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36
777화 백 년의 고독 (2)
이승건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길게 한숨을 쉬다가 부황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께서는 제가 대신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아십니까?”
황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승건이 다시 말했다.
“아바마마께서는 아마 잊으셨겠지만, 처음 저를 폐위하겠다는 말이 나왔을 때······ 원로 문신들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와 반대를 하며 저를 지지해 줬습니다······. 제가 비록 강인한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할 줄은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차마 나라를 위해 저를 지지해 준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를······ 무자비하게 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황제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짐이 너를 쫓아내려 했을 때 너를 구해준 사람은 또 있다.”
놀란 이승건의 머릿속에 한 화면이 떠올랐다. 남조국으로 가던 길에 몰래 사절단 속에 숨어 있던 청색 깃발의 사내를 떠올린 그가 물었다.
“범한 말입니까?”
황태자는 왕 십삼랑이 범한의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범한이 왜 자신을 도와준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황제의 말을 듣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승건은 자신과 장 공주 사이의 은밀한 비밀을 밝혀낸 게 범한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또 패배가 확정되었을 때 범한이 그에게 황궁에서 도망칠 기회를 줬던 걸 떠올리자 일순간 어리둥절해졌다.
황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안지는 믿음직한 사람이면서 또 가끔은 너처럼 너그러운 모습을 보일 줄도 안다.”
“저는 그보다 못합니다.”
잠시 뒤 황태자가 긴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아바마마, 소자는 줄곧 아바마마를 원망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아바마마의 가르침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다만 소자 떠나기 전에 마지막 당부를 드리자면······ 집안사람들이 이미 많이 죽었으니 아바마마께서도 앞으로는 너그럽고 인자하게 행동하셨으면 합니다.”
너그럽고 인자하게 행동하라는 말은 황제가 지금까지 부린 수단이 너무 잔혹하다는 의미였다.
이에 황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지만, 떠나기 전에 마지막 당부라는 황태자의 말에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가 복잡한 눈빛으로 이승건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마.”
이때 초가을 밤바람이 황성 북쪽에서 불어와 복도와 정원, 호수를 따라 ‘휙’하고 지나갔다. 서늘한 바람에 슬픔이 더해졌다.
“계속 살거라. 짐이······ 몇몇 일들은 일어나지 않은 거로 해줄 수 있다.”
황제의 입에서 이승건이 예상을 벗어나는 말이 나왔다.
이승건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반역을 일으킨 이상 그가 다시 황제의 신임을 얻는 건 불가능했고, 더구나 그는 고모의 일로 이미 황제의 역린을 건드린 상태였다. 물론 사람들은 황태자가 무슨 일로 황제의 역린을 건드렸는지 몰랐지만 말이다.
평생 갇혀 사는 삶을 이승건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씨 집안 남자인 그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차가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전에 역사책이 이 일을 어떻게 기록할 것 같으냐고 묻지 않았느냐.”
“지금 저는 반역을 저질러 나라를 어지럽힌 반역자이자 불효자입니다.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외부 적과 결탁해 궁정을 어지럽혔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한 나라 군주이시니 무슨 일이든 잘못하는 게 없으시지요. 잘못은 모두 다른 사람이 저지른 것들이지 않습니까.”
황제가 침착하게 이승건의 뼈에 사무친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바마마께서 한 가지 잊고 계신 게 있습니다. 역사를 어떻게 고치고 왜곡하든 사람들은 경력 7년 초가을 한 달 동안 경도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사실과 이씨 집안의 황태후 마마와 황후 마마, 장 공주마마, 그리고 황태자와 2 황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입니다.”
이승건이 한숨을 쉬며 처음으로 평등하게, 아니 더 높은 위치에서 자신이 절대 이길 수 없는 부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서는 역사책에 천년에 한 번 나오는 제왕으로 기록되시겠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곁을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다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황제가 차갑게 아들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었다. 마치 하늘 위에 있는 신이 인간 세상의 고독이나 즐거움에 연연하겠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황제가 일어나 동궁 문 앞으로 걸어갔다. 궁 문 앞에 섰을 때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그가 소매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바로 2 황자가 죽기 전에 남긴 유서로 궁전이 그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황제가 얇은 종이를 펼쳐 자신의 둘째 아들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을 읽었다.
말라붙은 붓으로 휘갈겨 쓴 걸 보니 시간에 쫓겨서 급히 쓴 게 분명했지만, 종이를 뚫을 듯한 강인한 서체에서 뼈에 사무친 울분이 느껴졌다.
경제에게 버려진 첫 번째 숫돌이었던 2 황자 이승택은 유서에서 높고 높은 권력을 가진 부황에게 황태자와 비슷한 뜻을 피력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문체는 더욱 신랄하고 자극적이었고,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환(鰥)! 과(寡)! 고(孤)! 독(獨)!’
환(鰥)은 아내 없이 홀로 늙어가는 홀아비를 말하는 것이었고, 과(寡)는 천하의 주인이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 하나 옆에 두지 못하는 외로운 군주를 말하는 것이었으며, 고(孤)는 어머니를 잃고 홀로 남은 자식을 말하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독(獨)은······ 늙어서 의지할 자식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
대동산에서 경도까지 이어진 싸움에서 경국 황제는 두 명의 대종사를 해치웠고, 황실과 군대 안에 있는 불순분자들을 색출해 숙청했으며, 조정 안에서 교활한 생각을 품고 있는 대신들을 찾아내었다. 이로써 그는 앞으로 이룰 천하통일이라는 위대한 대업의 근간을 만들었다.
