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22
763화 종이가 호수에 잠기니 물고기들이 물어뜯고, 소매가 내려가니…
황제 폐하는 이 한 줄의 편지가 이운예에게 이처럼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제왕의 신분으로써 자신이 돌아왔다는 걸 알리려는 것뿐이었다.
수사자가 들판 위에서 포효하며 사방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처럼 황제는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경국을 다스리겠다고 통보한 것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범한도 장 공주가 우는 이유가 뭔지 알지 못했다. 이 미친 여자의 얼굴에는 조금의 광기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암담한 슬픔만 엿보였다.
범한은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직접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 공주가 분노하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황제와 범한은 누구보다도 영민한 사람이었지만 장 공주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남자들에게 여자란 의심할 여지 없이 완전히 다른 생명체였고, 아주 먼 미지에서 사는 낯선 존재였다.
이운예가 팔을 힘없이 내려뜨리자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서신이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가 태평 별궁 중앙에 있는 작은 호수에 떨어졌다. 호숫물에 젖은 종이는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잠겼다.
서신이 바람을 타고 나풀나풀 날아갈 때 범한은 그 안에 적힌 문장을 읽을 수 있었고, 그 역시 놀람을 금치 못했다.
섭씨 집안이 배신했을 때 그는 어쩌면 폐하가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다만 지금 직접 눈으로 사실임을 확인하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도대체 대동산 정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폐하가 살아 있다는 건 장 공주가 철저하게 패배했다는 의미였다. 그녀가 이전에 말한 적이 있었기에 범한도 단 한 번에 천하에 강대한 남자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 그녀가 바라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소식은 범한이 계속 바라던 소식이었다. 정말 폐하가 죽었다면 그는 섭씨 집안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뭘 해야 할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격해진 범한이 주먹을 꽉 쥐고 천천히 일어났다. 이운예의 모습을 주시하는 그는 이 소식 때문에 그녀가 어떤 미친 지령을 내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운예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작은 호수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고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수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그걸 지켜보는 범한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신양 고수들을 두려워했겠지만, 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건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완아와 대보의 안전이었다.
하지만 이운예가 내린 명령은 범한도 예상하지 못했고, 신양 고수들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 가봐. 더는 필요가 없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놀란 부하들을 본체만체하면서 다시 지시를 내렸다.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남은 삶은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해. 복수같이 쓸데없는 일은 하려 하지 말고.”
장 공주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부하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장 공주를 바라보던 부하들이 결국 통곡했다.
“마마!”
범한이 태평 별궁에 앞에 나타난 순간 이들은 경도에서 일어난 반란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지만 장 공주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는 않았다.
이운예가 아무 말 없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젓자 다시 부하들이 소리쳤다.
“마마!”
부하들은 작은 언덕 위아래, 작은 호수 주변에 무릎을 꿇고 안은 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 모습을 지켜봤다. 범한은 이운예가 자신의 패배를 확인하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부하들을 놔줄 거라는 건 예상했었지만, 부하들이 그녀에게 이처럼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신양과 접촉이 아주 적었기에 장 공주가 부하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황제의 암묵적인 허락과 진평평의 도움을 받아 지난 2년 동안 장 공주와 전쟁을 치르면서 그는 진 적보다 이긴 적이 더 많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이운예를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울며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부하들을 모습을 보자 범한은 비로소 이들이 장 공주를 얼마나 따르는지를 알게 되었고, 어렴풋하게나마 그동안 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장 공주마마가 어떻게 조정 안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녀가 고하와 사고검을 설득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녀가 황태자와 2 황자를 통제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이것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는 여전히 장 공주의 매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 모든 걸 아름다운 외모만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순간 그는 장 공주의 진짜 능력을 볼 기회가 없다는 사실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주변에는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호수 옆에 서 있는 장 공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우두머리 관리는 그 모습을 보고는 이미 대세가 정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은 그가 장 공주를 향해 큰절을 올리고는 의연히 몸을 돌려 떠났다.
한 사람이 떠나자 이어서 많은 사람이 떠났다. 이들은 목숨을 연명하는 데 연연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명령을 내린 이운예가 따르라 독촉하니 떠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태평 별궁에는 장 공주와 범한만 남게 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만 남게 된 것이었지만 범한은 자신을 주시하던 시선들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독감을 느낀 그가 장 공주의 마른 어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운예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양손을 아주 우아하게 복부에 올리고 넓은 소매는 아래로 내려뜨려 아름답고 화려한 윤곽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눈은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녀는 더는 악랄한 방법으로 적들을 없애던 악녀가 아니었다. 황태후에게 항상 따귀를 맞으면서도 훌쩍이며 유약한 사람인 척 연기하던 딸도 아니었고, 황제의 단단한 손아귀 아래서 날뛰고 분노하고 슬퍼하던 누이도 아니었다.
