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328
669화 한밤에 산을 봉쇄한 장궁 (1)
“그를 설득했더구나.”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어두컴컴한 절벽가에 서 있었다. 오늘 하늘에는 구름이 껴 있었다. 이에 달빛은 두꺼운 구름층에 가려 있었다. 절벽 아래 가장 아래쪽에 있는 바닷물은 먹물 같은 짙은 검은색이었고, 그 위에서는 아주 가끔 미약하게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분명 황제의 행차를 호위하러 나온 교주 수군의 선박이었다.
범한이 황제 곁으로 다가가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후에 하마터면 떨어질 뻔하셨는데, 황제 폐하의 담력은 대체 어찌 단련된 것인지.’
하지만 사태가 너무 긴박해 범한은 황제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 산 아래에 기마병이 습격을 해왔사옵니다.”
황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얼굴에는 엷게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범한이 어찌 이 높은 산꼭대기에서 산기슭의 동정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황제가 천천히 물었다.
“그러하냐? 얼마나 왔느냐?”
“모르옵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이어 갔다.
“신이 보기에는 적이 습격을 해왔으니, 바로 호위를 보내 포위망을 뚫고 나가 구원 요청을 하도록 해야 하옵니다.”
그러자 황제는 차분히 범한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의 청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대신 느긋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너에게 따로 시킬 일이 있구나.”
바로 이때, 산 아래에서 불화살 한 대가 ‘슉’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잠시 동안 하늘을 밝혀 산자락에서 발생한 적과 관련한 긴급 사항을 알렸다. 지금 산 아래쪽에서 사람 죽이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피가 이리저리 튀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황제 시해를 목적으로 하는 경국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건방진 움직임이 이로써 서막을 연 것이었다.
“알려드립니다!”
금군 부통령이 산꼭대기 숙영지에서 뛰어나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재빨리 산 아래에서 발생한 상황을 보고했다. 산 아래에서 산 정상까지는 매우 멀어 몇 발의 령전(令箭: 명령 전달을 위해 쏜 화살)만 가지고는 구체적인 상황까지 알 수는 없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부통령은 한밤중에 찬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산 아래에서 적의 급습이 시작되었다는 것만 알뿐이었다. 이에 이것만으로도 그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금군 부통령은 이번에 습격해온 군대가 어떻게 지방 관아 모르게 대동산 산 아래까지 이동했으며, 그리고 이리 어두컴컴한데 어떻게 산 아래에 있는 금군 2천에게 맹공을 퍼부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내용 보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범한은 금군 부통령의 위아래로 씰룩이는 입술만 보고 있느라 귀로는 단 한 자도 듣지 못한 것만 같았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무성 영화의 한 장면을 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웃긴 일이었다. 어엿한 일국의 국주가 국토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대동산에서 포위되다니!
* * *
살육하는 소리는 높은 산 정상까지 전달되지 못했다. 피비린내도 위로 올라오지는 못했다. 이에 대동산 산봉우리는 여전히 청명했다. 그리고 이때 산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밤하늘에서는 두꺼운 구름이 갑자기 흩어지며 밝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색의 달빛이 산꼭대기에 있는 황제와 범한을 비추었다.
범한은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 달빛에 싸여 신처럼 서 있는 황제를 바라보고 있다가 긴장과 흥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철갑 같은 어깨 너머로 저 바다에서 다가오고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배는 파도를 따라 넘실대며 달빛을 맞으며 대동산을 향해 유유자적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산 정상과 바다까지는 서로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범한은 여전히 그 작은 배를 감지해낼 수 있었다.
그 배 위에는 섭류운이 서 있었다.
달빛은 물만큼 서늘했다.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저 멀리 떨어진 산 아래와 바다를 보고 있었다. 먹물 같은 바닷물 위에서 작은 배는 가볍게 내려갔다 올라가며 출렁이기를 반복했다.
범한은 패도의 정기 때문에 눈이 놀라울 정도로 밝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배 위의 상황은 여전히 명확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범한은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배 위의 그 늙은이가 잘 보였다. 그는 삿갓을 쓰고 수염이 나 있었다.
천하 4대 종사 중에 범한이 본 건 섭류운 뿐이었다.
어렸을 때 한 번, 소주성에서 한 번이었는데, 그때마다 너무 놀라 부러울 지경이었다. 섭류운은 멋스러운 사람이었다. 그것도 대단히 멋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오늘 밤에는 배에 올라타 검을 들고 파도를 헤치고 있었다. 그의 기세가 아직 산꼭대기까지 전달된 건 아니었지만, 풍채만큼은 절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범한은 넘실대는 바다 위의 배를 보며 저 배가 곧장 대동산으로 돌진하는 걸 상상하고 있었다. 저기 있는 자는 수천수만이 막아도 자기 식대로 해치워버릴 수 있는 대종사였다. 그런데도 범한은 절로 감개무량한 마음이 들었고, 이에 살짝 공경심이 생겨 어느 순간 그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작은 배는 매우 근접거리까지 온 것 같았지만 실은 대단히 먼 곳에 있었다. 수평선에서 달빛을 맞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해안에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범한은······ 인간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생과 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곧 무수히 많은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저 작은 배가 결국에는 해안에 오를 순간이 올 거라 생각했다.
해안선과 맞닿아 있는 대동산 산 아래에서 갑자기 반짝이는 불빛이 나타났다. 점점이 흩어진 작은 불빛이었지만 산꼭대기에서도 충분히 보였다.
