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29
770화 울분과 포도 (2)
폐하에게 계획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범한은 왕부로 향했다. 2 황자에게는 조금의 좋은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이전부터 자신을 스승님이라 불러준 섭령아에게는 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시로 나라를 관리하는 감국인 만큼 생포한 황자를 아주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다. 만약 왕부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왕부에 도착하자 범한이 저택 편액을 올려다볼 새도 없이 궁전이 곧장 안으로 안내했다. 왕부 안은 감시하는 군인들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설사 2 황자에게 아직 세력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갇혀 있는 감옥에는 모기 한 마리도 날아 들어오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2 황자가 사는 왕부를 방문한 범한은 순간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과 성격, 기질이 가장 비슷한 형제가 지금, 이 순간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궁전을 후원 밖에 두고 범한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왕부의 화려함과는 달리 정원은 고즈넉하게 아름다웠고, 방 안에서는 등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미 밤이 깊었음에도 젊은 왕야와 왕비는 여전히 잠이 들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섭령아 한 사람만 보였다. 슬픔 가득한 얼굴로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는 섭령아의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평소 옥처럼 밝게 빛나던 눈동자에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피로와 원통함, 그리고 뼛속까지 사무친 분노가 가득했다.
지금 왕비의 모습은 언제든지 달려들어 물어뜯을 수 있는 호랑이 같았다.
남편에게 이용당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가문을 위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그녀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범한이 그녀 옆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궁전이 저택으로 모시고 가려는 것도 호의에서 그런 겁니다. 며칠 지난 뒤에 다시 이야기해보면 승택과 예전처럼 함께 있을 수 있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섭령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방안에 들어온 사람이 범한이라는 걸 알아챈 그녀가 조소 가득한 눈빛을 지으며 뭐라 말하려 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범한은 섭령아가 나약하게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에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고개를 든 섭령아가 생기 없는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황궁에서 나랏일을 처리하셔야 할 분이 뭣 하러 왕부에 오신 겁니까?”
“설득하러 왔지요.”
범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섭령아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이번 일은 섭 대인도 어쩔 방도가 없었습니다······ 만약 둘째가 왕비의 설득을 듣고 이번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요.”
섭령아의 가엾은 모습을 보니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솟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전력을 다해 2 황자를 공격하면서 그는 잠재의식 안에 있는 생각을 숨겼다.
그는 감찰원과 폐하의 신임을 이용해 둘째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고 용상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용상에 대한 둘째의 욕망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던 데다가 장 공주가 묘수를 부리는 바람에 오히려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섭령아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이번 일을 스승님 탓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상황에 맞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지난 몇 년 동안 스승님의 공격으로도 그의 뜨거운 열망을 가라앉히지 못했는데, 보잘것없는 여인인 제 설득이 먹혔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스승님도 제가 왕부를 떠나라 설득하지 마세요······. 반역에 참여한 사람에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을 리 없잖아요?”
섭령아는 말을 할수록 표정이 점점 침착해져 갔다.
“승택이 어떤 사람이든 저는 그 사람은 아내입니다. 아버지와 가문 사람들은 저를 사람으로 봐주지 않았으니 저는 그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 저승에서도 부부가 될 겁니다. 그곳에서 가서도 황제가 될 꿈을 꾸지는 않겠지요.”
섭령아의 말을 들은 범한은 마음이 섬뜩해졌다.
섭령아가 죽음을 각오했음을 알아챈 그가 그녀의 침착한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동산에서 폐하께서 제게 분부를 내리시면서······ 승택을 죽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섭령아가 번쩍 고개를 들고는 잠시 기대와 기쁨에 눈을 반짝이다가 다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이 당황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섭령아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겉은 부드럽고 따뜻한데 속은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심지어 황궁에 계시는 어머니께서도 그를 예의를 갖춰 대하는데 그가 살면서 한 번이라도 따스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겠습니까? 그는 사람들에게만 무정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도 아주 차가운 사람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아내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그 사람의 잘 이해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지 알지 못하고,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도 생각하지 못하죠. 이번의 완벽한 실패로 그 사람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황제 폐하가 그에게 살길을 열어준다고 한들 그가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섭령아가 고개를 들고 상심 가득한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왕부로 돌아온 뒤에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어요······. 이미 죽으려고 마음을 먹은 거죠. 이런 상황에서 저마저 이곳을 떠나면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서슴없이 떠나려 할 거예요.”
범한이 깊이 숨을 들이쉬며 탄식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어디를 갈 수 있겠습니까?”
* * *
2 황자 이승택은 의자 위에 앉아 손안에 든 자색 포도를 먹고 있었다.