그녀는 장 공주였다. 그녀는 이운예였다. 하늘 아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이운예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사위를 바라봤다.
“폐하께서 살아계신다는 걸 알았는데도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기뻐하지 않는 것 같네.”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최근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기쁘지 않습니다.”
“그렇군. 자네는 자네 모친을 정말 많이 닮았어······.”
이운예가 약간 얼이 빠진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뭐라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말문이 막힌 그녀가 화제를 돌려 물었다.
“진씨 집안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나?”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굳이 정주군에 의해 경도에서 축출된 진씨 집안을 언급하는 이유가 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장 공주가 살짝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호수 바닥에 잠긴 종이를 바라봤다. 태평 별궁의 호수는 아주 맑고 얕아서 수면 아래 모습이 보였다. 퉁퉁 부은 만두피 같은 흰색 종이에 붉은 잉어들이 몰려들어 물보라가 생겼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장 공주가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는 별 볼 일 없는 걸 가지고 싸우는 저 물고기들과 다르지 않아. 하지만 이번에는 싸우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분노하고 실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분노하고 실망한 게 맞긴 하지. 하지만 황제 오라버니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기뻐한 것도 사실이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범한은 살짝 슬픈 감정이 들었다.
장 공주의 말대로 그녀 인생의 목표는 이미 달성되었다. 그러니 황제가 죽었든 살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다만 폐하가 돌아온다면 장 공주가 살길은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평생토록 잊지 못할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평온하고 담담한 얼굴을 한 이운예가 천천히 자신의 양팔을 내리자 옅은 색 궁복의 넓은 소매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배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한바탕 연극이 끝나고 연기자들이 마지막으로 관중들에게 감사 인사를 할 때 내려오는 장막과 같았다.
여기서 마지막 연기자는 그녀 자신과 독이 묻은 비수였다. 비수는 그녀의 아랫배에 깊이 박혀 있었다.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고는 칼자루밖에 없었다.
놀란 범한이 몸을 날려 바닥에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받치고 아랫배에 손을 뻗었다.
범한의 반응은 아주 빨랐다.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달려간 그가 한 손으로는 바닥에 쓰러지는 장 공주를 부축하고 다른 손으로 아랫배를 잡았다.
그리고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정기를 움직여 그녀의 상처 주변에 있는 경맥들을 막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옅은 검은 기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이 검은색 비수가 이운예의 복부에 박혀 있었음에도 넓은 소매에 가려진 탓에 범한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욱이 범한은 장 공주마마가 복부에 비수가 박힌 상태에서도 전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태연히 자신과 대화를 하며 그를 완벽하게 속였다는 점에 놀랐다.
이미 시간이 상당히 흐른 탓에 독소가 혈액을 타고 전신에 퍼져버린 상태였다. 심장에도 독소가 침입했고, 얼굴에도 옅게 독소의 검은 기운이 보였다.
설사 비개가 지금 당장 이곳에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할 터였다.
고개를 숙인 범한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하면서 그녀의 복부에 박혀 있는 비수를 바라봤다. 비수의 손잡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익숙한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비수가 어쩌다가 장 공주의 복부에 박히게 되었는지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장 공주의 어깨를 한 손으로 받친 뒤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눌렀다. 그리고는 북제의 천일도 무상 심법을 아낌없이 주입했다.
조금 뒤 고통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가만히 있던 장 공주가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꾸짖는 눈빛으로 범한을 째려보며 말했다.
“본궁은 천천히 고통과 죽음의 맛을 느껴보고 싶단 말이야. 도대체 왜 방해하는 거야?”
하지만 황족의 공주로 태어나 평생 동안 고귀한 신분으로 살며 부모와 형제들의 총애를 받던 그녀를 어찌 고통 속에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녀는 지금까지 살면서 황태후에게 네 차례 뺨을 맞은 것과 폭우가 내리던 날 분노한 황제 오라버니에게 목이 졸린 걸 제외하면 맞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뼛속까지 사무치는 고통의 맛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더구나 고통과 죽음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는 말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미친 소리였지만 범한은 한가하게 그녀와 입씨름을 벌일 영유가 없었다.
정기를 그녀의 체내에 주입해 독소를 몰아내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잠시 뒤 이운예의 얼굴에 옅게 드리워 있었던 검은 기운이 점점 짙어지더니 그녀의 태양혈 쪽으로 몰려 얼굴 다른 부분은 이전의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했다.
범한이 ‘끙’ 소리를 내며 오른손 손바닥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쳤다. 이운예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그가 재빨리 왼손으로 품속에 있던 환약 한 알을 꺼내 그녀의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는 비수에 묻어 있는 독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독을 배합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환약이 효과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운예가 칼에 찔린 사실을 오랫동안 숨기고 있던 탓에 이미 심장에까지 침투한 독소를 빼낼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