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278
619화 태도가 모든 걸 결정한다 (3)
그림자가 진평평에게 돌아가는 걸 확인한 범한은 졸였던 마음을 놓았다. 이번에 경도에서 떠나는 일을 두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너무나도 불안했다. 겨우 태자의 그 일 때문이라면 분명 늙은 절름발이에게 해가 갈 정도는 아닐 것이었다. 그럼에도 범한은 은근히 두려웠다. 경도에서 자기 예상을 뛰어넘는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일단 큰일이 발생해도 아버지 주변에는 은밀하게 감춰 둔 힘이 있었다. 그 점은 황궁에 있는 그들도 잘 모르는 일이었고, 이는 또한 아버지가 줄곧 잘 감춰 놓은 덕도 있었다. 그러니 경도에서 동란이 일어도 그분은 1순위 목표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평평은 달랐다. 정말로 큰일이 일어난다면, 그들은 가장 먼저 모든 힘을 규합한 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죽이려 들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가장 의지하는 검둥개를 말이다.
이는 수십 년 동안 대륙을 뒤흔든 역사에서 일찌감치 증명된 진리였다. 그러니 경국 황제를 죽이고 싶다면, 어떻게든 진평평부터 죽여야 했다.
늙은 원장 대인이 어떤 실력과 심계를 지녔는지는 범한으로서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진원을 둘러싼 방위 역량은 가공할만했다. 하지만 진평평 원장 대인 곁에 그림자가 붙어 있지 않는 이상 범한을 시종일관 불안했다.
* * *
마차는 계속 남하를 거듭해 위하강 옆 구릉, 강북의 산지, 큰 강을 지나 보수가 된 제방들을 지나 영주 부근까지 왔다. 이곳에는 하운총독 관아 지점이 있었다.
그날 밤, 범한은 문하생인 양만리를 불러 만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는 양만리가 어찌하고 있는지 직접 찾아가 보고 싶어서였고, 둘째는 최근 경도에서 온 감찰원 소식과 강남 수채에서 온 민간 소식을 급히 살펴봐야 해서였다.
경도는 평온했다. 범한이 계획한 그 일이 아직 실행되지 않아서였고, 그 위험한 신호들이 아직 전달되지 않아서였다.
범한은 탁자 옆에 앉아 옅은 등불에 기대어 문서를 보다가 참지 못하고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어쩌면 위험한 곳에 너무 오래 있던 탓에 지나치게 민감해져서 일수도 있었다.
경국 황제 폐하의 민간군은 더할 나위 없는 위엄과 명망을 지니고 있고, 경국의 조정과 관료 체계는 안정적이고 충성을 바치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누가 감히 반역을 일으킬 수 있을는지!
야심한 시각, 거리에서는 야경을 도는 소리가 들려왔다.
범한은 역참에서 홀로 나와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천하의 대세가 아직 흔들린 건 아니니, 직접 하려던 몇 가지 일은 반드시 시작해야만 했다.
성 밖에 있는 흙으로 만든 오래된 사당에서 범한은 그 푸른 깃발을 찾았다. 푸른 깃발 아래에는 눈을 부릅뜨고 멍하니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는 왕 십삼랑이 있었다.
“작은 활잡이 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범한이 그의 정면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너도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한데 지금 보니 잘 회복했구나.”
그러자 왕 십삼랑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 몸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튼튼해서일 수도 있지요.”
“튼튼하다니, 거 참 잘 되었구나. 너에게 다른 일을 줄 참이었거든.”
범한이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천천히 항주와 소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사이 네가 먼저 어디를 좀 가 봐야겠구나.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난 후 나 대신 빚을 받아 돌아오면 되느니라.”
왕 십삼랑이 범한을 쓱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명씨 가문의 일은 나로서는 도울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운지란 사형께서 그곳을 주시하고 계시거든요.”
“헛소리 집어치워라. 운지란이 지켜보고 있지 않다면, 내가 왜 너를 보내겠느냐?”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장사와 관련된 일이다. 나는 동이성과는 싸우고 죽이고 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 네가 나서는 게 제일 적합할 거다.”
왕 십삼랑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단순히 스승님의 태도만 보여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그건 제가 스승님 대신 운 사형까지 진압해드린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너희 동이성에 내홍이 일 거라 믿을 정도로 내가 바보는 아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왕 십삼랑 옆에 있는 푸른 깃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단지 그 계산서의 주인이 나여서······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기는 불편하구나. 내 문하생이나 수하가 나서는 것도 불편하고. 원래는 낯선 사람을 데려다 쓸 생각이었다. 하나 명씨 가문이 너무 압박을 받으면 그 사람을 죽일 염려도 있고 해서······. 너는 무공 실력이 높으니 그런 거친 생명의 위협 따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
왕 십삼랑이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설마 제가 그 계산서를 꿀꺽할 거라는 걱정은 않으시는 겁니까? 제가 명씨 가문에게 다 불어버릴 걱정은 안 하시는 겁니까?”
