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28
769화 울분과 포도 (1)
아버지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한 범한은 심장이 떨렸다.
진씨 집안 어르신이 장 공주 쪽에 서서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아마도 20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당시 나는 폐하를 따라 서호와 전투를 하고 있었고, 진평평은 연경 일대로 이동해 북쪽의 매우 급한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그리고 섭중도 정주에서 주둔하며 후방을 맡고 있었다.”
범건이 눈을 천천히 감고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진업은 경도에 남아 있었지. 추밀원 정사는 경도의 군사력을 통제할 수 있는 자리이니, 그가 경도 변란에 참여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단다.”
하지만 진씨 가문 어르신이 섭경미를 죽인 원흉 중 한 명이라면 어째서 4년 뒤 경도 피의 달 사건 때 황후 일족이 모두 참수되고, 경도 왕공 귀족들도 숙청되었는데도 어째서 진씨 집안만은 화를 입지 않았던 걸까?
만약 폐하가 진평평과 아버지와 손을 잡고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 했다면 어째서 진씨 가문 어르신은 내버려 뒀던 것일까?
범한이 의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범건이 천천히 설명했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거였어. 그래서 진씨 집안에게도 황태후와 마찬가지로 사건을 방임했다는 죄 말고 다른 죄는 물을 수 없었지······.”
범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진평평도 이전에 자신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황태후는 장본인이 아니라 방임자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설명을 듣자 범한은 진 원장이 원래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씨 집안이 그때 맡았던 역할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가장 뒷받침해 주는 것이 진씨 집안에 대한 진 원장의 태도였다. 흑기 부통령인 형과의 경우 진씨 집안을 무너뜨리지 못해 한이 맺힌 사람이었다.
진평평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위험한 배경을 가진 인물을 걷어 들인 걸까? 훗날 진씨 집안과 대립할 걸 대비한 것이 아니었을까?
범한은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기가 들었다. 만약 진평평이 추측했던 것처럼 진씨 집안이 섭경미 암살 사건에 참여했었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마치 서재 안이 한겨울이라도 된 것처럼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모공을 통해 뼛속까지 파고들어 왔다.
범한은 진실과 가까워지기 위해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추측을 하면서도 감히 누구에게도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심지어 진평평에게조차 묻지 않았다. 게다가 진평평도 차갑게 거리를 두며 그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범한은 항상 마음속에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있었기에 계속해서 자신의 중심을 은근슬쩍 북제로 이동시키고, 경국에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응어리가 활짝 열려서 안에 있는 시커먼 진실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과거 진씨 집안이 정말 그 일에 참여했었다면 오늘 마땅한 대가를 받은 셈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이런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자신이 이전에 두려워했던 걸 떠올릴까 봐 걱정되어 잽싸게 화제를 돌려 말했다.
“폐하가 머지않아 경도로 돌아오실 테니 조정은 앞으로의 일들을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범건이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들은 예부에서 신경을 써야 할 일이지 않느냐. 굳이 네가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느냐?”
범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범 상서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약간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비쳤다. 서재 안의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다.
오늘 밤 경도에서 살아남은 고위 대신들은 각자 집에서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대동산에서 살아서 내려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들 놀란 가슴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대신들은 섭씨 집안이 폐하가 숨겨둔 비장의 패였다는 사실과 물샐틈없이 완벽한 계획을 떠올릴 때면 황제 폐하가 어느 때보다도 두렵게 느껴졌다.
아무 말 하지 않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범한이 몸을 일으켜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
서재를 나간 그가 완아를 보러 갔다. 물처럼 시원한 가을바람이 그의 얼굴에 불자 상쾌함이 느껴졌다. 시원한 공기를 깊이 숨이 쉬며 몸의 상처를 돌보던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진평평이 산골짜기 습격 사건을 건들지 않고 가만히 둔 이유가 자신을 떼어 놓기 위해서라는 생각 말이다.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 불리는 절름발이 노인은 일찌감치 모든 걸 내다보고 있었지만 그에게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 조심히 홀로 모든 걸 처리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이렇게 그를 때여 놓으려 한 이유는 나중에 그의 안전을 위함이었을 터다.
범한이 줄곧 진평평에게 배워왔기에 오늘 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 하는 아버지를 굳이 자신의 추측 때문에 경도의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서로를 떼어 놓으려 하는 건 진정으로 아끼기 때문이었다.
진평평이 그를 아끼듯이 말이다.
범한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은 정말 진 원장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진평평은 경도 주변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간간이 명령을 내려 폐하의 움직임을 돕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경도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경도에 돌아가야 했지만, 오늘 밤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누군가가 범한을 보기 위해 범씨 저택을 찾았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간이라 아내를 보지 못한 범한이 허탈하게 저택 대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문 앞에 선 궁전을 본 범한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근심과 짜증을 억누르고는 예를 갖춰 인사했다.
