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65
806화 선우(單于) (2)
안타깝게도 연회석상에서는 기억해둘 만한 정보가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양고기는 비교적 맛이 좋았고, 술도 건강미 넘치는 호족 하녀들이 따라주었다. 하지만 상인들이 서호의 공덕을 추켜세우고, 관료인 좌우대당호가 열정적으로 건배사를 하는 귀에 좀 거슬렸다.
한편 초원의 왕은 범한이 상상했던 것처럼 들판에서 구른 듯 거칠고 상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심지어 연회가 진행되는 한 시진 동안 선우는 말을 총 세 마디 밖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 마디 말 때문에 범한은 심장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상냥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서 엄청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감찰원에 있는 상세 정보를 찾아봐도 현 선우에 대한 기록은 얼마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 왕장(王帳)이 줄곧 은밀하게 이동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째, 서호는 수십 년 동안 강대한 경국에게 공격을 받아 패하던 중이라 선우 왕정(王庭: 소수 민족의 조정이란 뜻도 있다)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좌우 두 현왕의 명성과 위세만 더 높아져 현 선우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두 현왕 중 하나를 보위에 올려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에 결국 지금의 선우가 힘들게 왕정(王庭: 군주라는 지위도 뜻함)을 계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초원에서 은근히 실질적 강자로 군림해 있는 건 두 현왕이었다. 이에 경국의 정보 수집 작업도 일찌감치 두 현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선우에 대해서는 소홀해지게 된 거였다.
그래서 30대의 청년 선우가 초원의 국면을 완벽히 통제하고, 좌우 두 현왕의 세력까지 크게 약화시킨 건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특히 힘으로 다수의 의견을 억압하고 북쪽 설원에서 온 만족(蠻族) 형제들을 받아들인 후, 만 명이 넘는 북만 정예병을 왕정의 친위대로 편입시켜 단시간 안에 실력을 증강시킨 건 더더욱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더욱이 이 선우의 왕장 안에는 중원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범한은 술을 마시고 홀로 자문자답을 하며 어둠 속에 있는 저 선우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했다.
바로 이때, 선우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맹금류 같은 눈빛으로 연회석상을 한 차례 쓱 훑어보았다.
하지만 선우는 별다른 걸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의 눈빛이 문 쪽으로 향했을 때 범한은 취한 눈으로 옆에 있는 서호 아가씨의 빵빵한 가슴이나 훔쳐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한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쉼 없이 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범한은 경국 황제와 함께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2대 연기파 배우였다.
* * *
대연회가 파하자, 셀 수도 없이 많은 상인들이 서호 사람들이 권한 술에 취해 있었다. 끈적한 유고(油膏)를 사용하는 등이 천막 안에 높이 걸리고, 등에서는 검은 연기가 가닥가닥 피어오르자 선우와 좌우곡익왕(穀益王)은 모두 쉬러 돌아갔다.
남은 두 당대호(當大戶)와 호족 사내들은 계속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중원 상인들에게 술을 먹였다.
범한과 목풍아는 일찌감치 인사불성으로 취해 버린 탓에 누군가가 그들을 들어다가 천막에 데려다 놓았다. 그런데 안타깝고 또 다행히도 서호 사람은 중원 사람들이 헐뜯었던 것처럼 황당하고 후안무치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적어도 중원에서 온 상인들의 천막에서 매혹적인 몸매를 가진 야생화처럼 아름다운 호족 여인과 억지로 밤을 보내려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불이 꺼진 후 목풍아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범한의 말똥말똥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데 그게 마치 한 마리 늑대의 눈빛과도 같아 목풍아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오싹해져 왔다.
청주성의 커다란 침대에서 목풍아는 똑같은 눈빛을 본 적 있었다. 평소 보던 온유하고, 맑은 대인의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가을날 초원에서 부는 칼바람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범한의 마음속에 있던 잔인한 것이 다시 겉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범한은 술 깨는 환약을 건네고는 별다른 말없이 곧바로 천막에서 나갔다. 그런 후 어둠의 엄호를 받으며 서호 사람들의 주둔지로 잠입했다. 그는 우선 월아해 후방에 있는 고산 아래쪽으로 가 옷을 질끈 묶은 후 산 위를 기어 올라갔다.
산 정상에 도달했을 때 범한은 툭 튀어나온 암석을 찾은 후 암석 후방에 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통을 꺼내 조심스레 두어 번 잡아당겨 그것을 길게 늘인 후 오른쪽 눈 위에 가져다 대었다.
황실 금고에서 생산한 최신식 망원경으로 범한이 직접 설계한 후 이번에 처음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원통이 차분하게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서호 왕장의 주둔지가 있었고 유난히 시끄러웠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무렵,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돌아 자그마한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선우의 행동이 원통에 포착되어서였다.
까만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은 너무나 아름다워 두려울 정도였다. 은하수 별빛이 월아해를 비추어 수면 위에서 무수히 많은 눈이 깜빡이고 있어서였다.
