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12
753화 나무 아래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 (2)
“제가 간청 드리겠습니다.”
범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끝내야 할 때입니다.”
‘끝내야 할 때’라는 말을 들은 이운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가 담담한 눈빛으로 범한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담담했지만 범한은 그 안에 뼛속까지 사무친 원망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았다. 장 공주의 눈에 담겨 있는 깊고 깊은 원망은 범한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끝내야 할 때라고?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장 공주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짓자 어깨 위로 꽃잎이 떨어졌다.
“섭중이 배신했다는 건······ 의외이기는 하지만 네가 이렇게 왔는데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니? 아마도 사람들은 네가 가진 무력과 두뇌와 감찰원을 두려워하겠지만 나는 네 존재를 단 한 번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어.”
범한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사람들은 네가 아름다운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속은 음흉하고 악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장 공주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감찰원에서 연기를 잘한 것도 사실이야. 덕분에 사람들은 네가 이익이 걸린 중대한 순간에는 가족도 안중에도 없는 냉혈한이 된다고 믿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알아······ 너는 지금껏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그래서 완아와 대보를 잡고, 지금까지 놓아주지 않으시는 거군요.”
범한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2년 전에 내가 말했지. 너는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일격에도 무너져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운예가 천천히 말했다.
“너는 세상에 아끼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온통 약점투성이야. 내가 하나만 잡고 있어도 너는 함부로 움직이질 못하지······. 그렇지 않다면 왜 경도에 남아 있지 않고 이곳까지 달려왔겠어?”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말했다.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지키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것이 일할 때 가장 불편한 점인 건 맞습니다. 완아를 예로 들어볼까요. 장모님께서는 자신의 친딸의 생명을 가지고 사위에게 위협을 하고 계시지요. 지난 10일 동안 애써 아닌 척했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장모님께서 완아의 목숨을 쥐고 계시는 바람에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완아가 안전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도 기꺼이 내놓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 공주의 눈에 의미심장한 기색이 살짝 보였다.
범한이 반짝이는 호수 물결에 따라 떠다니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목숨을 내놓고 싶은 것과 위협을 당하는 건 다른 개념입니다. 만약 완아의 병을 치료하는 데 제 뇌가 필요하다면 저는 기꺼이 머리를 가를 겁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죽어도 완아의 신변이 안전해지지 않는다면 뭣 하러 목숨을 내놓겠습니까?”
그가 고개를 돌려 장 공주를 바라봤다.
“오늘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제게 그런 위협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대화를 통해서 이 일을 잘 수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키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 온통 약점투성이인 사람입니다.”
장 공주가 입을 열기 전에 범한이 먼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약점이 많아서 오히려 약점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완아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반격을 하지 않았다면 제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겠습니까? 또 큰 형님과 셋째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두 다 가족인데 우선순위를 매길 수는 없지요. 완아도 이런 제 생각과 방법을 이해해 줄 겁니다.”
장 공주가 옅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범한의 말은 이미 그녀의 위협이 통할 길을 모두 차단해 버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시도해 볼 수는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생각이 일찌감치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냘픈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큰 형님과 셋째라고 말하는 걸 보니 너도 결국에는 네 신분을 인정했나 보구나. 이씨 집안 남자들은 모두 위선적이고 후안무치한 사람들이야. 그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아서 무슨 유리한 점이 있다고 그러니? 그저 나를 핍박해서 스스로 위안을 얻으려는 것뿐이지. 완아와 백치의 죽음은 너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너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사사로운 정 때문에 대의를 저버리는 짓은 할 수 없어 수수방관한 것이라고 위안하고 싶은 거잖아······. 잔인하고 악랄한 짓을 저지른 사람은 내가 되고, 너는 피해자로 천하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싶은 거겠지.”
그녀가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생각하기에도 후안무치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녀가 잠시 범한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점은 네 아버지를 똑 닮았어.”
지금 그녀가 말하는 아버지는 황제 폐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저지른 악행을 숨기려 하는 것이야말로 후안무치한 짓이지요. 저는 장모님을 핍박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분명 완아도 이런 저를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교착국면에 빠져들었다. 사실 지금 범한에게 장 공주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완아와 대보가 어디 있는지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어느 구석에서 신양 고수들이 그들을 붙잡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상태에서 범한이 장 공주를 공격할 경우 가장 먼저 목숨을 잃는 건 완아가 될 수 있었다.
범한은 겉으로는 침착하고 평온해 보였지만 속은 조급해서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다. 아내가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데도 그는 아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장 공주의 표정은 진지하고 엄숙했는데, 그 표정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나 수수한 화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이씨 집안 남자들은 후안무치한 사람들이라고 말한 건 틀린 말이 아니야. 지난번에 광신궁에서 폐하가 나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한편으로는 나에게 자신의 뜻을 따를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당한 명분이 있는 상태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서였어. 그래야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녀가 범한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폐하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누이를 진정으로 아껴준 적 없었어. 그래서 폐하는 자신이 나에게 기회를 주었으니 내가 그에게 엄청난 기쁨을 줄 거라 믿었던 거지.”