“궁 대인.”
조금 전에 그가 아버지와 함께 서재에서 의논했던 사람이 바로 앞에 나타난 것이다. 궁전은 폐하에게 가장 신임을 받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므로 범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궁전 역시 폐하와 가장 가까운 아들이자 신분이 높은 작은 범 대인을 가볍게 대할 수 없었기에 재빨리 맞절을 한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담박공께 골치 아픈 일을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지금 범한은 공작 대열에 있었으니 궁전에게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황제가 경도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라를 관리해야 하는 감국을 맡고 있었다.
궁전에게 골치 아픈 일을 부탁하러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큰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미 경도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범한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경도 주변 벌판에서는 아직도 싸움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성안은 점점 안정화 되고 있어 휴식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런데 모처럼의 기회를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안색이 좋을 리 없었다.
‘황제를 대신해 나라를 관리하는 일이 편할 리가 없잖아?’
범한이 이렇게 생각하며 머리끝까지 치솟는 짜증을 잠재우고는 궁전을 항해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궁전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곁눈질로 범한의 안색을 살필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수만 명의 반란군 중앙 진영에서 직도로 군대 원로인 진씨 가문 어르신의 목을 내리치려 했을 때도 이렇게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범한도 아무 말 없이 차분히 궁전을 바라봤다. 잠시 뒤 궁전이 마른 침을 삼키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공야께서 왕부로 가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도저히 아가씨를 말릴 수가 없어서······.”
이 말을 듣자마자 범한은 궁전이 깊은 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아챘다.
모두들 낮에는 적을 죽이고 자기 사람을 구하기 바빠서 이 점에 대해서 전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밤이 깊고 연기가 사그라진 뒤에야 비로소 폐하에게 충성하는 섭씨 집안이 만고에 길이 남을 공로를 세움으로써 생긴 문제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경도 밖에서 적들을 추격하고 있는 대원수께서 아가씨를 저택으로 모시고 돌아가라고 명령하셨는데, 아가씨께서 죽어도 따르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계십니다······.”
온종일 정양문을 지킨 궁전은 밤에 또 다른 큰 문제를 마주하자 해결을 위해 범한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지금 경도에서 황실 일을 처리할 자격은 갖춘 범한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더는 정주 쪽 체면을 생각할 상황도 아니었기에 직접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범한은 여전히 가만히 궁전을 바라보며 그가 말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지긋이 바라보는 범한의 눈에는 비웃거나 경시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궁전을 불안하고 부끄럽게 했다.
범한은 깊이 숨을 들이마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 지금 가장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은 임완아와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섭령아였다.
범한의 아내인 임완아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심에 괴로워하고 있었고, 섭령아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사실 2 황자와 섭령아가 혼인 뒤 금실이 좋은 부부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들의 혼인은 황제 폐하와 섭중이 세운 계획의 일부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섭령아는 계획을 위한 장기 말에 불과했다.
섭씨 집안은 그녀의 감정과 혼인을 이용해 장 공주에게 신임을 얻으려 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섭령아는 일이 터진 뒤에야 자신의 아버지가 처음부터 자신의 남편에게 대적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범한은 자연스럽게 장 공주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장 공주가 하고 싶어 했던 말은 세상의 남자들이란 모두 명예와 권력, 천하통일이라는 이상에 절절매는 쓸모없는 존재들이란 말일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지만, 그녀는 ‘섭중처럼 딸까지 파는 파렴치한 짓은 저지를 수 없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범한의 생각을 읽은 듯 궁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2 황자는 지금 왕부에 감금되어 있습니까?”
궁전이 그렇다고 답하자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다 말했다.
“대동산에서 폐하께서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죽이지 말라 말씀하셨으니 괜찮습니다. 더구나······ 승택(承澤)이지 않습니까.”
궁전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폐하가 살아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대동산에서 폐하가 범한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이었다.
만약 폐하가 정말 2 황자를 살려둘 생각이시라면 그것만큼 반가운 일도 없었다.
정주 사람들은 모두 섭령아를 아끼고 좋아했다. 그래서 오늘 진실을 알게 된 섭령아가 왕부에서 괴로워하자 정주군은 하나같이 부끄러움과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2 황자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는 섭령아가 과부가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제야 대동산에서 황제 폐하가 한 말의 의미가 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폐하는 그때 이미 자신이 안전하게 경도로 돌아올 때면 황태자와 2 황자를 이끈 장 공주가 패했으리란 걸 확신했다. 그래서 일부러 범한에게 둘째의 목숨을 살려두라고 말한 것이었다.
둘째의 목숨을 살려두는 이유는 섭령아가 과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자 큰 공을 세운 섭씨 집안의 체면을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만약 둘째가 급사한다면 섭령아는 어떻게 행동하려 할까? 천하 여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섭씨 집안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