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286
627화 대인물들
그날 밤 소주성의 청색 돌을 깔아서 만들 긴 위에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겨울 동안 굴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쥐들이 향긋한 음식 냄새를 맡고 밤을 틈타 모두 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등장한 쥐는 겨우 세 마리였다. 검은색 복장을 한 고수 세 명이 초상전장 방어를 가볍게 뚫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전장의 보안은 매우 삼엄할뿐더러 초상전장의 베일에 싸인 사장이 암암리에 세상 고수들을 모아 지키고 있었음에도 습격자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로 보아 세 명의 습격자들은 엄청난 실력을 가진 고수들이 분명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습격자들이 사용하는 장검이었는데, 무슨 마력이라도 깃든 건지 시퍼런 섬광을 내뿜으며 아무 소리 없이 사람을 베었다. 이처럼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공격에 전장은 안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고, 바닥에는 십여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비명이나 구조 요청을 내지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상황은 정리되었다.
하지만 이 세 명의 고수 검객들은 전장 후원에서 거대한 장애를 마주해야 했다. 이에 이들은 초상전장의 대행수가 차용증서를 품에 꼭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 섣불리 다가가 칼을 목에 찔러 넣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들의 우두머리인 최고봉 고수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손에 들린 산을 쪼개고 강을 갈라버릴 청검(靑劍)이 푸른 깃발에 막혀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챙, 챙, 챙’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진 뒤 검객이 검을 거두었다. 그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정중히 푸른 깃발을 든 청년에게 인사했다.
실력이 있는 무도인들은 서로를 존중해 주었기에 암살을 하러 왔음에도 상대방에게 존중을 표시한 것이었다.
푸른 깃발은 이미 세 번의 공격으로 갈가리 찢겨 무수한 파편으로 조각이 난 상태였다. 깃발 위에 적힌 철상이라는 두 글자도 작은 검은 점으로 변해버렸다. 과거 철상이라 불렸고, 지금은 왕 십삼랑으로 불리는 젊은 청년의 손에는 깃발이 사라진 깃대만 들려 있었다. 그가 상대방의 손에 들린 청검을 바라보고는 대가의 풍모가 흐르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부탁하네.”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얼굴을 가린 천을 내리고는 근엄한 얼굴과 살짝 나부끼는 수염을 드러냈다. 그가 검을 단단히 잡고는 온몸의 정기를 검에 실으면서 입술을 살며시 움직여 말했다.
천하에 두려운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는 왕 십삼랑이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만약 범한이 지금 이 자리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줄행랑을 쳤을 거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바로 운지란이었다. 동이성 사고검의 수제자이자 9품 검술 대가 운지란 말이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등장에 긴장한 왕 십삼랑이 오른손으로 깃대를 꽉 움켜쥐었다.
운지란을 따라 초상전장 후원에 들이닥친 두 명의 습격자는 동이성 고수들로 운지란이 직접 대결을 하려 하자 눈치껏 공손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속으로 깃대를 든 청년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는 없지만, 대종사나 경국 범한처럼 변태적인 인물은 아니므로 운지란의 상대가 될 수 없을 거라 단정을 지었다.
홀린 듯한 눈빛으로 운지란을 바라보던 왕 십삼랑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 상처는 나으셨습니까?”
운지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천천히 물었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작년 봄에 운지란은 홀로 강남에 내려온 이유는 자신이 아끼는 여제자의 실력을 몰래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바로 기회를 봐서 강남로 흠차 범한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일대를 풍미하는 검술 대가인 그는 어선 위에서 멀리 식당에 있는 범한을 지켜보고 있다가 감찰원 매복 공격이 당하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운지란은 그날 호수에서 귀신처럼 신출귀몰하던 검 끝을 잊지 못하고 있었고, 살짝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신출귀몰한 검 끝이 지금껏 자신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국 조정도 이 일이 외교 문제로 변질하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가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을 엄격하게 통제되어 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운지란은 상처가 나았냐는 왕 십삼랑의 질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왕 십삼랑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검객께서 어찌하여 도적질을 하려 하십니까.”
운지란이 웃으며 물었다.
“자네는 다르단 말인가?”
“대인께서 초상전장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여기 있는 계약서와 차용증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고 한들 명씨 집안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왕 십삼랑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는 건 모두 복사본이거든요. 원본은 소주에 없습니다.”
“원본이 동이성이 있다면 내일 되면 사라졌을 겁니다.”
운지란이 천천히 말했다.
“귀하가 어느 문하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씨 집안은 우리 동이성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니 막지 마시지요.”
왕 십삼랑이 말했다.
“명청달은 이미 끝났습니다.”
계속 운지란 옆에서 침묵하고 있던 검은 옷을 입은 다른 습격자가 입을 열었다.
“사부, 저 사람은 시간을 끌 생각인 겁니다.”
