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320
661화 동해로 온 황제 (3)
“짐이 지난 번 담주에 왔을 때는 신분이 태자가 아니었다.”
황제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때는 진평평이 지금의 홍사양처럼 내 뒤에 서 있었지. 그리고 네 아버······, 범건은 지금의 너처럼 짐과 함께 이곳에 나란히 서서 담주의 맑은 해풍으로 목욕을 했었단다. 짐이 태자가 된 후로는 범건은 다시는 짐과 나란히 설 수 없었지.”
범한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고 있다가 황제 폐하의 입가에 스치는 조소를 보았다.
황제가 살짝 자조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짐은 그 의자에 앉은 후로 남쪽을 정벌하고 북쪽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자 서 있는 건 고사하고, 감히 짐을 똑바로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더구나.”
범한이 시의 적절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때 우리 세 사람은 담주로 기분 전환을 온 거였단다. 그때 경도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거든. 친왕 두 분께서 적장자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암암리에 싸우고 계셨어. 그때 선황께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성왕야였을 뿐이었고.”
황제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우리 같은 젊은이들은 그 안에 끼어들 방법이 없었단다. 그래서 시시비비가 벌어지는 곳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지.”
황제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사실은 너의 지금 생각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단다. 다만 그때의 짐에 비하면 네가 훨씬 강력하다고나 할까.”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관건은 마음이온데······ 그다지 강단이 있지는 않사옵니다. 그래서 어떤 일들의 경우는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승건이에게 아직 연민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황제가 고개를 돌리고 싸늘하게 말했다.
“하나 이러고 있으니 참 좋구나······ 과거 우리 세 사람은 이 부두에 서서 저 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느니라. 그때 가슴속에는 누군가를 향한 연민 따위는 없었다. 우리가 바라는 건 어떻게 해야 스스로를 잘 지켜내고, 살아남을 수 있느냐였는데······. 짐은 항상 생각하던 게 있었지. 그날 바다를 볼 때도 어쩌면 바다에서 신선이 툭 튀어나와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거일지도 몰라.”
범한은 일단 조용히 있었다. 황제 폐하의 다음 말이 무엇일지 알 수 있어서였다.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냥 오늘과 똑같았다.”
황제가 천천히 말을 이어 가는데, 입가에 한 줄기 장난기가 어리었다.
“그러다 우리 모두 고개를 돌렸는데, 부두에 여인이 있더구나. 그것도 그녀의 이상한 시종도 함께 말이다.”
범한이 은은하게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옛날에 황제 폐하께서 어머니와 어찌 만나신 건지, 소자, 줄곧 생각을 했었습니다.”
황제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범한이 감성에 젖어 내뱉은 소자란 단어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하지만 요 녀석이 그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는 걸 알고는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황제가 조금 전까지 하던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까 너에게도 말했다시피, 지금껏 감히 짐과 나란히 선 사람은 없었는데······ 네 어미만은 감히 그리 하더구나······. 태자든, 황자든 상관 않고 네 어미는 짐과 나란히 서서 대해를 바라보고 바닷바람을 쐬며 짐을 특별한 사람 취급하지 않았지······. 심지어는 가끔씩 무례하게 짐을 깔보기까지 했단다.”
황제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녀가 죽은 후 세상에 그리 해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는데······. 그렇다고 네가 그녀의 그런 점을 조금이나마 닮아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단지 네가 너무 바보인 척 하며 공연히 짐과 네 어미의 위신을 깎아 먹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단다.”
그러자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옆에 세워놓고 옛날이야기 하신 게 그 위신 때문이었던 건지······. 그냥 관두겠습니다! 제 별 볼 일 없는 목숨부터 챙기렵니다.’
“황제 폐하, 경도로 돌아가시지요.”
범한이 드디어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살짝 우려하는 기색을 담아 말을 이어 갔다.
“경도를 비우신지 너무 오래되셨사옵니다. 그러다······.”
범한이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멈칫하자 황제가 싸늘하게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모두 하거라. 짐이 경도를 비운 사이 누군가가 나쁜 맘을 먹을까 염려된다 말하려던 것 아니냐.”
