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268
609화 나는 당신들이 작년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소. (2)
범한이 빡빡해서 시큰거리는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의자에 기대고는 무언가 생각해 봐야 할 게 있는 듯 사색에 빠졌다.
그의 오른손에는 사리리가 비밀 통로로 보내 준 정보가 들려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볼 필요가 없었다.
북제 황제가 그런 상황이라면, 사리리가 계속해서 보내는 상경성 정보는 분명 쓸데없이 과장된 것이었다.
범한이 오른손을 살짝 힘을 주어 쥐었다가 바로 힘을 풀었다.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해당타타가 과거 북제 상경성에서 말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자매 생각으로는 가능한 일이에요······.”
범한이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자매라고?’
북제 황제, 해당타타, 사리리. 이들 자매의 조합은 강력해도 너무 강력하지 않은가. 한데 이들이 자신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을 하니, 범한은 너무나도 화가나 미칠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자신과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로 북제의 젊은 황제라면? 그 연하고 청아한 금목서 꽃 향이······ 만약 정말로 북제의 젊은 황제에게서 난 거라면, 그녀는 왜 그런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과 잠자리를 가진 걸까?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다시 문서에 고개를 박았다. 그리고 과거 1년 동안 상경성 황궁에서 온 정보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대단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자신이 세간에서 시선(詩仙)으로 불리고 있어도, 장묵한이 자신을 꽤 좋아했어도, 생긴 게 잘 생겼어도, 가슴 시큰거리게 하는 글을 좀 쓰고, 빈정대며 말하기는 해도······ 그래도 범한은 자신을 걸어 다니는 춘약 향낭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천하 여인들이 자신의 검은색 연의 아래에 있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죽기 살기로 매달릴 정도는 아니라고 말이다.
특히 북제의 젊은 황제는, 강남과 북쪽에서 한 행동을 놓고 보면, 대단하고 심계가 깊은 사람이었다. 범한의 미색을 탐해 그런 식으로 미약을 써서 덮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감정 면에서는 어떨까? 범한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구장창 남장을 하고 있는 여인이, 그것도 항상 경계해야 하는 위험 속에서 사는 황제가 이리도 방종한 정신 상태를 가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 * *
최근 1년 반 동안의 정보를 정리한 범한이 살짝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들었다. 1년 반 동안 북제의 젊은 황제는 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나가고 있었다. 군왕이 조회를 빼먹는 일은 없었고, 밖으로 나가 노는 일도 없었다. 더욱이 행궁으로 피서를 간다거나 수렵을 가는 일도 없었다.
즉, 북제 젊은 황제는 줄곧 사람들의 시선에서 이틀 이상 사라진 적이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상경 황궁의 태의원에 약을 공급하는 일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약에 대한 범한의 예민한 감각에 의하면 유산 방지용 약을 들인 흔적은 없었다. 물론, 상대방이 몰래 착수 중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현 상황을 놓고 판단해 봤을 때, 북제의 어린 황제가 임신한 가능성은 없었다.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자 범한은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그가 가장 걱정하고 있던 일은 바로 북제 황제와의 하룻밤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아이를 갖는 것이었다.
범한에게 아버지가 될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건 아니었다. 단지 황제의 아버지가 될 준비가 안 된 것이었다. 특히나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약에 취해 일을 치른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씨를 주는 대상은 되고 싶지 않았다.
씨를 주다니. 씨를 주었다니. 그 씨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지만 않으면, 별 볼 일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니던가.
범한은 답답했던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대개 이런 식이다. 여인과 성적인 관계를 맺어 놓고도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데, 저런 자발적이지도 않은 상황에서의 벌어진 일이라면 자기 안위 정도는 해도 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범한에게 섭경미가 떠올랐다.
“인과응보였어요. 보복을 당하니 기분이 찜찜합니다!”
범한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웃고 있었다.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범한은 자신을 어머니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어떤 면에서는 어머니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황제와 잠자리를 가져봤다는 거였다.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닥친 일이 어머니가 쓴 방법보다 훨씬 더 처참하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오랫동안 앉아 있느라 감각이 없어진 엉덩이를 세게 툭툭 쳐댔다. 그러다 뒷북처럼 두려움이 밀려들어 무기력감과 함께 감찰원 밀실을 나섰다.
* * *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범한은 황실 금고에서 만든 특제 연필을 꺼내들고 잠시 꼼꼼히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후 흰 종이 위에 한 문장을 썼다.
“나는 당신들이 작년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소.”
그런 후 서한 봉투에 넣고는 목풍아에게 건네 이 서한을 성 서쪽의 비밀 가옥에 있는 왕계년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다.
범한의 심복들은 제사 대인이 감찰원의 비밀 통로를 이용해 북제 낭자에게 연서를 보내는 일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목풍아도 범한의 명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범한이 떠나가는 목풍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왕계년은 자신이 이 서한을 누구에게 썼는지 분명히 알 것이었다. 다만 이것은 연서(戀書)도, 해당타타 한 사람에게만 보내는 것도 아닌, 세 낭자에게 보내는 서한이었다.
상대방에게 당한 걸 가지고 지금이라도 반응을 보였으니, 범한은 당연히 이것을 통해 이득을 취해야만 했다. 적어도 정신적인 이득은 취해야 했다. 우선 한 줄 내용만 담긴 서한을 가지고 상대방을 위협이라도 해야 했다.
북제 젊은 황제가 지닌 지혜라면 범한이 무엇을 말하는지 당연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손가락 두 개 사이에 가느다란 연필을 낀 채 손장난을 했다. 그런 후 연필을 연의 위에 달린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문득 어떤 일이 떠올라서였다.
