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70
811화 사흘 (3)
범한과 해당타타는 일단 초원을 느긋하게 걸었다. 그러다 어느 부락에서 말 두필을 사서 마음껏 내달렸고, 그런 후 다시 어느 호수로 가 두 망 가득 물고기를 잡아 구어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밤에는 어느 큰 부락으로 들어가 서호 사람들과 함께 모닥불을 둘러싸고 소고기와 양고기를 먹고 소주를 마셨다. 이렇게 두 사람은 사흘을 보냈다.
해당타타는 이 사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흘 후면 두 사람은 지금의 복잡한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 불구대천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이 사흘은 소중한 날들이었다.
범한도 이 사흘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해당타타는 왕녀 신분이었지만 초원에는 소문이 나지 않은 상태라 범한을 데리고 초원을 자유롭게 다니며 행동할 수 있었다. 이에 그녀는 이와 같은 생생한 활동을 통해 호족과 중원 사람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며, 서호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야만적이고 살육을 좋아하는 게 아님을 알려주려 한 것이었다.
해당타타는 마음의 짐 때문에 범함과 사흘을 함께 해준 것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건 묻지 않아 범한이 원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모닥불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붉게 변한 두 사람의 얼굴은 마치 겨울날 놀러나간 어린아이들 같아 보였다.
해당타타가 물건 두 개를 범한에게 건네며 말했다.
“당신 아이들에게 줘요.”
받아들고 보니 홍옥(紅玉: 루비) 구슬을 꿴 것과 서호 아이들이 잘 가지고 노는 작고 귀여운 칼이었다.
“구슬 꿴 건 소화에게 주고 작은 칼은 아들 량에게 줘야 할까요?”
범한이 눈썹을 씰룩이며 묻고는 말을 이었다.
“소화가 좋아할 거예요. 량이는 아직 어려서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범 부인의 몸으로는 아이를 낳기 힘들다고 전에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어요. 한데 범량이를 낳았으니, 소원은 이룬 셈이네요.”
해당타타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당신이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일 거예요.”
힘들게 임신한 임완아가 3개월 전 드디어 아이를 낳았다. 그러자 범한은 황궁에서 먼저 제멋대로 이름을 하사하기 전에 서둘러 아이 이름을 범량이라 짓고 범씨 가문 족보에까지 올렸다.
이 일로 경국 황제는 대로했지만, 다행히 범한은 황제 아버지께 자(字)를 지을 기회는 남겨준 덕에 그 일은 어찌어찌 지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범한은 해당타타의 말을 듣는 순간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2년 동안 그는 황제 폐하를 도와 국사를 처리했지만, 그 외의 시간은 모두 완아의 병 치료에만 전념한 터였다. 그리고 완아도 아이를 낳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범한은 약을 개발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스승 비개가 사전에 정해 놓은 방향이 많이 도움이 되어 완아는 성공적으로 임신을 할 수 있었다.
“왜 이름을 범량으로 지었어요?”
해당타타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오늘 밤이 지나가면 더 이상 이 젊은이와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기에 그녀는 쉼 없이 질문을 던졌다.
요 2년 동안 상대방이 어찌 생활했으며, 그의 주변 사람이 어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은 듯 했다.
“한처(閑妻)에 양모(良母)라.”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모양처(賢母良妻)에서 따왔는데, 재밌지 않아요?”
(현모에서 현[賢]이 범한의 한[閑]과 발음이 같아 말장난 한 부분입니다.)
부락 사람들이 하나 둘 잠을 청하러 들어가자 모닥불 옆에는 어느새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범한과 해당타타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잠이 싹 달아난 상태였고, 이에 차분히 여명이 밝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곧 날이 밝아올 거예요.”
해당타타가 범한의 어깨에 기대며 천천히 말했다. 이별할 때가 다가오자 드디어 여인네 같은 감성을 드러낸 것이었다.
범한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날이 밝고 당신이 떠나면, 그 다정한 선우가 나를 잘게 토막을 쳐 놓을 거예요.”