“너는 도망치지 못할 거다. 너는 그저 단순히 직업적인 에이전트 노릇만 할 거니까 말이다.”
범한은 그가 생전 처음 듣는 말을 알아들었든 말든 상관 않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명씨 가문은 이미 내 올가미에 걸려 있지. 그러니 너는 그냥 얼굴만 보여주고 그 끈만 조이면 되는 거다.”
왕 십삼랑이 슬프게 탄식했다.
“작은 범 대인, 저는 절대 댁의 살수가 아닙니다!”
“태도라 하지 않았느냐.”
범한이 웃으며 그를 달랬다.
“태도가 모든 걸 결정하지. 너의 사부가 비밀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이상은 태도를 더 명확히 해야 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명씨 가문이 몽땅 무너진 후 동쪽 길로 가는 화물 통로가 원활히 뚫려 있을지는 보장할 수 없다.”
“동쪽으로 가는 길이 막히면, 경국도 함께 손해를 보게 됩니다.”
왕 십삼랑은 타인에게 위협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이 진지하게 나왔다.
“경국은 황제 폐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손해 입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동이성은 네 사부의 것이라 그가 손해 보는 걸 신경 쓰겠지. 이게······ 제일 큰 차이니라.”
강남의 기온은 당연히 경도보다는 많이 따뜻했다. 비록 새해가 되기 전에 소주와 항주 일대에서 대설이 내리고 하늘의 눈구름이 해안에서부터 경국 내륙까지 밀려와 모든 전답과 하천이 흰 눈에 갇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연초로 들어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겨울이 막바지에 달하자 강남에서는 눈이 그치고 해가 나와 얼음이 녹으면서 순식간에 엄동설한에서는 벗어났다.
그리고 소주성 밖으로 난 도로 옆 나뭇가지에서는 일찌감치 파릇파릇한 새싹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명씨 가문의 현 주인이자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으로 불리는 명청달은 지금 명원의 작은 언덕에 위치한 정자 아래에 있었다. 그는 눈을 들어 높이 솟은 담벼락 너머에 있는 파릇파릇 솟아난 새싹을 보고 있었다. 명원의 담벼락이 높기는 했지만 일단 문을 닫으면 방비가 삼엄한 보루가 되었다. 하지만 이 높은 담벼락도 그의 시선과 아직 미약하지만 점점 왕성해지는 봄기운은 막지 못했다.
비록 겨울이었지만 봄을 고대하게 되는 날인 것이었다.
명청달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살짝 늙고 피로해진 얼굴에 한 줄기 광채가 돌았다. 그는 유쾌한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번 겨울이 지나고 꽃이 피고 풀이 살아나면 자신의 명씨 가문도, 이 방대한 명씨 가문도 다시 새롭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년이란 시간 동안 명씨 가문은 너무나도 많은 변고를 겪었다. 과거 황실 금고에 기대어 벌어들이던 거액의 이윤이 꼬박 절반이 줄어들었다. 각 로에서의 장사도 감찰원에 의해 쉼 없이 방해를 받았다. 이에 장사 대금을 굴리는데도 곤란했고 이로써 명씨 가문은 점점 저문 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암암리에 명씨 가문을 통제하던 큰 노마님 역시 흠차 대인의 ‘핍박에 사망’하고, 셋째도 하마터면 유배를 갈 뻔하고, 또 갑자기 집안 가산을 빼앗으러 일곱째까지 나타나 있었다.
수많은 칼과 검이 명씨 가문 머리 위를 수도 없이 내리쳐 명청달은 살아나가기 힘들 정도로 숨조차 쉬기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 명청달은 이번 일의 막후 인물이 용좌에 앉아 계시는 천하지존이고, 이번 일의 집행자가 저 온유한 얼굴에 음험한 생각을 지닌 흠차 대인 범한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반년 동안 범한은 대부분 항주에서 머물고, 오주와 담주로 놀러 가 소주의 황실 금고 관아의 일을 거의 돌보러 오지 않았다. 특히 새해가 오기 전후 2개월 동안 범한은 강남을 떠나 경도로 돌아가 있었다.