넓게 펼쳐진 월아해 호숫가 풀숲으로 마치 꿈나라로 간 사람에게 말을 건네듯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월아해 주변부터 초원 저 먼 곳까지 늘어선 천막은 대부분 어둠에 휩싸인 채 별빛에 목욕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몇몇 천막에서는 등불이 켜져 있었고, 그 등불들은 하늘의 별빛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원통을 들고 있던 범한의 손은 어느새 살짝 굳어 있었다. 그는 미동도 않은 채 월아해 근처에 있는 왕장 부근의 동정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범한이 원통을 내려놓고 구부린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은 후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서호 선우는 그 작은 천막으로 들어간 후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주변 어둠 속에서는 분명 호족 고수들이 호위를 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전체 방어 체계가 평소와 비교해 훨씬 느슨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왕정의 고수들이 그 천막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걸 원치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저 작은 천막에 대체 누가 살고 있는 거지?’
기분이 살짝 가라앉은 범한이 마른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이번 발견은 어쩌면 위무성과 우연히 마주친 것보다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호족 입장에서는 누군가가 산 높은 곳으로 올라가 월아해 주변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상상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은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과학 기술이 이뤄낸 첫 번째 결과물이었다. 범한이 둥근 원통 망원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매만지며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선우가 그 천막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서른이 넘은 서호 선우는 깃털로 장식된 얇은 옷을 입었고 칼은 차지 않고 있었다. 천막을 걸어 나온 후 그가 몸을 살짝 앞으로 굽혀 인사를 했다. 그의 기분을 보니, 저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범한의 입가에서 비웃음이 섞인 냉소가 흘러나왔다.
* * *
이로부터 수일이 지난 후, 중원에서 온 각 상행(商行)들은 이번에 가져온 물건들을 가지고 서호 왕정의 고관대작 및 귀인들과 가격 흥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상인들은 좌현왕장과 우현왕장에서 온 사람들을 기다려주기 위해 기간을 약 이틀 정도 질질 끌기도 했다.
서호 왕정에서는 향후 물자 수입 문제를 생각해 이들 상인들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이번 가을에는 대량의 사치품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서호의 왕공귀족들은 사치품을 사기 위해 눈 하나 깜짝 않고 셀 수도 없이 많은 황금과 보석을 지불했다. 그들은 초원에서 나는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수중에 황금이며 보석을 잔뜩 지니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중원에서 온 상인들이 물건을 모두 팔아치우기까지는 네댓새가 걸렸다. 이 네댓새 동안 목풍아는 사주 제1 상행을 대표해 서호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돈을 좀 벌어들였다.
한편 범한은 자신의 직무를 간단히 이행한 후 월아해를 따라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그가 주변을 관찰하는 행동인 동시에 주변으로부터 관찰을 당하는 행동이 되고 말았다.
범한의 진짜 신분을 고려했을 때, 그가 서호 왕정이 들어선 중심 지역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대단히 시건방지고, 심지어는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범한은 미간을 당겨 조금 좁히고, 눈썹 꼬리에도 아교를 붙여 살짝 위로 향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피부색에도 살짝 변화를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생긴 얼굴이 어디로 간 건 아니었다. 그래서 월아해 부근 풀숲과 모래 언덕을 산책할 때면 범한은 무수히 많은 뜨거운 시선을 맞아야만 했다.
호족 여인들은 중원 사람들이 비방하는 것처럼 개방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정 표현이나 미남자를 대하는 태도는 훨씬 더 강렬했다. 이에 혹여 범한이 옷 아래 감추고 있는 근육이라도 보여주는 날에는 그녀들의 열정이 이내 가을날 횃불이 되어 당장 범한을 삼켜버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결말도 맺지 못할 일을 호족 안에서 진행시킬 생각은 없었다. 이에 범한은 월아해 주변을 걸을 때면 위무성과 대화나 나누었다.
이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위무성과의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북제에서 온 젊은이로 초원에 머문 지 오래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자 수시로 범한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며칠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범한은 몇 가지 일들에 대해 명확히 알게 되었다.
한데 마지막 이틀 동안의 대화에서는 위무성이 어떤 경고를 받았는지, 그는 말할 때 각별히 조심했다. 그리고 범한도 자기 주변을 주시하는 눈들이 더 늘어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행히 그리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왕장 안의 왕공귀족들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상인 및 상인 배후에 있는 세력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래서 서호 사람들에게는 허여멀건 놈으로 보이는 범한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범한은 밤마다 일정한 시간만 되면 우뚝 솟아 있는 고산 위로 혼자 기어 올라가 망원경을 들고 월아해 주변의 모든 걸 살폈다.
선우가 밤에 자신의 왕장에서 빠져나와 작은 천막으로 가는 건 매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법 자주 가는 편인 것 같았다.
이에 범한은 일찌감치 조사를 해보았고, 그 결과 왕장 사선 방향 후방에 있는 작은 천막은 호족 여시종들의 거주지라 별다를 게 없는 곳이라는 걸 알아냈다.
그러니 선우가 굳이 그곳으로 찾아가는 건 희한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희한하게도 범한과 목풍아는 그 작은 천막에 접근하는 게 유난히도 힘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그 천막을 보호함으로써 월아해 근처 세계로부터 완전히 격리해 놓고 있었다.
이에 나흘 동안 고산에서 쪼그려 앉아 지켜본 범한은 자신의 판단을 더 확고히 믿게 되었다. 그리고 초원의 주인이 지나치게 공손하게 행동하는 게 눈에 거슬려 참다못해 살짝 배알이 뒤틀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