 뒤 범한은 몰래 은전을 보내며 생활을 도와줬다. 더구나 자신이 결혼한 뒤에도 두부 가게를 여는 걸 도와줘 세 식구가 편하게 살 수 있게 해 줬다.
손을 흔들며 동아와 인사하고 두부 가게에서 나온 범한은 걸어가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아이를 등에 업고 두부를 자르고 있는 동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는 몸은 여전히 풍만해서 세월의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10년 전 자신을 안아 주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범한이 그 사건을 핑계로 동아를 저택에서 내쫓은 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여종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도 안전할 수 없었다.
동아는 ‘어린 시절’ 범한이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녀에게 안겨 있는 게 좋았던 범한은 나중에 커서 동아와 함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가 간과했던 사실은 그가 자랄수록 동아도 같이 자란다는 것이었다. 범한이 열두 살이 된 올해 동아는 이미 스물을 넘긴 상태였다.
보석과도 같고 꽃구름과도 같았던 범한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나는 아직 없었고 내가 태어나니 당신은 이미 늙었구려. 당신은 내가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나는 당신이 너무 빨리 태어난 것을 원망하오. 당신이 태어났을 때 나는 아직 없었고 내가 태어나니 당신은 이미 늙었구려. 같이 태어나지 못한 게 한스러워 매일 당신과 함께 지내고 싶구려.”
범한은 동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고는 시를 읊으며 백작가 별저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자신을 바라보던 죽은 물고기 같은 자객과 노합의 눈동자는 이미 잊었다고 믿으려 했다.
점심에 ‘고양이 매듭’이란 독이 섞인 죽순볶음을 먹고 오후에 사람의 목을 부러뜨린 터라 입맛이 없어 저녁은 거르고 침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잠자리에 눕자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범한은 종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등불을 들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으로 들어간 그는 갈치를 깨끗하게 씻은 뒤 식칼을 잡고 마치 새가 날갯짓하듯 민첩하게 비늘을 벗겨 냈다. 그러고는 오죽 밑에서 무채를 썰던 실력을 발휘해 생강을 채 썰었다. 어찌나 민첩하고 정교한지 식칼이 도마 위에서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후 썬 생강을 접시에 담은 뒤 끓는 물에 생선을 쪘다.
부뚜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던 범한은 순간 인생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비개나 오죽은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죽이는 방법과 다른 사람에게 죽임당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또 한편으로 보자면 좋은 의사가 되는 법과 성공한 요리사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준 셈인 듯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