범한이 생각하기에도 황제가 대동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것이자 장 공주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힘없는 여자가 다른 나라의 두 대종사를 설득하고 반란군을 조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거대한 계획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섭중의 칼은 범한에게 또 다른 진실을 알려주었다. 장 공주가 큰 계획을 세우기는 했지만, 폐하는 장 공주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더 방대한 계획을 세웠다는 걸 말이다.
그녀의 황제 오라비나 이번 일에서 기괴한 역할을 담당한 절름발이 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안지야,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줄곧 아무 말 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장 공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작년에 본궁이 너와 관계를 회복하려 했을 때 왜 응해주지 않은 거니?”
범한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운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죽이려 해서라거나 네 심복들을 죽여서 그런 거라고 말하지는 말렴······.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 둘 다 알고 있으니까. 아마도 너는 가족과 친구들을 아끼는 사람이면서도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지.”
잠자코 듣고 있던 범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단한 이유입니다. 장모님은 쉽게 물러설 분이 아니시고, 또 폐하께서······ 저희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 않으실 테니까요.”
사실 그는 지금 장 공주와 옛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장 공주가 그의 약점을 잡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장단을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상한 점은 장 공주는 큰 계획에 실패한 뒤 멍하니 지난 일을 추억할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든 범한이 장 공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오해하지 마. 이제 더는 너랑 손잡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황제 오라버니가 살았든 죽었든 이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어.”
그때 범한의 눈에 장 공주의 얼굴이 보였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황제 오라버니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야.”
이운예가 갑자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어. 나는 황제 오라버니가 대동산에서 하늘의 제사를 올리는 게 류운 아저씨를 끌어들여 죽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가 이처럼 큰 야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십여 년 동안 자신을 낮추고 참고 있었으니 그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롭고 쓸쓸했을 거야.”
범한은 이곳에 들어온 이후 연달아 누가 죽었는지를 알려 주었다. 이에 장 공주는 천재적인 지략을 발휘해 순식간에 대동산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황제의 의도를 추측했으며, 지난 5일 동안 동산로에서 아무 소식도 전해지지 않는 이유를 이해했다.
“동산로 소식이 봉쇄되었다는 게 황제 오라버니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한다고 생각하지 마.”
장 공주가 두 눈을 천천히 감으며 말했다.
“그 늙은 절름발이도 동산로 봉쇄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대동산 상황은 네가 기대하는 것과는 달라.”
“섭중이 움직였으니 류운 종사도 분명 움직였을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장 공주가 모든 걸 이해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고검과 고하는 섭류운이 내 사람이라고 믿기는 했지만······ 그래도 쉽게 경국 사람을 믿지는 못했을 거야.”
이운예가 두 눈을 살며시 떴다. 차가운 눈빛이라기보다는 담담하고 아무 생각 없는 눈빛이었다.
“너와 황제 오라버니가 잘못 생각을 한 것 같네······. 나도 경국 사람이야. 평생을 바쳐 황제 오라버니가 천하 통일을 할 수 있게 도와 왔다고. 그런 내가 설사 목숨이 위태롭다고 해서 경국 미래를 위험해 처하게 할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한 번도 황제 오라버니를 쉽게 생각한 적 없었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황제 오라버니는 단박에 상황을 역전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만 이번에 황제 오라버니가 류운 아저씨를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래도 고하와 사고검이 살아서 돌아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4대 대종사가 모두 대동산에 모였고, 그중에 류운 아저씨가 설사 황제 오라버니의 편에 섰다 하더라도 2대 2의 상황이니까. 고하와 사고검이 어떤 사람들이니. 황제 오라버니야 두 대종사를 죽이고 싶었겠지만, 절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나는 황제 오라버니의 능력을 믿어. 그래서 그가 죽으면서 두 대종사를 저승길 동반자로 끌고 갔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황제 오라버니가 가진 지혜와 강대함과 어울리는 것이니까.”
장 공주가 담담히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이제 우리 경국에는 류운 아저씨가 있는 반면 북제와 동이성에는 지켜 줄 사람이 없는 셈이 되지······. 이런 상황의 흐름이 이상할 게 있나? 류운 아저씨가 움직인 거나 4대 종사가 모두 죽은 거나······ 내 생각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게다가 대종사와 같은 괴물들은 애초에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됐어. 만약 대종사가 없었다면 우리 경국이 가진 군사력으로 진작 천하 통일을 이루었을 거야. 대동산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든 우리 경국이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거지. 너는 4대 종사가 대동산에 모여 모두 죽는 상황에서 폐하만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