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288
629화 명원 안 웃음소리 (2)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응접실에서 초상전장 대행수가 열두 번째 하품을 하고 있을 때 명씨 집안의 현재 주인인 명청달이 어두운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행수가 웃으며 말했다.
“명씨 어르신께서는 사람을 너무 기다리게 하시는군요.”
명청달이 그런 그에게 두 손을 잡고 예를 갖추 인사하거나 안부 말도 하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란석이가 반할의 지분을 담보로 맺은 계약을 장부에서 지워 주면 그쪽 사장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네.”
“네, 알겠습니다. 명씨 어르신.”
대행수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품에서 문서를 꺼내 건넸다. 바로 명란석이 소금 밀수 사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맺은 계약서였다.
명청달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대행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돌아가서 지워드리지요.”
명청달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가 되자 명씨 집안과 초상전장의 회계 선생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초상전장 대행수의 강력한 요청에 참석한 거상들이 한쪽에 앉아 있었고, 공증을 위해 소주부에서 보낸 관리도 대기하고 있었다.
탁자에 하얀 종이 세 장이 깔렸고, 붓이 그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얼마 뒤 세 건의 빚을 지분으로 전환한다는 문서가 쓰였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씨, 웅씨를 비롯한 거상들과 소주성 관리들은 종이 위에 적힌 내용을 이해하고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셨다.
초상전장이 명씨 집안 지분 중 3할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강남 대인물들은 명씨 집안이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누구도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명씨 집안이 이 지경까지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도 아닌데 4백만 냥의 빚을 처분하기 위해 지분 3할을 내어주다니?’
명씨 집안이 이런 계약을 맺는 이유를 생각하던 상인들은 마침내 현재 명씨 집안의 가장 큰 문제가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거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 점을 이해하자 상인들은 도리어 초상전장이 수지에 맞는 거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청달은 붓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침착하게 자신의 이름을 적고 지장을 찍었다.
모든 사람이 숨죽인 채 이 모습을 바라봤다. 명씨 집안의 적이든 친구든 명청달의 생각과 패기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백 년의 역사를 지닌 대가문이 지분 3할을 외부인에게 떼어 주는 건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과감한 조치였다.
초상전장을 대표로 서명하고 지장을 찍는 사람은······ 젊은이였다. 항상 초상전장 대행수 뒤에 서 있던 수려한 외모의 젊은이였다.
그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면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설마 초상전장의 베일에 싸여 있는 큰 사장이 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청년인 건가?’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장의 큰 사장이셨군요. 이전에 실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하지만 명청달이 눈치채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어디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왕 십삼랑은 상업계의 거물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부유한 사람처럼 느껴지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왕 십삼랑은 잠깐 당황하며 자신이 인정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 명원 입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급히 중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두 번째 문과 세 번째 문이 급히 열렸다. 밖에서 들리는 시끌벅적한 소리는 점점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응접실을 향해 다가왔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는 연이어 인사하는 사람들도 무시한 채 갈수록 걸음을 재촉하는 게 상당히 오만하게 들렸다.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고 응접실 밖을 바라봤다. 그 역시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기분이 아주 좋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검은색 감찰원 관복을 입은 범한이 기다란 문턱을 넘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뒤에는 감찰원 관복을 입은 홍상청과 명씨 일곱째 어르신인 하서비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응접실에 있는 관리와 상인들에게 인사하지 않고 곧장 명청달의 앞으로 걸어가서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명청달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사주 일대에 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오늘 명원에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흠차 대인을 향해 말했다.
“흠차 대인께서 왕림해 주셨는데 멀리 마중을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범한이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이처럼 성대한 일에 어찌 안 올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본관이 명씨 어르신께 감사해야 할 것도 있는데.”
“감사할 게 있으시다고요?”
순간 명청달은 가슴이 떨렸다.
“지분 3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명청달의 귓가에 대고 상대방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초상전장은······ 제 것입니다.”
명청달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속으로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탁자에 놓인 먹물도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문서를 바라보는 범한이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그동안 힘겹게 계획하고 인내한 끝에 마침내 오늘 성과를 달성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신분을 밝힌 이상 초상전장이 조정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건 늦고 빠르고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상황을 이용해 북제 황제가 두둑이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했다. 비록 경국 황제가 주시하고 있어 범한은 1백여만 냥의 은전 손실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연연하지 않았다.
강남에서 백 년 동안 득세하며 조정과 세상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수많은 백성의 생사를 가지고 놀았던 명씨 집안의 주인이······ 마침내 오늘 바뀌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자리에 범한이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직접 이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은전 1백여만 냥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범한은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명청달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가 졸도라도 하면 은전 1백만 냥의 가치가 더 충분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늘에서도 그의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초상전장 대행수가 범한의 손에 계약서를 건네주는 모습을 바라보던 명청달이 휘청거렸다. 그제야 명청달은 모든 일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호부에서 국고에 있는 은전을 옮긴 사실이 없는데······ 범한이 어떻게 전장을 열만큼의 은전을 얻을 수 있었냐는 것이었다.