범한이 강남을 떠난 건 명씨 가문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먹구름이 이동한 것이었다. 감찰원의 강남 분리사는 범한의 지시를 관철시키기 위해 명씨 가문의 장사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명씨 가문은 강남에 두터운 인맥을 보유하고 있었고, 무수히 많은 관원이 암암리에 돕고 있었다. 이에 명씨 가문의 장사는 잠시 활력을 되찾고 좀처럼 있기 힘든 활기를 맞이한 상태였다.
그래서 앞서 명청달은 담벼락 밖의 새싹을 보고 기쁨의 감탄을 내뱉은 것이었다.
* * *
하지만 그의 얼굴이 금세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기쁨에 들떠있었다는 걸 불현듯 알아차려서였다. 봄이 와 나무에도 새싹이 났으니······ 흠차 대인도 돌아오는 것을.
그는 갑자기 우울해지고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이에 소매를 펄럭이며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명원은 매우 넓었고 대부분의 성년 남자들은 명원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원칙대로라면 큰 노마님이 돌아가셨으므로 집안의 발언권을 쥔 명청달이 큰 노마님의 생전 거처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집안사람들의 의견이 그러해도 명청달은 그 집을 어머님을 기리기 위한 사친당(思親堂:어머니를 기리는 사당)으로 만들겠다고 변명을 해대며 한사코 방을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왜 그곳으로 이사할 수 없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지내다가 눈을 떴을 때 대들보 위에 달린 흰 천과 그 아래에서 계속해서 흔들리던 작은 발을 보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 * *
그날 오전 명원에서는 가문에 딸린 상행(商行), 전지(田地)와 장원에 관한 사무를 처리했다. 명청달은 뜨거운 수건으로 있는 힘껏 얼굴을 닦아 냈다. 그에게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로가 밀려왔다. 너무나도 큰 가문인지라 그를 노심초사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예전에 가주 역할을 할 때는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도 구체적인 일들을 처리했었다. 한데 그건 큰 방향을 정하고 조정 권력자 및 귀인들과 결탁하는 걸 큰 노마님이 직접 처리해 주어 굳이 명청달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경도 쪽에서 몰래 전해져 온 소식에 따르면 그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 중 가장 골치 아픈 건 다음과 같았다. 일단 흠차 대인이 명씨 가문을 향한 압박을 멈추지 않고 있어 외부적인 환난이 곧 닥칠 예정이었다. 그리고 명씨 가문 내부에서도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범한이 억지로 벌인 소송 때문에 하서비란 그 서얼 놈이 집안으로 밀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셋째가 최근 들어 하서비와 가까이 지낸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조정의 압박에 명청달에게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니 하서비가 조금씩 명씨 가문의 핵심으로 다가오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한 달 전,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하서비가 가문으로 들어와 제를 올리는 걸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고 있어야 했다.
안과 밖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명청달은 살짝 인내력에 한계가 왔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버텨야만 했다. 가문 사람들을 위해서 견뎌야 했고, 장 공주가 성공할 때까지 버텨야 했다.
명청달이 옆에 있는 두 사람을 쓱 쳐다보고는 속으로 탄식을 했다. 이들 남녀는 최근 들어 그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들 명란석이고, 여자는······ 과거에 큰 노마님 곁에 딱 붙어 있던 큰 여종으로 현재는 명청달의 첩이었다.
이 큰 여종이 아니었다면 명청달은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의 비밀을 완전히 파악해 이 집안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었다. 이에 명청달은 이 여인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는 것은 물론 애정까지 주었다.
한편 명란석은······. 명청달은 자기 아들을 쓱 바라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도 아들이 능력과 안목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자는 최근 들어 명씨 가문의 앞날을 두고 크게 충돌하고 있었다.
명란석이 보기에 명씨 가문이 조정에게 흉악하게 압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범한이 황실 금고를 확고하게 쥐고 있는 이상은 그들은 과거처럼 황실 금고에서 거액의 이득을 취할 가능성이 없었다. 이에 그는 분위기가 완화된 이 기회에 점차 황실 금고 사업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더 이상 황실 상인은 하지 않는 대신 명씨 가문이 강남에 가지고 있는 땅과 각지 망을 활용해 경국과 동이성 간의 무역으로 사업을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조정과 흠차 대인이 자신들에게 고마워할 것이고, 동시에 명씨 가문의 근간을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명청달은 아들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했다. 명씨 가문이 지금 힘들게 버티고 있기는 해도 그는 가문이 황실 금고 사업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해 다른 방향에서 살길을 찾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