황제가 바다를 바라보며 자그마한 소리로 냉담할 정도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짐은 이번에 바다를 바라보며 천제를 지낼 것이니라. 그리고 광명정대하게 태자를 폐위시킬 것이다. 그리고 누가 용기와 담력을 가진 사람인지, 작금의 경국 강산이 대체 누구의 천하인지 살펴봐야겠구나.”
해변에서는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어대고, 부두에서는 물보라가 가볍게 철썩였다. 한편 저 멀리 절벽에서는 파도가 절벽에 부딪혀 ‘촤라락’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부두 나무판자 위에 서 있던 범한이 황제 폐하가 토해낸 열변에 전혀 혹하지 않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은 만승(萬乘)의 존귀한 몸이신 황제 폐하께서 오시면 안 되는 곳이옵니다. 하여 부디 돌아가실 것을 재차 간청 드리옵니다.”
“경도에 황태후께서 계시고, 진평평과 두 대학사도 있는데 누가 감히 함부로 움직이겠느냐!”
황제가 대해를 바라보며 이제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천하를 찬탈하려면 그 의자를 빼앗아야 한다. 그리 하려면 일단 그 의자에 앉아 있는 짐부터 죽여야 할 터······. 하나 짐을 죽이지 못할 게다. 그러니 소란을 피우려면 피우라 하거라. 몹쓸 것들이 반역을 해봤자 십 년이 걸려도 못 이룰 것이다.”
범한은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황제 폐하께서는 진정한 변태라고 생각했다.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강한 자신감과 강렬한 의심이 합쳐져 이런 극한의 자아도취적 성격이 형성되다니······.
황제는 뱀을 굴에서 나오도록 유인하는 중이겠지만 그래도 그 자아도취에 때문에 언젠가는 죽을 수 있었다. 한데 정작 범한은 황제 폐하의 부장품은 되고 싶지 않았다.
“안지야. 사람은 마음은 원래 알기 어려운 것이니, 명심해두거라.”
황제가 갑자기 감상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게 자기 아들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기 누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 도통 알 수 없게 말했다.
이 말을 대단히 감상적으로 내뱉은 황제의 얼굴에 갑자기 피로가 밀려들었다. 미간 주름 사이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피로가 채워졌다.
이번 것은 황제가 조회 시 용좌에 앉아 신하들에게 일부러 내보이는 가짜 피로가 아닌 진짜였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생겨난 일종의 고단함이었다.
옆에 있던 범한은 황제 아버지의 낯빛과 표정을 차분히 또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황제 아버지의 얼굴에 나타난 진실하고 인간다운 표정을 보는 동안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쳤는지 모른다.
이렇게 흘러나온 진실한 감정은 담주 부두를 우연히 스치고 지나가는 구름과 같았다. 단지 우연히 나타나 눈을 찌르는 햇볕을 잠시 가려주었던 것뿐이므로 곧 흩어져 새파란 하늘로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어느새 황제의 얼굴에서는 그와 같은 감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남아 있는 건 원래 쨍쨍하게 내리쬐던 자신감과 굳은 의지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우연히 평범한 속마음을 드러내고는 곧바로 군왕의 역할로 돌아가 버렸다.
* * *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범한이 감개무량함을 금할 길이 없어 탄식했다.
“속담에 사람과 호랑이의 형상은 그려도 그 속에 든 뼈는 그리기 힘들다 하였습니다. 또한 사람의 얼굴은 보아 알 수 있을지언정 그 마음은 알 수 없다고 하였지요. 그러니 평소에 서로 부드럽게 대하던 사람이라도 칼을 들고 상대방을 찌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황제는 범한을 감개무량하게 한 대상이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황제도 같은 기분으로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살짝 넋 나간 듯한 모습으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세인들은 어쩌면 짐을 무심한 사람, 무정한 사람이라 여길 것이다. 하나 그들 생각은 모두 틀렸단다.”
범한은 옆에서 차분히 황제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황제가 천천히 말했다.