왕 십삼랑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청량한 목소리에 상대방이 여자임을 알아챈 왕 십삼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려사사도 온 겁니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놀란 듯 몸을 움츠렸고, 운지란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왕 십삼랑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내 문하 사람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유를 알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한 게 안타깝군. 곧 있으면 소주부에서 사람이 올 거네.”
그가 천천히 손에 쥔 검을 들었다. 살짝 떨리는 검 끝에 왕 십삼랑의 목을 겨누었다.
“대인은 저를 죽이실 수 없습니다.”
왕 십삼랑이 차분히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건······.”
왕 십삼랑의 얼굴이 갑자기 굳더니 왼쪽 발을 반 발자국 뒤로 뻗고는 깃대를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왼손은 깃대의 뒷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깃대 앞부분을 빠르게 누르면서 있는 힘껏 찍어 눌렀다.
바람을 부수는 엄청난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공기를 둘로 갈랐다.
엄청난 검의였다.
운지란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초상전장의 사장은 도대체 누구인 건가?”
왕 십삼랑이 잠시 주저하다가 깃대를 거두고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을 했다.
운지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두 여제자를 데리고 후원을 떠날 준비를 했다. 후원을 떠나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 말했다.
“후배, 조심하시게나. 범한은 자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이네.”
왕 십삼랑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사형께서 명청달에게 이 사실을 알리신다면 범한은 저를 천천히 죽일 겁니다.”
고개를 돌린 운지란의 두 어깨는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가 자네의 충성심을 알아보기 위해 큰 이익을 걸고 도박을 하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네.”
“저도 모르겠습니다.”
왕 십삼랑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제가 배신을 해도 명씨 집안의 숨통을 조일 방법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 일을 제가 맡겨 제 태도를 보려 한 것입니다.”
운지란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스승님의 뜻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명시 집안이 중요한 건가 아니면 자네가 범한에게 신임을 얻는 게 중요한 건가? 그걸 알아야 나도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네.”
“작은 범 대인의 신임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왕 십삼랑이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저와 대사형이 손을 잡고 명청달에게 사실을 알려줘서 화를 피하게 도와준들 다음에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황실 금고가 작은 범 대인의 손안에 있는 만큼 스승님께서는 외국 친구의 사정 같은 건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방금 말은 나한테 하면 안 됐네.”
운지란이 천천히 말했다.
왕 십삼랑이 문서를 품에 안고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초상전장 대행수를 바라보고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설사 제가 대사형께 말하지 않았어도 누군가는 제가 몰래 대사형에게 통지할 거라 의심할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여기서 알려 드리는 것이 낫지요.”
“보아하니 동이성도 조용하겠군.”
운지란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가 탄식한 이유는 오늘 헛걸음을 해서가 아니었다. 스승의 우매한 얼굴 아래 숨겨진 본질을 찌르는 생각에 감탄해서였다. 그는 지금에야 비로소 앞에 있는 베일에 싸인 사제가 검려에서 나온 뒤로 줄곧 범한과 함께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렇습니다.”
왕 십삼랑이 고개를 숙이며 설명했다.
“이젠 제가 공격할 테니 대사형께서는 잠시 물러나 침묵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러나는 거야 당연한 거지만 왜 침묵해야 하는가?”
운지란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자 왕 십삼랑이 품속에서 아주 작은 옥패를 꺼내 보여줬다. 옥패를 본 운지란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문중에서는 자네에게 검패가 없다고 알고 있었지 스승님께서 자네에게 그걸 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모두 양다리를 걸치고 상황을 주시하는 법이다. 동이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거목에 기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 거목이 어느 방향으로 치우치느냐에 따라서 예상하지 못한 치명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사고검은 어느 방향으로도 쉽게 치우칠 수 없었다. 그의 검은 항상 동이성을 수호해야 했으므로 그는 반드시 경국의 전체적인 상황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때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아니면 어떤 충분히 강력하고 치명적인 유혹이 있어야만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범한에게 그는 충분한 성의와 태도를 보여야 했고, 그것이 바로 왕 십삼랑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는 원래 동맹자였던 장 공주에게도 성의를 보여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운지란이었다.
이렇게 해야만 나중에 경국 내부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든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어떤 경우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양다리 전략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초상전장을 습격으로 인해 양측에 심어놓은 제자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는 대종사인 사고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범한이 먼저 움직인 만큼 운지란은 자신이 물러나는 데는 동의했지만 침묵하라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명청달에게 진상을 알려서 초상전장에게 지분을 주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승님의 검패를 보자 눈앞에 상황과 대종사가 어느 쪽에 기울어져 있는지가 이해되었다.
* * *
쥐죽은 듯 조용해진 초상전장 안에서 은은하게 피 냄새가 났다.
줄곧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던 초상전장 대행수가 이내 침착하고 온화한 표정을 회복하고는 깃대를 쥐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왕 십삼랑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심사를 통과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왕 십삼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복잡하고, 스승님과 범한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