불꽃은 아래 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귀신처럼 나타난 강력한 반란군이 금군 2천이 만든 방어선을 향해 필사의 공격을 펼쳤고, 이에 군영에 불이 나 벌써 통제 불능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한데 다행히 여름이라 비가 자주 내리고 바닷바람 때문에 산속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이에 불이 대동산을 몽땅 태운다거나 산 위에 있는 사람을 전부 타 죽일 염려는 없었다.
다시 화살 몇 대가 스산한 소리를 내며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한데 이번 화살은 산허리까지 올라왔다가 처참하게 비틀거리며 무력하게 떨어졌다. 지금 산 아래의 금군 방어선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고 곧 무너질 지경인 것만 같았다.
작은 배가 도착하기도 전인데 강한 적은 이미 산 아래쪽을 모두 초토화시켜 놓았다. 경국 황제 일행은 풍경 감상을 위해 만들어진 석재 난간 앞에 바다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리고 산기슭의 동정과 타오르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불을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얼핏얼핏 싸우고 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서로 싸우고 죽이는 소리는 산꼭대기까지 올라오던 중에 바람을 맞고 나뭇가지에 걸려 왜곡되어 절주를 가진 두드리는 소리처럼 변해 있었다.
그래서 소리에서는 살의란 게 사라지고 없어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아래쪽의 분위기를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다. 한편 그와는 반대로 대동산 뒤쪽으로 펼쳐진 바다에서 천천히 오고 있던 작은 배는 그들에게 훨씬 더 큰 긴장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때 천제를 담당한 예부 상서, 태상사경도 일찌감치 방안에서 나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황제 폐하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고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그런 자신들의 기분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다.
금군 부통령은 제일선에서 죽을 각오로 이미 산 아래에 내려가고 있었다. 한데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2천에 달하는 금군은 이미 어둠 속에서 혼객으로 변해 산중의 주검이 되어 있을 수 있었다.
범한은 입안에서 쓴 내가 나는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하지만 놀란 마음은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산 아래의 군대는 대체 어디에서 온 거지? 왜 감찰원은 일찌감치 동산로 망에서 관련 소식을 감지하지 못한 거야? 왜 효산 일대에 와 있는 흑기 500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거지? 상대방이 쥐도 새도 모르게 대동산 산 아래까지 잠입했다는 거야?’
지금 가장 놀라운 건 산 아래의 상황이었다. 불꽃의 후퇴, 죽이는 소리의 변화, 쏘아 올린 령전을 가지고 판단을 해보니 범한은 금군이 이미 견딜 수 없는 지경이란 걸 알 수 있었다.
‘2천 금군이 이렇게나 빨리 무너지다니!’
경국은 무력으로 천하를 재패한 나라다. 그래서 비록 금군은 경도에만 주둔해 있느라 전투 능력만 놓고 보면 정주군, 정북 군영의 7로 대군만 못했지만, 그래도 1황자가 금군 대통령으로 온 후 정서군의 근간이 되는 장수들을 많이 데려다 놓아 금군 실력은 어느 정도 향상이 된 상태였다.
‘그러니 설령 반란군 대군의 적수는 안 될지라도 그래도······ 이리 빨리 무너질 정도는 아닐 텐데.’
이에 범한은 너무 놀라 의혹이 일었다.
‘습격에 나선 군대를 대체 어느 집안 자제가 이끄는 거지?’
* * *
“연소을의 대군영에서 온 친위대구나.”
황제는 석재 난간가에 서서 산기슭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대 아래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범한과 늙은 홍 태감의 눈에서 불안감이 살짝 엿보이자 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
“금군은 저들의 적수가 못 된다.”
“연소을의 대군영에서 온 친위대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 달 전 창주와 연경 사이에서 벌어진 이상한 창주 대첩을 떠올리고 있었다. 연소을이 어떤 수로 병사들을 대동산 산 아래까지 이동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적이 도착한 이상 그런 것들을 따져보는 건 그에게는 순전히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너는 감찰원 제사다. 군대가 천 리를 이동해 국경 안쪽까지 습격해 왔는데, 이는 무슨 죄에 해당하느냐?”
황제가 범한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얼굴로 물었다.
범한은 잠시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었다. 황제 폐하가 농담을 던져서였다.
‘산 아래 정세가 이렇게나 험악한데 어떻게 저리 재밌어할 수 있는 걸까?’
범한이 황제의 질문에 대답했다.
“설령 담주 북쪽에 비밀 통로가 있다 해도 감찰원에서는 낌새를 알아차렸어야 합니다. 그러니 신의 생각으로는 감찰원 안에서 누군가가 저들을 돕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황제는 웃어주기만 할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범한이 감찰원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 건 진실을 말한 것인 동시에 탐문을 해본 것이었다. 산기슭에서 호랑이와 이리떼처럼 살육하고 있는 저 정예부대에게, 그러니까 연소을의 친위대에게 황제 폐하께서 일부러 길을 터준 건 아닌지 떠본 것이었다.
황제 폐하의 자신감에 찬 표정과 차분한 태도만으로도 범한은 자신의 추론을 믿고 있었다. 한데 황제 폐하의 웃음에 보이는 저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지금 산 아래 상황이 어떤지 짐도 알고 있다.”
황제가 갑자기 싸늘한 투로 말을 이어 갔다.
“짐은 눈먼 이가 되고 싶지는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