북제 젊은 황제가 큰 공주가 떠나기 전에 직접 금목서 꽃 향낭을 하사했다고 했는데······. 그렇게나 총명하고 주도면밀한 그녀가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이 향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걸까?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설마 여황제가 함께 하룻밤을 지낸 걸 가지고 나한테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건가? 그래서 순간 마음이 흔들려서 어떻게든 내게 알리려 했던 거고?’
범한은 자신이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에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맘먹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찌감치 알아차렸어야 했어. 《석두기》에 푹 빠진 사람이······ 어떻게 남자일 리 있겠어!’
* * *
어서방은 일찌감치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에 범한은 잔뜩 난처한 표정으로 맨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어서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경국 황제에게 매섭게 꾸지람을 들은 터라 이번에는 자리에 앉아 있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어서방에 있는 문무대신들 중 어떤 이는 범한이 혼이 나서 고소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더 매섭게 혼낼수록 범한을 총애하고 있다는 뜻이란 건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모두 기분이 좋아도 얼굴에 드러내지는 못했다.
범한은 자신이 욕먹을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군사와 나라와 관련한 큰일이 났는데 재빨리 입궁하지도 않았고, 황궁에서 자신에게 재촉했는데도 경중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자신은 국사에 소홀한 것이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저리 화내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범한이 보기에 오늘 자신이 조사한 일은 집안일 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실제로는 나랏일에 속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에 범한은 마음에 묻어 둔 채 조용히 욕이나 얻어먹는 편을 택한 것이다.
한데 조용히 욕이나 얻어먹고 잘못했다고 하지 않자, 황제는 표정을 풀지 않고 흥, 하고 두어 번 콧방귀를 뀌고는 범한을 냉한 곳에 방치해 버렸다.
황제가 오늘 범한을 입궁시킨 건 경국의 돌발사건 대응을 위한 고위층의 정책 결정 자리에 범한에게 참여할 기휘를 주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이를 범한을 교육하는 계기로 삼으려 했었다. 한데 자신의 뜻과 달리 지각을 하자 황제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논의는 일찌감치 시작된 상태였으며, 1차적으로 결정된 사항을 보면, 섭중이 군을 이끌고 서쪽 3백 리까지 진군해 서호의 꿈틀거리는 욕구를 진압하기로 했다. 동시에 정북 대도독 연소을을 앞당겨 북쪽으로 돌려보내 북제 일대에서 명장 상삼호의 기세를 막기로 했다.
그리고 이어 구체적인 후방 지원에 대해 이야기가 진행되었지만, 범한에게는 그 내용이 단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황제 폐하께서 자신과의 약속에 드디어 대답을 주셨다는 것 정도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연소을을 서둘러 쫓아버리고, 섭중을······.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오른손 쪽 방향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그다지 크지 않은 반면 살짝 살집이 있어 덩치가 커 보이는 사람이었다. 한데 양 눈을 축 늘어뜨리고 있어 마치 정신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가끔씩 깊이 있는 눈빛으로 범한을 슬쩍슬쩍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섭령아의 아버지로, 전임 경도 수비이자 현 정주 대도독인 섭중이었다.
범한이 그를 온화하게 바라보며 잠시 웃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홀연 요 태감이 황제 폐하의 뜻을 낭독하는 게 들려왔다. 경력 7년 어쩌구저쩌구.
범한은 깜짝 놀랐다. 이제야 새해가 지났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북제의 그 작은 사당에서 발생한 향기 사건은······ 분명 재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로 작년에 벌어진 게 아니었다.
* * *
어서방에서 진행된 긴급회의가 끝난 후 황제는 범한을 남도록 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한 차례 꾸짖는데 눈을 부릅뜨고 범한을 노려보기만 했다. 범한은 오늘 일은 자신의 잘못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더 이상 뻣뻣하게 굴 수 없어 씁쓸하게 웃으며 죄를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까 화친왕부에 있던 게 아니었느냐? 그 후에 어디로 간 것이냐?”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감찰원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서둘러 처리를 좀 하고 왔사옵니다.”
황제가 불쾌하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히 갔던 것이냐?”
그러자 범한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북쪽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상삼호가 남하한다는 명을 받았는데 연경으로부터 300리 떨어진 곳까지 왔다 해······ 하오나 그가 친위대를 이끈 건 아니라고 하옵니다.”
황제의 얼굴에서 살짝 노여움이 가셨다.
“그런 거였구나. 북제의 젊은 황제가 상삼호를 이용한 것만으로도 희귀한 일이었는데······. 고작 삼백 명밖에 안 되는 친위대도 감히 이끌지 못하게 하다니 못하다니. 마음 씀씀이가 고작 그 정도였군.”
범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황제를 해본 많은 이들 중에 황제 폐하처럼 자신감이 변태의 경지까지 오른 이는 몇 안 되니 그런 거죠.’
황제는 이어 몇 가지를 물은 후 화친왕부에서의 모임을 놓고 범한과 한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언행 사이사이에 1 황자의 일처리에 매우 만족한 듯한 느낌을 풍겼다.
범한은 가슴이 살짝 싸했다. 2 황자의 말이 맞아서였다. 황제 아버지는 자기 아들들이 싸우게 놔두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들들이 납득할 수 없는 손실을 얻는 건 바라지 않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마디 더 나누는 동안 황제는 범한이 불편해 하는 걸 알아차렸고, 이에 그를 서둘러 어서방에서 내보냈다.
범한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고는 태극전 옆에 있는 복도로 서둘러 나왔다. 한데 범한 앞에는 거구의 장수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에 경악한 범한은 제자리에 서서 티 안 나게 그자를 경계하며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