사흘이 지나자 두 사람은 뒤쪽 멀지 않은 곳에 초원의 주인이 있다는 걸 자신들의 무공 경지로 곧바로 알아차려 버렸다. 그는 억지로 노기를 억누르고 있었고, 범한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줄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눈을 감으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남자라고요. 그래서 여인에게 일 처리를 맡기는 건 영 어색해요.”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비추고 있는 그의 얼굴은 유난히도 친절하고 자신감 넘쳐 보였다.
“타타도 강하고, 선우도 강하지요. 그래도 내가 두 사람보다 더 강하다는 걸 증명해보이고 말 거예요.”
해당타타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범한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러나란 표정으로 조용히 바라보았다.
범한이 해당타타를 마주보고 차분하게 말했다.
“소설에서 부족민의 강요 때문에 헤어지게 되는 연인의 이야기가 나오면 너무 싫었어요. 타타, 당신은 초원에서 2년 동안 계획했겠지만, 나도 4개월 동안 준비했어요. 그러니 내가 철저하게 당신을 이길 거예요. 고하가 남긴 계획들을 전부 망쳐 버릴 거라고요. 나도 초원에서의 안락함이 좋아요. 하지만 경국 백성의 안락함을 위해, 나의 안락함을 위해, 그리고 선우의 안락함을 깨기 위해, 반드시 당신이 계획한 모든 걸 망가뜨려줄게요.”
“내가 당신을 사흘 동안 옆에 둔 건, 당신이 평생 내 곁에 남도록 하기 위해서였어요.”
경국에서 온 젊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여명이 오기 전의 어두컴컴한 초원을 바라보며 자그마하게 한 말이었다.으로 천천히 걸었다.
여명이 오기 전 새카만 어둠 속에서 모닥불이 ‘타닥’ 하고 소리를 냈다. 그러다 가끔 불꽃 몇 개가 튀어 올라 공중에 잠시 붉은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해당타타의 눈동자에 비친 이 붉은 흔적은 유난히도 괴이해 보였다.
해당타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을 바라보며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런 거죠?”
어쩌면 이 사흘이란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고 물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범한이 해당타타를 등진 채 대답했다. 범한의 뒷모습은 유난히도 곧게 서 있었다.
“나는 그저 당신을 사흘 동안 붙잡아두려던 거였어요.”
해당타타의 동공이 살짝 수축했다. 범한에게 사흘이나 속았다니. 그리고 왕정의 고수들이, 그것도 선우 속필달과 함께 자신들의 뒤를 사흘이나 뒤쫓았다니. 그렇다. 범한이 직접 뭔가를 하지 않았는데도 왕정 쪽에서는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재능이 출중한 이 여인은 잠시 범한을 말없이 바라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 부락 뒤쪽으로 갔다. 다급한 발걸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그녀는 무슨 초원의 정령이라도 된 듯 순식간에 3장(丈)을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당신이 돌아간다 해도 늦었어요.”
범한이 뒤로 돌아 차분하게 해당타타를 응시했다.
“당신과 북제 황제는 나를 한 차례 속인 것도 모자라, 몇 번이나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어요. 서호 왕정 쪽에 있는 중원 사람들은 모두 북제 사람들인데도, 당신은 계속 나를 속였고······. 저들이 서호 조정에서 하는 일들은 우리 경국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요. 그러니 나는 어떻게든 저들을 없앨 거예요.”
해당타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범한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만약 사흘 이내에 왕정 쪽에 이변이 생겼다면, 자신이 서둘러 돌아간다 해도 이미 늦었을 터다.
“월아해는 방어가 삼엄해요. 당신이 직접 나서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대체 누가 나선 거죠?”
범한이 대답해주기도 전에 싸늘하기 그지없는 형상 하나가 그녀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감찰원에 천하제일 자객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선우가 왕정에 없고, 고수들마저 모두 나와 있는 상태에서 그 자객이 움직였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다시 말해, 감찰원의 그림자가 나섰으니 절대 실패할 리 없다는 뜻이다.
