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311
652화 맑은 차, 독한 술, 편지, 대세
연소을은 북제 사람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잔을 들고 북해보다 더 북쪽에 있는 초원에서 만들어진 독주를 들이켰다. 술이 그의 수염을 적시고 눈에서는 갈수록 진한 한기가 차올랐다.
경도의 소식이 창주로 전달된 후 연소을은 자신이 위기에 직면했음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심복이 한밤에 소리를 죽여 주의를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차분했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상삼호가 북제 군대를 이끌고 천천히 철수한 후 벌거벗은 여인들이 긴 의자에 기댄 것 같은 유혹적인 자세를 취했을 때도 연소을은 놀라거나, 의심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냉소만 날렸다.
장 공주가 세를 잃었다는 소식은 북제 사람들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황제가 자신들을 차지하려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에 연소을이 자신에게 부과된 모든 압박감을 내려놓고, 모든 힘과 정신력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삼호는 일부러 약한 척을 해주었다.
그런데 무엇 하러 힘과 정신력을 유지하게 해준 걸까? 그거야 당연히 자기네 황제에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연소을이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입가에서는 한줄기 냉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북제 황제가 갑자기 상삼호에게 손을 쓰려 한다면 그도 그리 했을 것이다. 적국 내부에 문제가 생겼어도, 자기편이니 당연히 수수방관해야 하고, 더 나아가 적에게 최대한 많은 여유를 주어 실력을 발휘하게 해야 했다. 이렇게 해야 내부에서 서로 싸우고 죽여 편안히 어부지리나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소을은 아무런 준비도 않고 그날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바로 주름이 깊게 진 몇몇 늙은 태감이 말을 몰고 나타나 얼굴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가득한데도 최대한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피곤해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로 자신에게 황제 폐하의 성지를 낭독하는 그날을 말이다.
“연소을······ 은······.”
장 공주가 무너졌다. 그리고 장 공주의 심복인 연소을은 군 내 최대 조력자였으니······ 황제가 그에게 정북군의 10만 정예병을 이끌도록 윤허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이는 연소을도 잘 알고 있던 거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자기 측근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데 그의 예상과 달리 황제 폐하의 성지가 도무지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연소을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황제 폐하께서는 대체 나에게 무슨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시기에 이다지도 미적거리시는 걸까?’
독주에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이 일었지만 정말로 타고 있는 건 연소을의 심장이었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는 나를 그렇게나 신임하셨던 걸까? 하나 황제 폐하께서는 내가 과거에 일개 사냥꾼이었고, 장 공주마마가 아니었다면 평생 이름도 날리지 못했을 거란 걸 알고 계신단 말이지.’
더군다나 범한은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였다. 지금까지 증거를 잡지는 못했지만,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경국 내부에서 감히 자기 아들을 죽일 수 있는 미친 이는 딱 둘 뿐이었다. 그런데 장 공주는 제외해야 했으니, 그 미친 이는 당연히 범한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범한이란 사생아를 죽여 자기 아들을 위한 복수를 해줄 리는 만무했다. 그러니 이는 연소을과 황제 사이에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최대 모순이었다. 이에 흉포한 성격의 연소을은 죽을 때까지 경도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걸 구경 중인 북제 황제에게 병사를 끌고 가 투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굴욕적이니까.
연소을이 술잔에 다시 독한 술을 채워 넣고는 단번에 비우고 길게 탄식을 했다. 대체 어이해야 하는 건지. 그런 그에게 서한 하나가 도착했다. 한데 서한을 보낸 이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연소을은 서한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어느덧 서한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있던 손이, 신처럼 활시위를 가지고 놀던 그의 손이, 그림자와 범한이라는 9등급 고수들이 협공을 해와도 강철처럼 굳셌던 그 손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 * *
경국은 아직 봄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저 먼 남쪽의 국경선 부근에는 이미 무더위가 찾아와 있었다. 이에 사방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나무들도, 높이 솟은 태양도 모두 무기력하게 산 위 바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바위 위에 있던 덩굴들은 뜨겁게 달궈진 바위 때문에 고사되기 직전이었다.