그러니 수십 년 동안 계획해둔 목표가 실현된 지금은 의심할 여지 없이 경제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하지만 황후가 죽었고, 과거 그 여자도 죽었으며, 황태후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까지 바치며 20년 동안 황제 곁을 지킨 장 공주도 죽었고, 황태자와 2 황자도 죽었다.
남은 거라고는 황제 한 사람뿐이었다. 외로운 황제 한 명만 남은 것이다.
2 황자의 유서를 차갑게 바라보는 경제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곧이어 종이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흰색 가루로 변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 떨어졌다. 종이 가루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꼭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그가 괴로운 눈빛으로 종이 가루를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두 아들을 연달아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군왕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갈수록 머리가 하얗게 세는 중년 남자의 얼굴은 슬펐고 눈가는 촉촉해졌지만 꼿꼿하게 세운 몸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굳건했다.
* * *
동궁 문이 다시 닫혔다.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폐위된 태자 이승건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저 차가운 궁전에서 맞이하게 되리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언제 황궁에 종소리가 다시 울릴지도 알 수 없었고, 어쩌면 울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저 차갑고 무정하게 그의 죽음을 지켜볼 뿐이었다.
황제가 모두를 보낸 뒤 범한만 남게 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밤길을 뚫고 황궁 뒤 깊은 곳을 향해 걸어갔다.
긴 복도를 지나 아무도 찾지 않는 냉궁을 지나 무성한 잡초를 지난 두 사람은 마침내 오래도록 아무도 찾지 않은 작은 전각 앞에 이르렀다.
부자는 전각 위로 올라가서 초상화를 보러 가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전각을 바라보던 황제가 갑자기 몸을 돌려 잡초가 무성한 좁은 길을 따라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다.
범한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세 발자국 정도 걸어갔을 때 마음속 무거워졌다.
단순히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가족들을 연이어 잃은 황제 폐하의 심정이 어떨지 추측할 수 있었다.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던 적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피와 살을 나눈 가족이었다.
폐하는 신과 같았지만, 사실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신이라면 정에 연연하지도 않았고, 굳이 인간 세상에서 권력을 위해 다툴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연이은 죽음으로 범한의 마음도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었으니 황제의 마음은 어떠할지 짐작이 갔다. 피로한 얼굴을 한 중년 남자는 어쨌거나 아버지였고, 형제였으며 가장이었고, 아들이었다.
무릎까지 자란 잡초 위에 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 말 없이 밤이 드리운 황궁을 바라봤다. 황제가 입을 열지 않으니 범한도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조심히 곁눈질로 황제의 옆얼굴에 드리운 기분을 살필 뿐이었다.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던 황제는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아들인 범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궁으로 돌아가자.”
“네.”
범한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마침 고개를 돌린 황제가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슬픈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아들 범한이 갈수록 더 마음에 들었고 방금 전 황태자가 했던 말이 계속 황제의 귓가에 맴돌았다.
잠시 고민하던 황제가 힘없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만약 몸이 계속 불편하면 입궁해서 짐에게 물어보도록 해라.”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범한이 화들짝 놀랐다. 그가 뭐라 말하려 고개를 드니 황제는 이미 몸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 * *
어서방으로 돌아와 밤참을 먹은 황제는 더 피곤해 보였다. 이에 범한이 출궁을 하려 했지만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한 듯 황제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잠시 뒤 요 태감이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뭐라 말하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범한에게 저택으로 돌아가 쉰 뒤 내일 다시 입궁해 일을 의논하자고 말했다.
범한이 황제의 지시대로 물러나려 할 때 어서방 문밖 복도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바퀴 달린 의자가 굴러가는 소리였다.
그는 폐하가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노인을 향해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진평평이 마침내 경도로, 황궁으로, 황제 폐하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금 황제 폐하는 가장 고독한 사람이었고, 곁에 있어 줄 사람이 가장 필요할 때였다.
조용한 어서방 안에서 황제가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자신의 마음을 가장 이해해 주는 친구이자 가장 가까운 전우인 진평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짐이 아무래도······ 아들들에게 너무 모질게 대했던 것 같네.”
* * *
이날 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과 용상에 앉은 황제 폐하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수수께끼로 남았다.
왜냐하면, 항상 황제 폐하 옆에서 시중을 드는 요 태감을 포함해 아무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대화는 1년 동안 어서방 밖에서 이뤄진 두 차례의 대화와 비슷했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신하의 귀로 들어가면 제삼자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 경도 상황은 이미 수개월 전에 예측했던 일이었다.
폐하와 진 원장은 모든 걸 암암리에 계획하고 준비한 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적들을 튀어나오면 한 그물에 잡을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경제와 진 원장의 연합 작전은 보름 동안 경도 전체에 들어가는 소식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사람들은 진 원장이 오래전부터 폐하와 함께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는 걸 알고 되었다.
하지만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노인은 이미 몇 차례나 황제 폐하를 구한 적이 있었고, 이에 황제 폐하는 그에게 가장 큰 신임과 영광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늙은 세대 사람들은 폐하에 대한 진평평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일은 이미 역사에 따라 증명된 진평평의 충심이 다시 드러난 일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