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0
040화 약약의 석명
침묵이 계속되자 유씨는 이러고 있는 거야말로 자신의 기세를 약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명색이 자신이 어른이니 긴 침묵을 깨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잔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는 요즘 호부(재무부)에서 시랑(명청(明淸) 시대에 정부 각 부(部)의 부장관(副長官))으로 계신단다. 이번에 경도에 온 게 내년 과거 시험을 위해서니, 아니면 바로 호부에서 일을 하려는 거니?”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버지 말씀대로 따라야죠.”
그리고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아버지는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솔직히 말해서 경도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지금 앞에 있는 유씨 부인도 그중 하나였고 비개 스승님과 누이 약약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사람은 단연코 아버지였다.
당시 사남 백작이 어머니를 어떻게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섭씨 집안 딸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알고 싶었다. 어쩌면 자식 마음이 다 그렇듯이 죽은 여인만 어머니로 생각할 뿐 사남 백작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조금 있으면 돌아오실 게다.”
유씨 부인이 말한 순간, 안마당 대문 쪽이 몹시 소란스러웠다. 너 나 할 거 없이 종들이 서둘러 맞이하러 나갔지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아무도 막지 못한 듯했다. 갑자기 한 여자아이가 안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 여자아이는 예쁘진 않았지만 미간이 희한할 만큼 깔끔해 보였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지만 무뚝뚝함이 묻어났다. 여기서 무뚝뚝하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얼음 공주 같은 느낌이 아니라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냉정함과 주변의 모든 생물을 멸시하는 혐오감 같은 느낌이었다. 범한은 귀족 가문의 소녀 얼굴에서 나오는 냉담함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녀는 범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간에 드리워진 냉정함이 어느새 사라지면서 잔뜩 찌푸리고 있던 주름도 싹 없어졌다. 그러더니 양쪽 볼도 갑자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을 하려다 말고 살짝 뒤로 물러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예를 갖춰 넙죽 절했다. 그녀의 부드럽고 예의 바른 목소리에 약간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소녀, 오라버니께 인사드립니다.”
범한이 활짝 웃으며 얼른 그녀를 일으켰다.
“약약,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장난기 가득한 순수함 그 자체였다. 범한이 수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 세계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누이 약약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낯선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10년 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있는 남매의 분위기를 망쳐 놓았다.
“네가 범한이야?”
범한은 고개를 돌려 간신히 높은 문턱을 넘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았다. 통통한 몸에 왼쪽 얼굴에는 사마귀 몇 개가 보기 흉할 정도로 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몹시 불쾌한 듯 범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범한은 그 아이를 무시하고 누이를 자리에 앉히고 나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도련님은 누구신지요?”
그는 방금 등장한 아이가 누구인지 짐작했지만 일부러 아는 척하지 않았다.
“나는 범사철이야. 이 집안의 큰 도련님이라고나 할까.”
통통한 어린 소년이 범한을 쓱 훑어보고는 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아, 네가 그 서자구나.”
귓가에 들려오는 대답에 범한은 곁눈질로 유씨 부인을 쳐다봤다.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 유씨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일부러 자신의 아들을 불러 한바탕 소란을 피우게 해 범한의 평정심을 무너뜨릴 심산인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범사철이 어려서 잘 몰라서 그랬다는 핑계는 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범한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는 이미 담주에서 경도 저택에 있는 어린 도련님이 고집도 세고 무지막지하다는 소식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훗날 범씨 집안이 이 어린아이 하나로 비참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막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친히 어린 ‘동생’을 길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 벌어진 상황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옆에서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범약약의 얇은 입술 사이로 매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손 내밀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탁자 아래서 기다란 회초리를 하나 꺼내 들었다.
“왜?”
범사철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찰싹찰싹 소리에 맞춰 범사철의 손에 붉은색 자국이 선명하게 생겨났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내고 있었다. 그러고는 욕이라도 퍼부을 기세로 대들었다.
“이런, 계집애가······.”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무표정한 얼굴의 범약약은 이미 아까보다 굵은 회초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제야 범한은 누이의 미간에 나타나는 냉정함이 보통 사람들 눈에는 실제로 꽤나 무서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 형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돼. 둘째, 너는 범씨 집안 출신으로 말을 가려서 할 줄 알아야 해. 셋째, 형님에게 무례하게 굴면 안 돼. 이걸 다 못 지켰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범약약의 냉정한 말투와 회초리를 들고 있는 모습에 범한은 겉으로는 한없이 연약하고 사랑스럽지만 실제 내면은 당차기 그지없는 유치원 선생님들을 떠올렸다.
범사철은 범한을 무섭게 한번 쏘아보고는 입을 삐죽거리며 뒷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울었다 하면 저렇게 자기 어머니한테 달려간다니까.”
범약약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철은 이름이 두 글자네. 신기하군.”