한데 정말 무서운 건 더위보다도 밀림 속 습도였다. 남쪽에서는 왜 이다지도 폭우가 자주 내리는 건지. 비는 오래 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빗물은 흙으로 침투하기도 전에 고온에 뜨끈뜨끈한 수증기가 변해 수풀, 동물과 행인, 그리고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감싸버리고 모든 생명체들을 숨쉬기 힘들도록 만들었다.
줄곧 호탕했던 행렬도 이제는 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 길 위를 걷는 중이었다. 경국의 체면을 책임지고 있는 예부 홍려사 관원도 어느새 체통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옷섶을 활짝 열어젖힌 상태였다.
군인들은 마차 여러 대에 나눠 타고 있는 황궁 호위(虎衛)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데 엄하게 기율을 지키던 그들 수백도 어느새 반짝이는 투구와 갑옷을 삐딱하게 입고 있었고, 눈에서는 피로와 고단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가운데에 있는 마차에는 경국의 태자마마가 타고 있었다.
지금은 그가 경도에서 출발한 지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남조국(南詔國)에서의 현례(見禮: 인사하는 의식 중 하나)는 순조로웠다. 죽은 국왕의 영전에서 가짜로 여러 차례 울어도 주었고, 아직 아이인 국왕에게 따뜻하게 덕담도 건넸고, 등극식에서 증인도 되어주었으니 이제 태자마마 일행은 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가 쨍할 때 길을 나선 이유는 햇볕이 강렬해야 숲에 안개가 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남조국과 경국의 경계에는 밀림이 들어차 있었는데, 그 안에서 제일 무서운 건 독 안개였다.
태자 이승건이 마차 창살을 톡톡 두드려 마차 대열에 서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 후 태감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후 예부의 관원에게 자그마한 소리로 몇 마디 건넸다.
호위 하나가 공손하게 아뢰었다.
“마마, 독무의 공격을 받지 않으려면 해가 떠 있을 때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러자 태자가 미소를 지었다.
“좀 쉬게. 모두 지쳐 있지 않은가.”
“역참이 코앞인데, 도착하지 못할까 우려됩니다.”
호위가 난색을 표했다.
“어제 그 역참에 도착하기 전에 자그마한 집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태자가 상냥하게 말을 이어 갔다.
“오늘 밤에는 그곳에서 머물면 되느니라.”
그러자 앞서 질문을 받았던 예부 관원이 태자의 결정을 만류했다.
“마마의 신분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마마께서 어찌 황량한 야외에 들어선 곳에서 머무실 수 있단 말입니까? 천승현 역참은 무척 낡은 곳입니다. 이에 어젯밤에 정한 큰 역참에서 태자마마를 맞이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이옵니다.”
하지만 태자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수행하는 이들이 이미 많이 지쳐 더는 갈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에 예부 관원이 참지 못하고 주저하며 살짝 두려움이 섞인 어조로 물었다.
“하오나 돌아가는 날짜에 착오가 생기면······.”
“본궁이 책임지면 될 것 아닌가. 병사들이 지쳐 있는데 병까지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네.”
태자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답했다.
명령이 내려졌으니 일행 수백 명은 곧장 휴식에 들어갔다. 이에 오늘 밤은 천승현에서 묶을 수밖에 없었다.
군인과 호위들은 태자의 말에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태자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도로 양측에 서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번갈아 가며 휴식을 취했다.
그들은 고생한 자신들을 아껴준 태자를 감격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신을 보란 듯이 태자를 쳐다보지는 못했다. 한 달여 동안 경도에서 남쪽에 위치한 남소로, 다시 북쪽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그런데 태자마마는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만큼 오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평 한마디 없었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로 부하들을 달래고 독려해 주는 사람이었다.