해당뿐만 아니라 선우도 왕정에 남아 있었다면, 그림자에게 공격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해당타타는 그제야 범한이 왜 그를 찾을 수 있도록 흔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선우가 두 사람을 쫓아오도록 유인했는지 이해했다.
“안지는······ 갈수록 메말라가는군요.”
해당타타가 몸을 돌렸다. 범한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분노하고 있다기보다는 적적해 보였다.
“이 세상에서 당신이 이용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범한은 해당타타를 이용했지만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없었다. 두 사람은 원래부터 적대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무정한 사람이 아니에요.”
범한이 수 장(丈) 밖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런 후 두 팔을 툭 털고는 해당타타를 향해 돌진했다.
체내 패도의 정기가 순식간이 극한까지 치닫자 그 진동에 의해 초원의 공기에 어지러워지더니, 순간 긴 회오리바람이 허공을 휘감고 지나갔다.
해당타타는 천신처럼 압박해 들어오는 남자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이내 양손을 얇은 두루마기 안에서 꺼내 몸 옆에서 반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 몸 주변에 일었던 기류 변화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는데. 그런데 별안간 갑자기 광풍이라니. 범한은 달빛 아래에 나타난 살신처럼 자신을 따라온 풀 찌꺼기와 불꽃을 일격에 쳐내버렸다. 그러자 그의 주먹에서 천둥과도 같은 바람이 일었다.
해당타타는 몸이 잠시 흔들리는 것 같더니 광풍 앞에서 사라져 어느새 광풍의 핵인 범한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검 삼아 사선으로 공격했다. 그러자 해당타타의 손가락이 하늘의 달을 떨어뜨릴 기세로 곧장 범한의 울대 쪽으로 향했다.
* * *
월아해에 달이 비추니 무척이나 아름답고 청아하며 그윽했다. 호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오직 일찍 일어난 여시종들만 왕공귀족들이 세수할 물을 길으러 월아해로 향하고 있었다.
한 여시종이 몸이 굽은 벙어리 종을 보고 웃었더니, 품에서 호떡을 꺼내 건넸다. 이 벙어리 종은 4개월 전 대당호가 초원에서 데려온 이였다.
몸에 장애가 있기는 했지만 힘이 장사여서 거친 일을 시키는 데 최적이었다. 그런데 말도 못하는데다가 노예 신분이어서 왕정 지역의 젊은 귀족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라, 그냥 보기에도 너무 딱해보였다.
그래서 만약 마음씨 좋은 호족 여인들이 매일 조금씩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벙어리 종은 며칠 살지 못했을 것이다.
벙어리 종이 호족 여인이 건넨 호떡을 받아들고 씩 웃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하듯 목에서 ‘컥컥’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호족 여인들도 깔깔깔 웃었고, 그러다 하마터면 새벽이 오기도 전에 월아해를 감싸고 있는 고요함을 깰 뻔 했다.
벙어리 종이 월아해 뒤쪽 풀숲으로 갔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양 똥을 주웠고, 이는 왕정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벙어리 종은 오늘도 양 똥이 가득한 풀숲으로 들어가 여전히 몸을 굽힌 채로 있었지만, 오늘따라 양 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는 많은 양의 똥을 보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즐거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양 똥을 줍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길게 자란 풀숲으로 걸어간 벙어리 종이 품 안에서 천천히 쇠꼬챙이를 꺼내 흙에 찔러 넣고는 오른손 손바닥으로 한 차례 내리쳤다.
그러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피 묻은 쇠꼬챙이가 흙 아래로 수 자[尺]에 이르는 깊이까지 진동하며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벙어리 종이 마른 입술을 만지고는 눈을 감고 자신이 행동한 순서를 되짚어 보았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 하자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후 여전히 굽은 몸을 한 채 초원 먼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것도 저리 걸어서 언제 중원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를 지경으로 천천히 걸었다.