“짐이 그들에게 너무 많은 기회를 주었어. 그들이 깨우치고 후회하기를 바랐거든. 그래서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지. 한데 짐이 그들에게 정이 없었다면 무엇하러 이리 분주히 행동하겠느냐?”
이에 범한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도록 유도하고 압박해 그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셨지요. 태자와 2 황자가 수년간 고생한 걸 보십시오. 황제 폐하의 그런 행동은 아버지로서의 정일까요, 아니면 황제로서의 병일까요?’
“네 어미처럼······.”
황제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기 시작했다. 마치 해를 가려주던 구름이 사라져 햇빛에 눈이 부신 것만 같았다.
범한은 살짝 긴장감을 높여 황제의 말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황제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더니 얼굴을 돌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경국에 무척이나 큰 공로를 세웠단다. 짐에게는 더욱 그러하니······ 하늘같은 은혜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한데 하루아침의 변고로 그녀와 그녀가 세운 섭가가 과거가 되어버렸구나. 처참히 죽은 것도 모자라······. 하나 짐은 지금까지 그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단다. 비록 나중에 살짝 갚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베푼 은혜와 의리에 비하면 짐이 한 건 너무나도 보잘것없구나.”
범한은 황제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황제는 4년을 인내한 후 그 일에 몸담은 경도의 왕공귀족을 일망타진했다.
하지만······ 중요한 인물 몇몇은 죽이지 않고 남겨 두었다. 그런데 만약 그게 복수를 한 것이라면 이는 완벽한 복수로 볼 수 없었다.
황제가 천천히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짐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 두 사람도 묻지 않았다. 하나 짐은 ‘그들’이 속으로 개운치 않아 한다는 걸, 그리고 짐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느니라······.”
그가 입가에 자조하는 느낌을 살짝 띄우고 말을 이어 갔다.
“하나 그 일을 짐이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냥 아무 말도 없이 섭가를 국고로 편입시키고, 섭씨들을 역도로 몰은 건 무정한 일이었다. 하나 섭가를 위해 사건 해결을 해준다고 해보자. 황태후마마를 어이 해야 할까? 짐이 황후를 폐위시키고 죽였어야 했을까? 그래야 진정으로 정의롭고 의리 있는 행동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여기까지 말하는 동안 황제는 어조가 매우 차분한 건 물론 감정이 격앙되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범한은 절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물론 황제의 말에서 등장한 원망하는 마음을 품은 ‘그들’이란 바로 아버지인 범건과 진평평 원장이란 사실을 범한은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에 있다 해도 세상에서 제약을 받는 법이다.”
황제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짐이 정말로 그리 했다면 똑같이 무정한 사람이 되는 거란다. 더군다나 온 조정이 어찌 변하겠느냐? 짐의 생각으로는, 네 어미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 짐의 행동에 찬성해 주었을 게다. 네 어미는 강대하면서도 풍요로운 경국을 건국하고 싶어 했는데, 짐이 그걸 이뤘거든.”
황제의 얼굴에 살짝 의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세상을 돌아보면 경국은 현재 가장 강한 나라일 것이다. 경국의 백성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테고 말이지. 짐은 이 점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위로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범한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환생한 후 그는 경국은 어떤 나라이며, 경국 황제는 어떤 사람인지 자주 자문해보았다.
그리고 경도로 온 후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 깊이 있는 답을 얻게 되고, 드디어 자신감, 자기 연민, 잘난 체, 자학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는 황제와 만나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재작년에는 홍수, 올해는 폭설이 있었지만, 경국은 관료 기구의 효율이 높았고, 민간은 부유했으며, 정치적으로 깨끗했다. 그러니 전생에 읽었던 역사와 비교했을 때 몇 배나 강한 국가였다.
다시 말해, 지금의 경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치세(治世), 더 나아가 성세(盛世)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범한 옆에 있는 황제 폐하는 의심할 여지없는 명군(明君)이자 성군(聖君)이었다. 만약 황제에 대한 평가 기준을 백성을 배불리 먹여 살리는 데 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