이에 여정 동안 모두들 태자마마에 대해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본 태자는 진실로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고, 자신을 남조국까지 보낸 황제 폐하를 절대 원망하지 않으며, 항상 자신들을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태자는 황제의 명으로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남조국으로 간 것이었다. 이번 남조국 행은 고되기만 하고 이점이라고는 없던 터라 천하 사람들 눈에는 황제 폐하께서 태자마마를 쫓아내거나, 쫓아내거나, 경고를 주거나, 또는 변칙적인 벌을 주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하지만 함께 남조국 행에 나선 군인과 관원들은 ‘이런 훌륭한 태자에게 황제 폐하께서는 무슨 불만이 있으신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답답해했다.
* * *
숲에 푸른색 휘장이 둘러쳐진 태자만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사실 모두 알다시피, 이는 태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비록 오는 내내 태자와 함께 동고동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국의 당당한 태자마마에게 자신들처럼 일렬로 쭈그리고 앉아 궁둥이를 까고 변을 보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태자 이승건이 휘장을 들고 있는 금군들을 바라보며 난처하게 웃었다. 그런 후 휘장 끝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바지를 풀지 않았다. 대신 살짝 긴장한 상태에서 냉정하게 무언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환약 한 알을 쥐고 있는 손 하나가 푸른 휘장 안으로 쑥 들어왔다.
분명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닌 듯했다. 태자는 약을 집어 들고 곧장 입에 넣고 씹어서 삼켰다. 그런 후 혀끝으로 치아 사이사이를 세세하게 핥아 약 찌꺼기가 남아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곁에서 시중을 들며 몰래 감시 중인 태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약을 저 군사들에게는 줄 수는 없는 것인가?”
한동안 아무 말도 않던 태자가 푸른색 휘장 밖에 있는 희미한 형체를 향해 한 말이었다. 그가 슬픔이 담긴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오는 길에 이미 일곱 명이나 죽었구나.”
남소에는 장독(축축하고 더러운 땅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으로 열병 등을 일으키는 것)이 너무 많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태의가 최상의 약을 준비했다고 했지만, 그래도 몇몇 금군과 태감은 잘못해서 그 독 안개를 흡입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푸른색 휘장 밖에 있는 형체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마마, 갈수록 마마가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왕 십삼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태자가 쭈그려 앉아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왕 십삼랑이 범한의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범한이 이렇게 조심스레 자신을 보호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범한이 하려는 말은 매우 명확했으니, 자신도 범한에게 무언가를 감사할 필요도 없었다. 한데 태자는 고수가 감정적으로 자신을 엮으려는 게 조금 불쾌했다. 그래서 왕 십삼랑에게 가지고 온 약을 모두 내어 줄 수 없는지 떠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출처가 불분명한 환약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취침 시중을 들어주는 태감에게 들킨다면 그건 확실히 곤란한 일이었다.
하지만 환약이 없다면 사람을 구할 수 없지 않은가.
태자는 여정 동안 죽은 이들이 떠올라 어느새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어 버렸다.
태자는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처신을 매우 잘 해왔다. 왜냐하면 부황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부황은 자신을 태자에서 폐위시킬 이유를 찾고 계셨다. 그런데 황제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구실을 찾지 못한다면 부황도 서둘러 손을 쓰시지는 못할 것이었다.
태자에게 부황은 체면을 너무 중시하는 분이셨다. 이승건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밑 닦은 종이를 바닥으로 던지며 생각했다.
‘체면이나 밑 닦은 종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나 둘 모두 확실히 필요한 것이기는 했다. 적어도 그러했기에 이승건은 또 한동안 버틸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고집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부황, 소자는 너무 많은 구실을 제공해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폐위하시려면 체면 따위 버리셔야 할 것입니다.’
태자가 휘장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남조국 전국왕의 관 옆에 있던 어린아이가 떠올라 잠시 딴생각을 했다.
‘다 똑같은 태자이거늘. 아비가 일찍 죽는 건 실로 행복한 일이로구나.’
이내 그에게 오늘 밤 천승현(天承縣: 천승은 하늘을 잇는다는 뜻이다)에서 묵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현의 이름이 참으로 길(吉)해 태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