온몸이 떨리고 두 눈이 살짝 벌게진 명청달은 목구멍에서 ‘꾸르륵’하는 소리를 두 번 내는 것 말고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결국, 그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짖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인사하고는 ‘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응접실에 가득 울려 퍼졌다.
호탕하게 웃던 범한은 자신이 지나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겠다는 생각에 웃음을 멈췄다.
이때 잠시 졸도했던 명청달도 깨어났다.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살짝 불어진 눈동자로 범한의 얼굴을 노려봤다.
웃음소리가 그치고 졸도한 사람이 깨어나자 방금 전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명씨 집안 지분 3할이 범한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명씨 집안을 먹기에는 3할의 지분만으로는 부족했다.
명청달이 일어서서 범한 뒤에 있는 하서비를 바라보았다. 순간 하서비가 가지고 있는 지분과 자신과 사이가 멀어진 넷째를 떠올린 그는 마음이 섬뜩해졌지만 여전히 이 상황을 극복할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배웅해 드리지요.”
그가 마지막으로 범한의 손에 들린 문서를 보고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범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미 자신의 것이라도 되었다는 듯 화려한 명원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명청달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범한의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하서비가 명청달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을 배웅해 드리지요.”
손님을 배웅한다는 말은 명씨 집안의 귀속권과 명씨 집안 주인의 신분을 대표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하서비가 이 말을 했다는 것은 당당하게 명청달에게 도전을 시작하겠다는 의미였다.
응접실에 모인 손님들은 오늘 예상치 못한 큰일이 생기자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더구나 이 일로 인해서 진노한 명청달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다. 이에 상관없는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재빨리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공증을 위해 소주부에서 파견된 관리도 범한에게 인사를 하고는 진원에서 도망쳤다.
사람이 모두 떠나자 응접실 안이 순간 고요해졌다. 범한의 일행과 명씨 집안 남자들을 모두 포함해도 인원수는 많지 않았지만, 오랜 싸움을 결판내는 순간인 만큼 어느 한쪽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명청달이 차갑게 범한을 노려보며 품속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천천히 찢었다.
“어째서 후안무치하게 란석이의 지분 반할을 먹을 생각을 한 겁니까?”
범한이 그의 눈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조정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관리라서 장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쪽 아들 지분을 가져서 뭘 하겠습니까?”
범한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행 뒤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고는 상황을 지켜볼 준비를 했다.
그가 오늘 급히 소주에 온 것은 재미있는 장면을 직접 보는 동시에 하서비를 지원해 주기 위해서였다. 강남에서 오래 살아온 명씨 집안은 수중에 천명에 달하는 사병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강남 수채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겨도 정면에 나설 수 없었다.
하서비가 명청달 앞에 서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초상전장 사장님은 이미 자신의 지분 3할을 저에게 주겠다는 서류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소주부에서 저에게 보상해주라 판결을 내리자 큰형님께서는 기꺼이 1할을 지분을 증여해 주셨지요. 그 일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큰형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명원에서 사실 수 있도록 제가 성실히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명청달이 아들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일어나서는 자신의 뒤에 있는 명씨 집안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고통에 겨운 미소가 걸렸다.
“인제 보니 몰래 네 쪽에 붙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가 보구나. 그렇지 않다면 네가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겠지······. 지난 1년 동안 작은 범 대인을 상대하는 데 명씨 집안의 모든 힘을 쏟느라 너의 존재를 잊었던 게 사실이다.”
이 말이 나오자 명씨 집안 남자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몰래 하서비에게 투항한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부끄러움이 스쳤고,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일하게 명씨 넷째 어르신만이 냉담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깊이 심호흡을 하는 명청달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그는 상대방이 명씨 집안 주인 자리에 도전해온 이상 확실한 패를 쥐고 있을 거라 짐작하면서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켜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넷째를 바라보고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네 지분도 저놈에게 주었느냐?”
“상황을 파악해 움직였을 뿐입니다.”
명씨 넷째 어르신이 태연히 대답했다.
명청달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손가락을 가리켰다.
“바보 같은 놈! 명씨 집안이 망한다면 바로 네놈 때문이다! 죽은 뒤에 조상들은 어떻게 보고, 또 네 모친은 어떻게 보려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게야!”
명씨 넷째 어르신이 살며시 몸을 떨더니 표독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큰형님은 제 얼굴을 당당히 보실 수 있습니까? 작년에 제가 체포되어 소주부 감옥에 갇혔을 때 저를 도울 사람이 아니라 저를 암살할 사람을 보내셨지요······. 그래놓고도 저를 똑바로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명청달이 그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저도 압니다.”
명씨 넷째 어르신이 신경질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감옥에서 죽으면 강남 세력가들이 명씨 집안을 가엽게 생각할 거라 생각해서 그리하신 게지요······. 큰형님은 한 번도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시겠지만, 저도 명씨 집안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왜 저는 죽어도 되고 큰형님은 죽어선 안 됩니까?”
‘왜 죽어서는 안 되느냐니?’
명청달이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려 하서비를 향해 소리쳤다.
“네가 가진 패가 이거였구나! 셋째와 넷째 쪽 사람들이 모두 네게 붙는다고 해도 너는 명씨 집안 주인 자리에 오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