“사려 깊게 행동하라고 지어 준 이름인 거 같은데 뭐 하나 제대로 생각할 줄 몰라. 무조건 제멋대로야.”
“그럼 교훈적인 이름을 지어 줬어야 했나. 아무튼 네가 이름 풀이를 해주니 더 재미있다.”
“아무렴 오라버니가 해주는 얘기보다 재미있으려고.”
“근데 네가 회초리를 들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어?”
“응. 아버지가 나더러 사철이를 가르치라고 하셨거든.”
“내가 이 세계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네.”
“남성 권리 문제, 뭐 그런 거?”
“응. 그리고 집안 내 권력 분배 문제도.”
“요즘은 나에게도 어느 정도의 권력은 생긴 것 같아.”
“하지만 잊지 마. 네가 가진 권력은 그 남자가 무엇을 선호하고 좋아하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말이야.”
“오라버니도 잊어버리지 마. 오라버니가 말하는 그 남자가 바로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 말이야.”
마치 기관총을 쏘듯 이어지던 두 사람의 대화가 갑자기 뚝 끊기자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범약약도 조금 전까지 참고 있던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다.
범한도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와서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얘기할 수 있고 그걸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누이밖에 없었다. 처음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는 약약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어떤 면에서 보면 은연중에 세상과 인생을 보는 관점에 대해 범한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10년 동안 서로 못 보고 지낸 터라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기는 했다. 하지만 앞서 나눈 즐거운 대화 덕분에 그 거리는 순식간에 지난 10년을 훌쩍 뛰어넘었다. 앞에 앉아 있는 오라버니(누이)가 서로 떨어져 있었던 적도 없거니와 매일 정원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는 단짝 친구처럼 느껴졌다.
범약약은 범한을 스승처럼 따랐고 범한은 누이를 학생이나 후배처럼 여겼다. 두 사람 사이에 아주 미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범한은 약약을 바라보며 흐뭇한 얼굴로 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범약약이 머리를 숙이며 작게 대답했다.
“다 오라버니 덕분이지요.”
“어?”
범한이 수줍은 듯 웃어 보였다. 설마 자신이 쓴, 이전 세계의 로맨스 드라마에 나오는 갈등이 정말 도움이 되었다는 건가. 하지만 차마 이 말은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요즘 유씨 부인이 좀 조용해.”
범약약은 그녀를 그냥 유씨 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때 거실에 범한과 그녀, 두 사람뿐이었는데도 냉정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범한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내가 담주에 있었지만 유씨 집안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어. 너도 그분을 절대 만만하게 봐서는 안 돼.”
“그럴 리가.”
범약약이 눈꺼풀을 아래로 떨어트리자 뽀얀 살결에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범한은 단 한 사람일지라도 이 세계에서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정말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약약이 자신의 가르침 덕에 이만큼 성장한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 편지 받았어?”
“응.”
조금 전까지 그녀의 얼굴에 있던 차가운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그저께 밤에 방에 있는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랐잖아. 웬 나쁜 놈이 왔다 갔나 했는데 알고 보니 오라버니 필적이더라고. 그래서 알았지.”
범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죽 아저씨의 능력을 빌리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편지를 전달하기에는 너무 아깝긴 했다.
거실에는 여전히 두 사람뿐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분이 좋아진 범한은 차를 한 모금 삼키고는 정색하며 물었다.
“내가 경도에 온 이유는 아직 모르지?”
범약약이 고개를 들더니 웃는 듯 마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왜 그래?”
살짝 비웃는 듯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범약약이 웃었다.
“오라버니가 경도에 온 이유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걸. 게다가 여기 사는 각 집안의 자제들도 사남 백작의 서자가 경도에 온 후로 얼마나 달라질지 궁금해하고 있다고.”
“어?”
범한은 살짝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날 은밀하게 부르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경도에 있는 사람 중 내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 어떻게 궁금해할 수 있다는 거지?”
“왜냐하면 오라버니가 여기에 온 이유는 결혼 준비 때문이니까. 아버지가 골라 놓은 오라버니 신붓감은 아주 유명한 집안 딸이야.”
그 순간 범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결혼할 상대가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과 결혼할지도 모르는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긴 했다.
“넌 그 사람 알아?”
“내 미래의 올케는 임씨 집안 사람이야.”
범약약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눈빛이 스쳤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경도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야.”
“임씨 집안? 왜 그 사람이 유명한 거야?”
범한이 눈을 부릅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저 멀리 담주에 있었지만 나는 황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있잖아. 할머니 쪽에서도 한몫하셨어.”
범악약이 웃음을 터트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뭔가를 알아차린 범한이 이마를 탁 쳤다.
“네가 말하는 임씨 집안이 재상 임약보를 말하는 거야? 얼마 전 한참 시끄러웠던 재상의 사생아 딸 사건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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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명: 중국(中國) 후한(後漢)의 사서(辭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