이 모습을 범한은 이전에도 여러 번 봤었지만, 오늘 밤 2 황자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머리는 헝클어져 산발이 되어 있었고, 잘생긴 얼굴에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입꼬리는 비웃는 듯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누가 봐도 속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본인이 죽는다면 숙 귀비는 앞으로 누가 돌봅니까? 왕비는 어떻고요?”
맞은편에 앉아 말하던 범한은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마치 또 다른 자신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 2 황자의 기질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은 이미 경도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외모가 닮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범한이 2 황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어머니가 섭경미가 아니었다면, 자신과 2 황자의 신분이 바뀌었다면 오늘 의자에 앉아 포도 껍질을 뱉는 것도 잊고 멍하니 먹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2 황자는 이제야 범한이 온 걸 발견한 듯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범한이 어쩔 수 없이 다시 황제가 남긴 말을 말해 주었다.
2 황자가 자조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은 삶 동안 왕부에 갇혀서 누렁개처럼 살라는 거겠지. 부황은 자신이 늙어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가 되면 섭씨 집안을 개처럼 도살하고, 나에게도 사약을 내리실 거네······. 그러니 내가 살아남는다고 한들 앞으로의 삶이 어떨 것 같은가?”
범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령아에게 짐이 되거나 그······ 파렴치한 장인어른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지 않은가?”
2 황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게다가 이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범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줄곧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포부는 마침내 사라진 모양이군요.”
순간 2 황자가 포도알을 입에 가져가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초가을 달콤하고 과즙이 많은 포도처럼 그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지금 생각해보니 포월루 앞 찻집 안에서 자네가 내게 했던 말이 옳았네······. 지난 2년 동안 자네가 내 포부를 꺾으려 부단히 노력해준 점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 말해보니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그동안 줄곧 고모와 장인어른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정으로 나를 도와주려 한 사람은 자네였어. 내가 평생 가장 큰 적으로 생각했던 자네야말로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준 사람이었어.”
2 황자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감탄했다.
“자네는 정말 우리 이씨 가문의 별종이네. 섭가 아가씨는 정말 비범한 인물임 틀림없고.”
계속 말하던 2 황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내가 남보다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으니 머지않아 황위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네. 그런데 모든 일은 부황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을 뿐이었고, 나는 장기판 위의 말만도 못한 존재이자, 심지어 유약한 승건이만도 못한 존재였어. 나는 아무 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처럼 그저 멍하니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분노한 2 황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가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범한을 겨냥한 것이 아닌 건 확실했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숫돌의 역할을 강요하며 결국에는 지금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만든 부황을 향한 분노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무정하게 자신을 배신한 섭중을 향한 분노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자신이 황궁에서 태어난 것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었다.
범한은 완아가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좋았던 2 황자에게 돌머리라는 별명을 지어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는 단순하고 고집불통인 그를 황권이라는 칼을 갈기 위한 숫돌로 오랜 시간 사용하면서 사악한 기운과 부정적인 면을 기르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2 황자 이승택이 범한을 빤히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겠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나는 웃음거리네!”
범한은 황제 폐하 앞에서는 천하 모든 사람이······ 웃음거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너무 놀라서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었다며 눈물을 쏟으며 웃음을 짓던 2 황자가 갑자기 검붉은 피를 토했다.
검붉은 피가 손에 쥐고 있던 자색 포도에 뿌려졌다.
등불이 비추는 땅 위에 자색 포도에서 검붉은 피가 떨어졌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반쯤 열고 있는 2 황자의 아래턱에서도 검붉은 피가 흘렀다. 그가 눈꺼풀을 떨어뜨리며 손을 들어 자신에게 다가오려 하는 범한을 막았다.
“자네가 왕부에 들어왔을 때 독약을 먹었네.”
의자에 앉아 있는 2 황자가 머리를 푹 숙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가 비개의 제자라 하지만 독소가 심장에까지 퍼지면 살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나는 자네가 나를 살려주기를 바라지 않아. 자네는 분명 아주 대단한 사람이지만 내 죽음은 막을 수는 없을 거네.”
이미 죽을 결심을 세운 사람의 목숨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살릴 수 없다는 걸 범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2 황자를 바라보던 그는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 그가 이렇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둘째와 형제의 돈독한 우애 같은 건 조금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기 앞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아무 걱정할 것 없네. 내가 방금 유서를 써 두었으니 황실에서 자네를 탓하는 일은 없을 거고, 자네가 나를 죽였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없을 거네.”
고개를 숙인 2 황자가 피 묻은 손을 품속에 넣더니 서신 하나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